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6/21)

  5.

정말로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윤오는 서재에서 시간을 보냈다. 낮잠도 그곳에서 잤고 게임기도 아예 그리로 옮겼다. 햇빛이 잘 들고, 세 시쯤이 되면 따뜻해진 나무와 종이에서 향긋한 냄새가 나는 것도 좋았다. 천장이 조금 높긴 하지만 또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한참을 보면 서서히 가깝게 느껴지는 듯한 감각 역시 이곳에 정을 붙이게 했다.

문제는 고작 하루가 지났다는 점이었다.

오늘도 윤오는 어제처럼 낮잠을 자는 중이었고, 어제처럼 꿈을 꿨다. 생생한 꿈 때문에 자꾸 선잠을 자서 윤오는 꽤나 피로했다. 햇살이 바지런히 들어와 볼에 작은 창문을 만든 것도 모르고 윤오는 미간을 찌푸린 채 끙끙 앓았다.

꿈속에서 그는 엎드려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엎드린 채였다. 그들이 벌벌 떨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꿈속의 본인은 떨지 않았고, 오히려 체념을 느끼고 있었다.

‘이건 덫이나 마찬가지잖아.’

속으로 중얼거리며 분해하기도 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단 걸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건 극복할 수 없는 덫이라고, 그렇게 포기한 상태였다.

그 때 발소리가 들렸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것과 함께 아주 낮은 휘파람 같은 말소리가 들렸다. 요요히 엎드린 사람들을 휘감고 돌아가는 듯한 음성은 차라리 연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모두 일어나라.’

그러나 그 소리에 사람들은 오히려 고개를 흙바닥에 박았다. 꿈속의 윤오만 그러지 않았다. 윤오는 망설이다가 홀로 일어났다. 그러자 그럴 줄 알았다는 눈빛과 마주했다.

눈빛만 기억났다. 노란빛으로 빛나며 그것에 혓바닥이 달린 양 샅샅이 얼굴을 핥던.

‘너… 날 알아봤지?’

그것이 아주 짙게 호선을 그리며 웃었다. 그 순간 끈이 풀려 마른 우물 바닥에 추락하는 것처럼 가슴이 묵직하게 쿵, 하고 울렸다.

윤오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깼다. 그 이후로는 익숙한 짜증을 내며 얼굴을 쓸었다. 또 그 꿈이다. 사극 속 한 장면 같았고, 이상할 정도로 다른 등장인물의 이목구비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각기 다른 날 꾼 꿈들이 하나로 이어지는 게 맞긴 한가 싶었다.

더듬더듬 목과 가슴을 쓸어내렸다. 손바닥 아래로 식은땀과 빠르게 뛰는 맥박이 느껴졌다.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아 몸을 웅크리며 어둠에 눈이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

서재였다. 흙바닥도 아니고 축축한 돌바닥도 아니었다. 적당히 안락한 카펫이 깔려 있는 원목 바닥을 눈과 손으로 확인했는데도 현실감이 쉬이 돌아오지 않는다. 충동적으로 손을 뻗어 옆에 놓인 핸드폰을 쥐었다. 전화를 걸려다 그 직전에 멈추고 그저 움켜쥔 채 기계가 따뜻해질 때까지 이마를 괴고 있었다.

찾을 사람이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꿈속의 목소리는 벌써 흐려져 또렷하지 않은데도 자꾸만 범신조의 목소리로 떠오르는 탓이었다….

따뜻한 물이라도 마셔야겠다 싶어 무거운 몸을 끌며 서재를 나오는 참이었다. 서재는 디귿 자로 정원을 안도록 지어진 집의 왼편에 위치해 있었고, 덕분에 윤오는 막 정원을 가로지르는 길 실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길다온은 생각에 빠진 듯 고개를 가볍게 아래로 떨군 자세였다. 표정이 잘 보이지 않은 이유에는 고개를 떨군 것 말고도 날이 어두운 탓도 있었을 거다. 그는 무어라 곱씹고 중얼거리며 집 안과 연결되는 현관으로 곧장 들어왔다. 부드럽게 문을 여는 타이밍에 맞춰 윤오 역시 왼편 날개 부분을 지나 전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 김윤오 씨.”

범신조뿐만 아니라 길 실장이고 민 비서고 호칭이 입에 붙지 않은 윤오가 잠시 말을 고르는 사이 길다온이 먼저 알은체를 했다. 그는 평소엔 무표정한데 눈이 가늘고 길어서 그런지, 말할 때 볼이 씰룩거리면 덩달아 눈웃음 같은 게 지어졌다. 윤오의 머릿속엔 여전히 첫인상을 깔끔하게 속였던 이미지가 더 강했지만.

꾸벅 인사를 한 뒤 윤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민 비서도 아니고 길다온이 온 데는 이유가 있으리라 여겨서였다.

“오늘 집에 오는 거예요…?”

“누구 말씀이십니까?”

“범신조요….”

윤오가 꺼져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름 고민한 호칭이었다. 평소 신조를 부르듯이 그쪽이라고 부르면 또 한 번 누구냐고 되물을 게 뻔했다.

그렇다고 대표라는 말은 도통 입에 붙지 않았다. 직함으로 부를수록 이 관계가 왠지 부도덕하게 느껴졌다. 사실 찔리더라도 연장자인 범신조가 찔려야 마땅한데, 어쩐지 민망해하는 건 모두 윤오의 몫이었다.

“아, 아닙니다. 오늘은 다른 일 때문에 왔습니다. 대표님 옷 좀 챙겨가려구요.”

“그때 다 챙겨갔는데….”

“일정이 갑자기 생기셨거든요. 잠깐 어딜 들르셔야 하는데 어울릴 옷을 챙기지 못하신 바람에, 그만.”

“그럼 그건… 안 오고요?”

“러트요?”

드레스룸으로 향하던 길다온이 되물었다. 발정기라는 단어를 차마 입에 담지 못해서 적당히 에두른 건데 돌아온 건 처음 듣는 단어였다.

“네?”

“러트… 아, 발정기요.”

“네… 그거요.”

“오실 것 같습니다. 다만 오늘 하루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런 것도 알 수 있구나….”

앞서가는 길다온의 뒤를 따르며 중얼거리니 길 실장이 웃음기를 머금은 채 대꾸했다.

“다가오면 훅 알 수 있습니다. 체향도 짙어지고, 평소보다 동공이 확장되고, 체형도 좀 더 단단해져 평소엔 맞던 사이즈의 옷도 조금 빠듯하게 느껴지죠. 본인은 더 정확히 가늠할 수 있습니다.”

생각보다 자세한 정보였다. 검색으로는 얻기 어려운 실전 지식이라 윤오가 감탄사를 흘렸다. 길다온은 옷걸이를 살살 밀며 옷을 고르고 넥타이까지 모두 챙겼다.

“뭐, 아무래도 저 역시 금인이다 보니 잘 알게 되네요.”

전혀 몰랐던 이야기다. 놀란 윤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반응에 막 드레스룸에서 나오던 길다온이 조금 멋쩍게 웃었다.

“금인이라고 해도 대표님과는 비교가 안 되죠. 감히 같은 선상에 두기도 힘듭니다. 한 예로 김윤오 씨, 제 체향이 느껴지십니까?”

윤오는 가만가만 고개를 저었다. 오로지 코로만 아마도 길 실장이 뿌렸을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날 뿐이었다.

“지금 김윤오 씨에게 대표님 체향이 가득 덮여 있어서 제 것은 뚫고 갈 수도 없을 겁니다. 덕분에 저 같은 경우 발정기도 아주 약하게 지나가지만, 대표님은 정말 힘드시죠. 어휴, 말도 못 합니다.”

삽시간에 어두운 표정이 된 길다온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중얼거린 말에 따르면 대표적인 증상으로는 깨질 듯한 두통, 치솟는 심장 박동, 고열, 온몸이 쪼개지는 것 같은 근육통 등이 있었다. 퍽 심한 고통이라 이러다 미친다는 것도 영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닐 수준이라고 한다.

설명이 끝날 때쯤 길 실장의 얼굴은 다시 밝아졌고, 그와 달리 김윤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죽을 만큼의 고통이라면, 죽을 수도 있다면 차라리 그로 인해 자유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아주 미약한 내면의 목소리에 윤오는 당황했다. 요즘에는 그렇게 밉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까지 표현이 되지. 내심 원망이 깊었었나.

다음으로 그보다 거세게 튀어나온 건 오히려 죽기를 바랄 만큼 그 사람을 미워한 건 아니라는, 윤오도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극단적인 본심이었다.

“일정까지 시간이 빠듯해 먼저 가보겠습니다, 김윤오 씨. 혹시 필요한 게 있다면….”

“저도 가도 돼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입이 열리고 말았다.

“저도… 가고 싶어요.”

윤오는 양손을 꽉 쥐고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입 밖으로 뱉고 보니 정말 그러고 싶어졌다. 게다가 발정기인지 루트인지 러트인가가 얼마 남지도 않았다면서 다른 일정을 소화한다는 그 무모함을 말리고 싶기도 했다.

혹시 나갔다가 치인을 만난다면? 치인의 발정기도 끌어낼 수 있다면서 밖을 나돌아다니는 건 공연음란죄와 같지 않을까? 윤오는 자신이 두서없이 변명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더듬거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길다온이 조심스레 윤오의 말 사이로 끼어들었다.

“대표님만 괜찮다고 하면….”

“괜찮다고 할 거예요.”

솔직히 윤오도 잘 몰랐다. 다만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건, 범신조는 자신에게 화를 내지 않을 거란 사실이었다. 언제나 남의 기분을 과하게 살피고 생각해 온 윤오로선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자신감이었다. 그런데도, 확신이 들었다.

“그러니까 갈게요. 저도.”

잠시 윤오를 물끄러미 보던 길다온의 눈이 아주 갸름하게 접혔다. 기분 탓인지 조금 즐거워 보였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섰다. 윤오는 서둘러 점퍼를 챙겨와서는 발을 내디뎠다.

“아, 참고로 저는 여우입니다. 근원이 여우인 금인이지요.”

그가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며 여상히 말했다. 과연 그의 눈웃음이 예사롭지 않다 싶더니 딱 여우 눈웃음이구나 싶었다. 그의 체구가 상당한데도 둔한 느낌이 들지 않던 건 저 눈매 덕도 있던 것 같다. 윤오는 혼자 수긍했다.

* * *

호텔에 도착한 뒤 길다온은 대표님께 먼저 연락드리고 상황 파악을 좀 한 뒤 다시 오겠다며 먼저 올라갔다.

로비에 남겨진 윤오는 어쩐지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는 것 같아서 어색했다. 생각해 보니 급하게 나오느라 아직도 데면데면한 핸드폰도 두고 왔다. 결국 할 만한 일이라곤 제 손을 만지작대는 것밖에 없었다.

괜히 깨끗한 손끝을 보며 없는 거스러미까지 찾아 뜯는데 갑자기 옆 소파에 푹, 하고 누군가가 깊게 앉았다.

“혼자 왔어요?”

처음에는 자신에게 묻는 말이 아닌 줄 알았다.

“금인도 없이 혼자 왔냐고.”

그 말에야 고개가 들렸다. 돌아보니 여자가 하나 있었다. 잘 차려입었고 조금 피로해 보였지만, 그게 스트레스 같은 것 때문이 아니라 그저 나른하고 졸려서일 뿐인 것도 같았다.

“혼자 온 건 아닙니다.”

“혼자 온 거 같은데.”

“곧 일행이 올 겁니다.”

아니면 내가 그 일행에게 가거나. 윤오는 치인이든 금인이든 그 정체를 잘 아는 듯한 타인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게 불편해서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시선은 집요하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토록 노골적인 시선은 오랜만이었다. 범신조 역시 함께 있을 때면 종종 제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지만, 그게 곤란하거나 불쾌했던 적은 갓 만난 때를 제외하곤 없었다.

윤오의 미간이 좁아지든 말든 여자는 이것저것 말을 붙였다. 담배가 땡긴다거나, 그런데 요즘에는 어딜 가도 금연 구역이라며 투덜거리거나. 듣고만 있는데도 화제가 두서없이 바뀌었다.

“난 처음에 너 금인인 줄 알았어.”

그러다 툭 튀어나온 말에 윤오는 저도 모르게 대꾸했다.

“저를요?”

“어. 너한테서 범 냄새가 어찌나 지독하게 나던지.”

“범신조를 아세요?”

“찔러 봤는데 맞았네. 그냥 호랑이 냄새나서 그런 건데.”

“그런 게… 따로 있어요?”

“대부분은 잘 모르지만 범은 구별하기 쉽지. 얼마나 강렬한데. 악취는 아니지만 지독하다고 해야 하나 집요하다고 해야 하나….”

윤오는 조심스럽게 소매를 당겨 코로 가져갔다. 그 모습에 여자가 크게 웃었다.

“귀엽다, 너. 어디 절에서 살다 오기라도 했어? 산속에서 꼬여서 내려온 거야? 내내 짝만 기다리는 줄 알았는데 이런 앙큼한 짓도 하네, 범신조. 얼마 준다고 하디?”

“네?”

“눈 동그랗게 뜨는 것 좀 봐. 어리숙하게 구는 것도 컨셉이야? 몰랐는데 범신조 그 사람 그런 거 좋아했니?”

빠르게 쏘아붙여지는 말에 정신을 차릴 수도 없었고 대답할 틈도 없었다. 그는 범신조를 정말 잘 아는 모양이었다. 윤오가 천천히 얼굴을 굳히자 잠깐 말을 멈춘 여자가 눈을 가늘게 접으며 물었다.

“아니면, 네가 정말로 범신조의 짝이야?”

“…그런 것 같은데요.”

졸지에 돈을 받고 범신조의 구미에 맞게 행동하는 치인 취급까지 받은 윤오의 기분은 바닥을 쳤다. 안 그래도 바로 그 사람 때문에 좋지 않은 기분이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여자는 윤오의 정체를 알고 흥미진진한 표정이었다.

“말로만 듣던 범신조 짝이 누군지 궁금했는데 도통 보여 줄 기미가 안 보이더니. 이번 모임에는 데려오려는 모양이네. 하기야, 달라붙는 것들 밀어내기도 힘들었을 거 아냐.”

“모임이요…?”

바보같이 질문만 하고 싶지 않았지만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 윤오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묻자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가볍게 눈썹을 찌푸렸다.

“모르는 모양이네…?”

“김윤오 씨!”

그 때 길 실장이 막 내려왔다. 그는 윤오에게 다가오다가 여자를 알아채고 정중하게 인사 했다.

“주 대표님.”

“오랜만이야, 길 실장. 보아하니 애기가 오늘 스케줄을 모르는 모양이던데. 얘는 안 오는 거니?”

“아, 막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나만 빼놓고 다 아는 계획이었던 모양이다.

“새로운 얼굴은 언제나 환영이야. 게다가 그 새 얼굴이 이렇게 눈길을 끌게 생겼으니 다들 신나겠네. 손 한 번이라도 잡아 보고 명함 한 장 건네려고 줄을 서겠어.”

칭찬이겠으나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면에서 희롱을 들은 것 같았다. 윤오는 졸지에 부탁하지도 않은 어떤 감정을 받은 게 어이없고 좀 짜증이 났다. 치인들은 다 이런 대접을 받나?

“범신조가 오지 말래요?”

그래서 그답지 않게 초면에 제법 당돌하게 굴었다. 혼자 당혹감과 소외감을 덮어쓴 채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는 건 사양이었다. 특히나 저를 오늘 모임을 띄워 줄 어떤 상품처럼 대하는 걸 잠자코 참는 호구가 되는 건 더더욱 사양이었다.

“아, 그게 아니라.”

길다온은 주 대표라는 여자를 흘끗 보았다가 윤오에게 허리를 기울여 속삭였다.

“괜찮으시다면 모임 장소로 직접 오시랍니다.”

“그러니까 그 모임이 대체 무슨….”

“부자들의 친목 동호회야. 끼리끼리 만나서 교양 떨며 고상한 척하다가 구린내 나는 이야기 좀 나누고 헤어지는 곳이지.”

분명 길다온이 저에게만 조용히 속삭인 걸 텐데, 오해 하나 없이 똑똑히 들은 양 받아치는 주 대표의 말에 윤오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나 방금처럼 날카롭게 반응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주 대표는 조금 전, 윤오를 평가하듯 보던 것과는 조금 달라진 눈으로 윤오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가격표가 붙지 않은 물건이 아니라 진짜로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단 기색이었다.

“…부자가 아닌데 전 갈 자격이 안 되지 않습니까?”

“넌 돼. 거긴 그냥 부자가 아니라 금인과 치인들이라는 조건이 붙거든.”

“…….”

“어차피 치인은 너 말고도 부자 아닌 사람들 많아. 재미있을 거야. 아니면, 내가 데려가 줄까?”

“아뇨.”

윤오는 벌떡 일어나며 대답했다. 재미있긴 퍽이나. 모임 전부터 구린내가 났고 유쾌하지 않을 게 뻔했다. 그곳엔 주 대표 같은 사람들이 많겠지. 새로운 사람이 오면 이런 식으로 희롱하며 상대를 낱낱이 알아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애초에 목적이 순수한 친목회는 아니랄 것도 충분히 알겠다.

그러나 이대로 안 가자니 말려드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범신조가 이해되지 않아 더 화가 났다. 치인도 오고 금인도 오는 곳에 발정기가 임박했다는 사람이 가는 게 정말로 법에 위배되지 않는 거냐고 당장이라도 본인에게 따지고 싶었다.

“대표님도 영 내키지 않으시면 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

그곳에 범신조가 있을 수도 있단 생각을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배탈이 나기 전처럼 몸이 식는다. 윤오는 시선을 내려 발끝을 응시했다. 지금 이 발끝을 돌려 그냥 모르는 척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지만, 역시 그런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니에요…. 갈게요.”

로비의 거대한 자동문이 스르르 열렸다 닫히고, 길 실장이 윤오를 쫓기 위해 주 대표에게 다시 인사할 때였다.

“길 실장,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입은 맞춰 줄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싱긋 웃는 길다온의 눈이 여우처럼 접혔다. 여우,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손톱 끝으로 입술을 톡톡 두드린 주 대표도 웃었다.

그는 근원이 수리새인 금인이었다. 북미의 독수리계 알파보다는 체구가 작지만, 못지않게 빠르고 못지않게 강하다고 일컬어진 수리새. 주로 여성 금인이 많이 태어나는 집안이었다. 물론 여우보다는 급이 높았다.

“범신조가 그렇게 끼고 도는 치인을 에스코트하지 않고 홀로 보낼 리가 없잖아. 짝이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린다며 수절까지 한 미친놈인데. …그런데 말이야, 설마 했는데 정말 어리네.”

짝이라는 게 주는 이미지 때문인지 세간에는 그들의 관계를 과하게 로맨틱한 포장으로 감싸는 경향이 있다.

짝의 꿈을 꾼다? 맞다. 다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애초에 꿈 자체를 안 꾸는 금인이 더 많았다. 서로의 꿈을 꾼다, 라는 그 적은 사례가 훨씬 극적이고 아름다워 보이니 유독 그 이야기로 소문이 났을 뿐이다. 그리고 꿈을 꾼다고 다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행인 건 짝이 아니어도 아무나와 잘 수 있고, 그로 인해 발정기를 어느 정도 다스릴 수 있다는 거다. 그러다 보니 그저 발정기의 고통만 해결하면 되지 않냐며 즐기기만 하겠다는 질 나쁜 녀석들도 생겼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좀처럼 알려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극적이고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에 끌리게 마련이니까. 현실은 환상을 방패 삼아 교묘하게 사라진다.

게다가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듯 진정한 결합은 만난 이후에 서서히 이루어진다.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짝을 만나고도 파국으로 치닫는 금인과 치인이 나타나는 이유가 왜겠나.

결국은, 짝을 만나는 게 모두의 꿈이긴 해도 짝과 백년해로하는 것이 당연한 일은 아니란 뜻이었다. 그만큼 짝이란 건 추상적이다.

그러니 다른 치인의 체향이 독이 될 이유도 없었는데 범신조는 이상하리만큼 결벽하게 굴었다. 그렇기에 주 대표는 그걸 순애가 아니라 이상성욕이라고 생각했다. 변태 새끼. 그런 애들이 원래 더 제정신이 아니거든.

“저는 그저 대표님의 행복과 건강만을 바랄 뿐입니다.”

길 실장이 엄숙하게 선서했다. 주 대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 원래 연애에는 약간의 고비가 필요한 법이지.”

결국 그는 손을 내저어 길 실장을 보냈다.

“자, 그럼 나도 가 볼까.”

주 대표 역시 꿈을 꾸지 못했다. 그래도 번번이 이번만큼은 누군가 있겠지, 하고 이 명목상의 친목회에 얼굴을 비춰 왔었다. 금인이라는 것들은 모든 걸 타고나다 못해 지독한 외로움까지 타고난 존재니까.

하지만 그에게도 취향이란 게 있다. 그냥 발정기를 넘기기 위해 몸만 섞는 건 허무했다. 그게 조금 지쳐서 오늘은 빠질까 했었던 참이었다. 대신 저와 마찬가지로 이런 모임이라면 지겨워 죽으려는 범신조를 꼬드겨 오랜만에 진탕 마셔볼까 했는데, 그는 또 발정기가 얼마 안 남았다지 않나.

경쟁적으로 술을 비울 술친구도 없겠다, 차라리 안인을 만나 새로운 도전을 해볼까 싶어 로비를 기웃거리다 윤오를 발견한 참이었다.

그런데 그게 범신조 치인이었다니. 순식간에 흥미가 치솟았다. 저 어린 치인이 모임에 가게 되었으니 범신조도 나타나지 않을 수 없을 거다. 딱 봐도 맹랑하고 어린 저 애한테 휘둘릴 게 뻔한데, 그런 재미난 구경을 놓칠 수야 없었다. 

“지금쯤 허겁지겁 뛰쳐나오는 중인 건 아닌가 모르겠네.”

* * *

길다온에게 윤오가 모임 장소로 가게 됐다는 말을 듣자마자, 범신조는 어쩌다 일이 그렇게 되었냐고 물을 경우도 없이 옷을 챙겨 입고 바로 뛰쳐나왔다.

머리는 만지지도 못했고 흰 티에 검은색 면바지, 그 위에 대충 주워 걸친 긴 코트가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았다. 물론 그가 걸치고 있으니 우스꽝스럽지 않게 소화되긴 했지만.

그러나 드레스 코드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단 범신조는 발정기 때문에 운전을 하기 전에 약을 털어 넣어야 했고, 약효가 돌 때까지 핸들을 쥔 채 등신처럼 기다려야만 했다.

“모임이라니.”

김윤오는 아직 많이 미숙하다. 이제야 금인과 치인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한 참이다. 스스로를 안인이라 세뇌하듯 억누르며 지낸 탓인지 처음엔 체향조차 거의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는 제 곁에 있으며 저도 모르게 조금씩 체향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갓 터진 향은 지독히도 유혹적이고 그만큼 위험했다. 그 상태로 금인이 마구 돌아다니는 장소에 가는 건 분명 위험했다.

그곳은 하나의 작은 왕국이었다. 철저하게 먹이 사슬로 이루어져 누가 더 상위 포식자에 가깝냐로 위치가 결정되는 그 야만적인 세상에 김윤오는 잘 차려진 만찬처럼 보일 것이다.

“멍청한 짓을…!”

핸들을 주먹으로 세게 친 신조가 이마에 손등을 얹고 숨을 갈무리했다. 흥분은 임시방편에 불과한 약효가 도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앞으로 30분. 거지 같고, 지난하고, 끔찍한 시간이었다.

그동안 계속해서 윤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급하게 나왔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그의 머릿속에서 윤오가 급하게 뛰쳐나올 때 그 목적은 늘 도망이었다. 멀리 떠나고 철저하게 담을 쌓아 그를 밀어내고 또 밀어내는 도망. 그런데 이번에 윤오는 그가 알지 못하거나 알아도 갈 수 없는 곳이 아니라 아는 곳으로 향했다.

널 모르겠다. 범신은 열 때문에 가슬하게 일어난 입술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곧 그는 자조했다.

내가 한 번이라도 널 제대로 안 적이 있던가.

적잖은 시간을 돌이켜 보건대, 그런 적은 없었다. 하물며 그 외에 다른 사람을 안 적조차 없었다.

간신히 20분이 되었다. 30분까지 기다리려 했지만 도저히 안 되겠다. 가는 길에 사고가 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신조는 거칠게 기어를 바꾸었다.

* * *

“내리지 않으십니까?”

“…후회 중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기다리실 겁니다.”

“전 입장도 못 할 것 같은데요.”

가정집이 모여 있는 조용한 주택가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저마다 높은 담과 두꺼운 철문으로 가리고 안에서 목적에 맞는 모임을 가지는 장소였다.

그중 하나인 커다란 저택. 주차장에 들어온 순간부터 윤오는 망설이기 시작했다. 섣부르고 치기 어린 선택이었다. 이런 민폐를 끼치는 일은 잘 하지 않는데, 범신조에 한정해서 자꾸만 이런 충동적인 일을 저지르게 된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안에서 그 사람이 누굴 꼬시든, 누구와 뒹굴든….

입술을 깨물던 윤오가 결국 차에서 내렸다. 주위에 즐비하게 늘어선 차들은 하나같이 이름도 가늠키 힘든 데다, 안다 하더라도 국내에 이게 들어왔었냐고 되묻게 될 것들뿐이었다.

내리자마자 숨이 막혔고 발걸음이 무거웠다. 어깨가 짓눌린 것 같았다. 윤오는 열이 오르는 것처럼 끈끈해진 눈꺼풀을 깜빡이며 주차장 모서리마다 세워진 청동상을 보았다.

“개…? 늑대인가…?”

“들개입니다. 늑대랑 크게 다르지 않긴 하네요. 자, 어서 가시죠.”

길 실장이 윤오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순간 윤오는 닿은 부분부터 섬뜩한 소름이 끼치는 바람에 파드득 놀라며 그에게서 멀어졌다. 과민한 반응에 길 실장도 윤오도 당황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아, 아뇨. 아니요….”

그냥 신조를 찾아서 어서 나가고 싶었다. 그러다가 윤오는 그를 여기로 부르면 안 되나 싶어 길 실장을 불렀다.

“저 여기 있을 테니까 그냥 범신조가 오라고 하면 안 되나요? 올 텐데….”

“많이 불편하신 모양이네요. 그럼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잠시 기다리세요.”

윤오는 끄덕이고 내렸던 차 옆에 붙어 섰다. 점점 더 피로해졌다. 숨만 쉬어도 몸이 축나는 게 느껴졌다.

그 와중에 들개 상은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언젠가 강의로 들었던, 늑대 젖을 먹고 자랐다는 로물루스가 떠올랐다. 하체는 뱀, 상체는 사람 모양이었다는 여와 이야기도 떠올랐다. 늑대며 뱀의 형상이 빙글빙글 돌다가, 끝내는 노랗게 형형히 빛나는 눈빛만 떠올랐다.

“애기.”

어느덧 자신이 쪼그려 앉은 줄도 몰랐던 윤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낯익은 색의 옷이 보였다. 천천히 시선을 올리자 호텔 로비에서 봤던 주 대표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디 아파?”

호텔 로비에서는 못 느꼈던 체향이 느껴졌다. 범신조가 겹겹이 덮어 씌워둔 그의 체향이 시간이 지나 흩어지며 다른 금인과 치인들의 것이 쏟아진 탓이다. 청량하면서 독특하게 비린 바다 냄새가 피부로 느껴졌다.

“네. 아파요.”

윤오가 조금 몽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런. 이렇게 많은 짐승들은 처음 느끼는 거야? 정말 범신조가 꽁꽁 싸고돌았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면역이 없으면 어떡해.”

“…즐거워 보이시네요.”

“애기. 눈치 빠르네. 똑똑하구. 그런데 순진하면 몹쓸 일 당해.”

주 대표는 지나치게 즐거운 기색이었다. 윤오가 그걸 짚어내니 더욱 즐거워 보였다. 그는 윤오를 일으켜 세우더니 품에서 은색의 담배 케이스를 꺼냈다. 그리고 시중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모양이 아닌, 독특하게 돌돌 말린 형태의 것을 집어선 윤오의 입술에 물려 주었다.

“약, 약이에요?”

윤오가 어물거리는 목소리로 물으니 주 대표가 고개를 젓고는 라이터로 불을 붙여 줬다.

“너처럼 면역 없는 애들이 피우는 거. 요즘엔 갑자기 이렇게 노출되는 애들이 드물어서 이거 쓰는 애들도 거의 못 봤는데, 너 정말 희귀하고 재밌다.”

설명을 해 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알지도 못하는 걸 피우고 싶지 않아 고개를 흔들려는데 축축한 입술 안쪽에 들러붙은 얇은 종이 때문에 뱉기 힘들었다. 그러다 엉겁결에 연기를 들이마시고 말았다.

매캐하고 코끝이 찡해지는 매운맛이 나서 윤오는 한참을 콜록거렸다. 정말 담배가 아니냐고 되묻고 싶을 정도로 독했다.

그런데 그 독한 냄새가 뜻밖에 윤오를 취하게 만들고 중독시키기 직전이던 체향들을 천천히 중화시켰다. ‘사실 이것도 마냥 무해한 건 아니지만, 원래 이이제이라고 하니까.’라며 주 대표는 슬쩍 웃었다. 굳이 더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범신조가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이러는 거라면, 그것도 맞다. 그는 모든 인생 진리에 통달한 것처럼 늘 지루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어 좀 재수가 없었으니까.

“이제 괜찮지?”

주 대표가 물었다. 그 목소리에서 윤오는 진한 웃음기를 찾을 수 있었다. 이 사람, 웃고 있구나. 뭐가 즐겁지. 모든 게 그냥 재미있고 장난 같나.

저를 가지고 놀고 있으니 싫어해야 마땅할 텐데도 윤오는 주 대표가 크게 싫지 않았다. 다만 짝과 별개로 치인이라는 게 원래 금인을 별로 싫어하지 않도록 구성되어 있다면 윤오는 크게 실망할 것 같았다. 자신에게, 주 대표에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모든 관계에.

부축하는 손길을 거부하고 바로 서려 노력했다. 옆의 차에 손을 짚자 조금 미끄러졌다. 깨끗해서 거울로 쓰기에도 손색없는 차에 윤오가 남긴 자국이 선명했다.

“괜찮아요. 저는, 저는 여기서 기다리면 될 것 같아요.”

“나는 널 안으로 데려갈 생각이었는데. 안에 들어가려던 거 아니었어?”

“길 실장님이 범, 범… 그 사람을 데리고 나와 준다고 했어요.”

“여의치 않을걸. 고작 비서 실장이잖아. 그 안에서 길 실장은 존재감도 없어.”

“…길 실장님도 그런 곳에서, 제가 들어가면 뭘….”

“넌 다르지.”

주 대표가 차갑게 웃었다.

금인과 치인의 관계는 복잡하다. 금인에게 발정기는 치부다. 그것만 없으면 그들은 완벽을 가장할 수 있었다. 일말의 흠집도 내기 힘든 존재였다. 그들 안에서 또 누가 더 우열인지 아닌지를 가리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금인들은 그동안 두르고 있던 문명을 모두 벗게 된다. 네발로 기고 고통에 치태를 부리며 해갈되지 않는 상실감에 울부짖기까지 한다.

그리하여 꿈을 꾸지 않는 금인이라도 평생 함께할 치인을 갈구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들이 없다면 이런 식으로 비참하게 저희가 결국 짐승과 하등 다를 바 없으며, 아무리 힘을 가져도 결핍되고 망가졌단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니까.

치인이 없는 금인은 영영 균형을 잃은 세 발 화로가 되어 품은 숯을 자꾸만 쏟을 거다.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단순히 금인이 원해서 치인을 취하고 이런 것과는 전혀 다르단 뜻이었다. 특히 이렇게 상대를 찾고 싶어 모이는 장소에서 김윤오 같은 존재는 길다온보다 훨씬 귀하다.

김윤오는 신기했다. 치인이면서, 짝도 있으면서 그런 세상은 전혀 모른다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그곳에 윤오를 던져보고 싶다. 넌 어떻게 반응할까. 보아하니 가진 지식이라곤 안인들과 비슷한 수준인 것 같은데, 실상을 안 후에도 지금처럼 범신조를 찾을까.

“범신조랑 네가 정말로 짝이 맞아?”

윤오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축축해진 눈이 그게 무슨 말이냐고 조용히 되묻는다.

“모든 금인과 치인이 너와 범신조 같은 관계인 건 아니야. 사람들은 그게 무슨 운명이 점지해 준 거스를 수 없는 존재처럼 보는 모양인데, 사실은 특혜이자 저주거든. 짝이 있는 놈들은 다른 치인을 찾기 위해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지. 대신 짝이 먼저 죽거나 다치면 그토록 되기 싫어하던 짐승과 똑같아지고. 그런데도 다들 평생 함께할 상대를 갖고 싶어 해.”

주 대표는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운명의 상대란 포장지에 속아 넘어간 건 안인들뿐만이 아니다. 현실을 아는 금인들조차 그 환상을 좇는다. 그리고 저 또한….

“저 안은 사교장이 아니라 경매장에 더 가까워. 누가 나를 더 비싼 값에, 누가 너를 더 비싼 값에 살지 가늠하는 곳이라고. 서로 뺏고 빼앗는다면, 이왕이면 가진 게 많을수록 좋잖아? 여긴 상대를 통해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고루한 방식이라는 게 아직 통하는 곳이야. 그리고 범신조는 그 위시리스트의 맨 위에서 떨어진 적이 없고.”

“…….”

“이래도 여기서 멍청히 기다리고만 있을래?”

주 대표의 직설적인 말에 순간 욱했다.

윤오는 멍청해서 지금 이러는 게 아니었다. 당장 코앞에 훌쩍 다가와 겪어내야 할 발정기도 있었고, 가족 일도 있었으며, 엿 같게도 가장 크게는 바로 이 모든 것들의 중심에 있는 범신조를 향한 자신의 감정 변화가 있었다. 이 모든 걸 동시에 처리해야 했다.

그리고 모르는 척 도피하는 방식으로 해결하지 않기 위해 이곳에 온 거다. 주 대표가 의도한 건지 아니면 그냥 직설적인 건지 모르지만 그의 말은 윤오를 확실히 자극했다.

“여기서 멍청하게 기다리기만 하려고 온 거 아니에요.”

윤오가 멍청하게, 에 강세를 두고 말했다. 주 대표는 쾌활하게 응수했다.

“혹시 들어갔다가 도망치고 싶어지면 나한테 와. 내가 받아 줄게.”

윤오가 숨을 내쉬며 허리를 곧게 폈다.

“저 여기 온 거, 금인이 필요해서가 아니에요. 범신조만 찾으러 온 거예요. 그러니까 제안은 감사하지…도 않고요. 못 들은 거로 할게요.”

범신조를 찾으면 볼일이 끝난다. 만나서 뭘 어떻게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면서. 심지어 범신조의 발정기를 감당할 각오는 아직 안 되어 있다.

사실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인 범신조에 대한 감정과 이 문제가 확실히 연결되어 있단 건 알았다. 그저 그가 다른 사람과 발정기인지 러트인지를 보내는 걸 원치 않을 뿐이다.

할머니의 말대로 이게 그저 짝이기 때문에 당연하게 느끼는 소유욕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든 말든 속이 부대낄 정도로 싫었다.

“보기보다 맹랑한걸. 범신조한테도 그렇게 굴어?”

“…….”

“범신조한테도 그러는 모양이네. 어리광을 받아 주는 타입일 줄은 몰랐는데. 아니면, 너한테 대단한 잘못이라도 했나?”

그가 자신을 받아 주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정말 약점이라도 잡힌 듯이 무르게 굴고 있으니까. 하지만 둘 사이의 이야기를, 윤오도 이유를 모르겠는 범신조의 무른 구석을 주 대표에게 밝히고 싶진 않다.

윤오는 대답 대신 시선을 내렸다. 순해 보여야 할 태도에서 고집스러움이 엿보였다. 주 대표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일단은 들어가 보자고. 남에게 홀랑 잡아 먹힐 정도로 바보천치는 아닌 것 같으니까.”

주 대표의 목소리에 약간의 비아냥조가 비쳤다. 그는 윤오를 데리고 지하 주차장에 설치된 엘리베이터에 탔다. 문이 닫히는 틈 사이로 청동상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 * *

벽을 전부 텄는지 안은 상상보다 훨씬 넓었다. 사람이 북적거릴 정도는 아니지만 한 번에 면면을 살필 만큼 적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윤오는 이 안에 신조가 없다는 걸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도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순간 알았다.

갑자기 강렬한 향신료에 노출되면 코가 지끈거리는 것처럼, 피부가 따끔거렸다. 하나같이 지독한 것도 아니고 악취인 것도 아닌데 윤오에겐 과했다. 과하기보다 맡고 싶지 않은 향수를 맡은 기분이었다.

“점지된 짝이 없어서 파트너를 바꾸고 싶은 이들은 체향을 그대로 내보내거든.”

주 대표가 뒤에서 천천히 내리며 속삭였다. 안에는 외국인도 보였다. 미디어에 취약한 윤오조차 얼굴을 아는 유명한 영화배우도 있었다.

혹시라도 일어날 수 있는 편견에 기반한 차별을 막기 위해 개인의 형질은 스스로 공개하지 않는 이상 강제로 노출되지 않는다. 금인이 뒤에서 치인의 정보를 알아보는 일이 있다 해도, 일단 법률적으로는 그렇다. 설령 공인이라 해도 인터넷에 검색했을 때 프로필에 형질이 기입되진 않았다. 그래서 윤오는 낯익은 면면에 조금 놀랐다.

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 그의 얼굴은 곧 여기에 범신조가 없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골몰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주 대표는 그게 조금 의외였다. 어린애인 줄 알았고 어린애가 분명 맞는데, 생각보다 더 침착하고 종종 보이는 표정들이 무척 성숙했다. 범신조가 이런 모습에 빠진 건가?

솔직히 말하자면 주 대표는 그 후안무치한 사내가 짝이라는 개념을 편하게 이용하는 건 아닐까 생각해 왔었다. 짝이 있단 핑계로 그에게 접근하는 치인과 드문 취향인 금인에게까지 선을 긋고, 정작 짝이 나타나면 그를 방패막이 삼아 제멋대로 살기 위해 미리 연막을 치는 건 아닌가 하고.

심지어 주 대표는 범신조의 취향이 조금 독특한, 치인에 비하면 금인에겐 느껴지는 매력이 현저하게 낮은 안인이 아닌가 했던 적도 있었다. 무색무취에 심지어 발정기를 달랠 수도 없는 존재.

그런데 윤오의 존재가 이제까지의 그의 예상을 모두 뒤엎고 있었다. 그는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만약 범신조가 자신이 생각해 왔던 모습과 전혀 다르다면, 그 역시 금인이고 특히나 제 짝에게 무척 집착하는 타입이라면, 저는 지금 그저 잠깐의 유희를 위해 자충수를 두는 꼴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초조함에 예민해진 주 대표의 귀에나 겨우 들릴 정도로 윤오가 중얼거렸다. 긴장했는지 어느새 그의 옷자락을 잡고 있었다. 주 대표는 윤오가 기죽지 않고 제법 맹랑하게 굴 때보다 지금 보이는 모습에 더 당황하고 말았다.

사실 김윤오가 긴장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예민하게 만드는 체향보다도 더 신경 쓰이는 것 때문에.

“이런 곳에선 어떻게 해야 해요?”

주 대표는 조금 더 당황했다.

그러나 윤오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껏 그가 접했던 사교 활동이란 의무 교육 과정에 포함된 수준이 전부였다. 새터나 엠티를 가 본 적도 없고, 사회 생활을 경험한 적도 없다.

애초에 그런 것들과 이곳을 비교할 수는 없지만, 여하간 다수의 낯선 성인이 모여서 대화를 나누든 아니면 한껏 의뭉을 떨다가 침실로 가든, 이런 목적이 있는 사교 활동을 해 본 적이 없단 말이었다.

“그냥 가서 서 있기만 해도 돼.”

웃음을 꾹 눌러 참으면서 그 딴엔 진실된 조언을 해 줬는데도 마음 한구석이 켕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벌써부터 이리로 시선이 몰리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윤오는 새로 등장한 먹음직스러운 존재였다. 금인이라면 한번 찔러 보고 싶고, 치인이어도 궁금증에 이것저것 물어볼 것이다.

“너 범신조하고는 잤지?”

예의상 한 확인이었다. 당연히 잤을 거다. 제 짝을 점지받고 심지어 그 희박한 확률을 뚫고 만난 치인을 고이 길러 먹지 않는다는 건 금인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혹여라도 아직 범신조가 아무것도 안 했다면… 아, 그거야말로 정말 무서운 가정이었다.

그러나, 당연히 그랬을 거라고 여기고 물은 말에 윤오가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거세게 저었다.

“아니요?!”

1 퍼센트 미만으로 가정했던 대답이 나오고 말았다. 신조가 아직까지 손을 안 댔다고?

“왜?”

“당연히 제가… 아직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왜 이런 말까지 해야 하나 싶은 민망함에 윤오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돌렸다. 그 옆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주 대표는 믿을 수가 없었다. 하기 싫다는 이유로 참는다고?

아무리 짝을 아끼더라도 그럴 순 없다. 금인의 발정기는 정말 괴롭고, 그때는 짝이 아닌 치인조차 당장 삼키고 싶어진다. 그런데 짝은 어떻겠나. 발정기가 아니더라도 당장 따먹고 싶은 농익은 과실일 게 분명한데.

범신조는 역시 미친 게 분명했다. 주 대표는 확신했다. 이제껏 웃으며 했던 농담 수준이 아니었다. 범신조는 미친 이상성욕자고 그 대상은 바로 김윤오다. 주 대표가 박장대소를 하고는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그럼 길 실장을 찾아야겠네.”

길다온 이 새끼가 나까지 엿을 먹이려고 해?

길 실장의 의도를 확인한 것도 아니고 애초에 함께 계획한 일이 아닌데도 주 대표는 속으로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당장 길 실장을 찾아서 이런 애를 이곳까지 데려오는 게 정말 둘을 위한 일이냐고, 자극도 적당해야 자극이라고 아주 쏘아붙일 참이었다.

“바깥으로 나가 있어. 정원에 가서 이상한 소리 나는 곳에는 눈길도 주지 말고 조명이 있는 곳에 꼭 붙어 있어.”

그가 윤오의 등을 밀었다. 갑작스런 태세 전환에 놀라운 한편, 짧은 만남이었지만 주 대표가 이제껏 본 적 없는 심각한 모습을 보이기에 윤오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별안간 등을 떠밀려 테라스로 나왔다. 테라스는 고풍스러운 계단과 이어져, 그걸 통해 정원으로 바로 나올 수 있었다.

윤오는 뒤에서 손이 떨어지자마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민한 상태라 등에 손이 닿자마자 섬찟하고 떨렸지만, 다행히 앞서 피우게 했던 정체 모를 연초 덕분인지 과민할 정도의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뒤늦게 몸이 풀려 윤오는 비틀거리며 조명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옆에 있는 벤치에 무너지듯 앉았다. 차가운 공기가 열을 식혀 주었다.

안 그래도 안쪽이 너무 덥게 느껴졌던 터라 이 정도의 냉기가 기꺼웠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공기만 좀 차가운 날씨가 된 거다.

“…머리 아파.”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익숙지 않은 체향들은 창처럼 자신을 찌른다. 이성을 유지하고 제대로 된 생각을 하기에 힘들었다. 평소에 범신조가 자신에게 얼마나 조심스럽게 군 것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의 체향은 이런 식으로 노골적이고 날카롭지 않았다.

…그러니 더더욱 범신조를 찾게 된다.

만나기 전부터 느껴 온 미움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지금 김윤오에게 범신조의 의미는 상당히 커져 있었다. 어디에도 기댈 수 없고 돌아갈 곳도 없어 길잃은 김윤오의 유일한 지표.

여전히 시시때때로 튀어나와 그에게 향하는 감정을 걸리게 하는 방지턱 같은 불안감도 무시하게 될 만큼, 윤오의 마음이 점점 기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고된 일이었다.

잠시 앉아 있는 사이에도 졸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써야 했다. 윤오는 깍지 낀 손을 다시 무릎 사이에 끼고 몸을 까딱였다. 몇몇 지나가던 발이 걸음을 멈추고 제 발 앞에 선 걸 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각기 다른 목소리로 “취했어?”, “누구 약 먹었어?”, “뭐 좀 마실래?” 그리고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고개 좀 들어 봐.” 따위의 비슷한 말을 던졌다. 모두 윤오에겐 필요한 말이 아니었다. 기다리던 목소리 또한 아니었다.

윤오는 어리지 않았다. 순진하지도 않았다. 맛있는 거 사 주겠단 유혹에 흔들릴 나이는 지났다. 그는 모든 물음에 무뚝뚝한 톤으로 “아뇨.”, “안 취했어요.”, “목 안 말라요.” 그리고 “처음 보는 사이 맞는데 기다리는 사람 있어요.”로 일관되게 대답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여섯 번째 말했을 땐 조금 서글프기까지 했다. 서글프고 쪽팔리고 비참했다. 점점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부끄러움에 몸서리가 쳐졌다.

이런 수치심은 익숙했다. 가족들로 인해 견딜 수 없이 숨이 막힐 때면 새벽에 몰래 지하 주차장으로 나가 차 번호판을 모두 읽으며 빙글빙글 돌곤 했는데, 그런 때가 딱 이런 기분이었다.

“저 기다리는 사람 있어요.”

일곱, 여덟, …아홉 번째. 그렇게 말하면서 윤오는 점점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안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찾아야 하는데, 자꾸만 미루게 된다. 제가 찾기 전에 그 사람이 먼저 나를 찾을 것 같다고 하면 바보 같은 소리, 망상 같은 기대일까.

그리고 주차장을 맴돌다 다시 집에 돌아온 윤오가, 저의 부재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가족들의 닫힌 방문을 보며 대체 무엇을 기대했나, 하고 자책하듯이.

“…….”

끝내 이마가 무릎에 닿았을 때, 윤오의 머리 위로 낯익은 체향이 쏟아졌다.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는 그것은 아주 가벼운 젤리처럼 윤오를 안락하게 감쌌다. 지금까지 멋대로 와 부딪히던 온갖 낯설고 거북스럽던 것들이 모두 씻겨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아홉 켤레가 제 앞에 서 있다가 갔는데, 열 번째로 선 이 발은 분명 달랐다. 윤오는 차라리 두 눈을 감아 버렸다. 바보 같은 소리, 망상 같은 기대가 현실로 이루어졌다…. 까딱하다간 익숙하지 않은 어리광을 부려버릴 것만 같다. 자신이 그를 찾겠다고 온 건데, 결국 또 찾은 건 자신이 아니라 그였다. 그를 얼마나 알아 왔다고… 기다리고 있으면 찾을 줄 알았다.

‘봐, 기다리던 사람 왔잖아….’

“왜…!”

크게 터져 나왔던 목소리가 꾹 닫혔다. 입술을 터질 지경으로 깨문 신조는 윤오가 자신의 존재를 눈치챘다는 걸 알았다. 윤오는 모르겠지만, 그의 체향이 동요하고 있었으니까.

머리는 터질 것처럼 아팠고, 약을 먹은 게 무색하게 몸이 뜨끈뜨끈했다. 방금까지 있었던 회장 내의 공기가 영향을 미친 것 같았다.

장내로 들어오자마자 그는 길다온에게 다짜고짜 주먹부터 날렸다. 안의 분위기는 개판이 났고, 길다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벌떡 일어나서 다시 맞을 준비를 했다.

모두 사색이 되어 산에서 뛰쳐나온 범이라도 본 양 그를 보았다. 그 와중에 범신조는 차가운 눈을 부리부리 뜨고 주 대표를 똑똑히 쳐다봤다가, 다시 길다온을 치기 위해 주먹을 들었다가, 김윤오가 바깥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대로 뛰쳐나온 참이었다.

그래도 나름 무르익어 가던 안쪽의 분위기를 제대로 망쳐놓고, 범신조는 윤오의 앞에 서서 화를 삭였다. 터져 나오는 목소리를 참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흉곽이 들썩이며 온갖 생각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중 대부분은 이러했다. 김윤오가 연기를 하는 게 분명하다. 그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고, 자신을 벌주기 위해 머저리처럼 녹였다가 이렇게 엿을 먹이는 게 분명하다.

그게 사실이라면 눈이 뒤집힐 정도로 화가 나지만, 그보다 더 비참하고 그보다 더 끔찍한 건.

‘내가 그 어떤 말을 할 자격도 없다는 거지.’

김윤오가 정말 그런 의도로 이렇게 완벽하고 치밀한 연기를 하고 있다 치더라도 어쩔 수 없으리라고. 미간을 좁히며 한껏 찌푸려져 있던 눈썹에 힘이 빠졌다. 지친 듯 무력함이 내려앉은 얼굴을 쓸었다.

그가 지금껏 만난 그 어떤 모습 중에서도 가장 어리게 구는 짝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껏 만난 그 어떤 모습 중에서도 가장 자신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김윤오에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으면서 아주 혹독하게 굴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신조는 한쪽 무릎을 꿇고 윤오의 무릎에 양손을 올렸다.

“왜… 혼자 왔어.”

“…나도 모르겠어요.”

윤오가 고개를 저었다.

“발정기가 온다면서 집을 나가놓고, 이곳에 와서 고상 떨고 있을 모습을 생각하니까 안 올 수가 없었는데.”

“…….”

“막상 오니까 그쪽은 없고 난 머저리 등신에 바보 같아요.”

손을 들어 눈을 꾹꾹 누르며 울음을 참아보려 애썼다. 여기에서 울기까지 하면 진짜 김윤오 인생의 수치였다.

“모든 게 다 너무 빨라서 멀미가 날 것 같은데, 아무도 기다려 주진 않고…. 그쪽은 왜 이렇게 발정기가 빨리 와요…? 원래 그래요? 바, 밝히면 원래, 발정기도 빨리 와요?”

울음을 참느라 오히려 더듬거리며 헐떡이는 게 그를 더 어리게 보이는 것도 모르고 윤오가 물었다. 신조는 때에 안 맞게 웃음이 날 것 같다가 말았다.

“그냥 너무 오래 참아서 그래.”

“…….”

“미안하다. 난 너무 오래 기다려서 네가 빠르다 느끼고 있을 줄 몰랐어.”

미안하다는 말이 놀라울 정도로 쉽게 나왔다. 말에는 힘이 있어서 사과를 하는 순간 맥이 빠졌다.

미친 사람처럼 차를 몰고 왔다. 거칠게 핸들을 꺾으며 내내 했던 김윤오의 신변구속을 위한 온갖 상상들은 저 뒤로 뭉개졌다. 그리고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모든 것이 아무렇지 않아졌다.

당장이라도 머리꼭지가 터질 것 같은 발정열도 모르겠고, 그냥 이대로 김윤오와 내내 앉아서 얼어 죽든 말든, 새벽이 오고 이파리가 모두 살얼음에 어는 모습이나 보고 싶었다.

“김윤오. 내가 다른 치인이나 금인이랑 뒹굴까 봐 여기까지 온 거야?”

한참 만에 윤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새 부리처럼 나온 입술이 더욱 톡 튀어나왔다. 신조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딴 걱정을 왜 해. 다음부터는 누가 ‘범신조가 호텔 방도 안 잡고 길거리에서 뒹굴 기세더라.’라고 해도 쫓아가지 마. 어차피 난 너 아니면 아무하고도 뒹굴고 싶지 않아.”

“…….”

말은 누가 못하냐는 듯한 미심쩍은 눈빛에 문득 범신조는 김병후의 외도 기록을 떠올렸다. 김윤오가 알고 있었을까? 알았더라도 혼자 앓았겠지.

“진짜야.”

“…….”

“난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놈이야.”

김윤오가 평생 믿지 않아도 좋으니 신조는 윤오가 이 말뜻을 평생 모르길 바랐다.

* * *

차에 타기는 했으나 상황이 좋지 못했다. 신조는 더운 숨을 내쉬며 욕설을 씹었다. 김윤오의 체향이 칼날처럼 그의 몸 곳곳을 베었다. 당장이라도 옷을 찢고 덤벼들게 될 것만 같아서 신조는 마약 중독자처럼 콧잔등을 찌푸렸다.

“상태 많이 안 좋아요?”

윤오도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핸들을 덮은 팔에 괴었던 고개를 돌렸다.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김윤오 역시 이마에 땀이 조금 맺혔다는 걸.

“너 안에서 무슨 약 했어?”

무척 거친 목소리가 나왔다. 상냥하게 묻고 싶은데 쉽지 않았다. 약이라고 하니 윤오는 당연히 그저 먹는 약을 생각해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왜 네 상태가 좀 둔한 것 같지.”

신조가 손을 뻗어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이마를 건드렸다.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떼어 주는데 뒤늦게 윤오가 어깨를 움츠러뜨렸다. 순간 몸 안이 아주 간지러웠다. 긁을 수도 때릴 수도 없는 곳이 간지럽게 느껴졌고, 그 지점을 구체적으로 말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곧 사라졌다. 정말 신조의 말대로 둔하고 느린 반응이었다.

“잠깐 기다려 봐.”

문제는 신조 역시 윤오의 상태를 세세하게 신경 쓸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 아예 다 뜯어버렸다. 그리고 윤오 쪽으로 몸을 기울여 페트병째로 있던 물을 가져갔다.

일일이 뚜껑을 열 시간이 없어서 뽑아내듯 뜯어내는 손길이 성급했다. 그런 와중에도 느리고 둔해진 김윤오는 순간 지척에서 움직였던 신조의 체향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 박자 늦게 신조를 봤을 때 그는 이미 모든 약을 입에 털어 넣고 물을 비우는 중이었다. 순식간에 500mL를 다 마신 그가 종잇장처럼 페트병을 구겼다.

“약 기운 좀 돌면 가자.”

“마,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뭘 하든 지금은 안 돼. 지금 출발하면 구급차 타고 병원에 가게 될걸.”

“119 부를까요?”

“불러서 뭐라고 하게.”

시트에 몸을 기댄 신조가 픽 웃었다. 그리고 손으로 윤오의 정수리쯤의 머리카락을 부스스 흩뜨렸다.

“여기 발정 난 새끼 하나 있으니 데려가 주세요, 하게?”

“약이라도 있을 거 아니에요…. 해열제나 진통제 같은….”

“그거 내가 지금 먹었잖아.”

“그러면 이런 거, 계속 참고만 있어야 해요?!”

그래도 최첨단 의학이라는 게 있는데 어떻게 금인의 발정기 하나 못 억누르나 싶어 윤오는 끝내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이 와중에도 신조는 윤오가 소리칠 때 끝이 살짝 갈라지는 게 듣기 좋아서 실실 웃었다. 맛이 가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약을 너무 많이 처먹었다. 손끝이 저릿저릿하고 혀도 붓는 것 같았다.

좆같은 일이었다. 몇 번을 겪어도 수치스럽기만 했다. 바닥 저 끝까지 떨어지고도 더 추락하는 기분. 그토록 한심하게 여기던 짐승 그 자체가 되는 감각.

그럼에도 그 누구도 원망할 수 없다. 심지어 김윤오도 원망할 수 없었다. 이걸 선택한 이는 다름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참아야지.”

그래서 까슬해진 입술을 쓸면서 뇌까렸다.

“참는 것 말고 내가 뭘 어떡하겠어.”

“차라리 내가 운전하고 병원으로 데려갈래요.”

“운전해서 호텔로 가는 게 낫지.”

“호텔 가서 뭐 하게요.”

“갇혀서, 참는 거야.”

참고 참는다. 뼈마디가 모두 벌어지는 것 같은 고통과 머리가 곤죽이 될 것 같은 열, 아래가 까지도록 수음해도 가라앉지 않는 욕정과 그럴 때마다 반복되고 반복되며 수없이 반복되는 악몽을 선명하게 곱씹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흘끗 시간을 보았다. 거의 흐르지 않았다. 기가 찼다. 이만큼 고통스러웠다면 적어도 10분은 지났어야 하지 않나. 하지만 분침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고, 신조는 윤오가 있다는 것도 잊고 주먹으로 거세게 핸들을 내리칠 뻔했다.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랬을 거다.

열이 올라 부옇게 보이는 눈으로 창밖을 보았다. 얼굴의 반쪽이 부풀고 입가와 코밑에 채 닦지 못한 핏자국이 남은 길다온이 있었다. 신조가 창문을 내렸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꺼져.”

“김윤오 씨는 운전면허가 없지요. 그리고 지금 대표님 상태로는 높은 확률로 교통사고가 날 것 같은데, 김윤오 씨가 휘말릴 사고는 바라지 않으시겠지요?”

“…….”

“제가 모시겠습니다.”

신조는 눈이 부신 것처럼 찌푸린 눈으로 길다온을 응시하다가 욕을 씹었다. 그러고는 운전석에서 내렸다. 그대로 뒷자리로 가려다가 마음을 바꿔 다시 운전석 쪽을 두드렸다.

“먼저 가.”

“네?”

“쟤 먼저 데려다주고 나 픽업하라고.”

“한 시간은 걸릴 텐데요.”

“상관 없….”

“싫어요!”

윤오가 운전석 쪽으로 몸을 빼며 외쳤다. 지금 범신조의 상태는 문외한이 보아도 이상하다는 걸 눈치챌 만큼 안 좋았다. 병자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지나치게 육욕적으로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한마디로, 너무 야했다. 치인이 아니라 안인이라도 범신조가 침대로 데려가면 아무 말 없이 쫓아갈 것 같았다.

“그럼 어쩌라고.”

지금껏 나름대로 윤오에게 상냥하게 대하려던 말투가 싹 걷혔다. 상스럽고 날 것이었다. 당장이라도 침을 뱉으며 욕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신조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일말의 가증을 부릴 정신도 없을 만큼 한계에 몰린 거다.

“이대로 같이 타고 가다가 뒷자리로 끌려와 네 옷이 찢기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그걸 바라나?”

“대표님. 이러실 시간이….”

“내 옷은 내가 알아서 해요.”

하지만 김윤오도 밀리지 않았다.

“내 옷은 내가 알아서 하지만 그쪽은 지금 사리 분별이라곤 못하지 않아요? 난 바로 조금 전에 약속했던 거 못 믿겠거든요. 다른 치인하고 당장이라도 잘 것 같은데 어떻게 두고 가요? 우리 서로 못 믿는 사이에 시간 끌지 말죠.”

“…….”

“그러니까 제발… 그냥 같이 가요.”

윤오가 애원했다.

이 상황은 결국 꼬리물기였다. 범신조는 김윤오라는 군침 도는 만찬을 여기에 차려 둔 채로 갈 생각이 없다. 윤오 역시 범신조라는 탐나는 존재를 이곳에 두고 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둘 다 여기에 남겨져서 뜯어 먹히든지 함께 떠나든지.

결국 신조는 사납게 욕을 씹었다. 그러곤 뒷자리에 탔다. 문이 쾅 닫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로 가림막이 올라왔다. 이어 길다온이 능숙하게 페로몬 탈취제를 뿌렸다. 차에 가득 찬 체향을 흩트리기 위해서였다.

윤오는 옆자리의 길다온을 흘끔거렸다.

“죄송해요…. 제 고집 때문에.”

“아닙니다. 제가 제대로 알아보지 않았던 게 문제죠.”

길다온은 얼굴의 반이 곤죽이 된 주제에 쾌활하게 대꾸했다. 윤오는 문득 그가 여기에 있어도 되는 것인가 싶었다. 둔한 저조차 이렇게 범신조의 체향에 자꾸만 몸서리쳐지는데.

“그런데 발정기 온 금인이랑 같이 있어도 괜찮으세요…?”

“아!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페로몬 기관에 문제가 있거든요. 체향도 거의 나오지 않고 잘 맡지도 못합니다. 안인과 별로 다를 게 없어요.”

괜한 걸 물었다. 윤오는 죄송하다고 해야 할지 유감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어 잠시 우물쭈물했다.

“뜯겼거든요. 물려서.”

정작 그런 그를 두고 당사자인 길다온은 유쾌한 태도 그대로였다.

“네?”

“우리끼리 하는 말입니다. 물어 뜯겨서 거세된 거나 마찬가지라고.”

“아… 음… 네. 그렇구나.”

“자, 그러면 벨트 하세요. 제가 빨리 달릴 거거든요. 딱지 몇 개 떼일 예정이니 조심하시고요.”

“네, 네.”

고용인도 결국 고용주와 닮는 모양이다. 길다온도 겉보기와 달리 조금 이상하고 독특한 것 같았다. 괜히 예민하게 굴어 표현하자면, 좀 음흉해 보였다. 아무래도 첫인상이 큰 영향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다. 지금도 저렇게 맞아놓고도 범신조와 자신을 도우려고 하는데…. 마음을 고쳐먹어야지, 스스로를 반성한 윤오는 안전벨트를 하다가 가림막을 흘끗 보았다.

닫아도 스며드는 체향이 있다. 윤오는 저도 모르게 빨아들이듯 틈새로 고개를 폭 기댔다가, 곧 아지랑이 같은 열기를 느끼고 아찔해져 다시 앞을 보았다. 조금만 방심해도 다시 고개를 돌려 가림막 너머 체향을 갈구할 것 같았다.

문득 집요한 그리움이 떠올랐다. 그리움과 공포가 동시에 엄습했다. 마치 독한 술에 취한 양 지독하게 혼란스럽다.

동시에 차가 출발했다. 고흐의 그림처럼 이리저리 흐드러지는 밤 풍경 속으로 윤오는 그만 빨려들 것만 같았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눈물이 번질 때처럼 풍경이 뭉개졌다.

“괜찮으십니까?”

“아뇨.”

윤오가 손으로 거칠게 눈가를 문지르며 대꾸했다.

“페로몬 알러지 같은 것도 있어요? 자꾸 눈물이 나려는 것 같아요.”

“그런 건 들어보지 못했는데… 어쩌면 히트가 오는 걸지도 몰라요. 아, 히트는 치인들의 발정기인데, 어린 데다가 금인과 접촉이 드물었던 치인들은 주변 영향을 많이 받거든요.”

길다온이 뒤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김윤오 씨는 대표님 말씀대로 따로 가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죄송해요. 고집부려서.”

“죄송할 건 없습니다. 그래도 가는 길에 히트가 오면 곤란해질 테니까 좀 참아 주시겠어요?”

“그게 되면… 좋겠어요.”

차가운 창문에 머리를 댔다. 냉기가 무색하게 윤오의 몸은 점점 가라앉고 무거워졌다. 창문 너머로 비쳐 보이는 길다온은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즐거워 보였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길다온이 아니었다. 윤오는 뒷좌석으로 온 신경이 쏠려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방음이 얼마나 잘 되는지, 신조가 어떤 상황인지 조금도 알 수 없었다.

“실장님 때린 거 범신조예요…?”

윤오는 점점 흐려지는 정신을 돌리기 위해 아무 질문이나 던졌다.

“네. 손이 매우시죠. 놀랍게도 겨우 두 대 때리신 겁니다.”

“그런데도 운전해 주고 싶으세요…?”

“그럼요. 전 대표님이 김윤오 씨와 잘되는 일이면 무엇이든 할 거예요.”

씩씩한 대답이었고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대체 무슨 사이길래 이렇게까지 충성심을 보이지? 심지어 이쪽은 퍽 사적인 영역이었다. 고용주의 사적인 일까지 처리하는데 이런 열의를 보일 수가.

“범신조가 월급 진짜 많이 주나 봐요…. 길 실장님 같은 좋은 분도 계시고.”

길다온은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김윤오 씨는 정말 재미있는 생각을 많이 하네요. 근데 아닙니다. 월급을 많이 받기는 하지만 그거랑 별개예요. 돈을 적게 받았어도 두 분이 잘되길 바랐을 겁니다.”

“왜요?”

“대표님을 오래 봐 왔기 때문이죠.”

막 핸들이 돌아갔다. 아주 안정적으로 운전하고 있어서 몰랐는데 계기판을 보면 속도가 상당히 빠르단 걸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운전 실력이 정말 좋았다. 그래서 멀미가 일어날 일이 없는데 윤오는 점점 어지러웠다.

메스꺼운 어지러움과 달랐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윤오는 허벅지에 손톱을 박으며 참았다. 주 대표가 피우게 한 게 뭔지는 몰라도 효과가 좋긴 한 모양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버티지 못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대표님은 애착이 있으신 게 아무것도 없고 매사 지루하게 여기셔서, 갑자기 강도가 나타나 모든 재산을 달라고 해도 주실 분이었거든요. 그런데 만약 삶에 흥미를 느끼고 진짜 아끼는 게 생긴다면 얼마나 달라지시겠어요. 저는 대표님께서 그렇게 되셨으면 좋겠어요.”

“되게… 좋으신 분이네요.”

윤오가 겨우 대답했다. 길 실장은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하고는 속력을 낮췄다.

퇴근 시간도 지난 길은 분명 여유가 있긴 했지만, 호텔 부근은 여전히 차가 조금 밀렸다. 거리도 얼마 안 남았는데 오히려 그래서 더 초조했다. 윤오는 당장이라도 뒷좌석으로 넘어가 범신조를 확인하고 싶었다.

모르는 일이라 그런지 무서운 상상이 자꾸만 자랐다. 갑자기 심장이 멈추면 어떡하냐거나 너무 아파서 기절한 거 아니냐는 둥의 이야길 입 밖으로 내고 있단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길다온은 고개를 저었다.

“대표님은 인내심이 대단하신 분입니다.”

“아픈 데 장사 없다잖아요…!”

“인내심이 정말, 정말, 정말, 김윤오 씨가 상상하는 그 어떤 분보다 대단합니다.”

그러고는 차를 세웠다. 호텔 정문이 아니라 VVIP들이 남몰래 출입하고 싶을 때 사용하는 뒷문이었다.

“잠시 기다리세요. 다녀와서 댁에 모셔다드릴 테니까.”

“…….”

운전석에서 내린 길다온이 뒷좌석을 열었다. 윤오는 벨트조차 풀고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그곳엔 여전히 가림막이 있었다.

이어 문이 닫히는 소리.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땐 겨울 공기 속에 짙은 한숨을 내쉬고 있는 신조가 보였다.

그의 옆모습은 평소와 달리 다소 창백했다. 핏발이 섰는지 붉어진 눈가가 야릇했다. 습관처럼 주머니를 더듬다가, 담배를 챙기지 않은 건지 피울 정신이 없는 건지 곧 얼굴을 쓸어내렸다. 윤오는 저도 모르게 몸을 창가로 붙이면서까지 그런 범신조를 보았다. 곧이어 길다온과 벨보이가 나오는 게 보였다.

그래도 상상보다 괜찮아 보였다. 기절해서 업혀 가는 것도 아니었다. 비록 부축을 받긴 했지만 제 발로 걸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아주 폭력적이라 구속복을 입혀야 할 정도였다던 박 사장의 말과도 달랐다. 범신조는 아주 예리하고 흉흉한 기운을 뿜고 있긴 해도 다짜고짜 주변인을 때리거나 잡아끌지 않았다.

어느덧 윤오의 시선은 멀어지는 신조를 좇아 뒷좌석에서 앞좌석까지 넘어왔다. 괜찮은 걸 두 눈으로 확인까지 했는데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아니,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범신조가 점점 멀어질수록 불안해지고 초조해졌다. 이대로 영영 사라질 것 같은 불안감과 이대로 영영 사라져야 한다는 초조함이었다.

범신조가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모습을 좇느라 몸이 기우뚱, 바빴다. 그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시트에 몸을 파묻었지만 여전히 마음은 기우뚱기우뚱 흔들리고 있었다. 윤오의 손이 차 문고리로 향했다가 멀어지길 반복했다.

문을 열고 나간다 하더라도 이 흔들림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 기회를 틈타 도망칠 것이냐, 범신조를 쫓아갈 것이냐…. 어느 쪽이든 이전의 삶과 완전히 달라질 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다온이 돌아왔다. 그는 가뿐하게 운전석에 타선 갸름하게 접히는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윤오에게 물었다.

“이만 갈까요?”

순간 계속 기울던 초침이 한곳에 멈췄다.

“잠시만요.”

계속 갈피를 못 잡던 마음속 초침이 멈춘 순간, 김윤오의 입술이 홀린 듯이 멋대로 움직였다. 여기서 내려야겠다.

내려서, 범신조에게 가야 할 것 같다.

가슴을 찌르고 그 틈으로 손을 넣어 벌리는 것처럼 묵직한 통증이 이어졌다. 물리적인 통증이 아니었다. 윤오는 몇 번 헛손질을 한 끝에 차에서 내렸다.

“김윤오 씨?”

“…저 여기 남을게요.”

바깥에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찬바람이 순식간에 윤오를 파고들었다. 도망친 동안 끝이 고르지 못하게 엉망으로 잘렸던 머리카락은 그간 범신조의 집에 있던 시간이 더해져 제법 자라 볼과 콧대, 눈을 가리지 않고 찔렀다. 윤오는 금세 발갛게 어는 코끝과 입술로 재차 말했다.

“범신조한테 갈게요.”

“가신다고요?”

뒤따라 운전석에서 내린 길 실장이 차체 너머로 윤오를 보며 물었다.

“이건 메뉴처럼 바꿀 수 있는 선택이 아니에요, 김윤오 씨!”

바람이 점점 거세게 불어 소리를 쳐야만 서로에게 목소리가 가닿을 수 있었다.

윤오는 자문했다. 어쩌면, 아무것도 모르고 앞으로 일어날 일이 뭔지 상상도 못 하기 때문에 이렇게 무모하게 구는 걸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이 일이 앞으로 모든 걸 바꿀 수도 있을 만큼 중요하다는 걸 인지하지 못해서 이렇게 막무가내인 걸 수도 있다고.

하지만 모든 자문 끝에는 결국 하나의 대답이 남았다. 이대로 길다온과 같은 차를 타고 집에 돌아간다면 돌이킬 수 없이 후회하리라는.

그리고 그 후회가 어떤 것일지는, 놀랍게도 제가 이미 겪어봤던 것처럼 아주 명료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

“괜찮아요.”

윤오가 덜덜 떨면서 말했다.

“남을게요.”

몹시 추워 당장이라도 눈보라가 흩날릴 것 같으면서 아무것도 내리지 않고 입술만 내리 바짝바짝 마르는 건조한 날씨. 밤하늘은 암적색으로 회오리치고, 빌딩 사이사이로 찢긴 바람은 빽빽한 침엽수를 지나다가 그 이파리 모양대로 날카롭게 변한 것처럼 윤오를 때렸다.

물론 매년 겪는 겨울이라지만 지금은 무언가 달랐다. 윤오는 지금의 제가 어떤 경계선에 선 것만 같았다. 꿈과 현실,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경계선에.

* * *

“아직도 마음 안 바뀌셨어요?”

바뀌기보다 오히려 단단해졌다. 윤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길다온만 흐음, 하고 나직이 웃으며 윤오를 가늠하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 헷갈린다. 이 사람은 정말로 범신조의 행복을 바라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행복하길 바란단 말을 하진 않았었다. 분명 반성까지 했는데도 윤오는 여전히 그가 조금 거북하다. 속내를 읽을 수 없는 의뭉스러운 눈웃음 때문에 더욱 그럴지도 몰랐다.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점점 높아졌다. 그 숫자가 체온인 것처럼 윤오도 점점 더워졌다. 그러다 기가 막히게도 38층, 열로 따져도 고열 초입으로 들어갈 즈음이 되자 멈췄다.

“여기가 마지막입니다. 여기서 결정해야 해요.”

“제가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윤오가 길다온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작은 키로 살아오지 않았는데 길다온도 범신조도 워낙 장신이라 생전 안 해 본 고개 들기를 그들 앞에선 참 많이 하게 된다.

“정말로 대표님을 위해서라면 여기서 저를 속여서라도 들여보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윤오의 질문에 그는 가만히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시작한 순간, 길다온이 커다란 손으로 턱 잡았다. 움직임이 순식간에 멈췄다가 다시 열렸다. 놀라서인지 그 순간이 다소 공포스러웠다.

“그러네요.”

길다온이 곧 수긍했다. 이번엔 웃지 않았다.

“그러게요.”

중얼거린 그가 앞장섰다.

복도엔 문이 두 개밖에 없었다. 그 말은 이 큰 건물의 한 층을 룸 두 개가 나눠 쓰고 있단 말이었다. 지독하게 사치스러웠다.

“맞은편 방은 사람이 없습니다. 금인이 완전히 러트에 돌입하면 주변을 비워두는 게 상식이라서요. 그게 상위 포식자에 가까울수록 범위는 더 넓어지죠.”

“…….”

“김윤오 씨가 들어가야 하는 곳은 바로 그런 곳입니다. 주변을 비워둬야 하는 곳.”

“저니까, 저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잖아요.”

윤오는 정말로 맹랑했다. 겁이 없는 건 아니었다. 분명히 두려워하고 망설이지만, 일단 결정을 내리고 상황을 받아들이면 순식간에 차분해졌다. 스물셋의 나이로 갖추기 힘든 침착함이었다.

마치 차가운 얼음 같았다. 깨지기 쉬운 살얼음이나 서리가 아니라, 한번 얼어붙으면 봄이 되고서도 아주 오래도록 천천히 녹는 두꺼운 얼음.

그러나 그런 윤오의 속도 이번만큼은 평소와 같지 않았다. 일단 문 너머로도 느껴지는 짙은 체향 때문에 그랬다. 일렁이는 열기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제게만 느껴지는 건지 아니면 길다온이 정말로 뜯긴 존재라 그런지 윤오만 버티기 힘들어했다.

“이제 제가 알아서 할게요.”

“정말요?”

“아니면 뭐, 조언이라도 해 주시려구요?”

초조하고 긴장된 나머지 윤오의 대꾸가 다소 뾰족하게 나갔다. 그래도 길다온의 반응은 침착했다.

“김윤오 씨, 저도 범신조 대표님이 러트 때 치인을 만나면 어디까지 가는지 모릅니다.”

“짝인 치인이요?”

“아니요. 치인이요.”

“…….”

“지금까지 치인 없이 보내신 분이에요. 어쭙잖은 각오로는….”

“어쭙잖은 각오예요.”

윤오는 팔로 몸을 감싸고 아래로 주저앉지 않기 위해 버티며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모두 대단한 각오로 결정을 내리는 건 아니고, 저는 그런 대단한 각오를 할 만큼 이걸 깊게 생각할 시간도 없었어요. 그래서 어쭙잖은 각오로 어리단 거 하나 믿고 덤벼들 생각이니까, 이만 가 보세요.”

“…….”

“진짜로 후회해서 뛰쳐나와도 어쩔 수 없게.”

순간 윤오는 저 사람이 자신을 노려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고개를 숙였기 때문에 확인할 수는 없었다.

곧 길 실장이 엘리베이터에 타는 기척이 느껴졌다. 문이 닫히고, 느리고도 부드럽게 도르래가 움직인 후, 윤오가 초인종을 눌렀다.

처음에는 반응이 없었다. 엄습하는 불안감에 초인종을 거푸 눌렀다. 안에서 혈압이 너무 높아져 뇌졸중이라도 온 게 아닌가 하는 이상하게 구체적인 상상이 시작됐다.

그럼 안 됐다. 여기서 범신조가 죽어선 안 됐다. 아직 그를 이용하지도 못했다. 이용해서, 설령 그가 없어지는 날이 오더라도 가족에게 돌아갈 필요 없이 홀로 살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그것 말고도 범신조를 만나서….

“…….”

문이 열리고 나서야 초인종을 누를 때마다 뇌까린 모든 말이 자기변명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윤오는 그저 범신조를 보고 싶었다. 발정기가 온 범신조가 허튼 생각하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그를 믿지 못하니까 다른 치인이나 다른 금인이 이 사람에게 끌려 오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그만큼 범신조는 위험했고, 위험했기에 탐낼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역시 범신조에게 끌리는 멍청이 중 하나였다. 이제는 인정해야만 했다.

체향이 노도처럼 밀려왔다. 거센 파도가 되어서 윤오를 삼켰다. 푹 절여진 것처럼 사지가 묵직했다. 공기는 끈끈했고 숨쉬기 버거웠다. 모든 것이 밀도 높은 젤리 같았다.

특히 범신조의 시선. 노란색의 이채가 감도는 시선은 침엽수 안에서 윤오를 노려보던 꿈속의 그 장면과 똑같았다.

“…….”

팽팽한 침묵이 흘렀다. 1년, 10년의 시간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고작 2초나 흘렀을까. 범신조는 문고리를 부술 것처럼 잡았다. 그러곤 깊게 갈라져 바닥을 기듯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미쳤어?”

윤오는 시야 너머로 방금 전 엘리베이터 안에서 봤던 숫자가 아른대는 듯했다. 38에 멈췄던 빨간색 숫자가 점점 더 올라간다. 끝도 없이 상승하고, 윤오도 덩달아 점점 더 뜨거워졌다. 땀이 흐른 건지 다리 사이가 촉촉해졌다.

그것조차 자각하지 못한 윤오는 당장이라도 범신조를 당기고 때리고 할퀴고 꼬집고 뜯고, 끝내는 삼키고 싶은 욕구를 삼키며 중얼거렸다.

“…제정신은 아니죠.”

이제 5초의 시간이 흘렀다. 파도는 덮친 것을 끌고 심해로 들어간다. 높이만큼 센 힘이었다. 윤오의 온몸을 삼킬 정도로 높았던 파도니 끌어들이는 힘도 당연히 저항할 수 없을 만큼 셀 터였다.

범신조가 자신의 팔뚝을 잡았을 때, 윤오는 그곳부터 녹아 점액질로 변한다고 생각했다. 대번에 무릎이 풀리고 저항할 힘은 완전히 사라졌다.

애초에 저항할 생각은 없었다. 이곳은 제 발로 온 것이다. 잡아먹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범신조를 김윤오가 삼키기 위해서.

* * *

바닥에는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고, 조도가 낮은 조명이 켜져서 방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지만 손님 둘 중 이것에 관심이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신조는 윤오의 입가에 엄지를 걸어 당겼다. 아프지 않게 벌린 틈으로 뒤엉키는 혀가 보였다. 숨이 막혀 질식할 것만 같으면서도 밀어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신조가 몸을 아래로 누를 때마다 맞닿은 사타구니에서 열이 피어올랐고, 단단하게 짓누르는 것에 허리가 떨리도록 느꼈다. 맥없이 사정해 버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속옷 안쪽이 젖었다. 결국 윤오는 신조가 바지를 벗기려 할 때 손으로 막고 말았다.

“따, 땀이 많이 난 거 같아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한여름에도 땀을 많이 흘리지 않는데 무슨 일인가 싶었다.

하지만 신조는 알았다. 이건 땀이 아니었다. 정액도 아니었다. 윤오의 밀부 사이에서 축축한 것이 흐르고 있었다. 말하면 비참해할 수도 있고 무서워할 수도 있고 둘 다일 수도 있다. 그래서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모르는 척이라기 보단, 말할 생각이 들지 않은 게 더 맞았다. 땀이어도 상관없었다.

짙은 체향이 쏟아졌다. 몸을 섞을 때마다 너에게서 나는 향이 내 것인지 아니면 네 것인지도 구별이 되지 않았다.

“상관없어.”

으르렁댄 신조가 바지를 벗겼다. 젖은 속옷까지 내던졌다. 그러고는 단번에 윤오의 오금을 잡고 위로 훅 밀었다. 갑자기 엉덩이뿐 아니라 밀부까지 고스란히 드러내게 되어 윤오의 얼굴이 더할 수 없게 붉어졌다. 수치로 얼룩진 와중에 수치도 때론 흥분이 될 수 있다는 걸 체감하고 있었다.

지금 윤오에겐 호흡마저도 은근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또래보다 적었던 성적 호기심, 가출 이후 머물렀던 나이트에서 겪은 일로 단단히 걸어 잠근 성욕, 그 모든 것이 범신조의 체향에 설탕물이 되어 녹아들고 있었다. 물엿처럼 흐물거리는 아래를 집요하게 바라보는 범신조의 동공이 어쩐지 세로로 길쭉해지는 것 같다. 윤오는 공포심에 뒤를 움찔 조였다.

“하….”

나직이 감탄한 신조가 모여드는 볼깃살을 엄지로 꽉 잡아 벌렸다. 그러고는 젖어 반들거리는 입구를 보고 욕을 짓씹었다. 아래가 터질 것만 같았다. 얼마나 흥분했는지 아랫배의 피부마저 당기는 기분이었다.

만약 둘 다 제정신인 상태였다면 조금 달랐을 거다. 적어도 범신조는 행동하기 전에 한 번 묻기라도 했을 거다. 일단은 물었을 거다. 하지만 그럴 이성 같은 건 진작에 휘발되었다. 러트에 돌입하고 있다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게다가 앞에는 저와 마찬가지로 헐떡거리며 열에 들떠 어쭙잖게 발정기에 휘말리고 있는 짝이 있었다. 잘 차려진 만찬? 개소리였다. 김윤오가 정말로 도망쳤어야 했던 것은 그 모임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범신조는 고개를 숙여 윤오의 젖은 입구에 얼굴을 묻었다.

“하으…! 무슨, 아! 하지, 하지, 마!”

카펫에 몸을 비비적거리고 있던 윤오마저도 잠시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범신조의 우뚝한 코가 회음을 짓누르고 그의 두툼한 혀가 입구를 쓸었다.

“흐으으…!”

차라리 삽입 먼저 했다면 울지는 않았을 텐데, 자신이 받게 되리라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애무를 받게 되자 절로 울음이 터졌다. 격하게 솟은 수치심은 윤오가 그어둔 결벽적인 선을 훼손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윤오는 지독하게 흥분하고 있었다. 신조가 밀어 올린 무릎이 가슴에 닿을 것 같았다. 덕분에 눈만 뜨면 보이는 발끝이 자꾸만 앞으로 뻗어졌다. 발바닥에 아치가 그려지고 윤오의 아랫배가 움찔거렸다. 그럴 때마다 아래에서 물이 나왔다.

“시팔, 물이 왜 이렇게 많아.”

범신조가 고개를 기울여 팔뚝으로 콧잔등을 문질렀다. 그의 초점은 이미 나가 있었다.

잠깐 떨어진 사이 윤오가 서둘러 몸을 옆으로 돌렸다. 그 거센 움직임에 신조의 머리가 윤오의 다리에 맞았다. 아픔은커녕 제게 등을 보이고 멀어진단 사실만이 범신조의 뒷골을 후려쳤다.

도망은 볼품없었다. 시도만 좋았고 결과는 나빴다. 신조는 윤오의 발목을 잡고 헝겊 인형처럼 당겼다. 아래로 끌려 내려오며 카펫에 쓸린 윤오의 자지 끄트머리는 잔뜩 충혈되고 빳빳하게 서선 경련했다. 그러나 아래를 후비고 올라오는 절정에도 나오는 건 없었다. 윤오는 해소되지 않는 쾌감에 눈을 뜨며 몸부림쳤다.

사실은 이것이 주 대표가 물려준 것의 부작용이었다. 페로몬을 느끼는 기관을 조금 마비시키는 대신 그것과 이어진 쾌감 역시 틀어막는다. 잔뜩 태운 게 아니니 금방 풀리겠지만, 상황을 모르는 윤오는 패닉에 빠졌다.

그러나 패닉보다 무서운 건 꺼질 기세가 보이지 않는 열기였다.

“자, 잠깐, 힉. 아, 나올 것, 나오지가….”

“내가 준 거 말고 뭘 먹었어, 또.”

눈을 뗄 수가 없게 만든다며 그가 욕설을 짓씹었다. 어디서 누가 준 걸 경계심도 없이 먹었나 캐물어야 마땅하고, 대답에 따라 벌을 주어야만 했다. 그게 어린 짝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는 방법 아니겠나.

머릿속에서는 이미 합리화가 진행되었다. 이제 그의 이성은 자신이 저지르는 일들에 변명거리를 부여하는 데만 쓰일 것이다. 그 정도로 윤오를 기다려 줄 여유가 없는 범신조가 윤오의 골반을 잡고 들어 올렸다.

“네 발로 왔잖아.”

뇌까리는 목소리가 몽롱했다. 윤오는 카펫을 움켜쥐었다.

“물 많아서 좋아.”

낮게 중얼거린 범신조가 아주 질 나쁘게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윤오의 입구에 얼굴을 처박았다. 이번에는 혀가 입구에서만 노닐지 않고 안으로 들어왔다.

고작 끄트머리가 들어왔을 뿐인데 좀전의 끝이 개운치 않았던 절정이 이어져 윤오의 온몸을 떨게 했다. 차라리 사정했더라면 조금 나았을 거다. 하지만 열기는 느리고 꾸준하게 자꾸자꾸만 더 올라갔다.

“흐으, 흐으. 으. 아으….”

턱에 힘이 빠져 연신 입술이 벌어졌다. 윤오의 엉덩이가 내려오려 할 때마다 범신조는 골반이며 둔부며 우악스럽게 감싸 쥐었다. 손자국이 멍이 되어 남을 것처럼 강한 손아귀였다.

그리고 윤오는 하나를 더 배웠다. 때론 수치뿐만 아니라 통증도 쾌감이 될 수 있다. 물론 그건 윤오가 처음 겪는, 그리고 처음 겪기에 너무 강렬한 발정기의 초입을 밟고 있어서 그럴 테지만…. 제정신이 아닌 범신조는 그걸 가르쳐 주지 않았고, 윤오 역시 이게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느끼는 건 다른 것뿐이었다.

카펫에 얼굴의 반이 파묻힌 윤오의 눈동자가 탁했다. 그의 성기는 애매하게 발기한 상태였다. 뒤로 오는 끝없는 자극 때문에 완전히 가라앉지 못했고, 막 절정에 이른 터라 또 완전히 서지 못한 상태였다.

범신조가 다시 젖은 얼굴을 떼어냈다. 혀로 축축한 입술을 훑고 티셔츠를 벗었다. 함부로 벗어 잔뜩 구겨진 것으로 얼굴을 닦아내고 저 멀리 던졌다. 그러곤 윤오의 뒤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아프면….”

그가 거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프면… 시팔, 어떡하지?”

그러곤 웃었다. 미소라고 할 수도 없고 웃음이라고 하기에도 괴기스러웠다. 아주 사납고 육욕적이었다. 아파도 멈출 수가 없다는 의미였다.

“아, 그래. 아프면 나중에 날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해….”

지금은 안 돼, 지금은 말고…. 속삭이는 소리가 다디달다. 하지만 뒤로 들어오는 손가락은 그렇지 못했다. 범신조는 손가락도 굵고 길었다. 그것이 들어와 안을 벌렸다.

입구는 혀로 풀었지만 안은 여전히 빠듯하고 좁았다. 너무 좁아서 이대로 들어가면 터지겠다 싶으면서도 당장 넣고 싶었다.

“다시는 이렇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범신조의 중얼거림은 윤오에게까지 닿지 않았다. 손가락이 들어와 여기저기를 누르자 윤오가 허리를 들썩였다. 바라는 게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나오는 서툰 몸짓이었다.

더 깊이, 더 안쪽까지 들어오면 좋겠다. 그 역시 이성이 뭉개졌다. 더 안쪽인데 왜 바깥에서 미적거리나 싶어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카펫에 파묻힌 입가로 침이 흘렀다. 애간장이 녹았다. 발가락은 조금 전과 다르게 허공이 아니라 카펫을 마구 밀어냈다.

“조, 좀 더… 흐, 안쪽….”

재촉하는 목소리에 짜증이 짙게 묻어났다. 신조에겐 다행인 일이었다. 점점 대화가 없어졌다. 애초에 대화라고 할 수도 없었다. 서로 혼잣말을 하는 것에 불과했지.

신조가 지퍼를 내렸다. 내내 갇혀 있던 것이 밖으로 나왔다. 오래 참느라 그의 것도 앞이 젖어 있었다.

만약 발정기가 아니었다면…. 숱하게 반복한 가정. 가정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무력한 상상에 불과했다. 그래도 가정한다면, 범신조는 절대로 이 상태로 밀어 넣지 않았을 거다.

윤오의 둔부를 한껏 벌리고, 뻐끔거리고 있지만 여전히 좁은 입구로 끄트머리를 갖다 댔다. 피부로 느껴지는 체향이라는 것이 윤오의 가장 여린 부분을 흠뻑 적셨다. 아랫배가 절로 조여들며 안에서 또 물이 나왔다.

“흐으, 흐….”

신조는 단번에 처박으려 했다. 그게 본능이었다. 하지만 혀로 아무리 풀어도 입구는 여전히 좁았고 안은 더더욱 빠듯했다. 물이 나와도 소용없었다. 범신조도 윤오도 고통에 얼굴을 구겼다.

“아, 아파. 아! 아파… 흐, 하욱.”

밑에서 밀고 올라오는 게 내장을 다 밀어내는 것만 같아서 윤오는 몸을 웅크렸다. 범신조는 욕을 뇌까리며 자지를 빼냈다. 이대로 넣어선 다친다는 이성이 아니라 좀 더 벌려야 된다는 본능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게다가 바닥에선 오래 처박기 힘들 듯싶었다.

갑자기 가슴으로 쑥 들어오는 손에 벌렁 들린 윤오는 그대로 침대에 내던져졌다. 침대는 무척 푹신했다.

채 오므리지 못한 다리 사이로 범신조가 무릎을 꿇은 채 자리를 잡았다. 이제야 노골적으로 보이는 그의 하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평소라면 질겁하고 징그러워했을 윤오는 몽롱한 시선으로 신조의 자지를 응시했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 오물거리는 입술로 거칠게 옷자락이 들어왔다. 신조가 윤오의 티셔츠 자락을 끌어 올려 물린 것이다. 그리고 그 역시 탁해진 시선으로 윤오를 앞에 대고 수음하기 시작했다. 몸을 탐하는 시선이 노골적이었다. 살구색 젖판이나 선홍빛 자지 같은 건 특히. 먹음직하게 발개진 목덜미는 말할 것도 없었다.

옆으로 길게 빠지다가 돌연 위로 살짝 꺾어 빠지는 눈꼬리. 그런 모든 것을 자세히 볼수록 범신조는 흥분했고, 비참해졌다. 이성을 잃는 과정 속에서도 결코 지울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 죄책감과 그때의 기억 때문에 범신조는 비참하게 흥분했고, 사람을 앞에 두고 자존심도 없이 자위했다. 그것이 그의 머리꼭지를 가지고 놀았다. 윤오가 수치심도 흥분을 돋우는 하나의 요소가 될 수 있단 걸 깨달은 것처럼, 범신조도 비참함이 흥분을 높일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것이 평소보다 이르게 절정에 올랐다. 기둥에 융기한 핏줄이 움찔거리고 힘을 주지 않아도 선명한 근육들이 더 깊게 패였다.

“크… 읏….”

신조의 것은 양이 많고 진했다. 게다가 기분 탓인지 뜨겁기까지 했다. 그것이 기운차게 튀어 올라 윤오의 가슴, 목덜미, 야하게 생긴 입꼬리까지 닿았다. 체향이 더욱 진해졌다. 피부에 닿은 곳부터 정액이 아니라 불티가 튄 것처럼 몸이 뜨거워졌다. 윤오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아직 사정 중이었다. 범신조는 그것을 손바닥에 받아 그대로 자지에 문질렀다. 번들번들해진 것을 윤오의 입구에 다시 가져다 댔다. 아주 조금 작아졌지만, 조금 전보다는 나았다.

“안에다 쌀 거야.”

맛이 간 목소리로 신조가 경고했다.

“여러 번, 며칠 동안 쌀 텐데, 그러다 보면 들어가지 않겠어?”

그러며 단단한 손끝으로 윤오의 배 어드메를 꾹 눌렀다. 윤오의 몸이 튀고 혓바닥이 보이며 덩달아 물고 있던 옷자락이 조금 밀려 내려갔다.

“이상한, 이상한 소리 좀….”

“이게 이상하다고 생각해?”

순진한 소리에 웃음이 나왔다. 얼마든지 마음대로 생각하게 두기로 했다. 겁을 먹어도 상관없었다. 윤오는 제 발로 이곳에 왔고 범신조는 아주 오래 참았다. 아주, 아주, 아주 많이, 아주 오래도록.

윤오가 자신을 삼키겠단 알량하고 깜찍한 포부를 품고 왔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얼마든지 삼켜질 수 있다. 다만 김윤오는 자신을 다 먹어 치워야만 할 것이다. 전부 먹고 소화시킬 때까지 놓아주지 않을 셈이었다.

그러나 일단은 자지를 다 삼키지도 못하는 게 현실이었다.

“숨 막혀… 그만 넣어….”

아직 머리밖에 못 넣었는데 그만 넣으라고 한다. 범신조는 탁한 눈으로 접합부를 보다가 길게 침을 늘어뜨렸다. 떨어진 타액을 입구와 기둥에 발라도 고작 1cm가 더 들어갔을까 싶었다.

견디기가 힘들었다. 윤오는 발바닥으로 연신 시트를 밀었다. 온몸에 가시가 돋는 것 같았다. 참을 수 없는 열기에 제 손등을 씹기 시작했다. 범신조가 허리를 물렸다가 밀어 넣었다. 여전히 그 깊이였다.

“한 번 싸야겠어.”

헐떡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윤오에게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젖꼭지가 빳빳하게 서고 젖판이 무척 예민해졌다. 마찰하는 사타구니도 마찬가지였다. 가시가 아니라 깃털이 돋는 거였나? 자극이라곤 조금도 닿지 않고 있는 성기가 간지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윤오는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신음을 흘리며 제 자지로 손을 뻗었다.

“간지러워, 힉. 간, 아, 아으… 간지러….”

“안 돼.”

범신조가 윤오의 손을 낚아챘다. 그러곤 잡은 손이 마구 버둥대자 입에 넣고 굴렸다. 손끝이 입천장이나 볼을 긁어도 개의치 않았다.

“빨리 싸면 안 돼….”

너무 일찍 지치면 안 됐다. 범신조는 섣부르게 안을 찔렀다.

처음에는 답답하고 거북하기만 했던 입구가 점점 더 간지러워지고 점점 더 예민해졌다. 한껏 벌어진 입구에 거웃이 닿기라도 하면 얼마나 더 고통스럽고 좋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하, ─.”

그 순간 범신조가 점점 더 허릿짓을 가파르게 하며 어떤 이름을 불렀다. 소리로나 글자로나 자신의 이름이 아닌데도 윤오는 열에 들떠 대답했다. 으응, 응, 하는 소리가 신음인지 대답인지 모르겠으나 범신조는 윤오의 턱을 쥐고 혀를 빼 핥으며 재촉했다.

“지금 대답, 헉, 한 거야? 어?”

제대로 넣지도 못하고 대답해 달라고 애원하는 꼴이 아주 볼썽사나웠다. 그를 아는 누구라도 이 모습을 보면 기함할 거다. 그런데도 범신조는 이 상황을 마다하지 않았다.

“─. 지금 대답한 거야…?”

“하으, 빨리, 아. 빨리 싸…. 흐, 간지러워.”

윤오가 신조의 등을 마구 할퀴었다. 자신 쪽으로 당기려는 손길이 그렇게 나갔다. 신조의 등에 빨간 자국이 남았다. 그 자극에 범신조는 목빗근을 세우며 나직이 이를 갈았다. 그리고 바라던 대로 윤오의 안에 사정했다.

“흐으…! 으…!”

양도 많고 진해서 아주 많이 불편했다. 심지어 얕은 곳에 싸지르는 탓에 빠듯하게 벌어진 입구와 그곳을 차지한 범신조의 자지 틈 사이로 조금 새어 나오기까지 했다. 벌써 두 번째 사정인데도 박혀 있는 자지는 거의 변함이 없이 단단하고 두꺼웠다.

“한 번.”

범신조가 으르렁거렸다. 고작 한 번 쌌다는 거다. 윤오는 아직 사정하지도 않았는데도 탈력감을 느꼈다.

“깊숙하게 넣을 거야. 네 안에.”

몇 번이나 말하는 건지. 귀에 인이 박이는 것 같았다. 아, 반응하라는 건가? 지친 와중에도 온몸이 따끔거릴 정도로 흥분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아서 윤오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러자 범신조가 끄트머리를 더욱 빼고 입구에서 슬겅슬겅 비비적대다가 푸욱 소리가 나도록 들어왔다.

눈이 절로 홉떠졌다. 입이 벌어지고 숨 막히는 꺽꺽 소리가 났다.

“시팔, 한 번으론 부족했네.”

범신조가 상스럽게 중얼거렸다. 여전히 다 못 넣고 얼마쯤 남았지만 이쯤에서 포기해야 할 성싶었다. 김윤오와 같은 침대를 쓰려면 자기 전에 세 번은 혼자 빼고 누워야겠다.

“숨 쉬어.”

윤오와 붙어 있는 시간이 늘어나며 접촉하는 수위도 짙어지는 만큼, 신조의 발정기는 돌이킬 수 없이 심화하기 전에 천천히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성만 조금 돌아오는 거지 몸의 흥분이 가신다는 건 아니었다. 몸은 짐승이고 정신머리는 사람이었다. 맞지 않는 둘 사이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은 모조리 윤오가 감당해야 할 거다.

신조가 윤오의 혀를 꾹 눌렀다. 숨 쉬어…. 부드럽게 읊조려도 여간 힘들지 않은 모양이다. 범신조는 체향을 한껏 풀었다. 그것은 부드럽게 윤오의 가슴을 두드리고 목을 타고 올라와서 입 속으로 들어가 기도를 열었다.

뒤따르듯 신조가 윤오에게 입 맞췄다. 천천히 호흡을 되찾는 속도에 맞추어 느리게 허릿짓을 시작했다. 윤오는 위로도 아래로도 범신조를 삼켜야만 했다.

“우으, 웁. 응, 으응….”

맞붙은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렀다. 신조는 윤오의 겨드랑이 아래로 양팔을 넣어 꽉 껴안았다. 맞붙은 상체 사이에서 윤오의 오똑 선 젖꼭지가 비벼졌다. 윤오의 사타구니가 확 좁아 들며 벌벌 떨었다.

뿌리까지 들어오진 않았지만 거웃과 배가 윤오의 맨들맨들한 자지를 문질렀다. 바깥에서 느끼는 쾌감이 곧 안까지 이어졌다. 안이 경련하며 범신조의 것을 꼬옥 쥐었다. 완전히 맞붙은 채로 마찰하자 이젠 안에서조차 쾌감이 느껴졌다.

숨이 막혀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신조가 더욱 꽉 안으며 얼굴 옆을 따라서 귀밑 턱부터 귀까지 질척하게 핥았다. 감싸 안은 손으로 윤오의 머리칼을 쥔 채 가끔 두피를 문질렀다. 그곳에서부터 별이 튀는 것 같았다. 밭은 숨 때문에 윤오는 혀를 아주 살짝 뺀 채 헉헉거렸다.

“아흐흐으으으….”

곧 신조의 배가 축축하게 젖었다. 그제야 윤오도 처음으로 사정하며 절정에 이르렀다. 겨우 한 사정은 약 기운에 완전하지 못했다. 찔끔 나온 액은 진하고 음낭은 저리며 회음은 경련했다.

목마른 사람이 물 한 방울로 갈증을 해소할 리 없다. 오히려 간절함만 더해졌다. 윤오는 더, 더, 하고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더 안으로, 더 많이, 더 깊이, 더 세게….

범신조의 허릿짓이 잠깐 멈췄다가 다시 시작되었다. 몸을 바짝 붙인 채 천천히 움직이던 것도 잠시, 그는 윤오의 티셔츠를 벗겨내며 자신의 위에 앉혔다. 마주 본 채로 앉자 윤오가 고개를 마구 저었다. 이미 풀린 무릎으로 겨우 버티고 섰다.

“더 깊이는… 아, 안 돼.”

“하아, 정말? 안 돼?”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신조가 되물었다. 그 바닥에 으르렁거리는 탁음이 섞여 들렸다. 그는 당장이라도 쑤셔 넣고 싶다는 듯이 윤오의 둔부를 세게 움켜쥐고 오므렸다가 펼치길 반복했다.

“안 돼? 어?”

졸라도 안 되는 게 있다. 윤오는 달뜬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네가 좋을 방식으로만 움직여도, 안돼?”

손마디끼리 맞닿을 정도로 볼깃살째 잡아 모을 때면 절로 턱이 떨리며 신음이 마구 튀어나왔다. 그리고 입구가 공기에 노출될 정도로 다시 벌린 채 빼면 어깨가 마구 움츠러들었다. 범신조는 난잡하고 그의 기준에서만 배려가 있는 상스러운 방식으로 윤오를 탐했고, 윤오는 그 모든 방식에 쾌감을 느꼈다.

“죽을… 죽일 거야….”

죽을 것 같다고 하려다가 윤오는 죽일 거라고 말을 고쳤다. 신조는 아주 사납게 웃고는 시팔, 알았어. 하고 참았다. 물론 이 역시 그의 기준이었다.

그는 윤오를 가지고 놀았다. 말 그대로였다. 윤오가 범신조의 어깨를 잡고 겨우 버티는 동안, 그는 윤오의 둔부만 쥐고 오로지 자신의 허리 힘으로만 아래에서 위로 처박아 올렸다. 그 힘이 얼마나 세고 방향은 정확한지 윤오의 것은 채 다 서지도 못한 상태로도 사정했다.

약 기운은 몸을 섞지 않는 경우에만 도움이 되었다. 몸을 섞을 때는 도리어 방해였다. 절정은 해소되지 못하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축적되었다. 약 기운이 사라지면 결국 이게 터질 텐데 그러면 어떻게 될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몸이 산산조각 날 게 분명했다. 그리고 다시 조립되면, 다시 원래 모양으로 돌아오더라도 이전과는 결코 같지 않을 거다.

“아! 아아! 아! 아!”

그저 소리를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마구 덜컹거려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그런 와중에 범신조는 눈앞에서 흔들리는 윤오의 젖꼭지를 씹고 당겼다. 조금 전처럼 또다시 윤오의 볼깃살을 손으로 움켜쥐어 벌렸다 오므리기도 했다. 부드럽게 물고 빨 때면 손을 모아 입구를 조였고, 씹고 당길 때는 벌려서 풀어냈다. 아귀가 맞지 않는 애무에 정신이 없었다. 윤오로서는 도저히 견디기 힘든 쾌감이었다. 횟수를 매길 수 없게 자꾸 끊어서 나오는 정액은 처음보다 양이 늘고 더 연했다.

“여기서 살고 싶어.”

신조가 윤오의 귀를 씹으며 중얼거렸다. 그는 사납게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아예 일어섰다.

졸지에 허공에 뜬 윤오가 매달릴 곳은 범신조밖에 없었다. 상체를 앞으로 완전히 쏟아 껴안자 그가 윤오의 안에 제 것을 비벼댔다. 그때마다 윤오의 판판한 배가 가파르게 움찔거렸다. 연신 씹어댔던 귀는 새빨개져 톡 건드리면 터질 것 같았다. 범신조는 그대로 긴 커피 테이블로 향했다. 창문 앞에 준비된 것이었다.

위에 올라간 메모지, 펜 따위 옆에 윤오를 비스듬하게 눕혔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켜 윤오의 골반만 잡고 박아댔다. 자연스레 윤오의 한쪽 다리는 무릎을 세워 발바닥으로 테이블을 디뎠고, 한쪽 다리는 아예 테이블 옆으로 떨어졌다.

윤오는 제 골반을 쥐고 있는 범신조의 팔을 잡고 이를 꽉 다물었다. 이가 갈렸다. 지나친 쾌감에 자지가 푸르르 떨리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으으, 흣! 아, 제발, 아!”

제멋대로 흔들리다 신조의 팔을 잡지 않은 손을 뻗어 커튼을 잡았다. 커튼은 아주 두껍고 무거웠다. 그것을 잡고 버티고 버텼다. 범신조의 턱에 근육이 계단처럼 솟았다.

그가 윤오의 뒤통수를 잡고 반쯤 들어 올렸다. 배가 접히며 찔리는 방향이 바뀌었다. 긴 손가락이 윤오의 입가를 적시며 흐르는 침을 엄지로 닦아내고 윤오의 볼과 눈을 하염없이 쓸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노란빛 이채가 도는 시선은 단 한 번도 윤오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흐아… 으….”

떨리는 숨을 내뱉는 얼굴 위로 똑같이 생겼으나 분위기가 다른 얼굴이 겹쳐졌다. 독약을 삼킨 것 같은 섬뜩함이 등줄기를 내달렸다. 범신조는 황급히 제 것을 빼냈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윤오의 얼굴을 붙잡고 조금 내려 그 얼굴에 사정했다.

“흐읍…!”

윤오는 뒤늦게 눈을 감았다. 속눈썹과 코, 입술과 볼로 끈적하고 진한 액이 흘렀다. 느리게 흐르는 그것이 뭔지 생각도 하기 전에 혀로 조금 핥았다. 그리고 천천히, 멍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중얼거렸다.

“맛… 없네.”

쓰고 텁텁했다. 윤오는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체향이 농염하게 스며든 정액을 삼키니 아주 많이 지친 상태에서도 열이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범신조가 머물다 나가 벌어져 있던 입구가 움찔하며 조여들었다. 안에서 처음 싸지른 것과 윤오의 몸에서 나온 물이 섞여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하… 아으….”

그 감각에 윤오가 부르르 떨었다. 안에 든 것이 없는데도 내벽은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눈을 감고 눈썹을 아래로 기울이며 전율하는 그 섬뜩할 정도로 야한 모습을 범신조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의 목울대가 아래로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그가 고개를 양옆으로 기울였다. 덩달아 뚜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범신조의 열은 더 오르지 않았을 뿐,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러트는 이제 시작이었다.

그리고 김윤오 역시, 그가 깨닫기도 전에 짝의 영향으로 점점 발정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김윤오는 이제부터 아주 열심히 바라야 할 것이다. 범신조의 발정기보다 자신의 발정기가 더 오래 가기를.

* * *

열이란 것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자다가도 몸이 몹시 간지럽고 견디기 힘들 만큼 더워져 눈을 뜨기도 전에 다시 몸을 움직이기 일쑤였다.

엎드린 채로 시트가 구겨지든 말든 몸을 웅크리고 헐떡이다 보면 손이 뻗어 나왔다. 윤오는 그 손을 잡고 볼에 비비다가, 목덜미를 쥐게 했다가, 가슴을 어루만지게 하다가 종내에는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그 손바닥에 대고 허리를 움직이며 자위 아닌 자위를 하는 데 일말의 수치심도 느끼지 못했다. 그럴 정신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다 보면 윤오가 비비고 있던 손가락은 고리를 만들어 그곳에 윤오의 것을 걸고 남은 손가락으론 회음이나 입구를 가볍게 쓸었다. 안에 넣어달란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윤오의 아래는 상태가 좋지 못했다. 부은 것은 당연했고 쓸려서 틈틈이 연고를 발라야 했다. 아예 뚜껑을 열어둔 채로 주변에 늘어놓고 젤처럼 펴 발랐다. 만류하며 입구에 발라주면 그 자극조차 견디지 못한 윤오가 아예 상대의 위에 올라타서 허겁지겁 제 엉덩이 밑에 있는 것을 쥐어 입구로 가져가곤 했다. 그럼 상대는 윤오의 탁하게 흐려진 얼굴과 축축하게 젖은 입술을 어루만지다가 돌연 볼을 치며 물었다.

‘내가 누구야.’

김윤오는 대답하지 못했다. 원하는 대답이 돌아올 때까지 집요하게 물었다. 상처도 멍도 남기지 않지만, 적당히 아프고 적당히 수치스러움을 주는 대단히 능숙한 손찌검이었다.

‘내가 누구야, 김윤오.’

그제야 윤오는 피부 밑바닥을 기어 다니는 간지러움에 고통스러워하며 울상이 되곤 했다. 그리고 겨우겨우 대답했다.

‘범….’

‘…….’

‘너는… 범, 신조….’

그러면 드디어 상대는 기다리던 것을 쑤셔 넣어 주었다. 이제 윤오의 몸은 완전히 풀려 삽입에 맞춰 반응했다. 허리를 들썩이고 가슴을 활짝 내밀며 부르르 떨었다. 연고는 외피에서는 괜찮았는데 안으로 말려들어 가면 간지러움을 유발했다. 윤오는 발정 난 어린 짐승처럼 허리를 찧어가며 울었다.

범신조는 퉁퉁 부은 젖꼭지를 혀로 핥아 주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 혀가 부드럽지 않고 무척 까칠했다. 아파서 밀어내면 입구에 손가락을 지분대다가 팽팽하게 늘어난 살점을 걸어 당겼다. 그럼 윤오는 다시 울면서, 여전히 허리를 찧으면서, 범신조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상대도 상황이 안 좋은 건 마찬가지였다.

윤오가 기진맥진해 쓰러져 있으면 누군가가 물을 넘기게 하고, 물이 안 되면 주스라도 삼키게 했다. 그러고는 욕조로 데려가선 온수로 부드럽게, 이내 참을 수 없다는 듯 양다리를 욕조에 걸게 했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는 까져서 쓰린 자지와 거듭된 마찰에 빨갛게 익은 허벅지 안쪽이 노골적으로 드러났고, 그 아래론 범신조의 단단한 허벅지가 보였다. 그는 허벅지로 윤오를 치켜올린 뒤 삽입했다. 다정하게 어르고 챙긴 뒤에는 제 욕심을 채웠다.

정신을 못 차리고 엎드려 있을 때면 조용히 다가와 마치 제집처럼 파고들 때도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나, 처음 몸을 겹친 그 순간에 비해 윤오는 범신조의 몸에 지나치게 익숙해져 있었다.

산산이 부수어졌다가 녹여서 엉망이 되도록 섞고 다시 조형한 것 같다. 이전과 이후는 분명 달랐다. 윤오는 변해 있었다.

윤오는 몰랐지만, 학교를 다니는 내내 그에겐 늘 그를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었고, 나이트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저 애는 따로 못 부르냐며 선배 삐끼들에게 돈을 꽂아주던 누님들이 있었다. 동성에겐 묘한 패배감과 질투, 그리고 선망을 느끼게 했으며 이성에겐 늘 매력이 있던 김윤오는 완전히 흐무러져 변했다.

어느 순간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언제까지 갈지 모를 이성이긴 했다. 윤오는 퉁퉁 부은 눈꺼풀과 떼꾼해진 볼을 문지르다가 겨우 바닥에 발을 내디뎠다.

몸살을 심하게 앓는 것처럼 근육통이 온몸에 찌들어 있었다. 무릎은 후들거렸고 허벅지 안쪽은 심한 운동을 한 이후처럼 지끈거렸다. 이리저리 접히고 눌렸던 허벅지도 말도 못 했다. 하지만 가장 처참한 건 피부 상태였다. 꼬집히고 빨리고 씹힌 피부는 너덜거린다고 해도 무방했다.

지팡이가 필요한 사람처럼 휘청대면서 걷던 윤오는 발끝에 무엇인가 걸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아….”

가운이었다. 입은 기억도 없는 가운이 사용한 흔적만 남긴 채 바닥에 있었다.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바닥은 윤오와 신조가 벗어놓은 허물들로 어지러웠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아래로 떨어진 펜과 메모지, 깨지지 않고 용케 바닥에 떨어진 컵과 어쩐지 기울어진 커튼…. 민망해할 것도 없었다. 왜 그렇게 된 건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으니.

윤오는 오로지 심한 갈증만을 느꼈다. 가운을 주워 입는 내내 손이 떨려 죽을 노릇이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아 간신히 헐거운 매듭을 지은 뒤 구비된 바로 향했다. 바에는 술과 음료 등이 있었지만 오로지 물이면 충분했다.

옆으로 넘어져 있는 컵을 세우고 물을 따르는데 손이 덜덜 떨리는 게 보였다. 손뿐만이 아니었다. 팔, 다리, 심지어 입술도 떨렸다. 온몸이 젖은 수건이 되어 쭉 짜였다가 놓인 것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마실 때도 어린애처럼 두 손으로 컵을 쥐고 마셔야만 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목도 아주 많이 부어서 여러 번에 나눠 마셔야 했다. 물이 넘어가니 살 것 같은데 목은 아주 따가웠다. 다 마시고도 도저히 움직일 엄두가 안 나, 한참을 테이블에 양손을 짚고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그런 그의 뒤로 축축하게 젖은 몸이 다가왔다. 그것은 아주 단단해서 여간해선 흠집도 나지 않을 것 같은 신체였다. 열이 가라앉았는데도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더 뜨거운 체온 때문에 어깨 같은 곳에서 흐리게 김이 났다.

그는 머리를 털던 수건을 떨어뜨리고 김윤오의 뒤로 가 팔을 뻗었다. 바 테이블을 짚고 겨우 버티고 선 윤오의 양손 옆에 그보다 더 큰 손이 자리를 잡았다. 가볍게 테이블 모서리를 움켜쥔 것만으로도 힘줄이 섰다. 윤오는 아, 하고 신음했다. 보드라운 가운 너머로 두툼한 윤곽이 느껴졌다. 입술을 물었다가 통증이 느껴져 바로 놓았다.

범신조가 무릎으로 가운을 들추고 손으로 밑자락을 들어 올렸다. 헐겁게 묶은 매듭은 손을 댈 필요도 없이 풀렸다. 윤오의 상체가 앞으로 무너지고, 그는 발기한 것을 윤오의 엉덩이골에 비스듬히 갖다 대며 느리게 허릿짓을 했다.

몸에 묻은 물이 순식간에 미지근해졌다. 엄지로 둔부의 살을 지그시 누르니 빨갛게 부은 입구가 보인다. 애처로운 한편 가학적인 욕정이 솟았다. 신조는 제 것을 입구에 지그시 눌렀다.

고작 끄트머리만 댔을 뿐이었다. 그런데 입구에 닿기 무섭게 촉촉하고 뜨거운 안이 빨아들이며 안쪽으로 재촉하는 것만 같았다. 눈앞이 아찔해졌다. 첫 경험을 하는 것처럼 앞이 부옇게 바랬다.

“흐… 아, 직. 아직도… 발정… 기, 하…!”

윤오가 묻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알았다. 범신조는 젖은 얼굴을 윤오의 뺨에 비비며 허리를 꾸욱 눌렀다. 뿌리까지 들어가지 않던 건 벌써 엊그제 일이었다. 이제 윤오의 안쪽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문까지도 범신조는 열어젖혀 그 너머까지 범할 수 있었고 이미 범했다.

그 꺾인 부분을 누르면 윤오는 발끝을 쭉 펼치고 몸을 벌벌 떨었다. 신음도 내지 못하고 참았다. 앞으로도 질질 우는 건 물론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들어가면 신조 자신도 역시 엄청난 쾌감에 빠졌다.

“끝났어.”

신조 역시 거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 그런데 왜… 흐….”

“난 너만 보면 발기하거든.”

일말의 거짓도 없었다. 신조는 종을 치면 침을 흘리도록 학습된 개처럼 윤오를 보면 흥분했다. 윤오가 앞으로 팔을 뻗으며 허우적댔다. 덩달아 물이 쏟아지고 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지막 잔이었다. 이제는 정말로 룸 청소를 부탁해야 했다.

하지만 일단은 그것도 나중 일이다. 이 몸과 이어지고 나면 다른 일은 아무것도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모든 것을 묻어두고만 싶다. 영영 여기에 있을 수만 있다면 다른 건 어떤 의미도 없었다. 윤오도 그랬으면 좋겠으나 과연 그럴까….

며칠 동안 이곳에 갇혀 흘레붙었는데도 초조함과 두려움이 덜컥 솟는다. 그를 떨치려 신조가 윤오의 안에 정을 때려 박듯 박았다. 윤오는 입술을 벌리고 크게 헐떡였다. 가슴이 조여들고 목에서 피 맛이 나는 것 같을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도 착실하게 흥분했다.

“흐으, 으, 아… 파. 거기, 하, 하으. 멍들… 후아, 읏! 응!”

점점 더 허릿짓이 빨라졌다. 윤오는 더는 말하려 하지 않았다. 어차피 목이 아팠다.

이제 윤오는 발기하거나 사정하지 않고도 절정에 이를 수 있단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물론 많이 울어야 했다. 그 역시 하루 이틀 정도는 발정기의 힘으로 어찌어찌 버텨봤지만 범신조를 쫓을 수는 없었다. 그간 미뤄 온 삼 년간의 섹스를 모두 해치우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발정기가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범신조가 이렇게 구니 절로 눈물이 났다.

“울지 마.”

신조가 불성실하게 위로하며 윤오의 눈물을 핥았다. 눈이 짓무르겠다.

“하으, 하! 하앗, 아. 아, 아!”

덜컹거릴 때마다 무릎이 바 테이블에 부딪혔다. 이미 엎드려서 몇 번이나 몸을 섞은 덕에 멍이 든 무릎이었다. 윤오는 신조가 턱을 잡고 돌리자마자 입술을 열고 혀를 뺐다. 이것 역시 새로 생긴 습관이었다.

그래도 신조 역시 윤오가 한계라는 걸 알아서인지 이전보다 이르게 절정에 가까워졌다. 그는 마지막이라고 되뇌며 윤오의 목을 씹었다. 윤오는 목을 길게 빼서 아프지 않은 부분으로 이를 가져가게 했다. 목은 이미 걸레짝이었다.

“느껴져? 하하… 너 지금 힘, 풀고 있잖아….”

그가 턱을 놓아 준 덕에 고개를 떨군 윤오는 팔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신조의 말은 아득히 멀게 들렸고, 이해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윤오는 뒤늦게 자신이 아래를 움찔거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밭은 숨을 쉬며 배의 힘을 풀려 하고 있다는 것 또한.

발정기 동안 쉼 없이 섹스하며 배운 또 하나는 금인의 노팅이었다. 정확히는 범신조의 노팅이었다.

처음 겪었을 때는 울었다. 아주 많이 울고 소리도 질렀다. 무서웠다. 무서운데 그보다 두려운 건, 이 비정상적인 교합에서 윤오가 심하게 느꼈다는 점이다.

처음으로 뿌리까지 들어왔을 때가 노팅을 시도하려 할 때였고, 안쪽까지 쭉 펼쳐지며 들어온 것도 노팅할 때였다. 굽이진 부분을 억지로 벌리며 안에 박힌 것이 몸집을 부풀렸을 때 윤오는 수치스럽게도 소변을 흘리고 말았다. 얼굴을 싸맨 채 소리도 내지 못하며 벌벌 떠는데, 범신조는 눈이 맛이 간 채로 허리를 움직이지 않기 위해 일말의 남은 이성을 모두 사용하고 있었다.

실수를 한 다음에는 사정했고, 사정한 이후에는 소변도 정액도 아닌 맑은 물을 쌌다. 실례한 게 아니라며 범신조가 알려줬지만, 그 어조는 조금 상스러워 위로가 되진 않았다. 윤오는 직후에 탈진했고 다시 깼을 때는 욕실이었다.

이후로도 노팅은 두어 번 더 반복되었다. 이제 윤오는 소변을 지리진 않지만 사정하지도 못했다. 고환이 텅텅 빈 게 분명했다. 마른 절정만 번개처럼 몸 전체를 지지고 있었다.

그래도 몇 번 경험하니 윤오도 나름 요령이 생겼다. 살기 위한 요령이었을 거다. 숨을 밭게 쉬며 몸을 이완하려 애썼다. 그래도 완전히 익숙해지기는 아직 요원했다. 결국 퍼들거리며 발끝과 손끝을 떨자 범신조가 윤오의 떨리는 손을 잡고 뒤로 확 당겼다.

“흐, 후으… 우….”

윤오는 떨구어진 시선으로 아랫배가 봉긋 솟은 걸 봤다. 눈물이 솟았지만 나오지 않는 걸 보니 마른 게 분명했다. 아니면 눈가가 너무 아파서 저절로 참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괴물.”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순간 범신조가 움찔했다. 그러나 너무나 찰나였던지라 윤오는 눈치채지 못했다. 신조는 손목을 돌려 윤오의 팔을 제 목에 감싸게 했다. 윤오는 반쯤 감긴 눈으로 속삭였다.

“괴물….”

당연하지만 단어의 의미 그 자체는 아니었다. 비난의 의미이자, 말 그대로 괴물처럼 지치지도 않고 해대는 것에 대해 질린다는 의미의 감정 표현이었다. 그런데 머릿속으로는 알면서도 마음으로는 아니었다. 신조는 면도칼이 가슴을 세 등분하여 그은 것처럼 아팠다.

이번에도 아름다운 통정은 아니었다. 통정이라는 말은 정을 나눈다는 의미라는데, 사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단 게, 이 지난하고 질리도록 긴 인연이 얼마나 텅 비었는지를 알려줬다.

그럼에도 범신조는 이번에도 같은 선택을 했다. 참고 김윤오를 돌려보낼 수도 있었다. 지금 하는 선택을 더 잘 생각해 봐야 한다고 어쭙잖은 조언을 해 줄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제게 기회가 오기만 하면, 그게 얼마나 비겁한 변명에 불과한지 알면서도 네발로 기며 조금이라도 핥아먹기 위해 아주 비열하게 낚아채고야 만다.

김윤오는 어린 몸이고 금인에 대한 면역이 무척 낮다. 발정기 역시 갑자기 많은 치인과 금인을 만난 데다가 자신의 발정기와 겹쳐 강제로 이끌어내진 게 분명했다.

첫 발정기는 약을 동반하며 부드럽게 넘어가야 옳았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범신조는 사흘 내내 김윤오를 범했다. 김윤오 역시 힘이 제법 세 범신조의 몸에 여기저기 상처를 남겼지만, 본인의 몰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범신조는 윤오의 아랫배를 아주 조심스럽게 쓸었다.

“미안하다.”

윤오가 멍하니 눈을 꿈뻑였다. 사과를 할 줄이야.

애초에 오지 말라고 했는데 온 건 자신이었다. 정말 들어갈 거냐고 몇 번이나 묻는 말에도 끝내 벨을 누른 것 또한 자신이었다. 괴물이란 말에 이렇게 상처를 받을 줄은 몰랐는데….

“미안해.”

그렇게 말하는 범신조의 표정이나 목소리는 너무도 생소해서, 그것을 적절히 표현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대신 윤오는 이렇게 말했다. 고작 섹스에, 이미 따먹을 거 다 따먹어 놓고 왜 이러는 거지. 게다가 합의하에 이루어진 관계였는데. 중간에는 나도 자는 당신 몸에 올라타 억지로 세우고 넣었는데….

다만 모두 속으로. 목이 아파 말을 하기가 여의치 않았고, 배 속이 빠듯해서 숨쉬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 말은 해야겠다. 윤오는 의아함에 눈썹을 구기며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거의 바람 소리였다. 새된 쇳소리가 섞였다.

“왜… 이제 와서….”

이제 와서 새삼 무슨 사과고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해야 했는데, 입술이 꾹 닫혔다. 목이 메었고 몹시 피곤했다. 윤오는 범신조의 꺼칠한 볼을 쓸려다가 말고 너무 졸리다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아직 신조의 것이 안에 남아 있었지만 이어진 채로 잠드는 것쯤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

너무 피곤해서, 꿈을 꿀 거란 확신이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과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가 지나치게 생생한 기나긴 꿈을.

윤오를 씻겼다. 따뜻한 물에 담그고 부드럽게 몸을 문지르는데도 여운 때문에 아픈지 자꾸만 몸을 웅크렸다. 안쓰러운 일이었다. 그 안쓰러운 일이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게 자괴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을 거부하지 않는 품속의 연인이 꿈만 같아 황홀하고 벅차올랐다. 이것이 꿈이라면 품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깨고 싶지 않을 만큼 중독적이었다.

그는 이 순간에야 비로소 윤오에게 완전히 속해진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범신조는 듣지 못했지만, 윤오가 이 룸의 문 앞에 섰을 때 했던 결심이 결국 이루어진 거다. 삼켜지러 온 것이 아니다. 삼키러 왔다….

오래도록 씻겨 살성뿐만 아니라 손톱도 부드럽게 말랑거렸다. 범신조는 흉 하나 없이 깨끗한 손톱을 오래도록 보았다. 뒤에서 윤오를 끌어안고 손을 쥔 채 바위에 핀 소금처럼 희고 반투명하고… 완전한 모양을 보았다.

그 위로 겹쳐 보이는 것은 피가 맺히거나 몹시 짧게 뜯겼거나 거칠게 찢어진 손톱 모양이다.

그는 이제는 그저 평범한 손톱 하나에도 감격하는 한낱 나부랭이가 되었다. 철마다 때마다 바닥을 기며 이지를 잃으며 발정기를 겪는 짐승이 되었고, 지루하며 유치하며 졸렬하기 짝이 없는 욕구와 욕망의 바닥을 적나라하게 관조해야 했다.

모든 것은 자신의 선택이었다. 모든 건 업보였다. 모든 건 바로 너 때문이다. 네 탓이다… 네 탓이야.

범신조는 끝내 눈을 감고 윤오의 손에 입술을 묻으며 속삭였다. 오래도록 묻어두어 무덤이라면 봉분마저 삭았을, 삭지 않더라도 붉은 흙만 날연하게 드러내고 끝끝내 자신을 거부했을 이름을.

“비량아….”

그 부름에 윤오의 눈꺼풀이 움찔했다. 깊게 헤매고 있던 꿈속에서 안개가 점점 젖히고 깊이깊이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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