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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껍데기 上 (15/21)

13. 껍데기 上

어느 날 황궁에서 직접적으로 황제의 곁에 머물 사용인들을 구한다는 공고가 제국 전역, 그리고 국경 너머까지 퍼졌다. 단순 황궁 사용인을 모집하는 데 왜 이리 소문이 퍼졌느냐 하면, 공개적으로 모집했던 탓도 있지만 그 조건이 워낙 특이했던 것이다.

「폐하의 궁에서 사용인들을 구합니다.

조건은 녹색 머리와 체구가 크지 않은 이들이며 명단에 이름을 올리면, 그것만으로도 보상을…….」

조건은 녹색 머리인 이들이면 상관없고, 금액도 터무니없이 높은 금액을 주겠다는 이야기에 처음엔 사람들이 헛소문이라며 코웃음을 쳤다.

황제라는 자리는 무수한 인간들에게 노려지는 자리이다. 게다가 황제는 지금 미쳤다는 소문이 자자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를 황궁에서 나온 기사들이 직접 말하면서 사실임이 밝혀졌고 다양한 이들의 입을 타고 빠르게 퍼지며 많은 소문을 낳았다.

가령 황제가 녹색 머리를 가진 이에게 원한이 있어, 이참에 씨를 말려 죽이려는 것이라는 설, 숨겨진 황족을 찾으려고 하는 거 아니냐는 설, 실은 황제가 사랑했던 연인이 녹색 머리라는 설…….

그만큼 이번 일은 온갖 낭설이 파다할 정도로 제국 전역에 널리 알려졌지만, 소문이 무수하게 난 것치고는 지원자가 많이 없었다. 녹색 머리가 그리 흔하지 않기도 했지만, 이유는 뻔했다.

“그거 알아? 우리한테 얼굴을 가리라고 한 것도 어차피 죽을 사람들인데, 얼굴 알아서 뭐 하냐고 그런 것도 있대.”

황궁에 들어가면 죽음뿐이니까.

이미 제국 전역에는 황제가 미쳤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황궁에서 매일같이 시체를 묻으러 나온다는 이야기도 제국민 대부분이 알고 있었다.

그런 미친 황제를 곁에서 보필을 하게 될 이들이 살아 돌아올 가능성이 높을까? 당연히 현저히 낮지 않겠는가.

“아, 나 너무 무서워. 벌써 몇 명째야, 이게?”

오늘도 벌써 두 구의 시신이 황제의 궁에서 나왔다.

덜덜, 베일을 뒤집어쓰고 어깨를 잔뜩 옹송그린 녹색 머리인 이가 저 앞에서 실려 나오는 시신을 보고 제 미래인가 싶어 울먹였다. 유난히 겁이 많아 보이는 그는 덜덜 떨며 제 옆에서 같은 머리 색이자 같은 방을 쓰는 이의 팔을 덥썩 붙잡았다.

“야, 무슨 말이라도 해 봐…. 넌 안 무서워? 아무리 우리는 살 확률이 높다지만…….”

“…….”

하나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침묵 속, 옆에 있는 이의 시선은 곧았다.

그는 베일로 얼굴을 가려 저 시체들을 보며 무슨 표정을 짓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시선은 반투명한 베일 너머로 실려 나오는 시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아무런 말 없이 기사들이 끌고 나오는 시신들을 물끄러미 보기만 할 뿐이었다. 시체는 두 구였는데, 그 모습이 천으로도 뒤덮여 있지 않아 오가던 사용인들은 죄다 그 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다.

한 시체는 얼굴이 지독한 원한에 얽매인 양 칼로 난도질 되어 있었는데, 독에 당한 것인지 온몸이 보랏빛이었고, 다른 이는 팔이 있어야 할 자리에 너덜거리는 살점만이 붙어 있고,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보기만 해도 지독하게 시달린 흔적이 남은 시신 두 구를 보며 사용인들은 바들바들 떨었다. 하나 단순히 그것뿐이라면 사용인들이 이리 예민하게 굴지 않았을 것이다.

“나도 이러다 죽으면 어떡하지?”

두 구의 시신은 전날만 해도 밥을 같이 먹었던 사용인들이었다.

그러기에 대부분의 사용인들이 울먹이며 동요하는데, 그런 그들 사이로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이 모든 걸 지켜보는 이가 하나 있었다.

“너는 무섭지도 않아?!”

떨던 사용인이 공포에 못 이겨, 질색하는 표정으로 옆에 있던 그를 붙들었다. 하지만 역시나,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고, 그것에 울컥한 듯 뭐라 하려던 사용인은 제 옆에 있던 이가 누구인지 알아채고 굳었다.

“……아, 미안.”

“…….”

“모리스였구나.”

말을 할 수 없는 사용인, 모리스…… 모스였던 것이다.

사용인이 민망한 듯 사과하는 동안에도 모스의 시선은 여전히 곧게 앞을 향해 있었다. 모스는 수습되는 시체들을 보다가 돌연 뒤를 돌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디 가!”

다른 사용인이 그를 부르듯 소리치는 게 들렸지만, 모스는 그저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날 뿐이었다.

“뭐야?”

그 주위엔 죄다 모스의 체구만 한 이들이 가득했고, 그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가리는 베일을 뒤집어쓰고, 머리는 녹색이었다.

물론 개중 몇몇은 염색을 하고 온 것인지, 머리카락이 얼룩덜룩했고, 몇몇은 녹색이라고 하기엔 색이 오묘했지만, 황궁의 일손이 하나라도 부족한 마당에 가릴 수도 없는 처지였다.

모스는 저와 비슷한 이들 사이에 이질감 없이 섞여 들어갔다.

“아!”

다만 모두가 시신 쪽을 보기 위해,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가운데, 모스 홀로 그들을 거슬러 올라가니 당연히 어깨를 계속해서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아, 치지 마!”

부딪힌 사용인들이 핀잔을 주었지만, 모스는 신경 쓸 겨를이 없는 듯, 그저 넋이 나간 얼굴로 그들 사이를 지나 걸어갈 뿐이었다.

그는 걷고, 걷고 또 걸었다. 귓가에서 웅성이는 소리도, 쳐다보는 시선도 하나도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걸어가던 그는 곧 황궁에서 꽤 외진 곳에 도착했다.

“…….”

아마 이곳은 사용인들의 빨래를 널어 놓는 곳인 듯, 젖은 옷들이 이곳저곳 걸려 있었다. 그 공간에서 모스는 한참을 멍하니 우뚝 서 있다가 이내 주저앉았다.

“-욱.”

그는 배를 움켜쥐고 고개를 확 숙였다.

“우욱, 욱…….”

모스가 바들거리는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어떻게든 토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제대로 먹은 게 없어 신물만이 올라왔다.

모스는 계속 속을 비워 내려는 듯 굴었지만, 속은 시원해지지 않았다. 한참이나 구역질을 하던 그가 벽에 기댄 채 숨을 몰아쉬더니, 답답하다는 얼굴로 베일을 내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억.”

베일을 끌어 내린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몸은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새 축축해진 베일을 손에 쥔 모스는 벽에 몸을 기댄 채 눈을 질끈 감았다.

하나 그럼에도 속은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빈속에 술을 들이부은 듯 배 위쪽이 욱신거리고, 머리는 징징 울린다. 그런 머리의 진동을 막으려고 하듯 머리를 움켜쥔 채, 주저앉은 그는 떠올렸다.

“루, 인…….”

엉망으로 망가진 그의 황제가 있는, 이곳에 오게 된 여정을.

***

“어딜 가신다고요? 저는 반대예요.”

내가 절벽에서 돌아온 직후, 바로 향한 곳은 메리가 있는 곳이었다. 나는 돌아가자마자 그녀에게 황궁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메리는 내 말을 듣자마자, 질색하며 안 된다고 했지만, 내 생각은 확고했다.

“나, 나는 황궁으로, 가, 가야 해.”

모르는 이라고, 멀어져야 하는 이라고, 그리 생각하고 마음을 묻기 위해 간 절벽에서 보아선 안 될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급한, 이 일이야. 화, 황제가 위험, 해서 제국도 위, 위험해질 수 있어.”

황제가 아무리 미쳤다지만 황제는 황제이다. 그건 학문에 밝지 않은 나일지라도 알았기에 그리 말은 했지만…….

“언제부터 제국을 신경 쓰셨다고요? 그리고 황제를 모른다면서, 황제를 지키러 황궁에 들어가신다고요? 황궁은 또 어떻게 들어가시려고요?”

메리는 예리했다. 그녀는 내 부족하고 짧은 말에서 그새 의도를 다 파악하고 사납게 나를 몰아붙이듯 말했다.

“이전 생의 기억을 다 묻고 온다면서요. 근데 왜…… 왜 오라버니가.”

메리의 말은 틀린 게 없다. 괴물 생의 기억을 묻은 나는 루인 윈스를 모르고, 모르고 싶고, 몰라야만 했다. 하지만…….

“삿된 게 화, 황궁으로 들어갔어.”

이건 어쩌면, 별개의 문제이다.

“여, 여기 사람들은 모를 거야. 지금은 태어난 지 어,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냥 두면 나날이 가, 강해져서…….”

마물이 없고, 마왕이 없는 세상을 산 지금 세대의 사람들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인간을 흉내 내는 마귀가 있다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그러기에 돌아온 치테이르를 보더라도, 이상하다고 여길지언정 그 누구도 그게 마귀임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가서, 치테이르가, 아니 치테이르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마귀가 인간들을 해하는 걸 막아야 한다.

그 초조함에 사로잡힌 나는 그리 말한 뒤, 서둘러 나가려고 했다.

“……그게 오라버니랑 무슨 상관이에요?”

메리의 말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말투였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라버니, 이제 자유로워질 때가 되었잖아요….”

길고 긴 세월, 홀로 나를 찾아 헤매다 포기를 수도 없이 반복한 그 얼굴은 잔뜩 지쳐 있었다.

“그만, 해요.”

그건 단순한 투정이 아니었다. 그걸 투정이라는 단어로 말할 수 없었다. 메리는 진심으로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겪게 되는 고통스러운 삶이 아닌, 진정한 나만의 삶을 찾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메리…….”

그러기에 쉬이 문을 열고 나갈 수 없었다. 어린아이의 모습이라고는 없는, 노쇠한 노파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상황이지만, 나는 순간 그녀가 마치 어린아이처럼 보였던 탓이다.

너무나도 어려서, 내 손을 간신히 잡고, 총총거리는 걸음으로 겨우겨우 내 걸음을 따라잡으려고 노력하던 그 어린 길잡이.

“미안해.”

하지만, 그럼에도.

“가, 가야 해.”

어쩔 수 없었다.

오는 내내 생각했다. 왜 하필 그때, 나는 절벽에 그토록 강한 이끌림을 느꼈을까. 왜 하필 내가 그 절벽에 간 날, 마귀가 태어난 걸까.

왜 하필…….

“이번에도, 내, 내가 해야 하는, 것 같아.”

내 전부였던 이가 마귀의 표적이 된 것일까.

답은 뻔했다. 신이 손끝으로 나를 가리켜 용사라 명명했듯이, 이번에도 신은 나를 마귀에게 가는 길로 인도했다. 비록 이번엔 내가 용사가 아니더라도, 그 어떠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어도, 내가 아무리 가기 싫어도.

“미안해.”

비록 그가 미쳐서 나를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그가 황후를 들이더라도, 우리의 관계가 이토록 망가진 상태임에도.

결국 내가 갈 수밖에 없는 그런 완벽한 이유를 안배하셔서, 기어코 내가 황궁으로 걸음 할 수밖에 없게 말이다.

“…….”

나는 내가 어떠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내 눈을 마주한 메리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듯 뭉개지더니, 이어 울먹이는 얼굴로 변해 그게 걱정스럽고 미안할 뿐이었다.

“미안, 메리, 미안해, 미안해…… 빠, 빨리 돌아올 테니까, 우, 울지 말고…….”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가는 그녀를 보며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메리가 울었을 땐 어떻게 했더라? 서둘러 저 너머 멀리 잠들어 있는 기억을 뒤적여 메리를 달랬던 경험을 떠올렸다.

‘아!’

그게 있었다. 나는 문을 박차고 나가 바닥에 피어 있는 들꽃 중, 가장 색이 곱고 귀여운 꽃을 여러 송이 빠르게 뽑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엮어, 아주 작은 반지를 만든 뒤 서둘러 방안에 들어오니, 메리는 여전히 눈물이 고인 채,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메리에게 서둘러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려다, 이내 도리질하며 손을 옷에 문질러 닦았다. 그러자 꽃을 꺾느라 더러워졌던 손이 비교적 깨끗해졌고, 그 손으로 메리의 손을 잡은 뒤 그녀의 엄지손가락에 들꽃으로 엮은 꽃반지를 껴 줬다.

“짜, 짜안.”

그러곤 빙긋 웃었다.

“예쁘, 예쁘지.”

나를 본 메리의 눈이 크게 떠진다.

엄지손가락, 꽃반지.

모든 게 귀엽고 사랑스럽고 야무진 동생이지만, 그녀는 손재주가 그리 좋지 못했다. 반면 나는 그리 잘나진 않았지만, 꽃반지나 화관을 잘 만들어서, 가끔 동네 아이들이 만들어 달라고 달라붙을 때가 종종 있었고, 그건 메리도 마찬가지였다.

“이거 조, 좋아하잖아.”

그 말을 뱉자, 메리가 멍하니 나를 보았다. 그 멍하게 나를 보는 얼굴에서, 나는 메리에게 꽃반지를 만들어 끼워 주던 날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손가락이 못생겼어.

메리는 유독 손가락이 크고 통통하고 못생겼었다. 매번 마을 아이들에게 얼굴의 점과 손가락으로 놀림을 받으니, 친구들이랑 잘 놀다가도 곧잘 집에 와서 엉엉 울기 일쑤였다.

그런 그녀를 어떻게든 달래 보려 했지만, 나는 똑똑한 오라버니도 아니었고, 아이를 잘 달래는 옆집 아저씨도, 앞집 아주머니도 아니었다.

-오라버니. 나는 왜 이렇게 못난 구석이 많아?

하지만 그렇다고, 엉엉 울며 스스로를 자학하듯 말하는 메리를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우리에겐 서로만이 있었으니까.

그녀의 눈물이 방울져 떨어질 때마다, 내 마음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파 오던 그때, 문득 내가 가진 잔재주가 떠올랐다.

-모리스는 손재주가 정말 좋구나. 꽃을 이토록 잘 엮다니 말이야.

놀 게 없는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풀과 꽃을 갖고 노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어릴 적부터 나는 할 게 없으면 종종 들꽃을 엮은 화관을 만들어, 문 앞에 걸어 두곤 했는데 그걸 본 이들이 곧잘 칭찬하곤 했다.

그 기억을 떠올린 나는 서둘러 마당에 있는 작은 꽃을 한가득 따서 꽃반지를 잔뜩 엮기 시작했다.

-뭐, 뭐 해?

울음을 터트리던 메리는 그런 날 놀란 듯이 보았지만, 나는 대답 대신 빠르게 반지를 엮어 순식간에 열 개의 꽃반지를 만들어 냈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쥔 뒤, 마디마디에 그 반지들을 다 껴 주었다.

놀란 건지, 아니면 신기한 것인지. 꽃반지를 하나씩 끼워 줄 때마다 메리의 울음은 멎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새끼손가락에까지 반지를 끼워 준 뒤 고개를 들어 메리를 보았을 땐.

-오라버니가 제일 좋아!

활짝 웃으며 내게 팔을 뻗는 메리, 그런 그녀의 뺨에 나는 입을 맞춰 줄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는 무능력하고, 말더듬이에 머저리인 내게 가진 거라곤 메리라는 동생 하나였기에, 그녀는 내게 무엇과도 맞바꿀 수 없는 존재였다.

이후, 나는 그녀가 슬퍼할 때마다 반지를 엮어 껴 주었다.

“우, 울지 마.”

지금처럼.

다만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급하게 만든 꽃반지인지라, 한참 잘 만들 때보단 못 만들었을 것이다. 조금 위축되어 주춤거리던 나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메리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그만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오라버니는, 아직도 제가 아이인 줄 아시나 봐요.”

말투가 서늘해, 그 말만 들었더라면 누구든 그녀가 무척이나 화난 줄 알 것이다.

“나는 이미 노인이 되었는데, 오라버니는…….”

하지만 아니었다. 서늘한 말씨와는 달리 그녀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새빨개진 눈을 하고, 차마 내가 닦아 주기도 미안할 정도의 엄청난 눈물을 흘려 내는 그녀를 보며 얼어붙어 있다, 서둘러 그녀의 뺨을 닦아 내며 사과했다.

“미, 미안해. 내가 모, 못나서. 이런 거밖에 기억이 아, 안 났어. 오라버니가 미안해, 뭐, 뭘 해 줄까. 뭘 해 줘야 기, 기분이 풀리지?”

끝도 없이 흐르는 메리의 눈물에 밑바닥보다 더한 곳으로 몸이 쑥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나의 잘못이었다. 다 큰 어른은 이런 유치한 꽃반지 같은 걸 당연히 싫어할 게 뻔하지 않은가. 게다가 내가 없는 세월 동안 산전수전 다 겪은 그녀가 고작 이런 꽃반지 하나로 눈물을 멈출 리가 없고.

“미안해, 메리야, 미안해. 그, 그만 울어. 아, 아니야 울어도 괜, 괜찮은데…… 미안해.”

연거푸 사과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메리의 눈물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이러다가 큰일이 날까 봐 무서웠다.

“내가, 가면 혼자, 이, 있으니까 그러기 싫어? 그럼 그냥 아, 안 갈게. 내가…….”

그래서 어쩔 줄을 몰라 허둥지둥하다가, 그녀의 눈가가 눈물로 짓무르지 않도록 부드러운 천을 가지고 오려고 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시네요.”

그런 나를 메리가 붙들며 말했다.

“가세요.”

그리고 이어진 말.

그 말에 놀라 얼어붙은 것도 잠시, 서둘러 다시 돌아본 그녀는 더 이상 울고 있지 않았다.

“오라버니가 가고 싶은 대로, 가세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런 내가 당연해 더는 말릴 수 없다는 듯이. 내가 쥐여 준 어설픈 꽃반지를 가벼이 흔들며 말하는 그녀를 본 순간, 나는 그제야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더는 아이가 아니며, 그러기에 더는 내가 꽃반지를 엮어 주지 않아도…….

“저는 여기서 기다릴게요.”

울음을 멈출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는 것.

***

모스가 황궁으로 가는 길은 제법 험했다.

만약 메리가 급히 말을 빌려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더더욱 고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모스는 우습게도, 이 험한 길이 더 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계속했다.

‘생각하지 마.’

출발과 동시에 자꾸만 수십 개의 걱정과 잡념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다.

벌써 마귀가 황궁으로 들어갔고, 그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면 어떡하지? 마귀가 점점 더 강해지면 어떡하지? 악기는 다른 마물들을 끌어오기도 하는데, 그 탓에 살아 있는 다른 마물들도 같이 꼬이는 건 아니겠지?

-가기 전에 단 하나만 약속해 줘요.

다만 온갖 걱정과 상상이 물꼬를 틀 때면, 모스는 단 하나, 메리가 내건 조건을 떠올렸다.

-과거의 인연에는 연연하지 마세요. 어차피 괴물로 산 삶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면서요. 그러니 부디, 그 시절 맺었던 인연과 엮이지 마시고, 해야 할 일만 해 주세요.

모스는 문득 ‘길잡이의 길눈이라는 것은, 나이가 들고 인간의 삶을 훌쩍 뛰어넘어 살게 된 이에게도 보이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마치 모스에게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훤히 내다봤다는 듯이, 메리는 마지막으로 그리 신신당부하고 모스를 배웅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맞아.’

그리고 그 말은 말을 타는 내내, 근심으로 잠겨 버린 모스를 꾸역꾸역 뭍으로 끌어 올렸다.

‘우리는 이제 다 끝이잖아.’

비록 마귀가 엮이고, 어쩌면 서로 다시 얼굴을 볼 일이 있을지라도.

이미 루인은 귀도 멀고, 눈도 멀어서 모스를 알아볼 일이 없을 것이며, 그러기에 모스만 모른 척을 한다면 서로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면…….’

오히려 잘된 일이다. 그럼 메리의 말대로 되기가 얼마나 수월하겠는가. 루인은 모스를 알아보지 못하고, 마음 정리를 한 모스도 구태여 루인에게 다가갈 이유도 없으니 엮일 수가 없었다.

‘잘된 거지.’

하나, 생각과는 다르게 모스는 마냥 웃고 있지 않았다. ‘루인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라는 생각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아프다 못해 미어졌기 때문이다.

‘너는 나를 못 알아보겠구나. 또다시, 너는 나를…….’

그 생각을 하자마자 한없이 가라앉는 기분에 모스는 애써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갈 길이 아직 남았는데, 이리 깊은 상념에 잠겨 있을 시간이 더는 없었다.

‘곧 도착인가 보네.’

그사이 모스의 곁을 지나치는 사람들의 수도 늘고, 빈도도 점점 잦아지고 있었다. 그것에 모스는 직감적으로 자신이 수도에 거의 다 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 잊겠다며 악을 쓰고, 부정하고, 밀어 냈음에도 불구하고, 몸은 이곳에 왔다. 그는 연신 손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몇 번이나 옷에 손을 닦아 냈다.

“제대로 줄을 서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를 지키는 이들이 들어오려는 자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있었다.

“확인했습니다.”

메리가 준 제국민의 가족이라는 걸 알리는 작은 명패를 내밀자, 통과는 쉬웠다. 물론 석연찮은 부분도 있었다. 병사가 뭔가를 확인하듯 모스의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늦은 거 아닌가?”라고 읊조린 것이다.

“빨리빨리 들어가세요!”

하나, 그게 다였고 많은 인파에 모스도 정신이 없어 더는 신경 쓸 수도 없었다.

“오늘만 싸게 팝니다! 얼른 사세요!”

“이거 드시고 가세요!”

모스는 드디어 들어가게 된 수도의 모습에 넋이 나갔기 때문이다.

그는 이전에 황궁을 올 땐, 다리가 부러진 채 작은 상자 안에 몸을 욱여넣고 왔던 지라 바깥 풍경을 전혀 보지 못해서 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게다가 그땐 가혹한 겨울이었기에, 사람들이 이 정도로 활기차진 않았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빨리들 오세요!”

벌건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얇은 옷차림을 하고 길거리에 돌아다니고, 소리치고, 서로를 보며 커다란 웃음을 터트린다.

모스는 많은 인간들이 모여서 활기차게 돌아다니는 모습이 너무 생경하고 어색해 처음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윽고 손에 들린 말의 존재를 상기하고 서둘러 말을 팔기 위해 움직였다.

“말을 팔려고, 하, 하는데요…….”

“아, 한번 볼게요!”

말을 사고팔거나 맡아 주는 이들은 수도로 들어오는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몰려 있었다.

그들은 모스가 데려온 말의 상태를 하나하나 확인하더니, 이윽고 모스에게 이 정도 가격이라고 말해 주었고, 그 가격은 미리 메리에게 들었던 가격이기에 바로 팔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말을 팔고, 뒤를 돈 모스의 모습은 뭔가가 엉성했다. 초라한 행색과 더불어 어정쩡하게 쥔 돈이 든 작은 주머니, 너덜너덜한 신발, 잔뜩 헝클어져 엉망인 머리.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눈만큼은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빛났다.

‘여기가 수도…….’

그는 머리로는 당장 시간이 없다는 걸 알았다.

황궁에 어떻게 들어가야 할지, 그 안에서 치테이르의 거죽을 뒤집어쓴 마귀는 또 어찌 찾아야 할지, 그런 계획이 하나도 없이 온 것이기에 막막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쌉니다- 어서 저희 가게로 오세요!”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액세서리만 취급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당장 펼쳐진 풍경은 그를 현혹하기 충분했다.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또 움직이고, 그 사이에서 무언가가 끊임없이 바뀌었다.

매우 바쁜 그들 사이에 있으면 있을수록 모스는 기분이 묘하다 못해, 이상했다.

‘하기야 나는 모리스의 생에서도, 모스의 생에서도. 어느 하나 사람다운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었지.’

사람들은 모스만 보면 자리를 피하기 급급했다. 그는 모리스의 생에서는 저주받은 종족이라며 손가락질을 당했고, 모스의 생에서는 숲에 사는 괴물이라 불리었으니, 이리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에 있던 경험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 여겼다. 어차피 그들은 도망칠 테니까.

그런데, 지금만큼은 달랐다. 이 많은 이들 사이에 있어도 그 누구도 자신을 향해 괴물이라 손가락질하지도, 도망치지도 않았다.

그들은 모스를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각자의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모스는 생전 처음 겪는 상황에 멍하니 서 있었는데, 그때 그런 모스의 시선 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그래.

“마…귀?”

무언가가.

모스는 눈을 크게 떴다. 물론 마귀로 의심되는 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로브를 뒤집어썼기에, 모스가 정확히 본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비슷한 느낌에 모스는 그를 쫓아가려고 했다.

‘잡아야 해.’

잡아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떻게든.

그 생각에 사로잡혀, 사람들과 부닥치든 말든 무시하며 뛰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로브를 쓴 이의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어서 입술을 꾹 깨문 그때.

“여기 왜 있어요? 왔으면, 빨리 와야지!”

그것은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이러다 더 늦겠다! 얼른 뛰어요!”

갑자기 인파 속에서 손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모스의 손을 잡아채,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자, 잠깐-.”

모스는 갑작스러운 달리기에 반사적으로 자신을 붙든 이의 손을 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어찌나 힘이 억센지, 손은 놓아지지 않았고 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는 듯 그는 더 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누…….”

이게 무슨 짓이냐고, 누구냐고 물으려고 모스가 제 손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지만, 그는 말을 잇는 대신 눈을 크게 떴다.

‘머리가… 녹색?’

모스를 붙들고 뛰어가는 이의 머리 색은 선연한 녹색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뿐이라면 모스가 이토록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차례대로 순서를 지키십시오!”

녹색 머리는 한 명이 아니었다.

“일곱 명씩 한 줄로 서시길 바랍니다!”

무수히도 많은 녹색 머리가 모스의 눈앞에 있었으며, 그 앞에는 화려하고 커다란 문이 달려 있었는데.

‘이곳이구나.’

모스는 본능적으로 이곳이 황궁의 시작임을 눈치챘다.

황제가 사는 황궁의 시작이 이 문 너머로부터 펼쳐질 것이라는 사실에 이곳에 왜 끌려왔는지, 이곳에서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는 중요치 않아졌다.

그저 황제, 루인 윈스가 저 너머 있을 거란 생각 하나만으로, 모스의 심장은 아래로 쿵 떨어졌다. 순간 비명처럼 숨이 내뱉어지려는 것에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입을 틀어막았다.

닮은 이를 본 것도 아니고, 하물며 그의 옷자락을 본 것도 아니었다. 고작 황궁의 시작을 알리는 문을 하나 본 게 다인데, 왜 이리 심장이 벌써부터 미친 듯이 뛰는지.

‘루인 윈스.’

모스는 속으로 그의 이름을 곱씹고, 더 괴로운 듯 미간을 구겼다. 오는 길 내내 애써 내리눌렀던 그의 존재가 너무나도 크게 와닿는다.

‘난 마귀 때문에 온 거야.’

그는 눈을 질끈 감고, 가빠진 숨을 애써 정돈하며 마음을 다잡고자 했다.

그는 치테이르인 척하며 제국을 혼돈 속에 빠뜨릴 마귀를 잡으러 온 것이지, 루인을 보러 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어차피 나는 죽었어.’

게다가 햇빛을 못 보는 괴물 ‘모스’는 죽었다. 이제 이 자리에 있는 이는 모스가 아닌 인간 ‘모리스’일 뿐이었고, 모리스는 루인을 모르고, 루인 또한 모리스를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애써 그리 생각하려 해도, 굳어진 몸은 풀어지지 않았다.

모든 게 너무 빨랐다.

그는 형님을 죽이겠다던 치테이르의 거죽을 뒤집어쓴 마귀를 처리하기 위해 황궁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다짐했지만, 이토록 빨리 황궁 앞에 던져질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게다가 이 상황 자체도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녹색 머리인 이들이 다 하나같이 줄을 서 있었고, 문 앞에 있는 이들에게 뭐라 몇 마디를 걸더니 커다란 천 주머니를 받아 들기를 반복했다.

‘나를 데려온 이는…….’

두리번거리다 보니, 저 멀리서 그를 이곳으로 끌고 온 이는 이미 줄 맨 앞에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아보려는 듯, 모스가 주위를 둘러보는 와중, 모스의 앞에 있던 이가 종이와 펜을 건네주었다.

그 종이를 받아 들고 보니, 그곳에는 이름을 적으라고 적혀 있었다.

‘황궁으로 들어가는 과정인가?’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이름을 적은 듯 보였다.

물론 의문점은 많았다. 황궁 앞에 모인 이자들은 왜 하나같이 다 녹색 머리이며, 왜 이리 모여 있는지.

‘어차피 황궁으로 들어가려고 했잖아.’

하지만 고민은 짧았다. 어차피 그는 온갖 방법과 수단을 총동원해서라도 황궁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니깐. 게다가 아직 이 일대에 소란이 없는 것을 보아, 치테이르가 바로 온 것 같지는 않았고, 그럼 하루라도 빨리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지켜보고 있는 게 좋을 터.

그러기에 고민하던 모스는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펜을 제대로 손에 쥐었다.

‘아, 이런.’

물론 얼결에 이름을 ‘모스’라고 적었다가, 이어 화들짝 놀라며 ‘모리스’라 고쳐 쓰게 되는 작은 사건이 있었지만, 그건 찰나였다.

“이리 주십시오.”

모스가 이름을 적자마자 앞에 있던 이가 종이를 받아 들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모스는 그만 종이를 내밀기는커녕 아무런 미동도 하지 못했다.

“이봐요?”

그는 이 사람을 알았다. 물론 이자는 모스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 없으니 모스를 모를 것이다.

루인과 함께 지내던 그 궁에서 모두가 잠든 늦은 밤이 되면, 모스는 종종 몇몇 이들이 저 아래에서 걸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마다 어떤 이들이 움직이는 건지 궁금했던 지라, 어느 날은 루인이 깊게 잠든 틈을 타 창밖을 내다보았다.

밤이 되면 온갖 문을 다 걸어 잠그는 탓에 창문을 제대로 열 수가 없어 겨우 얼굴 하나만 쏙 내밀 수 있는 틈을 만들었다. 그렇게 힘겹게 목을 내민 그때 제일 먼저 들은 말은.

-황궁에 창놈을 들이다니, 역겹기 그지없어.

이어진 말들은 더 충격적이었다.

-저 창놈이 그렇게 잘 조이나? 얼마나 잘 조이기에 황제 폐하께서 저토록 빠져들어 비역질하시는 것인지. 아무리 그래도 난 사내새끼는 안 될 거 같던데. 소리를 들으면 간혹 귀가 더럽혀지는 거 같잖아.

아무리 눈치가 없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그여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저자가 역겨워하는 대상은 바로 자신이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모스는 곤욕과 수치가 밀려와 그날 이후로 더는 창밖을 내다보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사의 말은 며칠간 그의 마음에 남았다. 그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자신이 아무리 루인을 사랑하더라도, 루인은 황제였다. 그때 모스는 처음으로 남들이 보는 자신의 위치가 어떤지 제대로 확인하게 되었다.

“이봐?”

그리고 그때 그 말을 한 기사가 지금 제 앞에 있었다. 마치 이곳에서 자신의 위치를 다시금 확인시켜 주듯이.

그는 신경질적인 얼굴로 모스를 보고 있었고,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모스는 역겨워서 어쩔 줄을 몰라 하던 기사의 표정이 떠올랐다.

진심으로 역겨워하며 헛구역질을 흉내 낸 그와, 그런 그의 옆에서 낄낄거리며 웃던 사용인. 그들은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나가던 이에게 경고를 받듯 혼났지만, 그럼에도 특유의 웃음소리와 표정만큼은 뇌리에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돌연 그 장면이 떠오른 탓에, 모스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그저 얼어붙은 얼굴로 그를 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걸 그 기사는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인상을 살짝 구긴 뒤, 이윽고 어깨를 으쓱이며 모스가 내민 종이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기록했다.

“말을 못 하나? 그럼 직접 이름 옆에 말을 못 한다고 써야지. 쯧.”

기사는 모스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마치 모자란 이를 보듯 하고는 가벼이 혀를 차고 떠났다.

그것에 모스는 순간 억울함에 고개를 퍼뜩 들어 올렸으나, 이윽고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차피 더듬으니까…….’

모스는 생각했다. 이렇게 말을 심하게 더듬을 바엔 아무런 말도 안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이런 말더듬이가 입을 벌린다면 또 이상한 시선을 받게 될 것 아닌가.

“황궁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 절차를 밟겠습니다.”

생각을 하던 차에 마침 저 앞에서 몇 명인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황궁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많은 인원에 모스는 몹시 당황했지만, 줄을 서 있던 이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살짝 긴장하긴 했으나, 이윽고 예상했다는 듯 가만히 있는 것이다.

“이쪽으로 서 주세요.”

“한 명씩 와요.”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모스처럼 줄 서 있는 이들의 신장을 재고, 머리를 햇빛에 비춰 보기도 하고, 온갖 기행들을 하고 지나치길 반복했다.

“돌아가세요.”

그들 중 몇 명은 어떠한 기준에 못 미친 듯 보였는데, 그런 이들에겐 사용인이 돌아가라는 듯 바깥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면 그들은 아무런 반항도 없이 저 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황궁은 원래 이렇게 까다로운 건가? 근데 무슨 기준이지?’

모스는 혼란스러웠다.

“당신은 저쪽으로 가시고, 음 당신은… 이 정도면 뭐, 이쪽으로 오세요.

이곳은 현재 시장통이나 다름없었다.

차라리 신분을 확인하는 거면 모를까, 이곳에서는 그 누구도 신분을 확인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외양만을 보고 사람들을 나누는 것처럼 보이는 통에 모스는 혼란스러웠다.

저게 무슨 기준인가 싶고, 자신은 이곳에 왜 있으며, 대체 이 모든 행동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건지 가늠을 해 보려고 했으나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다만 계속 보다 보니, 내보내지는 이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었다.

“돌아가는 삯값은 미리 말한 대로 후하게 드릴 테니, 가세요.”

사람들의 손짓을 통해 내보내지는 이들은 대부분 키가 크거나, 녹색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머리카락 색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통과입니다.”

모스는 기준에 부합했다는 듯, 왼쪽으로 줄을 서라는 안내를 받았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문득 주위를 둘러본 모스는 얼어붙었다.

‘……이게 뭐야?’

이곳에 끝까지 남은 이들은 하나같이 모스와 머리 색도 비슷하고, 체구도 비슷했던 것이다.

물론 사람 얼굴까지 같을 수 없다는 듯, 얼굴만큼은 달랐지만, 전체적인 느낌이 너무 비슷해서 소름이 절로 돋았다.

그것에 왠지 모를 불안과 공포가 몰려와, 모스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는데, 이는 모스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로 느끼는 거 같았다.

“형…제 같다. 그렇죠.”

이 싸한 분위기를 애써 환기하려는 듯, 침묵 속에서 한 이가 말하자 다른 사람들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그렇네요, 정말 형제 같아요.”

서로 피라고는 단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건만, 녹색 머리에 비슷한 체형을 가지고 있으니, 마치 형제들처럼 보이긴 했다.

물론 형제라고 하기엔 그 수가 많아 보였지만…….

“여기서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때마침 마지막 사람이 기준에 부합하지 못한 듯, 문밖으로 내쫓기듯 내보내졌다. 그리고 사용인들은 왼쪽에 서 있는 그들에게 기다리라고 말한 뒤 싹 사라졌다.

그들을 감시하듯 서 있던 이들이 다 물러서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저흰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요.”

“그러게요. 저는 진짜 못 배우고 자라서, 황궁 내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아예 모르는데…….”

모스는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웠다. 근데 그때, 어떤 사람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무, 서워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하는 이는 정말로 얼굴이 공포에 질려 있었다.

“돈을 많이 준대서, 오, 긴 했는데. 무서워요. 너무 무서워요.”

파랗게 변한 얼굴로 오들오들 떨며 말하는데, 보기가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이어 저 슬픔이 전염이라도 되듯, 이를 보던 몇몇 이들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개중 몇몇은 훌쩍이기 시작한 것에 모스는 당황했다.

‘왜 이러는 거지?’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는 것은 모스뿐이었다. 애초에 이곳에 온 이유를 모르는 모스와는 달리, 다른 이들은 대부분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궁으로 들어가는 게 슬픈 일인가?’

물론 모스도 황궁으로 들어가는 게 무서웠다. 그에겐 황궁에서의 끔찍한 기억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황궁의 그 꿉꿉한 공기도, 갇혀 살았던 그 궁도. 어느 하나 두렵지 않은 게 없었지만, 이들은 다르지 않겠는가.

제국에서 가장 귀한 이인 황족이 지내는 공간 내에 들어간다는 것은 엄청난 가문의 영광 아닌가?

그렇게 의아함에 잠긴 채, 모스는 긴 시간 동안 서 있었다. 이곳에서 얼마나 서 있었는지는 시간을 재지 못해 모른다. 처음엔 조잘대던 이들도 어느 순간부터 입을 꾹 다물었다. 하늘을 보니, 아까는 머리 위에 떠 있던 해가, 어느덧 옆으로 기울어진 것으로 보아 시간이 꽤 많이 흘렀다는 것만 유추할 수 있을 뿐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때, 그의 머리 위로 목소리가 떨어졌다.

“들어갈 준비 하시지요.”

말을 한 사람의 뒤로 사람이 여럿 나와 그들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앞에 안내하는 이를 따라가던 모스는 흠칫해서 잠시 멈추어 섰다.

‘원래…… 이런가?’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물론 황궁에서 지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황궁을 제대로 구경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애초에 해가 떠 있을 때는 걸어 다닐 수가 없었고, 밤에는 루인과 함께 지내는 방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데, 그럼에도 지금 분위기는 너무 이상했다.

황궁이라 하면 필시 화려하고 아름답고, 생기가 가득한 곳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그가 보는 것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치 무덤가처럼 음산하다. 모스는 어느덧 소름이 돋기 시작하는 팔뚝을 문지르며 온기를 퍼트리려고 했다.

“이걸 쓰십시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무표정한 이가 다가와 그에게 흐물거리는 천을 내밀었다.

처음 보는 물건에 모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니, 같이 이곳으로 들어온 이들에게도 다들 손에 천이 쥐어지기 시작했다.

“이것을 드리는 의미는 앞으로 무엇을 보든 못 본 것으로 하시고, 같이 일하는 이들의 얼굴도 제대로 기억하지 마시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잠시 말끝을 흐린 그는 이어 속삭이듯 말했다.

“당신들을 지키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그 말에 천을 받아 든 대부분의 이들이 고개를 가벼이 끄덕이더니 하나둘씩 제 얼굴을 가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모스는 그제야 제가 받아 든 것이 얼굴을 가리는 베일임을 깨닫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베일은 꼭 쓰셔야 합니다.”

설명한 이가 그리 말을 덧붙이니, 베일을 처음 써 보는 듯 바로 쓰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나머지 이들도 서둘러 제 얼굴에 베일을 씌웠다.

‘원래 베일은 이런 건가?’

책에서 읽은 묘사와는 상당히 다른데. 모스는 그리 생각했지만, 큰 의문은 표하지 않았다.

황궁의 사용인들이 준 베일은 흔한 형태가 아니었다. 보통 일반적으로 쓰는 베일이란 신분을 가리기 위해 쓰는 것이기에 머리카락까지 가리는 것이지만, 그들이 준 건 머리카락은 선명하게 보이되 얼굴만큼은 제대로 가리게 해 둔 것이었다.

모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덧 각자의 개성이 넘치는 얼굴들은 다 어디 가고 전부 다 새하얀 베일을 쓰고 있었다.

“빨리 쓰세요.”

이는 모스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뭔지는 모르겠으나, 이것을 써야 황궁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은 제대로 인식한 모스가 베일을 뒤집어썼다.

“감사합니다. 모두 이쪽으로.”

다행히 베일을 써도 시야가 살짝만 흐릴 뿐, 보이긴 잘 보였다.

베일을 모두 쓴 것을 확인한 기사 하나가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고, 그런 기사의 뒤를 녹색 머리들이 따랐다.

자세히 보면 걸음걸이도 다르고, 조금씩 외양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어찌 되었든 비슷한 머리 색, 비슷한 체구인 이들이 죄다 베일을 뒤집어쓰고 있으니 전체적인 그림 자체가 기괴해 보였다.

그들은 걸어가다가 황궁 내의 다른 사용인들과 몇 번 마주쳤는데, 사용인들은 그 누구도 그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마치 보아서는 안 될 것처럼, 알고 싶지 않은 이들처럼.

쳐다보기는커녕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며 스쳐 가는 사용인들을 지나다 보니 어느덧 기사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반갑다.”

걸음을 멈추자마자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모스는 눈을 크게 떴다. 이윽고 고개를 들어 반갑다는 말을 한 이를 본 모스의 눈은 그보다 더 크게 뜨일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뜨였다.

마지막 순간, 자신을 붙잡고 도망치려던 이.

“나는 황제 폐하의 보좌관이자, 너희를 뽑으라고 지시한 이다.”

카를이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카를은 모스의 얼굴을 아는, 정말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였다.

순간 너무 당황한 모스는 혹여나 카를이 저를 알아볼까, 허둥지둥 제 얼굴을 가리려고 손을 뻗어 얼굴을 더듬거리다, 이윽고 잡히는 게 피부가 아닌 천인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 나는 지금 베일을 쓰고 있지.’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베일을 주지 않았는가.

얼굴이 가려졌다는 사실에 모스가 안도하려던 그때, 이어지는 카를의 말에 그는 더는 안도할 수 없었다.

“너희가 모시게 될 분은 황제 폐하시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폐하께서는 지금 정신이 온전치 않으시니. 너희가 최선을 다해 보필해야 한다.”

아니면 지독한 악연일지.

“자, 그럼 다들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가서 쉬시고…….”

다만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알아도 피할 수 없는 그러한 힘이, 둘을 서로에게 붙여 놓으려 하고 있다고.

***

무슨 정신으로 안내를 받았는지 모른다.

궁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방을 배정받기까지 모든 게 죄다 삽시간에 이루어졌고,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땐…….

“안녕. 우리 인사부터 할까.”

모스는 방 안에서 자신과 비슷한 머리 색을 가지고, 체구도 비슷한 이가 악수를 하자는 듯 손을 내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응?”

다만, 그는 모스가 넋 놓고 가만히 서 있으니까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고, 모스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후다닥 양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붙든 뒤 흔들었다.

“아- 이거 벗고 말하자. 여기서는 벗어도 된다니까 너도 베일 벗어.”

엉성한 모스의 움직임을 보고 웃음을 터트린 그가 쓰고 있던 베일을 벗으려는 듯 움직였다.

모스는 망설였다. 황궁 내에서 혹여나 내 얼굴을 알아보는 이가 있으면 어쩌지? 물론 그의 얼굴을 아는 이는 카를과 숲에 온 몇 명의 기사들뿐이었다. 다만 고민이 되기에, 머뭇거리며 서 있으니, 베일을 벗던 이가 말했다.

“여긴 함부로 안 들어올 거야. 편하게 있어도 될걸?”

모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대와 가벼운 짐들을 놓을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것을 보아, 이 안에서 앞으로 지내게 될 것 같았다.

잘 때까지 베일을 쓰고 있을 순 없을 터. 결국 모스도 쓰고 있던 베일을 끌어 내렸고, 방 안의 둘은 맨얼굴로 서로를 응시했다.

“어우, 덥다.”

앞에 있던 이가 베일을 벗은 얼굴은 모스가 상상했던 것과는 생판 달랐다. 머리 색과 체구가 비슷하니 은연중에 자신과 닮았을 것이라 여겼는데, 그는 머리카락과 체구만 모스와 비슷할 뿐, 눈동자는 채도가 높은 갈색 눈이었고, 모스와는 이목구비의 모양새도 아예 달랐다.

‘어디서 본 거 같은데.’

그럼에도, 저 얼굴이 어쩐지 낯익다.

모스가 그것에 고개를 기웃거리다, 이윽고 이자가 아까 장터에서 자신을 붙들고 뛴 아이라는 것을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어? 너는…….”

그건 그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뒤늦게 모스를 알아본 듯, 입을 설핏 벌린 아이가 활짝 웃었다.

“아까 길을 헤매서 내가 끌고 왔던 애구나!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자꾸 두리번거리길래 데려왔는데, 여기서 보네? 내 이름은 리엘이야!”

또 우연.

모스는 우연에 우연이 겹치는 게 과연 우연인지 의심이 들었으나, 리엘은 여전히 해맑을 뿐이었다.

‘대체 나를 이곳에 왜 끌고 왔어요?’

모스는 그리 물으려고 입을 벌렸지만, 문득 이곳에 들어오면서 말을 하지 못한다고 한 게 떠올라 도로 입을 다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때마침 모두에게 나누어 준 듯, 종이가 여러 개 묶여 수첩처럼 보이는 것과 펜이 구석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을 가져오자 그제야 무언가 눈치를 챈 듯 리엘은 “아.” 하며 작게 신음했고, 모스는 그곳에 또박또박 글씨를 써서 내밀었다.

「반가워. 실례가안 된다면날 이곳에왜 데려왔는지알려 줄수있어?」

모스는 글을 쓰면서도 긴가민가해 땀이 삐질삐질 새어 나오는 거 같았다.

‘이렇게 글을 쓰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네.’

글이란 걸 쓴 지 너무 오래되었다. 펜은 자꾸만 손에서 미끄러졌고, 글씨도 죄다 삐뚤빼뚤하고 예쁘진 않았지만 이게 그로서는 최선이었다.

“너…… 말을 못 하는구나.”

하지만 다행히도, 리엘은 모스의 글씨를 알아본 듯 눈을 깜빡이며 글을 차근차근 읽다가 이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여길 왜 데려왔냐고? 너도 녹색 머리잖아. 황궁 사용인 하려고 수도로 왔다가 길을 헤매던 거 아니었어? 그래서 마침 나도 가던 길이라 데려온 건데.”

리엘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모스를 보았고, 모스는 제가 들은 말을 최대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려고 했으나,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황궁사 용인 ?」

그 질문에 리엘이 얼빠진 표정을 짓다가 “얘 진짜 잘못 왔나 봐…….”라며 중얼거리다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이, 일단 내가 널 잘못 데려온 거 같아. 미안.”

나쁜 이는 아닌지, 그는 사과를 하고선 모스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그- 말하자면 긴데, 얼마 전 황궁에서 폐하의 곁에서 일할 사용인들을 모집했는데, 조건은 그저 녹색 머리였고, 말도 안 되는 돈을 준다고 했거든…… 난 너도 그거 때문에 온 건 줄 알았는데.”

「녹 색머리?황궁? 왜하필 조건이녹색머리?」

“그게.”

리엘은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이윽고 모스에게 바짝 붙어 비밀이라는 듯 검지를 입술에 가벼이 올리고 속삭였다.

“황제 폐하께서 머리가 완전… 이거 됐잖아. 이건 알지?”

리엘이 황제가 미쳤다는 듯 손끝을 관자놀이 쪽에 대고 빙빙 돌리자, 잠시 멈칫한 모스가 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황궁에서는 미친 폐하의 손에 사람이 매일 죽는대. 어찌나 많이 죽이는지, 아무리 청소해도 피 냄새가 안 빠져서 장난 아니라고 하거든? 그러니 사람들이 얼마나 거기서 일하기 싫겠어.”

“…….”

“그래서 이렇게 돈을 많이 주는 것도, 우리가 암살자인지 아니면 첩자인지, 그 어느 것도 확인도 안 하고 오로지 녹색 머리만 구하는 것도… 그냥 고기 방패를 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들 하는데……. 근데 있잖아.”

사실 여기엔 비밀이 있어.

리엘이 속삭이더니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 일하는 내 친구 말에 따르면…… 폐하가 사랑한 연인이 녹색 머리였다는 얘기가 있었거든.”

모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뭐… 옛 연인과 비슷하게 생긴 이들을 부르면 덜 죽이지 않을까 해서 부른 거 같더라. 그래서 이 베일도 황제의 옛 연인으로 착각하기 쉽도록 쓰는 거라는 얘기도 있고…….”

황제의 옛 연인. 사랑한 연인.

「연,인?」

“응. 연인.”

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 황제가 그 연인만 찾는다잖아.”

루인에게 연인이 있었나?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사랑이라고는 모르듯 굴던 그에게 연인이 있었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데…….

“근데 그 연인이 녹색 머리인 사람이래.”

심지어 그게 녹색 머리라고?

다른 말들은 들리지 않았다. 그저 그 단어에 꽂힌 채, 모스는 사랑, 루인, 녹색 머리, 연인을 반복해 생각하며 한동안 멍하니 리엘을 보다가, 이윽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너, 피가-.”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모스의 입술에서 새빨갛게 핏방울이 몽글몽글 맺히더니 번지듯 물들어 갔다. 당황한 리엘과 달리, 모스는 개의치 않은 듯, 그저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그가 날 사랑했을 리 없어. 아니면 황궁에 나 말고 다른 녹색 머리를 지닌 이가 있었나?’

하지만 설령 있었다고 해도, 그는 결코 사랑이란 걸 모르는 이다. 그게 자신일 리는 더더욱 없었고.

생각을 마친 모스가 글을 빠르게 죽죽 쓰기 시작했다. 어찌나 손에 힘을 주었는지, 자꾸만 펜 끝이 종이를 파먹고 들어가 찢어졌다.

순식간에 수첩은 엉망이 되었고, 이윽고 갈기갈기 찢어지듯 파인 종이를 휙 넘긴 모스가 하얀 수첩 위로 손을 사납게 움직였다. 그는 마지막 글자까지 쭉 쓰고 수첩을 내민 뒤 고개를 들어 리엘을 바라보았다.

「사랑?그런잔혹무도한이가무슨」

“야, 차라리 말로…… 아니다, 아니다. 이거 얼른 지워! 이거 걸리면 황족 모독죄로 잡혀 들어가!”

차라리 조용히 말로 하는 거면 모를까, 이러면 기록이 남지 않는가. 아무리 광증이 도진 황제라지만, 이런 내용을 황궁 내에서 떠들었다는 게 밝혀지면 사달이 나도 크게 날 터.

리엘이 읽자마자 사색이 된 채 서둘러 지우려고 했으나, 모스는 이미 눈앞에 보이는 게 없었다.

「거짓말하지마 이런말도 안되는이야기야말 로」

“아씨 빨리 지우라고!”

「다시말한 다 거짓 말이 아니라면네가잘못들은거겠……」

“아 진짜! 거짓말도 아니고, 내가 잘못 들은 것도 아니라니까?!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면 무조건 죽음뿐인데, 그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녹색 머리라고.”

자신이 직접 들었다고, 그래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할 만하겠다 싶어서 이곳에 지원했다며 리엘이 억울하다는 듯 말을 했지만, 그런 세세한 말들이 모스에게 닿을 리 없었다.

“그게 사랑이지 뭐겠어? 눈도 귀도 거의 다 먼 사람이, 오로지 색 하나만 보고 안 죽이는 게?!”

물론 모스도 머리로는 알았다. 리엘도 목숨을 걸었을 텐데, 들은 것도 없이 왔겠는가?

정말로 녹색 머리는 살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고, 돈을 벌고자 왔으니, 저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지만.

‘그럴 리가 없어.’

녹색 머리가 흔한 머리도 아니고, 분명 녹색 머리는 자신과 연관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날 사랑했을 리가 없어.’

그렇다면 모스는 저 말 자체가 너무나도 말이 안 되는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게 말이 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빨리 집합해!!!”

그때, 무언가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뭐, 뭐야?”

소리에 예민한 모스는 물론이고 리엘조차도 방금 소리를 들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빨리!”

“의원도 불러!!”

요란스러웠다. 한둘이 아니라, 황궁 내가 전체적으로 소란스러운 느낌에 리엘은 깜짝 놀라며 창가로 가서, 커튼을 거두어 냈다. 모스도 그런 리엘의 옆에 서서 고개를 내밀어 창밖을 보았다.

리엘과 모스뿐만이 아니라, 다른 방에 있는 이들도 궁금한 건 마찬가지인지 모두가 창가에서 고개를 내밀어 밖의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와 사람이…….”

사람은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많았다. 황실 기사단임을 알리듯, 화려한 황실의 인장을 단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그들 사이로는 의원인 이들이 섞여 있었다.

“무슨 일이길래 저러지?”

그들은 달려가며 연신 서로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거리가 상당했던지라 리엘은 들리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 기울이고 있었으나, 이 모든 이야기가 들리는 이가 단 하나 있었으니.

“폐하께서 팔을 또 그으셨다고 합니다! 이번엔 팔을 도려낼 정도로, 그으셔서 상태가 너무 위중해, 거의 힘줄마저도…….”

“빌어먹을, 카를 경께서는?!”

“이미 수도를 벗어나셨을 겁니다!!”

모스였다.

“이번에야말로 피를 너무 흘려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혹시 모르니 신관들에게도 연락해!!”

“서둘러!!!”

모스는 처음에는 제가 들은 게 정말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의 곁에 있는 리엘은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듯, 연신 “뭔 일이길래, 저래?”라며 읊조리고 있었고, 창가에 고개를 내민 이들도 그저 의아한 표정이었던 탓이다.

게다가 모스의 몸은 이전과는 달랐다. 평범한 인간의 몸보다는 예민하지만, 길잡이도 아니었고, 괴물은 더더욱 아니었기에 제가 들은 걸 믿을 수 없다는 듯 잠시 멍하니 서 있었지만…….

-폐하께서 팔을 또 그으셨다고 합니다!

누가 뭐라 할 새도 없었다. 모스는 아무렇게나 놓인 제 베일을 들어, 단번에 뒤집어쓴 채 방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야! 너 어디 가!”

저 멀리서 리엘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바깥의 소란에 사람이 몰렸는지 아무도 없는 텅 빈 복도를 뛰어서 나갈 뿐이었다.

밖에 나오자마자 모스는 눈을 데굴 굴렀다. 기사들 몇몇이 돌아다니는 게 보였지만, 사태가 심각하기도 했고, 그저 이번에 들어온 사용인이라 생각한 것인지 그다지 모스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 기꺼운 무관심 속, 고개를 휙 돌린 모스의 시선 끝에 사람들이 우르르 걸어가는 유독 화려한 건물이 들어왔다.

저곳이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음에도, 저곳에 가면 루인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땀으로 축축해진 코를 손등으로 문질러 닦은 모스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 방을 박차고 나올 때는 언제고 긴장이 된다. 후덥지근한 날씨도 아닌데, 베일 너머 얼굴이 온통 땀으로 뒤덮였고, 숨이 절로 헐떡거렸다.

‘어떻게 들어가지?’

저 벽, 저거 하나만 넘으면 루인이 있다. 그 사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긴장돼서 자꾸만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그는 애써 침착하려 노력하며, 사람들의 눈을 피해 걸어갔다. 걸어가는 내내, 어떻게 저 안으로 들어갈지 궁리를 하던 모스는 이내 혼란을 틈타 인파 사이로 섞이기를 선택했다.

“빨리 움직이십시오!”

“암살자의 습격이 또 있었으니, 혹 다른 이들도 함께 숨어들어 왔을 수도 있으니…….”

어떻게 들어가냐는 고민이 무색하게도, 황제의 궁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너무 많았던 탓에 모스는 금방 그 무리에 섞여 들었다.

“비키세요!!!”

꽤 큰일인지, 사용인들이 정신없이 의원들의 뒤에 붙어 들어가고 있었고, 기사들은 소리를 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 사이에 모스 하나 껴든다고 해도 티가 안 날뿐더러, 각자 일을 하느라 바쁜 그들은 모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복도에 사람이 지나칠 정도로 많아 걸어가기도 어렵다는 점이었다. 복도가 그리 비좁은 편은 아닌데, 사람이 어찌나 바글한지, 모스는 어리벙벙하게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연신 휘청였다.

“얘!”

그때 어느 이가 덥석 모스의 손목을 잡고, 물이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여기서 뭐 해! 이거라도 제대로 들고 따라와!”

모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것을 내민 이는 의원으로 보이는 이를 따라가던 사용인들 중 하나였다.

그녀는 의원이 들고 다니는 도구들을 힘겹게 들고 있었는데, 모스가 쓰고 있는 베일을 보고 이번에 들어온 사용인임을 알았는지 깨끗한 물이 담긴 접시를 내민 것이다.

“거기 앞에 비키세요! 의원님이 먼저 가셔야 합니다!!!”

방금까지만 해도 인파 속에서 휘청이던 모스는 더는 휘청일 필요가 없었다.

“빨리 가십시오!!! 폐하께서 의식을 잃으셨습니다!”

“빌어먹을, 그럼 빨리 비켜요!”

사태가 더 심각해졌는지, 의원을 선두로 해서 길이 빨리 뚫렸기 때문이다. 기사들은 또 다른 암살자들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흩어졌고, 몇몇은 황제 폐하를 직접 봐야 하기에 그런 의원의 뒤를 바짝 붙었다.

“아니, 얘는…… 오늘 들어온 애들 중 하나 아니야?”

“그게 지금 중요해? 이거 무거워 죽겠는데!”

다른 사용인들이 뒤늦게 모스를 발견한 듯 그를 보고 당황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의 출입이 용납되는 분위기였다.

뭐가 어떻게 되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모스는 이들을 잘 따라가면 빠르게 루인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꾸벅 숙이며 냉큼 뒤에 붙어 종종걸음으로 뛰다시피 걸었다.

‘피 냄새…….’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스는 코끝을 찌를 정도로 강한 피 냄새가 훅 풍겨 고개를 휙 들어 올렸다. 이는 단순히 한 명이 피를 흘린 게 아니라, 여럿의 피를 방금 벽에 바른 것처럼 지독했다.

“여깁니다!!!”

“왜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피 냄새가 코를 찌르다 못해 머리를 아파 오게 할 정도로 지독해진 그때, 모스의 일행을 다른 의원과 사용인들이 맞이했다.

“비키시오!”

아마 모스와 함께 온 의원이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이인지, 그의 한 마디에 안절부절 앞에 서 있던 이들과 사용인들이 기다렸다는 듯 쫙 비켜섰다.

바글거리던 이들이 앞을 터 주자, 그제야 피비린내의 근원들을 볼 수 있었다. 발치에는 시체들이 있었다. 머리가 터져 뇌수가 줄줄 흐르는 것도 있었고, 입이 찢어진 채 죽은 이도 있었고, 독을 삼킨 것인지 얼굴이 보랏빛으로 변해 입가 주위로 피범벅이 된 이도 있었지만, 모스는 그 시체들을 하나하나 볼 수는 없었다.

서둘러 몸을 낮춰 달려가는 의원, 경악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비명을 지르는 사용인과 일사불란하게 의원의 보조를 맞추기 위해 움직이는 이들, 그리고 그 모든 상황 속, 모스 홀로…….

“…….”

정적이었다.

아니, 정적으로 보일 것이었다. 모스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당장 이것을 봉합해야 한다! 빨리 움직여!!!”

“신관은!”

“아까 불렀습니다!”

모스가 눈을 깜빡였다. 자신이 보고 있는 게 꿈인지 사실인지를 모르겠다는 듯 깜빡이고, 또 깜빡이자.

“오는 데, 시간이 걸릴 듯싶습니다!!”

“향 때문에, 의식을 찾는 데 시간이 꽤 걸릴 성싶습니다!”

“알겠다. 올 때까지는 최대한 봉합해 보겠다! 서둘……!!”

“……은, 그래서……최대…….”

피비린내가 맡아지지 않고, 주위에 엉망으로 놓인 시체들도 흐릿하게 보이고, 점차 귀가 멀어 가는 이처럼 소리 지르는 이들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모든 이들의 움직임 또한 느릿하게 보였다.

소리가 멀어지고 모든 움직임이 정적에 달할 정도로 느릿하게 보이니, 모스는 제가 보고자 하려는 것이 점차 선명하게 보였다.

너무 선명히 보여서 주위의 이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만큼 선명하게.

“거, 짓……말.”

침상 위의 사람, 그걸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부를 수는 있을까?

모스는 처음에는 제가 무엇을 잘못 보았나 눈을 의심할 정도로 침상 위의 존재는 처참했다.

침상에 누운 이의 온몸은 온통 상처투성이였고, 개중 몇 개는 단순히 상처라는 단어로 표현이 되지 않을 수준이었다. 복부에는 툭 치면 마치 내장이 쏟아져 나올 것처럼 깊게 파인 자상들이 가득했고, 그건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칼로 마구잡이로 그은 듯한 자상이 있었고, 피고름이 가득 차 눈을 뜬다 해도 앞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찢어진 귀 근처에는 피로 눌어붙은 머리카락들이 있었으며 몸에서는 정말 말 그대로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개중 팔이 제일 심했다.

촛농으로 범벅된 팔은 엄청난 화상을 입은 듯 울퉁불퉁했으며, 그뿐만 아니라 마치 도끼로 팔을 후려친 것처럼,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움푹 파여 있었다.

그런 팔에서는 피가 정말 말 그대로 끊임없이 흐르고, 또 흘러서… 마치 시체나 다름없는 몰골이었는데.

“아, 아.”

모스의 생에서 시체란 흔했고, 그가 딱히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니었다.

“아…….”

툭, 촤아악. 모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들바들 떨다가 손에 있던 접시를 놓쳤다. 접시가 다행히 깨지지 않았지만, 그 안에 담겨 있던 물이 바닥을 순식간에 적시고, 발치에 찰박일 정도로 고였던 핏물과 섞여 다리에 튀었다.

그런 모스에게 몇몇 이들이 뭐라 했으나, 모스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그는 믿기지 않는 듯 제 눈에 맺힌 침상 위의 존재를 보며 고개를 도리질하고,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기 급급했다.

말도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연신 그리 읊조리며 도리질했으나, 눈앞의 풍경은 오히려 점점 더 선명해지기만 할 뿐 달라지지 않았다.

“왜, 왜… 네가….”

모스는 알았다.

저 침상 위의 시체나 다름없는 처참한 몰골을 하고, 수많은 의원들이 매달려 몸을 꿰매고, 생사를 오가는 듯 아슬한 모습으로 있는 저 존재, 저자를.

“왜…….”

입술을 달싹이며 그의 이름을 부르고자 하지만 나오지 않아, 모스는 “왜.”만을 반복했다.

두렵다. 이름을 부르면, 자신과 같은 천것은 전혀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질까 봐, 그러기에 이름을 부르려던 혀는 몇 번이고 입 안에서 헛돌았다.

“…아, 아아.”

이제 버티는 것도 한계였다.

모스는 더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입을 틀어막은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찰랑이며 고인 핏물이 옷에 스며들고, 일어나려고 움직이는 발은 그저 힘없이 헛돌 뿐이었다.

“폐하! 정신이 드십니까?! 팔을 움직이지 마시고……!”

그때, 침상 위 그의 손끝이 까닥 움직이더니 이윽고 다리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팔을 꿰매는 중이라며 의원이 소리쳤지만,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 이가 그런 걸 조심할 리가 없었다. 그는 의원의 고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우뚝 앉았다.

그 모습은 기이했다.

어느 하나 성한 곳이 없고 의식을 찾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 할 정도로 시체나 다름없는 몰골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등은 꼿꼿하게 펴져 있었다. 그리 똑바르게 자리에 앉은 그는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가 눈을 뜨는 모습이 느릿하게 보였다.

모스가 생각하기엔 햇빛은 막고 가린다고 한들, 온전히 다 막는 데에 한계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베일을 썼지만 모든 것을 관통이라도 하는 듯 지나칠 정도로 선연한 황금빛 금안, 일렁이는 태양을 담은 듯한 그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이 엉망진창인 상황 가운데에서도, 그는 꿋꿋이 제 존재를 알렸다.

더는 외면할 수 없게.

결국 모스는 절망에 잠긴 채 혀끝으로 그 이름을 담았다.

“루, 인.”

진실로, 너였다.

5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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