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기억
춥다, 추워.
제국민들은 종종걸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해 빠르게 제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창문을 닫고 촘촘히 천을 꾹꾹 껴 넣었다. 그리고 불 앞에서 차게 언 몸을 데우는 제국민들, 그들의 한숨 소리는 늘 조용하나 한이 서려 있다.
봄을 모르는 윈스 제국의 땅에 밤은 유독 가혹하다. 대체 이 지독한 추위가 언제 끝날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봄이 오기만 하면 너무 살기 좋은 제국일 텐데. 하지만 제아무리 선대 황제들이 애를 써도 봄을 보지 못했던 것을 떠올리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닐까.
추위는 황족들이 사는 황궁도 똑같이 공평했다. 황궁 내에서도 가장 외진 궁의 꼭대기 층,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지나칠 정도의 고요로 수몰된 그곳에서 죽은 듯 가만히 누워 있던 이의 눈이 돌연 여태 잠들지 않고 있었다는 듯 번쩍 뜨였다.
궁의 주인이 원하고자 한다면 한없이 따뜻하게 데울 수 있겠지만, 지금은 제대로 된 훈기랄게 없는 시리도록 추운 이 방 안에서 눈을 뜬 자의 금안은 아주 차갑게 얼어붙은 금처럼 보이기도, 또는 지나칠 정도로 따뜻해 보이는 불같이 보이기도 했다.
그는 그 아름다운 눈으로 차게 언 방을 말없이 훑어보다 창밖을 응시했다.
“…….”
어둠을 응시하는 루인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어서, 얼핏 봐서는 그가 밤을 싫어한다는 것을 바로 알아챌 수 없었다. 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치 적국의 원수를 보듯 증오하는 느낌으로 그는 깜깜한 밖을 보고 있었다.
봄을 되찾아야 하는 윈스 제국의 황제로서 쓸모없이 추운 밤을 반길 리는 없었지만, 그는 유독 더 싫어하는 느낌이었다. 해가 없는 밖을 응시하는 그의 주위에는 넘실거리는 살기가 지나칠 정도로 살벌해, 가뜩이나 푸르게 얼어붙은 방이 더 꽝꽝 어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원수를 보듯 창밖을 보던 루인의 시선이 미끄러지듯 제 옆에서 잠든 앳된 소년 같은 모스의 얼굴로 향했다.
그러자 참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살벌한 기세가 순식간에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지며 드러난 것은…….
“…….”
혼란.
혼란과 동요로 얼룩진 그가 처음 명확히 드러낸 표정은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지른 이처럼 수치스러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일그러진 얼굴로 얼마나 있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얼굴은 돌연 무언가를 질투하는 것처럼 사납게 구겨지더니, 또 이번엔 무얼 떠올린 것인지 온화하게 얼굴이 누그러지기까지 했다.
마치 여러 사람이 그의 안에 들어간 것처럼 휙휙 바뀌는 얼굴, 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누그러진 얼굴은 또 순식간에 야차와도 같은 분노를 담았다.
아드득, 그의 얼굴 근육이 꿈틀거리더니 이내 모스의 목에 양손이 올라갔다.
“…!”
당장이라도 목을 졸라 죽일 듯 바짝 붙은 손이 잠든 모스를 죽일 것처럼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는 목을 제대로 조르지 못하고 갈등하고 있었고, 이는 구부려졌다 펴지는 손끝에 여실히 드러났다.
목을 조를 것처럼 굴다가도, 그리하면 안 되는 것처럼 멈추었다. 당장이라도 부러뜨릴 수 있을 법한 가냘프고 연약한 흰 목덜미 위에 진 그림자가 온갖 생각, 감정이 휘몰아치듯이 함께 일렁였다.
달빛이 구름에 가려지고, 드러나고. 나무가 바람에 반쯤 꺾였다, 도로 허리를 펴고. 서늘한 까마귀 울음소리가 울리다 멎기가 반복하고.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그 시간 동안 몇 번의 망설임 끝에, 루인의 손은 언제 목을 조르려고 했냐는 듯, 앳된 모스의 뺨 바로 옆에 내려졌다. 그는 목을 조르는 것에 실패했다.
“으…, 응.”
이 기민한 괴물은 평소대로라면 눈을 떴을 텐데, 자기 전까지 집요하게 괴롭힌 탓인지 눈치채지 못하고 작게 웅얼거리며 입술을 달싹일 뿐 눈을 뜨지 못했다.
그러고는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면 절대 그리 굴지 못할, 마치 애교를 부리듯 훈기를 쫓아 루인의 손에 제 코를 가벼이 비비고는 그 손바닥에 제 옅은 숨을 뱉어 내며 다시 잠들었다.
“…….”
그리고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생명 하나를 앗아 가기엔 충분한 그 시간 동안, 루인은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방금 제 손으로 모스의 숨통을 틀어쥐려고 했던 이가 맞는지, 모스가 뒤척이는 동안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그가 도로 푹 잠든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루인은 무언가에 홀린 듯 한참을 그 앳된 옆모습을 빤히 보았다.
긴 침묵 속에서 그의 눈은 깜빡이지도 않았고, 무언가를 확인하듯 계속해서 모스의 잔상을 아로새기고, 아로새겨, 기어코 말문을 열어…….
“……너는 나를 그딴 눈으로 볼 줄도 알았어.”
…끝내 참으려던 말을 읊조렸다.
그리 읊조리는 루인의 얼굴에 짧게 패색(敗色)이 드러났다.
그 누가 윈스 제국의 황제의 얼굴을 저런 식으로 만들 수 있을까. 그는 무언가에게 졌다는 듯 분해 보였다. 물론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언제 그런 표정을 지었냐는 듯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속은 수많은 감정으로 뒤엉킨 뒤였다.
증오처럼, 질투처럼, 또는 안도처럼…….
끝도 없이, 바뀌고, 뒤엉키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
두 사람 사이에서 무언가가 바뀌기 시작했다.
가장 첫 번째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루인을 둘러싼 분위기였다.
기억을 잃은 후 만난 루인은 일상적이고 평온한 상황 속에서도 지나칠 정도로 날카로운 살기를 내뿜고는 했었다. 검이 검집에 잘 꽂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장이라도 뽑혀 나올 것만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늘 날이 선 그의 옆에서 모스는 매일같이 눈치를 보기 바빴었지만 근래에는 미묘하게 달라졌다.
“으, 응!”
지금만 해도 그렇다.
커다란 루인의 아래에 깔린 모스가 제 아래를 파고드는 커다란 성기에 어쩔 줄을 모르고 신음했다. 몇 번을 삽입해도 처음 넣는 것처럼 뻐근한 모스의 아래에 루인의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그는 모스를 나무라지 않고, 그런 모스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아파, 아파아….”
칭얼거리는 모스의 몸을 꽉 껴안는 루인의 얼굴에 날 선 기색은 없었다. 이전에는 이리 모스가 칭얼거리면 루인은 구멍이 좁아터진 네가 문제라며 모스를 나무랐는데, 지금은 오히려 달짝지근한 느낌이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읏, 아!!”
그때 모스의 눈동자가 뒤로 넘어갈 듯 까뒤집어졌다. 느릿하게 움직이던 루인의 허리가 거세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신음하는 모스의 얼굴을 짓누르듯 붙든 채 입술을 세게 깨물고 거칠게 입을 맞추었다. 얽히는 혀, 채 삼키지 못한 타액이 줄줄 흘렀다.
이대로 하다가는 정말 죽을 거 같았다. 모스가 도망치려고 허리를 위로 빼자, 깊게 파묻혀 있던 루인의 성기가 얼마나 싸 댄 것인지 번들거리다 못해 선단을 타고 뚝뚝 흘러내리는 정액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모, 못 해, 못 해.”
모스는 도망치려는 듯 허리를 더 위로 뺐다. 그리고 기듯이 뒤로 주춤주춤 움직였으나.
“아읏!!!”
루인이 가차 없이 모스의 허리를 붙들고 아래로 끌어 내린 뒤, 제 것을 더 깊게 밀어 넣었다. 느슨하게 빠져나갔던 루인의 것이 뻐끔거리는 모스의 구멍에 아까보다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가 박혔다. 그 바람에 모스는 벽에 머리를 쿵 부딪혔다. 하나 그럼에도 루인은 허리 짓을 멈추지 않았다.
“흐으, 으응, 윽.”
모스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엄청난 쾌락이었지만,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을 넘긴 쾌락은 오히려 괴로움에 가까웠다. 모스는 바들바들 떨며 괴로워했고, 거센 움직임에 모스의 머리는 쿵쿵 벽에 닿았다.
“……쯧.”
모스의 머리가 벽에 사정없이 부딪히는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루인이 혀를 쯧 차고는 모스의 머리 위에 제 손을 끼웠다.
“시끄럽게.”
신경질적으로 읊조린 그가 모스의 뻗친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얽은 채,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하아, 으, 으응?!”
숨넘어가듯 거의 뒤로 젖혀진 채로 헐떡이던 모스는 어느 순간부터 머리를 쿵쿵 찧는 통증이 느껴지지 않아, 어리둥절한 낯으로 눈동자를 굴리다가 루인이 손을 제 머리 위로 둔 걸 뒤늦게 발견했다. 모스는 그것에 놀란 듯 동그랗게 눈을 뜨며 루인을 바라보았다.
긴 정사로 인해 땀이 나 축 가라앉은 머리를 쓸어 넘긴 루인이 때마침 제 것을 빼내 사정하고는, 이어 시큰둥한 낯으로 모스를 응시했다.
“뭐.”
퉁명스럽고 신경질적인 말투만 보며 평소 루인과 똑같으나, 무언가 미묘하게 다른 느낌.
이것이 바로 그거였다. 근래 둔하디둔한 모스마저도 느낄 수 있는 묘하게 살가워진 그의 태도. 이전 같으면 이런 배려는 존재조차 하지 않았으나, 최근 들어서 모스가 느끼기에 루인은 자신을 조금이지만 배려하고 있었다. 그게 언제가 기점이냐고 묻는다면 모스는 루인이 자신을 햇빛에 녹여 버리려던 그날이라고 답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 늘 알 수 없는 적을 앞에 둔 것처럼 날카롭게 달려들던 그의 살기가 마치 그를 괴롭히던 적의 약점을 알아채 안심이라도 한 양, 한 꺼풀 벗겨져 느슨해진 것이다.
하나 물론 그렇다고 그가 다른 사람처럼 친절하고 상냥하게 변했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눈 똑바로 떠.”
방금까지 제 머리 위에 손을 넣어 고통을 최소화해 주던 이는 없었다. 잠시나마 누그러졌던 분위기는 모스가 눈을 내리깔자마자 사라졌고, 모스는 제 머리 위에서 서늘하게 말하는 루인의 말에 얼어붙을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제대로 안 해?”
목소리만 들어도 안다. 정말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근래 둘 사이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느슨해졌지만, 이렇듯 때때로 이전보다 더 살벌해질 때가 있었다. 그건 바로 모스가 시선을 피할 때였다.
최근 루인은 모스의 시선에 대해 굉장히 예민하게 굴기 시작하더니, 이젠 집착까지 했다. 모스가 딴 곳을 보거나 겁에 질려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지나칠 정도로 몰아세웠고, 그때마다 모스는 지금처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저런 서늘한 목소리를 들으면 몸이 굳어 버렸다. 눈을 피하면 그가 더 화내기에 안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시선이 루인에게 닿지 못하고 허공을 방황했다.
“또 녹고 싶어서 작정을 했군.”
“미, 미, 미안해.”
결국 루인은 자꾸 허공을 배회하는 모스의 눈동자를 못 참고 사납게 짓씹듯 말하기 일쑤였다.
살기와 예민한 기운이 솟구치자 모스는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또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루인의 녹인다는 말. 그것은 절대 농담이 아니었다.
틀림없이 저번처럼 창가로 끌고 가겠다는 뜻이기에, 모스는 결국 겁에 잔뜩 질려 울먹이면서도 루인과 눈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기를 쓰고 루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니, 루인은 언제 살기를 내뿜었냐는 듯, 순식간에 차분한 얼굴로 돌아와서는 빤히 모스를 응시하다, 돌연 인상을 구기더니 제 머리를 붙들었다.
“빌어먹을, 또…….”
뭔가를 보는 사람처럼 허공을 응시하던 그의 시선이 다시 모스에게 향했을 때, 모스는 흠칫 놀랐다.
‘또 다. 저 시선.’
요즘 종종 이런다.
무언가를 관찰하듯 자신을 응시할 때가 몇 번 있었는데, 그것은 뱀이 구석구석 틈 하나 없이 훑고 지나가듯 서늘하고도 꼼꼼한 시선이었다. 물론 매번 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눈을 돌리는 루인으로 인해 싱겁게 났지만, 그 시선을 받아 내는 모스로서는 죽을 맛이었으니.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어.’
그게 무서워 죽을 것 같았지만, 무서워서 그의 시선을 피하면 더 안 좋은 결과가 뒤따를 것임을 알기에 꾹꾹 참고 그를 응시하는 것만이 모스가 할 수 있는 전부였으나.
“왜…, 왜 그렇게 봐?”
오늘은 모스가 처음으로 용기를 냈다. 남들이 보았을 때는 저게 무슨 용기냐고 하겠지만, 소극적이고 겁많은 모스에게는 엄청난 용기였다.
루인은 모스가 그리 물을 줄은 몰랐다는 듯, 의외라는 얼굴로 한쪽 눈썹을 유려하게 휘었다 폈으나 딱 거기까지만 반응을 했다. 모스의 말에 답을 하지 않고, 그는 이제 대놓고 모스를 바라봤다. 모스는 루인의 시선이 화살처럼 박혀 드는 기분에 고슴도치가 된 것만 같던 그때, 드디어 루인이 입을 열었다.
“잡아 봐.”
“…으, 응?”
“잡아 보라고.”
뭐를…? 모스가 영문을 하나도 모르겠다는 듯 루인을 보자, 루인이 제 손을 툭툭 흔들었다. 마치 개를 부르듯 성의 없는 태도였으나, 모스는 루인이 원한다면 개가 되어야 한다. 그는 허둥지둥 일어나 루인의 손을 붙들었다.
“제대로 날 안아.”
그러자 루인은 제 손을 감싼 작은 모스의 손을 응시하다, 저리 말했다. 루인이 이리 군 적은 없었던지라, 모스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저 말이 무슨 말인지 의도를 파악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루인이 생각할 시간을 더 주지 않았던 것이다.
“팔을 감아.”
뜬금없었다. 목에 팔을 감는 행위는 숲에서 몸을 섞을 때 종종 했던 일인지라, 새로울 것도 없었지만, 이리 몸을 섞지 않을 때 요구하는 것은 정말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으, 응. 알았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스가 그 말을 거절할 배짱은 없었다. 루인이 제게 요구하는 것에 느리게 반응하면 그가 화낼 수도 있으니, 모스는 평온을 위해 서둘러 그의 목에 팔을 휘감았고, 동시에 누그러진 분위기를 느꼈다.
‘대체 뭘까.’
모스는 자신과 루인 사이의 기류가 뭐라고 정의할 수 없는, 미묘하고 복잡하면서도 이전과는 다른 것을 확실히 느꼈지만, 마음을 편히 놓을 순 없었다.
어차피 모스는 루인의 기행이 길어지지는 않을 것이라 여겼다. 자신은 그가 누누이 역겹다고 말하던 천것이지 않은가.
“이제 됐다. 비켜.”
“……아! 응, 으응.”
아니나 다를까, 루인은 모스를 밀치듯이 밀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겨진 방 안에서 모스는 그의 기행이 끝날 날이 며칠도 아닌 바로 오늘일 것이라고 직감했다. 그는 몸을 섞을 때 말고 모스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니, 이 기행을 오늘 이후로는 그가 벌일 것 같지 않다고 여겼으나…….
“매달려 봐.”
……그건 착각이었다.
하루면 끝날 것이라 여겼던 루인의 기행은 그날을 시작으로 며칠씩이나 더 지속되었다.
대뜸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니, 대체 그가 왜 이러는지는 영문을 하나도 몰랐으나, 모스는 그가 화내는 게 더 무서웠다. 그래서 허둥지둥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거나 그가 하라는 것을 했다.
그럼 반응은 매번 또 달랐다. 날카롭게 그를 감싸던 예민한 기운 대신 만족감 어린 시선이 모스에게 향할 때도 있었고.
“……제대로 안 해?”
“므, 므아내.”
또는 오히려 더 살벌해진 분위기가 생성되기도 했다.
오늘은 대뜸 루인이 제 것을 빨라고 해서, 모스는 허둥지둥 루인의 것을 문 채 오물거렸다. 하지만 성교도 루인을 만나 처음 하게 된 모스였기에 이리 성기를 물고 흥분시키는 것은, 그것도 이렇게 점점 살벌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제대로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모스가 오물거리기만 하니 루인의 성기는 커지지 않았고, 그것에 모스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다가 루인의 눈과 마주쳤다.
“…….”
루인은 아무런 표정 없이 관찰하듯, 또는 무언가를 빗대어 보듯 모스를 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보는데 보지 않는 느낌에, 모스는 순간 덜컹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어 저도 모르게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울먹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우으……?”
모스가 성기를 문 채, 울먹이자마자 커지지 않던 루인의 성기가 대뜸 발기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조차 되지 않는데, 루인은 더 알 수 없는 말만 했다.
“그래, 이리 볼 줄 알면서.”
“자, 잠까안, 욱, 우웁.”
“이리 보았으면서.”
루인이 거칠게 모스의 머리를 쥐고 흔들었다. 깊게 처박히는 커다란 흉기 같은 성기가 가차 없이 모스의 목구멍을 막았다. 헛구역질이 일며 눈물이 뚝뚝 흘렀지만, 루인은 멈추지 않았다.
“하아.”
잔뜩 흥분한 얼굴로 모스의 목에 사정없이 박아 대더니, 평소보다도 이른 사정에 도달했다.
“으, 으엑…….”
“삼켜.”
루인의 것은 크기가 큰 만큼 양도 엄청났다. 입을 범람해 줄줄 흐르는 것에 모스가 울먹이며 뱉어 내려고 했지만, 루인은 그 꼴을 보지 못하고 턱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을 모스의 손으로 주워 담아 삼키게 했다.
“이리 와.”
모스는 자신에게 오라고 손짓하는 루인을 주저앉은 채, 멍하니 올려보았다. 침상의 높이가 원래 이토록 높았던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루인이 너무나도 아득한 높이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모스는 문득 ‘근래 그가 대체 왜 이러는 걸까?’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그의 기행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을까?’라는 고민을 했다. 어차피 루인이 이상한 행동을 하는 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닐 수도 있었다. 이런 기행은 결국 성교로 이어졌고, 성교 중에서 기행으로 이어져도 결국 성교로 끝났으므로.
‘그래도 지금이 나아.’
굳이 따지자면 이전에 비해서는 나름 지낼 만했으니까. 루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가 하라는 것을 한다면, 이전처럼 배나 목에 검을 꽂아 넣지도, 숲에서 데려가겠다고 다리를 꺾지도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러기에 그는 이게 둘 사이의 최선임을 직감하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
여전히 모스를 이리 오라며 개 부르듯 손짓하는 루인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자니 아까부터 따끔따끔 아파 오던 가슴의 통증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심하게 괴롭히는 건 딱히 없는데. 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파 오며 눈알이 뜨거워지고, 그에게 닿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심장이 저릿저릿하고, 먹은 게 아무것도 없는 위가 꾹 눌리는 것만 같은지.
“쯧, 말귀도 못 알아들어? 머저리같이 굴긴.”
하나 무슨 생각이라도 모스에게는 길게 할 새가 없었다.
“미, 미, 미안해, 미안해, 머, 머저리라서, 미안해.”
모스는 사과를 쏟아 내며 루인의 명령에 따랐다. 그가 오라는 대로 달려들고, 말을 늦게 따라 폭언과 함께 뺨을 맞아도 그의 말을 어떻게든 듣고자 했다. 그리고 그 말을 잘 들으면, 루인은 상이라도 내리듯이.
“그래, 잘 듣네.”
모스의 젖은 뺨에 가벼이 입을 맞추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보았다.
“으, 응, 응. 나 말 자, 잘 들어. 잘 들어…….”
그러니까 나 버리지 마, 미안해, 잘못했어, 미안해, 나 말 잘 들을게, 나 버리지 마, 버리지 마…….
하나, 온갖 사과와 애원을 쏟아 내느라 모스는 볼 여력도 없었고, 보지도 못했다. 만족스러운 미소는 어디 가고, 모스의 위에 무언가를 덧그려 비교하듯 관찰하는 루인의 얼굴을.
그리고 변했다고 여겼던 분위기는 그저 폭풍 전야였음을.
***
모스는 잠들지 않았으면서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알겠다. 지금 가지.”
한 치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 모스는 제 머리맡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눈을 꾹 감았음에도 루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일어나고 싶진 않았다. 방금까지 정사를 나누었던 몸은 회복했지만 여전히 정신은 너무 피로했던 탓이다.
다행히 루인의 시선은 얼마 가지 않아 사라졌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루인이 멀어져 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귀가 밝은 모스인지라 루인과 카를이 이야기를 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정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모스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기에 금방 귀를 닫았다.
“……아.”
이어 두 사람이 아예 사라진 것처럼 이 안에 아무런 인기척이 들리지 않자, 모스는 눈을 떴다.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자 그새 어둠이 눈에 익어 천장의 화려한 무늬가 보였다. 숲에서는 밤하늘을 보았다면, 이곳에선 인간들이 새긴 무늬를 보며 지낸다.
저 천장의 무늬는 처음 보았을 땐 신기하고 아름다워 보였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매일 누워만 있으니 저 천장 무늬가 오히려 지겹다고 느껴지며, 문득 밤하늘이 보고 싶어졌다.
“……으응.”
그래서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는데, 앉자마자 모스는 제 속에서 무언가 꿀렁거리며 나오려는 것에 신음하며 주저앉았다.
“어, 어떡해.”
속에 있는 것을 빼고 싶었지만, 몇 시간 전만 해도 눅진하게 풀려 있었던 아래는 그새 빠른 속도로 회복이 되었기에 그새 입을 꾹 다물었고, 안은 루인의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래가 꽉 찬 느낌이 드는 바람에 기분이 이상했다. 모스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이불로 제 몸을 돌돌 말고 웅크렸다. 만약 자신의 개체가 수컷이 아니라 암컷이었다면 애를 가졌을 정도로, 그만큼 배가 살짝 볼록 튀어나올 정도로 가득했다.
모스는 튀어나온 제 배를 보다가 슬쩍 꾹 눌렀다. 그리고 바로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배를 누르자 몸 안의 열기를 품어 뜨거워진 루인의 정액이 구멍을 비집고 찔끔 새어 나와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은 충격적이었다.
아랫배를 눌렀다고 정액이 흘러내리다니, 원래 이게 맞는 건가? 이리 많이 싸 대는 게 정상인가? 아니 애초에 모든 인간은 이렇게 많이 싸는 건가?
온갖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빼고 싶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흘러나올 것만 같아서, 그거 때문에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던 것이다.
그는 이불 위로 천천히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다리를 벌린 뒤 자신의 아랫배를 꾹 눌렀다.
“으……….”
마치 소변이 나올 것만 같은 찌릿한 아랫배의 감각에 모스의 얼굴이 달궈졌다.
모스는 최대한 잡생각을 지우고 꾹꾹 아랫배를 누르고, 또 눌렀다. 하나 그렇다고 정액이 생각만큼 잘 나오는 건 아니었다. 아주 조금 흘러나오기만 할 뿐, 속에 가득 찬 감각은 사라지지 않아 모스가 울상을 지었다.
결국 모스는 짧게 고민하다 손가락을 넣었다.
“……?”
손가락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이토록 비좁은 곳에 루인의 것이 어찌 들어갔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된다며 모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잠시 고민했다. 그냥 이대로 둘까? 하지만 이 꿀렁이고 가득 찬 느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그는 그 작은 구멍에 꾸역꾸역 손가락 두 개를 넣고 벌렸다.
“하…….”
순간이 길었다. 모스의 이마는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들었고, 드디어 모스가 원하는 대로 루인의 정액이 손가락을 타고 꿀렁이며 나오기 시작하던 그때.
“혼자 재밌는 거 하네.”
모스는 얼어붙었다.
‘목소리?’
분명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그러기에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는데, 문 앞에는 행위에 집중하느라 어느새 들어온 것인지 모를 이가 어둠 속에서 특유의 푸른 눈을 빛내며 형형하게 모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저게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듯 모스의 표정이 얼이 빠졌지만, 이윽고 그가 누구인지 떠올린 듯 굳었다.
-와. 니가 황후세요?
어딘가 낯익은 생김새와 보석 같다고 느꼈던 저 푸른 호수 같은 눈. 저 눈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이곳에 처음으로 침범한 이며.
-형님이 널 사랑한다 했다고? 웃기지도 않지. 감히 그분이 너 같은 싸구려 남창을?
잊고 싶은 기억이었다.
치테이르는 모스의 눈이 잘게 떨리는 것을 보고 픽 웃다가
“우리 처음 봤을 때도 이거랑 상황 비슷했는데.”
“……아.”
치테이르의 시선은 새하얀 모스의 나신으로 향했다. 키득키득 웃음을 터트리는 치테이르의 앞에서 모스의 얼굴색이 새하얗게 질렸고, 모스는 허둥지둥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이불로 돌돌 제 몸을 말았다.
“왜 멈춰요? 난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하지?”
치테이르가 휘파람을 불며 장난치듯이 키득거렸다. 저번에 마지막으로 온갖 역정을 내며 나갔던 것과는 반대로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표정과 말투였다.
“…….”
모스가 그럼에도 경계를 풀지 않고, 이불을 돌돌 만 채 그를 응시하자 치테이르는 픽 웃곤 자신의 안주머니를 뒤적였다. 그의 품속에 나온 건 손바닥만 한 주머니였는데, 그 안에선 쿠키가 나왔다.
와작, 치테이르가 대뜸 쿠키를 씹어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쿠키 하나를 다 먹은 그는 새로운 쿠키를 꺼내 반으로 가르더니 흔들었다.
“쿠키 먹을래요?”
그는 그리 말하고 모스가 있는 쪽으로 다가가 반쪽짜리 쿠키를 내밀었다. 하지만 모스가 먹을 리는 없었다. 모스는 말없이 제 앞에 놓인 쿠키를 노려보기만 할 뿐 시간이 흘러도 먹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치테이르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런 모스를 관찰하듯 바라보다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아, 요즘 시대에 이런 수작이 먹히냐고 내가 그토록 말했건만.”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치테이르는 모스가 잠시 고개를 돌린 그때.
“우웁….”
순식간이었다.
“사람이 호의를 권하면 말이야.”
“아, 안…….”
“먹어야지, 안 그래?”
치테이르가 모스의 턱을 붙들더니 입 안에 억지로 쿠키를 욱여넣기 시작했다.
분위기도 완전히 달라졌다. 치테이르는 방금까지 빙글빙글 웃으며 장난치던 이가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웃음기를 거둔 채 모스의 입에 쿠키를 욱여넣었다.
“흐… 으.”
무서웠다. 모스가 바들바들 떨며 도리질 쳤으나, 이미 쿠키는 억지로 입 안에 들어간 상태였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이걸 먹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모스는 뱉어 내려고 했지만, 치테이르의 악력은 엄청났다.
“삼켜야지요.”
다시 빙긋 웃으며 말하는 치테이르는 부드러운 어조와는 다르게 팔에 힘줄이 설 정도의 엄청난 악력으로 모스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모스는 결국 쿠키를 삼킬 수밖에 없었고, 모스의 목울대가 꿀렁이자 치테이르는 모스의 입을 벌려 확인했다.
“잘했네.”
깨끗하게 쿠키를 삼킨 것을 확인한 치테이르는 먼지를 털어 내듯 모스를 툭 쳐서 밀쳐 내고는 웃었다.
“콜록, 콜록콜록!”
“맛있지?”
“코, 콜록, 콜록.”
맛은 느낄 수 없었고, 그저 괴로운 듯 마른기침이 계속 났다. 하기야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몸이니, 긴 시간 무언가를 먹는 법이 없던 모스였다. 그런 그에겐 이 작은 쿠키 덩어리도 거북하기 그지없었다.
“우욱…….”
음식물이 식도를 통해 내려간다. 그것에 당장이라도 토해 낼 것처럼 헛구역질을 하자, 치테이르는 “어어 그러면 안 되지.”라고 말하며 모스의 입을 틀어막곤 빙긋 웃었다.
두 사람이 바투 붙었다. 모스는 치테이르가 입꼬리를 찢어질 듯 올리고 있지만 눈은 하나도 웃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섬뜩해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아, 멈췄다. 다 먹었나 보네.”
한참 미친 듯이 기침하던 모스가 잠잠해지자 치테이르가 뒤로 한 발 물러서더니, 빤히 모스를 응시했다.
“…….”
침묵. 그저 치테이르는 손끝을 툭툭 제 팔뚝에 두드리며 모스를 응시했다. 억척스레 먹일 때는 언제고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태평한 그의 태도에 어리둥절한 것은 모스였다.
“…….”
뭐라 말할 듯 모스는 입술을 달싹였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하던 그때.
‘……새?’
치테이르가 아까 전 내려놓은 쿠키와 그 옆에 부스러기를 먹기 위해 창가에 앉은 새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새가 뭔가…… 이상했다.
방금만 해도 부지런히 바닥을 쪼던 새가 발작하듯 부들부들 몸을 떨기 시작하더니, 픽 쓰러진 것이다. 간헐적으로 떨리는 몸, 그 작은 새는 어떤 수를 쓸 새도 없이, 창 너머로 낙하했다.
부스러기를 즐겁게 주워 먹던 새가 딱딱하게 굳었다니?
모스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걸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모스의 앞을 치테이르가 가로막았다.
“이, 게 무슨…….”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채 모스가 굳어 있던 그때, 치테이르가 그런 모스를 빤히 보며 입을 열었다.
“너는 뭔데 안 죽어?”
“……주, 죽다니?”
“와 진짜 모르네.”
치테이르가 황당하다는 듯, 픽 웃었다. 그리고 창가 위에 남은 쿠키 부스러기들과 모스를 번갈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거 독이야.”
아주 여상하게, 평온한 일상의 일부를 읊듯.
너무나도 나긋하고 부드러운 어조였기에 모스는 그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지 않은가. 누가 음식에 독을 탔다는 이야기를 저리 평온한 어조로 읊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이어지는 치테이르의 말에 모스의 시선은 창가에 도로 향했다.
“소도 단번에 잡는다는 맹독.”
창가 위에는 작은 깃털 하나만 있었다. 멍하니 그 깃털을 보던 그때, 치테이르의 눈이 요사스레 휘었다. 그리고 말했다.
“너 인간 아니지.”
“이야기는 잘 끝나셨습니까?”
“…….”
“황태제 전하?”
곧 있으면 황제가 오기에 급히 치테이르를 불러낸 보좌관은 어리둥절한 낯으로 치테이르를 응시했다. 그는 방에서 나온 뒤로, 말이 사라지고 대신 영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보좌관의 부름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치테이르는 고개를 들어 보좌관을 응시했다. 그러고는 대뜸 그리 물었다.
“자네가 준 그 독 든 쿠키. 그거 확실하지?”
“예. 황제 폐하를 꼬여 낸 저 사특한 것에게 준다고 해서 신경 써서 만들었습니다만. 죽이는 데 성공하셨습니까?”
“…….”
“전하?”
치테이르는 답하지 않았다.
그랬다. 황제에게 조금의 흠집이라도 나는 걸 싫어하는 치테이르는 근래 들어 황제가 조금 이상해진 것이 저 방의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늘 저것을 죽이는 것이 치테이르의 목적이었고, 기왕이면 확실하게 제 눈으로 죽는 걸 봐야겠다는 생각에 황제가 자리를 비운 틈을 봐 손수 나선 것이다. 하지만.
“직접 보길 잘했어.”
“예?”
“역시 이상했잖아, 저거.”
치테이르는 인상을 구겼다.
“자네, 혹 불사의 몸을 가진 괴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 있나?”
“불사요? 그런 게 존재합니까?”
“…….”
“아무튼 독살 성공하셨냐니까요?”
“……음.”
치테이르는 보좌관을 응시했다. 그의 파란 눈은 평소보다도 더 깊게 가라앉아 있어, 질문을 한 보좌관은 순간 움찔했다. 하나 움찔은 짧았다. 치테이르가 돌연 빙긋 웃으며 장난스레 말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냥 안 줬어. 쟤한테 주기는 아깝더라고-.”
“예? 아니, 그 독을 얼마나 힘들게 구했는데. 섭취해도 몸 안에 흔적이 안 남는…….”
“됐고. 혹시 황실에서 대대손손 내려오는 금서 같은 거 없나? 어릴 적, 얼핏 듣기론 금서에 금기시된 존재들의 기록도 있었다고 들었는데.”
“금서요? 금서는 현재 신전이 관리하고 있지 않습니까?”
“신전?”
치테이르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래, 생각해 보니 그쪽이 이런 건 더 잘 알겠군.”
위장을 녹이는 맹독을 먹고도 살아난 존재, 네 정체가 무엇이냐고 묻는 물음에 스스로가 “괴물.”이라고 답하는 존재,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왔는지 그 어느 것도 짐작할 수 없는 존재.
“내일 신전에서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는 자를 하나 구해 와.”
치테이르의 움직임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형님이 뭔가 재밌는 걸 주워 온 모양이니, 내가 알아봐야지.”
이 당시에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
하아, 모스가 저도 모르게 숨을 내뱉었다. 시리도록 추운 어둠을 가르고 새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하나 모스는 입김에 시선을 빼앗길 수 없었다. 새파랗게 언 땅 위로 작은 새가 점처럼 콕 박혀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선명했다.
죽은 새, 쿠키, 맹독, 자신의 정체, 그리고 제가 “괴물.”이라 답했을 때.
-흥미롭네.
푸른 눈을 빛내던 남자.
모스는 자신을 보던 그의 표정이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다.
흥미롭다고 말은 하면서, 표정은 전혀 흥미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괴이했다. 습관처럼 그의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미지의 존재에 대한 경멸과 배척이 가득했던 것이다.
경멸, 배척, 정말 익숙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
그것을 다시 떠올리자, 속이 울렁거리더니 순간적으로 눈앞이 핑 돌았다. 정신을 잃을 것처럼 아득해져 눈을 꾹 감았다 떴는데, 모스는 어느새 제 몸이 창밖으로 반 넘게 기운 걸 깨달았다.
하나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모스의 몸은 순식간에 허공을 갈라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모스는 생명 줄처럼 제 몸을 감싼 이불을 꽉 쥐었다.
“아으, 윽.”
아무리 낙법을 잘 펼친다 해도, 현기증 때문인지 도무지 잘 떨어질 수가 없었다. 모스는 배가 쥐어짜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파.’
떨어지면서 키 큰 나무의 나뭇가지에 엄청나게 긁혀 생채기가 가득 생겼고, 배나 다리는 삐끗한 건지 너무 아팠다. 평범한 인간이었으면 꽤 커다란 부상을 입었을 테지만, 모스는 바닥에서 기듯이 몇 번 신음하는 것으로 회복을 했다.
그때, 그런 모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게 있었다.
‘아직 살아 있어?’
새가 있었다. 발작하듯 여전히 몸을 부들부들 떠는 새는 언 땅 위에 새하얀 점처럼 선명히 있었다. 모스는 순간 제 몸의 고통도 잊고 그 새에게 다가갔다.
하나 이어 모스는 탄식했다. 살아 있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간혹 이미 명을 달리한 동물일지라도 몸의 근육만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경우가 있었는데, 새도 마찬가지로 이미 죽었지만, 몸만 잘게 떨고 있었던 것이다.
모스는 멍하니 그것을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그 새를 들어 올렸다.
‘묻어 줘야 하는데…….’
숲에서는 늘 그랬다. 죽은 동물들을 땅 위에 두면, 이 추운 대륙에서 시체가 흙으로 돌아가지 못하기에 눈 뜬 채 얼어붙는다. 그러기에 시체는 인간이고 짐승이고 반드시 따뜻한 땅 아래에 묻어 줘야 한다.
손안에 새의 시체를 쥔 모스의 눈동자가 도르륵 움직이던 그때.
‘그 인간이다.’
모스는 무성한 풀 너머로 치테이르를 발견하고 얼어붙었다. 루인과 비슷하게 생겼으면서도 영 다른 분위기를 내뿜는 치테이르는 이토록 멀리서 봐도 모스의 몸이 절로 경직되게 만들었다.
‘도망가고 싶어.’
주춤주춤, 본능적인 껄끄러움에 뒷걸음질을 치던 모스는 어느새 뛰고 있었다. 왜 뛰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숲에서처럼 그는 풀이 눕지 않게, 아주 잘게 날 듯이 뛰어 치테이르에게서 멀어지고자 했다.
“……아.”
그 결과는, 바로 이것이었다.
‘물가구나.’
숲에서 보던 물가와는 조금 달랐다. 인간들이 사용하는 듯, 물가는 딱 보기에도 정말 잘 정돈되어 있었다. 물가를 둘러싼 돌들도, 풀들도, 그 옆에 예쁘게 닦인 길들도 죄다 눈을 즐겁게 하는 것들이었다.
“아, 마, 맞다.”
하나 그런 거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모스는 제 손에 꼭 쥐어진 작은 이의 존재를 잊지 않고, 주위를 두리번 둘러보다 흙이 있을 법한 곳을 찾았다.
잘 닦여진 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수풀과 흙이 있었다. 모스는 그곳으로 향한 뒤, 쭈그리고 앉아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미…… 미안해. 내가 괴, 괴물이라, 네가 죽었어.”
차갑게 식은 작은 몸을 묻으며 모스는 사과했다. 자신이 그 쿠키를 먹고,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면 소리를 질러서라도 새가 쿠키 조각을 못 먹게 했을 텐데. 하나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서, 그런 걸 눈치챌 수 없는 괴물이었다.
그렇게 작은 언덕을 만들어 도닥이는데.
“…!”
“당장, 찾……!!!”
“폐하께서!!!”
갑자기 소란이 일었다. 이곳과는 거리가 있는 곳이지만, 청각에 예민한 모스는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저 너머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엄청난 인원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갑자기 왜? 모스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문득 자신의 모습이 굉장히 튄다는 것을 깨닫고 도로 바짝 몸을 웅크렸다.
“……아.”
어쩌지. 그러고 보니, 벌거벗은 채로 이불 하나만 둘러싸고 여기까지 왔다. 이대로 조용히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싫어할 텐데.’
모스는 울상을 지었다. 루인은 모스가 나가는 것을 유독 경계했다. 저번만 해도 그렇다. 문으로 나갔다고, 해가 들어올 수 있도록 커튼을 걷어 모스가 못 움직이게 만들지 않았는가.
‘어떡하지.’
빨리 돌아가는 게 좋을 거 같다고, 본능이 경고했다. 하나 저 멀리서 느껴지는 인간의 수가 보통 많은 것이 아니었다. 이토록 많은 이들의 존재감을 느껴 본 적이 없는 모스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 자리에 다시 팍 주저앉은 채 머리를 감쌌다.
“어, 어떡하면…….”
인간들을 원래 이렇게 무서워하진 않았는데, 그날, 인간들의 검이 제 목을 깊게 찌른 이후로는 많은 인간들의 인기척이 느껴지면 이토록 두려움이 일었다.
모스는 머리를 붙들고 몸을 웅크린 채, 바들바들 떨었다. 그때, 그런 모스의 시선에 뜬금없이 꽃이 보였다. 그 꽃잎의 색깔은 예뻤다. 하지만 단순 그 이유로 시선이 간 것은 아니었다.
“……아?”
유독 희어 눈에 파묻히면 제대로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꽃이 옹기종기 피어 있었다. 모스는 저 꽃을 알았다. 아니, 잊을 수 없었다. 저 꽃들은 이 추운 날씨에도 유일하게 꽃잎을 틔워 내는 것이자.
-꽃을 좋아하나?
이전에 숲에서 루인이 제게 주었던 것이었으니. 모스는 순간 상황도 잊고, 이전 추억에 매몰되어 멍하니 그 꽃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한 송이를 꺾어 손에 쥐었다.
탁, 타닥, 탁…….
그때 소리가 났다. 바닥을 밟는 소리.
하나 모스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지금 근처에 있는 이는 한 명인 거 같아도, 그 너머에는 여전히 많은 수의 인간들이 있는 게 느껴졌던 것이다.
무섭다. 그는 서둘러 몸을 웅크리고 고개를 들지 않고 있는데.
“…….”
돌연 모든 것이 사라진 듯한 엄청난 정적이 일었다. 소름 끼칠 정도의 고요함에, 머리를 감싼 채 바들바들 떨던 모스는 저도 모르게 눈을 떴다. 그리고 가장 처음 보인 것은 희고 곧은 커다란 맨발이 방금 전 모스가 보던 꽃을 사정없이 짓밟고 있는 모습이었다.
“하.”
꽃을 짓밟은 이는 루인이었다.
루인이 왜 여기에 있는지 놀란 모스가 뭐라 말을 하려고 했으나, 그럴 틈도 없었다.
“네가 미쳤지.”
“아악!!”
루인이 모스의 머리칼을 낚아채 들어 올린 것이다. 머리카락을 쥔 채 억지로 들어 올리니, 모스는 바들거리며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고 그 탓에 몸을 감싼 이불이 주르륵 바닥으로 떨어졌다.
“감히.”
하나 몸의 고통은 루인과 눈이 마주친 순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모스는 얼어붙었다. 그의 이런 표정은 처음 보았다. 표정 자체는 시리도록 차가운데, 눈은 용암처럼 들끓고 있었다. 당장 제 앞에 있는 이를 죽여 버려 잘게 잘게 찢어 버릴 것처럼, 아주 성난 눈.
“감히.”
“아!”
짝, 한 손으로 모스의 머리채를 들어 올린 루인이 모스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물론 그 후려침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감히, 내게.”
“아, 아!”
“감히 나를.”
“아파, 아…….”
“감히, 감히….”
짝짝, 짝, 짝, 짝. 말을 내뱉을 때마다 루인은 모스의 뺨을 미친 듯이 때렸다.
어찌나 세게 후려치는지 골이 울릴 정도라, 모스는 나중에 비명도 못 질렀다. 모스는 그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에게 한참을 뺨을 맞다가, 이어 질질 끌려가기 시작했다.
“아으, 자, 잠시-.”
아무리 잘 닦아 놓은 길이라도, 비단길은 아니었다. 이불이 벗겨져 벌거벗은 몸은 바닥에 쉴 새 없이 쓸렸다. 맨살이 얼어붙은 바닥에 쓸리는 감각이란 정말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아파, 흐윽, 아파! 아파!!!”
모스가 비명을 질렀지만, 루인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팠다. 너무 아팠다.
“제바, 알, 제발, 제발.”
모스는 빌었다. 살려 달라고 빌었다. 제발 놔 달라고, 걸어가게 해 달라고 빌었다. 하나 루인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모스의 머리채를 꽉 쥔 채 앞으로 걸어 나갈 뿐이었다.
“무엇을 그리 보지?”
“아파, 아파!!!”
“눈깔아.”
“예, 예!!!”
“흐으, 으으으.”
가는 길에 다른 인간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모스는 그들을 의식할 겨를도 없었다. 너무 아팠다. 흐느끼는 것만이 모스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어 두 사람은 둘이 지내던 궁의 입구로 들어왔다. 거기서부터 루인은 모스를 일으켜 세운 뒤, 목덜미를 붙들고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기 시작했다.
“빠, 빨라, 제발, 제…… 아윽, 윽.”
어찌나 걸음이 빠른지, 모스는 끌려가는 내내 엎어지고, 무릎을 계속해서 계단 턱에 박았다.
천천히 가 달라고 모스가 애원했지만, 여전히 루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모스의 목덜미를 붙든 손에 힘을 더 주었고, 모스는 그 수많은 계단을 기듯이 지나 간신히 방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악!”
들어가자마자 루인은 모스를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엎어진 모스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머리를 붙들어 올려 저와 눈을 마주치게 했다.
“감히 도망을 쳐?”
모스는 눈을 크게 떴다.
우뚝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루인의 모습은 성하지 않았다. 그의 이런… 흐트러진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루인의 얼굴은 온통 땀범벅에, 손은 피범벅이었다. 옷은 또 어떻고. 늘 잘 정돈된 차림새였던 평소와 달리 잔뜩 흐트러져 있었으며, 발은 맨발이었다.
또 방 안은 엉망이라는 단어 하나로 말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들이 함께 쓰던 침상과 협탁은 무너져 내려 있었고, 유리로 된 것은 죄다 깨져 바닥에 조각조각 흩어져 있었으며, 피 냄새가 진동했다.
“대답해.”
“아!”
하나 그런 것들에 눈을 더는 빼앗길 수 없었다. 마치 짐승이 으르렁거리듯 루인이 모스의 머리를 뒤로 팍 세게 꺾으며 말한 것이다. 살벌한 루인의 기세에 모스가 바들바들 떨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나, 나는… 그, 그저… 새가…… 주, 죽어서, 무, 무, 묻어 주, 려고.”
“새?”
“으, 응. 새가, 주, 죽어서, 얼면, 흐, 흙이 되지 못, 해서, 그래서 내, 내가, 새를…….”
그렇게 한참을 더듬거리며 말을 잇던 모스는 무언가 떠오른 듯 급히 손을 내밀었다.
“그, 그리고 이, 이것 봐.”
모스가 손을 펼쳤다. 그곳에는 모스가 아까 전에 따온 흰 꽃 한 송이가 찌그러진 채 들려 있었다.
하나 막상 펼쳤을 때, 손바닥 안에 있는 꽃은 오는 길이 상당히 험악했던 탓일까, 엉망 그 자체였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꽃을 보고 모스는 숨을 들이켰다.
자신이 원한 건 이런 찌그러진 꽃이 아닌데, 한데 동시에 그 생각도 들었다.
-꽃을 좋아하나?
당시 남자가 내민 꽃잎들과 꽃들은 전부 생기로웠다. 이리 찌그러지지 않고, 갓 따 온 것처럼. 얼마나 조심해서 그 꽃들을 따 온 걸까. 문득 과거가 떠올라 모스는 울컥해 말을 바로 잇지 못했지만, 이내 더듬더듬 말했다.
“꼬, 꽃이야. 네가…… 내, 내게 줬던 꽃.”
말을 내뱉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어 모스는 제 머리를 꽉 쥔 힘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모스의 머리채를 붙들고 있던 루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 손을 풀고, 제 이마를 덮는 머리를 뒤로 넘겼다. 그리고 한동안 말없이 찌그러진 꽃을 응시했다.
꽃을 보는 루인의 얼굴에는 표정이랄 게 없었지만, 루인이 평소와는 뭔가가 다르다는 것을 모스는 눈치챘다.
침묵은 길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침묵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모스의 눈에는 옅은 기대가 서리기 시작했다.
‘설마 꽃을 기억한 건가?’
혹 알아본 건가 싶어서.
이 꽃은 그가 손수 꺾어 제게 준 것이지 않은가. 그러니 기억을 잃었더라도 이 꽃을 본 지금, 뭔가가 떠올랐을 수도 있다. 그러기에 모스의 눈에 서서히 기대가 서리기 시작했는데.
“……하.”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스는 제가 괜한 기대를 했음을 깨달았다.
“하, 하하. 하하하하!!”
돌연 루인이 정말 미친 듯이, 실성한 이처럼 웃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광인처럼 보이는 그 웃음에 모스가 넋 놓고 멍하니 그를 보던 그때.
그가 돌연 웃음을 뚝 멈추더니 입을 열었다.
“또 그 새끼인가?”
“아… 악!!”
순식간이어서 피할 틈도 없었다.
모스의 오른손을 루인이 그대로 짓밟았다. 그의 커다랗고 뼈대가 굵은 발에 작은 손은 꽃잎과 함께 사정없이 짓이겨졌다.
“아, 파. 아파! 아파!!”
손가락 마디가 죄다 분질러지는 거 같다. 상상을 초월한 고통에 입을 채 다물지도 못하고 비명만 나와 타액이 줄줄 흘렀고, 전신은 바닥을 기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루인의 발은 멈추지 않았다.
“또 그 기억 속에서, 또 그 새끼를 생각한 것도 모자라.”
“아파, 흐으윽…… 아파-.”
“짐에게 이딴 걸 가져와?”
잔뜩 분노한 그의 눈은 어딘가 미쳐 있었다. 그런 그의 발아래에서 손가락이 죄다 끊어지는 것처럼 엄청나게 아팠지만, 모스는 손가락보다도 마음이 더 아팠다. 틈 사이로 삐져나온 흰 꽃은 이제 더는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고작 잡풀 따위를?”
그가 뭉개는 건 단순히 꽃이 아니었다. 꽃잎이 찌그러지고,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이 바닥에 짓이겨지는 모습은 마치 둘 사이에 있던 추억 같았다.
그는 숲에서 나누었던 둘만의 작은 추억도 뭉개고 있었다. 그게 너무 아파 모스는 더는 비명도 못 지르고 꺽꺽거리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꽃잎이 찢어지고, 색이 변하고, 꽃잎이라 부를 수 없게 변하는 걸 막고 싶었다. 모스는 다른 손을 움직여 더듬더듬 엉망진창으로 변한 꽃잎을 쥐려고 했으나, 이미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리고 새를 묻어 주러 갔다고? 네가 본 새도 저렇게 생긴 새였나?”
그때, 창가에 앉은 새를 손가락으로 가리킨 루인이 실성한 듯 웃으며 말했다.
‘어느 틈에…?’
루인의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린 모스는 그새 창가 위에 내려앉은 새를 보고 얼어붙었다. 그리고 이어 새가 창가 위에 아주 조금 남은, 쿠키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려는 것을 깨닫고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 순간.
“지금 또.”
머리 위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모스에게 경고라도 하듯 내리꽂혔다. 그리고, 이를 부숴 먹을 듯 아드득 깨무는 소리가 나더니 그의 몸이 움직였다.
당연히 자신을 때릴 줄 알았던 모스는 움찔하며 눈을 꾹 감았지만, 더 이상의 폭력은 없었다. 뒤늦게 눈을 떴지만 이미 모스의 앞에 루인은 없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루인은 어느새 창가에 있었다.
“……어?”
그리고, 순식간이었다.
눈이 제대로 인식하기 전에 귓가에 콰직 소리가 먼저 났다. 이어 모든 순간이 모스에게 느릿하게 보였다. 루인의 새하얗고 곧은 손가락 사이로 새하얀 날개가 비죽 튀어나오고 핏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현실감이 떨어졌다.
괴물은 꿈이라는 걸 꾸지 않지만, 지금 보이는 풍경이 마치 거짓처럼 여겨져서 모스는 이게 혹시 괴물의 꿈이라 이토록 잔인한 것인지 순간 착각을 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어 눈앞에 보이는 모습에 이게 꿈이 아님을 직감했다.
루인이 손을 펼치자, 피로 절여진 하얀 몸이 창 너머로 툭 떨어진 것이다.
방금까지만 해도 새하얗게 부풀어 있던 생명 가득한 몸뚱이가 오그라들어 붉게 물들어 있었고, 그 새가 허공을 가르고 창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은 아주 느릿하게 모스의 눈에 잔상을 새겼다.
진득한 피의 냄새가 났다. 모스는 비명이 나올 것만 같아, 입을 벌리고 숨을 들이켜려고 했으나, 그가 빨아들이게 된 건 타인의 숨결이었다.
“하읍…….”
모스에게 다가온 루인이 새의 피로 축축하게 젖은 손을 움직여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입을 맞추었다.
모스는 질척하게 얽히는 혀를 밀어 내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머리칼을 붙드는 손길이 억세 절로 비명이 나왔다. 결국 그는 눈물이 고인 채로 남자를 받아 내야 했다.
진득한 피 냄새, 얽히는 입술과 혀.
그리고 바짝 붙은 눈앞의 남자의 금안, 금안…….
“시선 피하지 말라고 했지.”
……태양.
모스는 그와 눈을 마주한 찰나의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아름다운 금안 속에 담긴 제 모습이 너무나도 선명했다. 박제라도 된 양 굳은 채로 그 눈을 보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는데, 돌연 루인의 눈이 접혔다.
가장 먼저 길고 촘촘하게 늘어진 속눈썹이 아스라이 내려앉았다. 그러자 금색 속눈썹 사이로 태양이 노을을 만드는 듯, 금안이 언덕에 걸려 조각나는 것처럼 휘었다.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고, 또 아름다웠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모스는 제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전부터 그는 루인이 웃으면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기에, 이번에도 그런 줄 알았지만.
“……아.”
지금은 아니었다. 다른 의미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모스는 그가 아름다워서 굳은 게 아닌, 그의 손이 방금 전 죽은 새의 피로 범벅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얼어붙은 것이다.
쿵쿵쿵, 쿵쿵. 심장이 미친 듯이 빨리 뛰었다. 설렘과는 거리가 멀었다.
도저히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빨리 뛰는 심장에 모스가 숨을 제대로 못 쉬고 있다가 뒤늦게 몰아쉬는데.
“…어…?”
숨을 들이켜자 일순 눈앞이 일렁였다.
이런 적이 있었나.
모스는 여태 죽지 않는 괴물의 몸으로 살아가면서 심한 어지러움을 느낀 적이 거의 전무했던지라, 당황스러워할 뿐 그 어떠한 대처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비틀거리며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한 그의 몸이 당장 바닥으로 고꾸라질 듯 앞으로 푹 수그러졌다.
이대로라면 바닥에 제 얼굴이 처박힐 것이다. 곧 다가올 고통을 대비하고 모스가 눈을 꾹 감은 그때.
“너.”
모스는 고꾸라지지 않았다.
넘어지는 모스를 본 루인이 순간 눈을 크게 뜨더니, 손을 뻗어 비틀거리는 모스의 양팔을 꽉 붙들어 지탱했기 때문이다.
모스를 붙든 루인이 뭐라 모스에게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모스는 루인이 하는 말, 표정이 하나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그저 그의 시선 끝에는 여전히 새의 피로 젖은 루인의 손이 제 팔에 닿는 모습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코끝이 비렸다.
죽음의 냄새. 방금까지 살아 있던 것의 냄새.
방금까지 살아 있던 새가 얼마나 생기가 가득한 몸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리듯, 비리고 진한 피의 향이 모스의 코를 찔렀다.
그 죽음의 향은 방금 모스가 본 모습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고, 그를 순식간에 현실로 내쳤다.
잔혹한 이다. 시리도록 잔혹해, 모스는 제 마음이 얼어붙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리 잔혹한 이에게 감정이 남아 있을 리는 없다. 설령, 기억을 찾더라도.
“아…, 아.”
이 자의 심장은 이미 얼어붙은 지 오래이니.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저 헐떡이는 숨만이 입 밖으로 나올 뿐이었다. 언제 저 아름다운 금안에 홀렸냐는 듯 창백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며 바닥을 보던 모스가 돌연 손을 쭉 뻗어 바투 붙었던 루인의 몸을 세게 밀었다.
탁, 그는 루인의 품 안에서 벗어났다.
휘청이는 몸으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모스는 생각했다.
햇빛을 선망했다.
가장 두려워하지만 가장 닿고 싶은 그 존재를 담은 듯 빛나는 아름다운 루인의 눈을, 모스는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나 그 눈을 제대로 바라볼 자신이 없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지금, 그 눈이 여전히 네게 아름답게 보이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모스는 답할 자신이 없었다.
‘왜 죽였어? 죽일 필요는 없었잖아.’
어차피 저 흰 새는 다른 새들과 달리 유독 수명이 짧은 종이었다. 길게 살아 봤자 오 년. 그 새를 굳이 저렇게 터트려 죽일 이유가 있을까.
압력을 이기지 못해 터진 눈, 비틀어진 부리, 피로 젖어 오그라든 날개를 떠올린 모스가 창백한 얼굴로 도리질하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으…….”
모스는 제 팔만을 보면서 뒷걸음질을 치고, 또 쳤다. 그리고 이내 제 팔뚝에 지문처럼 남은 핏물을 벅벅 문질렀다.
피가 번진다.
뜨거운 피부에 맞닿아 눌어붙은 피의 향이 유독 예민한 모스의 코끝으로 빨려들어 갔다.
비리다. 산 것의 냄새.
산 것이었던 새의 냄새. 터져서, 남자의 손안에서 찌그러져서 죽은 새.
“우욱, 욱.”
핏물에 절어 죽은 하얀 새의 모습이 떠오르자 역해서 구역질이 절로 나왔다. 미친 듯이 팔을 문질러 닦던 모스가 헛구역질을 반복하다 문득 피에 절은 새의 모습에서 검에 찔려 죽었던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죽은 새와 자신이 다른 점이 뭐지?
모스는 새와 달리 죽지 않는 불사의 몸이었고, 남자를 사랑했다. 그러기에 자신에게 잔혹하게 굴어도 그의 곁에 남아 있고자 했다.
처음 접하게 된 온기에 파묻히기 위해서라면 그의 기억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그 무슨 고된 일도 감내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제 신경을 조금이라도 거스르면 자신과 연관 없는 생물이라도 단숨에 터트려 죽이는 저 인간을, 루인을, 자신은 사랑하고 있는 게 맞는가?
‘사랑해. 나는 사랑하는 게 맞아. 남자는 숲에서 내가 처음으로 만난 인간이잖아. 남자는 내가 사랑하던 사람이야, 내가 사랑하던…….’
그렇다면 남자는, 루인이, 맞는가?
모스는 머리를 붙잡았다. 저 질문에 차마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전에는 저 질문에 그래도 답을 할 수 있었던 거 같은데, 이상했다.
남자가 루인이고 루인이 남자니, 언젠가는 남자로 돌아올 것이라고 그리 굳건히 믿었던 때가 있었던 게 마치 너무나도 먼 과거처럼 느껴질 정도로, 지금은 아무런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지금 당장은 이전부터 서서히 어긋나던 것들이 온전히 어긋나 더는 되돌릴 수 없다는 생각만이 머리를 지배했다.
‘되돌릴 수 없다’, 모스는 저도 모르게 문을 바라보았다.
뒤죽박죽 뒤엉킨 머릿속의 생각과 일렁이는 감정, 그 어느 하나도 정리가 된 것은 없었고, 지금 하고자 하는 행위 또한 명확한 목적을 갖고 있는 게 아니었지만, 당장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본능이 속삭였다.
도망치라며, 본능이 속삭였고.
모스는 뛰었다.
제 발로 나갈 일이 없다고 여겼던 문으로 모스가 달렸다. 밖에 몇 명이 있든, 해가 언제 뜰 것이든 그런 계산 하나 없이 당장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문에 닿기 위해 손을 쭈욱 뻗었다.
쭉 뻗은 손끝에 문고리가 잡혔다.
아 닿았다, 라고 생각한 순간.
“컥…….”
손이 문고리에서 미끄러져 허공을 허무하게 갈랐다.
눈앞이 핑 돌았다. 순간 앞이 새까맣게 점멸했고, 이어서 올라오는 것은 두개골이 갈라진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의 둔통이었다.
풀썩, 순식간에 모스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이마부터 떨어진 몸, 달려오던 몸의 반동을 이기지 못해 이마가 그대로 바닥에 주욱 찢기듯 미끄러졌다.
그러나 이마의 고통을 제대로 느낄 새도 없이 몸은 뒤집혔고, 그 위에 올라탄 이는 사정없이 모스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입을 제대로 벌릴 수도 없었다.
주먹으로 얼굴을 사정없이 내리찍는 이의 악력이 너무나도 강했던 탓은 둘째 치고, 피부를 찌르는 살기는 당장이라도 숨통을 끊어 놓을 것처럼 날카로웠다.
찢어진 이마, 뭉개진 얼굴, 터진 입술, 꺾인 코뼈 아래로 줄줄 흐르는 피, 퉁퉁 부어 제대로 뜨지 못하는 눈.
피가 이렇게 많이 흐를 수 있는 걸까. 모스는 너무 아프고 피로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혼몽한 가운데 몸을 최대한 웅크리려고 했으나,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결국 얼굴에 사정없이 꽂히는 고통에 결국 눈 뜬 채 기절을 한 듯, 모스의 눈이 새하얗게 뒤집혔다.
만약 모스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지금이 딱 죽기 직전이었을 것이다. 죽음의 입구에 팔을 걸친 그때야 루인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었다.
“…….”
그의 주먹에서는 피가 뚝뚝 흘렀다. 방금 맨손으로 사람 하나를 죽일 기세로 달려들던 이가 맞는지, 루인은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얼마나 억세게 주먹을 내리꽂았는지 손등의 살이 벗겨져 피범벅이었다. 때리면서 뺨으로 피가 튄 듯, 얼굴에는 핏자국이 선명해 가뜩이나 흉흉한 얼굴을 더 소름 끼치게 만들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루인은 지나칠 정도로 모스에게 몰입했다. 그가 눈을 뜨는 그 순간을 보겠다는 듯, 기절한 모스의 얼굴을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코, 콜록, 콜록.”
잠시 후, 기절한 듯 정신을 잃었던 모스의 뒤집혔던 눈동자가 돌아옴과 동시에 모스는 미친 듯이 기침을 했다.
기침을 하자, 얻어맞은 곳들의 고통이 단번에 훅 밀려들어 왔다. 고통에 제대로 소리도 못 내고, 컥컥거리며 기침하던 모스가 간신히 숨을 내뱉어 짧은 침묵을 메꾸었다.
“하아, 하아…….”
피부 거죽이 뼈에 촘촘하게 들러붙는다. 틀림없이 회복될 때의 느낌이었다.
피로 범벅이 된 모스는 한참이나 기침을 쏟아 낸 뒤에야 제 위에 올라탄 루인을 마주 볼 수 있었다.
“아…….”
아직 회복이 덜 된 것인지 흐릿하다. 모스의 시야에는 루인이 둘로 보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초점이 맞춰졌다. 그리고 마주하게 된 모습은 괴물이나 다름없었다.
말아 쥔 그의 손등에는 그의 피인지, 모스의 피인지 모를 것이 덕지덕지 들러붙어 있었는데, 유독 상처가 심한 것을 보아하니, 그가 분에 못 이겨 바닥에 주먹을 몇 번 내리꽂은 것 같았다.
또 눈은 어찌나 흉흉한지, 시선으로 사람을 죽인다면, 그게 만약 가능하다면, 모스는 지금 이 자리에서 갈기갈기 찢어져서 죽었을 것 같았다.
그때 루인의 시선이 똑바로 모스에게 향했다.
눈과 눈이 마주친 순간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루인이 무서운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늘 무서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급이 달랐다.
‘괴물.’
딱딱딱, 모스는 차디찬 호수 한 가운데에 빠진 것처럼 떨림에 이가 서로 맞부딪혔다.
공포 어린 눈으로 루인을 바라보는 모스의 얼굴은 전쟁터에서 죽음을 목전에 앞둔 포로의 표정과 다를 바가 없었다.
“짐을…….”
그 얼굴을 보던 루인이 순식간에 표정을 확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고개를 바짝 숙여, 모스의 목을 붙들고 짓씹듯 으르렁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짐을 그딴 눈으로 보지 마.”
하지만 이미 공포에 질린 모스에게 루인의 말이 들릴 리가 만무했다.
“으, 으으.”
어떻게든 뒤로 물러나고 싶다는 듯 그의 발이 쉴 새 없이 바닥을 굴렀으나, 그의 몸을 짓누른 루인 때문에 요지부동이었다.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다. 점점 공포에 잠식되다 못해 이성마저 잃으려는 모스의 얼굴, 그 얼굴을 보며 표정을 더더욱 일그러트리던 루인은 결국 평온을 잃고 악을 쓰듯 말했다.
“그딴 눈으로 보지 말라고!”
그가 모스의 머리를 부여잡고 소리 질렀지만 모스는 경련을 일으킬 뿐 공포를 지워 내지 못했다.
“아, 어으, 아.”
단어조차 제대로 말하지 못하며 어물거리는 모스를 보고 루인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똑바로 봐.”
그리고 힘없이 누워 아무것도 못 하는 모스의 멱살을 잡아 제 얼굴로 바짝 당기며 발악하듯 말했다.
“똑바로 봐!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말고……!”
모스의 공포는 눈을 마주치면 칠수록 점점 더 심각해졌다. 루인도 모스의 공포가 느껴졌다.
단순한 공포가 아닌, 눈 뜬 채로 정신을 순간순간 잃을 정도로 모스는 루인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데, 지금은 무용지물이었다.
창밖이 아직도 새까만 밤하늘인 것에 루인이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터진 입술의 상처를 이로 잘근잘근 씹으니 피가 터져 나왔지만 루인은 이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그저 자리에서 제대로 일어나 모스의 머리채를 질질 끌고 가기 시작할 뿐이었다.
질질, 질질…. 공포에 질린 이의 반항이란 없는 수준이나 다름없었다.
쥐고 있는 머리카락 너머로 사시나무처럼 발발 떨리는 몸이 느껴졌지만, 루인은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까만 어둠으로 물든 창가로 모스를 질질 끌고 가는데…….
“……도.”
그때, 개처럼 질질 끌려가던 모스가.
“도, 돌…….”
입을 열었다.
자세히 듣지 않으면 제대로 들리지도 않을 소리건만, 루인은 용케 그 소리를 듣고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
걸음을 멈추자 방금 그가 들은 게 거짓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조용해졌다.
모스가 언제 말했냐는 듯, 방 안에는 모스의 흐느끼는 것처럼 느껴지는 공포 어린 숨소리와 분을 못 이겨 거칠어진 루인의 숨소리만이 얽히던 가운데.
“…나.”
드디어, 모스가 말을 했다.
적막을 가르고 이어지는 말은 지나칠 정도로.
“…숲, 으로 돌아가면…… 아, 안 돼?”
크게 들렸다.
굳어 있던 루인이 느릿하게 고개를 틀어 엉망인 모스의 얼굴을 보았다.
“…나는 여기 있으, 면 아, 안 되는 괴물이니까. 너는 내가 귀, 귀찮고 거, 거슬려서 날 미워하고 나, 나는 천것이니까…….”
모스의 얼굴은.
“그, 그러니까 나 숲, 으로 돌려, 보, 보내 주면… 안 돼?”
억지로 웃고 있었다.
모스는 형편없는 몰골이었다.
퉁퉁 부어서 차마 빈말로라도 웃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눈은 형편없이 구겨져 있었고, 얻어맞아 피범벅이 된 입술은 웃는 모양을 하고는 있으나 미소라기보다는 흉측했고 기괴했다.
모스도 스스로의 모습이 얼마나 엉망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모스는 필사적으로 웃으려고 하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민낯을, 제 표정을 드러내면 안 된다고 생각한 듯 이를 악물고 괴이한 미소를 유지하려 하고 있었다.
“……돌아가?”
“…….”
그 웃지도, 울지도 못한, 무슨 표정이랄게 제대로 담겨 있지 않은 기묘한 낯을 가만히 보던 루인은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 들은 이처럼 읊조리듯 되물었다. 물론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돌아간다고?”
두 번째 읊조림에서는 그는 틀림없이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그리 믿어 의심치 않는 얼굴로 모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모스는 루인의 말에 뭐라 말할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입 밖으로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저 사정없이 떨리는 눈으로 루인을 물끄러미, 마치 루인의 얼굴을 하나하나 제 눈에 새기듯 응시했다.
“…….”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대답을 종용하는 듯한 루인의 시선에 느릿하게 모스의 고개가 아래로 가벼이 떨어졌다 올라갔다.
끄덕, 끄덕끄덕, 느릿하지만 분명한 움직임을 짐승의 눈처럼 요요히 빛나던 금안이 어둠 속이라고 못 볼 리는 없었다.
“…그래, 간다고.”
그제야 루인 또한 제가 들은 소리가 헛소리가 아님을 깨달았다.
“숲으로 돌아간다고….”
모스가 돌아간다, 원래 있던 곳, 그 멀고 먼 시골에 박혀 있는 환각초의 숲으로 돌아간다….
루인은 돌아가겠다고 말한 모스의 말을 곱씹듯 계속 읊조리기 시작했다. 읊조리고, 또 읊조릴수록 어둠이 내린 그의 얼굴에 새겨진 표정은 소리 없이 시시각각 변하기 시작했다.
한 번의 중얼거림을 입술에 얹었을 때, 그는 모든 걸 불태울 듯 뜨거운 분노를 얼굴에 발랐다. 두 번 읊조릴 때는 모든 걸 얼려 버릴 듯 지나칠 정도의 서늘함을 담았고, 세 번째에는 아무것도 담지 않았다.
“…….”
고요.
표정이 싹 사라진 그에게서 낮은 중얼거림마저도 멎었다. 중얼거림이 멎자, 소름 끼칠 정도로 밀도가 빽빽한 적막이 기다렸다는 듯 둘 사이에 그득그득 들어찼으나.
“이 아둔한 천것아.”
이는 짧았다.
머리카락을 움켜쥔 손을 들어 올리자, 휘청이며 모스의 몸이 일으켜졌다.
루인은 마치 목을 잘라 내기 전 포로의 얼굴을 코앞에 들이미는 이처럼 우악스럽기 그지없는 손놀림으로 모스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서로의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깝게 마주했다.
바투 붙은 두 몸, 섞이는 시선.
“짐이 언제 강요를 했다고?”
그리고, 비소(誹笑).
“내가 네게 이곳에 오라고 애원을 했나? 발치에 엎드려 빌며 데려가 달라고 애원한 건 너다. 다리를 하나를 내어 주고서라도 오겠다고 한 것도 천것 너였다. 한데, 이제 와서 숲으로 돌아간다고? 다른 이도 아닌… 네가?”
루인은 모스의 머리카락을 쥐어 올렸다. 그 손놀림 속에서 조급함 비슷한 것이 짧게 내비쳤지만 이는 정말 찰나였다. 본인조차 모를 정도로 짧았다.
모스는 루인이 말을 하면 할수록 잘게 떨기 시작하더니, 결국 그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발발 떨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마, 맞아. 내가 서, 선택했어. 그, 그래서.”
모스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렀다. 피로 뒤덮인 얼굴 사이로 투명한 눈물이 피를 씻듯 흘러 바닥에 방울져 떨어졌다.
“미, 미안해. 미안, 해. 미안해. 너, 는 나를 싫어하는데, 나를 짐, 짐처럼 여기는데, 나를 지, 짐승보다 못하게 여기는데. 처, 천것인 내가, 너, 너한테 달라붙어서 미안해, 미안해. 그러니까, 그러니까…….”
모스의 얼굴은 순식간에 빗물을 고스란히 받아 낸 듯 축축하게 젖었다.
눈망울 가득 맺혀 있던 눈물이 빠르게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지자, 여태 눈물로 가려졌던 그의 녹색 눈이 드러났다.
또렷하게 감정을 담아.
“떠, 떠날게.”
후회.
후회를 담아서, 너무나도 명백해서 도무지 부정하려야 할 수 없는 선연한 후회라는 감정 위로 루인이 비쳤다.
모스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감정을 꼽으라면 후회였다.
모스는 여태 지나칠 정도로 루인에게 맹목적인 괴물이었다. 목을 내어 주고, 배를 내어 줬으며 이곳에 오기 위해 다리까지 내어 줬을 때, 모스는 공포 어린 얼굴을 했지만 후회라는 감정을 제 얼굴에 싣지 않았다.
이곳에 와서도 마찬가지이다. 가끔 지나칠 정도로 그를 몰아붙이는 루인 앞에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할 법도 한데도, 모스는 맹목적이었다. 심지어 기억을 찾기 위해서 자신을 죽여도 된다고 말했을 때까지도 그의 얼굴에서 후회라는 감정은 눈 씻고 찾으려야 찾을 수 없었으나.
“…후회해?”
지금은 아니었다.
루인이 모스의 어깨를 틀어쥐었다.
“후회를 하냐고.”
모스는 답이 없었다.
대신 후회를 한다는, 지독할 정도로 짙은 후회의 색을 담은 눈으로 낙인찍듯 루인을 쳐다보았다.
“웃어.”
후회한다는 모스의 얼굴을 보자, 루인은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병신 같은 웃음이라도 지어.”
그는 모스의 입꼬리를 우악스레 잡아당겼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입꼬리가 움직여 기이한 미소가 만들어졌지만, 넘실거리는 후회를 숨길 수는 없었다.
마치 형체가 있는 듯 또렷이 잡히는 모스의 후회에 루인은 잠시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이젠 웃는 것도 못 해? 웃어. 웃으라고.”
두 사람이 바닥으로 엎어졌다.
등이 아픈 듯 움칠거리는 모스의 위에 올라탄 루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딘가 정신이 나간 것만 같은 얼굴로 그는 제 손을 모스의 눈가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고는 짙은 후회의 색을 담아 저를 보는 모스의 시선을 견딜 수 없다는 듯 눈을 웃음 짓듯 옆으로 찢었다.
“하, 하…!”
하지만 눈을 찢어 눈동자를 숨겨도 소용없었다. 방금 전까지 그를 보던 모스의 짙은 후회 어린 시선이 망막에 맺힌 양 지워지지 않았다.
“감히 짐의 앞에서 후회를 해? 네가 감히?”
루인은 기가 찼다. 너무 기가 차고 화가 몰려와 손이 발발 떨렸다.
차라리 아무것도 보지 않으면 이 뒤집히는 속이 가라앉을까. 루인은 모스의 얼굴을 우악스레 잡아 표정을 만들던 손을 거두곤 제 눈두덩이를 꾹 눌렀다.
하나 속에서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의 요동은 쉽사리 정리되지 않았다.
본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넘실거리는 분노에 루인이 자신의 눈을 뽑아낼 듯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고 있던 그때, 모스가 말문을 열었다.
“보…고…….”
까맣게 암전된 시야, 루인은 모스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소리는 선명해지고, 더 선명해져서.
“싶……어. 보고…… 싶어.”
이윽고 온전한 말이 되어, 닿았다.
“보고 싶어.”
보고 싶다는, 형체 없을, 아니 어쩌면 형체는 있지만 허상일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그 목소리.
애써 조금 가라앉혔던 감정은 언제 가라앉았냐는 듯 빠르게 흙탕물로 변해 버렸다. 루인은 제 눈을 가리던 손을 내리고 몸을 다시 반쯤 일으켰다.
“무엇이 그리 보고 싶은데? 무엇이 그리 그리워서 그딴 말을 해?”
답은 알았다.
“응? 왜 대답을 안 하는 거지? 대답해. 무엇이 그리 보고 싶냐고.”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답을 알고 묻는 질문, 어쩌면 대답이 돌아오지 않길 바라는 질문.
하지만 괴물은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순수하고, 지나칠 정도로 잔혹해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도, 그저 물끄러미 루인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 제 답을 쉬이 담아내 드러내곤 했다.
루인을 바라보나, 루인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 눈.
루인을 시선으로 덧그리나, 다른 이를 그 위로 덧그리는 눈.
“빌어먹을!”
루인이 아닌 남자를 찾는 모스.
루인이 욕을 짓씹으며 소리 질렀다.
“감히 내 앞에서 누굴 찾는 거지? 네가 찾는 인간은 나다. 네가 그리 찾아 헤매는 이가, 네가 보고 싶다고 말하는 인간이 짐이건만 대체 왜……!”
“아니야!!”
그때 유리를 깨뜨릴 것처럼 사납고도 날카로운 음성이 둘 사이를 갈랐다.
“네가 아니야!!”
모스였다.
모스가 원망스러운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이를 악물고 루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아니라고?”
루인은 기가 막힌다는 듯 모스를 보다 몸을 깊게 숙여 당장 입술이 맞닿을 거리에서 피를 쏟아 내듯 한 글자씩 짓씹어 말했다.
“우습군. 네 앞에 있는 내가 네가 찾는 이다. 네가 그리 찾아 헤매고, 기다리고 보고 싶어 하던 존재는 나다!”
“아니야!!”
루인이 말했지만 모스는 듣지 않았다.
그는 한동안 악을 쓰고 소리를 지르더니, 이윽고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흐, 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며, 그래서는 안 된다며. 모든 걸 부정하는 듯 모스가 비명을 지르며 루인을 밀어 냈다.
루인은 순간 넋이 나간 듯 발버둥을 치며 고개를 미친 듯이 젓는 모스를 보았다. 그는 “아니야.”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또는 이를 부정해야 살 수 있는 이처럼 발악하고 있었다.
미친 듯이 아니라는 말을 반복하며 모스는 루인을 밀어 냈다. 태산처럼 거대한 저 몸이 쉬이 밀려날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기를 쓰고 밀어 내고, 또 밀어 냈다.
제 앞에 있는 이를, 죽어서라도 원하지 않는다는 듯이. 죽을힘을 다해서 밀어 내는 모스를 루인은 한동안 말을 잃고 바라보았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흐으, 으으, 아니야, 아니야…….”
비명은 울음이 되고, 울음은 애원이 되었다.
절대 너는 아니라며 기어코 울음을 터트리는 괴물의 낯은 여전히 피범벅이었지만, 그는 발버둥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나를!”
그때 루인이 움직였다.
그가 반쯤 상체를 일으킨 모스를 순식간에 팍 바닥으로 밀쳤다. 발버둥 치는 몸을 다리 사이에 제대로 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고함을 치듯 말했다.
“나를, 숲에서 제대로 나가지 못하게 할 때는 언제고, 이딴 얼굴로 나를 보는 거지?! 다정하게 해 달라고 하고, 버리지 말아 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돌아가겠다고? 아니? 너는 가지 못한다. 나는 네 애원을 잊지 않았고, 네 부탁을 잊지 않았기에 너는 돌아갈 수 없어. 다시는 내 앞에서 돌아가겠다는 말을 꺼내지 마. 죽여 버릴 거다!”
감히 돌아가겠다고 해?
분노에 머릿속이 새까맣게 태워진 루인이 모스를 향해 쉬지 않고 소리를 지르며 이성을 잃고 말을 쏟아 냈다. 그가 말을 끝낸 다음에는 시리도록 차가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한데, 뭔가가 이상했다.
“…….”
방금 전까지 아니라고 발버둥 치던 모스의 모습이 이상했다. 이상하다 못해 그는 어딘가 넋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언제 루인을 향해 아니라고 소리 지르며 악을 질렀냐는 듯, 귀신에 홀린 이처럼 멍하니 루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들은 듯.
그 얼굴은 너무 이상했다. 여태 본 적이 없는 얼굴이라고 해야 할까.
당장이라도 혼절할 것만 같은 얼굴은 벼랑 끝에 서 있는 이 같기도 했으며, 아니면 이미 벼랑에서 떨어지고 있는 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괴이한 낯짝에 루인은 뭐라 말할 듯 입을 벌렸지만, 이윽고 모스의 뺨에 흐르는 것을 보고 더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주륵, 모스의 눈에서 무언가가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모스의 눈가는 이곳에 와서 메마른 적이 없었다. 그의 눈가는 늘 눈물로 축축했으나 지금은 순간 루인마저도 말문을 막히게 만드는 것이, 그의 눈에서 넘쳐흘렀다. 그것은…….
뚝…….
피눈물이었다.
새빨간 눈물이 눈의 새하얀 부분을 물들였다. 온통 붉어진 눈으로 뚝뚝 피눈물을 흘렸다.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모스의 얼굴. 허공을 가르는 새빨간 눈물은 소름 끼칠 정도로 아름다웠고, 지나치게 괴이하고 소름이 끼쳐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히게 하는 모습이었다.
눈물이라는 껍데기가 슬픔을 휘감고 무언가를 꼭 움켜쥔 채 낙하했다.
바닥으로 낙하해서, 계속 가라앉고 또 가라앉으며…….
“기억을….”
심연 속에 지금 가라앉고 있는 게 무엇인지 물었다.
희망인지, 태양인지.
“이미 다… 찾았구나?”
둘 다일지.
처음에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다.
모스는 그저 제가 못 배운 괴물이라, 무언가 잘못 들은 게 틀림없다고. 제가 해석을 잘못했다고 생각을 할 뿐, 남자가 기억을 찾은 거라고는 감히 상상치도 못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모스의 기억 속 남자는 그리 다정하지는 않았더라도, 방금 제 얼굴을 미친 듯이 후려치던 이처럼 폭력적이지는 않았으니.
그래서 단순히 저 말만을 들었을 때는 의아했던 거 같다.
숲에서 나가지 못하게 한 것, 다정하게 해 달라고 한 것, 버리지 말아 달라고 한 것, 애원한 것, 부탁한 것. 그 모든 것을…….
‘왜 네가 그걸 알고 있어?’
기억을 잃은 루인이 어떻게 알고 있는지 신기할 뿐이었다. 이것들은 전부 숲에서 일어났던 일로, 기억을 잃었다던 네가 알 수가 없는 일일 터인데……?
그걸 루인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그저 의아하고 이해할 수 없고,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말을 쏟아 낸 루인의 얼굴이, 아니, 그의 표정이 지나치게 낯익었다.
그래, 정말 엄청나게 낯이 익고 익어서, 마치 제 눈앞에 루인이.
‘……남자?’
기억을 잃기 전의 그처럼 보였다는 게 문제의 원인이었다.
그러자 기묘한 느낌에 휩싸인 모스는, 이윽고 이제 알았다는 듯이 그간 지나쳤던 루인의 묘한 행동들이 바람에 날려 빠르게 넘어가는 책장들처럼 순식간에 하나하나 떠올랐다.
-시선 피하지 마.
-내 목에 팔을 감아.
-매달려 봐.
-제대로 손에 힘을 줘서 껴안아.
-올라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이유 모를 명령들.
모스는 자신이 루인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을 경우 입게 될 화가 두려워 허둥지둥 그의 말을 따르기 바빴기에, 그 행위에 대해 자세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기에 모스는 갑자기 그때 그 행위들이 왜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것인지 당황스러웠다.
그게 특별한 게 있었나.
곰곰이 생각하던 모스는 제가 명령을 따를 때마다 지나칠 정도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관찰했던 루인을 떠올렸다. 마치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보이던 그의 시선.
그게 무언지 모스로서는 알 수 없었으나 루인이 그것을 찾았을 때는 만족스러워했던 거 같고, 그걸 찾지 못했을 때는 화를 냈던 거 같다.
그럼 그는 제게 무엇을 찾은 걸까. 무엇을…….
-웃어.
무엇을…… 찾으려고.
-병신 같은 웃음이라도 지어.
아.
모스는 웃으라고 저를 미친 듯이 다그치던 루인을 떠올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생각을 멈춘 뒤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간의 명령들, 그것들은 전부.
‘내가 했던 것.’
과거의 자신이 기억을 잃기 전 그와 지내면서 했던 행동들 중 하나였다.
숲에서 있을 적에도 남자는 시선 피하는 걸 유독 싫어해서 모스는 남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었고, 관계를 맺을 때 목에 팔을 감거나 매달리면 남자가 더 자신을 꽉 껴안아 주는 자세를 좋아했었다.
남자가 홀연히 환각초를 넘어 떠나갈 것만 같아서 잠든 남자를 힘껏 껴안은 적이 있었고, 그가 보금자리의 문을 보는 게 싫어 슬쩍 올라타 은근히 시야를 막은 적도 있었으며.
-나는 너를 사랑하는 것 같다.
그가 그리 말했을 때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그만 볼우물이 푹 파일 정도의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기억을….”
모스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가 다정해졌다고 생각했던 그 시간들, 혹 루인이 제게 감정이란 것을 가지게 되었다고 여겼던 그 시간들은 사실.
“이미 다… 찾았구나?”
기억을 다 찾은 그가, 자신의 기억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던 것임을.
입 밖으로 말을 내뱉자마자 전율이라 해야 할지 소름이라 해야 할지,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 온몸을 휩쓸었다.
“…기억을 이, 이미 다… 찾았어.”
모스가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태어난 이후로 이토록 격렬한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있을까.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 기세가 너무 강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 모스는 눈을 홉뜬 채 잘게 신음했다.
“기, 기억을 이미 다, 그래…, 기억은 이미 다 찾았고. 나는 그것도 모르고, 난…… 그저 여기서, 너를 기다리려고….”
투둑, 뺨을 타고 흘러내린 것이 바닥을 적신다.
그것이 무엇인지 볼 새는 없었지만, 그가 바라보는 세상이 일순 붉었다 검어지기를 반복하는 것만은 인지할 수 있었다.
아. 남자가 기억을 찾는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는가.
둘이서 함께 만든 기억을 둘 중 하나가 잊는다는 것은, 마치 상대방이 죽고 홀로 남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홀로 기억하는 과거 속에서 머무르는 것은 미친 듯이 외롭고 슬픈 일이었다.
심지어 외로움은 루인이 자신에게 못되게 굴고 괴롭힐 때마다 더 심해졌다. 함께 있어도 매일매일이 외롭고, 슬프고, 아프고, 힘들었다.
차라리 남자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면 이리 속이 아프진 않을 거라며 수도 없이 생각했고, 차라리 남자를 포기하자고 생각한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모스는 제게 처음 닿은 온기를 놓칠 수 없었다.
몇십 년 동안 인간들은 그를 향해 괴물이라 손가락질했고, 곁으로 다가오는 것들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시체들 뿐이었다. 평생을 시체들을 묻고, 그들의 옷가지를 기워 입고, 시체들이 남긴 책으로 인간사를 배우며. 마을에서 갓 태어난 아기가 장성할 때까지 홀로 숲에서 지내던 모스였다.
온기라는 것도 모르고, 그저 죽지 않는 몸임을 알면서 어설프게 인간의 집을 따라 보금자리를 만들고, 그렇게 계속 줄곧…….
‘혼자.’
그러기에 모스는 그동안의 긴 삶에 비교해 보았을 때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그와 지냈던 것일지라도, 남자를 놓을 수가 없었다. 불가항력이었다.
물론 정말 많이 힘들었다.
하나 포기하고 싶어질 때면, 꽃을 좋아하냐고 웃으며 묻던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싶을 때면, 괴물인 걸 알고 있었다며 데리러 오겠다는 남자의 목소리가 귓바퀴에 들러붙었다.
그 과정을 수도 없이, 정말 수도 없이 반복하며 고통스럽고 힘들어서 숨이 턱턱 멎을 때마다, 모스는 희망을 떠올렸다.
이 억겁과도 같이 길고 험난했던 시간은 남자가 기억을 찾으면 끝날 것이라고.
기억을 찾으면 루인은 남자로 돌아올 것이다.
그럼 이렇게 자신에게 잔혹하게 굴 일도 없고, 자신도 이렇게 마음고생을 할 일도 많이 없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어떡하지?’
종종 지나칠 정도로 잔인한 남자의 모습을 보고 그런 의심이 피어날 때가 있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며 의심이 제게 속살거릴 때마다 모스는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자 했다.
애써 의심을 수면 위로 끄집어 올리진 않았다.
기억을 찾아도 남자가 똑같다면, 자신과 이전처럼 지낼 수 없다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국의 황제가 기억을 다 잃어 덜떨어진 머저리처럼 군 게, 그럼 자랑인가?”
의심을 무시한 대가는 더 크게 돌아왔다.
“…언, 언제? 언제 찾았, 언제 찾았어?”
“기억은 진즉 찾았다.”
그 의심에서 벗어나려고 갖은 애를 쓰고, 발버둥을 친 결과는.
“한데, 그게 지금 와서 중요한가?”
바로 이것.
“어차피 너는 내 것인데.”
루인의 바로 뒤에 있는 창가로 서서히 빛이 들기 시작했다. 그 탓에 그의 얼굴이 점점 역광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어차피 설령 선연하게 보여도 그가 이어 하는 말 때문에 표정을 세세히 볼 겨를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마치 당연한 사실을 고하는 것처럼 말했다.
“짐도 그 기억을 묻어 둘 테니, 너도 숲에서의 기억은 잊어. 어차피 내겐 수치뿐인 기억이니.”
숲에서의 기억을 묻어 두겠다고, 이젠 숲에서의 기억을 수치라 말하며 잊으라 한다.
인간들에게는 내장에 병이 생겨 죽는 경우도 있다는데, 그게 이런 느낌일까?
그가 말을 할수록 속이 너무 아팠다. 괴물이라 내장에 병이 생길 일이 없음을 알았지만, 지금은 제 껍데기가 다 벗겨지고 속까지 햇빛에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구역질을 한다면 입 밖으로 나오는 게 타액이 아닌 녹아 버린 내장일 것 같아 몸을 벌벌 떨며 시선을 바닥으로 뚝 떨구었다.
“…….”
끔뻑끔뻑,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자 시야가 점차 선명해지면서 남자의 신발이 보였다. 그래, 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가 입고 있는 옷도 시야에 들어왔다.
인간들 중에서도 손재주가 좋은 이들이 있는데, 그들이 구슬땀을 흘려 대면서 하나하나 새겼을 자수. 인간들의 화폐를 한 가마를 가득 채울 정도로 지불해야 살 수 있을 법한 장신구. 그 옷 속에 감겨 있는…….
“루인.”
너, 루인.
그러자 루인은 놀란 듯 모스를 응시했다. 모스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온 적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기억을 잃기 전에도, 기억을 잃은 후에도, 기억을 찾은 지금도 모스는 루인의 이름을 부른 적이 없었다.
이곳에 와서도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적이 없어서 루인은 어쩌면 그가 숲에서만 지내던 괴물이라, 자신의 이름을 들은 적도, 배운 적도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루인.”
그리고 모스는 루인에게 네가 잘못들은 게 아니라는 듯이, 다시 이름을 부르더니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그 시선은 참 묘해, 루인은 저도 모르게 잠시 표정이 경직됐다. 모스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배신감과 충격, 상처, 절망이 뒤섞여 제대로 거동조차 하지 못하고 발발거리던 상태였으나, 지금은 달랐다.
고요하게 루인을 응시하는 모스의 모습은 영 낯선 것이었다.
“…….”
침묵이 층층이 쌓이고, 또 쌓였다. 모스는 그렇게 루인의 이름을 부른 뒤 한참을 가만히 그를 응시하다가 슬피 웃었다.
“마, 맞네, 네… 이름.”
제아무리 그가 괴물이고, 인간사를 모른다고 해도, 어린아이들이 글을 외기 시작할 때면 제일 먼저 배우는 황제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스는 알면서도 루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남자와 함께 지낼 적에 남자의 이름을 알고 싶다고 수도 없이 생각했으면서, 막상 남자가 황제인 것을 알고, 그의 이름이 루인임을 알게 되었음에도 부르지 않은 이유는 단순했다.
“나, 는 남자에게 이, 이름을 들은 적이 없어.”
숲에서 모스와 함께 지냈던 남자는 이름이 없었으니까.
자신이 황제인 것도 잊고, 어쩌다가 숲에 들어오게 됐는지도 모르겠다던 남자는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기에 들을 수 없었던 것도 당연했다.
“루인.”
하지만 지금 제 앞에 있는 이 황제는, 모든 이가 태어날 때부터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스스로를 소개하지 않아도, 그렇게 당연하게.
“너, 는…….”
그러니까.
모스는 아까보다 한껏 차분해진 얼굴로 루인을 보고, 이내 애써 외면하려고 했던 사실을 읊조리듯 말했다.
“너는 내, 내가 찾던 이가 아, 아니야.”
“……뭐?”
저게 무슨 말인지. 루인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눈썹을 신경질적으로 휘었다.
그런데 모스의 상태가 이상했다.
모스는 그의 손짓 하나에도, 그의 눈짓 하나에도 매번 눈치를 보며 온몸을 한껏 웅크린 채 미안하다는 말을 와르르 쏟아 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 겁많은 괴물은 이리 쳐다봐도 절대 움츠리지 않았다.
“내가 찾던 이는… 이제 어, 없어.”
오히려 피눈물 자국을 가득 담은 그 얼굴은, 언제 울었냐는 듯 너무나도 담담했다.
그리고 그 흰 얼굴에 루인이 뭐라 말을 덧붙일 새도 없이 모스는 입을 열었다.
“죽었어.”
죽었다고 말하는 모스에 순간 루인은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모스의 눈을 응시했다.
아무런 표정이 담기지 않은 얼굴, 속을 모를 얼굴에 박힌 눈동자의 빛이 옅어지는 모습이 이상했다.
모스의 얼굴이 점점 시꺼멓게 변한다. 분명 뒤에서는 해가 떠오르고 있는데, 왜 모스의 눈에 담긴 빛이 옅어지는 것인지, 왜 그의 얼굴이 검게 변하는지.
하지만 더는 꺼트릴 불씨마저도 없다는 듯, 어느덧 시꺼멓게 죽은 눈동자는 마치 시체처럼 변해서.
“네가 죽였어.”
더는 아무것도 눈에 담지 않았다.
새하얗게 말라비틀어진 시체처럼, 모스가 루인을 응시하다 그리 읊조리고는 눈을 감았다.
아.
“이봐.”
평온하다.
눈을 감자 루인이 자신의 어깨를 붙들며 뭐라 소리치는 것이 느껴졌지만, 모스는 눈을 뜨지 않았다.
“괴물, 지금 뭐 하는 거지? 너……!”
루인이 소리 질렀다. 하지만 모스는 눈을 뜰 힘이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간만에 느끼는 이 안식이 달가워, 눈을 더 꽉 감으며 그간 제가 애써 무시하던 사실을 담담하게 인식할 뿐이었다.
있잖아, 나는 여태 허상을 좇고 있었던 거야.
“모스!!!”
이미 네가 죽여 버린 허상을.
***
잊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건 숨을 쉬듯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찾는 것과 별개로 기억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루인은 모스와 몸을 섞으면 섞을수록, 어느 순간부터인가 잊혔던 기억들이 서서히 돌아오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일부고 앞뒤가 없었던 지라, 기억인지 상상인지, 아니면 그사이의 무언가인지 긴가민가했다.
‘감정과 기억은 별개인 걸까. 아니면 본래 감정이 무뎌진 상태라 그런 것일까.’
게다가 루인은 잊혔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그간 허전했던 기억의 여백을 채워 개운한 느낌이 아닌, 그저 자신의 몸에 들어온 낯선 이의 이야기를 보는 것처럼 느껴져서 오히려 불쾌하기까지 했다.
부분부분 떠오르던 것들이 점점 선명하게 떠오르고, 그 기억들이 전부 제가 겪었던 일이란 걸 받아들이고 깨달았던 때.
무슨 느낌이 들었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루인은 쉬이 답할 수 있었다.
‘수치’라고.
하나 단순히 이 단어로 그 수치스러움을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자신이 저 천것과 정말 사랑 비슷한 놀음을 했다는 사실도 수치스럽지만, 더한 수치는 따로 있었다.
‘남으려고 했다니.’
기억을 잃은 그는 그 말도 안 되는 쓰레기장에서 괴물과 함께 지낸 것도 모자라서…… 떠나지 말아 달라고 하는 저 괴물 때문에 실제로 떠나지 않으려고도 생각했었다는 것이다.
만약 사고가 나서 기억을 되찾지 않았더라면, 루인은 그 숲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로 나머지 생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미치지 않고서야.’
숲에서 기억을 잃은 자신의 모습은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우스웠다.
숲에서 저 괴물과 미친 짐승처럼 성교를 하는데, 하물며 그 장소가 쓰레기장이나 다름없는 곳인 것도 모자라 사랑한다는 개소리까지 속삭였다.
촌극이 따로 없었다.
루인은 기억을 잃고 숲에서 머저리같이 군 자신의 촌극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수치스러움에 속이 부글부글 끓고, 화가 치솟았다.
그러기에 원래 그의 성미로는 기억을 잃고 수치스럽게 군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 이 괴물을 찢어발겨 죽이는 게 맞았다. 제국의 황제가 숲에서 이리 지냈다는 것을 알고 있단 사실 하나만으로 죽일 이유는 충분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래, 정말 이상하게도. 피어난 것은 살심이 아닌…….
“………너는 나를 그딴 눈으로 볼 줄도 알았어.”
패배감이었다.
궁에서 그가 그리 자신을 응시한 적이 있는가?
궁에서는 시선을 맞출 때마다 벌벌 떨었으면서, 기억 속 자신에게 모스는 어떻게든 눈을 맞추려 들었고, 그 눈동자와 행동에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살가움이 있었다.
그리고 그건 루인이 이곳에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종류였다.
-새끼는 못, 못 봐.
숲에서 모스는 더듬거리고 겁먹으면서도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며 올려다볼 줄도 알았고.
-조, 좋아해.
제법 요망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면서 목덜미를 붉힐 줄도 알았으며.
-나는 너, 인간, 너를 사랑해.
먼저 다가와 사랑을 속삭일 줄도 알고.
-나, 나를 버리지 마.
매달리고.
-네가, 나를…… 사, 사랑…….
그 괴물이 원하는 대로 사랑한다 말해 주니, 제대로 말도 못 잇는 주제에 활짝 웃을 줄도 알았다.
환각초와 열매만이 있는, 옆에는 인간들의 무덤이 즐비하고 언제 짐승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열악한 곳에서, 세상을 다 가진 양 괴물이 웃는데.
‘뭐가 그리 행복한 거지?’
못 볼 꼴이었다.
너무 별로라, 속이 다 뒤틀릴 만큼.
게다가 괴물의 웃음은 저것 한 번이 아니었다. 그는 때때로 뜬금없이 루인을 향해 웃어 보였다.
그 숲에 살아서 말하는 거라고는 자신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었다. 보금자리 주변엔 죽은 시체를 묻은 무덤뿐이고, 먹을 거라고는 연못의 물고기와 날짐승을 제외하면 말라비틀어져 죽은 짐승들 뿐이고, 보금자리는 차갑고 딱딱해 사람이 도저히 살 법한 곳이 아니었다.
한데 그곳에서 너는 뭐가 그리 즐겁다고, 대체 뭐가 행복하다고 그리 웃는 건지.
기억을 잃은 무능력한 저 ‘남자’가 네게 금은보화를 안겨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명예를 가져다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괴물인 너를 인간 사회에 섞여 들게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근데 너는 고작 그 무능력한 놈의 말 몇 마디에 그리 쉽게 웃고, 반겼으면서.
“나는 여기 있으, 면 아, 안 되는 괴물이니까. 너는 내가 귀, 귀찮고 거, 거슬려서 날 미워하고 나, 나는 천것이니까…… 그, 그러니까 나 숲, 으로 돌려, 보, 보내 주면… 안 돼?”
왜 내게는, 감히 내게는.
돌려보내 달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미, 미안해. 미안, 해. 미안해. 너, 는 나를 싫어하는데, 나를 짐, 짐처럼 여기는데, 나를 지, 짐승보다 못하게 여기는데. 처, 천것인 내가, 너, 너한테 달라붙어서 미안해, 미안해. 그러니까, 그러니까…… 떠, 떠날게.”
왜 나를 보며 그토록 짙은 후회의 시선을 던지며 묻는 거지?
“아니야!!”
왜 내가 이 앞에 있는데.
“네가 아니야!!”
내가 아니라고 하는 거지?
모스는 악을 질렀다. 제 앞에 있는 남자를 부정해야 자신이 살 수 있는 이처럼 아니라는 말을 반복했고, 또 반복했다.
그리고 멀거니 그 모습을 보던 루인은, 돌연 기억을 잃고 만나게 된 모스를 떠올렸다.
-우, 으. 보, 보고 싶었, 어.
눈이 많이 오던 때였다. 대체 자신이 이곳에 왜 있는 것인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창밖에 인기척이 있어 문을 열었더니 저것이 있었다.
새하얀 눈이 쏟아지는 추위 속에서 얼마나 몸을 옹송그리고 그 집 앞에 있었는지, 코는 새빨개서, 얼마나 울음으로 밤을 지새운 건지 눈 밑은 짓물러서, 어디서 어설프게 열매를 따 와 창가에 줄 세워 놓고서.
그러면서 제게 어떻게든 닿으려고 하며, 다친 ‘남자’를 걱정하며 안도하는 모습.
‘내가 아닌, 남자를.’
그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 제 앞에 있는 모스에게 기억 속의 모스가 겹쳐지고 비교가 되면서 눈앞이 걷잡을 수 없이 새빨갛게 변했다. 궁의 입구부터 왕좌까지 가는 길을 온통 피로 물들였을 때도, 기어코 아비를 죽였을 때도 이토록 눈앞이 붉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를, 숲에서 제대로 나가지 못하게 할 때는 언제고, 이딴 얼굴로 나를 보는 거지?! 다정하게 해 달라고 하고, 버리지 말아 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돌아가겠다고? 아니? 너는 가지 못한다. 나는 네 애원을 잊지 않았고, 네 부탁을 잊지 않았기에 너는 돌아갈 수 없어. 다시는 내 앞에서 돌아가겠다는 말을 꺼내지 마. 죽여 버릴 거다!”
머리를 거치지 않고 나오는 말들,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제대로 인지할 수 없었다.
그저 기억 속에서는 해사하게 웃을 줄 알았던 이 괴물이, 지금 제 앞에서는 미쳐서 악을 지르며 형형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눈이 뒤집힐 것 같았고,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로 정신이 나갈 거 같았다.
미친 듯이 쏟아 내고 나니, 순간 차가울 정도로 정적이 일었다.
하지만 정적도 잠시, 괴물은 제게 “기억을 찾았구나.”라고 말하며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을 담아 저를 보았다. 그 감정의 무게는 너무나도 무겁고, 괴상한 기분이 들게 만들어 루인은 애써 모스의 시선을 무시하고 그를 끌고 질질 창가로 갔다.
“기억은 진즉 찾았다. 한데, 그게 지금 와서 중요한가? 어차피 너는 내 것인데.”
루인은 창가에 다다랐을 때 내팽개치듯 모스를 바닥으로 던졌다. 모스는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가만히 있었지만, 루인은 악을 쓰듯 지껄이기 시작했다.
“짐도 그 기억을 묻어 둘 테니, 너도 숲에서의 기억은 잊어. 어차피 내겐 수치뿐인 기억이니.”
모스가 물끄러미 자신을 본다. 눈동자에 흰자란 없었다. 온통 시뻘겋게 피눈물로 젖은 얼굴을 하고 자신을 보는데, 루인은 순간 목이 타는 것처럼 욱신거렸다.
기억 속 자신을 응시하던 모스의 얼굴과 지금의 모스는 같은 인물이라고 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괴리가 엄청났다.
거기선 그리 웃어 줬으면서, 지금 그딴 표정은 뭐지?
그리고 그 괴리에서 오는 간극이 루인의 속을 뒤집히게 만들었다. 목구멍이 바짝 메말라 가뭄이라도 든 것처럼 갈라지는 것 같고, 손에는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지만, 어깨에는 지나칠 정도로 힘이 많이 들어갔다.
‘어떻게 해야…….’
기억 속 모스로 되돌릴 수 있지? 때리면 되나? 하지만 소용없었잖아. 해에 다시 녹이면 되나? 하지만 태양이 떠오르려면 아직 시간이 좀 남았다.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는 건가.
그는 처음으로 제가 무력하다고 느꼈지만, 고작 이딴 괴물 앞에서 무력하다고 느끼는 것은 제국의 수치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던 그때.
“루인.”
루인은 제 귀를 의심했다.
모스는 루인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듯, 한 번 더 루인의 이름을 불렀다.
루인, 파멸.
선황제가 자신이 빨리 뒤져 버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었던 게 틀림없을 이름. 그렇게도 싫어하던 비에게서 본 아들이 제가 아끼는 아들에게 해라도 될까, 모두가 말렸지만 꾸역꾸역 지은 이름. 그래서 제 이름을 좋아한 적이 있냐고 묻느냐면, 루인은 그리 물은 이의 목을 따, 제 이름을 지어 준 이의 곁으로 보낼 정도로 이 이름을 싫어했는데…….
무엇일까. 지금 이 느낌은.
제가 그토록 싫어하는 이름을 불렀음에도 루인은 모스를 죽여 버리고 싶지 않았다.
처음 느끼는 감각이 낯설어 멈칫했지만, 그것은 찰나.
“네가 죽였어.”
원망스러운 얼굴. 사람을 저주하듯 보는 눈.
저런 시선은 늘 봐 왔던 것이지만 지금은 느낌이 달랐다.
그 원망스러운 얼굴을 마주한 순간, 루인은 잠시 굳어 있다 자신이 무엇을 죽인 것이냐고 물으려고 했다.
하나 말을 제대로 하기도 전에 돌연 모스가 눈을 까뒤집으며 뒤로 넘어갔다.
모든 게 느릿하게 보였다.
무언가가 생명을 다해 쓰러지는 모습은 많이 보았다.
제 손으로 많이 죽여 보았고, 딱히 생명이 다해 죽는 것을 안쓰럽게 여기지도 않았다. 죽는 건 당연하다고 여겼고, 심지어 자신의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데 지금은 달랐다.
허공을 가르며 뒤로 몸이 넘어간다. 잘게 부서지듯 헝클어진 이끼색 머리카락이 부산스레 흩날린다.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눈을 가리고, 이윽고 창백한 턱선만 보일 무렵, 툭, 모스가 바닥으로 온전히 쓰러졌고, 그 일련의 모습을 전부 보는데…….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루인은 제가 숨을 쉬지 않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이봐.”
저게 죽지 않는 괴물임을 알면서도 이상하게 다급해졌다. 그는 서둘러 그를 부르며 어깨를 붙들었다.
하지만 축 늘어진 흰 몸은 시체처럼 늘어지면 늘어졌지, 힘이 들어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웃기지 마.”
넌 괴물이다.
죽지 않는 괴물이라는 것을 그간 몇 번의 경험을 통해 루인은 알고 있었다.
“넌 못 죽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죽을 줄 모르는 몸이겠지. 너는 괴물이니까.
하지만 그리 생각하면서도, 왜인지 루인의 손은 초조했다. 괴물이라 죽을 수 없다고 읊조리면서도 그는 기이할 정도로 집요한 눈을 하고 모스를 깨우고자 했다.
뺨을 후려치자 생채기가 났다가 다시 회복되었고, 목을 졸라 자국이 남아도 얼마 지나지 않아 매끈하게 돌아왔으며, 숨을 못 쉬게 하면 일순 숨이 멎지만, 도로 다시 돌아왔다. 인간이라고 하기엔 믿을 수 없는 회복 속도였으나.
“…….”
그럼에도 모스는 눈을 뜨지 않았다.
모든 신체 활동과 회복은 기이할 정도로 빠르게 이루어지는데, 그의 의식만은 깊은 수면 속을 헤매는 듯 결코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몸을 여러 번 섞고 곁에 오랜 시간 있어 보아서 안다. 모스는 꽤 예민하고도 기민한 기질이었기에, 작은 충격에도 쉬이 눈을 떴다. 따라서 이 정도 자극이면 눈을 뜨고도 남을 시간인데…….
‘왜 눈을 안 뜨지?’
이상하다. 너는 괴물이잖아.
겁 많고 아픔을 싫어하지만, 죽지 않는 몸이다. 하나 정신을 진즉 차리고도 남을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모스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묘한 초조함에 루인이 손을 움켜쥐었다. 꽉 쥔 손 틈 사이로 피가 새 나오고 있었으나, 그는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그때.
‘햇빛.’
아, 루인이 외마디 신음을 내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리 무지한 이처럼 굴다니.
그는 이미 쉬운 길을 알고 있었다.
루인은 햇빛이 제대로 닿기 전에 모스를 껴안아 그늘로 몸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품에서 모스의 한쪽 손을 끄집어내 햇빛이 들어오는 곳으로 쭉 뻗었다.
“일어나.”
모스는 일어날 것이다.
“안 그러면 너는 녹을 것이다.”
그는 햇빛에 녹는 괴물이며, 햇빛을 무서워하고 햇빛이 주는 고통에 예민한 이이니 틀림없이 일어날 것이다.
이게 답이다.
여태 그의 선택은 다 옳았다. 그가 정답이라 여긴 것은 정답이었고, 오답이라도 정답으로 만들었다. 그러기에 루인은 지금 제가 하려는 것이 하나뿐인 정답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래, 이건 하나뿐인 정답이니, 틀릴 일이 없다.
틀릴 일이…….
‘한데, 왜 이리 초조하지?’
틀릴 일이 없을 터인데.
루인의 손은 축축했다. 그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모스의 손을 보고 있었다.
어느덧 해가 거의 다 떴다.
점점 밝아져 오는 시야에 그의 금안이 햇빛을 머금고 날카로이 빛난 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치이익 소리와 함께 코를 찌르는 묘한 악취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칙, 치익, 제 손에 붙들린 모스의 손이 햇빛에 닿자마자 주르륵 녹아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는 그가 전쟁 통에서 맡아 보았던 시체 썩는 냄새와 비슷했다.
촛농처럼 뚝뚝 흘러내리는 살점들 사이로 뼈가 드러났고, 뼈마저도 햇빛에 순순히 녹았다.
마치 무언가 병이 옮는 것처럼 야금야금 녹아내리는 몸, 그 몸을 빤히 보던 루인이 인상을 구기고 햇빛을 제 등으로 막았다.
“이거 보여?”
그는 손을 제외한 나머지 몸이 햇빛에 닿지 않게 조심하며, 너덜한 모스의 손을 붙든 채 그의 얼굴에 제 얼굴을 바짝 대고 읊조렸다.
“네 손이 녹았다. 네가 그토록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햇빛에 네 손이 녹았다고. 그러니 일어나. 당장 햇빛으로부터 도망치려면 부지런히 일어나야지, 안 그래?”
하지만 모스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손이 녹아 꽤 아팠을 텐데도, 아직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것에 루인은 잠시 멈칫했으나, 본인도 눈치채지 못한 채 점점 다급하게 모스를 붙들고 있었다.
“아프지? 다음은 어디일 거 같아? 고작 손으로 끝날 거 같아?”
“…….”
“일어나. 안 그러면 다 녹여 버리기 전에.”
분노에 차 있음에도 비교적 느릿하고 차분히 말하던 루인은 점점 초조하다 못해 조급해지자 소리를 지르듯이 말했다.
“당장 정신 차리지 않으면……!”
모스의 몸을 붙든 루인이 그의 몸을 붙잡고 흔들자, 반동으로 모스의 손이 허공을 가르고 햇빛이 들어오는 곳에 놓였다.
치익, 다시금 지독한 냄새와 함께 촛농처럼 뚝뚝 흘러내리는 손. 그것에 일순 놀란 듯 눈을 살짝 크게 뜬 루인이 자신도 모르게 재빨리 녹아내린 손을 낚아채 그늘로 밀어 넣은 그때, 모스가 눈을 떴다.
거봐.
이게 정답이잖아.
모스가 눈을 뜨는 순간, 바짝 긴장하고 있던 루인은 긴장이 풀렸다. 그는 이끼색 눈동자가 드러나는 모습을 숨 하나 내쉬지 않고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생의 탄생을 보듯, 집요하고도 뜨거운 시선이었지만 이내 그 눈 안에 담긴 것은 안도가 아닌 의문이었다.
뭔가가 이상…….
“아.”
루인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모스가 작게 신음을 뱉더니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제 녹아 버린 손을 보았다.
뼈가 풀이 자라듯 엮어지고, 그 위로 근육이 덮어지고, 살이 파도가 밀려오듯 차오르고 있었다. 흉측한 몰골로 재생되고 있는 손은 빈말로라도 경이롭다기보단 징그러웠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하다.
루인이 기묘한 낯으로 모스를 보았다.
피부가 저리 재생될 때, 모스는 그 고통을 견디지 못했고, 그것은 보는 이가 괴로워질 정도로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녹은 손이 복구되는 모습을 가만히 보는 모스의 표정은…….
“녹았네.”
무감(無感).
아무런 감정과 고통이 없는 표정이었다.
마치 다른 이의 몸이 잘린 것처럼 제 손가락을 보던 모스는 이내 뭐라 루인이 말할 새도 없이 다시 눈을 감고 추욱 늘어졌다.
갑작스레 엎어진 몸에 치이익 햇빛이 더 깊이 닿아 모스의 손목을 갉아 먹었다. 하지만.
“…….”
그게 다였다.
***
그날로부터 하루가 가고, 사흘이 갔다.
닷새가 가고… 이레가 지나 기어코 열흘에 다다른 날.
“카를.”
새벽, 해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추운 한겨울.
궁 앞에 우두커니 선 황제의 눈 밑은 시꺼멓고, 입은 말라 생기가 없었다.
카를은 황제가 더러운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신을 신는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코를 얼릴 정도로 추운 날임에도 황제는 제대로 걸쳐 입은 것도 없었으며 발은 맨발이었다.
카를은 생전 보지 못한 황제의 모습에 당황해서 얼어붙은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별다른 부연 설명 없이 그저 저를 놀란 듯 멀거니 올려다보는 제 신하를 내려다보며 담담히 말할 뿐이었다.
“의원을 불러.”
그 말에 카를의 시선이 그제야 움직였다.
황제의 품속에는 축 늘어진 무언가가 빈틈없이 천에 돌돌 말려 있었으며.
“어서.”
황제는 시체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황제는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소문의 ‘그것’을 늘 품에 안고 있다고 한다.
그것을 먼발치에서라도 본 이들은 하나같이 그에게 안겨 있는 것의 형태가 틀림없이 사람이 맞는데 어찌 된 일인지 숨을 쉬는 기미도 없고, 살아 있다는 느낌이 하나도 들지 않아, 마치 모형 같은…… 살덩어리 같다고 묘사했다.
그리하여 궁 안의 사람들은 황제가 품 안에 끌어안고 다니는 것을 그리 불렀다.
“……덩어리.”
덩어리라고.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