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병원에 도착했을 때 범신조는 이미 수술실로 들어간 상태였다. 윤오가 따로 안내받은 출입구는 남들이 잘 쓰지 않는 뒷문이었으나 그런 걸 깨달을 정신이 아니었다.
환한 불빛 아래에 서서 ‘수술중’ 표시가 켜진 화면을 응시했다.
그 옆에 적힌, 이름 끝의 한 글자가 지워진 환자명이 낯설기 그지없었다. 범신. 연거푸 곱씹다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아래로 힘없이 떨어진 손이며 옷이며… 말라붙은 피로 엉망이었다.
언제… 이렇게 많이 묻었지. 언제 이렇게 많이 흘렸지….
멍하니 옷자락으로 손을 문질렀지만, 이미 말라붙은 것이 쉽게 닦일 리도 없고 떨어질 리도 없었다. 그런데도 윤오는 계속해 문질러 닦았다.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단 강박이 머릿속에 박혀서, 얼른 이걸 지우고 싶다는 것밖엔 생각할 수 없었다. 손이 자꾸 떨려서 때론 허공을 문지르는 꼴이 되었는데도 하나도 우습지 않았다.
옷 역시 피에 젖었다가 말라붙어버린 바람에 딱딱하게 굳어선 당길 때마다 버석거리고 서걱거렸다. 이마저 제 뜻대로 되지 않는단 게 서러워 윤오의 눈에서 툭, 툭… 물이 떨어졌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었다. 처음 생에서부터 단단히 꼬인 삶은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갓 삼은 새끼처럼 쉽게 풀리지도 않고, 이걸 풀려면 아예 자르는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만든다.
피로하고, 괴롭고, 지쳤다. 그만하고 싶었다.
사실 누가 멈춰 줬으면 좋겠다. 미친 사람처럼 더러운 옷으로 더러운 손을 닦으려는 바보 같은 짓도, 범신조와 나의 악연도, 어느 쪽이 우위라 할 것 없이 지나치게 사랑하고 지나치게 증오하는 것까지….
손이 새빨개지도록 옷으로 문지르고 있는 손등을 누군가가 덮었다.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윤오를 여기까지 데려왔던 남자였다.
“병실로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손을 뗀다. 윤오는 천천히 손을 떨궜다. 그리고 멍한 눈으로 물었다.
“범신조 죽는대요?”
“…….”
“범신조가 죽으면 그쪽은 어떻게 돼요? 실업자 되나요?”
마치 어린애처럼 묻는다. 남자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김윤오라는 치인은, 도덕관도 없고 사회 규범이란 제약에도 휘둘리지 않는 것 같은 제 고용주가 데리고 와 같이 살기 시작했다는 이 어린 남자는 지금 그의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부스러지고 흩어질 것만 같았다.
“범신조 죽으면….”
딱 보아도 그 역시 상태가 좋지 못했다. 무엇을 먹였는지 모르겠으나 몸을 연신 떨었고, 식은땀을 계속 흘리고 있어 탈수가 일어날 것 같거나 혹은 이미 일어났고, 차에선 한 번 기절한 참이었다.
어떻게 깨어났는지 모르나 다 죽을 것 같은 얼굴로 범신조를 꼭 봐야 한다고 해서 데려왔는데 잘못한 선택이었나.
남자가 망설이는 사이, 다 터진 입술을 달싹거리며 창백한 얼굴을 한 김윤오는 아연한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 그제야 제대로 눈을 맞추고 물었다. 그 목소리가 한숨처럼 가냘프고 속삭이는 듯 나약해서 듣는 귀가, 아니 목줄기가 간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럼 난 어떻게 해요…?”
질문을 받은 남자 역시 저 안에 있을 사람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이 죽으면 이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일단 가서 쉬고 계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 꼴로는 대표님이 깨어나서 보더라도 속만 상하실 겁니다.”
“…그럼 이대로 있을래요.”
고집이 있었다. 의외는 아니었다. 척 봐도 유약한 인상은 아니었으니까. 다만 남자의 고용인인 범신조가 김윤오가 이런 고집을 부리고 있는 걸 좋아하지 않을 거란 사실만이 마음에 걸렸다. 특히 지금처럼 김윤오의 건강 상태를 확신할 수 없을 때. 남자는 제 앞에 서 있는 윤오보다 의식이 없는 상태인 범신조가 훨씬 더 무서웠다.
“조금만 더 보다 갈게요. 그 정도면 괜찮죠?”
남자의 곤란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조금 말을 바꾼다. 고집이 있지만, 또 남에게 폐를 끼치는 건 잘 못 하는 모양이지. 남자는 김윤오를 조금 알 것 같았다.
무언의 허락에 김윤오는 발을 끌 듯 느리게 대기실 의자에 주저앉았다. 숨소리가 고르지 못하다. 어깨가 빠르게 들썩였고, 깍지를 낀 손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미간을 찌푸리고 한숨을 쉬듯 숨을 길게 뱉었다. 남자는 조금 기다렸다가 다가갔다. 가볍게 흔들어도 깨지 않는 것과 놀랄 만큼 차가운 체온을 확인했다. 역시 한계였던 거다.
고집은.
남자는 재차 중얼거리며 의료진을 불렀다. 안아서 옮겨도 되지만 고용주가 싫어할 것이 분명했다.
그의 고용주는 분명히 살아서 나올 것이다. 다시 건강해질 거고, 그 후엔 이 어린 남자에게 함부로 손을 댔거나 대려 한 사람들을 모두 찾아낼 거다. 언제나처럼.
쉽게 죽을 리가 없다, 그런 사람이.
* * *
의식이 없는 사이 검사가 이루어졌다. 윤오는 가벼운 영양실조 상태라는 진단을 받았다. 표면적으로는.
장용우는 범신조 대신 김윤오의 보호자가 되어 의사의 설명을 들었다. 가족을 불러드릴까요, 해도 김윤오는 대답이 없었다. 그의 시선은 범신조에게 느리게 가닿았고, 그게 마치 가족이라곤 범신조밖에 없는데, 그 사람이 지금 눈을 안 뜨네요, 하는 것 같아서 더 물을 수 없었다.
의사의 설명을 들은 뒤 장용우는 병원 건물을 빠져나와 한쪽에 작게 자리 잡은 흡연 구역으로 향했다. 다 이르기도 전에 성급하게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이고는 짧게 욕을 중얼거렸다.
“시팔 새끼.”
죽는 게 나았을 거다. 범신조가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될지 뻔했다. 그는 기분이 좋아 너그러울 때만 순순히 죽게 두었다. 하지만 살려두라 했다. 그리고 지금의 진단 결과까지. 길다온은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것도 아주 오래도록.
그가 배신했단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장용우는 그래도 같이 일한 시간이 있는데, 싶어 기분이 찝찝하고 영 개운치 못했건만, 이제는 일말의 그런 마음도 싹 사라졌다.
김윤오에게 약을 썼다고 한다. 그것도 금인용, 심지어 범신조처럼 사슬의 꼭대기에 속하는 상위 금인들에게나 쓰일 독할 것이었다. 이제야 김윤오의 몰골과 상태가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그런가. 김윤오는 머릿속으로 알던 이미지와 상당히 달랐다. 사람을 붙여놓고 사진이나 영상 등으로 보고를 받느라 몇 번씩 접했던 모습인데 그조차 거짓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럭저럭 그 나이대로 보이던 눈빛이 실제로 보니 나이를 가늠할 수 없게 깊고 복잡했다. 그러나 고작 약 때문에 그렇게 되진 않을 텐데….
하기야 많은 일을 겪긴 했지. 장용우는 그리 넘겨짚었다. 그런 만큼 길다온 역시 곱게 죽진 못할 거다.
“아, 전 직장 동료한테 작업하는 건 영 즐겁지 않은데.”
장용우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리며 목을 잡고 좌우로 풀었다.
* * *
그만 쉬라는 말에 윤오는 처음에는 이게 쉬는 거라 말했다. 사람들이 자꾸 말을 거는데 귀찮았다. 나중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반응도 거의 하지 않으니 말을 걸지 않는다.
사방이 조용하니 조금 낫다. 여전히 세상은 흑백처럼 빛이 바랬고 향기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나마 조금 나았다. 가상 심한 건 귀의 이명이었다. 먹먹한 것이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반복했다. 비량아 때부터 귀가 약한 모양이었다, 나는.
수술을 마치고 나온 뒤에도 범신조는 쉽게 깨지 않았다. 꽤 깊이 찔렸다고 한다. 자세하게 설명하려는 걸 끊어버리고 윤오는 사는 거죠, 그것만 물었다. 몸 자체가 건강하고 본래 금인들이 회복력이 좋다는 말에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이후로 이렇게 범신조의 침대 옆 1인용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그를 보고 있다.
윤오의 상태 역시 좋은 건 아니었다. 수액을 계속 맞느라 손과 손목이 부었다. 틈틈이 만졌던 핸드폰은 이제 미지근하다.
‘과거의 자신 때문에 신병을 앓는 기분은 어때요?’
칼을 쥐여 준 길달이 물었던 말이다.
‘과거의 기억이 당신에게 씌였잖아요. 참, 업보란 게 무서워요.’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했으나 시간이 지나니 알 것 같다. 비량아의 기억은 자신의 기억이면서 동시에 과거에 죽은 이의 기억이었다. 그러니 그 기억이 마치 물이 쏟아지듯 김윤오에게 덮어 쓰인 것은 일종의 신내림으로 볼 수 있겠지. 이제야 그간 지독하게 아팠던 이유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윤오는 힘없이 웃었다. 내가 나한테 씌다니. 기분이 이상하네. 분류한다면 악귀려나. 실없는 생각을 하며 무릎 위를 감싼 팔에 뺨을 지그시 댔다. 사위가 조용하고 세상에 빛도 향도 없으니 할 수 있는 게 생각밖에 없었다.
길달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모르는 게 있었으니까. 굴 밖으로 나온 뒤의 비량아에 대해.
꿈속을 흐느적거리며 걷듯 한달음에 산을 뒤로할 땐 범신조를 향한 증오가 가득했다. 그러나 산을 내려온 뒤 비량아는, 그러니까 자신은 범신을 증오하면서도 그리워했다.
증오라는 것을 범신 곁에 있는 동안은 차곡차곡 쌓인 산처럼 생각했는데, 떨어져서 보니 파도였다. 매일매일 다가왔다가 멀어지길 반복했다. 해일처럼 밀려와 나를 덮쳤다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빠져나간 뒤에는, 증오가 잠시 멀어져 맥을 못 출 때는 그제야 물 밖으로 드러난 모래사장을 거니는 것처럼 더는 의미도 없고 색도 바랜 그리움과 애정을 더듬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들던 순간들은 그 잠시간의 빈자리를 따뜻하게 데우는 게 아니라 한결 더 비참하게, 더 외롭게, 더 쓸쓸하게, 몸에 남은 일말의 것을 모두 빨아먹고 사라졌다. 뿌리 깊은 잡초처럼 나를 껍데기만 남게 하는 것 같았다.
증오가 나를 살게 했다. 살아 있는 동안은 그 마음으로 버텨야 했다. 하지만 죽은 뒤에는….
길달은 칼을 더 일찍 쥐여줬어야 했다. 범신조가 더 괴로워질 순간을 기다리지 말고 김윤오가 가장 비참해질 때를 찾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찔렀겠지. 모든 게 끝나버린 이후의 마음을, 산을 떠난 후 비량아가 곱씹었을 몇 년간의 시간을 그는 예상치 못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지금이다. 범신조가 자신의 칼을 잡았을 때가 증오가 물러난 소강상태였다면, 지금은 화가 나도 풀 곳이 없는 허무한 상태였다. 나를 망쳤던 범신은 고작 사람이 되어서 저렇게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으니 어디에 이 마음을 풀어야 하지.
풀 자격은 있나…. 아니, 애초에 풀고 싶은 마음조차 나는 이제….
윤오가 고개를 숙였다. 이마를 팔에 짓누르고 나직이 신음을 흘린 참이었다.
“…김윤오.”
범신조의 목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벼락이라도 꽂힌 것처럼 윤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자 범신조가 어느새 눈을 뜨고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작게 켜둔 스탠드 조명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따뜻한 색으로 적셨다.
“또 널 탓하고 있어?”
남자는 자신이 칼로 찌르려 했었던 일일랑 없었던 것처럼, 결국 저 대신 칼을 맞아 누워 있는 게 아니라 집에서 잠시 깨기라도 했단 듯이 아무렇지 않게 굴고 있었다.
“…나 때문에 다쳤잖아.”
윤오가 잠긴 목소리로 겨우 중얼거렸다. 천년의 시간 만에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낯설었다.
“고작 이 정도 가지고.”
“…내가 널 죽이려 했었잖아.”
“실패했잖아.”
“내가 죽을 때까지 깨지 않았잖아….”
아, 그때를 말하는 거군. 범신조가 피식 웃었다. 웃을 일인가. 김윤오는 그가 환자만 아니었다면 달려가서 흠씬 두들겨 팼을 거란 생각을 했다.
“결국 실패했잖아.”
“…….”
“세 번째로 만났던 너한테 이미 말했었지만, 넌 비량아 때를 제외하곤 기억을 못 하는 것 같으니 다시 말하지. 넌 실패했어. 날 죽인 건 나야.”
“우리… 몇 번째 만나는 거야?”
“지금이 다섯 번째. 처음 만났던 생까지 합하면 여섯 번째군.”
공교롭게도 육도(六道)와 횟수가 같았다. 그렇게 따지면 지금이 천상이겠군.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계, 그리고 지금. 정말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하며 범신은 자조했다. 그러면 처음 만난 생이 지옥이었으려나. 비량아에게나 자신에게나 부정키 힘든 질 나쁜 농담이었다.
“이제 그만 널 용서해 주라.”
범신도가 짓궂게, 하지만 진심으로 중얼거렸다. 일부러 가볍게 던진 말이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하고 간절했다. 이 업보의 고리를 끊고 싶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비량아가 자신을 용서했으면 했다. 그가 저지른 모든 잘못은 사실 그의 책임이 아니지 않나.
“그럼 내가 저지른 일들은?”
내가 버린 비파는? 내가 그 애한테 한 말들은? 그 애가 나 때문에 세상에 끈 하나 없이 태어난 건? 윤오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다 내 탓으로 해.”
“…….”
“날 미워해. 네가 모든 걸 망쳤다 여겨질 때마다 널 망친 건 나란 걸 기억해.”
범신조가 몸을 일으켰다. 찔린 곳이 지독하게 아파도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가 정말로 지옥불에 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은 따로 있다. 비량아가 자신의 앞에서 차에 치였을 때, 병에 걸려 죽었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내 앞에서 숨을 멈춘 그 모든 순간들.
윤오가 고개를 툭 떨구었다.
“…그거로 될 리가 없어.”
“간단해. 이기적으로 굴면 돼. 처음부터 그랬잖아. 이기적으로, 영리하게 굴라고….”
“…….”
“날 미워하는 힘으로라도 살아.”
“…….”
“그렇게 해 줘.”
어차피 틀린 말도 아니지 않냐고 덧붙이려 했으나, 그러면 정말로 울 것 같은 표정이라 범신조는 조금 참았다.
그러나 참을 수 없는 말도 있었다. 그대로 두면 흉곽 속에서 부풀다 터질 것 같아 그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침대에 묻었다. 얼굴에 음영이 더 짙게 드리워진 채 그가 속삭였다.
“윤오야.”
“…….”
“나 너 죽는 거 보고 싶지 않아.”
여섯 번째로 만난 너는 지금까지처럼 여전히 사랑스럽고 애틋한데, 지금까지 중 가장 행복해 보였다. 기억이 없어 아무것도 모르는 채 날 보며 마주 웃는 그 얼굴을 볼 때마다 두려웠다. 몸이 저미도록 행복한데 이대로 사라질 것이 두려웠다.
이번에도 네가 또 내 앞에서 나를 무력하게 만들며 숨을 거둔다면, 나는 죽지도 못하고 또다시 언제 올지 기약도 없는 널 기다려야 하는데.
“내 업보야.”
신조가 고백했다.
“범의 금인들을 짝으로 둔 치인은 모두 단명했다고 했지. 그 모든 금인이 나였고 모든 치인이 너였어. 나는 네 죽음을 지켜봐야 해.”
윤오가 입술을 달싹였다. 뒤늦게 숨을 참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조명 때문이라고 믿고 싶다. 그만큼 범신조의 표정이….
그는 아주 오래도록 할퀴어진 사람처럼 보였다. 실제론 없는 상처가 표정에 켜켜이 쌓인 것 같았다.
“내가 널 어떻게 또 잃어.”
웃으며 말하고 있지만 속은 말이 아닐 것이다. 김윤오는 천천히 시선을 떨구었다. 저 역시 모르지 않았다. 그의 배에 칼이 꽂혀 있던 걸, 천천히 쓰러지는 걸 보았던 기억이 제게도 할퀴어진 채 남았기 때문이다. 다시 태어나도 지워지지 않을 흉터처럼.
“…왜 지금에 와서야 말해?”
비량아 때의 기억만 남았지만 까닭 모를 확신이 들었다. 신조가 제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는 확신이.
“비량아인 너를 사랑하면서 김윤오인 너도 사랑하니까.”
“…….”
무슨 말인지 알겠다. 저 역시 김윤오로도 범신조를 사랑했으니까. 윤오가 엷게 웃었다. 범신조는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그 웃음 한 조각에 눈을 크게 떴다가 곧 다시 감으며 중얼거렸다.
“넌 울 때 예쁘다고 생각해 왔지만, 역시 웃는 걸 더 많이 보고 싶네.”
너무 많이 울렸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 * *
예전, 범신조의 발정기 즈음 우연히 만났던 주 대표가 병원에 찾아왔다.
“그 범신조가 다쳐서 입원까지 했다는데 안 와 볼 수가 있어야지.”
그는 짓궂게 말하며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꽃다발을 윤오에게 건넸다.
“범신조 말고 네 거야. 저런 놈이랑 어울리느라 고생이 많지?”
윤오는 꽃다발을 어색하게 껴안았다. 꽃다발은 졸업식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때는 범신조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받았던 것이었는데, 지금은 범신조의 곁에 있기 때문에 받는다니 기분이 묘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일과 별개로 꽃다발은 아름다웠다.
“지금은 자요.”
윤오가 바스락거리는 종이를 품에 지그시 눌렀다. 아무래도 진통제에 수면 효과가 있어서 그런지 범신조는 자주 잠들었다. 그는 그게 아주 성가시고 불필요하다고 불평하며 자신은 진통제가 필요 없다고 했지만, 윤오가 단호하게 지금처럼 처방해 달라고 했다. 김윤오가 시키는 일이니 범신조도 더 불평할 수는 없었다.
둘은 VIP층 대기실 소파에 앉아 서로를 마주 봤다. 주 대표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윤오를 응시했다. 처음 봤을 때는 정말로 애다, 싶었는데 다시 보니 몇십 년 만에 만나는 것처럼 낯설었다. 시간이 그리 오래 지난 것도 아닌데. 몇십 년의 세월과 사건을 한 번에 겪은 것처럼 윤오의 눈빛이 한층 깊어진 까닭일 테다.
어린 나이였다. 그러나 금세 어른이 될 나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자세히는 몰라도 간략하겐 들었다. 길다온의 배신이라니. 의외이긴 한데, 동시에 왠지 놀랍지는 않단 생각이 들었다. 길다온은 서글서글하고 일처리가 깔끔했으나 뭔가 꿍꿍이가 있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주 대표는 그게 그 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으레 풍기는 분위기라 생각했고, 범신조 역시 아마도, 아니, 분명히 처음부터 믿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도 믿지 않고 마음 주지도 않고 신뢰도 주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속았어도 이 정도였겠지.
찔러도 피도 눈물도 나오지 않을 것 같던 사내가 이렇게 당했단 것에 고소하단 생각도 조금 들었다. 그래도 기이하긴 하다. 아무도 설명하지 못하는 길다온의 배신의 계기하며 그 방식 등이. 게다가 모든 일이 그의 짝을 중심으로 흘러갔다는 건 운명의 장난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운명 따위는 믿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럼 일전에 파티장에서 만났을 때도 꿍꿍이가 있었던 걸까, 생각하면 그와 잠깐이라도 공모한 입장에서 입맛이 썼다.
“필요한 거 있니?”
주 대표가 다리를 꼬며 물었다. 사람을 앞에 두고도 누군가 알맹이를 쏙 털어간 것처럼 껍데기만 나풀거리는 듯한 윤오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저기 누워 있는 쓸모없는 네 짝 말고 내가 해 줄게.”
말투 때문에 희롱으로는 전혀 들리지 않는 소리를 하며 주 대표가 꼬드겼다. 다리를 바꿔 내심으로는 부탁할 것 하나 없을 것 같은 눈이네, 하는데 윤오가 입을 열었다.
“저 민증하고 여권을 만들고 싶어요.”
“응?”
“같이 다녀와 주실 수 있을까요?”
“너… 신분증도 없이 살았니? 범신조가 못 만들게 했어? 그런 거야?”
애가 성인이 된 게 언젠데 신분증도 없다니. 여권은 그렇다고 해도. 아니, 여권도 이상했다. 주 대표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사뭇 심각하게 물었다.
“범신조가 너 가둬놨어?”
“아니요… 제가 안 만들었어요.”
윤오가 힘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까진 눈치를 보며 망설였던 일이었다.
윤오는 범신조가 채워 주던 시계에 위치추적기가 들어 있단 사실을 모른다. 범신조가 아예 몸에 추적기를 심을 걸 그랬나, 하고 잠시 후회했단 것도 몰랐다. 제가 모르는 사이에 사진과 영상이 찍혀 실시간으로 보고되었단 사실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하려는 일을 알면 범신조가 아주 싫어하리란 사실은 알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껏 안 해 본 것을 해 보고 싶다. 그래야만 변할 것 같다.
“만들고 싶어요. 하지만 혼자는 못 나가게 할 거예요. 같이 나가주시면 도움 감사히 받겠습니다.”
제 쪽에서 먼저 필요한 게 있냐고 묻긴 했지만, 그래도 윤오의 태도가 제법 당당했다. 뻔뻔하단 생각보단 제법이란 느낌이 더 강했다. 주 대표가 턱을 괴었다.
“혼자 못 나가게 하는 게 가둬놓은 거 아니야?”
“아니에요.”
산에 갇혀 있던 적이 있다. 굴 앞에 기만으로 피운 꽃밭이 있고 범신이 허락하는 범위에서만 돌아다녔다. 어딜 가도 목줄이 매인 것 같았고 발목이 묶인 것 같았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너무나 다르다.
우리의 관계도 조금은 달라졌을까.
우리는 달라질 수 있을까.
“좋아. 그 정도야.”
주 대표가 흐려진 윤오의 표정을 보곤 흔쾌히 대답했다. 그러곤 VIP 대기실 문을 열어선 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던 장용우를 불렀다. 사실 여기 들어왔을 때부터 그가 훔쳐 들을 생각이었던 걸 안 주 대표가 일부러 둘만 남긴 채 문을 쾅 닫고 잠그기까지 한 터라 장용우의 표정이 영 떨떠름하고 좋지 못했다.
“나 김윤오랑 외출하고 올 거야.”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넌 고용주랑 같이 있어야지.”
장용우는 바로 그 고용주가 김윤오와 함께하길 원할 것 같단 말을 꾹 참았다. 주 대표는 성격이 아주 괄괄하고 그 변덕이 종잡을 수 없었다.
“곧 깨어나실 겁니다. 말씀드리고 가시는 게….”
“아뇨. 그냥 다녀올래요.”
그 때 뒤에서 윤오가 일어서며 말을 잘랐다. 덤덤한 표정에서 고집이 느껴졌다. 장용우는 속으로 욕설을 뇌까렸다. 골치 아프다.
이 셋 중 가장 무서운 건 고용주가 분명하지만 일단 지금은 잠들어 있고, 그런 상황에선 주 대표가 가장 무섭다. 물론 김윤오도 무섭긴 무섭지. 저 어린애가 말 한마디만 해도 범신조는 그 누구든 죽여서 가져다줄 테니까.
아, 그렇게 보면 저 어린애가 제일 무섭군. 장용우가 이를 꽉 깨물곤 한숨을 섞어 중얼거렸다.
“얼른 다녀오셔야 합니다.”
“범신조네 애들은 하나같이 다 건방져.”
주 대표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장용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곤 어깨 너머로 윤오를 불렀다.
“가자. 범신조 깨서 지랄하기 전에 얼른 다녀와야지.”
* * *
사진을 찍어야만 했다. 연식이 꽤 되어 보이는 한적한 사진관에 들어가니 사진을 찍기 전에 옷매무새를 다듬으라며 마찬가지로 오래되어 보이는 거울 앞으로 안내했다.
오랜만에 보는 거울이었다. 윤오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한참 응시했다. 익숙하면서도 낯설었고, 이제는 자신의 얼굴만 보이는 게 아니라 저와 닮은 다른 사람의 얼굴도 보였다.
부모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아니라 비파의 얼굴이 보인다. 윤오는 물끄러미 보다가 시선을 떨구었다.
“엉망이네.”
머리도 자랐고 한층 더 야위었다. 피곤에 젖은 눈매나 푸석해진 입술 같은 걸 보아하니 처음으로 만드는 여권이나 주민등록증인데도 꼴이 좋지 못한 사진을 갖다 쓰게 될 것 같았다.
“괜찮아. 멋져.”
담배를 막 태우고 들어온 주 대표가 거울 앞에서 망설이고 있는 윤오를 발견하곤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다 잠시 우뚝 세웠다.
“눈썹하고 귀가 보여야 할 텐데.”
“여권 사진은 눈썹 꼭 보여야 해요.”
사장님이 말끝을 요오, 하고 늘이며 안쪽에서 응수했다. 주 대표는 윤오의 모습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사장님께 머리 좀 자르고 오겠다며 다짜고짜 그를 끌고 나갔다.
“어, 얼른 들어가야 하는데.”
“넌 나와서도 안에 있는 사람 걱정이니. 그 사람은 네가 걱정을 해도 안 해도 누구보다 징그럽게 잘살 인간이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윤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래도 범신조와 자신의 관계는 주 대표,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해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예를 들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지나칠 정도로 불안해할 범신조의 속내 같은 것. 그리고 아무리 멀리 떠나더라도 혼은 거기에 두고 온 것처럼 자꾸만 뒤돌아보게 되는 자신 같은 것.
“금방 자를 거야. 키티 핀 같은 걸 머리에 붙이고 사진 찍을 순 없잖아?”
그러면서도 주 대표는 자신이 애용하는 미용실로 전화를 걸었다. 여기서는 거리가 조금 있었다.
차에서 내린 지 십 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차에 올라타게 된 윤오가 한숨을 삼키며 습관처럼 시계를 확인했다. 병원을 나와 아직 삼십 분도 되지 않았는데 세 시간은 된 것만 같았다. 빨리 돌아가고픈 마음이 무거워서일지도 모른다.
* * *
“너무 예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든 주 대표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누가 보면 그가 잘라 준 줄 알았을 거다. 윤오는 산뜻해진 머리와 눈썹 위로 겅중 올라간 앞머리를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너무….”
“어려 보이긴 하지. 그런데 귀엽잖아. 아직 어린 것도 맞고.”
주 대표가 뒤에서 윤오의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며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귓가에 조그마하게 속삭였다.
“어린데 범신조한테 엮인 게 안쓰러워서 그래. 앞으로 내가 좀 잘해 줄게.”
범신조한테 질리면 나한테 와도 좋고. 그렇게 덧붙이며 윙크하는 주 대표는 짓궂었고, 윤오는 어색하게나마 웃을 수 있었다. 벌써 다섯 번 죽고도 다시 태어나서 만나는 사이라 다른 사람 만날 여유는 없을 것 같아요, 같은 말은 속으로 삼키며.
“윤오야. 배우 할래?”
주 대표가 윤오의 가벼워진 머리카락 끝을 톡 치며 물었다. 머리가 잘 어울린다고 공치사한다기엔 목소리가 진지했다. 거울을 통해 눈빛으로 되물으니 주 대표가 씩 웃었다. 자신만만한 미소였다.
“엔터 쪽에서 사업하려면 강진의 주 대표 모르면 안 된다는 말 못 들어 봤나, 우리 핏덩이는?”
“…그쪽 일하셨어요?”
“응. 정말 생각 없니. 마스크 너무 좋은데.”
“생각 없어요.”
윤오가 부스스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저런 표정 같은 것. 표정 변화가 크지 않은데 변할 때마다 혹하는 게 있다. 무표정일 땐 인상이 차갑고 말도 걸기 어려운 느낌이 있는데, 그게 무너지면서 보여지는 분위기가 남달랐다.
정말 아쉽다. 입맛을 다신 주 대표가 물었다.
“그럼 배우 말고, 윤오는 뭐 하고 싶어?”
그래도 느릿느릿하나마 꾸준히 대답하던 윤오의 입술이 일자로 꾹 다물렸다. 뭘 하고 싶냐는 건 범신조도 그에게 묻던 말이었다. 다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좋다고. 하고 싶은 걸 생각해 보라고.
하지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장래 희망을 써오란 숙제가 제일 곤란했다. 하고 싶은 게 없기도 하지만 좀 더 솔직히 고백하자면, 미래가 상상되지 않아서.
그때는 그게 막연히 제 상황 탓인가 싶었다. 부모님과 할머니가 네 짝이 이미 정해져 있으니 네 운명은 고민할 게 없다고 해서 그런가 했는데, 도망친 이후에도 그건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기억이 모두 돌아오니 이유가 가늠이 된다. 이 세상에 끈 없이 동떨어졌기 때문이다. 스물다섯 이후로 살아 본 적 없는 운명. 살 수 없도록 정해진 운명. 그러니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으며 미래가 보이지 않던 것도 당연하지.
윤오가 쓰게 웃고는 뒤늦게 대답했다.
“이제부터 생각해 보려고요.”
“…그래. 너한테 필요한 건 여권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주 대표가 살갑게 대꾸하며 윤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사진까지 찍고 아슬아슬하게 여권과 주민등록증 신청까지 끝냈다. 윤오는 주 대표의 차로 향하며 지고 있는 해를 가늘게 뜬 눈으로 응시했다. 자몽색처럼 빛나야 할 석양은 낡은 필터를 겹겹이 씌운 것처럼 색이 바래 있었다. 범신조가 쓰러졌을 때 생겼던 감각이 둔화되는 듯한 이런 현상은 이렇듯 갑자기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곤 했다.
차에 탄 윤오가 창밖을 응시하다가 조용히 물었다.
“각인을 해도 떨어져 지낼 수 있어요?”
잠시 업무 관련 메일을 보던 주 대표의 손이 멈칫했다. 갑작스런 저 물음의 뜻을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애초에 윤오가 숨기려는 의도가 없기도 했다. 주 대표의 손이 허공을 맴돌았다. 침착하기 위해 애썼다.
“각인 상대와 좀 떨어져 있는다고 문제가 생기진 않아. 발정기야 힘들겠지. 다른 이와 보낼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각인했을 때 발정기가 안정된단 사례도 있었고…. 신체적 문제를 말하는 거라면 없어.”
“신체적 문제, 말씀하시는 거죠?”
“정신적으로는…. 장거리 연애랑 비슷하지 않을까?”
주 대표가 농담처럼 물었다. 그리곤 곧바로 “나는 짝도 없는데 왜 물어봐.”하고 투덜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윤오야, 어디 가서 말하지 마. 네가 각인했다는 거 말이야.”
“…….”
“범신조도 했어?”
“그건 모르겠어요.”
“그래…. 아무튼 말하지 않는 걸 권할게. 둘 다 했든 일방이든.”
화면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괜한 수고를 하는 대신 주 대표는 핸드폰을 뒤집었다. 그리고 초조한 듯 손으로 무릎을 두드렸다.
“각인을 했단 건 내가 상대방의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는 거야.”
치명적인 약점. 윤오가 조용히 읊조렸다.
“떨어져 있는 정도론 괜찮지만,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상실을 겪었을 땐 심각한 문제가 되거든. 각인 상대가 사망하자 뒤따라 사망하는 케이스가 열에 아홉이니까….”
“죽는다고요…? 스스로요?”
“그런 경우도 있지만, 아닌 경우도 많아. 신체가 스스로 활동을 멈추는 거지. 아주 느리게.”
과학적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형질인들이 평범함 속에 섞이기 어렵고, 결국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이형질인 파트너를 찾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런 데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각인도 짝도 그다지 낭만적이지 못하다. 살고자 하면 약점을 숨겨야 한다는 생존 본능을 거스르고 스스로 약점을 만드는 셈이니 어리석은 일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결국 그 어리석음을 갈구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건 자살일까, 타살일까.”
주 대표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답을 기대하고 물은 말이 아니기에 윤오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상대방의 약점이 된다는 말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자신은 오랜 시간 범신조의 약점이었다. 과거에도 그는 범신의 약점이었다. 범신조 자신도 알지 못했을 뿐.
더는 그러고 싶지 않다. 이대로라면 또다시 범신조의 약점이 될 거다. 그는 또다시, 이처럼 완성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수없이 반복한 과거처럼.
그러고 싶지 않아. 수렁 속에 빠진 것만 같은 이런 일을 계속 반복하고 싶지 않아.
윤오는 누군가가 먼저 끊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먼저 이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한다. 누군가 먼저….
서로를 끌어안은 채 끝없이 가라앉는 이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 * *
윤오는 꽉 다문 입술 안으로 마음먹은 말을 몇 번이나 읊조렸다.
말하자. 떠나겠다고. 늦었지만 이제야 보아도 보지 못하는 척, 들려도 듣지 못하는 척하자고. 이제라도 서로를 알아보지 말자고.
VIP 병실 앞에 장용우가 서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깍지를 강하게 낀 채 고개를 조금 숙여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모습은 차라리 기도를 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장용우는 혼이 빠진 것처럼 보이는 윤오를 흘끗 보곤 병실 문을 열었다.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에 윤오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작은 조명을 제외하곤 어두컴컴한 커다란 병실로 저도 모르게 발을 내디뎠다.
범신조는 침대에 없었다. 그는 이쪽을 등진 채 침대 옆의 커다란 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조금 열린 창문 너머로 뻗어둔 손에선 연기가 피어올랐다. 환자인 주제에 흡연하고 있는 남자는 태연하고 뻔뻔스러웠다. 윤오의 인기척을 알아챈 그는 마지막으로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이고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너른 등이 움직이며 이쪽을 향하는 모습에 윤오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순간, 자연스럽게 내린 머리와 환자복 안으로 얼핏 보이는 붕대, 그리고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빛에 입술이 떨렸다.
그토록 오래 곱씹었던 말과 겨우 단단하게 뭉쳤던 결심은 오간 데 없이 흐물어지고 윤오의 혀는 멋대로 움직였다.
“나한테 각인했어?”
“…….”
대답 대신 범신조는 시선을 떨구었다. 손에는 오래된 성냥갑을 쥐고 있었다. 담배가 궐련이라고 불릴 때부터 피우며 손에 익은 것이었다.
몸을 해치는 것은 거의 다 해 보았다. 심지어 지금 이렇게 배가 뚫렸던 것보다 더 심하게 다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매번 허사였다. 쇼크가 올 정도로 피를 흘려도, 치사량의 약을 해도 소용없다. 쓸데없이 튼튼한 몸뚱이는 제 숨을 악착같이 세상에 붙여 놓았다.
그런 바보 같은 짓을 매번 하면서도 그만둘 수 없었던 건, 그거라도 하지 않고선 네가 없는 세상을 견딜 수가 없었기에.
“했구나.”
대답은 없었지만 범신조의 반응은 답으로 충분했다. 윤오의 입술이 떨렸다.
‘그렇다면 그건 자살일까, 타살일까.’
주 대표가 한 말이 떠오른다. 어렴풋이 범신이던 그의 최후를 알 것 같았다. 비량아가 죽고 범신은 자살일지 타살일지 모를 최후를 맞이했겠구나. 범신조는 자신이 그를 죽이려던 시도가 실패했다고 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성공한 셈이었다. 완벽하게 치명적인 약점이 됨으로써.
“세상에 아쉬울 것 하나도 없으면서 왜 그렇게… 왜 대체….”
원망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쉬울 것도 없으면서 왜 그랬어. 고작 자신 때문에, 오랜 세월을 살다 보면 이름조차 잊혀질 사람 하나 때문에.
범신조는 창가에 몸을 비스듬히 기댔다. 왜냐니. 왜 그런 걸 물을까. 매번 이 짓을 반복하고 있는 자신조차 자문한 적 없는 걸.
“원래 호환은 점찍어 둔 이를 잡아먹기 전까진 떨어지지 않는 법이야.”
“…….”
“나는 호환이잖아, 비량아.”
“하.”
짧게 웃음도 아닌 것을 터뜨린 윤오가 손을 뒤로 뻗어 문을 잠갔다. 그러고는 침대로 다가오며 상의를 벗었다. 벗은 상의를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이어 바지를 벗고, 속옷까지 마저 벗었다. 서슴없이 나신이 되는 동안 범신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상의가 바닥에 떨어질 때쯤 뒤로 손을 교차하여 커튼을 닫았다.
알몸이 된 윤오가 무릎으로 침대를 오르고는 그 건너편에 있는 범신조의 환자복 멱살을 잡아당겼다.
“나 각인했어.”
범신조의 입매가 비틀렸다. 동공이 커지는 게 여실히 보였다. 짐승 같은 눈이다. 윤오는 이제 노란색 이채를 띠진 않는, 평범한 존재로 떨어지길 자처한 범신조의 눈을 들여다봤다. 모든 기억을 다 찾은 뒤에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다.
스물다섯 살까지 두 해가 남았다. 주민등록증을 만들었다. 2년이나 채 쓰게 될지 아닐지는 모른다.
스스로를 용서하라고. 그런 건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른다.
다 네 탓을 하고 살라고. 그마저도 이젠 지긋지긋하다.
늪에 빠졌을 땐 몸부림을 칠수록 더 깊이 빠진다고 한다. 뇌우가 내릴 확률이 백 퍼센트여도 바람이 거세게 불면 그 자리엔 비가 오지 않는다. 구름이 모두 떠내려가 버리니까.
그러니까 나는 이제 더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그저 흘러가게 두려고.
“이전에도 내가 당신한테 각인한 적 있어?”
“…없어.”
윤오가 범신조의 멱살을 쥔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럼 이제부턴 우리도 모르는 영역이네….”
이제까지 그들의 이야기는 결말까지 모두 본 책을 계속 돌이켜 읽듯 반복되어 왔다. 그리하여 항상 똑같이 처참했다면, 지금은….
윤오가 범신조의 입술을 물어뜯듯 달려들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범신조 역시 손을 뻗어 윤오의 머리카락을 와락 움켜쥐었다. 고개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꺾이며 입술이 완벽하게 맞물렸다.
* * *
범신조는 부상자였다. 배에 구멍이 뚫렸고, 수술도 꽤 긴 시간을 들여 간신히 봉합해 둔 참이었다. 진통제를 맞아야 했고 그건 수면을 유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진통제 없이 깨어 있었다.
윤오는 범신조를 눕히고 그 위로 올라탔다. 하의는 벗고 상의는 단추를 모두 푼 그의 몸에서 붕대가 희게 빛났다.
“…….”
윤오는 다친 어깨와 배를 피해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다친 건 그인데 몸을 사리는 것도 더 아픈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김윤오의 몫이었다.
범신조의 손은 윤오의 헐벗은 몸을 쓸었다. 수면 위를 만지작거리는 것처럼 잠방대는 손길이었다. 등과 견갑골을 어루만지는 오른손과 윤오의 벌어진 허벅지를 안쪽 사타구니부터 감싼 커다란 손.
건조한 손길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부터 마른 불티가 튀는 것 같다. 본래 마른 불이 더 무섭다. 윤오는 손을 뒤로 뻗어 범신조의 것을 어루만졌다. 반쯤 발기했던 것이 윤오의 손바닥 안에서 순식간에 용적을 키웠다. 손바닥과 엄지로는 기둥을, 남은 손끝으로는 첨단을 문지르자 그의 자지 끝에서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선액으로 손바닥이 젖고 난잡한 소리가 났다.
둘의 움직임은 다급하지 않았다. 느리고 조심스러웠다. 그 느린 속도감 때문에 긴장감은 도리어 더욱 팽팽해지고 있었고, 동시에 아주 얇아지며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것처럼 점점 더 고조되었다.
허벅지를 감싸고 있던 범신조의 손이 윤오의 뒤로 향했다. 사선으로 둔부를 감싸고 긴 손가락이 사이를 쓸었다. 그리고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데 더 어울릴 것 같은 손놀림으로 살을 벌려 입구가 드러나게 했다.
“하아….”
윤오가 눈가를 적시며 한숨을 흘렸다. 고조된 흥분 탓에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범신조가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어중간하게 깔고 앉은 그의 허벅지가 단단하게 힘이 들어가며 움찔했다. 덩달아 그의 손가락이 윤오의 입구 끝을 푹 눌렀다.
안으로 들어오진 않았으나 손끝이 잠기긴 했다. 검지부터 약지까지, 세 손가락이 동시에 느껴졌다. 범신조의 손은 그가 스스로 움직이고 있을 땐 어색함 없이 수려하게 잘 어우러졌으나, 타인의 몸에 닿으면 그제야 그게 얼마나 큰지 가늠이 되는 것이었다. 윤오가 턱을 젖히며 흐, 하고 신음을 흘렸다.
“미안.”
범신조가 미리 사과했다. 무엇 때문에? 윤오는 맥없이 흐무러진 눈빛으로 범신조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찌푸리는 건지 웃는 건지 모호한 표정을 하고 순식간에 체향을 풀었다.
“하윽….”
그 압도적이고도 묵직한 농도의 체향에 윤오의 몸이 온통 짓눌리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고개가 푹 꺾이고 어깨가 동그랗게 말렸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익숙해질 때까지 버티는 사이 벌어진 입가로 침이 떨어져 범신조의 붕대를 적셨다.
이대로 가다간 무릎의 힘도 모두 풀려 그의 다친 배 위로 주저앉을 것 같아서 윤오는 그의 것을 쥐고 있던 손을 풀고 몸을 겨우 뒤로 물렸다. 돌덩이처럼 단단한 범신조의 무릎에 풀썩 앉게 되니 절로 다리가 M자로 벌어져 그의 앞에 펼친 꼴이 되었다.
그런 꼴이 되었는데도 다리를 오므릴 정신이 없었다. 윤오는 전신을 바들바들 떨었다. 몸에 있는 모든 구멍, 땀구멍까지 모두 범신조의 체향이 밀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이대로 세포 하나하나 젖을 것처럼 농밀했다. 그럴 리 없는데도 공기가 끈적해진 것 같았다.
그러다 겨우 눈을 뜨자 범신조가 상체를 더욱 일으켜 윤오의 등을 받치고 다른 손은 그의 다리 사이로 가져가는 중이었다. 손으로 대강 훑기만 해도 느껴질 정도로 아래는 젖어 있었다. 범신조는 고개를 떨군 채 그 다리 사이를 보았다가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윤오는 입술을 감쳐물며 그 시선을 마주했다.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던 체향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사실은 그의 것에 상응하듯 윤오가 풀어낸 자신의 체향 탓에 서로 어우러지며 조금 숨 쉴 틈이 생긴 거다. 그제야 손발을 바르작대다 무릎을 모으려니 범신조가 받치고 있던 손으로 윤오를 바투 당기곤 젖은 입구를 더듬던 손을 불쑥 밀어 넣었다.
“흐으….”
내리깐 눈꺼풀이 떨리며 윤오의 속눈썹이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범신조는 넋이 나간 것처럼 그 모습을 응시하며 손을 더욱 넣었다. 곧 손바닥이 윤오의 올라붙은 고환에 닿았다. 등을 받치던 손을 내려 둔부를 잡고 앞으로 끌자 하체가 더 밀려나오며 손바닥이 회음을 지그시 누르게 되었다.
“하…!”
참았던 숨을 터뜨리듯 윤오가 신음을 토해냈다. 범신조의 손이 지근지근 위로 올라갔다. 배꼽 바로 아래쪽까지, 닿을 리가 없는데도 그 주변을 지그시 누르는 것만으로 사타구니와 이어지는 허벅지 쪽에 근육선이 서고 아랫배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입술을 물고 눈을 질끈 감는 윤오의 모습에 범신조가 속삭였다.
“소리 참지 마.”
“…….”
“듣고 싶어서 그래.”
범신조는 아주 부드럽고 대단히 조심스러운 손길로 중지를 더 밀어 넣었다. 이제 손가락은 두 개가 되었다. 둔부에 있던 손이 다시 올라와 윤오의 기울어진 어깨를 당겼다. 그렇게 차근차근 두 사람이 가까워진다.
고개를 조금 기울여 이마를 맞댄 범신조는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네가 좋아하는 소리가 듣고 싶어서 그러니까….”
싫어, 증오해, 하지 마, 아파…. 범신조는 제게 인처럼 새겨진 비량아의 외침을 떠올렸다. 가만히 바닥에 침잠해 있다가도 약한 물살에 매번 흔들려 이리저리 안쪽에 상처를 내는 얇은 금속 조각들처럼 영영 사라지지 않고 기억할 소리였다.
윤오가 입술을 질겅질겅 씹으며 손을 들었다. 범신조의 양 뺨을 감쌌다. 그 역시 살이 내린 덕에 볼이 조금 파였다. 그 이유를 아는 윤오는 손바닥으로 야윈 볼을 쓸며, 귀를 기울여야 겨우 잡아챌 듯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더… 넣어 줘.”
“음….”
범신조가 나직이 신음했다. 그가 무릎을 조금 세웠다. 윤오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완전히 퍼즐처럼 맞았다. 자세 탓에 엉덩이가 조금 들렸을 때 안쪽을 적시며 고인 물이 범신조의 손가락과 손바닥을 타고 흘렀다. 그 노골적인 감각에 윤오의 몸에 뜨겁게 열이 올랐다.
부끄러움으로 인한 열도 열이라고 체향이 더 뭉근하게 퍼진다. 범신조는 오랜 굶주림 끝에 얻게 된 것을 수치 따위 느끼지 못하고 받아 마셨다. 목덜미와 어깨가 이어지는 선에 코를 묻고 혀로 핥았다. 이로 질겅질겅 씹을 때는 그에 맞춰 윤오의 아래가 좁아지곤 했다.
“흐, 잠깐… 아….”
지금껏 한 섹스는 이런 방식이 아니었다. 다급하고 거칠었던 경험에 비해 지금은 너무 부드럽고 섬세했다. 그 조심스러움이 오히려 윤오의 속에 피어오른 열을 부추겼다. 윤오는 범신조의 어깨를 잡고 당겼다 밀기를 반복했다.
“빨, 리 그냥… 으.”
“빨리?”
범신조가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더니 둔부를 단단히 쥐고 벌렸다. 벌어진 입구 사이로 또 물이 흐른다. 윤오는 어깨를 웅크리며 소스라쳤다. 그 틈을 타서 범신조가 남은 약지와 소지까지 넣었다.
“…아! 아아! 잠깐! 아앗!”
윤오가 다급하게 외쳤다. 순식간에 네 개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하필 소스라치느라 몸이 웅크려져 있어서 안을 벌리고 들어오는 손가락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두꺼운 마디마디가 방지턱을 넘듯 윤오의 안으로 성큼 들어오는 것이다.
“아흐…!”
윤오는 이를 꽉 깨물며 눈을 감았다. 범신조가 그의 몸을 아래로 끌었다. 허리가 끌어내려지며 손가락이 더 깊이 들어왔다. 범신조는 안에 넣은 네 개의 손가락을 부리처럼 한데 모아 앞으로 기울였다. 쿡 찍히자마자 윤오의 앞이 픽 소리를 내며 물을 흘렸다.
“흐, 흐으. 하… 거기, 좋… 아.”
고개를 젖히며 달뜬 숨을 뱉는다. 윤오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허리를 들썩이고 있었다. 범신조가 혀끝으로 마른 입술을 핥았다. 입이 마른다. 둔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며 네 개의 손가락을 머금고 빠듯하게 벌어진 입구를 문질렀다. 안에서 물이 자꾸만 나와 손바닥에 고일 것만 같았다.
“무릎에 힘줘.”
짧게 뇌까린 그의 말을 머릿속으로 이해하기도 전에 아래에서 손이 쑥 빠져나갔다. 거의 동시에 입구를 지분거리던 손가락이 교차하듯 안으로 조금 들어와 완전히 닫히지 않게 막았다.
그는 젖은 손을 허공에 짧게 턴 뒤 무드등을 껐다. 몇 번 미끄러진 끝에 불이 꺼지자 방 안은 창밖의 어슴푸레한 도시의 빛이 커튼 사이로 겨우 들어오는 실금 외에는 온통 캄캄해졌다.
“아아….”
무릎에 힘을 주라고 했으나 갑자기 일어난 일과 엄청난 자극에 그럴 여유라곤 없었다. 윤오는 범신조의 어깨를 쥐고 고개를 괸 채 겨우 버티고 있다가, 재촉하듯 팔을 뒤로 뻗어 등 뒤에 닿는 살덩이를 쥐었다.
“천천히.”
가르치는 것만 같다. 범신조는 윤오의 귀를 아프지 않게 씹으며 다정히 속삭였다. 천천히? 그의 말대로 했다간 세상이 무너질 것만 같다. 그만큼 몸이 달았다. 흙과 피 냄새가 나는 사내의 체향과 죽순 향이 나는 윤오의 체향이 뒤섞였다. 병원은 산이고 병실은 굴처럼 느껴졌다.
“빨리… 닿고 싶어.”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다. 윤오는 단단한 어깨에 고개를 더욱 파묻었다. 범신조가 윤오의 손 위를 덮어 감쌌다. 살덩이를 두 사람이 쥐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움직이는 건 범신조였다. 그가 윤오의 젖은 입구로 살덩이를 가져가 문질렀다. 의도적으로 수차례 미끄러지며 회음을, 꼬리뼈로 향하는 얇은 살을 자지 끄트머리가 긁어댔다.
“흐윽…! 흐, 흐으! 싫어, 아, 이거 싫…!”
“네가 물이 너무 많아서 그래.”
“그, 그게 왜 하으, 왜 내 탓….”
“탓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건데.”
비죽 웃은 그가 두툼한 귀두를 윤오의 흐무러진 입구에 갖다 댔다.
“너 물 많아서 환장하거든, 내가.”
짧은 중얼거림이 상스럽고 속되었다. 걸고 있던 손가락 끝을 빼자 다시 오므라들며 자지 끄트머리를 살풋 빠는 것만 같았다. 머릿골이 뽑힐 것처럼 대단한 쾌감이다. 이를 빠득 문 범신조가 전부 닫히기 무섭게 윤오의 골반을 잡고 아래로 끌어내렸다.
“잠까… 앗!”
윤오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손가락 네 개를 넣고 풀어 줬는데도 조금 부족했는지 아니면 원체 안이 좁아서인지 버거운 것을, 신조는 단번에 끝까지 집어넣었다. 눈이 절로 감긴다. 윤오의 밭은 비명 소리를 들으면서도 자제하기가 어려웠다. 목이며 관자놀이며 핏대가 섰다.
범신조가 최대한 욕정을 억누르며 참는 동안, 윤오는 등줄기가 뻣뻣해질 정도로 느끼고 있었다. 온몸의 솜털이 바짝 서도록 소름이 돋았다. 윤오는 자신이 가는 줄도 몰랐다. 그의 자지 끝에서 진한 것이 몇 번씩 끊어가며 터졌다.
“박히면서 가는 거야? 응?”
그러는 범신조 역시 극한의 쾌감에 목소리가 거칠었다. 윤오의 등을 두 손이 연신 어루만졌다. 배에 붕대를 감은 것 따위 개의치 않고 제게로 바짝 당겼다. 윤오의 오똑 선 젖꼭지가 범신조의 솟은 쇄골에 비벼졌다.
“흐으응… 으흐, 흑….”
우는 듯한 신음이다.
“이러고 그냥… 영영 살까?”
개소리였다. 범신조의 헛소리에 윤오가 거칠게 고개를 흔들었다. 땀이 똑, 똑 떨어지도록 애간장이 났다. 그러나 범신조는 그 말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윤오는 범신조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왜… 왜애….”
왜 안 움직이냐는 애타는 물음에도 범신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모든 신경이 뒤로 향하여 그의 것을 물고 있는 내벽에 쏠렸다. 민감하고 여린 살이 자꾸 움칫움칫 떨린다. 그러지 않기 위해 신경 써야 했고, 신경 쓴 탓에 더욱 예민해졌다.
범신조의 자지 모양새가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두툼한 귀두와 단단한 기둥, 솟은 핏줄 등, 모든 것이. 정신적으로 후드려 맞는 쾌감이 상당했다. 윤오의 아랫입술이 떨렸다.
머릿속에서 이성은 점점 휘발되어 사라지고 남는 건 욕심과 서러움뿐이었다. 이곳에는 이제 그간의 원한도, 미움도, 애정도, 한데 들러붙어 떨어지지 못하는 애증도 없었다.
왜 이대로 살아 버리자는 건지 알겠다.
하지만 버티기 어려웠다. 윤오는 풀린 눈으로 범신조의 몸에 감긴 붕대와 그 위에 묻은 제 사정액을 보았다. 그걸 손바닥으로 대강 훑어내 물끄러미 보다가 취한 사람처럼 범신조의 어깨를 감쌌다. 그리고 그대로 그의 상체를 밀었다.
“아파서 안 움직여…?”
묻는 건지 혼잣말을 하는 건지 헷갈리는 어투였다. 미는 대로 신조가 눕자 윤오가 그의 가슴으로 손을 내렸다. 두툼한 양감의 그것에 손바닥을 댄 뒤 허리를 들썩였다. 사이에 틀처럼 박혔던 게 빠져나가는 기분이 선득하다. 그대로 안에 살점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흐으으….”
윤오는 흐느껴 우는 듯한 신음을 뱉었다. 범신조의 것은 번들거릴 정도로 젖어 있었다. 지나친 흥분에 윤오의 체향이 자꾸만 흘러나와 범신조의 온 피부를 적셨다. 어느덧 윤오에게선 범신조의 향이, 범신조에게선 윤오의 향이 날 것만 같았다.
“하, 하. 하으. 아, 아, 좋아… 아.”
“나로… 자위하는 거야?”
범신조가 마르게 웃었다. 그가 자위 기구라도 된 것처럼 윤오는 정신없이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었다. 올라갈 때마다 조붓하게 조이며 둔부 위, 허리 바로 아래에 보조개가 들어가고, 내려올 때면 힘이 풀려 자꾸 엇방향으로 찔리게 되었다.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윤오의 것이 안쓰러울 정도로 단단하게 부어 있다.
범신조는 윤오의 성기를 좋아했다. 잘생겼고 흠잡을 구석이 없다. 비량아 때부터, 그가 타고난 재주로 인한 특유의 음울함만 없다면 그 누구든 탐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음울함조차 없지.
어디에 두어도 그 누구든 탐할 김윤오. 내 눈에만 이토록 사랑스러울 리 없는 존재. 범신조는 그래서 그의 몫까지 더 탐욕스럽고 음습해져야만 했다.
앞만 써서는 갈 수 없어서, 뒤를 쑤셔달라고 애원해야 하는 몸이 되면 좋겠다. 네가 치인이라서 다행이다. 내가 짐승에 가까운 존재라 금인이 된 게 다행이다. 너에겐 그것이 아직도 불행일지 모르지만.
범신조는 윤오가 자신을 범하듯이 구는 걸 기꺼이 받아들였다. 허리를 찧는 모습이 어설프기 짝이 없다. 매번 익숙해질 틈도 없이 자신이 몰아세웠기 때문도 있을 테고, 밤으로 꼽는다면 그 횟수가 많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아직 부족했다. 마구 움직이고, 당장이라도 눕혀서 아래가 풀려 닫히지 않는다고 울 때까지 움직이고 싶은 걸 참기 위해 그는 윤오의 허벅지를 세게 쥐었다. 윤오의 발끝이 병원 특유의 얇은 시트를 연신 밀었다.
“하으! 아! 아! 아, 좋아, 아! 거기… 으…, 아니….”
윤오가 참지 못하고 제 앞을 쥐려 하자 범신조가 허공에서 낚아챘다. 잡힌 손 대신 다른 손을 쓰려 하기에 그것 역시 잡아 깍지를 끼었다. 동시에 허리를 한번 짓쳐 올렸다.
윤오가 마구 고갯짓을 하며 손바닥을 아래로 눌렀다. 범신조가 다분히 의도했던 제 가슴팍보단 지지력이 위태로워 자꾸만 뒤가 조여들었다.
“아냐, 아니. 흣. 거기 말고….”
서러움에 우는 얼굴이 보기에 좋다.
“하아… 여기?”
범신조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일부러 다른 곳을 찔렀다.
“아으으으!”
배꼽 쪽이 아니라 꼬리뼈 쪽이었다. 흥분으로 잔뜩 부푼 내벽이 신조의 것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덩달아 조금씩 아래로 내려가던 무릎이 들리며 가운데로 모였다. 윤오가 다시 한번 사정했다. 사정한 것이 제 허벅지에 가닿아 묻고는 아래로 느리게 흘렀다.
“자꾸 싸지 마.”
범신조는 결국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느라 팔을 당기자 윤오의 몸도 따라서 앞으로 훅 쏠렸다.
상체를 세운 그가 윤오의 눈시울을 길게 핥았다. 마음 같아선 윤오가 싼 것도 핥아먹고 싶으나 그가 연체동물이 아닌 이상 힘들 것이다. 특히나 배에 상처가 난 지금은 더더욱.
“다치니 좆같네.”
그가 초조하게 웃는다. 그 모습과 목소리, 말투가 어쩐지 제 또래처럼 보여서 윤오는 환상을 본 양 멍해지고 말았다. 있잖아, 너도 나도 기억이 없이 평범하게 만났다면 어땠을까….
그럴 일은 없겠지. 아마도 범신조는 그렇게 대답했을 것 같다.
마음 같아선 윤오를 벽에 붙여 놓고 들어서 박고 싶단 생각을 하며 그는 대신 무릎을 세워 윤오의 뒤를 받쳤다. 덩달아 박혀 있던 묵직한 살덩이가 조금 빠져나간다. 윤오는 숨통이 트인 것처럼 헐떡였다. 배를 빠듯하게 채우고 있는데도 전부 삽입한 게 아니란 사실에 절로 배가 아릿한 기분이었다.
한번 몸을 일으키니 욕심이 난다. 욕심을 버릴 수가 없다. 범신조는 느릿하게 윤오를 뒤로 눕혔다. 삽입되어 있던 것이 빠져나가자 윤오의 허벅지 안쪽이 속수무책으로 떨렸다. 그 안쪽부터 천천히 손을 쓸어 무릎부터 정강이까지 어루만졌다. 이제 자세가 뒤바뀌었다.
실금처럼 들어오던 불빛이 범신조의 얼굴을 마구 그었다. 반짝거릴 때마다 윤오는 그의 얼굴이 낯설다가도 익숙해졌다. 억새밭에서 보았던 그처럼 느껴지다가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또래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해서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렇게 나를 녹여놓고 또 떠나게?”
질문이 공교롭다. 오늘 주민등록증을 만들고 왔다. 그리고 여권도 만들었다. 윤오는 그것들을 떠올리며 가만히 가슴을 들썩였다. 그러고는 영원 같은 찰나 끝에 속삭였다.
“날 먼저 버렸던 건 너잖아….”
“…….”
“나… 너무 아프고 무서웠단 말이야….”
결국 목소리가 젖어 든다. 범신조는 윤오의 머리 양옆에 팔꿈치를 괸 채 조용히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눈도 거의 깜빡이지 않았다.
“무서웠어….”
윤오는 쾌감 때문이 아니라 설움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관자놀이를 타고 내려간 것이 땀에 젖은 머리카락에 스며들었다. 그때는 말하지 못하고 뼛속까지 묻었던 것을 이제야 말한다. 여섯 번째 생애에 이르러서.
범신조는 엄지로 윤오의 눈가를 훔쳤다. 닦아낸 것이 무색하게 그 위로 짠 물이 또 흘렀다. 물이 많은 비량아. 그래서 바다를 싫어하나. 그곳으로 가면 너도 모르게 홀려 녹아버리고 말까 봐.
“알아.”
범신조가 손으로 윤오의 머리를 느리게 문질렀다.
“이제는 알아….”
너무 늦게 알아서 미안하다거나, 잘못했다거나, 그런 구태의연한 말은 하지 않았다. 말로 뱉기에는 너무 큰 마음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나오지 않은 채 그냥 몸에 스며들었다. 닿을 때마다 전해지면 좋을 테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때도 이걸 알았더라면. 우리는 달라졌을까.
그러나 범신조는 만약에 같은 건 가정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현재와 김윤오의 확신할 수 없는 미래만이 중요했다.
윤오가 훌쩍였다. 그러고는 범신조의 목을 끌어안았다.
“안아 줘. 추워….”
아. 범신조는 진심으로 확신했다. 이 순간 윤오가 다시 저주를 안고 다가오는 것이라도 그때처럼 망설이지 않고 입 맞출 것이라고.
거부할 수 없는 운명에 순응하듯 그는 고개를 기울였다. 다시 배가 찢어지든 말든 상관이 없었다. 동시에 어느새 굳게 오므라진 입구에 끄트머리를 갖다댔다. 느리고 조심스럽게 삽입했다.
윤오가 가볍게 턱을 치켜들며 목줄기를 떨었다. 범신조는 그 선을 따라 입술을 붙었다. 천천히 떨어뜨리며 멀어질 때마다 허리를 물렸다가 다시 입술을 댈 때에 맞춰 들어왔다. 윤오의 몸이 퍼득퍼득 떨렸다.
“아… 아아….”
자맥질하듯 움직이는 허리에 윤오가 손끝을 세웠다. 범신조의 어깨를 단단히 감싸고 몸을 웅크리듯 모아 온몸으로 퍼지는 쾌감을 견디려 애썼다. 무릎이 범신조의 옆구리를 지그시 누르며 쓸자 그가 덩달아 들린 윤오의 뒤통수에 손바닥을 받치고 뺨과 뺨을 맞댔다. 너는 이렇게도 느끼는구나.
범신조의 턱 근육이 불거졌다. 최대한 참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혹여나 다시 상처가 터진다 하더라도 그는 상관이 없지만 김윤오는 아닐 것이다. 그는 이 시간이 영원했으면 했다. 이대로 멈추고 싶었다. 이후가 두려웠다. 무섭다는 감정은 오로지 김윤오에게 한정해서 발휘되는 감정이었다.
움찔거릴 때마다 윤오의 아랫배가 융기했다가 꺼지길 반복했다. 범신조는 손 대신 혀를 썼다. 손으론 윤오의 머리를 감싸고 젖은 머리칼 안쪽을 문질렀다가 움켜쥐길 반복했다.
“흐아… 아….”
천천히 고조되는 쾌감은 느리게 끓어오른 만큼 정점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고 지난하게 이어졌다. 범신조의 허리를 감싼 발이 서로 비비적대며 쫙 펴졌다가 오그라들길 반복했다. 발꿈치가 등을 짓누르는 것에 따라 범신조의 허리가 좀 더 깊이 들어왔다.
“흐윽!”
다 들어오기까진 아직 뿌리가 좀 더 남았는데도, 그것만으로도 벌려진 적 없는 곳이 범해지는 기분이다. 오랜만인 탓일 거다. 윤오는 심호흡을 하려고 했지만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힘들었다.
“헉, 흑, 흐읏, 아, 나….”
죽을 것 같아…. 윤오가 소리 없이 속삭이며 고개를 옆으로 돌려 제 머리를 감싼 범신조의 손목을 씹었다. 그러자 들어오는 힘이 점점 강해졌다.
질식하는 것 같았다. 목이 졸리는 것처럼 숨이 밭고 한번 놓친 호흡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들이마실 때 나오고 뱉을 때 들어오는 듯이 목구멍에서 호흡이 고였다. 윤오의 머리가 점점 하얗게 비워졌다.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바르르 떨리는 눈꺼풀 아래로 검은자위가 깜빡깜빡 뒤로 넘어갔다가 돌아오길 반복했다. 정말로 죽을 것만 같다…. 고통이라곤 없이 오로지 쾌감만으로.
범신조의 눈이 점점 더 이채를 띠었다. 그는 김윤오의, 비량아의 모습을 한 조각도 놓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의 잇새로 거친 숨소리가 잘려 토막토막 새어 나왔다.
“나… 안 돼… 아…, 아아….”
목이 졸리는 듯한 쾌감에 신음을 겨우 뱉었다. 윤오가 머리를 매트리스에 꾸욱 눌렀다. 덩달아 꺾이는 턱 끝으로 신조의 이가 박히고 연이어 입술이 집요하게 빨렸다. 제 등에 닿은 윤오의 발꿈치 두 개가 척추골을 사이에 두고 멍이라도 들게 할 것처럼 거세게 눌러댔다. 품에 가둔 몸이 바짝 긴장하며 버르르 떨렸다. 윤오의 것은 선 채로 떨렸고 나오는 건 없었다.
“크… 읏.”
터뜨릴 것처럼 죄는 내벽에 범신조가 고개를 푹 숙였다. 윤오의 머리를 감싸고 있던 한 손은 윤오의 머리칼을, 한 손은 시트를 움켜쥐었다.
이윽고 사정하지 않고 간 윤오의 안에서 겨우 제 것을 빼낸 범신조가 맨들한 아랫배와 자지에 토정했다. 짙고 많은 양의 정액이 안쓰러울 정도로 서서 까딱이는 윤오의 것에 뿌려져 기둥과 끄트머리를 적시고 아래로 느리게 흘렀다. 그러는 동안에도 윤오는 눈앞이 번쩍거리는 오르가즘의 여파에 젖어 있었다.
“…김윤오.”
범신조가 제 것을 쥐고 몇 번 더 위아래로 문질렀다. 점도 높은 액이 뚝, 뚝 떨어졌다. 그가 상체를 일으키자 윤오의 다리가 힘없이 흘러내렸다. 바닥에 떨어져 벌어진 것을 다물지도 못한 채 간헐적으로 떨렸다. 범신조는 세팅하지 못해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자신이 더럽힌 부위를 보다가 고개를 내려 숙였다.
“아, 안 돼! 하지 마!”
윤오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늦었다. 이미 그의 것은 범신조의 입 안에 들어갔다.
기억이 모두 돌아와서 그런지, 범신조의 입 속이라 하면 거칠거칠하게 가시가 돋은 혀와 뾰족한 송곳니가 떠올랐다. 잘릴 거다. 먹힐 거다. 그 두려움에 윤오가 범신조의 머리를 밀었으나 그는 오히려 물고 있는 입에 더 힘을 주었다.
“하… 아악… 으….”
아직 절정에 젖어 있던 터라 윤오의 저항은 오래가지 못했다. 등골이 뽑힐 것만 같은 쾌감이었다. 범신조의 머리를 뜯을 듯이 쥔 윤오가 소리도 없이, 숨도 쉬지 못하고 사정했다.
윤오 역시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앞서 두 번 사정했어도 물처럼 묽진 않았다. 범신조는 입속에 들어온 걸 우물거리고는 그냥 삼켜버렸다. 그리고 고개를 드니 팔로 눈을 가린 윤오가 불규칙적으로 들썩거리는 게 보였다.
“…….”
그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팔을 뒤로 뻗었다. 협탁엔 항상 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잔에 따를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물병째로 기울여 거푸 마신 뒤 윤오의 드러난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두드릴 때마다 몸이 흠칫흠칫 떨린다. 꽉 움켜쥔 주먹에 제 머리카락이 몇 가닥 뜯겨 있는 게 보였다.
“물 마실래?”
성적인 함의가 전혀 없는 담백한 권유였다. 아래는 여전히 단단한 것과 별개로.
한 번의 사정으로 풀릴 리가 없었다. 애초에 섹스를 시작하기 전부터 윤오에게 부담이 되지 않게 두어 번 빼고 나오는 그가 아닌가. 이번엔 그럴 틈도 없어서 다 넣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더 할 생각이 없었다. 김윤오가 원하지 않는 이상.
“…조금 있다가.”
윤오가 먹먹하게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신에 힘이 쏙 빠져 있었다.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가 풀리길 반복했다. 막연히 내일 근육통이 심할 것 같단 예감이 들었다. 어째 길다온과의 일로 폐부두를 다녀온 다음 날보다 더 힘들 것만 같다.
“내 거… 먹었어?”
숨을 고른 윤오가 아연하게 물었다. 범신조는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윤오가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먹진 못할 것 같은데.
범신조가 물을 더 들이켠 뒤 500mL짜리 페트병을 구겨 던졌다. 그리고 윤오를 일으켜 앉게 했다. 마주 앉은 모양새가 된 후에야 윤오는 범신조의 배와 어깨를 번갈아 확인했다. 보기에는 괜찮았다.
“안 아파?”
절정 이후의 풀린 발음과 나른하게 반쯤 감긴 눈을 꼼꼼히 뜯어보며 범신조가 대답한다.
“어.”
“…….”
“넌?”
“나도 안 아파….”
“좋았어?”
“…응.”
“그럼 됐어.”
여상히 대꾸한 범신조가 이불을 끌어와 윤오의 어깨에 두르고 꼼꼼히 감쌌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떨어져 있던 제 환자복을 입었다. 속옷 없이 얇은 천 한 장이다 보니 잘 갈무리할 때와 달리 고간이 적나라했다.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 않게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었다.
윤오는 조금 질린 눈으로 그걸 보았다가 좀 진정이 되어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구겨진 시트로 시선을 떨구었다. 좀 젖었네…. 민망하다.
지워지지도 않을 걸 손을 뻗어 문지르려 하자 이쪽을 흘끗 본 범신조가 그의 손목을 잡고는 다시 침대 위에 앉았다. 그러고는 다 큰 성인 남성인 김윤오를 가뿐하게 제 위로 올렸다. 이불로 돌돌 말린 윤오가 노곤하게 창밖을 보게 되었다.
“약한 영양실조라며.”
범신조는 못마땅함이 살짝 서린 어조로 물으며 손을 뻗어 창틀에 있던 담배를 가져왔다. 성냥으로 불을 붙이고 고개를 돌려 연기를 뱉는다.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윤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 오기 시작했는지 모를 비가 추적추적 도시를 적시고 있었다.
“그쪽이 약 만들었다는데. 그거도 맞았고.”
윤오는 범신조가 물려 주는 담배를 순순히 빨았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중독성은 없어. 몸에 해롭진 않고. 정신에는 독하고.”
“그런 걸 왜 만들었어?”
“그걸 쓰면 네가 보였거든.”
급격히 기분이 떠올랐다가 급격하게 추락하는 그 순간 비량아가 보였다. 기억이 헤집어지며 다시 만난 여러 생의 비량아 역시 차례로 만날 수 있었다. 매번 너는 나를 향해 웃다가 나를 향해 증오한다며 울었다. 약보다 더한 추락이었다. 그런데도 끊을 수가 없었다. 너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어 버티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깨면 네가 없어서 끊었지.”
이유는 오로지 그거 하나였다. 이대로라면 실제로 너를 만나도 환상인 줄 알까 봐. 너를 붙잡지 못하고 바라만 보다 놓쳐버릴 수 없어서.
미쳐 있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고통을 택했단 것과 마찬가지다. 지독한 감정이었다. 그야 제정신이라면 진작에 포기하고 말았을 테고, 제정신이었다면 애초에 스스로 목을 찌르지도 않았을 테니까.
윤오는 그 속에 감춰진 말을 다 알면서도 덤덤하게 말할 뿐이었다.
“한 번 더 줘.”
“안 돼.”
“어차피 간접흡연 중이거든.”
그러네. 범신조가 눈썹을 까딱였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반도 채 타지 않은 걸 지져 껐다.
“그럼 이제 끊지 뭐.”
“멍청이.”
“고작 멍청이? 귀여운 소리를 다 해.”
이 정도 욕은 애교다. 범신조는 코웃음을 치며 윤오의 머리를 입술로 헤집었다.
노곤노곤하다. 무겁게 내려앉는 눈을 3분의 1만 겨우 뜬 채로 윤오는 창밖의 반짝이는 빛들을 멍하니 응시했다. 빗방울에 부딪혀 흐르는 빛방울 때문에 나이프로 그린 유화처럼 보였다.
“…….”
범신조는 그대로 윤오가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 품에 안고 있는 무게와 온기가 현실성이 없다. 꿈만 같다.
길다온이 벌인 짓은 허술하기 그지없어 평소 같으면 막을 수 있었을 거다. 정확히는 그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누구 하나 다치지 않게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이런 식이다. 중요한 순간마다 눈을 가린 것처럼 허점이 생긴다. 그것은 마치 필연처럼 가장 중요한 순간에 자리하여 범신조의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는 비량아를 잃어 왔다.
그러니 배가 뚫렸든 어떻든 내가 지금 얼마나 만족스러운지 너는 모르겠지.
땀을 흘린 터라 윤오의 체향이 더 선명하게 지속적으로 퍼졌다. 신조는 그의 머리칼에 연신 얼굴을 묻었다. 몸을 섞은 직후라 공기가 더운데도 윤오의 체향엔 늘 그렇듯 열기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몸은 따뜻하고, 체향은 생생하다. 김윤오는 제 곁에 이렇게 살아 있다. 범신조는 미소를 지었다. 한고비를 넘겼다.
아직 스물다섯까지 2년의 시간이 남았고. 그는 매일 이렇게 마음을 졸이며, 하루하루 무사히 지나간 것에 감사해하며 살 것이다.
* * *
시트를 갈기 위해 사람을 불렀다. 김윤오가 외부인을 쓰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간병인도 처음 이틀을 쓰고 말았다. 제 딴에는 숨기려 했던 것 같으나 다 티가 났다. 그런 모습이 제 고용주와 닮긴 닮았다.
장용우는 뒷짐을 지고 무표정하게 선 채로 안을 천천히 살폈다. 범신조는 씻고 있었고 김윤오는 소파에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턱 아래까지 야무지게 이불로 감싸진 채였다.
“먹을 것 좀 사 와야겠는데.”
젖은 머리를 한 범신조가 나왔다. 상의는 방수 필름을 덧대느라 벗었고 바지만 입은 모습이었다. 그는 젖은 수건을 대충 던지고 장용우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바로 소파로 향했다. 그리고 윤오의 옆에 앉아선 손끝으로 겨우 드러난 머리카락을 툭툭 건드리기 시작했다.
평소엔 길쭉하니 장성한 청년의 모습이던 김윤오는 범신조가 옆에 자리하자마자 다르게 보였다. 그저 그가 웅크려 누워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늘 그랬으니까. 범신조 역시 혼자 있을 때는 나름대로 균형 잡혀 있던 체구가 김윤오 옆에 있으니 한층 거대하게 두드러졌다.
상사의 나이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대충 가늠할 뿐이다. 그러나 확실한 건, 막 성인이 된 김윤오와는 양손을 넘어가는 나이 차가 있으리란 사실이다. 장용우는 하는 일에 비해서 의외로 상식적인 사회인이었기 때문에 속으로 조용히 범신조를 욕했다.
‘양심 없는 인간.’
하긴. 애초에 범신조와 양심이란 말을 나란히 두는 것부터가 가당찮다.
“죽 사 올까요?”
“죽도 좋고. 영양가 있고 칼로리도 있는 거. 아. 과일이랑 과자도. 입 심심할 때마다 먹게 작게 포장된 것도 괜찮겠네.”
범신조는 보이는 것과 다르게 가리는 게 없었다. 자는 곳도, 씻는 곳도, 먹는 것도 대충이었다. 웬만해선 꼼꼼하게 따지는 것 없는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장용우의 시선이 흘끗 김윤오일 덩어리에 닿았다가 바로 떨어졌다.
그는 눈치가 빠르다. 상사의 짝을 오래 보지 말아야 하는 것쯤은 당연히 안다. 아무리 궁금해도 호기심보다는 목숨이 먼저 아닌가.
“오늘 어디 나갔다 왔지?”
낮에, 김윤오가 주 대표와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서 범신조가 깼다. 애초에 약이 잘 안 들어서 어쩔 수 없었다. 범신조는 장용우가 보고하기도 전에 윤오가 없는 걸 알았다. 들어가자마자 낮게 김윤오는, 하는 물음에 얼마나 오금이 저렸는지 모른다.
“그거 말고도 나간 목적이 있었을 텐데.”
“주 대표님께서 말씀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아하.”
오금은 또 한 번 저렸다. 내일 근육통에 시달릴 사람이 아무래도 윤오 말고 하나 더 있게 생겼다.
검지와 중지로 관자놀이를 괴고 다리를 꼬아 몸을 윤오 쪽으로 튼 범신조가 시선을 들었다. 장용우는 변명을 일삼는 혓바닥만 긴 새끼들을 아주 싫어하지만, 지금은 정말로 억울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주 대표님께 사람을 붙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랬겠지.”
“…….”
“나보다 주 대표가 무서웠다면 말이지.”
아, 정말로 죽겠다. 장용우가 침을 꼴깍 삼켰다. 나른해 보이나 실상 그의 속이 나른하게 풀려 있지 않으리란 건 당연했다.
길다온 그 정신 나간 새끼가 김윤오를 납치했다. 무사히 돌려받았다는 것 하나로 간단하게 풀릴 일이 아니었다. 그에게 그나마 남아 있던 전 직장 동료 사이의 정이 이 순간 모조리 사라졌다.
“…….”
침묵이 길어진다. 1초가 한 달처럼 느껴졌다. 장용우는 항변하고 싶었다. 제가 대가리에 총을 맞은 것도 아니고 길다온처럼 갑자기 돌아버린 것도 아닌데 주 대표님을 더 무서워하겠습니까. 대한민국에서, 아니, 대한민국을 떠나도 가장 무서울 사람은 범신조였다.
장용우는 점점 초조해졌다. 이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셔서 사람 말려 죽이느니 차라리 묶어놓고 때리십시오, 하고 싶은 마음이 커진다.
그 때, 범신조가 고개를 기울여 윤오의 귓가에 입을 맞추고 그대로 시선을 들었다. 천천히 고개를 드는 모습이 마치 물속에서 포식자가 고개를 드는 것 같아 사람을 긴장시킨다.
“됐어.”
정말이십니까? 진짜 된 겁니까? 나중에 다시 불러내시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눈치가 빠른 장용우는 입술을 꽉 다물고 치솟는 물음을 참아냈다.
“내가 물어보려고.”
“네….”
고개를 완전히 든 범신조가 가늘게 눈을 접어 웃었다.
“뭐 해? 가 봐.”
나가란 말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장용우는 고개를 냅다 숙이고는 바깥으로 도망쳤다. 덩달아 눈치를 보고 있던 옆의 사람도 구겨진 시트와 이불을 품에 안고 90도를 넘을 만큼 허리를 접은 뒤 쫓아 나왔다.
* * *
여권이 나왔다.
“정말요?”
“어. 정말로.”
수령 연락을 주 대표의 연락처로 받겠다고 적었기 때문에 그가 찾아왔을 때부터 예상하긴 했으나, 막상 들으니 얼떨떨하여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정말 그간 해외여행 한 번을 안 갔어?”
윤오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이고 주 대표가 사 온 롤 케이크만 이리저리 뭉갰다.
할머니는 다양한 걸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확고한 믿음과 고집이 있었고, 아버지는 배우자와 자식의 말은 듣지 않아도 제 어머니의 말만은 믿고 따르는 사람이었다. 윤오가 치인임을 알자마자 아주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가 이것저것 물어본 그는 돌아오자마자 윤오에게 앞으로 바다를 건너지 말라고 단단히 일렀다.
‘물이 많은 사주니 물에 가까이 가면 홀린단다. 가지 마라.’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진 몰라도 윤오는 애초부터 바다가 싫었다. 그 짠 냄새도, 부서지는 포말도, 가늠할 수 없는 막대한 양의 물도. 이제는 이유가 어림짐작이 되었지만, 어쨌든 그래서 해외에는 나가 본 적이 없다. 하물며 제주도도 가 보지 못했다.
“오늘 받으러 갈 거지?”
윤오는 손 안에서 포크를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권 받으면 어디로 가게?”
주 대표가 빙글빙글 웃으며 짓궂게 묻는다. 순간 윤오의 말문이 턱 막혔다. 거기까진 생각해 보지 못했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주 대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빨대를 물고 단번에 거의 반을 들이켰다. 술을 마실 때처럼.
“관광지 가. 아무 생각 없이.”
“아무 생각 없긴 해요.”
“거짓말.”
주 대표는 특유의 입꼬리를 길게 올리며 웃었다.
“네 머릿속 꽉 차서 복잡한 거, 누구나 알걸.”
“…….”
그 말에 입술이 툭 나온다. 뭘 안다고….
반박하고 싶다. 지금이 살아온 그 어느 때보다 가장 멍하고 아무 생각도 없다고. 밉단 생각도, 원망도, 후회도,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데.
“범신조는 알고 있어?”
그래. 그나마 그게 고민이다.
“모르는구나.”
주 대표가 허를 찔린 양 중얼거렸다. 아직까지 말하지 않았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사람이 아니니까. 그는 범신조의 반응을 상상해 보려다가 그만두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엮이면 안 될 사람이었네, 김윤오 씨.”
지금까지 비량아의 삶과 그 이후의 삶을 모두 포함하여 만난 이들 중 가장 그럴싸하게 윤오를 평가한 말이었다.
* * *
여권을 쥐고 한참을 봤다. 여권 커버엔 이름도 붙어 있었다. 제 사진도 보았다. 이렇게 생겼던가. 얼굴도 왠지 낯설었다. 피곤함이 얼핏 묻어나는 표정을 한 채 겨우 웃고 있었다.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손으로 목덜미를 거푸 쓸다가 고개를 돌려 그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이제 돌아갈까?”
주 대표가 허공에서 키를 던졌다가 받으며 물었다. 그는 외출 시 항상 운전사를 대동하는 편이지만 오늘은 특별히 직접 운전했다. 괴물 같은 회복력을 보이는 범신조가 아직 다 나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제 집에서 통원하며 치료해도 된다는 말을 듣고 퇴원일자를 받은 게 바로 내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 대표는 오늘 저녁 출국한다. 애초에 한국에 머무르는 시간이 1년에 3개월을 겨우 넘는 그였다.
“범신조한테는 언제 말할 거야?”
“곧이요.”
“말 안 할 것 같은데.”
“할 거예요.”
“그래. 꼭 해, 김윤오 씨. 하는 게 좋아.”
선글라스를 끼고 문을 쾅 닫은 주 대표가 핸들을 두드렸다. 윤오는 왜 그런 말을 하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거울로 잠시 제 머리를 살피던 그가 그 시선에 씩 웃으며 대꾸했다.
“범신조 너랑 관련된 일이면 좀 돌아 있잖아.”
“어떻게 아셨어요?”
얘 좀 봐라. 그래도 제 짝인데 아무리 돌려 말했다 한들 미쳤단 소리에 반응이 재미있다. 흐응, 웃은 주 대표가 범신조를 그렇게 판단한 그만의 기준을 댔다.
“짝 없이, 파트너도 없이 그렇게 오래 살아온 금인이 제정신일 리가 없잖아. 발정기 때를 어떻게 견뎌.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그러니 헤어지고 싶은 거면 차라리 말을 하고 도망쳐. 뭐, 많이 봐주면 1미터 밖에만 있겠다는 정도로 타협해 줄 수도 있잖아?”
김윤오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시트에 몸을 파묻었다. 안전벨트를 조이게 채운 덕에 가슴이 가볍게 눌렸다.
“대표님 사람 보는 눈 좋으시네요….”
“칭찬 땡큐.”
예전에 이런 사람이 옆에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좋았을걸. 윤오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을 때마다 어둠 너머로 억새풀밭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옆에 이런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범신에 대해 경고를 해 줬을 텐데.
그와 만났던 상황이나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고려하면 처음부터 피할 수는 없었겠지만, 적어도 각오는 했을 거다. 내가 손에 쥔 게 썩다 못해 끊어진 동아줄이란 걸.
“진지하게 묻겠는데, 범신조가 좋기는 해?”
신호가 멈춘 사이 주 대표가 물었다. 윤오는 반짝 눈을 떴다. 고개를 돌리니 그 역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선글라스 너머로 눈이 마주친 게 느껴졌다.
“저는….”
윤오가 입술을 달싹였다.
* * *
“어디 다녀왔어?”
주차장에서 주 대표와 헤어지고 VIP층까지 바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윤오는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말 그대로 자리에서 펄쩍 뛸 뻔했다. 화들짝 놀라서 옆을 돌아보니 범신조가 있었다. 환자복이 아니라 검은색 니트와 짙은 색의 청바지를 입고 코트를 팔에 건 채.
“왜 옷 갈아입었어요…?”
“집에 갈 거니까.”
범신조가 고개를 기울였다. 오랜 비행을 한 사람처럼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느리게 스트레칭하는 모습을 윤오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손등에 돋은 핏줄을 따라 올라가니 세운 손가락에 걸고 있는 시계가 보였다. 전부터 윤오에게 그토록 채워주고 싶어 하던 바로 그 시계였다.
“요즘 주 대표랑 친해졌나 봐.”
그가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왔다. 윤오는 잘못한 것도 없이 바닥에 발이 붙은 상태로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다가올수록 느껴진다. 그가 보기와 다르게 상당히 체구가 크다는 걸. 그리고 그의 그림자는 그의 몸보다 더 위협적이다. 정작 그림자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는데 말이다.
범신조가 손을 뻗어 윤오의 볼을 가볍게 건드렸다.
“그러지 마. 질투 나잖아.”
느긋한 말투만 보아서는 이 말이 상대를 놀리기 위한 장난처럼 들리겠지만, 그 아래에 진심이 깔려 있단 건 뻔했다. 특히 우묵하게 깊어진 눈빛이 그랬다.
“그래서. 뭐 하고 왔어?”
“…일단.”
윤오는 상체를 가로지르는 가방끈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내렸다. 덩달아 고개가 조금 떨어지며 부드러운 뺨이 범신조의 손가락 마디에 문질러졌다가 떨어졌다.
“일단 가자. 우리 집에.”
“…….”
윤오의 말을 오래도록 음미한 범신조가 느리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더니 뺨을 타고 손을 내려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가, 더욱 내려가 목적지인 손까지 이르렀다. 천천히 내려왔던 것과 달리 와락 손을 움켜쥔 그가 그것을 입술로 가져와 괴고는 시선을 든 채 중얼거렸다.
“우리 집이라고 해서 일단 넘어갈 거야.”
“그럼 어쩌게. 또 화내기라도 하게?”
손가락에 닿은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웃는 것이다. 눈 역시 사르르 접혔다.
“울기라도 해야지.”
“…….”
“필요하다면 애원도 하고.”
“…주 대표가 너보고 제정신이 아니래.”
“그래? 주 대표 사람 보는 눈 있어.”
윤오가 어깨를 조금 움츠리며 속삭였다.
“응. 나도 그렇게 말했어….”
코 아래로는 두 사람의 손에 가려진 범신조의 눈이 한층 더 진하게 접혔다. 너는 이렇게 웃을 수도 있구나. 윤오는 조용히 볼 안쪽을 씹었다.
그런 윤오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범신조가 잡고 있던 손을 내렸다. 그리고 시계를 채워 준다. 그 몸짓이 자못 엄숙하기까지 하다. 여권을 만들었어. 마음먹은 게 있어.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네가 싫어할 거야…. 말해야만 하는데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 복잡한 마음이 시계가 찰칵 잠기는 소리와 함께 정리되었다.
“차고 다녀. 디자인이 싫은 거면 새로 사 줄 테니까.”
제 손목에 딱 맞는 시계. 범신조의 것이었다가 그가 직접 줄인, 맞춘 적도 없는데 사이즈가 완벽한 시계.
이게 그냥 시계가 아닐 것 같단 예감은 들었다. 어느 정도 해로운 이유일 수 있다는 걸 알지만, 지금은 그냥 차고 있기로 했다. 남자가 그렇게 애원하고 있었으니까. 눈빛으로, 행동으로, 체온으로, 체향으로.
금인과 치인이라 다행이다. 체향이라는 게 편지처럼 느껴진다. 범신조의 체향은 수려하지도 않고 격식에 맞지도 않지만 돌려 말하는 것이 없이 와닿았다. 네 감정은 내 생각보다 순수했다.
* * *
피로가 쌓인 만큼 잠이 많아지리란 것쯤은 익히 짐작한 바였다. 윤오는 차에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잠에 빠졌다. 병실에는 딱히 짐이랄 것도 없어서 그냥 차에 타면 됐다.
범신조는 윤오가 앞쪽으로 돌려둔 가방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꾸벅꾸벅 조는 머리를 제 쪽으로 당겨 괴게 하고는 가방을 만지작거렸다.
“주 대표는 해외로 나간다고?”
“예. 삼십 분 전 이륙하셨다고 합니다.”
주 대표와 무슨 일을 벌인 건 알겠는데 자세하게는 알아보지 않았다. 먼저 말하길 기다리는 마음도 있고, 이것까지 쫓아다니며 뒤를 캐거나 하면 지금 한껏 예민한 상태인 김윤오를 자극하는 꼴이 될 것 같아서도 있었다.
“길다온은.”
범신조는 윤오의 어깨를 감싸고 귀를 눌러 제 고개에 더욱 붙이며 물었다. 잠들었어도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말씀하신 곳에 두었습니다.”
“오늘 밤에 갈 거니까 약 계속 넣고 있으라고 해.”
“네.”
장용우가 핸들을 뽀득 소리가 나게 잡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윤오에게 주입했던 약은 현재 아슬아슬한 수치까지 길다온의 혈관에 넣어지고 있었다. 그도 금인인 만큼 효과가 아주 좋을 터였다.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길다온은 마구 웃다가 마구 울기를 반복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억울하다고, 내가 뭐가 부족하냐고, 내가 뭘 그리 잘못했냐고 하는 데 그 모든 말이 기가 찰 노릇이었다.
당사자는 길다온이 왜 그랬는지 이유를 알까.
백미러로 흘끗 보았으나 거기엔 여느 때처럼 속내를 읽을 수 없는 표정이 전부였다. 그나마 속내가 보이고 사람처럼 느껴지는 건 오직 김윤오를 대할 때뿐이었다.
* * *
집에 도착해서도 윤오는 깨지 않았다. 범신조는 다른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안아서 집까지 데리고 들어갔다. 중간에 몇 번씩 서서 고개를 기울여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현관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으로 멈춰선 곳은 공교롭게도 비파나무 앞이었다. 그간 관리하지 못했는데도 비파나무는 나뭇잎 끝이 아주 약간 시무룩할 뿐, 그 외에는 모두 괜찮았다.
“씩씩하네.”
범신조는 조용히 중얼거리곤 다시 집으로 향했다.
집 안은 적막했다. 오기 전 특별히 일러둔 덕에 난방이 잘 되어 써늘하진 않았다. 범신조는 윤오를 더 바투 안고 침실로 향했다.
처음 볼 때보다 더 야위고 피곤해 보인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안 그래도 작은 얼굴이 더 작아진 건지 짧게 다듬은 머리카락이 며칠 사이 허수룩 길어진 것 같았다. 잠시 윤오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신조는 그의 손목에 있는 시계를 만지작거린 끝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레스룸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동안에도 윤오는 뒤척거리지도 않았는지 마지막으로 본 그 상태 그대로였다.
숨은 쉰다. 가슴이 야트막하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범신조는 멀찍이서 하관을 연신 문지르며 어쩐지 부끄럽고 쑥스러운 감정으로 그런 윤오를 보았다. 장용우가 바깥에서 대기 중이고 폐부두까지 가려면 출발해야 하는데 이대로 두고 나가고 싶지 않다.
마침내 한숨을 한 번 나직이 내쉬고 겨우 발걸음을 뗐다.
이제 해가 정점이다. 정오의 햇살이 너무 뜨겁지 않게 들어오는 거실을 한참 지나 현관으로 나왔을 땐 현관문에 못 보던 작은 장치가 달려 있었다. 기존에 있던 도어록과 비슷하게 생겨서 얼핏 보면 눈치채지 못할 수준이었다.
그것에 엄지를 올리자 삑 하는 소리가 나며 문이 닫힌 후 자동으로 잠겼다. 안쪽에서 사용하는 잠금장치였다. 등록된 지문은 제 것 하나뿐이었다. 이제 집 안으로 들어올 사람도 자신밖에 없었다.
일단 지금은.
범신조는 머릿속으로 숫자를 뇌까렸다. 윤오의 스물다섯 살이 될 새해를 기다리는 숫자다. 하나씩 헤아리는 심정은 제 목으로 도끼가 떨어지기까지의 시간을 기다리는 소감에 더 가까웠다.
무서워서 아직 물어볼 수가 없다. 너는 나만을 원망하고 널 용서할 준비가 되었는지.
아니라면….
순간 바닥이 훅 꺼지는 듯한 암담함에 그가 우뚝 섰다. 이번에도 또다시 비파나무 앞이다.
“너도 내가 미운 거 알고 할 말도 없으니까 그만 잡아.”
살아 있는 것도 아닌 고작 나무인데. 그는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아주 바보 같은 짓을 했다. 나무에 툭 말을 던지고 신조는 다시 정원을 나섰다.
정문 양옆에는 그사이 두 명의 건장한 남자가 서 있었다. 특수부대에서 근무했다가 전역 후 사립 경호원으로 뛰던 중 범신조의 회사로 스카우트된 이들이었다.
“못 나가게 해.”
범신조가 잠에 취한 것처럼 나른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현관을 나섰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푹 잠들면 좋을 텐데.
쉽게 깨지 않을 것 같기는 하다. 더 꾸어야 할, 더 기억해야 할 꿈도 더는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
열린 차 문을 잡고 잠시 뒤를 돈 그는 저 안쪽 겹겹이 감추어진 집 어딘가를 눈으로 더듬은 뒤에야 차에 올라탔다.
벌써부터 바다 냄새가 나는 것만 같다. 물론 그도 바다를 싫어한다.
* * *
폐부두는 환한 대낮인데도 음산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런 반면 범신조는 주말에 느지막이 점심을 먹으러 나온 사람처럼 편한 차림이었다. 다만 검정 일색일 뿐이었다. 물론 차에는 집에서 챙겨온 다른 옷도 있었다.
“의사 와 있지?”
“이미 며칠째 대기 중입니다.”
“너무 만지지 말라니까….”
범신조가 혀를 찬다. 컨테이너를 옮길 대형 화물차도 조용히 대기 중이다. 그는 시선으로 차를 확인한 뒤 늘어선 대형 컨테이너 중 하나로 향했다. 녹이 슬어 어디에 갖다 두어도 사람들이 자연히 시선을 피할 법한 외양이었다.
느긋하게 걸으며 검은색 장갑을 낀다. 손에 딱 맞고 길이 들어 편하다. 몇 번 손을 쥐었다가 편 그가 고개를 까딱였다. 장용우가 문을 열고 범신조가 들어갔다.
전기를 끌어와 간이로 켜둔 조명은 뿌옇게 번지고 빛도 흐렸다. 장용우가 문을 닫으려고 했다.
“아. 닫지 말고. 다 들어오라고 그래.”
하마터면 예? 하고 되물을 뻔한 장용우가 꾹 참고 다시 문을 열었다. 어쩐지 데려오라는 수가 좀 되더라니. 그는 더러운 일과 깨끗한 일, 그리고 양쪽을 모두 처리하는 제 동기와 선후배들을 눈짓과 고갯짓으로 불렀다.
“그래도 직장 동료인데. 봐 두는 게 좋겠지.”
범신조의 웃음기 서린 목소리에 장용우가 침을 꼴깍 삼켰다. 이렇게 화난 모습은 처음 본다.
다들 분위기를 살피는지 숨죽인 채 안으로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팀장 라인 중 막내가 문을 닫았다. 오들오들 떠는 꼴이 지리는 건 아닐까 싶었다.
문이 쾅 닫히는 순간 전구가 깜빡였다. 다시 켜졌을 땐 먼지가 폴폴 날리는 게 보였다. 그런데도 공기 중에선 습한 냄새가 났다. 쿰쿰한 곰팡이 냄새도 섞였다.
길다온은 발등에 링거를 연결한 채 의자에 앉혀져 있었다. 손목과 손등, 팔뚝을 다 써서 이제 발등까지 내려간 것이다. 꼴은 당연히 엉망이었다. 골고루 패 두었다. 치료도 잊지 않았다. 영양제도 맞혀줬다. 투여하는 약에 조금씩 섞어 주는 정도지만, 원체 건강한 몸이고 금인이다 보니 이 정도로도 다시 때릴 때 문제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범신조는 손가락 끝끼리 문질렀다. 뽀득거리는 가죽의 촉감이 느껴졌다.
“깨워.”
의사는 오래도록 함께한 이였다. 재주도 기술도 좋은데 의국 정쟁에서 밀려나며 홧김에 과장 차를 들이받은 이후로는 병원에서 잘리고 소문도 나서 취업도 힘든 와중에 범신조를 알게 되었다.
‘난 착한 사람은 필요 없고 실력이 있는 사람은 필요로 하는데. 같이 일 좀 하죠.’
그 말에 단번에 하겠다고 했다.
그는 아주 유용했다. 병원이야 얼마든지 수배할 수 있지만, 수배하지 않고 의사가 필요한 일에는 딱이었다. 범신조에게 비굴한 웃음을 지었던 의사는 길다온에게 고개를 돌리자마자 표정을 싹 바꾸었다.
그 비열한 표정에 범신조는 문득 아주 옛날에 봤던 한 남자를 떠올렸다. 무리의 대장이 죽은 걸 숨기기 위해 비량아의 다리라도 직접 벌려줄 기세던 그 우락부락한 남자. 세상이 변해도 사람들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자신마저도. 범신조가 자조했다.
길다온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깨어났다. 의사는 실력이 좋다. 정신머리가 좀 없어서 그렇지.
“그럼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믿음직스럽네.”
중얼거린 범신조가 가만히 생각하다가 의사 역시 남으라고 일렀다.
“오늘 좋은 구경 하시겠네요.”
상냥하게 웃는 얼굴에 오금이 저린다. 그는 범신조와 손잡은 이후로 별의별 모습을 다 보았다. 사람이 어떻게 망가지고 어떻게 죽는가에 대해서 학교와 병원보다 더 많이 배웠다.
바깥에서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위치였든 일단 이곳에 오면 모두 바닥을 보이게 됐다. 울고 지리는 건 기본이었다. 그러나 그런 난장 속에서도 범신조는 늘 똑같았다. 그게 무서웠다. 늘 한결같다는 것.
나가고 싶으나 닫힌 문은 열릴 것 같지 않다. 의사는 막내의 뒤로 숨듯이 섰다. 불안한 눈빛을 보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손목 부분을 당겨 재차 장갑을 손에 맞춘 범신조가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눈을 떠도 뜬 게 맞나 싶을 만큼 부은 길다온의 눈꺼풀을 검지와 중지로 눌러 벌렸다.
“용우야.”
“네, 대표님.”
“이거 풀어 줘라.”
장용우는 제 귀에 들린 말을 의심했다. 묶어둔 걸 풀자고?
“일방적이면 억울하잖아. 풀어 줘.”
범신조가 한 걸음 물러났다. 장용우는 잠깐 망설였다. 아무리 그래도 길다온은 금인이다. 궁지에 몰린 녀석이 뭘 할지 모른다.
그러나 역시, 걱정되는 쪽을 굳이 따지자면 길다온이지 범신조는 아니었다. 장용우가 다가와 길다온을 묶어둔 것들을 모두 풀었다. 그가 윤오를 구속했던 케이블 타이가 끊어졌다.
범신조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길다온을 기다리며 물었다.
“우리가 무슨 사이인데 그런 짓을 했어요. 내가 악덕 고용주였나?”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낯설기 그지없는 존대가 도리어 사람의 숨통을 콱콱 조였다. 길다온이 겨우 눈을 들었다.
“너… 내가 기억이 안 나…?”
칼칼하게 갈라지고 혀가 부어 발음도 엉망이었다. 범신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우… 산속에서… 비량아를 이용해서 말이야…. 내가 곰도, 곰도 죽였는데….”
“…….”
“어떻게 널 거의 죽인… 존재를 잊을 수가… 이, 있어….”
저게 무슨 개소리야. 미쳐버렸나? 장용우가 길다온의 뜬구름 잡는 소리에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곁눈길로 범신조를 보자 그의 표정엔 미동 하나 없다.
“내, 내가… 널 궁지까지 몬… 처, 첫 번째… 유일한… 존재일 텐데…. 네가 내 짝… 죽였잖아…!”
“하….”
범신조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느긋한 걸음으로 길다온에게 다시 다가갔다. 지척까지 서선 주머니에 손을 꽂고 고개를 푹 숙여 길다온을 내려보았다. 풀어 준 것이 무색하게 일어나지도 못하는 것을.
간신히 눈을 든 길다온은 범신조의 표정을 보고 흠칫 떨었다. 표정이… 어떻게 그래…?
“조금도 기억이 안 나.”
인상을 찌푸렸던 범신조가 산뜻하게 대꾸했다. 그 말에 길다온의 입이 떡 벌어졌다.
내내 맞았던 것은 참을 수 있었다. 범신조에게 자신의 정체가 누군지 말해 주고, 평생 저주할 것이며 너는 비량아와 또 반복된 삶을 살 거라고 외쳤을 때 일그러질 그의 표정만 생각하면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뭐…?
“기, 길달을… 길달을 기억 못 해…?”
“길달이고 나발이고….”
범신조가 고개를 조금 가누며 웃었다.
“조금도 기억 안 난다고.”
“거짓말…. 허세 떨, 떠는 거지?”
“내가 뭐하러.”
범신조가 고개를 들었다. 장용우가 기민하게 다가와 담배를 건넸다. 그가 원래 피우던 담배다. 윤오와 나눠 핀 순해 빠진 것 말고, 니코틴이 그 열 배는 되는 아주 독하고 무거운 종류.
여느 때처럼 성냥으로 불을 붙이고 허공에 손을 털어 불을 끄며 미간을 좁히던 그가 연기를 뱉곤 고개를 저었다.
“진짜 기억이 안 나는데.”
“어, 어떻게… 어떻게 네가….”
“옛날얘기를 하고 싶은 모양인데, 날 죽이려고 한 존재는 네가 최초가 아니야.”
범신조가 싱긋 웃었다. 그는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담배를 옮긴 뒤 의자의 양 손잡이를 쥐고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리고 실패한 것도 네가 처음이 아니고.”
“…….”
“그런 시도를 한 녀석들은 지금껏 무수히 많았어.”
그는 고개를 조금 옆으로 돌리며 담배를 물었다. 곁눈질로 보아하니 길다온의 표정이 말이 아니다. 개의치 않고 연기를 뱉으며 마저 이야기했다.
“내가 기억하는 건… 비량아뿐이야.”
아득히 먼 과거에서 현재까지. 미치지 않는 게 이상한 나날이었다. 사실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어서 미칠 수 없었던 거라고, 그런 판단을 내릴 정도로 충분한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서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건, 그리고 잊지 않고 기억하고 싶은 건, 오로지 비량아 하나였다.
비량아를 누군가 꼬드겼던가. 그랬을 수도 있지. 그러나 비량아가 그런 선택을 하게 된 건 바로 자신 때문이다. 호환이자 재액인 범신, 나 때문에. 여우고 나발이고, 길달이고 길다리고, 그 누구 때문도 아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렇게 너그러운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것이 비량아와 둘 사이에 끼어드는 건 달갑지도 않다. 오로지 나 때문에 비량아가 나를 죽이고 싶어 했고, 그 외에 다른 건 수단일 뿐. 누가 일일이 도구를 기억하나.
“내가 방심한 건 네가 용의주도하고 똑똑해서가 아니라.”
아니. 오히려 서투르고 조급했지. 아주 엉망이었다.
“네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어서야.”
“허, 허억….”
“네가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라서라고.”
범신조는 제법 상냥하게 가르쳐 주었다. 여우가 얼마나 살았든 자신보다 오래 살진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괴물들은 자신보다 짧게 산다. 자아를 가지게 된 산이나 바위 정도만이 그보다 오래 살았으려나.
교만한 여우. 어리석은 여우. 그간 저 혼자만 자신을 해치려 시도했겠나. 그러나 성공한 건 오로지 하나밖에 없다.
“비량아.”
범신조가 황홀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열에 달뜬 그 목소리는 광신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날 죽이는 데 성공한 건 비량아뿐이야.”
회포는 여기까지다. 자세한 이야기를 더 해 주고 싶은 생각은 없다. 비량아와의 기억은 자신과 비량아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 누군가에게 나눠주기에도 아깝다.
제가 더 미치지 않을 수 있는 건 바로 이 기억과 비량아를 향한 마음을 독식하고 있어서다. 기억마저도 나만 가질 것이다. 범신조는 주먹을 쥐어 허공으로 들었다. 그러다가 작게 웃었다.
더 미치지 않을 수 있는 건, 이라… 이미 미친놈이 말도 많군.
곧 그의 주먹이 포물선을 그렸다.
* * *
“마닐라 어때?”
범신조가 마치 휴가철 여행지를 고르는 듯한 여상한 어조로 물었다.
“마닐라요?”
“갔다가 적응 잘한다 싶으면 남미도 괜찮고.”
“…….”
컨테이너를 나선 그는 장갑을 벗고 바다로 휙 던져버렸다. 해가 부쩍 짧아져 아직 저녁이라고 하기 애매한 시간인데도 날이 어둡다. 바다는 특히 더 그렇다. 물이 위험한 건 어두울 때 그곳이 땅인지 아닌지 모른다는 것이다. 파도 소리에 장갑이 빠졌는지 아닌지도 확인할 수 없었다.
안에서는 의사가 제 본분을 다하고 있다. 살려놨고, 이후 살면서 여러 가지 힘든 일이 있겠지만 어쨌든 숨은 붙어 있다. 사후 처리가 완벽한 건 범신조의 자랑이었다. 이걸 이용해서 쥔 비밀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사람들 사는 건 옛날부터 참 지리멸렬하다고 생각해 오긴 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더럽기까지 하단 게 그의 소감이다.
잠자코 있던 장용우가 덧붙였다.
“남미로 바로 보내는 게 좋겠습니다. 마닐라에서는 수를 쓸 수도 있으니까….”
“어떻게?”
대번에 범신조가 조소했다. 하기야. 장용우는 길다온의 몰골을 떠올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 꼴로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을 거다. 고개를 숙인 그가 “준비해 두겠습니다.” 하고 마무리했다.
길다온은 컨테이너째로 옮겨질 것이다. 그러기 위한 곳이 바로 이 폐부두고 폐컨테이너 더미다. 배송비가 좀 들긴 해도 깔끔했고, 적어도 이 나라에선 다시 캐내어질 수 없는 완벽한 마무리였다.
장용우가 눈짓하자 기다리고 있던 녀석 중 하나가 주차된 화물차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헤드라이트가 번쩍 켜졌다. 그걸 신호 삼아 범신조가 몸을 돌렸다.
“씻고 가야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리지 않기 위해 옷까지 챙겨오지 않았나. 길다온 대신 사생활을 관리하게 된 새 비서 하나가 다가와 김윤오는 아직 잠든 것 같다는 말을 전했다. 아직 집은 컴컴하다고 했다.
전달까지 받고도 불안한 건 어쩔 수가 없다. 앞에 사람도 세워뒀고 문단속도 했으니 자신이 없이는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도무지 안심이 되질 않는다. 시계에 부착해둔 위치추적기로 집 안에 있단 것까지 확인했다. 위치추적기로도 믿을 수 없어 나올 수 있는 통로 곳곳마다 사람을 세워뒀으면서 그랬다.
그래도 돌아가면 지문인식 기능부터 일단 꺼야겠다. 안쪽의 자물쇠는 범신조만 아는 방법으로 껐다가 켤 수 있었다. 달아둔 건 제멋대로였지만 적어도 들켜서 미움을 사고 싶진 않았다. 이미 미워할 거리가 차고 넘치지 않나.
차에 탄 범신조가 시트에 몸을 묻은 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길다온, 길달은, 여우는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 * *
돌아왔을 때도 윤오는 여전히 잠에 빠져 있었다. 세상 근심 걱정과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그 편안한 모습을 오래도록 본 뒤에야 신조는 다시 조심스럽게 방을 빠져나왔다.
천천히 문고리를 놓아 닫히는 소리가 거의 나지 않게 한 뒤 거실로 돌아와 잔에 술을 따랐다. 유리잔 안에 든 영롱한 색채의 액체를 손으로 굴리며 그는 예전에 윤오의 돈다발을 확인했던 때처럼 거침없이 윤오의 가방을 열었다. 한 손에는 잔, 한 손에는 스포티한 가방을 든 그는 오히려 강도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거추장스럽게 딸려오지 않도록 무릎으로 가방을 누른 그는 안의 내용물을 한참 응시했다.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히 들여다보기만 했다.
“…….”
모든 것을 알게 된 윤오는 그럼에도 내 곁에 있을까.
어느 정도 예상했으면서도 아니길 부정하는 마음이 더 컸던지라 두 눈으로 끝내 확인하면서도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오래도록 볼 수밖에 없었다.
마음은 정리가 되지 않는다. 그 심정을 대신하듯 그의 손에 들린 잔에서 얼음이 녹아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그 정도로 고요했다.
* * *
낮잠으로 거의 열 시간을 잔 셈이 된 윤오는 깨고도 한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일단 방 안이 어두컴컴한 것도 한몫했다. 여기가 어디지, 그는 오래도록 생각했다. 아직 컨테이너 안인가. 그럼 그 컨테이너는 길다온이 준비했던 것인가 아니면 박 사장네 컨테이너인가.
한참 후에야 둘 다 이렇게 푹신푹신한 침대와 깨끗하게 바스락거리는 침구는 없다는 결론까지 닿은 윤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은 범신조의 집일 거다.
윤오는 기억을 더듬어 블라인드를 거뒀다. 그러나 암막 블라인드 때문이 아니라 날 자체가 어두워진 거란 건 그제야 깨달았다.
“…대체 얼마나 잔 거지.”
망연히 중얼거리며 볼을 문질렀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가볍게 세안을 하고 방문을 열었다.
“…….”
범신조가 있다는 것을, 눈보다 먼저 온몸에 훅 느껴지는 체향으로 알았다. 체향은 후각보다 존재감에 더 가깝다는 걸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문에 우두커니 서 있으니 이쪽을 등지고 바에 앉아 있던 범신조가 일어나 윤오를 돌아봤다.
“…….”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걸 기대하진 않았지만, 그보다 상황이 더 안 좋아 보였다. 범신조의 표정이 무척 어두웠다. 마치 제가 그를 떠나겠다고 하던 그때처럼 보였다. 자연히 윤오의 몸이 긴장으로 위축됐다.
“술 마시고 있었어?”
겨우 묻자 범신조가 고개를 돌려 제 어깨 너머로 바 테이블을 보았다. 반쯤 빈 술병과 술잔이 있었다. 언제 저렇게 비웠지. 자조한 그가 대답했다.
“그랬네.”
마치 술을 마신 게 자신이 아니라 모르는 누군가라도 되는 듯한 태도다. 윤오는 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입술만 씹었다. 그래서 범신조가 먼저 화두를 열었다.
“여권 만들었더라.”
“…내 가방 뒤졌어?”
“그래.”
남의 가방을 뒤져놓고 태연하다.
하긴. 떠올려 보면 김윤오로 만난 범신은 다정했지만, 그의 첫인상과 초반의 행동이 그닥 다정했던 건 아니었다. 그때 그는 화가 난 것처럼 제멋대로 굴었고, 지금이 딱 그때와 같았다.
“뒤졌어. 궁금해서.”
“…….”
“너는 도통 말을 해 주지 않잖아.”
“술… 취한 것 같은데.”
“그랬을지도 모르고.”
범신조가 다가와 윤오가 선 문틀에 팔을 괴었다. 순식간에 그림자가 윤오를 덮쳤다.
“아닐지도 모르고.”
말투가 영 고깝다. 그러나 윤오도 할 말은 없었다. 여권을 굳이 만드는 이유야 빤하지 않은가.
“어디 가려고.”
“…….”
“아하. 아직 안 정했나 보군.”
“…….”
“그럼 내가 정해 줄까?”
“비아냥대지 마.”
“아니. 진심인데.”
윤오가 손을 뒤로 숨겼다. 무섭다…. 손이 떨렸다. 몸에 사무친 기억이 끌어올린 두려움 때문이다. 끌고 가서 또 동의도 없이 나를 범할까? 가둬버리는 건 아닐까? 온갖 가정이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하나같이 불합리한 가정이었다.
하지만 불합리하고 비상식적인 게 바로 범신조 아닌가.
그 머리통을 내려다보던 범신조가 이를 꽉 물었다. 문틀에 대고 있던 주먹도 움켜쥐었다. 처음엔 화가 치솟아 주 대표에게 연락을 하려다가 말았다. 이미 한국에 없기도 하고, 김윤오가 부탁하는 걸 막을 권리는 그에게 없었으니까.
계약서라도 쓸 걸. 아니면 가족을 가지고 협박이라도 할 걸 그랬나.
…그러나 이건 이미 써 본 방법이다. 결말은 그도 잘 알지 않나. 범신조는 폭력적인 무력감에 젖어 몸을 홱 돌렸다. 갈증이 난다. 술잔을 채워 들이켰다. 그러다 이대로 있다간 정말로 만취해 사고라도 칠 것 같아서 병째로 들고 가 싱크에 내용물을 모두 부어버렸다. 남은 건 빈 술잔뿐이었다.
시선을 떨구고 있던 윤오는 갑자기 무엇인가 터지는 소리에 눈을 번쩍 들었다. 고개를 푹 숙인 범신조의 등이 어두운 부엌 속에 초라하게 웅크려 있었다.
“범….”
“넌, 다정하면 꼭 떠나려고 해.”
“…….”
“내가… 내가 널 잡을 자격이 없다는 걸 알면서.”
그가 천천히 손을 떨어뜨렸다. 그제야 윤오는 터진 소리가 어디서 났는지 알게 되었다. 그가 쥐고 있던 컵이다. 산산조각 난 컵이, 컵이었던 크리스탈 조각이 아래로 추락하고 범신조의 손에서도 피가 뚝뚝 흘렀다.
어두워서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내가 널 잡을 자격이 없다는 걸 알면서… 왜 날 떠난다고 그래, 자꾸.”
상상했던 건 억지로 범하는 너, 나를 가둬두는 너, 내 목을 조르는 너. 하지만 이 모습은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다. 범신조는 패잔병처럼 걸어왔다. 윤오는 그제야 그의 얼굴이 보였다.
“도저히 내 곁에는 못 있겠어…?”
범신조는 울고 있었다. 윤오는 충격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뻣뻣하게 굳어진 윤오의 앞에 범신조가 저항 없이 무릎을 꿇었다. 용서를 바라고 하는 행동이나 불쌍해 보이려는 게 아니었다. 불가항력이었다. 다친 건 자신의 손이면서 조심히 윤오의 손을 잡고 그곳에 이마를 괴었다.
범신조의 몸이 뜨겁다. 그의 체향이 윤오의 주변을 배회했다. 차마 닿지도 못한다는 듯이 어렴풋이 느껴지기만 했다.
“내 곁을, 나를 도저히 참아 줄 수가 없어…?”
“…….”
“어차피 내 벌은 네가 죽는 걸 무력하게 봐야 하는 거야. 그러니 너는 내게 돌아오게 되어 있는데, 그 벌을 받기 위해서라도 내게 다시 올 텐데, 그때까지 그냥 내 곁에서 날 미워하면 안 될까….”
이렇게 처참한 애원은 처음이었다. 모든 애원과 간구가 절절한 건 당연하지만 바로 그 범신조가, 그 오만한 사내가 매달려서는 자신을 사랑해 달라거나 용서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미워해 달라고만 한다. 애원은 언제나 내 몫이었는데. 살려 달란 애원, 데려가 달란 부탁, 제발 떠나게 해달라는 간청. 모두 내 몫이었는데….
윤오도 불가항력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범신조 앞에 팔을 늘어뜨리고 무릎을 구겨 앉았다. 범신조가 피 묻은 손으로 제 얼굴을 거칠게 쓸었다. 덕분에 끔찍한 꼴이 되었는데 또 그 덕분에 우는 것이 더 잘 보였다.
손을 뻗어서 그 얼굴을 더듬었다. 닿기까지는 여전히 망설이는 것처럼 움찔거리다가 결국 손으로 모두 덮었다.
“김윤오일 때나, 비량아일 때나, 나는 늘 너에게 사랑에 빠졌어.”
범신조가 축축하게 젖었는데도 황폐하게 보이는 시선으로 윤오를 응시했다. 상처받은 눈 때문에 그의 나이가 가늠키 어려울 정도로 어리게 보였다. 그때도… 오래 산 범인데도 불구하고 너는 어린애 같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너를 떠나서 살아보고 싶어. 끝내 내가 돌아오게 될지, 아니면 네가 없는 나는 다른 선택을 하게 될지. 난 그럴 기회가 한 번도 없었잖아.”
“…….”
“그러지 않으면 여기서 고여 다시 반복되기만 할 거잖아….”
이제는 윤오도 울고 있었다.
비량아는 누군가 멈춰 주길 바랐다. 기억을 모두 찾은 김윤오 역시 멈추고 싶었다. 지긋지긋한 굴레였다. 너나 나나 서로를 부수기만 하는 철로를 탄 것 같았다. 네가 내 쪽에서 출발하고 나도 네 쪽으로 출발하는.
누군가 멈춰 주길 바랐지만, 결국 멈출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밖에 없다. 범신조 네가 몇 번의 생애를 반복하며 본인의 실수를 몇 번이나 직면하고 되새긴 끝에 여기까지 변한 것처럼.
“나는 변하고 싶어…. 이제 그만 벗어나고 싶어.”
윤오가 울먹이며 중얼거렸다. 범신조는 멍한 눈으로 그런 윤오를 보다가 제 뺨 위에 얹어진 손을 덮어 잡았다.
“…그리고 끝내 내게 돌아오지 않으면?”
“…….”
“나는 그런 선택을 할 너를 감히 원망할 수도 없는데, 너를 원망하게 되면.”
그리고 또다시 잡으려 하고, 잡기 위해 또 망가뜨린다면.
윤오가 흐리게 웃으며 꺼져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린 이미 그 이후를 알고 있잖아….”
범신조는 더 말하지 않았다. 윤오의 말대로 너무나 지독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잡고 싶다. 그래도 잡고 싶고 보내줄 수 없고 네가 없는 세상이 두렵다. 그가 천천히 몸을 앞으로 웅크려 윤오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범신조의 체향이 파도처럼 밀려와 두 사람을 완전히 덮었다.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향기였다. 축축하고 쓸쓸하고 서글펐다.
“어차피 너는 내 앞에서 죽게 되어 있어. 그게 내 벌이야. 그러니까… 너는 나한테 돌아올 거야.”
“…….”
“내게 돌아올 거야….”
윤오는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범신조의 등은 오래도록 웅크려 있었다. 자신이 또 무엇을 놓쳤기에 윤오가 떠나가는지, 그것을 한없이 곱씹으면서.
왜 너에 한해서는 늘 한쪽 눈을 감은 것처럼 자꾸 놓치게 될까. 하지만 두 눈을 모두 떠 너만 보고 있더라도 더는 잡을 수 없다는 걸 안다. 알면서도 애원하게 된다.
그토록 생을 거듭하며 너를 잃어 봤지만 여전히 너를 잃는 것은 적응이 되지 않는다. 적응하고 싶지도 않다. 그럴 날도 오지 않을 것이다.
적응하게 되는 날, 그때가 오면 나는 더는 내가 아닐 테니까.
* * *
윤오가 먼저 깨는 일은 드물었다. 지난밤 열어둔 블라인드로 아침 햇살이 쏟아졌다. 어렵사리 눈꺼풀을 올린 윤오는 허리를 비롯한 몸이 무겁다는 걸 깨달았다. 손은 어딘가에 자연히 올라가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느리게 쓸던 윤오가 시선을 내렸다.
허리에 범신조가 매달려 있었다. 커다란 몸을 구기듯 윤오에게 안겨 가슴은 윤오의 가슴팍에, 허리에는 팔을, 아래로는 서로 구부린 덕에 퍼즐처럼 딱 떨어져 붙은 다리까지…. 몸을 섞기까지 했는데도 이 자세가 유독 낯뜨겁게 여겨져서 윤오의 얼굴이 천천히 화끈화끈해졌다.
그러나 그를 깨우고 싶지 않다. 윤오는 범신조의 몸을 쓸던 손을 떼고 그것으로 제 입을 가렸다. 숨소리조차 크게 들릴 것 같다. 지금 이 아슬아슬한 평화를 조금이라도 더 질질 끌고 싶다는 미련이 나쁜 건 아닐 거다.
어색하게 손을 포개어 얼굴까지 가린 채 윤오는 손가락 사이로 들이치는 초겨울의 햇빛을 보았다. 물을 가득 탄 것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 어쩐지 울 것 같다.
그리고 그 때 범신조는 가만히 눈을 떴다.
윤오가 깨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역시 깼다. 윤오의 체향은 조금 따끔거려서 그가 잠에서 깨면 금방 알 수 있다. 원래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기억을 찾고 난 이후 생긴 변화다. 신조는 윤오의 허리 뒤로 감싼 손끝을 비볐다. 따끔거리는 체향을 손에 감듯이 붙잡아 문질렀다.
그 역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기색을 숨기는 건 김윤오보다 자신 있다. 맞붙은 몸을 타고 김윤오의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린다. 평소보다 빨랐다. 어린 심장처럼 팔딱대는 그 소리를 들으며 범신조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렇게 하면 윤오의 심장 속도가 다시 안정되기라도 할 것처럼, 느리고 고른 숨을 쉰다. 오래 들이켜고 천천히 내뱉는다.
품에 안긴 것이 따뜻하다. 이 시간을 영원토록 멈추고 싶다.
* * *
둘은 마치 어젯밤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었다. 정확히는 범신조가 그렇게 행동했다.
그는 가을 끝물의 과일을 깎고 빵을 구웠다. 커피를 두 잔 내리고 코스터와 함께 식탁에 두었다. 그가 너무 아무렇지 않게 행동해서 윤오는 어젯밤의 그 눈물이 꿈이나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로 얼떨떨했다.
그러다가 정적을 깬 건 신경도 거의 쓰지 않고 내던져 두기 일쑤인 핸드폰 벨소리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범신조의 것이겠거니 했다. 윤오가 움직이지 않자 범신조가 집어 들고 자신에게 오길래 그제야 제 것인 줄 알았다.
“…….”
그러나 범신조는 바로 내주지 않고 화면을 물끄러미 보았다. 전화는 울리다가 끊어졌다. 윤오가 의아한 표정을 하고 있자, 이젠 윤오를 그렇게 물끄러미 보던 그가 재차 울리는 벨소리에 그제야 핸드폰을 내밀었다.
“통화하고 있어.”
“…….”
“하기 싫으면 그냥 끊어도 되고.”
못마땅한 말투로 뇌까린 그가 담배를 들고 거실 창을 통해 바깥으로 나갔다. 탁, 닫히는 소리에 화면을 확인하니 저장되지 않은 번호다. 그러나 지금껏 내내 바꾸지 않은 숫자 조합이라 이름이 뜨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
예전 같으면 위가 쓰릴 정도로 고민하고, 끝내 끊기면 죄책감에 휩싸이고, 다시 걸게 되고, 그리고 후회하겠으나 이제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지금 윤오가 이 연락을 받는 건 온전히 그의 의지다.
“여보세요.”
윤오가 고개를 들었다. 겨울 아침 햇살처럼 은은한 조명을 똑바로 응시했다. 손으로는 식탁 위를 덧그렸다.
전화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급한 성격을 숨기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뱉어내는 말들이 쏟아졌다. 그 말들은 윤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이 먼지처럼 흩어졌다.
기억을 찾으면, 자신의 무기력증과 허무감의 이유를 찾으면 해결될 줄 알았으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아직 그는 길을 잃은 것처럼 붕 떠 있는 것만 같았다. 오히려 가족에 한해서는 그 거리감이 부쩍 늘어났고.
“아버지.”
윤오는 범신조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며 상대의 말을 끊었다.
“이제 연락하지 마세요.”
그가 한창 하고 있던 말과는 전혀 상관없는 갑작스러운 이야기였다. 가족 앞에서만 유독 목소리가 크던 남자의 말이 뚝 멈췄다. 놀란 듯 숨을 고르는 게 느껴졌다.
그가 한참 만에 겨우 내세운 건 할머니였다.
―너, 너! 너, 이자식. 할머니가 편찮으신데…! 너 할머니가 너를 얼마나 예뻐했는지 알아 몰라. 어? 네가 이러고도 손주야? 하나뿐인 손주라는 게 이러면 할머니 억장이 어떠시겠어. 살날이 얼마나 남으셨겠냐, 그 노인이. 십 년을 살겠어, 십오 년을 살겠어?
십 년, 십오 년. 오래 사시겠다. 윤오는 헤식은 웃음을 흘렸다. 저는 지금 막 발급받은 주민등록증과 십 년짜리 여권이 그 십 분지 일도 채 쓰이지 못하고 폐기되는 건 아닐까 하고 있는데.
만약 내가 단명할 운명이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하면 이 사람은 무슨 반응을 보일까. 헛소리하지 말라고 할까. 네가 가진 불행보다 내가 짊어진 근심이 훨씬 무겁고 고통스럽다고 할까.
―할머니가 너를 얼마나 예뻐했는데…!
“예뻐하셨죠.”
예뻐했으니까 착하게 굴어야 하나. 그런 일방적인 등가교환이 어디에 존재할까.
윤오는 두 번째 담배를 무는 남자의 등을 보았다. 저 남자가 과거 자신을 예뻐했으니까 착하게 굴길 바랐다가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를 말해 줘도 아버지는 이해하지 못할 거다. 그건 범신조와 자신만 이해할 수 있는 과거니까.
그러나 이제 윤오는 그에게 말할 수 있다.
“당신만의 방식으로 예뻐하셨는데, 나는 너무 무섭고 힘들었어요.”
―야 이 자식아. 네가 지금 그걸 말이라고… 세상에는 너보다 힘들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이게 운 좋은 줄도 모르고….
“아빠. 내가 무섭다고 데려가 달라고 했었잖아.”
일곱 살 때, 아직 할머니가 같이 살지 않았을 무렵 함께 할머니 집에 간 적이 있다. 교육 좀 받고 오라며 나만 두고 두 사람은 돌아갔는데 돌아갔다는 사실조차 할머니에게서 들었다. 착한 아이가 되면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했었다.
그날 밤, 할머니가 나직이 코를 골며 주무시는 동안 어린 윤오는 자다가 깨선 새벽에 그 시골길을 뛰쳐나갔었다. 엉엉 울면서 한 시간을 넘게 부모님을 부르다가 터덜터덜 돌아온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내가 드디어 버려졌다고, 내가 나쁜 애라서 버려졌다고.
그리고 아침이 되어서 할머니 역시 같은 말을 했다. 네가 오죽 말을 안 들었으면 두고 갔겠냐고.
어느 날 밤에 몰래 전화를 했었다. 윤오는 암기력이 좋았다. 집 번호를 눌렀고 아빠가 받았다. 무섭다고, 착하게 굴겠다고 데려가 달라고 했더니 그거론 부족하다며 전화를 끊었었다.
이게 손을 놓친 마지막 기억은 아니고. 처음에 가깝달까.
“나 이제 무서운 게 없어.”
윤오가 바에 팔꿈치를 괴며 천천히 웃었다.
“무서운 게 없어서 데려가 줄 필요도 없어. 이제 혼자 살아 보려고.”
―무, 뭐? 너 범 서방은 어쩌고…. 설마 내쫓겼냐?
아, 정말로 웃기다. 이젠 웃겼다. 윤오는 얼굴을 싸매고 입술끼리 세게 비볐다.
“건강하세요. 연락 올 일 없게.”
―김윤오!
“없는 자식이라고 생각해요.”
―야…!
“나도 없는 가족이라고 생각할게.”
윤오는 대답을 듣지 않고 통화를 종료했다. 스툴 위로 다리를 올려 껴안곤 바에 등을 기댔다. 아슬아슬한 자세가 오히려 안정감을 불러일으켰다.
모은 무릎에 턱을 괴고 모친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어디 나갔다 올 예정이니 앞으로 전화는 안 받겠다고. 하지만 정말 필요할 때, 엄마도 떠나고 싶을 때는 연락을 달라고 했다.
오타가 나도 지우지 않고 보낸 뒤 핸드폰은 뒤에 바에 던지고 몸을 웅크렸다. 시원하긴커녕 가슴이 선득하다. 추상같은 염왕의 말이 당장 들은 불호령처럼 생생하다. 비파에게 한 일이 있기 때문에 내가 그 업보를 받는다는 거.
너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으….”
윤오가 신음을 흘리며 제 팔을 손톱으로 찍었다. 쥐어뜯듯 긁어야만 이 선득선득하게 옥죄는 죄책감이 흐려질 것 같다.
그 때, 바깥에 있던 남자가 어느새 인기척도 없이 들어와선 윤오의 팔을 잡았다. 연신 팔뚝을 긁어대느라 빨갛게 자국이 남아 있었다.
“배가 뚫려도 멀쩡한 사람 두고 뭐하러 네 팔을 괴롭혀.”
잡힌 팔을 따라 시선을 올렸다. 범신조의 눈은 평소와 다를 게 없지만 자세히 보면 속이 상했음을 알 수 있다. 약간 화가 나기도 했고. 다만 그 화의 대상이 자기 자신일 뿐이다. 윤오가 스스로를 원망하듯.
“…남자애였어. 비파는.”
멀거니 범신조를 응시하던 비량아가 속삭였다. 갑작스러운 그 말에 범신조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순간 팔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렸다가 다시 거세게 옥죄었다. 입술을 달싹이던 범신조가 물었다. 그 목소리가 그답지 않게 속삭이듯 작았다.
“…이름을 비파라고 지었어?”
“보자마자 그 이름이 생각났어.”
그 이름밖엔 생각나지 않았다. 마치 범신이 아이를 보고 이름을 지은 것 같다 싶을 정도였다. 윤오가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범신조는 얼굴을 쓸어내리고 잠시 침묵했다가 윤오의 곁에 앉았다.
“널 닮았겠지.”
비량아가 살던 마을을 찾아갔을 때, 피투성이가 되어 죽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으니까. 그때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안심하는 자신이 가증스럽다고 생각했다.
비파가 태어난 이후로는 배 속에 있던 것에 대한 두려움, 미움, 징그러움, 공포 모든 게 흐려졌다. 그래서 윤오는 범신조의 말뜻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닮았겠지, 하는 말에 픽 웃을 뿐이었다.
“날 많이 닮았어.”
“아쉽네. 널 닮은 걸 보고 싶었는데.”
“못 봤어…? 단 한 번도?”
“본 적 없어.”
“…….”
“그럴 시간이 없었거든.”
그럴 정신도 없었다. 비량아를 찾아야 한단 생각밖에 없었다. 비파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었다. 떠올렸다 하더라도 비량아를 쫓아갔을 것이다.
“내가 너를 찾아가서 들은 말론… 제 삶을 찾아 떠났다더군.”
자신의 삶을 찾아서…? 그런 게 아니었다. 듣기 좋은 말을 해 준 거겠지. 그 애의 등은 자신이 떠밀었다. 그래도… 떠났다니 다행이다. 그 집에 묶여 있거나 저 때문에 떠나지 못하거나 하지는 않았구나. 그곳으로부터 멀리 가서, 처음에는 비록 그 이유가 아니었어도 결국엔 자신의 삶을 찾아 살았길 바란다.
그러나 아무래도… 범신조의 말대로 그를 원망하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윤오가 다시 자신을 괴롭히려는 걸 눈치챈 범신조는 그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그리곤 그의 옆에 앉았다. 둘의 시선이 겨울을 맞이하며 색이 바랜 정원으로 향했다. 이번엔 범신조의 차례였다. 그가 조용히 물었다.
“바다로 갔다며.”
“…….”
그런 말을… 남겼었다. 글로 남겼다.
비파가 자신의 몸과 집을 태울 만큼 마음이 강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끝까지 모질고 미운 말만 했는데, 너는 사랑받지 못할 거고 나조차도 사랑하지 못했다는 그 아이는 끝까지 자신을 미워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럴 경우를 대비해 남긴 서신이 범신에게 전해진 걸 보면.
서신에 그런 말을 남긴 건, 혹시라도 기적적으로 범신이 살았다면 하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걸 본 그가 돌아오지 않을 바다를 보며 오로지 자신만 생각하길 바랐다. 제 아버지처럼.
어차피 그도 시간이 지나면 그곳엔 아무도 없을 걸 깨닫고 떠날 거다, 아니면 아예 찾아오지도 않을 거다, 자조하면서도 끝까지 구질구질하길 포기하지 못했다.
“정말 갔어?”
여기부턴 비량아도 김윤오도 모르는 이야기다.
“갔지.”
범신조는 자신이 속은 것에 대해서 여상하게 대답했다.
“가서 기다렸어.”
“…….”
“꽤 오래 기다리고 나서야 네가 오지 않으리란 걸 알았고. 사실 그전에 네가 떠난 게 아니라 영영 죽어버렸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혼백도 돌아오지 못할 물길을 보다가 결국 나 스스로를 찔렀어.”
상상도 하지 못했던 말에 윤오의 숨이 밭게 멈췄다.
“그러니까 넌 실패한 거야.”
범신조가 바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고 윤오 쪽으로 몸을 돌려 상체를 기울였다. 그는 밀어를 속삭이듯이 웃음기를 머금고 자신의 죽음을 운운했다.
“내가 나를 죽였으니까. 애초에 날 죽일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고.”
“…….”
“노력했을 텐데 미안하다. 성공하지 못하게 해서.”
“그걸 말이라고 해?!”
헛소리도 이런 헛소리가 없다. 윤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성공이니 나발이니, 심지어 사과할 것도 아닌 내용을 가지고 가볍게 농담처럼 말하는 범신조가 오히려 자신을 놀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범신조가 제정신이 아니어도 이런 거로 자신을 긁을 리 없다. 혼자서 긁고 긁히는 거다. 욱하는 마음에 고개를 돌렸던 윤오는 어느새 바짝 가까워져 있던 범신조의 얼굴에 당황하여 굳고 말았다. 나오려던 말이 쏙 들어갔다.
범신조는 내려 뜬 눈으로 윤오를 보다가 고개를 기울여 어울리지 않게 쪽 소리를 내고 떨어졌다. 얼핏 예감했던 일이지만, 듣고 진짜인 걸 확인하니 더 끔찍했다. 윤오는 입술을 물었다 놓길 반복하다가 젖은 눈으로 물었다.
“…후회하지?”
“너에게 한 짓을 후회하냐면, 그래. 내가 선택한 일을 묻는 거면, 아니.”
그는 추억을 반추하는 얼굴로 눈을 감았다. 입술에 어렴풋이 미소가 띠어 있었다.
“몇 번이고 너를 재회할 때마다 좋았어.”
“매번 그딴 결말을 맞이해도?”
“그래. 결국 기다리는 게 지옥이어도 좋았어.”
“…….”
“사람이 되기까지 돌아야 했던 수라도도 아귀도도 다 편안하기만 했던 걸 보면, 난 이게 체질인가 봐.”
헛소리다. 윤오는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팔에 고개를 파묻어 숨겼지만 조금 드러난 볼이며 귀가 빨갛게 익어 있었다. 그러다 투덜대듯 중얼거렸다.
“…담배 피울래.”
“아. 없어.”
“조금 전까지 피운 건?”
설마 그걸 다 피운 거냐고 동그랗게 뜬 눈으로 되묻는 게 퍽 순수하다. 김윤오가 어리긴 어리구나 하는 게 훅 체감이 되었다. 범신조는 쓰게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14mg이야. 독해서 안 돼.”
“14?”
“너하고 나눠 피우던 건 1mg짜리인데. 그건 다 피웠어. 새로 사 오는 걸 잊었네.”
머리를 쓸어넘기는 범신조의 모습이 나른해 보였다. 윤오는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아서 다시 물었다.
“왜 굳이 따로….”
그러나 말을 맺기도 전에 이유를 먼저 떠올렸다. 그리고 범신조 역시 윤오가 깨달았단 사실을 눈치챘다. 윤오가 섭섭하거나 삐질 일도 아닌데 그는 달래듯이 손마디로 뺨을 가볍게 건드리며 다정하게 말했다.
“스물여섯 살이 되면 한번 피워 보게 해 줄게.”
“…….”
“계속은 안 되고.”
스물여섯…. 윤오는 소리 없이 입속으로 그 숫자를 굴려 보았다. 스물여섯…. 지금까지 범신조가 만나 보지 못했을 비량아의 나이.
비량아가 범신조에게 저주가 되어 갔을 때 그의 나이가 스물다섯이었다.
“스물여섯 살이 되면 면허도 따. 차 사 줄게.”
“…….”
“스물여섯 살이 되면….”
범신조가 천천히 무너진다. 늘 바위산 같던 그가 지금 이 순간, 아주 오랜 시간 쉼 없이 무너지고 있던 모래 더미처럼 보인다. 범신조가 천천히 윤오에게 몸을 기울였다. 느리게 고개가 떨구어지고 윤오의 어깨에 그의 이마가 닿았다.
습한 목소리가 귓가에 고인다.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 줄게….”
어차피 내 삶이다. 어차피 김윤오의 삶인데도 그는 허락해 주듯이 군다. 하지만 이제 김윤오는 안다. 비량아라면 몰랐을지도 모를 범신조의 말의 뜻을.
그는 허락해 주는 것도 아니고 휘두르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이 모든 말이 기도였다. 스물여섯이 되어 줘. 스물다섯의 생일을 넘겨 줘. 스물여섯이 되고 나한테 돌아와 줘….
윤오는 범신조의 머리카락이 제 뺨에 닿는 것에 아찔해져 눈을 질끈 감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런 무뢰한의 제멋대로인 말에 눈물이 나는 건 아주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그래선 안 되는 거다…. 그렇게 되뇌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 * *
집으로 물건들이 왔다. 트렁크, 사계절 옷장을 그대로 옮긴 듯한 옷가지들, 신발, 머플러와 모자 등등. 온갖 것들이 집으로 들어왔다. 한두 개가 아니라 아예 현관문을 열어놔야 했다.
그때 윤오는 신조로부터 살이 내린 걸 원상복구하기 전까진 못 나가게 할 거라는, 하나도 무섭지 않은 협박 아닌 협박을 들은 후라 거실에서 영양바를 먹고 있었다. 끊이지 않는 행렬에 먹고 있던 영양바가 아래로 톡 떨어졌다.
“이게 다 뭐야?”
“네 거.”
“아니, 그건 딱 봐도 그럴 것 같은데… 대체 이게 다….”
“어디로 갈지는 정했어?”
범신조는 옷가지를 뒤적거리며 물었다. 이 주제를 꺼낼 때 그는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다.
“글쎄….”
떨어진 영양바를 주워 입으로 가져가려던 윤오는 커다란 손이 불쑥 나와 낚아채는 바람에 먹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어차피 먼지 하나 없을 정도로 깨끗한 바닥인데. 유난이다.
범신조는 그것을 저 멀리 두고 트렁크를 끌고 왔다. 튼튼하기로 유명하고 그만큼 비싼 걸로도 유명한 브랜드의 것이었다. 윤오는 잘 모르지만.
“다 안 들어갈 것 같은데.”
“상관없어.”
범신조가 결국 소파에 풀썩 앉으며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냥 내 만족이니까.”
윤오는 몇 개 만져지지도 않고 남겨진 행거들과 범신조를 번갈아 보다가 슬리퍼를 끌며 다가와 그의 곁에 앉았다. 아무리 집이 따뜻해도 남자의 체온만큼은 아니었다.
윤오와 범신조는 작위적인 영화 포스터처럼 어색하게 앉아 빽빽하게 늘어선 옷 더미 쪽에 시선을 두었다.
“숲 같네.”
“좆같지.”
툭 나온 대답에 윤오가 인상을 찌푸리며 범신조를 돌아봤다. 그는 검지와 중지로 눈썹뼈를 문질렀다. 초조하고 궁지에 몰린 듯 보였다.
“네가 나를 떠난다는데 이딴 등신 같은 짓이나 하고 있고.”
“…….”
“하지만 너는 내가 어떤 짓을 해도 떠날 거야. 그렇지?”
“응….”
“널 억지로 잡아두려고 하면, 너는 돌아오지 않을 거고.”
“이미 그래 봤잖아….”
범신조가 이번엔 손으로 입술을 쓸었다. 그러다가 다시 눈썹뼈를 괴고 고개를 숙였다.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떠날 생각이었나.”
너무 늦은 물음이었다. 왜 이제 와서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할까 싶은데 그러면서도 기꺼웠다. 풀리지 않을 줄 알았던 매듭이 느리게, 천천히 풀어지는 것 같았다. 윤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범신조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다른 이와 혼인하고 살았으려나. 나는 잊고.”
누가 누굴 잊어. 피식 웃은 윤오가 가볍게 대꾸했다.
“시간이 넘치게 많은 그쪽이 날 잊었겠지.”
“그렇게 생각해?”
“난 흔해 빠진 사람 중 하나였잖아. 시간이 무궁무진하게 많으니 언젠가 내 이름조차 잊게 되겠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범신조가 한쪽 입꼬리만 비죽 웃었다.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너는 나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 같아.”
“…….”
“기분이 좋지는 않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도 긴 신장 덕에 자라나듯 쑤욱, 눈높이가 높아졌다. 절로 고개를 들어 시선으로 쫓으니 그가 하관을 쓸며 중얼거렸다.
“그 정도 마음이었으면 우리가 이렇게 만나지도 않았어.”
그리고 그는 곧장 방으로 향했다.
남겨진 윤오는 범신조의 말을 느리게 곱씹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이기적이다 못해 어린애 같던 그 범신이 저런 말까지 할 수 있던가. 윤오의 얼굴이 홧홧해졌다.
* * *
“어디로 갈 거야?”
범신조는 종종 물었다. 침대에 가로로 엎드려 책을 읽고 있던 윤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몸을 뒹굴 굴려 책을 배 위에 얹고는 고개를 뒤로 젖혀 범신조에게 오히려 되물었다.
“왜 자꾸 물어봐?”
그는 오늘 장례식에 다녀와야 한다며 온통 검은색 일색으로 입은 참이었다. 머리를 넘긴 모습은 오랜만에 본다. 상처는 놀라울 만큼 순조롭게 낫고 있었다. 술도 마시고 흡연도 하는 주제에.
범신조는 시계를 차며 김윤오를 흘끗 보았다. 저 상태로 제 것을 물리고 싶다.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구음을 시키는 생각 따위나 하다니. 입매를 비틀며 웃었다. 질척한 제 머릿속도 모른 채 윤오는 뒤이어 물었다. 아, 자꾸 묻는 입술에 다른 걸 물리고 싶다.
“나 쫓아오려고?”
“…….”
“오지 마.”
귀신은 물을 넘지 못한다. 물귀신이 땅으로 오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범신조는 업보가 깊다. 그것이 그를 이 땅에 묶어두고 있다. 김윤오가 스물다섯 살을 넘겨야만 그도 이 땅을 벗어나 바다를 넘을 수 있을 거다.
반면 김윤오는 바다를 넘을 수 있었다. 두 번째로 만난 비량아는 섬에 살았고, 그런 그를 신조가 사람을 써서 내륙으로 불러냈으니까.
“못 가.”
같은 부정이라도 안 간다고는 말하지 않은 범신조가 마지막으로 옷자락을 당겨 폈다. 팔다리가 길어 맞춤으로 입어야 하는데 갑작스럽게 기성품으로 구해서인지 조금 불편하다. 가는 자리가 기껍지 않은 이유도 한몫할 거다.
준비를 마친 범신조가 윤오에게 다가갔다. 김윤오는 지금 자신이 거꾸로 보일 거다. 그의 뺨에 손바닥을 문질렀다. 이대로 지퍼를 내리고 제멋대로 굴고 싶은 걸 참고 다정하게 속삭인다.
“다녀올게.”
다녀와서도 네가 있을지 두려워하면서.
* * *
세상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수의 회장이 있다. 사장은 그보다 더 많다. 범신조는 부조금을 내고 예전에 몇 번 거래를 한 적 있는 노 회장의 영정에 인사를 했다.
장례 절차는 점점 더 복잡해져 범신조가 하품을 하기 일쑤인 지루한 일들이 훨씬 많아졌다. 상주에게 악수를 건네고 심심한 위로의 말을 하자 상주는 눈물 없이 우는 소리를 내며 범신조를 바짝 당겼다. 그러고는 어깨를 두드리며 마주 안는 척 귓속말을 했다.
“아버지의 비밀은 부디 이대로 묻어주십시오….”
범신조는 그 비밀이 뭘 말하는 건지 떠올려 봤다. 사생아? 영상물? 살인? 혹은 셋 다? 일단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걸로 사람을 쥐고 흔든다거나 목줄을 조였다 풀며 재미를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더는 그런 게 재미있지 않다.
예의상 자리에 앉았다. 음식 대신 잔을 두 개 청해 소주병을 열었다. 함께 온 장용우가 범신조의 잔에 술을 따랐다. 도수가 높은 전통 방식으로 증류한 소주가 범신조의 잔에 찰랑찰랑 차올랐다.
장례식은 좋아하지 않는다. 기억에 남는 모든 장례식은 비량아의 것이고, 그렇기에 그에게 장례란 비량아의 죽음을 기억하게 하는 촉매제였다.
떠난 이의 혼을 위로하는 초우(初虞)부터 장례의 끝 파제(罷祭), 그것이 간소화된 지금의 장례식까지…. 범신조는 매번 상주였고 비량아의 장례는 늘 적적했다. 가족조차 오지 않는 곳이었다. 그래도 범신조는 모든 절차를 다 치렀다. 지긋지긋했고 고통스러웠고 눈물도 나지 않았다.
숨도 못 쉴 것처럼 가슴이 으깨지는 와중에도 너는 언제 다시 돌아올까를 수없이 되뇌었다. 다시 올 걸 알기에 죽음이 익숙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김윤오가 해외로 나간다고 하는데.”
범신조가 심상한 어조로 운을 뗐다.
“예?”
장용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아니, 그걸 그냥 보내 주실 겁니까, 하는 말이 치고 나올 뻔했다.
“유학… 가시는 겁니까?”
“여행. 아마도.”
“아…. 일정이 어느 정도 되시는지….”
함께 가시냐고 묻기엔 처음 운을 뗀 말이 아무리 봐도 일행이 할 법한 소리는 아니었다. 애써 돌려 묻자 범신조는 잔을 비우고 고개를 저었다. 돌아오지 않는다는 건지, 모른다는 건지 모르겠다. 하기야 두 말은 결국 같다.
그럼 그사이에 발정기가 오면 어떡하는 건지, 짝이란 게 떨어져 지낼 수가 있는 건지, 안인에 불과한 장용우는 묻고 싶은 게 많았으나 참았다. 혀가 길어지면 잘릴 곳만 늘어나는 거다.
평범한 안인들에게야 이별이란 쉽지만 금인과 치인의 관계에서는 다르다고 들었다. 금인과 치인의 세계는 극단적인 드라마 같았다. 쉽게 헤어지지 못하고 헤어질 때마다 유난이었다. 제가 접해 온 그런 장면들에 비해 상사의 모습은 너무나 차분했다.
“사람을 붙일까요?”
그의 속마음을 어림짐작해 말을 꺼내 봤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오답이었던 모양이다.
결국 장용우도 그저 술잔을 비울 뿐이었다. 운전할 놈은 발에 채인다. 범신조는 조용하고 장용우는 이 자리가 불편했다.
* * *
윤오는 범신조가 없는 사이에 표를 예약했다. 이런 건 비량아 때와 변하지 않은 모양이다. 몰래, 보지 못한 장소에서 멋대로 일을 벌인다.
충동적으로 예약한 내역이 뜬 화면을 보며 윤오는 카드 모서리로 입술을 꾹꾹 눌렀다. 주 대표와 여권을 만들러 갔을 때 함께 만든 카드다. 이걸로 결제까지 마친 후 핸드폰을 옆으로 던지며, 범신조가 복제폰을 만들어서 이 내역도 실시간으로 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볼 테면 보라지.”
이미 여권도 들켰고, 설령 범신조가 본다고 안 갈 것도 아니었다. 혹여나 강제로 잡아둔다면 더 볼 것도 없이 우리의 이야기는 또 반복될 거다. 그러니까 윤오는 범신조가 이 사실을 알아도 괜찮았다. 정말 우리가 그냥 이런 결말을 반복할 운명이라면 미리 아는 게 차라리 나을 테니까.
던진 핸드폰 옆으로 풀썩 누워버렸다. 천장을 바라보며 공연히 이불을 쥐었다 폈다. 그를 처음 떠나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범신조는 이별을 다섯 번이나 기억했다. 그러니 괜찮을 거다…. 우리에게 이별은 특별한 일이 아니잖아. 심지어 내가 영영 떠나는 것도 아니니까….
자기변명 같기도 하고 우리는 괜찮을 거라고 안심하는 것 같기도 한 말을 수없이 되뇐 끝에야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어느새 날이 저문 후였다.
밤이 늦었는데 범신조는 오지 않고 있다. 애초에 집에서 늦게 출발하긴 했다. 윤오는 적적한 틈을 타서 집을 거닐었다.
그가 좋아하던 서재에서는 한참 서 있었다. 그날 마지막으로 두고 나왔던 그 풍경 그대로였다. 먼지는 조금도 쌓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매일 청소를 하면서도 자신이 어지른 상태로 다시 어지럽혔다는 뜻이었다. 이게 새로운 규칙이라도 되는 것처럼.
윤오는 책장으로 가서 괜히 책을 조금 당기기도 하고 기울여 놓기도 했다. 또 제멋대로 어지르고 책갈피는 아무 데나 두었다. 범신조가 꽂아둔 책갈피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나와서는 서브 베드룸마다 들어가 호텔처럼 정리된 침구를 들쳤다가 놓고, 누워서 시트를 구겼다가 나왔다.
그 후 따뜻한 물에 오래 씻었다. 뜨겁다 싶게 온도를 조절해 씻은 몸은 뽀득뽀득하다 못해 조금 빨갛게 익을 정도였다. 이윽고 물렁해진 채로 침대에 누웠다.
몸은 이토록 따뜻한데도 마음은 선득했다. 그러니 자연히 제가 아는 가장 따뜻한 것이, 여름에는 조금 성가실 정도로 뜨거운 체온을 가진 사내가 떠올랐다. 그 체온을 떠올리며 몸을 뒤척이다가 결국 웅크리고 잠들었다.
요즘에는 꿈을 꾸지 않는다.
* * *
범신조가 돌아온 것은 자정을 넘어 한 시까지도 훌쩍 넘기는 늦은 밤이었다.
술이 술을 부른다고, 범신조는 말술인 장용우와 함께 자리를 옮겨 음울한 술자리를 가졌다. 말 한마디 없어 재미라곤 하나도 없을 텐데 장용우는 잘 버텨 줬다.
장용우는 거의 기어서 돌아갔고, 범신조 역시 눅진하게 취한 상태였다. 숨을 깊게 내쉴 때마다 달큰한 술 냄새가 났다. 현관을 들어오며 이미 느슨하게 해두었던 넥타이를 아예 풀어버렸고 커프스 링도 신경질적으로 빼냈다. 이어 단추를 모두 풀며 욕실로 들어갔다. 메인 욕실이 아니라 서브 욕실이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로 씻었다. 그래도 정신이 바로 서지 않았다. 진창처럼 물컹거리는 세상을 걷듯 범신조가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침실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김윤오의 체향이 물씬 밀려 나왔다. 그는 눈을 감고 나직이 숨을 내쉬었다. 살 것 같다.
연한 죽순 냄새가 범신조의 몸을 물들인 향 냄새와 술 냄새를 밀어냈다. 나신으로 문틀에 기댄 그는 팔짱을 낀 채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취객의 목적지는 이불을 굴처럼 만들어 그 안에 웅크리고 잠든 제 짝이다.
“비량아.”
범신조가 웅얼거리며 이불째로 윤오를 감싸 안았다. 베갯잇이 금세 젖어 들었다.
“비량아….”
역겨우니 부르지 말라던 이름을 닳도록 불렀다. 그래도 품에 있는 비량아는 아무 힐난도 하지 않았다. 범신조는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 압박감에 선잠을 자던 윤오가 깨어났다.
“뭐야….”
웅얼거리며 몸을 돌리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비몽사몽 중에 윤오는 겨우 체향으로 범신조임을 알았다.
“취했어?”
물어도 답이 없었다. 한참 후에 돌아오는 건 “비량아.” 하는 속삭임뿐이었다. 그 목소리가 처참해서 윤오는 차마 범신조를 밀어낼 수 없었다.
“장례식에 가면 네 생각이 나.”
범신조는 축축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네 생각이 나….”
윤오는 숨죽였다. 고작 몇 시간 전에 범신조는 이별을 다섯 번이나 기억하니 괜찮을 거라 되뇌던 것이 떠오른다….
“사람이 되어서 좋은 건 울 수 있다는 거라 생각했는데, 네 장례마다 눈물이 안 났어.”
“…….”
“이번에도 내가 네 상주가 되긴 싫다….”
범신조가 자신을 더 강하게 껴안았다. 깬 걸 눈치챈 걸까. 아닌 것 같았다. 윤오는 움직일 수도 없었고 눈도 깜빡일 수 없었다. 가슴이 묵직하게 뛴다.
한참 만에 범신조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오래 살아.”
그 말이 무겁게 떨어졌다.
원래 한숨은 떨어질수록 무거워지는 성질을 지녔다.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이 윤오의 마음에 떨어질 때쯤엔 무게조차 달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뒤에서 고른 숨을 쉬는 남자가 원망스럽다. 내 잠을 다 깨워놓고….
범신조의 고른 숨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잠을 다 깨워놓고…. 사실 범신조는 핑계다. 몇 시간 전에 했던 생각이 눈사태처럼 돌아와 자신을 덮쳤다. 그래서 잠을 이룰 수 없고 그래서 울고 싶은 거다.
이별을 다섯 번이나 겪었으니 괜찮을 거라고…? 그런 말을 해선 안 됐다. 소리 없이 겨우 깜빡이기만 하는 눈시울이 새빨개지기 시작한다.
염왕은 네가 너를 용서하면 그때는 업보가 끝난다고 했다. 네가 정녕 그럴 수 있겠냐는 듯한 투였다. 그의 말대로 윤오는 스스로를 용서하기 힘들었다. 쉽게 잊혀질 기억들이 아니었다. 나 혼자만의 벌이라면 그냥 감내하고 살았을 거다. 반복되는 일이니 특별할 것도 없다고 멋대로 지껄였을 거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는데. 그러는 동안 너는 내 죽음을 다섯 번이나 봐야 했는데. 나는 오늘 잠 못 들지만 너는 오랜 세월을 불면으로 살았을 텐데. 사랑하는 이의 장례를 치르는 마음이 어떨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괜찮을 리 없다. 다만 괜찮길 바랐을 뿐이다.
어느덧 동이 터오르고 있었다.
* * *
윤오가 출국 예정일을 말했을 때 범신조의 반응은 생각보다 잠잠했다. 눈썹을 밀어 올리며 윤오를 빤히 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얼마 안 남았네.”
그 반응에 섭섭했냐고 묻는다면, 아니었다. 김윤오는 장례식장을 다녀온 범신조가 했던 말을 모두 기억한다. 그에 앞서 제가 떠난다고 했을 때 그가 운 것을 기억한다. 섭섭할 리가 없다.
그리고 더는 말이 없다. 범신조도 김윤오도 둘 다 조용히 제 앞에 있는 것을 해치웠다.
길고 무거운 침묵 끝에 범신조가 접시를 옆으로 밀고 몸을 일으켜선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윤오의 머리를 감싸 잡고 당겨 입 맞췄다.
“내 카드 가져가.”
갑작스러운 입맞춤 뒤에 하는 말치곤 로맨틱하다고 하긴 어렵다. 윤오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써.”
“…….”
“날 위해서.”
기록이라도 남아야 안심할 것 같단 말이었다. 즉 윤오가 사용하는 내역이 그에게 보내는 편지가 되는 셈이다. 내용은 없이, 그저 내가 여기에 있다고 알리는 주소뿐일 편지.
비량아일 때 그는 괴물을 잡았다. 그 괴물이 연기가 되어 산을 향해 날아가는 걸 볼 때마다 내심 기대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거다. 이번엔 그게 카드가 되는 거겠지. 피가 튀기지도 않고 원한이 쌓이는 것도 아니니 그때와 비교하면 아주 다정한 수준이다. 윤오는 가만히 시선을 내렸다. 그러다가 더는 사용 기록이 가지 않게 된다면 어쩌려고….
그래도 그런 말은 하지 말아야지. 그는 이제 울 수 있고, 우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으니까.
* * *
공항은 한산했다. 비수기에 평일인 덕이었다. 범신조는 부득불 배웅하러 오겠다고 했다. 윤오로서도 부득불 막을 생각은 없었다. 그거야말로 유난이다.
차를 타고 공항까지 오는 내내 차 안은 묵직한 침묵이 가득했다. 장용우는 그 분위기가 불편해서 자꾸만 엉덩이를 들썩이고 싶었다. 하지만 시트가 비벼지는 소리조차 천둥소리처럼 들릴까 봐 꾹 참아야 했다.
목석같이 있느라 몸에 쥐가 나기 직전이 되어서야 겨우 도착했다. 장용우는 서둘러 내려선 몰래 혀끝과 코끝에 침을 번갈아 찍으며 차 트렁크로 향했다. 좀 움직이고 싶어서 짐이 무거운 걸 핑계 삼아 제가 윤오의 트렁크를 내렸다. 범신조가 사 줬고, 안에 든 온갖 짐 역시 범신조가 사 준 것이었다. 트렁크는 하나였고 당연히 그가 사 온 수많은 옷은 반도 들어가지 못했다.
윤오는 편한 차림이었다. 박스 테이프로 터진 곳을 대충 막아뒀던 패딩 점퍼는 이미 버려진 뒤여서 범신조의 집에 올 때 입었던 상하의 위에 어울리지 않는 새 패딩 점퍼를 걸친 채였다.
체크인을 할 때가 되어서야 범신조는 윤오가 어디로 가는지 알았다. 홍콩. 가까운 곳이었다. 그렇게 가까운 거리도 그는 쫓아갈 수 없지만.
“왜? 생각보다 가까워서?”
티켓을 들고나온 윤오가 싱긋 웃었다. 떠날 때가 되어서인지 둘 사이의 기류는 부쩍 누그러져 있었다. 범신조는 트렁크를 맡겨 가벼워진 윤오의 손에 제 카드를 쥐여 주었다. 소액 결제가 되어도 잠기지 않게 미리 처리해 둔 것이었다.
카드를 주면서도 확신은 없다. 그가 아는 비량아는, 그가 아는 김윤오는 결코 쉽지 않아서, 약속하지 않은 카드는 사용하지도 않고 그대로 영영 떠날 수도 있으니까.
잡을 수 없는 곳까지 가는 네가 무섭다. 하지만 정말 비량아를 위한다면, 윤오가 이대로 떠나 자신을 잊고 넓어진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도록 두어야 한다. 그게 너를 위한 거란 사실을 알면서도 차마 떠나란 말을 할 수 없었다.
김윤오는 망설임도 없이 게이트로 향했다. 그를 뒤따르며 범신조는 걸음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아래에서 손이 마구 뻗어 나와 제 발을 잡는 것 같았다. 아귀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걸을 때마다 자신을 누군가가 잡고 있다. 이대로 저 또한 윤오를 잡고 싶다. 그러면 남는 건 결국 아귀도밖에 없는 걸 알면서도.
“나도 안으로 들어갈까.”
“아니. 싫어.”
오직 김윤오를 한 시간 정도 더 보기 위해서라면 범신조는 얼마든지 타지도 않을 비행기표를 비싸게 살 위인이란 걸 잘 알고 있다. 윤오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작별 인사하는 거 해 보고 싶었어.”
“…….”
작별 인사…. 너는 그 말을 참 쉽게도 하는구나.
“갈게.”
누구나 돌아볼 만큼 크고 아름다운 남자가 오로지 자신만 보고 있다. 그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시선을 보며 윤오는 입술을 축였다. 그리고 미련 없이 게이트를 넘었다.
그대로 들어가려다가 문득 다시 나와 난간에 몸을 기댔다. 실이 달린 것처럼 자연히 범신조 역시 상체를 기울였다.
“나는 제정신이 아닐 때 한 말은 횟수로 치지 않아.”
영문 모를 말이었다.
“부끄러우니 세 번은 물어야 본심을 말할 거라고도 했고.”
“…….”
“무슨 말인지… 알겠어?”
범신조는 대답하지 않았다. 네가 이 말을 이해할 때쯤 돌아오겠다고, 그런 약속은 하지 않았다. 그 역시도 이제부터 갈 길이 어떨지 조금도 모르기 때문이다.
윤오가 싱긋 웃었다. 다른 감정이라곤 없이, 해묵은 기억의 찌꺼기도 없는 오롯한 미소였다. 눈이 접히고 입꼬리가 실로 그리듯 아름답게 올라간다. 하루 종일 빨아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이와 찡긋거리는 콧잔등….
“안녕, 범신조.”
네가 지어준 이름을 부르고 작별을 말하는 너….
김윤오가 뒤돌아선다. 등을 보이고 멀어진다. 가만히 서 있던 범신조는 문득 내달려 게이트로 들어가는 줄 끝에 섰다. 인파가 있어도 워낙 큰 그의 키 덕분에 안쪽의 김윤오가 보였다.
입술을 깨물었다. 순식간에 피가 터졌다. 견딜 수 없는 상실감이 그를 뒤덮는다. 김윤오가 멀어질수록 세상은 무채색이 되고, 체향이 흐려질수록 세상은 무취로 변한다.
무력하게 네 눈앞에서 비량아를 잃을 수밖에 없으리라는, 그 저주만이 윤오를 잡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인데, 이미 그의 앞에서 무릎까지 꿇으며 수없이 뇌까린 말인데 정작 이 순간엔 그럴 수 없었다.
너를 위해서 돌아오지 말라고. 머릿속으로도 그게 옳단 걸 안다. 그 사실이 저를 비참하게 만든다. 끝끝내 그 말은 하지 않았다. 행여나 가는 발걸음이 가벼울까 봐.
가는 걸음을 가볍게 할 말도 하지 못하고, 넌 내 앞에서 죽을 테니 돌아오게 될 거란 말도 하지 못한다. 그저 우뚝 서서 난간을 바투 쥐고 이미 김윤오가 사라진 저 끝만 바라볼 뿐이다. 이게 바로 무력감이었다.
너는 무력하게 비량아를 잃을 것이며….
김윤오가 더는 보이지 않는데도 범신조는 한참을 그곳에 서 있었다. 나는 남겨지는 게 아니야. 그를 잃은 것도 아니지. 김윤오는 돌아올 것이며 늘 그랬듯이 자신의 앞에서 죽음을 맞이할 거다.
그러니까 범신조는 기다린다. 그들이 비량아와 범신으로 만났을 때 기다리지 못하고 보내 주지 못해 여기까지 와야 했던 만큼 얼마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