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몬스터, 디어 히어로(Dear Monster, Dear Hero) 2
3. 귀환 下
260년 전, 마왕의 죽음과 동시에 제국은 얼어붙었다.
마왕이 무슨 저주를 내렸는지는 몰라도, 제국에서는 그 이후 봄은 오지 않았다. 뒤늦게 마왕과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용사는 이유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며, 그를 찾으려고 해 보았으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갑작스레 찾아온 겨울에 온 나라가 혼란스럽던 사이, 용사의 행방이 묘연해진 탓이다.
간신히 진정된 뒤 용사의 실마리를 찾아냈으나, 그땐 이미 늦었다. 용사의 흔적은 얼어붙은 호수가 마지막이었다. 한 치의 틈 없이 얼어붙은 호수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용사가 지녔을 성물조차 얻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런 제국민들이 의지할 곳은 신과 기도뿐이었다.
봄이 오는 법을 알아내기 위해 황가의 사람들은 매년 제국건립 기념일에 신전을 찾아 신의 말을 듣고자 제사를 지냈고, 그건 시간이 흘러 하나의 전통이 되었다.
루인 윈스가 사라진 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날은 특별한 날이었다. 윈스 제국이 제국력 370주년을 맞이한 날이었고, 그날도 어김없이 루인 윈스는 건립 기념일을 맞아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전에 들어갔다.
물론 다들 허례 의식임은 알았다.
260년 동안, 여태 신의 말씀은 제대로 들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신전의 신관들이 신성력을 쓰는 모습이 보였기에 이 의식이 유지된 것이지, 만약 신성력을 쓰는 모습조차 없었다면 루인은 신전을 다 헐어 버렸을 것이다.
-신전을 싹 다 없애고 싶군.
신성력이 남아 있다는 것은 어찌 되었든 신이 있다는 뜻.
무신론자에 가까운 루인은 그날도 성가셔 미치겠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신전으로 들어갔다. 어린 시절, 전 황제에게 수도 없이 봄을 찾아오라고 시달린 루인은 신전을 제집처럼 많이 드나들었기에 신전을 혐오했고, 그래서 오래 머물지 않았다.
한데 그날은 이상했다.
이미 나오기로 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루인이 나오질 않는 것이었다. 그는 예정보다도 긴 시간이 흐른 뒤에 나왔고, 들어갈 때와는 사뭇 표정이 달랐다.
카를은 그날 황제의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여태 그랬던 것처럼 따분한 표정이 아닌, 무언가를 명백하게 들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루인은 침묵했고.
-폐하께서 사라지셨다고?
사라졌다.
감쪽같이 사라진 황제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황제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제국과 물 건너 타국에 알려지면 큰 혼란을 야기할 것을 알기에 실종을 대대적으로 알리지 못했다.
그저 황제의 배다른 동생인 치테이르가 섭정을 맡고, 측근인 카를 하르세나를 중심으로 황제를 찾는 게 당장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하지만 이상도 하지.
제국 어디에서도 황제를 찾을 수 없었다. 열흘이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반년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제가 찾겠습니다.
그러나 카를 하르세나는 포기를 몰랐다.
그가 아는 황제는 제가 아는 인간들 중 가장 강한 인간이었고, 가장 괴물 같은 이였으니 죽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반년이 흐른 뒤에야, 카를은 황제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의원을 만나 드디어 제 주군인 루인을 찾을 수 있었다.
“다 물러가라.”
“예!”
며칠을 쉬지 않고 달려오는 바람에 말들은 잔뜩 지쳤다.
지친 말을 세워 둔 카를은 다른 기사들을 다 물리고 황제와 둘이 남았다.
카를은 손에 들린 물을 벌컥벌컥 마신 뒤, 흐트러짐 없이 나무에 기댄 루인에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폐하. 이제 둘이 되었으니 말씀해 주시죠. 대체 그간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카를은 루인이 말도 없이 사라져서 반년간 자리를 비웠으니, 그가 엄청나게 중요한 일을 처리하고 왔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돌아온 말은 너무나도 황당한 것이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예?”
카를은 제 귀를 의심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니?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루인 윈스가 얼마나 소름 끼칠 정도의 기억력을 가진 자인가. 그는 서너 살쯤 제게 조금이라도 못되게 굴었던 이들을 다 기억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죄다 죽여 버린 자였다.
“정말, 이십니까?”
카를은 믿을 수 없었지만, 루인은 허투루 거짓이나 농을 할 이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기에 그 말을 고스란히 믿을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부터 기억이 나지 않으십니까?”
“짐이 신전에 들어간 이후, 전부.”
“신전에 들어간 이후요?”
그러나 기억의 공백이 커도 너무 컸다.
카를이 놀란 가운데, 루인은 묵묵히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신경질적으로 구겨진 눈썹을 보아하니, 본인 또한 사라진 기억이 영 마뜩잖은 듯싶었다.
“그럼 반년간 어떻게 지내셨는지 전혀…… 모르신다는 말씀이십니까?”
“…….”
침묵은 긍정이라고, 루인은 또다시 답하지 않았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아니, 그럼 여태 어떻게 지내신 겁니까? 저희 쪽으로 보낸 의원은 폐하를 최근에 만났다고 했으니 그간 그와 같이 지낸 것은 아닐 테고. 같이 지낸 사람은 없었습니까?”
여태 딱히 큰 반응이 없던 루인이었으나, 그 말에는 반응했다. 어둠 속에서 앞만 보던 루인의 미간이 일순 꿈틀거렸다.
그 꿈틀거리는 미간을 보던 카를은 순간적으로 방금 전 죽인 소년에 대해 떠올렸다.
“……설마 오늘 죽인 그 소년은 아니죠?”
그러고 보니 그 소년이 루인 보고 이상한 말을 했었다. 데려가기로 했지 않았냐느니, 뭐 이해할 수 없는 말들도 그렇고.
하지만 카를은 이내 제 말이 터무니없음을 알아챈 듯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시겠죠. 딱 보아도 아랫것이었는데.”
황제는 지독한 전쟁터를 전전했던 시절을 제외하고, 그 어느 하나 질적으로 최상급이 아닌 곳에서 살아 본 적이 없는 자이다. 그건 장소와 물건뿐만 아니라 사람도, 짐승의 혈통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주위에는 뼛속부터 귀족과 황족의 프라이드를 가지다 못해 콧대가 하늘을 뚫을 것만 같은 이들로 가득했고, 그런 이들 사이에서도 루인은 가장 꼭대기에 앉아 있었다.
“제가 실언했습니다, 폐하.”
그런 그가 그 소년과 어울렸다는 것은 말이 안 되었다.
루인이 그를 천것이라 했나. 카를이 혀를 말아 루인이 말했던 것을 고스란히 곱씹고서는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더 소년을 표현할 만한 단어는 없었다.
혈통을 극히 따지는 루인의 성미상, 기억을 잃었다고 한들 딱 보아도 밑바닥의 인생을 살아온 소년과 절대 같이 지냈을 리가 없었다.
그때,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고개를 젓는 카를의 귀에 나긋한 루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를. 내가 그 아랫것과 몸을 섞었다면, 너는 어떻게 할 것이지?”
카를은 너무 놀라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말에게 물을 주던 그는 제 귀에 들어온 말이 사실인지, 멍하니 허공을 보다가 느릿하게 루인을 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짐이, 그 천것과 몸을 섞었다면 너는 어찌할 것이냐 물었다.”
“……예?”
카를의 주군인 루인이 제일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반문하는 것이다.
그는 제 말을 단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는 것들을 무척이나 질색하고 싫어했으나, 카를은 이 상황이 너무 황당해 바보처럼 반문밖에 하지 못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제국의 가장 귀한 이인 황제, 루인이니 당연히 여성들과 몸을 섞는 일은 있었지만 그마저도 대부분이 제대로 된 혈통을 가진 자들이었다.
하룻밤일지라도 루인의 씨를 허투루 낭비할 수는 없었다. 만약 태를 본다면 그건 귀족과의 태였어야 하기에, 온갖 혈통을 따진 여자만이 황제의 침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폐하께서는 남색을 하시는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카를이 대번에 인상을 찌푸리며 역정을 냈다.
“혹 그 천것이 그리 말하덥니까? 폐하, 황가 적통인 백금발과 금안이 어디 흔합니까? 폐하는 기억이 나지 않으신다고 하시니, 당연히 폐하께서 제국의 태양인 걸 알고 그리 입을 놀린 것이겠지요!”
어디서 굴러먹은지 모르는 것과 황제가 뒹굴었다니. 그것도 씨를 받아 잉태할 수도 없는 남자와.
“정말 폐하께서, 그 천…….”
질겁을 하며 말하던 카를이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정말로 황제와 몸을 섞었다면? 그렇다면 그것을 계속 천것이라 하기에도 애매했다. 그게 천것이라면, 몸을 섞은 루인은 무어라 말인가.
카를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을 루인은 질책하지 않았다. 그저.
“그래. 그래서 죽였단다.”
나긋하게 말문을 열어 죽음을 가벼이 입에 담을 뿐이었다.
“수치도 그런 수치가 없지.”
나긋한 말투와 목소리와는 달리, 살 떨릴 정도의 살기가 카를을 꿰뚫었다.
주위의 온도가 뚝 떨어지는 것만 같은 싸늘함에 카를이 입을 일자로 다물고 손을 꽉 힘주어 움켜쥐었다.
“감히 내게 그런 거짓을 고하다니. 그것도 천것이.”
픽 웃는 얼굴에 웃음기가 담겨 있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싸늘하다 못해 노기 어린 루인의 모습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하기야 카를은 자신도 이렇게 놀랐는데, 남색을 질색하는 황제라면 놀라다 못해 분노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했다.
침묵 속에서 살짝 눈치를 살피던 카를은, 이내 화제를 전환하려는 듯 “황궁으로 돌아가시면 가장 먼저 무엇을 준비해 두라 이를까요?”라 물었다.
“글쎄.”
루인도 방금 전까지의 이야기는 달갑지 않았는지, 눈에 훤히 띄는 화제 전환임에도 넘어가 주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돌아가자마자 그간 섭정을 맡아 준 치테이르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먼저겠지.”라고 답했다.
그러나 카를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간 밖에서 고생이 많으셨을 것 아닙니까. 따라서 업무 외에 제가 따로 일러 준비해 둘 것은 없을지 묻는 겁니다. 가령 사냥 같은 거 말입니다.”
“사냥 좋지.”
“그럼 밀린 업무를 마치는 대로 사냥을…….”
“아니, 그전에 할 일이 있다.”
황제가 나쁘지 않다는 듯 말해서 당연히 사냥을 갈 것이라 생각했던 카를은 이어지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계집을 구해 와.”
여자? 카를은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제는 여자와 뒹구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즉위 초반, 비어 있는 루인의 옆을 노리고 여자를 방 안에 밀어 넣는 귀족들은 물론, 그들의 여식들마저 싹 다 죽인 적이 있을 정도로 종마 취급당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여자를 구해 오라는 말은 성욕이 일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하지 않았는데, 황궁으로 돌아가자마자 원하는 게 계집이라니.
‘설마 그 소년 때문에?’
잠시 머릿속에 루인과 몸을 섞었다던 소년이 떠올랐지만, 카를은 터무니없는 상상을 했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그건 천것이 욕심을 내 고한 거짓말이 틀림없었다.
“알겠습니다.”
이유는 묻지 않는다. 늘 그랬듯 어차피 그는 루인의 말을 따를 것이기에.
이후 루인은 황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더는 말을 하지 않았고, 카를도 이 이상으로 질문을 하지 않았다.
소년에 대한 이야기도 암묵적인 약속처럼 입 밖으로 누구 하나 내뱉는 일이 없었다.
황제와 기사단은 말을 몰아 쉬지 않고 달려 원래 도착해야 하는 날보다 훨씬 빨리 황궁에 도착했다.
황궁은 화려했고, 돌아다니는 이들의 행색은 죄다 고급스러웠다. 그 사이에 자연스레 섞여 드는 루인을 보고 나서야 그제야 카를은 안도했다.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왔어.’
사라졌던 황제 루인도 돌아왔고, 카를도 더 이상 루인을 찾으러 제국을 헤매지 않아도 된다.
그래. 이렇게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으니, 그저 카를은 앞으로 모든 것이 원래대로 평온하게 흘러갈 것이라…….
“카를 경, 벌써 황제 폐하의 침실에서 여섯 명의 여인이 죽었습니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
사라졌던 황제, 루인 윈스가 돌아왔다.
황제는 그의 가장 최측근인 하르세나 후작가의 차남, 제1 황실 기사단의 기사단장 카를과 함께 돌아왔는데, 흐트러진 티 하나 없이 멀쩡해서 그간 암암리에 돌던 사망설을 보란 듯이 일축했다.
하기야, 그 괴물 같은 황제가 죽거나 실종되었다는 게 더 말이 되지 않았다며 소문이 잦아들 무렵, 새로운 소문이 돌았다.
황제의 침실에서 밤을 함께 할 이들을 구한다고.
하지만 거기서 멈추었다면 이토록 황궁이 들썩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뒤졌나요?”
황제가 제 침실에 들어오는 이들을 죄다 죽였다는 소문 말이다.
“치테이르 황태제 전하.”
아홉 번째의 시신을 처리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카를의 옆에 치테이르가 화사한 외양을 빛내며 다가왔다.
황제 루인은 태양, 황태제 치테이르는 달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치테이르는 새벽의 고요함을 담은 화사한 은발과 푸른 눈을 지닌 이였다.
하지만 자애로운 얼굴로 방긋 웃는 얼굴은 피 냄새가 지독한 이곳에 어울리지 않았다. 화사한 얼굴과 달리 그들 주위는 지독히도 끔찍해, 오히려 괴리가 느껴졌지만 그 누구도 치테이르를 나무랄 수 없었다.
“냄새나. 뭐 해? 빨리 치워요.”
고인에 대한 존중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신랄한 말투, 카를은 치테이르의 빈정에 한숨을 내쉬었지만 솔직히 짜증이 나는 건 카를도 마찬가지였다.
황제가 돌아온 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그간 황제의 침실에서 죽어 나간 여인은 무려 아홉 명이나 되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죽는다는 소문을 못 들었을 리가 없는데, 다들 참 미쳤지요.”
문제는 저 여식들이 카를이 직접 모집해 온 것이 아닌, 황제가 밤을 같이 보낼 여인을 구한다는 소문만 듣고 몰래 숨어서 들어온 자들이라는 점이었다.
카를은 피를 정신없이 닦아 내는 하인들을 보다 골머리가 썩는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제 머리를 붙잡았다.
“황실의 태를 잇는 것만으로도 황후 자리는 확정이니 그렇지. 차라리 카를 경이 침실의 경비를 강화하는 것이 어떠신가요?”
“폐하께서는 암살자를 서른 명 보내도 아주 잘 살아 돌아오실 분입니다. 오히려 저희가 있는 게 거슬린다 하시니, 이유를 불문하고 곁을 내어 주실 것 같지는 않네요.”
치테이르의 말에 카를이 인상을 구기며 도리질했다.
예민하고 괴물 같은 신체 능력을 지닌 루인은 거슬린다는 이유로 하인조차 웬만해서는 근처에 두지 않는데, 그런 루인이 침실 주위에 기사를 제대로 둘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상황이 이러니, 말은 꺼내 보겠습니다. 하지만 폐하가 이전처럼 여인을 문전 박대를 안 하시니, 강화를 한다 한들…….”
카를이 심각한 표정으로 피에 젖은 침구를 보다 황궁에 돌아온 날을 떠올렸다.
황궁으로 돌아오자마자, 루인은 치테이르와 짧은 해후를 나눈 뒤에, 밀린 업무를 처리했다.
그간 치테이르의 섭정이 꽤 훌륭했던 지라 건드릴 부분이 적었음에도 할 일은 태산처럼 불어나 있었다. 그러나 루인은 괴물이었다. 그는 단 열흘 만에 반년간의 공백을 채웠는데, 정말 믿기지 않는 속도였다.
그 괴물 같은 속도로 일을 마친 루인이 침실로 돌아가자, 그 침실 안에는 귀족의 여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폐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결코 그 누구도 부른 적 없는 여자였다.
루인이 계집을 부르라는 말은 사실이었지만, 철저한 신원 확인과 혈통 검사를 끝내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냐, 당장 나가라!
필시 황제가 밤을 함께 보낼 여인을 구한다는 말을 쥐새끼처럼 주워들은 귀족이 벌인 짓일 것이다. 그것에 황제의 침실문을 열어 준 하인이 루인의 눈치를 보며 서둘러 여인을 내쫓으려고 했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닫고 나가.
훤히 드러난 나신의 여체를 보던 황제가 문을 닫으라고 손짓한 것이다. 여인에게 나가라는 게 아니라, 하인에게 나가라는 손짓에 그들은 깜짝 놀랐다.
그렇게 굳게 닫히는 문.
멀리 서 있어도 문 너머로 들리는 여자의 신음 소리에 황궁의 사용인들은 루인이 드디어 후궁을 들이려고 하는 거 같다고 생각했고, 그건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저희 아피오치 후작가 여식이 먼저지요, 흠흠!
-아니. 뭐라 해도 저희…….
황제가 여인을 침실에 들인 그 시각, 그 사실을 알게 된 귀족들은 앞다투어 하나같이 제 자식들을 침실로 보내겠다며 성화였다.
이런 금쪽같은 기회를 놓칠 수가 없는 귀족들이 황제의 침실에 제 핏줄을 집어넣으려 혈안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럼 이 순서대로 하겠습니다.
-흠흠.
심지어 침실에 밀어 넣을 순서까지 정했다.
그때까지는 모두가 이 일에 대해서 딱히 커다란 이상함을 갖지 않았다. 그저 혈기왕성한 황제가 드디어 제 짝을 찾으려 하는 것이 다라 여기며 황실의 허락도 없이 귀족들끼리 몰래 침실에 보낼 여식의 목록을 뽑았는데.
“죄다 죽여 버리시니.”
그 목록은 살생부가 되었다.
사용인들에게 듣기론, 처음에는 관계를 갖는 듯, 여성의 신음이 문틈으로 비집고 새어 나온다고 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신음은 건물이 울릴 정도의 비명으로 바뀌고, 아침이 되면 하인들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은 시신이었다.
그게 벌써 아홉 명이었다.
“황태제 전하, 그럼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코를 찌르는 혈향에 혀를 차던 카를이 고개를 내젓다가 이내 치테이르에게 인사했다.
“어디 가십니까?”
치테이르가 아직 정리도 덜 되었는데 떠나는 것이 의아하다는 듯 묻자 카를은 뭘 당연한 것을 묻냐는 듯, 한숨처럼 말했다.
“아까 전 열 번째 여인이 폐하의 또 다른 침실에 숨어 있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죽어 있을 거 같아, 열 명 기념으로 오늘은 제가 직접 가서 폐하의 의중을 떠보려고 합니다.”
“아, 다들 자살이 취미인가.”
정말 가기 싫다는 말투에, 치테이르가 어이없다는 듯 살짝 웃었다. 그런 치테이르에게 다시 인사를 올린 카를이 움직였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카를은 근래 몰아치는 업무 때문에 눈 아래가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순식간에 루인의 침실에 도착했다. 한데, 침실 입구가 보일 때부터 묘하게 싸한 느낌이 들더니 가까이 가면 갈수록 이상했다.
“문이, 왜.”
침실문은 열려 있었고, 그 앞에 하인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다들 사색이 되어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이지?”
“카를 경!”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머뭇거리던 그들은 카를이 나타나자 반갑다는 듯 재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카를은 자신을 이리 격렬하게 반길 줄은 몰랐는지 살짝 당황하더니, 이내 성큼성큼 문으로 향했다.
“대체 무슨 일이…… 아.”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물으려던 카를은, 열린 문 사이로 황제와 무릎을 꿇은 여인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는 듯 표정을 굳혔다.
“제가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아, 안 되면 새, 새, 새로운 여인을 들이겠습니다. 폐하, 제발, 부디 제 목숨만큼은…….”
바들바들 떠는 여인은 아무래도 살기 위해 문을 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황제는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는 이도 아니고, 그의 아랫것들도 마찬가지였다.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면서까지 그녀를 도울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각오하고 들어온 것이 아닌가?”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살, 살려 주세요….”
“이제 와서? 처음부터 나가라고 말했건만, 죽어도 상관없다며 내 품에 뛰어든 건 그대인데?”
황제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아름다운 얼굴로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마치 인형 같은 눈길에 여인의 표정이 희게 질렸다.
“씨를 받아 황후가 되고 싶다면서. 그런데 이거 하나 세우지 못해서야.”
카를은 저도 모르게 불경한 짓이라는 것도 잊고 루인이 턱짓으로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앞에 벌거벗은 여인이 있음에도, 루인의 성기는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심지어 축 처져 있는 성기는 다시 일어날 기미도 없었다.
카를은 여인을 보았다.
여인은 아름다웠다. 육감적인 몸매에, 남자라면 동할 법한 아름다운 외양이었다.
“기, 기, 기회를 주시면…….”
“여태 들어온 이들이 전부 그리 말했지. 하나, 어느 한 명도 짐의 것을 세우지 못했어.”
그런 그녀는 살려 달라며 벌벌 떨며 빌고 있었다.
황제의 것을 세우지 못해, 죽음의 직전에 이른 것임을 알아챈 카를이 입을 벌렸다.
‘그럼 여태 죽어 나간 여인들이 죄다 폐하의 성기를 세우지 못했기 때문인가? 설마 우리 폐하께서…… 발기 부전?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성욕이 일 때, 황제와 밤을 보낸 여인들은 대부분이 목이 떨어져 나갔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하나같이 잊을 수 없는 밤이라 말했다.
그만큼 황제는 절륜했으며, 카를은 가끔 이른 아침에 반쯤 선 황제의 그것을 본 적도 있었기에 황제가 성 기능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폐, 폐하. 제발 목숨만은…….”
죽음을 각오했지만, 막상 죽음의 문턱에서 그녀도 평범한 사람과 다름없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그녀의 곁에 있던 모든 이들이 말렸다. 아무리 명예가 따른다고 해도, 목숨이 더 중하지 않겠냐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 강인한 황제의 옆자리가 탐났다. 앞서 들어간 여식들의 죽음 앞에서도 그녀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발기하지 않는 그의 성기와 점점 싸늘해지는 황제의 얼굴에 결국 그녀는 벌벌 떨며 목숨을 구걸했다.
그러나 황제는 미리 경고했던 대로 그녀를 봐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조각 같은 단단한 몸을 훤히 드러낸 그가 벽으로 향하더니 장식용 검을 단번에 뽑아냈다.
“폐하.”
카를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실금하는 여인의 앞을 막아섰다.
평소의 그라면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루인의 분노와 그에 따른 결과가 얼마나 혹독한 것인지는 카를의 등에 기다랗게 나 있는 상처가 증명하고 있으니까.
“진정하시지요.”
하지만 훤히 드러난 나신으로 싹싹 비는 여인이 벌써 열 번째 여인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이 여인의 죽음은 정치적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제 자식을 수단으로 여기는 귀족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차피 여기 들어오는 이들은 그들이 진정으로 아끼는 여식이 아닌, 버리는 패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더 이상 피를 보는 것은 좋지 않았다.
“이러다 폐하의 광증이 다시 도지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계속 피를 보았다간, 즉위 초반 황제가 앓았던 광증이 다시금 그를 집어삼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카를은 황제의 모습을 살폈다. 완벽하게 균형 잡힌 육체는 겉보기에 문제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다만 그의 눈이 문제라, 카를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광증의 기미는 딱히 못 느꼈는데, 내 착각이었나.’
황제의 눈에는 실핏줄이 서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카를은 황제가 잠든 모습을 보지 못한 지 어언 한 달 가까이 되는 것 같았다.
카를은 입술을 깨물었다.
수면을 제대로 취하지도 않고 이토록 많은 이를 죽였으면 광증이 다시 도져도 할 말이 없었다.
“도망가십시오.”
여기서 더는 피를 보면 안 된다. 카를이 여인 쪽으로 눈길도 안 주고 속삭였다.
여인은 귀신같이 카를의 말을 알아들은 듯, 옷도 제대로 못 추스르고 급히 침실을 나섰다.
“닫고 물러나세요.”
여인이 침실에서 벗어나는 것을 본 카를이 턱짓으로 문을 닫으라 하자, 하인들이 기다렸다는 듯 허둥지둥 문을 닫았다.
쿵, 무거운 소리를 내며 닫힌 문 앞에서 카를이 한숨을 내쉬며 루인을 보았다.
“…….”
루인은 아무런 말 없이 카를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매서운 시선에 카를은 뭐라 변명의 말을 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폐하!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하지만, 이렇게 가다간 폐하의 광증이 다시 도지실까 염려되어 무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제가 폐하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해 주시면…….”
쨍그랑, 돌아오는 대답 대신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렸다.
카를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는 굳게 입을 다문 채 바닥을 보았고, 그런 카를의 옆에 있던 꽃병을 바닥으로 내던진 루인은 거침없이 벽으로 걸어가 들고 있는 칼로 선을 그었다.
그러나 루인은 그것으로도 분노가 풀리지 않은 듯싶었다.
그는 제 방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그 과정에서 유리 조각이나 파편이 카를의 뺨을 스치고 지나가 상처를 입혔지만, 카를은 어떤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 듯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이어지던 황제의 패악은 이윽고 방에 더 이상 부술 게 없을 즈음에서야 멈추었다.
“카를.”
카를은 저를 부르는 루인의 목소리에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방금 전까지 물건을 다 던지던 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숨 하나 차지 않은 단정하고 나른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카를은 그 안에서 분노, 초조, 불안을 명확하게 읽었다.
“예, 폐하.”
제 머리를 갈라놓을 듯 찌르는 살기임에도 카를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여전히 황제가 나신이나 다름없는 차림이기 때문이고, 그가 주제넘게 나선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는 카를을 부르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루인이 입을 열었다.
“남창.”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카를은 더는 고개를 숙일 수 없었다.
“남창을 데려오거라.”
퍼뜩, 카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남창이라니. 황제는 무의미하게 씨를 뿌리는 것을 싫어해, 남색을 하는 이를 굉장히 혐오했다. 그 탓에 이전에는 남색을 즐기는 부패한 귀족들을 데려다가 제 앞에서 성교를 해 보라고 하고는 나란히 절벽에 밀어 죽이지 않았는가.
근데 그런 그가 지금 남창을 데려오라고 하고 있었다.
너무 놀라, 카를은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시냐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당장.”
이를 아득 씹으며 충혈된 노란 눈으로 카를을 응시하는 황제는 자존심이 상해 보였다.
그는 남창을 데려오라는 말 자체가 수치스러워 보였다. 자신이 뱉은 말이지만 스스로가 천박하기 그지없다는 듯, 경멸 어리고 자존심이 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러기에 더는 아무런 말을 덧붙이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깊게 숙인 뒤, 서둘러 남창을 구해 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카를은 처음으로 여인이 아닌 남창을 황제의 침실에 밀어 넣었다.
이게 과연 황제가 원하는 것일까. 카를은 의심이 들었지만, 무엇이 되었든 이제 황제가 원하는 것을 해 드렸으니, 끝없는 살육도 끝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후, 황제는 열 개나 되는 남창의 목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제야 카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이상해졌다는 것을.
***
모스는 몸을 웅크렸다.
눈가에 눈물이 말라비틀어진 자국이 가득했고, 얼마나 울었는지 코끝은 여전히 붉었다. 그러나 그런 얼굴을 하고도 모스는 누군가를 기다리듯 문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안의 붉은 열매는 다 짓눌러 사라지고, 열매의 씨만이 꼭 쥐여 있었다.
“…….”
그는 말없이 제 손안에 있는 열매 씨를 만지작거리다가 그것을 조심스레 양손으로 붙잡고 품속에 밀어 넣었다.
그날, 홀로 보금자리로 돌아온 모스가 제일 먼저 찾은 것은 인간의 흔적이었다.
하나 인간은 갑작스레 나타난 것처럼 갑작스레 떠났기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아무런 흔적도 찾지 못해 상심에 잠겨 있던 모스는 어느 날, 제 보물 상자를 넣어 놨던 커다란 상자 구석에서 썩고 있던 열매를 발견했다.
급히 마을을 가던 날, 서둘러 보물 상자를 챙기느라 틈 사이로 통통 튀어 떨어졌던 열매 하나가 구석에 처박혀 터진 것이다.
“여, 열매.”
인간이 남긴 마지막 흔적이었다.
모스는 열매가 생명줄인 양 꼭 쥐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열매는 썩었고, 결국 씨만 남았다.
그럼에도 모스는 열매 씨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오돌토돌한 표면을 손가락으로 훑으면 안정이 되는 것 같기도 했고, 이것마저 잃어버리면 남자와 함께 지냈던 모든 추억이 허상처럼 흩어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으니.
“추, 워.”
모스가 더는 웅크릴 수 없을 것 같았던 작은 몸을 더 구기고는 달달 떨었다.
예전에는 몸이 이렇게 민감하지 않았던 거 같은데, 어째서인지 요즘은 제 가슴 속까지 얼어붙는 것처럼 추위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죽여.
그때 불현듯 모스는 자신을 죽이라 명하던 남자의 목소리를 떠올리고는 어깨를 더 옹송그렸다. 남자의 목소리는 송곳과도 같아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제 숨통이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끅.”
이윽고 그의 잇새로 꺽꺽거리는 소리가 났다. 모스는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듯 한참을 꺽꺽거리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뜨거운 피가 밖으로 솟구치고, 얼음장같이 차가운 검날이 안에서 한 바퀴 돌 때면 옆에 있던 내장이 함께 휘저어졌다. 그 감각은 어제 벌어진 일처럼 생생했다.
그날, 무슨 정신으로 보금자리로 돌아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저 눈을 뜨자마자 기를 쓰고 일어나 보금자리로 울면서 향했던 것만 드문드문 기억났다.
-너는 평생을 씻어도 소용없어. 날 때부터 역겹고 천했을 테니.
여전히 뜻은 잘 몰랐다.
그날 제게 인간이 무슨 말을 한 것인지, 모스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증오하듯 저를 보던 남자의 표정이, 그의 태도가, 그리고 그를 감싸던 인간들이 저를 더러운 것 보듯 바라보던 시선은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계속 떠올랐다.
“아, 아니야. 너는 나를 데, 데리러 올 거야.”
하지만 그럼에도, 모스는 인간이 제게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
기억을 찾으면 이전처럼 붉은 열매를 제게 따다 줄 것이다. 기억을 찾으면 이전처럼 저와 살을 맞대고 잠들 것이다. 기억을 찾으면…….
‘기억을 찾으면.’
그가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 살아 있으면, 그가 언젠가는 자신을 데리러 올 것이라는 그 하나의 희망에 모스는 제 전부를 걸기로 다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날을 잊어야 했다.
모스는 그날 저를 죽인 인간은 기억을 잃은 인간일 뿐, 제가 아는 남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버티고 또 버티려고 했다.
-죽여.
하나, 제 안을 파고들던 세 개의 검날은 너무나도 끔찍한 기억이었다. 동시에 폭포처럼 쏟아지던 남자의 폭언도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것이라는 게 문제였다.
저도 모르게 그날의 고통을 떠올린 모스가 오들오들 몸을 떨었다.
서늘한 목소리, 피 냄새, 시선, 경멸, 인간의 등.
“괘, 괜찮아, 괜찮아.”
귀를 틀어막았다.
저를 두고 뒤돈 인간들, 그들의 망토 아래로 무기들이 맞부딪혀 잘그락거리는 쇳소리가 환청처럼 귓바퀴를 긁고 머릿속으로 들어오자 절로 몸이 벌벌 떨렸다.
‘나는 괜찮다. 나는 아프지 않아. 괴물인 나는 인간이랑 다르니까. 나는 인간이 될 수 없는, 죽지 않는 괴물이니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오늘도 어김없이 스스로를 다독이던 사이, 어느새 해가 저물었다. 지긋한 밤의 향을 맡은 모스가 눈을 감았다 뜨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보금자리를 나섰다.
“하아.”
그는 제 잇새로 새 나오는 입김을 보며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환각초의 숲은 본디 다른 지역보다 더 따뜻한 편이었는데, 인간이 떠난 이후로는 이상하게 춥게 느껴졌다.
그러나 날이 제아무리 고될지라도, 모스는 할 일이 있었다.
그는 제 옷 주머니에 인간이 남긴, 거의 유일한 흔적이라 할 수 있는 열매 씨앗을 소중히 넣고 제가 내뱉은 뿌연 입김을 스쳐 걸었다.
몇 발이나 움직였을까. 모스가 향하려던 곳이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은 바로 저번에 남자를 업고 갔던 환각초를 정리한 길이었다.
모스는 익숙한 듯 몸을 숙여, 번식력이 빠른 환각초가 또 번지려는 부분들을 찾아내 하나씩 뽑았다.
“아.”
모스가 신음을 내뱉으며 손끝을 감쌌다 폈다.
꽁꽁 언 풀을 맨손으로 뽑으니,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환각초는 보통 억센 게 아니라서, 잘못 뽑으면 손톱이 부러지거나, 심할 경우 손가락뼈가 부러질 뻔도 했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기억을 되찾은 남자가 저를 데리러 오기 위해 이 길을 걸어올 것이라고, 조금의 의심 없이 확실하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자신을 데리러 오는 길에 그가 다치기라도 하면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아, 모스는 차라리 제 손이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길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것을 택했다.
그는 반복된 노동에 손가락이 부러질 것처럼 아파 오면, 주머니 속 열매 씨앗을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한동안 열매 씨앗을 만지고 있으면 손이 녹는 거 같아, 마저 일을 할 수 있었다.
한참을 길을 정리하던 그는 허리를 펴고 제가 닦아 둔 길을 보았다.
그래도 그동안 부지런을 떤 게 헛수고는 아니었는지, 처음에는 이곳저곳 박혀 있던 환각초들이 이제는 모습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인간이 닦아 놓은 길처럼 보일 정도로 깨끗하고 잘 정돈된, 숲 밖으로 향하는 길. 그 길을 가만히 보던 모스가 뒤를 돌아 길의 시작에 걸어가 앉았다.
그리고 가만히 제 몸을 웅크려 끌어안고, 길 너머, 환각초 숲의 끝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고된 노동으로 땀에 젖은 모스의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러나 바람이 불어도, 바람은 모스를 일으켜 세우지 못했다.
모스는 그 커다란 길 한 가운데에서 웅크린 채 홀로 숲 너머를 바라보았다.
밤이 깊어지고, 밤이 옅어지고, 해가 떠오르기 전까지.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계속…….
***
커다랗고 아름다운 황궁에 있는 루인은 날이 갈수록 예민해졌다.
평소보다도 그의 패악이 잦아져, 근래만 해도 궁에서는 사람이 한둘 죽어 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황제의 광증이 도졌다며 입방아를 찧었다.
-이, 이게 왜…… 아악!
붙들려 온 남창들은 전부 다 죽었다.
무슨 수를 써도 황제를 사정에 이르게 만들지 못하니,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들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고 그 표정이 떠오른 즉시, 황제는 그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늘 완전무결을 고집하던 황제는 제게 하자가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아는 게 끔찍하게 싫었던 것이다.
-의원을 불러라.
결국 의원이 왔지만,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몸에 문제는 없습니다. 아무래도 폐하의…… 심적인 문제인 것 같습니다.
심적인 요소라고 의원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짐에게 문제가 있다고?
더는 단순히 발기와 사정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무엇이든, 제게 손톱만큼이라도 문제가 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몹시 상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건 이상한 기행으로 이어졌다.
성욕이 비틀린 방향으로 황제를 이끄는 것인지, 황제는 쥐 죽은 듯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다가도 돌연 제 옆에 있는 이의 목을 졸랐다.
이유도 모르고, 언제 그럴지 예측할 수도 없게 아무런 전조도 없었다.
그저 갑자기 사람 목을 조르다가 그들의 눈이 뒤집힐 무렵에야, 황제는 툭 던지듯 사람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콜록이며 버둥거리는 사람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다 이리 말했다.
“다른데.”
……전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결국 황제가 이리도 피 냄새를 자욱하게 퍼트리니, 황제가 미쳐도 제대로 미쳤다며 황궁 내에서 소문이 날개라도 달린 듯 훨훨 날아 퍼졌다.
“이거 우리에게 불똥이라도 튀는 거 아니오? 우리가 회의 때 무슨 말이라도…….”
“폐하의 눈을 마주하면 나는 지리고 말 것이오.”
“맞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회의 때마다, 무서워서 살 수가 없어! 가뜩이나 무서운 눈이 요즘은 시뻘겋게 되어서. 하이고.”
그럼에도 귀족들은 나서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설 수 없는 것이다.
황권이 교체되던 날, 황제가 맨손으로 전 황제의 두개골을 으스러뜨리는 것을 보았는데 그 누가 황제의 면전에서 미치신 건 아니냐고 따지겠는가.
게다가 황제는 즉흥적이었다.
즉 제 마음에 거슬리는 게 있다면, 정치적인 것을 고려해 뒤에서 권모술수를 써서 치워 버리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는 것을 선호했다.
“가만히 있어. 아직 우리 상위 귀족들 중에는 죽은 이가 없으니.”
귀족들은 제 목이 잘려 나가지 않는 이상 눈치만 살필 뿐, 황제에게 뭐라 말할 수 없는 위치였다. 죽어 나가는 것은 아랫것들뿐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나아지겠지 라며 다들 생각했으나, 황제의 분위기는 가면 갈수록 좋지 않아졌다.
원래도 예민한 기운을 휘감은 듯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였는데, 그 정도가 심해져 하녀, 하인들은 황제를 보는 것만으로도 얼어붙어 실수를 연발했다.
하지만 황제는 그 실수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제 심기에 거슬리는 이들을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다.
칼 위를 걷는 듯 살벌한 황궁, 그러나 그 누구도 나설 수 없는 압도적인 무력을 지닌 황제이니 안하무인이 따로 없었다.
“카를 경!”
오늘은 황제의 기상이 유독 늦는다는 보고를 받은 카를이 황제의 궁으로 들어섰다.
궁을 들어서자마자 카를을 맞이하는 것은 자리를 맴돌던 하인이었다. 그는 카를을 보자마자 반갑다는 듯 허리를 곧추세웠다.
“폐하께서는 기침하셨는가.”
“그런 듯한데, 어젯밤부터 저희보고 근처에 오지 말라 하셔서.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저리 겁을 먹은 것을 보니, 그새 또 하나를 죽인 모양이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은 듯, 카를은 눈썹 하나를 쭉 올릴 뿐, 별다른 말 하지 않고 곧바로 황제의 침실로 향했다.
카를도 근래 살이 매우 많이 빠졌다.
겁많은 황궁의 사용인들은 황제의 침실 근처에 얼씬도 못 하니, 황제의 최측근인 카를만 최근 죽어나는 꼴이었다.
“폐하,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황제의 침실 앞에 선 카를이 정중히 문을 두들기고 물었다. 그러자 안에서는 들어오라는 말이 즉시 들려왔다.
육중한 문이 소리 없이 스르륵 열렸다. 카를은 제 손에 난 땀을 허벅지에 닦아 냈다. 오늘따라 대체 왜 이리 긴장이 되는지. 하지만 그가 잔뜩 긴장을 하며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느낀 것은 의외의 것이었다.
‘이 냄새는 뭐지.’
마치 정액 냄새 같은 것이 방에서 풍겼다.
하지만 황제는 현재 발기도 제대로 못 하지 않는가. 그러니 당연히 황제의 것은 아닐 것이다.
밤꽃이라도 핀 것인가, 하지만 여기는 언 땅 아닌가?
그럼 그새 새로운 남창이 온 것인가?
온갖 상상을 하는 바람에 그의 시선이 짧게 방황하다 황제에게 향했다.
늘 그랬듯 소파에 앉아 있을 거라는 카를의 예상과는 달리, 황제는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폐하?”
그러나 단순히 그 모습이면 이렇게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는 눈, 축 처진 백금발 사이로 황제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창백한 피부는 평소보다 더했다.
“혹 몸이 어디 안 좋으십니까?”
신관이라도 부르냐며 카를이 그리 물으려던 그때.
“실은.”
잠긴 목소리로 황제가 카를의 말을 잘랐다.
“근래 짐이 이상한 꿈을 꾼다.”
그러고는 이상한 말을 했다. 카를은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기울였다.
꿈? 카를이 아는 황제란 꿈은 거의 꾸지 않는 이였다.
오랜 시간 알아 왔더라도, 황제가 카를에게 꿈 얘기를 단 한 번도 한 적 없는 것은 물론이요, 이전에 악몽을 꾸었다며 카를이 흘리듯 말하자 루인은 “짐은 여태 제대로 꿈을 꾼 적이 없다.”라 했던 것도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특히, 오늘 꾼 꿈은 몹시 불쾌했다.”
한데 지금은 근래 꿈을 꾸는 것도 모자라, 오늘 꾼 꿈이 불쾌했다고 평했다.
그리 말하는 황제는 정말 불쾌했다는 듯, 목소리에 언짢음이 묻어났다.
정말 꿈을 꾼 것일까?
저 피도 눈물도 없는 황제의 꿈이 카를은 내심 궁금했는지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꿈입니까?”
카를이 묻자, 침대 끝을 응시하던 루인이 고개를 들었다. 축 가라앉은 앞머리 사이로, 충혈된 금안이 똑바로 카를을 응시했다.
“숲.”
아무리 수척해도 아름다운 외모는 가릴 수 없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을 한 황제의 눈이 꿈을 다시 떠올리듯 반쯤 감겼다.
“나는 숲을 가야만 했다. 그곳에 가면 내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거든. 하나…… 그곳에서 나는 내가 원하는 것 대신 다른 것을 보았다. 그래, 다른 것…….”
“숲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숲에는 짐이 있다.”
“그리고, 또 무엇이 있습니까?”
꿈속을 헤매듯 잠시 색이 바랜 그의 눈이 가라앉았다.
“푸른 풀, 녹색 연못, 붉은 열매…….”
빛에 반사된 새하얀 속눈썹이 느릿하게 움직이니 마치 나비가 나부끼는 것처럼 보였다. 그림 같은 모습을 한 황제가 읊조렸다.
“…….”
“모스.”
그 아름다움에 홀렸던 카를은 뒤늦게 황제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황제의 시선은 제 하반신에 있었는데, 황제의 하반신을 제대로 보게 된 카를은 순간 자리도 잊고 눈을 크게 떴다.
축축하게 젖은, 누가 보아도 사정을 끝낸 앞섶이 카를의 눈에 들어오자마자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몽정을 했지.”
그제야 카를은 제가 들어오자마자 맡았던 정액 냄새가, 황제가 몽정을 하여, 사정한 냄새임을 알아채고 눈을 크게 떴다.
온갖 수를 써도 일어나지 않고, 사정하지 않던 황제의 것이 몽정을 통해 사정을 했다.
너무 놀란 카를은 순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불경한 시선임을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황제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바로 고개를 숙였다.
“애새끼도 아니고.”
널린 게 여자고, 널린 게 남자였다.
하지만 그의 밤일을 도와줄 이가 널린 이 황궁 속에서, 그는 사람을 빌려 사정을 한 게 아닌 꿈을 빌려 사정했다.
사람이 제아무리 애를 써도 세워지지 않았던 게 꿈 하나로 해결되다니. 그것도 아이나 할 법한 몽정을 통해서.
그게 얼마나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일인가.
황제의 얼굴에는 스스로의 이런 모습을 믿을 수 없다는 감정과, 분노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카를.”
“예, 폐하.”
카를은 말을 아꼈다. 그가 당장 분노한 황제를 앞에 두고 할 수 있는 것은, 고개를 넙죽 숙이는 것 말고는 없었다.
짧은 침묵 끝에, 이어지는 황제의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숲에서 죽인 놈 기억하나?”
숲에서 죽인 놈?
처음에는 그게 누군지 잘 떠오르지 않았으나, 이내 숲에서 죽였던, 감히 황제와 살을 섞었다며 데려가 달라고 말했다던 맹랑한 소년이 떠올랐다.
“예. 근데 무슨 일로…….”
근데 갑자기 그 소년은 왜?
카를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말투를 감추지 못하고 묻자, 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시체라도 가져와.”
……설마.
순간 등골이 오싹해진 카를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자, 황제가 카를을 내려다보던 자세 그대로 여상히 답했다.
“그래.”
네가 생각하는 게 맞는다는 듯, 황제의 눈꼬리가 요사스레 휘어졌다.
그리고 이내 그는 근래 지은 적 없는 미소를 지었다.
“백골이 되었다면, 가죽이라도 씌워서 박게.”
카를은 웃으며 저를 보는 황제를 멍하니 보았다.
황제는 얼굴만 놓고 보면, 신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아름다운 미색을 지닌 이였다. 그런 이가 웃으니, 어찌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가 있을까.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미색에 가려졌던 황제의 말이 인지가 된 카를은 사색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저토록 화사하게 웃는데, 내용이 영 기형적이었다.
‘백골이 되었어도 가져오라고?’
시체에다 좆질을 하겠다는 뜻 아닌가. 어느새 카를의 팔뚝에는 본인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소름이 오소소 돋아 있었다.
“폐하. 차라리…….”
카를은 소년을 떠올렸다.
찰나에 마주하고, 순식간에 죽였던 지라 소년의 얼굴은 흐릿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리 흔한 인상은 아니었던 것 같았지만, 제국 내를 쥐 잡듯이 뒤지면 비슷한 이 하나 안 나오겠는가. 또한 카를은 없더라도 만들어 낼 자신이 있었다.
“제가 비슷한 이를 데려오겠습니다.”
시체에다가 좆질을 하는 걸 보느니, 차라리 그 소년과 비슷한 이를 데려오는 게 나았다. 그런 각오를 담아 말을 하던 카를은 황제를 보곤 일순 몸을 굳혔다. 저를 보는 황제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대는.”
황제가 툭 떨구듯 제 상체를 아래로 숙였다.
“짐이 머저리로 보이나?”
그걸 모르고 말했겠냐는 듯한 황제의 시선.
그 시선을 보자마자 카를은 제아무리 닮은 이를 데려와 봤자, 여태 침실에서 죽어 났던 이들처럼 죽으면 죽었지, 더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이 싹 사라졌다.
“……폐하의 명을 받들어, 소년을 찾아오겠습니다.”
서슬 퍼런 황제의 앞에서 카를은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미 황궁 안에서 많은 이들이 죽어 소란스러운 참이었는데, 여기서 시체를 더 궁 밖으로 내보낼 수는 없었다.
‘그래, 차라리 사람이 이렇게 죽어 나갈 바에야 말 그대로 백골이라도 가져오는 게 낫겠어.’
황제의 곁에서 살아남으려면, 나도 괴물이 되어야 하는군.
카를은 그리 생각하며 황제의 방에서 나오자마자 곧바로 라젠타 마을로 갈 이들을 골랐다.
황제의 명을 받들었지만, 카를은 황궁에서 할 일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래서 기사단의 기사들 중 뛰어난 기사 몇을 골라 숲으로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찔러 넣었으니, 죽었겠지.’
카를은 혹여나 소년이 살아 있을 거란 일말의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하나의 검도 아니고, 무려 세 개의 검을 욱여넣었으니 즉사나 다름없었다.
설령 천운이 도와 살아남았다고 한들, 소년을 죽였던 라젠타 마을은 촌 중에서도 촌이었기에, 제대로 치료를 받으러 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기사들을 보낸 지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어느덧 닷새가 넘었다.
올 때가 되었는데, 기사들이 오지 않았다.
카를이 슬슬 황제의 눈치를 보기 시작할 무렵, 다행히 기사들이 도착했다.
“……시체가 없다고?”
의아한 말과 함께.
“예, 폐하.”
기사들에게서 보고를 받자마자 카를은 황제의 침실로 향했다.
황제의 방 안에는 수면에 도움을 주는 향을 짙게 피워 놓았는데, 어찌나 독하게 피웠는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절로 기침이 날 정도로 뿌옇게 연기가 차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집까지 다 뒤져 보았는데, 그 누구도 소년의 시체를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방 한가운데에서 마치 인형처럼 몸을 늘어뜨리고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는 루인은, 그 이야기를 곱씹듯 가만히 있다가 툭 말을 내뱉었다.
“자세히.”
황제의 목소리가 아까와는 달리 불쾌하다는 듯 사뭇 가라앉아 있었다.
카를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게, 실은…….”
카를이 기사들을 이끌고 황제를 마중 간 날.
그날 소란에 마을 사람들은 꽤 많이 집 밖으로 나와 있었다고 한다. 그들 중 일부는 기사 셋이 한 소년의 몸에 검을 꽂는 것을 보았다고 진술했고, 거기까지는 카를이 아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이후 소년이 사라졌단다.
겁먹은 주민들이 집 안에 들어가 있었다가 나왔는데, 그 소년이 죽어 있던 자리가 피 한 방울 없이 깨끗했던 것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오히려 황제 일행이 소년의 시체를 처리하고 갖고 간 것 아니냐고 기사들에게 물어봤다고 했는데, 이상한 점은 있었다.
“흔적이…… 그 어느 것도 없었다고 합니다.”
혹여 죽어 나간 소년이 라젠타 마을 사람일까, 주민들은 수색을 게으르게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무슨 흔적이라도 있어야 했는데,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고 한다.
기사들도 근방을 쥐 잡듯이 뒤졌다.
그러나 시체가 땅으로 꺼졌나, 하늘로 솟았나 싶을 정도로 흔적 하나 없었던 탓에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그 좁은 촌구석에서, 그 누구도 죽은 소년의 흔적을 보지 못했다니.
기묘한 일이었다.
“그럼 들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황제가 서늘하게 물었다. 잠시 눈치를 살피던 카를이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한데, 기사 하나가 이상한 말을 하나 들었다고 합니다. 저는 터무니없다고 생각해 말씀을 안 드릴까 생각했는데, 그래도 들으시는 편이 나으실 것 같…….”
“말해.”
이럴 줄 알았다.
카를은 제 입으로 이 터무니없는 말을 올리게 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저희가 죽였던 그 소년이 실은 인간이 들어갈 수 없는 환각초의 숲에 사는 괴물이라면서, 환각초에 홀린 인간들을 잡아먹는다고 얘기했다고 합니다.”
미친 노파.
하려면 그럴싸한 얘기를 해 주지, 어린이 동화에도 써먹지 않을 법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해 댔다.
말을 꺼낸 카를이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한데 이상했다. 당연히 헛소리를 한다는 표정을 지을 줄 알았는데, 황제는 표정이 이상했다. 그는 살짝 놀란 듯, 카를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반응인지 가늠을 할 수 없어 머뭇거리던 그때, 황제가 말했다.
“계속 얘기해.”
“……그러면서 노파는 괴물이 나타난 게 벌써 못해도 40년은 훌쩍 넘었다고 했습니다. 하도 당당하게 말하니, 기사들이 혹시나 해서 숲에 가 보았는데…… 가까이 가자마자 정신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곳은 애초에 뭔가가 살 수 있는 곳이 아닌 것 같습니다. 따라서 제 사견입니다만, 그냥 미친 노파가 하는 말이라 여기시는 게 나으실 것 같습니다.”
환각초의 숲은 인간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 기사들도 들어가지는 못했다고 한다.
실제로 들어간 것도 아니고, 그 풀 앞에만 갔을 뿐인데, 기사 몇이 토악질을 하며 정신을 잃는 바람에 원래 오기로 한 날보다 늦어진 것이었다.
“…….”
황제는 카를이 이야기를 하는 내내 가만히 듣고만 있을 뿐,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이야기를 듣고 한동안 침묵했다.
꿀꺽, 카를이 침묵에 입이 마른 듯 침을 삼켰다.
황제는 가끔 사람 같지 않았다.
존재감만으로도 사람을 비쩍 마른 육포처럼 만들어 버리니, 기사단장을 하는 카를임에도 숨이 턱턱 막혔다.
아무것도 없으면 이런 터무니없는 이야기 대신, 아무 무덤을 파헤쳐서라도 백골을 가져왔어야 했던 것일까. 점점 무거워지는 공기에 카를의 등이 축축하게 젖어 들며 땀이 비 오듯 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1분이 10분처럼 느껴지는 중압감 속에서, 드디어 누워 있던 황제가 몸을 일으켰다.
거의 헐벗은 몸을 한 황제가 한 발, 한 발 카를에게 다가왔다. 이윽고 바로 앞에 멈추어 선 황제는 조용히 카를을 불렀다.
“카를.”
싸늘한 목소리. 당장이라도 카를을 죽일 것처럼 시선이 내리박혔다. 카를은 제 숨통이 옥죄어지는 것 같았다.
황제는 카를을 제 오른팔이라고 여기며 그에게 곁을 내어 주었으나, 피도 눈물도 없기에 그 오른팔을 단번에 뽑아낼 수 있는 남자였다.
그래서 카를은 이 터무니없는 얘기를 시작할 때부터, 솔직히 어느 정도 직감하긴 했다. 이번엔 죽는다. 틀림없이 죽는다.
그간 황제가 예상보다 많이 늦는 기사들에 관련해서 침묵했던 이유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카를이 황제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 믿었던 탓일 텐데.
“……폐하께서 제 목숨을 가져가신다면, 가문의 영광입니다.”
손에 꾹 힘을 준 카를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들려오는 것은 의외의 것이었다.
“하하.”
웃음소리에 카를이 제 귀를 의심하면서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황제는 웃고 있었다. 허리를 휘청일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짐이 널 왜 죽이나?”
웃으며 말하는 루인을 카를이 멍하니 보았다.
살면서 이렇게 소리 내어 웃는 황제를 본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 보니 그의 아비인 선황제의 머리를 맨손으로 터트릴 때, 황제가 소리 내어 웃었던 것 같기는 한데, 그 이후에는 이런 황제의 웃음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카를이 넋을 놓고 그를 보고 있는 사이, 한참을 웃던 황제가 뒤를 돌았다.
“준비해. 지금 환각초의 숲으로 간다.”
황제가 문을 열어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홀린 듯 황제를 보던 카를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둥지둥 그의 뒤를 카를이 뒤쫓으며, “환각초의 숲은 인간이 들어갈 수 없는 영역입니다!”라고 소리쳤지만, 황제는 하인에게 손짓해 외출복을 준비하라는 말을 할 뿐이었다.
“폐하!”
“걱정 마라.”
끝끝내 자신을 쫓아온 카를에게 황제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말했다.
“짐은 길을 알아.”
카를이 전혀 알 수 없는 말을.
카를은 황제에게 더 묻고 싶었다. 하지만 황제는 보기 드물게 정말 기분이 좋아 보였기에, 더는 말을 붙이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카를을 뒤에 버려두듯 둔 황제는 옷을 입혀 주는 하인들 사이에 가만히 있다가 눈을 감았다.
-꽈, 꽉 잡아야, 해. 알았지?
짧은 꿈은 허상이 아니었다.
***
모스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먹지 않아도 살 수 있고, 자지 않아도 살 수 있으니 낮에는 그저 보금자리의 입구만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가는 걸까.
갓 떠오른 태양, 아침의 축축함. 풀과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기뻐하는 것은 빛 하나 없는 시꺼먼 보금자리 안에 있어도 느껴졌다.
한데 오늘따라 유독 나가고 싶어, 애써 눈을 감았다.
그는 햇빛을 두려워했으나 닿고자 했고, 그러기에 아침은 무섭지만 보고 싶은 것이기도 했다.
‘내가 햇빛 아래로 갈 수 있다면, 너를 만나러 갈 수 있었을 텐데.’
모스는 슬프다는 듯이 제 무릎을 감싸고 문을 보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가만히 문을 보던 모스는 이내 무언가를 감지한 이처럼 손가락 하나하나에 힘을 꾹 주어 주먹을 쥐고는 눈을 부릅떴다.
“인, 간?”
말을 오랜 시간 하지 않아 말라붙은 잇새로 가라앉은 목소리가 더듬거리며 나왔다.
그는 귀를 쫑긋 세웠다.
먼 곳에서부터 희미하게 들리던 발자국 소리가 점점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발자국 소리는 환각초의 숲 테두리를 따라 걷는 게 아닌, 명백하게 안으로 향하고 있었다.
“인간.”
이 걸음걸이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보금자리에 가만히 몸을 웅크리고 문을 볼 때면, 모스의 귓가에는 남자의 발소리가 환청처럼 반복해서 들렸으니까.
처음에는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들렸던 발소리였던지라 이번에도 환청인가 생각했지만 모스는 헷갈리지 않았다.
풀이 누웠다. 바람이 갈라졌다. 침입자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숲이 평소와 다르게 소란스러웠다.
‘인간, 인간이 왔어.’
정말 그가 온 것이다.
또한 그가 오고 있는 방향은 제가 닦아 놓은 길이라, 모스에게 더 확신을 주었다.
길은 쉬이 찾을 수 없게 잘 숨겨 놓았었다. 환각초와 굉장히 비슷한 풀을 길 끝에 심어 두고, 그 근처에는 딱딱한 잎을 피워 내는 나무들이 수두룩하게 자라 있었기 때문에, 기억을 되찾은 그만이 올 수 있는 길이라고 여겼다.
모스가 인간이라 확신하며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슬슬 일어나던 그때.
“하, 하나, 둘, 셋……?”
모스의 표정이 굳었다.
발소리가 하나가 아닌 둘이 되고, 셋이 되고, 삽시간에 다섯 이상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뿐일까.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귓가에는 이제 쇳소리까지 들렸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던, 무기들이 맞물려 부딪히는 그 쇳소리가 들리자, 잔뜩 상기되어 양 뺨이 붉게 물들었던 모스의 얼굴은 이내 핏기가 빠진 양 새하얗게 질렸다.
‘아파, 아파.’
쇳소리만 들으면 그날 제 몸을 파고들었던 세 개의 검날이 떠올랐다.
그들이 쓰는 검은 죄다 길고 예리했다. 무딘 부분이 하나 없어, 몸에 박혀 빙글 도는 그 고통은 말로 이루 설명할 바가 되지 않았다.
모스가 허둥지둥 일어났으나,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는 보금자리의 문만을 볼 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지금 시간이 밤이면 어디로 도망이라도 갈 텐데, 이렇게 해가 내리쬐는 대낮이라면 어디로 도망가려야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숨을까.
모스는 허둥지둥 숨을 곳을 찾았다.
“……어.”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들은 마치 이곳에 보금자리가 있다는 듯이 거침없이 곧바로 이쪽으로 걸어왔고, 이어 문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여러 개의 천을 얼기설기 엮어 놓았던 천 무더기를 휙 걷어 버렸다.
모스는 눈을 찡그렸다.
이렇게 많은 빛이 쏟아지듯 안에 들어온 적은 없었다.
어둠에 익숙해졌던 눈이기도 했고 역광이 심했던지라, 문을 연 이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쏟아지듯 들어오는 햇빛에 당황도 잠시, 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기다랗게 손을 뻗어 모스의 왼쪽 발 정강이를 움켜쥐었다.
“아, 아아!”
모스가 자리에서 주저앉아 벌벌 떨며 몸을 뒤로 뺐다.
뒤늦게 발을 당겨 보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발목의 살점들이 뚝뚝 촛농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아파. 아! 아파.”
툭, 걷어졌던 천이 허공을 스치듯 내려앉는 묵직한 소리가 들렸지만 그곳을 볼 여력은 없었다. 살점이 촛농처럼 흘러내린 탓에 뼈가 드러날 것처럼 움푹 파였던 것이다.
고통으로 눈물이 절로 나왔다.
순식간에 뺨을 축축하게 적신 모스가 벌벌 떠는데, 발을 붙잡고 우는 그에게 한 사람이 다가왔다.
고통에 발버둥 치던 모스는 돌연 뭔가를 느낀 듯 파르르 떨던 떨림을 우뚝 멈추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모스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제 앞에 있는 이는 이전처럼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아닌 깔끔하게 정리된 머리카락이었다. 낡은 옷이 아닌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옷을 걸치고 있었고, 자신밖에 없던 그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바뀌어도, 모스는 단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다. 그는 그가 이곳에서 그토록 기다리고 갈망했던.
“어, 아…….”
인간이었다.
가만히 저를 보는 남자의 시선이 마치 이전, 기억을 잃기 전과 같아서. 그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벅차, 말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한동안 둘은 가만히 서로를 응시했다.
모스는 남자의 피부가 이전 숲에 있을 때보다 좋았으나, 얼굴이 조금 야윈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모스는 그가 흙을 얼굴에 치덕치덕 바르고 와도 남자가 좋았을 것이다.
이렇게 남자를 바라보고만 있는 것만으로도 녹아내리던 발이 언제 녹아내렸냐는 듯 고통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드디어 기억을 찾은 걸까?
남자는 모스에게 데려가겠다며 약속했고, 이렇게 보금자리로 직접 찾아왔다는 것은 자신을 데리러 왔다는 뜻이나 다름없게 느껴졌다.
이 외로운 곳에서 드디어 나를 데려가 주는 걸까?
상상만으로도 눈시울이 절로 붉어졌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처럼 시야가 흐릿해졌지만, 남자의 모습이 흐려지는 게 싫어 눈을 벅벅 문질러 눈물을 닦아 냈다. 그는 벌벌 떨리는 몸을 손으로 움켜잡고, 몸을 일으켜 남자를 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나, 나, 데리러 온…….”
벅차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견디지 못할 정도로 보고 싶었던 너를 만나 지금 너무 기쁘다는 목소리로.
하지만 모스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푹.
모스의 시선이 느릿하게 제 배를 보았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배 한가운데에 남자가 욱여넣은 단검. 그리고 그 단검을 움켜쥐고 있는 그의 손.
너무 현실감이 없었다.
그래서 고통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제 몸이 아닌 양, 모스가 제 배를 멍하니 보는 와중에 단검을 루인이 뽑았다. 울컥, 피가 미친 듯이 쏟아져 나왔다. 안에 있던 장기들이 구멍으로 같이 뽑힐 것처럼 울렁였다.
그때, 루인이 몸을 낮추고서는 모스의 상처를 손가락으로 벌려 보았다.
“허어, 억.”
고통에 모스가 비명도 제대로 못 지르고 제 입을 틀어막은 채 도리질했지만, 루인은 멈추지 않았다.
그가 집요하게 상처를 벌리던 그때, 모스의 몸이 반응했다.
구멍이 난 곳이 꾸물거리며 상처를 메꾸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루인이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가만히 보다.
“와.”
감탄을 하며 웃었다.
그 감탄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든 모스는 제 자리에 못이라도 박힌 듯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굳은 상태로 그의 얼굴을 보았다.
방금 사람의 몸에 단검을 쑤셔 넣은 이가 맞는지, 마치 소년처럼 천진하게 웃으며 놀라워하는 그의 눈은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피로 젖은 손을 한 그의 모습은 지나치게 아름다워, 지독히도 잔혹하게 느껴졌다. 모스는 소름이 끼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가 얼어붙은 채 루인을 보는 사이, 루인은 다시 확인이라도 하듯 단검에 질척하게 묻은 피와 어느덧 아물어 흠 하나 없어진 모스의 배를 번갈아 보고는 나긋하게 말했다.
“진짜 안 죽네.”
괴물 맞구나.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