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외전) (18/21)

  1.

벌레로도 살아 봤고 짐승으로도 살아 봤다. 그 반복되는 삶 중엔 우습게도 지옥이 그에게 가장 잘 맞았다. 특히 수라도와 아귀도가 그랬다.

다시 두 발로 땅을 딛고 서게 되었을 땐 약간 어지럼증을 느낄 정도였다. 가을이 한창 무르익은 때였고 세상은 아주 많이 변했다. 그가 기억하던 세상은 더는 없었다.

일찍이 문을 연 개항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철로 되어 새카만 배를 타고 온 양인들과 그 배를 타고 떠날 이들까지, 수많은 인파가 그곳에 있었다. 그는 부모도 없고 당연히 다른 가족도 없이, 홀로 이곳에 버려진 사람처럼 깨어났다. 더는 그의 것이라 할 수 있는 산도, 권속이라 할 수 있는 영물도 없는 데다 당장 몸을 누일 곳도 없으니 이전과 완전히 다르게 그는 아무것도 없는 존재가 된 거다.

그런 그를 부둣가에서 뱃사람을 감시하던 노인 하나가 발견했다. 그는 노인이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초로의 나이지만, 바닷가에서 짠 소금 바람과 뙤약볕에 번갈아 젖었다 마르길 반복한 데다 일찍이 천하게 태어나 온갖 고생을 한 탓인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의 또래보다 퍽 늙어 보였다. 대신 남들보다 많이 가지게 되었고 많이 알게 되었으니 완전히 손해였던 인생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거다.

그는 일찍이 쇤 외모만큼 이르게 연륜이 생겨 사람 보는 눈이 아주 뛰어났다. 그리고 그런 그가 보기에 저기 저, 남들보다, 심지어 양인들보다도 훌쩍 크고 체구가 아주 좋은 저 사내는 범상치도 심상치도 않았다.

이미 멀고 있는 회색의 한쪽 눈을 찡긋거리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선, 눈여겨보고 있는 내내 한 걸음도 떼지 않고 움직이지 않던 사내에게 다가갔다.

“이곳은 처음인가?”

‘그’는 갑자기 자신에게 말을 거는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도 시선을 내려야만 볼 수 있었다. 꽤 좋아 보이는 옷을 입고 있지만, 거친 손과 얼굴이 처음부터 녹록한 삶을 살았다고는 보이지 않는 중노인이었다.

“…한 번 온 적이 있소.”

“언제?”

“…옛날에.”

“무슨 일로? 근데 왜 다시 왔을까?”

“…….”

“아이고. 나도 나이가 먹어서 그런가, 너무 꼬치꼬치 캐물었지? 바다에 오는 이들이 응당 사연이 있어 오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오히려 사연 없이 오는 경우가 더 많지.”

사연이 없다는 게 바로 사연이라는 건 여기 오는 이들이라면 다 알 거다. 말하지 못하는 일도 사연은 사연이다. 설령 무슨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말하지 않으면 또 없는 일이 되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제가 사람이 필요하단 거지. 이룬 건 많은데 쓸만한 사람이 없어 마침 이런 놈 하나 급급했던 중노인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래…. 사연은 됐으니, 혹시 갈 곳이 없다면 내 밑에서 일하지 않겠나?”

그사이 또 바다 너머를 보던 사내가 느리게 시선을 굽혔다. 눈이 마주치자 별달리 어떤 표정을 짓지 않았는데도 눈빛에 서슬이 퍼런 게 보였다. 제대로 찾은 게 분명했다. 중노인이 씩 웃으며 품에서 비단 주머니를 꺼냈다.

“궐련 한 대 피우겠나?”

“…….”

사양하지 않고 손에 걸자 그에게 말을 건 중노인 역시 한 대를 꺼내 제 입술에 물었다.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얇은 막대였다. 나무도 아니고 쇠젓가락도 아니었다. 그런 걸 입술에 무는 이유를 모르겠으나 흉내 내어 봤다. 이 세상에 대해서 그는 거의 알지 못하니까 흉내라도 내야 했다. 이제 더는 내세울 자존심조차 없었다.

젖은 입술 안쪽에 겉면이 들러붙는다. 소금기 녹녹한 바닷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끈끈하게 감돌다 떨어졌다. 노인은 성냥으로 제 것에 불을 붙이고 이어 사내에게도 붙여 주려 했으나 그 바닷바람이 감춰내듯 불을 꺼트렸다.

“아이고.”

재차 붙이려 해 봐도 잘 붙지 않았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보던 사내가 노인의 손에서 성냥갑을 가져가 능숙하게 불을 당긴다. 그리고 바람에 꺼지지 않게 손으로 가림막을 한 뒤 궐련에 붙였다. 일련의 과정이 너무 자연스러워 누구도 그가 담배든 성냥이든 처음이리라곤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노인은 눈을 가늘게 접으며 쇳소리로 웃었다. 그러곤 물었다.

“이름은…?”

“…….”

“이름도 물어선 안 되나?”

깊게 빨아들이지도 않았는데 궐련은 순식간에 반절에 가깝게 탔다. 사내는 연기를 훅 뱉고 재를 땅으로 추락시키며 한쪽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이름이라고….

이제 그의 이름은 범신도, 산군자도, 귀신의 왕도 괴물들의 스승도 아니었다. 이제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니고 단 하나만 남게 되었다. 비로소.

“범신조.”

다시 궐련을 물고 조급하게 호흡했다. 물로 막 빠져나온 어리석은 물고기처럼. 사람이 되다 만 짐승처럼. 처음으로 두 발로 걷게 된 것처럼.

내 이름을 지어 준, 내 이름을 불러 줄 너를 찾기 위해 벌레도 짐승도 수라도 아귀도 모두 지나서.

“범신조라고 부르면 되오.”

비로소 사람이 되어서는 이제야 끝나지 않을 천벌을 시작하며.

* * *

범신조는 바다에서 오래 기다렸다. 그는 제게 의식주를 제공한 노인에게 검은 머리 짐승을 거두지 말란 말을 모르냐고 물었고, 노인은 자신도 검은 머리 짐승이 아니냐며 응수했다.

노인에게서 부두의 한 도크를 물려받아 이윽고 부두의 지분 70퍼센트를 차지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때는 이미 범신조를 자신의 양아들로까지 들인 영감이 타계한 후였다. 범신조는 나이가 거의 들지 않았으나 영감의 그림자 속에서 이름 없이 활동한 덕에 그가 후계자로 떠오른 후에도 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범신조는 늙지 않는 제 모습을 보고 힘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어디에 있든 비량아를 찾아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 있는 힘이. 모습과 명성을 드러내는 건 쉽다. 어려운 건 숨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개항지의 호텔을 지었고, 호텔을 시작으로 부두의 한 도크에서 부두 전체를, 그리고 그 지역 땅 대부분을, 건물을 삼켰다.

이윽고 그 지역을 떠나 다른 곳으로 터를 옮기고 재산은 늘어났으며 아는 것 역시 축적되어 세상에서 그를 영영 숨길 수 있을 정도로 힘을 가지게 되면서도 그는 여전히 비량아를 찾아 헤맸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많은 걸 포기해야 했고, 포기했다 생각한 것보다 더 포기할 각오를 다져야 했다. 그리고 그 끝에서 결국 여전히 자신은 이기적이며 그에게 재난이라는 걸 깨달을 때까진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그리고 그쯤 되어선 다른 사실도 서서히 인정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비량아가 없다.

비량아는 어쩌면 바다에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나를 그토록 증오했으니 거짓말을 할 수도 있겠단 데까지 결론이 이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범신조는 내륙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서 그때까진 아직 허허벌판이던 지역의 땅들을 사들였다.

낙조가 비늘처럼 부서지는 수면에는 비량아가 없다. 이 지긋지긋한 바다에서 이만 떠나야겠다. 산속에 있을지, 굴속에 있을지, 땅속에 있을지 모르는 너를 찾아서 나는 또 얼마나 헤매야 할까.

이후 그의 세세한 삶이 어찌 되었든 세상은 1800년대, 19세기, 최초의 금인이 나타난 때이며 최초의 금인은 범 계로 기록되었다. 이후로 범의 짝들은 단명했으며, 범신조는 여전히 기다렸다. 갖은 노력을 하여 너를 찾고 눈을 감은 것처럼 무력하게 너를 잃고 또다시 찾을 때까지.

그리하여 드디어.

“그것만 입고 나왔어? 추위도 많이 타면서.”

또다시 불운한 너를 내가 훔칠 수 있을 때까지.

* * *

범신조는 고른 숨을 내쉬며 깊은 잠에 빠진 윤오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갑자기 집 앞에 나타나서 사람을 정신도 못 차리고 달려오게 만들더니, 품에 껴안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 심장이 멎을 만큼 놀라게 하고, 이제는 다른 의미로 걱정이 될 만큼 깨지 않는 김윤오를.

“…….”

굳게 닫힌 눈은 쉬이 열리지 않을 것 같다. 그간 대체 무얼 하고 지냈는지, 피곤이 이만큼 쌓일 일이 있는 건지 동면에 빠진 새끼 뱀처럼 유순하게 잠들었다.

범신조는 얇은 홑이불을 좀 더 끌어올려 윤오의 턱 밑까지 여며 주었다. 김윤오는 더위보다 추위를 많이 타니까. 게다가 여름 감기는 지독하게 아픈 법이라 유난을 떨지 않을 수 없다.

떠났다가 돌아왔다.

그것이 무슨 뜻일지 과하게 이해하려 들고만 싶어진다. 몹시 들뜬 상태기도 하여 멋대로 의미를 부여하게 될 것만 같다. 오로지 저 좋을 의미로 말이다.

그럼에도 한편으론 그럴 수 없는 것은 그간 반복된 경험 탓이다. 범신조는 여전히 윤오가 돌아온 이유가 그 빌어먹을 업보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김윤오의 스물다섯 번째 해가 시작될 때까지 남은 기간은 고작 반년 남짓. 그 사이에 내 앞에서 죽어 또 나를 무력한 절망에 빠뜨리려고 돌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최악의 경우를 도저히 배제할 수 없었다.

그게 아닌 다른 경우는… 모르겠다. 김윤오가 병실에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지금 둘 다 모르는 길로 들어섰기에.

범신조가 윤오의 옆에 비스듬히 누웠다. 시선은 여전히 윤오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김윤오는 지금껏 만난 그 어떤 비량아 중에서도 가장 닮았다. 김윤오를 말하자면 비량아가 맞고 비량아로 말하자면 김윤오가 맞는데, 그 두 모습을 합쳐 놓으면 도통 낯선 것이 되어 범신조의 정신을 흔들었다.

그는 우주의 진리나 미스테리 같은 것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는 사람이라 이런 비유를 좋아하지 않지만, 김윤오는 정말로 달의 뒷면 같았다. 매일 밤 보는 똑같은 것인데, 뒷면은 보지 못해 어떤 모양일지 알 수 없듯 김윤오는 매일매일 난해해졌다.

그게 싫다는 건 아니다.

그가 싫을 리가 없었다.

“김윤오.”

범신조가 조용히 불렀다. 자면서도 귀가 열려 있는지 세 번쯤을 부르자 으응, 하고 대답이 돌아온다. 겨우 눈을 가늘게 뜨는데 눈빛이 졸음에 겨워 흐리멍덩하다.

“네가 어떻게 지냈는지 조사해봐도 돼?”

타인의 삶을 함부로 열람해 보겠다는 그 뻔뻔스러운 말에 윤오가 눈을 꾸덕하게 감았다 떴다.

그때까지 그는 아직 꿈에 잠겨 있었다.

‘왜 본인 귀신에 본인이 씌었어?’

윤오에게 꿈은 대부분 과거의 기억이었다. 비량아일 때의 기억뿐만 아니라 김윤오의 기억도 꿈으로 다시 나타나곤 했다. 여기에 네가 지나쳤던 단서가 있어, 라고 말하듯이.

그리하여 범신조가 태연하게 뒷조사를 운운할 때도 윤오는 꿈속에서 귀국할 비행기를 기다리던 중 만났던 한 할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본인이 모를 수가 없는데. 알고 있지? 네가 네 귀신에 씌인 거?’

윤오는 그 왕왕 울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신음을 뱉었다.

“으응….”

범신조는 그 모호한 대답을 허락으로 이해하는 뻔뻔함을 발휘했다. 눈을 번뜩인 그는 굳이 조심스럽게 일어나지 않아도 어지간한 움직임엔 미동도 안 하는 매트리스에서 마치 물이 가득 담긴 수반을 안은 고대의 시종처럼 움직였다. 또는 사냥감을 앞에 둔 범처럼 소리가 없었다.

그사이 윤오는 다시 꿈속으로 들어가 그 할머니를 보고 있었다.

‘예?’

‘아무리 본인이어도, 한을 품으면 독하기만 한데. 거기에 휘둘리지 말아야 해. 내 손주 같아서 하는 말이야.’

‘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지금 학생 몸 하나에 두 명이 살잖아. 하나는 과거의 학생, 하나는 지금 학생. 정신 제대로 차리지 않으면 둘 다 아니게 돼….’

그게 현실이었는지 꿈이었는지 윤오는 꿈속에서조차 혼란스러워하며 몸을 뒤척였다. 곧 설핏 깼던 잠이 부스러지며 그 할머니 역시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짧게 꾼 기억은 끝나고 다시 든 잠은 조금 전보다 깊고 조용했다.

* * *

조용히 침실을 나온 범신조는 저장하지 않은 번호를 눌렀다. 그는 번호를 저장하기보다 외우는 타입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를 받은 상대에게 짧게 명령했다.

“김윤오 지난 일 년 반 행적 조사해 와.”

얼마나 자세히 알아볼까요, 하는 물음을 들으며 그는 오랜 시간 닫아 두었던 거실의 블라인드를 열었다. 서서히 넓어지는 풍경은 변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김윤오가 떠났던 그 날부터 오로지 계절의 변화만 있었을 뿐.

“내가 더 궁금하지 않을 정도로.”

그로부터 2시간 47분 뒤, 범신조의 손에는 김윤오의 지난 일 년 반의 시간이 한 손으로 들고 넘길 수 있는 형태로 들려졌다. 태블릿에 담겨 있어 전부 몇 장인지는 모르지만, 그 장소에서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빠짐 없이 기록되어 있었다.

만약 김윤오가 다른 이름과 신분증을 사용했다면 여섯 시간까지 걸렸을 테지만 윤오는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더 찾기 쉬웠고. 그 말은 즉 범신조는 지난 일 년 반 동안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김윤오를 제 옆에 도로 데려올 수 있었다는 뜻이다.

김윤오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그럼에도 행방을 숨길 생각도 없는 것처럼 다녔던 건 범신조를 믿어서일지 아니면 믿지 못해서 시험한 건지 알 수 없다. 윤오가 말해줄 리 없지만 그가 물을 일 역시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범신조는 김윤오 이름 하나만으로 3시간 안에 그곳이 어디든, 그의 발자취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그 부두 구석부터 지금까지 온 거다. 비량아를 찾고자 하는 마음 하나로. 그렇게 범신조의 영역은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축축하고 음험한 굴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결국 또 이 방법이 도움이 되지 않나. 범신조는 조용히 화면을 긁었다.

이미 불면이 숙면보다 익숙한 그는 윤오가 잠든 방문을 조금 열어놓고 그 근처의 긴 의자에 몸을 누인 채 천천히 곱씹어 읽었다.

반복되는 출국과 입국, 짧은 막노동. 그리고 그가 익히 알고 있는 김윤오 부모의 이혼.

“…….”

범신조가 이 단조로운 기록을 끝까지 살펴봤을 무렵엔 날이 밝고 있었다. 마지막 장에 첨부된 통장 내역엔 그간의 제 입금 내역이 길게 줄지어 있다. 그건 혹시라도 부족할까 봐, 괜히 위험한 일을 하지 말라는 뜻이었는데. 김윤오는 알려 준 적도 없는 계좌에 찍힌 숫자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을 징그럽게 여기긴 했을 것 같다.

범신조가 패드를 내려놓은 건 기록이 끝나서기도 했고 안쪽에서 인기척이 나서기도 했다. 안쪽에서 느린 걸음 소리가 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범신조는 그 기적 같은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숨죽여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편한 옷을 입은 김윤오가 비척대며 나왔다. 손바닥과 손목이 이어지는 부분을 이마에 대고 있었다. 눈도 채 다 뜨지 못한 상태다. 목을 조이거나 몸에 달라붙는 걸 싫어하는 성격답게 커다란 티셔츠에 넉넉한 바지를 입고 있어 평소 그의 분위기보다 말랑말랑해 보이기도 했다.

“…너무 오래 자서 머리 아파.”

아주 작게 중얼거린 건데도 알아들은 범신조가 단번에 일어났다.

“약 줄게.”

“아냐….”

괜찮다고 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곧 깨끗한 물이 손에 쥐어지고 두통약이 손바닥에 올려졌다. 윤오는 잠이 덜 깬 멍한 시선으로 그것을 보다가 약을 삼켰다.

예쁘게 뻗은 목선과 턱선이 이어지는 걸 보던 범신조가 컵을 받아 들었다. 여전히 몽롱한 윤오의 어깨를 감싸며 자연스럽게 이마에 입술을 맞대었다.

“약이 있는데 왜 참아. 중독성이 있는 것도 아닌데. 진통제에 내성이 생긴다는 건 헛소리야.”

역사보다 신화가 더 가깝던 시대에 태어나 오랜 시간 살았다가 근대에 다시 태어난 존재가 하는 말치곤 아주 현대적이었다.

윤오는 범신조를 힘없이 밀어내며 씻을래, 하고 중얼거렸다. 그 말에 범신조가 윤오의 손을 끌어 욕실로 향했다. 그에겐 순하게 쫓아오는 기척마저도 기적 같았다.

마음까지 술렁이는 그 기척을 음미하며 범신조는 습관대로 시간을 셈했다. 윤오의 스물다섯 번째 생일까지 남은 시간을. 그에겐 매일매일, 불발일지 아닐지도 모르는 폭탄의 뇌관을 살피는 것처럼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의식이었다.

“바깥 생활은 즐거웠어?”

사람 속도 모르고 윤오는 욕조에 담근 발로 물장구를 쳤다. 소매를 걷고 물 온도를 재던 범신조가 그렇게 묻자 짓궂게 웃기까지 한다. 정말로 사람 속도 모르고.

그러나 저 웃는 모습에 속절없이 사랑스러움을 느끼는 걸 보면 속도 모르는 건 김윤오가 아니라 자신인 것 같다. 아니, 아예 속이랄 게 없다.

“내내 바깥에 있던 것도 아닌데.”

윤오가 범신조가 이미 알고 있는 얘기를 했다. 범신조는 모르는 척 잠자코 들을 뿐이다.

“한국을 오가면서 돈 벌다가 모이면 나가고 그랬지.”

“그래? 계속 나가 있는 줄 알았지. 연락 하나 없길래.”

앞서 한 말은 거짓말, 뒤에 붙인 말은 진심. 오랜 시간을 살며 시침을 떼는 실력도 늘었다. 범신조는 공연히 손가락으로 수면 위를 튕겼다.

“그럴 돈이 어디 있어.”

“…….”

“돈이 너무 많아서 그런가, 범신조 의외로 세상 물정에 약하네.”

말하는 목소리가 이전과 달리 밝다. 저를 두고 떠났으면서, 십 리도 못 가기는커녕 잘 다녔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제야 제 또래다운 쾌활함이다. 비량아 때는 가질 기회조차 없던 그런 쾌활함. 그래서 저 없이도 잘 다녔다는 게 섭섭하기도 하고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범신조는 비량아도 사랑했으나 비량아의 다른 일면인 김윤오 역시 사랑해 마지않았으니까.

“네가 보내준 돈, 하나도 안 썼어.”

윤오가 속삭였다. 조금 자랑스러워하는 기색도 느껴졌다.

“나 돈 벌려고 위험한 일도 했다.”

“음.”

범신조가 대답도 신음도 아닌 소리를 흘렸다. 막노동을 했다는 건 알고 있다. 안 그래도 조금 전 보고를 읽을 때부터 마음에 걸렸던 부분이다.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공사장이라니. 얼마든지 다칠 수 있었다. 약간의 위험이 김윤오에게는 유독 크다는 걸 그는 잘 모르는 모양이다.

하긴, 떠나는 이는 남겨지는 이의 마음 따윈 모르는 법이다. 안다면 범신조의 심장이 덜컹할 일 같은 건 하지 않았겠지.

만약 계속 윤오의 행적을 감시하고 있었다면 진작에 집으로 데려왔을 거다. 그러면 김윤오는 자신에게 다시 실망했으리라. 우리 관계는 애써 노력한 게 무색하게 원래대로 돌아가고, 지금 제 앞에서 눈부시게 웃고 있는 이런 김윤오의 모습은 영영 보지 못했을 거다.

신조는 다시금 제 눈앞에 있는 김윤오의 미소를 눈에 담았다.

지금껏 정해진 운명처럼 중요한 순간마다 눈을 감은 듯 김윤오를 놓쳐 왔지만, 이번처럼 자신의 의지로 그를 놓아 주었던 건 처음이다. 그리고 김윤오가 스스로 자신에게 돌아온 것도 처음이다. 세 번째 질문의 답을 가지고.

‘나는….’

이어진 말은 고백이라고 하기에는 미움이 남아 있었고 오롯이 증오라고 하기에는 절절했다.

네가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내가 들을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변화가 우리에게 최선의 결말도 가져와 줄까. 그러길 바라며 범신조는 윤오의 정강이로 따뜻한 물을 부었다. 작게 화상 자국이 난 손가락도 부드럽게 매만졌다.

“조금 험하긴 했는데, 안 다쳤어.”

거짓말. 조금씩 다쳤잖아.

범신조는 윤오가 어디를 어떻게 얼마나 다쳤는지 모두 알고 있다. 윤오가 어느 약국에서 무슨 약을 샀는지까지도.

그래도 거짓말에 깜빡 속아 넘어가 주기로 한다. 지금 눈 좀 감아주는 것으로 김윤오의 환심을 살 수만 있다면.

“나 되게 씩씩하게 잘 살던데.”

“…….”

“단명한다는 거 거짓말….”

“아니야.”

“…….”

“거짓말.”

조잘거리는 입을 단숨에 막은 범신조가 딱딱하게 굳었던 표정을 겨우 풀었다. 정말로 그게 질 나쁜 농담이고 장난이길 바라는 건 그였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대신 범신조는 윤오의 볼을 꾹꾹 눌렀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 안 고파?”

말을 돌리려는 티를 숨기려는 노력도 없었다. 윤오는 얼얼한 볼을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고파.”

“뭐 먹을래?”

부엌으로 향하는 범신조의 뒷모습을 보던 윤오가 충동처럼 뱉었다.

“피자.”

당연히 뭔가 자신이 차리려고 했던 범신조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어깨 너머로 돌아봤다. 짓궂은 미소와 함께 눈을 반짝이는 모습이 윤오를 제 나이대로, 어쩌면 제 나이대보다 어려 보이게 했다.

낯설 정도로 사랑스러운 모습에 범신조는 또다시 시간을 셈했다. 스물다섯 살까지 남은 까마득하게 길 몇 개월이 매분 매초마다 그를 안에서부터 찌르는 것만 같다. 시큰거리는 환통을 견디며 범신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사랑스러워서 도리어 무섭다니. 무슨 겁쟁이 같은 소리를.

그러나 내내 잃어만 왔던 상실감은 범신조를 바로 그 겁쟁이로 만들고도 남을 만큼 충분했다.

* * *

범신조는 쏟아지는 햇빛에 눈가를 찌푸리며 겨우 깨어났다. 블라인드가 완전히 열려 있었다. 마찬가지로 살짝 열린 문 틈새로 바람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손으로 옆을 더듬다가 자리가 텅 빈 것을 깨닫고 단번에 일어났다. 그러고는 열린 침실 창으로 향했다. 윤오가 돌아오기 직전 수리를 해 바로 정원으로 나갈 수 있게 바꿔둔 구조였다. 머리를 쓸어 넘기며 데크로 나갔다.

서늘한 기운에 발이 쭉 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밖을 바라보니 제 파자마 상의를 입고 호스를 든 채 정원을 누비는 김윤오가 어렴풋이 보였다. 대체 이 새벽에 뭘 하는 건가 싶은데, 해가 뜬 걸 보면 새벽은 아닌 모양이다. 그럼 자신이 오래 잠든 거다. 김윤오가 품에서 빠져나가는 것도 모른 채.

김윤오가 돌아온 이후로 범신조는 불면과 숙면의 사이를 누볐다. 때론 깊이 잠들었고 때론 선잠을 잤다. 숙면에 빠질 때는 주로 그간의 불면을 몰아서 채우듯이 조급했다.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가 제멋대로 놓인 실내화를 들었다. 제 것도 대충 꿰어 신고 바깥으로 나왔다. 얼마 걷지 않아 찾던 이가 눈에 들어왔다. 역시나 김윤오는 맨발로 정원을 누비고 있었다.

“왜 맨발로 나와 있어.”

호스 끝에 무지개가 걸려 있다. 제가 오는 걸 알았는지 윤오는 별로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어깨 너머로 돌아보기에 범신조는 고개를 내렸다. 김윤오가 딛고 있는 부분은 마른 흙이었다. 실내화를 툭 떨어뜨리고 무릎을 굽혀 발목을 당겼다. 순순히 끌려왔다. 손으로 흙을 꼼꼼히 털어내고 신게 하자 발가락이 움찔 오그라졌다 펴지는 게 보였다. 간지러운 모양이다.

“깨우지.”

“잘 자고 있는데 뭐 하러 깨워.”

“이렇게 몽유병 걸린 것처럼 나올 거면 깨우는 게 낫지.”

“몽유병….”

부정할 수는 없는지 윤오가 피식 웃었다.

새벽에 깼다. 몸을 웅크리고 해가 뜨는 걸 기다렸다. 그러나 막상 블라인드 사이로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일어나 블라인드까지 걷었다. 그러기도 잠시, 범신조가 눈가를 찌푸리며 빈자리를 더듬거리는 모습에 그 품으로 돌아가 어둠이 밀려나는 모습을 눈에 담았지만,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충동적으로 침대에서 빠져나오고 말았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몸 안에서 새싹이라도 나려는 것처럼 견딜 수 없이 간지러워 어디로든 달려 나가고 싶어질 때가. 그래서 윤오는 맨발로 뛰쳐나와 커다란 정원을 적시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몸이 간지러워서 발바닥이 흙에 곰실곰실 잠기는 것도 몰랐다.

“들어가자.”

범신조가 다가와선 손으로 윤오의 어깨를 가로질러 껴안아 당겼다. 머리에 입술을 묻고 속삭였다.

“추워.”

그 말에 윤오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다리가 얼어 있기는 했다. 윤오는 멀거니 중얼거렸다.

“언제 가을이 지났지?”

처서가 어제 같은데, 벌써 가을이 지났다. 윤오는 다른 의미로 몸이 굳는 것만 같았다.

염왕의 조건은 스스로를 용서하라, 였다. 나는 나를 용서했나?

때로는 업보도 잊은 양 마냥 즐겁게 지냈지만 때로는, 특히 최근 들어서는 업보가 자신을 짓누르는 것 같다. 아마도 스물다섯 살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일 거다.

어느새 그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범신조의 불면이 숙면을 이루는 날보다 압도적으로 많고, 윤오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시간이 길어지는 이유도 모두 매한가지였다. 용서라는 추상적인 조건이 두 사람을 침묵과 초조함에 빠뜨렸다.

그런 건 마침표가 찍히듯 어느 날 끝나는 게 아니다, 조급해하지 말자 마음먹어도 쉽지 않았다. 차라리 손가락이 여섯 개로 태어나 어느 날 그것이 떨어지는 순간 업보가 끝난다고 하면 쉬웠을 거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고 그만큼 확신할 길도 없는 이런 조건은….

범신조가 윤오를 바짝 끌어당겼다.

“춥다니까.”

엄살이었다. 추위보다 더위를 훨씬 많이 타는 남자였다. 그래도 윤오는 제 몸을 가로지른 팔을 가볍게 쓸었다.

“알았어.”

대답하며 호스를 떨어뜨렸다. 범신조는 윤오를 뒤에서 껴안은 채 펭귄처럼 뒤뚱뒤뚱 걸었다. 중간에 수도에 들러 물을 잠그고 현관을 통해 집으로 들어갔다. 손을 뒤로 뻗어 문을 닫자 집에 고인 훈기가 두 사람을 껴안았다.

윤오는 욕실로 자연히 끌려 들어갔다. 그를 욕조 모서리에 앉히고 그 앞에 몸을 굽혀 앉아 발을 꼼꼼하게 닦아 주는 범신조의 등에 씨앗 같은 흉터가 보였다. 조금 옆으로 가면 또 아몬드처럼 생긴 흉터도 있었다.

“아파?”

손을 뻗어 자국이 남은 부분을 쓸자 범신조가 나직이 웃었다.

“고작 그게 아프겠어?”

범신조의 몸에는 흉터가 제법 많다. 길달이 남긴 칼자국도 이제는 그중 하나였다. 범신조를 껴안고 있다가 흉터의 역사를 물으면 생각보다 더 옛날까지 거슬러 올라가곤 했다. 윤오는 조금 질린 표정으로 대체 얼마나 살아왔냐고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면 범신조는 모르는 척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은 과거 이야기는 잘 하지 않았다. 사실, 거의 하지 않았다. 비량아 때의 이야기도 물론이거니와 다른 생애의 이야기는 더욱 묻지 않았다. 범신조가 기억하는 비참한 최후든 김윤오는 기억하지 못하는 최후든 하나같이 곱씹어 볼 추억 같은 게 못 되었다.

윤오는 가만히 제 발끝을 보다가 톡 흔들었다. 물방울이 범신조의 턱에 튀었다. 눈을 깜빡이는 그에게 괜히 멍청한 말투로 물었다.

“팬케이크 해 주면 안 돼?”

범신조는 샤워기를 잠그며 피식 웃었다.

“왜 안 돼.”

다정하다. 전처럼 다정하다가도 언제 갑자기 제 발목을 잡아 거대한 바위에 묶어둘지 몰라 두려워하던 그런 변덕스럽고 종잡을 수 없던 때와는 다르다. 윤오는 이제 남자가 변덕을 부려봐야 바뀌는 건 팬케이크에서 프렌치토스트로의 아침 메뉴 정도밖에 없다는 걸 안다.

그리고 김윤오는 모른다. 범신조가 그의 모든 행적을 조사할 수 있고, 원한다면 세상에서 김윤오와 범신조의 존재를 모두 지울 수 있다는 걸.

모든 사람이 자신을 알아보게 하는 것보다 모두가 자신을 모르게 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걸 범신조는 안다. 그리고 이제 그는 그럴 수 있는 힘이 있다. 그 힘으로 하고자 하는 것이 고작해야 김윤오와의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는 것뿐일지라도, 사실 그게 가장 중요한 것 아닌가.

* * *

최근 범신조는 주변을 정리하고 있다고 했다.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해도 규모가 작진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불규칙적으로 나가서 불규칙적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하루를 넘기는 일은 없었다. 무엇보다 윤오를 혼자 두고 나가는 일은 절대 없었다.

자신을 쫓아다니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집 밖으로 나가기만 해도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애초에 범신조는 붙여둔 사람이 있다는 걸 숨길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잠깐 편의점을 가려고 나오자마자 바로 전화가 오는 것만 봐도 말이다.

― 어디 가?

지켜보고 있다는 걸 거의 고백하는 수준의 질문이었다. 대뜸 묻는 소리에 윤오는 아이스크림을 고르며 대답했다.

“간식 사러 나왔어.”

― 뭐 먹고 싶은데.

“아이스크림.”

― 사다 줄게.

“벌써 가게인데.”

전화를 이어가며 바구니 안에 여러 개를 쓸어 담았다. 범신조의 냉장고는 이런 종류의 먹기엔 즐겁지만 몸엔 안 좋을 군것질거리들이 별로 없어서 좀 불만족스럽다. 마침 2+1 이벤트 중이라 개수를 세며 윤오가 대꾸했다. 그 어조가 내용에 비해 퍽 심심했다.

“어차피 계속 나 보고 있잖아.”

― …….

“시계도 하고 나왔는데.”

― 음.

“여기에 위치 추적기 넣어뒀지?”

― …….

“안 뺄게.”

― 그래 주면 고맙고.

“언제 와?”

아이스크림에 이어 포장지 홈런을 당하는 와중에도 좋다고 웃고 있는 투수 캐릭터가 그려진 과자를 넣으며 물으니 대답이 없다. 어지간해서는 곧바로 답해 주는데, 귀가 시간에 대해서만큼은 늘 이렇게 대답이 모호했다. 바쁘긴 한 모양이다.

내가 없는 동안 정리 좀 해 두지, 했더니 그럴 정신이 아니었어서, 하고 덤덤히 대답하던 모습을 떠올리자 뭐라고 하기도 미안했다.

과연 돌아와서 마주했던 범신조는 전보다 좀 야위고 예민한 기색이 가득했었다. 게다가 잠을 대체 얼마나 안 잔 건지, 그날 밤에는 저를 껴안고 무려 먼저 잠들기까지 했다.

“나 심심해.”

윤오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집은 너무 크고, 게임은 하다가 질렸으며, 책은 읽지만 허하다. 작은 장난감들이 진열된 곳을 지나치던 윤오는 충동적으로 비눗방울을 담았다.

― 외로워?

범신조가 되물었다. 심심하다고 했는데 왜 외롭냐고 물어볼까. 그러나 윤오는 그의 말이 정확하단 걸 인정했다. 정확하게, 외로웠다.

“…….”

범신조는 어쩌면 보고 싶다는 말을 기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차마 그 말까지는 나오지 않았다. …아직까진.

어쭙잖은 자존심 때문일 수도 있고 단순히 익숙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겠다. 윤오는 대답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젓지도 않았다. 담은 것들을 바구니 채로 내밀자 바코드를 찍는 소리가 말과 말 사이의 빈 공간을 채웠다.

윤오가 대답하지 않자 그 침묵을 멋대로 해석했는지 범신조는 부쩍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사과 했다.

― 미안.

“…….”

― 일찍 갈게.

김윤오는 이제 완전히 붕 뜬 존재가 되었다. 이제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 과거의 친구들. 심지어 윤오가 멋대로 사라지는 바람에 다시 연락할 방법도 없어지고 연락할 면목도 없어졌다. 그리고 이제야 자신의 삶을 살게 된 엄마, 연락하지 않을 테고 하고 싶지도 않은 아버지와 할머니. 모든 끈은 허망하게 뚝뚝 끊어졌고 남은 건 그토록 인연을 끊고 싶던 범신조뿐이다.

― 일찍 갈게, 윤오야.

달래는 말이 윤오의 생각을 비집고 들어와 푹 꽂혔다. 그 목소리에 그만 정신이 확 든다. 그리고 얼굴이 홧홧할 정도로 부끄러워졌다. 자각하고 돌아보니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

어리광이라니. 그런 걸 부리는 제 모습이 낯설었다. 심지어 어렸을 때도 이러진 않았던 것 같은데. 윤오는 대답 대신 통화를 종료해 버리고는 범신조의 카드로 결제했다. 그리고 양손에 넉넉하게 봉투를 든 채 바깥으로 나왔다.

주택가 근처에 편의점이 하나뿐이라, 이곳은 언젠가 윤오가 왜 나를 강간했냐고 범신조에게 물었던 바로 그곳이었다. 그땐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늦게까지 고집스레 가지에 달려 있던 낙엽이 결국 떨어지고 있었다. 윤오는 허공을 보며 입술을 축이다가 봉투를 고쳐 잡고는 다시 천천히 오르막길을 올랐다.

주택 앞, 커다란 옹벽처럼 외부와 내부를 철저하게 격리하고 있는 문 바깥에는 늘 주차되어 있는 차가 있다. 윤오는 다가가서 조수석 창문을 두드렸다. 잠시의 침묵 뒤에 창문이 천천히 내려갔다.

“아이스크림 드세요.”

윤오가 봉투를 불쑥 내밀었다. 곧이어 조수석이 열리고 길쭉한 다리가 나왔다. 체구가 커서 차에 거의 구겨 들어가 있는 건 아닌가 할 정도인 남자였다.

뻔하게 흰 셔츠에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진 않았다. 사복 차림이긴 했지만 체구만 봐도 이미 평범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애초에 남의 집 앞에서 이렇게 대기하고 있는 사람이 평범할 리 없다.

“범신조도 이 정도는 먹어도 된다고 할 거예요.”

그제야 남자가 두 손으로 봉투를 받았다. 양손에 손잡이를 하나씩 걸고 고개를 꾸벅 하더니 무척 낮고 칼칼한 목소리로 “감사합니다.” 하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윤오는 머뭇거리다가 마주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어쩐지 들어가는 그의 뒤로 범신조가 쫓아오는 것 같다. 특유의 느긋한 웃음을 흘리며 ‘저 사람들만 챙겨줘? 나는?’ 하고 물으면서.

덥기는커녕 쌀쌀한 날씨인데도 괜히 몸이 화끈화끈하다. 윤오는 그 반응을 제가 직전까지 했던 통화 때문에 민망해서라고 치부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다 문득 숨이 밭는 걸 느끼고 정원 중간쯤에 멈춰 섰다. 가슴팍에 손을 얹으니 쿵쿵 뛰는 게 느껴졌다. 내가 너무 빠르게 걸었던가? 그런 것 같진 않았는데….

“운동 부족인가….”

이상하게도 숨이 자꾸만 턱 끝까지 자꾸만 차올랐다.

집으로 돌아와 숨을 고르고 찬물을 거푸 비웠다. 가슴 뛰는 건 나아졌는데 이젠 속이 더워 찬물이 자꾸만 들어갔다. 윤오는 양손으로 컵을 쥔 채 소파에 푹 파묻혔다.

몸이 안 좋은 것 같진 않은데… 뭔가 이상하다.

* * *

테라스에 앉은 윤오는 방금까지 만지작대던 걸 내던졌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세워 안은 채 거기에 턱을 괴었다. 옆에는 편의점에서 산 비눗방울이 놓여 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비눗방울을 불었다.

빨대 끝이 미끈하게 벌어졌다가 곧 동그란 원이 되어서 허공에 나풀나풀 날린다. 한참 보다 다시 용기에 쿡쿡 찔렀다. 비눗물을 넉넉히 묻히고 다시 불자 동그랗게 만들어진 방울 너머로 대문이 열리는 게 보였다.

커다란 문이 열렸다 닫힌다. 윤오는 테이블을 더듬더듬 만져 리모컨으로 불을 켰다. 반짝하고 정원이 은은하게 밝혀졌다. 불빛을 확인한 범신조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보았다. 아직 터지지 않았던 비눗방울이 범신조에게 향하다 마침내 터지고 말았다.

“이런 거 좋아했었나?”

윤오에게 곧장 다가온 범신조가 한쪽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물었다. 윤오는 대답 대신 한 번 더 불었다. 남자는 비눗방울이 제 쪽으로 오는데도 피하지 않다가 얼굴로 다가올 때나 고개를 조금 기울이고 말았다.

“그냥… 오랜만에 사 봤어.”

“심심해서 눈에 띄었겠지. 미안. 정말 거의 다 끝났어.”

범신조는 더 바짝 다가와 동그란 테이블에 손을 얹고 고개를 기울였다. 가볍게 입 맞추려는 걸 윤오가 살짝 피한 덕분에 입꼬리에 닿게 되었다. 목표에서 조금 빗나간 범신조의 입술 사이로 짧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김윤오랑 뽀뽀 한 번 하기가 어렵네.”

“…….”

그 말에 윤오는 아예 고개까지 돌려 버렸다. 범신조는 윤오가 민망하고 난처해서 저렇게 피한다는 걸 알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둘은 재회한 이후 아직까지 한 번도 몸을 섞지 않았다.

제 몸에 쏟아지는 체향으로 윤오는 범신조가 한계라는 걸 알았지만, 알면서도 그 한 걸음을 내딛기가 힘들었다. 이전에 그었던 선보다 더 넘기 힘든 선이 둘 사이에 그어진 것 같다. 그걸 그은 사람은 자신이지만 인식하는 사람도 오로지 자신밖에 없을 거다.

이유는 저로서도 명확하게 말하기 힘들었다. 스물다섯 살까지 살지 못하게 될까 봐 괜히 미련 남을 짓 같은 건 더 하고 싶지 않다고? 그러면 애초에 돌아오질 말았어야 했다. 차라리 다가오는 내년과 내년 초에 있는 자신의 생일이 무서워서, 그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차서 몸이 풀리지 않고 매일매일 더 딱딱하게 굳어가기 때문이란 게 더 정확한 이유일 거다.

하지만 윤오는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다. 무서운 건 있어도, 대체로는 이번 생애만은 다르게 흘러가리라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 비량아였다면 하지 않았을 선택들을 한 거 아닌가. 길다온의 내민 칼을 버려 복수를 포기하고, 변하기 위해 떠났고, 함께하기 위해 돌아온 거 아닌가.

그러니까 이렇게 갑자기 긴장하고 내외하는 이유는… 진짜 이유는….

‘새로 만나기 시작하는 것 같아.’

그와 전혀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양 새삼 쑥스럽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윤오가 이유를 알아냈고, 인정했다.

‘지금까지 반복되던 우리 모습이랑 달라서 낯선 모양이네.’

그리고 범신조도 윤오의 속내를 눈치챘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다. 범신조도 이런 저희의 모습과 상황이 조금 낯설고 설레기 때문이었다. 그토록 오랜 시간 만나고 다투고 헤어져 왔던 주제에.

재회한 이후로 두 사람 사이에 종종 찾아오던 침묵이 또 도래했다. 연약하고 부드러운 침묵이었다. 주 대표가 보았다면 기함을 했을 거다. 둘이 뭐 해? 둘이 사귀어? 하면서.

이 상황이 좀 서글프면서도 즐겁다. 범신조가 소리 없이 웃으며 시선을 돌릴 때였다. 비로소 윤오만이 아니라 그 주변까지 보게 된 그의 시야 속으로 어떤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

범신조의 시선 끝을 따라간 윤오의 얼굴이 당혹으로 젖었다.

“…….”

당황하긴 범신조도 마찬가지였다. 테이블에 놓인 종이새를 향해 뻗는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건 분명 일반적으로 많이들 접는 종이학의 모습과 달랐다. 그리고 이렇게 접는 방법을 그는 알고 있다.

“이거….”

윤오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범신조의 손에서 그걸 낚아챘다. 당혹감이 서린 얼굴이 점점 새빨개졌다. 쉽게 더워지고 쉽게 숨이 찬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내가 너한테 접는 방법을 알려 줬던가…?”

“…알려 줬는지 아닌지 기억도 못 하면서.”

“아니. 다시 묻지.”

범신조가 굳은 얼굴로 정정했다.

“이걸 기억했어…?”

대답은 필요 없었다. 제 눈앞에 접혀 있는 종이새가 그 증거니까. 윤오는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범신조가 얼굴을 쓸었다.

“…네가 이런 걸 기억할 줄 몰랐어.”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변덕으로 접었던 걸 텐데, 내게 가르쳐줬다는 걸 기억해…?”

윤오의 말투가 굴속에서 빗소리를, 눈이 내리는 소리를,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를, 새싹이 돋는 소리를 함께 듣던 그때로 돌아간 양 변했다. 범신조의 눈빛이 우묵하게 깊어졌다. 기억만 할 뿐인가….

“더 많이 접어줄걸… 싶지.”

“고작 종이접기인데 뭘 더….”

무심코 접은 것을 들킨 데 이어 갑자기 과거 이야기를 하게 되자 윤오는 괜히 뾰족하게 대꾸했다.

“맞아. 고작 종이접기지.”

고작 종이접기가, 수백 년의 시간을 지나 여기까지 이르렀다. 윤오는 머뭇거린 끝에 잡고 있던 종이새를 다시 테이블에 내려놨다.

범신조는 기운이 빠진 듯 윤오 옆에 털썩 앉았다. 그러곤 접고 남아 늘어져 있던 종이를 가져가 가져갔다. 몇 번 움직인 끝에 윤오가 만든 것보다 좀 더 섬세한 만듦새의 종이새가 그 옆에 놓였다.

“이런 걸 좋아했어?”

“…….”

“고작 이런 거였구나.”

“내가… 좋아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이 정도는 이야기해도 되지 않을까…. 윤오는 제 손끝을 뜯으려는 것처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러곤 망설이다가 겨우 중얼거렸다.

“나는 몰라도 비파는 좋아했어….”

별로 중요한 말을 한 것도 아니라고 스스로 되뇌었다. 하지만 심장은 조금 전보다 더 빨리 뛰었다. 절대로 말하면 안 될 비밀을 고백하는 것만 같다. 차마 눈을 보고 말할 수 없어 떨구었던 고개를 들었다. 범신조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흔들리는 시선이 섞인다. 범신조도 크게 동요하는 눈이었다.

잠시 후 윤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자리를 피해 도망치려는 그의 움직임에 덩달아 테이블이 덜컹거리며 비눗물이 쏟아졌다. 그걸 챙길 겨를도 없이 뒤돌아 안으로 들어가려는 걸 범신조가 잡았다.

“난 좋아했어.”

잡힌 손에 억지로 돌려 세워진 윤오의 뺨이 발긋했다. 울 것처럼 일그러진 눈도 예뻤다. 윤오가 또 도망칠까 초조해진 범신조가 절박하게 말했다.

“네가 보고 웃어서, 그래서 좋아했어.”

“…….”

“고작 그런 거로….”

고작 그런 것이 두 사람을 이만큼 돌아오지 않게 할 실마리가 될 수도 있었다. 범신조의 손이 떨렸다. 윤오는 입술을 달싹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는데 뭐든 말해야 할 것 같았다.

“…….”

그러나 벌어진 입술에서 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목이 갑자기 바싹바싹 말랐고 혀가 굳었다. 아찔할 만큼 가슴이 뛰었고 피부 아래부터 잘잘 끓는 열이 올랐다.

“김윤오…? 너 체향이….”

순간 늘 은은하던 윤오의 체향이 널을 뛰듯 훅 진해진 걸 눈치채고 범신조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 말은 이미 윤오에겐 들리지 않았다.

숨이 막혔다.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이대로 있다간 몸이 열에 녹아내릴 것 같다…. 시선을 이리저리 둘 곳 없이 헤매던 윤오가 손을 뿌리치고 몸을 돌리는 순간, 바닥이 크게 출렁거렸다.

“김윤오!”

범신조가 외치는 소리가 멀리에서 들렸다. 제 이름이 낯설게 들린다. 세상이 파도가 되어 자신을 덮쳐오는가 싶더니 곧이어 시야가 암전됐다.

* * *

비량아에게는 그에게 맞지 않는 도포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정말로 그에게 터무니없이 컸기 때문에 소매는 제 손을 덮고 아랫자락도 발목까지 올 정도였다. 그것은 범신의 것이었다. 제정신이 아닐 때 입고 있던 그대로 가지고 온 것이다.

자신이 입은 옷이 범신조의 것임을 깨달은 건 우달기를 쫓아 나왔을 때였다. 그가 옷자락이 거추장스럽지 않냐 묻기에 그제야 알았다.

버리자, 버리자…. 그렇게 수없이 마음을 먹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결국 우달기를 떠날 때에도 가지고 나왔고, 비파가 태어나고도 그는 여전히 그걸 가지고 있었다. 태우는 방법도 있었으나 그러지는 못했다. 차마 불을 붙여 그것이 눈앞에서 재가 되는 걸 보진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옷을 볼 때마다 비량아는 혼란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옷깃만 스쳐도 내생까지 닿을 인연이라 했는데, 이게 제 손에 있다는 건 그리하여 너희는 내생에 다시 재회하리라는 암시처럼 느껴졌다.

그러고 싶지 않다. 또 반복할 수는 없었다. 만나지 말아야 마땅한 인연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거기에 썼다. 제가 아는 것을 모두 동원해, 어떻게 하면 질기게 얽힌 인연이 내생에 다시 재회하지 않을 수 있을지를 남겼다. 울면서 밤낮을 지새우며 겨우 깨달은 건, 그림자가 혼과 각별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혼끼리 묶어 평생 함께한다는 건 알았어도, 그 반대로 오백 겁을 넘어 억겁의 인연이 닿았을지도 모르는 인연을 떼어놓는 방법은 알 수 없었다.

설령 알더라도 범신이 제 곁에 없었다. 억지로 그림자를 뜯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하물며 살아 있는지 아닌지조차 알지 못했다. 알아보러 갈 수도 없었다. 그는 스스로 기회를 땅 밑에 묻은 셈이 된 거다.

…더는 남은 시간이 없었다. 쓸개는 이미 돌이 되었을 것이며, 죽은 것들이 부르는 소리는 나날이 선명해진다. 애초에 끊어낼 수 없었나. 허망함일지 체념일지 모를 공허함만 가득했다.

옷자락을 쥐고 제겐 쓰일 일 없는 그림자 이야기만 멀거니 응시하는 그의 귓가에 저를 부르는 비파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가마.”

비량아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리곤 더는 범신의 체향이 남지 않은 옷자락에 얼굴을 묻었다. 뜯을 듯이 쥐고 있다가 옥함에 넣었다. 

그날, 비파가 깊이 잠든 밤, 주춧돌 바로 옆을 깊게 파서 그 안에 묻었다. 커다란 보름달만이 유일한 목격자였다.

그러는 동안 신열이 솟았고 정신은 점점 더 혼란해졌다. 땅을 파는 제 모습이 꿈인지 현실인지도 가물가물했다. 미쳐가고 있었다. 혹은 이미 미쳐 있었다.

비량아는 지나친 피로에 황홀하기까지 한 상태로 하늘을 올려보았다. 어두컴컴한 먹색 하늘에 범신의 머리칼이, 그의 그림자가 겹쳐 보였다.

비밀은 땅속 깊이 묻는다. 비파도 영영 알 수 없도록.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

어차피 범신은 제 손으로 죽였는데. 스스로 저주가 되어 찾아갔는데. 내게 다음 생이 기약될지도 모르겠는데. 어쩌면 지옥불에 내도록 갇혀 벌을 받을지도 모르면서, 영영 다시 만나지 말자며 옥함을 묻고…. 나는 누굴 기다리고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바보 같은.”

울먹이며 웃었다.

그 소리에 윤오 역시 깼다.

정신을 차리자 자신은 눈물을 흘리지 않고 마른 얼굴에 입술만 달싹이고 있었다. 가물가물 뜬 시야가 열로 일그러져 잘 보이지 않았다.

숨이 밭았다. 윤오는 물이 코 밑까지 차오른 것처럼 허우적거렸다. 이내 헐떡이며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미지근한 입술이 닿았고 곧 차가운 물이 들어왔다. 윤오는 그것이 유일한 동아줄인 양 허겁지겁 받아 마셨다. 물은 금세 미지근해졌고 목을 넘어갈 때쯤엔 뜨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뜨거워….”

중얼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다 무엇을 건드렸고 그것이 물컵이었음을 깨달았다. 물이 시트 위로 쏟아졌다. 급히 몸을 일으키려다가 손 아래 닿는 것이 젤리처럼 물컹하게 느껴져 다시 뒤로 쓰러졌다. 애초에 몸을 제대로 일으키긴 했는지도 모르겠다.

“누워 있어.”

범신조의 목소리였다. 윤오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너 발정기가 왔어.”

침착하게 달래려는 의도인지 차분한 어조였지만 그 밑에 깔린 은은한 초조함은 김윤오도 읽을 수 있었다.

다리 사이가 뜨거웠다. 아랫배에 불덩이가 들어찬 것처럼 더웠다. 힘없는 다리를 모아 무릎끼리 비비적대려 하니 범신조가 손으로 그 무릎 안쪽을 어루만졌다.

“흐…!”

그 손길에 신음이 절로 튀었다. 동시에 더럭 겁이 났다.

“나, 나 왜 이래…?”

조금 전 발정기라 들었던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고 윤오가 축축하게 젖은 눈으로 범신조를 찾았다.

“나 이상해….”

시트를 적신 물은 그의 손도 적셨다. 범신조가 젖은 손가락을 윤오의 입술 사이로 밀어 넣었다. 윤오는 이로 손가락을 물었다. 제법 아프게 물었다가 혀로 감쳐 핥는 것이 이갈이를 하는 새끼 짐승 같았다.

범신조는 온몸을 적시려는 양 풀린 체향에 덩달아 흥분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써야만 했다. 그렇게 참는데도 윤오는 희미하게 흘러나온 제 체향에 과민하게 반응했다. 분명 전조 증상이 있었을 텐데, 이쪽에는 무지하여 몰랐던 모양이다. 그는 침착하기 위해 넥타이를 풀어 던지고 곧 윤오의 다리 사이로 손을 뻗었다.

“이상해….”

범신조의 손가락을 빨던 윤오가 웅얼거렸다.

범신조의 발정기가 왔을 땐, 생애 처음 하는 행위라는 데에서 비롯된 긴장감이 먼저였다. 또한 상대가 봐주지 않고 몰아세운 덕분에 이후의 기억이 온전치 못한 것도 한몫 했다. 범신조의 체향에 취해 덩달아 발정기가 일어나면서도, 이미 쾌감의 중턱에 있어 인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발정기가 왔을 땐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었고.

하지만 지금은 아직 이성이 남아 있는 상태라 있는대로 흥분하는 자신의 몸이 낯설고 무서웠다. 다리 사이가 간지러웠고 몸이 뜨겁다. 손을 뻗어 잡히는 대로 시트를 잡아 뜯었다.

“왜 갑자기…, 갑자기 이런 게 오는 거야…?”

윤오가 축축한 눈으로 물었다. 범신조는 쓰게 웃었다.

“아마도 이제야 네가 내가 좀 믿음직스러운가 봐.”

이제야 마음을 제대로 터놓아서 그런 것 같다고, 그는 달래듯이 속삭였다. 그러나 열에 겨워 힘들어하는 윤오의 귀에는 헛도는 위로였다. 도리어 그 말은 범신조에게 더 위로가 되었다. 윤오는 괴로운데 자신은 감격에 떤다. 정말이지 이기적인 새끼였다.

각인한 상태에서 떨어져 지냈던 시간이 길었던 탓에 아마 이 발정기는 혹독할 것이다. 해결할 방법은 어차피 하나밖에 없다. 범신조가 고개를 숙여선 제 정장 조끼 단추를 풀며 윤오의 바지 지퍼를 이로 물어 천천히 끌어내렸다. 그 아주 미약한 진동과 소리, 상황만으로도 윤오의 발끝이 굽었다. 시트를 밀어내며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벌써 젖었네.”

범신조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벌써 젖으면 힘들 텐데, 하는 걱정은 그가 윤오의 것을 입에 담으며 뭉개졌다.

“하으윽!”

온몸이 지나치게 예민했다. 윤오의 엉덩이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가 입에 물자마자 갈 뻔한 추태를 겨우 참았으나, 한 번 고비를 넘겼다고 가라앉는 류의 쾌감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번 물러난 쾌감은 더 큰 파도가 되어 다가올 기세였다. 윤오의 눈에 자꾸만 물이 고였다. 물이 고이는 건 거기만이 아니었다.

“아, 안 돼…!”

제 둔부 사이로 손이 다가오는 것을 알아채고 윤오가 질겁했다. 지금 앞이 빨리는 것만으로도 죽을 것처럼 느껴지는데, 뒤까지 만져지는 건 정말 안 됐다. 발꿈치로 밀며 위로 도망가려는 순간 범신조의 이에 살덩이가 긁히고 말았다.

“흐윽!”

결국 한 번 사정하고 말았다. 범신조의 머리를 쥐고 몸을 한껏 구부린 채 발발 떠는 틈을 타서 그가 물고 있는 걸 빼지도 않으며 뒤에 손가락을 넣었다. 입구가 한껏 오므라들어 있어서 손끝으로 눌러 벌려야 했다. 그러자 덩달아 김윤오의 발가락이 쫙 펼쳐졌다. 벌어진 동공으로 그가 얼마나 느끼고 있는지가 고스란히 보였다.

“하, 하지, 하지, 마….”

범신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가로 윤오가 사정한 것이 느릿하게 흘렀다. 그러다 뚝, 떨어져선 윤오의 것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혀로 쓸 듯이 간지러운 감각에 윤오가 몸을 벌벌 떨었다. 타액과 섞여 좀 더 묽어진 것이 회음까지 향했다. 그 모습을 응시하던 범신조가 그것을 손으로 훔쳐내어선 바로 입구로 뻗었다.

“하윽…!”

지나친 자극에 윤오는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겨우 실낱처럼 남은 이성으로 할 수 있는 거라곤 그간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게 이것 때문이었나, 하는 추측뿐이었다.

반면 범신조의 표정은 신중했다. 손가락이 천천히 밀고 들어오며 그의 손가락 마디가 툭툭 걸릴 때마다 윤오는 몸을 움찔움찔 떨었다.

“히, 힘들어….”

이성은 곧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코밑까지 차오른 건 쾌감을 향한 욕망뿐이었다. 아래가 발씬거리는데 안쪽은 오랜 시간 열리지 않아서 바짝 조여들어 있는 걸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윤오의 눈이 점점 흐려졌다. 범신조를 밀어내던 손은 어느덧 셔츠 자락 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몇 번의 헛손질 끝에 셔츠를 벌려내고 드러난 목과 어깻죽지에 입술을 비볐다.

범신조는 어깨와 목선에 연거푸 떨어지는 가벼운 키스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 역시 참기가 힘들었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건 윤오 혼자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계까지 버티고 버틴 건 범신조 쪽이었을 거다. 열이 올라 뜨거운 입술이 닿을 때마다 그는 그곳에 자국이 남았으면 했다. 물집이 잡히고 터져 흉터가 남길 바랐다.

신조는 윤오의 입술에 제 목덜미를 더 갖다 붙이다가, 입술이 벌어지며 입질을 하기 시작하자 저열한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윤오의 머리카락을 단단히 쥔 채 고개를 돌려 입 맞췄다.

풀린 눈이 잠깐이나마 홉뜨며 이성이 돌아왔다. 윤오는 바르작대며 몸을 밀어내려 애썼다. 보잘것없는 반항이었다. 졸지에 제 정액 맛을 알게 된 윤오가 결국 고개를 거세게 돌리며 하악, 하고 다급한 숨을 뱉었다. 그러나 범신조는 숨을 고를 틈을 주지 않았다.

그의 커다란 손이 윤오의 다리 사이로 향했다. 그리고 만져주다 만 입구에 손가락 두 개를 한 번에 넣었다. 놀란 윤오가 흣, 하고 숨을 들이켜며 말뚝 같은 팔을 붙잡았다. 그러나 조금도 밀리지 않는다. 도리어 범신조는 그대로 손바닥을 회음과 고환, 음경까지 붙여 안을 쑤시며 윤오의 자지를 압박하고 비벼댔다.

“하, 하흐아, 아으….”

충격과도 같은 쾌감이 쏟아졌다. 윤오는 힘없이 범신조의 팔뚝을 잡은 채 몸을 앞으로 숙였다. 쓰러지려는 상체를 범신조가 받쳤다. 아슬아슬하게 지탱된 채로 윤오가 넋이 나간 채 입술을 벙긋거렸다. 벙긋 벌어진 입술 사이로 타액이 느리게 떨어졌다. 그것이 범신조의 팔을 적시고 떨어져 그의 손목에 선을 긋고 선액이 흐르는 음경까지 묻어났다.

점점 젖은 소리가 난다. 첩, 첩 하는 소리가 낯뜨겁기 짝이 없다. 귀에 불이 붙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뒤로 몸을 물릴 수도, 도망칠 수도 없다. 오히려 윤오는 허리를 들썩이며 안을 쑤시는 손가락이 더 깊이 들어오게 버둥거리고 있었다. 어느새 양 팔로도 범신조의 몸을 꽉 끌어안은 채였다. 제 손도 아닌 상대의 손을 이용해 자위하는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미치겠네….”

중얼거린 범신조가 남은 손을 제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퍼스너를 내리고 속옷을 끌어내리자 밴드 위로 묵직한 무게감을 지닌 살덩이가 텅 나왔다. 수치도 모르는 듯이 그가 발정 난 연인의 앞에서 수음하기 시작했다.

“김윤오… 조금 더 참아 봐. 응?”

“하윽, 윽… 하으… 히, 힘들어… 흐읏…!”

그사이 윤오는 한 번 더 사정했다. 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제정신이 아니었다. 범신조는 제 것을 흔들며 손가락을 하나 더 넣었다. 안은 무척 좁았다. 이대로 넣으면 반도 채 들어가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안쪽까지 제대로 닿지 않아 김윤오만 힘들 게 분명했다.

열이 해소되지 않아 질끈 감은 김윤오의 눈시울로 눈물이 찔끔 흘렀다. 그것마저 아까워 혀를 빼고 핥자 몸서리치며 엉덩이를 더 바짝 붙여 온다. 범신조는 손가락을 오므려 배꼽 쪽으로 지그시 겨눈 뒤 긁어내렸다. 

“하아악!”

윤오가 턱을 곧추세우며 발발 떨었다. 직전에 사정한 나머지 타이밍을 잡지 못해 졸지에 안으로만 가버린 것이다. 그대로 뒤로 쓰러지려는 걸 받아 천천히 눕혔다. 윤오의 상의는 자신이 사정한 것 때문에 축축했다. 벗겨내려 위로 올리자 뭣도 모르고 벌어진 입술로 옷자락을 받아 문다. 범신조는 그 무지한 행동에 얼굴을 찌푸리며 웃었다. 이게 사람을 자극하는 줄도 모르고….

“흐… 음…!”

범신조가 낮게 신음했다. 점점 거세지는 손길에 윤오의 아래에서는 이제 철벅거리는 지경의 젖은 소리가 났다. 차라리 제정신이 아닌 게 다행이었다. 제정신인 상태에서 이렇게 물이 나오는 걸 알았다면 수치스러워서 죽고 싶었을 거다.

범신조는 흥분과 열에 겨워 오똑 선 윤오의 젖꼭지를 코로 문질렀다. 예민한 첨단에 볼과 코가 번갈아 닿자 윤오가 발발 떨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잇자국이 남아 조금 젖은 옷이 드러났다가 다시 입술 사이로 삼켜졌다.

신조는 봐주지 않았다. 코로 함부로 문지르고 그 끝에 이로 질겅질겅 씹었다. 그러자 탄탄한 배가 옴폭 패이며 안쪽이 한껏 조여들었다. 손이 아니라 자지를 넣은 상태였다면 한 번에 갔을지도 모른다.

“몸이 더 탄탄해진 거 같은데.”

너무 흥분하지 않기 위해 범신조는 아무 소리나 지껄였다.

“물기 좋게.”

“흐으, 흐….”

“우리 윤오… 나 같은 새끼랑 엮이지만 않았어도 인기 많았을 텐데.”

평탄하고 힘들지 않게 살 수도 있었을 거다. 범신조는 제가 말을 하고도 기분이 나빠져 입술을 삐뚜름히 올렸다. 이런 상상에도 질투해 불쾌해하는 좁은 속내를 숨길 생각조차 없었다.

점점 말이 없어졌다. 곧 범신조가 이를 콱 씹으며 제 손을 빼냈다. 그리고 젖은 손으로 김윤오의 허벅지 뒤를 움켜쥔 채 다리를 들어 올렸다.

“으, 흐… 왜애…!”

뒤가 텅 비자 윤오가 울상을 지었다. 자기가 뭣 때문에 칭얼거리고 있는지 인식은 하고 있을까. 제대로 된 판단을 하기 힘든 상황인 어린 연인을 멋대로 범하는 꼴이 영락없이 사람이 되어도 짐승이나 마찬가지라는 말과 딱 어우러졌다.

범신조는 윤오의 양 다리를 포개 한쪽 어깨에 얹었다. 그리고 절정에 가까워져 핏줄도 흉악스러울 정도로 돋은 제 뜨겁고 두툼한 살덩이를 그 다리 사이에 끼워 넣었다. 다리가 늘씬하여 꼬듯이 포개지 않으면 허벅지가 모이지 않았다. 말랑하기보다 탄탄했기에 쓸릴 때마다 조금 아팠다. 그리고 범신조는 그것에 흥분했다.

“아! 아! 아아! 아아! 앗!”

윤오가 짧게 신음을 내질렀다. 뒤를 한껏 쑤셔 준 덕에 엉덩이 사이까지 젖어 있었다. 그 상태로 범신조의 단단한 허벅지와 연신 맞부딪혔다 떨어지니 수면 위를 내려치는 듯한 젖은 소리가 났다.

두 번의 사정과 사정 없이 이른 절정에도 윤오의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시작이었다. 윤오는 다리를 모아 배배 꼬듯 조이며 범신조를 재촉했다. 발꿈치로 연신 등을 내려찍으며 당겼다.

“그, 그냥 안에, 아! 넣어, 하, 넣어 줘…!”

“안 돼… 너 다쳐.”

범신조가 후욱 숨을 몰아쉬었다. 손으로 한껏 풀어 주었어도 부족했다. 기구라도 써서 늘려놔야 했나, 싶지만 그런 게 있지도 않을뿐더러 김윤오의 안에 자신이 아닌 다른 걸 넣고 싶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윤오가 몸을 비틀며 꼬아 대는 덕분에 허벅지가 옴쭉 조여들었다. 범신조는 움찔움찔 떨리는 허벅지 안쪽에 텁, 텁 소리가 나도록 제 것을 박아넣다가 결국 사정했다. 윤오는 제 허벅지와 사타구니에 쏟아지는 정액에 몸을 떨었다. 범신조가 참고 참던 체향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아래로 불덩이가 빠져든 것처럼 흥분에 겨운 물이 뜨겁게 넘쳐흐르는 게 느껴졌다. 이내 맞닿은 곳이 축축하게 젖는다. 윤오는 입술을 벌리고 할딱거렸다.

신음도 거의 내지 못하고 그저 헐떡이는 걸 내려다보며 몇 번에 걸쳐 나눠 사정하던 범신조가 욕을 뇌까렸다. 윤오는 듣지 못했다.

“좋아….”

몽롱하게 중얼거리며 제 배와 사타구니를 적신 걸 더듬더듬 만질 뿐이었다.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하다. 제정신일 때는 절대 하지 않을 일을 벌이고 있었다. 심지어는 손에 묻은 걸 넋이 나간 얼굴로 입술에 가져간다. 부푼 입술에 손가락을 문지르더니 혀를 내밀어 손끝을 핥기도 했다. 이제 김윤오는 제 정액의 맛뿐만 아니라 범신조의 맛도 알게 되었다.

그 모든 걸 낱낱이 본 범신조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너….”

남자가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가 겨우 두어 개 정도 걸려 있던 셔츠를 아예 풀어 헤쳤다. 그리고 김윤오의 오금을 움켜쥐어 번쩍 들어 올리자 유연하게 올라간 다리 사이로 젖은 입구가 보였다. 그걸 번들거리는 눈으로 탐욕스럽게 보다가 입술을 핥았다. 목이 탄다.

“아… 아…?!”

멀거니 제 다리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을 꿈처럼 보던 윤오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앞섶과 퍼스너만 푼 남자가 고개를 숙이더니 제 둔부 사이에 고개를 묻은 것이다.

“하지 마!”

윤오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머리를 밀어내려 해도 범신조는 도리어 오금을 잡았던 손을 놓고 윤오의 손을 잡는 것으로 대응할 뿐이었다. 깍지를 끼고 엄지와 검지 사이의 얇은 살을 집요하게 비볐다. 그것만으로도 애무처럼 느껴졌다.

“하지, 하지 마… 아! 아아! 아!”

자지러지며 울음을 터뜨렸다. 김윤오의 머릿속에 범신조의 혀는 늘 까끌까끌하다. 실제로 그렇지 않아도 지나치게 선명한 기억이 까슬한 가시가 돋은 혀로 인식했다.

착각의 힘은 강했다. 윤오는 까칠한 혀로 입구가 쓸리는 것처럼 눈가가 새빨개지도록 울었다. 범신조의 머리칼을 움켜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남자의 잘 세팅되었던 머리가 엉망이 되었다. 그래도 범신조는 놓지 않았다. 도리어 윤오의 깍지를 낀 손과 오금을 잡은 손에 각기 힘이 들어갔다.

“하으으으으으!”

윤오는 목선이 쭉 뻗도록 고개를 꺾으며 신음을 내질렀다. 이를 꽉 깨무는 바람에 빠득 하고 이 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범신조는 녹진하게 녹은 입구 안으로 아예 혀를 밀어 넣었다. 까칠하다고 착각하고 있는 혀가 내장을 쓸어내렸다. 허리가 빠지도록 느껴지고 뇌수가 흐르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쾌감에 절여졌다.

“하으으윽!”

윤오가 재차 신음을 내지르며 사정했다. 만지지도 않은 성기 끝에서 정액이 핏, 터져 나왔다. 일부는 윤오의 턱에 묻었다. 범신조는 마구 들썩이는 윤오의 허리를 잡아주지도 않고 고개로 쫓았다.

마침내 그가 얼굴을 들었을 때, 그의 우뚝한 콧대와 부드럽게 들어간 인중, 입술은 푹 젖어 있었다. 음탕한 짓을 하고도 뻔뻔한 낯짝을 한 남자가 입술을 핥았다. 셔츠를 벗고는 제 얼굴을 무심히 닦아내곤 구석으로 내던졌다.

그때쯤 윤오의 몸은 더 풀어줄 곳도 없이 녹은 상태였다. 눈도 마찬가지였다. 가물가물, 당장 감기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풀린 눈을 본 범신조가 가볍게 뺨을 두드려 깨웠다.

“내가 허락하기 전까진 기절하지 마.”

“…왜애.”

자고 싶은데 잘 수 없어 서러움에 취한 어린애처럼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 어리광이 통하지 않았다. 범신조는 만져 줄 것도 없이 발기한 제 것에 윤오의 발을 끌어 붙이고는 씩 웃었다.

“열을 좀 식혀야 잠깐잠깐 자더라도 안 아프지.”

그러나 이미 아픈걸. 윤오는 제 발을 끌어 자위하고 있는 후안무치의 남자에게 질린 시선을 보냈다. 푹 잔다는 것도 아니고 잠깐잠깐 자게 될 거란 말은 머릿속에 넣지도 못했다. 그저 남자의 한껏 흥분한 몸에서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가장 화가 나는 건, 그렇게 사정을 했는데도 여전히 배 속이 뜨겁고 머리가 멍하단 사실이었다. 그나마 그렇게 사정을 했기 때문에 지금 살짝 이성이 돌아왔다는 걸 억울하지만 받아들여야만 했다.

범신조는 제 선액으로 젖은 윤오의 발을 당겼다. 어느덧 침대 헤드까지 올라가 있던 윤오가 아래로 훅 끌려왔다. 한쪽 다리만 어깨에 걸쳐지고 한쪽 다리는 범신조의 허벅다리 바깥으로 늘어졌다. 범신조는 윤오의 골반을 잡아 넓게 펼친 손으로 지분댔다.

그 손길이 담백하여 윤오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미 범신조가 제 것의 끄트머리를 입구에 겨누고 있고, 골반을 잡은 손이 조금만 당겨도 푹 박힐 것이란 걸.

“…아아아아아!”

먼저 삽입되고 그 이후에 충격이 온몸을 때렸다. 윤오는 한 박자 늦게 비명을 질렀다. 아래로 영영 꺼지는 것만 같았다.

끝이 없는 벼랑 끝으로 추락하는 것처럼 눈앞이 캄캄해졌다가 겨우 돌아왔을 때, 그는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껏 제정신이라고 생각했던 남자는 제정신을 가장한 채 미쳐 있었다. 눈은 풀려 있고, 아랫배로 선명하게 올라온 핏줄이며 제 골반을 부술 듯이 잡은 팔뚝에 선 핏줄이며 야만적이기 짝이 없었다.

너무 오래 참았다. 김윤오만이 아니라 범신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삽입하자마자 한계를 느꼈다. 게다가 윤오의 안이 지나칠 정도로 조이고 있었다. 연신 거듭된 절정으로 경련하는 데다 열이 올라서 뜨거웠다. 범신조는 아찔한 나머지 눈을 감고 허리를 뽑아냈다가 연거푸 박았다.

박을 때마다 조금씩 더 들어간다. 조이는 와중에도 안쪽은 탐욕스럽게 자신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평소와 분명히 달랐다. 그는 사정감을 참지 않으려 했다. 조금이라도 빼야 자신이나마 이성을 유지할 성싶어서.

“김윤오. 김윤오, 김윤오….”

그러나 미친 사람처럼 한 이름을 연거푸 중얼거리는 걸 봐선 그 역시 제정신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삽입하는 힘이 워낙 거세서 윤오는 점점 위로 밀려 올라갔다. 결국엔 침대 헤드에 머리가 닿았다. 쿵, 쿵 소리가 날 때쯤 범신조가 손을 뻗어 머리를 감쌌다. 깍지를 껴 밀려 올라가지 못하게 막은 채 힘은 그대로 두고 박아 넣으니 뿌리 부근만 남기고 거의 다 들어가고 말았다.

“아파, 아! 아아, 아프…!”

윤오는 엉겁결에 혀를 씹고 말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잠깐의 아픔을 무시무시한 쾌감이 삼켰다. 범신조가 반쯤 풀린 눈으로 보다가 깍지 낀 손을 풀어 윤오의 볼을 눌렀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제 두툼한 혀를 넣고 다친 혀를 말았다가 쭉쭉 빨았다. 더듬더듬 범신조의 목과 어깨를 어루만지던 윤오의 손이 쭉 펴졌다가 세워져 손톱으로 긁길 반복했다.

목덜미에 상처가 남을 때쯤이 되어서야 그는 씹던 입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아… 제길…!”

욕설을 짓씹으며 그가 안쪽에 사정했다.

“흐으윽…!”

양이 많아서 부담스러웠다. 윤오는 몸을 한껏 웅크렸고 그 덕에 안쪽에서 정액이 밀려 나왔다. 범신조는 사정하면서도 삽입을 반복했다. 젖은 소리에 질척거리는 점액질 소리가 더해졌다. 지나칠 정도로 음란한 소리였다.

“…배불러….”

윤오가 꺼져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눈빛은 여전히 습기로 녹녹했다. 범신조의 어깨에서 손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범신조는 제 것을 뽑아낸 뒤 상체를 세웠다. 그가 사정할 때 윤오 역시 사정했는지 배가 축축했다. 시트를 끌어 젖은 배를 닦아주며 그는 다시금 그 모습에 흥분했다. 사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을 잡고 흔들자 뿌리가 서서히 부풀었다. 안에서 부풀기 전에 뺀 것이 천운이었다.

“후욱….”

숨을 몰아쉬며 그는 힘줄이 곤두선 팔로 핏줄이 흉흉하게 서서 징그럽기까지 한 성기를 애무했다.

범신조가 제 모습을 보며 자위하는 걸 가물가물한 시선으로 보던 윤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잠시 이성이 돌아왔는지 얼굴이 더할 수 없이 빨갛게 익어 있었다. 목도 가슴도 천천히 붉어졌다.

“왜.”

범신조가 거친 숨소리 속에 섞어 물었다.

“내가 너 앞에 두고, 자위하는 게… 추해?”

“아, 아니….”

“적응해.”

뻔뻔한 태도였다. 차마 시선을 둘 데가 없어서 윤오는 몸을 천천히 웅크렸다. 옆으로 몸을 돌리자 둔부 사이로 하얀 액이 밀려나오는 게 보였다. 범신조의 눈이 순식간에 가늘어졌다. 그는 윤오의 둔부 아래를 움켜쥐고 옆으로 벌렸다.

“하, 하지 말라고…!”

윤오가 질색하며 몸을 일으켰으나 범신조를 이길 수는 없었다. 발로 그의 어깨를 밀어도, 심지어 뺨을 발목으로 치게 되었는데도 남자는 태연하게 혀를 빼 윤오의 입구를 핥았다. 이제 범신조도 자신의 정액 맛을 알게 되었다.

“하으으으…!”

얼굴을 싸매고 버티려 했지만 수치심은 노도처럼 윤오를 덮쳤다. 차라리 이성을 잃었을 때가 나았다.

그러는 사이 범신조의 혀가 입구를 훑고 손가락은 안쪽을 긁어 안에 고인 것을 대충 빼내었다. 혀는 부드럽고 손은 무례했다. 일부러 안이 젖어 있게 좀 남길까 했는데….

“물이 줄줄 흐르네.”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며 지껄이는 말이었다. 윤오는 얼굴이 새빨개져 몸을 일으켰다. 이제 발정기가 끝난 듯 몸을 가눌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범신조는 발정기라는 게 간조와 만조처럼 사그라들었다가 다시 범람하길 반복한다는 걸 잘 알았지만, 김윤오는 아니었다. 어린 짐승 꼴이었으니까.

섣부르게 일어나서 도망치려다가 도리어 시트에 발목이 걸려 앞으로고꾸라지려는 걸 그가 잡았다. 바닥에 얼굴을 찧기 직전에 잡아채선 제 허벅지에 올렸다. 그가 침대에 앉고 윤오의 양 다리가 그의 뒤로 뻗어진 채였다.

“피 쏠린다.”

낮게 웃은 그가 윤오의 다리를 밀어 제 위에 앉게 했다. 그러나 여전히 아슬아슬한 모양새였다. 윤오의 발끝이 바닥에 닿았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범신조는 이대로 당장 밀어넣고 싶었지만, 제 것의 뿌리가 부푼 상태라 참았다. 대신 품 안에 넣은 김윤오를 지분거렸다. 골반 위로 오목하게 들어가는 등선이 예쁘다. 깊게 패인 그곳에 대고 자지를 슥슥 비벼대니 흐느껴 운다.

“흐으… 흐….”

입구에서 물이 질질 흘렀다. 윤오는 자신이 뒤로 물을 흘린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무섭기도 한 데다 징그러워서 정신이 거푸 후려맞는 것만 같았다. 차라리 흥분에 완전히 미쳐버리면 좋을 텐데, 금인과 달리 치인은 발정기가 와도 이성이라는 게 남아 있어서 더 고통스러웠다.

범신조가 윤오의 목을 감싸 턱까지 받쳤다. 그리고는 이를 세워 귀와 목덜미를 씹었다. 더운 숨을 훅, 훅 빠르게 내쉰 끝에 그의 것이 느릿하게 사정하며 부푼 뿌리가 천천히 줄어들었다. 아무래도 부풀 자리를 찾지 못한 걸 안 모양이다. 그 지끈거리는 고통에 범신조는 이를 악다물며 참았다가 지껄였다.

“어째 내 발정기가 온 것 같아….”

정말 그 말대로 뿌리가 줄어들었음에도 그의 자지는 말뚝처럼 단단하게 서 있었다. 윤오가 바르작댄다. 앞으로 나아가려기에 그대로 두었다. 바닥을 길 것처럼 손바닥을 댔지만 하체는 여전히 범신조의 허벅지 위였다.

나직이 한숨을 쉰 남자가 윤오의 들린 엉덩이를 잡고 양쪽으로 한껏 벌리더니 벌어진 입구로 단번에 삽입했다.

“…!”

윤오는 소리 없이 비명을 내질렀다. 입이 틀어 막힌 것처럼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뻐끔거리는 입술 사이로 어느새 올라온 손가락이 들어가 다친 혀를 짓누른다. 상처를 매만지고 입천장을 긁었다. 그리고 입꼬리를 당기며 하체를 짓쳐 올렸다.

“어욱… 욱! 아우…!”

우는 소리가 정말로 어린 짐승 같다. 범신조는 머리꼭지까지 흥분할 것만 같았다. 조금도 갈무리하지 못한 체향이 방을 가득 채웠다. 윤오의 죽순 향과 범신조의 비릿한 숲 냄새가 차올라 울창하고 습한 나무 속에 갇힌 것만 같았다. 그대로 숨이 막힐 것만 같다. 윤오는 바닥을 짚은 채 눈을 가물가물 떴다. 

“후욱…!”

범신조가 세게 찍어 올렸다. 꼬리뼈를 뚫고 나가는 게 아닌가 싶었다. 결국 눈물이 펑 터지고 범신조의 손으로 타액이 줄줄 흘렀다. 그는 다시 윤오의 어깨를 잡아 올렸다. 낮은 자세 때문에 피가 몰려 얼굴이 새빨갰다. 안쓰러울 정도인지라 그는 그 피를 내려 주겠답시고 뒤로 벌렁 누웠다. 변명의 여지가 다분했다.

“울지 마.”

제 가슴에 윤오의 등을 얹고, 허벅지 위로는 벌어진 윤오의 허벅지를 두고, 그 안쪽엔 손자국이 남을 만큼 손으로 짓누른 채로 남자는 가증스럽게 달랬다.

“울지 마, 윤오야. 우리가 지금 강제로 하는 게 아니잖아….”

아닌가? 시팔, 나도 잘 모르겠다. 확신이 없었다. 범신조의 머릿속에는 이 와중에도 시계가 돌아가고 있었다. 째깍째깍. 김윤오의 스물다섯 살까지.

얼굴이 흠뻑 젖은 윤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범신조의 볼에 입술을 마구 비볐다. 뽀뽀를 하려는 건지 아니면 칭얼대려는 건지 모르겠다. 낮게 웃은 범신조가 손을 뻗어 윤오의 오똑 선 젖꼭지를 짓누르고 거세게 비볐다.

“흐아아아….”

윤오는 엉엉 울었다. 젖꼭지가 예민해졌는지 아니면 온몸이 예민해진 건지 무릎이 펄쩍 뛸 정도로 느껴댔다. 범신조의 것은 겹쳐 누운 상태로도 깊게 찍어 올리기 충분할 만큼 긴 덕에 윤오의 아랫배를 집요하게 찍어 올릴 수 있었다.

“화장실 안 가고, 싶어? 응?”

이상성욕자.

김윤오가 흐린 정신 속에 중얼거렸다.

변태.

다섯 글자든 두 글자로 줄여 말하든 뜻은 같았다. 김윤오는 고개를 저었다.

“죽어버릴 거야….”

여기서 실례를 하게 되는 건 절대 못 참는다는 뜻이었지만 범신조는 대놓고 정색을 했다. 그가 질색하는 말이었다.

“그래?”

그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오래 살아도 결코 인내심이 늘어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김윤오의 죽음이었다. 그가 팔꿈치로 상체를 세우고는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그러곤 그 상태로 윤오의 다리 하나를 위로 들어 올렸다.

“아, 싫어, 이 자세… 아, 싫…!”

“어디 죽나 보자.”

이를 갈며 말한 범신조가 더할 나위 없이 세게 삽입했다. 각도는 배꼽 뒤쪽, 깊이는 평소보다 얕게. 윤오가 고개를 치켜들며 이를 꽉 깨물었다. 목에 핏대가 설 정도였다. 범신조는 앞으로 기어가려는 윤오의 상체를 팔로 가로질러 안고는 어깨를 씹어댔다.

“고작 그러고 죽나 보자고.”

남자는 치사했고 치졸했고 속이 좁았다. 그리고 김윤오는 물리적으로 속이 좁았다. 윤오가 급하게 손을 아래로 뻗었다. 사정감인지 배출욕구인지 모를 것이 발바닥부터 저릿저릿 올라왔다.

“시, 싫….”

“…….”

“싫어하는 거… 히, 익… 안 한다고 했….”

“넌 안 싫어해.”

과연 그 말대로 윤오의 안이 벌벌 경련하기 시작했다. 절정의 전조였다.

“내가 싫어할까 봐 걱정이라면….”

말을 짧게 토막 내며 겨우 뱉은 범신조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의 자지와 김윤오의 내벽이 맞춘 것처럼 꼭 붙는다. 이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 같다.

“쓸데없는 걱정이고….”

지금까지와 다르게 안을 지그시 누른 채 천천히 허리를 돌린다. 은근히 비비는 그 감각에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만 같았다. 홉뜬 윤오의 동공이 텅 벌어졌다. 몸이 천천히 경련하기 시작했다. 벌벌 떨리는 와중에 벌어진 입술 새로 막을 수 없는 비명이 힘없이 흘렀다.

“아, 아아… 아….”

더는 막을 수 없었다. 작은 균열이 일어난 댐처럼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 * *

“더, 더… 흐, 흑… 거기…. 아, 하으. 아! 앗!”

조름인지 부추김인지 아니면 둘 다일지 모를 애원에 범신조는 기꺼이 따랐다.

윤오의 발정기가 조금 가라앉을 때는 삽입한 채 가만히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면 윤오는 숨을 고르고 범신조가 넘겨주는 물이나 언제 가져왔는지 기억도 없는 과일 몇 조각을 겨우 먹은 뒤 까무룩 잠들었다가, 허리를 먼저 짓찧으며 그 자신의 움직임에 깨어났다.

열은 오르내리길 반복했다. 떨어져 있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그 반동도 컸다. 보통 치인의 발정기는 금인보다 짧은데 이번엔 범신조의 발정기와 거의 비슷해질 수준이었다. 그러나 윤오는 시간이 그만큼 흐르고 있는 줄도 몰랐다.

옆으로 누운 윤오의 뒤로 범신조의 몸이 빠듯하게 붙었다. 범신조의 무기 같은 다리가 윤오의 두 다리를 감싸 당겼다. 윤오의 것이 반복된 마찰 끝에 까진 지 오래인 데다 지독히 혹사당한 탓에 범신조는 제 짝이 너무 힘들어할 때면 입으로 빨아 사정하게 해 주었다. 그나마도 거의 나오지 않았고 대체로 마른 절정이 이어졌다.

마른 절정은 평범한 절정보다 훨씬 힘들었다. 경련이 반복된 몸에 힘이 완전히 빠졌다. 범신조는 블라인드 너머로 보이는 희끄무레한 빛을 보며 윤오의 목을 더듬었다. 맥박도 좀 안정되었고 열도 많이 내렸다. 아마 이번 한 번이면 끝날 것이다. 발정기 내내 기적처럼 버티고 있던 김윤오의 체력 역시.

이미 한계인 게 느껴졌다. 사정이 끝나자마자 기절하듯 잠들기 일쑤였으니까. 그사이 범신조는 윤오의 안에 고인 정액을 빼내 주었고, 씻겨 주었으며, 부르튼 몸에 오일이 섞인 로션을 발라 주고 엉망이 된 시트를 갈았다.

윤오가 싸지른 건 결국 소변은 아니었지만 이후로는 화장실 역시 그가 데려다 줘야만 했다. 윤오는 이성을 완전히 잃어 많이 울고 많이 쌌고 많이 졸랐다. 범신조가 이성을 유지한 게 기적이었다.

그의 몸 역시 김윤오만큼은 아니어도 충분히 엉망이었다. 잇자국, 손톱자국, 이리저리 차대거나 휘두른 손발 때문에 멍이 들기 시작한 곳까지. 둘의 몸은 섹스가 아니라 교미, 마운팅, 혹은 싸움을 한 것처럼 보였다. 범신조는 그 부분 부분의 아릿한 통증으로 이성을 유지했고 동시에 그곳에서 쾌감을 느꼈다.

그리고 애초에 그에게 이런 상처는 상처도 아니었다. 하지만 윤오는 아닐 거다. 제가 낸 흔적들인데도 안쓰러웠다. 좀 더 자제했어야 했는데,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아파?”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물었다. 그의 손은 부르튼 김윤오의 자지가 아니라 회음을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회음 역시 반복된 마찰에 부어 있었다.

부었길래 핥아 주었을 땐 너무 울어서 억지로 절정에 이르게 한 뒤 재워야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흥분한 김윤오가 끙끙대며 제 위에 올라타기에 그 역시 깨야 했지만.

“아파, 김윤오?”

대답이 없고 그저 괴고 있던 머리를 들어 자신의 팔에 비비적대기만 하기에 다른 손으로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주며 재차 되물었다.

윤오는 음…. 하고 애간장이 녹는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아프다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발정기 내내 아프거나 정말 견딜 수 없이 버거울 때면 발로 차든 할퀴든 물든 하는 방법으로 표현했으니 지금은 아프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아래의 상태는 어쩔 수 없이 좋지 않을 거다. 범신조는 중간부터 젤을 준비했다. 윤오가 물이 많긴 했으나 그래도 도움이 있다면 좋을 것 같아서. 손을 뻗어 젤 통을 가져와 짜는데 거의 빈 소리가 났다. 얼마 안 남은 것을 윤오의 회음과 입구, 그리고 자지 끄트머리에 발라 주었다. 그 상태로 선단을 쓸지 않고 손바닥에 댄 채 둥글리듯 어루만졌다.

“흐으으… 응….”

윤오가 쉰 목소리로 흐느껴 울었다. 범신조는 느릿느릿 움직였다. 이제 한층 지지부진해진 흥분에 보폭을 맞춰 줬다. 넣고 움직이지 않다가 윤오가 재촉하면 움직였다. 넣고만 있다가 시간을 두고 움직이는 섹스 방식이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나진 않는다. 애초에 범신조도 완전히 제정신이라고 할 수는 없었으니.

“이제, 움…직여….”

“알았어.”

나직이 웃은 범신조가 허리를 느리게 뺐다. 부은 내벽이 딸려 나왔다가 다시 딸려 들어간다. 길게 빼지 않고 조금만 뺐다가 대신 넣을 때마다 깊이 넣어 비볐다. 어느덧 전부 들어가게 되었다. 오랜 시간 몸을 섞지 않아서 굳어 있던 건 벌써 애저녁에 옛말이었다. 그저 범신조가 자제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윤오가 한계기도 하고 마지막일 테고 해서, 범신조는 굽어지는 내벽까지 비집고 들어갔다. 등줄기와 볼기에 보조개가 생기도록 꾸욱, 넣으니 윤오가 입술을 벌리고 고개를 뒤로 덜컥 젖혔다. 부들부들 떠는 몸이 안쓰럽다. 가슴을 가로지른 팔을 지그시 눌러 떨어지지 않게 했다.

이윽고 온몸이 격차 없이 빠듯하게 들어찼을 때 팔을 다시 내려 선단을 둥글렸다. 힘없이 정액이 질금질금 새어 나온다.

“더 넣는다.”

“더…?”

윤오가 멀거니 중얼거렸다. 신조는 이제 얼마 되지 않는 윤오의 정액으로 인해 젖은 손을 오금 아래에 넣었다. 다리를 들게 하고 몸을 앞으로 밀어 지그시 눌렀다. 범신조도 이를 깨물었고 윤오도 고개를 돌려 괴고 있던 팔을 물었다.

점점 더 깊이, 뿌리까지 완전히, 더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들어가 굽어진 곳 너머까지 찌르자 윤오는 머릿골이 빠지는 것만 같았다.

“나… 망가진 거 아냐…?”

눈물을 찔끔 흘리며 윤오가 훌쩍였다. 눈가 역시 짓물렀다. 혀로 빨아 주며 범신조는 대답을 미뤘다. 그리고는 꽉 맞아 들어간 곳에서 빠지지 않을 정도로만 움직였다. 체향을 완전히 풀어 윤오의 몸에 쏟아부었다. 발정기가 끝나가며 점점 줄어든 윤오와 달리 범신조의 것은 그동안은 자제했었다는 양 파도처럼 쏟아졌다. 둘은 그토록 싫어하던 바다속에 잠기듯 끝으로 향해갔다.

“흑… 아… 나, 입… 아, 입 맞춰 줘….”

울먹이며 고개를 돌려 애원하는 모습에 범신조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저 입술로, 저 얼굴로, 저 눈빛과 저 목소리로 원한다면 뭐든 기꺼이 들어줄 수 있을 거다. 네가 죽었으면 좋겠다 하더라도. 그런데 고작 입맞춤이라니. 오히려 자신이 애원하고 갈구해야 할 행위였다.

몸을 들어 고개가 꺾이도록 돌린 윤오의 입술에 입 맞췄다. 몸이 옆으로 휜 채 짓눌렸다. 윤오는 범신조의 몸에 그대로 터질 것처럼 눌린 채 입술까지 막힌 상황이 되었다. 다소 가학적이라 할 수 있는 상태로 윤오는 마지막 절정에 가까워져 갔다.

“웃, 읍… 흑….”

입술이 가까스로 떨어질 때마다 턱턱 잘린 신음이 터졌다. 윤오의 오금을 들어 올린 범신조의 팔뚝과 손 역시 더 힘을 주지 않기 위해 애쓰느라 떨릴 지경이었다. 아주 깊은 곳까지 들어찬 것이 윤오를 마른 절정으로 밀고 갔다가 예고도 없이 훅 빠졌다.

“아아아아…!”

동시에 입술이 떨어지며 윤오가 몸을 떨기 시작했다. 이가 딱 부딪힐 정도로 떨었다. 질끈 감은 눈시울이 아래로 기울었다. 범신조가 목에 핏대를 세운 채로 윤오의 입구에 사정했다. 그러나 너무 안에 사정하면 윤오가 힘들 테니 겨우 빼냈다. 마음 같아선 그대로 붙어 살고 싶다.

“흐윽, 흑. 허… 허엉….”

작게 흐느끼던 끝에 오열하듯 울음을 터뜨리는 이유는 힘들어서일 게 분명했다. 범신조 역시 그답지 않게 지친 상태였다. 이성을 잃은 김윤오를 앞두고 적당히라는 선을 지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목을 좌우로 기울여 뭉친 어깨를 풀고 제 손으로 얼굴을 감싼 윤오를 바로 눕혔다. 그리고 이젠 제 혀만큼 익숙해진 윤오의 것을 입에 담았다.

“흐으윽… 흑, 그만해…. 죽을 거엇… 흐으으윽.”

말을 채 끝내지 못한 윤오가 심하게 헐떡이며 범신조의 머리채를 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윤오의 것이 제 입에서 풀이 죽었다. 씁쓸한 액만 조금 나올 뿐이었다. 범신조는 아프지 않게 혀로 삭삭 문질러 주었다. 그사이에 머리채를 쥐고 있던 손이 아래로 서서히 미끄러지고 있었다.

“…….”

범신조가 입가를 훔치며 고개를 들었을 때, 윤오는 안쓰러울 만큼 흠뻑 젖은 얼굴로 실신한 상태였다.

“…많이 건강해졌네.”

범신조가 혀로 볼 안을 쓸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링거라도 맞히는 게 좋겠다. 필요하다면 보약도 좋고.

며칠 만에 몸이 축나서 탄탄하던 몸도 빛나던 얼굴도 초췌해진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시트째 윤오를 감싸 안았다. 

“자…?”

조용히 묻고도 부족해서 고개를 기울여 코를 깨물었다. 반응은 없었다. 귀를 기울여 새근새근, 울음기에 겨운 숨소리가 나오는 것까지 확인한 뒤 그는 천천히 욕실로 향했다. 발걸음마다 그의 체향이 눅진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윤오의 발정기가 폭주까지 가진 않을 정도로 조금씩 풀긴 했지만, 중독 수준으로 취하도록 계속 조절하고 있던 향이었다. 그리고 죽순 내음이 흐려진 지금엔 그 향마저 오롯이 삼켜질 정도로 그것이 집요하고 지독하게 터져 나오고 있었다.

원래부터 이렇게 하고 싶었다. 사실은 늘 이러고 싶다. 범신조는 늦은 욕망을 해갈하듯 이 넓은 공간을 전부 그의 체향으로 채워 그 안에 윤오를 가두며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너를 잃을 수는 없다고. 또 잃을 수는 없다고.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 * *

부스스하게 깨어난 윤오의 머리는 엉망이었다. 그러나 이리저리 뻗친 머리는 다른 엉망인 것들에 묻혀 중요한 문제가 되지 못했다.

“어때?”

감시 카메라를 달아 내내 보고 있기라도 했나, 깬 걸 어떻게 알았는지 바로 방에 들어오는 범신조를 향해 윤오가 눈을 감고 얼굴을 찌푸린 채 웅얼거렸다.

“내장이 다 헤집어진 것 같아….”

“하아.”

김윤오는 이상성욕자들을 자극할 발언들을 서슴없이 하곤 한다. 범신조는 배 속도 아니고 내장을 운운하는 김윤오의 옆에 비집고 앉아서 뜨거운 손으로 윤오의 배를 느리게 문질렀다.

“안쪽에 온통 멍이 든 거 아냐…? 확인할 수도 없잖아….”

게다가 목소리는 어떠한가. 연달아 자극적인 말을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제가 듣기에도 고역일 정도로 거칠게 쉬어 있었다. 거의 음성변조를 한 수준이었다.

범신조는 들고 있던 머그컵을 협탁에 내려놓았다. 내용물은 꿀을 넣은 생강차였다. 윤오의 목 상태를 익히 예상하고 준비해둔 것이다. 다음 순간 그는 윤오의 팔 사이로 손을 넣어 몸을 일으켜 앉혔다. 다 큰 성인 남성인데 졸지에 인형 다루듯이 다루어져 얼떨떨한 얼굴을 가볍게 한번 쓸고, 연이어 입술로 컵을 갖다 대는 손길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재빠르기만 했다.

윤오는 적당히 식은 차를 조금씩 나눠 마셨다. 마실 때마다 목이 아파서 인상이 찌푸려졌다. 게다가 머리는 멍했고 피부는 따끔거렸다.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겪은 뒤에 몸 상태가 이렇게 안 좋을 거면 발정기는 없어져야 맞는 거 아냐?”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자제한다고 했는데도 그 자제력이 아주 많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그런 반성을 속으로만 한 범신조는 입을 다물고 차만 틈틈이 넘겨 줬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윤오의 눈이 다시 가물가물 감기기 시작했다. 진이 잔뜩 빠진 만큼 많이 자야만 회복이 될 것이다. 범신조는 잔을 옆에 두고 윤오를 침대 헤드에 기대게 했다. 그리고 치약을 묻힌 칫솔을 가져와선 윤오의 볼을 꾹 눌러 안에 넣었다.

윤오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아주 많이 아픈 것도 아니고 그냥 피곤한 건데, 완전히 갓난아기를 대하는 것처럼 구니 기분이 이상했다. 싫다고 밀치자니 졸리고, 그대로 두자니 꼴이 우습고….

“그냥 내가 할게.”

결국 범신조를 밀쳤다. 무엇보다 침대에서 양치하고 싶지 않았다. 비척대며 걷는 눈이 거의 감겨 있었다. 뒤를 쫓아오던 범신조가 윤오의 이마를 감싸서 옆으로 밀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마를 찧었을 것이다.

그가 안내하는 대로 발을 끌며 세면대까지 온 윤오는 거품을 뱉었다.

“내가 씻겼어.”

수건을 내밀며 범신조가 먼저 선수쳤다. 들어온 김에 씻을까 했던 걸 눈치챈 모양이다. 그는 윤오를 다시 끌어 침대로 데려왔다. 눕혀주기도 전에 먼저 털썩 누운 윤오가 몸을 옆으로 웅크려선 베개를 껴안고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그 지친 옆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범신조는 손으로 머리칼을 거푸 넘겨주었다. 땀 하나 없이 부들부들한 머리카락과 보송한 뺨이 분명히 발정기가 끝났음을 보여주었다.

비량아에게는 풍랑과도 같은 시간이었겠으나, 범신조는 그의 몸에 와닿는 쾌감에도 불구하고 꿈결 같던 시간이었다. 네가 돌아왔다. 돌아와서, 내가 이끌어낸 게 아닌 발정기를 겪었다. 처음이었다.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늘 내 앞에선 경계심을 풀지 않고 풀 일조차 없을 것처럼 굴던 너였는데….

그는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윤오의 손을 잡아 입가로 가져갔다.

“비량아….”

조용히 중얼거린다.

그러나 무엇보다 궁금한 건 이제는 네 마음에 내리는 서리가 멈추었을까 하는 것이다. 아직 완전히 멎지 않아도 된다. 내가 다시 네 앞에 매일매일 꽃밭을 피울 수 있다면.

서리가 내리는 계절이 온다. 이번 겨울이 비량아에게 춥지 않은 계절이면 좋겠다. 추워도 춥다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함께 봄을 맞고 싶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