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미 으깨지고 깨지고 찢어진 손톱을 물어뜯는 것에 더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렇듯 신조도 다시 비량아를 범하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헤어진다는 선택지가 없는 망가진 연인의 모습이었다. 외사랑이 되어 버린 짝이라는 게 바로 이런 것이었다. 상대의 마음 대신 몸이라도 가져야 했다.
그는 제가 비량아의 마음을 예전에 가졌었단 걸 몰랐다. 손에 쥐고 있다는 걸 깨닫기 전에 잃어버려 더 허기진 걸지도 모른다. 그저 길들여진 짐승이 되어서 비량아를 보면 만지고 싶었고, 만지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그리고 비량아는 신조가 그럴 때만 유일하게 반응했다. 평소에는 신조를 본 척도 하지 않으면서, 비량아는 신조가 범할 때면 그 어깨며 팔이며 서슴없이 물고 찢었다. 몸은 익숙해졌으나 익숙해질수록 서로의 몸에 상처는 늘어났다.
비량아가 신조의 머리를 돌로 찧은 이후로 신조는 비량아가 상처 입히면 그대로 다쳤다. 여타 다른 평범한 것들처럼 피를 흘렸으며, 아무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 그의 몸에 상처가 쌓이는 건 당연했다. 차곡차곡,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처가 늘었다.
대화는 거의 없다. 서로 무언가를 묻고 답하거나 주고받는 것을 대화라고 친다면 아예 없다고 보아도 되었다. 비량아의 마음에는 이제 애정보다 증오가 더 많았고, 그건 속에서 곪고 썩어서 그를 안에서부터 죽어가게 했다.
제정신으로 깨어 있을 때면 고통과 두려움뿐이었다. 신조에 대한 배신감과 그가 직접 가한 신체적 가해는 다시 태어나도 잊지 못할 만큼 뼈에 아로새겨졌다. 그것이 끝내 괴물이 되어 자신의 배를 찢고 나올 거라는 두려움은 비량아가 채 잠으로 도피할 수도 없게 만들었다. 무서움에 잠도 깊게 잘 수 없었다. 그러니 긴 시간 제정신으로 깨어 있어야 했고, 비량아는 조금씩, 조금씩 부식되었다.
왜 나는 평범하게 가질 수 없어? 가족도, 연인도? 왜 내 사랑은 목숨을 걸어야 했지.
놀이패에서는 눈 깜짝할 사이에도 아이들이 생겼다. 아무리 살기 힘들다 해도 마음을 잇고 사는 이가 생겼다. 봄이 되면 싹이 트듯 모두 그리 살았다. 왜 나에게는 그조차 과분한 일이었을까. 넘보지 못할 것을 넘본 대가가, 그것으로 부족해서 감히 입 밖으로 낸 대가가 태어나기 전까진 어떤 모습일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이라고 생각하면 서러웠다. 아이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이 그랬다.
점점 비량아의 주변에 혼이 쉽게 꼬였다. 그들은 비량아의 외로움과 상처에 홀렸다. 썩어가는 마음에서 흐르는 진물을 한 방울이라도 얻고 싶어 모인 개미떼 같았다. 비량아는 그것들이 제 몸을 오가도 상관하지 않고 두었다. 오히려 몸을 내주면 그것들이 무슨 수를 부려서 굴 밖으로 나가는 덕에 도움이 될 정도였다. 정신을 차리면 벼랑 끝, 계곡 안, 바위 옆이었다.
“하하…. 여기서 죽으라고?”
비량아는 웃었다. 그러나 그냥 웅크려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다 돌아오기 일쑤였다.
범신은 제 혼을 잡아 어디도 가지 못하게 할 거다. 지박령으로 만들 수도 있을 거다. 그러다가… 질리면 잡귀 중 하나라 치부하고 잊어버리겠지. 살아 있을 때 질려주면 다행이나, 죽어서 질리는 건 끔찍했다. 어디에도 가지 못할 테니.
“그럴 순 없지. 그래 줄 순 없어…. 죽어서만이라도….”
이제는 오로지 단 하나를 바라고 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비량아는 신조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죽이지 못해도 아물지 못하는 상처를 남기고 싶었다.
몸에 남은 잇자국과 손톱자국으로는 부족했다. 그건 너무 약하고, 볼 때마다 오히려 자신이 얼마나 하찮고 아무것도 되지 못하는지를 확인하는 것밖에는 안 됐다.
한번 죽어보려 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마음을 죽여 본 적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상대를 죽일 생각밖에 없어서 그런진 몰라도 비량아는 점점 더 객귀를 쉽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그저 주위를 오가는 객귀 수준이 아니었다. 악귀도 불러와 다룰 수 있었다. 그 탓에 비량아의 주변에는 늘 추운 공기가 맴돌았으나 겨울이라 그것은 쉬이 숨겨졌다.
아침이 되어 부연 해가 떠오를 때면 굴 밖에선 밤사이 피어난 꽃들이 서리로 얼어붙은 꽃잎을 일제히 부수고 아래로 떨어졌다. 신조는 더는 꽃밭을 만들지 않았고, 비량아는 거기에 매일 밤 얼음꽃을 피웠다.
제가 이런 걸 할 수 있게 될 줄이야.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이젠 어딜 가도 사람이라고 말하기 여의치 않은 꼴이긴 했다. 배는 거의 불러오지 않으나 그 속에는 분명 어떤 것이 들어 있을 거고, 그것이 어떤 모양으로 자라 나를 죽이고 나올지 아니면 제가 먼저 죽을지 아무도 몰랐다.
비량아는 날마다 조금씩 더 멀리 나갔다. 섭식을 거의 하지 않아 야위는 몸과 체력을 개의치 않고 한계는 점점 더 넓어졌다.
이런 기적에 가까운 요행은 모두 제게 꼬이는 헛것들 덕분이었다. 이전보다 훨씬 유용했고 다루는 데 있어 지침이 없었다. 비량아는 그 이유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배 속에 있는 범신의 씨앗 때문이다. 귀신의 왕이라던 그의 피가 비량아로 하여금 혼백을 제 수족처럼 다루게 하고 그것에 지침이 없게 만들고 있었다.
“…웩!”
문득 깨달은 비량아가 왈칵 토악질을 했다. 나오는 건 거의 없었다. 몸이 살벌하게 떨렸다. 범신의 피가 더 강한 모양이다. 비량아는 나무에 기댄 채 배를 마구 긁었다. 상처가 나고 핏방울이 맺혔다. 그런데 눈에 띄게 금방 사라지고 있었다.
“아, 안 돼.”
속수무책으로 눈물이 쏟아졌다. 이게 범신을 닮게 태어나 새끼 짐승의 모습이라면 끝내 날 죽이고 말 텐데, 그렇게 태어나는 게 섭리일 텐데…. 그리 태어날 거면서 이 몸을 보호하고 있다는 게 가증스러웠다.
“무서워, 무서, 무서워….”
비량아는 마구 고개를 젓다가 급기야 배를 향해 주먹을 들었다.
그러나… 끝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눈물이 흠뻑 쏟아진다. 이미 젖은 얼굴을 재차 적신다. 자신의 나약함에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비량아는 재차 빈 구역질을 하곤 비틀대며 발걸음을 옮겼다.
원흉은 범신이야. 잘못은 그가 했어. 그는 내게는 범신이 아니라 악신이야. 나에게 재앙이고, 신벌이야.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마음에 담지 말아야 할 것을 담은 죄를 없앨 수 없다면 도망치면 된다.
산을 떠날 것이다. 저 지긋지긋한 굴을 떠날 거다.
비량아가 또다시 찢어진 손톱 아래로 피를 뚝뚝 흘리며 살얼음이 낀 뾰족한 바위 끝에 섰다. 종이가 갈가리 찢기는 소리를 내며 겨울바람이 귓전을 할퀴고 지나갔다.
“이만 돌아가자, 비량아.”
뒤에서 갑작스레 목소리가 들려도 비량아는 놀라는 기색 하나 없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너는 하는 거라곤 나 쫓아다니는 일밖에 없어?”
“…….”
“내가 자진이라도 할 줄 알았던 모양이지. 어차피 죽어도 네 곁에 둔다며. 혼이 되어도 묶어 둘 거라며.”
비량아는 천천히 발을 돌렸다. 그리고 제 발치에 있는 신조를 내려다봤다. 유치한 우월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신조 역시 야위어 턱선이 더 날렵하게 도드라졌고, 눈 밑에 음영이 드리워 삭막해졌다. 그래서 전처럼 흠결 하나 내기 힘든 상대로 보이는 게 아니라 자신과 같은 존재처럼 보였다. 때론 오히려 자신이 신조보다 우위에 선 것 같을 때도 있었다. 신조보다 높은 곳에 올라선 지금처럼.
“말해 봐. 어떻게 그럴 생각이었는데?”
은근한 물음이 달착지근한 맛을 남겼다. 신조는 혀를 날름거렸다. 그러나 저렇게 묻는 이유를 알아서 시선을 비스듬히 내렸다. 방법을 알면 그걸 뒤집어 영영 인연을 끊을 생각인 거다. 비량아는 영리했고, 하루하루 쇠약해지는 몸과 다르게 비량아가 타고난 힘은 점점 강해졌으니까.
“그럴 필요도 없어.”
신조의 눈빛도 번들거렸다. 그가 발 하나를 들어 바위의 유독 날카롭게 튀어나온 모서리에 올렸다.
“넌 이미 내가 삼켰거든.”
이죽거리는 말투에 비량아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넌 이미 내 배 속에 있어, 비량아.”
“…거짓말. 허세잖아.”
“허세는 네가 부리고 있는 게 아니고? 손이 떨리잖나.”
신조가 비량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바위 위로 올라서며 다른 손으로 비량아의 눈가를 만졌다.
“눈꼬리도 떨리고.”
“…….”
“거짓말 같은 모양이지. 그런데 사실이야.”
사람의 인연이라면 맺고 끊어지고 복잡다단하게 얽히고설켜도 괜찮으나, 상대가 범신이라면 다른 게 당연했다. 지금껏 범신의 짝은 단 한 명뿐이었다. 모든 범신들이 그랬다. 신조는 비량아의 눈초리를 손톱으로 누르며 웃었다.
“내가 널 삼켰다, 비량아.”
이미 잘못된 인연이라면 아예 산산조각 나서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 만큼 망가뜨려 버리자. 그게 네가 되든 내가 되든. 나 말고는 아무와도 연을 맺을 수 없도록. 심지어 내 씨앗도 나에게서 너를 빼앗아가지 못하게.
신조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러면서도 눈시울이 뜨겁고 목이 메었다. 차라리 울 수 있다면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량아와 신조의 이야기는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나은 일은 결국엔 일어나지 않는 식으로.
* * *
울화가 치미니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다. 가슴이 답답하여 자리에서 벌떡벌떡 일어난 적이 부지기수였다. 찬 몸이라 그런지 가슴의 울화에 유독 약했다.
굴 안엔 비량아 혼자였다. 범하면 범했지 같이 잠들지는 않겠다고, 두껍게 꺾어내 사뭇 위협적인 나뭇가지 끝으로 제 목을 겨누며 말했던 그때부터 신조는 계곡 쪽에서 잠들었다.
어차피 시끄러운 계곡 옆에 있다고 비량아의 소리를 못 듣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발소리는 신조의 귀에 고여 들어 꾸지 않는 꿈속에서조차 하얀 발자국을 남긴다. 비량아가 참지 못하고 굴 밖을 벗어날 때면 신조는 눈을 감고 선잠에 빠진 채 어디까지 멀어지는지 가늠했다. 산을 벗어나지만 않는다면야 봐줄 수 있다. 산은 자신의 영역이니 그 정도쯤 간다고 비량아를 못 잡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는 비량아에게 모든 신경을 쏟느라 다른 것에는 비교적 둔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오늘은 눈이 내린다. 억지로 잠에 들었던 비량아는 고요한 숲 위로 사륵사륵 내리는 눈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얼어붙다 못해 타오르는 듯한 흉골을 지그시 누르며 서둘러 뛰쳐나왔다. 누비옷도 버리고, 신조가 직접 벗겨 빨고 말리고 무두질한 가죽 요도 뒤로 내던졌다.
“하….”
고개를 하늘로 쳐들자 눈이 얼굴로 떨어졌다. 눈을 감고 그 냉기가 스며드는 걸 느끼다가 혀를 내밀었다. 혀 위로 떨어지는 차갑고 부드러운 것에 깊었던 갈증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았다.
맨발인 건 개의치 않았다. 발이 빨갛게 얼어도 무덤덤했다. 점점 사람이 아닌 것에 가까워지는 듯싶었다. 그래서 더 아프고 싶었고, 더 고통스러웠으면 좋겠다. 그러면 내가 아직 사람이구나 싶을 테니까.
비량아는 눈을 맞으며 걸었다. 처음에는 발을 끌 듯 걷다가 곧 달리기 시작했다. 비스듬히 내리는 눈이 비량아를 향해 쏟아졌다. 일부가 얼굴에 닿아 연신 눈을 깜빡여야 했고 대부분은 속눈썹에 걸렸지만,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비량아는 문득 생각했다. 만약 배 속에 있는 게 사람 형태로 태어난다면 이 애도 이런 운명을 타고날 것 같다는 강렬한 예감. 언젠가 자신이 지금 이러하듯이 광인처럼 맨발로 길을 내달리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은 점점 확신으로 바뀌었다.
넌 날 닮겠구나.
그 생각을 한 순간 발걸음이 겨우 멈춰 섰다. 고작 반보 앞에 낭떠러지가 있었다. 아래에서부터 바람이 거세게 올라왔다. 아찔한 나머지 시야가 한 바퀴 공회전을 할 정도였다.
부산스럽게 눈을 깜빡인 끝에 비량아는 자신이 겨우 멈춰 설 수 있던 이유를 향해 고개를 돌아봤다.
“…….”
긴 주둥이가 제 옷자락을 잡고 있었다. 비량아의 머리카락이며 소매가 바람에 매섭게 날렸다. 낭떠러지 아래에서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났다. 비량아는 추위에 곱은 손을 움찔거리고 입술을 달싹이며 중얼거렸다.
“고마워….”
동그란 눈이 샐쭉하게 접힌다. 그 모습이 손톱달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토록 좋아하던 달을 감상하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그리운 달을 바라보듯 여우의 눈을 본 비량아가 저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참 커다란 여우다. 커다란 여우가 자신을 구했다. 눈이 내리는데도 기이하게 달은 환한 밤, 낭떠러지 앞에서.
꿈이라면 제법 환상적인 꿈이 되겠구나 싶었다.
* * *
“깼어요?”
겨우 눈만 반쯤 떠 깜빡였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윤오는 손이 뒤로 묶이고 발은 포개진 채 발목끼리 묶여 옆으로 누워 있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제 앞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인영이 보였다.
“범신… 조….”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인영이 홱 돌아봤다. 당연히 범신조는 아니었다. 목소리도 더 가벼웠고 체구도 달랐다. 윤오는 혀를 깨물고 싶었다.
정작 길다온은 기뻐 미치려는 표정이었다. 희열과 쾌감, 기쁨이 이지러진 병적인 미소. 정말 미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지금껏 보지 못한 표정이었다. 길다온이 아닌 다른 이처럼 낯선 모습에 윤오는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
“범신이 그렇게 보고 싶어요?”
“…….”
“당신한테 그런 짓을 한 사람인 걸 알면서도?”
낄낄대는 웃음소리는 이전과 다르게 듣기 싫었다. 손톱으로 칠판 긁는 소리를 듣는 양 소름이 끼쳤다.
몸을 바르작대는 윤오를 흘끗 본 길다온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 보라며 요구했다. 물론 윤오는 반응하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고집 어린 얼굴에도 그는 히죽 웃었다.
“사랑. 좋죠. 하면 좋잖아요. 깊이 할수록 좋아요.”
길다온은 몸을 돌려서 다시 책상에 관심을 뒀다. 윤오는 그 뒷모습을 노려보며 연신 눈을 깜빡였다.
이제껏 조용하던 섬망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기억을 조금 더 찾았지만 찾지 않느니만 못했다. 비량아는 미쳐 있었고, 그 미쳐가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게다가 소름 돋을 만큼 같은 마음이었다.
차라리 죽지.
그 외침은 자신이 뱉은 건지 과거의 자신이 뱉은 건지 구별키 어려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이곳이 삭막한 실내가 아니라 눈이 내리고 있는 어두컴컴한 숲처럼 보인다.
이제 와 말하는데 신조와 살던 숲은 결국 우리나 마찬가지였다. 한번 들어오면 나갈 수 없었다. 신조가 특별히 허락하면 나갈 수 있었고, 이후에는 그 없이는 나가지도 못했다. 넓어서 몰랐을 뿐, 비량아는 이미 그의 배 속에 있던 게 맞았다. 산이란 결국 신조의 커다란 혈맥과 같았으니 말이다.
지금도 그럴까. 지금도 이 땅이 그의 손바닥 위에 있는 것과 같다면 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윤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더러운 바닥에 비비며 신음을 흘렸다.
범신조가 지금도 여전히 범신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죽은 이후로도 날 기억한 채 살아 있던 거라면…. 아… 고통 때문에 생각이 쉽지 않다.
…이 와중에 배 속에 있던 것 생각은 거의 나지 않는다. 자신 역시 이기적이고 끔찍한 종자였다.
윤오가 독기 서린 눈으로 길다온을 불렀다.
“길달.”
“오. 이제 제가 기억나세요?”
“아니.”
어차피 거짓말을 해 봤자 들통날 게 뻔했다. 윤오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손목을 꺾어서 엄지로 손목을 묶은 것을 확인하자 케이블 타이 같았다. 재질을 확인하려 갉작갉작 긁어 보았다. 손톱이 망가져 있던 비량아의 기억이 덧씌워진 참이라 그런지 손톱 아래가 긁힐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왜 나를 도왔어?”
계속해서 케이블 타이를 긁으며 윤오가 물었다. 사실 궁금하지 않다. 그저 시간을 벌고 그의 집중력을 흩뜨리기 위해서였다. 범신조가 나를 찾을 수 있을까. 나를 찾기야 하겠지. 미친놈이 아닌가. 벌써 몇 번을 지긋지긋하게 나를…. 윤오의 입술이 묘한 호선을 그렸다. 자신이 그런 표정인 것조차 모르면서.
“아직 기억도 못 하면서 물어 봤자 재미가 없지 않습니까.”
길다온이 몸을 돌렸다. 그의 손에는 주사기가 들려 있었다. 어떡하면 케이블 타이를 끊을 수 있을지 떠올리고 있던 윤오의 사고 회로가 그대로 정지했다.
피스톤을 살짝 밀자 주사기 안의 공기가 빠지며 허공으로 은구슬 같은 액체가 튀었다. 정체는 모른다.
“대표님, 그러니까 범신이 말입니다. 예전에 몇 가지 약을 만들었었거든요. 약에는 다운과 업 계열이 있다고 하죠. 이거는 그걸 반복하는 거예요. 롤러코스터 타 봤어요? 한껏 올라갔다가 추락하길 반복하잖아요. 그걸 계속하는 겁니다. 그러면요, 정신이 막… 흔들리거든요. 영리하죠?”
영리한 게 아니라 끔찍했다. 윤오의 속내를 읽은 것처럼 길다온이 실쭉 웃었다.
“그러니까 더 비참하고 더 행복한 거란 말입니다. 그 중간에서 사람은 미칠랑 말랑. 그래서 불행한 사람일수록 잘 먹힌다 하더라고요. 그런데 아쉽게도 이거 몇 개 없어요. 팔려고 만든 게 아니거든요. 본인이 하려고 만들었지.”
“…….”
“나는요, 이날을 너무 오래 기다려왔어요. 당신들과 다르게 나는 기회가 별로 없거든….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아요. 알 수 있어요. 그래서 미안하지만 비량아 당신이 기억을 다 찾기까지 얌전히 기다릴 수가 없네요. 이거로 정신을 조금, 아니 좀 많이 흔들게요.”
이날을 기다려왔다고…? 그 모든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적개심과 광기만 느껴졌다. 윤오의 입술 사이로 후욱, 훅 하는 공포 어린 숨소리가 빠르게 흘러나왔다. 길다온이 다가오고 있다. 윤오는 몸부림치며 뒤로 물러나려 애썼다. 길다온은 그 절박한 움직임을 보면서 한없이 즐거워했다.
애초에 소용없는 발버둥이었다. 길다온의 다리가 윤오의 등 뒤로 쾅 내려찍어졌다. 신장이 길어서 윤오가 간신히 넓혔던 거리가 한 번에 좁혀졌다.
“범신도 참 제정신이 아니야. 그렇죠? 당신과 그쪽 중 누가 더 미쳤냐고 묻는다면 글쎄, 정말 대답하기 어렵단 말이죠.”
“하, 하지 마….”
“정신이 들면 나한테 말해 주깁니다. 범신이 또다시 당신의 인생을 망치는 기분이 어떤지.”
약은 금인인 신조의 기준으로 맞춰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보다 비교적 체구가 작은 윤오에겐 더 효과가 좋을 거다. 중독성은 담배보다 낮지만 공포에 젖은 얼굴이 참 보기 좋아서 길다온은 거기까진 말해주지 않았다.
대신 그는 버둥거리는 윤오, 비량아의 얼굴을 무릎으로 지그시 누르고 팔을 꽉 잡아선 오금에 주삿바늘을 찔러 넣었다.
“욱…!”
머리가 눌린 채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약이 들어오는 서늘한 감각에 모골이 송연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윤오를 서서히 삼켰다. 동공이 커졌다. 이제 몸을 짓누르던 길다온이 떨어졌는데도 더는 반항하지 않았다.
크게 뜬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윤오의 몸이 경련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환희다. 신조가 저를 처음으로 구원했을 때와 같은.
비슷한 절망이다. 범신이 처음으로 자신을 범했을 때와 같은.
온몸을 찢는 신벌 같은 고통에 윤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정신은 순식간에 섬망 속에 던져졌다.
‘그를 죽이게 해 줄까요, 비량아?’
길달의 가로누운 손톱달 같은 눈 속으로.
* * *
“어떻게?”
비량아의 눈 밑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입술은 거칠게 찢어지기 직전이고, 다 뜨지 못하는 눈은 술이나 미향에 오래도록 취한 사람 같았다. 이미 망가진 모습 그 자체였다.
눈길을 달린 맨발은 새빨갛다. 뺨도 목도 얼어붙었는데 스스로 상태가 어떤지도 모를 만큼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미친 것들은 길달의 맛 좋은 열매다. 물론 모든 여우가 사악하단 건 아니지만, 길달은 고통에서 단맛을 느꼈으며 그것으로 힘과 욕심을 길렀다. 미치기까지는 지독한 고통이나 슬픔이 있게 마련이고, 거기서 죽지 않고 끝내 미쳐버린 것들은 작은 꼬드김에도 잘 넘어간다. 길달은 혀를 날름거렸다.
“당신은 곰의 아이잖아요.”
“아. 그래. 곰의 아이. 그게 뭐라고.”
비척거리며 벼랑 끝에서 몸을 돌린 비량아는 길달을 스쳐 지나갔다. 그놈의 곰의 아이. 이미 예전에 범신에게 질리도록 들어 이골이 났다. 제가 사람이 되지 못한 걸 나보고 어쩌라고. 범은 이미 그때 미친 게 분명해. 그리 생각하며 킥킥대고 웃은 비량아가 마른기침을 뱉으며 손사래를 쳤다.
“곰의 아이니, 사람이 된 거로 우월감을 삼으라느니 그런 원론적인 이야기를 할 거면 꺼져. 너라도 죽여서 내 분을 풀게 만들지 말고.”
아, 완전히 미쳐 버렸구나!
길달은 비량아를 오래도록 지켜봐 왔다. 바로 그 고고하고 거만한 범신이 직접 데리고 온 곰의 아이였다. 그것들은 더럽고 냄새가 나는 데다 터무니없이 짧은 삶을 살면서 뭐가 그리 복잡한지 모르겠다던 범신이 말이다.
‘사람의 왕? 그게 뭐가 무섭지? 뭐가 그리 대단하고. 당장이라도 담벼락을 넘어 목줄기를 물어뜯으면 끝이 아닌가. 머리에 쓴 것이 금관이든 무엇이든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죽을 게 곰의 아이고 곰의 아이들의 왕인데.’
그리 말하곤 했던 범신은 이제 미쳐가고 있다. 미쳐서 조금 약해지기까지 했다. 그 모든 게 바로 저 사내, 처음에는 다정했고 수줍기까지 했던 곰의 아이 때문이었다.
길달은 아주 유쾌했다. 그의 오랜 염원이 이뤄질 날이 머지않았기 때문이다. 범신이 없다면. 그만 없다면…. 어쩌면 내가 그보다 훨씬 더 영리한데. 오로지 이빨이 덜 날카롭고 덜 강하며 덜 빠르단 이유로 내가 그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단 건 납득할 수 없다.
길달은 속삭였다.
“그런 게 아니지요. 무슨 우월감입니까? 제 말은요, 곰의 아이라면 아이답게 부모의 힘을 좀 빌리자는 겁니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부드럽고 말투가 얼마나 달콤한지. 비량아의 몸을 휘감는 꼬리는 얼마나 푹신하고 따뜻한지. 비량아는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곧 겨울이 되어 곰이 이곳을 지날 겁니다. 동면에서 깰 때라면 몰라도, 잠들 때의 곰은 아주 느리고 둔하지요. 이곳의 산세는 제가 잘 압니다. 그 곰을 이용해요.”
“곰이 범신을 이긴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네.”
비량아가 차갑게 비웃었다. 다정하고 수줍던 이는 이제 더 이상 없다.
“당연하죠. 범신이 이길 겁니다. 다만 그 곰이 약해지면, 죽여요. 쓸개를 꺼내요. 곰과 범은 범이 동굴을 뛰쳐나가고 곰이 홀로 사람이 될 때부터 앙숙이 되었거든요. 곰의 쓸개를 범신에게 먹이는 거예요….”
길달의 목소리가 귓속에 축축하게 고였다. 습하게 고여 순식간에 버섯을 피우고 곰팡이와 이끼를 만들었다. 그것들이 비량아의 마음에 뿌리내렸다.
“범신에게 아주 해로울 거예요…. 죽을 만큼.”
“곰의 쓸개….”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것이 가능한지 아닌지, 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이지는 이미 사라졌다. 남은 건 오로지 애정을 모두 삼켜버린 증오뿐이었다.
“그게 언제인데?”
허공에 시선을 둔 채 비량아가 물었다. 그 넋이 나간 목소리에 길달이 더욱 짙게 웃었다.
“나만 믿어요, 비량아. 내가 복수하게 해 줄게요.”
“…….”
“범신이 더는 당신을 해치지 못하도록, 당신이 그를 해치도록 도와줄게요.”
사실 비량아는 이때 여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심지어 여우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오로지 기억에 남는 건 자신을 돕겠다는 말 한마디.
비량아는 아주 오랜만에 활짝 웃었고, 그 미소에는 비아냥도 비웃음도 없었다. 순수하게 활짝 웃는 그 모습을 신조가 보았다면 그마저도 이 계획에 동참했을 거다.
하지만 이 자리에 그는 없고, 비량아는 자신이 웃는 것도 모를 정도로 텅 비어서는 오로지 원한 하나로만 움직이고 있었다. 신조는 그동안 눈이 쌓이는 소리와 절벽 앞에 멈춰 선 비량아의 발소리만 가늠하고 있었다. 오로지 비량아만 느낄 수 있다면 된다는 것처럼.
* * *
“호가호위(狐假虎威)란 말 압니까?”
윤오는 신 침이 올라오는 걸 느끼며 겨우 눈을 떴다. 눈꺼풀이 채 반도 떠지지 않았다.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벌벌 떨리는 오한에 몸을 바르작댔다.
“여우가 호랑이의 권세를 등에 업고 권세를 누린다는 말인데, 나는 그게 틀렸다고 봅니다. 여우는 호랑이만 없으면 권세를 누릴 운명이었어요. 솔직히 하는 말인데요. 당시 범신은 미쳤었잖아요. 당신 때문에. 당신도 미치고 범신도 미치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미친 왕은 끌어내리는 게 맞지 않습니까?”
길다온이 고개를 불쑥 들이밀었다. 그의 손에는 작은 알약이 들려 있었다. 정말 정말 작았다.
윤오가 고개를 흔들었다. 흔들 때마다 그는 비량아였다가, 김윤오였다가, 비량아였다가, 그러다가 웃고 말았다. 어차피 둘 다 나인데 구분이 의미가 있나. 범신조를 사랑했으나 그만큼 증오했던 것처럼.
“범신이 당신에게 미쳐 있을 당시 산을 돌보지 않았죠. 뭐, 그는 존재만으로도 섭리이고 이치이니 그렇다고 한들 산이 아예 망가지고, 갑자기 괴물들이 난동을 피우고, 짐승과 영물들이 모조리 죽어 나가고 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살기 힘든 건 분명했어요. 새끼들이 꽤 많이 죽었으니까요…. 그건 알았나요? 아뇨, 몰랐겠죠. 당신도 당신 복수에만 취해 있었으니까.”
손가락이 입속을 쑤시고 들어오려 해서 윤오는 이를 꽉 깨물었다.
“확실히 치인이라 약효가 다르게 드는 것 같네요. 이건 좀 약하지만, 보조제로는 딱일 거예요. 걱정마십쇼. 비량아 당신 한 명에게 쓸 정도로는 약이 충분하니까.”
양 볼이 꽉 눌려도 입을 열지 않자 길다온이 윤오의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코를 틀어막았다. 연이어 입까지 틀어막혔다.
질식의 위협 속에서도 윤오는 여전히 케이블 타이에서 벗어날 방법을 떠올리려 하고 있었다. 죽어가는 순간에서는 뇌가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는데 혹시 모르지 않나.
‘윤오야. 이 타이가 말이다, 아주 끈질긴데 또 생각보다 약하거든.’
기억 저편에서 희미하게 박 사장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아버지보다 아버지 같던 그는 감옥에서 얻은 지식을 가끔씩 풀어놓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숨이 고갈되는 게 더 빨랐다. 헐거워진 입이 살짝 벌어진 틈을 놓치지 않고 길다온이 손에 든 알약을 목구멍 깊숙이 넣었다. 삼키는 걸 막진 못해도 길다온의 손가락은 깨물 수 있었다. 연이어 뺨이 후려쳐졌다. 고막이 얼얼했고 머리가 띵했다. 한쪽 코에서 피도 흘렀다.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건 고통스러운 신음 대신 황홀함과 오한이 뒤섞인 신음이 더 강했다. 윤오의 눈동자가 공막을 헛돌았다. 입술이 벙긋 벌어졌다.
‘만약에 이걸로 묶이거나 하면 생각보다 풀기가 쉬워. 내가 방법을 하나 가르쳐 주마….’
그 얘기를 해 주실 때 사장님은 설마하니 내가 그 방법이 필요하게 될 줄 알았을까. 심지어 그가 모조리 미친놈이라고 생각하는 금인 때문에.
‘일단은….’
박 사장의 목소리가 서서히 멀어져갔다. 어렴풋이 그 방법이 떠올랐으나 약효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실행으로 옮길 여력이 조금도 없었다. 윤오가 덜덜 떠는 입술로 중얼거렸다. 바람 소리에 가까웠고 발음은 뭉개져서 말로 구체화되지 못한 무엇이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또렷하게 불렀다.
범신조…. 나를 좀 구해 줘.
* * *
“잠시 굴속에만 있어야 해.”
신조가 비량아의 발목에 끈을 묶으며 말했다. 끈의 끝은 굴 가장 안쪽까지 이어져 있었고, 길이는 짧아서 침상 위에 눕기만 해도 조금 당길 정도였다.
“멍청하고 냄새나는 곰이 지나간다고 해서 내가 나가봐야 하거든….”
못마땅하나 곰 역시 영물이다. 마음 같아선 그것들을 자신의 땅에 발끝도 들이지 못하게 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아무리 범신이어도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신벌 그 자체를.
그러니 곰이 중간에 다른 길로 새지 못하게, 그리고 이 길을 열어 주는 것이 범신의 큰 은혜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는 산을 허락하고 가는 길을 감시해야만 했다. 곰은 동면이 다가오기 전 잔뜩 먹어 둔 만큼 느리게 움직였고, 그런 와중에도 틈틈이 무엇인가 더 먹기 위해 이 큰 산을 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벌써부터 지겹군. 그냥 지나가지 못하게 할걸.”
혹시라도 제가 보지 못하고 있는 동안 비량아가 사라져 버리기라도 할까 봐 발목까지 묶어 운신을 구속한 주제에도 그는 초조했다. 범신의 시야는 초조함으로 한껏 좁아져 있었고, 그 안에 자신의 권속들은커녕 오로지 비량아 하나만 담기에도 급급했다.
이미 단단하게 묶였음에도 범신은 자꾸만 비량아의 발목을 확인했다. 매듭을 더 당기고, 구석의 커다란 바위에 제대로 고정해 뒀나 여러 번 보고. 비량아뿐만 아니라 천하의 장사가 와서 밀더라도 움직이지 못할 바위였다.
“어차피 어딜 가든 쫓아올 거잖아. 내가 이 산을 다 벗어나는 데만 꼬박 한나절이 넘게 걸리는데. 그냥 꺼져.”
비량아가 비웃으며 신조의 어깨를 발바닥으로 밀어냈다. 무게를 실어 밀 때마다 신조는 조금씩 밀렸다. 이럴 때면 저 바위보다 더 단단할 사내가 우습기도 했다.
“내가 도망칠까 봐 무서워?”
비량아는 무릎을 모으고 그 위에 얹은 손으로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신조는 그게 자신을 비웃는 거란 걸 알면서도 조금 더 보기 위해 침상에 손을 얹고 몸을 일으켰다.
반쯤 일으킨 상체가 가까워질수록 신조에게서는 피비린내와 숲 냄새가 났다. 비량아는 숨을 쪼개 쉬며 그것을 천천히 들이켰다. 살면서 냄새라는 것에 취향이 있을 줄 몰랐으나, 신조에게서 나는 체향만큼은 가끔 황홀할 정도로 좋았다.
그리고 그 좋은 향이 나는 존재는 평범한 삶을 포기하고 여기서 영영 살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가, 이제는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
“무서운데.”
신조가 짧게 대답했다.
“네 말대로 잡을 수 있으니까 상관없어.”
“…….”
“사람들 사이에선 내가 호환으로 불리지. 나는 살아 있는 재액인데, 비량아. 너는 내게 너무 겁이 없구나.”
신조 역시 이제는 이 관계가 어디까지 갈지 두는 것 같았다. 자신이 좋아하든 미워하든 개의치 않고, 그저 도망치면 잡아 와 곁에 두면서.
그에게 제 마음은 언제나 고려대상이 아니다. 제 마음은 그의 눈에 띄기에 값지지 못하다. 예전엔 빛나기라도 했던 것 같은데, 이젠 반짝이지도 않는다. 자신조차 이제는 이게 무슨 마음인지 모른다….
그가 읽을 수 없이 탁해진 비량아의 눈빛을 응시하다 턱 끝을 지그시 눌렀다. 자연히 입술이 벌어졌다.
“넌 좀… 나를 무서워할 필요가 있어.”
까끌까끌한 혀와 언젠가부터 항시 뾰족한 송곳니를 보던 비량아가 고개를 돌렸다.
피하면 더 쫓고 싶다. 멍청하긴. 신조가 피식 웃으며 비량아의 볼을 당겨 억지로 구흡했다. 송곳니에 입술이 찢어지고, 까칠까칠한 혀 때문에 혓바늘이 돋은 혀는 한 번 더 혹사되었다.
한참을 습한 소리만 나는 입맞춤이 끝났다. 제법 집요했는데도 범신은 만족하긴커녕 도리어 더한 갈증만 느꼈다. 폭발할 것 같은 욕심과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에 그는 절로 사나워졌다. 곰이 제 영역을 밟는 게 처음도 아닌데 오늘따라 그게 예민하고 불길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 때문인가.
여기서 나가고 싶지 않다. 비량아와 동면에 빠지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한 번도 의문을 갖지 않았던 의무감이 지금만큼은 거추장스럽고 번거롭다.
“모든 짐승들이 동면에 들면 그때는 넌 굴에서 나가지도 못할 거야.”
신조는 이를 갈며 엄포를 놓았다. 그러는 그의 눈 밑에도 그늘이 졌고, 한층 야윈 얼굴은 신보단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게 비량아를 몰아세우던 그는 오히려 본인이 몰리는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선 굴 밖으로 박차고 나갔다.
홀로 남은 비량아는 뼈가 도드라질 정도인 발목을 응시하다가 묶인 끈을 바짝 당겼다. 무서워할 필요가 있다고…. 당신은 이미 내게 재액이자 호환이다. 무섭고 무서워 그것으로부터 멀리 떠나야만 한다.
그러니 오늘 밤 굴에 남게 될 건 하나밖에 없을 거다.
* * *
밤은 너무나 고요해서 오히려 더 소란스러웠다. 동면에 들지 않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비량아는 몇 번씩 깼다.
깨고 다시 자는 걸 반복하다 보니 하루가 지났는지 며칠이 지났는지, 혹은 아직 지나지 않은 밤이 끝없이 길게 느껴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잠이 들 때마다 악몽만 꿨다.
가위에 눌려서 눈을 뜰 때마다 부른 줄도 몰랐던 객귀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차라리 그게 나았다. 순도 높은 악몽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말하자면 대체로 신조와 함께 손을 잡고 늦은 밤을 거슬러 올라갈 때, 계곡에서 물에 함께 몸을 담갔을 때, 서로 바라보며 웃을 때… 그것이 더 버티기 힘든 악몽이었다.
그 꿈을 꾸고 싶지 않아서 비량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걸었다. 하염없이 굴 안을 맴돌다가 어느 순간 발목이 턱, 턱 걸렸다. 넘어질 것 같아서 비틀거리며 방향을 틀었고, 돌아왔다고 생각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발목이 걸렸다.
결국 자리에 주저앉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매듭 때문에 쓸린 발목을 마구 긁었다.
“싫다….”
비량아가 중얼거릴 때마다 객귀들이 몰려와 그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그 선득선득한 감각 때문에 오들오들 떨면서도 가지 말라고 애원했다. 너무 외로웠고, 이 외로움이 가실 날이 없었다. 차라리 범신이 처음부터 잔인했다면. 그랬다면 따뜻한 곳에서 차가운 곳으로 추락하는 이런 감각도 영영 모르고 살 수 있었을 텐데.
겨울이라 더더욱 춥다. 발목이 거세게 당겨지는 것도 지겹고, 자꾸 꿈을 꾸는 것도 지겨워서 비량아는 바위 옆으로 다가가 웅크렸다. 제 몸보다 큰 바위에 기대선, 겨울인 탓이라 되뇌며 몸에 열이 많아 항상 뜨거운 사내가 돌아오길 바랐다.
차라리 돌아와. 차라리 곁에 있어 줘. 서로 목을 조르게 되더라도 그냥 옆에 있어 주면 안 돼?
애정을 갈구하며 그로부터 힘을 얻던 때는 사라지고, 이제는 범신의 다정함이 비량아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무력함이 필요했다. 범신조 당신을 위해 혹은 우리 둘 모두를 위해….
그러나 범신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늘 얄미우리만치 제때 나타나 희망이든 절망이든 주었으나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비량아!”
쾌활한 목소리가 들린다. 기다리던 목소리는 아니었다. 비량아는 약에 취한 듯 가물거리는 눈을 떠서 굴 입구 쪽을 보았다. 언제 날이 밝았다가 지고 있는지 석양이 내려와 입구를 막고 선 것에 역광을 드리웠다. 비량아는 약해진 눈 위로 손을 얹어 차양을 만들었다.
“지금이에요!”
바위처럼 커다란 여우가 겅중겅중 뛰어왔다.
“드디어 기회가 생겼어요!”
“나는….”
비량아가 움직이지 않자 여우는 그를 한번 살펴보더니 금세 상황을 알아차렸다.
“이 정도는 저한테 맡기세요!”
그래도 영물은 영물인지 여우는 안간힘을 쓴 끝에 바위를 옆으로 굴렸다. 비량아는 천천히 발목을 끌었다. 가벼워진 발목, 쓸리지 않는 피부.
“이제 곧이에요. 곧, 당신의 꿈이 이루어져요.”
“내 꿈…?”
“범신을 죽이고 싶다고 했잖아요.”
길달이 속삭였다. 웃음기가 잔뜩 곁들여진 속살거림이 비량아의 뭉개진 정신을 흔들었다.
“곧 그럴 수 있을 거예요….”
차라리 돌아와 주지. 그러지 않으면….
비량아가 바위를 짚고 천천히 일어났다. 앞에 놓인 길은 외길이다. 선택지도 없었다. 비틀비틀 걸어 나왔다. 지금 온 이가 여우가 아니라 범신 당신이었다면….
“어디로 가면 돼?”
굴 입구에 서서 비량아가 물었다. 먼저 바깥으로 나간 여우는 커다란 몸을 가지고도 가볍게 깡충깡충 뛰며 멀지 않아요, 하고 외쳤다.
눈앞에서 그림자와 석양이 내려오는 곳이 확실히 나뉘었다. 비량아는 그 선을 물끄러미 보다가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순간 발끝이 여러 개로 보이기도 하고 흐물거리기도 했다.
녹아내린다, 라고 생각한 순간 바닥과 닿았다.
석양은 따뜻했고 굴에서 멀어질수록 정신이 명료해지는 것 같았다. 이대로 오물이 되어 바닥으로 흡수될 거라고 생각했던 몸이 점점 단단해지는 게 느껴진다. 내디딜 때마다 형체가 갖춰지고 비량아의 발걸음은 점점 더 가벼워졌다. 먹은 것도 없는데 겨드랑이 아래로 모든 객귀가 손을 대고 날개처럼 북돋워 주는 것 같았다.
굴에서 멀어질수록 범신을 갈망하던 마음이 사라졌다. 굴에 있던 쪽과 지금, 둘 중 어느 것이 진심인지도 이제 모르겠다.
“여기예요, 여기!”
길달은 온갖 흉흉한 것들을 덕지덕지 붙인 채 걸어오는 비량아의 우는 듯 웃는 듯한 표정을 보며 히죽 웃었다.
‘완전히 맛이 갔구나.’
불행은 언제나처럼 맛있다. 비량아의 것은 특히 더 맛있었다. 그에게서 범신의 집착이 짙게 섞인 맛이 느껴졌다. 조금만 먹어도 대단한 힘이 났다. 이게 모두 내 힘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긴 혀를 날름거리며 그는 앞장서 일찍이 파둔 덫으로 향했다.
여우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힘으론 커다란 어미 곰을 잡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고생하여 설치한 덫은 노련하지 못하고 까불거리는 어린 곰에게 딱 맞는 크기였다. 그리고 어린 곰은 여우의 예상대로 행동했다.
어차피 큰 곰이었으면 비량아도 어찌 손도 대지 못했을 거다. 여우는 곧 합리화했다.
물론 어린 곰이라도 실패할 수 있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고 혹은 반대로 성공할 수도 있지. 어차피 어느 쪽이어도 자신이 손해 보는 건 없다. 성공해서 범신을 해쳐도 자신에겐 이득이오, 실패한 비량아의 주검을 보고 범신이 미쳐버려도 이득이었다.
‘그럼 이제 범에 대한 신화는 사라지고 여우에 대한 신화가 시작되는 거지.’
길달은 벌써 몇 번이나 떠올렸던, 미친 범이 산군의 자리에서 끌려 내려오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상상을 했다. 그저 영리한 여우 영물에서 신이 되는 거다.
여우는 고작 영물이 된 수준에서 멈출 수 없었다. 지성이 생기니 두 발로 걷고 싶었고, 두 발로 걸으며 권속도 두고 아무도 자신을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 범도 신이 되었는데 나라고 안 된다는 법이 있나. 혹시 모르지. 범의 심장을 먹으면 신이 될 수 있을지도.
각기 다른 마음을 가진 여우와 사람이 비틀대며 한 곳으로 향했다.
어린 곰이 덫 안에서 버둥대고 있었다. 여우의 꾀로 만든 가시나무 덫은 움직일수록 점점 더 곰의 몸을 파고들었다.
“여기예요!”
길달이 비량아의 옷자락을 물어 끌었다. 우는 듯 웃는 듯한 표정으로 내려오던 비량아의 발걸음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어린 것이잖아.”
“그래도 흉포하긴 마찬가지예요. 오히려 더 잘됐죠.”
잠시 가벼워졌던 마음은 찬물을 뿌린 듯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눈을 좌우로 분주히 돌리며 비량아가 뒤로 물러나려 했다.
“어리잖아….”
그러나 길달이 비량아를 놓아주지 않았다.
“언제는 사람들이 그런 걸 따지고 사냥을 했던가요? 왜 이래요, 같은 사람이면서.”
“아, 아니 나는….”
“그럼 이대로 살 거예요?!”
길달이 짜증스럽게 외쳤다. 뾰족한 주둥이로 비량아의 배를 쿡쿡 찔렀다. 섬뜩했다. 이제는 그의 피부처럼 느껴지는 공포가 새삼 와닿았다. 나를 죽일지도 모르는, 실체도 모르는 어떠한 것.
그러나 그런 공포를 느끼면서도 비량아는 저도 모르게 배를 두 손으로 감싸며 몸을 돌렸다.
“이렇게 괴물 같은 꼴이 되어서, 범신에게 이용만 당하다가 죽고 싶냐구요.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이었어요?”
“…….”
“아니면 설마 정말로 범신을 아직도 연모하기라도 하는 거예요? 범신은 그쪽을 사랑한 적이 한 번도 없을 텐데.”
그 말에 비량아는 번개라도 맞은 듯 몸을 떨었다.
“나는… 난….”
“범신은 누군가를 연모하고 귀애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에요. 범을 본 적이 있어요? 수컷들은 자신의 새끼도 물어 죽인다구요. 어리석게 굴지 마요, 비량아. 그는 그저 번식욕에 당신을 범했을 뿐이라고요. 당신이 우는 소리가 온 산에 다 울렸어요. 사내면서 배가 부르게 될 거란 비아냥도 이미 천지에 소문이 다 났고요.”
길달의 독한 말은 비량아를 구석으로 몰았다. 비량아는 이미 구석이었고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위태롭게 가늘어진 정신은 약간의 두드림으로도 단번에 부술 수 있을 정도였다. 설당을 녹여 얇게 편 뒤 굳힌 것. 그게 딱 비량아의 정신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곧 흔들리던 시선이 다시 부옇게 변하며 멍해졌다.
“…내가 복수하기만 하면 정말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어?”
“그럼요.”
“그럼… 내가 그를 잊을 수도 있어?”
마른 무표정 위로 눈물이 주륵 흘렀다. 건조하고 텅 빈 표정에 어울리지 않았다.
“잊고 그리워하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고, 그냥 잊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살 수 있냐고.”
“물론이죠.”
거짓말이었다. 그딴 건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었다. 길달이야말로 비량아의 안위에 가장 관심이 없을 것이다. 대신 그는 비량아의 손에 직접 만든 흑요석 칼을 쥐여 줬다. 거칠게 깎아 잡고 있는 이의 손도 베일 칼이었다.
“그러니 어서 해요. 범신이 돌아와 또 당신을 범하고 완전히 망가뜨리기 전에.”
이미 망가진 주제에 발악하는 꼴은. 어차피 비량아도 저 덫 속의 곰과 같은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속으로 한껏 비아냥댄 그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비량아의 뒤로 돌아서서 콧잔등으로 야윈 사내를 밀었다.
비량아는 밀리는 대로 비척비척 걸었다. 발끝은 곧바르지 않고 이리저리 꺾였다. 비틀거린 끝에 구덩이 끝자락에 섰다. 발끝부터 절반은 허공에, 나머지 절반은 땅을 디디고 있는 꼴이었다. 발가락이 오그라들었다. 비량아가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해요, 비량아. 기다려 온 거잖아요.”
그리고 비량아는 구덩이 안으로 떨어졌다. 후일 괴로움과 죄책감을 견디며 숨 막히는 와중에 아무리 떠올려보려 해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래로 떨어졌던 건 자신이었던가 아니면 여우가 밀었던 걸까.
비량아는 헐떡였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꼼짝달싹 못 하고 낑낑거리고 있던 곰과 눈이 마주쳤다. 맑고 처연한 눈동자. 어리고 어린….
홀린 듯 그 앞으로 다가갔다. 제 호흡소리가 귓전을 가득 채웠다. 곰의 우는 소리도, 여우의 캥캥대는 간섭도 들리지 않았다. 무서운지 자꾸만 구석으로 웅크려드는 곰과의 거리는 고작 다섯 걸음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거칠어진 손에 자꾸만 힘이 빠진다. 흑요석으로 만들어진 칼을 몇 번이나 고쳐 쥐어야만 했다. 손이 덜덜 떨려 끝내 두 손으로 잡았다. 한 번. 한 번만 눈을 딱 감고 벌이면 된다. 고작 한 번이면 되는 일에 이렇게 떨 필요 없어…. 이것밖에는 방법이 없어. 이미 덫에 잡혔잖아.
“어서요. 어서…!”
여우는 자꾸만 떠들었다. 비량아의 귀에는 어차피 들리지 않았다.
내리막길을 걷는 것도 아닌데, 겨우 뗀 걸음이 아래로 푹 꺼졌다. 무릎의 힘이 풀려서다. 그렇게 한 걸음.
“하아… 하….”
비량아가 가쁜 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어느샌가 그는 빌고 있었다. 너무 괴로워. 너무 괴로운데 시간이 흐르질 않아. 그러다가도 갑자기 며칠이고 사라져 있어. 그에겐 찰나에 불과한데, 그 찰나를 위해서 내 평생을 이렇게 살 순 없어…. 그러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치닫자 울컥 눈물이 솟았다. 온몸의 물이란 물은 모두 눈으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 비량아가 접은 소매로 눈가를 거칠게 닦았다.
세 걸음. 두 걸음. 비량아는 속으로 애원했다. 여기 보지 마. 여길 보지 마. 보면 안 돼….
마지막 한 걸음.
“안 돼.”
나지막한 탄식을 뱉고 비량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곤 마지막 걸음을 채 내딛지 못하고 섣부르게 손을 치켜들었다. 한 번. 한 번만 제대로 찌른다면….
“그래요!”
즐거움에 겨운 여우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마침내 비량아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왜! 왜 그래요! 왜!”
여우가 캥캥댔다. 비량아는 그 악다구니에 천천히 눈을 떴다. 축축하게 젖어 엉겨 붙은 속눈썹이 겨우 떨어졌다. 그의 손이, 그가 쥔 칼날이 새끼 곰의 목을 죄고 있던 가시나무에 꽂혀 있었다….
멀거니 그것을 보던 비량아가 쇳소리 섞인 중얼거림을 뱉었다. 못 해. 못 할 짓이야.
“비량아!”
여우가 아무리 애가 닳아 외쳐도, 비량아는 고개를 저었다. 못 할 짓이야. 나는 못하겠어…. 그는 중얼거림 끝에 달려들어 미친 듯이 가시나무를 뜯었다. 손이 찢어지고 피가 마구 터졌다.
“뭐 하는 거예요!”
위에서 여우가 캥캥댔다. 비량아는 제 피가 어린 곰의 털 위로 마구 뿌려지는 건 전혀 개의치 않고 가시나무를 모두 뜯어냈다. 그리고 제 손의 고통은 잊은 채 낑낑대던 곰을 가리듯 막아서선 여우를 쳐다봤다. 곰은 길고 가냘픈 울음을 뱉더니 재빠르게 구덩이를 타고 올라 빠져나갔다.
“저걸… 저걸 어떻게 잡았는데.”
이를 갈며 이곳을 노려보는 여우를 올려다보았다. 비량아의 얼굴은 덫을 뜯는 동안 잔뜩 엉킨 머리카락과 거기 묻은 피로 엉망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모습이 자신을 구하던 범신의 모습과 닮아 있다.
“곰의 쓸개면 돼?”
오랜만에 머리가 맑다. 고통 때문인 것 같다. 머리가 맑다 못해 째지는 느낌이다. 오늘따라 헛것도 그의 주변을 맴돌지 않는다. 비량아의 눈이 겨울의 계곡처럼 시리게 빛났다.
“그러면 나도 되겠군.”
“뭐라구요? 비량아, 당신은 사람이에요. 정신 차려요! 지금 곰이 도망치려 하잖아요! 다 잡은 걸 놓칠 셈이에요?! 당신, 아직 덜 아팠죠? 그런 거죠? 가서 범신에게 더 범해지고 새끼의 손에 죽으면 그제야 후회하겠어요?”
“곰의 아이.”
비량아는 여우의 말을 듣지 않았다.
곰의 아이. 범신이 종종 저를 부르던 말이었다. 끝내 사람이 되어 굴을 나간 곰의 자손들. 그렇다면 저 역시 곰의 새끼였고 곰의 피였다. 비록 진짜 곰처럼 힘을 내려면 쓸개 하나로는 터무니없을 정도겠지만, 틀린 건 아니었다.
“나도 곰의 새끼잖아.”
“비량아, 당신이 곰의 몫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려면 그뿐만 아니라 당신 몸 전체를 바쳐야 할걸요? 스스로 저주를 걸 수 있어요? 걷는 재액이 될 수 있겠냐고요!”
비웃는 한편 여우는 기대하고 있었다. 지금 제 스스로 온몸에 저주를 뒤집어쓰는 짓을 하겠다고? 거기다 조금 부족하지만 그 또한 곰의 쓸개. 더없이 좋지 않은가. 여우는 초조한 척 비량아를 종용했다.
“걷는 재액….”
중얼거린 비량아가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한 번이라도 그에게 상처라도 되길 바랐다. 그런 걸 바랐기 때문에 운명이 이런 식으로 돌아오게 된 걸까? 범신이 내게 재액이 되어서 이번엔 내가 그의 재액이 되는 걸까.
비량아의 손이 배를 어루만지려다가 툭 떨어졌다. 어차피 어떻게 태어날지 모르는 씨앗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
이제부터 할 모든 건 다 내 잘못이야.
소리 없이 입술이 벙긋댔다. 어느새 매일 쉬지 않고 그를 괴롭히던 이명도 가슴을 울리는 진동도 모두 고요해졌다. 으깨지던 머릿속도 명징해졌다. 네가 날 죽일 괴물이든 무엇이든, 지금부터 내가 할 건 오롯이 내 몫이야. 비량아는 속삭였고, 여우의 말대로 그가 부를 수 있을 모든 원귀들을 불렀다.
그의 몸을 허다하게 탐내고 들락날락하던 것들이었다. 범신을 만나 방법을 배우기 전까진 무력하게 내주어야 했던 것들이었다. 그의 의지로 불러 전부 제 몸으로 들어오게 했다.
원한이 만든 독이 몸에 켜켜이 쌓인다. 산 채로 주검이 되듯 발끝부터 얼어붙었다. 이가 딱딱 부딪쳤다.
“멍청이! 자진하는 꼴이잖아요!”
스스로 죽을 수도 있단 것도 모르고 저주를 부리는 사람도 있나…. 비량아는 추위로 벌벌 떨리는 입꼬리를 올렸다. 몰려든 원귀는 그의 뜻대로 움직였다. 비량아에게서 대가를 취하고 그를 위한 저주가 되었다.
이윽고 서 있던 몸이 방금 전 곰이 웅크리고 있던 곳으로 무너졌다. 그 또한 웅크리고 벌벌 떨었다. 영원 같은 시간이 흘렀다. 실은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비량아는 수백 번, 수천 번의 죽음을 겪는 것 같았다.
“흐, 흐으….”
잇새로 마지막 호흡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속에서부터 울컥거리는 것에 비량아는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몇 번이나 욱 욱 게워내다 왈칵 피가 나왔다.
“…….”
제 입에서 주륵 흐르는 걸 멀거니 보았다.
그렇게 몇 번 더 피를 토한 끝에 나온 건 구슬이었다. 소지 손톱만큼 작고 새빨갰다. 그는 그것을 손으로 집어 올렸다. 그리고 다른 손으론 제 배를 감쌌다. 이 구슬이 자신의 쓸개였다. 배 속에 남은 건 이제 돌처럼 굳어가 끝내 죽고 말 거다. 그러고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 모든 순간이 지나가니 어느덧 깊은 밤이었다. 비량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곳이 밤바다 같았다. 그냥 아버지랑 같이 바다에 들어가 버릴걸.
“엄청나군. 성공했잖아…?”
몸을 웅크리고 구덩이 아래에서 벌어진 이 모든 일을 지켜본 여우가 눈가를 찡긋거렸다. 곰을 잡느라 헛수고한 것은 화가 나나 이 상황도 나쁘진 않았다. 아니, 더 좋았다.
비량아는 하늘에서 여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 날 꺼내 줘.”
이미 충분한 불행에 잠긴 비량아가 고요한 물처럼 중얼거렸다.
“씻고 싶어. 씻고 돌아가야 해.”
돌아가서 이제 신조를 기다려야지. 그리고 그다음은… 그다음은 내게 내려질 천벌을 기다릴 거다. 무엇이 오든 다 받아들일 거다.
* * *
몸을 씻고 더러워진 옷은 냇가에 버렸다. 덜덜 떨며 굴로 돌아와선 손에 집히는 대로 옷을 입었다. 다른 것은 다 맞았으나 도포만은 그에게 컸다. 범신의 것이었다.
비량아는 옷이 크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설령 옷을 거꾸로 입었더라도 몰랐을 것이다. 그저 거추장스럽기에 소매를 접었다.
젖은 머리칼이 마를 때까지도 신조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비량아는 스스로 발목에 매듭을 짓고, 저만치 굴러가 더는 끈을 짓누르고 있지 못하는 바위 옆에서 기다렸다.
직접 저주가 되었다. 과정은 이가 부딪힐 정도로 추울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아프진 않았다. 오히려 고요했다.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고요함이었다.
범신은 새벽과 함께 왔다.
“비량아.”
그는 몹시 초조해 보였다. 산을 지나가던 곰의 무리 중 새끼곰이 다쳤다. 게다가 그의 몸에는 사람 피가 묻어 있었다. 어미곰은 이 산에는 사람이 없다 하지 않았냐며 화를 냈고, 범신은 그 피가 누구 것인지 알았다. 비량아였다.
그 뒤부턴 뭐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어린 곰을 치료해 주고 어미 곰에게 무어라 말하면서도 신조는 속으론 한 이름만 불렀다.
비량아.
새끼 곰의 몸에 피가 묻을 일이 대체 무엇이지. 분명 묶어두고 나왔는데. 어떻게 나온 거지. 대체 어쩌다가 피를 볼 정도로 다친 거야. 무엇보다… 얼마나 다친 거지…. 아프진 않을까, 위험한 건 아닐까.
신조는 머릿속을 엄습하는 걱정에 걸음을 서둘렀다. 비량아.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그 이름의 주인이 있는 곳으로.
“비량아…!”
신조가 비량아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자 그가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든 비량아의 얼굴을 감싸고 살폈다. 몸도 더듬어 보았다. 은은한 피냄새가 옅었고 보기에 상처 또한 없었다.
“어서 와.”
그 덤덤한 말투와 목소리에 신조는 눈을 감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들었던 온갖 두려움이 사라지고 밀려오는 안도에 급격히 피로해졌다. 범신이 안도의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네가 이런 말도 다 하고, 내가 죽을 때가 되었나.”
장난기 하나 없는 재미없는 농담에 비량아가 같이 웃었다. 그리고 그의 무릎에 앉아 천천히 신조의 목에 팔을 감았다.
“정말 왜 이러지, 오늘.”
그러면서도 신조는 비량아의 허리를 마주 안았다. 그 팔이 따뜻하기 그지없다. 그제야 비로소 가슴에 있는 열기와 몸이 제대로 맞춰지는 것 같아서 비량아는 아주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도 신조처럼 고요했다.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하나밖에 없던 길은 점점 좁아져서 바늘 위를 걷는 것처럼 되었다.
“나를 기다렸어?”
“응.”
“나를… 그리워했나?”
“…응.”
신조는 황홀한 눈으로 비량아를 보았다. 이제 더는 반짝거리지도 않는데. 비량아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신조도 그에 맞춰 시선을 내리깔며 고개를 틀었다. 가만히 비량아를 응시하다가 조용히 웃는다. 그러곤 중얼거렸다.
“내가 너무 늦은 거지.”
신조의 눈빛에 비량아는 잠시 멈칫했으나 떨어지진 않았다. 그저 숨죽여 기다렸다. 어차피 저도 이 저주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눈치챈 그가 여기서 자신을 밀쳐내도 좋았고, 화를 내며 죽여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신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무엇을 할 수 있겠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내가 사람이었다면 네가 여기까지 오진 않게 되었을까. 내가 너를 이렇게까지 만들진 않았을까. 아니면 사람이었어도 나는 지금과 같은 실수를 했을까.
그래. 이제껏 내가 해 온 모든 게 실수였다. 신조는 이제야 깨달았다.
언제부터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 처음부터 잘못 시작한 바느질이었다. 중간에 잘라내고 끊어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실수가… 너무 많아서 이제는 감당할 수도 없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 곧 그를 덮칠 예정이었다.
지금이라도 비량아를 죽여서 제 눈앞에서 영영 치워 버린다면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자신이 비량아의 재액이듯 비량아도 자신의 재액인데, 피할 수 있으면서도 그러고 싶지 않다.
네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
그는 괴물의 스승이고 귀신들의 왕이었다. 네가 나를 껴안은 순간 깨달았다. 스스로 저주가 되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 나를 기다렸다고 하지 않나. 나를 그리워했다고 하는데, 비록 그게 나를 죽이기 위해서라 한들 그가 먼저 다가오는데 거부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네가 먼저 나를 껴안는데 어떻게 밀쳐낼 수 있겠어.
쓴 냄새가 났다. 비량아에게선 그 특유의 죽순 냄새도, 어느 순간부터 겹쳐 나던 금목서 향도 나지 않았다. 아주 쓴 냄새가 났고, 그런데도 신조는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이 맞닿으며 그것이 신조의 입으로 옮겨졌고, 천천히 신조의 몸에 스며들었다.
‘제 마음도 어리석어 보이세요…?’
이제는 아니라고 말해 줄 수 있는데. 이미 늦었다. 어리석은 건 자신이었다. 이제 비량아는 제 대답이 필요하지 않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다. 대신 그는 비량아의 손등을 덮어 쥐었다.
오래도록 입 맞췄다. 저주는 이미 옮아갔다. 그러나 비량아는 잡힌 손을 놓지 않고,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입술을 뗐다. 신조는 가볍게 마른기침을 한 뒤 비량아가 떨어지지 못하도록 허리를 꽉 껴안았다.
“묻고 싶은 게 있어.”
“…물어봐.”
복수를 성공한 비량아는 너그러웠다. 그러나 그는 고작 사람이라서 신조가 다 알면서도 입 맞췄다는 건 몰랐다. 이제 무지(無知)는 비량아에게로 넘어갔다. 그는 신조를 영영 모를 것이다.
“나를 연모해… 비량아?”
“…….”
“제발….”
스스로 정신을 놓았을 때도 물었던 말이다. 그때는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대답한 게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걸 신조도 알고 있었던 거다.
두 번째인 물음에 비량아의 눈에 순식간에 물이 차올랐다. 표정은 여전히 조금의 금도 가지 않는 무표정이었다.
“아니.”
“…….”
“널 증오해.”
“하하. 역시 그런가….”
신조의 눈이 가물가물 감겼다. 아무리 어두운 굴속이어도 비량아는 신조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걸 볼 수 있었다.
“피곤하다. 곰은 냄새가 났고 난폭했어. 그걸 막느라고… 너무 고단했어.”
그것 때문이 아니야. 아니, 맞을 수도 있어. 그 곰이 난폭해진 이유는 나 때문이니까. 하지만 피곤한 건 그보다 다른 이유 때문일 거야.
“조금만 자고….”
그리고 일어나서 눈물을 닦아 주고 싶다. 어느 순간부터 늘 울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한 번도 제대로 닦아 준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손을 대는 것조차 비량아는 끔찍하게 여길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이것으로 네가 후련하면 좋겠는데, 고작 이 정도로 용서받을 것 같지 않다.
신조는 제가 틀렸었단 걸 비량아에게 말해 주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너를 향한 마음이 연심이었다고 말해 주고 싶었으나, 이제는 그조차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어리석은 자신이라서. 그는 혀가 굳고 흐려지는 정신으로 자조했다.
그리고 비량아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신조를 응시했다. 그가 천천히 눈을 감고 옆으로 스러지는 걸 지켜봤다.
“…….”
잠시라도 놓치면 다시 일어나기라도 할까 그대로 한참을 있다가, 조심히 손을 뻗어 그를 만졌다. 그리고 차갑게 굳은 감촉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범신조…?”
떨리는 목소리가 공허하게 굴속을 울렸다.
“저기요….”
처음 그를 불렀던 식으로도 불러 봤다. 대답은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범신의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지진이라도 난 듯 늘 거세게 울리던 가슴의 진동이 잠잠했다. 고개를 숙이자 숨소리도 느껴지지 않았다.
“…….”
천천히 다시 고개를 올려선 허공을 응시했다가 시선을 내렸다. 그렇게 잠시 범신을 바라보던 비량아는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뒷걸음질 쳤고, 이내 입구 근처까지 도달했다.
찰나, 뒤로 뻗은 발꿈치에 한 조각 햇빛이 닿자마자 그는 몸을 돌려 내달리기 시작했다.
다리가 풀려 처음에는 달렸다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부러진 나무뿌리가 눈 속에 숨겨져 있었다. 그 날카로운 끝에 정강이가 찢겼다. 화살촉 모양의 상처가 났다. 고통스러운데도 비명이 나지 않았고,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발은 움직였다. 절뚝거리면서도 달렸다.
며칠 사이 내린 눈으로 바닥은 푹신푹신했다. 날은 평소보다 따뜻했고 햇빛은 화창했다. 벌써 봄이라도 온 것처럼 햇살이 따뜻하다. 날씨는 잔인하리만큼 아름다웠다.
멀리, 멀리 가도 바로 뒤에 송곳니가 있는 듯한 섬뜩함이 없어서 비량아는 크게 웃었다. 머리카락이 뒤로 흩날렸고, 그가 달리는 걸음을 따라 눈에 빨간 꽃이 뚝뚝 피어났다.
“아하하! 하하! 아하하하!”
비량아는 다리가 아픈 것도 숨이 찬 것도 모른 채 마구 내달렸다. 그에겐 너무 큰 도포의 접혀 있던 소매가 풀려 펄럭거리는 것도 몰랐다. 도포 자락이 떠나지 말라는 듯이 제 다리를 감싸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산을 반으로 접은 듯 단숨에 길이 짧아졌다. 하늘을 나는 것처럼 몸이 가벼웠다. 순식간에 지상에 닿을 것만 같았다. 굴은 이제 지겨웠다. 다시는 저기로 돌아가지 않을 거다. 저딴 곳에, 저딴 곳에 다시는….
“허억. 헉….”
마을이 어슴하게 보일 정도까지 내려와서야 비량아는 숨을 골랐다. 바싹 마른 나무를 잡고 허리를 숙였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욕지기가 나올 정도였다. 몸을 숙이고 헛구역질을 한 뒤 천천히 쪼그려 앉았다.
“훅… 흐윽….”
범신이 자신을 범한 이후로 홀로 나와 본 중 가장 멀리까지 나왔다. 아직까지 자신을 쫓아오는 인기척은 없고, 산은 죽은 것처럼 고요하다. 아침 새조차 우짖지 않았다. 저 멀리서 여우가 춤을 추는 듯한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나.
“흐… 흐윽… 하하, 하…!”
비량아는 헛구역질을 하며 눈물과 웃음을 동시에 토해냈다. 이제 다시는 저기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날 잡으러 오지도 않을 거다. 돌아가더라도 아무것도 없을 거다.
왜냐면….
“정말로 죽은 것 같아.”
내가 그를 죽였으니까.
“정말로….”
비량아는 그렇게 조금 더 헛구역질을 하다가 비척대며 일어났다. 눈을 한 움큼 집어 얼굴을 닦아냈다. 손이 벌벌 떨렸고 온몸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물이 뚝뚝 흐르는 데도 소매로 닦을 생각도 않고 그는 젖은 얼굴로 남은 길을 내려왔다. 조금 전까지 울고 웃던 이는 어디로 갔는지, 눈에 씻겨 내려갔는지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눈빛 역시 황폐했다.
조심히 내려가도,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뒤쫓는 건 없었다. 마침내 비량아는 산 아래에 발을 내디뎠고, 여전히 죽은 듯 고요한 산을 등진 채 겨우 입꼬리를 올려 봤다. 웃는 듯 우는 모습이었다.
새장처럼 나무로 촘촘히 둘러 가두었던 산을 나오고 나니 억새밭이 펼쳐져 있었다. 내린 눈이 억새 위에 아슬아슬하게 얹혀 구름밭처럼 보였다. 비량아는 그 속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억새가 드러난 피부를 긁어도 개의치 않았다.
억새를 헤치며 걷는데 자꾸만 환상이 보여 스스로 자신의 뺨을 때렸다. 그러나 환상은, 저를 앞서 가던 신조의 모습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비량아는 혓바닥을 씹었다.
그러다가 결국 억새밭의 중간에 우뚝 섰다.
어디로 가야 하지….
마르고 터서 새빨개진 얼굴로 햇빛이 노랗게 내려앉았다. 이제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처음처럼.
하지만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겠지.
비량아의 주변으로 돌개바람이 불며 순식간에 억새 위의 눈을 흩뜨렸다. 아래에서 위로 휘감아 올라가는 바람을 타고 마른 눈이 하늘로 버석하게 뿌려졌다. 작은 조각들이 햇빛에 반짝반짝 빛났다. 비량아는 그 모습을 오래도록 보았다.
바라던 대로 되었건만 여전히 세상은 무채색이다. 아무리 보아도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았다. 제 몸을 감싸는 바람도 추운지 따뜻한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떠난 당신의 환상만이 느껴진다.
* * *
그는 금방 자신을 찾을 것이다. 그 생각에 발걸음이 더 빨라졌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나를 찾을 거라고 생각하지? 내가 이미 그를 죽였는데. 내가 그의 저주가 되었잖아. 비량아는 어디로 향하는 줄도 모른 채 웃다가 떨다가 울다가 다시 웃길 반복했다.
눈물까지 모두 마를 즈음엔 더는 웃지도 않았다. 사흘쯤 혹은 일주야는 지난 것 같은데 쫓아오지 않았다. 자꾸 뒤를 돌아보아도 아무도 없었다. 그제야 점차 비량아의 걸음이 느려졌다.
정말 죽었나. 정말 내가 죽여 버렸나. 그래서 오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정말 자유가 되었나. 자유란 게 원래 이렇게… 혼란스럽고 거추장스러웠나…?
비탈길을 내려가느라 혹사한 탓인지 발목이 자꾸만 풀렸다. 휘청거리다가 종내에 앞으로 고꾸라졌다. 걷다 보니 눈도 내리지 않은 곳까지 온 모양이다. 쓰러진 몸 주위로 마른 흙먼지가 풀썩 날렸다. 그대로 일어나지 않고 비량아는 흙바닥에 뺨을 묻은 채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새벽인지 저녁인지 모를 시간이었다.
그대로 한참 있다가 뺨이 얼어붙어 얼얼할 즈음에 고개를 들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모르겠으나 이곳은 어느 집의 마당 안이었다. 비량아가 주검처럼 누워 있었는데도 아무도 그를 들춰보지 않은 걸 보면 버려진 집이 분명했다. 역병에 걸려 떠났다가 죽었든, 전쟁으로 떠나서 죽었든, 그냥 아무도 살지 않게 되었든 버려진 집인 건 매한가지였다.
비량아는 고요하게 썩고 있는 집을 보다가 천천히 무릎을 세웠다. 잠시 머물다가 가야겠다.
몸을 일으켜 안으로 들어서는 그의 뒤를, 마당 여기저기 옹기종기 모여 앉아 그를 구경하던 객귀들이 시선으로 좇았다. 비량아는 그 시선을 알은체도 하지 않았다. 툇마루에 올라 삐걱거리는 쪽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탁, 하고 닫히는 소리가 볼품없다.
* * *
방 구석에 웅크려 내도록 잔 후 일어난 비량아는 뒤늦게 몸을 뉘었던 폐가를 둘러보았다. 먼지가 가득했고, 오가는 포수나 떠돌이가 지내다가 갔는지 온통 산만했다. 그럼에도 좀 치우자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비량아는 다시금 곰팡이가 슨 바닥에 웅크리고 누웠다.
오늘은 날 잡으러 오나?
오늘 밤은 올지도 모른다. 갑자기 나타나 목줄기에 이를 박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비량아는 제 목을 더듬더듬 만졌다. 혹시 찢어진 상태로 떠도는 망령이 되어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
목이 아니면 배인가. 배가 찢어져 죽어버린 건 아닐까. 손을 내려 평평한 배도 두어 번 쓸어 본다. 배 속은 고요하다.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면 그곳에 무엇인가 있다는 것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비량아는 이제 신조가 자신을 미치게 하려고 작당하여 거짓말을 한 게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속에 의심이 많다. 모든 것이 자신을 속이는 듯하고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 믿을 수 없으니 부서진 정신을 의탁할 곳 역시 없었다.
손톱은 여전히 종잇장처럼 얇다. 물어뜯을 때마다 찢어지고 그러지 않아도 찢어졌다. 피가 맺혀 쓰라리고 아팠다. 그러나 비량아는 자꾸만 물어뜯고 찢었다. 그게 자꾸만 자라는 마음이라도 되는 양.
그렇게 하루하루가 참 빨리도 흘렀다. 해가 지면 달이 뜨고, 달이 지면 해가 떴다. 이상하게도 비량아는 배가 고프지도 목이 마르지도 않았다. 마치 사람이 아닌 것만 같았다.
대신 그의 주변에 자꾸만 귀신들이 꼬였다.
불러서 쓰자 하면 얼마든지 쓸 수 있고, 원하지 않는다면 아예 못 오게도 할 수 있다.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서 먼지나 흙을 먹 삼아 그림을 그리면 됐다. 글도 필요 없었다. 쓰면 이루어졌다. 그건 비량아가 타고난 재주였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뭐하러 그런단 말인가. 이제는 그들이 두렵지 않은데. 비량아는 그들이 보여 주는 세상보다 더 끔찍한 일을 겪었다. 오히려 죽음을 체험할 때가 더 편안했다.
“이보시오.”
그래서 목소리가 들렸을 땐, 이번에도 어디 길을 잃은 혼이라도 찾아와 저를 부르는 줄 알았다.
그때 비량아는 가만히 누워 좀이 슬고 무너질 것만 같은 서까래를 노려보고 있었다. 서까래를 차례로 세며 하나에 신조가 죽었을까, 또 하나에 혹시 죽지 않았나, 그런 걸 점치고 있었다. 그게 더 중요한 문제였는지라 바깥에서 누가 무어라 지껄이든 모르는 척할 생각이었다.
“이보시오, 안에 아무도 없소? 설마하니 안의 객도 사람이 아니고 혼백이오?”
장난기가 가득한 목소리였다. 혼백이냐는 소리에 비량아는 저도 모르게 삐걱대는 문을 열었다. 문이라곤 해도 겨우 갖다 막아 둔 정도지, 겨울이었다면 뚫린 창호지 사이로 거센 바람이 사납게 들이닥쳐 기괴한 소리를 냈을 어설픈 것이었다.
“허이구.”
바깥에선 중년에 접어든 듯한 사내가 서 있다가 비량아를 보곤 손뼉을 치며 웃었다.
“귀신인가 했더니 학처럼 잘생긴 사람이었군!”
“…무슨 일인데 사람을 방해하나.”
비량아가 못마땅하게 눈을 뜨고 말했다. 사내는 전신에 음산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음기가 여간 짙은 게 아니었다. 음기이되 이제껏 본 것들보다 더 불안하고 불길했다.
사내가 냉큼 기울어진 쪽마루를 밟고 올라섰다. 사내의 움직임을 시선으로 쫓는데 몹시 어지러웠다. 먹은 것이 없으니 당연했다. 이래도 죽지 않는 걸 보면 자신도 괴물이 된 모양이다. 팔짱을 끼고 부서질 것만 같은 문간에 겨우 기대섰다.
이리 보니 비량아보다 키가 작은 사내였다. 사내까지 올라오자 겨우 버티고 있던 마루가 뻐득거리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내가 이 근처 산에서 백일기도를 드리고 내려왔는데 말이지. 날이 늦고 궂어서 혹시 머물다 갈 수 있을까 해서 물었네.”
“…백일기도?”
백일 간 기도와 치성을 드렸다면 몸의 기운이 깨끗해야 망정인데 이 사람은 더러웠다. 얼룩이 끼었다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더러운 물을 담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람 자체는 호쾌한 인상이었고 목소리나 성격 역시 그렇게 보였다. 비량아는 무척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의 모습을 살피다 뒤늦게 그의 말을 곱씹곤 열병이 난 것처럼 멍해졌다.
“혹시 그 산이….”
더듬더듬 신조와 있었던 산 이름을 댔다. 얼마나 걸어서 여기까지 이르렀는지 모르기 때문에 댄 이름이었다.
“아이고, 거기까지 가다간 내년이 되었겠지.”
내년이라고…?
“내가 다녀온 산은 거기가 아니야.”
그리고 사내가 말한 이름은 정말로 그곳에서부터 남쪽으로 한참 내려와야만 들을 수 있는 지명이었다. 바다가 가까워졌던가. 비량아는 그만 아찔해지고 말았다. 눈앞에 파도가 부서지며 일으키는 흰 포말이 선연했다.
“그래서 말인데. 하루 머물다 가도 되겠지?”
태연한 사내의 요구에 비량아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내는 마치 집주인처럼 방으로 성큼 들어가더니 삿갓을 벗고는 후텁지근하다며 옷자락을 펄럭거렸다. 무례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으나 비량아 역시 주인 없는 집에 멋대로 들어와 붙어사는 신세인 만큼 할 말이 없었다.
그사이 상석으로 올라가 멋대로 가부좌를 틀고 앉은 사내가 씩 웃으며 비량아를 올려다봤다.
“그나저나 내 이름은 우달기인데, 주인댁의 이름은 무엇이신가?”
비량아는 사내의 뒤로 스물스물 퍼지는 그림자를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비량아.”
“…….”
“비량아라고 불러….”
남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게 아주 오랜만이었다. 이 집처럼 오래도록 방치되었던 이름을 들추듯 낯설게 자신을 소개한다.
그러나 무언가 더 말하려 했던 시도는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 이제는 이름 말고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예전에는 버려진 아이였고 조금 더 지나서는 광대패였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범신이 살려 주운 하찮은 놈이었고 이제는….
나는 뭐지.
비량아가 습한 벽에 고개를 쿵 찧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 * *
우달기는 코골이가 심했다. 비량아는 바깥으로 나와 하릴없이 밤을 지새웠다. 어차피 잠도 잘 오지 않던 참이었다.
날씨는 무척 후덥지근하였고 끈끈했다. 비가 내릴 모양인지 개구리가 사납게들 우짖고 있었다. 서로 누가 이길 건지 내기라도 한 양 악다구니를 쓰는 소리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흐린 회색빛 하늘을 향해 산에서는 쉼 없이 물안개를 피어 올렸다. 구름이 자욱하여 그것이 흐르는 게 눈으로 고스란히 보일 정도였다. 무지근한 사위에 비량아의 몸 역시 맥없이 늘어지기 일쑤였다.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던 비량아가 고개를 돌렸다. 무심코 닿은 시야 속, 팔을 뻗으면 겨우 닿을 법한 거리에 혼이 하나 서서는 이쪽을 보고 히죽 웃었다. 비량아가 손을 뻗자 더욱 화색을 하며 다가와 손을 마주 내민다. 서리가 내리는 양 추웠다.
비량아는 그것이 제 손에 닿기가 무섭게 휘어잡아 흩어놓았다.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도망치는 것의 뒤로 째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머리가 얼얼한 귀곡성은 어차피 비량아 자신밖에 못 듣는다. 신조도 없으니… 더욱.
그 순간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우달기가 반쯤 감긴 눈으로 이곳을 보고 있었다.
“대단하시구먼. 성불이라도 시켰나? 중도 못 하던 일을.”
“성불은 못 시켜. 그런 좋은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못 한다. 범신을 죽일 정도로 강력한 저주를 둘렀던 몸이다. 그런 선한 일을 하기엔 글러 먹었다.
“성불도 아니고, 부적 같은 것도 없이 아예 없애버린다고? 정말로 대단하군. 대단해. 대체 왜 이런 벽지에 홀로 갇혀 지내시나? 귀양이라도 온 양.”
“이런 재주를 가지고 사람들 속에 섞여 사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그쪽도 혼자면서.”
우달기는 비량아를 슬쩍 훑었다. 초췌하고 눈빛이 반들거려 그것만 보아선 나이를 가늠할 순 없으나 순수하게 외양만 따지면 앳된 청년이었다. 그런데도 제게 서슴없이 반말을 찍찍 한다. 제법 웃기는 놈이라 생각하면서도 그는 비량아가 흥미로워 그냥 둬 보기로 했다.
원래의 비량아라면 이러지 않았을 거다. 낯선 이에겐 조금 수줍고, 훨씬 정중했을 테다. 그러나 이제 이전의 제 모습은 그 본인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거야 모르지. 어울려 주지는 않아도 필요하면 찾아와 굽실거릴걸. 사람이란 게 원래 그래. 자기보다 더 강한 사람에게 끌리게 마련이지.”
“…….”
비량아는 시선을 피했다. 재미없는 이야기다. 흥미도 없고. 이제 그는 하나에 오래 집중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마치 산산이 부서진 것을 얼기설기 모양만 흉내 내도록 모아만 둔 사금파리 모음 같았다.
“나라면 그 재주를 가지고 더 잘살 수 있을 텐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우달기의 소리를 흘려들으며 비량아는 발끝으로 흙에 덩굴 같은 무늬를 그렸다.
“나랑 가지 않겠나? 응? 함께 부를 쌓아 보자고. 아, 물론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도움도 주고!”
“…….”
대답하지 않고 있자니 썩어 문드러진 마루를 피해 성큼 다가와선 비량아의 옆에 붙어 하도 조잘거린다. 그건 비량아가 귀찮음에 방으로 피해도 마찬가지였다.
“경진으로 갈 셈인데, 함께 가자. 그곳에는 사람이 하늘의 별처럼 많다고 하니 우리가 도움이 될 거야.”
“…그곳은 사람이 많잖아.”
“아, 그러면 산에 들어가서 살게? 사람 속에서 살아야 음산한 기운도 좀 사라지고 그러지.”
비량아가 우달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진심이냐고 눈으로 물었다. 사람이 많으면 여러 욕망에 오히려 얼룩지기만 하지, 어떻게 음산함이 사라진다는 건지.
그 눈빛에 찔끔한 우달기는 고개를 돌리며 괜히 딴짓을 했다. 그러다가 비량아가 더 말이 없자 눈치를 보며 한마디 더 얹었다.
“아니면, 여기서 누구라도 기다리나?”
“…….”
“기다리다가 돌이 되고 먼지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모르고?”
“누굴 기다리는 거로 보인다면, 그쪽은 헛것 보는 눈보다 사람 보는 눈을 고쳐야겠군.”
컴컴한 밤, 습한 기운이 묵직하게 비량아를 눌렀다. 비량아는 질식할 것처럼 입을 겨우 벌려 뻐끔댔다. 초조한 듯 혼란스럽게 눈을 굴리다가 우달기의 손을 당겨 제 뺨에 갖다 대었다.
“아니면… 혹시 내가 이미 헛것인가?”
우달기는 드물게 당황했다. 분명 앞에 선 이가 미친놈은 맞는데 미쳐도 아름답다. 여인 같다는 것이 아니었다. 초췌하고 망가진 와중에 아니, 그렇기에 오히려 눈길이 갔다.
그냥 헛것이라고 대답해 줄까. 그러면 울려나.
우달기는 잠시 망설였다가 “아니.”하고 히죽 웃었다. 잠깐의 쾌감을 위해 큰일을 망칠 순 없다. 비량아를 데려가면 자신의 일에 큰 도움이 되리란 확신이 있었다. 우달기는 어서 손을 뺀 뒤 확언했다.
“자네는 산 사람이 맞아.”
“…….”
바라는 대답이었을 것 같은데 비량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더니 여느 때처럼 등을 보이고 누웠다. 몸을 한껏 웅크린 탓에 서 있을 때보다 훨씬 작아 보인다. 이렇게 야위고 초췌하기 전의 모습이 있었을까. 있었다면 여인들 꽤나 울렸으리라.
“안타깝구만, 안타까워.”
하지만 놀라운 일은 아니다. 본디 산 자보다 망자들에게 사랑받는 이의 운명이란 빤한 것이 아니겠는가. 웅크린 비량아의 뒤로 순해 빠진 객귀들이 옹기종기 모여들어 늘어진 옷자락에 뺨을 기대고 안 듯 몸을 포갰다. 온기 하나 나눌 수 없으면서도 그를 제 아이처럼 감싸고 자신을 노려보는 모습에 우달기가 비웃음을 흘렸다.
저런 것들에게 사랑받는 짝이라니. 보지 않아도 얼마나 박복한 삶일지, 빤했다.
* * *
비량아는 꿈을 꿨다.
더위와 습기에 모든 문을 열어두고 부서진 마루에 겨우 기대서 있던 참이었다. 이상한 예감이 들어서 쉬이 방으로 가 쉴 수 없었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공연히 마음이 수런수런했다.
불안은 점점 심해져, 무엇인가 바로 뒤에까지 쫓아와 몰이를 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결국 비량아는 식은땀을 흘리며 충동적으로 집 밖을 나왔다.
발이 자꾸만 꼬였다. 한참을 걷는 동안 해는 차근차근 비량아를 쫓아왔다. 그러다가 저수지를 파는 인부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근거리에 있는 마을의 토호 유지가 끈질기게 이어지는 가뭄을 막기 위해서 직접 사람을 부려 파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파도 파도 돌만 나오는 상황인 데다 뙤약볕이 사람을 고되게 만들어 인부들은 저마다 삽을 집어 던지고 구덩이 안쪽 비탈에 앉아 탁주를 마시고 있었다.
‘날씨가 하두 수상하니 오늘은 이만 접을까.’
‘파하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수.’
‘하지만 곧 비가 올 것 같은데.’
‘큰비라면 더 깊게 파 두고 가야 마땅하지.’
서로 의견이 분분했다. 비량아는 사람들 근처에 와서야 숨을 고르며 조심스럽게 더 안쪽으로 섞여 들어갈 준비를 했다.
그들을 지나쳐 마을 입구에 접어드니 길거리엔 돼지 오줌통을 부풀려 만든 공을 뻥뻥 차고 다니는 아이들이 보였다. 그들이 깔깔대며 비량아 옆을 빠르게 지나갔고, 밥 짓는 구수한 냄새가 퍼졌다. 이엉으로 지붕을 보수하는 이들과 그조차 하지 않아 짚이 납작해진 집, 또 반대로 지붕이 무너지도록 만개한 흰 박꽃이 눈부신 집들이 이리저리 섞여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 서니 비량아를 향해 흘끗흘끗 보는 시선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에겐 오가는 이들의 면면이야 늘 그게 그 사람이었다. 그런데 척 보기에도 행상도 아닌 이가 멀뚱히 서 있으니 시선이 갈 수밖에.
비량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골목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여전히 불길한 기분은 생생했다.
‘어? 어어?’
그림자 속에 웅크리고 있을 때였다. 이 불길함이 기우에 그쳐 가시길 기다리려는데, 돼지 오줌보를 차며 놀고 있던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어, 어매. 어매!’
각자 꺅꺅 부모를 찾는 소리에 어른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밥 짓는 냄새는 고소하게 풍기고 있었다. 비량아 역시 뒤돌아보았다가, 훌쩍 길어진 그림자와 새빨갛게 물드는 세상에 당황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기우가 바로 이런 거였나 보다.
이미 서쪽으로 제법 기운 해가 그림자에 야금야금 먹히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비명을 지르거나 울어댔다. 부처를 찾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났다. 아이들을 품에 안고 웅크려 숨는 동그란 인영들 사이에서 비량아 홀로 우뚝 서선, 눈이 상하는 줄도 모르고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곧 동그랗고 새빨간 해가 완전히 삼키어졌다. 세상이 온전히 어둠 속에 잠겼다. 달빛조차 없었다. 마침 시기적절하게 먹구름들도 몰려오고 있었다. 어차피 어둠 속에서야 알아볼 수 없었지만.
‘이게 전부였나…?’
오히려 비량아만이 허탈해져, 그토록 불길했던 이유가 고작 이거였나 하며 멀거니 서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바닥 아래 구덩이가 있는 법이다. 순식간에 목덜미의 옷깃이 잡혀서는 허공에 벌렁 들렸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눈알만이 샛노랗게 빛났다.
허공에 들렸던 비량아는 이내 내던져져 등에 풀썩 떨어졌다. 차마 고개조차 들기 무서울 정도로 거센 바람 소리가 연신 귀를 때렸다. 그만큼 빠르게 달리고 있단 뜻이었다.
누군지는 묻지 않아도 알았다. 이미 올라탄 등이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세상을 받치는 데 네 다리가 쓰였다는 거북만큼 커다랗지 않을까 싶은 커다란 범. 제멋대로 다정하고 무지해서 잔인한 범신.
‘…나를 창귀로 만들려고?’
비량아가 꺼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게 신조의 귀에 들리지 않아서는 결코 아닐 거다.
‘나한테 복수하려고?’
비량아는 울었다. 복수가 실패해서 슬프기도 했고, 복수까지 하려고 온 게 반가워서이기도 했다. 두 마음 다 제정신은 아니었다.
신조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정말로 내가 실패했냐고 물으려는데 노란 눈알 같은 달 두 개가 하늘에 떠 있었다. 그래서 비량아는 이게 꿈이란 걸 알았다.
꿈이라니. 지겹다. 비량아는 커다란 범 위에서 내려오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아교에 붙은 것처럼 몸이 떨어지지 않자 차라리 저 달을 떨어뜨리기로 마음먹었다. 꿈이니까 할 수 있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꿈이니까, 손을 뻗어 활시위를 당기는 흉내를 냈을 때 화살이 나타날 수 있었던 거다.
반짝거리는 화살이 억새밭에서 보았던 흩날리는 눈처럼 반짝이며 달로 날아갔다. 두 개의 달 중 하나에 맞았고, 눈꺼풀 같은 게 깜빡하더니 달이 떨어졌다. 비량아는 자신도 모르게 팔을 벌려 그것을 받아냈다. 동시에 범 울음소리 같은 게 들리더니 눈이 떠졌다.
* * *
“나도 함께 갈래.”
“어? 정말?”
짚신에 발을 꿰던 우달기가 화색을 띠고 되물었다. 비량아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꿈에서 깬 이후,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을 정도로 고요하게 있던 것이 갑자기 존재감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무서웠다. 폐가에 홀로 남아 죽고 싶진 않았다.
어떻게 될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내가 품고 있는 게 짐승인지 아닌지, 이게 나를 죽이고 태어날지 아닐지, 그 전에 내가 죽을지 아닐지….
그 아득한 캄캄함이 두려움을 끝없이 길렀다. 그래서 누구든 쫓아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느슨하게 팔짱을 낀 척 배를 가리고 선 비량아가 구역질을 참으며 “그런데 난 아무것도 없는데, 괜찮아?”하고 물었다. 묻는 목소리가 불안했다. 그의 창백한 손이 심하게 떨렸다. 소매가 아니었다면 배를 가린 손에서 무엇인가 숨기고 있단 티가 났을 것이다.
데려가지 않을까 봐 걱정하는 모양이지. 저렇게까지 자신감도 없고 스스로의 가치도 모르다니, 정말로 자신이 사람 보는 눈은 있다. 천금이 제 품으로 들어오는 것 같아서 우달기는 씩 웃었다.
“괜찮고말고. 곧 으리으리한 기와집도 네 것이 될 테니 빈손으로 가볍게 올수록 좋다네.”
세상에는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는 일이 넘치게 많지. 바다의 모래처럼 많지. 그 모든 것이 다 재물이었다. 다 기회였다. 우달기는 비량아의 보폭에 맞춰 느릿느릿 걸었다.
“우선 가장 가까운 마을의 가장 큰 집부터 가자고. 어디든 환영해줄 걸세.”
그리고 가진 것이 많을수록 바라는 것 또한 많다. 어디든 비량아는 환영받을 거다. 나중엔 그게 원한으로 바뀌겠지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에 살자는 말이 있듯이 나중 일을 뭐 미리 신경을 쓰나.
우달기는 즐거웠고 비량아는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여전히 아무도 쫓아오지 않나 확인하고 또 확인하느라고.
뒤에는 아무도 쫓아오지 않고 있었다. 정말로 죽은 모양이다. 밤만 되어도 정말 죽었을까, 로 바뀔 마음이겠지만 일단 지금은 정말로 내가 죽인 모양이다. 정말로 내가….
다음 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