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재회
괴물.
모스는 사람들이 자신을 괴물이라 칭할 때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들의 얼굴에는 오로지 경멸, 공포만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제 앞에 있는 남자는 아니었다.
고개를 들어 모스의 눈을 들여다보는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경멸이 담겨 있지만, 달랐다.
남자는 기뻐하고 있었다.
죽지 않는 괴물인 모스를 보며 징그럽게 여기는 게 아닌, 명백하게 기뻐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반응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모스는 문득 소름이 돋아 얼어붙고 말았다.
그때, 남자가 홀린 듯 고개를 숙여 모스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순식간에 모스의 턱을 움켜쥘 것처럼 바투 붙은 손, 하지만 모스는 그 손을 저도 모르게 휙 고개를 돌려 거부해 버렸다.
“……아.”
뒤늦게 정신을 차렸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루인의 손이 어정쩡하게 그 무엇도 쥐지 못하고, 허공에 우뚝 멈추어 있었다.
순간, 모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졌다.
고개를 남자 쪽으로 하지 않아도, 눈치챌 수 있었다. 주위의 온도가 뚝 떨어졌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남자의 분위기가 싸늘해진 것이 피부로 느껴졌던 탓이다.
숨이 막히는 상황 속에서 모스가 눈동자를 굴리자 루인과 딱 눈이 마주쳤다. 모스는 남자의 표정을 보고 몸을 굳혔다.
웃음기 하나 없었다.
방금 전까지 위로 유려한 곡선을 그리던 입꼬리는 어디 가고, 굳게 일자로 다물려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본 모스는 더듬거렸다.
“나…, 나는.”
모스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저 손을 피한 건지, 스스로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남자를 거부한다는 것은, 그간 남자를 긴 시간 홀로 그리워하며 기다리던 모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건, 아니, 난…….”
억울했다.
남자가 제 얼굴에 손을 뻗는 순간, 생각이 뇌를 거치기도 전에 고개가 돌아간 것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모스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제대로 말도 잇지 못한 채 어물거리다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손이 벌벌 떨리고,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살기를 품고 있는 금안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모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은 마치 덫처럼 그를 옭아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머릿속이 온통 하얘져 무슨 행동을 해야 할지 몰라, 모스가 자리에 우뚝 멈추어 있던 그때, 루인이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뒤를 돌았다.
루인이 미련 없다는 듯 모스에게서 손을 거두고 뒤를 도니, 모스는 그 뒷모습을 보자마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도 그랬다.
그때도 저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남자는 모스를 홀로 두고 떠났다. 그날 자신을 그렇게 두고 떠난 남자의 뒷모습을 이 커다란 보금자리 내에서 모스는 곱씹고, 곱씹어서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나를…… 버, 버리고 가지 마. 제발.”
모스가 손을 뻗어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공포가 더한 공포 앞에서 굴복했다.
이곳은 숨 막힐 정도로 고요하고, 넓은데. 이 넓은 곳에 또 홀로 남아 있을 것을 생각하니, 모스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어떡하지.’
만약 이렇게 붙잡았는데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면 어떡하지. 방금 내가 손을 거부해서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홀로 남겨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희게 질린 얼굴을 한 모스가 필사적으로 루인을 붙들자, 루인의 움직임이 순간 멎었다.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는 모스를 응시했다.
“내가, 왜?”
루인은 그리 반문하며 방금 자신을 밀어 낸 건, 너 아니었냐는 듯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어, 어어…….”
그런 루인의 태도에 당황한 모스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저 생명 줄을 움켜쥐듯 자신이 만지는 것만으로도 옷감이 상할 것만 같은 화려한 루인의 옷자락 끝을 손안으로 말아쥐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게 마지막일까?
하지만 여기서 남자를 보내면 모스는 살 수 없었다.
이제는 혼자 있는 법도 모르겠고, 시간을 빨리 흘려보내는 법도 모르겠다. 외로움을 타지 않는 방법도 잊었고, 남자의 체온 없이 이 추운 겨울을 홀로 어떻게 지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뭐라도 해야 했다.
빌라면 빌고, 무슨 말을 해서라도 그를 사로잡을 수 있다면 빨리 입을 열어야 했다.
“나를, 나, 나를, 좋아한다고 했, 했잖아. 그러니 나를 데, 데려가려고 다시 온 거잖아…….”
모스는 자신이 무슨 말을 뱉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가 나가지 않도록, 그에게 최선을 다해 매달려야만 했다.
이 인간이 나가고 나면, 다시 그 억겁의 시간 속에서 공허를 느낄 것이다. 그건 너무나도 공포스럽고 두려운 일이었다.
모스가 벌벌 떨며 말하자, 남자는 말 없이 모스를 빤히 보았다.
침묵은 길었다.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모스는 최악 중에서도 최악의 답을 떠올렸는데.
“그래. 널 좋아하지.”
돌아오는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루인은 자신의 말에 안도한 듯,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는 이끼색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다, 난데없이 모스의 뺨을 후려쳤다. 소리가 짝 소리가 아닌 퍽 소리가 날 정도로, 둔탁한 손찌검이었다.
눈앞이 핑 돌았다. 귀가 멍했다.
멍한 표정을 짓던 모스가 이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루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루인은 모스가 자신을 똑바로 볼 여유를 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그가 모스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제 하반신으로 얼굴을 잡아당긴 탓이다.
“동한다. 네가 더러운 꼴을 한 괴물 새끼라는 것을 알고도 이것이 동하는 것을 보면, 기억은 없지만 나는 널 좋아한 건 맞는 거 같다.”
옷 위로도 선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어떻게 숨겼는지 의심될 정도로 그것의 크기와 열기가 선명했다. 모스는 제 얼굴만 한 남자의 중심이 잔뜩 성이 나서 제 입술을 툭툭 치는 것에 얼굴이 홧 달아올랐다.
“응, 으응. 너, 너는 날 사랑한다 했어, 사랑해, 나를 사랑해. 그러니까 가, 가지 마. 나를 데려가, 나, 나를 데려가. 약속, 약속했으니까.”
모스는 남자의 발기가 무서웠다. 그러나 동시에 반가웠다.
지금 모스가 매달릴 것은 저거 하나였다. 모스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방금 루인의 주먹에 맞아 한쪽 얼굴이 퉁퉁 부었고 입술이 찢어져 있었지만 입꼬리를 쭈욱 올렸다.
“네, 네가 나를 길들였잖아. 괴물인 나를 네가 길들였어……, 나는 더, 더 이상 혼자 살 수 없어. 나는 네가 필요해, 네가…….”
웃는 와중에도 모스의 머릿속에는 남자가 방금처럼 갑자기 제 배에 단검을 쑤셔 넣진 않을까, 저 멀리서 자신을 보고 있는 기사들이 또 제 목에 검을 꽂지 않을까, 라는 공포스러운 상상이 계속 되었다. 하지만 남자가 떠남으로써 혼자 남겨질 공포가 더 커 앞뒤를 잴 수 없었다.
아픈 거야 버틸 수 있다. 어차피 자신은 괴물이니 죽지 않으니까.
그러나 남자가 자신을 떠나는 것은 버틸 수 없었다. 이 남자가 모스에게서 떠난다면, 모스는 또 홀로 지내게 될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눈물이 흘러, 어느덧 아롱아롱 턱 끝에 눈물이 맺혔다. 매달린 콧물, 눈물이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모스가 바들바들 떨면서도 말을 잇는 모습을 별 감흥 없이 보던 루인은 일순 헛웃음을 지으며 식을 줄 모르는 제 하반신을 보았다.
무슨 수를 써도 제대로 발기가 안 되던 하반신이, 고작 저 우는 얼굴 하나 봤다고 발기를 하다 못해 요동치고 있는 꼴이 우스웠다.
“그래. 괴물아. 네가 내게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알아내려면. 널 데리고 가야겠지.”
루인은 틀림없이 자신이 기억을 잃은 새에 저 괴물이 제게 수작을 부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게 말이 되지 않았다.
“고마워, 고마워.”
그다지 좋은 어투는 아님에도 모스는 그저 데리고 간다는 말 하나에 고맙다고,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눈은 우는데 입꼬리는 여전히 기형적으로 올라가 있었다.
자신의 다리에 매달린 모스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빤히 바라보던 루인의 입술이 열렸다.
“그렇게 나를 따라가고 싶나?”
루인이 흥미로운 얼굴로 모스를 내려다보았다.
물론 애초에 두고 갈 생각은 없었다. 그저 버릇을 고치려고 기사들이 들고 있던 검 두어 개를 단번에 뽑아 오려던 것인데.
“으응, 응, 따라가고 싶어, 따라가게 해 줘…….”
고작 자신이 뒤 한번 돌았다고 이토록 벌벌 떨며 매달리는 꼴이라니.
저 작은 얼굴로 두려워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제게 엉겨 붙는 것이 우스웠다. 겁먹어서 당장이라도 혼절할 것만 같은 표정부터 관리하고 말하지, 무서워서 죽을 것 같다는 저 얼굴을 하고 다리에 매달리고 있었다.
한데, 그게 나쁘지 않았다.
제 다리에 엉겨 붙는 이 뜨끈한 체온이, 이상하게 불쾌하진 않았다.
‘물론 역겹긴 하지만.’
이 더러운 공간도, 이 허름한 녀석도 황제인 그로서는 적응하려야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저번에 녀석을 보았을 때는 이 천한 남자와 몸을 섞었다는 생각만으로도 헛구역질이 절로 일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역겨운 것과 별개로 당장이라도 좆을 저 녀석의 안에 박아 버리고 싶었다. 우는 얼굴을 더 진득하게 바라보면 광증마저도 내리누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루인은 지금 드는 이 충동이 기꺼웠다. 역시 제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었다.
아무 문제 없이 펄떡이는 하반신을 빤히 보던 그는 느슨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몸을 세웠다.
그리고 마치 측정을 하듯, 제 다리에 매달려 바들바들 떠는 모스의 몸을 보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고는 밖의 기사들에게 말했다.
“이 괴물을 넣어갈 곳이 있나?”
“괴물을 넣어가신다니, 그게 무슨…….”
“이 괴물은 해를 보면 녹는다. 그러니 상자에 넣어 데려가야 하지.”
더 이상 이 더러운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이것을 데리고 황궁으로 돌아가, 사정없이 안에 제 것을 박아 넣고 싶었다.
하지만 아까 햇빛에 발이 녹은 것을 보아, 이대로 나갈 수는 없었다.
괴물인 녀석이 돌아가는 길에 다 녹아 버리면 곤란했다.
루인이 그 생각을 하며 상자를 찾았지만, 상자는 없었다. 다만 식량를 넣어 온 상자가 하나 눈에 띄었다. 애초에 사람을 넣을 용도로 만들어진 게 아닌지라, 상자는 얼핏 보기에도 작았다.
작구나, 루인이 그리 말함과 동시에 모스가 사색이 되었다.
“미, 미안해. 미안, 미안해. 내가 커서, 미안해. 버리지 마, 나 버리지 마…….”
혹여 자신이 상자에 들어가지 못하면, 남자가 자신을 버릴까 봐 모스는 바들거리며 떨었고, 그의 눈동자엔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뚝뚝 떨어졌다.
“몸을 구기면 드, 들어갈 수 있을, 거야. 내가 해 볼게, 내가.”
기어서 상자로 향하는 몸짓이 애달프다.
엉금엉금 상자로 기어간 모스가 상자에 몸을 욱여넣었지만,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갖은 수를 다 써도 다리 한쪽이 삐죽 튀어나왔다.
그사이 기사가 상자를 새로 구해 오겠다고 했으나, 루인은 고개를 가벼이 저으며 “그럴 시간은 없다.”라고 딱 잘라 말했다.
여전히 모스는 울먹이며 상자에 들어가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 애처로운 모습을 루인은 가만히 보다가 기어가는 모스의 앞을 가로막고 손을 내렸다.
마치 모스의 눈물을 닦아 줄 것처럼 내밀어지는 손에, 모스가 기대 어린 얼굴로 고개를 들었으나.
그를 맞이한 것은 다정한 손이 아닌.
“잘라 줄까, 꺾어 줄까?”
검의 끝이었다.
“자, 자, 잘라?”
“목을 자르는 게 가장 정확하고 확실한데, 이는 너도 싫을 테고.”
검 끝이 그 새하얀 얼굴을 도려낼 것처럼 바짝 붙었다.
그러나 루인은 모스의 얼굴을 자르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표정을 슬쩍 구기더니 검을 느릿하게 움직이며 상체를 쭉 훑어 내렸다. 이어 다리 위에 검 끝이 닿고 나서야 움직임을 멈추었다.
“다리 하나만 자르면, 딱 들어갈 거 같은데.”
“하, 하지만, 나는 아픈 건, 싫, 너무 싫…….”
“왜? 어차피 다시 자라잖아.”
그러니까 상관없잖아?
루인의 여상한 말투에 순간 매달린 모스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렸다.
아무리 재생하는 몸을 가지고 있더라도 손끝만 다쳐도 아프다고 우는 모스에게는 다리 하나가 잘리는 것은 죽음이나 다름없었다.
입술을 꾹 깨문 모스가 도리질을 했다. 해초 같은 머리칼 틈 사이로, 눈물이 맺힌 녹색 눈동자가 애처로웠다.
“마, 마을에서 상자를, 구해 오면…….”
“비효율적이게, 굳이 왜? 네 다리 하나를 잘라 내면, 모두가 편한 것을.”
루인은 모스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투였다.
인간이라고 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아름다운 외양을 가진 루인의 얼굴에 지어진 표정은 정말 상자를 새로 구해 오는 행위 자체가 무척이나 비효율적이고 시간 낭비처럼 느껴진다는, 귀찮음이 묻어 있는 표정이었다.
“아, 아…….”
설령 그게 자신이 사랑을 속삭이던 이의 다리를 도려내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루인의 말에 모스가 바들바들 떨었다.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남자를 따라가고 싶은데, 다리 하나를 도려내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해서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하기 싫다고 하면?
다리를 잘라 내기 싫다고 하면, 루인은 모스를 가차 없이 버리고 갈 것이다.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모스가 바들바들 떨었다. 그러나 루인의 인내는 짧았고, 애초에 모스에게 선택지를 줄 생각도 없던 듯 여상히 말했다.
“하기야, 피는 귀찮다. 옷감에 묻으면 잘 지워지지도 않지.”
루인은 상자 안에서 몸을 욱여넣은 채 오들오들 떠는 모스의 앞에 느릿하게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리고 모스의 다리 한쪽을 붙잡고, 셈을 하듯 눈을 깜빡였다.
그때마다 팔랑이며 나비가 날갯짓을 하듯 루인의 속눈썹이 춤을 추었다.
그리고 그의 손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나붓하게 움직여.
“그러니 꺾지.”
단숨의 모스의 발목을 붙들었다.
모스는 제 다리를 꺾는다는 루인의 말에 새하얗게 질려 도리질을 연신 하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공포에 질려 우는 모스를 보던 루인이 괴이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왜 울지?”
“흐윽, 아픈 건 시, 싫어, 흐으윽.”
“너는 나를 사랑하잖아.”
그리고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눈길로 모스를 보았다.
“사랑.”
루인은 그 단어를 입 안으로 곱씹듯 씹다가, 도무지 혀에 감기지 않는지 묘한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래, 너는 날 사랑하잖아?”
그런데, 이 정도도 못 해 줘?
하지만 그럼에도 모스의 공포 어린 표정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루인은 덜덜 떠는 모스를 보며 정말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작 다리 하나로 황궁에 들어올 수 있다면, 천한 괴물인 네게는 영광 아닌가?”
모스는 루인이 말을 하면 할수록 표정이 더 굳어지더니 이내 대답하기를 포기한 것 같았다.
그는 덜덜 떠는 손으로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가리며 이 모든 것이 빨리 끝나길 바랐고, 손 틈 사이로는 비명 같은 울음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흐윽, 흐으으.”
모스는 더는 부탁을 하지 않았다. 루인에게 아양을 떨지 않았다. 그저 우는 법밖에 모르는 것처럼 울기만 할 뿐이었다.
“날 봐.”
모스가 얼굴을 가리자, 여태 무표정이던 루인의 표정이 처음으로 깨졌다.
그는 못마땅하다는 듯 얼굴을 가린 모스의 손을 붙들어 끌어 내리고, 거기에 제 얼굴을 쭉 내밀어 얼굴을 바투 붙였다.
“흐으.”
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모스는 루인을 보지 않았다. 모스는 곧 다가올 고통을 예상한 이처럼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눈물을 뚝뚝 흘리기 바빴다.
모스가 자신을 보지 않는 게 불쾌한지, 루인은 인상을 찌푸린 채로 말없이 모스를 보다가 손을 내밀어 다정하게 그의 발목을 쓸었다.
“소리는 지르지 마.”
루인이 왼손으로 모스의 턱을 우악스레 움켜쥐어 저를 보게 하고, 오른손으로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모스가 눈을 부릅뜬 채로, 눈물을 주륵 흘렸다.
“귀 아프니까.”
모스는 다정한 말투와 달리, 차가운 그의 말에 멍하니 허공을 보다 이전에 남자와 숲에서 함께 지내다가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그게 사랑이라면, 나는 너를 사랑하는 것 같다.
무표정한 낯으로 사랑을 고하던 남자.
-나는 너를 데리고 갈 것이다.
꼭 자신을 데리고 갈 것이라 말하던 남자.
그리고.
“넣어.”
지금 제 앞에서 제 다리를 꺾은 남자.
모스는 상자 안에 몸이 들어간 채 서서히 닫히는 문을 보았다. 여닫히는 소리도 없이, 조용히 닫힌 상자 틈 사이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빛 하나 들어오지 않은 덕에 부러진 다리 쪽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다행이라 여기며, 모스는 중얼거렸다.
“기억을 찾으면 될 거야, 기억을 찾으면…….”
남자가 기억을 찾으면 다 끝날 것이다.
모스는 열매 씨를 손에 꼭 쥐었다. 그리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상자 속에서 그리 미친 듯이 말을 하면 할수록, 의심은 고개를 선명하게 쳐들고 모스에게 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
갑작스레 자리를 비웠던 황제는 빠르게 복귀했다.
황궁을 나설 때는 빈손이었으나, 돌아온 그의 손에는 상자 하나가 있었다.
황제는 물건을 제 손으로 드는 법이 거의 없었다. 그런 그가 딱 보아도 식량이나 넣어 다닐 법한 상자를 직접 들고 오니, 사용인들은 저 상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해했다.
그리고 모두의 의문 속에서, 황제는 그 상자를 들고 방치된 궁으로 들어갔다.
그 궁은 유독 해가 들지 않아, 황제의 궁과 가까움에도 창고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황제가 쓸데없는 골동품을 하나 들고 온 거 아니냐는 말에 모두의 관심이 꺼져 가던 그때, 이상한 일이 연달아 일어나기 시작했다.
황제가 그 궁에 들어감과 동시에 입이 무겁거나 말을 하지 못하는 사용인들이 배치가 되더니, 그것을 시작으로 아무도 쓰지 않던 창고 같은 궁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가구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 가구들은 하나같이 진귀한 것들로, 저 귀한 가구들이 왜 창고 같은 궁으로 들어가는지 나르는 이들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약 닷새가 넘도록 황제가 그 궁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도 모자라, 패악도 부리지 않았다.
그간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의 목이 잘렸던 것과 달리, 황궁은 전례 없는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쯤 슬슬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황제가 황후가 될 여자를 숨긴 거 아니오?’
그들이 가장 큰 근거라 여기는 것은 바로 그 궁에서 신음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는 사용인들의 증언이었다.
황제는 그 궁 안에 들어가고 나오는 이들을 철저히 관리하는 것도 모자라, 대체 무엇을 숨긴 것인지 시꺼먼 천들로 가려 두어 내부를 볼 수 없게 만들었으나, 신음 소리는 막을 수 없었다.
시끄러운 낮이 아닌 밤에 그 근처를 지나가다 보면 얼굴이 새빨갛게 타오를 정도로 신음 소리가 난다는 사용인들의 말을 귀족들이 주워듣고 의심할 무렵, 황제가 회의에 모습을 드러내 정점을 찍었다.
그의 얼굴은 이전보다 훨씬 윤택했으며, 성격 또한(이전에 비해서는) 유해져, 황제의 얼굴을 본 귀족들은 하나같이 황제가 그 창고에 숨겨 놓은 것이 여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런 공포 없이 이렇게 유하게 회의가 흘러가는 것도 모자라, 황제는 보기 드물게 종종 웃음도 터트렸다.
대체 그곳에 누가 있는 거지.
귀족들은 혹 어떤 집안의 여식일지, 황제의 눈길을 피해 서로를 떠봤으나 딱히 성과는 없었다. 그리고 같은 시각, 그 의문을 해소하고 싶어 하는 이는 또 있었다.
황제가 국무 회의에 참석한 그때, 황제가 그렇게나 끼고 살던 이의 방에 몰래 들어온 이가 있었으니.
“와.”
그는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코를 찌르듯 나는 정사의 향에 감탄을 하다, 이불로 둘둘 말아 웅크리고 있는 작은 덩어리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이불 안에 있던 덩어리가 시뻘겋게 짓눌린 눈가를 하고,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고개를 들어 올림과 동시에 침입자가 말갛게 웃음을 터트렸다.
“니가 황후세요?”
황제의 동생, 치테이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