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몬스터, 디어 히어로(Dear Monster, Dear Hero) 5(완결)
13. 껍데기 下
모스는 그의 이름 두 글자를 간신히 내뱉고 곧장 입을 틀어막고, 눈을 미친 듯이 감았다 떴다. 혹여나 눈을 감았다 뜨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여.
하지만 눈을 계속 감았다가 떠도 달라지는 풍경은 없었다. 눈앞에서 넋을 놓고 허공을 바라보는 루인은 여전히 엉망인 모습이었고, 그런 그의 팔에는 의원과 사용인이 다 달라붙어 있었다.
“비, 켜.”
그마저도 얼마 가지 않았다. 넋 놓고 허공을 보는 거 같던 루인의 눈동자에 작게 이채가 돌더니,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팔을 휘저었다.
“독한 향이라면서, 왜 벌써!”
“심지어 신전에서 만들어 갖다준 것입니다!”
황제의 방에는 연기가 자욱했는데 이는 죄다 황제를 재우기 위해서 켠 향들이었다. 한데, 황제가 예상보다 빠르게 눈을 뜬 것에 의원들은 당황했다.
팔은 의원들이 달라붙어 재빠르게 꿰매었음에도 아직 반 정도 남은 상태였다. 피가 뚝뚝 흐르는 팔의 고통이 상당할 터인데도, 루인은 상처가 하나도 없는 이처럼 굴었다.
“폐하께서 의식을 찾으셨다! 무, 물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루인은 장시간 향에 노출되어서인지, 평소보다는 반응이 느렸다. 게다가 심각한 부상을 입었기에 너덜너덜한 팔로 움직여 봤자 얼마나 위협적이겠니만은…….
“빨리 나가!”
그는 맨손으로도 사람 머리를 으깰 수 있는 악력을 지닌 자다. 커다란 덩치로 옅은 살기를 품은 손의 움직임은 그를 에워싼 주변인들에게 굉장히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인간답지 않은 루인의 힘을 알고 있던 의원과 사용인들은 목숨을 챙기기 급급해 서둘러 방을 나서려는 듯 움직였다.
“얼른 뛰세요!”
“움직여!!”
언제 우르르 들어왔냐는 듯, 사색이 되어 서로 방을 나가려고 하는 참에 방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과정 속에서 누군가는 모스의 어깨를 후려치듯 지나가고, 누군가는 모스의 무릎을 짓밟아 밀어뜨리며 지나가고, 누군가는 모스의 머리통을 짓누르듯 치며 지나갔다.
그러나 그 모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모스는 나갈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의 시선이 루인에게서 떼어질 기미란 보이지 않았다.
나자빠질 듯 어깨가 뒤로 밀려나면 밀려나는 대로, 무릎이 꺾이면 꺾이는 대로, 머리통이 옆으로 휙 기울어지도록 치면 치는 대로, 그리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와중에도, 그는 우뚝 서 있는 루인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루인은 그들이 다 나갔음에도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해칠 것처럼 공격적인 자세였다. 허리는 구부정했으며, 손은 제 앞에 있는 게 무엇이든 쥐어짤 것처럼 보였고, 눈빛은 형형하고 표정은 선득했다.
“…….”
의원과 사용인들이 앞다투어 전부 나간 방 안은 싸늘했다. 복도 저 너머에선 사람의 인기척이 들리지만, 이곳에서는 꽤 멀었다.
지독한 침묵이 둘 사이를 메웠다.
모스에게 이 침묵은 전과 상당히 다르게 다가왔다. 이전에 둘 사이의 침묵은 대부분 서로의 존재를 인지한 상태의 침묵이었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모스는 루인의 존재를 확신하는데, 루인은 모스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으니, 일방적인 침묵이라고 생각하던 그때.
“…어, 딨어.”
침묵을 가르고 쩍 갈라진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에 모스가 멍하니 루인을 보았다.
이 침묵이 가득한 방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는 단둘이었기에, 방금 난 소리는 루인이 틀림없었다.
‘어디에 있냐고 한 건가? 설마… 내 존재를 눈치챘나?’
그런 생각에 뒷받침이라도 하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스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는 루인의 모습에, 모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끝이야.’
하긴 몸이 성치 않더라도, 루인은 단신으로 그간 침실에 찾아온 암살자들을 다 죽였다고 했으니.
이전처럼 괴물의 몸도 아니기에, 모스는 틀림없이 자신이 루인의 손에 갈기갈기 찢어질 것이라 예상하며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가 떠는 사이에도 루인의 걸음 소리는 착실하게 이쪽으로 향하는 듯 점점 크게 들렸다.
그리고 그 걸음은.
“나와.”
모스의 바로 코앞에서 멈추었다.
모스는 제 바로 위에서 소리가 나는 것에 몸을 잔뜩 웅크린 채,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꾹 참고 다가올 고통을 감내할 준비를 했다.
“…….”
하지만 이상하게도, 다가오는 고통이 없다……?
모스는 고개를 들어 올리자마자, 자신의 앞에 등을 지고 서 있는 루인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왜 자신을 등진 것인지, 모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루인을 보는데 그는 이어서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네가 원하는 대로 했잖아. 이리했는데도, 안 나와? 나랑 지금 장난하자는 건가?”
루인이 바로 앞에 있던 모스를 등진 채, 손을 뻗어 허공을 더듬으며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나와. 나오라고!”
형체 모를 무언가를 찾는 듯, 연신 손을 내밀어 더듬으며 걸어 다니고, 소리치는 그의 모습은 기괴했다.
-아 폐하께서는 스스로 눈과 귀를 도려내셨다고 하네요. 미치셔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모스는 문득 메리의 말을 떠올렸다. 메리에게 루인이 미쳤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큰 충격을 받았지만, 그 충격이 지금만큼은 크지는 않았다.
루인이 미쳐서 눈과 귀를 도려냈다고 해도, 모스는 어쩌면 마음 한편으론 루인이 생각보다는 멀쩡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막상 마주한 루인의 모습은 모스가 어느 것을 상상했던 그 이상이었다. 이것을 단순히 미쳤다고 표현할 수 있는 걸까? 아니, 그전에 루인을…….
‘살아 있다고 표현할 수 있는 걸까.’
물론 지금 얼핏 보기엔 루인은 의식이 있었고, 움직일 수 있었고, 말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모스는 루인이 살아 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아는 루인의 육체는 지나칠 정도로 예민했다.
그는 모스의 작은 움직임에도 늘 빠르게 반응했고, 그의 반응 속도는 인간을 초월한 것처럼 기민하기 그지없었는데.
“당장 내 앞으로 나와! 네 뜻대로 내가 해 주었으면, 응당 너도 대가를 치러야지!!”
지금은 아니었다.
‘나를 전혀 못 봐.’
루인은 멀지 않은 곳에 모스가 있는데도 그쪽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고, 그것도 모자라,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연신 악을 지르며 화를 내고 있었다.
물론 모스가 평범한 사람들보다 기척이 더 없는 편이기는 했지만 루인은 평범한 사람보다 훨씬 예민하지 않은가. 그러기에 모스는 루인이 자신의 위치를 쉬이 알아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오라고!”
그러나 아니었다. 그는 바로 지척에 있는 모스를 못 찾고, 연신 부산스레 방 안을 돌아다니며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대체…… 누구를 찾는 거야? 누구길래 이리 정상이 아닌 몸을 하고서도 찾는 거야?’
루인은 여전히 미친 듯이 방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고, 그가 움직일 때마다 생채기가 하나씩 더 늘며 채 여물지 않은 팔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뚝뚝 흘렀다. 그때, 제 베일을 쥐어짜다시피 움켜쥔 채로 루인을 보던 모스가 느릿하게 제 얼굴에서 베일을 벗겨 냈다.
“나와!!!”
스르륵, 모스의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그러나 모스가 베일을 내렸음에도, 이토록 가까이 있음에도 루인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모스가 있는 쪽을 바라보지도 않고, 다른 쪽을 바라보며 넋을 놓고 계속해서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너는 또 나를 잊었구나.’
루인의 상태가 소문보다도 훨씬 심각한 것도, 그런 그가 자신을 알아보기는커녕 존재조차 눈치채지 못하는 것도.
말로만 들어도 충격적이었는데, 직접 그 모습을 보게 되니, 모스는 제 심장이 철렁 바닥으로 내려앉는 거 같았다.
“나를 또 이곳에 홀로 남겨 둔 건가? 네 원대로 했으면, 이쯤 되면 나와야지. 어디 있어. 지금 내가 눈도 병신이고, 귀도 병신이라 너 하나 못 찾을 거라고 이리 구는 건가?”
하나, 다시 잊혀졌다는 생각에 절망에 빠진 것도 잠시, 그는 제정신이 아닌 이처럼 계속 허공에게 따지듯 묻는 루인의 모습에 더 큰 절망이 밀려 들어왔다.
‘왜 이리 슬프고 아픈 걸까. 그가 날 못 알아봐서? 내가 있는 것도 몰라서? 아니야. 그것만으로 이리 슬플 수가 없어. 그래, 네가 날 못 알아봐도 좋다. 내가 이곳에 있는 것도 눈치 못 채도 괜찮아. 그런데…….’
하지만 모스는 단순히 그것만으로 슬픈 게 아니었다. 물론 그 이유도 슬프긴 했지만, 이리 무너져 내릴 것처럼 슬픈 것은 루인이 자신을 못 알아보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너 모습이, 왜 이래.’
바로 망가진 그의 모습이 더 큰 절망으로 다가온 것이었으니까.
‘이게 뭐야. 이걸 어떻게 누가 황제라고 봐. 이걸 보고 누가 제국에서 가장 귀한 몸이라고 생각해. 그 귀한 몸이, 다 왜 그래.’
그간 루인이 이렇게 상처투성이인 몸으로 어떻게 숨을 쉬고, 어떻게 움직였던 것인지. 살아서 움직이는 게 기적인 것처럼 보이는 그의 모습을 보는데 가슴이 답답해져 오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울지 않아.’
모스는 꾹 눈물을 참아 냈지만, 미칠 것만 같았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아찔함에 모스는 이윽고 주먹을 꽉 쥐어서 제 가슴을 때리기 시작했다.
쿵, 쿵쿵, 쿵. 처음에는 약하고 느리게 제 가슴을 때렸지만, 그 움직임은 점점 거세졌다. 이어 모스는 바들거리며 제 얼굴을 감쌌다.
“아, 아….”
모스는 루인이 기억을 잃었을 때도 슬펐다. 당시에 그는 사람이 하나 죽었다고 생각했기에, 그 슬픔은 말로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모스는 기억이고 뭐고 다 상관없었다. 루인이 이리 자신이 가까이 있어도 알아보지 못한 것도 다 필요 없고, 상관없었다.
‘네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
그 지독한 절벽에서 살아 돌아왔으면, 이런 모습으로 살고 있으면 안 되지. 행복하게 지내야지. 비록 미쳤고, 눈과 귀를 도려냈다고 한들, 예쁘고 아름다운 황후를 곁에 들이고, 모두가 네 이름을 드높이는 가운데에서 활짝 웃고 있어야지.
모스는 제 몸을 감싸 안은 채 바들바들 떨다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구부정하게 허리를 펴지 못한 채 한 발 내디뎠다. 그의 발치에는 잔뜩 고인 핏물이 물결이라도 그리듯 일렁였다. 얕디 약한 물결임에도 모스의 발은 그 일렁임조차도 거스르지 못하겠다는 듯 일순 멈추었으나, 한 발씩 간신히 내디뎌 앞으로 나아갔다.
우뚝 서 있는 루인에게로 다가가면 갈수록, 그의 몸에 있는 상처들과 처참한 모습들이 점점 세세히 보였다. 그럴 때마다 모스의 발걸음은 멈칫했으나, 그는 어떻게든 움직여서 기어코 루인의 앞에 도착했다.
그렇게 앞에 간 그는 저 망가진 귀를 가진 루인이 들릴 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런 그에게 단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무엇이 널 이렇게 만들었어?’
대체 무엇이, 널 이렇게 만들었고, 이 어둠 속에서 넌 뭘 찾고 있냐고 묻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루인은 미동이 없었다. 미동 없이 우뚝 서 있는 모습은 지나칠 정도로 움직임이 없어, 얼핏 보기엔 그저 인형으로 착각할 정도였는데, 가까이서 본 모습은 더 심각했다.
눈두덩이를 가른 상처도, 목에 빼곡하게 난 상처도, 몸에서 나는 짙은 피 냄새도. 어느 하나 멀쩡한 곳이 없었다.
“…….”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모스가 이토록 가까이 왔음에도, 루인의 시선은 여전히 취한 이처럼 먼 곳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연신 헛소리만 하고 있을 뿐, 모스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의 늘 또렷하고 선명했던 금안은 수면 향에 취해서 몽롱하고 탁했으며, 귀는 멀어서 이리 가까이 와도 반응하지 못했고, 온몸에는 상처가 가득해서 귀한 이라는 것도 모르게끔 만들었다.
그토록 예민했던 이다.
누군가가 근처에서 살짝만 움직여도 알아차리고, 기민하게 반응했던 이라는 걸 모스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한데, 지금 그의 몰골이 어떠한가. 모스가 이렇게나 가까이 와 있는 상황 속에서도 이리 무방비로 내어진 채 가만히 있었다. 모스는 마치 자신의 존재 자체를 아예 지워 버린 것처럼, 수면 향에 취해서 멍하니 허공만을 응시하는 루인을 더는 지켜볼 수 없었다.
‘못 보겠어.’
모스는 눈을 질끈 감고, 손에 힘을 꽉 준 채로 뒤를 돌아 도망치듯 그의 앞에서 벗어나기로 다짐했다.
더 보고 있다가는 자신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기에, 내린 결정이었지만 마음과는 달리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움직여.’
하나 마치 말뚝이라도 박은 듯,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에 모스가 원망스레 제 발을 내려다보았다.
이곳에 더한 미련이 남았는지 제 말을 듣지 않는 몸에 모스의 얼굴에선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듯, 눈시울이 붉어졌다. 몇 번의 애원을 거듭한 후에야 굳어 있던 발이 말을 듣기 시작했다.
서둘러 이 방을 벗어나려던 그때.
“모스.”
그런 그의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치지 않았더라면. 그는 응당 그리했을 것이다.
어정쩡하게 몸을 앞으로 기운 채로, 모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몸이 굳어 버렸다.
‘내 귀가 드디어 고장 난 걸까.’
방금 틀림없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 거 같았는데.
“모스.”
그런 모스의 심정을 읽기라도 한 듯,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렸다. 더는 뒤돌아 있을 수 없었다. 모스는 몸을 돌렸고, 바로 제 눈을 똑바로 마주 보듯 응시하는 루인을 볼 수 있었다.
눈이 마주친 것만 같아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에 모스는 정말 그가 입 밖으로 꺼낸 단어가 제 이름이 맞는지 제대로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뒤를 돌자마자 자신을 똑바로 보고 있는 루인을 멍하니 보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제게로 향하는 루인의 시선이 몹시 곧아, 그는 순간 정말로 루인에게 제가 보이나 싶었지만, 곧 그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루인의 시선은 자세히 보면 모스를 바라본 듯하면서도, 무언가가 엇갈려 있었다.
‘그렇다면 방금은 우연의 일치? 혹은 헛것을 들은 것인가?’
모스가 혼란스러워하던 그때, 루인이 움직였다. 그는 팔을 느릿하게 들어 올렸는데, 그것에 모스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뒤로 물렀다.
아까 의원과 사용인들의 태도를 보아하니, 루인은 제 몸에 손대는 것을 싫어하는 것도 모자라 곁을 내주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근데, 자신은 그걸 봤으면서도 루인에게 이토록 가까이 붙어 있었으니, 눈치챘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이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뒤늦게 든 모스의 얼굴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틀림없이 날 해칠 거야.’
지금 그가 비록 눈과 귀도 멀고, 황제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고 한들, 그는 루인 윈스다. 언제든 제 앞에 있는 이의 목숨을 쉬이 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
당장 피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공포에 질린 듯 얼어붙은 모스에게 이어 벌어진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
루인이 모스를 휙 당기더니, 바로 꽉 껴안은 것이다.
틈 하나 없이 꽉 껴안은 몸, 닿은 곳에 작게 피어나는 열기. 모스는 루인의 품 안에 안긴 채 눈을 크게 뜨고 있는데, 그런 그의 뺨에 루인이 가벼이 제 빰을 문지르더니 이윽고 입술을 대었다.
비릿한 피 냄새 사이로 서로에게 익숙한 체향이 섞이고, 그 냄새를 깊게 삼키듯 마시던 루인이 모스의 뺨에 가벼이 입을 맞추었다.
‘이게 무슨…….’
모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여전히 눈을 크게 뜬 채, 제 뺨에 입을 맞추고 있는 루인을 보았다.
혹여 이게 꿈인가 싶었지만, 뺨에 닿는 까슬한 촉감은 거짓이려야 거짓일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그가 만족스럽다는 듯 숨을 내뱉더니 픽 웃었다.
“고작 팔 하나로 이리 진짜처럼 굴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마주하게 된 얼굴. 여전히 루인의 시선은 또렷하지 않았지만, 아까보다는 눈이 반짝거렸다.
“짐은 다리도 도려낼 수 있다.”
그 반짝거리는, 아름다운 금안. 빛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금안이 다시금 자신의 모습을 담고 반짝거리는 걸 본 순간, 모스는 제 심장이 일순 커다란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 여태 줄곧 찾던 게…….’
지금 드는 이 느낌을 감히 무엇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이 괴물아.”
괴물, 모스.
자신.
모스는 여태 루인이 저 어둠 속에서 자신을 찾아 헤맸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가까스로 서 있게 해 주던 발판마저도 밑으로 쑥 꺼진 것만 같았다. 하나 그 꺼진 발판 아래로 몸이 추락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끝끝내 루인에게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숨 쉬는 것도 잊었다. 모스는 숨마저 멈춘 채로 그를 응시하다가.
“……허억.”
우연일지는 몰라도 루인의 눈과 마주친 것처럼 느껴짐과 동시에 정신을 차렸고,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괴로운 듯 내뱉었다.
그리고 확 루인을 밀쳐 냈다.
확실히 수면 향에 취하긴 했는지, 갑작스러운 모스의 움직임에 루인은 짧게 휘청였고, 모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문을 향해 달려갔다.
“허억, 허억…….”
문까지의 거리가 이토록 멀었나. 들어올 때만 해도, 이리 방이 넓은지는 몰랐는데.
갑작스러운 뜀박질에 숨소리가 절로 거칠게 나왔다. 오로지 이 문을 박차고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그는 혹여나 뒤를 돌면 바로 뒤에 루인이 서 있을 것만 같아 뒤를 돌아보지도 못했다.
마치 쫓기듯 방을 나섰으나, 복도에는 사람 하나 없었다.
‘분명 아까 전만 해도 이 복도를 가득 채우다 못해 들끓듯이 사람이 가득했는데…….’
모스 홀로 텅 빈 복도를 질주하듯 지나,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을 내려가자, 그곳에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그들은 미친 듯이 뛰는 모스를 향해 멈추라며 소리를 쳤지만 모스는 멈출 수 없었다. 그는 쉬지 않고 뛰었다.
그렇게 뛰고, 뛰고, 얼마나 뛰었을까.
그토록 뜀박질이 빠를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급하게 황제의 궁을 나선 그가 향한 곳은 황궁에서 아주 외진 곳이었다. 그곳으로 도망치듯 간 뒤, 모스는 제 가슴을 움켜쥐고 주저앉았다.
“하, 아. 하아. 하아.”
이토록 미친 듯이 뛰었던 적이 언제더라. 뛸 때는 몰랐던 피로가 단번에 파도가 덮치듯 강하게 밀려 들어왔다.
마치 사지가 후들거리는 것만 같은 느낌에, 숨을 헐떡이며 벽에 기댄 채 제 몸을 진정시키려고 했으나, 쉬이 되지 않았다.
다만, 지친 와중에도 선연하게 떠오르는 장면은 하나 있었으니.
-모스.
제 이름을 부르던 루인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실은 그가 자신을 부른 그 순간부터 그에게 묻고 싶은 말들이 많았다.
‘왜 내 이름을 부른 거야? 방금 한 그 말은 뭐고, 왜 내게 그리 다정하게 입을 맞춘 거야? 왜 나를…… 찾은 거야?’
모스는 정신이 온전치 않은 그를 붙들고서라도 많은 말들을 묻고 싶었지만, 동시에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충동이 휘몰아쳐 더는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혹 누군가가 그 충동이 대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모스는 그 사람에게 쉬이 답할 수 없었다. 그건 그 누구에게도 말하기엔 부끄러울 정도의 날것인 행동이었다.
‘하마터면 입 맞출 뻔했어.’
바로 입 맞출 뻔한 충동.
만약 그 자리에 더 있었더라면, 그는 루인에게 입을 맞추었을 것이다.
‘어떻게 저기서 입을 맞출 생각을 하지?’
모스는 자괴감이 든다는 듯 제 얼굴을 감싼 뒤 자신이 미친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루인은 제정신도 아니고, 몸도 성하지 않았다. 당장 지금 제 옷을 보아도 그렇다. 그 짧은 새, 루인의 피로 물든 옷에는 여전히 피 특유의 비린내가 가득했다.
그러기에 모스는 자학을 하듯 제 머리를 두 손으로 후려쳤다.
‘진짜 이상해. 여태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모스는 혼란스러웠다. 황궁에서 루인과 매일같이 살을 맞대고 지낼 때, 그는 단 한 번도 루인의 입에 먼저 입을 맞추고자 생각한 적이 없었다.
매일같이 그의 눈치를 보며 살아남기 바빴으며,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정사에 정신을 차리는 것도 버거웠으니까.
그는 제 머리를 감싸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입을 맞추고 싶단 생각이 든 것은 결코 아니었다. 처음에는 자신을 못 찾아낼 정도로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그의 모습에 절망하고, 슬퍼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럼 오늘은 왜 그런 거지?’
그 충동이 언제 일었는지를 되짚어 생각해 보던 그는, 이어 빠르게 답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 괴물아.
그래, 그 순간.
모스는 그때야 깨달았었다. 루인이 여태 저리 미친 듯이 방을 헤집으며 찾던 게 자신인 것을.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순간만큼은 루인이 미친 것도 잊고, 그저 그의 얼굴만 보였다. 동시에 무언가가 벅차오르고, 묘한… 그래, 아주 묘한…….
“아.”
모스가 더는 생각을 이어 가지 못한 채, 새빨개진 얼굴로 제 얼굴을 거세게 벅벅 문지르다, 이윽고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베, 베일 두고 와, 왔구나.”
그러고 보니, 이곳에 달려오는 내내 얼굴이 지나치게 시원했다. 그 방 안에서 베일을 벗고, 챙겨 오질 않은 모양이었다. 하나 그렇다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기엔 이미 늦은 거 같았다.
‘내 얼굴을 누가 보았지?’
누가 자신의 얼굴을 보았나 되짚어 보던 그는, 이윽고 계단에서는 몇몇 사용인들이 서성이던 것을 떠올렸다.
루인의 피를 잔뜩 묻힌 채 나온 자신에게 그들이 뭐라고 소리를 질렀으나, 정신이 없어서 그 내용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은 기억났다.
그래 그 얼굴이 어떻게 생겼냐면…….
‘공포와 혐오.’
멈칫. 모스는 기억을 되짚어 보다가 얼어붙었다. 얼굴이 기억나기보단, 얼굴에 실린 표정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하얗게 질려 있었는데, 그들은 틀림없이 모스를 보고 있었지만, 실은 모스를 보고 있는 게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모스의 등 뒤 너머에 있을, 모스의 옷을 피범벅으로 만들었을 그들의 주인, 루인에 대한 공포였겠지.
“너, 너는 괴, 괴물이 아닌데….”
모스는 한숨처럼 말을 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루인은 살아 있었다. 비록 메리의 말처럼 미쳐서 눈과 귀도 멀고, 스스로를 해치며, 매일 홀로 그 적막 속에서…… 마치 숲에서의.
“나, 같은 게 아닌데.”
자신처럼. 괴물처럼.
모든 이의 배척을 받으며.
세상에서 가장 귀한 대접만을 받아야 한다고 여기던 이가, 이토록 멸시를 받으며 황궁에 산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이상하게 착잡했다.
그는 그렇게 한참을 외진 곳에 쭈그려 앉은 채 생각을 했다. 이윽고 제 얼굴이 흐릿하게 보일 정도가 된 늦은 밤이 되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난 모스는 어둠 속, 그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그림자에 스며들어 숙소로 돌아갔다.
‘꿈이라고 생각하자.’
어차피 복도 청소나 하는 처지인 모스가 루인을 다시 만나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 벌어진 일이, 루인에게도, 자신에게도 그저 단순한 꿈처럼 여겨질 가능성이 컸다. 그것에 모스는 묘한 감정이 일었다. 착잡한 것 같으면서도 다행이란 안도도 들고…….
“야! 너 어디 갔다 와?! 베일은 어디에 두고, 몸에는…… 이거 뭐야, 피?!”
하나, 그런 감정이 무엇이 그리 중요하겠는가.
모스는 이곳에 치테이르의 허물을 뒤집어쓴 마귀를 잡으러 온 것이고, 루인은 황제이며, 각자의 자리를 지키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모스는 원래의 자리로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황궁의 무수한 사용인들 중 하나로…….
“앞으로 네가 폐하의 방에 향로를 갖다드려.”
돌아왔다고 생각했었다.
***
텅 빈 방, 대체 이게 몇 번째 침실인지 모를 곳에서, 채 가시지 않은 피 냄새 사이로 지독한 향 냄새가 퍼진다. 마치 질식이라도 될 것처럼 그윽하게 들이찬 연기 틈 사이로 옅게 숨을 내쉬는 이가 하나 있었다.
하나, 그것을 ‘사람’이라 표현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모두가 의문을 가질 것이다. 뿌옇게 흐려진 방 안에 있는 그의 모습은 도무지 사람답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시체처럼 혹은 끈 풀린 인형처럼 축 몸을 늘어뜨린 채 앉아 있는 이의 머리카락은 정리가 되지 않아 엉망으로 뻗치듯 길러 있었는데, 색이 오묘했다.
단순 금발이라고 하기엔 마냥 맑은 색은 아니었고, 마치 피라도 묻은 양 군데군데가 붉게 얼룩진 머리를 한 이는 한참을 그러고 있다 고개를 들었다.
“…….”
연기 속에서도 저 이목구비는 감히 흐려질 수 없었다. 한 번 본다면 결코 잊을 수 없을 아름다운 얼굴이었으나, 생기랄 게 하나도 없는 이는 윈스 제국의 황제, 루인이었다.
그는 그렇게 말없이 허공을 보았다. 평소 지나칠 정도로 깔끔을 떠는 이가 맞는지 옷은 엉망이었으며, 옷 사이로 드러난 몸은 앙상하다는 표현이 걸맞았다. 그런 그의 왼쪽 팔에는 엄청난 양의 피가 묻은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손으로 왼쪽 팔을 만지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상하다. 기억에 없는 상처인데. 하나 그것들을 일일이 신경 쓰기에는 모르는 상처들이 이미 몸에 많이 늘었다. 어차피 이제는 하나둘 상처가 는다 해도, 모르는 기억들이 점점 늘어난다 해도, 상관도 없었고.
“……어딨어.”
그런 몸을 한 채 가만히 앉아 있던 루인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나타나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느껴지는 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인상을 구긴 그가 자리에서 무언가를 찾듯 손끝으로 옆을 더듬더니, 벌떡 일어나 움직이려고 했다.
하나,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그에게 움직이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바닥 카펫에 발등이 걸려 휘청인 그가 인상을 구기며 균형을 잡고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어딨어.”
루인이 왼쪽 눈썹을 위로 추켜올렸다. 그러자 눈가에 난 흉이 이를 따라 너울대듯 출렁였지만 루인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계속 허공을 보았다.
평소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 뜨길 반복하는 바람에 채 아물지 못한 상처에서 계속 흐르는 피고름에 한쪽 눈은 제대로 뜨이지도 않았고, 다른 한쪽은 뜨이긴 했으나 눈 자체에 자상을 입은 것인지 세상이 온통 흐릿했다.
“장난치지 말고, 나와.”
루인이 어이없다는 듯 그리 읊조리고는 눈을 뜬 채로 움직였다. 그러자 방금과 다른 움직임이 들어왔다. 눈이 멀쩡한 이처럼 자연스레 움직이는 건 결코 아니었으나, 아까처럼 카펫에 발끝이 걸리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이, 그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가기 시작한 것이다.
애초에 이미 뜯어진 그의 귀로 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혹 누군가가 루인에게 눈이 보이냐고 묻는다면, 루인은 안 보인다고 말하기는 뭣하고 보인다고 말하기도 뭣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눈을 도려낼 각오로 그어 냈는데, 실상 마주친 것은 암흑까진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희뿌옇게 보이는데, 간혹 색은 제법 인식할 수 있었고, 형태의 경우 가끔 잠을 푹 잔 날엔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이, 이, 있잖아.』
그래.
『차라리 주, 죽어 버리지, 그, 그랬어?』
이렇게.
귀가 멀었기에 소리가 들릴 리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루인은 계속해서 목소리가 들렸고, 목소리가 들릴 때면 앞에 아른거리듯 녹색이 보였다.
『으, 응? 주, 죽지, 그랬어?』
죽음을 종용하는 듯한 모스의 목소리, 아른거리는 녹색, 머리를 마비시킬 것만 같은 독한 향.
그 사이에서 루인은 웃는다.
“커, 커억, 컥-!”
어느새 나타난, 지독한 독내를 풍기며 온 암살자의 목을 단번에 틀어쥐며 웃는 루인의 한쪽 눈에서 피고름 섞인 생리적인 눈물이 뚝뚝 흘러 마치 피눈물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루인은 눈을 감지 않고 아른거리듯 보이는 녹색 형태에게 웃으며 연신 말을 걸었다.
“오늘은 왜 이리 늦게 왔나?”
손에 쥔 살덩이의 목숨이 끊어지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루인에게 더는 꿈과 현실의 구분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대답해.”
그리 말하며 손을 내뻗어 허공을 더듬는 것과 동시에 쥐고 있던 암살자의 시체가 바닥에 나동그라진다. 하나 루인은 그에 대해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어느새 입을 다문 환영에 신경질적으로 꾸짖듯 읊으며 인상을 구겼다.
“빨리. 죽여 버리기 전에.”
사나운 말투, 눈앞에 있는 것을 모조리 찢어 죽일 것만 같은 태도. 하지만, 우습게도. 그런 것과는 별개로 허공을 더듬는 그의 손은 지나칠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잡힐 리가 없는 허공을 휘젓듯 만지던 그는 이윽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닥쳤지. 틈만 나면, 조금의 심기라도 어지러워지면, 넌 이리 나오지. 나와. 좋은 말로 할 때 나와.”
그의 발이 신경질적으로 아래에 깔린 미동 없는 암살자의 시체 위로 내리꽂혔다. 순식간에 시체는 끔찍하게 뭉개졌으나, 루인은 개의치 않았다. 그저 가벼운 언덕을 넘는 듯, 시체를 밟고 성큼성큼 걸어가다가, 이윽고 멈칫하고는 고개를 휙 돌렸다.
『응, 그거야.』
동시에 모스의 목소리가 기다렸다는 듯, 루인의 귓가를 스친다.
그쪽으로 가. 그리 말하는 듯한 모스의 말에 루인이 홀린 듯 걸어가더니 이윽고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멈춘 그의 앞에는 일렁이는 무언가가 있었는데, 그는 제대로 앞이 보이지 않아도 냄새를 통해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 그거야. 응, 그거야.』
촛불.
이미 눈이 흐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는 그에게도 일렁이는 불빛이 얼핏 느껴질 정도로 커다란 초.
『만, 져 봐.』
모스는 그걸 양손으로 힘껏 만지라고, 루인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 사특한 의도에 루인은 픽 웃었다. 악을 빚어내 형상화한 것이 있다면 저것이지 않겠는가.
루인의 몸에는 성한 부분이 없었다. 얼마나 이런 일이 반복되었는지, 온몸이 흉으로 가득했으며, 몇몇 상처는 생사마저도 위협할 정도로 깊었고, 채 아물지 못해 새빨갛게 물든 자상들까지도 빼곡했다.
그럼에도 머뭇거림 따위는 사치였다. 저 목소리를 위해서라면, 저 일렁이는 녹색마저도 잃지 않기 위함이라면, 루인은 기꺼이 제 몸을 버릴 수 있었다. 그는 엉망이 된 팔을 하고도 손을 내밀어 움켜쥐었다.
치이익, 살이 뭉그러지듯 홧 달아오르는 느낌이 든 것과 동시에 아린 통증이 느껴졌다. 손바닥은 화상을 입은 듯 순식간에 엉망으로 변해 버렸다. 촛농은 팔목을 타고 흘러내려 상처들 위로 지지듯 뚝뚝 떨어졌다. 보기만 해도 끔찍한 고통일 텐데도.
“이제 만족하나? ……아.”
루인은 홀로 담담했다. 그는 오히려 확인을 구하듯 모스에게 묻고는, 어느새 선명해진 모스의 목소리에 만족한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하지만 모스는 배가 부를 줄 몰랐다. 그는 또다시 루인에게 요구했다.
『파, 팔을, 줘. 팔을, 팔을 줘.』
하나 루인은 아예 팔을 달라는 그 요구에도 활짝 웃었다.
“그래.”
『잔뜩, 줘, 줘, 줘.』
“이래야 너지.”
루인은 창가로 향했다. 망설임과 고민 따위는 없었다. 그는 사정없이 말라붙은 촛농이 덕지덕지 붙은 팔로 창을 후려치고, 또 후려쳤다. 루인은 팔의 살점이 너덜거림에도 행위를 반복했다.
기어코 제 팔이 구실을 못 할 정도로 피범벅으로 변하고 난 뒤에야 웃었다.
“만족해?”
이제 성한 팔은 없었다. 붕대가 감긴 왼쪽 팔에서는 상처가 터졌는지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고, 이번에 상처를 낸 오른쪽 팔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엉망이 된 두 팔을 한 루인은 생각했다.
이번에는 의식을 잃을 정도로 크게 상처를 냈으니 자신은 또 오늘을 기억 못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그럼에도 루인은 만족했다.
팔을 준 날, 상이라도 내리듯 모스가 나타난 꿈을 꾸었으니까. 다만 늘 모스는 꿈에 나왔기에, 새로울 것은 없었지만 이번은 조금 달랐다.
이번 꿈에서 나온 모스는 정말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만지면 따뜻했고, 말랑한 뺨에 입을 맞추었을 때, 마치 진짜처럼 부드러웠다.
“고작 팔 하나로 이리 진짜처럼 굴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그리하여 루인은 꿈속에서 그 몸을 끌어안고, 더 깊게 안으며 속삭였다.
“짐은 다리도 도려낼 수 있어.”
이리 만족스러운 꿈이 있을까. 팔 하나로 이토록 진짜 같은 모스를 만질 수 있다면, 몸을 다 내주면 어떨까.
모스의 환영은 늘 욕심이 많으니, 사지를 다 내주면 좋아할 것이다. 그럼 진짜보다도 더 진짜처럼 나타날 수도 있지 않을까.
루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독한 향냄새에 의식을 살짝 잃었다가 어김없이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역시나 그를 반기는 것은 코끝을 찌르듯 나는 독한 향냄새였다.
‘수를 늘렸나.’
들리는 게 없어 이 향의 의도를 알 수는 없으나, 루인은 이 향이 퍽 나쁘지 않았다. 매일 하나씩 수가 늘어 가는지 향내가 날이 가면 갈수록 진해지고, 몸을 가누는 건 나날이 더 힘들어지지만, 그 정도는 감내할 수 있었다. 이 향이 있으면 수마에 빠져드는 게 평소보다 빠르기 때문이다.
‘다시 잠들고 싶군.’
오늘따라 유독 머리도 맑았고, 잘려 나간 기억도 몇 개 없는 거 같다. 다만 지나칠 정도로 선명했던 모스와 닿았던 감각은 틀림없는 꿈임에도 불구하고, 손끝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에, 루인의 입매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한데…….’
그렇게 설핏 미소 짓던 그는, 이어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는 입매가 경직되었다. 루인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다가 인상을 구겼다.
본래 루인이 보는 세상이란 거의 흰색이나 다름없었다. 가끔 몸과 정신이 맑을 때 흐릿하게나마 색 정도는 보였는데, 오늘은 그 이상이었다.
애초에 눈을 감았다가 뜨는 감각조차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고장 난 눈인데, 감각이 지나칠 정도로 생생했으며 무엇보다도…… 아주 옅지만 보였다.
물론 정말 옅었다.
남들이 본다면 이걸 보인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라, 여전한 실명이라 하겠지만, 루인이 느끼기엔 이는 색만 보이던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딱히 치료받은 것도 아니고, 약을 한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시력이 서서히 돌아오는 거지?
형태의 외곽이 아주 흐릿하지만 보이는 것에 루인이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때, 그의 발치에 무언가가 가볍게 밟혔다.
눈이 보이지 않아, 그게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너무나도 가벼워 금방 날아갈 듯 나풀거리는 그것을 가벼이 만진 그는 이내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내려놓고 뒤를 돌았다.
그리고 어느새 나타난, 이 뿌연 세상 속 유일하게 보이는 선명한 존재를 보며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네가 고작 팔 가지고 만족하겠나?”
여느 때보다도 활짝 웃으며 무엇이든 줄 수 있다는 듯.
“이번엔 무얼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