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폭설 (10/21)

8. 폭설

황제가 제국을 떠난 지 거의 두 달이란 시간이 흘렀고, 본격적으로 전쟁터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어언 열흘이 훌쩍 넘었다.

세실리와 오베리안의 전쟁은 진즉 끝났다. 볼 것도 없이 오베리안의 압도적인 승리였으며, 오베리안을 돕는 제3국의 정체 또한 밝혀졌다. 바로 대륙 너머에 위치한 라오미트라는 언어마저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섬이었다. 그들은 지형적인 특성 때문인지, 윈스 제국과 오베리안의 대륙을 탐했고 그 탓에 전쟁은 생각보다도 훨씬 더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오베리안과 세실리 간 전쟁의 여파로도 힘겨운데, 더 큰 전쟁이 벌어지니 윈스 제국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난민들이 들어오고 있었고, 전쟁이 어떻게 자신에게 영향을 끼칠지 모르기에 제국민들의 분위기도 흉흉했다.

그리하여 제국도 여러모로 몸살을 앓고 있었고 황궁도 마찬가지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지만, 황궁이 몸살을 앓는 것은 다른 이유가 컸다.

“아악, 죄, 죄송합니다!”

주인 없는 황제의 침실, 그곳에서 틈 하나 없이 다닥다닥 달라붙어 무언가를 막던 기사들 중 하나가 견디지 못하고 욕을 내뱉으며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방 안을 가득 채울 수 있을 정도의 많은 숫자의 기사들이 모여서 하는 것은 그 곰처럼 커다란 기사들의 몸의 반도 되지 않는 모스를 막는 것이었으나.

“거기 꽉 붙들어, 뭐 하는 거야!!”

“부, 붙든 겁니다!!”

그들은 그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옴짝달싹을 못 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모스를 온몸으로 막아 내며 그나마 잘 버티는 것은 카를이었다.

“빨리 묶어!!”

“예!!”

모스가 잠시 휘청이는 사이, 카를이 옆에 어정쩡하게 있던 기사들에게 소리치자 그들은 밧줄로 모스의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스는 밧줄에 걸린 제 몸을 기형적인 각도로 꺾어 빠져나오려 했고, 카를은 이를 간신히 막아 냈다.

“해, 해가 집니다!”

소란이 이는 사이, 태양이 가시고 있다며 방 밖에서 대기하던 기사가 소리 질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스는 끈 떨어진 인형처럼 미끄러지듯 무너졌다.

모스가 쓰러지고 난 후, 방 안에는 헉헉거리는 숨소리와, 땀범벅이 된 기사들 중 몇몇이 털썩 등을 벽에 기댄 채 주저앉아 신음을 뱉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얼른 감아.”

“예!”

그 사이에서 무너지지 않는 유일한 이는 카를 하나였다. 그의 명령에 기사들은 모스의 온몸을 이불이나 다름없는 커다랗고 두꺼운 천으로 칭칭 휘감고, 그 위로 밧줄을 몇 겹이나 둘러 묶었으며, 그렇게 하고 나서야 카를은 긴장을 푼 듯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얼마 전만 해도 생기를 품었던 기사들의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아침이 되기 전, 다시 집합한다.”

“예, 알겠습니다!”

카를의 명에 지친 듯 땀을 닦아 내던 기사들은 고개를 숙이고는 허둥지둥 방을 나섰다. 기사들이 다 빠져나가자, 북적이는 시장통처럼 붐비었던 방 안에 이토록 적막이 일 수가 없었다. 삽시간에 조용해진 방 안에서 카를이 제 얼굴을 감쌌다.

‘빌어먹을.’

한 달하고도 두 달을 향해 가는 지금, 최근에서야 본격적으로 전쟁터에 모습을 드러낸 황제가 걱정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카를은 전쟁에 신경을 제대로 쓸 겨를이 없었다.

황제가 떠나고, 모스는 한동안 정말 귀신같이 조용했다.

다시 잠든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동안은 잠잠했지만, 그 이후에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햇빛을 탐냈다.

처음에는 입막음이 번거롭기에 어떻게든 홀로 막아 보려고 했으나,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카를은 홀로 막아 내기를 포기하고 기사들을 들였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스의 악력과 비이상적인 회복력, 신체를 포기하는 판단을 이겨 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지낸 지가 어언 두 달이 다 되어 가는 지금.

“궁이 스산해 무서워 죽겠어.”

황성에 소문이 안 나려야 안 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제아무리 아랫사람들과 기사들의 입을 막는다고 한들, 주인 없는 황제의 침실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이러고 있으니.

“황제의 방에 광인이 산다던데.”

“그래, 요 근래 기사들이 많이 모여 다니지? 그 광인을 막으려고 그런다고 하더라고.”

“유령 아니고?”

“무슨 소리야. 나는 시체라고 들었는데?”

온갖 소문이 황성 내를 떠돌았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방에서 나는 모스의 목소리에 사정을 모르는 사용인들이 쉬쉬하며 서로 떠들었다. 심지어 몇몇은 황제의 침실에서 혹 끔찍한 고문이라도 하는 것 아니냐고 추측했다.

황제의 침실이 있는 곳은 몇 명을 빼고는 접근조차도 불가능할 정도로 카를이 지키고 있기에 일반 사용인들은 그 근처에 가는 것조차 어려웠다.

다만 침실 밖으로 새는 절규와 애원하는 소리는 아무리 막더라도 막아지는 게 아닌지라, 내용은 모르더라도 비명 소리 자체가 정말 끔찍하기 그지없었기에 사용인들 사이에서 소문은 날개 돋친 듯 퍼져 나갔다.

“하긴, 고문이면 말이 되는 거 같기도. 그건 인간의 목에서 나올 수 없는…….”

“그렇지, 듣는 이마다 말하길, 등줄기에 소름이 쭉 돋아 머리카락이 뻣뻣하게 선다고 하더라고.”

그 비명이 어찌나 절박한지 자식을 잃은 부모의 목소리 같기도 했고, 죽기 직전의 이처럼 목숨이 경각에 달해 내는 단말마의 비명 소리 같기도 했던 것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소문이 괴담에 괴담으로 덧씌워지고 있던 가운데, 사용인들은 저 멀리서부터 크게 나는 인사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황태제 전하를 뵙습니다!”

때마침 황궁을 순찰하던 기사들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소리치는 것에, 웅성이던 사용인들은 언제 입을 놀렸냐는 듯 입을 꾹 다물고 넙죽 고개를 숙였다.

“…….”

황태제 전하를 뵙습니다. 똑같이 그리 소리를 쳤으나, 치테이르 황태제는 그런 사용인들과 기사들을 거들떠보지 않고 지나쳤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발자국 소리가 겹쳐도 너무 많이 겹쳐 들렸던 것이다.

의아함에 고개를 숙인 채로 사용인들이 서로의 얼굴로 슬쩍 눈길을 흘리며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떠보듯 바라보았으나 연유를 아는 이는 없었다. 그들은 법도에 따라 황태제가 지나간 뒤에야 간신히 고개를 들었고, 이내 멀어지는 황태제의 꽁무니를 본 사용인들은 모두 경악했다.

치테이르는 황제의 즉위를 물심양면으로 도왔으며, 황제 또한 섭정을 맡길 정도로 믿는 이였기에 다른 귀족들과 다르게 제한 없이 사병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수에 제한 없이 사병을 가질 수 있을지언정, 그는 자신의 기사들을 제대로 움직인 적이 없었다. 애초에 태평성대를 이룬 제국에서 황제와 사이좋은 그가 직접 그의 기사들을 움직일 정도로 큰일이 일어난 적은 없었는데.

“…뭐야, 저 많은 숫자의 병사들은?”

황태제가 끝도 모를 정도로 많은 병사들을 이끌고 온 것이다.

물론 그가 가진 병력의 전부를 끌고 온 것은 아닐 테지만, 그만큼 저리 많은 병사들을 이끌고 황제의 궁에 찾아가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의아한 점은 더 있었다.

“폐하께서는 안 계시잖아?”

황궁은 현재 비었다.

그런 텅 빈 황제의 궁에 왜 치테이르 황태제가 저토록 많은 병사들을 데리고 가는지는 알 도리가 없어, 사용인들이 웅성이던 차에 저 멀리서 있던 다른 사용인들이, 방금 제가 본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멍하니 이미 사라지고 없는 황태제의 꼬리를 보다가 읊조렸다.

“난 저런 표정을 지으신 것도 처음 봐.”

본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게 맞았다. 그럼에도 사용인은 지나칠 정도의 들끓는 살기를 느끼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치테이르의 옆얼굴을 훔쳐볼 수밖에 없었는데, 그 얼굴이 영 심상치 않았다.

황태제의 그런 얼굴은 처음 보았다.

현 황제가 매우 잔혹한 것과는 반대로, 황제의 동생이자 섭정을 맡는 황태제의 얼굴은 늘 온화하며 말씨도 황제에 비해 유했다.

황궁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면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황제처럼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지도 않았고, 오히려 귀족들과도 웃으며 말을 잘 섞으니 순한 양처럼 보이는 게 당연했던 탓이다.

하나 방금 본 황태제의 얼굴은 그간 그들이 알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스산했다. 그의 얼굴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일그러져 있었으며, 마치 배신을 당하고 상처받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사이로 새 나오는 살기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싸늘했다.

물론 단순 그것만이었다면, 사용인들은 이토록 당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방금 황태제의 표정과 그가 풍기던 분위기가…….

“마치 황제 폐하께서 돌아오신 줄 알았어…….”

황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치테이르는 모두가 경악을 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오로지 앞만 보며 걷고 있었다.

그의 걸음은 굉장히 빨랐다. 보폭이 넓은 그가 걸음을 내걸을 때마다 주변 배경이 휙휙 바뀌었다.

“…였어.”

게다가 거침없이 걸어가는 치테이르는 아까부터 무어라 중얼중얼 읊조리고 있었는데, 그 목소리는 자세히 듣지 않으면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 하지만 귀를 기울여 자세히 들어 보면 치테이르는 맥락이 맞지 않는 뚝뚝 끊기는 말을 반복해서 하고 있었다.

“형님이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이상했어. 지나칠 정도로 이상했단 말이지. 그래, 설령 그런 거라고 쳐. 이해하고자 하면 이해가 가. 그래도 왜 그러신 거지. 내게는 말할 수 있던 거잖아.”

그는 어딘가 홀린 것처럼 눈이 풀린 채로 말을 계속했다. 입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중얼거림을 멈추지 않았고, 그의 보좌관은 그런 치테이르를 불안한 듯 흘끗흘끗 쳐다보기만 할 뿐 막을 수는 없는 듯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치테이르의 걸음은 멈출 줄을 모르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뒤를 따르던 병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치테이르의 뒤를 충실하게 따라붙었고, 이윽고 그들의 발이 멈춘 곳은…….

“이게, 지금 무슨 짓입니까?”

황제의 침실 앞이었다.

소식을 들었는지, 카를이 급한 대로 근처에 있는 기사들을 침실 앞으로 불러 모았다. 하지만 밤은 기사들의 휴식 시간이기에 교대에 따라 몇몇은 숙소로 돌아갔고, 남아 있는 이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실력 좋은 기사들은 현재 전쟁에 나가 자리에 없기 때문에 딱 보아도 병력의 차이가 심하게 났다.

“비켜 줄 수 있습니까?”

그것을 아는 양, 치테이르는 제 앞을 카를이 막고 있는 것에 그다지 위협을 느끼지 않는 듯 뚱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저 빠르게 침실로 들어가게 양보해 달라는 듯, 손짓을 하며 말할 뿐.

“황태제 전하.”

황실의 2인자인 치테이르가 이 황궁에서 가지 못할 곳이란 딱히 없는 것을 안다.

그는 섭정을 맡으면서도 황제에 대한 뛰어난 충성도를 보였고, 배신한 적 없는 아주 의로운 형제이니 비켜 달라고 하면 비켜 주는 것이 카를의 도리이나.

“죄송하지만, 불가능합니다. 물러서십시오.”

하나 카를은 물러설 수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비켜 줬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이리 날 선 황태제를 만난 적이 있는가. 그간 기사단장으로 긴 황궁 생활을 하면서도 카를은 단 한 번도 치테이르가 이리 잔뜩 가시를 세운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기에 이 자리에서 비킨다면, 사달이 나도 제대로 날 것 같아, 카를은 치테이르의 앞을 막아섰지만 치테이르는 여유로워 보였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내가 데려온 게 고작 평범한 병사들로 보입니까?”

치테이르가 픽 웃었다. 그의 파란 눈이 차게 빛났다.

카를은 대답을 하는 대신 입술을 꽉 물었다. 치테이르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검의 높은 경지에 다다른 카를이 보았을 때도, 치테이르가 데려온 이들은 심상치 않아 보였다.

풍기는 분위기나 가진 기세만으로도 일개 병사들이 아닌 것 같았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물러서십시오.”

카를은 치테이르에게 경고하듯 말하며 검집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스릉, 서슬 퍼런 소리와 함께 카를의 뒤에 있던 기사들 또한 발도했다. 치테이르는 압도적인 차이에도 포기하지 않고, 검을 빼 드는 카를의 태도에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내가 뭐 할 줄 알고 막아섭니까?”

“저는 그저 폐하의 명을 따를 뿐입니다.”

카를은 제 말이 뭐가 그리 재밌는지 웃는 그를 마주 보다 입술을 깨물었다. 황제가 떠나기 전 모스와 황태제의 만남을 막으라고 명령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 문을 선뜻 열어 줄 수는 없었다.

“폐하의 명을 불복하시겠다는 뜻입니까?! 이는 반역입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황태제를 이 방 안으로 들이는 순간, 모스를 보호하라는 명을 지킬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 강하게 든 것이다.

“반역? 누가, 내가?”

치테이르는 아주 웃긴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그리 읊조리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나만큼 이 제국을 위하고, 황제 폐하를 사랑하는 이가 어딨다고? 카를, 자네야말로 이 모든 게 정상으로 보이나?”

“…….”

“경도 알잖아. 저것.”

치테이르가 손가락으로 방 안에 있는 존재를 가리킨 뒤, 읊조렸다.

“저것을 황궁 안으로 들인 뒤에, 형님의 완전함이 덜어지고 있다는걸.”

카를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그의 동요를 눈치채기라도 한 양, 치테이르는 씨익 웃으며 그에게 뭐라 더 말을 하려던 그때.

“지금부터 반역으로 간주하겠습니다.”

망설임도 잠시, 카를이 언제 흔들렸었냐는 듯, 그렇게 말하며 검을 고쳐 잡았다. 아까와는 기세가 사뭇 달랐다. 결연한 의지가 담긴 카를의 눈을 본 치테이르는 뭐라 말할 듯 벌린 입술을 꾹 다물더니 이윽고 표정을 굳혔다.

“……경의 뜻이 다르다면, 어쩔 수 없지.”

그는 더는 웃지 않았다. 얼굴에 모든 표정을 싹 지우고는 뒤로 손짓했다.

스릉, 스르릉. 그의 뒤에 있던 이들이 하나같이 검을 뽑아 들었다. 황제가 모든 창을 막아 두었기에, 빛 하나 없는 어두운 복도 안에서 들리는 거라곤 귓가를 긁는 검 소리뿐이었다. 서늘한 철의 움직임이 일렁이는 촛불 사이로 춤추듯 너울진 그 순간, 순식간에 검들이 얽히기 시작했다.

불씨가 튀듯 검이 맞부딪치고, 그 좁은 복도는 아비규환이라는 말로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으로 망가지기 시작했다.

“큭, 크윽.”

어둠 속에서 제대로 보이지 않더라도, 누구라도 이곳에서 큰 전투가 있음을 알 것이다. 신발 밑창에 들러붙는 혈향이 짙고, 진득하니 말이다.

왈칵, 피를 쏟아 낸 카를이 간신히 몸에 힘을 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잔뜩 흐트러진 카를과는 다르게 황태제는 조금의 흐트러짐조차 없었다.

그의 곁에 있던 기사들은 전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카를은 두 다리로 서 있기는 했으나 엄청나게 지쳐 보였다. 기력이 다한 듯, 비틀거리는 카를을 빤히 바라보던 황태제는 가만히 그를 보다 “형님이 넌 좋아하니까.”라고 말하고는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황태제 전하!!”

카를이 저벅저벅 걸어가는 황태제를 막으려고 했으나, 힘이 달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없었다. 그의 뒤에 있는 기사에게 가뿐히 제압당한 카를은 황태제가 가고자 하는 곳을 보고는 소리 질렀다.

“안 됩니다!!!”

그가 향한 곳은 두툼한 천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말아 두고, 밧줄로 칭칭 감아 둔 모스였다.

황태제의 발걸음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목표가 모스인 거 같았다.

성큼성큼 다가선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매어 둔 밧줄을 푸는 것이었다.

밧줄을 풀고, 천을 걷어 내자 드러난 것은 눈을 감은 모스의 모습이었다. 모스는 밤 동안에는 눈을 뜬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방금 막 해가 졌기에 모스는 해가 뜨기 전까지는 이렇게 눈을 감고 있을 것이다.

황태제는 눈을 감은 모스를 빤히 보았다. 모스는 역시나 눈 뜰 기미가 없었다. 굳게 닫힌 두 눈을 가만히 보던 그가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그럼에도 치테이르는 신난 듯 웃으며 떠들었다.

“듣자 하니 괴물아. 너 녹는 게 소원이야? 그럼 내가 도와줄까?”

밤이었기에 당연히 모스는 답이 없었다. 굳게 닫힌 두 눈을 치테이르는 별다른 반응 없이 바라보았으나, 이를 보며 경악하는 이가 있었으니.

“황, 태제 전하!!! 그분은 건들면 안 됩니다!!”

제압당한 카를이 드디어 황태제의 의도를 눈치채고 비명처럼 소리 질렀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모스를 녹이는 게 황태제의 목표인 것을 드디어 눈치챈 것이다.

하나 목표를 파악한다고 한들, 제압당한 상태인 카를이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그는 어떻게든 이쪽으로 기어 오려는 듯이 움직였으나, 이내 그를 발로 짓뭉개듯 누르는 정예병으로 인해 앞으로 걸어갈 수 없었다.

“제발! 그만두십시오!!”

그가 다가올 미래를 알아챈 양 소리를 질렀으나, 치테이르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다.

“일어나.”

그는 모스의 어깨를 쥐고 짤짤 흔들었다. 하나 모스는 밤이면 눈을 뜨지 않기에, 황태제가 흔드는 대로 흔들리기만 할 뿐, 눈을 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고요하게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는 모스, 그것을 보던 치테이르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맞다.”

여기 어딘가에 있을 텐데, 라고 중얼거리며 겉옷 안주머니를 뒤적이던 그가 무언가를 꺼내고 불쑥 내밀었다.

“너 이거 아니?”

치테이르가 히죽 웃었다. 녹이 슬어 짤랑이는 소리마저도 나지 않는, 아주 낡아서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은 목걸이와 새것과 다름없는 단검이었다.

단검에는 목걸이가 칭칭 감겨 있었는데, 그 목걸이의 넓적한 부분에는 무언가가 깊게 파여 박혀 있었다.

“성지에서 이거 가져오려고 내가… 아, 아니지. 내 부하들이 엄청 고생했거든.”

그렇게 치테이르가 단검과 목걸이를 들고 모스의 눈앞으로 내밀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파르르, 밤이면 결코 열릴 일이 없던 모스의 눈꺼풀이 떨리기 시작한 것이다.

‘말도 안 돼.’

이를 제압당한 채로 지켜보던 카를은 모스가 눈을 뜰 것처럼 눈두덩이를 잘게 떠는 것에 경악했다.

모스는 밤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깨지 않았다. 제아무리 새까만 방 안에 두어도 모스는 귀신같이 아침만을 알아채고 칼같이 눈을 떴었건만 지금은 밤이었다. 누가 뭐래도 밤이었는데 일어날 것처럼 저리 눈꺼풀을 움직이다니.

그런 카를이 경악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치테이르는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파르르 떨리는 모스의 눈꺼풀을 바라보았다.

모스의 투명하다고 느껴질 만큼 새하얀 눈두덩이 아래, 촘촘히 나 있는 속눈썹이 느릿하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빛나는 녹음과도 같은 눈동자가 목걸이, 그리고 그 목걸이에서 유일하게 녹슬지 않고 빛을 발하는 것을 똑바로 응시한 그 순간.

황태제, 치테이르의 푸른 눈이 물결을 그리듯 휘며 반으로 접혔다.

얼어붙은 호수 아래에서 아무도 모르는 역사와 함께 긴 시간 동안 잠든 단검, 이름만 적힌 목걸이의 주인, 목걸이의 에메랄드와 같은 녹음을 담은 눈동자.

“모리스 워커.”

잊혀진 역사의 시작을 열은 용사.

마왕에게서 그들을 구해 낸 영웅.

가장 천한 괴물은 과거 모두를 구해 낸 용사였고, 한 번 더 그들을 구해 내야만 했다.

“가자, 해가 제일 빨리 뜨는 곳으로.”

죽음으로써.

***

지도자야,

눈을 가리는 풀은 겨울이 좋아, 봄을 삼킨 용사를 지키고 있으니,

밤이면 용사는 제가 삼킨 봄의 차가움에 잠 못 들고,

낮이면 용사는 제가 삼킨 봄의 뜨거움에 녹아들고,

뛰어난 지도자야, 네가 먹혀진 봄을 잡아 오너라,

껍데기가 벗겨지면 봄이 오니, 껍데기를 녹여 오너라,

껍데기가 녹으면 봄이 오니, 흔적 없이 전부 녹여 오너라,

껍데기가 녹으면 얼음이 녹고, 얼음이 녹으면 봄만 남으니,

봄만 남으니 어서 뛰어라, 싱그러움을 담은 녹음을 향해,

짙디짙은 녹음을 향해, 어서 뛰어라, 쉴 틈이 없단다,

지도자야.

***

하.

황제가 입김을 내뱉으며 하늘을 보았다. 허공을 가르는 입김 사이로 드러난 날씨만은 맑기 그지없었으나 땅은 지옥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산처럼 쌓인 시체들의 살점을 뜯어먹기 위해 온갖 독수리와 까마귀 떼가 몰려들어 하늘은 새까맣고, 그런 하늘 아래에 있는 황제의 갑옷에는 아군인지, 적군인지, 누구의 것일지 모를 피들이 말라붙어 있었다.

“와, 아-!”

물론 그런 그의 곁에 시체들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치열한 전쟁인 탓에 다치고 성한 곳이 남아나질 않은 서로에게 기댄 채로 힘없이 서 있던 기사들은 적군 하나 남아 있지 않은 텅 빈 땅에서 승리를 선포하며 소리쳐 외쳤다.

“우리가 승리했다!!!”

“아아!! 황제 폐하 만세!!!”

“만세!!”

“윈스 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그런 기사들을 황제가 물끄러미 응시했다. 온통 붉은색으로 뒤덮인 그의 얼굴은 투구로 가려져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아마 그도 오늘만큼은 웃고 있을 것이라고 기사들은 생각했다.

오베리안은 다른 나라와 연합을 맺었음에도 제국의 기세를 꺾을 수 없었다. 황제는 그간 치렀던 수많은 전쟁을 바탕으로 오베리안과 연합군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완벽한 전술을 짜 노련하게 약점을 파고들었다. 간결하고 빈틈없는 그의 전술에 모든 이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결국 연합군 수장의 목을 도려냄으로써 연합을 주도했던 라오미트도 발을 뺐고, 이후는 수월했다.

연합이 없는 이상 오베리안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백성을 버리고 도망치려던 왕족들은 황제의 앞에 개처럼 질질 끌려와 엎드렸다.

“무엇이든 하, 하겠습니다. 부디 모, 목숨만큼은 부지할 수 있게 자,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한때 오베리안의 오만한 왕이었던 국왕은 지금 윈스 제국의 기사들에게 붙잡힌 채, 엎드려 빌고 있었다. 황제는 그런 왕을 보고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베리안의 왕을 이전에 봤을 땐 제법 살집이 올라 있었는데, 그간 전쟁통에서 마음고생을 크게 했는지 지금은 반쪽이 되어 있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

안쓰러운 얼굴로 고개를 땅에 파묻듯 내린 왕의 전신은 사시나무처럼 오들오들 떨리고 있었다.

‘살아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왕은 문득 자신의 생존 여부를 생각했다. 솔직히, 이리 빌고 있지만 왕은 황제가 다른 왕족들은 죽일지언정 자신만큼은 살릴 것이라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곧 제국으로 흡수될 오베리안 왕국은 연이은 전쟁의 여파로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그러므로 황제는 혼란에 빠진 국민들을 빠르게 정리해 줄 오베리안의 왕인 자신을 필요로 할 것이었다. 미지의 언어를 쓰는 저 너머 섬나라 라오미트와 소통할 수도 있기 때문에 제국 입장에서도 살려 두면 여러모로 이점이 있을 터.

‘그나저나 저게 사람이야?’

다만 왕은 황제가 정말로 사람이긴 한지 의구심이 들었다.

모두가 승리할 것이라 자신했다. 그토록 많은 연합군이 있었음에도 지금은 다 죽어 하나도 남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전술로 수없이 죽어 가는 이들의 목을 보았을 때, 국왕은 처음에는 그들이 안타까웠으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안타까움보다는 두려움이 솟았다.

‘대체 어떻게 저런 전술이 가능하지? 어떻게 저런 동선으로 저런 결과를 단시간에 낳는 거지?’

게다가 전쟁터에서 본, 황제가 날뛰는 모습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는 잠을 자는 시간마저도 아깝다는 듯, 잠들지 않았고, 병력과 장소가 몇 번이나 바뀌고 뒤집히고 교체가 되는 동안에도 끝끝내 선두를 지키던 괴물이었으니. 인간이 할 수 있는 신체적인 영역을 뛰어넘은 그는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무언가처럼 보였다.

‘이길 수 없다.’

그 모습을 보니 제아무리 애를 써도 승리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결국 왕은 승리를 포기하고 몰래 꼬리를 말고 도망가려고 했지만, 도망가기 전에 윈스 제국의 기사들이 쳐들어와 이리 허망하게 꿇어앉게 되었다.

게다가 전쟁은 단순히 ‘승리’라는 표현만으로도 부족했다. 제국의 ‘압도적 승리’였다. 도무지 손쓸 새가 없이 이곳저곳에서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니, 결국 이리되었다.

“전능하신 제국의 폐하시여, 제발 부디 가엾게 여기시고 저희를 살려 주십시오.”

뭐 인간 같지도 않은 황제임을 알지만, 자신이 가진 패도 꽤 있기에 빌어서 생존만은 해 보자며 왕이 계속해서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그때…… 손가락 끝에 축축한 게 걸려들었다. 한창 바닥에 머리를 터트릴 듯 내리찍던 왕이 어리둥절한 낯으로 제 손을 보았다.

“……아.”

그것은 바로 피였다.

황제의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황제의 온몸은 피로 절여져 있었다. 황제의 발치에는 몸에서 흐른 피가 고이고 있었다.

그것을 본 왕은 더는 비는 것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가만히 서 있어도 피가 뚝뚝 떨어질 정도로 사람을 죽인 건가? 아니면 다친 건가?

무엇이 되었든 공포스러웠다. 왕은 어쩔 줄을 몰라 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더는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두 손을 모아 빌었다. 그의 입에선 비명인지 신음인지 모를 알 수 없는 소리가 새 나왔고, 그의 뒤에 있는 식솔들도 덩달아 몸을 납작하게 숙이며 빌기 시작했다. 그들 중, 누구도 세실리에 누명을 뒤집어씌우고 쳤을 때는 이렇게까지 상황이 극악으로 갈 것이라, 생각 못 했을 것이다.

“고개를 들라.”

그때, 황제가 말했다.

그의 음색은 참 희한했다. 전쟁의 여파로 피곤한지 잠긴 목소리였으나, 그 안에 나른함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목소리만 들으면 그저 막 잠에서 깬 이 같을 뿐, 결코 궁의 입구부터 이 중앙 홀까지 핏물이 고이게 만든 장본인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왕은 엉망진창인 얼굴로 고개를 들었고, 고개를 들자마자 투구를 쓴 황제와 눈이 마주친 그는 마치 거대한 육식 동물의 사냥감이 된 느낌이 들어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래…. 네가 왕이었지.”

황제는 그러거나 말거나, 그제야 왕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다는 듯 느릿하게 말을 하며 왕을 내려다보다가 투구를 벗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전쟁통 속에서도 그 인간답지 않은 아름다운 얼굴은 여전했다. 신이 조각한 것만 같은 시리도록 차갑고 아름다운 얼굴로 황제는 왕을 응시하다 말문을 열었다.

“너를 살려 꼬리를 자르고 도망간 라오미트의 정보를 파악하고 라오미트를 정복하면 윈스 제국의 영토는 넓어지고 더 풍요로워질 것이야. 또한 난민이 된 네 나라의 백성들도, 네 명령에 따라 움직일 것이니 작금의 혼란도 빠르게 종결되겠지. 그러니 널 살리고 굴복시켜 움직이는 것이 현재로선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겠건만…….”

아, 나는 살아 나갈 수 있는 건가.

왕이 황제의 말을 듣다 저도 모르게 희망 어린 얼굴로 고개를 든 그때.

“나는 더는 네게 시간을 쏟고 싶지 않다.”

누가 뭐라 할 새도 없었다.

‘……어?’

노래하듯 잔잔하게 말하는 황제의 목소리를 듣던 왕은, 돌연 자신의 시야가 뒤집힌 것을 깨닫고 입을 벌렸다.

아무리 몸을 숙이고 있다지만, 어째서 자신의 시야가 이토록 낮게, 그것도 거꾸로 있는지 의아했다. 아무리 바짝 몸을 땅에 붙였다지만, 이건 대체 뭔지 몰라 눈동자를 굴리던 그는, 이윽고 피가 분수처럼 솟아나는 제 목 없는 육신을 보았다.

목……이 잘렸다.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왕은 그대로 눈도 감지 못하고 죽었다.

“꺄아악!!!”

“아아, 아아아!!!”

남은 왕족들은 얼어붙었다가 죽은 왕의 목이 데구루루 굴러가는 순간 비명을 지르며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기사들은 그런 왕족들을 보곤 서로 눈짓한 뒤, 어딘지 모를 곳으로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한편 순식간에 왕의 목을 잘라 낸 황제는 검신에 흐르는 피를 툭툭 털어 내며, 무슨 일 있었냐는 듯 검집에 검을 밀어 넣고 뒤를 돌아 걸어가고 있었다. 특유의 나른한 움직임은 없었다. 빠른 걸음으로 쭉쭉 걸어가 도착한 곳은 그의 말이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의 고삐를 틀어쥐었다.

“폐하.”

어느새 뒤따라 붙은 기사들은 그런 황제의 행동이 당황스러운 듯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하나 황제는 다소 조급한 움직임으로, 기사들이 제게 뭐라 할 새도 없이 어느덧 말 위에 앉아 있었다.

그러고는 당장이라도 말을 이끌고 출발할 것처럼 움직이는 것에 눈치를 보듯 서로의 얼굴을 흘깃흘깃 바라보던 기사들 중 하나가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지금 가시는 건 너무 힘드실 것 같습니다.”

기사가 그리 말할 만도 한 게, 황제는 정말 숨 쉴 틈 없이 여기까지 달려왔다.

작고 큰 전투가 몇 차례나 이뤄졌다. 여러 전투를 연이어 겪은 탓에 체력이 좋은 기사들도 입에 쇠 맛이 돌 정도였고, 나중에는 혼절하는 이들도 나왔다. 그런 기사들보다도 더 강행군한 황제의 몸 상태가 정상일 리 없었다.

“부디…… 쉬고 가시는 게 어떠신지요.”

하지만 기사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말을 탄 황제는 아무렇지 않은 듯 그저 담담하게 말할 뿐이었다.

“경들은 남아. 나 홀로 갈 테니.”

뒤를 쫓겠다, 이리 말해야 하는데 기사들은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지금 서 있는 것도 기적이었다. 온갖 긴장이 다 풀려 다리는 벌벌 떨리고 있었고 정신은 매우 지쳐 있었는데, 황제를 지키겠다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왜 이리 성급하시지.’

다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일쯤 출발하면 오늘 푹 쉬고 따뜻한 마차 안에서 편히 갈 수 있을 터인데, 왜 굳이 이토록 서두르는지 기사들은 알 도리가 없었다. 하나 그 말을 감히 황제 앞에서 꺼낼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모두가 제대로 말리지도 못하고 당황스러움에 이도 저도 못 하고 있던 그때, 그런 황제를 지켜보던 기사들 중 하나가 무엇을 본 양, 저도 모르게 크게 눈을 떴다.

“폐, 폐하!”

뭐라 할 새도 없이, 황제가 말을 끌고 멀리 나간 것이다.

남은 기사들 중 몇몇은 황제를 뒤쫓아 갈 준비를 해야겠다며 부지런히 움직였고, 몇몇은 지친 몸을 힘없이 벽에 기댔고, 황제의 얼굴에 걸린 찰나의 표정을 본 한 기사는 귀신에 홀린 양 묘한 표정이었다.

그 수많은 연합군을 앞에 두고도 물러서지 않고,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던 제국의 황제. 하나 방금 전 자신이 본 그의 표정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한없이 기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없이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며.

‘…설렘?’

설레는 것 같기도 했다.

***

이랴, 낮게 말하는 속살거림을 말은 용케 알아듣고 눈밭을 헤치고 뛰어가기 시작했다. 시리도록 추운 칼바람이 루인의 근처를 스쳤다.

‘아침.’

하늘을 보니 해가 아직 하늘에 똑바로 떠 있었다. 사시사철 지독히도 추운 윈스 제국에게 유일한 축복은 태양이다. 이 나라에 해마저 없었다면, 지옥이었기에 루인도 해의 존재에 대해서 굳이 말하자면 감사하다는 편이었다.

하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정확히 어느 시점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루인은 해가 싫었다.

참으로 이상도 하지.

봄을 찾겠다고, 더 따뜻한 햇볕을 가져오겠다고 그 수많은 시절을 헤맸던 것이 마치 꿈인 양 지금의 그는 아침이 싫고, 해가 싫었다.

전쟁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창 전투를 치르던 와중에도, 그간 아무런 신체적 변화가 없다가 아침만 되면 그는 이상하게 속이 메스꺼워지며 당장이라도 토할 것처럼 헛구역질이 일었다. 동시에 황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상태는 점점 심해졌다.

황궁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은 처음에는 단순 생각뿐이었지만, 갈수록 생각이 생각으로 그치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그는 때때로 돌아가지 않으면 자신이 정말 죽을 것처럼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황궁으로 뛰어가고 싶은 충동이 들고, 그럴 때마다 심장이 쥐어짜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통증은 생각보다도 격렬하고 자극적이라, 그는 몇 번이고 전쟁터 한가운데에서 적을 등지고 황궁으로 돌아갈 뻔했다.

‘드디어 미친 건가.’

그는 왜 이리 자신이 비이상적인 행동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가고 황당했다.

황궁에 돌아가 봤자 도움 되는 건 없었다. 루인은 전투에 있어서 자신이 있고 없고의 차이를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전쟁이 길어지면 자원 낭비만 하게 될 뿐이기에, 이를 빨리 끝내기 위해선 그가 이곳에 남는 게 이성적으로는 당연한데… 몸은 자꾸 황궁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심지어 황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심해져서 몽유병까지 생겼다. 그는 잠이 들어도 해가 뜰 무렵 눈을 뜨면, 말 앞에 우두커니 서 있기도 했고, 맨발로 황궁이 있는 방향으로 몇 발자국 걸어가다가 장애물에 부딪혀 깨기도 했었다.

대체 왜?

왜 이토록 황궁으로 돌아가려고 드는 거지?

이토록 이성을 거스르는 움직임이 계속 보이니 루인은 자신이 병에 걸렸음이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루인은 병을 치료하고자 의원을 불렀으나, 그들은 하나같이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저 모두가 그가 전쟁으로 인해 긴장과 무리를 많이 해서 그런 것 같다며,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할 뿐이었다.

긴장? 무리? 휴식?

하나 루인은 코웃음을 치며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여태 그가 나간 전쟁이 어디 한두 개인가. 그는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밤을 몇 날 며칠을 새고도 이런 증상을 보인 적이 없었다.

‘지금 또 이러네.’

잠시 그간 있었던 일을 생각하던 그는 인상을 구겼다.

말을 타고 황궁으로 돌아가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황궁으로 빠르게 돌아가자며 온몸의 근육이 날뛰고 있었다. 루인은 헛웃음을 짓다가 말고삐를 세게 틀어쥐었다. 그토록 황궁으로 돌아가고자 했으니 돌아가면 이 증세의 원인도 찾을 것이고, 나아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루인은 쉬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렸다.

타고 있는 말이 힘에 겨워 헐떡이면 잠시 멈춰서 말을 쉬게 하지만, 그 시간마저도 아깝다는 듯 그의 눈은 계속해서 자신이 가야 할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하.”

달리는 도중 이상하게 속이 소란스러워, 작게 숨을 내뱉자 한숨이 고드름으로 얼 것처럼 새하얗게 흩어졌다.

제국으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해가 지기 시작해서 그런지 날씨는 추워졌다. 또한 눈송이가 하나둘씩 떨어지는데, 기세가 심상찮다.

‘이런 날은 꼭 지독한 폭설이 내리는데.’

눈발이 거세지면 가는 길이 더럽다.

그 전에 도착하고자 마음을 먹으니, 말을 모는 그의 손이 아까보다도 더 조급해졌다.

“이랴.”

얼마나 날이 추운지, 갑옷에 묻은 피들이 얼어붙었다. 손은 이미 감각이 없어진 지 오래고, 눈동자마저 얼어붙을 것처럼 추웠다.

이 궂은 추위 속에 그는 멈출 법 한데도 계속 달렸다.

언 땅을 박차고 달리고, 또 달렸다. 심지어 마을에 들러 빠르게 말을 바꾸고 달리기까지 했는데, 그 과정에서 당연히 휴식이란 없었다.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마시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가니 예상보다 빨리 도착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토록 가고자 했던 황궁과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어째서인지 그의 얼굴엔 점점 긴장이 스며들었다.

‘왜지?’

한참 달리던 그는 자신이 왜 이리 긴장하는지, 스스로의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점점 표정이 이상해졌다.

하나 의문에 답해 줄 이란 없었다. 시린 추위에 손이 말라붙듯 얼어도, 입술이 새파래지더라도, 그는 도착하면 의문이 해소될 것처럼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해가 모습을 감춘 지 얼마 되지 않아, 황성에 도착했다.

말을 타고는 이틀을 꼬박 달려야 하는 거리를 하루 만에 달려왔다. 어떻게든 당장 황궁에 다다르려는 이처럼 집요하게 달린 결과였다.

그리하여 황제는 황성에 제대로 된 소식이 닿기도 전에 황궁에 먼저 도착했다.

“웬 놈이……폐, 하?”

처음에는 황제를 못 알아본 듯 날 선 얼굴로 황제를 올려다보던 문지기가 뒤늦게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제,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전쟁에 나가 매일 전쟁을 치르고 있다던 황제가 대뜸 전쟁터 한가운데에 있을 법한 피에 떡칠이 된 갑옷 차림을 하고 나타나니, 단번에 알아보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문을 열어라! 황제 폐하시다!”

황궁의 굳게 닫힌 문을 지키던 문지기가 그리 소리치자, 한창 전쟁을 치르고 있을 그들의 황제가 이곳에 있다는 것에 화들짝 놀란 듯 굳어 있던 이들이 서둘러 루인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문을 활짝 열었다.

끼이익, 커다랗고 무거운 문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열렸고, 열린 문 사이로 그가 지내던 황궁의 모습이 드러났다.

“…….”

풍경은 뻔했다.

바삐 돌아다니던 사용인들이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눈이 내려 점점 쌓이기 시작한 정원도 보였다.

겨울에도 푸른 잎을 자랑하는 나무들이 희게 고개를 숙인다. 그래, 눈. 수도에서부터 다시 미친 듯이 달리느라 잠시 신경을 끄고 있었는데, 하늘을 보니 언제부터인지 눈이 꽤 사납게 내리기 시작했다. 눈의 기세를 보아서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폭설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눈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루인은 하늘을 보던 고개를 내려 다시 황궁을 응시했다.

황궁의 모습은 떠날 때와는 다른 게 하나도 없었다. 놀라울 정도로 같아서 이상할 지경인데, 어째서인지…….

“폐하?”

낯설었다.

하나, 그것은 쓸데없는 걱정일 것이다. 묘한 위화감을 느낀 것을 뒤로하고, 루인은 말을 이끌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궁 내에서 탈 것을 이용할 수 있는 자는 오로지 황제뿐이다. 그는 제가 지내는 궁으로 단번에 말을 몰아 달렸다. 한데.

‘분위기가 왜 이리…….’

탁하지?

황궁이 평소보다 소란스럽다는 느낌을 받은 루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신이 일찍 입궁을 해서 놀란 것도 있겠지마는, 단순히 그것만은 아닌 거 같았다. 무엇보다도 사용인들의 모습이 이상했던 것이다.

그가 아무런 연락도 없이 온 것이 놀라울 수는 있지만, 사용인들이 지나칠 정도로 발발 떨며 눈을 굴리고 있었다. 게다가 분위기도 어수선하고 소란스러웠다.

뒤숭숭한 분위기에 루인의 눈이 가늘어지다 이윽고 고개를 떨구어 제 쿵쾅대는 심장을 느끼고 가슴을 응시했다.

황궁에 들어가기 바로 직전부터 점점 빨라지더니, 이제는 미친 듯이 빨리 뛰고 있었다.

정말 어디가 아픈가.

이전에 이런 적이 거의 없었기에, 이런 제 몸뚱이가 어색한 양 루인이 인상을 구기다가 말에서 내려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한데, 제 궁 안을 걷고, 또 걷던 그는 돌연 이상함을 깨닫고 우뚝 멈추어 섰다.

“…….”

기사들이 없었다.

단 한 명도.

그의 성격상 원래 황궁 내에 기사들을 잘 들이지는 않지만, 제아무리 들이지 않더라도 이건 정도가 심했다. 진즉 그의 앞에 태양을 맞이한다며 응당 나타나야 할 기사들이 하나도 없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별 시답잖은 생각이다.’

하나 루인은 애써 생각을 묻었다.

그래, 지금 시간은 밤이다. 아마 교대를 하느라 비웠을 수도 있고, 모스가 이곳에 있어서 카를이 기사들을 전부 물렸을 수도 있다. 납득할 수 있는 이유야 많았다.

한데, 왜일까.

이상하게, 지나칠 정도로 불안했다.

아까부터 뛰던 심장은 이제는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뛰고 있고, 불안은 점점 루인의 목을 조이다 못해 숨통을 틀어쥐는 것만 같았다. 점점 가빠지는 숨을 가까스로 내쉬며 그가 빠르게 침실 앞 복도에 도착했다.

걱정과는 다르게 침실 앞 복도는 평소와 다름없이 깨끗했지만 루인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위협을 감지한 것처럼 그의 동공이 바짝 커졌다.

‘혈향.’

그의 코끝에 짙은 피 냄새가 스친 것이다. 침실 앞에는 피 한 방울 떨어져 있지 않은데, 짙은 피 냄새가 나다니…… 그의 눈매가 사나워짐과 동시에 걸음이 빠르게 바뀌었고,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뜀박질로 바뀌었다.

루인은 뛰었다.

채 벗지 못한 갑옷의 철컹거리는 소리가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 소리와 겹쳐 시끄러웠다. 돌연 갑옷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져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멈추어 서서는 갑옷을 뜯어내듯 벗어 던지고 걸었다.

‘시끄럽다, 시끄러우니…….’

하나 갑옷을 벗어 던졌음에도 머리는 소란스러웠다. 심지어 점점 더 시끄러워졌다.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머릿속이 시끄러운 가운데, 와중에도 그는 문은 열고자 했다. 저 문을 열지 않으면, 그때야말로 정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원래 여기서부터 침실의 입구까지의 거리가 이토록 멀었나. 분명 몸은 가까이 가고 있는 거 같은데, 문고리가 기이할 정도로 멀리 느껴졌다. 루인은 더 빠르게 뛰어, 헐떡임을 채 감추지 못한 채 문고리를 틀어쥐었다.

벌컥, 쾅!

그가 드디어 멀게만 느껴지던 문을 걷어차듯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그의 시선은 침상으로 향했다.

침상 위에는 동그랗게 이불로 말려 있는 인영이 있었다. 구속을 당한 듯, 돌돌 이불로 말려 있는 인영의 몸에는 끈이 여러 갈래로 얼기설기 얽혀 있었지만, 어쨌든 존재했다.

“……하.”

그걸 보자마자 루인이 벽에 기대며 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만 해도, 숨을 제대로 내쉬는 방법을 잊은 것처럼 그리 굴었는데, 침상 위 인영을 보자마자 탁 긴장이 풀리더니 절로 한숨이 내쉬어진 것이다.

그는 벽에 기댄 채, 인상을 찌푸리다 고개를 수그려 제 가슴팍을 손으로 짚었다.

방금 전까지 터질 것처럼 뛰던 심장 또한 언제 뛰었냐는 듯 잠잠하기 그지없다. 루인은 그제야 제가 이토록 미친 듯이 달려오게 만든 원인이 고작, 저 작은 괴물 하나였음에 어이가 없음을 감추지 못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이리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데, 어딜 가고, 어딜 감히 녹겠는가.

그리 생각을 하며 침상으로 다가가던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상은 했다만, 침실의 상태는 떠나기 전보다 더 엉망이었다. 창가에는 해를 막기 위해, 몇 번이고 덧댄 흔적이 보였고, 군데군데 몸싸움의 흔적들이 보였으며, 구속구 여러 개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쯧, 아무래도 여러모로 고군분투한 모양이라며 작게 혀를 차고 루인은 침상에 바짝 붙은 뒤, 돌돌 말린 이불을 감싼 가죽끈을 풀어내려다 살짝 인상을 구겼다.

아무리 인간의 수준을 넘은 그더라도, 전쟁을 끝내자마자 달려온 것은 꽤 무리였는지, 말고삐를 틀어쥐었던 손바닥이 전부 터져 물러 있었다.

보기만 해도 아픈 상처이건만, 그는 잠시 제 손을 응시하는 걸로 반응을 다 하고, 가죽끈을 풀어 이불을 벗겨 내려고 들었다.

끈이 하나둘 떨어지고, 몇 겹이나 두툼하게 두른 이불을 내리는 가운데, 잦아들었던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빠르게 뛰던 심장 소리는 이불을 온전히 내렸을 때…….

“…….”

멈추었다.

삐이익,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며, 현실에서 동떨어지는 느낌이 났다.

그는 그 감각 자체가 자신이 죽음에 이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으며, 또는 세상이 멈춘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 기묘한 감각 속에서 얼어붙은 채 가만히 있던 그는, 이 추운 겨울이 기어코 자신의 눈을 가려, 제가 헛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하나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변하는 것은 없었다.

“……카를?”

모스 대신 이불 속에 있던 건, 엉망으로 얻어맞은 듯 퉁퉁 부어 피범벅이 된 카를이었다.

눈이 뒤집혀 있는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카를.”

그런 카를을 황제가 부르자, 카를이 움칠거리더니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폐, 하.”

곤죽이 된 얼굴로 카를은 황제를 응시했다. 카를은 황제가 이곳에 온 것이 놀라운 듯, 눈을 살짝 크게 떴으나, 이윽고 정신을 차리려는 듯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으…….”

간신히 몸을 반쯤 일으킨 그는 정신이 아직도 제대로 돌아오지 않는지 멍한 눈이었다. 그것에 카를이 자신의 정신을 다잡으려는 듯 머리를 휘저었지만, 그마저도 핑 도는 듯 비틀거렸다.

그 바람에 훤히 드러난 카를의 상체는 엉망이라는 말로도 부족해 보였다. 당장 지혈을 하지 않으면 큰일 날 정도로 커다랗게 난 상처들도 여럿 있었고, 전체적으로 몸이 퉁퉁 부어서 거동마저 힘들어 보였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몸을 한 그는, 드디어 정신을 차렸는지 루인을 똑바로 보았고.

“모, 모스를… 제가… 쿠, 쿨럭.”

고통스러워했다. 통증이 상당한지,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쉴 틈 없이 줄줄 흘러나왔고,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이윽고 그는 비틀거리는 몸을 한껏 웅크린 채 엎드리고는 빌었다.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카를을 본 루인의 표정이 달라졌다. 루인은 어딘가 비틀린 얼굴을 하고는, 엎드리느라 고개를 숙인 카를의 얼굴에 바짝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래. 짐이 묻고자 한 것이 그것이었다. 모스는, 그 괴물은 어딨지? 왜 이곳에 괴물 대신 네가 있는 것이고? 아, 도무지 너로는 그를 막을 수 없었나?”

“폐하.”

“네가 정 막는 게 버거워서 그를 지하 감옥에 둔 것이더냐? 그래, 그래. 네가 이전에도 몇 번이나 그를 지하 감옥에 두라 했으니, 그리 날뛰었으면 거기가 더 나을 수도 있지. 그래.”

“폐하. 그것이…….”

“하나, 지금 우리는 이럴 시간이 없다. 카를, 어서 안내해. 그 괴물은 날이 뜨면 미친 듯이 날뛸 터인데, 기사단장인 자네가 여기 있어서는 안 되지. 어서 그에게 가서…….”

“폐하!!”

카를이 눈을 질끈 감으며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치테이르 황태제 전하께서 모스를 녹이기 위해, 해가 제일 빨리 뜨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루인은 처음에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는 제가 잘못 들은 줄 알고, 마치 돌이라도 된 것처럼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얼어붙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누가 누구를 녹인다고?

귀가 아무래도 추위에 얼어붙은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헛소리를 들을 리가 없지.

발음을 제대로 해야지, 아무래도 자신의 기사단장이 기강이 빠졌거나 어딘가 아픈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카를을 탓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며 입을 열려고 했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이상하다.

꾸역꾸역 입술이라도 움직여 보려는데, 희한하게도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틀림없이 입술을 움직였는데, 움직여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더니 돌연 모든 감각이 멀어진다.

아득히 멀어져, 수면 아래로 끝도 없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고, 사지에 추라도 매단 양 팔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는데.

-인간, 아?

하나, 그것은 순식간에 깨졌다.

수면 아래에 가장 밑바닥의 땅바닥에 닿기 전, 녹색 눈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눈은 일그러져서.

-노, 녹게 해 줘. 녹게 해 줘.

이윽고 피눈물을 뚝뚝 흘리더니 녹아들기 시작했다.

언 땅이 녹는다. 샘솟기 시작하는 녹음, 만개하는 꽃들, 흩날리는 꽃잎들, 그리고 네가 있던…… 빈 허공.

숨이 막힌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진 루인의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채 무서운 기세로 카를을 붙들었다.

“언제.”

“제가 기절해 있어서 그간 흐른 시간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황태제 전하가 이곳에 왔을 때는 밤이 온 직후였…… 폐하!”

루인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뒤에서 카를이 목이 찢어져라 그를 부르면서 따라오려고 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무슨 정신으로 황궁의 입구로 달려갔는지 모른다. 다만 입구에 다다랐을 때, 한치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리는 폭설에 빠르게 뛰던 그의 걸음이 막혔다.

밤과 눈, 세상이 오로지 두 가지의 색만 갖고 있을 수 있다는 듯, 검고 희었다.

거센 눈이 내릴 거 같다던 직감은 헛된 게 아닌지, 말을 제대로 탈 수 없을 정도로 눈발은 거셌고, 시간대는 밤이라 한없이 검었다.

폭설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암흑, 저 사이를 뚫고 가다간 사람 하나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하나, 루인의 망설임은 짧았다. 아니, 없었다. 그는 본래 그곳에서 온 이처럼 향했다.

“폐하!!!”

뒤늦게 그를 따라 나온 카를이 소리를 질렀을 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폭설은 그의 그림자마저 우악스레 잡아먹어, 그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발자국마저도.

***

“……아 도착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여기야, 네가 녹을 자리.”

새까만 절벽 앞이었다.

‘……절벽?’

나를 붙든 이의 손길에 억지로 고개가 들렸다. 그런 내 앞에는 조금이라도 발을 헛디디면, 그대로 떨어져 뼈도 남지 않고 으스러질 것만 같은 절벽이 펼쳐져 있었다.

절벽 너머는 새까맣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배경으로 걸어 두고 있어, 보기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졌지만 더 큰 의문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이곳에 내가 어쩌다 오게 되었는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이 모든 게 전부 ‘갑자기’였다. 내가 어떤 연유로 이곳에 있는지 가늠해 보려고 하는데.

‘머리 아파…….’

그러나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리가 아팠다. 사방에서 무언가가 내 머리를 꽉 쥐고 조이는 거 같아서 머리를 움켜쥐며 눈을 감고 한참을 몸을 떨다, 간신히 눈을 떴다.

여전히 내가 있는 곳은 절벽 앞이었고, 내가 이곳에 왜 있는지에 관한 단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절벽 끝을 빤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응시했더니 별들이 안 보이는 대신, 눈송이가 마치 별처럼 내리고 있었다.

“……아.”

눈꽃을 시선에 담자, 아까부터 올라오던 두통이 일순간이지만 멎은 느낌이 들며 묘한 회상이 일었다.

이 삶을 부여받은 그해, 하늘에서 내리는 눈송이를 처음 보았을 때는 눈이 별인 줄 알았다.

그만큼 눈이라는 존재가 신기했다. 내리자마자 환상인 양 녹아 사라지는 것도, 별처럼 하얀 게 하늘에서 내리는 것도.

그렇지만 나는 첫눈이 내린 그해 이후로 긴 생을 죽지 못해 살았다. 처음에 신기하던 것도 날이 갈수록 무뎌지는 게 당연하다. 날이 가면 갈수록 눈이 더는 특별하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소복하게 쌓이는 눈을 참 좋아했다.

눈이 내리면 기록이 새겨진다.

지나간 이들이 발자국이 남고, 그 발자국들을 볼 때면 마치 여럿에게 둘러싸인 느낌이 들어서 조금 덜 외로웠다. 눈 위로 어느 짐승이 이곳을 지나갔고, 어느 인간이 스쳐 갔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이 지나간 흔적을 내 발로 덧대고 손으로 훑으면 조금 덜 외로워졌기에.

나는 그래서 눈이 좋았다.

눈이 소복하게 내린 밤이면 눈에 남은 자국을 찾아, 그곳에 한참을 머물다 갈 수 있으니 말이다.

다만 언제가 마지막이었더라.

이렇게 넋을 놓고 눈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본 적은 매우 옛날 일이었던 거 같다. 눈을 감지 않는 바람에 눈꺼풀에 눈송이들이 달라붙었다.

그게 지독히도 차갑지만, 이상하게 눈을 감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계속해서 하늘을 보던 그때, 누가 나를 잡아끌었다.

“정신을 못 차리네?”

내 옆에 바짝 붙어 있던 은색 머리가 내 어깨를 쳤다. 나는 그가 치는 대로 흔들리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 자는 누구지.’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이상하게 기억이 나지 않아 입술을 달싹이며 그를 빤히 보는데, 그가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보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뭐야, 왜 이래?”

그나저나 눈이 참 시리게 생겼다.

그의 눈은 시리도록 푸른 눈이었는데,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이었으나 알아볼 수는 없었다. 또한 그리 오래 보고 싶은 얼굴도 아닌지라 다시 허공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얘 녹겠다며 따라올 땐 언제고, 지금은 왜 이래?”

뭔 말이지.

남자가 누군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어 멍하니 허공만을 보는데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저희가 얼굴까지 너무 꽉 묶어서 데려온 거 아닐까요? 인간이라면 압사당해 죽을 정도의 강도여서…….”

“얘는 안 죽어.”

“그나저나 정말 괴물…, 아니 이 영웅을 녹이면 봄이 올까요?”

“같이 가서 신탁을 들었으면서도 그런 말이 나와? 얘 맞다니까.”

두 사람이 뭐라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던 와중, 다른 인간들이 다가와 큰 소리로 그들을 불렀다.

“석궁은 다 준비됐습니다!”

“돌이랑 밧줄도 여기 있습니다!”

“자, 얼른 고정해.”

그제야 허공에서 시선을 거두어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어느 틈에 온 것인지 내 뒤로 인간들이 많았다.

큰 소리를 내며 소란스레 움직이던 이들이 내게 뭐라 말을 걸었으나, 나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자 그들끼리 서로를 바라보며 도리질을 몇 번 하고는 여러 개의 밧줄로 날 꽁꽁 묶고, 그 밧줄 끝에는 커다랗고 무거운 돌들을 주렁주렁 매달았다.

내 옆에 있는 이 자는 누구고, 이곳은 어디고, 저기서 왔다 갔다 하는 인간들은 뭐지? 그리고 저 끝에 있는 거대하고 뾰족한 화살들은 뭐지?

궁금하고 이상한 점이 가득가득 쌓여 묻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이상하게 입은 떼어지지 않았다.

잘 굴러가지도 않는 머리로 어떻게든 이해를 해 보려고 애썼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머릿속에 안개라도 낀 양 흐릿해서 몽롱했고, 오히려 몸이 붕 뜨는 부유감이 들며 두통이 몰려왔다.

허공을 보니 또다시 머릿속이 고요해진다.

점점 물속으로 잠기는 것처럼 소리도 잘 안 들리고, 정신도 혼몽해지던 그때, 문득.

‘아, 이거 꿈인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꿈, 괴물인 나는 제대로 꿔 본 적도 없고, 꿀 수도 없는 인간들의 영역.

‘하지만 난 괴물이라, 꿈을 꿀 수 없는데.’

그러기에 이게 혹 현실은 아닐지 생각해 봤지만, 이 모든 게 꿈이 아니라면 말이 되지 않았다.

만약 이게 현실이라면, 괴물인 내가 이리 인간들 사이에 자연스레 섞여 있을 일은 없을 것이며, 인간들이 이렇게 날 앞에 두고 아무렇지 않은 양 돌아다니고 있지는 않을 테니.

‘아쉽다. 기왕 이게 꿈이라면, 낮에 눈이 내리는 모습을 보여 주지…….’

하나 욕심이란 끝도 없어서, 아쉬움이 남았다.

꿈이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을 보여 주는 것이라면, 현실에서 볼 수 없었던 낮에 내리는 눈을 보게 해 주면 어디가 덧나나. 꿈이란 참 야속하다고 생각하는 내내, 옆에서 인간들은 쉬지 않고 떠들었다.

“……이러다 도망가는 거 아닙니까?”

“이렇게 묶어 놓았는데 어떻게 도망가? 억지로 끈을 끊어 내거나 도망치면, 곧바로 석궁에서 화살이 날아와 바닥에 처박힐 텐데….”

하늘에서 흩날리는 눈은 점점 거세져서 어느새 주저앉혀진 내 몸 위로 쌓이고 있었다.

나는 느릿하게 손을 움직여 무릎 위로 쌓인 눈을 툭툭 건드리다, 문득 말라비틀어진 잎사귀를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잎, 나무, 숲.

그것을 보고 있으니 숲을 둘러싼 환각초가 생각난다.

‘한때 나는 그 풀을 손이 다 터지도록 뜯어냈지.’

언제더라. 나는 날 지키듯 둘러싼 환각초를 무자비하게 뜯어낸 적이 있다. 눈이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언 땅 위에서, 얼어붙은 환각초들을 맨손으로 뜯어내어 길을 닦아 놓고 그곳에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손가락 사이사이가 다 터지고 짓무르고 손톱은 빠지고, 그 엉망진창인 몰골로 하염없이 기다렸다. 하염없이…….

‘……누구를?’

내가 누구를 기다렸더라?

누구를 그렇게까지 하면서 숲에서 기다렸지?

이상하다. 분명 무언가를 기다렸는데, 이상하게 머릿속이 희었다. 그 부분만 도려낸 것처럼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숲에서 나는 그를…… 그를…… 근데.

“누구더라.”

깜빡,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곧 해가 떠오를 것 같습니다!!”

뒤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고, 더더욱 소란스러워졌지만 그들의 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어둠뿐이라고 생각했던 절벽 끝에서 무언가가 떠오르고 있었지만, 그것을 볼 겨를이 없었다.

‘누구를 기다렸지?’

무언가 떠오를 듯 형상 비슷한 것이 눈앞에 아른거렸지만, 선명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보려고 들면 들수록 내 머리는 쪼개질 것처럼 아파 왔다.

형체 모를 딱딱하고 무거운 게 내 머리를 짓누르고 조인다. 마치 고문이라도 당하는 듯, 엄청난 고통이었다.

“허억.”

결국 몸을 비틀거리다 허리를 굽히려 했다. 하나 그것마저도 쉽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려고 하자 몸에 묶인 밧줄들과 커다란 돌들이 팔을 바닥으로 달라붙게 만들었고, 계속해서 무릎이 꿇어졌다.

차라리 생각을 하지 말자며, 생각을 멈추려고 했으나 생각은 멈추고자 한다고 해서 멈춰지는 것이 아니었다. 아프다는 내 비명에도 불구하고 내 머리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 ‘누군가’를 자꾸 찾아내려는 듯 노력했고, 그 노력은 내게 고통이 되었다.

“아, 아파. 아파.”

그저 누구인지를 떠올리려고 했던 것뿐인데, 머리가 쇠꼬챙이로 쑤셔지는 것처럼 아팠다.

아파, 너무 아파서 미칠 거 같아. 머리가 너무 아프다 못해 터질 것만 같아서 눈물이 절로 새어 나왔다. 엄청난 격통에 이도 저도 못 하며 숨 쉬는 법도 잊은 양 헐떡였다.

“해가 뜹니다!!”

그때, 강한 햇살의 향이 났다.

머리가 아픈 와중에 나도 모르게 번쩍 고개를 들었다. 당장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뼛속에 새겨진 나의 본능이자, 삶의 욕구였다.

하나 고개를 들자마자 직감했다.

늦었다고.

햇빛이란 그랬다. 자각을 하는 순간, 도망칠 새도 없이 나를 녹여 버리는, 도저히 나의 힘과 속도로는 피할 수 없는 그러한 것.

햇빛이 다가오는 모습이 느릿하게 보였다. 그게 너무 지나칠 정도로 느리게 보여, 일순 세상이 멈춘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이토록 느리게 다가오면 머리 정도는 피할 수 있을 거라며, 삶의 욕구가 고개를 들어 내게 피하라고 속삭였다.

당연히 그 욕구에 부응하듯 몸을 돌려 해를 피하려던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꿈이잖아.’

방금까지 뭔가를 생각했던 거 같은데, 죄다 꿈이라 생각하니 아무래도 좋았다.

햇빛이 점점 내게 뻗어 온다. 끝도 없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이 절벽을 비추며, 어둠 속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담겨 있는지를 알리듯, 그렇게 내게 다가오는 햇빛, 황금색, 빛, 태양.

빛이 물결처럼 내게 넘실거리듯 범람해 들어오던 그때, 나는 돌연…….

“괴물아.”

태양 같은 그가 떠올랐다.

여태 어떻게 그를 잊고 있었는지 우스울 정도로 쉽게. 저 멀리서 떠오르는 황금색 해처럼, 마치 나를 녹이러 온 태양처럼.

“돌아가자.”

꿈속임에도 이토록 선명하게.

다가오는 햇빛을 가로막은 그, 황금 같은 금발이 파도치듯 너울거리고, 눈은 태양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순간, 번개가 내게 내리꽂힌 거 같았다.

‘어떻게 내가 너를 잊을 수 있었지?’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 그를 끝끝내 떠올리지 못했던 게 이해가 안 될 정도로, 그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나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은 정말 내가 숲에서 만났던 모습 그대로였지만, 그 아름답고 수려한 얼굴을 오래 볼 수는 없었다.

나를 한동안 가만히 보던 루인이 이어 내 위로 검은 천을 뒤집어씌워 발끝까지 덮고는, 그 위로 자신의 옷을 두른 것이다.

“형님! 대체, 여기를 어떻게 오신…….”

그런 그에게 다른 이가 말을 걸었지만, 루인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리에 나만 있다는 듯, 내게 말을 걸 뿐이었다.

“쯧, 이리 와.”

그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는 날 잡아끌더니 익숙한 자세로 들어 올렸다. 그의 손짓 몇 번에 아까 내가 기를 써도 움직여지지 않았던 내 몸은 너무나도 쉽게 안겼다.

나는 햇빛에 혹여나 몸이 닿을까 그의 품속으로 몸을 욱여넣었다. 방금만 해도 해가 두렵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어떻게든 햇빛에 닿지 않기 위해 발가락도 구겼다.

“햇빛을 피한다고? 너 설마…….”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었지만 나는 그가 덮어 준 천과 옷에서 온통 그의 냄새가 나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래, 내가 가장 좋아했던 그의 향기, 한때는 이게 나의 세상이었다.

그의 숨 하나에 별들은 위아래로 출렁였으며, 손짓 하나에 세상이 반쪽으로 갈라지기도 했고, 입맞춤 하나에 쪼개졌던 나의 세상은 다시금 언제 그랬냐는 듯 맞붙어 새로운 세상으로 다시 태어나 돌아갔다.

너는 내게 그런 의미였다.

“네가 싫어.”

네가 기억을 다 찾고도 나를 기만했던 그날 전까지.

꿈이라 그런 걸까.

그가 나를 기만했던 날이 떠오르자, 현실에서는 꺼내지 못했던 내 썩은 속내를 돌연 나의 입이 제멋대로 움직여 토해 냈다.

나는 내가 말을 내뱉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그득그득 들어찬 증오에 절로 헛숨을 삼켰다. 하지만 그건 찰나였다.

“네가 미워.”

어차피 이건 꿈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다 사라져서 나도 제대로 기억 못 할 꿈이라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썩어 문드러진 내 속을 새까만 말로 내뱉었다.

“너를 증오해.”

그는 내게 기억을 다 찾은 게 무슨 대수냐고 말하며 악을 쓰고, 몰아세우고, 내 평생을 바칠 수 있을 정도로 소중히 여기던 숲에서의 시간을 짓밟아 버렸다.

그러기에 그는 더는 내가 알던 남자가 아니었다. 남자의 탈을 뒤집어쓴 황제일 뿐이었다.

“차,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너를 싫어해, 미워해, 증오해.

그리하여 그가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며 꿈을 빌미로 말해 본다. 이러한 증오 어린 표현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찌 되었든 그는 모든 움직임을 잠시 멈추었다.

“…….”

그는 침묵했다. 그것도 꽤 길게.

침묵이 길어지자 어째서인지 크게 울고 싶어졌다. 하나 그렇다고 울음소리를 밖으로 내뱉고 싶진 않았다. 이를 악물자, 고요 속에서 눈물만이 주룩주룩 흘렀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앞이 흐려졌다가 선명해지길 반복했다.

“네가 죽었어야 했어.”

하나 꿈에서만큼은 우는 걸 들키기는 싫었다. 나는 눈물을 꾸역꾸역 삼키고 되뇌듯 침묵을 가르고 말했다.

내가 알던 그 남자가 아닌, 네가 죽었어야 했다.

무섭게 몰아치던 네가 아닌, 숲에서 내게 꽃을 주던 그 남자가 살았어야 했다. 기억을 이미 다 찾았으면서도 아닌 척, 나의 희망을 산산조각 내던 네가 아닌 그 남자가 살았어야 했다. 나를 위해 꽃과 열매를 갖고 들어오던 그 남자가, 살아서 돌아왔으면…….

“하, 그래?”

그때, 여태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던 루인이 돌연 입을 열었다. 안 보고도 표정을 그릴 수 있을 만큼 말투는 굉장히 싸늘했다.

“네가 내게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나?”

이죽거리듯 그가 말을 이었다.

“나도 너 같은 괴물 따위 징그러워. 인간도 뭣도 아닌 네가 인간처럼 그리 구는 것이 얼마나 역겹고, 혐오스러운지 아나? 너는 더러운 숲에서 왔으며, 인간 같지도 않은 징그러운 몸을 가지고 있지. 목에 구멍이 뚫려도 살고, 다리가 잘리면 괴물처럼 다시금 돋아나고, 그래 놓고 햇빛에는 녹아 버리지. 이게 정상이라고 생각하나?”

오로지 상처를 주려는 듯 내뱉어지는 말에, 일순 이게 꿈인 것을 알면서도 심장이 무너져 내리듯 철렁였다.

심장이 따끔따끔했다. 더는 상처받을 곳이 없을 줄 아니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또 자기 주제도 모르고 덤벼드는 무모함은 어찌나 어리석고 짜증 나는지. 그런 멍청한 네가 내게 다가올 때마다, 나는 매번 널 죽이고 싶었다. 그리고…….”

이어져서 나올 말이 두려워 눈을 질끈 감았다. 틀림없이 엄청난 폭언이 쏟아지겠지. 그 말들은 내 살갗을 가르고 심장을 쥐어짜 낼 것이다.

곧 다가올 고통을 떠올리니 몸이 절로 바들바들 떨렸다.

“…….”

하지만 어째서인지 루인은 말을 이어 하지 않았다. 가시 돋친 말 대신 내 귓가에는 이상한 게 들렸다.

쿵쿵쿵, 쿵쿵. 아까보다도 더 확연하고 빠르게 뛰는, 바투 붙은 그의 가슴에서 나는 심장 소리. 마치 긴장이라도 한 것처럼, 또는 ……상처라도 받은 것처럼.

하지만 난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을 접었다.

루인 윈스가 상처를 받고, 긴장을 한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언제나 냉정을 유지하고 폭력을 사랑하는 그는 결코 그럴 인간이 아니었다. 애원을 하고, 수도 없이 매달려 본 내가 장담하는데, 그는 내가 죽어도 눈 하나 깜짝도 하지 않을 인간이었다. 그만큼 잔혹했고, 자비란 없는 이니까.

“폐하!!! 거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당장 나오세요!!!”

그때,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소란이야 처음부터 있긴 했지만, 그 소음 자체가 아까보다도 훨씬 더 커져서 더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폐하!!”

“황제 폐하!!!”

그때, 루인이 갑자기 바짝 붙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어깨를 옹송그렸다.

아, 때리려나. 그의 심기에 거슬릴 말을 잔뜩 했으니, 나를 틀림없이 때릴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 위로 떨어질 무자비한 폭력을 예측하며 몸을 발발 떨었다.

“…….”

하지만 폭력은 없었다. 밖의 소란은 더더욱 요란스러워지는 데에 비해, 그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몸을 잔뜩 구긴 채 떨던 내가 의아함에 기어코 고개를 느슨하게 빼내던 그때, 루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에 내가 다시 움칠하며 몸을 웅크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내게 바짝 얼굴을 붙였다.

그리고 천을 뒤집어쓴 내 얼굴이 제대로 보일 리가 없을 텐데, 내 이마를 정확히 찾아 그곳에 입술 같은 것을 가벼이 댄 뒤, 이어 코를 내 엉망진창인 머리에 살살 비볐다.

“하.”

그렇게 있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크게 숨을 들이켜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제정신이 아니지. 그래, 제정신이 아니니 이 상황에서조차…….”

“폐하!!!”

“기억해.”

하지만 그의 웃음을 찰나였다.

“너는 영웅이 아니다.”

순식간에 내 어깨를 세게 움켜쥐며 말하는 말투에는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너는 괴물이다. 더럽고 천하며 결코 인간도 영웅도 될 수 없는 괴물.”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겁이 많아, 죽지 못해 사는… 괴물.”

그게 다였다.

대뜸 그리 말한 그는 짧게 침묵했다. 그리고 내가 뭐라 답할 새도 없이, 무슨 상황인지를 파악하기도 전에 돌연 나를 꽉 한번 안고는 힘껏 던졌다.

허공에 던져지니 당연히 뒤집어쓴 천에 틈이 생겼다. 빈틈으로 나는 온통 햇빛이 뒤덮인 절벽 위, 그를 볼 수 있었다.

“카를!!!”

고함과 동시에 누군가가 내 몸을 낚아채듯 붙들고선 달리기 시작했다.

펄럭이는 틈 사이로 내 눈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 우리 둘 사이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음에도 그는 내가 있는 쪽이 어딘지 똑바로 보고 있었다.

그의 눈을 마주하는 시간은 길었다. 분명 찰나임에도, 이상하게 마지막 순간을 각인이라도 하듯, 길었는데.

나는 숨을 쉴 수 없었다.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네가 밉다, 증오스럽다, 싫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 내가 한 말들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찰나의 순간만큼은 그런 말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눈빛에서 무언가 이상한 게 읽혔다. 하나 나는 생전 그런 것을 본 적이 없어, 그의 얼굴에 담긴 게 무언지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

우스운 것은 그도 스스로의 마음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아주 잠시 신기루처럼 짧게 그 알 수 없던 표정은 어디 가고, 루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혼란스럽고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제 얼굴을 문지르며 욕을 짓씹었다. 그러면서도 줄곧 내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 시선이 지나치게 강렬해, 나도 모르게 딴 곳을 보는데 안 보이던 것들이 보였다. 이 추위에 훤히 드러난 밧줄을 쥔 그의 손은 다 터져서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눈도 실핏줄이 터져 붉었고, 목에는 핏대가 잔뜩 세워져 있었다.

그런 모습의 그는 처음 보아,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어 그는 한 손으로 쥐고 있던 밧줄을 다시 움켜쥐려 했지만, 이내 지친 듯 비틀거리며 놓치고 말았다.

그러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마치 세상이 끌리듯, 밧줄들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그의 손을 빠져나갔고, 동시에 무수한 화살들이 그의 위로 쏟아져 내렸다.

“폐, 하!!”

그가 비처럼 내리는 화살들 사이로, 흐르는 햇빛을 거슬러, 절벽 너머로 사라진다. 그 순간까지도 그의 시선은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형님!!!”

비명, 절규, 고함.

그 모든 것이 잦아들기 전에 루인은 사라졌다. 끝끝내 스스로의 행동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폭설은 멎었다.

발자국 하나를 남겨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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