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모리스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물결이었다. 놀란 듯 입을 벌리자마자, 목구멍에 물이 강하게 휘몰아치듯 파고들었다.
서둘러 입을 다물었으나, 그새 잇새로 새어 나간 숨이 방울져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난 뒤에야, 모스는 자신이 물속에 있음을 깨닫고 몸을 버둥거렸다.
‘답답해.’
눈알을 훑듯 지나가는 물의 흐름이 이질적이다. 서둘러 눈을 질끈 감았다 떴지만, 변한 건 없었다. 그는 여전히 물속이었다.
모스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수면의 밑바닥까지 훤히 드러낸 투명한 물과, 물을 파고드는 강한 햇빛은 선명했다.
‘햇빛.’
물에 이어 자신의 몸까지 가를 것만 같은 강한 햇빛의 줄기. 그게 지금 제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햇빛이 제 숨통을 이미 조이고 있다는 사실에, 모스는 꼼짝도 하지 못한 채 굳어 버렸다. 이어 그의 몸은 곧 다가올 고통을 벌써부터 느낀 양 떨려 오기 시작했다.
‘아마 녹아 버릴 거야. 아프겠지. 이번에는 녹았다가 익사하기를 얼마나 반복해야 하지?’
긴 시간 해에서 도망치며 살았던 만큼 모스는 햇빛이 너무 무서웠다.
수면 아래로 내려오는 햇빛은 겉보기엔 아름다웠다. 그러나 모스에겐 그저 제 몸을 벨 듯 달려드는 날카로운 검처럼 느껴질 뿐이라 습관처럼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무서워.’
겪어 봐서 안다.
해는 두렵다. 특히 물속에 잠겨 있어도, 무자비하게 제 몸을 조각조각 낼 수 있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리하여 모스는 몸을 움츠리고, 더 움츠렸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상하다. 틀림없이 지금쯤이면 어느 한 부분이 녹기 시작했어야 했는데? 그 생각을 하며 벌벌 떨리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려 눈을 떠 보았다. 사지는 물론 햇빛이 닿은 팔까지도 멀쩡하건만, 오히려 다른 곳이 문제였다.
‘숨 막혀.’
당장이라도 물을 벗어나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모스가 짧게 허우적거리더니 서둘러 수면 위로 헤엄쳐 올라가려 했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올라가는 내내 모스는 물을 끝도 없이 마셔 댔으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마냥 조용하고 평화롭게 보이던 물속이 순식간에 끔찍하게 느껴졌다. 숨이 막혀 혼절할 것처럼 눈이 뒤집히려던 그때.
“……후우! 코, 콜록, 콜록!”
촤아, 시원한 물소리가 났다. 겨우 수면 위로 올라온 그는 서둘러 가까운 땅을 짚고, 물에 쫄딱 젖은 채로 콜록거리며 물 밖으로 나왔다. 어찌나 사지를 힘껏 내저었는지, 손과 다리가 벌벌 떨리고 있었다.
나오자마자 그를 맞이한 것은 녹음(綠陰)이었다.
하늘은 푸르고, 사위는 녹색과 꽃들의 향연이었지만,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콜록, 콜록!”
그의 입에서 물이 끝도 없이 나왔다. 조금이라도 더 물속에 있었으면 틀림없이 익사했을 것이다.
모스는 물에 쫄딱 젖은 채로, 어느 하나 엉망이 아닌 게 없는 상태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 위로 번듯하게 떠오른 해가 강하게 햇빛을 내뿜었다.
그래, 태양.
모스가 멍하니 하늘로 고개를 올리자 두 눈에 선연한 햇빛이 가득 담겼다. 낮에 번듯하게 떠 있는 해는 그간 삶 속에서 보고자 해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낮의 하늘을 이리 목도할 수 있게 된 게, 몇 년 만이지?’
그는 몇십 년 동안 하늘을 수도 없이 올려다보았지만, 오로지 달과 그 주변을 유영 치듯 빠르게 지나가는 새까만 구름들만 보았다.
그러기에 그는 이토록 하얀 구름 사이로 선명히 떠오른 해에서 시선을 떼려야 뗄 수 없었다.
모스는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맑음을 한참 보다 제 몸으로 시선을 떨구며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 몸이 햇빛 아래에 있는데, 녹지 않는다.
햇빛에 녹아내릴 때면 뇌를 쪼개는 것만 같은 아찔한 고통도, 시체 썩는 냄새도, 그 어느 것도 없었다.
솔솔 부는 바람에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이 나부끼고, 그 젖은 머리카락을 햇빛이 감싸 준다. 흠뻑 젖어 차게 식은 몸에 햇살이 마주 끌어안듯 스며들고, 물기는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린다.
‘따뜻해.’
햇빛이 피부에 닿는 감각이 영 어색하기 그지없었지만, 너무나도 평화롭고 따뜻했다. 이 감각을 얼마 만에 느껴 보는 걸까.
그는 연신 눈을 깜빡이며 햇빛 아래에 빛나는 제 흰 몸을 바라보았다. 나른함에 잠이 쏟아졌지만, 잠들고 싶진 않았다. 혹여나 잠이라도 든다면, 이 꿈같은 믿기지 않는 순간이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만 눈을 뜨고 하늘을 보기엔 햇빛이 너무 강렬했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고, 햇빛의 온기를 흠뻑 젖은 몸으로 느꼈다.
귀에 들어간 물이 스르륵 빠지며 여태 제대로 들리지 않았던 세상의 소리가 함께 스며들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 녹음의 손이 흔들리며 찰랑이는 소리, 귀를 쓰다듬듯 스치는 바람 소리.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을 것이 없는 낮의 자연들이 온전히 햇빛 아래 그에게 쏟아지던 그때.
……툭.
그 사이를 가르고 들리는 이질적인 소리 하나. 누군가의 인기척과 함께 무언가가 떨어진 소리가 들렸다.
모스의 눈이 느릿하게 떠지더니, 이윽고 그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가 정확히 향했다.
“…….”
그의 시선 끝에는 한 노인이 서 있었다. 방금 난 소리는 챙이 넓은 모자를 쓴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지팡이가 바닥에 떨어져 생긴 것이었다.
하나, 단순히 그뿐이었다면 모스가 이리 가만히 보진 않았을 것이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음에도 어째서인지 낯이 익었다. 그가 아는 인간이라고는 몇 없고,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가 없을 텐데, 이상하게 저 노인을 본 순간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노인과 모스는 우두커니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지팡이를 바닥에 떨어뜨린 노인이 먼저 한발씩 앞으로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노인은 아무래도 몸이 힘든지, 비틀거리며 걸었고, 종종 작게 신음했다. 손에는 주름이 자글하고, 얼핏 드러난 목에도 세월의 흐름이 보였다.
노인은 걸었다. 계속 걸었다.
지팡이 없이, 다리와 손을 떨면서도 모스에게 한 발씩 다가가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 걸음은 느리고, 무척이나 답답하기 그지없었으나 그럼에도 모스는 그 노인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
노인이 약 여덟 발자국을 남기고, 숨을 고르는 듯 멈추어 선 그때, 선선하게 불던 바람이 돌연 강하게 몰아쳐 그가 쓴 챙 넓은 모자가 바닥에 떨구어졌다.
그리고 가장 먼저 드러난 것은.
“……!”
눈가까지 덮은 선연한 검은색 점.
누군가는 저것을 보고 흉하다 손가락질을 할지언정, 모스는 아니었다. 그는 그걸 본 순간, 더는 표정을 관리할 수 없었고, 그건 노인도 마찬가지였다.
“오, 라-.”
목이 메는 듯 말을 하다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의 눈가가 순식간에 축축이 젖어 들어갔다.
“오라, 버니.”
잔뜩 쉬고 물기가 어린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내뱉은 그녀를 모스는 놀란 듯 바라보았다.
몹시 나이가 든 노인이 소년처럼 보이는 이에게 오라버니라는 호칭을 쓰는 것은 기묘한 모습이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하지만 노인은 모스에게 계속해서 오라버니라 말하며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미 많이 노쇠한 그녀는 걷는 것조차도 힘들어 보였는데, 어떻게든 빠르게 걸어가려는 이처럼 굴었다.
하나 다리가 영 좋지 않은지, 빠르게 움직이려던 발이 꺾이며 넘어질 뻔했고 지켜보던 모스가 재빨리 노인을 부축했다.
이어 모스는 제 손끝에 온전히 닿는 노인의 따뜻한 온기를 느꼈고, 죽기 직전 떠오른 모든 기억들을 흡수했다.
모리스의 생과 이어진 모스의 생까지 전부.
방금만 해도 모든 생이 기억은 날지언정, 제 것이 아닌 양, 붕 뜨듯 흡수가 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 이 노인을 안은 순간, 그 모든 게 하나의 삶으로 연결된 것처럼 느껴졌다.
참으로 기묘한 감각이었다.
라젠타 마을에서 시작된 모리스의 생, 이후 마왕과의 조우와 죽음, 새롭게 시작된 모스의 삶. 그가 걸어온 삶의 길들이 여태까지는 책 속의 이야기처럼 잘 와닿지 않았건만, 지금 이 순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의 이야기가 되었다.
“아.”
그리고 이 노인이 제게 가진 의미까지도, 전부.
모스의 눈이 크게 뜨이더니, 이내 믿을 수 없다는 듯 제 품에 안긴 이를 보며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 아아.”
모스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이처럼 계속해서 입술을 달싹였지만,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듯했다. 그저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듯 그녀의 얼굴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잔뜩 노쇠하고 주름진 그녀의 얼굴에는 그간의 세월이 담겨 있는 듯했지만, 눈만큼은 아니었다.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눈은 여인, 아니, 아주 어린 소녀와 다를 게 없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로 모스가 손을 가져다 대었다. 반면 주름이 가득한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훑는 모스의 몸은 누구보다도 소년처럼 보이지만, 눈은 아니었다. 그의 눈은 그간의 세월을 온통 기억한 양, 지긋했다.
그런 눈을 한 모스가 손끝으로 그녀의 눈가를 매만지자, 여태 눈물만 줄줄 흘리던 그녀가 눈을 반으로 접었다.
사륵 접히는 눈꼬리, 눈 밑을 덮는 속눈썹, 말려 올라간 입꼬리, 볼에 팬 보조개. 그것을 본 모스는 그만 참지 못하고 눈물을 툭 흘리고, 간신히 입을 열 뿐이었다.
“……메리?”
그 이름이 모스의 입 밖으로 나온 순간, 노인, 메리는 기다렸다는 듯 미친 듯이 눈물을 흘렸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얼핏 보았을 땐 울음이라고는 진즉 말라 버렸을 법한, 잔뜩 지친 노인의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모두가 죽었다고 했지만, 전 아니었어요.”
이 순간, 그녀는 모스의 손을 붙들고 마왕을 찾으러 가던 어린 날의 자신으로 돌아와 있었다.
“전 계속 기다렸어요. 찾으려고 했어요.”
메리가 주름진 손으로 모스의 얼굴을 훑었다. 메리의 손톱은 죄다 이상하게 휘어져 있거나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하지만 호수가 얼었어요. 오라버니가 있는 이 호수는 너무 꽁꽁 얼어서, 아무리 제가 파내도 찾을 수가 없었어요. 지독한 겨울이 왔거든요. 지독하디 지독한…….”
엉망진창인 메리의 손을 본 모스의 눈에서는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 뺨을 적셨다.
혼자서 맨손으로 모스가 잠긴 얼어붙은 호수를 파내려고 했으니, 손이 성할 리가 없었다.
‘네가 날 부른 게 맞았구나.’
모리스 생의 마지막 순간, 바로 호수에 뛰어들기 전. 모스는 그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지만, 차마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호수에 들어가지 않으면 이 모든 게 끝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앞만 보고 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호수로 뛰어드는 오라버니를 어떻게든 막으려 하던 어린 소녀의 절박함을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봄까지 기다렸어요. 일 년, 십 년, 그렇게 수십 년, 수백 년…….”
그녀는 홀로 어땠을까. 당시 우리에게 남은 건 서로밖에 없었는데.
단 하나 남은 핏줄인 자신이 이 호수로 뛰어드는 모습을 본 메리의 심정을 모스는 차마 헤아릴 수가 없어 그저 눈물을 흘리다, 덜덜 몸을 떨며 그녀에게 사과를 할 뿐이었다.
“미안, 해. 미안해, 미안해.”
자신을 찾으려 들던 그녀는 누구의 도움조차 받지 못했을 거다. 반점이 있는 자신들은 제국인들 중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고, 마을 사람들은 각자 제 입에 풀칠을 하느라 바빴을 거다.
“혼자 둬서, 미안해, 내가… 인사도, 안 하고 가서, 미안해….”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모스가 미안했던 건. 이별이라는 것을 제대로 모르던 아이에게,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떠난 것이었다. 제대로 인사를 했다면, 이렇게 몇백 년이란 시간 동안 날 기다리지 않았을 텐데.
“메리. 미안해.”
목이 메었다. 모스가 물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다시 말했다. 그런 모스를 가만히 보던 메리는 이어 제가 두르고 있던 망토를 모스의 어깨에 둘러 주며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이미 인간의 삶 이상을 부지해 온 것처럼 많이 늙고 노쇠해서, 정말로 이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동생을 보는 기분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모스는 그저 제 품 안에 커다랗게 큰 여동생을 두 팔로 꽉 껴안았고, 메리는 드디어 수백의 시간을 지나 웃을 수 있었다.
“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그 밤, 해가 뜰 때까지 메리와 그간 있던 일을 나누다 잠든 모스는 인간의 삶으로 돌아와 처음으로 꿈을 꾸었다.
어린 메리의 손을 잡고 열매를 따러 가는, 그런 소소하고도 일상적인 꿈을.
셀 수 없는 긴 세월을 지난 뒤 꾸는 꿈은… 정말 신기했다. 그 여운은 제법 길게 남아, 자고 일어난 다음 눈을 깜빡이며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꿈에서 나는 어린 메리와 함께 숲을 거닐었다.
유독 운이 좋은 날이었는데, 그래서인지 먹을 수 있는 열매들을 정말 많이 발견해 따 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데, 심지어 눈더미에 파묻혀 있던 흰 토끼까지 잡았다!
우리는 그 열매와 토끼 한 마리를 들고 위풍당당하게 마을로 돌아갔다. 굶주린 마을 사람들은 우리를 보며 환호했고, 그렇게 마을 사람들과 나눠 먹게 된 저녁은 감히 환상적이라는 말로 부족했다. 고작 그 토끼 고기 하나론 저리 많은 인원들이 배불리 먹을 수 없을 텐데, 꿈은 꿈인지 모두가 그 고기 하나를 가지고 행복하게 먹었다.
하지만 꿈에서 깬 내게 남은 것은 토끼 고기도, 열매도 아닌.
‘레딘 형, 칼 아저씨, 로빈 누나, 에비게일, 유나 아주머니…….’
사람들이었다.
모리스의 생에 잠겨 있던 이들의 얼굴들은 언제 잊혀졌냐는 듯, 선명하게 꿈속에서 다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마을 사람들이 우리에게 살가웠다고는 빈말로라도 할 수 없었다. 늘 굶주리며 쫓기듯 살았던 이들이기에 각자 살아남기도 바빴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떠올린 이유는 명확했다. 제아무리 살갑지 않다고 한들, 그들은 부모에게 버림받은 우리에게 가족이나 다름없었으니깐.
‘보고 싶다.’
간만에 꾼 꿈의 여운은 쉽사리 가라앉질 않았다. 나는 몸을 일으킨 채, 눈을 감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박고는 한참을 꿈속에서 떠오른 얼굴들을 기억하고자 했다.
그때 꿈속에서 내 앞으로 불쑥 내밀어진 열매 두 개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꿈에서, 내게 열매를 준 이가 있던 거 같다. 한데, 그 얼굴이 자세히 안 떠올라 긴가민가해서 기억을 잘 되짚어 보았지만 모르겠다.
‘이런 사람도 있었나?’
꿈이 깨기 직전, 즐겁게 웃고 떠드는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커다란 손으로 두 개의 열매를 내밀던 사람. 그는 마을 사람도 아니었고, 모리스의 생에서 마주친 이도 아니었던 거 같다며 생각하던 그때.
-먹어.
불현듯, 꿈속에서의 그와 눈이 마주친 기억이 떠올랐다. 마치 어제 실제로 있던 것처럼 지독할 만큼 선명하게.
-모스.
내 이름을 부르며 열매를 주던 이의 얼굴이.
나는 불에 덴 듯 몸을 파르르 떨며 눈을 번쩍 떴다.
그사이, 날이 밝았는지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땐 어둑하게만 보이던 방이 밝아져 있었고, 내 몸은 온통 땀범벅이었다.
‘생각하지 마.’
축축해진 이마를 손바닥으로 밀어뜨리듯 닦아 내며 애써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봄이 돌아왔다더니, 창밖 너머의 풍경은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피부에 닿는 이 따스함도, 코끝을 스치는 꽃냄새와 나무 향도, 이 모든 게 봄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제발, 그만 생각해.’
내 몸은 여전히 추웠다. 모든 게 봄인데, 홀로 겨울에 남은 이처럼, 이가 딱딱 맞물릴 정도로 추워서 한참을 내 몸을 움켜쥐듯 붙들고서는 바들바들 떨었다.
‘그건 꿈이다. 저런 일은 실제로 일어난 적도 없고, 앞으로 일어날 일도 없어…… 왜냐하면.’
내게 열매를 준 이는 죽었으니까.
그리 생각을 하니, 사시나무처럼 떨려 오던 몸이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그 얼굴을 가까스로 밀어 내는 데 성공했다.
“…욱……우욱.”
하나 그럼에도, 계속 속은 울렁거렸다.
머릿속에서 그가 빠져나갔을지언정, 몸은 아직 기억하고 있다는 듯. 그렇게 떨리는 몸과 어지러운 머리를 붙든 채 얼마나 있었을까.
한동안 가만히 넋을 놓고 밖을 보던 나는 나와 달리, 한없이 밝은 바깥세상이 웃겨서 순간 내 처지도 잊고 헛웃음을 지었다.
‘진짜 힘들었는데.’
이 봄을 되찾기 위해, 그간 정말 먼 길을 돌아왔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모리스의 생에서도, 모스의 생에서도.
물론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한낱 미물에 불가한 내가 세세히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다만 마왕을 제대로 봉인하기 위해서 수많은 생물의 탄생을 일굴 수 있는 ‘봄’과 길잡이인 내가 희생되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인지할 뿐이었다.
그리고 나 외에도 희생된 이들은 또 있었다.
-용사는 나 같은 게 아니라, 너라고!
오웬과 커너, 플로이드, 아이작.
돌이켜 보니 아쉬운 점은 있었다. 오웬과 그들의 일행까지 모두 살 수 있는 그런 길이 분명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
마지막 순간, 오웬은 자신이 영광스러운 용사로 남기 위해, 내 존재를 숨기고 배척한 것이라며 미안하다 했지만, 나는 여전히 그야말로 틀림없이 용사라고 생각한다.
그는 마지막까지 싸웠다.
그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힘을 지닌 마왕을 앞에 두고, 검을 겨눌 생각을 한단 말인가. 물론 비록 그들은 처참한 말로를 맞이했고, 다시는 볼 수 없는 존재가 되었으며, 기록에도 제대로 남지 않았지만 여전히 내 머릿속에서는 영웅이고 용사로 느껴졌다.
새까만 하늘 아래 마왕의 손짓에 이리 움직이고 저리 움직이던 끔찍한 마물들은 이제 없는, 오로지 파랗게 하늘이 물든 세상. 이 아름다운 세상을 그들도 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여긴 어디쯤일까.’
이곳은 내가 빠졌던, 그리고 살아 돌아온 그 호수에서 가까이에 지어진 오두막 같았다. 자세히 보면 저 멀리 숲 사이로는 호수가 있었고, 작은 동물들은 나무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그 한없이 평온하고, 한없이 봄다운 풍경 속 떨어지는 햇빛을 보다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 위의 햇빛이 마치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오라버니. 식사하실래요?”
어느새 나타난 메리가 문을 두드리며 일상적인 어투로 말했다.
“응. 고마워.”
일상적인 대답. 어느 하나 어그러짐 없는 지독히 평범하고도 단순한 아침.
돌아왔다.
이제야.
***
이불을 정리하고, 뻗친 머리를 대충 손으로 꾹꾹 누른 뒤, 모스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열자마자 코끝에 스치는 냄새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만 놀라 버렸다.
“요리도 할 줄 알아?”
오두막은 꽤 아담해서 메리가 요리하는 모습이 모스에게 훤히 보였다. 다만 예상보다도 훨씬 능숙한 그녀의 손놀림이 모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제 나이가 몇인데요.”
요리가 막바지에 접어들었는지, 불 위에서 하나둘 음식을 꺼내 그릇에 옮겨 담는 메리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는 인간의 생을 초월한 삶을 살았다. 아니, 솔직히 초월이란 말로 그게 가능할까.
-점이 크고 진할수록 오래 살더라고요. 이유는 모르겠어요.
어제 그리 말하며 씁쓸하게 웃는 메리의 얼굴에서, 모스는 직감했다. 메리를 뺀 제가 알던 이들 모두가 운명을 달리했다는 것을.
“그렇지. 너는 어…, 어른이니까.”
메리는 더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모스보다 연륜이 더 묻어날 노인이 되었다.
그런 메리를 보며 모스는 머쓱하게 입을 다물었다.
하기야, 그의 메리에 관한 마지막 기억은 아주 옛날이었다. 그녀가 아무것도 못 할 어린 시절에는 모스에게 모든 걸 의존했고, 그게 당연한 것이었다.
다만 모스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제 허벅지까지 오던 동생이 어느덧 이리 훌쩍 커서 요리까지 하다니. 그는 이 상황이 신기하기도 하고, 마음 한편으론 씁쓸하게 느껴져 쓰게 웃었다.
“……음.”
메리는 쓰게 웃는 모스의 얼굴을 보고 이내 한숨을 푹 쉬더니, 외려 밝게 말했다.
“신경 좀 썼어요.”
그녀는 생색이라도 내듯, 장난스레 말하며 모스의 앞에 모락모락 김이 나는 음식을 내왔다. 음식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정말 신경을 많이 쓰기라도 한 듯, 메리의 손에서는 계속해서 접시가 생겨났고, 그걸 모스는 멍하니 보다 이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토, 끼?”
“네, 중요한 날에나 먹던 거잖아요.”
특히 메인으로 보이는 음식은 더 놀라웠다. 그건 바로 온갖 열매들로 둘러싸인, 맛있어 보이는 토끼 구이였던 것이다.
마주 보는 의자에 앉으면서 메리는 씨익 웃었다. 모스가 놀란 이유가 아마 어릴 적 마을에서나 즐겨 먹던 추억의 음식이 나와서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와, 이걸…….”
그런 이유도 있지만, 실은 모스는 꿈에서 나왔던 토끼 구이가 나온 게 더 신기했기에 말을 못 잇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메리는 모스가 무척이나 감동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흠흠 헛기침을 하며 칭찬을 요구하듯 응시했다.
“머, 먹어도 돼?”
“그럼요. 오라버니 드시라고 특별히 꺼낸 거예요.”
음식을 만든 이의 허락이 떨어지자, 모스는 손을 뻗어 서둘러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한 것도 아니건만, 모스의 두 눈은 금세 동그랗게 뜨였다.
“…맛있다.”
이리 잘 차려진 인간다운 음식을 먹는 게 몇 년, 아니 몇십 년만이지? 모리스의 생에서는 늘 음식다운 음식이라곤 제대로 먹어 본 게 손에 꼽혔고, 그다음 모스의 생에서는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었기에 먹지 않았다.
그러기에 혀에 닿자마자 온기가 퍼지는 따뜻한 음식을 먹으니, 모스는 그간 얼어붙었던 제 마음마저도 녹아내린 것처럼 느껴졌다.
“고마워.”
그 어린아이가 이토록 커서 이런 요리도 할 줄 안다니.
“정말 잘 먹을게, 메리.”
모스는 메리가 이렇게 홀로 잘 클 동안 곁에 있어 주지 못한 게 미안해서 절로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그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가뜩이나 얼굴에 난 커다란 점 때문에 핍박을 받았을 텐데, 이렇게까지 클 동안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괜스레 또 마음이 울적해져서, 음식을 집어 먹는 모스의 손이 느려지자, 메리가 그걸 눈치라도 챈 듯 당황했다.
‘또 미안해하고 계시는구나.’
어젯밤, 그간 묻어 두었던 긴 시간의 이야기를 했다. 다만 주된 내용은 메리에 관한 것들이었다.
모스는 메리를 홀로 둔 것에 많이 미안해하고 있어서, 메리가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고, 메리는 이를 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냥, 나는… 괴물의 삶이었어.
반면 모스는 제가 여태 어떻게 지냈는지에 관해 길게 말하지 않았다.
그저 마왕의 저주를 받은 탓인지 죽지 않는 괴물로 살다가, 햇빛에 녹아 이제야 돌아왔다고만 말을 했고, 자세한 건 더는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길래 더는 메리도 묻지 않았다.
‘할 이야기가 아직 많이 남았지.’
둘은 어제 이야기를 나누다 잠들었기에, 메리도 절벽까지 가게 된 이야기까지밖에 못 했고, 모스도 저 이상으로 길게 말할 새가 없었다.
그저 서로 손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서, 서로의 존재가 신기하고 반가워서. 대부분의 시간을 그리 보냈다.
“오라버니.”
메리는 어제의 이야기를 되짚어 보듯 생각하다가, 이내 어제부터 느끼던 이질감의 정체를 찾은 듯 모스에게 물었다.
“이제 말을 많이 안 더듬으시네요?”
“…응? 내가?”
“예. 어제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말을 이전보다는 훨씬 안 더듬으셔서요. 어릴 적, 마물한테 크게 다친 이후, 말을 더듬었잖아요.”
모스는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해 보니, 이번에 눈을 뜬 이후로 말을 이전보다는 월등하게 덜 더듬은 것 같다.
“그, 그래?”
“의식하시니 더듬으시네요.”
메리가 바로 말을 더듬기 시작하는 모스를 보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고, 모스는 그런 그녀의 지적에 머쓱하게 웃었다.
“점점 좋아질 거예요.”
의식을 하면 다시 예전처럼 더듬지만, 의식을 안 하면 말을 안 더듬는다.
햇빛에 닿지 않으면 불사나 다름없는 모스의 몸으로 살아갈 때도 말을 더듬었는데, 이걸 이제야 고치다니. 모스는 그게 신기한지, 턱을 만지작거리다 머쓱하게 웃었다.
“그랬으면, 좋겠다.”
첫 번째 생에서는 마물에게 공격당한 후유증으로 말을 더듬었고, 두 번째 생에서는 기억은 없지만 습관이 몸에 밴 탓에 말을 더듬었던 거 같고, 세 번째 생인 지금은 모든 게 처음처럼 돌아왔지만, 아무래도 모든 걸 기억하고 살아난 탓에 습관이 있는 듯 없는 듯, 엉망인 거 같다.
‘하기야 점도 사라졌었지.’
모스의 허리에는 메리의 얼굴에 난 커다란 점처럼 길잡이를 나타내는 점이 있었는데, 이제는 없었다.
그 점이 없는 걸 확인한 순간, 모스는 묘한 감각에 휩쓸렸다. 모든 굴레에서 벗어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평화로워.’
모스는 엉망진창인 자신과는 달리, 한없이 화사한 문밖 세상을 보았다. 들꽃이 피어 있고, 저 멀리 호수가 보이고, 나무가 손을 흔드는 그런 평화로운 세상은 여태 밑바닥을 구르던 그의 삶과 무척이나 비교되었다.
‘그나저나 굴레라.’
자신이 지나온 두 개의 삶은 정말 지독한 굴레라는 말 외에 떠오르는 표현은 없었다.
용사라고 하기에는 희생양에 가까웠던 첫 번째 삶의 말로는 정말 끔찍했고, 이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무지한 괴물인 채로 살던 삶은 시작부터 정말 사무치게 외롭고 끔찍했다.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그리워 그들이 남긴 발자국이라도 보며 위안 삼고, 환각초에 홀린 이들의 시체들을 차곡차곡 묻어 주고.
물론, 그런 생활도 그를 만난 후에는…….
“아.”
“오라버니?”
쨍그랑, 모스가 손에 쥐던 식기를 접시 위로 요란스레 떨어뜨렸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메리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떠서 모스를 보는데, 모스는 창백한 낯을 한 채 굳어 있었다.
“괜찮으세요?”
메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모스를 보았다.
“무슨 땀이…….”
그새 모스의 이마가 땀이 나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넋을 놓은 듯 멍하니 있는 모스의 얼굴을 보고, 메리는 물을 떠 오겠다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그새 빈 모스의 물잔을 들고 움직였다.
원래의 모스라면 직접 물을 떠 오겠다고 말을 했을 터였다. 하나 지금 모스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었다.
갑작스레 생각 속에 치고 들어온 그의 존재가, 이내 숨을 제대로 쉴 수도 없을 정도로 크게 부풀었기 때문이다.
“……으.”
의식적으로 그를 떠올린 것은 아니다. 그저 불현듯 그가 떠올랐을 뿐인데, 가슴이 먹먹하다 못해 아파 왔다. 가슴의 답답함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슬픔을 엿본 것처럼, 가슴이 사무치듯 아파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윽고 그는 왜 이토록 그의 존재가 쉬이 떠올랐는지 깨달았다.
왜 몰랐을까.
‘숲, 나무, 호수, 풀, 햇빛…….’
이곳은 지나칠 정도로, 모스가 지내던 숲과 비슷했다.
모스가 괴물로서 살던 숲에도 이렇게 나무가 많았고, 인간들의 손길이 제대로 닿지 않아 마구잡이로 늘어진 잡풀들이 늘 정강이까지 자라 있었으며, 호수까지는 아니더라도 달빛이 예쁘게 부서지는 연못이 있었으며 그리고 그런 그의 앞에는 늘…….
‘……너.’
보금자리 문 앞에, 태양처럼 서 있던 그의 모습.
지금은 목숨을 해하는 환각초 따위 없고, 추운 겨울도 아니었고, 보금자리에 비할 바가 되지 않을 정도로 평온한 오두막이건만, 모스는 루인이 당장이라도 제 앞에 햇빛에 잘게 부서지는 백금발을 쓸어 넘기며 나타날 것만 같았다.
“아아.”
자신의 몸은 습관이 참 쉬이 잘 드는 몸인가 보다. 그러기에 이곳에서 자꾸만 비어 있는 존재를 찾으려고 들었던 것이겠지.
이제는 어떻게 해도 되찾을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미련하게.
“오라버니!”
새하얗다 못해 당장이라도 혼절할 것만 같은 모스를 보며, 물을 떠 온 메리가 발을 동동 굴렀다. 모든 게 초연할 것처럼 보이는 그녀여도, 제 오라비인 모스의 일에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제가, 약초라도…….”
“아니야.”
모스는 고개를 들어 올린 뒤 애써 웃음을 지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 메리는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온갖 약초를 뒤적였다.
“지, 진짜로 괜찮아져, 졌어.”
모스가 메리에게 잠시 속이 안 좋았던 것뿐이라며 거듭 반복해서 말하자, 처음에는 믿지 않던 메리도 나중에는 안도한 듯 의자에 무너지듯 앉았다.
“나는, 또 오라버니가 잘못되는 줄, 알고…….”
눈앞에서 가족을 잃은 고통이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메리가 모스를 붙잡았고, 모스는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그렇게 그들의 식사는 영 좋지 못한 분위기로 막이 내렸다. 노쇠한 메리는 방금의 일로 많이 지쳤는지, 피곤해 보였고, 모스는 자신 때문에 식사 자리가 망가진 게 영 마음에 쓰였는지 그런 메리의 옆에 붙어 그녀를 토닥이면서 애써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했다.
“…그, 나저나 여기에 어, 어쩌다 오게 되었어? 우리 어제 이야기… 끝까지 못 했잖아.”
축 처진 메리가 걱정스러웠는지, 모스는 애써 메리에게 말을 붙이며 밝게 물었다.
“제국에서 내쫓겼다고 드, 들었는데 어떻게 이곳에 와, 왔어? 여긴 제국 아, 안이잖아.”
어차피 해야 할 이야기기도 했다.
모스는 라젠타 마을에서 지내던 길잡이들이 죄다 제국에서 추방되어 숨어 지냈다는 이야기까지만 들었기 때문이다.
메리가 자기도 이 얘기를 왜 마저 안 했는지 모르겠다는 듯 놀라며 눈을 크게 뜨더니 이어 눈꼬리를 휘며 말했다.
“운이 좋게도, 다시 허락을 받았거든요.”
“…허락?”
제국 내로 돌아오는 허락을 누가 해 준다는 말인가?
그것에 의문이 서리던 그때.
“황제 폐하께서요.”
쿵, 모스는 일순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황제 폐하라니?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모스를 보며, 메리는 말을 계속 이었다.
“저희 일족은 제국 근처의 절벽에서 숨어서 지냈는데, 우연히 그곳에서 황제 폐하를 만나게 되었어요. 근데 폐하께서 목숨을 살려 준 값이라며 제국 내에 터전을 만들어 주겠다고 하셔서…….”
“황제, 폐하라고?”
쿵쿵쿵, 쿵쿵. 모스는 아까부터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애써 무시하며 꾸역꾸역 고개를 들어 메리를 보았다. 메리는 심상찮은 모스의 모습에 “오라버니?” 하고 되물으며 그를 보았지만, 지금 모스는 그런 것에 일일이 반응할 수가 없었다.
“황제? 그가?”
루인은 죽었다.
루인의 시체를 제 손으로 헤집었고, 그의 피에 젖은 옷도, 머리칼도 모스는 직접 다 보았었다. 그러기에 메리가 말하는 ‘황제’라 하면, 모스가 아는 그, 루인일 가능성이 현저히 낮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 황제라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모스의 심장은 미친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다른 황제를 말하는 것일 텐데.’
한데, 왜일까. 그는 죽은 게 틀림없어서 지금 메리가 말하는 ‘황제’라는 이는 루인이 아닐 텐데, 왜 심장은 마치 그가 살아 돌아온 것처럼 뛰기 시작하는 걸까.
그리하여, 모스는 그가 틀림없이 죽었음을 확신하면서도. 기어코 입을 열어 물었다.
“혹시, 그 황제가…….”
“오라버니께서는 모를 수도 있겠군요.”
이름이 어떻게 되냐고, 그리 다 묻기도 전에 메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해한 듯 끄덕였다.
모스는 어젯밤 메리에게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다만 긴 시간 동안, 괴물로 숲에서 지냈다고만 말을 했기에, 그녀는 아마 모스가 긴 시간 동안 홀로 괴물의 삶을 사느라, 황제의 이름조차 모른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루인 윈스.”
하나, 그 입을 열지 않는 게 어쩌면 더 좋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메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상한 투로 그의 이름을 담고, 끄덕였다.
“그가 이번 대 황제입니다.”
황제, 루인 윈스. 잊으려야 잊을 수 없을 그 이름.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받자, 이 모든 게 멈춘 듯 보였다. 말을 하는 메리의 얼굴도, 공기의 흐름도, 그리고 몸과 정신마저도.
모스는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멍하니 메리를 보다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읊조렸다.
“루인… 윈스?”
살아 있다고? 그가?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그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을 나는 보았는데. 그 아래에서 시체를 헤집고, 그의 피에 젖은 옷과 씨를 보았는데. 나는 분명히…….
“네. 루인 윈스는 제국의 유례없는 역사를 세우신 분이자 제 은인이지만 지금은, 음… 오라버니?”
새하얗게 질린 채, 눈을 크게 뜨고 굳어 있는 모스를 보며 메리가 당황했다.
모스는 그녀에게 또 걱정을 끼치긴 싫었기에, 억지로 어떻게든 웃으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자신의 입꼬리는 누가 잡아당기고 있는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고, 눈은 너무 부릅뜨고 있어 눈물이 흐를 것처럼 충혈되는 게 느껴짐에도 감기려 들지 않았다.
“또 어디 아프세요?”
당황한 메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절뚝거리며 모스에게 바짝 다가왔다. 모스는 메리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다 다물었다. 계속해서 메리는 모스에게 말을 걸었지만, 모스는 그저 멍한 얼굴로 계속 허공을 보다가 이윽고 간신히 소리를 냈다.
“살, 아 있어?”
머뭇거리던 모스가 메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
“루인 윈스가, 사, 살아 있는 거지?”
메리는 멈칫했다. 긴 세월을 살아와서 온갖 감정을 겪어 보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그녀조차도 모스의 눈에 담긴,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로 그득그득 들이찬 것을 본 순간 말문이 막혔다.
“으, 응?”
저게 무슨 감정인지 감히 메리는 헤아릴 수 없었지만, 다만 자신의 이 대답이 모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것은 깨달았다.
그녀는 가만히 모스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살아 계시죠. 제 두 눈으로 보았어요.”라고 대답을 했다. 잔뜩 긴장이라도 한 듯 굳어 있던 모스의 얼굴은 그 확정적인 대답을 듣고 나서야, 안도로 얼룩졌다.
‘살아 있어.’
그가 살아서 숨 쉬고 있다는 사실.
‘살아 있다고.’
루인의 이름을 듣는 그 순간부터 서서히 뛰기 시작하던 심장이 점점 빨라지더니 이윽고 걷잡을 수 없이 미친 듯이 뛴다. 몸은 당장이라도 루인을 만나러 갈 것처럼 들썩이기 시작했다.
“살, 아 있어. 살아 있어…….”
모스는 멍한 얼굴로 제 손을 보았다. 그 절벽에서 루인의 시체를 만졌을 때의 느낌, 내장을 맨손으로 뒤적이던 감각, 피 냄새, 비린내, 그 모든 게 지금까지도 지독할 만큼 선명하게 떠올랐다.
한데, 그 선명했던 모든 게 아니라고 한다. 그럼 제가 뒤진 건 다른 이의 시신이었나? 무엇이 되었든 모스는 그 엉망진창의 시신이 루인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한 듯 손을 벌벌 떨었다.
루인은 무섭다.
솔직히 말해서 그의 존재만으로도 두렵고 무섭고, 다신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모스는 그에게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고, 그와 엮여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많이 보냈기에 다시 생을 잇게 된다면, 절대로 그와 마주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막상 그가 살아 있다 들으니…….
‘살아 있어.’
그가 살아 있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가슴이 사무칠 정도로 너무 보고 싶었다. 이 오두막을 뛰쳐나가, 그가 내장을 다 내놓고 죽은 게 아니라는 것을 확인받고 싶었다. 살아서 숨을 쉬는 루인 윈스를 당장이라도 보고 싶었다.
“그럼… 루인은 지금… 어디에….”
모스가 고개를 들어 메리를 보고 어물거리며 물었다. 제국의 황제를 저리 아는 사람처럼 부르는 것에 메리는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이며 혹 모스가 루인과 인연이 있는지 생각하다가 이내 접었다.
괴물인 채로 숲에서만 지낸 모스가 어찌 루인을 안단 말인가.
“폐하께서는 지금 황궁에 계시죠.”
모스는 안도했다.
‘돌아갔구나. 무사히 그 절벽에서 나와 돌아갔어. 어떻게 돌아갔을까? 그 절벽은 지독히도 높아서, 떨어졌다면 나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다친 곳은 없을까? 그래도 살아 있어.’
그가 살아 있다.
온갖 걱정이 일었지만, 그 모든 걸 제치고 그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살아서 제 원래의 고귀한 자리로 돌아갔다는 것만으로도 모스는 가슴이 벅찼다.
그토록 미워하고, 증오하고… 사랑하는 이였다. 비록 그가 남긴 상처들로 괴로워했지만, 그 상처들보다 그가 죽었다는 사실이 자신을 더 괴롭게 만들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그 고통에서 해방되고자 햇빛에 녹는 선택을 할 정도였으니.
“다행…이다.”
말 그대로 그는 모스의 세상이었으니까.
그때, 다행이라 읊조리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스를 의아한 듯 쳐다보던 메리가 입을 열었다.
“다행은 아닐 겁니다.”
모스가 고개를 들었다.
“폐하께서는 눈도, 귀도 머셨거든요.”
이어진 그녀의 말에 모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눈과 귀가…?”
“네. 안타깝게도,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걸로 알고 있어요.”
루인의 일은 메리에게는 그래 봤자 타인의 일이었다. 메리는 안타깝다는 투로는 말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녀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루인의 이름을 담고, 그의 근황까지 서슴없이 쭉 말을 해서, 순간 모스는 이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몸을 굳혔다.
‘왜?’
다른 이도 아닌 루인의 눈과 귀가 먼 것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모스가 본 그는 인간의 경지를 넘은 육체를 가진 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귀한 자였고, 때문에 그의 곁에는 늘 무수히 많은 기사들이 있지 않는가.
“왜 눈과 귀가 머, 멀었어? 설마 절벽에서 떨어져서?”
“아니요? 폐하는 중상을 입었지만, 생각보다 멀쩡했어요. 정말 경악스럽게도요.”
“그럼… 저, 전쟁이 났어?”
모스는 그 루인 윈스가 눈과 귀가 멀 정도면, 자신이 인간으로 돌아오는 사이, 제국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메리는 모스의 말에 의아하다는 듯 갸웃 고개를 기울이더니 “딱히 전쟁이랄 건 없었어요.”라고 답했다.
“그, 그럼 왜 황제가……?”
“아 폐하께서는.”
그리고 믿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스스로 눈과 귀를 도려내셨다고 하네요.”
이어 들어서는 안 될 것까지.
“미치셔서.”
전부 다.
모스는 처음에 제가 들은 것을 믿을 수 없어, 한참이나 굳어 있었다.
그만큼 믿을 수 없었다. 당장 루인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그 스스로 눈과 귀를 도려냈다니.
정말 제가 아는 루인이 맞나?
모스가 아는 루인 윈스는 그럴 이가 아니었다. 비록 몸을 막 쓰는 경향은 있었으나, 그의 몸과 정신은 제가 보았던 그 누구보다도 삶에 대한 의지가 지독할 치만큼 가득했었다.
무려 그 환각초를 뚫고 살아서 땅을 밟은 이였다. 무수한 인간들이 환각에 얽매이고, 죽었지만 루인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환각에 얽매이지도 않았고, 기억은 잃었을지언정 독하게 버텨 내, 기어코 살아남지 않았는가.
그런 그가 미쳐서 스스로의 몸을 해했다고?
그럴 리가 없다.
그것에 모스는 믿기지 않는 듯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여실히 드러낸 채로 메리를 보았지만, 메리의 얼굴 어디에도 방금 내뱉은 말이 농담이란 투는 없었다. 단지 그녀는 모스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의아하다는 의구심만이 떠올라 있을 뿐이었다.
‘만나 봐야겠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저 별것도 아닌 소문이 허황되고, 과장되어 그런 걸 수도 있다.
어찌 이런 제국인들이 황궁에서 사는 황제의 내밀한 사정까지 알 수 있을까. 틀림없이 무언가 착오가 있던 게 분명하다.
그리고 만약에, 만에 하나 그가 소문대로 정말 미쳐서 스스로 눈과 귀를 망가뜨린 것이라 하더라도.
‘보고 싶어.’
모스는 루인이 살아서 숨을 쉬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모스를 대신해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이 아닌, 내장을 다 벌려진 채 죽은 시신이 아닌, 온전한 그의 얼굴을 다시…….
“그래서, 아마 조만간 황후 폐하를 들이실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다, 시…….
“황후 폐하는 어느 분이 되실까요?”
“……황, 후?”
순간, 머리가 굳는 것만 같았다. 이해하지 못한 채 메리를 보는데, 메리는 담담하게 말을 할 뿐이었다.
“예. 저번에 땔감을 가져다주던 사냥꾼이 말하길, 폐하의 광증이 심해져서 하루라도 빨리 후사를 보기 위해, 귀족들이 황후를 선별하려고 한다고…….”
황후. 일생을 무지렁이로 살아온 모스라도 그 존재는 알았다. 황제의 곁에서 남을 배우자, 평생 함께 가는 동반자, 제국에서 가장 귀한 여인.
하지만 그 루인 윈스가 황후를 들인다고?
모스는 믿을 수 없었다. 제가 지켜본 루인 윈스는 황후를 맞이할 법한 이는 결코 아니었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아름답지만 잔혹했으며, 누군가에게 제 곁을 내주는 법을 모르는 이였다.
“거, 짓말.”
그러니 그럴 리 없다. 그런 그가 여인을 곁에 두고, 품어서 아이를 볼 일이 없다.
그것을 모스가 저도 모르게 읊조리자, 메리가 의아한 듯 모스를 보며 고개를 기웃 기울이더니 설명을 덧붙였다.
“이건 거의 확실해요. 왜냐하면, 제국 내 미혼 여식들이, 조만간 황궁 연회에 가게 되었다며 엄청 떠들썩하거든요. 과연 그녀들 중, 누가 폐하의 여인이 될까요?”
폐하만큼 아름다우신 분이 될까요? 아, 그전에 성격이 잘 맞으실 수 있을지-라며 메리가 눈을 접어 웃었다.
세월의 흐름이 무색하게 메리의 얼굴엔 이런 일에 관해서는 꽤나 흥미로워하는 소녀 같은 반짝임이 눈가에 새겨졌지만, 반면 메리가 한 글자씩 말을 뱉을수록, 모스는 창백해져 갔다.
‘정말로?’
황실 연회, 제국의 미혼 여식들.
황후는 분명 아름답고 혈통 좋은 그들 사이에서 뽑힐 것이다.
황제는 귀한 이를 만나는 것이 당연하다. 후사도 못 보는 자신 같은 것이 아니라, 귀하고 아기도 낳을 수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 필요하다.
‘황후를 들여, 그가…….’
모스는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내가 대체 무슨 상상을 한 거지?’
황후? 후사?
자신은 그 어느 것도 될 수 없고, 할 수 없는 이다. 모스는 순간 시야가 빙 도는 것에 몸을 비틀거리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헛웃음을 지었다.
‘그를 보러 간다고?’
그리고 시선을 내려 자신의 몸을 보았다.
‘……천것.’
주제 파악은 누구보다도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메리의 집에 있는 옷을 입은 그는 괴물인 채로 지냈을 때보다는 때깔이 좋았지만, 황제인 루인에 비하면 여전히 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멍청아. 가서 뭐 하게? 지금을 봐라. 비록 인간으로 돌아왔을지언정 황제의 곁에 있을 수준이 되나? 모스는 방금 전 자신이 했던 모든 생각이 우스웠다.
루인을 찾아가려던 것도, 자신이 뭐라도 된 줄 알고 루인과 만나려고 했던 것도. 너무 수치스럽고 부끄러웠다.
“무슨 땀이-.”
그때 메리가 눈을 크게 뜨며 축축하게 젖은 모스의 이마를 보았다. 메리의 말에 뒤늦게 자신의 상태를 알아챈 모스가 서둘러 제 땀으로 젖은 이마를 닦아 내고,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더워서. 더워서 그래, 봄, 이잖아.”
누가 봐도 봄이라서 땀을 흘리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모스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혼절할 이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고, 입술에도 혈색이 없었다. 하지만 모스는 끝까지 더워서 그런 거라며 부정했다.
“혹시…….”
그런 모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메리가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와 아는 사이예요?”
그녀의 주저하는 물음에 모스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 물끄러미 메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는, 사이?”
아는 사이?
이 말 하나로 자신과 루인의 사이가 정의되면 얼마나 좋을까. 모스는 그런 생각을 하며 메리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그녀의 짙은 눈동자에 모스의 멍한 얼굴이 선명하게 비쳤다. 그 멍하고도 멍청한 얼굴의 자신과 눈이 마주친 모스, 그는 이어 천천히 입을 열어 답했다.
“아니.”
모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전혀 몰라. 모르는 이야.”
부정해야 살 수 있는 이처럼, 거세게 머리를 좌우로 내저었다.
“처음 드, 들어 보는 이름이야.”
필사적으로 부정하듯 말하는 모스를 보며 메리는 당황했다. 모스가 이리 크게 부정할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더 한 부정을 하니, 메리는 의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하나 모스는 그 얼굴에 실린 의심을 읽었음에도, 부정에 부정만을 거듭할 수 있는 이처럼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내가 아, 알던 황제의 이름이 아, 아니라서, 나는 그러니까, 예전에, 어, 언제지, 그러니까, 그만큼 기, 긴 시간이 흐, 흘렀나 싶어서, 진짜 몰라. 정말로, 나는…….”
그는 애써 담담한 척하려 했지만, 말을 점점 더 심하게 더듬는 바람에 당황하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메리는 이것을 보고, 오히려 황제와 모스가 아는 사이임을, 그리고 아는 사이 이상을 넘어선… 감히 짐작할 수 없는 어떠한 관계임을 예상할 수 있었다.
‘대체 어쩌다? 숲에서만 지냈다던 오라버니가 어찌 제국의 황제를 만난 거지? 그럼 혹시 그때, 황제가 절벽에서 그 말도 안 되는 몰골을 하던 게… 오라버니랑 관련이 있는 걸까?’
이제는 나이가 너무 많이 들어, 길잡이로서의 정확한 길을 찾진 못하지만 감만큼은 살아 있었다.
그녀는 문득, 절벽에서 보았던 황제의 망가진 모습을 떠올리곤, 제국의 가장 고귀한 이를 그리 망가지게 만든 원인이, 정말 뜬금없이 제 오라비인 모스일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직감이 들었다.
이처럼 메리는 모스에게 묻고 싶은 게 산더미만큼 쌓였지만, 모스의 얼굴을 본 순간 더는 묻지 못했다.
“나 같은 게 어떻게 그분을 알겠, 어?”
애써 웃는 모스의 얼굴이 안쓰러워서다.
새하얗게 질려서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얼굴로, 저 작고 여린 몸으로 모스는 꿋꿋하게 목을 세워 메리를 보고 부정했다.
담담한 척하려고 애쓰는 모습은 메리에게 참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절대 몰라. 나, 는 괴물이었으니까.”
모스는 자신이 메리에게 변명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안다. 이리 구차하게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다 안다. 하나 그렇다고 쉴 새 없이 떠드는 제 입을 멈출 수는 없었다.
메리가 수상하게 쳐다보자, 모스는 어떻게든 꾸역꾸역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황후를 맞이한다고.’
루인은 황제의 자리로 돌아갔고, 비록 귀와 눈이 멀었지만 후사를 보아 황제의 임무를 끝까지 다 할 것이었다. 나 같은 천한 괴물은 잊고, 가장 높은 자리에서 그렇게…….
‘그럼 나는?’
모스의 억지로 끌어 올린 입꼬리가 굳었다.
‘그럼 나는 어떡해?’
루인은 황후를 맞이해서 후사를 보고, 자신을 잊고 나아갈 수 있겠지만… 나는? 나는 그를 잊고, 나아갈 수 있나? 지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리 힘든데, 감히 내가 그를 잊을 수 있나?
“……메리.”
한참을 생각하듯 바닥을 보던 모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오랜만에 봤는데, 정말 미, 미안한데.”
의아하고 당황스러움이 가득 찬 메리의 얼굴을 보며, 모스는 이어질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앞으로 생이 그리 길게 남지 않은 메리와 남은 생이라도 즐겁게 살려면, 이 모든 과거의 그림자를 털어 내려면.
그러기 위해서 그는 그곳으로 가야 한다.
“나 지금 가야 하, 할 곳이 있어서. 가, 갔다가 금방 올게. 정리를, 못, 하, 한 게 있어서.”
모스는 자신이 녹아내린 그 절벽으로 가고자 마음먹었다.
루인으로 착각해, 헤집어 놓은 시체를 도로 묻어 주면서 지금 남은 이 미련까지도 전부…….
“다 무, 묻어 두고 올게.”
깨끗하게 묻고 올 것이다.
그날, 그곳에서 녹은 자신의 몸처럼.
“무엇을요?”
다만 이를 메리에게 자세히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무엇을 묻겠냐는 메리의 말에 한동안 모스는 대답을 하는 대신 입술을 달싹였다. 그렇게 몇 분여간 가만히 넋을 놓듯 허공을 보던 모스의 벌어진 잇새로는.
“내, 내… 과거. 천한 괴물의 삶을…….”
스스로의 삶을 폄하하는 말이 나왔다. 그 말에 메리는 인상을 구기며 반박하려는 듯하려 했지만, 모스의 말이 더 빨랐다.
“거, 걱정 마.”
모스는 꿋꿋히 말을 했다. 자신의 마음도, 그와의 기억도 전부 다 묻어 두고 올 것이라 다짐하며.
“금방 도, 돌아올 거야.”
온전한 끝맺음을 위해서.
***
카를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피 냄새와 비린내가 진동을 하는 것에 인상을 구겼다.
“……폐하.”
그 피 냄새가 가득한 곳 한가운데에는 그의 황제, 루인이 서 있었다. 루인의 손에는 정신을 잃은 이가 이빨이 다 뽑힌 채 잡혀 있었는데, 독 냄새가 나는 걸 봐선 아무래도 루인을 죽이려고 사용인들 틈으로 잠입한 놈인 거 같았다.
‘또 인가.’
근래, 벌써 이게 몇 번째 일인가. 암살 시도야 늘 있었다지만, 최근 들어 온갖 수단을 통해 이리 암살 시도가 들어오고 있으니.
“카를.”
루인이 카를을 불렀다.
그는 눈도 제대로 안 보이고 소리가 들릴 리가 없을 텐데도, 간혹 눈이 보이는 이처럼 굴 때가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 루인은 카를이 있는 곳으로 짐작되는 곳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고개는 돌렸을지언정, 늘 자리하던 아름다운 금안이 뜨이는 대신, 기다란 흉터가 자리하고 있는 눈두덩이만이 보일 뿐이었다.
……툭, 루인이 손에 들고 있던 머리를 놓았다. 곧 죽을 암살자의 얼굴을 보니, 그의 입에 이빨이랄 것은 없었고, 입에 얼마나 좆을 박아 댔는지 피와 거품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갑자기 내 품으로 엉겨 붙길래. 뜻대로 해 주었지. 내게 박히고 싶어 하는 것 같기에.”
말 같지도 않는 변명을 내뱉는 루인이 눈을 사락 감은 채로 꽃 같은 웃음을 화사하게 지었다.
맨손으로 암살자 이빨을 뽑고, 피가 줄줄 나는 그 입에 좆을 박아 댄 이가 맞는지. 루인의 옷차림은 너무나도 멀쩡했지만, 그와는 반대로 근처에 암살자들의 시체는 처참했다.
차라리 사정이라도 했으면 욕구 불만으로 일어난 행동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 루인의 성기는 사정은커녕 발기도 되어 있지 않았다.
정말 말 그대로 고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행위에 카를은 가까스로 탄식을 삼키며 루인을 보았다.
“…폐하.”
카를이 루인을 불렀으나, 귀가 거의 먼 루인은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신 웅웅거리듯 들리는 것인지 고개를 기울이기만 할 뿐, 카를에게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루인은 허공을 보았다. 마치 앞이 보이는 이처럼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며, 한참을 그리 있던 그는 돌연 읊조렸다.
“이해가 안 가.”
그래,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아.
루인은 그 자세 그대로 한참 동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말만을 중얼거리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머리가 언제부터 이리 아팠더라. 지끈거리는 머리의 통증에 미간을 꿈틀거린 루인은, 이 머리가 언제부터 아팠는지를 가늠하려는 이처럼 과거를 더듬었다.
그것은 그리 멀지 않은 과거였다.
-관두자. 너도, 나도.
두통의 시작은 귀와 눈을 스스로 이렇게 만든 이후였다.
루인은 검으로 눈과 귀를 단번에 도려내듯 썰어 버렸으니 고통이 꽤 상당했다. 그러나 그보다도 속이 더 시원했다. 그간 그의 앞에 깔짝대던 모스의 존재가 사라질 것이라 여겼고, 애초에 그러기 위해 그리 군 것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끝이다.
한데 우습게도 마냥 후련한 것은 아니었다. 눈이 멀기 전의 그 찰나, 모스의 환영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그 순간, 루인은 어쩌면, 조금은 아쉬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왜 그렇게 봐. 진짜처럼.
사정없이 눈과 귀를 그어 낸 자신을 보던 모스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루인은 세세히 기억하고자 마지막 순간까지 응시했다.
설령 환영일지라도, 눈을 잃게 되면 다신 저 모습마저도 볼 수 없을 것이니 말이다.
그리하여 그 짧은 순간 속에서도 루인은 모스의 모습을 꼼꼼하게 담았다. 앳되고 작은 얼굴, 늘 눈물을 터트릴 것처럼 그렁한 녹색 눈, 마르면서도 제법 살이 있는 두 뺨, 우울하게 휘어진 눈매, 마치 이끼처럼 이마에 달라붙은 축축한 녹색 머리.
그 모든 생김새를 빠르게 하나하나 마지막으로 눈에 새기면서, 루인은 조금이 아니라, 생각보다 많이 아쉬울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다.
‘지긋함의 종말이다.’
그러나 모스의 환영에 휘둘리느니, 이게 나았다.
루인은 모스의 환영을 말미암아 자꾸만 자신의 모습이 이상하게 변화되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스가 환영임을 알면서도 계속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져 집착하게 되고, 그 환영이 없으면 미친 듯이 불안하면서 화가 났는데, 그에 대한 분노는 무척이나 덩치가 컸다.
어찌나 큰지, 근처에 있는 살아 있는 것들을 싹 죽이고, 마지막으로 스스로의 목을 도려내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였다.
그리하여, 마지막 남은 실낱의 이성으로 칼끝을 눈과 귀에 두어, 이리 멀게 만든 것인데.
“눈과 귀까지 도려냈는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미 도려내듯 그어 낸 눈을 감아도.
“왜 자꾸 네가 나타나지.”
온전한 실명은 아니기에 약간의 색만 보이는 세상 속, 머릿속으로 자연스레 상상해 낸 공간에 덩그러니 서 있는 모스가 보이고.
『아, 안녕.』
이미 도려내듯 갈라진 귀에서도 그의 목소리가 들렸던 탓이다.
어이가 없지.
루인은 모스란 존재 자체를 없애 버리려고, 스스로의 눈과 귀를 포기했는데 그럼에도 환영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모, 모스야.』
지금도 봐라,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아 온통 뿌옇고 형태조차 알아보기 힘드나, 모스만은 아니었다. 세상이 흐리고 뭉개져 보이는 와중에, 모스의 형태는 선명했다.
결코 잊을 리가 없으리라 여겼던 얼굴과 어색한 표정. 마지막 순간까지 꾸역꾸역 눈에 담던 그 모든 게 고스란히 앞에 있었다.
너무나도 진짜처럼.
“지겨워.”
지겹고, 징그럽고, 환멸이 나.
그리 말하면서도 루인은 모스의 환영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자꾸만 늪에 잠겨 드는 기분에,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검을 쥐어 눈을 긋고, 귀까지 그었건만,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이다.
‘아니, 더한 늪이다.’
루인은 생각했다. 차라리 이전처럼 다른 것들이 보이고, 다른 것들이 들렸더라면 이토록 더 선명하게 느끼지 못할 텐데.
“……후.”
루인이 눈에 힘을 주었다. 부릅떠진 그의 눈에는 커다란 상처가 있었다.
한쪽은 여태 썩지 않는 게 기적일 정도로 희뿌연 눈알에 자상이 있었고, 피가 눈물처럼 고여 있었다. 다른 한쪽은 얼핏 보기엔 멀쩡했으나, 눈두덩이에 기다란 상처의 여파로, 앞이 보이지 않아야 하지만…….
『뭐, 해? 응?』
이상하게도 저 환영, 모스만은 루인이 눈이 멀어도 보였다.
루인은 모든 게 흐린 가운데, 유일하게 선명한 모스에게서 신경을 끄려야 끌 수 없었다. 결국 입술을 꾹 깨물고 빤히 모스의 얼굴을 보던 루인이 움직였다. 그는 손을 뻗어 움켜쥐듯 모스의 손을 쥐려고 했다.
“하.”
당연하게도 그곳은 허공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허공을 루인은 어떻게든 쥐려는 이처럼 손을 비틀었지만, 여전히 잡히는 게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허공을 쥐어짜듯 움직이다 픽 웃으며, 살기가 가득한 투로 읊조리기 시작했다.
“이 썩어 가는 눈알까지 마저 도려내면 안 보일까.”
아예 파 버려서 뜨지도 못하게 한다면.
루인은 살짝 고개를 들어, 허공에 내뻗었던 양손으로 제 눈을 파낼 것처럼 눈가를 훑다 이어 다 찢어져 너덜해진 귀를 툭 건드렸다.
“아니면 귀의 형체조차 남기지 않고 찢어 내야 멎을까.”
아예 머리를 가를 각오로 귀를 파내 버린다면, 너는 이제 사라지지 않을까.
루인이 살벌한 기세로 읊조리며 제 귀를 만지작거리자, 이를 지켜보던 카를의 눈이 크게 뜨였다.
‘분위기가 바뀌었어.’
방금까지만 해도 단순히 스산했던 루인의 분위기가 뒤틀렸다. 당장이라도 스스로의 눈알을 파내고, 귀를 뜯어낼 것처럼 아슬한 루인의 모습에 카를은 어떻게든 말려야 한다며 움직이고자 했지만, 숨을 내쉴 때마다 코를 찌르는 그의 살기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움직이면 죽는다.
살기가 어찌나 짙은지, 그곳에 카를이 낀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일이라며 직감이 그리 경고를 하는 통에 카를은 탄식을 간신히 삼켰다.
‘폐하, 대체 언제 돌아오십니까…….’
지금 제 앞에 있는 이를 보고 누가 황제라 여기겠느냐 말인가.
눈을 잃고도, 귀가 멀고도, 그럼에도 계속해서 누군가를 응시하듯, 대화하듯 구는 루인은 정말 처참하다는 표현 외에는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몰골이었다.
황가를 상징하는 듯한 찬란하게 빛이 나던 백금발과 금안은 빛을 잃었고, 몸은 음식을 제대로 먹지 않은지라 뼈와 거죽밖에 남지 않았다.
게다가 귀와 눈이 멀어 버린 바람에 모든 게 극도로 예민해졌는지, 언제든 다가오는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취할 준비를 하는 듯, 계속 예민한 기운을 두르고 있는 모습은 날짐승에 가까웠다.
그 날것의 모습으로 루인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보고 계속 떠들었다.
“왜 자꾸 내 앞에 얼쩡거리듯 보이는 거 같지? 왜 자꾸 들리는 거 같지? 이미 멀어 버린 눈이며, 이미 멀어 버린 귀인데. 왜 보이고, 왜 들리는 거지? 왜?”
보기만 해도 털이 죄다 쭈뼛 설 정도로 소름 끼치는데, 살기까지 가득해 지켜보던 카를의 목이 절로 메어 왔다.
화를 참지 못한 루인이 바닥에 굴러다니는 머리통을 걷어차듯 툭 밀어 냈다. 힘이 어찌나 억센지, 그 반동으로 동그란 암살자의 머리가 찌그러지며 눈이 튀어나왔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 머리통을 굴리듯 발로 몇 번 움직이더니, 허리를 굽혀 허공에게 말을 걸 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사라질 건데?”
『…….』
다만, 그 난리 통에서도 모스의 환영만큼은 침묵이었다. 그런 루인을 빤히 바라볼 뿐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루인은 답답하다는 듯 모스의 환영을 응시하다가 픽 웃었다.
“짐이 죽으면, 사라지나….”
“폐하!!”
카를은 그 얘기를 듣자마자 몸이 불에 덴 듯 펄쩍 뛰며 그를 만류하는 말들을 쏟아 냈다. 하지만 카를의 말이 루인에게 닿을 리가 없었다.
루인은 그저 집요하게 환영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방금 내뱉은 말에, 모스의 환영이 움찔하고 떨리더니 이윽고 뭐라 말할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자신의 발끝을 보았다.
자연스레 모스의 시선을 따라 움직인 루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너.”
그리고 그걸 본 순간, 루인은 자리를 박차듯이 일어났다.
“개수작 부리지 마.”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다. 모스가 나타나면 루인은 늘 그의 얼굴에 시선을 뺏기기 일쑤였으니까.
그래서 알 수 없었다.
“진짜 사라진다고?”
모스의 발끝이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서서히 흐려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환영은 우습게도 이전에 루인이 신겨 준 신발을 신고 있었는데, 그 신발은 이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정강이까지 옅어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점점 색이 연해지는 모스의 모습을 본 루인의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사라지라면서. 이게, 네, 네가 원하는, 거잖아.』
“네가!!!”
새빨갛게 충혈된 두 눈, 목까지 핏대가 선 루인이 사납게 소리쳤다.
“네가 언제는 짐의 말을 들었다고? 이제 와서?!”
『…….』
“하, 또 입을 처닫고 있지!!”
사납게 말하는 루인의 얼굴에는 언제 사라지냐고 난리 칠 때는 언제고, 초조함이 서렸다.
그사이 모스의 환영은 배꼽까지 사라졌다. 루인이 뒤늦게 모스를 붙잡듯 양손을 뻗어 보지만, 그의 몸을 투과할 뿐이었다. 하지만 루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든 모스를 손에 쥐려는 듯, 손을 계속 움직였고, 입은 사납게 모스를 몰아세웠다.
『주, 죽을 거라면서.』
그때, 그 모습을 바라보던 모스가 두려움이 담긴 투로 말을 더듬으며 내뱉었다.
『어차피 너, 너는 죽을, 거, 건데. 뭐, 무슨 상과, 관이야?』
그 말에 루인은 악을 지르듯 소리치던 것을 우뚝 멈추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만 같은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는 모스의 두 눈을 가만히 응시하다 이윽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 환영을 마주할 때마다 수어 번, 수십 번, 수백 번, 아니면 그 이상. 루인은 스스로에게 세뇌라도 하듯 말했다. 저 환영은 거짓이고, 모스는 죽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얼굴을 보면.
“하면, 짐이 안 죽으면?”
그 수많은 다짐들은 무용지물이 된다.
“짐이 죽지 않고, 이리 있으면 계속 나타날 건가?”
진짜 같아서.
루인은 이리 울먹이며 자신을 보는 모스의 환영이 가끔은 지나칠 정도로 인위적이고 작위적으로 느껴졌지만, 가끔은, 가령 지금 같은 순간에는 너무 사실적이라 놓기가 어려웠다.
“네가 짐에게 수작을 부렸잖아. 지금 와서 발을 빼면 안 되지.”
루인이 그리 말하며 비죽 웃었다.
그는 이전부터 제게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모스를 없애 버리고 싶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모스가 제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수작을 부린 건지는 몰라도, 그는 이제 이 환영마저 사라지면 숨도 제대로 못 쉴 거 같았다. 그래서 그를 죽여 버리고 싶으면서도 놓을 수 없었다. 모순 그 자체였다.
“사라지지 마.”
심지어 그는 이 환영을 지워 버리려고, 눈과 귀를 이렇게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결국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 환영이 이렇게 옅어질 때마다 루인은 모스를 잃는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처럼 느껴졌고, 결국 환영임을 알아도 이렇듯 모스를 붙들게 되었다.
『…….』
불편한 침묵 속,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을 한 모스가 루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루인은 그런 모스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눈을 마주쳤다.
서로의 시선이 말없이 오가던 가운데, 모스가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루인의 눈이 살짝 크게 뜨이더니, 이윽고 모스에게 되물었다.
“곁에 있을 거라고?”
끄덕, 모스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명백한 대답에 루인은 일순 말문을 잃은 듯 멍하니 모스를 바라보다, 이윽고 몸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당장이라도 제 앞에 있는 목을 졸라 죽일 것처럼 선득하게 얼어붙었던 표정이 모스의 작은 끄덕임 하나에 사라지며, 이어 훈풍이라도 불 듯 잔잔하고 고요한, 오히려 미소까지 서린 묘한 얼굴이 되었다.
“그래, 곁에 있어.”
없애려고 했으면서.
“움직일 생각일랑 하지 말고, 딱 붙어 있어.”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리려고 했으면서.
사라지라고 악을 쓸 때는 언제고, 풀이 돋아나듯 다시금 온전해지는 모스의 환영을 보며 루인은 평온을 찾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전부 지켜본 카를은 더는 경악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루인을 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피부를 따끔하게 할 정도의 살기를 내뿜었으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그리 구는 루인은 얼핏 보기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걸 대체…….’
이건 더는 고칠 수 없는, 지독한 광증임을 직감했다.
때문에 카를은 절망에 빠졌으나, 그런 카를의 마음을 루인이 알 턱이 없었다. 그는 기분이 상당히 좋아 보였다.
눈을 감았음에도, 그의 앞에는 여전히 모스가 우뚝 서 있었으니까.
그런 모스를 보던 루인은 눈꼬리를 가벼이 휘었다.
“…….”
정적.
혼잣말조차 없으니, 방은 지독할 만큼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침묵 속에서 루인은 한참을 웃는 낯으로 가만히 서 있다가 비칠거리듯 걸어 침상으로 향했다.
온갖 곳이 피 칠갑이 되어 있는 가운데, 침상은 피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리고 침상으로 걸어가면서 루인은 옷을 하나둘 벗기 시작했다. 루인의 벗은 몸은 더 심각했다. 새하얀 피부에 그간 무슨 일이 있음을 알리듯, 온갖 상처가 틈조차 내어 주지 않고 가득했으며, 몸은 너무 말라 뼈가 두드러져 있었다.
그 무수한 흉을 보고 카를이 탄식을 채 삼키지 못하고 작게 신음했으나, 정작 루인은 개의치 않아 하며 벌거벗은 맨몸으로 침상에 올라가 누운 뒤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돌연 제 옆으로 손을 뻗더니, 더듬거리다가 우뚝 손끝을 멈추었다.
“가만히…….”
루인의 목소리는 제법 다정했다. 그러기에 누구에게, 어떻게. 라는 것은 없었지만, 카를은 루인이 말을 거는 대상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리 말하며 루인은 비틀리듯 입꼬리를 한쪽만 슬쩍 올리더니, 이윽고 입은 일자로 다물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루인의 입에서 옅은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규칙적으로 변했다.
“…….”
피범벅이 된 벽, 암살자들의 시체가 즐비한 바닥, 카펫에 스며드는 피, 이미 수많은 이들의 피가 튀어 피눈물을 흘리는 듯한 천장에 그려진 천사들.
그 사이에서 누군가를 붙든 듯, 손을 옆으로 내민 채 움켜쥐고 그림처럼 잠든 루인.
비록 수척해지고, 엉망인 꼴일지라도, 아름다움은 가시지 않았다.
침상은 하나의 그림처럼 보일 정도로 기괴하고, 아름다웠다. 그 모습을 잠시 한동안 말없이 지켜보던 카를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그간 부정하던 사실 하나를 인정하고 뒤를 돌 수밖에 없었다.
그의 황제는 추락했다.
모스의 죽음으로 인해.
***
“오늘도 무리일 것 같습니다.”
달칵, 카를이 황제의 침실을 나서자 복도에는 언제부터인지 모를, 신관들이 숨죽인 채 서 있었다.
“간만에 폐하께서 잠드셨거든요.”
그중에 오늘은 특별히 제국에서 가장 바쁘다는 상위계급 신관들을 데려왔다.
가장 앞에서 화려하게 옷을 입은 신관은 오늘도 황제가 자신을 바람맞혔고, 벌써 몇 번째 손끝조차 대지 못하고 돌아가야 한다는 것에, 더는 참지 못한다는 듯 표정을 와락 구겼다.
그런 신관을 보며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한 듯, 입술을 달싹이던 카를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일단 정리부터 하겠습니다.”
방에서 끌고 나온 암살자들의 몰골은 끔찍했다.
감히 황제를 죽이려고 들었으니, 그들의 죽음은 응당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적에게도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암살자들의 모습은 지독한 고문이라도 당한 듯 말이 아니었다.
“죽여.”
어차피 이 자는 목숨을 부지해줘 봤자, 정보도 못 뱉어 내고 사경을 헤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을 것이다.
카를의 명령에 말없이 곁을 지키던 기사들 중 하나가 암살자의 옆으로 가, 가뿐하게 암살자의 얼굴을 비틀어 숨을 끊었다. 아마 이 암살자는 자결을 하려고 시도했겠지만, 자결조차 못 하게 루인이 막았을 것이니 오히려 이게 다행일 수도 있다.
헐떡이듯 잘게 들리던 소리가 멎자마자, 이를 잔뜩 구겨진 얼굴로 지켜보던 신관이 입을 열었다.
“아무리 황족이라지만, 어찌 매번 이러십니까.”
“신관님, 조금만 사정을 봐주십시오.”
예로부터 황족과 신전은 서로 상부상조할 수밖에 없었다. 신성력은 황족 혈통에게만 잘 통했기 때문에 황족은 신전을 지지했고, 신전도 그런 황족을 도와주며 이득을 챙겼다.
따라서 신성 치료를 받기만 한다면, 루인은 멀어 버린 눈과 귀가 돌아올 수도 있을 텐데…….
“암살자들 때문에 극도로 예민하신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폐하께 신성 치료를 못 하시는 연유를 아시지 않습니까.”
루인은 계속 거부했다. 본인이 직접 이유를 말한 것은 아니나, 다만 그가 어린 시절부터 신전에 갇혀 지냈기에 신전에게 적대감이 있으리라는 것은 이 자리의 모든 이가 예상할 수 있었다.
“압니다. 압니다만.”
다만 신관도 처음에는 이해하려고 했지만, 이는 도를 넘겼다.
“매번 거부를 당하니, 저희 측에서는 난감하기 그지없군요.”
“저희도 바쁜 몸입니다.”
신관은 주로 황족의 건강을 위해서 움직이는 게 맞긴 했지만, 그 밖에도 해야 할 일들이 최근 많았다. 얼어 있던 겨울이 녹고, 봄이 오면서 새로운 유적지들이나 기록이 발견되고 있었던 탓이다.
“제가 다음엔 꼭 설득해 보겠습니다.”
그러기에 신관들이 그 귀한 시간을 쪼개서 온 오늘 같은 날, 루인이 치료를 받는 게 최선이지만.
“저로서는 당장 폐하를 감히 깨울 수 없습니다.”
루인이 저리 푹 잠든 것은 최소 열흘 만인지라, 카를도 그를 차마 깨울 수 없었다.
너무나도 난감해 보이는 카를의 얼굴에 앞에 서 있던 신관도 입술을 달싹이다 꾹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예. 이해합니다.”
뭐 어쩌겠는가. 황실에서는 신전 측으로 매해 막대한 금액을 대고 있으니, 이리 저자세로 나올 수밖에.
신관의 물러섬을 확인한 카를이 손짓하자, 구석에 서 있던 사용인들이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자네들은 저걸 서둘러 치우고, 너희는 폐하께 절대 손대지 말고 청소해.”
카를의 명에 기사들은 서둘러 시신들을 수습하기 시작했지만, 사용인들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못한 채 얼어붙어 있었다.
“빨리!”
“…아, 알겠습니다!”
방 안의 모습은 끔찍했다.
카를의 채근에 그들이 벌벌 떨며 방에 들어가 조용히 청소를 시작할 무렵, 뒤에 있던 다른 신관이 불쑥 카를에게 물었다.
“잠드셨는데, 그냥 이참에 신성 치료를 시도해 보죠?”
신관이 조금 짜증스런 투로 말했다. 걸음을 대체 몇 번을 했는데, 치료의 ‘치’ 자도 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신관의 말에 카를이 놀란 듯 크게 눈을 뜨며 절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려 했지만, 그 신관은 빨랐다. 뭐라 말릴 새도 없이, 성큼성큼 루인의 곁으로 가는 것이다.
“안 됩니다!”
카를이 뒤늦게 그를 발견하고 소리를 냈지만, 이미 늦었다. 신관이 손을 뻗어 루인의 팔에 올린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끅, 끄윽…….”
잔상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정말 순식간이었다.
루인이 신관의 목을 틀어 올려 조르고 있었다. 어찌나 악력이 강한지, 순식간에 새빨간 얼굴로 변한 신관이 살기 위해 발을 버둥거렸다.
“폐하!!”
카를이 급히 달려가 루인에게 매달렸다.
하나, 루인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제가 목을 조르는 대상 쪽을 눈을 감은 채로 응시하다가, 이어 느릿하게 눈을 떠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에서 고인 피들이 뚝뚝 뺨을 타고 떨어져 새하얀 침상을 얼룩지게 만들었다.
“살려…….”
목이 졸리는 신관이 빌었다. 하나 루인은 눈뜬 채 잠든 것처럼 보였다. 그의 시선은 탁했고, 초점도 제대로 맞지 않았다.
“꺼억, 끅….”
그제야 카를은 이 모든 게 루인의 잠재의식 속 방어 기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간 루인이 얼마나 많은 전쟁터를 전전했던가. 루인은 누구보다 생존 본능이 강했고, 지금은 그 본능 때문에 저리 구는 것이 틀림없었다.
“빌어먹을! 폐하!!”
신관은 이윽고 숨이 넘어갈 것처럼 눈이 뒤집히더니, 정신을 잃은 듯, 축 늘어졌다. 하나 그럼에도 루인은 제가 쥐고 있는 신관의 목을 놓지 않았다.
저러다 진짜 죽는다. 카를이 다시 루인의 팔을 붙들었다.
“허억-!”
“카를 경!!”
하지만 소용없었다. 루인은 남은 한 손으로 카를의 배를 때렸고, 카를은 엄청난 고통에 입을 벌리며 주저앉았다.
“안 돼!”
목이 졸린 신관과 친분이 있던 이인지, 지켜보던 신관들 중 하나가 자리를 박차고 황제의 옆에 붙으려 했다. 카를은 가까이 다가서면 위험하다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몸에 꺽꺽거리며 연신 도리질을 할 뿐이었다.
“부탁드립니다! 제발 손을 놔줘요! 그만두라고요!!”
단숨에 달려간 신관은 목을 조르는 손을 붙들고 애원했다.
“이러다 진짜 죽어요! 제발, 제발 폐하-!”
울면서 매달리는 신관의 표정은 처절했다. 하나, 그런 소리가 루인에게 닿을 수는 결코 없었다.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루인이 알아서 멈출 리도 없고.
자비 없는 루인은 역시나 그 신관을 공격하려는 듯, 다른 한 손마저도 치켜들었고, 모두가 눈을 질끈 감은 그때…….
“…….”
시간이 흘러도.
“……?”
움직임이 없었다.
그것에 벌벌 떨며 말리던 신관도 느릿하게 눈을 떴다. 그리고 그는 눈을 뜨자마자 제 코앞에 바짝 붙어 있는 루인의 얼굴을 보고 이어 비명도 못 지르고 얼어붙었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다. 잠든 것처럼 보였던 루인의 눈이 똑바로 신관을 응시하고 있었다. 눈이 먼 그는 신관의 얼굴이 보일 리가 없는데도, 계속해서 징그러운 상처투성이 얼굴을 바투 붙이더니 이어 고개를 기울이다 픽 웃었다.
“꿈으로 마중 나왔나?”
분위기가 달라졌다.
방금까지 사람을 죽일 것처럼 몰아세우던 모습이 온전히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이전보다 훨씬 누그러진 태도로 제 앞에 있는 이를 빤히 보았다.
저 살가운 태도는 뭐란 말인가?
이 알 수 없는 상황에 팔을 붙든 신관도, 지켜보던 카를도 어리둥절했으나, 카를은 이어 뭔가를 눈치챈 듯 눈을 크게 떴다.
저 신관은…….
“모스.”
모스와 같은 녹색 머리였다.
얼굴은 완전히 다를지언정, 머리는 녹색이며 체구는 모스보다는 조금 컸지만 주저앉은 상태이기에 확실히 구분이 갈 정도는 아니었다.
‘시력을 완전히 잃으신 게 아니라, 색이나 형태 정도는 보이시는 건가?’
루인이 직접 제 손으로 자신의 눈과 귀를 그은 이후, 그것에 대해 일절 카를에게 말한 적이 없기에 카를은 몰랐던 일이었다.
다만 카를은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어 모두가 놀랄 일이 벌어졌다. 모스냐고 묻던 루인이 목을 조르던 손을 알아서 놓은 것이다.
“아아아, 아아…….”
툭, 루인의 손에서 새파랗게 질린 시체나 다름없던 신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옆에서 말리던 신관은 주저앉은 채로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다 벽에 몸을 바짝 붙인 채, 몸을 벌벌 떨었다.
신관이 제 앞에서 사라지자 루인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더니, 이어 손을 뻗어 제 앞이 텅 빈 것을 알아채고 인상을 구겼다.
고작 몇 발자국 앞에서 모스의 머리 색과 비슷한 신관은 입을 틀어막고 최대한 기척을 지운 채 벌벌 떨고 있었다. 하나 눈이 제대로 안 보이고, 잠에서 덜 깬 상태인 루인에겐 그마저도 보이지 않는지, 고개를 두리번거리듯 돌리다가 쯧 혀를 찼다.
그리고 그는 마치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도로 침상에 몸을 눕힌 뒤 조용히 눈을 감았다.
“…….”
사위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 누구도 함부로 숨조차 내쉬지 못하는, 지독할 만큼 시린 적막 속.
“……허, 어억, 헉.”
침묵은 목이 졸리던 신관으로부터 깨졌다.
“미엘르!”
그는 제 목을 붙잡고 콜록거리며 눈을 떴고, 이를 지켜보던 신관들이 그를 부축하려는 듯 달려들어 오려는 것을 카를이 막았다.
“같은 일을 반복하실 겁니까? 조용히 움직이세요! 당신들도 오늘은 일단 나가요!”
신관들이 주춤하는 사이, 카를은 아픈 배를 움켜쥐고 명령을 내렸다.
바로 옆에서 이 모든 걸 다 보게 된 사용인들 중 하나는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발발 떨고 있다가, 카를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몸을 일으켜 나갔다.
“챙겼으면, 빨리 움직이십시오!”
살짝 뒤척이는 루인의 모습을 본 나머지 신관들도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리를 떴다.
마지막으로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시체를 들고 나가자, 순식간에 방 안에는 누구도 남지 않았다. 아직 수습되지 않은 나머지 시신들과 피범벅이 된 방, 그리고 고요하게 잠든 루인의 얼굴을 보던 카를은 생각했다.
‘처음 살아남은 자야.’
그간 잠든 루인의 몸을 건들면, 그게 누구든 살아남을 수 없었다. 한데, 지금 저자는 유일하게 살아서 나갔다.
게다가 이유도 뻔해서 더 이상 추측할 것도 없었다. 루인을 말리던 신관의 머리 색은 모스와 같은 녹색, 그리고 비슷한 체구였기에…….
‘아주 조금 닮았을 뿐인데.’
하지만 고작 그것만으로도 황제는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그제야 카를은 깨달았다.
“……닮은 이가 필요해.”
황실에는 그의 껍데기라도 필요하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발을 잘못 두면, 한없이 추락해 뼈조차도 남기지 않고 죽을 것만 같은 절벽 앞에서 모스는 멍하니 허공을 보았다.
휘이잉, 거세게 바람이 부는 절벽 앞에 땀으로 젖은 머리칼이 잘게 흔들렸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고 절벽을 그저 멀거니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는 이 절벽의 무서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떨어지면 몸은 산산조각 난다. 그건 그가 직접 머리가 날아가는 것도, 내장이 죄다 터지는 것도, 다 겪어 봤기 때문이다.
다만, 이 절벽을 제외하고 풍경은 모든 게 그날과 달랐다.
“봄…….”
모스가 작게 읊조렸다. 새벽임에도 봄은 이토록 따뜻하구나.
그날은 동틀 무렵이었음에도,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던 날이라 흐렸다. 하나 지금은 날이 너무 좋았다. 눈은커녕, 따스한 햇빛이 절벽을 감싸고 있었다.
잎이 뾰족뾰족한 침엽수뿐이던, 마냥 을씨년스럽게만 보이던 숲은 형형색색 다양한 녹음들과 꽃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들은 따스한 햇빛을 맞이하기라도 하듯 손을 하나같이 다 내뻗고 있었다.
달라진 건 풍경뿐이 아니었다. 변화를 겪은 건 모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이전과 달리 꽃과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푸르디푸른 잎을 피운 나무들처럼 달라졌다. 이 절벽 아래로 떨어진 이후로, 그는 잃어버렸던 ‘모리스’를 찾았고, 잃어버렸던 인간의 몸을 찾아 온전히 해 아래에 서 있지 않은가.
인간의 몸. 모리스.
그는 이전 절벽에 왔던 날처럼, 햇빛을 피해 천을 뒤집어쓰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 더는 햇빛에 녹지 않으니까.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왔어.’
마왕의 저주가 풀리며 봄이 돌아왔고, 몸도 원래대로 돌아왔고, 여동생 메리까지 만났으니… 이보다 더 이상적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절벽을 응시하는 모스의 표정은 한없이 어둡기만 했다.
-꼭 가셔야겠어요?
메리는 모스가 어딜 간다고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음에도 말렸다. 아마 본능적으로 모스가 가려고 하는 곳이 꽤 힘든 곳임을 예측한 것처럼 굉장히 걱정스럽다는 투로.
그리고 그녀의 예상 어느 정도 맞았다.
이 장소는 단순한 절벽이 있는 곳이 아니었다. ‘모스’의 생이 끝난 곳이었다. 그래서 모스는 이곳에 오는 내내, 몇 번이나 뒤를 돌아 도망치고 싶었다.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그날의 강렬했던 감정들이 자꾸만 불쑥불쑥 가슴에서 치고 나오려고 했고, 때문에 여기까지 오는 시간은 예상보다 더 오래 걸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모스는 물러설 수 없었다. 이곳에 와야 이 모든 게 끝이 날 것만 같았기에.
-해야 할 게 있어.
그리 말하며 미소 짓는 모스를 보고 메리는 더 이상 그를 말리지 않았다. 그녀는 제 오라비가 가려는 길이 험한 것임을 알았기에, 어떻게든 모스를 말리고 싶어 했지만, 모스는 단호했다.
그리하여, 기어코 모스는 이 절벽에 섰다.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쥐게 된 그 안락함을 포기하고, 이곳에 와야만 했던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루인인 줄 알고 헤집어 놓았던 시체를 수습하기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여기서 다 끝내자.’
자신이 죽었던 곳에 와서, 모스로서 남긴 모든 미련과 마음까지도 다 두고 오기 위함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내려가야 하는데……, 모스가 절벽을 내려갈 길을 찾으려는 듯 두리번거렸다. 그때, 그런 그의 시선에 절벽을 내려갈 수 있을 법한 커다란 줄로 된 사다리와 사람의 흔적이 보였다.
이게 원래 있었나? 물론 당시엔 제정신이 아니었던지라, 저런 흔적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감사한 일이었다. 모스는 줄을 타고 천천히 절벽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절벽 아래로 갈수록 햇빛의 모습은 점점 사라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새까맣게 어두운 건 아닌지라, 모스는 적은 빛에 의존해 차근차근 내려갔다.
이어 절벽 아래에 있는 곳은 그가 예상했던 것과는 상당히 달랐다.
절벽 아래는 마치 누군가가 이 아래를 청소라도 한 것처럼 깨끗했다. 자신이 녹아내린 곳, 루인으로 착각한 시체가 있었던 곳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하다. 원래 이 아래엔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는데.
걷는 것만으로도 코끝이 아릴 정도로 죽은 자들의 향이 가득했던 것을 분명 겪었건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리둥절하게 주위를 둘러보던 모스는 혹 자신이 장소를 착각했나 하는 표정으로 천천히 발을 떼었다.
‘이곳이 맞구나.’
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이곳이 제가 보았던 절벽이 맞음을 확신했다.
인간, 그것도 죽은 인간을 제아무리 깨끗이 치운다고 해도, 흔적은 남는다. 시체가 누워 있었음을 알리듯 새까맣게 물든 자리, 아무리 치웠다고 한들 향까진 지우지 못한 듯 살짝씩 코끝을 찌르는 썩은 내, 채 치우지 못한 말라붙은 살점들이 하나둘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 근처였는데.’
자신이 녹은 자리이자, 루인으로 착각한 시체가 있던 곳.
모스는 그곳으로 향하고자 했고, 그런 그의 걸음엔 망설임이 없었다. 그날은 새벽이었고, 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았음에도 이상하게 그 자리만큼은 확실히 기억났다.
그렇게 걷고, 또 걷던 모스는 걸음을 우뚝 멈추고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이곳이다.’
이전처럼 시체들이 가득하지는 않지만, 알 수 있었다. 이 어둑한 절벽 아래로 새벽 내음을 잔뜩 실은 햇빛이 은은히 한 곳을 비추고 있었다.
그날, 모스가 녹아내린 것처럼. 딱 한 사람 정도 들어갈 수 있는 양으로.
“…아.”
모스가 그쪽으로 향하려다 멈칫하고 인상을 찌푸리더니 난감한 기색으로 제 손을 보았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모스의 손은 미친 듯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이제 이리 떨 필요는 없다. 모두 다 끝난 일 아닌가. 그러기에 애써 떨리는 손을 꽉 쥐고, 성큼성큼 제가 녹은 자리를 향했다.
‘아무것도 없네.’
모스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제가 녹은 자리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감히 유추조차 할 수 없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곳에 와서 묻어 주려던 시신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유독 깨끗했던 길을 보며 그 시신 또한 없을 수도 있겠다고는 생각했는데, 역시나 치운 지 꽤 오래됐는지, 시꺼멓게 물든 바닥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었다.
‘미안해요.’
그는 그 바닥을 보고, 조용히 인사했다. 누군가가 이미 치운 듯하지만, 미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당시 그는 여기에 있던 시체에서 루인의 옷과 머리칼이 나왔기에, 그 시체가 틀림없이 루인이라 생각하고 헤집었었다.
‘함부로 대해서 미안해요.’
죽은 이의 시신을 이리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되는데, 그때의 자신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모스는 미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계속 사과했다. 괴물로 살아갈 때도, 그는 죽은 이들의 옷과 물건들을 챙기긴 했으나, 늘 꼼꼼하게 그들을 묻어 주고 명복을 빌어 줬었다.
그만큼 모스에게 죽음이란 안타까운 것이자, 조심스레 여기는 것이었다. 그렇게 모스는 한참을 그 앞에 앉아 자신이 헤집은, 이름 모를 이를 추모하다 이어 제가 녹은 자리에 털썩 앉았다.
‘벌써 해가 움직였네…….’
시체를 보는 사이 그새 해가 움직였는지, 햇빛은 더는 모스가 녹아내렸던 바닥을 비추지 않고 절벽의 벽면 일부를 비추고 있었다.
벽면의 일부를 일렁이듯 비추는 햇빛을 보던 모스는, 무심코 그날을 떠올렸다.
그날, 녹아내리던 날.
그때 모스 내면에서는 온갖 감정이 휘몰아쳤다. 그의 몸으로 품기엔 버거운 감정들, 그것에 마음이 너무 아파서, 이럴 바엔 녹아내리는 게 사는 것보다 덜 괴롭겠다고 여겼을 때.
우연히 이곳에 햇빛이 들이닥쳤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이 절벽 아래는 무척이나 어두워 오늘처럼 날이 좋지 않으면 햇빛 한 점도 제대로 들지 않는 게 당연했는데, 그때는 달랐다. 마치 신이 자신을 지켜보고 어서 녹으라고 재촉이라도 하듯, 너무나도 선명하게 햇빛이 내려온 것이다.
‘설마 신께서 의도하신 걸까.’
모스는 쓰게 웃었다. 정말 신이 이를 의도했다면, 그는 참으로 잔인하면서도 자애롭고, 지혜로운 이었다. 자신을 녹임으로써 제국에 봄이 돌아왔고, 자신의 저주도 풀렸으니 말이다.
다만 그렇게 되는 데까지 모스의 고통은 상당했다. 녹아내리는 건 아팠다. 머리부터 내리쬐는 햇빛이 서서히 몸을 촛농처럼 녹이는데, 그건 차마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고통이었다.
만약 다시 녹으라고 누군가 명한다면, 다신 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지만, 그때의 모스는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녹아내리는 것보다 마음이 더 아팠으니까.
‘다 버려야지.’
이젠 그 아픈 마음조차도 이곳에 다 두고 갈 것이지만.
모스는 제가 녹은 자리에서 몸을 웅크리고 고개를 푹 숙인 뒤, 무릎에 코를 박았다. 시신이 수습된 걸 봤고, 여기에 더는 남길 마음도 없는데 왜 이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하는 걸까.
‘나는, 네가… 살아 있다는 걸 보고 싶은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모스는 이내 어이없다는 듯 자조 어린 웃음을 지었다. 루인은 미쳐서 모스를 못 알아볼 것이며, 무엇보다도 황후까지 들인다는 그를… 모스는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다 끝났어. 이제 일어나자.’
모스가 제 몸에 속삭였다. 하나 마음은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안달이었는데,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여기서 할 건 더 이상 없었다. 애초에 처음부터 이곳에 온 것도 남겨 둔 모든 걸 정리하려고 온 것 아닌가. 그러기에 누군가가 자신이 헤집어 두었던 그 시신을, 그리고 제 흔적마저 다 치워 놨다면 오히려 홀가분하게 떠나려는 마음만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왜…….
“……잖아.”
그때, 모스가 어깨를 들썩이며 고개를 퍼뜩 들었다.
“해야……, 그러니까…….”
띄엄띄엄 저 멀리서 말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은 소리지만, 분명히 들렸기에 듣자마자 모스는 몸을 바짝 긴장시키고 숨었다.
‘아, 이럴 필요가 없는데.’
그리고 뒤늦게, 머쓱하게 표정을 굳혔다.
이제 그는 더는 숨을 필요가 없는 ‘인간’이었다. 괴물이라고 칭하는 사람들을 피해 도망치기만 하던 옛날이 아니었는데도 습관이란 게 무섭다. 제대로 생각이란 걸 하기 전에 몸부터 숨기고 있으니.
‘누구지?’
모스가 커다란 돌 옆으로 몸을 구기듯 숨긴 채, 얼굴을 내밀어 흘긋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저들의 커다란 갑옷과 갑옷에 새겨진 화려한 문양, 그리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으로 보아 영락없는 황실의 기사들이었다.
그럼 저들이 사다리를 내려놓고, 시체들을 치운 걸까?
그리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다가온 기사들이 등불을 들고 아까 모스가 타고 내려온 사다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지막 시체까지 제대로 태운 걸 확인했으니, 됐겠지?”
“그래, 처음부터 여기에 황태제는 없다니까?”
“이제 이 지긋지긋한 절벽도 마지막이겠군!”
무슨 이야기인지 자세히는 알 수 없었으나, 모스는 직감적으로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는 절벽 아래를 정리한 이들이 저 기사들이 맞는 걸 깨달았다.
그들은 이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하며 멀어졌다. 그들이 온전히 사라질 때까지, 모스는 숨을 죽여 숨어 있다가 조심스레 모습을 드러내며 움직였다.
‘가자.’
방금까지 어떻게든 이곳에 머무르려는 듯 게으름을 피우던 몸이, 더는 이 장소가 그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선 빠르게 움직이라 재촉하고 있었다.
모스는 얼른 돌아가서 메리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녀는 아직도 모스를 걱정하며 뜬눈으로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 있을 것이다.
그것에 서둘러 일어나는 모스, 그때.
툭- 데구루루-.
발치에 뭔가가 걸렸다. 돌멩이인가? 하나 그거치고는 너무나도 가볍고, 빠르게 굴러가는데? 그 묘한 존재감에 모스는 고개를 숙여 무심코 제가 친 것을 확인하려 했다, 그리고.
“아……?”
모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믿기지 않았다. 이게 왜 여기에 있지? 이곳에 있을 거라고, 이것을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전혀 생각도 하지 않았던 모스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고 멍하니 그것을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혹 제가 헛것을 보는 건 아닌가 싶어 눈을 깜빡였으나, 그것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그것을 보던 모스는 주춤거리다 이내 몸을 숙이고 손을 뻗었다.
이어 그가 들어 올린 그것은…….
“이게 왜.”
붉은 열매 씨.
잔뜩 말라붙고 쪼그라든 그것은 더는 씨라고 보기도 애매하고, 그저 흉측하게 생긴 돌처럼 보일 뿐이었다. 오히려 불결하게 보일 정도로 시꺼먼 그 씨는 그 누구도 만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지만, 모스는 그 씨를 가장 소중한 것을 쥐듯 양손으로 꽉 쥐었다.
이것은 한때 그의 보물이었다.
그 삭막한 황궁에서 기억을 잃기 전의 루인이 보고 싶을 때면 손에 꼭 쥐고 잠들었고, 숲에서 둘에게 남은 유일한 흔적이기에 애지중지했었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뿐이었으면, 이런 마음까진 들지 않았을 것이다.
-폐하? 두고 가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무엇을 그리 소중하게 챙겨 가십니까?
-정말로 저게 무엇이길래, 저토록 소중하게 챙겨 가시는 거지.
모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냥 돌처럼 보이는데.
죽기 전, 모스는 이 씨를 통해 제 잊혀진 기억을 읽게 되었다. 그때 느낀 모든 감정은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마치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듯, 모스의 눈앞이 흐려지더니 절로 목덜미가 답답해져 왔다. 무언가가 토해 내고 싶은데, 턱 막혀 나오지 않는 것만 같아 모스는 답답하다는 듯 목을 긁다가 이윽고 고개를 푹 숙이고 숨을 헐떡였다.
‘답답해. 답답해 미칠 거 같아.’
쿵쿵쿵, 빠르게 뛰는 심장은 계속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펄떡이고 있었고, 제대로 먹은 게 없는 위장은 누군가 쥐어짜는 것만 같아 뒤틀리는 감각에 아팠다.
돌아가자며 손을 내뻗던 그, 절벽에서 자신을 대신해서 떨어진 그, 녹으려던 자신을 어떻게든 막아서려던 그, 씨를 챙겨, 전쟁 통에서도 늘 품고 있던 그.
‘……루인!’
그, 루인.
모스가 느끼기에 자신들 사이에는 안 좋았던 기억이 더 많았다. 저런 기억들보단, 그가 자신을 괴롭혔던 나날들이 더 많았다. 그의 폭언, 폭력, 살갗을 에일 듯 노려보던 시선들. 그 어느 하나도 잊을 수 있는 게 없었다.
하나 그럼에도, 우습게도. 왜 지금 당장 떠오르는 건 저런 것들뿐일까.
보고 싶게.
“안 돼.”
모스는 자신도 모르게 든 생각에, 화들짝 놀란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이곳에 온 목적이 무엇인가. 더는 그와 엮이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완벽히 정리하기 위해 온 것 아닌가?
어차피 자신들은 만날 수도 없고, 만나 봤자 악연일 게 틀림없었다. 루인은 가장 고귀한 이로 태어났고, 모스는 가장 천한 이로 태어나, 서로를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각자의 길에서 각자의 위치에서, 그는 고귀한 이답게, 자신은 바닥에서 올려다보는 게 익숙한 이답게, 그리 살아야만 한다.
그게 운명이었다.
‘버리자.’
모스는 다짐한 듯 씨를 꼭 쥐고 있는 양손을 보았다.
다 정리하려고 이곳에 오지 않았는가. 모든 걸 정리하고, 깨끗하게 잊기로 이곳에 오는 내내 수도 없이 다짐했던 걸 떠올린 모스가 강하게 마음을 먹으며 손에 꽉 쥐여진 씨를 꺼내려고 했다.
한데, 우습게도 손이 모스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손가락은 펴질 기미 없이 오히려 더 씨를 꽉 쥐었다.
‘바보야. 버려야지.’
뭐 해, 얼른 손가락을 펴. 그리고 손에 쥔 씨를 버려. 다 버리고, 다 잊기로 했잖아.
모스가 그리 속삭였지만, 손에서 씨를 놓기가 쉽지는 않았다. 손가락은 오히려 어떻게든 이 씨를 쥐려고 했다. 이것을 놓아 버리면, 정말 둘 사이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을 알기라도 하듯, 어떻게든.
그것이 기가 막히기도 하고, 속이 쓰리기도 해서 씨를 꽉 쥔 손에게 모스는 계속 말을 걸듯, 말했다.
“약속했잖아. 이, 잊어야 해.”
이것을 들고 간다고 한들, 모스는 계속 그를 잊지 못하고 괴로워할 것이다.
“응? 제발.”
모스는 제 몸을 달랬다. 마치 고작 하나 남은 이 루인의 흔적마저 빼앗아 가지 말라는 듯, 애걸하듯 떼어지지 않는 손가락에 계속 빌었다.
‘나도 살아야지. 나도 새로 살아가야지. 이런 징그러운 괴물, 모스의 삶을 내려 두고, 다시 모리스로 돌아와야지.’
그때, 모스가 애원하듯 마음속으로 속삭이자 손가락이 하나하나 펴지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하나씩 펼쳐질 때마다, 그는 제 가슴 사이가 욱신거리면서 아팠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리하여 온전히 드러난 손바닥 위의 씨. 새하얀 손바닥과 대비해 무척이나 새까만 씨를 가만히 보던 모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모스’라는 이는 묻어 두고 ‘모리스’로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서는 이 과정은 꼭 필요했다.
이제 손을 뒤집기만 하면 끝난다. 고작 손을 뒤집기만 하면, 정말로…….
“…….”
몸에 힘을 잔뜩 준 채로, 눈을 질끈 감았다 뜬 그가 다짐했다는 듯 손에 있던 씨를 떨구려던 그때.
스르르륵…… 탁.
모스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탁…… 스르륵…… 탁.
괴상한 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들리기 시작했는데,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소리를 듣는 순간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고 해야 할까.
‘기사들은 다 올라갔을 텐데?’
모스는 의아하다는 듯 내민 손을 거두어, 도로 씨를 손에 쥔 채 고개를 내밀어 두리번거렸다. 아까 이곳에서 떠들던 이들은 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기에 인기척이란 없었다. 이후로도 모스는 새로 내려온 이도, 인기척도, 그 어느 것도 감지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도 들리는 이 소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마치 무언가가 질질 끌리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고, 무언가가 걷는 것처럼 들리는 이 괴상한 소리.
‘인간?’
그때, 고개를 내민 모스의 시야에 무언가가 잡혔다. 인간으로 몸이 돌아와서일까, 모스의 눈은 이전처럼 밝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인간과 비교했을 때는 꽤나 밝은 편이었다. 그런 그의 눈에 저 멀리서부터 이쪽으로 서서히 다가오는 커다란 형태가 보였다.
아직 거리가 꽤 있어서, 자세한 형체는 보이지 않았지만 모스는 이상하게 긴장이 되어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스르륵…… 탁. 스르륵… 탁.
그것은 몸을 질질 끌 듯이, 반복적인 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었는데, 점점 모스에게도 자세한 형태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 게… 뭐야?’
정말로 ‘저게’ 무엇인지 모스는 알 수 없었다. 그 긴 생 속에서도 저런 모습의 괴물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저것’은 커다란 몸을 지녔고, 눈코입이 있어야 할 자리는 뻥 뚫려 있었고, 몸에서는 계속해서 뭔가가 나오는 듯, 축축하고 새까만 진액들이 계속 흘렀다. 하나 그것뿐이었으면, 모스가 이리 경악하진 않았을 것이다.
저 괴물의 가슴팍에는 인간의 얼굴이 열매처럼 매달려 있었다. 틀림없었다. 인간의 머리가 맞았다.
인간의 머리가 달린 괴물이라니? 그는 결코 저런 괴물은 모리스의 생에서도, 모스의 생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럼 마물인가? 하지만 대부분의 마물들은 마왕과의 전투에서 죽어 없을 텐데.’
무엇보다도 바라보기만 해도 느껴지는 독기는 지독해 코가 욱신거릴 지경이었다.
하나 마물이라 확신하기엔, 의구심이 드는 점들이 많았다. 강하고 기괴한 마물들은 우두머리인 마왕을 잃음과 동시에 자연스레 소멸되었고, 살아남은 마물들이라고는 그리 위협이 되지 않는 것들만 남은 걸로 모스는 기억했다.
그럼 저게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에 모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저것을 보다, 이윽고 무엇인지 알아채고는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 크기가 이전보다 월등히 커져서 못 알아봤는데, 저것은 일전에 마주했던, 이 절벽 아래에서 보았던.
‘시체를 먹던 괴물.’
그 괴물.
‘왜 저리 커진 거지?’
하지만 모습이 영 괴상했다. 당시 저 괴물은 그저 징그러운 짐승의 모습 정도였으며, 마물의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모스는 그 괴물을 마물이라 인식하지 않았었다. 그저 뭐든 닥치는 대로 먹는, 자연에서 청소를 도맡은 역할 중 하나라고 여겼던 것이다.
게다가 그 괴물은 마물이라 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조용했다. 마물이란, 저 괴물처럼 절벽 아래에서 조용히 지내는 존재일 수 없었다.
그들은 늘 호시탐탐 인가를 노리고 있으며, 살아 있는 많은 인간들을 먹기를 원하기 때문에, 이런 시체만 가득한 절벽 아래에 있지 않을 텐데…….
‘하나, 이 악기(惡氣)는 마물과 다를 바가 없어.’
모스는 저게 제 쪽으로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손끝이 저릴 정도의 사악한 기운에 점점 저것이 마물임을, 그것도 단순한 마물 이상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혹시 마물들 중 살아남은 개체가 있었다면? 그것이 긴 시간 동안 시체를 먹고 조용히 강해지고 있는데, 그걸 누구도 눈치챌 수 없던 것이라면?’
모스는 떠올렸다.
-딱 한 번, 인간이 약한 마물과 융합된 걸 본 적 있어. 그때, 정말 죽을 뻔했지.
돌연 모스는 마왕을 잡으러 가던 길에 오웬이 죽을 뻔했다고 말꼬를 트며 했던 이야기를.
-그건 정말 괴상한 모습이었어. 마물들이라고 다 강한 것만 있는 건 아니잖아? 죽은 인간의 원한이 자신을 잡아먹은 마물의 원한보다 더 강할 경우, 오히려 마물을 집어삼키더라고. 그때부터 인간은 인간이 아니게 되고, 마물은 마물이 아니게 되지. 근데 그게 왜 무서운 줄 알아? 그것들은…….
오웬의 말을 떠올리는 가운데, 괴물은 계속해서 다가왔고, 이어 사다리 앞에 우두커니 멈추었다.
그리고 가만히 서 있던 괴물이 고개를 슥 들어 올린 순간, 모스는 전신에 소름이 쫙 돋았다.
-지능이 있어. 인간 흉내도 낼 수 있고.
마치 사다리를 어떻게 올라갈지, 고민이라도 하는 것처럼 뻥 뚫린 얼굴로 고개를 기웃거리는 그것.
-우리는 그걸 마귀(魔鬼)라고 해.
단순한 마물 이상으로 지능을 가진 존재, 마귀.
모스는 혹여나 제 숨이 새어 나갈까, 입까지 틀어막았다. 모스는 마왕을 잡으러 가던 중, 마귀에 이른 존재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지금만큼은 장담할 수 있었다.
‘마귀……!’
저건 마귀다. 마귀일 수밖에 없다.
그는 세상에 이리 강한 악기를 가진 마물을 마왕을 제외하고 본 적이 없었다. 마왕의 앞에서는 두 발로 서서 정신을 차리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엄청난 악기가 풍겼던 반면, 저 마귀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마냥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눈이 매워.’
이토록 거리가 멀었음에도 눈이 맵고, 목구멍은 독한 연기라도 가득 들이마신 양 답답했다.
“아아아. 아아아.”
그때, 마귀의 가슴팍에 있던 인간의 머리가 노래를 부르듯 소리를 내더니 벌떡 고개를 쳐들었다.
“아아아아, 아아아, 원통해. 아아, 원통하구나, 아아아아, 분해, 아아아-.”
뻥 뚫린 눈을 하고, 뻥 뚫린 입을 한 인간의 얼굴이 비명처럼 소리를 내뱉었다.
그건 아주 기이한 모습이었다. 제대로 된 입이 없어 소리를 낼 수 없을 텐데도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빨도, 혀도 없는데 그것에게서는 노랫소리가 나왔다.
하나, 단순히 그것뿐이라면 이리 소름이 끼치진 않았을 것이다.
모스는 ‘저것’을 알았다.
“아아아, 분해, 아아아아, 억울해, 아아, 아아.”
저것은.
“그 괴물도, 형님도, 죽었어야 했는데.”
치테이르였다.
죽은 줄만 알았던 치테이르가 괴물의 몸에 기생이라도 하듯, 저리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아마 오웬의 말이 맞다면, 약한 마물이 절벽 아래로 떨어진 치테이르를 잡아먹었는데, 치테이르의 원한이 강해 마귀화가 진행된 것 같았다.
그때, 계속 들리던 치테이르의 노랫소리가 갑자기 끊겼다.
“…….”
사위가 조용했다.
모스는 숨조차 허투루 내뱉지 않았다. 마물들이란 감이 기민하기 그지없어, 숨도 내쉬면 안 된다. 숨 막히는 정적 속, 모스의 얼굴은 점점 식은땀으로 젖어 들기 시작한 그때.
“가자.”
그것이, 아니면 그것들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그것들은 ‘가자’라는 말을 빠르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어눌하게 말하던 괴물과는 달리 치테이르의 발음은 정확했다. 그렇게 한참을 주거니 받거니 노래를 부르듯 떠들더니, 돌연 치테이르의 입이 찢어질 듯 활짝 벌어졌다.
쩍 벌어진 입 안에 이도, 혀도 없었다.
“황궁으로 가서 다 죽여 버리자.”
그러나 치테이르는 노래했다.
“다 죽여 버리자. 씹어 먹어 버리자. 무도한 것들을 도륙 내 버리자. 죽여 버리자. 씹어 먹어 버리자. 다 죽여 버리자. 형님의 뼈를 하나하나 씹어 먹고, 천것의 몸뚱이는 찢어발겨 개 먹이로 주자.”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천것의 눈은 네가 먹고, 형님의 눈은 내가 갖자. 천것의 목뼈는 네가 먹고.”
“형님의 몸은 내가 갖자. 다 잡아먹자.”
“다 갖자, 다 먹자.”
“먹자, 먹자.”
점점 목소리가 섞이기 시작했다. 갈라지듯 들리던 괴물의 목소리는 치테이르의 목소리로, 치테이르의 목소리는 점점 더 선명하고 또박또박하게.
그렇게 될수록 괴물의 모습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쩌적쩌적 소리가 나더니 괴물의 몸이 반으로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둘의 노래는 멈추지 않았다. 몸이 반으로 찢겼는데도 죽지 않고, 그들은 노래하고 또 노래하다가……!
“…….”
정적.
모스는 눈을 깜빡이다 입을 벌렸다. 귀를 괴롭히듯 들리던 괴이한 노랫소리도, 눈이 매울 정도로 들이닥치던 독기도, 갑자기 일순 소멸하듯 사라진 것이다.
슬쩍 고개를 내밀어 더 자세히 보니, 산처럼 우뚝 서 있던 흉측한 괴물의 몸이 반으로 갈려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죽은 건가?’
마귀가 쉬이 죽을 거라 여기진 않지만, 그것은 정말 죽은 것처럼 아무런 미동도, 끊임없이 내뿜던 악한 기운도 없었다.
‘머리가 반으로 갈리긴 했지만…… 이리 쉬이 죽는다고?’
모스는 의심의 눈총을 거두지 못했다.
마물이란 본디, 머리를 제대로 가르지 않으면 몸이 빠르게 재생하는 골치 아픈 것인데……, 하지만 저것은 마물을 뛰어넘은 마귀지 않은가? 그 강한 오웬이 마귀와 싸우다 죽을 뻔했다고 말을 할 정도였는데, 이렇게 죽는다고?
모스는 뭔가가 찜찜한 듯, 쭈그리고 앉은 채 계속해서 괴물의 몸을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곳에서는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
다시금 조용해진 절벽 아래. 방금 마귀가 불렀던 소름 끼치던 노래도, 코를 찌르던 불쾌한 악취도, 그 어느 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에 모스는 제 생각이 과했던 건가 싶어 하늘을 보았다.
하늘에는 벌써 해가 많이 움직여 머리 바로 위에서 조금 옆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곧 해가 질 거야.’
절벽에 올 때만 해도 새파란 새벽이었는데. 이곳에서 메리가 있는 곳까지는 시간이 꽤 걸려 집에 도착할 때 즈음이면 해가 진 것을 넘어, 아주 어두컴컴한 늦은 밤이 될 것이다.
‘빨리 돌아가자.’
메리가 기다릴 것이다.
모스는 아까 전 자신을 배웅해 줄 때, 걱정 어린 얼굴로 보던 메리의 얼굴을 떠올리고 숨어 있던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래, 그리하려 했다.
지직, 지지직, 직-!
모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듣자마자 전신에 소름이 쫙 돋을 정도로 거북한 소리가 매섭게 나는 것에, 몸을 일으키려던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다시 납작하게 앉았다. 소리가 난 곳은 반으로 갈라져 바닥에 널브러진 마귀의 사체였다.
그리고 발견해 버렸다. 찢어진 몸 사이로 새하얀 손이 불쑥 솟아난 것을. 그리고 그 새하얀 손을 뒤따라 드러난 것은, 커다란 괴물이 아닌.
‘황태제?’
치테이르.
괴물의 진액을 뒤집어쓴 채, 눈을 감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이의 얼굴은 영락없이 치테이르였다. 마물의 가슴팍에 붙어 있던 머리도 아니고, 정말 온건한 인간의 모습을 한 치테이르.
그 모습을 본 모스는 순간, 제가 미친 건 아닌가 싶었다.
치테이르는 죽었고, 마물이 그를 잡아먹어서, 마귀화를 진행하던 중이라 가슴에 머리가 붙어 있었는데, 왜 갑자기 인간의 모습으로……?
모스는 제가 하나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순간 치테이르가 마귀의 늪에서 살아 돌아온 건가 생각했는데, 이어 고개를 들어 올린 치테이르의 눈이 새빨간 것을 보고 얼어붙었다.
“으음.”
그가 작게 신음하며 고개를 기울이자, 빨간 눈은 언제 있었냐는 듯 사라지고 도로 푸른색 눈으로 돌아왔지만, 그가 고개를 기울일 때마다 마치 비늘처럼 뭔가가 턱 끝에 오소소 일어났다.
한참을 몸을 풀듯 고개를 움직이던 치테이르, 이내 그것은 손을 뻗어 사다리를 잡았다.
“어디로 가지. 그래, 정했어.”
“으응, 그렇지, 그리하였지.”
“이미. 아까 말했잖아. 어디.”
서 있는 이는 단 한 명인데,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말을 할 때마다 말씨가 달라졌다. 눈을 감고 소리만 듣는다면 마치 둘이 있는 것처럼 착각할 지경이었다.
두 개의 목소리가 대화를 하듯 번갈아 들리는 와중에도 치테이르는 여전히 허공을 보고 있었다. 모스는 그 모습을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지켜보았다.
“황궁.”
돌연 그의 동공이 확 좁아지더니 새파랗던 눈동자가 새빨갛게 변하고, 감히 자세히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속살이기 시작했다.
“네가먹으렴.응.무도한것들.도륙내.다죽이기로.약속했잖아.네가살을바르렴.내가다씹어먹어.금안.녹안.나는형님의눈만있으면돼.좋아.그금안을네눈에넣으렴.천것의눈은.나는필요없으니먹어.좋아.”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황궁으로가자.”
목소리가 합쳐졌다.
그리고 그것은 미친 듯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
모스는 경악했다. 그것은 감히 인간의 몸놀림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마치 태어나기를 인간이 아닌 금수로 태어난 것처럼, 가늠할 수 없는 속도로 빠르게 올라가는 치테이르를 따라 모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으나.
“…갔어.”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고개를 느릿하게 돌려 보니, 숲 안으로 걸어 들어간 새빨간 발자국 몇 개가 있었다.
모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저것이 향하는 곳은 황궁이다.
황제, 루인 윈스의 죽음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