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2화 (5/21)

  4. (2)

집 주소는 그대로였다. 그사이에 형식만 조금 바뀌어 있었을 뿐. 안에 들어가려면 신분을 증명하라는데 증명할 길이 없었다. 결국 어머니께 전화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중 나온 어머니는 무엇을 기대했는지 좋은 옷을 입고 있었다. 아니면 그새 정말 형편이 좋아진 걸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사업과는 별개로…. 범 서방이라는 소름 돋는 호칭이 떠올랐다. 범신조에 대한 감정과 별개로 징그럽고 거북했다. 당연하게 위치를 점하고 호칭을 선수 쳤을 가족들도 징그러웠다.

그런데도 반가웠다. 아버지는 정말 싫고 할머니는 무섭지만 어머니에겐 마음이 쓰였다. 비록 윤오의 편은 되어주지 않아도 같은 곳에 섰다고 늘 생각해 왔다.

“윤오 왔어?”

반가운 미소를 띠며 달려와 안아 주는 품속에서 익숙한 향이 났다. 달달하고 짭조름한 냄새. 요리연구가인지라 늘 양념을 떠올리게 하는 냄새가 나곤 했다.

그걸 맡으면서 윤오가 중얼거렸다.

“다녀왔어요.”

* * *

대체 언제인지 윤오의 방을 없앤 모양이다. 우선 가장 먼저 그것에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가 취미방이 갖고 싶다고 해서.”

“방이 세 개인데요?”

“하나는 할머님 방, 하나는 너희 아버지 취미방, 하나는 안방이지.”

“그럼 엄마 방은요?”

“엄마 방이 뭐가 필요해.”

욱하는 마음이 솟았다가 습관처럼 무력하게 가라앉았다. 윤오는 머리를 쓸어넘기고 볼을 문지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먼저 도망쳤고 내가 먼저 떠났다. 할 말이 어디에 있겠어.

“오늘… 자고 가도 돼요?”

방이 없지만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머니는 화색을 띠며 그러라고, 취미방에 간이침대가 있다고 했다. 헛웃음이 나왔다. 아버지는 늘 그렇듯이 본인을 무척 사랑하셨다. 본인을 가장 사랑하는 게 문제였지. 오늘은 그 도움을 받네.

“밥은 먹고 왔어?”

“네. 먹고 왔어요.”

“갑자기 연락도 안 하고 왜 왔어…. 범 서방이랑 싸웠어?”

“엄마. 그렇게 안 부르면 안 돼요?”

어머니를 소파에 끌고 온 윤오가 손을 잡고 진지하게 부탁했다.

“그 호칭 이상하지 않아요? 아니. 이상해요. 진짜로. 내가 그쪽하고 결혼한 것도 아니잖아. 그런 사이도 아니잖아.”

“하지만….”

“법적으로 파트너가 되어 묶일 수 있는 건 아는데… 아무튼 아, 그건 아니야.”

“알았어. 알았어, 얘. 너희 할머니랑 아버지가 극성을 부려서.”

“됐어. 부르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부르라고 해. 엄마는 엄마 마음대로 살아.”

“알았다니까. 그런데 정말 싸운 거 아니….”

“내가 뭐, 그 사람하고 싸울 자격은 있고?”

윤오가 냉소를 짓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걱정이 많고 슬픔도 많은 어머니의 표정이 금세 변하는 걸 보고 윤오는 아차 싶었다. 속이 수선스럽고 번잡하지만 얼른 별일 아니라고 위로했다.

“자격, 자격이 아니라… 체격 말한 거예요. 체격. 운동이라도 한 것처럼 크잖아, 나보다….”

간신히 다른 화제로 돌리고 없는 기운을 끌어모아 괜히 신난 척했다. 그 후에는 새로 했다는 반찬을 맛보고 요즘 유행이라는, 하지만 윤오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드라마를 보며 괜히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가볍게 얹혔다.

* * *

할머니는 추가 검사가 있어 아직 병원에 계시고 아버지는 늦게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여느 때처럼 언제 들어온다거나 뭘 하다 늦는단 연락은 없었다. 세 번을 데웠던 반찬은 다시 반찬통에 들어갔다.

윤오는 일찍 안방으로 들어간 어머니에게 안녕히 주무시란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대로 자러 가려다 문득 할머니 방으로 향했다.

사람은 냄새로 시간을 기억한다고 한다. 그 시간 속에는 공간이 있고 추억이 있다. 방문 앞에 선 윤오는 저도 모르는 사이 신조와 아주 비슷한 자세로 문에 기대어 할머니의 방을 훑어봤다.

한때는 따로 살았으나 5년 전부터 함께 살았다. 그러나 따로 살았다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윤오는 할머니와 지낸 시간이 많았다. 그리고 좋은 추억보다 나쁜 추억이 더 많았다. 그것도 추억이라고 포장할 수 있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정이 쌓여야 할 텐데, 정이라고 해야 할지 지긋지긋함이라 해야 할지 모를 감정만 더께처럼 쌓였다. 바로 저기 있는 책장의 먼지처럼. 좋은 감정은 오히려 범신조가 할머니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을 거다.

그런 면에서 끝내 할머니의 말은 맞았다. 네 짝이니 맞을 수밖에 없다고. 그 비교치가 당신이 될 거란 건 알았을까.

윤오는 더 시간을 끌지 않고 몸을 돌려 취미방으로 들어왔다. 방 안에선 냄새가 거의 나지 않았다. 색소폰을 배우는 건지 반짝거리는 금속 빛만 눈에 아른거렸다. 그 노란빛이 범신조를 떠올리게 했다.

신기했다. 만나서 함께 지낸 지 얼마나 되었다고 어떤 것을 보든 그가 떠오른다는 게. 애써 잊어 보려 해도 자꾸만 생각났다. 잘라도 잘라도 또 자라는 손톱처럼.

마침 오늘은 손톱달이 떴다.

‘달을 좋아하나?’

그렇게 물었던 건 누구였지…. 문득 떠오르는 목소리에 윤오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삐걱거리는 침대의 소음에도 어려움 없이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 * *

새벽에 잠에서 깼다. 현관문이 벌컥 열리고 소란이 일었다. 안에서 애가 잔다며 조용히 하라는 어머니의 낮춘 목소리에 윤오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아버지는 폭언도 폭력도 없지만, 술에 취하면 언사가 조금 거칠어지는 타입이었다. 그런 술주정은 흔하디흔하니 별 특별할 것도 없다고 어머니는 말해왔다. 그래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윤오는 조심스럽게 일어나선 문에 다가섰다. 숨죽이고 문 너머 기척을 느꼈는데 아버지는 쉽게 잠들 기색이 아니었다. 평소보다 목소리나 발소리가 배로 컸다.

“근데 왜 나와서 인사도 안 하는 거야. 어? 나와보지도 않고 말이야, 자식새끼가 되어서는.”

3년이 지나도 여전하시네. 정정하시다. 윤오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문을 열었다. 괜히 피한답시고 실랑이를 해 봤자 세 명 다 잠을 못 잘 건 뻔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장단 맞춰 주고, 알아서 코를 골며 자든 말든 두는 게 옳았다.

“오셨어요.”

몸을 반쯤 내놓고 인사를 하니 아버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가왔다. 훅 끼치는 술과 연기, 그리고 고기 기름 냄새에 윤오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야 인마. 너 오랜만에 와서는 아버지한테 인사도 안 해?”

여기서 방금 인사했잖아요, 하는 건 소용이 없다.

“다녀오셨어요.”

윤오는 다년간 체득한 방식대로 처세했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 같은 날이 아니었다.

“너 말이야. 너, 뭐라고 말했기에 범신조 그 건방진 새끼가… 응? 투자를 재깍 한다고 해?”

“…네?”

“가서 말했어? 아부지 큰일 좀 하게 도와주십쇼… 했냐고. 쫀심 상하게… 말이야.”

가서 잘 말해 보라고 했던 건 언제고 정작 도움을 받으니 자존심이 상한다고 한다. 자기보다 한참 어린 인간이 돈도 잘 벌고 어디 가서 대접받고 그런 게 아니꼬운 모양이다.

그 양면적인 태도보다도 윤오는 제가 언급도 안 했던 일을 신조가 알고 멋대로 손까지 뻗었단 사실에 머릿속에서 불꽃이 튀는 것만 같았다.

“저 말 안 했어요. 아버지께서 전화했겠죠.”

“아니야, 인마.”

그는 손을 내저으며 숨을 푹푹 끼치더니 중얼거렸다. 제 딴엔 작게 속삭인 줄 알았겠지만 술에 인사불성이 되어서 제 성량도 조절을 못 했다.

“하나 있는 자식새끼 아들로 낳았더니… 쪽팔리게 같은 거 달린 새끼한테 시집이나 가고…. 쪽팔리게…. 그래도 짝까지 하자 있는 건 아니라 다행이지….”

하나부터 열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다 구시대적이고 썩어빠진 개소리였다. 김윤오는 그가 낳은 게 아니라 유전자의 반만 제공했을 뿐이며, 같은 거 달린 새끼한테 시집도 장가도 가지 않았다. 그리고 쪽팔린 건 이딴 소리를 자식 앞에서 지껄이는 본인이었다.

당황한 어머니도 황당한 김윤오도 모른 채 하소연을 늘어놓다가, 어느 순간 일어나 비척거리며 온 집 안을 헤집어 대고는 이윽고 옆으로 비키라며 윤오를 밀치는 꼴까지, 구제불능이었다.

“쪽팔려요? 제가요?”

윤오가 방으로 향하는 이의 뒤에 대고 이를 씹으며 물었다.

“그래서 도망쳤잖아요. 그래서 졸업식 날, 그렇게 떠난 거예요. 아세요?”

“뭐?”

“윤오야. 들어가, 그냥 들어가. 당신도 취했으면 그냥 얌전히 들어가서 자요. 응?”

평생 숨기려던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어머니도 놀랐을 게 분명한데, 술에 취해 이성이 약해져 사리 분별을 못 하는 사람이 상대다 보니 자연히 감정적으로 변할까 봐 그걸 막는 데 더 여념이 없었다. 윤오도 말할 생각이 없던 걸 토해낸 바람에 입술을 씹었다.

“주무세요.”

거실에서라도 자자. 몸을 돌리려는 순간 거세게 어깨가 잡혔다.

“너 다시 한번 말해 봐. 어른한테 눈 똑바로 뜨고, 어? 뭐라고 했어. 나가 살겠다고? 도망쳤다고?”

“그런 말이 아니라…!”

“그래. 어디 애미 애비 버리고 잘사나 보자. 내가 못 해 준 게 어디 있다고 너까지 나를 무시해. 어?”

“제가 언제 무시했어요. 취했어요, 좀…!”

“너도 내가 만만하지? 하… 쌔빠지게 일해서 가족 먹여 살렸더니….”

피곤했다. 오늘따라 칼날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는 일만 있다. 혹은 무딘 칼날에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진 끈이 문질러지는 것만 같다. 신경줄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아버지에게서 나는 지독한 냄새에 밀려 윤오의 몸에 묻어 있던 신조의 체향이 점점 사라질수록 그 위기감은 더해갔다.

“다들 날 무시하고 있어. 어? 둘이 편 먹고… 아주 그냥…. 네가 범신조 그 인간이랑 맞붙더니 뭐라도 되는 줄 알지?”

흥분하면 알코올이 더 독해지기라도 하나. 점점 더 벼랑 끝으로 내몰리듯 폭언의 수위가 아슬아슬해졌다. 저도 이제 한계였다. 윤오는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아니요. 거지 같아요. 그 사람이랑 있으니까 내가 더 뭣도 안 되는 거 같아서, 끔찍하다고요. 내가 원해서 이런 줄 알아요? 내가 그렇게 부러우면 아버지가 가서 사세요. 범신조랑…!”

“안 돼!”

어머니의 비명이 터졌다. 그보다 먼저 터진 게 윤오의 뺨이었다. 취객은 힘이 세진다. 조절 못 한 손바닥이 윤오의 뺨 안쪽을 터뜨리고 고개를 돌렸다.

“나가. 너 나가 살아, 새끼야.”

“…어차피 그렇게 살아야 하잖아요.”

그럴 생각이구요. 하고 뇌까린 윤오가 핸드폰만 챙긴 채 바깥으로 나갔다. 신발을 어떻게 챙겨 신었는지도 모르는 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싶지도 않아서 계단으로 내려왔다.

순식간에 1층이었다. 뛰어 내려왔기 때문에 숨이 찬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모르겠다. 바깥은 멎었던 칼바람이 불고 그 매서운 흐름을 따라 잘게 찢어진 눈이 내렸다. 건조하게 마른 눈이 사방에 흩뿌려졌다.

“흐으….”

눈물보다 서러운 울음이 먼저 터졌다. 목과 가슴이 들썩거리며 소리를 낸 뒤에야 눈물이 터졌다. 겨우 몇 방울씩 떨어지기 무섭게 바람이 할퀴고 지나갔다. 소매로 닦고 닦자 눈보라가 회오리치는 희부연 밤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별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컨테이너에서 살 때는 밤만은 오롯이 윤오의 것이었다. 어둠에 둘러싸여 적요한 가운데 별도 반짝였는데, 이곳은 어디를 가도 숨기 여의치 않게 환하다. 밤도 낮처럼 부연 빛으로 얼룩덜룩하다.

숨을 곳이 없어서, 갈 곳도 없어서, 겨우 왔는데 온 곳조차 내 자리는 없어서, 치인은 불운해서… 김윤오는 멍청해서…. 연락할 곳이 한 곳밖에 없었다.

보란 듯이 나온 게 무색하게, 마치 처음부터 그는 자신이 이렇게 될 걸 알아서 순순히 보내준 게 아닐까 싶은 오해가 들 정도로 일이 그를 위해 돌아갔다. 날 때부터 무슨 발악을 해도 금인의 손아귀에 들어갈 운명이라는 게 있는 걸까? 팔자라는 게 이런 걸까. 무력함에 윤오는 더는 아무런 발악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떨군 시야 속에 어머니의 슬리퍼와 자신의 운동화가 나란히 눈에 들어왔다. 우습기 짝이 없었다. 윤오는 힘없이 웃었다. 그런 와중에도 눈물은 뚝뚝 떨어졌다.

꾹 쥐고 있던 핸드폰은 배터리가 거의 없다. 윤오는 범이라고 저장된 이름을 꾹 눌렀다. 새벽이니 잠들었을지도 모른다. 받지 않았으면, 그러나 받았으면, 그러면서도 받지 않았으면… 그러나 끝내 받아서 나를 좀 데려갔으면.

― …여보세요.

“나 진짜 쪽팔리고 부끄러운데.”

윤오가 헐떡였다. 차마 데리러 와 줄 수 있냐는 말이 혀끝에 붙어 나오지 않았다. 전화까지 걸어놓고. 우스운 자존심 때문이기도 했고, 낮에 그에게 화를 냈던 기억 때문이기도 했다.

― 정말로 나 두고 갈 거야?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을 꿈뻑였다. 속눈썹에 마른 눈 조각이 들러붙어 순식간에 녹았다.

조금 뒤에야 윤오는 떠올렸다. 부끄러우니 세 번은 물어달라고 했던 자신의 부탁을. 그는 차마 낮에 하지 못했던 세 번째 질문을 하고 있었다.

“…아니요.”

섧은 울음을 삼키며 윤오가 주먹을 쥐었다.

바람에 흩어져서 바닥에도 제대로 떨어지지 못하고 심지어는 쌓이기도 전에 밀려나는 이 싸락눈처럼, 윤오 역시 어디를 가도 그곳이 제 자리가 아닌 것 같다 여겼다.

우습게도 그나마 숨통을 트이게 해주는 건, 윤오를 잡아주는 건 그토록 도망치고 싶었던 제 짝이었다.

날 때부터 소지에 빨간 줄을 동여매고 태어난 게 짝이라던가. 윤오는 제 새끼손가락을 들어 응시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추워서 덜덜 떨리는 모습만 보였다. 웅크리고 있어도 쉽게 체온은 오르지 않았다. 미끄럼틀 맨 꼭대기, 작은 지붕이 있으나 사방이 뚫린 작은 성에 틀어박혀 있는 모습이 처량하기 짝이 없다. 적어도 컨테이너는 사방이 막혀 있기라도 했는데.

조금 있다가 차가 들어왔다. 윤오는 저게 범신조의 차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도 언 몸은 잘 움직이지 않았다.

차에서 길쭉한 다리가 나왔다. 그는 전화를 받는 중이었고, 팔에는 긴 패딩을 들고 있었다. 아무리 가로등이 있다 해도 그림자 속에 있는 윤오가 잘 보일 리 없는데, 처음부터 이곳에 있으리라고 확신한 양 곧게 걸어왔다. 다가올수록 그의 목소리가 잘 들렸다.

“아뇨. 제가 데려갈 겁니다.”

“…….”

저 남자와 만날 때마다 내 꼴은 우스꽝스럽고 처량하다. 윤오는 데이트를 할 때마다 불운으로 만든 꽃다발을 가져오는 사신을 보는 양 신조를 노려봤다. 꽃다발 대신 패딩을 들고 낫 대신 핸드폰을 기울인 신조는 미끄럼틀 끝에서 윤오를 지그시 응시했다.

“아, 상관은 없는데. 그보다 이제는 호칭을 다시 정리할까 싶습니다. 범 서방이라는 호칭 말입니다. 재미있어서 듣고는 있었는데 이젠 좀 지겨워서요.”

무례하기 짝이 없는, 상대보다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걸 확신하고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화법. 그걸 아버지에게 하는 건지 어머니에게 하는 건지 잠시나마 궁금해하다가 그 역시 피로해서 그만둬 버렸다. 그런 윤오에게 범신조가 고개를 까딱였다.

“윤오가 제게 시집을 온 것도 아니고. 전 그냥 제 것을 다시 찾아간 것뿐인데 마치 가족 간의 화합이라도 있는 것처럼 구니 낯이 뜨겁습니다. 제가 투자자니, 이제부턴 범 사장이라고 부르시죠. 아, 이름. 이름으로 부를 사이는 아니지 않나, 우리가.”

아버지인가 보다. 윤오는 세운 무릎 사이로 턱을 묻었다.

“진짜 이유요? 고작 호칭에 별걸 다 따지시네. 그래도 말씀드리자면, 진짜 이유는 말이죠….”

싸락눈처럼 건조하고 작게 웃은 신조가 윤오에게 손을 뻗었다. 신장이 워낙 크고 그만큼 팔이 길어 순식간에 지붕 아래 윤오의 영역까지 침범했다. 조금 더 다가온 덕에 그림자가 범신조의 얼굴에도 기울었다. 오늘따라 더욱 노랗게 보이는 눈. 그의 눈 안에 가로등이 있었다. 보름달 같았다. 범신조가 웃자 그것이 곧 부드럽게 접힌다.

“우리 윤오가 안 좋아하더라고, 그 호칭.”

다정하게 웃는 남자는 쾌활한 어조로 무례한 말을 뱉는다. 그것이 마치 환상 같다.

윤오는 결국 손을 내밀었다. 붙잡은 손이 무척 뜨거웠다. 갑자기 따뜻한 곳에 들어가면 오히려 따끔거리고 간지러운 것처럼 윤오의 손가락들도 그랬다.

천천히 미끄럼틀을 내려올 때까지 옆에서 손을 잡아 준 범신조는 이렇다 할 인사도 없이 통화를 종료했다. 어느덧 미끄럼틀 끝, 고무바닥에 서서 윤오는 범신조를 올려다봤다.

“…화 안 내요?”

“지금 네 꼴을 보고?”

“…술 냄새나요.”

“어. 마셨어.”

“술 마시는 사람은 지겨워.”

“술 마시는 사람이?”

신조가 조금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아니지. 너는 술 마시는 사람이 아니라 술 마시는 내가 지겨운 거지.”

“…똑같은 말이잖아요.”

“달라. 아주 많이.”

“…그쪽이 지겨운 건 아닌데요.”

“이건 또 무슨 새로운 말장난이야? 네 아버지도 나하고 말장난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술기운에 실수였다고. 세게 때리지도 않았는데 오해를 하지 말라더라고. 맞은 건 넌데, 나한테 오해하지 말라고 말이야.”

“…….”

“못된 건 상관없어. 그런데 비겁한 건… 좀 많이 짜증 나지.”

그의 말투가 자못 삐딱했다. 여느 때라면 윤오도 대꾸하며 맞서 싸우려 했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너무 피로했고 몸은 춥고 무거웠다. 게다가 아버지 편을 들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길들이고 이용하라 했던가. 얼어붙은 머리는 잘 움직이지 않지만 몸은 멋대로 잘도 움직였다. 패딩이 걸쳐진 범신조의 팔을 잡고 올려다봤다.

“이거 나 주려고 가져온 거죠?”

“…….”

“그럼 왜 안 주세요?”

“…하.”

“너무 추운데….”

윤오가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슬쩍 범신조의 몸에 기댔다.

영악하게 굴려 했던 처사였는데 뒤는 예상치 못하게 흘러갔다. 신조의 몸은 무척 따뜻했고 윤오의 몸은 꽝꽝 언 상태였다. 본능이 이성을 이겼다. 입술이 풀리며 절로 녹는 신음이 흘렀다. 그 소리를 놓칠 리 없는 신조가 패딩을 펼쳐 윤오의 어깨에 덮고 꽉 마주 안았다.

“네 앞에 있으면 천치가 된 기분이야.”

“…….”

“머저리가 된 기분이라고. 알아?”

“…저는 모르겠는데요.”

“그렇겠지. 너는 내 앞에서 천치가 되지도, 머저리가 되지도 않으니까.”

허탈하게 중얼거린 신조가 윤오를 들었다. 당황한 순간 신고 있던 신발이 아래로 톡, 톡 연달아 떨어졌다.

“신발….”

“시발 소리 하기 전에 가만히 있어.”

그는 윤오의 엉덩이를 맵싸하게 때리고는 맨발을 자신의 발등 위로 옮겼다. 아예 짐짝처럼 옮기려다가 참는 거라고 으르렁대며 걸음마를 가르치는 양 움직였다.

차까지는 가까웠고, 차 안은 히터로 후끈했다.

“산책 즐거우셨어요?”

“길 실장. 헛소리 말고 그냥 운전해.”

신조가 으르렁댔다. 길 실장은 유쾌하게 예, 예 하고 기어를 바꾸었다.

“저 때문에 화 많이 났어요?”

윤오는 피곤에 겨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추운 곳에 있다가 따뜻한 곳에 오니 몸은 따끈거리고 정신은 혼곤했다. 범신조가 억지로 윤오를 자신의 허벅지에 눕혔다.

“화 많이 났지. 안 내려고 노력 중이야.”

“…저도 티 안 내려고 노력하는데, 잘 안 돼요. 이딴 모습 보여 주려고 그렇게 허세를 부렸나.”

“…….”

“쪽팔려 죽겠다구요….”

“쪽팔릴 게 뭐가 있어. 네 잘못도 아닌데.”

“제 잘못 같아요.”

윤오는 팔로 얼굴을 덮고 중얼거렸다. 겨우겨우 말을 잇는 아랫입술이 떨렸다.

“가족 일이잖아요. 부모님이고. 다 제 잘못 같아요. 설령 그분들이 잘못하고 있는 거라고 해도 내 잘못 같고….”

“쓰잘데없는 생각으로 에너지 낭비하는 타입인 줄은 몰랐는데.”

“알아요. 그쪽은 이런 거 이해도 못 할 것 같았어요.”

“그래. 이해가 잘 안 돼. 네 잘못도 아닌 일에 부끄러워하고, 생각보다 잘 울고, 시시해 보이는 풋내기 앞에선 잘만 웃던 너는 왜.”

신조의 손가락이 윤오의 입술가를 쓸었다. 간지러워서 팔을 조금 내리려고 했지만 신조가 막았다.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볼 수 없었다.

“너는 왜 내 앞에선 웃어 주질 않나, 그것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마셨어. 술.”

그랬나…?

윤오는 친구들 말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크게 웃어 본 적이 드물었다. 원래 감정표현 자체가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구구절절 설명하기 귀찮았다.

“재미가 없으니까 안 웃죠.”

그래도 범신조에게 확실한 재능이 있다면, 쉽게 수몰될 수 있는 감정에서 저를 아주 간단히 빼내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점이겠다. 만약 혼자였다면 밤새 걸어도 삭이지 못했을 감정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문득 윤오의 귓가로 길 실장의 웃음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재미가 없다고?”

자꾸 팔을 누르고 만지작대는 손길 때문에 간지럽기도 하고 괜히 민망해 윤오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패딩에 팔을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범신조의 표정이 조금 어이없어 보였다.

“그럼 뭐가 재미있어요. 맨날 말꼬투리나 잡고 있는데….”

“누가 들으면 나만 잡는 줄 알겠어, 그 꼬투리.”

“봐 봐. 지금도.”

“이야. 대표님께서 지실 때도 있네요.”

“길 실장. 앞을 보고 운전에 집중해. 우리 김윤오랑 나란히 사고 나는 엔딩은 싫거든.”

차갑게 웃은 신조가 윤오를 향해 어디 더 해 보라며 턱을 까딱였다.

“그럼 뭘 해야 재미있을까.”

막상 그렇게 되물으니 떠오르는 건 없었다. 그러나 대답에 10초 이상 걸리면 멋대로 ‘그럼 우리 섹스라도 해 보자고. 재미있게.’ 따위의 소리나 지껄일 것 같아서 윤오는 초조해졌다. 그러다가 불쑥 아무거나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게임 하실래요? 그거… 집에 게임기 있는 거.”

의외의 소리를 들은 건지 신조가 얼굴을 찌푸렸다. 조급해진 윤오가 덧붙였다.

“같이… 아니면 그쪽이 하는 거 제가 봐도 좋구요.”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면… 아니면 게임 같이 고르고….”

“그게 아니라, 김윤오.”

이마를 짚고 손으로 윤오의 말을 잠시 막은 범신조가 잠시 침묵 끝에 고백했다.

“내가 그런 걸 보면 어지러워.”

“네?”

“그런 화면, 나는 안 맞는다고.”

아주 쉬운 말인데도 알아먹는 데 시간이 걸렸다. 3D 멀미를 느끼는 사람은 적잖다. 윤오의 친구들 중에도 있었고 상당히 많은 수가 그걸 겪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게 범신조라고 하니 웃겼다. 아, 너무나 안 어울렸다.

“아하.”

남의 어려움으로 웃음을 터뜨리고 그러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윤오가 입술을 깨물었다. 곤란함에 세게 깨물수록 목구멍에서부터 간질간질한 것이 터져 나오려고 했다.

“크흠.”

길다온이 괜히 와이퍼를 켰다. 눈이 오니 켜야 하는 게 맞지만, 3단으로 켤 필요는 없는데. 세 사람 사이에 삐걱거리는 소음이 찼다. 결국 윤오가 참던 것이 무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아하. 하하하.”

작은 소리에 불과했다. 와이퍼 소리 때문에 길다온은 못 들었을 수도 있었을. 신조가 불쑥 몸을 기울였다. 부쩍 다가온 단단한 몸에 윤오의 웃음이 사그라들었다. 자신을 보는 신조의 눈이 이채로 반짝였다. 사나워서 웃음보다 위협처럼 느껴지는 미소를 입술에 걸고 채근했다.

“또 웃어 봐.”

“웃을 이유가 있어야 웃죠….”

“농담 같은 건 아는 게 없는데, 어쩌지. 빌딩이라도 줄까.”

“그런 소리 할 때마다 진짜로 나이 든 졸부 같아요….”

“나이도 들었고 부자도 맞고 넌 어리기도 한데, 새삼스럽게?”

“아, 진짜. 밀지 말고….”

“길 실장 눈치는 왜 봐.”

슬쩍슬쩍 앞 좌석으로 시선을 던지는 모습에 부아가 치미는지 신조가 앞자리와 뒷자리를 가르는 창을 올렸다. 이런 게 있는 줄도 몰랐다가 눈앞에서 펼쳐지니 윤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조는 또 손을 뻗어 그의 손속대로 우악스럽게 윤오의 고개를 돌리려다가 참았다. 그 덕에 시트가 뿌득, 그어졌다.

태생을 거칠게 살아오고 그것을 즐기던 이에게는 거친 게 정상이었다. 나긋하고 부드럽게 말로 달래는 일이야말로 비정상의 영역이었다. 그래도 신조는 무척 비정상적으로 굴었고, 안타깝게도 김윤오는 그가 이렇게 비정상으로 굴 때서야 겨우 경계를 풀었다.

“뭐 해 줄까.”

나이 어린 짝을 대하는 언행이 심히 불온하다. 그보다 그가 뿜는 체향에 노골적으로 유혹이 담겨 있었다. 성인이 됐다지만 윤오의 삼 년은 공백의 시간이나 마찬가지라 윤오는 이 간질간질하고 뜨거운 체향이 유혹인 것도 모른 채 몸을 움츠렸다.

“빌딩은 됐고….”

중얼거린 윤오의 시선이 한참 신조를 뺀 다른 공간들을 훑었다. 입술은 자꾸 말라서 혀로 거푸 쓸어야 했다. 후끈한 히터 바람이 건조해서 바짝 얼었던 윤오의 볼을 더욱 붉혔다. 그러니 신조는 자꾸만 오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윤오를 추궁할 수는 없다. 나는 잘못이 없다고, 내 행동 어디에 오해의 여지가 있냐고 뻔뻔하게 우기기에는 자신이 저지른 과오가 있어 그럴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다른 치인 만나지 마세요.”

“뭐?”

“다른 치인… 아니어도 다른 여자….”

아니, 범신조는 자신에게도 흥분하니까 남자도 포함해야겠지. 윤오는 머뭇머뭇 덧붙였다.

“여자랑 남자… 다른 사람하고 저랑 한 짓 하지 마세요. 저랑 만나는 동안은.”

이번만은 정말로 내가 결백한데, 하고 신조는 눈을 내리떴다.

“왜? 질투할 거 같아?”

“질투까진 아니고… 그건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거잖아요. 낮엔 그냥… 그냥 해 본 말이었어요. 동시에 여러 사람 만나고 그러는 거 제일 싫어요.”

어쩐지 말을 할수록 횡설수설, 변명처럼 늘어졌다. 윤오가 시선을 이리저리 피했다.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야. 그런데 김윤오는 너무 단정 짓는 버릇이 있는 것 같아. 네가 날 좋아할 수도 있잖아.”

“무슨… 싫어요.”

“알아. 그런데 난 너 좋아해.”

“…….”

“그러니까 네가 싫다는 짓 안 할게.”

“저랑 헤어지거나 제가 괜찮다고 하면… 그땐 만나도 돼요.”

“너랑 헤어져도 다른 사람 안 만나. 어차피 지금까지 이런 짓.”

잠시 말을 멈춘 신조의 손이 윤오의 가슴을 덮었다. 손끝이 느릿하게 움직여선 긴장감에 곤두선 윤오의 젖꼭지를 스쳤다. 그의 미소가 짙어졌다.

“너하고밖에 안 했어.”

이 말로 인해 윤오 안의 신조에 대한 신뢰도가 더욱 떨어졌다. 전에 애인도 있었다고 했으면서.

게다가 남자가 동정이라거나 그러리란 건 정말 조금도 믿기지 않았다. 차라리 지금껏 열 손가락으로도 부족할 만큼 애인이 있었다고 하는 게 더 믿음직하겠다.

“예. 뭐….”

“안 믿는 눈치네.”

“서로 믿음이 꼭 필요한가요? 어차피 그쪽도 저 안 믿으신다면서요.”

“그래. 안 믿어.”

신조의 입술이 비스듬하게 올라갔다. 그러면서도 더욱 다가왔다. 윤오는 제가 거부하는 순간 그가 떨어져 나갈 걸 알았다. 그런데도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신조를 막은 건 다른 말이었다.

“…우리가 정말 짝이라서 어떻게 해도 제가 이쪽으로 돌아오게 되는 거예요? 그럴 운명 아니, 인연이라고 하나요? 그런 거라서?”

짝의 꿈까지 꿨으면서 인연이니 운명이니 하는 말을 헛소리라고 여겨왔던 윤오가 어색한 말투로 물었다. 입맞춤 직전에 막혔으면서도 범신조는 성실히 답했다.

“현생의 부부가 전생에는 원수 사이라는 말 들어 봤어? 그 말이 진짜라면 전생에 우리는 악연이지 않았을까.”

“왜 갑자기 그런 말로 이어지는 거예요.”

“세간에서 짝이라고 포장해 말하는 인연에 너무 기대하지 않았으면 해서. 악연도… 인연이거든.”

“기대한 건….”

“김윤오. 무엇이든, 누구에게든, 섣부르게 기대하지 마. 그게 나라면 더더욱.”

그의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윤오의 입술이 덮였다. 신조의 혀가 이에 찢긴 볼 안을 피해서 안에서 노닐었다. 그 부드러운 입맞춤에 소름이 돋게 좋았다. 나는 기대한 적이 없고 오히려 당신이 기다리지 않았냐는 물음도 덩달아 입속에서 저어지다가 곧 녹아들었다.

여전히 윤오에겐 너무 짙은 입맞춤 끝에 범신조가 웃음기를 머금은 채 물었다. ‘김윤오, 이제 화풀이는 끝났어?’ 하고.

윤오는 입술이 떨어져도 지척에 있는 범신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다 알고 있었다. 계속 배배 꼬인 놈처럼 군 것도, 와 달라고 해놓고 언제 그랬다는 양 샐쭉하게 굴었던 것도 다 화풀이의 일종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하니 맥이 풀렸다. 맥이 풀리고 조금 기분이 좋았다. 범신조에겐 아닌 척하는 게 의미가 없었다. 그는 다 알고 있었고 알면서도 받아 주었으며, 그것으로 다른 걸 요구하지도 않았다. 전혀 그럴 필요 없는 사람이 끝도 없이 오냐오냐해 주고 있다. 버릇이 나빠져도 단단히 나빠질 것만 같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신이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 주는지. 단순히 짝이라서라거나, 그냥 얼굴이 마음이 들었다거나, 혹은 한번 자 보고 싶어서라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했다.

이해할 수 없어 한없이 수상쩍은 이 친절을 어디까지 받아도 될지 의아했다. 그러면서도 거부할 수 없었다. 성냥팔이 소녀가 어디 한순간의 온기라는 것도 모르고 내리 성냥을 그었겠는가.

어쩐지 울고 싶어진다. 롤러코스터를 탄 듯, 범신조를 만난 이후로 자신의 감정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짝을 만나면 이유 모를 미움도 원망도 다 원인을 찾게 될 줄 알았는데…. 땅에 발을 디딘 채 멀미를 하는 것 같아서 윤오는 어떤 일이 있어도 미동 하나 없을 것 같은 범신조의 품으로 고개를 파묻어 버렸다.

“졸려요.”

변명 한 번 성의 없다, 하면서.

* * *

집에 돌아오니 새벽 세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었다. 우습게도 인생 대부분을 살았던 집보다, 한 달도 채 살지 않은 이곳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졸려?”

“많이요.”

윤오가 비척거리며 침실로 향했다. 만약 씻지도 못한 상태였다면 암담했을 거다. 그대로 침대에 눕고 싶지는 않으니까. 겨우겨우 손만 다시 씻고 침대에 누웠다.

신조는 거실에 서서 윤오를 뚫어져라 지켜봤다. 윤오가 전날 함께 수음했던 방으로 들어가려다 멈칫하고 원래 함께 잤던 침실로 가는 것까지 전부. 손으로 입술을 가볍게 쥐었다 펴며 웃음을 참았다.

“저 여기서 자도 되죠?”

이미 눈이 반쯤 감긴 채로 묻는다. 문가에 비스듬하게 기댄 그는 윤오가 예상했을 대답을 했다.

“네가 원한다면.”

보지 않아도 집에서 그의 역할이 어땠을지 뻔했다. 어른스러웠을 거다. 집안 어른들에게 부족했던 어른스러움을 어린 김윤오가 일찍이 키우고 함양해야 했을 거다.

조숙하다는 뜻은 때론 폭력적이다. 너무 일찍 열매를 맺으려다가 일찍 말라 죽게 마련이다.

그런 김윤오가 자신의 앞에서는 짜증도 내고, 말꼬리도 잡고, 비꼬기도 하다가 서러워도 하고 끝내 어리광도 부린다. 본인이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겠으나 범신조는 이런 모습이 신기했다. 그가 익히 생각해 온 것과는 조금씩 달랐다. 그게 싫은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기꺼웠다.

그가 지금껏 알아 온 모습이 매 순간 새롭게 쓰여졌다. 그러나 분명 낯설지는 않았다. 그에겐 여전히 같은 사람으로 보였다. 그때마다 신조는 제가 윤오에게 했던 말의 힘을 새로이 체감했다. 짝이라고 아름답게 포장된 질긴 악연을.

윤오는 깊이 잠들었다. 고른 숨소리와 무방비하게 살짝 벌어진 입술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신조는 주의 깊게 때를 노리다가 천천히 다가갔다. 침대에 앉기 직전, 그는 저의 아주 작은 인기척에도 윤오가 깰까 봐 바닥에 한쪽 무릎만 세우며 앉았다.

“─.”

속삭이는 이름. 이렇게 부른 게 처음이 아니다. 저번에도 윤오를 이 이름으로 부른 적이 있다. 이제는 그 혼자만 기억하는 이름. 그러나 그조차도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이름. 김윤오라고 불렀을 때는 보지 않더니, 그 소리에는 돌아봤지.

“날 속이는 거라면 끝까지 잘 속이도록 해.”

네가 기억을 하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놀아나는 것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이젠 그 둘 중 무엇이 맞더라도 어쩌겠나 싶다. 너는 끝없이 나를 벌주고 나는 끝없이 심판받는데. 이 지긋지긋하고도 숨이 막히는, 그런데도 끝내 너를 만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광증은.

신조는 그가 버린 것과 그가 빼앗은 것을 셈했다. 공학 문제를 푸는 것도 아닌데 이 셈은 끝난 적이 없다. 맞아떨어진 적도, 답이 일관된 적도 없었다. 그의 눈이 노랗게 빛났다. 정말로 노란 것도 아닌데 동공 안쪽에서 우러나는 양 선명했다.

버석하게 마른 손끝이 윤오의 볼에 가닿았다. 살짝 부은 모양새로 알 수 있다. 사람을 때린 적이 손에 꼽고, 정작 그럴 때가 오면 겁이 덜컥 나는 멍청한 손찌검이 만들어낸 서툰 상처였다. 길 실장이든 민 비서든 그의 사람 중 누가 이렇게 맞아 오면 범신조는 혀를 찼을 거다. 이딴 손찌검도 못 피하는 머저리라며 비웃었겠지. 하지만 김윤오는 아니었다.

물론 머리로는 안다. 그는 제가 익히 알아 왔고 익히 만나 온 대로 작지도 여리지도 않다는 걸. 그래도, 이 오래 가지도 않을 상처는 신조의 마음을 크게 흔들었다.

“누군 그저 보기만 해도 감사한걸….”

중얼거린 신조가 망설이던 손끝으로 윤오의 입술을 꾹 눌렀다. 젖고 말랑거리는 안쪽까지 눌렀다가 주먹을 쥐며 겨우 떼어냈다.

* * *

윤오는 조금 무기력하게 지냈다. 기력이라는 게 단순히 힘을 내자, 조금 더 밝게 살아 보자,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서 어쩔 수 없었다.

몸에 익은 시간대로 일찍 일어난다 하더라도 오전이 어떻게 이렇게 흘렀나 할 정도로 순식간에 점심이 되고, 오후가 어떻게 흘렀더라 할 정도로 순식간에 저녁이 되었다.

신조는 그런 윤오 곁에서 책을 읽거나 신문을 읽거나 혹은 윤오처럼 늘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무기력해 보이지 않았다. 살면서 무기력이라는 걸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인 양 그의 곁에 있으면 항상 뜨거울 만큼의 생기가 느껴졌다.

하루 일과를 그다지 보람차게 보내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궁금해질 무렵, 신조가 윤오의 몸에 제 무겁고도 단단한 몸을 기울였다.

“나 주말에 자리 비울 거야.”

“주말에도 일하세요?”

“부자들은 원래 주말에도 일해.”

부자라면 일 안 하는 거 아닌가? 그래서 부자가 되고 싶은 거 아닌가? 윤오는 의아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일하러 가는 건 아니야.”

“그럼 어디 가세요?”

“궁금하면 한 번 웃어 줘.”

“빌딩도 안 줬으면서.”

“네가 필요 없다며.”

신조가 목 안으로 나직이 웃었다. 그런 그의 몸이 뜨거웠다.

“몸이 뜨거운데… 열나는 거 아니에요?”

“그러게. 감기인가.”

본인 몸인데도 범신조는 무척 심드렁했다.

“그러면….”

걱정하는 마음이 자연히 들었다.

가족과 얼마든지 만날 수 있고, 다시 연락도 할 수 있으며, 이제는 통장 계좌도 만들 수 있게 되었으면서 윤오는 오히려 최근 들어 더욱 고아가 된 것만 같았다. 세상에 남겨진 끈이 범신조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꾸만 마음이 기울고 남자가 궁금하고, 이왕이면 오래오래 곁에 있었으면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갑자기 나타난 방지턱처럼 이러면 안 된단 생각이 치밀었다. 내가 아니라 다른 존재가 덧씌워진 것처럼 윤오의 마음은 아주 변덕스러워졌고, 그러면서 날마다 몸의 체향이 강해졌다.

이번에도 그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쏘아붙였다.

“그러면 이제 밥 따로 먹어요.”

“…….”

기가 찬 신조가 게으르게 고개를 들어 윤오를 쳐다봤다. 진심이냐는 시선에 윤오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이목구비와는 별개로 또래보다 성숙한 분위기를 내는 무표정한 얼굴에서 당혹감이나 무안함이 티가 날 리 없는데 말이다.

“일부러 그러는 거야?.”

“뭐가요.”

“너, 내가 너한테 안달 나는 게 재미있어서 그러는 것 같은데.”

안달 나는 거긴 하고?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안달이니 어쩌니 하자 오히려 놀리는 것 같다. 그 정도로 그는 천연덕스러웠고 놀랄 만큼 거만했다.

“그게 안달 내는 거예요?”

“그렇게 안 보이나….”

“그쪽은 본인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자기객관화라고 아세요?”

“알지. 내가 그거 잘하거든.”

“잘하신다고요….”

“그래. 난 잘생겼고, 돈이 많고, 어디 가서 맞은 적도 없고, 거기도 크지.”

“…….”

“그리고 좋은 사람은 아닐 테고.”

“잘하시네요.”

“김윤오는 자기객관화 좀 하나?”

“해 볼게요.”

이상한 승부욕이 발동한 윤오가 하나씩 꼽아보려 했다. 그런데 신조가 말했던 잘생겼고, 돈이 많고, 싸움 잘하는 것에 대응할 만한 얘깃거리가 제겐 없었다. 그리고 거기… 역시 그렇다. 솔직히, 학창 시절 화장실에서 허리를 내밀며 자기들끼리 사이즈를 견주는 무리에 낀 적은 없지만 대충 잘난 편이 아닐까 싶었는데, 범신조 앞에서는 절로 억울해졌다.

“왜 안 해?”

“생각 중이에요.”

“내가 해 봐? 보기에는 부족함 없는 가족이지만 사실 안을 보면 그다지 건강하지 못해서 홀로 어른 노릇하는 조숙하고 잘생긴 청년? 젊음이 무기인?”

“…맞는데 그쪽이 말하니까 재수 없어서, 말하기 싫어요.”

“그럼 좋아하는 거라도 말해 봐.”

설마… 그 좋아하는 것에 본인이 포함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윤오가 신조를 흘겨봤다. 그러다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 대답했다.

“봄 말고 가을 햇빛 좋아해요.”

요즘 날씨를 보면 날씨에겐 조금 섭섭한 대답이었다. 아직 부르지도 않은 봄이 이르게 도착했는지 오늘따라 날이 훈훈했다. 바람에서는 놀랄 만큼 봄기운이 자욱했고, 흙은 질지도 걸지도 않게 보송보송해 곧 흩날릴 것처럼 무거운 기운을 벗고 있었다.

이러다가도 갑자기 몸이 덜덜 떨리도록 춥고, 이러다가도 갑자기 눈이 내리는 게 이맘때인지라 방심할 수는 없지만.

그것과 별개로 윤오가 기대한 건 따로 있었다. 신조가 소파 등받이에 팔을 괴고 물었다.

“달은 좋아하지 않고?”

‘달을 좋아하나?’

꿈이란 게 으레 색이 없고 소리도, 냄새도, 맛도 없는 게 당연한데 이 순간 윤오는 그 꿈이 그대로 겹쳐 보였다. 바로 이 순간 무성 영화의 자막에 소리가 덧씌워진 것처럼 신조의 목소리가 그 자리에 딱 들어맞는단 확신이 들었다.

신기했다. 이 또한 범신조를 만나기 전까지 내내 꿔 오던 범 꿈과 일맥상통하는 건가 싶기도 했고.

“그러는 그쪽은 좋아하세요?”

“달이 떠서 연락해 봤다거나 그런 타입은 아니지. 아무 감흥도 없어. 그냥 내가 좋아하던 사람이 자주 달을 보길래 물어봤었지.”

와, 진짜로 매너도 예의도 없었다. 센스도 없었다. 쇼윈도 부부처럼 각자 애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런 사이 같았다. 윤오는 조금 질린 기색이 되어 신조를 차갑게 노려봤다.

“그래서 뭐라던데요?”

“한 번도 대답해 준 적이 없던데.”

“왜 그랬는지 알 만한데요.”

“왜 그런 것 같은데?”

그걸 자신이 말해 봤자 의미가 있나 싶은데 신조는 자꾸만 캐물었다. 하도 집요하게 묻길래 슬쩍 자리를 피했는데도 방까지 졸졸 쫓아왔다. 그냥 여기에 재미가 들린 것 같았다.

끝내 서재까지 가서 문을 닫으려니 그 무거운 문을 가볍게 잡아 열고 안으로 불쑥 들어와 이젠 본인이 문을 닫았다.

“아, 이렇게 짜증 나게 굴어서 대답 안 해 준 거 같다고요.”

윤오가 왈칵 대답하자 신조가 웃음을 터뜨렸다. 천장이 높아서 웃음소리가 울렸다.

“그래서 넌 좋아해?”

내 대답이 뭐가 중요한지. 이래서 또래를 만나야 하는 건데. 억울해진 윤오는 소리치듯 대꾸했다.

“네! 좋아요. 됐죠?”

“어. 됐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범신조가 윤오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커다란 몸에 짓눌린다 싶었을 때 푹신한 카펫으로 조심히 눕혀졌다. 머리 뒤에는 신조의 손바닥이 넉넉히 받치고 있었고 이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제집처럼 신조의 허벅지가 윤오의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자꾸 만났던 사람 이야기하는 거 진짜 예의도 없고 짜증 나서 나도 다른 사람 만날래요. 공평하게.”

“어. 공평하게 아무도 만나지 마.”

“제 말 제대로 들은 거 맞아요?”

“들었어. 공평하게 하고 싶다며? 그러니까 나만 만나.”

아주 억지 부리는 게 소심줄이 따로 없다. 버둥거리는 윤오를 가볍게 누른 신조가 입술을 물며 웃었다.

“키스한다.”

“…….”

“애무도 할 거야.”

“…아, 쫌.”

“치인한테도 발정기가 있는 거 알아?”

“네?”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갑자기 이런 타이밍에 꺼내다니. 당황한 윤오의 손목을 쥔 채 세상 어디 없을 파렴치하고 뻔뻔한 사기꾼은 “네, 라고 했어.” 하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나 답답한 속과 별개로 범신조의 입맞춤은 황홀하게 좋았다. 마치 김윤오의 몸이 자신의 것이라도 되는 양 속속들이 아는 입맞춤이었다. 놀랍게도 그 혀끝이 닿는 곳마다 폭죽이 터지듯 예민하게 쾌감이 느껴졌다.

공략점만을 집중적으로 간지럽힐 때마다 윤오는 이 남자의 과거가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문란하다는 것도 그렇지만, 지어낸 게 분명한 지난 연인의 이야기를 이제껏 함께 뒹굴고 놀았을 온갖 사람들에게 읊조렸을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물론 이 모든 건 윤오의 추측이었다. 다만 여러 정황을 고려했을 때 그 가능성이 가장 높지 않은가.

이렇듯 때때로 범신조는 윤오의 머릿속에서 쓰레기, 후안무치, 사기꾼에다 양심에 윤오가 가졌어야 마땅했을 몫까지 털이 수북하게 돋은 놈이 되었다. 세간에서 흔히 접하는 금인에 대한 편견과 범신조가 주는 인상 때문에 생기는 오해였다.

“김윤오.”

입술이 떨어졌을 때는 당연히 경험치가 거의 없는 윤오만 헐떡거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꼴사납게 저만 흥분한 건 아니었다. 언제부터인가 바짝 붙는 허벅지에서 묵직한 윤곽이 느껴졌으니까.

“저번처럼 네가 날 속여 제대로 물 먹이고 싶은 거라면, 이번만큼은 제대로 당할 것 같다.”

신조의 입술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그야 비록 가출한 적이 있긴 하지만 신조를 알지 못했을 때이니 미필적 고의가 아닐까. 조금 억울해진 윤오는 여전히 헐떡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엔 정말로 죽고 싶을 만큼 아플 것 같다고.”

이어지는 그 말에 밭은 숨을 몰아쉰 윤오가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엄살쟁이.”

높은 천장에 닿아 울리도록 신조가 웃음을 터뜨린 건 당연했다.

* * *

“나 좀 배웅해 주지.”

의자에 발을 올리고 웅크린 자세로 요거트를 먹던 윤오의 뒤로 그림자가 기울었다. 윤오가 기댄 의자 등받이에 손을 감싸 얹은 범신조가 남의 요거트 뚜껑을 핥았다.

“…….”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는커녕 불건전해 보이는 이유는, 사람을 아주 녹초가 되도록 쥐어짜냈던 요전 날 밤의 기억이 아직도 압화처럼 남아 있기 때문일 거다.

그래도 이젠 윤오도 어느 정도는 익숙해져, 갑자기 별것도 아닌 단서에 그런 게 불쑥 치솟고 올라올 때마다 얼굴을 붉힐 정도는 아니게 되었다. 그보단 뜬금없이 배웅이라니 뭔 말인가 싶어 그를 멀뚱히 쳐다봤다. 그러자 신조가 아예 그의 옆에 의자를 빼고 앉았다.

“주말에 자리 비운다고 했잖아.”

“아직 금요일인데요?”

“아. 좀 미리 비우게 됐어.”

“주말에 해 드릴게요, 배웅.”

“나 없는데?”

“네.”

신조가 실실 웃으며 윤오의 헛소리를 관망했다. 무기력해진 만큼 먹는 양이 조금 줄어든 윤오는 간신히 요거트를 비우고 수저를 밀어냈다.

윤오는 최근 좀 게으름을 부리고 있었다. 딱히 뭘 할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다. 가출한 동안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움직였던 반동처럼 무료하게 보냈다. 언젠가는 범신조에게 이게 단명의 징후냐고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솔직히 그의 말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물다섯을 넘지 못한다고? 대체 그런 게 어디 있어. 그의 거짓말일 게 뻔했다. …그래야만 했다. 그랬으면 좋겠고.

윤오는 일단 부정하기로 했다. 애초에 범신조가 하는 말이라곤 죄다 이게 놀리려고 그러는 건가 할 정도로 아리송한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최근엔 그의 말을 좀 한 귀로 듣고 흘리게 됐다. 그만큼 편해졌단 얘기일 수도 있단 걸, 윤오는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기운 없어 보이네.”

“그냥, 조금. 나른해요.”

“아프면 말해. 꼭.”

“낮잠 자려고요.”

“그래. 나 배웅하고 자.”

“주말에….”

“나 배웅하고 끼니 놓치지 말고, 그다음에 자.”

“진짜로 어디 가는 건지 말해 주면 배웅해 드릴게요.”

“너 요즘 나한테 의심 많게 굴어.”

그래서 싫은 건가. 싫어도 참아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데 신조가 윤오에게 나긋이 그러나 묵직하게 기대며 한숨을 흘렸다.

“그럴 때마다 흥분돼.”

“…….”

“발정기 때가 가까워져서 그런가.”

당황한 윤오가 신조를 쳐다봤다. 어깨가 들썩거리는 바람에 고개를 떼야 했던 신조가 그 당혹한 눈빛에 입술을 끌어올렸다.

“괜히 들었다 싶지?”

“버, 벌써 1년이 지났어요?”

“아니. 그런데 조짐이 보여서. 체온이 높고 평소보다 더 흥분이 되고, 좀 그러네.”

“그, 나는, 난, 아직.”

본 적 없게 당황한 윤오가 말을 더듬어도 신조는 충분히 이해한다는 반응이었다.

“강요하는 게 아니야.”

“엄청… 힘들다면서요.”

“죽기보단 안 힘들지.”

딴엔 농담이랍시고 한 말인데 윤오의 표정이 여전히 심각했다. 신조는 느긋하게 그 모습을 관찰했다.

지금 김윤오는 자신의 손아귀에 있다. 몰아붙이면 포기하고 체념할 것이다.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니 이렇게 기다려 주는 건 범신조가 사려 깊거나 천성이 착해서는 결코 아니었다. 이것 역시 오랜 시간 반복한 끝에 찾아낸 하나의 비정상적인 길이였다. 김윤오가 좋아할.

“네가 싫어하는데 억지로 범할 생각은 없어.”

“…….”

“그딴 식으로 지내고 싶은 게 아니야. 고작 며칠 밤을 버티겠다고 이후의 우리 관계를 내내 망가뜨리고 싶진 않아.”

“…….”

그렇게 말하는 신조의 눈빛이 아주 거칠게 찢어졌다. 그걸 채 발견하지 못한 윤오는 당황한 채로 시선을 굴리다 겨우 끄덕였다.

“너무 그렇게 어두운 낯짝 하지는 마. 기미가 보인다는 거지, 온다는 건 아니니까.”

“그거 많이 힘들어요…?”

“그냥 하등한 짐승이 된 거 같은 정도야.”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비유였다. 차라리 얼마나 아픈지 아니면 얼마나 흥분되는지를 말해주면 좋을 텐데. 그러나 그렇게 표현하는 신조의 표정이 씁쓸해 보여서 윤오는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배웅을 해 주기로 했다.

아직 잠옷을 입고 있는 채로 현관에서 인사를 건넸다. 범신조는 작은 캐리어를 길 실장에게 건네고는 다시 돌아봤다.

“나가서 기다려.”

그에게 지시하면서도 시선은 집요하게 윤오에게 꽂힌 채였다. 길 실장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게임하고 있으면 시간 잘 갈 거 아냐.”

“…사실 게임 별로 재미없어요.”

“나랑 있는 것보다는 재미있겠지.”

윤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신조가 조금 놀란 기색을 보였다가 골치 아픈 이처럼 손을 펼쳐 양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데려가고 싶은데….”

“…….”

“몇몇 소수의 금인들은 치인의 발정기를 자신에게 맞춰 끌어낼 수 있는 거, 넌 모르겠지.”

“그런 건… 초능력 아니에요?”

아무리 금인과 치인이 보통 사람과 다르다 하더라도 무슨 그런 능력까지 따로 있는 줄은 몰랐다. 신조는 열없이 웃고는 윤오의 볼을 가볍게 두들겼다.

“기다리는 동안 공부 좀 하고 있어라.”

“…….”

“앞으로 뭐 하고 싶은지도 생각해 보고.”

그거 말인데, 윤오는 요즘 더욱 붕 뜬 상태였다. 오랜만에 쉬는 거라 그럴 수도 있지만, 그거랑 별개로도 범신조를 만나기 전에는 무엇을 하고 싶었던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때와 지금의 삶이 완전히 바뀐 것만 같았다.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긴 옆모습을 보면서 신조 역시 심란함에 한숨을 삼켰다. 정말로 가기 싫었다.

하지만 그는 제가 얼마나 쉽게 하등 짐승이 되는지 알았다. 짐승도 격이 있다면 발정기가 온 금인의 상태는 그냥 금수와 똑같았다.

이미 교훈은 뼈저리게 얻었다. 또 실수를 반복한다면 그건 진짜로 짐승이나 마찬가지고, 그는… 비겁하더라도 지금의 아무것도 모르는 윤오와 아주 오래 지내고 싶었다. 어쩌면 이번만은 다를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자꾸만 싹을 틔운다. 심지도 않은 씨앗에서 이미 썩어버린 줄 알았던 새싹이 질기게 올라와 그 역시 곤란했다.

가슴 안쪽에서 피어나는 간지러운 감각에 입술을 꾹 다물었던 신조가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뗐다.

“연락 없을 테니까 또 기다리지 마라.”

저번에 툭 튀어나왔던 말을 저렇게 또 써먹는다. 짓궂은 웃음만 남기고 범신조가 집을 떠났다.

범신조가 나간 뒤 윤오는 현관에 잠시 서 있었다. 그의 부탁대로 들어주긴 했지만 딱딱해서 안 하느니 못한 배웅을 한 참이었다. 현관은 컸다. 그가 오기 전엔 범신조 혼자서 살았을 텐데 지나치게 컸다. 이래서 나오기 싫었는데.

따지고 보면 여기만 과분하게 넓은 게 아니었다.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쪼그려 앉은 윤오가 중얼거렸다.

“집이 너무 커.”

아주아주 최소한의 인원을 추려도 셋은 살아야 할 것 같은 집이다. 그 정도는 있어야 균형이 맞을 거 같은 집에서 홀로 살면서 범신조는 아무런 외로움도 타지 않았겠지? 그럴 것 같은 사람이니까.

윤오는 범신조가 어떤 마음으로 이 집을 샀는지 모른다. 또한 그가 홀로 이곳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절대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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