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남자
“여기서 나를 주웠다고?”
오해가 풀린 후, 두 사람이 가장 먼저 간 곳은 남자가 쓰러졌다는 장소였다.
스슥, 남자가 등불로 풀 위를 쓸자, 풀들이 요란스레 소리를 냈다. 남자는 묘한 표정으로 그것을 한 번 보고는 이번에는 바닥까지 헤집었다.
그러나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 물건은?”
“아무것도 없, 었는데…….”
남자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서 보기에는 안전한 지대 같지만 조금만 걸어 나가면 숲은 환각초로 둘러싸여서 외부인의 입장을 허락하지 않는, 아주 위험한 곳이었다.
“이러고 여길 왔다는 건가?”
죽으러 온 것도 아니고. 이렇게 위험한 숲을 아무것도 없이 왔다는 게 기억을 잃은 남자로서도 무척이나 황당한 모양이었다.
“그럼 네 집…….”
남자는 집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엉망인 보금자리를 간신히 집이라 부르고 말을 이었다.
“그 안에 있던 물건들은 다 뭐지?”
드디어 제대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이 나왔다. 모스는 설레서 부끄러워하며 답했다.
“시체들한테서 주운 무, 물건.”
“…….”
“내가 소, 소개해 줄까?”
몹시 수줍었다.
“……되었다.”
모스의 표정이 도로 시무룩해졌다.
그런 모스를 지나친 남자는 자신이 쓰러졌다는 부분을 살펴보는 것을 그만두고, 저벅저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남자가 걷는 것을 보던 모스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나란히 걷지는 못하고 뒤를 주춤거리며 따라왔다.
남자는 걷고, 또 걸었고 모스는 그런 남자를 졸졸 따라갔다. 인간의 손을 타지 않은 숲은 정말 온전했고, 아름다웠지만 아무리 걸어도 풍경은 비슷했다.
나무, 환각초, 연못, 나무, 환각초, 연못, 나무, 환각초…….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남자의 표정은 심각해졌지만, 모스는 뒤에 서서 알 수가 없으니 그저 신이 나 보였다.
‘인간과 걷고 있어.’
그저 이렇게 누군가와 함께 걷는다는 게 처음이라 영 기쁜 듯싶었다. 남자의 발이 누른 풀 위에 모스가 괜히 발을 올려놓고, 입가를 실룩였다.
“나가는 길은 없는 건가?”
하지만, 남자가 말을 하자마자 모스의 실룩이던 입가가 그대로 굳었다.
“……으응?”
“이 숲을 나가고 싶은데, 길이 없군. 이 파란색 풀이 없는 곳이 있나?”
깜빡깜빡, 모스는 남자가 뱉은 말을 이해하려는 이처럼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후우.”
남자는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표정이지만, 심기가 아까보다는 훨씬 불편해 보였다.
그는 별다른 말 없어 뒤를 돌아 걸어가기 시작했고, 모스는 그런 남자의 뒷모습을 보다가 울상을 지으며 남자의 뒤를 따랐다.
‘나가고 싶나 봐.’
하긴. 모스는 자신 같은 괴물도 이 숲을 나가고 싶어 하는데, 인간이 이 숲을 벗어나려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까와는 달리 모스의 걸음은 무척이나 느렸고 표정도 축 가라앉았다.
‘많이 나가고 싶으면 어떡하지?’
모스가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게 울상을 짓는 사이, 어느새 둘은 모스의 보금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남자는 제집인 양 천을 걷어 안으로 들어갔고, 저 멀리 뒤처져서 걸어오던 모스도 후다닥 남자를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들어오자마자 남자가 말했다.
“이 숲을 나갈 때까지만, 잠시 신세를 지지.”
애초에 거절을 염두에 두지 않은 양, 남자의 표정은 부탁을 하는 순간까지도 특유의 거만하고도 위압적인 면이 있었다.
만약 허락하지 않는다면 무력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남자의 표정에 모스가 저도 모르게 얼어붙었다가, 이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여기서 같이, 지내?”
“그래. 안 되나?”
남자는 모스가 안 된다고 말해도 보금자리에 묵을 생각으로 보였지만, 모스는 그 말을 듣고 혹여나 남자가 떠날세라 사색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돼! 나는… 은인, 네 은인이니까.”
“그래.”
고맙다는 말 따위는 없었다.
그런 태도를 탓할 법도 한데, 모스는 그저 남자랑 같이 지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기뻐 보였다.
“여기에 펴, 평생 있어도, 돼.”
“그럴 일은 없다.”
물론 인상을 찌푸리며 단번에 모스의 말을 쳐 내는 남자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살짝 웃던 표정이 사라지고 곧바로 시무룩해졌지만 말이다.
그렇게 그날부터 두 사람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남자는 무척이나 부지런한 편이었다.
그는 새벽이면 어김없이 밖으로 나갔고, 모스는 늘 자는 척 귀를 활짝 열어 두고 남자가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면 모스는 몸을 일으켜 남자가 방금 나간 것을 알려 주듯 펄럭거리는 천 뭉치들을 보다 남자가 잠들었던 자리로 꼬물꼬물 기어갔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모스는 이 보금자리의 주인이지만 늘 맨바닥에서 잠을 청했고, 남자는 그런 모스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연스레 모스가 풀을 두툼하게 깔고 늑대 가죽을 올려 둔 곳에서 잠들었다.
불편한 잠자리에도 모스는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그저 이곳에 남자가 만족해서 평생 안 떠났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빌 뿐이었다.
가죽 위 남은 온기에 손을 비비던 모스가 고개를 느릿하게 숙여 남자가 떠난 곳에 뺨을 댔다.
“따뜻…해.”
남자의 향이 묻어 나왔다. 가죽 위에 얼굴을 살살 비비던 모스의 표정이 다시 우울해졌다.
남자는 모스에게 지나칠 정도로 관심이 없었다.
모스가 남자의 질문에 대비해 낮에 못 나가는 이유(핑계)를 100가지 정도 만들었을 때까지도 남자는 모스에게 아무것도 묻지를 않았다.
틀림없이 모스가 낮에는 밖에 나가질 않는 것을 알 텐데, 귀찮은 것인지 관심이 없는 것인지 그는 묻지 않았고 모스도 답하지 못했다.
하기야 남자는 지나칠 정도로 독립적이고 홀로 움직이는 게 익숙해 보였다.
어떻게 구해 오는지 모르겠지만 남자는 알아서 음식을 해결해 오고는 했고, 길도 숲의 토박이인 모스에게 물어도 되는 것인데 도움은 필요 없다는 표정으로 혼자서 척척 잘도 움직였다.
그래서일까. 남자는 모스가 제게 관심을 가지지 않길 바랐다.
모스라고 처음에 말을 안 건 것은 아니었다.
처음으로 같이 지내는 인간이었기에 그에게 수줍게 한두 마디 건네었으나, 돌아오는 말은 한 글자 내지 두 글자였고 간혹 아예 아무 말도 돌아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대화하기 싫은 기색을 내보이니 모스도 더는 말을 붙일 수 없었다.
“자, 잘 자.”
“…….”
나중에는 겉치레로라도 하던 잘 자라는 인사에도 답하지 않아 모스는 슬펐다.
그렇게 무심한 남자는 아침 일찍 나가 늘 새벽에 들어왔다.
코끝에 스치는 냄새를 통해 모스는 그가 숲을 헤집고 다니며 나갈 길을 찾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나가는 길이 있을까?’
모스가 알기로는 이 숲에서 환각초를 거치지 않고 나갈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엄청난 양의 환각초로 둘러싸인 숲은 산 생명도 죽여서 들여보내는 곳이기에, 설령 산 생명이 들어온다 한들 죽어서 나가는 것 또한 당연했다.
그리고 모스는 못된 생각인 것을 알면서도 남자가 나가는 길도, 기억도, 그 무엇도 찾지 않기를 바랐다. 그 사실들을 알면 남자는 주저 없이 홀연히 떠날 것이고, 그는 또 홀로 긴 시간을 숲에서 지내야 하니까.
그래서 모스는 요즘 낮이 너무 싫었다.
그렇게나 갈망하고 좋아했던 햇빛의 흔적을 보는 것도 싫었다.
밤에는 남자의 뒤를 밟을 수라도 있는데, 낮에는 햇빛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보금자리 안에서만 남자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그 시간이 얼마나 초조하고 불안한지, 숨이 막혔다.
그래서 오늘도 모스는 불안한 표정으로 보금자리 구석에 있는 커다란 상자에 제 몸을 구겨 넣었다. (이러면 왠지 마음이 편해진다.)
“…….”
모스는 적막 속에서 해가 질 때까지 집요하게 문을 바라보았다.
그간 모스에게 시간이라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렇기에 시간을 쫓은 적도, 쫓긴 적도 없었다.
하지만 남자가 오고 난 이후,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남자와 함께 있는 시간은 마치 쫓기는 것처럼 빠르게 지나간다고 느껴졌고, 남자가 없는 시간은 기이할 정도로 느리게 흘러 시간을 쫓게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해가 온전히 숨었다.
보금자리 안은 애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모스는 생존 본능 때문인지 해가 지는 것만큼은 누구보다도 빠르게 알아챘다.
벌컥, 천을 걷고 나오자마자 낮의 밝음은 어디 가고 별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모스는 걸었다.
그의 발끝이 향할 곳은 출발하기 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기에 망설임은 없었다.
그렇게 걷고, 또 걸었다. 땅에 새겨진 남자의 흔적을 밟아 정신없이 걷던 모스의 귓가에 찰랑찰랑 물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고개를 든 모스는 당황해서 순간적으로 숨어야 한다는 것도 잊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숲에는 몇 개의 연못이 있었는데, 그중 강이라고 할 정도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연못이 있었다.
수한 시간 동안 숲에 머물렀기에, 이제 와서는 그 어떤 것도 모스에게 감흥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모스라도 그 연못만큼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여전히 좋아하는 것 중 하나였다.
고작 발을 담그는 것만으로도 발목을 잘라 낼 것처럼 차가운 물이지만, 보석 같은 푸른 물에 달빛이 부스러지는 것을 보고 있자면 시간이 잘 흘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름다워도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인간들은 이 연못을 아무도 알지 못하기에 이곳은 그저 모스의 공간이었다.
그런데 그 공간에 처음으로 침입자가 생겼다.
“…인간?”
남자였다.
키가 유독 컸기 때문일까.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남자의 나신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물에 홀딱 젖어 머리카락은 축 가라앉아 있었고, 피부가 번들거렸다.
모스는 멍했다. 그저 멍했다.
다른 인간의 나신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저게 아름다운 것인지, 아닌 것인지 제대로 분별할 능력은 없었지만 시선을 뗄 수 없어 이끌리듯 계속 보게 되었다.
남자는 희고 단단한, 마치 돌 같으면서도 매끈한 몸을 갖고 있었다.
‘만져 보고 싶……!’
숭한 생각을 했던 탓일까.
모스가 저도 모르게 저 매끈한 몸을 만져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런 그를 탓하기라도 하듯 다른 곳을 응시하던 남자가 똑바로 모스를 보았다.
부스러지는 물의 표면보다도 더 밝고 아름다운 눈동자에 모스의 모습이 박힌 그 순간.
“……어, 어?!”
황급히 몸을 물리려던 모스는 그만 매끈한 돌 위를 밟고 주르륵 연못 안으로 미끄러졌다.
풍덩, 물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수면 아래로 쏙 들어갔다. 눈과 코로 물이 줄줄 들어왔다.
모스는 물을 좋아하지 않았고, 오히려 무서워했다. 수영이라는 것도 전혀 못 했다.
그러기에 그리 깊이가 깊지 않았음에도 순간적으로 너무 당황해 허공에서 손을 저으며 몸을 제대로 일으키지 못하고 있었다.
“프, 하!”
그런 모스의 겨드랑이에 누군가 손을 껴서 그를 일으켰다. 모스는 수면 밖으로 나와서도 어푸어푸 허공에서 손을 휘두르다, 땅에 발이 제대로 닿는 느낌이 들고 나서야 움직임을 멈추었다.
뚝뚝, 해초 같은 모스의 머리카락 끝에 물이 아롱아롱 맺혀 얼굴로 줄줄 흘렀다.
눈을 뜨고 싶었는데, 너무 매워서 뜰 수 없었다.
몸이 정말 말도 안 되게 추웠다. 추위에 덜덜 떨던 모스는 제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고 나서야 간신히 눈을 뜰 수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모스가 보게 된 것은 제 코앞에 있는 남자의 나신이었다.
이게, 왜, 여기에?
깜짝 놀라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은 모스가 새빨개진 토끼 같은 눈을 한 상태로 동공을 잘게 떠는 사이, 남자가 나뭇가지 끝을 살짝 잡아당기듯 느릿하게 몸을 숙여 모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뭐 하는 중이지?”
서로의 몸이 바짝 붙으며, 두 사람의 코가 맞닿았다.
나른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남자와는 달리 모스는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었다.
또옥, 똑…….
남자의 머리카락 끝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모스의 콧등에 떨어져 뺨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남자의 숨이 모스의 윗입술을 간지럽혔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남자의 숨을 제가 삼킬까 봐, 모스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멍하니 남자의 금안을 바라보는 게 당장 할 수 있는 행동의 전부였다.
그러나, 침묵은 얼마 가지 못했다.
풍덩. 모스를 빤히 보고 있던 남자가 겨드랑이에 껴 넣은 손을 불쑥 빼낸 것이다.
발이 땅에 닿은 상태였지만 모스는 순간적으로 놀라 허우적거리다 발이 미끄러져 도로 물속으로 빠졌다.
다행히 아까와 달리 땅에 발이 닿았던 감각이 있어 금방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추, 추워.”
모스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드는데, 남자는 어느새 모스의 바로 앞에 있었다.
“악!”
그리고 그는 다짜고짜 모스의 턱을 움켜쥐었다.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짜고짜 얼굴이 잡힌 게 영 당황스럽고 무서운 모스는 울먹였다.
“아, 아파, 추워.”
그러니까 제발 놔줘.
모스가 애원하듯 물에 젖은 얼굴로 남자를 보았지만, 하지만 남자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으로 그런 모스를 가만히 보기만 할 뿐이었다.
침묵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모스의 입술이 새파랗게 변하며, 이가 딱딱 맞부딪칠 무렵에서야 남자는 턱을 잡은 손의 엄지를 움직였다.
그리고, 돌연 모스의 입가를 손끝으로 쭉쭉 밀기 시작했다.
“……어으, …으으?”
모스는 영문을 모른 채로 입술 옆 피부가 벗겨질 듯 벅벅 문질러졌다.
이게 도통 무슨 상황일까. 뭐라 항의하고 싶었지만 남자가 계속해서 피부를 문지르는 바람에 잇새로 옹알이 같은 소리를 몇 번 웅얼거린 게 다였다.
근데 그게 거슬렸던 것일까.
“우, 푸으!”
남자가 돌연 머리채를 붙들고 모스의 얼굴을 물에 처박았다. 보글보글, 모스는 눈을 부릅뜬 채로 물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켁, 케엑.”
남자는 모스의 머리를 붙잡고 들어 올렸다가.
“……흐!”
다시 물속으로 처넣었다.
남자는 모스의 얼굴을 문질렀다가 물에 담그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물고문이나 다름없는, 갑작스럽고도 가차 없는 남자의 행동에 모스의 표정이 삽시간에 공포에 질리는 것은 당연했다.
그 짓을 몇 번이나 했을까. 더는 비명도 나오지 않는 가운데, 드디어 남자가 모스의 머리에서 손을 거두었다.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떠는 모스를 보고도 남자는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주, 죽일 거야.’
모스는 당연히 눈을 질끈 감았다. 난데없는 물고문을 했으니, 이제 남은 건 죽음뿐일 것이다. 바들바들 떨며 눈을 감은 모스, 그러나 그에게 느껴지는 것은 목이 졸리는 느낌도 아니고, 물고문도 아니었다.
남자의 손은 모스의 목이 아닌, 이마에 있었다.
“하…….”
그리고 어이없다는 듯 들리는 낮은 한숨 같은 소리.
그것에 모스가 순간 공포도 잊고 저도 모르게 눈을 떴다. 모스는 코앞에 바짝 붙어 있는 남자의 얼굴에 비명을 지를 뻔했는데, 그보다도 남자의 행동이 더 빨랐다.
“어, 으우…… 으애.”
왜 이러냐고 물을 새도 없었다.
남자가 양손으로 입가뿐만 아니라 이마와 눈 밑은 물론 눈두덩이까지 사정없이 엄지로 문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왜, 으, 이래?”
남자의 손안에서 모스의 얼굴이 찰흙처럼 이리저리 주물러지는 와중에, 모스는 이게 무슨 기행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몹시나 기묘한 것을 보듯 남자를 보았다.
그러나 남자의 손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왜…, 왜에…….”
남자의 손이 모스의 웃옷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모스가 반사적으로 남자의 손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로 눈을 크게 떴다.
“…….”
그러나 남자는 아무런 말도 없이 모스를 한 번 힐끔 보고는 옷을 벗기려고 들었다.
“싫, 싫은데.”
모스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남자는 계속 벗기려고 들었고, 모스는 뒤로 물러서다 보니 어느새 걸터앉을 수 있는 바위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오, 옷은 안 돼. 추, 춥단 말, 말이야.”
그러나 남자는 손이 빠르고 기술이 좋았다. 모스의 옷은 이미 반쯤 벗겨져 있었다.
“벗어.”
“시, 싫, 아!”
모스는 제 딴에는 열심히 반항했지만, 실랑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의 행위였다. 남자는 아기 손목을 뒤틀 듯 가벼이 모스의 손목을 휘어잡고 걸레짝이나 다름없는 그의 옷을 벗기는 것에 성공했다.
“집에 옷 많, 많은데…….”
모스는 남자가 자신의 옷을 탐낸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제 옷을 벗길 이유가 없었다.
‘자기도 좋은 옷 있으면서.’
옷이야 줄 수 있지만, 모스는 몹시 억울했다.
모스가 주로 입는 옷은 숲에서 건져 낸 시체들에게서 얻은 것들이지만, 남자가 입고 온 옷은 무지한 모스가 보기에도 제가 가진 어느 것보다도 좋은 의복이었던 탓이다.
웃옷을 남자에게 빼앗긴 모스의 얼굴에는 서러움이 가득 차올랐다.
가뜩이나 춥고 무서운데, 옷까지 빼앗기는 게 서럽고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지만 이제 원하는 것을 내줬으니 남자가 그만두리라 생각하고 견뎠다.
하나, 그건 착각이었다.
남자가 그것만으로 부족한지 손을 도로 내뻗어 모스의 바지를 붙잡은 것이다.
“아, 아래도?”
남자는 그저 말없이 모스를 바위 위로 밀어 눕히고는 바지를 벗겼다.
모스의 하반신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목을 조르는 것보다는 아프지 않았지만, 이유를 모를 수치심에 모스의 목과 얼굴이 점점 새빨개지기 시작했다. 차오르는 부끄러움에 모스는 얼굴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모스의 나신이 훤히 드러난 것을 남자는 훑어보았다. 그 시선이 너무 부끄러워서 모스는 저도 모르게 다리를 오므리려고 했으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으?”
어느새 자신의 다리 사이에 남자가 서 있는 것을 알아챈 모스가 깜짝 놀란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남자는 모스가 놀랄 시간도 주지 않고, 모스의 옷을 손에 쥔 채로 물에 몇 번 조물조물하더니 상체를 모스 쪽으로 숙였다.
‘틀림없이 죽일 거야.’
이번에야말로 죽을 것이다.
남자의 기세는 처음 눈을 떴을 때 보았던 것처럼 거칠었고 무서웠던 탓에, 모스는 바들바들 떨며 눈을 감았다.
“……?”
그런데, 고통은커녕 영 다른 느낌이 났다.
모스는 큰 손으로 제 목을 조르는 느낌이 아닌, 난데없이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천이 움직이는 감촉에 저도 모르게 눈을 떠서 얼굴을 가리던 손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건 인간들의 새로운 괴롭힘인가?’
남자는 모스의 걸레짝 같은 옷을 들고, 모스의 몸을 문지르고 있었다.
벅벅. 벅벅…….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은 모스는 저도 모르게 제 몸을 벅벅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닦고 있는 남자를 빤히 보다가 놀랐다.
남자의 저런 표정은 처음 보았다.
빨리 무언가를 해치워 버리고 싶다는, 짜증 섞인 눈빛으로 남자는 모스의 목을 다 문지르고는 팔을 벅벅 문지르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남자가 문지른 곳은 색깔이 달랐다.
모스는 왜 내 몸의 색이 이리 흰지, 왜 이리도 색이 다른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팔을 보고 남자를 번갈아 보았지만, 남자는 바빠 보였다.
그는 미친 듯이 모스의 몸을 문질렀다.
팔을 다 문지른 남자는 모스의 배를 힐끔 보았다. 팔, 다리와는 다르게 배는 무척이나 흰 상태이자, 그는 미련 없이 허벅지에 제 손을 올렸다.
모스는 저도 모르게 몸을 경직하곤 바르르 떨었다. 느낌이 이상해서 발끝이 오므라들며 작은 신음이 잇새로 새어 나왔다.
그 작은 신음을 남자가 들었던 걸까. 바쁘게 움직이던 남자의 손이 멈추었다. 허벅지를 문지르던 남자는 고개를 들곤 몸을 반쯤 일으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스와 눈을 마주쳤다.
뚝, 뚝뚝…….
남자의 머리카락 끝에 아롱아롱 맺혀 있던 물방울이 턱 끝으로 흘러내렸고, 턱 끝에 맺힌 물방울은 이어 모스의 허벅지로 툭툭 떨어졌다.
그리고 그게 발화의 시발점인 양, 남자가 하던 일을 마저 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은 발끝부터 시작해 발등, 정강이, 무릎, 그리고 도로 허벅지로 올라왔다. 그때.
“그, 그만…….”
모스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신음을 내뱉고서는 입술을 깨물었다. 남자의 손이, 묘한 곳에 닿았다.
따가운 걸까, 간지러운 걸까.
모스는 이상하게 홧홧 달아오르는 얼굴을 가리려는 이처럼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고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
다행히 남자는 모스를 붙잡지 않았다. 모스는 바위 위에 제 몸을 웅크린 채, 뒤늦게 밀려오는 추위에 몸을 덜덜 떨었다.
모스는 방금 굉장히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런 기묘한 느낌은 탄생 이후에 처음 느껴 보는 것이었다. 생경하고 불편하고, 얼굴이 달아올라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표정이 고스란히 모스의 얼굴에 떠올랐다.
남자는 아무런 말과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시선이 몹시 집요했다. 모스는 그 시선이 이상하게 간지럽고, 부끄러웠다.
그는 모스가 볼 수 없는 곳들을 하나하나 시선으로 핥는 것처럼 집요하게 그의 몸을 훑어보다가 이내 미련 없이 뒤를 돌아 모스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사라졌다.
“회색 짐승이 아니라, 흰 짐승이었군.”
저게 무슨 말인지.
모스는 자신이 괴물이면 괴물이지, 짐승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흰 짐승이 있나?’
남자의 말에 혹 자신의 근처에 뭔가가 있던 건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나한테 짐승이라고 한 건가.
남자의 말에 담긴 의도가 궁금했지만, 더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얼음장 같은 물속에 있었으니 말이다.
모스는 창백해진 얼굴로 찰박찰박 물을 밟아 뭍으로 올라와 허둥지둥 남자가 쓰레기처럼 버려두고 간, 축축한 제 옷을 껴입었다.
딱딱딱. 추위로 이가 딱딱 소리를 내며 맞물렸다. 그는 얼어붙은 발을 움직이고 또 움직여 간신히 보금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에……에취!”
아무리 괴물이라 할지라도 모든 감각을 고스란히 느끼기에 축축한 옷을 오래 입고 있다가는 죽지는 않더라도 앓게 될 거라는 건 자명했다.
아픈 것은 질색인 모스가 서둘러 다른 마른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젖은 옷을 구석에 두고 시체에게서 얻어 낸 옷이 뭉텅이로 들어 있는 상자를 꺼내 뒤적였다.
‘옷을 갈아입는다, 내가.’
그는 눈을 깜빡이며 제 손에 들린 옷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숲에서 옷이란 굳이 따지자면 쓸모는 없는 것이었지만, 인간을 조금이나마 따라 하고자 마음을 먹기도 했고 사시사철 가시지 않는 추위 때문에 모스에게는 옷이 필수였다.
다만 모스는 옷을 갈아입어도 그 옷을 보여 줄 개체가 없기에 인간들처럼 자주 갈아입지는 않았다.
물론 천이 너무 닳아 찢어질 무렵에는 새로운 걸 꺼내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번에는 찢어지지도 않았는데 새 옷을 꺼내 감회가 새로웠는지 모스가 벌거벗은 채로 쭈그리고 앉아 옷을 빤히 보던 그때.
끼이익…….
보금자리의 문이 열렸다.
“어? 어?”
모스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자, 남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남자는 한 번 숲으로 나가면 일찍 들어오는 법이 없었는데 오늘은 어째서인지 이른 귀가를 했다.
멍하니 남자를 보던 모스는 이내 제가 벌거벗고 있음을 떠올리고 급히 제 몸을 가렸지만 한계가 있었다.
‘빨리 옷을 입어야 하는데.’
벗고 있는 게 죄는 아니지만, 남자의 앞에서 맨몸을 드러내는 게 영 불편했다. 빨리 옷을 입고 싶어 모스가 급하게 웃옷만 붙잡은 채로 구석에 몸을 구기고 앉아 끙끙거리며 옷을 입으려고 했다.
하지만 급한 마음에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하고, 손은 연신 허공에서 헛손질을 하기 바빴다.
“…….”
남자는 그런 모스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어두컴컴한 보금자리, 일렁이는 등불 하나에 노랗게 빛나는 남자의 눈동자가 똑바로 모스에게 향해 있었다.
모스는 남자에게 자신을 보지 말라고 애걸하고 싶었다. 하지만 방금 전에 사정없이 물속에 제 얼굴을 처박은 남자에게 그런 말을 꺼낼 수 있을 정도로 담이 크지 않았기에 남자의 시선을 묵묵히 견딜 수밖에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재빨리 옷을 입는 것뿐이었다. 급히 웃옷을 껴입은 모스는 아래가 허전한 느낌에 웃옷을 죽 아래로 내리고서는 남자의 눈치를 살피다 당황했다.
“……?”
당연히 다른 쪽을 볼 것이라는 모스의 예상과는 달리 남자의 시선이 여전히 그에게 닿아 있던 것이다. 모스는 입술을 달싹이다 몸을 돌렸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다. 뒤를 돌았는데도, 남자의 시선이 계속해서 느껴지는 것이다.
“…….”
소름이 끼칠 정도로 조용한 적막 속에서 모스가 손을 뻗으려다 멈칫했다.
바지가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아무래도 몸을 일으켜서 바지를 잡아야 할 거 같은데, 지금 아래는 아무것도 입지 않아 숭한 상태다.
잠시 고민하던 모스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인간의 웃옷은 모스에게 대부분 컸지만, 지금 입고 있는 옷은 하필 다른 옷들에 비해 상의가 짧아 몸을 일으키자 하반신이 민망할 정도로 훤히 드러났다.
‘어차피 날 보지도 않을 텐데.’
시선은 착각일 것이다. 그러니 남자가 자신을 볼 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허둥지둥 바지를 찾아 꿰입었다.
하지만 마음이 급하면 손이 오히려 느려진다고 해야 하나.
모스는 조금이라도 빨리 옷을 입고 싶었지만, 바지는 그의 마음을 모르겠다는 듯이 계속 움직여 그를 힘들게 했다.
바지와 짧은 실랑이 끝에 드디어 모스가 옷을 다 입었다.
옷을 입은 모스의 몸은 땀범벅이었다. 고작 옷 하나 입는데, 이렇게 땀이 난 건 처음이었다.
아마 뒤에 서 있던 남자가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유 모를 긴장이 밀려온 탓이다.
‘보고 있을까?’
남자는 무신경하니 제 벗은 몸을 굳이, 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갈아입는 내내 남자의 시선이 뚝뚝 흘러 제 몸을 흠뻑 적시는 물과 같이 느껴졌기에, 도무지 뭐가 정답인지 알 수가 없었다.
손끝을 접었다 펴기를 반복하던 모스는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뒤를 돌았다. 그리고 그의 결연한 표정과 긴장은 뒤를 돌자마자 탁 풀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문가에 우두커니 서 있던 남자는 언제 움직였는지, 어느새 잠자리에 누워 있었다.
제 쪽을 전혀 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요요히 빛나는 그 화사하고 아름다운 백금발을 보던 모스의 입술이 머쓱하게 다물렸다.
남자가 자신을 보고 있었을 거란 생각은 완벽한 착각이었다. 부끄러웠다.
스으윽, 모스가 꾸물꾸물 느릿하게 몸을 눕혀 남자 쪽을 바라보았다. 바닥에서 자는 모스에게는 보금자리의 모든 곳이 누우면 그의 잠자리였다. 모스는 누워서 남자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보기만 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 오늘은 이상할 정도로 잠이 오지 않았다.
‘물이 묻어서 그래.’
아까 찬물에 몇 번이고 담금질을 당했던 게 불면으로 이어진 모양이다.
모스는 결국 몸을 일으켜, 여전히 한밤중인 밤의 냄새를 코로 킁킁 맡은 뒤 천을 걷어 내고 문밖으로 나섰다.
사락사락, 바람에 저 멀리서 환각초가 나부끼는 소리가 들렸다.
인간들은 저 소리가 죽음의 소리라고 하지만, 모스에게는 그저 평온한 밤의 바람 소리일 뿐 별다른 게 없었다.
늘 가벼이 허공을 걷듯 걸었던 평소와는 달리, 모스의 싱숭한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그가 걸어간 자리에는 풀이 누웠다.
‘왜, 그랬을까?’
모스가 아까 남자가 문지르던 제 팔을 옷을 걷어 확인했다. 이전에 회색빛이던 몸은 마치 달빛처럼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아직도 모르겠다. 남자가 왜 그리 미친 듯이 제 몸을 문질렀는지.
그렇게 모스는 의뭉스러운 남자의 행동을 곱씹으며 걷고 또 걸었다. 머릿속에 생각이 너무 많은 것 같기도 했고, 너무 없는 것 같기도 했고.
‘돌아가자.’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덧 아침의 향이 났다. 곧 있으면 동이 터올 것이다.
모스는 이제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며 발걸음을 재촉해 순식간에 그곳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하아…….”
이게 무슨 소리지.
모스는 이상하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아까부터 귓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는데, 점점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무언가를 두드리는 것 같으면서도, 치대는 소리. 그리고 그 소리와 맞물린 신음.
모스는 무심코 시체들이 쭈욱 묻혀 있는 무덤가를 바라보았다.
“하, 아.”
신음은 멈추지 않았다.
이 숲에서 신음을 뱉을 수 있는 존재는 남자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기에, 이 소리는 틀림없이 남자가 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모스는 그럼에도, 뭔가 믿을 수 없었다.
남자가 이런 소리를 낼 수 있었던가? 뭔가 굉장히, 간지러운데…….
모스는 저도 모르게 발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보금자리에 다가갔다. 천천히 다가가면 갈수록 신음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쓸리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그리고 입구를 수북하게 덮은 천 앞에 선 모스는 이상하게 입술이 마르는 것 같아 혀로 메마른 입술을 훑고는 천을 쥐었다.
그냥 들어가면 되는데, 왜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지.
이 천을 걷어 내면 안 된다고 계속해서 뇌가 경고하는 것과는 달리, 손은 착실히 천을 붙잡고 틈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틈을 통해 남자를 바라봤다.
“……하.”
모스는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고 천천히 남자를 훑어보았다. 역시나 신음의 주인은 남자가 맞았다. 낮고 끈적한 신음이 그의 잇새로 새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남자가 좀 이상하다.
아까 당장이라도 잠들 것처럼 누워 있던 모습은 어디 가고, 지금 그는 몸을 반쯤 일으켜 있었고, 바지도 반쯤 내려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모스도 남자에게 벌거벗은 모습을 보였으니.
‘저게, 대체…….’
뭐지?
모스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남자는 처음 보는 표정을 하고 흐트러져 있었다. 이 숲에서 남자는 틈 하나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한 단단한 모습으로 있었는데, 지금의 남자에게서는 미묘한 틈이 보였다.
늘 살 하나 드러내지 않겠다는 각오로 정돈하고 다니던 옷차림은 어디 가고, 웃옷은 그가 하는 일에 방해가 된다는 듯 반쯤 걷어져서 바위를 쪼갠 것 같은 단단하게 보이는 상체가 드러나 있었다.
그런 흐트러진 자세를 한 남자는 무언가가 불만족스러워 보였다.
짙고 굵은 눈썹은 진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눈매는 평소보다도 깊고, 볼에도 열기가 스며 있었다. 그의 입술은 몰두한 듯 살짝 벌어진 채로 간간이 이가 보였다.
한숨 같은 신음과 함께 그의 손은 쉬지 않고 계속 움직였다. 손이 움직일 때마다 그가 쥔 것은 조금씩 크기를 키웠다.
모스는 멍하니 그 모습을 보았다.
다리가 세 개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엄청나게 커다란 것을 흔드는 남자, 저런 행위는 살아생전 처음 보는 장면이었지만, 모스의 지식은 저 행위를 알고 있었다.
‘생식 활동.’
남자는 현재 생식 활동을 하고 있었다.
모스는 인간들의 생식 활동이 개체를 늘리기 위한 필수적인 행위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지금 이 모습을 보고 자연스레 넘어가는 것은 이상할 게 없었다.
한데, 그는 결코 눈을 뗄 수 없었다.
남자의 손이 검붉은 성기를 쥐고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모스의 시선도 같이 일렁였다.
남자가 신음을 내뱉으면, 어째서인지 오금이 저린 느낌이 나면서 손끝에 힘이 들어가고, 발가락 끝이 곱아 드는 것만 같았다.
“……후.”
천 틈으로 엿보게 된 남자의 틈.
남자가 목을 젖히고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점점 빨라지는 남자의 손과 그에 비례하듯 부풀어 오르는 아래를 모스는 눈 한 번 깜빡이지 못하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멍하니 보았다. 심장은 아까부터 점점 빨리 뛰기 시작해 터질 것만 같았다.
심장 소리가 너무 크고 빠른 탓일까.
모스의 심장 소리가 들리기라도 한 것처럼, 천장을 올려다보듯 허공을 보던 남자의 금안이 도르르 움직이더니.
“아.”
똑바로 모스가 엿보고 있는 틈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등불을 등지고서도 마치 태양을 눈에 박아 넣은 것처럼 선연하고 밝은 금안은 처음부터 자신을 엿보고 있는 틈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놀란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남자의 눈이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며 모스의 축축하고 어두운 이끼 색 눈동자를 응시했다.
뜨겁다. 채 가시지 못한 열기가 남자의 눈길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모스가 마치 불에 덴 듯, 놀란 얼굴을 한 채 손에 쥔 천을 저도 모르게 놓쳤다. 스르륵, 천이 느릿하게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과 동시에 남자가 행위의 절정을 알렸다.
“…….”
툭, 틈이 닫혔다.
“방금…….”
옷가지들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엉성하기 짝이 없는, 문이라고 부를 수 없는 천들 앞에서 모스는 마치 혼이라도 빠져나간 듯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선 모스는 방금 전에 자신이 무엇을 본 것인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스는 남자의 눈을 볼 때면 태양처럼 빛나는 눈동자지만 동시에 그 시선이 지나치게 차갑다고 느꼈는데, 방금 전은 아니었다. 뜨거웠다. 그가 쳐다보는 곳마다 햇빛에 녹아내리는 것처럼.
-하아…….
모스가 화들짝 놀라며 제 귀를 감쌌다. 남자의 신음 소리가 아직도 귀에 달라붙어 있었다.
열이 뒤섞이고, 채 가라앉히지 못한 흥분을 고스란히 노출한 남자의 모습, 그리고 잔뜩 성이 난 중심도…….
박제를 한 양 눈과 귀에서 방금 전 남자의 모습이 가시지를 않아, 모스는 보금자리에 들어가지 못하고 얼마간 그 앞을 뱅뱅 돌았다.
‘곧 해가 뜰 텐데.’
하지만 백날이고 천날이고 이 앞을 맴돌고 있을 수는 없었다. 곧 있으면 모스를 녹이는 해가 뜨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의 그런 모습을 보아서일까. 그는 보금자리에 들어가는 게 망설여졌다.
생식 활동은 자연의 섭리이고 당연한 것이기에 이렇게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데, 왜 이렇게 남자의 얼굴을 못 보겠는지.
주춤거리며 보금자리의 앞을 서성이는 사이에 어느덧 시간이 흘러 정말 해가 뜨기 직전이 되었다. 새까맣게 보였던 주변이 제 색으로 물들기 시작하자 더 이상 물러설 수도 없었다.
“후.”
긴장이 된다. 마치 짐승의 아가리에 기어들어 가는 것만 같은 느낌에 짧게 심호흡을 한 모스가 천을 조심스레 걷어 보금자리로 들어갔다.
그는 적막 속에서 조용히 제가 붙잡은 천을 놓았다. 겹겹이 쌓인 두꺼운 천 더미가 조금의 햇빛도 용서치 않겠다는 듯 툭 닫혔다.
“…….”
모스는 눈을 깜빡였다. 등불은 명을 다 했는지 꺼져 있었지만, 어둠에 익숙한 눈을 가진 그에게는 그건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눈을 데구루루 굴린 모스의 시선 끝에 남자가 걸리고, 그를 발견하자마자 모스는 긴장이 풀린 얼굴로 숨을 내쉬었다.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너무나도 평온하게 등을 지고 누워 있었던 것이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잠든 남자를 보고 다행이라고 모스는 생각했다.
만약 눈을 뜨고 있었다면, 모스는 분명 같은 쪽의 손발을 뚝딱뚝딱 움직여 간신히 남자를 겨우 등질 수 있었을 것이다.
“…….”
근데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방금의 일이 환상처럼 느껴질 정도로 고요했지만 코끝에 스치는 쿰쿰한 냄새는 방금의 일이 사실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알리고 있었다.
지나칠 정도로 조용한 적막 속에서 모스가 발걸음 소리도 내지 않도록 살금살금 움직여 남자와 가장 떨어진 곳에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모스는 남자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몸을 뒤척이며 뒤를 돌았다. 보금자리 구석에 엉성한 솜씨로 만든 바구니에 담긴 인간들의 물건들이 보였다.
모스는 잡념을 잊기 위해 부러 바구니의 불규칙한 문양을 훑으며 잠이 오기를 기도했다.
모스에게 본래 잠이란 시간을 죽이기 가장 쉬운 수단이기에 잠을 조절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 유독 잠이 안 왔다.
심한 불면에 시달리는 날도 숲을 한 바퀴 돌고 오면 간단히 해결이 되었는데, 오히려 아까 보금자리를 나설 때보다도 더 눈이 멀뚱멀뚱했다.
생각, 생각, 생각이 문제였다.
숲에서 생각이라고는 할 게 없었는데, 남자가 온 이후 모스의 밤은 늘 생각이 가득했으니 불면의 원인은 남자에 관한 생각일 것이다.
생식 활동을 하는 남자.
하지만 그의 모습을 지우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탓에 모스는 애써 바구니 안에 담겨 있는 물건들을 어쩌다가 구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저건 사냥꾼에게서 얻은 성냥, 저건 밤에 도주를 하던 남녀의 물건들, 저건…….’
바스락.
그러나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뒤에서 남자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머릿속이 새하얘진 모스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문제는 거리가 있어도 너무 조용한 공간이다 보니, 남자가 움직이는 게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먼저 남자는 늑대 가죽 위에서 몸을 일으켜 땅에 발을 디뎠다.
마치 사냥 전 짐승처럼 그는 느릿하고 조용하게 움직였다. 그럼에도 모스의 온 신경이 남자에게로 가 있어 그 움직임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가려는 걸까?’
하긴. 그는 이 숲을 나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상태 아닌가. 모스는 이상하게 속이 쓰린 느낌에 입술을 꽉 다물고 눈을 더 질끈 감았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남자가 더 움직이는 기색이 없다.
이상하다.
지금쯤이면 문을 나서고도 남을 시간인데, 남자가 움직이는 소리가 귀에 잡히지 않는다.
아무리 인기척이 없다시피 다니는 남자라지만, 이건 너무 지나치게 조용하지 않은가.
모스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눈을 한번 떠 볼까 고민하던 그때, 마치 모스의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드디어 남자가 움직였다.
남자의 발소리가 들리자 모스는 그제야 숨통이 트인 듯 잇새로 작게 숨을 내쉬었다.
여태 모스는 남자가 움직일 때까지 자신도 모르게 숨을 꾹 참고 있었던 것이다. 긴장이 풀린 듯, 모스가 한숨같이 숨을 내뱉은 그때.
저벅, 저벅…….
모스는 다시 얼어붙었다.
남자의 발걸음 소리가 문 쪽으로 향해 귓가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가까이 들렸기 때문이다.
남자는 제 발소리를 숨길 의도가 없어 보였다. 점점 다가오는 발소리는 다시금 모스의 숨통을 조여 왔고, 심장은 미친 듯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
이윽고 남자가 모스의 바로 뒤에 섰다. 감히 숨을 내쉴 수도 없는 적막 속에서 모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은 제 얼굴에 달라붙는 시선이 느껴졌다. 만약 시선이 물이었다면 이미 남자의 아래서 모스는 흠뻑 젖었을 정도로 그만큼 남자의 시선은 몹시 진득하게 모스에게 달라붙었다.
머릿속이 팽팽 돌았다.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남자에게도 들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모스는 잔뜩 긴장한 상태로 굳어 있었다.
숨 하나도 제대로 내쉬지 못할, 소름 끼칠 정도로 조용한 적막 속에 옷자락이 사락거리는 남자가 몸을 숙이는 듯한 소리가 들렸고 아까와 비견이 되지 않을 정도로 묵직한 시선이 모스를 짓눌렀다.
쿵쿵쿵쿵. 쿵쿵쿵쿵.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모스는 눈을 더 질끈 감았다. 남자 특유의 체향과 비릿한 향이 뒤섞였다. 평소 남자에게서 나지 않는 이 비릿한 향은 아마 아까 전의…….
“…하아.”
멍하니 생각을 하던 그는 저도 모르게 눈을 뜰 뻔했다. 묘한 소리가 들렸다.
아까 남자가 홀로 자위를 하며 내던 소리와 비슷한 신음이 귓가에 들리는 것에 모스는 처음에 제 귀를 의심했으나, 살을 치대는 소리도 함께 들리자 이내 그것이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의 억눌린 신음 소리, 귓가에 달라붙은 살 소리.
‘……또?’
모스는 몹시 당황했다.
남자가 생식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바로 앞에서!
사실을 깨닫자마자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그럴 깜냥은 없었다.
포식자의 시선을 피해 숨는 작은 동물처럼 모스는 숨을 죽이고, 자는 척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이미 그의 손은 벌벌 떨리고 있었다.
“……후우.”
남자가 뭉개듯 신음을 잇새로 내뱉었다. 탁탁, 불규칙하지만 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모스의 심장 소리는 이제 전신을 울릴 정도로 쿵쿵 요동치기 시작했다.
살이 맞물리는 소리는 아까보다 더 진득해졌다.
코끝을 찌르는 옅은 비린내가 강해짐에 따라 질척이는 소리도 함께 했다.
문득 모스는 아까 저 멀리서 홀로 검붉은 성기를 쥐고 흔들던 남자의 모습이 눈을 감았음에도 선연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을 떠올리면, 어째서인지…….
‘간지러워.’
제 허벅지 안쪽이 가려웠다.
어딘가에 문대고 비비고 싶은 느낌이 들면서 허리를 뒤틀고 싶었지만, 그러면 잠들지 않은 것을 들킬 것이니 꾹 참았다.
“하, 아.”
귓가에서는 계속해서 남자의 신음이 들렸다. 모스는 문득 남자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궁금했다.
눈을 떠 볼까?
잠시 갈등했지만, 모스의 동물적인 감각은 절대 남자에게 깨어 있음을 들키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깨어 있는 것을 들키면 무언가를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경고하듯, 혈관의 모든 피가 빠르게 색색 돌아 모스는 간신히 충동을 억누르고 눈을 꾹 감을 수 있었다.
“후, 욱.”
신음은 점점 커졌다. 느릿하지만 불규칙하게 움직이던 그의 손놀림도 점점 빨라지고 치대는 소리도 더 커졌다.
‘이상해, 이상해.’
그는 이 넓은 보금자리의 공간을 두고 왜 굳이 자신의 옆에서 이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왜…….
‘간지러워.’
제 중심이 왜 이리 간지럽고 뜨거워지는지 의문이 들었다. 마치 생식 활동을 기대하는 것처럼.
몇십 년간 숲에서 살면서 모스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제 아래 붙어 있는 것을 만지거나 쓴 적이 없었다.
근데 왜 지금은 이런 느낌이 드는 걸까?
애써 묘한 감각을 짓누르며 눈을 질끈 감고 움켜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귓가에 남자의 신음 소리가 날 때마다 아래가 가려웠다. 가렵고, 가려워서…… 만지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남자에게 깨어 있음을 들킨다면 그보다 더 민망한 상황이 아닐 수가 없으니까.
아까 물속에서 나신을 보였을 때도 부끄러웠는데, 지금 눈을 뜬다면 아까보다도 더 민망할 거 같았기에, 모스는 혼신의 힘을 다해 참았다.
잠을 자자.
잠을 자면 다 해결될 것이다.
모스가 애써 쿵쾅거리는 심장을 잠재우려고 했으나, 애초에 너무 긴장한 나머지 심호흡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숨을 제대로 쉬지 않아 새빨개진 얼굴을 하고 이를 악문 모스는 아무 생각이나 떠올렸다. 환각초 너머 숲에 사는 동물들, 초식 동물들을 잡아먹는 육식 동물들, 그리고 종종 마주치는 늑대.
‘늑대?’
하지만 모스가 순간적으로 떠올린 것은 산속에서 만난 늑대가 아니라, 제 보금자리에 있는 늑대 가죽이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모스의 머릿속에 아까 전 늑대 가죽 위에서 남자가 자신을 쳐다보았던 장면이 또 떠올라, 숨을 훅 들이켰다.
“흐읍…….”
여태 숨을 제대로 쉬지 않고 있다가 갑작스레 숨을 크게 들이셨던 까닭일까. 소리가 컸다.
“…….”
질척이던 소리, 살덩이가 비벼지던 소리, 남자의 신음 소리, 모든 소리가 모스의 숨소리가 내뱉어지자마자 그게 신호인 양 싹 멎었다.
들켰다.
당황스러워하며 모스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제 입을 틀어막고 얼어붙었다.
잠시의 침묵, 이내 스륵 모스의 목덜미에 뜨거운 체온이 닿았다. 남자의 손이었다. 뜨거움을 휘감은 손이 모스의 턱을 붙잡고 얼굴을 돌리게 만들었다.
“…어, 어….”
턱이 붙잡힌 채로 입술을 달싹이며 저도 모르게 남자의 손에 이끌려 고개를 돌린 모스는 얼어붙었다. 남자는 뒤에 있는 게 아니었다.
남자의 다리 사이에 모스가 있었다.
언제 이렇게 가까워졌을까. 모스가 경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남자의 얼굴을 보다가 그의 금안에 얼룩지듯 묻어 있는 뜨거움을 접하고 데인 것처럼 파르르 떨며 시선을 빠르게 돌렸다.
하지만 그건 오히려 악영향을 끼쳤다.
모스의 눈에 나무같이 생긴 엄청난 검붉은 살덩이가 잡혔다. 잔뜩 발기해서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끝에서는 투명한 나무 진액 같은 것이 당장이라도 방울져 떨어질 것처럼 끈적하게 흐르고 있었다.
“이, 이…….”
모스의 동공이 미친 듯이 떨리며 동요를 감추지 못하는데, 남자가 그때 작게 픽 웃더니 고개를 숙였다. 코앞, 당장이라도 입을 맞출 것처럼 바투 붙은 둘 사이로 짧은 침묵이 오갔다. 이내 남자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숨. 잘 참네.”
남자는 모스가 자는 척을 하며 숨을 꾸역꾸역 참았던 모습을 전부 보았던 모양이다.
뭐라 변명을 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다 벌린 순간, 모스는 더는 변명을 할 수 없었다.
뭔가가 후두둑 모스의 허벅지로 떨어졌다. 묽고 끈적한 액체였다.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지, 지금…….”
모스가 저도 모르게 시선을 아래로 두었다. 그리고 제 얇은 옷 위로 흩뿌려진 것들을 보고 더는 말을 이을 수 없는 듯 입술을 벙긋거리기만 했다.
“…….”
잔뜩 당황한 모스와 달리 남자는 이 모든 것이 일상적인 행동인 양 너무나도 태연한 태도였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혀끝까지 차올랐지만, 남자의 태연한 표정을 보니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남자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모스를 빤히 보다 고개를 숙였다.
그의 코끝이 닿은 곳은 모스의 목덜미였다. 남자의 백금발이 모스의 얼굴과 목에 쏟아지면서 간지럽히는 바람에 모스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지며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모스는 바짝 붙은 남자의 속눈썹이 팔랑거리는 게 느껴졌다.
일정한 속도로 깜빡이는 속눈썹은 팔랑이며 귀 아래를 간지럽혔고, 묘한 느낌이 들게 했다.
남자는 한동안 말없이 눈을 깜빡이며 모스의 체향을 들이마시듯 숨을 들이켰다. 남자가 혹 무슨 짓을 할까, 잔뜩 긴장했던 모스의 몸에 긴장이 조금 풀린 그때.
“악!”
남자는 돌연 모스의 목을 물었다.
긴장을 풀었던 탓일까. 굉장히 아팠다. 목에 불을 지진 것처럼 뜨겁고, 살갗이 쪼개지는 느낌이 선명했다. 가뜩이나 아픈 걸 싫어하는 모스는 버둥거리며 남자를 밀어 내려고 했다.
“아, 아, 아파!”
모스의 발버둥에도 남자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정말 엄청나게 커다란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고 모스의 목을 문 이에 힘을 더 주었다.
“아…… 뜨, 뜯겨!”
주르륵, 목덜미에 난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목뒤로 흐르는 게 느껴진다.
그만큼 남자는 정말 잡아먹을 듯이 이를 세워 그의 목덜미를 꽉 깨물고 있었다.
만약 저기서 이 사이 간격을 좁힌다면 모스의 살점은 사정없이 통째로 뜯겨 나갈 정도로, 남자의 행위는 결코 장난이 아니었다.
엄청난 고통에 모스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줄줄 흘러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사, 하으…, 살, 살려 줘…….”
어느새 목뒤가 흘러나온 피로 축축해졌다.
코끝에는 더는 남자의 정액 냄새뿐만 아니라 피 냄새도 뒤섞여 후각이 예민한 모스의 정신은 더더욱 혼미해졌다.
“마, 맛없을, 맛없어.”
잡아먹힌다. 정말 잡아먹힌다.
모스가 발발 떨며 남자에게 살려 달라며 빌었다. 코끝을 찌르는 제 피 냄새에 헛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나…, 놔줘.”
남자를 밀어 내려고 하다가도, 남자가 저대로 이를 꽉 다물면 살점이 뜯길까 봐 제대로 밀어 내지도, 그렇다고 잡아당기지도 못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남자의 몸은 모스에게 더 가깝게 달라붙었다.
“더 울어 봐.”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며.
남자는 모스에게 그 한마디를 하고, 모스의 눈물을 빤히 쳐다보다 제 몸을 비비듯 종이 한 장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모스에게 바짝 붙었다.
“놔, 놔아.”
더 울어 보라니, 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틈 하나 없이 남자의 아래 깔린 모스는 고통에 발버둥을 치던 와중에도 무언가를 느낀 듯 눈을 크게 떴다.
남자에게 물린 상태라 제대로 아래를 볼 수 없었지만, 제 배를 엄청나게 단단하고도 미끄덩한 무언가가 꾹꾹 찌르고 있었다.
이게 뭐지, 그는 목이 물어뜯겨 아픈 와중에도 그만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덜덜 떨며 눈을 내리깔았다가 언뜻 드러난 것을 발견하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대체 언제 다시 커진 걸까.
그러나 놀란 것도 잠시, 이내 그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파, 아, 아파……!”
잠시 느슨하게 모스의 목을 깨물던 남자는 모스가 다른 쪽에 신경을 쓰는 것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양, 울대뼈 바로 옆을 문 것이다.
“아, 커, 커억.”
상처가 회복될 틈도 없었다. 이러다 목소리를 잃는 것은 아닐까.
목이 뒤로 확 젖혀진 채로 희게 뜬 모스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아까보다 훨씬 더 아프게 목이 물어뜯겼다. 살점과 피가 죄다 남자의 입으로 빨려들어 간다.
모스의 머릿속이 뜨거웠다.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계속 발버둥 치자, 남자는 그제야 입을 떼어 냈다.
“흐으, 흐윽.”
모스의 얼굴은 눈물로, 그의 전신은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남자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눈물에 젖은 모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제대로 먹은 것 하나 없이 숲에서만 지내서일까.
모스에게서는 땀 냄새가 배어 나오는 것이 아닌, 축축한 나무의 향이 났다. 남자는 음미라도 하듯 눈을 감고 피와 섞인 모스의 체향을 깊게 들이켰다.
“살려, 살려 줘…….”
남자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모스의 공포를 더 부추겼다. 남자의 행위가 마치 잡아먹기 전 포식자의 태도처럼 느껴졌던 탓이다.
모스는 목이 졸렸을 때보다 더한 공포를 느꼈다. 목이 물어뜯기는 지금, 생살이 뜯겨 나가는 것이라 그런지 너무 아프고 괴로워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때, 생각을 하던 모스는 돌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흐, 으?”
아릿한 상처 위로 뜨겁고 축축한 것이 닿은 것이다.
이번에는 이가 아닌 혀였다. 남자는 자신이 언제 난폭했었냐는 듯 새삼 다정스레 그의 목에 묻은 피를 짐승이 제 새끼를 돌보듯 살살 핥았다.
마치 상처가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대고 상처를 핥는 남자의 모습은 굉장히 기묘했다.
그러나 남자의 기행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돌연 남자의 손이 자신도 제대로 만져 본 적 없는 곳을 움켜쥐는 것이다. 모스가 반사적으로 남자를 밀어 내기 위해 손에 힘을 주고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았다.
비록 옷 위인지라 느낌이 맨살을 비비는 것보다는 선명하진 않았지만, 남자의 손이 뜨거워서 그런지 묘한 느낌이 들며 배 속이 간지러웠다.
그렇게나 아팠으면서, 이 느낌은 뭐지? 너무 아파서 드디어 신경 어딘가가 고장 난 것일까?
모스가 고통과 해소되지 않은 간지러움 속에서 연신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우지 못하며 혼란스러워하던 그때, 남자가 몸을 반쯤 일으켰다.
“으, 으으!”
이때가 기회였다. 모스는 팔꿈치로 뒤로 엉금엉금 몸을 빼내며 기었다.
남자의 다리 사이에서 기어 나온 모스는 흐느끼느라 덜덜 떨며 벽에 등을 붙였다. 어찌나 피가 많이 흘렀는지, 몸을 세우자마자 등까지 피로 축축해진 것이 느껴졌다.
끄윽, 끄윽.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모스가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 제 손으로 목을 감쌌다.
아팠다. 너무 아프고 뜨거웠다.
목에 손을 댄 채로 모스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렀다. 벽에 몸을 바짝 붙이고 덜덜 떨며 남자를 보았다.
“…….”
남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반쯤 내려간 바지를 제대로 입고, 흐트러진 자신의 옷차림을 손짓 몇 번으로 말끔히 정리했다.
마치 방금 전에 벌어진 일이 꿈인 양, 깔끔하게 돌아온 남자.
그러나 단정한 그의 모습과 달리 모스는 등이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남자의 웃옷과 뺨에도 모스의 피가 튀었는지 군데군데 붉었으며, 남자의 입술은 지나치게 붉었다.
나가서 타 죽을지, 아니면 여기서 잡아먹힐지.
모스는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그나마 살아남을 확률이 높은 것은 이곳에 남아 남자에게 미친 듯이 비는 것인데, 모스는 자신이 어떻게 이 이상으로 더 잘 빌어야 할지도 몰랐다.
“하, 하, 하지 마.”
물론 남자는 모스에게 생각할 시간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남자는 덜덜 떠는 모스의 앞에 서서 몸을 낮추었다. 남자가 모스의 머리를 쓰다듬듯 살살 머리카락 사이에 제 손가락을 밀어 넣고, 엉망으로 콧등까지 내려온 해초 같은 머리카락을 뒤로 밀었다.
“……으으.”
눈물을 어찌나 많이 흘린 것인지, 눈 주위가 붉었다. 새빨개진 토끼 같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 모스의 얼굴을 보다 손을 미끄러뜨려 턱을 훑고, 목을 가벼이 쥐었다. 아까 목이 물어뜯긴 고통이 아직도 선연한지, 모스가 파르르 떨면서 자신의 미래를 직감한 양 눈을 질끈 감고 순순히 목을 드러냈다.
모스는 말 그대로 피범벅이었다.
정말 동물에게 잡아먹히기 직전까지 간 것처럼, 새로 갈아입은 옷은 피로 물들었고, 목은 흰 피부가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덕지덕지 피가 묻어 길을 그리고 있었다.
그 피투성이인 목을 향해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남자의 입술이 아까 물어뜯었던 곳에 다시 닿았다. 그리고 혀를 내밀어 할짝이며 피를 핥아 냈다.
흐읍, 모스가 숨을 삼켰다.
저렇게 상처를 보듬어 주는 듯 보여도, 잔혹한 남자는 또다시 제 목을 깨물 것이다.
남자가 제게 주는 고통은 몇 번을 감내해도 영 익숙해지지 않았다.
또 너무 많이 울었던 탓일까. 더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은 채로 모스가 이어질 고통을 생각하며 손에 힘을 꾹 준 그때.
“더 울지?”
순식간이었다.
남자가 모스의 손을 훅 잡아당기더니, 그의 손을 어딘가에 가져다 대었다.
옷을 입었음에도 채 감추어지지 않은 열기가 모스의 손바닥에 닿았다. 그제야 모스는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기분 좋은데.”
남자가 우는 자신을 향해 발정한다는 것을.
남자는 본능만 남은 이처럼 주저가 없었다.
그는 게걸스럽게 모스의 목에 흐르던 피를 마시고, 눈가를 꾹꾹 손으로 짓누르며 눈물을 쥐어 짜내고, 열이 잔뜩 오른 하반신을 모스에게 일방적으로 비벼 댔다.
“하아.”
열에 달뜬 남자의 신음이 모스에게는 어색하게 들렸다.
목에 난 상처는 이제 거의 아물었는지 고통은 이전보다는 덜했으나, 혹여나 남자에게 제 상처가 나은 게 들킬까 봐 모스는 잔뜩 얼어붙은 채로 어깨를 움츠리고, 벽에 기대 굳어 있었다. 잠시간 굳어 있던 모스는 눈이 도르르 움직이다 남자의 금안과 딱 마주쳤다.
금안, 불을 다 꺼도 반짝이는 저 짐승 같은 그의 노란 눈은 처음 보았을 때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무서웠다.
모스는 바르르 떨다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꾹 깨문 뒤 남자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어 내고 고개를 돌렸다. 그 바람에 그는 제대로 보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기분이 살짝 좋은 듯 올라가 있던 남자의 입꼬리가 스륵 하고 내려앉은 것을.
“……으!”
기분이 나빠진 남자가 심술을 부렸다.
갑자기 휑해진 아래에 모스가 깜짝 놀라 눈을 떠 제 아래를 보고는 헛숨을 들이켰다.
아래가 없다. 아래 입고 있던 바지를, 남자가 단숨에 발목까지 쑤욱 내린 것이다.
“어, 어.”
어물어물, 제대로 말도 못 꺼내며 모스가 굳어 있는 사이 남자는 모스의 바지를 끝까지 다 벗겨 내고, 다리 사이에 앉아 있었다.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남자의 시선은 모스의 성기에 향했다. 아까 남자가 치댔을 때 살짝 열을 머금었던 성기는 남자에게서 느낀 공포 때문에 어느새 기가 죽어 푹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반면 조금 더 몸을 앞으로 내밀면 맞닿을 거 같은 남자의 중심은 거리가 있어도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그의 바지춤에 윤곽이 아주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이 자세는 위험하다.
모스는 속으로 비명을 삼키며 땅에 손을 올려 뒤로 엉거주춤 물러서려고 했지만, 모스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남자는 모스가 물러서지 못하도록 한술 더 떠 모스의 다리를 제 어깨 위로 올렸다.
스르륵, 쿵.
벽에서 주르륵 미끄러진 모스가 바닥에 머리를 콩 박았다. 그러나 머리를 박은 잔고통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남자가 너무 유심히, 마치 새로운 것을 발견한 게 신기하다는 양 모스의 것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모스는 너무 부끄러워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 하나하나 전부 다 빨개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툭, 남자가 돌연 모스의 성기를 손끝으로 건드렸다.
모스가 제대로 소리도 못 내고 몸을 바르작거렸다.
그러나 남자는 그것만으로 멈추지 않고, 모스의 것을 움켜쥐었다. 손이 어찌나 큰지, 순식간에 모스의 것이 빨려 들어가듯 남자의 손안에 쥐어졌다.
그리고, 남자가 손을 움직였다. 탁탁, 아까 모스의 낯을 뜨겁게 만들었던 살 소리가 들리며 유독 거친 남자의 손안에서 모스의 것이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으, 으.”
모스는 여전히 얼굴을 가린 상태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남자가 제 것을 움켜쥔, 따뜻한 온기가 제 성기에 닿은 순간부터 눈가에 피가 몰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만, 단 한 가지의 의문은 들었다.
여길 왜 만지는 걸까?
왜?
모스에게 제 몸에 달린 성기란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그는 대체로 성욕이 없었고, 설령 약간의 욕구가 생기더라도 딱히 욕정할 대상이 없으니 금방 사그라들기 일쑤였고, 무엇보다 뭘 어찌 쓰는지 지식만 있을 뿐 방법은 잘 몰랐던 탓이다.
“서네.”
하지만 남자는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잘 알고 있는 거 같았다.
그는 작게 난 구멍을 살살 찌르기도 하고, 기둥 전부를 힘을 줘서 터트릴 것처럼 움켜쥐다가도 요사스레 손끝으로 긁으며 아래 달린 고환을 주물럭거렸다.
“하, 하지 마아.”
느낌이 이상했다.
모스가 꼬물거리며 남자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남자는 오히려 더 몸을 붙일 뿐이었다.
그는 신기하다는 듯 제 손에 쥐어진 모스의 성기를 이리 쥐어 보고, 저리 움직여 보다 아까 모스의 나신을 보았을 때를 떠올렸다.
훤히 드러난 아래, 겉으로 드러나는 피부보다 더 새하얀 성기, 새빨개진 얼굴, 마른 몸. 그래, 이 모든 게 문제였다.
아까 벌거벗은 모스의 몸을 보고 남자는 명백하게 욕정을 느꼈다.
새하얀 허벅지 사이에 붉은 물이 채 빠지지 않은 이 성기가, 가슴팍의 유두의 색이 마치 열매의 색처럼 시뻘겋다 못해 즙이 나올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도 계속 머릿속에 남았다.
그리고 그건 남자의 성기를 잔뜩 발기하게 만들었다.
해소하고 싶은 욕구에 고개를 쳐드는 성기를 흔드는데, 뭔가가 부족했다. 뭔가 확실하게 부족했는데, 그게 뭔지를 몰라 의문스러움에 인상을 잔뜩 구기던 그때 누군가 엿보고 있는 인기척을 눈치챘다.
그리고 인기척의 주인이 모스인 것을 확인한 순간, 사정했다.
사정은 길었다.
희뿌연 액체가 손안에 뚝뚝 떨어지고 나서도, 남자는 어느새 도망친 모스의 뒷모습을, 그의 나신을 곧바로 떠올렸고 떠올리자마자 언제 사정했냐는 듯 다시 성기가 발기했다.
두 번째의 발기에 남자는 확실하게 깨달았다.
자위를 해도 이는 갈증을, 이 욕구를 모스만이 풀어 줄 수 있다는 것을.
남자는 지금도 제 다리 사이에서 성기를 빳빳하게 세우고 허리를 배배 꼬는 모스를 빤히 바라보다 고개를 숙여 사정없이 가슴을 깨물었다. 그리고 제 성기를 꺼냈다. 퉁, 이미 잔뜩 발기해 쿠퍼액을 질질 흘리고 있는 성기를 꺼내 약속이라도 한 양 모스의 성기의 옆에 가져다 대었다.
“으, 응?”
몸을 배배 꼬던 모스는 저 미끈하고도 뜨거운 게 제 옆에 달라붙자 저도 모르게 힐끗 시선을 내려 아래를 보다 경악했다.
모스는 제 성기가 인간의 표준이라고 생각해 그리 작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남자의 성기 옆에 있으니 어린아이의 것만큼 작아 보였다.
하지만 생각도 잠시, 이내 모스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신음이었다.
“아, 아으으.”
남자가 모스의 성기와 자신의 성기를 손에 쥐고 흔들었다.
살갗이 치대는 소리, 성기 끝에 아롱아롱 매달린 묽은 액들이 끝내 뚝뚝 선단을 타고 흘러내리고, 그 액들은 두 사람의 성기를 번들거리게 만들다.
모스가 저도 모르게 허리를 위로 쑥 올렸다. 이어 잔뜩 발가락에 힘을 주었고, 벌린 잇새로는 타액을 줄줄 흘렸다.
“하, 아, 아.”
동시에 바르르 떠는 두 성기, 남자가 이를 악물고 사정하자마자 곧바로 모스도 사정했다.
모스의 안에서 나온 액은 어찌나 진하고 양이 많은지 모스는 괴물인지라 소변을 본 적이 없지만, 마치 소변을 보듯 줄줄 새 나오는 소름 끼치는 느낌에 바르르 떨었다.
‘사정.’
처음 느끼는 쾌락에 모스의 눈이 멍해졌다.
방금 자신은 사정했다. 머릿속에 남아 있는 지식으로만 알고 있었던 생식 행위의 일종, 자신에게 결코 벌어질 거라고 여기지 않았던 것.
기분이 좋은 듯하면서도, 뒤이어 부끄러움이 강하게 밀려와 모스가 다리 사이를 오므리려고 했지만 남자는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 거, 거, 거길 왜.”
게다가 이상한 짓도 함께 했다.
남자는 모스와 제가 뱉어 낸 정액을 손으로 싹싹 긁어모으더니, 돌연 모스의 아래 구멍에 손가락을 밀어 넣는 것이다.
하나의 손가락은 두 개가 되었고, 세 개가 되었다. 손가락의 개수가 늘어날 때마다 모스의 비명은 더욱 커졌다.
그리고 세 개의 손가락이 안에서 빙글 돌던 그때.
“으응.”
이런 소리가 왜…! 모스는 입을 틀어막았다.
동시에 남자의 눈썹 한쪽이 쭉 올라가더니, 이내 그의 눈가에 장난스러움에 서렸다. 그러곤 사정없이 방금 그 부분을 꾹꾹 눌러 대기 시작했다.
“흐으, 윽, 응.”
남자가 꾹꾹 누를 때마다 모스는 눈앞에서 별이 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고통에 축 가라앉은 성기가 누가 끌어당기기라도 하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스륵, 안을 미친 듯이 헤집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모스는 성기를 꼿꼿하게 세운 상태로, 혼란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다가 뒤로 엉거주춤 물러났다.
도망쳐야 해.
쾌락 속에 휘저어지던 머릿속이 잠시 잠잠해진 사이, 생존 욕구가 고개를 쳐들었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음을 알면서도 게걸음으로 엉금엉금 옆으로 물러서려고 했지만, 모스의 움직임은 이내 불필요해졌다.
“흐윽?!”
퍽, 남자가 순식간에 모스를 끌어 내려 그 안에 제 성기를 파묻었다. 물론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모스의 구멍은 아주 작았지만, 남자의 것은 아주 컸기에.
“아, 아악!”
생살이 찢기는 것만 같았다.
모스가 고통에 발버둥을 치고, 남자 또한 제 것을 잘 받아먹지 못하는 구멍을 보고 원망스러운 듯 인상을 구겼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꾸욱, 꾹. 어떻게든 뿌리까지 밀어 넣겠다는 강한 의지에 감응이라도 하듯 모스의 구멍이 꾸역꾸역 열려 이내 남자의 성기가 끝까지 삼켜질 수 있었다.
“좁군.”
또륵, 남자의 이마에 땀방울이 모스의 배 위로 떨어졌다.
아래가 잘릴 것만 같은 느낌에 인상이 절로 구겨졌지만, 제 것을 박은 채로 울먹이는 모스를 본 순간 엄청난 만족감이 그를 휘감았다.
“아! 아파, 아파!”
커다란 나무 장작을 제 안에 욱여넣는 느낌이 드니, 모스는 아프다며 비명을 질렀지만 이내 남자가 제 말을 전혀 들어 줄 기미가 보이지 않자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파, 너무 아파. 너무 아파.
아프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모스의 손을 억지로 떼어 내자, 눈물이 그렁그렁 흘러내려 남자는 게걸스레 그 눈물을 제 혀로 핥아 냈다.
“놔, 놔아……줘.”
비명을 어찌나 많이 질렀는지 그의 목소리가 어느덧 쉬어 있었다.
울먹임을 감추지 못하고 남자의 손에 손을 붙들린 채로 모스가 놔 달라고 애원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남자에게 자극이 된 모양이다.
“우, 움직이지, 흐으!”
움직이지 말아 달라고, 그런 애원임을 분명히 알았을 텐데도 남자는 천천히 허리 짓을 시작했다.
남자가 헛웃음을 지었다. 내벽이 촘촘하게 그의 성기를 옥죄며 달라붙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모스와 자신의 접합부를 빤히 바라보았다. 꽉 다물린 구멍이 분홍빛으로 오물오물 제 것을 삼키고 있었다.
도로 모스를 보니 남자의 것을 놔주지 않을 것처럼 꽉 다물린 아래와는 달리, 모스는 울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남자는 다시 모스의 눈물을 핥았다.
달다. 마치 생명수처럼 모스의 눈물을 핥고, 뺨을 깨물고, 턱을 깨물고, 목에 이르러서는 목울대를 빨았다.
“놔…….”
모스는 남자를 밀어 냈지만, 남자가 자신을 놔주지 않을 것임을 아는 것인지 아까보다는 현저히 느려진 움직임이다.
남자는 문득 충동이 들었다. 이대로 허리를 움직여도 쾌감이 충족이 될 것임은 알지만, 다른 어떠한 것을 보고 싶었다. 그게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다는 듯 살짝 구겨진 미간, 하지만 모르겠다는 생각과는 달리 몸은 남자가 보고 싶은 게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고 있는 듯했다.
“흣!”
남자의 성기 끝이 꿀렁이는 내벽을 휘감고 아까 모스가 느꼈던 부분을 정확하게 찔렀다.
그러자 모스의 입에서 고통과는 약간 궤를 달리하는 쾌감의 신음이 새 나왔다.
남자의 눈이 흥미로운 듯 반짝였다. 제가 뱉은 신음이건만, 모스는 놀란 듯 움찔하며 남자의 얼굴을 보았고.
“아, 흐, 거긴, 하, 하…… 하지 마. 싫어.”
이내 그곳을 찌르자 또다시 신음이 나왔다.
모스는 생소한 쾌감이 이상한지 하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지만, 남자의 입가는 어느새 상향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퍽, 남자의 허리가 움직였다.
“거짓말.”
남자의 금안이 쾌락에 달뜬 모스를 알아챈 양 사르르 반쪽으로 접혔다.
처음으로 드러낸, 마치 천사와 같은 남자의 미소에 모스는 상황도 잊고 순간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흉악한 것이 제 안을 사정없이 헤집어 쾌락과 고통이 뒤섞인 신음을 내질렀다.
두 사람이 한 몸처럼 움직였다.
***
남자와 몸을 섞었다.
마치 짐승이 교미하듯, 모스는 남자의 아래에서 몇 번이고 으스러졌고, 남자는 모스가 으스러지든 말든 개의치 않는 듯 하나의 행동에만 몰두했다.
모스는 아팠다. 너무 아팠지만, 그만큼 쾌락이 뒤따랐다. 결국 나중에는 온몸이 정액으로 범벅이 된 채 남자에게 매달려, 몇 번이나 했는지 셀 수도 없을 만큼 절정에 이르렀다.
해가 지고, 별이 뜨고, 해가 지고…… 몇 번의 밤을 지새웠다.
잠에서 깨면 두 사람은 몸을 섞었다. 모스는 제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남자에 경악도 잠시, 같이 움직이지 않으면 고통이 크기에 남자의 성기에 맞춰 허리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신을 잃은 거 같다.
삶이 시작된 이후, 여태 모스는 태양에 녹아내리는 고통 때문에 쓰러졌던 것을 제외하고 이런 혼절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그는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괴물의 죽지 않는 몸을 갖고 있기에, 햇빛에 녹는 고통을 제외하고는 혼절을 할 일이 전혀 없었다.
“아.”
그러나 이번에는 쓰러져도 제대로 쓰러졌다. 아무래도 여러모로 충격과 고통이 큰 모양이었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제 온몸을 끌어안고 파고드는 남자의 옆모습을 보다 어느 순간 픽 의식이 날아갔고, 눈을 뜬 게 바로 지금이었다.
“…….”
모스는 평소와 달리 부드러운 촉감에 고개를 숙였다. 언제 이곳에 눕혀진 것인지, 눈을 뜬 곳은 늘 남자가 잠들던 늑대 가죽 위였고, 커다란 모포 같은 것을 덮고 있었다.
모스가 눈을 깜빡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 몸처럼 움직이던 남자의 자취는 보이지 않았다.
또 모스의 몸은 벌거벗고 있지만 너무나도 깨끗했고, 몸에서는 피 냄새가 나지 않았다.
‘꿈, 이었나.’
문득 모스는 꿈인가를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는 괴물이기에 꿈을 꾸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꿈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이 자리가 깨끗하다. 피 냄새도, 정액 냄새도 나지 않는 보금자리.
모스가 혼란스러워하며 멍하니 허공을 보던 그때, 끼이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
남자였다.
움찔, 모스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며 덮고 있던 모포를 제 몸에 돌돌 말고 남자를 경계하듯 보았다. 천 틈으로는 해가 들어오지 않았다. 밤이었다.
남자는 들어오자마자 모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조금 놀란 듯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손에 들고 있는 것들을 보금자리 구석에 널기 시작했다.
무엇을 널고 있는 거지, 모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남자의 손끝을 보다가 이내 기겁했다.
남자가 널고 있는 옷은 그날, 피범벅이 된 모스의 옷이었다. 분명 새 옷이었는데 남자의 손에 쥐어진 옷들은 죄다 물에 푹 젖어 있었다.
역시 꿈이 아니었다며, 모스가 얼어붙었다.
남자의 아래에서 짐승처럼 다리를 벌리고, 남자가 우악스레 제 안을 파고들던 감각이 돌연 선명해진 탓에 몸이 떨렸다.
그리고 남자는 옷을 다 널고, 벌벌 떠는 모스를 빤히 바라보다 이내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또 하려고?
비록 몸이 회복되었다고 해도 모스는 아직 정신적인 충격이 가시질 않았다.
지금도 봐라, 남자가 다가오니, 마치 마중이라도 하듯 다리가 벌어질 거 같았다.
쾌락과 고통이 함께했던 밤일을 또 한다고 생각하니 모스의 얼굴이 혼절할 것처럼 새하얗다 못해 창백해진 그때.
툭.
질끈 눈을 내리깐 모스의 앞에 커다란 열매와 작은 열매 여러 개가 탈탈탈 떨어졌다. 모포에 작은 몸을 잔뜩 파묻은 채로 귀를 막고, 벌벌 떨던 모스의 떨림이 순간 뚝 멈추었다.
남자는 모스에게 열매를 주려고 한 게 다인 듯, 이내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손을 털고는 모스와 마주 보고 누웠다.
“…….”
모스는 멀뚱멀뚱 제 발치에 굴러다니는 열매를 보다가 남자를 힐끔 보았다.
남자는 유독 뜨거운 편이었다. 체온도, 손도, 모든 게. 바짝 붙은 남자의 몸에서 나오는 뜨끈한 열에 모스의 발끝이 따뜻해졌다.
“…어, 어어…….”
남자의 시선은 모스에게서 떼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모스가 어물거리다가 남자를 힐끔 올려다보고 눈에 띄게 어깨를 파르르 떨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여태 혼자 지내느라 누군가에게 제대로 된 관심을 받아 본 적이 없는 모스가 남자의 진득한 시선을 낯설어하는 것은 당연했다.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걸까?
모스는 묻고 싶었다. 하지만 고개를 떨궈도 늪같이 따라붙는 그의 시선은 몹시 무서웠으며, 자꾸만 며칠 동안 남자를 받아 냈던 일이 떠올라 도무지 제대로 쳐다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남자의 시선을 피하다 못해 지하를 뚫고 갈 듯 고개를 푹 숙인 모스의 시선 끝에 남자가 밖에서 따 온 열매들이 들어왔다.
맞다, 그러고 보니 남자의 시선이 너무 진득해서 잠깐 잊었는데 남자가 이 열매들을 따 왔었다.
모스는 그제야 열매들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 열매들은 이 숲에서 쉬이 구할 수 있는 것이지만, 질은 아니었다. 알이 크고 굵고 색이 진했다. 벌레가 파먹은 흔적도 없는, 아마 높은 곳에서 땄을 법한 아주 좋은 품질로 인간들도 먹을 수 있는 열매였다.
모스는 남자의 채집 능력에 잠시 상황도 잊고 안도했다.
남자가 보금자리 내에서 뭘 먹는 걸 본 적이 없어 그간 내심 걱정이었는데, 이것을 보아하니 제 코도 못 씻는 주제에 남의 코를 씻겨 주겠다는 생각을 한 꼴이었다.
‘근데 이걸 왜?’
다만 의아한 점은 있었다. 모스는 제 앞에 놓인 열매들의 반들반들한 겉면을 보며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들었다가.
“미, 미… 미안해?”
곧바로 창백해진 얼굴로 사과를 했다.
모스는 도대체 자신이 왜 사과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남자가 너무나도 무섭게 쳐다보고 있었기에 저도 모르게 사과가 불쑥 튀어나왔다.
“…….”
남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 줬으면 좋겠건만, 말없이 모스를 쳐다보기만 하니, 모스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남자가 열매를 준 의도가 무엇일까.
여태 그토록 무관심으로 일관하다 밤을 보낸 이후, 왜 열매를 준 것일까. 모스의 눈이 당장이라도 열매를 터트릴 것처럼 한참을 노려보았고, 남자는 무표정한 낯으로 그런 모스에게 스스로 생각해 보라는 듯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
생각의 끝에서 정답을 알아낸 양 모스가 작게 입을 벌렸다.
비장한 얼굴로 주섬주섬 모포로 몸을 제대로 감싼 뒤 품에 열매 몇 개를 꼭 껴안고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모스가 열매를 꼭 끌어안고 일어날 때까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다…….”
오물오물, 모스의 입술이 움직이는 모양을 남자가 지그시 보았다.
“닦아 오, 올까?”
모스는 남자가 열매를 먹고 싶으니 자신 보고 먹을 준비를 하라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시간은 밤이니, 연못에 가서 후딱 닦아 오면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빠, 빨리 닦…… 콜록.”
떼어지지 않는 입을 간신히 떼어 내서 내뱉은 말은 더듬거렸고,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졌다.
몸은 이미 회복이 되고도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목은 회복이 덜 된 것인지. 잠겨 있는 목소리에 놀란 모스가 말을 하다가 헛기침을 했다.
“콜록, 콜록.”
설상가상으로 사레들린 것인지 기침이 계속 멈추지 않았다. 그는 혹여나 열매에 제 침이 튈까, 품 안의 열매를 모포 안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고 고개를 휙 돌려 기침을 했다.
“흐…, 흐음.”
겨우 기침을 멈춘 그때, 모스는 돌연 등 털이 비죽 곤두설 정도의 살기를 느꼈다.
설마 기침을 했다고 죽이려는 걸까? 등을 옹송그리고 위축된 모습으로 모스가 끼긱거리며 고개를 간신히 돌려 남자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다행히 남자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속 모를 표정을 하고 모스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모스는 제가 방금 느낀 묘한 기척이 착각이라는 것에 안도를 느끼고 아까보다는 훨씬 나아진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네가 먹, 먹기 좋게, 닦아 올게. 소, 손질도…….”
“손질?”
손질. 그 단어에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는 듯 남자의 한쪽 눈썹이 아주 비뚜름하게 올라갔지만, 품속 가득 끌어안고 있는 열매가 떨어지지 않게 하려는 데에 정신이 팔린 모스가 남자의 얼굴을 보았을 리가 없었다.
그는 목이 나간 자신과는 달리, 이전과 전혀 달라진 것 없이 낮고 아름다운 남자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귓불을 붉히다가 고개를 끄덕여 허둥지둥 말했다.
“응, 먹기 좋게, 내, 내가 연못에서 씻어, 올…….”
“이미 씻은 거다.”
“……그럼 잘라서, 올…….”
“그 작은 열매를?”
뭐 어떡하라는 걸까, 모스는 몹시 당황했다.
하기야, 모스는 남자가 몹시 깔끔한 편임을 떠올렸다. 그는 매일같이 물에 몸을 씻는 것도 모자라 모스까지 씻겨 주었으며, 심지어 정사 이후의 보금자리도 그가 전부 다 깨끗하게 정리했다.
그럼 이 열매들은 왜 준 걸까.
모스는 순간적으로 저 말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그러나 이내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는지 눈썹을 위로 쑥 올린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입을 열었다.
“요, 요리.”
인간들은 의식주를 중요하게 여기고 맛을 느끼는 것도 몹시 즐거워하니.
“내가 요리, 해?”
이번에야말로 틀림없다. 남자가 요리를 해 달라는 것이 분명하다 여기며 모스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그리 말했다.
물론 모스는 요리를 어떻게 하는지는 전혀 몰랐다.
머릿속 지식에서는 요리에 관한 내용은 없지만 대충 풀과 열매와 벌레를 넣어 으깨면 그게 요리가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은 있었다.
“…….”
남자는 그런 말을 하는 모스를 보고 이제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을 모스는 저 좋을 대로 해석했다.
“지금 하, 할게?”
가뜩이나 작은 몸인데, 어깨를 옹송그리니 더 작아 보였다. 모포 사이의 열매들이 혹여나 부서질라, 소중하게 껴안은 모스가 종종걸음으로 남자를 지나치려던 그때.
“윽!”
모스는 남자를 지나칠 수 없었다.
툭, 데구루루. 모스가 품에 안고 있던 열매들이 채 잡을 새도 없이 바닥을 나뒹굴고, 모스는 그대로 뒤로 자빠졌다.
“아파!”
맨바닥에 들이박은 뒷머리가 얼얼하다. 찡하고 올라오는 고통에 모스가 울먹이며 고개를 들다가, 이내 입 안으로 밀려오는 새콤한 즙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씹어.”
남자가 언제 열매를 낚아챈 것인지, 모스의 몸에 올라탄 채 입 안에 열매를 밀어 넣은 것이다.
깜짝 놀란 모스가 어물거리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열매를 씹지도 못한 채 멍하니 남자를 보았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스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고 파악도 되지 않았다. 왜 남자는 다짜고짜 씹으라고 이걸 입 안에 밀어 넣는 걸까.
묻고 싶은 말이 한가득이었지만, 목 안쪽으로 꿀렁꿀렁 열매의 과즙이 밀려와 저도 모르게 꿀꺽 소리를 내며 삼키자,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다른 열매를 또 밀어 넣었다.
“웁.”
모스는 남자에게 왜 이러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을 벌려 말을 내뱉었다가는 입 안의 붉은 액이 남자의 얼굴에 튈 것만 같아 입을 다물고 씹을 뿐이었다. 그동안 남자는 그새 바닥에 떨어진 열매들을 주워 와서 모스의 입 안에 열매 두어 개를 더 밀어 넣었다.
남자는 모스가 열매를 삼키면 새로 넣어 주고, 또 대충 씹었다 싶으면 새것을 넣어 주었다. 심지어 나중에는 모스가 느리게 씹자 알아서 먹으라는 듯 열매를 계속 밀어 넣었다.
혹시 이것도 몸을 섞는 것과 관련된 것일까?
대체 이 행위의 의미란 뭘까?
모스가 알 수 없다는 멍한 얼굴로 남자의 얼굴을 보던 그때, 모스의 머릿속에 돌연 제짝을 끼고 살던 짐승 무리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런 비슷한 일을 본 적이 있었다.
눈이 많이 오던 날이었다.
새끼를 가진 듯 배가 불룩하게 나온 암컷의 옆에 수컷이 먹이를 쉴 새 없이 날랐는데, 암컷은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배 속의 새끼 때문인지 제대로 고개도 못 들 정도로 지쳐 보였다.
그때 수컷이 음식을 입에 물어 하나하나 암컷에게 먹였다. 긴 시간 동안, 계속 먹을 것을 나르고 먹였다. 아마 암컷의 배 속에 있을 새끼 때문일 것이다.
“씹어.”
그리고 모스는 문득 제 입 안에 열매를 억센 힘으로 넣어 주는 남자의 얼굴을 보면서 그 수컷의 얼굴을 떠올렸다.
하기야 요 며칠 둘은 생식 활동을 쉼 없이 하지 않았는가. 속으로 밀려 들어오는 뜨거운 남자의 씨들을 받아먹었던 기억이 방금 전의 일처럼 생생해 얼굴이 절로 붉어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모스의 표정은 마냥 밝지 않았다.
그는 암컷이 아니었다. 임신이라는 것이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지식 상으로는 완벽히 길쭉한 성기가 달린 수컷 개체였다.
“……어으.”
모스가 생각을 하느라, 씹지 않고 입을 어정쩡하게 벌린 채 가만히 있는 동안 남자는 꾸준히 모스의 입 안으로 열매를 밀어 넣었고, 그 결과 모스는 다람쥐처럼 양 볼이 볼록해진 채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미, 미안해.”
그리고 어눌한 발음으로 올망올망 남자를 올려다보며, 당장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만 같은 얼굴을 한 채 사과했다.
열매를 하나 더 밀어 넣으려고 하던 남자의 손이 멈칫했다.
그는 대체 모스가 왜 사과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과 또 시작이냐는 듯한 표정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나…… 나는.”
모스가 손을 더듬어 제 배를 문지르며, 정말 미안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다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새, 새끼가, 없어.”
실은, 남자의 저러한 챙김이 다정했기에 모른 척 계속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모스는 남자가 지금은 저럴지라도 원체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타고나기를 무섭게 타고난 사람이라는 말이 적절할 정도로, 보고 있으면 위축되고 눈치가 절로 보이게 만드는 사람.
“나는 수, 수컷이야.”
후환이 두려웠다.
나중에 새끼가 없는데 왜 아무 말 안 했냐고 난리 칠 남자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땀구멍이 열려 땀이 줄줄 흐를 것만 같았다.
괴물이었으며, 새끼도 못 가지는 몸인 것을 나중에 알게 된 남자가 얼마나 배신감에 치를 떨겠는가. 틀림없이 사지가 잘려 예쁘게 장식될 것이다.
“새끼는 못, 못 봐.”
그러니 새끼를 가질 수 없다며 모스가 질끈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벌을 받을 것이라면 미리 받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에 기인해서 나온 자백이었다.
‘죽이려나.’
눈을 감은지라 남자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남자의 시선이 모스의 머리를 반으로 가를 듯 집요해서 모스는 자신의 머리통이 뚫릴 것만 같았다.
역시 화가 많이 났나 보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으나, 막상 상황이 닥쳐오니 남자의 시선은 생각보다도 더 집요하고 무서웠다.
하긴 생식 활동은 인간이고, 짐승이고 하나같이 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생식 활동에 하자가 있으면 짐승 무리에서도 배척당하는데, 인간이라고 다를까.
분명 허투루 씨를 낭비한 것에 대해서 나무랄 것이라 생각한 모스가 눈을 질끈 감고 바닥을 보던 그때.
“하.”
남자가 한숨 같은 웃음을 내뱉었다. 바닥을 쳐다도 보지 못하고 눈을 꾹 감고 있던 모스는 몇 초간 제 귀를 의심하다가 다시 남자가 웃음을 내뱉자 잘못 들은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남자가 웃었다?
모스의 눈이 반짝 떠졌다.
모스는 감정을 잘 읽어 내지 못한다. 그가 말을 섞어 본 인간이라고는 이 남자가 다였고, 인간들의 집단을 정말 멀찍이서 구경만 했을 뿐이기에 그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은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이가 없군.”
남자가 웃고 있었다.
어느새 고개를 든 모스의 앞에서 남자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틀어 올리고 있었다.
모스는 저 얼굴을 잘 알았다. 남자가 자신을 괴롭힐 때도 보았고, 무서울 때도 저 얼굴을 본 적 있다. 하지만.
“유혹도 가지가지…….”
지금은 무섭지 않았다.
남자가 뭐라 중얼거리는데, 평소 같으면 그 중얼거림의 뜻이 무엇인지, 자신을 어떻게 괴롭히려고 하는 건지 엄청나게 눈치 보고 고민했을 텐데 이상하게 지금은 겁이 안 났다.
남자가 자신을 전혀 해칠 거 같지 않은 느낌이 났기 때문이다.
모스는 반으로 곱게 접힌 금안을 그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정말 느릿하게 깜빡이며 보았다.
“씨가 부족하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 건가.”
남자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멍하니 자신을 올려다보는 모스를 향해 남자의 손이 움직였다. 그는 열매로 볼록해진 모스의 뺨을 꾹꾹 눌렀고, 멍하니 남자를 보느라 정신이 팔린 바람에 모스의 볼 속에 있던 열매가 투둑 소리를 내며 터졌다.
모스의 입 안에 고인 붉은 즙이 뺨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아.”
그제야 정신이 든 듯, 모스의 눈이 커졌지만 이미 남자의 입은 모스의 입가에 닿아 있었다. 그는 모스가 흘린 열매의 즙을 하나하나 빨아들였다.
말캉한 모스의 뺨이 남자의 입술에 가벼이 빨려 들어갔다 나왔다. 그 입맞춤 같은 행동은 뺨에서 멈추지 않고 턱 끝, 턱 아래, 목…… 점점 아래를 향했다.
“으응.”
남자의 입술이 목으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야무지게 움켜쥔 모스의 양 주먹에 더더욱 힘이 들어갔다.
모스는 이제 이 행위에 담겨 있는 남자의 의도, 욕망을 모르지 않았다. 아마 지금 허벅지를 쿡쿡 찌르는 그것은 필시 발정한 남자의 것이다. 그리고 그건….
‘아니야.’
왜지? 상상만으로도 몸이 절로 꼬인다. 모스가 배 속에 피어오르는 묘한 열기와 당황스러움을 티 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꾹 다물고, 남자의 욕정을 모르는 척했다.
그때, 남자가 모스의 쇄골 아래 부근에서 나른한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새끼가 가지고 싶다고?”
모스는 당황해서 순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렇게 말한 적 없다고 제 몸을 걸고 맹세할 수 있었다.
그저 새끼를 잉태할 수 없는 몸이라고 말해 준 것뿐인데, 어찌 해석이 저리된 것인지. 모스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려고 했으나, 이미 남자는 모스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감히.”
그 ‘감히’라는 두 글자는 모스에게 어찌 자신을 씨를 뿌리는 종마 취급하냐는 듯한 말투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또는 자신과 같은 사람의 씨를 어찌 모스같이 천한 이가 받아먹을 생각을 하냐는 듯 탓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탓하는 말투와는 달리, 남자는 어째서인지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모스는 혼란스러웠다.
말만 두고 보자면 정말 화난 게 맞는데, 표정이나 목소리는 그가 들었던 남자의 목소리 중 가장 귀를 간지럽히는 나긋한 종류의 것이었다.
“그럼 씨를 더 받아먹어.”
명백한 욕정. 그것도 방금 전처럼 넘길 수 있을 정도의 욕정이 아닌, 차원이 다른 정도의 묵직한 욕정이 내리꽂혔다.
어느새 짐승처럼 제 몸을 덮치듯 짓누르는 커다란 남자의 아래서, 이리저리 뻗친 해초 같은 머리카락 틈으로 이끼색 눈동자가 잘잘 떨리며 남자를 응시했다.
“나는 수컷, 이라고 분명, 분명…….”
슬금슬금, 모스가 남자의 아래에서 빠져나가려는 듯 바닥을 기려고 했으나.
“그래.”
“……흣.”
주르륵, 남자는 모스가 제 아래서 나갈 궁리를 한다는 것을 빠르게 눈치채고 모스의 허리를 잡아 쭉 아래로 끌었다.
늑대 가죽과 함께 남자의 아래로 온전히 딸려 온 모스의 얼굴을 본 남자의 눈이 가라앉으며 모스는 순식간에 발가벗겨졌다.
“어, 어.”
남자는 손이 참 빨랐다. 눈 깜빡할 사이, 모스의 모포를 벗겼을 뿐만 아니라 어느새 바위를 갈라놓은 것만 같은 자신의 단단한 육체도 드러내고 있었다.
‘천천히’라는 단어는 남자랑 어울리지 않는 거 같았다. 짐승이 달려들 듯,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빠르게 모스에게 달려드는 남자.
“네 뜻대로.”
이 땅에 여름은 오지 않지만, 그러기에 여름을 겪어 본 적이 없는 모스였지만 남자가 여름임은 알 수 있었다.
모스는 움직이는 남자의 목에 팔을 감고, 습관처럼 입을 벌렸다.
뜨거운 살덩이가 그의 혀를 감고, 이어 주체할 수 없이 신음이 겹쳐졌다.
그는 남자의 아래에서 생명줄 움켜쥐듯 남자의 등을 긁었다. 여태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묘한 만족감이 모스의 배 속을 긁었다.
이어지는 쾌락이 너무 강했던 탓일까.
모스는 계절이란 바뀌는 것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
단조로웠던 모스의 하루는 많이 바뀌었다.
모스는 바빴다.
“그, 그만.”
지독할 만큼.
남자와 모스는 이제 막 성에 눈을 뜬 이들처럼 몸을 처음 섞은 이후, 낮이고 밤이고 숲을 수색하고 남은 시간 대부분을 집요할 정도로 몸을 섞으며 보냈다.
이전에는 숲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면,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남자가 보금자리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 갔다.
“더 이상은 아, 안 나와.”
모스야 죽을 맛이었다.
괴물이라 이 정도로 버틸 수 있는 거지, 괴물이 아니었다면 복상사로 죽어도 진즉 죽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남자는 인간이되 인간의 것이 아닌 성욕과 몸을 갖고 있었다.
남자는 여간 집요한 것이 아니었다. 몸을 섞어도, 섞어도 욕정했다.
모스는 제 안에서 방망이질하는 남자의 것도, 눈앞을 희게 만드는 쾌락도 영 익숙지 않아 종종 발버둥을 치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앞으로 도망치듯 엉금엉금 기어가다 쭉 미끄러져 내려오면 더 깊게 들어온다. 하도 그 상황을 반복하다 보니, 관계를 맺을 때 말을 거의 하지 않는 남자가 모스에게 이리 말한 적도 있었다.
-학습 능력이 없는 건가?
부끄러웠다. 얼굴이 틀림없이 새빨개졌을 것이다. 남자의 말을 들은 이후, 모스가 더 이상 정사를 나눌 때 도망치듯 앞으로 기어가지 않고 잠자코 가만히 있었더니.
-하, 학습 능력이 없다고 그랬으면, 서…… 아흑.
대체 무슨 일인지 남자는 더 흥분해 모스는 그날 또 혼절했다.
차라리 남자가 흥분하기 전의 전조를 알고 피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남자는 불이 언제 붙는지 차마 눈치챌 겨를 없이 모든 것이 ‘갑자기’였다.
보금자리에는 부끄러운 냄새와 피 냄새가 가실 기미가 없었고, 옷을 입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정액 범벅이나 피범벅이 되는 바람에 근래 모스는 옷을 입는 게 어색할 지경이었다.
남자는 시도 때도 없이 발기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모스의 목은 덜 물어뜯었지만, 종종 뜬금없는 부분을 물어뜯었다.
가령 손가락이나 발가락.
마치 하나를 잘라서 씹어 먹고 싶다는 표정으로 깨무는데, 한 번은 살점이 너덜해질 정도로 깨문 적이 있어 모스는 자리에서 엉엉 울었다.
물론 남자는 모스가 우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가 엉엉 울어 새빨개진 얼굴을 하면, 그 얼굴에 제 중심을 비벼 대기 바빴다. 참으로 잔인하다고 모스는 생각했지만, 동시에 찜찜한 점도 있었다.
‘왜 아무 말도 안 하지?’
모스의 몸이 비약적으로 빠른 회복을 한다는 것을 매일같이 몸을 섞는 남자는 분명히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입 밖으로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정말 아무 말도.
오히려 모스를 새끼라도 가진 암컷인 양 살뜰하게 보살피기까지 하니, 눈치를 하루 종일 보다가도 남자가 열매를 따 오면 모스는 입꼬리를 저도 모르게 실룩였다.
“고, 고, 고마워.”
몸을 섞은 다음 날, 오늘도 어김없이 남자가 열매를 가득 가져왔다.
처음에는 이 열매를 받는 게 너무 부담스럽고, 마치 새끼라도 낳아 줘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이 들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먹어.”
“으응.”
남자는 모스에게 열매를 먹이는 것을 좋아하는 건지, 뭔지 아무튼 모스가 열매를 먹기를 바랐고, 남자가 원하는 일이면 모스는 못 할 것이 없었다.
모스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그란 이끼색 눈으로 힐끔힐끔 남자를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파르르 떨며 고개를 푹 숙였다.
모스는 그가 새끼를 못 가지는 것을 앎에도 이리 보살펴 주는 이유를 자신을 그의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 여겼다. 이렇게 먹이를 챙겨 주는 행위는 가족 간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니까.
“열인가.”
고개를 끄덕이며 열매를 입 안에 밀어 넣고 꼭꼭 씹던 모스가 제 이마에 닿는 차가운 손에 흠칫 놀랐다.
“으, 응?”
새빨개진 얼굴의 모스를 보고 남자는 착각한 듯했다. 그는 모스의 이마와 목덜미를 더듬거리다 손을 뺐다.
누군가에게 챙김을 받은 적이 없었던 삶이었다. 이런 챙김이 너무 낯설고 어색하지만, 속이 간지러워 모스는 고개를 바닥으로 처박고 허둥지둥 다음 열매를 입에 밀어 넣었다.
“…….”
남자는 이상한 습관이 하나 있었다.
모스에게 열매를 주면, 모스가 열매를 먹는 것을 확인이라도 하듯 빤히 쳐다보다가 어느 정도 먹으면 되었다는 듯이 자리를 비키는 것이다.
모스는 남자와 조금이라도 더 붙어 있고 싶었고, 남자의 시선이 제게 가능한 오래 머무르길 바랐다. 이전보다 남자가 보금자리에 머무는 시간은 월등히 늘었지만, 그래도 더 함께 오래 있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한입에 털어 넣을 수 있는 열매도 부러 잘근잘근 흔적조차 남지 않을 때까지 씹어 느린 식사를 했다.
씹고 힐끔 보고, 씹고 힐끔 보고, 삼키고 힐끔 보고, 열매를 집으면서 힐끔 보고.
“…….”
모스의 부산스러운 시선의 움직임에도 남자는 딱 그 자리에 멈추어 모스를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 별다른 사족을 붙이지 않았다.
한참을 입에 열매를 넣고 씹던 모스는, 얼마 남지 않은 열매를 손으로 선뜻 잡지 않고 잠시 짧게 망설였다.
‘먹으면 갈 텐데.’
가면 아쉬운데.
머뭇거리던 손끝, 이내 망설이던 모스가 남자의 눈치를 살피며 열매를 잡은 그때.
“으, 응?”
모스는 순간 상황도 잊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번에 잡은 열매에는 물기가 유독 많이 맺혀 있었는데 그 탓일까. 열매의 표면에 꽃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꽃.
모스는 저도 모르게 그 꽃을 붙들고, 예전에 남자가 의식을 잃고 누워 있을 때 그 옆을 꽃으로 예쁘게 장식하려 했던 날을 떠올렸다.
처음 남자를 만났을 때.
단조로웠던 모스의 일상에 미끄러지듯 나타난 남자의 등장은 등장만으로도 너무 충격적이었다.
남자가 눈을 뜬 모습을 상상하다 보면, 남자의 옆을 꽃으로 장식하다 보면, 남자에게 조잘조잘 떠들다 보면 하루가 놀랄 만큼 빠르게 흘러가 신기했었다.
‘그때 눈을 감고 있었을 때는 이렇게 야만적이지 않았는데.’
물론 모스는 남자가 눈을 뜨면 자신을 보고 겁먹고 도망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저런 성격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눈을 뜨자마자 제 목을 조르다니. 생존 본능이 여간내기의 것이 아니었다.
‘몸을 섞을 줄도 몰랐는데.’
또한 정말로, 제가 좋아하는 이 보금자리를 걸고, 맹세코 모스는 남자와 지금과 같은 관계가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바라지도 않았다.
이렇게 생식 활동을 하루가 멀다 하고 할 줄은 몰랐는데… 낯 뜨거운 생각에 유심히 꽃을 보던 모스가 얼굴을 홧홧하게 불태웠다.
그리고, 그런 모스를 말없이 바라보던 이가 있었으니.
“꽃을 좋아하나?”
“……어, 응?”
남자가 갑작스레 모스에게 물었다. 놀란 모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파르르 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의도일까, 그는 남자가 왜 저런 말을 했는지 의아했으나 이내 무작정 끄덕였다.
남자는 끄덕이는 모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표정에 변화는 없었지만, 조금 놀란 기색이 묻어 있었다.
하기야 모스는 이곳에서 남자와 지내면서 무엇이 좋다는 표현을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먹어.”
그러나 남자의 놀란 기색은 모스가 남자를 힐끔 도로 볼 때 즈음엔 싹 지워져 있었다. 먹으라며 남은 열매 두 개를 턱짓으로 가리키니, 모스는 고개를 다시 끄덕이며 열매를 들어 올렸다.
“아…….”
그리고 남자는 딱 거기까지 볼 생각이었던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스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고 남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망설임이 없는 걸음으로 문으로 향하는 남자는, 이제 나가서 환각초를 헤치고 나갈 길을 찾을 것이다.
같이 있고 싶었지만, 하필 지금은 벌건 낮이기에 모스가 나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남자는 모스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문으로 향했다. 이어 살짝 드러난 햇빛 사이로 남자가 걸어 나갔고, 모스는 또다시 홀로 이 보금자리에 남겨졌다.
“…….”
남자를 의식해 입가로 가져다 대었던 열매에 입술이 닿았다. 텅 빈 보금자리 한가운데에서 모스는 멍하니 문을 보았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익숙한 정적이었다.
빈집에 홀로 앉아 이렇게 해가 질 때까지 문을 바라보는 것은 모스에게 늘 있던 일 중에 하나였고, 너무나도 익숙한 일이었기에 아무런 감흥이 없어야 함이 맞았다. 한데.
‘왜 이러지.’
모스는 이상하다는 듯 제 몸을 끌어안고 눈을 깜빡였다. 더듬더듬 손끝을 더듬어 팔뚝을 쓸고, 정강이를 쓸어도 묘한 공허함이 그를 감쌌다.
이 공허함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잘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남자가 있을 때는 이 감정이 이렇게 고개를 들어 올리는 경우가 몇 없었는데, 남자가 나갈 길을 찾아 보금자리를 나서면, 정체 모를 공허함과 불안이 모스를 집어삼킬 듯 덩치를 키우는 것이다.
‘어차피…… 못 나가.’
번식력이 빠른 환각초로 둘러싸인 숲은 나가는 길이 없어 그토록 많은 인간들이 죽은 것이니, 더더욱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남자는 이곳에서 모스와 지내야 한다.
평생.
그 생각을 하면 목줄 풀린 짐승처럼 날뛰던 불안이 잠시 수그러드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남자가 멀쩡히 이 숲 안으로 들어왔던 날을 떠올리면 애써 잠재운 불안이 날뛰기 시작했다.
남자는 이미 한 번 이 숲을 죽지 않고 건너온 적이 있기에 나갈 확률도 충분히 있었다.
모스는 저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던 열매를 조금 세게 움켜쥐었다.
“아.”
너무 힘을 세게 준 탓일까, 아니면 열매가 물렀던 탓일까. 남자가 쥐여 준 열매가 터졌다.
방금 전까지 멍하니 문을 보던 모스의 표정이 딱 깨졌다. 그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고 허둥지둥 붉은 물이 배어든 제 손을 보곤 혀를 내어 손을 핥았다.
그러나 이미 열매의 과즙은 바닥으로 떨어져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어, 어떡해.”
모스는 제가 터트린 게 심장이라도 된 양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둥지둥 천을 가져와 열매를 조심히 감쌌다.
열매를 돌돌 감싼 모스는 마치 보물을 다루는 것처럼, 소중하게 품에 열매 두 개를 끌어안고 총총총 구석에 있는 상자로 향했다.
끼이익,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열리는 상자 속 보석함을 열자 남자 몰래 넣어 둔 열매 여러 개가 이미 반짝반짝 빛을 내며 놓여 있었다.
“아, 안녕. 잘 있었니.”
열매가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음에도 모스는 오늘 받은 두 개의 열매를 보석함 안에 “새로운 친구야.”라며 넣었다.
그런 뒤 모스는 열매를 하나하나 닦기 시작했다.
뽀득뽀득, 더 닦을 것이 없을 때까지 꼼꼼하게 열매들을 닦은 모스는 이내 보석함 속 열매들을 턱을 괴고 보았다.
남자가 가져온 열매들은 숲을 걷다 보면 발치에 치일 정도로 흔하게 보이는 열매였기에 얼핏 보아선 이 보석함 속 열매들 또한 이 숲에서는 별 가치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모스에게 흔한 열매를 왜 이리 보관하냐고 묻는다면 모스는 이 열매들이 다른 열매들과 얼마나 다르고, 얼마나 제게 특별한지 설명할 수 있었다.
“다르지. 다, 달라. 색깔은 주황, 색이 조, 조금 더 돌고. 이건 빨간데, 여기 세모 모, 모양이 있고. 이건 예, 예쁜데…….”
모스는 할 말이 많았다. 한참을 열매를 설명하던 모스의 얼굴이 푹 익은 사과처럼 붉게 변해 고개를 숙였다.
“서, 선물 받은 거야.”
남자가 따 온 열매들. 그가 모스를 위해서 따 온 열매들.
이곳에 있는, 몇 년여간 모았던 잡동사니를 다 뒤로 제쳐 두고 남자가 준 열매는 단연코 모스에게는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다.
누군가가 처음으로 그에게 준 것이니까.
너무나도 소중하고 소중해서 먹기도 아깝다. “선물.”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은 모스가 실실 웃으며 보석함을 닫고 뒤를 돌자마자 이내 깜짝 놀랐다.
“어, 어, 언제…….”
언제 왔어?
너무 놀라 말문이 막힌 모스가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귀가 엄청 예민한 편인데, 모스는 열매에 정신이 팔린 탓에 남자가 온 것을 전혀 몰랐다.
‘혹시 방금 봤나?’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여나 남자가 보석함에 있는 열매를 빼앗을까 봐 슬그머니 상자를 등 뒤에 감춘 모스가 힐끔힐끔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여전히 뜻 모를 표정을 하고 모스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일찍 왔네, 어디 갔었어? 밖은 어때? 왜 일찍 왔어?
모스는 남자에게 묻고 싶은 말이 머릿속에 주르륵 떠올랐지만, 이내 남자가 제게 다가오자 머릿속의 말들은 다 날아갔다. 코앞으로 다가온 남자가 불쑥 주먹을 내미는 것이다.
“히익…….”
때린다. 맞는다. 무섭다.
고통이란 익숙해지려고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라 모스가 눈을 질끈 감고 이어질 고통을 상상했다.
“……?”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았던 모스가 눈꼬리에 힘을 주며 실눈을 떴다.
코앞에 남자의 주먹이 있었다.
뭘까, 시간차 공격일까? 눈을 뜨면 때리겠다는?
모스가 처음 겪는 상황에 당황에서 굳은 그때, 돌연 남자가 꽉 쥔 주먹을 폈다. 남자의 손에서 와르르 무언가가 쏟아졌고, 그것을 본 모스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꽃?”
희고 작은 꽃들이었다. 지나치게 희어서 눈 속에 파묻히면 제대로 발견조차 하기 어려운 흰색의 꽃잎과 꽃들이 남자의 손안에서 빠져나와 후두둑 떨어졌다.
처음에는 이게 무엇인지 몰라 멍하니 있었는데, 모스는 이내 저도 모르게 손이 먼저 나갔다.
모스가 꽃잎과 꽃을 주워 제 손안을 빤히 보았다. 자세히 보니 아까 열매 겉면에 붙어 있던 흰색 꽃잎이었다.
인간에 관해 무지하더라도 꽃을 선물로 주는 연인은 가끔 봤었다.
으슥한 곳에서 둘이서 꽃을 들고 웃는 모습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부러웠던 거 같다.
“이, 이거 선…….”
모스가 설마 이게 선물이냐고, 그리 물으려고 하던 그때.
“……응?”
모스는 입을 살짝 벌린 상태로 멈추었다. 모스의 입 안에 남자가 꽃을 밀어 넣은 것이다.
졸지에 꽃을 물게 된 모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자를 보는데.
“이게 먹고 싶다기에.”
남자가 영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대체 저게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할 수 없어 꽃 하나를 입에 문 채 남자를 멍하니 보는데, 남자가 그런 모스를 빤히 보다가 말했다.
“넌 취향이 특이하군. 꽃을 먹는다니.”
……아닌데, 꽃 먹겠다는 말 한 적 없는데.
모스는 대체 어디서부터 오해를 한 것인지 몰라, 남자의 말을 정정할 수도 없었다.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도 모스는 결코 꽃을 먹는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러기에 꽃은 먹는 게 아니라고, 자신은 꽃을 먹는 걸 즐기지 않는다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이어지는 남자의 미소에 모스의 혀는 그대로 얼었다.
“꽃을 좋아하나?”
저 남자가 웃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응.”
모스는 얼빠진 표정을 하고, 고개를 저도 모르게 끄덕였다. 끄덕끄덕, 모스는 남자의 미소를 눈에 담으며 홀린 듯 말했다.
“조, 좋아해.”
아그작, 모스가 입 안의 꽃을 씹었다.
쓴 물이 혀에서 느껴졌지만 이게 대수일까. 아랑곳하지 않고 꾸역꾸역 씹는 모스의 목덜미가 새빨갰다.
그는 남자의 눈을 피해 제 소매 안으로 꽃잎 몇 개를 밀어 넣었다.
“조, 좋아해……, 좋아해.”
좋아한다는 말만 할 줄 아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을 반복하여 옹알거리는 모스의 얼굴을 빤히 보던 남자가 반달로 접은 눈을 폈다.
언제 웃었냐는 듯 도로 서늘한 인상으로 돌아온 남자가 꽃을 기계적으로 씹던 모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모스의 턱을 움켜쥔 채, 손끝으로 모스의 턱 끝을 두드렸다.
그러자 모스가 입술을 자연스레 벌리며 눈을 반쯤 감고, 남자의 손에 익숙한 듯 제 머리를 기댔다.
남자는 그 일련의 과정 동안 눈을 한 번도 깜빡이지 않고, 그저 모스의 모습을 눈에 담고 관찰하는 데에 바빠 보였다.
하, 짧게 헛웃음을 지은 남자의 속눈썹이 사락 움직였다. 눈을 감은 남자가 순식간에 모스의 턱을 당겨 입을 맞추었다. 입맞춤에 모스의 몸이 스르륵 뒤로 눕혀졌다.
씹던 꽃은 뺨을 타고 떨어져 바닥으로 향했고, 모스는 이제는 익숙하게 남자의 목에 팔을 감았다.
혀와 혀가 얽히며 질척한 소리가 났다. 아래에 단단한 것이 맞물리며 모스의 잇새에서 신음이 비죽 새 나올 무렵에서야 남자가 입을 떼어 냈다.
“써.”
고개를 든 남자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제 입가를 쓰다듬다가 모스에게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아까보다도 더 깊은 입맞춤이었다.
***
졸린 눈을 깜빡거리며 눈을 떴을 때, 모스의 코끝에는 밤의 향이 스쳤다.
“아.”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앉자, 부끄러운 감각이 아래에 스쳤다. 뭔가가 제 안에서 주르륵 빠져나가는 느낌에 모스가 입술을 달싹이다 모포를 손으로 꾸욱 움켜쥐었다.
인간이 아닌 몸은 재생력이 빨라 아프지는 않았지만 남자가 토해 낸 것들이 아래에 가득 차 있는 느낌이 문제였다.
여러 번 반복했기에 이제는 퍽 익숙해질 법 한데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새 남자는 모스가 입었던 옷을 빨았나 보다.
구석에 축축하게 젖은 채로 널려 있는 옷을 보던 모스가 제 머리맡에 놓인 열매들을 보고 볼을 실룩이다 푹 숙였다.
모스는 남자가 좋았다.
몸을 섞고 난 다음, 다정하게 한 모포를 덮고 자는 것도. 열매를 한껏 가져와 제가 배부를 때까지 먹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정액으로 얼룩진 옷을 빨아 구석에 널어 주는 것도.
모포를 만지작거리던 모스는 옆을 보았다.
남자가 없는 게 아쉬웠다. 남자가 잠자리 후에 자리를 비우는 것이야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그래도 아쉬운 기색을 지울 수는 없었다.
남자는 더러운 것을 유독 싫어한다.
그래서 이렇게 몸을 섞은 후에 남자는 모스를 새 옷으로 갈아입히거나, 아니면 옷을 벗겨 모포로 휘감아 두고는 했다.
오늘은 후자이기에, 벌거벗은 몸을 모포로 휘감은 모스가 천천히 움직여 문을 열었다.
바람이 선선하게 부는 언 땅이 보였다.
사시사철 추운 겨울인 이 대륙 위로는 잎사귀가 단단한 것만 제대로 자라났다. 그나마 환각초로 둘러싸인 이 숲은 다른 지역에 비해 따뜻한 편이라, 꽃도 피고 열매가 맺힌다. 하지만 그래도 언 땅인 것은 다름없었다.
모스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귓가에 들리는 환각초가 바람에 흔들려 살랑이는 소리, 물고기가 통통 연못의 수면 위로 튀는 소리, 그리고.
“…….”
남자의 소리.
어느새 모스는 남자가 있는 곳까지 가 있었다.
멀찍이서 남자가 서 있는 모습을 보던 모스는, 남자의 옆모습을 보았다.
가만히 서서 머리를 흩날리는 바람을 맞고 있는 남자는 달처럼 보이기도 했고, 해처럼 보이기도 했다.
무엇이 되었든 그는 그림자도 생기지 않을 것처럼 홀로 반짝반짝 빛났다.
반짝 빛나는 남자는 너무 아름다워서 넋을 놓고 보게 되는데, 문득 남자가 어딜 보는지 궁금했던 모스가 남자의 시선 끝을 무심코 쫓았다가 곧바로 후회했다.
남자가 보고 있던 곳은 환각초 너머에 있는 숲 밖이었다.
남자의 시선은 우직하게, 한 끗의 오차 없이 마을로 가는 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걸 지켜보던 모스는 입술을 깨물고 손을 움켜쥐었다. 당장이라도 남자가 저 환각초를 넘어 숲 밖으로 사라질 거 같았다.
네가 가면, 나는 혼자 남는데.
무섭다. 너무 무섭다. 남자가 없는 일상이 이제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상상만으로도 식은땀이 비 오듯 주룩주룩 흐르는 거 같고, 눈앞이 새까맣게 점멸하는 거 같다.
모스는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뛰다시피 뛰쳐나가 남자의 소매를 움켜쥐었다.
그의 옷을 꽉 움켜쥐었음에도, 남자는 처음부터 모스가 있었던 것을 아는 양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그는 그저 물끄러미 살랑살랑 바람에 흔들리는 환각초를 보기만 했다.
그러다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저긴 환각초 수가 적어.”
남자의 말대로 그가 바라보던 곳은 다른 부분에 비해 비교적 환각초의 수가 적었다.
당장이라도 남자가 저쪽을 향해 뛰어나갈까 봐, 숨이 멎을 듯 몰려오는 불안을 애써 누르며 모스가 그의 소매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하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모스가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을 기어코 입 밖으로 꺼내놓았다.
“저쪽으로는 나갈 수 있을 듯한데.”
남자의 말에 모스가 순간 말문을 잃은 듯 가만히 있다가,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나…, 나가고 싶어?”
그제야 남자는 모스를 향해 시선을 두었다.
남자는 별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가고 싶은 게 당연하지 않냐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이 숲에 어느 미련도 남아 있어 보이지 않아 보였다.
그리하여 충동이었다.
모스는 남자의 목을 끌어당겨 그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남자는 살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으나, 이내 익숙한 듯 입을 벌렸다.
“으응.”
모스의 입맞춤은 서툴기 그지없었다. 그간 몸을 많이 겹친 것이 무색하게도, 제가 먼저 입을 맞춘 적이 없었던 탓인지, 서툴기 짝이 없는 입맞춤이었다.
남자는 대충 장단이라도 맞춰 주듯 혀를 얽어 주다, 이내 모스가 헐떡이자 고개를 떼어 냈다. 그러자 모스는 남자가 입술을 떼어 내자, 매달리듯 다시 입맞춤을 했다.
어떠한 기교도 없는 입맞춤이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 없는 행위였다.
결국 대충 장단을 맞춰 주듯 혀를 섞던 남자는 인내를 다 했는지 모스의 머리를 붙잡고 모스의 예민한 점막을 훑으며 깊이 입을 맞추었다.
“흐.”
모스가 앓는 소리를 하자, 남자는 그게 시발점인 양 위에서 잡아먹듯 내리찍는 키스를 시작했다.
비처럼 위에서 아래로 쏟아지는 남자의 입맞춤에, 모스의 몸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남자는 익숙한 듯 모포 사이로 손을 넣어 모스의 등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이게, 아닌데.’
정신없이 혀를 섞던 모스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는 정신을 차린 얼굴로 남자를 가벼이 밀쳐 냈고, 남자도 순순히 물러났다.
“떠, 떠날 거야?”
모스는 자책했다. 대체 왜 여기서 말을 더듬는 걸까.
똑바로 말을 하고 싶은데, 떠나냐는 질문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제대로 입이 열리지 않아, 버벅거리며 말했다.
“…떠날, 거야…?”
“…….”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묘한 표정을 지으며 모스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침묵은 모스에게 독이었다.
그는 남자가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을 긍정이라 알아듣고, 새하얗게 질린 채 남자를 빤히 보다가 더듬으며 말했다.
“가면 아, 안 돼.”
“왜?”
남자는 곧바로 모스에게 되물었다. 그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숲 밖에서 온 자가 숲 밖으로 돌아간다는 게 무엇이 그리 이상하다고.
그러기에 모스는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그를 붙잡을 수 있을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인간과 접점이 하나도 없던 모스기에, 그런 그가 누군가를 붙잡고 매달리는 경험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뭐라도, 뭐라도 해야…….’
덜덜덜, 남자가 당장이라도 숲 밖을 향해 달려 나갈까 봐 두려웠다. 모스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런 모스를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던 그때.
모스가 돌연 몸을 낮추었다. 동시에.
“너는 못 가. 여기가 커, 커졌잖아.”
남자의 눈이 크게 떠졌다.
모스가 무릎을 꿇고, 방금의 입맞춤으로 성이 나기 시작한 남자의 중심 앞에 제 작은 머리통을 갖다 대더니, 이내 남자를 올려다보고는.
“내가…… 도, 도와줄까?”
대뜸 입을 벌렸다.
모스가 교태라도 부리듯, 발기한 남자의 중심, 옷 위로 뺨을 비비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모스의 행동에 남자는 눈살을 찌푸리곤 몸을 뒤로 물리려고 했으나, 모스는 아니었다.
그는 지금 남자를 놓치면 떠날 것처럼 느꼈는지 바지에서 그의 성기를 꺼냈다. 바지에서 퉁겨져 나온 남자의 검붉은 성기는 반쯤 발기가 되어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어.”
모스는 남자의 것이 수도 없이 제 안을 오갔지만 이렇게 코앞에서 보는 적은 처음이었다.
크다. 그것도 엄청나게 크다.
아직 바짝 서 있지는 않았지만, 반쯤 선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코끝을 스치는 남자의 짙은 체향, 이어 꼿꼿하게 발기한 성기의 표면에는 혈관이 울퉁불퉁하게 솟아 있었다. 거대한 성기를 코앞에 두고 있으니 묘한 긴장에 절로 입술이 마르는 느낌이 들며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걸…… 어떻게 삼켜?’
모르겠다. 왜 도와주겠다는 말을 한 것인지는.
다만 뭐든 해야만 할 거 같아 그런 것인데, 실전은 상상과는 몹시 달랐다.
모스는 도대체 이게 어떻게 제 안을 오갔던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커다란 크기에 도와주겠다는 말이 무색하게 바로 입 안에 넣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때.
“지금 뭐 하는 거지?”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모스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늘 평정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던 남자의 얼굴은 실금이라도 그어진 양 예민해 보였고, 평소와는 다르게 잔뜩 날이 서 보였다.
“이딴 장난은…….”
거칠게 모스의 머리를 붙잡았지만, 이미 늦었다. 모스가 남자의 것을 대뜸 입에 밀어 넣은 것이다.
“으, 읍.”
입 안에 다 넣지도 않았는데 그의 성기는 너무 굵고 길어서 모스가 말 한 마디도 못 할 정도로 틀어막아, 숨도 제대로 쉬기 버거웠다.
남자는 모스의 갑작스러운 행동이 이상하다고 여겼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모스의 머리통을 밀어 내려는 듯했지만, 모스는 끈질겼다. 그는 남자의 허벅지를 끌어안아 앞으로 매달리며 더 깊게 남자의 것을 입 안으로 넣으려고 했다.
“컥, 커억.”
모스는 아무런 기교 없이 무작정 입 안으로 남자의 것을 욱여넣었다.
남자는 미간을 좁힌 채, 모스가 새빨개진 얼굴로 헐떡이며 제 것을 입으로 받는 모습을 보았다.
남자의 잇새로 채 감추지 못한 흥분이 어린 숨이 뱉어졌다.
기교가 없다 한들 누가 이 모습을 보고 발기를 안 할 수 있을까. 좆을 세우지 않고서야 버틸 수 없는 일이었다. 방금 전까지의 발기는 장난이었다는 듯, 남자의 성기가 더 커졌다.
“깔짝대지 말고, 제대로 해.”
결국 남자의 인내가 끝에 도달했다.
제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긴 그가 모스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제 쪽으로 확 당겼다. 반쯤 넣고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혀끝만 머쓱하게 굴리던 모스의 눈이 크게 뜨였고, 고였던 눈물이 후두둑 뺨을 타고 흘렀다.
“……크, 커어.”
남자는 사정이 없었다. 마치 모스의 입이 그의 아랫구멍인 양 사정없이 모스의 머리를 붙잡고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스는 정신이 아득했다. 어느새 입 안은 타액인지 남자의 성기가 뱉어 낸 쿠퍼액인지 모를 것들로 질척이며 음란한 소리가 났고, 쿰쿰한 향은 더 짙어졌다.
남자의 것은 커도 너무 컸다. 모스는 남자가 허리 짓을 해 목구멍에 제 것을 처박으면 구역질이 나올 거 같기도 하고, 혼절이라도 할 것처럼 검은 눈동자가 절로 뒤로 넘어갈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정신이 나갈 거 같다가도, 흥분한 채 제 머리를 붙잡은 남자의 얼굴을 보면 배 속이 허했다.
간지럽고, 뭔가로 채워야 할 것만 같은 느낌에 발가락이 꼼질거리다가도 이내 남자가 움직이면 새하얗게 머릿속이 비었다. 하지만 비어 있는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의 생각만은 남아 있었다.
잡아야 한다. 어떻게든 남자를 잡아야 한다.
그런 모스의 의지를 담은 손이 애처로이 남자의 허벅지를 붙들고 있었지만, 그건 오히려 역효과였다. 남자의 것이 목구멍으로 더 깊이 들어와 모스의 헛구역질은 반복되었다.
“하아.”
모스는 혼미해지다 못해 혼절할 것만 같았다. 그러던 중 위에서 신음이 들렸다. 이어 욕설이 작게 뱉어짐과 동시에 후두둑 모스의 입 안으로 비린 것이 떨어졌다.
“웁, 욱.”
문제는 양이 많다는 것이다. 좆이 크면 정액을 더 많이 뱉어 내는 것일까?
채 받지 못한 정액들이 입술 틈새로 주룩주룩 흘러내린 그때, 남자가 모스의 입에서 성기를 빼냈다.
주르륵…… 벌린 입 밖으로 엄청난 양의 정액과 타액이 섞여 흘러내리니 어느새 입술은 남자의 정액을 펴 바른 것처럼 번들거렸고, 채 삼키지 못한 것들은 턱을 타고 목으로 줄줄 흘렀다.
성기를 빼내고 나서도 모스의 입은 다물리지 못하고, 눈은 멍했다.
멍하니 허공을 보던 모스의 시선이 제 눈앞에서 방금 사정을 했던 게 맞는지, 다시 꺼떡이며 고개를 쳐올리는 성기를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보며.
“거봐, 나를 조, 좋아하는 거잖아.”
모스는 웃었다. 그러나 그 미소가 진짜 웃는 건지, 아닌지 따지자면 다소 미묘한 감이 있었다.
입꼬리를 당겨 웃는 것은 분명 웃는 행위가 맞는데, 입꼬리는 파들거리고 있었고 묘하게 맞지 않는 가면을 쓴 느낌이었다.
“사, 사랑하잖아.”
도로 발기한 남자의 성기를 제 뺨에 비비적거리며 모스는 불안과 초조로 점철된 말을 뱉었다.
반쯤 발기한 남자의 성기를 뺨에 비비는 모스의 얼굴에는 절박함이 있었는데, 그런 모스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남자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사랑?”
“응, 여기가 부풀어서.”
잠시 말을 멈춘 모스가 남자의 얼굴을 슬쩍 본 뒤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는 고개를 뚝 떨구고 더듬더듬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것을 내… 구멍에 너, 넣고 싶은 거면.”
“…….”
“내게 네 씨를 넣고 새끼를 나, 낳고 싶어 하는 거면.”
뭉개진 발음이 형편없는 데다 작은 목소리로 더듬거리는 바람에 제대로 들리지 않는데도, 남자는 그저 묵묵히 표정 없이 들었다.
“사, 사랑이라고 했어.”
이내 모스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남자가 눈썹 한쪽을 올렸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이는 서로를 채, 책임져야 해.”
모스는 그리 말하면서도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물론 모스도 사랑 없이 하는 생식 행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거까지 말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면 남자가 그간 일을 단순한 욕정이라 넘길 거 같아, 혀 밑으로 그 말은 감추었다.
“누가 그리 얘기했지?”
남자의 물음에 모스는 혹여나 제가 혀 밑으로 숨긴 말이 튀어나올까, 주먹을 움켜쥐며 답했다.
“……다 그랬, 어.”
모스는 제 머릿속의 지식을 누가 왜 대체 어떤 경로로 넣어 줬는지 모른다.
다만 모스의 머릿속 지식들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것들이었기에, 모스는 그저 그 말을 밀어붙이고자 했다.
“욕정하고, 생식 행위를 하고 싶고, 새끼를 낳게 하고 싶고, 하나라도 더, 해 주고 싶고, 같이 있고 싶으면, 그러면…….”
사랑이란 그런 감정이라고 했다.
하루 종일 붙어 있고 싶고, 떨어지기 싫고, 뭔가를 해 주고 싶고, 생식 행위를 같이 하고 싶고, 둘을 빼닮은 새끼를 낳고 싶은 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자 욕구의 발현인 사랑이라고…….
그리 주절주절 말을 잇던 모스의 머리 위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사랑을 한다고, 너를?”
제대로 생각을 정리해 말할 새가 없었다. 남자의 못 미더워하는 말씨에 모스는 허둥지둥 답하기 바빴다.
“응. 여기가 섰, 잖아? 사랑해야, 이렇게 발기해. 응, 사랑해야…….”
모스는 ‘남자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만이 남자를 붙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몸을 섞으면 섞을수록 모스는 남자를 더 알고 싶어졌다. 남자와 시간을 더 보내고 싶어졌다.
남자도 몸을 섞은 직후에는 모스와 시간을 많이 보냈으니, 모스도 어쩌면 남자도 저와 같은 마음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방금 남자의 표정이 어땠던가.
‘떠나려고 했어.’
모스는 숲 안을 보았고, 남자는 숲 밖을 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남자가 이 허무맹랑한 말을 순순히 믿어 줄 것이라는 기대는 크게 없었다.
남자는 기억을 잃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지식을 까무룩 잊은 것은 아니니까.
그러기에 긴장과 걱정이 어린 얼굴로 모스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그때, 손가락 하나가 그의 입 안에 밀어 넣어졌다. 축축한 모스의 입 안을 파고든 차가운 손가락이 입천장을 느릿하게 훑었다.
“그럼 너는 나를 사랑하나?”
그리고 예상치 못한 질문이 모스에게 향했다.
남자가 역으로 물을 줄은 몰랐던 지라 모스가 놀란 표정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기묘한 생물체를 보듯이 모스를 보고 있었다. 그는 입 안에 밀어 넣은 손가락으로 모스의 혀를 꾹꾹 눌렀고, 모스는 낮게 신음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그가 조용히 말했다.
“내 이름도 모르고, 내가 뭐 하던 이인 줄 나조차도 모르는데. 이런 날, 네가?”
남자의 말은 사실이다.
모스는 남자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이름을 가졌는지, 뭐 하다가 여기까지 왔는지, 어떤 사람인지, 아무것도 몰랐다.
“나는…….”
역으로 질문을 받을지 몰랐기에, 잠시 당황하던 모스는 남자의 재촉하는 눈치에 어물거리며 입을 열었으나, 쉬이 답을 하지 못했다.
‘나는 남자를 사랑하나?’
모스는 방금 전 남자에게 ‘사랑’을 설명하며 느꼈던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은 듯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어딘가에 홀린 듯, 모스가 느릿하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너를 보면 욕정해. 너와 내 새끼를 나, 낳고 싶고.”
비록 욕정은 남자가 더 제게 많이 하지만 모스도 남자에게 욕정하고 있었고, 남자와 하는 생식 행위도 힘들지만 좋았다.
그래서 남자와 저를 빼닮은 새끼를 낳고 싶은 욕구도 들었으며.
“비록 내가 가진 게 아, 아무것도 없지만, 네게는 뭔들 다 해, 해 주고 싶어. 그리고, 네가 떠나면 너무 슬플 거 같고, 그래서 너와 같이 있고 싶, 싶고…….”
남자에게 뭐 하나라도 더 해 주고 싶고, 늘 같이 있고 싶었다.
그가 떠나지 않는다고 하면 제 목숨이라도 빼내서 줄 수 있을 정도로.
남자는 느릿하고 더듬는 모스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의 얼굴을, 햇빛 같은 백금발, 금안을 보던 모스의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나는 너, 인간, 너를 사랑해.”
단 한 번도 볕 든 적 없던 삶에 처음으로 든 볕이었다. 그래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기에 말을 하면 할수록 모스는 벅찼다.
그러나 벅찬 모스와는 달리 남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묘한 표정으로 모스를 보고 있었다.
모스는 순간 심장이 철렁 바닥으로 추락하는 느낌이 들었다.
“너도 그렇잖아. 너, 너도 나를 사랑해.”
허둥지둥 모스가 매달리듯 남자의 다리를 붙들고 말했다.
“너는 나를 사랑하게 될 수밖에 어, 없어. 나를 새끼를 가진 네 짝처럼 보, 보살폈잖아. 나한테 먹, 먹을 거…… 예쁜 열매 줬잖아.”
예쁜 열매를 이렇게 많이 줬잖아, 먹을 것을 내 입에 밀어 넣어 줬잖아.
얼굴에 여전히 정액이 묻어 있는 것은 아는지 모르는지. 모스는 꿋꿋하게 말을 이어 갔다.
“내, 내 옷 빨아 주고, 내 몸도 빠, 빨아 줬잖아. 나도 빨아 줬고, 그리고…….”
더듬으며 말하는 모스의 말은 너무 느리고 뭉개지는 발음이라 답답할 수도 있었으나, 남자는 한참을 듣기만 했다.
어물어물 말하던 모스의 목소리가 잦아들고 나서야, 남자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사랑?”
단어를 뱉자마자 남자는 어색함을 느꼈다.
사랑이란 단어는 기억을 잃기 전에도, 실수로라도 혀 위에 올린 단어가 아닌 것임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남자는 제 아래에서 초조하게 눈치를 살피는 모스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모스는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붉혔다. 그런 모스의 기대 어린 붉은 얼굴을 본 순간 남자의 눈이 짧게 빛났다.
“너는 내게 기대를 하고 있나?”
남자는 모스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며, 모스의 뺨 위에 눌어붙은 정액을 손끝으로 훑고는 눈을 깜빡였다.
남자의 말대로 모스는 기대감을 버리지 못하고, 눈을 빛내며 남자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남자는 순간 궁금해졌다.
그는 느릿하게 모스의 뺨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깜빡였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이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열매를 처음 받았을 때의 표정을 지을까, 꽃을 처음 받았을 때의 표정을 지을까, 아니면…….
“…….”
한편 남자의 생각을 알 길이 없는 모스는 맹목적으로 남자를 보았다.
남자의 입술이 움직일 때까지 그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양, 입을 반쯤 벌리고 멍하니 남자를 보았다.
기대를 갖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이상하게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눈을 뗄 수 없던 그때, 남자가 결정이라도 한 양 입을 벌렸다.
달빛 아래서 부스러지는 백금발, 요요히 빛나는 금안이 감겼다 더 환히 빛나며 뜨이는 모습을 모스는 숨 하나 허투루 내뱉지 않고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래. 그게 사랑이라면.”
느릿하고 유연한 몸짓으로 등을 굽힌 그가.
“나는 너를 사랑하는 것 같다.”
사랑을 고했다.
담담하고 여상한 말투였다. 사랑을 고하는 이가 맞는지, 무척이나 담백한 목소리에 얼굴은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고 있었다.
그러기에 모스는 남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곧바로 반응을 하지 못했다.
“어……?”
남자는 물 흐르듯 고개를 계속 아래로 숙였다. 이어 두 사람의 숨결이 섞일 것처럼 바짝 붙고 나서야 모스는 남자의 말을 이해한 듯 눈을 부릅떴다.
“네가, 나를…… 사, 사랑…….”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기대를 했다지만, 상상과 현실 사이에는 무수한 괴리와 차이가 있었다. 모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남자를 멍하니 보며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어물거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뜻을 온전히 이해한 듯 모스의 눈에 달빛이 깃들었다.
늘 축 처져 있는 우울한 눈동자에 선명한 생기가, 본인 스스로도 감추지 못한 기쁨을 담은 볼우물이 푹 파였고.
“그래.”
그 모습을 관찰하듯 지그시 보던 남자는 이내 정답을 찾은 양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눈매를 휘었다.
모스의 눈은 남자만 보인다는 듯, 남자만을 눈에 담고 보고 있었다.
한 사람의 오롯한 애정 아래에서 남자는 숨 쉬듯 자연스레 모스의 입가에 제 뺨을 문지르다, 이내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
모스는 방금 제가 들은 말을 연신 곱씹고 있었는지 남자가 깨물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저 멍하니 허공을 보기 바빠 보였다.
그것에 묘하게 불만족스러워진 남자가 힘을 주어 다시 입술을 깨물자, 그제야 알아챈 듯 움찔거리더니 눈동자를 굴려 남자를 본 모스가 이내 다시 얼굴을 불태웠다.
그리고 모스의 불타오르는 얼굴을 가만히 보던 남자가 이상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포만감 이상의 감정이 일순 깃들었는데, 그게 무엇인지 남자는 알 수 없었다.
“…….”
한편 모스는 붉어진 얼굴로 제 가슴을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까부터 여기가 신경이 쓰인다 싶었는데, 이렇게 뛰다가 죽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팔다리가 저릿할 정도로 미친 듯이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런 모스의 턱을 잡아챈 남자가 물었다.
“하면,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응?”
“사랑을 한다면, 무언가를 해야 하는 건가?”
모스가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사랑의 정의까지는 어찌저찌 안다고 한들, 사랑을 한 적이 없던 모스가 사랑을 하는 사이가 무엇을 하는지에 관해서 자세히 모르는 건 매한가지였다.
연인에 관련된 서적을 읽은 적 있었는데, 그들이 한 일을 자신들이 이 숲에서 할 수는 없었다.
책 속의 연인들은 몸을 섞는 것 말고 이것저것 많이 했다.
서로에게 디저트를 먹여 주거나, 수다를 떨거나, 사랑 섞인 편지를 쓰거나, 아이를 낳거나 질투를 하거나……, 다양한 것들을 했었는데, 이 숲속에서는 웬만해선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제대로 된 펜과 종이가 없는데 편지를 적기도 애매하고, 디저트가 있을 리도 만무했다. 또 질투를 할 대상도 없고, 그렇다고 아이는…….
‘난 수컷인걸.’
모스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었다. 유일하게 남은 수단이 수다지만, 남자가 선뜻 허락할 거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말을 안 할 수도 없고, 모스는 입술을 달싹이다 입을 열었다.
“먼저 서로 워, 원하는 걸 들어주면 되는데…….”
그래도 말을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에 주절주절 말을 했다.
하지만 말을 하면서도 모스는 자신감이 떨어졌는지, 혹 남자가 이상한 점을 눈치라도 챈 것은 아닐지 연신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가만히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남자의 눈썹 한쪽이 올라가더니.
“그럼 요구해 봐.”
예상치 못한 것을 말했다. 다짜고짜 요구를 하라는 남자의 말에 모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입을 뻐끔거렸다.
“사랑하는 사이는 뭘 하면 되는지. 내게 요구해 보라고.”
남자는 어째서인지 흥미로워 보였다.
그는 이 상황을 즐기며 모스의 얼굴 표정을 면밀하게 관찰했다.
모스는 남자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고 돌처럼 굳어 있었다.
누군가에게 요구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술을 달싹이며 계속 시간을 축였다.
하지만 남자의 인내는 짧았다.
그가 재촉하듯 모스를 보자, 기가 죽은 모스는 아무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사명에 사로잡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아, 안아 줘. 다정하게.”
이런 말을 하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대뜸 안아 달라는 말이었다.
제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 몰랐던 듯 말을 뱉은 모스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정?”
남자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는 입 안으로 ‘다정’이라는 단어를 곱씹듯 혀로 몇 번 굴리며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고개를 숙였다.
“다, 아니, 그…….”
때리려나.
하기야 제가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다정이라는 단어가 결코 남자에게는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데, 그런 남자에게 다정하게 대해 달라고 말을 했으니.
모스가 더듬거리다 그저 무시해도 괜찮다고 말을 하려던 그때.
“그러지.”
산뜻하게 남자가 승낙했다.
당황한 것은 오히려 모스였다. 저렇게 선뜻 승낙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었다면 당황으로 그쳤을 텐데, 모스는 이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 지금 뭐 하는 거……야?”
번쩍, 그새 바지를 고쳐 입은 남자가 모스를 안아 올린 것이다.
갑자기 남자의 품 안에 쏙 안겨 들린 것도 모자라, 남자가 안아 올린 상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보금자리. 남자는 늑대 가죽 위에 앉곤 자신의 몸 위로 모스를 올렸다. 틈 하나 없이 바짝 붙은 몸뚱이, 남자가 모스의 코에 제 코를 부딪쳤다.
이게 무슨 일인지 모스가 파악하기 전에 남자가 방향을 틀어 모스에게 입을 맞추었다.
입이나 몸이나, 그 전에 이미 섞을 대로 많이 섞었기에 새로울 것도 없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다른 때와 달리 모스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곤 발끝을 오므라뜨렸다.
혀가 녹을 것만 같은 키스였다.
다정하게 치열 하나하나를 혀끝으로 훑고, 입을 억지로 벌리지 않는, 거칠지 않은 입맞춤은 처음이었다.
모스와 남자의 입맞춤은 매번 흥분에 못 이겨 거칠었다.
남자는 발정을 하면 거침이 없었고, 무엇보다도 엉엉 우는 모스의 모습은 가학심을 부추기는 면이 있기에, 남자는 거칠게 그를 늘 안았다.
“왜, 이러는…….”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혀가 녹을 듯이 다정한 키스를 하면서 천천히 모스의 몸을 손으로 훑는데, 그의 체온이 스친 곳이 평소보다 유독 간지러워서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남자의 입술이 모스의 턱, 목, 가슴으로 천천히 내려가며 모스를 눕혔다.
“자, 잠시만, 아.”
평소와는 다른 느낌에 모스가 흠칫할 무렵, 이내 제 다리 사이에 남자가 자리 잡는 것이 느껴졌다.
모스의 성기는 발기해서 반쯤 서 있었고, 그의 앞에 있는 남자의 성기는 바지를 뚫고 제 존재를 드러낼 정도로 발기하고 있었다.
모스는 당연히 이어질 삽입을 예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다리 사이에 남자가 자리를 잡으면, 그는 제 고환마저도 밀어 넣을 기세로 저 엄청나게 흉흉한 것을 쭉쭉 밀어 넣기 바쁘니까.
“…….”
그런데 이번에는 반응이 이상하다. 바로 안으로 집어넣을 거라고 여겼는데,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남자는 어째서인지 미동이 없었다.
모스가 의아함에 상체를 살짝 일으키려던 그때, 모스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위로 퉁기며, 목을 뒤로 확 꺾어 젖혔다.
“왜, 거기를, 왜.”
남자가 제 구멍에 입을 가져다 댄 것이다.
당황한 모스가 버둥거리며 남자의 어깨를 발로 밀어 내려고 했으나, 남자는 요지부동이었다.
꾹꾹, 혀끝으로 구멍을 핥는 행위에 모스가 신음을 지르며 제 얼굴을 가렸다.
그는 한 손으로는 모스의 성기와 고환을 손끝으로 꾹꾹 누르며 만지고, 다른 한 손으로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밀어 넣기 시작했다.
이런 적이 없었기에, 모스는 당황스러웠다.
“이…상해, 이상해…….”
손가락을 넣어 몇 번 풀어 준 적은 있지만, 남자는 웬만해서는 바로 제 성기를 처넣었는데, 지금은 이상했다.
남자는 모스의 구멍을 친절하고도 다정하게 하나하나 넓혔다. 손가락 하나, 둘, 셋. 제 안을 휘젓는 손가락은 평소보다도 느릿하고 아프지 않았다.
그래, 아프지 않은 게 문제였다. 아프지 않은데, 남자의 손끝이 누르는 곳은 모스가 잘 느끼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모스는 결국 남자의 것을 넣지도 않았는데도 사정에 이르렀다.
“어, 어떡… 어떡해.”
모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필 남자가 모스의 하반신에 얼굴을 바투 붙이고 있었기에, 모스의 정액이 남자의 얼굴로 튀었다.
깔끔한 것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남자였다. 그런 남자이기에 모스는 허둥지둥 남자의 얼굴을 닦아 냈다.
“…….”
그 과정 속에서 남자의 눈은 모스에게 집요하게 향했다.
집요하고 끈적한 시선에 얼굴을 닦아 내던 모스의 손이 결국 우뚝 멈추었다.
가만히 모스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남자는 입가에 묻은 모스의 정액을 손으로 훑어 손가락에 묻힌 뒤, 그것을 빤히 바라보다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내 성미와 맞지 않아.”
말 끝나기 무섭게 모스의 머리는 어느새 바닥에 닿아 있었다.
그런 모스의 다리 사이에서 옷을 빠르게 벗은 남자가, 제 성기를 모스의 아래에 맞춘 뒤 순식간에 안을 꿰뚫었다.
“하, 윽!”
다행히 남자가 잘 풀어 두었기에, 평소보다는 고통이 크지 않았다. 평소에는 뻑뻑하게 들어가던 성기가 단번에 들어간 것이다.
모스는 온몸이 저릿저릿한 듯 눈이 풀린 상태로 바들거렸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으나, 남자가 하필 파고든 곳이 모스가 가장 잘 느끼는 곳이었고, 단번에 그곳을 찌르니 그는 예고치 않은 고통과 쾌락의 늪에서 허둥거렸다. 하지만 당황스러워하는 모스와는 달리, 남자는 그제야 만족을 실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허리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모스가 쾌락에 버둥거리던 그때 남자가 허리 짓을 멈추지 않은 상태로 고개를 숙였다.
“거창한 것이라도 좋으니, 다른 걸 요구해 봐.”
잔뜩 성난 아래와 달리, 그의 말투는 고요했다.
“다정은 못 하겠으니.”
퍽, 그 말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성기를 끄트머리까지 빼내었던 남자가 모스의 엉덩이를 쪼갤 듯이 움켜쥐며 안으로 퍽 쳐올렸다.
“……아!”
바르르, 쾌감에 떨던 모스의 성기에서 탁한 액이 터졌다. 남자의 손에서 휘둘리듯 달랑달랑 흔들렸다.
“제발, 천천, 히.”
다른 걸 요구하라기에, 천천히 해 달라고 했으나 남자는 평소보다 더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천천히라는 말에는 응할 생각이 없는 듯 남자는 사정이 없었다. 몸에 채 힘을 주기도 전에 모스의 머리카락이 바닥에 쓸렸다.
이어 남자가 욕을 짓씹었다. 남자의 아래에서 흔들리던 모스는 제 안에 뿌리를 내리듯, 스며드는 뜨거운 남자의 정액에 몸을 움칠 떨었다. 놓치면 죽는 것처럼 간절하게 남자의 등을 감싼 모스의 양팔이 바들바들 떨렸다.
긴 사정이었다.
뜨거운 정액이 내벽에 쏟아지는 것이 처음이 아닌데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모스는 남자를 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바위처럼 단단한 뜨거운 몸을 껴안은 채, 모스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마.”
사정의 여운을 나눌 새도 없이 다시 허리를 움직이려던 남자는 모스가 작게 말한 것을 듣고, 이내 모스를 보았다.
“뭐라 했지?”
모스가 너무 작게 말했던 탓에 자세히는 듣지 못한 듯싶었다.
모스 또한 방금 전 사정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흥분이 서린 얼굴이었지만 그의 이끼색 눈동자는 평소보다도 빛나고 있었다.
“그.”
그러나 이상하게 쉬이 말을 하지 못했다. 모스는 입술을 달싹이며 제 속에 있는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머뭇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나, 나를 버리지 마.”
남자가 저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인상을 찌푸렸다.
구겨진 남자의 얼굴에게서 모스가 거절의 기미를 읽은 것인지, 있는 힘껏 남자의 몸을 꼭 껴안으며 말했다.
“날 버리지 마, 말아 줘.”
뜬금없는 말이었다.
대체 이 작은 이끼의 머릿속에 또 무슨 생각이 피어난 것인지. 남자가 인상을 구기며 갑자기 무슨 헛소리냐고 입을 열려던 그때.
“이게, 내… 요구야.”
“요구?”
“응, 내, 내 요구.”
요구라는 말이 나올 줄 몰랐는지 모스의 말을 들은 남자의 표정이 묘해졌다.
‘고작 그런 게?’
남자는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눈을 깜빡이며 시뻘겋게 변한 모스의 귓불을 빤히 보았다. 장난은 아닌 듯싶고.
“시, 싫으면 거절해도 되는데, 나는 그냥, 이것만 네가 들어주면…….”
“그러지.”
별 부탁 같지도 않은 부탁을 들었다는 듯 가벼이 답하는 남자.
“버리지 않겠다.”
모스는 남자에게 버리지 말아 달라는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되어 목이 절로 메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게 하나도 없었다.
별 시답지 않은 요구를 한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답하는 것에 모스는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쉽게?’
이 말을 꺼내기 직전까지도, 모스는 바짝 긴장했다.
남자가 대답을 안 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도 했으며, 최악의 경우 혐오 어린 거절까지 나올 줄 알았던 것이다.
“지금 우는 건가?”
그때 남자가 대체 왜 우는지 모르겠다는 듯 이해가 불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 아니?”
그제야 제가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모스가 제 눈물을 거칠게 닦아 냈다. 어쩐지 시야가 흐리더라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난 모양이다.
한심하다는 듯 저를 보는 남자 앞에서 모스는 빨리 눈물을 멈추고자 했으나, 눈물을 쉬이 멈출 수 없었다.
굵은 눈물방울들이 모스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뺨을 타고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퍽 처연한 꼴로 닭똥 같은 눈물을 쉴 새 없이 흘리니, 결국 모스의 눈물은 남자의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왜 울지?”
남자가 이해가 안 간다는 말투로 제 손등 위로 떨어진 눈물을 보며 물었다.
모스는 뭐라 답을 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는 가운데, 그는 단 한 마디만을 간신히 꺼낼 수 있었다.
“고마, 워. 고마워.”
모스는 살면서 이런 감정을 처음 느꼈다.
누군가가 자신을 버리지 않겠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너무 벅차올라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이제는 훌쩍이다 못해 오열하듯 히끅히끅 딸꾹질까지 하며 우는 모스를 남자가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뭐지, 이 불쾌함은?’
남자가 손을 들어 올려 모스의 뺨을 꾹 눌렀다.
모스는 남자가 제 뺨 위로 손을 올리자 그 손에 제 뺨을 자연스레 기댔지만, 여전히 울음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순식간에 축축하게 손 마디로 스며들 듯 미끄러지는 모스의 눈물을 남자가 가만히 보았다.
눈물을 흘리는 이 얼굴이 좋았다.
목이 졸렸을 때 엉엉 울며 매달리는 것도, 아플 때 엉엉 울면서도 실눈을 뜨고 눈치를 살살 보는 것도.
새빨갛게 열이 올라 붉어진 얼굴로 엉엉 우는 모스의 얼굴을 보면 아래에 열이 몰리고 흥분이 됐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별로 기분이 안 좋았다.
남자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여전히 모스의 안에 있는 제 아래를 보았다. 우는 얼굴을 보았으니 더 발기해야 정상인데, 오히려 식는 느낌이었다.
이 불쾌함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어느새 가라앉은 제 하반신을 보던 남자가 흥이 식은 듯 모스의 안에서 제 것을 빼냈다.
“네 요구를 받아들였으니, 나도 요구를 하나 하지.”
남자는 우는 모스의 얼굴을 우악스레 잡더니, 눈물이 마치 샘처럼 퐁퐁 솟아나는 그의 눈을 양손으로 꾹 눌렀다.
그새 퉁퉁 부은 모스의 눈이 살살 떨리며 남자의 얼굴을 좇았다.
남자는 어째서인지 신경질이 좀 나 있는 거 같아, 모스는 눈치를 살살 보며 남자가 무엇을 요구할까 걱정했다.
‘막상 별로였나? 사랑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나? 다 관두겠다고 하려나? 버리겠다고 하려나? 어떡하지, 어떡하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벅차서 어쩔 줄을 몰라 하던 마음이 불안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진창에 처박히는 것만 같았다.
“으응…, 뭔데?”
하지만 그렇다고 안 들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저런 부탁이라면 마음 같아선 거절하겠다고 난리 치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도 깜냥도 없는 게 사실이니. 모스가 딸꾹질을 하며 남자를 보았다.
아까와는 다른 기류가 흘렀다.
서늘하게 저를 쏘아보는 금안, 보는 것만으로도 솜털이 바짝 설 것 같은 느낌.
아슬한 분위기 속, 남자가 양손으로 모스의 얼굴을 틀어잡았다.
겁에 질린 모스가 움찔거리며 이어질 말에 미리 상처받은 듯 눈을 질끈 감으려던 그때.
“당장 이걸 멈춰.”
남자는 양손으로 모스의 눈꼬리를 누르고 있었다.
모스가 못난이처럼 눈이 짓눌린 모양으로 어벙하게 입술을 벌리고 눈을 떴다. 반쯤 뜨인 눈 틈새로, 남자가 제게 신경질적으로 말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거, 멈추라고.”
꾹, 남자가 맺힌 눈물을 지워 버리려는 듯이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기분 더러우니까.”
……그날 간신히 울음을 멈춘 모스는 눈치를 보다 그 말을 끝으로 더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남자의 팔 사이로 제 몸을 간신히 눕혔다.
둘은 서로 다리를 얽고 잠들었다.
아침이 될 때까지.
***
눈이 내렸다.
“눈…….”
모스가 낮 사이에 수북하게 쌓인 눈을 밟았다.
사시사철 겨울인 대륙인지라, 눈이 내리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서는 비교적 따뜻한 편인 숲에 눈이 내리는 일은 드물었기에 특별하다면 특별하다고 할 수 있었다.
사박사박.
눈이 발아래에서 뭉개지는 소리를 들은 모스의 눈이 잘게 흔들렸다.
“눈이야.”
모스는 손에 한가득 눈을 퍼서, 보금자리 앞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남자의 앞에 눈을 가져갔다.
“눈이 내려.”
모스가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모스의 표정에는 어느새 무지한 남자를 위해 눈에 대한 설명을 해야겠다는 강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눈은 쓰, 쓸모가 없어. 하지만 예뻐.”
남자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그는 모스의 손안에 담겨 서서히 녹는 눈과, 차가움으로 인해 발긋하게 변한 모스의 손을 번갈아 보다 시선을 올려 모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시선이란 익숙해지려고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다. 모스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더듬으며 말했다.
“누, 눈은 인간들을 다치게 해. 앞길을 막고, 미끄럽게 만들고, 시체들을 얼려서 시체를 옮기면, 내 손이 시, 시려워서…… 읍.”
눈을 설명하려는 노력은 가상하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방금까지 무표정한 얼굴로 모스를 보고 있던 이가 맞는지, 남자가 모스의 손에 깍지를 껴 잡아당긴 뒤 불쑥 입을 맞춘 것이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모스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아.”
이어 입이 떼어졌다.
모스가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다가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퍼뜩 고개를 숙였다. 드러난 모스의 목덜미가 시뻘겠다.
“그래서.”
그런 모스를 보고 남자가 언제 눈에 정염을 실었냐는 듯,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모스에게 물었다.
“저게 뭐 어떻다고.”
“……그, 래서…….”
처음에는 뭔 소리인가 싶었던 모스는 남자가 가리키는 ‘저게’ 눈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더듬으며 하던 설명을 마저 이으려고 했지만 무리였다.
모스는 남자의 입맞춤 이후,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하던 생각이 무언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눈은, 그렇……다고.”
대충 마무리 짓는 모스를 남자는 빤히 쳐다보았다.
모스는 머저리처럼 모자란 스스로의 모습에 낯이 달궈지는 듯, 아까보다 더 새빨개진 얼굴을 하고 고개를 홱 돌린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모스는 남자가 분명 한심하고 멍청이 같다는 시선으로 저를 보고 있을 거 같아, 제대로 마주 볼 용기가 없었다.
모스의 생각과는 달리 남자는 전혀 그런 표정으로 모스를 보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웃음기를 살짝 매단 채 모스를 빤히 보다, 이내 가벼이 모스의 머리를 손끝으로 훑고 그를 지나칠 뿐이었다.
“……?”
모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방금 뭐지, 뭔가가 머리 위를 스쳤는데.
바보보다도 더 바보 같은 얼굴로 자신을 지나쳐 성큼성큼 나아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던 모스는 입술을 실룩이다 그날을 떠올렸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 것 같다.
어찌 보면 고백이라 할 수 있었던 그날 이후, 남자와 모스 사이는 뭐라 달라졌다고 정확하게 꼬집어 말할 만한 것은 없었다.
남자는 이전처럼 종종 모스와 몸을 섞었고, 열매를 가져다주었고, 모스는 남자의 잠자리를 데웠고, 남자를 졸졸 따라다녔다. 애초에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어떻게 구는지 남자도 모르고, 모스도 몰랐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눈에 확 무언가가 뜨일 정도로 둘 사이에서 뭔가 달라지는 것은 없었지만, 방금 전과 같은 묘한 행위가 둘 사이에서 종종 벌어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가, 같이 가.”
모스가 앞서 나가는 남자의 뒤를 헐레벌떡 쫓았다.
유독 추운 오늘, 입김이 허공을 가르는 가운데 모스가 손과 발을 훤히 드러낸 채 뛰다시피 남자에게 향했다.
남자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았다.
어린 짐승이 제 어미를 향해 발을 내뻗듯, 어색하고 갈망 어린 시선으로 저를 보는 모스를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또 이 느낌이다.’
남자의 금안이 일순 어둡게 가라앉았다.
사랑한다는 말은 단순히 모스의 반응이 궁금해서 충동적으로 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말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제게 족쇄가 되어 저를 얽매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 모스를 보면 남자의 속에서는 이상한 것이 들어와 들끓는 느낌이 들었다.
성욕, 불만족, 욕구, 소유욕, 불쾌함, 답답함… 이렇게 때때로 모스를 보고 있으면, 무어라 정의하기 어려운 여러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나타나며 안 하던 짓을 하고, 안 하던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같이 가, 가자.”
그때, 언제 온 것인지 어느새 모스가 남자의 근처에 다가와 있었다.
혹여나 그가 밀어 낼까, 옷소매를 움켜쥔 모스의 얼굴에는 약간의 긴장이 서려 있었다.
발그레한 뺨, 추위로 새빨갛게 변한 발, 손, 코.
남자는 부끄럽다는 듯 목덜미를 붉히며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스를 관찰하듯 빤히 쳐다보다 사실을 읊듯 여상히 말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는구나.”
남자의 말에 모스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자마자 마치 모스를 관찰하듯 보는 남자의 시선과 부딪쳤다.
“……응?”
남자가 속삭이듯 하는 말이, 묘하게 인식이 잘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스의 표정은 어리둥절했다.
“방금 뭐라고…….”
남자는 답을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는데 아까와는 달리 걸음이 느려 모스는 쉬이 남자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새하얀 눈, 검은 하늘, 달빛, 푸른 입김, 그리고 남자.
모든 풍경을 뒤에서 담은 모스는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눈밭 틈에 숨어 있던 몬스터가 남자의 허벅지를 꿰뚫기 전까지.
***
“피 냄새.”
홀로 보금자리에 남아 있던 모스가 실눈을 떴다.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맡는 모스의 코끝에 짙은 혈향이 스친 것이다.
의아한 듯 고개를 살짝 기울이던 모스는 이내 납득한 듯 가벼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눈 때문인가.’
하기야, 어제오늘 눈이 많이 내리긴 했다.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면, 환각초 위를 눈이 수북하게 덮어 버리면서 환각초의 효과를 떨어뜨리기 때문에 삿된 몬스터들이 들어와 짐승들을 물어뜯는 경우가 많았다.
‘인간?’
하지만 짐승의 혈향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감이 있어, 모스가 눈을 가늘게 뜨다 고개를 저었다.
평소에는 환각초가 위험해 사람들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면 눈이 올 때에는 몬스터들이 들끓어 평소보다도 더 위험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 결국 이러나저러나 이 숲은 여행자가 실수로 들어온 게 아닌 이상 사람들의 출입이 거의 없었다.
‘곧 해가 진다.’
모스가 다가오는 밤의 향을 기대하며 눈을 감았다. 오늘은 낮 내내 남자가 자리를 비웠던 탓인지, 유독 낮이 평소보다도 더 길게 느껴졌다.
“안녕, 안녕.”
오늘도 어김없이 모스는 제 보물이 담긴 상자에서 마지막 열매까지 깨끗하게 닦고는 열매에게 인사하다 비죽 웃었다.
상자에는 더는 열매만 있지 않았다. 비록 말라 원래의 색을 찾기 어렵지만, 꽃도 있었다.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열매와 꽃을 보던 모스가 상자를 조심스레 닫았다.
이곳에서 제 목숨보다도 소중한 것을 꼽으라면, 모스는 주저 없이 남자와 이 상자를 꼽을 수 있었다. 그 정도로 모스에게 상자는 이제 그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었다.
이어 남자를 찾으러 가기 위해 준비를 시작한 모스는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 맡았던 혈향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던 탓이다.
‘왜 이쪽으로 오지?’
모스가 괴물임을 알기 때문일까, 그의 보금자리를 몬스터나 짐승들은 근처를 맴돌기만 할 뿐 결코 건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조심은 해야 하니, 모스가 작은 칼을 손에 쥐고 문을 빤히 보던 그때, 천 무더기가 크게 일렁였다.
침입한 것을 향해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공격을 할 것처럼 바짝 털을 세우던 모스는 공격은커녕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들어온 것은 몬스터도 짐승도 아닌, 남자였던 것이다.
“빌, 어먹을.”
모스가 경악한 듯 눈을 크게 떴다.
남자가 보금자리에 들어온 것과 동시에 짙은 피 냄새가 코를 찌를 것처럼 독하게 훅 밀려온 것이다. 그제야 모스는 아까부터 코끝을 스치던 혈향의 근원지가 남자임을 알게 되었다.
남자의 한쪽 허벅지에는 구멍이 뚫려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또 여기까지 걸어오는 데 산전수전을 다 겪은 양 온몸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상태 또한 척 보기에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이, 인간?”
도착하자마자 남자는 긴장이 풀렸는지 스르륵 자리에서 무너졌다.
남자가 쓰러지는 모습은 전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괴물인 모스보다 남자는 신체 능력이 월등히 좋았으며, 그래서 이 숲 안으로 들어와서도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인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남자는 끈 떨어진 인형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모스는 순간 모든 시간이 멈춘 줄 알았다. 남자가 쓰러지는 장면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느릿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모스는 반사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뛰었다.
다행히 남자가 땅으로 쓰러지기 직전, 간신히 달려가 부축할 수 있었다. 바닥으로 곤두박질하는 남자를 본 순간, 몸이 그의 생각보다 더 빨리 움직인 것이다.
“하아, 하아.”
모스의 품 안으로 무너진 남자의 상태는 심상치 않았다. 남자는 말을 하지 못하고 신음만 내뱉고 있었으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손은 무언가를 때려잡은 양 진득거리는 액체와 피로 엉망이 되어 있었고, 허벅지에서는 피가 울컥울컥 계속해서 나오고 있었다.
“……피.”
피를 흘린 것은 남자인데, 모스의 얼굴이 더 새하얬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한 모스가 얼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던 그때, 계속해서 앓는 소리를 내던 남자가 입을 벌렸다.
“이거.”
긴 침묵을 뚫고 한 말이 고작 “이거.”였지만, 그 덕분에 모스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괘, 괜찮, 괜찮아?”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올망하게 저를 보는 모스를 향해 남자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좀, 막아.”
남자가 턱짓으로 가리킨 것은 피가 퐁퐁 솟아나는 제 허벅지였다.
그제야 지혈을 해야 함을 깨달은 모스가 조심히 남자를 눕히고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천이란 천은 죄다 끄집어 가져왔다.
모스는 여태 지혈을 해 본 적이 없어, 어떻게 하는지는 잘 몰랐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여러 개의 천들을 남자의 허벅지에 칭칭 감아 꾹 묶었다.
“윽.”
“미! 미안해. 미안해.”
남자가 고통스러운 듯 고개를 젖혔다. 모스가 벌벌 떨며 남자에게 사과했지만, 남자는 이를 악물며 신음을 참아 낼 뿐, 그를 막지는 않았다.
고통스러워하는 남자를 보던 모스가 어느새 붉게 변하는 천을 보고는 표정을 굳혔다.
‘뭔가가 이상해.’
지혈을 시작했음에도 남자의 상태는 나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지는 것처럼 보였다. 무언가가 남자의 허벅지를 관통한 것 같은데, 단순히 관통만 당한 것이 아닌 거 같았다.
피 냄새와 섞인 끈적한 향에 모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본격적으로 남자의 다리 사이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 뒤, 고개를 숙여 남자의 허벅지에 코를 가져다 댄 모스는 이내 눈을 크게 떴다.
“……독.”
독 냄새였다.
창백한 얼굴로 남자의 허벅지를 보던 모스가 남자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서 묻어나는 진득한 진액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틀림없다. 이건 땅에 굴을 파고 지내는 전갈과 흡사하게 생긴 몬스터의 독이다.
모스야 독 냄새를 미리 맡아 피한 덕에 단 한 번도 당한 적 없었지만, 녀석이 짐승을 어떻게 사냥하는지는 본 적 있었다.
놈은 독이 든 뾰족한 꼬리로 상대를 관통함과 동시에 순식간에 독을 몸에 퍼지게 한다. 다행히 독이 그 자리에서 즉사에 이르게 하는 맹독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여차하면 사람 하나는 죽일 수 있는 독을 가지고 있었다.
‘주로 마을에 나타나는데.’
이틀 정도 굶으면 죽는 녀석이라, 먹거리가 풍족한 민가에 종종 출몰하는 놈이었다.
하지만 근래 눈이 많이 온 탓에, 그 몬스터는 아마 저도 모르게 비교적 따뜻한 환각초 숲으로 들어온 듯싶었다.
독이 더는 번지면 안 되니, 입술을 꾹 깨문 모스가 상처 부위 위로 새로운 천을 갖다 댄 뒤, 더 세게 천을 묶었다.
“……!”
남자가 신음도 제대로 못 내고 눈을 부릅뜬 채 입술을 꽉 깨물며 모스를 노려보았다. 어찌나 세게 입을 깨물었는지, 입술에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히다 주르륵 흘러내렸다.
“미, 미안해.”
이렇게 해야 독이 안 퍼지는데, 남자가 고통스러워하니 모스가 벌벌 떨며 사과를 했다.
다행히 모스가 묶은 게 소용이 있었는지, 남자가 숨을 헐떡이면서도 아까보다는 안정된 표정으로 모스를 보았다.
“너.”
헐떡이던 남자가 제 허벅지와 모스를 번갈아 보고는 말문을 열었다.
“아, 아프지? 많이 아파? 괜찮아? 어떡, 어떡…….”
“누가 네 옷으로 묶으라 했지?”
“……응?”
허둥지둥 말을 뱉던 모스에게 돌아오는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남자는 식은땀을 신경질적으로 닦아 내더니 제 허벅지에 모스가 묶은 천을 가리켰다.
“왜 네 옷으로 묶은 거지.”
“하지만, 네가…….”
남자가 죽게 생겼는데 옷이고 뭐고 다 뭔 소용이란 말인가. 모스는 그저 닥치는 대로 천을 끌어오느라, 제가 가져온 게 제 옷인 줄도 몰랐다.
하지만 남자는 아닌 듯싶었다. 그는 제 허벅지에 묶인 피범벅이 된 모스의 옷을 보고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짧게 혀를 찼다.
제 옷이 더러워서 그런 걸까.
모스는 기가 죽어 고개를 푹 숙인 채 조심스레 물었다.
“이제 괘, 괜찮은 거야?”
“나름.”
평소와 다름없는 남자의 얼굴로 돌아가니, 모스가 안심한 듯 남자의 옆에 붙어 묻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가…… 이, 이렇게 된 거야?”
“연못을 가던 중에, 무언가가 발밑에서 솟아나더니 막을 새도 없이 허벅지를 꿰뚫었다.”
그는 제 손에 묻은 진득한 진액을 짜증 섞인 얼굴로 옷에 문질러 닦은 뒤 혀를 짧게 찼다.
“바로 터트려 죽였지만, 허벅지에 박힌 꼬리에 뭐라도 들었는지, 몸이 이상하더군.”
그 몬스터 엄청 단단하게 생겼던데, 그걸 터트려 죽여?
남자의 악력이 대체 얼마만 한지 가늠이 되지 않아, 모스는 저도 모르게 무섭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남자의 손을 힐끔 본 뒤 조심히 물었다.
“그, 지금은?”
“괜찮다.”
괜찮다는 말에 모스가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자리에 풀썩 주저앉은 채 벌벌 떠는 손을 간신히 바닥으로 미끄러트렸다.
“다행이다. 나는 네, 네가 어떻게 되는 줄 알고…….”
모스는 남자가 피 냄새를 풀풀 풍기며 보금자리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미, 미안해. 내가… 피 냄새를 맡자마자 네게 갔어야 했는데.”
내 잘못이야. 모스가 그리 말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지혈을 하는 내내 남자가 혹여나 잘못될까, 스스로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눈이 올 때는 몬스터를 조심하라는 말을 하지 않은 것도 미안했고, 피 냄새를 맡자마자 밖으로 나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도 미안했다.
자책하듯 모스가 고개를 푹 숙이며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처럼 그렁그렁한 눈을 했다.
“이리 와.”
그때, 몸을 반쯤 일으킨 남자가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모스를 불렀다.
모스는 남자의 부름에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그의 옆자리에 앉았고, 남자는 그런 모스의 이마를 손끝으로 퉁 튕겼다.
“아!”
그게 퍽 아파, 모스가 제 이마를 손끝으로 문지르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너는 고작 그런 것에 내가 어떻게 될 것이라 여긴 건가?”
남자가 이상하다는 듯 모스를 보자, 그제야 모스는 안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그렇지? 너는…….”
강한 인간이니까. 모스는 뒷말을 삼키고 남자의 눈치를 살피는데, 남자는 평소와 달리 좀 졸려 보였다. 눈치가 빠른 모스가 늑대 가죽을 끌고 와 남자의 뒤에 깔아 주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눕혔다.
“자, 자게?”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잠을 잔다는 그가 이상한지 모스가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눈치를 살폈지만, 남자는 별다른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거, 상처는 어떻게 할까?”
“내버려 두면 낫겠지.”
“그래도, 더, 덧나기라도 하면…….”
“…….”
“……자?”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남자가 그새 잠든 것이다.
이렇게 갑작스레 잠든 남자를 보는 것은 처음인지라, 모스는 곧바로 자리를 뜨지 못하고 남자의 주위를 맴돌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스는 무엇이 약초이고 무엇이 독초인지 잘 몰랐지만, 남자의 환부에 도움이 될 법한 것을 가져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모스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독은 괜찮은 건가?’
사람 하나는 죽일 수 있는 독으로 알았는데, 남자에게는 효과가 없는 것이었나?
모스가 이상하다는 듯 눈을 깜빡이다 잠든 남자 몰래 살금살금 남자의 허벅지에 다가갔다. 다행히 피는 멎었는지, 천에는 아까 난 핏자국이 더 번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정말 괜찮은가 봐.’
피가 멎고, 남자는 잠들었다. 저렇게 평온하게 잠든 것을 보아서는 독이 그리 크게 번진 게 아닌 거 같다는 결론을 내린 모스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줄만 알았던 모스의 마음도 모르고 남자는 깊게 잠들어 있었다.
눈을 뜨면 무서운데, 눈을 감으면 인형이 따로 없는 도자기 같은 남자의 얼굴을 잠시 멍하니 보던 모스의 미간이 걱정스레 좁혔다.
깔끔하지 못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 남자가 걱정이 되었다.
제 옷까지도 매일 빨아서 입히려고 들 정도로 청결을 추구하는 남자인데, 지금은 다리가 피떡이 되어 있으니.
‘닦아 줘야겠다.’
저대로 눈을 뜨면 남자는 괴로워할 것이다.
조용히 남자가 깨지 않게 사뿐사뿐 구석으로 가 깨끗한 천에 물을 묻혀 온 모스가 조심스레 돌아왔다.
그리고 바지 밑단을 살짝 걷어, 피를 닦아 주려고 하는데.
“……어?”
모스는 그대로 얼어붙은 채 눈을 깜빡이며 제가 본 것이 맞는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드러난 다리는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부어 있었다.
굳은 얼굴로 다리를 보던 모스가 시선을 움직여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평온하게 잠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남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숨소리가 이상했다.
“……아.”
툭, 모스가 들고 있던 천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모스는 남자의 ‘괜찮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지만, 거짓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미 독이 퍼질 대로 퍼져 아무런 감각을 느끼지 못한 것이었다.
더는 정신을 차리지 않는 남자를 모스가 쓰다듬고, 껴안고, 열매를 짓씹어 먹였다.
하지만 무엇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들끓던 열은 어디 가고, 차게 식어 가는 남자를 껴안던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스는 처음으로 남자의 곁에서 숲 밖을 보았다.
***
동이 막 트기 시작할 때, 한 의원의 집 앞에 몬스터의 독에 당한 듯한 남자가 발견되었다. 발견된 남자의 옆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열매와 보석이 든 나무 상자가 있을 뿐 신원도, 이름도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뭐 하던 이인 줄은 모르나 상자 속의 보석은 퍽 탐이 나, 의원은 남자를 보살폈다.
하루, 이틀, 사흘……, 남자는 독에 여간 크게 당한 것이 아닌지 회복이 더뎠고, 눈도 뜨지 않았다.
생사를 몇 번이나 오갔을까.
명도 질긴 놈이라며, 상자 안에 들어 있던 보석이 아니었다면 버려도 진즉 내다 버렸을 것이라고 의원이 혀를 찬 지 어느덧 열흘째가 되던 날, 드디어 남자가 눈을 떴다.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남자는 감사의 인사 대신 의원의 멱살을 잡고 말했다.
“나는 제국의 황제, 루인 윈스다. 여긴 어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