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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 : 열매, 꽃, 연못, 보금자리, 우리 (21/21)

외전 2 : 열매, 꽃, 연못, 보금자리, 우리

새소리가 지저귀는 이른 아침, 침상에서 일찍이 눈을 뜬 루인은 모스의 녹색 머리카락을 손장난 치듯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품속에 안긴 모스는 맨살이 닿는 감각이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힌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전날까지 어찌나 집요하게 괴롭힌 것인지, 온몸에 울혈이 가득했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모스의 얼굴빛은 무척이나 좋았다.

‘몇 달이 지났더라.’

모스는 슬쩍 눈을 뜨며 이젠 익숙해진 고급스러운 천장을 흘끗 보았다.

이리 지낸 지, 몇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 시간은 모스가 황궁 생활에 적응하는 데에 꽤 충분한 시간이었다.

황궁을 돌아다니는 동안 루인은 모스를 떼어 놓고 지내지 않았기에, 이젠 황궁에서 모스의 존재를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그리고 그 한 달 동안 제법 여러 일들이 있었다.

-네가, 네가- 그, 그-!

가장 먼저 벌어진 일은 루인과 함께 복도를 걸어가다 리엘을 만난 것이었다. 루인은 모스를 가둬 두지 않고, 그가 다니는 곳마다 보란 듯이 데리고 다녔는데, 그러다 청소를 하던 리엘과 마주친 것이다.

너무 놀랐는지, 리엘은 황제의 옆에 붙어 있는 모스를 보고 순간 루인의 존재를 잊은 듯 손가락질을 해 버렸다. 그것을 본 루인에게 곧장 손가락이 잘릴 뻔했지만 모스의 애원으로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나저나 너, 마, 말도 할 줄 알았어?! 이-! 나는 네가 죽은 줄 알았다고!!

치테이르가 이상한 괴물이 되어 돌아온 것은 이미 제국 전역에 퍼질 정도로 유명해진 사건이었다. 하여 리엘은 돌아오지 않는 모스를 보고, 그 사고에 휘말려 명을 달리한 줄 알았다며 울먹였다.

-그 사고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는지 알아? 아직도 찾지 못한 실종된 신관들과 기사들도 많고, 그래서 나도 당연히……!

모스는 문득 실종된 신관이란 말에, 향로를 갖다주라 명하던 신관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날 이후로 그 신관을 만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던 사이, 그런 제 앞에서 리엘이 그만 참지 못하고 펑펑 눈물을 쏟아 내는 바람에 더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모스는 허둥지둥 손수건을 찾아 리엘을 달래 주려고 했으나, 루인의 서늘한 시선에 리엘이 “이젠 날 죽이려 하기까지 하네!”라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면서 일은 마무리되었다.

-살아 계셨습니까? 다행입니다.

정신을 차린 카를도 모스를 찾아왔다.

카를은 그간 대체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모스가 보기에도 살아 있는 게 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수척해진 몰골이었다.

-진짜 다행이에요.

처음엔 모스가 어찌 돌아온 것인지 이유라도 듣고 싶은 듯 루인을 흘끗 쳐다보았지만, 루인의 어림도 없다는 표정을 보고 헛웃음을 지으며 “일을 때려치우든지, 더럽고 치사해서…….”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어 기력을 다한 이처럼 “이젠 더는 못 버텨.”라는 말을 유언처럼 내뱉고 눈을 뒤집으며 쓰러졌다.

그 모습에 모스가 경악하며, 카를을 부축하려고 했으나 루인은 그런 모스를 만류하고는 저 멀리 턱짓했다. 이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의원들이 달려와서 카를을 부축해 사라지고, 그 뒷모습을 얼빠지게 보는 모스의 머리로 루인이 가벼이 입 맞추며 말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동안 쉬고 오면 괜찮아지겠지.

모스는 그 모습을 조금 질린 듯 응시했다. 루인은 정말 악덕한 고용주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왜 오라버니가 황궁에…….

메리도 만났다. 모스는 메리를 직접 보러 가겠다며 했지만, 루인이 이를 들어줄 리가 없었다. 대신 메리를 황궁으로 데려오게 했고, 메리와 모스는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갑자기 인기척이 들리기에, 오라버니인 줄 알고 오두막을 나섰는데 웬 기사님들이 계셔서…….

메리는 오두막에서 매일 모스를 기다렸다고 한다. 하지만 모스는 긴 시간 돌아오지 않았고, 그렇게 기다림이 길어지던 중에 기사들이 찾아와 황궁에서 모스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을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자마자 메리는 곧바로 마차에 몸을 싣고 왔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황제에게 안기다시피 있는 모스를 보고 그녀는 놀란 듯 말을 더듬다, 이어 생각하기를 멈춘 듯 넋을 놓은 표정을 지었다. 황제와 무슨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두 사람이 연인일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랄까. 황제는 신분도 신분이지만, 아주 서늘하고 소름 끼치는 인간이었다. 반면 모스는 동글동글하고 온화하면서도 소담한 느낌이었기에 메리는 한참을 멍하게 두 사람을 응시했었다.

메리는 며칠 동안 황궁에서 귀빈처럼 호화로이 지내며 모스와 자주 만났는데, 처음에는 둘 사이를 의심하듯, 계속 모스와 루인 곁에서 맴돌았다. 마치 관찰이라도 하듯 물끄러미 바라보는 메리의 시선에 모스는 너무 부끄러웠지만, 동시에 신기하기도 했다.

어찌 보면 메리의 행동은 굉장히 무례한 것이었다. 감히 황제와 그의 반려를 계속 관찰하듯 쳐다보고 따라다닌 것이니까.

그러나 그런 메리의 행동에 대해, 한마디 뭐라고 할 줄 알았던 루인은 별말이 없었다. 모스가 메리를 만나는 것에 대해선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둘만의 시간을 존중하듯 일부러 자리를 비워 줄 때도 많았다.

-흐응.

그때마다 메리는 주름진 눈을 샐쭉 찢듯이 웃으며 모스가 영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마치 내 시간을 아는 거 같네요.

그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지만 메리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루인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메리의 눈은 묘했다. 원망스러운 거 같기도, 고마운 거 같기도, 그리고 믿는 거 같기도…….

루인의 배려 덕분에 두 사람은 그간 있던 일을 다 얘기할 수 있었지만 그런 나날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메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생활은 자신과 맞지 않는다며, 당장 원래 살던 오두막으로 돌아가 살겠다고 선언해 모스를 서운하게 한 것이다. 제대로 이별할 시간도 없이, 갑작스레 돌아가겠다고 하니 모스는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모스는 내심 메리가 이 황궁에서 더 시간을 보낼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럼 저는 가 볼게요.

이별 준비는 짧았다. 루인과 모스가 주겠다는 것들을 전부 마다한, 그저 조촐한 짐을 든 메리는 마차 앞에서 모스에게 말했다. 그런 메리에게 모스가 무슨 말이라도 하려던 그때.

-여생은 여기서 살지 그래?

모스 대신 메리에게 말을 건넨 이는 의외로 루인이었다. 모스도, 메리도 예상하지 못한 루인의 말에 모두가 놀란 듯 루인을 보았으나, 그는 무덤덤한 얼굴로 메리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메리의 시선이 쭉 위로 향해, 루인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맞물렸다. 황금색 눈동자 안에 잔뜩 노쇠한 노인이 담겨 있었다. 이미 인간을 초월해 산 몸은 온통 주름이 지고, 검버섯이 피어 있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든 듯 잘게 떨리고 있었다. 하나 그럼에도 그녀의 녹색 눈만큼은 반짝거리듯 선연하게 빛나서 보석처럼 보였다.

-돌아갈 곳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리고 노인이 그 녹색 눈을 휘며 빙긋 웃었다. 대답이라고 하기엔 엉뚱한 말이었다. 하나 그녀가 미소를 짓자, 루인은 살짝 눈을 크게 뜨더니 마치 대답을 들은 이처럼 더는 그녀에게 묻지 않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도, 돌아갈 곳?

모스만이 의문인 듯 메리를 응시했다. 그녀의 말이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그녀의 시선이 제 뒤에 서 있는 루인과 자신을 번갈아 향한다는 것을 보고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아니야. 내가 돌아갈 고, 곳은 네 곁이야.

돌아갈 곳.

원래 둘에게 돌아갈 곳이란, 서로의 곁이었다. 메리는 모스에게 돌아가고자 긴 세월을 홀로 버텨 냈고, 기억을 되찾은 모스도 자신이 돌아갈 곳이 있다면 당연히 메리의 곁이라 여겼으나.

-오라버니.

메리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편지 많이 보내 주세요. 비록 제 눈이 침침하고, 손이 느리지만 답은 어떻게든 보낼게요.

-호, 혹시 너무 느, 느리면? 네가 너무 기, 긴 시간 답이 없으면… 내가 차, 찾아가도….

-그래도 찾아오지 마세요. 저는 그저 느린 것뿐이니까요.

아. 모스는 그 대답을 듣는 순간, 그간 메리와 지내면서 은연중 느꼈던 불안했던 마음의 정체를 제대로 확인한 느낌에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메리를 붙잡았다.

-아, 아, 안 돼. 메리 시, 싫어. 나, 나는… 나는…….

-보여 드리기 싫어요.

메리는 얼굴을 잔뜩 적신, 자신보다 훨씬 어린 소년처럼 보이는 모스에게 단호히 말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나보다 어린 당신께, 그런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지 않아요.

곧 다가올, 자신의 마지막을 하나 남은 핏줄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듯 결연한 얼굴이었다. 지금만큼은, 그녀는 노인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였다. 나이가 너무 들어 마지막을 준비하는 그 얼굴에 모스는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가끔 꽃반지나 편지에 담아 보내 주세요. 전에 주신 것들은 이미 흙으로 돌아갔거든요.

그리 말하며 메리는 제 손을 가벼이 흔들었다. 그게 신호였다는 듯, 그런 그녀의 모습에 모스는 자리를 박차듯 뛰어나가 허리를 숙여 그녀를 꽉 껴안았다.

-편지 하, 할게. 답 빠, 빨리빨리 보내 줘야 해. 답 느리면 내, 내가 채근할 거야. 무, 물론 알아 네 소, 손이 느릴 수밖에 어, 없는 것을. 하지만 네가 느리게 보, 보내더라도, 나는 나의 하루를 다, 담아 매일같이 네게 보낼 거야. 그러니까, 그, 그러니까…….

-사랑해요.

그런 모스를 마주 끌어안으며 소녀가, 노인이.

-사랑해요, 오라버니.

그간의 세월을 담아 사랑을 고했다.

그녀는 그토록 만나길 고대했던 모스와 헤어지는 것이 분명한데도 어째서인지 자유롭고 홀가분해 보였다.

그런 메리의 표정을 보았기에 모스도 더는 붙잡을 수 없었다.

-잘 지내세요.

그 긴 시간 동안 모스를 애타게 찾았고, 쫓기며 살았고, 돌아오고 나서도 모스를 기다렸던 그녀였다. 이제 그녀는 더는 무엇을 찾을 필요도, 누군가에게 쫓길 필요도, 뭔가를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너도, 너도… 자, 잘 지내야 해.

모스도 더는 제게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사는 메리를 응원하고자, 아쉬운 마음을 간신히 접고자 했다. 하지만 그게 마음처럼 쉬이 되지는 않는 것이었다.

‘잘 돌아갔을까.’

그게 바로 어제였다.

지금이라도 떠나가는 마차를 뛰쳐나가 세우고픈 충동이 불쑥불쑥 찾아왔다. 메리와의 마지막 만남일 수도 있는 것을 이리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과 그녀의 생각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이 계속 충돌했다. 그 탓에 모스는 방 안에 돌아와서 한동안 눈물을 뚝뚝 흘렸었다.

지금도 메리가 떠나는 모습이 다시금 떠오르자, 돌연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이상했다. 늘 같이 있는 게 익숙했던 둘인데, 이젠 떨어져 있는 게 더 익숙해지고, 각자의 삶이 있는 게 너무 생경하고, 묘하게 서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또 울려고?”

메리를 생각하던 모스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느릿하게 들어 올린 그는, 언제부터인지, 모스를 내려다보고 있던 루인과 눈이 딱 마주쳤다.

“아, 아니야.”

목소리가 쉬어서 형편없었다. 어제 늦게까지 가졌던 정사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모스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빨갛게 변했다.

쉬이 말문을 열지 못하는 모스를 보던 루인은, 평소보다 이르게 몸을 일으키더니 말했다.

“오늘 갈 곳이 있으니, 준비해.”

갈 곳?

모스가 의아하다는 듯 루인을 보았다. 루인은 여태 모스를 황궁 내에서만 돌아다니게 두었지, 밖으로 데려간 적도 없고, 웬만해선 많은 이들의 앞에 내보낼 일은 만들지 않은 이였다.

한데, 가야 할 곳이 있다고 하는 거를 보면 밖으로 나가는 거 같은데…….

“빨리.”

“아, 아… 으, 응!”

뭐가 되었든 좋았다.

목적지는 알 수 없으나, 묘하게 설레는 마음에 모스는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려고 하다 이윽고 어제 정사의 여파로 몸을 비틀거렸고, 그런 모스를 루인은 단숨에 안아 들었다.

“고, 고마…….”

그런 루인의 목에 손을 두른 모스는 이윽고 새하얗게 질린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가기 싫은가. 그래서 떼를 쓰나?”

“아니, 나는, 그게…….”

꾸욱. 아침이라 그런지, 아니면 늘 그런지 알 수 없는 묵직한 존재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픽, 루인이 웃으며 모스를 내려 두고 뒤를 돌았다.

단단하고 커다란 몸엔 여전히 상흔이 가득했으나, 이전보다는 조금 옅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몸 위에 옷을 입은 루인이 뒤를 돌며 모스를 응시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모스가 뛰듯이 루인에게로 갔다.

이제는 제법 익숙한 아침이었다.

***

모스는 마차에 탈 때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루인과 함께 황궁 밖을 이리 본격적으로 나가는 것은 거의 처음이었고, 이런 마차를 타 본 적이 없어 마음이 설렜다.

물론 마차를 타기 전에 수많은 기사들이 있어서 몸이 긴장되었으나, 그는 자신의 어깨를 감싸는 루인의 손을 느끼고 긴장을 풀었다.

‘신기해.’

마차 안은 생각보다 넓고 쾌적했다. 마치 방 안처럼 꾸며 놓은 것에 감탄도 잠시,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말 이상한 느낌이었다. 말이나 수레를 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느낌에 잠도 안 자고 눈을 반짝이자, 루인이 그런 모스를 보고 헛웃음을 짓고는 이내 눈을 감은 채 그에게 기댔다.

잠들듯 눈을 감은 루인은 모스가 그를 처음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살이 많이 오르고, 건강해 보였다. 그런 루인의 모습에 모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얼굴을 구경했다.

이제 제법 눈가의 흉이 꽤 옅어졌고, 찢어진 귀도 살이 덜 붙어 너덜거리는 부분은 있으나, 대부분 분홍빛으로 아물어 가고 있었다.

다만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흉들도 있었다. 그 붉은 상흔들을 빤히 응시하던 모스는 손을 뻗어 그 부분을 토닥토닥 조심스레 두드렸다. 아마 이 흉은 평생 남을 수도 있고, 어쩌면 운 좋게 사라질 수도 있으나… 조금이라도 더 옅어지길, 더 빨리 낫기를 기원했다.

그렇게 어설프게 토닥이는 손길은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며칠 동안 마차를 탔다.

모스는 처음에는 재밌게 탔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마차가 질렸다. 중간중간 새로운 곳에 가서 잠드는 것도 역시나 처음에는 신기하고 새로웠으나 나중에는 피곤했다.

‘대체 인간들은 이런 걸 어떻게 타고 다니는 거지?’

이젠 본인도 인간이면서, 모스는 종종 그리 생각했다. 이 마차는 겉으로 보기엔 너무 크고 좋아 보이지만, 몇 시간 동안 앉아 있기만 했더니 이젠 감옥처럼 느껴졌다.

탁! 모스가 지루함을 숨기지 못하던 그때, 마차가 멈추었다.

멈추자마자 루인은 여태까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드디어 도착했나 보군.”

멍하니 있던 모스가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루인을 보았다. 마차가 섰던 일은 여러 번 있었던 터라, 목적지에 도착했을 거란 기대는 없었는데, 이번엔 뭔가 달랐다.

‘도착?’

루인의 입에서 도착이란 단어가 나온 것이다. 모스가 의아한 듯 그를 보던 사이, 마차의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루인을 따라 조심스레 내린 모스는.

“어?”

이어 온전히 마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마차의 앞에 펼쳐진 풍경은 별게 없었다. 남이 보면 시시하다고 말할 수 있는, 아주 평범한 숲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모스는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는 넋을 놓은 듯 한참을 멍하니 숲을 바라보았다.

비록 이곳을 떠날 때와는 모습이 많이 달라졌을지라도, 모스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여기는…….”

“너와 내가 만난 곳이지.”

루인은 담담히 말했다. 그는 이 숲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지, 미간을 구겼으나 모스는 아니었다. 물론 배척을 피하기 위해 살게 된 이 숲이 그에겐 마냥 즐거운 곳은 아니었지만, 동시에 자신의 생이 시작된 곳이니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모스는 주춤이며 서 있다가, 이내 천천히 숲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상해.’

숲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갈수록 가슴이 많이 벅차올랐다.

이곳에 몇십 년 동안 살아 놓고 이리 또 보는 게 뭐가 좋냐고 누군가는 물을 수 있었다. 모스도 그 질문에 동의하기에 지금 이 설렘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토록 오래 여기서 지냈으면, 오히려 지겨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왜 이리 설레는 거지?’

왜 이럴까. 한때, 이곳이 그의 삶 그 자체이자 터전이라 그런 걸까. 이리 몸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설레는 것은.

처음에 느릿하게 걷던 그는 이내 아이처럼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모스의 뒷모습에 기사들이 당장이라도 쫓을 듯 몸을 돌렸으나, 루인은 그들에게 손짓 한 번을 하고는 무심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시야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게 모스를 똑바로 응시하고는 빠르게 뒤쫓아 갔다.

“하아, 하아…….”

루인을 뒤로하고, 모스는 계속 뛰었다. 처음에는 당황, 그리고 놀라움, 그다음은 기대와 설렘으로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면서 뛰었다.

더는 괴물의 몸이 아닌지라 고작 몇 걸음 뛴 것만으로 숨이 차고, 발은 무거워서 풀을 밟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났지만, 오히려 좋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는 제가 신은 신발이 거추장스러운 듯 벗고서 맨발로 흙을 밟았다. 발에 닿는 서늘하고 말랑한 땅의 감각이 좋았다. 풀 끝이 발가락 사이를 스치는 게 좋아, 더 멈출 수 없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나무들이 인사를 하듯 손을 흔들고, 그때마다 나뭇잎 사이로 새어 들어온 햇빛의 흐름이 달라진다. 부분 부분 얼룩지듯 머리에 햇빛을 묻힌 채, 모스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한참을 뛰어갔다.

그런 그의 눈에 드디어 익숙한 것들이 들어왔다.

-이, 이거는 이렇게 나무를 타는 짐승들이 즈, 즐겨 먹는 나무 열매야. 그리고 이거는 땅에 이런 세모 모양 발자국을 내는 몬스터들이 먹는…….

눈을 감은 루인에게 씹어 먹여 주었던 커다란 붉은 열매가 유독 잘 열리는 나무를 지나서.

-얘는, 밤에만 열리는 열, 매야.

밤이면 껍질이 활짝 열리며 열매를 드러내는 수풀을 가르고.

-뭐 하는 중이지?

-추, 추워.

씻는 루인을 훔쳐보다 몸이 빠져서, 서로 처음으로 제대로 끌어안게 된- 달빛에 부스러지듯 빛나던, 시리도록 차가운 푸른 연못을 지나쳐서.

-꽃을 좋아하나?

-……응. 조, 좋아해.

루인이 따서 주었던 희고 작은 꽃들이 피어 있는 곳을 스치고.

-사, 사, 살아 있어?

루인을 처음 본 곳에 도착했다.

“하아… 하… 아.”

모스가 뜀박질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평범한 인간임을 알리듯, 잔뜩 숨이 차 헉헉거리면서도 모스의 눈은 어느 때보다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하아, 하아.”

헐떡이면서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더는 환각초는 없지만, 환각초가 있던 자리에는 마치 제 존재를 알리듯 새파란 꽃들이 잔뜩 피어 있었다. 하나 모스는 그것에 더는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허름한 동굴과도 비슷한 움막 같은 게 바로 앞에 있었으니까.

그것은 바로 소중한 제 보금자리였다.

“……하하, 하.”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차마 집이라고 부를 수 없는, 온갖 옷가지들을 엮어 입구를 만들고, 어설프게 이것저것 주워 와서 지붕을 만든- 엉성하디엉성한 이곳을, 감히 누가 집이라고 생각할까.

“여기가 그렇게 좋은가? 그렇게 미친 듯이 뛰어갈 정도로?”

어느새 그런 모스의 뒤에는 루인이 와 있었다.

“그래도 신은 신어야지, 안 그래?”

그는 헉헉거리는 모스와는 달리, 숨소리가 전혀 거칠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모스가 벗어 둔 신을 주워온 듯, 앞에 내려 두며 인상을 구겼다.

“더럽게 좋나 보군. 나는 이곳만 오면 배알이 꼴리는데.”

잔뜩 상기된 모스의 얼굴을 본 그는 정말로 짜증이 난 듯, 도무지 모스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얼굴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하기야 그는 이전부터 이 숲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단순히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증오하다시피 했다.

이전에 모스는 이 숲에서 함께 지내던 기억 잃은 루인, 즉 남자를 찾으려고 들었고, 루인은 매번 그 남자를 죽이려고 들었으니.

“여, 길 왜…….”

“너를 위해 온 곳은 아니다.”

마치 자신을 위해 이곳에 온 것이냐고 묻는 듯한 기대 어린 모스의 얼굴에 루인이 고개를 휙 돌리며 답했다.

“환각초는 사라졌고, 그 덕에 이곳에서 난 열매나 꽃들의 존재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데, 그 가치가 몹시 중하다 하여, 직접 짐이…….”

그러며 뭐라고 말을 하기 시작했으나, 모스에게는 그런 게 하나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모스는 루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주변 풍경을 눈에 담았다.

환각초가 아닌 푸른 꽃이 피어 있고, 그들은 더는 이곳에 지낼 때처럼 낡은 옷이 아닌 좋은 옷을 입고 있었으며. 해를 볼 수 없던 탓에 달 아래에서만 있을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이번엔 태양 아래였다.

정말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그 짧은 새, 지독히도 많은 것들이 변했으나, 그럼에도 남아 있는 것들이 있었다. 모스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열매, 꽃, 연못, 보금자리, 그리고.

‘우리.’

그래, 우리. 우리라는 말이 이상하게 설레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모스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응달 하나 내어 주지 않을 것같이 작열하는 태양, 그 아래 더는 녹지 않기에 온몸으로 햇빛을 받아 낼 수 있는 자신과 그런 제 뒤에는 그림자가 있을 것이다.

이제 자신은 무언가의 그림자에 숨는 게 아니라, 자신만의 그림자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활짝 웃었다. 눈가가 사륵 반으로 접히고, 입은 쭉 올라가 입 동굴이 드러나며, 뺨에 살짝 접히는 주름은 그를 더 사랑스럽게 만들었다.

때마침 웃는 모스의 얼굴을 본 루인의 눈이 크게 떠진 그때.

“마, 많이 달라졌어. 앞, 으로도 마, 많이 달라질 거고…….”

모스는 말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붉은 열매도, 이곳에 열린 다른 열매들도 영원하진 않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더는 열리지 않을 수도 있고, 꽃도 마찬가지로 더는 제가 알던 꽃이 아닌 다른 꽃이 그 자리를 대신해 피어날 수도 있었다. 또 연못도 언젠가 메마를 수도 있으며, 제가 만든 보금자리는 시간이 지나면 무너질 게 분명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은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이, 있어.”

그들이 이곳에서 만났다는 사실은 영원할 것이다. 그제야 모스는 자신이 왜 이리도 이곳을 설레하고 좋아했는지를 깨달았다.

이곳이야말로 모스와 루인, 그들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그들의 추억들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 가장 많았던 곳이니 말이다. 물론 루인은 모스와 달리 그 사실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과거의 자신을 망령처럼 여기고 싫어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모스가 온전히 자신을 받아들인 지금은…….

‘이상하군.’

루인은 생각했다.

이곳에 모스를 데려오고자 했던 것은 메리를 보내고 펑펑 우는 모스를 보고, 문득 ‘그러고 싶어서’였다. 하나 막상 데려오자 생각보다도 더 모스가 좋아해서 기분이 나빴는데, 그 나쁜 기분은 이 안으로 걸어 들어오면서 점점 풀렸다.

그도 이곳으로 오던 길에 그들이 먹었던 열매를 보았고, 그가 따 왔던 꽃을 보았으며, 그들이 서로를 껴안게 된 연못도, 그리고 함께 지내던 이 보금자리까지도 시선을 거둘 수 없었으니까.

게다가 그 하나하나를 볼 때마다, 당시 있었던 일이 마치 그림으로 된 책을 넘기듯 넘실거리며 떠올랐고.

“봐, 봐! …여기서 내가 너, 너를 주웠어!”

그건 모스도 마찬가지인 듯, 어느새 신나서 먼저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루인이 주워 온 신을 도로 신은 채, 신이 나서 춤이라도 추듯, 환각초 대신 소담하게 피어난 푸른 꽃밭 위를 날듯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기, 기억나? 여기는……!”

그때, 모스는 가만히 서 있던 루인의 손을 잡아끌었다. 루인은 순간 인상을 구겼으나, 이내 찌푸린 미간을 풀고, 그 손에 순순히 이끌려가다, 문득 무언가가 생각난 듯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하늘에서는 햇빛이 올곧게 이 아래로 뻗어 나오고 있었다. 그 해를 따라 천천히 시선을 떨구니, 저 작열하는 태양 아래- 햇빛을 온몸에 묻힌 모스가 있었다.

모스는 더는 녹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너는 태양 아래에서도, 어느 곳이든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겠지.’

그 생각은 재회 후, 줄곧 들어 왔다.

그런 생각 때문에 루인은 때때로 초조함에 잠을 못 이루곤 했었다. 모스의 마음이 변심해 떠나가고자 한다면? 만약 그가 자신의 의지로 떠난다고 한다면, 그는 모스에게 가엾게 보이는 것 말고는…… 더는 이전처럼 햇빛 같은 명확한 수단으로 모스를 붙잡아 둘 길이 딱히 없었다.

‘차라리 네가 괴물일 때가 좋았어.’

그러기에 루인은 모스가 햇빛에 녹아들던 괴물이었을 때가 좋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빨리!!”

그의 어두운 상념은 모스의 재촉으로 인하여 깨졌다. 루인은 자신을 살짝 돌아보는 모스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그의 반달로 접힌 반짝이는 눈, 붉은 물이 든 상기된 뺨, 파란 하늘 아래 자유로이 흩날리는 녹색 머리카락을 차례로 훑은 끝에 모스가 꽉 잡은 제 손에 시선이 갔다. 틈 하나 없이 꽉 맞물린 손, 그걸 본 루인은 저도 모르게 힘을 주어 그 손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모스는 곧장 그가 끄는 대로 끌려와 루인을 바라보았고, 루인은 저항 없이 제게 끌려 바투 붙은 그 얼굴을 보다 문득 직감했다.

제게 스며든 이 불안함은 평생 해소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매번 태양 아래 이리 자유로이 움직이는 모스를 보면 불안할 것이고, 어딘가에 그를 가둬 두고 싶어 안달이 날 것이다. 그건 무슨 일이 있어도 바뀔 수 없는 원초적인 본능이자 감정이니까.

하나, 모스와 눈을 마주친 지금, 그가 제 손을 맞잡은 채 푸른 웃음을 터트리는 모습을 보는 지금, 일순 그런 음습한 생각들이 휘발되더니 한 가지 생각만이 남았다.

비록 태양 아래일지라도, 이리 손을 꽉 잡으면 된 거 아닌가.

서로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우리는.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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