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진실로 한 걸음 가까이 (2)
김경택 | 경찰공무원
출생 1965. 경상북도 구미
소속 경찰청 (청장)
경력 2020. 03~ 제22대 경찰청장
2018 제31대 서울지방경찰청장
2017 제30대 경남지방경찰청장
2016 경찰청 기획조정관
2014 주 미국 대한민국 대사관 주재관
2012 경찰청 감사담당관
2011 제23대 서울 서초경찰서장
..........
근무 중 잠시 짬이 난 틈을 타, 선우는 양승준과 김경택에 관한 정보를 찾아보던 중이었다.
10년 전 양승준의 아버지, 양기용 의원이 김경택에게 날개를 달아 줬다더니 과연, 김경택은 약 9년 전부터 요직만을 골라 파격 승진을 거듭했고, 결국 작년 3월 경찰청장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
양승준은 김경택에게 과거에 일 처리를 하나 맡겼다고 했지. 대화 중에 남자가 아무 이유 없이 ‘10년’을 언급하고, 김경택과의 인연을 물은 건 아닐 것 같은데. 설마, 이 일 처리라는 게 아빠의 사고와 연관된 일이었을까…….
양승준도 양승준이지만, 김경택까지 관련되어 있을 줄이야…….
노트북을 앞에다 두고 고개를 푹 숙인 선우는 두 손으로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만일 그렇다면, 김경택이 제게 직접 말한 그때 일로 마음이 편치 않은 사람들, 뒤에서 저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람들은… 본인을 말한 것이었나. 남자는 무언가를 더 알고 있는 눈치였는데…….
그와 단둘이 얘기할 기회가 생기면 궁금했던 것들을 꼭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선우는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옮겼다. 화면에는 선우가 양승준에 대해 알아보면서 띄워 놓은 기사들이 있었다.
내년 상반기에 있을 서울시장 선거를 벌써부터 예측하는 기사에는 양승준을 비롯해 가능성 있는 후보들 몇몇이 언급되고 있었다. 기사 중에는 아직 정당에 입당하지도 않은 김경택까지 후보로 포함한 것도 두어 개 보였다.
김경택이 뒤통수를 치려고 한다는 건 역시, 서울시장 출마를 말하는 거겠지……?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서울시장 당선이 양승준 집안의 숙원 사업이라는 것이었다. 양승준의 친조부와 아버지는 각각 국무총리, 경기도지사까지 지낸 바가 있으나, 두 사람 모두 최고 권력인 대통령의 벽은 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한 만평에서는 대통령으로 가는 전 단계인 서울시장 자리를 양승준과 그 집안사람들이 누구보다도 애타게 바랄 것이라고 논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양승준이 김경택에게 그렇게 분노한 것도 이해가 가긴 했다. 현재 여론 분위기만으로는 여당 후보라면 출마하는 즉시 당선되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제 뒤를 봐 주던 김경택이 입당하면서 저와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 되니, 기분이 나쁜 것을 넘어서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이 들었을 테지…….
얼추 생각을 정리하며, 선우는 보던 기사 창들을 하나씩 꺼 나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뉴스 포털을 끄려던 찰나, 사이트 맨 윗줄에 뜬 긴급 속보를 발견하고 선우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속보] 배우 김시헌, 과로로 실신… 응급실행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이내 세차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애써 다독이며, 선우는 속보 기사를 클릭했다.
[스타미디어 김이영 기자] 천만 배우 김시헌이 과로와 피로 누적으로 실신하여 응급실로 이송됐다.
16일 새벽 집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된 김시헌은 인근 병원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은 뒤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소속사 관계자는 “김시헌이 최근 몇 달 동안 쉬지 않고 영화와 드라마 촬영을 강행하다 과로와 피로가 누적되어 쓰러졌다”고 밝혔다.
현재 김시헌은 의식을 회복하긴 했으나 절대 안정이 필요한 상태이며……
“허…….”
이게 대체……. 선우는 기사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곧장 최근 기록에서 시헌의 이름을 찾아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들리고, 오래가지 않아 전화가 연결되었다.
- 어, 선우니?
“아… 어머니…. 안녕하셨어요…?”
선우의 전화에 응답한 이는 시헌의 어머니였다. 생각지 못한 대화 상대에 선우는 머리가 새하얗게 비는 기분이었다.
“……그, 시헌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어서요…….”
선우가 잔뜩 위축된 목소리로 말하니, 수화기 너머로 포옥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 그래. 선우 네가 좀 와 주면 좋겠는데.
“……네. 그럴게요.”
-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아프다는 애가 아무것도 안 먹는다고 하고, 뭔 말도 없으니까 내가 정말 답답해 죽겠다. 지금 한대 병원에 있어.
“……네, 어머니. 금방… 찾아뵐게요.”
뚝. 인사말도 없이 끊어진 짧은 통화에 선우는 무거운 숨을 뱉어 냈다.
***
시헌이 입원한 병원은 청사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선우는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시헌과 그의 어머니가 선우를 맞이했다.
“왔니?”
“네, 어머니.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네가 보기엔,”
“엄마!”
선우의 안부 인사에 냉랭하게 답하는 제 어머니를 시헌이 급히 막아 세웠다.
“…….”
시헌의 모친은 말을 하려다 말고 아들이 인상을 쓰며 눈치를 주자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입을 다물었다. 시헌은 곧 눈짓으로 병실 문을 가리키며, 그녀에게 자리를 비켜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녀는 한심한 아들놈을 향해 눈을 한 번 흘기고는 마지못해 병실을 나섰다.
“…괜찮아?”
둘이 남은 병실에서 잠시 머뭇대던 선우가 시헌에게 천천히 다가서며 물었다.
“며칠 사이에 왜 이렇게 말랐어.”
선우는 안쓰러운 마음에 시헌을 이리저리 살폈다. 볼살이 쑥 빠지고, 눈 밑이 퀭한 것이 사흘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선우는 1층에서 시헌의 매니저를 만났다. 시헌이 입원해 있는 특실 층은 관계자가 아닌 이상 출입이 불가능했기에 매니저는 병실 앞까지 선우와 동행해 주었다.
병실로 올라오는 길에 선우는 매니저에게 시헌의 상태를 물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시헌은 과로로 실신한 것은 아니었다. 입원의 원인은 과음으로 인한 급성 위염이라고.
매니저의 말에 의하면 시헌은 지난주 귀국한 뒤로 연락이 통 닿질 않았다고 했다. 그동안 정신없이 바빴으니 주말 동안 좀 쉬려나 보다 싶어, 그 또한 시헌을 내버려 뒀다. 그리고 오늘 새벽, 스케줄에 맞춰 시헌을 데리러 갔을 때, 시헌은 거실 바닥에 누워 꿈쩍도 하지 못한 채 복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가 있던 거실 테이블에는 빈 술병이 빽빽이 세워져 있었고, 그저 장식품에 불과했던 재떨이에는 웬일로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 즉시 병원으로 옮기고 치료를 받은 덕분에 시헌은 빠르게 호전되었다. 다만, 당장에 스케줄을 두 개나 펑크 내게 생겼으니, 언론에는 하는 수 없이 과로와 피로 누적이라는 핑계를 대야 했다고 매니저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는 기사에서 언급된 것만큼 심각한 상황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선우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시헌이 과음한 이유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선우는 속상한 마음을 도무지 감출 수가 없었다.
“밥은 좀 먹었어?”
“…….”
선우는 시헌이 앉아 있는 침대 앞에 서서 병실을 빙 둘러보았다. 휴식 공간에 마련된 테이블 위에 식판이 하나 놓여 있었다. 선우는 테이블로 가 뚜껑이 덮인 식기들을 하나씩 열어 보았다. 흰죽과 멀건 국, 간이 배지 않은 찬 몇 개가 전부였으나, 그마저도 손을 댄 흔적이 전혀 없었다.
“야, 왜 밥을 안 먹고 그래.”
선우는 걱정 어린 투로 시헌을 질책하며 식판을 들고 다시 침대 앞에 섰다. 그러고는 침대에 딸린 트레이를 세우고, 그 위에 식판을 올려놓았다.
“아플 때일수록 잘 먹어야 빨리 낫지. 얼른 먹고 기운 차리자. 좀 식었는데 데워다 줄까?”
“…….”
선우가 수저를 감싼 포장지를 벗겨 내며 물었다. 부러 씩씩하게 말을 걸었는데도 시헌은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선우는 힘없이 처진 시헌의 오른팔을 들어, 그의 손에 억지로 숟가락을 쥐여 주었다.
“선우야…….”
서글픈 눈을 하고 선우의 옆얼굴만 바라보던 시헌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풀이 한껏 죽은 목소리가 무척이나 안쓰러웠다.
“…그날, 미안했어.”
“…….”
“너를 누군가한테 뺏긴다고 생각하니까 잠깐 머리가 어떻게 됐었나 봐.”
“날 누구한테 뺏겨. 난 아무한테도 줄 생각이 없는데. 일단 식사부터 하자.”
선우의 말에 시헌은 선우가 쥐여 준 숟가락으로 흰죽을 몇 차례 뒤적거렸다. 그러나 한 숟갈도 채 뜨지 못하고, 그는 금세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선우야. 문태성 그 사람… 도대체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
그리고 묻는 말에 선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몸에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라, 선우는 침대 끝자락에 털썩 걸터앉았다. 두 사람은 트레이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왜 또 그 사람 얘기를 꺼내. 시헌아, 지금은 다른 생각 하지 말고 너 몸 추스르는 것만 신경 써.”
“선우야. 네가 그 사람이랑 어떻게 인연이 닿았고,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모르지만…….”
선우는 시헌이 제 말을 들을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했다.
“그 사람은 아니야.”
그러다 시헌이 뱉은 말에 다시 고개를 획 돌려 그를 보았다.
“그런 사람들 만나서 끝이 어떻게 되는지, 내가 한두 번 본 줄 알아?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고 멋있어 보일지 몰라도 그런 사람들… 너한테 진심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너 그냥 가지고 노는 거야.”
“…뭐?”
“네가 좀 눈에 띄고 신선하니까, 잠깐 데리고 노는 거라고. 실컷 놀다가 질리면 바로 돌아서서, 때 되면 집안에서 정해 주는 사람이랑 결혼할 거야. 재벌이라고 하는 그 부류 사람들 사는 방식이 그래.”
“…….”
“근데 넌 아니잖아. 넌, 아무한테나 쉽게 몸 주고 마음 줄 사람 아니잖아. 그거 뻔히 아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보고만 있어.”
선우는 말없이 침음했다.
“선우야. 차라리 여자를 만나. 네가 여자를 만나서 결혼을 한다고 하면, 나도 깨끗이 포기할게. 근데, 그 사람은… 정말 아니야.”
걱정 근심 가득 담긴 시헌의 말에 선우는 점점 가슴이 미어지듯 아파 왔다. 시헌이 일깨워 준 현실은 제 상사가 일러 준 것보다 더 무겁고 암담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갑갑한 마음에 돌덩이 하나를 더 얹으니, 갑자기 심장이 짓눌린 듯 숨을 쉬고 뱉는 것이 버거웠다.
“……그 사람이랑 그런… 관계 아니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얼른 밥 먹어.”
선우는 착잡한 심경을 꾸역꾸역 접어 제 왼쪽 가슴 저 한구석에 구겨 넣었다. 그를 향한 마음이 무엇인지 이제는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니 이 감정이 조금이라도 더 커지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아무도 모르는 곳에 깊이 숨겨 두어야 했다. 그래야 이 꽉 막힌 숨통이 겨우나마 트일 것 같았다.
“그런 관계가 아니면?”
“……내가 그 사람한테, 도움을… 받고 있는 게 있어.”
그래, 이 정도 관계로 충분했다.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되어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관계. 선우는 남자와의 인연을 이렇게 정의하기로 했다.
“…도움? 무슨 도움?”
시헌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아빠 사건에 대해 좀 알아보고 있는데… 나 혼자서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것들을 그 사람 통해서 알아보고 있어. 그래서,”
“왜 나한테는 말하지 않았어?”
“나중에… 일이 다 해결되고 나면 그때, 얘기하려고 했어.”
“그 사람한테 무슨 도움을 어떻게 받고 있는 건지 몰라도, 그 도움 내가 줄게. 그 사람 아니어도 나도 충분히 너한테 도움 줄 수 있어. 나 이제 그 정도는 돼, 선우야.”
시헌이 다급한 마음에 쏟아내듯 말을 뱉었으나, 선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시헌아. 너랑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잖아. 나는 너까지 이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
“상관없는 건 그 사람도 마찬가지잖아.”
“……그 사람 아니면 내가 이만한 도움을 받을 만한 곳이 없어.”
“도대체 무슨 도움을 주길래 그래?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된 이유가 뭔지 알아보는 거지? 내가 도와줄게. 아는 기자들한테 알음알음 물어서, 그 당시 사회부에 있었던 기자들이라도 소개받으면,”
“시헌아.”
갑자기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핸드폰을 찾는 시헌을 선우가 멈춰 세웠다.
“네 마음 너무 고맙기는 한데,”
“내가 여기까지 올라온 게 누구 때문인데.”
“……뭐?”
돌연 시헌이 소름 끼칠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를 쳐다보는 눈빛이 꼭 한이 서린 사람의 것이라, 선우는 순식간에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나, 너 하나 보고 여기까지 왔어 선우야. 빨리 커서 널 돕고 지킬 수 있는 어른이 되어야지. 내 이름 하나만 대면 네가 필요한 거, 원하는 거 다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 생각 하나로 지금까지 버텨 왔다고.”
시헌의 눈머리에 금세 물기가 고였다.
그 더럽고 힘든 연예계 생활을 이겨 내게 해 준 건 오로지 ‘한선우’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아니, 애초에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선택하게 된 이유가 ‘한선우’였다.
세상에 기댈 곳 하나 없는 선우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려면 제가 커야만 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우러러볼 만큼의 명예와 부를 갖게 되면, 그럼 너를 지킬 수 있지 않을까. 굳이 위험한 경찰 일을 하는 것도 아버지 일 때문이었으니까, 제가 그 사건에 대해 알아봐 주면 경찰도 그만둘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시헌은 제 능력으로 가장 빨리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을 택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이제 고지가 코앞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상에 서 있는 선우의 눈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너…….”
시헌의 말을 듣고 너무 놀란 나머지, 선우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
“나한테도 한 번만 기회를 줘, 선우야. 나도 널 위해 뭐라도 해 볼 기회라도 달라고.”
시헌이 트레이 밑으로 손을 뻗어 침대 위에 힘없이 놓여 있던 선우의 손을 잡았다.
“이제 와서 문태성한테 널 뺏겨야 하는 이유가 그 사람한테 도움을 받기 위해서라면 날 이용해.”
“…….”
선우는 말문이 막혔다. 5년이 넘는 그 긴 시간 동안 시헌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연예계 활동을 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선우야…. 나는 너 없으면 안 돼. 정말로…….”
“…….”
선우는 기가 찬 숨을 뱉어 내며 시헌에게 잡힌 손을 내려다봤다. 머릿속이 멍했다. 내 인생을 너에게 걸었노라고 말해 오는 친구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병실 내로 차차 묵직한 기운이 내려앉았다. 폐부를 짓누르는 것만 같은 밀도 높은 공기에 두 사람 모두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처참한 표정을 하고 한참 병실 바닥을 내려다보던 선우가 빈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고 이내 마음을 모두 정리했다는 듯, 시헌에게 차분히 말을 건넸다.
“나도야, 시헌아. 나도… 너 없으면 안 돼.”
감정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어조에 시헌이 숙였던 고개를 들어 선우를 바라보았다. 선우는 시헌과 눈을 맞추며, 그가 잡고 있던 손을 살며시 빼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서로를 좋아하게 돼서 너랑 나랑 만나게 된다면… 그럼 너희 어머니는? 너희 어머니께는 뭐라고 말씀드릴 건데?”
“……우리 엄마?”
뜬금없이 제 어머니를 얘기하는 선우에 시헌의 눈이 크게 뜨였다.
“……엄마한테는 내가 잘 얘기할게.”
“어떻게? 너희 어머니… 아들이 남자, 그것도 나 만난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쓰러지실지도 몰라.”
“…그런 건 걱정하지 마. 내가 잘 설득해 볼게. 정 안 되면 엄마랑은 인연 끊고 지내면 그만이야.”
“김시헌!”
선우가 순간 크게 소리쳤다.
시헌이 이렇게 나올 줄 예상하고 있었다. 시헌에게 조금도 여지를 주지 않으려고 일부러 꺼낸 이야기였다. 그러나 막상 모친과 인연을 끊겠다는 소리를 너무도 쉽게 하는 그를 보니 선우는 갑자기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시헌의 어머니는 선우를 몹시도 탐탁지 않아 했다. 그리고 선우는 그녀의 마음을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이해했다.
당신의 잘난 아들이 좋아하는 이랍시고 쫓아다니는 사람이 가족도 연고도 없는 고등학교 동창, 그것도 남자아이라는 것을 알고 그녀는 몇 번이나 까무러쳤다.
어릴 때는 사춘기 시절 잠깐 앓고 지나가는 가벼운 열병이겠거니, 선우를 선망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거겠거니, 싶어 시헌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친구를 향한 아들의 애정은 식을 줄을 몰랐다.
보다 못한 그녀는 언젠가부터 시헌의 사사건건을 간섭해 가며 선우를 만나지 못하게 했고, 결국 시헌은 연예계 생활을 핑계로 기어이 집을 나오고야 말았다. 그 후에도 만나면 늘 자신을 통제하려 드는 모친에게서 시헌은 점차 거리를 두려 했는데, 선우는 그게 항상 마음에 걸렸다.
시헌만큼은 아니래도 저 역시 시헌이 너무 소중했기에 애써 덮어 두고 있었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모른 척, 지금까지 상황을 내버려 둔 제가 이기적인 것이었다.
선우는 차라리 이번 기회에 깔끔하게 매듭을 짓기로 했다. 시헌과 저의 관계를, 그리고 어머니와의 관계도.
“봐. 이게 너랑 내가 안 되는 이유야. 엄마랑 인연을 끊어? 가족이랑 인연을 끊는다는 말이 그렇게 쉽게 나와?”
“!”
그를 알게 된 이래로 처음 보는 표정을 하고 싸늘하게 말하는 선우를 보고, 시헌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가족이랑 정말 인연이 끊어지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면, 넌 절대 그런 말 못 해.”
“…….”
그러다 어느덧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선우에 시헌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난 지금도 네가 나 때문에 어머니랑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것도 솔직히 마음이 너무 아파. 그러지 마. 어머니께 그동안 잘못했다고 하고, 지금부터라도 잘해 드려. 시간 나는 대로 집에도 자주자주 찾아뵙고.”
선우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 병실에 들어섰을 때처럼, 시헌 앞에 선 선우는 며칠 새 야위어 버린 친구의 손을 슬며시 잡아들었다.
“시헌아, 걱정 마. 난 평생 네 곁에 있을 거야. 너랑 세상에서 제일 친한 친구로.”
그러고는 단단히 약속이라도 하듯, 그의 손을 한 번 꽈악 쥐고 내려놓았다.
“그리고… 난 지금 누구랑 연애 감정 갖고, 그럴 생각 전혀 없어. 그건 네가 제일 잘 알잖아. 그러니까, 우리 두 번 다시 이런 얘기로 서로 얼굴 붉히지 말자.”
“선우야….”
“식사 나오는 대로 꼬박꼬박 잘 챙겨 먹고, 얼른 나아. 그게 지금 네가 날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일이야. 이만 갈게.”
“선우야.”
시헌이 급하게 손을 뻗어 선우를 붙잡았으나, 선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실을 나섰다.
***
2021년 8월 20일 14시경
강원도 정선군 정선국제종합사격장
“이게, 다….”
전시실을 돌아보는 선우의 입이 닫힐 줄을 몰랐다.
권총, 산탄총, 소총까진 그렇다 치고 기관총까지…….
사격장 본관 건물에는 한쪽 벽면 전체가 총기로 진열된 전시실이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총기를 한자리에서 본 적이 없었다. 선우는 신기한 마음에 벽에 걸린 총기들을 손끝으로 쓸어 만지며 느리게 이동했다.
“실탄이네요…!”
전시실 정중앙에 놓인 유리 전시대에는 짤막한 설명과 함께 수십 종의 총탄이 늘어져 있었다.
와아…. 손가락 끝을 전시대 위에 살포시 올려놓고 유리 안을 들여다보는 선우의 입에서 조그만 감탄이 쉬지 않고 나왔다.
“총 좋아하나 봐요.”
선우의 뒤를 느긋하게 따르던 태성이 어느새 옆에 와 섰다.
“총 안 좋아하는 남자도 있나요?”
정말로 궁금한 걸 묻는다는 듯, 눈동자를 반짝이며 되묻는 이를 보고 태성은 웃음을 터트렸다.
“골프장 대신 진작 여기를 데려올 걸 그랬네.”
“…….”
태성의 말을 뒤로하고, 선우는 금세 자리를 이동했다. 저는 완전히 뒷전이고, 총기 구경에 여념이 없는 선우를 보고 어이가 없어진 태성은 제자리에 멀뚱히 서서 혼자 실소를 했다.
전시실 막바지에는 사격장을 소개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국제 기준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이 공인 사격장에서는 국제 대회나 국가대표 선출을 위한 시합도 종종 열리는 모양이었다. 그를 기념하기 위해 벽 한 면에는 메달을 목에 건 선수들의 사진이 빼곡히 걸려 있었다.
사실 선우는 남자의 전적으로 보아 오늘 데리고 온 이곳도 허가 신고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불법 사업장은 아닐까, 내심 걱정했었다. 그리고 전시실을 나서는 길에 출입구에 국제 공인 인증 마크가 떡하니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선우는 크게 안심했다.
본관 구경을 모두 마치고 두 사람이 로비로 돌아왔을 때, 마침 양승준이 도착했다.
***
여전히 더운 날씨였으나 쾌청한 공기와 높은 하늘이 가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렸다. 양승준과 윤해진을 비롯한 네 사람은 안전요원의 안내를 받으며, 푸른 잔디가 깔린 야외 사격장으로 나왔다.
레인마다 설치된 차양대 아래 서서, 선우는 안전요원으로부터 지급받은 방탄조끼를 착용했다. 이어 귀마개를 목에 걸자, 안전요원은 선우에게 산탄총 하나를 건네주고 물러났다.
묵직한 총을 두 손으로 받아든 선우는 이내 고개를 들어 옆 레인을 바라보았다. 검은색 방탄조끼와 귀마개를 차례로 걸친 남자는 어느덧 고글까지 착용한 채였다. 차양대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서 있던 장총을 무심한 손길로 집어 든 그는 한쪽 옆구리에 총을 척, 끼고 두 손에 장갑을 꼈다.
익숙한 일인 양, 누군가의 도움 없이 혼자서 채비를 마친 남자는 곧 날씨를 가늠하는 듯 하늘을 빙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돌연 한 손에 총을 거꾸로 든 채, 저벅저벅 걸어 선우 앞에 섰다.
남자가 해를 등지고 자신 앞에 서자, 선우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또 무슨 장난이라도 떠오른 건지 남자는 미묘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한선우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갑자기 팔짱을 끼고 눈을 한껏 내리깐 남자는 제게만 들릴 정도의 크기로 나직이 속삭였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숙여 선우의 귓가로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만 봐요. 침 떨어지겠다.”
으악! 찰기가 느껴질 정도로 끈적한 남자의 목소리에 선우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제 시선을 눈치채고 있었다니……. 남자의 입술이 스치듯 닿은 귓바퀴가 삽시간에 불에 덴 듯 뜨겁게 달아올랐다.
금세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남자가 태연하게 저를 지나치자, 선우는 그제야 슬그머니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내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낮은 웃음소리에 선우는 뜨끈한 귓가를 박박 문질러 댔다.
“연우 씨 먼저 한번 해 볼래요?”
레인 뒤편에서 태성이 큰 소리로 물었다. 선우는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선우가 목에 걸려 있던 귀마개를 착용하자, 태성의 옆에 서 있던 안전요원이 다가와 선우를 사선1) 앞으로 안내했다.
안전요원은 선우에게 총기 사용법과 주의 사항을 차례로 알려 주고는 선우가 들고 있던 산탄총에 실탄 두 발을 장전했다. 똘망똘망한 눈으로 안전요원의 설명을 듣고 있던 선우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른쪽 어깨 위에 총을 얹었다. 안전요원이 마저 자세를 잡아 주고, 선우는 동그란 뺨을 개머리판 위에 밀착시켰다.
머지않아 공중을 향해 총구를 겨눈 선우는 숨을 한 번 크게 고르고 신호를 외쳤다.
“고!”
잠시 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파란 하늘 위로 주황색 원반이 떠올랐다. 원반의 움직임을 빠르게 쫓던 선우가 한순간 방아쇠를 세게 잡아당겼다.
탕!
반동으로 어깨가 조금 밀리는가 싶더니, 더운 공기 사이로 매캐한 화약 냄새가 풍겨왔다. 동시에 하늘에서는 팍! 원반이 터지며, 색색깔의 파우더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선우는 잠시 자세를 풀고 총을 어깨 아래로 내렸다. 공중에서 흩날리는 주황빛 조각을 보고, 선우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가슴을 울릴 정도로 우렁찬 총소리, 시원하게 터지는 피전2)에 갑갑했던 속이 확 뚫리는 듯했다. 어깨와 팔에 가해지는 진동에도 선우는 짜릿함을 느꼈다.
선우는 다시 자세를 다잡고, 곧바로 두 번째 신호를 외쳤다.
“고!”
탕!
“오, 좋네요. 자세도 안정적이시고.”
이번에도 명중이었다. 총 끝을 꺾어 탄피를 빼내는 동작이 제법 자연스러웠다.
“열 발 드릴게요. 이번에는 장전부터 혼자 해 보시겠어요?”
안전요원은 선우의 조끼에 탄환 8개를 넣어 주고, 두 개는 손에 직접 쥐여 주었다. 선우는 곧장 총알 두 개를 장전하고 어깨 위로 올린 총을 단단히 붙들었다.
“고!”
탕, 탕!
신호를 외친 뒤 방아쇠를 당기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주저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탕, 탕!
퍽! 퍽! 초보자에게서는 나오기 힘든 원반 터지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레인 뒤편에 놓인 좌석에 앉아 채비 중이던 양승준이 순간 움직임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에 빨강, 노랑, 파랑 빛깔 파우더가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어쭈?”
양승준은 내친김에 팔짱을 끼고 연우의 사격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탕, 탕! 비뚜름하게 앉아 다리를 꼬고 있던 그는 두 발의 총성에 꼰 다리를 풀었다. 탕, 탕! 이어진 두 발의 총성에는 허리를 바로 세웠다.
탕, 탕! 마지막 두 발의 총성이 울렸을 때, 양승준은 팔짱을 풀고 태성을 쳐다봤다. 양승준과 태성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보다가, 동시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와, 이건 뭐지?”
어깨 위에 총을 턱, 얹은 양승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우, 정말 잘하시네요. 자세도 좋으시고. 처음 맞으세요?”
안전요원이 선우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그런데 총을 내리는 선우는 내심 아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열 발 중 여덟 발을 맞췄는데, 놓친 피전 두 개에 미련이 남은 것이었다. 그 마음을 읽고, 안전요원은 일반인이 이 정도면 아주 수준급인 거라며 선우를 다독였다.
“연우 씨. 언제 클레이 사격 해 본 적 있어?”
양승준이 다가와 물었다.
선우는 기실, 매년 있는 사격 훈련에서 단 한 번도 1등급을 놓친 적이 없었다. 사격 자체를 좋아하는 것은 물론이고, 타고나길 집중력과 반사 신경이 워낙 뛰어난 편이기도 했다. 학부생 시절, 사격 실습 때는 심지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선수로 전향해 보라는 소리도 들은 적이 있었다. 물론 우스갯소리였지만.
그러니 권총에 비해 조준이 쉬운 샷건으로 이 정도 성적을 내는 건 선우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양승준의 질문을 듣고 나니, 제가 너무 아무 생각 없이 총을 쐈나 싶은 생각이 이제서야 들었다. 조금이라도 못 쏘는 척을 했어야 했나, 괜한 의심을 사면 어쩌지…….
“어… 그, 예에전에요…….”
선우는 뒤늦게 어리숙한 대답을 내놓았다.
“예전이라기에는 너무 잘하는데? 어째 내가 오늘 상대를 잘못 고른 것 같다?”
양승준이 목과 어깨를 돌려 가며 몸을 풀었다.
“문 대표! 그냥 개인전으로 해도 되겠는데?”
그리고 다가오는 태성을 향해 외쳤다. 본래는 초보인 (줄 알았던) 연우를 위해 윤해진을 포함해 둘씩 팀을 나눠 게임을 진행하려고 했으나, 연우의 실력을 보고 양승준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스키트로 할까?”
오랜만에 적수가 되는 사람을 발견했다는 생각에 양승준의 목소리가 살짝 들떴다.
“의원님, 처음부터 너무 세게 가시는 거 아닙니까?”
그새 선우의 옆자리에 선 태성은 괜히 한번 앓는 소리를 해 봤지만, 그의 얼굴에도 이미 즐거움과 기대감이 만연해 있었다.
스키트는 반원 모양의 사격장 내에서 사대3) 위치를 순차적으로 바꿔 가면서 표적을 쏘는 방식이었다. 반원 내에는 총 8개의 사대가 있었고, 표적은 반원 양쪽 끝에 위치한 두 개의 트랩 하우스4)에서 던져졌다.
처음에는 계속해서 바뀌는 사대 위치와 양쪽에서 날아드는 피전에 선우가 조금 주춤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연습 삼아 딱 한 라운드를 돌고 나니 선우는 진작 룰에 적응한 뒤였다. 오히려 어느 정도 감을 익히고 나니, 피전의 움직임에 가장 빠르게 반응하는 것은 나이가 제일 어린 선우였다.
본 게임은 25발씩, 총 3라운드까지만 진행하기로 했다. 모두 비슷한 실력을 가지고 있어 승패를 가르기가 쉽지 않았으나, 오늘 행운의 여신은 선우의 편인 듯했다.
태성과 선우, 양승준이 점수 차가 거의 나지 않는 상황에서 마지막 라운드에 양승준은 불발탄을 쐈다. 한번 호흡이 흐트러지고 나니, 그 후 양승준의 적중률은 현저히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남은 두 사람이 동일한 점수로 마지막 한 발을 남겨 뒀을 때, 갑자기 표적 근처로 새가 날아드는 바람에 태성은 피전 하나를 놓쳤다.
마지막에 운까지 따라 주었던 선우가 오늘의 최종 승리자였다.
***
사격을 마친 이들은 저녁 식사 후 깊은 산중에 있는 한 별장으로 이동했다. 통나무로 지어진 목조 주택은 겉으로 보기에는 낡고 평범한 구옥이었으나, 현대식 리모델링을 거친 내부는 조금도 오래된 감이 없었다. 오히려 목재가 주는 아늑함에 그와 어울리는 고풍스러운 인테리어가 더해지니 중후하면서도 고즈넉한 느낌을 주었다.
별장 1층에는 주방과 식당, 다용도실 외에 커다란 손님맞이용 응접실이 있었고, 계단을 따라 2층을 오르면 복도를 따라 여러 개의 작은 방이 나 있었다. 네 사람은 잠시 개인적으로 피로를 풀다가, 밤 10시쯤 응접실에 모여 술을 마시기로 하고 각자 방으로 흩어졌다.
선우가 방에 딸린 욕실에서 막 씻고 나왔을 때였다. 두터운 나무 벽을 타고 희미하게 말소리가 넘어오고 있었다. 옆방은 윤해진이 사용하기로 했는데, 그새 양승준이 그를 찾아간 모양이었다. 선우는 숨을 죽이고 옆방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똑똑.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선우는 고개만 돌려 문을 바라보다가, 이내 그 앞으로 다가가 빼꼼 문을 열어 보았다. 문 앞에는 편안한 옷차림을 한 남자가 양손에 위스키가 담긴 유리잔을 들고 서 있었다. 한 손에는 검지와 중지 사이에 시가 한 개비를 꽂아 든 채였다.
“술친구를 찾고 있는데.”
남자는 보조개가 폭 파인 얼굴을 하고 잔을 슬쩍 위로 들어 보였다. 찾아온 이의 정체를 확인하고 선우가 문을 크게 열자, 그는 잔 하나를 선우에게 건네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원래부터 정해진 제 자리인 양 자연스럽게 창가 옆에 놓인 티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얼떨결에 잔을 받아든 선우는 태성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곧 방문을 닫고 그의 건너편에 앉았다.
1인용 소파에 느슨하게 기대앉은 그는 말없이 시가를 태웠다. 매끈한 입술에 둥근 시가 끝이 닿았다 떨어지자, 머지않아 입술 새로 새하얀 연기가 흘러나왔다. 꽂힌 것이 시가인지, 남자의 입술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게 뭐가 됐든, 선우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저를 바라보는 눈빛에 호기심이 한가득이라, 태성은 비식 웃으며 말을 건넸다.
“피워 볼래요?”
“해 봐도 돼요?”
태성이 묻자마자 대답이 냉큼 뒤따라왔다. 태성은 제 손가락에 걸쳐 있던 시가를 선우에게 넘겨주었다.
“담배 피워 본 적 있어요?”
“아니요.”
선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불이 붙지 않은 쪽 끝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살짝만 빨았다 떼요. 깊게 말고. 입안에 연기를 잠깐 머금었다가 뱉는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잠시간, 입이 닿는 둥근 면을 반히 내려다보았다. 왠지 불량스러운 일을 난생처음 해 보는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가슴이 콩닥거렸다. 스무 살이 되어 처음 술을 입에 댔을 때 느꼈던 두근거림, 그때와 비슷한 감정인 것 같기도 했다.
선우는 손에 쥔 시가를 천천히 들어 올려 입가로 가져다 댔다. 남자의 입술이 닿았던 곳에 제 입술을 묻으니 괜히 심장 한구석이 저릿했다. 손끝이 살짝 떨리는 것을 티 내지 않으려고, 선우는 시가를 잡은 손에 힘을 바짝 쥐었다. 그러고 곧이어 숨을 깊게 들이마시니,
켈룩, 켈룩!
순간 눈앞이 핑-! 돌았다. 입으로 빨아들인 연기가 삽시간에 머리끝까지 파고들자, 돌연 시야가 새하얘지며 심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어욱! 목구멍을 긁고 지나간 매캐한 내가 코와 눈을 빠르게 잠식하니, 기침이 절로 나오고 순식간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선우는 띵하게 울리는 골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이런 걸 도대체 어떻게 하시는 거예요…….”
허엉…. 이럴 줄 몰랐다는 듯, 조금 억울한 눈을 하고 저를 쳐다보는 선우에 태성은 큭큭거리며 낮게 웃었다.
“가만 보면, 은근히 마초스러운 거 좋아해.”
“제가, 요?”
쿨럭, 선우는 연신 기침이 터져 나오는 입을 손등으로 틀어막으며 태성에게 시가를 넘겼다. 그러고는 서둘러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침 제가 씻기 전 침대 옆 협탁에 놓아두었던 생수병이 눈에 들어왔다. 선우는 여전히 맵고 따가운 눈과 코를 한껏 구겼다 펴고는 얼른 손을 뻗어 생수병을 제 앞으로 가지고 왔다.
“총, 시가. 또 뭐에 관심 있어요? 가죽 재킷에 오토바이?”
“아뇨. 그런 거 관심 없어요.”
웃음기 섞인 물음에 선우는 고개를 빠르게 내젓고 곧바로 물을 들어 마셨다. 관심 있다고 말하면 또 뭔가를 시킬 것 같다는 생각에 선우는 부러 딱 잘라 말했다.
근데, 가죽 재킷에 오토바이라니……. 그조차도 남자가 하면 참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찰나에 머릿속을 스쳤다.
“총 잘 쏜다는 말은 왜 안 했어요?”
생수병을 입에 댄 채로 허공을 보며 가죽 재킷을 입은 남자를 상상하고 있자니, 그 상상 속의 인물이 또다시 질문을 해 왔다. 선우는 들고 있던 병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태성을 쳐다봤다.
“물어보신 적 없잖아요.”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대답하는 선우에 태성은 순간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네. 내가 물어본 적이 없었네.”
태성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고는 잔을 들어 위스키 한 모금을 마셨다.
“…그럼, 대표님은… 왜 봐주셨어요?”
그리고 돌아오는 질문에 잠시 멈칫한 그는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았다.
“티 났어요?”
“네. 엄청요.”
클레이 사격 경험이 거의 없긴 했으나, 언뜻 봐도 남자의 솜씨는 꽤 대단해 보였다. 폼도 무진 안정적이었고, 어느 방향에서 표적이 날아오든 따라가는 움직임에도 거침이 없었다. 그런 그가 경기장 내로 새 한 마리 날아든다고 표적을 맞히지 못했을까. 마지막 한 발을 삐끗한 것이 도리어 더 어색했다.
그게 티가 안 날 거라고 생각했다니……. 선우의 입에서 피식, 가벼운 바람이 샜다.
“내가 총 들고 있으니까 멋있었어요?”
“네에…?”
그런데 갑자기 남자가 뜬금없는 소리를 해 왔다. 본인 입으로 기가 막힌 소리를 해 대는 이를 선우가 아연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계속 쳐다보길래.”
“제, 제가요?”
남자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완전히 기대며 선우의 눈을 마주했다. 턱을 위로 조금 치켜든 그는 두 눈을 내리깐 채였다. 그 모습이 나른하면서도 한편으론 오만해 보였으나, 두 분위기 모두 남자와는 소름 끼칠 만큼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아니야?”
“…….”
남자는 그 자세 그대로 시가를 입에 물었다. 제 입술이 닿았던 시가 끝이 다시 남자의 입안을 파고드니, 선우는 어쩐지 그를 쳐다보는 것이 부끄러워졌다. 선우가 말은 않고 눈동자만 데룩데룩 굴리고 있으니, 연기를 후- 뱉어 낸 태성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이상하네. 한선우는 마음에 드는 거 보면 눈이 반짝반짝해지던데.”
그러더니 문득 한쪽 팔꿈치를 소파 팔걸이에 올려놓고는 손바닥 위에 턱을 괴었다.
“나는 참느라 혼났는데.”
“……?”
선우가 의아한 얼굴을 하고 태성을 쳐다보자, 그는 곧 양 입꼬리를 부드럽게 끌어 올렸다.
“총 쏘는 한선우가 너무 섹시해서.”
“!”
선우는 일시에 온몸의 피가 몽땅 얼굴로 쏠리는 듯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제 얼굴이 얼마나 시뻘게져 있을지 알 것 같았다.
“애기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남자더라고. 덕분에 죄책감도 좀 덜었어요.”
으아……. 선우는 민망한 마음에 안절부절못하다 이내 두 손으로 뜨끈뜨끈한 양 뺨을 감싸 쥐었다. 그 모습을 보고 태성은 특유의 장난기 섞인 얼굴로 목을 울려 웃었다.
“아, 그런데.” 그러다 언뜻, 무언가가 생각난 사람처럼 운을 뗐다.
“조금은 자제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아… 네, 조심할게요. 제가 너무 부주의했죠.”
양 의원이 눈치챌지도 모르는데……. 그렇지 않아도 속으로 염려하고 있던 차라, 선우는 태성의 말에 곧바로 수긍했다.
“아니. 그거 말고.”
그런데 태성은 되레 고개를 슬쩍 저었다.
“네 매력은 나한테만 보여 주면 된다고.”
하, 제발요…. 조그맣게 앓는 소리와 함께 선우가 고개를 푹 떨궜다. 양 볼을 감싸고 있던 두 손은 이제 얼굴 전체를 가리고 있었다. 수그린 고개 너머로 드러난 목덜미와 귓등이 고운 다홍빛을 띠고 있었다.
“신분은 걱정 안 해도 돼요.”
어느새 남자의 목소리가 진중해졌다. 선우는 슬며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소속사에 연습생 신분 하나 만들어서 넣어 놨어요. 25살, 연기 지망생. 연기 전공하다가 지금은 휴학 중이라고 둘러대요.”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저… 말이 나온 김에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말해 보라는 듯, 태성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저번에 골프장에서, 양 의원이 김경택 청장님께 10년 전에 일 처리를 맡겼다고……. 그게 혹시… 저희 아버지 일을 말하는 거였을까요?”
“…아마 그럴 거예요.”
하, 착잡한 마음에 선우는 작게 한숨을 토했다.
“양승준이 그날 얘기했던 것처럼, 김경택이 옛날부터 정치인들 뒤를 많이 봐 주고 다녔어요. 그 사람, 본인은 워낙 배경이 없었거든. 한 경위도 알고 있죠? 성골이니, 진골이니 하는 것들.”
선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경찰 내부에는 극심한 골품제가 존재했다. 경찰들 사이에서 경찰대학 출신을 ‘성골’, 간부 후보생이나 고시 출신을 ‘진골’이라고 부르는 것은 공공연한 일이었다. 다수가 불만을 갖고 있었지만 이 단단한 유리 벽은 수십 년 동안 깨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말이 좋아 ‘성골’일 뿐. 같은 경찰대학 출신들 사이에서도 ‘진짜 성골’은 따로 있었다. 경찰대를 다니다 보면, 전교생에 한두 명쯤은 집안이 대대로 경찰 고위 간부직을 지내 온 동창들이 있곤 했다. 경찰대 출신들 사이에서 ‘성골’은 주로 그들을 의미했다.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그때 당시 경찰 내부는 지금보다 더 고인 물이었을 거예요. 김경택도 위로 올라가다 보니 알게 됐겠지, 본인의 한계를.”
물론 경찰대 출신이 다른 경찰들에 비하면 승진이 쉽고 빠른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수뇌부까지 올라가는 것은 ‘진짜 성골’들이나 가능한 얘기였다.
“그래서 제 배경이 되어 줄 만한 정치인들 꽁무니를 진작부터 쫓아다녔던 모양인데, 그때 양기용이 아들이 친 사고를 무마해 달라고 부탁을 해 온 거죠. 마침 그 당시 본인이 라이벌로 여겼던 진정한 성골이 한 경위 아버님의 상사였어요. 아마도 이거다 싶었을 거예요.”
김경택 기수를 전후로 최대 권세를 가진 성골은 박우진이었다. 과거 치안국장5)을 지낸 조부, 초대 경찰청장을 지낸 큰아버지를 두고 있으니 그보다 더 화려한 배경은 없었다.
학창 시절부터 가는 곳마다 중심이 되고 마는 박우진이 김경택에게는 눈엣가시와도 같았다. 제아무리 기고 난들 저보다 후배인 박우진을 앞지를 수가 없으니, 김경택은 호시탐탐 박우진을 노렸다.
그러던 차에 때마침 기회가 찾아왔다.
“아버님 사고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김경택은 일을 숨기는 게 아니라 일부러 더 키웠어요. 본인의 선후배, 부하들을 총동원해서 경찰 내 여론까지 조성해 가면서.”
“…….”
“서울청 수사과가 실적으로 부하들을 가혹하게 몰아치는 바람에 다들 힘들어하고 있다고. 한재민 경감의 일은 그동안 참아 왔던 고름이 터진 거라고.”
그래야 경찰 상부와 박우진을 흔들 수 있으니까.
우연인지 필연인지, 사건이 언론에 노출되면서부터는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과도한 업무에 시달려 자살한 경관의 소식을 접하고, 국민들은 불같이 달아올랐다. 연일 경찰 상부를 향한 분노와 비난이 쏟아졌고, 경찰청은 이를 잠재우기 위해 서둘러 대대적인 조직 개편을 시행했다.
그 과정에서 서울청 윗선의 몇몇은 옷을 벗어야 했고, 박우진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서울을 떠났다. 그리고, 김경택은 그 일을 계기로 양기용에게 아도니스 회원들을 두루 소개받았다.
아도니스의 날개를 단 이가 경찰청의 꼭대기에 올라앉는 데 걸리는 시간은, 10년이면 충분했다.
“사실… 한 경위한테는 미안한 얘기지만, 김경택이 그 자리까지 올라가게 된 데에는 나의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도 어느 정도 지분이 있어요.”
“…….”
박우진을 통해 알아낸 사실들을 모두 풀어놓고, 태성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반면, 어딘가 멍한 표정의 선우는 생각에 잠긴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버지의 사건 이면에 있었던 일들이라는데, 제게는 너무 와닿지가 않았다. 선우는 초점 없는 눈을 하고, 손가락으로 애꿎은 입술을 연신 쥐어뜯었다.
그러다 조금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김경택 청장이 제 아버지 사고를 이용해서 청장까지… 됐다는 말인가요…?”
“꼭 그 일이 아니었더라도 욕심 많은 사람이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위로 올라갔을 거예요. 하지만 어쨌든, 그 과정에서 아버님의 사고가 이용된 건 맞긴 하죠.”
“…….”
말도 안 돼…. 선우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문제는, 양승준이 아버님을 왜 죽였는지. 그걸 모르겠다는 건데….”
“……죽여요?”
태성의 말에 선우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런 선우의 반응에 태성 또한 놀라, 이마에 선이 가도록 눈썹을 한껏 치켜올렸다.
“…설마, 아버님이 진짜로 자살을 하셨을 거라고 믿었어요?”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고개를 힘없이 젓는 선우의 얼굴에 순식간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선우 역시 아버지가 자살했을 리 없다고, 수천 번도 더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타인의 입으로 확언을 듣는 것은 또 다른 얘기였다. 갑자기 거세게 휘몰아치는 소용돌이 속에 빠진 것처럼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옥상에서 떠밀기라도 한 걸까요…?”
선우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도 그게 궁금한데.”
태성은 한 손으로 제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따 상황 봐서 자리 피해 줄 테니까, 양 의원하고 얘기 한번 해 볼래요? 내 앞에서는 속에 있는 얘기를 다 하진 않을 거라.”
“……네.”
선우는 태성과 눈을 마주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약을 한 상태라면 정신이 없어서, 본인이 하는 말을 백 프로 다 기억하진 못할 거예요. 약 기운이 조금 올랐다 싶으면 그때 궁금한 거 조심스럽게 물어봐요.”
“…네. 그럴게요.”
선우의 대답에 태성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불현듯, 태성은 허공을 보며 눈을 날카롭게 떴다. 짙은 눈썹이 갑자기 모양을 구기자 그걸 보고 있던 선우도 따라 눈썹을 꾸물거렸다.
“이건 뭐, 발정 난 개새끼도 아니고.”
“?”
입가에 비소를 머금고 냉담하게 말하는 태성을 선우가 의문이 담긴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다 곧 그의 말뜻을 이해하고는 한 손을 들어 떡 벌어진 제 입을 틀어막았다.
‘앗! 하윽, 읏!’
벽을 타고 옆방에서 윤해진의 신음성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사이 양승준의 거친 욕설이 섞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소리에 선우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찰싹!’
살갗을 세게 내리치는 소리가 몇 차례 들리는가 싶더니, ‘악!’ 이어 윤해진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려왔다. 선우는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디 가요?”
급히 방을 나서려는 선우의 손목을 태성이 빠르게 잡아챘다.
“이거, 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선우가 눈을 크게 뜨고 심각한 얼굴로 묻자, 태성은 싱겁게 웃었다.
“침대 사정은 두 사람이 알아서 해결하게 둡시다.”
태성은 반쯤 줄어든 시가를 위스키가 남은 유리잔에 박아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거 엿듣는 취미 없으면 우린 내려가죠.”
***
응접실로 내려간 두 사람이 양승준과 윤해진을 기다리며 한창 체스를 두던 중이었다. 파자마 차림에 실크 가운을 걸친 양승준이 어슬렁거리며 응접실에 들어섰다. 한 손에는 가죽 재질의 작은 시가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일찍들 내려왔네?”
선우가 벽에 걸린 괘종시계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시간은 어느덧 10시 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윤 비서님은요?”
“자.”
선우의 물음에 짤막하게 대답한 양승준은 넓은 앤티크 소파에 널브러지듯 걸터앉았다.
선우는 조용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 1층으로 내려오는 길에 몇 번이고 들은 윤해진의 비명 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자는 게 아니라 혹시나 내려올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은 아닐지, 내심 걱정이 일었다.
태성이 체스판을 정리하는 동안 양승준은 테이블에 세팅되어 있던 양주병을 땄다. 금세 술 세 잔을 따른 그는 두 잔을 태성과 선우에게 각각 밀어 넣어 주고는 익숙한 손길로 테이블 밑에 달린 서랍을 열었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존재조차 모를 만큼 얇은 서랍이었다.
양승준은 서랍에서 하얀 플라스틱 통을 하나 꺼내 뚜껑을 열었다. 열린 입구를 손바닥에다 대고 톡 한 번 내리치니,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당연하게도 약이었다.
알약 한 알을 술잔에 넣은 그는 테이블 위에서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동그랗던 알약이 파스스 녹아내리며 노란 액체 사이로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역시, 이거 이렇게 깔끔하게 만드는 건 문 대표네만 한 데가 없어. 술이 술처럼 술술 넘어가잖아.”
술 한 모금을 들이켠 양승준이 말했다. 그는 싸구려 약은 술에 타면 뒷맛이 영 좋지 않다는 말을 덧붙였다.
“연우 씨 덕에 오늘 재밌었어요. 총을 잘 쏠 줄은 미처 몰랐네.”
양승준은 가져온 시가 케이스에서 시가 한 대와 토치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라이터로 시가 끝에 몇 차례 불을 쏘니, 그 끝에 벌겋게 불이 붙나 싶더니 곧이어 하얀 연기가 얇게 피어올랐다. 양승준은 시가를 입에 물고는 소파에 온몸을 늘어뜨렸다.
탁한 눈동자가 허공을 향하고, 머지않아 싸한 시가 향이 응접실을 감돌았다. 시큼하고 쓴맛이 강한 향이었다.
“총질은 사냥이 제맛인데. 요즘은 할 수가 없으니, 원.”
“사냥이요?”
“이 야산에서 옛날에는 진짜 사냥을 했거든. 이이 할아버지랑 내 조부란 사람이랑.”
시가를 한 번 빨았다 뱉은 양승준이 턱 끝으로 태성을 가리켰다.
“멧돼지도 잡고, 사슴도 잡고.”
“그럼 여기는…….”
선우가 응접실을 빙 둘러보며 물으니,
“호랑이 영감님 사냥터.”
텅 빈 눈을 한 양승준이 다시 한번 시가를 입에 가져다 대며 답했다. 그러다 그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사람처럼 늘어진 몸을 발딱 세웠다. 흐리멍덩하던 눈에도 어느새 초점이 또렷하게 잡혀 있었다.
“문호 회장님 알아요?”
“…회장님이요? 사진으로만 봤어요.”
“엄청났지. 그 옛날에 씨름 선수를 했을 정도니까. 난 진짜 그 양반이 호랑이라도 되는 줄 알았다니까? 덩치는 어마어마하지, 눈은 또 얼마나 매서운지.”
양승준은 문호 회장의 몸집을 얘기하며, 양팔을 좌우로 크게 펼쳤다. 그런 그의 뒤로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커다란 호랑이 가죽이 벽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고상한 목제 서랍장 위에 거꾸로 내걸린 호랑이는 흑요석을 박아 넣은 것만 같은 새카만 눈동자로 정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이가 괜히 이렇게 큰 게 아니야.”
양승준이 태성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선우의 시선이 자연스레 양승준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향했다. 그리고 선우는 그의 말에 온전히 동의했다. 세간에 널려 있는 과거 사진 속에서 문호 회장은 늘 남들보다 머리 하나, 어깨 한쪽은 더 있는 듯 보였으니까.
“어릴 땐 그 양반이 왜 그렇게 무서웠나 몰라. 회장님 본 날이면 그날 밤엔 꼭 자다 말고 오줌을 지렸어.”
“다 옛날 얘기죠.”
“눈빛이 하도 날카로워서 잊히지도 않아. 눈만 마주쳐도 꼭 내 속을 다 꿰뚫어 보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런가, 아직도 나는 한 번씩 회장님이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도 들어.”
“그럴지도 모르죠.”
주절주절 과거 담을 늘어놓는 양승준에게 태성은 옅게 웃는 얼굴로 응수했다. 양승준은 슬슬 입이 풀리는 듯 제 어릴 적 회장님과 있었던 에피소드들을 하나씩 풀어 댔다.
술 한 잔에 알약 한 알.
오고 가는 대화 속에 양승준의 술잔으로 네 번째 알약이 들어갔을 때였다. 태성이 시가를 가지고 오겠다며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양승준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고개를 대충 끄덕이고는 소파 등받이에 목을 꺾어 넘긴 채 시가를 태웠다. 그러다 태성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갑자기 목에 힘을 주고 고개를 바로 세웠다.
그는 이어 한 팔을 접어 소파 등받이에 올려놓고는 알딸딸한 머리를 손으로 받쳤다. 취기가 오른 눈은 조금 부은 듯했고, 양 볼은 상기된 채였다.
“연우 씨, 안 피곤해요?”
양승준은 게슴츠레 뜬 눈으로 제 오른편 대각선에 앉은 선우를 힐끔거렸다.
“네. 씻고 나니까 좀 괜찮아졌어요.”
“역시 젊음이 좋긴 좋네.”
선우는 다가온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의원님 젊었을 때는 어떠셨을지 궁금해요.”
“나 젊었을 때?”
“네. 지금 문 대표님 정도 나이였을 때……. 그때도, 지금처럼 이렇게 근사하셨겠죠?”
“근사하기는.”
양승준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면서도 근사하다는 말에는 기분이 좋기는 한지, 희미하게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하기 싫은 거 억지로 끌려다니면서 하는 인생이 근사하긴 뭐가 근사해. 나 좋은 거 하고 사는 삶이 근사하지, 연우 씨처럼.”
“……의원님 지금 하시는 일은… 하고 싶으셨던 일이 아닌가요…?”
“무슨. 난 정치할 생각 전혀 없었지. 할아버지에 아버지, 삼촌들. 어렸을 때부터 지겹게 봐 와서 나는 정치라면 아주 지긋지긋한 사람이야.”
뜻밖의 대답에 선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찾아봤던 수많은 인터뷰 자료에서 양승준은 늘 한결같이 얘기했다. 집안 어른들을 보고 자라면서 어릴 적부터 바른 정치인이 되는 것을 꿈꿔 왔다고. 정치는 본인 인생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라고.
그런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속마음은 완전히 정반대의 것이었다.
“어… 근데 결국은 정치를 하고 계시네요…?”
“아버지한테 저당 잡힌 인생이라.”
양승준의 코에서 자조적인 헛바람이 새 나왔다.
“저당을 잡혀요?”
“그냥, 흔한 얘기야.”
시가를 얕게 빨았다 뗀 그는 제 얘기를 남 얘기하듯 했다.
“네가 사고 친 거 수습해 줄 테니 이제부턴 내가 하라는 대로 하고 살아라, 뭐 그런 거 있잖아. 어차피 처음부터 내 맘대로 살게 두지도 않았을 거면서.”
“…….”
“그래서 난 연우 씨처럼 하고 싶은 일 하고 사는 사람들 보면 부럽더라고. 한 번쯤은 가족들 눈치 안 보고 자유롭게 살아 보고 싶어. 정말이지, 너무 피곤해.”
“…….”
양승준은 귀찮다는 듯 머리를 내젓고는 술병을 집어 들었다. 처음부터 쉬지 않고 홀짝이더니 술이든 약이든 취하긴 취한 모양인지, 자신의 잔을 채우는 손동작이 몇 차례나 버벅거렸다. 선우는 그런 그를 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의원님.”
으응? 양승준은 부르는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고 느리게 답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그게 어떤 사고였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
양승준은 순간 술을 따르던 행동을 멈췄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별거 아니야.”
이내 정말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얘기했다.
“실수로 일어난 작은 교통사고였어.”
“교통…사고요…?”
“뭘 그렇게 놀라?”
“아, 아닙니다….”
그의 말대로 선우는 잠시 놀랐다. 그러나 곧 양승준이 언급하는 사고가 제 아버지의 일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금세 실망하고 말았다.
“진짜 별거 아니었는데.”
그게 그냥 그렇게 뒤져 버릴 줄 누가 알았어.
“…!”
혼잣말처럼 뱉어 낸 그 말이 아니었다면 계속 그랬을 터였다.
“교, 교통사고 상대가…… 사망…했나요…?”
“…….”
픽, 양승준은 싱겁게 한 번 웃고는 입안에 술을 털어 넣었다.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선우는 그의 냉소적인 표정과 태도만으로도 충분한 답을 얻었다.
교통사고라니…….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다. 아버지가 정말로 투신했거나, 누가 강제로 떠밀었을 것으로나 예상했지, 다른 원인으로 사망했을 것이라는 건 상상치도 못했던 일이었다.
선우는 몹시도 심란해졌다. 양승준이 말하는 사고의 피해자가 제 아버지가 아닐 수도 있었지만, 또 맞을 수도 있었다. 교통사고를 냈다면 어딘가에는 그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할 텐데, 그에 관해 조사하면서 교통사고와 관련된 사건 기록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럼, 이 사고를 무마하기 위해서 김경택을 끌어들였다는 걸까…….
“이번엔 내가 하나 질문할까?”
“……네?”
생각에 잠긴 선우에게 갑자기 양승준이 말을 건넸다.
“내가 연우 씨한테 비밀을 얘기해 줬으니, 연우 씨도 나한테 비밀 하나 얘기해 줘야지.”
“……제… 비밀이요…?”
돌연 양승준의 한쪽 입꼬리가 하늘을 향했다.
“본명이 뭐야?”
“……네…?”
“스물다섯 살, 배우 지망생 한연우 말고. 진짜 네 이름이랑 나이, 어떻게 되냐고.”
“……!”
쿵.
심장이 발밑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선우는 헛숨을 작게 들이켰다. 양승준의 눈빛이 먹이를 발견한 매와 같이 번뜩이고 있었다.
“……무, 무슨 말씀…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진짜 몰라?”
“……네.”
선우는 그를 외면하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다른 질문으로 하지.”
“…….”
“이름, 직업까지 숨겨 가면서 문 대표 옆에 붙어 있는 이유는?”
하, 나직이 숨을 토해 낸 선우가 두 손을 맞잡았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렇게 긴장할 거 없어. 그냥 궁금해서 그래. 그 어린 나이에 신분 다 속이고 깡패 새끼 밑에 숨어 있어야 할 이유가 뭘까.”
“…….”
“연예인 지망생이라며 소속사 운영하는 놈 밑에 붙어서 데뷔할 생각도 안 하고. 뭐, 어디 빚쟁이한테라도 쫓기는 중인가?”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대답을 할 때까지 저를 향한 눈초리를 거두지 않을 기세라 뭐라도 말을 해야겠는데, 당황한 나머지 마땅히 둘러댈 이유가 생각나질 않았다.
“만일 그런 거면 문 대표가 가만히 보고만 있진 않았을 거 아니야. 설마 그런 거 하나 해결 안 해 주고 재미만 보고 있어?”
“…….”
뭐라고 해야 하지. 무슨 구실을 대야 저를 더 의심하지 않을까. 선우는 맞잡은 두 손을 번갈아 꾹꾹 눌러 가며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 언뜻 뇌리를 스치는 생각 하나에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그…… 저, 겨, 경찰…….”
“경찰?”
“제, 제가, 경찰에…… 쫓기고… 있어서…….”
허? 이것 봐라? 기가 막힌다는 듯 쳐다보는 양승준의 얼굴에 호기심이 가득 찼다.
경찰이라니, 이거 진짜 알수록 묘하네? 양승준은 곁눈질로 선우를 보며 팔짱을 꼈다.
“문 대표도 그 사실 알고 있어?”
“……네. 아, 아마도……”
양승준이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찰에는 무슨 일로 쫓기는 중인데?”
“그게…….”
선우는 곤란한 표정을 하고 이마에 손을 얹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사고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축축이 젖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 있자니 양승준이 물었다.
“뭘 그렇게 당황해해? 뭐, 어디서 사람이라도 하나 죽였어?”
“…….”
선우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양승준을 힐끔 보았다. 선우의 반응에 양승준은 눈을 점차 크게 키웠다.
“……뭐야, 진짜야? …뭐 때문에?”
“그, 러니까…….”
불안한 눈동자가 주위를 살폈다. 흔들리던 시선 끝이 테이블 위에 놓인 하얀 플라스틱 통에 닿았다.
“…야, 약이요…….”
“약?”
“…네, 네….”
“약하다 사람이 죽었어?”
“…….”
선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
“모…르겠어요…. 그냥, 같이 하던 친구가…….”
하, 양승준의 입가에서 비릿한 웃음이 퍼져 나갔다.
“그게 무서워서 이제 약도 안 하는 거야?”
“……네.”
양승준이 소파에 등을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그는 재밌는 걸 발견한 사람처럼 연신 피식, 피식 웃어 댔다.
“그래서 문 대표한테 붙어 있는 거구나. 이제야 이해가 되네.”
꿀꺽, 긴장으로 꽉 막혔던 목구멍이 침을 삼켰다.
“그렇다고 어떻게 문태성 밑에 숨을 생각을 다 했어? 연우 씨 진짜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순해 빠지게 생겨 가지고.”
의미심장한 눈길이 선우를 위아래로 재차 훑어 내렸다. 선우는 그의 시선을 피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래. 경찰 눈 피하기 그만한 데도 없지.”
“…….”
“근데 연우 씨, 조심해야 돼.”
양승준이 테이블을 향해 몸을 숙이며 술병으로 팔을 뻗었다.
“문 대표 그게 겉으론 웃고 있는 것 같아도 속은 상당히 냉철한 사람이야. 그거 지 할아버지란 인간이랑 똑같은 놈이라고. 지금이야 예쁘다고 품에 끼고 돌지 몰라도 그치 눈에 벗어나면 너, 얄짤없어.”
그가 제 잔을 채워 넣으며 말했다. 조르르르, 얼마 남지 않은 술이 금세 술잔으로 전부 넘어가고, 병 입구 끝에서 누런 물방울이 뚜욱, 뚝, 떨어져 내렸다.
“저런, 술이 다 떨어졌네.”
“아, 제가…! 가지고 올게요.”
선우가 몸을 얼른 일으켜 세웠다. 잠시라도 그의 시선과 화제를 돌릴 수 있는 기회였다. 제 뒤편에 원목으로 짜인 양주장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선우는 테이블을 벗어났다.
“엇!”
“술은 됐고.”
그리고 제 팔을 세게 잡아당기는 힘에 다시 테이블 앞으로 끌려왔다. 뒷걸음으로 걸어온 선우가 순간 중심을 잃고 몸을 휘청이자, 양승준은 그 틈을 타 잡은 팔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양승준의 위로 몸이 엎어질 것 같단 생각에 선우는 소파 팔걸이를 다급히 붙잡았다.
“난 연우 씨랑 더 얘기하고 싶은데.”
한 팔로만 몸을 지탱하고 선 선우를 양승준이 더 바짝 잡아끌었다. 어언 그의 얼굴이 코앞이었다.
“어, 어떤… 얘기를…….”
“뭘 이렇게 바짝 굳어 있어. 내가 뭘 했다고. 긴장 풀어. 이러면 더 잡아먹고 싶어지잖아.”
“…….”
양승준의 말대로 그에게 잡힌 팔이 긴장으로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문 대표 옆에다 두고 날 왜 그렇게 쳐다봤어?”
“제가… 의원님을요…?”
“그랬잖아. 사람 애간장 녹이는 것도 아니고. 힐끔힐끔 쳐다보고, 눈 마주치면 웃고.”
매캐하고 탁한 시가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양승준과 가까이 붙어 서니 조금 전 그가 태우던 시가 향이 물씬 풍겨 왔다. 제게 익숙한 것과는 달리 알싸하고 역한 기운을 가진 향이었다. 선우는 짧게 숨을 참으며 그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오해하셨다면… 죄송해요.”
“오해라고? 그 눈빛이 오해야? 말도 안 되지.”
“저는… TV로만 보던 분을 직접 보니까 신기해서…….”
“신기한 걸 보는 눈이 아닌데, 그건. 아니면, 진짜로 관심 있는 쪽이 내가 아니라 윤해진이라도 돼?”
“……아닙니다….”
선우가 고개를 잘게 저으며 기울어진 몸을 바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양승준은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듯 잡고 있던 팔을 재차 끌어당겼다. 그리고 선우의 볼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어쩌다 문 대표 눈에 먼저 띄었어. 보면 볼수록 진짜 아까워 죽겠네.”
보얀 살결 위를 타고 미끄러지는 양승준의 손을 선우가 턱, 하고 잡아챘다.
“의원님. 많이… 취하신 것 같습니다…….”
선우가 잡은 손을 아래로 끌어내리자,
“재미없기는.”
양승준은 김이 샜다는 듯 잡힌 손을 단번에 뿌리쳤다.
“그래. 나도 아직은 문 대표랑 척질 생각 없어. 시장 되기 전까지는 좋든 싫든 한배 타야 할 사람이니까.”
그는 뿌리친 손으로 선우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면서 둘만 알아야 하는 비밀을 얘기하는 사람처럼 선우를 보며 낮게 속삭였다.
“나중에 문 대표한테 팽당하면, 엄한 데 가서 방황하지 말고 나 찾아와. 너 하나 숨겨 주는 것쯤은 나한테도 일도 아니니까.”
“…….”
어금니를 훤히 드러내는 비열한 웃음과 코를 찌르는 역겨운 시가 향을 남기고, 양승준은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