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8/21)

  2.

신조는 비량아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비량아는 빗장 하나 없는 열린 문과 같았고, 그 문을 통해 불한당과 같은 혼백들이 무단으로 그의 안에 들어오려 했다. 그리하여 문을 잠그는 방법과 여는 방법을 배웠고, 필요할 때는 일부러 끌어들여 이용하는 것 역시 배웠다.

혼을 불러 제 몸에 들어오게 했다가 도로 내쫓은 뒤엔 무척 피곤했다. 몇 년에 걸친 꿈을 꾸고 난 것처럼 멍했다. 대신 들여보내면 비량아는 그를 이용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었다. 신조의 말에 따르면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고, 누군가를 해칠 수도 있고, 때로는 찾고 싶은 걸 찾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비량아는 죽이고 싶은 이도 없고, 해치고 싶은 이도 없으며, 찾고 싶은 것도 없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유롭게 불러내고 내쫓는 걸 연습하기만 할 뿐으로, 아주 가끔 먹고 싶은 산딸기나 머위, 잣을 비롯한 제철 열매의 위치를 물을 때나 썼다.

그를 보고 신조는 툴툴댔다.

“그렇게 대가 하나 없이 아무나 들락날락하게 했다간 너만 손해 본다.”

“손해 보는 것 아닙니다. 덕분에 이제 ‘아무나’ 들락날락하지 못하게 능숙해지지 않았습니까.”

아무나에 힘을 주어 반박하는 게 여전히 맹랑하여 범신은 헛웃음을 뱉었다.

사실, 비량아는 문만 걸어 닫을 수 있다면 족했다. 그 누구도 안에 들이고 싶지 않았다. 다른 혼백이, 특히 악귀가 들어올 때 기분이 굉장히 안 좋았기 때문이다. 사지를 내 몸처럼 움직이기 위해서 평소보다 더 많은 공과 체력을 들여야 한단 점도 그렇지만, 머릿속에 온통 메아리치는 절규가 듣기 싫었다.

“우위에 서면 모든 게 쉽다니까. 일단 아무도 너를 함부로 대하려 들지 않겠지. 그러면 설령 네가 여기 문을 열어놓고 다녀도 쉽게 들어올 생각을 안 할 거다. 다스린다는 것에 익숙해져야 해. 쉽지 않다는 건 알지만.”

웃음기인지 비웃음인지, 놀림인지 조언인지 모를 말을 하는 신조의 손이 비량아의 흉골에 닿았다. 그의 손은 커다랗고 단단하며 젖어 있었다. 복숭아를 먹고 있던 탓이다. 비량아가 군침을 꼴깍 삼켰다.

그 소리를 못 들을 신조가 아니었다. 그는 옆에 챙겨둔 복숭아를 들어 맞은편에 흐르던 개울에 닦은 뒤 옷자락에 문질렀다. 간지러운 털까지 없어졌겠다, 이제 불러들일 혼백도 없겠다, 비량아는 마음 편하게 복숭아를 물었다.

복숭아는 선과(仙果)다. 복숭아 나뭇가지나 열매나 모두 귀신을 내쫓는 데 쓰였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가 그리 쓰이듯 말이다. 바로 그 복숭아가 나기 때문에 비량아는 여름이 좋았다. 낮이 길어진 것도 좋고 밤이 부쩍 짧아진 것도 좋았다. 음기보다 양기가 강한 계절에 비로소 비량아는 호흡했다.

반면 신조는 여름이 깊어질수록 기분이 좋지 못했다. 일단 더운 것도 습한 것도 그는 딱 질색이었다. 게다가 음기가 더 많은 비량아와 달리 신조는 양기가 그의 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때가 되면 양기가 과해져 숨이 턱턱 막히고 쉽게 짜증스러워졌다.

“이리 와 봐.”

손을 대강 닦아낸 신조가 비량아를 불렀다. 비량아가 조금 망설였다. 그도 그럴 게, 신조는 더위와 습기 때문에 하체에 천 하나만 걸친 채 헐벗고 있었던 것이다.

산속에 들어온 이후로 그는 거추장스러운 복식 예절을 엄격하게 챙기지 않았다. 고름은 풀고 다니기 일쑤였다. 그러니 익숙해질 만도 한데, 보는 건 익숙해졌는데 이건 아직 아니었다….

“비량아.”

신조가 짜증스럽게 채근했다.

“예, 예. 알겠습니다.”

비량아가 샐쭉하게 중얼거렸다. 덜 먹은 복숭아를 쥐고 그에게 다가가자 신조가 비량아를 와락 끌어안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살 것 같다는 뜨거운 한숨이 비량아의 목덜미와 볼을 간지럽혔다.

“저 역시 사람이고 체온이 있는데… 안 더우십니까.”

“아니. 시원해. 몸이 터질 것만 같은데 널 안고 있으면 괜찮아.”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비량아 본인은 괜찮지 않으니 문제였다. 닿고 있는 곳마다 간지럽고 신경 쓰였다. 행여나 자신에게 향기 대신 악취가 나면 어쩌나, 행여나 자신이… 긴장하고 있다는 걸 그가 눈치채면 어쩌나.

신조의 열기는 땀 같은 것으로 배출되는 게 아니었다. 연기처럼 피어나와 주변에 흩어졌다. 그것들은 비량아와 닿아 있으면 그에게로 옮아갔다. 그리고 비량아의 몸에 차곡차곡 고였다. 놀이패 무리에 있는 동안 활기가 넘친다고는 할 수 없던 비량아는 신조의 열기를 담으며 평소보다 덜 피곤하고 덜 지쳤다. 그리고 그만큼 남은 기력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사내를 보며 흥분하는 그런 인사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여인을 보고 흥분한 적 또한 없었다. 비량아는 신조와 함께 지내며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자신을 무슨 기르는 짐승처럼 생각하는데, 자신은 아니었다. 신조는 아름다운 사내였고 그의 방식대로 제멋대로 다정하게 굴었다.

그 변덕에 비량아는 쉽게 놀아났다. 자주 들떴고 가끔 실망했다. 그가 나를 특별하게 대한다는 이제껏 경험해 본 적 없던 우월감과, 그 낯선 감각에 둥실둥실 떠다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추락하는 과정의 반복이 비량아를 무척 어지럽게 했다.

“비량아.”

아, 곤란하다. 열기에 취한 신조가 음기를 찾기 위해 입술로 더듬더듬 비량아의 귓바퀴며 머리칼 사이를 헤집기 시작했다. 그에게 보이지 않게 등지고 있는 비량아의 얼굴이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조는 그런 품속의 몸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그저 이 몸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단 욕망에 잡혀 있었다. 비량아를 안고 있으면 한겨울에도 숨이 막히도록 더운 열기가 가셨다. 열기 때문에 치솟던 짜증도 가라앉고, 그저 이대로 망부석이 되어도 좋다는 그답지 않은 어리석은 생각이 들곤 했다.

게다가 비량아에게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죽순 내음이었다. 그 씁쓸하면서도 깨끗한 냄새를 오래도록 맡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그랬지.’

발 너머에서 비량아를 본 순간부터 깨달았다.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것이란 걸. 대체 어디에 있다가 저 부랑배들 속에 숨어들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결국 만나게 된 건 감히 운명이라는 말을 붙여도 될 것 같았다.

그는 운명의 지배를 받지도 않고 그까짓 것에 놀아날 존재도 아니지만, 무작정 끌리는 호기심까지 거절할 정도로 결벽을 떠는 이도 아니었다. 궁금하니 데려왔고, 데려오니 만족스러웠다.

신조의 뜨거운 손이 옷섶 너머를 더듬었다.

“그, 그만.”

비량아가 새처럼 중얼거렸다. 그 힘없는 거부에 오히려 못된 마음이 솟았다.

“왜?”

심술궂게 묻고는 다물린 옷섶 사이로 드러난 속살을 쓸었다. 실수인 척 어루만지고 곧 떨어졌다. 그 순간 손끝에 남는 아쉬움에 자신도 살짝 당황했지만, 어차피 자신이 주워 온 사람이니 응당 제 것인데 뭐 어떤가 싶었다. 더 만지고 싶다면 만지면 될 일이었다.

“간지럽습니다….”

“고작 손이 닿은 것뿐인데도 간지럽다고? 약해 빠졌군.”

“그쪽이 너무 센 거겠죠. 손끝은 거칠고 힘은 우악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비량아가 일부러 툴툴댔다. 그래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신조의 손은 아름다운데도 불구하고 거칠었다. 힘을 조절해 아주 약간은 배려하는 게 느껴져도 여전히 그에게는 아팠다. 잡아끄는 손길 덕에 험준한 산길 속에서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지만, 밤이 되면 희미하게 멍이 들었다.

신조와 지낸다는 것은 이런 식이었다. 많이 안전하고 조금씩 다치게 된다.

“자꾸 엄살을 부리니 무엇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군. 너희는 원래 이런가? 쉽게 망가지려 하고 쉽게 아프고 쉽게 다치나?”

“…제가 약골인 건 절대 아닌데요.”

“내가 너를 특별하게 대하는 건 분명한데.”

서로 한마디도 져 주지 않았다.

비량아는 몸을 움츠렸다. 신조의 손은 미련을 남기고 비량아의 가슴팍 언저리를 머물다가 올라와 목과 턱선을 감쌌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커다란 손은 그저 가만가만 닿는 살을 어루만질 뿐이었다.

그가 자신을 특별하게 대한다는 것쯤은 알았다. 신조가 사는 곳은 사람이라면 여럿이 올라와도 겨우 한 명이나 살아서 내려갈 수 있을까 할 정도로 험한 곳이었다. 단순히 산세만이 아니라 이곳에 사는 짐승들이 그랬다. 그런데도 짐승들은 멧돼지든 삵이든 아무것도 비량아를 공격하지 않았다. 비량아를 빤히 보고도 돌아서는 데는 신조의 덕을 보는 게 분명했다.

“오늘부로는 구천으로 가지도 못하고 떠도는 망령들이 네 몸을 오가는 일이 없게 하자. 연습은 이만하면 충분해.”

평소보다 차가운 비량아의 체온이 마음에 들면서도 어딘가 마뜩잖아진 신조가 충동적으로 말했다. 사실이기도 했다. 비량아는 타고난 자질이 아주 뛰어나서 굳이 연습을 오래 할 필요가 없었다. 오래 해 봐야 몸만 약해질 거다.

삼도천을 경계로 산 자의 세상과 망자의 세상이 있다. 그 경계에 서서 발 한쪽씩을 양쪽 세상에 둔 자들은 오래 살기 어려웠다. 헛것을 접하며 망자의 세상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그랬다.

처음에는 잠깐의 흥미로 살려서 주워 온 사람이니 얼마를 살든 상관없이 잠깐 유희만 채우려던 신조였으나, 점차 그게 아깝기 시작했다.

“…왜요?”

비량아가 약간의 기대감을 담아 물었다. 사실 신조가 주의해야 할 것은 비량아가 망자의 세상에 더 가까워지는 게 아니었다. 자꾸만 신조에게로 기우는 그의 외로운 마음이었다.

“왜냐고? 그게 중요한가?”

“그냥 궁금해서 그래요. 왜… 하지 말라고 하세요?”

신조는 잠시 곰곰이 생각해 봤다. 여러 가지 이유가 떠올랐으나 하나같이 납득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이 일을 반복하는 게 네게 좋지는 않다, 같은 이유는 그럴싸하면서도 말이 안 됐다. 비량아에게 안 좋다 해도 그게 자신과는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신조는 제일 그럴싸한, 본인이 생각하기에 합당하다 여긴 사유를 말했다.

“이미 충분히 능숙해졌으니까. 더 하고 싶다면 더 하고.”

잠시나마 혹시 신조가 자신을 걱정해서 그런 건가 싶었던 마음은 채 싹이 트기도 전에 시들었다. 그럼 그렇지, 하는 체념에 비량아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무엇을 기대했는지, 기대를 한 자신이 한심스럽기만 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거만한 데다 말은 못되게 하는 사내 아니었던가.

입술을 꾹 다문 비량아를 눈치채지 못한 신조가 한쪽 무릎을 세웠다. 비량아의 몸을 돌려 제 다리에 등을 기대도록 하자 서로 얼굴을 보기가 무척 쉬워졌다. 그제야 샐쭉해진 표정이 보인다.

“섭섭해?”

사내는 모르는 게 아니다. 무심한 것이다. 마음이 없으니 이렇게 눈에 보이기 전까지는 알아주지 않는다. 비량아는 어느덧 반년 가깝도록 함께 시간을 보낸 사내에게 익숙해지고 있었다.

사내에게 익숙해지기 위해선 무던히 아파야만 했다. 오롯이 안전하기 위해 멍이 드는 것처럼, 더는 아프지 않기 위해 이 무심함에 계속 찔려야 했다.

이 감정은 동경일까, 두려움일까, 혹은 연모일까….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과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는 비량아는 날마다 줄타기를 하듯 헷갈렸다. 신조의 말 한마디에 뛰고 말 한마디에 고꾸라졌다. 그는 줄타기에 끔찍할 만큼 재주가 없었다. 약뫼가 가르쳐 보려 했을 때도 줄에서 몇 번이고 떨어지고 떨어진 끝에 포기하란 말을 들었었다. 신조 역시 비량아에게 줄과 같은 존재일까.

“아니요.”

그러니 떨어지지 않기 위해 거짓을 보태야 한다. 그와 사는 것은 변덕스러운 다정함과 그에 놀아나는 제 어리숙한 감정, 그리고 그 사이의 균형을 잡기 위한 거짓말로 이루어진 모양이다. 이 역시 범신은 조금도 알지 못할 테지만.

아마도 그게 바로 범신이 누누이 말하던 다스리는 감각이겠지. 그에게는 호흡하듯 익숙하고 저에게는 줄을 타는 것보다 어려운. 태생부터 다른….

* * *

거처는 집이라기보다 굴에 가까웠고, 굴이라고만 칭하기에는 필요한 세간 살림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중 대부분은 비량아가 함께 지내게 되면서 구해 온 것들이었다. 지금 그들이 덮고 자는 이부자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해가 길어서 밤이 짧아진 만큼 비량아의 잠도 짧아졌다. 하지만 단순히 여름이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 전부터 비량아는 짧게 자주 잤으니까.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전에는 옆에 누군가 들어올까 봐 자주 깼지만, 지금은 누군가 옆에서 자리를 비울 때 깬단 것이었다.

비량아는 내내 자신을 짓누르던 힘이 없어져서 눈을 떴다. 잠들 때면 더 덥다고 투덜거리는 신조는 그를 데려온 직후부터 그를 끌어안고 잤다. 여름에 접어든 요즘에는 그게 특히 더 심했다.

함께 자는 것이 익숙해지니 이제는 곁이 비는 것이 낯설어졌다. 눈을 뜨자 이번에도 옆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잠이 오는 것도 아니라 비량아는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조가 사라져서 깼던 처음에는 당황해서 산을 헤집고 다녔다. 이제 의탁할 곳이 그밖에 없었다. 신조가 있으니까 짐승들에게 해코지당하는 일도 없는 거였다. 차라리 놀이패 속에 있었을 때는 홀로 여기저기 잘 다녔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혼자가 두려웠고,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어린애처럼 나를 찾고 다니는구나.’

비량아가 끝내 당혹감에 얼굴을 흠뻑 적실 때가 되어서야 그를 찾아낸 신조가 했던 말이다. 잠시 바깥을 다녀온 사이에 깨서 돌아다닌다며, 어린애가 따로 없다고 타박하던 그 말소리에 거친 웃음기가 섞여 있어서 알았다. 저를 찾는 자신의 모습을 즐기는 게 분명했다. 그는 이게 재미있는 모양이다.

망연하여 바라보고만 있자, 그렇게 가슴이 철렁하여 흉골이 시리도록 만들더니 돌연 껴안고는 ‘네가 함부로 돌아다니면 나도 널 찾아야 하니까 그냥 제자리에 있어.’하고 다시금 변덕스러운 다정을 베풀었다.

그 이후로도 신조는 비량아를 두고 종종 사라졌다. 저를 찾는 제 모습을 바라기 때문일까. 혹은 정말로 볼일이 있어서일까. 감히 물을 수도 없다. 어느 대답이든 야속하기만 할 것이다. 그리고 주제넘게 원망을 하려 치면 금세 또 저를 껴안을 것이다.

비량아는 더는 자리를 떠나 그를 찾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럴 때마다 버려졌단 두려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말없이 자리를 비우는 신조의 무심함이 원망스러우나 제겐 그걸 원망할 자격일랑 없었다. 그는 비량아를 아주 쉽게 길들였다. 그러려는 의도가 있는 줄은 몰라도 분명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오늘도 자리에서 가만 기다리면 때가 되어 돌아올 터였다. 그러나 그걸 알면서도 비량아는 오늘따라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작은 화톳불을 켜고 굴을 나오니 어슴푸레한 달빛에 가까스로 길이 비쳐 보였다. 그곳으로 이끌리듯 향했다.

걸을수록 물 흐르는 소리가 가냘프게 들렸다. 그 소리를 듣자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산 정상에서부터 땅을 타고 흐르는 계곡이었다.

잠이 덜 깨서 게슴츠레한 눈으로 미끌거리는 돌을 밟았다. 동글동글 깎인 조약돌을 지나 커다랗고 넙데데한 바위 위로 올라가니 주위에 나무가 없어 훤히 펼쳐진 계곡물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야밤에 물속 깊이 몸을 담그고 있는 헐벗은 사내가 보였다. 비량아는 그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웅크려 앉았다.

걸어오는 동안 잠이 얼추 깼었는데, 이러고 있자니 다시 수마가 몰려온다. 비량아는 물비늘에 반짝이는 달빛과 남들보다 둔한 귀로 무디게 들리는 물소리에 가물가물 눈을 감았다.

무릎 위에 괸 팔로 볼이 막 닿으려는 찰나, 그 틈으로 손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차가웠고 이내 따뜻해졌다. 차가운 것은 물이었고 따뜻한 건 손이었다. 놀라 고개를 들자 신조가 앞에 서 있었다.

“내 둥지보다 지붕조차 없는 길바닥이 더 마음에 드는 모양이지.”

그렇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깔개를 바깥에 내놓고 여기서 자라고 할 것 같아서 비량아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여기 나와서 궁상이야.”

신조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물이 뚝뚝 떨어지고 목빗근이 사납게 섰다. 비량아는 저도 모르게 꼴깍 침을 삼키고는 대답했다.

“중간에 깨서… 또 어디 나가셨나 싶어서 나와 봤습니다.”

“아하. 어리광을 부리러 왔단 말이군.”

말만 들어서는 귀찮게 군다는 의미 같은데 음색은 그렇지 않았다. 손을 거둔 신조는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선 비량아가 앉지 않은 다른 바위에서 옷가지를 당겨왔다. 그걸 몸에 걸치려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서 비량아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불안하다. 비량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신조가 날쌔게 다가와선 허리를 낚아챘다. 부지불식간에 허공에 번쩍 들렸다. 비량아는 미끌대는 젖은 어깨에 손을 짚고 아슬아슬하게 허공에서 버텨야만 했다.

“무, 무슨 짓입니까!”

“이왕 나왔는데, 그냥 돌아가기에는 아쉽지 않겠나.”

“전혀 아쉽지 않습니다!”

어깨를 밀어도 꼼짝도 하지 않는다. 신조는 도리어 간지럽다는 듯이 웃고는 비량아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언제 이토록 수심이 깊은 곳까지 왔는지도 몰랐다. 비량아는 풍덩 빠졌다가 서서히 떠올랐다. 코가 맵고 기침이 났다. 콜록거리는 꼴이 안쓰럽지도 않은지 이내 붙잡아 세워 준 사내가 즐겁게 웃으며 상대의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눈을 질끈 감은 비량아가 제 얼굴을 분주히 만지는 손길에 대고 짜증을 냈다.

“대체 왜 이러십니까? 갑자기 사람을 물에 내다 꽂질 않나…!”

“비량아, 자꾸 그렇게 짜증 내고 화를 내지 마라. 그 얼굴이 보고 싶어서 괜히 안 하던 짓을 하게 되지 않냐.”

“그럼 이게 제 잘못이란 말씀이십니까?!”

비량아가 겨우 눈을 떴다. 얼굴을 부산히 비비고 신조를 보았다. 그가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머리칼을 마저 떼어낸 그의 모습은 뜻밖에도 이런 장난을 벌인 사람 주제에 고요했다.

“그래.”

뻔뻔하고 거만한 사내. 때론 호랑가시나무의 가시보다 무심하고 때론 갓 마른 흙처럼 부드러운 사내.

“네 잘못이다.”

그리 말한 신조가 비량아의 어깨를 쥐고 앞으로 밀었다.

두 몸이 동시에 물 아래로 빠져들어 갔다. 분명 발끝은 닿을 정도였는데 더 깊고 아득했다. 겨우 뜬 눈으로 수면 위 어룽지는 달이 보였다. 끝없이 추락하는 기분에 비량아가 신조의 어깨를 감싸 안자 그제야 범신은 절박하게 제 어깨에 매달리는 몸을 안고 끌어올렸다.

여름이어도, 밤이었다. 젖은 몸이 점점 차게 식었다. 그 몸을 신조는 더 강하게 껴안았다. 아예 껴안고 물 위로 들어 올렸다. 비량아가 이를 딱딱 부딪치며 떨었다. 마구 흔들리는 수면 위로 신조의 모습이 자꾸만 바뀌었다. 익히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가, 고개를 쳐든 범의 모습이었다가, 아무것도 비치지 않다가 다시 신조가 되었다.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비량아의 눈을 신조가 보았다.

비량아의 눈빛은 종종 커다란 쟁반에 담긴 물처럼 깊어졌다. 기도를 위해 떠 놓은 정화수처럼 고요하고 한없이 바닥을 몰랐다.

신조는 시끄러운 것을 싫어한다. 그가 산에 머물 때면 새조차 조용히 날아오른다. 그러나 지난 반년간, 신조는 비량아의 눈을 보고 있으면 주변이 아무리 소란스러워도 그다지 거슬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 깊은 눈 안에 담길 때면 물에 잠긴 것처럼 편안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제 나이보다 조숙한 비량아는 쉽게 흔들리는 일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의외로 마음을 쉽게 열었다. 그 빗장 문이 열린 이후로, 그러니까 그를 범하려던 놈을 죽이고 그를 거둔 순간부터 자신을 받아들인 걸 알았다.

그 눈을 보던 신조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너에게는… 좋은 향기가 난다.”

신조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 움직임을 쫓는 비량아의 시선이 아래로 포물선을 그렸다. 뻗어온 손이 볼에 와 닿을 때는 조금 놀라기도 한 것 같다.

손은 여느 때처럼 거칠고, 단단하고 뜨거웠으며 무척 컸다. 비량아가 작은 체구가 결코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랬다. 손이 커서 그럴까, 비량아에게 신조는 아버지, 스승, 형제… 가진 적 없던 그 모든 것이었다.

그리고 범이었고, 신조였고, 아무것도 아니기도 했다.

언제고 내가 모르는 존재가 될 수 있고 훌훌 떠날 수도 있는 사내. 비량아는 어깨를 짚고 있던 손을 들어 제 뺨을 덮은 신조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자세가 한층 더 불안해졌지만 떨어지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어, 어디 갈 땐, 마, 말을 좀 하고 가, 십시오….”

이가 부딪치는 바람에 말이 더듬더듬 나왔다. 따뜻한 손이 행여나 빠져나갈까 봐 더욱 단단히 끌어당겼다.

“무, 물장난을, 치고 시, 싶어도, 말을 먼, 저….”

“알았다. 알았어.”

아직 말이 끝나지 않는데 신조가 성급하게 말허리를 잘랐다. 제 말이 다 통했나 의심하기 전에 비량아의 입술로 아주 뜨거운 것이 닿았다. 물컹한 것이 입술을 꾹 누르고 놀라 벌어진 틈으로 더욱 뜨거운 혓덩이가 밀려들어 왔다.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아찔함에 눈이 질끈 감겨졌다.

입맞춤은 서툴렀다. 입맞춤이라고 하기에는 오히려 먹이의 살점과 뼈를 바르는 시늉 같았다. 혀는 거칠어 비량아의 입술을 붓게 했고, 두툼하고 단단해 숨이 막히게 했다.

서툰 입맞춤. 그건 비량아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서툴렀고 그 상대가 서로인지라 흥분했다.

입술이 떨어지고도 한참 후에야 정신이 들었다. 어느덧 몸을 떨게 하던 추위는 완전히 사라지고 오히려 목덜미가 홧홧할 정도의 열기만 남아 있었다. 비량아가 눅진하게 녹은 혀로 중얼거렸다.

“왜….”

“글쎄.”

신조의 말투가 몹시 못마땅했다. 어딘가 심사가 뒤틀린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겠다.”

첫 입맞춤. 솔직히 말하자면 비량아는 좋았다. 그러나 신조의 반응은 이 행위로 인해 끌어 올려진 기대와 달랐다. 땅바닥에 무참히 내던져진 짐승의 내장처럼 기분이 철부덕, 추락했다.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신조는 비량아를 내던지지 않고 철벅철벅 물살을 건넜다. 어느덧 비량아가 앉아 있었던 넙데데한 바위에 도착해도 내려 주지 않았고, 동글동글 잘 깎인 조약돌밭을 지나 끝내 굴에 도착할 때까지도 내려 주지 않았다.

못마땅하다면, 입맞춤이 기분 나빴다면 차라리 내던지지.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다. 비량아는 한없는 비참함과 말미의 기대감으로 머릿속과 흉골 안이 엉망이었다.

“곧 새벽이 되겠군.”

중얼거린 신조가 비량아를 눕히고 그 뒤로 자신도 자리를 잡았다. 비량아는 꾸물거리며 몸을 떼어냈으나 얼마 가지 않아서 신조에게 붙잡혀 도로 끌려갔다. 멋대로 물에 빠뜨리고, 멋대로 입 맞춘 사내는 이번에도 제멋대로 잡은 걸 놓아 주지 않았다. 답답함에 가슴을 마구 두드리고 싶었다.

“곧 잠들 수 있을 거야.”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전으로 떨어졌다. 목소리가 위에서 들리는 걸 보니 신조는 누운 게 아니라 손으로 고개를 괴고 있는 모양이었다.

“기운이 쏙 빠졌으니….”

갑자기 겪은 봉변에 잠도 내쫓길 판인데 무슨.

그러나 신조의 말이 맞았다. 이번에도. 비량아는 곧 참을 수 없는 수마에 눈을 감고 말았다. 기운을 쏙 뺀 탓이었다.

곧 숨이 고르게 퍼지며 규칙적으로 몸이 달싹였다. 신조는 약하게 오르내리는 그 어깨를 보다가 조용히 손으로 토닥였다. 비량아의 옆얼굴을 더듬던 눈길이 허공으로 향했다. 생각에 빠진 눈빛이 아주 예리했다.

그는 한 번도 성욕을 느껴 본 적이 없다. 동한다는 게 무엇인지 살며 단 한 번도 이해하지 못하고 살았다. 그런데 조금 전은….

낯설다. 비량아가 자신에게 그저 약간의 흥미가 아니라 낯선 감정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건 그의 계산 밖이었다. 이게 좋은 일인지, 두고 보지 말고 여기서 뿌리 뽑아야 하는 일인지조차 모르겠다. 그러나 잠든 비량아를 보고 있자니 내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범신이 저를 두고 이런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잠든 비량아의 얼굴은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반면 신조의 안에선 방금 전 계곡에서 비량아에게 느꼈던 그 욕구가 여전히 휘몰아치고 있다. 오히려 이제 시작이라는 듯이….

* * *

산에는 온갖 열매가 있으나 그것만 먹고 살 수는 없었다. 신조는 몰라도 비량아는 그랬다. 신조가 때때로 토끼나 새고기를 주긴 했지만 그냥 구워 먹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비록 배곯고 살면서 원 없이 고기를 먹어 보는 게 소원인 비량아였다 해도 그조차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을 정도였다.

밥이 먹고 싶었다. 사람이 한 요리를 먹고 싶었다.

산에서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종종 산을 내려와야만 했다. 보통은 홀로 내려오곤 했었는데, 이번에는 신조와 함께 내려오게 되었다.

“…….”

한 번도 예상해 본 적 없는 입맞춤을 한 뒤로 둘의 사이는 미묘해졌다. 원래 대화가 많은 사이는 아니었지만 더더욱 줄었다. 침묵에 익숙했었는데 요즘에는 조금 어색했다.

이게 비량아 혼자만 느끼는 건지 신조도 느끼는 건지 알 길이야 없었다. 신조는 솔직했지만 깊은 속마음까지 낱낱이 까발리고 다니는 이는 아니었다. 또한 눈치가 빠른 듯하면서도 세심하진 않다 보니 더더욱 알 수 없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평상시와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제가 별안간 산 아래 사람 사는 마을로 가겠다 했을 때도 당연히 혼자 다녀오라 할 줄 알았는데. 비량아는 옆에 선 이가 신경 쓰여 미칠 지경이었다.

“뭐가 먹고 싶지.”

신조가 조용히 물었다.

“그냥… 주막에서 국밥을 먹어도 좋고… 쌀을 좀 얻어오면 좋겠어요.”

의외로 필요한 세간살이는 전부 있었다. 가마솥도 있었고 구들도 갖추어져 있었다. 쌀을 가져가면 밥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한 됫박에 얼마쯤 할까. 보리가 잔뜩 섞여 있어도 좋았다.

신조가 가짜 도령으로 지낼 동안 패물을 몰래 훔쳐 왔을 리도 없고, 평소 재산의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했던 터라 비량아는 값을 치를 셈으로 그간 신조가 잡아 왔던 작은 짐승들의 가죽을 챙겨 왔다. 서툰 솜씨로 벗겨낸 거라 크게 평가받진 못하겠지만….

“산에 있는 게 네게 부족하던가….”

그의 중얼거림이 혼잣말인지 아니면 자신에게 묻는 건지 헷갈려서 비량아는 입을 꼭 다물었다. 둘은 다시 조용히 산을 내려갔다.

신조와 함께 다닐 때면 오르내리는 것이 한결 쉬웠다. 다듬어지지 않아 거친 산세도 그와 함께할 때면 알아서 길이 펼쳐지듯 열렸다. 이럴 때면 새삼 그가 산의 주인이라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와의 영영 좁혀질 수 없는 거리를 재차 확인하곤 했다.

전혀 다른 세상에 속하여 범신의 변덕에 따라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관계. 이 연결고리가 끊어질지 이어질지는 오로지 범신만이 선택할 수 있는 관계.

‘내가 떠난다고 하기도 전에 질려서 떠나라고 하더라도,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도 없겠지.’

그런 씁쓸한 생각에 잠기느라 비량아가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가 발밑을 살피느라 눈앞의 나뭇가지를 발견하지 못할 때면 뒤에서 팔이 뻗어져 그것을 밀거나 당긴단 사실이었다. 혹은 비량아가 가파른 내리막길에 바닥을 기듯 내려갈 때면 신조가 묵묵히 그의 옷자락을 밟거나 잡고 있기도 했다.

그리고 신조 역시 알지 못했지만, 이건 신조가 살면서 해 본 적 없는 배려란 것이었고, 느껴 본 적 없는 걱정에서 비롯된 행위였다.

만약 신조가 이전에도 이걸 알았다면, 혹은 알려 줄 사람이 있었다면 앞에 놓일 일들이 이토록 꼬이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범신은 그가 느끼는 감정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가 맨 처음 비량아가 지어 준 자신의 이름을 개의치 않았던 것처럼, 모르기에 구분할 수 없었으며, 알아보지 못하여 실수하고 말게 될 것이다.

* * *

비량아가 가져온 가죽은 역시 넉넉한 값을 치르지 못했다. 그나마도 신조가 뒤에 서서 눈을 부라리고 있었기에 더 받은 것이었다. 기대한 것보다 훨씬 낮은 값을 받은 비량아가 조금 시무룩해졌다.

“범 가죽이면 값을 더 치르냐.”

비량아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가 곧 빠른 속도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범 가죽은. 제가 다루기엔 너무 크, 크기도 하고….”

게다가 범은 당신이지 않나.

물론 그는 짐승과 다르고 짐승으로 묶이는 것도 무척 혐오하지만, 그래도 비량아의 작은 인식의 세계 속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그가 한 번도 범의 모습을 한 걸 본 적은 없으나, 그래도 어렴풋이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사실은 죽지 않기 위해 먹기는 하지만 그가 잡아 오는 토끼나 새도 먹기가 껄끄러웠다. 산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작은 짐승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 몸에 신조의 냄새가 잔뜩 배어 근처로 가도 도망치지 않으니 맘이 더 쓰이기도 했고.

“아무튼 범은 됐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해요.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것도 아니고….”

우물쭈물 대답한 비량아가 말을 돌리기 위해 “저는 저기서 곡식 좀 사 오겠습니다.”하고는 얼른 자리를 떴다.

신조는 쫓아가려다가 말았다. 사람이 많은 곳은 질색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에겐 체향이 난다. 신조에게는 그 냄새가 누린내처럼 느껴졌다. 오로지 비량아에게서만 죽순 같은 순한 냄새가 났다.

그가 살아온 삶에 비하면 비량아는 갓 태어난 수준이나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사람으로 치면 아이가 아니었다. 다 큰 사내였다. 그렇기에 그는 더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마을 바깥쪽으로 나와 장승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귀한 분께서… 걸음하셨소….]

지하여장군이 킬킬대며 속삭였다.

[어찌 이곳까지… 오셨는가….]

그러게. 왜 왔을까. 신조 역시 궁금했다. 분명 비량아 혼자 보내는 게 걱정돼서는 아니었다. 그럼 왜…. 답이 나오지 않는 생각에 빠지는 게 짜증스러워서 신조가 불쑥 내던졌다.

“요즘 키우는 것과 시간 좀 보내고 싶어서.”

지하여장군의 참견을 막기 위해 한 말이었으나 그게 내밀한 진심이었다. 신조는 저도 모르게 뱉어버린 진심에 조금 당황했다.

[그것을 몹시… 아끼시나 보오….]

장승이 다시금 킬킬대고 웃었다. 배를 잡고 허리를 꺾어가며 웃을 수 없는 게 아쉽다. 퍽 즐거워 보이는지라 신조는 “잡귀를 쫓는 장승이 이리 웃음이 헤프니 원.”하고 투덜거리고 말았다.

턱을 괸 신조의 모습은 어쩐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조금 미성숙해 보인다. 소년미가 느껴진단 뜻이었다. 장승은 고개를 돌리는 대신 옆에서 함께 바람을 맞고 비를 맞고 해에 마르는 솟대 위의 새를 보며 눈살을 찡긋거렸다.

[품에 놓기… 아쉬웁고… 눈밖에 두기… 두렵소?]

“나이가 들어 그런가, 말이 많아졌군.”

[더… 정들기 전에… 놓아주시오….]

“…….”

지하여장군이 더 무어라 하려는 순간, 신조가 검지와 엄지를 붙이고 입술 끝에서 끝으로 가로 그었다. 그러자 갑자기 지하여장군은 그저 평범한 장승이 되었다.

“그만하라니까.”

왈패처럼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팔을 얹어 앉은 신조가 고개를 숙이고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며칠 몹시 거슬리는데 시답잖은 말까지 해 더욱 신경을 긁는다.

한껏 성이 난 신조의 주변으로 개미도, 머리 위로 새도 다가오지 않았다. 숨을 죽이고 조용히 그를 피해 에둘러 움직였다.

그리고 같은 때, 마을 안.

곡식을 사서 돌아오던 비량아는 갑자기 코와 입이 틀어막혀져 아주 좁다란 골목으로 끌려갔다. 버티려고 발꿈치로 바닥을 득득 긁다 보니 짚신도 버선도 벗겨졌다.

숨이 막혀 눈이 꼴딱 넘어가려는 순간, 마을 입구 반대쪽까지 순식간에 끌려 나왔다. 마을이 작게 보일 정도로 멀어졌을 땐 비량아는 반쯤 기절한 상태였다.

곧 상대가 뺨을 후려쳤다. 그 충격에 가물가물 눈을 떴다.

시야에 들어온 건 꺽두를 따르던 놀이패의 사내들이었다. 옹졸한 생쥐 수염과 내관이 붙이는 가짜처럼 엉성한 수염, 그리고 도무지 수염이 나지 않아 검댕으로 턱을 거뭇하게 칠한 이까지 셋이 모여 비량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살인자.”

대뜸 떨어진 말과 함께 비량아의 얼굴로 침이 뱉어졌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어떻게 딱 이곳에서 만날까. 네놈이 꺽두를 죽였지?”

“아, 아닙니다. 아니에요.”

비량아는 분명 그들보다 신장이 컸고 여차하면 도망칠 수 있었으나, 그들이 내뱉는 비난 때문에 그런 판단을 할 정신이 아니었다.

“제가 죽인 게 아닙, 아닙니다!”

“처음에는 다 같이 짐승에게 해코지당한 줄 알았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서 다음 생에는 광대가 아니라 좋은 집에서 태어나게 해 달라 빌었던 우리가 바보 천치지. 네가 죽인 게 아니라면 어찌 너만 살아서 싸돌아다녀, 응?”

눈에는 형형한 살기가 돌았다. 그들의 얼굴은 이전보다 더 퀭하고 낯빛이 좋지 못했다. 무리가 제대로 구실을 못 하게 된 게 분명했다. 비량아의 추측대로 그들은 현재 처지가 엉망이 된 분까지 더해 비량아를 헐뜯고 비난했다.

“이제 우리는 풀뿌리 뜯어 먹는 화전민이 되어 근근이 살고 있다. 광대인데 어디서도 불러주지 않아! 우리는 쓸모없는, 이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 거야, 바로 너 때문에!”

“그게 아니라…!”

변명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이어졌다 하더라도 그들은 듣지 않았을 거다. 그걸 알기에 뺨을 후려치는 매운 손길을 비량아는 묵묵히 견딜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저들의 입장이었더라도 의심했을 거다.

“배은망덕한….”

시근덕거리는 세 남자는 약뫼가 비량아를 거두려 할 때 격하게 반대하던 이들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내쫓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들어보니 불길한 아이라고 하더라, 종종 정신을 놓고 때론 허공을 보며 헛소리를 한다고 했다….

사실 그 소문은 모두 맞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량아를 결국 받아 준 뒤 무리의 일원으로 대했던 것 역시 맞았다. 그러니까 배신자는 자신이었다.

“괘씸한 자식.”

곧이어 꽉 쥔 주먹이 얼굴로 날아왔다. 비량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한동안은, 어쩌면 아주 오래 뜨지 못할 수도 있는 눈이었다.

* * *

폭력은 지리멸렬하게 이어졌다. 폭력이 아니라 살인일지도 모른다. 이들은 비량아를 끝내 죽이려는 게 분명했다. 목숨에는 목숨. 무리의 입장에서 비량아는 굴러들어온 돌이고, 굴러들어온 돌 주제에 가족을 죽인 천하의 배은망덕한 놈이었다.

셋은 비량아를 마구 밟고 굴렸다. 비량아는 반항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얼굴을 가리며 웅크려도 봤지만 곧 몸에 힘이 풀렸다. 어느 순간부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굴을 거세게 연달아 맞은 탓에 고막이 찢어진 것이다.

머리가 징징 울리고 너무 아파서 차라리 빨리 숨이 끊어지는 게 낫겠다 싶을 때였다. 우레처럼 쏟아지던 폭력이 갑자기 멎었다.

귀가 나간 비량아는 소리를 듣지 못했고, 그래서 상황 파악이 늦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때 자신을 때리던 사내들은 바닥에 쓰러져 뒤로 기며 도망치고 있었다. 그리고 끝내 그의 앞에 선 커다랗고 길쭉한 인영은 분명….

“안 돼!”

비량아가 대뜸 앞에 선 이의 종아리에 매달렸다.

“안 돼요, 안 돼. 제발. 그냥 가게 두세요, 제발요!”

당장 앞으로 한 발 내딛으려던 신조는 발목이 잡혀 확 돌아보았다. 아니, 내려보았다. 제 다리에 매달린 비량아의 꼴은 엉망이었다. 피며 흙이며 잔뜩 엉겨 붙어, 사람 형상을 한 누더기에 불과했다.

이미 거세게 후려친 탓에 비량아를 이 꼴로 만든 사내들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손바닥으로 땅을 밀며 엉덩이로 기는 꼴이 비굴하기 짝이 없었다.

“놔.”

이를 꽉 깨물며 발목을 거칠게 털어도 비량아는 떨어지지 않았다.

“놓으라 했다.”

하지만 여전히 절박하게 매달린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놓으라는 말 대신 비량아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으나 답이 없었다.

신조는 고개를 조금 꺾어 비량아의 귀에서 흐르는 피를 보았다. 대답을 하는가 했더니, 혼자 간청하는 소리가 우연히 맞아떨어졌던 건가…. 그는 허공에 허, 하고 차게 웃었다. 그리고 설마 하는 마음에 재차 말했다. 다만 이번에는 다른 방식으로.

[놓으라고 했어, 비량아.]

그제야 비량아가 외쳤다.

“안 돼요, 못 놓습니다!”

피가 입 안에 가득 차서 발음도 줄줄 새면서, 지금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꼴이란 말인가. 주먹을 움켜쥐고 눈을 질끈 감은 신조가 재차 뇌까렸다.

[고집부려도 소용없어. 놓아라. 내가 널 걷어차게 만들지 말고.]

비량아는 대답 대신 팔에 힘을 더욱 쥐었다. 사내들은 벌벌 떨며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자신들의 생존에 급급하여 그들이 몰매를 때린 비량아가 자신들을 구하고 있다는 걸 파악할 여유도 없었다.

“차라리 그러세요….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겁니다. 저, 저는 괜찮잖아요!”

그 외침에 질끈 감고 있던 눈꺼풀이 열렸다. 안광이 형형하였다. 노란빛이 번들거리는 그것은 분명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사내들이 히익, 헛숨을 들이마셨다. 죽기 살기로 도망치는 것 말고는 이 목숨을 부지할 방법이 없다는 예감이 들었다.

“어, 얼른 일어나. 얼른!”

서로 지절지절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꼴에 신조의 주먹이 더욱 거세게 말렸다.

“안 돼요… 가지 마세요….”

비량아의 애절한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비량아의 한심스러운 오지랖이 아니었다면 그는 정말로 가서 목줄을 뜯어놨을 것이다.

뒤뚱거리는 뒷모습으로 오줌을 지려 얼룩진 바지가 보였다. 비량아는 그들이 정말로 아예 멀어져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신조의 다리를 놓지 않았다. 신조가 마음만 먹으면 저들을 금세 따라잡을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가지 마세요….”

[…….]

“가서 해치시면 저주를 할 거예요.”

[…네가 무슨 수로.]

“삿된 것을 부려서 저주할 거예요….”

[내가 가르친 방식으로 나를 저주하겠다고.]

비량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꼴이 처량하면서도 절박하기 짝이 없다. 신조는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곤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가 더는 쫓을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비량아는 몸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곡식… 다 흘려 버렸습니다.”

볼은 퉁퉁 붓고 입가며 코며 피가 줄줄 흘렀다. 눈 한쪽도 퉁퉁 부었으며 옷 아래 몸은 보지 않아도 피멍으로 자욱할 게 뻔하였다.

[이럴 줄 알았다면 내가 먼저 너를 망가뜨릴 걸 그랬다.]

이를 악문 신조의 말에 비량아가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고작 입맞춤에 사시나무 떨 듯하던 넌 어디로 간 거고.]

일견 원망이 섞여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비량아는 갸웃거리다가 고개를 떨궜다. 신조가 비량아의 몸을 끌어 제 허벅지에 괴었다.

“죄송해요.”

그제야 비량아가 퍽퍽하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귀가 잘 안 들리는 것 같아요.”

“…….”

“바람이 부는데… 소리가 안 나요. 그런데 목소리는 들리니 이상한….”

얼굴을 마주한 지가 언젠데 이제야 알았나. 신조는 차라리 지금 비량아가 제 입으로 내는 소리를 못 들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가 절로 갈렸으니까.

[…입으로 내는 소리만이 소리가 아니지.]

신조의 목소리는 비량아의 귀가 아니라 흉골로 닿았다. 그곳이 울리며 머릿속으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비량아가 겨우겨우 눈을 떠 사내를 올려보았다.

“사람을… 죽이면 혼에 낙인이 찍힌다고 합니다.”

[…….]

“그 숫자만큼요.”

그 숫자가 몇이 되든 신조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데도 비량아는 말을 이었다.

“그 낙인 하나하나가 곧 무게가 되어 삼도천을 건널 때 강 밑으로 가라앉게 된다는데… 그러지 마십시오.”

[나에겐 상관없는 일인데.]

“혹시 모르잖아요.”

비량아가 씩 웃었다. 그 미소가 이전처럼 보기 좋지 않고 흉했다. 신조의 손끝이 움찔했다. 입술을 새빨갛게 적시다 못해 흰 이까지 붉게 물들인 피를 닦아 주고 싶었다.

“혹시… 모르잖습니까. 저를 위해 괜히 그런 낙인을 찍지 마세요.”

다쳐 본 적이 없다. 어린 범의 시절일 때는 상처가 조금 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가슬거리는 혀로 몇 번 문지르면 지워지는 코웃음도 나지 않는 흠집이었다.

그깟 낙인. 신조에게는 그깟 낙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낙인 하나하나에 목을 매는 사람은 어떻던가. 사람은 쉽게 죽었다. 짧게 살았고 때론 고뿔에도 죽고 말았다. 신조는 비량아의 어깨에 닿을랑 말랑 하는 제 손을 보고 말았다. 그것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음기와 양기를 나누고 있지도 않은데 이 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그의 몸은 더위를 느끼지도 못했다.

“재미로 주워 온 네가 이렇게 어리석은 줄 꿈에도 몰랐다.”

흉골이 아니라 귀로 닿는 목소리는 비량아에게 들리지 않았다.

“나는 제 능력도 안 되면서 오지랖을 부리는 것들은 딱 질색이야. 손이 많이 가는 것도 싫고.”

비량아는 이미 정신을 잃기 직전의 경계선에 서 있었다. 눈은 감은 듯 떠 있고 뜬 듯 감겨 있었다. 어차피 시야에 들어오는 건 없었다. 그 맥없는 눈빛을 본 신조가 저도 모르게 비량아를 덥석 잡았다. 아플 텐데도 반응이 없었다. 허리를 기울여 얼굴을 바짝 붙이며 신조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너는 둘 다 해당하지.”

읊조리는 내용으로 보아서는 비량아는 여기서 버려져야 마땅했다. 귀찮은 것은 질색인 그이니 비량아를 이만 이곳에 두고 제 명대로 죽게 하는 게 마땅했다.

그러나 신조는 그러지 못했다. 짐덩이나 마찬가지인 데다 그가 그토록 무시하는 사람 중 하나인 비량아를 두고 가는 대신, 고개를 기울여 코 밑으로 나오는 아주 미약한 호흡을 느꼈다. 그리고 곧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몸이 흔들려서 비량아는 잠시 깨어났다. 엄청난 흔들림은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은 누워 있었다.

‘여긴 어디지….’

손으로 더듬더듬하자 만져지는 건 분명 짐승의 털이었다. 눈으로 확인하려 했으나 그사이에 눈꺼풀이 몹시 부어 초점을 잡는 데 시간이 걸렸다. 한참 후에야 겨우 본 것은 달빛 아래서 빛나는 범의 털가죽이었다.

그러나 비량아는 놀라지 않았다. 누구인지 알았으니까.

신조는 짐승으로 포함되는 걸 질색했다. 범이라 불리는 걸 혐오하고 짐승의 모습으로 바뀌는 건 쓰잘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은, 범이란 걸 자랑스러워하나 동시에 범이고 싶지 않아 하던 그의 등 위에, 가죽 위에 누운 것이다. 그만큼 커다랗고… 따뜻한….

‘왜 당신은 무심하다가도 끝내 다정합니까. 왜 자꾸만 기대하게 만들고, 헷갈리게 하세요.’

비량아는 나오지 않는 물음을 삼켰다. 왜냐하면 자신을 위해 그토록 싫어하는 모습이 된 신조를 오래도록 느끼고 싶어서.

몰매를 맞아 꼴이 엉망인데도 몸이 아프지 않다. 늘 냉골처럼 차갑던 흉골이 따뜻하다. 구름 위로 걸린 달이 그를 비스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비량아의 수려하게 잘생긴 얼굴을 면포가 가로질렀다. 한쪽 눈이 유독 붓고 충혈되어 가려 둔 것이다. 귀는 이전보다 더 들리지 않았고, 잘못 맞은 발목은 퉁퉁 부어 아직 절뚝거려야만 했다.

그래도 상태가 더 나빠지진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운이 좋은 거다. 일단 산에 돌아온 이후로 신조가 어디서 가져온 건지 모를, 그리고 무엇인지 모를 약초들을 먹여 주었는데 아무래도 그게 효과가 톡톡한 것 같았다. 먹으면 고통도 없었고 몸도 가뿐했다. 외상은 사라지지 않아도 내상은 남지 않았고, 거동이 약간 불편할 뿐 맞은 직후에 비해선 놀라울 정도로 괜찮았다.

비량아는 절뚝거리면서도 요령 있게 옮겨 다녔다. 여름 산나물이 한창 나는 철이라 소쿠리의 반을 곤드레, 반을 참취로 채웠다.

신조는 어제 산을 떠났다. 다녀올 곳이 있다고 하는데, 덜컥 걱정되어서 손을 붙들어 감싸 쥐고 그를 올려다봤었다.

‘그 사람들… 찾으러 가는 거 아니죠?’

신조가 고개를 내려 잡힌 손을, 정확히는 비량아의 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묘한 시선이다. 고개를 내리고 있어 비량아가 볼 수는 없었지만.

‘그냥 넘어가 주십시오. 충분히 오해가 있을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오해가 납득이 된다면 목숨까지 내줄 정도로 멍청하게 굴어도 된다는 거냐.’

거기에는 비량아 딴엔 할 말이 있었다. 다만 신조가 이해를 못 할 게 뻔했을 뿐이다.

어쨌든 혼자 살아 돌아온 건 일종의 배신이었다. 무리는 피가 섞이지 않아도 가족 그 이상으로 끈끈해야만 했다. 방랑하는 존재들이니까. 땅에 묶인 게 아니라 사람으로 존재를 증명하니까.

그런데 비량아는 외부인이었고, 꺽두는 무리 속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꺽두는 죽었고 비량아는 혼자 살아 돌아왔다. 그것 자체가 배신인 것이다. 다만, 이미 말했듯이 신조는 이해를 못 할 뿐이다.

대답이 없이 정수리만 보이는 꼴에 신조는 어쩐지 명치가 꼬이는 기분이 들어 손을 뿌리쳤다.

‘내가 너 하나 때문에 집요하게 누굴 쫓아 해치는 그런 헛고생을 하는 놈으로 보이냐?’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한참 잘못 봤다. 복수니 뭐니 그런 지지부진한 생각 같은 건 애초에 없어. 잠시 바람을 쐬러 다녀오려는 것뿐이야.’

사실은 머릿속에 그 세 놈을 쫓아가 사지를 찢고 목숨줄을 뜯어 발기고 싶은 생각뿐이면서 신조는 씹어뱉었다.

범신이 속이는 것에 능숙해서 비량아는 한편으로는 안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씁쓸했다. 하긴, 신조는 성가신 걸 무척 싫어한다. 그는 변덕스럽고 즉흥적이었다. 맞은 날로부터 이미 며칠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기억하며 그들을 곱씹는단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었다. 고작 흥미 하나로 데리고 있는 사람 아이, 그의 표현으로는 곰의 아이를 괴롭혔단 이유만으로.

알면서도 씁쓸하다. 독이 있는 줄 알면서도 가시나무에 손을 대고 만 것처럼. 애초에 기대조차 멋대로 했단 사실에 자신에게 실망하는 건 덤이었고.

‘어디 나갈 생각 하지 말고 얌전히 몸을 추스르기나 해라.’

불퉁하게 뱉은 신조의 낯이 더욱 구겨졌다. 정작 비량아는 아무렇지 않아 하는 몸의 상처들이 그의 눈에는 유독 또렷하게 부각되어 보였다. 눈이 밝기 때문이다.

눈이 밝기 때문이야…. 아무도 듣지 않는 변명을 뇌까리며 신조가 몸을 돌렸다. 이제부터 비량아 혼자 산을 내려보내는 일은 없으리란 다짐을 했다는 자각도 하지 못했다.

앞으로 비량아 혼자, 자신의 허락 없이 산을 떠날 순 없을 거다.

‘어차피 그럴 몸 상태도 아닐 테지만.’

그렇게 떠났다.

떠날 때 이미 날이 저물었었다. 하루가 전부 지난 것도 아니고 이제 막 한나절이 지났을 뿐인데 비량아의 머릿속은 신조로 가득 차 있었다. 그 걱정의 결과물이 소쿠리에 수북하게 담긴 나물이었다.

심산함에 어릴 적에도 하지 않았던 흙장난까지 하고 있는데 돌연 앞에서 인기척이 났다. 비량아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고개를 들었다.

“…아.”

눈앞에 있는 것은 토끼였다. 신조가 종종 토끼를 잡아 왔기 때문에 죄책감이 있었다. 게다가 지금 이쪽을 빤히 보는 구슬처럼 반들거리는 눈이 ‘네가 지금 곤드레며 참취며 싹을 말리려고 하는구나.’ 하는 것 같아서 지레 찔렸다.

시선을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량아가 움직여도 겁많은 토끼는 움직이지 않았다. 손에 묻은 포슬거리는 흙을 털어내고 토끼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토끼는 도망가지 않았다.

이 산에 있는 것들은 비량아를 피하지 않는다. 비량아의 몸에는 신조의 냄새가 흠뻑 배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량아와 함께 있을 때 신조는 으레 기분이 좋아서 그것이 위협적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더 뜯지 않고 돌아가마.”

사과를 건네는데 그 말투가 어느새 신조를 닮아 있었다. 정작 신조는 비량아에게 사과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아니, 비량아뿐만 아니라 그는 누구에게든 사과라는 걸 해 본 적이 없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들은 적 없는 말을 무던히 들어 온 말투로 중얼거린 비량아가 몸을 돌렸다. 머릿속 상념을 뽑듯 바닥만 보고 엉금엉금 온 길이 생각보다 꽤 되었다. 신조와 함께 지내는 굴로 돌아가는 데만도 시간이 꽤 걸렸다.

그리고 낯익은 흙바닥이 보여 고개를 들었을 때, 비량아는 환영처럼 서 있는 신조를 발견했다.

“아….”

인기척에 신조가 돌아봤다.

고작 한나절을 못 본 것이다. 고작 한나절. 그런데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끝에 본 것처럼 어쩐지 생경하고 어쩐지 꿈만 같았다. 그걸 신조도 느끼는 걸까. 그는 가만히 서서 물끄러미 이쪽만 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와 달리 쉬이 떨어지지 않는 집요한 시선에 비량아가 겸연쩍게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빠듯하게 팽창해 있던 침묵이 깨졌다.

“다녀오셨어요.”

“…그래.”

뒤늦게 신조는 비량아가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으리란 걸 기억해냈다. 그가 다시 대답하려는 순간, 입술 모양으로 대충 읽어낸 비량아가 조금 다가오며 물었다.

“저… 나물 좀 뜯어왔거든요. 드실래요?”

신조는 대답이 없었다. 비량아는 애써 내밀었던 소쿠리를 다시 가슴 쪽으로 바짝 당겼다. 민망하다.

[어딜 다녀온 거야.]

평소보다 부쩍 낮고 맥없는 목소리가 조금 의아해 비량아는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나물… 뜯으러 다녀왔다니까… 요.”

[아.]

정말로 그답지 않다. 신조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랬지.]

“…….”

[네가 어디론가 간 줄 알았다. 그사이에.]

“아무래도… 나물을 뜯으러 간 것도 어딜 간 거긴 하겠죠….”

그러곤 다시 침묵.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어색했다. 비량아는 공연히 소쿠리를 감싸 안은 손목 안쪽을 긁적거리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신조에게 다가갔다.

그에게서는 바람 냄새가 났다. 신조의 본래 체향은 아니다. 바람을 거슬러 빠르게 달린 사람처럼 묻혀 온 것이다.

“잘… 다녀오셨네요.”

잘 다녀오셨냐 물으려다 괜한 민망함에 발목이 잡혀 아주 이상하게 인사를 마무리 지었다. 신조는 비량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비량아가 보지 못한 쪽 손을 내밀었다. 쥐고 있는 것은 곡식 주머니였다.

비량아는 그것을 처음 보는 물체라도 대하는 양 낯설게 보았다. 신조의 손에 곡식 주머니가 쥐어져 있다는 게 어색했다. 어울리지 않는 둘이 한 쌍으로 붙은 꼴을 본 듯했다. 기분 탓인지 신조의 손마저 머쓱해 보였다.

[…입 안이 다쳤으면.]

“…….”

[물에 오래 끓여서 먹으면 된다고 하더군. 다만 잘 식혀서.]

“누가요?”

“…….”

“누군가한테 물어보신 거예요?”

당연히 비량아는 이미 아는 사실이었다. 신조에겐 필요 없는 상식이라도 상식이었다.

“뭐라고… 물어보셨어요?”

그런 게 왜 궁금하지? 신조는 조금 짜증스러워졌다. 그게 민망함에서 비롯된 것도 모르고. 그게 쑥스러움에서 기한 것도 모르고.

[그냥 다쳤다고 했다.]

쥐고 있는 곡식 주머니를 더욱 바짝 내밀며 신조가 채근했다.

[내가 거둬 키우고 있는 것이… 다쳤다고.]

“…….”

신조가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다친 이에게 쌀밥을 먹여도 되냐는 말에, 뭘 그런 것도 모르냐는 얼굴을 하던 아낙이 이렇게 덧붙여 물었다는 걸.

‘귀애하시나 봐요. 쌀이라니….’

그것도 다른 알곡이 섞이지 않은 흰 쌀…. 인사치레라도 충분히 물을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소리를 신조는 오래도록 곱씹었다. 심지어는 귀애하는 게 아니라 그냥 거둬 키우고 있는 것이라고 대답한 후에도.

아낙은 코웃음을 쳤으리라. 거두어 키우고 있는 것이 사람이든 귀한 가축이든 쌀은 주지 않는다. 배 아파 낳은 자식이라면 모를까.

아마 멋대로 어디서 주워 와 자식처럼 기르는 아이가 있나 보다 하고 아낙은 생각했고, 그것은 일견 맞는 듯 틀렸다. 신조는 비량아를 한 번도 아이라고 여기지 않았으니까.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여전히 감동과 실망을 동시에 주었지만 비량아는 그래도 좋았다. 어떤 날은 실망이 좀 더 컸고 어떤 날은 감동이 좀 더 컸다. 오늘은 감동이 좀 더 많이 컸다. 가슴이 뿌듯하게 채워진다.

사실은 꺼지지 않고 있단 말이 맞았다. 신조가 자신의 등에 비량아를 태우고 산을 네 발로 달려 올라왔을 때 틔어 오른 가슴 속의 불티가 어느덧 작은 화톳불이 되어선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것이 온몸을 태울까 봐 두렵다. 그만큼 커질까 봐 무섭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런 두려움은 뒤로하고 이 선물을 기꺼이 받고 싶었다. 비량아는 곡식 주머니를 가져갔다. 양손이 그득하게 찼다. 두 사람은 여전히 어색하게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비량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늘 축축하리만큼 젖어 있는 비량아의 눈이 자신을 직시하자 신조가 티 나지 않게 움찔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쫓아왔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그라는 존재와 만난 순간부터 비량아는 신조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두렵고 모든 것을 빼앗길 것만 같은데도 온 신경은 그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지금은?

지금은 쫓아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사내는 못됐다. 자꾸만 자신에게 이상한 여지를 불어넣는다. 초여름의 부채 바람처럼 자신을 간지럽힌다. 자신도 사내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 사내를 간지럽히고 흔들고 싶었다. 설사 미동도 없을 바위 같은 존재여도.

그리하여 비량아는 고개를 들었다. 손에 쥔 것을 꽉 쥐고는 발꿈치를 조금 들어 사내의 입술에 입 맞췄다. 입술 껍질과 껍질이 닿았다. 바스락, 종이꽃이 구겨지는 것만 같다. 조금 더 갖다 붙이니 서로의 습한 숨에 입술이 녹녹히 젖었다.

말랑말랑해질 때까지 붙어 있다가 떨어졌다. 엄한 짓치고는 너무나 순진하고, 마냥 순수한 짓이라 하기에는 발칙한 행동을 한 주제에 비량아의 표정은 수면 위처럼 잔잔했다.

“…잘 먹을게요.”

그러나 수면도 결국 흐르는 물이다. 비량아의 마음은 내내 흐르고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발 너머의 존재를 향하던 두려움은 사내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그 순간에 모습을 바꾸어 점점 빠르게, 그리하여 지금까지 흐르고 있었다.

엄한 짓을 한 비량아를 내려다보는 신조의 눈이 노랗게 빛났다. 다만 오늘은 그것이 섬뜩하지 않고 지는 해처럼 부드러웠다.

* * *

“무슨 일이지?”

막 현관으로 들어오며 넥타이를 끄르던 신조가 물었다. 윤오는 그의 매끈한 목덜미와 손,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저었다. 범신조는 조금 의아했지만 일단 욕실로 들어갔다.

씻고 나오니 윤오가 침대가에 앉아 있었다. 바닥에 발이 닿도록 정자세로 앉아선 또 자신을 빤히 쳐다본다. 윤오 앞에서 나체를 보이는데 거리낌이 없는 범신조는 잠시 멈칫했다가 으쓱하고는 머리를 말렸다.

그러나 머리를 말리는 내내, 거울을 통해 자신의 등 언저리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모습이 보였다. 보이기만 할 것이 아니라 시선이 느껴져 간지러울 지경이었다. 움찔거리는 등근육을 쳐다보던 김윤오가 오히려 목덜미를 움찔했다.

끝내 범신조는 머리를 다 말리지 못하고 윤오가 있는 쪽으로 왔다.

“대체 무슨 일인데.”

김윤오를 팔 안에 가두고 물었다. 품에 있는 인영이 시선을 피했다. 적나라하게 보이는 그의 성기 때문에. 하여튼 뻔뻔함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남자다.

“옷 좀 입죠.”

“누가 나를 너무 열렬하게 봐서 힘들겠는데.”

윤오는 곤란함에 혀끝을 질겅 씹었다. 막 씻고 나왔으니 보디샴푸 냄새가 더 강해야 할 텐데 체향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병원에서 깨어난 이후로, 정확히는 발정기를 함께 보낸 이후로 그의 체향이 노골적으로 느껴져서 곤란했다. 전문가들은 그걸 체향이라 표현해선 안 된다고 했다. 안인들의 체향과 구분이 모호하고, 무엇보다 금인과 치인이 서로를 느끼는 방식은 후각이 아니라 뇌의 화학 작용이니 틀린 용어란 거다.

하지만 무엇이라 표현하든 느끼는 방식이 더 중요하지 않나.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예민해진 걸 범신조의 잘못으로 일축할 순 없다. 이전과 달리 그렇게 받아들이게 된 자신의 문제지.

맨 처음 만났을 때도 나신을 봤다. 그때만 해도 이런 반응이 아니었는데. 그러니 이건 갑자기 예민해진 자신의 문제고, 그 때문에 곤란하다… 정말로.

“좋아. 옷부터 입고 오지.”

“…….”

“누가 수줍음이 많아서 말을 도통 안 하니 말이야.”

그리고 고맙게도 범신조가 멀어졌다. 윤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엔 여전히 남자의 나신이 어른거렸다. 잠시지만 복잡했던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질 정도였다.

그를 계속 본 이유는 현실보다 생생한 꿈 내용 탓이었다. 꿈속에서 범신조가 정말로 호랑이로 변했었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다던 것이 무색하게, 윤오는 간밤의 여운에 흠뻑 젖어 있었다. 호랑이를 타고 달리다니. 마치 동화 속 이야기 같지 않나. 물론 그전에는 R-18 등급을 받게 될 폭력 씬이 있긴 했지만 말이다.

여전히 그 아픔이 생생한 양 윤오는 제 몸을 쓸었다. 그래도 역시 신조의 다정함과 그 털의 촉감 같은 것이 더 마음에 남았다. 남다 못해 설렘이 이어질 정도였다. 이 흥분에 못 이겨 아까도 자칫하면 신조에게 덜컥 호랑이로 변할 수 있냐고 물어보게 될 뻔했었다.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안다. 사람은 동물로 변할 수 없다. 알파, 금인의 뿌리가 짐승인 건 말 그대로 뿌리고 특징일 뿐이지, 그게 몸까지 바꾼단 뜻이 아니었다.

윤오가 얼굴을 문질렀다. 낯이 화끈거린다. 꿈, 바로 그것에 깊이깊이 매몰되어 버린 탓이다. 꿈을 꾸는 순간 윤오는 김윤오가 아니게 된다. 비량아가 되어 모든 것을 똑같이 느끼고 똑같이 생각한다. 그게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여 깬 후에도 거부감일랑 없었다. 오히려 존재하는 줄 몰랐던 일기장의 앞 페이지를 발견한 것만 같다.

새로 쓰이는 기억… 그 속에서 느끼는 범신조와 똑같은 신조와의 감정이 무척이나 곤란했다.

안 그래도 꿈을 꾸기 전부터 윤오는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범신조에게 강렬하게 끌리고 있던 참이었다. 게다가 몸도 섞었다. 몸을 섞은 뒤로는 꿈을 꾸고… 꿈속의 자신은 아무리 보아도 막 사랑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 못되면서 다정한 제멋대로인 사내를….

“좋아. 이제 무슨 일인지 말해 줄 거야?”

편한 옷을 입고 마찬가지로 머리도 자연스럽게 내린 신조가 돌아왔다. 꿈과 이어지는 현실의 감정에서 혼란을 느끼던 윤오가 표정을 갈무리할 타이밍을 놓치고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범신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막 사랑에 빠진 것처럼 붉어진 뺨과 흔들리는 젖은 눈, 자꾸만 물었다 떼서 부푼 입술….

김윤오는 수려하게 잘생긴 남자였으나 단정한 느낌이 강해 무채색에 가까웠다. 그런 얼굴에 색이 곁드니…. 아니다. 이런저런 말은 모두 핑계에 불과하다. 범신조는 그저 김윤오에게 약할 뿐이다. 그는 무너지듯 윤오에게 몸을 쓰러뜨렸다. 순식간에 뒤로 눕게 된 윤오의 귀가 거친 손끝으로 문질러졌다.

거칠게 시작한 입맞춤은 곧 부드러워졌다. 너무나 부드러웠다. 사람을 삼킬 것처럼 혀를 밀어 넣던 꿈속의 사내는 어디로 갔는가. 신조가 온몸을 녹일 것처럼, 입 안의 사탕이라도 되는 것처럼 혀를 굴려대 윤오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입술이 언제 떨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윤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닿은 이마끼리 문질러진다.

“너는 언제까지 나를 헷갈리게 할 거지? 네가 그런 눈으로 나를 볼 때면 설마 네가 나를 사랑하나, 그런 착각을 하게 되니 말이야….”

꿈에서는 자신을 한껏 헷갈리게 하던 남자가 현실에선 저보고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한다. 미약하게 소름이 돋을 정도로 흥분하고 말았다. 홀로 비밀을 숨기고 있단 기분도 들었다.

“…내가 헷갈리게 굴고 있다면.”

윤오는 손을 뻗어 신조의 목에 팔을 걸며 읊조렸다.

“그건 나도 헷갈린다는 뜻 아닐까요.”

코웃음 친 신조가 “말은 잘하지.”하고 뇌까렸다. 그사이 그의 다부진 손이 윤오의 티셔츠 자락 아래로 들어왔다. 커다란 손이 윤오의 예쁘고 곧은 뼈대를 감쌌다. 손아귀에 흉통이 가볍게 쥐어졌다. 윤오는 그 압박감에 헐떡였다.

아는지 모르겠으나, 그 순간 윤오의 젖꼭지가 섰다. 그것을 향해 고개를 내리며 코로 문지르기까지 하는 행동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끝까지 하려는 걸까, 윤오의 몸이 긴장으로 굳었다.

그러나 의외로 손과 얼굴은 싱겁게 떨어졌다. 어느새 침대에서 멀찍이 떨어진 신조가 콧잔등을 가볍게 쓸며 인상을 찌푸렸다.

“나와. 저녁 먹게.”

그리고 순식간에 방을 나간다. 남겨진 윤오는 팔꿈치로 상체를 일으켰다. 덩달아 올라갔던 옷자락이 내려왔다. 긴장했던 것이 무색했다.

“뭐야….”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 * *

윤오는 한쪽 무릎은 끌어안고 한쪽 발은 내린 채 신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 치우려는 윤오를 밀어내고 제가 팔을 걷어붙인 것이다. 윤오에겐 양치나 하고 오라고, 아니면 더 뭘 먹겠냐고 묻기에 배가 부른 윤오는 고개를 젓고 그의 말대로 양치나 하고 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범신조가 자리에 털썩 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이어 자연스레 담배를 입술에 물고 성냥갑을 두드리다가 흘끗 윤오를 보고는 도로 담배를 집어넣었다.

“피우셔도 상관없는데요.”

“나중에.”

그리고 다시 침묵.

윤오는 신조를 물끄러미 보았다. 이전에는 그가 자신을 이렇게 집요하게 봤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도리어 범신조가 시선을 피하는 쪽이었다.

“뭐 물을 거 있나?”

픽 웃으며 중얼거릴 때조차 그는 성냥갑을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이름요.”

“이름?”

“그 이름 좋아하세요?”

문득 꿈속에서 자신이 지어줬던 기억이 나서 툭 묻고 말았다. 꿈은 꿈일 뿐, 정말 자신이 지어준 이름일 리가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냥 현재 가장 교류가 많은 사람이니까 무의식중에 떠올려 등장한 이름이겠지….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했다.

영 생뚱맞은 소리를 들은 범신조는 고개를 까딱였다가 천천히 아래서부터 위로 시선을 끌어 올렸다. 부드럽게 마주치는 시선이 속내를 샅샅이 까발려 보는 것만 같아서 긴장이 된다. 지금 그를 떠보고 있단 걸 고스란히 들킬 것 같다.

“김윤오.”

“네.”

“그러는 너는 네 이름이 마음에 들어?”

범신조가 거만하게 턱을 들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듯 보는 시선에도 불쾌함이 없는 건, 그가 실제로 무시하거나 경멸해서가 아니란 걸 알아서다.

“뭐… 그냥 지어 준 이름이니까.”

“나도 마찬가지야.”

잠깐 말을 멈춘 그는 물잔을 찾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소득 없이 도로 털썩 주저앉고는 눈썹뼈를 문질렀다.

“그럼 마음에 안 드시는 거네요.”

“아니.”

범신조의 손이 이번에는 눈썹뼈에서 윗입술로 향했다. 윗입술을 문지르며 뇌까렸다.

“지어 준 사람이 마음에 든다면, 어쩔 수 없단 거지.”

그 말에 윤오의 가슴이 하릴없이 떨렸다. 꿈속의 기억이 날조 없이 모두 맞다면, 자신이 미친 게 아니라면 그 이름을 지어 준 건 분명 자신인데. 우연의 일치든 아니든 범신조가 한 말은 자신을 위로하는 것 같았다.

윤오는 고개를 숙이고 배시시 웃었다. 마치 지금의 범신조와 꿈속의 신조가 정말로 같은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두 존재 모두 자신을 좋아하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

자못 차가운 말투로 신조가 물었다. 윤오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요.”

눈을 가느스름하게 접은 신조가 윤오를 빤히 쳐다본다. 속일 생각일랑 말라는 듯했다. 윤오는 시침을 뗐다. 독심술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알겠나.

“김윤오. 너 요즘….”

운을 떼려던 순간, 기막힌 타이밍으로 벨 소리가 울렸다. 범신조의 것이었다. 멈칫하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어지는 신조의 뒷모습을 보며 그제야 윤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범신조가 조금이라도 더 추궁했다면 저도 모르게 꿈 이야기를 꺼냈을 거다. 말로 뱉으면 이상하게 들리는 비현실적인 일을.

사실 물어본다고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기껏해야 미친 사람 취급 좀 받고 말 텐데. 그런데도 도저히 말이 안 나오는 건, 그런 충동이 들 때마다 이상하게도 머릿속이 꽉 옥죄이는 것처럼 혀가 굳어서였다. 누군가가 말하지 말라고 절박하게 입을 틀어막는 것만 같았다. 한마디로 저 벨 소리가 윤오를 살린 거다.

조금 후, 범신조가 돌아왔다. 그의 표정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읽을 수 없었다. 다만 분위기가 조금 무겁단 건 알았다. 신조는 털썩 앉아 이마를 괴고 있다가 문득 생각난 양 고개를 돌려 물었다.

“산책할래?”

갑자기 산책?

윤오는 창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컴컴한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았다. 어느덧 봄의 초입에 접어들어 해가 부쩍 길어졌지만, 그래도 여덟 시 경이 되었으니 어두운 건 당연했다. 이 시간에 산책이라니….

하지만 못할 것도 없었다. 요즘 현실처럼 생생한 꿈속에서 드넓은 산을 누비고 다녀서 그런지 답답한 걸 체감하지 못했는데, 셈해 보면 바깥바람을 쐰 지도 꽤 되었다. 윤오가 순순히 일어나자 제안한 남자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둘이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윤오의 핸드폰이 울렸다.

끊어질 듯 끊기지 않던 진동이 겨우 끊겼을 때, 갑자기 범신조가 방으로 들어왔다. 깜박 놓고 온 본인의 핸드폰을 챙겨 오겠다며 잠깐 돌아온 것이다.

“…….”

부재중 통화 기록이 남은 화면을 물끄러미 보던 그가 주머니에 넣어둔 한쪽 손만 빼내어 조용히 그 기록을 삭제했다. 아버지, 라고 적힌 세 글자가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지막 남은 통화 기록은 오늘 오전에 그가 걸었던 흔적뿐. 스크롤을 한참 내려도 아버지라고 쓰여진 건 없었다. 아주 오랜만에 연락을 했단 의미였다.

대신 아래로 내릴수록 제 이름만 이어졌다. 신조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것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돌아 나오는 걸음 끝에 웃음기 머금은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범신조… 라….”

분명 그의 이름인데도 이제껏 그 누가 부르든 낯설게 느껴지던 것이, 고작 김윤오의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단 사실 하나만으로 다르게 느껴졌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1)

지겹도록 들어 감흥 없던 문장이 드디어 신조에게 와서 시가 되었다. 그의 이름이 윤오에게 불려질 때 드디어 본디의 이름이 되듯.

* * *

윤오는 그간 자신이 무심했음을 깨달았다. 무심하게 흘려 넘겼던 시간이 어느덧 봄까지 도달한 것이다. 흙을 뚫고 움쑥움쑥 솟은 꽃대들이 낯설었다. 관목에 하얗게 돋은 봉오리가 별사탕처럼 어둠 속에서 빛났다.

정원의 조명은 조경을 망치지 않을 정도로만 은은하게 밝았다. 해가 졌는데도 외투를 입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 그만큼 시간이 지났다는 걸 몰랐단 사실에 번갈아 놀라며 윤오는 앞서 걸었고, 신조는 그 뒤를 조용히 쫓았다.

결코 작지 않은 키. 대중 속에 섞이면 큰 편이다 할 수 있는 키. 무엇보다 예쁜 것은 뼈대였다. 좁은 골반과 예쁘게 벌어진 어깨 같은 것이 균형을 이루었다. 그래서 그런지 윤오는 입혀놓아도 벗겨놓아도 예뻤다. 범신조는 윤오의 뒷모습에 조용히 침을 삼켰다. 뒤로 숨긴 손이 움찔거렸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윤오의 모습이 상상된다. 뒤를 돌아보고, 윤오의 짧은 머리칼은 순식간에 장발이 되어, 우리는 정교하게 꾸며진 정원이 아니라 억새풀이 다리를 휘감는 분지에 선 것이다. 너는 나를 증오하는 말을 뱉고 나는 너에게 상처를 준다…. 지독하게 먼 과거의 일이 눈에 그릴 듯 생생하여 범신조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이거는 무슨 나무예요?”

문득 윤오가 관목 하나를 가리켰다. 신조는 그쪽으로 다가가며 미간을 찌푸렸다. 실로 흔해 빠진 관목이었고 그래서 더더욱 몰랐다. 그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윤오가 기대하지 않았던 대답을 했다.

“잘 모르겠는데.”

“그러면 이건요?”

그 옆을 가리키자 신조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그는 관심이 없는 것까지 일일이 기억하는 그런 섬세한 부류가 못 되었다.

“어른들은 물어보면 다 말해 주던데.”

윤오의 중얼거림에 얼굴을 왈칵 찌푸렸다.

“너도 어른이지. 내가 너 성인이 되기까지 얼마나 기다렸는데.”

“…….”

굳이 법적으로 가름되는 성인과 미성년을 기준으로 어른이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건 비겁했다. 그런데 또 반박하자니 유치했다. 윤오는 유치해지기 싫어서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내가 관심이 있는 것 말고는 기억하지 않아. 그것 말고도 기억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심드렁한 말투에 상처받지 않는 건, 윤오가 자신이 바로 그 기억해야 할 일에 속한다는 걸 알아서였다. 자신할 수 있었다. 꿈속의 비량아처럼 자신을 잡초 취급한다고 상처받지 않는다.

하물며 꿈속의 신조 역시 최근 꾸었던 모습으로는 보는 사람이 낯 뜨겁게 다정했다. 그만의 방식으로. 오히려 한 걸음 떨어져서 보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다정함으로.

“하지만 네가 궁금하다면… 다음에 물어보도록 하지.”

윤오가 가리킨 손끝을 보기 위해 허리를 굽힌 채 범신조가 중얼거렸다. 약간의 짜릿함과 죄책감이 함께 느껴졌다. 윤오는 조금 반성했다. 나는 어른이 되기에 먼 모양이다. 이렇게 애정을 확인하기 위해 상대를 시험하니 말이다. 유치하기도 하지.

정원은 내내 돈을 주고 사람을 써서 맡겨 뒀다. 정원을 꾸민 이유는 내면의 을씨년함과 황폐함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것이 윤오가 관심을 보이니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마치 이곳의 주인이 돌아와 생기를 되찾은 것처럼.

정원의 원래 주인이 봄이 오며 여리게 물이 차오른 이파리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이런 데 관심이 있어?”

윤오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곧 결론을 내렸다. 저의 관심은 남들이 가진 만큼, 딱 그 정도에 불과하다고. 보면 예쁘고, 예쁘니 궁금하고, 궁금해서 물었다가 곧 잊을 정도.

“아니요.”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돌이켜 보면 윤오는 늘 호불호가 뚜렷하지 않았다. 좋게 말하면 무던했고, 나쁘게 말하면 무심한. 이렇게 보니 범신조의 무심함을 타박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럴 줄 알았어.”

픽 웃은 범신조가 숙였던 허리를 쭉 폈다. 순식간에 눈높이에 차이가 생겼다.

“넌… 좀 차갑다고 해야 하나….”

“무심하다고요?”

“아. 그래. 맞아. 무심해.”

“저도 지금 제가 그런 것 같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어요.”

그리고 태연하게 덧붙였다.

“그런데 제가 무심하다고 하는 건… 범신조 씨가 할 말은 아니죠.”

신조의 눈이 커졌다. 조금 건방졌나 싶어서 콧잔등을 긁는 윤오의 손을 낚아채고 신조가 자못 심각하게 말했다.

“다시 불러 봐.”

“네? 뭘요?”

“내 이름….”

“…….”

그러고 보니 윤오는 늘 그쪽이라고 부르곤 했었다. 다시 불러보라고 하니 낯이 뜨거워졌다. 고작 이름인데. 고작 이름 하나인데 왜 이렇게 부르는 게 새삼 민망하지.

실수했다는 생각도 든다. 윤오는 순간 가슴이 옥죄이는 것만 같았다. 느낄 필요 없는 자괴감이 물밀듯이 쏟아져서 숨이 막혔다.

낯선 일은 아니었다. 꿈을 꾸기 시작한 이후로 종종 누군가 참견하듯 윤오가 원하지 않는 감정 같은 게 느껴졌다. 유독 지금이 심할 뿐이다.

“…싫어요.”

체한 듯이 답답한 가슴 통증을 무시하고 윤오는 애써 가벼운 말투로 거절했다.

“원래 시키라고 판 깔아 주면 못해요, 제가.”

“그럼 불러 달라고 부탁해도?”

“그게 똑같잖아요….”

“녹음이라도 할 걸 그랬군.”

“고작 이름 가지고 유난 부리면서 저 부담스럽게 하려고 만드는 거죠?”

“내가 그렇게 신뢰도가 떨어지나? 안타깝네. 진심인데.”

다행이다. 부담스러웠던 분위기가 한결 가셨다. 옥죄이던 가슴 통증도 사라졌다. 아무래도 체한 걸 수도 있겠지, 애써 생각하는데 범신조가 가지고 있던 다른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꺼내 화면을 확인한 그가 못마땅한 얼굴로 쯧, 혀를 찼다. 그러나 확인만 하고 받진 않는다. 의아함과 함께 윤오에겐 또 막연히 저게 아버지일 것 같단 예감이 들던 차에, 집요하게 울리던 진동이 멈췄다.

다시 주머니에 넣으려는 순간 진동은 또다시 울렸다.

욕을 겨우 삼킨 신조가 아예 전원을 끄려는데, 그 위로 윤오의 손이 와 덮었다. 순간 핸드폰을 앗아가 번호라도 확인할 줄 알고 신조는 움찔했으나 윤오는 가만히 있었다. 대신 화살로 쏘아진 것처럼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거짓말 같은 걸 하면 단번에 알아보고 서릿발 같은 실망을 쏟아낼까 봐 무서운 눈이다.

“아버지죠.”

“…감 좋네. 신내림 받아야겠어, 우리 김윤오.”

말에 뼈가 있다. 윤오는 무시하고 손에 힘을 줬다. 마침 진동이 끊겼다. 범신조는 또다시 연락이 오리란 걸 예감했다.

최근 김병후의 자금 사정이 좋지 못했다. 당연한 결과였고, 보고를 듣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만든 게 자기 자신이니까.

크게 손을 댈 것도 없었다. 자금을 보태고 더는 돕지 않았다. 그는 밑 빠진 독과 같은 사람이었다. 재능은 없으나 욕심은 많고, 노력은 하지 않으나 자신을 과하게 믿었으며, 현실은 외면하면서 한탕이라는 꿈만 좇았다.

결말은 뻔했다. 지금껏 몇 번이나 말아먹은 사업이 겨우 유지될 수 있던 건, 아직 윤오를 데려오지 못한 범신조가 꾸준히 돈을 부어 줬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그에게는 티도 나지 않는 지출이었고.

그러나 이제 김윤오는 그곳에 없고 이곳에 있다. 정원에 함께 서 있다. 김윤오에게 김병후가 좋은 아버지가 아니라는 건 이미 확인했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가 김윤오를 쓰레기통, 지나가는 길에 버려진 캔처럼 생각했다. 화풀이를 하고 악감정을 쏟아냈다. 그러는 와중에도 김윤오에게 빨대를 꽂고 기생했다.

하나하나를 구분해 누군 잘못이 덜했네, 누군 사정이 있었네, 그런 자질구레한 짓엔 관심이 없다. 말했듯이, 범신조는 관심이 있는 것 외에는 모든 것에 지나치게 무심한 사내였으니까.

그가 보기엔 김윤오는 가족과 연을 끊는 것이 나았다. 서로를 위해서 그게 맞았다. 김윤오가 있는 이상 가족은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고, 김윤오 역시 아주 느리고 끈질기게 그쪽 사람들이 보내는 포자에 물들어 마음에 곰팡이가 슬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그가 마음만 먹으면 아주 손쉽게 그들의 인연을 끊을 수 있는데….

진동이 다시 울린다. 핸드폰 아래에는 범신조의 손, 위로는 김윤오의 손. 서로 불편한 진동을 느끼고 있었다. 먼저 운을 뗀 건 범신조였다.

“급한 일이 생긴다면… 그 사람들 입장에서 급한 게 아니라, 누가 봐도 정말로 만나야 할 일이 생긴다면 내가 말해 주지.”

“…….”

“하지만 김윤오. 장담하는데 지금 오는 연락은 결코 급한 게 아니야.”

김병후의 입장으로는 급할 거다. 하지만 그의 사업이 위태롭게 된 건 범신조의 잘못이 아니다. 게으르고 나태하고 거만하게 군 본인의 잘못이지. 아주 나쁜 인간은 아니나 성가시고 짜증 나는 부류의 이런 인간 군상을 범신조는 지독하게 오래 봐 왔고 잘 알았다.

죽게 할 리는 없다. 다만 교훈 정도는 필요하지.

“너희 가족은 현재 건강하고 아무 일도 없어.”

아직까지는.

뒷말은 숨겼으나 윤오도 충분히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물론 김윤오는 알았다. 왜냐하면 이 사람의 자식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이러는 건 아마 엄살을 부리며 강짜를 놓으려는 거다. 핸드폰을 움켜쥐려던 손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신조는 그것을 흘끗 보며 입술을 축였다.

“네가 만나고 싶지 않다면… 만나지 않아도 좋아.”

“…….”

“만나야 할 때가 온다면 내가 말해 줄 테니까. 혹은 네가 보고 싶을 때….”

“그럴 때면 보내 주겠다고요.”

윤오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살면서 아무도 모르던 치부였다. 자신이 치부라고 여긴 줄도 몰랐던 걸, 범신조는 너무 잘 알았다. 맥이 빠졌다.

마침 진동도 뚝 멈췄다. 범신조가 힘이 빠진 윤오의 손을 조심스럽게 내렸다. 그러곤 손목부터 손바닥을 감싸 쥐었다. 도톰한 손바닥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긁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김윤오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휘몰아치고 있을지 궁금하다. 혹은 수면처럼 잔잔하려나.

절로 솟구치는 초조함에 신조가 고개를 숙이려는 찰나, 윤오가 고개를 드는 타이밍과 딱 맞아떨어졌다. 교차하는 시선 속에, 윤오의 눈동자 안에는 신뢰감이 가득 찼다. 아주 아주 오랜만에 보는 그 오롯한 감정에 가슴이 쿵 떨어진다. 속절없이 떨리고 기약 없이 허무해졌다.

“알았어요.”

윤오가 잔잔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 말, 믿어 볼게요.”

“…….”

“큰일이 있으면… 정말로 말해 줘야 해요.”

“…물론이지.”

간단한 일이었다. 윤오는 그 말에 다짐을 받듯 신조의 손을 쥐려 했고, 신조는 그답지 않게 조금 허둥대며 손바닥 사이에 낀 핸드폰을 빼냈다. 그러곤 서둘러 맞잡았다. 정말로 그답지 않은 모습에 윤오도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들어갈래요?”

윤오가 물었다. 어쩐지 그냥 들어가잔 뉘앙스가 아니어서 신조는 제 귀를 의심했다.

“들어가면, 씻고 나올 건데….”

범신조의 반응이 없다. 윤오의 손이 긴장으로 후끈후끈해졌다. 조금 전 그가 먼저 손을 댔을 땐 몸이 굳었으면서, 지금은 먼저 이런 말을 한다고 비웃으려나. 지금까지 봐 온 범신조는 이런 거로 자신을 비웃을 것 같진 않지만….

그러나 그때 당황했던 건 윤오가 그를 보며 커다란 범을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범신조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었단 뜻이다.

“발정기가 끝나니까 이제 나랑 하기 싫어요?”

“…….”

“진짠가 보네….”

“아니. 네가 어디 아픈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왜요. 상한 건 먹으면 안 되니까?”

“넌 말을….”

말을 왜 그렇게 하냐고 타박하기에는 본인의 언어생활도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하다. 범신조는 나직이 한숨을 쉬고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안 하는 게 좋아.”

그러고는 김윤오도 성인이라던 좀 전의 말이 무색하게 금방 어린애 취급하는 듯한 말투로 바꾸어 타일렀다.

“왜요? 역시 발정기 때만 따먹고….”

“김윤오….”

곤란하단 목소리로 탄식한 범신조가 윤오의 입을 턱 막았다. 맹랑한 줄은 진즉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로 겁대가리 없을 줄이야….

아니다. 김윤오는 원래부터 겁이 없었다. 씁쓸한 마음으로 정정했다. 이런 예상치 못한 말도, 돌발적인 행동도 많이 했다. 신조는 윤오의 손목을 고쳐 잡았다.

“너 후회해.”

웃음기라곤 조금도 없는 진중한 경고였다. 범신조의 손은 여느 때처럼 뜨거웠고, 윤오는 그 열기에 가슴이 쿵쿵 뛰었다.

“후회할 거라고….”

뇌까리는 목소리는 오히려 말하고 있는 그가 더 후회에 사무친 것처럼 보였다. 윤오는 가끔 보이는 신조의 이런 모습이 당혹스러웠다. 왜 이 사람은 나를 이렇게 보지? 왜 이 사람은 이런 목소리를 하는 거지…?

위태롭지만 행복하던 한때와 여전히 위태로운 듯 행복한 한때를 꿈꾸며 또 보내고 있는 윤오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사내는 겁을 내고 있는 것 같았다. 꿈속에서는 무서울 것일랑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거침없었는데.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범신조의 옆으로 소슬바람이 지나갔다. 바람에 따라 흘러가는 소매도, 긴 머리칼도 없는데 윤오는 그 잔상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손은 놓지 못하고 있으면서, 정작 이미 넘은 선을 다시 긋듯 후회할 거라고 충고하는 남자가 믿기지 않게도 무척 연약하게 보였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윤오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내가 당신을 배신하고 떠난 연인처럼 보여요?”

꿈속에서 자신은 그를 배신할 여지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배신할 것처럼 손을 내밀다가, 거두었다가, 다시 내미는 건 사내였다. 그러니 윤오는 다시금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범신조는 꿈속의 그 사내와 같은 사람이 아니고, 그가 두려워하는 건 과거의 인연이 그를 상처입혔기 때문이라고.

“전 그 사람과 다른 사람인데도, 그렇게 생각해요?”

김윤오가 용기를 내서 한 말에 범신조가 씁쓸한 얼굴을 했다.

“그래. 넌 어쩌면 다를 수도 있지.”

“제가 당신과 자는 건 후회할 일이면서, 절 앞에 두고 전 애인 같은 걸 생각하는 건 후회할 일이 아니고요?”

“…….”

“그쪽이야말로 후회할 일 하지 마세요.”

저를 똑바로 응시하며 하는 말에 범신조는 입을 다물었다. 후회할 일…. 그건 네가 아무것도 모르니까 할 수 있는 말이야. 그 한마디면 되는데 뱉을 수가 없었다.

범신조는 앞에 선 생명체가 낯설었다. 지겹도록 오래된 질긴 인연. 매번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 지독한 결말을 안기고 홀연히 사라지는 차가운 연인.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그는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 어김없이 자신을 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매번 같으면서도 달랐다.

너나 나나 어리석기 짝이 없군. 신조는 속으로만 중얼거리다가 윤오의 손을 부쩍 당겼다.

갑자기 앞으로 당겨지는 바람에 윤오는 신조의 품 안으로 풀썩 들어가는 꼴이 되었다. 작지 않은 체구인데도 신조의 악력이나 힘이 어찌나 센지 팔다리가 종이 인형처럼 이리저리 팔랑거린다. 윤오는 눈을 깜빡거렸고, 그가 알아채지도 못할 만큼 짧은 찰나 종이새의 환영이 팔랑팔랑 이지러지다 사라졌다.

“후회하지 마라.”

“…그쪽이 겁먹은 것보다는 후회하지 않아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인데, 김윤오. 너는 겁을 먹을 필요가 있어.”

신조는 당겨 안은 윤오를 더욱 세게 껴안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윤오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을 반짝이며 재차 덧붙였다.

“도망칠 필요도 있고.”

말하지 않아도, 잘해 왔단 걸 알지만.

* * *

긴장 탓인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짧게 느껴진다. 맞잡은 손이 무척 어색했다. 범신조와 서로 수음해 주는 것은 괜찮으면서 고작 손잡는 게 그리 멋쩍을 일이던가. 그런데 그랬다. 멋쩍었고 쑥스러웠다.

현관으로 돌아올 때까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범신조는 태연해 보였다. 여기서 그와 자신이 확실히 다른 시간을 살아왔단 게 여실히 느껴졌다. 간신히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윤오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운동이라고 할 수도 없는 짧은 산책 때문은 아닐 것이다.

“먼저 씻을게요.”

메인 침실 말고도 게스트룸으로 쓸 수 있는 침실 두 개에 서재가 따로 있고 욕실도 세 개나 있는 집이었다. 윤오는 다급히 외치며 습관처럼 익숙한 욕실로 향했고, 신조는 그 도망치는 듯한 뒷모습을 보며 낮은 신음을 뱉었다.

당장이라도 쫓아가서 허리를 낚아채고 싶었다. 윤오의 뒷모습에 자신은 하염없이 약해진다. 약해지면 사나워졌다. 저열한 본성이었다.

본성을 억누르기 위해 신조는 성마른 손짓으로 상의를 벗었다. 그러면서 욕실로 향하는 걸음이 조급했다.

김윤오가 먼저 하자고 한 관계였다. 꿈만 같았다. 첫 연애를 시작한 풋내기처럼 속절없이 떨렸다. 기막힌 일이었다. 첫 연애라니…. 자조하면서도 옷을 벗다가 가만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손이 자잘하게 떨리고 있었다. 한참을 보다가 조용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매일매일 조금씩 더 비겁해지고 있다. 네가 기억을 영영 찾지 못하길 바라고 있다. 나는 그때부터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말종이었다.

* * *

먼저 씻고 나온 것은 윤오였다. 다시 옷을 벗기는 과정이 민망할 것 같아서 가운을 입었다. 이 가운도 몇 번이나 망설이며 입었다가 벗었다가, 다시 입었다가 벗기를 반복한 끝에 걸친 것이었다. 유난스러워 보일까 봐 그랬다.

그렇게 욕실을 나온 뒤에도 윤오는 침대에 앉아 가운의 허리끈을 연신 만지작거렸다. 애꿎은 끈을 몇 번이나 당겼는지 모르겠다. 역시 제정신으로는 힘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술을 짓씹으며 버텼다.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라고.

요즘 현실처럼 생생한 꿈을 꾸는 탓인지 날마다 몽롱했다. 때론 그곳이 더 자신의 현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사실은 지금 이 침대 위가 꿈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자못 섬찟하기도 했다. 나는 죽은 건지 산 건지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꿈을 꾸기 전부터 시작된 마음은 꿈과 함께 더없이 깊어지고 있었다. 깨어나면 심술궂으면서도 한없이 다정한 범신조가 기다리고 있다. 눈을 뜨길 기다렸단 듯이 보고 있다가 깨면 웃어 보인다.

옆에 없는 순간조차 외롭게 하지 않았다. 서재에는 윤오가 마구잡이로 꺼내 펼쳤다가 싫증 내며 덮은 책들이 저마다 책갈피가 꽂힌 채 정리되어 있었고, 담요는 늘 섬유유연제 향이 났으며, 윤오가 자주 만지작거리며 끝까지 읽은 몇 가지 책은 며칠이 지나면 그것과 비슷한 종류의 다른 책으로 갈음되어 있었다.

생활 모든 곳곳에 범신조의 애정이 느껴진다. 곳곳에서 그를 느낄 수 있었다. 책장에 점점 늘어나는 책갈피 개수처럼….

윤오는 가운의 허리끈 끝을 입술로 가져가 문지르다가 뒤로 덜렁 누워 버렸다. 왜 이리 안 나오지, 하는 차에 드디어 인기척이 났다. 바깥 욕실에서 씻었는지 거실 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술과 와인을 따로 보관하는 냉장고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도 났다. 윤오는 가만가만 그 걸음 소리를 셌다. 침실까지, 나에게로 오는 걸음 하나, 둘, 셋….

열세 걸음 끝에 범신조의 발걸음이 멈췄다. 아마도 제 앞에 있을 것이다. 윤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자는 척하는 게 아니니 범신조도 착각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꽤 오래도록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끝내 윤오가 눈꺼풀을 달싹이며 눈을 뜨려는 순간, 방의 불이 꺼졌다. 그리고 아주 은은한 조명이 방을 밝혔다. 밝혔다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조도였다. 윤오의 동공이 순식간에 좁아 들었다가 다시 조금 확장되었다. 그 찰나 어지럼증을 느끼는 걸 범신조가 조용히 내려다봤다.

그의 손에는 유리잔이 들려 있었다. 독한 술 냄새가 났다. 윤오는 술이라곤 싸구려 양주, 소주, 맥주 그리고 막걸리밖엔 몰랐다. 그러니 범신조가 마시는 게 어떤 술인지는 라벨을 보아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조용히 윤오를 내려다보던 신조가 윤오의 옆에 무릎을 올렸다. 매트리스가 조금 들어가고, 커다랗고 뜨거운 손이 윤오의 목덜미 아래로 파고들었다.

상체가 들어 올려졌다. 그리고 눈앞에 유리잔이 내밀어졌다. 비강으로 알싸한 술 냄새가 들어왔다. 누군가에겐 그윽한 향기겠지만, 윤오에게는 그저 독한 알콜 냄새에 불과했다.

“마셔.”

“안 마셔요.”

고개를 돌렸다. 신조는 목 뒤를 잡고 있던 손으로 살짝 덜 마른 윤오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마시는 게 좋을 거야.”

“제정신으로 할 거라고요.”

“후회한다고도 했지.”

“여기서 술을 마시고 하면 더 후회할 거예요.”

“…….”

“난 취기에 실수하자는 게 아니야.”

단호한 말투. 윤오가 잘 사용하지 않던 어미. 어둠 속에 깊이 잠긴 신조의 입매가 움찔했다. 당황한 나머지 잔을 치우는 타이밍이 늦어졌다. 그러자 아예 윤오가 신조의 손에서 잔을 가져가선 침대와 조금 떨어진 협탁에 두었다.

한쪽 무릎을 침대에 누른 채 윤오의 궤적을 천천히 좇는 시선 끝에, 가만히 서서 이쪽을 보는 어린 청년의 모습이 걸렸다.

“내가 무서워요?”

윤오가 순연한 말투로 물었다. 공격성이라곤 조금도 없는 그 무구한 목소리에 범신조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래.”

그러고는 손을 뻗었다.

여러 번 당겨 묶었던 끈이 가볍게 풀어졌다. 멱살이 잡혀 끌려가듯 몸이 붙는 동시에 신조의 손이 윤오의 볼부터 목까지 넉넉하게 감쌌다. 입꼬리가 눌리자 윤오의 입술이 자연히 벌어졌다. 이것이 키스를 하겠다는 신호임을 안다.

벌어진 입술로 성급하게 혀부터 들어왔다. 헤벌어진 앞섶 안으로 희붐하게 빛나는 가슴이 속절없이 떨렸다.

* * *

후회하리라는 말은 사실이었다. 윤오는 후회했다.

물고 있던 이불 귀가 입가로 툭 빠져나갔다. 입술 옆으로 침이 흘렀다. 거침없이 흔들릴 때마다 눈꺼풀이 경련하듯 부산스럽게 깜빡여졌다. 거친 힘에 위로 올라가다 침대 헤드에 머리가 부딪치기 시작했다. 양손으로 시트를 쥐고 버티려던 노력은 소용없어진 지 오래다.

윤오가 무력하게 부딪는 걸 놔두지 않고 재빠르게 단단한 손이 올라와 머리를 감쌌다. 몸이 위로 밀리지 않고 아래로 눌리자 박혀 올라오는 살덩이가 더욱 깊게 배 속을 헤집었다.

“하악!”

힘없이 할딱이던 윤오가 높게 신음을 뱉었다. 버겁고 고통스럽고 그 고통 속에서 황홀한 쾌감이 느껴졌다.

윤오의 손이 허공을 헤매자 범신조가 그것을 잡아 자신의 가슴에 갖다 댔다. 단단하고 뜨거운 감각에 윤오는 지레 놀란 것처럼 손을 뗐다가 손을 내려 아랫배를 밀었다. 무력한 손길이었다. 손톱으로 허우적대는 움직임은 애꿎게 자극만 할 뿐이었다.

범신조는 풀린 눈으로 제 아랫배를 더듬는 윤오의 손을 잡고 도리어 더 깊숙이 내렸다. 그러곤 이어진 윤오의 입구를 더듬게 했다. 그 크기와 굵기에 질려 있던 윤오는 발작하듯 떨었다.

“왜?”

약이라도 한 사람처럼 신조가 몽롱하게 묻는다.

“싫어?”

범신조가 술 몇 모금에 취할 리 없다. 그런데도 그는 취한 사람처럼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그가 성마르게 입술을 축이며 허리를 추켜올렸다. 그 가벼운 허릿짓에도 윤오의 눈이 가볍게 떨렸다. 이미 너무 깊이 박혀 있는 탓이다.

“아파?”

재차 묻는 목소리가 정말로 혼이 빠진 것처럼 들렸다. 윤오가 고개를 끄덕였고, 신조는 천천히 허리를 물렸다.

발정기 때와 분명 달랐다. 범신조가 자신의 두툼한 혓바닥으로 입구를 핥아 주었지만 젖는 양이 확연히 부족했다. 허리를 물리자 그의 자지를 따라 내벽이 딸려 나갔다. 추락하는 것처럼 절로 오금이 덜덜 떨려 윤오는 이를 꽉 깨물고 턱을 쳐들었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간지럽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시트에 정수리를 문질렀다.

“흐으, 흐. 흐읏.”

신열에 달뜬 것처럼 헛소리마저 튀어나올 것 같았다. 범신조가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그러나 쓸어 올려도 흘러내려 눈을 가리는 것들 때문에 한층 더 육욕적으로 보이기만 했다.

“괜찮아.”

믿음이 가지 않는 달램이었다. 신조가 핏줄이 한껏 융기한 손으로 자신의 것을 쓸었다.

“두 번 빼고 왔는데도 부족하다, 시팔.”

그러곤 해사하게 웃었다. 그가 하는 언행과 도통 어울리지 않는 미소였다. 윤오는 느리게 눈을 꿈뻑였다. 두 번 빼고 왔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이해를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신조는 대신 윤오를 뒤집었다. 때론 정상위보다 짐승 같은 자세가 삽입에 더 용이하곤 했다. 베개를 당겨 윤오의 배 아래에 포개고는 불쑥 솟은 둔부를 쥐고 한껏 벌렸다. 빨갛게 충혈되어서 움찔거리는 입구가 가련할 수준이었다. 그러나 동정심보다는 그 가련함을 한껏 훼손하고 싶다는 저열한 욕구만 치솟았다.

신조는 고개를 숙여 느리게 침을 뱉었다. 그것으로 자신의 것을 문지르는 손길이 아연할 정도로 상스러웠다. 윤오가 보지 못하여 다행일 정도였다.

“젖게 해 줄까?”

습한 목소리가 윤오의 귓가에 가닿았다. 윤오는 그 의미도 모르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사, 살살… 너무 깊게 넣지 마….”

돌아온 말은 손톱깎이로 잘라낸 것처럼 끝이 짧았다. 두 사람 모두 개의치 않았다.

“젖게 해 줄게.”

대신 신조는 자신의 체향을 한껏 풀었다.

윤오의 온몸에 일제히 소름이 돋았다. 목덜미에 바짝 선 솜털을 보고 범신조는 기막히단 양 웃었다. 어리긴 어리다. 하기는 한 번도 어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짙은 체향에 윤오가 바르작대기 시작했다. 절로 입이 턱 벌어지고 동공이 확장되었다. 옆구리, 등줄기, 목덜미와 발바닥같이 여린 부분이 마구잡이로 찔리고 간지럽혀지는 것만 같았다. 윤오는 저도 모르게 앞으로 기었다. 그 몸부림이 얼마나 미비한지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범신조는 허리를 숙여 윤오를 꽉 누르고 목덜미에 얼굴을 박았다. 짐승처럼 코를 문지르고 혓바닥을 빼내 핥아 올렸다. 덩달아 윤오의 체향이 풀어졌다. 어떻게 하면 체향을 열고 닫을 수 있는지도 모르는 어리숙한 짝이었다.

“피, 피 냄새….”

역시 감이 좋네. 범신조는 윤오의 열띤 목소리에 혀를 찼다. 아무리 숨겨도 그 끝에는 비린내가 난다. 그의 체향이 바닥에 깔고 있는 것은 관목 아래 젖은 흙이 아니라 피비린내였다. 쇳덩이 같은 냄새.

반면 김윤오에게서는 죽순 냄새와 박하사탕 향이 섞여 났다. 피비린내에 갖다 대기엔 죽순이나 박하사탕이나 너무 무르고 약했다.

“아냐. 다시 맡아 봐.”

범신조는 결코 선인이라 할 수 없다. 그는 악당에 더 가까웠다. 달콤한 목소리로 눙치고 체향을 더 지독하게 풀어냈다. 그 밀도 높은 압박에 윤오의 뒤가 질척하게 젖기 시작했다.

면역력 없는 하룻강아지다. 갑자기 범신조라는 존재의 체향에 온몸이 절여지면 버티기 힘들 건 당연했다. 그래서 신조는 강제로 발정기가 이끌어지기 직전에 멈췄다. 그 정도여도 충분했다.

개미처럼 바들거리는 윤오의 눈동자가 텅 비어 있었다. 입가로는 침이 흘러 젖었다. 신조는 윤오의 윗입술을 질겅 씹고는 손가락으로 아래 구멍을 헤집었다. 세 손가락이 빠듯하게 들어가긴 하나 적어도 뻣뻣하진 않았다. 적당히 젖어선 적당히 떨고 있었다.

“역시 마실 걸 그랬지?”

악인은 동정하는 대신 위선을 꺼내 보였다. 윤오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 시선 끝을 쫓으니 분명 풀려 있던 동공이 다시 돌아와 있었다. 난처함에 빨갛게 젖은 얼굴까지.

회복이 빠르다. 연인은 언제나 그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그런 식으로 제가 간신히 쫓아왔다 싶으면 다시 저 앞으로 훌쩍 날아올랐다. 그 사실에 신조는 유치한 분노에 휩싸였다. 그는 배꼽까지 꺼덕이는 것을 쥐고 윤오의 뒤에 느릿하게 삽입했다. 윤오가 움찔하고 떨었다.

발정기 내내 며칠간 이어져 있던 것이 무색하도록 안은 조붓했다. 부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신조는 윤오의 긴 등선을 지그시 더듬어 꼬리뼈 바로 위를 눌렀다. 허리가 베개 위로 바짝 붙으며 윤오의 것이 찔끔 정액을 지렸다.

안까지 빠듯하게 넣다가 막혔다. 신조의 것은 여전히 일부가 바깥에서 차게 식고 있었다.

“하아….”

누가 누구의 발정기를 강제로 이끌어낸다고. 도리어 지나치게 흥분한 건 범신조였다. 그는 이성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어쩌면 여기서 멈출 수도 있다. 윤오에게 교훈을 주는 건 이 정도로 충분할 수 있겠지. 머릿속에서 본성과 이성이 치열하게 사투했다. 그 와중에도 신조의 허리는 잘게 움직였다.

“하우… 흐….”

지독하게 느리고 부드러운 움직임에 윤오가 몸을 뒤챘다. 해무가 낀 것처럼 흐렸던 발정기의 기억들이 편린이 되어 떠올랐다.

그때는 부드러움이라곤 전혀 없었다. 내일이 세상의 끝인 것처럼 몸을 섞고, 서로를 산산이 해체하고 파헤치기 위한 전쟁 같은 섹스였다. 이렇게 다정하니 도리어 견디기가 힘들었다.

차라리 아무 생각도 못 하게 처박으면 나았을 것 같다. 힘들어서 우는 것보다 더 하고 싶어서, 욕심이 나서 나는 눈물이 훨씬 괴롭고 수치스러웠다. 윤오가 축축하게 젖은 눈으로 돌아봤다.

“왜.”

자신의 골반을 더듬는 신조의 손을 잡고 매섭게 노려봤다.

“왜 제대로 안 해요?”

깊으니 살살 해 달라던 어리광쟁이는 어디로 갔나. 범신조는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 윤오에게 놀아나는 것만 같았다. 이마에 핏대가 서고 목빗근은 발기한 성기처럼 올라붙었다.

“제대로… 해요.”

안에 들어찬 것 때문에 숨을 쉴 때마다 소스라쳤다. 호흡할 때마다 들썩거리는 뱃속에 움직이지 않고 박혀 있는 것이 너무 선명하게 느껴졌다. 내 몸 안에 저 사람이 들어가 있다는 정신적 쾌감이 회초리질 하듯 맨정신을 후려쳤다.

윤오의 눈가가 경련하는 것을 신조가 빤히 응시했다. 그러더니 손을 아래로 감아 배를 감싸 안으며 뒤로 앉았다.

“아아!”

졸지에 그의 위로 올라오게 된 윤오가 신음을 터뜨렸다. 배가 눌려 자극이 극심해졌다. 사정할 뻔했고, 사정하지 못했다. 덕분에 뒤만 심하게 조여졌다.

이를 깨물고 부들부들 떠는 중에 윤오를 안은 범신조가 뒤에서부터 어깨를 깨물었다. 단단한 이가 파고들 때마다 신조의 허벅지를 짚고 겨우 버티고 있는 윤오의 다리가 떨렸다.

“제대로 하라며.”

범신조가 낮게 신음을 흘리며 희롱했다.

“네가 제대로 하게 해줘야지.”

이어 손을 내려선 안까지 채 들어가지 못한 뿌리 부분을 더듬더듬 만졌다. 그러곤 아예 손톱으로 윤오의 입구를 긁었다.

“…아하윽!”

윤오의 무릎이 풀리며 깊이, 뿌리까지 안으로 들어왔다. 내내 막혀 있던 앞이 억지로 벌어져 더 깊숙이 들어가자 윤오는 더는 몸을 웅크릴 수도 펼 수도 없었다. 범신조 역시 쾌감이 대단해서 잠시간 눈앞이 머는 것만 같았다. 쥐고 있던 윤오의 골반을 으스러질 것처럼 움켜쥐었다가 다급하게 윤오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김윤오.”

신조가 중얼거렸다.

“다치게는 하지 않아….”

그러나 아플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그는 이미 충분히 충고했다. 몇 번이나 말리기도 했다. 윤오의 선택이었다.

윤오가 간과한 건 그가 성인(聖人)도 아니고 신선도 아니란 사실이었다. 한때는 신선에 가까울 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그를 추락시킨 건 다름 아닌 그의 연인이었다. 더는 거칠 것도 망설일 것도 없었다. 한없이 비천해지길 선택한 이에게 대체 뭘 바라는가.

“이건… 흐욱, 너무 깊…은 것 같아요….”

이 정도까지 들어올 줄 몰랐다. 발정기 때야 몸이 풀려 있기도 하고 훨씬 더 많이 젖었었다. 게다가 애초에 제정신도 아니었고. 그런데 지금은….

술을 마셨어야 했다. 윤오가 늦은 후회를 했다. 그의 시선이 협탁으로 향했다. 흘끔거리는 그 눈빛을 눈치챈 신조가 손을 뻗었다.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덩달아 깊이 박힌 자지의 방향이 바뀌었다. 윤오의 것은 맥없이 사정하고 말았다.

푸르르 떠는 내벽에 신조가 욕설을 뇌까렸다. 타이밍이 좋지 못했다. 손에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컵이 부서졌다. 그는 대강 손을 털어 유리 조각을 떼어내곤 아예 병째 들었다.

“후, 아….”

술병 입구를 입에 물었다가 윤오의 턱을 돌렸다. 윤오는 넘어오는 액체를 달갑게 마셨다. 마시자마자 목이 타들어 갈 것 같았다. 방금까진 갈증이 났는데 오히려 마시니 더 갈증이 났다.

“이제 안 돼.”

범신조가 술병을 침대 옆에 함부로 내려놨다. 다행히도 넘어지지 않아 흐르지는 않았다. 더 달라는 양 쫓아오는 입술에는 술 대신 자신의 혀를 물려주고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몸이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붙여져 열기가 마구 뒤섞였다. 체향 역시 마찬가지였다. 홧홧한 술 냄새, 비에 젖은 흙냄새와 피비린내, 박하사탕과 죽순 내음…. 바깥에서 정사를 하는 것만 같았다.

“흐으, 으, 아. 아, 아앗. 아!”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윤오가 달뜬 신음을 흘렸다. 손톱으로 범신조의 허벅지를 긁어댄 덕에 결 좋은 피부에 흠집이 났다. 범신조가 윤오의 손을 잡아챘다. 양손을 각각 잡아 뒤로 당기며 몸을 앞으로 밀었다.

침대에 무릎만 겨우 닿고 팔은 뒤로 쭉 당겨진 채 박히는 자세는 위태로워서 윤오의 몸을 긴장시켰고, 그 덕에 이어진 부분은 더욱 끈끈하게 엉겨 붙었다.

“좀… 그만 조여….”

정을 박듯 눌러 찍던 그가 거친 숨소리를 내며 뇌까렸다. 더운 숨이 윤오의 목덜미에 고였다. 범신조는 윤오의 귀 뒤, 엄지로 꾹 누른 듯 들어간 부분을 탐욕스럽게 보다가 혀를 내밀어 핥았다. 솟은 땀 때문에 짭조름하다. 불쾌함은커녕 죽순처럼 향긋한 체향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윤오에게서 나는 체향, 윤오의 땀, 타액, 모든 것이 마약처럼 지독했다.

“좋아…? 하… 김윤오… 좋아?”

연신 물었다. 윤오가 침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이 축축하게 부풀었다.

“흐윽, 응. 아, 좋, 좋아…. 아!”

한번 뚫고 들어간 안에서 빠져나올 생각이 없는 귀두가 연신 배꼽 윗부분을 때렸다. 윤오가 팔을 버르적거리자 신조가 놓아주었다. 짚었다고 하기에도 무색하게 윤오의 상체가 앞으로 한껏 기울었다. 다시 엎드려진 채 한쪽 팔은 겨우겨우 침대에 괴고 한쪽 손으로는 배를 더듬었다.

“아! 아! 아아, 아!”

짧게 나갔다가 깊게 들어올 때마다 요의가 치솟았다. 윤오는 뺨을 아예 이불에 파묻고는 손을 뒤로 뻗어 신조의 허벅지를 밀었다. 미동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가 윤오의 사타구니 안쪽으로 손을 뻗어 장골을 누르며 다리를 더욱 벌렸다. 뿌리까지 넣었으면서도 더 욕심을 내는 꼴이 숫제 무섭기까지 했다.

“밀지 마.”

협박성 짙은 목소리가 핏방울처럼 떨어졌다.

“밀어내지 마.”

범신조의 거웃이 입구를 간지럽혔다. 그럴 때마다 윤오의 요의는 한층 더 강렬해졌다. 윤오가 앞으로 기었다. 밀어내지 말라고 하자마자 멀어지려는 모습에 범신조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팔을 덥석 잡아끌자 윤오가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 가려는 게 아니라….”

“좋다며, 윤오야. 내 자지… 좋다며.”

“하으, 그게 아니라….”

소변이 마렵다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하나. 윤오는 남들도 다 이런 식으로 섹스를 하는지 궁금했다. 믿을 수 없었다. 다들 이렇게 사냥당하는 기분을 느낀다고? 이렇게 난잡하게 몸을 섞는다고? 사정감뿐만 아니라 요의까지 느끼는 이런….

그 때, 윤오의 안에 아예 뿌리를 내리려는 것처럼 박혀 있던 것이 쑥 뽑혔다. 윤오의 등이 한껏 둥글게 굽으며 하으으, 하는 신음을 토해냈다. 몸이 돌려진 것도 순식간이었다. 범신조는 윤오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울지는 않은 모양이다. 다만 땀을 흘렸고 타액도 흘렸다. 그는 펄떡거리는 맥을 확인하듯 목을 가볍게 쥐었다.

“화장실….”

윤오의 부푼 입술이 뻐끔댔다.

“가고 싶어….”

손톱깎이로 자른 양 짧게 잘린 말끝. 범신조는 괘념치 않았다. 아니, 지금 그는 모든 인습과 사회 통념조차 개의치 않을 것 같았다. 눈에서는 번들거리는 욕구가 흐르고, 온몸의 근육과 혈관은 보통 사람의 정상 범위보다 한참을 웃돌았다.

“나….”

나 화장실 다녀오겠다고, 말하려던 윤오의 입술이 이내 머리를 쓸어넘기며 악당처럼 웃는 범신조의 모습에 꾹 다물렸다.

“좋아.”

신조의 입술에서 나오는 ‘좋아.’와 윤오의 입술에서 나오는 ‘좋아.’는 분명 같은 언어인데도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내가 데려다줄게.”

그 이유는 범신조의 호감에는 흑심이 품어져 있기 때문일 거다.

“아, 아냐!”

거부해도 때는 늦었다. 신조는 다시 윤오를 뒤집어선 안아 올렸다. 우악스러운 힘이 이번에도 그 효과를 톡톡히 발휘했다. 윤오의 등과 신조의 가슴이 맞닿았고, 서로 흘린 땀 때문에 미끈댔다. 그조차 소름 끼치게 성감을 돋우었다.

“내가 다 해 줄게….”

다정하게 들려야만 하는 목소리에 윤오는 떨었다. 설마 하는 순간에 윤오의 아래로 신조의 것 끄트머리가 닿았다. 두툼하고 무겁고 뜨거운 것이 제대로 들어오지 못하고 미끄덩하며 윤오의 회음과 고환 가운데를 긁었다.

“아하으!”

그 선득한 쾌감에 윤오가 치를 떨었다. 신조는 말랑거리는 윤오의 귀를 입술로 물며 재차 삽입을 시도했다. 몇 번이나 미끄러졌고, 그럴 때마다 윤오는 입을 벌린 채 벌벌 떨었다. 요의는 오히려 더 강해졌다.

“어, 얼른!”

여기서 실수하는 꼴을 보일 수 없어서 윤오가 다급하게 외쳤다.

“얼른… 아!”

재촉하기 무섭게 범신조가 자신의 것을 푹 눌렀다. 이번에는 제대로 들어왔다. 벌어져 있던 곳이 제집인 양 무단으로 점거하고는 그것으로도 부족해 들쑤시며 걸었다. 걸음걸음마다 자극이 지나쳐 윤오는 허벅지에 이어 그의 팔도 박박 긁어놨다.

“다시는, 읏! 다시는… 너랑 안… 해… 아아!”

“하… 다시는?”

범신조가 허리를 추켜올리며 되물었다.

“정말 다시는?”

윤오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보이지 않는 뒤에서 그가 웃으며 중얼거린다.

“그럼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 후, 원하는 만큼 해야겠는데….”

궤변이었다. 울컥한 윤오는 자신의 어깨를 가로질러 상체를 잡고 있는 팔을 뜯듯이 쥐다가 고개를 숙여 덥석 깨물었다. 그 입질이 제법 사납다. 신조는 눈가를 찡그리면서도 아래를 추켜올렸다. 고통에 움찔거리는 바람에 도리어 자극받는 건 윤오뿐이다.

몸을 잇는다는 게 이따위다. 상대의 반응과 나의 반응을 불공평하게 공유하는 것이다.

“윤오야, 이제 화장실은 안 급해?”

이런 순간 그 어느 때보다 다정하게 지껄이는 사내가 저질스러웠다. 윤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입으로는 여전히 신조의 팔을 물고 있었다. 욕실의 불빛에 눈이 부셨다. 게다가 눈을 뜨면 바로 앞에 거울이 있다. 제 꼴이 어떤지는 전혀 궁금하지 않다.

신조는 윤오에게 팔을 물려 준 채 제 할 일을 했다. 어깨만 감고 있는 게 아니었다. 배를 가로지르며 허리를 감고 있는 팔도 있었다. 다리는 어정쩡하게 내려놓고 배를 지그시 누르며 추켜올리자 윤오가 눈을 홉떴다.

“으읍…!”

막힌 잇새로 질식하는 것 같은 숨소리가 터졌다. 발끝이 벌벌 떨렸다. 앞으로 고꾸라질 것만 같은 몸을 잡고 있는 건 신조였다. 두 팔로 제게 얽어맨 채 뒤에서 앞으로, 아래에서 위로 찍어 올렸다. 윤오의 안은 한껏 좁아지고, 끝끝내 참고 있던 요의가 한계까지 치솟았다.

“아, 안 돼…!”

윤오의 몸이 수치심으로 빨갛게 물들었다. 범신조는 터질 것 같은 흥분에 웃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흘끗 보니 일말의 가증도 떨지 못해서 미친놈이 따로 없었다. 또 한 번 자조했다. 그러면서도 윤오의 배를 더 지그시 눌렀다. 윤오의 눈이 가볍게 떨리며 공막 너머로 넘어갈 듯 말 듯했다.

“다 보여 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 속삭이는 소리는 저주가 따로 없었다.

“나한테 다 보여 줘… 김윤오.”

윤오야, 하는 소리에 비량아, 하는 소리가 겹쳤다. 윤오는 어쩐지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목에 덩어리가 치고 올라오는 양 지독하게 매웠고 눈시울은 홧홧했다. 그리고 범신조가 안에 넣은 것을 부풀렸다.

“아, 아으, 아….”

이에 힘이 빠지고 백치가 된 것처럼 입이 벌어졌다. 신조는 미간을 찌푸렸다. 비겁한 거짓말로 들릴 걸 알지만, 이번 것은 정말로 그가 의도한 노팅이 아니었다. 곤란한 상황이었다. 지금 빼면 윤오가 다칠 게 분명했고 계속 넣고 있자니… 시팔, 여간 쓰레기 같은 짓이 아닌 거다.

“미안.”

범신조가 정말로 난처하게 사과를 했지만 들릴 리 만무했다. 윤오는 입술을 벙긋댔고, 끝끝내 참았던 요의가 결국 한계를 넘어버렸다.

쪼르륵 소리와 함께 소변이 나왔다. 소변만 나온 것이 아니었다. 뒤이어 정액도 소변도 아닌 것까지 터졌다. 윤오는 수치심에 엉엉 울었고, 신조는 위도 아래도 잘 운다고 지껄이려다가 참았다.

“미안하다. 짐승 새끼라서.”

정말로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신조는 능숙한 금인이 아니었다. 그는 평생 한 명의 연인과만 이 짓을 해 왔고, 그 횟수는 많다고 할 수 없었다…. 풋내기와 다름없는 것이다.

노팅, 이 좆같은 것. 내가 짐승이라는 걸 재차 확인받는 짓을 하면서 신조 역시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엄청난 쾌감과 배덕감과 수치심, 죄악감이 연달아 그의 뺨을 치는 것 같았다.

노팅도 긴데 사정하는 시간마저 길었다. 신조는 팔을 뻗어 옆 타일을 후려쳤다. 쾅 하는 굉음을 윤오는 제 귀에서 나는 소리로 착각했다. 엄청난 쾌감에 머리에 징이 박히는 것처럼 연신 쾅, 쾅 울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심장 소리일지도 모른다. 어떤 것이든… 윤오는 끔찍하게 괴롭고 황홀하게 좋았다….

“미안해.”

범신조가 사과한다. 윤오는 메아리처럼 연잇는 사과에 미약하게 고개를 젓고 꺼져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괜찮아요.”

너무 쉬운 게 아닐까 할 정도로 쉽게 받아주게 되었다. 사과하는 게 도통 안 어울리고, 평생 한 번 할 것 같지도 않은 남자가 뱉는 사과의 힘은 그렇게 컸다.

이제는 발기가 죽은 제 좆에서 정액까지 나오고 있었다. 질금질금 나오는 게 정말 바닥까지 긁어내 보이는 꼴이었다. 망가진 것 같았고, 그래서 좋았다.

자기 피학적인 관계 속에서 윤오는 비로소 숨을 쉴 수 있는 것만 같았다. 이곳에는 사지에 족쇄처럼 달린 가족에 대한 책임감, 죄책감, 그들을 원망하는 자신에 대한 혐오… 그런 게 아무것도 없었다.

* * *

윤오가 허겁지겁 손을 뻗어 범신조의 뺨을 감싸고 당겼다. 그 역시 입을 벌리며 윤오를 맞이했다. 혀가 섞이고 윤오의 한쪽 다리가 재차 추켜 올려졌다. 한쪽은 신조의 허리에 감겨 그에게 매달린 채였고, 다른 한쪽 다리는 바닥을 짚고 있으나 사실상 범신조의 힘에 거의 들려 있는 꼴이었다. 양 둔부 아래를 단단히 움켜쥐고 몸 자체를 들었다 놓으며 박는 힘이 대단했다.

수치와 지독한 쾌감이 공존했던 첫 정사가 끝난 후 바로 샤워실로 옮겨져 두 번째로 이어진 정사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도리어 지금은 눈물이 나지 않았고, 드디어 합이 맞는단 느낌이었다.

윤오는 범신조의 목에 팔을 감고 타일에서 등을 뗐다. 그가 무릎을 조금 굽혀 아래부터 찍어 올리는 덕에 눈높이가 비등하거나 자신이 조금 더 높았다. 이런 표현이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사내 범신조는 윤오를 마치 숭앙하는 것처럼 보고 있었다.

그의 손이 뒤로 들어와 떨어진 등이 타일에 더는 쓸리지 않게 감쌌다. 동시에 몸을 돌려 이번엔 자신이 벽에 기대자 윤오가 신조를 덮치는 모양새가 되었다. 자세가 바뀌며 다리가 교차되었다. 허벅지 안쪽과 바깥쪽이 문질러지는 감촉에 윤오는 고개를 푹 숙이며 가만히 떨었다.

“좋아…?”

매사 무심하고 권태로워 보였던 남자는 생각보다 훨씬 더 집요했다. 아랫입술을 물고 있던 윤오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하고 제 손가락을 밀어 넣어 대신 물게끔 했다.

엄지 끝을 물고 있는 사이 거칠게 박던 신조가 좀 더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서 다 쏟아내 나올 것이라곤 이제 아무것도 없을 텐데도, 안쪽이 느리게 딸려 나갈 때마다 골수가 뽑히는 것만 같은 쾌감에 몸이 저렸다. 윤오는 자신이 느리고 부드럽게 하는 데 더 약하단 걸 두 번만의 섹스에서 깨달았다.

아니, 두 번이라고 칭할 수 있나….

“혀….”

고개를 든 윤오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백치처럼 입을 벌렸다.

윤오는 맹하게 생긴 얼굴이 아니었다. 굳이 동물과 비교하자면 학을 떠올리게 하는 단정하고 잘생긴 청년이었다. 그런 청년이 이처럼 무너지니 보기에도 심각하게 외설적이었다. 신조는 입술을 벙긋 벌리고 기다리는 윤오에게 다가가며 고개를 틀었다. 입술을 포개고 질척이게 혀를 섞었다. 동시에 윤오의 둔부를 잡고 몸쪽으로 바투 당겼다.

윤오의 양 다리가 범신조의 다리 바깥으로 감싸듯 놓여지고 어느덧 거의 들린 모양새가 되었다. 보통 사람보다 훨씬 센 금인의 힘은 윤오를 들어서 움직이지 못하게 해 놓고 박는데 최적화되어 있었다.

“흐읏, 으! 으읏!”

절정에이었다. 노팅으로 한 번 제대로 벌려졌던 안쪽은 여전히 얼얼했다. 하도 안쪽에 사정한 탓에 도리어 범신조가 굽어진 곳 너머까지 찌를 때야만 안에 고인 게 흐를 정도였다.

윤오는 신조의 귀를 씹었다. 팔로 목덜미를 감고 등을 긁으며 귀를 씹고,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어깨와 목덜미에도 잇자국을 내놓았다. 그래도 불공평했다. 둔부와 골반에 멍이 들 건 자명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엉덩이를 한껏 눌러 모았다가 다시 펴는 억센 손길에 턱이 덜덜 떨렸다. 단단한 살덩이가 안을 후벼팔 때마다 추락하는 것만 같았다.

“흐으으으으…!”

진저리친 윤오가 신조의 배에 제 것을 문지르며 사정했다. 양이 줄고 힘이 빠졌음에도 붙어 있는 탓인지 상대의 어깨까지 튀었다. 어깨에 튄 게 다시 윤오의 몸에 옮겨 묻었고 마구 비벼졌다.

윤오의 절정이 끝나지 않게 질질 끌고 가는 건 범신조였다. 그는 이를 악물고 윤오를 거의 몸째로 들썩이며 길게 뽑았다가 깊게 삽입했다. 쾅, 쾅… 별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윤오의 눈앞이 희게 바랬다.

이제는 윤오에게 절정이란 앞으로 가는 사정이 아니었다. 끝나지 않고 집요하게 끌려 이어진 쾌감이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휘몰아쳤다. 안쪽이 경련하기 시작했다. 윤오는 추위에 떠는 사람처럼 발작같이 떨었고, 범신조는 제 것을 집요하게 씹어대는 안쪽에 눈을 질끈 감았다.

“크… 읏….”

이를 갈며 내뱉은 신음과 함께 그는 윤오의 안에 깊이 넣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울컥울컥 나오는 양은 분명 평범하다고 할 수 없었다. 금인의 사정량은 보통 남성보다 많고 치인의 사정량은 보통 남성보다 적다고 했다. 막연히 들은 사실과 직접 겪는 건 전혀 달랐다. 배가 불룩하게 차오를 것만 같았다.

이윽고 범신조가 천천히 윤오를 내려놓았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의 어깨를 잡고 버텨야 했다.

“흐, 흐으… 흐으.”

윤오가 여운에 떨었다. 이가 딱딱 부딪쳤다. 고개를 드니 신조의 눈과 마주쳤다. 처연한 윤오의 눈빛과는 달리 신조의 눈은 여전히 끈적거리며 불타고 있었다. 불을 붙인 타르 같았다.

범신조가 느리게 제 것을 빼냈다. 질척거리고 뜨거운 것이 윤오의 허벅지 안쪽을 건드리며 빠져나갔다. 부르르 떠는 윤오의 모습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씹어 먹듯이 보던 그는 팔꿈치로 옆에 있던 레버를 올려 물을 틀었다.

천장에서부터 물이 쏟아졌다. 윤오는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것을 망연히 쳐다보았다.

갑자기 왜… 말할 수 없이 쓸쓸하고 서글프지.

흐린 눈을 깜빡일 때마다 바닥이 욕실의 검은 타일이 아니라 흙바닥으로 보였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왜….

멍하니 중얼거리는 윤오의 양 볼을 커다란 손이 감쌌다. 고개가 들렸다. 범신조는 윤오의 입술을 혀를 쓰지 않고 탐했다. 입술로만 입술을 포개 안으며 더듬길 반복했다. 그 사랑스러운 입맞춤에 윤오의 씁쓸함은 쓸려나갔다. 따뜻한 온수가 두 사람을 완전히 감쌌다.

“한 번 더?”

입술을 맞댄 채 묻는 소리에 오스스 몸을 떨었다.

“더 할 수 있겠어?”

“…더 하고 싶으세요?”

“네가 다시는 허락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

싫다고 하면 묶어서라도 할 거냐고 우스갯소리를 하려는데 기진맥진해서 그런지 그 소리는 차마 나오지 않았다. 윤오가 헤식은 웃음을 흘렸다.

“여기서 그냥 씻고 나가면 다음에 또 할 수 있겠죠. 사흘 후쯤…?”

“이틀 후는 안 되고?”

“양심이 없으시네.”

“넌 젊잖아.”

“젊은 저는 지쳤고 그쪽은 괜찮아 보이는데요.”

“그쪽 말고 신조.”

범신조가 어울리지 않게 어리광을 부리듯 채근했다.

“이름으로 불러 줘.”

코끝과 코끝이 맞닿았다. 이마와 이마가 비벼졌다. 흐르는 물줄기에 윤오의 몸을 뒤덮고 있던 땀을 비롯한 온갖 체액이 흘러나갔다. 그리고 신조의 체향과 윤오의 체향이 물에 스며들며 한데 비벼졌다.

훈기가 욕실을 채우고, 그들의 향이 더할 나위 없이 독특하게 어우러졌다. 윤오는 피부에 들러붙는 그 안정적인 체향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말로는 조르고 있지만 사내도 더는 할 생각이 없다는 게 오직 이 체향만으로도 느껴졌다. 신기한 노릇이었다. 대화가 없이도 통할 수 있다니….

“싫어요….”

윤오가 웃음을 섞어 대답했다.

“이름은 아직 못 부르겠어요.”

그 말에 범신조는 더는 조르지 않았다. 대신 윤오의 어깨를 짚었다. 그 손이 천천히 등으로, 허리로, 엉덩이와 허벅지 사이로 닿았다. 둔부 뒤에서부터 허벅지 안쪽 샅까지 감싼 손이 윤오의 입구를 더듬다가 꾹 눌렀다. 안에 고였던 것이 느리게 흘러나왔다. 뒤늦게 겁이 났다.

“치인은 남자도 아이를 가질 수 있다면서요….”

“그게 이제야 생각났어?”

“코, 콘돔 해야 했던 거 아니에요?”

그 말에 한치의 틈도 없이 바짝 붙은 신조가 속삭였다.

“괜찮아.”

“…….”

“네가 정말로 원하지 않는다면 아이는 생기지 않아.”

“…….”

“정말이야. 약속해, 약속할 수 있어.”

불안해한 적도 없는데 그는 병적으로 중얼거렸다. 약속한다고, 겁먹지 말라고. 약속한다고….

그게 마음대로 되는 건가, 금인과 치인은 뭔가 다른가 하다가도, 그가 저렇게까지 다짐하니 정말로 그 말처럼 될 것 같아서 윤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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