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15/21)

  4.

비량아는 우달기와 두 해를 함께 보냈다. 겨울에 만나고 또 겨울이 되어 새해가 코앞이었다. 비량아는 쥐고 있던 부채를 만지작거렸다. 언 손끝이 닳도록 만졌다. 부채 끝이 움직일 때마다 그를 따라 귀신들이 빙글빙글 돌았다.

‘술은 직접 다루면 안 좋아. 아무리 우리가 특별해도 고작해야 사람 아닌가. 다른 것을 통해야지. 매개체를 쓰는 거야. 속이는 거라고.’

우달기는 나름 도움이 되는 말을 하기도 했다. 대부분은 헛소리였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건 주로 어찌해야 더 많은 의뢰, 더 많은 힘, 더 강한 술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궁리였다. 그딴 생각만 하면 썩는다고 말해도 듣지 않았다. 어차피 모두의 마음은 조금씩 썩어 있지 않냐며, 제 기준에서 멋대로 내린 결론만 지껄였다. 그러나 그걸 듣고 있는 비량아야말로 안이 곪을 대로 곪았기 때문에 반박할 수 없었다.

비량아는 매개체로 부채를 선택했다. 부적을 애용해서 제 흔적을 최대한 남기지 않는 우달기와 달리, 직접 쥐고 흔들어야 하는 만큼 그의 흔적이 짙게 남을 도구였다. 용감하다기보다 무모했고, 겁이 없는 수준을 넘어 미친 짓이기도 했다.

그러나 부채를 사용했다. 손에 쥐이는 것도 좋았고 자신의 흔적이 남는 것도 좋았다. 그걸 따라 누군가 복수를 하려 쫓아올 수도 있겠으나 그게 누구든 무섭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다리는가.

잠이 오지 않는 깊은 새벽, 서늘한 새벽 소리를 듣고 등골을 시리게 하는 달빛을 보면서 자문한다. 스스로도 답을 알지 못하니 대답할 수도 없다. 매일 매일 물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 잠이 들 때에는 곁에 둘 필요가 없는 부채를 곁에 둔다. 꿈에도 꾼 적 없는 비단 금침을 덮고.

이제 그는 비단으로 만든 누비옷도 입을 수 있고, 어디를 가도 궁색할 필요가 없었다. 가진 것이 많아지고 우달기의 말대로 기와가 있는 집도 생겼다. 우달기와 함께 지내긴 하나 집이 워낙 커서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한번 방에 틀어박히면 나오지 않는 비량아의 습관 때문일 수도 있다.

나오고 싶지 않았다. 어쩌다 나오게 되면 며칠이고 잠도 자지 않고 배회했다. 잘못을 했든 안 했든, 해악을 끼쳤든 안 끼쳤든, 괴이가 있는 곳만 찾아다니며 괴이들을 해쳤다. 죽어도 괜찮고 안 죽어도 괜찮다. 언젠가는 쫓아서 죽일 테니까.

괴이들의 스승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자신의 제자들이 죽는 걸 느낄까. 그런데도 자신을 이대로 두는 걸 보면 정말로 죽어 버렸나.

비량아는 귀신들을 부렸다. 부나비처럼 꼬인 객귀들은 그의 수족이 되었다. 한 덩어리처럼 뭉쳐 사자의 모습을 했다. 이곳에서 나고 자라는 짐승이 아닌 탓에 사자는 말로만 전해지다가 그림이나 조각으로 구현되었는데, 비량아의 것은 그런 것들보다 훨씬 실물에 가까웠다.

비량아는 그게 무엇인지도 몰랐고 실물과 얼마나 가까운지도 몰랐으나 자연히 만들었고 능숙히 다루었다. 어쩌면 사라졌다는 그의 어미가 사자가 나고 자라는 곳에서 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비량아는 자신의 태생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런 그의 곁에서 짐승이 눈을 굴렸다.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리며 눈알을 뒤룩거리는 것을 비량아는 산예라고 불렀다. 산예를 종처럼 부리며 지금은 뱀 사냥을 하고 있었다. 머리가 둘 달린 커다란 놈이었다.

뱀이 사람 만 명의 피를 마시면 만인사가 된다고 한다. 만인은 채우지 못했고 이제 막 천인사가 되기를 기다리는 허연 배가 산예의 발아래에서 버둥거렸다.

[나를 왜 죽이는 것이냐.]

“구백구십구 명의 피를 마셔놓고 왜 죽이냐고?”

물론 그것은 구실에 불과했다. 비량아는 뱀이 천의 피를 마시든 만의 피를 마시든 상관없었다. 죽일 이유가 있다면 더 좋을 뿐이다.

비량아가 산예의 곁에 섰다. 산예는 뻐드렁니처럼 입 바깥으로 나온 송곳니를 핥으며 히죽이죽 웃었다. 그러곤 자신의 몸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은 비량아의 손바닥에 머리를 비비며 아양을 떨었다

그때를 노린 천인사가 카악 소리를 내며 고개를 내밀었지만 산예가 더 빨랐다. 입을 벌리고 뾰족한 송곳니로 목을 찍어 위아래로 잡아 뜯어버렸다. 내던진 머리가 굉음을 내며 쿵, 쿵 굴렀다.

“이런.”

가벼운 탄식에 산예가 자신이 실수라도 했냐는 듯이 울상이 되어 비량아를 바라보았다. 비량아는 괜찮다며 갈퀴를 어루만졌다. 어차피 이 정도론 죽지 않을 거다.

그의 예상대로 천인사는 남은 머리통으로도 쉭쉭 소리를 내며 나불댔다.

[네 소문이 자자하던데! 네 죄가 넘쳐 오죽하면 괴물들도 네 업보를 걱정한다더라! 죄 없는 요귀들도 다 잡는다며?]

“내 업보는 뱀이 걱정할 게 아니지. 그리고 보다시피 나는 비단옷도 입고 아주 잘살고 있어.”

[업보는 바로 오지 않는단다, 이 어리석은 녀석아. 나중에 오지. 후생에 올 수도 있고. 혹은 네 배 속에 있는 것에게 모두 갈 수도 있단 말이야.]

킬킬대는 웃음에 비량아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품이 큰 옷이라 배가 얼마나 나왔는지 잘 보이지 않으나 분명 이전에 비해 부쩍 자라 있었다. 볼 때마다 징그럽고 끔찍하기만 한 모양새였다. 2년 반을 지나 이제는 3년에 더 가까워지고 있는 동안 아주 고요히 그리고 지겹게 제 몸에 붙어 있다.

매일 밤 꿈을 꾼다. 이것이 날카로운 발톱과 송곳니로 배를 찢고 나오는 꿈이다. 그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악몽은 억새밭의 꿈이다. 자신이 죽인 범신도 나를 보고 웃고 있고, 나도 그를 보고 웃고 있다. 깨면 비참하고 웃던 자신이 수치스럽다.

그러니 뱀이 이 이야기를 꺼낸 건 악수였다. 비량아는 허리춤에 찬 칼을 들어 달려들듯 뱀의 정수리 위에 칼끝을 겨누었다.

[새끼가 불쌍하다. 태어나기도 전에 업보가….]

“그게 왜 나만 죄책감을 느낄 일이야.”

비량아가 이를 갈았다.

“왜 나만 느껴야 해.”

[재액을 탓하는 멍청이도 있나?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을, 갑자기 강이 넘치는 것을, 산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번개가 내리치는 것을 원망하는 천치가 있단 말이냐.]

비량아의 눈에 불티가 튄다. 그럼 자신이 겪은 일이 그저 단순히 운이 나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건가. 피할 수 없는 일이었고, 어쩔 수 없이 체념해야 할 일이었다고? 그가 범신이고 나는 하찮은 사람에 불과하니까?

[제정신이 아니야. 소문대로 정말 미쳐 버렸군. 하하, 미쳤어.]

“왜 나만….”

[네가 범신을 죽였잖아. 그럼 남은 건 너뿐인데 누굴 탓하라고.]

“뭐…?”

그 말에 비량아의 손이 떨렸다.

“어떻게 그걸….”

[산천초목 모두가 안다. 모르는 이가 없어. 이미 소문이 났지.]

눈치를 보던 뱀은 비량아의 칼끝이 흔들리는 걸 보고 기회라는 걸 직감했다. 산예가 제 발을 핥고 있는 걸 확인한 뒤 고개를 옆으로 빼어 비량아의 무릎을 콱 깨물었다. 비량아가 악,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나자, 비량아의 피로 인해 마침내 천인사가 된 뱀이 히죽거렸다.

[곧 태어나겠네.]

“…….”

[걔한테 업보가 갈지 안 갈지 직접 확인하라고. 얼마 안 남았으니까.]

비량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차갑게 굳더니 칼을 고쳐 잡았다. 그러고는 망설이지 않고 뱀의 머리를 뚫었다.

하고 싶은 말은 모두 후련하게 한 덕인지 이제 막 천인사가 되자마자 죽은 뱀의 얼굴엔 아쉬움이 없었다. 오히려 그 모든 미련과 원한이 다 비량아에게 옮겨간 것처럼 비량아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천인사의 커다란 몸을 수습하여 불에 태웠다. 요물들을 태울 때마다 연기는 늘 공교롭게도 한 방향으로 향했다. 그곳이 어디인지 안다. 굴이 있던 방향이다.

“죽었다면서.”

그럼 이를 사람도 없는데 가서 무엇 한다고.

비량아는 버석거리는 눈으로 그 연기를 바라봤다. 어두운 밤이라 더욱 잘 보였다. 습관처럼 흐르던 눈물이 마르고 잠을 이루지 못해 충혈된 눈도 빨갛게 익었다. 넋이 나가 빛을 잃은 눈빛은 노인의 것 같기도 했고 아이의 것 같기도 했다. 산예가 비량아의 손 아래로 제 머리를 넣으며 아양을 떨었지만 비량아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사람처럼 서서 하늘만 보았다.

서서히 연기가 줄어들 때쯤 비량아가 고개를 내렸다. 배가 무겁다. 소름이 돋았다.

“떠나야겠어.”

그 말에 산예가 갈 곳이나 있긴 하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저 홀로 죽어가는 게 싫어서 우달기를 따라 나왔을 뿐이다. 많은 걸 배운 덕에 산예가 생겼다. 그러니 홀로 죽는 일은 없겠지. 무엇보다 곁에서 봐 온 우달기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혹여 죽기라도 하면 우달기가 제 몸을 삿된 주술에 쓸까 봐 두렵다. 제가 아니더라도 제가 낳은 것을….

산예가 저를 보는 눈동자가 맑다. 잡귀들이 모여 만들어졌으면서. 비량아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손으로 허공을 더듬듯이 감쌌다. 그러자 산예는 부스스 흩어졌다. 다시 부르기 전까지는 그저 그의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을 거다.

비량아는 온몸에 탄 냄새를 묻히고 비틀비틀 우달기와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오자 값비싼 자색 옷을 입은 우달기가 버선발로 뛰쳐나왔다.

“어디 다녀왔나! 귀한 손님이 방금까지 있다 갔는데!”

기름기가 올라오고 화색이 도는 통통한 얼굴을 멀거니 내려보던 비량아가 툭 중얼거렸다.

“나 이만 떠나려고.”

‘또 지랄이군.’ 우달기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비량아는 실력으로 치면 자신과 비할 바도 안 되도록 뛰어나고 여전히 잠재력이 충만할 텐데도 이렇게 종종 넋 빠진 목소리로 사람 속을 긁었다. 역시 미친 것들은 어쩔 수 없다며 우달기가 이를 갈았다.

“또 왜!”

“왜라고…? 내가 또 떠난다고 말한 적이 있던가.”

“그럼!”

우달기는 지겹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빤했다. 또 시작된 거다.

비량아는 가끔 잠들지 못한 걸 보상하듯 오래도록 잤고 아주 잘 먹었다. 사람이 바뀐 것처럼. 그럴 때면 헌헌장부가 되어 아름다운 학처럼 자태가 고고하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다시 시들기 시작하여, 지금처럼 초췌하고 야위어 위태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면 갑자기 떠나겠다고 하다가 방에 들어가서 나오질 않았다.

우달기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고 할 수 있는 이가 왜 이렇게 산단 말인가. 마음만 먹는다면 저 궐 안으로 들어가서 그 잘나신 귀족과 심지어 왕도 코끝으로 부릴 수 있을 거다.

우달기의 대답도 듣지 않고 비척비척 제 방으로 가려는 얄미운 뒷모습을 노려보고 있자니 비량아의 어깨에서 산예의 눈알만 뽀록 나와 우달기를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그래, 저 산예만 해도.

저 사자가 자신에게 있다면 세상을 주물렀을 텐데. 제가 부족한 게 뭐가 있다고. 저 무기력한 비량아보다는 훨씬 더 좋은 곳에 썼을 것이다. 아깝다, 아까워. 왜 하늘은 나같이 준비된 이가 아니라 저런 이에게 대단한 능력을 주시나. 우달기는 채울 수 없는 열등감에 비굴하게 웃었다. 이것은 길달을 닮아 있었다.

그 모습을 곁눈질로 바라본 비량아는 오랜만에 잡소리 하나 없는 멍한 머리로 길달을 생각해 냈다.

‘정말 둘이 닮았었네.’

우달기는 영물도 괴물도 아니었다. 그러니 길달이 분한 건 아닐 테다. 그래도 한번 깨달으니 옆에 있고 싶지 않았다.

길달…. 어쩌면 모두 그 여우의 탓으로 돌려도 괜찮을 거다. 깨닫고 보니 그의 손아귀에 놀아난 셈이었다. 하지만 비량아는 그 순간 범신을 죽이고 싶단 자신의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단 걸 알았다. 선택도 제 몫이고, 그 말에 넘어간 것도 제 몫이었다.

범신이 사라진 지금은 그 여우가 산을 지배하고 있을까.

“난 이용당한 걸지도 모르겠군.”

비량아가 비식비식 웃었다. 나도 여우를 이용했으니 억울할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속 편하다. 호의로만 나를 도와줬을 리가 없지. 역시.

“저, 정말 떠날 거야?”

이번에도 말만 그러고 또 몇 날 며칠을 내리 잘 줄 알았던 우달기는 비량아가 짐을 싸자 당황한 기색이었다. 어떻게든 해야지. 원하는 걸 들어주고 며칠 더 있으라 하면서 좀 재우고 나면 마음이 바뀌지 않을까.

“이 정도면 많이 벌었을 텐데. 내 덕분에.”

그런 생각도 잠시, 비량아가 멀거니 묻자 우달기는 시근덕대기 시작했다.

괴물의 머리칼이나 이빨, 내장 같은 것은 인기가 많았다. 인간의 영생에 대한 헛된 꿈은 끝없는 재물이 솟아나는 구멍과 같았다.

그러나 우달기의 재주는 요귀를 다루는 게 아니라 주술에 더 통달해 있었다. 비량아처럼 괴이를 사냥해 오기엔 부족했다. 비량아는 자신과 지내며 이제 주술도 부적도 곧잘 다루는데 자신은 더 나아지는 게 없었다. 한계가 분명했다. 이것이 우달기를 더욱 열등감에 빠지게 했다.

“내가 번 재물을 다 줄 필요는 없고 집 구할 정도만 좀 주지.”

낮은 자신감에 오기만 솟았다. 변덕스러운 마음은 비량아만이 아니었다.

“여기!”

분기탱천한 마음으로 패물을 내던지자, 자존심도 상하지 않는지 물끄러미 보던 비량아가 하나하나 모아 봇짐 안에 넣었다. 그 모습에 우달기가 조금쯤 누그러진 말투로 물었다.

“어딜 가서 살게.”

“말하지 않을 건데.”

“어째서?!”

비량아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앉아 있는 자신과 달리 서 있는 우달기를 올려다보았다.

우달기가 흠칫했다. 비량아가 자신보다 아래에서 올려보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볼 때마다 묘한 기분에 빠지게 된다. 저 눈매 탓인가. 금욕적으로 생긴 이목구비와 달리 소리도 없이 줄줄 눈물을 흘려 항시 붉은 눈매 때문에.

“너, 나한테 집착하잖아.”

“뭐…?”

“내가 없으면 안 되는 게 많잖아.”

비량아가 한쪽 입꼬리만 느리게 올렸다.

“자네는 약을 잘 만들지. 주술도 잘 써. 사람도 잘 꼬드겨. 하지만 그 재료는? 실상 괴이를 잡는 일은? 사실 이제 나는 주술도 잘 쓰고 부적도 곧잘 써. 내가 없어지는 게 두려운 거 모를 줄 알았나? 내가 어디로 가는지 말하면 그땐 쫓아오겠지. 그런데 난 이제 싫어. 그만하고 싶어.”

“싫다고? 그리 즐거운 듯이 요귀들을 죽여놓고?!”

“아….”

그랬지…. 비량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가 엷게 웃었다.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

뒤늦게 깨달은 스스로의 행동이 우스워 웃음이 났다. 이제 보니 나는 계속… 서신을 쓰는 꼴이었군.

“내가 아무리 죽여도, 그 사실에 상처받고 분해하고 고통스러워할 이가 없다는 걸 알았거든.”

원래도 비량아의 눈은 공허했다. 그래도 이전엔 부스러진 파편을 모아 형상이라도 만들어 보려는 흉내는 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조차 아니었다. 정말로 완전히 텅 빈 눈을 한 채 히죽거리는 걸 보며 우달기가 본능적인 공포심에 뒷걸음질 쳤다.

“난 이제… 정말로 천벌만 기다리면 돼….”

“…진짜로, 자네 진짜로 제정신이 아니군.”

우달기가 무어라고 하든 비량아는 개의치 않고 짐을 쌌다. 그저 피로했다. 온몸이 무겁고 무거운 나머지 어디든 머무를 곳을 찾아 그곳에서 몇 년이고 누워 있고 싶었다.

집히는 걸 마구 밀어 넣는 손길이 조급해질수록 종잇장처럼 얇아진 손톱이 자꾸 엉키고 찢어졌다. 이제는 익숙했다. 낫지 않는 손톱도, 변하지 않는 자신도. 소식 없는 범신도. 내가 해온 모든 일도.

“미쳤어…. 그렇게 가서 잘살 것 같나? 지금 자네 꼴을 봐. 혼자서 제 구실이야 하겠냐고! 지금 자네가 날 떠나 홀로 산다면 며칠도 되지 않아 죽고 말 거야!”

짐을 모두 꾸린 비량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야 익숙한 그 모습이 되었다. 우달기가 비량아를 올려다보는.

“그래 준다면 오히려 고맙지.”

비량아가 선선히 웃었다. 사감 없이 순수하게 기쁜 미소였다. 처음 보는 그 모습에 우달기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대로 굳은 우달기를 두고 비량아는 집을 나왔다.

커다란 저택이었으나 자신의 방은 작았다. 불편하진 않았다. 작은 방을 요구한 건 자신이다. 봇짐은 패물이 대부분일 정도로 들은 게 없었다.

두 해가 꼬박 채워지고도 남게 보냈으면서 이곳에서의 기억은 거의 없다. 추억이랄 것 역시 당연히 없었다. 범신이 자신을 겁탈한 이후로 모든 기억은 드문드문 존재했고, 한 덩어리로 억지로 뭉친 듯이 망가져 있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앞으로도 세세하게 기억하지도 추억하지도 못할 테니 어떻게 되든 무섭지도 않았고 걱정되지도 않았다.

비량아는 대문을 나서면서도, 그리고 점점 멀어지면서도 단 한 번을 뒤돌아보지 않았다. 집을 나온 순간부터 우달기는 잊혀졌고 다시는 엮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이제 그는 그럴 힘도 있었다. 원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지 않고 원치 않은 인연을 끊을 수 있는 힘이.

그렇다면 이 힘으로 그는 주변에 아무도 두지 않을 것이다.

* * *

비량아가 터를 잡은 곳은 땅이 습하고 촉촉하여 쉬이 가물지 않고, 물난리가 나도 흙이 금세 머금어 범람이 오래가지 않는 곳이었다. 고을 자체는 크지 않으나 오가는 이들이 많아서 씨족만으로 구성되지 않은 독특한 곳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비량아도 조용히 스며들기에 알맞았다. 비량아는 패물로 집을 구하자마자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그에 대한 소문은 금세 퍼졌다. 새로 온 이가 있는데 심지어 금방 떠나려는 게 아닌지 집까지 장만하더란 이야기에 고을 사람들 모두 궁금증이 한껏 높아졌다. 그러나 정작 그 장본인이 도리어 집 문을 걸어 잠그고 두문불출하니 호기심에 더해 소문만 무성해질 뿐이었다.

온갖 소문 중에서 한때 귀족이었는데 집안이 몹쓸 짓을 하여 멸문지화를 당하고 겨우 목숨만 부지해 이곳까지 숨어들었다는 설이 가장 우세했으나, 그러기엔 그가 구한 기와집이란 것이 참 사치스러웠다.

혹자는 상인 집안의 부끄러운 아이라 이곳에 숨겨두는 것 같다 했으나,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숨을 필요까지 있단 말인가? 혹여 사람을 죽였나?

그러나 어떠한 소문도 비량아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이 중 하나쯤은 맞을 만도 한데 아무것도 맞지 않았다. 비량아는 그저 신을 알아본 죄로 신벌을 받게 된 운 나쁜 사내였다. 그게 죄가 될 줄은 당시에 범신도 그도 몰랐고.

“으, 윽….”

기와집 안쪽 깊은 방에서 비량아는 몸을 웅크리고 입술이 터지도록 깨문 채 식은땀을 흘렸다. 복통이 시작된 지 일주일째다.

변덕스럽게 아팠다가 변덕스럽게 괜찮아졌다. 아플 때는 주춧돌에 머리를 찧어 죽고 싶을 정도였다. 사람을 말려 죽이려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몇 시진을 몸부림치고 나면 갑자기 몸이 씻은 듯이 가벼워졌다.

그러나 오히려 그때 비량아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고통스러울 때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으나 고통스럽지 않을 때는 온갖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을 안겨준 이에 대해서와 그 이유를 떠올리게 마련이다. 자신을 향한 탓, 그를 향한 탓, 이제는 원망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복수의 허망함 같은 것까지.

그리고 어느 날, 이른 아침 비량아의 집 대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비량아는 그 소리를 무시하려 했으나 그날따라 머리가 징징 울렸고 대문이 쿵쿵 울릴 때마다 몸이 경련을 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결국 기다시피 문까지 갔다.

“누구십니까.”

“적선 좀 해주소.”

아이 같기도 하고 노인 같기도 하고, 남자 같기도 하고 여자 같기도 한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다.

“집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 없어. 거짓말 말고.”

“없다고요.”

정말로 없었다. 있었다면 차라리 시원하게 적선하고 끝냈을 거다. 비량아는 이런 말씨름도 피곤스러워 몸을 돌리려 했다. 그 참에 건너편의 칼칼하고 거친 목소리가 이리 비아냥댔다.

“그러니 아이가 나오고 싶어도 못 나오지.”

비량아는 홱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돌렸다. 마침 배가 아프려는 참이었다. 고통을 애써 무시한 그가 비척대며 문으로 다가갔다.

“…잘못 아셨소. 이곳에는 사내 하나밖에는 안 살아.”

“그 사내한테 하는 말이 맞는데?”

“…….”

“고통을 끝내고 싶지?”

여차하면 산예를 불러 뼛조각 하나도 남지 않게 하면 되지 않을까. 비량아는 창백한 안색에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눈빛만 형형한 낯짝을 해선 침을 삼켰다.

“끝내고 싶지?”

달콤한 목소리는 자신을 꼬드겼던 여우처럼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마음이 변하지 않던, 차라리 다정하게 무관심하고 잔인하게 사랑스럽던 신조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비량아는 천천히 걸쇠를 풀었다.

빗장을 열고 문을 열자 노파가 히죽 웃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갑자기 목소리가 무척 젊어졌다. 노파라고 하기에는 젊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낯이 익기도 했다. 비량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누구냐고 물으려는 찰나, 노파가 엄청난 힘으로 비량아를 밀었다. 손쓸 틈도 없이 뒤로 밀린 그의 앞으로 성큼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더니 갑자기 키가 쑥 커져 다른 사람이 되었다. 머리는 엉망으로 자르고 옷은 넝마를 겹겹이 주워 입은 듯한 여인이 나타났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걸걸한 목소리, 맨발인데도 깨끗한 발바닥과 다부진 손목엔 주목나무로 만든 염주. 가믄장아기였다.

그가 손을 까딱하자 문이 쾅 닫히고 빗장과 걸쇠가 겹겹이 둘러쳐졌다.

비량아는 쏟아지는 고통에 뒤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가믄장아기가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범신을 해친 소감이 어때?”

“…흐.”

“그렇게 복수하니 속이 시원해?”

“…….”

“그래야지. 속이 시원해야지. 후련해야지. 네 쓸개까지 바쳐가며, 네 목숨을 걸어가며 한 일인데, 속이 시원해야지!”

가믄장아기가 비량아의 얼굴을 쓸었다. 내내 비량아를 비웃는 듯했던 표정이 순간 안쓰러움을 드러내며 일그러졌다. 당사자 둘을 제외하면 둘의 사연을 그나마 가장 잘 알 이가 가믄장아기였다. 말은 이렇게 해도 가믄장아기는 비량아에게 측은지심을 느꼈다.

“그런데 네 꼴을 봐…. 통쾌해하지도, 후련해하지도 않잖아. 오히려 너는 그를 기다….”

“아니야.”

비량아가 이를 악물고 대꾸했다. 앙다문 입술에서 피가 비쳤다. 파고처럼 오르내리는 고통 속에서 그가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애써 참아내는 얼굴이 참혹할 정도로 위태롭다. 꺼져가는 목소리만 겨우 뜨문뜨문 나왔다.

“복수를 한다고 그래, 다 끝나는 건 아니더라. 하지만 하지 않는다면 나는 누가 위로를 해 줘?”

“그러나 그것 때문에 지금 괴물들이 멋대로 날뛰고 있지.”

대꾸한 순간 가믄장아기는 자신이 한 말을 후회하리란 걸 알았다. 하지만 이미 뱉은 것을 돌이킬 수는 없다. 비록 제 말이 비량아에겐 얼마나 교만하고 차갑게 들릴 줄 알면서도….

“…날뛰는 요귀들은 내가 다 잡았는데.”

“그것들이 왜 날뛰게 되었을까? …비량아, 복수가 네게 뭘 해결해 줬는데. 세상은 괴물들이 날뛰게 된 걸 네 책임으로 돌릴 거야. 그건 어찌할 건데.”

“그건 나한테 말고….”

옆으로 몸을 겨우 돌리며 비량아가 떨리는 입꼬리를 올렸다.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져 있어서 미소보다 우는 것처럼 보였다.

“그 작자에게 물어봐야 맞지 않겠나.”

“…….”

창백하게 질려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그는 말을 이었다.

“알아. 나보다 중요한 것들이 이 세상이 아주 많다는 걸. 하지만 내 삶은? 내 마음은? 내 첫 연정은, 그 처음이 부순 모든 것들은? 그리고 미워하고 미워할 시간은?”

눈물이 날 것 같았으나 눈은 불이 붙은 것처럼 뜨겁고 고통스럽기만 하지 나오는 게 없었다.

“나는 가진 게 나뿐이라 모든 게 아까워. 모든 게 아쉽다고. 복수를 왜 했냐고. 그럼 용서를 할까. 그렇게 치부하고, 잊혀지고,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때까지 하릴없이 흘려보낼 수 있을 만큼 많은 시간이 내게 있을 것 같아? 사람에겐 그런 시간이 없어. 너희들뿐이야, 그런 걸 가진 건.”

비량아가 허망하게 웃었다.

“그리고 범신도 그러하겠지….”

“…….”

“내 복수가 실패했다면, 그는 화가 나긴 하겠으나 결국 언젠간 날 잊을 거야. 나의 복수조차 사소한 게 될 날이 올 테고, 종내에는 비량아라는 이름조차 잊게 되겠지. 난 평생 그를 잊을 수 없을 텐데. 이제 나는 내 이름조차 흐릴 정도로 범신만 생각하고 있는데.”

처음부터 미워하기만 했다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 거다. 비량아는 입술을 세게 물었다가 뗐다. 빨갛게 충혈된 입술이 떨렸다.

“내 복수가 성공했다면, 아니 성공했길 바라는 건… 그의 마지막 기억이 나와의 입맞춤이고 내 얼굴이고 내 입술의 감촉이었으면 해서야. 잊혀질 시간도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는 순간, 그가 가진 끝없을 시간을 부수는 게 그토록 하찮게 여기던 나였으면 해서.”

이것도 증오라고 할 수 있을까. 오로지 증오라고만 할 수 있을까. 증오하고 있는 건지 날마다 연정을 쌓아 썩혀가는 건지 모르겠다. 그저 그가 나와 같은 마음이 되길 바랐다. 내가 느낀 모든 것을 그도 느꼈으면 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억울하잖아. 나는 너무 비참한 데다 그 비참하리란 것도 잊혀지게 될 거잖아.

“…….”

가믄장아기는 모든 것을 말해 줄까 하다가 말았다. 범신이 죽은 게 아니라 깊은 잠에 빠진 상태라는 걸.

그러나 말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나. 그게 위로가 되긴 하겠나? 설령 그렇더라도 매일 저녁이면 위로는 후회로, 후회는 안도로, 안도는 다시 증오가 될 거다. 그리고 증오는 다시 위로가 되겠지. 사람이었던 가믄장아기기에 비량아를 알았다. 이해할 수 있었다.

어차피 죽은 거나 비슷하긴 했다.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상태다. 그리고 그렇게 된 원인은 비량아가 맞았다.

비량아가 한 일 때문에 삼신마저 분노했다. 삼신은 아이가 태어날 날을 점지해 주지 않았고, 그렇기에 비량아와 범신의 아이는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에서 지닐 무게를 상실하고 말았다. 태어날 날이 없으니 죽을 날도 정해지지 않는다. 끈 없이 부유하는 것처럼 떠다닐 삶이 된 거다.

영영 이렇게 비량아를 괴롭히다간 둘 다 죽을 수도 있으나, 가믄장아기는 그건 비량아에게 너무 과한 벌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이렇게 몰래 나온 것이다.

“들어가자.”

엄청난 힘으로 가믄장아기가 비량아의 팔을 제 어깨에 걸쳤다. 그가 대단한 장신인 덕분에 비량아도 질질 끌리지 않을 수 있었다.

제대로 된 세간살이 하나 없이 텅 빈 황량한 방을 보고 혀를 찬 가믄장아기가 제가 걸친 온갖 넝마로 방을 꼼꼼히 가렸다. 이로써 삼신의 눈을 가릴 것이다.

“나도 처음 해 보는 거라 어떻게 될지 몰라.”

“뭐, 뭘 할 건데.”

비량아가 열에 들떠 흐려진 눈으로 가믄장아기를 보았다. 의심과 공포로 팔을 바르작대며 움직이지도 않는 제 몸을 팔꿈치로 열심히 밀고 있었다.

“네 배 속에 있는 걸 꺼낼 거다.”

“어떡, 어떻게….”

비량아는 덜컥 겁을 먹고 순식간에 약해졌다. 고개를 마구 저으며 구석으로 물러나려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그에 가믄장아기가 눈살을 찌푸렸다.

“배를 찢고 나, 나오면? 내가 짐승, 짐승을 품고 있던 거면…? 차라리 안 볼래… 차라리….”

“그건 미친 생각이야.”

“안 볼래.”

비량아가 입술을 물고 울기 시작했다. 약해진 마음 탓에 그의 울음 역시 연약하기 짝이 없었다. 어린애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가믄장아기는 안쓰러움을 느꼈다. 사실 비량아가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오해는 누구나 한다. 오해를 어떻게 푸느냐에 달려 있을 뿐. 그런데 오해가 풀리지도 않고 오히려 겹겹이 잘못만 쌓였다.

망가진 인연은 무릇 둘 다의 잘못이 있다곤 하지만, 가믄장아기가 보기에 죄의 질은 범신이 훨씬 나빴다. 그리고 범신이라는 이유로 그의 죄질은 일방적으로 덜어졌다. 비량아에게 억울한 일이었다. 심지어 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지금 비량아 혼자 오롯이 감당하고 있었다.

“안 볼래, 그냥…. 그냥 이대로….”

“아니. 안 돼.”

어쩔 수 없이 가믄장아기는 좀 나쁜 역할을 자처하기로 했다.

“그 애는 무슨 죄야.”

비량아가 창백한 얼굴로 눈을 껌뻑거렸다. 그대로 멈춘 그를 두고 가믄장아기는 허리에 찬 주머니를 꺼내 열었다. 무엇이 필요할지 알 수 없으니 일단 천구의 송곳니를 가져왔다. 해를 삼켰다가 뱉으며 하늘의 혼란을 가져오는 개의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유치는 아주 날카로운 만큼 비량아의 배를 열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되어서.

사내가 아이를 낳는다니. 아무리 가믄장아기여도 처음 겪는 일이었고 처음 듣는 일이었다. 전례도 없고 따라서 방법도 없었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어차피 죽고 싶다면 내 미친 짓에 어울렸다가 죽는 게 몸도 마음도 가볍지 않겠어?”

가믄장아기가 떨리는 목소리로 허세를 떨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게 도움이 되었는지 비량아가 얼빠진 얼굴로 천천히 옷자락을 열었다.

삼 년이었다. 삼 년이 지났다고 보기에 터무니없이 작은 배였다.

“차라리 기절하고 싶은데.”

비량아의 중얼거림에 가믄장아기가 작은 환을 꺼냈다. 마자(麻子)의 씨앗과 귀구(鬼臼), 석창포(石菖蒲)를 한데 모아 뭉친 것이었다.

“이걸 먹어.”

고개를 저으려던 비량아는 가믄장아기의 재촉에 겨우 그것을 물었다. 손에 쥐었을 때 빛이 났던 것은 입에 물자 독특한 지린내와 역한 맛에 먹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결국 꼭꼭 씹어서 삼켰다.

“조금만 기다리면 돼.”

“아니, 안 기다려도….”

비량아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는 더 빨리 움직였을지도 모른다. 그가 느끼기에 아주 느릴 뿐이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고, 고개를 저을 때마다 방향은 바뀌는데 잔상은 그대로 남아 방의 모서리가 수백 개는 되는 것처럼 보였다.

“나….”

풀린 혀로 중얼거렸다.

“나는….”

머리가 하는 말이 아니었다. 온몸으로 하는 말이었다.

“나는 죽이고….”

죽이고 싶지 않았나? 죽이고 싶었나?

더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가믄장아기의 손이 수천 개로 보였다. 피가 나오는 것 같았는데 아닌 것 같기도 했고. 비량아는 자신의 배라고 생각한 부분을 더듬었으나 그곳은 허공이었다.

“조금 자.”

가믄장아기가 진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다시는 천구의 이빨을 사용하지 말아야지. 결이 거칠게 잘리며 너무 깊이 들어갔다. 그러나 아이는 멀쩡했다. 가믄장아기는 지나치게 작은 아이를 들고 활짝 웃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어, 어서 맞다. 어서 꿰매야지.”

피 냄새가 자욱했다. 가믄장아기는 피살이 풀을 조금 찢어 비량아에게 먹였다. 살살이 풀까지 가져올 순 없었다. 그것까지 훔쳐 왔다간 서천 꽃밭 주인에게 잡혀 흠씬 두들겨 맞았을 테니.

백지장처럼 하얗던 안색이 조금 돌아왔다. 그 틈에 가믄장아기는 꼼꼼하게 배를 닫았다. 이를 위해 서천 꽃밭에 드리워진 거미줄을 가져왔다. 아주 튼튼하고 투명하고 얇았다. 그러나 실제로 보니 이 역시 살을 여미기엔 좋지 않았다. 다음에는 다른 방법을 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니다. 이런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게 낫다. 사내끼리 아이가 생기는 일 따윈….

“비량아.”

가믄장아기가 아이의 몸을 닦아 면포로 꼼꼼히 감싼 뒤 비량아의 가슴 위에 얹어 줬다. 비량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봐. 발톱도, 노랗고 까만 털도 없어.”

비량아는 눈으로 보기 전에 손으로 천천히 아이를 더듬었다.

“…짐승의 모습이 아니네.”

“사람의 몸으로 범신을 낳을 수는 없지.”

하지만…. 가믄장아기가 잠시 망설였다. 그러고는 아직 눈도 다 뜨지 못한 아이가 듣기라도 할까 봐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하지만 이 아이는 귀태 취급을 받을 거야. 귀태처럼 살 테고…. 귀신과 사람의 아이로 몸 성하게 태어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위로가 되라고 한 말도 아니었을 거다. 어차피 어떤 말을 들어도 지금 비량아에게는 좋은 이야기가 되지 못했다. 그건 아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

비량아의 손이 계속해 움직였다.

피부는 촉촉하고 보드라웠다. 아이치고 몸이 조금 찼다. 손은 아이의 볼을 감쌌다가 조심스럽게 입술 사이로 들어갔다. 아이인데도 이가 모두 나 있었다. 끝이 뾰족하지 않고 자신의 것처럼 동글동글한 네모였다. 혀는 부드럽고 미끈대는 걸 보아 가시가 돋지 않았다.

다시 나와 코와 손끝을 간지럽히는 속눈썹, 숱 많은 머리를 만진 뒤 아래로 내려갔다. 손과 발이 아주 작고 끝은 물렀으며 손톱과 발톱은 여린 종이처럼 얇고 동그랬다. 비량아의 눈에서 주르륵 물이 흘렀다.

“불쌍하게….”

“…….”

“날 닮았잖아….”

그토록 끔찍하게만 여기고 징그러워하며 한 번도 이것의 모습을 상상해 보지 않았다. 그리하여 머릿속에서 이것은 늘 뿌연 연기 같거나 짐승 같았다. 하지만 보지 않고 만지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닮았다는 걸.

그냥 아기였다. 자신이 낳았다는 느낌은 거의 없었다. 갑자기 어디서 나온 아이가 제 품에 던져진 것 같았다. 아기. 아기라니. 괴물도 아니고 그저 너무 작고, 소금 결정 같은 손톱과 복숭아 같은 피부를 가진 아기.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비량아는 아주 오랜만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 내어 울었다. 그간 그저 망가진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 위로 물만 흘렸는데 이번엔 아니었다.

“내가,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가슴이 들썩거리는데도 아이는 곤히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순한 아이였다. 너무 순했다.

“나 때문에 얘는 불행할 거야.”

그래서 비량아는 더 견딜 수 없었다.

“인생이 끔찍하게 괴로울 거야.”

우달기가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건, 그것이 오롯이 우달기 자신이 받을 업보기 때문이었다. 책임질 것도, 그 책임질 것으로 인해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으니까. 한때는 비량아도 그렇게 여기고 그렇게 살아왔다. 어차피 벼랑 끝인데 무슨 천벌이 와도 이보다 더하겠거니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책임질 것이 생겼고, 그건 오롯이 비량아의 책임이었다. 원망하고 전가하고 떠맡길 이 역시 없다. 자신이 죽였으니까.

비량아가 두 손으로 얼굴을 싸맸다. 흐느낌 끝에 젖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내가 널 망쳤어, 비파….”

* * *

비파는 젖이 아니라 피를 먹고 자랐다. 적게 먹었고 많이 잤다. 오래도록 잘 때면 비량아는 옆에 무릎을 안고 쪼그려 앉아 있다가 가슴이 들썩거리는 것과 부드러운 머리뼈가 오르내리는 것을 확인했다.

피를 먹는다니, 징그럽기도 하고 당연하기도 했다. 자신은 젖이 나오지 않았고 어쨌든 비파의 반을 만든 건, 어쩌면 대부분을 만든 건 짐승이었으니까.

꼬박 세 번의 사계절을 배 속에서 웅크리고 있었던 걸 보상하듯 비파는 많이 자고 그럴 때마다 쑥쑥 자랐다. 그리고 아주 가끔 울었다. 그사이 가믄장아기는 몇 번 왔다 갔고, 비량아는 비파가 말을 할 때가 되자 더는 오지 말라고 했다. 지금으로선 피를 먹고 많이 자고 아주 빨리 자랄 뿐, 그 외에는 범신의 기질도 자신의 기질도 닮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지루할 정도로 평범한 아이였으면 좋겠다. 그것밖에는 바랄 게 없었다. 그 이상을 바랄 자격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비파는 태어난 지 두 해가 되었을 때쯤 여섯 살 정도의 모습이 되었다. 그 속도가 사람답다곤 할 수 없었다. 그걸 새삼 깨달을 때마다 비량아는 잠을 이루지 못했고 명치가 시큰시큰 쑤셨으며 주먹을 쥐다가 손톱을 부러뜨렸다.

당연히 걸었고 말은 아직 못 했다. 비량아가 비파를 데리고 처음으로 문밖을 나섰을 때 사람들은 쑥덕댔다. 귀신 들렸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도는 저택에서 두문불출하다 겨우 나온 사내와 그 사내의 손을 잡고 있는 아이. 원래 아이가 있었던가? 어떻게 그간 저렇게 조용했지?

사람들은 어쩌면 비량아가 이곳까지 온 이유가 아이 때문일지도 모른단 이야기를 해댔다. 원하지 않던 아이가 불의의 사고로 생겨서, 집안에서 도망쳐 여기까지 와 숨은 것 같다고. 여인은 어디로 갔든 죽었거나 한 것 같다고.

저의 등 뒤에서 이루어질 수 없던 열렬한 사랑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지어지고 있단 걸 알았다면 비량아는 코웃음을 쳤겠으나, 우습게도 그게 비량아에 대한 추측 중 가장 사실과 가까웠다.

어찌 되었든 비량아는 자신에 대해 떠드는 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비파에게 맞는 옷이 없어서 우스꽝스럽게 소매를 자른 제 저고리 하나를 입혀놨기 때문에 옷이 필요했다.

그는 길쌈하는 여인에게 갔다. 손재주가 좋고 손이 빨라 종종 남은 것을 곡식이나 과일 같은 것을 받고 건네주기도 하는 이였다.

“아이 옷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오래도록 입을 수 있게 크기가 넉넉하고 다양하면 좋습니다.”

여인은 비량아를 흘끗 보았다가 비파를 보았다. 둘은 아주 많이 닮았으나 제법 달랐다. 비량아가 좀 더 선이 다부지고 사내다운 느낌이라면 비파는 여아인가 싶을 정도로 예뻤다. 마치 꽃 같았다. 비량아 역시 아름답긴 했으나 병색이 완연하여도 갖춘 뼈대가 있기에 꽃보다는 나무에 가까웠다.

“아들입니꺼.”

이 고을 특유의 말씨로 여인이 물었다. 비량아는 마른 눈으로 비파를 내려다봤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비파 역시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췄다.

“…그게 중요합니까?”

“아아니, 궁금하니까 그러지.”

비량아는 혀와 입천장이 들러붙은 것만 같았다. 그 한마디로 네가 누구냐고, 그리고 나는 누구냐고 묻는데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비파의 눈동자가 말갛고 커다랗다. 눈앞의 이가 본인이 태어나기도 전에 저의 삶을 고단하고 지리멸렬하도록 망쳐놓은 장본인인 줄도 모르고.

“몇 살이니꺼?”

이번엔 여인이 다른 걸 물었다. 비량아는 비파를 가만히 보다가 대답했다.

“올해 다섯 살입니다.”

태어난지 두 해밖에 되지 않았으나 배 속에 있던 게 삼 년이다. 비량아는 그 시간도 쳐 주었다. 비파가 아직 소리 내지 못하고 발음하지 못하는 입술로 다섯 살, 하고 중얼거리는 게 보였다. 그때 비량아는 마음먹었다. 괜한 기대를 하지 않도록 미리 가르치기로 했다.

“생년월일은 모르고요.”

“예?”

묻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 것에 여인이 고개를 들어 되물었다. 여인에겐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마치 혼잣말을 하듯 비량아가 중얼거렸다.

“천애고아입니다. 나밖에 없는.”

“…….”

“태어나게 한 이는 죽었거든요. 일찍.”

이제 비파는 비량아가 자신의 형인 줄 알고 살 것이다. 그래. 이게 맞다. 비량아는 이 순간 정했다. 아우로 키울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부모가 없는 듯이 살게 할 거다. 평범하게. 가능한 한 아주 평범하고, 아주 지겨우리만큼 재미없고 지루한 삶을 살도록. 업보도 모르고 괴이도 귀신도 모르는 삶으로.

“여, 여깄습니더.”

여인이 옷가지를 모두 모아 건넸다. 비량아는 집을 구하고도 남은 패물 중 하나를 주었다. 그 값어치를 꼼꼼하게 따지지 않고 돌아섰다. 그리고 다른 아낙에게 매주 한 번씩 먹을 것을 가져다 달라며 그 선금으로 또 패물 하나를 건넸다.

그렇게 비량아는 오랜만에 나와선 이후 한동안 나오지 않아도 되도록 한 뒤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대문을 들어서자, 집이라며 정을 붙이지도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일이 없는 그곳의 처마 끝에 잡상(雜像)처럼 작게 웅크린 산예가 눈을 뒤룩뒤룩 굴리며 그들을 기다렸다.

그쪽을 향해 고개를 든 비파가 꺄르르 웃었다. 우연인지 우연이 아닌지 모를 기세로.

* * *

비량아는 자기 자신은 나가지 않아도 비파가 나가서 놀고 오는 것에는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았다. 도리어 같이 놀 아이가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나가서 놀고 오겠다며 폴짝폴짝 뛰는 모습을 마루에 앉아서 멀거니 보고 있으면 아이는 중간중간 동그란 이마에 땀을 송글송글 매단 채 돌아오곤 했다. 그러곤 악의가 없어 더 뼈아픈, 아이들이라면 으레 하는 질문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형님, 우리 부모님은 어디 계세요?’

둘 다 내가 죽였어. 그런 거나 마찬가지야.

‘형님, 내가 태어난 날은 언제예요?’

네가 태어난 날은 의미가 없어. 삼신이 날 미워해서 네 존재를 잊었거든.

‘형님, 우리는 우리 집은 왜 맨날 조용하고 손님도 오지 않아요?’

그야 나는 동무도 없고 가족도 없으니까.

하나같이 대답하기 곤란한 것들뿐이었다. 비량아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비파는 시무룩해져 다시 나갔다가도 또 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다. 땀과 모래 때문에 꼬질꼬질해진 몸을 씻기는 것도 자신의 몫이었다.

그래도 비파가 있어 세간살이가 나름 들어찼다. 비파의 몸에 비해선 아주 큰 나무 욕조에 몸을 담그게 한 뒤 작고 동그란 어깨에 물을 뿌려주며 비량아는 매일 물었다.

“혹시 범이 나타났다는 이야긴 없었느냐.”

그럴 때마다 비파는 고개를 저었고, 비량아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안도인지 실망일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비파가 잠이 들면 비량아는 산예를 꺼내 풀어놓았다. 산예는 마을을 겅중겅중 뛰어다니고 동이 틀 때쯤 돌아와 어김없이 잠을 이루지 못한 비량아에게 아무것도 찾아오지 않았다고 속삭였다. 그러면 그제야 안심하여 선잠을 잤다.

그 일은 비파가 태어난 지 다섯 번째 겨울이 되었을 때였다.

비파 앞에선 산예고 뭐고 꺼내지 않던 비량아가 잠시 졸 때였다. 눈이 무척 내린 다음 날이라 마당은 비파가 걸을 때마다 작게 뽀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와 꺄르르 터지는 웃음소리에 비량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문을 조금 열어 바깥을 보니 비파가 허공을 보며 손뼉을 치고 있었다. 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 거지, 하며 돌아보자 머리를 마구 흩날리는 여인귀가 하느작거리며 인어처럼 허공을 유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분명히 비파의 시선은 그것에 꽂혀 있었다.

“비파!”

놀란 비량아가 산예를 불렀다. 산예는 단숨에 여인귀를 향해 몸을 내던졌고, 그것은 재빠르게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뒤쫓는 산예를 정확하게 가리키며 비파가 종알댔다.

“강아지. 커다란 강아지예요, 형님.”

사흘에 한 번꼴로 빗어 엉킨 머리에 이제 조금만 빨리 움직여도 헐떡거리는 나약한 몸으로 비량아가 망연히 비파를 보았다.

“저것과 이야기를 했어…?”

비량아가 묻자 비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순하고 예쁜 얼굴로.

“네. 제가 귀엽다고 했어요. 같이 놀자고.”

“…….”

“형님이 주무시니 조용히 하자고 하던 참이었어요.”

제가 참 잘하지 않았냐는 듯 가슴을 쭉 내미는 비파에게는 죄가 없다. 하지만 비량아에겐 세상이 까맣게 무너질 정도의 잘못이었다. 비량아는 맨발로 뛰어내려 또래에 비해 여전히 작은 비파의 어깨를 움켜쥐고 윽박질렀다.

“다시는!”

“혀, 형님….”

“다시는 저것들하고 이야기하지 마. 본 척도 하지 말고 알은 척도 하지 마! 다시는 말도 섞지 말고 눈도, 눈도 마주치지 말아라.”

“형님, 무서워요….”

“네가 진짜 무서운 걸 몰라서 그래.”

“…….”

“내 말 알아들었어?!”

비량아의 외침에 비파가 몸을 웅크리고 찔끔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울먹거리는 모습에 비량아가 비틀대며 일어났다. 손으로 이마를 짚고 헐떡였다.

“넌….”

“…….”

“나를 너무 닮아서 그런 게 보이면 안 된단 말이야….”

비량아 역시 울먹였다. 그래도 비파에게 그런 꼴을 보이고 싶지는 않아서 입술을 다부지게 깨물고 몸을 돌렸다. 허공을 향해 시선을 들어 눈물을 삼키곤 여러 번 불규칙하게 숨을 골랐다.

그날로 비량아는 부적을 썼다. 커다란 종이를 모두 꺼내고 굳어가는 먹을 갈아 부적을 휘갈겨선 대문의 양쪽 면과 담벼락마다 휘감았다. 빗장을 더욱 굳게 잠갔고, 이제부터 비량아에게 나갈 땐 허락을 받으라고 단단히 일렀다.

기가 죽은 데다가 눈치를 보느라 계속 울먹이는 비파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 건 한참 후였다. 울음은 길고 소리는 작았다. 서러움에 숨죽여 울다 참지 못해 한 번씩 소리가 튈 때마다 비량아는 어딘가에 머리라도 찧고 싶었다.

이윽고 산예가 입을 우물대며 돌아왔고, 비량아는 특별히 산예를 풀어놔 마당에서 뛰어놀게끔 했다. 폴짝거리는 산예를 보고 비파가 커다란 삽사리라고 하며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웃는 모습을 한참 봤다.

그러다가, 충동적으로 남은 종이를 집어 들어 접었다. 솜씨 좋게 새 모양을 빚고는 두 손바닥에 얹었다가 후, 불어 날렸다.

“우, 우와…!”

이미 밤이었고 하늘은 별이 반짝였다. 달빛과 눈이 밤을 새파랗게 물들였고 그 속에서 종이는 흰색에서 검은색으로 변하여 날아다녔다. 밤하늘로 높게 솟을 때면 그 모습이 묻혀 보이지 않다가도, 눈 쌓인 지면으로 다가와 낮게 날면 선명하게 보였다.

“너무 예쁘다…!”

산예가 새를 쫓아 펄쩍거리고 그 뒤를 또 비파가 쫓았다. 힘들지도 않은 모양이다.

말 그대로 개처럼 보이는 사자 귀신과 그 뒤를 따르는, 저처럼 구천을 떠도는 것들을 보는 저를 쏙 닮은 아이. 그리고 그 맨 앞을 나는 새.

‘어떠냐, 비량아.’

신조의 새는 흰색이었다. 티끌 하나 없이 순수한 흰색. 심지어 노랗게 삭은 종이로 만들어도 그의 숨이 닿으면 희게 물들었다.

‘내가 이런 하찮고 의미 없는 짓을 다 해 본다. 너 때문에.’

눈이 지독하게 내렸던 날,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굴 안에만 있는 비량아를 위해 부린 재주였다.

충동이었을 거다. 그렇게 섬세한 이가 아니었다. 게다가 비량아는 지금의 비파처럼 이런 걸 좋아할 만큼 어리지도 않았는데 신조는 종이새를 만들어 허공에 날렸다. 그러니 이건 그에게 배운 것이다. 자신에게 남은 범신의 흔적이었고, 망가지지 않은 채 남은 몇 안 되는 추억이었다.

아니, 망가진 채로도 가지고 있는 추억인가.

범신과 다르게 자신이 만든 새는 새카맣다. 타들어 간 속처럼, 재로 빚은 것처럼 새카맸다. 비량아는 공중을 나는 종이새를 보며 굴속에서 어룽거리던 불과 바깥의 추위는 모조리 잊을 만큼 따뜻하던 신조의 품, 그리고 불에 비추어 굴 벽에 커다란 날개를 드리우던 새하얀 새를 떠올렸다.

‘네가 원한다면 몇 번이고 만들어 주마.’

그러나 그 말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 이후로 비량아가 새를 만들어 달라 하기도 전에 그들은 망가졌다. 종이새가 작은 습기에도 쉬이 울고 작은 불티에도 쉬이 타며 짧은 시간에도 금방 삭는 것처럼.

“비파. 이리 와.”

비량아가 조용한 목소리로 불렀다. 뺨이 새빨갛게 익도록 신이 나 뛰어다니던 비파가 곧장 비량아에게 달려왔다.

“어떻게 만드는지 가르쳐줄게.”

그가 비파에게 무엇을 가르치는 건 드물었다. 가르치고 싶지도 않았다. 아이가 가진 저 능력은 능력도 아니고 저주에 불과했다. 모르는 게 나았다. 그러나 고작 종이새를 만드는 것 정도는….

“네 부모님이 가르쳐준 거야.”

“우리 부모님이요?”

비파가 눈을 반짝이고 물었다. 비량아는 픽 웃고 아니, 네 부모님, 하고 정정했으나 비파는 그 차이를 알지 못했다.

사실은 부모라는 말도 낯설고 알맞지 않았다. 그러나 따로 칭할 말이 없었다. 아버지가 둘이니 네 아버지가 가르친 거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그를 그렇게 긴밀한 관계로 두고 싶지 않았다. 비파는 모르는 게 나았다. 비파는 그저 종이새를 만드는 하찮은 재주만 알면 됐다.

“처음에는 이렇게 접는 거야….”

고작 이 정도로도 세상을 살 수 있으면 됐다. 네가 사는 세상이 고작 이 정도만으로도 살 수 있을 만큼 무해하면, 그러면 좋겠다.

그러나 아이들의 눈은 세상을 정확하게 보았다. 비파는 곧 마을 아이들 사이에서 귀신의 아이로 소문이 났다. 늘상 차가운 몸 때문일지, 아니면 분명 홀로 왔던 비량아가 언제 태어났는지 갑자기 데리고 다니기 시작한 아이가 이렇게나 자란 게 기이해서 그런지 마을엔 안개처럼 늘 그 소문이 퍼져 있었다.

자신이 왜 귀신의 아이라 놀림받는 거냐고 비파가 울며 물을 때 비량아는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곤 자신이 예전에 귀신을 다루고 괴이들을 취급하던 일을 해서 그런 소문이 난 모양이라고 에둘러 말해 주었다. 

비파는 여렸고,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비량아는 말문이 턱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결국엔 밖에 나가서 놀지 말라고 하는 게 전부였다. 외톨이가 되는 것만이 비량아가 아는 유일한 대처법이었기 때문이다.

* * *

비량아의 몸은 빠른 속도로 아주 많이 나빠졌다. 제 몸에 강력한 저주를 실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깨어 있는 날보다 잠든 날이 더 많았다. 눈을 떠서 비파를 볼 때마다 아이는 자랐고 더 외로워진 게 보였다.

하지만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제가 길어야 몇 년밖에 안 남았다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알았다. 결국은 홀로 남을 텐데, 무엇인가 해 준다면 자신에 대한 그리움만 강해질 뿐이었다. 차라리 자신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게 낫지.

비파에 대한 마음은 복잡하고 어려웠다.

자주, 미웠다. 웃는 모습이 범신을 닮았다. 웃는 방식도 비슷했다. 미운 만큼 자주 슬펐고, 가끔 안타까웠으며, 드물게 애틋했다. 몸이 아플수록 그 마음이 하루에도 여러 번 빠르게 바뀌어 변덕스럽고 괴팍한 형제가 되었다. 사실 형제도 아니지. 비량아는 기침하며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관리를 거의 하지 않아 집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문을 잠그지 않아도 쉬이 들어오는 이는 없을 거다. 부적은 어느 순간부터 새로 붙이지 못해 나달거렸다. 산예는 아예 풀어 버렸다.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때 돌아오라 일렀다. 부적과 산예 덕에 집으로 직접 들어오려는 요귀 또한 없었다. 그것은 동시에 무슨 일도 생기지 않았단 뜻이었다.

아, 정말로 죽은 모양이다.

비량아는 벽에 고개를 툭 기댄 채 입술을 씹었다.

진짜 죽은 모양이다.

하지만 제 모습도 별다르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부적은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걸 막을 뿐만 아니라 나가려는 자신도 막았다. 비량아는 자의로든 타의로든 이 집에서 나갈 기운조차 잃은 채 시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을 날이 갈수록 자신과 닮아가는 비파가 지키고 있었다.

가끔 생각한다. 차라리 나와 함께 죽는 게 저 아이에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고민하다가 다시 잠에 빠져든다. 무너지기 직전의 서까래를 세며 범신이 정말 죽었을지 안 죽었을지를 점치던 때처럼, 비파를 어찌할지 고민만 하다가 잠든다.

* * *

우달기에 대해서 다시 떠올리게 될 줄은 몰랐다.

비파가 밤마다 몰래 외출한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 비량아는 일단 의심했다. 대체 누구를 만나러 가는 거지?

처음에는 신조인 줄 알았다. 혹시 그가 돌아왔나. 돌아와서 비파를 만나고 있나? 그러나 범신 특유의 체향이 비파에겐 나지 않았다. 비파에게선 그저 금목서 향기와 독특한 연기 냄새가 묻어났을 뿐이었다.

그리고 진실을 알게 된 건 그 뒤였다.

‘우달기를 만나고 있어. 비파가 거기서 사람들을 해치는 주술을 받아 적고 있대.’

부리는 비량아가 약해짐에 따라 흐려지다 거의 사라지기 직전까지 간 산예가 거의 마지막으로 그에게 이렇게 말했을 때, 비량아는 마구 웃었다.

“결국엔 나를 꼭 닮았잖아.”

비량아는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좋아서도 아니고 기뻐서도 아니었다. 웃지 않고는 방법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를 꼭 닮아서 최악의 선택만 하네.”

결국 그 웃음 끝에는 이제 말라붙어 더는 나오지도 않는 울음이 솟았고, 비량아는 늦은 밤까지 잠들지 않기 위해 수많은 종이새를 접으며 기다렸다.

이제 종이새는 더 이상 날지 않는다. 허공만 맴맴 돌다가 더는 그 종착지를 찾을 수 없다는 듯 바닥으로 추락했다. 비량아는 죽은 듯이 바닥에 쓰러진 종이새들을 보다가 조용히 열리는 문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이가 돌아왔다.

비파는 오로지 내가 저지른 업보에 의해서만 삶이 고단해야 한다. 스스로가 더 업을 쌓아서 앞으로 있을 일들이 본인 탓이라고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는 외로움 하나 때문에 지금 같은 선택을 하는 일이 없어야 했다.

혼자 살아도 외롭지 않고, 아무도 원하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비파를 사랑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야 괴롭지 않다고. 비량아는 그게 옳다고 생각했다.

비량아가 비파의 앞에 섰다. 마른기침이 치고 올라와 당장이라도 피를 토할 것만 같았다.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예감이 분명해진다. 겁에 질린 눈빛으로 이쪽을 올려다보는 비파의 눈에 제 모습이 비치었다.

“밤새 기다렸다.”

비량아는 부채를 들고 있었다. 한창 술을 부릴 때 쓰던 손때 묻은 부채였다. 우달기와 함께 일을 시작하며 처음으로 손에 잡았고, 그간 온갖 일에 쓰여 짧은 시간 동안 수십 년의 세월을 겪은 것처럼 낡아버린 것이었다. 그의 집을 나온 뒤론 사용하지 않아 아주 오랜만에 잡았다.

부채 끝에는 작은 방울이 달려 있었다. 밭을 망치고 가뭄을 가져오던 강철이에게서 빼앗았다. 요귀에게만 반응하는 방울. 아주 귀한 것이라지만 비량아에게는 그저 부채 장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오히려… 울리기를 기다릴 때가 있었으나 항시 조용했다. 가끔 울리더라도 그것은 기다리던 게 아니었다.

하필 지금 이걸 꺼낸 건 우달기에게 경고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다시 비파를 불러낸다면 눈치챌 것이다. 비파에게 묻어간 이 방울의 소리를. 그가 어떤 수작을 부려 비파의 능력을 알아봤든, 다시는 손대지 못하게 할 것이다.

“네가 언제나 올까 기다렸지.”

기운이 없는 와중에 목소리는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비량아는 비파에게 다가가 뺨을 때렸다. 흰 뺨이 빨갛게 익고 비파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부풀었다. 떨어진 손이 아파 왔으나 때린 이가 아프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비량아는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아직 비파가 기어 다닐 때, 마지막으로 왔던 가믄장아기가 이리 물었었다.

‘정말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을 거야?’

그때 비량아는 구석에 웅크려 비파를 낯설게 바라보고 있었다. 낯설면서도 눈을 떼지 못했다. 모든 움직임 하나하나를 눈에 담았고, 혹여나 위험할 것 같을 때마다 몸을 움찔거렸다.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 건 기만 아니야?’

그런 비량아를 보던 가믄장아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간 몇 번 찾아오다 보니 정이 들어버렸는지, 가믄장아기는 차라리 망가진 비량아가 비파에게 마음을 붙이고 사이좋게 살았으면 했다.

그리고 비량아는 비파를 볼 때마다… 자꾸만 외면하게 되었다. 비파에게서 조금이라도 자신의 모습이 보일까 봐. 혹은 조금이라도 그 사내의 모습이 보일까 봐. 그럼에도 자신을 너무 닮아 때론 안쓰럽고, 때론 화가 났고, 때론 애틋했다.

비파가 사랑스럽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저 그가 사랑할 수 없었을 뿐이다. 그런 마음을 모두 소진했고, 방법도 잊어버렸다. 다정함은 모두 소실해버렸다. 다정함을 위해 나를 깎을 부분이 더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니 이건 자기변명이 아니라, 자백하는 거다. 모든 잘못은 내게 있다고. 비량아는 몸을 웅크리며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게 나아.’

‘…….’

‘그게 내가 저 애한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거야.’

‘비량아.’

‘아무것도 모른 채….’

“네가 미친 짓을 벌였더구나.”

“혀, 형님.”

비파의 우는 모습은 처연하여 시선을 끈다. 앞으로 우는 일이 없어야 하는데. 녹록지 않을 것이다. 설령 울더라도 못된 이가 이 모습을 보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비량아는 제 몸 같지 않은 입술을 벌려 뇌까렸다.

“우달기의 집에 가서 살을 만들어?”

“…네?”

“사람을 해치고 생(生)을 망치는 수작을 부려?”

“잠시, 잠시만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그런 거 한 적 없어요.”

몰랐던 모양이다. 역시나 몰랐다고….

‘아무것도 모른 채 나를 원망하며 사는 게 나아.’

몰랐다고….

“그럼 네가 한 것들이 뭐냐.”

비량아는 목소리에 떨리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더욱 차갑게 일갈했다.

“그렇구나. 너는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일을 벌였구나.”

나무라듯 말하며 비파에게 허리를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게 무척 오랜만이었다…. 그새 많이 자랐고 그새 더 닮아 있었다. 비량아는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너무 세게 쥐어 덜덜 떨릴 정도였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 그런 일에 엮이지도 마. 보여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들려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살아.

“너는 사람을 죽인 거다. 저주하고 악몽을 주고 병을 들게 하며 슬픔과 외로움에 절여 고통으로 죽게 만든 거야. 그게 네가 우달기의 집에서 쓴 비기며 살(殺)이라는 거다.”

그냥 그게 널 위한 일인데…. 비량아가 더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람을 해치는 일을 하며 즐거웠더냐. 아니면 무지하여 죄가 아니라고 여겼더냐.”

희게 질진 얼굴로 소리 없이 눈물만 줄줄 흘리는 모습에 제 모습이 겹쳤다. 비량아는 입술을 꾹 다무는 척 안쪽 뺨을 물었다.

“아, 아니에요. 분명히 저는 사람들의 소망을 들어주는 일을 했어요…. 정말이에요….”

“그렇겠지. 남을 해치고 싶은 소망을 들어주었겠지. 그러나 비파야. 악의에 찬 소망도 소망이더냐. 사랑하는 이가 건강하길 바라는 소원과, 증오하고 시기하는 이가 죽었으면 하는 소망이 같은 것이더냐?”

한마디 할 때마다 비파가 상처받는 것이 두 눈에 똑똑히 보인다. 이 순간이 비파에게 평생 아픔으로 남을 거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달기에게 평생 휘둘린다면 얘는 어떻게 해. 나는 곧 없어질 텐데.

이 고을에 그간 한 번도 요귀의 피해가 없던 건 비량아가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약해져도 어지간한 요귀는 없앨 수 있을 만큼 비량아는 강했다. 그러나 바로 그래서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스스로 건 저주로 인해서, 스스로를 미워하고 미쳐가는 걸 견디지 못해서.

나는 죽어가, 비파. 귀태로 살 네 삶에 나는 아주 잠깐 살다 갈 텐데, 좋은 기억으로 남아 네가 날 추억하며 살 필요는 없어. 난 그럴 가치가 없어.

 손바닥에 찍어 누른 손톱이 곧 손바닥을 헤집고 상처를 냈다.

“너는 참으로….”

참으로 나와 꼭 닮아서 어리석고 불행하다.

비량아는 슬프고 안타깝고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나서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듯한 비파를 밀쳐버렸다. 그러고도 속이 시원하기는커녕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괴롭기만 했다. 기쁘지도 않고 후련하지도 않다.

이내 바닥에 떨어져 있던 널판을 주운 그는 있는 힘 없는 힘을 끌어모아 문에 박았다. 뒤에서 비파가 저를 말리며 우는 소리가 들린다. 듣고 싶지 않아서 더욱 세게 때려 박았다. 못이 박힐 때마다 깨닫는다. 못을 박고 싶은 건 문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안 돼요! 안 돼요, 약, 약 사러 가야 해요. 안 그러면 형님 죽어요. 안 돼요!”

그깟 약. 어차피 듣지도 않는 것을. 비파야, 내가 왜 아픈 줄 알아? 내가 내 몸에 저주를 걸어서 그래. 그리고 저주를 건 이유는….

비밀은 너무 오랜 시간 묻혀 있어서 이제는 꺼내고 싶어도 꺼낼 수가 없었다. 비량아가 조소했다.

“때가 되면 죽어야지. 나는 이미 명이 다한 몸이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안 돼요. 형님, 제발!”

매달리는 비파를 몇 번이나 밀쳐냈다. 그럴 때마다 진창에 빠진 발이 점점 더 깊이 빠지는 것처럼 기분은 엉망이 되었다.

“호, 혹시 제가 번 재물은 더러워서… 그게 싫어서 그러십니까.”

너무 많이 울어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헐떡이는 소리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런 말이 나오기까지 비파는 나를 얼마나 오래 원망해왔을까. 나는 그간 얼마나 오래 비파가 원망하게 방치해 왔을까. 비량아는 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는다.

최악이다. 이번에도 나는 잘못된 선택을 한 모양이다. 그러나 어떤 것이 최선이었을지,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최선의 방법을 찾기에 그는 너무 오랜 시간 최악의 상태에 있었다.

너무 오래 미워하기만 해서 이제는 다른 감정을 깨달을 수조차 없다. 가장 많이 망가진 건 몸도 아니고 바로 이 부분이었다. 비량아는 더는 다정하지도 않고, 웃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마음을 믿을 수도 없었다.

* * *

산에서 도망친 이후에도 비량아는 쉬지 않고 범신을 생각해 왔다. 많은 시간을 증오하며 보냈다. 증오해서 더 잊을 수 없었고 지울 수 없었다.

어떻게 되어도 나를 찾아온다면서.

거짓말이 분명했다고, 내가 이겼다고 생각하면서도 기쁘지 않았다. 연심은 갯벌 같았고 증오는 해일 같았다.

그리하여 비량아는 살아서 깨어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범신에게서 도망치는 데 사용했다. 어떻게 하면 다음 생에라도 만나지 않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러다가 범신을 향한 증오의 말을 쏟아내고는 다시 지우길 반복하고.

혼끼리 끊으면 된다고 하나 끊을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일단 범의 그림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는 자신이 없앴고 다시 만난단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니면 비파를 이용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으나, 비파를 죽이거나 해치는 방법 외에는 아예 없을 것이 뻔했다. 그리하여 그쪽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애초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비량아는 천벌이 생각보다 시시하다고 생각했다. 고작 일찍 죽는 건가 싶었다. 더 심해야 했을 텐데. 어쩌면 제 몫까지 비파에게 간 건가 싶어서 그는 점점 더 비파를 제대로 볼 수 없었고, 제 모습도 볼 수 없었다. 집에 면경이랄 게 하나도 없는 건 당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비량아는 예감대로 죽음을 목전에 뒀다. 비파는 많이 울었다. 그게 신기했다. 잘해 준 것도 없고 다정하지도 못했는데, 심지어 너에게 폭언도 했는데 왜 울고 그래.

비파에게 묻고 싶었다. 내가 좋을 리가 없잖아. 내가 좋아서도 안 되잖아. 나조차 너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는데….

많은 비밀이 있고 하나같이 말할 수 없는 이야기뿐이었다. 자신까지 없어져야 영영 묻힐 이야기.

“미안…하다….”

너무 많은 게 미안했다. 사실은, 미안한 것뿐이었다.

“미안해….”

비파가 우는 모습에 때에 맞지 않게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너는 우는 게 예뻐. 그러면 안 되는데. 그러면 네가 울길 바라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비량아는 멀거니 허공으로 시선을 뒀다. 비파의 얼굴을 오래 보고 싶지 않다. 그러면 너무 오래, 너무 많이 떠올리게 될 것 같다. 그러지 말자, 우리.

“내가 죽으면, 태워라.”

비량아가 중얼거렸다.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하게….”

아무도 날 찾지 못했으면 좋겠어. 그 사내는 결국 끝까지 나를 찾아오지 않았지만, 이후에도 찾아오지 못하도록. 우리는 만나지 않는 게 나았어. 보아도 보지 못한 척, 들어도 듣지 못한 척해야만 했는데.

“그럼 저는요. 저는요, 형님.”

“너 역시 찾아오지 마라….”

“…….”

보지 않으려 했는데 비파를 보고 말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 가슴이 저몄다. 죽을 때가 되어서 그런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너를 사랑하려… 해 봤어…. 하지만… 도무지 되지가….”

마음을 모두 소진하고 방법을 잃어버리고 미쳐가고 있어서 사랑하지 못했어. 너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아…. 나도 그러했는데 누가 널 사랑할까.

하지만 더 말할 기운이 없을 때야 후회했다. 너는 불행할 거라고 말하는 게 나았을까? 앞으로 있을 모든 일에 기대해 버리거나 하면 어떡하지. 또 기대하고 실망하고 상처받으면 어떡하지.

네가 나처럼 되면 어떡하지…?

그러나 더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비량아는 너무 고단했다. 고단하고 피곤하여 이제 모든 걸 다 끝내고 싶었다.

“그래도 나는,”

너를 좀 더 볼 시간이 있었으면 했어. 너와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었어. 할 수 있다면 오래…. 비록 사랑이라 부를 순 없어도….

더는 시간이 남아 있지 않다. 끝이 다가오고 있다. 비량아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그의 감긴 눈으로 끝없는 억새밭이 펼쳐진다.

그리고 끝은 생각보다 시시하고 간단했다.

드디어 모든 게 끝났을 때, 비량아는 삼도천을 건너는 여정에 새로 올라야 했고 그것마저 너무나 지리멸렬하다 느껴졌다.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비량아에게 저승 판관들은 그의 가장 큰 세 가지 죄를 내밀었다. 첫째, 저주를 걸어 스스로의 몸과 범신을 해친 죄. 둘째, 범신을 해침으로써 요귀의 균형을 흐트러뜨린 죄. 셋째, 자식에게 도리를 다하지 않은 죄.

너의 몸과 타인의 몸을 해쳤으니 단명으로 그 죄를 갚을 것이며, 요귀의 균형을 흐트러뜨렸으니 네 삶은 허무하여 안정되지 못할 것이며, 자식을 자식으로 대하지 않았으니 너의 부모는 너에게 도리를 다하지 않을 것이다. 업과 보는 공평하고, 이 죄는 한 번 갚는 것으로 그 무게가 다하지 않으니 몇 번이고 반복해야 하리라.

판결이 쩌렁쩌렁 울리는 동안 비량아는 비식 웃기만 했다. 자꾸만 웃는 작태에 눈을 부릅뜬 염왕이 고개를 내밀어 말했다.

[너는 이 판결이 오히려 기쁘구나.]

그리하여 염왕은 하나의 조건을 더 달았다.

이 업보가 모두 갚아지기 위해선 네가….

비량아는 육도를 모두 돌아 다시 사람으로 태어났고, 금방 죽었다. 그렇게 언제나 다른 이름의, 그러나 같은 모습으로 몇 번이나 반복해 태어났다. 몇 번이고 범신을 만났으며 몇 번이고 단명하였다. 

제가 죽은 이후 범신의 삶이 어땠는지 그는 당연히 모른다. 그저 다시 태어나서도 범신을 기억하고 있었고, 갯벌 같은 연심이 들추어지기 전에 해일 같은 증오에 삼켜졌던 것만 분명했다.

그리고 김윤오로 태어났으며, 이제와 다르게 김윤오는 범신조를 만나기 전까지는 비량아의 기억이 없는 채로 살았다.

그러니 이제 모든 것을 기억한 지금, 그 결과는 똑같지 않겠는가. 늘 그렇듯이, 늘 그래왔던 것처럼, 늘 처참하게 끝나고 비참하게 다시 시작하지 않겠는가.

그와 함께 윤오가 눈을 떴다. 얼굴은 자신이 흘린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약 기운이 다 떨어졌음에도 약에 취한 것처럼 머릿속은 곤죽이었다. 몸은 기이하게 가벼운데 열이 치솟는 와중에 손발과 가슴은 지독하게 찼다.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키자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길달이 눈을 접어 히죽 웃으며 물었다.

“지옥에서 깨어난 기분이 어때요, 비량아?”

윤오는 갈라져 피가 날 것처럼 버석한 눈으로 길달을 보았다. 길달은 오싹했다. 그 옛날 그가 달갑게 여기던 비량아의 모습 그 자체다. 저는 흠 한 점 낼 수 없던 범신을 철저히 망가뜨리던 그 모습.

그는 다가가서 윤오를 묶고 있던 케이블 타이를 끊어냈다. 손목과 발목은 까지고 벗겨져 보기만 해도 쓰렸다. 그러나 둘 다 개의치 않았다.

길달은 윤오의 뒤로 가서 친근하게 그의 어깨를 감싸고 CCTV 쪽으로 데려갔다. 초록빛의, 화질이 그다지 좋지 못한 지지직거리는 화면이 몇 개 보였다. 여러 각도에서 관찰하고 있는 어떤 장소였다.

“저기요.”

그중 길달이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폐부두는 컸다. 이 커다란 장소가 전부 범신조의 것이었다. 범신조가 열었고 그가 닫았다. 그런 힘을 가진 사람을, 자신의 재산에서, 자신의 짝으로 인해 추락하게 하는 거다. 길달은 저속한 희열에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이상할 정도로 일이 쉽게 돌아간다는 건 생각지 않았다. 하더라도, 당연하다고 여겼다. 이게 업보겠지. 내가 복수하는 게.

윤오의 어깨를 잡은 손에 절로 힘이 바짝 들었다. 가리키는 손가락도 마찬가지였다.

“저기 보여요? 범신조예요.”

“…….”

“기억은 다 찾았죠? 어때요? 당신을 망가뜨린 사람을 보는 게?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연인처럼 굴다가 배신당한 기분은 어때요?”

길달은 너무나 가벼이 떠들었다. 흥분한 탓이다. 윤오는 멍하니 화면을 응시했다.

차가 보인다. 1화면에 나타난 그것은 이내 2화면으로, 2화면에서 3화면으로 미끄러졌다. 윤오의 시선도 그를 따라 움직였다. 그사이 옆에선 보스턴백을 연 길달이 준비해 온 것을 가져왔다. 그리고 여전히 넋이 나간 양 화면을 바라보는 윤오의 손에 강제로 그것을 쥐여줬다.

묵직하고, 질척거린다. 바다의 습기 때문에 눅눅했고, 크기가 워낙 커서 무겁기도 했다. 잘 벼린 날이 번쩍였다. 윤오는 신열에 취한 듯 멍한 눈으로 제 손에 쥔 칼을 느리게 훑었다가 길달을 쳐다봤다.

길달은 말이 없는 비량아가 괴이하다고 생각했지만 정신이 나가서 그런 거라고 넘기며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복수하고 싶지 않아요, 비량아?”

복수를 도와줄게요. 내가 해 줄게요.

내가 복수를 했어.

복수를 하고… 그리고… 그러면…. 윤오가 손잡이를 천천히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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