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2화 (11/21)

  4. (2)

어차피 챙길 짐도 없었다. 비량아는 그저 입고 있던 옷가지만 한 번 살피고 굴을 떠났다. 내려오는 길은 이제 익숙하고도 남았다. 본래 오를 때보다 내려가는 길이 빠른 법이다.

일찍이 떠나야 맞았다. 너무 오랜 시간 자리를 뭉개고 있었다. 언젠간 떠날 것이라 생각했기에 마음을 말할 생각도 없었다. 어차피 제가 떠나고 나면 그는 금세 자신을 잊고 말 게 분명했으니까. 그랬는데.

“바보같이!”

비량아가 스스로에게 욕을 씹어뱉었다.

“아둔한… 멍청이. 어리석기 짝이 없어. 대체 왜 참지 못하고 그 말을…!”

어차피 이리 떠나게 될 거라면, 끝까지 말하지 말지. 끝까지 숨기지…. 게다가 고백은 볼품없었다. 추궁 끝에 토로한 꼴이었다. 그러니 제 첫 연정의 끝은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볼품없는 고백이 된 셈이다.

“비량아!”

서둘러 떠나려는 비량아의 뒤로, 아니, 사방으로 쩌렁쩌렁한 소리가 터졌다. 범의 울음과도 비슷해 울창한 나뭇가지와 나뭇잎 겹겹이 비벼대며 더 넓게 퍼지게 하는 그 고성에 비량아가 몸을 웅크렸다.

저절로 마음이 급해졌지만, 지금 달린다 하더라도 붙잡힐 건 자명했다. 쓸데없는 헛수고를 하느니 비량아는 잠시 멈췄다. 역시나 헐떡이는 기색도 없이 신조는 순식간에 비량아의 뒤까지 쫓아왔다. 

비량아는 그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보고는 정작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있던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말씀이 없으셔서, 허락으로 여겼습니다.”

말끝이 흐려졌다.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서 비량아는 시선을 조금 돌리고 중얼거렸다.

“그럼, 괜찮으시다면 허락하신 줄로 알아도 될까요. …제발요.”

“아냐, 그게 아니라…!”

조급함에 신조가 비량아의 손목을 움켜선 당겼다. 거센 손짓에 휘청인 비량아가 균형을 잃고 앞으로 비틀거렸다.

그런 그를 붙잡고 신조는 말하려고 했다. 저 역시 설명하기 어렵고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난해하지만, 떠나진 말라고. 놓아줄 생각은 없지만, 너의 위협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비록 누군가에겐 호환이라 불리는 재액일지라도 너에겐 늘 구원이고 싶다고….

그런데 그 순간 보인 것은 비량아의 검지에 끼워진 옥가락지였다.

“…이게 뭐지.”

비량아는 난처한 눈을 했다. 그리고 왜 난처해졌는지, 왜 갑자기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지도 모르는 채 손을 당기려고 했다. 그게 잡힌 걸 빼려고 하려는 행동이든 숨기려고 그러는 거든, 이미 비틀린 신조의 심기를 건드리기에는 충분했다.

“이게 뭐야.”

이를 악문 목소리가 아주 낮고 음울했다. 마침 둘을 감싼 공기가 무척 습해졌다. 주변 나무들은 몸을 웅크리며 소소소 나뭇잎끼리 떨어댔다. 날은 순식간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애초에 오늘따라 구름이 많아 흐리던 차였다.

“너… 이게 뭐냐고 물었다.”

“…미련이 남은 혼을 봤습니다. 혼례를 부탁했지만, 그것까진 안 된다고 하는 대신 가락지만 받은 것뿐입니다.”

“네가 왜.”

신조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까지 그렇게까지 해 줬던 적 없잖아.”

“어리고 안쓰러웠습니다. 혼례복까지 입은 채였고….”

“그게 특별했어?”

“…불쌍했습니다.”

사실 그 모습에서 자신을 봤단 이야기는 숨겼다.

팽팽한 침묵이 이어졌다. 물에 적신 가죽을 목에 감고 뙤약볕에 말리는 것처럼 점점 쪼그라들어 곧 목젖까지 짓누를 것 같았다.

“고작 그 이유로…?”

위협에서 구해준 것도 아니고, 다친 것을 낫게 해 준 것도 아닌, 고작 그 이유라는 게 믿을 수 없었다. 어르고 달래보자 했다. 그런데 고작 잡귀 하나가… 고작 잡귀가 비량아의 몸에 제 흔적을 남겼다. 이토록 쉽게.

잠시 멈추었던 최초의 발정기는 변덕스레 들끓었다. 태어나서 처음 하는 질투는 발정열과 함께 이성을 야금야금 녹였다. 비량아의 잡힌 손목으로도 그 열기가 여실히 느껴졌다. 손아귀 힘이 더욱 세지고도 있었다. 비량아가 고통에 얼굴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나도 네게 불쌍해 보여야 할까.”

“무슨, 말씀을….”

“고작 불쌍하단 이유로 영영 사라지지 않을 가락지 자국을 몸에 남긴 너이니, 내가 불쌍해 보이면 떠나지 않겠지. 어찌해야 하나, 그리 보이려면.”

“아닙니다. 제가, 제가 떠나는 건… 제가 견딜 수가 없어서….”

“…견딜 수가 없다고.”

중얼거리는 범신의 눈이 풀려 있었다. 열에 들끓고 생애 첫 투기심에 젖은 그는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안 된다, 떠나겠다는 말만 주박처럼 그를 옥죄었다.

“네가 나를 그 잡귀보다 못한 존재로 만드는군.”

“아니, 잠시… 잠시 이것 좀 놓아 주십시오.”

“나를 떠나 또 불쌍하고 안쓰러운 것을 만나면, 그때도 이렇게 가락지를 내게 끼우시오, 할 것이냐?”

숨이 턱 막히는 시선이었다.

“아니면, 누군가 너를 보고 불쌍하고 안쓰럽다 여겨 가락지를 달라 할 수도 있겠지.”

너는 내 눈에만 어여쁜 게 아닐 테니까.

범신이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었다. 비량아의 입술 사이로 절로 신음 소리가 나왔다. 범신의 윽박지르는 말에 비량아는 서럽고 억울해졌다. 그래서 그럴 맘도 없으면서 되물었다.

“그러면, 윽, 그러면 안 됩니까?!”

“…그렇군.”

조용한 읊조림 뒤에 불길한 음산함이 이어졌다. 신조는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군.”

“이, 손목 좀….”

“비량아.”

신조가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리고 조용히 웃었다. 비량아는 그 광기 어린 미소에 더해 사납게 뾰족해진 송곳니와 이채 어린 눈동자를 알아봤다.

“마음을 바꿨다.”

“…네?”

“너를 보내줄 수가 없겠어.”

“갑자기 무슨….”

“그리고 내 결정에 네 의사는 중요하지 않아.”

앞에 있던 아름다운 사내는 순식간에 아름다운 짐승이 되었다. 커다란 짐승이 비량아를 물어 제 등 위로 던졌다. 가볍게 물어 다친 곳은 없으나 갑자기 짧게 목이 졸린 것과 같아서 정신이 아찔하였다. 창귀, 창귀가 되는 것만 같은 아찔함이었다.

내려왔던 노력이 무색하게 순식간에 굴 앞으로 되돌아왔다.

신조는 비량아를 굴 입구에 떨어뜨리고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러곤 비량아의 옷깃 안으로 손을 넣었다. 갑자기 손이 들어오자 비량아가 헉, 숨을 들이켰다. 그동안 하늘은 구물거리며 멋대로 울상을 짓고 있었다. 

“내게 가락지를 끼워다오. 내 눈에 너는 처음부터 불쌍하고 안쓰러웠으니, 나에게 네 것을 줘.”

그 순간 번개가 쳤다. 순식간에 반짝였던 신조의 안광이 섬뜩할 정도로 형형하여 비량아는 멋대로 뒤로 물러나듯 엉덩이를 밀고 말았다. 하지만 더 어디로 간단 말인가. 뒤로 갈수록 굴의 아가리에만 가까워졌다.

“가, 가락지 같은 건 없습니다.”

비량아는 앞섶을 여미며 헐떡였다. 무릎으로 선 신조가 음울한 미소를 띠었다.

“없다면 내가 네게 주마.”

신조는 제 옷고름을 풀었다. 습한 공기에 고름이 축 늘어진다. 번들거리는 앞가슴이 드러났다.

“처음 봤을 때도 네 주변에는 너를 욕정하는 사내가 있었지.”

“아니, 그건….”

“이제는 잡귀도 너를 탐하는구나.”

서늘한 목소리와 달리, 신조에게선 이만큼이나 멀리 떨어졌는데도 느껴지는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신조가 조용히 목을 좌우로 기울였다. 그럴 때마다 어깨와 목으로 이어지는 곳에서 뚜득 소리가 났다. 거의 동시에 천지를 울리는 천둥소리가 났다. 땅이 울릴 정도의 굉음에 산은 고요해졌다. 산 것이라곤 그들만 남은 것처럼, 무덤처럼 고요하다.

“이제 보니… 나만 너를 탐하고 있진 않은 것 같아.”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빗방울은 아주 차갑고 무거웠다. 피부 위로 하나둘 묵직하게 떨어질 때마다 비량아가 움찔움찔 떨었다. 뭔가 이상하다. 사내가 그 어느 때보다 낯설었다. 짐승의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건 알았어도, 오늘처럼 사람의 모습인데 짐승 그 자체로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그 벌레와도 같던 놈보다, 잡귀보다 내가 못 할 수야 없잖으냐. 적어도 그 버러지처럼 네 가슴이라도 쥐어 보고.”

동시에 비량아의 가슴이 세게 움켜쥐어졌다. 숨통이 턱 막혔다.

“네 몸에 징표라도 남겨야 하지 않겠어, 비량아.”

동시에 비량아의 가락지가 있던 검지를 쥐었다. 불이 붙은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비량아의 울음은 빗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참으로 우악스럽게도 내린다.

이윽고 손이 떨어지고, 남은 것은 가락지처럼 검지를 동그랗게 감싸고 있는 아주 섬세하고 작은 덩굴무늬의 화상이었다. 비량아가 눈물과 빗물에 젖어 헐떡이며 신조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는 원망과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그딴 가락지보다 더 오래 남을 징표란다. 네 마음에 들어찼으면 좋겠는데….”

“흐, 흐윽. 흑, 아, 아파….”

비량아의 흐느끼는 듯한 울음 소리는 장대비 소리에 묻혔다. 살이 탄 냄새 대신 피어오르는 물안개, 땅에서부터 올라오는 흙냄새 속에서 은은하게 피 냄새가 났다. 이 냄새를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울지 마.”

“흐윽…!”

“내게서 떠나지 못해 슬퍼?”

“…….”

“왜 나한테서 떠나려 했어?”

가증스러운 말투. 어린애처럼 순진무구하게 물으며 눈물을 훔쳐 준다. 비량아는 저를 바라보는 샛노란 눈동자를 보며 범신이 짐승이나 마찬가지란 걸 깨달았다. 제가 아무리 말한 한들 이해하지 못하리란 것도.

기다려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범신이 찰나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쩐지 우는 것만 같으나 그럴 리 없다. 범신은 울지 않는다. 울지 못한다.

“나를 연모한다면서. 그런데 왜 나를 떠나려고 해….”

연모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사내가 묻는다. 그 말에 비량아의 울음이 더 거세진다. 몸의 아픔보다 이미 줘 버려 제 것이 아닌 마음이 훨씬 아팠다.

“가지 마라, 비량아.”

차분한 목소리와 다르게 안광이 형형하였다. 도리어 차분해서 더 두려웠다.

“이제는 상관없어. 네가 변하든 내가 변하든. 네가 나를 변하게 하든.”

비는 오래도록 멈추지 않을 것 같다. 차가운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데도 손가락은 타들어 갈 것처럼 아팠다. 그래서 그런지 바다, 바다가 그립다.

아버지가 사라진 이후로 단 한 번도 그립지 않던 풍경을 떠올리던 비량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예감은 불행에 더 기민하게 반응했고, 틀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비가 바늘처럼 머리로 쏟아졌다.

“그러니 변해 보지. 네가 바라는 대로.”

그리고 신조가 비량아에게 달려들었다. 마을 안에서 그를 낚아챘던 것처럼.

늦여름의 장대비 속에서 비량아는 그만 불에 삼켜지는 것만 같았다.

* * *

이후의 기억이 흐릿하다. 불덩이에 몸이 녹는 것처럼 아팠다. 비량아는 자신이 뱉는 신음이 그저 남의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아래는 아예 감각이 없었다. 그냥 하체가 사라진 것만 같았다. 없는 곳에서 통증이 느껴진다. 사라졌나 싶은 곳이 아프다.

“아악…! 악, 하악…!”

목에서 피 맛이 났다. 바닥을 긁던 손톱이 으깨져서 그곳에서도 피 냄새가 났다. 아래에서도 피 냄새가 난다. 그리고 비량아를 껴안고 있는 사내에게서도 그 냄새가 났다. 욕지기가 올라왔다.

눈앞에는 달처럼 둥근 눈알 두 개가 집요하게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손을 뻗어 앞에 있는 사내의 목을 조르려고 하자, 노끈보다 두툼하고 단단한 것이 뱀처럼 올라와 비량아의 손목을 단단히 옥죄었다. 그것이 꼬리라는 건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비량아.”

거친 목소리는 짐승 울음소리와 섞여 기괴하게 들렸다. 비량아는 한껏 벌어진 다리 사이가 아파서 울었다. 다리 사이에 있는 구멍이 아파서 울었다. 그곳이 이렇게 쓰일 줄은 진작 알았으나 직접 경험한 건 처음이었다.

신조는 우악스럽게 손가락으로 대강 푼 뒤 성급하게 삽입했다. 그는 미친 것만 같았다. 아니, 지금도 분명 미쳐 있다.

“아, 아파… 아파….”

우는 소리를 거의 하지 않는 비량아가 소리 내어 울었다.

“아파… 살려주, 세요….”

수치심도 없이 애원도 쉽게 나왔다. 굴 바깥에선 비량아가 불러들인 혼백들이 모여 한껏 괴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평소라면 내쫓을 터인 신조는 지금은 이성을 잃어 그것들을 눈치채지도 못한 것 같았다.

비량아의 고백이 심겨져 있던 줄도 몰랐던 신조의 마음속 씨앗을 틔웠다. 씨앗은 열을 내며 자란다. 껍질을 깨고 새싹이 될 때는 엄청난 열이 난다. 신조의 몸은 열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의 첫 발정기는 첫 연정을 엉망으로 만드는 줄도 모르고 마구 뻗어 나왔다. 이미 그의 실수는 습관이 되어 있었다.

“비량아… 내 곁에 있어.”

송곳니 역시 뾰족하게 올라왔다. 그것이 비량아의 손목과 가슴을 마구 긁었다. 옷도 다 벗기지 않고 치러지는 일은 수치에 수치를 더했다.

비량아는 묶인 손목을 마구 비틀었다. 그의 꼬리를 깨물기도 했으나 오히려 신조의 흥분을 돋우는 것밖엔 되지 않았다. 안쪽에 박힌 것이 더욱 단단해졌다. 뼈가 든 것처럼 억세고 두꺼웠다. 고통을 견디다 못해 비량아의 눈이 눈꺼풀 뒤로 가물가물 넘어갔다 돌아오길 반복했다.

“하악!”

기절하려 치면 신조는 허릿골이 깊게 패일 정도로 박아넣었다. 배꼽 위로 튀어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두려웠다. 비량아는 눈물을 쉼 없이 흘렸다. 그 때문에 목이 마른 걸까. 입은 바싹바싹 말랐다.

“진작 이렇게 할걸….”

자신이 무어라 중얼거리는 줄도 모르고 신조가 열에 달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흘을 삭여도 해갈되지 않던 열이 비량아를 안으니 가라앉기 시작한다. 그러나 여전히 부족했다. 채워지지 않고 더 원하게만 된다. 닿아도 닿아도 부족했다.

“진작… 이렇게 하는 게 맞았어.”

그는 황홀했고 비량아는 고통스러웠다. 저에게 고통을 주는, 흥분에 절어 제게 파고드는 상대가 누구인지 낯설었다.

점점 몸이 내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 즈음, 신조가 첫 번째 파정을 했다. 그 감각은 더더욱 생경했다. 굴 바깥에서 귀신들이 악다구니를 썼다. 그리고 마침내 비량아의 눈이 텅 빈 것처럼 공허해질 때, 그것들이 안으로 모두 몰려왔다.

신조는 자신이 넋이 나가 이것들이 몰려온 줄도 몰랐단 사실에 당황했다. 비량아의 손목을 감싸고 있던 꼬리를 풀어 휘두르자 그것들 비명을 지르면서 우수수 사라졌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몇은 간신히 비량아의 몸으로 들어갔고, 비량아는 그들의 죽음을 체험하며 동시에 그들의 도움으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비량아…!”

쥐떼처럼 몰려드는 걸 손으로 마구 찢던 신조가 외쳤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던 짐승 꼴과 거의 비슷했다. 꼬리와 긴 이빨, 눈빛과 짧아진 인내심이 그랬다.

비량아는 엉망인 옷을 움켜쥐고 굴 입구를 향해 뛰었다. 다리 사이로 피가 섞인 정액이 흘렀다. 그러나 다행인지 아닌지 아래에 감각이 거의 없어져서 그런 건 신경 쓰이지 않았다.

“빨리. 더 빨리….”

얼마든지 내 몸을 오가도 좋으니까 내가 너희를 쓰게 해 달라고 빌었다. 비량아가 처음으로 귀들을 사적으로 이용한 순간이었다. 발에 날개가 달린 것처럼 가벼워졌다.

그리고 드디어 굴 밖으로 나오자마자, 우레 같은 굉음이 들렸다. 천둥이었다. 폭우가 쏟아져서 그 어떤 대화도 불가능하게 했다. 오히려 잘되었다 싶은 참이었다.

그렇게 아래로 내달리려는 순간, 비량아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내가.”

몸에 상처 하나 남지 않은 신조가 젖기 시작한 머리를 쓸어넘기며 다가왔다.

“귀신들의 왕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빳빳하게 굳어서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비량아를 받아 억지로 품에 넣고는 얼굴을 들어 눈을 마주치게 했다. 비량아의 주변에 몰려들었던 것들이 순식간에 날아간다. 도망은 찰나였고, 노력은 차마 가상하지도 않았다.

“내가 괴물들의 스승이라고도 했잖아.”

“…흐윽.”

“네가 배운 모든 것은 내가 가르친 거지, 비량아.”

비량아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 우는 모습이 처연하다 못해 비량아를 몹시도 어려 보이게 만들었다.

비가 쏟아지는 신조의 몸에서는 김이 났다. 열기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머릿속이 녹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비량아의 몸은 한층 더 차가워져 있었고. 음기를 한껏 운용한 몸이 신조의 몸에 딱 맞는 체온으로 그의 숨통이 되었다.

“내가 너를 구한 순간부터 아니, 네가 나를 알아본 순간부터 넌 내 것이었잖아.”

비량아의 표정이 천천히 스러졌다.

“…알아보지 말걸.”

“…….”

“그냥 널 알아보지 말걸.”

“너….”

“지금 내 눈에 네가 어떻게 보이는 줄 알아…? 내가 널 어떻게 알아보는지 아냐구….”

비량아의 목소리가 찢어지기 쉬운 종이처럼 흠뻑 젖었다. 눈에는 핏발이 섰다.

“내 눈에 비친 네 모습이 얼마나 짐승 같은지 봐….”

이렇게 말하면 신조가 제정신을 차리고 돌아올 줄 알았던 걸까. 아니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니라 악수가 되더라도 그저 상처를 주고 싶었던 걸까.

이제 어떤 거든 상관없었다. 비량아는 몹시 피로했고 너무 많이 아팠다. 이대로 눈을 감고 싶었지만, 신조가 자신의 눈을 통해 제 모습을 보았으면 해서 겨우겨우 홉떴다.

한참 비량아의 눈을 보던 신조가 뇌까렸다.

“그래. 네 눈에 이제 나는 짐승 새끼인 모양이군.”

“…….”

“그럼 너는 짐승의 짝이 되는 거다. 짐승과 흘레붙는 기분이 어떤지 나한테도 말해다오.”

비량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 자는 맛이 갔다. 미쳐버렸다! 비량아가 또다시 귀신들을 불러냈으나 신조는 그것들을 발바닥으로 지근지근 밟았다.

“내가 변하지 않아서, 내가 솔직하지 못해서 네가 떠났다면. 그럼 내가 변하도록 하지.”

가뿐하게 비량아를 들어 올린 신조가 다시 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우레가 천지에 진동을 하였다.

“잡귀에게까지 나눠줄 헐값의 다정함이라면, 그 역시 내가 갖도록 하고.”

“…나, 나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나를 연모하지도 않으면서…!”

“마음이 그렇게 중요한가?”

신조의 머릿속에 한 번이라도 들어갈 수 있었다면. 비량아는 신조를 제대로 봤다. 그는 미쳐 있었다. 그저 이 열을 해소하고 싶었고, 비량아와 더 닿고 싶었고, 이어지고 싶었고, 비량아를 영영 떠나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까짓 마음이 그토록 중요한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것이, 정작 저는 이해도 못 하고 알지도 못하는 그 추상적인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

“네게 그까짓 게 그토록 중요하다면, 그래. 내가 널 연모한다.”

그런데 왜, 그 눈에 보이지도 않고 이해도 되지 않는 것을 말로 뱉는 순간 이토록 고통스러울까. 흉골 안에 사금파리가 들어찬 것처럼 걸을 때마다, 숨을 쉴 때마다 아팠다.

하지만 비량아보다 아프진 않았을 거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비량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그까짓 거. 거렁뱅이에게 적선하듯 줄 수 있는 말. 비량아의 연정은 이제 적선보다 못하게 되었다.

“그러면 되냐.”

같은 땅 위에 있다고 같은 마음을 품는 건 아니다. 신조는 열에 들끓는 채로 풋정에 빠진 소년처럼 어리숙하게 굴었다. 입술을 혀로 축이고 초조하게 물었다. 어째서인지 말할수록 오히려 자신이 휘둘리는 것 같은 말을.

“널 연모한다.”

왜 이 말을 할수록… 수렁에 빠지는 것 같을까.

“널 연모해…. 이 말이면 되는 거냐.”

수렁에 빠지는 것 같을수록 왜… 나는 황홀한지.

비량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들을수록 마음이 닫혔다.

“…마음대로 해.”

기가 잔뜩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린 비량아의 팔다리가 축 늘어졌다. 

“네 마음대로 해…. 어차피 그럴 거잖아.”

어차피 그랬고.

한번 찢어진 나뭇잎은 다시 붙일 수 없고, 흐르기 시작한 물을 막을 방법은 없다. 비량아는 속으로 수없이 뇌까렸다. 어리석고, 어리석은. 바보 같은 비량아.

신조는 불안감을 느꼈지만, 그보다는 이지를 망가뜨릴 정도로 솟구치는 열이 더 강했다. 비량아는 영영 모르겠으나 신조에게는 이것이 첫 경험이었다. 신조는 모르겠으나 이것은 신조의 첫 연정이었다.

“네 마음대로 해….”

비량아가 눈을 감았다. 감긴 눈꼬리로 눈물이 흘러도 이미 몸이 흠뻑 젖었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지 마….”

불안감에 찬 목소리가 거친 숨에 섞여 흩어졌다.

“그런 식으로 말하진 마. 원하는 말을 해 줬잖아….”

어쩌라는 걸까. 비량아가 피식 웃었다. 이 상황에 안아 주기라도 하라는 걸까. 그런 걸 바라는 걸까.

아, 그냥 가슴이 송두리째 뜯겼으면 좋겠다. 이 사내가 완전히 짐승이 되어서, 식욕에 잠식되어 그냥 내 가슴을 뜯어먹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그 마음은 먹을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해서 삼키지 않으려나.

“비량아…. 비량아. 연모한다고 할게….”

어느 샌가부터 진심처럼 중얼거리는 이는 그까짓 마음 말해 주겠다던 사내고, 입술이 밀랍에 봉해진 것처럼 열리지 않는 건 진심으로 연모한다던 비량아였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소중히 간직하던 마음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가진, 유일한 값진 것이었다. 남들은, 심지어 범신조차 헐값 취급하는 마음일지라도 그에겐 무엇보다 빛나던 것이었다.

그래서 실은 감히 이 마음을 그에게도 전하고 싶었다. 대화를 훔쳐 듣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고백할 수도 있었을 거다. 제가 달만큼 당신을 좋아합니다…. 언젠가 저에게 달이 좋냐고 물었을 때처럼 나를 좋아하냐고 물어주세요. 그러면 응당 달만큼, 아니 달보다 좋아한다고 말할게요.

하지만 다 쓸데없는 일이었다. 그냥 부끄러울 뿐이었다. 멋대로 착각하고 멋대로 기대하다 끝내 이렇게 된 게.

“비량아….”

너에게 날 새기고 싶다며 뇌까리는 목소리를 들으니 더욱 혼란스럽다. 누가 누구에게 마음을 구걸하는 걸까.

* * *

사흘, 어쩌면 나흘.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겠다. 비량아의 몸은 넝마가 되었다. 신조는 정말 말 그대로 짐승처럼 그리고 괴물처럼 비량아를 삼켰다. 흥분이 가시지 않는지 자꾸만 다리를 벌리고 들어왔다.

더 괴로운 건 그가 자꾸만 자신을 치료했다는 사실이었다. 귀를 낫게 해 줬을 때처럼 아래를 낫게 하는 건 고통스러웠다. 살이 찢어지는 고통이 고스란히 돌아왔다.

비량아는 고문 같은 행위 속에서 거짓말로 쾌감을 말하게 되었다. 좋다고 하면 약간이나마 부드럽게 하니까. 좋으니 안아 달라고 하면 이를 세우던 걸 멈추고 그 까칠하게 뿔이 돋은 혀로 핥아 주니까.

짐승의 혀처럼 된 신조의 혀는 비량아의 온몸을 빨갛게 상처 냈다. 송곳니는 신조가 아무리 부드럽게 입 맞추려 했든 비량아에게 상처를 냈다. 빨아도, 핥아도, 씹어도 비량아는 쾌감이 아니라 상처밖에는 느끼지 못했다.

비가 그쳤는지 굴 밖에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느릿하게 난다. 그간 숨어 있던 새가 다시 나는 모양인지 지저귀는 소리도 났다. 공기는 청명하고, 굴 입구는 밖에서부터 들어온 눈부신 빛으로 가득했다. 싱그러운 나뭇잎 색에 눈이 멀 것만 같았다.

그리고 굴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몸을 일으키자 비량아의 위에 있던 옷자락이 아래로 떨어졌다. 신조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오로지 그 혼자였다.

깃털을 채워 가죽으로 여민 침상은 부드럽고 푹신한데도 비량아에겐 모든 것이 가시처럼 느껴졌다. 가칠하게 일어난 입술, 퀭한 눈 아래, 채 낫기도 전에 새로 생긴 상처들. 너무 벌어져서 오므리기 두려운 다리. 그리고 눈부신 세상…. 비량아의 핼쑥해진 뺨으로 눈물이 흘렀다. 그는 자신이 우는지도 모르고 멀거니 바깥을 볼 뿐이었다.

온갖 색으로 빛나는 굴 바깥에서 귀곡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비량아는 손을 뻗어 그것들을 불러들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이 주인 없는 굴로 들어왔다.

비량아는 그 모든 것과 손을 잡았다. 셀 수 없는 죽음이 그곳에 있었다.

* * *

윤오는 자신이 지르는 비명 소리에 깨어났다. 소스라치게 일어나서는 식은땀으로 젖은 몸을 감싸고 웅크렸다. 그럼에도 몸은 여전히 벌벌 떨렸다. 오해와 상처와 배신, 그 모든 게 그를 잠식하고 있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소화할 수 없는 모든 이야기에 윤오는, 아니 비량아는, 그리고 윤오는 침대를 박차고 나왔다.

신조는 집에 없었다. 아직 늦은 밤이었고, 그의 일정은 새벽이 올 때까지는 마무리되지 않을 예정이었다. 윤오는 자신이 누군지 알지도 못한 채로 집을 뛰쳐나갔다.

밖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꿈이 이어지는 것 같았다. 이곳이 굴처럼 느껴졌다. 비록 장대비는 아니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윤오는 그저 도망치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으로부터?

경보를 해제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멋대로 열어젖힌 대문 안쪽으로 빨간불이 깜빡이며 경보음이 울려도 귀에 닿지 않았다. 검지가 타들어 갈 것처럼 아팠다. 그에게 없던 상처가 생기고 있었다. 범신이 남겼던 덩굴무늬 흉터가 그의 검지에 새겨졌다. 타오르는 고통에 검지를 감싸쥐고 비틀대며 허우적댔다. 맨발인 줄도 모른 채 윤오는 빛을 향해 달렸다.

고급 주택가는 가구 수 자체가 많지 않았고, 각 가구마다 성채처럼 담을 높게 쌓아 바깥으로부터 그리고 안으로부터 빛이 새어 들어오거나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빛이 필요했다.

한참을 마구 뛰쳐 내려왔지만 빛을 찾을 수 없었다. 겨우 찾은 것이 편의점이었다. 그곳으로 비틀대며 들어가려 했지만 그 순간 바깥에 걸어둔, 날벌레를 잡는 전기 기구가 터지는 소리에 도로 뛰쳐나왔다. 귀가 막 나았던 비량아처럼 모든 소리가 너무 크게 그리고 또렷하게 들렸다.

편의점 옆에는 골목이 있었다. 차마 편의점에서 벗어나 빛으로부터 멀어질 용기도 없고 들어갈 용기도 없어 윤오는 골목 안으로 들어가 웅크리고 앉았다. 몸을 감싸고 벌벌 떨어도 도통 떨어져 나가지 않는 꿈이 있다. 그리고 그건 꿈이 아니라 나의 이야기였다. 내 이야기. 나와 범신조의 이야기.

젖은 벽에 머리를 쿵, 쿵 짓눌렀다. 감싸고 있던 손을 떼 검지를 보았다. 덩굴무늬 흉터가 선명하다. 꿈이 현실로 넘어와 실체가 되었다. 비량아가 되었다가 김윤오가 되길 반복했다. 시간은 섬망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번쩍거릴 때마다 십 분, 삼십 분, 오십 분이 흘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윤오의 앞에 구둣발이 섰다.

“김윤오… 너 대체…!”

고개를 드니 그곳에는 범신조가 있었다. 범신, 신조.

비량아는 저도 모르게 골목을 빠져나갔다. 날렵하게 범신조의 옆을 지나가 빠져나가는 그를 신조는 처음 편의점에서 만났을 때처럼 잽싸게 잡았다. 비량아가 된 윤오는 잡힌 손을 마구 버둥대며 발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 손이 무슨 짓을 했는지 그는 똑똑히 기억하니까. 

“놔, 놓… 놔…!”

“김윤오, 제발…!”

발작처럼 버둥대는 윤오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가 품에 억지로 넣어 껴안을 때였다. 정신이 쏙 빠진 윤오가 손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용케 몇 번 피했으나 결국 범신조의 뺨을 때리고 말았다. 게다가 빗겨나가는 바람에 긁기까지 했다.

피를 보고 나서야 윤오가 멈췄다. 헐떡이는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고 눈은 축축했다. 범신조는 고개가 돌아간 채 맞은 뺨 안쪽을 혀로 길게 훑었다. 아플 만도 한데 고작 그렇게 하고는 됐다는 양 다시 윤오를 응시하며 물었다.

“이제 괜찮아?”

괜찮냐고…. 그 물음에 서러움이 범람했다.

“아니.”

김윤오가, 비량아가 중얼거렸다. 빨갛게 달아오른 뺨으로 눈물이 흘렀다. 비량아가 그랬듯이 말이다.

“내가 미치고 있는 것 같아….”

무서워. 무서워, 범신조.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아.

“나… 미쳐가고 있는 것 같아.”

범신조는 이 소리가 처음이 아니라는 것처럼 덤덤하게 듣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점점 어둡게 가라앉아 갔다.

겁먹은 것처럼 손을 떨던 윤오가 자신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범신조의 품에서 벗어나 두 걸음 물러난 뒤 상체를 웅크렸다.

“왜….”

“…….”

“왜 나를 강간했어…?”

상체를 웅크린 채로 고개를 든 윤오의 얼굴은 신조가 익히 알고 있던 그대로였다. 원망과 증오가 섞인, 그러나 탓할 수 없는 얼굴.

이 자리에 칼이 있다면 신조는 기꺼이 자신을 찔렀을 거다. 하지만 그래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거푸 얼굴을 쓸어내린 신조가 피를 토하는 목소리로 불렀다.

“비량아… 나는….”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

“…….”

함부로 손을 뻗거나 하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창백하게 질렸다. 이 또한 같았다. 신조는 비량아가 그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더라도 알아보고 사랑할 자신이 있었으나 비량아는 늘 저 얼굴로, 저 외모로 태어났다. 그게 범신조에게 망각을 허락하지 않았다.

똑같은 눈빛으로 신조를 노려보던 똑같은 얼굴이 갑자기 어린아이가 울 때처럼 일그러졌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 엉엉 울면서 얼굴을 가렸다.

“내가… 미쳐가고 있는 것 같아요….”

“…….”

“내가 미치고 있는 거지…? 이건 내 망상일 뿐이지? 깨면 끝날 꿈이잖아…. 그래야 하잖아….”

신조도 비량아도 온통 흠뻑 젖어 있었다. 마치 그날 밤처럼 번개가 쳤다. 번쩍이는 빛 아래에서 신조의 표정이 보였다. 왜 당신이 그렇게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냐고 따져 묻고 싶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대답은 충분했다. 범신조는 모든 걸 기억하고 있다. 그는 모든 걸 알고 있다. 윤오가 비척비척 돌아섰다.

“윤오야.”

부르는 소리가 점점 거세지는 빗소리에 묻혔다. 내가 더는 누군지 모르겠어서 미칠 것만 같은데, 그래서 범신조에게 그냥 안겨들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이제는 이 꿈이 어디로 흐르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끝이 어렴풋이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귀신들을 불러내서 그대로 죽으려던 비량아를 끌어내고, 그에게 집요하게 매달리는 귀곡성을 쳐내면서 끝끝내 비량아를 제 곁에 두려 발악하는 신조의 얼굴이 젖은 웅덩이 속에 어렴풋이 보이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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