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3. 아도니스의 후예 (2) (5/19)

3. 아도니스의 후예 (2)

다음 날, 선우는 문자 한 통을 받았다.

시간도 장소도 없이 오로지 날짜만 적힌 메시지는 불장난 같았던 첫 키스의 상대로부터 온 것이었다.

다가오는 금요일. 선우는 동길과 당직 일정까지 바꿔 가며 하루를 통으로 비워야 했다.

그리고 목요일 밤, 퇴근길 집 앞에는 선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명함을 내밀며 자신을 소개하는 그는 사이렌에서 남자의 옆을 지키고 서 있던 정윤철이었다.

‘내일 오후 4시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정윤철은 선우에게 커다란 상자 하나를 건네주고 돌아갔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열어 본 상자 안에는 정장 한 벌과 구두 한 켤레, 그리고 A4 용지 크기의 얇은 파일철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중 파일부터 먼저 집어 든 선우는 안에 담긴 내용을 확인하고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가 보낸 것은 다름 아닌 아도니스 일원에 대한 정보였다. 열몇 장 남짓 되는 보고서에는 구성원의 명단과 그들에 대한 간략한 프로필이 보기 쉽게 정리되어 있었다.

명단에 있는 인원은 백여 명에 달했다. 정재계 사조직이라던 최대영의 말이 사실이었던 듯, 구성원들의 약력이 몹시 화려했다. 현재 활동 중인 정치인과 사람들이 흔히 재벌이라 칭하는 기업가들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도니스에 속해 있는 이들은 그냥 단순 정재계 인사가 아니었다. 2~3대(代)가 금배지를 단 정치 명문가 출신의 국회의원, 5대 기업 총수, 집안 대대로 대법원장이나 검찰총장을 지낸 법조인, 전·현직 국무총리·당 대표, 언론사 대표 등.

그 화려한 문태성의 스펙이 보잘것없어 보일 정도로 하나같이 어마어마한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개중에는 양승준, 그도 있었다.

제가 아도니스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을 남자가 의아해할 만도 했다. 선우로서는 평생을 가도 만나 보지 못할 사람들이었다.

이런 정보를 제게 줘도 되는 건가……. 선우는 문득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쥐가 고양이 걱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를 우려하는 제가 우스워 이내 그 생각을 접었다.

선우는 남자가 보낸 자료를 들고 소파 앞에 앉았다. 그러고는 조금 전 빠르게 훑었던 자료를 첫 장부터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어떤 정보가 어떻게 쓰일지 모르니 하룻밤 동안 가능한 많은 정보를 머릿속에 집어넣어야 했다.

***

선우는 상자를 열어 곱게 개인 슈트를 조심스레 꺼내 들었다.

남자가 보내온 옷은 선우의 몸에 맞추기라도 한 듯 기장과 품이 딱 맞았다. 언뜻 보기에는 평범하고 얌전한 포멀 슈트였지만 자세히 보면 공들여 만든 티가 역력했다. 얇고 부드러운 재질은 물론이고, 옷의 형태를 변형하는 대신 세심한 바느질로 멋을 낸 디자인이 무척이나 고급스러웠다.

이어 구두까지 꺼내 신은 선우가 현관에 달린 전신 거울 앞에 섰다. 한껏 차려입은 저 자신은 언제 봐도 어색했다. 선우는 뻘쭘하게 서서 이마를 긁적이다 곧 집을 나섰다.

약속 시각을 칼같이 맞춰, 아파트 입구에 리무진 세단 한 대가 도착했다. 뒷좌석 문을 여니 무표정한 남자가 저를 맞았다.

“오랜만이에요.”

“…….”

선우는 인사 대신 고개를 숙이며 묵례하고 차에 올라탔다. 선우를 태운 차는 곧바로 도로 위를 달렸다.

남자는 선우와 마찬가지로 정석에 가까운 슈트 차림을 하고 있었다. 이마 뒤로 머리를 시원하게 넘기니, 뚜렷한 이목구비에 시선이 집중되어 새삼 그가 참 잘생겼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날 밤의 흐트러짐은 한 치도 볼 수 없이, 남자는 완벽한 상태였다. 그날 이후 처음 마주하는 얼굴에 선우는 도무지 창피해서 눈도 제대로 쳐다보지를 못했는데, 반대로 그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자약하기만 했다.

“나는 한 경위, 비서라고 소개할 거예요.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서울 시내를 한참 달리는 동안 아무 말이 없던 그가 어느 순간 조용히 말을 건넸다. 창밖을 내다보던 선우가 고개를 돌려 태성을 쳐다보았다.

“가능하면 한 경위에 대한 어떤 정보도 말하지 말아요. 이름도. 사람 하나 캐는 거 일도 아닌 사람들이니까.”

태성이 나지막이 주의를 주었다.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한 선우가 입을 열었다.

“……연우로 할게요.”

“…?”

“이름이요.”

생뚱맞은 소리에 살짝 구겨졌던 미간이 선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활짝 펴졌다. 고개를 숙이며 웃는 그의 얼굴에 보조개가 움푹 패었다.

“무서운데, 그 이름.”

두 사람이 탄 차는 어느새 서울을 벗어나고 있었다.

2021년 6월 25일 19시경

강원도 정선군

리무진이 향한 곳은 강원도 정선이었다. 눈앞으로 문호그룹사의 거대한 복합 리조트가 펼쳐졌다. 그러나 도착지가 그곳은 아니었다.

조금 더 달린 차는 광활한 리조트 부지를 뱅 돌아, 리조트와 외부 사이의 경계막 역할을 하고 있는 뒷산으로 진입했다. 뒷산은 문호그룹 총수의 사유지로 지도상에는 야산으로만 표기되는 지역이었다.

울퉁불퉁한 산길을 조금 달리다, 어느 순간 길을 막고 있는 거대한 철문을 마주하고 차가 잠시 멈춰 섰다. 요새의 성문과도 같이 굳게 닫힌 문은 쉬이 열리지 않을 것 같았으나, 리무진이 가까이 다가가니 기다렸다는 듯 좌우로 활짝 길을 열었다.

철문의 뒤편으로 다부지게 닦아 놓은 포장도로와 풍경화를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한 정원이 펼쳐졌다.

빽빽이 들어찬 아름드리 정원수와 우아하게 손질된 화단을 지나 마침내 웅장한 저택 앞에 도착했을 때, 태성은 좌석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핸드폰은 반입 금지예요. 어설프게 도청 같은 거 할 생각 말고 여기 다 놓고 가요.”

태성이 먼저 문을 열고 내리자, 밖에 서 있던 도어맨이 선우가 앉은 쪽의 문을 열어 주었다. 열린 문을 보며 머뭇거리던 선우는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좌석 위에 올려놓고 차에서 내렸다.

차체를 돌아 선우 앞에 선 태성이 눈앞에 있는 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쑥 한 번 훑어 내렸다.

“잘 어울리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흡족한 미소를 지은 그는 이내 몸을 돌려 저택으로 향했다. 선우는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참석자들의 사생활 보호와 보안을 위해 내부에는 본인과 지정된 수행원 1명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평소에는 정 비서가 동행하나 이번에는 선우가 그를 대신하기로 했다.

연회장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보안검색대를 통과해야 했고, 간단한 몸수색도 거쳐야만 했다. 남자의 말대로 핸드폰은 물론이고 시계, 만년필, 도청 장치로 쓰일 만한 물건은 전부 제출해야만 안으로 입장할 수 있었다.

연회장 안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은 명단 속 인물들과 정확히 일치했다. 유명 정치인, 기업 총수, 고위직 공무원. 선우의 눈에는 이 현장이 현실이라기보다 TV 속 뉴스 화면이라고 하는 편이 더 믿음직스러웠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문 대표가 오랜만에 나왔네. 회장님은 무고하시지?”

입장한 순간부터 남자는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반가운 인사를 건네며 그를 찾아오는 이가 끊이지 않았다. 주로 현직에 있는 50~60대 고위공직자들이었다.

다가오는 모든 이에게 정중하고 예의 바른 그는 영락없는 사업가였고, 준비된 재벌가의 후계자였다. 혼자서도 줄을 지어 오는 인사들을 수월하게 상대해 내는 이 남자에게 애초에 수행원이 필요했을까 의문이 들 정도였다.

젊고 유능한 대표 옆에서, 선우는 그들의 대화를 유심히 주워들었다. 사회‧문화, 정치‧경제, 운동과 건강에 대한 염려까지. 주제는 다양했지만 그다지 특별할 것도, 유의미한 정보랄 것도 없는 대화였다.

연회는 너무 평범하고도 평온해서 정말로 친목을 다지기 위해 모인 것처럼 느껴졌다. 아도니스에 관해 물었을 때 남자가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입장할 때는 왜 그렇게 보안에 신경을 썼는지 선우로서는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태성의 주위가 겨우 잠잠해졌다.

너무 많은 대화 상대에 옆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선우는 기가 다 빨릴 지경이었는데, 그 많은 이를 상대하고도 태성은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태성은 지나가는 웨이터에게서 샴페인 두 잔을 받아 들었다.

“잘 살펴보고 있어요?”

그가 선우에게 샴페인 한 잔을 건네며 물었다. 연회장으로 들어와서 거의 처음으로 남자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의 숨결이 선우의 이마 위로 내려앉을 만큼 두 사람은 가까이 섰다.

“아도니스에 대해 뭐가 그렇게 궁금했나, 원하는 거 잘 알아봐요. 오늘이 지나면 한선우가 여기 올 일은 다시 없을 텐데.”

그 말에 불현듯 초조해진 선우가 샴페인으로 목을 축였다.

남자의 등 뒤에 숨어, 선우는 조금 전까지도 연회장 내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그러나 몇 번을 다시 봐도 제가 찾는 이는 보이지가 않았다. 분명 명단에는 있었는데, 오늘 모임에는 참석하지 않은 것일까. 그의 말처럼 오늘이 지나면 이곳에 다시 올 방법은 없는데…….

“……대표님은 일 다 보셨어요?”

“일?”

“네…. 여기서 보실 일.”

“…….”

선우의 질문에 대답 없이 어깨만 으쓱이는 그는 어딘가 의뭉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러다 언뜻, 태성의 눈이 선우의 등 너머를 향했다. 그는 눈빛으로 누군가에게 인사를 건넸다.

“문 대표가 못 보던 친구를 데려왔네.”

낯선 목소리에 무심코 뒤로 돌아선 선우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자신의 눈앞에 양승준 의원이 서 있었다.

“의원님, 오셨어요.”

태성이 가볍게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선우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서 있자, 태성은 선우를 잡아끌어 자신의 옆에 서게 했다.

“윤 비서님도 그동안 잘 지내셨죠?”

윤, 비서…. 선우가 눈을 크게 뜨고 양승준과 그 옆에 선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양승준의 옆에는 창백한 얼굴에 뼈대가 길고 가느다란 남자가 서 있었다.

“누구야? 처음 보는 얼굴인데?”

“새 비서요.”

“비서는 무슨.”

태성의 말에 양승준이 코웃음을 쳤다. 곁눈질로 선우의 이곳저곳을 힐끔거린 그가 비죽거렸다.

“역시 문 대표가 안목이 좋아.”

“…….”

양승준을 마주하면 어떻게 할 것인지 머릿속에 백 번도 더 그려 본 선우였다. 그러나 막상 그의 얼굴을 보니 눈앞이 새하얘져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내 아버지가 그렇게도 잡고 싶어 했다던 사람.

내 아버지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체포한 사람.

내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

그토록 애타게 찾았던 그 사람 앞에서 선우는 긴장으로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얼핏 손에 닿은 체온이 퍽 따뜻하다고 느끼고 나서야, 선우는 제 손이 핏기 하나 없이 차갑게 식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

연회가 끝난 뒤, 두 사람은 문호리조트 내에 위치한 호텔로 자리를 옮겼다.

스위트룸의 문을 열고 들어선 태성이 응접실에 멈춰 섰다. 곧바로 재킷을 벗어 소파에 걸쳐 두고, 넥타이를 거칠게 끌어 내리는 그는 이제서야 조금 지친 기색이 보였다.

태성은 응접실 한가운데 놓인 1인용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더니, 멀뚱히 서 있는 선우를 보며 빈자리를 가리켰다.

“궁금했던 건 답을 얻었어요?”

그러고는 선우가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

별다른 대답 없이 멍하게 테이블만 내려다보는 선우는 기운이 없어 보였다. 초점 없는 눈이 넋이 나간 사람 같기도 했다.

흐음, 팔걸이에 걸쳐 둔 팔을 세워 얼굴을 괸 태성은 그런 선우를 빤히 쳐다보다, 유감이라는 듯 눈썹을 한 번 치켜올렸다 내렸다.

“실망했나 보네.”

“…….”

선우는 힘없이 태성을 바라보았다.

“와서 보면 무슨 정보라도 금방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한 경위는 의외로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스타일인가?”

무심하게 말하고는 태성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작은 나무 상자를 제 쪽으로 가져왔다. 달칵, 뚜껑을 열자 상자 안에서 진한 향나무 향이 확 퍼져 나왔다. 그 안에서 갈색 빛깔의 시가 한 대를 꺼낸 태성이 이어 시가 끝에 불을 붙였다.

“!”

별안간 주위를 휘감는 향에 선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뇌리에 콱 박혔던 독특한 향기.

하얀 연기를 타고 퍼지는 시가 향은 달콤하고 씁쓸했던 남자의 체향과 꼭 닮아 있었다.

공기를 짓누르며, 짙고 묵직한 연기가 응접실에 내려앉았다. 그윽한 향기에 이끌려 선우는 저도 모르게 살며시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무게감 있는 향에 가슴이 답답할 법도 했으나, 부드러운 바닐라와 달콤한 초콜릿이 연상되는 단내에 선우는 도리어 안정감을 느꼈다. 그와 뒤섞인 우드 향과 풀잎 타는 내음은 뒤숭숭한 마음 한구석을 진정시키는 효과마저 있었다.

남자의 향으로 편안함을 느끼는 제 모습이 우스웠지만, 낯선 곳에서 낯선 시간을 보내느라 잔뜩 긴장했던 선우는 익숙한 향기에 조금씩 느슨해지고 있었다.

향이 어느 정도 방 안을 메우자, 태성은 시가를 입에 물었다.

힐끔, 시가를 피우는 남자를 보다가 선우는 언뜻 게슴츠레 뜬 눈을 마주했다. 소파에 깊게 몸을 묻은 남자는 선우를 보고 비식 웃었다. 보면 안 될 것을 본 것도 아닌데 괜히 뜨끔해진 선우는 양 볼이 슬그머니 달아올랐다.

한동안 말없이 시가를 태우던 태성은 돌연 소파 옆에 놓인 작은 서랍장을 열었다.

“한 경위가 기대했던 건 이런 거였으려나.”

그러고는 그 안에서 하얀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들었다.

“내일 밤, 강릉에서 요트가 뜨는데.”

그가 꺼낸 봉투는 선우의 앞에 놓였다.

“참석할지 말지는 한 경위 마음이고, 생각 있으면 내일 저녁 7시에 로비에서 봐요.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

말을 마친 태성은 시가를 깊게 한 번 빨고는 입안의 연기를 길게 뱉어냈다. 그러더니 아직 한참 남은 시가를 거치대에 올려 두고는 몸을 일으켰다. 제 용건은 모두 마친 듯, 소파 위에 걸쳐 둔 재킷을 챙겨 든 그는 이렇다 할 말도 없이 곧장 방을 나섰다.

태성이 나가고 선우는 봉투에서 내용물을 꺼내 살폈다. 전날 정윤철에게 건네받았던 자료와 구성이 동일한 문서였다.

새로 받은 명단에는 첫 번째 자료에 포함되었던 이들도 간혹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이 더 많았다. 50명이 조금 못 되는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삼사십 대라는 것, 그리고 대부분이 첫 번째 명단에 있던 사람들의 자제라는 것이었다.

선우는 명단에서 양승준의 이름부터 찾았다.

그리고 명단 중간쯤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한 순간, 참석 여부에 대해서는 고민할 것도 없었다.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좀 전처럼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채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로 저는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스타일이었나…….

양승준의 프로필을 읽고 잠시 자료를 내려놓는데, 아직도 연기가 피어나오는 시가가 눈에 들어왔다.

선우는 허공으로 흘러가는 연기를 바라보며 두 무릎을 끌어안았다.

저 시가 끝을 빨아들이던 입술이 제 입술을 잡아 삼킬 듯이 물고 빨았던 그날 밤이 또다시 떠올랐다.

계속 이런 식이었다. 아무리 잊으려 노력해 봐도, 선우는 순간순간 자꾸만 그날이 생각났다. 둘 다 술에 취해 얼떨결에 그냥 입을 맞춘 걸 텐데, 저는 매일같이 그 입술을 떠올렸다.

오늘 그를 보니 역시나 그 일을 의식하는 것은 저뿐인 듯했다. 그에게 하룻밤 키스 정도는 어쩌다 일어난 해프닝, 어쩌면 그보다도 못한 실수였을지도 모르는데.

선우는 제 입술을 손끝으로 매만지다, 이내 무릎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한선우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린 선우는 정신을 차릴 요량으로 씻기라도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재킷을 넣어 두려 옷장을 열었을 때, 그 안에서 가지런히 걸려 있는 정장 한 벌과 새 구두 한 쌍을 발견했다. 한눈에 봐도 남자의 사이즈는 아니었으니, 옷이 걸린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애당초 그는 제가 어떤 선택을 할지 알고 있었다.

그가 떠나고도 짙은 시가 향은 오랫동안 방 안을 맴돌았다.

***

선우는 약속 시각을 10분 앞두고 로비에 도착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남자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선우는 구석진 기둥에 기대 서 그를 기다렸다.

옷장에 걸려 있던 딤그레이 색상의 슈트는 몸에 아주 잘 맞았다. 어제의 포멀한 슈트보다 훨씬 가볍고 편안하기도 했다.

문제는 디자인이 선우와 잘 맞지 않는다는 데에 있었다. 투 버튼 재킷에 왜 이렇게 허리선이 잘록하게 들어가 있는지, 허리를 감싸는 얇은 벨트 장식은 도대체 무슨 용도인지, 선우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가 제대로 입은 게 맞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어디 패션쇼장에서나 볼 법한 섹슈얼한 디자인이 선우는 영 불편했다.

튀는 옷차림에 어쩐지 사람들이 다 저를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낯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선우는 대리석 바닥에 구두 바닥을 문질러 댔다.

“아. 이건 좀,”

반딱반딱한 대리석뿐이던 시야에 검은색 구두가 들어왔다. 머리 위로 내려앉는 익숙한 음성에 고개를 드니, 어느덧 남자가 제 앞에 서 있었다.

“내놓기 아깝긴 하네.”

그는 옅게 웃는 얼굴로 선우를 마주했다. 남자 역시 어제보다는 좀 더 편안해 보이는 차림이었다. 선우가 입은 옷과 색감과 재질이 같아 언뜻 보면 두 사람이 옷을 맞춰 입은 듯한 착각이 들게 했다.

두 사람을 태운 리무진은 곧장 강릉으로 향했다.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둘은 차에 탄 뒤로 대화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선우가 먼저 말을 걸 성격이 아니긴 했으나, 그걸 차치하고도 태성은 상당히 바빠 보였다. 차에 타자마자 정윤철에게 태블릿 PC를 건네받은 그는 그 뒤로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화면을 이리저리 넘기고, 체크하고, 서명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 모습을 보다가 선우는 방해가 되지 않게 조용히 챙겨 온 종이를 꺼냈다. 곱게 접은 종이는 어젯밤 그가 놓고 간 자료에서 선우가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 정리한 것이었다.

출발한 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급한 일 처리를 마친 태성이 태블릿을 내려놓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집중하느라 뻑뻑해진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고는, 태성은 선우가 앉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우는 누가 쳐다보는 줄도 모르고 하얀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기자기한 글씨체로 채워진 종이는 보지 않아도 내용을 알 듯했다.

시험공부 하는 학생도 아니고. 하는 양을 보고 있자니 매사 열심히 하는 스타일인 것 같아서 태성은 웃음이 났다.

“원래 뭐든지 그렇게 열심히 해요?”

느닷없이 들려온 질문에 선우가 고개를 돌려 태성을 보았다.

“혹시, 어제 준 자료 다 외웠어요?”

태성이 턱 끝으로 종이를 가리키며 묻자,

“……네.”

선우가 마주한 눈을 껌뻑거리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전날 보낸 것도?”

“…….”

조금 머뭇거렸으나, 이번에도 고개는 위아래로 움직였다.

“와, 그걸 하루 만에 다 외웠어요? 한연우 씨 유능한 비서였네.”

저 작은 머리통에 그 많은 게 어떻게 다 들어가지. 꾀를 모르는 선우의 성실함에 태성의 입술 새로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2021년 6월 26일 21시경

강릉항 요트 선착장

어둠 속에서도 하얀 광택을 뽐내는 요트 앞에 고급 승용차들이 한 대씩 멈춰 섰다 나가기를 반복했다.

차에서 내린 선우는 떡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요트…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선착장에 정박해 있는 배는 차라리 초호화 크루즈선에 가까웠다.

태성은 뭐가 문제냐는 듯한 표정으로 선우를 내려다보았다. 한쪽 손을 바지 주머니에 쑥 꽂고 배로 향하는 그를 선우는 얼른 뒤쫓았다.

두 사람이 탑승하기를 기다렸다는 듯 배는 곧바로 출항했다. 길을 잃기 딱 좋아 보이는 거대한 요트 안에서 태성은 익숙한 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했다.

도착한 곳은 커다란 객실이었다. 벽면을 소파로 빙 두르고, 가운데 넓고 긴 테이블을 놓은 곳은 오로지 유흥을 즐기기 위해 마련된 장소 같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명단 속의 인물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객실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의 이목이 온통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문 대표 왔어?”

“어, 뭐야? 문태성이 누굴 데려오는 걸 다 보네?”

“이야, 오늘 무슨 날이야?”

사람들은 태성과 그를 뒤따라온 낯선 얼굴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평소와 다른 요란한 환대에도 무덤덤한 태성은 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태성의 옆에 따라 앉은 선우는 방 안을 둘러보는 척하며 소리 없이 참석자들의 면면을 살폈다.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인물 중 명단에 있는 이들은 반이 채 되지 않았다. 다른 이들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갖다가, 당연한 듯 아도니스 소속원들의 시중을 드는 것을 보고, 선우는 그들이 수행원이라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그리고 테이블 중간쯤 자리한 양승준 역시 윤 비서라는 자와 함께였다.

술자리가 시작된 지는 꽤 된 듯, 테이블 위에는 양주병과 유리잔들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가볍게 술 한 잔씩 하며 자유분방하게 떠드는 분위기가 조용하고 평화로웠던 어제의 아도니스 모임과는 사뭇 달랐다.

개중에는 위스키에 곁들여 시가를 피우는 자들도 있었다. 이들이 태우는 시가는 어제 호텔 방에서 맡았던 것과는 다르게 향이 무척 쓰고 독했다. 공기를 타고 제 앞까지 흘러오는 희뿌연 연기에 선우는 눈이 한 번씩 따끔거릴 정도였다.

“누구야? 빅스타 소속?”

누군가의 질문을 시작으로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선우의 얼굴에 들러붙었다.

“이름이 뭐예요?”

“……한…연우요.”

“……연우?!”

갑자기 한 남자의 벼락같은 목소리가 룸 안에 울려 퍼졌다. 워낙 큰 소리에 객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움직임을 멈췄다.

연우의 이름을 되물은 이는 주식회사 한조의 고중호 사장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항공운송사업과 항공·선박·자동차 제조업, 종합물류업을 모두 영위하는 한조는 재계 순위 3위의 톱 티어 대기업이었다.

“야, 태성아. 얘가 그 연우냐?”

고중호가 태성을 향해 물었다. 다리를 꼬고 앉은 그는 한쪽 눈썹만 빼쭉 올린 채 이렇다 할 대답이 없었다.

“맞아?”

“왜? 연우가 누군데?”

고중호의 질문에 근처에 앉은 이가 물었다. 주위 사람들도 내심 궁금증을 숨기지 못하는 눈치였다. 고중호는 이내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탄사를 내뱉으며 싱겁게 웃었다.

“이야. 너였구나? 홍성민 빵에 보낸 애가.”

“……!”

고중호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선우의 눈이 더없이 크게 뜨였다.

나에 대해 알고 있어…? 어떻게? 홍성민은 지금쯤 구치소에 수감 중이라 연락이 따로 닿지 않을 텐데……?

“그게 무슨 소리야?”

홍성민을 알고 있는 이들은 의아한 얼굴로 고중호와 선우를 번갈아 봤다.

“내가 얼마 전에 출장 가다가 공항에서 성민이를 만났거든. 근데 이 새끼가 자꾸 미친놈처럼 실실 웃어 대잖아. 그래서 뭔 일 있냐고 물어보니까 자기가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는 거야.”

“물건?”

킬킬거리며 웃은 고중호가 위스키를 한 모금 들이켜고는 말을 이었다.

“어. 눈 돌아가게 예쁜 애가 있는데, 하는 짓이 완전 여우 같다고. 연우, 연우 아주 노래를 부르던데?”

“그랬어?”

팔짱을 낀 태성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딱 홍성민 취향이긴 하네.”

“걔 취향이 뭔데?”

“몰라? 걔 청순한 스타일에 환장하는데.”

홍성민과 친분이 있는 자들이 선우를 보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 소리를 잠자코 듣고 있던 태성은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안 그래도 천종윤 생일날 얘 만나기로 했으니까 나더러 보러 오라더라고. 근데 내가 그날 일이 바빠서 패스했지. 어린 애들 노는 데 관심 없기도 하고. 그러다 그날 하필 짭새 떠 가지고 난 또 연우라는 애도 같이 들어갔나 보다 했지?”

고중호가 시가를 한 번 빨더니 연기를 후, 하고 뱉어냈다.

“넌 어떻게 나왔냐?”

“네? 저, 저는 그날… 일이 있어서 못 갔어요….”

“그래? 운이 좋았네.”

“야, 그럼 홍성민 그 새끼는 오매불망 얘 기다리다가 경찰한테 잡혀간 거야? 와, 씨발 존나 눈물 나는데?”

고중호 옆에 앉은 이가 선우를 가리키며 하는 말에 객실 안의 모두가 한바탕 크게 웃었다.

“연우 너는 그러고서 바로 문 대표한테 공사 쳤어? 수완 좋네?” 하고 선우를 향해 묻던 고중호가 느닷없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 가만있어 보자. 그게 아니라 문 대표 네가 얘를 빼돌렸구나? 새끼, 아무튼 재빠르다니까.”

“…….”

선우는 가슴이 다 벌렁거렸다. 경찰인 것이 들통 난 게 아니라 한시름 놓긴 했는데, 한번 크게 놀라고 나니 초조함이 잘 진정되지가 않았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몰라도 줄 하나는 잘 잡았네. 우리 문 대표께서 신경 써서 케어하면 톱스타 금방이지, 뭐.”

떠들썩한 룸 안이 잠잠해질 때쯤 말을 꺼낸 것은 양승준이었다. 양승준의 말에 별안간 미간을 찌푸린 태성이 고개를 기울이며 턱을 매만졌다.

“별로, 밖에 내보일 생각은 없어서요.”

“…….”

“…….”

태성의 말에 장내가 일순간 고요해졌다. 자리에 앉아 있던 이들은 서서히 입을 닫으며, 서로 눈빛만 주고받았다.

“저 새끼는 꼭 좋은 건 혼자 다 차지하려고 하지.”

말문을 연 건 고중호였다. 태성과 선우를 번갈아 본 그는 재미있는 꼴을 봤다는 듯 비실비실 웃었다.

“그래, 이 잘난 놈아. 너 혼자 다 해 처먹어라.”

고중호가 제 앞에 놓인 마른안주를 태성을 향해 장난스럽게 던졌다. 그제야 다른 사람들도 웃음을 터트렸다.

“자자, 시끄럽고! 다 왔으면 슬슬 시작하자고.”

누군가의 외침으로 테이블 위에는 검은색 브리프 케이스가 올려졌다.

딸각.

하드커버가 열리고, 가방 안의 내용물로 수십 개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안에 든 것은 투명한 지퍼백이었다. 하얀 알약이 소분되어 담긴 작은 지퍼백들이 가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커버가 열리기 무섭게 사방에서 뻗어져 나온 손들이 하나둘 지퍼백을 집어 들었다. 그 안에서 알약을 한 알씩 꺼낸 이들은 각자의 술잔에 약을 퐁당 떨어트렸다.

동그랗고 작은 알약은 부지불식간에 녹아 노란 액체 사이로 퍼져 나가더니,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잠시 후, 선우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요지경을 실시간으로 관람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각 분야의 사회 리더들은 서서히 약에 취해 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큰 변화 없이 일상적인 대화를 하고 시답잖은 농담도 주고받기에, 선우는 술에 탄 약이 마약이 맞는지 잠시 의아하기도 했다. 그러나 알약의 개수가 야금야금 늘어나면서 분위기는 점점 이상야릇하게 흘러갔다. 동행한 수행원이 업무나 단순 시중을 위한 수행원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것도 그때쯤이었다.

한순간에 수행원들은 성행위의 파트너로 전락하였다. 성별의 구분 없이 수행원의 가슴을 주물럭거리거나 허리를 감싸 안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함께 온 이를 무릎 위에 앉히고 엉덩이에 자신의 앞섶을 비벼 대는 이도 있었고, 먹고 싶은 안주를 입에서 입으로 넘기도록 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전 대법원장을 아버지로 두었다는 한 검사의 옆에는 훤칠한 남성 한 명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가 보이지 않는다 싶더니 어느새 테이블 아래로 내려가 검사의 성기를 빨아 대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성욕을 참지 못하고 아예 파트너와 자리를 옮기는 이들에게는 차라리 고마움을 느낄 지경이었다.

이거였어… 아도니스의 실체가……?

경·검찰이 엮이면 귀찮아진다고 말한 게 이런 것 때문이었나. 선우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이 장관을 모두 지켜보고도 표정의 변화가 없는 그는 그저 무심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상한 나라에 혼자 떨어진 사람처럼 돌변한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저 하나였다.

여기저기 살색이 난무하는 방탕한 광경에 선우는 비위가 뒤집힐 듯했다. 당장에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선우가 난잡한 꼴을 애써 외면하며, 문 쪽을 바라보고 있던 참이었다.

아까부터 이따금씩 눈이 마주치던 고중호가 선우를 향해 다가왔다. 손가락에는 시가를 꽂은 채, 술잔을 들고 온 그는 선우의 옆자리에 앉았다.

양 소매를 걷어붙인 고중호는 셔츠 단추가 세 개나 풀려 가슴팍이 헤벌어진 채였다. 다른 이들에 비하면 비교적 멀쩡해 보이긴 했으나, 약 기운에 눈 주위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문 대표님. 파트너까지 데려와서 점잔 빼고 계실 겁니까? 애 심심해 죽으려고 한다.”

얼핏 코끝을 찡그린 고중호가 갑자기 선우의 어깨 위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아, 새끼. 지 냄새 다 묻혀 놓은 거 봐라.”

선우는 어딘가 불쾌한 기분에 어깨를 슬쩍 뒤로 물렀다.

“홍한테 약하고 싶다고 했다며. 해 볼래?”

고중호가 손에 든 잔을 선우에게 내밀었다.

“아, 아니요. 괜찮아요.”

“왜?”

고중호는 선우 옆에 앉은 태성을 힐끔 보더니 곧장 말을 이었다.

“문 대표 때문에 그래? 이거 어차피 다 쟤가 만든 건데, 뭐. 괜찮아, 위험한 거 아니야.”

선우는 조금 난감한 표정을 하고 태성을 슬쩍 쳐다보았다. 당연하게도 그는 이 상황에는 관심 없다는 듯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그때, 선우의 어깨에 불쑥 팔을 올린 고중호가 선우의 볼을 살짝 꼬집고 흔들었다.

“아!”

“와, 이거 살결 봐라? 너 진짜 물건은 물건이다, 야.”

제 볼을 손으로 감싸 쥐며, 선우가 인상을 쓰고 고중호를 쳐다봤다. 마주한 고중호는 선우를 보고 느물거리며 웃었다. 그 모습에 작게 한숨을 쉰 선우가 제 어깨에 올려진 팔을 치우려던 찰나였다.

불현듯, 선우의 등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고중호의 손을 먼저 쳐냈다.

“뭐야?”

밀쳐진 손을 내려다보다, 고중호가 태성을 불만스럽게 쳐다봤다.

“아무 데나 손대는 버릇은 이제 고칠 때도 되지 않았어?”

하! 태성의 말에 기가 찬다는 듯 실소를 터뜨린 그가 선우 쪽으로 바짝 붙어 있던 몸을 떼어 내며 불평했다.

“비싸게 굴릴 거면 여기 왜 데려왔어?”

“…….”

태성은 몹시 귀찮은 듯한 표정을 하고 곁눈질로 고중호를 쳐다봤다.

“왜. 또 네 거 만지는 게 싫어서 그래? 야, 안 닳아 인마. 결벽증 환자 새끼. 너 그 정도면 병이야, 새끼야.”

고중호의 말에 태성은 슬그머니 한쪽 입매를 올려 웃더니, 돌연 제 입안을 혀로 싹 훑었다.

“약 빠니까 상황 판단이 잘 안 되지.”

무겁게 내려앉은 목소리에 순식간에 주위가 싸늘해졌다. 고중호도 눈에 띄게 몸을 움찔, 하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놀란 선우가 태성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태성은 선우에게 밖으로 나가라는 듯 눈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저, 저…. 잠깐, 실례, 하겠습니다.”

매서운 눈빛에 당황한 선우는 말을 더듬으며 몸을 일으켰다.

***

선상으로 나온 선우는 갑판 위에 서 바닷바람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짠 내를 잔뜩 머금은 바람이 얇은 머리칼을 흩날렸다.

하얗게 포말이 이는 밤바다를 내려다보며 선우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메스꺼운 속을 달래 보고자 한 행동이었으나 어둠 속에서 출렁이는 바닷물이 오히려 역한 기운을 부추겼다.

벌거벗은 채 섹스를 하다 잡힌 마약 사범을 본 게 한두 번도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속이 거북한 건지. 그러리라 예상하지 못한 이들의 숨겨진 면모를 보는 것은 생각보다 충격적이었다.

문득, 턱 안쪽에서 신물이 올라오는 듯했다. 물이라도 한 잔 마시면 속이 좀 나을 것 같은데……. 아쉬운 대로 화장실로 가 입안이라도 헹굴까 싶어, 선우는 난간에 기댄 몸을 돌려세웠다.

“화장실 가서 변기 붙잡고 토라도 하고 있을 줄 알았더니, 제법이네.”

또박, 또박.

고요한 밤, 한적한 갑판 위에 남자의 구두 발자국 소리가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요. 괜히 발 들여서 더러운 꼴 보지 말라고.”

가벼운 쇠붙이가 핑- 하고 경쾌한 소리를 냈다.

치익.

지포 라이터의 심지에 불을 붙인 태성이 입에 문 담배로 불을 가져다 댔다.

선우가 다시 몸을 돌려 바다를 바라보고 서자, 그 옆에 태성이 나란히 섰다.

“여기서 하는 약도 전부… 에퀴스인 거죠?”

태성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고개를 한 번 까딱한 그는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아 넣은 채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원래 높으신 분들은 다 그런 건가요?”

“뭐가?”

“청장님도 그렇고 여기 계신 분들도. 하나같이 앞뒤가 참 다르신 것 같아서요.”

“앞뒤가 다르다.”

냉랭하게 뱉어 낸 선우의 말을 태성은 감정 하나 실리지 않은 어투로 되뇌었다.

“한 경위가 보고 싶은 면만 본 건 아니고?”

선우는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을 마주했다.

“여기 있는 누구도 본인이 순결하다고 말한 사람 없어요. 멋대로 기대하고, 알고 보니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고 뒤늦게 실망하고. 이런 건 밑에 있는 사람들 특징인가, 그럼?”

담배를 깊게 빨았다 숨을 내뱉는 그의 입에서 하얀 연기가 흘러나왔다.

“설마, 돈 많고 지위가 높으면 그만큼 사회적 책임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그런 재미없는 얘기 하자는 건 아니죠?”

선우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눈살을 찌푸린 채 태성을 쳐다보았다. 돈과 지위를 막론하고 사람이라면 응당 지켜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행동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적어도 지켜야 할 선은 지켜야죠. 여기서 일어나는 일들은 범법 행위예요.”

태성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법은, 하루아침에도 바뀌는 게 법이고.”

“……?”

“지금 마약이라고 하는 게 당장 몇 달 뒤에 합법이 될지 누가 알아요? 그냥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자신이 만족하는 삶을 살면 되는 거 아닌가? 남이사 어떻게 살든 신경 쓰지 말고.”

“……허.”

그럼 본인의 만족을 위해서라면 범법 행위를 저질러도 상관없다는 거야? 비상식적인 궤변을 늘어놓는 남자에 선우는 그만 말문이 콱 막혀 버렸다.

태성은 손에 쥔 담배를 깊게 한 번 빨아들이고는 여직 긴 도막을 바닥에 그대로 내리꽂았다.

“어떻게, 저 안에서 볼 게 아직 남았어요?”

구둣발로 대충 담뱃불을 비벼 끄는 행동은 툭 던지는 말만큼이나 성의가 없었다.

왼쪽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한 그는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선우를 향해 섰다.

“5시까지는 정박 안 해요. 다시 돌아갈 거 아니면 방에 가서 쉬어요.”

태성은 선상 3층에 위치한 객실 구역으로 이동했다. 그 뒤를 따르다, 선우는 순간 복도 한가운데에 우뚝 멈춰 섰다.

제 뒤를 따라오던 기척이 사라지자, 태성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러고는 멍하니 서서 발을 떼지 못하고 있는 선우에게 되돌아가 물었다.

“뭐 해요?”

선우는 태성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 선우는 한 객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양승준 의원을 발견했다. 정확히는 윤 비서의 머리채를 잡고 거칠게 키스하며 들어가는 그를 목격한 것이었다.

앞서가던 이 남자도 분명 그 장면을 보았을 텐데, 태성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혹시… 윤 비서님 성함이…….”

선우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 나지막이 물었다.

느닷없는 질문에 태성은 허공을 보며 기억을 더듬다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답했다.

“윤해진?”

대답을 들은 선우의 입매가 일자로 굳게 다물렸다.

***

빈 객실로 들어선 태성은 선우를 침대 위에 앉게 했다. 선우는 그가 저만 안내하고 곧장 돌아갈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로 태성은 조금 떨어져 있는 티 테이블에서 의자를 하나 가지고 왔다.

선우와 마주 보고 앉은 그는 양 팔걸이에 팔을 올려놓고, 천천히 다리를 꼬았다. 긴 정강이가 공중을 향해 늘씬하게 뻗었다.

“아도니스는 이게 다예요. 더 알고 싶은 게 있으면 지금 물어봐요.”

“…….”

선우는 멀거니 태성을 쳐다보았다.

아도니스가 뭔 줄이나 아느냐고, 그렇게 싸늘하게 굴어 놓고 이제 와서 알고 싶은 걸 물으라니? 이 남자는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물론 묻고 싶은 것들이야 밤새 붙잡고 물어도 모자랄 만큼 많기는 했다. 하지만 그가 제게 왜 이렇게까지 해 주는 건지 선우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혹시 또 무슨 다른 속셈이라도 있는 건가. 이래 봬도 저도 경찰인데, 정말 나쁜 마음 먹고 수사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러지…….

“명단 봐서 알겠지만, 난 거기 있는 사람들에 비하면 별 볼 일 없죠?”

태성의 말에 선우가 눈동자를 동그랗게 키웠다. 언젠가 딱 한 번 스쳐 지나가듯 한 생각을 들키자 선우는 속이 뜨끔했다.

“아, 아니요…. 대표님도, 충분히 대단….”

“본인이 거짓말할 때 어떤 표정인지 모르죠?”

속이 훤히 드러나는 얼굴에 태성은 목을 울려 웃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아도니스에 들어올 수 있었을까, 궁금하지 않아요?”

“…….”

궁금했다.

문호가 대단한 기업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공식적인 재계 순위로는 10위권을 겨우 맴도는 기업이었다.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아도니스 내에서 남자의 입지가 상당해 보였다. 아도니스에 소속되기에 나이가 굉장히 어린 축임에도 불구하고. 고중호만 해도 그보다 세 살이나 더 많으면서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눈치이지 않았는가.

그 사람들이 뭐가 아쉬워서?

단순히 이자가 약을 공급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잠시 말이 없었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의문 가득한 눈빛에 태성은 곧 입을 열었다.

“아도니스는 일종의 유산 같은 건데.”

“유산…이요?”

“우리 영감이 워낙 걱정이 팔자인 양반이라.”

아도니스 클럽을 창립한 것은 문호그룹의 ‘문호’ 회장이었다. 벌써 삼십 년도 더 된 일이었다.

요즘 사람들에게야 문호그룹이 선망의 대상이라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건, 연배가 지긋한 어르신들이 가끔가다 문호그룹을 두고 깡패 집단이라느니, 조폭 기업이라느니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문호그룹의 전신은 ‘영등포문호파’였다.

6070 격동의 시대. 드넓은 서울 바닥 뒷골목을 맨주먹 하나로 평정한 ‘문호’ 회장, 그리고 그의 식구들은 정치인들의 뒤를 돌봐 주며 세력을 키워 갔다.

싸움 실력만큼이나 수완도 뛰어났던 문 회장은 그러면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받아다가 사업이라는 것을 시작했다. 그 사업이라는 것이 처음에는 유흥업소 운영이나 돈 놓고 돈 먹는 사채놀이. 딱 그 정도였다.

그런데 뒤를 봐주는 것도 결국엔 사람이 하는 일이라, 더럽고 귀찮은 일을 맡아 줄수록 떨어지는 콩고물의 크기가 커졌다. 눈덩이처럼 슬금슬금 불어난 콩고물은 언젠가는 유수 지역의 개발권이 되었고, 언젠가는 국책 사업의 일부가 되었다. 영등포문호파가 ‘문호건설’이 되고, 문호건설이 ‘문호그룹’이 되는 것은 강산이 변하는 속도보다 빨랐다.

그렇게 세워진 문호그룹의 회장님께서 핵심 정재계인들을 모아 비밀 사교클럽을 만들기로 결심한 것은 그에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가 생겼을 무렵이었다.

속싸개에 돌돌 싸인 팔뚝만 한 아이를 처음 받아 들었을 때, 문 회장은 문득 아이에게 조직폭력배의 그림자를 남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비록 제 손은 이미 더럽혀졌을지언정, 아이만큼은 감히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인물로 키우고 싶었다.

손수 지은 그 이름처럼, 어두운 세상 속에서 가장 크게 빛나는 별이 되기를. 이 땅의 ‘주인’이 되어 네 뜻을 마음껏 펼치기를.

그래서 그는 또다시 고위 공직자들의 뒷배를 자청했다. 제가 뒤를 봐준 이들이 언젠가는 제 손자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 주기를 바라면서.

엄선하고 또 엄선한 클럽 일원들을 위해 문 회장은 무슨 일이든 했다. 돈이 필요하다면 돈을 대 주고, 연줄이 필요하다면 연줄을 이어 주고, 유흥이 필요하다면 약과 잠자리 상대를 제공했다.

문 회장의 막대한 자금과 성심성의를 바탕으로 아도니스는 금세 대한민국 최고의 상류층 클럽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문 회장의 별장에서 친목을 빌미로 열리는 연회에서는 일반인들이 상상하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곤 했다.

오로지 회원만이 입장할 수 있는 2층 접견실, 그 작은 방에서 모든 일이 이뤄졌다. 재계 순위를 뒤흔들 만큼 거대한 규모의 거래가 체결되고, 나라의 정권을 한순간에 뒤집을 만한 중요한 정치적 사안이 결정되었다. 높으신 분들의 입에 담지 못할 섹스 파티는 오히려 가벼운 축에 속했다.

음모론으로나 치부될 법한 공상들이 이곳에서는 현실이었다.

그러니 문 회장이 구축한 성벽은 나날이 두터워졌다. 아도니스 내에서 오가는 모든 정보, 자금, 그들만이 공유하는 비밀이 문호그룹과 회원들을 지키는 창과 방패가 되었다. 아도니스로 권력은 갈수록 더 단단해지고 확고해졌다.

문호 회장이 타계한 지금에야 회원들이 돌아가며 의장을 맡고 있지만, 문호가(家)가 아도니스의 주축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문호의 바람대로 그의 손자는 난공불락의 요새, 그 중심에 있었다.

“역시 이런 건 좀, 시시한가?”

제 조부와 아도니스에 대한 이야기를 마친 태성은 아주 가볍게 씩, 웃었다.

“나도 한 경위 입에서 아도니스가 나올 줄은 예상 못 했어요.”

“…어….”

반면, 선우는 어안이 다 벙벙했다.

이게 다 무슨 얘기인가. 이런 일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제가 살아온 세상과 남자가 말하는 세상은 괴리감이 커도 너무 컸다.

“설마, 여기서 막 대통령도 정해지고… 그런 건 아니죠…?”

그래서 선우는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상상을 해 보았다.

“그럴 리가.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예요.”

각 정당의 후보 정도는 정해진다고, 사실 누가 대통령이 돼도 아도니스 멤버들에게는 크게 영향이 없다고 말하면 너무 충격을 받을 것 같아 태성은 말을 아꼈다. 실제로 선우는 태성의 대답에 조금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이런 거, 제게 다 알려 주셔도 되는 건가요…?”

선우가 조심스레 묻자,

“그러니까.”

태성은 별안간 제 아랫입술을 혀로 살살 훑고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누구 씨 첫 키스를 가져오는 대가가 이렇게 클 줄 몰랐지.”

선우는 입에서 악! 소리가 터져 나올 것만 같은 것을 겨우 참아 냈다.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남자와 다르게 선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뭐, 한 경위가 어디 가서 떠벌리고 다닐 것 같지도 않고.”

“…….”

붉은 얼굴, 말간 눈동자가 태성을 반히 쳐다보았다.

“아니면, 오늘 본 거 가서 또 수사하려고?”

잠시 멈칫, 했던 선우가 이내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안 해요, 수사.”

태성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의자 뒤로 젖힌 태성은 빡빡해진 눈을 질끈 감고 눈머리를 꾹꾹 눌렀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라 그런지 그의 얼굴에도 어느덧 피로감이 내려앉았다.

의자에서 일어난 태성은 불쑥 침대로 다가오더니 빈자리에 풀썩 몸을 눕혔다. 제 옆에 눕는 남자를 보고 선우가 흠칫 놀라 그를 쳐다봤다.

“도착하면 깨워 줘요.”

그는 이미 한 팔을 베고 눈을 감은 채였다.

그 모습을 잠시 내려다보던 선우는 고개를 바로 하고, 제 무릎을 천천히 굽혀 감싸 안았다. 무릎 위에 턱을 얹은 선우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하나도 없었다.

똑, 딱, 똑, 딱.

시곗바늘 소리가 온 방을 가득 메울 정도로 방 안은 조용했다.

똑, 딱, 똑, 딱.

“아버님이 돌아가시게 된 게 아도니스랑은 무슨 관련이 있는 거 같아요?”

한동안의 정적을 깬 건 태성이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선우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눈 위를 덮고 있는 긴 속눈썹이 희미하게 팔랑거렸다.

알고 있었구나.

하긴, 청장과 저녁 식사를 하던 그 시점에 이미 제 아버지 사건에 대해 알고 있었으니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가 아도니스에 대해 모두 얘기해 주었으니 나도 내 이야기를 해야 할까…….

“……잘… 모르겠어요.”

선우는 아주 잠깐 주저했다. 그러나 양승준 의원과 친분이 있는 그에게 양승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선우가 입을 다물자, 태성도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선우는 감싸 안은 무릎 사이로 머리를 깊게 파묻었다. 이대로 잠깐 눈을 붙일까 싶어 두 눈을 꾹 감아 보았지만, 생각이 많아져 잠이 오지 않았다.

어슴푸레하게 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배는 닻을 내렸다.

선착장에는 두 대의 차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태성은 처음 타고 왔던 리무진에 선우를 태웠다.

“피곤할 텐데 가면서 좀 쉬어요.”

탁, 그가 뒷좌석의 문을 닫자 선우만을 실은 차가 곧바로 서울로 향했다.

***

아도니스의 선상 마약 파티를 다녀온 지도 벌써 3일이 지났다.

책상 한구석을 응시하는 선우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하얀 종이 위에서 빙글빙글, 까만 볼펜이 연신 동그라미를 그렸다. 같은 위치에서만 몇 번이나 원을 덧그린 탓에 그 밑에 적힌 글자가 이제는 거의 보이지 않으려 했다. 무의식적으로 그려낸 동그라미 안에는 ‘양’ 그리고 ‘윤’,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

우웅, 우웅.

선우는 볼펜을 쥐고 있던 손을 들어 턱을 괴었다.

최 팀장은 분명 양승준이 아도니스 멤버라서 더 수사를 할 수가 없었다고 했지. 그런데 정작 아도니스의 주인이나 마찬가지인 남자는 아버지 사건에 대한 전말을 잘 모르는 눈치였다.

양승준과 윤해진. 두 사람은 무슨 관계일까. 그날 그렇게 격정적인 키스를 나누던 걸 봐서는 윤해진이 호칭처럼 그렇게 단순한 비서만은 아닌 것 같은데……. 역시, 연인 사이인 걸까? 10년 전에는 둘이 함께 약을 하다 경찰에 붙잡힌 거고?

우웅, 우웅.

그런데 그게 담당 경찰관이 죽어야 할 만큼 심각한 사항인가? 당시 당 대표를 맡고 있던 양기용 의원의 아들이 마약을 하는 게 알려지면 안 되니까? 검사 결과도 나중엔 음성이었고, 결국 양승준은 무혐의 처분을 받았잖아. 아니면 남자 애인이 있다는 게 세상에 드러나면 안 돼서?

우웅, 우웅.

……잠깐. 그런데 양승준 의원, 결혼도 하고 애도 있는 거 아니었어?!

“선우야, 전화 좀 받아 봐라.”

“네, 네?”

선우의 뒷자리에 앉은 박민호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아까부터 줄기차게 울리던데.”

“아, 아. 네에.”

「문태성」

“?”

책상 위에서 핸드폰을 집어 든 선우는 액정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그만 화들짝 놀랐다. 너무 놀란 나머지 손에서 핸드폰을 그대로 떨어뜨릴 뻔한 것도 겨우 붙들었다. 누가 볼세라 주위를 빠르게 둘러본 선우는 이내 핸드폰을 꼭 쥔 채, 후다닥 사무실을 벗어났다.

인적이 드문 비상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전화가 끊겨 있었다. 그제야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부재중 전화가 무려 세 통이나 와 있었다.

언제 이렇게 전화가 왔지? 설마 세 통이 전부 다 남자로부터 온 건가 싶어, 서둘러 확인한 선우는 앞선 두 통은 15XX로 시작하는 스팸 전화인 것을 보고 내심 안심했다.

그리고 선우는 곧 벙찐 상태가 되었다.

왜…… 전화한 거지?

내가 다시 전화를 걸어 봐야 하나…….

엄지손가락이 액정 위에서 머뭇거렸다.

선상 모임이 있고 난 다음 날, 그리고 그다음 날에도 그는 연락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남자 입장에선 들어줄 필요도 없는 부탁을 무리하게 들어준 셈이었고,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보를 제게 제공해 주었다. 이 뒤부터는 제 일이었다.

애초에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 만한 사이도 못 되었으니, 남자와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줄 알았다.

지잉, 지잉.

선우가 고민하는 사이 다시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발신인은 그였다.

“……여보세요?”

- 바빠요?

“…아닙니다.”

- 일이 있어서 근처에 왔는데 마침 점심시간이라. 나 이 동네 잘 모르는데, 식사 같이해요.

“예에?”

안부를 묻는 것도 아니고, 다짜고짜 식사를 하자는 남자에게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꽥 질렀다.

“저 지금 근무 중인데요?”

- 밥은 먹을 거 아니야.

“아, 뭐어…….”

그렇기는 한데에……. 너무 당연한 말이라 선우는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10분이면 청사 앞에 도착해요. 큰길가로 나와요.

“어, 어… 네에…….”

갑작스러운 통화에 선우는 몹시 얼떨떨해졌다.

전화를 마치고도 선우는 꽤 한참을 비상구 계단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언뜻, 그에게 돌려줘야 할 것들이 떠올랐다.

눈에 익은 고급 세단이 청사 근처 도롯가에서 선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우를 태운 차는 ‘Hotel the Moon, 한강’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곧바로 호텔 내 한식당인 ‘청월’로 이동했다. 동네를 잘 모른다더니, 남자는 누구보다도 잘 알 것 같은 장소로 저를 데려왔다.

애피타이저로 나온 삼계죽에서 김이 포슬포슬 올라왔다.

“먹어요.”

하얀 김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선우는 가져온 종이 쇼핑백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마주 앉은 이에게 쇼핑백을 슥 밀어 넣자, 태성이 이게 뭐냐는 듯 의아한 눈으로 선우를 쳐다보았다.

“잘 입었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했어요.”

언젠가 그를 만나면 돌려줄 요량으로 선우는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슈트와 구두를 세탁해 놓았다. 다시 만날 날이 언제가 될지 모르니 고이 개어 제 차에 넣어 둔 참이었는데, 생각보다 기회가 금방 찾아왔다.

난 또 뭐라고. 태성이 손에 쥔 숟가락을 내려놓고 시큰둥한 얼굴로 쇼핑백을 쳐다보았다.

“그냥 가져가요. 잘 어울리던데.”

“아닙니다. 이런 거 받을 수 없어요.”

세탁비가 웬만한 옷 한 벌 값인 이런 고가품을 제가 받을 이유도 없고, 또 받아서도 안 되었다. 게다가 이렇게 비싸고 화려한 옷은 선우에게는 하등 쓸모없는 것이기도 했다.

“이거 맞는 사람 한 경위밖에 없어요.”

“……예?”

어벙한 물음을 무시하고, 태성은 다시 수저를 들었다.

“아니에요. 어차피 저는 이런 옷들 입을 일도 없고,”

“원하면 입을 일 만들어 주고.”

선우는 커다란 눈동자를 재차 끔뻑거리다,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요, 아닙니다.”

단호한 거절에도 태성은 개의치 않고 식사를 시작했다. 반응을 보아하니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옷을 가져갈 것 같지가 않았다. 돌아갈 때 차에 조용히 놓고 내려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선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직원이 몇 번 방 안을 들락거린다 싶더니, 곧 상다리가 휘어질 것처럼 식탁 위가 가득 찼다.

“그 이후에 좀 더 알아낸 거 있어요?”

젓가락으로 밥알을 한 알, 한 알 세고 있는 선우를 향해 태성이 물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선우는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돌연 심각해져, 손에 쥔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태성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말에 요트 뜨는데. 생각 있어요?”

“네…?”

“거기서 보고 들은 거 어디 가서 발설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나도 한 경위한테 협조할게요.”

왜? 태성을 바라보는 눈빛에 의아함이 서렸다.

“아도니스가 진짜 한 경위 아버지 사건이랑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나도 궁금하니까 같이 알아보자고.”

그러면서 태성은 갈비찜 한 덩이를 선우의 밥그릇 위에 올려놓았다.

“어, 어… 고, 맙습니다…….”

툭, 무심하게 얹어진 고깃덩어리를 보고 선우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방금… 그가 꽤 엄청난 제안을 했던 것 같은데? 정작 말을 뱉은 이는 워낙 아무렇지도 않게 식사를 재개하니, 선우는 그래도 되는 거냐고 더 묻지를 못했다.

조금 어리둥절한 기분을 남기고, 선우는 하얀 쌀밥 위에 놓인 갈비찜을 집어 한입 베어 물었다.

“!”

선우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말랑말랑하게 푹 고아진 살코기가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렸다.

와, 세상에. 갈비찜이 어떻게 이러지?

달짝지근하고 짭조름한 맛에 반해, 선우는 슬쩍 갈비찜 접시에 담긴 무 한 조각을 집어 먹었다. 그리고 또 감탄했다. 생전 이렇게 달콤한 무를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선우는 그제야 식탁 위에 올라온 음식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물이며 전이 윤기를 줄줄 흘리며 선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 조심스레 움직이던 손도 결국은 슬금슬금, 이동 범위가 넓어졌다.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놓은 전복과 버섯구이, 그 옆에 청포묵, 그 옆에 간장게장. 맛도 빛깔도 훌륭할뿐더러 하나같이 선우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어느덧 빵빵하게 차오른 볼은 쉬지 않고 오물거렸다. 입안이 가득 차 있는데도 손은 또 반찬을 향했다. 미슐랭 3스타에 빛나는 한식 요리 앞에서 선우는 너무 쉽게 가드를 내렸다.

“한 경위가 이렇게 잘 먹는 거 처음 봐요.”

“네? 아, 네…. 여기 진짜 맛있네요.”

태성은 어느 순간부터 식사를 멈추고 선우가 먹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제 손에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내려놓은 지는 이미 꽤 되었다. 게장을 말 그대로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고, 양 볼이 터질 것 같은데도 그사이를 못 참고 또 고기를 집는 건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난 또. 한식 싫어하는 줄 알았지.”

“아, 아니에요. 좋아해요….”

“좋아해요?”

“네에…….”

순간 민망해진 선우는 얼굴을 붉혔다. 내가 너무 열심히 먹었나……. 진수성찬 앞에 밥 한 공기가 금세 뚝딱이었다.

“잘 먹으니까 보기 좋네.”

손등에 턱을 괸 채, 씨익 웃는 남자의 눈매가 여느 때처럼 사르륵 보기 좋게 접혔다.

***

그 후로 선우는 태성의 도움으로 몇 번 더 요트에 올랐다.

패턴은 늘 같았다. 태성이 일정을 알려 주면 전날 정윤철이 옷을 들고 찾아왔다. 당일에는 언제나 리무진이 집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보낸 옷을 입고 차에 타면 선우는 예의 그 깊은 볼우물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선우가 요트에 오른 지 네 번째 되는 밤이었다. 그날의 유흥은 당구장에서 시작되었다.

2021년 7월 24일 22시경

강원도 동해 앞바다 선상

거대한 요트는 부대시설로 바는 물론이고 수영장, 카지노, 당구장 등을 갖추고 있었다.

선상에서는 본격적인 마약 파티에 앞서 간단한 오락을 즐기기도 했는데, 그 오락이라는 것도 주로 도박성 짙은 게임들이었다.

선우가 요트에 탑승했을 때, 아도니스 멤버들은 모두 당구장에 모여 있었다. 말이 당구장이지 눈부시게 화려한 샹들리에와 바닥을 뒤덮은 레드 카펫, 금박으로 둘러싸인 벽면이 어디 유럽 왕실을 연상케 할 만큼 호화로운 곳이었다.

그 안에서 마음 맞는 이들끼리는 이미 삼삼오오 팀을 이뤄 게임을 진행 중이었다. 산뜻한 샴페인도 곁들인 터라 분위기는 퍽 화기애애했다.

반면, 일말의 기대를 품고 왔던 선우는 맥이 완전히 빠져 버렸다. 매번 꼬박꼬박 모습을 드러내던 양승준 의원이 어쩐 일인지 오늘은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두 차례에 걸쳐 인사를 나누고, 이제 뭐라도 조금 사적인 말을 섞어 보려던 차였다. 그러던 와중에 흐름이 탁 끊겨 버리니 선우로서는 실망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남자 또한 오늘따라 무척 바쁜 눈치였다. 모임에 참석하는 날이면 언제나 그는 약속 시각에 맞춰 선우를 데리러 왔었다. 그런데 오늘 집 앞에서 선우를 기다리던 것은 빈 차였다. 따로 이동한 그는 배에 오르기 직전이 되어서야, 선착장에 대기하고 있던 선우를 만나러 왔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지, 요트 탑승 후에도 그는 정윤철과 계속해서 연락을 주고받았다. 목소리나 말투는 평소처럼 차분했으나, 간간이 인상을 쓰는 모습도 보였다. 지금도 정윤철에게 온 전화를 받느라 자리를 잠시 비운 상태였다.

선우는 당구장 한쪽에 마련된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의미 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한 게임 할래?”

큐대를 든 한 남자가 선우에게 다가왔다. 고중호였다.

“당구 칠 줄 알지?

“…아뇨.”

고중호가 당연하다는 듯 물었으나, 선우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몰라? 나 원. 지금까지 뭐 하고 살았어? 이리 와 봐, 내가 가르쳐 줄게.”

“엇!”

고중호는 거절할 겨를도 주지 않고 선우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아예 해 본 적 없어? 그럼 포켓볼로 연습해 볼까?”

비어 있는 포켓볼 전용 당구대 앞에 선우를 세워 둔 고중호는 벽면에 달린 거치대에서 큐대를 하나 더 꺼내 왔다. 그가 팁에 초크를 대충 바르고 큐대를 떠넘기듯 건네자, 선우는 엉겁결에 그걸 받아 들었다.

“…….”

선우는 손에 든 큐대를 멀거니 내려다보다 고중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벌써 당구대 위에 볼을 세팅하고 있었다.

“자, 봐 봐. 바닥에다 손바닥 딱 붙이고, 엄지랑 검지만 떼. 그리고 가운뎃손가락을 살짝 안으로 마는 거야.”

고중호가 선우에게 말했다. 그는 제일 먼저 큐걸이 만드는 방법부터 설명했다. 정말 제대로 가르쳐 줄 심산이었는지, 당구대 위에 제 손을 올려놓고 직접 시범도 보여 주었다. 그러고는 똑같이 따라 해 보라고 권하기에 선우는 엉거주춤 당구대 위에 손을 올렸다.

“응. 그 상태에서 가운뎃손가락 위에 엄지를 살짝 올려. 그렇지. 그다음에 검지로 큐를 감싸 주는 거야. 이게 기본자세. 에헤이, 아니지. 이렇게.”

처음 잡는 자세가 영 엉성해 보였는지 고중호는 선우의 손을 잡고 손가락 모양을 바르게 고쳐 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선우는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이어 그는 큐대 잡는 법을 알려 주었다. 그가 시키는 대로 큐대를 엄지와 손바닥 사이에 끼운 뒤, 나머지 손가락으로 감싸 쥐었을 때였다.

“어, 어! 너무 힘줘서 잡으면 안 돼!”

고중호가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다급히 외치더니, 하대를 잡고 있는 선우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덮었다.

“좆 잡는다, 생각하고 살포시. 어지간히 잡아 봤으니까 잘 알 거 아니야.”

“……네?”

뭘… 잡아?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선우는 움직임을 멈추고 방금 들은 말을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아무래도 제가 잘못 들은 건 아닌 것 같았다. 바르게 선 선우가 눈을 홉뜨고 고중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어금니가 드러날 정도로 씨익 웃더니, “농담이야, 농담.” 하며 선우의 어깨를 툭툭 쳤다.

“힘 빼고, 가볍게 쥐라고.”

무슨 일이 있었나 싶게 고중호는 다시 설명을 이어 갔다.

“다리는 어깨너비로 벌리고, 시선은 정면 유지하면서 허리를 아래로 숙여. 그렇지, 엉덩이는 뒤로 쭉 빼고.”

바로 뒤에 붙어 선 고중호가 한쪽 손으로는 선우의 골반을 잡아 뒤로 당기고, 한쪽 손으로는 등을 지그시 눌러 내렸다.

“힘들면 무릎 살짝 구부려도 되고.”

그러면서 선우의 오금을 슬쩍 쓸어내렸다. 자세를 잡아 준답시고 닿아오는 손길이 어쩐지 좀 끈적했다. 선우가 막 불쾌하다고 느낄 찰나였다. 옆에 바싹 붙은 고중호가 하얀 공을 가리키며 지시했다.

“이제 흰 공을 저기 삼각형 중심으로 보낸다고 생각하고 세게 쳐 봐.”

고중호의 말에 선우는 큐대를 큐볼과 일직선이 되게 놓고 그대로 밀어쳤다.

딱! 경쾌한 소리와 함께 표적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렇지! 어우, 잘하네!”

선우의 얼굴에 잠시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청아하게 울려 퍼지는 당구공 소리는 속을 시원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그 덕분에 꺼림칙했던 고중호의 손길도 그새 기억에서 잊힐 뻔했다.

“근데 연우 너, 비쩍 마른 줄만 알았더니 의외로 근육이 좀 있다? 몸이 밸런스가 예술인데?”

“…….”

느닷없이 팔을 주물럭거리는 두꺼비 같은 손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그랬을 것이다.

이 사람이 도대체 왜 이래. 샴페인에 취하기라도 한 건가.

가까이 붙은 고중호를 피해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난 선우가 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 통화를 마치고 들어온 남자가 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일이 잘 풀리지는 않은 모양인지, 성큼성큼 걸어오는 남자의 눈썹이 살짝 구겨져 있었다.

불현듯, 선우 옆에 서 있던 고중호가 킬킬대며 웃더니 큐대를 당구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다. 그러고는 모두에게 들릴 정도로 크게 외쳤다.

“자, 이제 그만하고 넘어갑시다!”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은 하던 게임을 모두 멈추었다.

무리를 지어 하나둘 밖으로 빠져나가는 와중에 태성은 선우의 앞에 우뚝 섰다. 선우는 오늘 처음으로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했다.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맹렬한 시선에 선우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정 실장님이랑은 얘기 다 끝나셨어요?”

“…….”

열린 문을 보며 선우가 말을 이었다.

“다들 이동하는데, 저희도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큐대를 당구대에 기대 세워 놓고, 선우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갑자기 팔을 세게 잡아당기는 힘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별안간 어두운 그림자가 선우의 얼굴을 뒤덮는다 싶더니,

“읍!”

도톰한 입술이 순식간에 축축한 입안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옴짝달싹할 수 없도록 선우의 머리와 몸을 꽉 붙든 태성은 물어뜯어 내기라도 할 것처럼 선우의 입술을 거칠게 빨아들였다.

“왜, 왜 이러세요!”

키스라 부를 수도 없는 난폭한 입맞춤에 당황한 선우가 태성을 힘껏 밀어내며 소리쳤다. 뒤로 한 발짝, 몸을 물린 선우의 다리가 당구대에 채었다.

“어디 만졌어.”

“뭐, 뭘요?”

간담이 서늘할 만큼 음산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선우는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저 새끼가 너 어디 어디 만졌냐고.”

“무슨…….”

태성은 선우의 몸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팔과 등, 골반을 살펴보더니 사나운 기색으로 이를 갈았다.

씨발.

그러더니 돌연 욕설을 뱉어 냈다.

한 번씩 살벌한 기세를 내뿜기는 했어도 욕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남자였다. 봉변을 당한 건 저인데 난데없이 욕을 들으니 선우는 황당하기가 그지없었다.

“아니, 이게 지금….”

상황 파악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 선우의 턱을 잡아채, 태성은 저를 바라보도록 고개를 고정시켰다. 그러고는 곧바로 새빨개진 입술로 달려들었다.

‘아!’ 아랫입술을 질근 깨물자, 입술 사이가 금세 벌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태성은 제 혀를 선우의 입안 깊숙이 밀어 넣었다. 마치 좁은 입안을 온통 제 것으로 가득 채우기라도 할 것처럼 할 수 있는 한 깊게, 목구멍 끝이 닿을 정도로 깊은 곳까지 혀를 박아 넣었다.

남자의 거친 행사에 깨물린 통증은 둘째치고, 선우는 입안이 뻐근하고 숨이 콱 막혔다. 답답한 마음에 선우가 태성의 어깨며 가슴을 연신 두드려 댔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선우가 고개를 돌려 피하려 하니, 그는 아예 선우의 얼굴을 감싸 쥐고 입을 맞댔다.

자꾸만 밀어붙이며 오랫동안 물고 놓아주지 않는 태성에 선우는 결국 당구대에 걸터앉은 채로 기나긴 키스를 받아 내야 했다.

꼭 저를 질책하는 것만 같은, 영문 모를 키스였다.

***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늦게 룸에 도착한 고중호는 자못 신이 나 있었다.

“이야. 살다 보니 문태성이 코가 꿰이는 날이 다 오네?”

“너는, 얌전히 있는 애를 왜 자꾸 건드려.”

고중호가 빈자리에 앉자, 테이블 중간쯤에 앉아 있는 서울중앙지검의 엄재한 검사가 한소리를 했다.

“재밌잖아요. 형도 태성이 그놈 눈 돌아가는 걸 봤어야 했는데.”

낄낄대는 고중호는 태성과 연우를 남겨 두고 당구장을 벗어나던 중, 두 사람이 입을 맞추는 것을 보고 온 참이었다.

“난 걔 아무것도 모른 척, 맹한 표정 짓고 있어서 별로던데.”

고중호의 옆자리에 앉은 이가 말했다.

“야, 네가 뭘 몰라서 하는 소리다. 홍성민이고 문태성이고 정신을 못 차리는 거 보면, 쟤 보통이 아니라고. 저렇게 순진하게 생겨서 잠자리에선 또 회까닥 도는 애들이 있지.”

……가만있어 봐라. 문태성 성질머리 구경하는 게 흔한 일이 아닌데. 마침 그 뽀얗고 말간 얼굴이 약 빨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기도 하고……?

고중호가 별안간 눈을 번뜩였다.

“볼래? 쟤는 어떤 쪽인지.”

제 앞에 놓인 유리잔을 얼음 몇 개와 위스키로 채운 고중호가 이어 지퍼백에서 알약 세 알을 꺼내 잔에 넣었다. 노란 액체 속에서 잠시 부풀어 올랐던 알약은 곧 형태를 잃고 사라졌다.

“어, 그거 문 대표 알면 질색할 텐데?”

이번에도 말리는 건 엄재한이었다.

“에이, 내가 나 좋자고 이럽니까? 어차피 재미 보는 건 문 대표님 아니야. 그 자식이 나한테 고맙다고 절을 해야지.”

“미친놈.”

“뭐, 인마. 넌 협조나 잘해.”

고중호는 술잔을 뱅글뱅글 돌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런 고중호를 향해 욕을 날린 건 바로 옆에 앉은 이였지만, 그 역시도 얼굴에는 웃음기를 띠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선우는 입술이 벌겋게 부은 채였다. 끈질기게 입을 맞추던 태성은 결국 선우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나오고 나서야 물고 있던 입술을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뒤늦게, 본인이 깨물어 놓은 아랫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어루만졌다. 이마가 마주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열망에 찬 시선으로 자신을 뜯어보는 남자에, 선우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 손길을 받고 있었다.

가슴 한구석을 간지럽히는 남자의 행동은 정윤철로부터 또다시 전화가 걸려온 덕에 끝이 났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안 되는 일이었는지, 태성은 전화를 받기 전 선우에게 먼저 룸으로 이동해 줄 것을 부탁했다.

룸 안에서는 이미 시가와 술이 한창이었다. 눈이 덜 풀린 것을 보니 약은 아직인 듯 보였다.

“뭐 하느라 이렇게 늦게 와?”

“…….”

선우가 매번 자리했던 소파 끝자리, 그 옆에는 하필 고중호가 앉아 있었다.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제일 늦게 온 터라 마땅한 자리가 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연우 씨. 연우 씨는 술 좀 해요? 몇 번 보는 동안 술 한 잔 먹는 걸 못 봤네?”

다소 지친 낯으로 소파에 앉은 선우에게 고중호의 옆에 앉은 이가 말을 걸어왔다. 김정주, 그는 국내 최대 언론사의 후계자로 거론되고 있는 자였다.

“아예 못 하는 거 아니면 같이 한잔할래요? 이 긴 시간 동안 뭐 해. 심심할 텐데.”

“아… 아뇨. 술은 괜찮습니다.”

고개를 저으며 거절하는 선우의 말을 무시하고, 김정주는 테이블 위에 뒤집어져 있던 빈 잔을 바로 세웠다. 투명한 유리잔에 얼음 몇 개를 넣은 그는 이어 술병을 들어 잔이 가득 차도록 술을 따랐다. 금빛 물이 차오른 잔이 제 앞에 놓이는 것을 멀거니 보고 있자니, 고중호가 넌지시 말을 건네 왔다.

“태성이가 잘해 줘?”

“……예?”

잘…해 주냐니, 뭐를? 남자가 제게 잘해 주고 말고 할 것이 있나? 고중호의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선우는 언뜻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나 받아?”

“뭐…를요?”

“그 자식이 고정 두는 놈이 아닌데. 소속사에 넣어 놓고 데뷔시킬 것도 아니래고. 썩어 빠지는 게 돈인 놈이니 그건 많이 챙겨 줄 거 아니야. 한 번에 한 장씩은 줘?”

“아…….”

고중호의 말을 더듬어 보다, 선우는 짧게 탄식했다. 이들 눈에 저는 한낱, 남자의 스폰을 받는 연예인 지망생일 뿐이었다. 그러니 고중호가 저를 아무렇지 않게 희롱하고, 노골적인 질문도 서슴지 않는 것이 이제야 납득이 갔다.

“…아니요.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런 거 아닌 놈을 여기 데려와서 키스하고 있어?”

고중호가 콧방귀를 흥 뀌었다.

순간 선우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남자와 키스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봤다는 말에 선우는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입을 뻥긋거렸다.

“야. 여기서 내숭 떨어 봐야 뭐 해. 피차 알 거 다 아는 놈들끼리.”

붉어진 얼굴을 비웃으며, 고중호는 자신 앞에 놓여 있던 술잔을 연우의 앞으로 슬그머니 밀어 넣었다. 허둥거리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연우 앞에 있던 잔을 제 쪽으로 가져오는 것은 그다음 일이었다. 그러고는 김정주에게 힐끔 눈짓을 보냈다.

“너는 뭘 그런 걸 물어보냐! 술이나 마셔. 연우 씨도 한잔해요!”

고중호의 신호를 읽은 김정주는 연우의 손에 덥석 술잔을 쥐여 주었다.

“아, 저는 정말 괜찮아요.”

선우는 김정주에게 잡힌 손을 슬쩍 빼내며, 술잔을 앞으로 살짝 밀어냈다.

“뭘 빼고 그래. 못 마시는 거 아니면 한잔하지?”

“술 생각이 별로 없어서…….”

“이야. 문 대표가 버릇을 아주 거지같이 들여 놨네.”

그런데 갑자기, 고중호가 소름 끼치리만치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

선우가 놀란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고중호를 쳐다보았다. 그는 잇몸을 훤히 드러낸 채 입만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 너한테 선택권을 주는 것 같아?”

머지않아 그 웃는 입도 금세 차갑게 꼬리를 내렸다.

“너네는 그냥 마시라고 하면 마시는 거야. 돈을 받았으면 받아먹은 값을 해야지. 어디서 이게 혼자 고고한 척을 하고 있어? 마셔.”

고중호는 팔 한쪽을 소파에 걸쳐 두고, 턱 끝으로 술이 가득 담긴 유리잔을 가리켰다. 돌연 험악해진 분위기에 선우는 어쩐지 뒷머리가 쭈뼛 솟는 듯했다.

“…….”

“안 마시고 뭐 해?”

턱을 치켜든 고중호가 내리깐 시선으로 자신을 보자, 선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제 앞에 놓인 잔을 내려다봤다. 고압적으로 나오는 고중호의 태도가 어딘가 미심쩍었다.

수상한 기색을 느낀 선우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고중호의 자리 앞에 알약이 몇 개 담긴 비닐 팩이 입구가 열린 채 놓여 있었다.

……이건가.

선우가 아무런 미동이 없자, 고중호는 불쑥 손을 뻗어 술잔을 집어 들었다. 그는 곧장 잔을 선우의 얼굴 앞에 가져다 댔다.

“자.”

“……싫, 습니다.”

선우가 인상을 쓰며 고개를 뒤로 물렀다. 그러자 고중호가 소파에 걸쳐 둔 손을 뻗어 선우의 목덜미를 콱 잡았다.

“좋은 말로 할 때 마셔.”

윽. 선우가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잡힌 목을 빼내려 하니, 고중호의 손아귀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하지, 마세요.”

턱을 뒤로 당긴 선우가 손을 들어 코앞에 있는 잔을 밀어냈다. 그리고 고중호는 선우가 밀어낸 만큼 더 강한 힘으로 잔을 밀어붙였다. 두 사람의 힘겨루기에 유리잔이 앞뒤로 밀리기를 반복했다.

적당히 해서는 고중호를 막아 낼 수 없겠다는 생각에 선우는 일순 있는 힘을 다해 유리잔과 고중호를 세게 밀쳐냈다. 퍽! 소리와 함께 뒤로 밀려난 고중호의 가슴팍 위로 유리잔이 처박혔다. 잔 안에 가득 들어 있던 위스키와 얼음 조각이 그의 얼굴에 튀고, 삽시간에 옷을 흠뻑 적셨다.

챙!

고중호의 몸을 타고 데구르르 굴러 내린 유리잔이 이내 대리석 바닥 위로 떨어지며 쨍한 소리를 냈다.

“…….”

한순간에 룸 안에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고중호가 축축하게 젖은 셔츠를 내려다보며 서서히 얼굴을 굳히자, 조금 웅성거리던 실내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 있던 이들이 조용히 눈길을 주고받았으나, 어느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 새끼가 근데, 미쳤나.”

“아… 괜, 찮으세요?”

선우는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닦을 것을 찾던 중, 테이블 가장자리에서 티슈 갑을 발견하고 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윽!”

그런데 별안간 고개가 뒤로 확 꺾였다.

순간 화를 이기지 못한 고중호가 눈앞에 보이는 머리채를 잡아챈 것이었다. 그가 곧바로 손에 잡힌 뒷머리를 거칠게 끌어내리자, 선우는 저항할 겨를도 없이 도로 소파에 주저앉고 말았다. 두피가 얼얼할 정도의 통증에 선우는 얼굴을 구기며 두 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움켜쥔 고중호의 손을 붙들었다.

그때, 난데없이 고중호의 반대쪽 손이 제 입을 턱! 막아 왔다.

“…!”

혓바닥 위로 동그란 알갱이 몇 개가 쏟아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입안에 쓴맛이 돌았다. 도로록 눈동자를 굴려 내리깐 시선으로 테이블 위를 보니, 알약이 들어 있던 비닐 팩이 어느새 투명하게 비어 있었다. 선우는 재빨리 두 손을 끌어내려 고중호의 손을 잡아 뜯었다. 그러나 턱과 뒷머리를 앞뒤로 단단히 붙든 고중호는 손을 뗄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우윽….”

양쪽 귀밑에서 새어 나온 침이 알약을 빠르게 녹여 냈다. 약물이 뒤섞인 타액을 입안에 머금은 채, 선우는 발을 들어 고중호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자 고중호는 입을 막고 있는 손의 엄지와 검지로 선우의 코를 잡아 숨통을 빈틈없이 틀어막았다.

“!”

갑자기 숨 쉴 구멍이 꽉 막혀 버린 선우는 두 눈을 꽉 감고, 두 다리로 마구 발버둥 쳤다. 그러나 고중호는 개의치 않고 도리어 선우를 소파에 내리누르며, 입을 막은 손에 힘을 더 가했다.

“삼켜. 그럼 치워 줄게.”

고중호가 살벌한 얼굴을 하고 선우를 내려다보자, 선우는 소리 없이 신음했다. 객실 내에 있는 모든 이들이 두 사람의 광경을 보고 있었지만, 고중호를 말리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삼키라니까.”

“끅!”

선우가 제 말을 듣지 않자, 고중호는 잡은 머리채를 뒤로 휙 젖혔다. 불식간에 고개가 젖혀지니 저도 모르는 새 꿀꺽, 목울대가 절로 움직였다.

“하, 씨발. 이렇게 간단한걸. 존나 비싸게 구네.”

선우가 약을 삼키는 것을 확인하고, 고중호는 그제야 머리끄덩이를 잡은 손에서 힘을 빼냈다.

“악!”

그와 동시에, 선우는 제 입을 막고 있던 손을 세게 깨물었다. 고중호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손을 빼내자, 선우는 그를 밀쳐내며 자리를 급히 벗어났다.

“이 씹새끼가!”

고중호는 벌떡 일어나 선우의 뒤를 쫓았다. 허공에다 대고 되는대로 손을 뻗은 그는 선우의 뒷덜미가 잡히자, 그대로 선우를 벽에다 내동댕이쳤다.

쿵! 갑작스럽게 등을 세게 부딪친 선우는 찍소리도 내지 못한 채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학!”

색색, 숨을 고르는 선우의 얼굴로 돌연 물벼락이 날아왔다. 고중호가 테이블 위에서 아무 잔이나 집어 들어 선우의 얼굴에 술을 끼얹은 것이었다.

느닷없이 쏟아지는 액체에 선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머리카락과 속눈썹 끝에서 누런 물방울들이 한 방울씩 뚝뚝 떨어져 내렸다.

“이게 씨발, 예쁘다 예쁘다 하니까 눈에 뵈는 게 없나 봐.”

“하…….”

쿵덕, 쿵덕.

문득 심장 뛰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시야가 아찔하니, 눈앞이 뱅그르르 도는 듯도 했다. 선우는 놀란 가슴을 애써 진정시켜 보려 했으나,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끼이익.

때마침 두터운 철문이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입에 담배를 문 남자가 들어서자, 선실 내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남자에게로 향했다. 일순간 잠잠해진 실내, 어쩐지 제 눈치를 살피는 것 같은 분위기에 태성은 주위를 둘러보며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물에 젖은 생쥐 꼴을 하고 바닥에 주저앉은 한선우 하며, 성난 얼굴로 빈 잔을 들고 있는 고중호의 상태를 보아하니 둘이 무슨 사달이라도 난 모양이었다.

“뭐야?”

태성이 무심하게 물었다.

“하, 그래. 너 마침 잘 왔다.”

고중호는 태성에게 벌겋게 부어오른 손을 들이밀었다.

“이거 보여? 이 새끼가 이래 놨다고, 이거. 넌 씨발, 애 교육을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네가 자꾸 오냐오냐 봐주니까 애새끼가 사람 무서운 줄 모르고 이따위로 기어오르는 거 아니야!”

태성은 고중호의 손을 한 번 쳐다보고, 이내 곁눈질로 선우가 앉아 있는 바닥을 흘깃 내려다봤다. 두둑한 살점 위로 선명하게 박힌 잇자국에 무표정하던 얼굴에 설핏 건조한 웃음이 서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태성은 금세 표정을 굳히며 입에 문 담배를 빼냈다. 아직 불도 붙이지 않은 긴 장초가 바닥에 꽂히듯 던져졌다.

“그러게. 그동안 내가 너무 많이 봐줬나 봐.”

태성은 느린 걸음으로 테이블로 다가가, 양주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술이 반 이상 들어차 있는 병이었다.

“몇 번 주의를 준 것 같은데.”

꺄악! 날카로운 비명이 방 안을 울리고,

“자꾸 기어오르네.”

고중호의 머리 위로 노란 액체가 줄줄 쏟아져 내렸다.

***

선실 밖으로 선우를 끌고 나온 태성은 곧바로 3층에 위치한 객실 구역으로 향했다.

걸음이 빠른 남자를 뒤쫓아가다가 선우는 다리에 힘이 풀려 몇 번이나 주저앉을 뻔했다. 팔을 단단하게 붙든 힘이 아니었더라면 벌써 몇 차례나 제 발에 걸려 넘어졌을 터였다.

잡힌 팔이 연방 휘청거리자, 태성은 가던 길을 멈추고 뒤로 돌아섰다.

“뭐야. 너 왜 이래.”

태성은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고개를 숙여 선우의 상태를 확인했다.

“한선우. 술 마셨어?”

술 한두 잔으로는 금방 취하는 체질도 아니면서 선우는 만취한 사람처럼 정신이 없어 보였다.

하아.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선우는 팔을 들어 얼굴에 남아 있는 물기를 대강 닦아 냈다. 하얀 셔츠가 지나간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반쯤 내려앉은 눈과 달리 눈빛에는 이채가 도는 것이 술에 취했다기보다는…….

“…너, 설마. 약했어?”

선우가 고개를 들어 태성의 눈을 마주했다. 설마가 확신이 되자 선이 진한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고중호 짓이야?”

“…….”

귓가에 닿는 묵직한 음성에 선우는 머리칼이 쭈뼛 솟는 듯했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명치끝이 찌르르하니 저렸다.

“얼마나 했어. 몇 개나 먹었냐고.”

“……모르, 겠어요….”

아……. 아까부터 빠르게 뛰던 심장이 이젠 누가 안에서 방망이질이라도 해 대는 듯 걷잡을 수 없이 팔딱거렸다. 가슴께에서 솟아난 홧홧한 열감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심장이… 흐으…, 터질 것 같아요….”

선우가 태성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묻는 말에는 제대로 된 대답도 하지 못한 주제에 입에서는 아무 말이 튀어나왔다.

이, 씨발 새끼를…….

잇새로 나직이 욕지거리를 내뱉은 태성이 선우를 두 팔로 휙, 안아 들었다.

“앗! 잠깐…!”

두 발이 갑자기 공중에 뜨자, 놀란 선우가 다리를 마구 바둥거렸다.

“객실까지만.”

태성은 선우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손을 뻗어 작은 머리통을 제 어깨 위에 꾹 눌렀다.

“하으…….”

곧은 목덜미에서 풍기는 익숙한 체향에 선우는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남자의 목을 끌어안은 선우는 그의 셔츠에 얼굴을 파묻고 깊게 신음했다.

***

객실에 도착한 태성은 선우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여기 있어요. 아무 데도 나가지 말고.”

“…….”

침대 헤드에 기대앉은 선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몸을 바르작거렸다. 열기를 조금이라도 식혀 보고자, 선우는 뒷머리를 벽에 비벼 대며 서늘한 기운을 쫓았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에퀴스는 필로폰과 모핵이 같은 물질로 기존의 마약보다 중독성이 낮은 대신 성욕 증진 효과가 높은 것이었다. 알약 한 알 정도로는 효과가 미미한 편이나, 여러 개를 한꺼번에 먹으면 사실상 미약이나 다름없었다.

지금 한선우의 상태를 보면 한 알만 먹었을 리가 만무했다. 약 기운을 즐길 게 아니라면 약효가 다할 때까지 잠을 자게 하는 것이 가장 괴롭지 않은 방법이었다. 그러나 즐기자고 모인 배 안에 수면제가 구비되어 있을 리가 없었다.

아쉬운 대로 에어컨 온도를 낮춘 태성이 미니바에서 생수 한 병을 가져왔다.

“더워…….”

차이나칼라의 하얀 셔츠를 어느새 두 번째 단추까지 풀어헤친 선우가 세 번째 단추에도 손을 가져다 댔다. 원하는 대로 잘 풀어지지가 않는지, 하얀 손가락이 셔츠 위에서 버벅거렸다.

“정신 차리고 물이라도 좀 마셔 봐요.”

“하아. 너무, 더워요…….”

하얀 벽에 볼을 비벼 대는 선우는 일어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목에 손을 받쳐 몸을 세워 주고, 물을 마시도록 도왔으나 정작 본인은 의지가 없었다. 제대로 삼키지 못한 물이 선우의 입가를 타고 조르르 흘러내렸다.

선우는 차츰 몸을 잠식해 오는 아찔한 흥분감에 두 눈을 꾹 감았다.

감은 두 눈에 파란 하늘이 끝도 없이 펼쳐지고, 그 위로 핑크빛이 감도는 구름이 드리웠다. 몽실몽실한 구름 사이로 아른거리는 것은 저를 보고 있는 남자였다. 짙은 눈썹 아래 예쁘게도 접히는 눈가, 우뚝이 솟은 콧대를 지나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입술, 그 끝에 옴폭 자리 잡은 보조개.

자꾸만 제 시선을 앗아 가는 그.

침을 한 번 꼴깍 삼킨 선우가 조심스레 눈을 떴다.

눈앞에 그가 있었다. 손만 뻗으면 금세 닿을 거리에 환상 속의 남자가 있었다.

선우의 시선이 남자의 입술로 향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던 입술, 매끄러운 입매.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달짝지근했던 첫 키스. 몸과 머리가 그와의 키스를 기억했다. 그리고 그와의 키스를 애타게 원하고 있었다.

문득, 하늘에 붕 떠 있는 듯한 황홀감이 들었다. 제가 보고 있는 것이 꿈인 듯 현실인 듯 분간이 잘 가지 않을 만큼 머리가 팽글팽글 돌았다.

“!”

순간 선우가 움찔하며 몸을 웅크렸다. 생각을 놓고 있다가 하마터면 남자의 입술로 손이 갈 뻔했다.

아, 안 돼. 아니야.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선우가 연신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불쑥불쑥 치밀어 오르는 욕망 속에서 한 가닥 남은 이성의 끈을 겨우 붙든 선우는 몹시도 괴로웠다.

“괜찮아. 약 기운 때문에 그래.”

선우가 서서히 고개를 들어 태성을 마주했다. 바투 다가앉은 그와 가까이서 눈빛을 주고받으니 가슴이 떨려 왔다.

“네 의지가 아니고, 약 때문인 거니까 불안해할 거 없어. 시간이 지나면 아무렇지도 않아져.”

“……무서, 워요….”

“무서워?”

무서워.

미칠 듯이 뛰어 대는 심장이 무섭고, 열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몸이 무서워. 자극적인 감각을 원하는 머리가 무섭고, 통제가 안 되는 감정이 무서워.

……당신을 너무나도 원하는, 내가 무서워.

“왜… 억지로, 약을 먹여요?”

상대방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난 이런 거 원한 적 없는데. 모른 척할 테니까 그냥 당신들끼리 하면 되잖아.

“…뭐?”

당신은 왜 이런 걸 만들었어요? 이거, 이 기분 진짜 싫어요.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잖아.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당신은.

선우는 머릿속에 와르르 쏟아지는 생각을 제가 어디까지 담아 두고 어디까지 말로 뱉고 있는지도 몰랐다. 약에 취해 나타나는 과잉 활동1) 증상이었다.

“그래. 내가 나빴네.”

생각지도 못한 원망을 들은 태성의 입에서 가벼운 웃음이 샜다.

반면, 선우는 아주 심각했다. 이리저리 널뛰는 감정에 흐느적거리다, 그 끝에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잔뜩 찡그린 울상이 되었다. 충동적으로 행동하고 싶은 심정과 그러면 안 된다고 자신을 억누르는 감정 사이에서 선우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 태성이 침대 옆 작은 협탁의 서랍을 열었다.

“한선우. 이거 보여?”

태성은 그 안에서 투명한 지퍼백을 하나 꺼냈다. 작은 지퍼백 안에는 언제나처럼 하얀 알약이 들어 있었다.

“네가 먹은 거랑 같은 거야.”

직접 확인이라도 해 보라는 듯, 그는 지퍼백에서 알약 한 알을 꺼내 선우의 눈앞에 가져다 댔다. 선우가 두 눈으로 하얀 덩어리를 응시하자, 알약은 곧 태성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까드득, 안쪽 이로 알약을 씹어 부수는 소리가 선우에게까지 들렸다. 이어 태성이 선우에게 주고 남은 물을 전부 들이켜고 나니, 그의 입안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봐. 아무 일도 없어.”

태성이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그가 하는 행동을 멍한 눈으로 좇던 선우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렇게 숨이 가쁘고 열이 오르는데 아무 일도 없을 리가 없었다.

“뜨거워. 몸이 너무, 뜨거워요. 내 몸이, 아닌 것 같아.”

“생리적인 거야.”

“아니에요.”

생리적인 게 아니야.

남자인 당신을 보고 흥분하고, 당신과 입 맞추는 걸 상상하고, 당신이 만져 주기를 기대해. 애단 나와 다르게 태연한 당신에게 서운해하는, 이게 생리적인 거라고?

아니. 약의 기운을 빌었을 뿐, 나는 당신을 보고 욕정을 느껴.

“내가…, 나는, 당신이, 윽….”

그와의 키스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아래로 피가 몰렸다. 차마 더 말을 하지 못하고 선우는 두 다리를 최대한 붙여 몸을 오그라트렸다. 이 사실을 그가 안다면 저는 부끄러움에 까무러칠지도 몰랐다.

그때, 태성이 선우의 손을 불쑥 잡아 끌어당기더니 자신의 바지 앞섶 위에 올려놓았다.

“괜찮아. 나도 그래.”

“아…….”

손끝에 묵직하고 단단한 덩어리가 닿아 왔다.

“이제 네가 선택해. 어떻게 할까, 혼자 있을래? 그럼 나는 나가 주고.”

선우의 손을 놓아준 태성이 엄지손가락으로 객실 문을 가리켰다.

하아…….

깊은숨을 내쉰 선우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다시 마주한 그의 눈은 마냥 평온하기만 했다.

“……키스…해도 될까요….”

“그걸 말이라고.”

조심스레 묻는 말에 조각 같은 얼굴 위로 보조개가 드리웠다. 선우는 남자의 어깨를 다급히 끌어안았다. 그러기를 기다렸다는 듯, 두 팔 벌려 안아 주는 남자에게 선우는 무작정 입술을 맞부딪쳤다.

그러고는 언젠가 그가 했던 것처럼 남자의 아랫입술을 혀끝으로 살짝 쓸고는 벌어진 입술 사이로 제 혀를 밀어 넣었다. 축축하고 말캉한 혀가 살갑게도 저를 반겼다.

“으응.”

마치 더 깊이 들어오라는 양 제 혀를 얽어 안으로 쭉 빨아들이는 힘에 선우의 목에서 신음이 울렸다. 동시에 선우의 몸이 번쩍 들렸다. 맞붙은 입술을 떼지 않은 채, 태성은 두 팔로 선우를 들어 올렸다. 태성의 목을 끌어안은 팔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목을 꽉 조이는 압박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고, 태성은 침대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앉은 태성은 품에 안은 이를 제 다리 사이에 내려놓았다.

자리를 옮기는 동안 조금도 떨어지지 않은 입술이었건만, 남자가 어디 도망이라도 갈세라 안달이 난 선우는 거의 무릎을 꿇다시피 하고 태성에게 매달렸다.

쩍, 촉촉한 두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선우는 어느 밤, 남자가 가르쳐 준 것을 그대로 답습했다. 다물린 입술을 한입에 가득 베어 무는가 하면, 윗입술만을 쪽 빨아들이곤 했고, 아랫입술만 살금 깨물기도 했다. 안쪽까지 혀를 넣어 입천장과 이를 훑어 대는 대범함마저 보였다. 제 방식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한 혀 놀림에 태성은 가슴께가 뻐근해질 만큼 흡족감을 느꼈다.

“하아….”

두 손으로 태성의 얼굴을 감싸고 한참 키스를 퍼붓던 선우는 잠시 입을 떼고 숨을 골랐다. 선우의 엄지손가락이 조금 부은 듯한 남자의 입술을 스치듯 매만졌다. 이마를 맞댄 두 사람 사이에서 태성의 시선은 선우의 눈에, 선우의 시선은 태성의 입술에 가닿았다.

“끝났어?”

“…….”

선우가 물끄러미 태성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목이 말랐다. 한참은 부족했다. 이 정도로는 바닥을 모르는 갈망을 도저히 채울 수가 없었다.

“앗!”

태성이 선우의 두 다리 아래로 손을 넣었다. 마주 보고 있던 몸이 빙글 돌아 선우는 한순간에 앞을 바라보게 되었다.

“지금부터 내가 선을 좀 넘을 건데.”

제 품 안에 쏙 들어오는 몸을 뒤에서 끌어안은 태성이 불쑥, 한 손을 선우의 바지 위에 가져다 댔다. 야트막하게 올라선 바지 앞섶을 커다란 손으로 뭉근하게 내리누른 그는 볼록 튀어나온 천 위를 느릿느릿, 손끝으로 쓸어올렸다.

“아, 읏…!”

“싫으면 싫다고 말해.”

달각. 이내 허리춤에 도달한 손이 바지 버클을 풀고 금세 지퍼를 내렸다. 드로어즈 안으로 손이 침범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아윽!”

뜨거운 손이 성기를 감싸 쥐자, 선우가 몸을 다급히 움츠렸다. 태성은 손아귀에 들어온 성기를 속옷 바깥으로 꺼내 위아래로 부드럽게 쓸었다. 어설피 서 있던 것이 금방 꼿꼿하게 제 모습을 드러냈다.

핏줄이 선 채로 꺼떡이는 발간 성기에 더 이상 봐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태성은 손에 힘을 꽉 주고 손안에 든 것을 위아래로 빠르게 치댔다.

“아, 앗! 잠, 이거…!”

뿌리에서부터 귀두 끝까지, 남자가 거친 손길로 제 성기를 죽죽 잡아당기자 선우는 머릿속이 온통 저릿저릿하고 눈앞이 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찌릿한 전기가 목덜미를 타고 손끝, 발끝까지 전달되니, 옹그리고 앉은 선우가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으읏….”

마지막으로 자위를 한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을 만큼 오래도록 욕구를 분출한 적 없는 선우는 생경한 자극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유 모를 죄책감과 수치스러움에 차오르는 격정을 온전히 즐기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그를 뿌리치기에는 치솟는 욕망을 사그라뜨리지도 못했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은 선우는 남자의 품에 안긴 채 그저 끙끙 앓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선우는 허리를 빳빳하게 굳혔다.

갑자기 몸을 좌우로 비비 꼬며 제 품을 벗어나려 하기에, 태성은 선우의 상체를 꽉 붙들고 성기를 쥐고 흔드는 손을 더 빠르게 움직였다.

“아, 안, 자, 잠깐. 흣. 잠깐, 만요….”

선우는 몸을 감싸고 있는 팔을 떼어 내려 했다. 그럴수록 돌덩이같이 딴딴한 팔뚝은 저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너른 가슴에 등이 완전히 파묻혀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선우는 두 다리로 대신 발버둥을 쳤다. 격렬한 발길질에 정갈하던 하얀 시트가 마구 구겨지며 점차 아래로 밀렸다.

“하으, 아, 아아. 안 돼…!”

재차 오므렸다 뻗는 다리가 차츰 속도를 늦추는가 싶더니, 돌연 하얀 허벅지 위로 뿌연 정액이 튀었다. 사정을 돕느라 기둥 끝자락을 살살 흔드는 태성의 손에도 하얀 액이 진득하게 흘러내렸다.

“아아…….”

이미 흥분에 절어 있는 몸에서 첫 사정은 너무나도 쉽고 빠른 일이었다.

하아, 하아.

순식간에 파정한 선우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약 기운과 긴장으로 잔뜩 흘린 식은땀에 새하얀 셔츠가 축축이 젖었다. 도대체 언제 벗겨졌는지도 모를 바지와 속옷은 어느샌가 침대 끝자락에 겨우 걸쳐 있었다.

맨살을 훤히 드러낸 다리 사이에 제 정액이 묻은 남자의 손이 놓였다. 다른 사람 손에서 절정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아찔한 배덕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그만큼 괴롭고 부끄러운 것을 모두 다 내려놓고 몽롱한 여운만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 또한 굴뚝같았다.

들쑥날쑥 요동치는 감정에 머리가 어지러워진 선우는 그만 두 눈을 내리감았다.

씨근덕거리며 숨을 고르는 선우의 이마에 뜨끈한 손이 내려앉았다. 갑자기 고개가 뒤로 젖혀진 선우는 잠시 멈칫했으나, 곧 힘을 쭉 빼고 남자가 시키는 대로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저렸던 사지가 노곤하게 풀어졌다.

그러다 문득, 제 허벅지를 쓸어올리는 손길에 선우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헉!”

어느새 태성은 자신의 손과 선우의 허벅지에 묻어 있던 정액을 선우의 성기에 펴 바르고 있었다. 그 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선우가 몸을 벌떡 일으키려 했으나, 태성은 선우의 이마를 다시금 내리눌렀다. 그러고는 아예 머리를 팔로 감싸 안고 놓아주지를 않아, 선우는 눈만 겨우 내리깐 채로 남자가 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아, 흐으…….”

큼지막한 손이 느릿느릿 위아래로 움직이자, 붉은 속살 위에 하얗고 차진 액체가 쩍쩍 들러붙었다.

“앗, 저, 저어…….”

치덕거리는 정액만큼이나 끈적이는 손놀림에 잠시 힘이 빠져 말랑이던 것이 금세 움찔거리며 다시 크기를 키워 갔다. 찌걱, 찌걱. 외설적인 광경을 눈으로 보는 것도 모자라 소리까지 들으니 선우는 더 이상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눅진한 촉감에 하체가 몽땅 녹아내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하으…….”

두 번째 와 닿는 남자의 손은 조금도 서두름이 없었다. 폭주하는 기관차마냥 거세게 몰아붙였던 것이 언제였나 싶을 정도로, 모든 과정을 천천히 즐기라는 듯 아주 느리고 여유 있게 움직였다.

대신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길고 커다란 손은 어디 한 부분도 닿지 않는 곳이 없도록 성기 곳곳을 꼼꼼히도 만져 댔다. 그러다 넓은 손바닥이 고환을 스치듯 지나면 턱을 부르르 떨며 진저리를 치는 선우였다.

남자에게 온몸을 내맡긴 채 그의 손길을 받고 있다 선우는 등 뒤에 닿는 단단한 것을 느꼈다. 여전히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선우는 고개를 돌려 태성을 올려다보았다. 평소보다 조금 더 혈색이 도는 것 외에는 그는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어쩐지… 억울하고 또 섭섭했다.

선우는 슬그머니 손을 뒤로 뻗어 남자의 다리 사이에 올려놓았다. 일순, 태성의 몸이 눈에 띄게 굳었다.

“…….”

“…….”

“후회할 짓 하지 말지?”

흘깃 선우를 내려다본 태성이 말했다.

후회…할까? 하겠지.

상관없었다. 나중에 후회를 한다 해도 지금은 그런 것까지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눈앞에 있는 이 남자와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교감을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뿐, 제 행동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당신과 이 열기를 나누고 싶어. 나처럼 당신도 이런 기분이면 좋겠어. 나 때문에 당신도 열에 들뜨면 좋겠어. 당신이 열망하는 게 나였으면 좋겠어, 내가 그랬듯이.

태성에게 기대고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켜 앉은 선우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남자를 마주했다.

“……싫으, 세요?”

태성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이게 누굴 성인군자로 알아.”

“앗!”

눈 깜짝할 사이 몸이 휙 돌아간다 싶더니, 이내 선우의 뒷머리가 풀썩 침대에 닿았다.

늘씬하게 뻗은 두 다리를 들어 그사이에 자리한 태성은 제 허벅지를 선우의 뒷다리에 바싹 붙였다. 엉덩이 살에 닿는 까슬한 촉감에 선우는 입안에 고인 침을 꼴깍 삼켰다.

이어 태성은 한 손을 선우의 머리 옆에 내려놓으며, 불그스름한 눈가를 마주했다. 열이 오른 눈동자에는 얼핏 초조함과 또 그만큼의 기대감이 함께 서려 있었다. 참 속을 숨기는 재주가 없는 눈이라고, 태성은 생각했다.

말간 눈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태성은 다른 한 손을 하얀 셔츠 위로 가져갔다.

“너, 이래 놓고.”

톡. 그렇게 애썼으나 선우가 끝내 풀지 못했던 세 번째 단추가 손쉽게도 풀어졌다.

“나중에 모르는 척하기만 해 봐, 어디.”

톡, 톡. 마침내 단추를 모두 풀어내고, 태성은 살짝 벌어진 틈 사이로 제 오른손을 밀어 넣었다. 커다란 손이 얇은 뱃가죽을 쓸어올리며 몸에 들러붙은 셔츠 자락을 서서히 걷어 냈다.

“읏…!”

선우는 순간적으로 상체를 움찔했다. 그러나 열기를 식혀 주는 서늘한 공기와 그와는 정반대되는 남자의 따뜻한 손에 선우는 금세 만족감을 느꼈다. 이내 뱉은 큰 숨 한 번으로 얼어붙은 몸도 서서히 긴장을 풀었다.

반대쪽 셔츠 자락마저 걷어 낸 태성은 반면, 무거운 탄식을 속으로 삼켜야 했다.

이럴 줄 알았지.

옷을 보내는 족족 기가 막히게 소화해 내는 이였다. 그러니 몸태가 곧고 예쁘리라는 건 태성도 진작에 예상한 바였다.

매끈한 살결에는 군더더기가 하나도 붙어 있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고, 아기자기하게 자리 잡은 잔근육들이 모두 조화로울 줄도 알고 있었다. 윤기 나는 새하얀 피부가 눈부시게 아름다울 줄,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다만, 이걸 직접 확인하고 나면 저는 분명 그를 욕심 낼 테니까, 그게 곤란한 거였다. 그럴 마음도 없는 사람을 저는 기어코 가져야 성이 찰 테니까. 차라리 돈이나 권력에 눈이 먼 자라면 다루기라도 쉽게.

혀를 잘게 찬 태성은 곧장 허리를 숙여 보얀 배 위에 촉, 입을 맞췄다.

“아……!”

판판한 윗배로 내려앉은 입술이 천천히 몸의 중심을 거슬러 올라갔다. 촉, 촉. 오목한 명치끝을 지나 가슴뼈, 쇄골 위를 차례로 오를 때마다 축축한 입술이 물기 어린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때마다, 떨리는 심장을 대신해 부여잡은 침대 시트가 선우의 손에서 사정없이 구겨지고 비틀려졌다.

이윽고 남자의 입술이 작게 도드라진 목젖 위에 닿았다. 선우는 불쑥 끼쳐오는 소름에 몸서리를 쳤다.

“으읏, 잠시…만요….”

목을 살짝 움츠린 선우가 태성의 어깨를 살며시 밀어냈다.

“왜.”

촉. 그러나 조금도 밀리지 않고, 태성은 선우의 턱 끝에 입을 맞췄다.

“사람 꼬드겨 놓고 이 정도도 각오 안 했어?”

선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남자의 입술이 닿는 곳마다 속에서 불이 이는 것 같았다. 그가 일으킨 불씨는 위로 올라오면 올라올수록 걷잡을 수 없이 크기를 키웠다. 배 속에다 지펴 놓은 불덩이는 순식간에 가슴을 홧홧하게 달궈 놓더니, 결국에는 머릿속을 팔팔 끓게 했다.

촉, 불길의 끝은 입술이었다.

“하아…….”

그제야 떨어지는 입술에 선우는 겨우 한숨을 돌리는가 싶었다.

하지만 태성은 그 찰나도 기다려 주지 않았다. 따뜻한 손은 곧바로 선우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색이 연한 돌기에 기다란 손가락이 스쳐 지나자 선우는 화드득 몸을 떨어 댔다. 손끝에 잠시 걸렸을 뿐인데도 동그랗고 조그만 젖꼭지는 금방 빳빳하게 굳어 제 존재를 알렸다.

“아, 흐읏…!”

이어 얇은 갈비뼈를 수를 세 듯 하나씩 쓰다듬으며 내려가는 손길에 선우는 연신 몸을 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이래 놓고 어떻게 버틴 건지. 약 기운을 참아 낸 게 용할 정도로 선우는 작은 자극에도 격한 반응을 보였다.

“전에도 생각한 건데 너, 은근히 잘 느껴. 알고 있어?”

“흐읍, 그, 그렇게, 만지시니까…….”

조금도 여유가 없는 선우가 숨을 헐떡이며 말끝을 흐렸다.

“내가 어떻게 만졌는데.”

“…야하게… 만지시잖아요…….”

선우는 한쪽 팔을 들어 두 눈을 가렸다. 제가 말하고도 부끄러웠는지, 팔 아래 자리한 두 볼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나 별거 안 했는데. 네가 예민한 거야.”

“하아. 그, 건… 약… 약 때문에…….”

“그래. 약 때문에.”

지이익.

“이왕 약에 취한 김에 조금만 더 내려놔, 그럼.”

언뜻 지퍼를 내리는 소리가 들리자, 선우는 눈 위에 올려 두었던 팔을 살짝 내렸다. 빼꼼 내민 눈을 남자와 마주치자 방금까지만 해도 기분 좋게 도곤대던 심장이 쿵쾅쿵쾅 야단법석을 떨었다. 크게 뜬 눈으로도 차마 아래를 내려다보지 못하는 선우를 향해 태성은 한쪽 입꼬리를 시원하게 올려 주었다.

“흣!”

이내 두 개의 성기가 맞붙는 감촉에 선우가 흠칫 몸을 떨었다. 벌어진 다리 사이를 묵직하게 내리누르는 압박감이 또다시 머릿속을 아찔하게 했다. 튀어나오려는 신음을 막으려, 선우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태성은 그런 선우의 팔을 휙 잡아 내리고는 엄지손가락으로 턱을 꾸욱 눌러 깨물린 입술을 빼냈다. 그러고는 곧장 벌어진 입술 사이로 제 혀를 박아 넣었다.

“으응….”

입안을 메우는 축축한 혓바닥에 선우의 입에서 만족스러운 신음이 흘렀다. 조금 더 가까이 닿고 싶은 마음에 선우는 남자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 덕에 서로의 몸체가 빈틈없이 붙자, 태성은 체중을 실어 누른 허리로 천천히 원을 그렸다.

선우는 놀라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저도 남자를 따라 허리를 움직였다. 부끄러워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싶을 정도로 선우는 맞닿은 성기를 적극적으로 비벼 댔다. 기가 막힌 태성은 목을 울려 웃었다. 입을 맞댄 두 사람의 몸이 동시에 미세하게 떨렸다.

진한 입맞춤을 마치며, 태성은 슬쩍 제 목에 감긴 손 하나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핫…!”

그리고 맞닿은 두 성기 위에 하얀 손을 내려놓았다.

제 것이 아닌 것을 잡아 본 적이 없는 선우는 당황스러움에 손끝을 머뭇거렸다. 그러나 머지않아 곧 결심을 세운 듯, 제 손으로 두 개의 성기를 꽉 쥐었다. 한껏 발기한 성인 남자 두 명의 것을 한꺼번에 잡자니 한 손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에 나머지 손마저 가져다 댄 것은 순전히 본인의 의지였다.

아, 이제 정말 모르겠다…….

평소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하지만 선우는 더 이상 판단을 내리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남자가 주는 달콤함에 뇌 끝까지 절어 버린 상태에서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는 건 이제 불가능에 가까웠다.

단 한 번쯤은 욕망에 충실해도 괜찮지 않을까…. 지금이 아니면 눈앞에 있는 이 남자와 이런 미친 행위를 할 일도 다시는 없을 것이다. 선우는 양다리를 크게 벌려 남자의 허리를 얽어맸다. 그러고는 두 손을 가득 채운 두 개의 성기를 서서히 위아래로 치댔다.

“아아….”

손바닥에 울퉁불퉁한 핏줄이 느껴질 만큼 남자의 성기가 몹시도 팽창해 있었다. 늘 여유만만하고 무신경하던 얼굴에도 어느덧 흥분이 도사렸다. 빛나는 얼굴의 달뜬 모습은 시각적인 자극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보다도 더, 상대가 저와 같은 기분이라는 것이 선우에게는 엄청난 고양감을 선사했다. 말도 안 되는 행복감으로 머리가 꽉 차서 이대로 시간이 멈춰도 좋을 것만 같았다.

“지금도 무서워?”

나직한 물음에 선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섭지 않다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인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지만 어쨌든 불쾌한 감정은 많이 가신 듯 보였다.

태성은 조금 느리게 움직이는 손길을 느긋하게 즐기다가, 하얀 두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제 것보다 작고 가는 두 손을 한 번에 꽉 움켜쥔 그는 위아래로 흔드는 움직임을 살짝 재촉했다. 그의 의도를 바로 눈치채고 선우는 제 손놀림에 점차 속도를 가했다.

“아, 읏! 저…!”

사정감은 금세 성큼 다가왔다. 성기를 쥔 두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가고, 태성의 허리에 두른 두 다리가 저절로 오므라들었다. 새하얀 허벅지가 태성의 옆구리를 강하게 옥죄였다.

“나, 나올 것… 하아, 아, 흣…!”

서두른 건 태성이었으나, 어느새 정신없이 손을 흔들어 대는 건 선우 쪽이었다. 하얀 손이 기둥을 붙들고 빠르게 움직이자 태성의 곧게 뻗은 눈썹도 차츰 모양을 구겼다.

“아, 아앗…!”

“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선우가 두 성기를 쥐어짜듯 세게 잡았을 때,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사정했다. 그리고 지친 선우는 후들거리는 사지를 침대에 뻗듯이 내려놓았다.

색색, 잠시 가쁜 숨을 고르다 선우는 시뻘게진 얼굴로 밑을 내려다봤다. 제 배 위에 두 사람분의 정액이 잔뜩 흩뿌려져 있었다. 한데 섞여 누구의 것인지도 알아볼 수 없는 정액을 보는 기분은 상당히 묘했다.

“하….”

이제 완전히 끝났다는 생각에 선우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기분 좋은 나른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무거운 눈을 깜빡, 깜빡일 때마다 의식이 점점 흐리멍덩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이 몽롱함이 놀라우리만큼 흡족스러웠다. 지금 상태가 영원히 지속됐으면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

얼핏 성기에 와 닿는 것이 아니었다면 선우는 행복한 나락 속에 계속 빠져 있을 뻔했다.

선우가 부스스 고개를 들어 보니, 남자는 힘이 다 빠진 제 성기를 아래위로 매만지고 있었다. 그 손길에 조금 전 미처 다 나오지 못했던 정액이 선단에서 울컥 흘러나왔다.

깜짝 놀란 선우는 태성의 가슴을 다급히 밀어냈다.

“아…. 바, 방금 했는데…….”

그러나 도리어 몸을 가까이한 태성은 선우의 허리 밑으로 손을 넣었다. 가는 허리가 굵은 팔 안에 손쉽게 감겼다.

“고작 그거 하고 끝내려고 했어?”

“…?”

분명히 같이 사정했는데? 도대체 언제 다시 발기를 한 건지 남자의 것은 그새 어마어마한 크기를 뽐내고 있었다. 한 손만으로 곧바로 두 개의 성기를 맞잡은 그는 아주 빠르게 손을 놀렸다.

“아흣! 잠, 잠깐…!”

강하게 쥐고 흔드는 자극에 선우의 것도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악력이 얼마나 센 건지, 한 손 안에 두 사람의 것이 전부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성기가 터질 것만 같았다. 제가 잡고 흔든 것은 장난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거칠고 거센 손놀림이었다.

“아, 아! 그, 그만……!”

아래쪽에서 울리는 뻑뻑거리는 소리에 민망함을 참지 못하고 선우가 외쳤다.

“또 정신 놓고 있으려고?”

“흐읏….”

선우는 남자에게 붙들린 허리를 뒤척였다.

이미 사정을 하고 난 뒤라, 두 성기는 한참을 곧추서 있음에도 쉽사리 사정하지 못했다. 남자가 너무 세게 쥐고 흔든 탓인지, 아니면 너무 오랫동안 발기한 채로 있었던 탓인지. 선우는 이제 살갗이 쓰리고 성기가 뻐근했다.

“아, 아파…. 저, 이제, 더, 안 나와요…….”

선우가 태성의 팔을 붙들었으나,

“안 나오긴.”

그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태성은 두 기둥을 맞잡은 채로 선우의 귀두 끝에 엄지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선단 끝을 부드럽게 만지던 손가락은 살짝 갈라진 틈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틈새 사이를 지그시 누르며 빙글 돌렸다.

으앗!

선우가 소스라치며 온몸을 바둥댔다. 한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전기가 관통하는 느낌에 선우는 사지를 바들바들 떨었다. 다리를 있는 힘껏 오그리고 달달 떨리는 손으로 남자를 밀어냈으나, 태성은 오히려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꽉 주었다. 선단 끝을 굴리는 손가락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불쑥 귀두 끝이 저릿하고 불에 타는 듯해,

“아, 안, 아니. 이거 아니에요.”

선우는 정신없이 고개를 저어댔다.

“저, 저… 싸, 쌀 것 같….”

“후, 조금만.”

선우의 말에 태성은 엄지손가락으로 요도 끝을 콱 틀어막았다.

“아흑!”

“같이 가.”

탁탁탁, 뿌리 끝까지 쳐 대는 소리가 재차 방 안을 울렸다.

“아니요, 아니에요.”

선우는 급격히 휘몰아치는 사정감에 태성의 팔뚝을 마구 내리쳤다.

“제발…! 나와, 나와요.”

“안 나온다더니.”

아무리 쳐대도 남자가 꿈쩍하지 않으니, 선우는 이제 애원을 했다.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괴로운 얼굴을 하고 선우는 태성에게 매달렸다. 등 뒤에 낭떠러지라도 있는 사람처럼 간절한 표정으로 그를 붙들었다.

“하, 할래. 지금, 싸고, 싶어요. 흐윽….”

“하. 이게, 뭐라는 거야.”

너무 강한 자극에 갑자기 머릿속에서 하얀 스파크가 파바박 일어났다. 남자의 말은 전혀 들리지 않았고, 제가 무슨 말을 뱉고 있는 줄도 선우는 몰랐다. 태성의 어깨와 팔뚝을 쥔 손가락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아앗!”

순간 선우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선우의 고개가 뒤로 획 넘어가자, 태성은 귀두 끝을 막고 있던 엄지손가락을 뗐다. 좁은 구멍 끝에서 픽, 픽, 뿌연 정액이 연달아 뿜어져 나왔다.

“아… 흐으…….”

이어 제 것만 쥐고 조금 더 치댄 태성이 선우가 싸 놓은 정액 위에 길게 사정했다.

하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태성의 아래서 부들부들 떨어 대기를 몇 차례, 일순 온몸을 축 늘어뜨린 선우는 그대로 기절하듯 눈을 감았다.

태성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불현듯 극심한 허기와 갈증이 밀려왔다. 먹이를 잔뜩 먹고도 배를 다 채우지 못한 짐승이 된 기분이었다.

건장한 상체를 연방 들썩거리다, 태성은 열기가 식지 않은 눈빛으로 한참 동안 선우를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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