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진실로 한 걸음 가까이 (1) (7/19)

5. 진실로 한 걸음 가까이 (1)

2021년 8월 2일 11시경

부산광역시 연제구 부산경찰청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박우진의 집무실에 오랜만에 손님이 찾아왔다.

“안녕하십니까, 청장님.”

“어어, 어서 와.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어.”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박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밝은 얼굴로 손님을 맞이했다.

“우리 문 실장 얼굴 보는 게 얼마 만이지?”

박우진은 저를 향해 다가오는 이를 마중하며 악수를 건넸다. 그리고 반가운 마음에 상대의 손을 두 손으로 맞잡고 크게 흔들었다.

“아, 내 정신 좀 봐. 대표 이사 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실장이라네.”

“괜찮습니다. 편하신 대로 부르세요.”

“그래, 앉지.”

박우진은 태성을 소파 자리로 안내하고는 곧 다기가 담긴 목재 다반을 내어 왔다. 상석에 앉은 그는 수묵화가 그려진 자기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붓고, 찻잔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리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 문 대표가 큰 도움 준 것 같던데?”

“아닙니다. 별일도 아닌데요, 뭐.”

찻잔을 달군 물을 내어 버리고, 박우진은 이어 다관 안에 녹찻잎 세 스푼을 차곡차곡 담아 넣었다. 그 위로 뜨거운 물을 붓자, 싱그러운 차향이 금세 주위로 퍼졌다.

미리 데워 둔 두 개의 찻잔에 번갈아 가며 차를 따른 그는 그중 하나를 받침에 받쳐 태성의 앞으로 밀어 넣었다. 찻잔에 담긴 연한 녹빛 물에서 희미하게 김이 올랐다.

“들어. 요즘 내 취미 생활이야. 나는 제주 녹차가 그렇게 좋더라고. 떫은맛도 적당하고.”

“잘 마시겠습니다.”

박우진이 먼저 찻잔을 들었다. 녹차 한 모금을 마신 그가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사람이 부산까진 웬일이야?”

“청장님께서 하도 얼굴을 안 보여 주시니까 제가 뵈러 왔죠.”

“능청스러운 건 여전하네.”

그러면서도 박우진은 싫지 않은 듯, 엷은 미소를 지었다.

“일 때문에 온 거야?”

“네. 연애 사업하러요.”

다시 찻잔을 들던 박우진이 태성의 말에 멈칫,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나 이내 허허하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화끈해서 좋다고, 그는 태성을 치켜세웠다.

“그래. 문 대표도 이제 자리 잡을 나이가 됐지. 문 대표를 부산까지 끌고 온 사람이 도대체 누군가 궁금하네. 나중에 기회 되면 나도 한번 소개해 줘.”

“네. 그럴게요.”

태성은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따뜻한 녹차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어린순의 풋내가 순식간에 입안을 가득 메웠다. 향긋한 액체를 서서히 목구멍으로 넘기자, 입안에 상쾌하고 개운한 끝맛이 남았다. 혀끝을 감싸는 담백함이 꼭 제가 아는 누군가를 생각나게 했다.

고작 녹차 한 잔에도 그를 떠올리다니, 태성은 저 자신이 우스워 조용히 코웃음을 쳤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깃든 정적을 깨고, 박우진이 먼저 말을 건넸다.

“김 청장께서 입당 준비하신다는 얘기가 들리던데.”

“네. 임기 끝나면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하실 생각인가 봅니다.”

박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야망 있는 사람이니까. 시장, 염두에 두고 계신 거지?”

“아무래도요.” 태성도 따라 고갯짓을 했다.

“어때? 가능성이 좀 있어 보여?”

“……글쎄요. 아직은 대중들한테 보이는 이미지가 나쁘지는 않은데, 선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서요.”

태성은 손에 쥔 잔을 엄지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선거에서 얼리 스타터가 이기는 경우는 흔치 않으니까요.”

잠시 후 잔을 내려놓는 태성은 입가에 연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눈빛에는 서늘한 기운이 서려 있어, 박우진은 김경택 청장의 앞날이 평탄하지만은 않으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소파 등받이에 슬쩍 등을 기댄 태성이 청장실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리고 일상을 얘기하듯, 담담한 말투로 넌지시 물었다.

“청장님께서도 슬슬 서울 올라오셔야죠.”

“서울은 무슨. 난 지금도 충분히 만족합니다.”

박우진은 제가 앉은 소파의 팔걸이를 재차 쓸어 만졌다. 그러다 저를 반히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크게 내저었다.

“문 대표. 내가 행여나 해서 하는 말인데, 나 정치판에 끼어 들일 생각하지 마. 난 조용히 살고 싶은 사람이야.”

“청장님 아니면 그 자리 앉을 만한 사람도 없다는 거, 아시잖아요.”

태성의 말에 박우진의 턱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여러 차례 태성의 시선을 피하던 박우진은 결국 그와 눈을 마주했다. 그러자 태성은 박우진의 눈길에 아주 잠시만 응하고는 도리어 제가 시선을 옮겼다. 박우진을 살짝 비껴간 눈동자는 청장실 벽 한구석을 향했다.

“경찰 내부도 정화가 좀 필요해 보이기도 하고요. 청장님께서 제일 잘 알고 계시겠지만요.”

그가 바라보는 곳에는 태극기, 그리고 양옆으로 경찰기와 지휘관기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서대문구 입성하실 때까지, 최대한 힘 실어 드리겠습니다.”

“…….”

이내 세 개의 깃발에서 시선을 거둔 태성은 다시 박우진을 응시했다.

“그러려면 아무래도 당분간은 이목을 좀 끌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 부산이 워낙 조용했어야죠.”

으음……. 슬그머니 웃는 낯으로 부산청의 소란을 예고하는 이에 박우진이 낮게 침음했다.

“그런데 사실, 오늘 뵙자고 한 건 이것 때문은 아닙니다.”

갑자기 자세를 고쳐 잡으며 진지한 태도로 말하는 태성에 박우진이 의아해했다. 그는 곧 용건을 말해 보라는 듯, 태성을 향해 턱을 한 번 치켜올렸다.

“청장님. 한재민 경감이라고, 아시죠?”

10년 전, 마포 청사에서 투신한.

생각지도 못한 이름을 듣고 박우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사망 당시, 청장님 소속 부하였더군요.”

“……음, 그랬지.”

박우진은 조금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떠난 지가 벌써 10년이나 되었나…….

한재민은 제가 서울경찰청의 수사과장으로 있을 당시, 마약수사대에서 복무하던 부하 경관이었다. 사건‧사고 한 번 없이 늘 착실하고 듬직했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청사에서 투신해 세상을 떠났다. 정확히는… 투신을 당했다고 표현하는 쪽이 맞는, 비운의 경찰이었다.

“그런데 문 대표가 한재민을 어떻게 알아?”

저조차도 10년 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연관이 전혀 없어 보이는 태성이 그를 언급하니, 박우진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했다. 그러나 태성은 입꼬리만 살짝 올렸다 내릴 뿐,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았다.

“당시에 한재민 경감과 양승준 의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청장님은 알고 계시죠?”

대신 나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자신의 용무를 밝혔다.

그 순간 박우진의 얼굴이 눈에 띄게 경직되었다. 특정 인물까지 거론하는 걸 보니 허투루 꺼낸 이야기가 아닌 듯했다. 그런데 갑자기 옛날 일을 묻는 이유가 뭔지, 그 일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가늠할 수가 없으니, 박우진은 제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무슨 일인데?”

“일은요. 그냥, 사실을 여쭤보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한재민 경감이 자살할 만한 위인은 아닌 것 같아서요.”

“…….”

입을 꾹 다문 박우진이 감정의 동요를 숨기지 못하고 쉬익, 긴 콧바람을 내쉬었다. 돌연 찾아온 긴장감에 그는 손을 들어 입가를 매만졌다. 예리한 눈초리로 저를 살피는 태성을 보니, 대충 둘러댄다고 끝날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시간 되면 식사라도 하지.”

박우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나갈 채비를 했다.

***

2021년 8월 3일 08:30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약범죄수사대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선우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무실에 들어섰다. 먼저 출근한 팀원들이 웬일인지 사무실 한가운데에 모여 있었다. 제 뒤를 이어 오늘부터 휴가를 간 동길을 제외하고 김지항, 박민호, 정기영이 모두 함께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팀원들에게 다가간 선우가 밝은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어! 마침 왔네.”

“휴가 잘 다녀왔어?”

“네, 덕분에 잘 쉬다 왔어요. 근데 다들 왜 여기 모여 계세요?”

“그렇지 않아도 너 오길 목 빠지게 기다렸다.”

“저를요?”

박민호가 느닷없이 선우를 잡아끌어 세 사람의 중심에 세웠다.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동자 여섯 개가 동시에 선우를 향했다.

“선우야. 문태성이랑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네…? 뭐, 뭐가요?”

정기영의 물음에 선우가 화들짝 놀랐다. 말을 더듬는 것과 동시에 새하얗던 귓바퀴가 진한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뭘 그렇게 놀라? 그날 말이야. 제보자랍시고 생뚱맞게 그놈이 나타나서 내가 얼마나 놀랐다고.”

“아, 아아… 그거요…….”

괜히 제 발 저려 당황한 것이 부끄러워진 선우는 금세 두 뺨마저 발그스름하게 붉혔다.

“그냥… 전화가 왔어요.”

“그냥, 갑자기? 너한테 전화가 왔다고?”

“네에…….”

“네 번호를 어떻게 알고?”

“어, 어…. 그러게요. 어, 어떻게 알았지…?”

김지항이 연달아 추궁하자, 선우는 삐질삐질 식은땀이 나는 듯했다.

“선우 너, 뭐 그놈한테 협박당하고 있고 그런 건 아니지?”

그런데 갑자기 박민호가 뚱딴지같은 소리를 해 왔다.

“네에?” 황당한 질문에 선우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니, 동길이 말이, 그 자식이 너를 아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고 그러잖아. 얼굴이 뚫리는 줄 알았다고. 그래서 나는 혹시나, 그놈이 사이렌이나 블루문 건으로 너한테 앙심을 품고 있나 싶어서. 경찰 사생활 털어서 보복하려는 놈들이 꼭 있으니까.”

“아, 하하, 그런 거 아니에요.”

선우가 옅게 웃으며 고개와 손을 동시에 내저었다.

“야, 그래. 만일 그런 거면 혼자 끙끙거리지 말고 바로 얘기해라. 내가 그 즉시 그놈 고발해 버리려니까.”

그러고는 잠시 생각에 잠긴 박민호가 곧 알 만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역시 그건가 봐요. 그쵸?”

박민호가 김지항과 정기영을 쳐다보자, 두 사람도 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거…라뇨?”

“그 거래가 원래 문태성 거였다고.”

“……예?”

정기영이 툭 던지듯 뱉은 말에 선우가 벙찐 표정을 했다.

“오사카 주길파가 뽕 밀수 규모가 어마어마하거든. 내가 알기론 일본 전체에서 두세 번째는 된다고. 그 정도 규모면 문태성이 거래를 안 하고 있을 리가 없고. 딱 보니까 해태파 놈들이 지 거래 가로채게 생겼으니까 우리한테 신고한 거 아니겠냐, 이 말이지.”

선우를 위해 정기영이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이는 사이, 박민호가 근처에 있던 제 책상에서 계산기를 가져왔다. 그리고 선우의 눈앞에다 대고 계산기를 두드리며 설명을 이어 갔다.

“봐라. 요즘 밀수 시세가 대충 그람 당 십만 원인데, 400㎏이면 그게 다 얼마냐. 4 곱하고 0이 다섯 개 붙으면… 일, 십, 백, 천, 만…… 사백억이다, 그치?”

사백억……? 선우는 터무니없이 큰 숫자를 막힌 숨을 토해 내듯 읽어 냈다.

“그래, 사백억. 사백억짜리 거래 뺏기면 눈 돌아가지, 안 돌아가고 배기나 그거. 어쩐지 그놈이 제 발로 부산까지 쫓아왔다 했다, 내가.”

박민호의 말을 듣고 조금 멍해진 선우가 큰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아…, 그래서였구나.

그렇지 않아도 선우 역시 남자가 뜬금없이 제게 왜 그런 제보를 했는지가 의문이었다. 그러다 그와 보낸 휴가가 너무 달콤했던 나머지, 혹시 저를 위해 일부러 정보를 제공해 준 건 아니었을까, 하는 착각을 잠시 하기도 했었는데…….

선우는 순간 그런 생각을 한 저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그 사람이 제 일을 왜 도와주겠는가, 제가 뭐라고. 차라리 지금처럼 본인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다고 보는 쪽이 훨씬 더 타당했다.

그럼, 남자는 해태파 거래를 막으려고 경찰인 저를 이용한 거였나…….

선우는 어쩐지 실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게 당연한 건데, 왜 서운하지……?

살짝 시무룩해진 선우의 어깨를 박민호가 툭 쳤다.

“야, 그래도 우리는 덕분에 완전 땡잡았지. 실적 빵빵하게 챙기고. 고래 싸움에 새우 복 터졌다. 우리 이러다 내년에 전원 특진하는 거 아니냐?”

으흐흐, 생각만 해도 좋다. 어깨를 들썩이는 박민호의 뒤로 최대영이 나타났다.

“다들 여기서 뭐 해? 아침부터.”

“좋은 아침입니다.”

김지항과 정기영이 최대영을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아, 팀장님 오셨어요. 문태성 얘기하고 있었어요.”

“어, 그래. 맞다.”

박민호의 말에 최대영의 시선이 선우를 향했다. 눈동자만 위아래로 움직여 선우를 두어 번 훑은 그는 곧 손짓으로 선우를 불렀다.

“한 경위, 잠깐 나 좀 보지.”

***

긴 책상 하나가 정중앙에 놓인, 그리 크지 않은 회의실에 최대영과 선우가 마주 보고 앉았다. 잠시간 아무 말도 없이 선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최대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해태파 밀수 건 제보를 한 게 문태성이었다고?”

“……네.”

흐음. 선우의 단답에 최대영이 허리를 곧추세우며 팔짱을 꼈다. 한쪽 눈썹을 비뚜름하게 치켜올린 그는 선우를 의심의 눈초리로 살폈다.

“한 경위. 문태성이랑 개인적으로 연락해?”

날카롭게 묻는 말에 선우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선우는 잠시 대답을 주저했으나, 이내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요.”

최대영의 눈길을 피해 선우는 책상 위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얇은 눈꺼풀에 빼곡히 매달린 속눈썹이 그의 시선을 따라 사선으로 내려앉았다.

“그럼 해.”

“…네?”

놀란 선우가 눈을 번쩍 뜨고 최대영을 바라보았다.

“개인적으로 연락하고 지내라고.”

상사의 황당한 지시에 커다란 눈이 빠르게 깜빡거렸다. 축 처져 있던 속눈썹도 그를 따라 아래위로 마구 나풀거렸다. 그러나 선우의 반응을 이미 예상한 최대영은 별일 아니라는 듯 예사롭게 말을 이었다.

“그쪽에서 먼저 연락 온 거 보면 그래도 한 경위를 좋게 보고 있는 것 같으니까 연락해 봐. 청장 라인까지 닿아 있는 놈이니 친분 쌓아 둬서 나쁠 건 없지.”

“…친분…이요?”

“응. 뭐 그때 그 자식이 말한 것처럼 가서 골프를 치든, 같이 술을 마시든. 아무튼 자리 만들어서 얼굴 좀 자주 익혀 둬.”

“……왜… 그래야 하죠?”

선우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을 하고 물었다. 약아빠진 구석이라곤 눈 씻고 찾으려도 찾을 수가 없는 부하를 앞에 두고 최대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왜냐니? 언젠가는 잡아야 할 거 아니야. 가까이 지내면서 그놈 뒤도 좀 캐고, 그러면서 건덕지 잡는 거지. 뭐, 정 안 되면 이번처럼 정보만 받아 와도 쏠쏠할 것 같고. 그 자식 입에서 나오는 정보들이 어디 보통 정보겠냐고.”

“아…….”

선우는 일순 말을 잃었다. 최대영의 말에 틀린 것이 하나 없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언젠가는 잡아야 한다는 그 말이, 선우로 하여금 말문을 탁 막히게 했다. 갑자기 둔탁한 것으로 머리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정신이 얼떨떨해졌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그냥 고급 망원 하나 만들어 둔다고 생각해. 잘 풀리면 그야말로 대박인 거고, 안 풀려도 살면서 그런 인맥 하나쯤 만들어 두는 거 나쁘지 않잖아?”

망원, 인맥…….

그를 지칭하는 단어들이 무척이나 낯설었다. 남자를 그런 단어들로 한정하자니, 어쩐지 속이 조금 쓰린 듯했다. 마음이 착잡해진 선우는 마른 입술을 슬그머니 입안으로 감춰 물었다.

“한 경위, 이런 기회도 아무나 오는 거 아니야. 마침 그놈이 먼저 연락 온 것도 엄청난 횡재라고.”

“……그, 런가요…….”

“너무 바쁘면 자질구레한 사건들 다 쳐 줄게. 동길이 휴가에서 돌아오는 대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건 다 넘기고, 넌 틈틈이 시간 내서 문태성한테 붙어.”

“자질구레한 사건들이요…?”

“응. 영양가 없는 잡범 사건들 다 끌어안고 있어 봐야 뭐 해.”

최대영의 말에 고운 눈썹이 모양을 구겼다. 선우는 오늘따라 최대영의 말들이 영 거북하게 들렸다. 사건이 크고 작을 순 있어도 중요하지 않은 사건들이 어디 있겠는가. 다른 사건들은 한순간에 쳐 내도 될 만큼 남자와 친분을 쌓는 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 그리고 그를 이용해서 당신과 나는 화려한 실적을 쌓고?

원래도 실적 욕심이 있는 분이긴 해도, 이렇게 대놓고 실과 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제가 믿고 따르던 팀장이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선우는 복잡한 심경에 나직이 한숨을 내뱉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다른 사건들은… 동길이한테 넘기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제가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래. 그건 상황 봐서 알아서 해.”

“네. 더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아냐. 이제 그만 돌아가 봐.”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선우가 최대영을 향해 고개를 한 번 꾸벅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 회의실 문으로 다가가 문고리에 막 손을 올리려던 찰나였다.

“아, 참. 한 경위.”

최대영이 선우를 불러 세웠다.

“문태성이랑 붙어 다니면서 아도니스인지 뭔지 하는 그것도 자세히 알아봐 봐. 도대체 그게 뭔지, 이번 기회에 정체 좀 알자.”

제자리에서 고개만 돌린 채, 최대영의 말을 듣던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네.’, 딱 한마디만 하면 되는 걸, 차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결국 선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회의실을 벗어났다.

터덜터덜, 청사 복도를 걷는 선우의 눈이 멍하니 초점이 없었다. 최대영과 면담을 마치고 혼자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지잉, 지잉. 문득 바지 주머니를 울리는 진동에 선우는 가던 길을 멈춰 섰다.

액정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하고, 선우의 표정이 미세하게 밝아졌다. 서둘러 전화를 받은 선우가 살며시 웃으며 말을 건넸다.

“어, 시헌아. 지금은 어디야?”

- 나 대만. 휴가 잘 보냈어?

“응, 그럼.”

- 같이 보냈으면 좋았을 텐데. 하필 해외 스케줄이 몰려 잡혀 가지고.

시헌은 7월부터 새로운 영화 촬영을 들어감과 동시에 아시아 팬 미팅 투어를 돌고 있었다. 영화 배경마저 중국과 홍콩을 오가는 탓에 최근에 그는 한국에 거의 없었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요즘은 한국에 있는 시간보다 비행기나 공항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라고.

그러니 얼굴 보는 건 고사하고 목소리도 듣기 힘든 시헌이었다. 그런 친구에게서 전화가 오니, 반가움에 선우는 목소리 톤이 저절로 올라갔다.

“다음에 너 시간 될 때 휴가 또 쓸게. 대만은 좋아?”

- 좋기는. 사람 사는 데 다 똑같지.

“그래도 해외 팬들 보니까 기분이 또 색다르겠다. 그치?”

- 응, 그렇지. 근데, 선우야.

“응?”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어쩐지 낮게 깔린 것이 선우는 좀 의아했다.

- 휴가 때… 뭐 했어?

“휴가? 부산 다녀왔어.”

- 부산? 뜬금없이 부산은 왜?

“아, 사건이 있어서. 휴가 첫날 일 조금하고, 이왕 거기까지 간 김에 바다도 보고… 그러고 왔어.”

전화가 길어질 것 같다는 생각에 선우는 몸을 틀어 창가에 기대섰다. 두 팔을 창틀 위에 올려놓고 하늘을 바라보니 색이 연한 하늘에서 쨍한 여름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눈부시게 새하얀 태양 빛에 선우는 언뜻 해운대에서 맞이한 아침이 떠올랐다.

- 휴가 때도 일을 한 거야 그럼?

“으응. 하루만이었어.”

- 그래. 근데, 저… 선우야…….

“응?”

시헌은 평소답지 않게 계속 말에 뜸을 들였다.

- 그, 문태성 대표랑은…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시헌의 물음에 선우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 떴다. 오늘따라 말을 걸어오는 사람마다 전부 남자에 대해 물으니, 선우는 이게 당최 무슨 일인가 싶었다.

- 그날… 아니. 너, 그 사람이랑은… 도대체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야?

“……지난번에 말했잖아. 일하다 알게 됐다고….”

- 그게 다야?

“……그럼?”

선우의 되물음에 시헌은 잠시 말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수화기 너머의 그는 꽤 한참을 머뭇거렸다.

- 일적으로 엮인 거 말고, 다른 건 없는 거… 확실해?

그러다 물어 오는 질문에 선우는 멈칫, 몸이 굳는 느낌이었다.

“……다른 거, 뭘… 얘기하는 거야?”

- ……사적으로. 그 사람이랑 무슨 관계냐고.

주위 사람들이 남자와의 관계를 묻는 것이 오늘만 벌써 세 번째였다. 그런데 선우는 이번 질문에는 어쩐지 쉽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관계는… 무슨…….”

머릿속으로 남자와의 관계를 정의해 보자니, 돌연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하니 저려 왔다.

“내가 그 사람이랑 무슨, 관계가 있겠어…….”

선우는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께를 문지르며 제가 내린 정의를 말했다. 분명 정답을 말한 것 같은데 왜 갑자기 심장 부근이 쥐어짜듯 뻐근해져 오는 건지. 고개를 푹 숙인 선우는 슬금슬금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제 옷자락을 꽉 붙들었다.

- 그래. 네가 그렇다고 하면 믿을게.

“……믿고 말고 할 게 뭐 있어. 그게 사실인데…. 근데… 갑자기 그 사람은 왜 물어보는 거야?”

- ……아니야, 아무것도. 나 아마 다음 주쯤이면 시간 날 것 같아. 한국 들어가서 보자.

“……응.”

- 또 연락할게.

“응…. 건강 잘 챙기고, 몸 조심히 지내다 와.”

시헌과의 통화를 마치고, 선우는 어느새 화면이 까맣게 변한 핸드폰을 망연히 내려다보았다.

그 사람과 무슨 관계냐고.

남자와 무슨 관계인지는 누구보다도 제가 가장 알고 싶었다. 어쩌면 마음 한편에서는 그와 무슨 관계이기를 조금이나마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오늘 아침, 사람들의 입을 통해, 그리고 제 입을 통해 선우는 저의 그런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달았다.

남자와 저는 어떤 관계도 아니었고, 또 아니어야 했다.

눈꼬리가 축 처진 제 모습을 비추던 액정 화면에 불현듯 짧은 진동과 함께 번쩍 빛이 들어왔다.

[문태성 : 오늘 저녁 시간 괜찮아요?](@메시지 포맷 가능할 경우 변경)

“…….”

그리고 도착한 메시지 한 통에 기어이 심장이 덜커덕 내려앉았다.

도무지 심란한 마음에 선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화사하게 빛나는 아침 햇살이 너무 눈이 부신 나머지 이내 두 눈을 꾹 내리감아야 했다.

***

“그날은 잘 올라왔어요?”

“네.”

“같이 올라왔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부산에서 해야 할 일이 좀 있었어요.”

선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다시 만난 곳은 ‘Hotel the Moon, 한강’의 일식당이었다. 선우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목제 식탁 위에 모둠회와 스시, 구이 요리, 튀김류, 장국이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었다. 그런데 식탁 한편에 어울리지 않게 갈비찜과 전복·버섯구이, 게장, 나물류와 각종 전이 함께 놓여 있었다.

이 조화롭지 않은 상차림의 이유를 선우가 모를 리가 없었다. 고급 일식당에서 보기 힘든 이 음식들은 언젠가 ‘청월’에서 그와 함께한 식사 때, 제 젓가락이 닿았던 것들이었다.

“혼자 운전하고 오기 힘들었을 텐데.”

“…아닙니다. 괜찮았어요.”

선우는 저를 위해 준비한 것만 같은 음식들에서 시선을 거두며 태성의 말에 답했다.

“몸은 좀 어때요?”

“몸이요?”

아무 생각 없이 태성의 말을 되물은 선우는 곧 그 뜻을 파악하고 금세 얼굴을 붉혔다.

부산에서 떠날 때, 남자는 제게 본인의 운전기사를 딸려 보내려 했다. 선우는 부담스러운 마음에 그의 제안을 한사코 거절하고 직접 운전을 하고 왔는데, 고속도로를 들어서는 순간 그가 왜 운전기사를 함께 보내려 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온몸이 쑤시는 근육통과 더불어 뭉근한 배 속과 밑이 열기가 도통 가시질 않아, 운전은 둘째치고 운전석에 오래 앉아 있는 것도 고역이었다. 중간중간 휴게실에서 몇 번이나 쉬고 온 탓에, 5시간이면 올 거리를 선우는 그날 한밤중이 다 돼서야 서울에 도착했고, 다음날 하루는 온전히 침대에서 보내야 했다.

“괘, 괜찮습니다.”

그러나 남자에게 이런 뒷얘기까지는 차마 할 수가 없어, 선우는 대충 대답을 얼버무렸다. 고맙게도 그는 더 자세히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괜찮다면 다행이고. 한식이랑 양식은 잘 먹는 거 알았고, 일식은 어떤지 몰라서 일단 준비했어요. 먹고 싶은 걸로 먹어요. 살 좀 더 찌워도 되겠던데.”

“…….”

태성의 말에 선우는 눈썹을 살짝 구겼다. 정신 차리고 보면 어느새 스며들어 있는 남자 특유의 다정함이 오늘따라 참, 달갑지가 않았다.

조금 전 호텔 주차장에서 선우는 약속 장소로 올라오지를 못하고 한참을 차 안에서 망설였다. 그리고 앞으로는 남자와 적당한 거리를 두자고, 단단히 마음먹고 나서야 차를 벗어났다. 그러면 제 마음이 오늘처럼 널빤지 널뛰듯 요란을 떨 일도, 제 상관에게 남자에 대한 정보를 보고해야 할 일도 없을 테니.

하지만 보조개가 옴폭 팬 얼굴로 친절하게 구는 남자 앞에서 그런 다짐은 한낱 쓸모없는 것이었다. 남자 몰래 세워 둔 감정의 벽이 파도에 쓸려 가는 모래성마냥,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밑바닥부터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밥은 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선우가 울적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자 태성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표정이 별로 안 좋아 보이네. 무슨 일 있어요?”

“……아니요.”

선우가 얌전히 고개를 젓자, 태성은 찬찬히 선우를 살폈다.

“밥이라도 먹이고 얘기하려고 했는데. 상태를 보니까 이거라도 보여 줘야 밥을 먹겠네.”

그러고는 불쑥 하얀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얼떨결에 봉투를 받아 든 선우는 곧 입구를 빼꼼 벌리고 그 안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이내 봉투를 거꾸로 세워 안에 든 것을 모두 꺼내자, 하얀 종이 몇 장과 플라스틱 카드 한 장이 손에 놓였다.

“양 의원이 자주 이용하는 골프 클럽 회원권이에요. 주로 금요일 오전에 골프를 치고 저녁에 아도니스로 넘어가요. 어때요, 같이 가 볼래요?”

의아한 얼굴로 카드를 앞뒤로 돌려보던 선우가 ‘양 의원’이라는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고 다니는데 어떻게 몰라. 덕분에 질투 좀 났지.”

남자는 개구지게 웃으며 말했지만, 선우는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최대한 조심한다고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제가 양승준을 살피는 것이 티가 났던 모양이었다. 양승준도 제 시선을 눈치채고 있었을까…?

“걱정 마요. 그렇게 티 나진 않았어요.”

초조한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 선우를 향해 태성이 태평하게 말했다.

하…….

그 말에 조그맣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나 믿고 필요한 게 뭔지 정확하게 말했으면 그런 일 당할 필요도 없었잖아.”

선우는 물끄러미 태성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태성은 턱 끝으로 본인이 건넨 자료를 가리켰다. 그의 턱짓을 따라 선우는 제 손 위로 서서히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손에 든 종이를 한 장씩 넘겨 보니, 거기에는 제 이름으로 등록된 클럽 회원권과 함께 골프장 정보, 클럽 이용 안내, 양승준의 방문 이력과 향후 예약 스케줄이 보기 좋게 정리되어 있었다.

“양승준이 아버님 사망에 연관된 건 맞고, 사고 뒤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아도니스의 인맥을 이용한 모양이에요. 아버님을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는지는… 본인에게 직접 들어 봐야 알 것 같은데.”

선우는 다시 고개를 들어 태성과 눈을 마주했다.

“한 경위만 원한다면 내가 알아봐 줄 수 있지만, 그걸 원하는 건 아닐 거 같아서.”

저를 똑바로 응시하는 눈빛이 언제나처럼 제 속을 훤히 꿰뚫어 볼 것만 같았다. 선우는 황급히 남자의 눈길을 피하며, 그가 준 자료들을 다시 봉투 안에 담아 넣었다.

“저, 대표님. 감사하지만, 이런 거 받을 수 없어요….”

선우의 말에 태성이 눈썹을 삐죽 치켜올렸다. 자료를 받고 좋아서 방방 뛸 것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매정하게 거절을 하는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저는… 대표님께서 왜 자꾸 이런 정보를 주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도와주셨던 걸로 충분해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이런 거 주지 마세요. 선우는 고개를 숙인 채 우물쭈물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고는 잘 정리된 서류 봉투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슬그머니 태성을 향해 밀어 넣었다.

“…….”

태성은 팔짱을 낀 채 선우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다, 제 쪽으로 다가오는 서류 봉투를 힐끗 내려다봤다. 그리고 이내 살벌하기 그지없는 어투로 말했다.

“이게, 발랑 까져 가지고.”

“……네?”

태어나 처음 듣는 소리에 선우는 고개를 번뜩 들어 올렸다. 깜짝 놀란 눈을 하고 선우가 태성을 쳐다보자, 그는 곧 기가 막힌다는 듯 한쪽 입꼬리만 올린 채 실소했다.

“한 경위한테는 내가 원나잇 상대였어요?”

“…네? 아니요?”

무슨, 그런 말을……. 충격적인 남자의 말에 선우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이런 정보를 왜 주느냐고?”

얼굴을 굳힌 태성은 조금 화가 난 사람처럼 빠르게 말을 이었다.

“한 경위는 뭐, 워낙 쿨해서 별 관심도 없는 사람이랑 휴가 같이 보내고, 잠도 자고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아, 아니,” 당황한 선우가 한 손을 들어 빠르게 흔들었다.

“난 아니에요.”

“아…….”

그러나 단호한 남자의 태도에 곧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전에도 말한 것 같은데. 난 아무나랑 안 자.”

남자는 광채가 도는 눈빛으로 한순간에 사람을 옴짝달싹할 수 없게 붙들어 놓더니,

“스쳐 지나갈 사람한테 시간이고, 정성이고 쏟아부을 만큼 한가한 사람도 아니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북을 두드리듯 심장을 쿵, 쿵, 두드려 댔다.

“이거보다 더 확실한 대답을 원해요?”

“…….”

그대로 숨이 콱 멎어 버릴 것만 같은 것을, 선우는 겨우 힘을 쥐어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러나 태성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팔짱을 풀고 상체를 바르게 세웠다. 얼어붙은 선우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한선우 씨.”

“대표님…!”

제 이름을 부르는 진솔한 목소리에 갑자기 정신이 바짝 든 선우가 태성의 말을 다급히 막았다. 더는 얘기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지만, 태성은 이번만큼은 선우를 배려할 생각이 없었다.

“내가 당신 좋아해. 생각보다 많이.”

윽, 마음을 고해 오는 다정한 숨결에 선우는 괴로운 얼굴로 신음했다. 기어코 남자는 제 심장을 쥐어틀고 말았다. 차마 그를 쳐다볼 수가 없어, 선우는 고개를 돌린 채 황망히 눈동자를 굴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창밖을 내다보는 이의 표정에서 당황스럽고, 불안하고, 어수선한 기색이 뚝뚝 묻어났다.

“대표님. 저… 저, 남자예요.”

요동치는 감정을 간신히 다잡고 남자의 눈을 마주했을 때, 그는 슬며시 웃고 있었다.

“내가 당신이 여자인 줄 알고 잤을까 봐?”

거침없는 언사에 선우가 양 볼을 발갛게 물들였다. 그러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남자에게 현실을 일깨웠다.

“……저, 이래 봬도 경찰…이에요…….”

“그럼, 지금이라도 둘이 손 붙잡고 가서 자수할까? 그러면 한 경위 바로 특진이라도 하나?”

이 순간조차도 천연덕스럽게 넘기려는 남자에, 선우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니에요….”

“나도 농담 아니야.”

태성은 식탁 위에서 유리잔을 집어 들었다. 표면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유리잔에는 시원하게 얼음을 동동 띄워 놓은 냉 녹차가 담겨 있었다. 풋풋한 향 내음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 박우진에게 정보를 받아 제주도에서 급히 공수한 것이었다.

“지금 당장 나랑 뭘 하자는 건 아니고.”

녹차를 한 모금 크게 들이켜고 난 그는 잔을 내려놓고, 두 손을 깍지 껴 식탁 위에 올려 두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나 이용하라는 얘기를 하는 거야.”

당신을… 이용하라고…? 왜……?

“나한테 빼 갈 거 많잖아. 아버지 죽인 놈을 잡든, 정보를 빼 가서 승진을 하든. 너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해.”

선우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남자를 쳐다봤다.

“난 그동안 열심히 너 꼬셔 볼게.”

그런 선우를 향해 태성은 사르륵, 눈을 접어 웃었다. 초승달같이 예쁘게도 접힌 두 눈에 선우는 돌연 심장이 파르르 떨렸다.

“대신, 한 경위 마음에도 확신이 생기면, 그땐 주저하지 말고 나한테 와.”

그게 언제가 됐든.

남자의 당차고 화사한 미소를 보는 선우의 눈동자가 바람 앞에 놓인 등불처럼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쩐지 울컥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빛이든 사람이든, 너무 눈이 부시면 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차오를 수 있다는 것을 선우는 난생처음 알게 되었다.

***

2021년 8월 6일 10시경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레이크파크 컨트리클럽

“팔은 양쪽 다 힘 빼고 그냥 툭, 떨어트려 놓는다고 생각하면 돼요.”

아…….

오른쪽 어깨를 쓸어내리는 손길에 불쑥 신음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선우는 속으로 몰래 삼켰다. 살갗을 간질이듯 팔 위를 부드럽게 타고 내려온 손은 선우의 손목에서 멈춰 섰다. 그립을 잡고 있는 선우의 오른손 위에 길고 커다란 남자의 오른손이 겹쳐졌다.

“허리 편 상태로 상체만 살짝 숙이면 돼요. 이러면 저절로 엉덩이도 뒤로 빠지지. 억지로 과하게 뺄 필요 없어요.”

일자로 뻗은 척추뼈를 마디마디 훑어내리던 왼손이 어느 순간, 선우의 등 한가운데를 지그시 내리눌렀다.

“이 상태로 무릎 조금만 구부립시다.”

언뜻 오른쪽 다리의 오금에 뭉뚝한 무언가가 닿는가 싶더니, 접히는 부위를 슬며시 밀어 넣는 힘에 선우의 무릎이 저절로 굽어졌다. 살짝 내려앉은 뒷다리에 남자의 탄탄한 허벅지와 무릎뼈가 맞닿았다.

“아, 다리가 길어서 조금 더 넓게 벌려도 되겠네.”

남자는 그립을 함께 잡고 있던 손을 놓더니, 갑자기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남자의 오른손이 선우의 허벅지를 스치듯 쓸어내리다가, 이내 안쪽 연한 허벅살 위에 놓였다.

헉…. 허벅지를 한 손에 쥐고 바깥쪽으로 끌어당기는 남자에 선우는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남자가 시키는 대로 오른쪽 다리를 조금 더 벌리는 선우의 귀 끝이 서서히 불그스름해지고 있었다. 단지 자세를 잡아 주려는 것뿐인데, 남자의 손이 놓인 등과 허벅지가 괜히 뜨뜻하고 후끈거렸다.

“지금 자세 좋아요. 이대로 한번 쳐 봅시다.”

슬쩍 몸을 뒤로 빼고 선우의 자세를 확인한 태성은 다시 선우의 뒤에 바짝 붙어 섰다. 등 뒤에서 뻗어져 나온 두 팔이 선우의 양팔을 감싸듯 포개 왔다.

“일단, 클럽 너무 높이 올리지 말고 아래에서만 연습해 볼게요. 지금은 손목 사용할 필요 없어요. 이대로 허리선 정도까지만 올렸다가, 위에서 아래로 내리누른다는 느낌으로 밀어치면 돼요. 이렇게.”

톡. 하얀 공이 클럽 헤드를 맞고 가까운 그물망 위로 떨어졌다.

“그렇지. 잘했어요. 아직은 멀리 보내는 거 신경 쓰지 말고 자세만 신경 써요. 몸통이나 어깨, 뒤로 뒤집어지지 않게.”

하아…….

왼쪽 어깨를 도닥이며, 마침내 떨어지는 태성에 선우는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남자는 잘했다고 말했지만, 사실 선우는 제가 어떻게 공을 쳤는지도 몰랐다. 그저 남자가 이끄는 대로 팔을 휘둘렀을 뿐이었다.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아까부터 선우는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가 없었다. 어깨 너머로 흘러오는 나직한 음성, 달짝지근한 체향에 자꾸만 귓가가, 그리고 코끝이 저릿했다. 아무렇지 않게 사지를 얽어 오는 단단한 팔다리에는 심장이 마구 벌렁거렸다. 등 뒤에 딱 붙어 저를 든든하게 지탱하는 흉곽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골프가 이렇게 심적으로 부담되는 스포츠인 줄은 미처 몰랐는데, 다들 이런 걸 어떻게 배우는 건지…. 매번 이런 식이면 양승준이랑 무슨 얘기를 해 보기도 전에 제 심장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았다.

가슴에 손을 얹고 선우가 한숨을 폭 내쉬자, 어느새 옆에 선 태성이 슬그머니 웃었다. 선우가 곤란해하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태성은 부러 괴롭히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처럼 그렇게, 계속, 나를 의식하라고. 단둘이 있는 시간만큼은 선우의 머릿속을 저로 꽉 채워 넣을 생각이었다.

“다시 해 볼까요?”

태성이 선우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자, 선우가 들고 있던 골프 클럽을 그에게 넘겼다. 태성은 건네받은 클럽 헤드로 바닥에 가지런히 놓인 공들 중에 하나를 살살 굴려 와, 선우가 치기 좋은 위치에 가져다 놓았다.

선우는 그런 태성을 신기한 사람 보듯 쳐다보았다. 골프 클럽과 공을 제 몸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게 다루는 남자를 보고 있자니, 전문 프로 선수를 했어도 참 잘 어울렸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편으로는 흰색과 검은색이 어우러진 골프웨어를 탁월하게 소화해 내는 모습이 의류 광고 모델을 해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남자가 마음을 고백해 온 날 밤, 선우는 밤새 인터넷으로 그의 이름을 검색했다. 단 세 자만으로도 무수히 쏟아지는 정보,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한 커뮤니티에 올라온 남자에 대한 찬양 글이었다.

익명의 네티즌이 올린 것으로 보이는 글에는 남자의 간단한 프로필과 함께 여기저기 떠도는 과거 사진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남자의 대학, 군대, 미 유학 시절 그리고 최근 대표가 된 후 노출된 사진들까지. 사람들은 그의 수려한 외모와 완벽한 스펙에 인정과 경외를 표했고, 누군가는 세간에 알려진 미담을 언급하기도 했다.

아득하리만치 멀게 느껴지던 글 속의 주인공. 다른 세상에 살 것만 같은 그 사람이 제게 골프를 가르치고 있었다. 내가 아는 당신과 그 사람이 동일 인물이 맞긴 한 건지…….

남자는 늘 이렇게 비현실적이었다. 너무 현실감이 없으니, 남자와 함께하면 저조차도 자꾸 현실을 망각하게 되는가 보다고, 선우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그렇게 봐요?”

옆얼굴에 와 닿는 시선에 태성이 고개를 돌렸다.

“아뇨. 그냥…….”

태성의 물음에 선우는 얼른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입을 열었다.

“아… 그게, 신기해서요.”

“뭐가?”

“진짜로 대표님한테 골프를 배울 줄은 몰랐거든요.”

멋쩍은 웃음에 동그란 광대가 살포시 위로 올라붙었다.

“그래요? 난 알았는데.”

이걸 또 누구한테 가서 배우려고.

태성은 골프 클럽을 다시 선우에게 넘기며 선우의 뒤에 바짝 붙어 섰다. 그러자 턱 끝쯤 닿아 있던 정수리가 풀썩, 앞으로 꺾였다. 하얗던 목덜미와 귓바퀴가 서서히 분홍빛으로 물들어 가는 것을 보고, 태성은 조용히 눈웃음을 지었다.

이른 오전부터 두 사람이 와 있는 곳은 호숫가를 끼고 있는 용인의 한 컨트리클럽이었다. 도심 속에서도 전원 풍경을 즐길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한 컨트리클럽에는 5개 층으로 구성된 실외 골프 연습장이 있었다. 그중 가장 위층에 마련된 VVIP 전용 연습장은 양승준이 애용하는 곳이었다.

양승준은 매주 금요일마다 시간을 따로 할애해서 골프를 칠 정도로 골프 애호가였다. 개인 일정이나 라운딩 약속이 잡히지 않은 날이면 그는 이곳에 와 프로 선수에게 레슨을 받는다고 했다. 태성의 정보를 바탕으로, 두 사람은 양승준이 항상 이용하는 자리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아 놓고 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한참 자세를 잡아 주던 태성이 이번에는 본인의 타격 자세를 직접 보여 주며 설명을 이어 가던 때였다.

“이야, 둘이 같이 서 있으니까 화보가 따로 없네.”

청명한 박수 소리와 함께 양승준이 두 사람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뒤로 캐디백을 들고 있는 윤해진이 보였다.

“잠깐 연습하는 척하고 있어요.”

태성이 낮게 속삭이자, 선우가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오셨어요?”

태성은 선우를 뒤로하고 양승준 앞에 섰다. 윤해진이 내려놓은 캐디백에서 클럽을 하나 골라 꺼내며, 양승준이 물었다.

“오전부터 여긴 웬일이야?”

“연습 좀 시켜 볼까 하고요.”

태성이 고갯짓으로 선우를 가리키자 양승준은 슬쩍 그의 등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몸에 맞추기라도 한 듯, 하얀 골프웨어를 딱 맞게 차려입은 이가 이목을 확 사로잡았다.

때마침 늘씬하게 뻗은 두 팔이 클럽을 휘둘렀다. 허공을 향해 내뻗어진 팔과 은빛 샤프트 위에서 햇살이 찬란하게 부서졌다. 골프웨어 밖으로 드러난 매끈한 목선과 새하얀 팔이 확실히 사람을 동하게 하긴 한다고 느끼던 찰나였다. 저를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인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공을 바라보던 이가 갑자기 힐끗 눈길을 보내왔다.

양승준은 눈을 마주친 게 우연이었던 것처럼, 연우를 향한 눈동자를 서둘러 태성에게로 옮겼다.

“고 사장이랑 한바탕했다며?”

“벌써 얘기가 거기까지 돌았나요.”

태성이 민망하다는 듯 어설피 웃었다.

“벌써라니. 애 하나 때문에 문 대표가 요트 뒤집었다고 소문이 자자해.”

“또 소문이 말도 안 되게 부풀려졌나 봐요.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연우가 도대체 누구냐고, 아직 못 본 사람들은 다들 얼굴 궁금해 죽으려고 하더라고.”

양승준은 뒤편에 놓여 있던 미니 테이블 쪽으로 태성을 조용히 이끌었다. 타석에서 거리가 조금 멀어지자, 양승준이 태성에게만 들릴 정도로 나직이 물었다.

“근데 저런 애들은 도대체 어디서 찾는 거야?”

양승준의 물음에 태성이 잠시 생각을 더듬다 이내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 만난 날,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도 기어코 도청기를 달고 나가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나이트요.”

“뭐어?”

너무 놀란 나머지 양승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 가서 회개 기도나 드리게 생긴 주제에, 나이트라니? 정치를 10년 가까이 하고도 저는 아직도 사람 볼 줄 모른다며, 양승준이 혀를 내둘렀다.

“그래서, 쟤는 이제 요트 안 태우는 거야?”

“네. 뭐, 겸사겸사요. 이제 슬슬 실적 챙겨야 할 시즌이기도 하고요.”

“아, 그렇지. 아무래도 문 대표가 한창 바쁜 시기이긴 하지.”

양승준은 이해한다는 듯 금세 맞장구를 쳤다.

“그래도 이번에는 문 대표가 좀 너무했어. 아무렴 그래도 형님인데.”

“네.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고 사장님께 연락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래. 우리 같은 사람들끼리 서로 챙기고 그래야지. 애 하나 때문에 사이 틀어지고 그럼 되나.”

양승준이 태성의 팔뚝을 툭툭 치며 다독였다. 그러다 그는 옆 타석으로 넌지시 시선을 옮겼다. 혼자 클럽을 몇 차례 휘두르던 이가 연습을 마친 모양인지, 캐디백에 클럽을 꽂아 넣고 있었다.

“어때? 재미는 좀 좋아?”

“재미는요, 무슨.”

태성은 심드렁한 표정을 하고, 손에 든 골프채로 바닥을 툭, 툭, 두드렸다.

“왜, 요즘 어린애 따먹어서 그런가 문 대표 얼굴에서 윤기가 다 나는데.”

“…….”

무표정하던 얼굴에서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죽이지? 딱 봐도 각이 나와. 엉덩이가 탄력이 다르잖아.”

이야. 양승준이 감탄사를 내뱉으며, 엉덩이를 주무르듯 허공에다 대고 손아귀를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곁눈질로 양승준을 보던 태성이 설핏 코웃음을 치고는 손에 든 골프채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립을 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가려는 것을 태성은 손목을 살살 돌리며 의식적으로 힘을 빼냈다.

그 순간, 양승준이 몸을 움찔하며 올렸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캐디백을 모두 정리하고, 왼손에서 장갑을 빼내던 이가 갑자기 자신을 바라봐 왔기 때문이었다. 저와 눈이 마주친 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아한 시선을 건네다가, 이내 저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양승준은 잠시 머뭇거리다, 곧 뭐에 홀린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골프는 좀 쳐?”

태성이 고개를 한 번 내저었다.

“오늘 처음이에요. 그래도 워낙 운동 신경이 좋아서 자세가 바로 나오네요.”

“잘 가르쳐서 조만간 필드 한번 데리고 나가야지?”

“그래야죠.”

“…….”

태성과 대화를 마친 뒤에도 양승준의 눈꼬리가 끈질기게 연우를 좇았다.

***

2021년 8월 13일 11시경

강원도 정선군

긴 산줄기가 푸른 잔디밭을 중요한 요새라도 되는 양 둥글게 둘러싸고 있었다. 울창한 숲을 뒤로하고 산자락 밑에 지어진 웅장한 클럽 하우스는 그리스 신전을 모티브 삼아 만든 것이라고 했다.

라운딩을 제안한 건 의외로 양승준이 먼저였다. 그가 태성과 선우를 불러낸 곳은 고(故) 문호 회장의 별장 근처에 위치한 골프장이었다. 오로지 아도니스 회원과 그 가족들만이 입장할 수 있는 골프장은 공식적인 명칭조차 없었다. 아도니스 회원들이 은밀한 이야기나 보안이 필요한 정보를 공유해야 할 때 종종 이용하는 장소라고, 태성이 선우에게 설명해 주었다.

“오늘도 예쁘네?”

먼저 채비를 마친 태성과 선우가 하우스 출입구 앞에서 양승준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양승준과 윤해진, 그 뒤로 캐디백을 들쳐 맨 하우스 캐디가 다가오고 있었다. 캐디가 카트에 짐을 싣는 사이 양승준이 두 사람 앞에 섰다.

“연우 씨는 골프웨어 모델 해도 되겠다. 늘씬하니 잘 어울려.”

양승준은 고개까지 오르내리며 선우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훑었다.

“문 대표. 연우 씨는 계속 이렇게 아깝게 썩히는 거야? 원하면 모델이라도 시켜 주지 왜.”

“본인이 별로 원하지 않아요.”

“그래? 당신이 원하지 않는 건 아니고?”

단칼에 잘라 내듯 대답하는 태성을 향해 양승준이 비식거리며 웃었다.

캐디가 이내 이동할 채비를 마치자, 네 사람은 함께 카트에 올라탔다. 그리고 곧 하얀 전동 카트가 정원 사이에 고르게 다져 놓은 회색 길 위를 빠르게 달려 나갔다.

“그나저나 그 며칠 사이에 손목을 다쳤다며? 따로 골프 연습이라도 했어?”

6인승 카트 앞줄에 앉은 양승준이 고개를 뒤로 돌리며 물었다. 이어 등받이에 한쪽 팔을 걸치고 몸통마저 틀어 앉은 그는 선우의 손목으로 시선을 넘겼다. 왼쪽 손목에 하얀색 손목 보호대가 채워져 있었다.

“아… 무거운 걸 좀 들었더니…….”

선우가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감싸 쥐며 말했다. 골프장에 도착하기 직전 차 안에서, 태성은 느닷없이 선우에게 손목 보호대를 끼워 주었다. 그러면서 양승준에게는 손목을 다쳐서 오늘은 게임을 할 수 없다고 말해 줄 것을 당부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영문은 모르겠으나, 어차피 골프 같은 건 관심 밖의 일이라, 선우는 곧바로 그러마 하고 말았다.

“내가 머리 올려 주고 싶었는데 아쉽네.”

그런데 양승준이 뜬금없는 소리를 해 왔다.

“…머리를 올려요?”

“처음 필드 라운딩 도는 걸 그렇게 표현해요.”

얼굴에 물음표를 띄운 선우를 위해 곁에 있던 태성이 말을 곁들었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오늘따라 유독 그는 표정과 목소리가 한층 더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뜨뜻한 여름 바람을 뚫고 달린 카트는 금세 네 사람을 새파란 들판 위로 안내했다. 자연 경관을 거의 해치지 않고 지어진 코스 한편에는 산골짜기에서부터 내려온 작은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코스 시작점에 도달하자, 이동을 도운 캐디는 카트를 남겨 둔 채 하우스로 되돌아갔다. 아도니스 전용 골프 클럽에서 캐디가 없이 라운딩을 도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굳이 이곳까지 와서 골프를 쳐야 할 때는 응당 그만한 사유가 있을 때인지라, 캐디보다는 개인 수행원이 동반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그리고 양승준의 경우, 일거수일투족을 윤해진이 보필했다.

그저 그런, 어딘가 모르게 주제가 겉도는 대화를 나누며 어느덧 5번 홀을 도는 와중이었다.

“요즘 김경택 쪽은 좀 어때?”

주변 경관을 둘러보던 선우가 갑자기 귓가로 날아든 익숙한 이름에 멈칫하며 양승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정작 질문을 던진 이는 등을 내보인 채 골프채를 힘차게 휘두르고 있었다.

딱! 소리와 함께 하얀 공이 붕 뜨며 허공을 가로질렀다. 양승준은 공이 완전히 낙하할 때까지 움직임을 뒤쫓아보다가, 잔디에 파묻혀 공이 아예 보이지 않게 되자 그제야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꽂힌 곳은 태성이었다.

“임기 끝나자마자 입당하기로 마음 굳히신 것 같던데요.”

태성의 말에 양승준이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기며, 낮게 욕을 지껄였다.

“임기 끝나려면 아직 한참 남지 않았어? 근데 왜 벌써부터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거야?”

양승준은 골프채를 어깨 위에 얹으며 태성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두 사람은 곧장 잔디 위를 나란히 걸었다.

선우는 조용한 걸음으로 태성의 뒤를 바짝 따랐다. 흔하다면 흔한 이름이라 혹시나 했으나, 임기를 말하는 것 보니 역시나 제가 아는 사람의 이야기가 맞는 듯했다. 선우가 기억하기로 김경택 청장의 임기는 앞으로 6개월 정도가 남아 있었다. 관심을 두지 않으려 해도 제 분야 꼭대기에 위치한 이가 언급되니, 온 신경이 저절로 두 사람의 대화로 쏠렸다.

“아무래도 정치 쪽은 워낙 경험이 없으시니까, 좀 불안하긴 하시겠죠.”

멀지 않은 곳에서 제 공을 발견한 태성은 주저 없이 샷을 날렸다. 양승준의 공이 위치한 곳과 얼추 가까운 곳으로 공을 보내 놓은 그는 무심하게 몸을 돌려세웠다. 실상 이 자리는 양승준의 플레이를 거들어 주기 위한 것일 뿐, 게임의 승패 따위는 애초에 태성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인제 와서 정치는 왜 하고 싶다는 건데?”

골프채로 땅을 짚고 짝다리로 서 있던 양승준이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글쎄요. 명예는 그만하면 됐으니, 이제는 권력이 욕심나실 때도 됐죠.”

하! 태성의 말을 듣고 양승준은 크게 코웃음을 쳤다.

“하던 대로 닦던 뒷구멍이나 제대로 닦을 것이지 뒤늦게 정치는 무슨 정치야.”

두 사람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양승준의 공을 찾아 이동했다.

“그 인간은 진짜로 자기가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뭐야? 뒷방 늙은이들이 좀 추켜세워 주니까 정말로 지가 뭐라도 된 줄 아나.”

“…….”

“정치는 좆도 모르는 것들이 꼭 나이만 처먹으면 너나 나나 다 정치한다고 지랄이지.”

태성은 이렇다 할 말 없이 양승준의 불평을 듣고만 있었다.

양승준의 공은 작은 언덕을 넘어, 페널티 구역으로 만들어 놓은 연못가 근처에 떨어져 있었다. 공을 발견한 양승준은 곧바로 그 앞에 서서 골프채를 다잡았다. 그런데 자세를 몇 차례 잡아 보고도 그는 쉽게 스윙을 하지 못했다. 잔디밭에 맞닿은 공과 클럽 헤드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양승준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문 대표, 우리 이참에 확실히 하자고. 당신도 김경택 그 인간 밀어 줄 생각 추호도 하지 마.”

혼자 생각을 곱씹다 보니 화가 차오른 모양인지, 그는 시근덕거리는 숨소리를 뱉어 냈다.

“제가 무슨 힘이 있어서요. 밀어 줄 생각도 없지만, 그럴 만한 힘도 없습니다.”

“나 말장난하자는 거 아니야.”

“압니다.”

양승준이 씩씩대며 태성을 노려봤으나, 태성은 아주 태연하고 침착했다. 얼핏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의원님께서 걱정하시는 일 없을 테니까 염려 마세요.”

태성이 정중한 어투로 확고히 말하자, 양승준은 조금 안심한 듯 다시 공으로 시선을 옮겼다.

“씨발, 서울시장은 뭐 아무나 하는 줄 아나.”

“…!”

클럽 헤드로 땅을 톡톡, 두드리며 내뱉는 말에 선우가 양승준을 쳐다봤다.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김경택이 정치에 입문하고 싶어 한다는 것도 꽤 충격적이었는데, 서울시장이 언급되니 선우는 놀란 마음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한편 약이 잔뜩 오른 양승준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그립을 바짝 잡고 공에 집중하려 애를 썼으나, 거칠어진 숨이 영 가라앉지를 않았다.

틱!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채 골프채를 휘두르자, 결국엔 헤드 끝에 공이 빗맞고야 말았다. 힘을 제대로 받지 못한 공이 연못을 완전히 넘기지 못하고 건너편 끝자락에 퐁당 빠져 버렸다.

“아, 좆같네 진짜.”

양승준은 빠드득 이를 갈며 단숨에 골프채를 땅바닥으로 처박았다. 빳빳하게 굳은 목덜미를 크게 돌리며 돌아선 그는 몹시 냉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

양승준의 플레이 중단으로 네 사람은 그대로 하우스로 되돌아와야 했다. 개별 라커룸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온 이들은 식당에서 다시 모였다. 방금 마신 식전 와인 덕분인지, 양승준의 기분이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아까는 내가 추태를 보인 것 같네. 미안해요.”

“아, 아닙니다.”

말과는 다르게 양승준은 조금도 미안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으나, 선우는 두 손과 고개를 동시에 내저었다.

네 사람이 앉은 하얀색 대리석 식탁 위에 곧 식사가 차려졌다. 제일 먼저 올라온 것은 으깬 단호박과 싱싱한 풀 야채, 견과류가 어우러진 리코타 치즈 샐러드와 즉석에서 짜낸 오렌지 주스였다. 그 뒤로 알록달록한 야채를 잘게 다져 말아 넣은 오믈렛과 베이컨이 여름 제철 과일과 함께 올라왔고, 마지막은 훈제 연어가 곁들어진 클럽 샌드위치였다. 자연주의를 표방한 이 브런치 메뉴는 양승준의 취향이 반영된 것이었다.

“애써 키워 놓은 개새끼가 자꾸 주인을 물려고 드니까, 내가 그만 화가 주체가 안 됐지 뭐야.”

양승준이 포크로 샐러드의 야채와 치즈를 한 번에 푹 찍어 올리며 말했다.

“……개…새끼요…?”

저의 우두머리를 지칭하는 듯한 말에 선우는 주스로 향하던 손을 멈췄다.

“응. 자그마치 10년을 키워 줬는데, 나이가 들어서 판단이 잘 안 서는 건지. 영 은혜를 모르네.”

“그러고 보니 의원님 아버님께서 저희 아버지께 김 청장을 소개해 주신 것도 딱 그 정도 됐네요. 10년.”

10년…? 선우는 태성이 특정 단어에 부러 힘을 주어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 문호랑 연닿은 것도 그때부터였어? 이것 봐. 내 아버지라는 사람이 그 인간한테 날개를 달아 줬다고. 이렇게 뒤통수 칠 건 생각도 못 하고.”

“김 청장이랑은 어떻게 인연이 닿으신 거랍니까?”

“인연은 뭐. 그 인간은 조무래기 시절부터 지역구 의원들 뒤 닦아 주는 걸로 유명했으니까. 아버지가 의원직에 계실 때부터 그냥 달고 다닌 거지. 하, 근데 일 처리 하나 잘못 맡긴 게 이제 와서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네.”

“일 처리요?”

태성이 묻자, 양승준은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다.

“있어. 그런 게.”

선우의 턱이 느리게 움직였다. 식사를 하는 척하고 있었지만, 실은 머릿속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따라가느라 음식을 먹는 건 뒷전이었다.

10년 전 김경택에게 날개를 달아 준 양승준의 아버지. 양승준의 뒤통수를 치려 한다는 김경택. 그리고 김경택이 맡았다던 일 처리.

남자가 아무 생각 없이 ‘10년’을 언급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럼 이 모든 게 아빠의 죽음과 연관이 있다는 걸까…….

입안에서 오렌지가 뭉개지고, 아몬드 칩이 잘게 부서지고 있었으나 선우는 그게 어떤 맛인지조차 느끼지 못했다. 대충 큰 덩어리가 물러졌다 싶자, 선우는 입에 물고 있던 음식물을 꿀떡 삼켰다. 그리고 제 앞에 앉은 양승준과 윤해진을 얌전히 번갈아 보았다.

그때 당시 당신 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두 분은… 사이가 참 좋아 보이세요.”

선우는 양승준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오믈렛을 떠먹던 양승준이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눈을 마주쳐 왔다.

“우리?”

“네. 윤 비서님은… 단순히 비서만은 아닌 것 같아서요. 어딜 가나 항상 함께 다니시고, 의원님이 필요로 하는 건 뭐든지 다 알고 계시는 것 같고……. 두 분이 알고 지내신 지, 굉장히 오래되었나 봐요.”

선우는 그동안 지켜본 바를 얘기했다.

양승준과 윤해진의 관계는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가 어려워 보였다. 단순히 고용주와 고용인 사이라기에는 너무 끈적했고, 연인 사이라기에는 상하 복종 관계가 명확했다. 양승준을 향한 윤해진의 충성은 또 가히 맹목적인 수준이라 그마저도 정상적인 관계는 아닌 것 같았다.

그림자. 한 발치 떨어진 곳에서 양승준의 모든 걸 케어하는 윤해진은 마치 양승준 몸에 딸린 그림자 같았다.

“오래라……. 해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우린 쭉 함께였어요. 일종의, 형제 같은 사이라고나 할까?”

“형제요…?”

선우는 양승준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되물었다. 요트에서 거칠게 입을 맞추던 두 사람의 모습이 아직까지도 기억에 생생했다. 그다음 장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는 불 보듯 뻔했다. 그런데 형제 같은 사이라고? 형제 사이에… 어느 누가 그런 행위를 하는데…?

“형제가 뭐 별건가? 같이 자라면서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괴로움을 함께 나누면 그게 형제지. 안 그래, 윤 비서?”

양승준이 윤해진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자, 윤해진은 대답 대신 옅은 미소를 보였다. 무언의 긍정에 만족한 양승준은 다시 연우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연우 씨는 형제 관계가 어떻게 돼요?”

“저는… 외동이에요.”

“그래? 의외네. 왠지 동생 있을 것 같이 생겼는데.”

“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소리 많이 들었어요.”

양승준은 대강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식사를 재개했다. 그의 식사 속도에 맞춰 윤해진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과일과 베이컨을 한입 크기에 맞춰 잘라 바치고, 음료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잔을 채워 넣었다. 어린아이를 보살피듯 양승준의 사소한 것 하나, 하나를 전부 보필하는 윤해진은 확실히 일반적인 비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근데,”

윤해진의 손길을 당연하게 받으며 샌드위치를 베어 먹던 양승준이 갑자기 운을 떼 왔다. 입안에 든 음식을 빠르게 씹어 넘긴 그는 물로 입안을 헹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연우 씨가 우리한테 관심이 많은가 봐. 자꾸 그렇게 쳐다보니까 신경이 쓰여서 밥을 못 먹겠네.”

“아!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저는 그냥 두 분이 보기 좋아서…….”

양승준의 말에 선우가 서둘러 사과했다.

“아니, 전혀. 난 연우 씨가 쳐다봐 주니까 좋은데? 기분은, 문 대표가 서운하겠지.”

양승준은 그러면서 태성을 보고 씨익 웃었다. 태성은 별다른 반응 없이 그를 따라 피식, 싱겁게 웃고 말았다.

불현듯, 양승준은 테이블 위에 한쪽 팔을 기대며 손등에 턱을 괴었다. 그러고는 반대쪽 손가락으로 자신과 윤해진을 차례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연우 씨가 관심 있는 쪽은 나야, 아니면 윤 비서야?”

반쪽만 웃는 낯으로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양승준에 선우는 일순 얼굴이 굳었다.

“어…… 저, 죄송합니다….”

선우가 난감한 표정을 짓자,

“귀엽기는. 장난이야.”

양승준은 도리어 크게 즐거워했다.

선우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려 물을 들어 마셨다. 그리고 잔을 내려놓는데, 양승준이 또다시 엉뚱한 소리를 해 왔다.

“연우 씨. 혹시 총 쏴 봤어요?”

“초, 총이요?”

양승준의 물음에 선우가 화들짝 놀랐다. 총을 사용하는 것이 빈번한 일은 아니었지만, 훈련 명목으로라도 일 년에 한두 번은 꼬박꼬박 쏘고 있었다. 양승준이 이 사실을 알 리가 없을 텐데, 난데없이 총에 대해 물으니 선우는 갑자기 입이 마르는 기분이었다.

“뭘 그렇게 또 깜짝 놀라.”

제가 예상한 반응이 그대로 나오자, 양승준은 능글거리며 웃었다.

“내가 취미로 사격을 하는데, 총 쏘는 거 이게 또 손맛이 죽이거든.”

빵! 양승준은 허공에다 대고 손가락으로 총 쏘는 시늉을 했다.

“아하, 네… 사격이요….”

혼자 뜨끔했던 게 민망해진 선우는 공연히 포크로 앞접시를 깨작거렸다.

“연우 씨도 언제 한번 해 볼래요?”

“네, 네에…….”

“문 대표, 들었지? 다음번엔 사격장에서 보자고.”

“네.”

양승준의 제안에 선우는 엉겁결에 대답했고, 태성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추 식사를 마치자, 마지막 후식으로 커피와 간단한 다과가 올라왔다. 커피를 몇 모금 들이켠 양승준이 돌연 고개를 갸웃거렸다.

“씁, 아까 와인을 너무 많이 마셨나? 갑자기 화장실이 가고 싶네.”

그러고는 양해를 구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식탁 옆을 지나치는데, 양승준의 팔이 선우의 커피잔을 툭 쳤다. 윗부분에 충격이 닿은 커피잔은 선우가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그대로 식탁 위로 엎어졌다.

“앗, 뜨거!”

위로 갈수록 넓게 벌어진 커피잔은 넘어진 즉시 안에 든 것을 와르르 뱉어 냈다. 아직 식지 않은 원두커피가 옷 위로 쏟아지자 선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뜨거운 담갈색 물이 가슴과 배를 적시고 흘러내려, 하얀 셔츠 끝에서 뚝, 뚝, 떨어져 내렸다.

“아이고, 미안해요. 내가 실수했네.”

“아, 괜찮습니다.”

선우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식탁 위에서 티슈를 발견하고는 몇 장 뽑아 제 옷을 닦으려 했다. 그러나 양승준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저런, 옷이 홀딱 젖었네.”

양승준은 선우 앞에 놓여 있던 냅킨을 재빨리 들어 선우의 옷 위에 가져다 댔다. 냅킨을 쥔 손이 축축하게 젖은 셔츠를 재차 쓸어내렸다.

“의원님, 괜찮습니다. 제가 할게요.”

선우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지만,

“어? 아니, 내가 미안해서 그러지. 이거 다 젖어서 어떡해?”

양승준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거듭 옷을 닦아 내는 양승준의 시선이 선우의 가슴팍에 고정되었다. 갈색으로 얼룩진 하얀 셔츠가 몸에 착 달라붙어 매끈한 실루엣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언뜻, 젖은 천 위로 살색보다 조금 짙은 색의 돌기가 도드라진 것을 보고 양승준은 조용히 입맛을 다셨다.

“의원님. 제가 하겠습니다.”

그때 불쑥, 양승준의 손에서 냅킨이 쑥 빠져나갔다. 단번에 냅킨을 가로챈 태성은 동시에 선우의 팔을 잡아당기며 선우를 제 쪽으로 획 돌려세웠다. 엉망이 된 셔츠와 대비되는 말간 얼굴을 번갈아 보다, 태성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낮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옷 갈아입어야겠네. 연우 씨, 이쪽으로 와요.”

***

“유치해서 봐 줄 수가 있어야지.”

팍, 얼룩진 냅킨이 바닥 한구석에 처박혔다.

태성은 전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개인 파우더룸으로 선우를 데리고 왔다. 벨벳 천이 씌워진 동그란 스툴 위에 선우를 앉힌 그는 옷장에서 본인의 골프 셔츠를 하나 꺼내 왔다.

“일단 이걸로 갈아입어요.”

선우는 쭈뼛거리며 태성이 내민 옷을 받아들었다.

“어디 데진 않았어요?”

“네. 괜찮아요. 커피가 그새 좀 식었었나 봐요.”

괜찮다는 말에도 태성은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 짧은 한숨을 내뱉은 그는 곧 옷을 갈아입으라며 눈짓으로 선우를 재촉했다.

선우는 태성의 시선을 따라 그가 건넨 옷을 내려다봤다. 남자가 코앞에서 빤히 보고 있는데 훌러덩 옷을 벗자니 어쩐지 뻘쭘하고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에 선우는 차마 옷을 벗지 못하고 옷자락을 붙든 채 머뭇거렸다.

왁!

그러자 지체 없이 뻗어 나온 남자의 손이 선우의 옷을 한 번에 휙 벗겨 냈다. 순식간에 맨몸이 된 선우는 갑자기 와 닿는 서늘한 공기에 와다다 소름이 끼치는 듯했다.

“안 데었다며.”

젖은 셔츠를 바닥에 내던진 태성이 왼쪽 눈썹을 구기며 물었다. 태성의 말에 선우는 고개를 숙여 제 몸을 확인했다. 커피가 쏟아졌던 왼쪽 가슴과 배가 발갛게 익어 있었다.

“아… 그냥 잠깐 빨개진 것 같아요. 금방 가라앉을 것 같은데.”

선우는 오른손을 들어 붉은 기로 얼룩덜룩해진 살갗을 쓸어내렸다. 그냥 있을 때는 모르겠더니,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니 괜히 조금 따끔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쯧, 태성은 혀를 잘게 차고는 선우에게서 셔츠를 빼앗듯 가져왔다. 그러고는 옷의 머리 부분을 벌려 선우의 목에 쑥 집어넣었다. 선우는 그의 의도를 읽고, 바로 셔츠에 양팔을 꿰어 넣었다. 주섬주섬 옷을 다 입고 엉클어진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나니, 남자의 굳은 표정이 그제야 슬쩍 풀어져 있었다.

“겁나서 어디 데리고 다니겠나, 이거.”

태성은 어이가 없다는 듯 가볍게 실소하고는 스툴 앞에 무릎을 구부리고 앉았다. 그리고 양팔로 둥근 스툴을 감싸듯 짚으며 선우를 올려다봤다. 마치 저를 품 안에 가둔 것 같은 자세에 선우는 남자 몰래 입안에 고인 침을 꼴깍 삼켰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기분이 더 더러워.”

남자는 무덤덤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툭툭 말을 뱉고 있었지만, 뭔가가 못마땅한 사람처럼 짙은 눈썹을 연신 꿈틀거렸다.

“매번 이런 식으로 나오면 널 도와주겠다고 한 게 좀 후회될 것 같은데.”

“……제가 오늘, 뭐 실수한 게 있었나요?”

진한 시선을 보내오는 남자에게 선우가 눈썹을 한껏 치켜뜨며 물었다.

“아니. 없어.”

태성은 선우와 마주했던 눈을 내리깔며, 선우의 왼쪽 팔을 천천히 잡아끌었다.

“그냥, 네가 아까워서 그래.”

애먼 놈들 눈에 널 내보이는 게, 머저리 같은 놈들이 널 보고 껄떡거리는 게, 기분이 아주 개 같아서 그래.

옷자락에 살짝 가려진 팔꿈치를 시작으로 선우의 팔을 부드럽게 쓸어내린 태성은 이내 오른손으로 선우의 왼손을 꽉 맞잡았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숙여 뽀얀 손등 위에 제 입술을 내리눌렀다. 코끝에 얼핏, 제가 채워 둔 손목 보호대가 스치듯 닿았다.

이깟 보호대 하나가 주는 어쭙잖은 만족감이라니. 태성은 저 자신을 비웃으며 손등에 박은 입술을 더 꾸욱 눌렀다 뗐다.

“양승준이 뭐라고 하든 크게 반응하지 말아요. 저런 놈들은 빈틈이 보이면 더 달려드니까.”

“…….”

남자가 손등에 갑작스레 남긴 키스에 선우는 순간 정신이 얼떨떨해지고 말았다. 그가 하는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아 무슨 뜻이냐고 되묻고 싶었으나, 어째 입이 잘 떨어지지가 않았다. 저를 지그시 응시하는 눈이 왠지 제게 답을 원하는 것 같아, 선우는 고개를 느리게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서울에 도착하고 나니 어느덧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 태성은 선우를 혼자 서울로 돌려보냈다. 본인은 그곳에서 바로 아도니스 모임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했다.

태성의 운전기사가 집 앞에 차를 세우자, 선우는 그에게 감사 인사를 남기고 옆좌석에 놓여 있던 보스턴백을 들고 내렸다.

“한선우.”

아파트 입구에 막 들어서는데 어디선가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돌려세우니 시헌이 다가오고 있었다. 검은색 캡 모자를 깊게 눌러쓴 그는 마찬가지로 검은색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시헌아!”

반가운 마음에 선우는 환하게 웃으며 그의 이름을 외쳤다. 그리고 금세 아차! 싶어 얼른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행인이 거의 없고, 근처에 있던 사람은 나이가 지긋한 노인 한 명뿐이라 그를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여기까지 웬일이야?”

“너 왜 이렇게 연락이 잘 안 돼?”

시헌은 빠른 걸음으로 선우 앞에 섰다. 마스크 위로 보이는 시헌의 눈빛이 제법 매서웠다. 분명히 또 불필요한 걱정을 사서 하느라고 그럴 테지.

그렇지 않아도 선우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시헌에게 연락을 해 보려던 참이었다. 원래는 오전에 시헌이 메시지를 남긴 것을 보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전화를 하려고 했는데, 차 안에서 까무룩 잠이 드는 바람에 그만 연락이 늦어지고 말았다.

“미안. 요즘 일이 좀 바빴어. 안 그래도 금방 연락하려고 했는데.”

선우가 밝은 표정으로 시헌을 올려다봤다. 그런데 선우를 내려다보는 시헌의 표정은 차츰 어두워지고 있었다.

“일? 이것도 일이야?”

시헌이 선우가 들고 있던 가방을 짜증스럽게 낚아챘다.

“아, 이건… 우리 일단 집으로 들어가자. 들어가서 얘기해.”

혹시나 시헌을 알아보는 이가 있을까 걱정한 선우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시헌의 팔뚝을 잡아끌고 서둘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이건 다 뭔데?”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마스크를 신경질적으로 벗어낸 시헌이 보스턴백을 보며 쏘아붙이듯 물었다.

“어, 이건 내가 일이 좀 있어서….”

“한선우.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뭐, 이번에는 골프장에 잠복이라도 하는 거야?”

시헌은 기가 찼다. 한동안 제가 해외 스케줄을 도느라 바쁜 탓도 있었지만, 최근 선우는 도대체가 연락이 닿질 않았다. 뭐가 그렇게 바쁜 건지 전화를 잘 받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메시지를 보내면 곧바로 답이 오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어쩌다 시간이 맞아 대화가 오가면 그마저도 금방 끊어지는 것이 태반이었다.

그래서 정말로 일이 많은가 보다 싶었는데, 웬 기사 딸린 고급 승용차에서 골프웨어 차림으로 내리는 선우를 보자 시헌은 순식간에 눈이 회까닥 도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선우가 입고 있는 피케 셔츠는 사이즈마저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건 아니고……. 시헌아, 일단 앉아. 우리 오랜만에 봤는데 얼굴 보고 천천히 얘기하자.”

뿔이 난 시헌을 달래며 선우가 먼저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시헌의 팔 한쪽을 잡아끌며 제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탁탁 내리쳤다. 그러나 시헌은 미동도 하지 않고 거실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었다.

“어… 아니면 맥주라도 한잔할래?”

왠지 모르게 심각해 보이는 시헌에 선우는 해맑게 음주를 제안했다. 시원하게 맥주 한잔하면서 차근히 제 상황을 설명하면 시헌도 금세 화가 누그러질 게 분명했으니까.

시헌이 아무 말도 없자, 선우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시헌은 그런 선우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다가, 쓰고 있던 모자를 거칠게 벗었다.

“문태성이랑은 무슨 사이야?”

“어?”

캔 맥주가 몇 개나 남아 있었던가, 냉장고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던 선우가 시헌의 질문에 고개를 휙 돌렸다.

“무슨 사이냐니. 그 사람이 여기서 왜 나와?”

“너 그 사람이랑 있다 왔잖아.”

“…….”

선우는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시헌이 갑자기 남자의 이름을 언급한 것도 황당했는데, 그와 같이 있다 온 사실까지 알고 있으니 이게 도대체 무슨 영문인가 싶었다. 냉장고에서 아무것도 꺼내지 않은 채 그대로 문을 닫은 선우는 멍하니 서서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 이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무 사이 아니야.”

“지난번에도 그렇게 얘기했어.”

어느새 시헌은 선우의 옆에 와 있었다.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휴가도 같이 보내고, 이른 아침부터 너 대신 전화도 받아 주는데 그게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

시헌을 쳐다보는 눈이 이를 데 없이 커졌다. 선우의 놀란 얼굴에 시헌은 이맛살을 사정없이 구겼다. 직면하고 싶지 않았던 상황에 기어이 맞닥뜨린 시헌은 괴로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태성이 선우의 전화를 받았던 그 순간, 시헌은 한국에 있었다. 정확히는 선우의 집 앞이었다.

선우가 휴가를 쓴다는 소식에 시헌은 어떻게든 스케줄을 조정하려 했다. 하지만 해외 스케줄은 제가 어떻게 손을 쓸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저 하나 때문에 수십억을 들인 로케 촬영 일정을 틀어 버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시헌은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홍콩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빽빽이 들어찬 일정 속에서 딱 만 하루가 비었다. 본래는 촬영 스케줄을 마치고 곧바로 대만으로 넘어갈 예정이었으나, 홍콩에서 찍기로 한 신 몇 개가 취소되는 바람에 갑자기 생긴 여유였다.

시헌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한국행 티켓을 끊었다. 당장 서울로 날아가면 한나절, 아니 못해도 반나절은 선우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테니. 서울에 도착한 시헌은 곧장 선우의 집으로 향했다. 아직 자고 있을 선우를 깜짝 놀라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집에 없었다.

그리고 건 전화에서 시헌은 엉뚱한 이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당시에는 너무 황당하고 기가 막힌 나머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전화를 끊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시헌은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한선우든 문태성이든 당장에 누구라도 붙들고 뭐라도 물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은데, 그땐 이미 저는 한국이 아니었다.

아닐 거라고, 제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라고 시헌은 몇 번이나 마음을 다잡았다. 선우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했으니까, 일적으로 아는 사이라고 했으니까, 저는 그 말을 믿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도 한편으로는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가 없어, 시헌은 귀국하자마자 선우의 집으로 쫓아왔다. 그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온 이곳에서 마침내, 그는 꿈에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마주하고 있었다.

“네가 지금 입고 있는 그 옷, 그 사람 거 맞아?”

시헌은 날뛰는 감정을 꾹꾹 내리누르며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시헌의 질문에 선우의 목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시헌아. 네가 무슨 오해를 하는지 알겠는데…….”

“너, 그 사람이랑 잤어?”

“……!”

더 이상 커질 것도 없는 눈이 시헌의 시선을 황급히 피했다. 고개를 획 틀며 다시 냉장고 문을 잡는 선우의 태도에 시헌은 순간 속에서 불덩이가 치솟는 기분이었다.

“그 사람이랑 잤어?!”

버럭 소리치며, 시헌은 선우의 팔을 세게 잡아당겨 자신을 마주 보게 했다.

아니라고 해.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아니라고 해…!

시헌이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선우를 바라보았으나, 그는 곧 절망하고 말았다. 제가 그렇게도 좋아하던 반짝이는 눈동자는 오늘도 거짓말을 할 줄 몰랐다.

“……어, 시헌아. 오늘은 얘기할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우리 다음에 다시 얘기할까.”

시헌의 눈이 삽시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지금 상태로는 도저히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없을 것 같아, 선우는 그를 달래기 위해 잡힌 팔을 조심스레 빼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아!”

그러자 시헌은 제 손아귀를 벗어나려는 팔을 다시 강하게 움켜쥐었다. 얼마나 세게 잡은 건지 팔뚝이 욱신거릴 정도라, 선우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저릿한 통증에 반대 손을 들어 시헌의 손을 떼어 내려는데, 언뜻 제 팔을 붙든 손끝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선우는 차마 그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선우야. 10년이야.”

충혈된 눈자위에 금세 물기가 어렸다.

“내가 너를 바라본 게, 10년이라고.”

“시헌아…….”

“난 또 네가 남자한테는 마음이 안 가는 줄 알고,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려고 했어. 평생 옆에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시헌은 선우의 남은 한 팔을 마저 붙들었다.

“근데 지금 이게… 이게, 뭐야? 내가 이 꼴을 보려고 병신같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보고만 있었던 건 줄 알아?”

“아윽!”

그러고는 선우를 뒤로 세게 밀어붙였다. 냉장고와 저 사이에 선우를 가둬 두고, 시헌은 두 손으로 선우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시헌아, 하지 마.”

시헌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다가들자, 선우는 재빨리 손을 들어 손등으로 제 입을 막았다. 일순 딱딱하게 표정을 굳힌 시헌이 선우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잡은 손목을 냉장고에 대고 단단히 내리누르며, 시헌은 다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선우는 다른 손을 들어 이번에는 시헌의 입을 막았다.

“김시헌, 그만해. 너 이러고 앞으로 나 어떻게 보려고 그래?”

선우가 딱 잘라 말했으나, 시헌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이내 제 입을 틀어막은 손마저 잡아 위로 올려붙였다.

“이거 놔.”

“선우야. 나 이만하면 오래 기다렸잖아. 너도 내 마음 몰랐던 거 아니잖아.”

윽! 선우가 잡힌 손을 빼내려 하자, 시헌은 쥐고 있는 손목을 세게 비틀었다. 그리고 곧장 선우의 입술을 향해 빠르게 달려들었다.

싫어, 하지 마. 선우는 시헌을 피해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그러나 시헌이 선우의 움직임을 좇아 얼굴을 들이미는 통에 기어이 두 사람의 입술이 살짝 스치고 말았다.

“하지 말라고 했잖아!”

찰나에 와 닿는 촉감에 선우는 고개를 푹 숙이며 크게 소리쳤다. 시헌이 잠시 멈칫한 사이 선우는 잡힌 두 손을 세게 뿌리치며 그를 확 밀어냈다.

“너 그 사람이랑 잤다며! 그 사람은 되고 왜 나는 안 되는데?”

“김시헌!”

고성을 내지른 시헌이 성난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선우를 노려보았다. 선우는 눈살을 구긴 채 시헌을 마주하다가, 곧 그의 눈길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머리를 천천히 쓸어 넘기며, 선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러고는 시헌을 어르듯 차분하고 나긋한 어투로 말했다.

“시헌아. 너는… 나한테 너는, 내 가족이나 마찬가지야.”

“가족? 가족이라고?”

시헌은 눈을 부릅뜨고 으르렁거리며, 다시 선우의 앞에 성큼 다가섰다.

“누구 맘대로 가족이래?”

“아…….”

“한선우. 나는 널 보면 가슴이 뛰다 못해 아려.”

곧바로 선우의 왼손을 잡아든 그는 맞잡은 두 손을 제 가슴 한복판에 올려놓았다.

“널 생각하면 누가 여기를 꽉 쥐고 비트는 것처럼 아프고 숨이 턱 막힌다고. 근데 이게 가족이야? 세상 어떤 미친놈이 가족한테 이런 마음을 가져!”

“시헌아…….”

시헌을 부르는 음성이 몹시도 애절했다. 화가 나서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은 시헌인데, 선우는 제가 더 슬프고 괴로운 얼굴을 했다.

차라리 내가 싫다고 하지.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꺼지라고 하지. 날 거부해 놓고 왜 네가 더 고통스럽다는 표정을 하는 건데.

시헌은 울컥, 설움이 복받쳐 올랐다. 선우의 손을 잡고 있는 손이 주체가 되질 않고 파들파들 떨렸다. 제 심장 위에 놓인 두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시헌은 선우의 손을 꽉 한 번 쥐었다 놓았다.

“나한테 넌 가족 아니야. 난 죽었다 깨나도 그거 안 돼.”

그러고는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차갑게 말하고 선우에게서 등을 돌렸다. 시헌이 그대로 부엌을 나서려 하자 선우는 다급히 그를 붙잡았다.

“그러지 마, 시헌아. 이러고 가지 마….”

시헌은 고개만 돌려 선우가 붙든 옷자락을 내려다봤다.

“너 이러고 가면… 나는, 너마저 잃으면… 내 곁엔 정말 아무도 없어…….”

선우가 축축이 젖은 눈망울을 하고 시헌에게 매달렸다. 그 눈을 보자 시헌의 눈에도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내가 가족이면, 그 사람은 너한테 뭔데?”

“…….”

물기가 그렁그렁 고인 눈으로 시헌이 물었으나 결국, 선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떨궜다. 제 옷자락을 부여잡은 손에 스르륵 힘이 빠지는 것을 보고 시헌은 허공에다 대고 실소를 했다.

이 이상 괴롭고 싶지도, 이 이상 선우를 괴롭게 하고 싶지도 않아, 시헌은 선우를 뒤로 한 채 끔찍한 현실을 벗어났다.

***

선우는 침대 위를 가로지른 채 누워 있었다.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 아무 생각 없이 쉬면 좋겠는데, 시헌이 남기고 간 말이 귓가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 사람은 너한테 뭔데?’

그 사람은 나한테 뭐지…….

제가 내릴 수 있는 답은 전부 정답이 아닌 것들뿐이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더는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선우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러고도 복잡한 머릿속이 나아지질 않자, 선우는 아예 옷자락을 끌어 올려 얼굴을 덮어 버렸다.

머리끝까지 뒤덮은 천 자락에서 익숙한 향기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달고도 씁쓸한 남자의 체향에 순간적으로 아찔하니 머리가 마비되는 기분이었다. 문득, 알 수 없는 감정의 회오리가 일어 선우는 두 손을 들어 셔츠로 덮인 얼굴을 또 한 번 가렸다.

어쩌지. 어떡해야 하지…….

시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야 하는데, 10년을 함께한 친구와 틀어진 이 순간마저도 선우는 그가 떠올랐다.

‘한선우. 나는 널 보면 가슴이 뛰다 못해 아려.’

내가 그래. 내가 그 사람을 보면 가슴이 뛰다 못해 아려.

‘널 생각하면 누가 여기를 꽉 쥐고 비트는 것처럼 아프고 숨이 턱 막힌다고.’

그 사람을 생각하면 누가 내 심장을 쥐고 비트는 것처럼 아프고 숨이 막혀.

나는……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다시금 조여드는 심장에 선우는 한 손을 내려 제 가슴께를 어루만졌다. 어쩐지… 뜨거운 커피에 덴 살갗보다 남자에게 덴 심장이 더 쓰라린 듯했다.

[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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