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김윤오가 아프다.
열이 나고 근육통을 앓았다. 기침도 했고 자꾸 잠만 잤다. 분명히 감기 몸살의 증상이었다. 하지만 겨울이 무르익으며 해가 기웃기웃 넘어갈 때가 되어서인지 범신조는 그냥 감기로 가벼이 넘길 수 없었다. 또 중요한 순간에 한쪽 눈을 감은 것처럼 시기를 놓치고 말까 봐, 그는 윤오를 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리고 그러는 과정에서 심하게 싸웠다.
“병원은 싫다고…!”
윤오로선 모로 보아도 감기에 불과하고 고열도 아닌 미열만 좀 오르내리는 상황에 병원이라는 유난을 떨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병원이라는 공간은 아무리 특실이든 VVIP실이든 그 두른 벽이 사람의 기운을 빨아먹기라도 하는 양 아프지 않다가도 아프게 느껴져서 싫었다. 병원 가기 싫다고 떼를 쓰는 어린애가 되고 싶지 않지만, 애초에 이거로 병원에 가자며 애 취급을 하는 건 범신조였다.
무엇보다… 범신조와 함께 입원했을 때의 기억이 나서 싫었다. 범신조는 잠들어 있고 자신은 끝없는 회색빛 세상에 갇혀 있던 기억이.
“아니. 안 돼. 이 문제는 양보 못 해. 안 해.”
하지만 범신조는 완고했다.
“이대로 너를 들고 그냥 나갈 수도 있어. 끌고 갈 수도 있는데 참는 거라고.”
그 말에 윤오는 이를 꽉 깨물었다. 범신조는 자신을 노려보는 눈길을 묵묵히 받았다. 그 눈길이 제 마음을 다 태우려 해도 버텼다.
말했듯이, 이런 문제에서는 양보할 생각이 없다. 미안하지만 스물 다섯이 되지 못하고 죽는 김윤오보다 평생 자신을 증오하더라도 오래 사는 김윤오가 보고 싶으니까. 그의 말대로, 이 부분만은 양보할 수 없었다.
“그래. 마음대로 해 봐.”
윤오가 이를 갈며 대답하더니 서재로 향한다. 손님방에 들어가서 고집스럽게 나오지 않던 때가 기억에 선명해 범신조는 바로 그 뒤를 쫓았다.
아슬아슬한 찰나에 서재 문이 쾅 닫혔으나 다행히 그의 손을 끼울 수 있었다. 윤오가 잠시 망설여 힘이 풀린 사이에 지끈거리는 손이 망설임 없이 문간을 잡았다. 정신 차리고 다시 문을 닫으려 했지만 이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윤오는 황당함과 당혹과 화가 뒤섞인 복잡한 눈으로 범신조의 얼굴과, 그의 피가 터져 고이기 시작한 손마디를 번갈아 보았다.
“이제 병원 갈 이유가 생겼네.”
“…약 발라.”
“아. 이거로는 부족해?”
짧게 웃은 그가 다른 손으로 윤오의 손 위를 잡은 채 다시 한번 거세게 문을 닫았다. 미닫이 형식의 문이 쾅 닫혔다. 분명히 부러졌을 것이다. 적어도 금이 갔을 정도는 될 거다. 하얗게 질린 윤오가 손을 놓으려는데, 진저리치며 떨어지려는 손을 신조는 도리어 더 세게 쥐었다. 함께 쥐고 있는 문이 부서질 것 같다.
“이제 가자.”
제 손을 스스로 아작낸 범신조가 상냥히 채근한다.
“절단이라도 내야 한다면 그렇게 하고.”
윤오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하필 몸도 저 미친 짓에 장단을 맞추듯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티를 내지 않으려 했는데 눈이 가물거리는 것만 보고도 아는지 범신조가 드디어 감싸 쥔 손을 놓고 목덜미를 쥐었다. 열을 가늠한 그가 윤오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나을 때까지만. 잠깐이면 돼, 김윤오.”
“…비량아라고 불러.”
의외의 대답에 범신조가 놀란 눈으로 돌아봤다. 제 손을 아작낼 때는 평온하더니 고작 이름 하나 부르란 말에 저런다. 윤오는 정말로 질려버렸다. 힘이 쭉 빠진 목소리에, 손에 남은 남을 다치게 한 감각에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심지어 두 번째였다. 평생 적응할 수 없을 거다. 아니, 또다시 겪고 싶지 않다. 손등으로 입가를 꾹꾹 누르며 겨우 중얼거렸다.
“새로 태어나서까지 미친놈하고 지내게 된 걸 인정하고 싶지가 않네, 지금만큼은.”
이름만 바꾼다고 그 사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그래서 범신조는 윤오가, 비량아가 나름 애쓰고 있다는 걸 알았다.
미안하고 동시에 미안하지 않게도, 그는 윤오가 자신을 다치게 한 순간 희열에 찼다. 더 다치게 하고 더 흉터를 내 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상처가 나을 때까지 함께 어디든 갇혀 있고 싶었다. 그는 제정신이 아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 끝없는 업보의 세월을 버틸 수 있었다.
“가는 길에 아이스크림 사 가자. 그거라도 먹어야지.”
아주 상냥하고 다정한 목소리와 말투로 어르며 신조는 식은땀에 젖은 비량아의 관자놀이를 입술로 찍었다.
애초에 범신조가 차를 멋대로 부른 뒤인지라, 둘이 집 안에서 난장을 펼치며 싸우는 동안 장용우와 운전기사는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드디어 대문이 열리자 장용우가 피우고 있던 담배를 황급히 지져 끈 뒤 몸을 돌렸다. 그리고 불안하게 싱글거리고 있는 제 상사를 보자마자 삼키듯 기침을 했다. 마음 같아서는 아주 솔직하게 묻고 싶다. 왜 그렇게 웃으십니까, 불안하게.
그리고 차에 탄 뒤에야 그의 상사가 손을 다쳤다는 걸 알았는데, 좀전의 미소가 떠오르며 어쩐지 섬뜩한 가설이 세워졌다. 혹시 김윤오 씨 놀리신다고 자해까지 하신 겁니까? 하지만 물을 자신은 없다. 김윤오의 분위기가 한없이 차가운 것만 봐도 알 만했다.
“비량아. 화났어?”
장용우는 그 순간 소름이 끼쳤다. 손은 심하게 다쳐 놓고 환하게 웃으며 저토록 다정한 목소리로 화났냐고 묻는 상사라니. 차라리 꿈이길 바랄 정도였다.
게다가 비량아는 대체 무엇인지. 둘 사이의 애칭인가? 그런데 애칭이 왜 저래? 아니, 애초에 그런 걸 짓는 것 자체가 범신조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 어린 애인이 만들자고 했다는 게 더 그럴싸해 보이겠으나, 얼마간 지켜본 바로는 김윤오는 그런 걸 만들 성격이 절대 아니었다.
숨죽여 뒷좌석을 살피던 장용우는 결국 윤오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것에 한숨을 삼켰다. 분명 고용주의 분위기는 이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졌는데, 왜 내 위는 더 쿡쿡 쑤시는가. 직장인의 비애였다.
* * *
김윤오는 감기 진단을, 범신조는 뼈에 금이 갔다는 진단을 받았다. 솔직히 골절 수준에서 끝난 것도 기적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세게 부딪혔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기는 전혀 의외가 아니었던 터라, 윤오는 조금 더 짜증이 났다.
감기일 줄 알았다. 뻔하고 흔해 빠진 병명을 진단받고 입구마저 다른 VIP 병실을 써야 하는 이유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런 병실이 병원에 열 몇 개씩 되는 것도 아닌지라, 하필 범신조가 누워 있던 그 곳이었다.
윤오는 아이보리빛의 따뜻한 병실을 울적한 눈으로 훑었다. 그때의 기억이 너무 선명해서 환한 병실 안이 마치 회색처럼 느껴진다. 윤오가 한숨을 내쉬었다.
손에 반깁스를 하고 돌아온 범신조는 헛웃음을 뱉었다. 처치할 게 따로 없는 만큼 먼저 병실로 가 있었던 윤오가 병실 문을 잠근 것이다.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고, 범신조는 장용우의 경악한 표정을 무시한 채 헛웃음을 뱉었다. 본래 그의 성격대로라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손잡이를 뜯어내야 했을 텐데. 그게 설령 제 공간이 아닌 병원이라도 상관없이 말이다.
그러나 범신조는 기다렸고, 링거를 빼기 위해 간호사가 문을 두드려 어쩔 수 없이 잠금이 풀리는 순간을 노렸다.
“실례.”
짧게 말한 그가 먼저 강한 힘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윤오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그래도 링거를 계속 하고 있는 것보다는 범신조가 안으로 들어오는 게 낫겠다 싶은 듯했다.
그리고 지금이다.
“아직도 화났어?”
범신조가 동글동글한 천혜향을 허공에 던졌다가 받으며 물었다. 윤오는 그가 장난치는 과일을 낚아채서 꼭지를 뜯었다. 허공에 신 과즙이 터졌다. 먼지처럼 반짝이는 걸 손을 내저어 치우는 순간 게임이라도 하는 듯 범신조가 천혜향을 가져갔다.
“이 부분은 양보 못 한다고 했어. 그냥 포기해.”
“…….”
“감기로 죽는 사람은 많아.”
“안 죽는 사람들이 더 많고.”
윤오가 맥없이 말했다.
잘 벗긴 과육을 내밀어도 먹지 않기에 범신조가 대신 우물우물 씹었다. 윤오는 과즙이 마르기 시작해 조금 당기는 손끝을 보다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과거에 매달려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너 아니야? 난 앞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나한텐 과거였던 적 없어.”
과연 양보 못 하는 문제라더니, 윤오의 말을 자르면서까지 범신조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나한테는 늘 현재야. 잊혀지지도 않는.”
“그래도…. 앞으로도 조금 기침하고 조금 열이 날 때마다 병원에 올 순 없잖아.”
“왜 없어.”
대꾸하는 목소리가 단호했다.
윤오가 앞으로, 라는 미래를 입에 담아 준 건 고맙지만, 그렇기에 더 조심하고 싶다. 이 기회를 잃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오지 않을 수도 있는 기회. 네 말대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는 기회. 무엇이든 과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다.
범신조는 무심한 태도로 윤오의 입술 사이에 과육을 밀어 넣고는 이어 말했다.
“안 아프면 돼, 김윤오. 그러면 병원에 올 일 따위는 없어.”
당연한 말을 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적어도 이 부분을 범신조가 양보할 수 없다는 건 확실히 알았다.
“나을 때까지만 있을게.”
범신조가 윤오의 고집을 이기기가 쉽지 않듯이, 윤오도 범신조의 고집을 도무지 이길 수 없을 때가 있다. 한 발 무르는 수밖에 없다. 결국 먼저 물러난 윤오를 달래듯이 범신조가 과육을 내밀었다.
병실은 따로 잡지 않았다. 그 역시 여기서 지낼 것이다. 더 많이 다쳤고 더 많이 아플 주제에 김윤오의 수발을 들며.
* * *
범신조의 손에서 반깁스가 사라질 때까지 윤오가 병원에 있게 되리란 건 정말로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윤오의 열은 미열 상태에서 자꾸만 오르내리길 반복했다. 상황이 안 좋을 때는 고열까지 치달았으나, 대부분 36.8도에서 37.3도 사이에서 오갔다. 크게 잠깐 아픈 것보다 길게 지지부진한 상태에 더 많이 지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범신조가 윤오의 상태에 대해 나았다는 말을 듣기 전까진 여기서 나가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은 만큼 나갈 수 없게 된 걸 텐데, 의외로 윤오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침착해졌다. 그게 마치 그간 제 손아귀를 빠져나가기 직전에 보여왔던 모습처럼 느껴져 범신조는 초조해졌다.
“나 그냥 피곤해서 그래.”
어느 밤, 윤오가 범신조의 눈가를 문지르며 속삭였다. 예민해져 잠을 이루지 못한 눈가가 까칠했다.
“안 잤어?”
윤오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척, 눈을 감고 다른 말을 하는 범신조의 볼을 꽉 꼬집었다. 설핏 미간을 찌푸리는 그에게 재차 말한다.
“나 정말 그냥 피곤해서 얌전한 거야.”
“…….”
“다시 화내고 그럴까? 그러면 좋겠어?”
늦은 밤이었고 밤낮없다는 병원조차 잠든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고요했다. 윤오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범신조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꼬집은 후에도 뺨을 떠나지 않고 가만가만 쓰다듬는 손길을 느꼈다. 그 손을 잡고 꾹 눌렀다.
“네가 날 미워하지 않으면 좋겠어.”
“…….”
“네가 나랑 같이 오래 살아 주면 좋겠어.”
차라리 자기 자신을 미워하라더니…. 범신조는 그가 살아 온 세월이 무색하게 이 순간만은 너무나도 어리게 느껴졌다. 그 순간 윤오는 비파가 떠올랐다. 그 아이는 범신조의 이런 면을 닮았구나. 겨우 나온 어리광 같은 게.
윤오는 잡힌 손을 빼내고 범신조를 껴안았다. 그리고 꽉 당겨 안았다.
“우리 진짜 바보 같다….”
솔직하게 말하기까지 대체 얼마만큼의 시간을 낭비했는지, 그리고 서로 껴안을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돌아왔는지.
윤오의 말에 범신조도 나직이 웃었다. 아마 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거겠지.
윤오가 아주 늦은 퇴원을 하게 된 건 12월 중순이 되어서였다. 어느덧 시간이 그렇게 흘러버린 거다.
“이제 집에 가자.”
퇴원 수속을 마치고 온 범신조가 병실로 들어서며 윤오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말을 해 줬다. 그를 위해 얌전히 있어 줬지만, 가벼운 감기 하나 때문에 이런 비싼 병실에 오래도록 입원했단 사실은 윤오에겐 여전히 낭비로 느껴졌다.
윤오는 이미 환복을 끝낸 상태였다. 집에 간다니 얼굴이 반짝였다. 귀여워서 범신조는 몸을 돌려 몰래 웃었다.
반깁스를 푼 만큼 범신조는 자신이 운전하겠다고 했다. 손에 아직 피멍은 남았으나 그는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하기는, 배에 칼이 꽂혔어도 흡연에 섹스까지 했었는데 손가락에 금이 간 것 정도야. 괴물 같은 회복력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윤오가 무심코 창밖을 보다가 웃었다.
“왜 웃어.”
“벌써 트리가 있어. 그러고 보니까 크리스마스가 코앞이잖아?”
“그런가.”
김윤오의 열이 내리지 않던 순간부터는 예민함이 극도로 치달아 날짜 가는 줄도 몰랐다. 열이 내려 안심했더니, 이번엔 얼마 남지 않은 새해가 그의 신경줄을 괴롭혔다. 벌써 크리스마스라고…. 입이 바싹 마르고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범신조를 아프게 하는 건 정말로 김윤오뿐이다.
“착한 일을 한 기억이 없어서 올해는 선물 받기 그른 것 같네.”
혼잣말을 한 윤오가 너는 어떠냐는 듯이 범신조에게 시선을 건넸다. 범신조는 짧게 비아냥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너 내가 무슨 벌을 받고 있는지 잊었어?”
착한 일은 그에게 거리가 먼 단어다. 애초에 착한 아이인 적도 없었다. 김윤오는 비아냥거리는 그 되물음을 받아쳤다.
“그럼 우린 서로 선물 주고받기라도 해야 하나? 받을 일이 없으니까?”
퇴원도 했겠다, 나오자마자 연말 분위기겠다, 윤오는 확실히 평소보다 들뜬 기색이었다. 그게 범신조의 마음을 가지고 논다. 네가 내게 줄 선물은 스물다섯, 스물여섯, 그 이상의 생일뿐인데…. 정말, 정말 이번에야말로 우리는 함께 스물다섯 너머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는 걸까.
벌써부터 기대해선 안 된다는 마음과 처음 경험하는 희망이 맞부딪힌다. 범신조는 끊기 시작한 담배가 갈급해졌다. 이렇게 기대하게 만들었다가 너를 잃게 되면 그야말로 완벽한 최고의 복수가 될 거다. 비량아 네가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덜 아문 손가락이 시큰거린다. 더 세게 찧을 걸 하는 후회가 든다. 아예 부러지게 할걸.
* * *
집으로 돌아온 윤오는 잠은 지겹다며 씻고 나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아이스크림 통을 든 채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범신조 역시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두 사람은 후속 시리즈가 많아 놔두면 끝없이 나오는 액션 영화를 틀었다. 잠이 올 때까지 보자며 이대로 있자며 상영되는 것을 보는 동안 아이스크림 한 통은 깨끗하게 비워졌고, 빈 통에 수저가 담긴 채 바닥에 내려졌으며, 범신조의 손은 윤오의 파자마 셔츠 안에, 다른 손은 윤오의 성기에 가 있었다.
화면 속에서는 주인공이 세상에서 가장 높다는 빌딩을 거꾸로 내려오는 중이었고 윤오는 그처럼 추락하는 것 같은 쾌감 속에 사정했다. 맞닿아 있던 범신조의 것은 여전히 단단해서, 사정 직후 예민한 곳에 대고 계속 비벼댈까 두려워 윤오도 손을 내려 그것을 맞잡았다.
“이게 선물이야?”
범신조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물었다. 사나운 말투가 차에서의 대화를 아직까지 꾸준히 복기하고 있었음을 알려줬다. 어느 부분에서 그의 가장 예민한 부분이 눌렸는지 심기가 뒤틀려 보였다. 그러니까 평소와 달리 페이스 조절이랄 것도 없이 윤오를 단번에 거칠게 절정으로 끌어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쩐지 제 것을 만질 때보다 범신조의 것을 만지고 있을 때 더 흥분된다. 등골이 조여드는 쾌감에 윤오가 할딱였다.
“너한텐….”
확신 없는 약속을 감히 던져 보기로 한다.
“내 생일을 선물해 줄게.”
범신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거의 동시에 그가 사정했다. 절정에 오른 사람치고 표정이 사나웠다.
“그냥 하는 말이라면, 이래놓고 또 날 엿 먹일 생각 따윌 하고 있다면 아예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이번에야말로 이래놓고 또 죽는다면 박제라도 하겠다는 듯한 이 갈린 목소리였다. 윤오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 확신이 있는 건 아니었다. 사실은, 범신조가 말했던 그간 단명한 범의 짝들이 죽어간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아무리 이번만은 다르다 해도 혹시 모를 운명이란 게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솟았다.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신 없는 기대라는 게 있었다. 그는 분명 이전과 달리 지금을 살고 있었다. 정말 뻔하고 지루한 말이지만… 아직도 종종 과거라기에 너무 선명한 비량아의 경험이 떠오르지만…. 그래도 아침이 되면 씻고, 범신조를 보고, 함께 커피를 마시며 천천히 김윤오로 돌아오고 있다. 그러려 하고 있다. 범신이 아니라 지금의 범신조, 너를 보면서.
윤오가 고개를 올려 입 맞췄다. 가볍게 입술을 포갰다가 떨어지려는 걸 고개가 쫓아와선 더 강하고 노골적으로 혀를 섞었다. 소파에 아예 파묻힐 것 같았다. 겨우 고개가 떨어졌다.
범신조는 손을 뻗어 물티슈로 묻은 액을 닦아낸 뒤엔, 잠깐 보였던 분노도 닦아낸 것처럼 속내를 읽을 수 없이 차분해져 있었다. 그는 윤오의 속옷만 입혀주고 바지는 벗겨놓은 채 맨다리를 제 허벅지 위에 올리고 쓸었다. 실내가 충분히 따뜻해서 이렇게 입고 있다고 추울 일은 없지만, 그래도 허벅지를 쓰는 손이 따뜻해서 절정 직후 뭉쳐 있던 다리가 노곤하게 풀렸다.
“난 네 말 안 믿어.”
따뜻한 손을 한 남자가 말했다.
“너 안 믿는다고.”
화면 속의 주인공은 죽지 않는 것이 용할 정도로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걸 보며 윤오가 한참 만에 대꾸했다.
“조금 전에 저 주인공이 뛰어내렸던 빌딩, 직접 보러 가자.”
“…….”
“내년에.”
물끄러미 응시하는 시선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윤오는 모르는 척 시침을 떼고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범신조가 윤오의 다리를 감쌌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가 떨어져 그의 이마가 무릎에 괴었다. 울진 않지만, 울고 싶은 것 같단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
* * *
둘은 이후에도 영화를 보았다. 상당히 많은 영화를 봤고 중간중간 서로를 만지기도 하며 마치 세상이 끝나기까지 며칠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연말을 낭비했다.
영화의 선정 기준은 단순명료했다. 해피엔딩일 것, 상업 영화일 것, 액션 씬이 들어갈 것.
몇몇 장면에서는 윤오가 ‘나 저기 가 봤어.’라고 했다. 같이 가자는 말은 없었다. 최근 침대보다 더 친해진 소파에 옆으로 누운 범신조는 뒤에서 감싸 안은 윤오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귀신처럼 사느라 바다를 넘지 못하는 벌도 윤오의 스물다섯 번째 생일과 함께 사라지지 않을까 하고. 공항만 가도, 부둣가에만 가도 그저 망망대해가 아닌 거대한 벽과 마주 선 것 같은 그 느낌을 더는 받지 않게 될까.
그리고 새해는 그들의 생각보다 덤덤한 기분으로 맞이하게 됐다. 너무 오래 기다려왔기 때문에 도리어 현실감이 없어서 그랬다. 얼떨떨하기야 했다. 2분이 채 남지 않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기도 힘들 텐데, 그 2분이 최근 이틀보다 더 긴장됐다.
윤오는 만 나이로 따지지 않아도 되는 건지 물었다. 범신조는 아주 재미없는 말투로 재미있는 해석을 내놓았다. 당연히 우리가 아는 나이지, 염왕이 만 나이를 따질 거 같아?
맞는 말이었다. 그러면 생일을 따지는 것도 의미가 없지 않나 싶은데. 윤오는 마음이 가벼워지려 하는데, 범신조는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내 생일 2월이야.”
윤오는 추운 날에 태어났다. 유별나게 추웠고 눈이 펑펑 내렸다고 한다.
“나 생크림 케이크 먹고 싶어.”
눈이 잔뜩 내린 풍경처럼 흰 케이크가 먹고 싶었다. 윤오의 말에 그제야 범신조의 인상이 조금 풀어졌다.
“딸기 들어간 거.”
“그땐 아직 딸기 철이 아닐 텐데.”
“그래도.”
“알았어.”
틀어놓은 TV에서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9부터 시작하는 외침에는 설렘이 가득했다. 윤오와 범신조 앞에는 아무도 입을 대지 않은 와인 잔이 놓여 있었다.
― …3, 2, 1!
― 시청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라겠습니다!
카운트다운이 끝나고 곧 타종하는 소리가 들렸다. 터지는 폭죽과 서로를 보며 웃는 연인을 클로즈업하는 것까지.
둘은 그 모습을 심심하게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공식적으로 해가 바뀌었지만, 급격히 뛰던 심박수가 서서히 차분해지는 것 말고는 아직 변화를 느낄 수 없었다. 너무나 평범했다. 그들이 그토록 가지고 싶어 했던 평범함.
윤오는 저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훅 내쉬었다. 그리고는 와인잔을 들어 한 번에 들이켰다. 값비싼 와인이 술 맛을 잘 모르는 김윤오의 입에서 단숨에 사라졌다.
“여행 갔을 때 카운트다운 했는데 거긴 서로 키스하더라.”
“그래서?”
했냐는 물음이었다. 윤오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자는 사람이 있는데 말았어.”
“뭐라고 하고.”
아마도 애인이 있다는 말을 기대한 모양인데, 김윤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영 의외의 것이었다.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아도 한참 많다고 했지.”
아마 비량아때의 기억까지, 그리고 그 이후의 시간까지 다 합쳐서 한 말인가 보다. 범신조는 그 농담의 저의를 간파하고 헛웃음을 뱉었다.
“그게 통해?”
아무리 보아도 앳된 얼굴. 외국인이 본다면 10대로 오해해도 충분한 얼굴이었다. 그럼, 그 새끼는 10대로 오해한 상태로 키스하자고 한 건가? 범신조가 웃는 낯에 사나운 손짓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동양인은 정말 안 늙는다고 하던데. 그래서 그런지 믿는 기색이었어.”
“아하.”
“근데 하나는 좋더라.”
카운트다운까지는 설레도 그 직후는 어쩐지 허무하다. 연도는 아주 허무하게 바뀌고, 축제 같던 분위기는 금세 식어서 누군가 심하게 토하는 바람에 김이 샌 파티처럼 가라앉기 마련이다.
윤오는 여행지에서의 새해를 떠올렸다. 평소 어디 있는지도 모르던 금인들이 거리낌없이 체향을 내뿜던. 체향이라는 말이 아직 더 익숙해서, 남발하는 페로몬 속에서도 윤오는 고집스레 체향이 지독하단 생각을 했다.
그래도 그에게는 몸에서 먼저 받아들인 짝이 있기에, 흥분에 겨워 하룻밤의 상대를 찾는 그 무리 속에서 홀로 침착할 수 있었다. 뜨겁게 데운 와인을 마시면서.
“너랑 각인해서, 다니기 편하더라.”
그리고 좀 많이 보고 싶었다는 말은 삼키기로 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진 후, 윤오는 의미 없는 광고만 이어지는 TV를 끄고 왔다. 그 침묵을 가르는 범신조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네 생일 2월인 거 알고 있었어.”
“알고 있을 줄 알았어.”
윤오는 망설이다가 범신조의 옆에 가 앉았다. 머뭇거린 끝에 장난스럽게, “나 패러글라이딩 하고 싶어.” 하는 말을 뱉었다. 당연히 반응은 안 좋다.
“법의관들이 절대 안 한다는 스포츠 중 하나 말이지.”
“그래서 안 된다고?”
“그건 스물여덟 살이 되어도 안 돼.”
다 해도 된다더니 약속을 자연스럽게 어기며 제한을 둔다. 어이없어하던 윤오는 문득 새해 카운트다운을 하기 직전까지 자신에게 플러팅을 하던 한 알파를 떠올렸다. 그가 노골적으로 흘리는 페로몬을 맡아도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었다. 애인이 있냔 말에 솔직히 말하긴 했다. 그는 짝이 있고, 이미 각인도 했다고. 아까 범신조에게 한 말은 거짓말이었다.
‘그러면 베타끼리 하는 섹스 같겠는데. 한번 해 보지 않을래? 너라면 박혀도 좋아, 예쁜이.’
외국에 와서 새로 알게 된 냄새가 있다면 대마 냄새일 것이다. 알파에게서는 대마 특유의 지린내가 났다. 윤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때 주머니에는 범신조의 카드가 있었고, 그걸 들고 어디서든 갑자기 윤오가 긁지 않을 법한 금액을 결제하기만 해도 범신조가 자신을 찾을 거란 확신도 있었다. 그냥 확 긁어버릴까.
‘안 돼. 내 짝은 미쳐 있거든.’
대신 윤오는 플라스틱 잔을 문 채 뭉개지는 발음으로 대꾸했다. 달달하다 생각했는데 제법 도수가 있었다.
‘미쳐 있다고? 집착이 심해?’
‘내 카드 내역까지 확인하고 있지.’
‘미쳤군. 네 말대로.’
윤오의 서툰 영어에도 곧잘 이해한 그 알파는 마구 웃어댔다. 윤오도 비식 웃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귀찮고 성가셔, 이 추근덕댐이 길어진다면 카운트다운이고 뭐고 그냥 돌아갈 생각이었다. 다행히도 이 알파는 집요하진 않았다. 대신 이 한마디를 남기며 돌아섰다.
‘조심해. 아무리 짝이어도, 아무리 알파여도 통제하는 놈은 제정신이 아니야. 아직 농담처럼 미쳤다고 할 수 있을 때 벗어나라고.’
“통제하는 알파하고는 헤어지라던데.”
“알파? 아, 금인? 누가 그러는데.”
“그냥. 사람들이.”
“나도 내가 그저 네 친구거나 네 가족이었으면 헤어지라고 했을 거야.”
어느새 윤오는 범신조의 다리를 가두듯 그의 허벅지 양옆에 무릎을 대고 있었다. 몸이 부쩍 가깝게 붙었다. 들이켠 와인에서 그 새해의 취기를 떠올린 양 몸이 노곤했다.
“그런데?”
“그런데 난 네 친구도 가족도 아니고 네 짝이니까….”
“…….”
“들키지 않게 해 볼게.”
안 그래도 아이스크림을 준 이후로 골목에 있던 차가 모두 없어진 건 알고 있었다. 사람을 치운 건 아니고 눈에 띄지 않도록 다른 곳에 배치했을 거다. 아니면 아예 다른 방법을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언젠가 또 감기를 핑계로 병원에 입원시키고 몸에 GPS칩 같은 걸 심는 건 아닌가 하는 과도한 상상도 해 본다. 영 말도 안 되는 상상은 아니란 게 어이없긴 했다.
“들키지 마. 진짜로.”
그 말은 즉 들키지만 않는다면 눈감아 주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한쪽 눈을 감게 되는 저주에 걸린 건 아무래도 범신조만이 아닌 것 같다.
* * *
2월 21일. 김윤오의 생일은 소리 없이 다가왔다. 범신조는 커다란 흰색 케이크를 사 왔다. 먹을 입이 많은 것도 아닌데 3단 케이크였다. 그걸 보고 한참 웃은 윤오는 ‘이건 웨딩 케이크잖아.’하고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오븐에서 나올 때부터 이 상태였을 것처럼 완벽한 케이크 안에는 시트 칸칸마다 딸기가 들어 있었다. 자르지 않아도 아름답고, 잘라도 아름다운 모양이었다. 단언컨대 윤오가 봐 온 그 어느 케이크보다 완벽했다.
범신조는 이제 담배를 끊었지만, 성냥갑은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성냥을 그어 초를 밝혔다. 흔히들 하는 것처럼 짧은 초 다섯 개, 긴 초 두 개로 간략하게 해도 될 것을, 그는 굳이 스물다섯 개를 챙겨왔다. 그 눈부시게 환한 초 다발을 끄는 것은 조금 힘겨웠다.
간신히 모두 끈 뒤, 탄 냄새가 남은 생일 케이크 앞에서 범신조는 문득 제 눈가를 손으로 감싸 쥐었다. 눈만 가린 손 아래로 입술을 깨무는 것이 보였다.
“좋은 날에 우네.”
윤오는 초 친다는 듯이 타박했지만, 말끝이나 목소리나 타박과는 거리가 멀었다.
생일은 새해 카운트다운과 비슷하다. 생각보다 허무하고 생각보다 겸연쩍다. 그러니 괜히 유난을 부려서 민망하게 하지 말아 달라는 애원 섞인 부탁에 범신조는 이렇게 일축했다.
나는 이날까지 근 150년을 기다려 왔어.
고작 자정까지의 10초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선녀가 내려와 그의 옷자락으로 바위를 스쳐 그것만으로 바위가 닳아 모래가 되는 시간. 그만큼의 까마득한 시간.
비량아를 만나고 범신으로서 죽은 뒤 사람이 되기까지의 시간과 사람이 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은 합칠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길었다.
김윤오는 손끝으로 아름다운 케이크를 훔쳤다. 크림이 묻은 손가락을 범신조의 입술로 가져가니 그가 머뭇거린 끝에 살풋 물었다. 그리고 곧 혀로 깊게 빨아 줬다. 깨끗해진 손가락으로 윤오가 이번엔 크림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간 뒤, 범신조를 껴안고 입을 맞췄다. 다디단 혀끼리 얽혔다. 품에 들어차는 몸이 뜨겁고 거대했다.
억겁의 시간이었다. 고작 스물다섯 번째의 생일,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다섯 번의 장례 끝에 얻은 기적. 억겁의 기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