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귀환 上 (4/21)

3. 귀환 上

“……황제 폐하요? 하하.”

터무니없는 말에 의원은 순간 멱살을 잡힌 것도 잊은 채 웃음을 터트렸다.

“여기는 변방 중의 변방인 라젠타 마을인데, 여기에 황제 폐하가 왜 계십니까? 당신이 황제 폐하시면, 저는 뭐 황궁의라도 됩니까?”

변방 중의 변방인 라젠타 촌구석에서 난데없이 황제라고 주장하는 이가 나온 게 어디 말이 되겠는가.

하하. 의원이 웃음을 터트리는데, 그런 의원을 보던 남자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는 화도 나지 않고, 웃기지도 않는 듯 그저 무표정한 낯으로 의원을 보다가.

“커억……!”

대뜸 그를 던져서 벽에 처박을 뿐이었다.

다친 이가 맞는지 의심될 정도의 엄청난 악력에 의원이 비명도 못 지르고 바닥에 엎어져 숨을 들이켰다.

순간 죽는 줄 알았다. 힘도 힘인데 남자가 죽기 직전에나 느낄 것만 같은, 엄청나게 강한 살기를 띠고 있었던 탓이다.

무섭다, 무서워.

방금 전 웃던 태도는 어디 가고, 공포를 이겨 내려고 하는 의원의 앞으로 남자가 다가왔다. 그러고는 간신히 몸을 반쯤 일으킨 의원의 턱을 대뜸 부술 듯 세게 붙잡고 물었다.

“그대는 혹 배움이 짧았나?”

“……허억.”

의원의 코앞에 조각상처럼 아름다운 남자가 있었다. 하지만 의원은 그 외모를 감상할 틈이 없었다.

아름답지만 기세가 무섭다. 보기만 해도 숨이 죄일 듯 긴장을 하게 만드는 남자라서, 사색이 된 의원이 벌벌 떨며 남자와 눈을 못 마주쳤다.

“내 눈을 똑바로 봐. 무엇이 보이지?”

억지로 강제로 고개를 들게 된 의원은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황가의 적통, 금안.’

황가의 적통에게서 내려오는 금안의 묘사는 특이하다.

사람을 잡아먹을 것처럼 몹시 사납다고 전해진 황가 적통의 금안은 태생적으로 사람을 압도하여 군주의 눈이라도 불리기도 한단다.

물론 그런 눈이 어딨냐며, 변방의 의원은 그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코웃음을 쳤다.

사람 눈이야 거기서 거기고, 황제가 어디 신이겠는가?

또한 어차피 변방에서 지내는 자신이 황제를 알현할 기회란 오지 않을 것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에, 한 귀로 듣고 흘린 정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보다도 선명하게 그 사실이 떠올랐다.

그 묘사는 그 무엇보다도 정확했다.

“…모, 몰라뵈어서 죄송합니다!”

이 눈을 보고도 그 누가 묘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시선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것만 같은 금수의 눈처럼 노란 금안. 의원이 압도되어 바들바들 떨다가 넙죽 엎드렸다.

만약 이 자가 현 황제가 맞다면.

“부,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필 역대 황제 중에서도 가장 잔악한 루인 윈스. 그다.

이곳이 수도에서 멀더라도 말은 발보다 빨라 귀로 들어오는 소문이 몇 가지 있었다. 특히나 현 황제에 관한 소문은 끔찍해, 잘 잊히지 않는 것이었다.

황제는 강하다. 인간을 초월할 수 있는 수준으로.

그러기에 자리에 앉을 때부터 수많은 이들을 죽이고 앉았는데, 맨손으로도 열 몇 사람을 죽였단다. 그뿐만일까. 사람을 벌레보다 못하게 여기며, 웬만해서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아 몇 번이고 신하들을 극한까지 밀어붙여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한다.

“어떻게 할까.”

하지만 지금 머릿속에 스치는 정보들은 죄다 의원에게는 죽음의 선고나 다름없는 정보였다.

머리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몹시 아름다웠으나, 별 감흥이 없었다. 그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빤히 의원의 머리통을 보았다.

살아야 한다. 의원은 간신히 목에 힘주고 소리쳤다.

“저, 저는 폐하의 목숨을 구해 드린 죄밖에 없습니다!”

“……네가?”

당장 의원을 죽일 듯 다가오던 그의 움직임이 일순 멎었다.

이때다. 이때가 기회다.

“예! 여기 앞에서 쓰러지신 채 발견되어서 고쳐 드린 것뿐입니다! 정말, 정말입니다요!”

의원이 냉큼 바짝 엎드리며 말했다. 툭 까놓고 얘기하자면 쓰러진 남자의 곁에 있던 보석이 목적이었지만, 구태여 그 말을 혀 위로 올릴 정도로 그는 멍청하진 않았다.

“…….”

침묵은 길었다.

의원의 말에 진위를 파악하듯 황제 루인이 가늘게 눈을 뜨고 의원을 보았으나, 머리가 지끈거릴 뿐 기억이 도저히 나지 않았다.

“물을 것이 있다. 고개를 들라.”

의원은 루인이 말하기 전까지 제 머리통이 반쪽으로 갈라지는 상상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다행히 신이 그의 편이었는지, 루인에게서 고개를 들라는 말이 떨어졌다.

“그럼 여기서 황궁에 연통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은 어디지?”

“황궁에 여, 연락을 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죄송하지만 저희 마을에는 그럴 만한 수단이 없고, 하루 정도 말을 타고 가면 그 마을을 지키는 기사들이 있습니다. 그 기사들이라면 황궁에 빠르게 연락을…….”

“여기서 황궁까지는?”

“모, 못해도 나흘입니다.”

“종이와 펜을 가져와라.”

빨리빨리 움직여야 살겠지. 의원이 벌벌 떨면서도 빠른 움직임으로 종이와 펜을 가져와 바쳤다.

“새것인가?”

“……예! 예, 그럼요!”

그는 의원이 새것이라고 말했음에도, 그가 건넨 펜을 더럽다는 듯 보다가 마지못해 제 손에 쥐고는 글자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어 종이를 대충 접은 뒤, 가장 윗면에 의원이 알 수 없는 문양을 펜으로 그리고는 의원에게 내밀었다.

“내가 적은 곳에 가서 이걸 전해라.”

“……네? 여긴 어디인지.”

당연히 황궁으로 가라고 할 줄 알았는데, 루인이 따로 내민 종이에 적힌 주소는 황궁이 아니었다.

“믿을 만한 자가 있는 곳이지.”

“하, 한데 제가 이걸 직접 말입니까?”

“여기 너 말고 누가 있지?”

“예, 예. 알겠습니다. 저 말 잘 탑니다! 그럼 내일 동이 트자마자…….”

“지금.”

두 번 묻는 것을 싫어한다는 얼굴로 루인이 보았다.

남은 답은 하나였다. 의원은 넙죽 엎드렸다.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말을 타야 하지만, 황제의 손에 죽는 것보다는 낫다.

의원이 울먹이며 동의하듯 고개를 숙이자, 그제야 루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루인이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의원은 왜 루인이 직접 가지 않는지 깨달았다.

‘괴물인가? 저 몸을 하고 그렇게 나를 내던진 거란 말이야?’

허벅지의 커다란 상처에서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탓이다.

그냥 상처도 아닌 허벅지를 관통한 상처기에, 엄청난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루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 그럼 저는 얼른 갔다 오겠습니다.”

의원은 얼른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혹 신경을 거스르게 된다면, 정말 가루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허둥지둥 먹을 것을 챙긴 의원이 집을 박차고 나갔다. 이어 그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다그닥, 잠시 눈을 감고 루인은 의원이 멀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소리가 안 들릴 때 즈음이 되어서야 그가 눈을 떴다.

눈을 뜬 그는 침대 옆에 있는 탁상 위 달력을 집었다. 그리고 곧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제 기억으로부터 반년이나 흘러 있었다.

기억을 잃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긴 시간이 지났을 것이라고는 미처 예측하지 못했다.

‘불쾌하군.’

누군가가 머릿속의 일부를 도려낸 것처럼 기억이 끊긴 느낌은 몹시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대체 그간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의원의 반응을 보아서 누군가의 반란이 일어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기에 그는 의원을 제 측근에게 보냈다. 아마 별일이 없다면 그가 기사단을 이끌고 이쪽으로 오게 될 것이다.

그럼 이제 루인이 할 일은 잃어버렸던 기억을 되찾는 노력을 하면서, 말을 탈 수 있을 정도로 제 허벅지의 상처가 낫기만을 기다리면 된다는 것인데.

“기묘한 느낌이군.”

그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곱씹듯, 묘한 표정으로 제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여기에 무언가가 빈 느낌인데, 그게 기억이라고 하기에는 무겁고, 심장이라고 하기에는 가벼웠다.

톡!

그때 창문 쪽에서 뭔가를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아주 작은 소리지만 모든 감각이 깨어 있는 루인에게는 확실하게 들렸다.

그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이내 짐승 같은 몸놀림으로 빠르게 창문을 확 열어젖혔다.

그리고 방금 난 소리가 무엇인지 확인한 그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열매?’

새빨간 열매들이 창가에 줄지어 놓여 있었던 것이다. 방금 전 톡 소리도 열매를 내려놓은 소리라면 말이 된다.

루인은 열매를 살폈다. 저마다 색이 다르고, 일부가 변색된 것을 보아하니 틀림없이 다 다른 날에 가져다 둔 거 같았다.

그는 묘한 표정으로 열매를 보다가, 이내 창 바로 아래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몸을 내밀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어둠 속 창가 아래에 몸을 웅크린, 이끼 같은 축축한 눈을 가진 작은 소년을 발견했다.

“…….”

루인의 시선이 탐색이라도 하듯 소년을 보았고, 이어 소름이 끼칠 정도의 적막이 흘렀다.

소년을 보면 볼수록 살수의 느낌은 들지 않았기에 방금 전 사람 하나를 잡을 것처럼 살벌해졌던 루인의 표정이 아까보다는 누그러졌지만, 완벽하게 풀리지는 않았다.

“……히끅.”

그때, 적막이 기묘한 소리와 함께 깨졌다. 적막을 먼저 깬 것은 루인이 아닌 주저앉은 소년 같은 남자였다.

저게 무슨 소리인지 파악을 하기도 전에 그는 돌연 울음을 터트렸다.

해초 같기도 한 이끼색 머리카락 틈 사이 즙이라도 나올 것처럼 새빨간 볼 위로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우, 으. 보, 보고 싶었, 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저 다 큰 남자가 어떻게 저리 어린아이처럼 우냐는 생각만 들 뿐이었는데, 루인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그새 몸을 일으킨 것인지, 창가를 올려다보는 이끼 같은 소년이 쭈뼛거리면서 대뜸 손을 내밀었다. 루인은 무표정한 낯으로 느릿한 소년의 움직임을 보았는데, 이어지는 그의 행동에 표정을 굳혔다.

“나, 는, 네가 어떻게, 된 걸까 봐……흐으.”

그는 루인의 손을 다 감싸기에는 터무니없이 작은 손으로, 그의 손을 필사적으로 감싸려고 했다.

세상 서럽게 울면서 말을 하는 탓에 소년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 루인은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했다. 대체 왜 보고 싶다고 한 것인지, 어떻게 된다는 뜻은 무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만 그는 그저 제 손등으로 얽히는 서늘한 체온이 거슬린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거슬린다는 생각.

쫘악!

“……아?”

울며 루인의 손을 붙잡던 모스의 머릿속이 크게 울렸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난 모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홱 돌아간 고개를 한 채로 허공을 볼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어 그의 머리 위로 벼락처럼 서늘한 음성이 꽂혔다.

“감히 짐이 누구인 줄 알고, 그 더러운 손을 가져다 대는 거지?”

삐그덕, 모스가 화끈한 뺨을 붙잡고 간신히 고개를 루인 쪽으로 돌렸다.

루인은 불쾌한 낯으로 모스가 쓰다듬던 손등을 털어 내듯 제 옷에 문지르며 모스를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천것아.”

모스의 눈이 크게 뜨이더니 이내 몸이 바짝 얼어붙었다.

그는 방금 남자에게서 맞은 고통보다도, 그의 표정에 더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모스를 정말 천것으로 보듯… 굉장히, 매우 불쾌하고 짜증이 난 것처럼 보는 그의 시선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모스는 그에게 도대체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묻고 싶었지만 너무 놀라 입을 제대로 뗄 수조차 없었다. 심장이 쿵 바닥으로 떨어지는 느낌에 그저 거미줄에 얽힌 곤충처럼 꿈쩍도 못 하고 굳는 게 당장 할 수 있는 행동의 전부였다.

그때, 루인이 창 손잡이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가차 없이 문을 닫으려 했다.

“자, 잠시만.”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창문을 닫으면 다음 기회가 없을 것 같아, 모스가 급한 마음에 대뜸 손부터 내밀었다.

루인은 분명 모스가 손을 뻗어 닫히는 창문을 막으려 하는 것을 알았지만, 문을 닫는 그의 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 결과.

“아, 악!”

결국 창틈에 모스의 손가락이 걸려 꺾였다.

모스가 비명을 질렀음에도 루인은 서늘한 낯으로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새빨갛게 붉어진 손가락으로 파들거리며 간신히 창틈을 붙잡은 모스는 혹여나 루인이 문을 아예 닫아 버릴까 허둥지둥 말문을 열었다.

“숨겨서 미, 미안해. 숲을 나가는 방법을 말하지 않아서, 내가 미안해. 내가 환각초를 다 뜯어 주면 너는 나갈 수 있었, 는데…… 내가 말을 안 해서, 네가…….”

모스는 루인이 기억을 잃은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다만 루인이 제가 숲을 나갈 방법을 숨겨서 화났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고개를 푹 숙인 채 연신 사과를 했다.

그때, 그런 모스의 머릿속에 지옥 같았던 그날이 떠올랐다.

남자가 몬스터의 공격을 받은 날, 남자의 몸은 이상했다. 불덩이처럼 열이 올랐다가도 차갑게 식는 것을 반복했다.

모스는 남자를 마을로 데려가야 한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숲 안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적었고, 모스의 지식 또한 한정적이었다.

다만 인간들의 민가에도 자주 출몰하는 몬스터이니, 인간들에게 해결책이 있다는 것만 추측할 수 있었다.

시간이 없었기에 망설임은 짧았다.

모스는 눈밭을 헤치고 걸어가 남자가 전에 환각초가 덜 났다고 말한 곳으로 향했다.

모스는 그곳에 가자마자 환각초 위에 쌓인 눈을 걷어 냈다.

눈이 환각초 위를 덮은지라 이 위를 걸어가도 괜찮겠지만, 남자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기에 위험은 최대한 배제하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모스는 환각초를 뽑아 내기로 결정했다.

땅이 얼어 손가락은 잘 들어가지 않았고, 도구를 사용해도 한계가 있었다.

파서 뜯고, 파서 뜯고. 환각초의 날카로운 단면에 모스의 손에는 수없이 많은 생채기가 났으며 땅을 파다가 돌에 손끝을 찧으면 손가락이 부러지기도 했다.

‘추워, 아파.’

아무리 몸이 원상 복구되는 괴물이라도 모든 고통은 다 느낀다.

손톱 아래로 피가 줄줄 흘러 땅에 스며들고, 발은 얼어붙다 못해 땅에 들러붙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모스는 이를 악물고 땅을 파 환각초의 뿌리를 그러쥐었다.

환각초는 인간들에게 무서운 존재지만, 모스에게는 이로운 존재였다.

환각초에 둘러싸인 숲에 웅크려 있으면 그 누구도 모스를 해치러 오지 않았고, 이상한 것도 꼬이지 않았기에, 지금 이 행동은 모스의 안전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모스는 멈출 수 없었다.

제가 위험해지는 것을 알면서도 보금자리 안에서 서서히 죽어 가는 남자를 상상하면 손이 먼저 움직였다.

‘내가 다쳤어야 했는데.’

힘없이 누워 있던 남자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계속 흘렀다. 모스는 환각초의 뿌리를 뽑는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쉬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손을 녹이면서 해야 하는데, 멈추는 법을 모르는 이처럼 계속해서 뿌리를 뽑았다.

그 결과 모스는 손가락 여덟 개가 부러지고, 손톱이 열여섯 번 뽑히고 나서야 길을 만들 수 있었다.

“꽈, 꽉 잡아야, 해. 알았지?”

그는 그 길로 남자를 업고 뛰었다.

혹여나 남자에게 피해라도 갈까, 길 바로 옆에 놓인 환각초 위로는 수북하게 흙과 눈을 쌓아 두었고 길은 울퉁불퉁 하지만 환각초 뿌리 하나 구경할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빨리, 빨리.’

온몸이 차갑게 언 모스는 발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추웠지만 뛰었다. 등에 맞닿은 체온이 마치 불꽃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그렇게 새벽, 동이 트기 직전 그는 간신히 마을에서 약초 향이 제일 많이 나는 곳 앞으로 갈 수 있었다. 다행히 인간들은 모두 잠들었는지, 바짝 긴장한 게 무색하게도 마을은 조용했다.

그리고 그곳에 남자를 조심히 눕힌 모스는 제 목숨처럼 여기던 것들이 담긴 나무 상자를 남자의 옆에 내려놓았다.

“여, 여기에 진귀한 것들을 넣었, 어. 그러니까 괜찮을 거야.”

남자가 들을 리 없는데도 주절주절 말을 하던 모스는 나무 상자를 두고 가기 싫은 듯 입술을 꾹 깨물고 나무 상자 겉면의 결을 손끝으로 매만지다 눈을 질끈 감았다.

인간들이 좋아하는 보석은 여기에 몇 번이고 넣어 그들에게 줄 수 있었지만, 열매는 아니었다.

남자가 모스에게 준 열매는 그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추억이었다.

하지만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소중한 것을 내밀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스는 알고 있었다. 이 말은 태어났을 때부터 머릿속에 있던 말이었다. 그래서 그는 제게 소중한, 남자가 준 열매들을 갖고 왔다.

‘동이 틀 텐데.’

곧 있으면 모스를 녹여 버리는 해가 뜰 것이다. 하지만 모스는 남자를 두고 쉬이 발을 떼어 낼 수 없었다.

언제 갈지 망설이던 모스는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남자의 옆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돌연 남자가 모스의 팔목을 붙잡았다. 깜짝 놀란 모스가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가지 마.”

그리고 대뜸 남자가 말했다.

목소리가 다 쉬고, 반쯤 뜬 금안에는 생기가 하나도 없었다. 가지 말라는 남자의 말에 모스는 태양에 녹아도 좋으니, 정말 그의 옆에 남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곳에 모스가 남는다면, 마을 사람들은 남자를 치료해 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미안해. 사실 나는 괴, 괴물이야.”

자신은 괴물이기 때문이다.

모스가 괴물인 것을 속여서 미안하다는 얼굴로 남자를 보았다.

속여서 욕을 하겠지?

다시는 얼굴을 보지 않겠다고 하겠지?

그러나 들려오는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알고 있었다.”

남자는 고통에 숨을 헐떡이면서도 간신히 눈을 뜨고 놀란 모스의 소매를 붙들었다. 그러나 이내 손은 미끄러지고, 모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런 모스의 뒤에서 남자가 말했다.

“나는 너를 데리고 갈 것이다.”

어디를 데리고 가냐고 모스는 묻고 싶었지만, 하나둘 귓가에 들려오는 인간들의 인기척에 발을 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게, 그날의 마지막이었다.

“……흐으. 화, 풀어 줘. 미안해, 미안해.”

데리고 간다는 말 하나 믿고 매일 선물이랍시고 창가에 열매를 둔 게 문제였을까. 그간 나가는 방법을 알고 있으면서 입을 다문 게 문제였을까. 아니면 두고 간 보석과 열매가 형편없던 게 문제였을까.

의식을 잃기 전 데리고 간다는 말과는 달리, 지금 남자는 다른 이를 보듯 모스를 보고 있었다.

‘미리 말을 했으면 저렇게 화를 내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랬다면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숲을 나섰을 것이다.

모스는 그날의 남자와 지금의 남자 사이의 간극에 서러움이 물밀듯 밀려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남자에게 사과했다.

“…….”

그리고 우는 모스의 모습을 보던 루인은 눈썹 한쪽을 불만족스럽게 올렸다.

충혈된 눈과 짓무른 눈가를 벅벅 문지르면서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하고 우는 이는 루인의 머릿속에 없는 사람이었고, 지금 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속이 뒤틀렸다.

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몇 달간을 이 이끼 같은 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래서 모스의 손가락을 자를 것처럼 꽉 붙들고 있던 창 손잡이를 놓았다.

“얘기 좀 하지. 들어와.”

“드…… 들, 들어와?”

모스는 예상치 못한 말을 들었다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루인은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문 앞에는 어찌저찌 섰는데 모스는 들어오지 못하고 머뭇거리기만 했다. 그러나 느린 모스의 행동에 루인의 눈이 서슬 퍼렇게 변하자 그는 허둥지둥 집 안으로 들어오는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집 내부를 처음 본 모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문 앞에 서서 안을 보았다. 아까 창문을 열었을 때도 내부의 훈기가 밀려왔는데, 문을 열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따뜻한 공기가 느껴졌다.

모스는 홀린 듯 집 안을 훑어보았다.

보금자리 내에서 가장 좋은 가죽이란 늑대 가죽이 다였는데, 이곳에는 등불도 여러 개 있었고 보드라워 보이는 여러 천들이 이곳저곳 예쁘게 장식되어 있었다.

좋은 냄새도 났다. 달큼하면서도 맛있는 냄새에 저도 모르게 코가 움직였다.

‘인간들은 이렇게 예쁘고 따뜻하고, 좋은 냄새가 나는 곳에서 지내는구나…….’

어둡고 쿰쿰한 냄새가 나는 딱딱한 보금자리와는 몹시 차이가 났다. 그래서 쉬이 들어가지 못했다.

그는 깔끔한 나무 바닥에 제 흙발을 내미는 것만으로도 큰 죄를 저지르는 거 같아 발가락을 꼼질댈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뭐 하는 거지?”

“가, 갈게.”

물론 그 느려 터진 행동을 루인이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루인이 그리 말하자, 모스는 허둥지둥 루인의 앞으로 갔다.

근데 루인의 시선은 모스의 얼굴로 향하지 않았다. 그는 기묘한 것을 보듯 모스의 뒤, 정확히 말하자면 바닥을 보았다.

그 시선을 모스는 저도 모르게 쫓았고, 그 결과 루인이 무엇을 보는지 알아챈 모스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미, 미안해. 미안해.”

숲에서 지내는 모스에게 신발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실내를 들어올 때, 신을 신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맨발로 들어온 탓에 흙 발자국이 나무 바닥에 고스란히 남은 것이다.

모스가 허둥지둥 엎드려서 제가 입고 있는 옷으로 발자국을 지우려고 했다.

“내가 얼른, 지울, 게. 미안해, 미안해.”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루인은 인상을 슬쩍 구겼다.

아까부터 좋지 않던 기분은 저 작은 이끼 인간을 집 안에 들여놓은 직후부터 점점 안 좋아지더니, 이내 바닥을 제가 입고 있는 옷으로 벅벅 문지르는 그를 보고 최악에 이르렀다.

“되었다. 그대로 내버려 둬.”

그는 간신히 화를 꾹 누르고 쓸모없는 짓을 그만하라는 듯 턱짓으로 문가의 실내화를 가리켰다.

모스는 허둥지둥 신발을 신었다. 신발은 너무 부드러웠다. 그간 모스가 신을 제대로 신지 못했던 이유는, 숲에 들어오는 이들의 발 크기가 모스와 죄다 달랐거나 신발 한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드라운 털 같은 게 달린 이 슬리퍼는 발 크기가 다르더라도 잘 신을 수 있었다. 모스는 그 감촉에 놀라 발긋하게 달아오른 뺨으로 신발을 봤다. 그러나 모스는 더는 신발의 감촉을 즐길 수 없었다.

“너는 누구지?”

머리 위로 벼락같은 말이 떨어졌다. 모스가 놀란 표정으로 루인을 보다가 덜덜 떨며 말했다.

“나를, 모, 몰라?”

“모른다. 기억을 잃었는데, 혹 그 시간 동안 내가 너와 함께 지냈던 것인가?”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자신을 잊었다는 말에 심장이 쿵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기도 했고, 손발이 잘린 것처럼 감각이 일순 사라지기도 했다.

잊힌다는 것은 이렇게 아픈 것이구나.

모스가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목 안쪽으로 간신히 넘기고, 덜덜 떨려 오는 양손을 깍지 껴 움켜쥐었다.

하긴 태도가 이상하기는 했다. 만나자마자 반갑다고 껴안는 사이는 아니지만, 생판 모르는 이를 대하듯 자신을 대하지 않았는가.

‘기억을 잃었구나.’

숲에 들어올 때 환각초로부터 살아남은 대신, 그 대가로 기억을 한 번 잃었던 이다. 그러니 또 잃었을 수도 있겠다며 모스가 그제야 더듬더듬 읊기 시작했다.

“나는 숲에서 너, 너를 주웠어. 너는 기억을 잃어서 네 이름도 모르고, 어디서 왔는지도 모, 모른다고 했어. 그리고 너는 나와 ……모, 몸을 섞었어.”

“내가 너와 몸을 섞었다고?”

루인은 모스를 위에서 아래로 느릿하게 관찰하듯 제대로 보았다.

엉망인 해초 같은 색의 머리, 가시지 않는 흙과 풀 냄새, 흙 범벅된 발바닥, 심지어 바지는 옷이라고 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흙으로 범벅이 되어 원래의 색을 알아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응, 네가 내 안에, 이렇게 들어왔었고. 다양한 방법으로 생식 행위를 해, 했어. 어떤 생식 행위였냐면…….”

“그건 됐고, 다른 얘기를 해.”

루인이 미간을 좁히기에, 모스는 루인의 눈치를 살피다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잠시였고, 이내 모스는 더듬더듬 그간 있던 일을 말했다.

“숲에서 너는 나, 나가려고 했어. 하지만 위험한 풀이 있어서 못 나가고, 나랑 같이 지내다가…….”

루인의 표정이 아무런 변화가 없는 반면, 주절주절 말하는 모스는 그 순간이 부끄러운 듯 몸을 종종 꼬았다. 이윽고 이야기가 끝날 때 즈음에 그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해, 했어…….”

모스는 말을 마쳤다. 그러나 돌아오는 말이 없다. 루인 쪽이 조용해도 너무 조용해 고개를 든 그는, 곧 루인이 좀 이상해진 것을 발견했다.

루인은 아까 이야기를 듣기 전보다 창백해졌고, 더부룩한 것을 삼켰다는 듯, 표정도 좋지 않았다.

“괘, 괜찮아?”

모스가 그것에 깜짝 놀라 루인에게 다가갔다.

역시 몸이 아직 덜 나은 것일까? 몸이 덜 나은 것인데 제가 괜히 들어와서 말을 한 게 혹여나 피해라도 준 건 아닐까, 허둥지둥 모스가 루인에게 다가가 루인의 몸을 살피려고 손을 내민 그때.

짜악.

루인은 걱정스러운 듯 손을 내미는 모스의 손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갈 길을 잃고 허공에 놓인 모스의 손, 그리고 그런 모스를.

“너 같은 천것과, 내가?”

루인이 경멸 어린 표정으로 바라봤다.

명백한 적의를 가지고 저를 보는 남자에 모스는 제 심장이 갈가리 찢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 나는…….”

나는 네가 내게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내가 또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어. 모스는 그리 말하고 싶었지만, 경멸 어린 루인의 얼굴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 그런 모스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루인의 표정이 일순 일그러지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썩은 것이라도 먹은 이처럼 비위가 상했다는 얼굴을 하고 헛구역질을 했다.

헛구역질은 잦아들 것처럼 보이다가도 모스 쪽을 보면 다시 시작되었다. 먹은 것이 없는지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헛구역질의 끝에서 루인이 간신히 입을 벌렸다.

“역겨워.”

루인은 모스를 보고 헛구역질을 한 것이다.

당장 앞에 있는 것을 조각조각 내 짐승의 밥으로 던져 내겠다는 의지가 담긴 듯한 명백한 적의(敵意), 경멸, 그 모든 감정이 모스에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보던 모스가 헛숨을 들이켰다.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보다도 더한 고통이 몸을 관통했다.

제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아 헐떡이던 모스가 루인의 시선에서 도망치듯 빠른 몸놀림으로 문을 박차고 나섰다.

“노, 녹아.”

온몸이 녹는 것처럼 아팠다. 남자와 함께 있는 사이, 해가 뜬 모양이다. 모스는 서둘러 응달로 가기 위해 허겁지겁 뛰어 숲으로 숨었다.

이 고통이라면 틀림없다. 하늘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해가 뜬 것이다.

뇌까지 녹아내릴 것만 같은 격통을 느끼며 모스는 뛰었다.

아프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왜 자신은 괴물로 태어나서 해를 못 보는 것일까? 한시라도 빨리 응달로 가서 고통을 없애야겠다며 모스가 바들거리는 몸을 붙잡고 간신히 숲에 들어왔다.

“아, 아파. 아파. 아파.”

그러나 이상도 하지. 분명 숲 안의 응달로 들어왔는데, 여전히 모스는 아팠다.

이럴 리가 없다. 혹 잎 틈새로 빛이 들어오는 걸까? 모스는 창백해진 얼굴로 숲속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나무 밑동 옆에 동그랗게 몸을 말았지만, 여전히 고통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여기까지 왔으면 이제 안 아파도 되는데, 왜 이렇게 아플까. 눈물은 언제부터 흐른 것인지, 그의 양 뺨은 축축할 정도로 젖어 있었다.

“흐, 아파. 아파아.”

모스는 계속 신음했다. 분명 응달 속으로 들어왔는데도, 몸이 녹는 거 같았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던 그가 대체 어디서 해가 들어오는지 보겠다는 듯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하늘을 확인한 다음,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밤이었다.

그제야 모스는 깨달았다.

처음부터 해는 없었다는 것을.

‘말도 안 돼.’

모스는 태양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자리에 동그랗게 떠 있는 달을 망연한 얼굴로 올려보았다.

피부가 녹는 것만 같고, 전신이 타들어 가는 것과 같은 작열감이 들었기에 당연히 해가 떠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그의 눈동자에 담긴 것은 해가 아닌 달이었다.

그럼 이 고통은 무엇일까?

해가 아니라면 지금 제가 느끼는 이 고통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멍하니 달빛을 보던 모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급히 뛰어나오면서 신은 어디에 내던졌는지 모르겠으나, 발이 흙 범벅이었다. 모스는 발을 멍하니 보았다.

-역겨워.

그때, 머릿속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그의 경멸 어린 눈이 자신을 노려보는 장면이 떠올랐다.

살기를 담은 짐승처럼 노란 눈이 저를 휘감았던 것을 떠올리자마자, 그는 제 입을 틀어막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뭔가가 역류하는 것처럼 속이 요동쳐서 구역질을 했지만, 정작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흡…….”

모스는 남자의 앞에 섰던 제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혼미했다.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고, 눈앞이 희고 검게 보이기를 반복하였다.

그는 그렇게 그곳을 뛰쳐나올 생각은 없었다. 그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는데, 저를 보며 역겹다고 하고 헛구역질을 하는 남자의 모습을 보자 그만 발이 먼저 움직였다.

‘기억을 찾은 건가?’

그곳에서 지내는 남자의 모습은 자연스러워 보였다.

행동 하나하나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누가 보아도 인간들과 많이 어울리고, 그들이 만든 터전에서 오래 살았던 인간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기에 모스는 남자를 보자마자 그가 이전의 기억을 찾았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잘된 일인가?’

남자가 엉망진창인 모습으로 생사를 오갈 때, 모스는 이 모든 게 제가 욕심을 내서 생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계속 빌었다. 더럽고 흉측한 모양으로 재생해 버린 검은 손톱을 하고 빌고 또 빌었다.

-무슨 짓이라도 할게요. 괴물인 내가 무슨 짓이라도 할 테니까 부디 이 인간을 살려 주세요.

제발 무엇이 되었든 인간을 살려 달라고 형체 없는 무언가에게 쉼 없이 기도한 결과, 남자는 다행히 사지가 멀쩡하게 깨어났다.

건강해 보였고, 이전에 잃어버린 기억까지 덤으로 찾았다. 하지만.

‘날…… 잊었어.’

모스가 고개를 숙였다.

정말 형체 없는 무언가가 제 소원을 들어주어 저와의 기억과 그의 목숨을 바꾼 것일까?

고작 기억과 목숨을 맞바꾼 일이라면, 이것으로 그친 것이 잘된 일이 맞았다.

하지만 모스는 마냥 남자의 건강 회복을 기뻐할 수 없었다.

역겹고 천한 이를 보듯, 자신을 새까맣게 잊은 남자를 떠올리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괴로웠다. 너무 괴롭고 사무치게 외로워, 눈물이 자꾸 줄줄 흘러나왔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연못에 발끝이 닿아 있었다.

연못, 모스와 남자가 종종 오던 연못이었으나 이제는 둘이 아닌 혼자였다.

모스가 주저앉아 연못 앞에 쭈그려 앉자, 달빛이 부스러지는 표면 위로 얼굴 하나가 그려졌다.

가만히 제 얼굴을 보던 모스가 손을 뻗어 제 얼굴에 달린 것들을 하나하나 만지작거렸다.

흐느적거리는 이끼색 머리, 흐리멍덩한 이끼색 눈, 아래로 축 처진 입꼬리, 우울한 인상, 시꺼먼 손톱, 흙 범벅 발…….

“천것.”

잇새로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은 모스가 제 얼굴을 찰흙처럼 조물거리던 손을 우뚝 멈추었다.

두근, 방금 전 간신히 잦아들었던 심박수가 그 말이 기폭제인 양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천, 것.”

남자는 저를 보고 천것이라 했다.

그 기억이 강렬했던 탓이었을까. 모스는 저도 모르게 제 얼굴을 보고 천것이라 읊조렸는데, 갑자기 아까부터 뺨에 인사라도 하듯 살랑이던 풀이 거슬렸다.

모스는 풀을 밀어 내듯 살짝 옆으로 치웠지만 여전히 뺨은 간지러웠다. 결국 그는 간지러움을 이기지 못해 손끝으로 살살 제 뺨을 긁었다.

하지만 간지러움은 해소되지 않았다. 뺨에 풀이 붙거나 닿은 것도 아니고, 잔벌레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얼굴이 기이할 정도로 간지러웠다.

“천것, 천것.”

‘천것’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더 간지러웠다. 손끝으로 살살 제 뺨을 긁던 움직임이 점점 거세졌다.

멍한 눈으로 같은 말만 반복하며 제 뺨을 긁던 그때.

“아.”

손톱이 깊게 들어가 결국 피를 보았다.

잠시 손을 멈춘 모스가 연못 표면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아픔에 굉장히 예민한 모스기에, 평소 같았으면 제 뺨이 아프다고 난리란 난리는 다 쳤을 테지만 지금은 이상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이처럼 표면에 비친 제 얼굴을 바라보더니 이제는 더는 긁는 수준이 아니라 얼굴을 도려낼 것처럼 후벼 파기 시작했다. 손끝이 눈알을 스치고 지나가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연신 그의 손끝에서 살점이 쥐어뜯겼다.

‘천것’이라는 말을 반복하며 제 얼굴을 도려낼 것처럼 긁어 대던 모스의 손은 수면 위로 핏방울이 떨어져 제 모습이 흐려지자, 그제야 우뚝 멈추었다.

제가 무엇을 한 것인지 멍한 표정으로 손바닥을 보자, 그곳에는 뺨에서 흘러내린 피들이 잔해처럼 묻어 있었다.

“내, 냄새.”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연못 안의 제 얼굴도, 피도 개의치 않았다.

다만 코끝을 스치는 혈향은 확실하게 맡은 듯, 제 몸의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나, 냄새나?”

그렇게 한참을 어딘가 넋이 나간 것만 같은 얼굴로 미친 듯이 제 몸의 향을 맡던 모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숲에서 지내는 그에게 밴 향이 이상한 냄새일 리가 없었다. 그저 나 봤자 풀 냄새가 다일 텐데, 모스는 그게 아닌 것처럼 보였다.

“여, 역겨워. 그래서, 역겨워서 인간이 날 보고…….”

한참을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제 몸의 냄새를 맡던 모스가 허둥지둥 옷을 벗었다. 그리고 누가 뭐라 할 새도 없이 연못 안으로 들어갔다.

풍덩, 벌거벗은 나신으로 시리도록 차가운 연못에 다짜고짜 뛰어드니, 당연히 몸이 절로 벌벌 떨렸다.

이가 딱딱 서로 맞물려 부딪칠 정도의 추위였으나, 모스는 머리끝까지 연못에 집어넣었다. 그는 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오히려 무서워하는 편에 가까웠지만 어떻게든 꿋꿋하게 물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제 몸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벅벅벅, 물속에서 눈을 뜬 모스는 미친 듯이 제 몸을 문질렀다.

가장 먼저 문지른 것은 머리였다. 그는 손가락 사이로 얽히는 해초 같은 머리카락을 문지르고, 이어 피부를 문지른 뒤 수면 아래로 깊이 제 몸을 밀어 넣었다.

‘혹시 눈알에서 냄새가 나는 건 아닐까? 혹시 내 목구멍에서 냄새가 나는 건 아닐까? 혹시…….’

숨을 쉬기 위해 수면 위로 고개를 들자마자 그가 하는 일은 냄새를 맡는 것이었다. 이미 충분히 씻다 못해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몸을 문질렀는데, 모스는 제 몸의 냄새를 계속 맡고 또 맡았다.

하지만 이상도 하지.

“아, 안 사라져. 안 사라져.”

냄새가 계속 났다. 비릿한 혈향에 모스가 새하얗게 질린 낯으로 손톱을 세워 제 피부를 긁어냈다.

하지만 혈향이 사라질 리가 없었다. 상처가 아물기 무섭게, 손톱으로 파내니 피비린내가 아까보다 더 심하게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모스는 그 당연한 것을 알아챌 정도의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제 몸에서 비린내가 난다 생각하여 연신 몸을 닦아 내고 긁어냈다.

너무 많이 문질러서 피부가 까졌다. 살점이 뭉텅뭉텅 도려내졌다. 그럼에도 그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물속에서 눈을 뜨는 바람에 눈에 핏줄이 다 섰다. 그런 눈을 하고도 그는 이를 악물고 물속에 제 얼굴을 밀어 넣어 몸을 문질렀다. 그리고 제 옷도 벅벅 문질러 빨았다.

연못 곳곳은 얼어 있었는데, 그런 차가운 물에 오래도록 있으니 입술이 새파래지다 못해 시체처럼 검게 죽었다. 그러나 생기를 잃은 입술과는 달리 그의 피부는 온통 새빨갰다.

계속 손으로 문지르고 긁어내는 바람에 어느 하나 붉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물속에 있던 모스가 간신히 벌벌 떨며 연못을 나와 바닥을 밟았다. 그가 쪼글쪼글해진 제 옷을 간신히 펴 입은 다음 도로 제 몸의 냄새를 맡았다. 하지만.

“……내, 냄새가 나.”

여전히 냄새가 가시지 않는 것만 같았다.

분명 이렇게 물로 씻어 내면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아야 하는데, 여전히 제 몸에서 역겨운 향이 나는 것만 같았다.

냄새가 없어야 인간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보고 헛구역질을 하며 내쫓을 것이다.

돌아가려면 씻어야 한다. 깨끗해야 한다.

모스는 남자를 떠올리며 다시 연못으로 들어가 씻으려고 했지만 더는 이곳에 있을 수 없었다.

“태양.”

어느덧 해가 떠오를 기미가 보였다.

아침의 향을 맡은 이상, 더는 지체하지 말고 보금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결국 모스는 보금자리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따닥따닥, 추위로 이가 맞물리고, 피부는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새하얗게 질리다 못해 당장이라도 고꾸라질 것처럼 창백한 모스의 잇새로 입김이 나오고,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동그랗게 물웅덩이가 생겼다.

‘깨끗하게 씻어서 가면, 더는 날 천것이라 하거나 역겹다고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다 보면 기억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얼어붙은 모스의 머릿속에는 깨끗하게 씻고 나서 남자에게 가야겠다는 생각 하나만 남았다.

그렇게 돌아간 모스는 다음 날, 해가 지기 무섭게 연못에서 몸을 씻었다. 그러나 비린내는 가시지 않았다.

그다음 날도 모스는 몸을 씻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제 몸이 역겹게 느껴졌다. 모스는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씻고 또 씻었다.

하지만 며칠을 씻어도 그는 여전히 제 몸에서 안 좋은 냄새가 나는 거 같았다.

그리고 결국, 그날이 왔다.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수많은 기사가 모였다. 황제의 귀환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

모스는 밤이 되자마자 보금자리를 나서 숲 너머를 빤히 응시했다.

숲이 소란스럽다. 정확히 말하자면 숲 너머인 것 같았다.

잠시 눈을 감으니, 여러 개의 발자국 소리가 섞여 들렸다. 저 너머에 마을 사람들 여럿이 몰려 있는 것 같은데.

“낯선 사람.”

이 근방에서 듣던 소리는 아니었다. 틀림없이 낯선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묘하게 이상했다. 낯선 외지인이 오는 일이야 있을 수 있지만, 달랐다. 손끝을 맞대고 눈을 꾹 감은 채로 가만히 있던 모스의 눈이 딱 떠졌다.

‘쇠.’

묵중한 쇠들이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틀림없이 무기일 것이다.

어차피 그는 인간들이 들어오지 못하는, 환각초에 둘러싸인 숲에 사는 유일한 괴물이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모스는 몹시 불안한 표정이었다.

‘인간.’

몸이 앞섰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좋지 않은 느낌 또한 작용했다. 미친 듯이 숲 사이를 헤집으며 달려가려고 한 곳은 남자가 머무르던 집이었다.

그러나 집이 보이자마자, 모스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제 앞에 있는 커다란 나무에 재빨리 몸을 낮춰 제 몸을 숨기고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벌렸다.

인간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살면서 인간들이 이렇게 많이 있는 모습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대체 왜 이렇게 많은 인간들이 남자의 거처 앞에 드글드글 모여 있는지는 알 수 없었기에, 모스는 몰려 있는 이들의 행색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남자의 거처 앞에 있는 이들은 죄다 새까만 망토 같은 것을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망토로도 감출 수 없는 육중한 몸을 하고 쇠 냄새를 풍겼다.

모스가 손가락을 꼼질거리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설마 해치려는 걸까? 어쩌지.’

모스는 제 몸에 코를 가져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

매일 밤이면 손가락의 지문이 쪼그라져서 닳아 버릴 정도로 몸을 씻어 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냄새가 나는 거 같았다.

‘나는 역겨운 천것.’

가 봤자 들을 말은 뻔했다. 그는 또 모스에게 역겹고 천하다고 구역질을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말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모스의 전신은 사시나무 떨리듯 덜덜 떨려 왔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속이 울렁거리고 뒤집혀서 꼼짝도 못 하던 그때, 끼이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모스의 시선 끝에 드디어 남자가 보였다.

“아…….”

모스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제 앞에 끝없이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놀랄 법한데도, 마치 예상이라도 한 양 별다른 표정 변화가 크게 없는 남자는 그저 아름다웠다. 이 어둠 속에서도 선연하게 보일 정도의 아름다움이었다.

집 내부에서 새어 나오는 빛에 반사된 찬란한 금발은 별 가루를 뿌린 양 빛이 났고, 짐승같이 노란 눈은 반쯤 감긴 채 앞을 보았다.

하지만, 모스는 마냥 저 얼굴을 보고 멍하니 홀려 있을 수 없었다.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가려워.’

모스가 제 팔을 긁었다. 하지만 손가락으로 몸을 문지른다고 해서 그 간지러움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손끝을 날카로이 세운 채 팔뚝을 미친 듯이 긁었다. 살이 파이는 것이 느껴졌으나, 모스는 멈출 수 없었다.

‘아파, 가려워, 아파, 가려워.’

남자가 문에서 나오자마자 시작된 이 가려움은 해소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팔이었으나 팔을 타고 어깨까지 가려워지더니, 이내 목까지 가려워져서 목을 긁었다.

모스는 본능적으로 이 가려움을 제거하려면 남자에게서 시선을 거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이 올가미에 사로잡힌 이처럼 반짝반짝 빛이 나는 남자에게로 계속 향하던 그때, 미친 듯이 몸을 긁던 모스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앞에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이들이 그리 외치고는 단숨에 한쪽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일사불란한 동작이었다. 어느 하나 흠잡을 데가 없을 만큼 빠르고 순식간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동작은 모스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황제?’

제국의 태양, 제국의 황제라 하면 인간들 사이에서도 가장 귀한 이 아닌가.

그 땅에서 사는 이들이 모두 복종해야 하고, 말을 따라야 하는 이가 황제다. 가장 귀하고 고귀한 황제가, 모스와 살을 섞은 인간이었다.

그가, 남자라고?

“일어나라.”

루인은 제 앞에 있는 이들을 빤히 보다 일어나라 말했다.

그러자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이들이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뒤집어쓰고 있던 망토를 벗었다.

모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강인하고 단단한 육체를 덮은 화려한 의복 위에는 그보다 더 화려한 문양이 수놓아 있었다. 황가의 문양이었다.

그렇게 망토를 벗은 그들은 루인을 감쌌다.

그들과는 달리 루인은 무척이나 질이 떨어져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서 가장 빛났다.

“카를. 그간 있던 일은 다음에 설명하고, 지금 섭정을 맡은 이는 누구지?”

“예, 폐하! 치테이르 황태제 전하입니다.”

루인이 익숙한 듯 가장 앞에 있던 이에게 말을 걸자 곧바로 절도 있는 목소리가 답했다.

“상황은.”

“쉬쉬하고 있었으나, 아마 상위 귀족들 몇몇은 폐하의 실종을 눈치챈 것 같습니다.”

“쯧.”

“저희의 미숙함 때문입니다. 죄송합니다!”

혀를 차면서도 루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곤란한 기색이라고는 없지만, 그의 앞에 있던 기사들은 마치 죽을죄를 지은 듯이 고개를 푹 숙이며 황제에게 온전히 제 머리 뒷부분을 드러냈다.

모스는 그 모든 동작을 나무 뒤에 숨어 멍하니 지켜보았다. 몇 발자국 걸으면 닿을 자리에 남자가 있었는데, 이상하게 너무나도 멀어 보였다.

닿으려야 닿을 수가 없는, 까마득한 거리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 수가 적지 않은 게 문제였을까.

제아무리 기사들이라고 해도 인기척을 온전히 지우는 것은 불가능한지, 주변에 있던 집에 불이 하나둘 들어오더니 이내 밖으로 마을 사람들이 이 광경을 발견했다.

“뭐가 이리 소란스러워?”

“뭐야, 무슨 사람이……?”

영문도 모른 채 잠기운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을 하고 밖을 내다보던 사람들은 황실 문양이 박힌 기사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과 그 사이에서 홀로 허리를 펴고 서 있는 사내를 발견하자마자 굳어 버렸다. 그 사내는 황가의 특징이라고 불리는 새하얀 백금발과 짐승 같은 노란 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기운이 싹 달아난 주민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화, 황제 폐하?”

“맙소, 사. 제, 제,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으나, 일단 냅다 엎드렸다.

그 황제였다.

제 아비마저도 잔혹하게 죽이고, 아비와 손을 잡은 이들 또한 싹 다 죽여 한때 황성에서 묫자리를 씨가 마르게 만든 루인 윈스.

물론 국정 자체만 두고 보자면 루인은 사람들에게 오히려 전대 황제보다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초반 권력을 다잡는데 흘린 피를 잊을 수는 없었다.

마치 세포에 각인되듯 제국민들이 공포에 떠는 것은 당연지사고, 이런 촌구석의 주민들에게는 더했다. 그들은 황제의 눈빛만으로도 실금을 지리는가 하면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폐하, 죽일까요?”

그 모습을 보던 기사단장이 루인에게 작게 물었다. 아마 황제의 움직임에 대한 소문이 날까 해서 물은 모양이었다.

“…….”

사람을 죽이냐고 묻는 기사 단장 카를도, 루인도 둘 다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사람 몇을 죽여도 대수롭지 않아 하는, 일상적이고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얼굴을 멍하니 모스가 보았다.

‘……맞을까?’

그는 순간 저 사람이 제가 아는, 보금자리에서 같이 지내던 인간이 정말 맞을까 싶었다.

루인의 앞머리가 바람에 흩날려 뒤로 젖혀졌다. 훤히 드러난 이마 아래 수려한 얼굴은 모스가 기억하는 인간의 것이었지만, 저 표정은 아니었다.

딱 인형 같았다.

어느 감정도 담지 않은 얼굴이 딱 저리 생겼을 거 같았다. 생명의 기운이란 담기지 않는, 마치 시체 같은 표정에 소름이 돋아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귀찮다. 바로 황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소름이 돋은 것도 잠시, 모스는 돌아간다는 얘기에 고개를 퍼뜩 들어 올렸다.

돌아간다고? 황궁으로?

“시간이 없으니, 그간 있던 일은 가면서 설명하지.”

“예,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루인이 고개를 돌렸다. 카를이 그런 루인을 호위하며 말을 세워 둔 곳으로 향하려는 듯, 손짓했다. 그 손짓에 뒤에 있던 기사들은 누가 뭐라 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대열을 맞추어 따라붙었다.

‘떠나?’

바스락, 멍하니 서 있던 모스가 발끝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떠난다고?’

이상했다.

지금도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면서, 그의 얼굴만 보면 속이 쥐어짜지는 것처럼 아파 와 제대로 앞에 서 있지도 못하면서 몸이 절로 움직였다.

왜냐하면 그가 떠난다는 말 하나가 여태 겪었던 모든 아픔보다도 더 아팠기 때문이다.

모스는 남자가 이곳을 떠난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더 발을 내뻗었는데.

“이봐. 너는 누구지?”

순식간이었다. 황제의 뒤를 따르던 기사들이 눈 깜짝할 새에 모스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

모스가 깜짝 놀란 얼굴로 멈췄다. 땅에 발이 닿는 소리조차 없었다. 허공에 옷이 나부끼는 소리마저도 없었는데, 이토록 빠르게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것일까?

만약 모스에게 순발력이 조금이라도 없었다면, 저 칼끝은 틀림없이 모스의 목에 박혔을 것이다. 그 정도로 기사들의 검은 빠르고 가늠할 새가 없는 것이었다.

“뭐지?”

그리고 뒤에 있는 소란을 알아챈 듯, 앞서 걷던 루인이 멈추어 뒤를 돌았다. 그리고 정확히 모스를 보았다.

“아.”

이성보다는 본능이었다.

모스는 저를 잊은 남자가 자신을 역겨워하고 싫어하는 것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남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눈에 그를 담았다.

루인은 걸음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기사들 사이에서 멀찍이 모스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모스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날 데, 데려간다고, 했잖아.”

머저리 같은 말임을 안다.

그는 어차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또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자신과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을 것 정도쯤도 안다.

하지만 뭐라도 내뱉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지 않는다면 몸이 펑 하고 터질 것처럼, 속이 아팠다.

갑작스러운 모스의 말에 루인은 걸음을 멈춘 채 빤히 그를 바라봤다. 황제의 시선이 허락이라 여겼는지 모스의 목에 칼끝을 대던 기사 셋도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루인의 시선은 차가웠다. 예의 아무런 표정 없는 얼굴에 담긴 아무런 감정 없는 눈빛.

모스는 그 시선이 닿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도려내지는 것처럼 아려 왔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돌연 제가 입고 있던 웃옷을 벗기 시작했다. 훤히 드러난 맨몸은 지나칠 정도로 하얗고 창백해서, 이 어둠 속에서도 확연하게 두드러졌다.

“나, 나 씻었어.”

모스가 팔을 벌렸다.

“매일매일 씻어, 씻었어. 네가 여, 역겹다고 해서, 처, 천것이라 해서 씻었어. 손바닥이 지, 짓무를 때까지 씻었어. 나, 이제 조금 깨, 깨끗해.”

깨끗한지는 아직 확신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안 하면 정말 남자가 자신을 안 데려갈까 봐, 모스는 초조함에 계속 말했다.

“내, 내가 천것이라서 싫은 거면 내가 더 마, 많이 씻을게. 덜 천것이 되, 되도록 노력할게. 으, 응?”

그러나 남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남자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히고 세상이 핑 도는 것 같았고 손발이 벌벌 떨리다 못해 제대로 힘도 못 주었지만 모스는 멈추지 않았다.

“나 데, 려가. 나 데려가. 네가 나, 나를 길들였잖아. 날 두고 가지 않, 않겠다고 약, 속했잖아. 나를 데려가. 내가…….”

어물어물, 어눌하게 눌린 발음으로 한 글자씩 꼭꼭 씹어 말하듯 말하는 모스를 보던 기사 세 명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폐하께서 아시는 분입니까?”

결국 카를이 루인에게 물었다.

여전히 모스는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어물거리며 말을 잇고 있었다. 그런 모스를 가만히 쳐다보던 루인의 무거운 입이 드디어 열렸다.

“아니. 모른다.”

그 말에 모스의 눈이 크게 떠졌지만, 이내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너는 나를 아, 알아. 너는 나를 잠시 잊은…….”

그러나 모스의 말은 이어질 수 없었다.

더듬거리며 말하는 모스의 말을 싹둑 잘라 낸 루인이 돌연 성큼성큼 걸어와 모스의 앞에 섰기 때문이다.

바로 앞에 서 있는 루인, 그리고 그런 루인을 올려다보는 모스.

루인은 말없이 모스의 이끼색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유독 동그랗고 유리알 같은 눈동자였다. 그 동그란 녹색 눈동자에 루인의 모습이 담기는데…….

“많이 씻어서 역겹지 않다고?”

그는 방금 모스가 한 말들을 죄다 들었는지, 그리 물었고 홀린 듯 루인을 바라보던 모스는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였다.

“으, 응. 나는 씻었어. 많이 씻었어. 그러니까 이제는 더, 덜…….”

“넌 씻으면 천한 태(胎)가 사라지는 줄 아는 것인가?”

루인이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웃었다. 그의 미소는 서늘했지만 아름답고 산뜻했다.

그 미소에 모스는 순간 울렁이는 속도 잊고 그의 얼굴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그런 모스의 귓가로 루인의 입술이 향했다.

마치 모스의 귀에 입술이 닿을 것처럼, 두 사람은 가까이 붙었다. 하지만 입술은 닿지 않았다. 손가락 한 마디의 반 정도의 거리를 남긴 채로, 멈춘 루인이 입을 열었다.

“너는 평생을 씻어도 소용없어.”

다정한 말투.

모스의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러 루인에게 향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날 때부터 역겹고 천했을 테니.”

죽을 때까지 똑같겠지.

귀가 녹아 버릴 정도로 다정히 속삭인 루인이 고개를 들었다.

모스는 말을 잃은 모양새였다. 그는 멍하니 제게서 몸을 거두고 뒤를 돌아 걸어가는 루인을 보았다.

그리고 그런 루인에게, 모스의 목에 칼을 여전히 겨눈 세 명의 기사 중 하나가 물었다.

“폐하. 이것의 처분을 어떻게 할까요?”

루인은 모스를 등지고 걸었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그리고…….

“죽여.”

세 발자국.

“예. 알겠습니다.”

푸욱, 순식간에 모스의 몸을 세 개의 칼이 파고들었다. 하나는 목을 꿰뚫고, 하나는 심장을 꿰뚫고, 하나는 명치를 꿰뚫었다.

세 군데에 푹 파고든 칼끝은 들어온 속도만큼 빠르게 빠져나갔다.

퐁퐁 솟아나다 못해 분수처럼 미친 듯이 쏟아져 나오는 피. 반동으로 옆으로 쓰러지는 모스는 이 모든 장면이 느리게 보였다.

모스는 손을 뻗었다.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루인이 멀어져 갔다.

루인은 끝까지 뒤돌지 않았다.

이토록 가까운데, 이토록 멀었다.

2권에서 계속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