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1)
모친이 택시를 타고 떠나는 모습까지 본 뒤 윤오는 지친 얼굴로 돌아섰다. 카페 외벽을 따라 놓인 벤치에 앉아, 오돌도돌한 벽에 머리를 기대고 멍하니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길다온에게 연락했다. 햇살이 따뜻한데도 속이 선득했다. 운 것도 아닌데 진이 쏙 빠지게 통곡이라도 한 것처럼 힘이 없었다.
어쨌든 오늘 모친을 만나며 하나는 확실해졌다. 제가 생각보다 훨씬 더 범신조를 의지하고 있고 그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단 것.
언제 이렇게 되었을까.
심지어 이렇게 되면 범신조는 윤오의 첫사랑이 되는 셈이다. 사랑이라는 거창한 단어까지 붙이긴 아직 너무 갔다 싶긴 하지만, 어쨌든 성애를 포함한 마음으로 좋아한 건 그가 처음이라는 뜻이었다. 윤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 탓에 드러난 목덜미가 발긋하다.
문득 바람이 슬며시 그 위를 간지럽혔다. 고개를 드니 꽃비가 내리고 있었다. 맞아도 젖지 않는데 보다 보면 까닭 없이 마음이 축축해지는 꽃비를 맞으며 윤오는 입술의 거스러미를 질겅질겅 뜯었다. 불현듯 깨달은 마음이 그저 달갑기만 하면 좋을 텐데…. 범신조의 고백이야 이미 들은 만큼 이게 그저 속없이 달가운 일이면 좋으련만 윤오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못내 괴롭힌 끝에 입술이 부풀어 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윤오는 허공을 멍하니 응시했다. 남들보다 느린 시간을 걷는 양 꽃잎이 느긋하게 떨어져 내린다.
호흡이 점점 느려지려는 찰나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김윤오 씨.”
길다온이 차에서 내려 다가왔다. 윤오는 역광 때문에 그림자를 잔뜩 뒤집어쓴 남자를 멍하게 쳐다봤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생각보다 일찍 끝나셨네요!”
“아… 뭐 오랜만에 본 것도 아니고. 큰 볼일이 있던 것도 아니니까요.”
윤오가 웅얼거렸다. 비록 어색한 침묵 끝에 할머니가 건강이 좀 안 좋으시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조차도 별일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길다온이 손을 뻗었다. 기운이 없어서 맥없이 일어나는 걸 보고 현기증이라도 느끼는 줄 안 모양이다. 윤오는 무심코 팔에 닿은 길다온의 손을 거세게 쳐 버렸다. 의식하고 한 건 결코 아니었다.
“아, 아….”
“아이고.”
“죄송해요.”
“아닙니다. 제가 놀라게 했죠?”
윤오는 고개를 저었다. 뒤에서 갑자기 만진 것도 아니고 놀랄 것 하나 없었다. 그냥 갑자기 섬뜩했을 뿐이다.
길다온 때문이 아니라 요즘 종종 그랬다. 윤오는 마치 범신조에게 거세게 거절당하고 환멸받은 것처럼 때때로 괴로워했고 자주 외로워했다. 이게 본인이 이끌어낸 감정이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그림자처럼 짙어진 비량아의 기억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서 미칠 지경이었다. 오늘 순간적으로 모친 앞에서 불안정한 모습이 나온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윤오의 꿈은 다른 사람들의 것과는 달랐다. 지나치게 생생하고 고통스러웠다. 그리하여 윤오는 꿈을 꾸며 서서히 자각하고 있었다. 나는 기억을 꾸고 있는 걸지도 몰라. 어쩌면 이 모든 건 다 내가 경험한….
윤오가 제 마음을 깨달은 걸 순수하게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잔인하고 다정해서 그의 마음을 간단히 찢기도, 설레게도 하는, 범신조와 같은 얼굴, 같은 이름, 같은 목소리인 꿈속의 사내. 윤오가 부디 이 모든 게 그저 꿈이길 바랐던 가장 큰 이유….
“김윤오 씨, 안색이 안 좋습니다. 괜찮으세요? 병원이라도 들를까요? 사장님께서 김윤오 씨 건강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아니에요!”
길다온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빠져나온 윤오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원래 범신조가 조금 예민하잖아요. 과, 과하게. 괜찮아요. 그냥 아이스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셨나 봐요. 속이 춥네요.”
“정말 괜찮으신 거죠?”
“네. 얼른 가요.”
“알겠습니다….”
여전히 미심쩍은 기색을 보이면서도 길다온이 조수석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김윤오 씨, 아프면 안 돼요.”
“…….”
“김윤오 씨가 아프면 사장님께서 얼마나 슬프시겠어요.”
과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또 아예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범신조는 윤오가 단명이라도 할까 봐 운전도 못 배우게 하는 편집증 같은 게 있었으니까. 윤오가 쓰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게요. 제가 바람 불면 날아가는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봐요.”
“바람 불면 날아갈지는 몰라도 사소한 사고에 죽을까 봐 그런 거죠.”
의외로 단호하고 당혹스러울 만큼 직설적인 말에 윤오가 고개를 올려다봤다. 길다온은 읽기 힘든 여우 눈을 찌푸리며 웃었다.
“사람은 그만큼 약하잖아요. 게다가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 아닙니까.”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인데… 왜 오늘따라 가슴에 쿡쿡 박히는지.
조수석 문이 닫혔다. 윤오는 시트에 몸을 한껏 파묻었다.
* * *
“가는 길에 뭐 사 갈까요?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아, 아뇨…….”
“너무 안 드시면 사장님이 걱정하세요.”
“저 잘 먹어요.”
“에이. 입 짧으시죠? 다 알아요.”
진짜 이 사람은 첫인상과 달랐다. 다소 푼수 같은 말투에 윤오는 헛웃음을 뱉고 말았다. 그리고 조금쯤 편안하게 길다온과의 대화를 이어갔다.
“사람을 잘 챙기시는 것 같아요. 다정하신 성격인가 봐요. 인기 많으시죠?”
“인기는 없습니다. 슬프게도.”
옆모습이라 그런지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조소하는 것처럼 보였다. 윤오는 조심스레 물었다.
“애인 없으세요? 있으실 줄 알았는데….”
“인기 없다니까요. 김윤오 씨, 잔인하시네요.”
역시 방금 느낀 분위기는 기우였는지 장난기 어린 목소리에 윤오는 마음이 편해졌다. 심지어는 그가 오래도록 안 사람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금인과 치인의 세계는 복잡한 것 같지만 사실 아주 단순해요. 숫자처럼요. 저는 그다지 매력적인 금인이 아닙니다. 강하지도 않고 체향이 짙지도 않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욕구가 그다지 강하지 않아요. 욕구는 본능인데 본능이 약한 금인은 재미가 없죠.”
“그런가…? 전 잘 모르겠어요. 일부러 이쪽 세계는 안 보려고 해서 그런 건지 몰라도. 그치만 짝에 대한 욕구는 다르지 않을까요?”
“김윤오 씨에게만 비밀을 알려드릴게요.”
그렇게까지는 필요 없는데. 이번에도 장난인가 싶어서 윤오는 사양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핸들을 돌리며 길다온이 한쪽 입꼬리를 길게 올렸다. 눈꼬리처럼 입꼬리도 날카로웠다.
“저는 짝을 잃었어요. 그래서 짝을 만들지 못해요. 거세당한 거나 마찬가지죠.”
“아… 죄송해요.”
무슨 일인지 몰라도 일단 유감을 표했다. 길다온은 분위기를 가라앉히려고 한 말이 아니라며 재차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덧 집이 코앞이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 특히 사장님은 사랑이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제 오지랖을 좀 봐주세요, 그러니까.”
“네… 네, 괜찮아요.”
“다 왔네요. 들어가서 쉬세요. 필요한 거 있으면 말씀하시고요.”
“아무것도 없어요. 오히려 저 때문에 모처럼 쉴 수 있는 날인데 고생시켜드린 게 아닌가 싶어서 죄송한데요.”
윤오가 조금 허둥지둥하며 안전벨트를 풀었다. 의도치 않게 듣게 된 개인사가 생각보다 무거웠다. 위로든 공감이든 건네기엔 윤오는 너무 서툴렀고, 서툰 자신의 모습이 보고 싶지 않아서 숨기려는 게 오히려 도망치는 꼴처럼 보였다.
그사이에 길다온은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고 있었다. 그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싱긋거리며 윤오에게 충고 아닌 충고를 했다.
“사랑한다고 표현해 주세요. 사장님께서 아주 좋아하실 거예요. 그리고 무엇보다, 할 수 있을 때 말하는 게 좋아요. 때를 놓치거나 때가 어긋나면 좋은 마음에서 한 말도 무기가 될 수 있거든요.”
그 무기는 상대를 찌르기도 하고 자신을 찌르기도 할 거다. 윤오는 꿈속에서 사람을 혐오한다고 씹어 뱉던 신조를 떠올렸다. 훔쳐 듣던 비량아는 뱉지도 않고 뱉을 생각도 없이 속으로 품고만 있던 마음으로도 상처 입었다. 윤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렸다.
정원을 오르는 길에 새로 심은 것들을 확인했다. 이게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일주일은 지나야 알 수 있다니. 기다림만이 답이었다. 조바심을 누르며 기분 탓인지 맥없어 보이는 잎사귀를 만지작거렸다.
“다녀왔어?”
그런 윤오에게 범신조가 다가왔다. 그는 여전히 편한 차림이었다. 그러나 한 번 갈아입었는지 오전과는 옷차림이 달랐다.
거추장스러운 걸 싫어하는 범신조는 정장보다 홈웨어를 선호했다. 그런데도 그가 걸치면 편안한 홈웨어가 당장이라도 외출해도 될 것 같은 룩북으로 바뀌는 것도 참 신기했다.
앞머리를 쓸어넘기던 그가 대뜸 윤오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부푼 흉곽이 윤오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가 가볍게 떨어졌다.
“길다온 냄새가 묻었네.”
“안 묻히려고 했다는데, 묻었어요?”
“괜찮아. 내가 닦아냈어.”
“무슨 얼룩 묻은 것처럼 말하네.”
“얼룩이지.”
타인의 체향은 원래 다 얼룩이다. 그리고 그걸 알면서도 김윤오를 자신의 얼룩으로 온통 뒤덮게 한 범신조가 제일 악질이었다. 스스로도 인정한 신조가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올렸다.
“피곤해 보인다.”
“조금….”
“만남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모양이지.”
“그것도 조금…. 아니, 그런데 어떻게 다 알아요? 도청기라도 붙여 놨어요?”
“멀리 떨어지면 음질도 별로 안 좋은 걸 왜 붙여 놔.”
범신조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벌써 일전에 윤오와 아버지의 대화를 감청한 적도 있는 주제에 낯색도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한다.
“낮잠이라도 좀 잘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가 윤오의 손목을 잡고 정원을 거슬러 올라갔다.
“너 요즘 잠이 부족해 보여.”
그건 다 꿈에서도 나타나는 당신 때문인데. 그 말을 삼킨 윤오가 느적느적 뒤를 쫓았다. 좀 자겠냐는 말을 듣자마자 마수에 걸린 것처럼 피곤이 몰려왔다. 매일매일 점점 더 얇아지는 신경 끈을 겨우 잡고 있는 건 범신조의 과잉보호와 최근 부쩍 늘어난 수면 시간 덕분이었다.
“애늙은이 같아서 걱정했더니 애기가 됐네.”
메인 베드룸이 아닌 다른 곳으로 그를 데려간 범신조가 축축 늘어지는 윤오의 팔 아래로 손을 넣어 안아 올렸다. 윤오가 입술을 벙긋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가장 하고 싶은 말은… 도와달란 말이었다.
“자기 싫어.”
윤오가 중얼거렸다. 이 방의 침구는 호텔의 것처럼 바스락거렸다. 낮잠을 자기에는 딱 좋은 재질이라 자칫하면 바로 잠들 것만 같았다.
“그냥 안 잘래요.”
버둥거리며 일어나려 하다 보니 범신조의 품에 안기는 꼴이 되었다.
“자꾸 꿈을 꾼다고요.”
윤오가 짜증스럽게, 그리고 애타게 말했다. 듣는 범신조의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가 제 어깨에 매달린 윤오를 떼어내더니 손바닥으로 눈을 감게 했다. 그리고 조용히 물었다.
“무슨 꿈을 꾸는데?”
“그쪽이 저 싫어하는 꿈이요.”
나름 용기 내어 한 말에 범신조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한마디로 정리했다.
“개꿈이네.”
“개꿈 맞아요?”
“어. 난 너 사랑해.”
무슨 고백을 이렇게 재미없게 하지. 그러면서도 그 말에 잠이 깨어 윤오가 눈을 꿈뻑였다.
“내가 너 사랑하는 거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런 표정을 지어.”
“…밥 먹었냐는 말투로 하니까요.”
“특별한 순간에만 해야 하나. 특별한 순간에만 널 좋아하는 게 아닌데.”
기운이 빠진 윤오가 뒤로 털썩 누웠다. 그 옆으로 범신조가 한쪽 다리를 올려 비스듬하게 앉았다. 머리를 내려서 그런 건지 아니면 지금의 장난스럽고 가벼운 분위기 탓인지 또래 연인끼리 자존심 싸움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범신조는 애먼 손톱을 보다가 물었다.
“너는?”
순간 윤오는 범신조가 정말로 동갑내기 친구처럼 보였다. 서투른 연애를 하는 것처럼. 그는 닳고 닳았을 테고 진짜 숙맥은 자신인데.
“나는….”
이 순간을 예감하고 길다온이 숨기지 말라고 한 건가.
윤오는 처음으로 짝을 잃어 왔을 지난 금인들을 이해해 보려 했다. 말해도 닿지 않고, 아꼈더니 너무 늦어 닿을 곳도 없는 고백들을 말이다.
“나도… 좋아해요.”
오늘 도망치자는 말을 듣고도 당신 생각이 났다. 이젠 그러고 싶지 않을 정도로 좋아하게 된 것 같았다.
그러나 제 고백은 어쩐지 고백 같지가 않았다. 두려움과 긴장이 가득했고 확신도 없어 보였다. 윤오는 그 이유를 알았다. 이건 도박이었다. 당신은 꿈속의 사내와 다를 거라고, 더 이상 나빠지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절박한 희망을 거는 도박.
그에게 기대어 도저히 지울 수 없는 이 불안감을 떨쳐내고 싶었다. 고작 이 한마디로 모든 게 해결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윤오는 밀려오는 후회를 누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
왜 이렇게 반응이 없지. 혹 거짓말처럼 들렸나 싶어 윤오가 흘끗 시선을 들었다. 그렇게 보고 말았다. 범신조의 표정을.
신조의 눈이 가만히 커졌다가 얼굴 전체로 서서히 기쁨이 퍼졌다. 노골적이고 순수한 환희였다. 그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워지고 눈썹은 지나치게 사랑스러운 것을 볼 때 가슴이 아픈 것처럼 찌푸려져 있었다. 그리하여 윤오에게 그 어떤 후회의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잠 다 깼어요.”
볼품없는 고백에 비해 상상치 못한 반응이라 부끄러워진 윤오가 괜히 말을 돌렸다. 말이 더듬더듬 끊겼다.
“…배고파요.”
“…….”
“저 먼저 나가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니 먼저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윤오가 몸을 홱 돌리는 순간 뒤에서 범신조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같이 가.”
그 목소리가 들은 적 없이 달콤했다. 희열에 가득 차 있었다.
“같이… 가. 혼자 가지 말고.”
얼핏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범신조는 윤오를 데리고 바깥의 선베드로 데려갔다. 모처럼 날이 아주 좋았다. 두 사람을 감싼 분위기도 그만큼 부드러웠다.
“뭐 먹을래? 아예 식사를 할래?”
전에 없이 들뜬 기색으로 범신조가 물었다. 그걸 보고 저도 모르게 웃던 윤오가 다급히 헛기침을 했다.
정신 차리자. 방금 전까지 도박이라고 해놓고, 지금은 가진 모든 것을 배팅할 듯이 굴고 있으니. 조금만 더, 자신의 불안감이 기우에 불과하다는 걸 확인할 때까지만, 조금만 더 정신 차리자.
단단히 마음을 먹고 나니 정말 허기가 졌다. 하루종일 여기저기 마음 쓰느라 식사다운 식사는 못 한 것도 이유였다. 고민하던 윤오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떡볶이 시켜도 돼요?”
생각해 보니까 이곳에서는 배달 음식을 한 번도 시켜 먹은 적이 없었다. 자극적인 게 당겼다. 한번 떠올리니 참을 수가 없었다. 특히 떡볶이라는 게 그랬다. 생각나면 먹어야만 했다.
“허락까지 받을 일이야?”
“보통 부모님은 운전면허 따는 것보다 시켜 먹는 떡볶이를 더 허락 안 해 주거든요.”
“또 나를 부모 취급하네.”
“그런 게 아니라요. 과잉보호하는 경향이 있다곤 생각해요.”
“뭐?”
범신조가 기가 찬 듯 웃고는 윤오의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부드럽게 쓸어 올리는 손길에는 다행히도 욕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체향이 사뭇 달랐다.
몸을 감싸는 체향이 포근해서 저절로 긴장이 풀렸다. 한껏 나긋해진 채로 선베드에 옆으로 누우니 범신조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건넸다.
“시켜 봐.”
“그쪽도 먹을 거예요?”
“어.”
“맵게 시켜도 돼요?”
“달지만 않으면 돼.”
그사이 새로 생겼는지 처음 보는 이름도 많았다. 그중에서 윤오는 친구들과도 종종 먹으러 갔던 체인점 이름을 눌러서 주문을 했다.
핸드폰을 내려놓자마자 범신조가 윤오의 뒤로 오더니 팔을 밀어 넣어 윤오의 몸을 당겨선 제 품에 넣었다. 선베드가 빠듯하게 찼다.
“아버지 사업이요. 그쪽이 손 쓴 거예요?”
“말은 바로 해야지. 손을 쓴 게 아니라 손을 안 쓴 거야.”
밑 빠진 독이었다. 그간은 막아 줬으나 더는 막지 않았을 뿐이다. 흡연 욕구가 당겼다. 범신조가 습관처럼 주머니를 만졌다가 손을 떼는 걸 보고 윤오가 대신 손을 넣었다.
“조심해.”
신조가 심술궂게 웃었다.
“다른 거 만지지 말고. 네가 야외에서 하는 게 좋다면 어쩔 수 없지만.”
“…같은 방향에 수납하지 않으면 되잖아요.”
“내 마음이야.”
유치하게 대꾸한 신조가 윤오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고는 직접 손을 넣어 담뱃갑과 성냥갑을 꺼냈다. 그리고 윤오의 손바닥에 올려주었다.
“안 피어도 돼.”
“피어도 된다고 했는데요.”
“됐어.”
“아니면 내가 피워봐도 돼요?”
“…….”
범신조가 어이없단 표정으로 저를 보았다. 대답이 없기에 담뱃갑을 열었다.
“정말 궁금하면 한 대만 피워봐.”
“…그럼 한 대만.”
결국 범신조가 몸을 조금 일으켜 담배를 가져와 물고 불을 붙였다. 깊게 들이마셔 태운 뒤 윤오의 입술에 물려 주고는 연이어 자신의 것에도 불을 붙였다. 손을 허공에 몇 번 흔드니 순식간에 불은 꺼지고 까맣게 비틀린 재만 남았다.
“왜 성냥을 쓰세요?”
“오래 쓰다보니 손에 익어서. 빨아 봐, 김윤오.”
범신조는 평범한 말도 외설스럽게 들리도록 하는 재주가 있다. 김윤오는 머뭇머뭇 다시 담배를 물었다.
그사이 제법 타들어 간 탓에 빨아들이는 순간 범신조의 가슴팍으로 재가 떨어졌다. 신조는 아무렇지 않게 손등으로 재를 털어내곤 그 역시 필터를 물었다. 갸름하게 뜬 눈으로는 윤오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때?”
윤오는 기침을 삼키며 맛없어요, 하고 대꾸했다. 정말로 맛이 없었다. 왜 피우는지 모르겠으나 일단 문 것을 빼진 않았다.
“이런 걸 왜 피워요?”
“처음에는 신기했고 다음에는 궁금했지. 아편을 피울까 하다가 궐련이 낫다고 해서 한번 물어 봤어.”
“되게 옛날 말이네….”
“아무튼 그러다가 습관이 된 거야.”
흐리게 웃은 그가 손을 옆으로 뻗어서 재를 털었다. 그러곤 탁자에 있는 재떨이에 비벼 껐다. 반쯤 타다 만 윤오의 것도 가져가서 자신이 마저 태우고는 껐다.
“그럼 아직도 종이 신문을 보는 것도 습관이고?”
“그래. 그것도.”
“그게 더 편해요?”
“편하기보다는 그냥… 몸에 익은 거지.”
김윤오는 습관이라는 말뜻을 모르나? 범신조가 윤오의 귓바퀴를 물고 속삭였다. 손이 어느새 티셔츠 안으로 들어와 등을 더듬고 있었다. 앞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는 바람에 척추뼈가 오돌도돌 만져졌다.
만지고 있자니 침이 돌았다. 범신조는 습, 하고 가볍게 한숨을 삼켰다. 윤오의 몸에서 체향이 흘러나왔다. 고개를 기울여서 목덜미에 묻자 그 향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이대로 있자.”
피할 생각도 없었는데 신조가 중얼거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지 모를 몽롱한 상태가 이어졌다. 윤오 또한 범신조의 체향에 몸 안도 바깥도 부드럽게 물들어 있었다. 눈을 느리게 깜빡이는 윤오의 귓전으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윤오야.”
“네.”
“난 나쁜 습관이 많아.”
갑자기 웬 고백일까. 알고 있다니 다행이지만. 그리고 제 이런 생각에 픽 웃었다.
“나는 나쁜 습관이 많아… 습관적으로 벌인 일들이 많은데.”
“…….”
“고칠 수 있을까.”
자신보다 어른인 사람이 조언을 구한다. 윤오는 가만히 생각했다.
“저는 입술 뜯는 습관이 있는데요.”
그 말대로 윤오의 입술은 가슬가슬하고 거친 편이었다. 모양이 예쁜데, 아쉬운 일이었다.
“나쁜 습관인 건 아는데 잘 고쳐지지가 않아요.”
“아, 그거. 고쳤으면 좋겠지.”
“때가 되면 고쳐지겠지 하는데, 범신조 씨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런가.”
“참아 보세요. 참는 게 습관이 되면 고쳐지겠죠.”
신조가 흘린 웃음이 느껴졌다. 그가 이마를 윤오의 어깨에 비볐다.
이윽고 시킨 음식이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 자연스럽게 범신조가 일어나 대문을 향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만지지도 않고 내려가는 뒷모습에선 나쁜 습관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윤오는 말려 올라간 옷자락을 정리했다. 이윽고 다시 돌아온 범신조의 손에는 깜찍한 떡볶이 캐릭터가 그려진 봉투가 들려 있었다. 귀찮은 양 눈을 대충 뜬 신조의 모습과 어울리면서도 안 어울려서 웃었다.
“많이 먹어야 해.”
그런 윤오에게 다가오며 범신조가 엄포를 놓았다.
* * *
커다란 식탁의 의미가 없다. 둘은 늘 같은 자리에 앉았다. 모서리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범신조는 대식가답게 잘 먹었고, 윤오는 씁, 하 하고 연신 숨을 들이켰다.
“매운 거 잘 못 먹네?”
“예전엔 잘 먹었는데….”
세상에서 가장 의미 없는 게 매운 거로 자부심을 느끼는 걸 수도 있지만,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는 것 역시 매운 걸 잘 먹냐 아니냐였다.
범신조가 재밌다는 양 웃으며 윤오에게 같이 온 주스를 따라주었다. 그러나 자존심 때문에 그걸 마시는 대신 튀김을 먹었다. 범신조는 자꾸 웃었다. 여느 때보다 훨씬 풀어진 게 느껴졌다. 특히 그의 체향이 유독 부드러웠다. 가장 마지막에 맡아지곤 했던 피비린내도 평소보다 옅었다.
이제야 체향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 알겠다. 윤오는 감정과 긴장도까지 체향으로 알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심지어 때로는 이것으로 흥분을 일으키기도 하니, 여전히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고 몸으로는 절절히 체감되는 신기한 영역이었다.
그 때 범신조의 전화가 울렸다. 그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말해.”
전화 매너로 치자면 10점쯤 되지 않을까. 100점 만점에. 인사 하나 없이 차가운 말투로 명령하는 모습에 윤오가 고개를 저었다. 나쁜 습관이라면 이런 게 바로 나쁜 습관이지. 보아하니 고칠 생각도 없어 보인다.
“아….”
잠시 말을 길게 끈 범신조가 시계를 보았다. 그러곤 손목을 털어 옷소매를 자연스럽게 내려오게 한 뒤 의자 등받이에 삐딱하게 몸을 기댔다. 얼굴을 쓸던 그가 그대로 팔을 가슴에 붙이고 핸드폰을 쥔 팔꿈치를 괴었다.
“알았어. 다시 연락할 테니 그때 차 대기하고 있어.”
상대방은 아직 이야기하는 중 같은데 범신조는 통화를 종료해 버렸다.
“어디 나가세요?”
윤오가 묻자 범신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윤오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훔쳐서 혀로 핥은 그가 “일 때문에.”라고 간결히 대답했다. 아직도 범신조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윤오는 대체 어느 회사가 남들은 다 퇴근을 준비하는 때에 출근을 하라고 하나 싶었다.
“지금은 말고. 조금 있다가.”
“몇 시에요?”
“너 잘 때. 밤늦게.”
“…….”
퇴근을 준비할 때도 아니었다. 야근을 해도 너무하단 소리를 들을 때였다.
“블랙 컴퍼니 같은 거 운영하세요?”
의심이 한가득인 목소리에 범신조가 웃음을 터뜨렸다. 재밌기도 하고, 윤오가 생각하는 블랙 컴퍼니의 기준에 따라 대답이 달라질 예정이라서.
하는 일을 양지로 꺼내 법의 잣대를 들이댔을 때 문제가 있냐 없냐로 가린다면 블랙 컴퍼니가 맞다. 하지만 직원 복지를 따지자면 이보다 더 좋은 회사는 없을 거다. 범신조가 일하고 싶을 때 일을 하니까. 신조는 턱을 괴고 실실 웃으며 대꾸했다.
“심심풀이로 하는 일이야. 몸이 굳지 말라고.”
“무슨… 골프 같은 거예요?”
“비슷하지.”
골프채를 종종 쓰기도 하는 범신조가 대답했다. 다만 공이 아니라 다른 걸 친다는 게 다르겠다.
아, 이제 이 짓도 좀 지긋지긋하다. 김윤오 탓이었다. 김윤오 덕이라고 해도 맞았다. 짝을 만나 체향이 오갈 데 없이 질질 흐를 일도 없고 욕구도 푼 덕이겠다. 물론 성이 풀릴 만큼 푸는 건 아니지만…. 범신조의 목빗근이 섰다가 고개를 좌우로 꺾는 행동에 따라 가라앉았다. 사춘기의 머저리처럼 김윤오의 벗은 몸 아니, 그냥 김윤오를 떠올리기만 해도 흥분하는 꼴이 꼴사나웠다.
“스포츠 관련이긴 하지.”
윤오는 대충 골프 같은 돈이 많이 드는 스포츠 취미 쪽 사업이겠거니 생각하고 말았다.
“야구 배트도 다루고.”
용품 쪽인가? 조금 정정했다. 범신조의 미소가 점점 더 악질적으로 변했다.
“때론 맨몸 운동도 하고.”
폭력이라는 게 왜 나쁜 건지 이해할 수 없는 범신조는 자신의 일에 대해 떠들길 서슴지 않아 했다. 먹이사슬이라는 말이 있는 만큼 폭력이라는 건 당연한 수단 아닌가. 예전부터 변하지 않는 생각 하나가 있다면 사람들은 참 나약하고 거추장스럽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김윤오에게 그 속내를 말할 생각은 없다. 이미 비량아에게 한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는 실수를 너무 많이 저질렀고, 수업료는 아주 값비쌌다. 뼈저리도록.
“어?”
남은 소스를 공연히 헤집던 윤오가 고개를 돌렸다. 해가 져서 몰랐는데 비가 내리고 있었다. 거실 유리창에 빗방울이 빗금처럼 그어졌다.
“비 오는데.”
“나가지 말라고?”
“아뇨….”
대뜸 하는 말에 자신의 속내를 들킨 것만 같아서 뜨끔했다. 사실 나가지 않았으면 하는 게 맞았다. 배가 부르니 다시 피곤해졌다. 그런데 잠들고 싶지 않았다. 특히 비가 오는 날에는 더더욱…. 어쩐지 악몽이 될 것만 같았다.
이제 꿈은 지겨웠다. 그것 때문에 점점 내가 누군지조차 헷갈리는 것도 싫었다. 그 나이대보다 조숙한 편이어도 윤오는 아직 스물셋이었다. 만 나이로는 스물하나밖에 되지 않았다.
“나가지 말까.”
“괜찮다고요.”
왜 솔직하지 못할까. 윤오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말하지 않은 속마음을 알아달라고 항의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데, 자꾸 옹졸해졌다.
범신조가 윤오의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 이런 얼굴을 하면 당장이라도 전부 집어치우고 싶다. 그러나 오늘은 나가야만 했다.
윤오를 만난 뒤로 모든 사업이 재미가 없어졌다. 그냥 두어도 굴러들어오는 게 돈이긴 하다만, 범신조를 찾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는 게 문제였다. 더러운 문제들을 덮어 달라고 애걸복걸하는 게 한둘이 아니었다. 오늘은 날 잡고 전부 정리해버릴 참이었다. 그라고 비 오는 날에 윤오를 두고 나가고 싶은 게 아니었다.
“이리 와 봐.”
그가 윤오를 데리고 창가로 향했다. 그러곤 윤오의 손을 창문에 짚게 하고 그 뒤에 섰다.
“잠 잘 오게 해 줄게.”
“어어…?”
순식간에 체향이 짙게 풀어졌다. 식사를 하기 전에 묻혀 둔 범신조의 체향으론 부족하다는 것처럼 윤오의 몸 위로 다시금 그것이 흠뻑 쏟아졌다. 눈꺼풀이 나긋하게 풀렸다. 윤오가 잠깐만, 이라고 중얼거렸다. 정말로 소리를 내서 뱉었는진 잘 모르겠다.
윤오의 옷 안으로 들어간 손이 금세 오똑하게 선 젖꼭지를 더듬었다. 일부러 손끝으로 닿을 듯 말 듯 간지럽히자 등을 바짝 굳히며 하으으, 하고 달뜬 신음을 흘린다. 범신조의 고간이 순식간에 부풀었다.
“아, 진짜… 변태….”
윤오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으나, 짜증이 난 이유에는 그 역시 착실히 흥분했기 때문도 있었다. 목덜미가 보기 좋게 익어서 범신조는 이를 드러내며 웃다가 목덜미를 빨았다. 이제 날이 따뜻해져서 목을 가리는 옷을 입지도 못하는데 누가 보든 말든 상관없단 작태였다. 그뿐 아니라 다른 곳도 씹어놨다.
“내 핑계… 내 핑계 대고….”
“네 핑계를 대야지 그럼. 다른 사람한테 흥분할 순 없잖아.”
범신조가 윤오의 판판한 배를 어루만졌다. 그러다가 맨들한 고간으로 손을 뻗어 반쯤 선 것을 덥석 잡았다. 손이 워낙 커다래서 단숨에 잡을 수 있었다.
“우리 김윤오 자지가 내 손바닥만 하네.”
“…자기 손이 큰 건 생각도 안 하고…!”
“자기? 하하, 흥분된다. 더 불러 봐.”
미친놈 소리가 절로 나오는 발언이었다. 윤오가 도끼눈을 하고 뒤돌아보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범신조가 입술을 물었다. 두툼한 혀가 윤오의 입천장을 훑고 천박하게 혀로 안을 더듬었다. 반쯤 섰던 것이 범신조의 손에서 완전히 섰다.
가늘게 눈을 뜬 그는 윤오의 뒤에서 다른 손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마음 같아선 여기서 끝까지 하고 싶지만, 그러면 밤이 새벽이 될 거다.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끝까지 안 해.”
하고 싶지만 못한다. 범신조가 윤오의 자지를 만지던 손을 빼선 침을 뱉었다. 그러곤 다시 윤오의 것을 잡았다. 덩달아 바지가 더욱 내려갔다.
“하으으….”
텁, 텁 소리가 나도록 거칠게 문지르는 손길에 윤오가 유리창에 얼굴을 붙였다. 습한 숨 때문에 순식간에 김이 서렸다. 범신조가 제 바지 지퍼를 풀었다. 철걱거리는 소리에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흐으….”
“너 허리 움직인다.”
손이 움직이지 않으니 자신의 손바닥에 자위하듯 허리를 움직이는 게 맹랑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내 손으로 자위하니까, 좋아?”
하하, 웃는 성마른 소리에 윤오의 눈시울이 수치로 붉어졌다. 허리를 멈추고 싶어도 녹진한 체향이 머리부터 퍼부어져 쉽지 않았다. 이성은 약해지고 본능만 강해졌다. 범신조는 탐욕스러운 눈으로 윤오를 보다가 옷자락을 입에 물었다. 대화할 시간도 부족했다.
“음…!”
윤오의 다리 바깥으로 제 다리를 세웠다. 다리가 딱 모여지도록 안쪽으로 밀자 윤오가 더욱 미끄러졌다. 유리에서 뻐드득하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났다.
다리가 붙어도 살이 별로 없어서 틈이 벌어졌다. 범신조는 거기에 제 것을 넣었다. 제 것이 커서 다행이지 않냐고 지껄여야 하는데 입이 막혀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아쉬울 노릇이었다.
“후아, 으….”
이런 식으로 해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런 방식도 있는 줄은 몰랐다. 윤오의 허벅지 안쪽이 범신조의 프리컴으로 젖었다. 범신조가 눈을 찌푸리며 웃곤 윤오의 티셔츠를 위로 밀었다. 등줄기가 예쁘다. 숨겨야 마땅하지만 둘만 있는 이 집에서는 맘껏 보아야지.
“흐, 흐으. 으.”
윤오가 얼굴을 찌푸리며 차가운 유리에 얼굴을 비벼댔다. 범신조의 허릿짓이 여느 때처럼 거칠고 거셌다. 음모가 회음을 간지럽혀서 뒤가 움찔거리기도 했다.
그게 범신조의 눈에 보이지 않을 리 없었다. 범신조는 얼굴을 사납게 찌푸리곤 둔부를 쥐었다. 양손으로 잡아 벌리곤 번들거리는 시선으로 응시했다.
“아, 놔아… 놔!”
퉤, 소리와 함께 범신조가 제 옷자락을 뱉었다. 거추장스럽든 말든.
“내 거 물고 싶어? 응?”
체향은 푸는 사람도 이성을 흐리게 만든다. 범신조는 지금 최대한의 다정함을 흉내 내는 중이었다. 정말 원하는 대로 했다면 윤오는 당장 온몸에 온갖 체액이 뿌려졌을 거다.
“뒤가, 허전해? 하. 발랑 까진….”
“아흐! 아, 하지… 마. 헉.”
윤오의 입구로 범신조의 엄지 두 개가 들어갔다. 풀린 눈으로 그걸 보던 신조가 고개를 기울여 천천히 제 타액을 흘렸다.
길게 늘어진 것이 엄지와 입구에 닿아 적셨다. 윤오의 몸이 퍼득 떨렸다. 체향 때문에 안이 조금 젖어 있었는데 바깥도 젖으니 정말로 자신이 발랑 까져 질질 싸는 것처럼 느껴졌다. 범신조가 상스럽게 군 것도 모르고 윤오는 울상이 되었다.
그 와중에도 회음을 긁는 음모와 제 것을 찌르고 비벼대는 범신조의 뜨겁고 두툼한 것 때문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삽입하지 않았는데도 삽입한 것만큼 느낄 수가 있다니. 범신조와 함께 있다간 점점 미치는 것만 같다.
바깥에선 한창 빗방울이 두꺼워지고 있었다. 무겁게 유리를 때리는 것에 윤오는 갈증을 느꼈다. 혓바닥이 날름날름 마른 입술을 핥았다.
“하 시팔. 넣고 싶다, 윤오야.”
“후으. 아, 안 돼… 하. 아냐….”
“안 넣어. 내가 그 정도로 개새끼는 아냐….”
설마 그 정도까지 떨어지겠냐며 범신조는 윤오의 뺨을 길게 핥으며 지껄였다. 헛소리에 불과했다. 윤오가 젖은 눈으로 노려보자 신조의 입꼬리가 떨렸다. 이 정도 눈빛은 귀엽기만 하다.
“사랑해.”
신조가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사랑한다.”
“갑자기… 하, 하. 하아.”
갑자기 웬 미친 소리냐고 하려는데 성감이 치솟아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윤오는 신경질적으로 유리창에 이마를 괴었다가 머리를 흔들어 비벼댔다. 머리카락이 이마에 마구 달라붙었다.
범신조는 연이어 이상한 말을 해댔다. 믿어달라고 쉼 없이 중얼거리는 거다. 그간 너무 우리가 서로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가. 윤오는 이 와중에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커다란 남자에게 이상한 안쓰러움과 이상한 우월감을 느꼈다. 뒤를 잡고 있는 손을 당겨서 제 가슴에 얹었다.
“헛소리… 그만해요….”
범신조가 픽 웃고는 윤오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떡볶이를 먹다가, 갑자기 비가 내리다가, 그러다가 대체 이게 무슨 봉변인가 싶었는데 과연 비가 무섭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윤오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그저 바로 코앞에서 흘러내리는 물방울과 함께 녹는 것만 같았다. 오금이 움칠 떨렸다.
“하으으… 으아. 앗.”
윤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찌푸려진 미간이며 벌어진 입술이며 황홀경에 닿기 직전이었다. 까치발을 들며 몸을 더욱 앞으로 붙였다. 바짝 선 아킬레스건과 그 끝의 동그란 발꿈치가 범신조의 다리에 문질러졌다.
범신조는 마저 잡고 있던 손을 떼고 두 사람분의 선단을 쥔 채 손바닥에 문질렀다. 둥글게 굴리는 손길에 애간장이 녹았다. 윤오의 눈꺼풀이 가뭇 들렸으나 제 의지에 따른 게 아니었다. 시선이 발발 떨리며 눈이 공막 뒤로 넘어가려다가 말길 반복했다. 가장 예민할 때 가장 예민한 부분을 둥글리는 손길에 요의까지 느껴졌다.
“하윽…!”
종내에 윤오는 애먼 유리를 손톱으로 긁어내리면서 몸을 한껏 웅크렸다. 곧 범신조의 손바닥에 윤오의 것이 고였다. 고이다 못해 넘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툭, 투둑 하는 소리가 바깥에서 들리는 빗소리에 뒤섞였다.
“하아…!”
범신조가 탄성을 뱉었다. 그가 허리를 위로 짓찧었다. 막 절정을 맞은 윤오의 것이 위로 올라붙으며 자신의 배와 범신조의 것에 짓눌렸다. 새빨갛게 익은 잘생긴 자지가 발발 떨렸다. 범신조가 그것에 대고 비비적대자 윤오의 것이 정액을 힘없이 더 뱉어냈다.
이윽고 허벅지 사이가 질척해졌다. 울컥대며 나오는 것은 제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양이라 흐르는 감각이 더 선득했다. 물방울이 하나하나 흐르는 듯한 그 느낌에 윤오가 몸서리를 쳤다. 한창 휘몰고 간 열기 탓에 몸이 떨리기도 했다.
맥없이 늘어진 윤오를 범신조가 당겨 안았다. 제 몸에 바짝 붙이고는 여운이 남는 양 여전히 단단한 좆을 슬겅슬겅 문질렀다.
“그만해요. 따가워….”
“졸려?”
“졸리기도 졸리고….”
“재우고 가야겠네. 애기가 따로 없어.”
윤오는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지랄…. 하는 헤식은 소리를 놓치지 않고 들은 범신조가 윤오의 젖꼭지를 무람없이 희롱했다.
“아 그만 좀 하라니까….”
“나 없어도 중간에 안 깰 거지?”
“피곤해 죽겠어요….”
“안 깨겠네. 꿈 같은 것도 안 꾸고 그대로 잠들겠어.”
겨우 뜬 눈으로 범신조를 보았다. 웃고 있는 모습에 어쩐지 긴장이 서려 보였다. 윤오와 눈이 마주치자 아무렇지 않은 척 가슴을 주무른다. 내일쯤 손자국이 남을지도 모르겠다.
마침내 범신조가 몸을 떼어내곤 피곤과 나른함에 무릎이 푹푹 꺼지는 윤오를 추슬러 안았다. 한 손으로는 제 바지를 끌어 올렸는데 지퍼만 대강 잠가서 장골이 도드라졌다. 윤오는 그 뼈에 자꾸 골반이 부대껴서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씻겨 줄게.”
“절대 싫거든요.”
“왜. 내가 설령 다른 짓을 할까 봐?”
“백 퍼센트로….”
“섭섭하네.”
“지금도 체향이 너무 짙어서 피부가 아플 지경인데.”
“아, 이젠 그런 것도 알아? 다 컸네, 김윤오.”
진작에 다 컸다. 게다가 윤오는 혼자 잘 컸다. 자기가 키운 것처럼 생색내는 신조를 밀어낸 그는 비척대며 욕실로 향했다. 범신조는 신경질적으로 옷자락을 끌어내리며 풀린 다리로 애써 걷는 윤오를 보며 웃다가 천천히 표정을 굳혔다.
‘그쪽이 저 싫어하는 꿈이요.’
윤오가 잠드는 걸 두려워하며 했던 그 말이 범신조의 가슴에 내내 가시처럼 박혀 있다. 심지어 윤오와 몸을 섞는 동안에도 잊혀지지 않았다. 과거의 그가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처럼 나타나 자신의 뒤에 도사리고 있다. 다만 이것이 해칠 건 자신이 아니라 윤오일 것이다.
그러니 그 꿈, 그가 익히 알고 있고 바꿀 수 없는 내용의 기억… 그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겠다. 여기서 멈출 수만 있다면.
‘나도… 좋아해요.’
“왜 하필 이때….”
범신조가 괴로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얼굴을 싸맸다. 한번 맛본 김윤오의 다정함은 앞으로 안배될 업보를 더욱 두렵게 했다. 차라리 이런 걸 느끼지 못했더라면 범신조는 견딜 수 있었을 거다. 또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서 그대로 삭고 또 삭았겠지만, 김윤오와의 시간은 그를 한없이 약하게 만들었다.
윤오가 씻고 나오는 사이 비는 멎었다. 거실로 나오니 젖은 흙냄새가 났다. 범신조도 씻었는지 그는 옷을 갈아입고 데크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윤오가 다가가자 열린 문틈으로 지그시 이쪽을 응시했다. 필터를 물었다가 떼면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재떨이에 지져 끄기에 다가갔다. 담배 냄새와 젖은 흙냄새에 섞여 비누 향이 났다. 뽀득거리는 비누 향이라니.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어울렸다. 담배 냄새에 섞여서 그럴지도 모른다.
신기한 건 체향이 느껴지지 않는단 사실이었다. 정말로 그걸 나게 할 수도 있고 아예 안 나게 할 수도 있는 모양이다. 윤오는 속으로 기합을 줘 봤다. 티가 안 났다고 생각했는데 턱과 볼을 어루만지던 범신조가 눈썹을 까딱 올리며 물었다.
“뭐야? 애교 부리는 거야?”
말이 되는 소리인가. 어이없는 데다 실망까지 한 윤오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범신조는 희미하게 피어오른 윤오의 체향에 굳은 어깨가 절로 풀렸다.
그는 검은색 셔츠에 검은색 바지 차림으로 온통 검은색 일색이었다.
“장례식장 가요?”
“아니. 간다면 흰 셔츠를 입었겠지. 그냥 격식 좀 차려 본 거야.”
옷 갈아입을 시간조차 낭비하지 않고 바로 집에 오기 위한 복장이면서 범신조는 뻔뻔하게 맘에도 없는 소릴 했다.
“난 장례식엔 안 가.”
범신조가 윤오의 턱을 어루만졌다.
“애도 같은 건 내 성정에 안 맞거든.”
“친구가 없어서 그러는 건 아니고요?”
윤오가 맹랑하게 받아쳤다. 범신조가 조용히 웃었다.
“그래. 그것도 맞다고 하자. 이만 가야 하는데, 괜히 다른 거 하지 말고 일찍 자.”
“늦어요?”
“새벽에 올 수도 있고. 기다리지 마, 윤오야.”
다정하게 구는 말투가 괜히 간지럽기까지 하다. 윤오가 손등으로 범신조의 손길이 닿았던 곳을 문질렀다.
범신조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서 현관으로 나가는 번거로움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데크 아래로 내려섰다. 윤오는 어둠 속에 잠겨 그림자처럼 보이지 않는 범신조의 등에 대고 충동적으로 뱉었다.
“그쪽은 애도 같은 거 안 어울리긴 해요.”
애초에 운다거나 서글프거나 상심한 모습이 안 어울린다. 항상 남들보다 위에 선 것처럼 건방진 미소나 짓고 있는 게 나았다.
“맞아. 안 어울리지.”
지금처럼 말이다.
돌아보는 범신조의 얼굴이 좋아서 가만히 늘어놓았던 손을 들어 흔들었다. 그 작별이 귀엽다. 범신조도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는 천천히 정원을 내려갔다.
육중한 대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까지 들은 후에야 윤오는 돌아왔다. 그리고 그간 처박아두고 잊고 지냈던 게임기를 꺼냈다. 피곤한데 이대로 잠들 수 있을 거 같진 않아서.
잊고 지냈는데도 먼지가 하나도 없었다. 윤오는 단순한 게임을 꺼냈다.
입으로 바람을 불기도 하고 상대를 삼키기도 하는 귀여운 캐릭터가 쉬운 난이도의 맵 속에서 깡충깡충 뛰어다녔다. 반복되는 패턴을 보다 보니 꾸벅꾸벅 졸게 되었다. 결국 게임을 끄고 정리하는 건 미룬 채 소파에 누웠다.
소파는 푹신한 데다 몹시 크고 넓어서 침대처럼 쓰기에 손색없었다. 그대로 담요를 끌어 덮은 채 웅크려 누웠다.
그 때 맞춘 듯이 범신조에게서 문자가 왔다.
[잘 자.]
윤오는 그 두 글자를 여러 번 중얼거렸다가 다시 핸드폰을 툭 떨어뜨렸다. 잘 자…. 어느덧 익숙해진 범신조의 다정한 목소리가 절로 떠오른다.
최근 들며 점점 더, 범신조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숨길 수 없는 애정을 느꼈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더욱 다르게 느껴졌다. 자주 심술궂고 때때로 다정하던 꿈속의 사내를 죽이고 그 거죽을 뒤집어쓴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이 범신조인 척하는 상상을 하다가 윤오는 가물가물 눈을 감았다.
조명을 켜두어서 거실은 마냥 까맣지 않았다. 자다가 깨도 외롭지 않을 자신은 없었다. 악몽을 꿀 것 같지만, 어쩌면 전혀 다른 이야기로 깨고 싶지 않아질 수도 있다. 윤오는 일말의 기대를 걸며 잠에 빠져들었다.
* * *
[비량아.]
비량아는 어깨가 잡혀 그 자리에서 펄떡 일어났다. 뒤돌아보니 신조가 있었다.
[뭐 하고 있었어. 아까부터 한참 불렀는데.]
조금 전 사람 같은 건 혐오한다며 버러지를 이야기하듯 하던 말투는 오간 데 없었다. 소년처럼 반짝거려 나이를 가늠키 힘들게 하는 눈빛과 고목의 안쪽에서부터 울리는 듯한 다정한 목소리로 그는 비량아를 또 가지고 놀았다.
[너 귀를 고치는 게 좋겠다. 귀찮아 죽겠어.]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힐난의 기색은 조금도 없는데, 비량아는 귀찮다는 그 한마디에 가슴이 갈가리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동안 자신만은 특별한 줄 알았다고 내심 기대했던 모양이다.
이제껏 사람들 사이에서 비량아는 이질적이고 이상한, 껄끄러운 존재였다. 고향에서는 부모 잡아먹은 놈이라고 쑥덕댔고, 무리 속에서는 찝찝한 놈이라고 수군대며 그를 겉돌게 했다. 그렇게 한 번도 섞여들지 못했던 사람이라는 무리에 묶여, 신조에게는 버러지보다 못하게 여겨진다는 게 비량아에게 절망을 선사했다. 버러지 중 그나마 나은 존재일 거란 사실은 그다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비량아. 비량아? 귀를 고쳐 줄까, 물었는데.]
가슴이 뻥 뚫리기라도 했는지 흉골로 전해지는 목소리도 자꾸만 뒤로 흐르고 빠져나가 사라졌다. 비량아가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전혀 듣지 못했다.
[그래. 고쳐 줄게.]
비량아는 넙데데한 바위에 앉아 있었고 손에는 억새가 들려 있었다. 초록빛으로 아직 다 익지 않은 것이 고개를 가만가만 가누었다. 그런 비량아의 무릎을 잡고 신조가 그의 몸을 제 쪽으로 돌렸다. 커다란 손이 비량아의 무릎을 감싸 허벅지 위에서 손가락을 놀렸다.
그 때 비량아의 헐벗은 발 위로 개미들이 지나갔다. 신조의 손끝이 그걸 아무렇지 않게 치워 버렸다. 그걸 보던 비량아는 참을 수 없어서 묻고 말았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똑같이 보이시나요?”
신조는 비량아가 갑자기 왜 이런 말을 묻는가 싶었다. 그에겐 당연했기 때문이다. 생애는 신조의 손톱만큼 짧았고, 성장은 손톱이 자라는 것처럼 미비했으며, 그들의 삶은 너무 복잡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두발짐승들.
[혹시 너도 그렇게 볼까 봐 걱정이라 그래?]
비량아는 차마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못했다. 신조가 픽 웃었다.
[너는 그렇지 않아. 너는 수많은 잡초 중에서도 내가 이름을 기억한 잡초잖아.]
범신은 억새밭에서의 대화를 떠올리며 장난스레 대꾸했다. 자신이 그때의 사소한 대화를 하나하나 기억하고, 추억처럼 떠올린다는 자각도 못 한 채.
그 말을 들으며 비량아는 속수무책으로 부끄러움에 잠겼다. 맞다. 그는 처음부터 저랬다. 처음부터 숨기지도 않았건만 이제 와 속임이라도 당한 양 상처받은 건 자신이었다. 그는 전혀 변하지 않았는데, 처음부터 숨김없던 그 모습 그대로인데 저 혼자 착각을 한 것이다. 그에겐 충동에 불과했을 입맞춤 몇 번에 홀로 마음을 품어버린 거다. 그가 요구하지도, 바라지도 않던 마음을….
그러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단 한 번을 바라는 어리석은 기대에 비량아가 물었다.
“저희가 처음 만난 그 집 마님…. 그분을 기억하시나요?”
[그래.]
신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에서 비량아를 만났기 때문에 어쩌다 보니 여즉 기억하고 있었다.
“그 마님께서 아들이 달라진 걸 알면서도 부정하고 무슨 일이든 하시려던 그 모습이… 아직도 어리석어 보이시나요?”
신조는 비량아가 왜 이런 걸 묻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조금 짜증났고 이상스레 불안했다. 범신은 불안하단 걸 살며 느껴 본 적이 거의 없기에 이것을 불쾌함과 혼동했다. 가슴이 거북하고 어딘가 뜨끔뜨끔한 이유를 그렇게만 치부하여 불쾌함을 그대로 내보였다.
[네가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새삼 왜 그런 걸 묻지? 어리석어 보이냐고? 물론이다. 어리석어 보여. 이제 됐나?]
사랑을 모르는 사내.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내.
분명 처음 만났을 때에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알면서도 그런 사내를 마음에 담아 버렸다. 돌려받을 수 없는 마음을 감히 바라고 결코 같을 수 없는 존재를 바랐던 비량아의 마음은 천천히 부서졌다. 신조의 말대로 이건 오로지 그의 어리석은 마음, 어리석음 때문이라 그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것조차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것 역시 바보 같은 짓이었다.
[안색이 안 좋아, 비량아. 역시 귀가 들리지 않아서 마음이 심산하냐. 금방 고쳐줄 테니 가만히 있어.]
“아니, 아니에요. 그러지 마세요…. 저는 그냥 이대로 있을래요. 그냥 이대로 있겠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설마하니 다정한 그가 아픈 저를 내쫓을까 싶어서 비량아는 귀를 고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리고 다른 마음으로는 차라리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게 낫겠다 싶기도 했다. 혼자 있으면 세상이 텅 빈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신조는 비량아를 그냥 두지 않았다. 결국 그의 어깨를 잡고 제게로 당기려 하기에 비량아가 다급히 팔로 밀치고 돌아섰다.
민망할 만큼 약한 힘인데도 신조는 자신을 밀어내는 손길에 뻣뻣이 굳었다. 몸만 굳은 게 아니라 머릿속도 굳었다. 왜 이러지, 라는 말이 솟구쳤다. 당혹스럽고 초조해서 화가 났다.
[아직 가라고 말하지 않았을 텐데.]
이를 악물어 사납게 읊조리며 비량아의 손목을 움켜쥐어 거세게 당겼다. 비량아에게는 충분히 고통스러울 만큼 우악스러웠다. 그렇게 행동하면서도 범신은 자신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고작 밀쳤을 뿐인데, 고작 먼저 등을 보였을 뿐인데, 왜 이리 화가 나는 거지? 왜 이렇게 견디기 힘든 거지?
몸에선 홧홧한 열이 돌았다. 한여름보다 더 더웠다. 비량아를 잡고 있어도 식지 않았다. 오히려 그 미지근한 몸을 잡고 있으니 더 열이 났다. 침이 돌고 아래가 뻐근했다.
[오늘따라 네가 까다롭게 구는구나. 다른 걸 더 원해서 그러는 거냐? 그게 아니라면, 그냥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 내일부터는 마음이 바뀌어 영영 귀가 안 들리게 둘 수도 있으니까…!]
제가 왜 이리 화가 나는지, 무엇에 화가 났는지도 모르고 신조가 비량아, 하고 재차 짓씹어 뱉었다. 한껏 욱하여 쏟아낸 말이 비량아가 수치스럽다 여기던 제 마음에 더한 비수를 꽂는 줄도 몰랐다.
“그냥… 그냥 전.”
중얼거리던 비량아가 끝내 한숨처럼 “지금만은 보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요….”하고 말았다. 바람보다 작은 소리인데도 신조는 그걸 들을 수 있었다.
[뭐…?]
멀거니 중얼거리는 신조의 아귀힘이 점점 거세졌다.
“아, 아악…!”
비량아의 비명도 이어졌다. 그냥 피부가 빨개지는 수준이 아니라 뼈가 부러지는 게 아닐까 할 정도의 통증이었다.
그 때 두 사람을 둘러싸고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돌개바람이 땅 위에서 솟아나듯 하며 비량아와 신조 사이를 가르려 했다. 작은 돌들과 나뭇잎들 사이에서 덩굴처럼 구불거리는 손톱이 나와 신조를 할퀴려 들기에 신조는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형형한 안광으로 노려보니 곧 그것이 사라졌다.
“너. 비량아….”
의도한 건지 아닌지 몰라도 지금 이건 비량아가 불러들인 게 맞았다. 그가 가르쳤으니 안다. 그가 비량아를 가장 먼저 알아보았으니 더더욱 모를 수가 없었다.
물러선 것이 무색하게 덜컥 다가온 신조가 그를 확 당겼고, 비량아는 자꾸만 밀쳐내는 상황이 되었다.
“읏….”
점점 신조를 밀어내는 손길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다가 그가 신조의 팔을 손톱으로 긁어버리고 말았다. 그 순간 속에서 거센 불길이 치솟으며 신조의 눈앞이 깜빡깜빡 점멸했다. 그는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가 손을 치켜들었다. 비량아는 당연히 자신을 때리려는 줄 알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본 신조가 손을 움켜쥐었다가 다시 펴선 비량아의 귓가로 가져갔다. 그리고 양손을 맞부딪혀 커다란 파열음을 냈다.
쩌어엉…. 징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꽹과리가 찢어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동시에 비량아의 몸이 옆으로 휘청 무너지자 그걸 신조가 한 손으로 받아냈다. 한 손으로 움켜쥔 거라 위태롭기도 했고 아프기도 몹시 아팠다.
우그러지는 손아귀 속에서 비량아의 몸이 구겨졌다. 눈빛이 황망하게 꺼져들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몸도, 머릿속도, 귀도. 비량아의 귀와 코 아래로 흐르는 피를 신조가 다른 손으로 닦아냈다.
“아, 아… 아파….”
비량아의 몸이 차갑게 식었다. 순식간에 창백해져선 부들부들 떨었다. 그냥 잠시 혼자 있고 싶었을 뿐이다. 조금만 자신을 추스르고 싶었다. 그게 이렇게까지… 이렇게까지 그를 화나게 할 일이었나? 약간의 반항도 선을 넘는 거였나 보다. 이 정도도 안 되는 모양이었다. 몸도 아팠지만, 마음이 더 아팠다.
범신에게는 육체가 있지만 그가 다루는 힘은 귀신의 것이었다. 귀신의 힘으로 사람의 백에 손을 댔다. 사람의 혼에 손을 대는 것도 죄인데 하물며 몸인 백에 손을 대다니, 얼마나 옳지 않은 일인지는 신조야말로 잘 알았다.
“아파, 아파….”
어린애처럼 우는 비량아가 신조를 올려다봤다. 알아, 하고 중얼거리는 신조의 목소리가 몇 겹으로 겹쳐 들렸다. 징징 울리는 소리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비량아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귀를 막았다.
“…내가, 내, 가 싫다고 했는데.”
“너를 그저 때릴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정말 그랬더라면 비량아는 죽었을 것이다. 범신은 폭력을 자행하는데 거침없는 존재였지만, 비량아에겐 그런 적 없고 이토록 화가 나는 순간에서조차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토록 아껴 주는데 왜… 왜….
그리고 왜 나는 이렇게까지 너에게 화가 나는지….
“내가 한 것 중에 어차피 너에게 나쁜 건 없었잖아.”
“흐으… 윽.”
“지금껏 내내 잘해 줬는데, 왜 나를 무서워해.”
그러나 말의 내용과 달리 신조는 일그러진 얼굴로 비량아를 내려다봤다. 골이 울리도록 어지러워서 비량아는 신조의 눈빛까지는 보지 못했다. 냉골처럼 쏟아지는 차가운 목소리와 그걸 뱉는 입술만 보였다.
“너에겐… 잘해 주고 싶고 그럴 뿐인데, 왜….”
왜 갑자기 고집을 부리고 미운 말을 하냐고. 왜 내가 잘못한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냐고, 이상하게 내 마음을 흔들지 말라고…. 신조는 말을 삼켰다.
고집으로 느껴진 이유는 비량아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어서고, 미운 말로 느껴지는 이유는 그가 하는 말 하나하나가 저를 흔들고 헷갈리게 해서라는 걸 몰랐다. 비량아가 없이 살아온 범신의 세월은 너무나 무결하고 완벽했기에, 그 세상에서 쌓아 올린 아집이 공고했다.
신조는 비량아를 안아 올렸다. 아예 기절하는 게 낫지 않을까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몸이 아래로 까라지는 게 느껴졌다. 아마도 걸음 소리와 흔들리는 진동마저 너무 큰 소리로 느껴져서 그럴 거다.
범신은 축 늘어진 비량아를 아랑곳 않고 고쳐 안았다. 성큼성큼 걷는 속도는 변함이 없었다.
[이봐, 범신…!]
때마침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나타난 가믄장아기가 신조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반갑게 불렀다. 전번의 만남에서 둘의 사이가 신경쓰여 다시 방문한 참이었다. 그러나 그는 범신을 따라잡자마자 미소가 굳어지며 우뚝 섰다.
[범신. 너 혹시….]
[가라.]
신조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중얼거렸다. 가믄장아기는 드물게 당황하여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얼핏 보기에도 범신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짐승들이 발정기가 올 때 부쩍 예민해지는 것처럼, 커다란 체구 뒤로 우렁우렁 보이는 기운이 악신이 되기 직전처럼 개운치 못했다.
[품에 안은 건 뭐야. 범신아, 상대가 원하지 않는 걸 억지로 하려는 건 아니지?]
떨리는 물음에 신조가 돌아봤다. 가믄장아기는 그제야 품에 안긴 걸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왜소한 체구도 아니고 여인처럼 보이는 이도 아니었다. 학을 떠올리게 하는 금욕적인 인상의 청년이었다. 몸도 대나무처럼 곧았다. 직감적으로 일전의 그 사람 아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인도 아니라니. 벌써부터 삼신 할멈들이 길길이 날뛰는 것이 눈앞에 훤해 가믄장아기는 탄식부터 나왔다.
[범신아, 그러면 안 된다.]
[내가 뭘 할 줄 알고?]
범신이 아주 느릿느릿 물었다. 권태롭고 나긋한 어조가 오히려 오싹했다.
[나도 내가 뭘 할지 모르는데, 가믄장아기는 아나? 알면 좀 알려 주지. 내가 뭘 할 것 같은지.]
[…네 품에 안긴 이가 네 정인이냐. 정인이라면 그렇게 대하지 말아야지.]
[정인이라고? 여기 어디, 누가?]
[네 품에 있는 이…. 정인이 아니야?]
[오늘 너도 이 녀석도 나를 짜증 나게 하는군. 나는 그런 거 몰라. 정인 같은 건 만들지도 않고 만들 생각도 없고. 품에 있는 건….]
범신은 잠시 품에 안은 비량아를 내려보았다. 지금껏 산 것도 죽은 것도 명확히 정의 내리지 못한 적이 없는데, 비량아를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내가 좀 기르는 거야. 귀엽고, 특별하긴 하지만 그게 다야.]
오히려 그건 자신에게 하는 약속 같았다.
[그렇다면 네 말대로 그게 전부여야 할 거야…. 정인이어서도 안 되고, 그냥 그게 전부여야 할 거라고.]
가믄장아기가 아연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조금 마음에 두었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그러나 그 말은 가믄장아기에게 오히려 모든 게 변할 것만 같단 예감을 불러일으켰다. 달라지는 건 없다고 스스로에게 되뇌듯 말하고 있지만, 그건 본인이 지금 무슨 표정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범신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워서 화가 난 거다. 어린애처럼.
그리고 가믄장아기는 알았다. 기절했지만 몸만 잠든 것에 불과한 탓에 저 아이가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것을.
[이런 걸 곁에 두었다고… 내가 변하기라도 하리란 것처럼 호들갑 떨지 마라. 지금 잠시 마음에 들었을 뿐이야. 어차피 찰나를 사는 한낱 사람, 그 순간에 불과한 게 나를 변하게라도 한다는 양 굴지 말라고.]
자못 고집스러운 선언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말에 가믄장아기조차 더 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내, 자기가 한 말이 떨어진 땅에서 진저리치듯 범신이 멀어졌다.
그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했다. 갑자기 비량아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사실 하찮은 반항보다 비량아의 눈빛이 그를 흔들었다. 이제껏 그 긴 삶을 살며 몇 번 겪지 않은 땅의 흔들림보다 더욱 거세게 한낱 좀 남다를 뿐이라 여겼던 비량아의 눈빛이 달라졌단 사실이었다.
사실 그 눈빛의 의미는 비량아 자신의 마음에 대한 부끄러움,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을 바라고 말았다는 데에 대한 절망이었지만, 그게 자신에게 향한 순간 신조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초조했다.
평소처럼 왜 자신을 빛나는 존재처럼 보지 않을까. 겨울만 남은 세상 속의 유일한 온기처럼 보더니 왜 이번엔 그러지 않는 거지. 왜 나를…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해. 싫어하게라도 된 것처럼.
난생처음 겪는 불안으로 인해 범신은 무척 동요했다. 그는 이름조차 모르는 감정인 불안이 그를 파고들어 말도 안 되는 상상까지 하게 만들었다. 그래, 너희는 원래 변덕이 심했지. 짧은 생애 동안 몇 번이고 바뀌지. 그래서 이젠 날 보던 눈빛마저 바뀌었나.
그렇다면, 날 보지 않으면 또 누굴 그런 식으로 보려고.
제 이가 뾰족해져 범일 때처럼 변하는 줄도 모르고 산세를 거칠게 올라가던 신조가 문득 고개를 돌아봤다. 옆에는 졸졸 흐르는 개울이 있었다. 개울에는 두 인영이 비추었고, 그건 분명 그와 비량아가 맞았다. 맞는데도, 볼 수 있는 건 비량아밖에 없었다. 신조의 얼굴은 물결에 거칠게 뭉개진 것처럼 도통 보이지 않았으니.
“…….”
제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원래 그랬다. 면경에 비추어도, 물에 비추어도 보이지 않는다. 알아볼 수 없으니 매일 두렵고 의심한다.
원래 멍청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야 신조가 무슨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그대로 볼 뿐이다. 애써 자신은 그들과 다르고 짐승과도 다르니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두려운 건 어쩔 수 없다.
비량아에게 말하지 않았으나, 사실 그간 범신들은 권태로 죽은 게 아니라 광증으로 죽어 왔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미워하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경멸하다, 그렇게.
사실은 아주 우스꽝스럽거나 추악하게 생긴 게 아닐까. 쑥과 마늘을 오십 일만 먹고 나왔으니 짐승도 사람도 아닌 괴상하기 짝이 없는 모습인 게 아닐까. 추악하여 그 어느 것도 비추지 못하는 게 아닐까.
너무 닮고 싶어서 끝내 혐오하게 된 사람이나 뿌리임에도 다른 짐승이나 그 어느 곳에 속하지 못한단 사실에 절망하다, 그렇게.
‘나를 알아봤구나.’
처음 만났을 때 그 목소리에 희열이 가득 찼던 이유는, 정말로 비량아가 신조를 알아봤기 때문이다.
비량아에게 묻고 싶다. 나는 어떻게 생겼지. 나는 괴물이냐, 짐승이냐. 혹은 사람의 몰골이냐. 아마도 자신이 조금 더 미쳐 있고 조금 더 수치를 몰랐다면 진작 물었을 거다. 참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비량아가 자신을 늘 빛나는 것처럼 보았기 때문이다. 그 눈빛을 알아 버렸다.
그리고 이제 그 눈빛이 사라진다면….
신조가 제자리에 우뚝 섰다. 흔들거리는 아슬아슬한 바위 위에서도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힘들어서 나는 땀이 아니라 두려움에 식은땀이 솟아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생침을 삼키는 목울대가 가냘프게 떨렸다.
이름을 신조라고 불렀던가. 세상에 있을 수많은 신조가 아니라 유일한 범신, 신조. 그 이름을 지어준 건 비량아, 그 이름을 아는 오직 한 사람도 비량아, 내 모습을 아는 것도 비량아….
신조는 비량아를 어깨로 업으며 더듬더듬 제 목을 만졌다. 목줄 같은 건 없었다. 그러나 만져지는 게 없어도 한번 자각한 두려움은 영영 쫓아다닐 것이다. 식은땀과 달리 몸은 자꾸만 열에 끓었다. 자꾸만 갈증이 났다. 홀홀 벗고 비량아도 아예 벗겨버리고 싶었다.
“내가.”
퍽퍽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내가 너 때문에 죽을 요량이다….”
“…….”
“네가 나를 죽일 모양이다.”
설마하니 그럴 일이 있겠나, 하는 비웃음과 함께 설마하니 정말로 그렇게 되리란 공포가 동시에 일었다. 신조는 구역질을 참으며 비량아를 내던지는 대신 다시 끌어안고 산을 올랐다.
더 높이, 더 깊이. 더 외롭게. 더 고독하게.
* * *
비량아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신조는 없었다. 어디로 갔는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사라지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아플 때, 이렇게 고통스러울 때조차 그가 곁에 없는 건 처음이었다.
다시 태어난 것처럼 모든 것이 낯설었다.
원래 귀가 좋지 못했던 비량아였다. 신조가 돌려준 청력은 손상된 구석 하나 없이 깨끗하고 건강했으며, 또한 그만큼 예민했다. 비량아는 몸을 웅크린 채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밤의 숲은 지나치게 고요해서 그 침묵이 바짝 당긴 북 가죽처럼 울렸고, 아침의 숲은 일어난 새들로 인해서 찢어질 것처럼 소란스러웠으며, 낮에는 물소리 때문에 딛고 있는 흙바닥마저 흐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비량아는 사과를 해야지, 생각했다. 사과를 해야지. 내가 너무 주제넘게 굴었다. 내가 상황도 모르면서, 그냥 지나갈 수 있는 일에 홀로 매몰되어서 괜히 일을 키운 게 분명하다. 사과를 해야지…. 그의 말대로 결국 그가 하는 일은 자신에게 좋았으니까.
고통에 잠 못 이루고 눈물만 흘리면서도 비량아는 사과를 해야지, 결국 좋은 일이니까, 결국 내가 좋아하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신조는 사라져서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사흘째가 끝나가는 밤에 비량아는 포기했다.
버려졌다는 생각도 했다. 버려졌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는 한편 조금 후련하기도 했다. 그의 옆에 있는 일은 행복했지만 괴롭기도 했고, 그는 한없이 다정했지만 외로웠으니까. 사과는… 이미 늦은 것 같다. 때를 놓쳐서 곰삭고 말았다.
날이 밝아온다. 나흘째 아침이었다. 그렇게 나흘을 보낸 뒤에야 비량아는 새로 얻은 귀에 적응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정말 말도 못 하게 괴로워 눈에 띄게 수척해졌고, 그동안 잠도 자지 못해서 핏발이 선 눈은 괴기스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창백한 피부며 물어뜯어 터진 입술이 수려한 청년의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굴 입구에는 여러 망령들이 잔뜩 모여 괴괴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간 고통에 겨운 비량아가 신음할 때마다 조금, 바닥을 긁을 때마다 또 조금씩 찾아든 모양이다. 그러나 하나같이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했다. 비량아를 둘러싼 신조의 체향이 무서워서.
비량아는 모르겠지만, 신조는 첫 발정기를 겪고 있었다. 비량아가 고통스러울 때 억지로 고통을 심고 사라진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평소보다 한층 강해진 험악한 체향에 귀신들은 굴 밖만 맴돌고 있었다. 만약 비량아가 마음먹고 불러들였다면 들어올 수 있었겠지만 아직 그는 그 정도로 이성을 잃진 않았다.
다만 마음은 약해져 있었다. 너무나 외로웠던 것이다. 비량아는 아픈만큼 외로웠고, 외로운 만큼 마음이 약해졌다.
구천을 떠돈다고 다 악귀는 아니었다. 악귀도 있겠지만, 적어도 위로를 한 번이라도 건네줄 이가 있으면 했다. 그래서 일부러 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척 굴을 나왔다. 비틀대면서도 천천히 걸어선 바람이 잘 부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사이 주변에서 쭈뼛거리던 것들이 부산하게 비량아의 주변을 맴돌다가, 그가 아는 척도 하지 않자 터덜터덜 떠나갔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모였던 것들이 조금씩 흩어져 이내 전부 모습을 감췄다. 단 하나만 남기고.
“후….”
언제까지고 버티며 계속 무시하려던 건 아니다. 그런 소모적인 기 싸움을 할 정도로 기력이 남지도 않았다. 비량아는 무너지듯 옆 나무에 기댔다. 그리고 바람 속에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나흘 내내 지독하게 아프던 두통이 조금 가시는 듯했다. 그것만으로도 숨이 트였다.
“…….”
그렇게 한참을 지낸 것 같았는데, 곁에 있는 혼은 여전히 떠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비량아가 천천히 돌아봤다. 나무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탓에 내려뜬 눈을 마주하자 혼이 무척 부끄러운 양 몸을 꼬았다.
혼은 여인이었다. 고작 약관을 넘었을까. 그리고… 혼례복을 입고 있었다.
“…….”
무슨 사유인지 모르겠으나 사연이 기구할 것이야 뻔했다. 비량아에게 모이는 것들이란 하나같이 그랬다. 애초에 기구하고 뭐가 그렇게 미련이 남고 그렇기에 구천을 떠도는 거겠지. 비량아는 몸을 앞으로 숙였다.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넘기다 말고 고개를 괴었다.
“왜.”
그 목소리가 축축하게 떨어졌다. 기운이 빠지기도 하였고 나흘 내내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기도 하여 끝이 거칠하게 찢어져 있었다.
“왜 안 가. 뭘 바라는데.”
뭔가 바라더라도 줄 것이 하나도 없다. 애초에 가진 것이라곤 아무에게도 준 적 없던 마음뿐이었는데, 그건 마음이 없는 범신에게 빼앗겨 이제 제겐 없다.
척 봐도 자신보다 서너 살은 어려 보이는 귀신에게 죄 같은 게 있을 리 없다는 건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가. 네가 바라는 게 뭐든….”
고개를 천천히 고꾸라뜨리려는 비량아의 옆으로 그것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온다. 그 천진난만함에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혼이 품 안에서 무엇을 꺼냈다. 그리고 주먹 쥐었던 손을 펼치자 가락지 두 개가 나왔다. 대강 보기에도 하나는 작고 하나는 컸다. 혼은 작은 것을 제 손에 끼우더니 큰 것은 비량아에게 내밀었다. 어서 하라는 듯 재촉하는 모습에 비량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그 기구한 사연일랑 알지도 못하고 알지 않는 게 좋기야 하겠지만, 마음이 쓰린 건 지금 자신의 꼴도 마찬가지라서가 아닐까. 그 연심 하나에 바보가 된 걸 알아서. 비량아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혼백끼리 혼례를 맺자고…?”
혼은 아주 뻔뻔스러운 부탁을 해놓고 말갛게 웃었다. 원래 구천을 떠도는 것들이야 미련 하나로 남아 있는 거라 그것에 관련해서만은 한없이 이기적인 걸 알지만, 비량아는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산 사람에게 와서는 혼으로 혼례를 맺자니. 기가 차는 소리였다.
그런데 또 뭐 어떠랴 싶기도 했다.
“그게 네 유일한 소원이야? 내가 네가 주는 반지를 끼고… 아무 의미도 없고 서로 닿지도 못할 혼례를 맺자고?”
그러자 또 한 번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비량아는 아무 의미도 없고 서로 닿지도 못한다는 말을 곱씹었다. 살아 있는 존재를 좋아하지만 그게 아무 의미도 없고 서로 닿지도 못한다는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일들 때문에 그런지 비량아는 이제 관계랄 것에 대해 크게 의미를 두지 못하기도 했다.
“고작 그거? 그러면 천도할 것 같아?”
두 손을 꽉 마주 잡고 황홀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혼의 모습이 참 순수하기까지 했다.
“그거론 안 될 거야.”
비량아가 비웃었다. 하지만 정말 악의적인 비웃음은 아니었다. 누가 누굴 비웃을 처지인가. 이대로라면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죽더라도 저 역시 저렇게 되지 않으리라고 자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인정하는 한편으로 그는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포기했기 때문일까.
앓느라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머릿속에선 자신을 안고 가던 신조의 차가운 말이 선명하게 떠올랐었다. 그리하여 몸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제 생각보다도 저는 신조에게 하찮았던 모양이다.
그의 말대로 찰나밖에 살지 못하는 존재, 그에게는 순간에 불과할 의미. 어차피 그런 존재인데 한이 남은 혼백의 작은 부탁 하나는 못 할 게 없지 않은가. 적어도 이 혼백에게만은 찰나도, 순간도 아니겠다 싶었다.
비량아는 창백한 손을 내밀었다. 체구가 작은 새색시가 자리에서 동동 뛰는 것이 보였다.
“이걸로 혼백이 묶이는 건 아니고 혼례식을 올리는 것도 아니지만.”
[…….]
아쉬운 표정이 참 노골적이다. 순수하기 때문인가. 비량아는 오랜만에 진심으로 웃었다. 비록 바람 빠진 수준이어도 말이다.
“그래도 가락지를 끼워 주는 미련만은 풀어 주마.”
어림짐작은 새색시의 손끝이 닿자마자 확신으로 바뀌었다. 비량아에게 그의 사연이 흘러들어왔다.
가락지를 주기 위해 품에 안고 가던 참이었다. 뒤에는 처가살이를 위해 신행을 쫓아오는 서방이 있었다. 부모님께 인사를 드린 뒤에야 조모에게 물려받은 가락지를 끼워 주어야지, 수줍음 많은 새색시는 생각했다.
다정하고 훤칠한 사내였다. 어렸을 때부터 알아 왔고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다. 긴 짝사랑은 사실 외사랑이 아니었다. 그리고 드디어 이루어지려는 순간, 산 위에 아슬아슬하게 있던 돌무지가 무너졌다. 죽음을 맞이한 것은 오직 새색시뿐.
“…….”
악귀가 되고도 충분히 남음직한 이야기. 구질구질하고 애만 타는 이야기. 비량아는 혀를 찼다. 새색시는 그토록 좋아하던 사내를 까맣게 잊은 채, 오로지 가락지를 끼워 주고 싶다는 미련 하나만 남아 이 주변을 떠돌다 비량아의 고통에 홀려 온 모양이다.
처연히 시선을 내린 그는 제 눈에만 보이는 가락지가 검지로 부드럽게 들어오는 것을 눈에 담았다.
“…예쁘네. 그 사내가 무척 아쉽겠어.”
손에 있으나 또한 없는 것을 보며 중얼거리자 새색시는 활짝 웃었다. 말도 잃고 사랑하는 이도 잊고 연정도 잃고, 가장 마지막에 품고 있던 가장 강렬한 마음만 남아서 그게 집착이 되고 미련이 남는다니….
“이만하면 됐지?”
퍽 아쉬운 모양이다. 아무래도 혼례를 치르지 못했다 싶은 마음에. 그건 틀린 사실이라, 비량아는 새색시의 머리칼을 만져 주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 뒤꽂이를 꽂으니 제법 깔끔해졌다.
“너는 이미 짝이 있으니 나와 혼례를 맺을 필요가 없어.”
그 사내가 죽었을지 아닐지는 모르겠다. 애초에 남겨진 사람의 삶은 궁금해하지 않는 게 나았다. 살지도 못할 정도로 슬퍼하면 지켜보기 괴로울 뿐이고, 슬퍼한 끝에 자신의 삶을 살아가도 섭섭할 뿐이고, 슬퍼하다가 결국 새로운 연인을 만나면 증오할 뿐이었다.
“가면… 가서 기다리면 만나게 되겠지.”
그 말에 고개를 갸웃하던 새색시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찾는 모양이다. 차사가 이름을 세 번 부르기 전에 도망쳤을 미련 남은 혼백은 그만큼 돌아가는 길이 멀고 흐릿하다.
그래도 알게 되어 있다. 사실은 어디로 가든 그 길이다. 자신이 결심만 하면 되었다.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바로 알 수 있었을까? 그 사실이 놀라우면서도 비량아는 제겐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악하든 선하든 혼백과 닿고 나면 그 죽음을 조금씩 겪었으니까. 어쩌면 자신은 이미 삶보다 삼도천에 더 가까운 상황일지도 모른다.
“가, 이제. 너를 내쫓고 싶진 않다.”
갈 듯 말 듯 망설이던 그가 입술을 벙긋거렸다. 그러나 하는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했고 그나마도 곧 사라졌다. 정말로 천도했는지 아니면 아직도 다른 곳에서 떠돌며 혼례를 올려줄 다른 이를 찾을지는 모르겠으나 일단은 이곳을 떠났다.
비량아는 손가락에서 가물가물 빛나는 가락지를 보았다. 사라질 듯 사라지지 않았다. 고작 이거 하나를 했다고 크게 무겁지도 않았다. 색이 없어 모르겠지만 아마도 옥가락지가 아닐까 싶었다. 푸르고 예쁜… 나뭇잎이 떠다니는 물 위로 햇빛이 비치면 볼 수 있는 색.
* * *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개울로 갔다. 비량아는 오랜만에 씻었다.
엉킨 머리카락을 풀고 몸을 모두 닦는 데 시간이 한참 소요되었다. 중간중간 우뚝 서서 신조를 떠올린 탓도 있을 거다. 물을 끼얹을 때마다 버려졌다는 생각, 끼얹을 때마다 괜히 화를 냈다는 생각, 그리고 또다시 끼얹으며 사과를 해야지 하다가 끝내 그조차 부질없다는 생각.
사과를 하더라도 애초에 그 사과를 들을 사람도 없었다.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자신을 버리고 갔단 생각만이 선명해졌다. 그는 언제고 나를 버리고 갈 수 있으며, 나는 언제고 버려질 수 있으나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차가운 자기 평가가 비량아를 자꾸만 멈추게 했다.
넋이 나갈 때마다 떠올리는 건 원하지도 않는데 베푼 너그러움과, 그로 인해 얻게 된 고통스러운 사흘 낮밤뿐. 그나마 포기한 끝에야 덤덤히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어리석었네.”
작게 푹 꺼진 목소리에 기운이라곤 없었다.
“어리석은 거 맞아.”
자조하며 얼굴을 연거푸 닦아냈다. 가슴에 커다란 들창이 생긴 것처럼 휑하고 추웠다. 가을로 접어드는 절기라 을씨년한 바람이 부는 것과는 달랐다. 이건 속에서부터 이는 바람이었다. 찬바람이 안을 거세게 휘돌며 온몸을 떨리게 한다.
여기서 계속 미련하게 시간을 죽이는 건 더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하면서 비량아가 머리카락을 잡아 비틀었다. 물기를 죽 짜내며 이만 나가려 뒤를 돌아보았다가 우뚝 서고 만 것은, 노들바위 위에 올라선 신조 때문이었다.
돌아왔다.
멋대로 호의를 베풀어 고통만 선사했다가 또 훌쩍 떠나놓고 훌쩍 되돌아왔다. 비량아는 호전적인 자세로 서 있는 신조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
신조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몰랐다. 실은, 그는 바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비량아를 자신의 굴에 누인 뒤 손을 잡고 한참 기다렸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숨이 가빠지고 열이 올랐다.
처음에는 병이 났나 싶었다. 하지만 범신이 병이 난 적이 있던가. 점점 이성이 짧아지고, 식욕 같으나 식욕과는 다른 욕구가 솟구쳤다. 허기를 닮아서 비량아의 온몸에 대고 이며 혀며 갖다 붙이고 싶다가도, 피를 내어 살점을 먹고 싶은 건 또 아니었다. 그래서 급히 굴을 뛰쳐나왔다.
괜찮아진 줄 알았다. 차츰 이성이 돌아오며 몸이 진정되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돌아가서 봐야겠단 것.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비량아의 생각으로 열이 올라 견디기 힘들었으면서도, 열이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한 결심 역시 그를 봐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비량아의 눈빛을 보자마자 그는 도망치고 싶어졌다. 하지만 어디로 간단 말인가? 이곳이 그의 산이고 포식자 역시 자신이어야 마땅한데. 그런데 왜 비량아에게 잡아먹힐 것 같을까. 언제부터 이랬지? 언제부터 우리의 관계가 뒤집혔지?
그의 목울대가 아래로 푹 꺼졌다가 올라왔다. 불편한 속내와 다르게, 비량아의 헐벗은 몸을 보는 시선은 점점 더 열로 끓어올랐다. 열이 식을 때까지 떠나 있었더만 모두 허튼 일이 된 거다.
물은 비량아의 허리까지 가랑가랑 차올랐다. 판판한 가슴과 조붓하지 않고 넓게 펴진 어깨, 단단한 팔과 옆구리 같은 것엔 부드러운 구석이라곤 조금도 없는데 신조는 그 몸에 자신을 파묻고 싶었다.
“다녀오셨어요?”
이번에야말로 제가 먼저 말을 하려 했는데. 어쩌면 사과를 하고 싶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먼저 입을 연 건 비량아였다. 어디 갔었냐고 묻지도 않는다. 신조는 주먹을 꾹 쥐었다. 아주 바보 같고 졸렬하고 유치한 어린애가 된 것만 같다….
비량아는 마치 신조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덤덤하게 개울가로 나왔다. 젖은 몸 위로 속의도 입지 않고 저고리만 둘렀다. 신조는 여전히 그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이전과 달리 그가 자신을 내려보는 자세여도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귀는.”
신조는 여전하다. 제가 묻는 말에는 답하지 않고 시큰둥한 목소리로 본인이 궁금한 거나 물어본다. 대체 저 귀가 얼굴에 달린 귀인지 아니면 귀신 할 때 귀인지 모르겠다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비량아는 고개를 모로 틀었다. 이제는 귀를 만지작거리기만 해도 그 엄청난 고통이 떠올랐다. 내 몸의 한 부분인데도 낯설기만 했다.
비량아가 좀처럼 대답을 하지 않자, 가만히 기다리려 해 봤던 신조가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그러곤 성큼 다가와 귀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손에 창백한 귓바퀴가 닿으려는 순간, 비량아가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손은 허무하게 허공만 어루만졌다. 분위기는 찬물이 아니라 얼음장이 끼얹어진 것처럼 차가워졌다. 냉골이 따로 없다.
“…….”
“…….”
의도치 않았던 터라 저도 모르게 피한 비량아가 오히려 더 당황한 기색이었다. 흘끗 본 신조의 얼굴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날벌레가 손길을 피하는 건 당연하다는 것처럼 말이다. 비량아는 당혹을 거두고 옆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귀.”
그러나 신조가 비량아의 어깨를 거세게 움켜쥐며 자신 쪽으로 당겼다. 그리고 끝내 귀를 만졌다.
“어떠냐고 묻잖아, 내가.”
잡힌 어깨도 무척 아프고 귀도 뜨거웠다. 명치에서부터 답답함이 고였다. 대체 이 작자는 무슨 생각인지 사람을 마구잡이로 가지고 논다. 아니, 생각을 따지는 것부터 어리석나. 가지고 놀고자 하는 것에서 끝나나.
“안 아픕니다.”
비량아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아프다 하더라도, 상관하시겠습니까?”
그러든 말든 어차피 마음대로 했잖아.
“…아프다 하더라도 고쳐 준 건 맞잖아. 다시 들리게 되니 편하지 않냐.”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비량아가 선 곳에 해가 뜨면 그가 선 곳에선 해가 지고, 비량아에게 해가 지면 그에게는 해가 뜨는 정도로 다른 곳이었다.
비량아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허리까지 차오른 게 물이 아니라 허무함 같았다. 목 끝까지 차오른 건 부끄러움이었다. 멋대로 기대해서 멋대로 마음을 이만큼이나 자라게 했구나. 그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언젠가 어두운 밤에 산을 오른 적이 있다. 비량아는 눈이 어두웠고, 신조는 늘 그렇듯 어둠 속에서도 헤매지 않았다. 숨이 가빠오는 와중에도 그를 향해 시선을 떼지 못하자 내가 그리도 좋으냐고 물었다. 좋다고 대답했다. 아마도 숭앙의 의미로 이해했는지 신조는 너털웃음을 뱉으며 나도 네가 좋다, 농담조로 대꾸했다. 그러고는 이렇게도 말했다.
‘괴물들이 나를 따르듯이 너도 나를 따르는 게 이치겠지. 그래도 내가 요즘 귀여워하는 너도 나를 좋아한다니 나쁜 기분은 아니군.’
비량아는 그때도 이미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었다. 좋으냐 물었을 때 얼마나 고민했던가. 예, 좋습니다.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수없이 되뇌다가 겨우 뱉은 말이었다.
이젠 그러지 말아야지.
억지로 시선을 외면하며 옷을 입었다. 안 그래도 헐벗은 기분인데 정말 나체로까지 서 있을 필요는 없었다. 서두른 탓인지 다 입긴 했으나 몸이 젖어서 옷자락이 가볍게 몸에 붙어 있었다.
옷고름을 잡고 우물쭈물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자, 그런 비량아를 보던 신조가 물었다.
“자꾸 내 눈을 피하네.”
“…….”
“고작 마음대로 귀를 고쳤다고, 그것 때문에 이제는… 내가 싫으냐.”
저절로 비웃음이 나오는 소리였다. 비량아는 고개를 옆으로 들며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젠 내가 싫냐고…? 언제는 그런 걸 궁금해 했었다고. 정작 내가 싫다고 했을 땐, 그땐 듣지도 않아 놓고선.
아픔과 외로움에 지친 비량아는 그의 모든 말이 서럽고 원망스러웠다.
“내가 네 귀를 아프게 해서 싫어?”
더 서글픈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량아는 신조가 싫지 않단 점이었다. 원망스럽긴 해도 싫을 이유가 없었다.
결과가 어쨌든 의도는 좋았다. 설령 꺽두가 죽어 무리에게 돌아갈 수 없게 되었어도 비량아는 억지로 욕보이지 않았고, 고통에 사흘 밤낮을 이룰 수가 없게 되었어도 귀가 싹 나았다. 신조는 비량아에게서 하나를 빼앗고 하나를 돌려주었다.
“내가 싫어할 리가 있습니까.”
비량아의 목소리가 힘없었다.
마음을 접기로 했다. 분수에 넘치는 감정을 이제야 깨닫고 포기하기로 했다. 그가 아무리 다정해도, 그 이상을 바라지 않겠다.
그러나 지금까지 품고 있던 것은 마음먹은 대로 끊어지진 않았다. 비량아는 제 의지에 반하여 터지고 마는 고백을 막지 않았다. 차라리 뱉으면 얼마나 보잘것없는 마음이었는지 깨닫고 끝내 버리게 될 것이다…. 어차피 자신에게만 소중했던 마음이다. 어차피 그에게 줘 버린 마음이다. 흘러나오는 목소리 끝은 떨렸고 목은 메었다.
“내가 이토록 좋아했는데.”
잔뜩 일그러진 채 저를 향해 돌아보는 얼굴을 보고 신조는 숨도 쉴 수 없었다.
“내가 이렇게 당신을 연모했는데. 싫어할 수 있을 리가.”
이렇게… 고백을 할 생각은 없었다. 우리가 전혀 다른 존재인 걸 아니까, 더욱 할 생각이 없었다. 평생 숨기려면 숨길 수도 있었다. 설령 그 마음이 끝내 녹슨 칼이 되어 몸을 모두 썩게 만들지라도 영영 품고 살려고 했는데. 이러니까 사람인 모양이다. 이러니까 한낱 버러지밖에 안 되는 모양이다.
“내가 당신을… 마음에 품은 지 오래되었는데….”
기운 없이 떨구어진 머리를 보며 신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흉골 속에 풍랑이 일었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고 또 동시에 써늘해졌다. 모두 과거의 일이 된 것처럼 말하는 게 신조를 두렵게 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라.”
신조는 저도 모르게 사납게 지껄이고 말았다.
“그렇게… 다 끝난 것처럼 말하지 말라고.”
제 목소리와 말투가 다급한 줄도 모르고 신조는 빠르게 쏟아냈다. 가믄장아기가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저게 애원이라는 걸 알았을 테지만, 그는 신조가 일찍이 내쫓아서 없었다.
비량아는 헛웃음이 나왔다. 제법 웃기는 소리가 아닌가. 변하는 게 싫다고 이대로 있자고 하더니, 이제는 제 마음도 끝내지 말라고 한다.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에요. 왜 모르십니까. 이렇게 말한다 한들, 내 마음이 끝나지도 않는데… 그런 마음이라도 당신에겐 아무런 의미도 되지 못할 텐데…!”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이 떠오른다. 아들이 이미 죽은 줄도 모르고 웃지 않는다는 이유로 광대패를 부르던 어머니가 있는 저택…. 그곳에서 당신에게 들키지 말았어야 했는데. 당신이 나를 알아보았나 묻더라도 모르는 척해야 했는데. 마음이 없는 사내인 걸 알고도 쫓아온 내 잘못이던가.
자식이 죽은 것도 모르고 그 아이의 웃음을 보겠다던 어미의 마음이 어리석다 하던 이의 눈에는, 제 마음도 어리석을까….
“제 마음도….”
비량아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목소리가 녹녹히 젖어 든다.
“제 마음도 어리석어 보이세요…?”
비량아는 신조에 대한 원망이 생기는 게 싫었다. 그를 미워하고 싶지는 않았다. 첫 연정을 미움으로 기억하고 싶은 이는 아무도 없을 거다. 그냥 지나가야지, 지나가야지…. 그렇게 흘려 버리듯 이곳을 벗어나려 했다.
그런데 멀어지는 비량아의 팔을 신조가 잡아챘다. 그 힘에도 비량아는 돌아보지 않았다. 저번에도 가란 말도 하지 않았는데 먼저 돌아섰다고 화를 냈었으니 이번에도 그럴 수 있다 여겼다.
한편 범신은 비량아의 등을 보고 있자니 막막하고 도무지 그 속을 알 수 없었다. 보통 등을 보이는 건 그였다. 범신이 잡은 손목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네가 말하는 마음이 그래, 나는 뭔지 모르겠어. 어리석어 보이냐고? 모르겠다. 생각도 안 해 봤어. 네가 나를 연모한다, 그런 상황은 생각해 본 적도 없다고! 그냥 지금은 너를 보내주기가 싫다. 그거면 안 되는 거야?”
그 말에 비량아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더없이 다정하면서도 한없이 이기적이고…. 천천히 비량아가 몸을 돌렸다. 마주친 얼굴에 범신은 조금 놀라고 말았다. 울 것처럼 새빨개진 눈과 정작 고이지 않는 눈물이 그의 심정을 쿵 떨어트렸다. 있는 줄도 몰랐던 마음이다.
“왜 매번 이런 식입니까? 매번, 사람을 다정함에 흠뻑 젖도록 했다가 갑자기 뙤약볕에 내쳐두는 듯 버려두고, 얼음장에 밀었다가 다시 꺼내서 껴안아 녹이는 것처럼. 매번 이러시는 이유가 뭡니까. 무서워요. 무섭습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마음이 바뀌어 영영 귀를 멀게 할지도 모른다 하셨듯이, 날이 바뀌면 네가 질렸으니 꺼지라고 할까 봐서요! 아니면 나흘간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던 것처럼, 어느 날 나를 버리고 떠나실까 봐요!”
비량아의 입으로 듣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모두 낯설었다. 누굴 말하는 거지? 정말 저 이야기가 날 말하는 게 맞나. 낯설고 낯설었다. 게다가 나흘이나 지났다니. 나흘이나 지났다고…?
신조는 저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아직 몰랐다. 수면에 비치는 게 아무것도 없듯이 그라는 존재를 알게 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몰랐던 이야기, 처음으로 직면하는 원망, 서러움에 범신은 서릿발을 맞는 것만 같았다.
“변화가 두려우시다고요. 그러면 처음부터 저를 데려오지 마셨어야지요. 누군가를 들이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기를 바라셨습니까? 쑥과 마늘을 오십 일간 먹고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기대했습니까? 아니면, 무슨 일이 일어나길 바라지만 동시에 일어나는 게 무서웠나요.”
“너…!”
쑥과 마늘은 범신들에게 역린이었다. 비량아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상처를 주려던 게 아니었다.
“그저 심심하니 저에게 잘해 주셨겠지요. 네, 압니다. 저 혼자 멋대로 착각하고 멋대로 마음을 키운 것. 하지만 세간 사람들은, 당신의 눈에는 하찮기 짝이 없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모르고 한 일 역시 죄라고 합니다. 아십니까, 때론 무지도 죄입니다….”
사실은 다른 말을 하려고 했다.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하려 했는데…. 숨이 막혔다. 비량아는 얼굴을 감쌌다. 두 손으로 감싸고 고개를 쳐든 채 가슴을 들썩였다.
“저는 당신에게 순간밖에는 되지 않을 테지만….”
“…….”
범신의 손이 크게 움찔하였다. 들을 줄 모르고 한 말이, 그가 지껄인 말이 비량아의 입을 통해 나오고 있었다. 이런 내용이었던가. 이렇게 모질고 차가운 말이었나.
“그 순간이 저에게는 전부인 걸 왜 몰라주십니까….”
“그건…!”
다급히 입은 열었으나 변명할 게 있을 리 없었다. 그 순간에는 그게 진심이라 믿고 뱉은 말이었으니.
“가진 것이라곤 이 몸뚱아리 하나뿐이라… 제 전부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마음마저 줘 버렸다. 남은 건 정말 몸뿐이었다. 텅 빈 껍질이나마 지키고 싶었다. 그에겐 어차피 찰나일 제 평생을 줄 수 없었다. 너무나 비참하고, 너무나 외롭지 않은가. 바다로 사라진 제 아비보다 더 쓸쓸한 죽음이겠지.
“떠나겠습니다.”
그러니 떠나야겠다. 이미 줘 버린 마음을 되찾을 순 없어도 그곳에서 새 마음은 키울 수 있을 거다. 그러지 못하더라도, 껍질만은 제 것인 채 죽을 수 있을 거다.
“…….”
“떠나게 해 주세요. 더는 제가… 제 마음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저 누군가에게 찰나로 살다 잊혀지고 싶진 않습니다.”
비량아의 얼굴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차분해지는 게 아니라 식는 것이 눈앞에 선명하게 보였다. 혈색을 잃고 감정을 침잠시키는 얼굴에 신조는 소스라치는 섬뜩함을 느꼈다.
“이만 저도… 저와 비슷한 이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연심을 품어도 되는 곳으로 가면 당신이 잊혀질까요.
그렇진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정말 운이 따라주면 누군가와 살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살다 보면, 그러다 보면 이토록 숨도 못 쉴 만큼 괴로운 일도 과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
“허락해 주세요.”
“…내 허락이 필요하긴 하냐.”
이미 마음을 다 정해 놓고. 나는 하루인 줄 알았던 나흘이 가는 동안 네가 보고 싶다는 생각만 했는데. 그저 널 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는데, 너는 그동안 나를 떠나야겠단 마음만 먹고 있었구나.
“보내 주시면….”
“…….”
“우리는 다시는 변할 일이 없겠지요.”
당신이 바라던 대로.
비량아는 뒷말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떨구고 모로 돌렸다.
범신은 저를 외면하는 모습에 목이 탔다. 붙잡고 싶다. 가지 말라고 하고 싶다. 두려우니 여기 있으라고. 내가 너를 만나 어떻게 변할지 두려운데, 네가 떠나는 건 더욱 두렵다고 말해.
하지만 입은 열리지 않고 주먹은 세게 쥐어질 뿐이었다. 열이 식지 않는다. 폭력을 저지르고 싶다. 익히 잘해 오던 짓을 하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간 비량아는 죽겠지. 사람은 쉽게 죽으니까.
“그 찰나라도… 내 곁에서 마지막까지 있으라고 하면?”
“…제게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굴지 마세요.”
비량아는 힘없이 웃었다. 신조는 주먹을 움켜쥔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 사이로 위태로운 침묵이 흘렀다. 비량아로부터 신조에게로 바람이 분다. 떠밀리듯, 비량아가 저에게 허릴 굽혀 인사를 했다. 불어오는 바람에 향기가 실려 온다. 본래 나던 체향이 평소보다 진하게 풍겼다. 머리가 벌겋게 익는 것만 같았다.
오래된 이야기 중 거대한 거북의 다리를 잘라 하늘의 네 귀퉁이를 받치게 했다는 내용이 있다. 신조는 그 말을 믿지 않았으나, 이 순간 거북이의 오금이 썰리기라도 했나 싶을 정도로 세상이 거세게 뒤집혔다.
비량아가 나를 먼저 떠난다.
그의 생이 저에 비하면 하찮으리만큼 짧으니 먼저 떠나보내리란 건 알았지만, 이런 방식일 줄은 몰랐다. 처음 억새밭에서 주웠을 땐 금방 싫증이 나 내보내지 않을까 하던 그였으나 어느덧 비량아가 끝까지 저와 함께 있으리라 여겼던 거다. 너무나 당연하게. 이렇게 아무런 변화도 없이, 지금처럼만….
‘내가 이렇게 당신을 연모했는데.’
연모한다는 말이 그의 안으로 들어와 흉곽 안을 두들겨 깨웠다. 그리고 뿌리를 내려 싹을 틔웠다. 그러나 그것과 직면하려는 순간 다시는 말하지 않겠다는 말이, 그 무엇보다도 말할 생각이 없었다는 게 그를 사납게 짓눌렀다.
마지막으로는 떠나겠다는 말.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얼굴을 성기게 감싸고 있던 신조가 갑자기 눈을 치떴다.
그를 이대로 보내줄까 생각도 해봤다. 아주 잠시.
그러나 저와 비슷한 이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그를 돌려보낼 수가 없다. 너처럼 찰나를 살 이들에게 보낼 수 없었다. 네 평생을, 다른 이의 평생과 엮게 둘 리가 없다. 내가 너에게 그런 걸 허락할 리 없다. 내겐 순간이어도, 그게 네 전부라면 모두 내 것이어야지.
다시 달래보자. 달래고 어르면 여느 때처럼 웃으며 날 부를 것이다.
“비량아.”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열기가 가득했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처음 비량아가 그를 알아본 순간부터, 그를 알아본 비량아를 범신이 알아본 순간부터. 홀로 있던 세상에 너라는 다른 존재가 나타난 순간부터.
거칠게 박차고 떠나는 신조의 모습이 수면 위로 어룽졌다. 그중 손바닥으로 뭉갠 것처럼 잘 보이지 않던 얼굴 부분이 평소보다 또렷한 듯도 했으나, 그걸 눈치챌 이는 이미 이 자리에 없었다.
다음 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