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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도니스의 후예 (1) (4/19)

3. 아도니스의 후예 (1)

최근 선우는 며칠째 최대영 팀장의 눈치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단둘이 조용히 대화를 나눌 타이밍을 재고 있는데, 블루문 사태 뒤처리로 그도 선우도 하릴없이 바빠 도무지 각이 나오질 않았다.

선우를 애타게 한 사건의 발단은 약 일주일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21년 6월 6일 12시경

서울 근교 추모공원 ‘하늘연’

해마다 현충일이 되면 선우는 부모님을 모신 납골당을 찾았다. 비록 아버지의 순직은 인정이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십 년 가까이 국가를 위해 헌신한 그였으니 저라도 그 마음을 기리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마침 청천벽력과도 같았던 전날 밤에 선우는 속이 뭉그러질 대로 뭉그러진 상태였다.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며 이 우울한 기분을 떨쳐내고 새로이 마음을 다잡고 오리라. 그렇게 국화꽃 두 다발을 들고 선우는 납골당에 도착했다.

봉안실로 향하는 대리석 복도는 여느 때와 같이 무척이나 한산했다. 고요한 복도를 혼자 걷고 있자니, 웬일인지 반대편에서 중년의 남성 한 명이 걸어 나왔다. 그는 선우가 가려는 봉안실에서 이제 막 나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어딘가, 매우 낯이 익은 사내였다.

인맥이라고는 해 봐야 손에 꼽힐 정도인데, 이상하게도 머릿속이 그를 아는 이로 인식을 했다. 아리송해진 선우는 제자리에 서서 저를 지나치는 남자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이내 봉안실로 향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유골함 앞에 꽂힌 국화꽃 한 송이를 보고 선우는 그대로 달려 나왔다.

“저기!”

아직 멀리 가지 못한 남자를 선우가 다급히 불러 세웠다.

선우와 박기덕 경감은 추모공원 한편에 마련된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온통 하늘색 물감을 칠해 놓은 듯,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한 여름 하늘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네가 선우구나. 혹시 집안에 다른 어른들은… 전혀 안 계시니?’

새벽에 아버지의 사고를 알리고, 병원에서 제일 먼저 다가와 주었던 그의 동료. 용케도 선우는 박기덕의 얼굴을 기억해 냈다.

“네가 이렇게 잘 자란 걸 보니 내가 다 고맙구나. 진작 와 봤어야 했는데, 나도 사는 게 바쁘다 보니 이제서야 여길 와 보네…….”

“아니에요. 여기까지 찾아와 주신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하죠.”

어쩌다 부는 바람에서조차 열기가 느껴질 만큼 따뜻한 날씨에 두 사람이 쥐고 있는 음료수 캔에도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한재민의 아들을 보고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박기덕은 곧바로 선우를 붙들고 그간의 이야기를 묻고, 또 자신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10년 전, 한재민과 같은 팀에서 근무했던 형사라고 자신을 밝혔다. 올해로 사망한 지 꼭 10년이 된 동료가 문득 떠올라 급히 수소문해 이곳을 찾아냈다는 말과 함께.

“그나저나 경찰이 되었다니, 아버지가 아셨으면 정말 기뻐하셨을 텐데.”

선우는 옅게 웃다 곧 고개를 숙였다.

“경찰이 되면……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된 이유를 금방이라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근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어딘가 서글퍼 보이는 선우를 보다, 박기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위에서 작정하고 숨기는 일들을 일개 말단 경찰이 어떻게 알 수 있겠어.”

“…….”

위에서 숨기는 일. 선우는 복잡한 심경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러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었다.

“저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당시 상황을 조금만 여쭤봐도 될까요? 제가 아버지 일에 대해 잘 아시는 분을 뵌 게 그날 이후로 처음이라…….”

“아, 그래! 그랬겠구나.”

박기덕은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을 깨달은 사람처럼 무릎을 탁, 쳤다.

“아이구. 그동안 속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대답 없이 그저 쓰게 웃는 모습에 박기덕은 그만 하, 탄식을 하고 말았다. 아주 잠시 제가 아는 사실들을 얘기해도 될까 고민했으나, 애잔한 얼굴을 한 선우가 안쓰러워 박기덕은 이내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알고 있는 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만,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보다는 백번 낫겠지.”

그의 말에 일말의 기대감을 품은 선우가 눈을 반짝였다.

“그때 당시… 내가 유독 기억에 남는 건, 너희 아버지가 양승준을 잡으려고 어지간히도 애썼다는 거다.”

“양승준이요……? 양승준이라면…….”

“그래. 국민당 국회의원.”

선우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이의 이름을 듣고 고개를 갸울였다.

“왜 그렇게 그놈한테 집착을 했는지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만, 몇 달간 무진 애를 써서 결국엔 그놈을 잡았거든. 근데 뭐, 잡아넣기가 무섭게 증거 불충분으로 금세 풀려났지. 그다음 날 바로 네 아버지가 그렇게 됐고…….”

“…….”

현재 여당인 국민공화당 소속, 서초구 국회의원. 조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3대(代)째 금배지를 단 것으로 유명한 그 대단한 인물과 제 아버지 사이에 어떤 접점이 있을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나는 처음에는 네 아버지가 제 화를 못 이기고 정말 자살을 한 건가 싶었거든? 근데 너도 알다시피 네 아버지가 그럴 사람이 아니잖니. 그놈을 또 잡아넣으면 잡아넣었지 고작 그런 일로 목숨을 끊을 양반이 아니지, 한재민이.”

심각한 얼굴로 박기덕의 이야기를 듣다가, 선우는 동의의 의미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도 생각이라는 걸 좀 해 보니……. 양승준이 어디 보통 사람이냐? 집안 하면 대한민국에 그만한 집안이 또 없는데. 그런 놈을 잡아넣었으니 아무리 무혐의로 풀려났다고 한들, 탈이 안 나겠어?”

“아…….”

선우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까 양승준 그놈이 뭔가 관련이 있기는 한가 보다, 그 집안에서 혹시 무슨 압박을 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나중에서야 들더라고.”

“…압박…이요…….”

선우는 익숙할 듯 익숙하지 않은 단어를 홀린 듯 뱉어 냈다.

“아, 확실한 건 아니고. 그냥 내 짐작이 그렇다는 얘기지. 그래도 당시 특이 사항이라고 할 만한 게 그 일 말고는 딱히 없어서…….”

“……네에.”

그가 전한 이야기가 너무도 뜻밖이라, 선우는 그만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버지의 사건 수첩이나 수사 자료에서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던 이야기였다.

“……아빠가 담당했던 사건 중에 그런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아아, 담당자는 바뀌었겠지! 네 아버지가 사건 마무리도 못 하고 그렇게 되는 바람에.”

“!”

선우는 헛숨을 작게 들이켰다.

“저, 그럼, 그 바뀐 담당자가 누군지, 혹시 아세요?”

“글쎄, 그건 찾아봐야 알겠는데……. 그 뒤에 내부에서 조직 개편을 크게 하는 바람에 나도 곧바로 수원으로 발령이 났거든.”

박기덕은 음료수를 들이켜며 목을 축였다.

“조직 개편…….”

조그맣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선우는 조금 넋이 나가 있었다.

“…….”

박기덕은 그런 선우를 힐끔 보았다. 그러나 표정이 뭐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심란해 보였기에 더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적막이 선우는 도리어 고마웠다. 제게 생각할 시간을 주는 듯해서.

멍하니 앉아 푸른 공원의 전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새하얀 나비 한 쌍이 팔랑팔랑 날아와 선우 옆에 사뿐 내려앉았다.

“엇, 이거 내 정신 좀 봐라. 얘기하느라 시간이 이렇게 된 줄도 몰랐네. 난 이만 돌아가 봐야겠는데?”

박기덕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 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주신 말씀이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선우 역시 그를 따라 벌떡 일어섰다. 허리가 다 접히도록 선우는 그를 향해 연방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래. 이렇게 보니 정말 좋구나. 기회 봐서 또 한번 보자. 지금은 파출소에 있어서 내가 뭔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고.”

위로를 건네듯 박기덕은 굵은 손을 뻗어 선우의 두 손을 꼬옥 맞잡았다. 제 손등을 도닥이는 손길에 선우는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한 것을 참아 내느라 혼이 났다. 박기덕의 두터운 손이 어릴 적 제 손을 잡아 주던 아버지가 떠오를 만큼 따뜻하고 포근했기에.

박기덕과 헤어진 뒤로 선우는 곧장 서울로 돌아왔다. 아무렴 그가 향한 곳은 집이 아니라 사무실이었다.

한산한 일요일의 사무실에서 선우는 도착하기가 무섭게 피의자 양승준의 사건 자료를 찾아보았다.

한참 노트북을 들여다보던 선우는 이윽고 앉은 자리에서 몸을 바로 세웠다. 박기덕 경감의 말대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양승준 사건의 담당자는 다른 이로 변경되어 있었다.

잠시 허공을 올려다본 선우는 서서히 고개를 돌려 비어 있는 팀장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바뀐 담당자는 최대영,

당시 마약 3팀에서 근무하던 최대영 경위였다.

* * *

“블루문 조사한다고 고생 많았어.”

며칠이 지나고, 고민 끝에 선우는 결국 최대영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두 사람은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씩을 뽑아 들고 청사 옥상에 올랐다.

“속 좀 쓰렸지?”

“괜찮습니다.”

최대영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담배 한 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팀장님. 실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주머니를 뒤져 라이터를 찾던 그가 말해 보라는 듯 턱짓을 했다. 선우는 잠시 주저하다 곧 입을 열었다.

“……혹시 양승준 의원에 대해 아십니까?”

“양승준 의원? 국회의원 양승준을 말하는 거야?”

느닷없는 질문에 최대영은 입에 문 담배를 빼내며 무심코 답했다.

“알지, 그럼. 양승준 모르는 서울 사람도 있나?”

“……양승준 의원이 10년 전에 마약 투약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적이 있었는데……. 그 사건, 기억…하세요?”

이내 라이터를 찾은 그가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 말고 선우의 질문에 행동을 멈췄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살짝 기울어진 고개가 미동이 없었다.

“……당시 사건 담당자가 팀장님으로 되어 있어서요.”

“그래. 그랬지, 참.”

최대영은 굉장히 새삼스럽다는 표정을 하고는 담배를 다시 물었다. 담배 끝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게 빨아들이자, 그의 볼이 옴폭하게 패었다. 머지않아 후, 하고 뱉어 낸 숨에서 희뿌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체포 직후에 한 소변 검사에서 양성 반응을 보였는데, 이후 진행한 정밀 검사에서는 음성 판정이 나왔더라고요.”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양승준은 윤해진이라는 자와 함께 서울의 한 호텔에서 마약 투약 혐의로 현장 체포되었다. 체포된 건 한재민 경감이 사망하기 바로 며칠 전이었다.

체포 직후 진행된 간이 마약 검사에서 양승준은 양성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2차로 진행된 정밀 검사에서는 여러 차례 음성 결과를 받았다. 반면 함께 체포된 윤해진은 정밀 검사로 필로폰 투약이 확인되었다.

그 결과 양승준은 혐의 없음, 윤해진은 마약법 위반 혐의로 결론이 내려졌다.

“아아, 그래 맞다. 그전에 먹은 감기약 때문에 검사 결과가 잘못 나왔다고 그랬지, 아마?”

선우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 역시 양승준의 진술서에서 확인한 사항이었다.

“……사실일까요?”

순진한 물음에 최대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근데 한참 된 사건을 갑자기 왜?”

“아, 아니요. 그냥……. 이번 사건 정리하다가 비슷한 경우가 또 있었나 싶어서요.”

최대영은 피우던 담배를 손가락에 걸고, 난간 위에 올려 둔 커피를 들어 마셨다.

“혹시 그 당시에도 이번처럼… 어떤, 외압 같은 게 있었을까요?”

“외압? 윗사람들 연관되면 뻔하지, 뭐.”

콧바람을 내뿜는 그의 얼굴에 아주 자연스럽게 비소가 걸렸다.

“그렇게 보면 인생 참 불공평하지? 돈 있고 힘 있으면 죄짓고도 떵떵거리면서 잘 사는 세상이라니까, 이 나라가.”

“네에…….”

최대영은 눈가를 잔뜩 찡그린 채 담배를 뻑뻑 피워 댔다. 그러다 담배가 손가락 두 마디보다도 짧아지자, 꽁초를 바닥에 휙 던지고는 발끝으로 자근자근 이겨 불을 껐다.

어느덧 미지근해진 종이컵을 매만지며 한참을 주저하던 선우가 마침내 용기를 내어 말했다.

“……팀장님. 사실은 제가… 저희 아버지 사건을 좀 알아보고 있었거든요.”

“어… 어…. 그래……?”

“……네. 그런데 얼마 전에 우연히 아버지 과거 동료분을 뵈었어요. 그분께서 하시는 말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양승준 의원을 직접 체포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희 아버지 일이 혹시나 양승준 의원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나 싶어서요…….”

“…….”

“팀장님. 이런 부탁 드려서 정말 죄송하지만…, 그때 일에 대해서 뭐라도 알고 계신 게 있다면… 제게 조금만이라도 얘기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아, 아니……. 나야 뭐, 그때 막 팀 옮긴 상태였는데 내가 알긴 뭘 알겠어. 갑자기 조직 개편한답시고 팀도 업무도 싹 바뀌는 바람에 나도 그냥 위에서 시키는 대로 자료 받아다 사건 정리만 한 거지…….”

“아… 네…….”

사건 담당자에게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하자, 선우는 기운이 조금 빠졌다.

최대영은 담배를 태우다 곁눈질로 선우를 흘끗 보았다. 그러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게다가 양기용 의원 아들에, 아도니스 소속인 양승준을 누가 어떻게 더 조사나 할 수 있었겠어.”

“……아도니스…요?”

선우가 의아해하며 되물었으나, 그는 하늘을 올려다볼 뿐 대답이 없었다.

“그게… 뭔가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재차 묻자, 그제야 그는 선우를 마주 보았다. 한숨 같은 담배 연기를 내뱉은 최대영이 몹시 쓴 표정을 하고 말했다.

“정재계 인사들끼리 모여서 만든 무슨 비밀 사교 모임 같은 거라던데, 거기 속한 사람들이 도대체 얼마나 대단하신 분들인 건지. 그 클럽 회원이라면 무슨 일이 생겨도 수사든 뭐든 일절 건들지를 못하게 하더라고.”

“어… 네에…….”

말로만 듣던 그런 모임이 정말로 존재하는구나. 선우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손에 쥔 커피를 내려다보았다.

“너도 이번에 겪어 봐서 알잖아.”

“?”

그러다 최대영이 툭 던진 말에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최대영은 남은 커피를 한 번에 들이켰다.

“어… 팀장님. 그럼 이번에도… 그 아도니스라는 모임이 사건에 무슨, 간여를 했다는 말씀이세요?”

“글쎄. 난들 알겠냐마는.”

선우의 질문에 최대영이 쓰읍, 하고 잇새로 공기를 들이켰다.

“문태성 그 자식이 무려 청장까지 들쳐 업고 나왔는데 아니라고 보는 것도 어렵지 않겠냐?”

“…….”

이제는 너무도 익숙한 그 이름에 선우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문득, 제 아버지 사건에 대해 알아볼 것이라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근데 선우야.”

그런데 영 내키지 않는 얼굴을 하고, 최대영이 나직이 선우를 불렀다.

“……아버지 일은 나도 참 안타깝게 생각한다만……. 그 참, 사건 파헤치는 건 아무래도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냐?”

“……예?”

선우가 화들짝 놀랐다.

“아니……. 그날 청장님 하신 말씀도 있는데, 괜히 알아보다 걸리면 윗분들 눈 밖에 날까 봐 그러지……. 경찰 일 중간에 그만둘 것도 아니고……. 거기다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데, 그러다 너도 아버지처럼 안 좋은 일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래.”

“…아….”

“워낙 오래된 일이라 알아보기도 아마 쉽지 않을 거다.”

“……그…렇죠.”

일순간 사고가 멎어 버린 선우는 제가 무슨 말을 뱉고 있는지도 몰랐다.

“내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너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정말로.”

“……네에.”

“……덥다. 그만 내려가자.”

그는 선우의 어깨를 두어 번 다독이고는 먼저 옥상을 벗어났다.

끼이이익.

등 뒤로 철제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선우는 꽉 막힌 숨을 토하듯 뱉어 냈다. 그새 싸늘하게 식은 커피를 난간 위에 내려놓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선우는 먼지가 잔뜩 낀 난간 위를 손끝으로 어루만지다 곧 꽈악 하고 세게 잡았다. 난간 너머 저 아래로 청사 앞마당이 보였다.

당신이 세상과 안녕을 고한 이곳.

생애 마지막 순간, 당신은 이곳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린 아들을 혼자 두고 떠나야 할 만큼 당신을 괴롭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당신이 죽음과 함께 가지고 가야 했던 비밀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아랫입술을 터질 듯 깨물고, 선우는 그 자리에서 한참 동안 난간 너머를 내려다보았다.

* * *

선우는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사무실을 나섰으나 아직도 주차장을 벗어나지 못한 채였다.

핸들에 힘없이 얹어 둔 손끝에는 모퉁이가 살짝 구겨진 하얀 종이가 걸려 있었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최대영의 반응에 선우는 허망함마저 느꼈다.

상사에게 다 지난 과거 일을 묻는 것이 예의가 아닐 수도, 불쾌함을 느끼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상관들이 전부 다 그렇게 여긴들, 최대영만큼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적어도 제가 아는 그는 윗선에서 눈치를 줘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일은 하는 사람이었고, 부당함에 화낼 줄 아는 이였다.

그렇다면 최대영이 정말로 저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을까?

선우의 결론은 아니다, 였다.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나는 그의 얼굴에서 선우는 낭패를 읽었다.

당시 양승준과 아버지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고, 아도니스라는 집단은 어떤 압력을 가했기에, 청장과 팀장은 왜, 아버지의 사고를 불편하게 여기는가.

선우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눈앞으로 가져왔다.

오로지 회사의 로고와 직급, 이름이 전부인 명함. 이 명함의 주인은 어쩌면… 답을 알고 있을까.

그날 밤을 마지막으로 남자와 다시는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선우는 긴장한 표정으로 숨을 크게 한 번 내쉬고는 명함을 뒷면으로 돌렸다. 새하얀 바탕에 적힌 것이라곤 주인이 직접 남긴 열한 자리의 숫자뿐이었다. 군더더기 없는 정갈한 글씨체가 주인의 외양을 떠오르게 했다.

이내 완전히 결심을 내린 선우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전화번호와 통화 버튼을 차례로 누르고, 곧바로 이어지는 신호음에 선우는 저도 모르게 꼴깍 침을 삼켰다.

- 한 경위?

“……?”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대뜸 저를 부르는 소리에 선우는 돌연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선우는 의아한 얼굴로 핸드폰을 슬그머니 귀에서 떼어 내고, 잠시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번호를… 준 기억이 없는데……?

의문을 담은 눈이 끔뻑, 끔뻑 감겼다 뜨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언뜻, 말도 없이 제집 앞을 찾아왔던 남자가 생각났다. 마음만 먹으면 일개 경찰관의 전화번호 하나 알아내는 것쯤, 그에겐 일도 아니리라.

“…안녕…하세요.”

- 네. 안녕해요. 잘 지냈어요?

“…네에….”

수화기 너머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통화하기로 이미 약속이라도 되어 있던 것처럼 상대는 처음 걸린 전화에도 놀라지 않고 태연하게 안부를 물었다. 기다리겠다던 말이 완전히 빈말은 아니었는지 목소리에도 반기는 기색이 묻어 있었다.

“……저어.”

- 네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하셨죠?”

남자는 이전보다 조금 더 길게 웃었다. 귓가가 저릿할 정도로 나직한 음성에 선우는 저도 모르게 손에 쥔 핸드폰을 꼬옥 붙들었다.

-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

웃음기가 배인 목소리에 멋쩍어진 선우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 전화로 할 얘긴 아닐 거 같고, 조용한 곳이 좋겠죠?

“……네.”

- 주소 보낼게요. 10시쯤 어때요?

19:05.

선우는 고개를 틀어 대시보드에 달린 시계를 확인했다.

“……네. 괜찮습니다.”

- 이따 봐요, 그럼.

“…….”

불과 30초를 넘지 않는 짧은 통화에도 선우의 손바닥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 * *

문자로 도착한 약속 장소는 다름 아닌 그의 집이었다.

세계적인 건축 거장이 디자인하고 문호건설이 시공을 했다고, 한때 언론에서 떠들어 대던 청담동의 고급 빌라.

평생을 가도 올 일이 없을 것 같았던 장소에서 다시는 마주할 일이 없을 줄 알았던 남자를 기다리며, 선우는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대한 응접실을 둥글게 감싼 유리창 앞에 서자 새까만 강물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반대로 검은 하늘에 그대로 덮쳐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좌우로 넓은 시야에 높은 층고가 주는 개방감마저 더해지니, 실경을 보면서도 마치 파노라마 사진을 보고 있는 듯했다.

남자의 집에서 보는 서울의 야경은 제가 이곳에 와 있는 것만큼이나 현실감이 없었다.

선우는 까만 공단 위에 보석을 수놓은 듯, 유리창 너머로 반짝이는 불빛들을 손끝으로 어루만져 보았다.

“경치가 나쁘진 않죠?”

등 뒤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선우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렸다.

남자는 어느새 편안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선우는 그를 위에서부터 찬찬히 훑어 내렸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내려온 까만 머리와 옅은 미소를 띤 얼굴을 지나, 선우의 눈이 너른 품에 잠시간 머물렀다. 충분히 넓다고 생각했던 어깨와 흉곽이 부드러운 재질의 니트에 그 실체를 여실히 드러냈다. 잔주름 하나 없던 슈트 바지와 앞코가 반질거리던 구두는 편안한 면바지와 실내용 슬리퍼가 대신하고 있었다.

“…….”

온화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남자에게서 선우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시선이 그의 발끝에 닿을 즈음, 선우의 머리 위로 낮은 웃음소리가 내려앉았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 선우는 고개를 퍼뜩 쳐들었다. 얼굴을 마주한 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픽, 헛웃음을 지었다.

“하여간, 겁이 없지.”

매끈하게 올라간 입매, 그 끝에 자리한 보조개에 선우의 시선이 한참을 머물렀다.

“술 괜찮아요?”

“…….”

그의 양손에는 위스키와 작은 스트레이트 잔 두 개가 각각 들려 있었다. 살짝 치켜든 유리병을 빤히 보다가, 선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접실 정중앙에 있는 탁자 위에 술병과 잔을 내려놓고, 태성은 야경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자리에 앉았다. 그는 두 개의 유리잔을 하나는 자신의 앞에, 하나는 대각선에 위치한 자리 앞에 두고는 두 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술잔이 놓인 자리에 선우가 조용히 앉자, 태성이 퍽 다정한 어투로 물었다.

“내 선물은 잘 받았어요?”

“……선물이요?”

선우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태성의 입술이 보기 좋게 호선을 그렸다.

“서울청 마수대가 일 잘한다고 소문 좀 내 달랬는데.”

“아…….”

선우는 그제야 말뜻을 알아차렸다.

어쩐지 수사 결과에 비해 언론에서 너무 요란하게 보도를 한다 싶었다. 개중에는 마수대와 강남 경찰서 경찰관들의 활약을 무슨 무용담처럼 서술한 기사도 있었다. 그 기사를 보고 도리어 마음이 무겁기가 짝이 없었는데, 이마저도 남자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었다니…….

선우는 언뜻 가슴께가 조금 답답해져 왔다.

“별로 마음에 안 들었나 보네.”

심드렁한 말투에 선우가 태성을 쳐다보았다. 그는 마주친 눈으로 선우에게 술을 권했다. 선우가 쭈뼛거리며 유리잔으로 손을 뻗자, 그도 이내 제 잔을 집어 들었다. 잔 안에 든 술을 단번에 털어 넣는 남자의 목울대가 시원하게 움직였다.

“그래서, 여기까지 온 용건은?”

“……네?”

“이 밤에 나랑 놀자고 온 건 아닐 거 아니야.”

“…….”

선우가 숨을 작게 들이켰다. 마음을 다잡고 온 것과는 별개로 막상 말을 꺼내려니 입이 잘 떨어지지가 않았다. 긴장감에 입안이 바짝 마르는 듯해, 선우는 손에 쥔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그대로 쭈욱 한 잔을 모두 들이켠 선우가 탁자 위에 잔을 내려놓고는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저……. 아도니스라는 모임에 대해…… 알고 싶어서요.”

“…뭐?”

태성은 빈 잔에 술을 따르려다 말고 멈칫, 동작을 멈췄다. 미세하게나마 미소를 띠고 있던 얼굴이 차츰 눈에 띄게 굳었다.

탁자 위에 그대로 술병을 내려놓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그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얘기가 왜 그렇게 튀지?”

“네?”

몸을 뒤로 물린 그가 소파 등받이에 팔을 얹고는 긴 다리를 느릿하게 꼬았다. 그러다 별안간 비식, 하고 실소를 터트리더니 혀끝으로 입안을 훑었다.

“누가 시켰어요? 최 팀장? 김경택?”

“네? 아, 아니요. 누가 시킨 게 아니라…….”

“참신하네.”

“예……?”

“미인계를 쓰는 마수대라.”

농담을 건네듯, 웃는 얼굴로 말했지만 스산한 목소리에 선우는 뒷머리가 다 쭈뼛하고 솟는 기분이었다.

“아, 뭔가 오해가…….”

오해라는 말에 태성은 콧방귀를 뀌었다. 비소를 담고 있는 얼굴이 무척이나 언짢아 보여 선우는 적잖이 당황했다.

태성은 다시 몸을 앞으로 해, 비어 있는 두 잔을 모두 채웠다. 그러더니 제 잔에 채운 술을 재차 한 번에 들이켜고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선우를 마주했다.

“아도니스에 대해 뭘 알고 싶은데.”

“어……, 그…….”

냉랭한 표정에 선우는 말문이 턱 막혔다.

“그게 뭔 줄은 알고?”

“…….”

태성의 반응에 순간 얼어 버린 선우가 크게 뜬 눈을 도로록 도로록 굴렸다.

……무슨 말을 잘못한 거지? 아도니스라는 게 단순한 사교 클럽이 아니었나? 그럼 그게 도대체 뭔데…? 그가 이토록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선우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친목… 모임이 아닙니까…?”

“친목.”

어리둥절해져 묻는 말에 태성은 웃음을 터트렸다.

“친목 한번 거창하게도 다지네.”

“…….”

비꼬듯 얘기하는 어투에 선우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뭐라도 기대하고 왔을 텐데 안타깝네. 아도니스에 대해서는 내가 해 줄 수 있는 얘기가 없어요. 그게 용건이었다면, 이만 돌아가 봐도 좋아요.”

웃는 낯을 순식간에 굳힌 태성이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어, 어…! 선우는 저도 모르게 그의 팔을 붙들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앉지도 일어서지도 않은 어정쩡한 자세로 태성은 제 팔뚝을 부여잡은 하얀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는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한 경위 도와주느라 나까지 귀찮은 일에 휘말리면 얘기가 달라지지.”

“…….”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단호하게 말하자, 선우의 눈자위로 순식간에 절망이 드리웠다. 태성은 그런 선우의 눈길을 외면하며 제 잔을 채웠다.

“경찰이든 검찰이든 수사한답시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것만큼 성가신 게 없거든.”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려 웃은 그가 술 한 잔을 단번에 털어 넘겼다.

“아, 아니에요!”

남자는 제 입으로 아도니스에서 경·검찰이 수사할 만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했지만, 선우는 그런 판단을 내릴 정신이 없었다.

“오해가 있으신 것 같아요. 수사가 아니에요. 제 개인적인 일입니다. 수사랑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에요.”

오로지 제 상황에 사로잡혀 다급하게 쏟아내는 말에도 태성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선우를 보았다.

“정말…이에요…….”

선우의 목소리가 힘없이 늘어졌다. 한껏 처진 눈썹이 억울함을 호소했다. 단박에 거절당할 것을 예상치 못한 선우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

저를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반응도 없는 남자에 선우는 이리저리 허망하게 눈동자를 굴리다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보는 이의 얼굴에는 반면, 설핏 미소가 스쳤다 사라졌다. 그는 사실 선우의 표정만으로 이미 충분한 답을 얻은 상태였다. 감정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얼굴은 거짓말을 할 주제도 되지 못했다. 참 속을 알기 쉬운 사람이었다.

저 절박하고 애처로운 표정이 거짓이라면, 그야말로 연기 대상감이고.

“그래요? 그럼,”

하지만 상대에게는 애석하게도,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어린양을 그냥 돌려보낼 만큼 자비로운 인간은 아니었다, 문태성이라는 작자가.

“내가 아도니스에 대해 알게 해 주면, 한 경위는 나한테 뭘 해 줄 수 있는데요?”

선우가 서서히 고개를 들어 태성을 보았다.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한 경위를 도와주면, 당신도 그에 상응하는 걸 나한테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제가… 대표님께요…?”

선우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나랑 잘래요?”

“네…?”

선우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설명해 줘야 할 만큼 어려요?”

선우는 앞에 앉은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제대로 알아들었기에 그 말이 진심인지, 아니면 이번에도 또 저를 가지고 질 낮은 장난을 하는 것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진심…이세요?”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말에도 태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어깨만 으쓱 올렸다 내릴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의 의중을 알 수가 없어 선우가 남자의 두 눈을 번갈아 보았다. 뜨거운 열기를 담은 눈이 선우의 눈동자를 쫓았다.

농담이라기엔 지나치게 노골적인 시선에 삽시간에 손바닥에 땀이 차올랐다.

이자가 원하는 것이 정말 나와 관계를 맺는 것일까. 이자의 요구를 들어주면, 나는 아도니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기는 한 건가?

정염이 이는 눈을 애써 외면하며 선우는 조금 망설였고, 깊게 고민했다. 그러나 결정을 내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매번 남자는 얄궂은 말장난, 저질스러운 농담으로 저를 놀려먹었으므로 이번에도 역시 그럴 것이다. 더 이상 저 세 치 혀에 놀아날 생각은 없었다.

설사 그의 말이 진실이라 하더라도……

이런 방법으로 알고 싶지는 않았다.

저도 모르는 새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대던 선우가 어느 순간 움직임을 뚝, 멎었다.

축축한 두 손을 맞잡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선우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별안간 고개를 깊게 숙였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제가 실례를,”

“농담이에요.”

“…!”

무심코 던져진 남자의 말에 선우는 그만 기가 막혔다. 선우가 고개를 들어 태성을 마주했을 때,

“나도 아무랑은 안 자.”

그는 빙글빙글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또다시 남자의 말장난에 당한 것을 알아채고는 선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분한 감정에 선우는 입술을 앙 깨물고 인상을 콱 구겼다.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남자가 턱 끝으로 슬쩍, 선우가 일어난 자리를 가리켰다.

“앉아요. 오늘은 술친구나 해 줘요.”

* * *

넓은 응접실에 홀로 남겨진 선우는 소파에 기대앉아 몸을 축 늘어뜨렸다. 도수 높은 술을 상대의 속도에 맞춰 급히 마셨더니 취기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술을 많이 먹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말끝마다 사람을 간 보듯 살살 약을 올리는 남자에 오기가 생겨 그만, 따라 주는 족족 마셔 댄 것이 화근이었다.

뱅글뱅글 도는 머리를 등받이에 기댄 채, 선우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예쁘게도 반짝이던 불빛들이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붉은빛이 돌던 조명은 어느덧 반의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자정이 지나자 그렇게 바쁘게 돌아가던 서울에도 어둠이 내려앉았다.

밤바람에 강물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것을 보고 있자니, 문득 선우는 조금 서글퍼졌다. 그리고 조금 외로운 것도 같았다.

제 인생도 저 강물처럼 잔잔하게 흘러가기만 한다면 참 좋으련만.

술에 취하니 평소에 하지도 않던 신세타령마저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유를 알고 나면 더 이상 괴롭고 힘들지 않을 수 있을까……. 그동안 꾹꾹 눌러 놓았던 감정이 술기운을 타고 자꾸만 밖으로 기어 나오려고 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유리창에 뻔뻔한 술친구의 모습이 드리웠다.

선우는 고개를 천천히 반대로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몸을 바로 세우기에는 조금 어지러워, 머리는 소파에 그대로 기댄 채였다. 취한 기색 하나 없이 멀쩡한 술친구의 손에는 새로운 술병과 약간의 안주가 들려 있었다.

“아, 우울해 보이네.”

가져온 것들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태성은 본인의 자리가 아닌 선우의 옆자리에 앉았다.

예기치 못한 동석에 나른하게 풀려 있던 눈이 점점 크기를 키웠다. 선우는 무거운 머리를 억지로 일으키고,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위로해 줄까요?”

“…….”

남자는 그림같이 황홀한 미소를 띠고 그렇게 말했다. 온몸을 녹여 내기라도 할 듯, 한없이 다정한 눈빛과 나긋한 말투에 선우의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

“우울할 땐 머릿속을 그냥 비워요.”

별안간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선우의 턱 끝에 살짝 닿았다. 그의 숨결이 코끝에 스칠 만큼 가깝다고 느끼는 순간,

“아무 생각 하지 말고.”

부드럽고 말랑한 무언가가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

한순간에 방전된 로봇이라도 된 것처럼, 선우는 조금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놀란 눈을 재차 깜빡이는 것뿐이었다.

언뜻 시야 끝에 매끈한 입술이 걸렸다. 선우는 남자의 입술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앞에 앉은 남자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갑자기 목덜미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올라와 귀와 두 볼을 후끈하게 달궜다.

삽시간에 붉어진 얼굴을 보고 목을 울려 웃은 태성이 그대로 눈을 내리깔아 선우의 입술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말간 눈동자를 마주했다. 꼭 선우의 행동을 고스란히 흉내 내는 사람처럼.

이내 손을 더 깊게 뻗은 태성이 선우의 한쪽 볼을 고이 감쌌다. 붉은 기가 여실한 귓불부터 선이 고운 턱선까지. 작은 얼굴이 커다란 손안에 폭 담겼다.

“피하지 않으면 동의한 걸로 알게요.”

그 말을 끝으로 턱이 살짝 들린 선우의 입술에 다시금 부드러운 입술이 내려앉았다.

“!”

귓가를 울리던 낮은 속삭임이 마치 피하지 말라는 주문이라도 되듯, 선우는 그 상태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머리가 쭈뼛 설 정도로 음침한 목소리와 다르게 맞닿은 입술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따스했다. 그 보드랍고 촉촉한 감촉에, 선우는 입술을 떼어 낼 생각일랑은 하지도 못했다.

전신을 휘감는 아찔하고도 눅눅한 감각에 파들파들 떨리는 눈꺼풀을 내리감자, 그러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태성의 고개가 모로 꺾였다.

시선을 함빡 내리깐 채로 도톰한 입술을 위아래 할 것 없이 한입에 담아 쭉 빨아들이자,

“아……!”

오동통하고 연한 살이 그대로 딸려와 태성의 입안을 가득 메웠다.

태성은 얼굴을 감싸던 손을 뻗어 작은 머리통을 받쳤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살그머니 제 혀를 밀어 넣으니, 선우가 몸을 흠칫 떨었다. 태성은 말랑거리는 혀를 혓바닥으로 얽어 쭉 한 번 당겼다 놓고는 축축한 입안을 구석구석 훑었다. 혀끝에 슬쩍 닿은 볼 안쪽 살이 몹시도 야들야들했다.

뾰족이 세운 혀끝으로 입천장을 살살 긁다가 이내 고른 치아를 어금니부터 하나하나 훑어 내리고 있자니, 문득 제 입안에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얼어 있는 혓바닥이 느껴졌다. 혓바닥의 주인은 그동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는지, 제 아래에서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

태성은 맞붙은 입술을 살짝 떼어 냈다.

얼마나 긴장을 했나, 이마를 덮고 있는 앞머리에 그새 땀이 잔뜩 배어 있었다. 태성은 선우의 뒷머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앞으로 가져와 땀에 젖은 앞머리를 살살 쓸어 넘겼다.

고운 이마를 바라보던 시선이 금세 선우의 눈으로 향했다.

“설마, 첫 키스예요?”

“…….”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는 선우의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나이까지 키스 한 번 못 해 본 저를 반푼이라고 생각할까. 선우는 순간 쥐구멍에 숨고 싶을 만큼 부끄러워졌다.

그러나 태성은,

“와. 영광이네.”

선우에게 예의 그 화사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선사했다.

사르륵 접히는 눈매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니, 선우의 고개가 느닷없이 뒤로 홱 꺾였다.

“?”

뭐에 자극을 받은 건지 선우의 뒷머리를 한순간에 잡아챈 태성은 지금까지 엄청난 배려를 했다는 듯 거칠게 입을 맞췄다. 제 앞에 앉은 이를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달려든 그는 선우의 입술 새를 거세게 파고들며 말랑거리는 살덩이를 힘차게 빨아들였다.

“읏…!”

혓바닥이 뽑혀 나갈 것만 같은 통증에 선우가 신음했다. 그러나 그 소리 또한 금방 남자의 입속으로 먹히고 말았다.

입안으로 넘어오는 숨결에서는 위스키의 달콤한 향이, 입안을 휘젓는 혀끝에서는 알코올의 씁쓸한 맛이 느껴졌다.

남자와의 키스는 어느 순간에는 사지가 다 녹아내릴 듯 부드럽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머릿속을 몽땅 뒤집어 놓을 듯 격렬했다. 난생처음 하는 키스에 선우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타액이 고인 살갗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견딜 수 없이 민망하면서도 눅진하게 눌어붙는 감촉이 말도 못 하게 좋았다. 어느덧 그의 입술을 간절히 쫓고 있는 것은 저 자신이었다.

단순히 사람과 입을 맞대고 혀를 섞는 행위가 이렇게 기분이 좋은 것이었나.

“하아…….”

지난날 약의 기운으로 황홀감을 느꼈던 제가 어리석다고 느껴질 만큼, 선우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충만함을 느꼈다.

사고가 마비된 듯,

그의 말대로 정말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한번 맞붙은 입술은 한참을 떨어질 줄 몰랐다.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태성이 선우의 입술을 파고들면, 선우는 할딱거리면서도 그의 움직임을 모두 받아 냈다. 그러다 그 부드러운 입술이 조금이라도 떨어질라치면, 도리어 제가 더 안달이 나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가며 남자의 얼굴에 들러붙었다.

어느 틈에 제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매달려 있다는 것도 선우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떻게 이렇게 좋을 수가 있지.

그의 입술이 내려앉은 입술, 맞닿은 혀와 그 혀가 훑고 지나간 입속, 손에 휘감긴 머리칼까지. 그가 닿는 곳곳이 전부 다 애가 달았다. 남자의 따뜻한 체온에 안정감마저 드니, 조금만 더 저를 만져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술에 취해서 이성적인 판단이 안 되는 걸까. 그게 아니면, 남자가 너무 비현실적으로 잘생긴 탓일까. 내가 아닌 누구라도… 이 사람과 숨결을 나누면 이런 감정이 드는 걸까…….

일순간 소파 위로 얇은 머리카락이 쏟아져 내렸다. 태성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그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찬 선우는 제 몸이 소파로 기울어지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갑자기 등 뒤로 닿는 서늘한 촉감에 선우는 눈을 번쩍 떴다.

쿵쾅쿵쾅, 심장이 몹시도 요동을 쳤다. 너무 요란하게 두근대서 이러다 심장이 터진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으…. 아, 저, 그만…….”

선우가 진하게 붙어 있던 입술을 뒤로 물리며 태성을 밀어냈다.

“그만?”

태성은 숨을 가삐 고르는 선우를 내려다보며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하도 빨아 대어 입술이 빨갛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안 그래도 도톰한 입술이 깨물면 터지기라도 할 듯 포동해졌다. 이대로 그냥 입안에 쑥 넣고 잘근잘근 씹어 먹어 버리면 딱 좋겠다 싶을 만큼.

“……너무….”

“너무.”

선우는 물끄러미 태성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나 태연하게 구는 남자의 얼굴에 낯설게도 열기가 서려 있었다. 흥분에 젖은 눈동자에 선우는 그만 몸서리가 쳐졌다.

뜨겁게 달아오른 눈이 저를 꿰뚫어 낼 듯 바라보자,

심장이 너무 뛰어서…….

선우는 혼잣말을 하듯 작게 속삭였다.

하, 선우의 종알거림에 몸을 잠깐 뒤로 무른 태성이 허공을 향해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한 경위.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이내 고개를 숙인 태성은 다시금 내려온 선우의 앞머리를 살갑게 쓸어 넘겼다.

“이 뒷감당을 다 어떻게 하려고 그래.”

상냥한 남자의 손길이 어쩐지 부끄러워 선우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언뜻 탁자 위에 놓인 양주병이 눈에 들어왔다.

약! 약이구나. 남자가 술에 약을 탔나 보다. 그래서 이렇게 황홀하고 기분이 들뜬 거였어.

선우가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 태성은 제 앞에 놓인 귀에 쪽하고 입을 맞췄다.

“아! 저, 저기…!”

삽시간에 귓가에 소름이 돋은 선우가 손으로 귀를 막으며 태성의 얼굴을 살짝 밀었다.

“혹, 혹시…….”

그러고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조그맣게 물었다.

“약… 약, 타셨어요…?”

갑자기 날아온 엉뚱한 질문에 어이가 없어진 태성은 그대로 선우의 가슴께에 이마를 묻었다. 그가 소리 없이 몸을 울려 웃자 선우의 몸에도 약한 진동이 전달되었다.

“무슨 칭찬을 그렇게 해.”

고개를 든 태성은 눈을 접어 웃고 있었다. 선우는 불현듯, 시원하게 올라간 입가와 그 끝에 자리한 보조개를 만져 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 욕망 어린 시선을 읽고 태성은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목이고 쇄골이고 입술이 닿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쭉쭉 빨아 버리면 좋겠는데, 선우는 이런 자극에 영 면역이 없어 보였다. 하는 수 없이 태성은 망상스러운 입술을 입안 가득 베어 무는 것으로 욕구를 대신 채웠다.

얼마가 지나고 마침내 두 사람의 입술이 온전히 떨어졌을 때, 서로를 담은 눈동자에는 붉은 기운이 가득했다.

차마 눈을 마주하고 있기가 부끄러워 선우는 서서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펼쳐진 광경에 선우는 그만 제 입을 틀어막았다.

제가 내내 잡고 늘어진 남자의 니트가 완전히 엉망이 되어 있었다. 사정없이 구겨진 옷은 본래의 형태를 잃었고, 죽 늘어난 옷감 사이로는 무시무시한 가슴 근육이 슬쩍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선우를 아연하게 한 것은 빈틈없이 엉겨 붙은 네 개의 다리였다. 남자의 다리 사이에 제 것이 있고, 제 다리 사이에 남자의 것이 있었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불룩하게 성이 난 바지 앞섶은 부러 짝을 맞추기라도 한 듯, 남자의 것과 꽉 맞물려 있었다. 서로의 성기가 맞닿은 부위가 뜨끈했다.

정신이 아득해진 선우가 눈을 질끈 감았다.

…한선우 미쳤구나…….

너무 창피하고 민망한 나머지 얼굴이 달아오르다 못해 이제는 곧 펑, 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이제 기분 좀 나아졌어요?”

웃음기가 배인 목소리에 불쑥 자괴감이 몰려와, 선우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췄다.

그런데 돌연 미처 가리지 못한 코끝에 촉, 가벼운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그의 입술이 닿은 곳이 제 코끝에 달린 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터져 나올 것 같은 한숨을 삼켜 내는 선우의 머리 위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내렸다.

“이만 쉬어요.”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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