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비는 뭍보다 물을 사랑하는 이였다. 해가 뜨기 전에 바다로 나가 어망을 치고 물고기를 잡았다.
어미는 소문만 무성했다. 그러나 확실한 건, 아이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아비의 곁을 떠났다는 거다. 그는 어느 날 바다에서 왔다고, 동네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노인이 바람이 많이 섞인 목소리로 말해 주었다.
바다에서 구해 온 건지 아니면 갑자기 바다에서 떠올랐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갑자기 나타났고, 뭍보다 물을 사랑하던 비숙의 곁에 살았고, 아이를 낳고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아마도 왔던 곳으로 돌아갔으리라고 노인은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비숙은 그 말을 믿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그도 바다로 들어갔다. 달이 휘영청 떠오른 밤이면 비량아의 손을 잡고 바다 위에 쌍둥이 같은 달 하나를 더 그리는 바닷가로 매일, 매일, 매일, 그리고 또 매일 나가다 못해, 졸음을 못 이기고 꾸벅거리던 비량아의 손을 놓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거품이 되어 사라지지는 않았다. 비량아가 깨어났을 땐 해초 같은 머리카락이 어렴풋이 보였을 뿐이다. 비량아는 생각했다. 만약 내가 잠들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떠나는 발소리를 잡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잡았다 한들 바다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을 영영 잡을 수 있었을까. 아비는 한 번도 자신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바다 너머 지평선 어딘가를 보았다. 오직 그곳만이 자신이 숨 쉴 곳이라는 듯이.
비량아는 이후로 다시는 바다에 가지 않았다.
* * *
북적북적 모여 저마다의 일을 하느라 분주했다. 비량아의 등장은 별로 이목을 끌지 못했다. 놀이패는 누가 나타나든 말든 고개를 푹 숙이고는 탈을 보수하려 풀칠을 하고 있거나, 나달거리는 옷에 조각천을 덧대고 있거나, 혹은 짚신을 꿰매고 있었다.
그 평등하게 정신없는 인파 속에서도 보다 윗사람은 존재했다. 나무 궤짝에 앉아 지푸라기로 꽹과리를 닦고 있는 중늙은이 약뫼가 그러하였다.
약뫼는 짐짓 근엄하게 미간을 찌푸리고 그네가 닦는 것이 마치 금덩이라도 되는 양 굴었다. 성기고 거친 지푸라기를 잡은 손은 마디마디가 몹시 두껍고 살성 역시 질겨 뺨따귀라도 후린다면 금세 귀를 나가게 할 것처럼 무섭게 보였다. 비량아는 그의 옆으로 다가가 허락도 없이 오른편에 주저앉았다.
약뫼가 흘끗 시선을 준다. 비량아는 오래된 삿갓을 벗었다. 하나로 대강 묶은 머리카락은 늘 그렇듯이 산만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그 행색이 더럽거나 게으르게 보이지 않는 것도 비량아가 가진 독특한 재능 중 하나였다.
던졌던 시선을 거둔 약뫼는 없는 마노라보다 귀하게 여기는 꽹과리를 들여다봤다. 이리저리 패였으나 이 또한 의도한 거다. 그는 설령 이 꽹가리가 아예 구겨지더라도 소리를 낼 자신이 있었다. 없는 마노라, 없는 자식 대신 꽹가리가 있었다.
“갈 곳이 있다.”
툭 던져진 말이 다였다. 어딜 다녀왔냐, 잘 다녀왔냐를 묻는 것도 없다. 시답잖은 사담을 나누느니 제 밥줄이나 한 번 더 닦겠다는 게 약뫼, 이 떠돌아다니며 놀이를 하는 패거리의 우두머리였다.
비량아는 봇짐에서 곡식이 든 주머니를 꺼내 내놓았다. 약뫼 뒤에서 장구채에 기름을 먹이고 있던 둘째 우두머리 꺽두가 그것을 가져가 무게를 가늠했다. 넉넉했다.
“어딜 가요?”
비량아의 말에 약뫼는 그제야 꽹과리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했다. 그는 평소 씹어 뱉거나 우물거리다 칵 토해내듯 말을 하는 이였으나 비량아에게만은 그러지 않았다. 항시 입술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움직였다.
“귀족집에서 잔치를 한다고 한다.”
“회갑연이라도 하나요? 아니면 고희연? 그것도 아니라면 돌?”
“다 아니다. 나도 모르겠다. 그저 돈은 넉넉히 줄 테니 관객 없는 마당에서 한바탕 놀아줄 수 있냐고 했지.”
“관객이 없는데 뭣 하러 합니까?”
“곧 겨울이다. 입춘이 될 때까지 꼼짝없이 굶어 죽을 수는 없잖으냐. 새 식구도 생겼고.”
과연 약뫼의 말대로 갓난아기를 어르고 있는 이가 보였다. 때가 와야만 수확할 수 있는 곡식과 다르게 아이는 보릿고개든 추수철이든 가리지 않고 태어났다.
“언제 떠납니까?”
“되도록 이르게 오라 하셨으니 당장 오늘 떠나도록 하지. 산을 하나 넘어야 하는데 거기는 범이 없다고 하더라. 언제 다시 산주인이 생길지 모르니 채비만 끝나면 바로 떠날 거다.”
그래서 이토록 분주했구나.
오자마자 다시 떠나게 되었는데도 비량아는 토를 달지 않았다. 앉은 자리에서 짚신을 보수하고 한결 가벼워진 봇짐을 도닥여 모양새를 새로 잡는 것으로 채비를 마쳤다.
“가자.”
약뫼가 일어나며 외쳤다. 깊고 우렁우렁한 목소리였다. 놀이를 이끄는 우두머리다웠다.
하지만 비량아는 약뫼가 밤이 되면 꼬리가 무척 긴 기침을 한다는 걸 알고 있다. 가무잡잡한 피부색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 눈 밑도 한결 그늘졌다. 마구잡이로 기른 수염 때문에 가려졌으나 볼 역시 옴폭 들어갔다.
약뫼가 없으면 놀이패는 꺽두가 이끌게 될까. 하지만 꺽두는 그릇이 작다. 투기도 심한 편이고 편애가 도드라졌다. 특히 꺽두는……. 비량아는 자신을 향한 집요한 시선을 모르는 척했다. 약뫼는 시선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꺽두의 시선에서 비량아를 가렸다.
여태껏 비량아가 자는 이불 속에 꺽두가 함부로 침범하지 않은 건 비량아의 곁에서 자는 약뫼 때문이었다. 약뫼는 단순한 우두머리가 아니라 아비와도 같았다.
“왜 이리 늑장을 부려. 다들 배가 불렀군.”
약뫼의 못마땅한 소리에 하던 일이 끝났든 안 끝났든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떠도는 게 일상이고 천형이라 짐을 넓게 푸는 일이 없어 금방 떠날 수 있었다. 파한 자리에는 꺼트린 재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약뫼가 앞장서고 꺽두와 비량아가 뒤를 이었다.
‘너는 어차피 노래도 잘 못하고 줄을 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기악을 하는 것도 것도 아니니, 머무는 동안엔 바깥을 다녀 동냥이나 해 와라.’
그리 시킨 건 약뫼였다. 꺽두의 추잡스러운 욕심이 점점 노골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잔기침을 삼키는 약뫼의 뒤로 꺽두의 손이 뱀처럼 움직였다. 허리에 단 장구채를 만지는 척하며 비량아의 옆구리를 찔러댔다.
비량아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피하면 재미라도 있을 텐데, 돌덩이처럼 구는 모습에 꺽두는 얼굴을 구겼다. 안 그래도 서늘한 얼굴이 이렇게 무표정할 때면 제가 뭐, 상대할 가치도 없는 길거리의 개똥처럼 여겨졌다. 꺽두의 그릇은 좁을 뿐만 아니라 이토록 얕기까지 했다.
비량아는 귀가 좋지 못했다. 아버지가 바다로 자청하여 들어가는 순간에 깨지 못한 것은 어쩌면 그가 그때 몹시 피곤했기 때문이 아니라 귀가 좋지 않아서일 수 있다. 집중해야 그나마 명료하게 들을 수 있던 만큼 딱 하나 좋은 것은, 꺽두의 들척지근하여 끈끈하고 역겨운 말을 쉽게 무시할 수 있다는 점이겠다.
“비량아. 다녀온 곳은 어떻더냐. 어디 나만큼 사내다운 이가 있더냐?”
누런 이를 보이며 킬킬대고 웃는 꺽두는 당장이라도 비량아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했다.
우스운 것은 비량아가 꺽두보다 신장이 조금 컸단 사실이다. 소지 한 마디 남짓하게 더 컸다. 비량아는 워낙 팔다리가 길고 남들보다 길쭉하였다. 배곯고 자란 건 놀이패의 여타 다른 이들과 비슷할 텐데도 타고난 것인지 혼자 콩나물처럼 자랐더란다.
꺽두는 자신이 비량아보다 크다는 건 염두에 없었다. 조금 큰 눈높이? 그까짓 건 가로로 널찍하고 짱돌처럼 단단한 가슴팍에 비하면 뭣도 아니었다. 모두 꺽두만의 생각이었다.
비량아는 꺽두의 손에서 슬쩍 몸을 피하며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였다.
달큰한 봄바람에 맞추어 가슴이 일렁거린다. 내기를 하듯 앞다투어 움트는 꽃봉오리에서는 농익은 꿀 향이 흘러 호흡마다 단맛이 어리었다. 어린아이들도 성인도 가리지 않고 보이는 꽃마다 잡아 뜯어 꽁무니를 빨아 먹었다. 비량아도 그렇게 했다. 진달래 하나 뽑아 손끝에서 돌리다 화전을 부칠 수는 없으니 진홍빛 꽃을 거꾸로 물고 입술을 깊게 눌렀다.
꺽두는 그 모습을 보고 당장 아래가 설 것 같아 하초를 벅벅 긁었다. 비량아가 여인과 혼동할 미색이란 건 아니었다. 그는 놀이패에 어울리지 않는 비량아의 분위기에 욕정했다. 저것을 억지로 범하면 귀한 집 도련님을 탐하는 짜릿한 쾌감이 채워질 것만 같았다.
‘잘못 태어난 거지. 어디 귀한 집에서 태어났으면 부마라도 되었을 텐데. 부마는 못 되어도 이 꺽두 님의 구멍으로는 삼아 주마.’
비열한 음심을 분출할 수 없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것은 치졸한 괴롭힘으로 나타났다. 꺽두는 걸핏하면 비량아의 옷을 더럽히고, 자는 비량아의 얼굴에 애꿎게 검댕이나 마른 흙을 발라댔다.
다행히도 비량아는 그런 유치한 괴롭힘에는 개의치 않았다. 약뫼는 그런 행동이 꺽두를 더 약 오르게 한다는 걸 알았지만 가르쳐주지 않았다.
약뫼는 비량아를 아꼈다. 하지만 그보다 무리를 더 중히 여겼다. 그가 밤에 비량아의 곁으로 기어들어오는 꺽두를 막아주긴 해도 평소의 행동은 막지 않은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자신은 얼마 남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오늘 가는 길에 갑자기 죽어도 놀랍지 않을 것이다. 그럼 꺽두가 무리를 끌어야 했다.
놀이패는 강한 우두머리가 필요했고 우두머리에게 덤비는 건 놀이패를 무너뜨리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에, 누가 더 윗사람인지를 보여주는 행위 정도야 용납되었다.
꺽두의 추근덕거림이 귀찮은 비량아는 발걸음을 놀려 약뫼에게 붙어 섰다. 약뫼가 그런 비량아를 흘끗 보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들이 있다고 한다.”
“…….”
“아들이 하나 있는데, 딱 하나 있다지. 자식이라곤. 그런데 동기들 간 유랑을 다녀온 뒤로 갑자기 시름시름 앓는 듯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일주야가 지난 뒤 간신히 나오긴 했지만,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웃지 않는다던가.”
“한 번도요?”
“단 한 번도.”
약뫼는 성마른 기침을 하고 덧붙였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났다고 하는군.”
“그런 일이라면 의원이나 만신(萬神:무당)을 불러야지, 왜 저희를 부르는 겁니까?”
“그 이야기는 해 주지 않았다. 우리 같은 천한 것들이 뭘 할 수 있냐. 그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지. 노잣돈 넉넉히 얹어 주고, 잔치를 열어 목구멍에 기름칠도 하게 해 주겠노라 단단히 약조하더군. 우린 그저 가서 한바탕 놀고 그 웃음 귀한 도련님 입가에 호선 잠깐 띄우면 될 일이야.”
“설마하니 나라 제일가는 우리 약뫼 놀이패가 그 고고한 도령 입술에 호선 하나 못 그리겠습니까?”
꺽두가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리통이 어찌나 큰지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비량아조차 미간을 찌푸렸다.
“전 이거 왠지….”
꺽두는 무시한 비량아가 약뫼에게 한마디 하려고 했다. 왠지 불길했다. 찝찝하고.
“넌 아무 말 마라.”
하지만 생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일각마다 생생히 느끼고 있는 약뫼는 보릿고개를 날 여비를 챙겨야 한단 생각에 초조했다.
추수가 이루어질 즈음부터 끝날 때쯤까진 어디서든 밥 빌어먹기가 쉬웠다. 그럴 때면 다들 저고리며 치맛자락이며 양구 바지 안이며 두둑하게 음식을 훔쳐 왔다. 그것으로 겨울을 났다. 문제는 봄이었다. 꿍쳐둔 식량이 모두 떨어지면 언 땅이 녹고 이랑을 파기 좋을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지독하게 흐르지 않았다.
보릿고개였다. 버틸 것이 필요했다. 비량아가 아무리 비상하게 감이 좋다 하더라도 그는 만신 같은 게 아니었다. 애꿎은 불안감을 떠들게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대장, 원래 비량아가 심약하여 겁이 많지 않습니까. 비량아야, 그토록 무서우면 오늘 밤 내 품에서 잠들지 그러냐.”
꺽두가 크게 웃었다. 호탕하기보다 더러웠다. 비량아는 꺽두를 무시했고, 그 서릿발 같은 옆모습을 보는 꺽두의 얼굴만 붉으락푸르락 다채롭게 변했다.
도도한 새끼. 같은 천것끼리 건방지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새끼. 저것의 궁둥짝을 보고야 말아야지. 여인처럼 아리땁게 고운 것도 아니고 그저 말쑥한 사내인데 어째서 여인보다 동하게 하는 것인지, 꺽두도 사실은 알 수 없었다. 그저 동하니 취하고 싶었다.
비량아와 다른 쪽에서 꺽두 역시 감이 좋았다. 그의 비상한 감은 타인이 언제 어떻게 약해지는지를 알아차리는 데 뛰어났다. 조금이라도 약해지면 그 약점을 잡고 늘어지는 성정에 딱 알맞았다. 그러니 당연히 약뫼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도 알았다.
곧 무리가 내 것이 될 테고, 그러면 저 건방지기 짝이 없는 비량아도 자신의 것이 되리라. 그런 산법 덕에 꺽두는 최근 희열에 가득 차 있었다. 이미 승기를 거머쥔 것처럼 언제고 생각만 하면 흥분에 하초가 짜릿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비량아는 오로지 지금 가는 길만을 생각했다. 약뫼가 없다는 상상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꺽두가 신기했다. 저렇게까지 앞날에 대해 기대가 크다니.
“비량아야. 오늘도 내가 기침이 심할 것 같으니까 네가 내 옆에 있어야겠다.”
꺽두의 노골적인 눈빛을 약뫼가 모를 리 없다. 약뫼는 늘 그래왔듯이 아주 미약하고 애매한 그의 방식대로 비량아를 보호했다.
“비량아를 낳기라도 한 것 같소? 너무 끼고 도는 것 아닌가? 낳은 게 아니라 새끼를 낳게 하려고 품는 건 아니고?”
지껄이는 소리가 귀가 더럽혀졌다 싶을 정도로 상스러웠다. 반응하지 않는 게 답이었다. 약뫼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모두 제 말에 눈 하나 까딱하지 않자 멋쩍어졌는지 혹은 김이 샜는지 꺽두가 고개를 돌려 카악 퉤, 가래침을 뱉었다.
걸쭉한 가래침 뒤로 수없이 많은 발이 오갔다. 누군가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가는 길의 흥을 조금이나마 돋울 수 있는 곡조 한 가락 뽑기 시작했다.
곡조는 끊어질 듯 이어졌고 설령 끊어지더라도 머잖아 다른 이가 받았다.
가는 길은 그곳이 어디든 쉽지 않겠지만 적어도 외롭지는 않았고, 설령 고단하더라도 나눌 이가 있었다. 비량아는 이곳이 좋았다. 남들이 무시하더라도 놀이패는 흥겨이 살기 위해 힘썼고, 바람처럼 자유로이 살다 떠났기 때문이다.
비록 그 떠돌이 무리 속에서조차 그는 섞이지 못하고 외롭더라도.
* * *
다다른 곳은 곳간만 여섯 칸은 될 듯한 커다란 기와집이었다. 은은한 미소가 그리어진 얼굴 무늬와 연꽃 무늬가 기와의 마구리를 번갈아 틀어막고 있었고, 조금 아래로 내려온 만큼 한결 따뜻해진 날씨에 걸맞게 꽃잎이 드문드문 흩날려 암키와와 수키와 사이사이를 수놓았다. 비량아는 수줍은 분홍빛의 꽃잎을 멍하니 보다가 꺽두의 억센 손에 끌려갔다.
비량아의 재주가 기악에 있는 것도 아니고 가락을 손꼽히게 잘한다고 할 수는 없어도 그 목소리는 무척 좋았다. 목소리가 좋아 평범한 가락도 제법 심금을 울렸다.
무엇보다 탈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가 올리면 나오는 반응이 좋다. 그래서 꺽두는 배앓이를 하는 막막이를 대신하여 영노탈을 다짜고짜 비량아에게 안겨 주었다.
본디 내용대로라면 귀한 혈통 100명을 먹으면 하늘로 올라가리라고 믿는 영노와 그 귀한 혈통 역을 하는 이가 있어야 하는데, 사실 오늘은 그것보단 도련님을 웃기게 하는 것이 중요하여 즉흥적인 연기를 더하기로 했다.
“너 덧배기춤 잘하지? 해라.”
“영노가 덧배기춤을 추는 게 말이 돼요?”
“무슨 상관이야. 우리 같은 광대가.”
꺽두는 그저 목적만 이루면 상관없다는 이였다. 그러니 영노가 괴물이건 아니건 그 탈을 쓴 비량아가 그저 잘한다는 이유 하나로 덧배기춤을 추라고 하는 거겠지.
덧배기춤은 신에게 돋보이기 위해 추는 춤이기도 하나 또한 덧난 것을 베어 버리는 춤이기도 했다.
덧난 것. 영노가 바로 그 덧난 것이기도 하지만, 비량아는 은연중에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자신 역시 덧난 것과 같다고 여겨 그걸 추기가 불편했다. 덧난 것인 자신이 가진 그나마의 특기가 덧배기춤이라는 것도 참 우스운 일이었다.
“잘해야 해. 잘해야만 탈도 새로 만들고 옷도 수선하고 무엇보다 굶어 뒈지지 않고 보릿고개를 넘을 수 있어. 그걸 버텨야 들놀이도 하고 농사 맞이 놀이도 하지.”
“알았다고.”
비량아는 퉁명스럽게 말끝을 잘라 대답했다. 꺽두는 그런 그에게 주먹이라도 한 번 날리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당장 마당에 설 놈을 두들겨 팰 수 없으니 참았다. 그리고 이런 자신이 참으로 다정하고 대견스럽다며 뿌듯해하는 것까지 모조리 비량아의 눈치에 걸려 들어왔다.
코웃음을 친 비량아는 탈을 뒤집어썼다. 겨우내 바짝바짝 말라 갈라진 안을 메우느라 바른 종이풀 냄새가 시큼하게 콧속을 채웠다.
비량아의 옷 역시 기울 곳이 많았다. 얼기설기 올이 나와 옆구리를 간지럽히기도 했다. 그래도 사람이라는 게 설령 개똥밭에 눕더라도 적응하게 마련인지라 비량아 역시 새 옷은 무슨, 보릿고개만 잘 나도 좋겠단 마음으로 줄을 섰다.
아직 웃겨야 할 도령의 모습은 보지 못했다. 곧 놀이판이 될 마당에 뛰어들게 되면 자연히 보게 될 것이다.
이 탈의 가장 좋은 점을 꼽자면 탈을 쓰고 마당에 선 보상으로 감히 저 출신부터 다르다는 분들의 면면을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농을 지껄이고 이끌어내며 희롱해도 되었다. 수위만 잘 지킨다면야.
외줄타기를 하듯이 그 선을 교묘하게 넘나드는 것이 또한 우수한 광대의 조건이었다. 약뫼의 실력이 기가 막혔고, 꺽두는 종종 선을 모자라게 갔으며, 비량아는 대체로 끼지 않았다. 오늘 역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조용히 괴물 역을 하다가 사라지면 될 일이었다.
마당에서부터 실려 오는 냄새에 고소한 기름 냄새가 배어났다. 저마다 콧망울을 벌름거리며 기대에 찼다.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그러게 말이야. 이렇게 냄새가 진한데 잔치 소리가 안 나네.”
“아, 다들 처먹느라 조동이 놀릴 여유가 없나 보지.”
“그래. 그렇겠다. 그렇겠어.”
퉁명스럽게 뱉은 꺽두의 말에 저마다 낄낄깔깔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비량아는 왠지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 이 침묵에는 포만의 여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굶주림의 조급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비량아는 보지 않고도 확신했다. 마당에는 아무도 없다. 우리는 텅 빈 놀이판에서 애써야 하는 것이다. 웃는 이도 없고 함께 어울리는 이도 없는 광대가 되어야만 한다.
관객 없는 광대라니. 얼마나 처량한지 모른다. 게다가 웃지도 않는 도령과 함께라면 끔찍한 적막과 함께해야 할 텐데 우습기까지 했다. 우스움은 돌아오지 않는 웃음소리와 함께 점점 섬뜩해질 거다.
역시나 느낌이 좋지 않다.
그러나 비량아는 표정을 차갑게 굳히며 탈을 내렸다. 아무리 적막한 놀이판이라 하더라도 광대가 먼저 울상일 수는 없는 노릇이잖은가.
* * *
놀이패는 마당 한가운데에 서서야 섬뜩한 분위기를 느꼈다. 무언가를 깨닫기도 전에 피부로 와닿는 것이었다.
놀이가 한창 정점에 이르면 그들은 황홀경을 맛보았다. 육신과 혼이 유리되어 전혀 다른 세상에 닿는 것만 같은 황홀경. 그런 그들은 종종 보통 사람들보다 예리한 감각을 가지곤 했다. 설명키 어려운 것들을 느낀다고나 할까.
“이상하다.”
턱주가리에 힘이 쏙 빠진 것처럼 절로 입이 덜컥 열려 바람 빠진 말을 흘리고 말았다. 머뭇거리던 비량아의 표정이 떠올랐다. 역시 그 말을 들었어야 했나. 그러나 낭패라고 느꼈을 땐 이미 늦었다. 약뫼는 이미 늦은 주둥이를 단도리하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날마다 생기가 새고 있는 몸이라 입술을 씹어도 쉬이 부풀거나 붉게 피가 돌지 않았다. 창백한 낯은 이미 좋지 않은 낯빛에 가리어져 숨길 수 있었다. 불안함은 연륜으로 감출 수 있었다. 그가 시작해야만 놀이가 시작되었다. 메마른 손이 마노라나 마찬가지인 꽹가리를 고쳐 잡았다.
아직 들어갈 때가 아닌지라 옆으로 빠져 관객 없는 놀이판의 가짜 흥을 더할 역할로 나선 비량아는 대청마루로 연신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는 발이 쳐져 있었다.
어째서 발을 쳤을까? 제대로 보이기는 할까?
그 발은 마루의 한쪽만 가리고 있었다. 아마도 두 명이 자리를 잡은 듯싶은데, 한 명은 우릴 부른 마나님이시니 한 명은, 그러니까 발로 가려진 저 이가 웃음을 잃었다는 그 도령일 테다. 비량아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음산한 기운에 어깨를 크게 움찔했다.
그 때, 기분 탓인지 발 너머에서 일렁이던 기운이 돌연 비량아에게 화살처럼 쏘아진 것 같았다. 그 기운이 어찌나 센지 홀홀 벗겨져 순식간에 알몸이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비량아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얼굴을 더듬었다. 그리고 종이풀을 여러 겹 먹어 단단한 탈이 자신을 가리고 있다는 것에 안심하며 저곳에서 신경을 끄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다행히 그런 것은 그에게 익숙했다.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는 곳에서는 아주 조금만 고개를 들고 시선을 굴려도 태가 나게 마련이다. 누운 벼 이삭들 가운데 꼿꼿이 선 벼는 바람에 쉬이 꺾이고 만다. 게다가 비량아는, 아직은 약뫼만 겨우 눈치를 챘다지만, 아주 자주 그리고 아주 쉽게 이곳에 있어선 안 될 것들을 보았다. 헛것이라 할 수도 있고 망혼이라 할 수도 있는 령들. 그들을 보면 몸이 뻣뻣이 굳고 움직일 수 없었다.
그것들은 비량아가 자신들의 존재를 본다는 걸 눈치채면 바로 본색을 드러냈다. 갑자기 비량아의 몸을 통과하거나 어깨에 앉아 속살거리기 일쑤였다. 그러면 황홀했다. 황홀하면서도 눈물이 났다. 제 몸을 마음대로 내주는 데 대한 수치심과 모멸감이 들었다. 범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황홀함을 느끼며 허공에 붕 뜬 듯 눈을 느리게 껌뻑이고 마는 것이다.
그러다 겨우 깨달은 것은 그들을 보면 모르는 척해야 한단 사실이었다. 보여도 보이지 않는 듯, 들려도 들리지 않는 듯 살아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용당하고 그러지 않으면 빼앗긴다.
그리하여 비량아는 대청마루에서 느껴지는 기이하고도 범상치 않은 기운을 외면했다.
놀이가 시작되었다. 꽹과리의 선창을 시작으로 장구가 얹어지고 소고가 결을 더했다. 서로 긴장한 와중에도 실수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절로 발장단이 시작되고 엉덩이를 씰룩댔다.
그래도 손꼽히는 놀이패였다. 봄이 오면 으레 여기저기서 데려간 탓에 밟고 오지 않은 지신이 드물 정도였다. 이내 그들은 꺼림직한 기운을 무시하고 몰입하기 시작했다.
비량아 역시 그랬다. 여전히 탈 너머로 느껴지는 시선 같은 것은 차치하더라도. 제가 놀이패 무리 중에선 아무리 잘 보아줘도 재주가 썩 좋다고 할 수는 없어서 집중하고 또 집중해야만 했기에 더욱 그랬다.
그리고 때가 되었다.
자신의 차례가 오자 비량아는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입고 있던 옷을 정리하고, 비록 누더기에 가깝지만 최대한 깔끔하게 보이도록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마당에 섰다.
일단 대청마루 쪽으로 서서 능청을 떨며 제 소개를 해야만 했다.
“나는….”
뱃심을 주고 목을 틔워 선창하자 약뫼가 얼쑤, 하고 받아쳤다. 그리고 놀이가 이어지며 저저, 뻔뻔스러운 것, 이라거나 아이고, 날름 잡아먹히겠구나! 혹은 저 아둔한 괴물 좀 보게, 하는 추임새가 들어갔다.
내내 느껴지던 기운과 별개로 오늘따라 비량아는 날아다녔다. 목이 쉬이 가지도 않고 소리도 잘 나오며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러면서도 발놀림은 날렵하니 뿌듯했다. 왜일까, 왜일까. 위에서 누군가 잡아 들어 올려 주는 것처럼 발이 이토록 가볍다니.
이윽고 제 몫의 장이 끝나 마당에서 물러나는 순간에도 비량아는 가슴을 들썩이며 남는 여운에 몸서리쳤다. 처음으로 놀이패로 있는 것이 단순히 소속감 때문이 아니라 놀이패 자체로 좋았다.
그런데 그 때, 마나님께서 접선을 소리 나게 접었다. 따귀 때리는 소리처럼 짝, 하는 소리에 떠들썩하던 마당이 일시에 잠잠해졌다.
약뫼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는 계속 마루 위 관객들의 분위기를 살피고 있었다. 옆에 발을 친 도령은 모르겠으나 적어도 마나님께선 계속 웃고 계셨는데.
“이만하면 된 것 같네.”
안타깝게도 계속 웃던 게 언제였냐는 듯 마나님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서늘하게 굳어서 옆자리를 흘끗흘끗 곁눈질하는 모습이, 설마하니 자식의 눈치를 살피는 것만 같았다. 그러곤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엄중한 표정이 되어선 마당의 놀이패를 굽어보는 게 아닌가.
체구는 분명 비량아보다 훨씬 작다. 비량아의 반 품이나 겨우 채울까. 그러나 표표히 피어오르는 서릿발 같은 분위기와 종잇장보다 예리한 이목구비가 마나님의 위엄을 더욱 돋우었다.
“소문이 자자하여 불렀는데 그 모든 소문을 너희가 낸 거냐?”
약뫼는 눈을 질끈 감았다. 덫이 코앞에 있었다. 코앞에 있는데도 뒤는 벼랑이라 걸릴 것을 알면서도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다.
“대답해 봐라. 울던 아이도 웃게 만든다던 명성은 다 헛소문에 불과했는지!”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대단했다. 팔로 감싸 안듯 둘러쳐진 담벼락에 부딪히며 마당에 쩌렁쩌렁 울렸다.
“아닙니다!”
약뫼가 냅다 머리를 박으며 외쳤다. 그를 이어 놀이패 모두가 흙바닥에 머리가 파묻히도록 엎드렸다.
“아닙니다, 저희가 감히 어떻게 그런 헛소문을 내겠습니까. 결단코 아닙니다. 가치 없는 천한 목숨이라도 걸고…!”
“내가 어떻게 믿지? 그리고 왜 믿어야 할까. 조금도 웃지 않는 내 아이를 보고 말이야.”
마찬가지로 비량아도 엎드려 벌벌 떨었다.
“웃지 않는 아이를 둔 어미의 애타는 속을 기만한 게 분명하다.”
서글픈 목소리에도 동정심이라곤 들지 않았다. 저 마나님을 포함하여 이곳의 모든 가솔은 고작 도령이 웃지 않는 걸 걱정하겠지. 하지만 이 순간 비루먹을 놀이패는 목숨을 걱정해야만 했다.
“당장 네놈들을…!”
무너지는 억장을 추스르며 불호령을 내리려던 마나님의 말이 뚝 끊겼다. 발 너머로 가녀리고 창백한 섬섬옥수가 나왔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분노를 잠시 말린 그 손이 이내 발을 천천히 걷어 올렸다.
갈대와 호박, 청옥을 번갈아 꿴 발은 올라갈 때도 내려올 때도 차르르 구슬 흘러가는 소리가 났다. 그 영롱하고 맑은 소리는 남들보다 귀가 어두운 비량아에게 이상하리만큼 명료하게 들렸다.
“신조야…!”
창백하고 마른 몸에 자주 앓아 신경질적인 아이였다. 하나뿐인 자식이 품이 남아돌 정도로 야위어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새카만 머리카락은 어미를 닮아 풍성하고 아름다웠지만 그 때문에 또래 사내들과 달리 낭창낭창한 목이 더욱 돋보였다.
그래도 부모에게 걱정 끼치지 않겠다고 잘 웃던 아이는 요양을 위해 유랑을 다녀온 이후로 확 바뀌었다. 귀신이라도 씌인 것처럼 웃지 않고 멍했다. 그러니 자연히 걱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나간 넋을 이곳에 붙들어 두고 싶었다.
마루를 내려가 신을 신고 마당으로 향하는 아드님을 마나님께서 그리 걱정 어린 시선으로 보는 동안, 비량아는 어쩐지 참을 수 없어 고개를 들고 말았다. 호기심 때문이 아니었다. 분명 궁금하긴 했으나 감히 고개를 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의 비량아는 무엇인가에 홀린 것만 같았다.
‘병약한 도령이라고 하더군. 자주 앓아 야위고 낯빛은 늘 창백하고, 여인보다 아름다운 손을 가지고 있다지. 마치 갈대처럼.’
이곳에 들어서기 직전에 약뫼가 중얼거렸던 것이 있다. 그러나 탈의 눈구멍 너머로 얼핏 보이는 모습은 그 묘사와 완전히 달랐다.
비량아의 눈에 비치는 도령과, 마나님을 비롯한 다른 이들 눈에 보이는 도령은 전혀 다른 이였다. 갈대처럼 가녀린 발목은 오간 데 없이 혜 위로는 단단한 발목이 있었다. 옷으로 감싸여 정확하진 않지만, 적어도 익히 들었던 병약한 이의 체구가 절대 아니었다.
시선이 천천히 올라갔다. 그리고 끝내 이른, 허리 아래로 부드럽게 움직이는 손. 여인보다 아름다운 손? 분명 곧게 뻗고 한데 몰린 곳 없이 모양이 골고루 단정하나 그것은 절대로, 여인의 손에 비할 것이 못 되었다.
비량아는 당장 다시 고개를 처박았다. 발로 가리고 있어 몰랐다. ‘이것’은 비량아가 지금껏 겨우 지켜 오던 그런 것이 분명했다. 보아도 보지 못한 척, 들어도 듣지 못한 척해야만 하는 그것.
‘이건 덫이나 마찬가지잖아.’
처음부터 웃지 않는 게 당연했다. 다른 이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분명 자신과는 다른 모습을 보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헛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토록 또렷하고 이토록 압도되는 기운을 뿜는 헛것을 본 적이 있던가.
그 때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멈췄다. 그가 지척에 있다는 걸 감각으로 느꼈다. 고개도 아니고 시선만 들어도 발치가 보일 걸 알았다. 비량아의 몸이 차게 식었다.
“일어나라.”
머리 위로 아주 낮은 휘파람 같은 말소리가 들렸다. 엎드린 사람들을 요요히 휘감고 돌아가는 듯한 음성은 차라리 연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비량아를 제외한 주변 사람들은 그 명에 따라 고개를 들었다가, 차갑게 내려보는 야위고 퀭한 병자의 얼굴을 보곤 다시 아래로 처박았다. 저 도령이 일어나라고 한 것은 자신들이 아니라 비량아였다.
분명 비량아도 그걸 눈치챘을 텐데, 비량아는 오히려 그 소리에 더더욱 고개를 흙바닥에 박았다.
“내가 일으켜 세워야 할까.”
마음만 먹으면 그러겠다는 투였다. 마나님을 비롯한 다른 이들은 바람이 휙휙 부는 텅 비고 맥없는 목소리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명이 길지 않은 도령이란 게 느껴졌다.
그러나 비량아는 아니었다. 그 목소리는 두툼한 짐승의 발이 되어 제 목을 짓누르는 위협이요, 먹잇감을 맛보는 거친 혓바닥이었다. 무두질한 가죽 같은 목소리.
일어나야만 한다. 그러나 도통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본능이 제 몸을 빳빳하게 굳게 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여기서 한 발자국을 더 내미느니 뒤에 있는 절벽에 몸을 내던지는 것이 낫다는 두렴증이 일었다.
비량아가 반응이 없자 그 옆에 있던 꺽두가 이를 꽉 깨물고 이마를 괴고 있던 손을 내려 팔꿈치로 퍽 쳤다. 네가 일어나지 않으면 다 죽는다는 협박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비량아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사이 탈이 조금 비뚤어져 있었다. 눈구멍이 잘 맞지 않아서 사내의 얼굴이 보이지 않고 그저 넓은 어깨와 강인한 목선만 보였다.
도령일지, 사내일지, 헛것일지. 아마도 헛것일 사내의 형상이 손을 뻗었다. 비량아는 움찔하였으나 주먹을 쥐고 버텼다. 그 처연한 발악에 사내는 웃음을 참았다.
탈 밑부분에 검지를 걸고 천천히 들어 올렸다.
세상에 잠시 막이 드리워졌다. 우연인지 고의인지 손가락 마디가 코를 가볍게 건드렸다. 소름이 돋는 간지러움. 비량아는 오히려 어둠 속에서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손을 쳐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있을 리가. 끝내 탈이 온전히 이마 위로 올라갔다.
질끈 감았던 눈을 겨우 떴다. 하지만 신분을 핑계로 시선은 발치로 내린 채였다. 그러자 탈을 넘기던 차가운 손이 비량아의 턱을 쥐고 끌었다. 고집스럽게 내린 시선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던 사내가 천천히 입술을 귓가로 가져와선 속삭였다.
“너… 날 알아봤지.”
숨통이 턱 막히고 온몸의 피가 차게 식었다. 시선을 들자 너른 어깨선이 시야를 반이나 가리고 있었고, 그 너머로는 걱정스레 이곳을 보고 있는 마나님이 보였다. 분명 땅에 발을 딛고 어디로 갑자기 자리가 바뀐 것도 아닌데, 비량아는 세상이 사내와 자신 둘만 두고 멀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찬 손과 달리 더운 호흡으로 그가 더욱 낮게 속삭였다.
“내가 널 알아봤듯이 말이야….”
가솔들의 애타는 마음을 기만하듯, 입꼬리가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 하나에 목숨이 걸린 놀이패를 희롱하듯 그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듬뿍 머금어져 있었다.
곧 괴고 있던 몸이 떨어졌다. 그는 여전히 비량아의 턱 끝을 잡고 있었다. 분명 별 힘을 주지도 않고 가볍게 잡은 것 같은데 빠져나올 수 없었다.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사내가 고개를 돌아보았다. 무척 어색해 보이는 미소여도 그 역시 미소라, 마나님께서는 입을 틀어막고 “세상에!” 하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어머니. 이자들이 나를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보답을 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며칠이든 머물게 해서 대접하지요.”
“그, 그래. 그래, 신조야.”
신조가 그의 이름은 아닐 테다. 누구든 그가 가장하고 있는 이의 이름일 거다. 이름도 빼앗기고 자리도 빼앗기고 가족도 빼앗긴 신조.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가짜가 다시 비량아를 보았다.
“나를 오래도록 즐겁게 해 줄 것 같습니다.”
안광을 번뜩이며 보이는 웃음 너머로 노랗고 섬뜩한 불빛 같은 게 어리었다. 눈을 질끈 감는 비량아를 두고 신조는 몸을 돌렸다. 그의 옷자락이 비량아의 정수를 할퀴고 지나갔다. 바람결에 “또 보자.” 하는 음성이 스러졌다.
“여봐라. 여기 놀이패에게 머물 곳을 내어주고 음식도 내어주거라. 신조야, 신조야!”
홀로 사랑채로 향하는 자식의 뒤를 쫓는 발걸음이 조급했다. 내던지듯 떨어진 명령에 가솔들 몇이 와서는 자신들보다 천한 광대들에게 떨떠름한 표정을 내지었다.
내어진 전각은 방 두 칸의 작은 행랑채였다. 한 칸에 사내들, 한 칸에 아이와 여인들이 머물게 되었다. 길에서 노숙하는 일에도 익숙하기에 그들은 감지덕지했다.
“여기 너무 좋아!”
철없이 방방 뛰는 아이들을 보면서 놀이패는 겨우 웃었다.
“이제사 말하지만, 조금 전에는 정말 오금이 다 떨렸다니까요. 범 눈깔하고 내 눈깔하고 요만치밖에 거리가 안 나는 거처럼 와들와들 몸이 굳구. 그래도 우리가 태어나서 날 때부터 한 짓이란 게 이런 것뿐이라 몸이 먼저 움직여 다행이지만.”
“엄살이다.”
약뫼가 한마디 했다. 사실 다른 이들도 약뫼가 내심 긴장했었음을 눈치챘다. 그만큼 오랜 시간 함께해 온 인연이었다. 여기서 이방인은 비량아밖에 없었다. 연이은 폭풍으로 더는 천애 고아를 챙겨줄 수 없다며 마을 사람들이 약뫼에게 떠넘긴 아이, 비량아.
당시 그는 열셋이었다. 딱히 재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다른 아이들보다 배움이 늦어 오히려 여섯 살 난 아이가 비량아를 가르쳐야 하는 처지였다.
왁자지껄 떠드는 와중에도 비량아는 홀로 떨어져 탈의 매듭을 풀고 있었다. 나달거리는 끈이 행여 상하기라도 할까 조심스러운 손끝을 약뫼가 조용히 응시했다.
* * *
저녁상이 들어왔다. 꽁보리밥에 호박잎과 된장 약간이 전부였지만 모두 행복하게 먹었다. 비량아도 오랜만에 조금 허겁지겁 먹었다.
“비량아, 꺽두. 밤에 나 좀 보자.”
그러나 도통 식사를 하지 못하던 약뫼가 낮게 일렀다. 입 안 가득 호박잎과 보리밥을 물고 있던 꺽두가 비량아를 흘끗 보았다.
“예.”
그러곤 무뚝뚝하게 답했다. 비량아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약뫼를 보았다. 불길함이 엄습했다.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거친 호박잎이 목에 턱 걸리는 것만 같았다.
“히야. 여기서만 살면 좋겠다.”
된장으로 싹싹 비빈 밥을 우물거리던 아이가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저마다 그러면 좋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밤이 깊어졌다. 새소리는 물론이고 벌레끼리 눈이 마주치는 소리도 날 것처럼 고요한 밤이었다. 모두 잠든 게 분명한 깊은 밤에 약뫼와 꺽두 그리고 비량아 세 사람이 둘러섰다.
증축하며 퇴물이 되는 바람에 이만 곳간으로 고쳐 쓸까 하던 낡은 행랑채 뒤편에서 눌러 삼킨 기침 소리가 오래도록 이어졌다. 참고 참은 게 이 정도였다.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떼어내자마자 약뫼는 쓰게 웃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손을 내밀었다. 어두컴컴해서 오래도록 보아야만 그 손에 무엇인가 묻어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비량아는 익히 알고 있었고 꺽두는 몰랐던 피였다. 꺽두가 눈썹을 치켜뜨며 되물었다.
“이게 뭐요?”
“피다.”
“몸이 안 좋다, 안 좋다 하더니만, 이 정도였소?”
“꽤 오래되었어.”
이미 명줄이 끝자락에 접어들었단 걸 아는 약뫼는 덤덤했다.
“만약 내가 이곳에서 죽게 된다면 너희는 좋게 끝나 봐야 그냥 내쫓기고, 나쁘게 끝나면 두들겨 맞고 내쫓길 거다.”
“아니, 시팔, 그러면 처음부터 떠나겠다고 했어야지…!”
“그냥 보내줄 분위기가 아니었어.”
약뫼는 도령이 비량아를 마음에 들어 했단 걸 알았다. 차라리 비량아만 남으라 했다면 두고 떠났겠으나, 무리 모두에게 대접하라고 했다. 천한 광대들이 감히 윗전의 명을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가 비량아를 얼마든지 내줄 생각을 했었단 걸 비량아가 알았다면 섭섭해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약뫼는 언제나 무리가 먼저였다. 비량아를 아끼긴 해도 가장 중요한 건 무리였다.
한편 꺽두는 다른 것에 속 터져 하고 있었다. 약뫼는 그게 무엇인지 알았다. 비량아에 대한 소유욕이다. 흙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와중에도 눈빛이 형형하게 불타던 걸 보았다. 연정보다 소유욕을 기반으로 한 질투는 추잡하면서도 집요했다.
약뫼는 결국 비량아가 꺽두의 것이 될 걸 알았다. 다만 시간문제였을 뿐이다. 그의 생각에는, 그래도 비량아가 도령의 노리개로 구르다가 버려지는 것보다는 적어도 함께 지내던 무리 속에 있는 게 낫지 않나 싶었다. 결국 정말로 비량아를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당황함에 시선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비량아를 본 약뫼가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러니 알겠지, 꺽두야. 내가 죽기 전엔 여기서 나가야 한다. 한 번 혹은 두 번의 놀이를 하고 나면 질리겠지. 그때만 기다리자. 그때까진 버텨 보마.”
“염병할… 시팔놈의 상황이 있구만.”
“나 다음엔 꺽두 너밖에 없다. 욱하지 말고 차분히 무리를 돌봐야 한다.”
“재수 없는 소리는 끝까지 하는구먼. 본인 몸이나 챙기쇼.”
그리 지껄인 꺽두는 침을 탁 뱉고는 씨근덕거리며 벽을 발로 차 댔다. 그런 꺽두의 뒷모습을 보며 약뫼는 잠시 착잡한 눈을 했다가 비량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는….”
마른 입술을 달싹인 약뫼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혈색 없는 입술 껍질이 죽은 생선의 비늘처럼 성마르게 일어섰다.
“들어가자. 아직 밤은 차다.”
그러곤 곧이어 다시 굵은 기침을 해댔다. 꺽두는 툴툴거리면서도 그런 약뫼를 바짝 당겨 부축하며 안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자리에 여전히 우뚝 서 있는 비량아를 흘끗 넘겨 보았다.
“너는 안 들어가냐.”
이대로라면 은근슬쩍 약뫼와 자신 사이에 누울 게 빤하다. 비량아는 한 걸음 물러나 고개를 저었다.
“전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갈게요. …달이 예뻐서.”
마땅한 변명이 없어서 밤하늘의 잘게 찢긴 구름을 어렴풋이 걸친 달 핑계를 댔다. 꺽두는 고작 달이니 꽃이니 바람이니, 입에 풀칠하는 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소리나 지껄이는 비량아가 한심스러웠다.
“나약한 놈.”
자고로 사내라면 육고기, 싸움, 투계 이런 것을 즐겨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꺽두였다. 그가 여러 고을을 전전하며 종종 재물깨나 있는 과부들의 밤 수청을 들고 돈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떠돌이 처지를 면치 못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었다. 조금이라도 돈이 모이면 노름판으로 달려가 모두 잃는 것이다. 그가 비량아를 한심스럽게 여기듯, 비량아도 그런 꺽두를 한심스럽게 여겼다.
멀어지는 두 사람의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질 때쯤이 되어서야 비량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홀로 남은 그는 담벼락으로 다가가 그림자에 숨듯 등을 기댔다. 그리고 낮에 무리의 다른 이들이 감탄하던 처마 끝이며 여러 개의 곳간이며를 보는 대신, 비량아가 본 것은 겨우 하늘이었다.
구름이 드리워 평소보다 괴괴한 밤하늘. 그 안에 웅크린 달에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심히 손을 들어 허공에 그리듯 만져 보았다. 핑계를 대긴 했지만 정말로 아름다워서….
“달을 좋아하나?”
인기척도 없이 불쑥 들어온 목소리에 손끝이 멈췄다. 낮에 들은, 무겁게 휘감아 올리는 목소리였다.
“내가 찾아올 줄 알았단 기색이군. 전혀 놀라지 않는데.”
천천히 돌아보니 인기척도 없이 코앞에 사내가 있었다.
“말을 할 줄 모르나?”
“…할 줄 압니다.”
“그러네. 할 줄 아네.”
가짜 이름에다 가짜 외모로 도령 행세를 하고 있는 가짜 사내는 침의를 입고 있었다.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로 그의 몸이 비쳐 보였다. 남들 눈에는 병약한 사내로 옷 품도 넉넉하게 남아돌아 위태롭고 봄인데도 밤바람에 내놓으면 안 될 것처럼 보이겠으나, 비량아의 눈에는 아니었다.
“그럼 조금 전엔 왜 답하지 않았지?”
“…….”
“보아도 못 본 척하고 들려도 안 들리는 척하면… 네가 숨겨질 줄 알았어?”
사내가 눈을 접어 웃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대체 무엇이 저렇게 즐거운가 싶었다.
“너는 숨죽여도 감춰질 존재가 아닌데.”
“대체 누구시길래 이곳에 계십니까?”
“네가 감히 상상도 못 할 이.”
“상상도 못 할 분이라 하셨는데 제 앞에 있네요. 그러니 상상은 필요 없습니다. 그저 답해 주시면 됩니다.”
맹랑한 대답에 사내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겁먹어 바들바들 떨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바들바들 떨어도 재밌겠건만 이리 나오니 더 흥미로웠다. 그는 태생이 포식자고, 포식자는 본디 재미없는 사냥보다는 즐거운 사냥을 더 좋아하는 법이다. 웃음기 어린 시선이 흘끗 아래를 내려다봤다.
“나는….”
가슴팍의 문이 덜렁 열린 줄도 모르고 천둥벌거숭이처럼 나다니는 요 맹랑한 이에게 솔직하게 말해 줄까 말까, 그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속일 이유가 없었다. 이 깜찍한 핏덩이는 제게 약간의 호기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킬 뿐 다른 멍청이들과 똑같았다.
“나는 귀신들의 왕, 괴물들의 스승이다.”
“…….”
사내의 손끝이 칼끝처럼 비량아의 명치를 지그시 눌렀다.
“그러는 넌 누구지?”
“나는….”
목이 졸리는 것처럼 머리가 어질했다. 힘 빠진 목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나느은….”
가물가물한 눈을 뜨기가 어려웠다. 사내의 뒤로 어느덧 구름을 내던진 달이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사내의 눈도 그랬다. 짐승 냄새가 났다.
“난….”
세상이 천천히 무너졌다. 땅이 하늘로 가고 하늘이 바닥으로 향하며 비량아는 정신을 잃었다.
* * *
“얼른 일어나지 않고 무엇 허냐.”
꺽두가 발끝으로 비량아의 옆구리를 툭 쳤다. 워낙 강골에 몸이 단단해서 가볍게 치는 건데도 헉 소리가 나도록 아팠다. 옆구리를 문지르며 일어나는 비량아의 얼굴에 짜증이 묻어났다.
피곤했다. 잠이 많은 편이 결코 아닌데 얼굴을 여러 번 비벼도 도통 잠에서 깨지 않았다. 멍하니 있다가 하품을 연거푸 하고 나서야 일어났다.
마당에는 이미 아이들이 씻고 있었다. 서로 물을 나눠 썼다. 비량아도 슬그머니 끼어 한자리를 차지했다. 대야를 앞에 놓고 앉아선 미적지근하여 유독 들큼하게 느껴지는 봄바람에 눈을 껌뻑였다. 아직 꿈에서 깨지 못한 기분이다. 가위로 잘라낸 양 잘린 간밤 기억을 되짚었다.
샛노란 달만 기억이 났다.
“어제 달이 휘영청했던가.”
중얼거리는 비량아의 뒤로 지나가던 꺽두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휘영청은 무슨. 구름이 더덕하여 흐렸는디. 너 뭐 꿈꿨냐.”
그랬나…? 아무리 생각해도 노란색 달 두 개는 본 것만 같아서 조금 의아했다.
그러나 의아함은 곧 사라졌다. 행랑아범이 두리번거리며 이쪽으로 오더니 비량아를 향해 손짓했기 때문이다.
“너, 네가 어제 영노극에서 놀았던 그이지?”
“네…. 맞는데요.”
“이리 와 봐라. 도련님께서 부르신다.”
도련님이 부르신다고? 의아하여 대야에 담그고 있던 손을 허공에 털었다. 그걸 보던 꺽두가 비아냥거렸다.
“살아나시더니 이른 아침부터 비역질하느라 바쁘시구먼.”
누가 들을지도 모르는데 조심성이라곤 없는 꺽두의 목소리를 듣고 약뫼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러곤 제 쪽을 돌아보며 허락을 구하는 비량아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천한 광대들이 거절할 방법이란 없었다.
비량아는 옷자락에 손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행랑아범은 비량아가 자신에게 다가올수록 생각보다 신장이 크다는 걸 알고 조금 당황했다. 원체 하체가 긴 편이라 그가 앉아 있을 땐 몰랐던 것이다. 행랑아범이 가솔들 속에서도 작은 키가 결코 아닌데 그보다 컸다. 도련님과 비슷해 보일 것 같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도령의 모습은 비량아의 눈에 보이는 이가 아니라 그들이 보는 진짜의 모습이었다.
안채와 사랑채 쪽으로 올수록 분주한 가솔들의 모습이 보였다. 머지않아 농번기를 알리는 가냘픈 비가 내려 땅이 젖으면 바로 이랑을 팔 수 있게, 겨우내 숨겨두었던 곡괭이 등을 꺼내 말리고 있었다. 녹이 슨 부분은 닦아내고 삭은 나무는 잘라냈다.
그 번잡함을 지나 사랑채 앞에 다다르니 행랑아범은 더 따라오지 않고 고개만 까딱였다.
“저 혼자 들어가요?”
“너만 찾으셨어. 어서 들어가 봐.”
비량아는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며 신을 벗었다.
그 때, 사랑채 쪽으로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게 심어 둔 버들가지가 비량아에게 손을 뻗듯 움직였다. 커다란 버드나무는 사시사철 잎이 있는데, 봄이 되자 연노랑색으로 생기가 도는 것이 그 이파리 하나하나에서 동이 터 오르는 것 같았다. 비량아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자 가지 끝이 닿을 듯 말 듯 하다 곧 떨어져 나갔다.
허무한 손끝을 접자마자 기다렸단 듯 사랑채 문이 열렸다.
“기가 막히는군.”
안에 든 이는 대놓고 비아냥거리며 입술을 한쪽만 슥 올리고 있었다.
“보아도 보지 않은 척, 들려도 들리지 않는 척, 제대로 하고 싶다면 평소에도 모질도록 정신 차리고 있어야지. 저것이 손을 뻗는다고 바로 넘어가나? 한심스럽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버드나무는 백 년이 되었다. 백 년 전에도 이 자리에 있었단 말이지. 능구렁이 영감 하나가 자리를 잡고는 제 변덕에 따라 여기 머무는 이들에게 복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때론 흉사를 가져다주기도 해. 네가 마음에 드는 모양인데, 헛수작 부리게 두지 마라.”
“어찌 그런 걸 그리 잘 아십니까?”
“이미 말했지 않았나.”
사내는 얼빠진 비량아의 얼굴을 보고 혀를 차더니 손목을 훅 당겼다.
“기억을 못 하는군.”
“…….”
기억을 못 하면 다시 알려 줄 수도 있는 건데, 사내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비량아를 세워두고 돌아섰다.
“거기서 기다려.”
익숙하게 명령한 그는 거리낌 없이 침의를 벗었다. 사람이 있건 말건 개의치 않고 탈의하는 모습에 당황한 건 비량아였다.
한 겹밖에 되지 않는 침의를 모두 벗으니 위협적인 근육질의 몸이 드러났다. 게다가 뒤에서도 다리 사이의 물건이 보였다. 빼꼼도 아니고 적나라해 앞에서 보았다면 어땠을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비량아는 같은 사내의 물건을 상상하는 그런 이가 아니었다.
얼굴을 찌푸린 비량아를 면경 너머로 본 사내가 픽 웃었다. 그러곤 귀찮을 정도로 거추장스러운 옷을 하나씩 입었다. 처음에는 침의만 입고 다녔더니 이 몸의 어미가 자꾸만 울고 가솔들이 숙덕거리는 통에 귀가 간지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도 그 번잡스러움과 지루함을 참고 있길 잘했다. 재미있는 걸 발견했으니.
얼추 옷을 모두 갖춰 입은 그가 돌아와 비량아의 앞에 앉았다.
“저 영감은 네가 마음에 드는 모양인데, 너도 영감이 취향이더냐.”
“무슨 그런 말을…!”
돌연 뒤집어쓴 모욕감에 비량아가 고개를 쳐들었다. 사내는 눈을 반짝였다.
“너는 화가 났을 때 더 보기 좋군. 울지도 웃지도 않는 얼굴은 다소 심심했다.”
“…대체 왜 저를 이곳으로 부르신 겁니까?”
“이미 말하지 않았나. 심심해서.”
이 사내와는 도통 말이 통하지 않는다.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비틀자 사내가 손등으로 비량아의 볼을 쓸었다.
“이곳에는 있을 만큼 있었다. 이만 떠나려 하는데, 너도 같이 간다면 데려가 주마.”
“…….”
“같이 가겠어?”
얼토당토않은 말이었다. 고려의 여지도 없었다. 비량아는 코웃음 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최대한 공손하게 대답했다.
“제 가족은 저곳에 있습니다. 저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너는 광대가 어울리지 않는데.”
“키워 준 가족입니다. 죽을 때까지 함께해야지요.”
사내는 비량아의 말을 대놓고 비웃었다. 쓸던 손으로 뺨을 움켜쥐었다. 그는 약뫼의 속내를 알았다. 무리의 우두머리가 비량아를 냅다 바치고 떠나지 못하는 상황을 아쉽게 여겼던 것을. 그런 걸 가족이라 하던가? 겨우 만난 재밌는 것은 멍청하리만큼 순진한 구석이 있는 모양이다. 조금 전 그 찰나에도 홀릴 뻔하더니.
“가족이 그토록 중요한가? 홀로 태어나 홀로 살다 홀로 죽는 게 순리일 텐데.”
“그렇다면 도련님께서는 그렇게 사세요.”
이까지 악물고 대거리하는 비량아의 모습을 보고 사내는 미안함은커녕 되려 크게 웃었다. 순진하긴 한데, 아예 멍청하진 않은 모양이 기꺼워 터진 웃음이었다. 귀가 쩌렁쩌렁한 웃음이었다. 천둥이 치는 것만 같았다.
웃음만으로도 이러는데 이 사내가 눈물을 흘릴 땐 어떠할까. 비량아는 문득 궁금했으나 곧 사내가 손을 뿌리치듯 얼굴을 놓아주어 정신을 차렸다.
“같이 가지 않겠다니 일단은 지금은 그렇게 알아두지.”
돌아선 그는 연꽃이 그려진 흰 자기 주전자에서 찻물을 따라 마셨다. 그 뒷모습에 대고 비량아가 중얼거렸다.
“이만 나가 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서 자신이 아닌 역을 하며 자신의 것이 아닌 물건들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사내는 도둑이나 사기꾼이라기보다는 찬탈자처럼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비량아는 얼얼한 볼을 문지르며 나가려다 문득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떠나신다면 이곳의 진짜 도련님은 어찌 되는 겁니까?”
그 말에 사내가 비긋이 고개를 돌려 어깨 너머로 비량아를 응시했다. 더럭 겁이 나는 시선이었다.
“네가 궁금해할 일은 아니지.”
“…….”
안 그래도 저 반응에 알고 싶었던 마음도 싹 사라졌다. 비량아는 입술을 씹다가 방을 나섰다.
사랑채 문간에 섰을 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곳으로 손을 뻗듯 휘날리던 버드나무 가지가 바싹 말라 있었다. 그 찰나에 가뭄이 들 리도 없는데. 눈을 동그랗게 뜨는 비량아의 옆으로 가솔 몇이 서둘러 달려갔다.
“아이고, 귀한 나무에 좀이 슬었네.”
호들갑을 떨던 이들이 자신들 쪽을 보던 비량아를 쳐다봤다. 여기서 무얼 하냐는 눈빛이었다. 비량아는 두 손을 모아 공손히 인사하고는 자리를 떴다. 그야말로 이곳에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 * *
기이한 시간이 이어졌다. 붙잡아 놓았으니 무엇이라도 시킬 줄 알았건만 아무런 말이 없다. 또 다른 놀이를 하게 할 줄 알았던 놀이패는 처음에는 편했으나 점점 좌불안석이 되었다.
그렇게 사흘이 흘러 나흘이 되던 차, 초저녁에 갑자기 놀이패가 불러 모였다. 연회가 열린다는 모양이었다.
마당에는 방석이 여럿 깔려 있었다. 가장 상석에는 마나님이 계셨고 그 옆에 빈자리가 있었다. 놀이패가 놀이 준비를 하는 동안 자리가 하나씩 채워졌다. 저마다 마나님과 그의 아들인 도령의 이목구비를 조금씩 닮아 있었다. 서로를 부르는 살가운 호칭 덕에 그들이 가족임을 알았다.
커다란 가족, 그리고 그 안의 그 누구도 배를 곯지 않는 넉넉한 재물.
“부럽다.”
놀이패 중 한 아이가 손가락을 쪽쪽 빨며 중얼거렸다. 어미는 그 손을 빼며 손등을 찰싹 때렸으나 그 역시 저들이 부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신분의 귀천이란 결국 전생의 업보에 따라 결정되니 그들이 천한 광대로 태어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되뇌면서도, 그러면 또 막막해지는 것이다. 후생에 귀한 집에서 태어날 정도로 나는 잘살고 있는 것인가.
“뭐가 부러워. 우리도 알아서 잘살고 있어.”
꺽두만이 신경질적으로 씹어 뱉었다. 과부에게 몸을 파는 꺽두는 내생에 조금도 흥미가 없었다. 기대도 없었다.
비량아는 이번에는 역할이 없었다.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그의 몫이었다. 자꾸만 어미의 곁에 붙어 치맛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으려는 아이를 안아 들며 비량아는 고개를 까딱였다.
“후회 없이 놀다 오세요.”
“오오냐.”
약뫼에게 한 말인데 꺽두가 대답했다.
곧 자그마한 화등이 밝혀지며 어슴푸레한 저녁이 농익었다. 밤으로 이어지기 전 짧게 흥을 돋우는 놀이였다. 본격적으로 극을 하는 것은 아니고, 꽹과리와 장구 그리고 태평소로 놀음 조금 하는 정도였다. 탈을 쓴 이들은 옆에서 허청허청 춤을 추면 되었다.
비량아는 아이들을 팔로 감싸서 오리가 새끼를 당기듯 천천히 뒷마당으로 향했다. 그러면서도 몸을 한껏 웅크려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려 애썼다.
“우와! 저게 뭐야?”
무너져가는 그들의 임시 거처, 행랑채에 이르자 아이들이 빨던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외쳤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앞다투어 달려갔다.
마당에는 평소에 없던 평상이 놓였고 그 위, 머릿수에 맞춘 나무 사발마다 전이 담겨 있었다. 내놓기에 모양이 예쁘지 않은 못난이 전들이나 고소한 기름 냄새에 배가 꼬이도록 침이 고였다.
“야, 얘들아. 천천히 먹어야지. 그리고 조금 조용히….”
아이들은 달리면 웃는다. 원래 그렇다. 기쁨에 겨운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는 무리의 뒤로 비량아가 얼른 쫓아가 소란을 잠재우려 했으나, 어느 순간 손목이 잡히더니 한쪽으로 끌려갔다.
엄청난 힘이었다. 비량아는 순식간에 지금 머무는 행랑채를 가리듯 그 사이에 지어진 곳간의 측벽으로 밀렸다.
“네가 나오는 줄 알았는데, 너는 왜 애새끼들이나 보고 있지.”
졸린 듯이 내려 뜬 눈으로 비량아를 내려보는 건 사내였다. 그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다.
“저, 저는 원래 놀이패에 잘 끼지 못합니다.”
“왜?”
심드렁하게 물은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비량아의 얼굴과 몸을 샅샅이 살폈다.
“박색이라 그런 건 아닐 테고.”
“재주가 없습니다.”
“재주? 하기야, 너는 다른 재주를 타고났으니까.”
다른 재주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대로 꾸벅 인사를 하고 가려니 사내가 귀찮게 군다는 식으로 다시 그의 손목을 잡고 당겼다.
“무리 중 제일 뼈대가 굵고 음색이 더러운데 목소리는 가장 큰 놈이 너를 탐하려 하냐?”
“…꺽두요?”
“이름은 알 바가 아니고. 네 이름도 궁금하지 않은데 저놈 이름이 궁금할까, 내가.”
“…탐하려 하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십니까?”
“하기야. 놀이패는 사내도 사내끼리 접붙고 여인도 여인끼리 접붙는다지. 온기만 준다면 말이야.”
“안 그런 곳도 많습니다.”
“그럼 너도 안 그런 곳에 속하나?”
“그건 제 일입니다.”
“여기에 네 일은 없어. 내가 묻는다면 너는 답하는 거야. 내가 묻는 순간 그건 네 일이 아니라 내 것이 되지.”
“듣자 하니 세상이 모두 도련님 아래에 있는 모양입니다.”
“듣자 하니 너는 목숨이 여러 개인 모양이구나.”
꼬리에 꼬리를 물며 점점 말려들기만 하는 대화였다. 이 영양가 없는 담소를 잇느니 가서 못난이 전을 먹는 게 훨씬 나았다. 비량아가 손목을 뿌리쳤다. 이래 봬도 그 역시 무리에서 두 번째로 힘이 센 사내였다. 약뫼가 건강할 땐 세 번째였지만….
허락도 구하지 않고 멀어지려는 비량아의 뒷모습을 보던 사내가 느릿하게 물었다.
“내가 떠나면 도령이 어떻게 되나 물었지.”
“…….”
“어떻게 되는 건 도령이 아니다.”
의미를 모르겠는 말에 비량아는 저도 모르게 멈춰 섰다.
“옛날에 한 여인이 살았다. 태생이 악하고 욕심이 많았지. 그는 산 중턱에서 홀로 살았는데, 어느 날 과거를 보러 떠난 세 형제가 도착했다. 옥동자처럼 귀하게 자란 아이들이었어. 하룻밤 머물고 갈 수 있냐는 말에 그 여인은 편히 머물다 가라고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삼 형제는 여인이 차린 음식을 먹고 죽었지.”
“…….”
그게 이 도령과 무슨 상관이라는 걸까. 게다가 듣기에 즐거운 이야기도 아니었다. 비량아가 흔들리는 눈으로 돌아봤다. 사내는 여전히 심드렁한 말투로 이야기를 이었다.
“여인은 삼 형제의 시체를 뒷마당에 묻었다. 그리고 일 년 후, 그런 사실조차 잊은 채 바로 그 자리에서 피어난 예쁜 꽃을 보았다. 정확히 세 송이였지. 꽃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향은 황홀하리만큼 달콤했어. 그리고 이내 그만큼 아름답고 황홀한 향을 뿜는 작은 열매를 맺었지. 한 송이당 한 개씩. 여인은 그걸 먹었고, 곧 아이를 가졌다. 세쌍둥이였다.”
비량아는 점점 불안함을 느꼈다. 그만큼 이야기에 빠져들었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머리는 총명하고 외모는 수려하고 효심은 깊었다. 여인은 천하를 가진 것 같았어. 그리고 시간이 지나 세쌍둥이는 자라서 과거를 보러 갔다. 삼 형제가 여인을 찾아왔을 때와 정확히 같은 나이였지. 나란히 장원, 차석, 삼석을 하였고, 금의환향하여 여인에게 절을 했다.”
“…그, 그리고요?”
“그게 다야. 절을 하고, 그들은 죽었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순간 비량아의 귀에 처절한 절규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세상을 잃은 여인의 처절한 절규와 함께, 그 일이 어쩌다 그리 되었는지 섬세하게 꿴 구슬이 자르륵 흔들리듯 짜 맞춰지는 이야기.
그러나 저 이야기가 어찌하여 이 집 도령과 관련이 있다는 걸까. 그 의문을 입 밖에 내기도 전에 그의 말이 이어졌다.
“저 버드나무에 사는 영감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집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오래도록 외동아들이 태어나길 기다렸다. 그는 이야기에서처럼 삼 형제가 아닌 외동아이 하나만을 원했어. 집은 번성해야 했고, 그것을 모두 안겨 주고 싶어질 정도로 사랑스러운 단 하나의 자식, 단 하나의 아들을.”
도령은… 외동이라 하였다.
“백 년 전 이곳에 살고 있던 어떤 이가 있었다. 그에겐 아주 귀한 딸 아이 하나가 있었는데, 그들이 살던 그 조그만 땅에 토호 귀족이 자리를 잡았다. 불한당과 다름없던 놈이 나라를 새로 세운 이에게 줄을 아주 잘 댔던 거지. 귀한 딸은 아름다웠고, 이미 부인이 여섯이나 있는 그 악인은 귀한 딸마저 탐내려 했다. 나이를 처먹으며 욕심도 같이 먹은 이였어. 결국 귀한 딸은 우물 안으로 몸을 던졌고, 그 아비는 아끼고 아끼던 고명딸을 쫓아 명을 다했지.”
“…….”
“악행을 너무 많이 저지른 이는 사소한 악행 따윈 기억하지 않아. 딸을 탐내 죽음까지 이르게 한 악인은 곧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잊고 새로 집을 지었다.”
그렇게 말한 사내는 천천히 집을 둘러봤다. 바로 이렇게 지었다는 것처럼. 비량아는 순식간에 백 년 전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가장 행복할 때 망가뜨려야 복수가 아니겠나.”
잔인하고 슬픈 이야기를 하면서도 사내는 일말의 감흥이 없었다. 비량아만이 잠긴 목소리로 되물었다.
“…버드나무에 있다는 영감이 그 아비군요.”
“그래. 딸이 태어나면 집을 풍족하게 번성하도록 해 주었지. 아들이 태어나면 외동이길 기다리며 조금 장난을 쳤고. 이 집안은 자식 복이 많더군. 영감의 복수에 백 년이나 걸렸으니 말이야.”
“그럼… 그럼, 이 집의 도령은 영감께서 죽이신 겁니까? 이미 죽은 이란 말입니까?”
“하필 병약해서, 조금 더 일찍 죽어 버렸지. 명줄은 조금 더 이어져야 했어. 나는 그 자리를 채우고 있을 뿐이다.”
“당신이 무엇인데요?”
“이미 말했잖아.”
싱긋 웃는 모습은 부드럽기보다 차가웠다. 그 얼굴에서 비량아는 비로소 잊고 있던 나흘 전 밤을 떠올렸다. 귀신들의 왕, 괴물들의 스승이라는 난해하고 막막한 그의 정체를.
하지만 그보다 막막한 건 두 이야기 속에 도사린 치밀하고 지독한 복수였다. 악연이 촘촘히 엮이고, 그 결말이 터지기까지 끈질기게 서로를 망치고 있는 모든 관계가 끔찍했다.
저로선 결코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차라리 용서를 하라면 하겠다. 매사 덤덤히, 소금을 약간 탄 물처럼 살아왔기에 비량아는 진저리를 쳤다.
“복수를 하고 싶단 마음은 이해가 되나, 너무 끔찍하여 마냥 먼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이 이야기는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제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겁습니다.”
“그래. 그건 네 마음이지. 나는 그저 네 물음에 답했을 뿐이다.”
“…이미 도령이 죽었는데 굳이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을 기만하면서까지 그 복수를 도우실 이유가 있습니까?”
“그럼 안 그럴 이유는 있나?”
잔인하고 너무하단 생각이 들었다. 입 밖으로 말하지 않았는데도 사내는 네 속이 뻔하다며 코웃음을 쳤다.
“너희들의 마음이 아픈 것까지 내가 일일이 고려해야 하나? 한낱 한철 살다 말 너희보다 나는 백 년을 기다린 저 귀신의 원한이 더 의미 있고 내 호기심이 더 중요해.”
“…….”
궁금증은 풀렸으나 속이 시원하진 않았다. 오히려 불편했다. 그건 사내의 매정하리만큼 차가운 대꾸 탓도 있을 거다. 차라리 듣지 않는 게 나았겠다, 하며 비량아는 마당에 있을 마나님을 떠올렸다.
“신조야, 신조야!”
그리고 그 생각이 가닿은 것처럼 마나님이 모습을 드러내며 이미 사내가 대신하고 있는 도령을 찾았다.
“저 이도 제 아들에게 이상함을 느꼈겠지. 그러나 제 아들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 어리석음을 도저히 모르겠군.”
사내가 어리석음이라 일축한 그 마음은 사랑이다. 사내는 사랑을 모르는 이였다. 비량아 역시 경험해 본 적 없는 마음이나 그걸 어리석다고 믿진 않는다. 상냥한 말투임에도 차가움이 느껴지는 이유는 이 때문일 거다.
그는 비량아에게 마지막으로 시선을 흘끗 주었다가 몸을 돌렸다.
넓은 보폭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비량아는 몸서리쳤다. 저 멀리 있는 버드나무 가지가 손을 뻗어 자신의 볼과 팔을 어루만지는 것 같은 오싹함 때문에.
* * *
연회는 밤이 무르익으며 함께 농익었다. 본당 처마부터 담벼락의 처마까지 줄을 이어 등을 달았다. 은은하게 켜진 오색 창연한 빛이 마당을 밝히고 곡주의 향기가 허공을 가득 채우니, 열심히 음식을 만들던 부엌마저도 그 내음에 취할 지경이었다.
놀이패 역시 떨어진 콩고물로 배를 그득 채웠다. 꺽두는 굉장한 대식가에 주당이라서 쉬지 않고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넌 안 먹냐.”
비량아 몫의 그릇까지 당기며 묻는 말엔 성의가 없었다. 비량아는 가짜 도령, 가짜 신조 사내에게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입맛이 똑 떨어졌다. 가만히 있다가 봄바람이 목덜미를 간지럽히기만 해도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여기저기서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아 무서웠다. 이럴 땐 둔하기 짝이 없는 꺽두가 부러웠다.
“야, 야. 사람이 묻는데 대답은 않고, 어딜 가냐!”
입에 여전히 음식이 그득한 채로 꺽두가 자리를 떠나는 비량아의 뒤에 대고 소리쳤다. 비량아는 들은 척도 않고 구석에 있는 약뫼에게 갔다.
약뫼는 놀이판에서 돌아온 뒤로 줄곧 시커멓게 죽은 낯으로 이 행랑채의 좁은 마당 구석에 앉아 있었다. 기둥에 몸을 기대고 고개를 푹 숙인 꼴에서 스산함이 느껴졌다.
“꺼, 꺽두.”
비량아는 약뫼에게서 한 걸음을 남기고 멈춰서 꺽두를 불렀다.
“꺽두!”
“아, 시팔. 뭐야. 밥 먹는데.”
비량아가 손까지 흔들며 그를 부르는 탓에 꺽두는 이 사이를 혀로 빨며 투덜거렸다. 그러나 부르는 소리와 표정이 심상치 않자 낯짝을 구기며 일어났다. 그러곤 바로 달려와 한껏 낮춘 목소리로 물었다.
“뭔데?”
“대장이 이상해….”
“뭐?!”
“대장이….”
중얼거리다가 끝내 삼킨 뒷말이 무엇인지 꺽두도 눈치챘다. 그는 쌍소리를 중얼거리며 약뫼에게 다가갔다.
“대장. 이봐요, 대장.”
떨리는 손끝으로 약뫼의 볼을 건드리던 찰나, 꺽두는 손끝에 닿는 차가움과 딱딱함에 몸서리쳤다. 돌아보니 비량아의 낯이 허옇게 질렸다. 그 반응에 자신이 무슨 표정을 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둘은 말하지 않고도 눈빛만으로도 상황을 이해했다.
꺽두는 마지막으로 숙인 코 아래에 손을 지그시 댔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약뫼를 번쩍 들어 올렸다.
“아, 씹….”
그 무게를 무어라 설명할까. 불쾌함이 팔부터 발끝까지 쏟아졌다. 구정물을 맞은 것처럼 기분이 더러웠다. 묵직한 나무토막 같다. 그러나 일일이 드러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꺽두가 말하기도 전에 비량아가 서둘러 방의 문을 열었다. 둘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약뫼를 이불로 쌌다. 사내들이 서로 나눠 쓴 단 한 장의 이부자리가 그들이 이 고래등만 한 기와집에서 훔쳐 가는 유일한 것이 되리라.
“오늘 밤 당장 떠나야 해.”
“알아.”
진땀을 흘리면서도 비량아가 곧장 대답했다. 집에서 가족도 아니고 천한 광대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그것도 아들이 나았다며 벌인 연회 날 밤에 이런 사달이 나 찬물을 끼얹었다는 걸 알게 되면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꺽두는 약뫼의 봇짐을 풀어 길게 찢었다. 그것으로 이불째 둘둘 감싸 묶었다. 씻기지도 못했고 옷을 갈아입히지도 못했다. 이게 염(殮)의 전부였다. 그런 꺽두를 황망하게 바라보던 비량아가 별안간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홀린 사람처럼 나가 마루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꽹과리를 가져왔다.
“이거, 이것도 넣어야 해.”
“…지이랄.”
욕설을 지껄였지만 그 소리는 평소보다 기운이 없었다. 꺽두는 청승 떨지 말라고 하는 대신 이불귀를 벌렸다. 비량아는 그 속에 서둘러 꽹과리를 넣으며 눈물을 똑 떨어뜨렸다. 남은 눈물은 겨우 삼킨 뒤 가까스로 중얼거렸다.
“마노라와 먼 길 떠나고 괴로울 것 같거들랑 아예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마시오.”
“질질 짜지 마라. 그리 궁상떨면 가려던 이도 못 간다.”
비량아도 알았다. 떠나는 이의 발걸음과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건 살아 남겨진 자들이 할 예의가 아니었다. 아무리 광대로 태어나 뿌리내리지 않고 떠돌며 살다가 이렇게 이부자리로 염해진 채 버려질 운명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밤이 깊어지면 버리고 오는 거다.”
“당장 떠나는 게 옳지 않을까.”
“당장? 갑자기 저 나으리들이 흥을 돋우라고 우리를 불렀는데 없다면?”
“…….”
“밤이 깊어지면 묻고, 새벽이 되면 술기운에 겨워 깨어난 주인댁에 아뢰는 거다. 우리는 이만 떠나겠노라고.”
불안감이 드는 건 죽은 이가 바로 곁에 있어서일까 아니면 정말로 비량아의 타고난 재주가 경고를 보내는 걸까. 헤아릴 틈도 없이 바깥에서 꺅, 하는 작은 비명 소리가 들렸다.
“도, 도련님.”
“배부르게 먹고 있는 건가 싶어 와 봤다.”
저들에게는 부드러운 미성일 목소리겠으나 비량아에게는 아닐 거다. 애초에 비량아의 귀엔 들리지도 않았다. 꺽두는 도련님이란 소리에 벌떡 일어나다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양 반응이 없는 비량아를 보고 이 귀머거리 병신, 하고 중얼거렸다.
“야. 얼른 일어나.”
얼얼하도록 팔을 잡아끌고선 먹먹한 귀에 대고 씹어 뱉었다.
“두목에게는 아무런 일도 없는 거야. 알았어? 울적한 낯짝하고 티 낼 생각일랑 말아.”
바짝 들이밀어진 꺽두의 입술 사이로 고기 누린내가 나 비량아는 인상을 찌푸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좀 놔….”
그가 꺽두의 어깨를 밀어내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꺽두와 비량아는 말 그대로 심장이 발끝으로 떨어진 것처럼 놀랐다. 불에 데인 듯이 화들짝 놀란 둘은 본능적으로 약뫼의 발치에 바짝 붙어서 시신을 가렸다. 그런 그들을 가늘게 뜬 눈이 천천히 훑어봤다. 신조였다.
“비역질을 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 아닌가.”
한껏 비아냥거리는 소리에 꺽두가 비굴하게 웃어 보이며 대꾸했다.
“아유, 아닙니다. 초저녁부터 그럴 리가요.”
“그럼 깊은 밤에는 그런단 말이군.”
이미 도령과 몇 번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 비량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저자가 또 말꼬리로 말장난을 하고 있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꺽두는 비량아를 팔꿈치로 툭툭 쳤다. 제 딴에는 티가 나지 않은 줄 알았겠지만, 신조는 그 모든 수작을 다 보았다. 또한 그 행동의 이유가, 저 도령이 너랑 떡방아 좀 찧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네가 비위 좀 맞추란 의미란 것도 알았다.
뭔가 숨기고 있군.
제 짝이라도 되는 양 질투로 번들거리는 눈깔을 하던 놈은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라면 직접 비량아의 다리라도 벌려 줄 기세로 바뀌었다. 그 모습이 참 뻔하면서도 늘 새롭게 역겨웠다. 사내의 시선이 차갑게 꺽두에게 닿았다가 사뭇 다른 기색으로 비량아에게 가닿았다.
비량아는 꺽두의 집요한 눈치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반짝 들었다. 싫다는 기색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그걸 숨길 생각도 없으면서 제게로 다가와선 나긋하게 허리를 숙인다.
웃음을 터뜨리고 싶었다. 놀이패에 어울릴 만한 재주가 없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이 흥미로운 인간은 지금 각시극 속의 각시탈을 하고 있었다. 살랑거리며 허리를 흔드는 역을 하는데 그 연기가 형편없었다. 교태라곤 조금도 없었다. 꽃을 닮은 것도 아니고 대나무를 닮았으니 어설프게 흉내 낸다고 통할 리가 없다.
어디 이 우스꽝스러운 연기를 비웃어 줄까… 아니면 장단 좀 맞춰 저 뒤의 송장까지 모두 눈감아 줄까….
“제가 발목이 아프다 하여 잠시 돌봐준 것뿐입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비역질을 하겠습니까.”
“여기가 아니라면 비역질도 하겠단 뜻 같군. 발목이 아프다면 네 바지 속으로 고개를 들이밀어도 된단 말 같고.”
사내는 인정했다. 이 자는 긁는 재미가 있다. 오기와 모멸감에 반짝거리는 눈이 예뻤다. 증오와 미움으로 작은 불티를 틔울 때마다 새카만 눈동자가 반짝이며 그 속에 별이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런 허랑방탕한 짓은 하지 않습니다.”
“광대들이란 원래 허랑방탕한 족속들 아닌가.”
노골적으로 자신을 긁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비량아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저도 똑같이 사내를 공격하고 싶은데 사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무엇을 갖다 대도 비웃고 말지 않겠나. 불공평한 싸움이었다.
한편, 사내는 이 되도 않는 거짓말에 넘어가 주기로 했다. 특별한 의도가 있는 건 아니었고,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무마하여 넘겼다고 여긴 뒤에 상대가 무슨 짓을 할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허랑방탕하게 태어났는데 어쩌겠나. 사통을 방해할 수는 없지. 그저 배불리 먹고 있나 확인하러 왔어. 나는 좀… 주렸거든. 오래도록.”
그리 뇌까리며 돌아보는 뒷모습에 섬찟 소름이 돋은 건 의외로 비량아가 아니라 꺽두였다. 꺽두는 자신이 왜 떨었나 싶다가 특유의 무감함으로 화제를 넘겨 버렸다.
“눈치 못 챈 것 같지?!”
“아마도….”
사내라면 단번에 눈치챌 줄 알았는데, 과대평가했던 걸까. 비량아가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꺽두는 서둘러 약뫼의 시신을 옆으로 밀며 빠른 어조로 명령했다.
“아무래도 당장 뜨는 게 좋을 것 같다. 저 음침한 도령이 날이 밝자마자 시체를 찾아내라며 엿을 먹이면 그땐 답도 없어. 오늘 밤, 우선 무리를 먼저 내보낸 뒤 우리가 뒤쫓아가며 약뫼를 묻자.”
“으응.”
“시팔, 하필 남은 게 이렇게 못미더운 샌님이라니.”
비량아는 꺽두의 근거 없는 힐난에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줄곧 옆으로 밀려난 이불 뭉치를 향해 있었다.
약뫼와 함께 지냈던 기억이 역순으로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처음 만났을 때 약뫼는 스스로를 이 무리의 아비 같은 존재라고 칭했다. 마을 사람들이 앙상한 손으로 제 등을 밀 때, 약뫼는 특히 엄지와 중지 마디에 굳은살이 두둑하게 박인 손으로 비량아의 목을 잡고 끌었다. 거친 손길이지만 누군가 거둬준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은 길이나 산에서 죽었으리라.
“질질 짤 생각 하지 마.”
조용한 비량아를 향해 꺽두가 한마디 했다. 그는 우는 것들이 딱 질색이었다. 울어 봤자 해결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세상일이라는 게 그랬다. 운다는 건 약함의 증명밖에는 안 되었다.
“안 울어.”
멍청한 꺽두. 그 사실을 비량아라고 모르겠나. 비량아야말로 조금 전 흘렸던 눈물 한 방울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마음 깊이 속상하고 슬펐지만, 그와 별개로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시팔, 시팔 상소리를 한참 지껄이던 그가 결심했는지 비장하게 말했다.
“나가서 뭐라도 먹어. 이제부터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야 하니까.”
원래대로 꿀꿀이죽만 먹어도 감사한 나날로.
* * *
밤이 깊어진 것보다 중요한 건 저택의 모든 이가 잠드는 것이었다. 늦은 밤까지 측간을 들락날락하는 소리가 나더니 드디어 무거운 침묵이 도래했다.
“됐다.”
꺽두의 중얼거림에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자는 척을 하던 양쪽 방의 무리가 눈을 반짝 떴다. 그들은 날렵한 몸놀림으로 미리 꾸려둔 보따리들을 챙겨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어둠에 몸을 숨기고 담을 따라 걷다가, 백정들이 육고기를 옮길 때 쓰는 작은 문을 조심히 열었다. 빗장을 풀 때 나무 삭은 소리가 나서 손이 달달 떨렸다.
겨우 문을 연 뒤 잠시 또 분위기를 살폈다. 거나하게 취한 손님들과 그 옆에서 콩고물을 주워 먹고 잔에 남은 술을 핥아 마시느라 덩달아 취한 종들은 반응이 없었다. 때를 잘 잡은 것이다. 약뫼도 이때를 위해서 겨우 버틴 걸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자. 아이들 먼저.”
체구가 작은 아이들이 먼저 뽀르르 빠져나가고, 뒤이어 여인들과 숱 적은 수염을 지닌 이들 몇이 쫓아 나갔다. 남은 건 꺽두와 비량아, 그리고 약뫼의 시신뿐이었다.
“네가 다리를 들어라.”
꺽두가 고개를 까딱이며 신호를 주었다. 비량아는 다리를 들고 이를 꽉 깨물었다. 죽은 이에게서 풍기는 섬찟한 분위기와 촉감 탓에 어질할 지경이었다.
정신을 다잡고 문턱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바깥으로 나왔다. 꺽두는 손으로 약뫼의 머리 부분을 넉넉히 받친 뒤 날렵하게 빠져나와 등 뒤로 문을 꼭 닫았다. 그러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저 집의 재물도 아니니 떠난다고 해 봐야 불쾌할 뿐 굳이 추노까지 붙이지 않을 것이다. 집을 한 번 뒤집기야 하겠지. 이것들이 몰래 훔쳐 간 것이 없나 봐야 하니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만 했담 봐라.”
비량아의 뒤에서 꺽두가 심술궂게 지껄였다. 무리는 평지로 가고 둘은 산에 들러 약뫼를 묻고 가기로 했다. 광대의 팔자가 이런 것인지, 이름조차 없는 휑한 산이었다.
산 중턱에 이르러 꺽두와 비량아는 땅을 팠다. 작은 호미는 무리의 누구든 봇짐에 넣고 다니는 것이었다. 풀뿌리 파먹는 일이야 흔하지 않나.
다만 호미로 사람을 묻고도 넉넉하게끔 파는 일은 쉽지 않아서 둘은 야밤에 땀을 뻘뻘 흘렸다. 봉분 같은 사치를 부릴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파고 나서 멈췄다. 이부자리로 염한 약뫼를 구덩이에 넣고 호미 날로 흙을 모으다가 답답하여 손으로 쓸어 담는 모습이 궁색 맞고 서글펐다.
“이리 묻어 주는 게 어디냐.”
꺽두가 자꾸 그렇게 말했지만, 저 혼잣말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서라는 걸 알았다.
이윽고 다 묻었을 때는 두 사람 모두 기진맥진했다. 아무렇게나 바닥에 널부러져 숨을 골랐다. 그러다 땀을 뻘뻘 흘리던 꺽두가 문득 물었다.
“어디서 만나기로 했었더라?”
“윗골과 아랫골이 나뉘는 갈림길에서.”
“그래…? 멀지 않았던 거로 기억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군. 조금 쉬엄쉬엄 가도 되겠는걸.”
꺽두의 제안에 비량아도 심적으로나 몸적으로나 지친 상태라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제 네가 대장이잖아.”
힘없이 중얼거리며 대답한다. 대장, 그 말을 꺽두는 만족스럽게 읊조렸다.
“맞아. 이제 내가 대장이지…. 대장이 없으면 무리가 어딜 가겠어. 안 그래?”
“응.”
비량아는 꺽두가 여느 때처럼 또 뽐내는 모양이다 하며 성의 없이 대꾸했다.
“무리는 모두 대장 말에 따라야 하고 말고.”
뒤이어지는 중얼거림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비량아는 꺽두의 목소리 저변에 깔린 음험한 속내를 눈치채지 못했다.
“좋아. 말 나온 김에 여기서 조금 쉴까. 아예 눈 좀 붙였다 날이 밝은 뒤 내려가도 좋고. 어차피 아이들이 있어서 지금 당장 만나더라도 바로 움직일 순 없을 거 아냐.”
“무덤 옆에서 잘 순 없어.”
“무슨 상관이야?”
삶과 죽음은 손등과 손바닥처럼 붙어 있다. 다분히 본능적으로 사는 꺽두에겐 무덤 위든 옆이든 흙 밑만 아니면 되지 않나 싶었다. 그렇지만 비량아는 달랐다. 당장이라도 흙 위로 약뫼의 손이 나올 것만 같아서 이 자리를 서둘러 피하고 싶었다.
“쉬더라도 난 여기선 못 쉬어. 더 가 볼래.”
비량아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오기로 움직였다.
발걸음이 축축 늘어졌다. 흙이 젖어 있었다. 비인지 이슬인지 모를 것 때문에 도망치듯 멀어지는 발걸음이 점점 늦어졌다. 반면 그 뒤를 쫓는 꺽두의 걸음에는 여유가 넘쳤다.
만약 사내가 지금 비량아의 곁에 있었다면 일러 줬을 것이다. 포식자는 도망치는 등에 흥분한다고. 등을 보이는 순간, 털은 바짝 서고 동공은 좁아들며 후각은 예민하게 발달한다고.
꺽두의 꼴이 그랬다. 약뫼에 대한 유감은 어느새 뒷전이고 산 자인 자신의 본능이 앞섰다. 멀리 도망치는 비량아의 저보다 키가 큰 뒷모습에서 자꾸만 미아가 된 듯한 불안이 엿보였다. 그는 입맛을 다시며 비죽이 입꼬리를 올렸다.
* * *
비량아와 꺽두는 번개를 맞아 기울어진 나무 근처에서 잤다. 번개 맞은 나무는 나쁜 것을 내쫓는 힘이 있다 하니 그 미신에 빌어 본 것이다.
약뫼를 묻은 이름 없는 산은 높지는 않고 옆으로만 길었다. 밤에 오르느라 그 사실을 몰랐던 두 사람은 하염없이 앞으로만 나아가다가 그만 산을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나무를 둘러싸고 비량아는 가능한 꺽두와 멀리 떨어져 기대앉았다. 눈을 감은 체 꺽두의 동태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행여나 그가 무슨 짓이라도 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러나 다행히도 꺽두는 나무에 기대더니 대번에 눈을 감고 잠들었다. 코까지 드렁드렁 곤다. 그 소리를 숨죽여 듣던 비량아 역시 서서히 잠들었다.
그리고 동트기 직전, 최후의 발악과도 같은 짙은 어둠 속에서 비량아가 움찔 떨었다. 뱀같이 섬뜩한 것이 그의 옷섶을 벌리고 안을 파고들고 있었다. 더운 숨이 목덜미를 불쾌하게 적셨다. 무척 피곤해서 쉽게 깨지 못했던 비량아는 가슴팍이 덥석 잡힌 순간 눈을 떴다.
“뭐, 뭐야?!”
놀라 소리치며 다급히 다리를 위로 걷어 올렸다. 그 탓에 그를 덮치듯 올라타고 있던 꺽두의 가랑이가 제대로 맞고 말았다.
“어억!”
숨을 들이켜며 앞으로 훅 고꾸라지는 묵직한 몸을 밀쳐냈다. 꺽두가 조금 밀리기 무섭게 비량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황한 나머지 옷섶도 추스르지 못했다. 그러나 그보단 도망치는 것이 먼저였다.
그의 낡디낡은, 심지어 크기와 품도 맞지 않은 작은 신은 도망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다. 간밤 제대로 털지 못해서 굳어버린 흙은 짚신을 겨우 붙들어놓긴 했지만 걸음을 가볍게 해 주진 못했다.
‘미친 새끼, 미친 새끼!’
약뫼가 없어지면 자신을 범하려 들 건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바로 짐승만도 못하게 굴 줄 몰랐다. 약뫼를 묻은 지 하루도 되지 않았고 그가 묻힌 산에서 벗어나지도 않았는데. 개자식…!
“비량아!”
쩌렁쩌렁한 외침이 나무 사이를 흔들었다. 해가 떠오르기 전의 발악 같은 어둠은 독하기도 무진 독하여 도통 익숙해지지 않았다.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얼굴이 긁혔다. 그 얼얼함에 두 팔로 얼굴을 감싼 순간, 하필이면 내딛는 걸음 앞이 낭떠러지 끝이었다.
딱 비량아의 신장만 할 높이에서 데구르르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덩달아 젖은 흙이 그의 머리카락과 얼굴을 더럽혔다. 헐떡이며 당장 다시 도망치려는데 발목이 불에 덴 것처럼 아팠다.
“아윽!”
주저앉으며 뱉은 외마디 신음이 나무와 잎사귀에 부딪히고, 날아오르는 새 날갯짓에 실려 꺽두에게까지 닿았다. 두리번거리던 꺽두가 고개를 홱 돌려서는 내달리기 시작했다.
꺽두는 밤눈이 좋았다. 그는 뱀 잡는 땅꾼을 했어도 잘했을 것이다. 어디를 가도 사냥하고 망가뜨리는 일을 해서 먹고살았을 거다. 그 천성의 끝이 지금은 비량아에게 향했다.
“비량아! 이제부터 무리의 우두머리는 나다! 무리의 모든 것은 우두머리, 바로 나, 꺽두의 것이야!”
괴랄하게 웃어젖히며 꺽두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비량아는 이를 악물고 일어나려 했다가 아주 잠깐 절망했다. 이대로 도망친다 하더라도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의 말대로 비량아는 놀이패의 일원이었다. 놀이패는 이제 꺽두의 것이 되었고, 그렇다면 이제부터 그는 꺽두의 것이 맞았다.
어디로 가라고, 어디로.
문득 소금기로 부글거리는 포말 속으로 사라진 아비가 떠올랐다. 하지만 썰물처럼 곧 지워졌다. 이곳은 바다가 아니었고, 비량아는 고작 바다에 홀려 쓸려가는 그런 존재는 되지 않을 거다. 생에 대한 집착이 부모와 비량아 사이의 다른 점이었다.
“비량아!”
이제 목소리가 지척에 있었다. 어쩌면 바로 위에 있을지도 몰랐다. 차라리 어둠을 이용할까. 비량아는 구석으로 엉금엉금 기었다.
그 때 우레와 같은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지진이 난 줄 알았다. 땅이 울리고 모든 새가 일제히 날아올랐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아주 커다란 무엇인가가 비량아의 앞을 지나가, 낭떠러지를 마치 돌멩이를 넘듯 가뿐하게 넘어 올랐다.
“으, 으아악!”
이건 꺽두의 비명 소리였다. 귀를 찌르는 소리에 비량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귀가 좋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처음의 비명 소리 이후로는 잘 들리지 않았으니까.
비량아는 꺽두가 신음을 흘리며 살려 달라고 하는 소리도, 목에 낀 피거품이 끓는 소리도, 숨이 끊어지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도리어 그 작은 소리 하나도 듣지 않기 위해 귀를 막고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범일까? 범밖에 없는데.
이 땅에서 사람들은 한 해의 반은 범에게 잡아먹히며, 한 해의 반은 범을 쫓으며 살았다. 가장 두려운 존재고 가장 현명한 짐승이었다. 범밖에는 가능성이 없는데도 확신이 들지 않는 건 그만큼 아까 본 그림자가 컸기 때문이다.
집채만큼 커다란 범이라니,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저 또한 잡아먹으러 올까. 그는 차라리 바닷물에 쓸려가는 게 나았다고 후회하며 바들바들 떨었다.
“…….”
침묵이 이어졌다. 사위가 고요해진 것도 모를 정도로 비량아는 떨고 있었다. 곧 제 위로 커다란 기와집의 지붕이 기우는 것처럼 범이 덮쳐와 머리와 몸을 뜯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비파가 헐떡이며 눈을 떴다. 겨우겨우 눈꺼풀을 드는 순간 낭떠러지에서 흙이 한 무더기 쏟아졌다. 비량아는 제 발등을 덮은 적갈색의 흙을 보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흙의 색을 알아보고서야 동이 터오르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새벽만은 계절과 상관없이 공평했다. 조금 더 이르게 오느냐 조금 더 게으르게 오느냐의 차이일 뿐이었다. 여름의 밤이 투명하다면 겨울의 밤은 두텁고, 봄의 하늘이 낮다면 가을의 하늘은 높은데 새벽만은 늘 서슬 푸르고 쓸쓸했다.
그 쓸쓸한 빛 속에 사내가 서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비역질을 하려고 했는데, 내가 방해를 했나?”
사내는 풀어헤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물었다. 머리카락은 군데군데 뭉쳐 있었는데, 무엇에 뭉친 건지는 그의 몰골을 보고 유추할 수 있었다.
입 주변부터 턱, 목 아래, 옷깃의 흰 동정과 앞섶, 심지어 손까지 새빨간 피로 젖어 있었다. 뚝뚝 흐를 지경은 아니고 조금 닦아낸 듯싶은데 그것이 도리어 얼룩처럼 두려웠다. 얼룩… 범의 줄무늬처럼 보인다.
“…주, 죽였습니까?”
“그래.”
“어, 어떻게…. 꺽두는 무척 힘이 센데….”
“그걸 힘이 세다고 할 수 있나.”
사내는 코웃음을 치며 제 몰골만큼 더러운 비량아의 꼴을 내려보았다. 비량아의 비참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왜… 왜 여기에….”
“그 도령에게 내려진 천수가 끝났거든. 더는 재미없는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되지.”
“그런데 왜 하필… 내 앞에….”
“소득 없이 남 좋을 일만 하고 돌아갈 순 없잖아.”
그리 말한 사내가 비량아의 손목을 낚아채어 일으켜 세웠다. 발목을 접질리기도 했거니와 정신이 한계까지 내몰렸던 상황 탓에 비량아의 다리가 풀썩 풀렸다. 그 허리를 잡아 가뿐하게 들어 안는 사내의 힘이 어마어마했다.
이 사내가 꺽두를 죽였다. 살인을 한 것이다.
사람을 죽이고 나타났는데 이상하게도 입과 목, 그리고 손에 유독 피가 많이 묻었다. 칼을 썼다거나 목을 졸라 죽였다거나, 비량아가 상상할 수 있는 방법을 썼을 때 보일 모습은 아니었다. 더 야만적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 모든 기이함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고, 비량아 역시 그 모든 게 보였는데도 두렵지 않았다. 두려움보다 안도감이 먼저 몰려왔다. 비량아의 눈이 흠뻑 젖기 시작했다.
“이런.”
사내가 곤란한 양 웃었다.
“너는 우는 게 예쁘구나.”
그러면 나는 늘 널 울리고 싶어질 텐데.
사내의 말을 듣지 못하고, 그가 누구인지도 알면서 달려들어 앞에 있는 목을 답삭 끌어안았다. 피비린내와 그 축축함이 몸서리치게 끔찍한데도 일단 구해졌다는 안도감과… 아닌 척하려 했으나 끔찍했던 꺽두로부터 벗어났다는 해방감이 비량아를 용감하게 만들었다.
“다시 물으마.”
사내가 피에 젖은 손으로 비량아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주 다정하게 물었다. 다정한 말을 뱉는 입술이 새빨갛다.
“같이 가자고 하면, 같이 갈 테냐.”
“…거절한 한 번이 민망하니 세 번은 물어 주십시오.”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떼어낸 비량아의 요구가 맹랑하기도 하고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제법 귀여워서 사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라면 절대 들어주지 않을 아주 귀찮고 성가신 부탁이나 한 번쯤은 어떠냐 싶었다.
“같이 갈 테냐.”
지금 저의 상황에서 안 갈 수가 있나…. 돌아보아도 벼랑, 앞을 보아도 태산이었다. 차라리 태산이 나았다. 비량아가 울먹이며 대답했다.
“…네. 같이 가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다. 너는 사람들 속에 어울릴 수 없어.”
어울릴 수 없다면 평생 이방인으로 외롭게 산단 말인가. 저주처럼 단언하는 말이 재수 없었으나 그래도 은인이라고 꾹 참았다.
그사이 사내는 비량아가 눈치챌 수도 없을 만큼 가벼운 몸놀림으로 낭떠러지 위를 올라와 비량아가 지금껏 왔던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산 정상 쪽이었다.
산을 넘어 다른 곳으로 갈 것이다. 이름도 없는 이런 방석만 한 산은 그에게 답답하기만 하다. 가는 동안 이 어리고 흥미로운 것을 조금 가르치는 것도 유흥이 될 테지.
“너는 보아도 보지 못한 척, 들어도 듣지 못한 척할 필요가 없어. 너는 그것들을 이용할 수 있고 심지어 부릴 수도 있지. 내가 그 방법을 가르쳐 주마.”
“저에게 왜 그런 걸 가르쳐 주시려 하십니까…?”
여전히 코가 먹먹한 목소리로 되묻는 비량아에게 사내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야 내가 괴물들의 스승이기 때문이지.”
“…….”
“재미없는 벌레들 속에 숨어 있던 어리고 작은 괴물아.”
상대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을 무람없이 내뱉는다. 거리낌 없이 지껄이는 언행에선 태생적인 지배자의 느낌이 났다.
여전히 귀신들의 왕, 괴물들의 스승이라는 말이 이해되지 않지만, 비량아는 뻗어진 이 동아줄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무리에게 돌아간다면 우두머리를 해친 죽일 놈이 되어 정말로 버려질 테니.
오갈 곳 없는 비량아에겐 동아줄이 썩은 것인지 금은으로 된 것인지는 전혀 중요치 않았다. 설령 그 동아줄이 자신을 괴물이라 칭하더라도. 그렇다면 괴물이 되면 될 일이었다.
산을 넘자 작은 분지가 나왔다. 비량아는 거기서 잠시 쉬자고 했다. 이성을 되찾은 후로는 부담스러운 나머지 안았던 걸 내려달라고 했었다. 그러더니 이제는 또 힘들어서 기다려 달라 간청하게 된 것이다.
“나약하긴.”
사내는 혀를 찼지만 그래도 기다려 주었다. 마침 산에서부터 흘러 내려오는 개울물이 있어서 그곳에서 쉬었다. 비량아는 주저앉은 채 개울 안으로 들어가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피를 닦아내는 모습이 능숙했다. 무척 더러워진 옷은 개의치 않고 손과 얼굴, 목만 대강 닦아낸 뒤 머리를 높게 틀어 묶으니 괴기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사내는 괴기했고 아름답고 두려웠다.
“저희는 어디까지 갑니까?”
흐르는 수면 위로 얼굴을 비춘 비량아가 조용히 물었다. 머릿속에는 갈림길에서 새 대장을 기다리고 있을 놀이패가 함께 흘러가고 있었다.
흐르는 기억 속에 낯익은 면면이 떠내려간다. 대장이 없는 무리의 미래는 뻔했다. 비량아를 망가뜨리려 한 건 꺽두 하나였으나, 비량아가 망가뜨린 건 여럿의 목숨이 된 셈이다. 그의 낯이 어두워졌다.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그들을 생각하면 돌아가서 이야기라도 전해야 하지만, 그럴 수 없다. 그들은 분명히 제가 꺽두를 죽였으리라 생각하겠지. 차라리 비량아까지 돌아오지 않았으니 둘 다 범에 물려 죽었다고 여겨주길 바랄 뿐이다.
위협을 당한 건 자신인데 어디에도 토로할 수 없다. 이젠 외톨이에, 무리를 망친 죄인까지 된 거다. 눈을 질끈 감고 수면을 후려치는 비량아를 물끄러미 보던 사내가 다가와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 산까지 갈 것이다.”
“…산도 있으십니까.”
여전히 일그러진 얼굴로 비량아가 되물었다. 목소리도 잠겨 있었다.
“모든 산이 내 것이지. 왜. 믿기지가 않아? 너처럼 갈 곳도 머물 곳도 없는 떠돌이인 줄 알았나.”
“…범이 사람 모습이 되기도 하고 사람이 범의 모습이 되기도 하니 실감이 나지 않아서 물었습니다.”
“너희들의 좁은 세상에선 사람은 사람 모습이어야만 하고, 범은 범이기만 해야 하니 그렇지. 나는 사람 모습도, 범도 될 수 있고 심지어 괴물도, 귀신도 될 수 있거든. 너희는 항상 두 발로만 다녀야 하니 재미라곤 조금도 없겠다.”
“듣자 하니 은인께선 저희들을 무척 무시하시네요. 사람을 하찮게 보시니 분명 사람은 아닌 모양입니다.”
기운이 쪽 빠져 맥없는 와중에도 그놈의 말대꾸는 쉬지 않았다. 사내는 픽 웃고는 막 자란 새싹을 성의 없이 뽑아 던졌다. 오로지 심심풀이로.
“어쨌든 함께 가겠다고 했으니 따라가야지요. 그곳이 어디든지요. 게다가 생명의 은인이신데, 원래 저희 같은 하찮은 것들은 길을 가다가 넘어진 걸 잡아준 은인에게조차 적어도 삼 년은 은혜를 갚는 게 도리라 믿거든요.”
조금 무시 좀 했다고 꽁하기는. 게다가 삼 년은 누구 코에 붙이나. 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고작 삼 년?”
“사람에게 삼 년은 깁니다.”
“나에겐 눈 깜짝할 시간이다.”
“정말 대단하신 분인가 보네요.”
비아냥대는 티가 역력하였다. 사내는 흥겨웠다. 대화가 이토록 즐거웠던 적은 오랜만도 아니고 거의 처음인 것 같다. 건방지다며 한 손만으로 단숨에 머리통을 깨부술 수 있는데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뭐, 우는 모습이라면 보고 싶긴 하다. 우는 모습이 퍽 보기 좋았으니.
“나의 조부는 곰과 함께 동굴에 처박혔다. 쑥과 마늘만 먹으며 백 일을 버티면 너희처럼 되리란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 발로 걷고 양손을 뻗어 과일을 움켜쥐고 싶었다. 그 마음 하나로 쑥과 마늘을 먹었고 매일, 매일… 육고기와 피에 대한 갈망을 견뎠지.”
사내는 얄밉지만 재밌는 이야기만은 많이 알았다. 잔뜩 지치고 울적해진 비량아조차 귀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견줄 수 없는 싸움 아니냐. 곰은 꿀만 먹고도 살 수 있다. 하지만 범은 피와 살코기를 취해야만 살 수 있다. 50일을 버티고 동굴을 뛰쳐나왔다고 하지. 그리고 곰은 남아 끝내 너희 같은 모습이 되어 아이를 낳았다고 하고.”
사내는 비량아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렇다면 반백 일을 버티고 나온 범은 무엇이 되는 거냐. 그냥 짐승?”
까마득하게 먼 옛날이야기인데도 비량아는 대답을 알 수 있었다. 그냥 짐승은 되지 않았을 거다. 사람도 아닐 거다.
“아주 오래 살았고 그 누구보다 현명했지. 짐승의 모습이었을 뿐. 그러나 사람 모습도 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 이 땅엔 사람 수의 반도 되지 않는 괴물들도 잡초처럼 자라기 시작했어. 범은 그들과 짐승들을 이끌었다.”
“…….”
“나는 끝까지 동굴에 남은 곰이 어리석다고 생각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대답할 수 없었다. 저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비량아는 곰의 아이였다. 곰의 아이가 곰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대신 말을 돌렸다.
“그럼 그 조부는 어디 있습니까?”
“죽었어.”
사내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아버지인 전 범신도 죽었고.”
신이 어떻게 죽을 수 있을까. 사내가 마침 이유를 덧붙였다. 그들은 무료하고 지루한 나머지 죽음을 선택했다고.
비량아로선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삶이란 늘 치열하다. 생존을 위해서 매 계절을 치열하게 나야만 했다. 그런데 어떻게 지루할 수 있을까. 사내가 까마득하게 멀게 느껴진다. 단 한 순간도 가깝다고 여긴 적은 없으나 지금 이 순간 이후로는 더욱 멀게 느껴질 거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진 죽고 싶을 만큼 지루하진 않아. 구미호에게 사람 간 백 개를 먹으면 사람이 되는 방법도 가르쳐 주고, 바다뱀에게는 바다를 건너는 이들에게 공양을 받는 방법도 가르쳐 준 뒤로는 이제 너희를 가까이서 봐 볼까 했거든. 그런데 다 빤하게 사는지라 오래 볼 것도 없어 질리려던 참이었다.”
“…그러다 절 보셨고요.”
“그렇지. 꽤 신기해. 날 대하는 것도 그렇고. 처음에는 순진하고 멍청한 줄 알았는데, 그런 것 같지도 않고 말이야.”
사내는 비량아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흥미와 재미를 느끼느냐가 중요했다. 오죽하면 자신의 이름도 궁금해하지 않고 오로지 흥미로운 나비라도 되는 양 보는 사내의 시선에 비량아는 쓰게 웃었다.
그리고 그것이 비량아가 자신의 분수를 깨닫게 해 주는 적정선이 되었다.
사내는 분명 자신을 구해준 은인이고 심지어 오갈 데 없는 그를 거두어 주겠다고 했으나, 그건 잠깐의 흥미 때문에 생긴 변덕에 불과하다. 마음은 언제고 변하고 흥미는 언제고 싫증으로 바뀐다.
처음 마당에서 보았을 때보다 그다음 날이, 그날보다 지금이 더 멀게 느껴지듯 알면 알수록 사내가 멀게 느껴졌다. 그리고 가까워질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영영 다른 존재였다. 비량아가 자신을 어떻게 여기는지, 얼마나 멀리 있는 존재로 여기든지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역시 삼 년 후쯤에는 제가 떠나려 하지 않아도 그쪽이 저를 먼저 내쫓으실 것 같습니다.”
“그쪽?”
사내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량아는 별것 아닌 투로 대답했다.
“예. 알고 보니 도련님도 아니셨잖습니까. 도련님이 아니니 그리 부를 수 없고 저도 그건 좀 찝찝해서요.”
“아… 그렇지. 너희는 이름에 목을 매지.”
“그 집에선 신조라고 부르던데, 그 이름으로 불러도 될까요? 이미 귀에 익어버렸습니다. 아니면, 은인님으로 부를까요.”
“은인님은 낯간지러워 싫다. 도련님이라 부르긴 찝찝하고, 그 이름을 쓰는 건 괜찮고?”
“성을 달리하면 되지 않습니까. 이름이야 뭐, 주변에 널린 이름이 개똥이입니다. 혹시라도 그쪽이 괜찮으시면.”
개똥이는 당연히 싫었다. 사내는 얼굴을 더욱 구겼다. 사실 이름 같은 건 필요 없었다. 그는 존재 자체가 산이고 존재 자체가 증명이었으니까.
이런 건 또 조금 귀찮네. 겨우 앵앵대는 도령의 집에서 벗어났나 했더니.
그냥 두고 갈까, 하던 차에 마주한 눈이 다시금 그의 마음을 끌었다. 그의 마음을 끄는 존재는 드물다. 이 세상의 것과 다른 세상의 것까지 보는 눈이 새벽처럼 투명했다. 결국 사내는 집어치우란 말을 꺼내지 못했다.
사내가 더 싫단 기색을 보이지 않자 비량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되물었다.
“성을 범으로 하겠습니다, 그럼. 아무래도… 범이니까.”
“그건 절대 싫다. 그냥 이름만 불러. 그것도 아주 어쩔 수 없을 때만.”
“왜요?”
“내가 고작 짐승 취급당하는 걸 견딜 것 같으냐? 난 성 따위 필요 없어.”
사내는 신경질적으로 일어나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이름도 부를 일이 없을 것이다. 이 재미있는 것이 대화를 나눌 상대는 자신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네 마음대로 불러라. 단, 한 번만 더 짐승 취급하며 그따위 이름을 붙이려 들면 네 머리통도 으깨질 줄 알고.”
“…네.”
이미 은인님 같은 소리는 싫다고 했으면서, 마음대로 부르란다. 부를 일이 없을 거라 여기는 모양이다. 비량아는 속으로 이미 사내를 신조라고 부르기로 했지만 입으로는 순순히 대답했다.
다른 이름을 짓기에는 도저히 떠오르는 게 없다. 아무래도 저는 이런 데 재주가 없는 모양이다. 언젠가 기적처럼 연인을 만나 아이를 낳게 되더라도 이름을 짓는 일은 배필에게 맡겨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배필은 무슨. 누가 제 짝으로 오겠나. 그럴 일은 없다. 비량아가 자조하는 사이, 신조가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이만 가자. 가면서 네가 배울 것들이 있어 시간이 좀 걸릴 거다.”
“배울 거요?”
신조는 맹하니 되묻는 비량아를 돌아봤다. 그리고 비량아의 흉골을 툭툭 건드렸다.
“넌 이곳이 활짝 열려 죽은 것들이 너를 탐내는 거다. 열어두고 안에 든 것을 모두 훔쳐 가길 원하는 건 아니겠지. 네가 원할 때 여닫고, 설령 네 몸을 빌리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때 너 역시 소득이 있을 수 있게 가르쳐 주마.”
신조가 웃었다. 짙은 이목구비가 화려하게 피어났다. 가만히 홀린 것처럼 그 모습을 보던 비량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재수 없게 하고 사람을 무시하고 천성이 차갑긴 해도, 그래도 자신을 살렸고 적어도 지금 당장 자신에게 어떠한 속셈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흥미로움. 비량아의 가치를 오로지 그 하나로 평가하는 건 오히려 고마웠다. 음험한 마음, 동정… 이런 게 아니라서.
“그럼 가 볼까.”
“그, 그런데!”
돌아서는 신조를 엉겁결에 붙잡은 비량아가 외쳤다. 무슨 일이냐 돌아보는 그에게 비량아가 꺼져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제 이름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신조가 고개를 갸웃하였다. 그러곤 되묻는다.
“내가 그걸 알아야 하나?”
“…….”
“너는 길가에 있는 모든 잡초에게 이름을 붙여 주고 외우나 보지?”
기대한 게 있는 것도 아닌데 가슴이 선득하게 시렸다. 악의에 찬 폭언보다 더 서늘한 비수였다.
당혹감에 젖어든 얼굴을 가만히 보던 신조가 다시 몸을 돌렸다. 그의 배려 없는 보폭에 비량아는 서둘러 뛰어야만 했다. 어디 가서 남의 걸음에 맞춰 준 적은 있지 맞춰 본 적은 없는 탓에 퍽 낯설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신조가 웃음기 머금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 속삭임이 바람에 실려 비량아의 귀에 닿았다.
“하지만 본인에게 특별한 잡초라면 누구든 이름을 지어 주고 싶을 테고, 혹시 이름이 있다면 알고 싶겠지.”
“…….”
“비량아. 너를 부르는 소리를 들어서 이미 안다.”
아…. 비량아는 저도 모르게 앞섶을 움켜쥐었다. 사람을 정말로 입 속에서 혀로 굴리듯 가지고 노는구나. 비웃다가도 손을 내밀고, 밀쳐내다가도 껴안는 무뢰한이었다.
그리하여 제 분수를 알아 기대하지 않고, 호감이랄 것도 없어 버석한 마음조차 멋대로 출렁거리고 이상한 간지러움을 느끼게 했다. 이러다가 또 바닥으로 내동댕이치는 차가운 말을 하리란 걸 알면서도 재차 듣고 싶게 만들었다.
신조는 위험했다. 아름다운 털가죽과 영롱한 호박과도 같은 눈빛으로 사람을 제 아가리로 이끄는 범, 그 자체였다.
“조, 조금 천천히 가 주십시오.”
비량아가 낯설도록 술렁이는 가슴을 부여잡고 부탁했다. 뒤돌아보지 않고 제 앞길만 보는 신조의 걸음이 눈에 띄지 않게 아주 천천히, 천천히 비량아의 보폭에 맞춰졌다.
완전히 날이 밝고 놀이패는 이미 아랫골을 넘고 있을 때, 비량아와 신조 역시 억새풀 분지를 건너고 있을 때, 그들이 떠난 아름다운 기와집에서 숨죽인 통곡 소리가 나왔다.
이미 파장한 연회의 분위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방에서 도련님의 주검이 발견되었다. 늦도록 깨지 않아 직접 흔들어 깨우기 위해 들어갔던 마나님은 그대로 졸도하였고 유모는 혀를 깨물 뻔했다.
담장 너머 누군가가 침입한 흔적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도련님은 범에 물려 죽은 모습이었다. 그건 신조가 잠시 가려두었던 도령의 최후였다. 그는 유랑을 떠났다가 범에 물렸다.
범에 물린 이들은 창귀가 되어 가까운 다른 이를 데리고 떠난다 하였다. 그렇기에 소문낼 수도 없어 장례도 크게 치를 수 없었다.
해묵은 원한이 끝나고 억누른 울음소리가 문지방 사이로 새어 나오는 사이, 아름다운 기와집의 백 년 묵은 버드나무가 조용히 시들었다. 시들어 떨어지는 나뭇잎 소리가 노인의 웃음소리처럼 허허로웠다.
* * *
윤오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뒤이어 입술이 달싹 열리고 숨을 들이켰다. 오래도록 죽었다가 다시 깨어난 것처럼 몸이 제 몸 같지 않았다. 눈꺼풀은 눈알에 들러붙어 쉬이 떨어지지 않았고 전신의 마디마디가 괴로웠다.
윤오가 나지막하게 신음을 흘리자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신조가 벌떡 일어났다.
“김윤오…!”
“으….”
입술 움직임으로 목이 마르다고 겨우 중얼거리자 그걸 본 신조가 잔을 가져왔다. 마시는 이도 없는데 매일 새로 채우는 물로 입술을 적셔 주고, 목에 걸리지 않게끔 천천히 넘겨 주었다. 오랜 갈증을 채운 윤오가 겨우 눈을 떴다.
“…저 죽었어요?”
“일어나자마자 재수 없는 소릴 하는 걸 보니 김윤오가 맞군.”
“그럼 저 왜… 몸이 무거워요?”
“발정기가 끝나고 사흘을 깨지 않았어. 오늘이 나흘째였지.”
“나흘… 나흘이요?”
목이 잠겨 드문드문 말하던 윤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미간을 가만히 문질러 주며 신조가 다시 침대 옆에 앉았다. 윤오는 짐짓 그를 흘겨봤다.
“…변태.”
“병원에 입원까지 했으니 인정해야 하나.”
신조는 선선히 대꾸했다.
“병원이라고요…?”
“그래.”
“저, 저… 어디가 아프고 그런 건 정말 아니죠?”
“그래.”
깜짝 놀랐던 윤오가 여느 때처럼 차분한 대답에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그러고 나서야 뒤늦게 나흘이라니. 하고 어이없이 중얼거리고 만다. 시간이 그렇게 빨리도 사라지는 거구나.
그런 후에야 저보다 더 놀랐을 범신조를 향해 돌아봤다. 기분 탓인지 남자는 조금 수척해 보였다.
“그쪽은… 나 기다렸어요?”
“…그래.”
윤오는 낯설면서도 낯익은 사내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긴 꿈을 꾸었다. 꿈이 길어서 깨기까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나? 기이할 정도로 길고 또 선명했다. 차라리 꿈이 아니라 기억 같았다.
꿈속에서 그는 비량아였다.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이런 치밀하고 생생한 꿈을 꿀 정도로 제가 상상력이 좋았던가. 보통 꿈은 으레 깨기 직전의 이야기만 편린처럼 기억난다. 이렇게 모든 장면이 떠오를 수는 없었다. 그럼 정말로 이건 기억일까? 기억이라면, 전생 같은 걸까? 자신과 범신조의?
그렇게 묻자마자 윤오는 곧바로 부정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애초에 전생 같은 걸 믿어 본 적이 없다. 게다가 다짜고짜 범신조에게 우리가 전생에 만난 적이 있냐고 묻기에는 본인이 듣기에도 미친 소리 같았다.
그래서 윤오는 잠시 이 일을 머리 한편으로 미루었다. 발정기가 끝나고 잠시 꾼 꿈일지도 모른다. 만약에 다시 꾸게 된다면 더 확신이 생기겠지만, 아직은 부족했다.
다시 꿀 리가 없어. 고작 꿈이야… 되뇌면서도 자신은 없었다.
게다가 비록 꿈속에서 ‘비량아’는 고생을 하긴 했으나 결국 구해졌다. 구한 상대는 범신조와 똑같이 생겼고, 범신조보단 더 차가운 구석이 있긴 해도 결국 다정한 면도 있었다. 그렇게 둘이 떠나는 게 이 이상한 꿈의 결말이 아닐까. 그러길 바랐다. 그 이후의 이야기가 알고 싶으면서도 영영 알고 싶지 않았다.
윤오는 꿈 대신 현실을 직시했다. 자신의 손을 감싸 쥐고 조용히 내려다보는 범신조를. 그 눈 속 깊이 일렁이는 걱정과 흘러넘치는 애정이 여기에 있지 않나.
“…제가 또 죽을까 봐 걱정했어요?”
“…….”
“걱정해도 제가 걱정해야죠. 창창한 나이에…. 억울한 건 난데.”
“네가 일찍 죽으려 했다면… 이대로 죽을 것 같았다면….”
신조는 고작 며칠 깨지 않은 것에 대해 지나치게 불안해했다. 조금 전 윤오에게 아픈 곳은 없다 해놓고 죽음을 입에 담는다. 범신조는 감싼 손을 조용히 입술로 가져간 뒤 눈을 감았다.
“이번엔 차라리 내 손으로 널 죽이려 했어. 차라리….”
이번엔, 이라니…. 왜 그렇게 말을 해요. 마치 저번이 있었던 것처럼.
윤오는 지금도 꿈의 연장선이 아닌가 싶었다. 그만큼 얼떨떨했다. 그러나 범신조의 손은 뜨거웠고, 뒤늦게 둘러본 주변은 억새풀 밭이나 울창한 숲 대신 깔끔하게 정리된 침구나 너스콜 같은 게 있었다. 윤오가 입술을 달싹였다.
“범… 신조.”
그 조용한 중얼거림에 빈 잔을 손에서 굴리던 범신조가 고개를 들었다.
“범… 신조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정말?”
범이라는 말에 코웃음을 치고 신조라는 이름에 그런 것에 집착하는 저를 한심하게 여기던 목소리가 마치 엊그제 들은 것처럼 머릿속에 생생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흐려지는 여느 꿈과 다르게, 점점 더 선명해지기만 한다.
지금 보이는 얼굴이 당장이라도 냉소를 지을 것 같은데 신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윤오는 망설이다가 또 물었다. 이번엔 대놓고 도발하는 말투였다.
“범 말고 견이라고 불러도 괜찮고요? 정말 내 마음대로 불러도 괜찮아요?”
한낱 짐승들과 내가 똑같냐 하던 거만한 말투가 귓가에 생생한데, 그의 앞에 있는 범신조는 이리 대답한다.
“네 마음대로 불러. 그게 나를 부르는 것이라면 뭐라고 해도 좋아.”
“…개새끼라고 해도?”
그 말엔 신조가 크게 웃었다. 왜 웃나, 그건 역시 선을 넘었나 하는데 범신조의 대답은 생각과 달랐다.
“뭐라고 불러도 괜찮다니까.”
혼란스러울 정도로 윤오의 머릿속에 찰싹 붙어 있던 꿈이 조금 떨어져 나가는 것만 같다. 잠시나마 미칠 것처럼 현실 구분이 안 되었는데, 꿈속의 사내와 지금 보는 범신조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묘하게 안심한 윤오는 충동적으로 팔을 벌렸다. 범신조는 눈썹을 올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윤오를 마주 안았다. 벌린 팔 안으로 들어오는 커다란 몸에 조심스러움이 한가득 묻어났다. 만지면 부서질까 불면 날아갈까, 항상 밉살스럽던 말투보다 더 선명하게 깊이깊이 배어드는 진심이 이곳에 있었다.
이어질 이야기가 궁금했던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뒷일은 궁금하지 않았다. 지금 그는 편안하고, 껴안고 있는 사내는 다정했으며, 이미 자신의 마음은 바람에 따라 몸을 뉘는 벼처럼 기울었으니.
* * *
윤오는 하루를 더 병원에 머물렀다. 병원에 이렇게 커다란 병실도 있는 줄은 몰랐다. 침대도 커다랗고 심지어 소파에 테이블도 있었다. 윤오와 신조는 침대에 나란히 몸을 붙여 누웠다. 범신조는 체구가 커서 그가 눕자 커다란 침대가 순식간에 꽉 차게 느껴졌다.
씻고 나온 그에게서는 물 냄새와 옅은 비누 냄새가 났다. 머리카락 끝이 조금 젖어 있었고, 얼굴에는 피로감이 묻어났다. 앞서 일어나지 말라며 그가 빨대 있는 음료수를 갖다준 덕에 반쯤 누운 채 음료를 마시고 있던 윤오가 물었다.
“피곤해 보여요.”
“아무래도 일주일을 거의 못 잤으니까.”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하는 이야기에 윤오는 당황했다. 일주일이라니.
“호텔에서 사흘, 여기서 사흘. 그래도 중간중간 조금씩 잤어. 괜찮아.”
호텔에서 사흘이라 함은 역시 발정기 때를 말하는 걸 테다. 그걸 잤다고 하기에는 범신조나 김윤오나 알맞지 않았다. 수면은 그런 게 아니었다.
윤오는 그 후로 사흘 밤낮을 깨지 않고 오래도록 잤으니 나흘째인 오늘은 똘망똘망했다. 그러나 반대로 그동안 내내 잠들지 못한 범신조는 죽도록 피곤할 게 분명했다. 한쪽 팔을 윤오의 머리 위로 올려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는 손길에서 노곤함이 느껴졌다.
“좀 자요.”
“그래야지.”
“저 신경 쓰지 말고.”
“넌 늘 신경 쓰여.”
“…….”
툭 내뱉는 말에 윤오는 또다시 꿈속의 사내를 떠올렸다. 사람을 몹시 상처 주고는 마지막에 던지는 말이 유독 달아서 다시 끌려가고 말던 위험한 사내를 말이다. 그렇다. 꿈은 여전히 기억에 남아 생생했다. 직접 경험한 것처럼 숲속을 달리며 부딪혔던 가지의 촉감과 억새풀의 건조한 냄새까지 남아 있었다.
범신조는 입을 가리고 잠시 하품을 했다가 윤오의 어깨에 볼을 괴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윤오는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적요함을 깨기 위해 틀어놓은 TV에서 출연진의 경망스러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럴싸한 분위기를 조성하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둘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윤오는 이것을 단지 긴장감으로만 인식하고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연상하지 못했다.
그런 윤오를 빤히 알아챈 신조가 헛웃음을 뱉었다. 그러곤 몸을 조금 더 돌려 완전히 마주 보도록 한 뒤, 그의 머리 위로 걸치고 있던 팔을 내려 뒤통수부터 감싸 당겼다. 다른 손으로는 윤오의 얼굴을 감쌌다.
얼굴을 완전히 감싸고 엄지로 입술 꼬리를 꾹 누르자 옆으로 살짝 벌어지는 입술이 무해하다.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밤을 보내고선도. 범신조에게 있어 무지함은 죄악이다.
“첫날밤이 지나자마자 신랑을 두고 도망친 것처럼 깨어나지 않더니, 이제는 이런 눈으로 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가?”
“무슨 신랑이에요….”
윤오는 진심으로 진저리쳤다. 범신조는 크게 웃었다. 싫어할 줄 알고 한 말인지라 이 반응이 재미있다.
“싫어? 네가 싫다면 내가 부인을 할까. 나는 아무거나 상관없는데.”
“둘 다 싫어요.”
“좋아.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네가 좋아하는 건 별로 없잖아?”
중얼거리며 다가오는 얼굴에 윤오의 손이 움찔거렸다.
비교할 상대가 없어도 알 수 있었다. 범신조는 이 짓을 정말로 잘한다.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물었다가 떼고는 다급하게 다가와 혀로 입술 사이를 더듬는다. 쉽게 뜯어지기도 하고 헐기도 하는 입술 안쪽이 그렇게 어루만져질 때면 절로 우는 신음이 나왔다.
범신조는 떨어지려는 머리를 단단히 잡았다. 억센 힘과 다르게 손길은 무척 부드러웠다. 윤오는 여전히 제 볼을 감싸고 있는 손목을 떼어내려다가 도리어 그걸 동아줄마냥 붙잡고 하염없이 녹아내려야만 했다.
어루만지는 손길이 우악스러움과 섬세함을 넘나들었다. 갑자기 손에 힘이 들어갈 때면 범신조의 목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고 나면 다시 손길이 부드러워졌다. 어떠한 걸 떠올리며 견디고 참는 듯싶었다.
감은 윤오의 눈 너머로 넓은 풍경이 펼쳐졌다. 은빛으로 빛나는 억새풀 분지였다. 사방에는 낮은 산이 둘러쳐 있고, 내려앉은 분지에는 설익은 억새들이 흔들리며, 그 사이사이로 산에서부터 내려온 물이 흘러 땅을 부풀게 했다.
그리고 그 고요한 억새 한가운데, 자신을 짐승 취급하지 말라며 일갈하고 네 이름 같은 건 궁금하지 않다고 하다가도 돌연 비량아, 하고 부르는 사내의 옆모습이 아름답다. 비량아는, 아니 윤오는, 그 옆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김윤오….”
한숨처럼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못내 달콤하다. 윤오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침대 위에 범신조와 마주 보고 누워 있었다.
하지만 주변 풍경은 더는 병실로 보이지 않았다. 남들이 가냘프고 병약한 도령으로 볼 때조차 진짜 모습을 훔쳐보고 말았던 비량아처럼, 윤오는 병실이 아닌 억새밭을 보았다. 낭창거리는 억새로 가득 찬 세상 속에, 둘이 누워 있는 침대가 섬처럼 외따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마른 핏자국이 남아 있는 긴 머리칼의 신조와 짧은 머리칼의 범신조가 겹쳐 보인다.
‘비량아. 너를 부르는 소리를 들어서 이미 안다.’
그 순간 비량아는 마음 빗장을 열어버리고 말았으리라. 빗장이 열린 문은 바람이 조금만 거칠어져도 쉽게 흔들린다. 틈이 살짝이라도 벌어지면 그 속으로 비바람이고 눈발이고 쉬이 들이친다. 손가락 마디 하나만 한 틈이 모든 것을 바꾼다.
“네가 눈을 뜨지 않는 동안 별로 살고 싶지 않았어. 다시는 그러지 마.”
윤오의 마음 역시 그랬다. 빗장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량아가 신조의 말 한마디에 그랬듯 김윤오 역시….
나는 실수하는 걸까, 그때처럼….
어느덧 자신도 모르는 사이 꿈속의 비량아와 자신을 일체화시켰단 사실을 깨닫기 전에 신조가 다시 다가왔다.
그는 사흘 동안 참았다. 눈앞의 이가 지쳐 잠들었을 뿐 아무 문제가 없단 걸 머릿속으로는 알면서도 몸은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육체를 안심시켜 줄 때였다. 몇 번이고 다시 들러붙는 입술에 윤오의 생각이 천천히 침몰했다.
* * *
오랜만에 돌아온 집이 낯설다.
돌아온다는 말과 집, 둘 모두가 낯선 걸지도 모른다. 일주일을 통째로 비웠음에도 집은 먼지 한 톨 없었다.
범신조는 거실에 서서 천천히 집을 둘러보는 윤오의 뒷모습을 보았다. 어쩐지 기시감이 든다. 내도록 깊은 잠에 빠져들어 깨지 않던 윤오는 깬 이후로 눈빛이 사뭇 바뀌었다. 원래도 조숙한 편이었는데 겹겹의 생을 살다 온 것처럼 그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덩달아 신조의 불안감도 차올랐다. 처음 눈을 떴을 때 자신을 보던, 누군지 살피는 듯한 그 눈빛을 보자마자 마음이 덜컹했다. 바로 증오를 띄우고 당장 내 앞에서 사라지라고 외칠까 봐 두려웠다.
그러나 윤오는 이후로도 신조의 입맞춤을 밀어내지 않았다. 처음 잠깐 보였던 눈빛 외에는 변함이 없었다.
“김윤오. 씻을래?”
“아… 그럴래요.”
“…같이 씻을래?”
신조가 조용히 물었다. 당연히 싫다고 즉답할 줄 알았던 윤오의 대답이 늦어졌다. 그러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한 사람은 차분하고 오히려 제안한 사람이 더 놀랐다. 윤오는 욕조가 있는 욕실 쪽으로 향하며 “먼저 들어가 있을게요.”하고 덤덤히 고했다. 당황한 신조의 꼴만 우스워졌다.
윤오는 돈이 시간의 흐름도 바꿀 수 있단 생각을 조금 해 봤다. 들어왔을 때 그간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이 전혀 티 나지 않던 집이나, 시간이 지나도 식지 않는 욕조 속의 물 같은 걸 보며 말이다.
작은 거품들이 떠 있는 수면 아래로 언뜻언뜻 범신조와 자신의 몸이 보였다. 범신조가 먼저 앉고 그 앞에 윤오가 앉은 모양새라 허벅지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러고 보면 꿈속의 범신조와 똑같은 외양인 신조 역시 참 특이한 사람이었다. 성냥과 종이 신문을 즐겨 사용하고, 모든 사람들이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것처럼 굴면서 설령 높임말을 써도 하대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매사 지겨운 것처럼 보이는 모습 등.
다만 그러면서도 윤오와 하는 아주 시답잖은 말씨름 하나하나에도 최선을 다하는 걸 보면 범신조와 그 사내는 닮은 듯 달랐다. 꿈은 꿈으로 두려 했는데, 어느덧 늘 그 생각만 하고 있는 줄은 윤오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기요.”
이상한 꿈을 꿨다고 말해 볼까 고개를 돌렸다.
“…….”
범신조는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었다. 같이 잠들었을 때조차 본 적 없던 완전히 풀어진 모습이었다. 지금까지는 자고 있더라도 어딘가 긴장했다는 느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입술 사이가 살짝 벌어지고 고개도 옆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 정말로 조금의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일주일을 거의 자지 않고 보냈다고 했다. 당연한 일인데도, 윤오는 헐벗고 있을 때조차 빈틈 하나 보이지 않던 사람이 자신의 앞에서 무방비하게 잠든 게 신기했다. 잠시 망설이던 윤오는 거품이 묻어 반드르르한 손을 들어 올려 범신조의 얼굴로 가져갔다.
욕실 안을 채운 물안개 같은 훈기와 함께 범신조의 얼굴이 흐리게 보였다.
‘네 마음대로 불러라. 단, 한 번만 더 짐승 취급하며 그따위 이름을 붙이려 들면 네 머리통도 으깨질 줄 알고.’
‘네 마음대로 불러. 그게 나를 부르는 것이라면 뭐라고 해도 좋아.’
같은 목소리. 그러나 다른 말. 하나는 무섭게 협박하고 하나는 더없이 다정하다. 그게 어떻게 같은 사람일까. 어떻게 같은 사람일 수가 있을까.
그를 부르고 싶어진다. 한낱 꿈이란 걸 확인하듯이.
윤오가 입을 열어 범신조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벨소리가 울렸다. 범신조의 것이었다. 신조가 눈을 반짝 떴고, 그 순간 둘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
아주 잠깐 사이에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눈길이 자못 사나웠던 신조는 곧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이 촤르륵 떨어지고, 동시에 시야로 지나가는 범신조의 것에 윤오는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감기 걸리지 않게 얼른 나와.”
허리를 숙여 윤오의 어깨에 손을 얹고 볼에 입술까지 붙였다가 떼는 일련의 행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윤오는 고개를 끄덕였고 새삼 충격을 받았다.
‘저게 내 몸속에 들락날락했다고?’
범신조가 들었다면 ‘들락날락이라니….’ 하고 인상을 찌푸렸을 표현이었다.
윤오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제 팔을 내려다봤다. 펼친 손가락을 손목에 감아 천히 아래로 내려가며 그 크기와 길이, 굵기를 가늠하다가 곧 포기했다. 내리 잤다가 일어나서 그런지 몸은 조금 찌뿌둥한 것 말곤 컨디션이 나쁜 건 아닌데 정신적 충격이 컸다.
멍하게 욕조에서 나와 몸의 물기를 천천히 닦아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든 순간 윤오는 마침 눈앞에 있는 전면 거울과 마주치게 되었다. 보자마자 몸 상태는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정정할 수밖에 없었다.
“…징그러워.”
경악한 윤오가 외마디를 중얼거렸다. 거품으로 가릴 수도 없어져 적나라하게 직면한 몸 상태는 정말 징그러웠다. 손목과 허벅지 안쪽, 제겐 잘 보이지 않는 오금과 발목까지 손자국에서 비롯된 멍이 덕지덕지 남았고, 젖꼭지는 화끈한 단계는 벗어났으나 여전히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여기저기 물고 뜯고 빤 흔적이 적나라한 탓에 당분간은 날이 갑작스레 더워지더라도 긴팔과 긴바지를 입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아직 날씨가 변덕스레 쌀쌀하단 것이 윤오에게는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러다가, 윤오는 깨달았다. 겨울이 끝나고 어느덧 봄의 초입이라는 것을. 어느덧 그만큼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멍하니 거울을 보고 있는 윤오의 어깨 위로 가운이 걸쳐졌다.
“뭐 하고 있어. 감기 걸리니까 나오라 했더니, 나와서 감기 걸리게 생겼네.”
“…통화 다 끝났어요?”
“응.”
“누구였어요?”
“어쩐 일로 궁금해해?”
그러게. 왜 궁금했지? 곰곰이 생각하던 윤오는 통화한 상대가 왜인지 자신의 가족일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혹시 저희 아빠였어요?”
“…….”
신조가 입술을 꾹 닫았다. 미간을 찌푸리고 별것도 아닌 말에 못마땅한 기색을 보였다.
“어떻게 알았어?”
“그냥… 찍었는데요.”
“그런 것치곤 확신에 차 있는데. 마치 점이라도 본 것처럼 말이야….”
“그냥 찍은 거라니까요.”
“그런 거면 좋겠다. 아무튼 네 아버지는 아니야.”
거짓말.
순간 윤오의 머릿속에 목소리 하나가 먹물이 풀어지듯 확 퍼졌다. 당혹스러우리만큼 선명한 목소리였다. 어찌나 생생한지 누군가 외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놀란 윤오가 한쪽 귀를 막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김윤오. 왜 그래.”
낯을 서늘하게 굳힌 범신조가 물었다. 윤오는 방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냐고 물으려다, 그거야말로 다분히 미친 소리 같아서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진짜 감기 오려나 봐요.”
“그러니까 왜 맨몸으로 서 있어.”
타박하면서도 범신조는 단단하고 뜨거운 팔로 윤오를 와락 껴안았다. 당기는 대로 이끌려 침실에 이르자 신조가 침대에 윤오를 앉히고 앞섶을 여며 주었다. 허리끈도 흑, 소리가 나도록 꼼꼼히 묶었다. 그것으로도 부족한지 침대 속에 들어가게 한 뒤 이불을 꾹꾹 눌러 주는 얼굴이 심각해서 도리어 웃겼다.
“뭐야. 뭐가 그렇게 웃긴데.”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가 묻는다. 듣기에 좋다. 남자에 대한 감정과 별개로 객관적으로 듣기 좋은 목소리다. 윤오의 나직한 웃음소리에 앞머리가 흔들리며 신조의 이마를 간지럽혔다. 결국 범신조는 나름 눌러 참던 웃음을 흘렸다.
웃음을 매단 채로 고개를 들자, 윤오는 범신조가 왜 자신의 웃음 따위를 보고 싶어 애닳아 했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범신조의 미소야말로 정말 천금을 내서라도 보고 싶을 만큼 보기 좋았다. 감정과 별개로 남자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던 것처럼, 그의 외모 역시 호불호를 떠나 모두에게 감탄을 부를 외모였다. 이거로 많은 이익을 봤겠지? 적어도 싸우다가 뺨을 맞을 일은 없겠다 싶었다.
윤오는 저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축였다. 강제로 걸어 잠근 욕정 때문에 미숙하고 늦된 김윤오의 성적인 감각은 지금 자신이 느끼는 게 성욕이라는 것도 모르는 상태로 범신조를 꼬드겼다.
말했듯이, 무해함은 죄악이다. 무지는 폭력이고, 순수함은 사기와 같았다. 신조는 욕설을 뇌까리며 몸을 기울였다.
고개를 옆으로 꺾자 그의 턱선이 도드라졌다. 윤오는 범신조의 귀밑부터 턱끝으로 이어지는 선을 무척 좋아했다. 그것이 다가와 볼 아래쪽을 누르고 손이 입술을 눌러 혀로 범할 틈을 만들었다.
“으… 움.”
참지 못하고 윤오가 어깨를 움츠리며 신음을 흘렸다. 범신조는 이제 막 섹스를 배운 풋내기처럼 그 작은 소리 하나에 몹시 흥분했다. 그의 거친 손길이 가운 속으로 파고들자 윤오는 몸을 더더욱 웅크렸다. 손이 닿으니 괜찮아 보였던 젖꼭지도 쓰렸다.
그런데… 동시에 흥분이 됐다.
몸이 달아올라 끙끙대는 윤오를 보던 범신조는 손을 아래로 가져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윤오의 것을 움켜쥐었다.
편한 옷을 입고 머리도 모두 내린 신조는 얼핏 보아선 나이를 가늠키 힘들었다. 어쩌면 또래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윤오는 또래였을 범신조를 상상해버리곤 발꿈치로 이불을 밀어댔다. 면바지 위로 두둑하게 용적을 부풀린 신조의 것도 만져주고 싶은데 쉽지 않았다.
어깨 아래로 줄줄 미끄러진 가운 탓에 김윤오의 예쁜 뼈대가 보였다. 침이 고인다. 신조는 입술을 거칠게 쓸었다.
“아, 아… 앗.”
시선으로도 범한다는 게 이런 거다. 윤오는 차마 그 시선을 마주 볼 수 없어서 고개를 내렸다. 그러자 이번엔 제 것을 쥐고 흔드는 범신조의 커다란 손이 보였다. 결국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감은 눈으로는 옷자락과 억새가 보였다. 그 너머로 일렁이는 옷자락, 어슴푸레하게 나는 물 냄새와 피비린내.
곧 다른 비린내가 더해졌다. 윤오가 절정에 이른 것이다. 몸을 한껏 웅크리며 여러 번에 걸쳐 사정한 것이 범신조의 손뿐만 아니라 팔뚝과 옷자락까지 튀었다.
범신조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여운에 떠는 윤오의 정수리와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동그란 어깨를 응시했다.
“부끄러워?”
묻는 목소리가 무척 낮았다. 지금 이 타이밍에 하필 이런 걸 묻는 것조차 마치 제 또래처럼 느껴져서 곤란하다.
“고개 좀 들어 봐. 응?”
“…안 어울리게 왜 다정하게 굴어요.”
“원래 이러고 싶었어.”
“…….”
“난 항상 너한테 다정하고 싶었다고.”
“처음엔 안 그랬잖아요.”
기가 찬 윤오가 거짓말을 하려면 입에 침부터 바르란 투로 쏘아붙였다. 그러자 범신조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 그땐 좀 화가 나서. 그리고 좀 오래 참아서.”
“…혹시 지금도 참고 있는데 이러는 거예요?”
윤오가 말하는 건 범신조의 발기한 아랫도리다. 다정을 운운하며 다짜고짜 사람을 끌고 와 일도 그만두게 했던 첫 만남처럼, 사람을 앞에 두고 낯 뜨거울 만큼 흥분한 범신조는 태연했다.
“좀 오래 서 있다고 죽는 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보기 민망해서 그래요.”
사실은 윤오가 민망해서 그랬다. 혼자 사정해 놓고, 혼자 수줍어하는 꼴이. 범신조는 아무것도 묻지 않은 다른 쪽 손으로 윤오의 것을 투박하게 문질렀다.
“아, 앗.”
예민해진 상태라 절로 신음이 나와 버린 탓에 윤오는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애무가 아니라 묻은 걸 닦아주는 손놀림인데도 몸은 과민하게 반응했다.
이제 범신조의 손에 의해 윤오의 것이 완전히 깨끗해졌다. 범신조의 양손은 더러웠고.
그걸 가만히 보던 신조가 윤오의 앞에서 서슴없이 티셔츠를 벗었다. 그의 몸은 너무나 완벽하고 육욕적이어서 이럴 때마다 윤오는 저도 모르게 물끄러미 보게 되었다. 모두의 이상향일 신체가 있다면 딱 이렇지 않을까 싶어서.
“…하, 려고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려 했는데 조금 멈칫하고 말았다.
“싫어?”
“…….”
윤오의 반응을 본 범신조는 조금 길게 심호흡을 하더니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일어나 방을 떠나 버렸다.
윤오는 조금 떨리는 손으로 옷섶을 여몄다.
사실 당황했다. 이미 넘은 선이니 다시 긋는 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걸 안다. 언제고 다시 몸을 섞게 되리란 것도 아는데, 막상 그 상황이 다가오자 당황하고 말았다.
정말로, 고의는 아니었다. 다만 발정기 때 보낸 밤이 너무 강렬했던 모양이다. 맨정신으로 본 그의 것이 좀 위협적이었던 이유도 있고….
그래도 이렇게까지 반응할 일은 아닌데, 왜 이렇게 겁먹은 것처럼 구는지는 자신도 잘 모르겠다. 윤오는 주먹을 꽉 쥐어 이마를 괴었다. 그러나 부러 꽉 쥔 손으로도 떨림은 숨겨지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범신조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사이 방이 점점 훈훈해졌다. 봄의 초입이라는 걸 생각하면 과하게. 윤오가 가운만 입고 있어도 조금의 냉기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리고 범신조가 돌아왔을 때, 옷을 갈아입은 그는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그의 손에서 유독 작게 보이는 아이스크림 통이었다. 또, 유독 작게 보이는 수저도. 좀 전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옆에 앉으며 아이스크림을 내미는 것에 윤오도 조용히 받았다.
“먹어.”
크게 푼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으며 신조가 채근했다. 윤오는 얼결에 고개를 꾸벅이며 수저를 들었다.
다리 한쪽은 바닥에 내려놓고 나머지는 모두 침대에 올린 신조의 모습은 방종의 끝이었다. 윤오는 그 옆에서 오랜 목욕과 뒤이은 사정으로 인해 노곤한 몸을 미끄러뜨리며 누웠다. 둘 사이에 침묵이 부드러운 깃털처럼 차올랐다.
“궁금한 게 있는데….”
그 결이 너무나 부드러워서일까. 전부터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이 절로 흘러나왔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이번에는’이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이에요?”
범신조의 손이 멈췄다. 그는 수저를 문 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우리, 전에도 만난 적 있어요? 내 기억 속엔….”
잠시 망설였던 김윤오가 중얼거린다. 범신조는 덩달아 숨을 죽였다.
“내 기억 속엔 우리, 만난 적 없는데….”
“…….”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아직까지도?
그렇다면 혹시 이번 생에는 영영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범신조는 그 사실에 내심 설렜고, 바로 그 사실에 자기혐오를 느꼈다. 예나 지금이나 비겁한 새끼. 여전하다는 게 스스로를 향한 환멸감을 일으켰다. 자조한 그가 수저를 바꿔 쥐고는 손목을 돌리며 대꾸했다.
“그간의… 일을 말했을 뿐이야. 대대로 범의 짝은 단명했단 사실을.”
그건 거짓이기도 하고 진실이기도 했다. 엄밀히 따지고 들어가면 조금의 거짓말도 하지 않은 것이고, 그 안을 더더욱 따지고 들어가면 거짓말이기도 했다.
윤오는 가만히 그 말을 씹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이야기일 뿐이잖아요. 우연일 수도 있고…. 그쪽이 그걸 믿는 건 정말 의외니까… 그 이야기에 너무 몰입하지 마요.”
지나치게 몰입… 그 정도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우리의 관계가 그토록 망가지진 않았을 거다.
“그래.”
범신조는 사금파리를 뱉는 듯한 고통스러움 속에 중얼거렸다.
김윤오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 전화를 건 상대가 가족일 거라고 확신했던 것처럼. 그때 범신조가 거짓말을 한 것처럼 지금도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날카롭게 간 바늘이 정수리부터 꽂혀 들어오는 듯한 명징한 예감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믿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한마디를 하고 싶었다. 윤오는 조용히 읊조렸다. 너무나 작은 목소리라, 신조는 물론 자신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윤오는 그저 한숨을 내쉰 걸지도 모른다. 이런 내용의.
“요즘 그쪽의 꿈을 꿔요.”
그리고 그건 나의 꿈이기도 해요. 아마도.
다음 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