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클럽 블루문 사태 (3/19)

2. 클럽 블루문 사태

길었던 한 주도 어느새 끝자락이었다.

흔치 않은 일이나, 오늘 선우는 종일 사무실에서 근무 중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날씨가 더워지는 것이 이제 곧 외근이 힘들어지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겨울도 겨울이지만, 푹푹 찌는 여름날만큼이나 외근직 경찰을 괴롭게 하는 것도 없었다. 얼음이 가득 든 아메리카노를 쪽 빨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자니, 선우는 내근직을 지원하지 않은 것이 잠깐이나마 후회가 될 뻔했다.

선우가 속한 마약수사대는 업무 특성상 기획 수사가 잦은 편이었다. 최근 마약 1팀은 SNS와 메신저를 통한 마약 거래에 대해 수사를 착수했다. 보통은 정보 수집 단계에서부터 현장을 도는 경우가 많은데, 요즘은 온라인으로 거래를 해 주니 덕분에 몸은 편히 일한다며 선우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지잉.

인터넷으로 수상한 SNS 계정들을 한창 찾고 있는데, 문득 핸드폰이 울렸다.

메시지를 확인한 선우는 고개를 살짝 꺾어 책상 앞에 놓인 탁상 달력을 보았다. 마침 오늘은 금요일이고, 내일은 당직 근무도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스트레스가 좀 쌓여 있던 차라 선우는 시헌의 제안이 퍽 달갑게 느껴졌다. 시헌의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또 한동안은 얼굴 보기가 힘들어질 테니, 서로 시간이 맞을 때 미리 봐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 약속 장소를 정하는 메시지에 선우는 잠시 멈칫했다.

시헌이 말하는 ‘한강 라운지 바’는 여의도에 위치한 ‘Hotel the Moon, 한강’의 라운지 바를 말했다.

시헌은 직업 특성상 사람들이 많은 곳은 가기가 어려운 처지라, 만나는 장소로 조용하고 한산한 곳을 선호했다. 연예인에 대한 소문이 잘 새어 나가지 않는 곳이면 더 좋았다. 그런 조건을 갖춘 장소 중에서도 한강 라운지 바는 마침 선우의 직장과도 거리가 가까워, 두 사람은 이따금씩 그곳에서 저녁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런데 늘상 가는 그곳이 오늘따라 영 내키지가 않았다.

다른 데서 보자고 할까…….

눈썹 끝을 매만지며, 선우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렇다고 마땅한 장소가 금방 떠오르는 건 아니었다. 그래, 뭐. 서울 바닥에 호텔 더 문이 여의도에만 있는 것도 아닌데,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나.

메시지를 보내는 손에 망설임이 머문 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 * *

2021년 5월 14일 21시경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 ‘Hotel the Moon, 한강’

띵-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전 층이 통유리 벽으로 둘러싸인 호텔의 최고층에서는 라운지 바로 향하는 복도에서부터 장대한 경치가 펼쳐지곤 했다.

날씨가 맑은 날이면 화려한 도심의 야경은 물론이고 강 건너 남산타워까지도 한눈에 볼 수가 있었는데, 오늘이 마침 딱 그런 날이었다.

어두운 밤하늘을 은은하게 밝히는 노란 달빛 아래, 수없이 많은 자리에서 저마다의 존재를 알리는 하얗고 붉은 불빛들. 까만 강물 위로 어룽거리는 마포대교의 주황빛 조명과 저 멀리 산꼭대기에서 푸른 기운을 전하는 하얀 타워까지.

선우가 가장 좋아하는 서울의 야경이었다.

반짝이는 서울의 밤에 취해, 느린 걸음으로 라운지 바에 들어서니 이미 안에는 시헌이 도착해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바 테이블에 앉아 있는 그에게 다가가, 선우는 옆자리의 의자를 빼 앉았다.

“일찍 왔네?”

“응. 리딩이 생각보다 일찍 끝났어.”

오늘 스케줄은 대본 리딩만 있다더니, 과연 맨얼굴을 한 시헌은 소탈한 옷차림에 검은 캡 모자만 푹 눌러쓴 채였다.

선우는 여전히 믿기지가 않았지만, 배우 김시헌은 요즘 최고 상한가를 달리는 연예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스물한 살이 되어서야 연예계 일을 시작한 시헌은 데뷔가 빠른 편은 아니었지만, 서글서글한 외모와 큰 키로 데뷔 초부터 곧장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선한 인상에 연기도 곧잘 하는 편이라 신인 시절부터 호감도가 높긴 했는데, 몇 해 전 시골 체험 예능에 출연한 뒤로는 완전히 대체 불가 연예인이 되었다. 한참 선배 연예인들을 모시고도 쾌활하고 싹싹하게 구는 모습에 온 시청자가 열광하고 칭찬했던 것을 선우도 기억하고 있었다.

최근에도 영화 촬영을 하나 마치자마자 새 드라마에 캐스팅된 시헌은 말 그대로 바쁜 몸이라, 두 사람은 거의 한 달 만에야 겨우 만나게 되었다.

“옷 잘 어울리네.”

“응. 근데 이거 그렇게 비싼 거였어? 동길이가 엄청 부러워하더라.”

선우가 제 옷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시헌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시헌은 협찬으로 받은 소품 중에 사이즈가 작거나 제 스타일이 아닌 것들은 주로 선우에게 넘기곤 했다. 오늘 선우가 입은 셔츠와 슬랙스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문제는 시헌의 급이 올라가면서 협찬도 급이 달라졌다는 데에 있었다. 정말 시나브로 선우의 옷장은 어느새 고가품이 꽤 차 있었는데, 정작 패션에 문외한인 선우는 그 값어치는 물론이고 브랜드명조차도 잘 알아보질 못했다.

명품이며 한정판일 옷들을 매일같이 갈아입는 턱에, 사정을 모르는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 한 경위는 종종 걱정 아닌 걱정을 사고 있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경찰 월급을 옷값으로 탕진한다고.

“뭐 먹을래?”

“난 그냥 맥주.”

“바이올렛 피즈 하나 주세요.”

시헌이 가까이 있던 바텐더에게 주문을 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텐더가 보랏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유리잔을 선우 앞에 내려놓았다.

“아니, 이럴 거면 매번 왜 물어보는 거야.”

선우가 헛웃음을 치며 물었다.

“나 아니면 이런 거 사 줄 사람도 없잖아.”

시헌이 빙글빙글 웃는 낯으로 거들먹거렸다. 선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시헌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네 말이 맞긴 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을 마주한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킥킥거렸다.

“나 드라마 티저 나왔어.”

“응, 봤어. 멋있더라. 이아영도 너무 예쁘고.”

시헌의 말에 칵테일을 마시던 선우가 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그런데 여자 주인공 역을 맡은 상대 배우를 칭찬하자, 웬일인지 시헌이 단숨에 얼굴을 구겼다.

“그게 뭐가 예뻐?”

되묻는 목소리 또한 살짝 날이 서 있었다.

“왜? 그 정도면 엄청 예쁜 거지, 청순하고. 너랑도 되게 잘 어울리던데.”

“잘 어울린다니. 어디 가서 그런 말 절대 하지 말아라.”

“……왜? 무슨 일 있었어?”

선우는 의아했다. 시헌과 상대 배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적지 않았는데, 이렇게 대놓고 불만을 표출하는 건 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참나. 시헌이 기가 찬다는 듯 실소를 했다.

“아주 난리도 아니다. 맨날 지각하고, 대본 숙지도 하나도 안 되어 있고. 지가 뭐 대배우라도 되는 줄 알고 완전 고자세로 뻗대는데. 아, 도대체 뭘 믿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네?”

“와아……. 그래?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상대역을 맡은 이아영은 최근 청순 아이콘으로 급부상 중인 여배우였다. 워낙 곱고 순한 이미지라 당연히 성격도 그러리라 생각했던 선우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야. 사람 얼굴 보고 판단하지 마. 여기는 그렇게 생긴 얼굴, 안 그렇게 생긴 얼굴, 그런 거 정말 믿을 게 못 된다. 거기다 진짠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열변을 토하던 시헌이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눈으로만 주위를 훑어보았다. 근처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가 언뜻 목소리를 낮춰, 선우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다.

“약쟁이라는 얘기도 있어.”

“뭐?!”

선우가 깜짝 놀랐다.

그렇게 얌전하게 생긴 여배우가 약쟁이라는 것보다, 실은 시헌의 입에서 ‘약쟁이’라는 말이 나온 것에 더 놀랐다. 그가 말하는 ‘약’이 단순 몸이 아플 때 먹는 치료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리라.

시헌이 몸담고 있는 연예계는 마약과는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곳이었다. 두 사람 모두 그 사실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에, 둘은 항상 조심했다. 혹시나 서로의 일에 피해가 갈지도 모르니, 선우가 마약수사대에서 근무하게 된 뒤로는 ‘약’에 대한 이야기는 은연중에 두 사람 사이에서 금기어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시헌이 ‘약’을 언급했다는 건, 그걸 그냥 단순 루머 정도로 치부하기에는…… 어딘가 무거운 구석이 있었다.

선우는 어쩐지 목이 바싹 타는 기분이 들었다. 그에 칵테일 한 모금으로 얼른 목을 축이고, 좀 더 자세히 물어볼 요량으로 입을 열었다.

“그…….”

“한선우 경위님?”

동시에 저를 부르는 소리에 선우는 말을 멎었다. 그리고 귀에 익은 목소리에 그만, 사고마저 멎었다.

“경위님을 여기서 다 뵙네요.”

깊은 울림을 지닌 부드러운 목소리는 누구에게나 듣기 좋을 법했다.

정작 한 경위에게는 누구보다도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 * *

태성은 일을 마치고 막 퇴근을 하려던 참이었다. 오늘의 마지막 일정은 ‘Hotel the Moon, 한강’의 시찰로, 바캉스 시즌을 앞두고 리뉴얼한 퍼실리티를 최종 점검하는 것이었다.

“좀, 소란스럽네요.”

호텔 로비를 지나는데 평소보다 약간 어수선한 분위기가 신경을 거슬렀다.

“아, 네. 지금 라운지 바에 김시헌 씨가 와 있어서요.”

태성의 뒤를 바짝 따라 걷던 호텔 총지배인이 상황을 설명했다. 잘빠진 갈색 구두가 반짝이는 대리석 위에 우뚝 멈춰 섰다.

“김시헌?”

“네. 배우 김시헌 씨요.”

재차 확인시켜 주는 지배인의 말에 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시헌이라면 최근 몇 개월째 브랜드 평판 1위에 랭크되어 있는 배우이니 이 소란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다. 이제 보니 호텔 정문 앞에 카메라를 들고 있는 여학생 무리도 두셋 정도 있었다.

“오늘 촬영이 있다는 얘긴 못 들었는데.”

“라운지 바에 개인적으로 종종 방문하는 VIP 고객입니다.”

김시헌. 김시헌….

유명 배우의 이름을 되뇌며, 태성은 최근 받았던 보고 자료를 떠올렸다.

“혼자 온 겁니까?”

“아……. 항상 동행하는 손님이 한 분 있긴 한데, 평소대로라면 아마도 그분과 함께일 겁니다. 필요하시면 지금 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대표의 질문에 지배인은 애매한 대답을 내놓았지만, 오히려 대표는 원하는 대답을 들은 사람처럼 무척 만족스러운 표정을 했다.

“귀한 손님이 오신 것 같은데. 인사라도 드리고 가는 게 예의겠죠?”

태성은 걸어온 방향으로 다시 몸을 돌렸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그의 얼굴에는 정말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러 가는 사람처럼, 혹은 즐거운 일이 생각난 사람처럼 웃음기가 만연했다.

* * *

나쁜 예감은 언제나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선우는 종종 그런 경험을 했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그러니 어딘가 찜찜한,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고 께름칙한 느낌을 받았다면 애초에 주의를 해야 했다. 예상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선우에게는 충분히 그럴 기회가 있었다. ‘Hotel the Moon’이 문태성이 대표로 취임하고 문호리조트가 처음으로 런칭한 호텔 브랜드라는 걸 알고 있었다면, 저는 이곳에 오면 안 되는 거였다.

“경위님을 여기서 다 뵙네요.”

선우는 마치 공포 영화 속에서 이제 곧 귀신이라도 맞닥뜨릴 사람처럼 서서히 뒤를 돌아보았다.

“…….”

수많은 시간과 무수한 장소 중에 나는, 그리고 그는 왜 하필 지금, 이곳에 있는 걸까.

말없이 침음하는 선우를 대신해 응답한 건 시헌이었다.

“문태성 대표님?”

“김시헌 씨, 오랜만입니다.”

“네. 전에 영화제 뒤풀이 때 한번 뵙고, 그 이후로는 처음 뵈는 것 같아요.”

이미 면식이 있었는지, 두 사람은 밝은 얼굴로 악수를 나눴다.

“두 분이 친분이 있으신 줄은 미처 몰랐네요.”

태성이 선우와 시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하하. 제가 열렬히 쫓아다니는 사이입니다.”

시헌이 유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태성은 의외의 대답을 들었다는 듯, 한쪽 눈썹을 위로 쭉 치켜올렸다. 그의 시선이 선우 앞에 놓인 칵테일 잔을 향했다.

“네, 뭐. 한 경위라면 그럴 만도 하죠.”

보랏빛 칵테일이 반쯤 남은 유리잔을 보고 있자니 픽, 입술 새로 싱거운 바람이 새어 나왔다.

“대표님께서는 저희 선우를 어떻게 아세요?”

이번에는 반대로 시헌이 물었다.

음, 태성은 턱에 힘을 준 채 말에 뜸을 들였다.

어떻게 아는 사이라 할지 대답을 고민하는 듯 보였겠으나, 실은 ‘저희 선우’라 지칭하며 저를 경계하는 김시헌의 태도에 언짢음을 표출한 것이었다.

“일! 일하다…! 잠깐, 뵀어…….”

그 틈에 선우가 다급히 외쳤다.

혹시라도 남자의 입에서 엄한 소리라도 나올까 싶어 서둘러 말을 가로챈다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앞서 그만 소리를 빽 지른 꼴이 되었다. 선우는 황급히 목소리를 낮추며 곁눈질로 슬쩍 태성을 살폈다.

“그렇죠. 일을 하고 있었죠. 한 경위도, 나도.”

입꼬리를 말아 올려 웃는 얼굴에서 음침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 일은 잘되고 있어요?”

“……네?”

“수사 말이에요.”

“아…….”

결국 남자 입에서 나온 그 단어에 선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때 보니까 일이 잘 안 풀리는 것 같길래. 안타까워서요.”

“…….”

정작 안타까운 기색은 하나도 없이, 본인의 수사에 관해 묻는 남자는 어쩐지 좀 즐거워 보였다.

선우의 입에서 근심이 가득 담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해도 자꾸만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말대로 ‘문태성’에 대한 수사가 그 이후 마땅한 방도를 찾지 못하고 지지부진했기에 더욱 그랬다.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는 붉으락푸르락 영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아, 선우는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저희 호텔에 방문해 주신 기념으로 제가 두 분께 한 잔 대접해도 될까요?”

호텔을 대표하는 이가 자못 신사적인 어투로 물었다.

갑작스런 대표의 제안에 선우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시헌을 쳐다보았다. 시헌은 이런 일이 익숙한 사람처럼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태성은 손짓만으로 바 매니저를 호출했다. 이어지는 대표의 짧은 지시에 매니저는 곧바로 와인 한 병과 유리잔을 내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빙을 준비하는 매니저를 보고 있자니, 문득 선우의 어깨에 스치듯 닿는 것이 있었다.

선우는 어깨 위로 시선을 옮겼다. 그때는 이미 등 뒤에서 넘어온 팔이 제 어깨를 지나 가슴 언저리까지 도달한 상태였다. 태성은 선우 앞에 놓여 있던 칵테일 잔을 테이블 한쪽 구석으로 밀어내며, 와인 잔이 놓일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정말 손수 대접이라도 할 모양인지, 매니저가 가져온 와인 잔을 두 사람 앞에 내려놓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물 흐르듯 우아하게 움직이는 손을 눈으로 따르다, 선우는 언뜻 코끝을 자극하는 묘한 향기를 느꼈다.

이게… 무슨 냄새지?

달짝지근하면서 어딘가 씁쓰름한 향기는 향수 따위의 인공적인 향은 아니었다.

불현듯 초콜릿이 떠오를 만큼 진한 단내가 난다 싶더니, 이내 숲속을 연상시키는 깊은 나무 향과 마른 풀 내음이 그 뒤를 이었다. 특징이 또렷한 몇 가지 향들이 뒤섞여 어지러울 법한데도, 또 저들끼리는 오묘하게 잘 어우러져 부드럽고도 중후한 느낌을 주었다.

낯선 향기에 아리송해진 선우는 무심결에 그 향을 쫓아 코로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향이 시작되는 곳은 아마도 와인을 따르기 위해 팔을 살짝 걷어붙이는 대표로부터인 듯했다. 남자의 품에서 흘러나오는 향기가 그와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에, 선우는 홀린 듯 태성을 올려다보았다.

“두 분이 태어나신 해에 생산된 샤또 마고인데, 마침 그해 프랑스 포도 작황이 좋아서 와인도 질이 나쁘지 않아요.”

조르르르, 유리잔을 두드리는 맑은 소리에 선우의 시선은 이제 와인병으로 향했다. 서빙을 마치고 대표가 내려놓은 병에는 저택의 그림과 함께 선우와 시헌이 태어난 해의 숫자가 적혀 있었다.

“향부터 한번 맡아 볼래요?”

태성이 손으로 와인 잔을 가리키며 가볍게 제안했다. 선뜻 내키지는 않았으나 면전에다 대고 거절할 수 있는 성정은 못 되었기에, 선우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잔을 코끝에 가져다 대었다.

“어때요?”

“어, 제가 와인을 잘 몰라서요…….”

“좋은데요? 향도 풍부하고, 맛도 훌륭해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곤란해하는 선우를 대신해 시헌이 감평했다. 태성은 그 평가에 동조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같은 향이 나는 걸로 골랐어요.”

“같은 향이요?”

제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어리바리하게 구는 선우에 태성은 조금 난감한 얼굴을 했다.

“아, 본인 취향이 아닌가 보네.”

“……뭐가…요?”

태성이 눈빛만으로 구석에 박아둔 칵테일 잔을 가리켰다.

“바이올렛. 제비꽃 향이요.”

“…아, 이게…….”

선우의 입에서 맹한 탄사가 터져 나왔다. 술은 마시고 취할 줄만 알았지, 향 같은 걸 신경 써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순간 열없어진 선우는 민망함에 괜히 눈썹 끝을 매만졌다.

그 모습을 보고 태성은 그만 실소를 터트렸다. 이건 뭐, 반응이 너무 말랑해서 놀려먹는 것도 미안할 지경이었다.

‘김시헌 아니야?’

‘대박! 맞아, 김시헌이야!’

그때, 갑자기 귀에 확 꽂히는 소리에 선우가 화들짝 놀랐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새 이쪽을 향한 시선들이 꽤 있었다. 심지어 바 안팎으로는 호텔 직원들이 간간이 모여 있는 모습도 보였다.

호텔 내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유명 인사 문태성 대표가 무려 배우 김시헌과 같이 있다는데, 다시 없을 눈 호강 기회에 직원들이 몰려드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 술렁이는 분위기에 휩쓸린 손님들이 하나둘 시헌을 발견하게 된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 어쩌지…? 시헌에게 이목이 쏠리자, 선우는 괜히 불안해져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정작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어찌할 바를 모르고 혼자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꼭 뭐 마려운 강아지 같았다.

아, 이거 조금만 더 하면 아주 울겠는데.

애처롭게 구는 흰둥이가 짠해서, 태성은 이쯤에서 그를 놓아주기로 했다.

“제가 두 분 시간을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이만 자리 피해 드릴게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뵙죠.”

돌연 커다란 손이 선우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무슨 절친한 사이라도 되는 양 살갑게 구는 손길에 선우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들어 남자를 마주하자, 그는 싱긋 웃는 얼굴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남자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선우는 그가 저를 실컷 놀려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이렌에서 제가 했던 인사를 그대로 돌려받고 나니 삽시간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어떻게 이렇게 안일할 수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길 온 거야. 눈을 질끈 감은 선우는 한 손을 들어 제 두 눈을 모두 가려 버렸다.

“너 저 사람 어떻게 알아?”

“잘 몰라. 그냥, 일하다 한두 번 본 게 다야…….”

시헌의 질문에 선우는 눈 위에 올려 둔 손으로 머리를 대강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러는 너는 저 사람을 어떻게 알아?”

“뭐, 이쪽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 문 대표님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투자자 중에서는 워낙 큰손이라. 특히 해외로 나가는 드라마나 영화는 저 사람한테 투자 많이 받는 것 같더라고.”

선우가 되묻자 시헌이 당연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그런데… 좀 쎄하지 않냐?”

목소리를 한껏 낮춘 시헌이 바 위에 올려진 와인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뭐가?”

“아니, 뭐. 다들 저분 보고 멋있고 젠틀하다고 하던데, 나는 뭐랄까……. 눈빛이 좀 섬뜩하다고 해야 하나? 아까도 좀 그랬는데. 그래서 함부로 다가가지를 못하겠어. 이쪽에서 오래 일하다 보니까 나도 사람 보는 눈이 좀 생겨서.”

선우는 적잖이 놀랐다.

남자를 처음 마주했을 때, 진준배와의 거래를 앞둔 그에게서 선우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섬뜩하고, 가까이 다가가기에 두려운 느낌.

오늘 만난 문태성 대표는 굉장히 신사적이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나이트클럽에서 마주했던 이와 동일 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그래서 선우는 등골이 서늘했던 그 느낌을 오늘은 전혀 받지 못했는데, 시헌은 정말 사람 보는 눈이라도 생긴 모양이었다.

“음. 난 잘 모르겠는데…….”

선우가 어설피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볼 일이 없는 사이라면 모를까 연예계 일을 하는 동안은 한 번씩 남자를 마주하게 될 텐데, 그의 실체를 모르는 편이 시헌에게 더 낫지 않을까 싶었다.

“응.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 내가 잘못 봤나 보지 뭐.”

다행히도 시헌 또한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 시헌아. 그보다, 아까 이아영이 약을 한다고 그랬지?”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선우는 이제서야 물어볼 수 있었다.

“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나도 잘은 몰라. 갑자기 뜬 데다가 하도 건방지게 구니까 뒷말이 좀 많은가 보더라고. 스폰이 있다, 약을 한다 뭐 그런 거 있잖아.”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까. 다른 연예인들한테 별 관심도 없고, 험한 연예계 뒷얘기는 더더욱 잘 옮기지 않는 시헌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선우의 얼굴이 차츰 어두워졌다.

“에이, 뭐가 그렇게 심각해. 내가 괜한 얘기를 꺼냈나 보다. 우리 술 마시러 온 건데 술이나 먹자.”

“…….”

그새 한 잔을 모두 비운 시헌이 와인병을 들어 자신의 잔을 직접 채웠다. 그 모습을 보다, 선우는 아직 한 방울도 줄어들지 않은 제 잔을 내려다보았다. 고작 술일 뿐인데 왠지 마음이 무거워 손이 가질 않았다.

“시헌아. 이런 건 얼마쯤 해?”

속이 비치지 않는 검붉은 액체를 보고 있자니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글쎄. 한선우 월급 한 세 달 치쯤?”

“뭐어?”

선우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세상에 아무리 경찰 월급이 박봉이라지만, 와인 한 병 값이 한 달도 아니고, 두 달도 아니요. 무려 세 달 치라니? 가격을 듣고 나니 선우는 이제 아예 손을 대는 것도 겁이 나, 손끝으로 와인 잔을 멀리 밀어냈다.

선우의 행동에 시헌이 큭큭대며 웃었다.

“그러니까 뭘 그런 걸 물어. 얼마가 됐든 대표님한테는 푼돈일 텐데.”

그러고는 테이블 밑으로 감춘 선우의 손을 잡아끌어 와인 잔을 손수 쥐여 주었다.

“너한테 준 거 아니고 나한테 준 거라고 생각하고 먹어. 대표님한테는 이거 그냥 막 뿌리는 거야. 판촉물 몰라, 판촉물?”

선우를 안심시키려는 시헌의 노력에도 선우는 여전히 머뭇거렸다. 어딜 가도 환대받는 시헌과 달리 선우는 이런 거창한 대접이 익숙지가 않았다.

한참을 망설인 선우가 슬그머니 고개를 숙여 와인 향을 살짝 맡아 보았다. 향긋한 과일 향 사이로 어렴풋이 자작한 꽃향기가 나는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있잖아.”

또 한참을 주저한 선우가 입을 열었다.

“응?”

“대표님이 우리가 태어난 해를 어떻게 아셨을까?”

잘게 흔들리던 선우의 눈동자가 병 라벨에 쓰인 네 자리 숫자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음…….”

시헌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선우를 따라 짐짓 표정을 굳혔다. 그러다 금세 픽, 웃고는 제 핸드폰을 선우에게 들이밀었다.

“내가 태어난 해는 검색하면 나오긴 하는데.”

선우는 큰 눈을 깜빡이며 시헌의 핸드폰을 쳐다보다가,

“아하!”

곧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밝은 얼굴을 했다.

별안간 불안감에 휩싸였던 선우는 그럴듯한 해답에 곧바로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 * *

월요일 아침부터 새벽같이 출근한 선우는 노트북 화면에 SNS 계정 몇 개를 띄워 놓고 있었다.

몸만 청사가 아니었다 뿐이지, 주말 내내 선우는 거의 당직 근무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난 금요일, 시헌의 얘기를 허투루 흘려보낼 수 없었던 선우는 주말 사이 이아영의, 그리고 그녀와 친분이 있다고 알려진 연예인들의 SNS를 샅샅이 뒤졌다. 탈탈 털어낸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사진 하나, 댓글 하나하나를 흡사 이 잡듯이 들여다보았다.

물론 그렇다고 이아영의 SNS에서 마약과 관련된 무언가를 곧바로 뚝딱, 찾아낸 건 아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일반인들도 숨어서 하는 마약을, 하물며 대중의 환심을 먹고 사는 연예인이 공개 계정에다 대놓고 투약 사실을 드러낼 리가 없지 않은가. 거기다 이아영은 요즘 부쩍 주목받는 배우이다 보니, 소속사에서도 그녀의 계정에 적당히 관여를 하는 눈치였다.

그런데도 선우는 포기하지 않고 그녀의 SNS상에 있는 백여 개의 게시물과 수만 개의 댓글을 모두 살펴야 했는데, 그 시작은 이아영과 절친한 사이로 알려진 모델, 예지희가 남긴 댓글로부터였다.

yes.Ghee 언니~!! 우리 언제 봐? 술 한잔해야지~~~!

술 한 잔.

지극히 평범한 인사치레가 선우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술 한 잔’은 마약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흔히 사용되는 은어였다. ‘술’은 필로폰, ‘한 잔’은 한 번 투약할 수 있는 양을 말했다. 평소였다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을 법한 댓글이었지만, 시헌에게 들은 바가 있어서인지 사소한 단어들도 마냥 무시할 수가 없었다.

예지희는 광적인 클러버였다. 이아영의 계정에서 타고 들어간 그녀의 SNS에는 클럽에서 찍은 사진들이 난무했다. 테이블 위의 각종 술, 화려한 조명 아래 놓인 디제잉 장비, 유명 인사들과 함께한 클럽 파티가 예지희의 주된 일상이었다. 그런 그녀를 대중들은 화끈하고 섹시한 이미지로 소비하고 있는 듯했다.

선우가 주목한 것은 사진보다는 다른 사람들과 주고받은 댓글이었다. 수많은 글 중 한 달 전쯤 남준호라는 남성 모델과 나눈 대화가 제법 수상했다.

lamNam @yes.Ghee 나 쇼 전까지 한 달 자유임. 한잔하러 갈래?

yes.Ghee @IamNam 요즘 갈만한 곳이 없어ㅠㅠ

lamNam @yes.Ghee 파란집ㄱㄱ 신상 개죽음

선우는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이였으나, 남준호는 업계에서 나름 알아주는 톱 모델이었다. 무심코 지나쳤던 TV 광고에서 심심찮게 보였던 이가 바로 그였고, 패션쇼에서도 오프닝이나 엔딩을 거의 도맡아 한다고 했다. 그의 SNS 역시 쇼나 광고 촬영장에서 찍은 사진들로 가득했다.

그런데, 어쩌다 한 번씩 남준호가 셀카를 직접 올리는 경우가 있었다. 사진 속의 그는 주로 술에 취한 듯 눈이 잔뜩 풀려 있거나, 희뿌연 연기 속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 팬들은 남준호의 퇴폐미를 예찬하는 글로 댓글 창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일반인은 거의 알아차리지 못할 은어로 약 구매를 유도하는 댓글들이 드물지 않게 보였다.

과연 그가 취한 것이 술 담배가 끝이었을까. 선우는 진한 의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선우, 좋은 아침!”

“어! 선배님. 저 괜찮으시면 이것 좀 잠깐만 봐 주실래요?”

이제 막 출근하는 박민호를 선우가 덥석 붙잡았다.

“야, 나 지금 막 왔다. 숨이라도 좀 돌리자.”

핀잔을 주는 말투와는 다르게 박민호는 반가운 기색이었다. 기본적으로 마약 1팀 팀원들은 다들 워커홀릭 기질이 다분했다.

박민호가 책상 앞으로 다가오자, 선우는 그가 보기 편하도록 노트북 방향을 조절해 주었다. 스크롤을 쑥쑥 내리며 화면을 빠르게 훑는 박민호의 눈에 어느 순간부터 이채가 돌았다.

“이야. 이 새끼 이거, 냄새나는데?”

남준호가 동료 모델과 나눈 대화를 보고는 이렇게 말했고,

“어허. 이건 보나 마나 떨3)일 거고?”

게슴츠레 뜬 눈으로 시가를 물고 있는 사진에서는 그렇게 말했다.

“아주 나 잡아가쇼 하는구만?”

“확실히 좀 수상하죠?”

“수상이라니, 이놈은 백 프로야.”

박민호가 화면 속 남준호의 얼굴을 검지로 툭툭 쳤다.

“여기서 얘기하는 파란 집이라는 게 강남에 있는 블루문을 얘기하는 것 같아요.”

“……그래? 어, 가만있어 봐. 블루문이면…….”

“네. 맞아요.”

‘Hotel the Moon, 강남’에 위치한 클럽.

“와, 씨. 일이 또 이렇게 풀리네? 야, 선우야 뭐 하냐? 당장 팀장님한테 말씀드리지 않고.”

박민호는 다시 한번 남준호의 SNS를 훑어 내렸다. 기가 막힌다는 듯 그의 입에서 연신 “이야.”, “허, 참.” 하는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래! 이거다, 이거야!’

선우가 자료를 정리해 최대영에게 보고하자, 그의 얼굴에 단번에 화색이 돌았다.

‘이것 좀 더 자세히 알아봐 봐. 약은 분명히 문태성이 뿌리는 걸 테니, 실제로 거기서 투약하고 있는지만 확인해. 증거 확보하는 대로 곧바로 쳐들어가자고.’

그렇지 않아도 잠복 실패 후에 문태성을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 퍽 난감하던 차에, 선우가 물어 온 정보는 제법 괜찮은 돌파구가 될 것 같았다.

연예계 마약 연루 사건이라면 기자들한테 슬쩍 언질만 넣어 줘도 이슈 몰이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개중 몇 놈만 잡아다 조사하고, 블루문에서 약을 공급한 걸로 여론을 자극하면 제아무리 문태성인들 나 몰라라 할 수가 있을까. 무려 본인이 대표로 있는 호텔 본점에서 일어난 사건인데. 워낙에 능구렁이 같은 놈이니 바로 소환해내기야 쉽지는 않겠지만, 심간을 흔들어 놓기에는 충분했다.

최대영은 오랜만에 전율이 흐를 정도로 짜릿한 흥분감을 느꼈다.

때마침 다음 주, 클럽 블루문에서는 한 패션 잡지의 창간 30주년 기념 파티가 열릴 예정이었는데, 예지희와 남준호는 그날 서로를 만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최대영의 지시를 받자마자, 선우는 곧장 시헌에게 SOS를 청했다.

* * *

다음 날, 선우는 퇴근하자마자 시헌의 집으로 향했다. 사생활 보호를 위해 소속사에서 구해 주었다던 한남동 빌라는 인적이 드물어 일대가 한적하고 고요했다.

단지 앞에서 치킨과 생맥주를 사 들고 시헌의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선우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간 집 안은 어쩐지 공기가 다소 서늘했다. 현관 앞 복도를 지나 거실에 도착하니, 천장에 매달린 팬이 실내 온도를 낮추기 위해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다.

우선 부엌으로 향한 선우는 아일랜드 식탁 위에 치킨을 내려놓고, 생맥주는 살얼음이 얼라고 냉동실에 넣어 두었다. 다시 거실로 돌아와 소파에 앉아 잠깐 숨을 돌리는 사이, 현관문에서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왔어?”

선우는 복도로 나가 시헌을 맞이했다.

“응. 많이 기다렸어?”

“아니, 나도 방금 왔어.”

“야, 나 스케줄 마치고 왔는데 네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느낌 되게 이상하다.”

시헌은 가슴이 벅차다는 듯 심장 위로 손을 올렸다.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꼭 신혼부부 같잖아.”

단번에 눈썹을 찡그린 선우가 능글거리며 웃는 시헌의 등짝을 찰싹 때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치킨 사 왔는데 먹을 거지?”

“아, 나 체중 관리해야 되는데…….”

불시에 낭패를 당한 시헌이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울상을 지었다.

“그럼 나 혼자 먹을까?”

“누가 안 먹는대?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라 했다?”

그새 치킨이 사라지기라도 할까, 시헌은 앞장서서 부엌으로 향했다.

치킨과 맥주를 챙긴 두 사람은 거실 끝자락에 딸린 야외 테라스로 이동했다.

파라솔이 펼쳐진 원목 테이블에 앉아 탁 트인 하늘을 보고 있자니, 복잡했던 머릿속이 말끔해지는 기분이었다. 선우는 까만 밤하늘을 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그를 따라 선우의 가슴통도 작게 부풀었다 이내 제자리를 되찾았다.

“나도 연예인이나 할까?”

맑게 갠 하늘 저 멀리, 별처럼 반짝이는 인공위성을 보며 선우가 감정 없는 말을 뱉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한다.”

시헌이 치킨 포장을 풀어헤치며 코웃음을 쳤다.

“왜? 나도 돈 많이 벌어서 이런 집에서 살고 싶은데.”

“야. 연예인 하고 싶은 이유가 그거면 넌 애초에 마인드가 글러 먹었다. 거기다 연예인은 뭐 아무나 해? 넌 일주일도 못 버틴다에 내 전 재산 건다.”

“……그 정도야?”

저도 별생각 없이 말하긴 했지만, 시헌이 너무 단호하게 평가를 내리니 순식간에 김이 픽 샜다.

“응. 넌 불의를 보면 못 참고 달려드는 성격이잖아. 여긴 억울하고 부정한 일투성인데, 일주일이 뭐야? 하루도 못 버티지.”

“아냐! 나도 꼭 그렇지만은 않아!”

“됐어. 할 맘도 없으면서. 이거나 먹어.”

시헌은 시큰둥한 표정을 하고 노릇노릇하게 튀겨진 닭 다리를 선우에게 바짝 들이밀었다. 코앞에 놓인 닭 다리를 내려보다가, 선우는 아기 새마냥 그대로 입을 쩍 벌려 둥근 튀김 끝을 왕 물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오가고, 병에 가득 차 있던 생맥주가 어느덧 바닥을 드러낼 때쯤이었다.

“촬영은 잘돼 가?”

“응. 그럭저럭.”

“……이아영 씨는 잘 지내고?”

가슴살을 쭉 뜯던 시헌이 손을 멈추고 눈을 치켜떴다.

“걔 안부를 네가 왜 물어?”

“아니, 뭐…. 네 상대역이니까…….”

우물쭈물하는 선우에 시헌은 손에 있던 살코기를 그만 내려놓았다. 그렇지 않아도 치킨을 조금 먹나 싶더니, 아까부터 제 눈치를 살살 보며 튀김옷만 깨작거리고 있는 것이 신경 쓰이던 차였다.

“무슨 일인데?”

시헌이 대뜸 물었다.

“어?”

“무슨 부탁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여?”

“…티 났어?”

“내가 널 모르냐? 알고 지낸 지가 10년이다, 10년.”

민망해진 선우가 빨간 혀를 샐쭉 내밀며 헤헤거렸다.

“그……, 이아영 씨 말이야.”

선우가 손에 쥔 컵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만약에…… 진짜 이아영 씨가 마약을 하는 거면……. 그거 걸리면, 지금 찍고 있는 드라마는 어떻게 돼?”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시원하게 말아먹는 거지.”

“……그러면 너한테도 피해가… 많이 가겠지?”

“…….”

시헌은 말없이 맥주를 들이켰다.

“네 말 듣고 조사를 좀 해 봤는데……. 아무래도…… 맞는 것 같아. 그, 클럽 블루문 알지? 이아영 씨 친구들이 거기서 마약을 하는 눈치라, 이번에 우리 팀에서 블루문을 수사하게 되었거든…….”

시헌의 표정은 이미 심각해져 있었다.

“이아영도 수사 대상에 포함된 거고?”

선우의 고개가 느릿느릿 아래위로 움직였다.

“물론 이아영 씨는 아닐 수도 있지만, 만일 맞으면 너까지도 타격을 입을까 봐… 그게 좀 걱정이 되긴 하는데…….”

“……아닐 리가.”

“…….”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곤란해진 선우는 꼭 제가 죄를 짓기라도 한 양, 눈썹 끝을 추욱 늘어뜨렸다.

시헌이 허공을 향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네.”

“……미안해, 시헌아.”

“뭐? 야, 네가 왜 미안해해. 애초에 말을 꺼낸 게 난데. 아, 하여간 방송국 놈들 사람 보는 눈이 없어요. 도대체 걔를 뭘 보고 캐스팅한 거야?”

시헌은 갑자기 속이 타 마지막 남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빈 잔을 테이블 위로 탕!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하, 그래도 미리 귀띔이라도 해 줘서 고맙다. 일 터지고 알았으면 나 뒷목 잡고 쓰러질 뻔했네.”

본인 잘못도 아니면서 여전히 표정이 어두운 선우를 위해 시헌은 씁쓸하게나마 미소를 보였다. 그 희미한 미소 덕에, 그나마 선우도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선우는 가장 중요한 부탁을 하기 위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그래서 말인데, 너 혹시… 엘런 창간 기념행사에 초대받지 않았어?”

“그렇겠지.”

그런 거 알 게 뭐야, 라는 식의 무심한 반응이었다.

“나, 거기 좀 데려가 줄 수 있어?”

“뭐? 거길 네가 왜 가.”

“조사하려고?”

“싫어.”

시헌은 대번에 거절했다.

“어…? 왜?”

거절당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선우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거기 위험한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시헌이 닭 가슴살을 입에 쏙 넣으며 말했다.

“위험한 놈들?”

“엉. 남자 여자 안 가리고 찝쩍거리는 놈들, 약해서 정신 나간 놈들이 수두룩해.”

“응. 그러니까 그런 놈들이 진짜 있는지 확인하러 간다는 거잖아.”

방금까지 무슨 얘기를 들은 거야? 선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헌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야, 그렇게 따지면 내가 제일 위험한 놈 아니야?”라고 말하는 순간에는 너무 해맑기까지 해서, 시헌은 잠시 기가 막힐 뻔했다.

“아니, 아니. 약이 문제가 아니라……. 너 말고 다른 사람은 없어?”

“다른 사람 누구? 경감님들?”

시헌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기억 저편에 있던 선우의 팀원들을 머릿속으로 끄집어냈다. 한 명, 한 명 떠올려 봐도 어째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험상궂게 생긴 아저씨들만 생각이 나니, 왜 선우가 갈 수밖에 없는지 곧바로 이해가 되기는 했다. 그나마 덩치가 산만 하지만 어린 친구가 하나 있긴 했는데…….

“그… 동길이는?”

“동길이 요즘 부산 왔다 갔다 하느라 바빠. 아, 혹시 너 일하는 데 내가 옆에 있으면 신경 쓰여서 그래?”

“…아니….”

“나 가서 조용히 둘러만 보고 올게, 넌 일해. 안에 들어가게만 해 주면 나는 하나도 신경 안 써도 되는데….”

“아니, 그게 아니고…….”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시헌의 목에서 끄응, 하고 앓는 소리가 나왔다.

“그런 거 아니면 나 한 번만 도와주면 안 돼?”

시헌이 조금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선우는 냉큼 일어나 시헌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야아…. 부탁할게, 응?”

옆구리에 찰싹 붙어 헤실헤실 웃는 낯으로 선우가 시헌의 팔뚝을 콕콕 찔렀다. 시헌은 완전히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한숨을 푹 쉬었다.

정말 내키지 않는 부탁이었지만, 시헌은 한선우의 웃는 얼굴을 거절하는 방법 같은 건 알지 못했다.

* * *

“와! 역시 잘 어울릴 줄 알았어요.”

얼굴이 하얘서 이런 색도 잘 받는다고, 시헌의 코디 민경이 거울 앞에 선 선우를 보고 연신 손뼉을 쳤다.

시헌의 연락을 받은 건 행사 당일인 오늘 오후였다. 시헌은 선우에게 퇴근 후 바로 자신의 집으로 오라고 하더니, 선우가 도착하자마자 그를 드레스룸으로 끌고 갔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옷 한 벌을 내밀었다. 하얀색에 가까운 연한 아이보리색 슈트였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익숙하지 않은 옷차림에 머쓱해진 선우가 자신의 앞뒤를 휘휘 둘러보았다.

“그럼 가서 경찰인 거 티 내고 있을래?”

“……나 경찰인 거 티 나?”

“어. 몰랐어? 너 누가 봐도 경찰 그 자첸데?"

얼굴에 쓰여 있네, 경찰이라고. 시헌이 거울 속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시헌의 말에 뜨끔한 선우가 거울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진짜 그런 게 좀 티가 나나? 그래서 문태성도 제가 경찰인 걸 곧바로 알아차렸나? 얼굴을 좌우로 살피다 자못 심각해진 선우가 조그맣게 한숨을 쉬며 뺨을 쓸어내렸다.

곧이어 민경은 선우를 화장대 앞으로 데려갔다. 얌전히 앉아 머리를 만져 주는 손길을 받아내다가, 선우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민경 씨, 귀찮게 해서 미안해요. 나 때문에 퇴근도 일찍 못하고.”

시헌이 제가 따라가는 걸 탐탁지 않아 했기에 전담 코디인 민경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할 줄은 미처 몰랐다. 시헌에 이어 민경까지, 수사한답시고 괜한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친 것 같아 선우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에이, 뭘요! 전 즐거웠어요. 이 옷 보자마자 오빠한테 딱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진짜 동화 속에 나오는 백마 탄 왕자님 같아요."

“……고마워요.”

낯간지러운 칭찬에 선우가 양 볼을 발갛게 물들였다.

“시헌 오빠한테 추가 근무 수당 꼭 받아 낼 거니까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민경이 몸을 뒤로 젖히며 까르륵 웃었다. 듣는 사람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밝은 웃음소리였다.

솜씨 좋은 민경이 메이크업까지 금세 마치자, 시헌이 선우의 손목에 시계를 채워 주었다. 아이보리색 슈트와 잘 어울리는 갈색 가죽 시계는 가볍고 편안했지만, 가격은 전혀 그럴 것 같지가 않았다. 선우는 이런 것까진 필요 없다며 시계를 풀어내려 했다. 그러나 시헌의 행동이 조금 더 빨랐다. 시헌은 선우의 왼쪽 손목을 턱 잡고는 이제 가야 한다며 선우를 질질 끌고 방을 나섰다.

결국 선우는 의상에, 메이크업에, 시계까지 풀 세팅을 한 채로 고대하던 클럽으로 향했다.

밴을 타고 클럽으로 이동하는 내내 시헌은 선우에게 단단히 주의를 줬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말고, 돌아다닐 때는 꼭 나랑 같이 다녀.”

“응.” 선우가 짧게 대답했다.

“엄한 놈들이 치근덕거리면 반응해 주지 말고.”

“네가 있는데 왜 나한테 치근덕거리겠어.”

하, 얘가 정말 뭘 모르네. 시헌이 눈을 지그시 감고 제 가슴을 퍽퍽 내리쳤다. 맹한 표정으로 눈만 껌뻑껌뻑하고 있는 선우를 보고 있자니 속이 다 답답했다.

“누구냐고 물어보면 꼭 내 이름 대면서 일행이라고 하고, 가능하면 네 이름도 얘기하지 마. 대충 아무 이름이나 대. 연우해라, 연우. 우리 소속사 연습생 중에 있어.”

“응.” 선우는 고개를 딱 한 번 끄덕였다.

“네 번호는 당연히 주면 안 되고.”

“응, 알겠어. 걱정 마, 시헌아.”

총알처럼 쏟아지는 그의 잔소리에 선우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더 말대꾸를 했다간 클럽에 도착할 때까지도 이 긴 설교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만 좀 해라. 선우가 애도 아니고.”

운전을 하던 매니저가 보다 못해 면박을 주자 그제서야 시헌이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도 아직 할 말이 많은 눈치라 선우는 얼른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 밤, 올해 들어 가장 큰 슈퍼문이 뜬다더니, 과연 그득하게 차오른 보름달이 서울 하늘을 휘영청 밝히고 있었다.

2021년 5월 26일 22시경

서울특별시 강남구 ‘Club Blue Moon’

어두운 복도를 지나 클럽 안으로 들어서자 떠들썩한 음악 소리와 함께 형형색색의 레이저가 허공을 마구 쏘아 댔다. 그 화려한 움직임을 쫓아 보자니 눈이 다 시릴 정도였다.

시헌이 도착하자 행사 진행 요원 한 명이 바로 따라붙었다. 그는 VIP 초청객을 위해 마련된 안쪽 자리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시헌의 뒤를 쭐레쭐레 따라가며 클럽 내부를 둘러보다, 선우는 그만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동화 속 이야기’라는 콘셉트에 맞춰 클럽 곳곳에는 성과 숲속을 연상시키는 오브제가 장식되어 있었다. 하늘에서는 커다란 비눗방울이 퐁퐁퐁 쏟아져 내리고, 바닷속 왕국처럼 꾸며진 투명 풀장에서는 심지어 인어공주를 떠올리게 할 만큼 아름다운 모델들이 물 위를 노닐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호화로운 광경이 아니라, 선우를 놀라게 한 것은 다름 아닌 클럽의 규모였다.

내부가 이렇게 크면 범인 검거하기가 쉽지가 않을 텐데. 도망칠 만한 곳이 너무 많네….

대한민국에서 제일 핫하기로 소문난 클럽에 처음 입성한 선우의 감상은 그거였다.

진행 요원에게 안내받은 테이블에는 이미 사람들이 어느 정도 차 있었다. 모두 시헌이 얼마 전 촬영을 마친 영화의 관계자들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시헌이 뿔테를 낀 남자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뒤에서 감싸 안으며 인사했다. 영화감독 장영진이었다.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가 세 편이나 되는 감독이라, 연예계에 무지한 선우조차도 그의 얼굴은 알아보았다.

“어, 자기 왔어?”

“이게 누구야? 우리 배우님 오셨네!”

영화 관계자들은 무척 요란하게 시헌을 반겼다. 시헌을 발견하자마자 다들 환호를 지르며 맞이해 놓고도, 스태프들은 한 명씩 짧은 인사를 나누는 동안에도 멋있다, 잘생겼다, 하나같이 민망한 칭찬들을 끊임없이 쏟아냈다. 선우는 듣는 제가 다 부끄러울 지경이었는데, 시헌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넉살 좋게 잘도 받아넘겼다. 일하는 시헌은 언제 봐도 낯설었다.

“누구야?”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마자 곧바로 장 감독이 물었다.

“아, 그냥 친구예요. 한번 와 보고 싶다고 해서요.”

“마스크 좋네. 연기해?”

“아니요, 연기는요. 그냥 일반인이에요.”

시헌이 무심한 투로 딱 잘라 말했다.

“무슨 일반인이 이래. 이 얼굴이 일반인이면 이쪽 업계 사람들 다 죽으라고?”

“그래, 시헌 씨. 멋진 친구 데려왔으면 소개 좀 해 줘 봐.”

시헌을 향해 있던 시선들이 하나둘 선우에게로 옮겨지고 있었다.

“에이. 그냥 잠깐 놀러 온 건데요, 뭘. 얘 금방 갈 거예요.”

그에 시헌은 웃는 낯으로 철벽을 쳤다. 그러고는 아예 관심을 두지 말라는 듯, 선우를 등지고 앉았다. 애초에 구석진 자리에 앉았던 선우는 그 바람에 사람들과 완전히 단절되어 버렸다. 오늘따라 어딘가 예민해 보이는 시헌에,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선우를 보던 사람들도 한 번씩 힐끔거리기만 할 뿐 그에 대해 더 자세히는 묻지를 못했다.

시헌이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선우는 조용히 주위를 살폈다. 적지 않은 테이블마다 초청객들이 무리를 지어 앉아 있었지만, 남준호와 예지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근처에서는 약을 하는 사람도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러기에는 조금, 오픈된 공간이기는 했다.

“시헌 씨. 저쪽 포토 존에서 사진이랑 핸드 프린팅 한 장씩만 찍어 줄 수 있을까?”

방금 시헌을 찾아온 잡지사 에디터가 간절한 얼굴을 하고 그에게 매달렸다.

“아, 네…. 금방 갈게요. 잠시만요.”

시헌은 앉은 자리에서 몸을 바르게 세워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여긴 다 제가 아는 사람들이고, 선우가 앉은 자리는 바깥에서 잘 보이지도 않으니 잠깐은 괜찮지 않을까……. 포토 존에 데려갔다가 괜히 사진이라도 찍히면 그게 더 골치 아팠다.

“…선우야. 나 가서 사진 좀 찍고 와야겠는데.”

선우에게 조용히 속삭이는 시헌은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어, 어. 그럼! 얼른 다녀와.”

“금방 올게.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잠깐만 있어. 안에 돌아보는 건 이따 나 오면, 그때 같이해. 알았지?”

“응!”

선우가 알겠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도 시헌은 뭐가 그리 불안한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마지못해 자리를 떴다.

“이름이 뭐예요?”

시헌이 자리를 비우기가 무섭게 장 감독 옆에 앉은 이가 선우에게 말을 건넸다.

“한, 연우요.”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제 이름을 그대로 뱉을 뻔하다가, 불현듯 시헌이 한 말이 생각나 그가 얘기한 이름으로 재빨리 고쳐 말했다.

이지적인 이미지의 그녀는 자신을 프로덕션 매니저라고 소개했다. 프로덕션 매니저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선우는 잘 몰랐지만, 장 감독과 허물없이 이야기하는 것이 대략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인 줄은 알 것 같았다.

“진짜 일반인이에요?”

“…….”

세상에 일반인, 비 일반인이랄 게 따로 있나. 선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아까부터 일반인 타령을 하는 사람들의 말이 어폐가 있다고 생각했다.

“저, 그쪽 알아요.”

이번에는 비교적 나이가 어려 보이는 여자 스태프가 들뜬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시헌 씨 SNS에서 봤어요. 맞죠?”

“SNS요? 시헌이 SNS에 제가 있어요?”

선우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되묻자, 그녀는 본인의 핸드폰을 몇 번 두들기더니 금세 선우의 앞에 액정 화면을 들이밀었다.

“이거 봐요. 이거 연우 씨 맞죠.”

그녀가 내민 것은 시헌의 SNS에 게시된 사진 한 장이었다. 사진 속에는 시헌과 회색 후드티를 입은 사람이 함께 앉아 있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핸드폰을 보고 있어 얼굴이 정면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푹 눌러쓴 후드 밑으로 언뜻 보이는 눈코입과 턱이 제가 맞았다.

이게… 언제 찍은 거지? 배경은 시헌의 집, 테라스 정원이었다. 구도를 보아하니 시헌이 혼자 셀카를 찍으려다 옆에 앉은 저까지 같이 찍힌 모양이었다. 부끄럽게 이런 걸 왜 올렸담…….

“이 사진 보고 팬들이 엄청 궁금해했거든요.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냐고.”

두 사람의 대화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사진을 한 번씩 들여다보더니, ‘오, 연우 씨 맞네.’ 하며 맞장구를 쳤다.

“시헌 씨는 워낙 연예인 친구도 많지 않고 사생활도 조용한 편인데, 갑자기 엄청 잘생긴 친구 사진이 올라와서 다들 놀랐어요. 여기 봐요, 댓글 엄청 많죠.”

얼굴이 살짝 상기된 스태프가 조곤조곤 설명을 덧붙이며 팬들의 댓글을 보여 주었다. 얘기를 듣다 보니 그녀가 시헌의 열렬한 팬인 게 느껴져, 선우의 얼굴에도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이름이 연우라고?”

그녀와 머리를 맞대고 시헌의 SNS를 보고 있자니, 불쑥 장 감독이 물었다. 선우는 고개를 들어 장 감독을 쳐다봤다.

“이쪽 일 한번 해 볼 생각 없어요?”

“어… 네에…….”

“감독님. ‘권태’의 ‘예준’이 역할이랑 어울린다고 생각하셨죠.”

프로덕션 매니저의 물음에 장 감독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 해요?”

“어…….”

학생이라고 해야 하나? 회사원? 공무원?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지 않을 만한 직업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

“어? 대표님!”

스태프 중 한 명이 크게 소리쳤다.

“와우! 대표님, 오늘도 역시 멋지시네요.”

프로덕션 매니저는 순식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표라는 사람을 크게 반겼다.

“다들 오래간만이네요.”

어두운 실내를 훤히 밝힐 만큼 훤칠하고 근사한 남자의 등장에 선우는 숨을 다급히 들이 삼켰다.

“대표님! 이쪽으로 앉으세요.”

매니저가 상석인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려 하자, 대표는 손을 살짝 들어 괜찮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여느 때처럼 성큼성큼 시원한 걸음으로 다가온 남자는,

“여기 자리 있네요.”

시헌의 빈자리에 앉았다.

“아, 대표님. 여기는 김시헌 씨 친구래요. 한연우 씨.”

“…….”

매니저에게 연우 씨를 소개받은 대표는 황당함에 그만 헛웃음을 터트렸다.

“일반인이라는데 외모 장난 없죠? 그래서 장 감독님이 연기하라고 한창 꼬시는 중이었어요.”

대표는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한연우를 응시했다. 선우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그의 눈을 피해 시선을 이리저리로 옮겼다. 그렇게 한들 제게 들러붙는 진득한 시선은 무시할 수가 없어서, 귓바퀴가 불에 덴 듯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예쁘네요.”

“…….”

나긋한 어투로 그렇게 말하는 남자를 선우는 결국 쳐다볼 수밖에 없었는데, 그 행동은 금세 후회가 되어 돌아왔다. 긴 다리를 꼬고 앉은 남자는 내리깐 눈으로 선우를 마주하고는 조용히 콧방귀를 뀌었다. 연우 씨만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자그마한 비웃음이었다.

“우와. 두 분이 같이 앉아 계시니까 각본 하나 그냥 나오는데요? 이거 완전 브로맨스 각이다. 그쵸, 감독님.”

스태프 중 한 명이 두 손뼉을 짝! 하고 마주치며 외쳤다.

“진짜! 대표님, 어떻게 한번 안 되겠습니까? 대표님이 연기 안 하시는 게 빅스타에 가장 큰 손해인 건 아세요?”

프로젝트 매니저의 말에 선우는 대표를 힐끔 올려다봤다. 그는 그저 웃기만 할 뿐,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다.

과연, 연기자가 어울릴 만한 사람이기는 했다. 공포스러울 만큼 섬뜩한 기운을 느낀 것이 엊그제 같았는데, 오늘의 문태성은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사이렌에서 상준이 제게 해 줬던 것과 비슷한 머리 모양에 조금 가벼운 정장 차림을 한 그는 무척이나 부드러운 인상을 주었다. 양 볼에 깊은 보조개를 띄우며 미소 지을 때는 그런 느낌이 한층 더 했다. 민경이 말했던 백마 탄 왕자님은 아마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연우 씨?”

“네, 네?”

뭐에라도 홀린 것처럼, 폭 파인 보조개를 넋 놓고 보고 있던 선우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사실 부른다기보다 이름이 맞는지 확인하는 것에 가까웠다.

다리 위에 팔을 올려 두었던 그가 손등에 턱을 괴며 선우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내가 아는 사람이랑 많이 닮았네.”

그의 눈빛과 목소리는 사람을 묶어 두는 힘이 있었다. 나른하게 내려앉은 시선을 피할 수도, 나직하게 깔리는 목소리에 입을 열 수도 없어 선우는 그저 침음을 했다.

“어머. 이런 얼굴이 또 있어요?”

“네. 그 사람은… 경찰인데.”

매니저의 물음에도 대표는 선우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오히려 그는 얼굴을 더 자세히 뜯어보기라도 하는 듯 선우의 눈, 코, 입, 얼굴 구석구석을 눈빛으로 꼼꼼하게 훑어 내고 있었다. 대표의 노골적인 폭로와 낯 뜨거운 시선에 선우의 눈동자가 갈피를 잃고 흔들렸다.

“와, 이 얼굴로 경찰을 한다고요? 그런 인재 낭비가 어디 있대?”

잔뜩 긴장한 선우는 침을 꼴깍 삼켰다.

“어때요?”

이제는 아예 매니저의 말은 듣지 못한 사람처럼, 대표가 선우를 향해 바로 물었다.

“뭐, 뭐가…요…?”

“연기도 곧잘 하는 것 같은데. 이번 기회에 전향해 보는 건?”

한쪽만 끌어올린 입술엔 순식간에 싸늘한 비소가 걸렸다.

쿵. 심장이 떨어지는 듯했다.

“아… 아뇨…. 괘, 괜찮습니다…….”

쿵쿵쿵쿵. 또다시, 남자를 처음 만난 그날처럼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앉은 자리에서 제 신상을 모두 까발릴지도 모를 남자 앞에서 선우는 불현듯 초조함을 느꼈다. 그를,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고,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려 댔다.

“……저, 죄송하지만… 잠깐, 화장실 좀…….”

누가 쫓아오기라도 할까, 선우는 정신없이 자리를 벗어났다.

* * *

테이블 석이 완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 가서야 떨리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킬 수 있었다. 모르는 새 꽤나 긴장을 하고 있었는지, 하얀 손끝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선우는 벽 한구석에 세워진 둥근 기둥 앞에 서서 제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일개 잡지사 행사에 그가 직접 나타나는 것은 선우로서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시헌의 영화 관계자들과 친분이 있는 건 더더욱 그랬다. 대표라는 이가 도대체 할 일도 없는 것인지, 왜 자꾸 홍길동마냥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거람.

선우는 이내 기둥에 머리를 콩 박고 섰다.

사실 문제는 제게 있었다. 그 사람을 어디서 보든, 그가 뭐라고 하든 그냥 태연하게 반응하면 그만인걸. 이미 한번 겁을 먹은 심장은 그 앞에선 더 이상 통제가 되질 않았다.

이래서야 원, 수사를 어떻게 한다는 건지.

하아, 한숨을 크게 쉬고 주위를 둘러보니 아직 파티가 한창이었다. 어차피 제 옆자리를 차지한 대표님 때문에 자리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 선우는 시헌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어둡고, 시끄럽고, 넓기까지 한 곳에서 한 사람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헤매기를 포기하고 선우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시헌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차에,

“어…!”

선우는 저 멀리서 낯이 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이아영과 예지희. 두 사람은 서로 팔짱을 낀 채 2층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선우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계단으로 향했다. 두 사람의 동선을 놓치지 않기 위해 오로지 그 둘만 보고 걷는 터라 몇 번이고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쳤으나, 선우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계단과 가까워질수록 선우의 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그렇게 계단 앞에 막 도착한 순간,

“어, 엇!”

느닷없이 새카만 정장 차림을 한 경호원이 제 앞을 턱 가로막았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고개를 옆으로 쭈욱 빼 경호원의 뒤를 보니 어느새 계단을 모두 오른 이아영과 예지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는 관계자 외에는 출입 금지 구역입니다.”

대답 없이 2층만 올려다보는 선우를 향해 경호원이 엄히 말했다. 선우는 잠시 고민하다, 이내 마른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문태성 대표님 일행입니다.”

일순간 경호원의 몸이 눈에 띄게 경직되었다. 경호원은 짙은 눈썹을 위로 치켜뜨며 선우를 위아래로 치훑었다. 그러기를 몇 차례, 곧 미심쩍은 시선을 거둔 그는 정면을 바라보며 몸을 옆으로 비켜섰다.

선우는 재빨리 계단을 올랐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밑에서 시간을 지체하는 사이 그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세 갈래로 갈라진 2층 길목에 서서 선우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화장실이 전부인 좌측, 오늘 행사에서는 사용되지 않아 출입을 막아 둔 스탠드 석이 우측.

그리고 남은 곳은 단 하나, 정면에 있는 복도뿐이었다.

맨 끝에 비상구를 알리는 초록빛 유도등을 제외하고는 조명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컴컴한 복도였다.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이 외에는 갈 곳이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동굴같이 시커먼 복도로 발을 내디디려던 때였다.

휘이익-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한 남자가 선우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고, 껄렁껄렁한 걸음으로 걸어 그는 선우 앞에 섰다.

“이쁜이, 안녕?”

제법 귀티가 나는 남자는 선우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누구랑 왔어?”

처음 대면했지만, 이미 얼굴을 알고 있는 남자를 선우는 물끄러미 쳐다봤다.

홍성민, 30세.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전과 2범.

현재 집행유예 기간 중.

선우의 머릿속에 남자의 신상 정보가 빠르게 스쳐 갔다.

그는 작년 봄, 선우가 마약수사대로 처음 발령받았을 시기에 옆 팀에서 체포했던 이였기에 선우는 이자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건설업과 금융업으로 유명한 미래 그룹 오너의 차남, 홍성민은 필로폰 불법 투약 혐의로 두 차례나 체포된 바 있었고, 두 번의 집행 유예를 선고받았다. 그리고 선우가 기억하는 바로 그는 두 번째 형에서 징역 3년, 집행 유예 4년을 선고받고 현재 그 기간 중에 있었다.

“나랑 놀래?”

홍성민의 제안에 선우의 얼굴 위로 슬그머니 미소가 떠올랐다. 그 옅은 미소를 긍정의 의미로 해석한 홍성민은 선우의 손목을 덥석 잡아끌었다.

어두운 복도를 거침없이 걸은 홍성민은 단숨에 비상구 등이 있는 위치까지 선우를 끌고 왔다. 막다른 벽에는 철제문으로 된 비상구가, 그리고 우측 벽에는 미닫이문이 있었다. 이 위치까지 들어오지 않는 이상 보이지도 않는, 벽과 같은 색깔, 같은 재질의 미닫이문은 손잡이도 따로 없어 언뜻 보면 그냥 벽의 일부 같았다.

홍성민이 문에 손바닥을 대고 힘을 주어 미닫이를 열었다. 그러자 문 뒤로 숨겨져 있던 비밀 공간이 드러났다. 바닥 조명만으로 은은하게 불을 밝힌 대리석 복도와 그를 따라 여러 개의 룸이 줄지어 있는 이곳은 시끌벅적한 1층 클럽과는 전혀 다른,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공간이었다.

홍성민은 경호원 한 명이 지키고 서 있는 맨 앞쪽 룸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룸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는 행여라도 놓칠세라 선우의 손목을 꼭 잡은 채였다.

방 안에는 이미 한 쌍의 남녀가 있었다. 성인 남녀 댓 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넓은 소파에서 둘은 마치 한 몸인 듯 붙어 있었다. 술에 취해 눈이 잔뜩 풀린 두 사람은 누가 들어오고 나가는 것은 안중에도 없이 세상에 오직 둘뿐인 것처럼 보였다.

선우는 룸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크지 않은 파티 룸에는 가구라고 해 봐야 테이블과 그를 빙 둘러싼 소파가 전부였고, 한구석에 노래방 시설이 있었으나 사용감은 거의 없었다.

테이블에는 양주며 각종 음료, 안주, 유리잔들이 정신없이 늘어져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살피긴 했지만, 일단 테이블 위에는 약을 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 앉아.”

홍성민이 비어 있는 소파에 앉더니 옆자리를 툭툭 쳤다. 커플 남녀의 맞은편 자리였다.

“뭐 마실래? 술 한잔 줄까?”

선우가 쭈뼛거리다 이내 자리에 앉자, 홍성민이 양주병을 들었다.

“아니요. 술 잘 못 해요.”

앞에 놓인 유리잔에 곧바로 술을 따르려 하기에 선우는 서둘러 손을 들어 거절했다.

“그래? 그럼 이거 줄까?”

홍성민은 이번에는 제 앞에 있던 이온 음료를 선우에게 내밀었다. 캔 뚜껑이 이미 따져 있는 것이 영 찜찜해, 선우는 테이블 위를 쓱 둘러보았다. 가까이에 오픈되지 않은 사이다 캔이 하나 있었다.

“저는 그냥 이거면….”

선우가 사이다로 손을 뻗으려 하자 홍성민이 먼저 캔을 낚아챘다. 톡, 시원하게 캔을 딴 그가 선우 앞에 놓인 유리잔에 사이다를 부었다. 캔 채로 마시려던 선우는 홍성민의 행동이 너무 재빨라서, 말리지도 못하고 얼떨결에 유리잔을 받아들었다.

“이름이 뭐야?”

“연우요.”

그래도 두 번째라고 가짜 이름이 입에 착 달라붙었다.

“연우? 이름도 예쁘네. 여긴 어떻게 왔어?”

“친구 따라서요.”

“배우 지망생? 아이돌? 소속사는 있고?”

홍성민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선우를 연예인 지망생으로 취급했다. 마땅히 떠오르는 직업도 없기에 선우는 그냥 그의 장단에 맞춰주기로 했다.

“네. 뉴트렌드요.”

아는 소속사라고는 해 봐야 몇 개 있지도 않은 선우가 이름을 댈 수 있는 곳은 하나뿐이었다.

“아! 알지, 알지. 거기 유명한 애가 누구 있더라?”

생각을 더듬는 듯 홍성민이 눈살을 좁혔다.

“음. 김시헌… 선배님?”

“그래, 맞다. 거기 괜찮지. 소속사 잘 골랐네!”

뒤늦게 선배 호칭을 붙인 것이 다소 어설펐으나, 홍성민은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혹시…… 여기서 이아영 씨… 못 보셨어요?”

문득, 룸 안을 조심스레 살피던 선우가 조용히 물었다.

“이아영?”

“…네. 아, 사실은 제가 이아영 선배님 엄청 팬이거든요. 사인 받고 싶어서 여기로 올라오시는 거 보고 따라왔는데, 올라오고 보니까 안 계셔서요.”

선우의 말을 듣고, 홍성민은 느닷없이 끌끌대며 웃었다.

“이아영 좋아해?”

“……네에.”

“걔 뭐, 여기 어딘가에서 한창 좋은 시간 보내고 있을 거야.”

여기 어딘가에서, 한창 좋은 시간……. 홍성민의 말을 속으로 되뇐 선우는 대리석 복도에 나 있던 여러 개의 방문을 떠올리며 사이다로 목을 축였다.

그때 불현듯,

“아!”

갑자기 여자의 높은 신음성과 함께 살갗이 쩍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선우가 놀라 앞을 보니 두 남녀가 도가 지나칠 정도로 진한 스킨십을 나누고 있었다.

서로의 입술을 쭉쭉 빨아 대며 남자는 한 손으로 여자의 엉덩이를 거칠게 주물렀고, 다른 손은 다리 사이로 들어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남자 위에 걸터앉은 여자는 가랑이 사이로 남자의 바지 앞섶을 비벼 대며 달뜬 숨을 내뱉었다.

앞에 있는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에 아연실색한 선우가 고개를 돌려 홍성민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앞사람을 신경 쓰지 않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홍성민의 눈과 귀는 오로지 연우를 향해 있었다.

“피부 진짜 좋다.”

불쑥 손을 뻗은 그가 손등으로 선우의 볼을 쓸어내렸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화들짝 놀란 선우는 어깨를 움츠리며 재빨리 몸을 뒤로 물렀다. 의아해진 선우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홍성민을 보았으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속눈썹이 어떻게 이렇게 길어?”

도리어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동그란 눈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곧이어는 감탄을 했다.

“내가 연습생들을 좀 많이 봐서 아는데, 넌 데뷔하면 바로 뜨겠다.”

잡티 하나 없이 새하얀 얼굴을 오밀조밀 뜯어보던 홍성민이 돌연 핸드폰을 꺼내 선우에게 내밀었다.

“우리 자주 보자. 네 번호 찍어.”

“어, 저… 소속사에 걸리면 안 돼서…… 형 번호 주시면 안 돼요? 제가 연락할게요.”

“…뭐?”

선우는 제법 그럴싸한 핑계를 댔다고 생각했는데, 홍성민은 순식간에 굉장히 형형한 눈빛을 했다.

“얘 좀 봐라. 너 지금 내 번호 따는 거야?”

그러고는 저를 나무라기에 선우는 그가 기분이 상한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별안간 입이 찢어져라 크게 웃더니 나중에는 어깨까지 떨며 끅끅거렸다. 괴상한 표정과 기이한 웃음소리가 꼭 실성한 사람 같아서, 선우는 엉덩이를 살짝 움직여 그와 조금 거리를 뒀다.

“너 내가 누군지 알고나 이래? 야, 내 번호 존나 비싸. 이거 아무나 주는 거 아니다?”

홍성민은 곧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선우에게 내밀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낄낄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미래건설 전략기획실 홍성민 실장.

선우는 파란 로고 아래 새겨진 글씨를 눈에 한 번 담고 명함을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홍성민은 연우라는 이를 힐끔 쳐다봤다. 온순하게 생긴 주제에, 기대에 찬 눈으로 사람을 훑어보는 것이 여간 요망한 게 아니었다. 말간 눈동자에 축 처진 속눈썹이 청순한 인상인 줄로만 알았더니, 가까이서 보니 색기가 줄줄 흘렀다. 반반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명치에서부터 뜨거운 고양감이 치밀어, 홍성민은 저도 모르게 다리를 달달 떨어 댔다.

홍성민은 데뷔 전인 연예인 지망생이나 아직 뜨지 못한 신인들을 데리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남들이 알아보기 전에 미리 원석을 발견하고 나중에 이들이 뜨면, 왠지 자신의 미적 감각을 인정받은 기분이랄까?

그래서 그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신나고 즐거웠다. 이 정도면 원석도 아니고 정제된 보석이었다. 예쁜 얼굴만으로도 차고 넘치게 충분한데, 되바라지게 제 번호까지 따 가는 발칙함이라니. 저를 형이라고 부르는 순간에는 대뜸 아랫도리로 피가 쭉쭉 몰려 아주 혼이 날 뻔했다. 저 하얀 슈트 안에는 또 얼마나 예쁜 속살을 숨기고 있을까, 상상하니 이제는 콧노래마저 흘러나왔다.

홍성민은 슬쩍 손목을 들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혼잣말을 하듯 낮게 중얼거렸다.

“이쯤 되면 반응이 올 때가 됐는데.”

번득이는 눈동자가 선우를 향했다.

“……!”

수상한 눈초리에 한순간에 온몸이 싸늘하게 식는 듯했다.

선우는 설마 하는 생각으로 테이블 위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반이나 비어 버린 유리잔을 발견하고, 선우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나 순간 머리가 핑 돌며 눈앞이 하얗게 되는가 싶더니, 결국 다리에 힘이 쭉 풀려 다시 소파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거 봐. 나 딱 맞췄지. 이게 10분이면 끽- 이라니까.”

홍성민이 손으로 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아… 이, 이게…….”

정신이 아찔해진 선우는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떴다. 침침해진 시야를 또렷이 밝히고자 한 행동이었으나, 개기는커녕 도리어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고 있었다.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언뜻 귀까지 먹먹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선우는 잔뜩 구긴 얼굴로 홍성민을 노려봤다. 그는 비실비실 웃는 낯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걱정 마. 형이 금방 기분 좋게 해 줄게.”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 홍성민이 바지를 툴툴 털고는 선우의 팔을 잡아당겼다.

“아! 이거… 놔……!”

선우는 잡히지 않은 팔을 들어 그를 밀어내고자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온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질 않았다. 순식간에 물먹은 솜이라도 된 것처럼 사지가 축축 처져, 선우는 저와 체격이 비슷한 사내를 조금도 밀어낼 수가 없었다.

“악!”

금방이라도 늘어질 듯한 선우를 홍성민은 단번에 세게 끌어당겼다. 선우는 소파 팔걸이라도 붙잡아 보려 했으나, 그럴 새 없이 몸이 위로 죽 딸려 올라갔다. 반항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홍성민은 제대로 서지도 못한 선우를 문 앞까지 아주 빠르게 끌고 갔다.

팔뚝을 쥐어트는 억센 악력에 그저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던 선우는 문이 열리자마자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더 이상 끌려가면 안 된다는 생각에 언뜻 보인 문고리를 재빨리 잡고 온 힘을 다해 버텼다.

앞만 보고 걷던 홍성민은 갑자기 팔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힘에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문고리에 애처롭게 매달린 이를 보고 홍성민은 쯧, 하고 혀를 세게 찼다. 그는 가려던 길을 되돌아와 문고리에 걸린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 냈다.

“으윽…….”

작정하고 손가락을 드러내는 힘을 이겨 낼 재간이 없었다. 서서히 눈꺼풀마저 무거워지자 선우는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흐린 시야 사이로 문 앞에 서 있던 경호원이 보이자, 선우는 다급히 도움을 요청했다.

“저, 저기, 좀…, 도, 와주……!”

있는 힘을 다해 뻗은 손이 간신히 경호원의 바짓자락을 스쳤다. 하나 분명 제 목소리를 듣고 제 손길을 느꼈을 텐데, 경호원은 그저 앞만 볼 뿐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금방이야. 저기까지만 가면 돼.”

홍성민은 선우 앞에 쭈그리고 앉아 손가락으로 복도 끝을 가리켰다. 그러더니 곧 선우의 팔 한쪽을 자신의 어깨 위로 두르고 환자를 부축하듯 선우를 일으켜 세웠다.

“읏! 안, 돼에…….”

홍성민이 팔로 제 허리까지 휘감고 복도를 걸으려 하자, 선우는 그 자리에 서서 거세게 저항했다. 앞뒤로 양옆으로 몸을 뒤치락대며 그를 벗어나려 했고, 앞으로 더 나아가지 않기 위해 바닥에 두 발을 딱 붙이고 서서 안간힘을 다해 버텨도 보았다.

그러나 제 몸 하나 가눌 힘조차 없는 상태에서 허리를 단단하게 붙든 팔을 이겨 낼 리 만무했다. 매끈한 대리석 바닥 위에서 구둣발은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저 주르륵 미끄러졌다.

“이거… 놓…… 흐으…….”

한참 복도 한가운데서 몸 씨름을 하는 두 사람 앞에,

뚜벅, 뚜벅.

또 다른 구두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들어 보니 희뿌연 시야 속에 사람의 형상이 어른거렸다.

“어? 형, 오랜만!”

선우는 멀리서 다가오는 이를 자세히 보기 위해 머리를 흔들고 눈을 꾹 감았다 떠 보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정신만 더 아득해질 뿐이었다.

“으윽… 여…기… 흐…….”

누가 됐든 상관없었다. 저 좀 도와달라고, 구두 소리의 주인에게 소리친다는 것이 입안까지 마비가 된 것인지 발음이 뭉개지고 침이 질질 흘러 말 한마디 뱉기가 힘들었다.

“아… 흐으…….”

말이 아니라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구조 요청을 해야 했기에, 선우는 얼마 남지 않은 힘을 다해 온몸을 비틀었다. 그러고는 홍성민이 잠깐 방심한 사이 그를 힘껏 밀쳤다.

허우적거리며 홍성민의 품을 벗어난 것도 잠시, 선우는 다리에 힘이 빠져 그만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아, 씨발. 존나 귀찮게 구네.”

그 꼴을 보고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홍성민은 순식간에 선우를 어깨 위로 들쳐 멨다. 그리고 그는 대리석 복도 가장 끝 방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홍성민은 선우를 곧장 소파 위에 내려놓았다. 푹신한 소파에 머리와 등이 닿으니 아스팔트 위에 놓인 아이스크림이라도 된 양 온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차츰 눈이 내려앉고 의식이 가물가물해지려는 걸 억지로 붙들고 있는데, 난데없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등받이에 그대로 머리를 기댄 채 고개만 돌려 보니 홍성민이 작은 유리병에 주사기를 꽂고 있었다.

“…!”

그제서야 아차 싶은 선우가 황급히 몸을 바닥으로 굴렸다. 두 다리로 일어설 힘까지는 없어,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네 발로 엉금엉금 문을 향해 기어갔다.

“윽!”

그러나 금세 쫓아온 홍성민이 선우의 목덜미를 뒤에서 콱 잡아챘다. 그는 선우를 가뿐히 들어 올려 소파에 팽개치듯 내던졌다. 등받이에 머리를 부딪히자 그리 세지 않은 충격임에도 골이 띵, 하고 울렸다.

“연우야. 형 힘들다. 너나 나나 다 좋자고 하는 건데, 우리 서로 힘 빼지 말자.”

홍성민은 도망갈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선우의 몸을 자신의 팔과 몸통으로 깔아뭉갰다. 으윽, 하고 선우가 앓는 소리를 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선우의 팔소매를 걷어붙였다. 그에 소스라치게 놀란 선우가 파드득 몸을 떨었다.

“이게 에퀴스라는 건데, 이거 진짜 예술이야."

“읏. 하, 지… 마……!”

선우가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동시에 선우는 팔을 격하게 흔들며, 다리를 허공에다 대고 마구 찼다. 그러자 홍성민이 제 밑에서 팔딱거리는 몸을 더 세게 짓눌렀다.

“아, 이거 왜 이렇게 바둥거려. 나중엔 제발 달라고 졸라 댈 거면서.”

“으윽….”

이내 새하얀 팔뚝 위에 날카로운 바늘이 가차 없이 꽂혔다.

“아! 안… 돼……!”

선우는 망연자실하게 주사가 놓인 부위를 쳐다봤다. 투명한 실린지가 완전히 비는 데는 단 1초도 걸리지 않았다.

“흣…!”

머지않아, 팔뚝에서부터 시작된 차가운 기운이 혈관을 타고 빠르게 퍼져 나갔다. 순간 전신이 찌르르하고 울릴 정도로 전율이 흐르더니, 일순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듯했다.

“어때? 죽이지?”

허억! 하고 선우가 별안간 헛숨을 들이켰다.

갑작스러운 몸의 변화가 당황스러웠다.

느닷없이 눈 주위가 뜨끈뜨끈해진다 싶더니 꺼진 스위치를 탁! 켠 것처럼 시야가 한순간 훤히 밝아졌다. 웅웅거리던 귀도 단번에 뻥 뚫렸다. 팔다리는 여전히 무겁고 힘이 들어가지 않았는데, 감각을 느끼는 기관은 눈, 코, 입, 귀할 것 없이 전부 예민해졌다.

선우의 변화를 눈치챈 홍성민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는 곧 새 주사기를 뜯어 또다시 약을 채워 넣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홍성민이 제 팔뚝에도 주삿바늘을 꽂아 넣으려던 찰나였다.

“홍성민. 정리해.”

벌컥, 소리와 함께 방문이 활짝 열렸다.

하, 선우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잔뜩 얼어 있던 몸이 문이 열리는 소리에 긴장을 확 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익숙한 중저음에 온 신경이 문 쪽을 향해 곤두섰다.

“어? 형, 나 이제 시작인데?”

“짭새 떴어.”

“뭐?"

방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팔짱을 낀 채 문틀에 기대서 있었다.

“…….”

“…….”

홍성민과 그가 눈길을 주고받는 동안, 방 안에는 짧은 침묵이 흘렀다.

“농담하지 마. 형도 낄래?”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여?”

언짢음에 눈살을 찌푸리자 고운 미간에 선이 그어졌다.

“……아, 씨발.”

문태성이 시답잖은 농담 할 성격은 아니지. 홍성민은 소파에 누워 있는 연우를 내려다봤다. 발그스름하게 달아오른 게 먹기 딱 좋은 상태였는데. 아쉬움에 입맛을 쩝 다시니 갑자기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홍성민은 고개를 뒤로 홱 젖히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좆같은 새끼들. 타이밍 한번 개 같네.”

타악, 손에 든 주사기를 바닥에 내동댕이친 그가 성난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달칵.

문이 닫히고 뚜벅, 뚜벅 걷는 구둣발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우리가 이렇게 자주 볼 사이는 아닌 거 같은데, 형사님.”

“…….”

하아, 선우는 말없이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뚜벅, 뚜벅.

“계속 마주치는 걸 보니 인연은 인연인가 봐.”

뚜벅, 뚜벅. 구두 소리는 소파 앞에서 뚝 멎었다.

“한 경위는,”

짧은 한마디를 뱉은 이가 소파 위에 누워 있는 선우를 향해 허리를 깊게 숙였다. 맹수같이 사나운 눈빛이 겁을 잔뜩 먹고 파들대는 눈동자를 마주했다.

“용감한 거야, 아님 무모한 거야?”

“…….”

느릿하게 뱉어 내는 묵직한 저음에 선우는 등골이 부르르 떨렸다. 제 몸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남자를 대면하자 문득 두려움이 밀려왔다. 어느 순간부터는 손끝까지 벌벌 떨리기에 선우는 주먹을 꼬옥 쥐며, 저를 향한 시선을 슬그머니 외면했다.

그런 선우를 내리깐 시선으로 보다, 태성은 돌연 하얀 옷깃을 한 손에 쥐고 위로 바짝 들어 올렸다.

“윽!” 힘 빠진 몸이 종잇장처럼 쉬이 딸려갔다.

“뭐가 그렇게 궁금해서 이런 데를 자꾸 기어들어 와.”

긴 손가락이 선우의 볼을 톡톡 쳤다. 어린아이를 나무라는 듯한 태도에 기분이 나쁠 법도 했으나, 정신이 하도 까마득하니 선우는 불쾌함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태성은 툭, 선우를 내던지듯 내려놓고는 테이블 위에 놓인 바이알을 들어 보았다. 투명한 유리병 안에 약물이 반 정도 남아 있었다.

“약효가 두 시간 정도 갈 거야.”

“…….”

소파에 늘어진 선우는 고개를 돌려 서늘한 가죽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까부터 자꾸만 몸에 열이 올라 저도 모르게 차가운 기운을 쫓게 되었다.

홍성민이 주사를 놓은 뒤로 계속 심장이 쿵쾅거리고 혈관이 팔딱팔딱 뛰어 댔다. 도대체 무슨 약을 쓴 건지 애간장이 타고 온몸에 열이 올랐다. 할 수만 있다면 발을 동동 구르고 몸을 비비 꼬고 싶었으나, 무거운 사지는 손 하나 까딱하기도 버거웠다.

“흐으…….”

불현듯, 미약한 신음성이 들리자 테이블을 향해 서 있던 태성이 몸을 돌려 선우를 내려다보았다.

“괴로워?”

“…….”

대답 없이 뜨거운 숨을 색색 내뱉는 얼굴이 탐스러운 사과처럼 발갛게 익어 있었다. 태성은 작고 동그란 머리통 옆에 손을 짚고는 몸을 아래로 한껏 낮췄다.

“도와줄까?”

“……읏.”

귓가에 나직이 속삭이는 부드러운 음성에 마치 전기라도 오른 듯 등줄기가 찌릿하고 저렸다. 가만히 있다가는 제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올 것만 같아, 선우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보지 않으면 좀 나을까.

도무지 해소되지 않는 열감에 선우는 두 눈마저 질끈 감았다. 그러니 언뜻, 남자의 목덜미에서 달짝지근한 향내가 스멀스멀 풍겨 나왔다. 언젠가 마주했던 그 향기를 좇아 선우는 저도 모르게 숨을 깊게 들이켰다. 뇌 끝까지 파고드는 묵직한 달콤함에 머릿속이 온통 절여지는 듯했다.

“하아.”

달큼한 체향이 선사하는 만족감에 선우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때, 별안간 두꺼운 무언가가 선우의 다리 사이를 갈랐다.

헉! 놀란 선우가 눈을 번쩍 떠 밑을 내려다보았다. 탄탄한 허벅지 한쪽이 제 무릎 사이를 파고들고 있었다. 두 허벅지 사이에 놓인 무릎이 안쪽으로 서서히, 그리고 깊게 들어오자 두 다리가 양쪽으로 힘없이 벌어졌다.

“아읏!”

가랑이 끝에 도달한 무릎이 선우의 고간을 지그시 눌렀다. 선우는 곧바로 단발성의 신음을 터트리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성기에 가해지는 압박감에 일순 숨이 턱 막혀 오자, 선우는 남자의 바지를 쥐어뜯었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부터 아랫배 밑으로 야금야금 피가 쏠리는 기분이었는데, 무릎으로 짓누르기까지 하니 꼿꼿해진 성기가 슬금슬금 위로 올라붙었다.

당황한 선우는 다급히 다리를 오므리며 가랑이 사이에 놓인 허벅지를 힘껏 밀어냈다. 그러나 돌덩이같이 단단한 허벅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밀려나긴커녕 오히려 부푼 앞섶에 닿은 무릎을 좌우로 비비며 성기를 이겨 대고 있었다.

“하앗! 잠…!”

“여긴 좋다는데?”

순간 핑그르르, 눈에 별이 돈 선우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세게 도리질을 쳤다. 그와 닿지 않기 위해 엉덩이를 뒤로 바짝 무르니, 물러난 공간만큼이나 두툼한 무릎이 다리 사이를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허벅지를 밀어내는 두 손에는 그새 흥건히 땀이 차올라 남자의 바지 위에서 맥없이 미끄러지기만 할 뿐,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아, 흣…!”

선우가 몸을 부들 떨었다. 태어나 처음 겪는 벼락같은 쾌감에 선우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늘을 유영하는 구름처럼, 허공에 두둥실 떠 있는 듯한 몸은 사정 직전의 흥분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귓속을 파고드는 음침한 목소리는 귓가는 물론 턱과 목덜미까지 저릿하게 했고, 아찔하고 다디단 향기는 코를 타고 뇌까지 흘러들어 선우로 하여금 어떤 생각도 할 수가 없게 만들었다.

무쇠 같은 허벅지에 비벼지는 성기는 이미 제 의지가 아니라, 너무 애가 타서 그만 옷을 홀랑 벗고 성기를 마구 흔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미친 거지, 미친 거야.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기분이 들 수가 있을까. 제가 생각하고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쾌락을 느낄 수 있는 존재였나. 굴욕적인 상황에서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성욕이 끊임없이 치밀어 올랐다.

“아으…….”

선우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대로 넋을 놓고 있다가는 저도 모르게 앞에 있는 남자를 붙들고 매달릴 것만 같아서였다.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아래턱이 덜덜 떨렸다. 동그란 코끝에는 어언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잘 참네.”

이게 참는다고 참아지는 게 아닐 텐데.

보통의 인내심으로 견딜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도 약의 설계자인 제가 제일 잘 알았다. 끙끙거리면서도 찍소리도 내지 않고 버티는 모습에 태성은 기특하다는 듯 작은 머리통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러고는 손가락 사이사이로 얇은 머리칼을 얼기설기 얽어 뒤로 살살 쓸어 넘겼다.

선우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진저리를 쳤다. 그의 손이 닿으니 두피마저도 성감대가 된 것처럼 뒤통수에 소름이 쭉쭉 끼쳤다.

머리를 쓸고 내려온 손은 느릿느릿 목덜미를 한 번 주무르고는 그대로 목을 타고 앞으로 넘어왔다. 빗장뼈를, 가슴 언저리를 스치듯 쓸어내린 손은 불쑥 재킷 안을 파고들었다.

“아…!”

얇은 옷감 위로 닿는 뜨거운 체온에 선우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갈비뼈를 하나하나 훑으며 옆구리를 천천히 쓸어내리는 손길에 지금까지 참아 왔던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더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단내를 풀풀 풍기는 가슴팍에 끌리듯 얼굴을 파묻고 선우는 흐으,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면서도 선우는 홀린 듯이 그의 향기를 쫓았다.

“하아아…….”

숨을 한 번 들이쉴 때마다 달짝지근한 향기가 몸속을 파고들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향기를 더 맡고 싶었다. 그에 할 수 있는 한 가장 크게, 아주 깊게 숨을 들이마시니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이유를 알 수 없는 포만감이 차올랐다.

아아…….

애절한 신음이 절로 흘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달콤한 향 끝자락에는 씁쓸한 풀 내음이 있었다. 그 향기마저 모두 다 들이켜야만 저는 겨우나마 안정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흐으으…….”

그만하고 싶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쾌감에서 그만 벗어나고 싶었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욕정에 선우는 이제 황홀감을 느꼈다.

그러나 원치 않은 황홀경은 괴로움이고 두려움이었다.

태성의 옷자락을 부여잡은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태성은 그 떨리는 손을 가만히 내려보다가,

“그러니까 왜 알짱거려, 겁도 없이.”

기다란 검지로 동그란 이마를 살짝 밀었다.

지잉. 지잉.

“아, 아읏!”

그때, 선우의 몸에서 느닷없이 진동이 울렸다. 예상치 못한 자극에 선우는 몸을 팔딱 튀었다.

진동 소리에 태성이 멈칫하는 사이 선우는 무릎을 세워 몸을 잔뜩 웅크리고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선우의 허리에서 손을 떼어 낸 태성은 진동을 쫓아 선우의 몸 이곳저곳을 뒤졌다. 그리고 이내 재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찾아냈다.

핸드폰을 꺼내 든 그는 액정 화면을 보고 입꼬리를 샐쭉 올려 웃었다.

“한선우 보호자 연락 왔는데.”

눈앞에 친히 내밀어진 화면에는 익숙한 이름이 떠 있었다.

「김시헌」

“받을래?”

“…….”

일렁이는 눈동자로 선우가 희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대신 받아 줄까?”

“아… 안, 돼……!”

선우는 핸드폰을 향해 다급히 손을 뻗었다. 동시에 태성도 핸드폰을 쥔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태성의 손끝에 미처 닿지 못한 두 손이 그의 팔에 애달프게 매달렸다.

“으읏… 흐으…….”

제 팔을 잡고 늘어지는 이를 내려다보다, 태성은 실소를 했다. 열감을 이기지 못하고 새빨갛게 달아오른 두 눈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깨문 입술은 잔뜩 부어 있었다. 동그란 양 볼을 붉게 물들이고 달달 떨어 대는 모습이란, 정말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태성은 제 팔에 붙은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핸드폰을 소파 위로 던지며 말했다.

“한 경위. 이렇게 아무 데서나 사람 부추기면 안 돼.”

말투는 한없이 다정했으나,

“너 그러다 큰일 난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은 자못 살벌했다.

태성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유리 바이알 한 개를 꺼내 들었다. 이어 그는 테이블 위에서 새 주사기도 하나 집어 들었다. 주사기 포장을 거칠게 뜯어낸 그는 실린지에 약을 가득 채우고 선우의 팔뚝을 세게 붙들었다.

“아악! 싫어, 그… 안…! 악!”

주사기를 발견하고 눈이 휘둥그레진 선우가 잡힌 팔을 빼내려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다. 그러나 팔뚝을 한 손으로 다 휘감을 만큼 커다란 손의 악력을 도무지 이겨 낼 도리가 없었다.

푹, 하얀 팔뚝 위로 다시 한번 바늘이 꽂혔다.

주사기 한 대를 온전히 다 비우고 나서야 자유로워진 팔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흐윽, 으읏…….”

더 이상은 싫었다. 제 맘대로 달아오른 몸도, 걷잡을 수 없는 감정도 더는 느끼고 싶지 않았다. 고통스러움에 그만 울고 싶은 심정이 들 때쯤, 부지불식간에 졸음이 쏟아졌다.

깜빡, 깜빡. 저절로 내려앉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릴 때마다 몸이 옆으로 스르르 기울어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 틈에 선우의 앞에 무릎을 구부리고 앉은 태성은 서서히 감기는 눈을 바라보며 나긋한 어투로 말했다.

“흰둥아. 봐주는 건 여기까지야.”

달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뒤로 선우의 눈이 완전히 감겼다.

* * *

살풋 들어 올린 눈꺼풀 사이로 밝은 빛이 새어들었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을 두어 번 감았다 뜨니, 하얀 천장을 둘러싼 우드톤의 몰딩이 점차 형태를 뚜렷이 했다.

헉! 선우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혼비백산이 되어 주위를 둘러보다 이내 눈에 익은 공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선우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침대 끝자락에 방의 주인인 시헌이 어두운 표정을 하고 앉아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꽉 잠긴 목에서 까칠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시헌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시헌이 최대한 차분하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하아. 선우가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고는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겼다.

“나… 여기는 어떻게 왔어?”

“문태성 대표가 네 전화를 받았어. 와서 널 데리고 가라더라.”

아, 전화! 정신이 번쩍 든 선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침 침대 옆 협탁에 놓여 있던 핸드폰을 발견하고 선우는 급히 통화 기록을 살폈다. 첫 번째 시헌의 전화는 부재중으로 남았고, 바로 이어진 두 번째 전화는 수신 기록이 있었다. 두 전화 사이에 시간 간격이 얼마 되지 않는 걸 보고 선우는 안심했다. 제가 파악할 수 없는 시간이 다행히도 그리 길지는 않았다.

선우는 곧바로 제 옷소매를 휙 걷어 올렸다. 두 번의 주사에도 새하얀 팔뚝은 깨끗했다. 아주 유심히 들여다봐야 겨우 보일 정도로 바늘 자국은 거의 티가 나지 않았다.

도리어 홍성민과 실랑이를 벌이다 생겼을 것이 분명한, 시계 밑에 숨겨진 검붉은 압박흔과 잔뜩 구겨진 재킷이 지난밤의 상황을 더 잘 설명해 주고 있었다.

돌연, 심장이 벌렁벌렁 뛰어 댔다.

제 몸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끔찍했던 순간들이 떠올라 선우는 문득 공포심이 일었다. 또다시 바들바들 멋대로 떨리는 손을 쿵쾅대는 심장 위에 얹고, 선우는 조용히 옷자락을 붙들었다.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미안.”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시헌을 보고 선우가 멋쩍게 웃었다. 시헌은 인상을 찌푸린 채 팔짱을 꼈다.

“그 자리에서 기다리라니까 혼자 어딜 갔었어?”

“아, 화장실 좀 가려다가…….”

“화장실? 2층으로?”

시헌의 질책에 변명을 해 보았지만,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으응. 길을 잃어서……. 안이 엄청 넓더라고…….”

선우의 대답에도 미심쩍은 얼굴은 풀릴 줄을 몰랐다.

“그 사람이랑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 사람?”

“문태성 대표 말이야.”

심각한 얼굴을 하고 시헌이 계속 저를 추궁하니 선우는 지은 죄도 없이 괜히 목이 탔다.

“……무슨 일은. 아무 일도 없었어.”

“아무 일도 없었다니. 너 지금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는 거야?”

선우가 시헌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 이아영과 예지희를 뒤쫓다가 홍성민을 만나서 강제로 약을 맞았고, 문태성을 마주해 날벼락과도 같은 일을 겪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일이라면 없는 걱정도 사서 하는 시헌에게 이 중 어떤 것을 말할 수 있을까.

“시헌아, 걱정시켜서 미안해. 근데 나, 별일 없었어.”

“별일 없었다고? 나도 몰랐던 그런 곳까지 가서 정신도 못 차리고 기절해 있었으면서, 별일이 없었어? 내가 너 못 찾았으면 어쩔 뻔했어?”

저를 안심시키려는 듯한 말투에 시헌은 도리어 목소리를 높여 선우를 다그쳤다.

“……그러게. 네가 날 살렸다, 야.”

흥분한 시헌을 진정시키고자 선우가 어색한 웃음과 어설픈 농담을 건넸다.

“한선우!”

그러자 시헌이 버럭 소리쳤다. 태연하게 구는 선우에 결국 시헌은 화를 참지 못했다.

조금 전, 어딘가 비밀스러운 방 안에 쓰러져 있던 선우는 아무리 몸을 흔들고 불러 봐도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어디가 아프기라도 한 건지 큰일이 났다고 허둥대고 있자, 잠든 것뿐이라며 두세 시간 후에나 깰 거라는 말을 해 준 것은 다름 아닌 문태성 대표였다.

도대체 문 대표가 왜 그 자리에 있었을까.

유명세를 떠나서 워낙에 귀하신 몸이 아니던가. 어디에 얼마를 투자했다더라 말은 무성해도, 웬만큼 큰 규모의 행사가 아닌 이상에야 만나 뵙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자였다. 수백억을 투자한 영화 촬영장에도 얼굴 한 번 내비친 적 없는 사람이, 하물며 자신과 별 관련도 없는 잡지사 행사에 참석을 한다고.

이 의아한 감정은 얼마 전 호텔 바에서 느낀 것과 같은 부류의 것이었다.

느닷없이 나타나 호감인지 적대감인지 모를 모호한 태도로 지나친 관심을 표출해 대던, 비싸다는 말로는 부족할 귀한 와인을 손수 대접하고 간, 그날의 행동이 불러일으킨 의아함.

딱 그만큼 오늘의 그의 등장은 시헌으로 하여금 의문을 갖게 했다.

“……나 진짜 별일 없었는데……. 그리고 블루문 조사하려면 어차피 한 번은 그 안에 들어가 봐야 했어.”

조사, 그럼 그렇지.

시헌은 그만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제 심정이 어떤 줄도 모르고 태평하게 목이나 긁으면서 말하는 선우에 기가 찼다.

그놈의 조사를 한답시고 혼자 돌아다니다가 무슨 일을 겪긴 겪은 모양인데……. 이렇게 되면 아무리 물어 봐야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말해 주지 않을 것이 뻔했다.

선우의 일은 이런 것이었다. 자신이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이렇게나 위험한 일이었다.

“……선우야.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너 그냥, 다른 부서로 가면 안 돼?”

시헌은 이때다 싶어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선우가 하는 일이 탐탁지 않았던 시헌이었다.

경찰의 임무에 쉬운 일이 뭐가 있겠냐마는, 선우가 속한 부서는 더 그랬다. 마약 하는 놈들 중에 제정신인 이가 도대체 몇이나 되겠는가. 위험하고 또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선우가 노출되는 것이 무엇보다도 싫었다.

“너 아니면 그 일 할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원하면 얼마든지 부서 이동 가능하잖아. 왜 그런 위험한 일을 사서 해.”

“…….”

선우는 시헌의 걱정을 가만가만 듣고 있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고집스러운 눈망울이 시헌을 반히 쳐다보자, 시헌은 곧 그를 외면했다.

“…….”

“…….”

두 사람은 서로 말이 없었다.

“……시헌아. 나는….”

잠시간의 정적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선우였다.

“…됐어.”

‘나는 이 일을 해야 해.’, 선우는 언제나와 같이 그런 말을 늘어놓을 태세였다. 이 이상 얘기했다가는 선우마저도 기분이 상할 것 같아 시헌은 말을 아끼기로 했다.

“피곤할 텐데 좀 더 쉬어.”

정작 피곤한 얼굴을 한 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벗어났다.

방문을 닫고 나온 시헌은 한동안 불도 켜지 않은 채 어두운 거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창밖은 아직도 밤이 한창이었다.

어딘가 침울한 낯빛은 시간이 지나도록 나아질 줄을 몰랐다.

기실 문 대표가 아무리 모호하게 굴었기로서니, 그가 내비치는 의도가 호감인지 적대감인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가 못 알아차릴 리는 없었다.

그래도 시헌은 모르는 척하려 했다. 그날도, 오늘도. 별일 아니겠거니 무시하려고 했다. 그저 우연이 겹친 것이겠거니.

물렁해 보여도 아니다 싶을 땐 칼같이 자르는 아이였으니, 선우만 아무 이상이 없다면야 제가 굳이 나서서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었다. 이것이 한선우 옆에서 10년을 버티면서 얻은 깨달음이라면 깨달음이었다.

그러나 불쑥 나타난 그는 10년 동안 다져 온 시헌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섬뜩하다고 느꼈던 그 눈빛이 선우를 향해 있었다.

‘친구 간수 잘해야겠네. 내 눈에 보기 좋으면 남의 눈에도 보기 좋은 법이거든.’

조언이랍시고 남기고 간 그의 마지막 말이 한참 동안 머릿속에 남아 시헌을 괴롭혔다.

* * *

회의실에 놓인 긴 타원형 책상 앞에 선우가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핸드폰 한 대와 어젯밤 받은 명함 한 장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선우는 핸드폰을 들어 명함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신호음이 들리기 시작하자 하얀 손가락이 스피커폰과 녹음 버튼을 차례로 눌렀다.

뚜르르르.

책상 위에 팔을 괸 선우가 깍지 낀 두 손 위로 턱을 올려놓은 채 생각에 잠겼다.

홍성민이 처음 사용한 약은 보나 마나 헤시오닐(Hecionyl)일 터.

일명 ‘허쉬(Hush)’라고도 불리는 헤시오닐은 수술용 마취제이지만, 소량 사용할 경우 몸이 나른하고 몽롱한 기분이 들게 해 젊은이들 사이에서 데이트 강간 목적으로 악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보아하니 유리잔에 미리 약을 발라 놓은 듯싶었고, 제 경우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였으니 꽤 많은 양을 사용했으리라.

문제는 홍성민 본인도 맞으려 했던, 그 주사가 뭐였냐는 건데.

선우가 마약을 직접 경험해 본 것은 물론 처음이었으나, 성욕을 불러일으키는 정도가 정말 보통이 아니었다. 클럽에서 가장 흔히 사용되는 것이 필로폰이기는 했지만, 필로폰에 취한 자 중에 이런 반응을 보인 사람을 저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약에 취한 와중에 홍성민이 언뜻 약 이름을 이야기한 것도 같았는데, 당시 귀가 먹먹하고 정신이 하도 없어 뭐라고 말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럼 문태성이 쓴 건 무슨 약이었을까. 수면제? 진정제? 기억나는 것이라곤 주사를 맞자마자 까무러치듯 잠이 든 것뿐이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건, 두 사람에게 꽤 격렬하게 반항했던 것 같은데도 몸 어디 한구석 불편한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한숨 푹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몸이 가볍고, 머릿속은 깨끗하니 개운했다. ……마약이란 게 원래 이런 건가?

- 여보세요?

한창 생각에 빠져 있던 선우를 끄집어낸 건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형, 안녕하세요. 저 연우예요.”

스피커 앞으로 몸을 숙인 선우가 침착하게 인사를 건넸다. 홍성민이 과연 이 이름을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싶었는데,

- 어? 연우?

“네. 저 기억하세요?”

- 당연하지! 연우야, 어젠 잘 들어갔어?

어찌 된 영문인지 그는 몹시 반색을 했다. 도망갈 때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내뺀 주제에 친절하게 안부까지 묻기도 했다.

- 그냥 단순 순찰이었다는데 문태성 그 새끼가 괜히 오버해 가지고.

“아, 네에.”

홍성민의 목소리는 어쩐지 조금 들떠 있었다.

“어제는… 그렇게 된 게 좀 아쉬워서 연락드렸어요.”

- 아아, 그치. 나도 아쉬워 죽는 줄 알았다.

전화 너머로 입맛을 쩝쩝 다시는 소리가 들렸다.

“저희, 또 볼 수 있을까요?”

- 어…? 어어, 봐야지, 봐야지. 언제 볼까? 아, 근데 어쩌지? 내가 오늘 밤에 해외 출장을 나가서……. 하…….

그는 정말 아쉬운 듯 연이어 한탄을 했다.

- 아! 다음 주에 볼까? 블루문으로 와라. 다음 주 금요일에 천종윤 생일이라 모이기로 했는데.

“천종윤이요?”

- 어. 있어, 그런 놈.

그런 놈은 선우도 한 명 아는 이가 있었다.

망나니로 유명한 선광 코스메틱 창업주의 차남, 천종윤.

선광은 국내 화장품 업계 1위를 달리고 있는 기업으로 기업 자체의 이미지는 나쁘지 않았다. 다만, 경제 뉴스보다 사건·사고로 더 자주 얼굴을 내비치는 자제들 때문에 회장님이 사업은 잘 일궈 놓고 자식 농사는 거하게 말아먹었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천종윤만 해도 폭행 시비, 마약류 밀반입 등으로 경찰청 내에서는 이미 나름의 유명 인사였으니 선우가 그를 모를 리 없었다.

“……생일 파티면, 사람들도… 많이 오겠네요?”

선우의 질문에 홍성민이 한껏 신이 나서 떠들어 댔다. 그날 참석자 중에는 연예인이나 방송 관계자들도 있을 텐데, 데뷔하고 나면 모두 네 선배님이니 와서 미리 안면을 트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선우를 부추겼다.

그런데 선우는 어째 풀이 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형. 그럼… 그때, 그거 못 하는 거 아니에요?”

- 그거?

“네. 그거…….”

말을 길게 늘어뜨리기만 하고 그게 무엇인지 똑바로 말을 하지 않는데도 홍성민은 금세 눈치를 챘다.

- 아…, 혹시 에퀴스?

“에퀴스요?”

선우의 얼굴에 물음표가 떴다.

에퀴스?

완전히 처음 듣는 이름에 약의 정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혹시 엑기스4)를 말하는 건가? 그럼 대마나 아편류였을까? 이런 건 보통 흡연을 할 텐데?

아니면 자신들이 모르는 새로운 은어일지도 몰랐다. 마약쟁이들은 수사망에 걸리지 않기 위해 약의 별명을 저들끼리 수시로 지어 대므로 경찰이 파악하지 못한 은어들이 언제나 속출하기는 했다.

- 응. 약 말하는 거 아니야?

“아, 네. 맞아요….”

- 못 할 리가. 다들 그거 때문에 모이는 건데.

“…….”

홍성민의 솔직한 진술에 선우는 살짝 고개를 들어 앞에 앉은 이와 눈을 마주했다. 선우가 잠시 말이 없자, 수화기 너머로 별안간 킬킬대는 소리가 들렸다.

- 왜? 언제는 싫다고 난리 치더니. 지나고 보니까 또 생각나?

민망하다는 듯 따라 웃은 선우가 목을 한 번 가다듬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저… 그럼, 그날 누구누구 오는 거예요?”

* * *

“에라이, 드러운 새끼.”

“씨벌. 할 짓이 없어서 한다는 게 약 빨고 사내새끼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는 거냐.”

홍성민과의 통화를 마치자 옆에 있던 박민호와 동길이 한 소리씩 했다. 거친 비난은 그나마도 젊은 형사들한테나 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마약수사대에서 인간사 볼 장이란 볼 장은 다 본 경감님들은 통화를 모두 듣고도 눈썹 한 가닥 꿈쩍하지 않았다.

홍성민 같은 자들을 구슬리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도 쉬웠다.

참석자 한 명, 한 명 이름을 댈 때마다 인맥이 대단하다고 추켜세우니, 우쭐해진 홍성민은 그 자리에서 고급 정보들을 술술 뱉어 냈다.

참석자 중에는 이아영과 예지희, 남준호는 물론이고, 연예인, 재벌가 자제들, 방송국 PD, 유명 성형외과 원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에게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마약 1팀은 본격적인 검거 계획을 짰다. 선우가 미끼가 되는 것은 전혀 예상에 없던 일이었으나, 덕분에 블루문을 털어 내는 일이 퍽 수월해졌다.

홍성민과 그 무리는 약을 투약하는 타이밍에 맞춰 현장 체포하기로 했다. 어느 범죄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마약 사범은 현행범으로 체포하는 것이 가장 명확했다. 대부분의 범죄는 흔적을 남기지만, 약은 시간이 지나면 투약 증거가 사라져 버리므로.

게다가 이번처럼 사회적으로 저명한 이들은 온갖 수를 써서 법조망을 잘도 피해 가니, 현행범으로 잡아 애초에 빠져나갈 구실을 주지 않는 것이 좋았다.

클럽의 규모가 워낙 크고 불법 투약 혐의가 의심되는 자들이 여러 명이라, 최 팀장은 일선 경찰서에도 추가로 병력 지원을 요청하기로 했다.

일명 ‘블루문 소탕 작전’의 막이 오르고 있었다.

2021년 6월 4일 23시경

서울특별시 강남구 ‘Club Blue Moon’ 인근 사거리

‘Hotel the Moon, 강남’에서 조금 떨어진 사거리 도로변에 승합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시동이 꺼진 승합차 뒷좌석에서는 1차 투입조가 작전 계획을 점검하고 있었다.

뒷좌석 한가운데에 놓인 것은 선우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클럽 내부 구조도였다.

“여기서 한 분이 경호원 제압해 주시고, 나머지 분들은 바로 계단 올라오시면 가운데에 비상구가 있는 복도가 있어요. 어두워서 멀리서 보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끝까지 오시면 비상구 우측 벽에 미닫이문이 있습니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구조도 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문 여시면 파티는 여기, 제일 앞쪽 룸에서 진행될 겁니다. 그런데 약은 다른 룸으로 이동해서 따로 하기도 하니까, 대기조 합류하는 대로 안쪽 룸도 전부 다 확인해 주셔야 해요.”

이번 작전을 위해 지역 관할서인 강남 경찰서로부터 경관을 10명이나 지원받았다. 전부 젊고 힘 좋은 순경, 경장들이거나 마약 범죄자 체포 경험이 있는 베테랑 형사들이었다.

작전에는 최대영 팀장을 포함한 마약 1팀 6명 전원과 지원받은 10명을 합쳐 총 16명의 경찰 인력이 투입될 예정이었다. 마약 투약자들이 워낙 충동적이라 무슨 일을 벌일지 도통 알 수 없기 때문이기는 했으나, 이쯤 되면 구성원이 거의 드림팀이나 다름없었다. 이슈가 되는 사건은 냄새를 기가 막히게 잘 맡는 최대영에게 이번 사건에 ‘촉’이 제대로 왔기 때문이었다.

1차 투입조는 선우와 마약 1팀의 남동길 경장, 강남 경찰서 소속 순경 3명이었다. 선우를 제외한 나머지 4명은 손님으로 위장하여 클럽에 먼저 입장하기로 했다. 이들은 1층에서 내부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가, 선우가 홍성민을 만나고 신호를 보내면 곧장 2층으로 진입하기로 했다.

작전 점검을 마친 1차 투입 조원들이 각자의 귀에 무선 수신기를 꼈다. 선우도 몸에 소형 카메라와 도청 장치를 숨겨 달았다.

『이아영, 예지희 입장합니다.』

때맞춰 다른 위치에 잠복해 있는 대기조로부터 무전이 왔다. 이들은 클럽 입구가 잘 보이는 곳에 숨어 예상 참석자들이 클럽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있었다. 명단에 있는 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하자, 깔끔하게 차려입은 동길과 3명의 순경도 승합차를 나섰다.

홍성민과의 약속 시각은 밤 11시였으나 선우는 조금 더 천천히 들어가기로 했다. 용의자들이 약을 하는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함이었다.

11시 정각에서 정확히 10분이 넘어가자, 홍성민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 연우야, 어디야?

“형, 도착하셨어요? 저 급하게 일이 생겨서 조금 늦을 것 같아요. 금방 갈게요. 죄송해요.”

홍성민은 개의치 않고 조심히 오라, 늦어도 괜찮으니 꼭 오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선우가 클럽 안으로 들어간 것은 자정을 10분가량 남기고였다. 타깃들의 입장이 얼추 확인되고 20분을 더 기다린 뒤였다.

출입구에서 홍성민에게 연락을 취하자, 그는 1층까지 한달음에 달려 나왔다. 선우를 보자마자 함박웃음을 지은 홍성민은 곧바로 선우의 손목을 덥석 잡아끌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는 그날과 마찬가지로 경호원이 지키고 서 있었다. 경호원은 홍성민과 그의 일행에게는 일말의 제지가 없어, 선우는 간단히 클럽 내의 비밀 공간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홍성민이 선우에게 약을 먹였던, 문제의 그 룸이 오늘의 파티 장소였다. 참석 인원이 많아서인지, 오늘은 룸 앞에 두 명의 경호원이 배치되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룸 안에서는 이미 술판이 거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 있는 이들이 어림잡아도 10명은 넘었으나, 대부분은 벌써 취해 홍성민과 선우가 들어온 줄도 모르는 눈치였다. 설사 알았더라도 저들끼리 마시고 떠드느라 정신이 팔려 새로운 이의 등장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 둘, 자세히 얼굴을 살피니 천종윤이 보이지 않았다. 명색이 파티의 주인공이 자리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아영과 예지희, 그 외 몇몇 또한 자리에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출입구마다 붙어 있는 대기조에게서 누군가 빠져나갔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아직 클럽 안에 있는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면 약을 하기 위해 다른 방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홍성민이 그랬던 것처럼.

그대로 룸 안에 자리를 잡을 줄 알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홍성민은 테이블 위에서 간단한 소지품만 빠르게 챙기고는 선우 앞에 섰다. 턱 끝으로 문 쪽을 가리킨 그는 이내 선우를 데리고 방을 나서려 했다.

“어? 형, 어디 가요?”

“우리끼리 조용히 할 얘기가 있잖아.”

“아, 전 여기도 괜찮은데….”

아직 안을 제대로 살피지도 못한 선우가 아쉬운 마음에 두 발로 버티고 섰다.

“에이, 저기는 이미 판 끝났어.”

홍성민이 한쪽 눈을 찡긋, 하더니 선우의 손목을 세게 잡아당겼다. 잡힌 부위가 욱신거릴 정도의 거센 악력에 수려한 눈썹이 절로 구겨졌다. 그 전날에는 그저 약에 취해서 질질 끌려간 줄로만 알았더니, 홍성민이라는 자는 근력이 엄청난 사내라 선우는 맨정신으로도 그를 뿌리치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날과 같이 홍성민은 복도 끝, 가장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당시에는 시야가 흐릿해 방 안의 구조며 가구를 자세히 보지 못했었는데, 이제 보니 방이 하나의 고급 스튜디오 같았다.

커다랗고 까만 가죽 소파와 유려한 디자인의 원목 테이블, 단 두 개뿐인 가구에도 실내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벽에 붙어 은은하게 주홍빛을 내는 조명등과 그 불빛이 비친 벽지마저 우아한 느낌을 주어, 마치 가구 사진을 찍기 위해 마련된 촬영장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연우, 못 본 사이에 더 예뻐졌네?”

홍성민이 선우를 소파로 이끌었다. 엉덩이와 다리에 닿는 촉감이 몹시도 폭신했다. 약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몸이 그대로 녹아내릴 것처럼.

그리고 선우는 이 포근함이 소름 끼치도록 불쾌했다. 이렇게 고상하게 꾸며 놓은 장소에서 한다는 것이 고작 마약이었다. 본인이 마약을 하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생판 모르는 이에게 의사도 묻지 않고 강제로 투약을 하는데, 그 추잡한 행동 속에는 아주 조금의 주저함도 죄책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몇 명의 피해자들이 저보다도 더한 고통을 겪어야 했을까. 불현듯 화가 치밀어 오르려는 것을 선우는 애써 참아 냈다.

“형도 오늘 멋있으시네요.”

입가에 냉소를 머금은 선우가 빈말을 툭 던졌다. 생각 없이 뱉은 칭찬에도 홍성민은 기분이 좋은지 실실 웃었다.

방 안을 둘러보고 있자니, 문득 벽 너머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작아 대화 내용까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분명 성별이 다른 두 명분의 목소리였다. 간간이 하이톤의 새된 소리도 들려왔다.

“……옆방에도 누가 있나 봐요.”

선우가 동료들을 향해 넌지시 상황을 전달했고,

“응. 천가 놈.”

홍성민이 확답을 주었다. 만족스러운 대답에 선우가 어렴풋이 미소를 지었다.

“형. 그거…… 가지고 오셨어요?”

선우의 물음에 홍성민이 파티 룸에서 가져온 검은색의 작은 손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서 주사기 두 개와 유리 바이알 두 개를 꺼낸 그가 주사기를 선우 앞에다 대고 짤짤 흔들어 보였다.

“이게 그렇게 하고 싶었어?”

눈앞에서 좌우로 움직이는 주사기를 보며 선우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때, 에퀴스…라고 하셨죠?”

“응. 얘 이름이라는데, 그게 뭐가 중요해. 뽕이 다 똑같은 뽕이지, 뭐.”

“뽕…이요?”

선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필로폰을 에퀴스라고 부른다는 건 선우로서는 생전 처음 듣는 얘기였다. 너무 낯선 이름에 어쩌면 신종 마약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선우는 홍성민의 말에 도리어 혼란스러워졌다.

이게… 뽕이라고?

그사이 어느새 주사기의 포장을 모두 뜯어낸 홍성민이 바이알을 막고 있는 회색 고무 패킹에 주삿바늘을 푹 꽂아 넣었다. 피스톤을 쭉 당겨 순식간에 약을 빨아들인 그가 선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팔 줘 봐.”

선우는 팔을 슬그머니 내빼며 몸을 움츠렸다.

“아, 형. 근데 저… 형 먼저 하시면 안 돼요? 사실 저 바늘을 좀 무서워해서…….”

두 눈을 내리깔고 선우가 주저하듯 말했다. 가지런하던 눈썹 끝이 양쪽으로 축 처졌다.

“어, 어?”

눈꺼풀을 서서히 들어 올려 앞에 앉은 홍성민을 물끄러미 쳐다보자, 당황한 그가 조금 망설이는 것이 보였다.

“형이 하는 거 보면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큰 눈을 깜빡, 깜빡 감았다 뜨자 눈동자 위를 빼곡히 덮은 속눈썹도 그를 따라 한들한들 허공 위를 나부꼈다.

이… 씨이발. 홍성민의 입에서 느닷없이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 눈, 이 표정이었다. 홍성민을 동하게 하는 것이.

처음에는 그냥 잘생기고 예쁘장하길래 한번 놀아나 볼까 하는 심정으로 접근했는데, 계속 보고 있자니 연우라는 놈은 어딘가 사람을 애끓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쌍꺼풀 없는 눈으로 사람을 자꾸 빤히 쳐다보는 게 세상 순해 보이면서도 축축한 눈동자가 묘하게 색정적이었다. 그래서일까, 커다랗고 맑은 눈동자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면 이상하게도 홍성민은 소유욕이 일었다. 성격은 또 당돌하기가 짝이 없어, 숫기 하나 없이 수줍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제 하고 싶은 말은 다 해 댔다.

연예인 지망생 중에는 아주 가끔, 이런 ‘물건’들이 있었다. 연예 활동에 필요한 끼와는 상관없이 사람 꼬시는 재주가 타고난 물건. 그리고 홍성민은 오늘 처음으로 그런 물건에 욕심이 났다.

그동안은 예쁘고 잘생긴 애들이 널리고 널렸는데 굳이 고정을 두는 형들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됐는데, 지금은 그 마음을 십분 알 것 같았다. 다른 이가 보기 전에 연우를 어딘가에 꽁꽁 숨겨 두고 혼자서만 독차지하고 싶다는 생각이 언뜻 든 것이었다.

홍성민은 고개를 아래로 내려 약이 그득하게 들어찬 주사기를 보았다. 이 약으로 잘만 꾀어내면 곁에 붙어 있게 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연우가 제 앞에서 웃고, 울고, 매달릴 모습을 상상하니 입가에서 자꾸 비식비식 웃음이 새 나왔다.

“야, 이게 뭐가 무섭다고 그래. 형이 하는 거 잘 봐 봐. 이거 뭐, 별거 아니야.”

홍성민은 선심 쓰듯 제 팔을 드러내더니,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스스로 주사를 놓았다.

“와, 씨발. 좋다.”

그의 입에서 곧장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약은 혈관을 타고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전신을 휘몰아치는 전율에 홍성민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느낌에 내가 이걸 못 끊지.”

이어 또 다른 주사기에도 마저 약을 채운 그가 선우를 향해 다시 손바닥을 내밀었다.

“자! 이제 네 차례야.”

선우는 제 앞에 놓인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저, 그전에 형한테 드릴 게 있는데요.”

“응? 뭔데?”

선우가 바지 뒷주머니로 손을 뻗었다. 곧이어 찰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은색 빛이 반짝이는 무언가가 따라 나왔다.

“어? 이거 뭐야.”

푸핫! 홍성민은 선우가 꺼낸 물체의 실체를 보고 크게 웃었다.

“너 이런 취향이야? 와……. 안 그렇게 생겨서 존나 화끈하다, 너.”

“마음에 드시는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예쁘게 눈을 접어 웃은 선우가 홍성민의 한쪽 손목을 잡아당겨 착, 하고 수갑을 내리 채웠다. 선우의 행동에 어이가 없어진 홍성민은 얼굴에 웃음기를 머금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거 진짜 골 때리네.

감탄하는 그의 눈앞에 돌연,

“서울경찰청 마약범죄수사대 한선우 경위입니다.”

하얗고 빳빳한 플라스틱 카드 한 장이 들이밀렸다.

“홍성민 씨, 당신을 마약류 불법 투약 혐의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으며, 지금부터 하는 모든 발언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찰칵. 반대쪽 손목에도 연이어 수갑이 채워졌다.

“…….”

웃음기를 띠고 있던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

홍성민은 한가운데 얌전히 모인 양 손목과 그보다 더 얌전하게 생긴 하얀 얼굴을 번갈아 봤다.

“야…, 뭔 플레이를 이렇게 진지하게 해.”

억지로 끌어올린 한쪽 입가가 파르르 하고 떨렸다. 표정 하나 없는 얼굴로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연우에 홍성민은 그제야 제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인지했다.

“경찰……. 허…….”

기가 콱 막혀 헛숨이 터졌다.

“……좋은 말로 할 때 이거 풀어.”

홍성민은 복받쳐 오르는 화를 쉭쉭, 콧김으로 대신 내뱉다가 이내 한껏 낮춘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수갑이 차인 손목은 선우에게 들이민 채였다.

선우는 굵직한 두 손목을 한 번 힐끔 보고는 가져온 비닐 팩에 주사기와 유리 바이알을 챙겨 담았다.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에 머리끝까지 화가 차오른 홍성민은 욕지거리를 뱉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버릇처럼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려는데, 반대쪽 손이 저절로 따라 올라왔다. 손 하나 제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자, 홍성민은 별안간 괴성을 꽥 내지르더니 수갑이 채인 손목을 허공에다 대고 찰찰 흔들어 댔다.

“이게 미쳤나! 누구한테 수갑을 채워?”

“왜. 넌 주사도 마음대로 놓는데, 수갑 정도면 양호하지.”

정리할 것도 별로 없는 현장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난 선우가 그게 뭐 별일이냐는 듯 심상한 어투로 말했다.

“이게 진짜!”

열이 잔뜩 오른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홍성민은 당장에라도 한 대 날릴 기세로 두 팔을 위로 번쩍 들었다.

때마침 문밖에서 와장창, 무언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중간중간 날카로운 비명과 굵직한 고성도 함께였다.

그때, 방문이 활짝 열리면서 검은 옷차림의 사내가 급하게 들어와 소리쳤다.

“홍 실장님, 경찰입니다! 빨리 피하……!”

파티 룸을 지키고 서 있던 경호원 중 한 명이었다. 경찰 출동 소식을 알리려던 그는 홍성민의 손목을 보고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어이, 형씨. 자꾸 이러면 이것도 공무 집행 방해라니까 그러네.”

뒤따라온 동길이 얼어붙어 있던 경호원의 등을 가볍게 툭툭 쳤다. 앞을 막아선 그의 어깨를 잡아 뒤로 밀쳐내고는, 동길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어! 마침 잘 왔다.”

그렇지 않아도 선우는 홍성민이 워낙 힘이 좋으니 무력을 쓰면 저 혼자 감당하기가 벅찰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경호원과 경찰, 소란스러운 바깥 분위기에 홍성민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대로 잠시 멍청하게 앉아 있다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너, 이 씨발 새끼가! 내가 누군지 알고 이래?”

버럭 소리치며, 홍성민은 앞에 앉은 선우의 멱살을 쥐고 힘껏 잡아당겼다. 조금의 반항도 없이 딸려 가며 선우도 그 김에 두 발을 딛고 일어섰다.

“자자, 회포는 서에 가서들 푸십쇼.”

두 사람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온 동길이 멱살을 한 손으로 풀어냈다. 그러고는 홍성민의 한쪽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넣어 팔짱을 단단히 꼈다. 옆에 선 선우마저 반대쪽 팔짱을 끼자, 동길은 홍성민을 밖으로 잡아끌었다.

“이… 이익! 씨발 짭새 새끼들이, 이거 안 놔?”

홍성민이 온몸을 비틀어 대며 거칠게 저항했다.

“좆만 한 새끼들이 감히 누구를 지금! 너희가 겁대가리를 상실했지? 엉?”

문밖으로 질질 끌려가면서도 홍성민은 고래고래 소리치고 발을 마구 뻗어 선우와 동길의 다리를 되는 대로 차 댔다. 짤랑짤랑 손목에서 철제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도 울렸다.

홍성민의 발악을 잠자코 듣고만 있던 선우가 복도로 나오자 팔짱을 풀고 그의 앞에 섰다.

“억지로 끌려 본 소감이 어때?”

“이 짭새 새끼가 뒤질라고! 내가,”

한쪽 팔이 자유로워지자 냉큼 제게 달려들려 하기에 선우는 발을 들어 홍성민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찼다. 억! 소리와 함께 그의 허리가 90도로 굽어졌다.

“미래건설 전략기획실 홍성민 실장님. 네가 누군지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짭새 걱정은 이제 그만하시고. 아직 약 기운 덜 돌았으면 변호사님이라도 미리미리 호출합시다.”

고개를 푹 숙인 정수리 위로 듣기 좋은 목소리가 나긋나긋 쏟아졌다. 좌절한 이에게 위로라도 건네듯, 새하얀 손이 홍성민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마침 반대쪽 복도에서 순경 한 명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 선우는 그와 동길에게 홍성민을 넘겼다.

아아악! 다른 방으로 이동하는 선우의 등 뒤로 울화가 가득 찬 괴성이 울려 퍼졌다.

조금 떨어진 옆방에는 김지항과 정기영, 두 경감이 거의 닫힌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천종윤은요?”

“쥐새끼 같은 놈. 벌써 튀었어.”

“네에…?”

선우가 얼굴에 의문을 잔뜩 담았다. 출입구와 비상구마다 대기조가 적어도 두 명씩은 배치되어 있었는데, 천종윤이 어느 틈에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었는지 의아했다.

“후발조 진입하는데 출입구에서 경호원들이랑 실랑이가 좀 있었거든. 그 사이에 클럽 관계자가 대피시킨 모양이야. 파티 룸에 있던 놈들도 그새 싹 도망갔어.”

“우리가 파악 못 한 비밀 통로가 따로 있는 것 같아.”

“아…….”

동료들의 말에 선우가 아쉬운 내색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번 홍성민도 그랬지만, 일이 터지면 쏜살같이 내빼고 도망가는 것이 재벌가 자제분들의 주특기인가 싶었다.

“그럼 여기는…….”

그럼에도 두 명이나 방을 지키고 선 연유가 궁금해, 두 사람의 어깨 사이로 선우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빈틈 사이로 안을 들여다본 선우는 내부 상태를 확인하자마자 단박에 고개를 뒤로 무르고 문을 닫았다.

방 안에는 벌거벗은 여자가 옷자락으로 주요 부위만 겨우 가린 채 소파에 홀로 드러누워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아영이었다. 술인지 약인지 모를 것에 떡이 되도록 취한 그녀는 그야말로 인사불성, 고주망태의 상태였다.

천종윤과 동시에 보이지 않아 함께 있는 것을 예상 못 한 바는 아니었는데, 상대는 도망가고 혼자 누워 있는 모습을 보니 피의자를 떠나 인간적으로 조금 안쓰럽게 느껴지려 했다.

“완전히 꼭지가 가5) 버려 가지고.”

꼴이 저 모양이라 여경들을 급히 호출했다고 말하는 정기영에게 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점입가경으로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그다음 방이었다.

선우가 방 앞에 도착했을 때는 다수의 경찰관이 한창 현장 정리 중이었다. 문 앞에 선 선우의 앞으로 땀에 푹 절은 한 남자가 경관 두 명에게 양팔을 붙들린 채 끌려 나갔다.

어수선한 방 안 꼴은 흡사 도떼기시장 같았다. 바닥은 주사기며 깨진 약병, 정체를 알 수 없는 진득한 액체들로 온통 너저분했고, 피의자들은 한쪽 혹은 양쪽 손목에 수갑을 찬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 중 반 이상이 반나체 상태였고, 누구 하나 제정신인 자가 없었다.

한 여자는 방 한구석에서 망연자실한 채로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고 있었다. 그 옆에 있던 또 다른 여자는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욕을 했다를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깔깔거리며 자지러지게 웃어 댔다.

한 남자는 경찰의 도움을 받아 옷을 챙겨 입었고, 마지막으로 맨몸으로 바닥에 주저앉은 남자는 욕설과 함께 주사기를 휙휙 휘두르며 경찰을 위협했다. 헛것이 보이는지 사람이 없는 허공에다 대고 하는 위협이라 그리 효과적이진 않았다.

남자 셋, 여자 둘.

한 방에서만 총 5명이 검거되었다.

이들은 약을 한 뒤 집단으로 성관계를 하던 중에 체포되었는데, 경찰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도 약과 섹스에 취해 밖에서 무슨 난리가 난 줄도 모르고 있었다고 했다. 그 덕에 한 명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5명 모두를 그 자리에서 고스란히 잡을 수 있었다.

체포된 5명 중에는 모델 예지희와 강남의 유명 성형외과 대표원장, 공중파 방송국의 예능국 PD도 포함되어 있었다.

파티가 열렸던 룸은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깨진 유리잔과 술병들이 바닥을 뒤덮었고, 테이블과 소파가 술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고 일부러 방을 헤집어 놓고 간 흔적이 여실했다.

이를 눈치챈 최대영은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파티 룸을 현장 보존하도록 지시한 뒤 곧장 감식반을 호출했다.

클럽 블루문에서는 홍성민과 이아영을 포함한 마약 투약자 총 7명을 현장 체포한 것으로 출동이 일단락되었다.

마약 1팀은 검거한 피의자들을 바로 수사대로 이송하였고, 최대영은 지원 병력을 세 팀으로 나누어 호텔 주변을 더 수색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리고, 약에 취해 호텔 주차장에서 방황하고 있던 모델 남준호를 발견했다고 연락받은 것이 새벽 3시경이었다.

* * *

토요일 새벽, 해도 전부 뜨지 않은 시각이었지만 불을 훤히 밝힌 마약수사대는 시끌벅적했다.

블루문에서 이송해 온 마약 사범들은 모두 유치장에 수감하고 차례로 소변 검사를 실시했다.

뽕이라던 홍성민의 말이 사실이었는지, 피의자들은 대부분 간이 시약 검사에서 필로폰이나 헤시오닐에 양성 반응을 보였다. 개중에는 두 개 이상의 약물에서 양성이 뜨는 이도 있었고, 결과가 부정확한 이들도 있어서 전원 모두 정밀 검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선우는 피의자들의 구속 및 신체에 대한 압수·수색·검증 영장을 청구한 뒤, 조사 시작을 위해 유치장으로 향했다.

“어! 경위님 잘 만났다!”

유치장 앞에서 박정철 기자가 반갑게 인사했다.

“안 그래도 경위님 찾고 있었는데.”

“저요? 저를 왜요?”

“에이, 알면서.”

박정철 기자가 곁눈질로 웃으면서 선우에게 엉겨 붙어 왔다.

박정철은 KBC 방송국 사회부 사건팀 소속 기자로 올해 3년 차가 되었다.

선우가 막 마수대로 발령받고 처음 일을 배우느라 애쓰던 시기에 박정철도 한창 수습 기간을 거쳤다. 선우와는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는 데다, 함께 밤을 새우며 고생한 날들이 쌓이니 어느새 동질감이 생겨 이제는 제법 안면을 트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뉴스거리를 찾아 인근 병원 장례식장을 기웃거리던 중이었다. 그러다 강남 지역을 담당하고 있는 선배 기자에게 급하게 콜이 와서 부리나케 마수대로 쫓아오는 길이었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박정철이 선우 옆에 바짝 붙어 유치장을 쓱 한 번 훑어보았다. 2년이 넘도록 유치장을 들락거렸더니 이젠 피의자 외형만 봐도 대충 무슨 사건인지 눈치가 빤했다. 이번에는 주로 젊은 남녀에 머릿수도 많으니, 보나 마나 클럽에서 집단 투약을 하다 걸린 모양인데…….

“어? 저 자식, 혹시 미래?”

유치장 안을 유심히 보던 그가 선우에게 귓속말을 하듯 속삭였다.

“음, 뭐어…….”

선우는 가타부타 뭐라 말을 하는 대신 볼만 긁적였지만, 그 무언의 행동에 긍정의 의미가 숨겨진 것은 누구라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와, 저 새끼는 아직도 정신 못 차렸나 보네. 지금 집유 기간 아니에요? 하긴, 약쟁이가 약 끊는 건 숨 끊어질 때뿐이라데요.”

박정철이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혀를 쯧쯧 찼다.

“어, 어, 어어!”

여성 전용 유치장으로 고개를 돌린 박정철이 별안간 크게 소리를 쳤다.

“이, 이, 이, 이아영? 맞아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손가락질을 해 대며 목소리를 키운 그가 이번에는 말까지 더듬으며 속닥거렸다.

이번에도 역시 선우는 이렇다 할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저 허공을 향해 눈알만 또로록 굴렸을 뿐이었다.

“와아악! 씨발, 나 계 탔네!”

박정철의 느닷없는 포효가 유치장 안에 울려 퍼졌다.

“내가 어쩐지 오늘 경위님이 너무 보고 싶더라니까?”

“으악!”

선우를 끌어안고 방방 뛰어 대다,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박정철은 그만 선우의 볼에 쭙, 하고 입을 맞췄다.

* * *

새벽 6시쯤부터 본격적인 피의자 조사가 시작되었다. 피의자가 많으니 빠른 조사를 위해 팀원들이 각자 한 명씩 맡아 동시다발적으로 조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진술실에 이아영과 마주 앉은 선우는 책상 위에 노트북을 펼쳐 놓았다. 피의자 신문에 앞서 미란다 원칙을 한 번 더 고지하고, 선우는 이아영을 쳐다보았다. 멍하니 초점 없는 눈을 보아하니 조사가 원활하게 진행될 것 같지가 않았다.

“피곤하시죠?”

선우가 미련 없이 노트북을 닫으며 물었다.

“산뜻하게 커피라도 한잔하고 시작할까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슬며시 고개를 든 이아영이 선우를 보고 큰 눈을 끔벅끔벅거렸다. 분명 자신을 형사라고 소개한 남자는 그의 말처럼 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형사보다는 커피 광고 모델이 더 어울릴 만큼 부드럽고 따뜻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뭐 좋아하세요? 바닐라 라테? 커피 아닌 것도 괜찮아요.”

“…….”

부드럽고 따뜻한 형사. 어딘가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남자는 묻는 말마저 생뚱맞았다. 이아영은 어리둥절해져 앞에 앉은 이를 멀거니 쳐다만 볼 뿐 입을 열지 못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

핸드폰으로 이 시간에 배달 가능한 매장을 찾는 모습이 한두 번 해 본 것이 아닌 양 자연스러웠다.

“아니면 그냥 아무거나 시킬까요?”

이아영이 계속 대답이 없자, 핸드폰을 보고 얘기하던 선우가 눈만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선우를 마주하던 이아영이 잠시 후, 기어드는 목소리를 더듬더듬 뱉어 냈다.

“……모, 모카칩… 프라푸치노….”

“아, 그거 맛있죠. 단거 좋아하시는구나.”

고개까지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 주는 형사님에 이아영은 그만 벙찌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형사가 온다기에 조폭처럼 무섭고 험악한 사람이 와서 윽박이나 지를 걸 예상하고는 겁을 잔뜩 먹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하얗고 선이 고운 남자가 와서 눈웃음치며 대뜸 엉뚱한 소리를 해 대니, 이아영은 갑자기 꿈속에라도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아직 약이 덜 깼나…….

‘휘핑 얹을까요?’라고 묻는 그를 향해 어느새 이아영은 뭐에 홀린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주문한 커피는 20분도 채 되지 않아 진술실로 도착했다. 선우는 휘핑크림이 잔뜩 올라간 모카칩 프라푸치노를 주인 앞에 놓아 주고 친절히 빨대도 꽂아 주었다. 이어 그는 제가 주문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쭉 빨아들이더니, 함께 배달 온 종이 상자를 주섬주섬 풀어헤쳤다.

“저도 밤새워서요. 당 떨어지면 머리 아파요.”

배시시 웃으며 펼친 상자 안에는 케이크가 몇 조각 들어 있었다. 색깔 고운 레드벨벳케이크와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치즈케이크, 딸기가 탐스럽게 올려진 초코케이크까지. 옆에 있던 또 다른 상자에는 알록달록 무지갯빛 마카롱이 예쁘게 줄을 지어 있었다.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제 마음대로 시켰어요. 좀 드실래요?”

“…….”

선우가 불쑥 포크를 내밀었다. 이아영은 조금 주저하는가 싶더니 이내 못 이기는 척 그걸 받아 들었다. 하지만 선뜻 커피나 케이크에 손을 대지는 못하고, 포크 손잡이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선우는 치즈케이크의 뾰족한 끝을 포크로 크게 잘라 보란 듯이 입에 떠 넣었다. 이아영의 시선이 선우의 포크를 따라 움직였다. 그 시선을 알고도 모른 척, 천연스럽게 케이크를 먹던 선우는 치즈케이크를 반쯤 해치운 뒤 포크를 내려놓았다. 자신은 커피로 손을 옮기고 종이 상자를 앞으로 밀어 주니, 머뭇거리던 그녀가 곧 레드벨벳케이크에 포크를 살그머니 가져다 대었다.

사실 선우는 꼭 군것질하는 것 같은 이런 디저트류를 제 돈 주고 사 먹는 성향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달달한 간식을 잔뜩 주문한 건, 순전히 모카칩 프라푸치노를 좋아하는 피의자의 취향에 맞춘 것이었다.

조금 전, 인터넷으로 특보 기사가 뜨기 시작했다.

유치장에서의 상황을 전해 들으니 소속사와 매니저가 연락이 닿질 않는다고 했다. 첫 속보부터 그 흔한 ‘L 양’도 아니고 바로 실명으로 기사가 나간 걸 보아 소속사에서는 이미 손절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본인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지금쯤 심적으로 아주 불안하고 두려운 상황일 게 분명했다.

피의자와의 라포르 형성을 위해 신문 중에 음식을 제공하는 것은 수사에 있어서는 고전 중의 고전이었다. 사람은 먹을 것을 받아먹으면 응당 마음이 약해지기 마련이었다. 옛날이야 국밥, 짜장면이었다지만 요즘은 피자, 치킨, 배달만 되면 무엇이든 가능했다. 여기에 경찰이 조금만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면 초범자의 경우 열에 아홉은 수사에 협조적으로 바뀌었다.

거기다 마약 중독자들은 약 기운이 도는 동안은 흥분감에 취해 식욕을 전혀 느끼지 못하다가, 약발이 떨어지고 나면 엄청난 허기에 시달리곤 했다. 첫 투약이 아니고서야 이아영도 그럴 가능성이 농후했다.

아니나 다를까 커피와 케이크에 이어, 마카롱까지 남김없이 털어먹은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이야기를 터놓기 시작했다.

스무 살 갓 넘어 데뷔한 이아영은 긴 무명 생활을 보냈다.

5년, 연기를 해 보겠다고 이 악물고 버틴 게 자그마치 5년이었다. 어릴 때부터 예쁘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외모도 이 바닥에서는 그다지 빛을 발하지 못했다. 수십 번, 수백 번 반복되는 오디션에는 이미 내정자가 있는 경우가 허다했고, 작은 단역조차도 돈이든 빽이든 뭐라도 가져다 대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일거리는 없으나 투자는 계속되어야 했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경제적으로 궁핍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소속사 사장은 물론이고 가족들마저 저를 식충이 취급하자 더는 그들을 볼 낯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른 길로 진로를 바꿀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

그러던 와중 예지희가 불러 나간 술자리에서 천종윤을 만났다. 그리고 그다음 날, 천종윤은 비서를 통해 스폰을 제안해 왔다. 처음에는 스폰이라는 것이 겁이 나고 꺼림칙해 만남을 거절했는데, 한 달에 한두 건 겨우 있을까 말까 한 보조 모델 일자리마저 잃고 나서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천종윤과 만나 약을 하고 관계를 맺으니 난데없이 선광 코스메틱의 광고 모델 제의가 들어왔다. 만남을 지속하면 지속할수록 의류, 음료, 생활용품까지 광고 계약 범위가 늘어났고, 머지않아 예능, 드라마 섭외로까지 이어졌다. 그야말로 하늘에서 황금 동아줄이라도 내려온 기분이었다.

천종윤과 함께하니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소속사의 대우가 달라지고, 방송사의 대우도 달라지더니, 급기야는 가족들조차도 저에게 쩔쩔맸다.

이렇게나 쉬운 일이었다, 성공이라는 것이.

약 한 번에 섹스 한 번으로 돈도, 인기도, 사람도 모두 제 발밑에 둘 수 있었다. 그러니 이아영은 동아줄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한번 맛본 하늘 위는 너무나도 달콤했고 황홀했기에. 그 동아줄이 제 인생을 갉아먹는 썩은 동아줄이라는 것도 모르고.

“…….”

“…….”

마약 투약에 이어 본인의 성매매 사실까지 고스란히 밝힌 피의자에 선우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천종윤과 약을 하고 성관계를 맺는 대신 광고나 방송 출연 제의를 받았다는 말씀이신 것 같은데. 제가 맞게 이해했나요?”

조금 주저하던 이아영이 말없이 끄덕였다. 제 입으로 말하고 보니 이제서야 잘못된 일인 줄 깨달았는지, 그녀는 곧 고개를 푹 숙였다.

“……약은 어디서 구했어요?”

“……몰라요.”

“…?”

진술서를 작성하던 선우가 자판 위에 그대로 손을 멈추고 이아영을 쳐다보았다. 의심쩍은 눈초리에 이아영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정말이에요! 진짜 몰라요. 약은 천종윤이 알아서 구해 왔어요. 주사도 다 그 자식이 놓아서 전 무슨 약인지도 사실 정확히 몰랐어요. 그냥 맞으면 일단 기분 좋으니까…….”

토독토독.

아까 그 부드럽고 따뜻한 커피 모델은 어딜 가고, 심각한 표정으로 노트북을 두들기는 차가운 형사님만 남아 있었다. 이아영은 눈치를 보다 조심스레 물었다.

“혀, 형사님……. 저어, 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말씀하신 내용 바탕으로 사건 정리해서 검찰에 넘길 거예요. 중간에 추가로 조사가 몇 번 더 이뤄질 수도 있고요. 남겨 주신 연락처로 진행 상황 알려 주는 안내 문자가 갈 겁니다.”

선우는 노트북에서 눈과 손을 떼지 않은 채 사무적으로 응답했다.

“어……. 검찰에 넘기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

“…….”

“재판, 받으셔야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이아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하늘이라도 무너질 듯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은 그녀가 곧 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형사님, 저 진짜 억울해요. 다 그 새끼가 하자고 한 건데. 안 걸린다고, 절대 안 걸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어요. 약도 처음엔 하기 싫다고 했는데 억지로 놓았어요. 정말이에요…….”

“…….”

이아영이 천종윤과 관계를 이어 간 것이 수개월. 그동안 무수히 많은 성 접대와 불법 투약이 있었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았다. 이걸 천종윤만을 탓할 수가 있을까.

연예계가 인기 없는 연예인에게 얼마나 냉정하고 가차 없는지는 선우도 시헌을 통해 들은 바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한 행동이 정당화될 수는 없었다. 정당화되어서도 안 됐다.

“힘들었던 상황은 이해합니다만,”

선우가 목을 한 번 가다듬고 입을 떼자, 눈물 가득한 큰 눈이 눈을 마주쳐 왔다. 무언가가 원망스러운 표정이었다.

“그 상황에서 모두가 이아영 씨와 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아요.”

담담한 어조에 이아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질끈 감은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토독토독.

진술실 안은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남았다.

* * *

이아영의 조사를 마치고 늦은 아침 겸 이른 점심을 먹은 선우가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한창 진술실에 있을 박민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유인즉슨, 박민호가 조사를 맡은 홍성민이 저를 애타게 찾고 있다는 것.

- 곧 변호사가 오기로 해서 기다리는 중인데. 어떻게, 한번 와 볼래? 내키지 않으면 무시하고.

시계를 보니 12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선배님. 식사는 하셨어요?”

- 아니, 식사는 무슨. 바빠 죽겠는데 식사할 겨를이 어딨냐.

제 예상대로 그는 식사도 거른 채 일하는 중이었다.

“그럼 지금 하고 오세요. 그동안 제가 잠깐 얘기하고 있을게요.”

- 어, 그럴래?

마침 허기가 졌던 박민호는 선우의 제안을 반갑게 받아들였다. 선우는 그 길로 홍성민이 앉아 있는 진술실로 가 박민호와 교대를 하였다.

“형, 안녕하세요.”

진술실 문을 닫으며 선우가 밝게 인사를 건네자, 홍성민이 낮게 욕을 지껄였다. 부리나케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선우에게 성난 황소처럼 달려들었다. 수갑이 채워져 있는 두 손으로 선우의 멱살을 잡고 벽에 쾅 밀치자 선우의 입에서 억,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경찰? 경찰! 너, 이 씨발 새끼! 날 속였어!”

핏대가 잔뜩 선 두 눈이 선우를 한껏 노려보았다. 손에 쥔 멱살을 홍성민이 거세게 흔들자 손목에 걸린 수갑이 찰랑찰랑 경쾌한 소리를 냈다.

당장에라도 저를 잡아먹을 것처럼 구는 남자에도 선우는 동요하지 않았다. 선우는 시선을 내리깐 채 시뻘건 눈을 마주했다.

“너도 나 속였잖아.”

차분하고 당당한 태도는 홍성민의 성질을 더 돋우었다.

“뭐? 이 개새끼가. 내가 너 함정 수사로 고소해 버릴 거야.”

“함정 수사라니. 홍 실장님. 그날 약하러 오라고 나 초대한 게 누군지, 기억 안 나?”

퍼억. 화를 참지 못한 홍성민이 결국엔 선우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애초에 피할 생각이 없었던 선우는 날아오는 주먹을 그대로 맞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순식간에 입가와 볼에 뜨끈하게 열이 올랐다. 입술 끝이 언뜻 찢어진 것 같기도 했으나 굳이 확인하지는 않았다.

홍성민을 직접 체포하고도 선우가 이아영의 신문을 맡은 건, 마음이 편해서일지 여성 피의자들이 한선우 경위 앞에서는 홀린 듯이 범행 사실을 줄줄 토해 내는 이유도 있었지만, 이럴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때마침 진술실로 들어오던 변호사가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상황 파악을 하느라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 변호사를 선우가 한 번 올려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옷을 툴툴 털었다.

“홍성민 씨 변호 대리인 맞으시죠? 앉으세요.”

손을 들어 자리를 안내한 선우가 저는 맞은편 의자로 가 앉았다.

“너도 앉아.”

“근데 이 새끼가 자꾸 말이 짧다?”

“야, 뽕쟁이.”

뭐? 이 씨발 새끼가? 기가 머리끝까지 찬 홍성민이 발을 쿵쾅거리며 선우에게 다가갔다. 또 한 번 주먹을 날려 줄 요량으로 손을 높이 들자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앉아. 강간 미수에 공무원 폭행 혐의까지 얹기 전에.”

아직도 앉지 못하고 서 있는 변호사의 얼굴이 금세 새파랗게 질렸다.

“이, 이익!”

빠드득, 홍성민이 옆 사람에게 들릴 정도로 세게 이를 갈았다. 쭉 째진 눈으로 변호사의 눈치를 본 홍성민은 주먹을 부들부들 떨어 대다 곧 슬그머니 팔을 내렸다.

* * *

이런 일이 익숙한 듯, 변호인은 홍성민을 능숙하게 다루었다. 현장 체포되었고 아직 집행 유예 기간이니 최대한 수사에 협조해서 감형을 받아 보자고, 변호인은 침착하게 그를 설득했다. 그 덕에 현실을 파악한 것인지, 홍성민도 그 이후로는 비교적 성실하게 조사에 임했다.

4시간여에 걸친 조사를 마치고 박민호가 진술서를 마무리했다.

‘약은 어디서 났어?’

‘다 알고 있으면서 뭘 물어요. 문태성 무서워서 누가 거기다 약을 대. 뒤질 일 있나.’

피의자 신문을 지켜보던 선우는 홍성민의 진술에 한껏 들떴다. 드디어 공식적인 루트로 문태성을 소환할 방안이 생긴 것이다.

블루문에서 그 일을 겪은 뒤로 선우는 어떻게든 그자를 조사실에 앉히고 말겠다고 마음먹었다. 야차 같은 얼굴을 하고 사람을 농락하는 것이 그의 방식이라면 제 방식은 이거였다. 당신이 저지르고 있는 범법 행위에 대해 조사와 그에 따른 정당한 처벌을 받기를.

흥분되는 마음을 애써 가다듬으며 선우는 사무실로 들어섰다. 마침 최대영이 저를 급히 찾고 있었다.

“팀장님, 홍성민이 상선6)으로 문태성을 지목했습니다!”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해 봐도 한 톤 높아진 목소리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네?”

“한 경위, 너 얼른 정리하고 따라 나와.”

최대영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청장님이 보자신다.”

* * *

2021년 6월 6일 18시경

서울특별시 종로구 북악산 중턱

“어, 왔네. 어서들 와.”

아, 맙소사…….

좌우로 열린 창호문 앞에서 선우는 더 이상 한 발자국도 뗄 수가 없었다. 스르륵 벌어진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은 것을 선우는 억지로 삼켜 내야 했다.

최대영과 선우를 반갑게 맞이한 것은 김경택 경찰청장이었다. 선우의 마약수사대가 속한 서울경찰청의 장이 아니라, 치안총감7) 김경택.

선우는 최대영이 말하는 청장이 당연히 서울청의 고희수 청장인 줄로만 알았다. 최대영은 그래도 연에 한두 번쯤은 서울청장의 부름을 받았기에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서울청장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제게는 엄청난 일이었기에 언감생심 김경택 청장과의 대면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하물며 새 경찰청장이 취임한 이래, 그의 실물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애써 누른 탄식은 청장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김경택과 마주한 자리에는, ‘그’가 있었다.

어리석게도 선우는 방금까지만 해도 조금 설레어 있었다. 최대영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까마득히 높은 상사가 이름조차 모를 한참 밑의 부하까지 챙겨 부를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아마도 이번 사건에 대해 전해 듣고 저희 팀을 독려하고 사기를 북돋아 주시려는가 보다, 그런 바보 같은 생각으로 그만 마음이 들떠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남자를 발견하고 선우는 순식간에 흙탕물을 뒤집어쓴 기분이 되었다.

선우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이러니 제가 무슨 영화 속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지 않은가. 비리 경찰 내용을 다룬 범죄 영화 속 주인공.

아니지, 한선우는 주인공을 빛내 주는 조연에 불과했다. 현실에서의 주인공은 그일 테니.

겨우 정신을 다잡은 선우가 최대영의 뒤를 따랐다. 먼저 방 안으로 들어선 최대영이 김경택의 옆자리에 앉는 바람에 남은 빈자리는 하나가 되었다. 차갑게 내려앉은 표정으로 선우는 남자 옆에 자리했다.

곧이어 최대영과 선우의 앞에 푸짐하게 차려진 한식 한 상이 놓였다. 놋그릇 위로 찬란한 오색 빛깔의 음식들이 저마다 먹음직스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으나, 찬이 어떻고 국이 어떤지 선우는 감상할 의지가 전혀 없었다.

내비게이션에 안내가 나온다는 것이 신기할 만큼 깊은 산중에 있는 한옥집. 고층 빌딩으로 둘러싸인 종로 시내를 거쳐, 굽이굽이 좁은 도로를 지나, 우둘투둘한 돌길 위를 달려온 곳이 그를 만나는 자리였다. 이 얼굴을 마주하려고 기껏 날밤 새워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무언의 압박을 듣기 위해.

그런 생각을 하자니 음식을 보는 것만으로도 목구멍에서 신물이 올라올 것 같았다.

“우리 마수대 식구들이 워낙 고생하니까, 내가 밥 한 끼 먹이려고 불렀지. 최 팀장네가 이번에 큰 건 하나 한 것 같던데? 고생 많았어, 편히들 식사해.”

김경택이 먼저 젓가락을 들었다.

“아, 소개가 늦었네. 여기는 문태성 대표. 알지? 문호. 뭐, 문 대표야 워낙 유명인이니까.”

선우가 고개를 들어 옆에 앉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청장의 소개에 그는 옅은 미소로 응답했다. 본성을 감추는 데 능한 남자는 오늘은 건실한 청년 사업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쪽은 서울청 마수대 최대영 팀장, 그 밑에 한선우 경위. 최 팀장네가 아마 작년도 마수대 검거율 1위였지?”

“…….”

“…….”

청장의 소개에 선우는 이내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제 앞에 앉은 최대영의 얼굴에 그늘이 한껏 내려앉아 있었다. 선우는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제 얼굴 역시 그러하리라는 것을.

“마침 이 근처에 있다기에 내가 식사라도 같이하자고 불렀어. 인사 나눠. 젊은 친구들끼리니 한 경위랑은 말이 더 잘 통하겠네.”

옆에서 저를 보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선우는 눈길을 외면한 채 제 앞에 놓인 상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문태성 대표와의 식사 자리에 저희를 부른 것은 무슨 의도인가. 이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그 뜻을 입에 담지 않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이미 알고 있었다.

무려 경찰청장을 뒷배로 둔 자를 체포하려 했으니 저희가 얼마나 어리석고 바보 같아 보였을까. 자신을 노리는 형사를 보고자 벌건 대낮에 청사까지 찾아왔던 그의 자신감이 이제야 이해되었다. 허탈감과 자괴감, 부끄러움과 당혹스러움, 온갖 불편한 감정들이 한데 뒤엉켜 선우를 괴롭게 했다.

“문 대표가 사람이 참 괜찮아. 요즘 젊은이들답지 않게 진중하고, 윗사람 위할 줄도 알고.”

“과찬이십니다.”

남자의 눈가가 사르르 접히니, 볼에 자리한 보조개가 깊게 패었다.

“먹어. 왜 다들 가만히 있어.”

김경택이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하자 최대영과 문태성도 이어 수저를 들었다. 놋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찬찬하게 울렸다. 그러나 오기가 생긴 선우는 미동 없이 음식만 노려보았다. 그러다 가슴속에서 올라오는 치기를 참지 못하고 그만 입을 열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이 식사… 청탁금지법에 위반되는 것 아닙니까?”

방 안에 한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었으나, 저를 쳐다보는 세 명의 시선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눈초리에 가시가 달린 것도 아닌데, 선우는 온 얼굴이 다 따끔거려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잠시 후, 김경택이 별안간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의아함에 선우가 슬그머니 고개를 드니, 남자 또한 한쪽 입가를 끌어올린 채 웃고 있었다. 입매만 보면 꼭 비웃는 것 같기도 했으나, 유려하게 휘어진 눈매에도 역시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우리 한 경위가 오해를 해도 단단히 한 것 같은데, 오늘은 내가 사는 거야. 내 식구 내가 밥도 못 사 먹이나? 그런 건 걱정하지 말고 어서 편하게 먹어.”

시원하게 한바탕 웃고 난 김경택이 옆에 있던 백자 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자, 한 잔씩 받아.”

최대영이 먼저 술잔을 들었다. 조금 머뭇거린 선우도 이어 두 손으로 술잔을 받쳤다. 주전자와 같은 결의 백자 술잔에 맑은 인삼주가 담겼다.

“한 경위 같은 경찰만 있으면 내가 더 걱정할 일이 없겠어.”

청장의 칭찬에 선우의 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저의 얄팍한 반항심이 몹시도 부끄러워졌다. 미간을 조금 찌푸린 채, 선우는 아무도 없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손에 들린 인삼주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씁쓸한 맛이 딱 제 마음과도 같았다.

숨 막히는 식사 자리는 계속되었다. 물론 선우에게만 해당하는 말이었다.

김경택과 문태성은 편안히 일상적인 이야기를 이어 갔고, 최대영이 간간이 대화를 거들었다. 선우는 대화에 끼고 싶지 않았고 또 낄 만한 주제도 못 되었다. 눈앞에 펼쳐진 산해진미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그저 의미 없는 턱관절 운동만 반복하고 있을 때였다.

50대 중년 남성과의 대화가 으레 그렇듯,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레 ‘골프’로 넘어갔다.

“올해는 장마도 길다는데, 날씨 더 더워지기 전에 필드 한번 나가셔야죠.”

윗사람을 위할 줄 아는 진중한 젊은이가 김경택에게 살갑게 제안했다.

“어, 어. 그래야지. 한선우, 공 좀 치나?”

“…….”

선우의 젓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제게 묻는 말이 맞는지 확신이 들지 않아 선우는 대답을 주저했다. 혹시 최대영에게 물으려다 제 이름을 잘못 말한 것은 아닐까. 고개를 드니 김경택이 시선을 보내오기에 정말로 저에게 물은 것임을 깨달았다.

“……아뇨. 할 줄 모릅니다.”

“잘됐네. 문 대표가 알려 주면 되겠어. 이 친구 실력이 아주 기가 막혀, 웬만한 프로 뺨친다고. 나중에 기회 되면 이 멤버로도 필드 한번 같이 돌면 좋겠네.”

“청장님 선호하시는 코스로 조만간 일정 잡아 보겠습니다.”

“…….”

선우는 순간 저도 모르게 콧방귀를 뀔 뻔했다. 도대체 어느 신입 경위가 감히 치안총감과 함께 골프를 친단 말인가. 듣도 보도 못한 소리였다. 까마득한 상사의 의도를 알 수 없는 사탕발림에 선우는 심보가 뒤틀리려 했다.

한참 시간이 흘렀을까, 식사를 어느 정도 마친 듯한 남자가 셔츠 소매를 살짝 걷어 시계를 보았다.

“청장님. 식사 중에 죄송하지만, 다른 일정이 남아 있어서 먼저 일어나 봐야겠습니다.”

“어어, 그래. 내가 괜히 바쁜 사람을 붙들고 있었네. 이만 가 봐.”

모두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넨 뒤, 남자는 방을 나섰다. 이번에도 그가 남기고 간 자리는 참으로 깔끔했다. 음식을 먹다 흘린 흔적도 없었고, 남긴 음식조차도 흐트러짐 없이 정갈했다. 이쯤 되면 결벽증 환자 아닌가. 심통이 난 선우가 괜히 입을 삐죽거렸다.

그의 발걸음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때쯤, 김경택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최대영. 일 크게 만들지 마.”

김경택은 제 술잔에 직접 인삼주를 따르며 말했다. 단호한 지시에도 최대영이 아무 대답이 없자 김경택이 뒷말을 덧붙였다.

“네가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는데. 개고생 다 해 놓고 이제 와서 한 방에 무너뜨릴래? 경찰 그만두고 싶어?”

그러고는 최대영의 빈 잔에도 술을 채워 넣었다.

“이거 아니래도 할 일 많잖아? 안 되는 일에 괜히 힘 빼지 말자고.”

“…….”

하늘같이 높은 상사는 고개 숙인 부하들을 향해 혀를 찼다.

“쟤네들이 일 년에 내는 세금만 얼만 줄 알아? 저런 애들이 잘돼야 우리 같은 사람들도 맘 편히 나랏돈 받고 사는 거야. 큰일 하는 사람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우리가 방해해서야 되겠어?”

김경택이 최대영의 어깨를 달래듯 도닥였다.

“최 팀장네 인사 고과는 최대한 신경 쓰라고 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선우가 팀장의 낯빛을 조심스레 살폈다. 일개 팀원인 저도 이렇게 분하고 답답한데, 하물며 어린 팀원 앞에서 이런 상황을 겪는 팀장의 마음은 얼마나 쓰릴까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불똥이 선우에게로 튀었다.

“한선우. 넌 인마, 아버지 일 생각하면 네가 그러고 다니면 안 되는 거야.”

“……네?”

느닷없는 아버지 얘기에 선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김경택이 손을 들어 제 잔에 든 술을 쭉 들이켜고는 잔을 내려놓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아버지 따라 경찰이 된 건 참 기특한 일이긴 하다만… 아직도 내부에는 그때 일로 마음이 편치 않은 사람들이 있다고. 그 사람들 생각하면 네가 이렇게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 되겠냐 이 말이야.”

“…….”

“얌전히 지내, 얌전히.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보여도 다들 뒤에서 지켜보고 있으니까.”

“…….”

김경택의 말에 선우는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양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딘가 언짢은 표정을 한 김경택은 차분하게 그리고 엄숙하게 자신의 부하들에게 경고했다.

“둘 다 잘 들어. 난 경찰 내에서 또다시 그런 불미스러운 일 일어나는 거 정말 원치 않아. 적어도 내 임기 중에는 그래. 그러니 우리 부디 조용히 지내자고.”

불미…스러운 일?

청장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선우의 목이 고장 난 기계라도 된 것처럼 삐거덕거렸다.

당신이 말하는 그 불미스러운 일이라는 게 내 아버지의 사고를 의미하는 건가? 제대로 듣고 맞게 이해를 한 건지, 선우는 제 귀와 머리를 의심했다. 순간 옆구리와 팔 안쪽에서부터 불쾌한 전율이 흘렀다.

한선우가 한재민 경감의 아들임을 아는 수뇌부 중에 저를 못마땅히 여기는 이들이 있다는 건 선우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한재민의 사고가 경찰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선우는 더 바르게 행동하고 착실하게 생활했다. 모나지 않게, 다른 이들의 눈 밖에 나지 않게. 제 아버지를 욕보이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래 봐야 그들에게는 아버지의 죽음이 그저 불미스러운 일이고, 저는 그 불미스러운 일을 떠오르게 하는 불편한 존재인 줄도 모르고.

불현듯 밀려오는 비참함에 식탁 아래 놓인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제 의지로는 떨림을 주체할 수가 없어 선우는 두 손을 꾸욱 맞잡았다. 열 손가락 끝이 어느새 얼음장같이 차가워져 있었다.

숙연해진 부하들을 향해 김경택은 흠흠,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는 돌연 부스스 몸을 일으키더니,

“밥도 제대로 못 먹은 것 같으니 자리 피해 줄게. 편히 먹고 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최대영과 단둘이 남은 방 안은 적막으로 가득 찼다. 둘 중 누구도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각자가 분통했고, 서로가 안쓰러웠다.

최대영은 테이블 모서리에 달린 호출 벨을 눌렀다. 벨이 울리기가 무섭게 직원이 방문을 열었다.

“소주 있으면 두 병만 주십시오.”

곧 직원이 소주병과 잔을 내어 오자 최대영은 말없이 병을 따 자작을 했다. 우두커니 그 모습을 지켜보다, 선우도 곧 제 잔에 소주를 따랐다. 맨정신으로 있는 것이 견딜 수 없이 괴로워 목구멍으로 술을 털어 넘겼다.

알코올이 맴도는 입안이 몹시도 썼다.

* * *

이후, 소주 세 병을 더 시켜 최대영과 나눠 마셨다. 소주 두 병이 최대 한계치인 선우에게는 주량을 꽉 채우고도 남는 양이었다.

바로 이 앞이 집이건만 오늘따라 길이 멀었다. 비척비척 힘없이 걷는 몸이 길 위에서 갈지자를 그려 댔다. 눈앞이 어찔어찔하니 하늘은 빙그르르 돌고, 땅은 꿀렁꿀렁 위아래로 요동을 쳤다. 속에서 욕지기가 올라 배 속을 한바탕 게워 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어제부터 선우는 눈 한 번을 제대로 붙이지 못했다. 현장 출동과 이어지는 긴 조사로 몸이 충분히 고된 상태였는데, 거기에 술까지 진탕 퍼붓고 나니 이제는 아무 길바닥에 누워 그대로 잠이 든대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곧장 침대로 가 두 발 뻗고 잠이나 자야지, 선우는 그렇게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나, 고단한 몸을 이끌고 겨우 도착한 집 앞에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낡은 아파트와는 어지간히도 어울리지 않는 손님의 방문에 선우는 그득하게 취한 술이 홀딱 깨는 듯했다.

건물 입구에 선 남자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까지도, 선우는 제가 너무 취한 나머지 다른 이를 남자로 착각한 것이기를 바랐다. 그게 아니라면, 제가 아닌 다른 일로 이곳에 온 것이기를 또 바랐다.

오늘은 더 이상 누군가를 상대할 기력이 남아 있질 않았다. 그 누군가가 ‘그’라면 더욱더.

“늦었네요.”

“…….”

차라리 술을 더 마셨더라면 길바닥에 주저앉았을지언정 남자를 알아보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무심코 얕은 한숨을 내뱉은 선우가 남자를 못 본 척, 그냥 지나쳤다.

터덜터덜 느리게 걷는 선우의 팔이 별안간 커다란 손에 턱, 하고 채였다.

“차 한잔 얻어먹으려고 왔는데.”

염치없는 손님의 요구에 선우는 인상을 찡그린 채 잡힌 팔을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이내 남자를 향해 몸을 돌려세우고 있는 힘껏 그를 노려보았다.

“…바쁘신 분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내가 바빠요?”

그런 선우의 눈을 남자는 진하게 응시해 왔다. 도리어 본인의 상태를 되묻는 그를 향해 선우는 기가 찬 숨을 뱉었다.

“다른 일정이 있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요.”

“왔잖아요. 다른 일정.”

“…….”

애초에 저를 만나러 온 것이 정해진 일정이라고 말하는 이에 선우는 말문이 막혔다.

“늙은 여우 비위 맞추느라 한 경위랑 대화를 못 해서.”

팔을 잡아챈 손에 서서히 힘이 풀리자, 선우의 팔이 스르르 힘없이 떨어졌다.

“아쉽더라고.”

지그시 눈을 맞춘 남자가 양 입가를 깊게 끌어 올렸다. 짙은 미소를 바라보다 돌연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선우는 그만 두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취기가 오른 선우는 오로지 바닥만 보고 서 있었고, 벽을 기대고 선 태성은 그런 선우의 옆모습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필요한 것만 갖춘 집은 주인을 닮아 아담하고 깔끔했다. 선우의 집을 휘이 둘러본 태성의 감상이었다.

느릿느릿 부엌으로 향한 선우는 찬장을 열어 보았다. 커피믹스 몇 개를 제외하고는 손님 대접할 거리가 마땅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선우 혼자 사는 집은 일이 바빠 거의 잠만 자는 공간이 된 지 오래였다.

혹시나, 하고 그 옆 찬장을 열어 보다가 문득 든 생각에 선우는 움직임을 멈췄다.

아니,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야. 배알도 없지. 지금 제가 차를 내어 주게 생겼느냐고.

“드릴 만한 차가 딱히 없어요. 커피라도 드릴까요?”

한숨을 폭 내뱉고 이어진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차는 핑계예요. 앉아요.”

등 뒤에서 들리는 말에 선우가 뒤를 돌아봤다. 도대체 언제 부엌으로 들어온 건지 그는 이미 식탁에 앉아 있었다. 선우가 큰 눈을 껌뻑, 감았다 뜨자 남자가 턱짓으로 제 앞을 가리켰다.

선우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 되었다. 다시 찬장을 바라보고 선 선우가 술이라도 깨 보고자,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고는 컵 두 잔을 꺼내 물을 따랐다.

물 두 잔 중 한 잔은 손님 앞에 내려놓고, 나머지 한 잔은 손에 쥔 채 그의 맞은편에 선우가 앉았다. 작은 식탁에 장신의 남자와 마주 보고 앉으니 서로의 무릎이 스치듯 맞닿았다. 옷감을 사이에 두고 느껴지는 촉감이 간질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오금에 살짝 소름이 돋는 것 같기도 했다. 선우는 신경이 자꾸 그쪽으로 쏠려, 몸을 뒤로 무를까 하다가 그게 더 그를 의식하는 것 같아 그냥 두고 말았다.

태성은 제 앞에 처연하게 앉은 집 주인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밖에서는 주위가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는데, 엘리베이터에서부터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와 볼이 눈에 밟혔다. 식사 때부터 거슬린 상처도 여전했다.

“누가 그랬어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선우가 고개를 들었다. 남자와 눈을 마주하자 그는 본인의 입가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아……. 그제야 말뜻을 이해한 선우가 손을 들어 제 입가를 매만졌다. 일이 바빠서 잊고 있었는데, 홍성민에게 맞은 자리가 찢어져 그새 딱지가 지려 했다.

“그 얼굴에 그런 상처 달고 다니는 건 반칙인데.”

손바닥에 턱을 괸 남자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저를 놀리려는 의도는 분명한 것 같아 선우는 조금 불쾌해졌다.

그래서 부러 딱 잘라 물었다.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태성은 질문에 답하는 대신 재킷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이어 그는 불을 붙이려 지포 라이터를 열려다 “아.”, 무언가 생각난 듯 하던 행동을 멈췄다. 그러고는 집주인의 허락을 구할 용의로 라이터를 살짝 들어 보였다.

“……재떨이가 없어서요.”

선우의 대답에 태성이 눈썹을 사뿐 올렸다 내렸다. 이내 입에 문 담배를 빼낸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라이터와 담배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는데 무시할 수가 있어야지.”

“……무슨….”

고운 미간을 살짝 구기고, 선우가 의아한 표정을 했다. 선우는 아까부터 한 번에 알아듣기 힘든 남자의 말이 답답했다.

“애처롭게 보잖아, 한 경위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아까와는 반대쪽 손을 들어 손등에 얼굴을 괸 태성이 선우의 눈을 뚫어질 듯 쳐다봤다.

“그게 사람 꼴리게 하는 줄도 모르고.”

적나라한 시선을 보내며 비식, 웃는 남자에 선우가 얼굴을 와그작 찡그렸다. 불현듯 슬쩍 닿은 무릎이 불쾌해, 선우는 다리를 뒤로 바짝 빼냈다. 그 행동에 태성이 큭큭대며 소리 죽여 웃었다.

“내가 무서워요?”

“아니요.”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걸고 묻는 태성에 선우는 여전히 인상을 쓰고 대답했다.

“오.”

선우의 대답이 아주 의외라는 듯, 태성은 짐짓 감탄을 했다.

“무서운 분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시시한 분이셔서요.”

그동안은 뭔가 대단한 사람인 줄 알고 지레 겁을 먹었는데, 결국은 당신도 똑같다고. 그렇고 그런 뒷공작이나 펼치는 시시한 사람일 뿐이었다고. 그래서 다시는 당신을 무서워할 일은 없을 거라고.

태성을 똑바로 마주한 두 눈은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맹랑한 대꾸를 하고, 선우는 차갑게 눈을 내리깔았다. 기다란 속눈썹이 눈 아래로 어두운 음영을 드리웠다.

태성은 생각지 못한 공격에 순간 멈칫했다. 그러다 뾰로통하게 튀어나온 입술을 보고 그만 웃음이 터져 그대로 소리 내어 웃었다.

“아, 나보고 시시하다고 한 사람은 또 한 경위가 처음이네.”

만족스럽다는 듯 한바탕 크게 웃은 태성이 곧 자세를 바로 세웠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팔짱을 끼자 금세 거만한 자세가 완성되었다.

“블루문 건은 홍성민 선에서 대충 정리합시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서는 웃음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목소리에도 예의 그 살벌한 기운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술에 취한 선우는 겁이 조금 없었다.

“제가 대표님 지시를 따라야 합니까?”

되바라지게 묻는 이를 향해 태성이 코웃음을 쳤다.

“그럼, 다른 방도 있어요? 백날 잡아다 머리카락 자르고 피 뽑아 봐야 소용없을 텐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동그랗게 뜬 눈에 불쑥 강한 흡연 욕구를 느낀 태성은 식탁에 내려 두었던 담배 한 개비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는 담배를 입에 무는 대신 필터 끝을 세워 식탁 위를 톡, 톡, 톡, 두드렸다.

“검사에서 마약이 검출될 일은 없다고.”

엉뚱한 남자의 말에 선우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쳤다.

“그럴 리가요. 홍성민만 해도 필로폰에 양성 반응이,”

“이것저것 되는대로 섞어 하는 놈들이야 내 알 바 아니고.”

“……?”

순간, 선우의 머릿속에 조금 낯선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에퀴스….”

혼잣말을 하듯 조용히 꺼내 놓은 말에 태성이 짙은 눈썹을 으쓱 들었다 내렸다. 담배 끝으로 식탁을 두드리던 손짓도 그만 뚝, 움직임을 멈췄다.

“신종…인가요…?”

“뭐, 비슷해요.”

역시……. 선우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졌다. 머릿속을 꽉 메우고 있던 술기운이 순식간에 달아나 버렸다.

에퀴스라는 생소한 이름을 들었을 때, 마약 1팀 또한 그것이 신종 마약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신종 마약은 일반적인 마약 검사로는 투약 여부를 확인할 수 없고, 마약류로 지정되어 있지 않으니 마약류관리법 위반으로 형사 처벌을 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만일 체포한 피의자들의 검사 결과에서 마약류가 검출되지 않는다면, 재빠르게 정밀 검사로 그 물질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임시 마약류 지정8) 요청까지 하려고 계획을 모두 짜 둔 상태였다.

그러나 홍성민이 에퀴스를 필로폰이라 지칭하였고, 실제 검사 결과에서도 피의자의 반 이상이 필로폰이나 허쉬에 양성 반응을 보였기에 팀원들도 에퀴스를 필로폰으로 인지하고 이후의 절차는 밟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당장 출근하는 대로 제가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정리하는 선우를 두고 태성은 말을 이었다.

“임시로 지정하는 것도 별로 의미는 없어요.”

“……?”

“마약류든 임시든 지정해 봐야 에퀴스는 다른 약물로 바꾸면 그만이니까.”

“……바꾼…다고요?”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얼굴에 의문을 담은 선우를 향해 태성은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아직 세상에 내놓은 적 없는 다른 물질로. 그러니까 그게 언제가 됐든, 당신들이 찾는 에퀴스는 이미 시중에 없을 거란 얘기야.”

“……허.”

“술래잡기가 취미면 계속 해 보든가.”

잡아도 잡아도 끝나지 않을 술래잡기.

당신이라는 작자는 도대체…….

선우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안 걸린다고, 절대 안 걸리니까 걱정 말라고 했어요.’

문득, 조사실에서 억울하다며 외친 이아영의 말이 떠올랐다.

“……천종윤은 알고 있었나요?”

태성은 눈을 한 번 깜박이는 것으로 긍정했다.

“홍성민만큼 멍청한 놈은 아니라.”

“…….”

선우가 낮게 침음했다. 남자를 마주할 때마다 느끼던 묘한 위화감의 정체를 이제야 깨달았다. 그의 꼬리를 잡은 건 분명 저인데, 마치 제가 그가 쳐 둔 덫에 걸린 기분이었다.

이 남자는 뒷일을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는 걸까. 어쩐지 범법 행위를 일삼고도 행동이 뻔뻔하고 주저가 없더라니. 경찰보다 몇 수는 더 앞을 보고 있는 그에게 무작정 덤벼든 저희가 어리석고 무모했다.

선우는 갑자기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어깨를 추욱 늘어뜨린 선우 앞에 팔짱을 낀 태성이 상체를 살짝 숙였다.

“설마하니 당신네들 출동하는 걸 내가 몰랐을까.”

“……!”

평온한 목소리 어딘가에 스산한 기운이 묻어났다. 동그란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휘둥그레지자, 태성이 웃으며 몸을 뒤로 물렀다.

“한 경위가 고생 많이 했는데, 그래도 실적 하나는 채워 줘야겠더라고.”

“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선우의 얼굴이 볼만했다. 시뻘게졌다 새파래지기를 반복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무언가를 상실한 사람처럼 굴었다.

“그렇게 절망적인 표정 지을 거 있어요?”

‘미지수’, ‘미지의 것’.

‘에퀴스(Equis, X)9)’는 그런 의미였다.

존재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약물.

존재가 알려지면 곧바로 세상에서 사라질 물질.

문태성 사단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후보 물질 중 어떤 것이 에퀴스의 이름을 달고 유통되는지는 알려질 일이 전혀 없었다. 완제품의 정보를 온전히 아는 것은 태성과 연구소장, 단둘뿐이었으므로.

그것이 태성이 마약 사업을 영위하고, 고객을 보호하는 동시에, 법을 거스르지 않는 가장 탁월한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애먼 데 힘 빼지 말라고 충고나 해 주려고 왔더니, 이렇게 세상 다 잃은 것 같은 표정을 지을 건 또 뭔가. 어차피 구제 불능인 약쟁이들인데 뭐 때문에 이렇게 필사적인 건지.

태성이 쯧, 하고 혀끝을 찼다.

“날 잡아넣으면 뭐가 달라질 것 같아요? 내가 아니어도 약쟁이들은 어떻게든 약 해요.”

선우는 이제 거의 울상이었다.

“나쁜 놈들은 나쁜 놈들끼리 상대하게 두고, 한 경위는 착한 사람들 지키는 일 하세요. 질 안 좋은 놈들한테 얽혀서 자꾸 더러운 꼴 보지 말고.”

충고라기보다는 조언에 가까운 말투였다.

“……굳이 여기까지 오셔서… 제게 이런 얘기를 다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선우가 괴로운 얼굴을 하고 물었다.

“그러게.”

본인도 의아하다는 듯, 태성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턱을 매만졌다.

선우의 말이 맞았다. 태성이 구태여 이 시간에 이곳까지 올 필요는 없었다. 청장과 함께한 식사로 주의는 충분히 준 셈이었고, 처음부터 자리를 만들 것도 없이 청장을 통해 지시만 해도 끝날 사항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선우 경위’를 콕 집어 식사 자리에 불러내고, 그것도 아쉬워서 다 늦은 밤에 집까지 쫓아온 건…….

“한 경위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봐.”

“…….”

하아, 마음이 착잡해진 선우가 눈을 질끈 감으며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지끈하고 속이 울렁거려, 선우는 고개를 숙이며 이마를 손으로 받쳤다.

“앞으로도 자주 보게 될 것 같은데, 연락처 정도는 주고받는 게 어때요?”

선우의 앞으로 불쑥 새하얀 종이 한 장이 내밀어졌다.

“내 도움이 필요하면 먼저 연락해도 좋고.”

“아니요.”

몸을 바르게 세운 선우가 내용은 자세히 읽어 보지도 않고, 종이를 다시 주인 앞으로 밀어 넣었다.

“괜찮습니다.”

무척이나 단호한 거절에 태성이 눈썹을 한껏 치켜떴다. 그대로 눈만 내리깔아 제 앞에 놓인 명함을 보고 있자니 픽, 하고 실소가 터졌다.

“필요한 순간이 올지도 모르잖아요.”

“그럴 일 없을 겁니다.”

“글쎄. 사람 일은 모르는 거거든.”

한쪽 입꼬리만 비스듬히 올린 채, 태성은 선우를 진득하니 바라보았다.

“혹시 알아? 내가 한재민 경감 사망 사유를 알고 있을지.”

“!”

한순간에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사람처럼, 선우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얇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남자의 입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나오자 선우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몹시 동요했다.

“저희 아버지를…… 어떻게 아십니까?”

“아직 잘 몰라요. 지금부터 알아볼까 해.”

걷잡을 수 없이 떨리는 목소리에도 범상하게 대답한 태성이 식탁 위에 놓인 명함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제 명함을 꼭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아무래도 이거, 필요하겠죠?”

어느새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 사이에 낀 명함을 선우를 향해 들어 보였다. 태성의 손끝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내 명함을 다시 내려놓고, 태성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선은 여전히 선우를 향한 채로 식탁에 놓인 명함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니 선우가 고개를 들어 태성을 마주 보았다.

“기다릴게요.”

한 번 씨익, 웃은 그는 미련 없이 부엌을 나섰다.

곧이어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선우는 애써 참아 왔던 토기가 밀려오는 듯했다.

* * *

위용 위용.

간밤에 무슨 일이라도 난 건지, 지은 지 30년이 넘은 작은 아파트 단지에 새벽부터 앰뷸런스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잠에서 깬 선우는 식은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베개 옆에 놓인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아직 6시가 조금 못 되었다.

어젯밤 술의 여파인지, 아니면 충격적인 대화의 여파인지. 머리가 띵하니 무거워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누워 있다 일어날 요량으로 선우는 몸을 모로 돌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눈꼬리에 겨우 매달려 있던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륵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한동안 꾸지 않았던 꿈을 다시 꾸었다.

정말 오랜만에.

2011년 10월 15일.

그날은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선우의 아버지, 한재민 경감은 서울경찰청 마약수사대에서 근무하는 형사였다.

형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그는 늘 바빴다. 늦은 밤에 들어오는 것이 일상이었고, 밤을 새우고 오는 것 또한 다반사였다. 휴일 당직 근무는 20년 가까이 그를 따라다녔다.

그래서 그날도 그냥 아주 평범한 ‘보통날’인 줄로만 알았다.

금요일 밤. 선우는 늦은 시간까지 친구들과 컴퓨터 게임을 하며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러다 어느새 자정이 훌쩍 넘자, 뒷정리를 하고 혼자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 새벽.

‘여보세요? 거기 한재민 경감님 댁 맞습니까?’

집으로 온 전화 한 통은 한재민 경감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무슨 정신으로 간 줄도 모르고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선우의 앞에 놓인 것은 하얀 천이 덮인 침대였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흰 천을 걷어내자 침대에는 빗물에 축축이 젖은 남자가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피와 흙으로 범벅된 얼굴은 온통 붓고 일그러져 그 형체를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남자의 체구 하며, 그가 착용하고 있는 옷과 신발은 어제 아침 현관에서 밝게 인사하던 제 아버지의 것과 같았다.

‘네가 선우구나. 혹시 집안에 다른 어른들은… 전혀 안 계시니?’

손가락 하나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서 있는 선우에게 경찰관 한 명이 다가왔다. 아버지의 동료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는 이어 한재민 경감의 사망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청사 옥상에서 떨어지셨다는데…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심장이 멎은 상태라…….’

그러면서 타살의 흔적이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유언이나 유서를 남긴 것은 없는지, 최근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는지, 도리어 선우에게 물었다.

선우는 그때, 아마도 고개를 저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당장 어제만 해도 웃는 얼굴로 즐겁게 인사하고 집을 나선 그였다. 최근 들어 일이 좀 바빠 보이긴 했으나, 안색이 좋지 않거나 말 못 할 고민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제 아버지는 평소와 같았다.

장례는 선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주 빠르게 진행되었다. 미성년에 일가친척 하나 없는 선우를 대신해 경우회10)가 일을 도맡았다. 어렸던 선우는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에 경황이 없어 그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따랐을 뿐이었다.

장례 첫날에는 도무지 현실이 믿기지 않아 상주석에 우두커니 앉은 채 아버지의 영정 사진만 바라보았다. 이튿날, 제 손을 잡고 눈물을 훔치는 조문객들을 보고 나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선우는 그 뒤로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선우가 슬픔에 잠겨 있는 사이 장례는 끝이 났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의구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아마도 그건 아버지의 사고를 다룬 기사를 읽고 나서부터였을 것이다.

웬일인지 몇몇 언론에서는 한재민 경감의 사망 사고를 대서특필하였다. 과도한 업무에 격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경찰이 근무하던 청사에서 투신자살을 하였다고. 거기에 유가족이 원치 않아 부검은 진행하지 않기로 했다는 사실까지 덧붙여 보도가 되었다.

‘부검.’

당시 선우는 난생처음 겪는 상황에 무언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사망 사고를 접해 본 적이 없는 선우가 유가족이 부검을 의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턱일랑 역시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어린 유가족에게 부검 의사를 묻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한번 시작된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었다.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본인의 직업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경찰이라는 직업에 자부심이 있었고, 일에 대한 사명감도 투철했다. 제 직업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하나뿐인 아들조차 경찰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종종 내비친 것이 한재민이었다. 그런 사람이 과도한 업무 때문에 자살을 선택해야 할 만큼 일로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게다가 사건‧사고를 그렇게 많이 겪어 본 형사가 유서 한 장, 전화 한 통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난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선우는 제 아버지만큼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돌아가신 엄마의 몫까지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늘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였으니까.

혹시나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을지언정, 아들을 제 목숨보다 더 아끼던 남자가 ‘그날’을 선택하진 않았으리라.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날은 선우의 열일곱 번째 생일이었으므로.

그날 이후 선우는 매일 밤 같은 꿈을 꾸어야 했다. 잠만 들면 그날 밤의 일이 마치 반복 설정된 영상처럼 수없이 되풀이되었다.

응급실에서 시작되는 꿈은 장례식장에서 끝을 맺었다. 장례식장에 앉아 있는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아빠! 아빠…!’

아버지의 사진을 향해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았고,

‘아빠…! 거기… 누구 없어요…?’

주변에 누가 있는지 소리쳐 물어도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 아빠… 흑… 흐윽…… 아빠아…….’

온통 암흑인 공간에서 선우는 우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시간이 흘러도 꿈속의 선우는 언제나 열일곱 살이었다.

너무 괴로운 나머지 급기야 선우는 잠을 억지로 참았다. 잠이 들지 않기 위해 어린 선우가 선택한 방법은 고작 밤을 새워 공부하는 것이었다. 체력이 바닥날 때까지 일부러 자신을 몰아쳤다. 그러다 지쳐 쪽잠에 들면 그래도 그날은 2시간이든 3시간이든 꿈을 꾸지 않고 잘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때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갈까 수없이 고민하기도 했다. 혼자 남겨진 세상은 너무 무섭고 외롭고 또 고단했다. 삶에 대한 욕심도, 살고 싶은 이유도 없어 이대로 죽어도 아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마다 아버지의 입버릇이 선우의 발목을 잡았다. 저는 돌아가신 엄마와 아빠의 몫까지 더 열심히 살아야 했다. 그게 아버지가 삶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경찰이 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의 못다 한 삶을 제가 더 살아 보기로 했다. 하늘에 계신 부모님도 그런 저를 더 대견하고 기특하게 여기시지 않을까.

선우는 살기 위해 공부를 했고, 죽을힘을 다해 경찰이 되었다.

스스로 무언가 할 수 있다는 희망이 무의식에 반영되기라도 한 것일까. 경찰이 되고 나서 가장 좋았던 점은 더 이상 그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경찰이 되자마자 선우는 한재민 경감이 과거에 남긴 사건 기록들을 들춰 보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왜 죽어야만 했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자살이 맞다면 왜 그런 선택을 해야 했는지,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거라면 무엇 때문이었는지, 혹시라도 억울하게 돌아가시지는 않았는지.

단지 그 이유만이라도 알고 싶었다.

그러나 경험과 능력이 부족한 신입 경찰이 과거 자료를 수십 번 들춰 본들, 사망 원인을 쉽게 찾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부단히 아버지의 흔적을 뒤쫓다 보면 한 번씩 극심한 외로움에 사무치고 말았는데, 그때마다 선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버지의 사건 노트를 끌어안고 그를 그리워하는 것뿐이었다.

핸드폰의 알람이 7시를 알렸다.

선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땀과 눈물로 젖은 베개를 내려다보았다. 이 꿈을 꾸고 나면 꼭 오늘처럼 베갯잇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불미스러운 일…….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벌써 10년 전 일이었다. 이제 충분히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이들의 입으로 아버지의 사건을 들으니 심장을 불쏘시개로 들쑤신 듯 가슴이 아파 왔다.

세월은 흐르고 세상은 더 이상 제 아버지를 품지 않는데, 왜 저는 그럴 수가 없는 것인지.

그립고,

보고 싶었다.

저를 지켜 주던 든든한 품, 푸근했던 그 미소가 눈물 나게 그리웠다.

선우는 천근만근인 몸을 한껏 웅크렸다.

다시 열일곱 살로 돌아간 듯, 선우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 * *

무거운 몸을 이끌고 출근하는 선우의 낯빛이 오늘따라 무척 파리했다. 청사 복도를 힘없이 걷는 선우의 어깨 위로 느닷없이 두툼하고 거친 손 하나가 턱 하니 얹혔다.

“한 경위, 좀 살살 하자.”

“아. 안녕하세요, 팀장님.”

손이 올려진 방향으로 고개를 틀자, 사무실을 함께 쓰는 마약수사 2팀의 이무용 팀장이 서 있었다.

“주말 사이에 폭탄 제대로 터트렸던데? 한 경위 덕분에 우리 팀 애들 다 죽게 생겼어.”

이무용이 웃는 낯으로 앓는 소리를 하자,

“아… 하하…….”

선우도 희미하게 웃었다.

“거 쉬엄쉬엄 해, 쉬엄쉬엄. 어차피 한 경위는 시간만 지나면 진급은 그냥 따라올 텐데 뭘 그렇게 열심이야. 실적도 너무 빨리 먹으면 체한다, 너?”

“……네에.”

농담조였으나, 그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경찰이라 하면 밖에서 보기엔 다 똑같은 일을 하는 공무원일지 몰라도, 경찰 내부는 실적 경쟁이 굉장히 치열한 곳이었다. 특히 큼직한 사건을 많이 다루는 강력범죄수사대나 마약범죄수사대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래서일까 평소에는 웃고 지낼지언정 실적만 관련되면 예민하게 구는 이들이 간혹 있었다. 마약 2팀의 이무용 팀장처럼.

‘한선우 경위’는 종종 그런 사람들의 시샘 대상이 되곤 했는데, 그건 선우가 경찰대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순경부터 차근차근 진급을 밟아 온 형사들에게 경찰대 출신은 눈엣가시와도 같은 존재였다. 나이가 한참 어리고 경력도 짧은데, 저와 직급이 동일하거나 승진이 빠르니 그럴 만도 했다. 마침 현재 마약수사대 실무자 중에 경찰대 출신은 선우가 유일한 데다, 성정도 모질지가 못하니 분풀이 상대로 씹고 뱉기에는 딱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나마 좋은 팀원들을 만나 1팀 안에서는 선배들의 애정을 독차지하는 선우였으나, 경찰대 출신이 한 명도 없는 다른 팀 사람들에게는 이따금씩 이렇게 뼈가 있는 농담을 들어야 했다.

그들이 어떤 마음인지 선우도 모르지 않았다. 마수대에 지원할 때부터 어느 정도 각오를 한 부분이기도 했다. 그래서 평소에는 어떤 말을 들어도 그저 허허실실 웃고 넘겼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말속에 있는 뼈가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심장을 쿡쿡 찌르는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침울하게 서 있는 선우를 슬쩍 본 이무용이 그 두툼한 손으로 선우의 등짝을 팍 내리쳤다.

“잘했다고 그런 거야, 잘했다고. 그럼 수고해.”

“아…….”

맥없이 휘청이는 몸을 두고, 이무용은 먼저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이무용의 뒷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선우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형사님!”

그때, 선우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밤새 별일 없으셨죠?”

“하아. 네, 별일……. 네, 뭐…….”

박정철 기자였다.

“기사 완전 잘 나왔어요, 보셨어요? 지금 다들 난리도 아니에요!”

선우가 쓰게 웃었다.

유명 연예인과 재벌 3세가 엮인 마약 사건. 클럽 VVIP 룸에서 벌어진 집단 섹스 파티.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데 이보다 더 좋은 화젯거리가 또 있을까.

주말 사이, 일명 ‘클럽 블루문 사태’는 각종 포털 사이트를 뜨겁게 달궜다.

《충격! 서울 강남 클럽서 집단 마약 투약, 유명 연예인•재벌가 자제 등 8명 적발…》

박정철 기자의 특종을 시작으로 블루문 사건에 관한 기사가 쏟아지자, 사람들은 온갖 정보를 동원해 마약 투약자가 누구인지, 투약 장소가 어디인지를 밝혀냈다.

그러자 사람들의 관심사는 자연스레 블루문으로 옮겨졌다. 클럽 위치, 내부 인테리어와 이용 후기를 다룬 후킹성 글들이 커뮤니티를 타고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블루문의 실소유주가 누구인지, 이들이 어디서 어떻게 약을 공급받았는지와 같은 핵심 사항들은 언급되지 않았다.

“경위님, 이 정도면 올해 실적 다 채운 거 아니에요?”

박정철 기자가 실실 웃으며 선우를 치켜세웠다.

“…실적…이요…….”

그의 말에 순간 멈칫했던 선우가 눈썹을 매만지며 어설프게 웃었다. 그는 분명 좋은 의도로 한 말일 텐데, 아침부터 연이은 실적 타령을 들으니 마음 한편이 그만 씁쓸해지고 말았다.

자극적인 이슈에 후끈 달아오른 세상과 다르게 사건에 대한 열정이 차갑게 식은 선우는 그저 착잡하기만 했다.

* * *

‘블루문 사건’의 담당자는 오롯이 한선우 경위가 되었다.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이번 사건에서 선우가 세운 공이 커서라고 생각했겠지만, 실은 청장의 입맛에 맞게 사건을 잘 마무리하라는 팀장의 의도가 담겨 있는 결정이었다.

어찌 됐든 구색은 맞춰야 했기에, 선우는 추가 조사를 위해 천종윤과 여타 관련자들에게 경찰 출석 요구서를 보냈다.

급한 일을 마치고 나니 불현듯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선우는 서둘러 청사 밖을 나섰다.

이제 막 여름이 시작되었음에도 밖은 벌써부터 뙤약볕이 내리쬐었다. 선우는 뜨거운 햇살을 피해 청사 마당 한쪽에 자리한 정자로 가 앉았다. 어느새 주렁주렁 연보랏빛 꽃을 피운 등나무가 무더운 열기를 식혀 주었다.

- 나 참, 일찍도 연락한다.

선우가 전화를 걸고 신호음이 연결되기가 무섭게 상대방이 바로 응답을 했다.

“시헌아아아.”

선우는 미안한 마음에 말끝을 길게 늘어뜨리며 상대방을 불렀다.

“미안해…….”

- 미안한 놈이 이제 연락해? 너한테 얘기 좀 들어 보고 입장 표명하려고 했는데, 네 연락 기다리다 상황 정리 끝났다, 야.

이아영의 기사를 접하고 시헌은 선우에게 여러 통의 전화와 메시지를 남겼었다. 그러나 선우는 영 답이 없었다.

“그랬어? 아으, 미안…. 내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사건이 워낙 급박하게 돌아간 탓도 있었지만, 선우는 주말 동안 너무 많은 일을 겪은 나머지 도저히 시헌에게 연락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다 조금 틈이 생기니 이제서야 그가 떠오른 것이었다.

“드라마는? 드라마는 어떻게 됐어?”

- 잠깐만.

시헌이 자리를 옮기는 듯 전화 너머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 난리 났지, 뭐.

아, 역시……. 이내 들려온 시헌의 대답에 선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무려 여자 주인공이 이렇게 되었으니, 시헌이나 드라마 제작사 측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터였다. 선우는 제가 저지른 잘못도 아닌데 괜히 저 때문에 드라마가 차질을 빚은 것 같아 마음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별안간 시헌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 괜찮아. 감독님은 엄청 빡치셨는데, 스태프들은 오히려 좀 환영하는 분위기?

“으응……?”

그리고 들려온 엉뚱한 소리에 선우는 그만 벙쪘다.

- 다들 그동안 쌓인 게 좀 많았나 봐. 이제 같잖은 꼴 보지 않아도 돼서 속 시원하다고 그러던데?

여주인공을 다시 캐스팅하고, 이미 마친 촬영분도 재촬영해야 하는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제작사 입장에선 방영 중간이나 후에 사건이 터지는 것보다야 백번 나았다. 심지어 제작사 측에서는 이 김에 언론에 한 번 더 노출될 수 있으니 내심 이 상황을 역이용하려는 눈치라고, 시헌이 설명했다.

“아……. 그럼 그나마 다행이기는 한데…….”

- 너 그래서 나한테 말 못 했던 거였어?

“응?"

- 그날, 문 대표랑 무슨 일 있었는지 말 못 한 거. 생각해 보니까 그 클럽이 문 대표네 호텔에 있는 건데, 잘못하면 그 사람도 수사에 엮이는 거 아니야? 너도 그래서 말 못 한 거지?

“아, 으응…. 그렇지, 아무래도…….”

- 내가 괜히 일 열심히 하는 애를 다그친 거 같아서 미안하더라고.

“아니야, 무슨 소리야. 네가 나 걱정해서 그런 거 다 아는데. 나야말로 너, 드라마에 문제 생길까 봐 마음이 너무 안 좋더라고…….”

- 나? 난 오히려 동정표 좀 산 것 같던데?

시헌이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사실 그의 말대로였다.

배우 김시헌은 바르고 싹싹한 이미지에, 그동안 이렇다 할 문제를 일으킨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서 사람들은 시헌을 동정했다. 이아영의 마약 투약 사실과 함께 그동안의 행실까지 밝혀지자, 김시헌도 피해자라며 그를 불쌍히 여기는 여론이 형성된 것이다. 오히려 그간의 일들을 모두 참아 낸 김시헌의 인성과 프로 의식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을 정도였다.

- 그러니까 내 걱정은 말고 너 몸 챙겨 가면서 일해. 밤새우면 힘들잖아. 어, 선우야. 나 이만 가 봐야겠다.

저 너머로 누군가 시헌을 애타게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응! 그래, 얼른 가 봐. 밥 잘 챙겨 먹고!”

- 누가 할 소릴 하는 거야.

시헌의 웃음소리가 멀어지며 전화가 끊겼다.

통화가 급히 종료된 핸드폰을 내려다보다 선우는 신발 끝으로 정자의 나무 바닥을 문댔다. 시헌과의 통화로 마음이 아주 조금 나아지기는 했으나, 어쩐지 청사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 * *

관련자 조사 과정에서 선우는 마약 투약 혐의자 4명을 추가로 입건하였다. 조사 당시 소변 검사에서 양성 반응을 보인 자들이었다. 반면, 음성 반응을 보인 자들도 3명이나 있었는데, 예상했던 대로 천종윤도 그중 하나였다. 이들은 모두 미리 짜기라도 한 듯,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모른 척 발뺌했다.

‘걔가 그래요? 내가 지를 스폰했다고? 와, 얼척없네? 여자 친구 좀 잘되게 해 보겠다고 있는 인맥 없는 인맥 다 끌어다 일자리 만들어 줬더니, 이따위로 엿을 먹이나? 씨발, 요즘 세상에 무슨 스폰이야 스폰이. 안 그래요, 형사님?’

천종윤은 성매매 혐의 역시 인정하지 않았다. 이아영과 연인 사이라고 주장한 그는 생일 파티에서 약간의 애정 싸움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스폰은 이아영이 복수심에 한 거짓 진술이라며 도리어 불같이 성을 내기도 했다.

조사의 마지막은 블루문의 법적 소유자와 클럽 직원들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아이고, 형사님. 저희도 정말 억울해 죽겠습니다. 뭔 놈의 약쟁이들이 뻑하면 약을 들고 쳐들어와 가지고 내가 영업을 못 해요, 영업을. 형사님, 이참에 그 망할 놈의 약쟁이들 좀 싹 다 잡아가십쇼, 예?’

참고인 조사에 변호사를 대동하고 온 블루문 사업자는 어느새 사건의 피해자가 되어 있었다. 능구렁이 가죽을 뒤집어쓴 듯 번지르르한 얼굴에 대고 문태성과는 어떤 사이냐고 묻자,

‘예? 문 대표님이요? 아이, 처음 입점 계약할 때 빼고는 내가 얼굴을 뵌 적이 없어요. 그분이 얼마나 바쁘신 분인데 이런 하찮은 클럽 사정까지 일일이 신경 쓰고 그러시겠어요. 내 얼굴이나 기억할랑가 모르겠네?’

라며 안면몰수했다. 클럽 직원들이 피의자들을 모른 체한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조사서를 쓰고 있자니 선우는 속이 다 허탈했다. 이건 조사도 아니었다. 윗선에서 지시한 대로 말을 맞추기 위해 벌이는 보여 주기식 쇼에 불과했다. 관련자들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러자고 경찰이 된 게 아니었는데…….

선우는 경찰이 된 이후 처음으로 뼈저린 무력감을 느꼈다. 반질반질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거짓을 진술하는 피의자들이 가증스러웠다. 옳은 일이 아닌 걸 알면서도 눈을 감는 상관들과 그보다 더 위에서 이들을 조종하는 남자에 분개심이 일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이 모든 상황을 받들어 그럴싸하게 마무리 짓고 있는 저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가장 컸다.

한선우에게 인간에 대한 혐오와 경찰에 대한 회의를 남기고, ‘클럽 블루문 사태’는 마무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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