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덩어리(3권) (9/21)

디어 몬스터, 디어 히어로(Dear Monster, Dear Hero) 3

7. 덩어리

윈스 제국의 황제를 단순히 까다롭다는 말로 정의할 수 있을까.

귀족들은 자신들이 모시는 게 황제가 아닌 본능만 남은 짐승처럼 느껴지기도, 가끔은 지나칠 정도로 냉철해서 인간을 초월한 무언가인… 마치 신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귀신(鬼神) 황제.’

그래서 뒤에서 귀족들은 그를 귀신 황제라고 불렀고, 그만큼 그를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도 없었다.

그런데 그 귀신 황제가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은 흉물스럽고 낡아 빠진 궁에 “무언가”를 들여온 이후 기이할 정도로 잠잠하게 그 궁에서 지낸다니.

‘대체 무엇을 들여온 거야?’

처음에는 다들 믿지 않았으나, 황제가 꿀단지라도 숨겨 놓은 이처럼 궁에 한 번 들어가면 나오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국정까지 돌보지 않자 황제의 기행은 소문이 안 나려야 안 날 수가 없었다.

“황제 폐하께서 이리 계시니, 어떻게 제국이 굴러가겠습니까!”

이때다.

황제가 무서웠던 신하들은 그제야 큰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러며 섭정 자리에 앉아 있는 치테이르를 은근히 부추겼다.

사람을 시도 때도 없이 죽이는 황제보단, 적어도 상식선에서 움직이고 구슬릴 수 있는 치테이르를 황제로 두기를 원했던 귀족들이 꽤 있었던 탓이다.

“고작 이것으로 이토록 왈가왈부하다니. 내가 섭정을 너끈히 수행하고 있는데, 뭐가 문제지?”

하지만 두 사람의 의가 좋다는 소문과 같이 치테이르는 황제의 충실한 수족으로, 단번에 귀족들의 말을 일갈하고 제 수행원과 바삐 자리를 떠날 뿐이었다.

게다가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치테이르 또한 황궁에서 얼굴을 보기 힘들 정도로 두문불출했다. 결국 귀족들의 관심은 황제가 끼고 산다는 이에 관한 것으로 기울어졌고.

“……저기 혹시 황제 폐하 아니신가?”

그 존재는 느닷없이 수면 위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날은 새벽에 가까운 아침이었다.

해도 제대로 뜨지 않은 때, 황제가 그 낡은 궁에서 나와 천으로 돌돌 만 것을 껴안고, 본인이 원래 지내던 곳으로 다짜고짜 무식하게 걸어가기 시작하는 것을 잡일을 하던 사용인들이 본 것이다.

사용인들이 입을 모아 말하기를, 그날의 황제는 얼핏 봐서는 못 알아볼 정도로 정말 이상했다고 한다.

늘 태양처럼 빛나던 눈엔 반짝이는 총기는커녕 생기조차 없었다. 눈 밑은 시꺼멓게 죽어 있고, 볼은 홀쭉하며, 심지어 이 추운 한겨울에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인 것도 모자라.

“사람인 거 같은데.”

손은 피범벅에, 품속에는 뭔가가 있었다. 그의 품속에 있는 이는 마치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었고, 그 옆을 기사단장 카를이 황제가 껴안은 것을 가리듯 옆으로 서서 빠르게 걸어가는 것이었다.

“소문의 그 사람인가?”

“그분 맞아?”

다만 의아한 점이 있었다.

정녕 그 낡은 궁에 있던 소문의 그 사람이 맞다면, 황제의 은총을 받는 이라는 건데……. 그런 이가 대체 왜 저런 시체 같은 모습으로 새벽에 도망치듯 황제의 품에 안겨 나오는지 말이다.

몇몇은 기어코 그 인간 같지 않은 황제가 자신이 총애하는 이라도 자비 없이 죽인 거 아니냐고 웅성거렸지만, 목숨이 두 개가 아닌 이상 더는 떠들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날 밤의 목격자들이 그 일을 쉬쉬하던 가운데, 황궁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계속 벌어졌다.

“창을 다 덮으라고요?”

“그래, 폐하의 명령이다. 햇빛 하나 못 들어오게 다 막아.”

그날 새벽에 대뜸 황제의 궁으로 목수들이 소집되었다. 불려 나온 목수들은 영문도 모르고 창문 위에 죄다 나무를 덧대어 망치질을 했다.

그렇게 궁전의 화려한 창문들은 순식간에 폐쇄됐다. 어찌나 창을 잘 막았는지, 벌건 대낮에도 황제의 궁 내의 사용인들은 죄다 초를 들고 다녀야 했다.

하루아침에 화려했던 궁전이 누더기 궁전으로 바뀐 것에 모두가 황당해했으나,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의원들이 끊임없이 궁을 오가기 시작했고, 그 의원들은 반나절이면 죄다 무언가를 본 것인지 새하얀 낯으로 입을 꾹 다문 채 감옥에 갇히질 않나.

“저건 뭡니까?”

“붉은 과일인데, 저걸 왜…….”

추운 대륙에서 얻기 힘든 붉은 과일이란 과일은 죄다 사들이질 않나.

“……새?”

주먹만 한 작은 흰 새들이 철창에 갇힌 채 줄줄이 궁 안으로 들어가질 않나.

그뿐인가.

“자네, 방금 들었어?”

황제의 궁에는 소수의 사용인들만 들어갈 수 있는데, 그 근처를 정찰하다 보면 벽을 뚫을 정도의 고함이 종종 들려 궁을 지키는 병사들의 등골이 오싹해지기도 했고.

“……폐하?”

그것도 모자라 심지어 황제가 맨발로 궁의 입구에 서서 가만히 허공을 보다가 해가 뜨면 사라지는 걸 본 이들도 있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매일매일 벌어지는 새로운 일들에 당황한 귀족들이 섭정을 맡는 치테이르에게 이 일에 대한 것을 물으려고 했으나, 어찌 된 일인지 최근 치테이르 또한 궁에 붙어 있기보단 신전의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려서 말할 새도 없었다.

소문은 이제 황궁을 넘어, 바깥까지 파다하게 퍼졌다.

그리하여 온갖 소문이 날개를 달고 돌아다니게 되었는데, 그중 몇몇 개는 황제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것들이었다.

긴 시간 동안 피를 본 황제가 드디어 미쳤다는 소문, 또는 궁에 들인 황제의 정인이 황제의 눈을 가리러 온 아주 사특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 그리고…….

“폐하께서 시체와 사랑에 빠진 거 아니냐는 소문이 돈다고?”

황제가 시간(屍姦)을 한다는 소문.

그렇게 황제가 자신이 지내던 궁에 처박혀 나오지 않은 지 어언 2달, 그간 온갖 끔찍한 소문이 궁 밖으로 파다하게 번지기 시작했지만, 소문의 주인공인 황제는 이를 저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온갖 소문의 진원지인 황제의 궁에서도 가장 내밀한 공간인 그의 침실은 소문 한 자락도 들어가지 않은 것처럼 끔찍할 정도로 고요했다.

“…….”

황제가 지내는 궁전의 모든 창을 막았기에 벌건 대낮임에도 햇빛 한 줄기 없었으나 몇 개의 촛불이 방을 은은히 밝히고 있었다.

그 옅은 빛으로 침실을 들여다보면 그간 온갖 물건들이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는 소문은 사실인지, 그의 커다란 방 한편에는 열린 새장이 몇 개 있었고, 바닥에는 붉은 과일들이 뒹굴고 있었다.

다만 그토록 너저분한 것을 싫어하는 황제의 방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방 안은 참 더러웠다.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더러운 것을 싫어하고 누군가에게 닿는 것 또한 질색하는 황제가 맞는지, 그는 그 난장판 한가운데에서 제 품에 안긴 무언가를 빤히 응시하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는 밖에서 자신을 향해 뭐라 떠들든 전혀 중요치 않아 보였다. 그저 제 품에 안긴 이를 가만히 바라보며 집중하는데, 얼굴이 묘하게 이전과는 달랐다.

수려한 미모는 여전했다. 조각 같은 얼굴과 황금과도 맞바꿀 수 없는 금안과 황홀한 금발은 여전히 그림같이 아름다웠으나, 홀쭉하게 들어간 양 뺨과 퀭한 눈, 눈의 흰자는 실핏줄이 터진 듯 붉었으며 눈 밑은 시꺼멓게 죽어 있어 마치 전쟁터 한가운데 놓인 이 같았다.

“…….”

그는 미동조차 없이 제 품속에 안긴 이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품속에 안긴 이는 축 늘어져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으나, 황제는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움직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한 움직임마저 집요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그때.

“폐하. 명하신 대로 의원을 데려왔습니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어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이게 대륙에서 온 마지막 의원입니다.”

들어온 이는 카를이었다. 그는 바들바들 떠는 의원을 방 안으로 들여보내고 문을 굳게 닫았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바들바들 떨던 의원이 몸을 크게 움찔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화,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궁에서 무언가를 보고 살아 돌아온 의원들이 있긴 했으나, 그들은 마치 혀가 잘린 사람처럼 침묵을 유지했고, 몇몇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으며, 몇몇은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것을 이곳에 끌려오는 길에 알게 된 의원은 마음이 몹시 불안했다. 당장이라도 소변을 지릴 것처럼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으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황제는 말이 없었다. 고개를 들으란 말도, 자리에서 일어나란 말도. 의원은 그 시간이 마치 고문처럼 느껴졌다.

의원이 쇳덩어리를 얹은 것처럼 묵직한 등, 자꾸만 고꾸라지려는 고개를 도저히 어떻게 감당할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은 그때.

“이 자를 봐라.”

드디어 황제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의원이 상상했던 것보다 낮았고,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조용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산하고 쉰 목소리에 가깝지만, 기품이 실려 있어 오히려 소름이 돋는 느낌이 들었다.

“……예, 예! 예! 알겠습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의원이 대답을 하며 고개를 들자마자 멈칫했다. 자신을 보고 있는 황제의 그 요요하게 빛나는 노란 금안보다도 그의 품 안에 안겨져 있는 이 때문이었다.

‘소문이 사실이었나?’

황제가 시체와 사랑에 빠졌다는 소문 말이다.

터무니없는 소문이겠거니 했는데, 정말 황제의 품속에 있는 이는 살아 있다고 말하기가 애매했다.

축 늘어져 있는 몸에선 삶의 의지란 볼 수 없었고, 지나칠 정도로 흉 하나 없이 새하얀 피부는 그간 어떤 생을 살았는지 유추할 수 있는 흔적 하나 없었으며, 방 안에 황제 말고 다른 이가 있는 줄도 모를 정도로 사람이라면 응당 나야 할 기척조차 없었다.

‘아니야, 살아 있어.’

하나 정말 미세하게,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미세하게 그는 숨을 쉬고 있었다.

“그럼 잠시 상태를 보기 위해, 실례하겠습니다. ……저, 그, 폐하?”

환자의 상태를 보기 위해 진찰 도구를 꺼내 들고 뒤를 돌았을 때, 의원은 당황해서 얼어붙었다.

보통 진찰을 보겠다고 하면 환자를 침상에 눕히는데, 황제는 품에 안은 이를 내려놓지도, 보여 주지도 않았다.

어쩌지, 난감해하던 차에 얼마 지나지 않아 다행히 황제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고, 침상 위에 안고 있던 이를 내려놓았다.

감사 인사를 한 의원은 환자를 앞에 둔 탓인지, 떨림이 아까보다는 멎은 채로 그를 진찰하기 시작했다.

‘이상한데?’

한데, 묘했다. 진찰을 하면 할수록 묘한 이였다.

사람이 어찌 이리 묘할 수가 있는가? 그는 사람처럼 숨을 쉬고 심장도 있고, 어느 하나 사람이 아닌 게 없었는데 기이할 정도로 생기가 없었다.

‘잡생각은 하지 말자.’

목숨 줄이 달린 일이다. 의원은 빠르게 상념에서 벗어났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황제가 바로 옆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침을 꿀꺽 삼킨 의원이 차근차근 당장 할 수 있는 진찰을 하기 시작했다. 진찰을 하기 위해 손을 가져다 대거나 옷을 추켜올릴 때마다 소름 끼칠 정도의 한기가 느껴졌지만, 의원은 집중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정말 이상했다.

몇 번이나 살펴보고, 몇 번이나 확인해 봤지만.

“특별한 이상이 없습니다. 그저 잠든…… 상태이신데요.”

이 시체 같은 이는 모든 게 완벽한 정상이었다.

그리 말을 한 의원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마자 언제 이리 바짝 온 것인지, 황제가 제 코앞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에 흠칫 놀랐다.

“잠든 상태?”

황제를 이리 가까이서 볼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기에 당황도 잠시, 그리 읊조리는 황제의 기세가 서릿발처럼 차갑고, 잘 갈린 칼끝처럼 날카로워 의원의 몸이 바짝 얼어붙었다.

“넌 두 달을 넘게 잠만 자나?”

……두 달?

의원이 황제의 말에 답하지 못하고 당황한 표정을 한 채 다시 누워 있는 이를 보았다. 지나칠 정도로 창백하고 흰 피부기는 하지만 모든 게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죄, 죄송합니다. 제 배움이 부족해서 더는 알 수 없습니다!!”

애초에 의원이라면 그 누구도 저 말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이 어찌 두 달을 자고도 이토록 정상적인 모습을 유지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두 달 동안 잠든 이라면, 이럴 수는 없었다. 근육도 빠져 있어야 하고 살의 형태도 쏠려 있어야 하는데 이 자는 그런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어제까지만 해도 잘 움직이다가 그저 잠들 때가 되어 잠든 이처럼, 어느 하나 이상한 점이 보이지 않았기에 의원은 넙죽 엎드려 빌었다.

“더는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부디 신관을 부르셔서 신성력으로라도……!”

“신관?”

픽, 황제가 의원의 말을 자르며 웃었다.

“너도 신관을 부르라고 하는구나.”

듣자 하니 황족들은 신관들의 신성력으로 치료를 한다기에, 그리 말한 것뿐인데 어찌 된 일인지 황제는 역린이라도 건드려진 이처럼 예민하게 반응했다.

하나, 그것에 의문을 제대로 가질 새도 없이 황제의 기운이 날카롭게 다가왔다. 전쟁에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 간 이답게 의원이 기에 짓눌려 벌벌 떨며 고개를 못 드는 사이, 황제가 낮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신관, 신관이라면…… 신은 인간이 이해하려야 할 수 없는 영역이지. 어쩌면 뭔가를 고칠 수도 있겠어. 하지만 신관은 안 돼. 신관은 안 되지, 응, 무언가를 알아채고 세 치 혀라도 놀리면 큰일이지. 그러니 신관은 안 되고, 그래…….”

어느 순간 중얼거림이 삭 멎었다.

그 소름 끼치는 적막에 의원은 무심코 고개를 들었고, 어느새 황제의 품속에 의원이 진찰했던 이가 안겨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황제는 제 품 안에 있는 이를 의원이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얼굴의 이목구비는 지나칠 정도로 평온했으나, 눈은 아니었다. 품속에 안긴 이를 터트려 죽여 버릴 것처럼 살벌하기도, 또는 그를 죽이거나 놓치면 죽는 이처럼, 황제의 얼굴에 있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애절함이 담겨 있기도 했다.

의원은 황제의 내밀한 무언가를 본 것만 같아 황급히 고개를 내렸다.

“끌고 가.”

그리고 황제의 명이 떨어졌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의원이 더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그럴 새도 없이 의원은 카를에게 붙잡혀 질질 끌려 나갔다. 달칵, 카를이 의원을 데리고 나가자 복도에서 지레 겁먹은 의원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카를이 이러다간 의원의 씨가 마른다고 해서, 감옥에서 입을 조심하라는 경고만 받고 내보내질 텐데, 저리 멱따는 소리를 내며 갈 줄은 몰랐다.

황제는 그 비명 소리가 멎을 때까지 생각에 잠긴 듯 의뭉스러운 얼굴로 가만히 문을 응시하다, 이내 제 품에 안긴 이를 빤히 응시했다.

머리카락은 길이가 길어지지도 짧아지지도 않았고, 손톱과 발톱도 마찬가지이고, 전부 다 두 달 전과 똑같았다.

그래, 두 달 전.

황제는 두 달 전, 모스가 잠든 날을 떠올렸다.

***

“아, 녹았네.”

그리 말하며 지나칠 정도로 초연하던 얼굴.

그 얼굴엔 아무것도 담기지 않았다. 고통도, 그 어떤 감정도. 그 무감한 얼굴로 눈을 느릿하게 감는 것은 기억 속에서 잊힐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녹았다고 담담하게 말하는 모스는 마치 지금 녹아내린 게 제 손이 아닌, 타인의 손을 보듯 보고 있었으니.

“…….”

모스가 눈을 감음과 동시에 방 안이 조용해졌다. 밝아진 사위, 지저귀는 새소리만이 아침이 밝았음을 알려 줄 뿐이지, 방금까지 이곳에서 서로를 향해 악을 지르고, 폭력을 행사했던 게 마치 꿈만 같을 정도였다.

빽빽하게 들어찬 침묵 속, 루인은 고요하게 눈을 감은 모스를 보았다. 한참을 보았다.

괴물은 평온했다.

그저 잠든 듯 눈을 조용히 감고 있었다.

그 모습을 숨죽여 바라보던 루인이 살짝 몸을 움직이자, 품 안에 안겨 있던 모스의 손이 제 몸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향했다.

툭, 허공을 가르고 떨어진 손은 바닥에 손등을 비빈 뒤 멈추었다. 루인은 느릿하게 시선을 돌려 그 손을 보았다. 그리고 이상하다는 듯 아까부터 귀에 거슬리던 소음의 원인, 제 심장을 노려보았다.

쿵쿵, 쿵쿵쿵.

불안하게 뛰는 심장이 이제야 저를 알아차렸냐는 듯 더 거세게 박차를 가한다.

이건 뭐지?

전쟁을 앞두었을 때도 이리 심장이 뛴 적이 없었다, 끝없이 밀려오는 적들을 보면서도 이런 적 없었다. 아비를 죽였을 때도, 수많은 적을 쳐 내고 왕좌에 앉았을 때도. 인생의 커다란 변환점들 사이에서도 느낀 적 없는 묘한 감각이 전신을 휩쓴 것에 그의 미간이 불쾌함으로 좁혀졌다.

“무의미한 것을.”

쯧, 루인은 혀를 차며 감정을 갈무리하고자 했다.

이런 감정을 느껴 봤자, 그는 괴물을 눈 뜨게 하는 정답을 알고 있었다.

방금만 해도 보라, 햇빛이 몸에 닿으니 어찌 되었건 곧장 눈을 뜨지 않았는가.

그러니 답은 쉽다. 햇빛에 녹여 괴물이 고통을 느끼게 하면 이 괴상하기 짝이 없는 무표정도, 이 소름 끼치는 적막도 빠르게 깨질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떨구어진 모스의 손을 붙들고 햇빛 속으로 뻗었다.

치이익, 살이 녹는다.

뼈를 덮고 있는 근육이 타들어 가 뼈가 드러나고, 뼈마저도 그을리듯 검게 변하더니 사라졌다. 모스의 손이 있던 자리는 어느새 반절이나 사라졌다. 그런데.

“…….”

여전히 조용했다. 루인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손이 있어야 할 자리가 마치 구멍이라도 난 듯 텅 빈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그것을 그늘로 이끌었다.

햇빛에서 벗어나자 타듯이 치직거리던 단면에서 뼈가 돋는다. 언제 녹아내렸었냐는 듯 손은 빠르게 회복되었다.

루인은 회복된 손을 붙들고, 다시 햇빛으로 이끌었다. 시체 썩는 내와 함께 다시금 손이 촛농처럼 햇빛 아래에서 녹아내렸지만, 이번에 루인은 녹아내리는 손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제 품 안에 안긴 모스의 얼굴에 향했다. 하지만.

“…왜?”

여전히 침묵이었다.

모스는 일어나지 않았다.

손이 녹아내려도 굳게 닫힌 눈꺼풀 사이로 이끼색 눈동자가 드러날 기미란 보이지 않았다. 그것에 루인은 한동안 말없이 그 얼굴을 빤히 응시하다 다시 손을 끌고 와 그늘에 넣었다.

손이 회복되기 시작했지만 다시 자라난 손을 빼고는 둘 사이에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상하다. 이럴 리가 없을 텐데.

본디 통각에 예민한 몸이다. 햇빛에 손톱만큼이라도 녹는다면 자지러지며 눈물을 흘리고 발버둥 치던 이였다.

한데 지금은 제 몸이 손톱만큼만 녹아도 울고불고 살려 달라고 빌었던 이와 동일 인물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아무런 반응도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틀린 답을 선택한 것은 아닐 터였다. 방금만 해도 손을 녹이니, 곧바로 눈을 떴지 않았는가?

그러니 이건 맞는 답일 것이다. 틀림없다.

‘그럼 왜 아직도 눈을 안 뜨지.’

아까와 다른 점이 있나? 다를 게 있나? 그의 눈이 빠르게 아까와 다른 점을 찾듯 녹아내린 모스의 손과 햇빛을 번갈아 보았다. 하나 시간이 흘러 햇빛의 방향만이 조금 달라졌을 뿐, 나머지는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혹 고통이 부족한 건가?’

사람을 고문할 때, 반복적인 고문은 효과가 좋지 않았다. 더한 고통을 주었을 때야말로 비로소 얻고자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에, 이것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생각이 제대로 끝을 맺기도 전에 루인은 빠르게 고개를 돌려 햇빛의 위치를 파악했다. 이곳에서 세 발자국 더 나가, 안은 채로 뒤를 돌면 정확히 모스의 반신을 녹일 수 있었다.

반신 정도를 녹이면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루인이 그리 생각하며 모스를 안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군더더기 없고 빠른 동작이었는데, 조급함이 묻어났다는 게 평소와는 달랐다.

하지만 루인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햇빛으로 걸어가겠다는 생각과는 달리 우두커니 멈춰 선 채 잠시 굳었다.

루인의 표정은 섬뜩했다. 한참을 무언가 생각이라도 하듯 허공을 바라보던 루인의 시선이 느릿하게 모스를 향했다. 그간 모스를 이리 안은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동안 둘이 붙어 있던 시간을 생각하면 이 자세로 들어 올린 것 또한 익숙했고, 그러기에 지금 모스를 안는 행위가 익숙한 느낌이었어야 할 터인데.

지금은 낯설었다.

마치 모스가 아닌, 시체를 들어 올린 느낌과도 같아서.

머리마저 뒤로 축 늘어진 몸은 깃든 게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영혼이 빠져나간 듯 의지가 하나도 깃들지 않은 묵직한 살덩이는 마치 시체를 들어 올리는 것처럼 느껴질 뿐, 살아 있는 생명체의 것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루인은 천천히 팔 위치를 바꾸었다. 그는 한 손으로 모스를 안았고, 남은 한 손으론 흐트러지는 이끼색 머리카락을 잘 쓸어 담아 제 가슴으로 모스의 얼굴을 끌고 왔다.

그런데도, 쉽사리 이 소름 끼치는 느낌은 잦아들지 않았다.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지? 아니, 불안하지?’

괴물을 깨울 답은 알고 있고, 괴물이 도망간 것도 아닌 제 손안에 있는데. 계속해서 불안하다.

하나 이 불안은 괴물을 깨우면 사라질 터. 루인은 빠르게 생각을 갈무리하고, 모스를 끌어안고 햇빛 안으로 걸어가려고 발을 내뻗었다. 손을 녹인 게 소용없으면 다른 곳을 녹이거나 더 많이 녹이면 일어날 것이다. 아픔에 예민한 모스이니 일어날 것이다. 틀림없이 눈을 뜨고, 그러면, 나는…….

……멈칫.

루인은 발을 어정쩡하게 뻗은 채 굳었다. 어찌 된 일인지, 더는 걸어갈 수 없었다. 발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떼어지지 않는 자신의 발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응시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가장 정답에 가까운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모든 감각이 외치고 있다. 더 많이, 더 넓게 녹인다면 모스가 일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머릿속으로 떠올린 이 생각이 가장 합리적이고 정확하며 시간 낭비를 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인 것은 맞는데. 대체 왜 몸이 명령을 듣지 않는 것인지. 표정을 굳힌 루인은 우두커니 선 채로 생각했다.

혹 이 행위가 잔인해서 망설이는 건가?

하나 그 생각을 함과 동시에 루인은 어이없음을 감추지 못하고 픽 웃었다. 잔인해서 망설인다고? 누가, 자신이? 그건 말도 안 되는 우스운 일이었다. 이게 잔인한 것이라면, 그간 전쟁에 참전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애초에 상대는 계속해서 살아날 수 있는 괴물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왜?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자신의 행동에 루인의 미간이 구겨졌다.

가장 정답에 가까운 방법을 앎에도 하지 못하는 것이 영 짜증 난 듯, 그는 한참을 모스를 안은 채 점점 좁아지는 햇빛을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

그러고 얼마나 있었을까. 드디어 그가 결정을 내린 듯 발을 뻗었다.

성큼, 성큼성큼. 첫걸음만 잠시 주춤거렸을 뿐, 두 번째 발걸음부터는 거침이 없었다.

루인은 모스를 안은 채로 빠르게 걸어 햇빛이 들어오는 쪽을…… 지나쳤다.

그는 크게 빙 돌아 햇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제 침상 쪽으로 향했고, 햇빛에 닿지 않게 조심스레 모스를 침상 위에 눕혔다.

풀썩, 루인이 눕혀 주는 대로 모스가 누웠다.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며 동그란 이마가 드러났다. 그 동그란 이마를 시작으로 그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모난 곳 없이 동글게 난 눈썹, 그 아래로 꾹 감긴 눈, 코, 입…….

루인의 시선은 그렇게 모스의 얼굴로 계속 향했다. 하나하나 뜯어보듯 집요한 시선은 멈출 줄을 몰랐고, 사위가 어둑해져 모스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무렵에서야 루인은 뒤를 돌아 창가를 확인했다. 언제 해가 떴었냐는 듯, 조용하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 대신 추위가 뻥 뚫린 창가로 스며들고 있었고, 방 안은 어둑해져 빛 한점 찾을 수 없었다.

밤 동안 루인의 자세는 흐트러지는 일이 없었다. 루인은 잠든 모스의 곁을 꼿꼿하게 등을 세운 채 지켰다. 해가 침상으로 들어오지 않게, 커튼으로 창을 반 정도 가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물끄러미 모스를 바라보며 그가 깨어나길 기다렸다.

하지만 해는 떴고, 또 졌으며, 새벽이 찾아왔고, 또 해는 떠올랐다. 원래 이토록 태양이 빨리 사라지는 것이었나. 하나 그런 의문이 무색할 정도로 루인은 날짜를 세는 것도 잊은 채 하염없이 모스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눈은 시야가 흐려졌다가 선명해지길 반복했고, 햇빛을 보다 깜빡 눈을 감았다 뜨면 해가 져 있었다. 갈수록 시간에 대한 관념도 사라졌으며, 갈증은 어느 순간부터 느껴지지 않았지만 대신 칼날들을 집어삼킨 듯 목구멍이 까슬했다.

그렇게 잠을 며칠씩이나 자지 않고, 제대로 물 한 모금 마신 적 없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날은 유독 개운했다. 아마 앉은 채로 본인도 모르게 선잠을 잤던 것 같다.

피로가 한계까지 쌓인 상태에서, 고작 선잠 좀 잤다고 개운하게 느껴진 것에 헛웃음을 지은 것도 잠시, 루인의 시선은 자연스레 제 옆에 누워 있는 모스에게로 향했다.

여태 그의 신경은 아닌 척 전부 모스에게 향해 있었다.

며칠간 작은 움직임 하나라도 잡고자 했고, 그의 작은 숨소리마저도 집요하게 붙들려고 한 이답게, 루인은 오늘도 어김없이 모스를 응시했다.

‘이건 무슨 냄새지?’

그때, 이상한 냄새를 맡은 루인이 인상을 구겼다. 쪽잠이라도 자서 상태가 나아진 탓일까. 그간 맡지 못했던 게 의문스러울 정도로 강한 썩은 내가 코를 찔렀다. 그쪽을 향해 살짝 고개를 돌린 그는 사용인들이 이전에 두고 간 음식이 썩어 있는 것을 그제야 발견했다.

윈스 제국은 늘 겨울이었기에 언제나 추운 곳이었다. 실내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아무리 따뜻하게 할지언정 그래도 공기는 어쩔 수 없이 차갑기 마련인데, 그 추운 나라에서 음식이 썩을 정도로 시간을 흘려보냈다니. 그는 뒤늦게서야 자신이 흘려보낸 시간이 여간 적은 게 아님을 깨닫고 헛웃음을 지었다.

“빌어먹을 괴물에게, 내가 대체….”

그때야 처음으로 루인의 얼굴에 표정이랄 게 생겼다.

생각해 보니 우습다. 대체 이 괴물이 뭐라고.

대체 이 괴물이 무엇이길래 자신이 이런 수모를 겪게 만드는 거지?

그냥 죽여서 햇빛에 녹여 없애 버리자.

그럼 이딴 말도 안 되는 불쾌함과 불안함, 초조함, 이유 모를 감정들도, 무의미하게 흘려보낸 시간들까지도 정리가 될 것이다.

그는 사냥하듯 모스의 목을 낚아채 꾹 눌렀다. 자신은 이 괴물을 위해 이득을 포기하고, 알고 있는 걸 침묵했건만, 이 괴물은 감히 자신에게 악을 지른 것도 모자라 눈을 뜨지 않고 있다니.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꽈아악, 살이 마찰되는 소리가 들린다.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자지 않은 이가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그의 눈은 흉흉하고 얼굴은 소름 끼칠 정도로 살벌했으며 악력이 여간내기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물끄러미 제 손에 들어찬 목을 응시했다. 한 손으로 부러트릴 수 있을 정도로 가는 목, 이 목을 꺾어 버린 뒤 흔적도 남지 않게 햇빛에 녹여 버릴 것이다.

‘진즉 이리 했어야 했다.’

자신이 이 자리에 앉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온 그 긴 시간 동안 거슬리던 이들이 살아 있는가? 다 죽여 버려 그 조잘대는 입과 면상을 흙 속에 묻어 버리고, 태워 버리고, 성벽에 걸어 버렸다. 그러니 진즉 자신도 제 제국을 위해서, 그리고 거슬리는 원인을 치워 버리기 위해서 이 괴물을 죽였어야 했다.

이젠 죽여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루인은 손에 힘을 더 주었다. 결심을 다진 그의 얼굴에 선득한 살기가 새겨지고, 정말 마지막이라는 듯이 표정에는 자비란 없었다.

그에게 목을 꺾는 일이란 마음만 먹는다면 한 손으로도 가능할 정도로 쉬운 일이었다. 순식간에 바짝 선 힘줄, 짙게 가라앉은 눈. 모스의 목덜미를 붙든 루인의 손이 점점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가 누른 곳이 붉어지며, 손가락이 깊게 들어갔다.

죽음의 색. 사람을 죽일 때 나오는 그 특유의 짙은 어둠이 방 안에 가득 찼지만, 창밖의 해는 여전히 굳건했다.

짙게 죽음의 색으로 물든 괴물은 햇빛에 녹을 것이다. 자신이 녹일 것이다.

얼굴조차 꼴 보기 싫으니 목을 꺾어 그 얼굴을 바닥에 짓뭉갠 채 녹여 버릴 것이라 생각하며 루인이 모스를 죽여 가던 그때.

『이…….』

멈칫.

루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부릅떠진 금안이 잘게 떨렸다. 목을 꾹 누르던 손에도 순간 놀라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느슨해진 손 사이로 빠르게 혈액이 돌아 목이 본래의 색으로 돌아갔지만, 루인은 그것에 집중할 수 없었다.

모스는 말문을 열 때, 말을 많이 안 해 본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굉장히 망설이며 제일 앞 글자를 꾹 눌러서 말하는 경향이 있었다. 더듬거리는 말투, 특유의 어눌한 발음.

『이…….』

루인이 기억하는, 괴물의 말투.

목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빠르게 올라가 모스의 얼굴로 향했다.

아. 이게 정답이었어?

답은 해가 아니었다는 것이 이해할 수 없기는 하지만 괜찮다. 결과적으로 원하던 결과를 얻게 되었으니.

목을 조르던 손이 느슨해지고, 사람을 하나 죽일 작정으로 덤벼들던 살기 어린 표정 또한 누그러졌고, 일그러지듯 굳게 다물린 입가 또한 본인도 제대로 의식할 수 없는 사이 유하게 뭉개졌다.

눈을 뜬 괴물은 자신을 향해 뭐라 할까. 목을 조르던 자신을 원망하려나?

하나 원망을 해도 상관없다. 제까짓 게 원망을 해 봤자 뭐 얼마나 하겠는가.

그러게, 일어나란 말을 잘 듣지 그랬어. 말만 잘 들었어도 이리 죽이려 들지는 않았을 텐데.

머릿속으로는 잔혹하게 생각을 하면서도 입술, 코, 그리고 눈을 향해 올라가는 시선은 확실히 방금 전보다 누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

모스의 눈을 확인하자마자 루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언제 누그러졌냐는 듯 얼굴에서 표정이 싹 사라졌다.

그는 상상했었다. 모스가 일어났을 때의 눈 모양을. 틀림없이 특유의 반쯤 감긴 눈으로 그 이끼색 눈동자에 잔뜩 눈물을 담고 있을 것이라고. 하나 그가 마주한 것은.

침묵.

모스는 그저 아까와 같았다. 목이 졸리기 전, 루인이 눕힌 그대로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고 굳게 닫힌 눈꺼풀은 미동조차 한 흔적이 없었으며, 입 또한 굳게 다물려 있었다.

루인은 그 침묵 속에서 가만히 모스를 응시하다 헛웃음을 지었다.

‘이제는 헛것까지 듣는 모양인가.’

참으로도 이상하지. 그에게는 틀림없이 모스의 목소리 같은 게 들렸고, 그건 결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선명했는데.

자신이 갈 데까지 갔나 싶어 절로 헛웃음이 나와 고개를 숙인 채 살기만 더해 가던 그때.

『으, 응?』

또다시 적막이 갈라졌다.

루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번에도 틀림없이 모스의 목소리인 것에, 크게 뜨인 루인의 눈이 빠르게 도로 모스의 얼굴에 닿았다.

그리고 그가 보게 된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나, 나는…….』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모스의 생기 어린 눈이었다.

축축하게 눌어붙은 이끼색 머리카락 사이로, 머리 색보다는 옅은 녹안이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하고 올망이며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과는 달리 새빨갛게 상기된 뺨, 살짝 겁에 질렸지만 그 사이로 보이는 가릴 수 없는 호기심. 괴물이라기보단 소년처럼 보이는 그가.

『인간의 시체를 묻어, 주는……이, 인간. 인간이야…요.』

더듬으며 자신을 소개하고 있었다.

루인은 순간 말문이 턱 막힌 듯 입을 살짝 벌린 채, 저를 보며 자신을 소개하는 모스를 향해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그래, 저런 얼굴도 있던 거 같다. 아니, 저런 얼굴도 있었다.

그간 이 궁에서 그가 매일 본 괴물은 늘 우울한 모습이었고, 매일같이 눈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으며, 생기가 없는 날이 더 많았지만.

제가 잊었던 기억 속 모스의 얼굴이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과 같았다.

다만 기분이 이상했다. 뺨을 저리 붉히며 호기심을 드러내는 얼굴 같은 건 이 황궁에서 본 적이 없었기에, 이리 코앞에서 보는 게 너무 낯설고 생소해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고 굳어 있던 그때, 모스는 말을 이었다.

『여기에 펴, 평생 있어도, 돼.』

루인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모스가 방금 전 호기심 어린 얼굴은 어디 가고, 순식간에 눈물이 가득 고인 얼굴로 휙 바뀌더니 제게 애원을 담아서 말을 하고 있었다.

순간순간 바뀌는 표정과 말들에 기시감과 위화감이 들었다. 그것에 루인이 미간을 살짝 좁히며 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사이 모스는 다시 휙 바뀌었다.

『나는 너, 인간, 너를 사랑해.』

그 순간, 루인의 갖은 생각들은 싹 사라졌다.

제게 사랑을 고하는 모스의 얼굴을 보는 지금, 기시감과 위화감은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이 하얘지며 가슴이 요동치듯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그 감각이 너무 낯설어서 어떠한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넋 놓고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던 그때, 돌연 기억을 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기억을 찾은 자신을 괴물이 알아채고 기억 속 머저리 같은 얼굴로 본다면, 자신은 어떻게 그를 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말이다.

당시에는 괴물에게 그딴 표정이 가당키나 하냐며 징그럽다 뭐라 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루인은 언제 그런 생각을 했냐는 듯, 뭐라 하고 싶은 마음도,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넋이 나간 듯 모스를 멍하니 바라보게 되었다.

『……응? 나, 나? 나는…….』

그사이 모스는 다시 표정이 휙 바뀌었다. 그는 보는 이가 답답할 정도로 우물우물 망설이며 말문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루인은 한동안 말없이 그 얼굴을 보다가.

“……하.”

기시감과 위화감의 정체를 손끝으로 기어코 붙드는 데 성공해 헛웃음을 지었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 피어난 그의 얼굴에는 허탈이 묻어 있었다.

그렇다. 사실 그는 아까 그 얼굴들도, 지금 저 얼굴도 알고 있었다.

모스가 저리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며 힘들게 말문을 열었던 그날이 바로.

『모, 모스.』

“모스.”

숲에서 모스가 처음으로 제게 이름을 알려 준 날이었으니까.

루인이 모스의 말을 따라잡음과 동시에 모스의 조잘거림이 멎었다. 그리고 다시금 루인은 침묵 속으로 잠겨 들었다. 방금 전 귀에 바짝 대고 떠들 듯 들리던 음성들과, 모스의 생기 가득한 얼굴들은 환상인 양 싹 사라져 있었다. 모스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을 빼고.

귀에 들이찰 정도로 옹알대던 모스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적막이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살심이란 게 언제 뻗어 나왔냐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남은 것이라곤 속이 쓰릴 정도의 공허와 이유 모를 느낌들이었다.

텅 빈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싼 루인이 이 말도 안 되는 과거의 환상을 본 스스로를 비웃었다. 처음에는 작게 속살대듯 내뱉던 헛웃음이 점점 커지더니 이내 큰 웃음으로 번졌다. 하하하, 그가 미친 듯이 웃었다. 말 그대로 미친 사람처럼 웃는 그의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한참을 웃던 그는 다시 모스를 죽일 것처럼 모스의 목에 아까처럼 손을 가져다 댔는데, 이내 목을 조르기는커녕 다시 손을 툭 풀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 하하. 하하.”

그는 이 상황이 정말 웃기다는 듯 목을 뒤로 꺾어 가면서 웃어 젖히고 있었다.

정말 괴상한 그림처럼, 둘의 모습은 이상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이의 목을 당장이라도 조를 것처럼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손, 하나 그것과 별개로 한껏 젖혀진 얼굴과 고개는 너무나도 즐거워 보였으니.

루인은 웃었다. 웃고 또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미친 듯이 울려 퍼지던 웃음소리는 어느 순간 예고 없이 뚝 멈추었다.

목을 뒤로 꺾은 자세로 웃음을 멈춘 그는, 눈을 꾹 감은 채로 한동안 가만히 있다 눈을 떴다. 웃음기란 하나도 없는 얼굴을 한 채 천천히 고개를 숙여 제 손을 응시했다.

“고작 기억 따위인 네가 감히 내게.”

벌벌 떨리고 있는 손.

“저걸 죽이지 말라고, 그리 말하고 싶은 거냐?”

목을 조르려고 들자, 아까와는 달리 손이 그리하면 안 된다는 듯 벌벌 떨린 것이다.

기억 따위가 감히, 감히. 그딴 환상을 보여 주면서까지 나를 막아?

루인은 그것에 반발이라도 하듯 어떻게든 모스를 죽이려는 이처럼 손에 힘을 주었다. 하나 손은 멀쩡하다가도 모스의 목 근처에만 가면 벌벌 떨렸다.

몸과 머리가 서로 따로 노는 듯, 제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손을 보던 루인은 돌연 고함을 내질렀다. 그리고 형체 없는 자신의 기억에게 악을 지르고 소리를 질렀다.

“형체도 없는 기억 주제에…!!”

고작 기억 따위가 자신을 막으려고 하냐며 이죽거리고 소리 질렀지만 여전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모스의 목에 가져다 댈 수 없는 손에 화가 난 루인은 그 분노를 담아 벽을 후려쳤다. 굉음과 함께 벽이 뭉개지고 순식간에 그의 손은 피범벅이 되었다.

손에 통증이 느껴질 텐데도, 루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미친 사람처럼 또다시 웃음을 터트리던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죽어.”

제 머리를 후려치고, 또 후려치는 것이었다.

기억이 있어 봤자 무엇을 하겠는가. 방해만 되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오히려 있어 봤자 거슬리기만 하는 그 기억을 마음 같아서는 다시 지워 버리고 싶었다. 그 마음을 담아 마치 사람을 하나 죽이듯 제 머리를 피범벅 된 손으로 후려치고, 후려쳤다. 보는 이가 질릴 정도로 지독한 행위였으나, 정작 그의 표정이 담담해서 더 소름 끼쳤다.

엄청난 악력으로 머리를 친지라, 일순 세상이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시야가 울렁였지만 루인의 분노를 내리누를 순 없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을까.

손은 이미 엉망을 넘어서 손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뻘겋게 부어올랐고, 머리에서 난 피가 귀 뒤를 축축이 적신 것도 모자라, 목덜미까지 적시기 시작한 그때.

우뚝.

그가 돌연 움직임을 멈추었다.

머리를 때리던 그 자세 그대로 움직임을 멈춘 그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이어 여전히 잠들 듯 누워 있는 모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모스는 아까와 다를 바 없는 자세였다. 평온하게 감긴 두 눈과 꾹 다물린 입은 아까와 같았으나, 루인에게는 달랐다.

루인은 자해하던 걸 멈추고 모스의 코앞에 제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머리에서 흐른 피가 눈썹뼈를 타고, 이어 코끝에 맺혀 툭, 투둑 모스의 얼굴로 떨어졌다.

“…….”

새하얀 얼굴에 떨어진 핏방울, 하나 루인은 그것을 바라보는 듯했지만 묘하게 시선이 비껴 있었다. 그는 느릿하게 모스의 가슴에 제 귀를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을 그의 가슴에 귀를 가져다 대고 있다가 일어났다.

“왜일까.”

그는 읊조리며 이상하다는 듯 제 귀를 툭툭 치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남들은 이 방이 지나칠 정도로 조용하다고 하겠지만, 루인은 달랐다. 그는 이 방 안의 적막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간 밤낮을 지새우며 꼿꼿하게 이곳에 앉아 있으면서 들었던 모스의 작은 심장 박동 소리가 그에게는 몹시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여전히 시끄럽냐고 묻는다면 그는 더는 그리 답할 수 없었다.

“안 들려.”

모스의 심장이 안 뛴다.

그는 비로소 적막을 느끼게 되었다.

적막 속에 갇힌 루인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가기 시작하더니, 돌연 작게 신음했다.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모스를 보는데, 기이한 감각이 몸을 감고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벌레가 제 위를 기어 다니는 듯한, 생소하고 기분 나쁜 감각에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그는 불편한 듯 제 목을 만지작거리더니, 이어 손끝으로 가벼이 목을 몇 번 긁다가 고개를 바짝 숙였다.

“으음…….”

그럼에도 답답하고 간지러운지 그는 계속 신음하며 인상을 구겼는데, 손은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느릿하게 목을 긁던 손가락의 움직임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불을 긁듯 가볍게 나던 소리가 이내 살점을 갉작이는 소리로 변하고, 손가락은 목을 좀먹는 벌레처럼 강하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보기만 해도 고통스러울 지경인데, 그럼에도 그는 눈을 단 한 번도 깜빡이지 않고 모스만을 응시한 채 제 목을 미친 듯이 긁었고, 그 결과 기어코 피를 보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짐승이 할퀸 양 깊게 나 있는 상처를 파먹듯 긁어 대자 손톱 사이에 살점이 꼈다.

뼈를 드러내야 직성이 풀릴 이처럼 미친 듯이 제 목을 긁는 루인의 얼굴은 지나칠 정도로 표정이 없어, 얼굴만 보자면 자신의 목을 저리 흉물스럽게 만든 당사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넋이 나간 얼굴로 계속해서 제 목을 긁었다. 하나 그 멈추지 않을 것만 같았던 행위는 모스에게로 피가 튀기자 멈추었다.

손을 멈춤과 동시에 목에서 흘러나온 뜨거운 피들이 가슴을 지나 배로 흘러가는 게 느껴졌지만 루인의 시선은 제 몸이 아닌, 여전히 모스에게 꽂혀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모스를 바라보다 또다시 느릿하게 고개를 숙여 모스의 가슴 쪽으로 제 머리를 가져다 댔다. 하지만.

“…….”

여전히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어 그는 모스의 심장 쪽에 바짝 제 귀를 붙였다. 하나 그럼에도 귀에 들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상하다. 평소 모스의 심장 소리는 귀를 이리 가져다 대지 않아도 선명하게 들리다 못해 조금 시끄럽기까지 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니.

게다가 고작 그 소리 하나 없다고, 적막이 유독 짙게 느껴졌다.

더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텅 빈 적막 속에서 그는 한참을 같은 자세로 미동 없이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어둠 속에서 제 표정을 숨기던 그는 느릿하게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더듬기 시작했다.

피로 얼룩진 그의 손이 얼굴 위로 그림을 그리듯 붉은 자국을 새겼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당장은 볼 수 없는 제 얼굴에서 무언가를 찾듯 더듬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손은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움직였다. 처음에는 제 눈썹을 더듬다가, 부릅뜬 눈을 갈라낼 듯 사납게 훑고는, 콧대를 더듬고 마지막으로 제 입술을 문지른 뒤,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옆으로 느슨하게 돌린 그의 얼굴은 놀라움과 두려움과 불신이 뒤섞인 표정이었는데, 그는 그 얼굴로 괴상하다는 듯이 읊조렸다.

“……무엇이 두려운 거지?”

아까부터 제 몸을 벌레처럼 타고 올라오던 것이 두려움이라는 감정임을 지금 깨달은 것이다.

그는 제가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제 얼굴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하지만 몇 번이고 손으로 제 얼굴 위를 덧그려 확인했으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떨리는 손, 일그러진 눈썹,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초조한 듯 가만히 두지 못하는 입술, 바짝 긴장된 몸. 이 모든 게 자신이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다른 이도 아닌, 윈스 제국의 황제인 자신이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니.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얼굴을 손끝으로 덧그렸지만, 떨림은 잦아들지 않았다.

“내가 두려워하고 있다고?”

그가 두려움을 느꼈던 건 까마득한 어린 시절뿐이었으며, 그 시절에 제게 두려움을 준 이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두려움을 느낄 대상도 없고, 두려움을 느낄 이유도 없는 제국의 황제인 자신이, 이토록 떨고 있다니.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 몸을 보고 인상을 구기던 그는 이어 낮게 신음하기 시작했다.

‘답답해.’

목이 또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루인은 이미 파낼 때로 파낸 제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또 긁으려다, 이내 멈칫했다.

그래, 옷.

옷이 있었다.

모스의 옷이 두꺼워서 소리가 들리지 않은 게 틀림없다.

루인은 무언가에 홀린 이처럼 모스의 옷을 찢듯이 벗기기 시작했다. 뜯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흰 가슴에 손을 올리자, 피로 물든 손이 모스의 새하얀 가슴 위로 깊게 상처라도 입힌 것 같은 자국을 남겼다. 그에 루인은 살짝 멈칫했으나, 이내 제 귀를 모스의 가슴팍에 바싹 붙였다. 그러고는 그보다 더 밀착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까이 붙인 귀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하지만.

“…….”

시간이 지나도 들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모스의 몸은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느껴지는 거라곤 오로지 침묵, 적막, 정적 뿐이었다.

마치 죽은 듯이.

그는 언제부터 떨렸는지 알 수 없는 손으로 급히 모스의 심장이 있는 쪽을 문질렀다. 문지르다, 제 귀를 갖다 대고, 다시 문지르다, 제 귀를 또 갖다 댔다. 지금 자신이 하는 게 무의미한 행동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 터인데, 여태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행동을 그토록 경멸하던 이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그는 무의미한 행동을 계속 반복했다.

그사이 시간은 또다시 빠르게 흘렀다.

해는 언제 떴었냐는 듯 저물었고, 어느덧 어둠이 창가에 스멀스멀 기어들어 왔다. 하나 그때까지도, 그는 같은 동작밖에 할 줄 모르는 이처럼 모스의 가슴을 문지르고, 또 문지를 뿐이었다.

어느덧 시꺼멓게 물든 방 안, 그는 천천히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히 가슴에 손을 올린 채로 빤히 모스를 응시했다.

창백한 얼굴, 굳게 닫힌 눈, 뛰지 않는 심장.

이상하다.

죽을 리가 없을 텐데.

자신은 그를 햇빛에 더 녹이지도 않았고, 목을 조르지도 않았고, 크게 피를 낸 것도 없었고, 아무것도 한 게 없었는데, 왜 죽은 걸까.

루인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여전히 같은 자세로 미동 없이 누워 있는 모스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죽은 건가?”

적막을 가르고, 그리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이란 없었다. 애초에 죽은 이가 답을 할 리가 없었다.

그는 해가 곧 떠오를 것처럼 밝아지는 창을 바라보다가 모스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불을 들어 제 품에 안긴 모스의 위에 덮었다. 덕분에 축축이 젖은 시뻘건 루인의 앞섶도 조금 가려졌다. 그렇게 모스를 안아 든 루인은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을 열었다.

발을 내딛자, 채 멎지 못한 핏물이 손등을 타고 떨어져 바닥을 물들였지만 루인은 앞만 보았다. 그는 어두운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뒤늦게 황제의 인기척을 느낀 사용인들이 허둥지둥 복도로 나와 루인의 앞에 고개를 숙였으나, 루인은 그들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그는 그저 넋을 놓은 이처럼 걸어갈 뿐이었다.

추운 날이었다. 이 빌어먹을 제국에 추운 날이야 하루 이틀도 아니지만, 이날은 지나칠 정도로 추워 카를마저도 이를 꽉 깨물게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카를은 방금 들어온 보고를 무시할 수 없었다. 다급한 얼굴로 빠르게 걷던 카를은 드디어 만나야 하는 이의 앞에 도착했으나.

“폐하, 이게 대체 무슨…….”

카를의 입 밖으로 뿌연 입김이 퍼졌다. 그는 허망하게 제 앞에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과연 저 모습을 보고 누가 그를 윈스 제국의 황제, 루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황제의 몰골은 성하다고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목은 몬스터의 습격이라도 받은 양 시뻘겋게 피에 절여져 있었으며, 살점은 너덜거렸고. 거칠지언정 언제나 희고 곧았던 손은 시뻘겋게 물들어 마치 붉은 장갑이라도 낀 것처럼 보였다.

발은 또 어떻고. 더러운 것을 싫어하다 못해 멸시하던 이가 맞는지, 맨발로 눈을 밟고 있었다. 또한 이 추운 날씨에 앞섶도 제대로 정돈하지 않은 채였고, 걸친 것도 없었다.

차마 말을 이을 수 없는, 거의 처음 보는 황제의 모습에 카를이 말을 못 잇고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얼어붙은 가운데, 황제가 입을 벌렸다.

“……심장이 안 뛴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어둡고, 가라앉아 있었다.

“박동은 컸다. 방 안을 꽉 채울 정도로 컸어. 너무 시끄러워서 제대로 잠도 잘 수 없을 지경으로 컸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카를은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단 한 가지, 품속에 있는 이가 모스임을 직감하고 표정이 굳었다. 그사이, 루인은 카를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않고, 계속해서 말을 잇고 있었다.

“죽은 걸까? 하지만 괴물인데. 목을 졸라도 죽지 않고, 검을 목에 욱여넣어도 살아 돌아왔고, 다리를 꺾어도 괜찮았잖아. 애초에 해에 완전히 녹지 않으면 죽지 않는 괴물인데, 그래. 괴물이야. 한데, 왜? 왜 심장이 안 뛰지?”

“폐하.”

“왜 죽은 거지? 이해가 안 가. 심장을 꺼내 보면 될까? 카를, 의원을 불러. 당장 부를 수 있는 의원이 있나? 그자를 당장 불러서…….”

“폐하!!”

황제의 눈은 텅 비었으며 몸은 당장이라도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핏기 하나 없이 얼어붙어 있었음에도, 그는 계속해서 말을 내뱉고 있었다.

게다가 평소 그토록 논리정연하게 말하던 황제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두서 또한 없었다.

“진정하십시오!”

저런 모습은 여태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카를은 루인이 제 몸에 손대는 것을 싫어하는 걸 알았지만 허둥지둥 달려가서 제 손수건을 피로 젖은 루인의 목에 얹은 뒤, 얼른 제 신발을 벗어 내밀었다.

“시, 신이라도 신으세요. 제 신을 드리겠습니다. 이거라도 신고 말씀을 다시…….”

하지만 루인은 카를을 거들떠보지 않고 지나쳤다.

“폐하!!”

그새 피로 흠뻑 젖은 손수건이 바닥을 나뒹굴었지만 주울 새가 없었다. 카를은 급히 황제의 뒤를 쫓았다. 황제의 발걸음은 지독히도 빨라, 카를은 그를 간신히 따라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황제는 여전히 어딘가 넋을 놓은 이처럼 허공을 보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을 하고 또 해 보아도 이해가 가지 않아. 목을 내가 너무 세게 조른 건가? 하나, 그걸로 죽지 않는 몸이었다. 난 뼈를 꺾지도 않았고, 기억이 환각을 내보여 제대로 조르지도 못했으니 그건 확실해. 하면, 왜 이러는 거지? 왜 죽었을까. 왜 죽었어? 왜 죽었어?? 왜 갑자기 이러는 거지? 이해가 되질 않아. 이해가 되지 않아. 정답은 뭐지?”

카를은 말문을 잃고 멍하니 황제를 보았다.

황제는 미친 사람처럼 계속 말을 하고 있었는데,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발 정신을 차리십시오!!”

결국 카를이 견디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며 황제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결과 드디어 황제와 눈이 마주할 수 있었으나, 카를은 섬뜩함에 제대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왜 죽은 걸까?”

황제는 고장 난 인형처럼 되물었다.

“햇빛에 안 녹였어. 녹이지 않으면 죽지 않잖아. 괴물이잖아. 근데 왜? 왜 죽은 걸까?”

섬뜩했다. 어딘가 혼이 나간 이처럼, 넋이 빠진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카를도 당황해 순간 하려던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 일단, 제가 들겠습니다.”

카를은 이대로 두면 황제가 이 추위 속에서 넋이 나간 채 계속 서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서둘러 이 상황을 수습하고자 했다.

하지만 모스를 넘겨받으려 내뻗은 카를의 손은 아주 냉정하게 내쳐졌다. 모스에게 채 닿기도 전에 카를의 손을 루인이 거부하듯 쳐 낸 것이다.

“폐하. 일단 황궁으로 가시지요. 폐하가 말씀하신 대로 심장 소리가 들리는지, 의원을 불러 확인하면 되지 않습니까…….”

카를은 초조했다. 황제의 상태를 보니, 그를 황궁으로 최대한 빨리 모시는 게 가장 먼저였다.

그는 황급히 황제의 피투성이 목을 가리듯 제 옷으로 덮고, 서둘러 그를 황궁으로 에스코트했다.

이번에는 황제가 카를의 뜻대로 황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카를은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사용인들을 시켜 침실을 데우고 의원을 부르라고 한 뒤, 뒷수습을 하려는 듯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사이 황제는 카를이 이끄는 대로 따뜻한 불 앞에 가서 앉았다.

타닥타닥, 장작이 타는 소리만 방 안을 채우는 가운데, 황제는 모스를 품에 안은 채 말없이 불 앞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불길이 일렁일 때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같이 일렁였다. 황제는 끝끝내 모스를 바닥에 내려놓지 않고 제 품속에 꽉 껴안고 있었다.

“…….”

일렁이는 불길을 보는 루인의 창백한 얼굴에 드디어 혈색이 돌기 시작했으나, 그것과 별개로 표정이랄게 지나치게 없어 눈 뜬 시체처럼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생각을 하긴 하는지, 넋을 놓은 듯 가만히 있는 루인의 얼굴에 카를은 차마 말을 붙일 수 없었다.

황제는, 제게 죽음의 그림자가 바투 붙었을 때도 저리 넋을 놓지 않았다.

모두가 끝났다며 한탄할 때도, 홀로 웃었던 이다.

제가 모시던 황제란, 그런 이였는데.

지금 루인은 그간 제가 알던 그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저런 얼굴과 표정은 처음 보는 것이라 생각하며 카를이 움직이지도 못하고 멍하니 루인을 보던 그때, 루인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그의 시선 끝에는 여전히 흰 천을 뒤집어씌운 모스가 있었다. 제 품속에 있는 이를 빤히 바라보던 루인이 피로 물든 손으로 그 흰 천을 거두었다.

느릿하게 천이 걷어지며 모스의 얼굴이 천천히 드러났다. 그걸 본 카를은 저도 모르게 새 나올 뻔한 탄식을 삼켰다.

지금 자신이 본 천 아래의 모스는, 정말이지…… 시체 같았다.

창백한 피부는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을 더 생기 없어 보이게 만들었고, 축 늘어진 몸과 가누지 못해 힘없이 꺾인 목은 정말 전쟁통에서 보던 시체처럼 보였다.

결코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이가 저리 시체처럼 누워 있으니, 묘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건 얼마 지나지 않아 경악으로 바뀌었다.

‘말도 안 돼.’

너무 인간답지 않아서 귀신 황제라고도 불리는 황제, 루인 윈스가.

그 황제가, 모스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것도 모자라, 품속에 있는 게 소중한 이라도 된다는 듯, 불편한 자세로도 모스를 놓지 않고 얼굴을 손끝으로 쓰다듬듯 훑는 것이다.

그건 카를이 이해할 수도,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모습이었다. 그는 황제의 저런 모습을 살아생전 자신이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제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경멸했다. 그는 인간에 대해 지독한 불신을 가지고 있었고, 사람을 사람으로 보기보단 도구로 이용하는 데 능한 사람이다. 게다가 그는 사람과 닿는 것을 몹시 싫어하고, 더러운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데 그 황제가 천것이라 부르던, 경멸해 마지않던 괴물을 껴안고 저리 굴다니.

심지어 모스를 데려오기 전, 그는 만약 모스가 죽었다면 아쉬운 대로 모스의 해골에 좆을 박겠다고 말한 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만약 모스가 심장이 안 뛴다 한들, 황제는 단순히 모스에게 몸만을 원했기에 상관이 없는 거 아닌가? 한데 지금 황제의 모습은 마치…….

‘연인 같지 않은가….’

황제의 몸 상태는 얼핏 보기에도 정상이 아니었다.

물론 전쟁통에서 보았을 때와는 비교할 바가 되지 않았지만, 어찌 되었건 그의 머리는 피로 얼룩져 있고 목은 말할 것도 없으며 손도 엉망이었다. 한데 그런 자신의 몸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오로지 모스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카를이 처음 보는 황제의 모습에 혼란스러워하던 그때, 문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들렸다.

“폐하, 의원이 도착했습니다!”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카를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국의 태,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어느 분을 제가 진찰하면 되는지요?”

의원은 바짝 긴장한 채로 들어와서 황제를 향해 크게 인사를 했다. 황제는 의원이 들어와 인사를 할 때까지도 답을 하지 않았지만, 무릎 꿇은 의원의 앞에 모스를 내려놓았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의원은 제가 진찰해야 할 이가 모스임을 바로 눈치챘다. 분위기가 영 살벌하니, 그는 가타부타 말을 덧붙이지 않고 곧바로 모스를 진찰하기 시작했다.

진찰은 빨랐다. 아마 황제와 카를이 한 공간에 함께 있기도 했고, 자신을 쳐다보는 황제의 시선이 뜨거워서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던 마음도 컸을 것이다.

황제는 의원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바삐 쫓는 이처럼 그를 계속 바라보았고, 의원은 그 시선에 손에 바짝 힘을 주고 집중해서 진찰을 했다.

“다 됐습니다.”

도구를 가방에 넣으며 의원이 고개를 숙이자 옆에 서 있던 카를이 “살아 있나?”라고 물었다. 의원은 살아 있냐는 말에 의아한 듯 고개를 살짝 기울이곤 이내 위아래로 끄덕이며 말했다.

“예. 다 살펴보았는데, 반응이 전체적으로 약한 것은 맞습니다만, 틀림없이 살아…….”

“살아 있다고? 한데 심장이 뛰질 않던데.”

하나 의원은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대뜸 의원의 말을 자르며, 황제가 입을 연 것이다.

그리고 그 기세는 여간내기의 것이 아니었다. 여태 살기를 어찌 숨긴 것인지, 가리려야 가릴 수가 없을 정도로 짙은 농도의 살기가 의원을 찍어 눌렀다.

“아, 아닙니다!”

의원은 사색이 된 채 소리 질렀다.

“보통 사람들보다는 옅지만 틀림없이 심장이 뛰고 있습니다. 숨 또한 자세히 듣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지만, 쉬고 계시고요!”

의원이 허둥지둥 자리에 주저앉은 채, 제가 쥐고 있는 장비들을 내밀었다.

“이, 이것으로 심장 박동을 잡을 수 있습니다! 제가 최대로 소리를 키워 들려 드리겠…… 아!”

“짐이 하겠다.”

루인은 의원이 내민 장비를 낚아채듯 제 손으로 가져왔다. 장비의 가격이 가격인지라, 의원은 그런 루인의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그에게 심장 박동 소리를 어찌 듣는지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모스의 몸에 장비를 댄 황제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다시 바짝 모스의 가슴 쪽에 가까이 갔는데…….

“들리시지요?”

쿵쿵.

들리지 않던 박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모스의 가슴에 댄 장비에서 난 소리는 옆에 바짝 붙어 있는 카를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반응이 전체적으로 약한 것은 맞습니다만, 틀림없이 살아계십니다. 신체 반응은 정상적이니 아마 조금만 더 지켜보시면 일어나실 거고요, 그러니 큰 걱정을 안 하셔도…….”

의원은 설명을 보충하듯 주절주절 말을 이었으나, 카를은 의원의 말에 하나도 집중할 수 없었다. 모스의 심장 소리를 듣는 황제의 표정이 달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방금 전만 해도 전쟁을 코앞에 둔 이처럼 바짝 긴장했던 황제의 얼굴은 느릿하지만 녹기 시작했고, 그의 입매는 아까보다 누그러졌으며 반쯤 제정신이 아닌 것만 같던 눈 또한 원래 알던 대로 돌아온 것도 모자라서.

“그래.”

웃었다.

“들려.”

모스의 가슴에 귀를 바짝 댄 채, 웃는 황제의 얼굴.

그건 정말 기묘한 얼굴이었다.

황제가 짓는 웃음이란 늘 누군가를 비웃기 위한 것이었고, 설령 웃는 것이라 하더라도 전혀 웃는 느낌이 들지 않는 비틀린 미소였다. 하나 지금은 그런 웃음들과 비교할 바가 되지 않았다.

루인의 눈은 정말 기쁘다는 듯 휘어졌으며, 늘 딱딱하게 굳어 있던 입매 또한 지금만큼은 허물어졌다. 마치, 안도라도 하듯이.

하지만 그 웃음, 그 안도는 얼마 가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나흘이 지나고, 열흘이 흐르고,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다 될 때까지도.

“오늘도 일어나지 않은 겁니까?”

모스는 일어나지 않았다.

마음의 문제일 수 있다는 의원들의 조언대로 모스가 좋아하는 것들을 죄다 방 안으로 끌고 들어와도 소용없었다.

그렇게 약 두 달째가 되고 세 달이 다 되어 가던 그날.

“지금, 이게.”

황제가 아주 잠시, 오베리안과 세실리 왕국의 전쟁 문제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와서 보게 된 모습은….

“뭐 하는 짓이지?!”

맨손으로 나무판자를 뜯어내고, 햇빛에 제 몸을 녹이려고 달려드는 모스였다.

***

눈을 떴을 때, 내가 본 것은 출렁이는 물결이었다.

나는 물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괴물인 나는 물에 빠져도 죽지 않았고, 그건 죽는 것보다 훨씬 더 괴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익사로도 죽을 수 없다는 건, 삶의 시작으로부터 몇 해 안 지났을 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숲에서 혼자 지내는 내가 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홀로 숲을 돌아다니고, 또 돌아다녔다. 그렇게 한참 돌아다니다가 실수로 연못에 빠진 적이 있었다.

한데, 나는 수영을 할 줄 몰라, 차마 그곳에서 헤엄쳐 나올 수 없었다. 물에 깊게 빠지자마자 눈을 떴으나, 보이는 건 없었다. 사위가 온통 검었다.

내가 움직일 수 있는 때라곤 오로지 밤 뿐이기에, 시꺼먼 밤의 연못은 한 치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게 당연했다. 그리하여 나는 허우적거리며 수면 아래로 계속해서 잠겨 들어갔었다.

하지만 아무리 내려가도, 내려가도. 내 속으로 물이 꽉꽉 들어차도. 나는 무거운 돌처럼 바닥에 가라앉을 뿐이지, 온전히 죽을 줄을 모르는 몸이었다.

바닥에 닿는 그 순간까지 몇 번을 죽었는가.

숨을 못 쉬어서 죽고, 이윽고 눈을 뜨고 발버둥 치다 죽고, 바닥을 손톱으로 긁으며 일어나다가 죽고.

죽고, 죽고, 또 죽어도 물속이었다.

나는 수도 없이 많은 죽음을 겪고 나서야 간신히 수면 위에 다다를 수 있었다. 우습게도 그때 나를 살린 건 햇빛이었다. 수면에 스며든 햇빛을 보고 길이 트인 덕에, 몸이 일부 녹더라도 그 지옥 같은 물속에서 벗어날 수 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물을 무서워했고, 물에 깊게 빠지는 건 더 무서워했기에.

‘물속?’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는 지금 가라앉고 있었다. 그날 밤의 연못보다도 더 어두웠고, 팔을 아무리 휘저어도 무거운 짐을 대롱대롱 사지에 매단 이처럼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내가 왜 물속이지? 내가 어쩌다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이지? 당황함에 살짝 허우적거리며 그리 생각했으나.

‘……가고 싶지 않아.’

돌연 그런 생각이 들며, 모든 움직임을 우뚝 멈추게 되었다.

내가 이곳에 어쩌다 다다르게 되었는지, 지금 상황은 무엇인지,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기억나는 것은 없었지만 원래 있던 곳으로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 하나가 또렷하게 떠오른 것이다.

그러기에 몸에 힘을 쭉 풀었다.

그토록 무서워했던 물속이라도,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캄캄한 물속으로 안겨 들 듯, 내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겁쟁이고 물을 무서워하던 내가 왜 이리 구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눈을 감으니, 물속이란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편안했다. 이리 가만히 있으니, 마치 쉬지 않고 달려오다 간신히 안식에 이른 이처럼 편안했기에 나는 눈을 감고 계속 가라앉았다.

【……어나.】

가라앉고, 또 가라앉는데.

중간중간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일어나라는 듯, 내게 소리치는 목소리.

처음에는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게 들렸지만, 가라앉으면 가라앉을수록 머릿속이 새하얘져 더는 그가 누구인지 추측조차 하지 못했다.

다만 이상한 점은 있었다. 물 너머의 그가 나를 향해 소리지를 때마다, 나를 촘촘하게 감싼 물이 요동치는 게 느껴진 것이다. 하나 그럴 때마다 나는 눈을 더 꽉 감았다.

이 안식을 방해하려는 건 그게 무엇이든 듣고 싶지 않았다.

【일어나라고.】

【눈을 떠.】

하지만 소리는 꾸준히 들렸다. 그는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 말을 걸어, 나의 안식을 방해했다.

【너는…….】

목소리가 갈수록 애절해졌던 거 같기도 하다. 어찌나 애절했는지,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거릴 만큼. 하지만 나는 눈을 뜨는 대신 뱀처럼 몸을 더 깊게 말았다.

그만해.

나는 너무 지쳤어.

대체 무엇에 지쳤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고, 무엇이 그리 힘들었는지도 잘 알 수 없었다. 지금 날 애타게 부르는 이가 누구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귀를 막고 계속해서 가라앉았다.

그토록 무서워하던 물속이라는 것도 잊은 양, 그렇게 가라앉고 또 가라앉고, 또 가라앉은 끝에…….

툭, 가장 밑바닥에 닿았다.

등이 땅에 닿고 나서야 느릿하게 눈을 떴다.

사위가 미친 듯이 컴컴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여기저기서 빛줄기가 내려와 있었다.

뻐끔, 입을 나도 모르게 움직이자 입술 새로 투명한 물방울이 와르르 뱉어졌다. 보글거리며 위로, 더 위로 올라가는 물방울은 아름다웠다. 시선을 빼앗긴 채, 멍하니 그걸 보는데, 그때 무언가가 팔에 치였다.

나는 어리둥절한 낯으로 옆을 보았다.

‘……인간?’

내 바로 옆에 작은 몸이 웅크리고 있었는데, 복장이 특이해서 나도 모르게 빤히 응시하게 되었다.

처음 보는 형태의 복장이었다. 굉장히 오래전 유행을 하던 복장 같기도 하고, 유독 낯이 익기도 해서 그걸 빤히 보며 시선을 움직이다, 인간이 꽉 쥐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검붉고 동그란 것. 무언가가 그것에 꽂혀 있었다. 저게 무엇인지 궁금해서 고개를 숙이는데.

“잊었니?”

인간이 대뜸 말을 하며 눈을 반짝 떴다.

마주한 눈은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날 정도로 선명했다. 그 선연한 눈빛에 놀라 헛숨을 들이켜며 몸을 뒤로 무르는데, 인간은 눈을 부릅뜬 채로 나를 응시하다 돌연 눈물을 흘렸다.

“왜 잊었어?”

그 얼굴은 너무 슬퍼 보였다. 보는 이가 다 슬플 정도로 한동안 슬피 눈물을 흘리던 그는 제가 꼭 쥐고 있던 것을 내게 내밀었다.

“잊으면 안 되는 거잖아.”

그것은…… 심장이었다.

“너는 잊지 말았어야지.”

심장에는 단도가 꽂혀 있었는데 당장이라도 피비린내가 날 것처럼 시뻘건 색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제 앞에 내민 채, 인간은 계속 울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잊으면 안 됐어. 잊지 말라고 했잖아. 잊으면 안 된다고.”

애원하듯, 원망하듯, 그렇게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나를 보는 그 얼굴.

그래, 그 얼굴. 낯익은 그 얼굴은.

“너를 위해서라도.”

나였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단도에 박힌 심장을 내게 내민 채, 당장이라도 누군가가 구해 주지 않으면 죽을 이처럼 숨넘어갈 듯 눈물을 흘리며, 원망하듯 바라보는 인간은 틀림없이 나였다.

울지 마.

너무 서글프게 울어서 저게 나임을 알면서도 그리 달래 주고 싶었다.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리지만, 그 안에는 차마 아이의 것이라 할 수 없는 온갖 슬픔이 웅크리고 있었고 그게 물결 너머로 느껴졌다. 그 슬픔의 크기를 감히 헤아릴 수 없어, 지켜보던 나도 눈물이 절로 나올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비통하도록 나를 향해 원망하고, 원망하고, 또 원망하다 천천히 제게로 다가오는 햇빛에 닿더니 녹아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눈물을 흘리며 사라진 ‘나’, 그리고 덩그러니 남은 심장과 단도 하나.

나는 나도 모르게 주춤이다 그것들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하나, 햇빛이란 늘 그랬듯 내 편이 아니어서, 어느새 내 손끝엔 햇빛이 있었다. 손끝에 닿은 햇빛은 번지듯이 나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나는.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지?!”

햇빛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모스!!!”

녹아야 해.

잠에서 깬 내 머릿속에는 그 생각만이 가득했다. 녹지 않는다면 큰일이 난다고 생각한 나는 나를 붙잡으려는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더 가까이, 더 많이 내 몸을 녹일 수 있도록 손을 내뻗었다.

“너…!”

그런 나를 누군가가 뒤에서 낚아채듯 잡아당겨서 끌어안았고, 나는 한껏 벌린 팔로 햇빛을 안으려고 했으나, 소용없었다. 나를 끌어당기는 인간의 억센 힘에 질질 끌려가는 바람에 고작 햇빛에 스치듯 손이 닿은 게 다였다.

“뭐 하는 짓이냐고, 물었어!!!”

귓가에서 고함이 웅웅거렸지만 무슨 말인지 정확히 들리진 않았다. 그저 내 시선은 아래로 떨어질 뿐이었다. 그새 햇빛에 녹았는지, 내 손 대신 있는 건 텅 빈 허공이었다.

“모스! 나를……!!”

옆에서 인간이 소리를 지르며 내 턱을 붙들고 뭐라 말했지만, 이젠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여전히 물속에 잠긴 양, 귀가 먹먹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응달로 들어왔다고 그새 꾸물거리며 붙어 가는 뼈, 근육, 살점들…… 그것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이내 저 멀리 창과 번갈아 보았다.

창은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인간들에 의해 나무판자로 덮이고 있었다. 그들이 빠르게 창을 다 틀어막자, 햇빛은 한 줌도 들어오지 않았다.

시꺼먼 어둠, 내게 소리 지르는 인간, 우르르 들어왔다 다시 우르르 나가는 인간들. 하지만 그 무엇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저.

“노, 녹았어야 했는데.”

아쉬울 뿐이었다.

내가 왜 녹아야 하는지, 내가 왜 이러는지, 하나도 알 수 없었지만 미친 듯이 아쉬웠고, 안타까웠다. 나는 그저 그새 재생된 손을 꼼지락거리며, 아쉬워하다 눈앞에 바짝 다가온 어둠과 직면하게 되었다.

“모, 스!!!”

나를 붙든 인간이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지만, 이내 그 소리는 적막한 어둠에 짓눌려 납작해졌다. 다시금 찾아온 고요, 나는 나를 해일처럼 집어삼키는 물속으로 저항을 모르듯 잠겨 들어 눈을 감았다.

평온한 물밑이었다.

***

긴 시간 얼어붙은 모양인지, 눈마저 소복하게 쌓인, 호수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얼음 바닥을 빤히 보는 이가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수북하게 쌓인 눈과 별 차이를 보이지 않는 새하얀 은발에 가까웠으며, 눈은 시리디시린 깊은 호수처럼 새파랬다.

“황태제 전하.”

그 특이한 외양을 가진 이는 근래 황제를 대신해 섭정을 맡느라 정신이 없는 치테이르 황태제였다.

가만히 있어도 절로 눈에 물이 맺힐 정도로 춥다. 치테이르는 살짝 충혈된 눈으로 느릿하게 시선을 굴리다가 고개를 약간 기울이고는, 제 옆에 서 있는 신관에게 물었다.

“이 호수입니까?”

치테이르의 턱 끝이 가리키는 것은 꽁꽁 언 호수였다. 치테이르의 옆에 나란히 서 있던 신관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거의 동시였다.

“예. 고대 문헌에 따르면, 이곳이 바로…….”

신관이 주저앉더니 제 손끝으로 툭툭 호수를 두드렸다.

“마왕을 죽인 용사의 마지막 발자국이 끊긴 곳, 성지(聖地)라 불리는 곳입니다.”

“뭔 성지가 이럽니까.”

치테이르는 소문으로만 내려오던, 마왕을 죽인 위대한 용사가 죽은 성지가 그저 황량한 얼음 호수일 뿐이란 게 퍽 황당한지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당시 갑자기 찾아온 겨울에 수많은 사람이 동사하고, 급격한 식량 부족을 겪었던지라 수습을 못 했을 겁니다.”

“여태까지?”

“아, 아무래도 이곳은 외진 곳이고- 유독 추워서…….”

신관이 머쓱해하며 최대한 좋게 답하려 했지만, 속뜻이야 뻔했다. 그냥 자기들 먹고살기 급급하니, 영웅이고 뭐고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는 말이었다.

“아무튼 이래서 용사에 대한 기록이 절망적일 정도로 없는 것이군요.”

“예. 마왕 토벌 직후, 갑작스레 겨울이 닥쳐온 것도 그랬지만 용사의 움직임이 애초에 은밀했다고 해야 할까요. 마왕을 토벌한 직후,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연기처럼 사라졌으니. 그 누구도 그의 신원, 이름,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요.”

“용사에게도 일행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들 또한 다 실종되었습니다. 아마 죽은 거겠죠. 남은 흔적이 있다면 이 호수로 들어간 것으로 추측되는 얼어붙은 발자국… 그리고 대규모 전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흔적들뿐이라고 하더군요.”

“그 발자국이 어떻게 용사의 것이라 확신하죠?”

“이 근처에 마왕의 터가 있었으니까요. 용사 말고 누가 이 호수를 올까요.”

“그 이후로는요?”

“짐승들 말고는 딱히 없습니다만, 아! 옛날에는 가끔 제정신이 아닌 이들이 뭘 찾는다고 이 성지를 오간다고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사람조차 없어서…….”

말끝을 흐리는 걸 보니 제대로 아는 게 없거나, 썩 중요한 내용이 아니라는 뜻이다. 치테이르는 신관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호수를 응시했다.

여긴 말로만 성지이지, 그냥 호수나 다름없이 보였다. 용사는 무려 온갖 몬스터들을 조종하던 마왕을 죽인 역사적인 인물인데, 그 인물의 역사는 겨울에 묻혀 버린 모양이라며 치테이르가 짧게 혀를 차자, 신관이 맞장구를 치다 물었다.

“그나저나 황태제 전하께서는 무슨 일로, 이 성지를 안내해 달라고 제게…….”

“아.”

치테이르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게 성지라면 좀 파 볼까, 하고.”

“……예?”

신관이 어리둥절한 낯으로 서 있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대체 방금 제가 무엇을 들은 것인지 모르겠다는 듯, 당황스러워하는 신관을 둔 채, 치테이르는 그저 담담히 뒤를 돌며 말할 뿐이었다.

“다 올라오라고 해.”

“예, 알겠습니다!”

보좌관이 고개를 끄덕이자, 갑자기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추운 날씨에 눈도 제대로 못 뜬 신관은 이게 무슨 일인지 파악을 하지 못하다가, 이어 치테이르의 뒤로 보이는 수많은 이들을 보고 경악했다.

“저게, 무슨.”

무려 백 명이 넘는, 곰같이 체구가 큰 이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치테이르가 데려온 이들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는데, 그건 죄다 날카로운 곡괭이였다.

그리고 그들은 들고 있던 것들을 가지고 돌연 깡깡 얼어붙은 호수를 내려찍기 시작했다. 그것에 여태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하던 신관이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아니, 성지에 무슨 짓입니까!”

신관이 경악하며 치테이르를 말리려 했지만 그를 말릴 수는 없었다. 오히려 치테이르는 멈칫한 인부들에게 태연스레 손짓하며 서두르라는 명을 내릴 뿐이었다.

“뭐 합니까? 뚫어.”

“황태제 전하!!”

신관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으나, 치테이르는 그런 신관을 치워 버리라는 듯 손짓하고는 뒤돌 뿐이었다.

“성지를 훼손해서는 안 됩니다!!!”

신관은 끌려가는 내내 목에서 핏덩이를 내뱉을 것처럼 소리쳤으나, 그것은 치테이르에게 닿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치테이르는 메아리치듯 울리는 신관의 목소리를 무시하듯 어깨를 으쓱이고는 하품하며 물을 뿐이었다.

“얼마나 걸릴 거 같지?”

“족히 한 달은 걸릴 거 같습…….”

“한 달?”

몇백 년간 언 호수가 쇠질 조금 한다고 밑바닥을 바로 드러낼 일은 없었다. 치테이르가 눈썹을 까딱이더니 보좌관에게 인원을 세 배로 늘리라고 했다.

“이리하면 얼마나 걸리지?”

“호수의 깊이를 봐야 알겠습니다만…….”

인부들을 통솔하는 대장이 머뭇거리며 말하자 날 선 치테이르의 시선이 떨어졌다. 그는 치테이르의 살기 어린 눈에 고개를 납작 숙이고는 “어떻게든 되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했고, 그것에 치테이르는 흡족한 양 살기를 거두었다.

“가지.”

치테이르가 뒤를 돌아 마차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인부들을 보며 정신없이 손을 움직이던 보좌관도 치테이르의 움직임에 화들짝 놀라며 그의 뒤에 바짝 붙었다.

“황태제 전하. 근데 갑자기 이곳은 왜 찾은 것입니까?”

치테이르는 보좌관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듯 침묵을 지키다 “자네도 아는 게 좋겠지?”라며 말문을 열었다.

“그때 그 신탁 말이야.”

“신탁?”

“응. 형님이 사라지기 전 들었던 신탁.”

치테이르는 마차에 올라타며 말했다. 기다렸다는 듯 따뜻한 훈기가 치테이르의 몸을 휘감았고, 보좌관은 앉자마자 서둘러 마차의 문을 닫았다.

조용해진 가운데, 마차가 출발하자 치테이르가 입을 열었다.

“그날, 대신관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잖아? 근데 자네도 알다시피 신탁은 계시를 받은 형님과 대신관 말고는 발설할 수 없잖아.”

“예, 그때 뭐…… 대신관은 신탁에 대해 발설 자체가 안 되는 이처럼 혀가 굳지 않았습니까.”

“어. 근데 내가 고대 금서를 뒤지다 보니, 옛날에는 성물의 힘을 지니면 신이 눈을 잠시 감아 줘서 그때 살짝 발설이 가능하다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용사가 신탁을 말해 일행들을 모을 수 있었던 거라고 하는 추측이 있던데.”

보좌관이 눈을 크게 떴다.

황제가 실종된 후, 함께 신탁을 들은 대신관을 찾아 모두가 신탁의 내용을 말하라고 했지만, 대신관은 신탁을 발설하면 자신이 죽는다며 입을 꾹 다물었고, 억지로 입을 벌리게 만들었을 때는 혀가 돌처럼 뻣뻣하게 굳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었다.

“그렇다면 이곳에 온 게…….”

“그래. 용사의 성물. 그걸 좀 구해 보려고.”

치테이르는 그럼 신탁의 내용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말을 덧붙였다.

그제야 보좌관은 치테이르가 최근 섭정을 맡아 바쁜 가운데서도 계속 신전에 들락날락하고, 성지의 위치를 집요하게 찾아내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근데 신탁을 갑자기 왜 들으려고 하시는 건가요?”

한데, 굳이 지금 와서?

황제가 실종되었을 때, 치테이르는 신탁의 내용을 듣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 대신관의 혀가 굳는 모습을 보았고, 제가 아는 황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을 이가 아니라며 더는 추궁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치테이르의 말대로 황제는 손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 귀환하지 않았는가.

그러기에 이제 와서 신탁의 내용을 집요하게 찾으려고 하는 치테이르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보조관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고, 그것에 치테이르는 낮게 대답했다.

“이상해졌잖아.”

누가요?

보좌관은 영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더 설명을 구하듯 치테이르를 보았다. 하지만 치테이르는 그 이후, 아무런 말도 안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모습에 치테이르에게 자세한 설명을 구하려 했던 보좌관 또한 더는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는 치테이르의 표정이 어느덧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싸늘하게 굳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치테이르의 손에 들어온 건 낡아 빠진 목걸이와 새것처럼 빛나던 단검, 그리고…….

“이걸 폐하께서 알고 계셨다고?”

숨겨진 신탁과 배신감이었다.

치테이르는 헛웃음을 터트리다 물었다.

“그 천것, 지금 어딨어?”

***

모스는 종종 눈을 떴다.

하지만 그가 눈을 떴다고 해서, 황제도, 카를도 안심할 수 없었다.

눈을 뜬 모스는 말 그대로 눈만 뜬 것일 뿐, 결코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그는 제 옆에 있는 이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고, 눈을 뜨는 그 순간부터 죽을힘을 다해, 햇빛으로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그간 그를 막기 위한 갖은 수는 다 썼던 거 같다.

손을 묶어 놓기도, 나가지 못하게 발목에 커다란 족쇄를 걸어 놓기도 했다. 하나 그때마다 모스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그곳을 벗어났다.

수갑을 사용하면 그는 스스로 손목을 부러뜨려 벗어나고, 족쇄로 묶어 두면 제 발을 망가뜨려 족쇄를 빠져나왔다.

막아도, 또 막아도 어떻게든 계속해서 창가로 달려들었고 그 힘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모스는 온몸을 부러뜨리고 망가뜨리면서까지 햇빛에 다가가겠다는 본능만이 남은 짐승처럼 굴었다.

“무슨 힘이……!”

오늘도 어김없이 모스가 뜯어내려던 나무판자를 움켜쥔 채 카를은 신음했다.

잠에서 깬 모스는 기사단장인 카를도, 황제도, 간신히 막을 수 있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힘을 내뿜었다.

대체 어찌 이리 작은 몸에서 그토록 강한 악력이 나오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지만, 단순 악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또, 팔을.”

황제가 모스의 기형적으로 비틀린 팔을 보고 인상을 구겼다.

잠에서 깬 모스는 마치 전투에 특화된 인간형 몬스터 같았다. 몸을 붙들어 제압하면, 붙든 곳을 포기하듯 잘라 내거나, 뼈를 기묘한 모양으로 뒤틀어 탈출하고는 바로 창가로 뛰어들었다.

오늘도 똑같았다. 눈을 뜬 모스는 구속구를 단번에 벗어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창을 가린 나무판자를 뜯어내고 있었다.

카를은 서둘러 나무판자를 붙들었고, 창과 모스 사이를 가로막은 것은 황제였다.

“폐하!!”

주륵, 날카로운 것이 스친 듯 황제의 옆구리에서 피가 튀겼다.

모스가 손톱을 바짝 세워 황제를 밀치는 것에, 카를이 경악하며 소리 질렀지만, 황제는 그저 제 앞에 달려드는 작은 짐승 같은 모스를 꽉 껴안을 뿐이었다.

“…노, 녹아야 하는데… 녹아야 하는데.”

작은 신음처럼 모스가 말을 웅얼웅얼 뱉어 냈다. 그것은 마치 잠꼬대처럼 표정도 그렇고, 말투도 어딘가 몽롱한 구석이 있었다.

풀린 눈을 한 모스의 희고 가는 팔이 허공에서 허우적 헛돌았다. 허우적거리는 움직임과는 달리 힘이 어찌나 강한지, 짐승처럼 펄떡이는 모스를 껴안은 황제의 등도 덩달아 움찔움찔 움직였다.

“녹아야 해, 녹아야 해. 녹아야 돼. 녹게 해 주세요.”

모스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황제의 품속에서 모스는 애원하고, 빌고, 애달파했다.

마치 햇빛에 닿지 않으면 죽는 이처럼 매달렸지만 황제는 그런 모스를 놓지 않았다. 대신 입술을 꽉 깨물며 더 힘을 주어 모스를 있는 힘껏 껴안을 뿐이었다.

“노, 녹게 해 줘. 녹게 해 줘.”

모스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계속 저 말만을 반복했다. 녹아야 한다고, 녹게 해 달라고, 녹아야만 한다고.

하지만 그 애원을 황제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모스를 막을 뿐이었다. 그러자 처음에는 단순히 애원만 하던 모스의 행동이 점점 과격해지기 시작했다.

“왜? 왜!! 왜?!”

잠들기 전 모스의 모습을 본 이들이 지금 모스의 모습을 보면 무슨 말을 할까.

그는 모스의 거죽을 뒤집어쓴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눈이 새하얗게 뒤집혀서는 남은 게 악밖에 없다는 듯, 계속 손을 뻗어 제 앞을 막는 것은 다 치워 버리겠다는 듯이 밀쳐 내고 긁고 뜯어내려고 하며, 어떻게든 햇빛에 닿고자 했다.

“비, 비켜! 나는-.”

“폐하!!”

기어코 사달이 났다. 모스가 황제의 얼굴을 손톱으로 길게 긁어내자, 황제의 눈썹 뼈부터 귀까지 기다란 상처가 났다.

상처가 꽤 깊은 듯 피가 바로 주륵 흘러내렸고, 그것에 카를이 기겁을 하며 모스를 막으려고 했지만, 황제는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카를을 향해 인상을 구길 뿐이었다.

“오지 마.”

황제는 모스를 밀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더 깊게 껴안으며 말했다. 카를의 이마는 땀으로 흥건했다. 차라리 본인이 저 사이에 껴서 막으면 모를까, 황제는 카를이 모스에게 닿는 걸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기에 그는 이렇게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황제의 명에 우뚝 멈춘 카를이 이도 저도 하지 못하고 작게 신음하는 사이, 모스는 더 발악했다.

“녹, 녹아야 해, 녹아야 해! 녹아야 해!!”

손이 한 번 더 강하게 황제의 얼굴 근처로 획을 그었다. 손끝이 황제의 콧등을 스쳤고 상처가 났으나 그것 한 번뿐이 아니었다.

모스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양 발버둥 쳤고, 그 발버둥을 온전히 받아 내는 건 황제였기에 황제의 얼굴에는 계속해서 생채기가 늘어났고, 모스는 여전히 눈이 풀린 채로 끊임없이 손을 창가로 내뻗었다.

며칠간 창과 모스 사이를 가로막은 황제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그 누구도 손을 대지 못했던 황제의 얼굴, 목, 가슴팍에는 짐승이 할퀸 것 같은 온갖 생채기가 가득했고, 몇 번은 손끝이 눈알을 스쳐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기도 했다.

“노, 녹아야…….”

하지만 자신의 몸에 상처가 늘어나도 황제는 별다른 표정과 말없이 모스의 행동을 끌어안아 저지할 뿐이었다.

모스는 창문으로 가지 못하자, 한껏 손을 내뻗었다. 손끝이 간신히 벽에 닿자, 이제는 그 벽을 긁어 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시뻘겋게 물든 모스의 손끝을 본 카를이 소리치자, 황제가 빠르게 피범벅이 된 모스의 손을 붙잡아 내렸다.

“폐하!”

모스의 발버둥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제 황제가 벽이라도 되는 양, 황제의 몸을 긁었다.

모스의 손톱은 짐승의 이처럼 날카로워 순식간에 루인의 목덜미가 피범벅이 되는 것을 보고 카를이 기함했지만 황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뚝…뚝….

길게 난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려 턱을 타고 떨어졌다. 황제에게서 저토록 시뻘건 핏물이 떨어지는 모습은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질 수 없는 모습이었기에 카를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담담한 황제의 모습에 결국 카를은 더는 보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비명의 끝은 새 비명, 상처를 긁어내는 끝없는 소리. 그 지옥을 얼마나 반복했을까.

보는 이가 진이 다 빠질 정도로 발작 같은 모스의 움직임은 그의 눈이 까무룩 까뒤집어지고 몸이 축 늘어지고 나서야 멎었다. 드디어 그토록 기다리던 정적이 다가왔으나, 황제의 몰골은 심각했다.

“폐하, 이것으로 피를 닦으시는 게….”

황제는 카를이 내미는 손수건으로 피를 대충 닦은 뒤, 모스를 껴안은 채 침상에 눕혔다.

울고불고 난리를 치던 모스의 얼굴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평온해 보였다. 피투성이 손은 피를 닦아 내니, 어느새 새살이 돋고 있었다. 저 멀쩡한 손을 보면, 그가 피범벅이 될 때까지 벽을 긁어 대었다는 걸 믿을 이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그는 그저 깊은 잠에 든 것처럼, 굳게 닫힌 두 눈을 하고 누워 있지만 카를은 긴장을 놓칠 수 없었다. 모스는 하루에도 몇 번씩 불규칙적으로 깨어났고, 그때마다 자살을 시도했으니. 해가 뜬 지금, 언제 일어나서 아까와 같은 일을 벌일지 모르기에 카를은 여전히 긴장한 표정이었지만, 황제는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이었다.

그는 긴장한 것도, 당황한 것도 아닌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모스를 한참이나 빤히 들여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인간이라면 으레 내비쳐야 할 고통의 내색조차 없었다. 오히려 보는 이가 어쩔 줄을 모르게 만드는, 여전히 제대로 피도 멎지 않은 상처들을 그대로 방치한 채 한참 동안 말없이 모스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

황제가 그저 가만히 모스를 보며 아무런 움직임을 내보이지 않는 것에 속이 터지고 미어지는 것은 카를이었다.

당장 상처를 의원에게 내보여도 시원찮을 판에, 황제는 고집불통처럼 며칠을 저리 굴었다. 게다가 상처가 난 곳에 또 상처가 나고, 덧나는 것을 반복하니 나아질 리가 없었다.

카를이 제발 의원에게 가자고 애원을 해도 소용없었다. 황제는 모스가 일어날 때만 움직였으며, 모스가 잠들었을 때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저리 동상처럼 굳어 있었으니 의원을 어떻게든 앞에 데려온다고 한들 제 몸에 손대는 것을 허락할 리가 없었다.

다만 의아한 점은 있었다.

‘왜 안 죽이시지?’

솔직히 카를은 모스가 녹겠다고 난리 치다가 기어코 황제의 얼굴에 상처를 냈던 날, 그날 모스의 명이 다할 줄 알았다.

황제는 얼굴에 상처 나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이유는 뻔했다. 천해 보인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전쟁터에서도 제 얼굴을 투구로 감싸 결코 얼굴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얼굴을 드러냈을 때, 혹여나 누가 작은 상처라도 제 얼굴이 낸다면 그자는 곤죽으로 만들었다. 그랬기에 잔혹한 성정의 황제라면, 모스를 진즉 죽이고도 남았을 일이었는데, 처음 그가 상처를 입었을 때 보인 반응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하?”

모스가 처음 날뛰다가 제 얼굴에 상처를 내고 쓰러진 날에 황제는 답지 않게 얼이 빠진 표정을 좀 짓다 이내 야차와 같이 표정을 구겼다.

보는 이의 사지가 떨릴 정도로 분노한 황제는 방금 전까진 햇빛에 녹으려고 달려드는 모스를 막았던 모습이 무색하게, 나무판자를 맨손으로 뜯어내 그 빛으로 모스를 녹이려고 했다. 하지만 뜯어낸 판자 틈 사이로, 그새 귀신같이 햇빛이 스며들어 모스의 다리에 흠집을 낸 순간.

“……아.”

황제의 동작은 우뚝 멈추었다. 그의 표정은 순간 놀란 듯 보였다. 그는 제가 왜 멈추었는지 이유를 찾으려는 이처럼 조금 녹은 모스의 다리와, 판자 틈 사이로 들어오는 한 줄기의 햇빛을 번갈아 응시했다.

그리고 이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판자를 뜯던 것을 멈추고 실성한 듯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하, 하하.”

미친 듯이 웃으며 그가 제 머리를 거칠게 뒤로 쓸어 넘겼는데, 손이 이상하리만치 잘게 떨리고 있었다. 결국 모스를 죽일 것처럼 달려든 것과는 달리, 그는 끝끝내 나무판자를 다 뜯어내지 못하고 한참을 웃음만 터트렸다.

하나 웃음을 터트린다 하여 속에 있던 분노가 녹아내린 것은 아니었다. 갈 길 잃은 분노로 시뻘겋게 붉어진 눈을 한 그는 돌연 표정을 휙 바꾸더니, 순식간에 방 안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몇 시간 동안 날카롭고 요란스런 소리가 귀를 찢을 듯이 났다. 장식품들, 갖은 가구들은 황제의 손안에서 뭐라 할 새 없이 으스러지고 부서졌다.

하나, 그것으로도 그는 화를 풀 수 없었다. 그는 스스로의 분을 못 이겠다는 듯 고함을 지르고, 웃으며 제 얼굴을 가렸다가 모스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넌…….”

잇새로 까드득 소리가 났다. 그 기세가 너무나도 흉흉해 이번에야말로, 저 괴물은 죽겠다고, 카를은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기세와는 달리, 황제는 어떠한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손을 부들부들 떨 정도로 분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가만히 앞에 앉아 모스를 보다가 얼굴을 푹 숙이고는 욕을 짓씹었다.

“빌어먹을.”

이어 그가 한 행동은, 아까 들어온 햇빛으로 녹아내렸던 모스의 다리를 쓸고 인상을 구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게 다였다.

황제는 모스를 죽이려 들지 않았고, 처음에 보였던 날 것 그대로의 분노 또한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집요할 만큼 모스의 곁에 계속 있고자 했다.

그는 모스의 몸을 살피듯 종종 들여다보았으며, 모스의 손이 매일같이 엉망이 되자 부드러운 천을 한 뭉텅이 가져와 그의 손에 칭칭 감는 행위를 직접 매일 했다.

안 죽이는 것도 모자라, 직접 보살핀다니.

그래서 카를은 어쩌면 저 괴물의 존재가 황제에게 상상 이상으로 큰 존재, 가령 연인 비슷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이런 생각 또한 어느 날 깨졌다.

새까만 밤.

모스가 눈 뜰일 없는 어두운 밤은 카를과 황제에게 찾아온 하루 중 유일한 휴식이었다. 해가 뜨면 언제 눈을 떠 창가로 달려들지 모르는 모스를 맞이해야 했으니.

그날도 어김없이 잠시 선잠에 든 카를은 별안간 복도에서 느껴지는 옅은 인기척에 눈을 가늘게 뜨고 문을 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의 침실 바로 앞에 한 인영이 서 있었다. 누가 이 야심한 시각에 찾아오겠는가, 암살자인가 싶어 잔뜩 경계를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에 적응한 눈이 알아챈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이였다.

‘폐하?’

황제가 자신의 침실 앞, 복도에 가만히 서서 제 방문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단순히 그것뿐이라면 카를이 이토록 경악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옅은 촛불에 선득한 빛이 번뜩였다. 황제의 손에는 기다란 검이 들려 있었다.

그 기다란 검을 움켜쥔 황제를 본 순간, 카를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촛불의 힘이 매우 약해, 황제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카를은 어쩐지 황제의 얼굴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스산한 살기, 마치 늪 깊은 곳에 침전되어 있던 음울함과 습함, 진득하고 끈적이는 감정들, 모든 게 줄기처럼 황제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

그리고 황제는 그 상태로 아침을 맞이할 때까지, 검을 손으로 꽉 쥔 채 제 침실 방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방 너머의 누군가를 당장이라도 검으로 갈라내고 싶어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던 황제는 해가 뜨는 시간을 대체 어떻게 아는 건지, 해가 뜰 기미가 보이면 검을 두러 사라졌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방 안에 들어갔다.

그리고 어느 날 시작된 이 기행은 지금까지도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몽유병인 줄 알았다. 그 정도로 황제의 행동은 납득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

밤이면 그토록 모스를 죽이고 싶어 하고, 아침이면 그를 살리려고 든다.

이게 과연 정상적인 상황인가? 그러기에 카를은 하루에도 몇 번씩 황제가 가지고 있는 게 증오인지 애정인지, 아니면 그 무엇도 아닌 다른 것인지 늘 궁금했다.

‘차라리 감옥에 넣으면 좀 달라질까.’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하는 황제, 그 원인인 모스.

카를은 차라리 모스를 여러 겹으로 구속해 햇빛 하나 없는 지하 감옥에 두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저런 루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모스를 지하에 둔다면 황제는 지하 감옥에도 따라 들어갈 것만 같았다.

또 지하로 내려간다고 해서, 모스의 저 발작 같은 움직임을 저지할 수 있을 거란 기대도 들지 않았다.

현재 침실만 해도 창밖에는 몇 겹의 천을 두르고, 안에서는 햇빛 하나 들어오지 못하게 나무판자를 몇 겹이나 덧대고, 사이에는 흙까지 채워 넣었다. 그 탓에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황제의 침실은 이미 지하 감옥이라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모스는 어떻게든 빈틈을 엿보고 꾸역꾸역 해를 찾으려 발악을 하니, 지하로 간다고 해도 황제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할 것이다.

‘하필 이 시기에 이러다니.’

다만 시기가 좋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카를이 난감하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당장 오늘이라도 출발하시는 게 좋은데.’

전쟁이 코앞으로 닥쳐왔다. 오베리안과 세실리 왕국 간의 전투에서 오베리안의 승리가 거의 확실시 되었고, 심지어 그들은 대륙 너머의 제3국과 접촉하고 있었다. 오베리안의 힘이 더 커지기 전에 어수선한 지금 치는 것이 적기였으며, 그 전쟁에는 황제가 반드시 필요했다. 전쟁에 있어서 혀를 내두를 정도의 감각을 지닌 황제가 있어야 모든 게 빨리 정리될 것이니 말이다.

‘한데, 지금 가셔야 한다고 말하면 가실까?’

다만 카를이 여태 말을 못 한 이유가 있었다.

‘저 괴물을 어쩌지?’

차라리 모스가 이전처럼 끝도 모르고 잠들어 있다면, 황제의 출전을 어떻게든 이끌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영 달라졌다.

눈을 뜨면 미친 듯이 발악하는 모스를 과연 다른 이들이 막을 수 있을까? 기사단장인 자신도 모스를 제대로 못 막을 것 같은데, 황제가 자리를 비운다면…… 저 괴물은, 죽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하지만 카를은 제국의 검.

그는 말문을 열고는, 이내 생각을 정리하듯 눈을 감고 무릎을 꿇었다. 머뭇거림은 짧았다.

“아시다시피 이러실 시간이 없습니다. 저희는 하루라도 빨리 오베리안을 밟아 버려야 합니다.”

카를에겐 저 괴물보단 제국의 안전이 더 중요했다.

“아시지 않습니까. 이 시기를 놓치면 전쟁이 고되어집니다.”

다른 나라가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전인 지금, 오베리안이 눈치를 못 챈 지금을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다.

오베리안은 전쟁에서 승리를 막 거둔 상태라 기세만 올랐지, 내부는 엉망이기에 조금만 공격해도 속절없이 무너져 내릴 것이기에 이보다 더 좋은 시기는 없었다.

“…….”

카를의 이마로 뜨거운 황제의 시선이 닿았다. 미동 없던 황제의 시선이 다행히 움직인 듯싶었지만, 여전히 그는 말이 없었다.

정예 기사들을 하나둘씩 오베리안의 급소에 숨겨 놓으란 것도 황제였고, 승리가 가장 쉬울 이 시기를 예측해 준비하라 명한 것도 전부 황제였다. 그러기에 황제도 가까운 시일 내로 전쟁을 할 것이라는 생각은 있었을 터.

“명하신 것들의 준비는 끝났습니다. 폐하께서 이끄시기만 하시면 됩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기세를 올려 주고 선봉에 서서 기사들을 이끌어 줄 황제만 합류를 하면 이 전쟁은 시작될 것이고, 그가 낀 이상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

하나 황제는 즉답하지 않았다. 침묵의 꼬리가 길어졌다.

황제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카를은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보고 싶었지만, 봐 봤자 황제의 생각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었기에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침묵은 길어도 너무 길었다.

이미 답이 돌아오고도 남을 시간인데, 침묵의 꼬리는 밟히지 않았다.

“폐하. 혹시…….”

결국 밟힐 듯 밟히지 않던 꼬리를 조심스레 잘라 내는 것은 카를이었다.

“안 가실 겁니까?”

그럴 리는 없었다. 윈스 제국은 현 황제가 황권을 잡은 이후, 모든 전쟁의 선봉에 그를 내세워 승리했다.

황제가 겉보기에는 제국에 헌신적이지 않아 보일지라도, 그가 제일 집착하는 것은 제국이었다. 유년기에 허울뿐인 제국이라는 이름 아래, 다른 나라로부터 핍박당하고 멸시받던 제국을 지켜본 경험 때문인지 그는 제국의 평화와 힘에 집착했고, 이 제국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나라가 되길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이도 아닌 황제가 필요했지만 놀랍게도 황제는 지금, 처음으로 전쟁을 망설이는 것 같았다.

원래라면 진즉 답이 돌아오고도 남을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

설마 저 괴물이 전쟁과 저울질을 해도 비등할 만큼 큰 존재였던 것일까.

‘하지만 폐하께서는 그러시면 안 되잖아.’

카를이 황제의 뒤를 지키는 것도, 황제만큼은 소중한 것들을 곁에 두지 않아 누구보다도 더 냉정하게 제국을 정상으로 이끌 수 있는 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카를은 불현듯 몰려오는 불안에 볼 안쪽을 잘게 씹었다. 비릿한 혈향이 잇새로 번졌지만, 불안은 멎지 않았다. 침묵이 불안해 당장이라도 황제를 재촉하고 싶었으나, 신하 된 도리로 그럴 수는 없었다.

침묵은 길어지고, 또 길어져서 숨이 막혀 오다 못해 정신이 아찔해질 무렵.

“카를.”

드디어 황제는 침묵을 깼다.

“무엇을 걱정하는 거지?”

카를은 그 말에 명령이 없었음에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어 제 주인을 응시했다.

황제는 늘 그렇듯, 제가 모시던 그의 황제답게 카를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짐은 출전한다. 짐이 곧 제국이고, 전쟁은 곧 나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이다.”

어둠 속에서도 요요히 빛나는 금안, 아름다운 얼굴로 고저 없이 말을 이으며 그가 쓸데없는 생각을 일갈하듯 말했다.

“고작 이런 일로 출전을 안 할 리가 없지. 당장 지금 출발해도 된다.”

역시 그건 괜한 기우였나.

잠든 모스를 두고 가는 것이 황제의 발걸음을 좌지우지할 것이라 여겼는데, 전혀 아니란 사실에 카를은 안도했다.

하기야, 황제는 뼈도 제대로 자라지 않던 시절부터 선황제가 죽으라고 보낸 전쟁에서 꾸역꾸역 살아남아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온 이가 아닌가. 밑바닥부터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전쟁 덕이며, 그러기에 전쟁과 쟁취가 삶 자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살아온 이였기에 전쟁을 마다할 리가 없었는데.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한데, 왜 이리 속이 후련하지 않지?

그가 전쟁에 나가는 것은 당연하며, 이상할 게 없는데도, 그럼에도 카를은 속이 후련하기는커녕 도리어 찜찜해진 듯, 표정을 제대로 펴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대답을 했다.

“카를.”

아니나 다를까, 황제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그러니 너는 여기 남아.”

이게 무슨 소리지?

카를은 당황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가 황제이기 전부터, 늘 그의 뒤를 지키던 유일한 사람은 바로 카를이었다.

“너무 위험합니다!”

그런 카를을 이곳에 두고 출전한다는 건 황제의 뒤에는 그 누구도 없다는 뜻이었다. 물론 군대야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황제는 사람에게 곁을 내주지 않고, 뒤는 더더욱 내주지 않는 이이기에 군대가 제 뒤를 따르더라도, 정말로 제 뒤에 가까이 두진 않을 것이다.

이는 너무 위험한 행위이기에 카를은 만류하려는 듯 입을 열어 더 뭐라 말을 하려고 했으나, 그의 시선 끝에 걸린 황제의 손에 카를은 이내 말을 잃었다.

“이건 명령이다.”

황제는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었으나, 모스의 팔목을 꾹 움켜쥐고 있었다. 어찌나 꽉 움켜쥐었는지, 모스의 손이 피가 돌지 않아 희게 변했다. 마찬가지로 힘을 잔뜩 준 황제의 손은 그보다 더 새하얬고 표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깐 황제의 얼굴이 마냥 느긋하고, 두루뭉술하게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새겨져 있었다.

“이 괴물이 녹지 않도록 지켜.”

그렇다. 그는 모스를 잃는 것을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전쟁보다도 더 두려워하고 있는 것도 모자라, 카를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황제가 두려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황제가 명령이란 허울을 뒤집어쓴 부탁을 한 적이 있는가?

아니, 없다.

황제는 두려움이란 모르는 사람이고, 명령을 내릴 줄은 알지만 부탁 같은 건 해 본 적이 없는 사내였다.

한데 지금은 모스를 꽉 붙든 손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혹여나 모스가 벌떡 몸을 일으켜 창가로 갈까, 노심초사라도 하는 양, 꽉 붙들고 있었으며. 겉으로 보기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고압적인 태도로 카를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황제답지 않게 절박해 보였다.

“……폐하.”

카를이 신음을 삼켰다.

여기에 남으라는 황제의 명을 받들기 싫었다. 황제의 뒤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이는 자신이다. 또 그가 적진 한가운데로 나아갈 길을 잘 닦아 놔야 하는 것 또한 자신이 해야 한다.

한데, 한데…….

“명령을 수행하겠습니다.”

황제의 얼굴을 보자 차마 카를은 더는 그에게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인지 황제의 뒤를 지키는 일보다, 이 일이 더 중요한 것 같았다.

카를은 이 전쟁에서 제국이 패배하지 않을 것임을 다년간의 전투 경험으로 확신했다. 물론 혹여나 지더라도 수많은 손해를 보겠지만 되돌릴 수 있다는 확신도 있었다. 하지만 모스가 녹는다면, 그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의 죽음 이후로 생길 일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되돌릴 수 없을 것이며.

“그러니 걱정 마십시오.”

단순히 모스 선에서 끝나는 게 아닌, 황제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겠습니다.”

전쟁에서 지는 것보다도 더 큰 일이.

그는 자신의 직감을 믿기로 하며 결국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 선택에 혹여 후회가 남는 건 아닐까 생각하며 카를은 볼을 또 씹었으나, 더는 혈향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얼어붙은 표정으로 고개를 깊게, 더 깊게 숙일 뿐이었다.

황제는 카를이 그리 답하며 고개를 숙인 것을 보고, 더는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물끄러미 카를의 동그란 머리를 보던 그는 시선을 틀어 창문이 있던, 지금은 판자로 빽빽하게 막힌 곳을 응시할 뿐이었다.

어찌나 꼼꼼하게 막았는지 그곳은 정말 벽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밖의 풍경이 결코 보일 리가 없었을 텐데도, 루인은 밖에 떠 있는 해를 바라보듯 한참을 물끄러미 창가를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입을 막고, 여러 겹으로 묶어 놓고, 눈은 가려 놓아. 얼굴에는 가면을 씌우고, 옷은 두껍고 긴 걸 전신으로 입혀. 기사들은 늘 상시 창가 앞에 세워 두고, 최악의 경우 무력을 행사해 제압해도 좋으나 피는 보지 말고… 혹 기사가 괴물에게 상처를 내, 피를 보게 한다면 그자는 죽이고…….”

그는 말을 하다 말고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거두어 제 옆에 곤히 잠든 모스를 내려다보았다.

모스는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굳게 닫힌 눈은 아까의 소란도, 작금의 사태도 모두 잊게 만들 정도로 순하고 조용했다.

그 어린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황제의 표정이 찰나 일그러졌다. 그 찰나가 너무 짧아, 고개를 숙인 카를은 결코 볼 수 없었겠지만 그는 순간 저도 모르게 치고 올라오는 알 수 없는 감정을 얼굴에 덧씌웠다 빠르게 벗겨 내고는 입을 열었다.

“……해가 지면, 출발하겠다.”

담담한 말투였다. 아까 내보였던 두려움은 꿈인 양, 방금 보였던 알 수 없는 아리송한 감정의 잔재는 착각인 듯, 그리 읊조리는 그는 아무런 감정 없이 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이 보일 리가 없음에도 그는 해가 진 걸 아는 이처럼 출전 준비를 하겠다며 사용인들을 불러 준비를 시작했다.

그의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어, 행동만 놓고 보자면 그는 하루라도 빨리 모스에게서 떨어지고 싶어 하는 이처럼 보일 정도였다.

준비는 빨랐다.

아니면 빠르게 느껴졌거나.

어느덧 준비를 다 한 채, 문 앞에 서 있는 황제를 본 카를은 저도 모르게, 주제넘은 것을 알면서도 입을 열었다.

“폐하.”

황제는 카를이 자신을 부르자 눈을 굴려 살짝 그를 응시했다.

하나 카를은 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 망설이듯 입술만을 달싹이자, 황제는 카를에게 시간이 없으니 어서 말하라는 듯 턱짓을 했고, 그런 그의 신체 언어를 읽었음에도 카를은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하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안 보시고 가셔도 괜찮습니까?”

해가 뜨면 눈을 뜨는 모스를, 정말 보지 않아도 괜찮냐고.

그 말에 황제의 손끝이 살짝 멈칫했으나, 그것은 굉장히 찰나였다. 그의 손은 이내 언제 멈추었냐는 듯, 다시 부드럽게 움직여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무엇을.”

황제는 시치미를 떼었다.

카를은 많은 설명은 생략했지만, 그걸 눈치 빠른 황제가 못 알아들을 일은 없었기에 모른 척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다만 카를은 그 말에 자세한 설명을 더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이며 침묵을 유지했고, 그런 카를을 빤히 바라보던 황제는 헛웃음을 지었다.

“저게 무엇이 그리 중요하다고?”

그는 미소를 입가에 걸친 채, 모스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쪽에 시선을 한 톨이라도 주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그는 오로지 카를을 똑똑히 응시하며 말했다.

“쓸데없는 말을.”

그러기에 두 사람은 그날의 선택을 두고두고 후회할 줄은 몰랐다.

“가지.”

그 순간이 따뜻한 손으로 한 움큼 들어 올린 눈 같은 시간인 줄 알았더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곳을 떠나진 않았을 것인데.

***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었다.

“괴물아. 너 녹는 게 소원이야?”

“…….”

“그럼 내가 도와줄까?”

끝없이 내려서, 해도 보이지 않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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