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20/21)

  3.

김윤오의 생일이 지난 지 삼 개월이 되었다. 김윤오는 생일이 지나자마자 선언했다.

“나 운전면허 딸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범신조는 윤오가 왜 면허가 필요한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시간은 돈인 세상에서 돈도 시간도 차고 넘치게 많은 그가 어디든 태워다 줄 수 있는데 그게 필요한가 싶었다. 그리고 떨떠름한 기색으로 이 생각을 숨김없이 이야기하기도 했다.

물론 설득은 통하지 않았다. 김윤오의 입장에서 애초에 저 말은 설득을 위한 노력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때 윤오는 개별 상자로 포장되어 있으며 그 안에서 열두 가지 종류의 피규어가 랜덤하게 나오는 상자를 까고 있었다. 얼마 전 범신조와 영화를 보러 나왔을 때 영화관 안에 있던 장난감 가게에서 받은 것이다. 입점 이벤트로 뽑기를 하길래 심심해서 뽑았더니 당첨됐다. 해가 바뀌더니 운이라곤 없던 제 인생에 이런 소소한 행운도 생기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지금 깐 상자에선 마침 키링으로도 쓸 수 있게 체인이 달린 피규어가 나왔다. 유명한 흰 강아지 캐릭터였다.

“딸 거야.”

윤오는 검지에 체인을 걸고 범신조 앞으로 불쑥 들이밀며 선언했다. 열두 개의 상자 중 당연히 한 번은 나올 법한 키링 피규어가 마치 계시라도 된다는 듯이 말이다.

“약속했잖아. 생일이 지나면 뭐든 하라고.”

얼핏 들으면 네다섯 살짜리 아이와 그 아이의 떼를 들어 주지 않으려는 부모의 대화 같았다. 실제로 범신조는 부모의 마음을 조금 느끼고 있었다. 뭐든 하게 해 줄 것 같았는데 막상 때가 되니 걱정이 앞선다.

졸지에 거짓말을 하게 된 건 미안하지만, 생일이 지났음에도 그는 뼛속까지 새겨진 두려움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건 자정이 지나가 1월 1일이 되자마자 자동으로 바뀌는 연도 숫자 같은 게 아니었다. 업보였고, 숙명이었고, 습관이었다.

“범신조….”

대답이 없는 짝의 모습에 윤오의 표정이 조금 흐려졌다. 머뭇거리는 입술과 피하는 시선에서 범신조는 윤오가 가지고 있는 업보와 숙명과 습관을 읽어냈다. 범신조가 윤오를 잃을까 봐 늘 두려운 것처럼, 윤오 역시 언제고 신조가 자신의 자유를 빼앗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차마 안 된다고 할 수가 없었다. 소파에 있던 그는 바닥에 앉아 박스를 마구 늘어놓는 윤오의 앞으로 가 털썩 앉았다. 박스를 덮고 있던 조금 빳빳한 종이를 가져가 손으로 만지작거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새를 만들어선 윤오의 손등 위에 올렸다.

“알았어.”

종이새를 물끄러미 보던 윤오가 여전히 시선을 내린 채 조용히 웃었다. 보기 더럽게 힘든 비싼 웃음이었다. 자연히 넋이 나간다.

이맘때쯤 비량아가 떠났었다. 그가 기억하는 이맘때의 비량아는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수척했고 야위고 눈빛만 형형했다. 미쳐가고 있었다. 그 모든 이유에는 자신이 있었다. 지독하게 서툴렀던 건 비량아와 자신 둘 다였고, 지독하게 잔인하게 군 건 자신이었다.

자기혐오와 이만큼의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후회가 다시 서리처럼 범신조에게 뿌려지려 할 때, 윤오가 웃음이 남은 얼굴로 물었다.

“면허 따고 주행 연수할 때 가장 많이 헤어진다고 하던데.”

그래서 연인들끼린 운전 배우는 거 아니라고 진지하게 말하는 걸 보다가 범신조는 픽 웃고 말았다.

“난 네가 날 죽이려 해도 헤어질 생각이 없었는데, 고작 운전 가지고 그러겠어?”

잘잘못을 따지려는 말투가 아니라 무척 장난스러운 말투라서 윤오도 찰나 마음이 무겁긴 하나 곧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정말이네, 하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가벼웠다.

그리고 실제로 둘은 싸우지 않았다. 윤오는 한 번에 면허를 땄고 바로 범신조에게 주행 연수를 받았다.

범신조는 의외로 아주 모범적인 운전을 했다. 그리고 윤오는 좀 거칠게 운전했다. 범신조가 혼낸 건 그거 하나였다. 다칠 일을 만들지 마, 다치면 집에 가둬 버릴 거야. 나직이 엄포를 놓는 목소리는 오히려 차분해서 더 무서웠다.

‘난 네가 운전 거칠게 할 줄 알았어….’

‘내가 운전하는 거 몇 번 타 봤잖아.’

‘그땐 내가 같이 타서 그런 줄 알았지….’

‘제대로 알았네. 네가 탈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하는 거야.’

그 말에 윤오는 조금 민망했지만 웃고 말았다. 범신조는 지구는 자전한다,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 같은 불변의 진리를 말하듯이 말을 이었다.

‘난 네가 안전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쓸 거야.’

윤오는 그 말에 조금 웃었다.

‘내 앞에서 담배 피워놓고는 무슨.’

‘옛날 사람이라 그랬어. 그땐 애들도 피웠었거든.’

미간을 찌푸린 범신조가 응수했다. 그렇게 나온다면 뭐, 어쩔 수 없다.

그 대화를 할 때 그들이 탄 차는 차고에 들어와 있었다. 이 사방이 가려진 매력적인 공간에 들어온 지는 조금 되었고, 윤오는 배움이 빠른 학생이었다.

범신조는 핸들을 만지작거리는 윤오를 미열 섞인 시선으로 훑었다. 그리고 운전석 너비를 가늠하다가 카섹스를 하기엔 좋은 환경이 아니란 판단을 내렸다. 너비가 좀 넓고, 천장 높이도 있는 차가 한 대 필요할 것 같았다. 김윤오가 타고 다닐 것도 물론 필요했고.

그게 범신조가 지금 차를 사러 나온 계기였다. 마치 장을 보러 나오듯이.

매장의 문은 잠겨 있었고, 소수만 내부를 돌아다녔다. 내부에 있는 손님은 많아야 네 명, 대충 보아 세 명 정도로 보였다. 직원이 손님보다 더 많은 탓에 북적이는 느낌은 그대로였다. 새로 들어오려는 사람이 있다면 내부가 혼잡하다는 사유를 들어 정중하게 돌려보냈다.

바깥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어서 내부 분위기 역시 조용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범신조는 커피가 식도록 내버려 둔 채 카탈로그를 넘겼다. 직원은 필요할 때 부르겠다며 물린 참이었다. 범신조가 바라는 바는 명확했다. 튼튼하고, 수리비가 아주 많이 나오는 것. 아주, 아주 많이.

그러다 틈틈이 그는 시계를 확인했다. 윤오는 서점을 다녀오겠다고 했다. 이제 그의 서재에는 그가 고르지 않은 책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평소라면 그가 들여다보지도 않을 책도 있었다. 물론 아주 만족스러웠다.

근처라고 했고 정각까지 이곳으로 직접 오겠다고 했으니 곧 도착할 거다. 정각까지는 십 분가량 남았다. 데리러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김윤오는 범신조의 과한 간섭, 과한 관심을 싫어했다. 범신조도 줄이려고 노력하는 척을 하는 중이었다. 노력 말고 노력하는 척.

그러나 도무지 시간이 가질 않는다. 언제 다시 태어날지 모르는 짝을 기다리는 시간은 버텼으면서 곧 만날 십 분은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질까. 그냥 데리러 가 버릴까 싶었다. 지루하기도 했다.

“고객님, 현재 출차 기간이 어느 정도 걸릴지 먼저 보여드려도 될까요?”

마침 범신조에게 딜러 중 한 명이 다가와 정중하게 물었다. 어차피 조건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던 터라 범신조는 카탈로그를 덮고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데. 다른 건 없나?”

그 때 한 남자가 범신조가 앉은 테이블 쪽으로 다가왔다. 말투가 느긋했다. 윤오도 목소리 탓인지 말투가 느린 듯한 경향이 있어서 무심코 보게 됐다.

테이블을 지나갈 줄 알았던 그는 범신조의 근처에서 멈춰 섰다. 엄지와 검지를 딱, 딱 부딪히며 인상을 찌푸리더니 그 있잖아, 하고 운을 뗀다.

“좀 더 무난한 거면 좋겠는데.”

남자는 무난함이란 단어를 좀 지루하고 싱거운 것을 묘사하듯이 툭 뱉었다. 누가 봐도 본인 취향을 고르는 게 아니었다. 마침 저 역시 그런 경우인지라, 범신조는 남은 십 분 가량을 채우려 그 대화나 듣기로 했다. 들어보고 괜찮다 싶으면 윤오의 차를 고르는데 참고하기 위해서. 범신조의 취향은 아무래도 클래식한 계열인지라 윤오의 취향과는 차이가 있었다.

“저번에 산 것도 무난했던 것 같은데. 대체 도련님은 뭐가 맘에 안 든 거지?”

하관을 문지르며 미간을 찌푸린 남자는 곧 신경질적으로 머리도 넘길 기세였다. 그러나 그 짜증스럽고 초조한 몸짓과 달리 도련님이라고 말할 때는 목소리가 제법 부드러워졌다. 범신조가 윤오의 이름을 입에 담을 때처럼.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웃던 딜러가 “고르신 것들이 대체로 무난해서 가장 인기가 좋아요. 유행도 타지 않고….” 하고 설명을 재개했다.

“카탈로그 다시… 아. 그거, 혹시 안 보는 겁니까?”

턱을 괸 채 있던 범신조에게 남자가 다가왔다. 그리고 범신조가 손으로 책자를 밀어주자 그의 앞 빈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근데 이건 출차가 아무리 빨라도 1년이라면서.”

페이지를 거칠게 넘긴 남자가 사진 하나를 쿡 가리켰다. 최근 인기 있는 모델은 기본 2년은 기다려야 하는 걸 생각하면 아주 빠른 편이었으나 도무지 불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그 모델은 마침 범신조도 눈여겨보던 것이었다. 시트 옵션이 윤오가 좋아할 만한 촉감이란 이유 하나로. 1년이라…. 범신조의 입매도 좀 뒤틀렸다.

“진짜 도련님 입맛 맞춰 주기 힘드네. 조금 있다가 다시 부를게요.”

골치 아픈 듯 관자놀이를 괸 남자는 직원에게 아이스 커피를 요청했다. 범신조는 식은 커피를 마시며 다리를 포개 꼬았다. 그 역시 신장이나 체구나 상당히 큰데 상대 남자도 그런 듯 보였다. 금인이나 치인은 아니었고.

금세 자잘한 얼음이 들어간 커피가 나왔다. 남자는 그걸 순식간에 반을 마셨다가 범신조에게 눈짓했다.

“내 돈 내고 사는 건데 몇 년씩 기다리기까지 해야 하고, 웃기지 않습니까?”

“그러네요.”

범신조가 빙긋 웃고는 대답했다. 그러곤 둘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범신조는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사업차 필요한 대화야 얼마든지 할 수 있어도 친목을 도모하는 이야기 같은 건 관심 없었다. 남자는 함께 나온 아주 작은 케이크를 포크로 조각냈다.

“그쪽 차 사러 오셨어요?”

“아니요. 다른 사람 사 주러 왔습니다.”

“아하. 애인 차구나. 나도 그런데.”

남자가 씩 웃는다. 범신조는 애인이라는 말을 입속에서 굴렸다. 짝이란 소린 몇 번 해 봤지만 애인이란 소린 처음이었다. 애인. 혀 위를 간지럽히며 이리저리 구른다. 최근 부쩍 쾌활해진 김윤오처럼 통통 튀는 단어라고 생각하며.

“애인 나이가 어떻게 되는데요? 우리 도련님 또래면 조언 좀 구해 보게. 차라리 무슨 차가 갖고 싶다, 말을 하면 편한데 말을 안 해 줘요. 도통.”

“스물다섯입니다.”

그러자 남자가 범신조를 흘끗 보고는 낮게 웃었다. 도둑놈이시네, 하고 중얼거린다. 처음 만난 사이인데도 거침없는 남자의 말투보다 그가 한 말의 내용이 의외로 범신조에게 쿡 박혔다.

도둑놈이라고…? 범신조가 미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그가 태어나 대부분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만든 시기에는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였다. 범신이었을 때도 사람으로 태어났을 때도. 그리고 그는 늘 비량아를 대할 때면 나이 차 같은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늘 치열하고 절박하다 보니 실수하고, 또 상처를 주고, 상실하고 후회하기 급급했기 때문이다.

“내가 나이가 많아 보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쪽 나이를 내가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앞자리가 2는 아닐 것 아닙니까?”

도둑놈…. 생각보다 그 말이 퍽 충격적이었는지 곱씹은 범신조가 커피잔을 비웠다.

“고객님, 출차 시기를 앞당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때, 동분서주했는지 아직 여름이 되지도 않았는데 이마와 콧잔등에 땀이 송글송글한 딜러가 나타났다. 남자는 커피잔을 모두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는지 몸을 돌리더니 손을 내밀었다. 손등에 난 흉터를 물끄러미 보던 범신조가 맞잡았다.

“주신도라고 합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명함은 개인 사정상 없네요.”

“범신조입니다. 저 역시 개인 사정상 명함은 없습니다.”

명함이 없다기보다 다시 볼 일이 없을 거라 여겼다는 게 더 맞을 거다. 주신도라는 남자도 등을 돌리자마자 범신조에 대해 거의 잊을 테고, 범신조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침 문이 열리는 인기척이 들렸다. 범신조는 빠르게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직원이 양해를 구하려 다가가는 것과 동시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빠르게 윤오에게 향했다.

“손님, 정말 죄송하지만 오늘 입장은….”

“젖었네.”

범신조가 직원을 가볍게 제지하며 윤오를 끌었다. 윤오는 제습기 덕에 쾌적한 실내로 들어와서야 살 것 같은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물이 떨어지는 우산은 직원이 챙겨갔다.

자신이 앉았던 자리로 데려가며 범신조가 윤오의 젖은 어깨를 털어 줬다. 빗방울이 굵은 건 아닌데 바람이 불어 막지 못한 모양이다. 바짓단도 좀 젖어 있었다.

“책 좀 샀어?”

의자를 빼 자리에 앉히며 묻자 윤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혈색이 잘 돌지 않는 창백한 뺨이 습기 때문인지 오늘따라 뽀얗게 보였다. 그리고 저 역시 자리에 앉아서 앞을 보니 백팩을 맨 차림새나 머리카락이 쳐져 눈썹을 가린 얼굴이 평소보다 더 어려 보였다.

도둑놈…. 머릿속에 슬며시 그 단어가 떠오른다. 범신조가 미간을 찌푸렸다. 드물게 심란한 범신조의 눈에 윤오의 모습이 하나도 빠짐없이 나노 단위의 프레임으로 나눠져 전부 담겼다. 아이스티를 부탁하는 모습, 눅눅한 상의 소매를 접는 모습….

“그런데 여긴 왜? 차 사려고?”

그런 밀도 높은 눈빛은 모른 채 윤오가 습기 때문에 차분히 가라앉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물었다. 범신조는 팔짱을 낀 채 심상히 대꾸했다.

“어. 네 거.”

“내 거?”

윤오가 인상을 찌푸렸다. 펼쳐진 채 놓여 있는 카탈로그에는 그도 익히 아는 엠블럼이 그려져 있었다. 튼튼하기로 유명해서 그 가격은 묻히곤 하는 차였다. 범신조는 윤오의 반응을 유심히 보았다.

카탈로그를 넘기던 윤오는 맨 뒤쪽을 보더니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들었다. 대형 트럭들이 작은 사이즈로 정리된 페이지였다.

“나 어렸을 때 트럭 되고 싶었는데.”

“…트럭?”

“응. 그 컨테이너 몇 개씩 다는 트럭.”

“그걸 되고 싶어 했다고?”

“어렸을 땐 그런 생각 다들 한 번씩은 해. 만화 영화 주인공 되고 싶다, 그런 생각. 그쪽은 안 해 봤지?”

그리곤 곧 웃더니 “아, 어린이 범신조가 상상이 안 돼.” 한다. 당연했다. 범신조는 어린이였던 적이 없으니까. 새끼 범이었던 적이야 있지만, 그때 그는 사슴을 사냥해서 살과 가죽을 바르고 있었지 새나 바다가 되고 싶단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그는 무심코 잔을 들어 입술로 가져갔다가 비었음을 알고 내려놨다. 업보에서 천천히 벗어나고 있는 최근의 김윤오는 이토록 습한 날에도 반짝반짝 빛났다.

“비파라면 비행기가 되고 싶다고 했을 것 같아.”

“…….”

정말 무의식중에, 무심코 한 말이었던 모양이다. 찰나 비량아가 되었던 윤오는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고 흥미롭게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숨이 멎을 만큼 당황했던 범신조는 마른 손길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뭔가 입을 열려던 차에 마침 윤오의 아이스티와 다과가 나왔다. 잠시 멈칫했던 범신조는 한참 만에 잠긴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수리비 가장 비싼 것들 페이지 접어놨어.”

무의식중에, 정말 무심코 한 이야기를 굳이 다시 꺼낼 필요는 없다.

“수리비?”

“그래야 함부로 안 박지.”

차를 박느니 옆 전신주를 박는 게 나을 정도의 차여야 한다며 뇌까린 그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근데 나 밖에서 잠깐 봤는데, 앞에 앉아 있던 사람 누구였어?” 

설마 그 모습을 봤을 줄 몰랐던 범신조가 놀라 돌아봤다. 어쩐지 윤오의 얼굴은 조금 민망해 보였다. 질투인가? 윤오가 질투 같은 걸 하리라곤 상상도 안 해 본 범신조가 고개를 기울이며 “주신도래.” 하고 대답했다. 김윤오가 바라던 대답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럴 줄 알고 일부러 의뭉스럽게 말한 거기도 했다.

“친구…?”

“아니. 잠깐 같은 자리 앉은 사이.”

고개를 끄덕이고 가만히 생각하던 윤오가 중얼거렸다. 시선은 아까부터 한 페이지에서 넘어가지 않은 채였다.

“혹시 주 대표님이랑 아는 사이인가?”

“그건 아닐걸.”

“어떻게 알아? 주 씨가 흔한 건 아니잖아.”

“주 대표랑 안 닮았어.”

그리고 혼자 자란 분위기가 컸다. 범신조는 눈짓으로 기다리고 있던 딜러를 불렀다. 바로 다가와선 상냥한 웃음을 지었다.

“일행분 오셨군요. 시승 도와드릴까요?”

범신조가 앞서 접어둔 몇 페이지는 펴고 윤오가 오래 바라봤던 세 장 가량만 접어서 건넸다. 오늘 시승해 볼 목록이었다.

* * *

시승 후 범신조는 세 대 중에 수리비가 가장 높은 것을 사기로 했다. 너무 간단하게 결정해 버리는 모습에 윤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는 오늘 시승만 해 보는 줄 알았다. 차라는 게 원래 이렇게 그 자리에서 깊은 고민 없이 바로 결정하는 건가? 하물며 머리 염색조차 며칠을 고민하는데….

머뭇거리던 윤오가 범신조의 팔을 잡았다.

“너무 비싸….”

“아무래도 차니까.”

그게 다였다. 무를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난 아직 차 살 생각 없었는데….”

“면허 땄잖아.”

“그건 그거고. 지하철 편해.”

“그럼 지하철 타. 가지고만 있어. 선물이야.”

“진짜 그럴 때마다 졸부 영감 같아.”

윤오가 웅얼거렸다. 졸부 영감…. 그 말이 제가 예전에 했던 졸부와 애첩 놀이를 기억해 하는 말이란 걸 아는데 오늘은 좀 다르게 들렸다. 카드 모서리로 볼을 누르던 범신조의 표정이 사뭇 가라앉았다. 설득이 먹히는 건가? 하고 어림짐작한 윤오가 팔을 끌었다.

“더 생각해 보면 안 돼?”

“음….”

“더 보고… 생각도 더 해 보고….”

그러나 범신조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차 때문에 심각해진 게 아니니까. 그는 윤오를 보면서 손으로는 카드를 굴렸다. 그러고는 딜러에게 넘겼다.

“커서 트럭이 되고 싶었다고 했던 애한텐 결정권을 주고 싶지 않은데.”

그야말로 억지였다. 윤오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떡 벌렸고 범신조는 능숙하게 서류를 작성했다. 한 명을 응대한다기엔 너무 많은 인원이 싱글벙글 웃으며 범신조의 펜이 유려하게 움직이는 걸 감상했다.

서류는 두 종이었다. 윤오는 당황해서 몰랐지만, 오늘 구매한 차는 총 두 대였다. 하나는 김윤오의 것이었고 하나는 김윤오와 카섹스를 할 차였다. 천장이 높고 앞뒤 자리가 널찍하고 튼튼한.

범신조는 마지막 서류를 보다가 고개를 옆으로 슬쩍 돌려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트럭도 한 대 사 줘?”

윤오는 질린 얼굴로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 * *

주 대표가 귀국했다고 한다. 2년하고도 반년만이었다. 그는 외국에 있는 동안 본 수많은 가구 디자이너들을 만나고 컨택했는데, 그들이 만든 걸 직수입해 판매하는 사업을 해 볼까 한다 했다. 본업은 엔터테인먼트고 이건 취미라곤 하지만 취미치고는 거창했다. 그러며 먼저 들여온 물품들도 보여주고 얼굴도 볼 겸 한번 놀러 오라는 말을 남겼다.

범신조는 별로 흥미를 보이지 않았고 윤오는 가고 싶어했다.

─ 그 전에 다른 데서 먼저 보겠네.

웃음기 머금은 소리가 스피커 너머로 들렸다. 그때 범신조는 직접 생선을 해체하고 있었다. 그가 회도 뜰 수 있단 사실을 알게 된 윤오가 보여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피를 깔끔하게 뺀 민어가 범신조의 손에서 깨끗하게 발라지고 있었다. 처음 부두에서 일했을 때 배우게 된 기술 중 하나였다. 본디 산에서 살았던 터라 비린내를 좋아하지 않던 범신조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손질되는 생선이 아니라 섬세하게 움직이고 망설임 없이 사용되는 손놀림을 보던 윤오가 되물었다.

“다른 데서 먼저 보다뇨?”

─ 윤오도 한 번 갔던 그 모임 있잖아. 이젠 둘 다 각인도 했으니 와서 각자 짝이 있다고 공표할 겸 얼굴 좀 내밀어야지?

“공인받을 필요 없어.”

범신조가 단호하게 대꾸했다. 그는 얼음물에 살점을 넣어 두고 이젠 내장을 따로 빼고 있었다.

─ 근데 범 대표 뭐하니? 뼈 바르는 소리 난다? 작업해?

묘한 단어 선정에 범신조가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는 그 묘한 느낌을 차단하려 바로 대답했다.

“회 떠.”

주 대표의 웃음소리가 크게 터졌다.

─ 사업 접었다더니 바쁘네. 재주도 많아. 이젠 횟집 하는 거야?

“윤오가 보고 싶다고 해서.”

─ 다음에 놀러 가면 나한테도 해 주나?

“놀러 올 일이 있을까.”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그가 니트릴 장갑을 벗어 쓰레기통에 넣었다. 팔뚝까지 손을 깨끗이 씻고는 후처리를 위해 그릇과 살점, 내장 등을 부엌으로 옮겼다.

─ 오는 게 좋을 거야. 지난번에 윤오가 너무 잠깐 있다가 가서, 네가 짝이 생겼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그나저나 길다온 일을 어떻게 그렇게 깔끔하게 잘 묻었어? 그래도 한 가닥 한다는 찌라시 상인들조차 하나도 모르더라?

윤오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 범신조는 대수롭지 않게 지금쯤 필리핀을 거쳐 온두라스로 향하고 있을 그 몸을 잠깐 생각하다가 말았다.

대답이 없자 주 대표는 말머리를 돌렸다. 그가 하루 이틀 이 바닥에 있던 게 아니니까.

─ 와. 오랜만에 보고 싶네, 우리 윤오.

“보고 싶어 해서 뭐 해.”

─ 왜? 우리 친해졌어.

“그래. 친해졌지. 내게 말도 안 하고.”

범신조가 바 모서리를 쥐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전완근 안쪽이 단단하게 굳어 근육의 결과 핏줄이 선명하게 보였다. 윤오는 이럴 때마다 범신조가 범일 때를 떠올렸다. 두꺼운 가죽 너머로도 보이던 산맥 같던 근육과 달려도 지치지 않는 다리, 순식간에 산을 넘을 수 있던 자유로움을. 그가 빼앗았고 범신조가 버린 몸을.

─ 아, 몰라. 온다고 말 안 하면 안 끊을 거야.

그러나 시선이 천천히 내려가는 윤오를 보고 범신조가 주 대표와의 통화를 일방적으로 종료해 버렸다.

“안 갈 거야. 그런 표정 하지 마. 네가 싫어할 곳 안 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범신조가 버렸을 몸을 생각하는 순간, 자연히 과거로 끌려들어 갔기 때문이다. 어느덧 익숙한 일이었고,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을 일이었다.

생일이 지나고 난 뒤 언젠가 새벽에 깨서 운 적이 있다. 오랜 시간 나눠 꿨던 꿈을 한꺼번에 꾼 날이었다. 비량아의 이름을 부르며 울었고 범신조의 이름을 부르면서 울었다. 새벽이 되어서야 이성을 되찾았는데, 그때 가장 먼저 보인 게 범신조의 얼굴이었다.

어렴풋이 제가 꿈결에 그를 때렸던 기억이 났다. 화를 못 이겨서였다. 그 순간은 완전히 과거의 비량아에게 먹혀 있었다. 그러나 때린 기억만 나지 때리려고 했던 마음은 생각나지 않아 윤오는 당황했고 범신조는 쓰게 웃었다.

돌아오기로 선택한 건 윤오였다. 돌아오면 다시 과거와 직면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모르는 척 묻어두고 지낼 수는 없었다. 그건 회피하는 거지 용서를 구하는 게 아니었다.

돌아온 덕분에 윤오는 아직 불안정하고 때때로 악몽을 꿔야 했지만, 도망치지 않으며 하나씩 버텨내고 있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사이 범신조는 다시 윤오의 일상에 녹아들었다. 게다가 그 방식은 이전과 달리 폭력적이고 고통스럽지도 않았다.

이렇게 영영 잊지는 못할 과거가 찾아와 두 사람 모두 쉬이 잠 못 이루는 밤이면 범신조는 윤오가 진정될 때까지 안고 있다가 대충 옷을 입히고, 모자를 나란히 눌러쓴 채 무작정 나갔다. 주로 24시간 운영하는 카페나 마트였다. 사람이 많고 밤에도 낮 같은 곳.

지나치게 고요한 나머지 벌레의 날갯짓조차 들리는 숲에서 별안간 불야성의 도시로 끌려 나오면 윤오의 현실감각도 서서히 돌아왔다. 그럼 범신조에게 미안해하고, 범신조는 그게 왜 미안할 일이냐며 윤오의 음료를 멋대로 가져가 허락 없이 반씩 마시곤 했다.

‘단 건 별로야.’

말로는 그렇게 하면서.

어렸을 땐 악몽에서 깨어나 울어도 아무도 달래주지 않았는데, 그 악몽의 주인공인 범신조는 어디든 반짝거리고 달콤한 곳으로 데려간다. 그렇게 점점 잠을 설쳐도 괜찮은 날들이 반복되는 거다.

그런 밤을 몇 번 보내니 윤오는 언젠가 공항에서 만났던, 선을 잘 그어야 한다고 단단히 이르던 어떤 할머님의 말씀을 다시 떠올리게 됐다.

비량아는 나지만, 동시에 죽은 귀신이었다. 그리고 산자의 삶에 귀신이 개입해서는 안 됐다. 보고도 보지 못한 척, 듣고도 듣지 못한 척. 그건 비량아도 끝없이 되뇌고 비파에게까지 가르쳐 주던 진실이 아닌가.

순식간에 또 과거로 갈 뻔했던 윤오가 상념을 떨치고 고개를 들었다. 그와 함께 거리로, 마트로, 카페로, 공원으로 다니며 밤을 지새운 기억을 붙잡고 돌아올 수 있었다.

“아냐. 가자.”

윤오는 범신조가 자신을 위한단 명목으로 세상으로부터 유리되길 바라진 않았다. 달음박질 한 번에 산을 넘을 수 있던 몸을 돌려줄 수는 없지만, 자신 때문에 우리에 갇혀 있도록 두지도 않을 거다.

“가고 싶어.”

손가락을 세워 피아노 건반 치듯 대리석 상판을 가볍게 두드린 범신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가고 싶다는데 가야지, 어려운 일도 아니고.

* * *

그리고 몇 시간 후, 그들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아! 아아! 아, 거기! 아, 거기만 때리지… 흑, 아!”

“후… 안 때렸어.”

“아으윽! 아!”

“박고 있지.”

두 사람 주변에 향긋한 술 냄새가 퍼졌다. 높은 도수의 소주가 쏟아져 바를 짚고 있는 범신조의 손바닥을 적셨다. 범신조의 옆구리를 겨우 감고 있는 윤오의 한쪽 다리에 바지가 덜렁거렸다. 그만큼 급하게 진행된 행위였단 뜻이었다.

발단은 이러했다. 생선을 즐기지 않는 범신조는 술을 곁들여 접시를 비우고 있었다. 반면 초장과 고추냉이 맛으로 먹는 듯하던 윤오가 갑자기 범신조의 술을 넘봤다.

‘나도 마셔 볼래.’

범신조는 대수롭지 않게 잔을 넘겼다. 아주, 아주 작은 잔이었다.

입에 기미나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적은 양이 따라지고, 윤오는 그걸 제법 맛있게 먹었다. 코를 가득 채우는 향이 좋다고 했다. 그렇게 몇 잔 홀홀 마셨고, 또 범신조는 잘 마시는 김윤오가 신기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계속 따라줬다.

김윤오가 취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취한 김윤오는 처음에는 잘 웃었다. 목소리도 조금 더 커졌다. 얼굴로는 잘 티가 나지 않았으나 눈꺼풀이 무거워 연신 눈웃음을 짓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이미 범신조는 윤오의 잔에는 물을 따르고 있었다. 술은 자신의 입으로 갔고.

그러던 찰나, 아이스크림을 먹겠다며 없는 아이스크림을 찾아 일어나던 윤오가 균형을 잃었다. 몸이 앞으로 기우뚱 기울어졌다. 손은 범신조의 허벅지를 짚었다. 사타구니에 가까운 부분을 짚게 된 윤오가 눈을 느리게 깜빡이더니 더듬더듬 둔하게 손을 움직였다.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섰어?’

범신조는 물을 따르며 여상히 대꾸했다.

‘안 섰는데.’

‘안 섰는데 이런 거야?’

‘응.’

‘넌 사람이 되었는데 왜 여기는 아직도 짐승 같아?’

‘그래서 좋지 않아?’

‘안 좋아. 축소 수술 알아볼까?’

윤오가 재잘댔다. 그러나 말이 조금씩 더 느려졌다. 게다가 아직 손을 떼지 않고 있어서 범신조로는 좀 곤란했다.

‘알아볼까?’

‘네가 자꾸 그렇게 만지면 이제 설 텐데.’

‘알아보자.’

범신조는 잔을 비워냈다.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고는 접시 따위를 대강 밀었다. 여전히 자신의 허벅지를 더듬거리던 윤오의 손목을 당겼다. 순식간에 허벅지 위에 올라앉게 된 윤오가 눈을 꿈뻑 뜨며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얼마나 줄일까.’

범신조가 물었다. 윤오의 손에 있던 그것은 분명 조금 전보다 훨씬 두툼해져 있었다. 손을 떼려는 걸 잡은 범신조가 자신의 것에 손바닥을 문지르게 했다. 등줄기가 움찔움찔 떨렸다.

‘이만큼?’

손가락을 벌려 제 기둥을 더듬게 한다. 윤오는 얼떨결에 잡게 된 것의 열기에 얼빠진 소리를 뱉었다.

‘어….’

어느새 윤오는 뒤로 눕혀져 있었다. 아주 긴 바였던 터라 접시들은 저 멀리 밀려난 채였고. 자기들끼리 뒤엉키든 말든 범신조는 술병마저 밀쳐냈다. 병이 균형을 잃고 엎어졌지만, 내용물이 얼마 없어 많이 흐르진 않았다.

‘평소에 어디까지 들어갔지?’

여기? 여기인가? 범신조가 윤오의 배를 눌렀다. 윤오는 머뭇거리다가 명치 아래를 만지작거렸다. 헛웃음이 났다.

‘거기까지 들어가면 죽지.’

하지만 느낌이 늘 그랬는데…. 아무튼 거긴 아니라며 범신조가 윤오의 손을 감아쥐었다.

그러곤 지금이었다.

느릿느릿 삽입하며 어디가 가장 좋냐고 물었다. 아프면 말하라고 하기에 말하려고 했으나, 윤오가 적응할 때를 기다리는 듯 아주 느리게 들어오는 것은 어디를 찌르든 쾌감만 선사했다. 윤오의 몸은 발정기 때보다 훨씬 덜 젖었다. 범신조가 간신히 움직일 정도였다. 그러나 어쩐지 좀 더 빠듯하고 뻑뻑한 그 느낌이 약간의 공포감과 함께 쾌감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어디가 아픈지 말해 줘야지.”

범신조가 웃으며 물었다. 그러나 윤오는 이미 꾸벅꾸벅 졸 기세였다. 취한 김윤오는 헤실헤실 웃으며 실없는 소리를 하다가, 시간이 조금 지나면 느려지다가, 결국엔 이렇게 몸이 모두 풀리고 열이 오른 채 반 수면 상태에 빠지는 모양이다.

윤오의 몸이 너무 부드럽게 풀려서 자칫 잘못하다간 너무 깊게 박을 것 같았다. 범신조는 이를 깨물며 입구를 어루만지는 것으로 참았다. 뿌리까지 넣는 건 되도록 자제하고 있었다. 뿌리까지 넣는 경우 노팅으로 이어지기 쉬웠고, 노팅은 발정기 때가 아니면 아무래도 몸에 무리를 주니까.

“좋아… 아…, 흐윽. 흑, 안에, 배꼽 아래… 거기 좋아….”

윤오가 글썽글썽 젖은 눈으로 배를 더듬었다. 말로는 배꼽 아래라 해놓고 더듬는 곳은 그보다 위였다. 명치가 아닌 게 다행인가. 범신조는 자꾸 미끄러지는 윤오의 다리를 잡았다. 그리고 팔에 윤오의 오금을 받쳐 다리를 들게 했다. 걸리적거리는 바지는 완전히 벗겨 던져버렸다.

상체를 겨우 올리고 있던 윤오가 뒤로 완전히 젖혀 눕게 되었다. 머리카락이 술에 젖어 들었다. 범신조가 다리를 받친 손으로 바를 짚었다. 그의 손에도 술이 묻었다.

“아직도 아파? 하하… 줄일까, 윤오야?”

범신조가 더듬더듬 물었다. 그 역시 대단히 흥분한 상태였다. 아랫배에 도독 올라선 핏줄이 그걸 증명했다. 한계까지 발기한 탓에 안에 더 넣을 마음은 완전히 접은 상태였다. 미리 빼고 오는 준비도 못 한 채 벌어진 행위라서 범신조는 머리가 돌 것 같은 흥분 속에서도 자제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아, 아니….”

그러나 윤오는 이게 다 들어온 건 줄 아는 모양인지 괜찮다고 말했다. 팔로 각각 범신조의 팔과 목덜미를 잡고 흔들리는 걸 버티려 하고 있었다. 손톱이 자꾸만 범신조의 전완근과 목덜미를 긁었다.

“괜찮, 괜찮아…. 그런데, 아, 나… 어지러, 워….”

버티는 건 금방 포기하고 도망치려는 듯이 몸을 옆으로 굴린다. 범신조는 그런 윤오의 상체를 단단히 잡고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바로 뒤로 돌아 몸을 붙였다.

그제야 윤오는 조금쯤 정신이 돌아왔다. 앞을 보게 되어 어지럼증이 덜해진 것 같지만, 아무래도 안을 때리듯 쑤시고 있으니 여전히 아찔하긴 했다.

“네 거가 안쪽을 때리는 거 같아….”

윤오가 옆으로 누운 8자 모양처럼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하소연했다.

“그럼 문질러 줄까?”

범신조가 뭉근히 허리를 돌렸다.

“하으으…!”

내내 두들겨 맞던 곳이 문질러지자 아래가 쑥 꺼지는 것처럼 쾌감이 강했다. 윤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사정하지 않은 채 가볍게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가벼운 절정이 쉼 없이 이어지는 게 문제였다. 윤오는 원망을 담아서 범신조의 귓불을 씹고 우물거렸다. 그 어리광에 불과한 복수에 범신조가 신음을 흘렸다. 정신적인 만족감에 사정 욕구가 치솟았고, 그는 참지 않았다. 참고 더 집요하게 굴었다간 윤오가 울게 될 것 같았다.

“으읍, 읏, 응, 으!”

귓불을 문 입술이 움찔거리다가 결국 벌어졌다. 범신조는 한계까지 이른 절정을 해소하기 위해 윤오의 몸을 들었다가 아래로 내리길 반복했다. 아래에서 위로 치고 올라오는 허릿짓과 위에서 아래로 추락하는 제 몸 때문에 윤오는 앞이 깜빡깜빡 점멸할 정도로 느끼고 말았다.

범신조의 몸을 감싸고 있던 다리가 서로 강하게 엉키며 조여들었다. 고개가 뒤로 확 꺾이자 범신조가 머리를 받아 뒤로 부딪히지 않게 해 주었다. 발가락이 강하게 오그라들며 윤오의 안도 조였다.

둘의 사정은 거의 동시에 이뤄졌다. 기적처럼 맞아떨어진 타이밍에 깨끗한 바닥으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액이 뚝뚝 떨어졌다.

“시팔, 밖에 하려고 했는데.”

범신조가 중얼거렸다. 윤오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느리게 입구를 조였다 풀기만 하고 있었다. 안쪽이 떨려서 나오는 반응이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욕설을 내뱉고 자신의 것을 거칠게 빼냈다. 어느새 타액이 흘러 반들거리는 윤오의 입술이 소리 없이 벌어졌다가 닫혔다.

자신의 것은 거칠게 빼내 놓고 윤오는 아주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남자가 바로 손을 입구로 가져갔다.

“빼 줄게.”

“왜, 왜…?”

평소 같으면 안에 싸고도 몇 번이나 했을 텐데, 하는 물음이었다. 범신조는 바로 직전까지 거친 행위를 주도했던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는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너 지금 취했잖아.”

“흐읏….”

손이 안을 벌렸다. 막 다물리려던 입구가 벙긋 벌어졌다. 안은 아직 예민했다. 반복되던 거친 삽입과 취기에 열이 올라 있었다. 자꾸 오므리려 하기에 허벅지 안쪽을 꽉 잡고 벌어지게 했다. 손가락으로 긁어낼 때마다 정액이 떨어졌다. 원목 바닥이 순식간에 더러워졌지만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그 때 무릎을 꿇고 앉은 범신조의 어깨에 손이 올라왔다. 어디 불편한 게 있나 싶어 고개를 올려보니 취기와 쾌감에 젖은 눈을 한 윤오가 유순하게 물었다.

“취한 사람하고는… 많이 하기 싫어?”

네가 취하긴 취했구나. 묻는 말에 부끄러움 하나 없었다. 아쉬움이 느껴졌다면 모를까.

“하….”

“아…!”

범신조는 어쩐지 화가 난 사람처럼 웃음을 흘렸고, 윤오는 갑자기 허벅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 신음을 뱉었다.

“취한 걸 이용해서 내가 어디까지 할 줄 알고?”

물론 범신조는 선을 지킬 것이다. 그 선의 기준이 남들과 다를 수는 있어도, 적어도 지켜야 하는 수위란 게 있긴 하단 소리였다. 망가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두려운 나머지 빈 껍데기가 되어가는 몸이라도 탐하기 급급하던 예전과 달랐다.

젖은 손으로 윤오의 둔부를 꽉 움켜쥔 건 그래서였다. 그냥 여기까지 하자는 위협 섞인 달램이었다.

그러나 취한 김윤오는 처음에는 잘 웃었고, 다음에는 몸이 풀린 채 나른해했으며, 이제 와서는 겁대가리 없이 야해 빠졌다.

“내가 멈추라고 하면… 멈출 거잖아.”

“…….”

“미움받는 거 싫어하니까….”

게다가 영리했다.

범신조는 나직이 탄식을 뱉었다. 거의 동시에 고개를 들며 몸을 일으켰다. 윤오의 입술을 허겁지겁 삼키며 상의를 끌어 올렸다. 옷을 벗을 때만 잠시 입술을 뗐다. 허겁지겁 입술을 빨았다 놓으며 범신조가 짜증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너 앞으론 술 많이 마시지 마.”

“왜…?”

“이래놓고 멈추라고 하면 고문이 따로 없을 테니까.”

그 말에 취한 김윤오가 킥킥 웃으며 손을 뻗었다. 김윤오의 손이 뺨을 감싸고 접혔다가 순연하게 감겨들었다. 그대로 점차 다가오는 얼굴을 보던 범신조는 욕설을 씹어 삼켰다. 설령 이 역시 네가 나를 죽이기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내가 어떻게 너를 거부하겠어, 황홀한 탄식을 뱉으며.

* * *

딜러가 말했던 출차 기간은 그에겐 아무 의미가 없었다. 범신조가 사람으로 태어나 처음 시작한 곳이 바다였고 특히 항구였던 걸 생각하면 당연했다. 그는 개인 컨테이너를 이용해서 어렵지 않게 차를 들여왔다.

그렇게 윤오가 탈 차와, 천장이 높고 좌석 간 거리가 넉넉한 차가 생겼다.

범신조는 차가 차고에 잘 들어간 걸 확인하고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느라 살짝 숙인 목덜미 뒤쪽에 선명한 손톱자국이 드러났다. 윤오는 아프거나 너무 좋으면 참지 않고 범신조의 몸에 상처를 냈다. 비량아 때부터 남은 습관인 듯싶었다.

다른 이들이 내는 상처는 금방 낫거나 티도 나지 않는데 윤오가 낸 것은 달랐다. 평범한 사람인 것처럼 상처가 생겼고, 그만큼 시간이 걸려 나았다. 마치 범신이던 때에 비량아가 그의 몸에 상처를 냈던 것처럼.

범신조는 기꺼운 상처를 만지작거리며 차고에서 집으로 올라갔다.

느긋한 걸음이 향한 곳은 침실이었다. 윤오는 헐벗은 등이 보이도록 엎드려 잠든 상태였다. 동이 틀 때쯤 잠들었으니 쉽게 깨기 어려울 건 알지만, 점심때가 다 되었다. 더 자게 두면 속이 쓰릴 게 분명했다.

“김윤오.”

그는 윤오의 팔 아래에 손을 넣어 위로 끌어 올렸다. 으응, 하며 얼굴을 찌푸려도 봐주는 게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는 짝이 맞지 않았다. 사람은 둘인데 파자마는 하나였다. 범신조는 자신의 파자마 상의를 들어 윤오에게 입혔다. 이런 차림을 보는 건 도통 질리지 않는 일이었다.

“일어나. 밥 먹자.”

“…죽을 것 같아.”

“그렇게 안 둬.”

지금 윤오가 힘든 원인을 생각하면 양심에 털이 북실북실하게 돋은 대답이었다. 그 대답에 울컥한 윤오가 겨우 눈을 떠서 한 일은 범신조를 노려보는 것이었다. 허벅지 안쪽은 땅기다 못해 덜덜 떨리고, 무릎 안쪽 역시 뻐근하게 늘어진 것 같고, 목은 바짝바짝 마르게 만든 사람이 자기 아니면 누구라고 죽게 안 둔단 말을 하는 거지.

윤오를 보는 눈빛이 부드럽다. 만족감에 가득 차 보인다. 저랑 다르게. 윤오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윤오의 발정기 이후로 그들이 몸을 섞는 횟수는 빈번해졌다. 이전에는 가끔 몸을 섞었고 그나마도 유사 성행위가 반 정도였다면, 지금은 삽입까지 이어지는 섹스가 대부분이었다. 금인의 발정기에 떠밀리듯 강제로 끌어내어진 게 아니라 스스로 일어난 발정기를 겪은 치인의 몸은 한결 더 부드러워졌고 회복력도 좋아졌다.

그리고 윤오의 회복력과 체력이 유독 좋아진 건 특히나 범신조가 몸소 느끼고 있었다. 매일 조금씩 더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섹스를 하는 이유도 그 역치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의 사심도 상당히 큰 이유고.

겨우 일어난 윤오는 몸을 거의 기역 자로 굽힌 채 엉거주춤하게 욕실로 향했다. 중간에 벽을 짚고 잠시 멈춰 섰다가 발을 끌며 걸었다. 안이 아직도 벌어진 기분이었다. 범신조의 것은 두툼하고 단단해서 안을 얻어맞다가 끝내 멍까지 든 것처럼 느끼게 만들곤 했다.

“내가 씻겼어.”

욕실까지 쫓아온 범신조가 말했다. 그는 팔짱을 끼고 문가에 기대서 있었다. 그 말을 무시한 윤오가 세면대에 붙은 거울로 그를 응시하며 물었다.

“어제는 너무 심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 말을 무시한 윤오가 세면대를 잡고 거울을 통해 그를 응시하며 물었다. 무시무시한 눈빛에 범신조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조금 반성이 되네.”

“많이 해야 할 거 같은데. 반성.”

“또 씻겨 줘?”

대답 대신 문이 쾅 닫혔다. 그 너머로 시근대고 있을 윤오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는 듯해 범신조는 낮게 웃었다.

거실로 나오던 그는 전화벨이 울려 발걸음을 멈췄다. 확인하니 저장된 이름은 아니지만 익히 알고 있는 번호였다. 무심히 엎어두고 부엌으로 향했다. 지난번에 먹었다가 남은 민어로 매운탕을 끓이는 중이었던 터라 매콤한 냄새가 풍겼다.

뚜껑을 잠시 열어 국자로 젓는 동안 잠시 끊겼던 전화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범신조는 느긋하게 기다렸다가 전화를 받았다.

“전화 받았습니다.”

─ 이보게, 범 서방.

“범 서방이요?”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러자 건너편의 상대가 급격하게 긴장했다가 다시 고쳐 말했다.

─ 범 대표….

“예. 말씀하십쇼.”

범신조는 조용히 침실로 향했다. 안쪽에서 샤워기 소리가 들렸다. 몸이 뻐근한 만큼 따뜻한 물에 몸이 풀릴 때까지 오래 있을 거다. 그는 여유롭게 몸을 돌렸다.

─ 저번에 보내 준 돈… 말인데. 그거로는 부족해. 그거로는 아무것도 못 하네.

“그런가요? 적잖은 돈이었을 텐데 말입니다. 생활하시기에는요.”

─ 생활하기에도…!

“충분하죠.”

범신조가 팔짱을 낀 채 침실이 보이는 벽에 기대서 대답했다. 리스한 차를 반납하고 라운딩 도는 것을 포기하면 충분하고도 남을 돈이었다.

─ 그래. 추, 충분해. 그런데… 내가 계속 자네 돈만 받아먹으며 살면 윤오에게 세울 낯이 어디 있겠나. 면목이 있지…. 그러니까 말이야….

“우리 윤오는 당신이 건강히 사고 치지 않고 살기를 바라지, 면목을 세우길 바라지 않습니다.”

─ 그 애는 내 아들이야! 내가 자네보다 훨씬 더 잘 알아!

“그래요? 그런 것치고는 생일 때도 연락이 없으시던데요.”

그날 전화가 왔던 김윤오의 모친과는 달랐다. 범신조는 이 남자가 자기 자식의 생일을 기억하기나 할까 싶었다.

“사고 치지 말고 건강하세요.”

유쾌하다 못해 상쾌한 목소리로 범신조가 덕담을 늘어놓았다.

“보내는 돈은 그대로입니다.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어요. 하지만 익히 말씀드렸다시피, 이 돈의 대가는 이미 인연이 끊긴 가족들에게 연락하지 않는 게 조건입니다. 김윤오는 물론이고 김윤오의 모친에게도 연락을 할 경우에는 얄짤 없습니다, 응?”

─ 그 사람은 내 와이프야! 내가 누구한테 연락하든…!

이혼했으면서 와이프는 무슨.

범신조는 이제 슬슬 통화를 끝내기로 했다. 인덕션을 끄고 국자로 안을 휘저어 조금 올라온 거품을 걷어내는 등의 일상적인 일을 하며 그는 대다수 사람에겐 비일상적일 일을 행했다.

“자꾸 이러시면 정말 사업체 하나 내드려야 하나 싶긴 합니다…. 영역 다툼이 좀 심해서 매주 한두 명 정도 죽어 나가긴 하지만, 고작 한두 명인데 설마 우리 김병후 씨가 해당되겠습니까? 운이 어지간히 나쁘지 않고서야…. 좀 덥긴 해도 골프도 치기 좋은 나라 어떠세요?”

노골적인 협박에 상대의 반응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대로 조용히만 있으면 서로 유감스러울 일 같은 건 없을 것이다.

범신조는 김윤오 하나에만 집중하고 싶고 그 일에 무척 공을 들이는 중이라 바쁘니, 그와 연락하고 있는 모친이든 이모든 아무 일도 없기를 바랐다. 김윤오의 생명 활동이 멈추는 것 외에는 뭐가 일어나든 수습이야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이런 사소한 일에 시간을 빼앗기는 건 질색이었다.

그는 여전히 김윤오의 다음 생일이 되기 전에 그를 잃을 수도 있다는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 그에겐 숙명이자 습관인 두려움. 그러니 주변에 날파리가 꼬이는 건 질색이다. 이런 일로 더는 피곤하게 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

“그럼 이만 끊습니다. 아, 리스한 차량은 이만 반납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골프장 회원권이라도요. 옛… 인연이 있어 조언해드리는 겁니다.”

범신조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어조에는 흠잡을 게 없었다. 그게 보이지 않는 위계질서를 더욱 공고히 하는 것 같았다. 그 위압감에 김윤오의 친부는 더는 토를 달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그나마의 반응은 인사도 없이 먼저 전화를 끊는 것이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통화가 끝나길 기다렸던 범신조가 핸드폰을 무심하게 옆으로 던졌다. 깨끗하게 윤이 나는 상판 위로 기계가 미끄러졌다.

차가 올 때 사람을 불러 내부를 치워둔 터라 새벽까지 부엌과 거실에서 이어졌던 행위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옷을 입은 범신조 역시 몇 시간 전까지 무슨 일을 했는지 추측도 되지 않을 만큼 단정한 차림이었다. 유일하게 그 모든 티가 나는 윤오가 발을 질질 끌며 거실로 나왔다. 머리가 아픈지 자리에 앉자마자 엎으려 앓는 소리를 냈다.

“머리 아파….”

“소주가 안 맞는 모양이네.”

매운탕이 적당히 끓었나 맛을 본 범신조가 김윤오와 자신의 몫을 식탁에 차렸다. 씻고 나오기까지 했는데도 여전히 눈이 반쯤 감긴 윤오가 국물을 몇 수저 떠먹더니 고개를 반짝 들었다.

“맛있다.”

“조심히 먹어. 혀 데이지 않게.”

조금만 뜨거운 액체를 먹어도 번번이 데이기 일쑤인 윤오가 열심히 불어선 식혀 먹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속이 안 좋은지 고작 반 공기를 그나마 국물에 말아 먹은 게 전부였다.

“차 왔어.”

결국 수저를 놓은 윤오에게 범신조가 말했다.

“차?”

최대한 빠르게 들여오긴 했지만 삼 개월가량 걸렸다. 윤오는 그사이에 너무 부담스러웠던 선물 생각을 지워버린 모양이다. 멍하니 되묻는 그에게 범신조는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건넸다. 키 끝에 흰색 강아지 피규어가 대롱대롱 달려 있었다.

윤오는 제 속도 모르고 웃고 있는 흰 강아지와 차 키, 그리고 범신조를 번갈아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부담스러워.”

“이게?”

“돈으로 환심 사려는 거 같아.”

“나 아직도 환심 못 샀어? 그럼 트럭 사 줄 걸 그랬지.”

“아니, 내 말은….”

“김윤오. 나 돈 많아.”

“…….”

“내가 몇 년을 살았는데. 없는 게 이상하지 않아?”

“…….”

“난 지겨우니까 네가 써. 돌려받을 생각은 없어. 영 싫으면 어머니 드려도 괜찮아.”

그래도 선물받은 건데 어머니를 드릴 순 없었다. 윤오는 너무 무겁게 느껴지는 키를 몇 번 쥐락펴락했다가 겨우 속삭여 말했다.

“고마워….”

“내가 더.”

“응? 뭐가?”

괜찮아도 아니고 내가 더, 라니. 고마울 일을 했던가? 의아해서 되묻는 윤오에게 자리에서 일어나던 범신조가 고개를 기울여 속삭였다.

“어젯밤에, 고맙다고. 아주 즐거웠거든.”

어젯밤에 있던 일 중 고맙다고 할 만한 게 뭔지 떠올려 보려 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밖에 없었다. 김윤오는 아, 신음을 흘리며 얼굴을 싸맸다. 왜 필름은 끊기지도 않았는가. 몸이 너무 힘들어서 잠시 잊고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이 자리에서도 한바탕 했었다. 그런 일 자체가 없었던 양 깨끗하다 해도 그런 일이 일어났던 건 변하지 않는다.

“…부엌에서 다시는 안 해.”

“그래. 다음엔 서재에서 하자.”

“…….”

“아, 차에서도. 카섹스하기 좋은 거 샀어.”

김윤오는 기함하여 차 키를 범신조 등에 던질까 하다가 말았다. 딱딱한 쇳덩이를 사람에게 던질 만큼 정신 나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어차피 범신조는 못 이기겠다 싶은 막막한 마음도 있었고.

* * *

윤오는 이후로도 몇 번 더 신조에게 설득을 시도했다. 역시 부담스럽다며 도저히 못 쓰겠다거나, 지하철과 버스도 편하다는 등.

마지막으론 어차피 집에서 잘 나가지 않는데 어떠냐고도 했으나, 윤오의 어머니가 이모와 반찬 가게를 열며 그곳을 몇 번 왔다갔다 하는 사이 자연히 선물한 차는 목적대로 윤오의 것이 되었다. 네가 그렇게 차가 싫다면 어디를 가든 범신조 자신이 기사 노릇을 해주겠다 한 것도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직접 운전해서 마트도 갔다 왔다며 윤오가 눈을 반짝이며 말할 땐 범신조는 저 조잘대는 자랑을 조용히 끝까지 듣겠다는 다짐을 쉽게 깨고 달려들어 입 맞췄다. 그러며 몇 번이고 되뇌었다. 참길 잘했어. 놓아 주길 잘했어. 참고, 버티고, 매일 하루하루, 분과 초마다 구속하고 통제하고 싶은 걸 참기를 잘했어, 하고.

백 일을 기다리지 못해 인간이 되지 못한 범의 새끼가 오랜 시간을 들여 깨우친 기다림의 대가는 아주 달콤했다. 이백 년에 가까운 시간이라도, 기다릴 가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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