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의심 (7/21)

5. 의심

숨을 내쉬면 그 숨을 도로 자신이 마셨다.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든, 아주 작은 식량 상자 내에서는 자세를 바꾸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상자 안에 있던 모스는 누군가의 등에 자신이 매달려 있는 것은 알았지만, 그게 누구인지 몰랐다. 다만 그 상태로 쉬지 않고, 어딘가로 향한다는 사실 하나만은 뚜렷하게 알았다.

‘아파.’

하지만 무엇보다도 기형적으로 꺾인 제 다리가 문제였다.

살짝 시선을 움직이면 어둠 속에서 적응된 눈이 제 다리를 보게 되는데, 그때마다 꺾였던 고통이 다시금 떠오르는 것만 같아 눈을 꾹 감고 현실에서 도망쳐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렇게 며칠이나 갔을까.

어느 순간부터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많이 들렸고, 그때쯤 되어서야 대충 목적지에 다 왔다는 것만을 눈치껏 알아챌 수 있었다.

“나오세요.”

상자 위에는 무슨 천인지는 모르지만, 뭔가가 씌워져 있었다. 아무래도 상자 틈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막을 용도로 씌운 것 같았다. 그것이 걷어지자, 한 사람이 문을 열었다.

모스는 조금 열린 문을 툭 밀고 고개를 내밀었다. 제 꼴이 새로운 공간을 탐색하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모습을 바로 할 정도의 정신은 없었다.

문을 열자마자 순식간에 많은 정보가 모스에게 밀려왔다.

늘 맡던 숲의 흙과 풀 냄새가 아닌, 낯선 곳의 돌 냄새와 나무 냄새, 쇠 냄새, 그리고 불 냄새와 피부에 닿는 온기가 가장 먼저 밀려들어 온 정보였다.

“아. 안녕하십니까.”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보게 될 이는 남자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어딘가 낯익은 기사 여럿이 모스를 보고 있었다.

기사, 모스는 기사들이 무서워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리고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그들은 남자를 데려간 이들이고, 제 목에 검을 쑤셔 넣은 이들이었으니, 무서운 것이 당연했다.

“…….”

모스가 겁에 질린 얼굴로 기사들을 보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딱히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들은 모스를 달랠 생각도, 다그칠 생각 또한 없어 보였다.

그저 귀찮은 물건을 맡아 골치 아프다는 표정이 대다수였고, 몇몇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즉‘저게 괴물이라고?’라는 호기심 어린 눈길을 던지기는 했으나 결코 호의적인 기류는 아니었다.

“이, 인간은?”

결국 애달픈 것은 모스였다. 기사들의 눈치를 살피던 모스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가장 가까이 있던 기사에게 더듬으며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영 다른 것이었다.

“지금부터 다리를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겠습니다.”

“인간, 은…?”

“좀 아플 겁니다.”

인간은? 어디 있어?

모스는 계속 인간의 행방을 물었지만, 기사들은 모스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제 할 일에 대해, 다리를 고칠 것이라는 말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다리를 다시 부러뜨려야 하니, 잠시 몸을 붙잡겠습니다.”

“부러, 뜨려?”

하지만 이어지는 충격적인 이야기에 모스도 더는 인간의 행방을 물을 수 없었다.

모스는 부러뜨린다는 말에 하얗게 질린 채, 서둘러 제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예. 원래대로요.”

정말로 저 기사 말대로 다리 모양이 원래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제야 모스는 자신이 괴물임을 다시 한번 더 자각했다.

햇빛 아래에 서지 않는 이상 죽지 않는 불사이자 괴물인 모스기에, 오는 길에 뒤틀린 뼈가 그새 서로 맞붙어 이상한 모양으로라도 붙어 버린 것이다.

머리로는 다시 꺾어 원래대로 만들어야 함을 알지만, 고통이 아직도 선연하게 떠올라 싫었다. 다시 다리를 꺾어야 한다니.

“싫어. 안 할래. 아, 아파.”

모스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도리질했다.

그날, 남자가 제 다리를 꺾었던 날. 마치 뼈가 쪼개지는 것만 같은 고통은 뇌리에 각인되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벌벌 떨렸다.

“그 다리를 하고서는 못 걷습니다.”

“아, 아니야. 이거는 괜찮아, 나 걸을 수 있…… 아!”

잘 걸을 수 있으면 꺾지 않을까 싶어, 모스가 보란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한 발도 제대로 못 가고 모스는 앞으로 엎어졌다. 기형적으로 붙어 버린 다리로 걸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거센 소리를 내며 바닥에 처박힌 턱이 마치 부러진 것처럼 아프다. 얼얼한 턱을 붙잡고 모스가 울먹이는데, 그런 그의 앞에 기사가 한숨을 쉬며 모스를 내려다보았다.

“안 되지 않습니까.”

“다시, 다시 해 보면…….”

“설령 그 꼴로 걸을 수 있다 한들, 황명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화, 황명?”

기사는 더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턱짓을 해서 다른 기사들에게 모스를 붙들라는 신호를 보냈고, 그들의 손에 붙들린 모스는 마치 고문이라도 받는 사람처럼 사지가 벌어져 붙잡혔다.

“그럼 이제 꺾겠습니다.”

“…아!! 하…, 하지 마. 하지 마. 아파! …아악!”

다리가 꺾여졌을 때도 아팠는데, 원래대로 돌아가는 건 더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뼈가, 바로 붙는데?”

이건 예상치 못했다는 듯, 지켜보던 기사들도 당황했다.

비틀어서 제대로 모양을 잡으려고 했는데, 모양을 제대로 잡기도 전에 모스의 뼈가 바로 붙어 버리는 것이다.

모스의 재생력이 이 정도일 줄 상상도 하지 못했던 듯, 기사들이 당황하며 서둘러 뼈가 붙기 전 모양을 잡으려고 했지만, 뼈 붙는 속도가 가히 괴물과 같은 속도라 다리는 계속 이상한 모양이 되었다.

결국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원래대로 돌아갈 때까지 으스러뜨려 비트는 것을 반복해야만 했다.

“아, 아! 악, 흐… 흐으….”

문제는 그 고통이 고스란히 모스에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기사들이 사지를 붙잡아, 그새 붙은 뼈를 도로 비틀어 으스러뜨릴 때마다 비명이 절로 나왔다.

모스는 괴물인 제 몸이 원망스러웠다.

“아, 파. 아파. 아파…….”

그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순식간에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었다. 눈물을 얼마나 흘려 댔는지 눈가가 눈물 때문에 짓물러 쓰라렸다.

그만해. 제발.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모스가 양손을 모아 빌었다. 그리고 애원했다. 이상한 다리 모양이라도 좋으니, 이대로 살겠다고, 제발 그만해 달라고 했지만, 기사들은 멈추지 않았다.

‘빌어먹을, 이걸 어떻게 하라고.’

모스의 다리를 직접 꺾던 이는 카를이었는데, 그의 얼굴도 땀범벅이었다.

다리를 원래대로 돌려놓으라는 황제의 명이 있는 이상, 이 다리를 원래대로 만들어 놔야 자신들의 목이 달아나지 않기 때문에 카를은 이를 악물고 다시 모스의 다리를 꺾었다.

“다 됐습니다.”

그 짓을 몇 번을 반복했을까. 모스가 더 이상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해 의식이 날아가기 직전이 되어서야, 다리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럼 쉬십시오.”

물론 기사들은 다리를 고치자마자 이곳에 더는 있기는 싫다는 듯이, 순식간에 방을 벗어났다.

‘추워. 슬퍼. 아파.’

그들이 다 나간 텅 빈 방 안에서 모스가 몸을 웅크렸다. 다리를 원래대로 돌리는 동안 모든 고통을 다 느낀 지라, 몸이 벌벌 떨리며 눈물 콧물로 얼굴이 범벅이었다.

그는 축축한 제 손바닥을 보았다. 얼마나 주먹을 꽉 쥐었는지, 온통 피범벅이었다. 축축하게 피로 젖은 손바닥을 보던 모스가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보고 싶어.’

인간이 보고 싶었다.

아무도 모르는 이 공간에 인간이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았다. 지금 느끼는 이 외로움도, 공포도, 전부 다 그 인간이 먹어 줄 것 같았다.

그렇게 계속, 인간을 그리던 모스는 너덜너덜한 정신으로 까무룩 잠이 들었다.

모스의 의식은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돌아왔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비몽사몽 한 정신을 빠르게 다잡은 모스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문 앞에는 루인이 서 있었다.

모스가 그리 기다리던 인간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 모습이 마치 보금자리에 홀로 있을 때, 열매를 한가득 따 왔던 이전의 모습과 너무나도 흡사해 모스는 그만 순간적으로 잊어버렸다. 제가 여기 어떻게 오게 된 것인지,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는 자리를 박차고 문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마치 옛날처럼, 벅참을 가득 담아 인간에게 다가서서, 안아 달라는 듯 팔을 내뻗었다.

“나, 나…….”

제발 제게 온기를 나눠 달라는 듯 애달픈 몸짓은 보기만 해도 안타까웠다, 하나 당연하게도 모스의 손은 루인에게 닿지도 못했다.

제 몸을 만지려는 그의 손을 남자가 짜증 섞인 표정으로 쳐 낸 것이다.

“뭐 하는 거지?”

천것을 보듯 저를 보는 시선에 그제야 모스는 뭍에서 끌어진 양 퍼뜩 정신을 차린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루인은 잔뜩 인상을 구긴 뒤였다.

맞다. 그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난…….”

싸늘한 시선에 몸이 절로 덜덜 떨렸다.

그가 기억을 잃은 상태임을 잊었으면 안 됐는데, 오늘 하루가 너무 버거웠던 탓일까. 아니면 아직 덜 가신 수마 때문일까. 무엇이 되었든 이미 실수를 했다.

모스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자, 루인이 표정을 더 구겼다. 야차처럼 구겨진 루인의 얼굴에 모스는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사람처럼 헐떡였고, 결국 루인이 다가왔다.

루인이 성큼성큼 다가와 모스의 몸을 일으키려던 그 순간, 모스의 귓가에 낮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네 다리가 이렇게 된 게 누구 때문인 줄 아냐며,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게 누구인지 알면서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이러고 있냐며, 한심하다는 듯 모스를 비웃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린 것이다.

그 탓에 모스는 저도 모르게 발작이라도 일으키는 사람처럼 퍼뜩 놀라며 옆으로 굴렀다.

“…….”

모스를 잡지 못하고, 허공에 애매하게 놓인 루인의 손.

그 손을 보던 루인의 표정이 아까보다 더 싸늘하게 식었다. 이어 바닥에서 저를 원망스레 보는 모스를 보고는 어이없다는 듯 웃더니 말했다.

“또 이러네.”

루인의 싸늘한 말투를 듣자마자 모스는 찬물을 뒤집어쓴 양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저번에 보금자리에 찾아온 남자의 손길을 피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떠오른 것이다.

“아…, 니야….”

그때도 모스는 지금처럼 루인의 손길을 피했고, 손길을 피하자마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가려고 하지 않았는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나서야 그와 함께 갈 수 있던 것인데, 이렇게 또 손을 피하다니.

막상 데려왔는데, 이런 자신의 태도 때문에 도로 내보낸다고 하면 어떡하지?

“내가 자, 잘못했어.”

모스는 남자에게서 자신이 버려진다는 상상을 했다. 그 상상만으로도 너무나도 무섭고, 공포스러워 머릿속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지만, 단 하나는 확실했다.

“날 버, 버리지 마.”

지금 남자에게서 떨어지면 안 된다.

허겁지겁 달려가 그의 다리를 붙들어 껴안았다. 궁에 온 이후 닿은 적 없던 온기가 처음으로 붙잡혀졌다. 익숙한 향이었다. 익숙한 촉감이었고, 익숙한 이였다.

하지만 그 온기는 얼마 가지 않았다. 남자가 혀를 차며 모스를 걷어찬 것이다.

“한데, 감히 그런 눈으로 나를 봐?”

“허, 허억.”

명치에 제대로 발이 들어왔다.

내장이 등으로 눌어붙는 느낌에,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지만, 생존 본능이라는 게 참으로 무섭게도 몇 번 헛숨을 내쉬니 탁 숨이 트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아팠다. 명치가 움푹 파인 고통에 비명이 나올 것 같았다.

엎드려서 바닥을 두어 번 굴러야 고통이 가실 것 같았지만 모스는 그러지 않고, 남자에게 거머리처럼 달라붙었다.

“미, 미안해. 미안해. 내가 큰 게 잘못이야. 내가 자, 작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어. 내가 다 자, 잘못한 거야. 미안해. 응? 버리지 마.”

모스는 제가 무슨 말을 내뱉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머릿속을 스치는 말들을 곧바로 중얼중얼 빠르게 쏟아 내며 히끅히끅 울 뿐이었다.

방울방울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모스의 시뻘겋게 변한 볼 위로 뺨보다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러, 순식간에 얼굴 전체가 축축했다.

“너, 너는 친절해서, 그래서 내 다리도 안 잘랐어. 넌 친절해, 친절해, 내가 나빠, 내가 나, 나빠…….”

“비켜.”

“날 혼자 두지 마. 다, 다른 사람에게 날 버, 버리지 마.”

“……하아.”

루인은 제게 달라붙는 모스가 성가시다는 얼굴이었다. 그는 모스를 비키게 만들기 위해 다시 발길질을 할 양인 듯, 발을 들어 올렸으나, 모스가 더 빨랐다.

모스는 루인이 자신을 걷어찰 것임을 알았지만 피하지 않고, 오히려 손을 뻗어 옷 아래, 루인의 것을 손으로 잡고 주무른 것이다. 방에 들어올 때부터 반쯤 서 있던 그것을 모스는 생명줄인 양 움켜쥐었다.

“조, 좋지? 좋잖아.”

발길질을 하지 못한 루인이 인상을 구겼고, 모스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채 루인을 올려다보았다.

손은 벌벌 떨리고, 눈은 반쯤 풀린 그는 겁에 질린 채라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는 게 명백해 보였다.

다만 지금 이 행위가 루인이 기억을 잃기 전에도, 잃은 후에도 그가 좋아했던 행동임을 기억하고 손을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만져도 남자의 표정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모스는 당황했다. 이어 그는 벼랑 끝에 몰린 이처럼 다급히 남자의 옷을 내렸다. 그리고 그것을 입에 덥썩 물었다.

“내, 가 노력할게. 그러니, 까…….”

제 것을 머금으려 드는 모스에, 루인이 낮게 신음을 내뱉으며 인상을 구겼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며, 모스의 머리통을 밀치려고 하는데.

-너는 못 가. 여기가 커, 커졌잖아.

루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거 같았는데.

“커… 크흡.”

그러나 제 아래를 문 모스가 허덕이며 신음을 내뱉고 있는 것을 보니, 이내 떠오른 기억은 휘발되었다.

아득, 뼈를 짓씹듯 남자의 턱 근육이 움직였다. 이어 그가 모스를 일으켜 세우더니 성난 표정으로 말했다.

“누가 천것 아니랄까 봐.”

천것.

모스의 마음에 칼날이 박히듯 움푹 그 말이 다시 심장에 아프게 박혔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는 달랐다. 무슨 말이든 남자의 말을 거스르지 않겠다는 듯,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모스가 말했다.

“응. 나, 처, 천것이야. 나 천것 맞아. 그래도 나 버리지 마. 나 버리지 마….”

“그럼 더 잘해야지.”

“응, 응. 잘할게, 잘할게, 나는 네가 좋으니까, 너를 사랑하니까…….”

곁에 남을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는 듯 맹목적인 시선이었다.

루인은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담지 않을 것만 같은 그 맹목적인 얼굴에 순간 시선을 뺏겼다.

그는 한 손으로 가뿐히 모스를 제 품으로 당기더니, 모스의 옷을 찢어발기듯 힘주어 붙잡았다. 이어 그를 질질 끌고 침대로 향한 루인이 침대 위에 던지듯 모스를 두고, 그 위로 올라탔다.

“입 장난 그만하고 벌려.”

제 침의를 던지듯 끌어 내린 루인의 상체가 느슨하게 기울었다.

길고 흰 목이 유연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루인의 입은 당장이라도 모스를 씹어 삼킬 듯 벌어졌다.

“뭐 해, 안 벌려?”

***

나를 버리지 말아 달라며 매달린 결과, 모스가 루인에게 안기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흐으…, 으으…….”

며칠인지 셈할 수도 없을 만큼, 루인은 쉼 없이 모스를 안았다. 그는 그간 하지 못한 정사를 몰아 하는 이처럼 맹렬하게 모스의 다리를 벌렸고, 모스는 그런 루인을 받아 들이는 데에 정신이 없었다.

문 사이로 새어 나오는 신음 소리는, 감정의 고조가 거의 없는 궁의 사용인들 또한 낯이 뜨거워질 정도였다.

모스는 루인에게 안기면서, 그가 제 생명줄인 양 붙들고 놓지 않았다.

아래가 찢어질 것처럼 아파도, 이어 숨을 콱콱 막히게 하는 열락에 어찌할 바를 몰라 남자의 등을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아, 아. 금방 열 띤 신음을 내뱉던 모스가 허공에 달랑거리는 제 두 발을 보다 문득 생각했다.

이게 사람인가 짐승인가. 아니, 설령 짐승도 이렇게는 못 할 것이다.

모스는 제가 얼마나 루인에게 안겼는지는 감히 셈할 수도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에 얼굴을 확 붉혔다.

“아, 흐으.”

하지만 루인은 모스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모스는 루인의 아래에서 미친 듯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용케 팔을 힘껏 뻗어 루인의 목에 제 손을 감았다. 그는 혹 자신이 쓰임을 다했다고 버려질까 봐 절박함을 담아 루인을 껴안았다.

몸을 섞는 동안 두 사람이 특별히 주고받는 대화는 없었다. 둘 사이에 섞이는 것은 신음, 숨, 타액일 뿐이었다.

그마저도 모스는 기꺼이, 안도하며 루인을 껴안았다.

이렇게 살을 섞고 있으면 그때의 남자 같았으니까.

딱딱하고, 따뜻한 곳이라고는 늑대 가죽이 전부였던, 하나 서로 엉겨 붙어 있으면 추운 것이라고는 몰랐던 그 보금자리에서의 남자 말이다.

그러나 회상은 사치였다. 익숙한 쾌락에 달뜬 몸이 이내 절정을 맞이하고, 곧이어 루인도 사정했다.

“흐, 아으.”

모스의 속에서 몇 번째인지도 모를 뜨거운 정액이 퍼졌다. 더는 밀어 낼 힘도 남아 있지 않은 모스가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눈이 계속 감겨, 방금 전 사정이 부디 마지막 사정이길 빌었다.

그러나 눈을 감아도 얼굴에 닿는 시선이 따갑다. 결국 모스는 간신히 눈을 떠서, 제 앞에 있는 루인을 응시했다.

“…….”

루인은 묘한 기색으로 그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리고 모스와 눈이 마주치자, 제 것을 안에서 빼냈다. 그의 성기가 모스의 몸 안에서 빠져나오면서 뭉근하게 내벽을 긁었다.

“…으.”

모스는 루인의 성기가 빠지면서 활짝 열린 구멍이 뻐끔거리며 정액을 내뱉는 게 느껴졌고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일어 바르르 떨었다.

신음을 내뱉는 모스를 보는 남자의 눈에 다시금 정염이 오르려고 했으나, 모스는 울먹이며 도리질했다. 그러고는 기다렸다는 듯 허둥지둥 다리를 오므려 정강이를 허벅지에 바짝 붙였다.

고개를 내려 보니 루인의 성기는 내벽에서 묻어 나온 정액으로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고, 제 구멍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계속해서 정액을 꿀렁꿀렁 뱉어 내 이불을 축축이 적시고 있었다.

“모, 못 해.”

지독히도 야한 모습에 모스가 얼굴을 붉히며 도리질했다. 완강한 거부의 몸짓을 빤히 응시하던 루인이 땀에 젖은 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그 얼굴을 보던 모스의 얼굴이 순간 새빨개졌다.

처음에는 온통 예민한 기운 휘두른 것처럼 선득한 표정을 짓던 루인이었다. 하지만 모스를 안으면 안을수록, 모스의 내벽이 정액으로 흐물거리면 거릴수록 남자의 분위기는 누그러졌다.

지금도다.

그는 정사 도중에도 종종 나른한 얼굴로 모스를 보곤 했는데, 모스는 저 얼굴이 너무나도 좋았다. 마치 기억을 잃기 전의 남자와 몸을 섞는 것 같기도 했고, 분위기가 말랑해지는 것 같아서.

“……아, 으응.”

하지만 행동은 말랑하지 않았다. 벽에 바짝 붙었던 모스의 발목을 루인이 붙잡고 제 쪽으로 쭉 끌어와, 순식간에 바짝 붙인 다리를 벌렸다.

당황한 모스가 허공에 손을 내뻗으며 허우적거리는데, 탁, 그 손을 루인이 낚아챘다.

“대체 무슨 수작을 부렸길래.”

그는 짓씹듯 말문을 열었다. 모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듯 살짝 입을 벌렸다.

그간 몸을 섞으면서 했던 말이라고는, “벌려”, “엎드려”, “제대로 해” 말고는 없었기에, 처음으로 제대로 나온 문장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수, 수작? 그게 뭐, 야?”

애석하게도 귀하디귀하게 나온 첫 마디이건만, 모스는 그 말이 도통 무슨 뜻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루인이 무슨 말을 할지, 신경이 쓰이는 듯 두 귀가 쫑긋 세워져 얼굴을 발긋하게 붉히는 것은 결코 모스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그는 루인이 할 말이 기대되었다. 여기 와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생각에, 절로 얼굴이 상기된 것이다.

“하.”

하나, 루인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는 가만히 모스의 얼굴을 보다 돌연 헛웃음을 지으며 욕을 짓씹었다.

갑작스러운 욕에 모스가 당황스러워하는 것도 잠시, 이내 루인이 제 아래를 보고 미간을 구겼다. 모스도 루인의 시선을 따라, 그의 중심을 바라보는데.

“이봐, 또 이러지.”

축축하게 젖어 축 처졌던 루인의 성기가 어느덧 기운차게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을 본 모스는 못 볼 것을 보았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가뜩이나 루인의 것은 지나칠 정도로 커서 아프고, 기능이 의심될 정도로 느리게 싸는데, 쌀 때까지 모스는 발기한 루인의 것을 품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더 부담이 컸다.

어쩌지. 모스가 창백한 얼굴로 서서히 크기를 키워 가는 그의 것을 보았다. 또 한동안 끈 떨어진 인형처럼 달랑달랑 루인의 아래에서 흔들릴 일이 자명했던 탓에 그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더, 더는 못 해.”

아무리 루인이 좋다고 해도, 한계란 있었다.

“여기, 가 꽉 찼어. 더는 못, 못 해. 그만해.”

결국 모스가 제 배를 붙잡고는 흐느끼며 항복을 선언했다.

본디 뭔가를 먹는 법이 없던 괴물이었던 모스에겐, 아랫배가 볼록한 이 느낌은 굉장히 생소했다.

포만감이라고 하기에는 과했다. 남자의 것을 머금고 있을 때면 배꼽 아래가 자꾸 올록볼록거렸는데, 그러다 뱃가죽이 뚫릴 거 같아 무서웠다.

또한 남자가 사정을 하는 양도 어마한지라, 진짜 이대로 그가 더 싸다가는 배에 남자의 것이 가득 차서 펑 터져 버릴 것만 같았기에, 모스는 결국 엉엉 울며 남자에게 매달렸다.

“이, 이러다가는 펑 터질 거야. 아, 아프게 하, 하지 마. 이제 그만…….”

울먹이며 모스가 주절주절 말을 잇는데,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루인이 이를 부러뜨릴 것처럼 아득 입을 꽉 다물더니, 당장이라도 제 아래에 있는 모스를 죽여 버릴 듯이 사납게 노려봤다. 그러곤 제 아래를 모스의 아래에 맞췄다.

“너, 는 진짜…….”

그것에 모스가 질겁을 하며 도리질했다.

“찌, 찢어질 거야. 더는 모, 못 해.”

“찢어지기는 무슨, 여긴 잘도 먹는데.”

턱도 없는 소리를 한다는 듯 픽 웃고는 아래를 휘젓는 남자의 손, 그 말은 틀린 게 아니었다. 눅진한 아래는 오히려 남자를 반기는 듯 씹고 놔주질 않았다. 그것은 결코 모스의 의지와 관계있는 것이 아니었다. 모스는 아프다고 도리질했다.

“또 거짓을 고하네. 그새 다 나았잖아?”

“아니, 아니야. 아니야.”

남자의 말이 맞았다. 아마 평범한 인간이었으면 진즉 복상사였겠지만, 모스는 괴물이었기에 빠른 회복력으로 여태 버틴 것이다.

그러나 그 회복이 독이었다. 구멍이 벌어졌다가 순식간에 조여드니, 매번 새로 받아 들이는 것처럼 감각이 꽤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너무, 커. 너무 커.”

더는 하기 힘들었다. 여러모로 모스는 한계에 몰린 기분이 들어서 엉엉 울며 그를 밀어 내다 남자와 딱 눈이 마주쳤다.

아, 순간적으로 모스가 혀를 짓씹으며 제 실수를 자책했다. 허둥지둥 눈을 내리깔았지만, 이미 늦었다. 눈이 마주칠 때면, 이어지는 행위가 대부분 삽입이었기 때문이다.

루인은 그러한 모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고개를 떨군 모스가 고개를 재차 들어 올릴 생각이 없는 듯 굳건히 바닥만을 보자, 루인의 눈에 서서히 불쾌감이 서리기 시작했다.

“…이상도 하지.”

그가 모스의 턱을 움켜쥐고 잡아당겼다.

웅크렸던 몸이 엉거주춤 일으켜져 앉은 것도, 서 있는 것도 아닌 채로 모스가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누가 내 눈을 똑바로 보는 걸 그리 달가워하지 않아. 그러기에 종종 뽑아 버리는데.”

뽑아 버린다고?

뒤늦게 말을 이해한 모스가 질겁한 얼굴로 도리질하며 슬금슬금 제 엉덩이를 뒤로 움직여 루인의 손아귀에서 제 얼굴을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모스는 얼굴을 빼낼 수 없었다.

“으윽.”

강한 악력으로 루인이 제 턱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눈을 꾹 감아도 시선이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눈을 뽑을 것처럼 날이 선 눈빛에 겁에 잔뜩 질린 모스가 달달 떨다, 살짝 눈을 떴다.

턱을 붙든 루인이 바짝 모스의 얼굴에 당장이라도 입을 맞부딪힐 것처럼 다가와 있었다.

그는 짐승같이 노란 눈을 빛내며, 늪같이 어두운 모스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모스가 눈을 내리깔려 들면 가만두지 않고 손에 힘을 더 주었다.

“넌 왜 피하면 뽑아 버리고 싶을까.”

잡고 있는 목을 찢어발길 것처럼 서늘한 시선이었다.

이어지는 숨 막히는 정적.

마치 모스의 속을 들여다보려는 이처럼 집요하게 눈맞춤을 하는 루인과, 피하는 순간 몸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만 같아, 루인의 시선을 피하지 못해 이도 저도 못하는 모스.

“폐하. 국무 회의가 곧 열립니다!”

그때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고, 루인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오늘은 꼭 가셔야 합니다! 사안이 꽤 중합니다!”

쾅쾅쾅, 다급한 목소리를 한 카를이 다시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하, 모스는 정적이 깨지자마자 꾸역꾸역 참던 숨을 간신히 내뱉었다.

밖에서는 카를이 계속해서 미친 듯이 문을 두드렸다. 평소엔 이렇게까지 문을 두드리지 않았는데, 오늘은 루인이 나오지 않으면 큰일이 생길 것처럼 여간 집요한 게 아니었다.

모스는 힐끔 루인의 눈치를 살폈다.

몸을 섞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요 며칠 누군가가 몇 번이나 문을 두드리며 루인을 불렀지만 그가 단 한 번도 밖에 있는 이에게 응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당연히 오늘도 응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모스가 눈을 깜빡이며 루인을 보는데.

“오베리안과 세실리 사이에서 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어, 저희 제국이…….”

그 순간,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는 듯 가만히 있던 루인의 눈빛이 달라졌다.

“아시는 분이 왜 그러십니까! 더는 지체할 수 없습니다!”

루인의 시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는 물끄러미 모스를 보았다. 무슨 상황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남자가 이 상황에 제법 화가 난 듯 보였기에 모스는 그저 목을 움츠린 채 눈치만 보았다.

그때 툭, 모스의 턱을 붙잡은 손을 남자가 놓았다. 그리고 그는 별다른 미련이 없다는 듯 뒤를 돌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모스의 시야에서 남자의 모습이 멀어졌고, 밖에서는 계속해서 루인을 찾던 카를이 이제야 나오시냐며 나무라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가지.”

밖에서 들리는 두 사람의 목소리에, 가만히 누워 있던 모스는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 안 되는데.’

당연히 루인이 안 갈 줄 알았던 모스가 뒤늦게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다리 사이로 주르륵 남자가 그간 싸 놓은 것들이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감각을 제대로 느낄 새도 없었다. 남자가 나가서 돌아오지 않을까, 모스는 그게 두려워 달려 나가 문을 열었다.

“여기 겉옷을 준비했습니다. 정말, 제가 방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당장 있을 국무 회의는 양국이 동시에 제국군 파견을 요청해서 귀족들이…… 아.”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것은 남자와 저번에 상자에서 나오자마자 제 다리를 꺾은 기사였다. 모스는 그 기사의 얼굴을 보자마자 얼어붙었고, 그 기사는 모스가 방에서 나올 줄은 몰랐는지 눈을 크게 뜬 채 모스를 보았다.

모스가 제 몸을 보았다. 그새 겉옷을 걸친 남자와 달리 자신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새하얀 나신이었다.

그간 정사를 나누는 동안, 옷은 하등 필요가 없는 것이었고, 당장 남자를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만 가진 터라 옷을 걸칠 새도 없었다.

“아.”

살짝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모스가 꼬물거리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는데, 그런 모스를 가만히 보던 루인이 말했다.

“잘 걷네.”

“……으, 응?”

“잘 걷는다고.”

어딘지 모르게 화난 기색에, 우물쭈물 바닥을 보던 모스가 고개를 들어 올리려던 그때.

“어, 억.”

모스는 제 숨통이 죄이는 느낌에 몸을 버둥거리며 입을 벌렸다.

루인이 빠르게 모스의 목을 붙잡은 채, 마치 올가미에 걸린 짐승을 들고 가듯 질질 모스를 끌고 정사의 향이 채 가시지 않은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크, 윽.”

허공에서 버둥거리던 모스는 이를 경악스러운 듯이 보던 카를과 눈이 마주쳤지만, 카를의 얼굴을 더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곧바로 그는 며칠간 벗어나지 못했던 침대에 처박혀 버리고 말았다.

“아, 아파.”

턱, 루인의 손이 모스의 쇄골을 꾹 눌렀다.

그 악력은 마치 쇄골을 부러뜨릴 것처럼 강해 모스는 아픔에 울먹였고 루인의 시선은 축축해진 모스의 아래를 집요하게 훑었다. 이어 그는 고개를 돌려 모스가 걸어온 길에 생긴 동그란 물방울 자국을 보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 꼴로 뚝뚝 흘리면서 걸었나?”

“…나, 나는.”

“좆 물 흘리기만 해 봐.”

목소리가 지나치게 날카로워 모스가 당황해서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함부로 나오지 마. 돌아와서 확인할 거니, 얌전히 여기 처박혀 있어.”

모스가 그러거나 말거나 루인은 제 할 말만 했다. 그는 옆에 있는 이불을 모스에게 던졌다. 갑자기 루인이 왜 저러는지 모르겠는 모스가 멍하니 이불 아래에서 있다가, 그가 걸음을 옮기자 서둘러 이불 너머로 얼굴을 내밀었다.

루인이 문으로 걸어 나간다.

‘따라가야 해.’

하나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모스는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나서려다, 그런 모스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양, 루인이 뒤를 도는 바람에 움찔하며 멈추어 섰다.

그는 웃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모스를 보는데, 새까만 어둠 속에서도 그의 시선은 코앞에 있는 칼날처럼 매섭고 날카로웠다.

“나, 나도… 데, 려…가면…….”

루인이 나가서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가뜩이나 자신은 이곳이 어딘지, 누가 있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한 번 버려졌던 모스의 머릿속에는 루인이 떠난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용기 내서 말을 꺼냈으나, 말을 꺼내자마자 루인의 눈이 선득하게 자신을 응시하는 바람에 기가 죽은 모스는 곧바로 고개를 떨구었다.

“폐하, 더 이상 지체하실 수 없습니다.”

“잠시.”

루인은 문을 나갈 것처럼 굴다가, 돌연 발끝을 돌려 모스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의 발끝은 정확히 말하자면 햇빛 하나 들어올 틈 없이 꽉 닫혀 있던 시꺼먼 천들이 덧대어진 커튼 쪽으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루인의 행동에 문가에 서 있던 카를도, 모스도 의아한 듯 그를 보는데.

촤악, 이내 시꺼먼 천이 걷어짐과 동시에 모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 이를 지켜보던 카를의 눈도 부릅떠졌다.

“아, 안 돼.”

모스가 있는 침상의 앞에 몇 걸음을 제외하고 침상부터 문까지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는 새하얗게 질린 채로 벽에 바짝 붙었다. 한 뼘이다. 한 뼘만 더 앞으로 나갔다면 그의 발목은 도려졌을 것이다.

“햇빛, 아,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햇빛에 녹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다. 생살이 불에 지져지는 고통이니, 모스가 이토록 겁먹는 것이 당연했다.

새하얗게 질린 채 바들바들 떠는 모스의 눈에 아롱 눈물이 맺히는 모습을 루인은 가만히 보다 문으로 향했다.

“폐하? 아니, 창가의 천을 저리 거두어 두시면, 어찌합니까!”

이 모든 상황을 본의 아니게 보게 된 카를이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루인에게 말했다.

“왜?”

“왜냐니요, 저리 두면 햇빛으로 크게 다칠 터인데…….”

“그게 왜?”

루인은 카를을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보며 반문했다.

“짐이 무엇을 잘못한 건가?”

그제야 카를은 루인의 의도를 알아채고 경악 어린 표정을 지었다.

루인은 모스가 혹여나 나갈까, 그것을 방지하고자 천을 걷은 것이다.

이게 최선의 방법이라는 듯, 물끄러미 카를을 보는 루인의 얼굴에는 한 치의 죄책감도 없었다.

“가지.”

자신을 지나쳐 걸어가는 루인의 등이 꼿꼿하다.

카를은 그 널찍한 등을 보다 탄식을 뱃속으로 삼켰다. 이게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건지 하나도 알 수 없었지만, 언제부터 그런 게 중요했단 말인가.

황제의 뜻은 제국의 뜻, 즉 무엇이 되었든 카를이 따라야 할 뜻이었으며 어차피 황제는 늘 상상을 초월해 이해할 수 없는 범주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카를은 애써 잡념을 지우고 사무적인 투로 말했다.

“……일단 상황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베리안 왕국이 예전부터 세실리 왕국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계셨겠지요. 다만 이번에 세실리 왕국에서 오베리안의 다섯 번째 왕자를 죽였다며 전쟁을 선포한 겁니다.”

“…….”

“현재 세실리는 이는 함정이라며 제국군의 파병을 통한 중재를 요청했습니다. 반면 오베리안은 동맹은 세실리 측에서 먼저 깼다며, 제국군의 파병을 통해 이 전쟁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를 보여 달라는…… 폐하 듣고 계십니까?”

빠르게 루인의 뒤를 쫓으며 주절주절 말을 잇던 카를은 지나치게 조용한 황제가 이상한지 걷다가 걸음을 멈칫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루인이 더는 걷지 않고 우뚝 서 있는 것을 보고, 뒤를 쫓던 카를도 서둘러 멈추었다.

갑자기 왜 멈춘 것이지. 카를이 의아하게 그를 보던 그때, 한동안 가만히 서 있던 그가 뒤를 느릿하게 돌고서는 말했다.

“보았나?”

서늘한 말씨에 카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왕자 시해 사건의 전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 흐름상 꼬집을 내용이 저것 말고는 없었기에, 카를이 고개를 끄덕이며 제가 들고 있던 보고서를 쭉쭉 넘겼다.

기사단장인 카를은 황제의 그림자 안에서 움직이는 이이기에 정치에 나서는 일은 거의 없지만, 다만 이번 일은 제국군 파병과 관련이 있어 진즉 사태에 대한 보고를 실시간으로 받아 보고 있던 참이었다.

“정보원들과 제 견해를 섞어 말하자면, 이번 일은 오베리안의 함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전쟁의 당위를 만든 것이지요. 오베리안은 이전부터 힘을 길러 우리 제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어 했고, 애초에 세실리 쪽은 전쟁을 원치 않…….”

“아니.”

루인이 한 걸음 더 다가와 가까이 섰다. 그것에 카를은 흠칫 몸을 굳혔다.

햇빛을 등진 황제의 얼굴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 그림자 진 얼굴 사이로는 금수의 눈처럼 노란 눈이 빛을 빨아 먹은 듯 요요히 빛나고 있었다.

카를은 그 눈을 마주한 순간 오싹했다.

기사단장인 카를도 풍채가 좋은 편이지만, 루인은 더 했다. 타고나길 기골이 장대했다.

그 커다란 몸을 하고 루인이 가만히 카를을 내려다보니, 집채만 한 짐승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무력한 저를 삼킬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 것 같은 위압감이 들며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고작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땀이 주룩주룩 흘러 등이 축축해지는 것 같았다.

숨조차도 제대로 내쉴 수 없어 얼어붙은 채로 황제를 보던 그때.

후, 한동안 카를의 얼굴을 빤히 보던 황제가 얼음같이 굳어 있는 카를의 얼굴 위로 작게 숨을 내뱉었다.

옅은 숨이 카를의 이마를 훑으며 지나가고, 이어 루인이 뒤를 돌았다.

“…되었다.”

침묵이 깨지며 공기가 느슨해졌다.

“주의하게.”

황제는 그 말을 남겨 두고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주의하라고? 무엇을?

카를은 그리 묻고 싶었으나, 물을 힘이 없었다. 하마터면 저 살기에 짓눌려 주저앉을 뻔했다. 방금 전 집요하게 저를 보던 그의 시선에는 명백한 경고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카를이라 버틴 거지, 평범한 기사였다면 그만 주저앉아 고개를 들지 못했을 것이다.

긴장으로 인해 축축이 젖은 뒷덜미를 손으로 문지른 카를은 황제의 경고가 아까 전, 황제와 몸을 섞은 소년을 본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내가 설마, 그 괴물 나신을 봐서?’

그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다는 듯, 헛웃음을 짓다가 표정을 굳혔다.

황제는 무언가에 집착을 하는 이가 아니었기에, 자신과 몸을 섞은 여인이 카를에게 안긴다 하여도 눈 하나 깜짝할 인간이 아니었지만.

‘설마.’

혹 이번에는 다른 걸까?

하기야 황제의 분위기가 손바닥 뒤집듯 갑자기 바뀐 것은 카를이 모스의 나신을 본 이후였다.

“카를.”

번뜩, 상념에 잠겼던 카를이 저를 부르는 황제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황제는 어느덧 저 앞까지 가 있었다. 허둥지둥 그의 뒤를 쫓자 루인이 기다렸다는 듯 카를에게 물었다.

“당장 양국에 있는 제국민들을 빼 올 수 있나?”

“그거라면 오베리안이 전쟁 선포를 한 순간부터 준비 중이었습니다. 그럼 파병 요청은 어찌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양국의 파병 요청을 전부 거절할 것이다.”

“……예?”

그간 교류가 활발했던 두 왕국이었다.

최소 어느 한 곳에는 파병을 허가할 줄 알았던 카를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으나, 루인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둘 다 원래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나름 왕국 간의 전쟁에 대한 문제였지만 루인에겐 그저 찍찍대는 쥐 새끼가 성가시다는 투였다.

“이참에 다 엉망이 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카를은 표정을 굳혔다. 그의 주군은 농을 즐기는 이가 아니니, 정말로 파병 요청을 전부 거절하고 뒤로 물러나 전쟁을 구경할 셈이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구경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 훤했다. 만약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면 제국에도 큰 영향이 미칠 것이고, 파병 요청에 응하지 않더라도 제국이 직접 나서야 할 순간도 필시 올 것이다.

“하지만 폐하 그렇게 된다면…….”

카를이 그런 생각을 하며 루인에게 입을 열려던 그때, 루인을 바라본 카를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가벼운 말투와는 달리 루인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것이다.

‘폐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것인지 영 알 수가 없군. 그나저나 귀족들이 이 얘기를 들으면 꽤 놀라겠어. 그네들은 지금쯤 국무 회의에서는 귀족들이 서로의 이득에 따라 제국군을 세실리에 보낼지, 오베리안에 보낼지 싸우고 있었을 텐데.’

파병을 전부 거절하면 귀족들의 논쟁은 전혀 쓸모가 없게 되어 버린다.

긴급하게 열린 국무 회의를 순식간에 쓸모없는 회의로 만들어도 괜찮은 건가 싶었던 카를은 계속 루인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생각하다, 돌연 갑작스레 떠오르는 생각에 눈을 크게 떴다.

‘설마, 폐하께서는 전쟁을 원하시는 건가?’

카를은 황제를 누구보다도 곁에서 오래 지켜본 이였다.

그래서 전부는 아니더라도, 얼추 생각을 알아맞힐 수 있었다.

만약 카를의 생각이 맞다면, 황제는 승리한 왕국이 그 누구이든 더는 동맹국으로 두지 않고, 그 나라를 씹어 먹을 셈인 것이다.

영원한 겨울의 저주를 풀지 못한 제국은 늘 녹은 땅이 필요했고, 땅은 곧 풍요이자 국력이었으니까, 승자가 누구이든, 전쟁의 여파로 허덕이는 승전국을 가차 없이 짓밟아 땅을 쟁취한다면 제국으로선 이득이었다.

‘폐하께서는 직접 참전하시겠지.’

전쟁이 벌어진다면 선두에는 신이 빚은 황제인 루인이 있을 것이다. 수많은 이들의 목을 단번에 꺾고, 제국에 풍요를 가져다줄 그들의 왕 말이다.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카를을 벅차게 해, 그는 저도 모르게 흥분 어린 표정을 지었지만, 그의 마음에는 여전히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그 괴물.’

카를은 뒤를 힐끔 돌아본 뒤, 인상을 찌푸렸다.

황제와 모스가 머물던 방이 보일 리가 없지만, 그의 시선 끝엔 아까 전 방문이 있는 것 같았다.

황제가 집착하는 대상이 생긴 것이라면…… 이는 제국의 득인가, 실인가.

카를은 그것을 가늠이라도 해 보듯 눈을 가늘게 뜨다가 고개를 돌렸다.

하긴, 흥미가 얼마나 가시겠어. 이러다 말겠지.

그는 불안의 고개를 억지로 꾹꾹 눌렀다.

***

울다 지쳤다.

남자가 너무 밉다가도, 그런 남자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다가도, 남자가 없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어서 눈물이 줄줄 났다.

“무, 서워.”

다행히 햇빛은 모스와 점점 멀어졌다. 하지만 이 상황 자체가 너무 무서워 그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되어 있었다.

위안을 구하듯 그 얼굴을 이불에 문질렀다. 어찌나 눈물을 많이 흘렸는지, 이불이 순식간에 축축해졌다.

그렇게 훌쩍이다 보니, 잠시 선잠이 들었다. 긴 정사의 여파였을까, 아니면 들어온 이의 발이 지나치게 가벼웠던 이유일까.

“와. 니가 황후세요?”

모스는 제 앞에 침입자가 서고 나서야, 그의 존재를 알아챘다.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저를 보고 웃는 침입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흠칫 놀랐다.

기척으로만 들었을 때, 움직임이 가벼워 성별이 남자일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침입자는 남자였으며 처음 보는 낯이었다.

다만 모스는 저도 모르게 침입자의 눈을 보곤 홀린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새벽녘 햇빛 냄새가 날 적, 연못 색이 딱 이러했다.

투명하고 맑은, 하지만 어딘가 어두운 파란색이 발라진 남자의 눈동자가 너무 아름다웠다.

남자를 제외하고 인간과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눈을 마주쳐 보는 것은 생에 두 번째 벌어진 일이라 시선을 떼지 못한 것도 있지만, 남자는 딱 보기에도 화려하게 생겨 여러모로 시선을 뗄 수 없는 이였다.

머리카락을 달빛으로 꼬아 만들 수 있다면 저리 생기지 않았을까, 어찌 저리 하얗지?

모스가 그리 생각하며 침입자의 부서지듯 얇게 꼬불거리는 백색에 가까운 머리칼을 보았다. 그때.

“이게 마음에 드나?”

대뜸 남자가 제 머리를 한 손으로 붙잡은 채, 얼굴을 코앞으로 들이밀었다.

멀리서도 선연하게 보이던 푸른 눈이 엎어지면 맞물릴 거리를 사이에 두고 다가오자, 그제야 혼몽함 속에서 벗어난 모스가 정신을 차렸다.

“누, 누…, 누구야?”

모스가 잔뜩 경계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이렇게 넋 놓고 볼 때가 아님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뭐야, 말 병신이야? 하하.”

그런 모스를 보며 눈꼬리를 사륵 접고 웃던 남자가 다시금 얼굴을 더 들이댔다.

“황후는 나를 모르나 봐요?”

황후?

그러고 보니 남자가 부르는 호칭이 이상했다.

모스가 제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제 앞에 있는 이 침입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기에, 저 침입자가 말하는 황후가 자신임을 그제야 알아챘다.

“나…, 나는 화, 황후가 아닌, 데.”

황후가 무슨 자리인지, 모스도 알았다. 황후란 황제의 아내이다. 하지만 자신은 수컷이라 황제의 아내는 결코 될 수 없는 몸이기에 모스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닌데, 맞을 텐데.”

침입자는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몸을 낮추어 모스와 눈을 마주쳤다.

그가 빤히 모스의 얼굴을 보고, 살짝 드러난 새하얀 목을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고는 “아닌가?”하고 웃었다.

나풀나풀, 춤을 추듯 움직이는 속눈썹, 끝 모르고 휘어진 입꼬리, 붉은 입술. 한 폭의 그림 같은데 묘하게 어디서 본 것 같았다.

그것에 모스가 또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멍하니 침입자를 보던 그때.

“아!”

넋을 놓고 있던 모스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돌연 침입자가 손을 뻗어 모스가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벗겨 냈다.

순식간에 모스는 알몸이 되었다. 허둥지둥 이불을 다시 덮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그 움직임은 침입자의 손으로 인해 가뿐히 무산되었다.

“황후가 아니라니, 무슨 소리예요.”

손쉽게 모스를 제 아래로 누른 침입자가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그러고는 벌거벗고 있는 모스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더니, 발목을 잡고 활짝 다리를 벌리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형님이 이렇게 싸질러 놨는데.”

“하, 하지 마.”

무언가 예상을 한 듯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리를 벌렸는데, 역시나 벌어진 모스의 다리 사이로 희멀건 정액이 주르륵 안에서부터 흘러나왔다.

“와, 엄청 쌌네.”

“하지, 말라고…….”

황급히 모스가 다리를 오므리려 했지만, 억센 그의 힘 때문에 소용은 없었다. 무력하게 활짝 벌어진 다리 사이를 침입자가 집요하게 보았다.

“이렇게 많이 싸기도 힘들 텐데. 형님이 와서 정말 이 짓만 했나 봐요?”

침입자의 시선을 따라간 모스가 그간의 정사를 알리는 듯한 흔적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희게 말라붙어 있는 정액들과 짙은 정사의 향.

모스는 이곳에 와서 한 것이라고는 정사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다른 이가 확인해 준 것만 같아 수치스러웠다.

“비, 비켜.”

모스가 손끝에 힘을 주어 확 밀어 내자, 그제야 그는 어깨를 가벼이 으쓱한 뒤 몸을 뒤로 물렀다.

“근데 나 몰라요?”

“모, 몰라.”

“진짜?”

세상에 갓 나온 모스가 그를 알 리가 없었다. 장난이 아닌, 정말 모스가 모른다는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젓자 그제야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치테이르 윈스를 모른다고?”

자신을 모른다는 반응에 말도 안 된다는 듯 구는 그의 태도는 몹시 거만해 보였다. 하지만 치테이르가 이리 반응하는 것도 당연했다.

“나 황제 폐하 동생이잖아요.”

수많은 전(前) 황자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황태제가 된 이가 치테이르라는 사실은 제국민이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치테이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모스를 훑어보았다.

도대체 어디서 온 거지. 뭐 어디에서 감금당하다 온 건가. 지식이 영 얕은 게 마치 어딘가에 갇혀 있던 사람처럼 보여 수상했다.

‘어차피 상관은 없지만.’

물론, 치테이르는 처음부터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치테이르가 바짝 고개를 모스에게 붙이며 조잘거렸다.

“할 때 형님은 다정하게 안아요? 아님 거칠게? 아, 거칠겠다. 그 성정이 어디 가겠어.”

그의 입가에는 이 상황이 흥미롭다는 듯 깊게 선이 파였다.

“네? 말 좀 해 봐요. 어떻게 안아요? 마치 사랑하는 것처럼 안아 줘요?”

물론 모스에게 그런 그의 말이 제대로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치테이르의 통통 튀는 대화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워서 어버버하던 모스가 뒤늦게 뜻을 알아듣고는 새빨갛게 얼굴을 물들였다.

“그, 그게…….”

“말 안 해 줄 거면, 다리 벌려서 내가 확인해 봐도 돼요?”

“아, 아니야. 그런 거 아, 아니야. 안 돼.”

새빨개진 얼굴을 한 모스가 고개를 젓다 말고 입술을 꾹 깨물고 제 몸을 껴안았다.

흰 나신이 동그랗게 몸을 말고 바들바들 떠는데, 대답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저 황태제 전하….”

치테이르는 대답을 기다리는 듯 그 모습을 한동안 가만히 내려다봤다. 하지만 이내 문밖에 있는 이가 문을 두드리며 치테이르를 불렀다.

저건 아마 곧 황제의 회의가 끝나니, 슬슬 나올 준비를 하라는 하인의 신호였다.

그러나 치테이르는 곧 황제가 온다는 걸 알면서도 딱히 조급해하지는 않았다. 그는 여유롭게 고개를 숙여 모스에게 새로운 질문을 할 뿐이었다.

“근데 형님이랑 무슨 사이예요?”

“……사, 사이?”

“네. 예를 들어 연인이나… 뭐.”

그건 말도 안 되는 개소리지만.

치테이르가 뒷말을 삼킨 채 빙긋 웃으며 모스를 보는데, 이어지는 반응이 영 이상했다.

“여, 연인?”

모스가 깜짝 놀란 낯으로, 어쩌면 조금 설렌다는 얼굴로 치테이르를 보는 것이다.

그 모습에 어째서인지 치테이르는 절로 헛웃음을 나왔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공포스러워했으면서, 고작 저 질문 하나로 공포를 잊고 눈을 마주치는 게 당돌하다.

‘남자와 나의 사이? 연인?’

한편 모스의 작은 머리통 속에는 생각들이 계속 팽팽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치테이르는 시간이 없었다.

“황태제 전하.”

다시 재촉하듯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치테이르가 모스에게 대답을 빨리하라는 듯 툭툭 쳤다. 그제야 멍하니 허공을 보던 모스가 정신을 차리고는 더듬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우, 우리는.”

하나 모스는 바로 말을 하지 못하고 침을 목뒤로 삼켰다.

“사…… 사, 사…….”

사, 사, 사. 몇 번이나 같은 글자를 반복했을까.

모스가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사랑하는 사이야.”

제 입으로 이런 말을 내뱉으니 너무 낯이 뜨겁다.

그는 제 얼굴을 황급히 손바닥으로 가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

그리고 그런 모스를 치테이르는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고 빤히 응시할 뿐이었다.

모스는 정말 전형적인 사랑에 빠진 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설렌다는 듯 눈을 빠르게 깜빡이고 입술을 뻐끔거리는 모스를 보던 치테이르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둘이 사랑하는 사이라고?”

믿기 힘들다는 치테이르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스는 자랑이라도 하듯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으, 응. 인간이 나, 나를 사랑한, 다고 해서, 나는 머, 멀리 사는데 나를 데리러, 와, 왔어. 그래서 나는 이곳으로 같, 같이 왔어.”

“형님이 널 사랑한다고 했다고?”

“으, 응.”

“하, 사랑?”

치테이르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모스는 고개를 연신 주억거리며 말을 이을 뿐이었다.

“응, 응. 우, 우리는 서로를 사랑, 해.”

사랑. 그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도 치테이르는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폐하는 사랑을 몰라.”

치테이르는 웃는 것도, 정색한 것도 아닌 일그러진 낯으로 모스를 바라보았다.

“설령 사랑을 고했다 한들, 그건 진심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야, 분명히 나를 사, 사랑한다고.”

“폐하는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이가 아니야.”

치테이르의 얼굴은 ‘그 황제가 널 사랑한다고 말했다고?’라는 업신여기는 표정을 온전히 담고 있었다. 하지만 너 같은 게 낄 자리가 있다고 생각하냐는 그 시선에도 모스는 굽혀지지 않았다.

“저, 정말 나를 사랑한다고 했어. 다정하게 해, 해 준다고 했고. 비록 지금은 기억을 잃었지만, 여기에 데려도 왔고. 여기 따뜻하고, 무, 무엇보다도 나, 나를…… 살려 줬잖아. 기, 기억을 찾는다면 나를 사, 사랑한다고 말할 거, 거야. 기억을 찾는다, 다면…….”

정확히 말하자면, 루인이 살려 준 게 아닌 그가 죽을 수 없던 것이지만.

하지만 모스가 뒷말을 삼킨 것을 알 리가 없는 치테이르는 이미 속이 잔뜩 뒤틀릴 뿐이었다. 치테이르는 어디를 보는지 멍하니 허공을 보며 사랑이라는 단어를 계속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휙 돌렸다.

“닥쳐.”

그리고 그 얼굴에는 더는 웃음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끅, 끄윽.”

갑작스레 치테이르의 손이 앞으로 나갔다. 그는 단숨에 모스의 목을 틀어쥐었다.

순식간에 허공에 떠오른 모스가 버둥거리며 치테이르를 밀어 내려고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형님이 널 사랑한다 했다고? 웃기지도 않지.”

“커, 흐으, 놔, 줘.”

“감히 그분이 너 같은.”

치테이르의 맨 팔뚝은 모스의 손톱으로 인해 살점이 파여 피가 났지만, 이미 그의 눈은 반쯤 돌아 있어서 상처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싸구려 남창을?”

남창. 그 단어에 모스가 순간 얼어붙었다.

그러나 치테이르는 이미 반쯤 돈 충혈된 눈으로 모스를 보다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할 뿐이었다.

“황후님, 황후님, 하고 놀아 줬더니.”

“……허억.”

감히 그분을 대상으로 역겨운 소설을 써?

치테이르가 모스를 죽일 것처럼 이제는 양손으로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치테이르의 눈에는 이미 시뻘겋게 실핏줄이 올라와 있었다.

황제는 완벽해야 한다. 그러기에 황제는 사랑을 몰라야 한다.

설령 사랑을 알더라도 이런 어디서 왔는지 모를, 그것도 심지어 씨를 거둘 수 없는 남창이 아니라 좋은 피가 흐르는 계집이어야 하는데.

“다리만 벌릴 줄 아는 남창 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물론 옛날이었으면 저런 우스갯소리 따위 치테이르도 가벼이 무시했을 것이다. 완벽한 황제에게 흠결을 내지도 못할 헛소리라며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실종되었다 돌아온 황제는 명백하게 이상했다. 늘 완벽하고 고고했던 그가 마치 정사에 미친 인간인 양, 이 방에 박혀 몇 날 며칠을 좆질을 해 댔다는 말부터가 믿기 힘들었는데.

“사랑?”

이제는 이 버러지 같은 것이 지가 황제랑 사랑을 한단다.

평소 같으면 단순히 소설이라 치부하고 넘겼을 테지만, 이번에는 소설인 걸 알면서도 유독 짜증이 났다. 어이가 없고, 당장 이 버러지를 죽여야만 성이 풀릴 것 같은 기분에 치테이르가 눈이 돈 채 모스의 목을 졸랐다.

모스의 눈이 까뒤집어졌다. 정말 곧 죽을 이처럼 손이 축 늘어지려던 그때, 문가에 서 있던 하인이 더는 안 된다는 듯이 문을 쾅쾅 두들겼다.

“황태제 전하! 폐하께서 오십니다!”

폐하가 오신다.

그 정보가 입력되자마자 치테이르의 일그러진 표정이 순식간에 평온해졌다.

그는 평온한 얼굴로 곧 숨이 넘어갈 것처럼 시뻘겋게 변한 모스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툭, 손바닥을 펼쳤다.

쾅, 콰당.

요란스러운 소리가 나더니 허공에 있던 모스가 바닥을 굴렀다.

“……하, 컥, 커억. 켁켁.”

모스는 물론 목이 졸린다고 죽을 수 있는 몸이 아니었지만, 고통은 고스란히 느꼈기에 주체할 수 없이 침이 줄줄 흐르고, 눈알이 터질 것 같았다. 목은 매캐한 연기를 몇 시간이나 마신 양 아팠다.

하지만, 모스는 그것보다도 더 두려운 게 있었다.

제 목을 조르던 남자의 시선, 눈빛, 말투.

-천것아.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던 그 얼굴이, 그 표정이, 그 말투가 다시금 머릿속에서 되새겨졌다. 모스가 덜덜 떨며 제 머리를 감쌌다.

시선, 눈빛, 말투, 검날, 그리고 뒷모습.

뒷모습. 떠나가는 뒷모습.

순식간에 모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어 목이 졸리던 고통이 싹 사라지더니 단 한 가지의 생각만 들었다.

“……미, 미안해.”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모스가 바닥을 기어 순식간에 치테이르의 다리에 매달렸다. 모스를 뒤로하고 문으로 향하던 치테이르는 덜덜 떨며 제 발목에 매달린 모스를 보고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하?”

“버, 버리지 마… 버리, 지 마. 미안해.”

이건 또 왜 이래.

어딘가 넋을 놓은 것처럼 텅 빈 눈동자를 한 채, 미친 듯이 제게 매달리는 모스.

치테이르는 그런 모스가 성가시고 귀찮다는 발로 걷어찼다.

“처, 천해서 미안해. 미안해.”

순식간에 벽으로 내팽개쳐진 모스는 계속 사과를 하고, 계속 매달렸다.

짜증 섞인 표정을 짓던 그가 모스의 뺨을 후려치려는 듯 한쪽 손을 높게 들며 상체를 숙이던 그때, 치테이르가 손을 돌연 우뚝 멈추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온 것이다.

“황태제 전하!”

하지만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볼 새는 없었다.

밖에서 다급히 저를 부르는 하인의 목소리에 결국 치테이르는 뒤를 돌아 문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방을 온전히 나가기 직전, 그는 뒤를 돌았다.

돌자마자 보이는 풍경은 괴이했다. 모스가 웬 씨앗 같은 걸 허겁지겁 제 품에 껴안고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허공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 문을 두드리는 하인의 노크 소리가 귀가 따가울 정도로 사나웠다.

결국 치테이르는 방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왜 이제 나오십니까! 지금 폐하께서…….”

“이상하네.”

“……예?”

나오자마자 하인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치테이르에게 뭐라 뭐라 말을 했으나, 치테이르는 그런 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질러 가면서 눈도 깜빡이지 않고 허공을 보며 연신 이상하다, 이상하네, 라는 말만을 반복하며 고개를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중얼거렸다.

“분명 죽기 직전까지 목을 졸랐는데.”

나가기 직전 보게 된 저것의 목은.

“왜 흉 하나 안 남지?”

지나치게 깨끗했다.

***

국무 회의가 길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남 일이라 여겼던 다른 두 나라의 전쟁이 막상 제국의 일로 닥쳐오자 귀족들의 의견은 분분히 엇갈려 같은 대화가 수없이 반복되었다.

하기야 아무리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진 제국일지라도 전쟁은 전쟁이었다.

그 누구의 목 하나 잘리지 않고 끝날 수 있는 평화로운 일이 아니기에, 그 결과 국무 회의는 본래 예상보다도 훨씬 더 늦게 끝났다.

“결과가 이리 나왔으니, 다음 회의에서는 정보원들의 정보를 토대로 저희 쪽 전쟁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구체적으로 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여기서 국무 회의를 마칩니다. 또 공식적인 회의록 기록도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황제는 그 긴 시간 동안 지루하다는 듯 귀족들의 말을 듣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전쟁을 거부하는 귀족들의 발언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저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었지만, 늘 그렇듯 결과는 황제가 의도한 대로 흘러갔다.

황제는 그것을 예상한 듯 투표 결과가 전쟁 쪽으로 기운 것에도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았다. 좋지도 싫지도 않은, 으레 이리 나올 것임을 알았다는 얼굴.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휘적거리자, 서기가 회의록의 작성을 마쳤다는 듯, 펜을 내려놓았다. 동시에 앉아 있던 귀족들이 죄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황제에게 인사를 한 뒤 서로 속닥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예견된 일일지도……, 차라리 이참에 자본을 어서 움직이는 것이 좋지 않겠소?”

“세실리가 승리할 가능성이 있을까요? 그 경우 저희는 전쟁보다는 타협으로 진행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보다 대체 두 나라의 난민과 우리 제국의 상단들은…….”

“지금 난민이랑 상단이 중요합니까? 국경에 있는 제국민들에게 먼저 알려야 하지 않습니까!”

“음, 아까 회의에서 말이 나왔듯 알리면 혼란을 야기할 뿐이오, 하여 당분간은 쉬쉬하는 게…… 아, 어차피 전쟁이 난다는 건 슬슬 소문이 도는 듯하니까, 상단 정도야 뒤로 하나둘 빼는 것도…….”

귀족들은 삼삼오오 모여 회의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한, 주로 자신들 영지에 어떤 영향이 미치게 될지에 대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물론 그 과정 속에서 영지민의 피해를 걱정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지만, 귀족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바람에 회의실이 순식간에 시장통이 되었다.

그 탓에 회의실을 나서는 황제의 걸음이 평소보다 빠르다는 것은 오로지 그의 뒤를 따르던 카를만이 눈치챌 수 있었다.

황제는 귀족들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걸어 나갔다.

그 뒷모습을 향해 귀족들이 뒤늦게 고개를 바짝 숙이고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며 카를은 문득 자연스레 전쟁을 논하는 이 상황이 신기하게 여겨지기는 했다.

예전의 제국은 제국이라는 이름이 허울에 가깝게 군사력이 강한 편은 아니었던지라, 주변국들과 친밀하게 지내 자원을 얻는 것을 추구했었다. 하지만 현 제국은 아니었다.

공포 위에 세워진 황위라 그런지, 황제는 끝나지 않는 겨울을 이겨 내기 위해서, 제국에 압도적인 힘이 필요하다 주장했다. 때문에 그가 황권을 쥐자마자 강화한 것은 첫째도 군사력이고, 둘째도 군사력이었다.

물론 그것에 위협을 느낀 주변국들과 그들과 친밀한 관계인 귀족들의 반발이 심했으나.

‘다 죽였지.’

황제는 타협을 하지 않았다. 제국의 군사력이 강해지는 것을 견제하는 이들을 싹 다 죽여 버려 타협할 상대를 없앴으니까.

강해져서 힘을 막 휘두를 수 있는 제 제국을 누가 싫어할까. 황제의 폭정과는 달리 제국민들은 의외로 황제를 좋아했다(물론 황제는 제국민들을 그리 생각하는 편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리되었다).

“혼자 가겠다.”

생각을 마친 카를에게 황제가 말했다.

황궁을 나서자마자 황제의 발끝이 가리키는 곳을 그의 곁을 늘 보좌하던 카를이 모를 수가 없었다. 그가 가려는 곳은 틀림없이 잡아 온 소년이 있는 궁일 것이다.

카를은 황제에게 혼자 가도 괜찮겠냐는 말도,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서 그의 그림자 속에서 벗어났다.

괴물이나 다름없는 루인이 이 황궁 내에서 괜찮지 않으면, 그 누가 괜찮을까.

“…….”

그렇게 루인은 혼자 남았다.

그는 어느덧 어둑해진 하늘을 올려다보고 인상을 구겼다. 해가 져 있었다.

해를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어쩐지 해가 졌다 하니 더 초조해지는 것 같아 걸음을 재촉해 모스가 있는 궁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는 황궁답게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인조적으로 조성되어 아름답게 가꾸어진 풀과 나무가 바람결에 흔들리고, 장인이 하나하나 배치한 그림 같은 연못도 일렁였다. 황궁의 사용인들이 죄다 인사를 건넸지만 루인의 시선은 오로지 앞만을 향해 있었다.

점점 더 빨라지는 발걸음, 이어 그의 발은 뛰듯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유독 음영이 짙은, 모스가 있는 궁에 도착한 루인은 성큼성큼 건물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

궁에서 각자의 일을 하던 사용인들은 빠르게 황제의 존재를 알아채고 소리 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루인은 방 앞에 섰다. 다급하게 문손잡이를 잡아 문을 열어젖힌 그의 눈동자가 방 안을 재빨리 훑었다. 젖혀진 커튼, 움직임 하나 없는 가구 위치, 그리고.

덩어리.

방이 작아서 그런가. 아니면 달빛이 저쪽을 가리켜서 그런가. 루인의 눈동자에는 각인이라도 되듯, 이불에 둘둘 말아져 있는 덩어리가 유독 크고 선명하게 보였다.

루인은 제가 왔다는 듯 바닥을 긁으며 덩어리에게 향했다. 하지만 덩어리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래, 아무런 반응도.

미동 없는 덩어리에 루인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이내 여태 제대로 느껴 보지 못했던, 하나 아까부터 제 안에서 깔짝거리던 감정에 속이 울렁거렸다.

그는 빠르게 다가가 이불을 확 젖혔다. 신기하게도 그 감정은 웅크리고 잠든 모스를 발견하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 루인이 참았던 숨을 내뱉다가 스스로의 모습에 미간을 구겼다.

긴장을 했었나. 아니, 살면서 그는 긴장이라는 것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어, 이것을 긴장이라 부를 수 있는 건지 의심부터 했다.

다만 아까부터 제 안에서 초조하게 째깍째깍 돌아가던 시계가 탁 소리를 내며 멈춘 것만은 깨달을 수 있었다.

“…….”

이것, 이것이 소리 없이 잠든 모습은 인간의 것이라기보다는, 굴속에 웅크린 짐승과 다를 바가 없었다.

색, 색, 잠든 몸이 조용히 떠올랐다 가라앉는다. 그 모습을 루인은 집중해서 가만히 보다가 인상을 찌푸리고 몸을 낮췄다.

이것. 괴물.

이게 대체 무어라고, 이것이 회의 내내 이상하게 머릿속에 밟혀 제게 집중을 앗아 갔다.

다리를 분지르는 아픔을 견디면서까지 저를 따라왔으니 도망가지 못할 것을 알았다. 하나 알면서도 이상하게 이것이 도망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자꾸만 피가 거꾸로 솟아 당장 종알종알 떠드는 귀족들의 입을 싹 도려내고 바로 이쪽으로 오고 싶은 충동이 수도 없이 들 정도였다.

쭉, 손을 뻗어 모스의 얼굴을 감싼 루인이 손가락을 차례차례 구부려 뼈대를 만졌다.

작다. 지나칠 정도로 작아, 한 손이면 얼굴이 죄다 가려지는 게 기묘한 느낌을 주어, 손을 거두려다 다른 부분을 만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그는 모스의 하늘거리는 이끼색 머리카락을 훑었다.

손끝에 풀 냄새가 묻어 나올 것만 같은 색이 묘하게 눈을 홀린다. 그 머리카락을 훑던 루인의 손은 모스의 동그란 이마, 그리고 옅은 눈썹, 그 아래 핏줄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얇은 피부, 안구를 감춘 볼록한 언덕을 훑은 뒤 입술로 향했다.

다른 곳은 죄다 색이 옅은데, 이곳은 지나칠 정도로 붉게 느껴졌다.

하지만 또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진한 색은 아닌 거 같은데. 루인은 굳게 다물린 입술을 손으로 훑다가 이내 엄지를 미끄러트려 그 안으로 넣었다.

“으응.”

잠귀가…… 밝았던 거 같은데. 작은 신음 하나를 내뱉고 모스의 가슴팍이 다시 위아래로 느릿하게 움직였다.

루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마치 죽은 듯이 잠들어, 제 입술 사이로 침입한 손가락에도 모스는 작게 신음을 할 뿐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루인은 관찰하듯 모스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

“불쾌하군.”

돌연 불쾌함에 휩싸였다. 잠든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이런 걸까?

루인은 아까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감정과 지금 드는 이 불쾌함이 거슬렸다.

그는 감정을 지우려는 듯, 서둘러 손가락을 빼내려고 했으나, 이내 손가락을 빼지 못하고 우뚝 손을 멈추고는 잇새로 헛웃음을 내뱉었다.

“……하.”

손가락이 빠져나가려고 하자, 돌연 모스가 제 혀를 내밀어 손가락 끝을 핥은 것이다. 주먹만 한 짐승이 핥아 주듯, 핥은 부위가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루인은 소름이 돋았다. 등의 털이 짐승의 털처럼 빳빳했다면 틀림없이 꼿꼿하게 서 옷 틈으로 비죽비죽 고개를 들었을 것이다.

“괴물.”

이것을 데려오자마자 루인은 아랫것들에게 도서관의 모든 기록을 뒤져 보라고 명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명령을 내릴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본능적으로 이 괴물의 정체는 그 누구도 찾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만 한 가지의 의문은 있었다.

의문은 이것과 지내면 지낼수록, 날이 가면 갈수록 선연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햇빛 아래에서 녹아내리지만 달빛 아래에서는 멀쩡하며, 인간의 말은 하되 세상의 흐름은 모르고, 시체의 옷을 기워 제가 입던 이 괴물을.

‘사랑했을까.’

정말 괴물의 말대로, 기억을 잃은 자신이 사랑했었을지 궁금했다.

하나, 단순한 궁금증이었다. 그는 애초에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백번 양보해서 설령 사랑을 했을지라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역했다.

천것이지 않은가.

어디서 굴러먹다 온 이인 줄도 모르고, 두르고 있는 것은 최상급 옷감이 아닌 시체의 옷이며, 제대로 든 것조차 없는 머리로 알량하게 제 좆만 물 줄 아는 이이니, 사랑한 적도 없었을 것이고, 사랑을 해서도 안 되고 사랑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 생각을 하는 지금도 루인의 시선은 모스의 얼굴에서 거두어지지 않았다.

그 어린아이같이 말갛게 잠든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는 문득 꿈에서 종종 떠오르는, 아주 단편적인 모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틀림없이 그건 이전의 기억일 것이다. 그것은 모스가 만들어 둔 길을 걸을 때, 의심에서 확신으로 자리 잡았다.

루인은 꿈에서 자신이 모스에게 한 말을 제대로 떠올리지 못했다. 하나 많지는 않지만 모스의 몇몇 모습은 선명하게 기억해 냈다.

첫 번째 꿈은 목을 조를 때, 모스의 얼굴이었다.

그는 이 작은 눈동자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이고, 흐를 때는 홍수처럼 주룩주룩 흘러 눈 밑이 순식간에 짓무르며 뺨 위로 붉은 물이 번지듯 발갛게 물드는 것을 보고 몽정을 했다.

다른 한 꿈은 저를 업고 가는 모스의 뒷모습이었다.

무슨 상황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것은 계속해서 루인에게 말을 하며 눈길을 헤치고 꾸역꾸역 앞으로 갔다. 추위 속에 얇은 옷 하나만 입은 그는 제게는 바리바리 모포를 둘러 주었다. 붉다 못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은 붉은 귀, 제 반만 한 몸으로 저를 용케 업고 가던 씩씩하고 작은 등. 그 모습을 보며 자신은…….

“아.”

루인이 돌연 인상을 구기며 제 머리를 붙잡았다.

언젠가 느껴 본 적 있던 거 같은데, 이상한 느낌? 감정? 아니면 단순한 두통? 눈알을 꿰뚫을 것처럼 강렬한 무언가가 딱딱한 머리뼈 아래로 훑고 지나가 혈류를 거쳐 심장을 쿡 찔러 저릿하게 만들었다.

그때, 곤히 잠들어 있던 모스의 솜털이 그가 깨기도 전에 오소소 줄 세워지더니, 이내 모스가 눈을 뜨기 시작했다.

“…….”

루인은 그가 눈을 뜨는 모습을 가만히 보았다.

모스가 서서히 눈을 떠 숲의 푸른 녹음을 듬뿍 담은 눈으로 루인을 바라보았을 때, 루인의 태양 빛 같은 금발을 그 선연한 녹색 눈에 섞이게 하는 그 순간까지, 루인은 움직임이 없이 그를 가만히 들여다볼 뿐이었다.

“어…….”

모스는 갓 잠에서 깬 모양인지, 눈이 여전히 반쯤 감겨 있었다.

그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제가 루인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어 눈을 크게 뜨더니 루인의 얼굴을 한동안 말없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

침묵 속에서 오가는 것은 서로의 시선뿐이었다.

이곳에 온 이후, 모스는 마음 편히 정신을 잃은 적이 없었다. 제가 잠들어도 루인은 부지런히 허리를 놀리며, 제 몸을 괴롭히기 바빴으나, 지금의 루인은 잠든 모스에게 아무런 위해를 끼치지 않았다.

평소랑 다른 분위기였다.

오로지 제게 온전히 집중하는 루인을 느끼고, 홀린 듯 그를 가만히 바라보는데 루인도 가만히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스는 이내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몸을 잘게 떨더니, 이어 감격 어린 목소리로 도무지 흥분을 감출 줄 모르겠다는 듯 눈물이 그렁해서 말했다.

“……기, 기억, 찾았어?”

하지만, 그것은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돌연 루인의 눈이 싸늘해지더니 이어 살기가 그득그득 차올랐다. 루인은 속이 뒤집히는 기분에 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천것의 얼굴에 토를 해 주고 싶었다. 속이 뒤틀려 무엇이라도 쥐어 짜내지 않으면 이 감정이 내장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허……허억.”

루인이 울먹이는 모스의 목을 양손으로 졸랐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모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컥컥거리며 루인을 밀치려고 했지만, 루인의 악력 아래에서는 무엇을 해도 무용지물이었다.

“왜, 짐이 기억을 찾기를 바랐나?”

버둥거리는 모스를 더 힘주어 누르던 루인은, 이어 눈이 까뒤집어지려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그리고 비로소 처음 느끼는, 저를 좀먹던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꿈 깨. 앞으로 찾을 일도 없고, 찾지도 않을 것이니.”

그것은 불안이었다.

불안, 이 단어를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루인은 수치스럽고 부정을 타는 것만 같았다.

루인은 여태 빈말로라도 순탄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가 아니었다. 그는 제가 밟고 있는 누군가의 등이 적군인지 아군이지 모를 정도로 피가 흠뻑 젖은 신을 신은 채 황족의 머리 여러 개를 대롱대롱 뒤에 매달고 왕관을 썼다.

그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그러기에 그는 수도 없이 죽음의 위기를 직면했다. 하지만 죽음을 코앞에 앞두고도 그는 단 한 번도 두려워하지도, 불안해한 적도 없었다.

죽음이 두렵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고자 하는 일에 불안을 느낀다면 그 일은 그르치고 말 것임을 알기에 그리 살아왔는데.

고작.

그래, 고작.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자신이, 고작 이 괴물이 자리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하나로 불안을 느꼈다.

그뿐인가. 기억을 찾았냐는 질문 하나만으로도 이성을 잃을 뻔했다. 그는 제 속에서 주체할 수 없이 솟아나는 불안과 분노가 징그러운 듯 인상을 구기며 서둘러 본인도 알아채지 못하는 깊은 내면으로 감정을 수납하려 했다.

하나 날것의 감정이란 온갖 티란 티는 다 내며 시끄럽게 우는 갓난아이와 다를 바가 없어, 계속해서 자신을 표출하려 들었다.

유리에 금이 가듯, 결국 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일그러진 얼굴을 한 루인이, 이성을 잃은 듯 반쯤 혼이 나간 눈으로 모스의 목을 틀어쥐는 손에 힘을 세게,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

“…미… 미, 안, 컥.”

모스가 루인의 아래에서 바르작거렸다. 무엇이 그를 화나게 한지는 제대로 짐작할 수 없었으나, 모스는 일단 눈앞의 루인에게 빌었다.

어차피 죽지도 않는 몸, 목이 졸려 봐야 죽지 않고 괴로움만 더할 뿐이라 최선을 다해 손을 놔 달라고 애원했으나, 이미 루인의 눈은 반쯤 돌아 있었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피부 표면이 갈려 나가는 것 같은 강하고도 잔혹한 감정이 고스란히 제게 쏟아져 내리고 있는데, 어찌 이 모습을 보고 착각을 할 수 있었을까.

외양만 같다고 다가 아니었다. 모스는 방금 전 기억을 찾았냐고 물었던 제 모습이 얼마나 멍청하고 순진하게 보였을지를 깨달았으나, 이내 고통에 제대로 된 생각에 이르지 못하고 다시 발버둥 치기 급급했다.

“으, 윽.”

모스가 몸을 뒤틀었다. 숨이 또 막히고, 그가 조른 목이 아프다, 눈앞이 컴컴해진다.

죽음을 코앞에 두었을 때만 나는 진득한 썩은 내가 제 몸에서 다시 나는 거 같았다.

‘또 나를 죽이는 걸까.’

어차피 그에게 자신은 죽지 않는 괴물이며, 그러기에 자신의 죽음은 그에게 턱없이 값싼 것일 테니 죽고, 또 죽고, 또 죽음을 반복하겠지.

-버리지 않겠다.

하지만.

-나는 너를 데리고 갈 것이다.

…하지만.

너는 나를 데리고 간다고, 맨손으로 환각초의 뿌리를 뽑은 그 언 땅에서 내게 약속했잖아.

나를 버리지 않겠다고 말했잖아.

“……언, 제.”

모스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숨을 헐떡이며 한 글자씩 말을 내뱉었다.

“기, 억 찾아?”

순간 루인은 자신이 무엇을 들은 것인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언제, 기억 찾아?”

이내, 다시 한번 쐐기를 박듯 내뱉은 모스의 말에 그대로 우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둘 사이의 시간은 그대로 멈춘 것 같았다.

둘은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은 양 움직이지도, 무슨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축축하게 젖은 음울한 녹색 눈동자와 화사하게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는 색도, 담은 감정도 너무 달랐다.

하지만 그 서늘한 시선 앞에서도 모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설령 다시 죽더라도,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정말 모스는 더는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았다. 애원이라면 애원이고, 힐난이라면 힐난이었다. 무엇이라 정의할 수 없는 여러 감정이 뒤섞인 괴물의 눈이 똑바로 황제를 응시했다.

“나, 힘, 들어.”

나 힘들어, 너무 힘들어, 너무 아파, 힘들어. 어눌한 말투로 느릿느릿 내뱉는 말 하나하나가 아무런 반응 없는 루인에게 일방적으로 쏟아졌다.

봇물 터지듯 주룩주룩 흐르는 눈물 사이로 축축이 젖은 이끼색 눈에 루인의 상이 맺히자마자 눈물에 흐릿해져 시야가 묽게 변했다. 아롱아롱 뺨으로 흐른 눈물은 루인의 손에 맺혔다 바닥으로 추락했다.

“기억, 차, 찾긴, 찾아?”

남자가 황제일 적 기억이 돌아왔듯이, 모스는 제 앞의 황제가 남자일 적 기억이 당연히 돌아올 것이라 여겼고 그거 하나를 믿고 여태 버틸 수 있었다.

“언제 나, 기억해 내? 언제? 내, 내일? 모레? 어, 언제? 말, 해 주면 기다릴게. 나 자, 잘 기다려. 여기서 기다, 릴게. 꼼짝 안 하고 기, 기다릴게. 숨도 안, 안 쉬고 기다릴게.”

그러나, 이젠 그걸 모르겠다.

모스가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침묵과 비명과 애원만 가득하던 방 안에 언제 멈출지 모를, 기약 없는 긴 울음이 가득 채워졌다.

“모, 목을 조르면 기억이 더 자, 잘 돌아와? 그렇다면 더, 더 졸라도 돼. 아… 아니면 내, 내가 죽으면 기억이 더 빠, 빨리 돌아와? 그러면….”

그는 사라진 남자의 모습을 루인의 얼굴 위로 계속 덧그리며 애원했다. 기억을 찾기 위해서라면 그 무엇을 해도 된다는 태도는 보기만 해도 애달픈 모습이었으나, 루인은 그저 우두커니 그런 모스를 보기만 할 뿐이었다.

“나, 를 죽여서 기억을 찾아. 응? 제, 제발.”

가만히 그가 모스를 내려다보는 내내, 모스는 애원하고, 빌었다.

기억을 찾기만 한다면 자신의 죽음도 감내하겠다는 말에, 미묘하게 구겨져 있던 루인의 인상이 펴지더니 이윽고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담기지 않았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것만 같은 삭막한 얼굴. 방 안에 모스의 울음소리와 애원만이 퍼지던 그때, 모스의 목에서 루인이 느릿하게 손을 떼어 냈다.

그의 손은 모스의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는데, 루인은 아랑곳하지 않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목이 졸리던 자세 그대로 누워 있는 모스를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몇 번 죽어 줄 수 있는데?”

……깜빡, 멍하니 허공을 보던 모스의 눈꺼풀이 열렸다 닫히며 루인을 응시했다. 루인은 아무런 표정이 담기지 않은 얼굴로 가만히 깜빡이는 모스의 눈꺼풀을 바라보다 말했다.

“고작 한 번 죽어서 내 기억이 돌아오겠어?”

한 번 말고, 한 열 번 정도 죽으면 내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르지.

동시에 모스의 얼굴은 당황한 듯 얼어붙었다. 그 기가 막힌 내용에 순간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는 듯 모스는 입술을 살짝 벌린 채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이를 가만히 지켜본 루인은 이윽고 짧게 웃었다.

“……그럼 그렇지.”

거봐, 아무것도 못 하네.

고통을 두려워하는 이 괴물이 당연히 이리 반응할 것임을 마치 예상했다는 듯한 말투였다.

루인은 모스가 겁이 많은 괴물이라는 것을 진즉 눈치챈 터였다.

죽지 않는 몸이면 막 굴려도 될 텐데, 이 괴물은 겁이 많고 아픈 게 싫은지 매사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그런 성미를 가진 이가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의 죽음을 감내할 만한 용기가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여전히 실소를 얼굴에 띤 루인은 아직 회복되지 않은 채 붉은 자국이 목줄처럼 남아 있는 모스의 목을 가만히 보았다.

루인은 그 자국을 덧그리듯 손끝으로 뭉근하게 문질렀다. 그는 모스가 기억 얘기를 할 때마다 이 상흔을 남긴다면, 언젠가는 정말 목줄이 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므로 아무리 이 상흔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이곳에 상흔을 새기고, 그 위에 또 새기고… 그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영원히 옭아맬 수 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던 루인이 또다시 제게 기억을 언제 찾냐 따위의 얘기를 하면 몇 번이고 죽을 각오를 해야 할 것이라고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벌리려던 그때.

“……!”

이어진 모스의 행동에 루인은 더는 그리 생각할 수 없었고 말도 이을 수 없었다. 루인의 기준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모스가 거두려던 루인의 손을 잡아채, 제 목 위로 도로 가져다 댄 것도 모자라 기다렸다는 듯 눈을 감은 것이다.

마치 자신을 죽이라는 듯이.

얼어붙은 방 안에서 루인은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루인의 아래에 깔려 죽음을 받아들이겠다는 듯 가만히 있는 모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이죽거리듯 말하던 루인의 입은 멈추었고, 행동도 멈추었다. 루인은 괴물을 급히 관찰했다.

이 괴물은 이제 죽음과 고통에 대한 공포가 없어졌나?

아니? 아니다. 괴물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고통에 대한 공포가 매우 큰지, 모스의 굳게 닫힌 눈꺼풀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괘…괜찮아.”

하지만 그럼에도 꿋꿋이.

“나를, 주, 죽여.”

자신의 죽음을 종용한다.

눈을 감고 제 죽음을 종용하는 괴물의 모습에 순간 숨이 턱 막혔다.

겁이 많은 이 괴물은 제가 저를 죽이려고 드는 시늉만 해도 발발 떨며 어떻게든 구명을 하고자 했고, 조금이라도 아프면 몸 안의 수분이란 수분은 죄다 빼냈다.

“많이 죽여도, 괘, 괜찮아.”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기억, 그 빌어먹을 기억을 찾겠다고 이 더럽게 겁많은 괴물이 제 목까지 내놓은 것이다.

아.

루인은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까와는 격이 다를 정도로 속이 뒤집히고 꼬였다. 내장이 요동을 치듯 속이 끓어올랐고, 머리에는 쇠꼬챙이를 몇 개를 박아 넣은 양 욱신거리며 아파 왔고, 눈알이 지끈거렸다.

“…….”

침묵이 길어졌다. 길어지고, 또 길어진 가운데 루인은 어느덧 사위가 밝아진 것을 눈치채고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둘의 실랑이에 결국 밤은 물러서고 어느덧 하늘에서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태양, 햇빛, 그것을 빤히 바라보던 루인.

그는 홀린 듯 그 햇빛을 보다 느릿하게 모스 쪽으로 다시 몸을 틀고 입을 열었다.

“일어나.”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담담하고, 아무것도 담기지 않았다. 텅 빈 그의 목소리에 눈을 내리깔고 눈물만을 흘리던 모스는 그의 분노가 갈 길을 잃고 사라진 건가 싶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루인을 보았다. 그러나 이내 아무런 말도 표정도 짓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의 분노가 갈 길을 잃고 사라졌다고? 아니다. 루인의 눈과 마주치자마자 그것은 제 착각임을 깨달았다.

담담한 목소리,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표정과는 달리, 올곧게 모스만을 바라보는 그의 금안은 새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윽고, 순식간에 모스의 팔을 움켜쥔 루인이 억센 손으로 그를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네가 바라는 대로 죽여 줄 테니.”

해가 떠오르는 창으로.

분노에 사로잡힌 루인의 시선 끝에 때마침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하는 해가 보였던 건 우연이었다.

루인이 모스의 팔을 붙들고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루인이 무슨 짓을 하는 건지 감이 안 온 듯, 엉거주춤 일어난 채 멍하니 루인의 뒤를 따르던 모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하려던 일이 무엇인지 알아채고 사색이 되었다.

“싫, 어… 싫어, 싫어….”

모스가 허둥지둥 끌려가지 않겠다는 듯이 바닥에 제 몸을 바짝 붙였으나 턱도 없었다.

모스를 창가로 끌고 가는 것은 루인에게 갓난아기의 손목을 비트는 것만큼 쉬운 일인지라, 그는 반항하는 모스의 팔을 붙잡은 채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모스는 질질 끌려가면서 발등이 딱딱한 바닥에 죄다 쓸리고 턱뼈가 빠질 것만 같은 고통에 신음이 절로 내뱉어졌지만, 그런 잔고통은 제대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살, 살려 줘….”

점점 가까워지는 창가. 다가오는 햇빛.

모스는 반항을 멈추고 필사적으로 루인에게 매달려 빌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기억을 찾기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겠다고 했지만, 햇빛을 보자마자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저 머릿속이 희게 변해, 도망쳐야 한다는 본능만 남았다.

그만큼 햇빛은 모스에게 공포였다.

하기야 세상 그 누구도 햇빛에 녹아내리지 않기에, 모스처럼 햇빛에 녹아내리는 고통을 아는 이는 없을 것이다.

고작 손끝이 살짝 녹는 것만으로도 뇌가 태워지는 것만 같은 엄청난 두통이 밀려오고, 얼굴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몸 안의 수분을 다 끄집어낼 듯 눈물, 콧물이 줄줄 흘러나오게 만들며, 잇새로는 짐승이 내뱉을 법한 비명 소리가 새 나오게 만드는 그 고통.

“해, 해는 안 되, 는……사, 살려 줘.”

죽지 못해 살게 만드는, 그리하여 제 죽음의 자유마저도 앗아 간 햇빛.

공포로 인해 입가가 떨려 이빨이 맞물리는 소리가 탁탁탁 났다.

하지만 이미 창가는 코앞이었다. 모스가 발악에 가까운 발버둥을 치는 사이, 어느덧 두 사람은 창가에 다다랐던 것이다.

모스는 새하얗게 질린 채, 숨을 들이켰다. 곧 다가올 아침의 향이 진하게 폐부에 들이찼다. 그는 심장이 내려앉은 듯 미동하지 못하고, 오로지 눈만 깜빡이며 멀리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해가 다가온다. 해가 다가와. 해가 떠. 해가.

햇빛이 스멀스멀 안으로 들어오려는 것에 엉덩이를 쭉 뒤로 빼며 모스가 뒷걸음질 치려 했다. 이는 본능이요, 어쩔 수 없이 나오는 행동이었으나 루인은 이를 봐주지 않았다.

“똑바로 날 봐.”

억센 힘이 모스의 턱을 움켜쥐었다.

바짝 다가온 햇빛에 공포로 새하얗게 질려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모스의 이끼색 눈동자에 루인의 얼굴이 오롯이 담겼다.

어둠 속에서도 유독 선연하고 화려한 황금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그리고 조각같이 아름다운 얼굴이 어둠을 가르고 선연하게 드러나기 시작했지만, 모스는 그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해, 햇빛…… 나, 해가…….”

평소 같으면 그 얼굴에 어김없이 홀렸을 텐데, 모스는 루인을 전혀 보지 않고 밖을 보며 웅얼거리고 연신 도리질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 박혀 있는 녹색 눈동자는 곧 다가올 고통을 예지한 양 공포에 얼룩져 미친 듯이 일렁이고 있었다.

점점 떠오르는 해의 존재감이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햇빛의 윤곽이 점점 선명해지며, 당연하다는 듯이 다가오는 모습은 점점 모스의 숨통을 조이는 것 같아 결국 눈을 질끈 감았고, 동시에 루인의 표정이 구겨졌다.

꽈악, 루인이 더 세게 모스의 손목을 틀어쥐어 제 앞으로 바짝 그를 끌어왔다. 그럼에도 모스의 시선이 자신에게 전혀 향하지 않고, 그저 눈을 질끈 감고 있자 그의 턱을 우악스레 뒤틀어 저를 보게 만들었다.

눈 떠.

턱을 비틀듯 쥐어 오는 강한 악력에 모스는 외마디 비명을 내뱉으며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천것아. 너는 짐이 기억을 찾길 원하는가?”

방금 전 모습이 복기라도 되듯, 그의 머릿속에서 자꾸 모스의 눈 감은 모습이 떠올랐다.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자 모스가 신음을 내뱉었지만, 루인은 그저 모스의 눈을 집요하게 바라보며 붙들 뿐이었다.

“내가 기억을 찾길 원하냐고.”

눈이 짧게 마주쳤다.

마주치자마자 루인은 코를 바짝 붙여, 공포 어린 모스의 밭은 숨을 삼키며 또다시 집요한 물음을 짓씹듯 던졌다. 그러나 모스는 루인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다.

“무, 무서워. 놔줘. 미안해, 미안해.”

모스는 루인의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햇빛이 코앞에 다다른 것만 보인지라 새하얗게 질린 모스는 덜덜 떨며 빌기만 할 뿐, 제대로 된 답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루인이 뭐라 입을 열려던 그때.

“제, 제발…… 아악!”

사달이 났다.

뒤늦게 루인이 모스의 손목을 제 쪽으로 잡아당겼음에도, 창가 끝에 걸쳐져 있던 모스의 손끝이 들이닥치는 햇빛에 스친 것이다.

모스의 손끝은 순식간에 촛농처럼 주르륵 녹아내렸다.

“으으, 흐으윽. 아파, 아파! 아파!!”

그가 고통에 몸부림을 치며 비명을 질렀다.

그간 죽지 못한 이유도 이 고통 때문이었다. 본능적으로 햇빛에 제 몸을 전부 녹인다면 죽는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으나, 햇빛에 녹는 느낌은 말로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살점이 녹아내릴 때도, 살점이 차오르며 다시 형태를 갖추는 과정 속에서도, 온몸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너.”

뚝뚝 흘러내리는 살점을 본 루인의 눈이 살짝 크게 떠졌다.

순식간에 눈물에 젖은 모스의 얼굴은 죽음의 문턱에 발을 걸친 이처럼 보였다. 한데 단순 그것뿐이 아니었다.

‘무엇이지, 이 감각은?’

루인은 인상을 구겼다. 어디선가 이런 비슷한 모습을 흘리듯 본 거 같은데, 그건 정확하지 않았다. 마치 꿈에서 스치듯 본 것처럼, 무언가…….

-나가면 안, 아…… 악!

……이 괴물이 나가려는 자신을 붙들려고 한 적이 있었나? 루인의 머릿속에 그가 알 수 없는 아주 단편적인 기억의 조각이 나타났다.

“뭐, 뭐든 할게. 살려 줘.”

루인이 갑작스레 떠오른 기억에 모스에게 뭐라 물을 듯 입을 달싹였지만, 단어가 문장이 되기도 전에 모스가 루인의 옷자락을 붙들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그 단편적인 기억을 애원하는 모스가 순식간에 덮었다. 루인도 더는 잡념을 떠올릴 수 없었다.

“살려, 살려 줘. 아파, 아파, 아파.”

그리고 애원과 동시에 루인은 하려던 말을 하지 않고, 물끄러미, 가만히 제게 애원하는 모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모스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은 당장이라도 혼절할 것처럼 보였는데, 이는 아까 전에 제게 목이 졸렸던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제발, 제발… 나 진짜… 주, 죽어. 너무 아파, 너무 아파. 하, 할게. 다 할게. 시키는 거, 다 하, 할게.”

어느덧 높이 떠오른 태양.

강렬한 햇빛을 피하기 위해 루인의 앞으로 몸을 구기고 쪼그려 앉아 무엇이든 하겠다고, 그러니 살려만 달라고 말하는 얼굴은 절박하기 그지없었다.

“뭐든…, 한다고?”

“응…, 응. 하, 하라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살려 줘.

모스는 혹여나 제게 햇빛이 닿을까 두려워 다급한 얼굴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다가올 고통이 두려운지 공포에 얼룩져 제게 매달리는 모스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루인은 시선을 틀어 물끄러미 저를 붙잡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손을 응시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그리고 돌아온 것은.

“짐이 기억을 찾길 원하는가?”

질문이었다.

무엇을 하라고 명령을 내릴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받은 모스는 당황했지만 스멀스멀 다가오는 햇빛을 피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의 손짓 하나하나에 목숨 줄이 달린 모스는 고개를 바짝 들어 올렸다. 그리고 서둘러 루인의 말에 담긴 의도를 가늠하고자 눈을 가늘게 떠 그의 표정을 읽기 위해 부산스레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하지만 영 알 수 없었다.

방 안을 흠뻑 적시는 햇빛은 지나치게 눈부셨고, 그 햇빛을 등진 루인의 표정은 역광으로 인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모스가 알아챌 수 있는 것은 역광으로 시꺼멓게 물든 얼굴 사이로 요요하게 빛나는 금안이 똑바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점 하나였다.

“나, 나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하지만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햇빛은 착실하게 혀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곧 있으면 방 안을 가득 채워 모스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죄다 삼킬 것만 같던 그때.

드디어 어둠 속에 적응한 모스의 눈이 루인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읽음과 동시에 모스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의 표정은 감정을 읽는 데에 서툰 모스에게도 선연하게 다가올 만큼 명백하게 어떠한 답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모스는 순순히 말을 할 수 없었다. 햇빛을 피할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하겠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모스는 햇빛이 제게 들이닥칠 듯 코앞까지 다가왔음에도 이상하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멈칫할 뿐 어떠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저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햇빛은 몸집을 키우며 모스에게 다가오고 있었고, 모스가 유일하게 붙들고 있는 응달은 대답에 따라 사라질 수도, 계속 응달이 되어 줄 수도 있는 루인뿐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사지에 몰릴 대로 몰린 모스는 결국.

“안 찾으면……, 네가 기억 안 찾으면… 조, 좋겠어.”

순응했다.

그전에 부리던 고집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기억을 찾기 위해서라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각오도 휘발되었다.

모스는 루인의 앞에 몸을 옹송그린 채 바들바들 떨며 매달리고 애원했다.

“그러니까 제발, 제, 제발. 나, 나를 숨겨 줘.”

참으로 이상도 하지.

이 상황을 만든 것은 루인, 그인데 그에게 원망을 쏟아 낼 새도 없이 애원부터 해야 한다.

하지만 당장 햇빛을 피해 매달릴 것은 루인밖에 없었다. 햇빛을 가려 주고 저를 숨겨 줄 수 있는 존재는 제 앞에 있는 루인뿐이었다.

모스는 할 수 있는 말이 고작 ‘제발 도와줘’, ‘제발 살려 줘’ 이 두 마디인 양 같은 말을 반복하며 빌고, 또 빌었다.

그렇게 얼마나 빌었을까. 햇빛의 가는 빛줄기가 점차 두꺼워짐에 모스가 당장이라도 혼절할 것처럼 눈을 뒤집으려던 그때가 되어서야 루인이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아니었다.”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모스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려운 말이었다.

“응, 마, 맞아. 맞아. 그건 네가, 네가 아니었어.”

“그것은 이제 죽은 이나 다름없다.”

“맞아. 마, 맞아.”

하나 이해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그는 코앞에 있을 햇빛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전신이 발작하듯 떨려 와,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그저 미친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했다.

그저 이 순간을 넘기기 위해 고개를 빠르게 끄덕끄덕하는 게 할 수 있는 행동의 최선이었다.

“죽, 죽었어. 죽었어. 그, 그건 없어. 죽었어.”

오직 루인의 말만이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저 세상에 자신을 구해 줄 이가 루인 하나인 것처럼 매달렸다.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도, 설령 이해가 되더라도 모스는 이어지는 루인의 말에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 말이 다 맞아. 다 맞아…….”

그런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거 같지.

네가 아니었다고, 그 남자는 죽은 이가 맞다고 그저 루인의 말에 동의하는 게 다인데, 모스는 이상하게 심장이 불태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눈물이 얼룩진 눈으로 서둘러 몸을 살폈으나, 햇빛에는 닿지도 않았는데 가슴 사이가 뻐근해지며 그곳에 햇빛이 칼날처럼 박힌 것 같았다. 모스는 경련하듯 몸을 바르르 떨다 서둘러 루인에게 매달렸다.

“그, 러니까 이제 나를 살려 줘… 날 살, 려 줘.”

이제 대답을 다 하지 않았냐며, 서둘러 해를 치워 달라고 모스가 어설프고도 애달픈 움직임으로 제 몸을 루인의 품에 안기듯 쏙 밀어 넣으며 빌었다.

루인은 마주 안아 주지 않았다. 그저 일방적으로 품 안에 엉겨 붙은 작은 몸뚱이가 양옆으로 쏟아지는 햇빛에 혹여나 닿을까 죽을힘을 다해 제게 바짝 붙어 있는 모습을 응시할 뿐이었다.

“…….”

그때 물 위로 파도가 일듯, 여태 미동 없이 잔잔하던 루인의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이 괴물이 제게 엉겨 붙는 순간, 저도 모르게 끌어안을 뻔했다.

이건 무슨 느낌일까. 루인은 이 괴물이 제게 안기자마자 밑도 끝도 없이 대뜸 끌어안을 뻔한 제 손을 느릿하게 응시했다.

이게 뭔지는 모르겠다. 이런 적은 여태 살면서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이 복합적인 느낌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도 알아맞힐 수도 없었지만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하, 읍….”

당장 입을 맞추고 싶었다.

이 천것에게.

강한 힘으로 단숨에 그를 제게로 잡아당겨 집어삼킬 듯 입을 맞추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모스는 처음에 당황스러워 저도 모르게 루인을 밀어 내려고 했으나, 이어 그가 자신을 달랑 들어 올리며 햇빛이 없는 쪽으로 발을 내뻗는 것을 보고, 허둥지둥 혀를 얽기 바빴다.

모스는 루인에게 아무런 반항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할 생각도 없었다.

이 무서운 햇빛 아래를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제대로 혀를 얽는 방법도 모르면서, 모스는 그렇게 루인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루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갓 태어난 새끼처럼 눈도 제대로 뜨지도 못하면서 혀를 얽고, 제 앞에 있는 이가 사지로 자신을 몰았다는 것을 알 텐데도 온몸으로 매달리는 괴물.

자신을 죽이려고 하고 괴롭히려는 이와 혀를 얽고, 다리를 벌린다니.

루인은 이해가 되지도 않고 제게 매달리는 이 괴물이 아둔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잇새로 헛웃음을 지었지만, 그 헛웃음은 이어 배 속이 끓어오르는 열기에 묻혔다.

이 아둔하고 멍청한 괴물.

한심하고 미련하고 모자라 보이는 이 괴물.

“눈 떠.”

이 괴물은 짐의 것이다.

비실거리는 몸을 제게 온전히 기댄 채 입을 벌리고,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린 속눈썹 아래로 드러난 선연한 이끼색 눈동자가 저를 똑바로 담자, 동시에 걷잡을 수 없이 흥분이 되었다.

루인이 작은 입을 찢을 듯 엄지를 넣어 쭉 벌린 뒤, 거칠게 제 혀를 얽었다. 목에 감기는 가는 두 팔, 그 아래로 손을 뻗어 허리를 감싸 안으며 루인은 창가 위로 고개를 내민 햇빛을 보고 생각했다.

진즉 이리할 것을.

쉽네.

이리 쉬운 길을 두고, 답지 않게 괜히 먼 길을 돌아올 뻔했다.

루인은 당장이라도 고꾸라질 듯 허덕이며 제게 매달리는 모스를 한 손으로 가뿐히 안아 들었다. 그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 하고 있었다. 벌벌 떨며 혹여나 제게 햇빛이 쏟아질까 두려워 입술을 꾹 깨물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수, 숨겨 주기로, 했, 잖아.”

모스는 루인의 뒤에 있을 햇빛이 당장이라도 자기를 덮칠까, 정신이 나간 이처럼 웅얼거리고 울먹이고 매달렸다.

웅얼거리는 모스에게 루인의 시선이 달라붙었다. 루인은 제발 도와 달라고 저를 붙드는 모스의 눈물 젖은 얼굴을 보다 시선을 미끄러뜨려 그의 앙상한 어깨를 보았다. 그리고 이내 눈썹을 위로 슬쩍 올렸다.

한 팔로 안아 들 수 있는 작은 몸. 거죽만 붙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마른 몸.

누가 이걸 보고 괴물이라 할 수 있을까. 만약 이게 괴물이라 한들, 괴물이란 말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오히려 약자에 가까웠다.

약자라. 루인은 힘이 없어 스스로 생활을 영위하지 못하는 생물은 좋아하지 않았다.

작고 연약한 것은 늘 위를 올려다보며 살려 달라고 도움만을 바라지, 정작 제게 이득이 되는 것이란 하나도 없기에, 루인으로서는 이렇게 힘없고 무능력한 것들이 제 곁에 들러붙는 것을 귀찮고 따분하게 여겼다. 그래서 약한 것들이 엉겨 붙으면 당장 죽여 버려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별로 죽이고 싶지 않은데.’

루인이 이상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이 괴물이 제가 제 세상의 전부라는 듯 매달리며 붙드는데…… 본래대로라면 질색을 하며 이미 죽이고도 남는 일이었을 텐데 죽이고 싶지 않았고,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작고 하찮은 게 제게 매달린다는 게, 기분이 나쁘지 않다 못해 오히려…….

좋았다.

루인은 현재 기분이 꽤 좋다는 것을 깨닫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기억을 찾으라며 모스가 제 목을 조르라고 했을 때는, 루인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분노가 휘몰아쳤었다. 이 정도의 분노면 하루가 지나도 사그라들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는데, 하루도 채 되지 않는 시간에 기분이 좋아지다니.

아까 불길 속을 걷는 것처럼 속이 뒤집혔는데, 지금은 분노의 흔적조차 마치 꿈이라도 꾸었던 양 사라져 있는 게 본인 스스로도 믿기지 않아 헛웃음을 연신 짓던 그는 이내 제 옷자락을 말아 쥐는 모스의 움직임에 생각을 멈췄다.

“해, 햇빛…….”

여전히 모스는 햇빛을 무서워하고 벌벌 떨고 있었다. 햇빛이 제게 다가올까 두려워, 안긴 채로 몸을 반절 꺾어 꾸역꾸역 그늘로 밀어 넣었다.

루인은 불안한 듯 저를 잡아끄는 그의 손짓에 기꺼이 응했다. 모스의 뺨에 연신 입맞춤을 하고 고개를 숙여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그는 모스의 두려움마저 소유하고 싶다는 듯, 본인 스스로도 모를 집착 어린 입맞춤을 하며 모스의 턱 아래에 잇자국을 남겼다. 그리고 제게 매달리는 눈물 젖은 얼굴, 그 얼굴의 눈물을 죄다 핥으며 모스를 데리고 침상으로 이끌었다.

“두려워하지 마. 밤은 곧 오니.”

햇빛이 닿지 않는 완연한 어둠 속으로 두 몸뚱이가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루인은 모스를 달래듯 밤은 곧 온다며 속삭였지만, 내심 밤이 오질 않길 바랐다.

엉겨 붙는 괴물의 모습이 퍽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물론 그런 생각은 꾹꾹 삼켜 입 밖으로 뱉지는 않았고, 그저 모스의 부드러운 피부에 코를 파묻고, 손을 내뻗어 은밀한 곳을 벌렸다.

그러자 모스는 그런 루인이게 제 전부를 다 던지는 이처럼 달라붙었다. 제 허리에 감기는 두 다리에 그의 입매가 만족스러움을 머금고 다물렸다.

이어 두 사람 사이에 열락이 피어났다. 루인의 말대로 햇빛은 언제 혀를 내뻗었냐는 듯 어느 순간 사라져 있었다.

그러나 해가 사라져도 두 사람의 정사는 계속되었고, 다시 몇 날 며칠을 살을 맞대었다.

짐승처럼, 괴물처럼.

***

칠흑같이 어두운 방은 시간의 한 축이 멈춘 듯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지만, 귀를 잘 기울여 보면 옅은 숨소리가 들렸다.

그마저도 너무 옅어 보통 사람이라면 들리지 않을 소리인지라, 제대로 들은 이마저 귀를 의심할 정도였지만 어찌 되었든 무언가가 있긴 있었다.

그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얼마 지나지 않아 빛 한 줌 없는 새까맣고 어두운 방 안에서 잠들어 있던 생명 하나가 눈을 떠 숨소리가 헛것이 아님을 알려 주듯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아.”

낮은 신음과 함께 눈을 뜬 그의 초점은 흐릿했다.

하나 눈이 어둠에 차차 길들자, 틀림없이 빛이 하나 없는 방 안이건만 녹색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미약한 빛이라도 머금은 듯 보석처럼 제 존재를 드러냈다.

이끼색 머리칼을 엉망으로 흐트러트리고 언제 빛을 내뱉었냐는 듯 시꺼멓게 가라앉아 있는 검은 빛을 머금은 녹색 눈동자를 가진 이는 모스였다.

“…어….”

눈을 뜬 모스는 뭐라 말을 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그것은 단어가 되지 못하고 잇새에서 사라졌다.

잘게 움직이던 움직임마저 멎고, 다시 칠흑 같은 어둠 속의 적막이 이어졌다. 침묵, 그리고 또 침묵.

어둠을 헤치고 허공을 바라보는 모스. 그는 눈을 깜빡이지 않고 한참 동안 허공을 바라보았다.

허공에 무언가 있는 이처럼 한참을 멀거니 시꺼먼 어둠을 바라보기에, 그가 일어났어도 일어나기 전의 적막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바짝 붙어 보면 모스의 눈동자는 소리 없이 미친 듯이 일렁이고 있었다.

도무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 알 수 없었으나 표정에는 온갖 감정이 몰아치고 있었다.

크게 요동치듯 일렁이는 눈을 한 채 한참을 허공을 보던 모스의 시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어느덧 그의 시선 끝에는 잠든 루인이 있었다.

루인을 보자마자 그의 눈이 요동쳤다. 일순 시선이 헛돌 듯 허공을 배회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새까만 어둠 속에서 잠든 그를 멀거니 바라보기 시작했다. 분명 바짝 붙어 있음에도 한없이 멀리 있는 것을 보는 듯, 묘하게 거리감이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평소의 루인이었다면 눈치채고 일어났을 테지만, 며칠 동안 잠도 들지 않고 이어졌던 정사 탓인지 누군가가 묘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모스가 그렇게 한참을 루인을 보는 사이 어느덧 사위는 서서히 밝아지고 있었다.

“…….”

모스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창가의 여명을 보았지만 햇빛을 피하기 위해 움직이지는 않았다.

창가에는 곧 있으면 햇빛이 고일 것이지만 그가 있는 이곳은 괜찮다. 모스는 요 며칠간의 정사에서 이 침상은 햇빛으로부터 안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스의 시선은 이내 낮은 신음과 함께 푹 바닥으로 향했다.

고작 고갯짓 한 번 한 것뿐인데, 그가 싸질러 놓은 것들이 비질비질 새어 나왔다. 마치 살아 있는 무언가가 새 나오는 것처럼 느껴져서 인상이 절로 구겨진 모스의 귓가에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음.”

남자, 루인이 내는 소리였다.

그는 여전히 반쯤 잠들어 있는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러기에 제 품 안에 안겨 있던 모스가 일어난 것을 아직 제대로 눈치를 채지는 못했을 텐데, 그는 귀신같이 손을 허공에서 몇 번 휘젓더니 이윽고 모스를 잡아채 제 쪽으로 끌어안았다.

눈을 감았음에도 참으로 정확하고도 빨랐다. 어찌 제 품속이 빈 것을 아는지.

화들짝 놀란 모스는 안긴 채로 혹 그가 깨어났나 살피듯 루인을 올려다보았지만, 다행히 그는 아직까지 잠든 채였다.

예민하게 일그러진 눈매를 하고서도 일어나지 않는 루인의 얼굴을 모스가 찬찬히 훑었다.

고집스레 다물린 입매, 힘주어 저를 껴안는 팔의 꿈틀거리는 근육, 그리고 잠든 것을 알리는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가슴.

무슨 용기가 들었는지, 모스는 돌연 꼬물꼬물 손을 꺼내 느릿하게 루인의 가슴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그가 숨을 내쉬면 제게 닿고, 숨을 마시면 몸이 밀려났다.

몸이 닿았다 떨어지고, 닿았다 떨어지고……. 그 모습을 보던 모스는 묘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이 남자를 처음 자신의 보금자리로 들였을 때.

인간이 숨을 한 번 내뱉으면 하늘에 떠 있는 별이 아래로 출렁, 한 번 숨을 마시면 별이 위로 출렁이는 것만 같았던 때가 있었다.

인간이 숨 쉬는 것을 지켜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잠들었던 나날들, 그때 모스는 잠든 남자의 상태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기분이었고 매일같이 그가 일어나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남자, 네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묻고 싶은 말을 한가득 준비하는 과정도 즐거웠고, 깨어나지 않는 남자의 옆에서 아무도 듣지 않을 머저리 같은 자기소개를 하는 것도, 그 언 땅에서 꽃이란 꽃은 꾸역꾸역 다 찾아내 남자의 주위에 뿌려 주고 열매도 하나하나 입으로 먹여 주는 것도 행복했다.

이렇듯 평온하다면 평온하다고 말할 수 있던 그 나날들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절로 지어졌지만.

-일어나. 네가 바라는 대로 죽여 줄 테니.

그 찬란한 기억들은 순식간에 진창에 빠졌다.

찬란한 숲의 기억을 찢어발기듯 가르고, 햇빛 아래로 저를 질질 끌고 가던 루인의 등이 불쑥 눈앞에 떠올랐던 탓에 모스가 숨을 훅 들이쉬었다.

쿵쿵쿵, 쿵쿵쿵, 쿵쿵쿵.

돌연 루인이 저를 질질 끌고 가던 기억이 떠오르자 심장이 포식자의 열린 아가리로 들어가기 직전인 양 미친 듯이 뛰었다. 모스는 잔뜩 동공이 확장된 상태로, 덜덜 떨며 얼어붙어 있다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여전히 잠든 남자의 낯을 보았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이 더 이상 아름다워 보이지 않고, 두려워 보이는 이 순간.

‘숲으로 돌아가고 싶어.’

모스는.

‘너를 두고.’

자신의 마음이 점점 닳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도 몰랐던 닳은 마음에 모스의 눈이 놀란 듯 커졌지만, 이내 그는 허둥지둥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꾹 깨물고 눈을 내리깔았다.

이러면 안 되잖아,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혼란스러운 듯 한참을 눈을 내리깔던 모스는 웅얼거리듯 말문을 열었다.

“괘, 괜찮아.”

말더듬이가 하나도 괜찮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바들바들 떠는 몸을 힘주어 누르며, 당장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은 눈물을 꾹 참으며.

루인이 저를 햇빛으로 끌고 가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속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지만, 지금 이 정도 고통은 괴물이니 괜찮다며 스스로를 속였다.

남자가 두려운 것도 제가 괴물이니 이 정도의 두려움쯤은 괜찮다고, 이 사람은 네가 선택한 인간 남자이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마음에게 제발 닳지 말라며 속삭이고, 또 속삭이자, 점점 괜찮아지는 듯했다. 아까보다는 덜 아팠다.

그렇게 한참을 속삭이던 모스는 루인의 그늘에 몸을 웅크리고 침대 아래 숨겨 두었던 열매 씨의 위치를 가늠했다. 그리고 마치 그 씨를 쥐고 있기라도 한 듯, 손을 옹송그리고 눈을 질끈 감으며 다짐했다.

그래도 나는 기다린다.

-나는 너를 데리고 갈 것이다.

나를 데리고 간다던.

루인이 아닌 남자, 너를.

이곳에서.

***

기억은 비로 흠뻑 젖어서 새벽에 문을 두드리는, 갑자기 나타난 손님처럼. 아무런 기척 없이, 아무런 전조 없이, 그렇게 느닷없이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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