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그 여름 해운대 밤바다 (6/19)

4. 그 여름 해운대 밤바다

2021년 7월 29일 22시경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약범죄수사대

“어으, 덥다.”

늦은 밤, 마약 1팀 사무실 안으로 김지항과 남동길이 들어섰다.

“오셨어요? 먼 길 운전하시느라 피곤하시죠.”

“어? 선우 아직도 퇴근 안 했어?”

벽에 걸린 시계가 10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네. 오시는 거 보고 가려고요. 어떻게 됐어요?”

연일 무더위가 기승인 여름날. 마약 1팀 팀원들은 근래 부산을 왔다 갔다 하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올해 초, 선우네 팀은 홍대 놀이터에서 필로폰을 투약하던 20대 청년들과 외국인 몇 명을 검거했다. 피의자 조사 중 이들은 부산에서 약을 구했다고 진술했다. 구매한 양도 적지 않았고 구매 방식도 너무 손쉬웠기에, 1팀은 곧바로 공급책을 찾기 위한 수사를 착수했다.

그런데 가볍게 생각하고 시작한 수사에서 허탕 치기를 몇 번.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팀원들은 일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판매자를 붙잡아 조사를 하면 그는 하선2) 끄트머리에 불과했고, 하선들은 윗선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일명 점조직 방식으로 운영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공급책을 소수 인원으로 구성된 여러 개의 하부 조직으로 잘게 나눴다. 그리고 그 소수 인원 중에서도 다른 공급책과 직접 연락을 취하는 인물은 더 극소수로 한정해 두었다. 그러니 같은 조직에 속해 있으면서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고, 안다 한들 서로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잘 몰랐다. 이런 깜깜이식 운영을 하니, 말단 공급책을 아무리 잡아내도 거기서 끝. 더는 수사가 진전되지 않았다.

그에 마약 1팀은 아예 작정을 하고, 규모가 큰 거래로 이들을 유인했다. 그 과정에서 판매책 관리인 한 명을 체포했는데, 알고 보니 그는 부산 최대 조직폭력단인 해태파의 중간급 관리자였다.

그때부터 마수대는 부산경찰청과 합동 조사를 통해 해태파의 뒤를 캤다. 지금까지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해태파는 필로폰 제조에 직접 관여를 하고 있었고, 국내 유통만이 아니라 일본과도 거래를 튼 눈치였다. 제조양도, 거래량도 추정되는 것만으로 상당했다.

그러나 벌써 몇 달에 걸친 조사에도 불구하고, 수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해태파의 움직임은 여간 치밀한 것이 아니었다. 제조자는 공장3)을 수시로 바꿔 가며 체포할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 공급책의 관리자는 오로지 해태파의 일원으로만 구성되어 있어 정보가 거의 새 나가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부산 세관 측에도 이미 손을 써 놓은 상태였다. 한번은 일본으로 약을 보내는 일정을 입수하고 해당 일정의 항만 컨테이너를 뒤지려 했는데, 세관이 뭉그적거리며 협조를 하지 않는 바람에 일이 수포로 돌아간 적도 있었다.

“말해 뭐 해. 똑같지, 뭐.”

“해탠지 호랑이 새낀지 하는 놈들 대갈빡 굴리는 게 보통이 아니에요. 이젠 멍청하면 조폭도 못 한다니까?”

“근데 선우 너, 내일부터 휴가 아니야? 집에 안 들어가고 뭐 해?”

서울에서도 여전히 해야 할 일은 많았기에, 팀원들은 둘 또는 셋씩 번갈아 가며 서울과 부산을 오가고 있었다. 며칠간 부산에서 고생한 김지항, 남동길과 교대하기 위해 오늘 오전 정기영과 박민호가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선우는 김지항의 말대로 내일부터 3박 4일, 여름휴가를 쓸 예정이었다. 물론 팀원들과 상의하에 정한 날이었지만, 더운 날 고생하는 동료들을 두고 혼자 쉬는 게 선우는 미안하고 찜찜했다. 그래서 팀 내에 남은 잡일이란 잡일은 다 찾아 하면서 야금야금 퇴근을 미루던 중이었다.

“네에. 곧 가야죠. 요즘 너무 정신없는데, 하필 이때 휴가를 써서 죄송해요.”

“에이, 무슨 소리야. 이건 예전부터 쓰기로 한 거고. 너 작년에도 여름휴가 제대로 못 간 거 다들 알고 있는데.”

“그래도…….”

“미안해할 것 하나 없어. 우리가 뭐 언제는 안 바빴나? 그렇게 생각하면 너 평생 휴가 못 쓴다? 쓸데없는 생각 그만하고 얼른 들어가.”

김지항이 선우의 등을 떠밀었다.

“선배님. 긴급 콜 받지 마세요.”

김지항의 말에 주섬주섬 짐을 챙기는 선우를 향해 동길이 말했다.

“뭐 걱정된다고 중간에 얼굴 들이밀지도 마세요. 선배님 없다고 세상 안 무너지니까 핸드폰 꺼 두시고 편안-히 쉬시다 오세요.”

동길은 꼭 넉넉한 인심을 쓰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래. 눈물 나게 고맙다, 야.”

그래야 다음 타자인 저도 휴가 때 마음 놓고 놀 수 있으니 그러는 것을 김지항과 선우는 뻔히 알고 있었다.

2021년 7월 30일 9시경

경기도 성남시 판교테크노밸리 현주바이오텍 본사

두터운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김현수가 연구소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고. 우리 물주님 오셨습니까?”

김현수가 밝게 인사를 건넸으나, 태성은 대답이 없었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그는 그저 태블릿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건 뭐야? 아도니스 YB 모임?”

어느새 소파 뒤에 양팔을 기대고 선 김현수는 태성이 보고 있는 화면을 함께 내려다보았다.

촤악, 바닥에 주저앉은 이의 얼굴에 술이 흠뻑 끼얹어졌다.

‘이게 씨발, 예쁘다 예쁘다 하니까 눈에 뵈는 게 없나 봐.’

“와우.”

배 안에서 뭔 일 있었나 보네. 막장 드라마를 보는 기분으로 김현수는 안경 너머 눈을 반짝이며 흥미롭게 동영상을 관전했다. 그러나 화면 속에 태성이 등장하면서부터는 김현수의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

‘몇 번 주의를 준 것 같은데. 자꾸 기어오르네.’

“컥.”

곧 귀가 째질 듯한 비명과 함께 고중호의 머리 위로 액체가 콸콸콸 쏟아졌다. 김현수는 숨을 콱 죽이고 태성을 쳐다봤다. 저를 향한 시선을 알면서도 태성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화면 속 태성은 바닥에 있던 이를 억지로 일으켜 밖으로 끌고 나가고 있었다.

‘이, 이익…! 씨발, 저 깡패 새끼가!’

쨍그랑! 고중호가 손에 쥐고 있던 유리잔을 벽에 던지자 깨진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

고중호의 고함에 김현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힐끔힐끔 태성과 동영상을 번갈아 보던 그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책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도 검사라고 바른말 하는 놈이 딱 하나 있긴 하네.

태성은 동영상을 본 감상을 남기며 태블릿을 티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소장님.”

“야. 그렇게 부르지 마. 나는 네가 그렇게 부를 때가 제일 무서워.”

태성은 피식 웃었다.

“지금 유통되는 에퀴스 말이야. 그거 제형 그대로 안에 내용물만 바꿀 수 있을까? 필로폰이든 코카인이든.”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김현수가 얼굴을 구겼다.

“만드는 데 얼마나 걸리겠어? 아, 에퀴스는 에퀴스대로 제조하고 이건 따로 만드는 거야. 한, 만 정 정도면 될 것 같은데.”

“어려운 부탁을 되게 쉽게 하시네요.”

“그러려고 그 자리 내드린 거니까요.”

끄응, 침음하는 김현수를 향해 태성이 예쁘게 눈을 접어 웃었다.

「연구소장/CTO4) 김 현 수」

책상 맨 앞에 놓인 명패가 형광등 불빛을 반사하며 반짝반짝 빛을 냈다.

“하…….”

예에, 제가 무슨 여부가 있겠습니까.

“뭐, 코카인은 정제로 만들기도 힘들고 효과도 떨어지니까… 필로폰이나, 아님 헤로인이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하고….”

“뭐든. 상관없어. 검사에서 검출만 되면 돼.”

이 새끼가 또 뭔 짓을 하려고 이래. 김현수는 수상한 눈초리로 태성을 훑었다.

“그건? 알아냈어?”

김현수의 물음에 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냈지. 고작 그거 알아내겠다고 이 꼴을 겪었는데 못 알아내면 안 되지.

“그래서? 누구 짓인데?”

“예상했던 대로.”

“와. 해태파도 많이 컸네. 우리 문 사장님 거래처를 넘보고.”

최근 태성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부산 해태파.

지난 몇 달간 태성이 신약 에퀴스에 집중하는 사이, 누군가가 태성의 필로폰 거래처를 가로채는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일반인을 상대로 한 소규모 거래는 무시해 왔으나, 일본 거래상 중 두 번째로 규모가 큰 주길흥산(住吉興産)과의 거래가 줄어들자 태성은 더 이상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게 되었다. 한 번에 몇백㎏ 단위로 거래하는 주길은 거래처 중에서도 나름 큰손이었다.

겁도 없이 제 밥그릇을 갉아 먹는 쥐새끼가 도대체 누군가, 하고 뒤를 파보니 주길의 새로운 거래처는 부산 해태파였다. 해태파가 돈 냄새를 맡고 어설프게 제 흉내를 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범인을 밝혀냈으니 처리하는 것은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이런 일은 부지기수로 일어났고, 용감하게 도전하는 이들에게는 친절히 현실을 깨닫게 해 주면 그만이었다.

이참에 해태파를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주길에는 필로폰에 에퀴스를 함께 얹어 주면 홍보 효과도 노릴 수 있으니, 오히려 더 좋은 기회로 전환할 여지가 충분했다.

문제는 다른 하나, 지금도 머릿속을 꽉 채운 예기치 못한 상대인데…….

태성은 요 몇 달 사이 자신의 꼬락서니가 아주 우스울 지경이었다. 나이를 먹었다고 이제 와서 반짝이고 예쁜 게 눈에 들어오기라도 한 건지. 첫인상은 그냥 멀끔하고 오목조목한 게 사람 좀 꼬이게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꼬여서 허덕이는 것은 저 자신이었다.

사연은 또 뭐가 그렇게 기구해. 어쩐지 세상 근심 혼자 다 안고 사는 눈을 하고 있더라니.

아도니스의 선상 모임이 있던 지난밤, 태성은 정 실장을 보내 해태파의 소행을 밝혀내던 중이었다. 그 일로 태성이 자리를 비운 사이, 고중호는 기어이 사달을 내고 말았다.

고중호는 태성에게 지독한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한 번씩 부러 심기를 건드는 행동을 하곤 했는데, 태성은 그런 걸 신경 쓰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불똥이 한선우에게 튀어 버리니 상황이 웃기게 돌아갔다.

그날, 불같이 화가 나서 한선우에게 달려든 것도, 고중호에게 술을 뒤집어씌운 것도 태성으로선 굉장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거 조금 만지고 약 먹인 게 뭐 대수라고. 열 살짜리 애도 아니고. 내 거라고 영역 표시나 하는 유치한 짓거리를 제가 하고 있다는 것이 태성은 믿기지가 않았다.

어릴 적부터 타인에게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 법을 질리도록 교육받아 온 저였다. 덕분에 감정 조절 하나만큼은 누구보다도 자신 있었는데. 이래서야 원, 제왕 교육이랍시고 영감이 30년을 가르친 게 말짱 헛수고가 아닌가.

뭐, 이만하면 인정해야 했다. 한선우에 대한 관심은 반짝이는 것에 대한 즐거운 호기심도, 한두 번 찔러 보고 말 가벼운 유흥거리도 아니었다.

“어떻게 할 거야?”

“글쎄.”

태성은 버릇처럼 제 턱을 쓸었다.

“경찰에 신고할까 봐.”

“뭐?!”

김현수가 눈을 크게 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뭘 그렇게 놀라? 나는 손 안 대고 처리해서 좋고, 걔네는 실적 올려서 좋고. 일석이조인데.”

“……어디서 예쁜 여경이라도 봤냐?”

“왜 얘기가 그렇게 돼?”

“아니, 경찰이라면 학을 떼는 놈이 갑자기 경찰에 신고를 한다니까 그러지.”

“생각하는 거 하고는.”

태성은 김현수에게 비소를 날렸다.

“넌 그 편견 좀 버리라니까 그러네.”

“아, 아님 말고!”

또 그놈의 편견 타령을 한다고, 김현수가 구시렁댔다.

“예쁜 건 맞고, 여경은 아니고.”

“……엉?”

“…….”

“…….”

말을 잃은 김현수를 향해 태성이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이, 이, 미친놈이……?

태성의 말뜻을 뒤늦게 알아차린 김현수는 급히 책상에서 벗어났다. 재빠르게 테이블 앞으로 다가온 그는 태성의 태블릿을 집어 들고 멈춰 있던 동영상을 다시 재생시켰다.

영상의 타임 라인을 이리저리 옮겨 가며 바닥에 앉아 있는 이를 찾아낸 김현수는 이내 재생을 멈췄다. 그러고는 두 손가락으로 영상을 최대한 확대했다. 술이 끼얹어진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느라 쌍꺼풀 없는 작은 눈이 크기를 있는 대로 키웠다.

아니, 씨발. 화질이 존나 좋아서 그런가. 영상으로 봐도 욕이 튀어나올 정도로 예쁘고 잘생긴 게 눈에 보이기는 하는데….

제 친구라는 놈이 나라에서 하지 말라는 짓거리는 다 하고 다니는 놈인 줄은 진작 알았지만, 연애 상대도 그런 사람을 고를 줄이야.

“야. 이… 미친놈아아…….”

한번 돈 짓을 하면 끝을 모르는 놈이니까 김현수는 내심 걱정이 앞섰다.

“자, 그럼 우리 민중의 지팡이 솜씨를 좀 보실까.”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를 띠고, 태성은 곧장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

늦잠을 자는 게 얼마 만인지 몰랐다. 그래 봐야 오전 10시를 넘기지 않았지만 피로를 풀기엔 충분했다.

최근 선우는 제대로 쉰 기억이 없었다. 일주일에 5~6일은 일을 했고, 그나마 있는 휴일엔 요트를 탔다. 체력이 좋은 편임에도 슬슬 버겁다고 느끼던 차였다. 그때 마침 다가온 휴가가 선우에게는 가뭄에 내리는 단비 같았다.

이번 휴가는 정말로 쉬기만 할 생각이었다. 누워서 조금만 뒹굴뒹굴하다가, 밀린 집안일을 빨리 해치워 놓고, 바쁘다는 핑계로 못 읽었던 책들을 실컷 읽을 작정이었다. 밤에는 회차가 제법 쌓인 시헌의 드라마를 보면서 맥주 한잔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하루는 시간을 내서 엄마 아빠도 보러 가야지.

그렇게 하고 싶은 일들을 손꼽아 보니 끝이 없었다. 한가롭게 누워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일분일초라도 알차게 보내려면 지금이라도 당장 일어나야 했다.

생각을 멈추고, 선우는 침대를 냉큼 벗어났다.

곧장 부엌으로 간 선우는 냉장고 문을 열어 보았다. 그리고 안을 들여다본 선우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튀어나왔다. 생수와 맥주를 제외하고 먹을 것이라곤 날짜가 다 지난 우유가 전부였다.

장도 보러 가야 하네…….

이내 부엌 이곳저곳을 뒤진 선우는 운 좋게 라면 두 봉지를 찾아냈다. 아침은 대충 이걸로 때우고, 선우는 바로 마트부터 다녀오기로 마음먹었다.

냄비에 물을 담아 가스레인지 위에 막 올려놓던 참이었다.

지잉, 지잉.

식탁 위에 놓아 둔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불을 켜려던 것을 멈추고, 선우는 식탁으로 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문태성」

“…….”

발신자를 확인한 선우는 입술을 감춰 물었다. 막힌 입을 대신해 한숨이 코로 새어 나왔다.

“…여보세요?”

- 목소리, 오랜만에 듣네요.

“아… 네에…….”

요트에서 보낸 밤을 마지막으로 남자와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었다. 두 사람은 그동안 서로에게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배에서 그 난리를 일으켰으니 남자 입장에선 황당할 만도 했다.

제가 먼저 연락하려고 선우가 시도를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에게 연락을 하면 저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그날 밤 일에 대해서 사과를 먼저 해야 하나, 아니면 부디 잊어 달라고 부탁을 해야 할까.

핸드폰을 몇 날 며칠 손에 쥐고도 선우는 남자에게 연락을 취하기에 도무지 염치가, 그리고 용기가 없었다.

- 잘 지냈어요?

“……네. 대표님도… 잘 지내셨어요…?”

- 그럼요.

“……무슨, 일이세요?”

- 우리가 무슨 일 있어야만 통화하는 사인가?

“…….”

짐짓 서운한 말투로 말하는 남자에 선우는 입을 다물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두 번째 손가락이 애꿎은 식탁을 뽀득뽀득 밀어 댔다.

- 섭섭하네. 나 제보하려고 전화했는데.

“……제보…요?”

- 얼굴 보고 얘기하죠. 내가 서로 갈까요?

“어……. 저, 지금 휴가 중이에요.”

- 그래요? 음, 그럼 어쩌지.

남자가 조금 곤란하다는 듯, 말에 뜸을 들였다.

- 내일 새벽에 오사카로 뜨는데. 필로폰이 아마, 한 400㎏쯤?

“어디로 가면 될까요?”

태성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선우의 대답이 뒤따랐다. 이어 전화 너머로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부산항에서 봐요.

***

서둘러 부산으로 내려가는 길에 선우는 정기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 선우 웬일이냐.

“경감님! 해태파요. 어떻게 되고 있나요?”

선우가 다급히 물었다.

- 어? 휴가 간 놈이 그걸 물어보려고 전화했어? 안 그래도 새벽에 명 교수5)를 잡았어.

명 교수는 해태파가 데리고 있는 필로폰 제조자였다.

- 아, 근데 공장에 약이 없네. 이 새끼들이 그새 어디로 다 빼돌린 것 같은데, 이걸 불어야 말이지. 긴급 체포한 거라 시간이 없는데…….

정기영과 박민호, 부산경찰청 경관들은 밤사이 새로 찾아낸 공장을 급습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명 교수와 해태파 조직원 2명을 긴급체포했다.

그런데 공장에는 제조 시설만 있을 뿐, 약이나 원료는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번지르르한 시설을 봐서는 제조 규모가 보통이 아닐 텐데, 당장에 제조했다는 증거가 없으니 피의자들은 몇 시간째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었다.

긴급 체포를 할 경우, 경찰은 48시간 이내로 구속 영장을 청구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처럼 증거가 부실할 경우 영장을 청구해 봐야 발부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피의자들 역시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딱 이틀만 버티면 아무 탈 없이 석방될 것을 알기에 그들도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었다.

“경감님. 부산항이요!”

- 뭐?

“내일 새벽에 오사카로 가는 컨테이너들을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요.”

- 무슨 소리야? 오사카라니?

전화 너머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에 함께 있는 경관들이 정기영의 말에 술렁이는 듯했다.

“……제보를 받았습니다. 내일 새벽에 배가 뜬다고 하니 그때까지 버틸 생각인 것 같아요. 지금 당장 압수 수색 영장 신청해 주시면,”

- 확실해?

“…….”

정기영의 물음에 선우가 쏟아내던 말을 뚝, 멈췄다.

- 그 제보, 믿을 만한 거냐고.

믿을 만…하냐고.

문태성, 그자를 믿을 수 있을까…….

결국은 그도 범죄자였다. 그 사람이 내게 제보를 해서 얻는 게 뭐지. 혹시나 경찰을 이용하려는 거나 골탕 먹이려는 거면 어떡하지? 아니면 또 무슨 뒷공작을 펼치려는 거라면……?

운전대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네.”

잠시 주저했으나, 선우는 곧 다부지게 대답했다.

“저도 지금 내려가는 길이에요. 부산항으로 바로 가겠습니다.”

2021년 7월 30일 16시경

부산광역시 남구 신선대 컨테이너 터미널

강렬한 태양 빛이 까만 아스팔트를 뜨겁게 달궈 놓았다. 해는 벌써 중천을 넘어섰지만, 땅바닥은 여전히 후끈했다. 신발 바닥에 닿는 지면이 조금 끈적거린다 싶더니, 저 멀리서는 이글이글 아지랑이마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늘만큼이나 새파란 바다와 짠 내 나는 눅눅한 공기. 연안 부둣가를 한가로이 거니는 갈매기를 보고 나서야 선우는 부산에 도착한 것을 실감했다.

미리 연락을 받은 정기영이 대형 크레인 앞에서 선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기영에게 다가가자 그는 불쑥 하얀 종이 뭉치부터 내밀었다.

“이게 다 내일 새벽에 뜨는 물류라는데, 양이 만만치가 않아. 오늘 밤 내로 다 들춰 볼 수나 있을지 모르겠는데?”

돌돌 말린 종이를 펴내니, 화물 리스트가 끝도 없이 펼쳐졌다.

“일단 탐지견 동원하고 식품 쪽부터 뜯어 보고 있어. 아직 찾아낸 건 없고.”

정기영과 박민호는 부산경찰청 경관 및 세관 공무원들과 이미 팀을 여러 개로 나누어 컨테이너를 수색 중이었다.

선우는 리스트를 앞뒤로 넘기며 꼼꼼히 살폈다. 종이가 한 장, 한 장 넘어갈수록 선우의 얼굴은 점점 심각해졌다.

마약을 식품에 숨겨 보내는 것은 밀거래에서 가장 흔한 수법이었다. 밀가루, 소금, 설탕. 필로폰을 숨기기에 그만큼 좋은 환경도 없으니 식품류부터 수색을 진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일일이 확인하기에는 정기영의 말대로 화물의 양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필로폰은 무색무취라 마약 탐지견도 쉽게 찾아낼 수 있는 약물이 아니었다.

“유력한 것부터 X-ray 찍고는 있는데, 그것만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

마지막 장을 넘기고 고개를 들었을 때, 선우는 문득 눈앞이 캄캄해졌다. 빽빽하게 줄지어 선 수백 개의 컨테이너가 선우를 반기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수고가 많으시네요.”

별안간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기영과 선우가 동시에 몸을 돌렸다.

인사를 건넨 이는 열기를 다 가시게 할 만큼 시원시원한 걸음으로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남색 스리피스 슈트를 제대로 갖춰 입은 남자는 오늘도 빛이 났다.

정기영은 입을 꾹 다물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의 등장에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기도 했다. 뭐야? 얘가 왜 여기 있어? 정기영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

선우가 조금 난처한 얼굴을 하며, 제 눈썹을 매만졌다.

“…이분이… 제보자예요, 경감님.”

“처음 뵙겠습니다. 문태성이라고 합니다.”

어느새 두 사람 앞에 선 태성은 반듯한 자세로 정기영에게 목인사를 했다. 예의 그 사람 좋은 미소도 함께였다.

***

해가 저물고 하늘이 어둑어둑해지자, 대형 크레인들이 하나둘씩 조명을 켰다. 이내 곳곳에 위치한 조명탑이 한 번에 번쩍, 불을 켜니 터미널 전체가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아오, 쪄 죽겠네. 이게 벌써 몇 시간째냐.”

박민호의 손에서 웅웅대며 돌아가던 휴대용 선풍기가 어느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어? 뭐야. 이거 왜 이래.”

박민호는 선풍기의 전원을 껐다 켰다. 그래도 작동을 하지 않기에 탁, 탁 손바닥으로 두어 번 내리쳤으나 선풍기는 반응이 없었다.

“아, 배터리 다됐나 보네.”

에이씨. 박민호는 컨테이너 한구석에 대충 선풍기를 던져두었다. 그러고는 커터칼로 반듯하게 포장된 종이 박스의 중심을 갈랐다.

“마약수사대가 이렇게 대책 없이 수색하는 줄은 아무도 모를 거야. 그것도 21세기에. 안 그러냐, 선우야?”

비닐 팩에 포장된 찰보리를 찰찰 흔들며 박민호가 말했다. 선우는 대답 대신 싱겁게 웃고 말았다.

“근데 저놈은 왜 안 가고 계속 저기 있어?”

허리를 숙이고 상자 속을 들춰 보던 선우는 박민호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활짝 열린 컨테이너 밖을 쳐다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 문태성, 그가 서 있었다.

쏟아지는 조명 아래에서 그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정윤철과 함께였다. 그런데 도대체 웬일인지, 오늘따라 검은 양복을 차려입은 수행원들이 네 명이나 그의 주변을 지켰다. 그 모습이 꼭 누아르 영화의 한 장면 같긴 하다만…….

왜 아직도 남아 있는 거지? 설마 약을 찾을 때까지 있으려는 건가?

선우는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8:48.

숫자를 본 선우의 눈이 크게 뜨였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미처 몰랐다. 오전부터 치면 반나절을 넘게 화물을 뒤진 셈인데, 이래서야 끝이 없었다.

“선배님. 리스트 가진 거 있으세요?”

“어어. 저기.”

또 다른 상자를 가르며, 박민호가 조금 전 선풍기를 처박아 둔 구석을 가리켰다. 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꼬질꼬질 때가 묻은 종이를 집어 든 선우는 조명이 새어 들어오는 문 쪽을 향해 섰다. 그러고는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운 마음으로 리스트를 다시 살폈다. 손가락으로 차근차근 종이를 훑어내리며 꼼꼼하게 짚어 나간 선우는 리스트를 끝까지 확인하고, 도로 중간쯤으로 돌아왔다.

어쩐지 묘하게 신경을 거스르는 것이 있었다.

“……선배님. 저는 이쪽으로 가 볼게요.”

선우는 식품 물류를 벗어나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박민호는 선우에게 힘 좋은 경사 한 명과 말단 관세행정관 한 명을 딸려 보냈다.

그런데 아까부터 선우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문태성과 그의 수행원들이었다.

선우가 컨테이너를 이동할 때마다 남자는 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선우가 컨테이너 안에 든 화물을 뒤지기 시작하면, 그의 수행원들은 뒤따라 들어와 말없이 화물을 뒤졌다.

처음엔 의아한 마음에 남자에게 물을까 했다. 여기서 뭐 하는 건지, 왜 돌아가지 않고 저를 계속 따라오는 건지. 그런데 당장 일손이 부족하니 네 명이나 되는 수행원들이 꽤나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닌가.

말이 좋아 수행원이지 사실 조직원이나 다름없을 텐데. 경찰이 돼서 이들의 도움을 받아도 되는 건가, 선우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손길을 내치기에는 당장 눈앞에 있는 일이 너무 시급했다. 어설픈 자존심은 잠시 내려놓고, 선우는 일단 급한 불부터 끄기로 했다.

몇 개의 컨테이너를 더 살피고, 문제의 새 컨테이너 앞에 섰을 때였다.

열면 곧바로 차곡차곡 쌓인 화물부터 나오는 여타 컨테이너들과 다르게, 이번 컨테이너 안에는 또 다른 작은 컨테이너가 들어 있었다. 한가운데에 아주 굵직한 자물쇠가 채워진 채였다.

“행정관님. 이것 좀 열어 주실래요?”

선우가 자물쇠를 가리키며, 씰6) 절단기를 가진 관세행정관에게 요청했다.

“어, 이거 고리가 너무 두꺼운데……. 이걸로 잘리려나?”

행정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절단기를 최대한으로 벌렸다. 절단기의 이음새를 자물쇠 고리에 바짝 가져다 대니 두꺼운 쇠붙이가 절단기 사이를 꽉 메웠다. 이내 행정관은 좌우로 벌어진 손잡이를 안으로 바짝 오므렸다.

“아… 이게… 으윽…….”

행정관이 팔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한껏 힘을 주었으나, 자물쇠는 잘리지 않았다. 체구가 작고 마른 그의 힘으로는 절단기가 거의 아물리지도 않았다.

“어우. 이거 안 되는데요?”

“줘 봐요.”

이두박근이 갓난아기 몸통만 한 경사가 행정관에게 손을 내밀었다. 행정관이 절단기를 건네자, 경사는 받은 것을 즉시 자물쇠에 가져다 댔다. 콧김을 쉭 뿜으며, 경사가 양 손잡이를 힘껏 모으자 이번에는 절단기가 살짝 뒤틀렸다.

“와, 씨. 더 하면 부러지겠는데.”

여기서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절단기가 아예 망가져 버릴 것 같았다. 경사 덕에 자물쇠 고리에는 미세하게 금이 패었으나, 잘릴 기미는 없었다.

“이 절단기가 좀 작은 거라 힘이 약하죠…. 큰 거로 바꿔 올까요?”

“더 큰 절단기가 있어요?”

“네. 팀장님이 가지고 계신 게 약간 더 크긴 해요.”

“아, 그러면 거기까지 또 다녀와야 하잖아요. 몇 번 반복하면 끊어질 것 같은데?”

행정관과 대화를 주고받은 경사는 다시 절단기를 쩍 벌렸다.

“저… 그냥 제가 얼른 다녀올게요. 뛰어갔다 오면 금방이에요. 그동안 다른 데 먼저 보시는 게…….”

우람한 팔뚝이 기어이 절단기를 부러뜨리고 말 것 같다는 생각에 행정관이 경사를 말렸다.

“무슨 일입니까?”

컨테이너 내부가 조금 어수선해지자, 밖에 서 있던 태성이 정윤철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아, 자물쇠가 안 끊어져서요.”

행정관의 말에 태성은 눈썹 한쪽을 삐쭉 올렸다. 그의 눈이 컨테이너 중앙에 매달린 자물쇠와 경사의 손에 든 절단기를 번갈아 보았다.

난 또 뭐라고.

하여간, 공무원들이란.

“정 실장님.”

작게 혀를 찬 태성은 정윤철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윤철은 곧 그의 손바닥 위에 검은 쇳덩이 하나를 올려놓았다. 손에 착 감기는 서늘한 맛을 즐기며, 태성은 굳게 잠긴 컨테이너 앞에 섰다.

“잠깐, 뒤로.”

태성은 턱짓으로 공무원 세 명을 뒤로 물렀다.

그리고 별안간에 철커덕,

탕!

한적한 부둣가에 총성이 울려 퍼졌다.

탕! 탕!

푸드드득. 벼락같은 소리에 컨테이너 위에서 꾸벅이며 졸던 새들이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

팅, 티딩, 바닥에 떨어진 탄피가 경쾌한 소리를 냈다. 정중앙에 총알이 콱 박힌 자물쇠는 고리가 끊어진 채로 컨테이너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닫힌 컨테이너는 자물쇠와 맞닿아 있던 부분이 그새 움푹 패어 버렸다.

방아쇠울을 검지 끝에 걸고 태성이 빙글 돌아섰을 때, 공무원 세 명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초… 초, 초, 초, 총……!”

관세행정관은 손가락으로 총을 가리키며 말을 더듬었다. 경사는 눈을 부릅뜨고 태성을 위아래로 훑어 댔다. 그리고 나머지 공무원 한 명은…….

“한 경위님.”

태성은 망부석이 되어 버린 선우를 불러 깨웠다. 총을 내려다보던 선우가 퍼뜩 고개를 쳐올렸다.

“네, 네…!”

“열렸어요. 자물쇠.”

태성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몹시 태연한 얼굴이었다.

“일들, 마저 하시죠?”

그가 경사와 행정관을 번갈아 보며 말하자, 두 사람은 동시에 한 경위님을 쳐다봤다. 선우는 잠시 쭈뼛거리다, 마른침을 삼키고는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컨테이너 앞에 선 선우는 간신히 걸린 자물쇠를 빼내고, 닫힌 문을 양쪽으로 활짝 열었다. 삐걱 소리를 내며 열린 컨테이너 안에는 커다란 갈색 종이 박스들이 행과 열을 맞춰 가득 들어차 있었다.

경사가 상자를 향해 손전등을 비추자, 선우가 빛이 닿는 곳으로 들어섰다. 제일 위에 놓인 상자부터 꺼내 뜯으니, 투명 비닐에 포장된 겨울용 구스다운 패딩이 나왔다. 리스트에서 확인한 대로였다.

곧바로 패딩 한 장을 집어 비닐을 벗겨 내니, 엉덩이를 푹 감싸고도 남을 롱패딩이 아래로 길게 펼쳐졌다. 선우는 푹신푹신한 패딩을 꾹꾹 눌러보다가, 아예 상자 위에 올려놓고는 이곳저곳을 들춰 보기 시작했다.

모자 속과 안감을 먼저 훑어보고, 허리춤에 있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였다.

“……?”

분명 주머니 속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는데, 선우는 언뜻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건, 합성 섬유를 스쳤을 때 나는 소리는 아니었고, 그보다 더 얇고 빳빳한 재질을 스쳐야만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선우는 패딩을 양쪽으로 확 펼쳤다. 안감 왼쪽, 배를 덮는 지점에 손바닥만큼 커다란 상표가 붙어 있었다. 그 상표를 더듬더듬 만져 보자, 조금 전 들은 부스럭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손끝에서 상표와 따로 노는 무언가가 만져지는 것 같기도 했다.

찾았다. 선우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서둘러, 그러나 차분히 선우는 커터칼로 상표를 뜯어내기 시작했다.

“어…?”

선우 곁에서 시야가 잘 보이도록 손전등을 비춰 주던 경사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상표 뒤편에 감춰진 얇은 비닐을 발견한 것이었다.

일순간 선우와 경사가 허공에서 눈을 마주했다. 서로의 눈빛을 읽은 두 사람은 동시에 다른 패딩들을 다급히 꺼냈다. 비닐을 뜯어내고 곧바로 안쪽 상표를 만져 보자, 역시나 옷감이 아닌 무언가가 손에 걸렸다. 그리고 선우는 뜯어낸 상표 뒤에서 또다시 얇은 비닐을 찾을 수 있었다. 투명한 비닐 팩, 그 안에는 하얀 가루가 담겨 있었다.

“어? 찾았다!”

작은 컨테이너 안에서 관세행정관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

너른 아스팔트 바닥에 비닐 포장이 벗겨진 패딩들이 즐비하게 깔렸다.

“히야, 새끼들. 머리 굴린 거 보소.”

“이걸 다 어떻게 쑤셔 넣었어? 씨벌, 정성 한번 겁나 갸륵하네.”

경찰들은 곳곳에 앉아 패딩에서 필로폰을 해체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새카만 바닥 위로 하얀 가루가 담긴 비닐 팩이 끊임없이 쌓여 갔다.

“이게 도대체 몇 ㎏이야. 400㎏이야, 400㎏.”

투명한 비닐 팩 안에는 개당 약 10g의 필로폰이 담겨 있었다. 패딩이 총 4만 장이니, 얼추 400㎏이 맞았다. 뜯어도 뜯어도 끝없이 나오는 가루약에, 경찰은 해당 컨테이너를 통째로 압수하기로 하고 현장을 정리했다.

“이야, 이 정도면 1년 검거량 한 번에 해치웠는데? 선우야. 우리 올해는 일 더 안 해도 되겠다.”

박민호가 상기된 표정을 하고 선우의 어깨에 어깨동무를 했다.

압수 컨테이너를 수송 트레일러에 실어 경찰청으로 보내고 나니 시끌벅적하던 부둣가가 한순간에 고요해졌다. 경관들과 세관 직원들도 하나둘 일터로 돌아간 뒤였다. 넓은 부지에 남은 이는 박민호와 선우, 그리고 문태성뿐이었다. 정윤철과 수행원들은 어딜 가고, 그새 남자는 혼자였다.

박민호가 저벅저벅, 태성을 향해 걸어갔다. 선우는 의아한 표정을 하고 박민호의 뒤를 따랐다.

우뚝 솟은 남자 앞에 서서 박민호는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위아래로 치훑었다. 그러더니 문득 바지 뒷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윗부분이 뜯어진 담뱃갑을 쥐고 아래로 훅 한 번 내리자, 담배 한 개비가 위로 솟아올랐다.

“한 대 할래요?”

박민호는 담배 한 대가 튀어나온 담뱃갑을 태성에게 내밀었다. 태성은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뽑아 들었다. 이어 박민호는 제 입에도 한 대를 물고 불을 붙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담배를 피웠다.

하얀 연기 몇 모금을 뱉어 내고, 박민호가 힐긋 태성을 올려다보았다.

“뭐어. 어찌 됐든 간에 고맙게 됐수다.”

고맙다고 말하는 이의 말투가 상당히 껄렁했다.

“뭘요. 선량한 시민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아아, 예에.”

천연덕스럽게 구는 태성에게 박민호가 어련하시겠냐는 듯 답했다.

박민호 옆에 조용히 서 있던 선우는 두 사람이 담배를 태우는 동안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까 싶어, 내심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박민호는 덤덤했다.

기실 범죄 제보는 범죄자에게 듣는 것이 가장 정확했다. 10년 가까이 형사 생활을 하는 동안 박민호는 그런 경우를 숱하게 경험했다. 당장 저만 해도 대부분의 정보는 깡패, 건달, 양아치로부터 얻으니, 마약상에게 밀매 정보를 얻는 게 박민호로서는 새삼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문태성이 준 정보라고 하니 믿음이 간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다.

“선우, 넌 이제 그만 들어가 봐. 나머지 뒷정리는 경감님이랑 내가 알아서 할게. 수고 많았다. 휴가 제대로 보내지도 못하고 또 여기 와 있네.”

담배 한 대를 모두 피우고 난 박민호가 말했다.

“지금부터 쉬면 되죠. 덕분에 부산도 놀러 왔네요.”

하하. 선우가 멋쩍게 웃으며 어둠이 내려앉은 항구를 빙 둘러보았다.

“그래. 뭐 따로 할 일 있는 거 아니면 내려온 김에 좀 놀다 가. 바닷바람도 쐬고.”

“그럴까요, 그럼.”

선우가 박민호를 향해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박민호가 경찰서로 돌아가고, 선우는 태성과 단둘이 남았다. 선우는 뻘쭘함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태성 앞에 섰다.

“……저, 고맙습니다.”

고개를 푹 숙였다 올리는 선우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태성이 어깨를 으쓱였다.

“말로만?”

장난스러운 말투에 선우는 물끄러미 태성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저는 일하느라 정신이 팔려서 허기를 느끼지 못했으나, 저녁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 수색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 그 역시도 얼결에 식사를 거른 셈이었다.

“어, 그럼…… 순대국밥이라도 살까요?”

선우는 앞에 선 남자를 향해 어설프게 웃었다. 그리고 남자는 양 입가를 시원하게 끌어 올리며 응답했다.

“그거보다 더 좋은 거.”

***

2021년 7월 30일 23시경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해운대해수욕장

“정말 이걸로 괜찮으시겠어요?”

“이게 어때서요. 순대국밥보다는 훨씬 나은데?”

맥주를 넘기는 남자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입자가 고운 모래 위에 깔린 것은 과자 몇 봉지와 캔 맥주가 다였다. 한편에 치워 둔 편의점 비닐봉지 안에는 빈 맥주 캔이 벌써 세 개째였다.

“아, 솔직히 그 집 국밥은 좀 비리더라고.”

뜬금없는 고백에 선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태성을 쳐다봤다. 바다를 바라보는 남자의 옆얼굴에는 보조개가 움푹 패어 있었다. 선우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곧 맞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거긴 왜 데려갔어요?”

괜히 뜨끔해진 선우는 바닥에 내려 두었던 맥주 캔을 집어 들었다.

“어… 저희 팀원분들은 다 좋아하시던데요.”

조금 머뭇거리다, 맥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선우가 물었다.

“그러는 대표님은 그 비린 걸 왜 그렇게 맛있게 드셨어요?”

“밥 사 주는 사람 앞에다 두고 맛없는 티 내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나?”

하, 선우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쳤다. 범죄란 범죄는 다 짓고 다니는 남자가 예의를 찾고 있었다. 문득, 밥 사 주는 사람을 앞에다 두고 맛없는 티를 팍팍 냈던 북악산에서의 식사가 떠올랐다.

혹시 지금 나 돌려 깐 건가…?

선우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고 보면, 고중호를 제외하고는 그가 누군가에게 예의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대화를 할 때도 그는 언제나 웃는 얼굴로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고 얘기했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남자의 태도는 꼭 ‘당신을 존중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제게도 매번 능글맞게 굴긴 해도 선을 넘을 듯 말 듯, 마지막 순간만큼은 절대 먼저 넘지 않았다.

예의 바르고 매너 좋은 범법자라니.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었다.

본격적인 휴가철을 맞이한 해운대는 늦은 시간까지도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연인, 학생들, 가족. 시원한 옷차림을 한 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들뜬 얼굴을 하고 있었다. 드문드문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듣는 사람의 마음마저 설레게 했다.

“……해운대 좋네요.”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눅진한 공기를 타고 흘렀다.

“저 사실, 이번에 일하면서 부산 처음 와 봤어요.”

맥주 캔을 입에 가져다 대는 선우를 태성이 신기한 사람 보듯 쳐다봤다.

“지금까지 공부만 하고 살았어요?”

“…네, 그랬나 봐요.”

선우는 실없이 웃었다. 따뜻한 바닷바람을 쐬며 얕게 치는 파도를 보는 이 순간이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분위기에 취하기라도 한 건지, 선우의 입에서는 자꾸만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맥주 한 캔을 전부 비우고, 문어 모양 과자를 입에 쏙 넣는 선우를 향해 태성이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뭘요?”

“패딩.”

“아아.” 선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새 맥주를 땄다.

“식품은 이미 들출 만큼 들춰 봤으니까요. 그다음부터는 뭐, 이것저것 되는 대로 다 뒤져야죠.”

선우가 리스트를 다시 살폈을 때, 식품 화물은 탐색이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동원된 인력이면 1시간 내로 끝낼 수 있는 양이라 판단하고, 선우는 식품을 제외하고 가장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곳으로 이동한 것이었다.

“그 되는 대로가 왜 패딩이었냐는 거지.”

“아, 그건 얼마 전에, 점퍼 지퍼 고리를 갈라서 그 안에 약 숨기고 다시 꿰매서 밀수해 온 걸 적발한 적이 있었거든요. 갑자기 그게 생각이 나서……. 그리고 패딩, 왠지 좀 수상하잖아요.”

선우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뭐가 수상해요? 겨울 시즌 미리 준비하려면 지금 보내는 게 맞는데?”

“네. 그래서요. 너무 당연하니까 세관 눈을 피하기 쉬울 것 같았어요. 그리고… 오사카는 따뜻하니까 구스다운까진 필요 없지 않나요? 안 가 봐서 잘은 모르겠지만…….”

“…….”

태성의 입에서 피식, 바람이 샜다.

항만을 드나드는 수출입 화물 중에 관세청의 검사를 거치는 것은 해 봐야 전체의 5% 내외에 불과했다. 관세청이 특이적으로 감시 단속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경우가 아닌 이상, 세관 검사를 거칠 일은 거의 없다는 의미이다. 검사 대상이 차고 넘치는 상황에서 고작 4만 장밖에 되지 않는 겨울옷을 세관이 검사한다? 밀고가 아니라면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운 일이었다.

“근데 찾고 보니까, 상표 부분만 살짝 뜯어서 약 빼내고 다시 박으면 티 안 나게 패딩도 넘길 수 있겠더라고요. 그냥, 운이 좋았나 봐요.”

선우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태성은 말없이 선우를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허공을 보며 아랫입술을 혀로 핥는 남자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아, 자꾸 이러면 진짜 곤란한데.

태성은 일본 정보통을 통해 일요일 자정쯤, 오사카항에서 해태파가 물건을 건네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사실 약을 어떤 방식으로 숨겨 보내는지, 물건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까지는 그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정말로 약을 찾아 달라는 의미로 경찰에 제보를 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컨테이너를 마음껏 뒤질 수 있는 여건을 만든 것뿐, 태성은 경찰에 일말의 기대도 없었다. 보나 마나 조금 깨지락거리다가 시간이나 흘려 보내고 말겠지.

태성은 자정까지만 기다리다 그때까지도 약을 못 찾아내면 제 인력을 풀 생각이었다. 그쯤 되면 경찰도 제풀에 지쳐 알량한 체면만 내세우지는 못할 테니.

그렇게 30명이면 충분할까, 아니면 50명은 있어야 하나를 고민하던 와중에 선우가 자물쇠로 잠긴 컨테이너를 찾아냈다. 굳게 닫힌 컨테이너를 보고 태성은 반쯤 확신했다. 그게 해태파가 보내는 물건이라는 것을. 곧바로 자물쇠를 쏴 버린 것은 그런 연유였다.

선우가 약을 찾아낸 건 우연이었을까. 무슨 생각으로 겨울옷부터 뒤지고 있었을까. 태성은 그저 궁금해서 던진 질문이었다. 정말 운이었대도 하등 상관없었는데, 나름 진지하게 머리를 굴린 결과였다니. 조막만 한 머리통 주제에 하는 짓이 제법 기특했다.

“경찰 그만두고 나랑 같이 일할래요?”

“…농담이시죠?”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는 듯, 미간을 찡그리는 선우를 보고 태성은 소리 내서 웃었다.

“이번엔 진심인데.”

얼토당토않은 말에 선우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제가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저희가 해태파 조사하고 있는 줄은 어떻게 아셨어요?”

“마음만 먹으면 한 경위가 어젯밤에 뭐 먹었는지도 알 수 있어요.”

켈룩, 켈룩. 남자의 무시무시한 얘기에 들이켜던 맥주가 목에 탁 걸리고 말았다. 다급히 고개를 돌린 선우가 바닥에 대고 콜록콜록, 여러 차례 기침을 했다. 탄산에 쏘인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얼굴로 쏠리는 압력에 눈물도 찔끔 새 나왔다.

“……부디 그러지 마세요.”

목을 붙잡고 말하는 선우의 목소리가 까끌했다. 이후 헛기침으로 몇 번 목을 가다듬고 나서야 목소리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 총기 신고는 돼 있는 거죠…?”

“휴가 중에 업무 관련 얘기 그만합시다.”

나 참, 업무 관련 얘기 먼저 꺼낸 사람이 누군데. 선우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태성을 쳐다봤다. 그러다 선우는 남자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얼른 앞으로 돌렸다.

사실 아까부터 그와 눈만 마주치면 얼굴에 슬쩍슬쩍 열이 오르는 선우였다. 그래서 최대한 마주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남자가 저를 보고 웃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그래도… 그렇게 아무 데서나 쏘시면 안 돼요….”

선우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예요?”

“으음….” 태성의 물음에 선우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걱정하는 게 대표님은 아닌 것 같아요.”

당신이 아니라 당신한테 총 맞을 무언가가 걱정이 되는 거였다.

펑!

두 사람 모두 마지막 남은 맥주 캔을 뜯을 때였다. 까만 하늘 위에서 갑자기 빨간색 불꽃이 터졌다. 붉은 점들이 모여 만든 원이 점차 크기를 키우는가 싶더니, 이내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하늘 위를 흘러내렸다.

그리고 펑! 또다시 새로운 불꽃이 피었다.

휴가철을 맞이해 인근 호텔에서 불꽃 쇼를 준비한 모양이었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폭죽 소리와 함께, 알록달록 휘황찬란한 불꽃들이 금세 밤하늘을 수놓았다.

빨강, 노랑, 초록. 색깔도 다양한 불꽃들은 국화꽃처럼 사방으로 펼쳐지는가 하면, 폭포수처럼 마구 쏟아져 내리기도 했다.

“와…!”

고개를 위로 한껏 꺾어 든 선우는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번쩍이는 불꽃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담아 내려는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이 났다.

“너무 예뻐요.”

바닥에서 일직선으로 연달아 솟아오르는 불꽃을 마지막으로 10분가량 지속된 불꽃놀이가 끝이 났다. 이제는 허여멀건 연기만 남았지만, 선우는 여전히 하늘을 보고 있었다.

“야경 좋아해요?”

태성은 제집에서도 그가 한강 야경을 넋 놓고 보던 모습이 떠올랐다.

“네.”

선우의 시선은 이제 바닷가를 빙 둘러싼 고층 건물들로 향했다. 여전히 꺼지지 않은 불빛들이 해안 도시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수없이 지새웠던 외로운 밤, 선우를 위로해 준 건 밤하늘이었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도 없는 공허한 시간 속에서 새까만 하늘은 눈물을 닦아 주는 손수건이었고, 울다 지친 몸을 덮어 주는 포근한 이불이었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불빛들이 선우에게는 세상에 혼자가 아님을 알려 주는 등댓불과도 같았다.

유일하게 제 마음을 모두 털어놓을 수 있는 안식처를 좋아하지 않을 리 없었다.

선우의 입가에 얼핏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감상에 젖은 제 모습이 어쩐지 청승맞게 느껴졌다. 선우는 남은 맥주를 모두 털어 넣으며, 울적함도 함께 털어 버리기로 했다.

“…….”

그러다 언뜻, 저를 향한 시선을 느끼고 선우는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어느새 턱을 괸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우는 할 말이 있냐는 듯, 눈을 크게 뜨고 태성을 마주했다. 그 동그란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태성은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여기서 야경이 제일 멋진 곳을 알고 있는데.”

차분하게 내려앉은 목소리와 뜨거운 시선,

“갈래요?”

제 팔을 부드럽게 끌어당기는 손길을 선우는 피할 수가 없었다.

***

쾅!

객실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선우의 등이 문에 세게 부딪혔다.

“아…!”

놀란 선우가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사이, 태성은 두 손으로 선우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고개를 모로 꺾은 그는 곧장 입술부터 맞대어 왔다. 흉곽을 크게 들썩이며 달려드는 남자에게서 평소 같은 여유로움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조금 전, 엘리베이터 안에서만 해도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계기판을 보고 있던 남자였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는 순간, 곧바로 선우의 손목을 세게 잡고 이끈 남자는 그 무심한 사람과 동일 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성급하게 굴었다.

맞닿은 입술을 한껏 빨아들이며, 태성이 한 손을 선우의 셔츠 안으로 집어넣을 때였다.

“잠깐! 잠깐만요!”

고개를 돌려 뺀 선우가 맨살을 타고 올라오는 손을 셔츠 위에서 막아 내며 다급히 외쳤다. 갑자기 행동에 저지를 당한 태성이 몸을 살짝 물렀다.

“저, 저, 냄새나요!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무슨 소리야. 지금 너한테서 단내 풀풀 나.”

다시 고개를 숙이며 다가오는 남자를 선우가 밀어내며 말했다.

“아, 그건… 아까, 수색하다가… 사과즙이 터져 가지고…….”

“사과즙.”

내리깐 눈으로 선우를 쳐다보는 태성의 입에서 헛웃음이 샜다. 터져도 꼭 지 같은 게 터졌어.

태성은 아쉬운 듯 선우의 허리를 슬쩍 쓸어내리며 셔츠 안에서 손을 빼냈다. 잠깐 움찔했던 선우는 태성의 손이 떨어지자, 조금 말려 올라간 셔츠를 슬그머니 아래로 끌어내렸다.

“저 지금 엄청 찐득거리고… 더럽고…….”

자꾸만 끈질기게 붙어 오는 남자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선우가 우물거렸다.

“씻으면 괜찮은 거야?”

“…….”

선우는 눈만 위로 뜬 채 태성을 올려다보았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동그란 얼굴이 콕 찍으면 그야말로 사과즙이 나올 것 같기는 했다.

태성은 선우의 손목을 잡아끌고 침실로 향했다. 방 안을 확인할 틈도 없이, 태성은 곧바로 안쪽에 붙은 욕실로 선우를 집어넣었다.

“여기 써요. 난 밖에서 씻을게.”

웬만한 방 하나 크기의 욕실에 선우를 혼자 남겨 두고 태성은 문을 닫았다. 조명부터 장식까지 화려하지 않은 곳이 없는 욕실을 눈을 크게 뜨고 둘러보던 차에…

“아! 그리고,”

벌컥, 욕실 문이 다시 열렸다. 선우가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리며 돌아섰다. 남자는 반쯤 열린 문의 문고리를 잡고 서 있었다.

“미리 말해 두는데. 도망가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예요.”

남자의 웃음기 섞인 경고에 순간 선우의 얼굴이 화르르 불타올랐다.

“정말 아니다 싶으면 내가 나오기 전에 돌아가.”

쿵. 욕실 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욕실을 막 벗어난 선우의 얼굴이 열기에 발갛게 익어 있었다. 하얀 가운을 입고 나온 선우가 넓은 침실을 휘 둘러보았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해운대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폭넓은 유리창, 그리고 창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너른 침대였다.

깔끔하게 각이 잡힌 새하얀 침대를 보니 얼굴에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아무리 진정시키려 노력해 봐도 달아오른 얼굴, 두근대는 심장이 도저히 가라앉지 않았다. 아직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선우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창가로 다가가, 유리창에 이마를 콩 박고 섰다.

어떻게 해야 하지…….

따뜻한 물줄기 아래 서서 수십 번도 더 고민을 한 선우였다. 이대로 돌아갈까. 아직 늦지 않았는데. 이러면 안 된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상대는 남자고, 무엇보다 범법자가 아닌가. 아무리 웃는 얼굴로 사람 좋은 척 행동한다 해도 그가 잠재적 피의자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저를 응시하는 눈빛, 저를 향해 짓는 미소를 선우는 도무지 거부할 수가 없었다. 남자가 노골적인 시선으로 훑어 댈 때면 불쾌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입을 맞추고 싶었다. 드문드문, 기억이 조각난 그날 밤을 떠올리면 괴로운 와중에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뛰었다.

꼭 죄를 지은 것만 같은 그 밤을, 선우는 잊고 싶으면서도 잊고 싶지 않았다.

성욕에 관해서는 꽤나 담백한 성향이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이렇게 유혹에 약한 사람인 줄 선우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선우가 유리창에 이마를 비벼 댔다.

“…?”

그때 불쑥, 고개 숙인 선우 앞에 와인 잔 하나가 놓였다. 창에 박은 머리를 떼고 옆을 쳐다보니, 창밖을 바라보고 서 있는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어두운 바닷가를 내려다보며 와인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축축이 젖은 머리로 저와 같은 가운만 입고 있는 남자에게서 욕실의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제가 쓴 것과 같은 보디 샤워의 향 사이로 남자 특유의 묵직한 체향이 밀려들었다. 달콤하고 씁쓸한 시가 향에, 믿고 싶지 않게도 아랫배 저 밑이 슬쩍 뻐근해지는 듯했다.

술의 힘을 빌리면 좀 진정이 되려나. 선우는 창틀에 놓인 와인 잔을 들어, 한 모금을 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입안 가득 퍼지는 향기에 잠시 멈칫했다.

“어, 이거…!”

“기억해요?”

태성의 물음에 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혀를 감싸고 도는 풍부한 과일 향과 화려한 꽃향기는 언젠가 그가 손수 따라 주었던 빈티지 와인과 같은 향이었다.

“먹지도 않아 놓고.”

“……어, 어떻게 아셨어요?”

“뻔하지. 한선우 성격에.”

태성이 피식 웃었다.

선우는 민망함에 괜히 와인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나중에 인터넷을 찾아보고 안 사실이었지만, 와인의 가격은 시헌의 장난이 약간 섞여 있었다. 예상보다 덜 비싼 가격에 선우는 아주 잠시 안심했었다. 그러나 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제가 태어난 해에 생산된 상품을 구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는 더 질색했던 기억이 있었다.

“어때요?”

“…맛있어요.”

“향 좋죠?”

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샤또 마고는 와인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있어요. 프랑스 보르도 와인 중에서는 제일 우아한 와인이라고 평가해요.”

아, 이게요…. 붉은빛의 와인을 내려다보며 선우가 조용히 응답했다.

“마고 지역은 다른 곳보다도 토양이 거칠고 자갈이 많거든요. 그래서 포도나무가 수분을 찾아서 땅속 더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린대요. 덕분에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은 더 부드럽고 섬세한 향을 낸다고 하니, 참 아이러니하죠.”

선우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와인에 대해 설명해 주는 남자를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태성은 제 잔에 얼마 남지 않은 와인을 모두 마시고, 창틀 위에 와인 잔을 내려놓았다.

“나도 와인에는 별로 조예가 없긴 한데, 제대로 숙성된 마고는 향이나 맛이 다른 와인이랑은 비교할 수가 없더라고.”

태성은 몸을 옆으로 틀어 선우를 바라보고 섰다.

척박한 땅을 이겨 내고 자란 포도나무에서만 얻을 수 있는 고아한 맛과 향. 코르크를 따는 순간부터 붉은 과실과 꽃밭을 떠오르게 할 만큼 화려한 향을 뿜어내면서도, 묵직하게 그러나 부드럽게 제 속에 담긴 것을 여실히 드러내는 꾸밈없고 순수한 맛이 꼭 너를 생각나게 했다.

그러니 반짝이는 너에게 사랑 고백을 할 거라면, 어설픈 칵테일이 아니라 ‘보르도의 보석’이라 불리는 마고 정도는 바쳤어야 했다고. 태성은 불쑥 치밀어 오르는 아이 같은 심보를 뱃속 깊은 곳에 조용히 밀어 넣었다.

“앗!”

태성이 선우의 팔을 휙 잡아당겼다. 갑자기 세게 끌어당기는 힘에 선우는 태성을 마주 보고 서게 되었다. 조심스레 선우의 허리를 감싸 안은 태성은 선우를 창틀에 기대 세웠다. 눈앞에 보이는 새하얀 목덜미에 곧장 입술을 가져다 대자, 선우가 화드득 몸을 움츠렸다. 선우의 손에 든 와인 잔 안에서 반이 좀 안 되게 남은 와인이 출렁거렸다.

“저, 저, 이거 다 흘리겠어요!”

선우가 급히 외치자, 태성은 선우의 손에 있던 와인 잔을 뺏어 들었다. 남은 와인을 한입에 털어 넣은 그는 빈 와인 잔을 조금 떨어진 창틀 위에 올려 두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선우에게 입을 맞췄다.

“…!”

이내 선우의 입안으로 향긋한 액체가 울컥 흘러들었다. 선우가 깜짝 놀라 태성의 팔을 붙들자, 그는 반대쪽 팔에 감긴 허리를 단단히 조였다. 그러면서 입에 머금은 와인을 조금씩 흘려보냈다.

선우는 입안으로 넘어오는 것을 쭉 빨아들였다. 울걱울걱 밀려드는 액체가 행여 밖으로 새어 나갈까 싶어, 선우는 연신 꼴깍거리며 남자가 건네는 술을 전부 받아먹었다.

“…으음.”

차마 다 넘기지 못한 마지막 한줄기가 선우의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입안에 든 와인을 모두 넘긴 태성이 마지막으로 선우의 입술을 세게 빨아들여 쪽, 소리를 내며 입술을 떼어 냈다.

“잘하네.”

“아…….”

선우의 턱에 흘러내린 와인을 엄지손가락으로 훑어 내며, 태성이 깊게 미소 지었다. 남자의 볼에 폭 파인 보조개를 선우는 멍한 눈으로 좇았다.

태성은 돌연 선우를 번쩍 들어 창틀에 앉혔다. 유리창을 등지고 앉게 된 선우가 태성을 내려다보았다. 매번 올려만 보던 남자를 위에서 내려다보니 무척 색다른 기분이었다. 자신을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미끈한 인물에는 얼핏 가슴 한구석이 설레는 듯도 했다.

“왜 도망 안 갔어요?”

태성이 선우의 허리를 팔로 휘감으며 물었다. 선이 뚜렷한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선우는 이내 고개를 양쪽으로 저었다. 남자의 질문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도망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선우는 제가 남자를 거절하지 못하는 이유를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큰일 났네. 이거 진짜 마지막 기회였는데.”

태성은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렸다.

“휴가가 언제까지예요?”

“……월요일이요.”

“잘됐네.”

태성이 얼굴을 가까이하니, 두 사람의 코가 거의 맞닿을 정도가 되었다.

“여기서 주말 보내고 가요.”

선우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태성은 입을 맞췄다.

창틀에 걸친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몸은 아직도 뜨끈한 기운을 내뿜었다. 태성이 맞붙은 입술을 지그시 밀어붙이자, 선우의 등이 유리창에 닿았다. 차가운 유리창과 뜨거운 남자의 상체에 끼어 옴짝달싹할 수 없음에 선우는 가슴이 일렁였다.

태성은 고개를 꺾으며 촉촉이 젖은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선우가 두 눈을 내리감으며 태성의 팔 언저리를 꼬옥 붙들자, 태성은 긴장한 이를 달래듯 혀끝으로 선우의 입천장을 살살 쓸어올렸다.

그러다 말캉한 혓바닥을 한순간에 휘감아 쑥 끌어당기니,

“으응….”

선우의 목에서 앓는 소리가 흘렀다.

태성은 혀에 감긴 살덩이를 제 입안으로 끌어오며, 선우의 허리에 감긴 끈을 서서히 잡아당겼다. 잘 여며져 있던 가운이 양쪽으로 살그미 벌어지자, 그는 선우의 혀끝을 쪽 빨아들이고는 맞붙은 입술을 떼어 냈다.

그러고는 벌어진 가운 한쪽을 슬쩍 밀어내며, 늘씬하게 뻗은 목선에 이를 박아 넣었다.

“읏!”

앞니로 연한 살을 살금 깨물자 새하얀 목 위에 희미하게 잇자국이 남았다. 이어 일자로 곧게 뻗은 쇄골에 입술을 묻고 얇은 살가죽을 세게 빨아들이니,

“아흣….”

새하얀 피부 위로 금세 새빨간 울혈이 생겼다.

백지장같이 깨끗한 피부 위에 제가 남긴 붉은 흔적들을 보고 있자니, 태성은 하얀 몸 구석구석을 마구 씹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조급한 손길로 선우의 몸을 덮고 있는 가운 한쪽을 완전히 밀어내자, 목선을 따라 고운 선을 그리는 어깨가 훤히 모습을 드러냈다.

태성은 동그란 어깨 끝에 또다시 제 이빨 자국을 남겼다. 희고 부드러운 살결은 내면 한구석에 숨겨 둔 가학성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게 어쩐지 괘씸해, 태성은 선우의 어깨를 부러 세게 물었다.

“아!”

이번에는 통증을 참지 못하고 선우가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미간을 살짝 찡그린 선우를 보며 태성은 슬며시 웃었다.

“아팠어요?”

선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못이야.”

장난스레 말하고는 태성은 제가 깨문 자리를 혀로 핥아 진정시켰다.

이걸 내가 왜 아도니스에 내비쳤지.

멍청한 약쟁이 새끼들이 주제도 모르고 치근덕거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보기 좋은 것에 호기심을 갖고, 때 묻지 않은 것을 탐내는 건 인간이라면 응당 갖게 되는 본능이니까. 깨끗한 것을 보면 더럽히고 싶고, 고고한 것을 보면 무너뜨리고 싶어 하는 욕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멍청한 새끼들을 마주하게 한 원인이 애초에 제게 있었으니, 진짜 멍청한 새끼는 자신이었을까.

태성은 선우의 허리에 두르고 있던 손을 위로 올려 마른 등 전체를 감싸 안았다. 낭창거리는 몸을 제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긴 그는 연한 빛을 띠는 젖꼭지를 입에 물었다.

“흐읏.”

혓바닥을 넓게 펴 오똑 도드라진 것을 슥 핥아 올리니, 자그마한 꼭지가 입안에서 단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중심에 대고 혀끝을 빙글 돌리다가, 이내 유륜 전체를 세게 빨아들이자 선우가 앓는 소리를 내며 태성의 머리를 다급히 끌어안았다.

저를 향해 무너져내리는 이를 받치며, 태성은 입안에 머금은 것을 이로 살살 긁었다. 그러고는 곧 판판한 가슴을 크게 베어 물며, 갈비뼈가 두드러진 옆구리를 쓸어내렸다.

으응…. 선우가 몸을 흐늘거리다 태성의 어깨 위에 이마를 파묻었다. 태성의 머리를 끌어안고 있던 팔은 그새 그의 목을 바투 당겨 안은 채였다.

태성은 고개를 기울여 제 어깨에 묻힌 얼굴에 입을 맞췄다. 당장 입술이 닿는 귓가와 볼에 쪽, 쪽, 짧은 키스를 남기고는 고개를 더 깊이 숙여 둥근 턱 끝과 입술에도 쪽, 쪽, 쪼듯이 입을 맞췄다. 그리고 두 팔을 뻗어 창틀에 앉은 선우를 단번에 안아 올렸다.

“아앗…!”

창가 바로 옆 침대 위에 선우를 내려놓고, 태성은 선우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섰다. 두 사람의 무게에 매트리스가 울렁이자, 한쪽만 가까스로 걸치고 있던 선우의 가운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팔꿈치 부근까지 내려간 가운은 전신에서 양팔만을 겨우 가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남자 앞에서 나체가 된 선우가 얼굴과 목을 새빨갛게 붉혔다.

“이미 볼 거 다 본 사이에 왜 이렇게 부끄러워해.”

눈을 마주쳐 오는 남자를 향해 선우가 고개를 저었다.

“……기억이… 잘 안 나요….”

말 그대로 선우는 사실 그날의 기억이 별로 없었다. 격하게 흥분되고 들떴던 감정만은 아직도 생생했으나, 제가 했던 말과 행동, 겪었던 상황들이 전부 기억나지는 않았다.

편집된 영상처럼 부분부분 잘린 기억 속에는 옷을 반쯤 벗고 남자의 품에 안겨 할딱거리던, 남자의 것과 제 것을 한데 쥐고 정신없이 흔들어 대던 자신의 모습만 어렴풋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거 봐. 모른 척할 줄 알았지, 내가.”

태성이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가지런히 내려온 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고는 허리로 손을 가져가 가운을 여미고 있던 끈을 쭉 잡아당겼다. 새하얀 가운이 금세 양쪽으로 활짝 벌어졌다.

헉, 눈앞에 펼쳐지는 장대한 기골에 선우가 숨을 급히 들이마셨다. 당황한 선우는 큰 눈을 재차 깜빡거렸다.

“어… 자, 잠시만요……?”

벌어진 가운 사이로 드러난 남자의 몸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늘 하나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탄탄하게 짜인 가슴 근육도, 균형이 꽉 잡힌 복부 근육도, 빛깔 좋은 매끈한 피부도 아니었다.

선우는 거대한 성기를 보고 정신이 홀딱 깼다. 힘 있게 올라붙은 성기는 저 또한 남자 몸의 일부라는 것을 증명하듯, 곧고 길었다. 그리고 그의 몸처럼 굵고 단단했다.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 선우가 태성을 올려다보았다.

“저, 저, 저, 혹시…….”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는 선우의 얼굴이 터질 듯이 달아올랐다.

“저, 저희가, 지금 하려는 게…….”

“생각하는 게 맞을걸?”

남자의 말에 선우는 엉덩이를 뒤로 슬금 밀었다.

“어… 어…… 그…….”

생각을 말로 뱉는 것이 죽을 만큼 부끄러웠지만, 선우는 꼭 말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제, 제가… 아, 아래인… 거죠……?”

“아. 혹시 넣고 싶어요?”

남자는 외설적인 언사를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했다.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선우의 눈썹이 팔자 모양이 되었다.

체격 차로 보나, 경험 면으로 보나 선우는 자신이 남자를 리드할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분위기상으로도 제가 아래인 게 맞는 것 같긴 한데……. 남자의 것은 크기가 정상적인 범주를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 있었다. 아무리 인체가 신비롭다 한들 저걸 넣을 만한 구멍은 제 몸에는 없는 것 같았다.

“이, 이거… 너무… 큰 것 같아요…….”

선우는 남자의 아래를 힐끔 내려다봤다가 얼른 눈을 돌렸다.

“만질 거 다 만져 놓고 이제 와서 새삼?”

“아, 아니… 그날은 정말로… 기억이 잘, 안 나서…….”

“자꾸 기억 안 난다고 하니까 좀 서운해지려고 하네. 나 그날 열심히 봉사했는데.”

태성은 자꾸만 뒤로 물러나는 선우의 다리 사이로 제 무릎을 성큼 집어넣었다. 커다란 상체가 저를 덮을 것처럼 다가오자 선우는 손을 들어 남자를 저지했다.

“어… 이거, 안 될 것 같아요. 차라리, 지난번처럼 제가 손으로,”

“기억 안 난다며.”

태성은 앞으로 뻗어 나온 손을 잡아채며 웃었다.

“왜 해 보지도 않고 포기를 해. 한선우답지 않게.”

“어, 어, 이, 이건, 불가능한 거예요……!”

태성은 난처한 얼굴로 외치는 선우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한번 해 봅시다. 되는지 안 되는지.”

그러고는 쉬이 딸려오는 몸을 한순간에 휙, 뒤집어 버렸다.

“앗!”

제 앞에 엎어진 선우의 팔 끝에서 태성은 가운을 벗겨 내 침대 밑으로 던졌다. 이어 선우의 배를 한쪽 팔로 감싸며 허리를 위로 쭉 끌어올리자, 탄력 있는 엉덩이가 볼록 솟았다.

“참고로, 내가 불가능한 걸 가능하게 만드는 걸 좀 잘해.”

태성은 양손으로 선우의 골반을 단단히 잡았다. 이내 두 엄지손가락만으로 탱탱한 엉덩이를 양쪽으로 벌린 그는 곧바로 벌어진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으악!

저는 제대로 본 적도 없는 엉덩이골에 남자의 뜨거운 숨결이 닿자, 선우가 소리를 내지르며 소스라쳤다. 언뜻 허리 부근이 징- 울릴 듯 소름이 끼쳐, 선우는 앞으로 기어 도망가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손을 내뻗어 본들, 커다란 손에 붙들린 다리는 조금도 나아가질 못했다.

“뭐, 뭐 하시는……!”

꼭 다물어진 구멍 주위로 촘촘하게 아물린 주름을 태성이 혀끝으로 슥 핥아 올리니, 선우가 기겁을 하며 꽥 소리를 질렀다.

“악! 더, 더러워요…!”

재차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몸을 꽉 붙들고, 태성은 벌어진 다리 사이에 얼굴을 더 깊게 묻었다. 선우의 엉덩이를 위로 한껏 치켜들며, 타액이 잔뜩 고인 혓바닥으로 회음부를 훑어 내리자 선우의 상체가 순식간에 아래로 푹 꺼졌다.

하, 하윽.

태성은 마침 눈앞에 놓인 동그란 음낭을 한 손으로 받쳐 들었다. 다른 곳보다 진하긴 해도 여전히 색이 옅고 두께가 얇은 피부는 몹시도 몰랑거렸다. 태성은 입을 크게 벌려 둥근 살덩이를 한입에 담았다. 야들야들한 것을 입안에 넣고 살살 굴리니, 혀끝에서 탱글한 감촉이 느껴졌다.

헉! 고간에서 느껴지는 습한 기운에 선우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침대 위에 머리를 처박은 채로 선우는 남자를 벗어나고자 온몸을 뒤척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피해 보겠다고 엉덩이를 좌우로 움직이니, 오히려 그의 높은 콧대에 제 살을 더 비벼 대는 꼴이 되었다.

“아… 아, 그만, 하세요…….”

선우는 제 골반을 붙든 손을 밀어내며 애원했다. 물기가 조금 어린 목소리에 태성은 입안에서 굴리던 것을 혀로 한 번 싸악 훑고는 이내 춥, 소리를 내며 빼냈다.

하아. 선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찰나, 태성은 다시 회음부를 핥아 올렸다. 윽! 외마디 신음을 뱉으며 선우가 몸을 바짝 굳히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포동한 엉덩이를 양옆으로 활짝 벌렸다.

좁은 골 사이를 혀끝으로 쓸어올리다 마침내 안으로 바싹 오므라진 구멍에 도달했을 때, 태성은 이를 세웠다. 붉은 기를 띠는 엷은 살을 앞니로 슬금슬금 긁다가 폭 팬 곳에 돌연 입술을 밀착시켜 강하게 빨아들이니, 손안에 잡힌 엉덩이가 움찔움찔 경련했다.

“으… 흣……!”

생경한 감각에 선우는 아랫입술을 짓깨물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 입에서 무슨 소리가 튀어나올지 저조차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

태성이 뾰족이 세운 혀를 오목한 애널에 박아 넣고 빙빙 돌리다가, 혀끝에 힘을 실어 벌어진 틈새 사이로 밀어 넣었다.

“아, 아…!”

축축하고 말캉한 것이 점막을 짓누르며 파고들자, 문득 꼬리뼈가 지릿지릿하더니 등골에 소름이 쭉 끼쳤다. 선우는 눈앞에 보이는 하얀 베개를 황급히 끌어안고 머리를 파묻었다. 속을 훤히 까발려진 채 남자에게 붙들린 것이 부끄럽고 창피하기도 했으나,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순간 가슴속에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 음심에 당장에 뭐라도 붙들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이거, 이거 왜, 흣!”

태성이 깊숙이 집어넣은 혀로 뭉글뭉글한 내벽을 꾹꾹 누르자, 선우가 베개에 파묻은 머리를 좌우로 내저었다. 모든 피가 머리로 쏠리는 것 같았다. 양 볼과 귀가 후끈후끈한 게 보지 않아도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올랐을 것이 분명했다. 더러운 곳을 핥고 쑤시는데 도대체 왜 성욕이 이는 건지. 남자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 지금 선우에게는 유일한 안심거리였다.

바들바들 떨어 대는 다리를 양팔에 끼고 태성은 좁은 구멍 안에 혓바닥을 깊이 넣었다 빼기를 반복했다. 타액을 잔뜩 모아 혀와 함께 밀어 넣으니, 혓바닥이 들어가고 나올 때마다 춥, 춥, 연신 민망한 소리가 났다.

“흐으…….”

아, 미쳤나 봐…….

지저분한 곳에 얼굴을 파묻고 거듭 혀를 밀어 넣는 남자도, 내벽을 문대는 물컹한 감각에 몸서리치며 흥분하는 저도 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남자의 혓바닥이 지나는 모든 곳이 흐물흐물 녹아내릴 듯했다. 엉덩이든 회음이든 남자가 이를 세워 긁어 댈 때면 간지러우면서도 찌릿해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엉덩이를 실룩거렸다.

진득하니 내벽을 넓히던 태성이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린 구멍에서 단번에 혀를 쑥 빼냈다.

“읏!”

뜨끈하고 축축한 것이 갑자기 빠져나가자, 선우는 얼떨결에 그를 따라 엉덩이를 치켜들었다.

가랑이 사이에 끈질기게 붙어 있던 남자가 마침내 떨어져 나가니, 선우는 베개에 파묻었던 얼굴을 살그머니 들어 올렸다. 어쩐지 조용한 것이 수상해 눈을 데굴 굴리다가, 선우는 고개를 돌려 남자를 찾았다.

그는 침대 옆 협탁에서 보디 오일을 집어 들어 손바닥에 덜어 내고 있었다. 은은한 백단향 향기가 일순간 침대 주위를 맴돌았다. 따스한 느낌의 수목 향을 들이마시니 떨리는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 듯했다. 선우는 그 결에 베개 위로 슬쩍 몸을 늘어뜨려 보았다.

그 찰나, 큼직한 손이 다시금 둔부 사이를 파고들었다.

“…!”

태성은 오일이 흥건하게 고인 손바닥을 곧장 선우의 엉덩이골에 가져다 댔다. 갈라진 틈 사이에 미끌거리는 오일을 전부 펴 바른 그는 이어 넓은 손바닥으로 회음부 전체를 지그시 눌렀다. 오일 덕분에 차지게 마찰된 손바닥을 위아래로 천천히 비벼 대니,

“으응…….”

선우는 금세 비음 섞인 신음을 뱉었다.

이건, 뭐 이렇게 쉬워. 선우의 반응에 태성은 조용히 실소했다. 제 손길을 달가워하는 이를 위해 태성은 몇 번 더 손바닥을 문질러 주다가, 곧 부드럽게 풀어진 구멍 사이로 검지와 중지를 한 번에 밀어 넣었다.

하윽!

미끄덩한 오일 덕에 생각보다 진입이 쉬웠으나, 좁은 내벽은 금방 두 손가락을 강하게 조여 붙였다. 겨우 두 마디쯤 들어갔을 때, 선우는 낯선 이물감에 둔부에 바짝 힘을 주었다. 애써 풀어 둔 구멍이 조붓이 오므라들려 했다.

“아, 이거… 이, 상해요…….”

“어떻게 이상한데?”

태성은 손끝으로 둥글게 원을 그리며 두 손가락을 천천히 안으로 집어넣었다. 빡빡한 내벽에 손가락을 끝까지 밀어 넣은 그는 손목을 빙글빙글 돌려 가며 안을 넓혔다.

“모, 모르…… 흣……!”

느긋하지만 꾸준한 움직임에 속 근육이 말랑하게 풀어지며, 닫혀 있던 점막이 부드럽게 벌어졌다. 안쪽 공간에 여유가 생기자 태성은 두 손가락을 서서히 빼냈다. 그리고 곧바로 손가락 하나를 더했다.

“아, 아파…!”

내벽을 가득 채운 손가락이 그나마 익숙해졌다 싶었는데, 압박감이 더 심해지자 선우는 몸을 비틀었다.

“이렇게 안 하면 나중에 더 아파.”

태성은 남은 한 손으로 선우의 허리를 뒤에서 감싸 안으며 위로 솟은 꼬리뼈에 쪽, 입을 맞췄다. 일자로 곧게 뻗은 등줄기 위에 차근차근 입을 맞추며 점차 위로 올라가다, 어느새 어깻죽지까지 도달한 태성은 도드라진 날개뼈와 어깨 위에도 쪽, 쪽, 입맞춤을 남기고는 선우를 품 안에 꼬옥 끌어안았다.

“아, 으응….”

“너는 뭐, 여기도 말랑거려.”

뽀얀 등에 무수히 입을 맞추는 와중에 기다란 손가락은 느릿느릿 구멍 안을 들락거렸다. 미끄러운 손가락이 안팎을 드나들 때마다 기분 좋은 나무 향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귓가와 목덜미에 연신 짧은 키스를 남기며, 태성은 느리게 치대던 손에 슬쩍 속도를 가했다. 점차 빨라지는 남자의 손에 선우의 숨도 차츰 가쁘게 차올랐다. 어느 순간부터 퍽퍽, 강하게 쳐올리는 힘이 선우는 버거워지려 했다. 이제 그만 멈춰 달라고 말하려는 찰나,

“아흡!”

남자의 손끝이 내벽의 한 지점을 스치듯 지났다. 선우는 불현듯 밀려오는 짜릿함에 몸을 한껏 움츠렸다.

“여기야?”

귓바퀴에 입술을 맞댄 채 묻는 남자의 목소리에 귓속의 솜털이 쭈뼛, 솟는 기분이었다. 간지럽고도 저린 감각에 선우는 베개를 끌어안고 있는 팔에 제 귀를 마구 비볐다.

“아, 응!”

태성은 아주 미세하게 튀어나온 부위를 재차 누르며, 선우의 허리를 안고 있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반쯤 선 성기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위아래로 문지르니 단단하게 올라붙는 것이 금방이었다.

아아…….

성기에 닿는 온기에 선우가 몸을 꼬며 끙끙거렸다. 이 자체로도 좋긴 한데, 조금 애가 달아서였다. 그냥 세게 쥐고 흔들어 주면 좋겠는데 남자는 그저 부드럽게 쓸어 대기만 했다. 제 것을 완전히 잡고 있지도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선우는 제가 직접 앞을 비벼 대다, 결국 손을 뻗어 태성의 손을 붙잡았다.

“흐으응….”

태성은 선우의 행동에 실소를 했다. 그러다 이내 선우의 성기를 꽉 쥐었다.

“역시. 한선우는 솔직한 게 매력이지.”

그리고 곧장 빠르게 쳐 대니, 선우가 신음하며 태성의 팔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체온이 높은 큼직한 손, 허리를 든든하게 지탱해 주는 굵고 탄탄한 팔뚝이 미칠 듯이 좋았다.

“앗! 흐읏, 아!”

안쪽 점막을 지그시 누르며 성기를 재빠르게 흔드는 손길에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선우는 엉덩이를 바싹 치켜들고, 거칠게 움직이는 남자의 손을 쥐어짜듯 붙들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 손길에 선우가 온몸을 흠칫흠칫 떨어 댔다.

이내 새하얀 시트 위로 희멀건 정액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하아, 하…….”

고개를 푹 숙이며 숨을 몰아쉬는 선우에게서 손가락을 빼내고, 태성은 아직 손에 남은 오일을 제 성기에 펴 발랐다. 그러고는 곧바로 선우의 허리를 치켜들고 두 손으로 엉덩이 사이를 한껏 벌렸다. 빠끔거리며 오므라드는 구멍에 태성은 빳빳이 곧추선 제 것을 끼워 맞췄다.

“아윽!”

충분히 풀어냈다고 생각했는데, 한참을 공들인 것에 비해 성과가 별로 없었다. 고작 귀두 부분만을 삼킨 애널이 긴장으로 꽉 아물어 들었다. 선단을 조이는 압력에 태성의 미간에 세로줄이 박혔다.

“힘 좀, 빼 봐.”

“읏.”

태성이 동그란 엉덩이를 살살 토닥이자, 선우는 도리어 힘을 바짝 주었다. 그런 선우를 품에 안으며 태성은 하얀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숨 크게 내쉬어. 나 너 안 잡아먹어.”

심장 부근을 크게 쓸어내리는 손에 선우는 조금 안도했다. 남자의 말대로 숨을 크게 내쉬며 몸에 힘을 빼니,

“흐으… 윽!”

그가 때맞춰 허리를 강하게 쳐올렸다.

“학……!”

내벽이 강제로 쩍 벌어지는 고통에 아프다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단단하고 굵은 것이 살을 짓이기며 안을 파고들자, 선우는 숨을 다급히 들이켜며 더듬더듬 남자의 손을 찾았다. 제 어깨를 감싼 손과 상체를 끌어안은 팔을 두 팔로 붙들고 나서야 선우는 얕게나마 숨을 내쉬었다.

“흐, 아파…….”

태성은 커다란 손으로 제 팔에 매달려 어쩔 줄 모르는 이의 목을 감싸 쥐었다. 매끈한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채, 상체 곳곳을 살살 쓸어 주니 그제야 선우는 조금 느슨해지는 듯했다. 그에 태성은 예쁘게 호선을 그리는 귓바퀴를 덥석 물었다. 얇은 귓가를 살금살금 베어 물다가, 귀 전체를 한입에 넣고 혀를 굴리니 선우가 간지러움에 얼굴을 비벼 왔다. 그 틈을 타, 태성은 한 번 더 제 성기를 꾸욱 밀어 넣었다.

“흣. 아, 그만……!”

“하…….”

기둥 전체를 힘껏 조여 붙이는 쫄깃한 내벽에 태성은 좁은 골을 마구 쑤셔 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더… 더, 안 들어가요……!”

뒤로 손을 뻗어 저를 밀어내는 이가 아니었더라면 이미 제 욕구를 실행하고도 남았을 터였다. 태성은 선우의 팔목을 잡고 반쯤 들어간 성기를 천천히 빼냈다. 두꺼운 것을 뱉어 내는 와중에 벌게진 구멍이 연신 움찔거렸다.

태성은 입구에 귀두 끝을 남겨 둔 채, 침대 한편에 던져 둔 오일 병을 집어 들었다. 한 손만으로 뚜껑을 딴 그는 제 성기 위에 오일을 주르륵 쏟아부었다. 그리고 툭, 바닥으로 병을 내던지고는 제 몸을 덮고 있던 거추장스러운 가운도 획 벗어던졌다.

이내 번들거리는 것을 기둥 전체에 빠르게 펴 바른 그는 다시 허리를 밀어붙였다. 이미 한 번 길을 터 놓은 탓인지, 아니면 미끄러운 오일 덕인지 처음보다 삽입이 수월했다.

“아…! 너무, 깊……!”

느리게 진입한 성기는 어느새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내장을 짓눌렀다. 아랫배까지 꽉 들어찬 이물감에 선우는 그만 숨이 콱 막혔다. 벅찬 숨을 헉, 들이켜고는 제대로 뱉어 내지도 못하고 있는 선우의 등에 남자의 너른 가슴이 닿았다. 그리고 별안간 제 의지와 상관없이 고개가 옆으로 휙 돌아간다 싶더니, 입술 위로 부드러운 것이 내려앉았다.

“……흐으으.”

태성은 통통한 입술에 제 입술을 꾹 눌러 비볐다. 그러자 선우는 제 예상대로 만족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흐늘흐늘 몸을 늘어뜨렸다.

키스 못 하고 죽은 귀신이 붙었어. 왜 이렇게 입 맞추는 걸 좋아해. 태성은 희미하게 웃으며, 살가운 입안으로 제 혓바닥을 밀어 넣었다. 동시에 허리에 힘을 주어 성기를 뿌리 끝까지 박아 넣었다.

……!

장기가 다 밀려 올라갈 것 같은 느낌에 선우는 침음하며 몸을 굳혔다.

선우는 어깨를 옆으로 틀어 태성의 목을 세게 끌어안았다. 남자를 안고 몸을 맞대면 왠지 이 고통이 사라질 것만 같은 생각이 언뜻 들어서였다.

“아, 안아 주세요… 안고, 싶어요…….”

맞붙은 입술을 떼어 내며 선우가 말했다.

……이게 진짜. 태성은 제 목을 조여 오는 하얀 팔뚝에 기가 찼다.

“내 뒷조사하면서 취향까지 파악했어?”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마음에 드는 짓만 골라 할 수가 있을까.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서 한 번씩 자극적인 말을 뱉는 입이 아주 요사스럽기 짝이 없었다.

태성은 오른손을 아래로 뻗어, 선우의 오른쪽 다리를 휘감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선우의 몸을 앞으로 휙, 돌렸다.

“아흑!”

남자의 성기가 아래에 꽂힌 채로 몸이 빙글 도니 선우는 눈앞이 아찔했다. 안쪽 점막이 불에 덴 것처럼 후끈거렸다. 그런데 또 전립선이 비벼지는 쾌감은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짜릿했다.

고통을 동반한 쾌락.

상반된 두 감정이 꼭 남자에 대한 제 마음 같았다. 밀어내는 것이 마땅한 이 남자는 외면하기에는 너무도 찬란하고 황홀하니, 그와 함께하는 순간들은 언제나 고통을 수반했다.

선우가 열이 잔뜩 오른 눈을 하고도 눈살을 찌푸리자, 태성은 선우의 턱을 양손으로 감싸며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살짝 깨물었다. 사과즙 타령을 할 때부터 태성은 이 동그란 볼을 깨물어 보고 싶었다. 역시나 보드라우면서도 말랑거리는 감촉이 사람을 돌아 버리게 했다. 그대로 콱 씹어 버리면 좋겠는데, 그럼 또 소스라치게 놀랄 게 뻔했다. 아쉬운 대로 태성은 입술에 힘을 주어 입안에 문 볼살을 세게 한 번 빨아들이고 말았다.

그러고는 미끈한 목과 어깨에 입을 맞추며, 제 목을 끌어안은 팔 한쪽을 풀어냈다. 늘씬한 팔뚝을 손에 쥐고, 태성은 팔 안쪽 연한 살에도 입을 맞췄다. 그대로 쭉, 팔 선을 타고 입술을 미끄러트린 그는 마지막으로 손등에 입술을 묻었다.

그리고 부러 춥, 선우를 바라보며 입으로 물기 어린 소리를 냈다. 그러면 지금처럼 이렇게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저를 쳐다볼 것이 분명했으니까. 태성은 마주한 두 눈을 떼지 않은 채, 서서히 허리를 움직였다.

“아, 으응….”

밑을 치고 빠지는 생소한 자극에 선우가 몸을 꼬물거렸다. 그러다 곧 남자의 어깨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선우는 금세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몸소 확인했다. 따뜻한 몸을 맞대고 있으니, 확실히 통증이 덜한 것 같았다. 남자가 제 머리를 감싸 안아 줄 때는 더 그랬다.

심지어 남자의 성기가 안을 가득 채울 때면 아픈 와중에도 가슴 한구석이 뿌듯한 마음마저 드니, 아이러니한 감정에 선우는 남자의 어깨에 이마를 묻고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

“흐으…….”

선우의 두 다리를 양팔에 걸쳐 활짝 벌리고, 태성은 허리를 거듭 쳐올렸다. 아프다고 저를 몇 번이나 밀어낸 주제에, 어느새 완전히 긴장이 풀어진 선우는 꽤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 지금 기분 되게 좋아 보여. 알아?”

아, 그런가…….

그러고 보니 그 어마어마한 성기가 들락거리는 건데도 이제는 고통보다 쾌감이 더 컸다. 안으로 깊숙이 들어올 때는 충만함에 신음이 절로 나왔고, 쑥 빠져나갈 때는 아쉬움에 엉덩이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매번 뿌리 끝까지 박아 넣는 탓에 남자의 고환이 연방 엉덩이골을 찰박찰박 쳐 대는데, 우습게도 선우는 그게 싫지 않았다. 싫기는커녕, 오히려 살갗이 간질간질한 것이 더 세게 올려붙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섹스라는 게 원래 이렇게 기분 좋은 건가. 그럼 그동안 모르고 살았던 게 조금은 억울할 것 같은데…….

솔직한 심정으로 저는 약을 먹고 성욕을 주체하지 못했을 때보다 이쪽이 훨씬 더 좋은 것 같았다. 이렇게 서로 몸만 맞대고 있어도 좋은데, 사람들은 도대체 왜 마약을 하는 거지….

“아! 읏!”

갑자기 엄청난 세기로 퍽, 치고 빠지는 성기에 선우가 허벅지를 안으로 오므렸다.

“여유 있으시네. 딴생각도 하시고.”

그동안 선우의 상태를 봐 가며 느릿느릿 움직이던 태성이 슬슬 허릿짓에 속도를 가했다.

“아, 아파요…. 천, 천히…….”

“아프기만 한 건 아닌 것 같은데?”

태성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직접 만져 주지도 않은 성기가 이미 팽팽하게 선 채로 보기 좋게 올라붙어 있었다. 태성은 팔에 걸친 다리 한쪽을 제 허리에 감았다. 그리고 빈손으로 선우의 성기를 잡아 위아래로 빠르게 치댔다. 밑을 쳐올리는 것과 같은 속도였다.

“하윽!”

느닷없이 앞뒤로 휘몰아치는 자극에 선우가 얼굴을 급격히 찡그렸다.

“미안. 근데 이제, 내가 여유가 없어.”

“흐으, 응, 읏!”

남자는 성기를 거의 끝까지 빼냈다가 거세게 쳐올리기를 반복했다. 꼬리뼈가 연신 징징 울리고, 골반이 반으로 쩍 갈라질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두꺼운 선단이 내벽을 재차 긁어 대니 아랫배 저 밑이 자꾸만 근질거렸다. 그때마다 남자의 손안에 놓인 성기가 제멋대로 꺼떡거리기도 했다.

“아, 아아… 으으으응……!”

치밀어 오르는 사정감을 애써 억누르고 있었지만, 깊숙이 처넣고 안을 헤집어 놓을 듯 문대는 것에는 도무지 참아 낼 재간이 없었다. 선우는 저도 모르게 둔부에 힘을 꽉 주며 속 안에 든 것을 세게 쥐어짰다.

순간 남자가 미간을 좁히며 얼굴을 구겼다. 이상하게도 선우는 거기에 마음이 동했다.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선우는 곧장 남자의 목을 잡아채 입을 맞췄다.

***

대표님, 대표니임…….

선우는 기운이 하나 없는 목소리로 태성을 불렀다. 성이 난 가슴팍을 밀어내는 손에도 힘이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그만… 할래요…….”

“응. 이번이, 마지막이야.”

그 말은 이 직전에도 들었다. 남자는 마지막이라는 말의 뜻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이게 도대체 몇 번째지……. 남자가 세 번쯤 사정한 뒤로, 선우는 제가 사정한 횟수를 세는 것을 포기했다. 이 무지막지한 남자는 아무래도 오늘 제 몸에 있는 체액을 모두 빼낼 작정인 듯했다.

“흐으으읏…….”

오랫동안 벌려 둔 허벅지 안쪽이 제 의지를 무시하고 파들파들 떨렸다. 거칠게 드나드는 남자의 것에 배 속이 뜨거운 무언가로 지져 댄 것처럼 화끈거렸다. 아래는 진작부터 부어 처음에는 홧홧하더니, 이제는 얼얼하니 감각도 별로 없었다. 둔부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데, 어디 근육이라도 파열된 건 아닐까…….

문제는 하체에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목이며 어깨, 팔, 가슴. 입술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입을 맞추던 남자는 어느 순간부터 살갗을 빨거나 혹은 이로 긁어 댔다. 그러다 조금 전부터는 아예 이를 세워 자국이 남을 정도로 깨물기도 했다. 꼭 살이 연한 곳만 골라 물어 대는 통에 선우는 몸 이곳저곳이 다 아리고 쓰라렸다.

“아, 흑.”

태성의 품 안에 안긴 선우가 바람에 나부끼는 종이 인형마냥 힘없이 흔들렸다.

아무리 타고난 체격이 좋다 한들, 도대체 이런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때 문득, 선우의 머릿속에 생각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대표, 님…. 혹시, 흡, 약…, 약…….”

“약, 안 탔어.”

“아니… 저… 저, 말고… 흣…….”

지치지도 않고 발기하는 성기에 혹시 당신, 약을 먹은 건 아니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쉬지 않고 몰아붙이는 남자에 선우는 문장 하나를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나, 먹었, 냐고?”

태성이 허리를 연달아 쳐올리며 말했다.

“윽, 흐윽.”

“안 했어.”

내가 약을 왜 해.

에퀴스는 다른 마약류에 비하면 중독성이 적고 체내 머무는 시간이 짧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한 가지 아쉬운 부작용이 있었다.

일시적인 기억 장애.

일부 마약성 물질들이 그러하듯, 현재 에퀴스 또한 일정 용량 이상 투여하면 약효가 도는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부분적으로 기억하지 못하는 현상이 종종 나타나곤 했다.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긴 것처럼 전날 밤 기억이 드문드문 잘려 있다고, 에퀴스를 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내가 미쳤다고 약을 해. 약 먹고 했으면 네 안이 이렇게 좁고 따뜻하다는 것도 기억 못 할 거 아니야. 그게 아니더라도 약에 취해 해롱거리는 상태로 상대를 안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태성은 품 안에 안긴 이를 더 꽉 끌어안으며, 허릿짓에 박차를 가했다.

“아흑. 아, 아……!”

더는 내보낼 것도 없을 줄 알았는데, 불현듯 사정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선우는 몸을 부르르 떨며, 두 다리를 남자의 옆구리에 딱 붙였다. 발가락 끝까지 오그라든 새하얀 발이 태성의 양쪽 골반에 애처롭게 걸렸다.

허리를 강하게 옥죄는 압박감에 태성이 조용히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사람 꼴리게 하는 것도 가지가지네, 진짜.

“이런 건, 큭, 타고, 나는 거야?”

“흐으…….”

선우는 다부진 등을 감싸 안으며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깊이 파묻었다.

창 너머 어두컴컴하던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변한 것이, 선우는 제 착각이기를 바랐다.

***

부스스 몸을 일으켜 앉은 선우가 멍한 얼굴로 눈을 비볐다. 창밖 너머 해안가를 바라보는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일어났어요?”

문득 들리는 다정한 목소리에 선우가 고개를 돌렸다. 침실에 딸린 욕실에서 목에 수건을 두른 남자가 나오고 있었다. 막 씻고 나온 듯, 머리가 촉촉하게 젖은 남자는 금세 제게 다가와 침대 위에 비스듬히 걸터앉았다.

“지금… 몇, 시예요……?”

꽉 잠긴 목구멍을 비집고,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5시 넘었어요. 피곤했나 영 못 일어나더라고.”

“오후, 5시요?”

선우가 깜짝 놀랐다.

새벽녘, 남자의 등 뒤로 언뜻 해가 뜨는 걸 본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러고 곧바로 잠이 든 모양인데, 남자의 말대로라면 저는 그 뒤로 한 번도 깨지 않고 내리 12시간을 잔 셈이었다.

선우가 황당함에 창밖을 쳐다봤다. 아직 날이 저물지는 않았지만, 둥근 해가 이미 중천에서 한참을 기울어져 있었다.

“일어나서 밥 먹어요. 배고프지 않아요?”

“아, 괜…찮아요….”

밥이라니……. 방금 눈을 뜬 선우는 입맛이 전혀 없었다. 입맛만 없을까. 밥을 먹을 정신도, 숟가락을 들 힘도 없었다.

선우는 댕그랗게 뜬 눈을 끔뻑, 끔뻑거리다 이내 목을 좌우로 길게 늘려 보았다. 목덜미와 어깨에서 느껴지는 뻐근함에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묵직한 팔 한쪽을 겨우 들어 목덜미를 조물조물 주무르고 있자니,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고단한 게 도대체 얼마 만이지.

타고난 체력이 원체 좋은 편인 선우는 그 힘들다는 경찰대 체력 검사, 별별 훈련을 하고도 다음날 몸이 무거웠던 적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한때는 동기들 사이에서 체력왕이라고 불리던 적도 있었다. 그런 제가 남자랑 그 몇 시간 뒹굴었다고 이렇게나 몸이 고되다니. 경찰대 체력왕의 꼴이 참 우스웠다.

그나저나 밥이 문제가 아니라 일단 씻기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오일을 무지막지하게 퍼부은 데다, 정액도 줄기차게 싸 댔으니 지금 제 상태가 말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어째… 끈적하고 찝찝해야 할 몸이 생각보다 보송했다. 땀에 절어 축축해야 정상인 시트도 어쩐지 보들보들하니 감촉이 산뜻하기만 했다.

……설마…?

선우가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태성을 쳐다봤다. 그는 큼지막한 손으로 선우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먹을 수 있을 때 먹어 둬요. 이따 또 힘쓰려면 미리 에너지 보충해 놔야지.”

“……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선우의 어깨 끝에 쪽, 입을 맞췄다.

“아, 저, 저기…….”

선우가 흠칫 놀라며, 태성을 슬쩍 밀어냈다. 선우가 밀어내는 대로 몸을 무르는 태성의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미소를 머금은 얼굴에 어쩐지 등골이 싸해, 선우는 힐끔 남자의 입술이 닿았던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세에…상에…….

그제야 제 몸 상태를 확인한 선우는 몹시 기겁했다. 어깨와 팔, 가슴팍, 양 옆구리, 몸 구석구석이 울긋불긋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제 콤플렉스 중의 하나인 허여멀건 피부가 본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얼룩덜룩해져 있었다. 빨간 도장을 쾅쾅 찍어 놓은 듯, 불그스름한 울혈로 뒤덮인 몸에는 심지어 이빨 자국도 남아 있었다.

진짜… 깨물었어……?

팔오금에 콱 박힌 선명한 잇자국에 선우가 실색했다. 이 정도면 살이 뜯기지 않은 게 용했다. 혹시 남자는 성적 취향마저 사회에서 용인하지 않는 범주에 있는 건 아닐까. 예를 들면 식인…이라든가……?

일순 목덜미에 소름이 쭉 끼쳤다.

“대표님, 저… 지금, 도망가도 될까요…….”

선우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물었다.

“이제 가고 싶어도 못 가는데. 한 경위 옷 없어요.”

“네에?”

“좀 전에 세탁 맡겼거든. 저거 입고 서울까지 갈 수 있으면 가든가.”

태성이 턱 끝으로 바닥 한구석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두 사람분의 욕실 가운이 아무렇게나 뒤엉킨 채 한 덩이로 뭉쳐져 있었다.

허어……. 나무꾼에게 날개옷을 뺏긴 선녀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기가 막힌 선우의 입에서 조그맣게 탄식이 샜다.

“그러게, 어제가 마지막 기회라고 했잖아.”

태성은 얄밉게 웃으며 침대를 벗어났다.

옷이 없다는 것은 남자의 얄궂은 장난이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씻고 나오니, 욕실 앞에는 하얀 리넨 셔츠와 편안한 면바지가 걸려 있었다. 남자가 마련해 두었을 것이 분명한 옷을 입고, 선우는 한참 동안 욕실을 벗어나지 못했다. 남자가 입고 있던 것과 스타일이 너무 유사한 이 옷을 입고 도저히 남자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사람을 기다리게 할 수 없어 시뻘게진 얼굴을 하고 밖으로 나왔을 때, 남자는 선우를 야외 테라스로 안내했다. 시야가 확 트인 테라스에는 오로지 두 사람만을 위한 경치와 식사가 마련되어 있었다.

남자의 손에 이끌려 홀린 듯 탁자 앞에 앉자, 하늘에서는 곧 역동적인 노을 쇼가 시작되었다.

하얗게 뜬 구름 사이를 비집고 노란빛을 내뿜던 태양은 야금야금 하늘을 분홍빛으로 물들였다. 하늘의 파랑과 뒤섞인 햇빛은 잠시 오묘한 자줏빛을 띠는가 싶더니, 이내 하늘 전체를 새빨갛게 뒤덮었다.

수평선을 향해 달려가는 태양을 바라보며, 두 사람은 말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남자와 함께하는 저녁 시간은 아주 느리고 고요했으나,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도리어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야속할 정도였다.

마침내 붉은 기운을 몰고 바다 너머로 태양이 꿀떡 넘어가자, 해운대에는 다시금 밤이 찾아왔다. 하늘에는 하얀 반달과 검푸른 구름만이 남아 있었다. 더는 알록달록한 하늘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다고 느껴질 때쯤,

펑! 갑자기 불꽃이 터졌다.

그리고 선우는 남자가 말한 ‘야경이 제일 멋진 곳’이라는 의미를 알게 되었다. 애초에 불꽃 쇼를 주최한 것이 문호리조트였는지, 어제와 같은 불꽃놀이가 테라스 정면에서 펼쳐졌다.

다시없을 광경을 조금 더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에, 선우는 식사를 대충 마치고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곧바로 테라스 난간에 기대섰다. 큼지막한 불꽃들이 코앞에서 터지니, 이 불꽃놀이가 꼭 저만을 위해 준비된 것만 같았다.

펑, 펑. 연신 터지는 아름다운 불꽃을 보다가, 선우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어느새 남자가 제 옆에 서 있었다.

여기서 야경이 제일 멋진 곳.

그래, 어쩌면 그 표현이 정확할지도 몰랐다.

이 넓은 바닷가에서 남자가 서 있는 곳은 이곳뿐이었으니.

선우는 자꾸만 저를 벅차게 하는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다, 이번에는 제가 먼저 입을 맞췄다.

***

눈부신 아침 햇살에 눈이 저절로 뜨였다. 제 옆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아채고, 태성은 곧바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이내 침대 발치에 앉아 있는 이를 발견한 태성은 나지막이 감탄성을 내뱉었다.

하얀 이불을 몸에 두른 채, 선우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쏟아지는 햇살을 맨몸으로 받아내는 이는 얼핏 신화 속에 등장하는 미소년을 연상케 했다. 햇빛을 반사하는 새하얀 나신은 마치 스스로 빛을 내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했다.

아, 정말. 나도 중증이네.

태성은 팔불출 같은 저 자신을 속으로 나무랐다.

“일찍 일어났네요.”

“해 뜨는 거 보고 싶어서요.”

“봤어요?”

선우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어젯밤 남자와 뒹구는 와중에 해가 뜨는 것을 보지 못한 게 내심 아쉬웠다. 마침 새벽녘에 잠시 눈을 뜬 선우는 더 잠을 청하지 않고 그대로 일출을 맞이했다.

늘 어두운 밤하늘을 보고 위안을 받았던 선우였지만, 떠오르는 태양은 또 다른 감상을 주었다. 달빛이 아픈 마음을 잔잔하게 어루만져 주었다면, 쨍한 태양 빛은 가슴을 설레고 벅차게 했다. 온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햇빛은 너무 눈이 부셔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지만, 그 빛깔이 너무도 영롱하여 피할 수도 없었다.

“너무, 밝아서… 눈이 부신데도, 가슴이 벅차서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선우는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태성은 그런 선우를 조용히 응시하다 한 박자 늦게 말을 건넸다.

“너도 그래.”

태성의 말에 선우가 고개를 휙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늘 그렇듯, 남자는 부끄러운 말을 내뱉고도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오늘도 얼굴을 붉히는 건 제 몫이었다.

“이제 뭐 할 거예요?”

“아… 그만 올라가야죠.”

선우의 대답에 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좀 쉬다가 밥 먹고 천천히 가요. 나는 여기 볼일이 남아서 서울은 내일 올라가려고 해요. 같이 있다 가면 좋겠지만, 그래도 휴가 내내 붙들고 있는 건 좀 너무하지?”

“…….”

선우는 아침 햇살처럼 훤히 빛나는 남자의 얼굴을 힘겹게 외면했다.

***

지잉, 지잉.

침대 옆 협탁에 놓인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태성은 요란한 진동 소리를 그냥 무시하려다, 액정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네.”

전화를 받은 태성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응답했다.

- ……여보세요?

“네. 말씀하세요.”

- ……누구, 시죠?

“한선우 씨 핸드폰 맞습니다. 용건 얘기하시면 전해 드릴게요.”

태성의 말에 상대방은 잠시 응답이 없었다. 예기치 못한 수신인에 당황한 것이 전화 너머로도 느껴졌다.

- ……문, 태성… 대표님?

상대는 용케도 태성의 목소리를 바로 알아챘다.

“네, 김시헌 씨. 오래간만이네요.”

- 대표님께서 선우 전화를 왜…….

“본인이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니까요.”

놀란 나머지 말을 다 잇지 못하는 시헌과 다르게, 태성은 태연자약했다.

- ……선우 좀… 바꿔 주시겠습니까?

“같은 말 두 번 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 ……선우 바꿔 주세요.

처음은 공손했지만, 두 번째 요청하는 시헌의 말투에는 날이 서 있었다.

“지금 자고 있어요.”

- ……예?

“피곤했나. 너무 곤히 자서 깨우고 싶지 않은데.”

- ……!

태성의 말에 시헌의 말문이 턱, 막혔다.

“전할 말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면, 이만 전화 끊겠습니다.”

태성은 그대로 전화를 끊으려다 말고, 다시 선우의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아, 참. 좋은 시간 방해할 만큼, 김시헌 씨 눈치 없는 스타일은 아니죠?”

- …….

“그럼 다음에 보죠.”

말을 잃은 상대를 뒤로하고 태성은 통화를 종료했다.

달칵.

때마침 욕실 문이 열렸다. 방금 샤워를 마치고 나온 선우는 멀리서 제 핸드폰을 들고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곧바로 그에게 다가왔다.

“어… 저, 전화 왔었나요?”

태성은 고개를 저으며 선우의 핸드폰을 도로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

“잘못 걸린 전화예요.”

그러고는 몸을 일으켜 선우의 앞에 섰다. 그는 선우가 든 수건을 가로채 선우의 머리 위에 얹었다.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살살 비비며 말려 주는 손길이 한없이 부드러웠다. 상냥한 손놀림에 선우는 저도 모르게 살포시 눈을 감으며 남자에게 머리를 내맡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