2.
윤오는 따뜻한 물 아래에서 잠시 졸았다. 눈을 뜨고도 몽롱하게 선잠을 가누다가 겨우 나왔을 때는 손끝의 피부가 쪼글쪼글해졌다. 컨테이너에서 찬물로 서둘러 씻을 때와는 다른 사치와 여유였다.
문을 열고 나오니 윤오가 챙겨 두었던 그의 옷 대신 새 파자마가 있었다. 들어서 골반에 대자 사이즈가 맞았다. 새로 산 걸까. 그렇다면 눈썰미가 대단하다. 딱 맞았으니까.
“나왔으면 얼굴 좀 보지.”
집이라고 말하기에는 정감 없이 커다란 공간이었다. 저 끝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윤오는 노곤노곤한 몸을 움직였다. 어쨌든 집주인이었다. 그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맞았다.
신조는 영화 속에서나 보던 크리스털 잔에 호박색 액체를 따르고 있었다. 윤오의 짧은 음주 지식에 따르자면 양주는 얼음과 마시는 걸 텐데 그는 얼음 없이 잔에 가득 따랐다.
“앉아.”
시선을 주지도 않고 턱짓을 한다. 윤오는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신조는 물기만 털어 촉촉한 윤오의 머리카락과 뽀얗게 물오른 볼에 시선을 주었다가 거두었다. 아직 솜털이 남은 어린애였다. 자랄 때까지 기다렸다고 생각했는데, 지난한 기다림의 시간에 비해 결과물이 야박했다.
사회 통념과 모럴이라는 걸 길거리의 낙엽처럼 생각하는 신조여도 윤오의 어린 태는 달갑지 않았다. 그의 몸을 두 번은 거푸 접어야 윤오의 몸피만 해질까.
“성인 맞지?”
성인이 된 지는 이미 몇 해가 흘렀다. 윤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실래?”
“아니요.”
“왜. 술 못 마셔? 아니면 양주라 싫나? 소주파야?”
왜 남자의 질문은 어떻게 들어도 놀리는 것 같을까. 가만히 있어도 슬쩍 올라간 한쪽 입꼬리 때문일까.
윤오는 상념을 접었다. 그는 소주도 양주도 좋아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둘 다 취할 때까지 마셔 본 경험이 있다. 둘 다 동시에 마셨다. 결코 좋아서는 아니었다. 서빙이 끝나 얼음이 질척하게 녹은 바스켓에 뒤섞여 있던 역겨운 액체가 윤오가 아는 술의 전부였다. 양주도 소주도 섞였으나 술도 아니었고 사람이 먹는 것도 아니던.
“술 싫어해요.”
“좋네. 앞으로도 마시지 마, 그럼.”
꼰대처럼 너희는 이런 거 하지 마라, 그런 어쭙잖은 멋이라도 부리는 걸까. 윤오는 비스듬히 신조를 올려다보았다. 금욕적으로 생겼는데, 단정하게 잘생긴 얼굴이 이렇게 볼 때면 인상이 사뭇 달라진다. 신조는 저를 관찰하는 모습을 가늘게 접힌 눈으로 보다가 미소 지었다.
“왜. 마시지 말라니까 갑자기 마시고 싶어졌나?”
그리고 엄지로 크리스털 잔을 쓸다 액체를 들이켰다. 그는 보통의 주당들보다 훨씬 잘 마셨다. 궤짝으로도 마실 수 있는 사람이었다. 금인들이 원래 잘 먹고 잘 마시기도 했고.
“줘?”
“싫어요. 맛도 없고….”
“그래. 안 마시는 게 좋아. 간에 안 좋으니까.”
얼음도 안주도 없이 생으로 독한 술을 마시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신조는 개의치 않고 잔을 새로 채우며 물었다.
“폐는 어때. 감기는 자주 걸리는 것 같던데.”
“다 아시네요. 그럼 가벼운 정도로 앓고 넘어가는 것도 아실 텐데, 아시면서 왜 물어보세요?”
“그냥. 네 입으로 듣고 싶어서.”
“담배도 피우지 말라고 하시게요?”
“응.”
신조는 빙글빙글 웃었다. 윤오는 잔 안에서 돌아가는 호박색 액체에 시선을 고정했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것도 모르는 모양이다. 그는 긴 팔을 뻗어 좁은 미간을 문지르고 떨어졌다.
“김윤오가 오래 살았으면 해서 그래.”
‘고양이 쥐 생각하는 꼴….’
윤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신조가 문득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장고를 열더니 새빨간 홍옥 같은 체리를 꺼냈다. 깨끗이 씻어낸 뒤 크리스털 볼에 담아 내온다. 평소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힐 것 같은 사람이 이러니 어색하다.
“먹어.”
“양치했어요.”
“또 하면 되지.”
그리고 그는 흡연 욕구를 누르는 듯 손바닥의 반도 되지 않을 성냥갑을 식탁에 두드렸다.
사실 아직 양치하지 않은 참이었던 윤오는 유혹에서 이겨내기 위해 시선을 피하다가 결국 지고 말았다. 방금 냉장고에서 꺼내 씻은 것도 봤으니 뭘 탔을 리도 없고. 체리 하나를 입에 넣었다. 아주 달고 맛있었다. 눈물이 쏙 빠질 맛이었다.
집을 나오고 나서야 과일이 사치라는 걸 깨달았다. 나이트에서 더 이상 재탕조차 하지 못할 과일 안주를 입에 몰래 넣으며 비참함과 서러움에 눈물을 참았던 이후로는 한참 먹지 않았었다. 박 사장이 제철이라며 단감을 가져왔을 때에도 괜찮다며 사양했었는데…. 지구 반 바퀴를 건너왔을 체리는 참을 수가 없었다.
곁에 자신이 있는 것도 잊은 것처럼 우물거리는 윤오를 보며 신조는 가볍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맛있어?”
“…….”
윤오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민망함에 시선을 피한다. 시선을 내리깔거나 내리깔았던 시선을 올릴 때면 눈매가 더욱 도드라졌다. 섬세하게 빠진 눈꼬리가 특히 신조의 시선을 여러 번 붙잡았다.
“혹시 말이에요….”
“응. 혹시 말이에요.”
“저희 부모님께 연락하셨어요…?”
망설임 끝에 나온 말이었다. 죄책감이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신조는 주머니를 뒤적여 핸드폰을 꺼냈다. 몇 개의 기기가 동시에 나왔다. 몇 개를 들고 다니는 거지? 윤오는 하나도 없는 핸드폰이 그에게는 지금 보이는 것만 세 개였다.
“할까?”
그가 느릿하고 권태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주어가 뭔지 아는데도 달랑 저 동사만 그의 입술에 담기니 어쩐지 불온하게 들렸다.
금인과 치인에 대한 교육만 안 들으려 애썼지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발정기 때 옆에 있는단 게 그저 애착 인형처럼 가만히 있는 게 아니란 것도 알았다. 윤오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 때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번호만 덜렁 뜬 화면을 윤오 쪽으로 돌렸다. 숨길 수도 없이 동요하는 눈을 보던 범신조가 전화를 받았다. 귀에 갖다 댄 게 아니라 스피커폰으로.
“범신조입니다.”
신조가 웃음기를 머금은 눈으로 윤오를 응시했다. 왜 나를 보지, 하는 의문은 곧 풀렸다.
― 여보세요. 범 서방, 자네인가?
겹쳐 포갠 다리를 앞으로 밀며 신조가 다분히 한량스러운 자세로 몸을 폈다. 윤오는 그 태연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네. 접니다.”
― 아니, 다른 게 아니라. 한국에 돌아왔다고 해서 말일세. 잘 다녀왔나?
아버지의 목소리는 아주 좋았다. 몇 년간 외동아들이 실종된 사람의 목소리로 들리진 않았다.
“잘 다녀왔습니다.”
― 그래. 그… 아잇. 잠깐만. 나 얘기 중이잖아.
수화기 너머로 실랑이 소리가 들렸다. 나도 좀 바꿔 달라 재촉하는 소리였다. 엄마의 목소리에 윤오는 입을 틀어막았다. 신조는 중간중간 자신을 범 서방이라고 부르는 중년 부부의 실랑이를 가만히 음미했다.
― 미안하네. 그, 언제 저녁이나 하자구. 내가 대접하겠네. 우리 윤오랑 오랜만에 얼굴 좀 봤으면 해서.
윤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신조는 반쯤 내리깐 시야로 윤오의 눈이 어디까지 동그랗게 될 수 있는가 구경했다.
“윤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지금은 시차 때문인지 피곤해서 잠들었거든요.”
순간 그가 말하는 윤오가 자신을 말하는 게 맞나 헷갈렸다. 부르는 소리가 정다웠다. 심지어 그는 거짓말에 몰입했는지 손목시계까지 확인했다. 기가 찼다. 수화기 너머로 그래, 그래. 피곤하겠지. 하는 얼버무리는 말투가 이어졌다.
“그래서 말인데… 저 역시 피곤해서 다음에 연락드릴까 하는데 괜찮습니까?”
― 그렇다면 쉬어야지. 미안하네. 미안해.
미안하다고 할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엄마도 아니었다. 그러면 누구…? 윤오는 신조를 노려보았다가 고개를 떨궜다. 미안해할 사람은 여기에 김윤오 자신밖에 더 있나 싶어서.
신조는 망설임 없이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고 교무실에 불려 온 학생처럼 주눅 든 윤오를 바라보았다. 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와서는, 혀로 액체를 굴리며 가늘게 뜬 눈으로 윤오를 천천히 훑었다. 복사뼈와 손목뼈 따위를.
“기뻐해야지. 불효자가 아니게 된 걸.”
“…어떻게 된 거예요?”
“네가 그렇게 멋대로 사라진 날, 내가 상심하실 너희 부모님께 심심한 위로를 해 드렸거든. ‘내 치인 김윤오를 약속대로 고등학교 졸업을 끝내고 데려갔습니다. 한동안 해외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며 견문을 넓히게 해 주고 싶으니 이해해 주십시오.’”
“절 찾지도 않았다고 한 건요? 거짓말이에요?”
“내가 네 멋대로 군 걸 수습해 주지 않았다 한들 네 가족들이 널 찾았을 것 같아?”
“…….”
“찾더라도 널 걱정해서였을까? 말해 봐. 네가 나보다 더 잘 알 거 아냐….”
그의 말이 맞았다. 잘 안다. 찾기야 했을 거다. 하지만 그게 자신을 걱정해서는 결코 아닐 거다. 반박할 말이 있어야 욱하기라도 하지. 박 사장의 가게에서부터 윤오는 그의 말에 뭐라고 하든 변명하는 꼴이 될 뿐이었다.
“널 데리고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하니, 그날부터 나를 범 서방이라고 부르더군.”
해외는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일까. 윤오는 자조했다. 그야 견문이 넓어지고 다양한 경험을 하긴 했으나 그게 도움이 되는 건 아니었다. 습진이 생긴 손가락은 거스러미가 쉽게 올라왔다. 윤오는 그것을 툭 떼어내며 실소를 흘렸다.
“저희가 부부도 아니고 제가 아내도 아닌데 범 서방이라고요? 웃기셨겠어요.”
구시대적이고 징그러운 데다 편견만 가득한 바보 같은 호칭이었다. 그런 말을 해서라도 각별한 사이인 양 보이고 싶었을까. 부끄러움은 윤오의 몫이었다.
“웃기진 않고 흥미롭던데.”
“…….”
“그래서 계속 들어 보려고.”
“왜 그런 거짓말을 하셨어요? 제 생각해서요? 제가 안쓰럽게 느껴지기라도 하셨나 봐요. 그러면 그냥 두지 왜 갑자기 찾아와서는….”
신조는 손을 뻗어 윤오가 앉은 스툴을 당겼다. 성인 남자가 앉아 있는 가구를 한 손으로 가볍게 당기는 힘이 무시무시했다. 그는 벌린 허벅지 사이로 윤오의 무릎이 들어오게 한 뒤, 등 뒤로 손을 뻗어 가볍게 눌렀다. 그러자 윤오가 신조의 품에 반쯤 안긴 꼴이 되었다.
“그냥 둘까 생각도 해 봤어.”
윤오는 혼란스러웠다. 쥐새끼에게 다정한 고양이인 건지 아니면 꼬리를 잡고 이리저리 휘두르며 재미를 보는 고양이인 건지 모를 사내였다.
“참다 참다 궁금은 해서 한 번 보러 온 거야. 근데 한번 보니까.”
어둡게 가라앉은 눈은 분명 검은색인데 붉은색 이채가 도는 것 같았다. 검붉은 눈. 사람이 아니라는 게 이토록 생생하게 느껴지다니. 윤오는 턱이 잡힌 채 신조가 다가오는 걸 방관해야 했다.
“그 이후로는 벌써 오늘이야. 내가 생각하기도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난 게.”
생각하기도 전에 곁으로 데려와야겠다고 마음먹었고, 몸은 움직이고 있었다. 윤오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해 줄 생각은 없다만, 이 정도는 괜찮겠다 싶었다. 신조는 어린 태가 나고 제법 건방지게 굴면서도 그보다 더 자주 어리숙하게 구는 하룻강아지를 샅샅이 훑었다.
인부로 위장해 직접 가게까지 다녀온 길 실장으로부터 보내진 사진을 볼 때마다 낯설면서도 낯이 익는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낯설면서도 낯이 익다. 아마도 매일 이럴 것 같다.
“적응이 좀 될 것 같아?”
그 자신도 자신이 없으면서 신조는 잔을 기울이며 물었다. 잔 때문에 생기는 곡률 속에서도 윤오는 크게 일그러지지 않았다. 아니면 제 눈에만 그런 걸지도 모른다.
“아니요.”
모르겠어요, 라고 할 만도 한데. 신조는 엷게 웃었다. 그러곤 남은 술을 모두 들이켰다.
“그래도 해.”
단호한 명령조에 윤오는 미간을 찌푸렸다.
“오래 걸려도 상관없어. 기다리는 건 익숙하니까.”
취하지 않은 게 분명한데도 신조는 느릿하게 일어나서 멀어졌다. 그의 한 손에는 병이 들려 있었고 잔은 남아 있었다. 병나발이라도 불 생각인가.
윤오가 본 사람들은 대부분 병나발을 불었다. 시작은 고상하게 잔이었어도 종내에는 네발로 기며 술을 마셔댔다. 윤오는 고개를 기울여 잔에 남은 향기를 들이켰다. 구역질이 나던 그 쓰레기 술과는 분명 달랐다.
* * *
이번에도 꿈은 꾸지 않았다. 우연이 세 번이면 인연이라고 하는데, 내일도 마찬가지라면 윤오는 이제 인정하기로 했다. 저 남자를 만나서 꿈을 꾸지 않는 거라고.
신조는 늦잠을 자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늦잠을 잔 건 윤오가 아니라 그였다. 윤오는 할 게 없어서 거실 소파에 누워 발을 까딱였다. 신조를 깨울 용기는 나지 않았고, 신조가 없으면 애초에 이 집에서 나갈 수도 없었다.
출근을 못 하게 되었는데 초조하지 않았다. 어렴풋이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일 거다. 실감은 안 나지만 제가 더는 식당에 나가지 않게 되리란 걸.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말이다.
‘새로 직원을 구할 때까진 있어야 예의인데.’
윤오는 긴 소파 끄트머리에 어깨를 걸치고 누웠다. 덩달아 고개는 뒤로 젖혀졌다. 거꾸로 보이는 세계는 조용했다. 그 풍경을 멍하니 보다가 눈을 감았다.
잠시 졸았거나 아무 생각도 안 했던 것 같다. 인기척에 눈을 뜨니 발이 보였다. 어제 구두로 남자를 먼저 봤던 때처럼.
신기하다. 윤이 나는 구두보다 맨발이 더 잘 어울린단 느낌이 든다.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처음 만났을 때 나신을 보여서 그런가.
“그렇게 누워서 뭐 해.”
뭘 하긴. 보면 모르나.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 아무것도 못 하고 있었다.
“일어났으면 깨우지.”
윤오는 몸을 옆으로 굴려 일어났다. 남자는 잘 때도 도통 옷을 입질 않는지 상체를 헐벗은 채였다. 그는 게으르게 발을 움직여 부엌으로 향했다. 대리석 상판을 짚고 물을 마시는 등이 사납고 야성적이었다.
윤오는 저도 모르게 팔을 돌려 제 등을 더듬더듬 만졌다. 아무리 운동을 하고 식단을 해도 결코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태어날 때부터 다르게 태어난, 태생이 다른 생물 같았다.
“좀 일찍 일어나야겠군.”
중얼거리는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혼잣말 같았다. 윤오도 혼잣말을 가장해 중얼거렸다.
“나 없어서 식당 바빴겠다.”
어이가 없어서 신조는 몸을 돌렸다. 팔짱을 끼자 가슴이 단단하게 모였다. 윤오는 이번엔 가슴팍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걱정 마. 사람 보냈어.”
“사람이요?”
“다음 직원 구해질 때까지 일할 사람.”
“그… 길 실장님이요?”
“왜? 보고 싶어?”
신조는 픽 웃었다. 윤오로선 어떻게 제 질문에 저런 되물음을 할 수 있는지 싶어 그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아니요. 조금… 무섭게 생기셔서….”
“식당이 손만 야무지면 된 거 아닌가?”
“…….”
싱크대 안에 컵을 둔 남자가 걸어왔다. 가까이 다가와선 윤오의 턱을 잡고 얼굴을 좌우로 살폈다.
“네가 예쁘다고 온 손님들은 아니었을 테니까. 안 그래, 김윤오?”
“…예쁘지는 않은데요.”
“내 눈엔 예뻐. 너에겐 안타까운 일이지.”
무어라 읊조린 신조의 목소리를 윤오는 듣지 못했다. 그에 앞서 그가 손을 떨치듯이 내린 바람에 머리가 얼얼하게 흔들렸다. 신조는 윤오를 옆으로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해 앉았다. 눈으로 보기보다 맞닿아 있을 때 남자의 체구가 정말 바위처럼 단단하고 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짓눌리는 것만 같았다.
그 와중에 윤오는 어떠한 향기를 맡았다. 혹은 냄새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처음 겪는 감각이었다. 무릇 향이란 코로 맡는 것일 텐데 온몸으로 느끼는 것만 같았다. 머리와 피부가 먼저 인식하고 코로 뒤늦게 이해하는 듯한….
멍해진 기분을 느끼며 윤오는 손가락 등으로 코 밑을 막았다.
“왜? 냄새나나?”
“네.”
“설마 악취는 아닐 테고.”
“이상해요. 설명하기 어려운데….”
“너한테도 나. 그 설명하기 어려운 냄새.”
신조는 고개를 기울여 윤오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가 깊게 숨을 들이켜는 게 느껴졌다. 흉통이 들썩거리며 윤오의 어깨뼈를 건드렸다 떨어지길 반복했다. 이윽고 신조는 나직이 앓는 소릴 내며 떨어졌다.
“짐승들은 냄새로 서로를 알아본다지.”
“…….”
“너와 나는 이런 방식으로 서로를 알아볼 거야. 아주 짐승다운 방법이지 않아?”
“치인은 짐승이 아니잖아요….”
“그럼 짐승의 짝이 짐승 아니고 뭐겠어.”
아주 커다란 손이 윤오의 허벅지를 덮었다. 지그시 누르는 악력이 상당했다. 신음 소리가 나올 뻔했지만 자존심이 상해서 참았다.
신조는 등받이에 팔을 대고 턱을 괴었다.
“생각은 좀 해 봤어? 날 길들일 방법.”
“우리나 목줄을 쓸 순 없죠…?”
오기로 지껄인 말에 신조가 고개를 들며 웃었다. 호탕한 소리였다. 그사이 허벅지에 있던 손이 조금 더 안으로 들어왔다. 윤오는 슬슬 그것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건 내가 쓰고 싶은 방법인데, 나도 참고 있으니까 너도 다른 방법을 찾는 게 공평하겠는데.”
“공평이란 말이 우리 사이에 가능한 말이긴 해요?”
“너 하기 나름에 따라 공평보다 더한 보너스를 얻을 수도 있겠지.”
“되게 잘나셨나 봐요.”
“현대 사회의 기준에 대면 그런 편이지. 사실 상당히 그런 편이야.”
“전 쥐뿔도 없는데요.”
“쥐뿔도 없진 않지. 오백만 원이나 있잖아.”
정확한 숫자에 윤오는 저도 모르게 신조의 손을 쳐냈다. 제법 매서운 손길에 의해 허공으로 던져진 제 손을 보고 신조가 어깨를 으쓱였다.
“제 가방 뒤져 보셨어요?”
“쥐새끼처럼? 어. 그랬지.”
“왜 그러셨어요?”
“네가 숨기니까.”
마치 저의 책임이란 것처럼 말한다. 윤오는 신조를 대할 때 상식으로 대하면 안 된다는 걸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차라리 물어보세요. 그럼 말해 드릴게요. 숨길 것도 아니었어요.”
“물어보지 않아도 네가 말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럼 제가 먼저 말할게요. 그럼 된 거죠? 쥐새끼처럼 뒤 안 캐실 거죠?”
“좋아.”
신조가 자신의 허벅지를 때렸다. 협상이 된 것처럼.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오는 까마득히 높아진 눈높이를 좇았다. 그리고 이내 어둡게 빛나는 눈과 마주했다. 신조는 흐트러져 내려온 머리카락 사이로 윤오를 한참 응시했다.
“이제 조금 알겠어? 어떻게 길들이면 되는지.”
방금 그게 길들인… 거였나?
자신이 뭘 했다고 저런 소리를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어서 어리둥절해졌다. 몸을 돌려 안쪽으로 들어가던 범신조가 손을 딱딱거려 여전히 얼떨떨한 상태인 윤오의 주의를 끌었다.
“준비하고 나와. 어린 애첩 생긴 졸부 늙은이 같은 짓 할 거니까.”
저 불온하고 더러운 묘사는 대체 뭐란 말인가. 윤오는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더러운 상상을 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뭔데요?”
“쇼핑.”
문틀을 잡았다가 떨어지는 손에 힘줄이 우드득 돋았다.
대체 누가 쇼핑을 저딴 식으로 설명하지. 윤오는 치를 떨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것도 없는 이 부유한 감옥 안에 있는 것보다야 제멋대로인 남자와 나가는 게 훨씬 낫겠지 싶어서.
그의 뒤를 쫓아가던 윤오가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오백오십이거든요….”
* * *
“그렇지. 옷이 그게 다지, 네가.”
신조는 일찍이 준비를 끝내고 나와 기다리고 있던 윤오를 보며 이마를 짚었다. 곤혹스럽게 눈썹뼈 언저리를 긁적거린 그가 체념하고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니까 오늘 쇼핑하려는 거였고. 일어나.”
“제 거 사러 가는 거예요?”
“어.”
“영화 속 주인공 같네요.”
“영화보단 드라마가 더 꾸준하지 않나. 클리셰잖아. 잘 먹히니까 유구하게 써먹히는 걸 테고.”
구두를 신은 범신조는 완벽했다. 윤오는 지금 구멍을 테이프로 대충 기우고 기장은 안 맞아 손목이 보이는 패딩 차림인 제가 남자 옆에 서 있는 게 맞나 싶었다. 한쪽이 지지리 궁상이고 한쪽은 그린 듯이 완벽한 것조차 남자의 말대로 클리셰였다. 신조는 물었다.
“너에게도 먹히려나.”
“차라리 음식을 사 주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제 딴에는 별것 아닌 말에도 신조는 크게 웃었다. 가슴이 커서 그런지 소리도 컸다. 윤오는 의식해 본 적도 없는 제 흉통이 신조를 만난 이후로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빨리 가요.”
패딩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 낡은 운동화를 신었다. 고등학교 3학년 올라갈 때 사서 마르고 닳도록 신었으니 이 역시 패딩과 꼴이 별다르지 않았다.
신조는 카드를 대고 엘리베이터를 불렀다. 윤오는 나란히 선 신발 두 짝을 내려다봤다. 제 몸집이 아기자기하게 작은 것도 아닌데 신조의 옆에 있으니 작게 느껴졌다. 남자의 앞에서 왜소함을 느끼지 않으려면 농구 선수쯤 되어야 할까.
“…….”
정면의 엘리베이터에 두 사람의 모습이 비쳤다. 고개를 푹 숙인 윤오의 머리통이 빚은 것처럼 동글동글하다. 머리를 쓸어 넘긴 신조가 혀로 입술을 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문이 열렸을 땐 비치던 게 사라져 아쉬울 정도였다.
안에 들어가 지하 주차장 버튼을 눌렀을 때 신조는 미약한 짜증을 느꼈다. 시야 구석에 흰 목덜미가 들어와서만은 아니다. 사실 지금만이 아니라 윤오의 행방을 알게 되고 그의 사진을 받은 이후로 신조는 늘 가볍게 신경질이 난 상태였다.
신경질. 짜증보다 정확한 표현이었다. 그의 모든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서 있으니까.
밀폐된 공간에 있으니 윤오의 체향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윤오는 오늘 아침 겨우 잠깐 자신을 느꼈겠지만 신조는 아니었다. 오래도록 참고 견딘 보람도 없도록 발정기가 한꺼번에 몰려올 것만 같았다.
당장에라도 윤오의 희고 곧은 목덜미를 틀어쥐고 아래로 찍어 누르고 싶었다. 신조는 간지러운 손을 엘리베이터 안전바에 얹었다. 욕구를 짓누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그것을 세게 움켜쥐었다. 제 속내도 모르고 윤오는 유순히 바닥만 보고 있다.
“핸드폰부터 사지.”
펜트하우스 사용자를 위한 전용 차고는 지하 주차장보다는 작지만 여섯 대 정도는 넉넉하게 주차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였다. 윤오는 제 말만 하며 앞장서는 신조의 뒤를 따르면서도 주위를 살피느라 정신이 팔렸다.
박 사장이 이곳에 오면 눈물을 흘리며 경배를 할지도 모르겠다. 차에 대해서 마니아 수준은 아니어도 윤오 역시 여타 남자 고등학생들이 알 정도로는 알았다. 엠블럼과 브랜드 이름을 매칭해 떠올릴 정도는 된다는 거다.
반짝거리는 차를 본 순간 윤오에겐 요 몇 년간의 팍팍한 생활로 묻어두었던 고등학교 시절의 그 작은 세계가 떠올랐다. 서로의 드림카를 묻고 미래를 꿈꾸던, 턱없이 즐겁고 위태롭던 시한부 세계가.
“타고 싶은 거 있어?”
“없어요.”
비집고 들어오는 낮은 목소리에 윤오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때도 자신은 드림카가 무어냐는 친구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었다.
대답은 못 했어도 결국 타게 되기는 하네. 그것도 그렇게 피하고 싶던 짝과 함께. 팔자라는 게 정말 바꿀 수 없는 건가. 윤오는 자조하며 차에 올라탔다. 신조는 윤오를 위해 히터를 틀었다.
“핸드폰 안 사 주셔도 돼요.”
말하고 나니 왜 범신조가 어린 애첩이 생긴 졸부 같다고 했는지 일견 이해하겠다. 하지만 자신은 어린 애첩도 아니고 범신조 역시 졸부가 아니었다. 어쨌든 윤오가 갖고 싶은 건 핸드폰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으로 된 통장이었다. 그리고 그건 이렇게 걸려 들어오게 된 이상 자신의 힘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었고.
“내가 불편해서 그래.”
“불편한데 핸드폰을 왜 세 개나 들고 다니세요?”
“네 개야.”
핸들을 돌리며 신조가 픽 웃었다. 윤오는 정말 맹랑했다. 말꼬리도 잘 잡고 질문도 도발적이었다. 본인이 그걸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알고 하는 행동이고 그 의도가 정떨어지게 하려는 거라면 안타깝게도 헛다리를 제대로 짚고 있지만.
“그런데 김윤오는 부모님 보고 싶다는 말을 안 하네. 못 본 지 오래되었으면서.”
빨간불에 정차한 신조가 갑자기 치부를 찔러 온다. 윤오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맹랑한 하룻강아지는 부모 이야기만 나오면 빠르게 가랑이 사이에 꼬리를 숨긴다. 신조는 사실 윤오의 부모에게는 개털만큼의 흥미도 없지만, 윤오의 반응에는 흥미가 다분해 계속 묻게 되었다.
“못 본 지 꽤 되었을 텐데. 안 보고 싶어?”
윤오가 고개를 휙 옆으로 돌렸다. 신조는 그런 행동을 자제하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다. 목빗근이 선 흰 목선이 뜯고 싶도록 예뻤다.
“볼 낯이 없어서 그러나. 내가 거짓말도 해 줬는데 뭐가 망설여지지.”
망설여지는 건 없다. 그저 놀라울 만큼 보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윤리적 측면에 따라 윤오는 자신을 키워 준 이들에게 말도 하지 않고 사라진 것에 대한 부채감이 있다. 죄책감이 있지만, 그건 부모라는 덩어리 앞에서 존재하는 도덕적 반사작용에 불과했다. 만약에 그들이 다른 부부로 대체된다 하더라도 이는 똑같을 거다.
오히려 미안하고, 보고 싶은 건 박 사장 내외였다. 윤오는 스스로가 참 모질고 못되었단 생각을 한다. 신조는 그런 윤오를 보며 무른 속은 세상을 사는 데 하등 쓸모없다는 생각을 하고.
서로 다른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윤오는 대답할 때를 빼고는 먼저 말을 거는 둥 애써 친근하게 굴지 않았고, 신조는 심심찮게 농담 따먹기를 했다는 거다.
“음료수 마실래?”
묻지도 않고 드라이브 스루에 들어오면서 묻는다. 윤오는 고작 몇 년의 방황만으로도 주문이 낯설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냥 아무거나 먹을게요.”
하지만 자존심이 상했다. 뭘 시켜야 할지 모르겠어요, 라고 하는 대신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신조는 커피 한 잔과 함께 듣기만 해도 혼란스러운 온갖 커스텀을 추가한 음료를 주문했다. 윤오는 슬슬 불안해졌다. 그가 별 괴상망측한 걸 줄까 봐. 커피는 분명히 지가 먹겠지? 윤오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넌 달달한 거 마셔.”
들기에도 묵직한 프라페가 나왔다. 윤오는 탑처럼 쌓인 생크림을 보고 질린 기색을 했다. 심지어 컵도 컸다.
“먹기 싫으면 주고. 내가 먹게.”
“아니에요.”
“자존심은. 자존심 부리다가 다치기만 해.”
“…….”
더는 대꾸하지 않고 생크림을 떠먹었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소리에 신조가 고개를 돌리며 목 안으로 웃음을 삼켰다.
이후 매장에 들러 핸드폰을 사고, 지역이 발달하며 새로 생긴 백화점에 들를 때까지 윤오는 느릿느릿 컵을 비웠다. 겨우 다 마셨을 때는 속이 느글거릴 정도였다. 그래서 윤오는 신조가 내미는 옷이 베이지색인지 밀짚색인지 아이보리인지 알 바가 아니었다. 사실 제 눈엔 다 그게 그 색 같아 보였다.
“탁하지 않고 노란 기 안 도는 베이지 계열로 줘요. 그리고 좀 보들보들하게 안 자극적인 촉감으로.”
세상에 ‘보들보들’이라는 말이 이렇게 안 어울리는 사람도 없을 거다. 범신조의 손목이 가볍게 돌 때마다 컵 속의 얼음이 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거기에 운율을 맞추는 듯한 ‘보들보들’을 곱씹으며 윤오는 헤식은 웃음을 흘렸다.
자존심 상하게도 범신조가 멋대로 시킨 음료는 윤오의 입맛에 맞았다. 다만 양이 너무 많았다. 오랜만에 단 걸 너무 많이 먹은 게 문제였을까. 한숨이 푹 나오는데 그 숨에서조차 단내가 나는 것 같았다.
이것저것 제 마음대로 고른 뒤 손을 내저어 쇼퍼를 내보낸 신조가 윤오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팔이 자연스레 윤오의 등 뒤로 뻗어져 누가 보면 정말 애첩과 졸부처럼 보일 자세가 되었다.
“맛있었어?”
“다음엔 그냥 먹고 싶은 거 제대로 말할게요.”
“그래. 그런데 정말 다 안 마셔도 되는데. 고집은.”
“…약 올리는 거 같아서요.”
“내가? 뭐하러.”
신조는 픽 웃고는 팔을 내렸다. 엉겁결에 윤오가 소파에서 등을 떼는 바람에 그의 팔이 등을 감고 돌아 허리에 감겼다. 커다란 손이 윤오의 차게 식은 배를 더듬었다. 옷 위로 더듬는데도 그 체온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윤오는 또다시 피부로 먼저 신조의 체향을 느꼈다.
“그렇게 꼬인 사람 아니야. 싫으면 싫다고 말해.”
“싫었어요. 단 거 잘 안 먹어요.”
“그래. 좋네. 저녁엔 따뜻한 거 먹자. 배탈 안 나게.”
“날 거 같아요, 이미.”
“믹스 커피 잘 마시길래 단 거 좋아하는 줄 알았어. 미안.”
눈을 질끈 감은 윤오가 등받이를 타고 스르르 미끄러졌다. 의외로 사과를 잘한다. 사과해 버려서 짜증을 낼 기운도 빠졌다. 사실 안 먹어도 되는데 억지로 먹은 제 잘못도 있었다. 괜히 자존심을 세워서는….
신조는 얼굴을 굳히고 윤오를 당겼다.
“그만해. 시체처럼 보이는 장난 안 좋아해.”
“…그쪽이 예민한 거 같은데요.”
“맞아. 과민해. 그러니까 흐느적거리고 싶으면 차라리 나한테 기대.”
신조가 꼬아 앉은 다리를 바꿔 포개며 자신의 어깨로 윤오를 눌렀다. 윤오는 저도 모르게 킁킁거리며 그의 체향을 맡았다. 그 우스울 만큼 거친 숨결을 느끼며 신조는 고개를 모로 돌렸다. 어린 치인일수록 체향에 약했다. 유혹에는 더더욱 약하겠지.
뒷조사? 물론 했다. 윤오가 질 나쁜 나이트클럽에서 반년간 일했단 사실도 안다. 이력은 알아도 하루하루 무슨 일을 겪었는지까진 모른다. 그래도 큰일은 없던 모양이다.
윤오는 끔찍했을지 몰라도 몸 성히 나왔으면 잘 지낸 편이다. 어린 치인이 어쩌다 금인에게 걸려 유혹에 빠졌다면… 그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신조는 윤오의 팔뚝을 집요하게 문질렀다. 생각에 빠질수록 그의 체향이 짙어졌다. 윤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신조에게 더 달라붙었다.
방 안의 묘한 분위기에 말을 걸까 말까 고민하던 쇼퍼와 눈이 마주친 건 그 때였다. 신조가 윤오를 더 끌어당기며 짙게 웃었다.
“들어와요.”
그 소리에 윤오는 당황하여 정신을 차렸다. 언제 이렇게 붙어 있었지. 허둥지둥 몸을 떼려는데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신조가 강한 힘으로 어깨를 누르고 있어서 이 이상 넘어가지 않게 버티는 데만도 버거웠다.
“예쁘네.”
조금 전과 다르게 행거를 보지도 않은 신조가 카드를 내밀었다.
“집으로 갖다줘요. 아, 파자마랑 속옷도 몇 벌. 사이즈가….”
그는 느른히 윤오에게 시선을 돌렸다. 민망한지 여전히 품에서 벗어나려 버둥대고 있었다.
“아래는 알겠는데, 김윤오. 가슴 사이즈가 몇이야?”
그 태연한 물음에 윤오가 기함했다. 아래 사이즈를 아는 것도 징그러운데 필요도 없는 가슴 사이즈를 묻는다. 저 입을 한 대만 때리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세 대도 좋겠다.
“아. 그건 다음에 사고.”
킥킥 웃은 신조가 펜을 꺼냈다. 윤오에겐 낙낙한 셔츠 파자마가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일상복은 밝은색으로 맞추었으니 파자마는 짙은 색이 좋겠다. 주문표에 취향대로 사이즈를 조금 더 크게 적었다.
이어 속옷 쪽도 적어내려가다 잠깐 멈칫했다. 가슴 사이즈는 일부러 놀리기 위해 물은 건데도 문득 궁금해져서 허공에 대고 손을 펼쳤다. 엄지와 엄지를 붙이고 조금씩 좁혀 가자 무엇인가를 움켜쥐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 정도였던가.”
그게 자신의 가슴을 뜻하는 것임을 뒤늦게 깨달은 윤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화났네. 풀어줘야 할 것 같아서 가 봅니다. 나머지도 알아서 잘해 주시고.”
펜을 행커치프 주머니에 꽂은 신조가 휘적휘적 윤오를 쫓아 나갔다.
앞서가는 동글동글한 머리통 위로 김이 올라오는 것 같다. 애는 애다. 새삼 윤오가 어리다는 걸 느끼며 범신조가 한숨을 삼켰다. 조금 전 손으로 가늠했던 가슴 폭도 되새겼다. 망가뜨리지 않고, 다치지 않을 정도로 쥐려면 어느 정도로 해야 할지…. 가슴뼈를 말하는 건지 김윤오 자체를 말하는 건지 모호한 말을 속으로 뇌까리며 허공에 손을 쫙 폈다가 쥐었다.
* * *
윤오는 결국 배탈이 났다. 속이 차가워진 만큼 얼굴도 희게 질렸다. 윤오가 말도 없이 홀로 참고 있는데도 신조는 어떻게 기민하게 눈치채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꼴좋다 여기며 이리저리 끌고 다닐 줄 알았는데 뜻밖이었다. 심지어 옷을 갈아입고 나오라 방으로 들여보낸 사이 따뜻한 수건까지 준비해둔 상태였다.
“왜. 사람이 좀 의외성이 많아?”
윤오를 소파에 눕힌 뒤 배 위에 따뜻한 수건을 올려둔 채 신조가 물었다. 팔꿈치를 소파에 두고 바닥에 앉아 있어 얼굴과 얼굴이 무척 가까웠다. 윤오는 식은땀을 흘리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너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주문한 거 아니야.”
신조가 커다란 손으로 윤오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얼음을 삼킨 것처럼 차가운 배는 쉽게 따뜻해지지 않았다. 배가 아픈 걸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마는 윤오는 특히 싫었다. 기침 감기보다 더 싫었다. 어쩐지 비참해지고 기분이 끔찍하게 망가졌다. 고작 배가 아픈 건데 그랬다.
눈물이 많은 타입이 아닌데도 이상하게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특히 신조와 시선을 마주치고 있으니 그랬다. 피하면 될 일인데 피하고 싶진 않았다. 이것도 태어날 때부터 점지된 짝이라서 그런 걸까.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내려와 눈가를 훔쳤다. 건조한 손끝을 적신 것을 신조는 입 속으로 가져갔다.
“더러워.”
윤오가 중얼거렸다. 신조는 비웃었다.
“고작 눈물이?”
“짜지 않아요?”
“별로.”
심심하게 응수한 신조가 수건을 확인했다. 금세 식었다. 싱크대로 가서 물에 적시고 전자레인지에 돌리는 행동이 처음부터 끝까지 남자하고는 안 어울렸다.
그는 다시 돌아와 윤오의 판판한 배 위에 수건을 올렸다. 따뜻함에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신조는 팔을 괴고 윤오를 지켜봤다.
“생각보다 재수 없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고작 이틀 지내 봤으면서.”
“그럼 재수 없으세요?”
하룻강아지는 생각보다 골 때린다. 신조는 제 입술을 꾹꾹 누르다가 대답했다.
“모르겠는데. 그건 이제부터 네가 판단해야지.”
“…적어도 겨울엔 좋을 것 같아요.”
“겨울에만?”
“여름에는 체온이 너무 높아서… 더울 테니까요.”
“아하. 날 탕파처럼 쓰시겠다.”
“탕파가 뭐예요…?”
“따뜻한 물주머니.”
“옛날 말이죠? 옛날 사람.”
신조는 아파도 쉬지 않는 윤오의 입술에 기가 찼다. 대답하는 대신 몸을 일으켜 소파 위로 올라갔다.
신조가 옆으로 누우면 어떻게 두 명도 수용할 수 있는 소파였다. 수건 아래로 뜨거운 손이 들어와 윤오의 명치께를 지그시 눌렀다.
“안 무서워?”
위에서는 고개와 팔이, 아래는 다리가, 옆은 몸통이 윤오를 가두었다. 소파와 신조 사이에 파묻혀 숨이 막혔지만 무섭지는 않은 것 같았다. 확신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그래도 체향은 좋았다.
“여름엔 확실히… 더울 것 같아요.”
“에어컨을 세게 틀게 하지.”
“…….”
“김윤오. 내가 옆에 있어도 안 무서워?”
윤오는 한참 만에 웅얼거렸다. 배가 조금 덜 아팠다.
“그런 것 같아요.”
“…….”
“어쩐지… 알고 있던 형 같아요.”
“형?”
“아니, 삼촌.”
“삼촌….”
신조의 목소리가 한껏 낮아졌다. 형이라고 할 때는 웃음을 터뜨리려다가 삼촌이라고 하니 떨떠름한 모양이었다. 윤오는 축축한 수건을 쥐었다 펴며 피부로 스며드는 체향을 만끽했다. 잠이 온다. 가물가물 감기는 눈꺼풀을 저항하기에 윤오는 너무 무력했다.
“저녁 먹어야지.”
나지막하고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윤오는 작게 몸서리쳤다. 듣기 좋은 목소리인데도 끔찍하게 떨쳐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무의식중에 윤오는 차갑게 대꾸했다.
“싫어.”
닿아 있던 몸이 잠시 굳었다가 풀어졌다. 신조는 여전히 고저 없는 목소리로 “좋아. 마음대로 해, 고집쟁이.”라고 했다.
사실은 배가 고프지만, 안긴 품이 따뜻해서 눈을 뜨기 싫은 건데. 윤오는 자신이 왜 이렇게 못되게 굴었나 생각하려다가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 * *
부드럽게 닿는 촉감에 어렴풋이 웃었다. 좋아, 하고 중얼거린 것 같기도 했다. 윤오는 볼을 간지럽히는 손길에 고개를 돌리려다가 그것조차 귀찮아서 그냥 두었다. 다가온 손길은 부서질 것을 대하듯 볼을 어루만지고 목선으로 내려갔다. 이불이 조금 내려가고, 그다음에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제 방이 아니었다. 사실 신조가 너 쓰라고 준 방이 아니었으니 내 방이라고 할 순 없지만, 일단 이곳이 이틀간 신세 졌던 그곳이 아닌 건 확실했다.
윤오는 상체를 일으킨 채 눈을 꿈뻑였다. 주위를 둘러보자 창가에 위치한 라운드 테이블과 그 위의 화병에 꽂힌 싱싱한 꽃이며 갈대풀이 윤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바닥은 따스했다. 살짝 디딘 발바닥이 절로 노곤하게 풀어졌다. 윤오는 느릿느릿 걸어 화병으로 손을 뻗었다. 강아지풀도 이렇게 꽂히니까 멋있네.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이곳은 아마도 신조의 방일 것이다. 집중해 신경을 기울이지 않아도 자연히 피부에 와닿는 체향이 그랬다. 깨닫기도 전에 은은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윤오는 여전히 피부로 향기를 느낀다는 것이 어색해서 자신의 팔을 쓸었다.
‘되게 넓네….’
안방이 아니라 안쪽에 있는 다른 집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컸다. 구경하자니 주인이 없어 망설여졌다. 고민하다 결국 그대로 침대에 다시 누워버렸다. 딱히 잠이 오진 않는데 나른해서 마음만 먹으면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윤오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하릴없이 시간을 죽였다.
배가 많이 고프긴 했다. 왜 이렇게 배가 고프지, 하다가 전날 밤에 제대로 먹은 것 하나 없이 잠들었다는 게 떠올랐다. 다 범신조 때문이었다.
‘…그냥 이름으로 막 불러도 되나?’
남자를 무어라 칭해야 할지 모르겠다. 분위기 탓인지 외모로는 도통 나이를 가늠키 어려웠다. 형이라고 하기에는 아무리 적어도 형 터울은 아닌 듯싶었고, 그렇다고 아저씨라고 부르자니 그 정도로 나이가 많은 것 같지도 않았다. 게다가 아저씨라고 부르면 더러운 관계처럼 보일 것만 같았다.
‘그게 맞긴 하지.’
치인이 금인의 발정기를 잠재워 주는 대신 치인과 그의 집안은 금인이 주는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 대가가 있는 잠자리를 세간에서 뭐라고 하는지, 윤오도 잘 알고 있다.
쓸데없는 생각이 길어진다. 윤오는 차라리 잠들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한번 마음먹으니 몸에 힘이 들어가서 자꾸만 움찔거리며 선잠에 빠지게 되었다.
뇌가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게 느껴진다. 피로할 정도로 분주하게 움직이며 온갖 장면들을 그렸다 지워냈다. 그중에는 윤오가 경험한 적 없는 일들도 있었다. 상상력은 무엇이든 그릴 수 있었다.
얼굴이 따뜻했다. 아마도 따뜻한 물을 끼얹은 모양이다. 세수라도 했나. 세수라면 요란하게도 했다. 손바닥을 내려다보니 꿈 특유의 색조 없는 화면 속에 까칠하게 벗겨진 살갗이 보였다. 그리고 가슴이 들썩거리도록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도망이라도 친 모양이지. 현실에서도 그토록 도망 다니더니 꿈에서도 이런다. 그러면 옷은 사이즈가 작고 낡은 패딩을 입고 있어야지, 난데없이 옛날 옷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도망이라고 하기에는 가슴 깊은 곳에서 묻어나는 안도감에 눈시울이 시큰할 지경이었다.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제가 도망치려던 존재가 아닌지 두려움은 밀려오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가슴이 쿵쿵 무겁게 내리 앉았다.
커다란 발이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짚신조차 신고 있지 않다. 거친 산길을 맨발로 헤치고 있으면서도 그게 전혀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천천히 든다…. 이 얼굴을 알고 있다.
알기에, 보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이 강렬했는지 윤오의 꿈이 끊어졌다. 옆에서 왁 소리를 지른 것처럼 지레 놀라 깼다. 움찔하며 놀라서 깬 바람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가위라도 눌린 양 사지가 무겁다. 바위, 아니 태산 같은 것에 짓눌리는 것 같다. 피할 수 없는 파도를 준비도 없이 맞게 된 것 같다.
남자를 만나고 잠시 끊겼던 꿈이 결국 다시 시작됐다. 다만 전과 다른 점은 더 이상 노란 눈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이게 대체 무슨 꿈인지 모르겠다는 거다. 옛날인 것 같기도 하고. 사극을 많이 본 것도 아닌데 별 이상스러운 꿈을 다 꾼다. 어쩌면 자신은 원래부터 꿈을 많이 꾸고 헛된 망상을 많이 하는 타입이었던 모양이다.
몸을 뒤척이려던 윤오는 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걸 깨달은 순간 세상이 훅 넓어졌다. 작은 초점처럼 좁았던 인식의 범위가 시야 너머로 펼쳐졌다.
“…….”
잠들 때까지는 없었던 남자가 어느새 자신의 옆에 누워 있었다. 아니. 옆이 아니다. 자신을 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목이 배긴다 싶었더니 원하지도 않은 친절한 팔베개 때문이었다. 돌처럼 딱딱한 몸이니 돌베개나 마찬가지지.
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사람 자는 틈에 몰래 들어와서는. 왠지 평소보다 조금 더 화가 치밀었다. 그런데 이상스러운 미련도 있었다. 미련이라니. 이해할 수 없게도.
결국 밀쳐내려는 것 같기도 하고 껴안으려다 만 것 같기도 한 어정쩡한 팔을 한 채로 윤오는 신조를 노려봤다.
“꿈 다 꿨어?”
눈을 감은 채로 신조가 물었다. 어쩐지 놀랍지 않았다. 신조는 잠도 안 잘 것 같고 피도 안 나올 것 같다.
“네.”
“무슨 꿈 꿨어?”
“그냥 개꿈이요.”
그 말에 신조가 눈을 떴다. 윤오의 베개로 쓰던 팔을 당겨 머리 밑에 괴고 윤오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말해 봐. 무슨 개꿈인데.”
“…….”
“설마 내가 나왔나? 개새끼 하나가 나와서 꿈에서까지 간섭질을 했어?”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다. 다만 정말로 범신조가 꿈에 나왔다면 자신이 저렇게 생각했으리란 점이 저 말을 더 진담처럼 들리게 했다. 사실도 아닌데 왠지 찔려서 윤오는 팔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신조가 딱딱하게 굳은 윤오의 볼을 엄지로 쓸었다.
이 남자는 은근히 사람의 몸에 쉽게 손을 댔다. 너무나 가벼운 접촉에 성욕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윤오도 저도 모르게 자꾸만 몸을 내주게 되었고. 시나브로 익숙해지는 건 순식간일 게 분명했다.
익숙해지지 않겠다 하더라도, 적어도 지금은 이 온기가 달가웠다.
“진짜야?”
“아니에요. 그냥 개꿈이었어요. 기억도 잘 안 나요.”
“그래…?”
“누가 나오는지 얼굴도 몰라서 개가 나왔는지 그쪽이 나왔는지도 모르겠고요.”
남자가 웃었다. 한쪽 입꼬리만 올리는 재수 없는 웃음이 아니었다. 자세히 보려는 찰나 순식간에 표정이 사라지고 평소처럼 돌아온 그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배고프지? 밥 먹자.”
집요하게 캐묻지 않는다. 처음 편의점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그렇게 사람을 무섭게 쫓더니, 정작 같이 지내며 발견해 가는 건 숨 막히게 굴지 않는단 점이었다. 첫날에는 그저 겁을 준 것에 불과했나 싶을 정도였다.
“그쪽은 제 생각하고 다른 것 같아요.”
네 개나 있다던 핸드폰 중 하나를 짚어 대충 화면을 쓸던 남자가 멈칫했다.
“왜? 생각보다 더 별로인가?”
윤오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신조는 이 순간 잘 읽고 있던 화면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뇨. 첫인상이 너무 별로였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거 같아요.”
“이런. 좋아지려면 더 힘내야겠는데.”
“제가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당돌한 물음이었다. 그리고 내뱉자마자 후회했다.
신조는 핸드폰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리고 대답하지 않고 방을 나갔다. 윤오는 이번에도 눈치챘다. 범신조는 제가 어떤 대답을 해도 자신이 부담스러워하리란 걸 알고 있었으리라고.
* * *
생각보다 둘이 있는 게 힘겹지 않았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각자 할 일을 해도 그 침묵이 어색하지 않아, 같은 공간에 있어도 피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거실이 어지간한 집보다 커서 그럴지도 모른다. 범신조와 윤오는 소파의 끝과 끝에 자리를 잡고 그렇게 고요 속에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일 좀 볼 게 있다며 신조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윤오는 낯선 핸드폰을 만지작대다가 신조가 사라지기 무섭게 빈방으로 들어왔다. 근무하던 한식 뷔페 이름을 검색하고, 뜨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모르는 번호라고 받지 않으시면 어떡하지.
그동안은 서로 전화를 걸 일이 없었다. 걸 방법이 없기도 했고. 처음 면접을 봤을 때 핸드폰이 없다고 하니 그러면 지각할 땐 어떡하냐는 물음에 절대 그럴 일 없다고 했다.
그럼 한번 일해 보자는 말과 함께 시험 삼아 일주일, 그러다가 열흘, 그러다가 한 달이 이어져 일 년 반이 되었다. 일 년 반이나 함께 지냈으니 이렇게 떠나온 게 마음에 걸리는 게 당연했다.
몇 번의 연결음 끝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 예. 한라 한식 뷔페입니다.
박 사장의 목소리였다. 윤오는 이 목소리를 부모님 것보다 그리워했다.
“사장님!”
핸드폰을 두 손에 꼭 쥐고 다급히 외쳐 말했다. 일 년 반을 일하는 동안 차분하기만 했던 윤오의 목소리가 이렇게 높아진 건 박 사장도 처음 들었을 거다.
“저 윤오예요. 저…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갑작스럽게 그렇게 그만두게 되어 죄송해요. 경우 없었어요. 저 때문에 곤란하시면 안 되는데….”
두서없이 급하게 제 할 말만 늘어놓느라 바빴다. 말끝이 점차 흐려졌다. 잠자코 듣고 있던 박 사장은 점점 조급해지는 윤오의 말을 부드럽게 잘랐다.
― 윤오야. 괜찮아.
입술을 꾹 깨물었다. 괜찮다는 말이 얼마나 고맙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정말 괜찮으세요? 정말요? 제가 또 찾아가도 돼요…? 수많은 물음이 밖으로 나오지 않고 그저 동글동글 뭉쳐 목을 막았다.
― 일이 곤란하지도 않고. 그리고 그날 우리 예감했었잖냐. 걱정하지 말고 너무 죄책감 가지지도 말고. 월급날 직후에 그렇게 되어 다행이네.
박 사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윤오의 마음을 가볍게 해 주려는 게 빤했다. 그리고 그 빤한 마음에 윤오의 체한 마음도 살살 풀렸다.
― 또 연락하면 좋겠다. 사장님은, 아니, 아저씨는 그저 네가 잘 지냈으면 해.
저도요.
그런 대답이 입속에서 맴돌았다. 그의 말대로 내가 잘 지냈으면 하는 희망과, 나 역시 박 사장 내외가 잘 지냈으면 한다는 안부가 함께 뒤섞여 가라앉았다.
윤오는 끊기가 아쉬워 미적거리는데 박 사장은 아니었다. 그는 어차피 언제고 윤오를 다시 볼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이게 영영 이별인 것처럼 미련을 두고 싶지 않았다.
─ 잘 지내라, 밥 잘 먹고.
그 목소리 뒤로 윤오야, 놀러 와, 보고 싶다! 하는 사모님의 쾌활한 인사도 들렸다.
통화를 잘 마무리하고도 윤오는 자신이 바쁠 때 전화했나 싶어 고민했다. 장사를 마무리했을 시간이란 걸 앞서 확인했으면서도 이런 생각을 한다.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하고 마는 것, 그게 바로 미련이었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방문을 열었다가 흠칫 굳었다.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선 신조가 보였다.
“1분만 더 안 나왔으면 들어가려 했어.”
뭐하러? 급한 게 있는 것도 아니고 굳이 그럴 이유가 있나. 그리고 그는 자신이 나오길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냥 들어오셔도 되잖아요. 어차피 그쪽 집인데.”
“그럴 수 있지. 하지만 그랬다간 네가 싫어했을 거 아냐.”
“전에 제 돈도 멋대로 보셨으면서 그런 걸 신경 쓰세요?”
“어. 싫어할 걸 알면서도 하게 되네. 앞으론 좀 참아 볼게. 근데 일단 저지른 짓은 숨기는 것보단 말하는 게 낫지 않았어?”
어쩌면 저렇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포장하려는 노력도 없이 잘할까. 윤오의 귀에는 그저 궤변에 불과하다.
“그냥 하지 마세요. 싫어할 짓을.”
기가 차서 뾰족하게 대꾸하고 말았다. 남자가 자꾸만 받아주니 자신도 이렇게 선을 넘는다. 뒤늦게 아차 싶으면서도 뭐 어떠냐 하는 게 자신답지 않았다. 범신조 앞에서는 자꾸만 평소의 김윤오답지 않게 행동했다.
아, 남자의 궤변도 이런 걸까.
범신조가 싫은 건 아니다. 그런데 거슬린다. 남자가 곁에 있는 게 불편하진 않은데 곁에 있으면 신경이 곤두선다. 윤오는 조금은 신조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저 왜 기다리셨어요?”
시선을 빗겨 내리며 윤오가 중얼거렸다. 신조는 잠시 망설였다. 원래 창백한 피부인 윤오의 얼굴은 조명 아래에서 유독 더 차게 보였다. 그럴 때면 손을 뻗고 싶어진다. 신조는 간지러운 손끝을 옆구리에 더 붙였다.
“할머님이 병원에 입원하셨대.”
윤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원래 김윤오는 반응이 큰 편은 아니었다. 그 나이대에 비해 조숙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설령 놀라거나 화가 나더라도 눌러 참는 건지 오래 티 내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날 정도로 동요하고 있었다. 다만 그건 사랑하는 사람의 안 좋은 소식을 들어서라기보다, 혼란과 당황이 많이 섞인 채 자신도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분간하지 못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 약해진 모습이 범신조를 흔들었다. 크게 뜨여 흔들리는 검은자위와 부산스럽게 깜빡이는 눈꺼풀이. 길을 잃은 데다 겁까지 먹어서 울지도 못하는 어린애 같은 표정이.
신조는 결국 충동을 이기지 못했다. 자신을 꺼려하는 걸 알아 잘해 주고 싶어도 자꾸만 욕구부터 뻗쳤다. 윤오의 볼에 손을 얹었다. 솜털이 느껴진다. 다 컸는데도 어린 기운이 남아 있다. 하기야. 그의 눈에 윤오는 항상 어려 보일 것이 당연하다.
“갈래?”
지금껏 들은 신조의 말투 중 가장 다정한 말이었다. 윤오는 망설이며 시선을 피했다. 그는 망설이는 윤오를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그래서 윤오는 내밀리듯 결정하지 않을 수 있었다.
“가면 부모님도 계시겠죠…?”
“그래.”
생각에 잠겨 시선을 옆으로 굴리느라 덩달아 윤오의 고개가 미약하게 돌아갔다. 신조의 손바닥에 부드러운 볼이 폭 파묻혔다. 신조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피부로 느껴지는 체향. 윤오의 체향이 그 어느 때보다 짙게 느껴진다.
“어차피 잡혔는데.”
“…….”
“갈게요.”
“네가 원하는 대로 해.”
그 말에 윤오는 눈을 돌려 신조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사실은 그렇게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그는 아직 확신이 없다. 언젠가 생기기나 할까 싶은 확신. 범신조는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인가.
결국 윤오는 꺼질 듯한 목소리로 혼자 다녀올게요, 했다. 짝인 금인과 함께 나타나고 싶지 않다. 잘됐다거나, 만나니 괜찮지 않냐거나, 하다못해 그 이상한 ‘범 서방’ 같은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다.
폭언을 듣거나 폭력이 휘둘러진 적도 없고 방치된 적도 없는데 나는 왜 부모님을 만나는 게 싫을까. 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까….
“난 앞에서 기다리지.”
“혼자 보내면 도망칠 테니까요?”
“맞아.”
범신조가 윤오의 남은 뺨에도 손을 올렸다. 그리고 얼굴을 자신 쪽으로 당겼다. 신조는 윤오가 너무 아담하거나 왜소하지 않아서 좋았다. 그의 체구는 상당히 큰 편이고, 만약 윤오가 작고 왜소했다면 이렇게 하는 것조차 어려웠을 거다.
“넌 도망을 아주 잘 치잖아.”
확신이 없는 건 윤오만이 아니었다. 신조 역시 윤오에게 확신이 없었다.
그것만은 공평했다. 아무리 보아도 둘은 사회적 지위, 재력, 심지어 육체적 힘까지 큰 차이가 나는데 서로를 믿을 수 없다는 사실만은 공평했다.
* * *
내키지 않았다.
가장 내키지 않는 점은 범신조와 함께, 높은 확률로 그의 차를 타고 가게 될 거란 사실이었다. 호기롭게 도망쳐 나와선, 도망치려던 상대가 해 준 거짓말로 시간을 벌고 끝내 그와 돌아간다니. 촌극도 이런 촌극이 없었다.
“김윤오.”
신조가 자신을 불렀다. 옷장 앞에서 터진 곳을 테이프로 붙인 패딩을 만지작대며 자괴감과 부끄러움에 빠져 있던 윤오가 이윽고 바깥으로 나왔다.
“왜요…? 한 시간 뒤에 가자고 했잖아요….”
불만으로 웅얼거리는 퉁퉁한 얼굴을 보곤 신조는 괜히 입술을 만지작대는 척 터지려는 웃음을 가렸다. 어리단 건 알았지만 이렇게 보면 정말 어렸다. 그저 나이 차가 있어서 어리단 느낌이 아니라 나이의 숫자 자체가 적은 느낌. 신조에게 좋은 일은 아니었다.
“좀 노안이었어도 좋은데.”
“네?”
“아니야. 그냥 한 말이야. 나와 봐, 애첩. 졸부가 한 짓거리 보러.”
윤오는 느릿느릿 발을 끌며 나왔다. 그러곤 정말로 놀라고 말았다. 눈앞에 펼쳐진 옷의 향연에.
윤오에게 옷을 산다는 건, 손에 들 수 있을 만큼 쇼핑백에 담아 집으로 돌아오는 규모를 뜻했다. 택배를 시켰을 때도 어쨌든 본인이 들고 들어올 정도의 크기를 뜻했고. 이렇게 옷가게를 전부 옮겨 온 것 같은 풍경은 아니란 뜻이었다.
“병원엔 어떤 옷을 입고 가야 맞나. 병원을 가 본 적이 없어서.”
범신조가 잡히는 대로 윤오에게 갖다 대 보았다.
“너무 많은데요…. 제가 이만큼 샀다고요?”
“무슨 소리야. 네가 어떻게 이만큼 사.”
그 대답에 안도의 숨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내가 샀지. 김윤오. 이거 입을래?”
검은색 목폴라였다. 윤오는 우리가 가는 곳이 상갓집은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며칠 지낸 것만으로도 범신조가 상식적인 대화가 그다지 통하지 않는 사람이란 건 깨달았다.
그런 사람 앞에서 바지가 안 맞는다고 아랫도리를 내놓고 갔던 나도 나지만…. 새삼스럽게 자신이 했던 짓이 얼마나 미친 짓이었나 깨달았다. 윤오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아무거나 집히는 대로 한 벌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옷을 모두 벗고 하나씩 입으려는데 갑자기 문이 열렸다.
“너 벨트….”
아무리 본인 집이라고 해도 너무 갑작스러운 거 아닌가. 조금 전에는 문밖에서 기다렸으면서. 남자의 매너와 비매너의 기준을 모르겠다. 당황한 윤오는 곧 다시 옷을 입는 데 집중했다. 여전히 그에게는 신조가 제 짝인 금인이라는 사실보단 연상의 동성이란 생각밖엔 안 들었다.
니트부터 일단 입고 벨트를 받으려고 돌아보았다가 움찔하고 말았다. 신조가 코앞에 있었다.
“노, 놀래라.”
“정강이에 상처가 있네.”
신조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무릎을 굽히고 천천히 내려가 윤오의 정강이를 들여다본다. 그 시선이 간지럽고 민망해 다리를 꼬자 대번에 다리가 덥석 잡혔다. 신조는 손으로 종아리를 감싸고 엄지로 상처를 쓸었다. 상처인 줄 알았던 건 이미 손상과 회복의 단계를 지나 흉으로 남은 흔적이었다.
“언제 다친 거야?”
그가 자꾸 다리를 당기려고 해서 윤오는 결국 뒤에 있던 침대에 털썩 앉고 말았다.
“그냥 어릴 때부터 있던 상처예요. 몽고반점 같은.”
“날 때부터 이랬다고.”
“…다친 거라고 했으면 다치게 한 사람 찾아가 때리기라도 할 표정이네요.”
“고작 때릴 정도일까.”
신조는 어쩐지 힘 빠진 웃음을 흘렸다. 여전히 그의 엄지가 정강이를 헤매고 있었다. 사실 거의 신경 쓴 적 없던 상처인데 그가 자꾸 이렇게 만지니 새삼 간지럽고 보이기 싫다. 다리를 빼려고 하니 무슨 일인지 순순히 놓아 주었다.
“때리는 정도론 안 되지. 사는 게 아주 고통스러워야지. 안 그래?”
“고작 다리 상처로요? 왜 그렇게 무섭게 이어져요? 금인들은 원래 그래요?”
“적응해. 너한테는 무섭게 안 할 테니까. 그리고 다른 금인들은 어떤지 몰라. 궁금하지도 않고.”
나한테는 무섭게 안 하겠다고? 그건 모르는 일이지. 윤오는 속으로 말대꾸를 하고 바지를 입었다. 벨트나 얼른 받고 내보내야겠다 싶었다. 그러나 달라고 손을 내밀었어도 신조는 순순히 건네주지 않았다. 오히려 튕기며 가지고 놀았다.
“…좀 변태처럼 보여요.”
남자 손에 가죽 벨트가 들려 있으니 가학 성향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데, 그게 또 무섭도록 잘 어울렸다. 신조는 대놓고 저를 비난하는 말에 개의치 않고 손을 뻗어 윤오의 허리 뒤쪽부터 벨트를 밀어 넣었다.
“김윤오.”
“네.”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말해.”
“저 스물셋인데요.”
“그래서? 스물셋이면 괴롭히는 사람 없어?”
“지금 저를 처음 등교하는 초등학생처럼 대하시니까요.”
“매일 아침을 첫 등교라고 생각해. 매일 긴장하고 매일 조심해.”
남자가 자신을 과잉보호한다. 조사를 했으니 자신이 어떻게 지냈을지 다 알 텐데,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처럼 구는 신조가 윤오는 조금 이상했다.
그러면서도 금인이 치인에게 가지는 당연한 집착이라고 생각하면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박 사장이 말한 금인만 보아도, 저 치인은 자신의 것이니 죽여서라도 가져와야 한다고 했다잖나. 그 금인에 비해선 범신조는 조금 이상하긴 해도 훨씬 안 무서웠다.
“뭐 좀 먹고 가자.”
금세 주제가 바뀐 덕에 무겁던 공기가 산뜻해졌다.
윤오가 벨트를 채우는 동안 범신조는 윤오가 고른 적 없는 외투를 가져왔다. 도톰하니 따뜻해 보이는데 입었을 때는 놀랄 만큼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눈이 동그랗게 커져 소매를 살피는데, 범신조가 불쑥 다가와 코트를 여미고 허리끈까지 묶어 주었다. 다 입고 나니 어디 귀한 집에서 어화둥둥 키운 금지옥엽 도련님 같은 태가 났다. 신조는 만족스럽게 윤오를 살피다가 손을 뻗었다.
머리로 다가오는 커다란 손에 윤오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
그걸 물끄러미 보던 신조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대신 귀밑 부분부터 턱까지 조심히 감싸고는 닿을 듯 말 듯 눈꺼풀을 쓸고 지나가 앞머리를 넘겨 주었다.
쓸어 넘기는 손길이 너무나 조심스러웠다. 자신도 왜 그랬나 모를 정도로 놀라 질끈 감았던 눈이 천천히 떠졌다. 범신조는 무표정하게 윤오의 머리를 거듭 만지고 있었다.
평소에 짓궂게 구는 편이라 잊곤 하는데 범신조는 섣부르게 말을 걸기 힘든 인상이었다. 잘생겼으나 차갑다. 특유의 위압감 있는 분위기 때문인지 나이도 가늠키 어려웠다. 그래. 나이도 모를 정도로, 여전히 윤오는 범신조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그러니 궁금해진 차에 묻기로 했다.
“몇 살이에요?”
“이제야 내가 궁금해?”
“그냥 한 번에 대답해 주는 일은 없는 거예요?”
“네 반응이 재미있잖아. 활력 넘쳐서 좋아. 자꾸 찌르고 싶어져.”
“가르쳐 주기 싫으면 마세요. 제 마음대로 부를게요.”
“뭐라고 부르게.”
“아저씨요.”
범신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가 윤오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머리칼을 뒤로 넘겨도 성숙미보다는 어디 가족 행사에 따라온 풋내기 냄새가 너무 났다. 윤오에게서 나는 향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윤오에게서는 씁쓸한 풀 냄새가 난다. 바람 냄새기도 하고, 나무껍질의 향이기도 했다. 그리고 끝이 미약하게 달다. 그 잠깐의 단 향을 쫓아 자꾸만 맡고 싶어진다.
“아저씨는 아닌데.”
“그럼 몇 살인데요?”
“다음에 알려줄게. 일단은 좀 가지.”
사실 윤오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미적거린 것도 없잖아 있다. 신조는 그런 윤오의 속내를 꿰뚫어 본 듯 말했다.
그도 벌써 준비를 마쳤다. 윤오는 어디 콩쿠르 같은 곳에 내보낼 듯 예쁘게 꾸며 놓고, 정작 본인은 가볍게 피부로 떨어지는 브이넥 니트와 트라우저에 겉옷만 걸쳤다. 추위를 별로 안 타는 모양이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신조는 아예 윤오의 신발까지 골라줬다.
“예쁘네.”
“이런 거 좋아하시나 봐요. 어렸을 때 인형 놀이 좋아하셨어요?”
편견이 없다고 해야 할지, 편견이 있다고 해야 할지. 범신조는 얘가 진심으로 묻는 건가 싶어 속내를 파악해 보려다 포기했다. 김윤오의 진심을 이해할 수 있는 날은 쉽게 오지 않을 거다. 지금까지도 완벽하게 이해한 적이 한 번도 없으니까.
“난 네가 벗고 있는 게 더 좋지만, 예쁘게 입혀 가야 너희 부모가 좋아할 것 같아서.”
“…….”
“나한테 기대한 게 있다며. 뭐라고 했더라. 대학도 보내 주고 원하는 건 다 사 준다고 했던가.”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이 열렸다.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읊는 덤덤한 목소리에 윤오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달아올랐다.
“그 기대에 부응하도록 예쁘게 꾸며서 보여줘야지. 그래서, 뭐 갖고 싶어?”
범신조가 자신의 볼을 가볍게 두드리며 물었다. 비꼬는 의도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말투인데도 민망하다. 그때는 미친 것처럼 굴자 해서 지껄인 말이, 제정신을 차린 지금은 그저 우스운 허세에 속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그가 저렇게 웃는 것도 이해가 됐다. 오히려 자신이었다면 훨씬 더 심하게 놀렸을 거다….
“놀리는 거 아니야. 정말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도통 움직이지 않는 윤오를 안으로 끈 신조가 닫힘 버튼을 눌렀다. 탑승했는데도 손을 놓지 않아서 엉겁결에 손을 꼭 잡고 있게 되었다. 윤오가 바르작거리자 신조가 더욱 세게 쥐었다. 혹시 손을 잡는 대신 원하는 걸 준다는 건가? 정말 그렇다면 기막힌 계산법이다.
“…자전거요.”
그래서 윤오는 손에 힘을 빼고 대답했다. 이미 지껄인 말에 대한 체념이 묻어났다. 막말로 화를 내거나 비꼬는 것도 아닌데 혼자서 부끄러워하면 뭣하나.
의외의 대답이었는지 신조는 한쪽 눈썹을 느리게 추켜올렸다. 지문 하나 없는 엘리베이터 벽면에 그 모습이 비쳤다. 한 명은 앞을 노려보고 있고 한 명은 그런 동행인을 응시하고 있다. 노려보는 건 윤오였다.
“자전거가 갖고 싶어요.”
자전거는 타기 위해 존재하는 거다. 자전거를 사 준다면 타기 위해 나가는 것도 허락해야 한다. 신조가 어떤 대답을 할까. 윤오는 잠시 숨을 죽였다.
“그래.”
곧 신조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이번에는 윤오가 눈썹을 추켜올렸다.
“소박하네. 차도 사 줄까?”
“면허 없어요.”
“넌 어쩜 내 마음에 쏙 드냐.”
신조는 킬킬 낮게 웃었다. 윤오는 눈치 빠르게 그의 의중을 깨달았다. 면허가 없으니 멀리, 빨리 갈 일도 없다는 거다.
곧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전에 백화점에 갈 때와 다른 차를 탔다. 신조는 어울리지 않게 조수석 문을 열어주고 운전석에 탔다.
가는 길이 그다지 멀지 않았다. 생각보다 도착 시간이 금방인 걸 보니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윤오는 괜히 어디 들르지 말고 빨리 가자고 했다. 먹고 싶은 게 없냐는 물음에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먹고 싶은 게 없는 게 아니라, 지금으로선 뭘 먹어도 얹힐 게 분명했다.
신조가 변명을 해 두었다고 해도 제 쪽에선 멋대로 가출한 뒤 몇 년 만에 만나는 거다. 속이 편할 리 만무했다.
그런 윤오의 속도 모른 채 병원까지 가는 길은 막힘 없이 수월했다. 병원 입구에서 잠시 시간이 걸렸지만 그건 주차를 위해서 속도를 낮춘 차들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다. 윤오는 고집스럽게 창밖을 보고 있다가 내릴 때가 되어서야 쥐고 있던 안전벨트를 놓았다. 손이 빨갛게 익었다. 긴장했는지 땀이 살짝 배어났다.
신조에게 이끌려 로비로 들어올 때까지 사실 윤오는 거의 정신이 없었다. 멍하게 그저 기다리고 있다가 병실을 알아 온 신조가 그를 건드려서야 정신을 차렸다.
“김윤오.”
“…아.”
“6층이라고 하네.”
“저, 저 혼자 다녀올게요.”
윤오는 신조를 밀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제 딴에는 침착하게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전혀 아니었다. 신조는 어디 윤오가 하는 대로 둬 볼까 싶어 순순히 밀려 줬다.
“저 혼자 다녀올 수 있어요. 그, 부모님도 오랜만에 뵙는 거고, 인사하는 데 시간도 걸릴 것 같아요.”
윤오는 자꾸 시선을 피했고 목소리는 떨렸다. 신조는 고개를 느리게 기울였다. 윤오의 손이 점점 오그라들어 신조의 옷을 구겼다.
“그러니까 저 혼자 다녀올게요….”
“김윤오.”
“…….”
“뭐라고 안 했어. 네가 그러길 원하면 혼자 다녀와.”
그제야 윤오는 자신이 신조에게 절박하게 매달려 있었단 걸 알았다. 천천히 몸을 세우고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게 예쁘다고 생각했던 니트에는 이미 구김이 갔다. 입술을 말고 몸을 돌렸다. 무안했다.
꺼져가는 목소리로 다녀올게요, 라고 말한 건 주의를 기울여야 겨우 들을 수 있었다.
윤오의 뒷모습을 보던 신조는 담배가 당겨 잠시 나갈까 했다. 기다리는 동안 느긋하게 있으면 될 거다. 도망을 잘 치는 짝을 두고 느긋하게 있을 수 있겠는가 싶다만.
몸을 돌렸던 신조가 갑자기 돌려세워졌다. 여전히 입술을 말아 물고 있는 윤오가 신조의 구겨진 옷을 털어주었다. 가벼운 손놀림이 손아귀 모양대로 뭉쳐졌던 걸 폈다.
“…됐어요.”
일을 벌리기도 하고 수습해 놓기도 하고, 그러고선 뭐가 무안한지 빠른 걸음으로 돌아 걸어간다.
때마침 온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윤오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던 신조는 고개를 내렸다. 구겨진 자국 하나 없이 말끔하게 펴진 니트는 가격의 가치를 했지만 오늘따라 그게 좀 못마땅했다. 좀 자국이 남았어도 좋았을 거다.
그러고도 잠시 더 옷자락을 보던 그는 허, 짧게 웃곤 발걸음을 돌렸다. 담배 말고 다른 것이 당겼다.
* * *
6층에 왔는데, 정작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윤오는 바보가 된 기분으로 멍하니 서 있다가 데스크로 향했다.
“저, 고양옥 환자분 뵈러 왔는데요.”
윤오는 쭈뼛거렸다. 이윽고 병실을 안내받긴 했지만 쉽사리 발걸음이 떼어지진 않았다. 복도가 울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간신히 걸어가 겨우겨우 문을 열었을 때는, 깨끗한 1인실이 있었다.
1인실. 그리고 상체를 일으켜 세운 채 앉아 계신 할머니, 어머니와 아버지.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신조가 이미 거짓말을 해 줬다는 기억은 까마득히 사라졌다.
“저….”
입술이 말랐다. 윤오는 혀로 빠르게 입술을 축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소리 없이 숨만 흘러나왔다.
그 때, 부모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윤오를 향해 다가왔다. 윤오는 순식간에 두 분의 품에 안겼다.
“윤오야! 어머, 세상에. 어머! 말도 없이 어떻게 온 거야…!”
“너 이 녀석. 그간 연락도 없더니…!”
안긴 힘은 강하고 체온은 따뜻했다. 그런데도 윤오는 굳은 몸을 풀 수가 없었다. 도리어 더 긴장된 나머지 웅크리고 또 웅크렸다. 나는 불효자야…. 묵직한 죄책감이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묵직하게 내리 갈랐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윤오는 부모님을 껴안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이 닿기 전에 할머니의 엄중한 목소리가 들렸다.
“범 서방은?”
그에 부모님도 고개를 반짝 들며 물었다.
“그래. 범 서방은? 같이 왔지? 밖에 있어?”
윤오가 들었던 손은 허공에서 머뭇거리다가 맥없이 떨어졌다.
“그 사람은… 밖에 있어요.”
“왜 밖에 있어. 들어오라고 하지. 그래, 윤오야. 너두 자리에 앉고. 좀 있다가 갈 거지? 범 서방이 데리러 올 거지?”
엉겁결에 끌려 앉혀졌다. 명치가 싸르르 시렸다. 윤오는 그간 잊고 있던 습관대로 손깍지를 꼈다가 풀어선 통째로 쥐었다가를 반복하며 조용히 부산을 떨었다.
“그 사람이 왜 범 서방이에요….”
하지 마시라며 힘없이 웃으니 할머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 보니 편찮으시다 해서 온 건데 어떠시냐고 묻지도 못했다.
“네 짝 아니냐. 짝이면 그런 법이야.”
“그런… 그런 게 어디 있….”
“윤오야. 그 사람 참 괜찮더라. 늘 살뜰히 챙겨주고 말이야. 바쁜 사람이라 잘 보지는 못하지만, 명절마다 이것저것 보내주고 그랬어.”
“그래. 여기도 우리가 범 서방 이름 대니까 금방 1인실로 잡힌 거 아니냐. 입원하려면 대기를 며칠은 해야 하는데.”
어찌나 뿌듯하고 자랑스러우신지 가슴을 쭉 내밀고 말씀하시는데, 그 모양새로 보아 아들은 아무래도 자신이 아니라 범신조인 모양이다. 윤오는 점점 더 가슴이 답답해졌다. 오늘 뭘 먹었더라…. 맞다. 아무것도 안 먹었지. 그러길 잘했다.
“네가 잘해야 한다. 그런 사람 없어. 너한테도 잘해 주지?”
“모르겠어요. 잘 모르는 사람 같아요.”
윤오는 겨우 웃어 보이며 말했다. 여기 들어와서 처음으로 말하는 진심이었다. 정말로 그 사람을 잘 모르겠어요.
“그 사람 자주 못 보신다면서요. 정말 좋은 사람 맞아요? 저는 안 보고 싶으셨어요? 저… 3년 만에 뵙는 거잖아요….”
“윤오. 이리 와 봐라.”
할머니가 윤오를 불렀다. 윤오는 흠칫 떨다가 등을 미는 손길에 겨우 일어섰다.
할머니께 다가가니 주름진 손이 윤오의 손을 잡았다. 손등을 쓸어내리는 촉감에서 섬뜩함을 느끼는 자신이 쓰레기처럼 여겨졌다.
“우리 윤오 착한 아이지?”
숨 막히는 소리. 착한 아이가 하기 싫어서 가출까지 했는데, 신조의 거짓말 덕에 여전히 윤오는 착한 아이로 남게 되었다.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할지 원망해야 할지… 어지럽기만 하다.
“윤오야. 우리 집이 얼마나 잘살았었는지 할머니가 몇 번이나 말했었지? 동네에서 티브이도 제일 먼저 들인 집이 우리였다. 그러다가 너희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풍비박산 났지. 할미는 말이야, 윤오가 복덩이라는 걸 진즉에 알았어. 너희 할아버지가 보내주신 복덩이라고.”
윤오는 벌벌 떨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아주 엄했다. 당신의 말씀대로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바쁘게 동분서주하던 부모 대신 조모가 어린 윤오를 돌보았다. 사실 윤오는 유치원이 가고 싶었는데, 할머니는 내가 있는데 남의 손을 타게 두냐며 절대 안 된다고 하셨다. 일찍이 짝이 있는 복덩이니 직접 가르치겠다 공언하시곤 곁에 두고 놓아주질 않았지.
“그래. 내 말이 다 맞지? 할머니 말이 다 맞지? 너한테 딱 맞는 짝이지?”
윤오가 대답을 하지 않자 부모님이 옆에서 재촉했다.
“너한테 잘해 주지 않니? 우리한테 하는 걸 보면 너한테도 극진할 텐데, 너 표정이 왜 이래. 응? 부모님이랑 할머니 걱정하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윤오야. 사람이 너무 욕심이 많으면 안 된다.”
“저는 아직 한마디도… 아니. 저 잘 지내요. 제가 잘하고 있고요.”
숨이 막혔다. 윤오는 이렇게 우물쭈물하다가 생길 일을 알았다. 분명 자기 잘못이 될 거다. 억울한데, 듣다 보면 정말 그런 게 그 말이 맞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이제껏 그래 왔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저는 어느 날은 자기 의사 표현 하나 제대로 못 하는 낯가림이 심하고 수줍은 애였고, 어느 날은 고집이 너무 센 욕심쟁이였다.
“잘 지내요.”
윤오는 이명이 들릴 것만 같은 귀를 막고 애써 웃어 보였다.
“저한테 잘해줘요. 정말이에요. 그런데 그러니까, 저 부탁이….”
윤오는 자신의 계획을 떠올리고 그걸 잊지 않으려 부단히 애썼다. 범신조에게서 조금 떨어져서 지낼 수 있게 도와달라는 부탁을 해야 하는데, 그게 계획이었는데….
“그래. 그러면 이제 자주 연락도 하고 보러 오고. 응? 부모님 걱정하게 만들면 안 되지. 안 그러니.”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이 있고 말해야 하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놀랍게도 범신조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신조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종종 스스로도 왜 이러지 싶을 정도로 말이 건방지게 튀어나올 때가 있다. 그래도 범신조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친다. 그것에 대해 무어라 평가를 하지도 않았다.
‘정말 할머니 말대로 내 짝이 맞긴 한 모양이지.’
자조하는 윤오를 잡아끈 건 할머니였다.
“너무 대거리하지 말고 나긋나긋하게 굴어. 너는 다 잘하는데 가끔 속에 못된 고집이 올라와 말대꾸를 하곤 하잖니. 그것 빼곤 다 좋단다. 우리 윤오, 가족 걱정 안 시키는 착한 아이 맞지?”
숨 막힌다. 그다지 길게 있었던 것 같지도 않은데 이만 가고 싶었다.
“근데 부탁할 게 있다더니, 뭐니?”
할머님은 정정했다. 잊지 않고 날카롭게 캐묻는다. 차라리 말하지 말고 돌아가야지, 하던 계획을 간파한 것처럼 쳐다보는 눈빛에 윤오는 기가 죽었다. 옛날부터 제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으면 그게 거짓말인지 아닌지 몰라도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허벅지나 옆구리를 맵게 꼬집곤 하셨었다. 그때의 아픔이 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얼떨결에 더듬더듬 말하고 말았다.
“저, 저 잠깐 범신조랑 떨어져서….”
“너 버르장머리 없이 그냥 이름으로 부르는 거냐?”
대번에 목소리가 달라졌다.
“…….”
“그리고 떨어져서? 또 뭐가 부족한데. 너, 아직도 짝이 무섭다는 소리나 하고 있는 거니? 얘, 너 내가 진작 윤오 저거 병원 보내 봐야 한다고 했지. 세상천지 누가 제 짝을 무서워해.”
할머니의 화살이 엄마로 돌아갔다. 움츠러드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김윤오도 한껏 위축되었다.
“할머니!”
그래서 윤오는 겨우겨우 용기를 내어 조모의 말을 자르고 애써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게 제 마음에는 전혀 없는 말일지라도.
“그러고 보니까 제가 잊고 있었어요. 저 저녁에 짝이랑 약속이 있거든요. 오랜만에 인사드리면서 죄송하지만 먼저 일어나야 할 것 같아요. 다음에 다시 올게요, 할머니. 엄마 아빠.”
역시나 윤오의 추측대로 입에 담기에도 어색한 그 단어, ‘짝’을 꺼내니 대번에 모두의 표정이 밝아졌다.
“기다리게 하면 안 되지. 큰일 하는 사람이잖니.”
큰일? 그런 건 모르겠다. 윤오는 사실 신조가 무슨 일을 하는지 하나도 몰랐다. 관심도 없었다.
“그래. 그럼 다음에는 범 서방이랑 오고.”
“네. 그럴게요….”
“맞다. 윤오야. 네 연락처를 아직 모르는구나. 입국하자마자 핸드폰은 개통했겠지? 설마하니 그것마저 안 하고 있었다거나 미뤘다거나 한 건 아닐 거야.”
아내가 혼이 날 때도 아들이 사라졌을 때도 가만히 있던 남자가 갑자기 나섰다.
“윤오가 좀 느리고 둔해도 설마 아직 핸드폰 하나 없겠니.”
바로 뒤이어 할머니가 치고 들어왔다. 그런 얼빠진 짓을 했다간 당장이라도 혀를 차며 여러 마디 보태겠다고 벼르는 게 노골적으로 보였다. 윤오는 더듬더듬 제 번호를 읊었다. 제대로 알려준 것인지 확신도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가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으나 윤오의 핸드폰은 조용했다.
“하여튼.”
결국 혀를 끌끌 찬 아버지는 윤오가 겨우 꺼낸 핸드폰을 빼앗아서 자신의 것처럼 능숙하게 제 번호를 눌렀다.
“너는 손이 정말 많이 간다니까. 똘똘한데 영 야무지지 못하니 원.”
그렇게 끝내 윤오의 번호를 가져간 뒤에야 분위기가 희석되었다.
“자주자주 연락해라. 설마하니 네가 바쁠 리도 없고 말이다.”
자꾸만 꼬리표가 붙는다. 야무지지 못한, 바쁘지도 않은, 어딘가 부족한.
“연락하면 받고. 밥은 잘 챙겨 먹고, 어디 아프면 꼭 전화해. 알았지?”
걱정 어린 다정한 말에도 가슴이 따뜻해지긴커녕 명치가 서늘하니 아팠다.
“네. 정말로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다음에… 올게요.”
어느덧 창백해진 얼굴로 엷은 미소를 띤 윤오가 병실을 스르르 빠져나왔다. 꼭두각시처럼 걸어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한참 그러고 있다가 웃음이 터졌다.
“결국 어디가 아프신지는 못 물어봤네.”
* * *
1층에 도착한 윤오는 로비에 우뚝 섰다. 그 주위로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범신조한테 가야 하나. 어디에 있지? 아니, 왜 가야 하지. 그냥 이대로 도망칠까….
윤오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당연히 지갑 같은 건 없었다. 돈이 없는 것도 당연했다. 있는 거라곤 핸드폰밖에 없었다. 윤오는 핸드폰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이것저것 만지며 구경은 했는데 정작 연락처 쪽은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저장된 목록은 조촐하기 짝이 없었다. 길다온 실장과 범, 두 연락처가 전부였다. 통화 기록은 그에 못지않게 조촐하다. 박 사장의 식당 번호와 지금 막 아버지에게 걸었던 번호가 전부였다.
아버지의 번호는 3년 전과 달랐다. 낯설었다. 윤오는 망설이다가 그 기록을 치워버렸다. 그러곤 조촐한 연락처 목록으로 돌아왔다.
“범 좋아하네.”
애칭이야, 뭐야. 중얼거리면서 손을 그곳에 갖다 댔다 떼기를 반복했다. 결국 신조에게 전화를 건 건 5분이 더 흐른 뒤였다.
그런데 진동 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났다. 윤오는 당황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야.”
신조의 목소리가 들린 건 뒤쪽이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저 큰 사내를 왜 진작 발견하지 못했나 싶었다. 정신이 쏙 빠져 있는 건 분명했다.
볼에서 핸드폰을 뗐다. 손이 스르르 내려갔다. 신조는 등받이에 길게 팔을 걸치고 고개를 젖혔다. 그의 입에 정말 안 어울리는 것이 물려 있었다. 막대 사탕이라니. 윤오는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서 뭐 해요?”
“기다렸어.”
신조가 다른 쪽 무릎에 올린 발목을 까딱였다. 사탕 때문에 대답하는 소리가 조금 뭉개졌다.
“네가 도망칠까 안 칠까, 도망치면 어떻게 잡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가 핸드폰을 흔들었다. 통화를 종료하는 걸 잊어서 여전히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문득 윤오는 그의 핸드폰에 자신이 어떻게 저장되어 있는지 궁금했지만, 치인이나 내 것 등등 윤오의 인격체를 몰개성하게 묻는 이름이 뻔할 듯해 궁금증을 접었다.
곧 제 손에 들린 핸드폰에서 삐 소리가 들렸다. 이어 통화료가 부과된다는 안내음이 들렸다.
“어디 가고 싶어도 어차피 돈도 없잖아요.”
“그러게. 잘 알고 있는데 말이지.”
신조가 몸을 일으켰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허리를 굽히며 일어나는 몸태는 얼핏 보면 슬림하게 보이다가도 실상 자세히 보면 돌처럼 단단했다. 윤오에게 다가온 신조가 검지와 엄지로 윤오의 핸드폰을 가져갔다. 통화를 종료하고는 돌려줬다.
“김윤오. 울어?”
“아니요.”
“그럼. 울고 싶어?”
“…….”
“네 가족 별로 좋은 사람들은 아닌 것 같더라.”
“지가 뭔데 그런 소리를.”
윤오가 먹먹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도 모르게 툭 나온 말이라 다음 순간 당황해 입을 틀어막았지만. 신조는 재밌다는 양 눈썹을 비스듬히 올렸다가 말았다.
“네가 여전히 좋다면, 그래. 네 마음대로 해.”
“…부모님이 그쪽 많이 보고 싶어 했어요.”
“아하.”
“되게 마음에 드나 봐요.”
“그래? 난 별로 마음에 안 들던데.”
분명 가족을 모욕하는 말인데도 불쾌하지 않았다. 윤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신조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아직 감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어리긴 하구나, 네가. 솜털이 보송하니.
발정기가 얼마나 남았더라…. 우려가 앞섰다.
“가요. 이제 그만….”
“윤오야.”
다정한 목소리였다. 지금껏 김윤오, 김윤오 하던 남자가 자신을 다정하게 얼러 불렀다. 그게 꿀 바른 독처럼 들린다. 경계심만 비대하고 불신은 수렁처럼 깊었다.
“싫은 건 싫다고 말해. 들어 줄게.”
“…그러면 제가 그쪽의 발정기 때만 함께 지내고 싶다고 하면요?”
신조는 웃었다. 아하하, 웃는 게 사람을 무시하는 게 분명해 윤오의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당장 몸을 돌려 병원 정문을 빠져나가는 걸 신조가 느긋하게 쫓았다.
“따로 지내는 건 안 돼.”
윤오의 걸음도 제법 빨랐는데 어렵지 않게 쫓아온 그가 어깨에 팔을 감고는 비밀을 나누듯 속닥였다.
“그리고 어디서 지내게. 내 굴이 아니면.”
“집이지 무슨 굴이에요….”
“좀 더 아늑해 보이지 않아?”
“별로요….”
오히려 우중충해 보인다. 이 남자는 진짜 이상하다. 윤오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부모님 집이 있잖아요. 거기서 지낼게요.”
기운이 쏙 빠진 목소리에 신조가 속아 넘어갈 리 없었다. 그는 어깨에 둘렀던 손으로 윤오의 볼을 콕 찔렀다.
“가족하고 있는 거 싫어하잖아.”
“…….”
“아니면 싫은 사람들과 있는 게 나을 정도로 내가 싫은 건가.”
“그건 아니에요.”
저도 모르게 빠르게 대답해 버렸다. 윤오도 놀랐고 신조도 놀랐다. 그는 턱을 문지르다가, 입술을 벙긋거렸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입을 닫았다. 발정기가…. 조금 전에 날짜를 따졌으니 확실하다. 분명히 아직 멀었는데 곧 다가올 것마냥 인내심이 짧아진다.
“그럼 됐어.”
“정말 됐어요?”
“그러면 여기서 내가 왜 날 좋아하지 않냐고 물을까?”
확실히 그건 아니었다. 게다가 그런 식으로 대답을 재촉하는 남자의 모습은 쉽게 상상이 되지도 않고 이상하기만 했다. 그저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부쩍 다정해서 윤오는 저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얼굴도 모르고 만나 본 적도 없을 때부터 이상하게 그쪽이 미웠는데… 왜 그랬을까요?”
미웠는데 왜 지금은 빨리 네게로 돌아오고 싶었을까, 하고 묻는 대신 겨우 다른 말로 고쳐 물었다. 머뭇거리며 조심스럽게 내민 의문에 침묵하던 범신조가 한참 만에 대답했다.
“…그건 내가 답할 게 아닌 것 같은데.”
묘한 대답이었으나 윤오는 내 감정이니 그가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해석했다.
“…….”
그야 맞는 말이지만, 왠지 여기서 끝내면 안 될 것 같단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더 뭘 물어야 할지 모르겠다. 정말로 모르겠으니까.
겨우 찾아낸 질문은 이거였다.
“다른 짝들도 이래요?”
“몰라. 다른 놈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관심 없어.”
조금 전의 다정한 대답과 더 비교되는 심드렁한 어조로 대꾸한 신조는 어느덧 다시 흐트러진 윤오의 머리카락 끝을 가볍게 손끝으로 건드렸다.
“이만 가자. 병원에 있으면 피곤해.”
그 말이 정말 맞았다. 윤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피곤함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윤오는 도로에 빼곡히 늘어선 차를 보다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한편 시간을 확인한 신조는 퇴근 시간도 아닌데 왜 차가 밀리나 싶어 혀를 찼다. 차라리 다른 곳으로 빠져서 미룬 식사를 하고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는 상대의 의사를 묻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김윤….”
어느덧 윤오는 소리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새근거리는 숨소리도 나지 않았다. 범신조는 그걸 가만히 보다가 손을 뻗었다. 코밑에 대니 엷은 숨결이 느껴졌다. 섬유 자락처럼 간지러운 호흡이었다.
그는 답답하지 않게 히터를 조금 줄이고 조수석을 조금 눕혀 줬다. 잠깐 뒤척이던 윤오는 곧 편안한 표정을 짓고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아직 길은 꽉 막혀 있다. 천천히 몸을 앞으로 기울여 핸들을 감싸고 고개를 괴었다.
* * *
집에 도착할 때까지 깨지 않기에 범신조는 윤오를 안아 올렸다. 어리다고 하긴 했으나 몸까지 어린 건 아니었다. 그래도 안고 걷는데 흔들림이 없었다.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 침대에 윤오를 눕혔다. 코트의 허리끈을 풀어주고 벨트도 풀어줬다. 답답하게 옥죄는 것을 풀어준 뒤 더 손을 대려다가 허공에서 멈췄다.
“…….”
가만히 윤오를 내려다봤다.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과 빛이 닿으면 연하게 보이는 속눈썹까지 꼼꼼히 진득하게 응시했다. 윤오의 머리 옆에 손을 짚고 무게를 실으니 매트리스가 조금 들어갔다.
“으음….”
“…….”
움찔거리는 목울대에 이어 목선이 눈에 들어왔다. 목선 다음으로 그 아래가, 그 아래 옷 속이 적나라하게 그려졌다. 더 아래, 더 아래까지…. 신조는 윤오의 입술 가까이로 고개를 가져갔다. 완전히 포개질 때까지 고개를 틀었다가, 잠시 멈추고 다시 고개를 일으켰다.
그는 천천히 라운지 체어로 다가가 의자를 침대 쪽으로 돌리고 몸을 파묻었다. 손가락으로 입술을 만지작거리다가 눈을 덮었다. 깊은 한숨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