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마지막 연회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슬슬 도착하실 분들을 맞이하러 가고, 자네들은 음식을 챙기고, 나머지는 술 저장고에 가고. 아, 너는 나와 함께 악단에 가서 이야기를 좀 하고, 그리고…….”
총괄자의 입에서 해야 할 일이 끝도 없이 나오는 것에 사용인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전날까지 준비를 열심히 했지만, 당일이 되니 생각했던 것보다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 탓에 사용인들은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연회장을 뛰어다녀야 했고, 이 와중에 귀족들이 하나둘씩 도착해 정신이 두 배로 없었다.
“모리스. 이것도 거기에 좀 놔 줘.”
모스도 바쁘기는 매한가지였다.
복장을 새로이 갖춰 입은 그는 베일을 뒤집어쓴 채로 음식들을 바삐 나르고 있었고, 그런 그의 옆에는 리엘이 있었다.
“야, 야야.”
“…….”
“야?”
한참 일을 하던 리엘이 모스를 불렀다. 그런데 모스가 뭔가 이상했다.
기계적으로 손만을 움직이는 모스는 넋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모리스?”
리엘은 주위를 의식해 조용히 모스를 불렀지만, 모스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에 리엘은 모스가 오늘 아침부터 좀 이상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밤을 꼴딱 새운 몰골로 아침이 다 되어서 들어왔지. 그러고 바로 이쪽으로 왔고.’
일의 강도가 꽤 높은지라, 리엘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기절하듯 잠드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 탓에 모스와 종종 마주치지 못할 때가 있었는데, 그렇다고 해도 리엘이 나갈 때쯤 들어온 거는 오늘 아침이 처음이었다.
물어볼까. 고민하던 리엘이 말문을 조심스레 열려고 하던 그 순간.
“너… 어제…….”
“여기! 술 좀 더 갖다주겠니?”
“아,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뭐라 모스에게 더 말을 붙이려던 리엘은 그새 텅 비어 버린 귀족의 술잔을 확인하고 부리나케 술 저장고로 달려가야 했다.
그는 나가기 전까지 모스가 걱정된다는 듯 뒤를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한편 모스는 제대로 들리는 게 없었다. 피로가 감당할 수 있는 지점을 넘어, 그저 시키는 대로 음식을 옮기는 것 외에 아무것도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한숨도 자지 못하고 이곳에 와 일을 하니 피곤한 게 당연했다. 게다가 그 피곤은 비단 오늘 하루만 쌓인 게 아니었다.
음식을 내려놓자마자 그간 누적된 피로가 물 밀려오듯 쏟아지며 시야가 핑 도는 것에, 모스가 잠시 테이블을 붙들고 고개를 푹 숙였다.
“거기 뭐 해! 빨리 움직여!”
하지만 그리 멈추어 있는 시간도 사치였다. 잠시 멈춰 있는 모스에게 다시 일감이 쏟아졌고, 모스는 다시 뛰다시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까보다는 확연히 사람이 늘었다. 움직일 때마다 귀에 쨍한 목소리들이 섞여 들어왔고, 어떻게 움직여도 어깨가 스칠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커다란 연회장을 꽉꽉 채우고 있었는데, 특히 여인들이 많았다.
모스의 시선이 느릿하게 그들을 향했다.
너무나도 귀하게 보이는 사람이 많았다. 하나같이 눈이 멀 것처럼 반짝거리는 보석들을 달고 있었고, 형형색색 아름다운 옷들을 걸치고 있었다. 움직임은 또 어떻고. 귀한 집에서 귀하게 자란 태는 그들의 손끝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었다.
그 모습들을 순간 넋을 놓고 바라보던 모스는 고개를 숙여 제 옷을 바라보았다. 베일을 쓴 얼굴, 혹 무언가가 묻어 더러워질 것을 고려한 새까만 옷.
그 새까만 옷을 이 화려한 이들 사이에서 입고 있으니, 마치 그림자처럼 보였다.
결코 저들과 어우러질 수 없는 것처럼.
‘여기서 황후가 뽑히겠지.’
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이러는지.
모스는 애써 생각을 접으며 창가를 바라보았다. 아침에 보았던 흐린 일출이 착각은 아니었는지 하늘은 당장이라도 비를 내릴 것처럼 흐렸고, 시간은 어느덧 저녁을 향해 가고 있었다.
때마침 주머니 속 열쇠가 짤랑거리며 오늘 그가 해야 할 일을 알렸다. 신관이 말한 향로를 옮길 시간이 온 거 같다.
몰래 연회장을 빠져나가기 위해 모스가 사람들 사이를 걸어가는 동안에도, 귀족들은 계속해서 떠들었다. 욱신거리는 머리를 뚫고 들어온 말들은 죄다…….
“그래서 폐하께서는 언제 오시지? 자네가 생각하기에 황후 폐하는 어느 여식이 될 거 같은가?”
“당연히 명망이 높은 케드릭 후작가의 여식 아니겠는가? 그 집은 어찌나 콧대가 높은지, 여태 혼사를 다 고사하고 황후 자리를…….”
“내 생각엔 황후는 틀림없이…….”
“어허, 황후 폐하께서는-.”
황후, 황후, 황후.
모스는 고귀한 자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대화 주제를 갖는지는 비천하고 못 배운 자신이 알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황후’라는 단어만큼은 모스의 귀로 계속 들어왔다. 마치 이 연회의 목적이 확실히 황후 간택을 위한 것이니, 헛된 생각일랑 하지 말라는 것처럼 느껴지는 통에 모스는 쓴웃음을 짓고 더더욱 발을 빨리 놀렸다.
루인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본래라면 일찍이 자리하고 있는 게 맞지만, 애초에 참석한다는 것 자체가 대부분이 기적이라고 생각하는지라, 다들 루인이 늦게 온다는 것에 별다른 생각이 없는 거 같았다.
‘결국 못 보겠네.’
왜일까. 조금 아쉬운 것은.
그에게 괴롭힘을 당한 아래는 아직도 아프고, 마음은 그보다 더 아팠음에도, 모스는 화려하게 꾸민 저 상석에 앉게 될 루인을 보지 못한다는 게 조금 아쉬웠다. 보기만 해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 저 상석에, 마치 세상의 보석을 다 갖다 놓아도 아름다움이 비할 바가 되지 않는 루인이 앉는다면…….
‘……어?’
그때 모스는 혹, 제가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었나 싶은 생각을 함과 동시에 눈을 의심했다.
문까지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데, 그 앞부터 사람들이 하나둘씩 몸을 바짝 낮추기 시작했고, 그 낮아진 몸들 사이로…….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루인이 들어오고 있던 것이다.
사람이 북적이고 귀가 터질 듯 시끄러웠던 연회장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아니 어쩌면, 모스 홀로 그 정적 속에 잠겨 든 것일 수도 있었다.
루인의 모든 움직임 하나하나가 느릿하게 보였다.
눈이 보이지 않는지라, 카를의 부축을 받고 있었지만 그건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루인은 온통 흰 옷이었다.
금색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리 화려한 문양도 아니건만, 루인의 외양 탓인지 이 모든 게 자극적일 정도로 화려하게 보였다. 루인은 이곳에 있는 그 어느 이보다 아름답고, 귀해 보였다.
“뭐 해, 빨리 엎드려!”
아. 넋을 너무 놓고 있었나 보다.
모스는 이토록 가까이 왔는데도 홀로 우두커니 서 있던 것을 깨닫고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른 이들처럼 몸을 납작 엎드렸다.
모스는 더는 루인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발은 볼 수 있었다. 그의 발이 제 앞을 지나가는데, 루인은 신발마저도 희었다.
“모두 고개를 들라.”
이윽고, 루인이 황좌에 앉자마자 카를이 루인을 대신해 입을 열었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이들은 몸을 일으키자마자 황좌를 응시했고, 그건 모스도 마찬가지였다.
“제국의 태양을 보게 되어 영광입니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모두가 고개를 숙이며 그리 말했다.
그 상황에서도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은 저 멀리, 홀로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는 루인뿐이었다. 그는 제 앞에 있는 이들이 고개를 조아려도, 별다른 표정 없이 모두를 내려다보는 자세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
모스는 느껴졌다.
음악도 흐르지 않는 정적 속, 모두가 그의 외모와 기세에 눌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을. 방금까지만 해도 방긋방긋 잘 웃던 귀족들도, 황후 자리를 위해 온 거 같은 여식들도. 죄다 얼빠진 얼굴로 그를 보고 있는 것을.
본인이 이뤄 낸 침묵을 귀가 들리지 않는 그가 과연 알까.
그는 그저 마치 그림과도 같은 모습을 한 채,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다만 모스가 느끼기에, 루인은 눈이 보이지 않으면서도 무언가를 찾듯, 혹은 살피듯 고개를 느릿하게 돌리고 있었는데…….
어쩐지, 눈이 마주친 거 같다.
틀림없이 자신은 베일을 쓰고 있었고, 그는 눈이 보이지 않았다. 하나 이 많은 사람들 중, 루인이 자신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
마치 이 커다란 연회장에 둘만 남겨진 것만 같은 오롯한 그 느낌에, 모스는 홀린 듯 루인을 보았다. 그리고 그건 루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모스가 있는 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 죄송…… 뭐 해요?!”
모스는 제 어깨에 거세게 부딪힌 이을 보고,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처음엔 귀족인 줄 알고, 사과를 하다가 이윽고 상대가 모스인 것을 보자 버럭 화를 냈다.
“뭐 이리 길을 막고 있어? 무례하게!”
허둥지둥 깊게 고개를 숙였지만, 그의 비아냥은 계속되었다.
모스는 절로 나오려는 신음을 애써 삼켰다. 사람이 이토록 많은데, 몸을 부딪칠 수도 있는 건 당연했지만, 자신의 처지는 달랐다.
한참을 사과하던 모스는 문을 응시했다. 그가 문 쪽으로 향하기 시작하자 기다렸다는 듯 음악이 흘러나오며, 동시에 사람들의 말문이 터진 듯 연회장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모스는 그 소란스럽고 떠들썩하고 축제 같은 분위기 속에서 홀로 침묵에 잠긴 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소문보다는 조용하신데요?”
“광증이라더니, 다 뜬소문인 것 같소. 저 정도면, 충분히 황후를 맞이해도…….”
처음에는 그리 빠르지 않은 걸음이었다.
“다들 봤어요? 방금만 해도 시큰둥하던 여식들 눈에도 이채가 도는 것을.”
“당연히 봤지요. 다들 하나같이 자신이 황후가 된 상상을 하는 거 같던데?”
“하하, 맞소. 관심 없던 이들조차 관심을 가질 외모 아니겠소.”
“이번에 경쟁이 치열하겠어.”
하지만 그 걸음은 점점 빨라지더니, 나중에는 뛰다시피 움직이고 있었다. 모스는 더는 듣기 싫다는 듯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향을 옮긴단 핑계로 연회장을 벗어났다.
다만 그리 도망치듯 그곳을 벗어나면서도 모스의 마음 한편에서는 저리 반짝반짝 빛나고, 모두가 탐내는 것이… 자신의 세상이었다는 자랑스러움이 피어났다.
비록 아무에게도 자랑할 수 없더라도.
***
문을 지키는 문지기와 기사들은 다들 피로한 얼굴을 한 채, 미간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
이 제국의 귀족이란 귀족은 죄다 오늘 올 것이란 말이 낭설은 아니었는지, 그들은 하루 종일 마차 문을 열어 신분을 확인해야 했다.
“뭐 이리 숨기는 게 많은지들 몰라.”
“윗사람 마음을 우리 같은 아래 것이 어찌 헤아리겠어?”
다만 그 과정이 죄다 녹록지 않았다는 게 피로의 원인이었다. 문을 열어서 신분 좀 확인하겠다는 말 하나에도 꼬투리 잡고,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이들이 어찌나 많은지.
“그래 봤자, 황제의 아래나 핥으러 오는 것들이지. 쯧.”
“어허, 자네는 말도 참……!”
신랄하게 말을 한 이의 얼굴에는 심술이 덕지덕지 쌓여 있었다.
“이제 더는 올 사람이…….”
“자네가 말하기 무섭게 저기 누군가가 오는데?”
기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저 멀리를 응시했다. 누군가가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연회 시간은 훌쩍 지났는데. 늦게 오신 건가. 한데 마차가 없는 걸 보아하니…… 황궁의 손님은 아닌가.’
종종 거지들이 멋모르고 구걸을 하러 올 때가 있어서, 기사들이나 문지기는 홀로 걸어오는 이의 행색이 그리 귀족답지 않은 것에 미리 지레짐작하듯 시큰둥한 낯으로 문 앞에 가서 섰다.
“…누구십니까? 어느 가문에서 왔는지를 밝혀 주시…… 커억!”
모든 게 눈 한 번 깜빡일 새에 벌어진 일이었다. 다가오던 이가 순식간에 가장 앞에 있던 기사의 목을 거둔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멍한 얼굴로 앞에 있는 이를 보았다.
틀림없이 기골이 장대하다고는 하나 인간이 맞는데, 움직임이 여간 빠른 게 아니었다.
“이, 이게… 무슨…!”
병사들이 경악하며 뒤늦게 검을 빼 드는 사이, 그것은 고개를 들어 씨익 웃었다.
“형님은?”
푸른 눈이었다.
***
모스가 연회장을 벗어나자 기사들 몇몇이 의아한 듯 그를 보았으나, 모스가 입고 있는 의상과 베일을 보고 사용인이라 생각했는지 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방심을 틈타 모스는 복도를 뛰어서 곧바로 신관이 말한 황제궁의 1층 창고로 향했다.
끼익…… 그곳의 문을 여니, 온갖 잡동사니들이 가득했고, 그 사이 향로도 있었다. 향로가 그리 귀한 거라 하더니, 말과는 달리 귀찮아서 제대로 관리도 안 하고 여기에 처박아 둔 신관의 행태가 어이가 없었다.
모스는 양손으로 향로를 들고 곧바로 신전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걷는 길은 조용했다.
소름 끼칠 정도로 조용한 길에 모스는 방금까지 제가 연회장 안에 있었다는 사실이 마냥 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문득 그 장면을 떠올리니, 현실과 동떨어진 감각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마치 그림처럼 떠오르는 선연한 루인의 모습에 발길을 멈추었던 모스가 두통과 더불어 느껴지는 통증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부터 머리가 아픈 건 둘째 치고, 이젠 허리까지 아파 온 것이다.
어제의 정사 때문인가 싶기도 했지만, 무언가 결이 달랐다. 마치 불에 덴 것처럼, 무언가에 지져지는 듯이 아파서 허리를 보고 싶었지만, 손이 부족해서 그저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신전으로 가는 길은 꽤 멀었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어, 왜 신관이 그토록 게으름을 피웠는지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모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덧 하늘을 보니 가뜩이나 흐린데 해 모습이 거의 없었다. 점점 땅거미가 올라오는 길을 걷는데, 길은 꽤 길었다. 하지만 그 긴 길 위에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는 문득 이 모습이 참으로 이질적이고 낯설다고 느껴졌다. 황궁이란 곳은 어딜 가나 사람이 많아, 사용인으로 그동안 지내면서도 이렇게 조용했던 적은 없었던 것이다.
‘연회라 그런가…….’
하기야 그럴 만도 한 게, 지금 연회가 한창인데 황궁 내에 있는 신전으로 가는 길목에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사용인들은 다 연회장에서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녀야 했고, 모스도 원래대로라면 그 연회에서 부지런히 일하고 있는 게 맞았으나….
‘무거워.’
신관의 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향로를 가져다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 생각을 하는 사이, 드디어 신전이 눈에 들어왔다. 황궁 안에 있는 신전임에도 크기는 제법 컸다.
그는 괜히 신관들의 눈에 띄었다가는 긁어 부스럼을 일으킬 거 같아, 인기척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움직였다. 다행히 오늘 연회에는 신관들도 참석한다고 얼핏 들었던 게 사실인지 개미 한 마리도 없었지만, 신관이 말한 노란 문양이 기다랗게 새겨진 곳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니던 그때, 모스는 신관이 말한 곳을 찾았다.
신관의 묘사대로 기다란 노란색 문양이 새겨진 허름한 곳이었는데, 열쇠를 꽂아 보니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다.
“코, 콜록.”
문을 열자마자 퀴퀴한 냄새와 먼지가 훅 바깥으로 쏟아져 나왔다. 순식간에 앞이 뿌옇게 변하는 것에 모스가 고개를 휙 돌려 기침을 한참이나 했다.
이어 그렇게 문을 열고 얼마 있지 않아, 파도처럼 덮쳐들던 먼지가 느릿느릿 개기 시작했다. 이윽고 보이는 풍경은 신전에서 쓰는 물건들이 방치된 채 놓여 있는 것이었다.
‘저긴가?’
두리번거리던 그는 누가 보아도 그나마 먼지가 덜 쌓인 자리, 아마 이 향로를 두었던 것 같은 자리를 발견했다. 그곳을 본 모스는 한숨을 내쉬고는 그쪽으로 향로 두 개를 내려놓았다.
그는 향로가 귀한 것이라고 그리 강조하면서도, 막상 이런 허름한 창고에 보관하라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깨달았다.
‘섞여 있구나.’
향로를 두는 자리 뒤에는 똑같이 생긴 향로들이 줄줄이 놓여 있었는데, 그 수가 지나칠 정도로 많은 걸 보니, 여태 진짜 향로와 가짜가 섞여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아마 루인의 침실에 두는 것도 마찬가지일 거다. 어차피 향로의 본질은 향이니 향로가 가짜여도 그리 큰 영향은 없을 것이니, 진짜와 가짜를 섞어서 둔 것이겠지. 진짜는 하나만 넣어도 되니까.
모스는 한숨을 내쉬고 뒤를 돌아 곧바로 나가려다, 비가 부슬거리며 내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머뭇거리는 사이, 빗방울이 순식간에 굵어져서 이젠 폭우 수준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쏴아아--.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급격하게 쏟아지는 비는 황당하다 못해 맥이 빠질 수준이었다. 이런 것을 보면 봄은 별로인 거 같기도 하다. 겨울엔 몽글몽글한 눈이 내려서 예쁘기라도 하지…….
‘그나저나 여길 어떻게 지나가지?’
몸 하나 덜렁 왔으니, 저 비를 뚫고 갈 수단이 없었다. 어떻게 가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이렇게 힘들게 나가 봤자 갈 곳이라고는 연회장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는 머뭇거리다가 이내 쭈그려 앉았다. 비가 너무 많이 내리니까, 비가 조금 멎을 때까지만 여기에서 기다리는 게 좋겠다는, 괜히 연회장에 가기 싫어 핑계를 대어 본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허리가 엄청나게 욱신거리면서 아팠는데, 이젠 그게 무시할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
머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어느 하나 성한 부분이 없고, 비도 오고…….
“……어?”
그때, 이상한 게 보였다.
모스는 제 눈을 의심하듯 감았다 떴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주저앉아 있던 그는 천천히 몸을 세웠다.
터벅터벅…, 그가 느릿하게 걷기 시작했다. 걸어가면서도 그의 시선은 창고의 구석에 꽂혀 있었다.
먼지가 쌓여 있는 그곳에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한 모스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 먼지 구덩이 사이로 손을 내뻗은 모스는 이어 눈을 크게 뜨고 제 손에 들어온 그것을 한참이나 멍하니 응시했다.
“……!”
이것의 가치를 그 누구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게 이리 먼지 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겠지. 하기야 생각해 보니 몇백 년이나 흐른 일이다. 이걸 아는 이들은 이미 죽고 없으며, 설령 있더라도…….
“이, 게 왜……?”
이걸 사용한 이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모스는 손끝으로 먼지를 훑고, 이어 단검을 감은 목걸이에 새겨진 음각을 보고선 놀란 듯 읊조렸다.
“모, 리스, 워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모스가 마지막 순간 마왕의 심장을 찔렀던 성검이었다.
돌고 돌아 이 성검을 손에 쥐게 된 모스는 소름 끼친다는 듯 손을 놓았다.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성검이 바닥으로 낙하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휘젓다 제 머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미친 듯이 눈을 깜빡이다 이윽고 무언가를 본 듯 창백하게 질렸다.
“왜, 왜….”
그는 허공을 보고 연신 도리질하며 읊조렸다. 그러고는 제가 보이는 것을 부정하려는 이처럼 굴었으나.
“기, 길이 보, 여?”
그의 눈앞에 보이는 길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 길.
그건 평범한 사람들이 말하는 길이 아니었다.
길잡이에게만 보이는 길이 모스의 눈에 다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가, 갑자기 왜?”
마왕을 죽이는 법도 알려 주었던 그 길.
햇빛이 내리쬐듯 보이는 황금색 길.
하지만 이번 생에선 길이 보이지 않았기에, 모스는 앞으로는 더는 길잡이로서의 명을 이어 가지 않아도 된다고, 이 굴레에서 벗어나서 다행이라고 여겼으나, 지금 보이는 게 그럼 길이 아니고 무어라 말인가.
모스는 혹시나 싶은 생각에 창백해진 얼굴로 아까부터 아프던 허리 부분의 옷을 들춰내서 보았다. 그리고 허리를 보자마자 비명이 나올 것만 같아 입을 틀어막은 뒤 경악했다.
‘반점이 어느 틈에…?!’
길잡이의 특징인 반점이 모스의 허리에 보란 듯이 있던 것이다.
모스는 틀림없이 이번 생의 시작을 기억했다. 모스의 생도 그렇고, 이번 생도 그렇고 둘 다 분명 허리춤에 이 반점이 없었다.
‘그럼 아까 그 통증이…….’
돌이켜 생각해 보니, 모스는 이 신전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불로 달궈진 쇠꼬챙이로 허리를 지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반점은 그때 생긴 게 틀림없었다.
신관으로 향해야만 했던 상황, 창고에서 보게 된 성검, 그리고 되찾게 된 길잡이의 능력. 그는 이 모든 게 자신에게 마치 아무리 애를 써도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듯 말하는 것 같아, 문득 제 처지가 한없이 서러워졌다.
서러움에 얼굴을 감싼 채 주저앉아 있던 그의 발 앞에 펼쳐진 길이 얼른 움직이라고 재촉하듯 반짝거렸다. 그 빛에 못 이겨, 손가락 틈새로 물끄러미 길이 반짝이는 것을 바라보던 모스는 대체 저게 무슨 길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끔뻑이며 보다, 이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두 눈을 부릅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설마.’
갑자기 제 눈앞에 나타난 성검과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 길과 상황은 낯익었다.
그래, 마치…….
‘마귀가 온 건가?’
그때 마왕이 나타났을 때처럼.
모스는 탄식했다. 신은 무엇이든 우연으로 안배해 놓지 않기에, 이 성검을 들고 저 길을 따라가면 마귀가 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습게도, 막상 고대하던 순간이 닥쳐오자 모스는 나약한 생각이 들었다.
‘그냥 이대로 도망칠까. 나 같은 게 뭘 한다고…….’
생각해 보면 우습다.
저 검 하나로 뭘 어쩌겠다고.
그는 육체적인 능력도 떨어지고, 더는 괴물도 아닌지라 팔이 잘리면 잘릴 것이고, 다리가 잘리면 잘릴 것이며, 목이 뽑히면 그대로 죽을 것이다.
그런 자신이 마귀를 막겠다고 가는 게 말이 되는가?
‘나는 못 해. 못 할 거야.’
모스는 할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신이 길잡이의 능력을 돌려주는 것도 모자라 성검이 제 앞에 나타난 것까지. 이 정도로 안배했다는 건… 정말로 마귀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뜻일 터.
‘무서워.’
하지만 알면서도, 모스는 할 수 없었다. 그는 두려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마왕의 악기 앞에서 그의 동료들이 얼마나 우스울 정도로 쉬이 무너져 내렸는가.
마왕의 손짓 하나에 그토록 강인했던 이들이 반으로 갈리고, 죽고, 그랬는데… 이번엔 비록 마왕은 아닐지언정 그들도 없이 홀로 마귀와 맞서야 된다고 생각하니 공포스러웠다.
“모, 못 해.”
무엇보다도 모든 것을 잊은 채, 봄을 삼키고 두 번 녹아야 했던 그 끔찍한 저주를 혹여나 다시 마주하게 될까, 그게 더 두려웠다.
마왕이 건 저주 때문에 모스는 그간 긴 세월을 홀로 헤매었는데, 마귀라고 그런 능력이 없을까. 만일 마귀에게 마왕과 같은 저주를 걸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또 저주에 걸리면 어떡하지? 또다시 고통 속에서 수없이 무너져 내릴 텐데, 그걸 버틸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가겠다는 말이 쉬이 나오지 않았다. 절대 그럴 수 없었다. 모스는 성검에게서 외면을 하려는 듯 뒤를 돌고 벌벌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오라버니.
눈물 젖은 메리의 얼굴도 떠올랐다. 더는 어린 여동생에게 마지막 인사하는 법도 가르쳐 주지 않고 죽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제 어린 동생은 없다. 그저 살날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이만이 있을 뿐이기에, 모스는 그녀의 남은 생을 결코 홀로 두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었다.
‘돌아간다고 했으니까.’
모스는 생각했다.
어차피 루인은 오늘 황후가 될 법한 이를 물색해 들일 것이고, 그는 강인하고 아름다운 이니 마귀가 찾아온다고 해도 쉬이 이겨 낼 수 있을 것이니…, 그러니까 나는… 나는…….
“가, 갈래.”
돌아갈래. 이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도망치겠다며 모스가 자리를 박차고 창고에서 뛰쳐나왔다.
문을 도로 잠가야 한단 생각도, 열쇠를 챙기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쏴아아……!
마치 하늘에서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비가 쏟아졌다. 빗물은 순식간에 그의 베일을 적시고 얼굴에 들러붙었지만, 모스는 개의치 않았다.
그저 그는 신에게 보라는 듯, 그가 가리키는 길을 밟지 않고 반대로 뛰려고 했다.
[모리스.]
제 뒤에 서 있는 이를 발견하기 전까지.
모스는 갑작스러운 부름에 멈칫했다. 이윽고 그의 앞에 서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는 앳된 얼굴에 고개를 갸웃 기울이다 천천히 경악스러운 얼굴로 바뀌었다.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왜냐하면 봄이 돌아오고 평화로운 세상이 찾아왔을 때, 마왕에게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어린 네 명의 용사들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올랐었으니까.
그중에서 가장 용감하고 아름다웠던 오웬이 기억보다도 더 앳된 얼굴을 하고, 흐릿하게 모스의 앞에 선 채,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오, 웬?”
그 얼굴이 유독 어려 보여서 모스는 순간 상황도 잊고, 오웬이 이렇게 어렸었나 싶었다.
그만큼 오웬은 앳되어 보였다. 하긴 돌이켜보면, 그들은 스물도 안 된 시절부터 용사를 하겠다고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마왕을 조우한 게 스물을 막 넘었을 무렵이었다.
“네가, 왜…….”
다만 모스는 그가 왜 지금 나타나서 자신을 이리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간 꿈에서조차 단 한 번도 안 나오던 이 아닌가.
그것에 넋을 놓은 모스가 오웬을 보는데, 오웬은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썹을 휘며 안타까이 말했다.
[가는 거야?]
오웬이 고작 말 한마디를 했을 뿐인데, 모스에겐 그 말이 마치 도망가는 자신을 질타하는 것처럼 들렸다. 지레 찔린 모스는 도리질하며 뒷걸음질 쳤다.
“갈 거예요. 나, 나는 이제 못 해.”
미친 듯이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모스의 몸이 휘청였다.
“그간 힘들, 었어. 내, 내가 무엇, 을 그, 렇게 잘못했어?”
그는 눈 뜨기도 힘든 상황임에도, 베일을 벗진 않았다.
질식이라도 할 것처럼 계속 베일이 얼굴에 들러붙었지만, 모스는 제 표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에 베일을 뒤집어쓴 채 그저 연신 고개를 저었다.
“나, 나는… 태, 태어날 때부터 저주바, 받았다고, 맞고, 버림받고….”
울컥한 얼굴로 모스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오웬은 여전히 미동 없이 모스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는데, 그 멀끔한 얼굴을 보니 어쩐지 제 얼굴이 추악해 보이는 거 같아 모스는 더듬으며 변명하듯 중얼중얼 말했다.
“마왕을 주, 죽였다고 괴, 괴물이 되고, 그래서 호, 홀로 그, 그 긴 세월을 무지렁이가 되, 된 채 나는…….”
나는, 진짜, 힘들었어.
그리 말하는 모스를 오웬은 빗속에 하나도 젖지 않고 물끄러미 모스를 응시하다가 말했다.
[도망가.]
탓하는 말 같은 건 없었다.
[멀리 떠나. 더는 무언가를 위해 희생하지 말고, 길을 안다고 앞장서지 말고, 그 누구의 수단도 되지 말아. 설령 그게…… 신일지언정.]
비는 끊임없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토록 시끄러운 장대비 사이로도 오웬의 말은 또렷하게 들렸다. 마치 마음에 스며드는 듯이.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
그렇게, 모스에게 닿았다.
너무 듣고 싶었던 말이어서 그랬던 걸까, 아니면 자신보다 훨씬 일찍 죽고, 그 끝이 비참했던 이의 말이어서 그랬던 걸까.
이상하게 저 이야기를 듣는 내내, 모스는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간 고통스럽고 수고로이 살았던 그의 생을 인정해 주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 안에 스며든 슬픔까지 알아주는 느낌이었다.
“그럴 거예요. 나는 내가, 워, 원하는 대로 살 거야.”
모스가 주억거리듯 그리 말하고 뒤를 돌았다.
“더는 아,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 을 거야. 설령 길이 보이더라도 그, 그 길은 가지 않을 거야. 누군가를 위해 희, 희생해야 한대도 그 사, 상대가 루인일지라도, 나는…….”
나는… 나는…….
그리 한참을 같은 말을 반복하던 그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그는 더는 읊조리지 못하고 그저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그 비를 오롯이 온몸으로 다 맞으며 서 있을 뿐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어 들어가는 그의 눈동자가 아래를 향했다.
가야 하는 길이 아닌 반대로 거슬러 왔기에 길이 없는 곳이었다. 황금색 길이 없이, 아무것도 없는 흙바닥을 보던 그는 이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결국 그는 뒤를 돌았다.
여전히 빗속에선 오웬이 서 있었고, 저 멀리에는 버려진 듯 바닥에 성검이 있었다. 모스는 그런 오웬을 스쳐 지나가 성검을 주워 든 채, 뒤를 돌았다. 그리고 뒤를 돌자마자, 헛웃음을 지었다.
풍경이 달라졌다.
아까는 길이 하나만 보였는데, 이제 더는 그의 눈에 길이 하나만 보이는 게 아니었다.
온 세상이 길로 변해 있었다.
마치 이 모든 게 그의 길이라는 듯이.
모스는 그 모습을 한참을 보다 성검을 힘주어 움켜쥐고, 비가 내리는 잿빛 세상 속에 몸을 내던졌다. 그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뒤를 도는 법을 모른다는 듯 달리는 그의 발치에 흙탕물이 튀겨 옷은 엉망이 되었고, 베일은 계속 얼굴에 붙었지만, 모스는 앞만 보이는 이처럼 굴었다.
달리고, 또 달려가던 모스, 그때 그는 뒤늦게 무언가가 생각난 듯 뒤를 돌았다.
어느새 점처럼 작아져 있는 오웬, 하나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모스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는 그를 향해 모스는 잠시 머뭇거리다 베일을 살짝 들어 입을 벙긋하고 마저 뛰어가기 시작했다.
[…….]
홀로 남은 오웬은 환영인 게 틀림없음에도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오웬, 너는 용사야.
***
“폐하, 대체 뭘 찾으십니까?”
카를은 들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그리 물었다.
루인은 오늘 이상했다.
원래 이 연회는 루인이 참석해 주면 좋았지만, 굳이 참석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자리였다.
황후 후보를 물색하는 것은 황제파 귀족들 선에서 끝나도 되는 것이었고, 어차피 황후를 맞이해 봤자, 현재 루인의 상태로는 그 끝이 좋지 않을 거라 생각해, 그저 귀족들의 성화를 못 이긴 허울뿐인 황후를 들일 생각이었으니까.
“오늘 진짜 이상하십니다. 이 연회에 참석하신 것도 그렇고, 이렇게 일찍 오신 것도 그렇고.”
그러기에 카를은 귀족들에게 루인이 연회에 참석하는 것처럼 말을 흘렸지만, 막상 연회가 시작되었을 때는 루인의 몸이 좋지 않아 참석할 수 없다고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루인이 어떻게 안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귀환한 카를을 보자마자 곧바로 이 연회에 오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도 모자라, 예상 시간보다도 이르게 자리에 왔다.
‘제대로 말씀드린 적도 없고, 들리지도 않으실 텐데…… 이 연회는 어떻게 알고 오겠다고 하신 것인지. 혹 귀가 들리시나? 아니면 누가 손에다 글을 써서 알려 줬나. 또 왜 이렇게 꾸미셨지?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으신가.’
게다가 꾸미기는 어찌나 꾸몄는지.
몸도 좋지 않은 이가 하도 안 입어서 창고에 둬야 하나 고민하던, 그가 가진 옷 중 가장 화려한 의상을 직접 꺼내달라 말해서 입은 것도 모자라, 저리 꾸미고 왔다는 것도 굉장히 의외였다.
가뜩이나 그냥 왔어도 이곳에서 가장 시선을 사로잡을 외양인데, 작정하고 꾸미고 온 루인은 이곳에 있는 그 어느 미인보다도 빛이 났다.
그 말이 단순 카를의 콩깍지만은 아닌 게, 지금만 해도 이 자리의 귀족들의 시선이 전부 루인에게 향하고 있지 않은가. 아닌 척 기웃거리는 이들도 있고.
그러나 막상 저리 꾸미고 온 루인은 그들에게 관심이 없어 보이는 거 같기도 하고, 있어 보이는 거 같기도 했다.
왜 그리 표현하냐면 루인의 움직임이 카를이 보기엔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었던 탓이다.
‘왜 저리 두리번거리시지?’
어차피 눈이 다쳐 보이는 게 없을 텐데, 루인은 무언가를 찾는 듯 계속 고개를 움직이고 있었다. 정말 이곳에 온 이유가 황후 감을 찾기 위한 것처럼 보이기에 카를은 혹 자신이 자리를 비운 새 루인에게 무슨 일이 있나 싶었다.
‘아니면 이미 향의 효과가 돈 것인가?’
카를은 제 목이 잘릴 각오를 하고 성력으로 빚어낸 초를 매일 켜게 만든 게 드디어 효험을 발휘한 것인지 눈을 가늘게 뜨고 루인을 살폈다. 그러나 루인은 이전보단 상태가 좋았지만 여전히 눈과 귀가 안 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황궁을 너무 오래 비워서 영 아무것도 모르겠네.’
카를은 수도의 살인 사건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그걸 채 수습하기도 전에 이 어리둥절한 상황에 놓이게 되니, 혼란스러운 게 당연했다.
하지만 루인은 그 혼란스러움을 잠재우기는커녕, 오히려 더더욱 생뚱맞은 말을 했다.
“사용인들은 여기 다 모인 건가?”
“……예?”
“이게 다인가?”
대체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당황한 카를은 이내 루인에게 “아마 그러지 않을까요.”라고 답하려다 서둘러 그의 손바닥에 동그라미를 하나 그렸다.
“아닐 텐데.”
“네?”
“아닐 거라고.”
혹시 내 말이 들리시나?
너무나도 척척 맞아떨어지는 대답에 카를은 혼란스러워 보였지만, 루인의 귀에 난 상처는 여간내기의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저 눈도.
지금 저리 두리번거리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으니, 저 눈은 틀림없이 보이는 게 없을 터.
‘한데, 왜 자꾸…….’
왜 자꾸 보이고, 들리는 거 같은 느낌이 들지.
그러나 루인이 구태여 그런 걸 연기할 이유가 없었기에 카를은 찜찜한 느낌이 들었으나, 그가 의심하는 사이에도 루인은 여전히 두리번거리는 데 여념이 없어 보였다. 그것에 카를은 루인의 상태를 제대로 보기 위해 뭐라 다시 입을 벌리려고 했으나.
“치… 치테이르!”
이어 입구 쪽에서 나는 소리에 경악스러움을 담아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화, 황태제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들려서는 안 되는 이름이 들렸으니까.
그 말을 들은 카를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곧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 쪽을 바라보았고, 연회장에 있는 다른 귀족들도 놀란 듯 입구를 바라보았다.
“황, 태제 전하?”
“살아 계셨다고?”
조용했던 연회장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사실 입 밖으로만 말을 안 꺼냈을 뿐이지, 귀족들은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돌아오지 않은 황태제가 죽은 것이 확실하다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미심쩍은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가운데, 카를은 루인의 얼굴을 살폈다.
지나칠 정도로 태연하고 무표정한 얼굴을 본 그는 루인이 혹 시력과 청력을 회복한 건 아닐까, 했던 의심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정말로 치테이르가 살아서 이곳에 온 것이라면, 루인이 가장 먼저 반응했을 테니까.
‘그나저나 이상하네. 황태제는 틀림없이 죽었을 텐데.’
물론 시체를 찾을 수 없던 게 찝찝하기는 했으나, 그 절벽은 살아 나오는 게 말이 되지 않는 높이였다. 황제야 늘 인간 같지 않은 행보를 보였으니 그렇다고 쳐도, 그간 제가 지켜본 치테이르는 평범한 인간이나 다름없는 자였다.
“황태제 전하를 뵈, 뵙습니다!”
“뵙습니다!!”
그때, 그런 카를의 생각을 부정이라도 하듯 보란 듯이 치테이르가 나타났다.
황족의 등장, 귀족들은 곧바로 몸을 납작 엎드렸다. 그 탓에 카를은 쉬이 치테이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정말로 살아 있었다고?’
부정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얗게 부서지듯 빛나는 은발과 푸른 눈, 그리고 그 외양. 비록 입고 있는 옷이 황실에서 지낼 때 입었던 것처럼 좋은 옷은 아닐지언정 틀림없이 그가 맞았다.
뚜벅뚜벅, 그가 엎드린 귀족 사이를 지나 루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근데 뭔가가 이상했다. 지나치게 서늘해서 시체 같은 치테이르의 얼굴도, 그리고 그가 지나간 길에 무언가가 방울방울 자꾸만 떨어지는 것도. 결국 엎드린 귀족들 중 하나가 호기심을 못 이기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들어 그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내 그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정적 속에서 외쳤다.
“어? 어?? 피, 피가……!”
치테이르의 몸에서 쉼 없이 떨어지는 것은 핏방울이었다.
“피라고?”
“피가 흐른다고요?”
피가 여기 왜 있어? 혹 황태제가 다치기라도 했단 말인가?
귀족들 중 몇몇이 슬쩍 고개를 내밀어, 치테이르가 걸어온 길이 죄다 핏빛으로 물들어 있는 걸 발견하고 경악했다. 저 정도의 상처면은 보통 죽지 않냐며, 그리 생각하던 귀족들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올린 그때, 이어 그들은 제 얼굴이 비처럼 뭐가 후두둑 떨어지는 것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밖에 비가 온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나 지금 이곳은 천장이 막혀 있어 비가 떨어질 일은 없었기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그들은…….
“아-, 아아!”
이내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아아!!!”
“피, 피가-!!”
“헤밀턴 경!!!”
피가 있다며 제일 먼저 소리친 남자의 몸이 비스듬하게 잘려 있는 것이다. 동시에 그의 내장이 터지듯 나오고, 피는 분수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옆에 나란히 있다 그의 피를 뒤집어쓴 귀족들은 죄다 비명을 질렀고, 이윽고 이 사달을 본 귀족들 중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려는 귀족들도 이내 비명을 지르며 나가지 못했다.
“시- 시체가 밖에!!”
복도에는 기사들의 시체로 길이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걸 본 귀족들 몇몇은 눈이 뒤집히며 기절하듯 쓰러지고, 몇몇은 구역질을 하면서도 어떻게든 이곳을 나가겠다는 듯 달렸고, 나머지는 얼어붙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넋을 놓고 주저앉아 있었다.
지옥이 있다면 이곳 아닐까.
아비규환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카를은 “근위병!”이라고 연신 외쳤지만, 이미 대부분 당했는지 들어오는 자들은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경악을 하는 와중에도 치테이르는 똑바로 걸어오고 있었다. 지나치게 평온하다 못해 잔잔한 미소까지 띠운 치테이르, 반면 그의 주변은 다들 공포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스르륵-탁, 스르륵-탁.
치테이르는 황제가 있는 곳을 똑바로 걸어오고 있음에도 마치 온몸을 질질 끄는 거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 얼굴은 그들이 익히 아는 치테이르의 모습이 분명 맞건만, 묘하게 이질적이라며 귀족들과 카를이 생각하던 그때.
우연히 치테이르의 등을 보게 된 귀족들이 동시에 입을 틀어막았다.
치테이르의 등에는 이곳에 오는 동안 여러 고초를 겪은 것을 알리듯 무수히 많은 화살들과 검이 꽂혀 있었지만, 단순히 그것들 뿐이면 이리 정신을 놓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등에 뭔가가 파고들고 있었는데, 동글동글하고 낯선 모양인지라 처음엔 다들 저게 무엇인지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것들의 정체를 알아챈 이들은 하나같이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살…려… 주, 세…….”
“…아, 파.”
“어, 머니…….”
얼굴들이었다.
그의 등에 주렁주렁 매달린 인간의 얼굴들이 꺽꺽거리며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마치 늪에 잠겨 드는 것처럼 치테이르의 등에 빨려가듯 들어가는 인간들의 머리는 흉측하다 못해 기괴했다.
그 모습을 본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은 생각했다.
‘저건 황태제가 아니야.’
외양이 제아무리 치테이르로 보여도, 그의 말투나 움직임이 치테이르여도 저건 황태제일 수가 없다.
저건 애초에 인간이라 할 수 없으니까.
카를도 마찬가지로 생각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저자는 황태제가 아니다! 죽여라!!”
동시에 연회장에 있던 몇몇 황실 기사들이 제 허리춤에 찬 검을 스르륵 뽑아내며 치테이르에게 달려들었다.
“죽어!!”
“죽여라!!!”
잘 훈련된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빠르게 달려들어 치테이르의 목에 검을 쑤셔 넣고, 몇몇은 심장에, 몇몇은 배에 검을 밀어 넣었다.
강한 힘에 짓눌려 치테이르의 목이 덜렁거리며 옆으로 쓱 기울어졌고, 검을 꽂아 넣은 곳에서는 피가 솟구치듯 흘러나왔다.
그래서 얼핏 보기엔 성공한 것처럼 보여, 몇몇 기사들이 순간 몸에 힘을 풀던 그때.
“……아?”
치테이르의 심장에 검을 욱여넣은 기사가 이상하다는 듯 제 손을 보았다. 그리고 이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 아아! 아!!!”
검을 움켜쥔 그의 손이 그대로 치테이르의 몸에 빨려 들어가고 있던 것이다. 그 모습에 놀란 기사들이 어떻게든 그 기사의 손을 빼내려고 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도와주던 이의 손마저 같이 빨려 가는 통에, 기사 둘이 순식간에 손이 묶였고, 다른 하나는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떨구고 뒷걸음질 쳤다.
“으, 으으……, 으…!”
이어 그 기사는 도망치기 시작했고, 나머지 기사들이 뒤로 주춤거리는 사이 어느새 심장을 찌른 기사의 몸은 팔뚝까지 빨려 들어갔다.
“사, 살려 줘!!”
“뭐 하고 있어!!! 살려 줘!”
도움을 요청하는 기사들, 하나 그 누구도 도와주겠다고 달려들지 못했다.
뭐든 상식이 통해야 달려들 수 있는 건데,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여태까지 쌓아 온 모든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으니까.
그때 빨려 들어가던 기사 둘이 이내 고통에 비명을 지르다 눈을 까뒤집었다. 그런 다음 축 늘어졌는데.
“킥, 키킥, 킥.”
그들이 축 늘어지자마자 너덜거리는 목을 한 치테이르가 돌연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킥킥, 킥, 킥키킥.”
마치 즐겁다는 듯, 웃는 그의 입에서는 피가 한가득 맺혀 있었는데.
“……킥.”
“키킥.”
상황은 거기서 멈춘 게 아니었다. 치테이르가 아닌 다른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이어 겹치듯 여러 명의 웃음소리에 사람들은 두리번거렸다.
“키키키.”
“킥킥.”
웃음소리는 다시 겹쳤다. 겹치고 또 겹쳐 기이하게 들렸다.
그때, 두리번거리던 이들 중 몇몇이 본능적으로 치테이르의 몸에 빨려 들어가던 기사 둘을 보았고, 이내 등 털까지 꼿꼿하게 서는 걸 느꼈다.
“키키키키키킥.”
“키기킥킥킥킥킥기킥.”
그들은 어느새 몸의 반절 이상이 사라진 채였는데 피눈물을 흘리는 눈과는 달리 그들의 입꼬리는 기이할 정도로 쭈욱 올라가 있었고.
“키키키킥키키키키킥키키키.”
“키킥킥키킥킥킥키킥키킥.”
그 상태로 치테이르를 따라 미친 듯이 웃고 있었으니까.
치테이르의 몸에 빨려 들어가면서, 피눈물을 흘리면서, 하지만 입꼬리만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은 채 활짝 입을 벌려 웃는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한참이나 웃던 그들은 이내 치테이르의 몸에 전부 흡수되듯 들어갔고, 치테이르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덜렁거리는 목을 도로 붙였다. 그의 등에는 더는 얼굴이 매달려 있지도 않았고,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도 없었다. 그저 평온했다.
무슨 일이 벌어졌었냐는 듯, 쥐 죽은 듯 조용해진 가운데, 태연하게 목을 붙인 치테이르가 다시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일련의 상황 속, 그 누구도 움직일 수 없었고, 그 누구도 숨을 쉴 수 없었다.
“…저…게…….”
저걸 치테이르라고 볼 수 있나?
아니 그전에 인간이 맞나?
지금은 비록 기사로서의 기능은 하지 못하더라도, 수많은 전쟁터를 전전했던 카를이다. 하지만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라도 이 상황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다만 이 모든 상황의 원인인 치테이르는 홀로 담담했다.
치테이르, 아니- 마귀는 물끄러미 넋을 놓은 귀족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제일 상석에 앉아 있는 루인을 똑바로 응시할 뿐이었다.
루인은 이리 난리가 나도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데, 그는 치테이르를 바라보는 듯하면서도 바라보지 않는 듯했다. 그 모습에 치테이르의 눈썹이 신경질적으로 위아래로 꿈틀거리듯 움직였으나, 이윽고 루인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손에서 떨어진 핏물이 미끄러지듯 길게 늘어졌다.
“히, 히익-!”
“살려 줘! 살려 줘!!”
아직 도망가지 못하고 자리에 남아 있던 귀족들은 치테이르가 제 쪽으로 오는 것에 혼비백산하며 도망치기 급급했다. 기사들도 더는 치테이르를 막지 못했다.
루인에게 가는 동안, 치테이르의 앞을 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는 길에 만났던 기사들은 이미 들어오기 전에 거의 다 죽여 놓았고, 남은 기사들마저도 겁에 질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그나마 카를이 나섰지만, 그는 이미 부상으로 약해진 상태라 치테이르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카를은 루인의 앞을 가로막다, 이윽고 저 멀리 얼어붙은 사용인에게 “기사들을 불러!”라고 소리쳤다. 하나 그걸 보며 치테이르는 낄낄 웃었다.
“사람 없을걸? 수습하느라 좀 걸릴 거거든.”
“그게 무슨….”
“카를 경!”
뭔가를 알고 있다는 듯 히죽거리며 말하는 치테이르의 뒤로 새하얗게 질린 사용인 하나가 들어와 소리쳤다.
“지금 수도에서 불이 크게 났습니다! 불이 계속 번져서……!”
“…빌어먹을!”
카를은 절망했다. 비가 내려도 불이 번진다고? 틀림없이 저 사특한 것이 수를 쓴 게 틀림없다. 따라서 이미 치테이르를 막으러 올 수 있는 나머지 기사들도 그쪽으로 가고 있을 확률이 컸다.
“무, 문이 닫혔습니다!!”
“살려 줘!!!”
게다가 상황은 더한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사용인이 들어옴과 동시에 돌연 문이 쾅 닫히더니, 철커덕 소리가 나며 문이 잠긴 것이다. 아직 채 빠져나가지 못한 귀족들과 사용인들이 뒤늦게 비명과 고함을 내지르며 문에 달라붙었으나 문은 밖에서 걸쇠라도 건 양 열리지 않았다.
“문을 열어 주시게!!”
“제발 문을 열어 주세요! 제발, 제발!”
귀족들이 애원했지만, 밖에 사람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살아 있는 이들은 이미 이 복도를 지나 도망쳤을 것이며, 남은 것이라곤 문을 열 힘이 없는 시체들뿐이니.
“시끄럽네.”
하나 그 소란도 치테이르의 작은 한 마디에 멎었다.
문을 미친 듯이 두드리던 귀족들과 사용인들의 시선도 일제히 치테이르에게 향했다.
그저 한 마디뿐이지만, 귀족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더 소리를 치다간, 먼저 죽은 헤밀턴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것임을 직감한 것이다.
정적이 연회장 안을 휘감았고, 치테이르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마저 걸음을 이어 갔다. 모두가 정적이고 움직임이 없는데, 그 홀로 걸어가니 그 속도가 무척이나 빨라 보였다.
……우뚝, 치테이르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어느새 루인의 앞에 서 있게 되었는데, 그 일련의 시끄럽고 요란스러운 과정에서도 루인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형님.”
그런 루인을 응시하던 치테이르가 말문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그는 루인에게 황실의 예를 갖춘 인사를 했다.
그 행동은 조금 과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그 탓에 오히려 우스꽝스러운 느낌이 들어 루인을 더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
그러나 그리 도발처럼 보이는 인사일지언정 루인은 반응이 없었다. 그것에 이상함을 느낀 치테이르가 루인을 살피듯 응시하다 인상을 구겼다.
루인은 애초에 치테이르를 바라보고 있지도 않았는데, 그럴 만도 한 게 그는…….
“눈을 못 쓰는 겁니까?”
반응할 수 없는 상태였으니 말이다.
뒤늦게 루인의 얼굴에 난 상처들을 보고 이를 눈치챈 듯 치테이르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이란 없었다. 그것에 눈을 가늘게 뜨고 루인의 눈과 귀를 훑은 치테이르가 픽 웃었다.
“귀도 병신이네?”
그 말을 함과 동시에 그는 불쑥 루인에게 제 얼굴을 바투 붙일 것처럼 다가왔다.
“뒤로 물러…… 커억.”
“꺄악!!!”
“카, 카를 경!!!”
위협적인 그의 움직임에 치테이르를 뒤로 밀어 내려던 카를, 하지만 이내 치테이르의 손짓 하나에 고개가 휙 꺾이더니 저 멀리 벽에 틀어박혔다.
“으, 으으……!”
이를 지켜 보던 귀족들이 비명을 지르려다 치테이르의 눈치를 보고는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 그가 카를을 죽일 정도의 힘을 쓴 건 아닌지, 후두둑 벽의 잔해가 쏟아지는 사이로 카를은 배를 붙잡으며 괴로워하기만 했다.
“이게 무슨 추한 몰골이세요.”
카를에게 치테이르는 조금의 관심도 가져 주지 않았다. 그저 앞에서 날아다니던 날벌레를 치워 낸 것처럼 별다른 표정 없이 평온하기만 한 모습이었다.
방해꾼도 없겠다, 치테이르가 부쩍 루인에게 붙었다. 눈가에 여전히 좀 남아 있는 흉, 군데군데 갈라진 귀, 이전보다 훨씬 마른 몸.
그 모습을 본 그는 안타깝다는 듯 과장스레 눈썹을 구기고 혀를 차더니, 이윽고 제 몸을 툭툭 가리키며 말했다.
“하긴 나만 하겠습니까. 형님은 모르겠죠.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것에게 씹어 먹혔고, 어떻게 이리 아득바득 살아 돌아왔는지. 하하.”
그리 말하며 씨익 웃는 치테이르의 몸은 얼핏 보기에도 이상했다.
흰 피부에 새겨지듯 음각을 그리는 힘줄은 연신 튀어나올 것처럼 꿈틀거리고 있었고, 배나 등에서는 당장이라도 뭔가가 가르고 나올 듯 근육이 살아 있는 것처럼 괴상하게 부풀었다 사그라지길 반복했다.
게다가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는 힘과 기다란 손톱들은 그가 실종된 시기에 무슨 일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치테이르의 표정이 가라앉더니, 이윽고 시선이 도르륵 굴러가며 제 몸으로 향했다.
“그래, 이런 꼴…….”
그리 읊조리며 제 몸을 살펴보던 치테이르는 서서히 분노한 듯했다. 짙디짙은 살기가 순식간에 그를 휘감더니, 이윽고 악기(惡氣)가 연회장에 몰아치듯 훅 들어왔다.
“그까짓천것에게눈이멀어나를이꼴로만들다니.”
일순 두 개의 목소리가 뒤섞여 그의 입을 빌려 나온 거 같았는데, 그 속도가 매우 빨랐다. 꽉, 치테이르의 손이 쏟아지듯 뻗어 나가더니 이윽고 양손으로 루인의 목을 졸랐다.
“곱게 죽여 드릴게요.”
꾸욱, 힘을 주자마자 새하얀 루인의 살결이 붉게 물들어 갔다. 당장이라도 목뼈를 꺾어 낼 것처럼 여간내기의 기세가 아니었으나, 목이 졸리는 와중에도 루인은 치테이르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연회장의 입구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상처 없이 온전히 삼켜, 보내 드리겠습니다.”
정중한 말과는 달리 치테이르의 얼굴은 이미 일그러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제 앞에 있는 이를 찢어발겨 삼키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는 듯, 핏줄이 터진 눈은 어느새 본인조차 감당할 수 없는 분노로 물들어 있었다.
“그 천것 곁으로.”
그때, 우연인지는 몰라도 목이 졸리던 루인의 시선이 물끄러미 치테이르에게 향했다. 치테이르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금안에 짧게 얼었다.
여태 무엇을 해도 반응이 없던 그였으니 당연히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달랐다. 착각인지는 몰라도 똑바로 눈이 마주친 것처럼 느껴진 그 순간.
…픽, 루인이 웃었다.
가당치 않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웃는 얼굴을 본 순간 치테이르의 얼굴이 사납게 구겨졌다.
“비웃어?”
분노로 채 절제하지 못한 감정이 폭발하듯 그의 몸에서 튀어나왔다. 어찌나 노했는지, 치테이르의 눈에서 혈관이 터졌다.
“내가 너무 예의를 차렸어! 너는 이제 내 형님도 뭣도 아닌, 먹이인데!”
목에서 손을 뗀 그는 바짝 손톱을 세우며 소리쳤다. 그는 이제 루인의 목을 졸라 죽이는 것이 아닌, 당장 그를 찢어발길 것처럼 보였다.
그 살벌한 기세에 지켜보던 귀족들이 비명도 못 지르고 얼어붙어 있는 가운데, 루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제가 죽을지도 모르는 그 상황 속에서도 그는 홀로 태연하게 치테이르를 바라보고 있었고, 이에 치테이르는 더 화가 났는지 당장 루인의 머리통을 씹어 먹을 듯 이를 세우며 달려들었다.
그의 손톱이 쭉 길어지며 루인의 전신을 조각낼 것처럼 날카롭게 변했고, 악한 기운이 연회장을 전부 감쌀 정도로 강해졌다. 그 지독한 악기에 도망치지 못한 이들이 괴로운 듯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제 목을 붙잡았다.
“커억, 컥…….”
이들은 마귀고, 마왕이고, 마물이고 이런 걸 모르는 시대의 인간들이었다. 대응이라는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순식간에 연회장을 집어삼킨 악기에 귀족들이 모두 바닥을 나뒹굴며 괴로워했다. 이토록 거리가 먼데, 마치 치테이르에게 목이 졸리는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그렇게 악기가 이 연회장의 모든 이를 녹여 버릴 듯 짙게 풍기던 그때.
쾅!
닫힌 연회장 문을 누군가 밖에서 연 듯, 문이 열렸다. 동시에 루인을 죽일 것처럼 달려들던 치테이르가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귀찮게….”
인상을 구긴 치테이르가 귀찮다는 듯이 그리 읊조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그에게 날아오는 것을 느꼈지만, 뒤를 돌지는 않았다. 이곳에 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검과 화살들을 등에 매달고 왔는가. 그러기에 이번에도 그런 거겠거니 했는데.
“……음?”
……아프다?
치테이르는 이상하다는 듯이 제 몸을 보았다. 방금 제 몸에 꽂힌 것은 화살이었다. 생김새는 이미 등에 십여 개는 꽂아 놨을 그 화살과 같았지만 느낌이 달랐다.
울컥, 치테이르는 속이 뒤틀리면서 피를 토할 거 같은 느낌에 고개를 휙 돌렸다.
“잡아!!!”
“시, 신성력을 쏟아부어!!”
그냥 기사들이 아니었다.
지금 제게 이 화살을 박아 넣은 이들은 신관과 성기사들이었다.
그들의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치테이르의 눈이 새빨갛게 변했다.
“버러지 새끼들이 기어들어 왔구나!”
치테이르가 느끼기에, 인간이 아닌 자신과 무력으로 견줄 수 있는 자는 이 자리에 없었다. 하지만 무력은 통하지 않더라도 성력은 달랐다. 그건 자신과 상극인 힘이었다.
치테이르가 눈을 희번덕 빛내는 사이, 신관과 성기사들은 이미 치테이르의 지척에 있었다.
“고작 이딴 걸로, 날 죽일 수 있으리라 여기는 건가?!”
그러나 그의 손짓 하나에 달려온 신관 셋의 머리가 달아났고, 제 동료의 죽음을 본 성기사들이 멈칫한 순간, 그들의 몸은 순식간에 반으로 갈라졌다.
“아, 아아!!!”
“아악!!!”
아무리 신성력이 그의 몸에 통한다고 한들, 이미 마물 그 이상의 반열에 들어선 치테이르의 물리적인 힘은 너무나도 압도적이었다.
그들이 들고 온 무기가 치테이르에게 채 닿기도 전에, 몇몇 이들이 으스러지듯 죽어 갔다. 그것을 본 신관들과 성기사들은 기세가 한풀 꺾였지만, 그들은 희한하게도 어떻게든 치테이르를 상대하려고 했다.
‘독한 기운이 코를 찌르는구나……!’
그것은 신성력을 타고 난 자들의 본능이었다. 악한 기운을 느끼고, 저것을 이 땅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이들이 치테이르에게 달려들었다.
그 수는 꽤 많았고, 보기에도 버거워 보였지만 치테이르는 인간을 많이 잡아먹고 온 덕에 한 치의 틈도 내주지 않았다.
“하하, 하하! 닿질 못하는구나! 벌레 같은 놈들아!”
그는 그들을 놀리듯이 몸을 움직였는데, 말과는 달리 그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치테이르도 안 것이다. 이 신성력의 앞에서는 제아무리 자신이 많은 인간을 잡아먹어 강해졌다고 하더라도, 틈을 조금이라도 내어 주면 큰일 날 수 있다는 것을.
‘이상한 게 들어온 거 같더라니!’
첫 화살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것도 치테이르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없었다. 오히려 죽어 나가는 것은 신관들이었기에, 그 모습을 본 대신관이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대신관은 저것이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아주 이질적이고 소름 끼치는 감각이 들어 서둘러 신관들과 성기사들을 데리고 왔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이상한 것’이라는 표현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괴물 같은 것일 줄이야…!’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마물이고, 마왕이고, 마귀이고, 무엇도 없는 평화의 시대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마물의 무서움을 몰랐고, 하필 마주하게 된 게 기록에도 잘 남아 있지 않은 마귀였으니.
‘이걸 어떻게 해야……! 신이시여!’
어떻게든 방도를 세우고자 했지만, 쉽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걸 이 밖으로 내보내는 순간, 단순히 유혈 사태만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란 사실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보내면 안 된다!”
대신관의 명에 신관들이 기도를 하며 치테이르가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압박하기 위한 결계를 세웠다. 대신관도 급히 결계에 힘을 보태고자 기도를 올리려던 그때-.
“……어느 틈에!”
단번에 결계를 뚫고 들어온 치테이르가 대신관의 배에 바짝 붙어 손을 쑥 밀어 넣고는 빙긋 웃었다.
“쿠, 쿨럭.”
“-대신관님!!!”
“신관님!!!”
다행히 관통하지는 않았으나, 상처가 꽤 컸다.
치테이르의 공격에 대신관은 순간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했다. 그런 대신관을 죽이려는 듯 치테이르가 다시금 손을 뒤로 뺀 그때.
“음?”
그의 동공이 돌연 확 확장되듯 넓어지더니, 이윽고 뒤로 휙 돌았다. 그곳에는 루인이 있었는데, 루인만 있는 게 아니었다.
마치 루인을 대피시키려는 듯, 신관들 몇몇이 그에게 붙어 있는 모습에 치테이르의 얼굴이 야차처럼 구겨졌다.
“어딜 감히……!”
눈앞의 신관들도 거슬려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그것보다도 루인을 향한 원한이 더 강했다. 제 먹잇감인 루인을 빼앗긴다는 생각에 치테이르는 곧바로 방향을 틀어 루인에게 향했다.
“마, 막아!!”
“어서 막거라!”
이것을 본 성기사들이 뒤늦게 달려 나갔지만, 이미 늦었다. 치테이르는 마치 화살처럼 땅을 박차고 이미 루인의 지척에 붙어 있었다.
치테이르의 손이 단번에 루인의 심장을 뜯어낼 것처럼 내뻗어진 그때……!
쉬익-.
무언가가 이 연회장의 한가운데를 가르며 일직선으로 빠르게 날아왔다.
말도 안 되는 빠른 속도로 날아온 그것은 바람을 가르고 치테이르의 등에 꽂혔다.
푹-!
어찌나 세게 박혔는지, 그건 치테이르의 배를 관통하여 앞으로 툭 튀어나왔다.
“……하!”
이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순간의 흐름이 깨진 것에 심기가 불편해진 치테이르가 표정을 신경질적으로 구기더니 이윽고 목을 뒤로 휙 꺾었다. 그리고 그는 저 멀리 문 앞에 서 있는 이를 발견했다.
“거… 건드리지 마.”
홀딱 젖은 채 베일을 쓰고 있는 이었다.
이미 저 몰골을 한 이가 연회장에 수십은 되니, 누구인지는 가늠할 수 없었지만, 그건 어차피 중요하지 않았다.
“이딴 걸로 나를 방해해?”
신관이나 성기사가 아니라면 어차피 그에게는 이 모든 공격이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비웃으며 목을 제자리로 돌린 그 순간.
“쿠, 쿨럭.”
치테이르는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제 입에서 기침처럼 쏟아진 것을 닦아 내었다.
‘……피?’
이 단검이 배 한가운데를 꿰뚫었다고 한들, 자신은 인간을 초월한 몸이기에 이리 피를 뱉어 낼 일은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되고.
하지만 이상했다. 계속하여 속에서 무언가가 솟구치듯 핏덩이가 울컥울컥 입을 통해 쏟아져 나온다. 그것에 심상치 않음을 느낀 치테이르가 급히 제 몸에 박힌 것을 빼내려고 손을 댔지만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검을 붙잡은 손이 녹아내리고, 뱃속부터 시작된 내장을 휘젓는 고통이 느껴졌다.
설마 이건…….
“성, 력!”
신의 힘. 성물.
단순히 성력만 담긴 게 아닌 신의 의지가 깃든 그것.
엄청난 통증과 괴로움에 치테이르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변했다.
동시에 치테이르, 마귀는 두려움에 몸을 잘게 떨었다.
“성검, 심장, 마왕을 죽인, 기억해, 심장을 찔러, 봄이 도왔어, 용사, 신이 선택한…….”
마물로서 타고난 본능적인 공포는 바로 그들의 뿌리, 마왕의 죽음이었다.
이 성검에 의해 마왕이 죽으면서 느꼈을 절망과 공포가 질식할 듯 그를 휘감았다. 무섭다, 괴로워, 아파, 아이처럼 칭얼거린 것도 잠시, 이윽고 그는 두두둑 고개를 꺾더니 문 앞에 있는 이의 정체를 깨달은 듯, 비명을 지르며 외쳤다.
“길잡이!!!”
저건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마물의 피에 새겨진 마왕의 기억이 마귀에게 말해 주고 있었다. 마왕을 죽인 길잡이, 그만이 마왕을 죽인 그 성검을 찾아 마귀의 몸에 이리 쑤셔 넣을 수 있다고.
“아아, 아!!”
죽을 수도 있다. 이토록 수많은 인간을 잡아먹고, 강해졌음에도 고작 이 성검 하나로, 고작……!
“괴물아!”
저 괴물 하나 때문에!
이리 허망하게!
하지만 고통에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렸던 치테이르는 이내 기쁜 듯 입꼬리를 주욱 올렸다. 입이 비정상적으로 늘어나 곡선을 그렸다.
이미 성검이 박힌 곳에서부터 몸의 붕괴가 시작되고 있었다. 인간의 흉내를 내기 위해 쓴 겉가죽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곧 이 몸이 으스러질 것임도 알았다.
“괴물아! 괴물아!! 그래, 괴물아!! 살아 있었구나!”
한데 그럼에도, 치테이르는 기뻐했다.
저 멀리서 베일을 벗어 던진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가 제 손으로 직접 찢어 죽이고자 했던 모스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모든 고통을 이겨 낼 수 있었으니까.
“죽은 너를 내 얼마나 수도 없이 찢어발기고 싶었는데! 네가 제 발로 걸어 들어왔구나!”
치테이르의 관절이 뚜둑 소리가 나더니 이어 누가 붙잡을 새도 없이 몸을 휙 돌렸다. 그는 순식간에 모스가 있는 쪽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건 인간의 움직임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유연해서 징그러웠다. 붕괴가 시작된 몸은 무너지고 있었고, 그 탓에 온몸에 뼈가 없는 듯 어깨와 팔이 축 늘어졌다. 게다가 기묘할 정도로 빨리 달려가느라 발목뼈가 으스러지듯 뭉개졌고, 이미 늘어진 팔은 탈골된 듯 덜렁거리며 꺾였지만 치테이르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통증을 모르는 듯 달렸다.
“이번에야말로, 기다렸다, 갈기갈기, 뼈도 남기지 않고, 찢어발겨서, 마왕을 죽인, 너를, 길잡이를, 씹어 먹어 주마!”
두 개의 목소리처럼 들리기도 했고, 하나의 목소리처럼 들리기도 할 정도로 괴상하고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듣는 것만으로도 귀가 오염될 것처럼 목소리에는 원한이 그득그득 담겨 있었고, 그 사특한 기운에 몇몇 신관들은 이미 눈을 뒤집고 귀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치테이르에게 남은 시간은 별로 없었다. 모스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점점 몸이 한계에 다다랐는지 더 심하게 붕괴가 시작된 것이다.
인두겁 사이로 새까만 뼈대가 으득거리며 드러났는데, 그 징그러운 모습에 지켜보던 몇몇 이들은 비명을 질렀고, 모스는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저건 피할 수 없다.
자신의 끝은 이곳이다.
‘…좀 더 침착했어야 했는데.’
후회를 해 봤자, 다가오는 속도를 보아하니 이미 늦었다.
모스는 잠시 다른 길을 더 고려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후회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이게 그로서는 최선이었다.
이곳으로 가야겠다고 방향을 잡고 달려오는 내내, 수많은 시체들을 본 모스는 이미 마귀가 인간들을 많이 먹어 제법 강해졌음을 눈치챘다.
그래서 그를 어찌 죽여야 할지 고민을 했는데, 다행히 머릿속에선 여러 방법들이 떠올랐고, 마귀를 만나면 그중 하나를 바로 택할 셈이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이 예상대로 흘러가지는 않는 법. 연회장으로 들어오자마자 모스는 루인의 심장이 꿰뚫리기 직전인 것을 보고 더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가장 안전한 길? 쉬운 길?
그런 건 다 필요 없었다.
‘너를 살리는 길.’
오로지 그 하나만이 모스의 목표였다. 그 마음을 먹자마자 그간 세상을 꽉 채울 것처럼 수도 없이 나열되던 길이 단 하나로 줄어들었다.
성검을 그에게 던지는 것. 얼핏 들었을 때는 명확하고도 쉬운 길처럼 보였지만, 단번에 심장을 맞히지 못하면 마귀가 즉사하는 게 아닌지라 모스가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큰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이 당장 모스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었고.
‘끝이야.’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모스는 다가오는 마귀를 꼼짝도 못 하고 바라보았다.
마귀는 죽을 것이다. 저 성검은 무려 마왕을 죽인 검이었기에, 마왕도 되지 못한 마귀는 결과적으로 사라질 것이지만… 동시에 모스는 자신도 죽을 것임을 직감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방금까지만 해도 정확한 답을 알려 주듯 황금색으로 물든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절체절명의 순간, 길잡이에게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죽음을 뜻했다.
이리 돌고 돌아 본래의 몸을 되찾았음에도, 신은 그를 또다시 수단으로 썼다.
원통하지 않냐고? 하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아까는 분명 분하고 억울했던 거 같았는데, 이번만큼은 억울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를 살릴 수 있는 수단이 나라서 다행이야.’
신에게 감사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모든 생을 통틀어 이 길로 인도해 준 그의 신에게 한없이 감사했다.
다만 마지막으로 소원이 하나 있다면, 그는 루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이런 상황까지 내몰려서도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게 루인의 얼굴이라니, 자신이 생각해도 우스웠지만 이미 눈은 달려오는 마귀를 보는 게 아닌 그 너머의 상석을 보았다.
하나, 그곳은…… 이미 비어 있었다.
그것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이던 사이 이미 마귀가 코앞에 있었다. 당장 모스를 잡아먹을 것처럼, 흘러내린 인간의 껍데기 아래로 드러난 새까만 뼈가 날카로이 칼날처럼 모스에게 향한 그때.
“너 같은 게 무슨.”
그 뼈는 모스의 시야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신 화려한 금빛 문양이 새겨진 옷이 눈앞에서 펼쳐지듯 느릿하게 펄럭였다.
멀리서 봤을 때도 아름답다고 여기던 옷이었는데, 이리 가까이서 보니 그 섬세함은 더더욱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나 모스는 그 아름다움이 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들어올 수가 없었다.
“한심하다.”
그는 어느새 제 앞을 가로막은, 늘 보았기에 잊을 수 없던…… 익숙한 뒷모습을 눈으로 좇기 바빴으니까.
“이런 꼴이 되었어도 넌 날 못 따라잡는구나.”
그의 앞에 선 이는 마귀의 손에 옆구리를 내준 듯, 왼쪽 옆구리에서 피가 뚝뚝 흘러나오고 있었으나, 꿋꿋하게 마귀의 목을 틀어쥐었고, 이윽고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똑바로 마귀의 눈을 마주한 루인이, 그의 태양이, 그의 세계가 자신을 감싸고 있었다.
“핏줄아.”
그 순간 길이 쏟아져 내렸다.
별이 떨어지듯.
생(生)이.
방금까지만 해도 살길이라고는 없다는 듯, 길 하나 없이 어두웠던 사위가 다시 황금빛으로 얼룩덜룩 덧입혀진다. 그의 생이 이어짐을 알리듯 온통 반짝이는 색으로 덧입혀진 세상을 보자 모스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왜 네가?’
다만 모스는 그것에 길게 신경을 쓸 수 없었다. 그저 제 앞을 가로막듯 서 있는 이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머리가 굳은 건지, 아니면 이해력이 부족한 건지, 아니면 둘 다 일지.
어느 하나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다만 모스는 믿을 수가 없어 계속 눈을 깜빡이며 제 앞에 있는 이의 뒷모습을 보았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눈꺼풀엔 불안과 의심이 깃들었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목을 살짝 덮는 백금발, 그 아래 느슨하게 흘러내린 옷, 상처로 뒤덮인 뒷덜미.
“커억, 컥……!”
그는 모스가 의심이라도 하는 걸 알아채기라도 한 양, 제 손에 있는 이의 목을 세게 졸랐다. 마치 자신이 이곳에 있는 것을 알리듯,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루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모스는 뒤늦게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마귀!’
이렇게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커다란 루인의 등 때문에 시야가 가려진 모스가 옆으로 고개를 내민 뒤 경악했다.
“틀, 림 없이, 너는……!!”
치테이르의 모습을 본 모스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것은 인간 같기도 했고, 마물 같기도 했다.
성검의 영향 때문인지 피부는 계속 흘러내려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고, 드러난 뼈와 근육은 인간의 것이 아닌 악기로 뒤덮인 새까맣고 징그러운 모습이었다.
“넌 망가진, 상태, 였을, 터인데!!!”
치테이르는, 아니 마귀는 악에 받쳐서 남은 눈알 하나로 루인을 똑바로 바라보며 소리 질렀지만 루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그 흉측하고 징그러운 마귀의 목을 꽉 틀어쥐었을 뿐이고, 마귀는 그 억센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는 듯 몸을 비틀었으나 소용없었다. 어떻게 해도 빠져나올 수 없었던 그는 돌연 치테이르의 목소리를 냈다.
“형님, 아파요. 놔주세요. 형님, 살려 주세요. 아파요. 놔주세요. 형님, 아파요. 살려… 줘요….”
마귀는 누구라도 동정심에 사로잡힐 만한, 불쌍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저는 형님밖에 없는 거 알잖아요. 너무 존경해서 그랬어요. 형님이 저 괴물에게 혹해서… 놔주세요, 살려 주세요…….”
애달프게 말하는 치테이르의 눈에서는 이윽고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미 성물이 몸에 파고든 상태라며, 어차피 죽은 목숨이니 놔 달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이 살고 싶은 어린 애처럼 보였다. 하나 루인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이게 네가 원하던 최후인가?”
그는 툭, 마귀의 말을 끊으며 치테이르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 순간, 조잘대듯 떠들던 목소리가 멈추었다. 울던 것도 멎었다. 싸하게 식은 얼굴을 한 치테이르의 붉게 변한 눈알이 휙 돌아가 섬뜩하게 루인을 노려보았지만, 그는 그저 담담한 얼굴로 말을 할 뿐이었다.
“그토록 추한 걸 못 견디고, 황족의 자부심으로 살던 네가 바라던 최후가 이것이냐 물었다.”
이젠 녹아내려 하반신조차 없는 그것의 하나 남은 눈알의 색이 파랗게 물들었다 빨갛게 변하기를 반복했다. 마치 마귀와 치테이르가 충돌하듯 한참을 색이 왔다 갔다 하던 그 눈은.
“치테이르.”
루인이 부르자, 이내 푸른색을 한 채 물끄러미 루인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몸은 거의 다 부서져서, 이젠 목까지밖에 안 남은 상태였다.
“나는…….”
마귀가, 아니면 치테이르가.
그 누군가가 무슨 말을 할 것처럼 입을 열었지만, 끝까지 말을 이을 수는 없었다.
이윽고 남은 뼈대와 눈알마저 부서지듯 사라져 가더니, 루인의 손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마귀의 최후는 너무나도 허망했다.
그간 많은 이들을 잡아먹으며 한 제국을 몰살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했던 이의 최후가 맞나 싶을 정도로.
스러지는 모습을 보던 모스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내가 없었으면, 아마 저 마귀는…….’
이 시대의 사람들이 마물이고 마귀고, 그것들을 제대로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을 알 리가 없었고, 성물을 어찌 사용해야 하는지도 알 리가 없었다.
이곳에는 신탁도, 용사도, 용사의 일행도, 그 어느 것도 없는 평화로운 시대니까.
아마 저 마귀의 입장에서는 탄생의 시작을 길잡이에게 들킨 게 가장 큰 흠이었을 것이다.
“이건 대체…… 무슨.”
그것의 말로를 자리에 있던 귀족들과 신관들이 넋을 놓고 보았다.
멍한 얼굴로 보던 그들은 이윽고 하나둘 정신을 차린 듯 소리치며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나, 나가!”
“의원을 불러!!!”
“부상자들을 어, 얼른…….”
귀족들은 더한 일이 벌어질 게 두려운 듯, 모두가 앞다투어 문을 통해 나갔다. 다친 이들은 부축을 받으며, 카를처럼 실신한 몇몇은 업혀서.
신관들은 제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울면서도 어떻게든 꾸역꾸역 제 동료들의 시체들을 챙겼고, 그 모든 과정은 또 다른 아비규환이나 다름없었다.
그토록 정신이 없는 가운데, 이 상황과 비교될 정도로 돌처럼 가만히 멈추어 선 유일한 두 사람이 있었으니.
“…….”
루인과 모스는 서로 아무런 말 없이 자리에 멈추어 있었다.
뚜욱, 뚜욱…… 모스의 젖은 몸에서는 계속 빗물이 뚝뚝 바닥으로 흘렀다.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까. 그것을 모르겠다는 듯 한참 동안 바닥을 보던 모스가 고개를 들자마자, 움찔했다.
그간 자꾸만 엇나가듯 뒤틀리던 두 사람의 시선이 섞였다. 루인은 언제 눈이 보이지 않았냐는 듯, 똑바로 모스를 보고 있었다.
“어, 언…제, 부터?”
먼저 말문을 연 것은 모스였다.
“언제, 부, 부터 눈이 보, 이고, 언제, 부터…… 드, 들을, 수 있… 아니, 아니…….”
혼란스러웠다. 무슨 이야기부터 어떻게 꺼내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붙잡고 말을 웅얼거리며 더듬거리던 모스가 시선을 빗겨 허공을 보았다.
온갖 생각과 감정이 얼굴에 실렸다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은 지켜보는 이의 동정심을 자극할 정도로 안쓰러웠지만, 루인은 그저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 모스를 보며 눈썹을 살짝 꿈틀거릴 뿐, 아무런 말 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모스의 얼굴 중 어느 하나 훑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집요하게 보았다.
“내, 내가, 하, 고 싶은, 마, 말은.”
그런 루인을 알 리가 없는 모스는 더듬거리며 다시 말을 하고자 애를 썼지만 힘겨워 보였다. 그는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렵고 괴롭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미친 듯이 목을 긁었다 신음하기를 반복했다.
“그러, 니까, 그게.”
“…….”
“그, 러니까, 그러니까…….”
몇 번의 더듬거림 끝에 결국 모스도 입을 다물었다.
마치 1분이 1시간처럼 느껴지는 침묵이었다. 그 침묵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괴로워하던 모스는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야 간신히 말문을 열며 고개를 들었다.
“나, 나를, 날…….”
그러자 루인은 기다렸다는 듯 모스와 눈을 마주쳤다. 그것에 다시금 감정이 차올라, 숨이 턱 막히고 말이 잘 나오지 않았지만 모스는 꾸역꾸역 말을 이었다.
“언제, 알아봤어?”
모스의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묻고 싶은 말들은 수도 없이 많았고, 상세하게 듣고 싶은 것들도 많았다. 하지만 말주변이 없고, 마음만 앞서는 모스로서는 이게 당장의 최선이었다.
“나는, 네가 나를… 못 아, 알아본 줄 알았어.”
모스는 그간 루인이 제대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환영이나 꿈이라고 여겼던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 생각할 만한 이유도 많았다. 그간 모스가 지켜본 루인은 늘 향에 취해 몽롱해 보였고, 자꾸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미친 사람처럼 헛소리를 반복하기도 하며, 무엇보다도 눈과 귀를 쓸 수 없기에…… 모스는 정말로 그가 자신을 알아봤을 것이라 여기지 못했다.
그 탓에 모스는 상처도 많이 받았다.
비록 그가 ‘모스’를 그리워해 환영을 보는 듯 굴었지만,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모스는 자꾸 루인을 마주할 때마다 자신이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없더라도 누구든 이 자리에서 ‘모스’인 척 흉내를 낸다면, 쉬이 넘어갈 것이라 여겼기에.
“또, 다시.”
잊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버려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 를 잊은, 줄 알았는…데.”
이전에 그가 기억을 잃었을 때처럼.
“언제, 부…터 날 알아봤, 어?”
그러나 지금 고개를 들어 마주한 금안은 어떤가.
어딜 보아도 광기란 없었고, 누구보다도 선명하게 모스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간 눈이 안 보여서 계속 허공을 바라봤던 게 다 거짓이었던 건가?
아니, 그렇다면 언제부터 그런 거지?
만약 거짓된 행동이었다면 왜 그런 짓을 한 거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된 건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그 탓에 모스가 혼란스러워하며, 그와 더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그때.
“눈과 귀는 회복할 생각이 없었다.”
루인이 말문을 열었다.
“그대로 사는 게 더 평온했거든.”
그는 지켜보는 이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 정도로, 엉망진창인 모습이었을 때가 더 살기 좋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모스는 당연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루인을 보았으나, 그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저 제가 느꼈던 바를 거짓 없이 솔직하게 말하는 듯, 평온한 얼굴이었다.
“다만 향을 들인 이후, 조금씩 들리고,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지. 그래서 다시 눈과 귀를 쑤실까 고민하던 차에…….”
루인은 말을 잇는 대신, 물끄러미 모스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집요하고도 음습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답지 않게 짙은 감정이 묻어나기도 했다. 마치 감정이 옮겨지기라도 하듯, 모스는 순간 넋을 놓고 루인을 보았다.
“언제 널 알아봤냐고?”
그때, 루인이 가장 우스운 질문을 들었다는 듯이 픽 웃었다. 그리고 누가 뭐라 할 새가 없이 손을 쭉 뻗더니 낚아채듯 모스의 턱을 붙잡아 제 앞으로 쭉 당겼다.
“처음부터.”
두 사람의 시선이 탁 맞물렸다.
“네가 내 앞에 선 순간부터.”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간 보이지 않는 듯 허공을 보던 시선은 이젠 모스만 보인다는 듯 그를 향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말없이 뒤섞였다. 긴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서로가 가진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이 오갔다.
그리고 끝내 내린 결론.
“…어, 떻게?”
진실.
루인은 진실로, 재회의 순간부터 모스를 알아보았노라고 말하고 있었다.
“너, 는 눈도 아, 안 보이고… 귀도…….”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만일 향을 통해 루인의 시력과 청력이 차차 돌아왔다고 해도, 처음 마주했을 때의 루인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당시 그의 눈은 온갖 흉터와 피로 뒤덮여 계속 진물을 흘리고 있었고 심지어 팔에는 심한 자상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독한 수면 향까지 피워 놓은 채였다.
그런 상태에서는 설령 눈과 귀가 멀쩡했더라도, 모스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
“왜. 짐이 병신이라서 너 하나 못 알아볼까 봐?”
루인이 그의 생각을 당연히 알고 있다는 듯 모스의 놀란 얼굴을 보고 말하자, 모스는 다시 어깨를 움츠렸다.
그리고 그런 모스의 손을 루인은 빼앗듯 휙 잡아당겼다.
“아, 자, 잠깐……!”
놀란 모스가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루인의 힘은 억셌으며 더 빨랐다. 그는 모스의 손을 제 심장이 있는 쪽으로 끌어당기고는, 이윽고 문지르듯 꾹 눌렀다.
그때, 모스가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손이 닿은 부분은 정확히 루인의 화려한 겉옷 부분이었는데, 단순히 옷만 만져진 것이 아니었다. 그 안에 있는 동그랗고, 딱딱한…….
“마, 말도… 아, 안….”
모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다, 이어 조심스레 겉옷을 뒤집었다. 그 느릿하고 답답한 손짓에도 루인은 가만히 있었다. 그저 무심한 표정으로 제 가슴팍에 있는 안주머니를 헤집어, 끝내 그 안에 있는 것을 꺼낸 모스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것은, 붉은 열매 씨였다.
황궁에서 생활을 하던 중, 어느 순간 사라졌던 것이 저기에 있었다. 아무리 방을 뒤져도, 청소하는 곳들을 다 헤집어 봐도 못 찾았는데…….
“알아보라고 두고 간 거 아니었나?”
루인이 어이없다는 듯 말하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 천 쪼가리랑.”
그가 턱짓을 한 곳엔 방금 모스가 던지듯 내려 둔 베일이 있었다. 그제야 모스는 루인이 언제 자신을 알아봤는지 알아챈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날, 황궁에 들어오자마자 루인의 팔이 크게 다쳐 얼떨결에 의원들 틈에 섞여 방에 들어간 날.
그의 엉망진창인 모습을 보고 절망에 빠져, 제 한 몸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그날.
“처, 음부…터.”
그는 거짓을 고하지 않았다.
그날의 루인은 정말로 모스를 환영이나 꿈속의 존재로 착각했을 수 있다.
하지만 이후 방 안에서 저 씨와 베일을 발견해 모스임을 알아본 것이었다.
다만 모스는 그럼에도 이해가 안 갔다.
“그, 그럼, 아, 안 보이는 척을… 하, 한 거야?”
모스는 그간 루인과 같이 지내면서 가끔 위화감을 느낄 때가 있곤 했다. 그가 자신의 말을 듣는 것처럼, 또는 시선이 맞물리는 것처럼 느껴질 때는 있었지만 그건 정말 ‘간혹’이었다.
그간 루인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 때문에 불편한 게 한둘이 아니었고, 다치기도 많이 다쳤다.
‘그런데 여태 그 모든 게 연기라고?’
둘이 함께 보내는 시간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그럼에도 그는 끝끝내, 심지어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는 이처럼 굴지 않았는가.
“보, 보이면서도, 드, 들리면서도, 그럼 여태…….”
내가 얼마나 모자란 이처럼 보였을까.
연기를 하는 그의 모습에 속아 넘어가는 자신을 보며.
“우, 스, 웠어?”
그의 연기에 자신이 넘어가는 모습이, 그는 얼마나 재밌었을까.
모스가 배신감이 어린 눈으로 루인을 원망스레 응시했다. 그가 이리 멀쩡하게 돌아온 것은 기뻐할 일이 마땅하나,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모스는 루인이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아서 제가 있을 때도 종종 다치는 것을 보았고, 그것 때문에 불편해하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다.
“내, 가… 얼마나… 나, 나는….”
그때마다 가슴이 얼마나 무너져 내렸는가. 그때마다 얼마나 눈물이 치솟았는가.
그렇게 네 아픔을 보고 괴로워하는 나의 모습들을 보면서 너는 재밌었냐고, 모스가 분함을 감추지 못하고 눈물을 당장이라도 떨굴 것처럼, 새빨갛게 눈을 붉히며 말했다. 그 모습을 루인은 그저 물끄러미 보았다.
달래 주지도 않고, 그저 집요하게 한참을 응시하던 그는 툭 말을 내뱉었다.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날 저버렸을 거잖아.”
담담히.
“내가 가엾지 않았더라면.”
단 하나의 의심도 없이 확신에 찬 어조로 뱉은 루인의 말에 배신감에 눈가가 붉어진 모스가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그가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루인은 지금 모스에게 자신이 이리 눈이 있고, 귀가 있고, 다친 곳 없이 멀쩡히 있었다면 네가 내 곁에 머무르지 않았을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고작 그 이유 하나로, 그간 그리 굴었던 것이라고?’
다만 모스는 이해할 수 없고, 믿을 수도 없었다.
제가 아는 루인은 자신이 그의 곁을 떠날까 봐, 그토록 긴 시간 동안 눈과 귀가 망가진 것처럼 구는, 이런 귀찮은 짓을 할 이가 결코 아니었다.
차라리 자신을 사냥하듯 붙들어서 가두는 것이야말로 루인의 방식이었다.
루인의 집착은 비정상적으로 심했다. 지금만 보아도 모스를 붙든 손아귀의 힘이 결코 쉬이 놔줄 것이 아닌지라, 모스는 그가 당장 자신을 개처럼 질질 끌고 가서 묶어 놓아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게 루인다운 방식임을 그간 겪어 봐서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루인은 지금까지 함께 지내면서 모스를 가둘 기회가 그토록 많았음에도 웬만해서는 잡지 않았다. 그래, 어떻게든 억지로 잡지 않고 오히려…….
‘……놓아주었다?’
모스는 눈을 크게 떴다.
만약 그것이 의도된 것이라면?
다시 만났을 때의 그는 누가 보아도 심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기에 자신을 놓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깨달았겠지. 이 몸으론 잡아 봤자, 금방 놓칠 거라는 것을.
그러기에 그가 더 완벽한 몸으로 돌아올 때까지,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거라면?
이미 눈과 귀가 돌아왔으면서도, 그럼에도 숨죽여 때를 기다렸던 거라면?
‘설마…….’
새하얗게 질린 채, 덜덜 떨던 모스가 손에 쥔 씨를 놓으려고 하자, 그 손을 꽉 움켜쥐며 루인이 입을 열었다.
“나는 기다렸다.”
동시에 모스는 잘게 흔들리는 눈을 감추지 못하고,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 몸으로는 널 제대로 못 잡으니까.”
제가 그런 불확실한 일을 하겠냐며 뚫어지게 모스를 응시하는 루인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서 나중엔 그토록 싫어하는 신성력도, 신관도, 전부 견뎠지.”
루인은 말하고 있었다.
너를 온전한 육체로 붙잡고자 여태 몸을 납작 엎드린 채 숨죽이고 있었노라고.
그리고 그것을 위해, 그토록 싫어하는 신성력까지 받아들였다고.
“예상보다는 일렀지만.”
모스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모든 시간에 함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모스는 루인이 나머지 시간 동안은 그저 잠들어 있을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그의 가엾음에 자리를 뜨지 못하는 모스의 위로 촘촘한 거미줄을 치고 있던 것이었다. 뒤늦게 이 모든 걸 알고, 이곳을 벗어나려고 해도 도망도 치지 못하게, 그렇게.
“허, 억.”
모스는 순간 공포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어 숨도 제대로 못 쉬고 헐떡였다.
이상하게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사방에 있는 모든 것이 제 목을 조르기 위한 수단으로 보여, 더는 이곳에 있을 수 없었다.
이런 성 말고 하늘이 보고 싶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하늘과 끝도 없이 걸어 나갈 수 있는 그런 땅.
축축한 땅과 풀 내음을 맡아야만 이 숨 막히는 느낌이 끝날 것 같다고 생각하던 그의 시선 끝에 테라스가 보였다.
‘숨을 쉬고 싶어.’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이러다간 숨도 못 쉬고 질식을 할 것 같다고 생각한 모스는 루인을 밀쳐 내고 그쪽을 향해 미친 듯이 뛰었다.
쾅! 문을 조심스레 열 여유도 없었다. 부술 듯 세게 열자마자 비가 미친 듯이 쏟아지는 밖을 볼 수 있었다.
“허억, 허, 억…….”
모스는 자신의 몸을 세차게 때리는 비에 아랑곳하지 않고 숨을 헐떡이며 두리번거렸다. 연회장이 있는 이곳은 층수가 높은지라, 뛰어내린다면 크게 다칠 게 자명했지만 그의 눈에는 보이는 게 없었다.
흙바닥을 밟고 싶었다. 이런 딱딱한 바닥이 아닌 흙으로 된 바닥을 밟아야 이 숨이…….
“커억!”
그러나 그것은 생각에서 멈출 뿐, 실행되지 못했다.
루인이 모스의 뺨을 후려쳤고, 엄청난 힘에 모스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마치 뼈를 으스러뜨릴 듯한 악력에 그의 귀에 이명이 들렸다.
고통에 멍하니 서 있는 모스를 루인이 멱살을 잡듯 끌어 올렸다.
“또 내게서 벗어나려고?”
……쏴아아.
모스는 힘겹게 하늘을, 아니 루인을 보았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는 비에 모스가 바르르 떨며 축축하게 젖어 무거워진 속눈썹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또!”
그런 그의 앞에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한 루인이 있었다. 가까스로 눈을 뜬 모스는 연회장에서 새어 나오는 빛에 그림자 진 루인의 얼굴을 보았다.
그 비싸고 귀한 옷이 젖어 드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스를 내려다보는 루인의 얼굴에 그새 물방울이 알알이 맺히더니 이윽고 흘렀다.
장대 같은 비로 축축하게 젖고, 또 젖는 루인을 모스는 가만히 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는 천것, 이야.”
모스의 말에 멱살을 붙들고 있던 루인의 손이 순간 움찔했으나, 모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퉁퉁 부은 얼굴로 말을 할 뿐이었다.
“나기를 천했, 고, 길잡이였고, 괴, 물이었고…… 이젠 그 어느 것도 아닌, 천것.”
천것.
모스는 웃었다.
“너는, 황, 제야.”
미친 듯이 쏟아지는 빗물이 모스의 얼굴에 쉼 없이 고였다 흐르기를 반복했다.
“영리하고, 가, 강인하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 보물 같은 이야.”
그는 이 생각을 그간 얼마나 수도 없이 많이 했는지, 때문에 얼마나 많이 무너져 내렸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둘 사이의 차이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그리해서 더는 이 관계를 이어 갈 수 없다는 것을 담담하게 말할 뿐이었다.
루인은 그저 말없이 손으로 그런 모스의 몸을 꽉 붙잡았다.
담담한 모스의 얼굴이 마치 조금만 더 건드렸다가는 아스라이 사라질 것처럼 흐리게 보였다. 그래서 그는 고개를 숙여 모스에게 입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축축하게 빗물로 젖어 들어간 얼굴이 미끄러지듯 모스의 입을 집어삼켰다.
입을 맞춘 채, 루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모스의 옅은 온기를 느끼며, 그리하여 그의 존재가 여기 있음을 확인하듯 그리 멈춰 있었다.
“하, 아…….”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던 모스가 루인의 숨을 삼키고 호흡하기 시작하며, 이어 루인의 옷을 꽉 움켜쥐었다.
빗물로 축축하게 젖어 든, 기다랗고 화려한 겉옷이 빛을 잃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동시에 몽롱하게 빛을 잃듯 흐려지던 모스의 녹안에 초점이 맞기 시작했다. 그는 먹구름이 잔뜩 껴서 끊임없이 빗물을 뱉어 내고 있는 하늘에서 가까스로 시선을 떼어, 루인을 툭 밀쳤다.
쏴아아아…, 둘 사이를 메우는 것은 빗소리뿐이었다.
시야를 가리는 빗물 사이로, 서로를 바라보는 루인의 눈빛만큼은 형형했다. 루인은 놓칠세라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모스를 응시했고, 모스는 그런 루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네가.”
그 모습을 보던 모스가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이, 렇게까지 하, 하는 이유가… 뭐, 야?”
루인은 엉망이었다.
지금 몰골만 보자면 이 연회의 주인이었음이 분명한데도, 주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빗물에 젖어 축 가라앉은 머리와 몸에 달라붙는 옷은 저 안에서 봤을 때처럼 빛나지 않았다. 허리에는 아까 마귀에게 당한 부상도 있었고, 상처에서 흐르는 피 때문에 좋은 냄새 대신 피비린내가 짙게 풍기고 있었다.
하나 이런 꼴이 되었음에도 그는 모스를 여전히 붙들고 있었다. 그토록 손해를 보기 싫어하는 이가, 추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이가.
모스는 느릿하게 고개를 숙여 제 팔을 붙든 손을 보았다. 어찌나 세게 움켜쥐었는지, 그의 손과 팔에는 힘줄이 곤두서 있었다.
왜일까.
그는 이런 곳이 아닌 따뜻한 황궁을 택할 수 있으나, 자신과 함께 이 축축하고 기분 나쁜 빗줄기 속에 남아 있었다.
또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한 황가의 문양이 새겨진 겉옷이 망가지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을 붙들고 있고, 또…….
아.
모스는 순간 믿을 수 없다는 듯 루인을 보았다.
모스의 눈에 기대 어린 빛이 서서히 깃들기 시작했다. 마치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의 어둠 속에서 등불이 켜진 것처럼, 온전하고 또렷하게 제 존재가 여기 있음을 알리듯 서리는 빛에 루인은 눈을 뗄 수 없었다.
“혹시 나를…….”
모스는 아까부터 줄곧 그런 의문이 들었다.
왜 더 나은, 무수히 많은 조건들을 두고, 자신을 택했는지.
또 저것뿐만 아니라 루인이 자신을 닮은 환각을 보고 계속 찾아 헤맨 것도, 이후 눈과 귀를 회복하고도 귀찮음과 번거로움 그리고 위험함을 무릅쓰고 자신의 앞에서 연기를 한 것도, 마귀가 달려들 때 다치면서까지 자신의 앞을 막은 것도.
그리하여 당장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거머쥐는 대신, 모든 것을 버려야 쥘 수 있는 자신을 선택한 이유.
“나를 사랑, 해?”
사랑.
그것 말고는 없었기에.
“그럴 리가.”
그러나 루인은 그 말을 듣자마자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즉답했다.
“사랑? 내가…….”
너를? 이란 단어를 내뱉으며 비웃듯,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말을 이어 가려던 루인의 얼굴이 굳어져 가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모스의 눈에 불이 켜지듯 열기가 서렸었다.
옅은 빛도 아니고, 강하고 뚜렷해 밝다고 느낄 정도의 빛이 모스의 눈에 새겨졌었다. 그 빛이 어찌나 강하고 힘이 있는지, 방금만 해도 부스러질 듯 사라질 것만 같았던 모스의 존재감도 강해졌었는데.
“왜 그런 얼굴이지? 그게 그리 중요한 것인가?”
루인이 부정의 대답을 함과 동시에 그 빛이 꺼졌다.
언제 켜졌냐는 듯, 마치 이 빗물에 힘을 잃은 초처럼 으스러지듯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 것을 보며 루인의 얼굴에 다시금 초조함이 번졌다.
“이게 무어라고, 사랑이 네게 대체 어떤 영향을 주길래 이러는 것이지?!”
“…….”
“그건 어차피 감정이다. 눈앞에 내보여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그저 감정일 뿐인데. 그게 대체 뭐가 그리 중요한 것이라고 이러는 건데?”
그는 모스의 어깨를 붙들고, 대답을 채근하듯 흔들었다. 그러나 모스는 마치 인형처럼 그의 손안에서 흔들릴 뿐, 여전히 넋을 놓고 있었다.
“또 나를 이곳에 홀로 두려고?”
차라리 단 한 번도 빛을 가져 본 적이 없었더라면 괜찮았을 텐데, 누구든 빛을 가졌다 잃어 보면 그 상실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루인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 인형 같은 모스를 원하는 게 아닌, 눈에 빛이 깃들어 누구보다도 또렷하게 제 존재를 알리는 그를 곁에 두고 싶다고.
“날 가엾게 여겨.”
하나 그 방법이 무엇인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
“그간 너를 속인 내게 복수를 하고 싶나? 네가 원한다면 다시 눈을 그어 주지, 귀도 찢어 주지. 이번엔 연기를 하지 않고, 치료도 받지 않으마. 이러면 되는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제 빛은 다신 켜지지 않을 듯, 모스의 눈은 새까맣게 죽은 것처럼 가라앉았다.
“뭐라도! 뭐라도!! 말해!!”
결국 이를 견디다 못한 루인이 모스를 흔들며 다시 소리쳤다.
“무엇을 원하는지! 당장 말……!”
“……사랑.”
그때, 열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모스의 입이 열렸다.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새하얗게 질린 얼굴과 새파란 입술로.
“나는… 네가 나를… 사랑해 줬으면 조, 좋겠어.”
그러나 그토록 듣고자 했던 모스의 대답이건만 루인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그게 무엇인데? 그건 내가 할 수 없는 것이다.”
“…….”
“그래, 눈과 귀를 주마. 혹 부족하면 짐의 팔을 잘라 줄까? 다리를 내어 줄까? 아니면 무엇을 내어 줄까. 무엇을 내주면 나를 가엾게 여겨 남을래.”
“…….”
“대답해! 당장 대답하란 말이다!!!”
스스로도 답답하다는 얼굴로, 루인은 호소하듯 모스를 붙들고 다시 채근했으나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아니면 직접 네가 앗아가.”
스릉, 검이 뽑히는 소리가 났다. 루인의 허리춤에 있던 검이 검집에서 뽑혀 나와 어느새 흉흉한 기세로 둘 사이를 가르고 있었다.
그 검을 루인은 모스에게 쥐여 주었다. 모스는 잡지 않으려고 손가락을 펼쳤고, 검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챙-.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집어 든 루인이 모스의 손에 다시 쥐여 주었다. 이번에도 모스는 손을 펼쳐 검을 잡지 않았고, 다시 검은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자 루인은 또 모스에게 검을 쥐여 주며…….
“하, 하하…….”
반복, 그리고 또 반복.
그 무의미한 행위의 반복에 모스가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울음인지 웃음인지를 모를 표정으로 소리 내 웃으며 루인을 응시했다.
무엇이든 내줄 수는 있지만 사랑은 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내, 루인.
사랑하지 않는 이에게 네 곁에 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며 묻고, 사랑하지 않는 이에게 눈과 귀를 도려내 주면 남을 것이냐 묻고, 사랑하지 않는 이에게 순식간에 제 삶을 앗아 갈 수 있는 검을 쥐여 주고, 원하는 대로 목숨을 취하라고 말하는 그.
세상 어떠한 이가 사랑하지 않는 이에게 이리 군다는 말인가.
그러기에 모스는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너는 나…를 사, 사랑하는구나.”
이 모든 행동이.
“너는, 나를 사랑해.”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이었음을.
모스는 새빨갛게 젖은 눈으로 루인을 보았으나, 루인은 잠시 표정을 굳힐 뿐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여전히 단호하고 확신에 차서.
“그러니 내가 내어 줄 수 있는 것을 말해. 아니면 내 멋대로 내어 주면 되는 건가?”
그는 애써 그런 모스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그의 손에 억지로 쥐여 준 검을 도로 제가 쥐었다. 그리고 정말로 눈과 귀를 그을 셈인 듯 검을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본 모스는 그만.
“나는 너, 를 사, 사랑해.”
그를 끌어안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챙, 루인이 들고 있던 검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날카로이 지면을 울렸다.
“나,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아, 않은 적이 없어.”
우리는 왜 이토록 돌아왔는가.
“처음 본 수, 순간부터 너는 내게 세, 세상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모스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의 목을 세게 껴안았다.
제게 매달리는 모스의 모습에 굳어 있던 루인의 눈이 도르륵 움직이더니, 이윽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제 품에 안긴 모스를 응시했다.
‘나를 사랑한다고?’
루인은 혼란스러웠다. 지금 모스가 제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 추상적이고 괴상하기 짝이 없는 감정인, 사랑을 내게 하고 있다고?
기분이 이상했다. 루인은 이상하다는 듯 제 몸을 보았다.
아까부터 서서히 빠르게 뛰기 시작하던 심장은 저 말을 들은 순간, 이보다 더 흥분할 수 없다는 듯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무언가가 자꾸만 벅차오르는데, 이는 전장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사랑, 고작 그 말 하나 들었다고, 자신이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다.
모스를 만난 이후로 줄곧 그랬지만, 지금은 더더욱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루인은 불편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기울였으나, 그럼에도 그의 시선은 여전히 모스에게 향해 있었다.
“워… 원하는 것을 아, 알려 달라고?”
하나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은 이어진 모스의 말에 살짝 굳었다.
아까 전, 루인이 모스에게 원하는 것을 주면 제 곁에 있겠냐고 물었기에, 이제야 그것에 대한 대답을 하나 싶었던 것이다.
루인은 생각했다.
커다란 부를 원하려나? 하지만 모스는 물욕과는 거리가 먼 이이니, 물질적인 것을 요구할 리는 없었다. 하면 명예를 원하나? 루인은 그조차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용사였음에도 그것을 내세울 생각일랑 없는 이이니, 명예나 직위는 필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내게 요구할까.’
곰곰이 생각했다. 아마 모스가 가장 원하는 것은 사랑이겠지만, 그건 진즉 주지 못한다고 답했고, 그렇다면 틀림없이 속인 것에 대한 보상을 요구할 것이다.
‘그래, 복수.’
남은 것이라고는 그거 말고 없었다. 아까는 루인이 내민 검을 마다했지만, 아마 생각하면 할수록 배신감이 컸던 것이 틀림없다. 그럼 눈과 귀는 당연히 달라고 할 것이며, 더 나아가 환영에서 그랬던 것처럼 몸을 상처 입히길 원할 수 있었다.
그런 것 정도야 쉬이 줄 수 있다며 생각하던 그때, 머뭇거리던 모스가 말문을 열었다.
“지금 당장 날….”
그리고 요구했다.
“…세게 아, 안아 줘.”
루인으로서 영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루인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인상을 구겼다.
고작 원하는 게 안아 달라는 것이라니? 그게 다란 말인가?
아니면 자신을 놀리는 건가 싶었던 루인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내려다보았지만, 이윽고 그게 빈말이 아님을 깨달았다.
모스는 온 힘을 다해, 루인의 목을 껴안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정말 제 있는 힘을 다 짜낸 듯, 힘껏 루인을 붙들고 있는 것에 조금씩 루인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또.’
혹 거절이라도 당할까, 눈을 질끈 감고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움츠러든 모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또 이상하다. 욱신거려서 아픈 것 같으면서도, 또 마냥 아픈 건 아닌, 그런 이상한 느낌.
하지만 지금은 그 느낌이 무엇인지 파헤칠 생각도, 이해할 시간도 없었다.
그는 당장 이 괴물을 안고 싶었다.
머뭇거림은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망설임조차 사치라는 듯 모스에게 팔을 뻗었다. 더 이상 손안에 검은 없었다.
느릿하게 하지만 확실히, 모스를 들어 올리듯 끌어안았고, 모스는 화답하듯 루인을 껴안고 있던 팔에 더 세게 힘을 주었다. 그리고 서로의 체향을 맡았다.
익숙한 향이었다.
빗속에서 둘은 한동안 말없이 껴안고, 서로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그런 그의 품속에서.
모리스는, 괴물은, 그리고 모스는 생각했다.
아마 앞으로 평생을 그와 함께 살아도 루인의 입을 빌려 ‘사랑한다’는 말은 들을 수 없을 것이라고.
“그럼 너는 이제 내 곁에 남을 것인가? 내가 네게 사랑을 고하지 못해도, 더는 가엾지 않아도- 그럼에도 끝까지 내 곁에 남는 것인가?”
하나 이젠 상관없었다.
모스는 그 말을 이젠 듣지 않아도 되었다.
“응.”
이미 많이 들었으니까.
“기꺼이.”
나의 괴물, 나의 영웅.
너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