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Siren
2021년 5월 9일 21시경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 나이트클럽 ‘Siren’
애애애앵-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문밖에서는 신나는 최신 가요 메들리가 시작되고 있었다.
우렁찬 노랫소리에도 불구하고 문이 닫힌 직원 휴게실은 퍽 조용했다. 흥겨운 음악과 빠른 노랫말은 의외로 얇은 나무 벽 한 장을 미처 넘지 못했다. 웅웅웅웅, 소리가 먹힌 댄스곡이 진동만으로 휴게실 문을 일정하게 두드렸다.
저녁 9시. 직원들은 모두 출근을 마치고 웨이터들은 홀이나 호객 행위를 나가는 시각이기에 휴게실에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 막 일을 시작하는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선우는 휴게실 벽 한 면을 전부 차지하고 있는 직원용 사물함 앞에 섰다. 임시로 사용 중인 3번 사물함을 열자, 어제와 같이 웨이터복 한 벌이 정갈하게 걸려 있었다.
젊은 층을 겨냥한 나이트클럽답게 사이렌의 웨이터복은 세련되고 깔끔했다. 하얀 셔츠와 검은색 정장 바지, 벨벳 칼라가 달린 검정 조끼와 같은 재질의 보타이로 구성된 의상은 어느 고급 레스토랑의 것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선우는 웨이터복을 꺼내 갈아입고, 사물함 안쪽에 붙은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본래 옷의 주인은 그보다 조금 더 작고 마른 체형이었는지, 셔츠와 조끼가 약간 타이트했다. 등과 허리 라인이 그대로 드러나는 차림새에 평상시의 저라면 눈살을 찌푸리고도 남았겠으나, 지금은 딱히 그런 걸 가릴 처지는 아니었다.
‘웨이터 짱 구’
왼쪽 가슴팍에 달린 금색 이름표가 형광등 불빛을 반사하며 번쩍거렸다.
머리까지 대충 매만지고 난 뒤, 선우는 옷걸이에 걸려 있던 보타이를 꺼내 들었다. 미리 챙겨 온 검은색 초소형 카메라를 리본 하단에 부착하고, 그는 타이를 곧바로 목에 걸었다. 거울을 보며 카메라 렌즈가 겉에서 보이지 않도록 조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어 그는 가져온 도청기를 셔츠 소매 안쪽에 붙이고, 마지막으로는 무전기를 착용했다. 이곳에서 일하는 웨이터들이 업무 중에 사용하는 무전기와 같은 모델이었으나, 무전 상대는 그들과 달랐다.
“하나둘, 하나둘. 잘 들리십니까?”
『오케이.』
『잘 들립니다.』
이어폰을 통해 팀원들의 목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카메라는요?”
『화질 좋고!』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선우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과정을 몇 번 반복했다고 장비 세팅하는 것은 이제 일도 아니었다. 선우는 사물함 내부를 깔끔히 정돈하고 문을 닫았다.
쿵, 쿵, 쿵, 쿵.
그 순간, 갑자기 쨍한 음악 소리가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야, 우리 얼굴 천재 클래스. 형님은 오늘도 역시 빛이 나네요.”
휴게실 문을 불쑥 열고 들어온 이가 선우를 보며 환히 웃었다.
“어, 상준이 왔어?”
발랄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웨이터 ‘냥이아빠’, 김상준이었다.
“네. 저어기서 형님 들어오는 거 보이길래 인사라도 하려고 잠깐 들렀어요.”
탁, 상준이 문을 닫으며 휴게실 안으로 들어섰다.
흐음. 휴게실 한가운데 팔짱을 끼고 선 상준이 선우를 위아래로 훑어보다 이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지금도 물론 나쁘지는 않다만, 유행에 워낙 민감한 상준이 보기에 선우는 어딘가가 살짝 아쉬운 모습이었다.
“아, 우리 형님은 인물 하나는 진짜 끝내주는데 스타일이 너무 클래식하단 말이지? 형님, 잠깐만 이리로 와 봐요.”
상준은 선우를 휴게실 한쪽에 놓인 화장대 앞으로 이끌었다. 선우를 거울 앞에 앉힌 그는 화장대 위에서 둥근 플라스틱 통을 하나 집어 들었다. 웨이터들이 공용으로 쓰는 포마드 왁스였다.
상준은 거침없는 손길로 플라스틱 통의 뚜껑을 열더니, 왁스를 푹 퍼내 반대쪽 손바닥에 착- 하고 덜어냈다. 그러고는 꼭 거사를 앞둔 사람처럼 장엄한 표정으로 두 손을 마주 비볐다.
손바닥에 왁스가 골고루 퍼지자 상준은 선우의 이마로 손을 뻗었다. 중앙에서 약간 치우친 지점에서 이마를 갑갑하게 덮고 있던 앞머리를 양쪽으로 가르니, 동그랗고 고운 이마가 수줍게 모습을 드러냈다. 상준은 무심한 듯 무심하지 않게 선우의 머리를 뒤로 빗어 넘겼다.
오우. 뭐지, 이 형?
그리고 상준은 새삼 감탄했다.
원래도 잘생긴 줄이야 익히 알고는 있었다만, 하얗고 보송한 얼굴을 훤히 다 드러내니 이젠 지나가는 연예인 뺨을 쳐도 될 것 같았다.
“형님. 거울 한번 봐 봐요.”
톡톡, 상준이 손가락으로 거울을 두드리며 말했다.
“……어, 이게 멋있어?”
그의 지시대로 거울을 들여다본 선우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그러자 상준이 어깨를 한껏 올렸다 늘어뜨리며 휴, 하고 부러 크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형님, 이게 요즘 유행하는 반깐이라는 건데 들어는 봤어요?”
이러고 나가면 여자들 다 난리 난다고. 손에 남은 왁스로 옆머리와 뒷머리를 살뜰히 정리해 주다 말고, 상준이 갑자기 선우를 향해 눈을 흘겼다.
“하긴, 번호 따려면 번호표 뽑고 줄부터 서야 하는 형님 같은 분들이 뭘 아시겠습니까.”
“그게 뭔 소리야…….”
상준의 말에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은 선우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살폈다. 이런 건 좀, 느끼하고 부담스럽지 않나……. 선우는 목덜미를 긁적였다. 그런 선우를 보고 이 형은 도대체가 스타일을 모른다고 상준이 혀를 찰찰 찼다.
“형님, 그 얼굴 그렇게 막 쓸 거면 차라리 날 줘요. 내가 겁나 알차게 써 줄 수 있는데.”
상준은 선우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 얼굴을 하고 외모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사이렌에서 일을 하다 보면 웨이터부터 손님들까지 차고 넘치는 게 미남이고, 훈남이었다. 손님 중에서 연예인이나 유명 모델을 찾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세상에는 어찌나 그렇게 멋지고 예쁜 이들이 많은지.
하지만, 한선우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고 상준은 자부했다.
유리알같이 맑고 깨끗한 느낌을 주는 선우는 꼭 이온 음료 CF에서나 나올 것 같이 생겼다. 인간 이온 음료, 이온 음료 그 자체라고나 할까.
그런데 그게 다냐, 하면 또 아닌 것이 어딘가 모르게 우수 젖은 눈망울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사람들의 관심과 보호 본능을 일으키기가 딱 좋았다. 오죽하면 얼마 전에는 같이 일하는 웨이터 형님조차도 선우의 연락처를 물어봤을까. 그 형님 게이도 아니랬는데. 아무튼 우리 선우 형님은 멋있고 예쁜 건 혼자 다 했다.
상준은 사실 선우를 처음 알게 됐을 때 잠깐, 아주 잠깐 부러움에 그를 시기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인물 좋아, 머리 좋아, 망할 놈의 성격까지 좋아 버리니까 이건 뭐 애당초 질투하는 게 의미가 없었다. 깨달음을 빨리 얻은 상준은 그 뒤로는 아무도 반기지 않는 선우의 1호 팬을 혼자 자청한 상태였다.
다만, 인생 쉽게 살 수 있는 하이패스를 가지고 태어나 놓고 왜 이런 고된 일을 하고 있는지는 좀 이해가 안 됐다. 혹시 요즘은 이 일을 하려도 스펙이 엄청 좋아야 하나? 싶다가도 또 똥길이 형님을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상준이 선우를 빤히 보다가, 입술을 삐죽이며 물었다.
“형님은 그 얼굴로 뭐 한다고 이렇게 힘든 일을 하고 있어요?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이 일 그만두고 나와서 나랑 쇼핑몰 할래요? 그럼 우리 진짜 대박 날 것 같은데.”
『얼씨구, 애새끼 입방정 떠는 것 좀 봐라?』
“상준아, 쉿.”
선우가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빙긋 웃었다. 그러고는 옷소매에 숨긴 도청 장치를 가리켰다. 상준은 헙! 하고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한 번만 더 그런 소리 하면 나한테 진짜 한 대 맞는다고 전해 주세요.』
도청기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남동길이 선우에게 무전을 쳤다. 목소리는 험악했지만 말투에는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사이렌에서 웨이터 일을 하는 김상준은 마약수사 1팀의 망원1)중 하나이다.
김상준은 몇 년 전만 해도 참 철없는 시절을 보냈다.
일진.
중‧고등학교 친구들은 저를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재미있고, 한 번씩 일탈하는 게 짜릿해서 해서는 안 되는 짓들도 심심치 않게 했다. 그때는 그게 그렇게 멋있고 좀, 있어 보였더랬다.
그러다 한번은 친구에게 좋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소개받았다. 일은 아주 간단한 심부름이 전부였다. 조폭같이 생긴 아저씨가 작은 종이 상자를 몇 개 주면 그걸 여기저기로 배달하고 돈만 받아 오면 끝이었다. 배달비를 건당 오천 원씩이나 쳐 줬으니 당시엔 얼마나 쏠쏠한 알바 자리였던가.
그 아저씨가 정말 조직폭력배였고, 자신이 배달한 물건이 마약이었다는 것은 손목에 수갑이 채워지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몇 해 전, 서울 한 지역의 조직폭력단이 어린 학생들을 지게꾼2)으로 이용해서 마약을 판매한 사건이 있었다. 경찰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조폭들이 순진한 아이들을 운반책으로 꼬여냈는데, 푼돈에 혹한 상준과 친구들이 뭣도 모르고 그 일에 가담하고 만 것이었다.
마약류관리법 위반은 그 자체로 중범죄이기 때문에 미성년자여도 처벌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당시 사건을 맡았던 마약수사 1팀 김지항 경감은 상준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 조사 과정에서 부모나 이렇다 할 보호자가 딱히 없고, 몸이 아픈 할머니와 단둘이 지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김지항은 주변에 상준을 바르게 이끌어 줄 어른이 없었다는 사실을 통감하고, 상준이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는 대신 처벌을 최대한 낮게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의 노력으로 검찰과 법원에서도 상준이 운반한 물건이 마약이라는 걸 몰랐다는 것을 참작해 주었다. 덕분에 상준은 반성문과 사회봉사 명령 선에서 처벌을 끝낼 수 있었다.
상준은 자신을 갱생의 길로 이끌어 준 인생 첫 어른에게 크게 감명받았다. 그 후로 상준은 김지항에게 은혜를 갚겠다며 그의 망원을 자청했고, 마약 1팀에 종종 고급 정보를 제공해 주고는 했다. 이번 잠복 또한 상준이 얼마 전 그만둔 웨이터 대타 자리를 소개해 줘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선우는 문득 상준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고는 엷게 미소 지었다. 마냥 동생 같고, 철부지 같지만 혼자 힘으로 저만의 삶을 꾸려 가는 상준이 어쩐지 기특했다. 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상준의 뒤통수를 쓱쓱 쓰다듬었다.
“고마워.”
“엥? 뭐가요?”
“아니야. 이만 나가자.”
선우는 싱그럽게 웃으며 걸음을 뗐다. 먼저 문 앞에 다가선 선우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한순간에 막힌 귀가 뻥- 뚫린 듯, 시끄러운 노랫소리가 파도처럼 귓속으로 밀려들었다.
* * *
쿵, 쿵, 쿵, 쿵.
어두운 복도를 지나 너른 중앙 홀에 도착했다. 천장에서는 엄청난 크기의 사이키 조명이 빙그르르 돌아가며 현란한 빛을 쏘아 대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수십 개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사방의 벽을 사정없이 때려 댔다. 그 벼락과도 같은 울림에 선우의 심장도 쿵, 쿵, 덩달아 박동 속도를 높였다.
주말의 마지막.
일요일 밤의 유흥업소는 대개 한산하기 마련이나, 이태원의 핫플레이스 ‘사이렌’에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휴일의 끝을 보내기가 아쉬워 몰려든 청춘 남녀들로 이른 시간부터 실내가 곳곳이 알차게도 들어차 있었다.
선우는 홀 입구에 서서 주위를 빙 둘러보다가 곧 어느 한 테이블을 향해 다가갔다. 같은 팀 동료, 박민호 경위와 남동길 경장이 손님으로 위장해 있는 자리였다.
멀리서 다가오는 선우를 보고 동길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이야, 선배님. 이제 완전 삐끼 다 되셨네요?”
동길이 선우의 모습을 흉내 낸답시고 양손을 들어 제 머리를 싸악 쓸어 넘겼다. 선우의 뒤를 졸졸 따라온 상준이 제 작품이라며 동길에게 으스댔다. 두 사람의 방정쯤은 사뿐히 무시하고, 선우는 동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별일 없었어?”
“예. 너무 없어서 탈이에요.”
동길이 깍지 낀 두 손으로 머리를 받치며 몸을 뒤로 기댔다.
“아, 이거 오늘도 안 나타나면 잠복 장소 다시 생각해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러다 출국일 다 다가오겠는데?”
“그러게나 말이다.”
동길이 불퉁하게 묻자 마주 앉은 박민호가 씁쓸하게 대답했다. 크게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도 걱정이 되는지, 박민호는 테이블 아래 놓인 다리를 달달 떨고 있었다.
“이제 곧 나타나겠죠.”
팀원들을 북돋기 위해 선우가 부러 씩씩하게 말했다. 그러나 한풀 꺾인 기세가 금방 살아나진 않았다. 어딘가 모르게 처진 분위기에, 상준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눈치를 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형님들. 과일이라도 하나… 올릴까요?”
“네가 쏘는 거냐?”
그러자 동길이 험악한 인상을 하고 물었다.
“와, 완전 노양심. 새파랗게 어린애한테 지금 삥을 뜯는 거예요? 공무원이 이래도 돼요?”
“야. 손님 대접 모르냐, 손님 대접? 그리고 인마, 나도 아직 새파랗게 어리거든?”
동길이 상준의 팔뚝을 주먹으로 툭 쳤다.
“아! 왜 때려요! 자꾸 이러시면 형님 폭행죄로 신고할 거예요?”
그러면서도 상준은 동길의 팔뚝에 똑같이 주먹을 박아 넣었다. 개와 원숭이마냥 만나기만 하면 투닥거리는 상준과 동길은 여느 때와 같이 서로를 물고 뜯었다. 오고 가는 주먹질에 놀랄 만도 한데, 늘상 있는 일이라 선우와 박민호는 별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만 가 볼게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무전 주세요.”
선우가 자리를 뜨기 전 박민호를 보고 말했다. 박민호는 가벼운 거수경례로 답을 대신했다.
“어, 어? 형님, 같이 가요!”
테이블에서 멀어지는 선우를 상준이 쪼르르 뒤따랐다.
서울경찰청 마약범죄수사대 마약수사 1팀이 나이트클럽 사이렌에 잠복을 한 지가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 갔다. 2~3일 내로 타깃이 나타날 거라고 예상한 것과는 달리 잠복 기간이 꽤나 길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타깃의 동태를 봐서는 이번에도 이곳, 사이렌에서 거래가 이루어질 확률은 매우 높았다. 그러나 6명의 팀원 중 4명이 매일 밤 잠복을 하면서도 그럴듯한 성과가 아직 하나도 없었다. 팀원들 모두 겉으로는 내색하고 있지 않지만, 다들 느끼고는 있었다. 슬슬 피로가 쌓이고 있었다.
밤을 새우는 데는 이골이 난 사람들이라 육체적인 피로는 사실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문제는 정신적인 피로였다.
오늘이면 나타날까, 내일이면 나타날까. 긴장과 경계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와중에, 대기가 길어지니 이제는 다른 곳에서 거래를 마친 건 아닐까 하는 걱정마저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이번을 놓치면 또 언제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라, 기약 없는 기다림에서 오는 초조함과 불안함이 선우와 팀원들을 조금씩 피곤하게 만들고 있었다.
근심 어린 표정으로 홀을 둘러보던 선우가 이내 머리를 좌우로 털었다. 마음을 갉아먹는 잡생각은 빨리 떨쳐 버리는 것이 좋았다.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들이 나타나기를 바라고 기다리는 것뿐,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웨이터 일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자리 안내와 서빙은 일반 음식점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즉석 만남을 원하는 손님은 받은 팁과 함께 상준에게 인계하면 그가 알아서 처리해 주었다.
좁은 차 안에서 엉덩이가 뻐근해질 때까지 대기하거나, 눈알이 빠지도록 CCTV 화면만 쳐다보고 있는 것보다야 이렇게 몸을 움직이는 편이 훨씬 더 나았다.
그런데 가끔은 난처한 일이 한 번씩 있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이런 일.
“처음 보는 오빠네? 새로 왔어요?”
테이블 사이를 지나가는데 누군가 선우의 손목을 확 잡아당겼다. 잡힌 손을 향해 고개를 돌려 보니 테이블에는 화려하게 치장한 여성 손님 세 명이 앉아 있었다. 셋은 선우를 보고 동시에 소리를 꽥! 지르더니 느닷없이 호들갑을 떨었다.
“야, 이거 봐! 내가 이래서 여기를 못 끊는다니까?”
“와, 미친. 이 존잘러는 뭐야?”
“이 오빠 얼굴 개오진다 진짜. 오빠 새로 왔어요?”
노랫소리를 뚫고 울리는 하이톤의 목소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갑자기 어수선해진 분위기에 주위 테이블에 앉아 있던 손님들도 하나둘 선우를 힐끔거렸다.
여기저기서 들러붙는 시선에 민망해진 선우가 허리를 낮게 숙였다. 제 손목을 잡고 있는 여성의 손을 살며시 떼어 내며, 선우는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뭐 필요한 거 있으십니까?”
“오빠 번호요.”
긴 생머리를 한 여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선우에게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오늘 몇 시에 끝나요? 4시? 5시?”
“오빠, 우리 시간 많아요. 끝나고 같이 놀자. 뻘쭘하면 오빠 친구들도 데려와도 되고.”
그녀의 앞에 있던 친구들도 금세 합세했다. 세 명이 동시에 부추겨 대는 통에 선우는 아주 정신이 없었다. 선우가 가장 곤란해하는 상황은 주로 이런 류였다. 이런 상황이 닥치면 선우는 도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도무지 몰랐다.
눈썹이 축 처져 대답에 뜸을 들이고 있자, 조금 전 손목을 잡았던 여성이 선우의 팔뚝 위에 손을 얹었다. 눈을 야릇하게 치켜뜬 그녀가 별안간 선우의 팔을 천천히 쓸어올렸다.
“일 끝나고 우리랑 한잔해요.”
외설적인 그녀의 말과 행동에 선우는 깜짝 놀랐다. 화장을 진하게 하긴 했으나, 그래 봐야 이제 갓 성인이 된 듯 얼굴에서 어린 티가 팍팍 났기 때문이었다.
“아, 저… 미안합니다. 오늘 주말이라 좀… 바쁘네요.”
선우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어깨선이 훤히 드러난 옷을 치켜올려 주고 늦었으니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고 등이라도 떠밀어 주고 싶었지만, 웨이터 복장을 하고 있는 제가 할 말은 아닌 듯했다. 선우는 제 팔뚝 위에 놓인 손을 잡아 조심스레 테이블 위로 옮겼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그러고는 허리를 푹 숙여 인사하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아아- 선우의 등 뒤로 아쉬운 탄성이 흘렀다.
『어허, 우리 선우. 인기가 하늘을 마구 찌른다잉? 키야. 좋을 때다, 좋을 때야.』
클럽 밖, 승합차에서 대기 중인 김지항이 말했다.
『하아. 나는 이제 한선우 씨 잘생겼다는 얘기 좀 그만 듣고 싶어요. 진짜 지겨워 죽겠네.』
동길은 거의 한탄을 했다.
『선우야, 그럴 때는 ‘여자 친구 있습니다.’ 하면 되지. 어떻게 그렇게 매번 어쩔 줄을 몰라 하냐?』
『에이, 여자 친구가 없는데 어떻게 있다고 해요. 선배는 그런 거짓말도 잘 못 할걸요?』
『그럼 이번 기회에 여자 친구 좀 만들면 되겠네. 우리 천연기념물 이제 연애할 때도 됐지!』
『그러게요. 저 얼굴을 가지고 왜 연애를 못 하나 몰라? 신이 선배님한테 줄 거 다 줘 놓고 연애 세포는 안 주셨나 봐요.』
김지항과 동길이 핑퐁처럼 무전을 주고받으며 선우를 놀려 댔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슬쩍 발끈하게 하는 데가 있어, 선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연애 못 하는 거 아니고 안 하는 거라고, 저도 한소리를 할까 하다가 어차피 제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사람들이라 선우는 그저 한 번 웃고 말았다.
주말의 피크 타임은 평일보다 두 배 이상 바빴다. 12시가 10분 정도 남은 시각, 서빙에 지친 선우는 잠시 숨을 돌릴 겸 화장실로 향했다.
퍽.
그러다 갑자기 어깨를 세게 부딪쳐 오는 힘에 몸이 뒤로 밀렸다. 화장실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한 남성 취객을 마주한 것이었다.
“어? 삐끼네?”
비틀거리는 그를 피한다고 피했는데 기어이 부딪쳐 오는 것이 어쩐지 고의성이 다분해 보였다.
취객은 눈이 침침한 사람처럼 인상을 팍 찌푸리더니 선우의 가슴팍에 붙은 이름표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고는 웨, 이, 터, 짱, 구, 이름표의 글자를 손가락으로 한 자, 한 자 찍어 누르며 어눌하게 읽었다.
“짱구! 그래, 짱구야. 너 말이야. 일을 말이야, 엉? 제대로 하란 말이야. 내가 존나 씨이발, 오늘 날 제대로 잡고 룸에 양주까지 시켰는데에…….”
“저어… 손님. 조금 취하신 것 같네요.”
“취하기는! 씹… 겨우 한 병 가지고…….”
그는 눈이 반쯤 풀린 채로 선우에게 몸을 기댔다.
“야, 여기가 그으렇게 물이 좋다매에. 근데 왜 이래? 내가 오느을, 여기서 얼마를 쓴 줄 알아? 새끼들이……. 씨발, 니들은 팁만 챙겨 가면 다냐고오……!”
느릿느릿 뱉어 내는 숨에서 술 냄새가 물씬 풍겨 왔다.
“팁을 받아 처먹었으면, 엉? 제대로 된 애들을 데려와야 할 거 아니야아, 씨이이발. 야, 짱구. 너 가서 언니들 좀 데려와. 5번 방. 이왕이면 여기, 여기 빵빵한 애들로. 오케이?”
선우의 가슴을 손으로 더듬거리며 그가 실실 웃었다.
선우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클럽 내에선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술만 취하고 마음 맞는 파트너를 잡지 못하면 꼭 이렇게 웨이터에게 화풀이를 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은 웬일로 조용히 지나간다 싶었는데…….
술에 취한 사람과 실랑이를 해 봐야 좋을 일이 하나 없었다. 오죽하면 상준이 제일 처음 알려 준 것이 진상 취객을 달래는 일이었을까.
“아유, 우리 형님 많이 서운하셨나 봐요. 이렇게 멋진 형님한테 누가 그렇게 섭섭하게 했을까?”
선우는 눈을 접으며 상준이 알려 준 방법으로 진상을 얼렀다.
진상은 순간 몸을 움찔, 했다.
홈런은 그렇다 치고 장타도 제대로 못 친 것이 짜증 나던 차에 그는 하얗고 말랑하게 생긴 웨이터를 마주했다. 웨이터를 보니 갑자기 생으로 날린 팁들이 생각났다. 그래서 일부러 시비를 좀 걸어 보자 했더니, 웬걸? 이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놈이 쫄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에게 더 엉겨 붙어 왔다.
남자라는 게 아쉬울 만큼 예쁘장한 얼굴을 들이밀며 상냥하게 구는 웨이터에 그는 그만 얼떨떨해지고 말았다.
“5번 방이라고 하셨죠? 같이 가요. 제가 바로 예쁜 누나 찾아서 보내 드릴게요.”
취객의 어깨를 감싼 선우가 그를 복도 밖으로 이끌었다. 몸을 흐물거리던 그는 선우의 부축에 얼떨결에 룸으로 이동했다.
5번 룸 안에 진상을 욱여넣고 나온 선우는 그대로 한쪽 벽에 몸을 기댔다. 술 취한 장정을 나르고 나니 그만 온몸에 힘이 쭉 빠져 버렸다.
선우는 한 손을 들어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오늘도 그냥 이렇게 날리는 건가 싶은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애애애앵-
그때, 장내가 온통 빨간 조명으로 뒤덮이며 12시 정각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쿵쿵. 쿵쿵.
이제 스피커에서는 빠른 속도의 일렉트로닉 음악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타깃 입장. 타깃 입장했습니다.』
이어폰에서 박민호의 무전이 들려왔다.
* * *
2021년 4월의 어느 날 11시경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울경찰청 수사통합청사 마약범죄수사대 제1회의실
“문태성. 나이 34세. 현직 문호리조트 대표 이사로 문호그룹의 호텔, 관광, 면세 사업 부문을 맡고 있습니다. 현재 빅스타 엔터테인먼트의 경영 고문을 겸임하고 있는데, 이곳도 사실상 문태성이 지배하는 구조로 보고 있습니다.”
불이 꺼진 회의실에서는 브리핑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회의실 전면에 설치된 스크린에는 간단한 신상 정보와 함께 고급 승용차에서 내리고 있는 한 남자의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짙은 눈썹과 강인한 눈매, 우뚝 솟은 코에 귀밑으로 각이 도드라진 턱선까지. 선이 굵은 남자는 날카로운 인상을 줄 법한데도 호선을 그리는 도톰한 입술과 매끈한 피부 덕에 어딘가 모르게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다.
굴지의 대기업 ‘문호그룹’의 차기 후계자.
밀레니얼 세대 가장 기대되는 젊은 경영인.
미래 변화를 선도할 차세대 CEO.
문태성을 향한 세간의 평가는 그러했다.
한국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군 복무도 육군 만기 전역으로 마친 그는 대외적으로 이미지가 아주 좋았다. 허울뿐인 스펙이나 병역 기피를 위해 도피 유학을 일삼는 재벌가 자제들의 이야기가 나오면, 그는 언제나 비교 대상 1순위로 떠올랐다.
준수한 외모 또한 그의 이미지 메이킹에 한몫을 더했다. 과거 한 시절을 미모로 평정했던, 국민 여배우를 어머니로 둔 그는 외모만큼은 그녀를 쏙 빼닮았다. 덕분에 190㎝에 육박하는 큰 키를 가지고도 문태성은 귀공자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2년 전, 문호리조트 대표 이사로 취임한 그는 한 여성 잡지와 취임 기념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었는데, 우습게도 해당 인터뷰는 그 내용보다 슈트 화보 같았던 사진이 더 화제가 되었다. 아직까지도 인터넷상에서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그때의 사진이 그의 사기 스펙과 함께 회자되곤 했다.
그러나 문태성에 대해 그렇게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그의 실체를 몰랐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마약수사 1팀의 팀장, 최대영 경정이 손에 쥔 포인터를 누르자 스크린 화면에 조직 흐름도가 나타났다.
“마약 거래는 주로 감시망이 소홀한 항만을 이용합니다. 문호인터내셔널 전용 컨테이너선으로 약을 실어 보내면, 대금은 빅스타와 계약한 현지 연예 에이전트사가 빅스타나 페이퍼 컴퍼니에 지급하는 식입니다.”
국제 마약 업계의 큰손.
마약수사 1팀이 문태성에 대해 내린 결론이었다.
그가 영위하고 있는 사업들은 훌륭한 마약 유통 창구가 되었다.
해외 여러 나라의 범죄 조직들은 대부분 수입원 중 하나로 연예 매니지먼트 사업을 운영하곤 한다. 그런데 마침 아시아 전역에서 한국의 연예인이나 드라마가 인기를 끄니 문태성은 이를 거래에 활용했다.
최대영 팀장의 개인 정보망에 의하면, 국제 범죄 조직 산하에 있는 해외 연예 기획사가 빅스타 엔터와 문화 콘텐츠 제휴 계약을 맺고, 여기서 발생한 수입을 지급할 때 마약 대금을 얹어 주는 방식으로 거래한다고 했다.
국내 과세 당국에서 해외 연예계 수입 구조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사업자가 큰 문제를 일으키거나 탈세 혐의가 의심되는 경우가 아닌 이상, 당국은 굳이 먼저 나서서 조사를 하지는 않는 편이었다. 이런 허점을 이용해 문태성은 수천억 원의 마약 대금을 손쉽게 세탁하고 있었다.
물론 작정하고 조사에 나서면 모두 드러날 행각들이었으나, 국세청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표면적으로는 빅스타 엔터테인먼트가 벌어들이는 외화가 상당하기 때문에 당국 입장에선 국위 선양하는 기업을 조사하기가 껄끄럽다는 것이 이유였다. 물론 내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최대영이 포인터를 한 번 더 클릭하자 스크린 위에 아시아 지도가 떴다. 지도 위에는 약의 유통 흐름을 나타내는 화살표들이 여러 개 그어져 있었다. 인천항에서 시작된 화살표가 아시아 전역으로 퍼지고 다시 인천항으로 되돌아왔다.
“이전에는 국제 조직 간 거래에 경유지가 되어 주는 정도였습니다만, 최근에는 아예 생산과 유통을 도맡아서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 일본은 물론이고 대만, 태국, 베트남 등 지역을 가리지 않고 아시아 전역과 거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거대한 규모로 거래를 할 수 있는 가장 큰 요인은 약의 퀄리티에 있었다. 문태성 사단의 약은 투약 후 잡스러운 부작용이 적고 체내 대사가 빨라 뒤끝이 깔끔했다. 그러니 유통이 비교적 쉬운 해외에서는 이미 최상품으로 거래가 되고 있었다. 오죽하면 요즘 동남아 뒷골목에서는 K-drug가 최고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3월 말 대만 삼방파(三幇派) 두목 진준배, 이달 초 일본 야마가와카이(山川會) 간부 마쓰야마 지로가 국내에 직접 입국했던 모습입니다. 문태성과는 두 번 모두 이태원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접선했습니다.”
화면이 넘어가고 이번에는 사진 두 장이 나란히 게시되었다. 키가 작고 배가 불룩 나온 진준배와 얄팍한 몸에 검은 선글라스를 낀 마쓰야마 지로가 경호를 받으며 나이트클럽으로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진준배의 이름으로 인천행 비행기 티켓 3장이 끊겼습니다. 5월 3, 4, 5일. 이 중 한 날 진준배의 입국이 예상되는 바입니다.”
최대영이 말을 멈추지 않은 채 화면을 넘겼다. 그의 뒤로 한 나이트클럽의 전면 사진이 크게 떴다.
‘Siren’
클럽 입구에는 붉은색 글씨의 화려한 간판이 붙어 있었다.
“최근 문태성이 해외 바이어를 접대할 때 주로 이용하는 클럽입니다. 진준배가 문태성과 접선을 한다면 이번에도 장소는 이곳일 확률이 높습니다. 따라서 클럽 내부에 잠복해 있다가 거래 현장을 직접 포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최대영의 브리핑이 끝나자, 남동길이 조용히 일어나 회의실의 불을 켰다. 사위가 밝아진 회의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잠잠했다.
회의 테이블 정중앙에 앉은 수사대장, 조현순 총경은 의자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이내 허리를 바로 세운 그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한 손으로 꾹꾹 눌렀다.
“최 팀장.”
“예.”
“우리 중에 문태성이 나쁜 새끼라는 거 모르는 놈 있었냐.”
“…….”
“우리가 그동안 저놈이 나쁜 놈인 거 몰라서 안 잡았냐고.”
수사대장의 낮고 힘 있는 목소리가 회의실을 울렸다.
“갑자기 문태성은 왜 들추는 건데? 새삼스럽게 실적 욕심이라도 났어?”
조현순은 못마땅한 눈초리로 최대영을 쳐다보았다.
“요즘 부쩍 움직임이 많아졌습니다. 웬만해선 몸을 드러내지 않는 놈이 직접 거래에 나온다는 건 그만큼 거래 규모가 커졌다는 의미입니다.”
조현순이 굳게 다문 입술에 힘을 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문태성이 전면에 나서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거래가 한탕 끝나고 나면 귀신같이 몸을 사릴 테니 수사를 한다면 지금이 적기가 맞긴 했다.
다만, 이런 거물급은 수사를 마냥 허락할 수 없는 속사정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무슨 수로 잡을래? 세관도 국세청도 협조 안 할 텐데.”
“그래서 일단 접선 과정만이라도 포착하자는 겁니다. 삼방파랑 거래하고 있다는 증거 들이밀면 세관도 협조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래서 쟤네 둘이 접선할 때까지 무작정 잠복하게? 접선하면 거래 얘기하는 건 확실해? 야, 패기만으로 덤벼들기에는 너무 거물 아니냐?”
“…….”
상관의 질책에 최대영은 말문이 막혔다. 수사 허락을 받아내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예상보다 더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최대영이 굳은 표정으로 테이블을 내려다보자, 조현순이 미간을 구기며 회전의자를 옆으로 돌려 앉았다. 그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그래, 뭐. 운 좋게 잡았다 치자. 이런 애들은 잡아도 문제야. 변호인단 열댓 명씩 달고 다니는 애를 어떻게 처넣으려고.”
항간에는 자유로운 위법 행위를 위해 문태성이 개인 자문 변호팀을 따로 두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수사 기관과 금융 당국에서 ‘문호 자금’이 닿지 않은 곳을 찾는 게 더 빠르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문제는 그 말이 소문도, 우스갯소리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확실한 증거 잡으면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부하 직원의 고집스러운 면모를 잘 아는 조현순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의자를 다시 바로 한 그가 두 손을 맞잡아 테이블 위로 올렸다.
“확실한 증거. 확실한 증거 좋지. 근데 그 증거 잡다가 우리 다 같이 골로 갈 수도 있다고.”
조현순은 짧지 않은 경찰 생활 동안 힘 있는 자를 잘못 건드렸다가 낭패 본 경찰들을 여럿 봐 왔다. 제 상관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최대영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이 건은 제가 책임지고,”
“책임은 내가 지는 거지. 당신이 무슨 책임을 진다고 그래, 이 사람아!”
조현순이 별안간 테이블을 탕! 내리치며 목청을 높였다.
두 상사의 숨 막히는 대화에 회의실 분위기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마약수사 1팀의 팀원들은 어느 누구도 입을 떼지 못하고 서로의 눈치만 보았다.
토도독, 토도독.
조용한 실내에 테이블 두드리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조현순은 고민에 빠져 자신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고, 조현순이 한층 차분한 어투로 달래듯 물었다.
“최 팀장. 이거 꼭 해야겠냐? 다른 건 없어? 괜히 벌집 건드렸다가 우리가 역공당하는 수가 있어. 고소라도 당하면 골치 아프다고.”
“…….”
상관의 회유에도 최대영은 눈썹만 꿈틀거릴 뿐, 대답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조현순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앞에 뒷짐을 지고 섰다.
마약수사대 팀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이런 위험 요인을 모를 리가 없었다. 상관이 반대할 줄 알면서도 보고를 한다는 건 둘 중 하나였다. 정말 제대로 된 정보망을 잡았거나, 진짜 옷 벗을 각오까지 하고 있거나.
부디 전자이길 바라며 조현순은 곁눈질로 최대영을 흘겨보았다.
“최대영. 네 정보망, 제대로 된 거냐?”
“……네. 확실합니다.”
멀리 창밖의 파란 하늘을 내다보며, 조현순은 마지막 숙고를 마쳤다.
“자신 있어? 이건 하려면 진짜 제대로 해야 해.”
“……자신 있습니다.”
조현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굳센 의지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그래, 진행해 봐.”
상사의 승인이 떨어지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팀원들이 동시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을 크게 뜬 그들은 입가에 미소를 건 채 서로를 쳐다보았다.
“대신!”
그러다 뒤따라 들려오는 우렁찬 목소리에 다 함께 목을 움츠렸다.
“장기전으로 간다. 괜히 확실하지도 않은 거에 설쳐서 일 시끄럽게 만들지 말고, 저쪽에서 눈치채면 바로 후퇴해. 치고 빠지기 제대로 하라고. 그래야 우리 신상에 이로워.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
조현순이 엄한 얼굴을 하고 마약수사 1팀 전원에게 주의를 줬다.
“네!”
“오케이, 수고.”
힘찬 대답에 흡족한 그가 손을 한 번 들어 보이고는 회의실을 벗어났다.
조현순이 나감과 동시에 회의실 여기저기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아, 어차피 허락해 주실 거 그냥 처음부터 해 주시면 좀 좋아요? 쫄려 뒤질 뻔했네.”
긴장이 풀린 동길이 테이블에 엎드려 투정했다. 막내의 엄살에 팀원들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 테이블을 정리하는 선우에게 박민호가 다가왔다. 박민호는 팔꿈치로 선우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한선우 어깨가 무겁겠는데?”
선우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유리창 너머로 흐드러지게 핀 벚꽃 잎이 바람에 살랑살랑 흩날리던, 어느 봄날의 일이었다.
* * *
『타깃, 2층으로 올라갑니다.』
귀를 통해 들려오는 무전에 선우는 몸을 퍼뜩 세워 주방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VIP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주방이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키가 훤칠하고 얼굴이 미끈한 웨이터 두 명이 고급 양주와 각종 음료, 그 밖에 필요한 잔이나 식기류들을 트레이에 챙겨 담았다. 안쪽 조리대에서는 주방 이모가 안주를 바삐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근무 중에는 거의 보기 힘든 영업부장까지 나와서 일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어! 너 짱구 대타구나. 이리 와 봐라.”
주방 입구에서 선우를 발견한 영업부장이 가슴팍에 붙은 이름표와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선우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선우가 영업부장 앞에 다가서자, 그는 시선을 위아래 양옆으로 돌려 가며 선우를 훑었다.
“좋네. 마침 잘됐다. 손이 모자랐는데.”
그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거 다 되면 2층 제일 안쪽 룸에 좀 가져다드려라.”
영업부장이 스테인리스로 된 조리대 위를 가리켰다. 커다란 접시 위에 과일이 한창 세팅 중이었다. 지금까지 일하면서 봤던 과일 안주와는 차원이 다르게 풍성하고 다채로운 구성이었다.
“2층 제일 안쪽 룸이요?”
선우가 꽃 모양으로 커팅된 수박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물었다.
“응. 중요한 분들이니까 실수 안 하게 조심하고. 인사 깍듯이 한 다음에 이것만 놓고 나오면 돼. 어려울 거 없어. 어어, 준비 다 됐냐?”
주류로 가득 찬 트레이를 들고 웨이터 한 명이 다가오자, 부장은 두 웨이터를 모두 데리고 주방을 나섰다.
주방 이모가 과일을 마저 담아내는 동안 선우는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약간의 기대와 긴장으로 심장이 도곤도곤 가볍게 뛰었다.
팀원 중 한 명이 웨이터로 잠복을 해야 한다면 마약수사 1팀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일단 나이대가 가능한 팀원이 동길과 선우였는데, 동길이 웨이터를 하면 여자 손님들이 전부 겁을 먹고 도망갈 것이라며 팀원들이 극구 말리는 통에 남은 선택지는 오로지 하나가 되었다.
박민호의 말대로 선우의 어깨가 무거웠다.
일주일을 기다려 잡은 기회였다.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또 때가 올지 몰랐다. 다 같이 밤을 새우며 고생하는 팀원들을 생각하며, 선우는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어느새 완성된 과일 안주를 선우가 트레이로 받쳐 들었다. 고작 하나뿐인 접시가 맡은 임무만큼이나 묵직하게 느껴졌다.
중앙 홀로 나온 선우가 2층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이내 저 멀리 앉아 있는 동길과 눈을 마주치니 그가 자신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는 숨을 한 번 크게 쉬고는 곧바로 계단을 올랐다.
클럽 내부는 복층 구조로 되어 있었다. 1층에는 스테이지와 테이블석, 룸, 2층에는 소수의 VIP룸만 있는 구조였다.
예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던 VIP룸이 어쩐지 오늘은 많이 비어 있다 싶었는데, 일요일이라 그런가 했더니 알고 보니 진짜 VIP를 맞이하기 위함이었다.
2층에 올라서니 레드 카펫이 깔린 복도를 따라 여러 개의 문이 나 있었다. 북적이는 1층과는 다르게 복도가 한적했다. 오가는 사람 없이 가장 안쪽 문 앞에 경호원 두 명만이 서 있을 뿐이었다.
『선우야. 너무 긴장하지 말고, 우리는 딱 우리 할 일만 하자. 일단 도청기만 잘 붙여 놓고 나온나.』
가장 안쪽 룸이 다가오자 김지항이 무전을 해 왔다. 그의 말에 선우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내리며, 짐짓 태연한 척 표정을 고쳐 지었다.
마약 1팀의 1차 목표는 거래 정황 확보였다.
선우의 역할은 문태성과 진준배의 접선 현장을 포착, 접선 장소에 도청기를 달았다가 그들이 자리를 뜨면 다시 도청기를 회수해 오는 것이었다.
문태성의 앞마당일 것이 분명한 이곳에서 증거도 확보하지 못하고 몸부터 들이미는 것만큼 위험천만한 짓도 없었다. 또, 수사 중이라는 사실이 어설프게 노출되면 미리 수를 써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 테니 무엇보다 증거 확보가 최우선이었다.
룸 앞에 도착하자 새까만 정장 차림의 경호원이 선우를 깔아보았다. 엄중한 표정을 한 그는 선우와 접시를 몇 번 번갈아 보더니, 곧 시선을 거두고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끼익, 방 안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룸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긴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테이블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진준배와 그의 수행원이, 맞은편에는 문태성이 앉아 있었다. 테이블 끝에는 문태성의 비서실장으로 알려진 정윤철 변호사가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문태성이 문 쪽을 힐끔 쳐다보며 손바닥을 앞으로 살짝 내보였다. 그러자 중국어로 한창 이야기를 하던 진준배가 일순 말을 뚝 멈췄다.
달칵, 등 뒤로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웅웅웅웅.
빠른 노랫소리가 문을 뚫지 못하고, 진동만이 방 안으로 전달되었다.
『오케이! 문태성, 그 앞에 진준배 확인!』
선우가 천천히 테이블로 다가갔다. 보타이 아래 숨겨진 카메라가 룸 안의 인물들을 잘 담을 수 있도록 일부러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아따, 고놈 자알 생겼다.』
문태성과 가까워지자 김지항이 그에 대한 감상을 내뱉었다. 아닌 게 아니라 뚜렷하고 진한 이목구비가 어디서 어떻게 보아도 눈에 확 들어올 수밖에 없는 외모였다.
남자답고, 또 잘생겼다.
그의 외양을 표현하는 데는 단 두 마디면 충분했다.
그런데 선우는 그 잘난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문 앞에서 스치듯 부딪친 눈빛이 서늘하다 못해 냉랭해서. 그 뒤로 저를 따라붙는 눈길이 날카롭다 못해 매서워서.
조금이나마 부드러운 기색이 느껴졌던 사진과는 달리, 실제로 마주한 그는 서슬이 시퍼레 어딘가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가진 사내였다.
『진준배 옆에 있는 가방 좀 봅시다.』
김지항의 주문에 진준배 옆자리를 보니 검은색 007 가방이 놓여 있었다. 선우는 카메라에 진준배 쪽이 잘 보이도록 자리를 잡았다. 그러니 자연스레 문태성과 가까운 위치에 서게 되었다. 눈을 치켜뜨고 쳐다보는 시선에 오른쪽 뺨이 따가웠으나, 선우는 최대한 침착하게 덤덤한 표정을 유지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양주와 잔이 완벽히 세팅된 테이블 위에 커다란 과일 접시를 내려놓을 때였다.
“처음 보는 얼굴이네.”
귓가를 울리는 낮은 음성에 선우가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남자의 말이 혼잣말인지, 제 응답을 기대하고 물은 질문인지 어딘가 모호했다. 선우는 살짝 구부린 몸을 바로 세우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고개만 돌려 남자를 쳐다보았다. 저를 지그시 바라보는 눈빛은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아, 하하…. 네,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선우가 어설프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속을 훤히 꿰뚫어 볼 것만 같은 예리한 눈초리에 선우는 황급히 눈을 피하며 몸을 일으켰다.
“한잔할래요?”
그가 한 손으로 양주병을 들며 물었다.
“……저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뜬 선우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선우는 제 귀를 의심했다. 혹시 저 말고 다른 이가 또 있나 싶어 주위를 휙휙 둘러보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말을 건넨 이는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저 눈썹을 한 번 들었다 내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어……. 저, 지금은 근무 중이라서요.”
선우가 옅게 웃으며 거절하자, 그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병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럼, 한잔 따라 주는 건?”
“아…….”
선우는 제 앞에 놓인 유리병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예상에 없던 돌발 상황에 당황한 선우가 이마를 긁적였다. 그대로 잠시 머뭇거리다, 웨이터에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라는 판단이 서자 선우는 천천히 술병을 집어 들었다.
투명한 유리잔에 곧 누런 빛깔 액체가 차올랐다. 그러는 동안 남자의 눈은 선우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얼굴 위로 진득하게 달라붙는 시선에 그 작은 스트레이트 잔을 채우는 찰나의 시간이 선우에게는 억겁처럼 느껴졌다. 애써 담담한 척을 했지만, 병을 든 손바닥에 스멀스멀 차오르는 식은땀까지는 숨길 수가 없었다.
선우가 병을 내려놓자마자, 그는 주저 없이 잔을 들었다. 고개를 뒤로 젖혀 술을 한입에 털어 넣는 동안에도 내리뜬 눈은 ‘웨이터 짱구’를 향해 있었다.
그 뜨거운 눈길을 받고 있자니 어쩐지 모골이 송연해져, 선우는 서둘러 자리를 뜨기로 했다.
“더 필요한 거 있으십니까?”
“…….”
예의상 묻는 말에 그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선우를 향해 있던 날카로운 시선을 벽면으로 돌렸다. 그러고는 돌연 몸을 벌떡 일으켜, 커튼이 쳐져 있는 룸 정면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벽면에 비스듬히 기댄 채 커튼을 살짝 걷어내자, 커튼 뒤로 깨끗한 유리창이 빼꼼히 드러났다.
“가 봐요.”
유리창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남자가 무심하게 말했다.
선우는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하고는 빠르게 몸을 돌렸다. 문으로 향하는 도중에 들고 있던 트레이를 옆구리에 끼고, 소매 안쪽에 숨겨 온 도청기를 몰래 꺼냈다.
문 앞에 다다라 문고리를 잡고, 막 도청기를 붙이려던 찰나였다.
“아, 참.”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남자가 웨이터를 불러 세웠다.
선우는 문고리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몸만 돌렸다. 그러다 헉! 눈앞을 가득 메운 장대한 기골에 그만 헛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어느 틈에 여기까지 온 건지 그는 선우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코앞에서 마주한 그는 실로 건장한 체격이었다. 고개를 들어야만 눈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큰 키에 탄탄한 몸체를 가진 이가 위에서 내려다보니,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중압감이 들었다.
선우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면서도 최대한 차분하게, 손가락 끝에 놓인 도청기를 문고리 뒤에 꾸욱 눌러 붙였다. 도청기를 붙인다는 사실을 남자가 알 리가 없는데도 왠지 모를 긴장감에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이걸 까먹었네.”
남자는 느닷없이 지갑에서 노란 지폐 몇 장을 꺼내 선우의 눈앞에 들어 보였다. 입꼬리를 한쪽만 끌어올려 웃은 그가 지폐를 대충 반으로 접더니, 그 뭉치를 선우의 가슴 포켓에 구겨 넣었다.
“아, 하하…… 티, 팁이요…….”
어설픈 웃음 속에 안도의 한숨이 섞여 나왔다. 제가 지나치게 긴장을 했던 걸까. 순간 열없어진 선우는 감사 인사를 하는 것도 잊어버린 채 제 가슴께를 멍청하니 내려다보았다.
그때, 커다란 손이 불쑥 선우의 보타이를 잡아당겼다.
“엇…!”
깜짝 놀란 선우가 난데없이 튀어나온 손을 급히 쳐 냈다.
“아! 죄, 죄송합니다….”
쿵. 너무 당황한 나머지 뒷걸음질을 치려다, 선우는 그만 문에 등을 부딪치고 말았다. 얼떨결에 문과 그 문만큼 커다란 사내 사이에 갇힌 꼴이 된 선우는 그대로 얼어붙어 눈 한 번도 제대로 깜빡이지를 못하고 서 있었다.
그런 선우를 내리깐 시선으로 보다가, 불현듯 야차 같은 미소를 지은 이가 다시 보타이로 손을 뻗었다.
“삐뚤어졌어요.”
“아…….”
리본 방향을 잡아 주는 사람이 눈은 상대의 얼굴을 향해 있었다. 웃는 낯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남자는 귀신을 잡으러 온 사자 같기도 하고, 먹이를 앞에 둔 맹수 같기도 했다. 목 근처로 닿는 손길에 선우는 순식간에 숨이 턱 막히고, 입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꼈다.
쿵쿵쿵쿵.
문을 타고 넘어오는 거센 진동이 몸을 울렸다.
쿵쿵쿵쿵.
아니, 몸을 울리는 것은 제 심장이었다. 노란 지폐가 마구잡이로 꽂혀 있는, 그곳에서부터 시작된 박동이 쿵쾅쿵쾅 전신을 매섭게 울려 댔다.
“이제 됐어요.”
남자는 리본을 위아래로 살짝 움직이더니, 곧 볼일이 끝났다는 듯 타이의 중심을 검지로 톡 건드렸다.
“하…….”
그 손길이 마치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선우는 참았던 숨을 쏟아 내듯 뱉어 냈다.
“……감, 감사합니다.”
움직이지 않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려 웃자 양 볼이 파르르 떨려 왔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한 선우가 도망치듯 황급히 룸을 벗어났다.
쿵쿵쿵쿵.
선우는 빠른 걸음으로 레드 카펫 위를 지났다.
들켰나? 들켰을까? 타이 뒤에 숨겨진 카메라를 봤을까? 조명이 어두우니까 어쩌면 보지 못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떻게 된 거야?』
쿵쿵쿵쿵.
입술을 앙 감춰 문 선우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그렇게 가까이에 있었는데 못 봤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도청기의 존재는 눈치채지 못했을 테니 괜찮지 않을까? 이대로 조용히 빠져나가기만 하면…….
쿵쿵쿵쿵.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제는 음악 소리보다도 오히려 제 심장 뛰는 소리가 더 크고 빠른 듯했다. 도를 넘은 긴장감에 정신마저 혼미해질 무렵,
『한선우!』
팀원 중 한 명이 다급히 부르는 소리에 선우는 겨우 이성의 끈을 다잡았다.
『도청기 붙였어?』
“……네.”
문득, 문 앞에 서 있던 경호원 중 한 명이 자신을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귀 뒤로 들리는 발자국 소리에 온 신경이 쏠렸으나, 선우는 내색하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아무 소리도 안 나는데?』
“…….”
그러나 김지항의 무전에는 우뚝, 제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아무 소리도 안 난다고?
어느덧 선우는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이었다. 계단 밑에서는 또 다른 경호원 한 명이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는 듯했다.
조그맣게 한숨을 내쉰 선우가 초조함에 머리를 쓸어 넘겼다. 심호흡을 하며 한 발, 한 발,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자 예상대로 경호원은 선우의 앞을 떡하니 막아섰다. 그에 아무 일도 없는 양, 선우는 천연덕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슬그머니 무전 버튼을 눌렀다.
“오늘 물이 진짜 좋네요.”
『……오케이. 다들 조심해서 복귀한다.』
타다다닥. 가볍게 묵례하며 경호원을 지나친 선우는 계단을 아주 빠른 속도로 내려갔다.
저 멀리 박민호와 동길이 저를 보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선우는 그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괜히 팀원들에게 눈길을 주었다가 쫓아오는 경호원들이 일행의 존재를 알아차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1층에 도착한 선우는 망설임 없이 계단 뒤편에 나 있는 복도로 향했다. 이 복도 끝에 밖으로 바로 연결된 비상구가 있었다.
손에 든 트레이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선우는 어두컴컴한 복도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짱구 퇴근합니다.”
마지막 무전을 마친 선우가 무전기를 끄고 귀에 꽂힌 이어폰을 거칠게 빼냈다. 발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허리춤에 꽂혀 있던 무전기를 빼 그 위로 이어폰을 돌돌 감았다. 차고 있던 보타이는 빠르게 풀어 바지 주머니 속에 깊숙이 넣었다. 도청기에 문제가 생긴 이상 진준배와 접선한 영상만큼은 반드시 지켜 내야 했다.
뛰는 듯한 걸음으로 비상구 앞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갑자기 바깥쪽으로 비상구 문이 확 열리더니, 검은 정장을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자리에 멈춰 선 선우는 그 짧은 찰나에 남자를 그대로 지나쳐 나가야 할지, 다시 뒤돌아 가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러는 동안 제 뒤로 또 다른 발걸음 소리가 달라붙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저를 쫓아온 두 명의 경호원일 것이 분명했다.
더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선우가 앞에 선 남자를 태연하게 지나쳤다.
그리고 비상구 문의 손잡이를 잡는 순간,
퍽!
뒷머리를 세게 내려치는 충격에 시야가 까맣게 내려앉았다.
* * *
핑- 탁! 핑- 탁!
가벼운 철제가 스쳤다 부딪히는 소리가 연신 방 안을 울렸다.
넓은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남자가 엄지손가락만으로 지포 라이터를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남자는 등받이에 걸쳐 둔 한쪽 팔을 들어 손끝에 걸린 시가를 입에 가져다 물었다. 시가 끝을 한 번 빨았다 떼고 숨을 내쉬자, 희뿌연 연기가 공기 중으로 퍼져 나갔다.
무표정한 얼굴로 허공을 보며 시가를 태우던 남자가 시선을 테이블 위로 옮겼다. 옷가지와 핸드폰, 지갑. 그 옆으로 보타이와 무전기, 도청기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 꽂혀 있던 시가를 재떨이에 대충 걸어 두고, 그는 지갑으로 손을 뻗었다. 정확히는 지갑 위에 올려져 있던 신분증으로였다.
경찰공무원증
한 선 우
소속 : 서울경찰청 마약범죄수사대
직급 : 경 위
신분증에 쓰인 글자를 한 자, 한 자 되새겨 읽은 남자의 입에서 비식,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몸을 앞으로 기울여 앉은 그는 손에 쥔 신분증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렸다.
어이가 없다는 말조차 아까웠다.
거래가 미뤄진 것은 심기가 조금 불편했으나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미뤄진 이유가 다른 것도 아니고, 경찰이 붙어서라니. 게다가 그 사실을 제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기가 막혀 웃음도 나질 않았다. 그동안 너무 안일하게 지냈나, 지난날을 돌아보게 될 정도였다.
남자는 무심코 굴리던 손가락을 멈추고 다시 한번 신분증을 들여다봤다. 한가운데 자리 잡은 증명사진에 시선이 절로 박혔다. 제복을 반듯하게 입은 모습이 단정하다 못해 청초하기까지 했다.
타고난 것인지 후천적으로 발달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태성은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했다. 한번 본 얼굴은 웬만해서는 잊어버리지를 않았는데, 제가 아는 ‘웨이터 짱구’는 분명 이자가 아니었다.
하긴, 이 얼굴은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 더 어려울 것이다.
애초에 삐끼를 할 만큼 두꺼운 낯짝은 아닌 듯했고, 처음에는 연예인 지망생인가 싶었다. 옆에 찰싹 붙어 눈웃음을 살살 치길래, 제게 얼굴도장이라도 한번 찍어 보려고 달려드는 이들 중 하나일 것으로 생각했다.
보타이 밑에 달린 까만 렌즈를 보기 전까지는.
카메라를 발견한 뒤로는 그저 새끼 심부름꾼이겠거니 했다. 간혹 신생 조직들이 거래 정보를 듣고 겁 없이 염탐꾼을 보내는 일들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1층 테이블 석에 험상궂게 생긴 남자 둘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시간까지 남자 둘이 맥주 몇 병만 축내고 앉아 있는 것이 말이 안 됐고, 딱 봐도 보통 체격이 아니라 당연히 그쪽으로 생각이 쏠렸다.
용산 경찰서를 손바닥 안에 두고 있는 태성이 이태원에서 경찰을 안중에 둘 리가 없었다.
그런데 마약수사대가 나섰을 줄이야.
해외 바이어 열에 아홉은 한국의 밤 문화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곤 했다. 특히 조직원들에게 유흥업소는 사업 현장의 견학과 다름없기에, 나이트클럽이라면 다들 환장을 하고 달려들었다. 중요한 거래의 접대 장소로 이만한 곳이 또 없어, 최근에 아예 클럽 하나를 인수한 것이 ‘사이렌’이었다.
노상 하는 거래라면 제가 직접 나설 필요까진 없었겠으나, 최근 태성이 부쩍 바쁘게 움직인 건 얼마 전 개발한 신약의 첫 거래를 트기 위해서였다.
신약은 그 효과를 보장할 수 없으니 바이어들이 쉽게 거래에 응하지 않았다. 게다가 삼방파 진준배는 의심이 많은 남자였다. 진준배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얼굴을 비춘다는 것이 그만 경찰에 빌미를 제공한 꼴이 되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사진 속의 얼굴을 퉁, 하고 튕겼다.
겁에 잔뜩 질린 눈을 하고서도 기어이 도청기를 붙이고 나갔단 말이지. 가만 보니 경찰치고는 좀 어려 보이는 감이 있었다. 요즘 세상에 신분증 위조야 일도 아니니, 어쩌면 이것도 깜찍한 눈속임일지도.
태성은 제 핸드폰을 꺼내 신분증을 사진으로 찍고는, 곧바로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고는 지갑을 열어 신분증을 원래 있던 위치에 꽂아 두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지갑을 내려놓은 그가 이번에는 보타이를 집어 들었다. 뒷면에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초소형 카메라가 붙어 있었다. 태성은 손에 힘을 주어 뒤에 붙은 카메라를 잡아 뜯고는, 그 안에 든 칩만 빼 자신의 주머니에 넣고 나머지는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콱!
구둣발로 카메라를 단번에 내려찍은 그는 마치 담뱃불을 끄는 사람처럼 바닥에 발을 자근자근 비벼 댔다. 그것도 잠시, 얇은 렌즈가 산산조각이 나자, 태성은 너덜너덜해진 카메라를 보타이 옆에 휙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리고 태성은 테이블 위에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이어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침대 앞에 다가섰다.
새하얀 침대 위에 얌전히 누워 있는 이에게서는 경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뽀얀 이마에 동그란 양 볼과 턱이 말 그대로 보송보송했다. 감은 눈에 촘촘히 달린 속눈썹 하며, 둥근 코끝에 매달린 작은 점까지 어디 하나 올망졸망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짱구는 무슨, 흰둥이면 모를까.
입매를 뒤틀며 헛웃음을 친 그가 제 앞에 누워 있는 이의 손을 잡아 들었다. 들고 온 핸드폰 하단에 흰둥이의 엄지손가락을 가져다 대니 잠금 기능이 단숨에 풀렸다.
키패드를 열고 익숙한 번호를 누르자, 머지않아 태성의 재킷 주머니에서 지잉, 지잉 진동이 울렸다. 그러나 태성은 제 몸을 울리는 진동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걸던 전화를 끊고는 발신 내역을 삭제할 뿐이었다.
그대로 핸드폰을 침대 위로 던져두려는데, 문득 두 번의 진동이 연달아 울렸다.
화면에 뜬 메시지를 읽고 태성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핸드폰의 전원을 아예 꺼 버린 그는 테이블로 돌아가 가지런히 놓인 소지품 옆에 핸드폰도 함께 내려놓았다.
이윽고 할 일을 모두 마친 태성은 방을 나서려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갑자기 멈칫, 가던 길을 멈췄다.
아주 잠시, 제자리에 서서 무언가를 고민하던 그는 다시 테이블로 되돌아왔다. 그러고는 테이블 위에 있는 물건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곧 그중 하나를 조용히 집어 들었다.
손에 착 감기는 물건을 허공에 휙- 한 번 던졌다 받고 퍽 만족스러운 표정이 된 남자는 그 길로 방을 벗어났다.
방문을 여는 그의 입에서 언뜻, 상쾌한 휘파람이 새어 나왔다.
* * *
드르르륵-
한밤중, 도로변에 주차된 승합차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이가 문 바로 옆자리에 주저앉다시피 앉고는 힘없이 차 문을 닫았다. 이마에 식은땀이 잔뜩 맺힌 이의 고개가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선우야!”
“선배님!”
선우를 본 팀원들이 동시에 외쳤다.
“뭐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가장 가까이에 있는 김지항이 선우의 어깨를 붙들고 물었다. 그러나 어딘가 멍한 선우는 숨만 색색 고를 뿐 말이 없었다.
조금 전을 떠올리니 선우는 그야말로 눈앞이 아찔했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고 그대로 기절을 한 모양이었는데, 눈을 뜨고 보니 저는 낯선 방에 홀로 누워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너무 황망한 나머지 선우는 주변을 살펴볼 생각도 못 하고 허둥지둥 짐을 챙겨 나왔다. 그리고 로비로 나오고 나서야 제가 누워 있던 곳이 사이렌 클럽이 위치한 호텔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가 저를 그 방에 데려다 놓았고, 제 소지품은 어떻게 알고 챙겨 놓았는지는 궁금해할 겨를조차 없었다.
“…죄송합니다.”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한 선우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 얘기 좀 해 봐.”
초조한 얼굴로 저만 쳐다보는 팀원들을 한 명씩 둘러본 선우가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뗐다. 무릎 위에 놓인 옷자락을 손에 쥐고 꼼지락거리는 것도 잠시, 선우는 이내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호텔 방에다 눕혀 놨다고? 허, 참.”
뒤통수 쳐서 기절시켜 놓고 호텔 방에 고이 모셔 두는 건 또 무슨 경우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전 상황을 모두 듣고, 박민호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래서 어디까지 눈치챈 것 같은데?”
김지항은 차분하게 가장 중요한 것부터 짚어 물었다.
“……도청 사실은 확실하고, 제가 경찰이라는 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선우가 한껏 풀이 죽어 얘기하자, 박민호가 턱을 쓸며 중얼거렸다.
“하, 귀신같은 새끼. 그걸 어떻게 알아차렸지?”
김지항은 아쉬운 마음에 그만 입맛을 쩝 다셨다.
“……됐다. 이미 벌어진 일인데 어쩌겠냐. 진준배랑 접선한 거 직접 확인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없진 않아. 카메라는?”
“저…… 그게…….”
무척이나 곤란한 표정을 한 선우가 머뭇거리며 카메라를 내밀었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렌즈에 사방팔방 금이 가고 그 틈새가 벌어져, 카메라는 본래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칩은… 이미 빼 간 상태였습니다.”
“…….”
하아. 팀원들의 깊은 한숨 소리에 면목이 없어진 선우는 고개를 푹 숙였다.
“넌? 너는 괜찮아? 몸 어디 아픈 데는 없어?”
심상치 않은 렌즈의 상태를 보고 그제서야 김지항이 선우의 상태를 다급히 확인했다.
“……네.”
가격당한 뒤통수와 목, 어깨 근육이 뻐근하게 아팠지만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한 시간 전쯤 문태성 차가 빠져나갔어. 너도 곧 나올 줄 알았는데 아무 연락이 없어서 동길이가 방금까지 이 주변 돌아보던 참이었어.”
“아…….”
선우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승합차는 호텔 건너편에 주차되어 있었다. 선우의 신호를 듣고 서둘러 차 안으로 복귀한 팀원들은 마지막까지 문태성의 움직임을 주시하고자 했다. 본래는 호텔 주차장을 벗어나는 검은 차량을 곧바로 뒤쫓으려 했으나, 도대체 무슨 일인지 그때까지도 선우가 연락이 닿질 않았다. 몹시도 허무했지만 마약 1팀 팀원들은 하는 수 없이 눈앞에서 타깃을 그냥 떠나보내야만 했다.
“에라이, 제대로 공쳤네.”
박민호가 창밖을 보며 쯧, 하고 혀를 찼다.
“됐어. 한 경위 무사한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3시 다 됐는데, 어쩔래? 퇴근할래?”
“아, 지금 퇴근하면 언제 집 가서 언제 다시 나와요. 그냥 청사 근처 사우나나 갔다가 바로 출근하시죠?”
김지항의 물음에 운전석에 앉아 있던 동길이 시동을 걸며 말했다.
“그럴래?”
선우는 대답 대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 차가 출발하고, 선우는 흔들리는 좌석에 몸을 묻었다. 눈을 꼬옥 내리감은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 * *
2021년 5월 10일 12시경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울경찰청 마약범죄수사대
사무실에 앉아, 선우는 책상 위에 올려 둔 무전기와 카메라를 오도카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난밤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머리를 마구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침부터 상황 보고를 위한 팀 회의가 진행되었으나 선우는 무슨 정신으로 회의를 마쳤는지도 몰랐다. 뒤통수를 맞을 때 넋이 빠져나가기라도 한 건지, 오전 내내 저는 아주 멍청한 사람처럼 굴었다.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눈치를 챈 거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의심의 여지를 준 기억이 없었다. 해 봐야 안주를 내려놓고 술을 따른 것이 전부였는데. 다만 몇 번 마주친 눈에서 제 속을 읽기라도 한 걸까? 박민호의 말마따나 정말 귀신같은 남자였다.
문제는 문태성이 저의 실체를 어디까지 알게 되었느냐인데……. 만일 제가 경찰이라는 걸 알아차렸다면, 그동안 팀에서 준비해 온 수사가 모두 물거품이 되어 버릴지도 몰랐다.
선우는 곰곰 생각해 보다 금방 고개를 저었다. 경찰인 줄 알았다면 제가 눈을 뜬 곳이 호텔 방이 아니라 적어도 한강 변쯤은 되지 않았을까. 크게 위협되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그나마 이 정도 선에서 끝을 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당장 기절한 저를 두고 그자가 무슨 짓을 했어도 저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을 테니.
문득, 어젯밤 저를 내려다보던 스산한 눈빛이 떠올라 선우는 순식간에 뒷덜미에 소름이 쭉 끼쳤다. 그에 진저리를 친 선우가 잠시 후에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선배들처럼 좀 더 능숙하고 경험이 많았다면 이런 실수를 하진 않았겠지……. 함께 고생한 일주일을 하룻밤 만에 날리고 나니 자꾸만 자책감이 들었다. 울적한 마음에 선우는 고개를 숙여 책상에 이마를 콩 찧었다. 책상 위에는 렌즈가 박살 난 카메라가 선우의 마음을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었다.
“어? 이거 아직도 반납 안 했어요?”
어느새 다가온 동길이 머리를 박고 있는 선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뭐, 아직도 그 일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머리 아프게 계속 생각해 봐야 뭐 해요. 밥이나 드시죠?”
“어, 벌써 그렇게 됐어?”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벌써 12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다른 팀원들은 모두 외근을 나가고 사무실에는 동길과 저만 남아 있었다.
“괜찮으세요?”
청사 복도를 지나며 동길이 물었다.
“응. 괜찮지 그럼?”
그에 뭐 별일 있었냐는 듯, 선우가 예사롭게 대답했다.
“그럼 다행이고요. 진짜 걱정했어요. 무전은 끊겼지, 핸드폰은 꺼졌지. 정말 무슨 일 생긴 건 아닌가 하고.”
“그랬어? 미안…….”
선우가 사죄의 마음을 가득 담아 쓰게 웃었다.
“아, 이렇게 사람 애타게 하기 있어요? 내가 그 새벽에 이태원을 얼마나 뒤졌다고. 오늘 점심은 선배님이 쏘세요!”
“그래, 알겠어.”
결국은 밥 사 달라는 말이 하고 싶었던 거였다. 그 큰 덩치로 앙탈을 부리는 동길이 우스워, 선우는 오늘 처음으로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날씨라는 건 사람이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나, 오늘은 어쩐지 하늘이 선우의 기분을 대신 드러내 주는 듯했다.
청푸른 오뉴월임에도 아침부터 하늘색이 영 좋지가 않더니, 점심때가 되자 세상이 온통 회색빛으로 뒤덮였다. 어둡고 꾸물거리는 것이 곧이라도 비가 내릴 것만 같았고, 간간이 부는 바람도 어딘가 음산한 데가 있었다.
“어우, 날씨 왜 이래. 뭐 드실래요?”
동길이 하늘을 향해 눈가를 찌푸리며 물었다.
“아무거나. 너 먹고 싶은 거.”
선우는 별생각 없이 답하고는 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러다 갑자기 걸음이 조금씩 느려지더니,
“어? 잠깐만, 동길아.”
곧 가던 길을 아예 멈추고 동길을 불러 세웠다.
건물 입구에서 멈춰 선 선우는 뒷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앞으로 가져와 앞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러고도 부족해 제 몸 앞뒤를 만지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주머니도 없는 셔츠 위를 여기저기 더듬어 대기도 했다.
그러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나 지갑이 없네?”
“아, 뭐예요. 선배님, 팀장님 닮아 가요?”
동길은 선우가 농담을 하는 줄 알고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아니, 진짜야. 나 항상 뒷주머니에 넣고 다니는데 왜 없지?”
“사무실에 두고 온 거 아니에요?”
“아, 그런가?”
동그란 눈동자가 커다란 눈 안에서 또록또록 굴렀다. 선우는 머릿속으로 오늘 아침을 더듬어 보았다. 내가 지갑을 어떻게 챙겼더라? 시간을 차근히 거슬러 올라 봤으나 지갑에 대한 기억은 도통 떠오르지가 않았다.
“동길아. 나 얼른 사무실 좀 다녀와 볼게. 조금만 기다려 줄래?”
“네. 다녀오세요.”
동길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선우가 다시 청사 안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엥? 선배님, 저거 문태성 아닙니까?”
동길의 생뚱맞은 물음에 선우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가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잿빛 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뒤로한 채, 저 멀리 도로변에서 건장한 체격을 한 남자가 청사를 향해 거침없이 걸어오고 있었다. 성큼성큼 걷는 걸음새가 어찌나 시원스러운지, 미지근한 바람에도 목에 걸린 타이가 펄럭 허공을 나부꼈다.
훤칠한 외모와 당찬 걸음걸이.
단 한 번이라도 그를 본 적이 있다면, 도저히 못 알아볼 수가 없는 용모와 자태였다.
“어, 어어, 엄마야. 저거 맞는데? 저놈이 여긴 웬일이래요?”
선우는 언뜻 그와 눈이 마주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어…… 선배님. 저놈… 우리한테 오는 거 같은데요…….”
그리고 동길의 속삭임에 곧 착각이 착각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선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장신의 남자가 마주 서자 삽시간에 선우의 얼굴 위로 어두운 그늘이 내려앉았다.
“제가 맞게 찾아왔나 보네요.”
그는 얼굴에 아주 온화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분실물을 습득해서요.”
그리고 돌연, 한 손을 서서히 위로 들어 올렸다. 그 손의 움직임을 따라 선우와 동길의 시선도 아래에서 위로 향했다. 커다란 손에 든 물건을 확인하고, 선우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저절로 떡 벌어진 두 사람의 입은 닫힐 줄을 몰랐다.
“음,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왼쪽 팔을 위로 쑥 뻗었다 접은 남자가 손목에 걸린 시계를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오뉴월의 하늘만큼이나 푸르른 미소를 걸고 선우를 바라보았다.
“사례는 점심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애애애앵-
불현듯, 큰 길가에서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어디선가 큰불이라도 난 듯, 빨간 소방차 여러 대가 연달아 도로 위를 달려 나갔다.
* * *
세 사람이 도착한 곳은 청사 뒷골목에 위치한 작은 순대국밥 집이었다. 단층짜리 판잣집을 개조해 만든 식당은 낡고, 좁고 또 허름했다. 암, 고매하신 재벌 3세를 모시게 되었는데 이 정도쯤은 되어야 하지 않겠나.
가게 앞에서 선우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앞장선 선우가 미닫이로 된 새시 문을 호기롭게 열었다. 고개를 살짝 숙이며 안으로 들어선 선우의 뒤를 동길이 익숙하게 몸을 굽히며 따랐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이는 새시 틀 한가운데 서서 비스듬히, 또 구부정하게 몸을 구기고 나서야 겨우 식당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어느새 선우의 뒤에 바짝 붙은 동길이 조용히 속삭였다.
“선배님, 순대국밥 잘 못 드시지 않아요?”
쉿! 선우가 집게손가락을 슬쩍 입에 가져다 대며 동길의 말을 막았다.
점심시간이 한창인 식당은 무척이나 북적거렸다. 빈자리가 거의 없어, 세 사람은 하는 수 없이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아야 했다.
제일 먼저 식탁 앞에 앉은 선우 옆으로 동길이 앉자, 자연스레 남자가 그 앞에 자리했다.
하필 그가 앉은 자리는 지붕 모양을 따라 천장이 비스듬하게 내려앉은 곳이었는데,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는 사람이 그 비좁은 공간에 틀어박혀 있으려니 몸을 옴짝달싹하는 것도 버거워 보였다. 게다가 칼주름이 빳빳하게 잡힌 슈트 차림에 머리까지 고이 올린 모습인지라, 남자는 장소와 영 어우러지지를 못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좁은 자리에 몸을 구겨 넣던 모습이 얼마나 고소하던지. 선우는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입안에서 볼살을 깨물어 가며 참아 냈다.
머지않아 주인아주머니가 식탁 위에 물병과 컵을 내려놓았다. 선우는 돌아서는 아주머니를 붙잡고 곧바로 말했다.
“국밥 세 개요. 내장 많이 주세요.”
주문을 넣기가 무섭게 식탁 위에는 반찬이 올라왔다. 그래 봐야 깍두기, 새우젓, 생고추와 된장이 전부인 조촐한 상차림이었다.
조르르 올려진 낡은 접시들을 남자는 팔짱을 끼고 내려보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고 가게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이렇다 할 말 한마디, 표정의 변화도 없는 이에 도리어 불안해진 것은 선우였다.
그저 무덤덤할 뿐, 그에게서는 불쾌한 기색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조금은 언짢아할 줄 알았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자 선우는 괜히 제 발이 저려 자꾸 남자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마침내 국물이 가득 담긴 뚝배기가 도착했다.
으흠, 선우는 괜히 의미 없는 헛기침을 해 보았다.
“드세요. 이래 보여도 여기가 이 동네에서는 나름 유명한 곳이에요.”
“…….”
태성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뚝배기를 가만히 쳐다보다, 별안간 씨익 웃고는 숟가락을 손에 쥐었다.
“잘 먹을게요.”
날카롭던 눈매가 부드러운 선을 그리고, 매끈하던 양 볼에는 돌연 보조개가 깊게 패었다.
저를 바라보며 웃는 낯에 선우는 순간 사고가 뚝, 멎는 듯했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화사하고 우아한 미소에 어쩐지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는 기분이었다.
콩닥, 콩닥.
멈춘 머리를 대신해 작동하는 것은 심장이었다.
선우는 설레설레 도리질을 쳤다. 아무래도 전날 남자한테 받은 충격이 너무 커, 머리며 몸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제멋대로 구는 것 같다고, 선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앞에 앉은 이의 심장이 어쩐지 알 턱이 없는 태성은 꽤 익숙한 사람처럼 식탁 한쪽에 놓여 있던 양념장과 들깻가루 통을 열었다. 두 가지 모두를 크게 한 스푼씩 떠 자신의 뚝배기에 넣은 그는 숟가락을 휘휘 저어 국물과 양념을 잘 섞었다. 그러고는 제 앞에 놓인 공깃밥마저도 한 톨도 남기지 않고 전부 다 말았다.
이내 무심한 표정으로 국밥 한 숟갈을 크게 떠 입에 넣은 태성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시선들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안 드세요?”
“먹,”
“먹습니다!”
선우의 대답을 동길이 홀랑 가로챘다. 선우는 어이가 없어 동길을 쳐다봤다. 왜 갑자기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는 건지. 동길은 뚝배기로 호다닥 고개를 파묻고 급히 식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하, 선우는 누구도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조용히 한숨을 내뱉고는 숟가락을 들어 조심스레 국물을 떠먹었다.
윽, 비려. 한 숟갈 만에 선우의 얼굴이 구겨졌다.
한식을 가장 좋아하는 선우가 유일하게 못 먹는 한식을 꼽자면 그건 돼지국밥이었다. 그나마 순대는 조금 먹긴 했는데, 희한하게도 국물과 내장은 돼지 비린내가 역해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잠복도 실패하고, 밥도 사야 하는 이 울적한 상황에 소심하게 복수라도 해 보겠다고, 선우는 남자가 입에도 대지 못할 것 같은 음식을 생각해 봤다. 그 순간 당장 떠오르는 게 허름한 식당의 순대국밥이라 이곳으로 데려오긴 했는데, 문제는 저조차도 입에 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앞에서 국밥을 퍼먹는 꼴을 보니 괴로운 것은 저 혼자뿐인 듯했다. 순대국밥은 태어나서 본 적도 없을 것 같이 생긴 남자는 어느덧 뚝배기를 반가량 비워 낸 상태였다.
착잡한 심경으로 선우는 비린내를 잡아 보겠다고 들깻가루를 국물 위에 한가득 퍼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하나는 순대만 넣어 달라고 할걸. 내장을 많이 달라고 했더니 알맹이는 꼴랑 2개뿐이었다. 심통이 나서 제 입술이 뚜 하게 튀어나와 있는 줄도 모르고, 선우는 애꿎은 뚝배기 바닥을 숟가락으로 북북 긁었다.
선우를 제외한 두 사람은 말없이 식사에 집중했다. 생각지도 못한 적과의 겸상에 그만 입맛을 잃은 선우는 숟가락을 살포시 내려놓았다. 그렇다고 식사를 아예 안 할 순 없는 노릇이니, 젓가락으로 맨밥에 깍두기만 몇 입 깨작거리고 있을 때였다.
똑똑.
노크하듯 식탁을 두드리는 소리에 선우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소리를 낸 이와 눈을 마주하니, 그는 양이 거의 줄지 않은 뚝배기를 턱 끝으로 가리켰다.
“별로 안 좋아하나 봐요.”
“아니에요. 좋아합니다.”
선우는 단번에 부정했다.
그러나 대답이 못마땅하다는 듯, 태성은 자세를 바로 세우고 선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손에 쥐고 있던 숟가락을 식탁에 탁, 내려놓더니 돌연히 자리를 벗어났다. 느닷없는 행동에 선우와 동길이 놀란 눈으로 그를 좇았다.
그는 주방 앞에 있는 셀프 코너에서 멈춰 섰다. 그 앞을 천천히 어슬렁대는데, 커다란 체구에 가려 도대체 무얼 하는지 잘 보이지가 않았다.
잠시 후, 자리로 돌아와 앉은 태성은 깍두기 접시 옆에 새 접시를 내려놓았다. 그가 가져온 새 접시에는 깍두기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선우는 그제서야 처음 나왔던 깍두기 접시에 무가 한 알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거 먹고 가서 어디 범인 잡겠어요?”
허, 선우는 황당해서 그만 헛바람을 내뱉고 말았다. 제가 잡아야 할 범인이 한다는 소리가 아주 기가 막혔다.
선우는 한 알 남은 깍두기를 젓가락으로 푹 찍었다. 그러고는 곧장 입안에 쏙 넣고 오독오독 씹어 댔다. 저 파렴치한 이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산더미 같았지만, 차마 그러지 못한 선우는 작은 무 조각에다 대고 사소한 분풀이를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성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천연덕스럽게 식사를 재개했다. 뻔뻔한 남자의 얼굴에 선우는 그나마도 먹을 마음이 싹 사라져 손에 든 젓가락을 그만 식탁 위로 내려놓았다.
‘엇!’
아무 생각 없이 옮긴 선우의 시선이 문 앞, 계산대 뒤에 놓인 작은 TV에서 멈췄다.
주인아주머니가 보는 TV에서는 시헌의 새 드라마 홍보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곧 방영이 시작된다더니. 저 역시도 처음 보는 티저라 선우는 한껏 집중을 하고 화면을 쳐다봤다.
“한 경위님.”
“네, 네…?”
턱까지 괴고 TV를 보던 선우는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더 안 먹을 거면 이거 내가 먹어도 되죠?”
“어… 어……!”
애초에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던 듯, 태성은 이미 선우의 국밥을 끌어가며 말했다.
태성이 옆으로 밀어 둔 뚝배기를 보고 선우는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그의 몫이었던 그릇 바닥에는 국물이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뚝배기는 설거지가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깨끗해져 있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제가 문호리조트 대표 이사님의 취향을 제대로 맞춘 듯했다.
어느새 TV는 뒷전이 되고, 선우는 이제 아예 대놓고 그가 먹는 것을 구경했다. 동작이 크고 거침이 없는데도 국물 한 방울 허투루 흘리는 법이 없어 신기했다. 할 수 있으면 따라 배우고 싶을 만큼 행동이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진짜… 잘 드시네요.”
본인의 국밥까지 반 이상 먹어 치우는 모습을 보고 선우는 감탄을 했다.
“잘 먹으라고 사 주는 거 아니었어요?”
남자의 물음에 선우는 아차, 싶어 입을 꾹 다물었다. 태성은 피식 웃고는 수저를 그릇 옆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다 먹었으면 이만 일어나죠.”
바글바글하던 식당 안도 그새 듬성듬성 빈자리가 나 있었다. 선우는 가장 먼저 일어나 계산대 앞으로 향했다.
청사 앞에서 돌려받은 지갑에서 카드를 한 장 꺼내 아주머니에게 내미는데, 언뜻 등 뒤로 단단한 무언가가 닿았다. 그러더니 불쑥 어깨 위로 커다란 손이 튀어나왔다.
갑자기 맞닿은 몸에 깜짝 놀란 선우가 그대로 어깨를 조붓이 움츠렸다.
“잘 먹었어요.”
불시에 귓가에 닿는 나직한 음성에 귓속이 찌르르하고 저렸다. 슬쩍 고개를 돌려 등 뒤의 남자를 쳐다보니, 그는 아주 근사한 미소를 걸고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콩닥, 콩닥. 심장이 또 제멋대로 굴었다.
선우와 눈을 마주한 채로 태성은 팔을 앞으로 길게 뻗었다. 마치 감싸 안으려는 듯, 선우의 몸을 천천히 가로지른 손끝은 카드 단말기 옆에 놓인 나무 바구니에서 멈췄다. 바구니 속에서 박하사탕 하나를 집어 든 태성은 선우를 바라보며 느릿느릿 포장을 뜯어냈다.
작은 비닐 조각 사이로 하얗고 동그란 사탕이 모습을 드러내자, 태성은 보란 듯이 그걸 제 입안에 쏙 넣었다.
그러고는 씨익, 입꼬리를 시원하게 끌어올려 웃으며 가게를 벗어났다.
끔뻑, 끔뻑. 움츠린 몸으로 눈을 깜빡이던 선우가 곧 상황을 파악하고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이씨…….”
자세를 바로 한 선우는 간지러웠던 귓가를 손바닥으로 벅벅 문질렀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자, 국밥집 앞에는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도착해 있었다.
그러나 선우가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 태성은 차로 곧장 가지 않고 선우를 마주 보고 섰다.
“한 경위.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아요?”
“예……?”
갑자기 뚱딴지같은 질문을 하는 남자에 선우는 얼빠진 사람처럼 되물었다.
“내 조사 어디까지 했냐고요.”
“…….”
살벌한 질문을 하면서도 그는 빙긋 웃고 있었다.
“난 편견을 깨는 걸 좋아해요.”
또 한 번, 의미를 모르겠는 말에 선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태성을 올려다봤다.
“색안경 끼고 보는 사람들 한 방 먹이는 것만큼 재밌는 것도 없거든.”
부지불식간에 그의 얼굴에는 소름 끼치는 비소가 걸려 있었다.
“그런 의미로, 오늘 아주 즐거웠어요.”
“아…….”
내뱉은 말과는 다르게 얼음장같이 싸늘한 눈빛에 선우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무래도 제가 남자의 심기를 제대로 건든 듯했다.
냉랭한 표정을 하고 선우를 깔아본 태성은 더 이상 볼일 없다는 듯,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주인이 올라탄 검은 승용차는 조금의 지체도 없이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선우는 그만 어안이 벙벙해져,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멀어지는 차량의 뒤꽁무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와……. 선배님, 우리 저 인간 잡을 수 있을까요?”
옆에 서 있던 동길이 말을 걸고서야, 선우는 정신이 들었다.
“한 번만 더 건드리면 국밥이 아니라 내 뚝배기를 조져 버릴 것 같은데……?”
“…….”
선우는 말없이 카드를 지갑에 넣었다.
“내가 경찰 하면서 별의별 놈들 다 봤는데, 진짜 포스가 다르긴 하네요. 눈빛 봤어요? 와, 씨벌. 밥 먹다 지릴 뻔?”
큰 덩치로 호들갑을 떠는 동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선우는 생각에 잠겼다.
예상과 다르게 문태성은 제가 경찰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말인즉, 본인이 경찰의 타깃이 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는 의미인데……. 그런데도 벌건 대낮부터 청사로 경찰을 직접 찾아왔다?
이건 명백한 경고였다.
더 이상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 범죄를 짓고도 공권력을 상대로 저렇게 당당할 수 있는 것일까. 경찰인 주제에 저는 또 왜 바보같이 그를 겁내고 있는 것인지.
불현듯 밀려오는 씁쓸함에 입안이 깔깔해졌다.
“아니 근데, 감히 겁도 없이 대한민국 경찰의 지갑을 훔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남자의 기세에 눌려 찍소리도 못했던 동길이 이제 와서 양손을 허리에 얹고 큰소리쳤다.
남자의 차는 이미 떠난 지 오래였고, 길바닥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지나가지 않았다.
힘없이 손을 든 선우가 동길의 옹골찬 가슴팍을 툭 치며 말했다.
“야, 커피는 네가 사. 난 아이스아메리카노.”
* * *
“오늘은 다들 이만하지?”
최대영이 서류철을 정리하며 말했다. 팀장의 반가운 제안에 노트북 앞에 구겨져 있던 팀원들이 하나둘씩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야. 이렇게 일찍 퇴근하는 게 얼마 만이냐.”
박민호의 목소리가 조금 들떠 있었다. 오랜만에 아들에게 치킨이나 사다 줘야겠다며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래 봐야 저녁 8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지만, 자정까지도 야근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마약수사대에서는 일찍이라면 일찍이었다.
“선우야, 집에 안 가냐?”
언제나 팀원들을 살뜰히 챙기는 정기영 경감이 물었다.
“네. 전 정리할 게 조금 남아서요.”
“내일 해, 내일. 얼른 정리하고 들어가라. 빨리 갈 수 있을 때 가야지, 이런 기회가 흔한 게 아니라고.”
“네, 그럴게요.”
모두가 퇴근하고 혼자 남은 사무실에는 적막이 흘렀다. 선우는 형사 포털에서 수사 자료들을 찾아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미 여러 차례 봤던 자료들이었지만, 혹시나 제가 놓친 게 있는 건 아닐지 보고 또 보았다.
틈이 나는 대로 옛날 사건 기록들을 들춰 본 것이 벌써 1년이 지났다. 선우가 찾아보는 사건들은 모두 담당자가 동일했다.
‘한재민 경감.’
위잉. 사방이 쥐 죽은 듯 조용하니, 어쩌다 한 번씩 돌아가는 노트북 팬 소리가 요란하게 느껴졌다. 오늘도 딱히 이렇다 할 실마리를 잡지 못했는데, 어느덧 시간은 자정에 다가서고 있었다.
하아……. 한숨을 크게 쉰 선우가 노트북에서 눈을 떼고 의자 뒤로 몸을 기댔다.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한참 바라보던 그는 그만 몸을 일으키고 책상 서랍 가장 아래 칸을 열었다. 그리고 잔뜩 쌓인 파일 아래로 손을 넣어 맨 밑에 숨겨 둔 검은색 양장 수첩을 꺼내 들었다. 수첩의 겉면에는 2011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었다.
수십 번도 더 읽어 본 아버지의 사건 수첩은 이제 눈을 감고도 그 안의 내용을 모두 외울 수 있을 정도였다.
선우는 수첩을 열어 낯익은 글씨의 글자들을 손으로 어루만져 가며 눈에 한 번, 또 마음에 한 번 새겨 넣었다. 그가 사무치게 그리운 날에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것뿐이었다.
늘 그렇듯 쓸쓸하고 외로운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