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1)
“대표님. 재 떨어집니다.”
“…….”
장용우의 말에 신조가 손을 옮겼다. 담배를 피우고 있던 것도 잊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십니까?”
아마도 장용우는 신조가 돈 굴릴 궁리를 한다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 궁리를 하지 않아도 돈은 자꾸만 불어났다.
그의 집안은 개항 때는 항구에 호텔을 차리고 호텔에서 번 돈으로 주변 땅을 샀으며, 이후에는 항구 주변 구역을 야금야금 차지하고, 건물을 올리고, 팔고 사고 다시 파는 식으로 부와 세를 불렸다. 아마도 이 나라에서 현금 보유로는 다섯 손가락, 아니 세 손가락 안에 꼽힐 것이다.
그러니 장용우가 생각하기로 그의 고용주는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주기적으로 오는 발정기에 짐승이 되는 것만 빼면, 그는 완벽하고 아쉬울 것 하나 없으며 남에게 아쉬운 이야기도 할 필요 없는 그런 부류였다.
바로 그런 고용주가,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던 사람이 오늘따라 정신이 어딘가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상념에 잠긴 것 같기도 하고 고민에 빠진 것 같기도 했다.
장용우의 추측대로 범신조의 머릿속은 번민으로 복잡했다. 오랫동안 싸지 않은 티가 역력한 풋내 나는 김윤오의 몸과 체향 때문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남이 들으면 범신조답지 않다며 꽤나 놀랄 것이다. 그들이 멋대로 이미지한 범신조는 난잡하고 거리낌 없이 문란하게 구는 여타 금인과 다를 바 없을 테니 이런 풋내기 같은 고민은 하지 않을 거라 여길 테니.
상념을 끝내기 위해 그는 거의 피우지 않은 채 타들어간 담배를 재떨이에 지져 껐다.
“김윤오 씨 아버지가 연락해 왔다고.”
“예. 자금 사정이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사실 이런 건 길다온이 더 적임자였다. 장용우는 말로만 입씨름하며 거들먹거리는 것들을 싫어했다. 혀가 긴 놈들이란 겁이 많고 한심하기까지 하단 게 그의 신조이자 이른 일반화의 결과였다. 그리하여 김윤오 아버지에 대해서도 말하는 투가 심드렁했다.
김병후는 배포도 그릇도 크지 못한 남자였다. 그러면서도 남 밑에서는 일하고 싶지 않고, 한번 들은 사장 소리에 중독되어서는 꾸준히 되지도 않는 사업을 자꾸만 벌였다.
“빌려줘.”
신조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순순히 답했다.
“얼마 안 되는 돈이잖아. 우리 김윤오 잘 키워줬는데 보답은 해야지.”
“안 그래도 김윤오 씨 안부를 먼저 묻더라고요.”
“우리 김윤오 사랑 많이 받고 자랐네. 그렇게 걱정하는 사람이 많아.”
네가 필요한 그 치인이 우리 아들이니 똑똑히 기억하란 뜻으로 묻는 안부일 테다. 얼마 전에 봐 놓고 또 무슨 안부가 궁금할까. 3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그다지 열성적으로 아들을 찾지도 않았으면서.
“은혜도 모를 수는 없지. 좀 뚫어드려. 한숨 돌린 기념으로 어디 클럽 회원권도 좀 드리고. 맛 좀 보시게.”
자못 차가운 말투로 제 할 말을 끝낸 범신조가 모니터를 켰다. 켜진 화면 속에 김윤오의 모습이 보였다. 서점에서 이것저것 펼쳐보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민 실장이 찬양하는 제 서재가 그의 취향에는 맞지 않는 모양이다.
장용우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야말로 약 주고 다시 병을 주는 꼴이다. 그래도 짝의 부모인데, 이런 방식은 조금…. 김윤오도 아나?
알든 아니든 사실 제가 크게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장용우는 고개를 숙였다. 길다온에게 전달하면 그가 아주 신속하고 깔끔하게 김병후를 달달한 설탕물로 안내할 것이다.
“예. 줄 좀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어. 나가 봐.”
대충 손을 내저은 신조는 턱을 괴고 화면 속의 윤오를 찬찬히 살폈다.
간밤에 세 번 싸게 했다. 마지막엔 살이 까져 아프다며 그만하자고 하길래 입속의 야들야들한 살로 물어 줬다. 정말 힘들다고 우는 소릴 한 끝에야 네 번까지는 가지 않았다.
평소 발정기를 제외하고는 성욕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남들보다 빨리 세우고 오래 가고 많이 싸는 건 알았지만, 많이 하고 싶다거나 미치도록 박고 싶단 생각은 잘 하지 않았다. 김윤오를 만나게 되면 이것도 바뀌게 되리란 건 알았지만….
“또 참지를 못하네.”
자조하는 소리에 막 나가려던 장용우가 돌아봤다. 무슨 말씀하셨냔 질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려다가 문득 물었다.
“내가 하는 짓이 징그럽나?”
“어떤… 것을 말씀하십니까?”
“내가 김윤오한테 집착을 심하게 하는 것 같냐고.”
“글쎄요.”
장용우는 지금까지 고용주의 일을 곰곰이 떠올렸다.
“금인 중에는 치인의 몸에 위치 추적기를 다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새끼도 있대?”
“예. 미친 새….”
“영리하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
“나가 봐.”
“시술자를 찾아볼까요?”
“됐어. 내가 말할 때까진.”
사실 장용우는 지금 범신조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답지 않다. 원래 제 마음대로 사는 게 익숙한 데다, 남의 마음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 아닌가.
그런 고용주가 김윤오에게는 무르게 군다. 장용우는 내심 그 가증스러운 인내심이 언제 끝날까 혼자서 내기하는 중이었다.
* * *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향기가 났다. 종이책을 보면 스트레스가 준다고 들었는데, 꽤 오랜 시간 들여다보고 있으면서도 윤오의 마음은 영 편치 않았다.
일부러 어느 스님이 썼다는 평정심에 관한 스테디셀러 에세이를 골라 펼쳤다. 그러나 마음이 다스려지긴커녕 머릿속에는 포르노나 마찬가지인 원색적인 장면만 생생하게 재생되었다. 화면만 흘러도 곤란한데 소리까지 서라운드로 제공되는 탓에 윤오의 목덜미가 새빨갰다. 몸에 열이 올라 지나치게 더웠다.
‘서점에 히터를 너무 세게 튼 거 아냐…?’
잠시 떠올랐던 핑계는 옆에 지나가던 행인 둘이 평소보다 서점 안이 춥지 않냐며 투덜거리는 걸 듣고 맥없이 사그라들었다.
‘김윤오… 아직도 사내새끼는 안 꼴려?’
웃음과 거친 호흡이 섞인 목소리가 뒤에서 덮치듯 들려왔다. 동시에 이때의 상황과 함께 구체적인 자세도 떠올랐다. 범신조가 뒤에 있었다. 그의 팔은 뒤에서 뻗어 나와 아래로 들어왔다가 위를 짓누르며 윤오의 어깨를 잡았다. 옴짝달짝할 수 없이 갇혀서 허벅지 사이로 오가는….
“아.”
윤오가 짧게 탄식했다. 쥐고 있던 책이 구겨진 거다. 스님께서 ‘네 머릿속에 마구니가 가득 들어찼구나.’ 하고 비난하시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벌써 세 번째 책이 구겨졌다. 윤오는 한숨을 삼키며 지금까지 구긴 책들을 계산하러 데스크로 향했다. 네 번째로 죄없이 구겨지는 책이 생기는 일은 피하는 게 좋지 않겠나.
만 원짜리 다섯 장을 들고 나왔는데 어느새 돌아갈 차비밖에 남지 않았다.
‘한 권만 구겼어야지.’
윤오는 동전과 지폐를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요새 한숨이 많아졌다. 바쁘게 지낼 때는 오히려 이런 버릇이 거의 없었는데. 쉬는 것도 잊고 살았는데.
막 회전문을 통과하려는 순간, 윤오의 어깨가 덥석 잡혔다. 기척도 없어 방심하고 있던 윤오가 놀라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가슴이 뻐근하게 뛰었다.
“야, 김윤오 맞잖아!”
“…김선기…?”
“미친놈아! 지금까지 어디 있었냐?!”
커다란 소리에 정문을 오가는 손님들뿐만 아니라 안에서 책을 고르던 이들의 시선이 모두 이쪽을 향했다. 윤오는 자신을 와락 껴안은 고등학교 때 친구를 끌며 바깥으로 나왔다.
칼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어찌나 센지 몸을 웅크려도 볼이 따가웠다. 그러나 둘 다 개의치 않았다.
“야! 우린 너 죽은 줄 알았어!”
선기가 몸을 웅크리면서도 활짝 웃는 얼굴로 우다다 말을 쏟아냈다. 정말 반가웠는지 죽은 줄 알았다는 과격한 표현을 하며 연이어 윤오의 어깨를 쥐고 흔든다. 윤오는 여전히 얼떨떨했다. 갑자기 이렇게 동창을 우연찮게 만날 줄은 몰랐다.
졸업식 날 제게 예정되었던 선로에서 튀어 나간 뒤로 내내 지도도 없는 곳을 헤매는 것 같아 늘 붕 뜬 기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시간이 삼 년 전으로 돌아간 양, 애써 현실과 거리를 두고 싶어 세워뒀던 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연락도 없지! 번호는 없어졌다고 하지! 소문으론 너 외국 갔다고 하지! 근데 네가 말도 안 하고 갈 성격이냐?”
말도 안 하고 외국을 갈 성격은 아니어도, 말도 안 하고 사라질 깡다구는 있었나보다, 과거의 나는. 칼바람이 불어 뼛골까지 떨리도록 추운 와중에 윤오는 어렴풋이 웃었다.
“너… 아니 우리… 오랜만이다.”
“와. 너무 추워. 미쳤다. 일단 우리 어디 들어가자. 어?”
선기가 윤오의 손을 끌었다. 여전히 윤오보다 한 뼘 반이 작았다. 선기는 체구는 작지만 날렵해서 점심시간마다 축구 시합을 하면 늘 앞장서곤 했다. 윤오는 다른 체육 활동은 곧잘 했는데 이상할 정도로 구기 종목에 약해 어정쩡한 위치에 있곤 했다.
아, 애써 죽여두었던 추억들이 마구 쏟아졌다. 정체도 모르던 운명한테서 도망치겠다고 이 모든 걸 버리고 도망쳤던 거다. 윤오는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러나 밖으로 나오는 건 없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망설였고, 그다음에는 말해 봤자 무겁기만 한 주제라고 생각해 안으로 삭였다. 그러고 나니 아무것도 말할 게 없어, 어설프게 웃으며 바보 같은 소리만 하는 수밖에.
“나 돈 없어….”
“됐어. 내가 사야지. 오랜만에 봤는데! 미쳤다, 진짜. 단톡방에 우리 사진 찍어 올리자. 어?”
“너 여전히 남한테 막 사 주냐. 그러다가 호구 잡혀….”
“너한테만이야. 너한테만.”
지도 앱이 없으면 편의점도 잘 찾지 못하는 윤오 대신 선기가 열심히 앞장섰다. 그 뒤를 따르면서도 주책맞게 자꾸 눈물이 날 것 같다.
도망치려면 독하게 떠나야 한다. 계좌도 만들지 말아야 하고, 내 명의의 거주지도 없어야 하고, 핸드폰도 마찬가지다. 다 버리고 가야만 도망은 완벽해진다. 그렇게 해도 잡히고 만다.
게다가 두고 온 게 무엇인지 다시 깨달은 지금, 윤오의 마음은 더 부드럽게 무너졌다. 지금은 도망치고 싶단 생각을 하고 있진 않지만, 설령 그런 생각이 들더라도 앞으로는 힘들겠다는 그런 확신 때문에.
이어진 끈이 많을수록 포기는 힘들고 도망은 고단하다. 처음부터 외로이 태어났다면 모를까.
* * *
선기가 트레이를 들고 오는 모습에, 메시지를 쓰던 윤오는 결국 완성하지 못한 채로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찔릴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저 신조에게 친구를 만나고 들어갈 거라고 보내려 했다. 그러나 타이밍을 놓치니 객쩍어지고, 객쩍어지니 곱씹게 된다. 곱씹으니 불필요한 일처럼 느껴지고, 불필요한 일을 왜 하나 싶다 보니 괜히 민망해졌다.
어차피 범신조도 멋대로 나가서 멋대로 돌아온다. 그 남자의 생활 패턴을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아니, 종잡을 패턴이랄 게 아예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요즘 뭐 하고 지내?”
트레이를 내려놓으며 선기가 살갑게 물었다. 트레이 위엔 케이크가 각각 다른 종류로 네 개나 올라가 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매점에 새로 들어온 신제품은 꼭 제일 먼저 맛봐야 성이 풀린다던 그였다. 이곳도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디저트 카페라고 했다. 선기를 잘 아는 윤오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얻어먹는 처지에 이렇게 많이 받아도 돼?” 하는 말 대신 “이렇게 많이?”라고 되물었다.
“역시 여럿이 와야 좋다. 나 혼자 올 때면 많아야 세 개밖에 못 먹는데.”
역시 예전과 변한 게 없다. 윤오는 남몰래 작게 웃었다.
윤오가 포크를 든 틈을 타 선기는 자신의 근황과 친구들 근황까지 알아서 털어놓았다. 선기 자신은 꿈을 위해서 제과제빵과에 들어갔다고 했다. 자꾸만 살이 쪄서 큰일이라고, 운동을 시작해야겠다고 하며 자연스레 윤오에게 말머리를 돌렸다.
“너는?”
“난… 난 지금 그냥 지내. 딱히 하는 거 없이.”
윤오가 그간의 시간을 간단하게 말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 아, 혹시 지금 같이 사는 사람 있고?”
“같이 사는 사람?”
“왜, 있잖아. 졸업하면서 금인들이랑 사는….”
“아냐.”
자신이 듣기에도 조금 차가운 목소리였다. 아차 하고는 얼른 무마했다.
“아냐, 그런 거. 그냥 자기 탐구 중이야. 자아 성찰 같은 거.”
일부러 되도 않는 농담까지 해가며 쾌활하게 말했는데도 효과는 미흡했던 모양이다.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졌다.
“내가… 말실수한 거지? 미안….”
선기의 잘못은 아니다. 그저 보통 사람들이 치인에 대해 가지는 편견 때문일 거다.
그들은 치인들이 당연히 금인과 만나게 된다고 여긴다. 아무리 같이 어울려도 저희와 다른 존재라는 기본 통념은 쉬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이형질인들은 만날 일도 거의 없고, 듣는 이야기란 고리짝 옛날부터 알음알음 퍼지는 낭설이 대부분이니 어쩔 수 없다.
윤오 역시 굳이 금인이니 치인이니 하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보니 선기 역시 자연스럽게 제게 익숙한 대로 생각한 모양이다. 죽지만 않았더라면, 소문대로 외국으로 떠났던 게 아니라면.
“말실수 아니야. 괜찮아.”
“…….”
애써 무마했는데도 순식간에 대화가 끊겼다. 말을 고르느라 그러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윤오가 먼저 선수를 쳤다.
“학교 다닐 땐 그런 거 신경도 안 쓰고 지냈잖아, 우리.”
“그랬…지?”
“다른 친구들이랑 똑같이 대해 준 거, 사실 그땐 미처 말 못 했지만, 엄청 고마웠어.”
그 말에 멋쩍게 웃을 줄 알았던 선기는 어쩐지 더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 그게.”
뭐지? 윤오는 불안감이 엄습해서 차가운 유리잔을 꽉 쥐었다.
“사실은 너희 아버지가…. 아니다. 아니야.”
“왜? 말해 봐.”
스스로 생각해도 억지로 웃는 게 뻔했다. 목소리도 떨렸다.
“그냥 말해 줘.”
종내에는 애원처럼 부탁했다. 선기는 자신의 주둥이가 문제라며 모은 손끝으로 입술을 때리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희 아버지가 너 몸 다칠 일 없게 놀라고 엄청 당부했었어.”
“…언제부터?”
“그냥… 같은 반 됐을 때부터.”
“…….”
“우리 1학년 때 이후로 계속 같은 반 했잖아. 담임들도 알고 있었을걸. 아마 계속 같은 반 된 거도 너희 아버지가 부탁해서 그런 걸 거야. 원래는 그러면 안 되지만, 워낙 우리야 치인이니 금인이니 하는 건 잘 모르니까. 뭐 듣자 하니 치인은 몸도 약하다, 근육도 잘 안 생긴다 어쩌고들 하잖아. ……그래서 배려해 주신 걸 거야.”
말하는 중간에 묘한 침묵이 끼어들었다. 눌러놓은 건 아마 그 얘기일 거다. 치인들은 남자도 임신할 수 있다잖아…, 같은 이야기. 윤오 본인조차도 믿을 수 없는, 혹은 믿고 싶지 않은 그런 이야기.
“다른 반에선 네가 당연히 약골일 거라는 소문도 있었고. 하하. 웃기다. 너랑 조금만 같이 지내도 그거 다 헛소문인 거 알 수 있었는데. 안 그러냐? 김윤오가 약골이라니. 사실 그래서 나도 나중엔 그런 거 다 잊어버렸어. 그러니까 고마울 것 까지야.”
어색하게 웃는 윤오를 두고 선기는 당황스러움을 감추려 과장되게 이것저것 주워섬겼다. 지금까지 잘 숨겨왔던 이야기를 털어놓고 말았다는 것에 후회하는 기색이었다.
윤오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민망함이 가장 컸다. 아버지는 대체 왜 그런 말을 했지, 왜 쓸데없이 그런 말을 했지, 뭐가 자랑이라고,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에 대해 얼마나 쉽게 오해를 하는데….
친구들이 알고 있었고, 지금 와서야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된다는 모든 게 민망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행히 선기는 개의치 않고 곧 다른 얘기로 주제를 돌렸다. 옛날 추억이기도 하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라 들뜬 기분이 더 큰 것 같았다. 학교를 다닐 때처럼 두서가 없고 의식의 흐름대로 흐르는 대화였다. 혼자서 말꼬리를 잡아 말머리로 밀어내고, 말머리가 다시 말꼬리가 되었다. 윤오는 문득 제가 신조와 이야기할 때 대화 꼴이 딱 이렇겠다 싶었다.
다행히도 윤오의 불안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 역시 아는 이야기고 추억은 으레 미화되기 마련이라 퍽 즐거웠기 때문이다. 아마 사십 년 후쯤에 다시 우려먹어도 재미있을 선생님 성대모사나 학창 시절 있던 해프닝이 나올 때는 정말 오랜만에 본인의 웃음소리가 어땠는지 깨달을 정도로 소리 내어 웃기도 했다.
다만 대학 이야기를 할 때면 마냥 먼 나라 사정처럼 들렸다.
윤오는 아직 대학 생활에 대한 환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가 본 적이 없으니 환상이 깨질 일도 없던 거다. 그래서 선기가 몇백만 원을 수업료로 내는데도 듣고 싶은 수업을 들을 수 없다거나, 시험 기간의 피곤함을 토로할 때도 남 일 같았다.
대화의 끝은 취업이라는 현실적인 미래 고민으로 이어졌는데, 어쩐지 들을수록 먼 나라에서 온 환상 동화처럼 들렸다. 잠깐이나마 테두리 안에 들어온 줄 알았는데 여전히 윤오는 바깥에 있었던 거다.
“또 나만 떠들었네. 목이 다 아프다. 네 얘기 좀 해 봐. 다른 애들은 지겹도록 보는데 넌 오랜만이라 궁금해 죽겠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넘어간 줄 알았던 한참 늦은 안부 겸 근황 질문이 들어왔을 때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은 금인을 만났어. 금인이 돈이 많은가 봐. 나 데리고 돈지랄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 대문에 CCTV를 달아뒀어. 금인들은 다 어딘가 정신이 나갔다더니 그게 맞는 것 같아. 근데 생각보다는 말이 통하고 생각보다는 덜 미친 것 같아…. 개중 할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는 건 당연했다. 말하는 순간 선기가 윤오를 어디 별나라에서 온 애처럼 볼 것이 뻔했다.
당황해서 입술만 벙긋거리는데 타이밍 좋게도 전화가 왔다. 전화 올 사람이야 뻔했기 때문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미안. 잠깐만 전화 좀 하고 올게.”
“어어. 그래.”
고개를 끄덕이는 선기를 두고 윤오는 화장실로 향하는 구석진 통로 벽에 붙어 섰다.
“여보세요?”
― 어디야?
낮고 웃음기 어린 목소리였다.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내는 게 범신조다웠다. 윤오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선기를 보며 어느 카페라고 대답했다.
“친구 만났어요.”
― 친구?
“네. 저도 친구가 있거든요.”
― 누가 뭐라고 한 것처럼 말하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어.
“늦게 들어가… 가려고요.”
늦게 들어가도 되냐고 물어볼 뻔했다. 그건 상대가 범신조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윤오의 습관이었다. 윤오의 생활을 엄격하게 단속하던 가족들 때문에 생긴.
그렇게 허락을 구해도 거의 들어주지 않았고, 일찍 들어가야 한다고 할 때마다 애들은 너희 집 무슨 200년 전 사람들이냐고 했는데. 뭐, 틀린 말은 아닌가 싶곤 했다. 그만큼 갓 캐 온 화석처럼 오롯이 보존된 썩은 소리를 지껄이곤 했으니까.
― 데리러 갈까?
“아뇨. 괜찮아요.”
― 그럼 우연히 지나가다 널 태우는 건 어때.
“맞다. 저 못 믿으신다고 했죠.”
― 어. 그리고 사실 여기서 네가 보여.
“네?”
윤오는 놀라서 소리높여 되물었다. 큰 소리에 선기를 포함한 손님 몇몇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윤오는 고개를 마구 돌려 카페 안을 살폈다. 그러나 어디에 두어도 눈에 띌 존재감이 보이지 않았다. 곧장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니… 그제야 범신조가 보였다. 길 실장과 모르는 사람 하나가 그와 함께 서 있었다.
곁눈질로 윤오를 보던 신조가 몸을 돌렸다. 핸드폰을 귀에 댄 채 비긋이 웃는 모습에 기가 막혔다.
“저 미행했어요?”
― 미행은 무슨. 마침 여기서 약속이 있어서 나왔는데 네가 있었던 거야. 네가 날 쫓아온 건 아니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치자 가증스럽게도 신조가 가슴에 손을 얹고 눈썹을 찌푸렸다.
― 너무하네. 나한테 너무 차가운 거 아니야? 그래도 싫은 가족보다는 좋다며.
“…좋다고 한 건 아니었거든요.”
― 뭐. 그럼 덜 싫은 거로 치지.
“…….”
― 몇 시에 들어가?
“모르겠어요.”
― 친구랑 밥 사 줘?
“싫어요.”
냉탕과 온탕을 번갈아 오가듯 급변한 상황을 따라갈 수 없었다. 다시 돌아갈 수 없으리라 생각한 평범한 일상과 지금의 현실이 주는 괴리감 때문에 안 그래도 멀미가 날 정도로 기분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확실한 건, 선기한테 내 짝이야, 하고 천연덕스럽게 신조를 소개시켜 줄 정도로 낯짝이 두껍진 않단 거였다. 그건 신조도 마찬가지일….
― 아시는 분이십니까? 혹시 조카분?
― 고 사장은 조카하고 침대 같이 씁니까? 내 짝입니다. 내가 그렇게 노안이에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에 윤오는 얼굴을 싸맸다. 여전히 자신이 신조를 만만히 보았단 걸 깨달았다. 이 사람은 또라이다.
“왜 그런 소리를… 그리고 무슨 침대를….”
― 너 내 침대에서 자잖아.
엄밀히 말하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윤오는 속이 답답해져서 이만 통화를 종료하고 싶었다.
“끊겠습니다.”
“왜. 누구야? 너 가야 해?”
마침 선기가 다가왔다. 윤오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혹시라도 선기가 저쪽을 보고 눈치챌까 봐서.
“아니. 보험 가입하래.”
그 순간 창문 너머에서 신조가 허리를 굽히며 웃는 게 보였다.
― 아, 내가 네 가족의 보험이긴 하지.
“정말 끊습니다.”
윤오는 짜증스럽게 통화를 종료했다. 씨근덕대며 꺼진 화면을 보고 있자니 윤오를 지나쳐 화장실로 가려던 선기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진짜 집요했나 보다. 보이스 피싱은 아니고?”
“그 정도야.”
“네가 짜증 낼 정도면 악질인 모양인데. 너 화 잘 안 내잖아.”
“어?”
“짜증도 안 내고 화도 안 내고 욕도 잘 안 하고. 그냥 늘 그래, 좋아, 그러면서 조용히 웃기만 하고.”
“내가…?”
“우린 너 진짜 도련님인 줄 알았어. 나중에야 아니란 거 알았지만.”
“…….”
“나 화장실 갔다 올 테니까 앉아 있어.”
윤오의 어깨를 턱턱 누른 선기가 스쳐 지나갔다. 남겨진 윤오는 선기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미간을 좁혔다
‘그랬나…?’
원래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본인 모습은 본인이 가장 모르는 법이다. 자리로 돌아가서도 계속 고민하던 윤오는 결국 선기의 말을 납득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토록 온건히 지내 온 자신을 사사건건 은근히 거슬리게 하고 신경 쓰이게 하는 범신조도 참 재주는 재주다 하는 결론을 내렸다. 조금쯤 개운해져 막 빨대를 무는 참이었다.
“어서 오세요.”
무심코 돌린 시선 끝에 신조와 길 실장, 그리고 그의 약속 상대로 추정되는 여자가 들어왔다.
윤오는 당황해서 할 말도 잃은 지경인데 신조는 태연히 “길 실장은 뭐 마실래. 초코 뭐… 달달한 거?” 따위나 묻고 있고, 고용주를 쏙 빼닮은 길 실장 역시 거기에 대고 “저는 아인슈페너 마시겠습니다. 크림 추가됩니까?” 이러고 있었다.
그들이 주문을 끝내고 자리를 잡을 때까지 윤오는 고개는 물론 몸까지 자연히 돌아가 그들을 쫓았다. 윤오 말고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는 셋은 정작 이런 시선쯤 익숙하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와. 촬영이야?”
어느새 돌아온 선기가 고개를 기웃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불에 덴 듯 몸을 돌린 윤오가 웅얼거렸다.
“몰라.”
“잘생겼다.”
“저 사람이?”
“어. 둘 다 잘생겼는데 저 넥타이핀 한 쪽이 미쳤네. 여자랑 잘 어울린다.”
넥타이핀을 한 쪽은 분명 범신조였다. 그의 외모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생각했지만 뒤이은 말이 윤오를 조금 당혹스럽게 했다.
“둘이 잘 어울린다고?”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봐서 그런지 윤오는 여자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도 않았다. 사실 길 실장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에 있든 어느 무리에 있든 범신조만 눈에 들어왔다. 다 그런 줄 알았는데. 그의 옆에 누군가 있고 그게 잘 어우러지는 그림이라는 건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던 사실이었다.
“뭐야. 이쪽 본다. 와 눈빛 봐.”
넉살 좋은 선기가 호들갑을 떨며 목소리를 낮춰 떠들었다. 요즘 힘들어서 동태 눈깔이 된 동기들만 보다가 저런 눈빛 보니까 색다르다는 둥의 소리를 들으며 윤오의 몸은 점점 더 위축되었다. 그가 이쪽을 보는 이유를 알 것 같아서다. 김윤오만 아는 이유로 김윤오만 보고 있는 게 뻔해서.
“우리 자리 옮길까?”
“어? 왜?”
“아니 배고파서….”
케이크를 억지로 다 먹어치우느라 배는 하나도 안 고프면서 윤오는 거짓말을 했다. 그저 이 자리만 피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속내는 모른 채 선기가 고맙게도 자리에서 일어나 주었다.
“우리 닭갈비 먹으러 갈까? 너 그거 기억나? 예전에….”
학원이 끝나고 다 함께 닭갈비집에 갔던 때를 끄집어내며 금세 또 재미있게 에피소드를 풀어놓는 통에 윤오는 감탄하면서도 끝내 웃고 말았다.
그때 윤오는 학원을 그만둔 지 한 달 되던 참이었다. 물론 그 역시 아버지의 의사였어서 집에 있는 게 유독 힘들던 시기였다. 함께 학원을 다니던 애들은 지겹다고 하지만 윤오는 좋았다. 그래서 끝날 시간에 맞춰 몰래 집을 나왔었다.
그렇게 몰래 나와서 간 곳이 지금 선기가 말하는 닭갈비집인 것이다. 그런 만큼 윤오도 그때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재미있는 각색까지 덧붙이니 웃음이 꽤나 길어졌다.
그렇게 자리를 정리하고 웃음기가 남은 채로 고개를 돌렸을 때, 마침 이쪽을 향해 앉아 있던 신조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는 컵을 입가에 갖다 댄 채로 이곳을 지그시 보고 있었다.
“…….”
범신조의 존재를 아주 잠깐이나마 의식하지 않고 있었는데 다시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도록 신경 쓰였다. 게다가 그 눈이, 깊고 집요한 눈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서. 너는 내 존재를 아주 쉽게 잊고 때로는 아주 쉽게 두 번째로 미룬다고, 그렇게 토로하는 것 같아서. 미안해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데 갑자기 가슴이 시렸다.
“가자. 근처에 체인점 있다.”
잡아끄는 손길에 이끌려 가면서도 어쩐지 무엇을 남기고 온 듯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그 때문일지 모른다. 형태도 없고 이유도 없는 마뜩잖음 때문에.
* * *
당연하지만 윤오는 거의 먹지 못했다. 선기는 어디 몸이 안 좋냐고 했다. 얻어먹는 처지에 민망해서 열심히 할 수 있는 한 더 먹었다. 그리고 헤어질 땐 저녁까지 얻어먹었는데 커피값이라도 받아 달라며 남은 돈을 모두 선기에게 건네줬다.
“진짜 괜찮다니까. 너 차비는 있고?”
“누가 데리러 온대.”
“진짜로?”
“어. 너랑 오랜만에 만났는데 내내 얻어먹기만 하면 다음에 안 불러줄까 봐.”
“야. 내가 안 부르는 게 아니라 네가 안 나올 것 같지.”
선기가 웃으며 말했는데 그 말이 은근히 양심을 찔렀다. 연락처를 교환하고 다시 날을 잡아서 같이 보자는 말과 함께 작별했다.
혼자 남았다.
이제 막 퇴근 시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어디든 한창 밀릴 때였다. 날은 추웠고 빌딩 사이사이로 칼바람이 불었다. 몸을 웅크리며 걸어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보다가 벤치에 앉았다. 얼어붙으려는 손으로 최근 통화 기록을 열었다.
전화를 걸고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상대와 연결이 되었다.
“저 좀 데리러 와 주세요.”
다짜고짜 용건만 말하는 건 범신조에게서 배운 거다. 첨예하게 솟은 빌딩 모서리를 보며 한숨을 내쉬자 입김이 포르르 흘러나왔다.
“저 데리러 와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즐거웠다. 즐거운 와중에도 혀뿌리에는 씁쓸함이 맴돌고 가슴은 깊이깊이 허했다. 그건 이제 그 시절로는 돌아갈 수 없는 걸 알아서일 거다.
치인의 절반, 혹은 그 이상은 일찍이 금인의 집에서 함께 자란다고 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꾸준히 만나서 얼굴을 익힌다고 하는데, 윤오는 그런 적이 없었다. 방치라고 할 정도로 범신조는 윤오를 찾지 않았다.
적어도 친구들조차 윤오가 치인인지 뭔지 모를 정도로 평범하게 보낼 시간을 줘서 고맙다고 여겨야 하는 건지, 아니면 잘 지낸 줄 알았는데 내내 이방인이었다는 걸 깨닫게 만든 범신조의 존재에 욕을 퍼부어야 할지 모르겠다.
차가 빠듯하게 밀렸다. 새벽처럼 푸른 저녁이 내려앉았다. 어느새 칼바람은 잠잠해졌다. 그런 와중에 윤오는 신조의 체향을 느낄 수 있었다.
눈을 감았다. 목덜미부터 소름이 돋았다. 목덜미에서 귀로 이어지고 귀에서 이마와 두피, 눈두덩이까지… 그리고 혀뿌리부터 혀끝까지 그것이 감돌았다. 온몸으로 느끼는 향이라고 했다.
신기한 건, 짝이라는 게 마냥 헛소리는 아닌지 이 향이 좀처럼 낯설지 않았다는 거다. 어디에서든 맡아 본 적 없는 냄새인데도 금세 익숙해졌고 오히려 그립기까지 했다. 아주 오래도록 맡아오고 또 오래도록 그리워한 것처럼….
“제 연락 기다리셨어요?”
“그래.”
신조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건지 거짓말할 이유가 없는 건지 그는 묘하게 솔직했고, 그게 얄미우면서도 끝내는 안심하고야 만다. 적어도 이 사람 말은 헛소리처럼 들려도 완전 거짓말은 아니겠다 싶어서.
거짓말은 익숙했다. 아버지는 언제나 이번에는 다르다, 이번에는 가겠다, 기억한다,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어머니는 이번에는 용서하지 않을 거다,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 너만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입에 담고 살았다. 할머니는 가끔이지만 가족보다 윤오 네가 최우선이라고 했고.
다 거짓말이고, 공통점은 매번 내가 믿고 속아 넘어갔단 거지. 범신조의 말은 믿은 적이 없어서 그런가 속아 넘어갈 일도 없었다.
“저 단명하는 거 맞아요?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이야기는 없던데.”
“내가 아는 한은 그랬어.”
“살면서 치인 되게 많이 봤나 봐요. 아는 게 맞네.”
“내가 살면서 가장 많이 본 건 너밖에 없는데. 아는 것도 너밖에 없고.”
“그럼 뭐, 나 단명하라고 곡이라도 하는 거예요? 왜 그런 재수 없는 소릴 해요.”
“…….”
“그 말이 맞다고 치면요. 적어도 지금까지 나한테 거짓말은 안 했으니까 그 말이 맞다고 치면요.”
고개를 들자 남들에 비해 가벼운 차림의 신조가 보였다. 추위도 별로 타지 않는다는 남자는 사람이라기보다 아예 다른 물성으로 보였다. 윤오는 벤치에 한결 몸을 문질러 웅크렸다.
“그럼 어차피 저 짧게 사는 거, 제 맘대로 살게 각자 살면 안 돼요?”
“…….”
“다른 치인으로 어떻게든 발정기를 보낼 순 있잖아요….”
말하면서도 얼마나 억지를 부리고 있는지를 알아서 윤오의 고개가 절로 떨어졌다. 이건 그냥 화풀이였다. 윤오의 목소리가 떨렸다. 범신조라고 좋을 리 있을까. 짝이라고 있는 게 말도 없이 사라졌었고, 다시 만났다고 해도 하나도 맞지 않는 데다 내내 서로 비꼬기만 하는데.
“넌 내가 다른 치인이랑 지냈으면 좋겠어?”
“…….”
이번에는 윤오가 입을 다물었다. 문득 그 여자가 떠올랐다. 왜 외모도 기억하지 못했을까. 그래도 분명 잘 어울렸을 거다. 범신조는 본능처럼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걸 찾아낸다. 그의 집, 장신구, 옷, 하물며 성냥까지 그랬다.
“말해, 김윤오. 내가 다른 치인이랑 보냈으면 좋겠냐고.”
그렇다고 하면 그대로 미련 없이 몸을 돌리고 다른 치인을 찾아갈 것 같았다.
침묵도 긍정의 의미가 될까.
“…세 번은 물어보세요.”
윤오는 이게 다 소주 탓인 걸로 책임을 돌렸다. 선기가 부득부득 소주를 시켜 나눠 마셨다. 얻어먹는 처지에 술까지 거절할 순 없었다. 사실은 마시고 싶기도 했다.
잔을 기울이는 순간 나이트에서의 일이 떠올라 구역질이 날 것 같았지만 참고 마시니 또 들어갔다. 그러다가 주량도 모르는 주제에 너무 빨리 마신 모양이다.
“…뭐?”
“바로 대답하면 자존심이 상하고, 두 번째에 대답하면 민망하니 세 번째에 답할게요.”
정말 자존심도 상하고 민망해서 한 말이었는데 신조는 입술을 꾹 다물고 윤오를 응시했다. 왜 저렇게 보는가 싶어 절로 고개가 옆으로 틀어졌다. 그러나 그는 윤오의 볼을 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허리를 숙여 물었다.
“김윤오. 연기 잘해?”
“네?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사람들이 보잖아요. 이거 좀….”
“매일 헷갈려. 내가 아는 사람이랑 똑같은 말을 하고 같은 행동을 해. 그런데 너는 나를 모르는 것처럼 대하지.”
“몰라요. 정말… 누군데요, 그 사람이…!”
“정말 몰라?”
신조의 눈이 또 노란빛으로 번뜩이는 것 같다. 체향도 견디기 힘들 만큼 짙게 뿜어졌다. 윤오가 헐떡이기 시작했다. 목이 졸리는 것처럼 숨 막혔다.
“기억하는 거라면 또 나를 가지고 놀려는 모양인데….”
“으… 나 숨이….”
“그럼 또 어울려 줘야겠지. 네가 언제 돌아올 지 초조하게 기다리면서. 안 그래?”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믿을 수 없게 비참해 보였다. 그리고 그걸 듣는 윤오로서는 그저 억울했다. 언제 돌아올 지라니, 이곳에 없는 사람을 찾는 듯이 말을 한다. 지금 이게 난데, 돌아올 모습도 없는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그런 와중에 점점 볼을 누르는 손아귀 힘이 세졌다. 윤오는 끝내 신조의 손목을 확 긁어 버렸다.
당황하여 손을 뗀 신조의 얼굴이 당혹에 물들었다. 기막힐 노릇이다. 지금 어이없을 사람이 누구인데. 멍이 들어도 놀랍지 않겠다. 윤오는 욱신거리는 볼을 감싸고 벌떡 일어나 눈물이 핑 도는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왜 이래요! 미쳤어요?”
순간 신조가 성큼 더 다가왔다. 그 눈빛이 정말 이상할 정도로 위협적이라 윤오는 신조가 뻗은 손을 거세게 쳐 버렸다.
“가, 갑자기 사람을… 이해도 못 할 말을 하면서 위협하고….”
그제야 비로소 신조의 눈빛이 돌아왔다. 여전히 조금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런데 혼란이라면 윤오 자신이야말로 느껴야 할 감정이었다.
“잠깐이라도….”
당혹감인지 추운 바람 때문인지 뺨이 붉어진 윤오가 낮에 카페에서 느꼈던 감정을 되새기며 씹어 뱉었다. 아주 잠시나마 마음이 시렸고, 두고 가기 어쩐지 내키지 않았던 그 마음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상생 관계? 역시 개소리였다. 이 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건 언제나 금인이고, 저 사람인데.
어렸을 때부터 막연하게 그가 밉고 원망스럽고 두려웠던 건 이런 미래를 알아서였나. 그때의 감정과 익숙하지 않은 술기운과 지금의 억울함이 뒤섞여 진창이 되었다. 진창이 된 마음으로 하려던 말을 마저 뱉었다.
“잠깐이라도 그쪽이 신경 쓰였던 내가 바보지.”
“…….”
화도 잘 내지 않고 짜증도 잘 내지 않았다던 선기의 말과 다르게 윤오의 흉곽은 분노로 들썩였다. 결국 윤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마음대로 하라고 했죠. 제 마음대로 할래요. 쫓아오지 마세요.”
“김윤오.”
“보는 앞에서 떠나면 비겁하게 도망치는 거 아니죠?”
신조는 못이라도 박힌 듯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윤오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
그대로 멀어지려 했던 윤오가 갑자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반대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
신조는 자신에게 바짝 붙어 서는 윤오를 찌푸린 눈가로 내려다봤다. 조금 전까진 고작 볼을 잡는 것 가지고 사람들이 본다 어쩐다 하던 녀석이 지금은 자신의 몸을 서슴없이 더듬고 있었다. 성적인 뉘앙스는 전혀 없었다.
그러다 신조는 코트 깃을 열었다. 무슨 의중인지 해석하려고 빤히 바라보던 윤오는 안주머니로 손을 넣었다. 지갑이 그곳에 있었다.
“내 돈을 훔쳐 가도 쫓아가지 말아야 하나?”
“어차피 푼돈이실 거 아니에요. 영 아까우시면 방에 두고 온 오백사십오만 원 가지세요. 아, 수지에 맞게 저도 딱 그 정도만 쓸게요.”
어차피 마땅한 현금도 없었다. 꺼내려던 수표 대신 카드를 꺼내선 주머니에 쏙 넣는 모습이 맹랑하다. 김윤오는 여전했다. 설령 본인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범신조를 흔들었다.
“김윤오. 이럴 필요까진 없잖아.”
그것이 짜증스럽고 지겹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무력해져 그는 끝내 하지 말아야 할 소리를 하고 말았다.
“그건 당신 생각이고요.”
윤오는 차갑지도 않은 말투로 화를 내지도 않으며 대꾸하곤 택시를 잡았다.
윤오가 탄 택시가 사라지고, 거친 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린 신조가 지갑을 확인했다. 이 와중에도 가진 것 중에 가장 무난한 카드를 골라 갔다. 도망치는 데 있어서는 운도 좋고 타이밍도 좋지. 만약 바로 옆이나 위의 카드를 골랐다면 범신조의 서명 없이 결제가 되지 않아 결국 그를 부를 수밖에 없었을 테니 말이다.
“고집은 여전하지.”
욕설과 함께 짓씹어 뱉었다. 윤오가 들었다면 그런 고집을 부리게 만드는 본인 언행이나 돌아보라 했었을 거다. 실제로 그렇게 말한 적도 있다. 아니, 그건 김윤오가 아니라….
신조는 오래도록 속으로만 불러왔던 이름이 새어 나오지 않게 입술을 꾹 닫았다.
‘다시는 내 이름 부르지 마.’
칼바람보다 아프고 한겨울의 계곡물보다 차갑던 목소리가 떠올라서.
* * *
충동적으로 택시를 타긴 했지만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다. 호기롭게 오백사십오만 원을 쓰겠다고 했지만 그럴 깜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범신조에게 대거리하고 그가 보는 앞에서 그의 카드를 훔칠 배짱은 있으면서도.
“손님. 어디로 갈까요?”
일단 출발해 달라고 했지만 마냥 막히는 길을 돌 수도 없었다. 윤오는 기억을 되살려 부모님이 살던 동네 이름을 댔다. 그리고 망설이다가 어머니에게 문자를 넣었다. 집에 가려고 하는데, 주소가 어떻게 되냐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답장이 왔다. 무슨 생각을 하신 건지 퍽 들떠서는 메시지가 길었다. 준비한 것도 없는데 너는 갑자기 연락도 없이 온다고 하면 어쩌니, 하는 서론과 본론인 주소, 그리고 뒤이어 누구와 몇 시에 오냐는 물음까지가 결론이었다. 행간에 범서방도 오냐는 기대가 짙게 묻어났다.
[저 혼자 가요. 그냥 들르려는 거예요. 삼십 분 정도 걸릴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