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겨울(4권) (12/21)

디어 몬스터, 디어 히어로(Dear Monster, Dear Hero) 4

10. 겨울

봄, 그것은 제국이 그토록 갈망했던 것.

어느 날 찾아온 봄은 그간 피지 못하던 꽃들을 피우며 자신의 귀환을 화려하게 알렸으나, 그리 요란스레 알리지 않았더라도, 사람들은 금세 눈치챘을 것이다.

공기부터가 달랐다.

살갗을 아리게 하던 추위는 가시고, 따뜻한 공기와 따사로운 햇살로. 얼어붙었던 땅은 축축한 땅으로, 그리고 그 땅 위로 싱그러운 생명체들이 제 존재를 드러냈으니.

“그건 뭐예요?”

“이번에 새롭게 재배하게 될 작물이지!”

봄은 그간 무수한 세월을 잊고 살았던 게 무색하게도 쉬이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더는 제국은 품종을 고르고 골라, 작물을 재배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추위로 옷을 두툼히 입을 필요가 없었다.

“황제 폐하 만세!”

“윈스 제국 만만세!”

윈스 제국이 이토록 풍요롭고 기름진 땅이었다니.

꽁꽁 얼어붙었던 얼음 땅이 녹고 드러난 제국의 진면모에 모두가 환호하며 황제의 이름을 연호했다.

몇백 년 동안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것을 해낸 황제, 루인에 대한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

“절벽에서 겨울의 비밀을 찾으셨다고 해!”

“심지어 거기서 엄청난 괴물과 싸우셨다는데?!”

“맞아. 그래서 그 싸움에서 치테이르 황태제 전하께서 희생되셨다고 하고, 또…….”

황가에서 아무런 입장을 내놓지 않으니, 이야기는 살이 붙어 마치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내용으로 무성하게 세상에 뻗어 나갔다.

“존경하는 기사단장님을 뵙습니다!”

“…어휴, 이제는 단순히 보좌관일 뿐이라니까.”

“아닙니다! 존경합니다!”

카를은 복귀했다.

그는 한쪽 팔과 다리에 평생 갈 만한 중상을 입는 바람에 더는 현직 기사단장으로 있을 수 없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루인의 곁에 남아 일 처리를 돕고자 했다.

그런 카를을 따르는 기사들은 많았다. ‘봄을 되찾은 기사’라는 칭호가 그의 앞에 붙은 탓도 있겠지만, 지금 가장 추앙받는 황제의 옆에서 모든 것을 함께 한 유일한 기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럼 나는 폐하를 뵈러 가겠네.”

“예! 알겠습니다!”

올망졸망 저를 보는 기사들을 보며 웃는 낯을 하던 카를은 뒤를 돌자마자 표정을 굳혔다.

그는 굳은 얼굴로 황제의 집무실을 향했다. 그와는 달리 그의 곁을 지나치는 사용인들의 얼굴은 밝았다.

날씨가 이렇다.

혹한 속에서는 다들 표정이 딱딱했는데, 지금은 지나치는 이들이 모두 꽃처럼 웃었다.

하나 그럼에도 카를은 마냥 웃고 있을 수 없었다. 황실과 황제의 위상이 하루가 멀게 드높아지지만, 카를은 여전히 그날에 머물러 있었으니까.

그래, 그날.

***

“……폐하?”

의식을 잃었던 카를은 눈을 떴다.

그는 어지러운 정신을 간신히 다스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려, 이윽고 자신이 약 냄새가 지독히 풍기는 천막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뭐가 어떻게 돌아간 거지?’

마지막 기억을 더듬어 보던 카를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절벽에서 떨어진 황제, 그리고 병사들에게 끌려가던 모스. 그 장면을 마지막으로, 카를도 한계가 다해 정신을 잃었다.

“아!”

자리를 박차듯 일어나려고 했던 카를, 하지만 이내 오른쪽 손에 마치 수십 개의 칼날이 박힌 것만 같은 통증을 느끼고 새하얗게 질린 채 헉헉거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한계를 넘어서 움직인 이 몸의 수명이 다해, 다시는 기사단장으로 복귀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나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폐하는?! 모스, 그자는?!’

천막 안에 있을 때가 아니었다. 서둘러 폐하의 안전과 모스를 확인해야 한다. 자신이 죽은 게 아닌 천막에 있는 걸 봐서는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어 가고 있다는 뜻 아닌가.

카를은 넝마가 된 몸을 가까스로 일으켜 천막을 나섰다. 시간은 밤이지만, 어두운 밤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샅샅이 찾아!”

“움직여!!”

수많은 횃불로 가득 차 있었다.

많은 이들이 횃불을 들고 절벽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 사이로 수많은 시신이 들것에 실려 이동하고 있었고, 그리고 그 사이에는.

“……폐하?”

그런 시체들을 일일이 확인하는 황제가 있었다. 의아함도 잠시, 카를은 그런 루인의 모습을 제대로 보자마자 비명을 지를 뻔했다.

루인은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그의 상태는 심각했다. 몸에 드러난 살 중, 붕대에 감기지 않은 부분은 없었고 그 붕대들은 계속 새빨갛게 물들어, 옆에 있던 다른 이가 계속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붕대를 갈아 주고 있었으며, 붕대 틈으로 드러난 살들은 온통 새까만 멍투성이였다.

“카를 경? 여긴 어찌 나오셨어요?”

그때, 옆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던 병사들 중 하나가 놀란 듯 카를을 보았다. 카를은 그 병사가 이번 루인이 이끈 전쟁에 참전했던 병사들임을 깨닫고, 바로 모든 상황을 알아챘다.

아마 절벽에서 살아 돌아온 황제가 전쟁터에서 복귀하는 기사들과 병사들에게 연락을 해, 이쪽으로 데리고 온 것임을.

한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지금 폐하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왜 저리 성하지도 않은 몸을 한 황제가 절벽 아래에서 올라오는 시신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있고, 이들은 왜 저렇게 자꾸 시신들을 끌고 올라온단 말인가?

“아, 저건… 치테이르 황태제 전하께서 절벽 아래로 떨어져서 수색하는 중이었어요. 절벽 아래에 시신들이 원체 많아 벌써 수색이 닷새가 넘도록 이어지고 있었고요.”

“……닷새?”

카를은 경악했다.

‘벌써 닷새나 흘렀다고? 또 황태제는 어쩌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졌지? 그리고 폐하께서는 반역이나 다름없는 황태제의 시체를 불태워도 모자랄 것인데, 왜 저리 열심히 찾는 거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무엇보다 폐하께서는 닷새 동안 저리 계셨단 말인가?’

당장이라도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으로, 닷새간 저 수많은 시체를 보았다고?

경악한 카를은 이내 루인에게 몸은 괜찮으시냐며, 대체 어떻게 살아 돌아오셨냐며, 그리 묻고 싶은 게 가득인 얼굴로 그에게 다가가려고 움직였다.

“으, 윽.”

“아이고, 경!”

하나 몸이 너무 아팠다. 단순히 아프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인지라, 카를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그저 주저앉은 채 고통 어린 신음을 내뱉었다. 이를 지켜보던 병사가 화들짝 놀라 급히 카를을 부축하려던 그때.

‘어?’

그 순간, 카를은 눈을 크게 떴다.

‘꽃잎?’

어두워서 여태 몰랐는데, 아까부터 위에서 떨어지는 것은 꽃잎들이었다. 동시에 카를은 이상함을 느꼈다.

‘이리 얇은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와 있는데 춥지 않고, 꽃잎이 나풀거리다니?’

무심코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바라본 카를은 이내 경악했다.

하나의 꽃잎이 아니었다. 하나, 둘 셋, 넷…… 셀 수 없이 많은 꽃잎이 제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던 것이다.

그걸 보자마자, 카를은 깨달았다.

‘봄.’

봄이 되었으며.

막연하게, 정말 막연히 느닷없이. 모스가 죽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의 죽음을 직접 눈으로 본 것은 아니었으나, 정황이 그러했다. 이상한 말을 하고, ‘봄’을 들먹이며 뭔갈 알고 있다는 듯 모스를 그토록 녹이려고 하던 치테이르, 그리고 하늘에서 내리는 꽃잎들, 봄을 알리듯 따뜻한 공기.

“치워. 다음 것을 내놔.”

무엇보다도 자꾸만 시체의 얼굴을 확인하는 루인이 이 모든 게 모스가 죽었을 것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카를은 아픈 몸을 부여잡고, 황제의 얼굴을 보려고 했으나 볼 수 없었다. 다만 얼핏 보이는 루인의 모습은 엉망이라는 말로도 쉬이 표현할 수 없는 몰골이었다.

그러나 그런 엉망인 모습을 하고 황제는 시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다 확인하고 있었다. 절벽 아래로 떨어진 시체들은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성하지 않았고, 곤죽이나 다름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날이 따뜻해졌기에 대부분은 부패가 이미 진행 중이었다. 썩은 내가 이 멀리 서 있는 카를의 코끝을 찌를 정도로 강하고, 비위가 상할 정도였다.

하지만, 루인은 꿋꿋했다. 하나하나 얼굴과 신원을 확인하고자 하고 있었다.

“안타까워서 어떡합니까.”

“가뜩이나 두 분은 우애도 깊으셨는데…….”

“쉿, 아무런 말도 하지 마. 지금 상심이 가장 크신 건 폐하시다. 서둘러 움직여!”

고작 손 하나 있어도 확인하고, 발 하나만 있어도 확인하는 모습을 본 주변 병사들과 기사들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그만큼 시체를 하나하나 확인하는 루인의 움직임은 절실했다. 얼굴이 다 뭉개져서 그저 보기만 해도 끔찍한 시신의 얼굴을 직접 손으로 만지고, 머리가 날아간 시신의 몸을 더듬는 손도… 어느 하나 절실하지 않은 게 없었다.

“살아 계실까?”

“황태제 전하께선 무사하실 거다! 쓸데없는 소리 말아!”

카를은 그런 루인의 뒷모습을 넋 놓고 볼 수밖에 없었다. 주위에 있는 기사들과 병사들은 하나같이 다 황제가 저리 구는 게 하나 남은 핏줄, 치테이르의 시체라도 찾고자 함이라고 여기는 것이 틀림없다.

‘멍청이들.’

하나 그것은 틀렸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다 틀렸다.

반역을 일으킨 것이나 다름없는 치테이르의 시신을 루인이 저리 찾을 리가 없었다. 설령 반역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그 피도 눈물도 메마른 황제가 저리 절실하게 시체들을 살핀다고?

‘그럴 리가.’

카를은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제아무리 겉으로 우애가 좋아 보일지언정, 언제까지나 루인에게 ‘인간’이란 도구였다. 그중 치테이르는 편한 도구였고.

그러니 지금 루인이 저토록 찾으려고 드는 것은 아마…….

‘모스.’

그것 말고는 말이 되지 않았다. 그는 지금 모스를 찾고 있는 것이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절실하고, 애타게.

카를은 천천히 황제에게 다가갔다.

주군인 그의 등을 보는 것은 카를에겐 너무 익숙한 일이었다. 그는 황제가 밑바닥을 칠 때도, 전쟁통에서 죽을 뻔했을 때도, 그리고 왕좌에 앉는 그 순간까지도 저 등을 보았는데 지금은 그 느낌이 달랐다.

왜일까. 고작 등인데. 표정을 본 것도 아니고, 무어라 말을 나눈 것도 아니건만.

“다음.”

“여, 여기 있습니다! 이번 시신은 다만 부패가 심해…… 폐하! 그걸 맨손으로!”

맨손으로 시체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루인의 뒷모습을 보는데 숨이 턱 막힐 정도의 먹먹한 감정이 느껴져,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폐하.’

카를은 안타까웠다. 그의 영리한 황제는 알 것이다.

모스는 햇빛에 녹는 괴물이기에 남들처럼 시신조차 되지 못하는 이임을, 그러기에 이미 죽었다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을 것임을.

하나 그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지만, 루인은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저토록 깔끔한 걸 좋아하고, 더러운 것이라고는 조금의 접촉조차 허용하지 않는 이가 저리 냄새나는 시신들을 일일이 맨손으로 만지는 것이겠지.

‘가 봐야 해.’

카를은 당장이라도 루인의 곁을 지키고자 했다. 그리고 그에게 괜찮으신 것이냐고, 그리 묻고자 했지만, 이내 그러지 못했다.

돌연 여태까지 돌던 약 기운이 떨어진 양, 물 밀듯 아찔한 통증이 밀려온 것이다.

안 돼. 그리 읊조렸지만, 점점 의식은 흐려졌다.

그리고 정신을 잃는 그 순간까지도, 루인은 묵묵하게 시신들을 손으로 살펴보고 있었다. 자신의 등이 어느덧 새빨갛게 물든 것도 모른 채, 새빨갛게 물든 시신들에 온전히 집중하며.

그러기에 카를은 정신을 잃는 순간까지 걱정했다.

루인에게 생각보다 큰 의미였던 모스가 사라지고, 루인이 괜찮을지 말이다. 하지만.

“폐하.”

그것은 괜한 기우라는 듯, 이날 이후 다시 황궁에서 만나게 된 루인의 얼굴은…….

“기사단장 대신, 내 보좌관으로 복귀한 첫날은 어떤가?”

태연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게… 무슨 상황이지?’

너무나도 태연한 황제의 모습에 카를은 혹 그간 있던 일이 꿈인가 싶어, 그 자리에서 황급히 제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그날 절벽에서 혼절한 뒤, 다시 눈을 떴을 땐 자택이었다.

그곳에서 눈을 뜬 카를은 오로지 회복에만 전념했다. 이미 몸이 많이 상해, 기사단장은 되지 못할지언정 그의 옆을 지킬 수 있는 보좌관이 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카를은 루인을 만나기 전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날에 대해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황제가 자신에게 뭐라 말할지, 그리고 그때 자신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서류를 달라고 했을 텐데.”

하나, 막상 만나게 된 루인의 모습은 카를의 그 어떤 상상보다도 전혀 달랐다. 그간 있던 무수한 일들에 대한 말을 하는 게 아닌, 서류를 내놓으라는 여상한 얼굴에 순간 카를은 말문이 막혔다.

“음?”

“…아, 여깄습니다.”

재촉하는 듯한 루인의 얼굴에 서둘러 집무실로 들고 온 서류를 내미니, 루인은 카를이 뭐라 말을 덧붙이기도 전에 알아서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카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에 오기 전, 그는 루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물론 이야기라고 해 봤자 별건 없었다. 그저 절벽에서 돌아온 이후, 황제는 너무나도 잘 지내고 있으며, 업무를 이전보다도 더 완벽하게 해내고 있다는 말들이었으니까.

하나 그 소문들을 들으면서, 카를은 코웃음 쳤다.

모스의 문제만 엮이면 황제는 이성을 잃어버리는데, 심지어 모스가 죽었는데 그가 이성적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기에 이곳에 오기 전까지 카를은 틀림없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제가 들은 것들은 조작된 소문과 다름없을 것이라고 여겼지만…… 막상 오게 된 황제의 집무실은 소문과 다를 바가 없었다.

“…….”

카를은 얼빠진 얼굴로 멍하니 루인을 보았다.

소문 그대로였다. 루인의 옆에는 그가 처리한 서류들이 잔뜩 있었고, 그런 서류들 옆에서 그의 손은 유려하게 움직인다.

물론 그런 그의 흰 손은 이전과는 달랐다.

마냥 희고 곱기만 하던 손에는 온갖 흉이 덕지덕지 붙어 있어서 그 절벽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고 알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루인은 평온해 보였다.

그간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모스가 있었을 때보다도 훨씬 안정적으로.

‘전부 나의 착각이었던 건가.’

모스가 죽어서 당연히 그가 미쳤을 것이라 여기던 그간의 생각이 민망할 정도로 너무나도 루인과 집무실은 평화로웠다.

하지만 왜지.

이토록 마음이 불안한 것은.

카를은 불안에 제 엄지손톱에 찌꺼기처럼 붙은 거스러미를 도려낼 듯, 한참을 검지로 긁어내다 피를 보고 난 후에야 멈추었다. 그리고 애써 불안을 누르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괜한 걱정일 것이다.

카를은 냉정하고 흐트러짐 없는 루인의 시선과 마주하며 머리를 식혔다.

“제가 병상에 있을 때 보고받았던 외지인들의 경우, 원래 선대부터 라젠타 마을에서 살던 이들이라며 그곳에 살기를 희망하여 그쪽으로 터전을 옮기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중 ‘메리’라는 노파가 무슨 호수 근처에 살고 싶답니다. 문제는 그곳이 이전에 성지로…….”

“원하는 대로 해 줘.”

“예?”

“그 노인이 해 달라는 대로 웬만하면 들어주라고.”

병상에서부터 외지인 문제를 계속 보고받았던 카를은 루인의 대답이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이 루인의 목숨을 구했다는 그날에 대해 듣지 못한 그는 그저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 주라는 말에 놀랐는지 고개를 기울이다 이어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답했다.

“다음은 시신 수색에 관한 건입니다. 절벽으로 간 수색대가 말하기론, 치테이르 황태제의 시체를 계속 찾고는 있지만, 쉽지 않다고 합니다. 수색대 인원을 더 늘리라고 해야 할지…….”

이어 카를이 말한 것은 이곳에 오는 길에 보고받았던, 카를과 루인을 제외하고 극소수만 아는, 극비로 진행되는 수색이었다.

비록 치테이르가 큰 죄를 저질렀으나, 그는 제국에 남아 있는 유일한 황태제이다. 그러기에 치테이르의 잔당은 전부 처리했더라도, 치테이르에 대한 수색은 그날 이후로 계속 이어져서 카를도 보고를 받고 있었다.

“수색을 멈춘다고.”

수색을 멈춘다는 카를의 보고에 루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하기야, 저건 포기 못 하시겠지. 카를이 그간 건너 듣기로는 절벽에서 나오는 시신들은 죄다 새까만 천을 뒤집어씌우고 황궁으로 들여 루인에게 일일이 확인을 받았다고 한다.

‘정말 치테이르 황태제를 찾으려고 한 것이었나.’

카를은 그간 병상에서 보고를 들었을 때는, 당연히 루인이 모스의 시체라도 찾으려고 하나 보다 했는데.

‘오늘 보아하니, 폐하께서는 더는 모스에 대한 미련이 없어 보여. 그럼 모스를 찾으려고 든 건 아닌 거 같고…… 정말로 여태 모스가 아닌, 치테이르 황태제를 찾던 것이었나?’

하지만 그럴 리가 없는데.

황제가 치테이르에게 가족으로서의 애정이 있는 것이면 모를까, 그가 지켜본 황제는 이리 치테이르에게 절절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정이 없다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신뢰는 할지언정 도구, 그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보지 않았었다.

“계속 수색하라 명할까요?”

하지만 카를은 사람 감정이란 게 겉으로 보이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형제간에 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카를이 묻자 루인이 잠시 손을 멈추었다. 그는 고민을 하는 듯 보였다.

저리 고민하는 기색을 보아하니, 핏줄은 핏줄. 아무래도 루인이 치테이르의 시체를 찾고 싶어 한다고 생각한 카를이 수색을 이어 하겠다고 말하려던 그때.

“관둬.”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것에 눈을 크게 뜬 카를이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루인을 보는데, 그는 언제 망설였었냐는 듯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서류에 서명하고 있었다.

“그 절벽은 살아 돌아올 수 없는 곳이니, 죽었을 거다. 이제 더는 수색대도 보내지 말고, 여태 들여온 시체들은 싹 다 태워서 없애 버려. 공식적으론 치테이르가 실종되었으나 돌아올 것이라 믿는다며 국장(國葬)은 치르지 않겠다고 말하고.”

카를은 살짝 움찔했다.

‘치테이르’라는 이름을 담을 때, 짙은 살기가 순간적으로 방 안을 휘감았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나 그 살기를 감지한 카를은 더 의구심이 들었다. 여태 그리 시체들을 맨손으로 뒤적이면서까지 치테이르를 찾으려고 들었으면서, 이제 와서? 갑자기?

‘게다가 장례도 치르지 않는다고?’

물론 치테이르는 비공식적이나 반란에 준하는 일을 저지른 자이니, 국장을 치를 수 없는 건 맞았다. 하지만 여태까지 그런 치테이르를 찾으려고 들지 않았는가.

‘대체 뭐지?’

하나부터 열까지 알 수 없는 것투성이다.

‘치테이르’라는 이름을 고작 혀끝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짙은 살기를 뿜어 대는 것도, 그렇게나 살기를 내뿜을 정도로 증오하던 이의 시신을 계속 찾으려고 들던 것도.

“알겠습니다.”

어느 하나 이해가 가는 것이 없었으나, 카를은 더는 말을 덧붙이지 않고 창밖을 보았다.

아주 평온한 오후였다.

따사로운 햇빛이 창가로 들어와 방을 비추고 있었고, 너머로 사용인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활짝 핀 꽃과 푸른 나무들은 봄바람에 흔들거리듯 움직여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아 보였다.

“말씀하신 대로 수색을 중단하겠습니다.”

그리고 카를은 이 평화를 지키고 싶었다. 그러기에 무언가가 한없이 찝찝하지만, 애써 안온함에 제 몸을 맡기고자 하며 고개를 숙이고 문으로 걸어 나갔다.

“어, 안녕하세요.”

그렇게 카를이 문을 열었는데, 문을 열자마자, 책을 여러 권 든 사용인을 마주치고는 눈을 크게 떴다.

혹 이야기를 들은 건 아닌가 싶어, 사용인의 얼굴을 보았는데, 그녀는 제 몸을 가릴 정도로 무거운 책들에 정신이 없어 보였다.

‘책?’

그나저나 대체 이게 무슨 책들이란 말인가. 얼핏 보기에도 새까맣고 오래된 고서처럼 보이는 책들이 이렇게나 많이?

그것에 의아한 듯 그녀를 보다 책의 제목을 본 카를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마왕과 세계사, 신과 마왕, 윈스 제국의 영웅과 마왕, 마왕의 흔적……?’

책에 적혀 있는 제목에 의아함도 잠시 “들어와.”라는 루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 폐하. 이곳에 책을 두겠습니다! 다 읽으신 서적들은 갖고 가겠습니다!”

그 말에 끙끙거리며 책을 둔 사용인은, 저 구석 쌓여 있는 서적들을 가리키며 물었고 루인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턱짓했다.

카를의 시선이 사용인이 가지고 나가는 서적들의 제목에 향했다. 아까 보았던 것들과 별반 다름없는 비슷한 종류의 제목이었다.

‘저 책들을 폐하께서 읽으셨다고?’

심지어 평범한 책도 아닌 듯한 게, 사용인이 허둥지둥 서적들을 챙겨 나가자, 그런 그녀의 주위를 성기사들이 에워싸듯 감쌌기 때문이다.

신전에서 보관하는 고서나 금서의 경우, 이동할 때마다 책들을 귀족 호위하듯 지킨다고 하던데…….

‘폐하께서 원래 고서에 관심이 있으셨나?’

카를은 당황한 듯, 뒤를 돌아 루인을 보았지만, 루인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그저 방 안은 그가 서류를 넘기는 소리를 제외하고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저 평화로운 집무실의 한때처럼 보이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카를은 묻고 싶은 말들을 꾹꾹 삼킨 채, 애써 찾게 된 평화를 지키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그 평화는…….

“폐하께서 사라지셨다고?”

루인이 사라짐과 동시에 깨졌다.

너무나도 이르게.

***

“허억, 허억…….”

정신없이 뛰어가는 이는 카를이다.

일에 복귀한 지 며칠이나 됐더라. 사흘? 아니면 엿새? 하지만 당장 그리 길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폐하께서 사라지셨다! 당장 찾아!”

황제가 사라졌다. 감쪽같이.

처음에는 외부 침입의 흔적이 없어, 황제가 사라졌다고 한들 잠시 자리를 비운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길어지는 게 문제였다. 벌써 하루가 다 저물어 가고 있는데, 이 시간 동안 황제는 황궁 어디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체 어딜 가신 것인지!’

처음에 카를은 납치가 아닐지 생각했다.

한데, 감히 제국의 황제를 납치할 정신 나간 이가 어딨단 말인가. 수많은 기사를 뚫는 건 둘째 치더라도, 루인은 결코 만만한 이가 아니었다.

그러기에, 황제가 스스로 움직였다고 생각했지만…….

“혈흔이 있었으니, 모두 빨리 움직여!”

뒤늦게 카를이 이리 날뛰며 서두르는 이유는 황제의 침상을 정리하던 사용인이 방금 전 이불을 정리하다가 침상을 흠뻑 적실 정도의 피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러면 납치나 암살의 가능성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의 침실에서 저토록 피를 많이 흘릴 일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없습니다!”

“샅샅이 뒤져!”

“없어요!!!”

사용인들, 기사들, 병사들, 온갖 이들이 동원되어 황궁을 쥐잡듯 뒤졌지만 없었다. 심지어 외부로 나간 흔적도,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도 없기에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건강만 좋았어도-!’

중상을 입은 후에는 체력이 이전과 같지 않았다.

카를은 어느새 숨이 찬 모양인지 헉헉거리며 몸을 벽에 기대었다.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아픈 가운데, 카를은 문득, 정말 느닷없이 어떤 장소 하나가 떠올랐다. 다만 그곳은 여기서부터 거리가 꽤 있는 먼 곳이었지만, 망설임은 짧았다.

“자네랑, 자네! 그리고 너희! 당장 날 따라와!”

“예, 예! 알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카를은 수색을 같이 하던 기사들 중 몇몇을 손으로 골라내, 말에 올라탔다. 그들도 덩달아 말에 올라탄 채, 카를의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바닥을 치고 나가니, 말에 올라탔음에도 쉴 틈 없이 몰아치는 바람에 숨이 가쁘고 등 허리가 부러진 듯 아파 오기 시작했다.

하나 견뎠다. 지금 가는 이 길이 괜한 시간 낭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불쑥 떠오르긴 했으나, 카를은 달리고 또 달려서…….

“여긴 대체…….”

“절벽?”

절벽에 향했다.

어느덧 해는 지고 있었다. 같이 온 기사들은 온몸이 땀범벅으로 젖은 채, 카를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폐하!!!”

그리고 드디어 절벽 끝에 우두커니 선 루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체 왜 이곳에 계신단 말입니까!”

그는 황제의 몸을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슬한 그의 모습을 본 순간 이성을 잃었다. 카를이 달려가 루인을 붙든 그때.

“피가 필요하대.”

카를은 더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흘려도 흘려도 부족하다 하여, 그래서 이리 흘렸는데도 부족하다 하여.”

팔이 온통 칼로 난 자국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어느 곳 하나 성한 부분 없이, 엉망으로 칼로 난도질당한 채 루인은 카를을 빤히 보다 고개를 돌리며 허공을 가리켜 말할 뿐이었다.

“그래서, 이곳에 흘렸지.”

“폐하!!!”

저무는 해, 그것을 바라보는 루인은 핏기 없는 얼굴로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카를은 그제야 절벽 아래로 루인이 얼마나 무수히 많은 피를 흘렸는지를 깨닫고 비명을 질렀다.

“당장 근처 마을의 의원을 불러!”

“차라리 신, 신관을-!”

“폐하께서는 신성력에 대한 거부감으로 신성 치료를 받지 않는 분이다! 뭐 해! 빨리 움직여!!”

“예, 예-!”

루인은 신전에 대한 거부 반응이 큰 이기에 신성 치료를 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 카를이 그리 명령을 내린 그 순간.

“폐, 하!!!”

카를은 쓰러지는 루인을 간신히 부축했다.

피를 얼마나 흘린 것인지, 머리부터 발끝까지가 새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 있었고, 호흡도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의식이 흐려지는 듯, 눈을 점점 느리게 꿈뻑이는 것에 카를이 어떻게든 그의 정신을 붙들려는 듯 “정신 차리세요!!!”라고 소리 질렀으나, 루인은 점점 의식이 멀어지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하지만 루인은 쓰러져 가면서도, 끝끝내 카를을 보지 않았다.

그저 카를의 옆에서 우두커니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그’를 향해 피범벅인 팔을 내밀며 말을 걸 뿐이었다.

“만족하나?”

황제, 루인 윈스.

“모스.”

그는 진즉 미쳐 있었다.

자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정신을 잃어 가던 그는 문득 그날을 떠올렸다.

이 환영이 시작된 날을.

***

절벽 아래에서 의식을 잃기 전 보았던 그림자 없는 모스.

루인이 본 모스의 환영은 그날을 기점으로 며칠 동안 보이지 않았다. 시체를 며칠이나 뒤지는 와중에도, 치료를 받는 와중에도, 선잠을 드는 모든 밤에도.

그날 보란 듯이 나타났던 모스의 환영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차피 환영이 없어도 상관없었다.

처음 며칠간 루인은 무너지지도, 포기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모스가 녹은 걸 보았음에도, 심지어 환영까지 보았음에도, 정말 모순적이게도.

‘안 죽었어. 너는 괴물이니까.’

모스가 살아 있을 것이라고 여겼으니까.

그리하여 황궁으로 돌아온 루인은 겉보기엔 멀쩡해 보였으나, 속은 매우 시끄러웠다. 어떻게든 모스를 되찾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번에도 아니군.”

오늘은 다섯 구의 시신을 찾아왔다고 해서 루인은 지하실로 향했다.

하나 대충 보기에도 이들은 아니었다. 체구가 너무 컸으며 얼핏 보아도 모스다운 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고작 몇 분 있었다고, 그새 몸에 밴 시체의 냄새가 지독하다. 하나 루인은 제 몸을 휘감은 썩은 내에도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고, 그저 곧장 서적을 읽으러 갈 뿐이었다.

“여기 요청하신 서적들입니다.”

그는 모든 것은 기록이 남는다고 믿었다.

한낱 미물마저도 그 존재의 가치를 찾기 위해 기록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이마저도 스치듯 지나가는 한 줄의 설명으로 자취를 남긴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루인은 시체 썩은 내를 몸에 휘감고, 온갖 신화와 신에 관한 책은 닥치는 대로 읽었다.

‘다 아는 내용이야.’

오늘도 건질 만한 내용이랄 건 별거 없었지만.

처음에 그는 모스의 흔적을 쉬이 찾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저리 ‘괴물’이라 떠들었다고 한들, 그는 용사 아닌가?

한데,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모스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기록이 있더라도, 이건 모스가 아니다.’

용사에 관한 기록도 다 읽어 보았다. 무언가의 기록이 있긴 한데, 묘사 자체가 모스와는 전혀 달랐다. 제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모스의 흔적이란 조금이라도 찾을 수 없었다. 그래도 루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읽고, 또 읽고, 또 읽었다.

책장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모스와 관련된 것처럼 보이는 책들을 읽고, 또 읽었으나 수확은 없었다.

당연히 성치 않은 몸으로 잠도 제대로 안 자고 그러니, 몸은 점점 망가져 갔다. 다만 이미 많이 망가진 몸이라, 더 망가진다고 한들 티가 나지 않는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렇게 그가 하루하루 밀려드는 업무와 모스를 찾고자 하는 일을 버티지 못하고 한계가 슬슬 다다르기 시작할 무렵.

……그날.

그날은 유독 피곤했던 날이었다.

그는 틀림없이 침실에서 잠을 잤는데, 눈을 떴을 때 제가 서 있는 곳은 영 다른 곳이었다.

‘납치인가?’

간만에 푹 잔 게 문제였나?

그는 잠귀가 지나칠 정도로 밝아 단 한 번도 암살자들에게 당한 적이 없는 자였다. 그것에 몸에 바짝 힘을 준 채, 손을 들어 올린 루인은 의아한 듯 미간을 좁혔다.

납치인데 손발이 자유로울 리는 없었다. 아무것도 묶이지 않는 손과 발을 보니, 납치는 아닐 터.

의아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빛 한 점 없이 어둑한 방 안임에도 단번에 이곳이 어딘지를 알아보고 인상을 사정없이 구겼다.

빛 하나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공기의 흐름만이 뺨에 스쳐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바로 괴물과 함께 지내던…… 그 낡은 궁이었다.

‘이 빌어먹을 곳에 내가 왜 온 걸까.’

틀림없이 분명 잠들었는데, 어느 틈에 온 것이지.

그는 인상을 구겼다. 납치도 아니고, 누군가가 이쪽으로 황제인 그를 직접 데려다가 놓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스스로 걸어 들어온 것일 터. 이해를 할 수 없었으나, 단순히 습관이라 여기기로 했다.

그간 이곳에서 긴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가. 정신이 나간 이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곳에 있던 시간들이 길었으니 본능적으로 움직인 것이겠지…….

“빌어먹을.”

그러나 화는 여전히 식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 건지, 이상하다고 여기면서도 주위를 둘러보듯 고개를 움직였다.

‘불이…….’

그는 손으로 어둠을 더듬어 성냥을 찾아내 불을 붙였다. 익숙한 물건의 배치에 불은 쉬이 켜졌다. 그리하여 조금은 환해진 안에서, 본능적으로 창을 보았다.

창은 마지막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괴물에게 혹여나 햇빛이 닿을까, 얽고 또 얽어 햇빛 한 점도 못 들어오게 막아 둔 창, 그 앞에서 있었던 수많은 몸싸움을 알리는 듯한 흔적들.

시선을 천천히 움직이니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물건들과 가구들이 보였다. 흐트러진 물건의 모양마저도, 마지막에 보았던 것과 같았다.

마치 시간이라도 멈춘 듯, 모든 게 똑같은 방 안을 천천히 스치듯 보던 그때.

“넌…….”

그는 더는 시선을 움직일 수 없었다.

둘의 주된 하루는 침상에서였다. 모스는 침상을 벗어나면 햇빛이 닿아 녹을 수도 있었기에 벗어날 수 없었고, 그런 모스의 옆에는 늘 루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침상 위에는.

『아, 안녕?』

결코 그가 잊을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진 모스가 있었다.

『나, 는 모스야.』

그리 말하며 모스가 눈을 휘어 웃었다.

어느 하나 그의 기억과 다른 게 없었다.

요 며칠 루인이 가장 후회하는 것은 모스의 초상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그토록 오랜 시간 살을 맞댄 이가 맞는지, 점점 흐릿하게 지워지던 모스였는데,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모스가 루인이 아는 그대로인 모습으로 그의 앞으로 걸어와 우뚝 선 것이다.

『반가, 워.』

…그림자 없이.

존재하는 것들은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 게 당연했다. 지금도 일렁이는 등불 너머로 모든 게 아롱아롱 매달리듯 벽에 그려지고 있었고, 하물며 주먹만 한 작은 물건들도 하나같이 어둑한 그림자를 달고 있었다.

그의 그림자도, 탁자의 그림자도, 심지어 침상 위 이불 모양까지도. 하지만 개중에…….

『안녕.』

인사를 건네는 모스의 그림자만은 없었다. 다른 모든 것들이 자신의 음영을 드리우는 가운데, 그만은 아니었다.

그림자 없이 깨끗한 벽면 앞에, 침대에 앉아 있는 모스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그렇게 입을 벙긋거리며 말을 걸었다. 특유의 헝클어진 머리, 붉은 눈가에 별처럼 박힌 짙은 녹색 눈에 루인의 모습이 너울지듯 담겨 있었는데…….

“모, 스?”

이름을 입밖에 내뱉을 생각은 없었는데, 루인은 저도 모르게 입이 움직였다.

저 환영을 보고 진짜인 양 얼빠진 채 보고, 말까지 걸다니. 스스로의 행동이 어이없었는지 루인이 인상을 구긴 그때.

『……응.』

모스가 자신이 맞는다는 듯 생글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진짜처럼.

‘하지만 저것은 거짓이다.’

다만 수줍어하는 얼굴 뒤로는 여전히 그림자가 없었다. 그러기에 루인은 제 앞에 있는 모스가 살아 있을 리가 없다고, 그리 생각하면서도…… 생각과는 달리 그의 시선은 모스에게서 거두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무엇일까. 이 감정은.

살아 있는 듯, 생기를 한껏 담아 말하는 저 얼굴을 보는데, 이상하게 가슴 사이부터 윗배까지 죄다 내장이 비틀리듯 아파 오며 욱신거렸다.

『으, 응?』

저 행동이, 저 표정이, 저 말투가… 어느 하나 익숙지 않은 게 없었다.

고개를 기울이며 말하는 그의 얼굴은 예전에 보았을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묘하게 생기가 가득하고, 웃음기와 수줍음이 묻어 있는…….

『응?』

숲에서의 그.

궁에서 지내던 때와는 달랐다. 궁에서는 늘 움츠려 있고, 얼굴에 그림자가 가득했으며, 눈물 자국이 하루가 멀고 남겨져 있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꽃을 삼키고선 떨떠름한 얼굴로 웃는 모스, 붉은 열매를 따 주면 아닌 척하면서도 기쁜 티를 감추지 못해 손과 발을 가만히 두지 못하던 모스.

그저 단어를 조합해 만든, 아무 감정 없는 사랑한다는 말에 환히 웃던 모스.

그렇게 루인이 한참을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그를 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보자, 모스는 웅얼거리듯 말을 하며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손을 꽉 움켜쥐고 입술을 떼었다 다물기를 반복하다 이어 꾹 입을 다문 뒤 빤히 응시한다.

『왜 그런 어, 얼굴이야? 어디 아, 파?』

그때의 모스가 마치 살아서 돌아온 거 같았다.

『으, 응? 왜?』

하지만, 이건 거짓이다.

“우습지도 않아.”

그날, 그 절벽에서 그토록 두려워 마지않던 햇빛에 온전히 녹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죽지 않았을 것이라 부정했으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건 소용없는 믿음이란 걸 알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그 빌어먹을 신이 말했던 것이기에 틀릴 리가 없었다.

[껍데기가 벗겨지면 봄이 오니, 껍데기를 녹여 오너라,]

녹으면 봄이 온다는 말, 정말 말 그대로 모스는 녹고, 봄이 돌아오지 않았는가.

윈스 제국에는 그간의 폭설은 어디 가고 눈은 내리지 않았다. 대신 비가 내렸다. 무엇 하나 제대로 피지 못했던 언 땅은 녹아, 그 위로 무엇이든 피워 내고 있었다.

“넌 죽었잖아. 꺼져.”

그는 더는 이 촌극을 못 보겠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을 나섰다.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모스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루인은 뒤돌지 않았다.

걷고, 또 걸었다.

무슨 정신으로 복도를 걸어갔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평소보다 빨리 걸었던 게 분명한데도, 지금 걷는 이 복도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그게 뒤에서 루인을 계속 울면서 불러 대는 모스의 목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망설이는 그의 발걸음 때문인지.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무엇인지 결론을 내리기 전에 몸은 궁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루인이 이곳에 오는 모습을 본 모양인지, 주위를 맴돌 듯 움직이던 기사들이 그에게 인사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제야 루인은 여태 자신이 숨을 쉬지 않았다는 것을, 맨발로 걸어 나왔다는 것도 깨달았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천것들도 이리 다니지 않는데, 맨발로 맨바닥을 디디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자니 갑자기 화가 솟구치다 이어 허탈함이 밀려왔다.

“폐하, 손에서 피가-!”

루인의 손에 검붉은 피가 뚝뚝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찌나 손에 힘을 주었는지, 그의 턱에는 힘줄이 잔뜩 서 있었다. 어느덧 새빨갛게 물든 손을 한 그는 뒤를 돌아 궁의 입구를 손가락으로 삿대질하듯 가리키며 사납게 말했다.

“당장 막아.”

“예?”

“당장 그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게 입구를 봉쇄하라고!”

갑작스러운 명령에 기사들은 무척이나 당황한 눈치였으나, 알겠다는 듯 경례를 하고 부산스레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켜.”

됐다. 저 궁은 이제 폐쇄되었으니, 실수로라도 이쪽으로 걸음하지 않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루인은 앞에 선 기사를 밀쳐 내듯 치운 뒤, 자신의 침실로 걸어가려고 했다.

『왜, 나, 나를 모른 척해?』

제 앞에 선 모스를 보기 전까지.

어느새 모스가 루인의 앞에 와 있었는데, 그림자 하나 없건만 등불들이 훤히 켜진 밝은 곳에서 보는 모스의 얼굴은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

“……너.”

그것은 더 선명하고, 더 진짜 같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걸음을 멈춘 건 그 표정이었다. 슬프게 루인을 바라보는 모스의 얼굴은 마치 숲에서 루인이 모스를 두고 낮에 홀로 걸어갈 때 짓던 표정과도 너무나도 똑같았다.

그것에 일순 루인은 시선을 빼앗겼는데.

『나, 버, 버리지 마.』

저것은 여전히 그림자가 없었다.

가짜기에.

루인은 표정을 굳히고 모스를 스치듯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망설임 없이 걸어가던 그는 어느새 자신의 궁 입구에 도착했다.

“…….”

하지만 그 입구에서 루인은 우뚝 멈추어 서더니, 무슨 생각이라도 잠긴 듯 들어가지 않고 물끄러미 문을 응시했다.

그렇게 얼마만큼의 침묵과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돌연 뒤를 돌고, 빠른 속도로 지나친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폐하?”

그가 돌아온 곳은 그의 명대로, 문을 막는 보수 공사를 하는 기사들 앞이었다.

“벗어.”

“…예?”

“네 신을 벗으라고.”

갑작스레 돌아온 루인을 보고 놀란 듯 서 있던 기사는 대뜸 루인이 신을 벗으라니 당황했지만, 루인이 맨발인 것을 발견한 뒤, 서둘러 제 신을 벗어 내밀었다.

하지만 신을 신을 거란 기사의 예상과 달리, 루인은 그 신을 신지 않았다. 그저 그는 빠른 속도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서 있던 모스의 앞에 다가가, 신을 내밀었다.

툭, 모스의 발 위로 루인이 내민 신이 떨어졌다.

비록 그건 형체가 없는 것인지라, 신은 허공을 가르듯 바닥에 떨어졌지만, 루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신고 따라와.”

그의 사나운 시선은 줄곧 상처투성이 모스의 맨발에 있었다.

비록 그게 환영일지언정.

신발이라도 신는 버릇을 들였다면 달랐을까.

어차피 방 안에만 있어서 신을 신기지 않았는데, 신을 신겼더라면 어떻게든 발이 녹는 걸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

“폐하, 그리하여 이 안건은…….”

『있잖아. 뭐, 해?』

중요한 서류들을 들고 루인에게 보고를 하는 카를의 옆으로 누군가가 얼굴을 쏙 내밀며 루인에게 말을 걸었다.

『바, 바빠? 어디 가? 나, 제대로 봐, 봐 주면, 안, 돼?』

“폐하?”

루인이 대답을 하지 않자, 카를이 그의 눈치를 살폈지만 루인은 마른세수를 할 뿐이었다.

『응? 나 왜 안 봐, 봐 줘?』

모스가 어느새 집무실 책상에 엎드린 채 코앞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몇 달 전, 갑자기 예고도 없이 나타난 모스는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모든 순간 루인의 곁을 맴돌며 말을 걸었다.

루인은 그만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카를, 나가.”

“예?”

“당장 나가라고.”

“어, 하지만 이 안건은 급해서…….”

“빠른 시일 내로 짐이 직접 처리할 테니, 나가.”

카를은 갑작스럽게 나가라고 말하는 루인의 행동에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지만, 황명을 거스를 수 없었다.

알겠다며 카를이 고개를 숙이고 나갔고, 이윽고 방 안에는 루인만이 남았다.

『우, 와. 이제 우리 노, 는 거야?』

하나 홀로 남은 게 아니었다.

루인은 여전히 제 코앞에 바투 붙은 모스의 얼굴을 보았다.

그날, 모스의 환영을 만난 이후. 모스는 그의 일상생활 속에 수없이 나타났다.

날이 가면 갈수록 그는 선명해지고, 행동도 정말 살아있는 이처럼 자연스러워졌다. 여전히 그림자는 없지만 상황에 맞게 말을 하고, 때때로는 마치 대화를 하는 것처럼 굴 때도 있었다.

『으음, 뭐, 할까?』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카를이 나가자마자 모스는 루인의 책상 위에 앉아 신나게 말을 하기 시작하며 발을 동동 흔들었다. 그런 모스의 발에는 그날, 루인이 빼앗아 신긴 기사의 신이 엉성하게 신겨 있었다.

하나 루인은 제아무리 모스가 떠들어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옮겨 문서에 둘 뿐이었다.

무엇이라도 집중할 게 필요했고, 무엇이라도 붙들 것이 필요했다. 그러지 않으면 매번 저것에게 말이라도 걸고, 대답이라도 요구할 것 같았다.

서류를 들여다보며 일을 하니, 그것은 한동안 잠잠하게 있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있잖아. 나는 부, 붉은 열매가 진-짜 좋아! 특히 네, 가 따 온 거 말이야. 우리, 수, 숲에 가서 다시 따, 올래? 응?』

“…….”

『대답해, 주라. 응?』

마치 모스가 살아 있으면 뱉었을 법한 말들.

하나, 루인은 미동 없이 일을 할 뿐이었다. 왜냐하면.

『아 맞다! 있잖아.』

이야기는 결국.

『나는 부, 붉은 열매가 진-짜 좋아! 특히 네, 가 따 온 거 말이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반복되었으니까.

저 이야기는 이미 그가 정확히 스무 번 하고도 네다섯 번은 더 들은 이야기였다. 저 말을 할 때, 모스의 표정, 말투, 톤. 어느 하나 다를 게 없었다. 같은 멜로디만을 일정하게 내뱉는 오르골처럼, 방금 뱉은 말을 또 뱉고, 또 뱉었다.

다른 이야기를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한 번 내뱉은 이야기를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다. 모든 것이 똑같게.

그러기에 루인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당연하지 않은가. 저리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헛것의 앞에서 그가 왜 입을 열겠는가.

따라서 루인은 이번에만큼은 시선조차도 그에게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듯 일을 했지만.

『으응?』

하지만.

『이, 제 날 보는구나?』

……온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일을 하는 그의 앞으로 불쑥 모스가 얼굴을 내밀었다. 루인이 결국 모스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그의 시선을 기다렸다는 듯, 모스가 생긋 웃는다.

“닥쳐.”

그리고 가끔, 모스가 저리 살아 있는 것처럼 말을 걸 때면, 루인은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아졌다.

“넌 죽었는데, 왜 자꾸 나타나는 거지? 짐은 그날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넌 네가 그렇게 두려워 마지않던 그 빌어먹을 태양 아래에서 얼굴이었던 것이 뚝뚝 흘러내렸고, 시체 썩은 내를 풍기며 몸도 녹아내렸으며, 겨우 남은 두 발마저도 끝내 녹았지.”

루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제 앞에서 웃음을 터트리던 모스에게 사납게 말했다.

“게다가 넌 죽기 전까지 날 증오했다. 증오하며 내게 악담하던 때는 언제고, 지금은 왜 내 곁에서 행복하다는 듯 웃는 표정을 짓나? 그거 아나? 넌 숲에서도, 그리고 황궁으로 와서도 짐에게 그런 식으로 웃어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환영이라면 그럴듯하게 묘사해야지, 감히 흉내도 제대로 못 내면서 살아 있는 척을 해?”

그들의 마지막 순간은 그 절벽 위였다.

그 위에서 모스는 루인에게 저주를 퍼붓듯 악에 받친 말을 했고, 그게 마지막 대화였다.

또 모스는 루인의 말대로 단 한 번도 그의 곁에서 저리 큰 소리로 행복하다는 듯 웃은 적이 없었기에 지금 그의 앞에 있는 모스는 환영보다도 더 환영 같은 존재였다.

『아, 아니야. 나는 살아 있, 어. 여기에 있잖아. 내가 보이잖아…….』

그러기에 루인이 사납게 몰아세우자, 그 얘기를 듣기라도 하는 듯 가만히 있던 모스는 돌연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며 부정이라도 하듯 계속해서 뭐라 웅얼거리며 루인이게 다가와 무언가를 설명하려는 듯했지만, 으레 그렇듯 말이 짓뭉개져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지친다.

그런 모스를 보고 있은 지 어언 몇 달이 되어 가니, 루인은 자신이 서서히 미쳐 가는 것만 같았다.

“내 인생에서 사라져.”

루인은 우는 모스에게 사납게 말했다.

“다신 나타나지 마.”

그러자, 모스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루인을 응시했다.

『무, 슨?』

그가 일렁이는 눈을 하고 루인을 보았다.

마치 진짜처럼.

그 크게 뜨인 눈이 너무나도 진짜 같아, 순간 말문이 막힌 듯 루인의 입술이 달싹였으나 그의 머리는 이미 차갑게 식은 뒤였다.

더는 저 허상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저 허상을 볼 때면 온갖 감정이 일렁이는 것도 물론이지만, 무엇보다도 끝없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치테이르가 그리 모스에게 관심을 두지 않게 죽여 버릴 것을. 그딴 소국이 뭐라고, 내가 직접 전쟁에 출전하지 말았을 것을. 출전하더라도 더 빨리 더 최선의 속도로 끝냈을 것을. 황궁에 너를 지킬 인력을 더 많이 배치해 둘 것을. 너를 지하 감옥에 가두는 한이 있어도 그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고 어떻게든 숨겨 놓았을 것을.’

이것들은 그가 수십 번 수백 번씩 생각하고 후회한 것들이었다. 심지어 그는 선잠에서 꾼 꿈에서조차도 저런 생각을 했지만, 그것들은 이제 해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시간은 흘렀고, 과거는 거스를 수 없는 것이기에 오로지 상상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상상은 루인을 점점 갉아먹기 시작했다.

‘한계인가.’

루인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들고 인상을 구겼다.

잠을 제대로 든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눈을 감아도 저 환영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저것의 말도 멈추지 않았다.

눈을 감은 그의 옆에서 모스의 환영은 계속 떠들었다. 같은 말을 하고, 때때로 새로운 말들을 하지만, 그건 해 본 적이 없는 말이라 그런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널 만난 게 후회돼.”

그러기에 루인은 그리 말을 했다. 모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매일을 과거에서 사는 것도, 환영을 보는 것도. 그 어느 것도 하지 않았을 것이기에 후회한다고 말하며 모스를 바라본 루인은 순간 눈을 크게 떴다.

『…….』

모스의 눈시울이 붉었다. 마치 저 말을 듣고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이어 모스는 뭐라 말할 듯 입을 달싹이더니 입을 꾹 다물고 루인을 한참이나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순간 루인은 심장이 잠시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저리 원망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는 모스를 본 순간만큼은, 그가 마치 환영처럼 보이지 않았다.

“너…….”

그것에 뭐라 말을 붙이려는 듯, 루인이 입을 떼려고 했으나… 순식간이었다. 모스의 환영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진 것이다.

루인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넋을 놓은 듯 가만히 바라보다가 읊조렸다.

“…잘됐네.”

그는 읊조리며 언제 내뻗은 것인지 모를, 모스를 향해 뻗은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도로 집무실 의자에 앉아, 이 고요함을 즐기듯 눈을 감았다.

……조용하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더는 환영은 나타나지 않을 것임을.

앞으로 이 집무실에서 제 귀를 괴롭히던 조잘거리는 목소리는 멎을 것이고, 무슨 일을 할 때마다 매사에 참견이라도 하듯 옆에 나타나 종알거리는 소리도 나지 않을 것이다.

잠들기 전 옆에서 들리던 웅얼거리는 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을 것이며, 시도 때도 없이 웃음을 터트리던 그의 얼굴도 더는 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래, 이제 모든 게 원래대로 흘러갈 것이다.

그는 더 헛것을 보지 않고 주어진 대로 살아가면 될 것이며, 괴상한 환영을 통해 느껴지는 잡념들 또한 사라질 것이며 모스의 얼굴도, 그의 얼굴도…….

‘어떻게 생겼더라.’

덜컹,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왜지? 분명 방금까지 환영을 보았기에 잊을 수가 없는데, 루인은 이상하게 모스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몇 달 내내 모스의 목소리를 들었고, 방금까지 조잘거리던 목소리이건만 이상하게 지금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머리 색과 눈 색을 제외하고, 그 어느 것도 가늠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모든 게 흐릿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모스의 얼굴을 다시금 떠올리려고 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안개라도 잔뜩 낀 양, 기이할 정도로 그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데 숨이 턱 막혔다.

그는 더는 눈을 감고 있을 수 없었다.

“나와.”

그 짧은 시간 사이, 그의 눈에 핏줄이 터지듯 새빨갛게 충혈이 되었다. 그는 스스로가 미친 게 틀림없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모스를 찾았다.

“나와서 떠들어.”

방금 꺼지라고 하고 후회된다고 말하고, 그리 말하며 어떻게든 환영을 없애려고 했던 이가 맞는지.

그는 무척이나 초조한 낯으로 계속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모스를 찾고자 했다.

하지만 환영은 도로 나타나지 않았다.

루인이 계속 허공을 향해 말을 걸었음에도, 모스는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 조잘댈 때는 언제고, 이리 숨은 거지?”

결국 루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모스를 찾기라도 하는 듯, 벌컥 문을 열고 나가 복도를 헤집으며 방문을 하나하나 다 열어 보았다.

그러나 모스는 나타나지 않았고, 가면 갈수록 루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기억이 안 난다.

방금까지 코앞에 둔 얼굴이건만, 기억이 안 나.

머릿속에 안개가 뿌옇게 낀 양, 정말 아무것도.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이 느낌이 소름 끼치게 싫었다.

루인이 황궁을 쥐잡듯 휘저었지만, 모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당황한 사용인들이 루인을 보며 이도 저도 못 하던 그때, 그는 돌연 모스와 지내던 그 낡은 궁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낡은 궁은 정말 흉물이었다.

심지어 이젠 그의 명대로 기사들은 입구를 죄다 틀어막아 놓아, 들어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루인은 개의치 않았다. 짧게 그 문을 말없이 노려보더니, 이윽고 그 합판들을 맨손으로 뜯어내기 시작했다.

“폐하!!!”

그를 말리려는 듯 기사들이 달려왔지만, 그는 그들을 뿌리치고 입구를 가로막은 것들을 죄다 뜯어냈다.

온갖 쇠붙이를 이용해 붙인 것이기에, 맨손으로 뜯어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니나 다를까, 고정해 둔 쇠붙이들에 긁히고 파여 그의 손이 피범벅이 되었으나, 그는 상관없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그저 문을 열고, 처음 그의 환영이 나왔던… 빛 하나도 제대로 들지 않는 방으로 뛰듯이 걸어갔다.

“나와.”

그리고 텅 빈 침대 위를 보며 그저 미친놈처럼 환영을 찾아 헤맬 뿐이었다.

“나오지 말라고 할 때는 잘도 나오더니, 이제 와서 이런다고? 나와서 당장 그 입을 열어. 얼굴을 내게 보여.”

고작 환영일지언정 나는 너를 놓지 못한다.

“나를 저주하는 말이라도 좋으니…….”

나타나라며, 그리 말하려던 루인의 얼굴이 돌연 휙 돌아갔다.

옅은 등불에 의존한 어둠 속, 침상 위에 앉은 누군가의 뒷모습이 루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다.

루인은 그 뒷모습을 보자마자 누가 붙잡을 새가 없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모스를 잡아채듯 손을 내뻗었고, 동시에 그 인영이 뒤를 돌았다.

『아, 안녕?』

모스였다.

루인은 방금 전까지 머릿속에서 뿌옇게 흐려졌던 모스의 얼굴이 누구보다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에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었냐는 듯, 속눈썹 하나까지 선명하게 보이는 그 얼굴.

『나, 는 모스야.』

“…….”

『반가, 워.』

어느 하나 루인이 모르는 것 없는 그 얼굴로, 모스는 처음 이 침실에서 환영을 직접 본 날처럼,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인사를 건넸다.

천연덕스럽게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얼굴의 모스를 가만히 보던 루인의 시선이 점차 떨어지더니, 어느 한 곳에 고정되었다.

“그래.”

자조 어린 투로 읊조리는 그의 시선 끝엔, 아까 모스를 붙들기 위해 그가 무심코 내민 손이 있었다.

루인은 이윽고 손을 움직여, 모스의 손을 쥐려는 이처럼 손가락을 굽혔다 폈지만, 애초에 환영이니 잡히는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루인의 손은 이어 이 모든 일을 이해하지 못한 어리둥절한 얼굴로 루인을 바라보기만 하는 모스의 얼굴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뻗어진 손끝이 모스의 눈을 통과하고, 코를 통과해, 아무것에도 제대로 닿지 못한 채 허공으로 툭 떨어졌다.

“봐.”

모스의 얼굴을 통과하듯 넘어서자 루인의 얼굴은 사정없이 구겨졌다.

“어차피 만지지도 못하는 것을.”

그는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모스가 나타난 순간부터 그는 줄곧 이리 손을 뻗어 그를 만지고 싶었던 거라고.

물론 머리로는 알았다. 저것은 환영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저 환영에게 손을 뻗어도 만질 수 없고, 닿을 수 없고, 그 어느 것도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기에, 여태 이를 악물고 그를 부정하고 외면하려고 든 것이었다.

『으, 응?』

하지만 이젠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모스를 통과한 손을 세게 움켜쥐었다 핀 루인이 인상을 구겼다. 그런 루인을 보고 모스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림자 없는 모스는 지독한 환영이자 악몽이었다.

그저 루인의 기억에 의존해 만들어진 덩어리인 모스의 행동은 정형적이며 과거의 기억에 국한되어, 했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하고 무수히 반복할 뿐이었다.

마치 고장 난 오르골처럼.

그러나 그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우습게도 루인은 이곳을 뜰 수가 없었다. 이미 고장이 날 대로 나서, 제대로 소리도 내지 못하고 헛돌기만 할 뿐인 오르골이더라도, 이것마저 없으면 숨을 못 쉴 거 같았다.

“폐하, 이게 무슨…….”

그때, 루인의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소식을 듣고 온 모양인지, 기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에게는 선연하게 그림자가 각각 하나씩 달려 있었다. 바스러질 듯 일렁이는 촛불에 따라 그 움직임을 달리하며, 그렇게.

“무슨 일이십니까?”

하나 의아함도 잠시, 그들은 루인의 차갑게 얼어붙은 시선이 자신들에게 훑듯이 떨어지는 걸 보고 얼어붙었고, 그런 기사들을 향해 루인은 경고하듯 말했다.

“오늘 본 것을 그 누구에게도 발설한다면, 죽여 버릴 것이다. 당장 나가.”

그리고 마치 이곳에 온 기사들을 기억한다는 듯 하나씩 눈으로 훑기 시작했다. 그 시선에는 거짓이랄게 없어, 기사들은 더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살기, 아니면 그 이상.

분명 황제는 갑옷도, 하다못해 아무런 무기도 없는 무방비한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싸워서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은 압박감을 느낀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황명을 받들겠습니다!”

저건 황명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거슬러서는 안 되는.

그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아무것도 듣지 않은 척, 이곳에 있던 모든 일이 없던 일인 양 서둘러 자리를 떴다.

달칵. 이윽고 문이 닫히고 사위는 조용해졌다.

“…….”

새까만 어둠 속, 그 속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일렁이는 등불.

적막 속에서 루인은 물끄러미 허공을 바라보다 이내 언제 바짝 다가왔는지 모를, 제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스를 바라보았다.

모스는 여전히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듯, 가만히 루인만을 보고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던 루인은 일렁이듯 흐려지는 모스의 발끝을 보고 사정없이 인상을 구겼다.

“사라지게?”

또. 아까처럼?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양, 그렇게 허공만을 남겨 두고?

“어떻게 하면 짐 곁에 머물 거지?”

루인은 모스와 거리를 바짝 좁혔다. 당장이라도 입을 맞출 것처럼, 그리 바투 붙은 얼굴 사이로 스치는 숨결은 없었다.

“짐이 뭘 하면 되나?”

『…….』

“대체 뭘 하면 사라지지 않고, 머물 건데?”

일방적인 숨결을 모스의 얼굴에 토해 내듯 뱉어 내며 루인이 씹듯이 말했다.

그런 그의 얼굴에 평정은 없었다.

무표정한 낯 대신 그 얼굴을 가득 채운 건 이 환영에 집착하는 자신에 대한 수치스러움과 이 상황에 대한 혐오, 무슨 감정으로 얼룩졌을지 본인조차 모를… 다만 지독히도 진하게 가라앉은 두 눈이었다.

『…….』

그런 루인을 모스는 가만히 올려다볼 뿐이었다. 마치 유리구슬처럼 투명해 보이는 녹색 눈동자는 제법 살아서 움직이는 이처럼 루인을 비추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는 그림자가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 아니, 하나의 환영과 하나의 살아 있는 이가 한참이나 눈을 마주치고 있던 그때.

『긁어 봐.』

말문을 연 것은 의외로 모스였다.

모스는 그리 말하며 물끄러미 루인을 보았고, 그는 모스의 말이 무슨 의도를 가졌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 듯 인상을 구기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 사이 모스는 뒤를 돌아 뚜벅뚜벅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루인의 시선도 모스가 향하는 곳으로 갔다. 모스가 걸음을 멈춘 곳은 침상 옆에 놓인 협탁이었다.

그 앞에 선 모스는 물끄러니 협탁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그것을 가리켰다.

『긁어 봐.』

정확히 말하자면.

『응, 긁어 봐.』

협탁 아래의 단검을.

저게 저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안 거지? 루인은 그 의문이 먼저 떠올랐으나, 이내 픽 웃었다. 하기야, 자신만 보이는 환영이니, 저 위치를 아는 것도 문제가 아니지.

루인은 그런 모스의 옆에 가 단검을 집어 들고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단검의 날은 아주 서늘하다 못해 서슬 퍼렇다. 스치는 것만으로도 피를 볼 수 있을 만큼, 아주 날이 바짝 선 단검을 본 루인은 기가 찬 듯 헛웃음을 지었다.

『긁어 봐.』

그제야 저 환영이 제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헛소리를.”

이걸 내 몸에 그으라고? 지금 자해를 하라고 시키는 건가?

아무리 환영이라지만, 도를 넘는다.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루인은 단검을 던지듯 바닥에 내려놓고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시선을 돌린 곳에는…….

“……어디 갔어.”

아무것도 없었다.

“어디 갔어!!”

루인은 순식간에 표정을 야차같이 구기며 방 안을 미친 듯이 헤집었다. 침상의 이불을 다 뒤집다 못해 바닥에 내던지고, 침상 아래에 몸을 밀어 넣어 뒤지고.

“사라진다고? 사라져?? 감히?!”

그는 미친 사람처럼 그 방 안을 정말 미친 듯이 헤집었다.

구멍이란 구멍은 다 뒤지고, 물건들은 죄다 던지고 밀쳐 내서 몇 분 사이에 초토화된 방 안에는 성한 게 없었다.

“나오라고!!!”

루인은 멈추지 않았다.

“나와서 무슨 말이라도 해! 그 잘난 주둥아리로 실컷 떠들라고!”

헤집은 곳을 또 헤집고, 더 이상 건드릴 수도 없는 물건들을 맨손으로 뜯어내 깨부쉈다.

“그래, 나를 증오한다 했지. 차라리 나를 보며 증오하고, 죽여 버리고 싶다는 말이라도 해. 증오 어린 말이라도 좋으니, 당장……!”

자신의 앞에 나타나라며 허공을 향해 고함치던 그때 그런 그의 발치에 무언가가 걸렸다.

그것은 단검이었다. 아까 그가 코웃음을 치며 던져 놓았던 그 단검.

“…….”

순식간에 적막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방금까지 물건들을 부수고, 악을 쓰던 이가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루인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은 양 그저 물끄러미 단검을 바라보았다.

검이 유독 어둠 속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잡으라는 듯이, 서둘러 이 검날을 손으로 꼭 붙들라는 듯이. 유혹적으로 반짝거리는 검날을 루인은 홀린 듯 한참을 응시하다 이내 고개를 휙 돌리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미쳤군.”

정신이 나가도 제대로 나간 게 틀림없다.

어차피 그래 봤자 환영이 떠든 말이다. 신경조차 쓸 가치가 없는 허상이니, 들을 필요는 없었다. 루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문으로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문으로 걸어가는 그의 표정은 결연했다. 다시는 뒤를 돌지 않겠다는 듯이, 결연한 얼굴로 걸어가 문손잡이를 붙든 그때.

『제발.』

멈칫. 루인은 손잡이에 손을 댄 그대로 멈추어 섰다.

『제발.』

까득- 까드득!

모스의 애원하는 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과 동시에 루인은 뒤를 돌았다. 사정없이 걸어가는 그의 맨발 아래에서 부서진 가구들의 잔해가 으깨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루인은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잔해들이 제 발에 박혀도, 그게 피로 이루어진 길을 만들어도.

하나도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이 걸어간 루인은 단번에 손을 뻗어 단검을 잡아채듯 들어 올렸다.

서늘한 단검이 기다렸다는 듯 거울처럼 루인을 비쳤다. 검날에 비친 제 얼굴을 본 루인이 인상을 구겼다.

그 자신도 알았다. 이것이 미친 짓임을.

어차피 제 앞에서 지껄이던 건 없어져야 하는 게 맞는 거다.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것이었기에 사라져야 맞는 거다. 하지만…….

“빌어먹을.”

루인은 자조 어린 웃음을 내뱉었지만, 손을 멈출 순 없었다. 누가 뭐라 할 새도 없이, 그가 손에 쥔 단검의 방향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는 제 배를 사선으로 가르듯 훑었다. 날이 무척 잘 선 검이기에, 훑듯이 지나간 것임에도 피가 줄줄 흘러 순식간에 배를 뒤덮었다.

주륵, 주르륵- 어느덧 보기만 해도 끔찍할 정도의 피가 옷을 적시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전에 절벽 아래에서 다쳤던 상처를 건드렸는지, 간신히 아문 상처들이 벌어지는 느낌이 들었으나, 루인은 제 상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가 보고 있는 곳은……,

『고, 고마워.』

어느덧 다시 또렷하게 제 앞에 서 있는 모스.

모스는 웃고 있었다.

『네 더, 덕분이야.』

활짝.

그 웃음을 본 루인은 직감할 수 있었다.

자신이 앞으로 이 짓을 수십 번, 수백 번 할 것임을.

***

카를은 루인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헐레벌떡 말을 타고 황궁으로 향했다. 그의 얼굴은 약 한 달 전보다 훨씬 야윈 상태였다.

“폐하께서는 어디 계신가!”

“지, 지금 침실에…… 카를 경!”

뒤에서 사용인들이 위험하다며 카를을 말리려는 듯 다가오고 있었으나, 카를은 아랑곳하지 않고 앞만 보고 걸어 나갔다. 이윽고 그는 황제의 침실을 벌컥 열고 들어가, 의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인상을 구기고 있는 루인을 본 뒤, 사자후처럼 고함을 내질렀다.

“대체 이게 몇 번째입니까!!!”

카를은 절벽에서 루인을 발견한 날이 되어서야, 그간 루인이 잘 지내고 있다 여겼던 것이 실은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왜냐하면 쓰러지듯 잠든 루인을 의원에게 데려가니, 절벽에서 난 상처 외에도 최근에 생긴 듯한 여러 상처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건 자해입니다. 그것도 아주 긴 시간 동안 여러 번 행해진 자해.

굳이 의원이 소견이 없어도, 루인의 몸을 보면 당연히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의 몸에는 어느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폐하! 제발 신성 치료를 받는 것까진 안 바라지만, 약이라도….

-시끄러워. 자해는 무슨. 네 착각이다. 절벽은 그저 볼일이 있어 갔던 것뿐이다.

하지만 눈을 뜬 루인은 자해를 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너무나도 태연하게 굴었다. 카를이 이미 다 안다고, 사실대로 말씀을 해 달라 애걸복걸 매달렸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매일 일을 해 나갔다.

너무나도 태연한 낯에 카를은 제가 절벽에서 본 루인의 모습과, 그리고 그의 몸에 빼곡하게 있던 흉터가 꿈이었나 싶을 정도로 혼란스러웠지만.

-폐하, 대체 이게 무슨……!!

그의 이상 행동은 계속되었다. 카를은 그 풍경을 잊을 수 없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보고를 올리기 위해 서류를 챙겨 집무실에 간 날, 집무실 안은 온통 피범벅이 되어 있었고, 그 사이에 우두커니 서 있던 루인을 보게 된 것이다.

카를은 이게 예삿일이 아님을 깨달았지만, 이미 그땐 늦은 후였다.

루인의 광증은 낮이고 밤이고 상관없이, 정말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때에 도졌다. 그는 돌연 사라지기도 했고, 사람들이 다 있는 앞에서 제 목을 그으려고도 했고, 아니면 텅 빈 방 안에서 홀로 남아 한참을 중얼거리다 스스로 목을 조르려고 들기도 했다. 하지만 자해를 하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또 내가 그랬다고?”

“예! 폐하께서 그러셨지요! 이번에는 무슨 일로 라젠타 마을까지 가셨습니까? 폐하를 찾는다고, 이른 아침부터 수십, 아니 수백의 기사들이 동원되었습니다!”

“……내가 그럴 리가 없다.”

“또 기억이 안 난다고 하시게요?”

루인은 기억을 점점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그 장소에서 무엇을 했는지 분명히 아는 눈치였는데, 나중에는 정말 모른다는 식으로 구니 카를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라젠타 마을에 가셔서, 기다란 장검을 배에 냅다 꽂으려고 하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말렸다고 합니다! 진짜 제정신이십니까? 아무리 폐하라지만, 그건 죽어요!! 정말로 죽는다고요!!!”

심지어 이번엔 정말 죽을 뻔했다. 황제가 자꾸만 사라지고 위험한 일을 하니, 기사들이 늘 붙어 다니는데 이번에는 기사들까지 따돌리고 라젠타 마을로 가, 배에 기다란 장검을 꽂으려고 했으니.

만약 그 근처를 지나가던, 마을 사람들이 없었다면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루인을 잃을 수도 있었다.

“이게 벌써 몇 번째입니까! 제가 아는 것만 해도, 적어도 열 번은 넘었습니다!”

카를이 미쳐 버리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카를을 바라보는 루인은 자신이 정말 그런 짓을 했냐는 듯 믿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또 기억이 끊긴 건가.’

벌써 이게 몇 번째인지는 루인조차 알 수 없었다. 처음 단검으로 배를 그은 날 이후로도 루인은 몇 번 더 몸에 칼을 댔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자꾸만 자고 일어나면 기억나지 않는 몸의 상처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몇 번은 기억이 나고, 몇 번은 얼핏 기억이 나고, 몇 번은 아예 기억이 나지 않고.

그러기에 나날이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리며, 깨어 있어도 잠든 것처럼 정신이 몽롱하기까지 했다.

하나 몽롱한 와중에도 단 하나 선명한 것이 있었다.

『아, 안녕.』

이 환영.

수줍은 듯 루인을 바라보는 모스의 환영은 처음 나타났던 날보다 훨씬 더 선명해져 있었다. 예전에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을 때는, 누가 보아도 저것이 환영임을 알 수 있었는데 이젠 아니었다.

모스의 환영은 날이 갈수록 선명해지고 더 선명해져서 이렇듯 많은 이들 사이에 있어도, 마치 살아 있는 한 사람처럼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폐하, 제발…….”

『잘 자, 잤어?』

지금까지도.

생긋 웃으며 루인에게 말을 거는 모스의 앞에는 루인을 향해 애걸하는 카를이 있었다. 그는 요 근래 성치도 않은 몸으로 루인을 찾고, 뒷수습을 하느라 삐쩍 말라 있었다.

하나 그 모습을 하고도 카를은 여전히 제 주군인 루인을 신경 쓸 뿐이었다.

“제발 약이라도 드십시오. 예?”

『으응, 약… 약은 싫은데.』

“이리 부탁드리겠습니다. 뭐라도 합시다. 진짜 이러다가 큰일 나요.”

『야, 약 먹게? 나는 약은 싫은데, 으음, 음.』

애원하는 카를을 바라보던 루인의 눈이 도르륵 구르듯 움직였다.

『으음, 음-.』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울먹이며 말하는 카를의 옆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모스.

우는 사람 옆에서 해맑게 웃으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너무 이질적이고 괴상한 풍경이었지만, 루인은 모스에게서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모스는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는 최근 황성에 널리 퍼진 유명한 노래였다.

『황제께서, 봄을 찾았네-. 선황제도 못 찾은 봄-을, 으음, 선선황제도 못 찾은 봄을-, 음음, 선선선황제도 못 찾은- 봄을-, 음- 현 황제가 해냈다네-.』

루인을 칭송하는 노래이자, 계속 쉼 없이 반복할 수 있는 가사가 특징인 노래. ‘선’이라는 말로 말장난을 하며 누구든 쉬이 부를 수 있는, 흔하디흔한 길거리 노래.

『황제께서 봄을 찾았네-. 선선선황제도 못 찾은 봄을, 음음, 선선선선황제도 못 찾은 봄-을, 으음, 현 황제가 해냈다네, 음-.』

모스의 노래는 계속되었다.

길어지고, 또 길어져서 이윽고 노래는.

『선선선선황제가, 선선선선선황제가, 선선선선선선황제가, 선선선선선선선황제가. 선선선선선선선선선선선선선선선선선선선선선선선선…….』

기괴하고, 더 기괴해지기 시작했다. 가사랄 게 없었다. 음이랄 것도 없었다. 모스는 루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생긋 웃으며 같은 음조로 ‘선’이라는 말만 미친 듯이 반복했다.

“…폐하?”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루인은, 저 멀리 서 있는 기사들 중 하나의 허리춤에 걸린 기다란 장검을 보았다.

……그래, 장검.

“폐하!”

루인은 머리를 붙들고 인상을 구겼다. 장검을 들고 숲에 갔었다.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지? 무엇을 만났지? 나는 그 숲에서…….

-『찔러 봐.』

모스, 카를, 환영, 황궁, 황성…….

-『네가 내게 그랬듯이.』

신탁, 라젠타 마을, 환각초, 검날, 모스.

-『어서.』

……모스.

루인이 벌떡 침상에서 일어나더니, 이윽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제도- 못 찾은 봄을, 으음.』

그런 루인의 옆으로 어느새 노래를 부르는 모스가 따라오더니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루인은 모스를 보지 않았다. 그는 모스를 통과해 지나갈 뿐이었다.

“폐하.”

심상찮은 모습에 카를의 몸이 바짝 긴장했다. 이윽고 그는 불안을 감지하고, 루인을 붙잡을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루인은 걷고 또 걸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몇 번이고 모스는 루인의 앞을 가로막았고, 루인은 그런 환영을 통과해 지나갈 뿐이었다.

『으음, 으음-.』

귓가에 여전히 소리가 맴돈다. 어린아이처럼 떠들 듯 말하는 모스의 목소리가 들리고, 또 들린다.

“폐하!”

어느새 루인은 뛰고 있었다. 갑작스레 뛰어가는 루인을 카를이 뒤쫓으려고 했지만, 성치 않은 몸으로는 무리였다. 엎어지듯 침상에 무너진 카를은 다급한 얼굴로 주변 이들에게 소리쳤으나, 루인의 손에는 이미.

“모스.”

장검이 쥐여 있었다.

상황을 모르는 이처럼 한껏 신난 얼굴로 여전히 노래를 부르는 모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루인이 입을 열었다.

“넌 허상이자 거짓이지. 굳이 따지자면 사라져야만 하는 쪽이고.”

자조 어린 투로 말문을 연 루인의 눈은 지긋지긋하단 표정이었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자신이 아무리 저 환영이 사라지길 바란다고 하더라도 막상 환영이 없어지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더 견디기 힘들어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환영을 볼 때는 이보다 더 최악은 없을 거라 여겼는데, 모스의 환영마저 없는 채로 지내는 것은 그보다 더한 나락으로 떨어진 끔찍한 느낌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환영, 조잘거림 없는 정적 속에서 그는 때때로 모스의 얼굴조차 떠오르지 않아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가까스로 붙들던 무언가마저도 온전히 박살 난 거 같았고, 그때 루인은 무언가가 붙들 게 필요했다.

그리하여 그는 애원했다. 나오라고, 증오라도 좋으니 뭐라도 나와 뱉으라고.

“그 결과는 이것이고.”

그 결과 자신의 꼴이 어떤가.

매일을 저 허상을 보고자 아등바등하고 있고, 점점 날이 갈수록 기억도 흐려지고 있었다. 하나 루인은 실은, 정말 솔직하게 말하자면 상관없었다. 이리 아등바등하는 것도, 자신의 기억이 점점 흐려지는 것도, 하다못해 제 몸에 수많은 상처를 스스로 입히는 것도.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는 게 딱 하나 있었다.

“네가 환영으로 나타나면 뭐 하나.”

…정말 딱 하나.

루인은 손을 뻗었다. 이윽고 그의 손은 모스의 얼굴에 향했고.

“보여도 안을 수 없고, 탐할 수 없고.”

그 손은 모스의 얼굴을 만지기 위해 내민 것이었지만 결국 환상을 가른 뒤 허공을 휘저을 뿐이었다.

그렇다.

루인은 이 환영을 보기 위해서라면 뭐라도 했다.

이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라면 뭐라도 할 것이었지만, 이것만큼은 도무지 견딜 수 없었다. 그는 모스가 나타나는 것을 위해서라면 제 몸을 망가뜨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는 이지만, 모스와 닿지 않는 것은…….

“어느 하나 그러안을 수 있는 게 없는데.”

만지고자 손을 내밀 때마다 꿰뚫어 버리는 것은, 이제는 참을 수 없었다.

루인은 서서히 검을 높게 들었다.

“관두자.”

카를이 비명을 내지르며 저 멀리서 루인에게 손을 뻗었지만, 루인은 비릿하게 웃으며 제 앞에 있는 모스의 인영을 바라보곤 이어 손에 쥔 검을 더 꽉 쥘 뿐이었다.

“너도, 나도.”

순식간이었다.

검의 방향이 휙 돌아가더니, 그는 재빨리 제 눈가부터 제 귀까지 도려내듯 썰었다.

그러기에 루인은 자신이 본 마지막 풍경이 핏빛이었는지, 모스의 얼굴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타는 듯한 고통 속에서 카를의 비명이 점점 들리지 않는다는 것과, 온전히 찾아든 어둠을 만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귀와 멀어 버린 눈을 한 루인은 제 몸을 잡아당기는 이들의 손짓에 몇 번 흔들리다, 이윽고 모스가 어디 있는지를 가늠이라도 하듯 고개를 휘휘 돌렸다.

그리고 한참을 그쪽을 응시하다 읊조릴 뿐이다.

“……춥군.”

그는 그제야, 비로소 겨울이었다.

“지나치게 추워.”

홀로.

***

“너희가 모시게 될 분은 황제 폐하시다.”

맨 앞에 있는 이, 카를의 말에 베일을 뒤집어쓴 많은 이들이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한데, 불려 온 이들의 모습이 어딘가가 비슷했다. 그들은 베일 같은 것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체구는 대부분 작고 왜소했으며, 머리 색은 하나같이 흔하지 않은 녹색이거나 녹색과 비슷한 머리 색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기이한데, 그들을 둘러싼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 제국에서 황제를 모시는 일은 집안의 행운이라 여길 수 있는 영광스러운 자리였다.

하나 베일을 쓴 이들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 대다수는 두려움으로 몸을 떨고 있었다.

마치 자신들이 사지로 팔려 왔다는 듯이. 그리고 그건 단순 분위기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폐하께서는 지금 정신이 온전치 않으시니.”

제국 내에서는 대부분의 이들이 황제의 광증을 알고 있었다.

황궁에서 황제의 상태가 소문나는 걸 어떻게든 막아 보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황제가 처음부터 모든 이들을 죽이고 그런 건 결코 아니었다.

다만 그 광증을 틈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의 암살 시도가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 이후 황제는 지나칠 정도로 공격적으로 변했고, 일이 이렇게까지 커져 버렸다.

게다가 가뜩이나 최근 황궁에 모든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가운데, 모든 이들의 입을 틀어막을 수는 없었기에, 이런 황제의 상태를 숨길 수 없었고, 제국의 민심은 상당히 바닥을 찍었지만.

“너희가 최선을 다해 보필해야 한다.”

어쨌든 황궁은 황궁, 황족은 황족, 제국은 제국. 강대한 힘을 가진 황권에 감히 그 누구도 도전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이 사실을 다 알고도, 황궁의 사용인이 된 것이다.

“게다가 이미 너희는 평생 벌 수 없는 금액을 몸값으로 치르고 온 이들이다. 혹 도망이라도 친다면…….”

돈 때문에.

카를이 끝까지 말을 하지 않더라도, 그 말을 듣는 이들은 뒷말이 무엇인지 쉬이 예상한 듯, 몸이 경직되었다. 이미 제 집안이 2~3대는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을 받고, 이곳에 왔으니 도망일랑 치지 말라는 경고겠지.

하나 돈을 아무리 많이 받았다고 해도, 공포를 온전히 덜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레 겁을 먹은 이들은 베일에 뒤로 숨어, 소리 죽여 훌쩍였다.

물론 훌쩍이는 소리조차도 베일에 감춰져 누가 내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근처에 있는 이들만이 입술을 꾹 깨물고 전염된 공포를 삼킬 뿐이었다.

“알다시피 폐하께서는 크게 다치셔서, 회복하는 중이시다. 너희는 부족함 없이 최선을 다해 폐하를 보필해라. 그리고 베일을 제대로 써. 얼굴을 제대로 보이는 일이 없다면, 살아남을 확률이 클 수도 있으니.”

“…….”

“대답!”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렁찬 대답 소리 사이에 은근히 스며든 울음소리. 카를은 그것에 입술을 달싹이다 꾹 깨물었다.

“그럼 나는 다른 지역을 가야 해서……, 나머지를 부탁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카를은 마차에 올라타면서 사용인에게 말하고 답답한 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이번 일로 암살자들이 대거 유입될 것이라는 건 알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황제를 왕좌에서 끌어내려야 합니다!

설상가상으로 민심도 많이 좋지 않았다.

제국민들은 황제의 광증을 알게 되자 그를 서둘러 폐위시켜야 한다고 난리가 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함부로 황제를 물러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황권은 하늘이 내려 준 것이기에 귀족들은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고, 무엇보다도 루인 윈스는 그 긴 겨울의 족쇄를 직접 끊은 역사적인 인물이다. 때문에 제국민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게 갈린다고 한다.

-섭정은…… 부족함이 많으나 한동안 제가 맡겠습니다.

섭정은 황가의 핏줄이 없는 관계로, 황제를 곁에서 보필하던 카를이 나섰다.

황족이 아니기에 카를의 섭정을 반발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황제의 광증을 견딜 수 있는 이는 카를이 유일했기에 그를 제외하고 선택할 수 있는 인물이 없었으며, 무엇보다 고위 귀족 출신인 그를 귀족들이 지지했다.

-차라리 황후를 들이는 것은-!

-황후라고 쓰고, 사형수라고 읽으시게요?

-황가의 대가 끊길 위기에 처한 지금, 황족은 자식을 낳을 의무가 있소!

-맞소! 그럼 연회라도 열어 주시오!

몇몇 귀족들은 때마침 광증이 도진 황제의 곁을 꿰차, 허수아비 왕을 만들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를 안 황제파 귀족들이 강하게 반박했으나, 결국 완고한 귀족들 탓에 루인이 황후를 고를 수 있는 연회 정도야 여는 것으로 정해졌다.

카를은 이게 우스웠다. 황제가 현재 저 상태인데 어찌 황후를 고를 수 있겠는가, 틀림없이 귀족들 입맛대로 고를 것이 훤했다.

그렇게 많은 일들이 생김과 동시에 카를은 섭정을 맡았고, 여러 귀족들이 그와 어깨를 나란히 두고 함께 국사를 돌보기 시작했다.

“오늘은 서쪽이구나.”

카를은 윈스 제국의 황족의 피를 타고 난 사생아라도 수소문해 보러 가야 한다. 서쪽은 꽤 멀기에 벌써부터 지치지만, 하루라도 빨리 후계자를 앉혀 술렁이는 제국을 안정시켜야 하기에 별다른 수가 없었다.

“이랴!”

이윽고 마부가 큰 소리를 내며 카를의 걱정을 한가득 실은 마차를 이끌었다.

순식간에 흙먼지가 부유하고, 뿌옇게 흐릿해진 시야 틈으로 사용인들이 박수를 두세 번 치며 새로 들어온 이들에게 들어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지금 나눠 주는 이 옷을 챙겨 각자 지정된 방에서 갈아입고 오고, 서둘러 중앙 계단 앞에 모이시오!”

“알겠습니다.”

대답은 잘하지만, 베일 너머의 얼굴들은 죄다 죽을상이었다. 하기야 목숨이 간당간당한 황궁으로 팔리듯이 온 이들이니, 하나같이 황궁에 가기 싫다는 듯 발을 질질 끌며 옷을 받아 들어가던 그때, 유독 뒤에서 느리게 움직이는 이가 하나 있었다.

그것에 옷을 나눠 주던 사용인이 신경질적으로 그를 손짓하며 불렀다.

“빨리 움직이지 않고 뭐 하는…… 아, 자네는.”

하나, 그 신경질적인 면도 이어 명단을 확인하고 누그러졌다.

“말을 못 한다고?”

이번 사용인에 지원한 이들 중 대부분은 몸이 성치 않았다. 높은 가격에 팔려 오다시피 온 이들이 대다수기에 다리를 절거나, 눈이 한쪽 안 보이거나, 말을 못 하거나, 이런 경우가 꽤 있었다.

그리고 이 자는 그들 중 말을 하지 못한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그것에 괜히 채근하듯 화를 내던 사용인이 머쓱하다는 듯 태도를 바꾸며, 손끝으로 주섬주섬 그의 이름을 읽기 시작했다.

“이름이…….”

사용인이 이름을 찾는 사이, 말을 못 한다는 이가 고개를 들었다. 베일을 써 얼굴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기도 전에 그저 옷을 받아 들고,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사용인을 지나쳐 앞으로 성큼 나아갈 뿐이었다.

그때 그의 얼굴에서 베일이 허공을 나부끼듯 움직였다.

때마침 들리는 이름, 베일 뒤로 드러난 눈.

“모리스.”

잊을 수 없는 선연한 녹색.

***

안녕, 내 이름은 모스.

모리스 워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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