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21/21)

  4.

짝을 이룬 금인이 짝이 생긴 이후 처음으로 참여하는 모임에서 술을 제공하는 건 일종의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처음 범신조가 짝을 데려왔단 얘기가 돌았을 때부터 2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그들은 범신조의 짝과 그가 살 술을 고대하고 있었다. 애초에 범신조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같이 강한 개성을 지닌 이형질인들 사이에서도 워낙 눈에 띄는 존재면서 곁은 주지 않아 늘 관심의 중심이었는데, 고작 2년이 지났다고 잊을 리가.

그렇게 이번 모임은 근 2년 사이 가장 참가 인원이 많은 모임이 될 예정이었다.

제 나이보다도 짧을 그딴 전통, 여느 때라면 무시했을 텐데 윤오가 가고 싶어 한단 이유 하나로 범신조는 주류 수입을 담당하는 회사에 직접 가게 됐다. 층고가 넓고 방마다 각 주종에 맞는 온도를 설정해둔 창고에 들어선 지 벌써 삼십 분이 지났다. 금인들은 대체로 주당에 대식가들이 많은 만큼 너무 적어서도 안 되었다. 그렇다고 아무거나 살 수도 없는 법이었다. 물량도 충분하면서 어느 정도 수준의 미식을 만족할 수 있는 범위…. 범신조는 이딴 것으로 고민하고 있는 시간이 귀찮고 질린단 생각을 하며 목록을 지워나갔다.

“대표님, 최근 사케류도 저희가 취급하기 시작했거든요. 한 번 시음해보시겠습니까?”

자동차가 처음 수입되기 시작할 때부터 몰고 다녔던 범신조는 윤오를 태울 때를 제외하면 직접 운전하는 걸 즐기지 않았다. 지긋지긋할 만큼 했으니 말이다. 그런 만큼 오늘은 윤오를 빼고 장용우가 함께 온 참이었다. 직접 운전할 일이 없으니 시음이야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그에게 조금 후, 데운 사케와 차가운 정종이 함께 들어왔다. 범신조는 몇 잔 입에 대며 역시 자신의 취향은 아닌가 싶었다. 회를 먹을 때 종종 입에 대긴 했지만, 그건 메뉴와의 궁합 때문이지 선호해서는 아니었으니까.

그냥 무르려던 그가 멈칫하더니 몇 종을 선택했다.

“이거랑 이거, 그리고 이건 개인적으로 좀 구매하고 싶네요.”

아직 시장에 풀리지 않은 것들이었다. 직접 응대하고 있던 사장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 체구가 크고 위압적인 남자는 매사 성가신 일이란 듯한 반응이지만, 그래도 미감만은 확실히 좋았다. 까다로운 손님이니 만큼 하나도 선택받지 못할 각오도 했는데, 세 종이나 선택하다니. 게다가 고심 끝에 어렵게 들인 신제품이었다. 이 손님에게 선택된 이상, 판매량은 보장되겠구나 싶어 화색이 돌았다.

“이건 제가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별것 아니지만,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찾아주셔서 감사하고 이후로도 찾아주십사 하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범신조가 사람으로 살게 된 이후 초반 몇십 년은 이 저의 섞인 말을 파악하기가 힘들고 성가셨다. 왜 그냥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지, 했으나 이제 그 속에서 지겹도록 오래 살아온 범은 이런 화법에 통달해 있었다.

싱긋 웃은 그가 “제 짝이 좋아하겠군요.”하고 응수했다.

다만 이건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이건 김윤오를 위한 것이었다. 얼마 전, 양주나 맥주보다 소주류를 더 쉽게 마시던 게 생각나서 고른 거니까. 매번 과음하게 두진 않겠지만, 어쩔 수 없이 윤오의 약간 취한 모습을 기대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때 김윤오가 너무 귀여웠거든.

범신조는 엄지와 검지에 판판한 핸드폰을 껴 돌렸다. 혹시 더 마시고 싶은 게 있나 물어볼까.

[소주는 잘 마시고. 사케는?]

굳이 따지자면 둘은 연락을 잘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드문드문 문자를 나눈 기록도 조금만 올리면 끝이 날 정도로 적었다. 대체로 서로의 행방을 물을 때 쓰였다. 윤오의 위치를 알 방법이야 여전히 많이 준비해 두었지만, 최근 범신조가 가장 선호하는 건 이렇게 직접 묻는 방식이었다.

어차피 윤오는 외출이 잦지 않았고 어딜 가더라도 모친의 반찬 가게나 서점, 혹은 혼자 목적지 없이 잠시 산책을 나가는 게 전부였다. 범신조가 집에 없을 때 윤오가 나가는 경우엔, 범신조에게 차고에서 몇 번 차량이 빠져나갔다는 알림이 오고 그러면 그가 윤오에게 연락하는 식이었다.

그러다보니 윤오는 별로 필요성을 못 느끼는지 핸드폰을 잘 확인하지 않았다. 그걸 알기에 범신조는 목록 중에서 윤오와 마시기 위한 게 아니라 모임에 제공하기 위한 세 종류의 술을 골라내며 기다렸다. 주문할 양과 현재 있는 재고와 수급 일자를 조절하기 위해 사장이 잠시 자리를 떴을 때는 이미 15분이 지나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김윤오에게 답은 없었다.

슬슬 초조하다. 어쩔 수 없는 통제욕이 슬슬 흘러나온다. 범신조는 혀를 찼다. 전화를 걸어봤으나 여전히 답은 없었다. 잠시 액정을 두드리며 기다렸던 그는 결국 위치 추적 화면을 켰다.

시계는 여전히 장식장 안에만 있었다. 아직까지도 열에 두 번은 잊지만, 그래도 최근에는 외출할 때마다 하고 나갔으니 높은 확률도 지금 외출 상태는 아닐 거다. 하지만 그 열에 두 번이 문제였다. 비량아는 늘 의외의 구석이 있었으니까.

범신조는 관자놀을 괸 채 눈썹을 문질렀다. 못마땅하기도 하고 불안한 상태기도 했다. 화가 난 건 아니었고. 다만 그의 인상이나 워낙 가진 분위기 때문에 다소 흉흉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막 재고 상태와 수급 일자를 정리해서 나오던 경쾌한 사장의 발걸음이 분위기를 눈치채고 느려졌다. 장용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이제 범신조의 이런 분위기와 상황에 익숙해졌다.

“저에게 주시면 됩니다.”

이개 대체 몇 자리인가 싶은 액수가 적혀 있었다. 범신조는 가격은 보지 않고 수급 일자만 확인한 뒤 서명을 했다.

까다롭고 무섭긴 해도 고용인에게 박한 고용주는 아닌지라, 그래도 다른 지역에 오면 그 지역에 꽤 맛있고 상당히 비싼 식사를 함께 할 수 있어서 내심 기대했던 장용우는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허탕이네, 오늘은. 바로 집에 가자고 하시겠군.

역시나, 거래가 끝나자마자 범신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킷 단추를 채우며 일어난 그가 빠르게 악수까지 마무리한 뒤 장용우에게 입을 열어 “가자.”라고 하려는 순간, 김윤오에게 연락이 왔다.

장용우는 저장된 이름을 보자마자 책상 아래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김윤오 씨, 제발 집에 있다고 해주세요, 하는 간절한 마음이 솟았다.

“여보세요.”

일어났던 범신조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뭔가 잘못되었나 싶어 덩달아 앉으려는 거래처 사장에겐 장용우가 미소로 괜찮다는 뉘앙스를 소리 없이 전했다. 일단 연락이 되니 분위기는 한결 유해졌다.

“뭐하고 있었어?”

장용우는 괜히 일을 보는 척을 하기 위해 패드를 꺼냈다. 그리고 조용히 퍼즐 게임을 켰다. 상사의 사생활 특히 연애는 정말로 궁금하지 않다.

― 정원 구경했어.

“정원? 오늘 조경사 올 텐데.”

― 응. 오셨어. 그래서 옆에서 구경했는데… 내가 귀찮게 한 것 같아.

“귀찮으시대?”

― 아니. 내가 자꾸 뭐 물어보고 그랬거든.

윤오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덤덤하고 차분했으나 범신조는 그 밑에 은은하게 흥분이 깔려 있음을 눈치챘다. 제법 즐거웠던 모양이다.

“재미있었으면 됐어.”

― 술 샀어?

“몇 병만. 선물 받았어.”

― 전에 숙취 심해서 안 마시고 싶은데….

“나중에. 나중에 생각나면. 너 안 마셔도 내가 마시면 되고.”

집이란 것과 뭘하고 있었는지까지 확인한 범신조는 안심하여 느긋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른여덟 번째 리트라이 중인 퍼즐 게임을 끈 장용우가 그 뒤를 따랐다.

― 나 엄마가 가게 오라고 했는데, 지금 올 거야?

“왜? 내가 가는 거 싫어?”

― …….

대답이 없다는 건 싫다는 게 아니다. 김윤오가 어차피 겉으로는 거의 드러나지 않아 범신조나 눈치챌 민망함을 숨기고 있을 게 눈에 훤해, 차 문고리를 잡은 범신조가 나직이 웃었다.

“싫어? 늦게 갈까?”

― …….

“아예 내일 갈까?”

― 아니….

세 번 물어야 나오는 진심은 아주 작고 투명해서 조금만 조급하게 쥐려 하면 산산이 부서질 게 분명했다. 범신조는 겨우 나온 진심을 오래도록 음미했다.

“저녁 먹고 올 거지?”

― 응. 먹고 올 거야?

범신조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나도 먹고 들어갈게.”

고용주의 옆에서 무표정으로 그 말을 기다리던 장용우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곧 통화가 끝났다. 집에서 봐, 보고 싶어, 곧 만나자, 혹은 사랑해. 그런 어떤 말도 없었다. 그런 말을 하는 상사가 아예 상상되지도 않았고 어울리지도 않긴 했다. 신기하게도 김윤오라는 그 앳된 청년 역시 저런 밀어가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서로가 얼마나 진득하게 서로를 생각하고 있는지는 분명히 보였다. 때때로 그게 마냥 사랑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나 싶을 때가 있지만.

“위치추적기를 반지 모양으로 만들 수 있나?”

그래. 바로 이럴 때.

자신의 식사도 상대에게 맞춰 결정하던 남자는 바로 위치 추적기를 운운한다. 반지 같은 로맨틱한 물건에 그런 불손한 의도를 담아도 되는 건지, 평생을 그다지 건전하게 살아오지 못한 주제에 상식적인 장용우가 곰곰이 생각했다.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그러나 결국 장용우는 고용주의 마음에 맞는 대답을 내놓았다.

저녁 식사가 끝날 즈음, 장용우는 업체 이름 하나를 댔다.

“여긴 경호 업체잖아.”

“예. 겉으로는 경호 업체만 운영하는 곳이죠.”

뒤에는 ‘저희가 했던 것처럼요’라는 말이 숨겨져 있었다.

범신조는 몸을 등받이에 기대며 업체 이름을 곱씹었다.

겉으로, 라고 했으니 이름이 같진 않을 거다. 다른 이름으로 위치 추적기를 비롯한 여러 제품을 개발하는 모양인데, 덩치가 커서 경호 업체로 눈가림 같은 걸 할 수 있는 방산업은 아닐 테고…. 아니면,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나?

내밀어진 화면을 검지로 톡, 톡 두들긴 그가 다시 장용우에게 패드를 넘겨주었다.

“연락해볼까요?”

“내가 직접 할게.”

정종을 마시며 대꾸했다. 일단 지금은 어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 *

조경사가 왔다 간 정원은 한층 깔끔해졌고 이전에는 없던 관목도 새로 생겼으나 범신조는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설사 주의깊게 봤다 하더라도 바뀐 점은 잘 몰랐을 거다.

그는 약간의 경사가 만들어 작게 축소한 산처럼 연출한 정원을 가로질렀다.

집은 정원을 포함하지 않아도 넓은 공간이지만, 범신조와 김윤오가 쓰는 영역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즐겨 쓰는 공간은 특히 더 적었고.

처음에는 서재를 확인했다. 서재에 없기에 거실, 그다음 다이닝룸과 합쳐져 크게 빠진 부엌으로 갔다. 막 그곳으로 들어서자 검은색 비닐 봉투를 여는 윤오가 보였다. 고개가 빠지도록 안을 보고 있던 윤오가 인기척에 범신조를 발견했다. 절로 부드러운 시선으로 윤오를 보며 물었다.

“지금 막 온 것 같네.”

윤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볼이 볼록했다. 곧 물고 있던 걸 마저 씹어 삼킨 뒤 봉지 안에서 손을 뺐다. 젓가락과 함께 반찬이 딸려 나왔다.

“그… 챙겨주시는 분이 계신 건 아는데… 그런 분이 있으니까 안 줘도 된다는 말을 하지 못했어….”

범신조가 타박하는 것도 아닌데 어머니가 챙겨준 것으로 보이는 반찬을 용기에 옮기던 윤오의 목소리 끝이 사그라들었다. 범신조는 다가와서 윤오를 가볍게 밀어내고 그 자리에 섰다. 크게 크게 옮겨 순식간에 가져온 반찬을 모두 정리한 그가 딱 소리가 나게 뚜껑을 닫았다.

“잘 먹겠다고 전해드려.”

“…….”

“난 불편해하시는 것 같으니까.”

그제야 윤오가 웃었다. 확실히 엄마가 이제야 말하지만, 범신조 그 사람 너무 무섭다고, 나보다 나이도 어린데 어렵다고 말하긴 했었다.

범신조는 윤오가 아직도 자신을 무서워하고 불편해할 때가 있는 걸 알았다. 자신이 가진 죄책감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듯이, 몸으로 각인된 범신조에 대한 앙금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거다. 그래서 방금 전처럼 뭔가 미리 말하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멋대로 나가기도 하고 때론 문도 멋대로 닫으면서. 범신조는 겁먹을 때와 일을 벌일 때의 차이점을 아직 구분할 수 없었다. 이만큼 살고 몇 번이나 거듭 반복된 만남에도 배울 게 남은 모양이다.

“왜 그래?”

범신조가 갑자기 제 양 뺨을 손바닥으로 누르듯 감싸 올리자 입술이 톡 튀어나온 윤오가 물었다.

“그냥.”

하기는, 지금까지 만난 그 어느 비량아의 삶보다 길게 살고 있으며 그리하여 늘 몰랐던 부분을 보여 주는 김윤오니, 이렇게 새로 배워야 할 일은 계속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범신조는 부디 그 새로 배울 것들이 무궁무진하게 이어졌으면 했다. 아주 오래도록 너를 알아갈 수 있도록.

* * *

이 집에는 서재가 두 개였다. 하나는 책장이 벽을 가득 채운, 어느 순간부터 윤오 취향의 담요가 어질러져 있는 곳이었고 하나는 범신조가 부득이 집에서 일을 해야 할 때 사용하는 깔끔하고 딱딱한 인테리어의 서재였다.

잘 들어오지 않는 곳인데 오랜만에 들어왔다. 그래도 매일 사용한 것처럼 깨끗했다. 범신조는 검은색 가죽 의자에 앉았다. 장용우에게 받은 연락처를 한참 보다가 전화를 걸었다. 비서실에서도 직통 번호로 연결되는 번호였다. 상대는 경호 업체인데 수상하게도 소형 위치 추적기 같은 걸 제조한다는 그 회사였고.

신호음이 두 번 정도 울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 상각 시큐리티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어딘가 부족한 인사말이었다. 범신조는 직통 전화 중에서도 소수만 아는 번호인가 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기에.

범신조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현재 귀사에서 제공하는 서비스 중에 이용하고 싶은 게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 경호 서비스라면 저희 홈페이지로도 전화로도 충분히 신청 가능하신데요, 고객님.

비서가 아닌 것 같은데. 범신조의 입술이 흥미로 비스듬히 올라갔다. 상대는 목소리로만 보아선 이십 대 후반이 아닐까 싶었다. 이끼 위에 서리가 낀 듯한 목소리였다. 눅눅하면서도 냉소적이었다. 이십 대 후반이 아닐 수도 있고. 뭐, 중요한 건 아니지.

“제가 원하는 건 그런 곳에선 찾을 수 없거든요.”

― 혹시 그 서비스라는 걸 잘못 찾으신 건 아니신지. 저희 회사는 경호를 제공하지 다른 걸 제공하진 않는데요, 고객님.

범신조는 상대의 말에 화내며 끊는 대신 낮게 웃었다. 이상하게 그다지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방산업이나 통신업을 하는 것도 아닌데 소형 위치 추적기 개발은 왜 하는 겁니까?”

― 아, 그 서비스.

상대는 당황하지도 않았다. 상대 역시 재밌는지 나직이 웃었다.

“사이즈는 어느 정도까지 가능합니까? 악세서리로 개량할 수 있습니까? 예를 들면 반지 같은….”

― 그러려면 보석이 꽤 큰 게 필요하시겠는데요, 고객님.

“그건 문제가 아니고.”

― 문제죠. 착용할 사람이 큰 보석을 싫어하여 착용을 안 한다면 무용지물이니까요. 몸속에 심는 건요?

“몸에 칼을 대게 하고 싶진 않아서.”

― 아하. 몸에 칼 대진 않았으면 하는데 위치는 추적하고 싶다….

비꼬는 게 분명한데도 여전히 범신조는 불쾌하지 않았다. 그게 무엇이 문제인가 싶기까지 했다. 그는 오랜 시간 시행착오를 거쳐 만들어진 현대의 상식과 도덕 규범보다 산속 먹이사슬의 방식으로 지배하는 데 더 익숙했다. 도덕 규범과 상식을 조금만 무시하면 김윤오를 한층 더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데, 왜 굳이 돌아가야 하지. 언제라고 다시 중요한 순간에 한쪽 눈을 감은 듯 방심하여 윤오를 잃게 되지 않도록 그는 어떤 수단과 방법이든 쓸 수 있었다. 칼을 대지 않는 건 그 나름의 양보였다.

― 그래도 몸에 착용할 텐데, 미감도 중요하죠. 어느 정도 사이즈까지 가능한지, 제안하는 디자인까지 정리하여 보내드리겠습니다. 성함이?

“범신조입니다.”

― 이 번호를 아는 범신조는 많지 않을 테니 찾기는 쉽겠네요.

“고객의 개인 정보를 무단으로 찾아보겠다고 말하는 그쪽 성함은 어떻게 됩니까?”

범신조가 다리를 바꿔 꼬며 물었다. 비량아를 제외하면 아주 오랜만에 조금이라도 재미있는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하면서.

― 이무윤.

“…….”

― 이무윤입니다.

직책을 말하는 것도 없이 오로지 이름뿐이다. 그 의미는 이 이름을 댔을 때 상극에서 나올 이무윤 역시 많지 않다는 뜻이었다. 혹은 아예 나오지 않거나.

상극의 대표는 60대 후반으로 알고 있다. 대표실로 연결되는 전화를 받을 수 있고, 상극에서 개발하지 않는 위치추적기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라…. 사내에서 위치가 평범하진 않을 듯 싶다.

통화를 종료한 범신조는 이름을 곱씹었다.

이무윤. 어쩐지 자꾸만 되뇌게 되는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 * *

범신조는 서재를 나와 코너를 틀었다. 일하는 서재와 독서를 위한 서재는 정원에서 조금 떼어내 키운 듯한 중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코너를 돌아서 서재 문을 열자 적당히 선선한 바람과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책과 직사광선은 사이가 좋지 않다. 그래서 이 서재만은 창을 전통 방식과 현대 기술을 혼합한 기술로 설치했다. 외창은 일반 이중 유리로, 내창은 두꺼운 창호지를 덧댄 문으로. 그리하여 햇살은 아주 부드럽고 뽀얗게 안을 적당히 밝히는 정도만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잠든 김윤오가 있었다. 그가 좋아하는 촉감의 담요는 배와 허벅지만 간신히 가리고 있었고 한 손은 배 위에, 한 손은 의자 너머로 떨군 채였다. 옆으로 내린 손에서 책이 간신히 매달려 있다. 그나마도 바닥에 모서리가 딱 닿아 있어서 떨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범신조는 다가가서 그 책을 빼 가름띠로 페이지를 표시하고 옆 탁자에 두었다. 이것저것 기분과 날씨에 따라 책을 열었다가 덮길 반복하는 윤오의 주변에는 늘 읽다 만 책들이 있었다. 기척 없이 다가가 윤오가 앉은 푹신한 의자 옆에 앉았다.

범신조는 한 책을 진득이 읽는 타입이었다. 윤오가 널려놓은 책들 사이에 그가 읽던 것이 나와 있었다. 꺼내놓은 기억이 없는 걸 보니 윤오가 꺼낸 모양이다. 자신이 읽는 책이 대체 무엇인지 궁금하여 꺼내 보고, 무슨 내용인지 알고 싶어 펼쳤다가 자신의 취향이 아님을 깨닫고 덮어 옆에 두었을 김윤오를 상상해 보았다. 그는 연인과 함께 있던 시간보다 이렇게 머릿속으로 그리고 반추한 날이 훨씬 많았기 때문에 윤오가 그 일련의 행동을 하며 이곳을 돌아다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종이 넘기는 소리조차 조심하며 책을 펼쳤다. 읽은 부분을 펼쳤다가 들어서 코 맡에 가져갔다.

“…….”

김윤오의 체향이 났다.

갈무리할 필요조차 배우지 못하여 뜻하지 않게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는 그 향. 여린 죽순과 흩뿌리듯 내리는 소슬비와 산에서 자라는 운해(雲海)를 닮은 향이. 범신이 태어날 때부터 자라고 가꾼 숲의 가장 여린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향이….

그의 낙원이 이곳에 펼쳐져 있었다.

* * *

“…으으음.”

윤오가 눈도 채 뜨지 않고 기지개를 켰다. 개운한 신음이 흘렀다. 잠이 완전히 깨기까지 눈을 깜빡이며 가만히 천장을 보던 윤오가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천장을 물든 색이 노랑빛보다 주홍빛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그 말은 즉 이미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단 뜻이었다. 윤오는 당황하여 허겁지겁 내려오려다가 “괜찮아. 제때 일어났어.” 하는 목소리에 멈췄다.

범신조가 그곳에 있었다.

“잘 잤어?”

그는 전부터 잡고 있던 책을 쥐고 있었다. 분명 가름띠가 책의 반쯤에 있었는데, 어느덧 후반부를 보고 있었다. 놀랐다가 훅 긴장이 풀린 윤오는 미끄러지듯이 의자에서 내려왔다.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오늘은 바로 그 모임에 가는 날이었다. 범신조가 먹음직스럽고 취약한 상태로 내던져진 줄 알고 김윤오가 무모하게 뛰어들었던 바로 그 곳에.

“가야지.”

슬슬 날이 저물고 있는데 둘은 여전히 게으름을 피었다. 범신조는 약속도 잊고 잠든 윤오를 탓하는 대신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윤오는 그 손길에 눈을 감고 손목에서 풍기는 체향을 맡았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돌리더니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입술은 차근차근 올라왔다. 콧대가 곧 범신조의 뺨에 닿았다. 체향이라고 느끼고 있는 것은 사실상 후각이 느끼는 게 아니고, 그러니 엄밀히 말해선 체향보다 영어권이 사용하고 있는 페로몬이라는 용어가 더 알맞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습관이라는 게 무서웠다. 윤오는 ‘체향’이라고 박힌 개념에 걸맞게 코를 범신조의 뺨에 문질렀다.

“뭐해?”

간지러운지 범신조가 나직이 웃으며 물었따.

“고양잇과는 뺨에서 체향이 가장 짙게 난대.”

“그래서, 확인하는 거야? 어때. 맞는 말 같아?”

잘 모르겠다. 사실 범신조의 냄새는 어디서든, 어느 속에 섞여 있어도 눈에 띄게 짙게 느껴졌다. 다분히 짐승적 논리로 돌아가는 금인과 치인 방식으로 따지자면 그가 먹이사슬의 가장 끝에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윤오의 호흡에 따라 뺨이 간지러웠다. 범신조는 가만히 손을 들어 코와 제 뺨 사이를 막고 밀어냈다.

“더 하면 흥분할 것 같은데.”

담담한 말투지만, 윤오는 범신조가 이런 말투로도 얼마든지 아래를 세울 수 있는 파렴치한이라는 걸 잘 알았다. 그래서 담백하게 떨어졌다. 흙냄새와 짙은 나무껍질 냄새, 그리고 그 끝에 느껴지는 쇠비린내와 흡사한 피냄새가 멀어졌다.

밀어내놓고, 범신조는 윤오에게서 손을 떼어내지 않았다. 손등으로 뺨을 쓸다가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피어싱할 생각이 있냐고 물으려다가 피어싱이 반지보다 더 작은가 싶었다. 역시 아무리 해도 반지나 피어싱 사이즈의 위치 추적기는 힘들겠지. 그 정도가 되려면 군용도 아니고 정보 기관에 납품하는 수준이 되어야 할 거다.

“반지에 보석이 크면 싫어?”

윤오는 대놓고 반지를 운운하는 것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곰곰이 생각한 끝에 대답했다.

“크면 좋지.”

이제 범신조는 윤오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윤오는 범신조가 마음대로 하게 두었다.

“엄마가 반지는 비상금이랬어.”

“비상금?”

“여차하면 현금화해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아. 그러면 기각.”

“왜?”

“현금화해서 뭐하게. 또 도망가게?”

윤오는 대답 대신 조용히 웃었다. 범신조는 윤오가 제 말을 농담으로 들었단 걸 알았다. 진심인데.

습관 같은 불안이 일어 와락 껴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윤오의 허리를 감싸 안고 조용히 숨을 고른 끝에 나름 마음을 정리했는지 고개를 들었다.

“더 늦기 전에 가자.”

윤오는 안 떠날 거란 말 대신 함께 가자고 손을 내밀었다.

범신조는 윤오의 뒷모습을 떠올린다. 네가 비량아일 때를, 그 웅크린 뒷모습을. 날이 갈수록 야위어 작아지던 뒷모습과 날이 갈수록 돌아보지 않던 너를.

처음에는 너를 부르기도 전에 인기척을 내는 것만으로도 돌아봐 웃었는데, 겉잡을 수 없이 아집과 실수로 망가지며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면 나를 남겨 두고 그 등이 작아지다가 끝내 영영 사라질 것만 같아 더 붙잡았다. 망가지는 걸 알면서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그러다가 네 손이 영영 내게 내밀어지지 않게 되리란 것도 몰랐다.

“안 가?”

“가야지.”

범신조는 수백 년의 시간을 한꺼번에 흘려보내고 현실로 돌아왔다. 윤오의 손을 잡고 일어나려다가 갑자기 생각을 바꾸어 잡은 손을 훅 잡아당겼다. 윤오는 순식간에 아래로 무너졌다. 아프지 않게 받은 뒤 몸을 굴려 제 아래에 눕힌 뒤 예고 없이 입 맞췄다. 잠시 놀랐던 김윤오 역시 눈을 감고 입술을 벌렸다.

그 작은 입술 안에 세상이 들어 있었다.

* * *

범신조는 카섹스를 위해 구매한 차를 끌고 모임 장소에 도착했다. 몇 년 사이에 모임 장소는 바뀌어 있었다. 이전에 왔던 곳과 달리, 지하와 1층이 아니라 루프탑 층까지 이어진 두 개의 층과 아래 객실까지 바로 이용할 수 있었다.

“가서 뭐해?”

그 모임에 대해서 윤오가 기억하는 건 많지 않다. 분위기를 파악하거나 둘러볼 경황도 없었다. 기억하는 건 분위기나 사람들의 불편한 관심 정도. 그러니 자연히 가서 뭐하냐는 천진한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범신조는 발렛에게 차키를 건네며 재킷을 여몄다.

“그냥 놀아. 먹고.”

“그게 다야?”

“다지.”

“사교 모임 아니야?”

“친구 사귀고 싶어? 난 네가 거기서 친구 안 사귀었으면 좋겠는데.”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지내, 도 아니고 친구 사귀지 마, 라니. 어쨌든 서로의 보호자가 될 관계인데 한 보호자가 좀 이상했다.

“진짜야. 친하게 지내서 뭐해.”

“나 친구 없어. 가출하고 연락 끊겨서.”

“나도 친구 없어.”

할 말 없게 만든다. 범신조는 윤오의 손을 당겨 쥐어선 제 몸에 딱 붙게 끌었다. 억지로 깍지를 끼게 한 손을 입술로 가볍게 빨았다.

친구가 없는 건 정말 자랑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이렇게 나오니까 뭘 말하려 했었는지도 까먹게 된다.

윤오는 그래도 모임이라고 셔츠를 입은 상태였다. 그는 넥타이를 하고 범신조는 노타이에 셔츠 단추까지 좀 푼 상태였다. 대학 졸업식 사진을 찍을 때처럼 긴장하고 차려입는 윤오를 보니 귀엽고 웃겨서 그럴 필요까지 없다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솔직히, 김윤오의 넥타이와 셔츠 단추를 풀 기회가 또 언제 오겠나. 입을 때부터 벗겨 먹을 생각부터 한 남자는 고르고 골라 카섹스를 상상하며 구매한 차를 선택한 것이다.

그런 속내도 모르는 윤오는 이 가짜 사교의 장을 앞에 두고 신입생 모임이 있는 가게 입구에 선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데 자꾸 떨렸다. 분명 처음에 오겠다고 결심했을 땐 가벼운 마음이었다. 숲에 갇혀 있던 전번의 생과 달리 범신조와 함께 세상 속에 나오자 싶었던 마음 정도였다.

그런데 정작 당일이 되고 코앞에 임박하니 두려운 게 아니라 뭔가 저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이 자꾸 든다.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아주 오래 기다려왔으면서도 영영 마주하고 싶지 않은 무엇처럼 심장을 마구 뛰게 했다.

안그래도 이런 상태로 윤오는 오늘 하루종일 묘하게 들떠 있었다. 단순히 지금 입장을 직전에 두어서 떨리는 게 아니란 뜻이었다. 가슴에 헬륨 가스가 들어간 양 자꾸만 헛바람이 일었다. 그래서 범신조의 사심과 다르게 옷을 고르는 것도 그답지 않게 시중했다.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약간 흥분 상태에 젖어든 양 넋이 나간 윤오는 자신이 범신조를 끌며 앞서나가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안으로 들어가자 여느 때처럼 적당히 시끌시끌한 분위기와 서로의 체향이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 중화되도록 피운 향 같은 게 느껴졌다.

“술 조금만 마셔.”

왠지 모르게 들떠 보이는 윤오를 끌어서 귀엣말로 충고했다. 윤오는 건성으로 들으며 내부를 이리저리 살폈다. 눈에 띄게 불안정해보이는 모습에 슬슬 범신조도 걱정이 되었다. 왜 이러는 거지?

“나 혼자 구경하고 다녀도 돼?”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듯 멍한 목소리로 묻는다. 범신조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왜?”

“여기 전시회도 하고 있잖아.”

범신조는 그제야 내부에 가구들과 그림 따위가 있다는 걸 알았다. 이곳에 몇 번 와봤지만, 이런 걸 하는 줄도 몰랐다. 그가 이전까지 이곳에 오는 목적은 여전히 그 누구의 체향도 자신에게 와닿지 않고, 이 속에 비량아는 없으며, 나는 아직도 업보 속에 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였으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홀로 왔다가 비량아가 없다는 걸 알고 홀로 떠나는 장소밖엔 되지 못했었다. 이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이런 것도 했었나….”

“나 저거 보고 올게.”

중얼거리는 사이에 윤오가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는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범신조는 조금 당황했다. 윤오는 슈가 하이가 온 어린애처럼 묘하게 흥분한 모습이었다. 뒤늦게 그 모습이 비량아가 헛것들을 볼 때의 표정이란 걸 떠올린 범신조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윤오를 살피기 위해 느리게 쫓았다. 눈은 윤오에게 꽂은 채 서버의 트레이 위에서 잔을 챙겼다.

그림과 가구 때문인지 사람들은 이쪽에 조금 몰려 있었다. 범신조는 그들 사이를 해쳐 지나가다가, 갑자기 붙들렸다.

“범신조 대표!”

주 대표였다. 그는 활짝 웃으며 범신조의 팔을 붙잡았다. 갑자기 불린 이름과 사람들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윤오 쪽을 번갈아 보던 그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가 펴며 돌아봤다.

“오랜만이네.”

“그러게! 안 올 줄 알았지 뭐야. 술 오늘 그쪽이 준비했다며? 다들 맛있다고 난리야. 게다가 네가 짝이 생긴 건 다 헛소문이라고 믿었던 놈들까지 진짜였냐고 충격에 빠져 있더라고. 네 덕에 오늘따라 재밌다, 여기.”

“아, 뭐.”

범신조가 듣는 시늉도 안하며 대충 대답했다. 주 대표는 여간 신난 게 아닌지, 그러거나 말거나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그간 범신조 고자인 설까지 돌았는데 말이야. 최초의 고자 금인인 줄 알았더니 용케 짝이 생겼다고 다들 쑥덕대고 있어. 나야 미리 알았지만, 지금 안 척하고 있지. 술은 잘 마실게!”

“음.”

“그나저나 내 컬렉션 어때? 벌써 주문 들어와서 매진된 것도 있거든? 다시 수입하려면 반년은 기다려야 해. 범 대표 몫은 의리로 내가 빼줄 수 있으니까 골라 봐. 윤오는 이런 거 안 좋아하나?”

웬 가구인가 했더니, 주 대표의 사업 프로모션이었던 모양이다. 범신조는 마르는 입을 축이고 건성으로 반응했다. 슬슬 짜증난다. 윤오가 오고 싶어 해서 데려왔는데, 오늘따라 그 애는 이상하고 사람들은 거슬린다.

“범신조 대표님?”

그때 한껏 흥분해 떠드는 주 대표의 목소리 사이로 어쩐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눅눅한 목소리. 고개를 들어보니, 그곳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머리칼에 약간 가무잡잡한 피부, 자세히 보면 예쁘장한 구석이 남아 있으나 전체적으로 벼린 날처럼 생긴 남자였다. 특히 오래 살아왔음에도 읽기 힘든 깊은 눈빛이 그랬다. 자세히 보니, 칠흑같은 검은 눈에 붉은 기가 미미하게 돌고 있었다.

남자는 온통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범신조처럼 노타이에 셔츠 단추를 그보다 조금 더 풀어놨는데 다소 위험한 분위기가 풍겼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모습을 보자 남자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저, 얼마 전에 통화한 이무윤입니다.”

크고 또렷하기보다 안개 같은 느낌을 주는 목소리인데도, 주변의 소란스러움을 뚫고 똑똑히 들렸다. 범신조는 제게 내밀어진 손을 보았다가 주 대표에게 먼저 양해를 구했다.

“나 잠깐 볼일 먼저 보고 올게. 나중에 연락하도록 하지.”

주 대표는 얼떨떨한 눈으로 무윤과 신조를 번갈아 보았다. 무윤은 오늘 처음으로 나타난 사람이었다. 본업인 엔터 사업 덕분에 여간 발이 넓은 편이 아닌 주 대표조차 이 남자는 초면이었다. 범신조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 좀 더 좋은 구석으로 향하는 둘을 보던 주 대표가 들고 있던 술을 홀짝였다.

“둘이 좀 분위기가 닮았네.”

중얼거리며.

* * *

“이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무윤은 본인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범신조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았다. 대부분 범신조를 만나면 일단 당황하는 경우가 많은데, 특이했다. 범신조는 상대의 피가 어느 혈통일지 궁금했다.

아주 오랫동안 살아온 범신조는 그 누구보다 금인에 대해 잘 알았다.

옛날에는 인구가 이만큼 많지 않았다. 그 속에 극소수인 금인들은 각자 다 근원이랄 짐승이 있었고 그만큼 짝도 정해져 있었으나 이제는 아니었다. 인구가 급속도로 늘며 피가 옅어져 안인에 가까워진 금인도 많아졌고 안인과 짝을 이룬 금인도 있었다. 그만큼 혈통이랄 것도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그러니 상대도 잡종일 확률이 높지만, 어쩐지 아닐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이리?”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무윤의 눈이 흥미롭게 뜨였다.

“카니스 루푸스(Cannis Lupus;늑대)요.”

남자가 구체적으로 학명을 댔다.

“촉이 좋으시네요.”

나직이 웃는 모습이 의뭉스럽다.

“금인이신 줄 몰랐습니다. 요즘엔 안인들 중에도 위치 추적기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서요.”

“…….”

“상대 분과 함께 오셨나 보죠?”

“짝과 함께 왔습니다.”

그저 그런 상대와 짝은 분명히 달랐다. 무윤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번엔 범신조가 물었다.

“상대를 찾으러 오셨습니까?”

“아뇨. 저도 짝과 함께.”

“어려 보이시는데, 벌써 짝을 찾으셨다고요.”

“운이 좋아서.”

기이한 사내였다. 웃을 때 접히는 눈이 무표정할 때보다 오히려 속내를 알기 힘들었다.

“말씀하신 소형 위치 추적기요, 가능할 것 같아서 말이에요. 반지 디자인은 결정하셨어요? 제가 평소 이용하는 브랜드가 있는데, 디자인을 결정하시면 제작도 대신 해드릴 수 있습니다.”

“아직 못 골랐습니다.”

범신조의 관심은 금세 흐려졌다. 반지 이야기를 하며 놓쳤던 윤오에게 다시 관심이 쏟아졌다. 고작 이 정도 떨어졌다고 초조해하는 게, 첫 발정기를 겪을 때의 금인보다 인내심이 짧았다.

그때 윤오는 범신조가 있던 비교적 한갓진 구석의 정 반대에 있었다. 마음이 끄는 대로 걸었더니 여기였다. 이 그림은 인기가 없는지, 이곳만 덜 붐볐다. 왜 여기로 오고 싶었을까. 단순히 그림 때문이었나? 그렇게 마음에 들진 않는데. 그림을 어떻게 봐야 할 지도 모르겠고.

그레서 윤오는 그저 그림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이거 다 진품일까?

그런 윤오의 옆에 누군가 섰다. 자신처럼 유독 인기가 없는 이 그림에 눈이 팔린 또 다른 손님이 있는 모양이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던 윤오는 그만 굳고 말았다.

“…….”

손님은 얼핏 윤오와 닮아 있었다. 다만 선이 조금 더 부드럽고 피부가 희었다. 윤오보다 키도 체구도 조금 작았고 조금 억센 윤오의 머리칼과 달리 부드럽게 흩날릴 것 같은 머리카락이었다. 귓바퀴에 작은 점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달콤하고 은은한 향이 났다….

그는 그림을 다 감상했는지 옆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윤오는 홀린 것처럼 그 발걸음을 쫓았다. 어느덧 그림은 아니, 이 모든 공간과 상황은 날아가고 이 세상에 둘만 남은 것 같았다. 윤오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고 입술은 살짝 벌어진 채 떨렸다.

‘누가 널 사랑하겠어….’

‘내가 네 삶을 망쳤어.’

제 목소리가 귀에 왕왕 울린다. 딛고 있는 바닥은 모래로 된 늪이 되어 자꾸만 발걸음이 푹푹 꺼지는 것 같았다. 손님은 윤오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그림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윤오는 점점 차가워지는 손을 접었다가 폈다.

“제 짝은 저쪽에 있습니다.”

범신조는 무윤이 가리키는 손끝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곳에서 보기에는 뒷모습만 모였다. 하나는 낯설었고 하나는 뒷모습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는 제 짝이었다.

윤오는 그림을 앞에 두고도 그곳이 아니라 제 옆에 선 사람을 보고 있었다. 넋이 나간 듯 미동조차 없었다. 범신조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옆은 제 짝인데 말입니다….”

뭔가 이상한 분위기에 범신조가 발걸음을 움직였다. 무윤 역시 제 짝 옆에 선 사람이 제 짝에게 온 신경을 쏟고 있는 걸 보곤 덩달아 이동했다.

그림이 걸린 벽면을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움직였다. 어쩐지 다가가는 걸음마다 범신조는 그답지 않게 긴장되는 게 느껴졌다. 김윤오의 뒷모습을 보고 쫓고 있는 거라 그런 걸까? 김윤오, 하고 부르려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왔더라도, 김윤오가 아니라 비량아의 이름을 불렀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선생님.”

대신 부른 것은 옆에 선 사람이었다. 무윤이 제 짝을 불렀다. 짝의 직업이 선생인 건지, 그의 선생이었던 건지 아니면 둘 다 해당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림 앞의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세계에 푹 빠져 있던 터라 돌아보지 않았다. 초조하다. 범신조는 두 치인을 번갈아 보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비량아, 조금 전 채 뱉지 못한 이름이 한숨이 되어 흘러나왔다.

“비파 선생님.”

재차 부른 말에 이번엔 돌아본다. 두 사람 모두 돌아봤다.

비파 말고 낯선 사람도 함께 돌아봤을 때, 무윤은 조금 놀랄 정도로 분위기가 닮은 그 모습에 발걸음을 멈췄고 범신조는 윤오의 표정과 무윤의 입에서 나온 이름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

울 것처럼 창백하게 질린 표정. 이루 설명할 수 없는 모든 감정이 저곳에 모여 김윤오 아니, 비량아의 형상을 빚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감정들은 모두 당장이라도 흘러내릴 것 나약하고 축축해서… 김윤오 역시 무너질 것 같았다.

무윤이 먼저 움직였다. 그가 성큼 다가가 비파를 가리듯 섰다. 그에 범신조도 움직였다. 바닥이 물컹거리는 것처럼 어지럽다. 그가 딱딱하게 굳어 미동도 없는 윤오의 어깨를 감쌌다.

“괜찮아?”

낮은 목소리로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범신조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거대한 파도가 둘을 쓸고 갈 것만 같았다. 이미 윤오는 천재지변을 맞닥뜨린 것처럼 무력하게, 비량아를 지나치게 닮은 남자를 보았다.

무윤과 비파는 자신들을 번갈아 보는 윤오의 시선이 의아했다. 그는 마치 자신들을 익히 알던 사람들처럼 보고 있었다. 저런 눈빛을 하고 쉽사리 말도 걸지 못하는 경우에는 보통 원수를 대할 때 같은데, 조금 더 보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원수가 아니라….

“제 짝, 서비파입니다.”

저쪽이 먼저 소개할 분위기가 아니기에, 무윤이 비파를 소개했다. 자신의 짝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짝의 성함이 비파시군요.”

범신조는 뒤늦게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비파는 무윤에게 속삭였다. 아는 사람이야? 하는 목소리에 범신조가 안은 윤오의 몸이 튀었다.

서비파. 비파에게 성이 있다. 그건 안 어울리듯 어울렸고 뺏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도 영영 비파에게 속하길 하는 두 가지 마음을 들게 했다.

“안녕하세요.”

비파의 목소리에 범신조는 이를 꽉 깨물었다.

“안녕하세요…. 서비파입니다.”

어색한 웃음을 섞어 인사를 건넸건만 무안하도록 답이 없다. 윤오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신조를 조금 밀어냈다. 애써 웃어 보였다. 저 목소리나 말투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다. 그러나 혹시나하는 마음이 든다. 아직 제대로 보지 못해서 그런 거 아닐까. 제대로 보면 떠오르지 않을까.

떠올린다고 좋은 기억이랄 건 하나도 만들어주지 않았으면서.

비파와 비량아가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비파는 그의 기억보다 조금 더 자라 있었다. 아마 이게 모두 성장했을 때의, 비량아가 결코 보지 못한 모습이었을 거다. 비량아는 타들어가는 것처럼 마른 입을 겨우 열었다. 이렇게 보고 있어도 비파의 표정은 변화가 없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

“김윤오입니다….”

“네에.”

“악수를 청해도 될까요?”

갑작스러운 요청일 텐데 비파는 당황하지 않고 선뜻 손을 내밀었다.

비량아는, 김윤오는… 먼저 악수를 청해놓고 도리어 본인이 머뭇거렸다. 그리고 겨우 맞잡았을 땐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범신조의 옷자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범신조는 저를 바라보는 윤오의 표정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공들여 세운 모래 방벽을 파도가 밀려와 허무하게 무너뜨리는 듯한 마음이었다. 지금 김윤오가 무슨 부탁을 하든 다 들어주고 싶어진다. 그래야만 속죄가 되는 게 아닌데도, 그렇게 해서라도 잡지 않으면 이대로 무너질 것만 같았다. 범신조는 제 옷자락을 잡은 손을 당겨선 움켜쥐었다.

“아는 사람이야?”

윤오가 절박하게 물었다. 시선 끝에는 비파 곁에 서있던 무윤이 있었다. 어떻게든 닿은 선 하나를 찾으려는 그 애처로운 몸짓에 범신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이름 하나 아는 사이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윤오를 실망시키고 싶진 않다.

그 모습을 보던 무윤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비파의 어깨를 잡고 가자고 속삭이려다가 멈칫했다. 비파가 비량아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사람들과 교류하는게 불편하다며 낯선 사람이 있는 경우 그 자리에 오래 있지도 않던 사람인데.

“선생님, 혹시 아는 분들이에요?”

무윤이 부러 다정하게 묻자 비파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선잠에서 깨듯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모르는 사람이야.”

“그런데 왜 그렇게 봐요. 나 오해하게….”

웃으며 말하고 있지만 진심이었다. 이끼로 숨긴 칼날처럼 말속에 숨겨진 뉘앙스를 읽은 비파가 제 어깨를 잡은 손을 감싸고 난처한 듯 웃었다.

자기도 이해할 수 없게, 저 사람한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자신을 보던 표정이 너무 안 좋아서 그랬을까?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서.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어서.

그리고 그 옆에 선 남자 역시 자꾸만 곁눈질로 자신을 보고 있다. 마치 오래도록 알았지만, 잊고 지냈던 사람을 갑자기 재회한 듯한 기분이다.

정작 눈이 마주치니, 윤오는 시선을 피했다. 자꾸만 몸을 숨기고 싶어졌다. 숨이 가쁘다. 손발이 저릿저릿하다. 죄책감일 테다.

보아하니 비파는 자신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럼 이 상황에서 비파의 이전 일을 모두 아는 건 자신 뿐일 거다. 영영 맞출 수 없도록 조각 일부가 없어진 퍼즐 조각들처럼 이들이 모여 있었다. 운명 같은 우연으로 혹은 우연을 가장한 운명으로.

사연을 모르는 무윤은 비파와 윤오 사이에 흐르는 묘한 분위기와 그걸 방조하는 범신조에게 심사가 뒤틀린 것 같았다.

“제 짝에게 관심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두 분 다.”

무윤이 사납게 웃으며 물었다. 범신조는 그런 무윤을 보며 아직 어려서 그런가 치기 넘친단 생각을 했다. 그에 반해 비파는… 나이가 몇인지는 모르겠으나 수면처럼 잔잔했다. 제 짝을 감당할 수 있을지, 감당하려다가 지쳐 재로 타들어 가게 되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만난 적은 없지만, 따로 부모로서 준비된 마음가짐이 있다고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름을 지어준 비량아와의 아이였다. 현생에선 아닐지라도 전생에선 분명 그랬다. 다른 이름을 갖고 태어나지, 하필이면 또 그 이름을 갖고 자랐구나.

범신조는 오랜만에 넘긴 머리를 조금 초조하게 쓸었다. 그러다가 마침 지나가던 서버를 잡아 술잔을 받아 윤오에게 건넸다. 윤오는 그게 냉수라도 되는 양 들이켰다. 아직 한 잔인데, 비파의 시선이 느껴질 때마다 없는 취기가 오르는 것 같다. 얼굴이 붉어질 것만 같다.

“아닙니다. 저희가 짝이 되고 처음으로 참여한 모임인데, 우연히도 이런 첫 참여에 저희처럼 짝이 있는 분들을 만난 게 신기해서요,”

자연스러운 변명이었다. 그리곤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였다. 물론 고의로.

“마치 인연같지 않습니까?”

그 말에 윤오가 조금 당황했다. 뭐하는 거야, 하고 속삭였다.

“원래 짝이 생기면 모임에 한턱 내는 게 전통이라서요. 아마도 다음 번에는 이무윤 씨 차례가 될 것 같은데, 제가 좋은 술을 취급하는 업체를 하나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다음에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여유로운 범신조와 달리 윤오는 목이 탔다. 지나가는 서버에게서 잔을 하나 더 가져와 비워냈다. 물처럼 투명한 생김새와 달리 제법 독한지 코와 눈시울이 찡했다. 다른 이유 때문에 찡한 걸지도 모른다. 비파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어 시선이 자꾸 비파의 어깨나 목덜미에서 미끄러졌다.

“…그렇군요.”

무윤은 천천히 대꾸했다.

그동안 범신조는 제 등 옷자락을 잡아끄는 윤오의 손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손은 계속 떨리고 빈속에 마시는 술이라곤 다 독해서 금방 취할 것 같았다. 웃기지도 않는 전통이고 나발이고 중요한 게 아니었다. 범신조는 무윤에게 명함을 건넸다. 전에 차를 살 때는 가지고 있지 않던 여러 종류의 명함 중 하나였다. 이름과 번호만 적혀 있는.

“다음에 또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무윤은 명함을 받고는 손가락 위로 동전을 굴리듯 그 종이를 굴렸다. 보고 싶은 건 내가 아닌 것 같은데. 이 두 사람의 의도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선생님에게 관심이 있단 거다. 그냥 무시할까…. 그러던 차에 비파가 조금 나와선 자기 번호를 알려주려는 게 보였다.

“선생님!”

나직이 외친 무윤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비파를 보았다. 무윤만 알 수 있는 방식으로 비파는 조금 상기된 상태였다.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 없이 왜 그래요? 하고 물었으나 비파 역시 혼란스러운 눈빛이었다.

“제 번호를 드리죠.”

그래서 무윤이 나섰다. 비파의 단출한 연락망에 새로 사람이 추가되는 건 달갑지 않다. 무윤은 성급한 손길로 번호를 눌렀다. 곧이어 범신조에게 기록이 남았다.

찍힌 제 번호를 저장하는 걸 보며 무윤은 핸드폰 모서리로 턱을 툭, 툭 쳤다. 비파에게 다른 의도로 관심을 보이는 여타 사람들에게 느껴지던 불쾌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만약 그런 기색이 있었다면, 예를 들어 짝이 있는 상태로 다른 사람과 쓰리썸을 즐기고 싶어하는 이상성욕자 커플 같았다면 애초에 이렇게 오래 마주보고 있지도 않았을 거다. 무윤은 감이 좋았고 그건 대체로 틀린 적이 없었다.

오늘따라 왠지 이곳에 꼭 오고 싶어 했던 윤오의 감이 맞아 떨어졌던 것처럼.

“오늘은 제 연인이 몸이 좋지 않아서 부득이 먼저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곧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어느새 세 번째 잔을 비우고 있던 윤오를 끌어 옆에 단단히 붙인 범신조가 흠잡을 데 없는 인사를 건넸다.

윤오는 자신보다 조금 작고 자신을 많이 닮은 비파를 보다가 시선을 피했다.

속이 울렁거린다. 비단 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도망치고 싶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시간이 멈추었으면 한다. 이율배반적인 마음은 흔들리다가 이도저도 아니게 될 뿐이지, 명확한 정답으로 이어진 적은 한 번도 없다. 범신을 죽이고 싶으면서 동시에 곁에 있고 싶었던 마음이 끝내 죽이지도, 영영 떠나지도 못하게 된 것처럼.

대신 윤오는 비파의 옆에 선 남자를 보았다. 그는 비량아일 때처럼 혼백을 보지도 못하고 그들을 수족처럼 다루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감이란 건 남았다. 기억을 되찾은 이후로는 그 감은 더 정확해졌다. 오늘 내내 기이하게 들떴던 이유도 결국 지금의 만남을 예고한 게 아니었나.

늪 같다. 비파의 짝이라고 선 남자를 본 순간 그런 인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아니, 용암 같다는 게 더 맞겠다. 위험해 보인다. 윤오는 그런 짝을 고른 비파를 보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에게 비파에게 조언이든 무엇이든 할 자격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지금 여기서 그들은 초면이었다. 가짜 형제도 되지 못하고 심지어는 친구조차 아닌.

“만나서… 반가웠어요.”

윤오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비파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뒤늦게 네, 하고 대답했다. 저 순한 반응이 자신이 알던 비파 그대로였다. 성이 있는 서비파든 성이 없는 비파든 그는 자신이 알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 모습 그대로의 네가 나를 기억하지 못해서 다행이다.

비량아는 겨우 웃어보였다.

* * *

바깥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국지성 호우였다. 빗방울은 굵었고 차로 가는 아주 짧은 시간동안에도 주최가 제공한 우산 위로는 묵직한 물방울 소리가 들렸다. 범신조는 혼이 빠진 듯 넋이 나간 윤오를 단단히 감쌌다.

좌석에 올라타는 잠깐 사이에도 몸이 젖었다. 윤오는 멍하니 조수석에 앉아서 물방울이 궤적을 그리는 앞유리를 보았다. 운전석에 탄 범신조가 안전벨트를 당겨 대신 해주었다. 그의 품이 다가온 순간 윤오는 젖은 숲 냄새를 맡았고 곧 비파의 체향을 떠올렸다.

그가 태어나지 않던 몇 년 동안 자신에게서 나던 향이었다.

차는 어느새 도로 위였다. 추적추적 비가 내려 젖은 창문 안쪽으로 윤오의 모습이 보인다. 멍하니 앞을 보고 있던 얼굴이 함께 젖었다. 창문에 온통 그어진 빗방울 궤적 때문에 처음에는 그가 우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곧 윤오의 허벅지 위에 있던 손이 주먹으로 말리며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도로는 막혔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 밤, 갑작스러운 비 때문에 돌아가는 차 행렬 때문에 거의 서 있어야만 했다. 윤오는 잔뜩 젖은 창 너머로는 새나가지 않을 소리를 내며 엉엉 울었다. 그 얼굴이 어린아이들처럼 망가졌고 범신조는 조용히 핸들을 감싸며 그곳에 턱을 괴었다.

달랠 말이 없다. 달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윤오가 비파에게 함부로 말을 걸지 못하던 이유와 같았다. 차 안으로 윤오의 울음이 고인다. 발바닥부터 찰랑찰랑 차고 올라 곧 두 사람을 모두 잠기게 할 것이다.

* * *

새벽에 윤오는 침대를 빠져나갔다. 범신조 역시 눈만 감고 있었지, 잠들었던 건 아니었던 터라, 조금 기다렸다가 쫓아갔다.

봄이 저물고 여름의 초입으로 들어서는 시기였다. 그래도 여전히 밤은 서늘했다. 범신조는 얇은 카디건을 팔에 걸고 윤오를 찾았다.

윤오는 어두운 밤길을 휘청거리면서도 용케 걸어갔다. 행여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범신조는 손만 뻗으면 바로 잡을 수 있는 거리에서 지켜봤다.

어디로 갔을지는 뻔했다. 역시나 윤오는 비파 나무 앞에 섰다. 그 앞에 서서는 뒤쫓아오리란 걸 알았다는 듯 놀라지도 않고 범신조 쪽을 물끄러미 보았다.

촉촉한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볼과 손이 다 찢어질 것처럼 차가운 겨울 바람이 부는 것만 같다. 비량아도 김윤오도 노상 건조하고 차가웠다. 눈물이라도 흘리면 좋을 텐데 눈시울만 빨갛게 붉힌 채 이쪽을 응시하고만 있다. 범신조는 그런 윤오에게 다가가 카디건을 걸쳐주었다. 그 손을 뿌리치지 않은 윤오는 곧 서늘한 눈에서 곧 터질 것 같은 습한 눈이 되어 물었다.

“…이렇게 만날 수도 있어?”

“내가 삼라만상의 진리를 모두 통달했다면, 여기에 있지 않겠지.”

“…….”

“너에게 그런 실수를 하지도 않았을 테고. 우리 사이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거야. 오히려 네가 낯선 감정에 무서워 도망치려 한다는 걸 일찍이 깨닫고 차분히 가르쳐줬겠지. 그러니 나도 모르겠어. 이렇게 만날 수도 있는 건지.”

지금 이야기가 아니라 비량아와 범신 때의 이야기를 말하는 거다. 윤오는 범신조도 오랜 시간 왜 우리가 그렇게 되었을지를 곱씹고 복기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깨닫기까지 아주 많은 시간과 여러 번의 비량아의 죽음을 겪어야 했으니까, 어떻게 이렇게 비파를 만나게 되었을지까지 이해하려면 또 많은 시간이 필요할 거다.

“만나리라곤 생각도 못했어….”

“추워.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해.”

“똑같았어. 봤어? 그 애가 맞아. 그런데 내가 기억하던 모습보단 조금 더 성숙했어. 완전히 몸이 자란 것 같았어. 나이가 몇이었을까? 그 옆에 있던 짝은? 짝 봤어? 안 좋은 사람 같았는데….”

“안 좋은 사람인진 모르겠고.”

떳떳한 업종을 하진 않는 것 같단 말은 뒤로 숨기고 범신조가 횡설수설 떠드는 윤오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윤오는 신열을 앓는 사람처럼 두서없이 혀를 움직였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것 같았어. 체구는 크지 않았고. 전생에도 그랬을까? 그 짝도, 전생에 만났던 것 같아?”

“비량아, 나는 비파가 전에 어땠는지 몰라.”

평소였다면 윤오는 이 말을 듣자마자 입을 꾹 다물었을 거다. 범신조가 혹시나 하여 던진 비량아라는 이름에도 반응이 없다. 그는 무섭다. 윤오가 다시 과거에 덮쳐질까 봐, 그래서 또 새벽마다 달려나가던 때처럼 길을 잃을까 봐서. 그러나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침착함을 잃지 않고 견디는 일 뿐이었다.

“별로 느낌이 안 좋았는데…. 난 좀 더 햇살같고 평범한 사람을 만났으면 했어. 아주, 아주 평범해서 저무는 해를 보며 때론 이렇게 사는 게 좋은 걸까, 회한이 들 정도로 평범한 사람. 아니, 아니야. 사실은 아무도 안 만났으면 했어. 내가 겪은 일 같은 건 겪지 않았으면 했어. 나 같은 실수는 하지 않고 너 같은 실수를 하는 사람도 만나지 않고, 그냥 그런 건….”

“…….”

손도 가만히 두지 못하고 마구 중얼거리던 윤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곤 천천히 다시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차에서처럼 탈진할 만큼 울까 봐, 범신조는 초조해졌다. 그 역시 비파를 보았지만, 실제로 본 이후에도 그에겐 여전히 비량아가 우선이었다. 평생 온전히 잡아본 적도 없고 다치지 않게 잡은 적도 없던 연인이.

“우린 너무 닮았잖아… 그렇지?”

“…….”

범신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기에도 비파는 비량아를 무척 닮아있었다. 지금은 머리 모양도 다르고 옷차림도 상당히 달라 풍기는 분위기 때문에 그런 닮은 모습이 조금 덜 느껴지겠지만, 지난 생애처럼 다들 비슷한 옷을 입던 때라면 확실히 눈치챘을 거다. 누가 보아도 둘이 혈육이라고.

범신조의 모습은 입술과 귀 모양 정도겠다. 그는 비파가 자신을 거의 닮지 않아서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해왔다. 조금이라도 닮았다면 아이는 발톱과 이빨을 지녔을 것이고 비량아가 악에 받쳐 했던 말처럼 결국 그의 피가 비량아의 배를 찢어 죽이고 말았을 거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윤오가 얼굴을 싸맸다. 으으, 앓는 소리를 내더니 결국 후회를 하고 만다.

“괜히 아는 척을 했어….”

“후회해?”

“…후회해.”

“비파가 너를 기억하지 못하는데도?”

윤오는 범신조의 입에서 나온 비파라는 이름에 깜짝 놀랐다. 조금 전에도 불렀건만, 이제야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모양이다.

쓰게 웃은 범신조는 차치하고, 윤오는 범신조가 이름을 뱉을 때의 음성을 곱씹느라 여념이 없었다.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그저 이름을 불렀을 때와 얼굴을 안 뒤에 이름을 부르는 건 분명히 다르다. 이제 범신조도 비파를 ‘아는’ 것이다. 비록 얼굴 뿐이라도.

비파를 만나고도 그 이름을 입에 담는 목소리는 생각보다 더 차분했다. 그리고 생각보다는 더 다정하게 들렸다. 비량아로 함께 지내온 범신조나 이후에 김윤오로 만난 범신조나, 그는 비파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특히 비량아일 땐 태어나진 않았어도 뱃속에서 함께였는데도 불구하고 다정한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사실상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래서 윤오는 그가 비파에게 관심이 없고 하염없이 차가울 줄 알았다. 범신이 평소 사람을 대하고 평할 때처럼.

“…그 목소리로 비파 이름이 불리니까 이상해.”

“이상해? 내가 지어준 이름인데.”

“하지만… 별로 관심이 없었잖아.”

“짐승들은 원래 그래. 수컷 범은 자기 새끼도 물어 죽인다는 거 알아?”

“쓰레기네.”

“음.”

쓰레기라 불리는 건 괜찮았지만, 윤오가 이렇게 바깥에서 서성거리는 상황은 안 괜찮았다. 이제 그만 억지로라도 안에 데려갈까 하는데, 그 사이 또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심각해진 표정으로 윤오가 중얼거렸다.

“비파 짝도 좋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았어.”

짝‘도’라니…. 이건 제 짝인 나도 좋은 사람은 아닌 것 같단 뜻이겠지. 머릿속으로 도둑놈, 이라는 단어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 생각이나 할 정도로 비파의 짝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범신조와 달리, 윤오는 두 사람이 서있던 모습이 자꾸 머릿속에 맴도는지 초조한 기색이었다.

“잘못된 상황이면 어떡해? 잘못 만난 거면…? 나처럼 실수하는 거면… 걘 나를 너무 많이 닮았잖아.”

윤오의 눈빛이 흐려졌다. 꿈결을, 이미 지나가버려 고칠 수도 없는 과거를 헤매는 것처럼 보였다. 범신조는 윤오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지금의 비파는 아니지. 지금 비파가 어떤지 네가 어떻게 알아.”

그는 비파를 만나고도 이성적이었고 그래서 다소 모진 말을 하는 악역을 자처할 수 있었다.

“네가 만난 건 네가 알던 비파가 아니라 다른 생을 가진 서비파야. 넌 걔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걔도 너를 기억하지 못하고.”

“…….”

“그리고 전생의 비파조차, 너 역시 잘 모르잖아.”

갑자기 가슴을 은비녀로 찔린 양, 윤오의 말문이 턱 막혔다.

비파와 살던 시절 대부분을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보냈다. 그는 현대 기준에서 보면 좋은 양육자가 아니었고 오히려 학대자에 가까웠다.

범신조의 품으로 윤오의 무게가 맥없이 기대온다. 저녁 그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걸 겪으며 널뛰던 감정 탓에 몸이 무척 피로해진 거다. 범신조는 제 품으로 비스듬히 무너진 윤오를 감싸안고 정수리에 턱을 문질렀다. 조금 아팠다. 말도, 머리도. 덕분에 조금 정신이 들었다.

“네 기억과 지금을 똑똑히 구별해. 김윤오, 네가 제대로 구별하지 않으면 너는 다시 무너질 거야.”

“…….”

“현재를 살아야 해. 내가 해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조언이야. 네가 현재를 살지 않으면… 나는 널 다시 잃게 돼. 그리고 미안하지만 나는 네가 그 무엇보다 중요해.”

비량아는 김윤오의 과거였으나 동시에 독이기도 했다. 윤오에게 기억이 돌아오는 건 단순한 복기가 아니라 체화로 이어지는 경험이었다. 그 고통과 마음은 모두 비량아의 것이면서 동시에 김윤오의 것이었다. 과거의 자신이 악령처럼 자신에게 씌인 신병이란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과거와 현재의 선이 흐려진다. 이제 하나로 뒤엉켜 비량아이자 김윤오가 된 그는 범신조를 찌르려고도 해봤고 범신조를 떠나도 봤다. 그러나 결국 영영 분리하진 못할 거다. 언제고 다시 미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범신조 역시 미쳐가겠지.

윤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염왕의 스스로를 용서하라는 건 자기 자신에게 잡아 먹히지 말라는 뜻이었나보다. 그는 공명정대한 판관이었고 확실히 비량아에게 가장 힘든 벌을 내렸다. 결국 뻔하지만 윤오가 노력한 그날 그날을 사는 게 맞았던 거다. 돌아보지 않고, 삼켜지지 않고.

“네가 현재를 살지 않으면, 비파까지 끌어들이게 될 거야.”

그 말은 꿈결처럼 아스라이 들렸다. 윤오는 입술을 꽉 깨물고 눈을 떴다.

그 사이 또 시간이 제법 흘렀는지 몸이 찼다. 윤오는 지지대처럼 기대고 있던 범신조에게서 떨어졌다.

“…따뜻한 게 마시고 싶어.”

“그러자. 그게 좋겠다.”

범신조는 윤오의 손을 감싸 쥐었다. 커다란 손이었다. 윤오의 손도 결코 작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위태롭게 내려오던 윤오와 달리 밤눈이 밝은 범신조는 잘못된 부분은 모두 피해갔다. 현관 아래에 서자 노란빛의 불이 은은하게 들어왔다.

“…너는 죽순 향이 나.”

범신조의 동공은 범신이던 때처럼 가늘어지지 않는다. 항상 상냥한 동그라미가 되었다.

“대나무는 혹독한 환경에서도 자라는 걸 알아, 김윤오? 다른 나무는 죽을 정도의 물이라도, 대나무는 살아.”

“…….”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이면 그 약한 금목서도 살게 되겠지.”

이전의 그는 비량아를 끝내 부러뜨리고 말았다. 부러져 죽창이 된 걸 알면서도 내가 부러뜨렸으니 포기할 수 없었다. 내가 부러뜨린 네가 나를 해치고 상처내도 향하는 걸 멈출 수 없었다.

그런 주제에 이런 말을 운운하는 것처럼, 범신조는 윤오가 조금 뻔뻔스러워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사실, 무엇을 해도 상관없었다. 또다시 이전에 반복되던 일처럼 죄책감으로 자신을 해치다 못해 다시 제 곁을 떠나지만 않는다면.

범신조의 복잡다단한 마음과 별개로 그가 한 말에 윤오는 눈시울이 후끈했다. 고개를 떨구었다. 또 몽유병이라도 걸린 양 맨발로 나와, 그의 발에는 흙이 묻어 있다. 막 비를 맞아 촉촉한 흙이었다.

“…네가 그런 말 하니까 되게 안 어울려.”

“너도 나처럼 오래 살아봐. 그러면 안 하던 것도 하게 돼.”

안 하던 것만이 아니라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된다. 애초에 우리의 처음 만남이 내가 하지 않을 법한 일을 해서 시작된 게 아닌가.

범신조가 현관문을 열었다. 흙으로 더러워진 발로 들어가기 곤란해 발걸음을 멈추니 신조가 윤오를 번쩍 들었다. 이럴 때마다 놀라게 된다. 성인 남자에, 가녀린 체구도 아닌데 이렇게 쉽게 번쩍번쩍 드니 말이다.

가끔 윤오가 이렇게 혼이 빠진 것처럼 맨발로 정원을 나가곤 해서, 이제 범신조는 무릎을 꿇고 윤오의 발을 닦아주는 게 익숙해졌다. 정원을 크게 두길 잘했단 생각을 한다. 답답함을 느끼기 전, 나가는 중에 정신을 차리니까. 윤오가 저 정원에 다시 서리가 내리길 바라지만 않는다면, 발을 닦아주는 일이야 몇 번이든 할 수 있다.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닐 거야.”

“어떻게 알아?”

“그냥 느낌.”

“뭐야, 그게….”

“너도 그냥 느낌이잖아. 나쁜 사람이란 추측 말이야.”

“나쁘다… 정도는 아니어도.”

윤오는 잠시 망설인다. 단어를 고르는 모양이다.

“둘이 상성이 안 맞아 보여.”

“우리 둘도 별로 맞진 않는데. 너는 속내를 잘 말하지 않고 나는 그걸 기다리기엔 성질이 급하지.”

“…….”

생각보다 정확한 분석이었다. 윤오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가 불퉁하게 뱉었다.

“…도둑놈 같아.”

어쩐지 우리 순진한 비파를 꼬드겨 데려간 불한당 같단 의미였다. 키웠던 기억의 비량아와 망가지지 않고 지금까지 온 윤오의 관점이 적절히 섞인 한 마디 평이었다.

“음.”

그 평에 범신조가 애매모호한 반응을 내놓았다.

도둑놈…. 전에 차를 구매할 때 들었던 소리가 생각났다. 사실 은은히 늘 생각하고 있던 말이다. 아무리 봐도, 현대 기점에선 자신이 도둑놈이 맞지, 무윤이 들을 말은 아니었다. 너 그렇게 말하면서 우리 관계는 괜찮아? 하는 물음이 담긴 시선을 물끄러미 던졌으나 윤오는 제 생각에 잠겨 반응이 없었다.

시간을 허투루 보낸 건 아닌지라 비량아의 일에 한정해서 다소의 양심이 생겨 그런지 조금 마음이 불편하다. 그렇지만 불편한 건 불편한 선에서 끝나고 만다. 진짜 도둑놈 범신조는 윤오의 차에 술을 조금 탔다. 뜨거운 차에 섞이며 위스키 향이 훅 올라왔다. 윤오는 마치 독약이라도 탄 걸 보듯 하다가 몇 모습 마셨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모양이다. 적당히 식은 차는 순식간에 반이 비었다.

몸이 녹으며 눈이 가물가물해진다. 누가 보아도 졸음의 전조증상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범신조가 손을 뻗어 눈을 감겨주었다.

“이제 좀 자는 게 좋겠어.”

풍부한 저음의 목소리. 굴 벽을 두드린 뒤에 돌아오는 메아리 같은 목소리.

비량아는 이제야 기억해냈다. 기억이 온통 잘려 엉망으로 맞춰졌던 때의 기억. 오래도록 묻혀져 있던…. 잠을 이루지 못하며 몸 안에 끓는 울화에 뒤척이다가 끝내 자신의 몸을 할퀴고 물어 뜯을 때마다 안아주던 억센 품과 목소리. 좀 자, 자면 괜찮을 거야, 네가 깨기 전에 나갈게….

남자는 자신을 구해줬고, 제 삶에서 유일하게 다정했으며 자신을 망가뜨렸다. 그는 자신을 괴롭히는 악몽의 주범이었으면서 악몽에서 꺼내주는 유일한 짝이기도 했다.

윤오는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미안해….”

“…….”

“이 말을 하기엔 너무 늦었어…?”

“기다린 적이 있을 때 늦었다고 하는 거야. 난 네 사과를 기다린 적이 없어서, 그냥 선물 같네. 깜짝 선물 고마워. 잘 받고 잘 간직할게.”

다소 얄미운 말투다. 그게 참 범신조다웠다. 그리고 그 말투 덕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것마저도 범신다운 방식이었다.

* * *

무윤에 대한 정보가 화면에 떠있다. 범신조는 손가락 마디 위로 펜을 굴리며 몇 번이고 읽은 정보를 재차 읽었다.

혹시 놓친 게 있나 싶어서 봤지만, 없었다. 공식 기록은 단출했다. 비공식 기록은 진부했다.

비공식 기록으로 무윤은 사생아였다. 정말로 진부하여, 비밀 축에도 낄 수 없었다. 공식 기록으로는 무윤은 고아원에서 열 살까지 자랐다. 열 살, 친조모가 그를 데려갔다고 한다. 열세 살 어린 나이에 유학을 갔다. 유학이란 이름으로 내쫓긴 것이리란 것쯤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가족이 함께 가진 않았고 홀로 갔다고 한다. 돌봐주는 사람이야 있었을 거다. 다만 가족은 아니었겠지.

스물 둘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공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머리는 무척 좋은 모양이었다. 상극은 무윤의 친부가 하는 사업이고, 그의 부모는 오랜 기간 군수물품을 대는 공업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윤의 입국 반년 만에 작은 공업사가 상극의 하청 업체로 등록되었다. 너무나 작은 곳이었고 정말 갓 만들어진 신생이었던 만큼 누구도 주목하지 않은 곳이었다. 무윤은 이곳에 있었고, 그나마도 제 이름은 가린 채였다. 그렇게 5년이 지났다.

하청 업체는 여전히 한미했다. 규모는 작고 영업 이익은 적자였다. 보잘 것 없는 특허 몇 개가 전부였다. 그러나 범신조는 눈치챘다. 무윤이 아무래도 방산업 쪽을 노리는 모양이라고. 그리고 이미 밑작업은 상당히 준비되었을 거라고.

그리고 그 외의 기록은 깨끗했다. 비파에 대한 기록 자체는 없었다.

범신조는 손 안에서 구르던 펜을 책상 위로 던졌다. 지나치게 깨끗하단 건 기록을 정리했다는 의미다. 특히 비파에 관해선 철저하게.

범신조는 이런 기록을 잘 안다. 그가 종종 취미처럼 해주던 일이었으니까. 그는 무윤에 대한 평가를 끝냈다. 멍청하고 유약한 것보다는 낫다.

“…….”

공연히 마우스 휠을 굴리던 그가 나직이 한숨을 뱉었다.

비파에 대한 조사는 시키지 않았다. 무관심이 그 이유는 아니었다. 비파의 과거가 혹시라도 안 좋다면, 그의 과거에 안 좋은 일이 하나라도 있다면 자신은 분명 개입하게 될 것이다. 그게 설령 몇십 년 전의 일이어도. 그리고 개입하는 순간 윤오는 눈치챌 테고 그건 윤오에게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거다. 그는 윤오와 비파가 필요 이상으로 얽히지 않았으면 했다. 김윤오는 분명 비량아지만, 동시에 비량아가 되어서는 안 되니까.

그래서 범신조는 무윤과 비파가 제법 잘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개입하지 않기로 한 이상 비파의 곁에 호락호락한 놈이 있는 건 볼 수 없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비파는 정말로 비량아를 닮았다. 외모뿐 아니라 운이나 성질도 비슷하다면….

생각을 끝낸 범신조가 던져둔 핸드폰을 들었다. 얼마 전 받았던 번호를 어렵지 않게 찾아 눌렀다. 얼마간 신호가 갔다. 무윤의 목소리가 들린 건 부재중인가 싶어 전화를 끊으려던 참이 되어서였다.

─네.

간단하고 심드렁한 목소리였다. 범신조는 책상을 부드럽게 밀며 의자를 돌렸다. 창 너머를 보며 다소 유쾌한 말투로 물었다.

“범신조입니다. 제안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그 전에 하나 물어도 되겠습니까? 전에 저에게 위치추적기를 몸에 심을 생각이 없냐고 한 건, 이무윤 씨가 짝의 몸에 위치추적기를 심었기 때문에 한 말입니까?”

잠시의 침묵 후에 웃음 소리가 터졌다. 범신조는 그 소리를 들으며 빙긋 웃었다. 목소리는 성숙한데, 웃음소린 소년 같은 구석이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며, 범신조는 비파를 떠올렸다. 듣지 못한 웃음소리마저 비량아와 닮아 있을까.

* * *

제 차에 익숙해지며 윤오의 영역은 점차 넓어졌다. 범신조는 윤오의 외출이 잦아지자 아침마다 시계를 골라 채워줬다.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놀진 말고 돌아와 달란 의미라고 했다. 윤오가 언제 그렇게 오래 놀았다고, 변명이 제법 번드르르했다.

언제 준비했는지, 윤오의 손목에 딱 맞는 시계가 스트랩과 디자인, 브랜드 별로 채워졌다. 불편하고 귀찮아서 하기 싫어해도, 자신에게 시계를 채워줄 때 범신조의 표정이 너무 만족스러워 보여서 하지 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어울리는 걸 고르고 채워준다. 범신조에겐 그게 하나의 루틴이자 의식인 모양이었다.

예전에 범신조와 온 적이 있던 화원 말고 다른 농원을 알게 되었다. 집에 왔던 조경사 분이 하는 곳이라고 했다. 수더분한 성격과 이해하기 쉬운 설명으로 윤오는 그 분이 단번에 마음에 들었다. 금목서를 키우고 싶다고 하니, 그건 키우기가 까다로울 텐데요,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남쪽이 아니면 도통 겨울을 잘 나지 못하고 꽃이 피는 시기도 짧다고 했다.

하지만 향은 좋잖아요.

그렇죠. 무척 좋지요.

그 대화를 끝으로, 윤오는 금목서를 키우기로 마음 먹었다.

윤오는 농원에 가서 묘목을 받아 뒷좌석에 실었다. 그리고 어깨를 누르며 뻐근한 목을 옆으로 기울였다. 지난 밤에는 잠을 설쳤다. 악몽 때문이다. 원래는 일주일에도 두 세 번씩 정도로 잦았지만, 최근엔 좀 드물어진 일이었다. 그래도 그 빈도가 점점 주는 것에 안도했다.

고른 묘목을 포장해줄 때까지 기다려달라며 안으로 안내해준 덕에 윤오는 화원까지 구경할 수 있었다. 농원 뿐 아니라 꽃다발 포장을 하는 화원까지 겸하는 모양이었다. 가족 사업이라더니 따님이 보였다. 포트폴리오처럼 노끈에 걸어둔 꽃다발과 꽃바구니 사진들이 아주 예뻤다. 윤오조차 하나 사갈까 할 정도였다.

“손님, 이쪽 분만 먼저 해드리고 바로 갈게요! 조금 보고 계세요!”

아마 부인으로 추측되는 분이 상냥하게 외쳤다. 윤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제야 다른 손님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손님은 한 명 밖에 없었다. 뒷모습에 몸을 숙이고 무어라 쓰고 있는데도 키가 무척 큰 게 느껴졌다. 곧 허리를 쭉 폈을 땐 장신일 거란 추측이 확실해졌다. 허리가 무척 곧았다. 여유 있는 길이로 자른 윗머리와 달리 뒷머리는 깔끔하게 쳐져 목덜미가 드러났다.

“이렇게만 써드리면 될까요?”

“예. 부탁드립니다. 거기 적힌 꽃은 꼭 추가해주시고요.”

남자가 머리를 쓸어넘겼다. 곧 윤오를 확인한 사장이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외쳤다. 괜찮단 의미로 웃어 넘기고 꽃들을 하나하나 보았다. 어느덧 딱 보고 이름을 댈 수 있는 종수가 꽤 늘어 있었다.

다른 손님은 팔짱을 끼고 책상만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꽃 자체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윤오도 곧 신경을 끄고 쪼그려 앉아 동글동글해 유화 그림 같은 마가렛을 구경했다. 그 사이에 안에서 준비가 끝났는지, 노란색과 흰색이 어우러져 풍성한데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느낌을 주는 꽃다발을 들고 나오는 따님이 보였다. 꽃다발은 과연 아주 예뻤다. 만드신 분도 회심작인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연꽃은 아직 덜 피었으니까요, 물에 담가두시면 활짝 필 거예요.”

독특하게도 연꽃 두 송이가 그 속에 섞여 들어가 있었다. 무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남자는 꽃다발을 보자마자 활짝 웃었다. 그러자 냉하게 생긴 인상이 순식간에 부드럽게 핀다.

“여기 카드에 말씀하신 대로 적었는데 확인해주세요. [명하에게, 퇴원 축하해. 사훤.] 맞으신가요?”

“맞습니다.”

“퇴원하시나 봐요. 축하드려요.”

그 물음에 남자는 그저 웃고 말았다. 쪼그려 앉은 윤오의 뒤로 지나가는 그에게서 향기 냄새가 언뜻 나는 것 같았으나 꽃향기와 비슷했던 터라 곧 화원의 향에 묻히고 말았다.

“손님?”

자신을 찾는 소리에 일어나려다가 그새 다리가 저릿저릿해서 엉거주춤하게 일어난 꼴이 되었다. 윤오는 기우뚱하게 서서 손을 들고는 아래에 있는 마가렛을 가리켰다.

“저 이거랑 이거 섞어서 꽃다발 좀 만들 수 있을까요?”

윤오는 사이즈를 어느 정도로 할까 고민하다가, 막 나간 손님이 들고 있던 꽃다발을 떠올렸다. 손으로 뒤쪽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방금 나가신 분, 그분이 들고 있는 사이즈로 부탁드려요.”

“네에. 카드는 필요하세요?”

곰곰이 생각하던 윤오는 곧 고개를 저었다. 카드는 필요 없다. 본인도 이해할 수 없이 갑자기 충동적으로 주문하게 된 것이기도 하거니와 굳이 누군가에게 준다면 떠오르는 한 사람에게 카드를 쓰기에는 어쩐지 민망했다. 쑥스러운 마음에, 윤오는 괜히 시선을 피했다.

* * *

집으로 돌아오기 전, 범신조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웬일로 받지 않았다. 윤오는 바쁘거나 어딜 나갔나,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말았다.

그리고 차고에 들어갔을 땐, 못 보던 차가 있어서 그제야 손님이 왔나 싶었다.

범신조를 만난 이후 그가 손님을 부르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윤오는 그 손님이 장용우가 아닌가 싶었다. 아마 높은 확률로 장용우거나 다른 직원일 거라 생각하며 별생각 없이 차고에서 올라와 정원을 가로지를 때였다.

윤오는 습관대로 시선을 조금 아래로 둔 채 느릿느릿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또, 습관대로 비파 나무 근처에 이를 쯤 고개를 들었다.

“…….”

농원을 갔다가 오는 길에 산을 봤다. 70퍼센트는 산이라는 이 땅에서 늘 보는 흔한 산 중 하나였다. 날씨가 조금 습해서인지 운해(雲海)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윤오는 산이 낳는 듯한 그 안개를 보며 홀릴 것만 같단 생각을 했었다.

어쩌면 그 생각을 할 때 이미 홀렸을지도 모른다.

윤오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렇게 타이밍을 놓쳤다. 그렇게, 상대가 먼저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세요.”

비파 나무 앞에 비파가 서있다.

이미… 홀렸을지도 모른다.

* * *

“제가 오고 싶다고 했어요.”

비파는 손에 든 꽃다발을 고쳐 쥐며 말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둘은 윤오와 범신조가 자주 앉는 테라스의 선베드에 있었다.

비파를 보고 꽃다발을 떨어뜨렸다. 아, 하고 뒤늦게 반응하는 자신보다 비파가 한발 더 빨랐다. 고개를 숙이고 줍는 모습이 꿈처럼 아득했다.

‘아니에요. 손님… 주고 싶어서 샀어요.’

그렇게 말한 순간 왜 그토록 충동적으로 꽃다발을 사고 싶었는지 알게 되었다. 비파의 품에 들리니 너무 잘 어울렸다. 제자리를 찾은 것 같았다. 미리 온 줄 알고 계셨냐는 물음 대신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사하다고 말하는 모습에는 비량아가 익히 알던 앳된 모습이 남아 있었다.

무윤과 왔다고 했다. 범신조가 함께 와도 좋다고, 부디 그렇게 해달라고 해서 따라왔다고 한다.

“집이 예뻐요.”

안에서 둘이 이야기를 할 게 있다고, 편히 구경하라고 제안한 건 범신조였다. 직접 방문을 모두 열어주었다고 한다. 윤오는 비파에게 이 집과 잘 어울려요, 라고 말할 뻔했다가 겨우 참았다.

“꽃도, 정원도 예쁘고요.”

윤오는 바보같이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전에 잠깐 뵈고 아쉬웠거든요.”

나도, 윤오가 중얼거렸다. 다행히도 비파는 듣지 못한 모양이다.

비파에겐 금목서 향이 났다. 아주아주 약했다. 어쩌면 그냥 기억 속에 있던 향일 수도 있겠다. 어떤 정신으로 커피까지 내왔는지 모르겠다. 컵을 엎을 뻔했고 들고 오다가는 떨어뜨릴 뻔하기까지 했다. 이상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써야만 했다. 정신을 바짝 차려도 부족한데, 이 상황이 도무지 현실같지 않으니 자꾸만 한창 꿈을 꿀 때처럼 넋을 놓게 되었다.

“그때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렸죠. 서피바입니다. 서른 하나고요.”

자신보다 나이가 많았다. 윤오는 입술을 달싹였다. 형님, 형님 하며 뻗던 고사리 같은 손이 눈 앞에 선연했다. 이제는 그 반대였다. 인연이라는 건 예측할 수 없었다.

“저는… 그때 인사도 못드렸죠. 김윤오…입니다. 스물 다섯 살이에요.”

비파는 나이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윤오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자꾸만 입술을 씹으며 괴롭혔다. 저만 기억하는 이야기를 떠들지 않기 위해.

손님을 반기지 않는단 오해를 줄 수 있는 윤오의 모습에도, 비파는 오해 없이 쾌활했다.

“저 친구가 별로 없거든요. 그 모임도 무윤이랑 처음 간 건데, 그림 앞에서 본 뒤로 자꾸 생각났어요. 아, 작업 거는 그런 의미가 아니고요. 그냥 또 보고 싶었다구요…. 왠지 모르게.”

역시 말재주가 없어 미안하다고 덧붙인다. 하나도 미안할 거 없는데. 너는 나한테 아무것도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데. 다 자란 비파의 얼굴을 멍하니 보느라 뒤늦게 고개를 저었다.

“저, 그냥 이름만 불러도 돼요. 편하게.”

윤오는 편하게요, 하고 미련이 남은 양 중얼거린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떨리진 않았을까 우려된다. 하지만 비파는 그런 건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은근히 둔한 구석이 있기도 했다.

윤오는 비파가 아니라 서비파인 지금의 그의 과거가 궁금하다. 그렇지만 물을 자격도 없고 그럴 명분도 없었다. 차라리 친구였다면 편했을까. 하지만 그들은 친구조차 되지 못한다.

짝은 어떻게 만났어요?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에요? 잘해줘요? 가족들은 어때요? 부모님은… 다정하고요…?

그러나 수많은 질문 대신 윤오는 겨우 한 마디를 꺼내 물었다.

“행복하세요?”

겨우 통성명한 사이에 묻기에는 너무 철학적인 질문이다. 급작스럽고 난데없기까지 하다. 비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봤다. 범신조가 이 모습을 보지 못한 걸 알았다면 그조차 제법 아쉬워했을 풍경이다. 비파의 저 표정이 비량아가 드물게 보여 주는 것과 아주 비슷했기에.

“행복… 하세요?”

“…….”

‘그 모임에서 본 사람, 나랑 닮은 것 같지 않아?’

돌아오는 길에 무윤에게 물었을 때, 무윤은 미간을 조금 찌푸리고 ‘모르겠어요.’하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비파는 아무리 보아도 닮았단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만남 이후로 열심히 궁리했지만 정말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후로도 자꾸 생각이 났다. 그래서 초대를 받았다고 말하더니 한참만에 마지못하며 ‘같이 가실래요?’하는 무윤의 물음에 바로 쫓아 나온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자신에게 행복하냐고 묻는다. 의아하지만, 비파는 고민의 여지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네. 행복해요.”

윤오의 표정이 안도감에 젖는다. 자신보다 어린데, 이상하게도 더 나이가 많은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마치 혈육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정하게 보기에 비파 역시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김윤오 씨는 행복하세요?”

쉬이 말을 놓지 못하는 습관이 재차 나온다. 하지만 호칭은 중요하지 않다. 윤오는 돌아온 대답에 머뭇거렸다.

딱 1년 전의 자신에게 물었다면 그는 대답하지 못했을 거다. 윤오는 무심코 범신조가 어딘가에 있을 집 안쪽에 시선을 던졌다가 대답했다.

“네….”

여전히 악몽을 꿔. 하지만 빈도는 낮아지고 있어. 좋아하는 게 생겼어. 묘목을 사왔기 때문에 이게 자라는 걸 보고 싶단 생각을 해. 운이 좋으면 올해, 아니면 내년 가을에는 묘목에서 꽃이 필 거야. 그건 금목서 향이 날 테고. 궁금한 것과 기다리는 것들이 생기니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내년을 기다리겠지.

그리고 너를 만났어. 범신조와 보내는 오늘이 가장 큰 기적일 줄 알았는데, 더한 기적이 있었어. 이보다 더한 행복을 바라는 건 너무 많은 욕심이란 걸 알아….

윤오는 재차 대답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확고한 목소리로.

“네. 그런 것 같아요.”

둘은 서재로 갔다. 범신조와 같이 살긴 했지만, 소속감이라곤 없었던 집을 자신이 소개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윤오는 이곳을 돌아올 곳으로 여기긴 했어도 우리 집이라든지 내 집으로 여긴 적은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자꾸만 정원으로 뛰쳐 나갔었나. 새삼 드는 생각이었다.

비파는 서재의 한 가운데에 서서 나지막하게 감탄을 했다가 돌아봤다.

“이 집에서 서재를 제일 좋아하죠?”

마치 김윤오를 잘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다. 윤오는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도 모르게 확신하여 말했다.

“서재가 제일 맘에 들죠?”

“하하, 네.”

비파는 구석구석 보더니 사진 찍어도 돼요? 하고 물었다. 윤오는 저도 모르게 그래, 하고 대답할 뻔했다.

‘나가서 놀아도 돼요?’

그렇게 물을 때 열에 아홉은 안 된다고 했었는데.

나지막이 웃음을 삼킨다. 비파는 움직임이 크지 않고 조용했다. 그렇다고 꼼꼼한 성격은 아닌 듯했다, 팔꿈치나 손끝으로 책 등이나 모서리 따위를 툭, 툭 치게 되어 민망한 표정이었다. 이리저리 책이 어질러져 있는 이유가 자신인 윤오는 웃고 말았다.

“여기 있었어?”

그때 뒤에서 인기척 없이 나타난 범신조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범신조 옆에 무윤도 함께 서있었다.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는 줄 알았던 비파가 무윤아, 하고 윤오를 스쳐 지나갔다. 그 발걸음에서 반가움이 묻어났다. 얼마나 떨어져 있었다고.

무윤이 풍기는 분위기나 비파를 향한 걱정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를 걱정스럽게 보던 윤오도 저런 비파의 모습을 본 순간 더는 아무런 불평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입술을 꾹 다문 윤오를 보던 범신조가 다가왔다. 시야를 가리며 앞에 서선 어깨를 말아 쥔 채 조용히 묻는다.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네.”

“아….”

“잘 갔다왔어?”

다정한 목소리에 윤오는 범신조 옆으로 고개를 조금 빼 비파를 보았다가 범신조를 보았다.

“입술이랑 귀가 닮았네.”

멍하니 중얼거리는 말에는 주어도 목적어도 없었지만, 범신조는 바로 알아들었다. 그는 싱긋 웃고는 대답했다.

“어쩐지. 처음 봤을 때도 귀랑 입술 먼저 보이더라.”

천천히 살펴본 끝에 내린 결론이었으면서, 범신조는 태연했다. 범신조까지 지나치게 괴로워하고 몰입했다면 힘들었을 텐데, 그가 이런 반응이라 윤오는 꿈에서 깨듯 천천히 현실로 돌아왔다.

보아하니 분위기가 식사를 함께 한다거나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할 건 아닌 듯 싶었다. 무윤은 비파와 한시라도 닿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굴고 있었다. 지금도 손을 잡고 있다. 윤오는 범신조를 지나쳐 비파에게 다가갔다.

다음에 또 보자고 할까, 그래도 될까? 그냥 작별 인사를 하는 게 옳을까…. 아무래도 그게 맞겠지…, 여기서 더는 끼어들지 말아야만….

“다음에 또 연락해도 돼요?”

“…….”

윤오의 끝없는 생각을 자르며 비파가 묻는다. 아, 하고 입술을 달싹인 윤오가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또… 놀러 와요.”

“와, 정말요?”

웃는 모습이… 이제보니 자신과 별로 닮지 않았다. 웃는 건 비파만의 모습이었다. 범신조도, 나도, 그 누구도 닮지 않았다.

“우리, 다음에 또 봐요.”

“…….”

“형….”

윤오의 속삭이는 소리에 비파의 웃음이 한층 더 환하게 펴졌다. 그 모습을 보던 윤오가 뒤늦게, 그리고 처음으로 비파 앞에서 웃었다. 그의 가짜 형 비량아였을 때를 포함하여 최초로.

* * *

“울고 있을 줄 알았어.”

비파와 함께 정원을 보았던 선베드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윤오 옆으로 목소리가 떨어졌다.

막 씻고 나왔는지 머리칼이 젖어 있는 범신조가 윤오 옆 선베드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아직 채 지우지 못한 습관대로 성냥을 꺼냈다가 멈칫하곤 탁자 위에 올렸다.

“비파 부모님은 좋은 사람들일 것 같아.”

윤오가 중얼거렸다.

“전에 나쁜 보호자를 만났었으니까.”

“…….”

“신조야.”

가만히 대꾸 없이 듣고 있던 범신조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 걸 목도한 듯이 놀란 표정으로 돌아봤다. 그런 신조를 윤오 역시 무릎을 안은 팔에 얼굴을 괸 채 보고 있었다.

“나중에 내가 너하고 아이를 낳고 싶은 날이 올까?”

“…….”

범신조가 마른 침을 삼킨다. 그는 아이나 후계 같은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언제나 중요한 건 쥐어도 쥐어지지 않고 끝내 부러뜨리고 말았던 사람에게 있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까지도, 그의 마음과 별개로 언제든지 떠날 것처럼 불안함을 주던 그 비량아가, 그 김윤오가 저런 말을 하고 있었다.

“언젠가, 그런 마음이 들 날도 올 것 같아.”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뒤 윤오가 다시 고개를 돌아본다. 촉촉한 습기가 내려앉은 늦봄과 초여름의 경계, 이 시간은 늦여름과 초가을과도 비슷하다. 해가 저물고 있다. 혹은 뜨는 걸지도 모른다. 계절도 시간도 모호해지는 순간이 내려앉는다. 윤오가 스스로 이 골목으로 돌아와 범신조를 재회했던 때처럼.

범신조는 지금이라는 확신이 든다. 그는 짝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입술을 축인다. 주머니에서 상자도 없이 넣어둔 동그란 것을 꺼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는 짐승이 되어 비량아를 이해해보려 하지도 않고 그를 범했었다. 그때는 잡귀가, 이번만은….

윤오는 제 앞에 내밀어진 반지를 보다가 천천히 껴안고 있던 다리를 풀어 내렸다. 이런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애초에 이런 순간을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윤오가 당황한 눈으로 범신조를 보았다.

“갑자기 이게… 뭐야?”

“그냥, 흔해 빠진 거. 우리도 하면 안 되나.”

말투는 대수롭지 않다는 양 심드렁하나 목소리는 아니었다. 범신조는 반지를 고쳐 쥐었다.

위치추적기는 없다. 이만큼 작은 것을 제조할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오늘 무윤이 왔을 때 그는 그냥 주문 자체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 대신 그가 방산업을 계획한다는 걸 알며 미리 투자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오롯이 반지만을 받았다. 이무윤은 주얼리 쪽에도 소질이 있었다.

받자마자 줄 생각은 아니었다. 제작하고 소장하는 것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나… 비량아 앞에서 언제는 제 뜻대로 이루어진 적이 있던가.

“아무래도 네가 나보다 하루 더 사는 건 허락해주기 힘들 것 같아.”

갓 돌아왔던 윤오가 했던 말을 되돌려주며, 범신조는 김윤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두 손으로 윤오의 허벅지를 가벼이 잡고 올려보았다.

“상대가 죽는 것을 보는 건 아주 괴로우니까, 조금이라도 익숙한 내가 할게.”

“…….”

“대신, 그게 마음에 걸린다면… 조금이라도 미안하다면….”

손에 쥐고 있느라 따뜻해진 반지를 윤오의 손바닥을 펼쳐 올려놓는다. 허락 없이 끼우는 일은 없다. 윤오의 검지에는 얇은 덩굴 무늬의 흉터가 남아 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저 반지 자국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자신이 고통과 함께 남긴 흉터다. 이걸 너에게 남기고 싶어서 너를 쥐었고, 부러뜨렸고, 끝내 몇 번이나 네가 죽게 해야만 했다.

이만하면 너를 놓아주어야 하는데. 이만하면 우리가 이번 생을 끝으로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 할 텐데, 그게 널 위한 걸 텐데…. 범신조는 윤오의 손을 감싸 쥐게 하고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양 손으로 감싼 윤오의 손을 제 이마에 대고 애원하듯 속삭였다.

“그렇다면… 우리 극락정토의 연꽃 위에서 다시 태어나자.”1)

억지로 짝까지 만들어 버린 상대는 답이 없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차마 고개를 들어 직면하기가 어려웠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범신조는 미간을 찌푸리며 설핏 웃었다. 역시나… 하는 순간 윤오가 고개를 기울였다. 숙인 제 머리에 윤오의 입술과 뺨이 연이어 닿았다.

“우리가 극락정토 같은 곳을 어떻게 가.”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 범신조는 순간 이 주변에 온통 연꽃이 만개하는 것만 같았다. 구정물은 연꽃이 만개하며 청정수로 변하고 몇 번이고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봐야 했던 곳은 극락이 된다.

“앞으로 되게 많이 착하게 살아야겠다.”

앞을 속삭이는 네 목소리와, 너와 나를 우리로 묶는 그 말이 아집과 실수 그리고 오해로 뭉친 과거를 손쉽게 녹여냈다.

“알잖아, 내가 솔직하게 대답할 수 있도록 세 번은 물어줘….”

범신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세 번을 물을 인내심이 있었다면 될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세 번을 물어달라, 재촉하지 말아달라 말하면 될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벌어진 일 자체를 원망할 수는 없다. 이렇게 돌아온 시간이 낭비라고 느껴지진 않는다. 결코. 몇 번을 잃었으나 몇 번이든 너를 재회하는 건, 너를 보는 건 행복했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질리지도 않고 또다시 욕심을 부리게 된다. 그는 잠긴 목소리를 뱉었다.

“김윤오, 부디 나와….”

악연이 인연이 될 수 있을까. 미움이 애정이 될 수 있을까.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속죄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정원으로 뛰쳐나가지 않는 밤이 올까, 너와 나를 우리라고 부르는 게 자연스러워질 날이 올까, 내년에는 우리가 함께 바다를 보러 갈 수 있을까….

그러나 가장 쉽게, 가장 빨리 대답할 수 있는 것 하나는 있었다.

윤오는 숨죽여 기다린다. 범신조의 세 번째 물음을. 지치지도 않는지 또다시 태어나서 다시 만나자는 말을. 더는 범신조의 인내심이 짧지 않듯, 그 역시 더는 미숙하지 않다. 그의 대답에는 확신이 있다. 더 없을 확신이.

<동티> 외전: 일련탁생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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