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눈을 떴을 때는 무척 어두웠다. 윤오는 얼굴 옆으로 늘어뜨린 팔을 들어 올렸다. 얼마나 깊게 잤는지 얼굴이 부었을 게 스스로 느껴졌다. 눈을 비비고 몸을 일으키자 상의는 입었던 옷인데 하의는 벗겨져 있었다.
“…….”
당황한 윤오가 잠시 얼떨떨하게 맨 무릎과 발등을 번갈아 노려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리를 벌려서 안쪽을 더듬더듬 살폈다. 새빨갛게 마찰한 흔적이나 애매하게 끈끈한 느낌도 없었다.
“…아 씨.”
머리를 헝클며 고개를 숙였다. 대체 언제 잠들었지? 잠든 기억조차 없었다.
윤오는 비척대며 일어섰다. 긴 낮잠에 머리가 멍했다. 어두워서 커튼이 쳐진 줄 알았는데 정말로 해가 졌다는 걸 알 때까진 시간이 조금 걸렸다. 게다가 여기는 한번 잠들었던 신조의 방이 아니었다.
“나 버리고 갔나…?”
윤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궁금하면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었다. 그는 묵직한 손잡이를 열고 나갔다.
“…정말 버리고 갔나?”
그 집이 아니었다. 황량하니 크기만 했던 2층짜리 펜트하우스, 그곳만큼 크지는 않아도 더 요목조목 채워져 있고 꾸준히 손을 탄 흔적도 있었다. 고즈넉한 한옥에 가까워 보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곳이 더 윤오의 취향이었다.
게다가 이 공간 자체로도 어지간한 가정집의 거실을 세 개 합친 크기였고, 전의 집처럼 창이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건 밖으로 가장 먼저 보이는 게 고층 건물이 아니라 정원이라는 점이었다.
윤오의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창으로 다가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유리에 손을 올렸다. 냉기에 조금 정신이 든다. 아예 이마까지 대고 느리게 비비적댔다.
“하….”
기분 좋은 신음이 절로 나왔다.
차가웠던 감촉이 금세 체온을 따라 미지근해졌다. 고개를 뗐다가 다른 곳에 대려는데, 이마와 유리 사이로 단단한 살성이 들어찼다.
“머리를 박으려면 베개에나 박아.”
신조였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둘째, 셋째 날보다도 지금이 더욱, 그 목소리에 느껴지는 적의가 한껏 줄었다. 윤오는 멀거니 제 눈앞을 가로막은 손을 바라보다 남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제 옷 벗기셨어요?”
“그래.”
“아무 짓도 안 하신 것 같더라고요.”
“기대했어?”
“기대하긴요.”
윤오가 질색하며 대꾸했다. 신조는 어깨를 으쓱하곤 대수롭잖게 말했다.
“너 오래 잤어.”
“알아요. 멍해요, 그래서.”
“배는 안 고프고?”
“고파요.”
“그럼 이리 와.”
신조는 윤오의 이마를 부드럽게 떼어내고 몸을 돌렸다. 그동안 씻고 옷을 갈아입은 모양이다. 낮보다 더 편한 옷차림에 향긋한 냄새도 났다. 그게 신조의 체향과 어우러졌다. 윤오는 향긋한 세제 냄새보다 범신조의 향을 더 맡고 싶었고, 그런 생각을 한 자신에게 조금 충격을 받았다.
그걸 내색하지 않고 신조를 쫓아가자 두 명이 앉기에는 커다란 식탁이 나타났다. 나무를 통째로 깎은 것처럼 독특한 생김새였다.
“앉아.”
식탁 위에는 반찬 몇 가지가 놓여 있었다. 윤오는 설마 신조가 준비한 건가 싶어서 얼떨떨하게 앉았다. 그가 앉자 신조는 금세 국과 밥을 내왔다.
“…이게 제 밥이라고요?”
“그럼?”
너무 많았다. 고봉밥이란 게 딱 이런 거였다. 윤오는 당황해서 수저도 못 들고 신조의 것과 자신의 것을 비교했다. 불공평할 것 하나 없이 신조도 이만큼 퍼 왔다.
“이걸 어떻게 다 먹어요?”
“왜 못 먹어.”
그는 정말로 이해하지 못한단 태도였다. 그의 주변에는 다들 대식가만 있는 모양이다. 배는 고픈데 식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조금 질렸다. 그래도 윤오는 어떻게 수저질을 시작했다.
잠시 있다가 범신조가 한마디 했다.
“억지로 다 먹을 필요는 없어. 내가 욕심 좀 부린 것 같으니까.”
“…….”
차가운 음료를 멋대로 주문할 때도 그렇고, 이 사람의 배려는 어딘가 아리송하고 이상하다. 애초에 의사를 묻고 하면 될 일을 멋대로 저지르고, 그 이후에 마음대로 하라고 한다. 어찌 보면 약이 오르고 어찌 보면 서툴러 보이기도 했다.
“억지로 먹고 괜히 토하지 말라고.”
“안 토할 수도 있죠….”
“먹기 싫은데 먹는 건 맞네. 그런 꼴 하라고 데려온 거 아냐.”
그럼 애초에 데려오지 않으면 되지…. 그러다가 윤오는 생각을 고쳤다. 발정기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르지만, 저 큰 남자가 미치는 줄 알았다고 했다. 약속된 날짜에 약속된 걸 받지 못했단 이유로 화풀이를 할 정도는 충분히 된다는 거다.
그러나 범신조는 그러지 않았다.
물론 제가 바보도 아니고, 고작 자신에게 화풀이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로 갑자기 그를 좋게 보고 그럴 건 아니었다. 다만….
오늘 가족들을 보고 왔기 때문인지 생각이 많다.
윤오 주변에 있던 연장자들은 어른이라기보다 고집쟁이, 욕심쟁이인 어린애들과 같았다. 부모가 자신에게 바란 게 우울하거나 힘들 때 자신을 위로해 줄 자식이란 걸 어렴풋이 알고 있다. 성인이 아이에게 그러면 안 된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다. 하지만 그걸 벗어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그냥 범신조에게 더 마음이 기운다….
식사를 하는 중에도 윤오는 가족 생각으로 여념이 없었다. 신조는 자신을 앞에 두고 다른 생각에 푹 빠진 윤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윤오보다 더 많이 담겨 있던 그의 그릇은 이미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윤오는 결국 조금 남겼다. 범신조는 그것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다른 게 더 신경 쓰였으니까.
“정말로, 그런 얼굴 하라고 가족들 보고 오라 한 게 아닌데.”
신조가 검지와 엄지로 머리를 괴며 중얼거렸다. 내 얼굴이 지금 어떤데? 윤오는 평소와 같았다. 가족들과 있던 평소랑 다를 게 없었다. 오히려 일상으로 돌아온 건데.
“따뜻한 물로 씻고 와. 목욕을 해도 좋고. 입욕제도 있어.”
“그럼 이거 치우고….”
“내가 너 이런 거 치우라고 데려온 것 같아?”
“아니요. 발정기 때문에 데려오셨죠.”
윤오의 되바라진 대답에 신조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진지한 대답에 왜 저렇게 웃는지 정말 모르겠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보고 있어도 신조는 이유를 말해 줄 것 같지 않았다. 대신 예의 짓궂은 소리를 했다.
“발정기 때문에 널 옆에 끼고 사는 사람 앞에서 속옷만 입고 밥을 먹네, 우리 김윤오 씨는.”
“이건…! 제가 벗은 게 아니잖아요.”
“맞아. 내가 벗겼어. 더 벗기려다가 참은 거야. 그랬다간 정말로 자는 애 데리고 몹쓸 짓 할 것 같았거든.”
그렇게 말하며 신조는 윤오의 표정을 살폈다. 얼굴을 붉히려나, 화를 내려나, 궁금했는데 뜻밖에 아무렇지 않았다. 금인과 자신은 아예 기질적으로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적어도 자신을 포함한 금인들에게 괜히 틈을 보이거나 기대를 하진 않을 테니까.
“저는….”
윤오는 진지하게, 자신이 남자에게 흥분한 적이 없고 남자의 몸을 성적으로 본 적도 없다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놔두고 씻고 오라 하니 그럴 셈이다.
* * *
씻고 나오니 식탁은 깨끗했다. 신조는 책을 읽고 있었다. 수건으로 머리칼 아래를 털던 윤오가 우뚝 서자 그가 손짓하여 윤오를 불렀다.
“책 읽으세요?”
“왜? 난 책도 안 읽을 것 같나?”
“조금요.”
신조가 또 웃는다. 윤오는 이제 그가 마냥 불편하진 않았다.
머리에서 물이 떨어지는 채로 얼마일지 가늠도 안 되는 소파에 앉으니 신조가 소파 위로 다리를 올렸다. 그의 발끝이 허벅지에 닿았다. 아무렇지도 않다. 역시 그와 짝으로 생활하는 건 영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여긴 어디예요?”
“빨리도 묻네. 내 집이야.”
“집이 되게 많으시네요.”
“맞아. 많아. 썩는 게 돈이야. 김윤오가 하고 싶은 건 다 해 줄 수 있지.”
“…….”
“허튼 생각하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것만 해.”
그는 여상히 말하고는 책장을 넘겼다.
…왜 하필이면 범신조가 나에게 너 하고 싶은 대로 살라고 하는 걸까. 어째서 제 평생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을, 그토록 피하고 싶고 도망치고 싶던 사람의 입으로 듣게 된 걸까.
도리어 가족들은 숨죽이고 짝에게 맞춰 살라고 했다. 그게 숙명이고 어차피 그렇게 될 거며, 그게 윤오의 행복일 거라고 했다.
“그쪽하고 영영 그걸… 하고 싶지 않다고 해도요?”
“섹스를?”
신조는 뻔뻔한 구석이 있다. 차라리 제가 그냥 남자의 노골적인 어휘에 적응해야겠다 싶었다.
“네. 그걸요.”
“내가 얼마나 참았는데 네가 동하기 전까지 못 참을까.”
미성년자를 데리고 할 수는 없으니 윤오 기준으로 따지면 그는 3년을 참은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금인의 발정기가 어떤지도 모르는 데다 설마하니 성욕 자체를 참았겠어, 하는 불신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윤오 자체가 성욕이랄 게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게 과연 긴 시간인가 하는 마음이 없잖아 있었다.
“김윤오. 내가 제법 기술이 좋아. 잘 만지고 잘 빨지. 동하면 말해. 왜 진작 이걸 안 했나 싶게 빨아 줄 테니까.”
나보고 빨라고 하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윤오는 젖은 머리카락을 개의치 않고 소파에 몸을 푹 묻었다. 창 너머로 어두운 정원이 보였다. 수목은 예민하여 밤에는 조명이 적은 것이 좋다고 했다. 그래도 한 번쯤은 불이 켜진 정원이 보고 싶었다.
“정원에 조명은 없어요?”
신조는 대답 대신 옆에 있던 작은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그의 손에서 유독 작아 보였다. 버튼을 넉넉히 가리는 손으로 이것저것 누르니 곧 은은한 조명이 정원을 밝혔다. 윤오는 가만히 벙긋 입술을 벌렸다.
“예뻐?”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뻤다. 저 모습 그대로 스노우볼에 담아서 영영 보관하다가, 마음이 깊게 가라앉을 때마다 거꾸로 흔들어 보고 싶을 정도였다.
반쯤 누워 있던 신조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에는 평범한 정원이었다. 특별할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익숙하다 못해 지루한 풍경. 저 안에 너를 세워두면 그제야 그에게도 특별하게 보일 것이다. 윤오가 정원을 스노우볼에 담고 싶어 하듯 그는 윤오를 스노우볼에 가두고 싶었다.
하지만 참는다. 그는 인내라면 인이 박이도록 해 왔기에 이쯤은 참아낼 수 있었다. 고목이 되어 긁어도 아프지 않아야 마땅한 마음 한편이 윤오를 만나고 지겹지도 않은지 새살을 내고 있다. 그건 미치도록 간지럽고 아프지만, 참을 수 있었다.
“이 집이 더 마음에 드는 모양이네.”
“네.”
저도 모르게 대답 먼저 나갔다. 그런 후에야 민망함에 입을 꾹 다물었다. 말을 돌리기 위해 윤오는 괜히 궁금하지도 않던 책 내용을 물었다.
“뭐 읽으세요?”
“‘무엇을 더 할 수 있겠어요. 제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요. 이제 저는 알아요. 저를 경멸하는 건 당신의 자유라는 것을.’”1)
“…….”
“그냥 옛날 소설이야.”
소설이라니…. 독서도 독서인데 그게 소설이란 것도 뭔가 그에게 어울리듯 안 어울린다. 하여튼 의외의 취미인 것만은 분명했다. 신조는 책갈피를 끼워두고 책을 덮어 무심히 떨어뜨렸다.
“김윤오.”
“네.”
“나는 진짜야. 네가 원하지 않으면 너와 섹스하지 않을 거야.”
“그럼 뭐하러 절 데리고 계세요?”
당돌한 질문에 신조는 조금 다른 대답을 했다.
“다른 나라에 비해 금인과 치인의 발견이 아주 늦었다지, 우리나라는.”
그런 것까진 몰랐다.
“금인의 존재는 개항 이후에 처음으로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그 이후로 기록된 범… 그러니까 근원이 호랑이인 금인의 짝들은 내내 단명했어.”
단명이라니.
윤오는 당혹감으로 가슴에 돌덩이가 내려앉는 것 같았다. 방금 먹은 저녁이 바로 얹힌 것만 같았다. 관자놀이를 괴고 시선을 옆으로 내린 신조는 지치고 피곤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너는 나로 인해 신세가 망쳐질 것이 분명한데, 내가 너를 억지로 범하기까지 하겠니.”
“…….”
“그러니까 나를 이용해도 좋아. 네 마음대로 굴어. 네 신세를 망치는 내가 설마하니 그 정도도 안 해 주겠냐고.”
드디어 평소의 신조처럼 짓궂은 어조로 돌아왔다. 그러나 윤오는 갑작스러운 말에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단 기색이다. 창을 통과한 정원의 조명은 한결 부드럽게 뭉개졌다. 그것이 윤오의 얼굴을 물들였다. 신조는 그 얼굴을 오래 보기가 힘들어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 정도 자각을 하고 계실 줄은 몰랐어요.”
“잘하지. 잘 알지. 어쩌면 너보다.”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윤오는 비틀대며 일어났다. 깨어났던 방으로 향하는 걸음에 맥이 없었다.
들어오자마자 이 방이 신조의 방이란 걸 떠올렸지만, 그냥 문을 닫았다. 쿵 닫고 천천히 주저앉았다.
* * *
술이 당기는 밤이다. 신조는 천천히 잔을 채우며 비울 때마다 성냥을 그었다가 끄길 반복했다. 어느덧 타 버린 성냥개비가 다섯 개가 되었다. 그러니 다섯 잔을 마셨다는 이야기겠다.
내내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열린 건 여섯 잔째를 채울 때였다. 조용히 문이 열리는 걸 알아챈 신조는 무심코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덧 늦은 밤을 지나 새벽이 되고 있었다.
“안 주무세요?”
“내가 거기 들어가서 네 옆에서 잤으면 해?”
윤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신조의 시선이 한발 늦게 그쪽으로 향했다. 얇고 보들거리는 셔츠 파자마가 잘 어울리는 몸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성냥을 들었다가 공연히 그 허리를 꺾었다. 꺾이는 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울렸다.
그게 신호탄인 것처럼 윤오가 다가왔다. 신조는 그답지 않게 온 신경이 곤두서도록 긴장했다.
“…….”
다가온 윤오가 신조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저도 한 잔 주세요.”
신조는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잔을 새로 꺼내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윤오가 그의 옷소매를 잡았다. 그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윤오가 먼저 손을 뻗는 건 처음이다.
“아니다. 이거로 마실게요.”
그러고는 신조가 마시려 따라 둔 잔을 가져가 단숨에 비워버렸다. 뒤이어 후, 하는 젖은 입술 사이로 술의 달콤한 향기가 흩어졌다.
“나이트에서 일했었어요. 거기는 신고식이 있었어요. 신입인 저한테 온갖 걸 섞은 술을 줬어요. 아니, 그건 술도 아니었어요. 그냥 구정물.”
“…….”
“다 안 마시면 저를 따먹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자신이 비운 잔이 아니니 성냥을 피우지 못한다. 대신 신조는 새 성냥의 허리를 분지르고 또 분질렀다.
“그래서 술이 되게 싫었는데… 이건 괜찮네요.”
“주당이네.”
기분이 한껏 더러워졌으나 내색 않고 픽 웃어 보였다. 독한 술인 만큼 윤오의 목덜미가 발긋해졌다. 신조는 그의 것이었던 잔에 새로이 술을 채워줬다. 그러자 윤오는 이번엔 그것이 코코아라도 되는 것처럼 양손으로 감싸고 여러 번 나눠 마셨다.
“저한테 키스했어요. 자고 있는데, 갑자기….”
그 나이트가 어디냐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치솟는다. 신조는 턱을 괴고 입술까지 거칠게 쓸어내렸다.
“제 첫 키스인데, 너무너무 더럽고 끔찍했거든요.”
“…….”
“그런데 새로 해 보면 이 술처럼 괜찮을 수도 있으니까, 한번 해 봐요.”
“그 이야기를 듣고 너와 키스하라고. 나보고.”
“그냥 뽀뽀부터요.”
“너 지금 나랑 장난하니.”
신조가 성마르게 웃었다. 그러나 눈만은 웃지 않고 윤오를 바라보았다. 뽀뽀, 라고 중얼거리는 입술이 통통하고 촉촉하다. 윗입술 산은 꼬집어 올린 것처럼 귀엽고. 옆에서 보면 부리 같은 입술이었다. 말을 할 때마다 오밀조밀 움직이는 게 신기할 정도다. 다른 부분은 다 단정하니 서늘하게 생겼으면서, 그 부분만 유독 귀염성이 몰려 있었다.
그는 턱을 괴고 윤오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다면 네가 해.”
“…….”
“내가 먼저 할 생각은 없으니까.”
생각이 없다니. 신조는 자조했다. 할 생각이야 무궁무진하다. 뽀뽀 같은 지랄맞은 소리나 하는 김윤오는 감히 생각도 못 할 그런 일들을.
윤오는 남은 술을 마저 비워내고 고개를 돌렸다. 오로지 이곳에만 켜 둔 조명은 밝지 않고 은은하다.
남자에게 흥분한 적이 없다. 동성의 신체에 매력을 느낀 적도 없었다. 동경이라면 모를까. 그런데 범신조의 몸은 처음 본 그날부터 종종 떠올렸다. 흠모일까, 흥미일까, 흥분일까.
술기운을 빌려 천천히 다가갔다.
눈을 감아줄 줄 알았다. 드라마를 보면 으레 그렇게들 했으니까. 그런데 신조는 눈을 감지 않았다. 오히려 잡아 삼킬 것처럼 눈빛이 형형했다. 긴장감에 침을 꼴깍 삼키는 윤오의 목울대가 떨렸다. 복숭아 씨앗처럼 늘씬한 뼈대다.
촉.
입술이 드디어 닿았을 때 신조는 헛웃음을 뱉었다. 볼이라니. 정말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어때. 기분이 좆같아?”
신조가 사납게 물었다. 사람 갈증만 한껏 돋운 채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꼴이라니.
윤오는 가만히 있다가 자작하여 또 한 잔 비워냈다. 그러고는 이번엔 조금 빠르게, 조금 저돌적으로 신조의 입술에 쪽, 소리가 나게 입맞췄다. 신조는 조금 당황하여 눈이 커졌다.
“괜찮아요.”
윤오 역시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괜찮으면 안 되지.”
이게 정말 나를 가지고 노는구나. 가지고 놀아라 했더니 아주 잘한다. 재미와 함께 약간의 희열을 느낀 범신조가 무심코 손끝으로 식탁을 긁었다.
“좋아야지. 더 하고 싶어야지. 꼴려야지, 나를 가지고.”
“그건 모르겠는데….”
“…….”
“한 번 더 해 봐도 돼요?”
이번에는 신조가 잔을 채웠다. 윤오의 양보다 두 배를 채우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이번엔 내가 하게 해 준다면.”
언뜻 보이는 송곳니가 무척 뾰족하다. 그 모습에 윤오는 오히려 친근함을 느꼈다. 내도록 악몽이라 여기던 꿈속의 호랑이가 정말 이 남자구나 싶었다.
윤오가 망설이자 신조는 당장 사냥감에 달려들 것처럼 온몸을 긴장시키면서도 달려들지 않았다. 윤오는 시선을 도록 굴려 식탁 위에 올려진 손에 제 것을 얹었다. 힘이 들어가 마디까지 흰 신조의 커다란 손과, 설거지 때문에 생긴 습진과 식칼에 베인 상처들로 엉망인 제 손이 보였다.
지금 자신은 그를 시험하고 있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여기서 신조가 더 참지 못하고 달려들어 억지로 입 맞춘다면, 더 나아갈 수 있던 그들의 관계는 여기서 끝이 난다.
윤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
신조의 몸에서 순식간에 힘이 빠졌다. 윤오는 그런 그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지나갔다.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발끝이 간지럽고 아랫배가 저릿했다. 낯선 감각이지만 알 수 있었다. 쾌감이었다. 짜릿하고 피가 빠르게 돌아 머릿속이 수다쟁이 난쟁이로 가득 찬 것처럼 분주해졌다.
그리고 윤오가 몸을 돌렸다.
성큼 다가가 뒤돌아보고 있던 남자의 볼을 잡고 당기자, 남자가 낮은 신음을 씹으며 윤오의 허리를 당겼다. 순식간의 그의 허벅지 위에 앉혀졌다. 백 미터를 전속력으로 달린 것처럼 호흡이 가빴다.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나 싶도록, 그는 으스러질 것처럼 윤오를 껴안고 입술을 벌려 혀를 넣었다. 혀가 두껍고 꺼칠했다. 숨이 막히고 손이 덜덜 떨렸다. 거칠거칠한 혀가 윤오의 입천장을 찌르다가 사과하듯 쓸어내리자 발끝이 절로 쭉 펴졌다. 손가락은 굽혀 들어 감싸고 있던 신조의 목을 긁었다.
신조의 커다란 손이 윤오의 흉곽을 으스러뜨릴 것처럼 안았다가 한 손을 빼 식탁을 쥐었다. 식탁이 커다랗고 유독 튼튼한 이유는 아마도 이 순간 신조가 부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입술이 떨어질 땐 붙을 때와 달리 젖은 소리가 났다. 그 작고 습한 소리에 윤오의 등줄기가 떨렸다.
“어때.”
신조가 훅, 숨을 뱉으며 물었다. 그 목소리가 자못 음습했다.
“이제 나한테 좀 흥분돼?”
윤오는 다리를 꼬았다. 어린 몸은 흥분에 면역이 없었다. 신조는 윤오의 촉촉한 눈을 보며 황급히 혀를 뺐다가 참았다. 윤오의 몸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잘했어.”
이마에 핏대가 선 채로 신조가 웃었다. 상냥한 척하려는 모양인데 실패다. 이미 눈빛부터가 사나웠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애써 다정하게 을렀다.
“이렇게 네가 원하는 걸 가져가. 무엇이든 내 줄 테니.”
“…자전거를 타고 정원을 돌고 싶어요.”
윤오는 어디까지 발을 뻗어도 될지 가늠했다. 혼자서는 나가지 못하게 할 거다. 고작 실내에서 타라고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집이 많으니 짐 하나 없어서 자전거로 뱅글뱅글 돌 수 있는 집 정도는 있을 테니까.
“그런데 정원을 망가뜨릴 수도 있어요.”
“그래. 네 마음대로 해.”
호흡을 갈무리하며 신조가 중얼거렸다.
“그렇게 해.”
내뱉고는 윤오를 꽉 껴안았다. 그 박동이 자신만큼 빨랐다. 그 소리를 듣다 보니 가물가물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신조가 심장 박동조차 속일 수 있는 능수능란한 사기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다. 그래도 그런 사기꾼의 품이, 일단은 오랜만에 부모님을 재회한 병실보다 편하단 사실만은 확실했다.
“이상해요. 분명히 그렇게… 싫었는데….”
입술이 멋대로 움직였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들리더라도 꿈결처럼 현실성이 없었다.
“그런데도 지금은 그냥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고 싶어져서… 자꾸만 잠이 쏟아져요. 밥에 약이라도 탔어요…?”
윤오의 중얼거림에 신조는 아래로 까라지려는 몸을 고쳐 안았다.
“약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들어가서 자.”
말과 달리 안은 팔에는 힘이 풀리지 않았다. 윤오는 픽 웃고 눈을 감았다. 그토록 잤는데도 또 잠이 온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 * *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니 손이 내밀어졌다. 그 손을 보며 활짝 웃었다. 두껍고 단단하고 큰 손이었다. 무엇이든 맡길 수 있을 것 같고, 무엇을 맡기든 지켜낼 것 같았다.
‘너는 참 약하구나.’
웃음기 어린 그 목소리도 좋았다. 뿌듯했다. 이 사람이 유독 자신에게 친절하고 무르게 군다는 사실에 우쭐하기도 했다.
‘내가 약한 게 아니라, 앞서가는 이가 뒤따르는 이를 생각하지 않고 제 속도만 낸다곤 생각 안 하십니까?’
‘말은 잘하지.’
‘그게 싫으시면 곁에 두지 마시지요.’
‘아니. 아직까진 네가 재미있고 제법 귀엽거든. 그리고, 날 두고 가고 싶은 거냐. 마음에도 없는 소리지?’
그 순간만큼은 뿌듯함도 사라지고 가슴이 뜨끔하였다. 잠시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피하니 ‘힘드냐.’하고 묻는다. 가로젓고 고개를 들었다. 내 속은 당신조차 모른다.
‘제가 무슨 대답을 하든, 저를 믿으십니까? 저도 거짓말쟁이입니다. 숨기고픈 내밀한 진심은 세 번은 물어야 답해드릴 테지요.’
‘나는 성격이 급해서 세 번이나 묻지 않는데.’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예. 그러실 것 같습니다. …그래도 세 번은 물어 주세요.’
‘그 전에 질리지만 않는다면.’
우렁우렁 웃는 소리에 가슴이 간지러웠다.
“하하….”
윤오는 자신의 웃음소리에 깨고 말았다. 당황하여 눈이 절로 번쩍 뜨였다.
“무, 무슨 꿈을 꿨지?”
꿈을 꾼 것 같았고 그 꿈이 즐거워 웃었던 건 맞는 듯한데 정작 그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꾸물거리며 잠을 깨기 위한 노력을 할 필요도 없이 벌떡 일어나기는 했다. 어쩐지 가슴팍이 간지러워 윤오는 파자마 위를 문질렀다. 얼떨떨함이 오래 갔다. 꿈결처럼 둥둥 떠다니는 것 같기도 했다.
“아….”
양치 거품을 뱉을 때쯤에야 왜 이리 몽롱한지, 깨고서도 꿈속에 있는 것 같은지 알았다. 꿈에서 숲이 나왔던 것 같은데, 범신조의 체향이 그와 비슷했단 게 유일하게 기억났기 때문이다.
“향이라니….”
제가 향기로 남자를 기억하는 게 갑자기 부끄러워져 윤오는 부드러운 수건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문을 열고 나오니 바깥이 조금 소란스러웠다. 얼빠진 낯으로 정원을 내다보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창을 통해 그들을 보고 있던 신조가 보였다.
“무슨 사람들이에요…?”
“깼어?”
신조가 다정하게 물었다. 갑작스러운 다정함에 이 남자가 왜 이러나 하다가 문득 간밤을 떠올리고 말았다.
미쳤었구나.
윤오의 평가는 담백했다. 그러나 감정은 아니었다. 술에 취해서 저지른 일이 일상이라도 된다는 양 지금껏 잊고 있던 것도 미친 짓이고, 저지른 일의 내용도 미친 짓이었다. 당장이라도 창문에 머리를 박고 싶었다.
그런 윤오의 속내를 간파하듯 신조가 잡생각이 모두 사라질 말을 던졌다.
“CCTV 좀 설치하려고 하는데.”
“네?”
“욕실은 싫겠지. 욕실과 화장실은 빼고. 또 어디에 설치할까.”
“…그런 취미 있으세요?”
“무슨.”
“잠자리 같은 거… 찍어 두고 보는 취미요.”
“우리 김윤오 씨가 내 잠자리에 관심을 다 가져 주시네.”
픽 웃은 신조가 한술 더 떠 능갈쳤다.
“왜? 나랑 잠자리라도 가지게? 난 그런 취미 없지만 김윤오가 그런 취향이라면 맞춰 주지.”
“무슨… 아니요. 그냥 잠만 자는 거요.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저는 찍어 두고 그러는 거 싫어요.”
“기억해 둘게. 그럼 현관에만 다는 건?”
“제가 도망칠까 봐서요?”
“거짓말해 봐야 소용없겠지. 맞아.”
“지금까지 속고 속이는 연애만 해 보셨나 봐요.”
아무리 짝인 치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연애를 해 보지 않았으려고. 윤오는 절대적인 사랑도 운명적인 사랑도 그다지 믿지 않았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게 내 일이 되리라고는 더욱 생각지 않았다.
신조는 무심히 대꾸했다.
“아마도.”
그렇다면 좀 안타깝다. 모처럼 한 연애가 속고 속이는 기만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면 차라리 저처럼 한 번도 안 해 보는 게 낫긴 하겠다. 윤오가 유치한 승리감을 누리는데 그의 머리로 손이 덥석 올라왔다.
“김윤오는, 남자는 동하지 않는다고 했지.”
“…….”
어제부로 반쯤은 아니게 되었으니 이제는 당당히 남자에게 흥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이상한 곳에서 도덕적인 윤오가 침묵으로 일관하자 신조는 늘 그랬듯 자기 할 말만 했다.
“그럼 여자는? 연애는 해 봤나?”
“…….”
“아. 맞다. 자다가 덮친 새끼가 했던 키스가 첫 키스라고 했지.”
“덮친 건 아니에요…! 깨서 밀쳤으니까….”
“하지만 했지. 키스.”
“…….”
“혀 밀어 넣는 거 말이야.”
신조가 낮은 목소리로 추궁하며 손가락을 윤오의 입술에 물렸다. 아랫입술을 꾹 누르자 입이 벌어졌다. 커다란 손가락이 윤오의 혀를 멋대로 눌렀다가 쏙 빠졌다. 괴롭기 직전에 빠지는 솜씨가 으뜸이다.
“이름이나 얼굴 기억하면 말해.”
“복수해 주시게요?”
“내가 뭐라고 복수를.”
“…….”
“복수는 네가 원해서 네가 하는 거고. 내가 하는 건 화풀이지.”
“화풀이….”
“근데 내 화풀이는 귀여운 수준이 아니야.”
키들키들 웃는 꼴이 음산했다. 화풀이라고 하면 가서 딱밤을 쥐어 때리거나 진상 손님이 되어 고단하게 하는 것 정도만 생각한 윤오는 신조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화풀이가 어떤 건지 모르듯이, 신조가 마음만 먹으면 윤오를 어디부터 어디까지 구속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 모른다는 상태가 신조를 가지고 놀았다. 말 그대로 그는 어린 치인 김윤오의 호흡 하나하나에 들뜨고 내리꽂히길 반복한다. 그것 역시, 윤오는 모르고 모를 것이다. 몰랐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CCTV를 달겠다고 하면 질색할 줄 알았는데, 아니네.”
“현관에만 단다면서요. 오히려 없는 게 이상한데요. 이런 집에는.”
“그렇단 말이지.”
“허락 안 받고 달았으면 기분 나빴긴 했을 거예요.”
“미리 말만 하면 된다고.”
무엇이 웃긴지 신조가 나직이 웃었다. 그리고 곧 그가 몸을 돌렸다.
“자전거 갖다 놨다.”
“벌써요?”
“그럼 한 오백 년 걸릴 줄 알았나. 정원에서 타도 좋고 집에서 타도 좋아.”
“거실에서 타다가 뭐라도 망가뜨리면요?”
“눈 오는데 청승 떨며 바깥에서 타다가 감기 걸리는 것보단 싸게 먹히네.”
신조가 바로 옆에 있던 도자기를 톡 건드리며 중얼거렸다. 진품이었다. 정작 갤러리 같은 곳에는 가품이 전시되어 있는.
* * *
정원은 예스럽고 고풍스러운 곳이었다. 오솔길을 따라 핀 조명이 있어 밤이 되면 별을 박은 것처럼 오솔길이 빛났다.
서리가 내리면 윤오의 소망대로 스노우볼에 넣어 흔든 것처럼 전경이 요요한 흰빛으로 젖었다. 겨울인지라 잎은 날카롭게 몸을 웅크렸고 그러지도 못한 잎은 떨어져 가지만이 바르르 떠는데, 그것이 쓸쓸해 보이지 않고 옹기종기 모여 추위를 지새우는 가족처럼 보였다.
다시 말하자면, 자전거로 누비고 다니기에는 좋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걸 타고 바깥으로 나가고 싶었던 거지, 내가 생각한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윤오는 커다란 거실을 천천히 돌았다. 정원에 한 번 나갔다가 결국 크게 넘어진 뒤로 신조는 거실을 치워 줬다. 소파 대신 라운지 체어가 들어오고 깨질 만한 것들은 방으로 들어갔다.
‘이러면 좀 탈 만하겠어?’
사고 칠 걸 두려워해 아예 하지 않는 윤오의 속내를 다 읽은 한마디였다. 휑하게 빈 커다란 거실을 보고 윤오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신조는 그의 손을 잡아끌어 라운지 체어로 데려갔다. 뒤로 몸을 파묻으면 중력도 느껴지지 않고 우주에 둥실 떠오른 듯했다. 이 의자를 고르고 샀을 신조는 정작 바닥에 앉아 윤오의 다친 다리를 제 허벅지에 올렸다.
다치지 않은 다리를 당겨 안은 윤오는 신조가 상처를 치료하는 모습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커다란 손인데 의외로 섬세했다. 찢어진 상처를 다루는 모습이 능숙해 보였고. 커다란 반창고를 붙이기 전에는 어울리지 않게 입술을 모아 후, 불기까지 했다. 그것이 간지러워 윤오는 발끝을 구부렸다.
‘술 없이는 아직도 사내새끼에게 꼴리지가 않아?’
오므라든 윤오의 발가락을 보고 그가 한 말이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신조의 얼굴이 수려했다. 윤오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신조가 말한 ‘동한다’의 의미는 아직 잘 모르겠다. 꼴린다는 것도 윤오에게는 지나친 표현으로 들렸다. 하지만 이 순간, 어쩌면 이런 순간으로 분류할 수 있는 그때는 신조에게 입 맞추고 싶었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지.
윤오는 다시 한 바퀴를 돌며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윤오의 귀에 꽂힌 이어폰에서는 연신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나라에서 금인이 최초로 기록된 시기는 1800년대 후반입니다. 하지만 공식 기록이 아니기도 하고, 당시 사회 배경을 살펴보면 금인 자체는 조금 더 일찍부터 존재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 볼 수 있지요. 다만 그리 이른 시기부터 존재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유럽에서 알파와 오메가가 등장한 시기가 흑사병 이후이고, 다른 대륙에서 이형질인이 등장한 시기 역시 인구수가 폭발적으로 감소한 직후라고 보면 더욱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렇게 따져 보면 1800년대 중후반, 역병이 돌며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사망자가 늘고 덩달아 가뭄이 3년간 이어지던 시기에 금인과 치인이라는 이형질인이 등장하지 않았을까….]
“범신조 말이 맞았네.”
역시 자신보다 똑똑하긴 한 모양이다.
윤오는 뒤늦은 이형질인 공부를 하고 있다. 이미 잡혔고, 여러모로 따져 봐도 신조에게서 벗어나는 게 일단은 힘든 이런 상황에서 마냥 무지하게 지낼 수는 없었다. 다행히도 여러 매체에서 금인과 치인에 대해 다루고 있어 정보를 얻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사실 꼭 필요하다고 할 순 없는 배경지식이나 훑고 있는 이유는 역시 와닿지 않기 때문일 거다.
언젠가 범신조와 자야 할 날이 올 거다.
신조는 윤오가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박 사장도 그러지 않았나. 발정기가 온 금인은 그저 짐승이라고. 머릿속으론 알지만 현실로는 부정하고 싶은 암담하고 상상하기도 어려운 미래였다.
‘김윤오.’
문득 신조의 나신이 떠올랐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미 본 적 있으니까. 그런데, 그때는 그저 위협적인 몸이라고 생각하고 말았던 그 나신이 왜 갑자기 다르게 떠오르는 걸까. 필터라도 낀 것처럼 한결 습하게 그려지고 말았다.
“미쳤어….”
윤오가 당황하여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그리고 거세게 고개를 저으려는 순간,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깨닫고 말았다.
생각은 언제나 늦다. 옆으로 기우뚱하며 윤오는 쓰러지고 말았다.
큰 소리가 울리고, 그의 몸 위로 누운 자전거 바퀴가 공회전을 하는 동안 윤오에겐 욱신거리는 팔꿈치와 등보다도 다른 감각이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금인에게 발정기가 있다면 치인에게는 아무런 번식 본능도 존재하지 않는 걸까요? 금인과 치인은 같은 성별이라 할지라도 드물게 임신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추측하기론 치인 역시 발정기라는 시기를 겪으며….]
윤오는 신경질적으로 이어폰을 빼 던졌다. 눈을 질끈 감았다. 혼란이 몸집을 부풀린다.
* * *
“그냥 보조 바퀴 달고 탈래? 어? 그러면 이 지랄 좀 덜할까?”
멍이 들기 시작하는 윤오의 팔꿈치를 보며 신조가 한 말이다. 윤오는 분해서 입술을 꾹 다물었다. 부끄럽고 민망하다. 그런데 정작 몸 주인보다 더 화가 난 듯 보이는 사람한테 신경 끄라고 할 수는 없었다. 화가 난 말투와 달리 착잡한 게 눈빛으로 다 보여서.
“예쁜 몸에 이게 뭐니.”
“제 몸이 예쁜지 안 예쁜지 어떻게 알아요.”
윤오는 제 손목을 잡고 가볍게 흔들며 혀를 차는 신조에게 불퉁하게 쏘아붙였다. 자존심이 상했다.
운동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진짜로 자전거를 갓 배운 것도 아니다. 오히려 신조의 생각을 하다가 넘어진 거니 그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신 생각을 하다가 넘어지지 않았느냐 하면 도리어 역으로 말꼬리가 잡힐 걸 아니 함부로 말할 수도 없었다. 억울한 노릇이었다.
“멍이 잘 어울리는 몸일 수도 있… 아.”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김윤오.”
어린 치기로 뱉은 말에 신조가 눈매에 날을 세우며 타박했다. 엄지로 팔 오금을 꾹 누르는 바람에 절로 상체가 앞으로 쏟아졌다.
“아픈 게 좋아? 네 몸에 흉이 있는 게 좋고? 피학 성향인가? 그런 걸 고민은 해 봤어?”
힘이 어찌나 센지, 가볍게 짧은 순간 눌렀을 뿐인데 눌린 부분이 희게 질렸다가 곧 빨갛게 익었다. 윤오는 어쩐지 자신보다 속상한 표정을 짓는 신조를 낯설게 보았다. 이런 표정도 하는 사람이구나.
“함부로 대해도 되는 여지를 만들지 마. 특히 나한테는.”
“…….”
“네가 그런 여지를 보여서는 안 될 사람의 목록을 만들면 맨 위에 올릴 이름이 나야.”
“본인을 나쁘게 말하는 걸 좋아하시나 봐요.”
“…….”
이번에는 신조가 대답을 잃었다.
“자책하시는 걸 즐기세요? 자존감이 낮은 타입이신가요? 종종 우울하세요?”
윤오가 제법 본인 흉내를 잘 내는 바람에 신조는 힘이 빠지고 말았다. 입새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자책은 가끔 하고, 자존감은 의식한 적 없고, 때때로 우울할 때가 있지.”
“…그냥 한 말이었어요. 그쪽이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니까 별로예요. 사람이 왜 이렇게 진지해요?”
“그럼 너를 가볍게 대할 수는 없잖아?”
“네. 차라리 이런 게 나아요. 말장난하고 말꼬리 잡고, 시답잖은 소리 하는 게 더 낫다고요.”
의자에 몸을 기댄 신조가 턱을 어루만졌다. 그런 게 취향인가, 하는 작은 속삭임은 듣지 못한 윤오가 팔을 접었다 폈다. 멍이 들긴 했지만 아프진 않았고 움직이는데도 무리가 없었다. 바닥이 단단한 타일 재질이라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하긴 했다.
앞으론 조심해야지. 이 정도로 자전거를 안 탈 생각은 아니었던 윤오의 기대를 신조가 무참히 비집고 들어왔다.
“아. 한동안 자전거는 금지야.”
차라리 보조 바퀴를 달고 말지…!
보통은 부모님이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테고, 그럴 공간도 여의치 않아 사람들이 잘 즐기지 않을 실내 자전거에 슬슬 재미가 들리던 참이었다. 윤오의 얼굴에 드물게 커다란 감정이 퍼졌다. 자리에서 일어나던 신조는 그 표정을 보고 나직이 웃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충격과 실망에 슬쩍 벌어진 윤오의 입술을 건드렸다.
“뽀뽀해 주면 다시 고민해 보고.”
“…….”
“키스해 주면 보조 바퀴 다는 조건으로 타게 해 주고.”
“제가 자전거만 타게 해 주면 키스해 주는 사람인 줄 아세요?”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차라리 자전거를 안 타면 안 탔지. 윤오는 씩씩대며 방으로 향했다. 신조가 다른 방을 주지 않아서 엉겁결에 그와 같이 쓰고 있는 방이었다. 타인과 침대를 공유하는 일이 이리 빨리 오게 될 줄 몰랐는데, 의외로 범신조와 같은 침대를 쓰는 건 금방 적응이 되었다.
그리고 윤오의 뒤를 그가 느긋하게 쫓았다.
발걸음이 빠른 것도 아닌데 가끔 윤오는 그가 뒤따른단 사실이 무섭게 느껴졌다. 숨이 턱턱 막혔다. 그가 해를 끼치거나 붙잡아서 폭력을 저지르는 것도 아니건만, 여전히 남은 금인에 대한 두려움이 범신조와 쌓은 일말의 얇은 친분보다 강한 모양이다.
“김윤오. 삐쳤어?”
침대에 누운 윤오를 향해 신조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삐쳤냐고 물으면 진짜 삐친 사람도 아니라고 하게 마련이다.
“어린애 취급을 하시니까요.”
“어린애 취급이 낫지 않아?”
“전 성인인데요.”
윤오는 천장을 보도록 바로 누우며 대꾸했다.
“얼마 전까지는 제 밥벌이도 했고요.”
“아하. 오백만 원. 기억하지. 아니지. 오백오십만 원이라고 했지.”
“제가 우스우세요?”
“네가 우스웠으면, 집 안에서 자전거를 타라는 내가 더 우습지 않겠어.”
고개를 돌리니 신조가 침대 위로 올랐다. 옆으로 누워 턱을 괴고는 윤오를 바라봤다. 때때로 집요하게까지 느껴지는 그의 시선도 이제는 조금 익숙해졌다.
“…….”
“왜 그렇게 봐.”
“그냥 그쪽은 뭐든 쉬워 보여서요.”
윤오가 아무리 이 정도면 선을 넘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굴어도 여유롭다. 여유는 가진 것에서 나온다. 범신조가 그어놓은 선은 대체 어디쯤이고 대체 얼마나 여유로울까. 일단 그 수위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한참 높은 건 분명한 것 같다.
“주변 사람들이 다 우습고 쉬운 세상에서 살면 어때요?”
비꼬는 기색 없이 순수한 질문이었다. 정말로 궁금했다. 보기에도 부족한 것 없고 갈망할 것도 없이 다 가진 데다가 모든 게 쉽다면 세상살이가 어떨지.
“지루해.”
뭐, 뻔한 질문이었다. 뻔한 대답이었고.
몸을 돌리려는 윤오의 어깨가 턱 잡혔다.
“고통스러워.”
“…….”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점점 돌덩이가 되어 굳어가는 것 같다면, 믿을래?”
“전 그런 세상에서 사는 게 아니라 못 믿겠는데요.”
“김윤오. 못 믿겠더라도 동정의 뽀뽀 한 번은 해 줄 수 있잖아.”
“다 가졌으면서 이런 우스운 거렁뱅이의 뽀뽀가 무슨 도움이 된다구요.”
“내 거렁뱅이는 특별하거든.”
“그럼 돈 주세요. 적선이라도 해야죠.”
“오백오십만 원이나 있는데 더 필요해?”
놀리는 말투에 부아가 치민 윤오가 대답을 재촉했다.
“얼른요. 얼마 주실 거예요?”
“얼마 필요한데?”
막상 물어보니까 떠오르지 않았다. 윤오는 가만히 있다가 “오십육만 원이요.” 하고 말했다.
“묘하게 구체적인데. 갖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야.”
우연히 봤던 헤드폰 가격이다. 헤드폰 주제에 정말 비싸서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비싼 가격이라 윤오가 도리어 선뜻 말한 금액을, 신조는 정말 별것 아닌 가격이라 선뜻 응했다.
“좋아. 뽀뽀해 줘.”
남자가 말하는 그 단어가 얼마나 낯간지럽고 이상한지 모른다. 또 막상 하려니까 민망해서 윤오는 꺼져가는 목소리로 “선불이요.” 했다.
“계좌도 없는데 어떻게 주지. 수표로는 백 단위 이상밖에 없고. 뭐, 공증이라도 해야 하나.”
정말로 길 실장이든 누구든 불러서 꼭 지불하겠다고 공증을 세울 기세였다. 고작 뽀뽀인데. 정확히는 입술 거죽이 타인의 살가죽에 닿는 것뿐인데. 윤오는 바로 그 입술 거죽을 질겅 씹다가 몸을 일으켰다. 신조는 덩달아 높아진 윤오를 올려다보며 느긋하게 셔츠 단추를 풀었다.
“단추는 왜 푸세요?”
“혹시 모르잖아. 김윤오가 내 가슴에 입 맞추고 싶어 할지. 내가 가슴에 좀 자신이 있어.”
탄탄한 가슴과 사잇골이 눈에 들어오긴 했다. 그래도 애먼 남자 가슴에 입 맞추고 싶어 할 정도로 바뀐 건 아니었다. 기도 안 차는 신조의 도발에 윤오의 긴장이 사라졌다. 윤오는 신조의 어깨를 꾹 누르고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이 닿은 종착지는 입술도 턱도 아니고 목울대였다. 입술이 닿는 순간 울대뼈가 움찔했다.
“입술도 아니고.”
신조가 한쪽 입꼬리만 꾹 눌러 올리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스산한 분위기였다.
“가슴을 내미시길래, 아무 데나 해도 되는 줄 알았죠.”
그것 때문이 아니다. 신조의 분위기가 살풍경하게 일어난 이유는, 윤오 딴에는 섹슈얼하지 않다고 생각해 고른 부위가 그 어느 곳보다 자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의외성에서 오는 자극이 얼마나 높은지, 김윤오는 모른다. 그렇기에 김윤오는 나이만 웃자란 어린애에 불과했다. 신조는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웃자란 김윤오의 둔부를 쥐고 싶단 욕구에 휩싸였다. 욕구는 물론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더 깊게, 더 내밀하게, 더 탐욕스럽게….
“돈 아까우시죠?”
이 질문이 윤오에게는, 그러니까 다시는 화대 같은 내기는 하지 말자는 의미였다.
“다음에 또 할까? 백만 원을 주면, 그때는 가슴에라도 해 주나?”
신조에게는, 이런 우스꽝스러운 기 싸움으로 몇 번이고 받아낼 수 있는 짜릿한 전리품이 생겼단 의미였고.
“…스킨십을 돈으로 사면 윤리적으로 좀 안 좋단 것도 모르세요?”
“나는 윤리니 모럴이니 사회적 규범이니, 개좆으로 여겨.”
“…….”
몰랐다. 윤오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신조는 여전히 자신의 어깨를 누르고 있는 윤오의 손을 잡고는 순식간에 자세를 뒤바꿨다. 졸지에 천장을 보고 누운 윤오의 다리 사이로 두툼한 허벅지가 들어왔다. 단단하여 벽에 갇힌 것만 같았다.
“…제가 하고 싶다고 하기 전까진 안 한다면서요.”
“누가 한다고 했어? 머릿속에 뭐가 든 거야. 밝히는 치인… 나쁘진 않지.”
아주 제 마음대로다. 연애 경력이 없는 윤오여도 지금 이 상황이 미묘하게 흐르고 있단 것쯤은 알고 있다. 신조의 셔츠 단추는 위태롭게 풀려 있고 남자의 눈은 묘하게 맛이 갔다. 장소는 침대 위고 어떻게 해도 그를 힘으로 밀어낼 수는 없을 거다.
윤오의 시선이 슬쩍 아래로 향했다. 사타구니가 아니었다. 허벅지에 윤곽이 두툼하게 부풀어 있었다. 윤오의 얼굴이 삽시간에 구겨졌다.
“못 볼 거라도 봤단 표정이네. 좀 상처인걸.”
허탈해진 신조가 옆으로 내려앉았다. 윤오는 방금 본 윤곽에 대한 충격으로 말을 잃었다. 그도 평균보다는 웃도는 편인데도 신조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역시 금인과 그런 짓을 하는 건 옳지 않다. 할 수 없는 일이다.
다채롭게 변화하는 윤오의 표정을 보던 신조가 핸드폰 벨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여보세요.”
통화를 하며 어깨 너머로 시선을 흘긋 던졌다 놓더니 뒷목을 슥슥 문질렀다. 윤오는 뒤늦게 참았던 숨을 훅 뱉었다.
“말해. 듣고 있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신조가 주머니를 뒤적이며 바깥으로 나갔다. 담배를 피울 모양이다. 분위기로 보아 공적인 일, 업무 관련된 내용 같은데 지금까지 그저 돈 많은 한량인 줄 알았던 터라 조금 의외였다. 일도 하는구나….
신조가 떠난 뒤에 윤오는 얼굴을 거칠게 비볐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걷는 걸음이 살짝 엉거주춤하다. 아주 조금 발기한 탓이다.
“분위기 때문이야. 분위기에 휩쓸려서….”
나이트에서만 해도 뒷정리하러 룸에 들어갈 때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더러운 소리를 지껄이다 흥분하는 놈들이 태반이었다. 그들과 자신이 같은 놈이었다고 말하고 싶진 않지만, 그만큼 몸이란 게 분위기에 약한 거다, 라고 되뇌며 윤오는 욕실로 들어갔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양치까지 하고 나왔다. 앞머리가 조금 젖어 검지와 엄지로 쭉쭉 누르며 방문을 여니 외출 준비를 끝낸 신조가 보였다.
“나갈 거야.”
손목시계가 셔츠 소매에 걸리지 않도록 정리하는 손길에 절로 시선이 갔다.
“저도 가요?”
“아니. 김윤오는 여기 남고. 식사는 때 되면 차려주는 사람 올 거야. 괜히 치우거나 하지 말고.”
“저는 뭐 해요?”
“하고 싶은 거 해.”
여기 갇혀서 말이지. 윤오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신조가 있을 때는 시간 가는 게 빨라서 어느새 저녁이 되었고 아침이 되었다는 느낌이었는데, 그가 없을 땐 좀 지루했다. 이젠 자전거도 금지당했으니 무엇으로 시간을 보내야 하나.
“사람 보낼 거야.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필요한 거….”
신조가 윤오를 스쳐 갔다. 지금껏 들어간 적 없던 방문이 열렸다.
활짝 열린 문 안쪽으로 색깔과 톤에 따라 가지런히 정리된 옷들이 보였다. 백화점 전시장처럼 반짝거리는 유리케이스 안에는 시계들이 마찬가지로 나란히 늘어놓아져 있었다. 개중 윤이 도는 메탈 시계를 꺼낸 범신조가 그걸 손목에 차려다 혀를 차곤 다시 넣었다.
“좀 늦어질 수도 있는데.”
“얼마나요?”
물어 놓고선도 재촉하는 것처럼 들려서 윤오는 조금 민망했다. 다행히도 생각에 잠긴 얼굴인 신조는 “음… 하루 이틀 정도. 어쩌면이지만.” 하고 중얼거리고 말았다.
잠시 뒤에야 신조가 고개를 들었다. 장식장에 손을 얹고 이쪽을 향해 미소를 띤 모습에 윤오는 조금 당황했다. 그린 듯이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새삼스럽게도 그런 게 눈에 보였다.
“왜. 일찍 왔으면 좋겠어?”
“…아뇨. 그냥 심심하니까.”
“되도록 일찍 올게.”
드레스룸의 문을 닫고 나서는 신조를 재촉하듯 그의 핸드폰 두 개가 다발적으로 울렸다. 일찍은 무슨…. 당연히 제가 자신을 기다릴 거라고 믿고 얘기하는 투에 윤오는 속으로 꿍얼거렸다.
현관으로 향하던 그가 문득 돌아서선 드물게 조급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윤오의 볼을 쥐고 지그시 눌러 충고했다.
“허튼 생각하지 말고 있어.”
허튼 생각은 또 대체 뭘 말하나. 한 번 도망쳤던 이력치고는 얌전히 잘 있지 않나. 역시 전에 만났던 연인들과의 불신에 가득 찬 관계가 문제인 게 분명하다. 눌린 볼 때문에 입술이 부리처럼 튀어나온 채로 윤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보는 신조의 시선이 한없이 깊어지다가, 곧 어슴푸레 웃으며 드리운 그림자를 지워냈다.
* * *
허튼 생각을 할 틈이 없잖아.
윤오는 멀거니 눈앞에서 일어나는 분주한 모습을 응시했다. 저녁을 먹는데 사람 셋이 들어왔다. 맨 앞에 선 양복을 입은 남자는 고개를 깊숙이 숙이더니 자신을 민수영 실장이라고 소개했다. 그러고는 뒤쫓아온 남자 둘에게 고갯짓을 했다.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바닥에 두툼한 카펫이 깔렸다. 이런 걸 대체 어디서 구했나 싶을 정도로, 이 커다란 거실을 거의 다 채울 만큼 컸다.
“자전거는 조심히 타시라고 하셨습니다.”
길 실장보다는 서글서글한 인상의 그가 어린애에게 선뜻 허락해주듯 신조의 말을 전했다. 그러니까 저 커다란 카펫이 보조 바퀴 대신이라는 거다.
“아, 그리고.”
내내 신경 쓰였던 커다란 상자가 드디어 풀렸다. 그사이 카펫을 다 깐 사람이 이번에는 액자처럼 생긴 커다란 텔레비전을 들고 왔다. 막 설치된 텔레비전에 민 실장이 게임기를 연결했다. 슬림한 본체에 비해 상자가 너무 커 과대포장이 아닌가 했더니, 안에 든 건 온갖 게임들이었다.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얼마든지 말씀해 주세요. 하시고픈 제품이 있거나 책이 필요하다면 책도 얼마든지요. 아, 서재도 둘러보시라고 했는데, 어딘지 아시나요?”
게임을 좋아하는 건지 눈을 반짝거리며 기기를 보던 민 실장은 윤오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선뜻 일어나 앞장섰다. 갑자기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양 얼떨떨해진 윤오가 그를 뒤쫓았다.
한옥을 개조한 저택은 복도 끝에 꺾이는 곳이 있었다. 그곳을 지나니 같은 지붕 아래에 있는 공간인데도 별채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서재를 한 번도 안 가 보셨어요? 정말 좋은 곳인데. 대표님께서 깐깐하게 직접 고르셔서 수집하셨거든요.”
“저… 그 대표님은 대체 무슨 일을 하세요?”
남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자신은 조금도 알지 못했다. 그걸 이상하게 생각할 줄 알았는데 민 실장은 대수롭지 않게 굴었다.
“그냥 이것저것 하세요.”
대수롭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이 남자도 혹시 나만큼 범신조에 대해 모르나 싶을 정도였다. 민 실장은 고용주의 정보보다 고용주의 서재에 대해 더 많이 알고 관심을 가지는 게 분명했다.
서재 문 앞에 선 그의 눈이 반짝였다.
“자. 엽니다.”
윤오는 독특한 성격의 민 실장이 어쩐지 낯설지 않아 이상하다 여기다가 곧 이유를 떠올렸다. 그는 한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와 얼핏 닮아 있었다. 장난기가 많아 시선을 끌고 짓궂은데 선을 넘지 않는.
절로 떠오르는 그 개구진 얼굴에 미소를 띠고 말았다. 민 실장은 서재를 열려다가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웃으시니 인상이 확 바뀌시네요! 그래서 대표님께서 그토록 잘 모시라 신신당부하셨구나.”
대표님, 그러니까 범신조일 게 분명한 남자가 신신당부까지 하며 잘 챙기라고 했다니. 윤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당황스러워서 그런 건데 민 실장은 실언을 한 줄 알고 난처하게 변명을 시작했다.
“아니, 그러니까. 집에 혼자 계실 텐데 적적하면 안 되지 않냐, 뭐 그런 말씀을….”
“괜찮아요.”
애인이나 심지어는 스폰이라고 하기에도 미묘한 관계가 오해 속에 들추어진 것만 같아서 윤오는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잘 모시라는 말은 윤오가 웃었으면 해서가 아닐 거다. 그는 윤오가 지금껏 한 번도 웃지 않았어도 전혀 개의치 않고 사람 약을 올리거나 종종 긁거나 아리송한 말을 해대곤 했으니까. 민 실장이 한 말이 그저 거짓말이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또 범신조가 그런 말을 했다고 상상하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적당히 대답한 것인데, 민 실장은 윤오의 말뜻을 그도 알고 있으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해석하고는 안심하고 서재의 문을 열었다.
“…와.”
호들갑을 떨면 대부분 그보다 실망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윤오는 가만히 입술을 벙긋 벌렸다.
책들은 직사광선에 약하다. 서향에 위치한 서재는 느지막하게 구물구물 들어오는 석양을 부드럽게 흡수하고 뙤약볕은 거부했다. 항상 오렌지빛으로 빛날 것만 같은 방이었다. 책장은 짙은 나무색으로 방의 온기에 색채를 더했다.
그리고 꽂힌 책들. 책에서 나는 특유의 종이 향에 윤오는 조금쯤 조급해졌다. 그간 독서 욕구에 굶주리거나 한 것도 아닌데 얼른 이 공간에 파묻히고 싶었다.
“멋지죠?”
책을 상당히 좋아하고 은근히 수집 욕구도 있는 민 실장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감탄했다. 고용주가 이곳에 있을 때나 오갈 수 있는 장소지만 오래 일해선지 손에 꼽을 정도로 적게 온 편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들어설 때마다 감탄이 일었다. 책 수집의 끝은 결국 부동산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진다더니, 이곳이 바로 그 수집욕이 구체화된 이상적인 공간이 아닐까 싶었다.
“편히 사용하라고 전해달라 하셨어요.”
“감사합니다….”
뭘 읽어야 할지 모르겠고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지만, 그래도 이 공간이 고마웠다.
문득 윤오는 자신이 한 생각에 당황했다. 고맙다고? 쥐가 고양이를 고맙게 여기는 짝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보다 더 편안하게 살 수 있나 싶은 해이한 생각도 드는 거다…. 한심스럽다.
“아, 저는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더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제게 연락 주시면 됩니다.”
“번호가 없어서….”
“제가 지금 전화 한 번 걸겠습니다. 민 실장으로 저장해 주셔도 좋고 ‘부하 1’ 정도로 저장해 주셔도 하셔도 좋아요.”
정말 구김살 없이 좋은 성격이었다. 뒤이어 그의 손짓 몇 번에 오히려 잊고 사는 시간이 더 많은 제 핸드폰이 울리는 걸 확인하고 윤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민 실장은 이제 더는 시간을 끌 수 없는지 시계를 연신 확인하다가 꾸벅 인사를 했다.
“식사는 여기 봐주시는 분께서 차리고 나가실 거예요.”
“네….”
어쩐지 푸른 수염의 성 같았다. 보이는 사람이라곤 없는데 모든 것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고, 그러면서도 이 안락함이 마냥 편안하지만은 않은.
푸른 수염이 숨긴 비밀은 무엇일까.
할 일도 없으니 민 실장을 배웅했다. 당연하게도 그는 무람없이 현관을 오갔다. 윤오는 현관 안쪽 마당에서 삐걱 열리는 문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빨간빛이 깜빡거리는 카메라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 * *
군침이 돌게 하는 향기에 점점 깼다. 손을 움찔하니 딱딱한 게 쥐어졌다. 컨트롤러였다. 귀에서도 비장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게임을 켜 둔 채로 잠든 거다. 달그락대는 소리에 윤오는 몸을 일으켰다.
“아, 일어났어요?”
주방에는 레스토랑 주방에서나 볼 법한 옷을 입은 남자가 있었다. 민 실장이 말한 식사를 담당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가 사부작사부작 차려낸 음식에 절로 이끌리듯 윤오는 식탁으로 향했다.
어느새 저녁 시간이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게임을 했다. 게임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재미도 있고 시간도 잘 갔다. 중간중간 시계를 확인하다가 진저리치며 더 집중하려 한 것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윤오가 뒤늦은 인사를 하니 직원이 살갑게 받았다. 나이대는 어림짐작해서 박 사장 또래가 아닐까 싶었다.
“이 집 식사 담당하는 이덕의 셰프입니다. 이 셰프라고 불러도 좋고, 이 아저씨도 좋고, 그냥 아저씨도 좋습니다. 두루두루 가리지 않고 다 요리하지만 중식을 가장 잘해요.”
중식을 언급하며 눈을 찡긋하는 모습에 윤오는 그만 박 사장이 떠올라서 작게 웃고 말았다.
“그럼 식사 맛있게 하고, 혹시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쪽지로 남기거나 지금 말해 줘도 좋습니다.”
“가, 가시게요?”
“네. 차리는 게 제 일이니 할 일을 다 했으면 이만 가야지요.”
“같이 드셔도 좋은데….”
사실은 윤오가 혼자 먹기 외로웠다. 박 사장 내외랑 지내다가 나와서는 범신조와 내내 붙어 있다가 갑자기 홀로 남으니 혼자 하는 식사가 달갑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이 셰프는 공과 사의 구별이 철저했다. 그는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제 일은 여기까집니다. 같이 식사를 하란 말이 있었으면 했겠지만, 없었으니 말아야지요.”
“…….”
“지시된 것 이상은 하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보통은 혼자 남겨져 홀로 식사를 해야 하는 상황엔 같이 먹으라고 하지 않나? 굳이 사람을 보내 식사까지 차려주고, 그냥 가라고? 누가 이런 야박한 명령을 했는지 묻지 않아도 알겠다. 따로 신경 쓰지 않으면 모르다가 어느 순간 순간 남자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 당혹스럽기도 하고 당연히 조금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다.
이 셰프는 쾌활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꼭 말하라며 재차 강조했다. 그러고는 윤오는 있는 줄도 몰랐던 뒷문으로 사라졌다.
“…….”
대기 모드에서 흐르는 게임 음악만 이 무지막지하게 큰 공간을 채웠다. 허기졌었는데도 입맛이 똑 떨어졌다. 윤오는 수저를 겨우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누가 누구를 길들이라고?”
길들이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을 그립게 만들려는 수작이 분명하다. 귀에 인이 박이도록 듣던 순응하고 살라는 말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서 윤오의 오기를 일으켰다. 윤오는 핸드폰으로 이전에 듣던 강의를 틀었다.
[…금인들의 특성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요. 외양적 특성의 경우 종종 타고난 뿌리를 닮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통적인 특징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대표적으로는 제가 ‘포식의 욕구’라고 부르는 공격성이 있습니다….]
배우면 배울수록 더 난해하다. 너무 벽을 치고 살았나, 스스로를 안인이라고 생각하고 산 기간이 길어서 그런지 무슨 별소리인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발정기 얘기는… 그 파트는 건너뛰었다. 별로 듣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다.
[이러한 특성으로 금인은 사회 다방면에서 주요 역할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치인의 경우는 조금 어려운데요, 혈통으로 발현되는 것도 아니며 금인처럼 카테고리화할 수 있는 기질을 공유하는 것도 아닌 만큼 의견이 하나로 모이는 경우가 드물지요. 연구 또한 최근에서야 시작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현재로서는 둘의 관계를 상생 관계로 보는 것이 중론인 상황입니다.]
공생 관계…. 그 말을 곱씹었다. 여러 번 곱씹어도 전혀 와닿지 않는다.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영영 이 관계에서 우위는커녕 대등한 관계도 못될 것 같은데.
씁쓸한 저녁이었다. 그것은 비단 외로이 먹는 식사라서는 아닐 것이다.
* * *
범신조가 나간 이후로 사흘째의 아침이 밝았다. 그간 연락은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윤오가 할 수도 있었겠지만, 내키지 않았다. 신조가 바로 그걸 기다리고 있단 의심도 씻을 수가 없었다.
윤오는 담요를 끌어 올리며 몸을 뒤척였다. 여기저기가 배겼다. 아무리 편한 라운지 체어여도 침대만큼은 아니었다. 어젯밤에는 잠이 오지 않아서 서재로 와 끌리는 제목마다 다 꺼내서 펼쳐보다가 잠들었다. 몇 권은 재미있었고 몇 권은 지루했다.
가장 마지막에 보다가 읽는 걸 멈추지 못하고 끝내 여기서 잠들게 만든 책은 이형질에 관한 것이었다. 혹시 여기에 신조가 말했던 치인의 단명에 관한 이야기가 있을까 싶었는데 그런 말은 전혀 없었다. 어제 읽었던 게 초반부 3분의 1 분량이었으니 아직 나오지 않은 걸 수도 있지만.
찌뿌드드한 몸을 길게 늘이던 중에 배터리를 충전하지 않아 저전력 모드로 들어간 핸드폰이 울렸다. 어쩌면, 이란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화면에 뜬 것은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이 번호를 아는 사람이 손에 꼽는데, 070으로 시작되는 광고 전화도 아니라 일단 받아 보았다.
“여보세요?”
― 윤오야.
반가움에 흠뻑 젖은 목소리였다. 상대는 윤오를 한껏 반기는데 윤오는 아니었다. 절로 경직된 목소리로 대꾸했다.
“네, 아버지.”
― 너 어디니? 오늘 좀 봤으면 하는데.
마치 맡겨놓은 약속을 찾듯 다짜고짜 오늘 일정을 묻는다. 이미 익숙했다. 여기서 윤오의 스케줄은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일정이 있다고 해도 온갖 말로 윤오에게 죄책감을 덧씌운 뒤 끝내 취소하게 만들 테니까.
차라리 없는 게 다행이었다. 적어도 짓누르는 듯한 죄송한 마음은 안 생길 테니 말이다.
“저는… 그냥 집에 있어요.”
― 집 어디? 어느 집 말이냐. 범 사장이 어디서 지내지, 요즘?
오늘은 범 사위가 아니라 범 사장이다. 그 징그럽고 맞지도 않는 호칭보다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며 윤오는 간략한 주소만 읊었다.
― 아버지가 그 근처로 갈 테니까 좀 나와라. 할 얘기도 있고, 얼굴도 좀 보자, 우리 아들.
곧 요즘 건강은 어떤지, 잘 지내고 있는지와 같은 살가운 안부 인사가 이어졌다. 전화를 달갑지 않게 여겼던 윤오는 그 녹을 듯이 다정한 목소리에 자신이 배배 꼬인 못된 자식 같단 무거운 감정을 느꼈다.
그런 식이었다. 변덕과 기분에 따라 윤오에게 꿀처럼 다정하게 군다. 그러나 진의는 따로 있다. 제 의도대로 윤오가 움직이지 않으면 곧 혀를 차며 너는 이렇니, 저렇니 하고 온갖 꼬리표를 단다. 그러면 분위기를 망쳤다는 긴장감과 오랫동안 자신을 키운 부모가 한 말이라는 주박에 걸린 양 윤오는 그 죄책감을 떠안게 되는 거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줄이었다. 거는 사람도 걸린 사람도 인지하기 힘든 부드러운 목줄.
― 주소 보내 줄 테니 늦지 않게 나와라. 한 시간 후면 도착하니까.
역시, 윤오의 사정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계획이 모두 있었던 거다.
김윤오의 아버지 김병후는 본인 스스로 생각하기엔 아주 이성적이고 계획적인 사람이었다. 비록 그 이성이란 열대 지방의 소나기처럼 변덕스러운 감정에 휩쓸리지 않을 때나 존재하는 찰나에 불과하고, 계획이란 상대방의 상황을 전혀 조율하지 않은 채 홀로 결정하는 이기적인 일정이었어도, 그는 이성적이고 계획적인 사람이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믿었다.
무심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려는 순간, 윤오는 빨간빛이 반짝이는 카메라 렌즈를 떠올렸다.
“아, 아버지. 그런데….”
― 그런데. 뭐.
금세 목소리가 낮아졌다. 윤오는 피곤함에 미간을 문질렀다. 역시 어제 아무리 졸렸어도 침실로 가야 했다. 끈끈한 한숨을 삼키며 뒷말도 삼켰다. 어떻게 말하겠나. ‘여기 CCTV가 있는데 범신조한테 말은 하고 나가야 할 것 같아서요. 근데 답변이 언제 올지 모르겠어요.’ 라고?
곰곰이 곱씹어 보니 신조에게 나가도 되냐고 묻는 것도 기가 막혔다. 무슨 허락을…. 도망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정말 물건도 아닌데.
“아니에요. 나갈게요. 늦지 않게요.”
윤오가 조용히 대꾸했다. 긴 시간은 아닐 거다. 설령 긴 시간이 걸린다 하더라도, 연락 하나 없이 언제 올지도 모르는 사람을 기약 없이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준비를 끝내고 현금을 챙겼다. 물론 자신이 모았던 오백오십만 원에서 빼 왔다. 현관문을 잡는 짧은 순간 정전기 같은 짜릿함이 느껴졌다. 아, 이대로 멀리멀리 떠나고 싶다. 불쑥 치솟는 욕구에 윤오는 잠시 오스스 떨었다.
“…….”
떠나고 싶은 건 당연했다. 그런데 왜 그와 동시에 뒤를 돌아보고 범신조에게 전화를 걸고 싶은 건지는 모를 일이었다.
윤오는 팽팽하게 당겨지는 두 마음 사이에서 고개를 들었다. 빨간빛이 눈처럼 반짝이는 카메라를 똑똑히 응시하고, 잠시 후 문을 닫고 멀어졌다.
* * *
신조는 눈을 가늘게 뜨며 담배를 물었다. 남이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그는 늘 직접 담뱃불을 붙이곤 했다. 허공에서 손을 털자 까맣게 말라 죽은 성냥이 떨어졌다. 그런 뒤 핸드폰을 꺼냈다. 오로지 윤오만 저장되어 있고 윤오만 번호를 아는 것이었다.
화면을 켜니 윤오의 모습이 보였다. 이쪽을 빤히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카메라를 응시하는 거지만.
곧 멀어지는 걸음이 참 가벼워서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한 시간 반 전의 영상이었다. 한 시간 반 전에 이미 실시간으로 봤지만 틈틈이 계속 보고 있다. 이쪽을 노려보는 얼굴이 좋아서. 금인들은 이상성욕자들이라는 루머가 있던데 어쩌면 그게 맞을지도 모른다.
자조하는 소리가 철골로 지어진 높은 천장의 폐창고를 울렸다. 범신조는 핸드폰을 도로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은?”
“출발하셨단 신호가 뜨자마자 붙였습니다.”
“소리랑 영상 상태는 어떻고.”
“깨끗합니다.”
“좀 볼까.”
평소와 다르게 검은색 캡모자에 온통 검은색 일색인 옷을 입은 길다온이 태블릿을 내밀었다. 신조는 볼이 우묵하도록 연기를 빨며 소리를 켰다.
― …그러니까 네가 말 좀 해 봐다오. 범 사장이 조금만 도와도 대박을 칠 아이템이야. 응? 이거만 잘되면 너랑 너희 엄마 고생할 필요 없다.
― 그렇게 말했던 게 몇 번째예요…. 그만 해요, 아버지.
윤오의 피곤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깨가 동글동글하게 굳었을 거다. 신조는 제 어깨가 윤오의 것이라도 되는 양 고개를 좌우로 깊이 기울여 풀어 주었다.
― 언제까지 작은 가게로 만족할 건데. 사내로 태어났으면 더 큰 꿈도 꾸고 그래야지.
― 왜 아버지의 개인적인 꿈에 다른 사람까지 노력하는데요….
― 하아. 윤오야. 너는 대체 왜 아빠 마음을 몰라 줘. 응? 네가 소심하단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꿈까지 작은 애로 키우지 않았다, 나는.
“재밌네.”
범신조가 낮게 웃었다. 김윤오를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는 방식으로 가둬 키웠으면서 꿈을 어떻게 키워 줬단 건지. 그런 독특한 교육법이 있다면 궁금해서 한 번쯤은 알아보고 싶었다.
“김병후 이력이 어떻게 되지?”
“고깃집 3년 영업 후 폐업, 회전 초밥집 2년 영업 후 폐업, 주점 5년 영업 후 폐업입니다. 현재는 사장님께서…”
“아하. 내가 먹여 살리고 있었지. 맞다.”
담배를 쥔 손의 엄지로 콧잔등을 긁으며 신조는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듯 굴었다. 그의 분위기만 보면 이곳이 카페 정도쯤은 되어야 어울릴 법했다.
하지만 이곳은 부둣가 폐창고고, 안에는 피 냄새가 자욱했다. 그의 흰 셔츠는 소매와 카라가 이미 핏자국으로 엉망이었고 검은색 바지 역시 빨간색이 보이지 않을 뿐 말할 것도 없었다.
“좀 더 일찍 먹여 살릴 걸 그랬나. 7년이 세포가 모두 바뀌는 주기라고 하던데. 좀 더 일찍 내 돈으로 살게 했으면, 김윤오의 세포에 내 손이 닿지 않는 구석이 없는 게 될 수도 있었단 말이잖아.”
“그래도 음식은 대표님이 하시는 게 아니니까요.”
“하… 내가 요리에 관심이 없어. 사실은 대부분의 것에 관심이 없어.”
대화의 초점이 부드럽게 옮겨졌다. 범신조가 태블릿을 돌려줬다. 그러곤 발을 들어 물컹해진 허벅지 위에 얹었다. 구두가 무언가로 번들거렸다. 물은 아닐 것이다.
끄윽… 하는 신음 소리에 맥이 없었다. 그는 바지 뒷주머니에 걸어두었던 가죽 장갑을 꼈다. 그러곤 다른 직원에게 칼을 받았다. 손에 익은 잭나이프가 신체의 일부처럼 움직였다.
금인은 폭력성이 있다. 대뜸 주먹질을 하고 싶다거나 마음에 안 드는 놈을 일단 패고 본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그러나 약간의 혹은 좀 많은 피를 봐야만 해소할 수 있는 본능이 있다. 잘 억누르고 있는 금인이 대다수긴 하지만 근본이 최상위 포식자에 가까울수록 종종 이렇게 풀어줘야 했다. 이게 바로 범신조가 그의 위치에선 굳이 할 필요도 없는 궂은일을 자처하는 이유였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세상. 돈 대신 비밀을 듣고 그 뒤처리를 해 준다. 소소한 부업이고 취미 생활이었다.
그나마 썩은 내가 나는 비밀로 남을 쥐락펴락하는 게 아주 약간의 자극이 되었는데 이제는 이조차도 즐겁지 않았다. 피 냄새를 맡는 게 싫다는 건 아니고. 이건 어찌 보면 필요불가결한 하나의 생존 활동에 가깝지 않나.
지금은 이런 곳에서 시간을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크다. 익숙하던 여기도 이젠 지루하게 느껴져서 이만 돌아가 그의 곁에 있고 싶다.
김윤오.
제게 그나마 있던 약간의 자극조차 무색무취하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존재. 범신조의 사타구니부터 허벅지가 두툼하게 부풀었다.
잠시 후 닫혀 있던 폐창고 문이 열렸다. 차가운 바람이 밀려 들어와 꿉꿉한 악취들을 밀어냈다. 지독한 탄내가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날이 부쩍 춥고 하늘이 우중충하다 싶더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범신조는 담배를 질겅질겅 씹으며 성냥을 꺼냈다. 핸드폰을 꺼내 윤오가 있는 곳의 날씨를 확인했다. 그곳 역시 눈이 내리고 있다고 했다.
“…….”
“대표님.”
눈이 내린다는 표시를 하염없이 응시하던 그의 뒤로 길 실장이 다가왔다.
“처리 다 끝났습니다.”
어깨 너머로 돌아보니 소화기로 남은 불씨까지 확실히 없애고 있는 검은 옷들이 보였다. 단백질 탄내는 유독 지독하다. 신조는 비스듬히 창고 문에 기댔다.
“집 확인 한번 하라 그래.”
“예.”
“더워도 좋으니까 따뜻하게 해 두라고. 김윤오 추운 거 싫어해.”
그랬나…? 길 실장은 그 춥던 컨테이너에서도 잘 지냈던 김윤오와 얇은 후드 집업만 입고 편의점에 가던 김윤오를 떠올렸다. 하지만 신조는 확신이 있는 것처럼 재차 강조했다.
“춥지 않게.”
“바로 안 가실 겁니까?”
“가야지.”
어찌나 눈송이가 큰지 잠깐만 손바닥을 내밀고 있었는데도 금세 우묵하게 모은 살 속에 물이 고였다. 그는 허공에 손을 털었다.
“샤워 좀 하고. 아, 옷도 갈아입고.”
과연 신조의 몰골이 보기 좋지는 않았다. 소매를 걷어두긴 했어도 흰 셔츠에 피가 티 나지 않을 리도 없었고, 얼굴에 튄 것도 적지 않아 살벌했다. 이런 모습 때문에 금인들이 이상성욕 혹은 이상식성이 있단 루머가 도는 거라고 길 실장은 어렴풋이 중얼거렸다.
“우리 김윤오 겁먹을라.”
“그렇게 겁이 많으신 분 같진 않던데요.”
제 고용주에게 일일이 말대꾸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범신조가 원래 제 앞에서 기죽어 빌빌대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탓에 비서실이나 그가 부리는 사람들이 대부분 할 말은 하는 타입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게 대거리를 할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범신조의 성격을 모르는 사람들조차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그러니 김윤오가 평범하다고 할 수는 없을 거다. 역시 짝은 다른가. 길다온은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겁이 많은 건 아닌데.”
“…….”
“겁먹은 표정이 너무 예뻐.”
“…….”
“그래서 많이 짓게 하고 싶지 않아.”
신조는 이해하기 힘든 말을 흘리며 차로 향했다. 그 뒤를 길 실장이 서둘러 쫓았다.
그들이 통째로 빌린 사우나에 도착할 때쯤엔 남은 정리가 모두 끝나고 폐부두의 문도 이전처럼 굳게 잠길 것이다. 신조가 다시 본성을 좇아 찾아올 때까지 열리지 않도록.
* * *
상대방의 사정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자기 혼자서 쉴 틈 없이 떠들던 사람이 갔다. 이제 앞자리에는 아무도 없는데 아직까지도 귀에 이명이 들리는 기분이다. 윤오는 얼음이 녹아 반쯤 투명해진 라떼를 바라보았다. 그게 재미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멍하니 시선을 둘 곳을 찾다 고른 게 그것이었을 뿐이다.
아버지는 시종 범 사장에게 잘 좀 해라, 사근사근하게 굴어라, 그래서 아버지의 사업 아이템에 대해 말 좀 꺼내 봐라, 하는 본인의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병이야. 병. 사업병.’
지긋지긋한 이삿짐을 싸며 넋두리하던 어머니의 말이 딱 맞았다. 그건 병이었다. 이렇게 불치병인 줄은 몰랐네. 윤오는 자조했다. 아버지는 에둘러 말했지만, 결국 그 내용은 베갯머리 송사 좀 해 보라는 뉘앙스와 별다르지 않았다.
피부 아래에서부터 도깨비 풀이 자라는 것만 같다. 윤오는 멀거니 얼굴을 비볐다. 곧 그 손길이 신경질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열이 오르는 게 손바닥 때문인지 아니면 자식을 팔아먹는 것과 다르지 않은 아버지의 말 때문인지 모르겠다. 점점 차오르는 불쾌감과 모멸감에 머릿속이 빨개졌다.
마침 진동이 울렸다. 손가락을 살짝 벌려 틈새로 핸드폰 화면을 보았다. 깜빡거리는 배터리 잔량 표시와 함께 문자 내용이 미리 보였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등록되지 않은 번호였지만, 낯익었다. 어머니의 것이었다.
[윤오야 오늘 아빠 만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