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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루인 윈스 (19/21)

에필로그 : 루인 윈스

내 품에 안기듯 들어온 네 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여전히 비가 미친 듯이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너는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그게 무언지, 아직은 헤아릴 수 없고, 빈말로라도 뱉고 싶지 않았다. 다만 지금 중요한 건 네가 내 곁에 남겠다는 듯 나를 이리 세게 껴안았다는 사실이다.

한번 말을 하면 지키고자 하는 너니까, 틀림없이 너는 내 곁에 남을 테지만, 나는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늘 준비할 것이다.

언제든 가엾어질 준비를.

***

환영임을 알면서도 내겐 매 순간이 너였다.

나도 알았다. 너는 남들에게 보이지 않고, 그림자도 없는 거짓임을. 하지만 알면서도 그것마저도 없으면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아 놓지를 못했다.

보이지 않는다 여기던 눈은 어느 순간부터 색을 알아보았고, 들리지 않는다 여기던 귀는 어느 순간부터 약간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지만, 거기까지였다.

나는 여전히 제대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간 속에서도 네 존재만큼은 환영일지라도 늘 선명했다.

그리고 너는 내게.

“언제, 부, 부터 눈이 보, 이고, 언제, 부터…… 드, 들을, 수 있….”

끝내 실체가 되어 찾아왔다.

나는 물끄러미 지금 내 앞에 존재하는 너를 응시했다. 그간 숨죽여 웅크리며 때를 기다리고 있던 나를 정말로 눈치채지 못했는지, 연신 내 앞에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을 하는 너.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그간 나의 어리석음에 헛웃음이 절로 나올 뻔했다. 환영을 어찌 너로 착각했을까. 그게 의문일 정도로 내 앞의 너는 그 어떤 것의 존재보다도 선명했다.

나는 그 선명한 모습을 한시라도 놓치기 싫어,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그간 보이지 않는 척을 했기에 이리 똑바로 보는 것은 재회 후 거의 처음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아니…….”

여전히 너는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얼빠진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어찌 눈이 보이고, 귀가 들리는 것이냐며. 그럼 그간 자신을 속인 거냐는 듯한 원망, 그리고 내가 알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감정들이 네 눈가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너는 그간 정말 몰랐나 보다.

“언제, 부…터 날 알아봤, 어?”

그러기에 이런 질문을 하지.

내가 언제부터 너를 알아보았냐고? 네가 어찌 그런 질문을 내게 할 수 있나?

내게는 그 질문 자체가 우스웠다.

제아무리 병신이 된 나라도, 눈앞에 나타난 너 하나를 알아보지 못할 거 같냐고 그리 따져 묻고 싶었으나 참았다.

그리하여 언제부터 너를 알아보았느냐고 묻는다면.

“처음부터.”

의심의 여지 없이.

***

『만, 져 봐.』

촛불을 쥐라기에 쥐었다.

『파, 팔을, 줘. 팔을, 팔을 줘.』

배를, 팔을 온갖 부분을 내어 달라기에 주었다. 네가 요구하는 것들은 갈수록 과해져서 그 탓에 생사를 몇 번 오갔으나, 그건 중요치 않았다.

환영인 너는 영리했다. 네 말을 따르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았고, 다음에 나타날 땐 더한 것을 요구할 게 뻔했지만, 이를 알면서도 다 받아들였다.

네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벌이라도 주듯, 넌 나타나지 않을 거니까.

제국의 황제가 이 꼴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제 모습이 우습기는 했다. 틀림없이 이 어리석은 지도자를 둔 제국민들의 원성은 자자할 것이며 카를은 저 너머에서 계속 날 부르며 어떻게든 멀쩡하게 돌려놓으려고 노력하겠지만 이미 글렀다.

이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심지어 나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널 지워 버리겠다고 눈과 귀까지 버렸는데, 이 이상 어쩌란 말인가? 눈을 잃어도 넌 내 앞에 선명하게 보였고, 귀를 잃어도 스스로를 해하라는 너의 말은 이전보다 더 선명하게 들렸다.

그래. 너는 나를 길들였다.

끝내 나는 그거 하나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이윽고 내 현실을 깨달았다.

나는 널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죽는다.

네가 안 보이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고작 환영 따위라 할지라도, 환영이 나타나지 않는 것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며 눈이 뒤집혔고, 폐가 굳은 듯 움직여지지 않아 추하게 숨을 꺽꺽거리기 일쑤였다.

‘병신 같은 몸.’

내 말을 하나도 듣지 않는 몸은 필요도, 쓸모도 없었다. 나는 몇 번이고 이 병신 같은 몸이 역겨워 죽으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죽으려고 할 때마다, 환영인 너는 그런 내 앞에서 슬픈 표정을 짓고 사라지려고 했다. 발부터 서서히 사라지는 네 모습을 보고 있으면 죽음이고 뭐고 눈에 들어오는 게 없었다.

그저 절벽에서 다 녹은 네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서, 어떻게든 네가 사라지는 것을 막겠다는 마음 하나만 남았기에.

“하면, 짐이 안 죽으면?”

결국 나는.

“짐이 죽지 않고, 이리 있으면 계속 나타날 건가?”

오늘도 살아남았다.

이렇듯 내 모든 각오는 매번 네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그 끝에 몰려서도, 난 네가 보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난 네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환영조차 없으면 영위가 되지 않는 나날이었으니, 상처 한둘 느는 게 더 이득 아니겠는가. 그렇게 나는 하루하루 몸을 내어 주며 죽지 못해 살았다.

‘나는 지금 깨어난 것인가. 여전히 잠든 것인가.’

없는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다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간 잦아들었던 현실의 감각이 내게 몰아쳤다.

오늘도인가. 눈을 감은 기억이 없는데, 눈을 뜬 기억이 앞서다니.

‘병신이 다 돼서.’

나도 안다. 스스로가 점점 미쳐 가고 있다는 것을.

‘빌어먹을 향…….’

점점 꿈이 아니라는 듯 몸의 감각 하나하나가 선명해졌다.

암살자의 기척은 없으나, 오늘도 어김없이 방에 소란스레 꽉꽉 들어찬 인기척이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이 코끝을 아리게 할 정도로 지독한 향내.

저 향은 일반적인 향과는 달랐다.

명하지도 않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향냄새가 나기 시작하더니, 저 향은 내가 원치 않아도 날 수면 아래로 잡아당겨 잠들게 만들었다.

물론 억지로 잠드는 기분만큼 역한 것은 없는데, 그럼에도 저 향을 눈감아 주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잠을 자면, 꿈을 꾸는데.

『루, 인?』

그곳에서 그 괴물이 웃고 있거든.

아주 행복하고 화사하게, 숲에서 있던 그때처럼. 해맑게 웃으며 제 뒤를 따라오는 모스의 모습 때문에 저 향이 이상한 물건임을 알면서도 거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정말 죽을 뻔했군.’

다만, 이번 팔에 그은 상처는 좀 깊었다. 팔을 그으라기에 그었으나, 요령이 없었던 탓인지, 아니면 눈이 보이지 않았기에 그랬던 것인지… 하도 피를 많이 흘려 정신을 잃었지만, 상관없었다.

‘다시 꾸고 싶을 만큼 또렷했다.’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다, 꿈을 복기라도 하듯 떠올렸다. 깊은 상처를 내어 준 가치가 있었다.

정신을 잃고 꾸게 된 꿈은 마치 현실과 착각할 정도로 흡사했다.

이전에 꾸던 꿈속에서는 현실의 내가 눈이 없을지라도 늘 앞을 볼 수 있었는데, 이번 꿈은 특이하게 현실처럼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다만 눈앞에 네가 있음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면 내가 이리 머저리처럼 꿈에 취해 앉아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스.”

꿈에서 나는 네게 닿았다. 네 이름도 불렀다.

너와 닿은 곳에는 꽃이 피어오르듯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고 살아 있는 것 특유의 생기가 넘실거렸다.

아, 나는 이게 꿈인 것을 알면서도 환희로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나는 늘 빌었다. 혹 시체가 된 너라고 할지라도, 그 식어 빠진 뺨에 입을 비비고 끌어안아 닿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한데 내게 닿은 것은 시체도 아니었고 살아 있는 너였다. 그래, 살아 있는 너. 꿈임에도 모든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충족감에 가슴이 벅찼다.

‘여태 나는 죽어 있었구나.’

너는 죽었으니, 이리 네게 닿는 건 필시 꿈일 테지만 무엇이 되었든 좋았다.

난 네가 무엇이라도 상관없다는 듯 힘주어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널 안자마자 그토록 무수한 상상 속에서도 구현해 낼 수 없던 네 체향을 맡을 수 있었다.

깊게 숨을 들이쉬며 몸을 쓱 숙였다. 그 행동은 아주 느릿했는데, 혹여 조금이라도 빠르게 움직였다간 설령 꿈일지언정 제 품속 이것이, 사라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조심스레 움직이던 그때 드디어 네게 툭 닿았다.

그리고 부드러운 뺨이 내 뺨에 맞물리자,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뺨에 입 맞출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무슨 단어로 엮어 표현하면 좋을까. 네가 마치 살아 돌아와, 내 앞에 있는 것 같은 이 감각은.

“고작 팔 하나로 이리 진짜처럼 굴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짐은 다리도 도려낼 수 있다.”

그간 나는 물속에 있었음을 깨달았다.

감탄조차 내뱉지 못한 채 그 감각에 잠식되듯 잠겨 들어갔다. 입술 끝에 닿는 부드러운 감각, 살아 있는 것만 같은 열기, 옅은 숨.

그 뺨에 입을 맞추는 지금, 나는 더는 물속이 아닌 뭍으로 올라와 숨이 탁 트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괴물아.”

환희에 차, 그리 말을 하면서도 내 머리는 꿈속임에도 빠르게 돌고 있었다. 여태 온갖 꿈을 다 꾸었지만, 이번처럼 생생했던 것은 없었기에 이 꿈을 다시 꾸기 위해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꿈속에서 정신을 잃는 순간까지 생각을 곰곰이 했더니, 변수는 내가 크게 다친 것 말고는 저 향밖에 없었다. 마치 정신을 놓아 버릴 것만 같은 아찔한 향. 저 향이 제게 무슨 짓을 해도 제대로 했나 보다. 하나 그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기에, 간만에 제가 살아 있음을 느끼는데.

‘깼나.’

도로 현실로 돌아왔다. 그런 내 앞에는 어김없이 선명한 네가 있었다.

‘다시 선명해졌군.’

꿈에서는 환영이 흐릿하게 나왔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멀어 버린 눈이 담은 세상이기에 모든 게 뿌옇게 보이는 가운데, 너만은 머릿속으로 그려 낸 존재임을 알리듯 홀로 뚜렷했다.

환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그런 내 정강이에 무언가가 감겼다. 잡아서 만져 보니 웬 얇은 천 같은 것이라, 내던지듯 옆으로 치우고 다시 환영을 보았다.

“……그래. 네가 고작 팔 가지고 만족하겠나? 이번엔 무얼 줄까.”

향도 향이지만, 만일 팔을 내어 줘서 꿈에 나온 것이라면, 다리도 내어 줄 수 있었다.

그것뿐인가? 나는 더 나아가 욕심 많은 너를 위해 사지를 죄다 내어 줄 수 있었다.

죽을 수 있지 않느냐고? 상관없었다. 환영 속에서 죽는 것 이상으로 행복한 결말이 어디 있을까.

그리 생각하고 웃으며 그를 보는데, 환영이 이상했다. 깜빡이다 휙 사라진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뒤늦게 방 안을 죄 뒤져도 나오지 않는 것에 분통이 터져 허공을 보며 소리쳤지만, 환영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머리로는 안다. 저것은 자신이 그려 낸 환상이니, 어차피 곧 다시 나타날 것임을.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행동은 결코 같을 수가 없다. 나는 초조하고, 또 초조했다.

‘이번엔 무얼 달라고 할까.’

나는 애써 초조함을 감추고자 다시 나타난 모스가 내게 무얼 요구할지 생각했다.

자상의 강도는 나날이 높아져 갔다.

처음엔 칼로 옅게 긋기를 바라던 그는, 어느 순간부터 생사를 오갈 법한 중상을 입지 않는 이상 잘 나타나려 들지 않았으니까. 이번엔 더한 걸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환영을 쫓기 위해 다시 움직이려던 그때.

‘이건… 뭐지?’

발치에 뭔가가 툭 걸렸다.

요즘 하도 방 안에 찾아드는 손님이 많고, 암살자의 쉴 틈 없는 방문으로 방을 계속 바꾸니, 이상한 물건 몇 개 정도야 방 안에 있어도 괴상하게 생각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모든 감각이 자꾸만 발끝에 쏠렸다. 마치 저게 무엇인지 당장 확인하라는 듯, 재촉하는 듯한 본능적인 감각에 못 이겨 허리를 숙이고 조금씩 더듬어 간 끝에, 그것을 주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자연스레 손에 쥔 나는 얼어붙은 채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을 강타하는 온갖 생각 속에서 쉼 없이 휘청이며 균형을 잡을 수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뱉고 싶었으나,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성을 되찾아 생각을 정리하려 했으나, 혼란에 찬 머리는 어떠한 결론을 내는 걸 거부했다.

다만 손은 쥔 것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힘을 준 채로, 바삐 손바닥에서 굴리며 내가 아는 것이 맞는지를 확인하듯 이리 쥐었다, 저리 쥐기를 반복했다. 이윽고 손의 지문이 사라질 정도로 세게 문지르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늘 대체 몇 개의 향을 켠 것인지. 평소보다 더 몸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빠르게 걸어가려는 마음과는 달리 몸은 쉬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향에 취해 혼미해진 정신 속에서, 어떻게든 균형을 잡아 앞으로 걸어가다가 벽에 얼굴이 부딪쳤다. 채 낫지 않은 눈가의 상처에 열이 확 오르며 상처가 터진 듯, 눈가가 축축해졌다. 틀림없이 피나 고름일 것이지만, 그것을 닦아 낼 여유는 없었다.

지금 당장, 확인해야만 했다.

향에 취해 눈도 귀도 보이지 않는 병신 같은 몸이 벌벌 떨렸다. 위협적인 것들이 도처에 퍼져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날 지키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사치였다.

손에 있는 것을 꽉 움켜쥔 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움직이니, 결국 이런저런 물건에 치여 온몸이 욱신거렸다. 몸 이곳저곳에 멍이 든 것 같았고, 기듯이 움직이느라 상처들이 터져 피비린내가 났으나 그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볼 겨를은 없었다.

나는 바닥을 길 뿐이었다.

그저 아까 전, 내가 내던진 이질적인 것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만이 온정신을 지배했다. 얼마나 바닥을 헤집었을까. 어쩌면 영겁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른다. 무수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간신히 아까 내가 던지듯 내려 둔 천 쪼가리를 잡아 들 수 있었다.

까슬한 촉감이 먼저 느껴지기 전에, 그 안에 파묻히듯 얼굴을 밀어 넣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한 번으로 족하지 않고, 몇 번이나 숨을 들이켜던 나는 이어 고개를 들어 손안에 든 천과 씨를 움켜쥐고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꿈이, 아니었군.”

그렇구나.

“너였어.”

살아 있었어.

뭐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는 천치와 다름없는 몰골이 되었음에도, 너 하나 못 알아볼 병신은 아니었다. 네게 닿은 건 꿈이 아니었다.

꿈이라면 왜 내가 절벽에서 버려둔 씨가 여기 있고, 네 체향이 이 천 쪼가리에서 나겠는가?

너는 살아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 있었다.

전율이 내 몸을 관통하기 전에, 널 당장 찾아, 내 앞에 데려다 놔야 한다는 생각이 몸을 지배했다.

나는 자리를 박차듯 일어나 문을 열었다. 내 왼손에는 베일이, 오른손에는 씨를 움켜쥔 채, 상처투성이로 얼룩진 몸으로, 온몸에 밴 진득한 향내를 풍기며, 그렇게 너를 찾겠다며 나서려던 그때…….

‘지금 이 병신 같은 몸으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곳을 빠져나가서 뭐 어쩌게? 이리 눈도 안 보이고, 귀도 안 들리는데, 그를 제대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어. 오히려 소란에 그는 방금처럼 도망칠 것이다.

‘날 증오하니까.’

모스는 결코 내 곁에 남을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내가 이 넓은 황궁에서 그를 찾겠다고 소란을 피우다, 그가 작정하고 숨으면 이후론 어떻게 찾겠는가? 또 설령 어찌저찌 찾아 데려왔다고 한들, 실수로라도 내가 짧게 잠들고 눈을 떴을 때, 사라지면 어쩌지? 나는 눈도 귀도 병신이라, 그가 사라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텐데?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신 그리 두어서는 안 된다.

모스를 놓치고 얼마나 후회를 했던가. 온몸을 묶어 가둬 두었어야 했음을, 치테이르를 진즉 갈기갈기 찢어 죽였을 것을, 무슨 일이 있어도 참전을 포기했어야 함을, 그 절벽에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갔어야 했음을.

‘회복해야 한다.’

여태 내 몸을 해한 것에 대한 후회는 일절 없었으나, 지금은 후회하다 못해 시간을 돌리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더듬더듬 눈가를 만지다 귀를 붙들었다. 이 너덜한 몸으로 그를 잡으러 간다는 것은 놓아주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눈과 귀를 어떻게…….

‘향.’

그래. 저 향.

나는 돌연 이 방 안을 가득 채워, 끊임없이 내 목과 코에 쑤시듯 들어오고 있는 저 향의 존재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저것은 꽤 특이했다. 웬만한 수면 향은 내게 들지 않을 텐데 잘 들었고, 심지어 약간의 치유 효과도…….

‘……치유?’

아. 나는 깨달음에 눈을 크게 떴다.

이걸 여태 왜 눈치채지 못했지? 필시 저것은 신전의 것이다. 고작 향 하나로 이런 효과를 낼 수 있다면 신전의 물건임이 틀림없다.

신성력, 이름만 들어도 뱃속이 뒤틀리는 듯한 반감이 드는 역겨운 힘. 그토록 증오하는 신이 친히 황족에게 준 특권이건만 유년기를 신성력에 얼룩진 삶으로 보냈기에, 내겐 꺼림칙한 것에 불과했다. 하나, 지금 상황에서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천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남은 잔향이, 네가 여기에 있음을 명확히 알리고 있었다.

‘다시 한번 더.’

너만 내 손에 쥘 수 있다면, 그 역겨운 신성력이고 뭐고 그보다 더한 것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자 머리가 차게 식었다. 그리고 빠르게 답을 내렸다.

‘신관을 불러 치료를 받고, 향을 피워 회복한다.’

몸을 최대한 빠르게 회복해야 한다.

나는 그 생각을 하며 당장 방으로 돌아가, 사람을 부르기 위해 종을 흔들었다. 그리고 사람이 오면 신성 치료를 받을 것이니, 신관을 데려오라 명할 계획을 세운 그때.

‘내가 회복할 때까지 모스가 기다려 줄까?’

무엇보다도 회복하는 동안에 자신을 보러 올까?

만일 그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싫어하는 상태라면, 그는 내가 눈이 보이고 귀가 들리기 시작하면 또다시 도망칠 것이다.

그럼 그를 어떻게 끌어 올까. 아니, 그 전에 그는 왜 왔을까, 왜 굳이 이곳에 왔다가 도망치는 번거로운 짓을…….

‘설마.’

나는 손을 들어 눈가와 귀를 훑고, 이윽고 몸을 더듬었다. 어느 하나 두드러지지 않은 상처가 없었다. 게다가 단순히 가벼운 상처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당장 손에 들러붙는 핏물만 봐도 엉망이었다.

몇 번이나 생사를 오간 듯한 이 몸, 그리고 가장 최근에 난 팔의 상처. 인기척이 많았던 걸 봐선, 틀림없이 소란이 일어도 퍽 크게 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소란에 모스도 왔을 것이다. 경비가 삼엄하긴 했지만, 모스라면 어떻게든 이곳에 숨어들어 올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유독 기척이 없는 이니까.

‘하면, 왜?’

의문이 들었다. 너는 줄곧 내게서 벗어나려고 했기에, 내가 아는 너는 내 앞에서 도망치는 것이 옳았다. 그러기에 어떻게든 네 존재를 내게 알리지 않는 것이 네 도망에 도움이 될 테니, 들키지 않으려고 할 것이고.

그럼 왜 너는 그 위험을 무릅쓰고 홀로 남았을까.

알 듯 말 듯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들었다. 꿈이라 여겼던, 하나 꿈이 아닌 널 만난 기억은 그새 흐릿해져 더듬어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했다.

그 시작을 찾으려고 들었다. 꿈속에서 난 평소와 다름없이 보이지 않는 모스의 환영을 찾으려고 했고, 이후 네가…….

“아.”

알겠다.

네가 내게 남은 이유.

“넌 날 가엾이 여겼겠구나.”

나는 손안에 든 것을 내려놓았다.

고작 새 한 마리의 죽음에도 관심을 기울이던 녀석이었다. 그런 그가 이 엉망진창인 나의 몰골을 보고, 흔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틀림없이 가엾게 여겨, 나를 그토록 증오하고 미워하면서도 못 이기듯 내게 온 것이 분명했다.

나는 처음으로 내 손으로 만든 흉터투성이인 몸뚱이가 마음에 들어, 미소를 지었다.

이런 병신 같은 몸도 제법 쓸모 있다는 생각을 하며.

‘너는 다시 오겠지.’

널 계속 부르려면, 무슨 일이 있어도 회복이 되어 간다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어떻게든 추레하고 병신이나 다름없는 꼴로, 제 삶 하나 부지하기 어려워 바닥을 기는 인생처럼 보이면 너는 다시 날 찾아올 것이다.

그때, 문이 열리는 듯 바닥이 잘게 울었다. 아까 부른 사용인이 들어온 건가? 때마침 방을 열고 들어오는 인기척에 자리를 박차고 달려 나가듯 그의 머리채를 잡은 뒤, 한 손으론 얼굴을 틀어잡아 이목구비를 더듬었다.

겁에 잔뜩 질린 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숨을 뱉어 내는 이는 네가 절대 아니었다.

“내가 널 기억한다.”

나는 그것의 얼굴에 내 얼굴을 가까이 대고 말했다.

“넌 앞으로 날 치료할 신관을 아침마다 은밀히 데려와라.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아야 한단다. 설령 카를일지라도 말이다. 만일 이 사실이 새어 나가면, 너도, 그 신관의 목도 달아날 것이다.”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된다. 결코 최후의 최후까지 들켜서는 안 된다.

내가 바닥을 기면.

‘날 긍휼히 여기도록.’

넌 날 일으켜 세우려 할 테니.

***

“응. 기꺼이.”

지금처럼.

나는 내 품에 안기듯 들어온 네 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여전히 비가 미친 듯이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너는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그게 무언지, 아직은 헤아릴 수 없고, 빈말로라도 뱉고 싶지 않았다. 다만 지금 중요한 건 네가 내 곁에 남겠다는 듯 나를 이리 세게 껴안았다는 사실이다.

한번 말을 하면 지키고자 하는 너니까, 틀림없이 너는 내 곁에 남을 가능성이 컸지만, 나는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늘 준비할 것이다.

언제든 가엾어질 준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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