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홍대 교주산 성수 사건
2021년 8월 26일 10시경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약범죄수사대
“선우야, 바쁘냐?”
조용하던 마약 1팀 사무실의 정적을 비집고, 박민호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뇨, 괜찮습니다.”
“잠깐 이리 좀 와 봐라.”
선우와 등진 자리에 앉은 박민호는 노트북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선우는 의자에 앉은 채로 발을 굴러 그대로 그의 옆자리로 이동했다.
박민호는 제 곁에 온 선우에게 노트북을 들이밀었다. 그가 보던 것은 익명성이 높기로 유명한 해외 기반 SNS 사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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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이거. 이게 요즘 많이 보이거든. 너 혹시 성수라고 들어 본 적 있냐?”
성수, 교주, 골목길.
모두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 사용되는 은어인 듯했다. 마약 판매업자들은 주로 흔하면서도 쉽고 자극적인 단어로 은어를 만들어 내곤 했다. 그래야 경‧검찰의 검색망을 피하면서도 일반인의 호기심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교주는 만드는 놈, 성수는 보나 마나 뽕인 것 같거든? 근데 이 골목이 어딘지 모르겠다는 거지.”
박민호가 노트북 화면 위의 ‘골목길’이란 글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시간대 맞춰서 홍대 도는 건요?”
“야, 이미 싹 훑었지!”
“아, 벌써 다녀오셨어요?”
“엉. 어제도 가고, 그제도 가고. 동길이 데리고 밤에 홍대 바닥 다 돌고 왔는데, 쉽지 않아. 거기 골목이 한두 개도 아니고, 그냥 무작정 가서는 소득이 없어. 시간 낭비야.”
박민호가 머리를 절레절레 털어냈다.
으음…. 선우가 노트북 옆에 놓인 마우스를 잡아 휠을 도로록도로록 굴렸다. 스크롤이 내려가며 유사한 형태의 게시물 여러 개가 빠르게 화면을 스쳤다.
“그럼… 제가 상준이를 좀 만나 볼까요?”
***
점심시간이 다 지난 패스트푸드점은 무척이나 한산했다. 때늦은 장마로 연일 비가 와서 더 그런 듯했다. 매장 한쪽 구석에 자리한 박민호와 선우가 빗물 맺힌 유리창을 보며 한가로이 프렌치프라이를 먹고 있을 때였다.
“어, 왔다!”
투명한 자동문이 열리고, 매장 안으로 상준이 들어섰다. 문 앞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금세 박민호와 선우를 발견하고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는 베이지색 트렌치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씩씩하게 다가왔다.
“상준이 오랜만!”
“야, 안 덥냐? 한여름에 무슨 바바리야.”
박민호가 옷차림에 핀잔을 주자, 의자를 끌어 자리에 앉던 상준이 순간 발끈했다.
“아, 이 형님. 패션을 몰라도 너무 모르시네! 원래 이 패션 피플들은 계절을 앞서 나가는 거거든요.”
“야, 이씨. 그 패션 피플인가 뭔가 하다가 땀띠나 뒤지겄다.”
“아니, 씨발 그럼 어떡해요. 존나 몇 달을 별러서 샀는데, 딱 보니까 올해도 가을은 없어. 이러다가 금방 또 추워진다니까요? 겨울 오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입어야 해요.”
상준은 억울한 얼굴을 하고 큰맘 먹고 장만한 명품 코트를 애지중지 쓸어 만졌다.
“그나저나 형님들 요즘 잘나가시던데요? 저 기사 다 봤어요! 블루문도 그렇고, 거기 또 어디지? 부산?”
“다 네 덕분이지, 뭐. 일단 뭐 좀 하나 먹어.”
박민호가 바지 주머니에서 신용카드 한 장을 꺼내 상준 앞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평소 같았으면 신이 나서 카드를 집어 들 상준이 오늘은 왠지 미심쩍은 눈초리로 박민호를 살폈다.
“싫어요. 이거 먹고 또 뭐 알아 오라고 할 거잖아요.”
그러고 제 앞에 놓인 카드를 다시 박민호 쪽으로 밀어 넣었다.
“어허, 사람을 어떻게 보고! 너 고생했다고 인마, 내가 그냥 사 주는 거야. 이거 내 개인 카드야, 자식아.”
“됐어요. 그럼 돈으로 주든가.”
상준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귀를 후벼 팠다. 그러면서 트렌치코트가 덥긴 더웠는지 한쪽 손으로는 코트의 앞자락을 잡아 팔락거렸다. 그러고도 더위가 가시질 않자, 상준은 선우 앞에 놓인 아이스커피를 집어 들었다. 뚜껑을 열어 입안에 커피를 와르르 쏟아 넣은 상준의 입에서 곧 오도독, 오도독, 얼음 씹는 소리가 들렸다.
“…….”
박민호는 그런 상준을 주시하다, 이내 선우를 쳐다보며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상준아. 입분 씨는 잘 지내?”
“어? 네. 사진 보여 드릴까요?”
갑자기 훅 들어온 선우의 물음에 상준이 눈을 키웠다.
“응. 오랜만에 우리 입분 씨 얼굴 좀 보자.”
선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상준이 활짝 웃으며 코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곧바로 사진첩 앱을 켠 그는 개중 마음에 드는 사진 한 장을 골라 선우에게 들이밀었다. 화면 속 사진의 주인공은 얼룩무늬 고양이 한 마리였다.
“우와.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입분 씨 진짜 미묘다. 너무 예쁜 거 아니야?”
와, 이거 봐. 입분 씨 완전 애교쟁이네. 선우는 손가락으로 사진을 한 장씩, 한 장씩 넘기며 연신 감탄을 쏟아 냈다.
“크, 역시 형님이 고양이 볼 줄을 알아. 근데 요즘 좀 외로워하는 거 같아서 한 마리 더 데려올까 생각 중이에요.”
입분 씨는 상준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상준과 입분 씨가 묘(猫)한 동거를 시작하게 된 것은 2년 전쯤. 상준의 하나뿐인 혈육, 김입분 할머니가 오랜 병고 끝에 세상을 떠나고 난 직후였다.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상준은 집 앞에서 길고양이 한 마리를 만났다. 평소에는 동물에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었던 상준이었는데, 희한하게도 이 얼룩무늬 고양이에게는 자꾸만 눈길이 갔다. 그건 고양이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녀 역시 몇 날 며칠 상준의 집 근처를 얼쩡거렸다.
그러다 하루는 고양이의 빼빼 마른 등뼈가 상준의 눈에 들어왔다. 자고로 고양이는 토실토실한 게 맛이거늘. 상준은 안쓰러운 마음에 지나는 길에 우유를 한 팩 사다 먹였다. (그때만 해도 고양이도 우유를 먹으면 설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한 그릇을 아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기에 다음 날엔 참치 캔도 하나 사다 먹였다.
그러기를 하루 이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본인은 그녀에게 제 방까지 내준 상태였다. 조금 어이가 없긴 했지만, 그땐 이미 마음을 다 뺏기고 난 터라 이젠 어디 내보낼 수도 없었다. 또 한편으로는 혼자 외롭게 지내지 말라고 할머니가 보내 준 아이인가 싶기도 했다.
그에 상준은 만난 날을 기념하며 고양이에게 아예 할머니의 이름을 붙여 주고, 입분 씨를 정식 가족으로 맞이했다. 원체도 할머니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상준은 그 뒤로 그 애정을 전부 입분 씨에게 쏟아붓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모두 아는 선우에게 입분 씨는 일종의 ‘치트키’였다. 입분 씨 이름만 들어도 헬렐레하고 얼굴이 풀어지니, 상준의 마음을 허물어트리는 데는 이만한 소재가 없었다. 형이 되어서 마음 약한 동생한테 치트키를 쓰는 게 조금 치사하고 미안하긴 하지만… 이게 다 좋은 일 하자고 하는 거니까.
사실, 이 치트키도 선우만 쓸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상준이 입분 씨 다음으로 약한 상대가 바로 선우 형님이었으므로.
선우에게 더 예쁜 사진을 보여 주겠다고, 열심히 사진첩을 뒤적이는 상준에게 박민호가 툭, 말을 던졌다.
“상준아, 너 홍대 좀 아냐?”
“홍대요? 네에, 뭐어…….”
상준은 핸드폰 화면을 슥슥 넘기며 대강 대답했다.
“홍대 골목길이라고 하면 어디를 말하는 거냐?”
“골목길? 홍대 골목이 한두 개예요?”
“그러니까.”
박민호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기지개를 쭈욱 폈다. 그러고는 제 앞에 놓인 콜라를 쭉쭉 빨다가 무심한 어투로 물었다.
“상준아. 주변에 약하는 애들 좀 있냐?”
“약이요? 에이, 없어요. 저는 약하는 애들이랑은 상종 안 해요. 형님들 무서워서 걔네들이랑 어떻게 어울려요.”
상준은 액정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도 않고, 모범 답안을 늘어놓았다.
“…….”
그러다 어딘가 모르게 꺼림칙한 시선이 느껴져, 상준은 조용히 고개를 들어 보았다. 역시나 박민호와 선우가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뭐요. 왜 그렇게 봐요. 진짜예요.”
깍지 낀 두 손 위에 턱을 괴고 있던 선우가 상준을 향해 빙긋이 웃었다.
“아, 아니이이. 왜 눈웃음을 쳐요.”
상준이 못마땅한 얼굴로 미간을 구겼다. 그는 들고 있던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던지듯 내려놓고 상체를 뒤로 물렀다.
“진짜라니까? 연락 안 하고 지낸 지가 얼만데!”
박민호가 옳지, 싶어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탁! 내리쳤다.
“좋네! 상준아, 오랫동안 연락 못 한 친구들한테 안부도 좀 묻고 그래라. 그것도 다 사회생활이야. 형님들이 또 네 인간관계를 이렇게 생각해 준다. 그치?”
“걱정 마, 상준아. 네 친구들한테는 절대 피해 갈 일 없어.”
아, 아아. 상준이 앓는 소리를 하며 제 머리를 헤집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또 나 막 부려 먹으려고 불러낸 건 줄 알았다고 내가.”
상준은 능글맞게 구는 박민호보다 옆에서 상냥하게 웃는 선우가 더 얄미웠다. 저 형님은 제가 본인의 웃는 얼굴에 약하다는 걸 알고 일부러 저러는 것이 분명했다.
“형사님들. 제가 은혜를 입은 건 지항 아저씨지, 형사님들이 아니거든요? 이렇게 저 막 함부로 이용해 먹고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예?”
상준은 인상을 팍 쓰고, 제 깐에는 험악한 목소리로 형사님들을 을러 댔다. 그래 봐야 뻔뻔한 형사님들은 속눈썹 하나 까딱 안 했다.
“그때도 씨발, 새로 온 짱구가 일주일 만에 그만두고 나갔다고 위에서 형님들이 하도오 지랄을 해 대 가지고, 내가 얼마나 난감했는데!”
“활동비 넉넉히 챙겨 줄게.”
“아씨. 내 얘기 듣긴 들었어요?”
늘 이런 식이지, 늘 이런 식이야. 상준은 심통이 나서 바닥에 발을 한 번 굴렀다.
아, 씨. 이왕 이렇게 된 거 뜯어먹기라도 제대로 뜯어먹어야겠다. 상준은 다리를 달달 떨며 박민호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일단 카드나 다시 줘 봐요.”
박민호에게 카드를 건네받은 상준은 곧바로 햄버거 세트 두 개를 사 와 자리에 앉았다. 별로 출출하지도 않으면서 치킨너깃과 치즈 스틱도 함께 얹었다.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저 이제 불러도 안 나올 거예요. 형님들 때문에 제 인간관계가 엄청나게 좁아지고 있단 말입니다.”
“누가 뭐랬냐? 만날 사람들 다 만나.”
“무서워서 만날 수가 있어야지!”
상준은 프렌치프라이 두 개를 트레이 위에 한꺼번에 쏟아 놓고, 한쪽 구석에 케첩을 쭈욱 짰다.
“나한테 정보 빼 갔으면 기사 낼 때 내 얘기도 좀 넣어 주든가. 어? 이게 다 서울 사는 스물세 살 김모 씨 덕분이라고.”
기다란 프렌치프라이 하나를 케첩을 콕 찍어 입안에 구겨 넣은 상준은 이번에는 햄버거를 집어 들었다. 순식간에 포장을 벗겨 한입 크게 베어 물자, 상준의 한쪽 볼이 금세 도토리를 입에 넣은 다람쥐처럼 빵빵하게 차올랐다.
“그래서 이번엔 뭔데요?”
상준이 입을 우물우물대며 물었다. 그러자 박민호는 이 말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상준에게 곧장 제 핸드폰을 보여 주었다.
으흥. SNS 글 몇 개에 대충 상황 파악이 끝난 상준이 입을 삐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건 아니고. 거래 장소나 좀 알아봐.”
박민호의 말에 상준은 햄버거를 내려놓고 대신 핸드폰을 들었다. 저장된 연락처를 엄지손가락으로 쓱쓱 밀어내다가, 제가 찾던 이름을 발견하고 상준은 손을 멈췄다. 이내 그 이름과 전화 버튼을 연달아 누르니, 스피커에서 통화 연결음이 작게 흘러나왔다.
상준은 통화를 스피커폰으로 전환해 놓고, 핸드폰을 테이블 한가운데에 올려놓았다.
신호가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젊은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이, 상준!
“형니임, 오랜만에 연락드립니다.”
- 오랜만은 무슨. 낮술 했냐?
핸드폰을 보고 있던 상준이 힐끔 박민호와 선우의 눈치를 살폈다.
“왜, 왜요? 나 형 엄청 오랜만인 것 같은데?”
- 병신아. 우리 지난주에,
“아, 형님, 형님! 나 뭐 좀 하나 물어보려고 하는데.”
상준은 청년의 말을 다짜고짜 막더니,
- 어. 뭔데.
“요즘도 홍대에서 물약 쉽게 구할 수 있나?”
오랜만이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노골적인 질문을 편하게 했다.
- 응, 뭐. 구하면 구하지. 왜, 너 하게?
“아니, 아니. 아는 형이 좀 필요하대서.”
이 사람이 형사들 앞에서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어. 상준이 혼자서 기겁을 했다.
그때, 선우가 말없이 손을 흔들어 상준의 주의를 끌었다. 상준이 고개를 들어 선우를 쳐다보자, 선우는 소리 없이 입 모양만으로 얘기했다.
‘골목.’
“아! 형, 근데 골목이 어디야?”
- 골목?
“어. 그 뭐, 홍대에서 성수인지 뭔지 파는 곳.”
- 아아, 메이즈 뒷문.
“아, 가면 사람 있어? 얼마나 해?”
- 뭐… 얼마나 필요한데? 대충 10만 원 치 사면 그날 하루 노는 데는 충분한데…….
청년의 대답에 상준이 선우와 박민호를 조용히 번갈아 보았다. 그러자 박민호가 이쯤이면 됐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오케오케. 알겠어, 형. 고마워요. 조만간 밥 한번 살게!”
상준이 통화를 마치자마자, 박민호와 선우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어, 어디 가요? 나 아직 다 안 먹었어요!”
상준은 황당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박민호는 그런 상준의 어깨를 툭툭 내리치고는 테이블을 빠르게 벗어났다.
“먹고 가라.”
“이거 봐, 이거 봐. 정보만 쏙 빼먹고 나 또 버리고 가지! 이봐요, 형님들!”
한가한 패스트푸드점에 상준의 애타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박민호와 선우는 그 길로 서교동으로 이동했다. 오후부터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 비 때문인지, 그 활기찬 홍대거리가 오늘따라 좀 차분한 분위기였다.
두 사람이 도착한 건 오후 5시경이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클럽 메이즈(Maze)를 비롯한 대부분의 술집, 클럽들이 문이 닫혀 있거나 이제야 장사 준비를 시작하는 중이었다.
박민호와 선우는 곧바로 클럽 메이즈의 뒷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내 ‘골목길’의 의미와 이곳에서 마약이 거래되고 있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클럽 뒷문으로 가는 길은 오로지 어둡고 좁은 골목길, 단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이 ‘골목’이 ㄱ자로 꺾어진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냥 지나다니면서는 골목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는 구조였던 것이다.
그러나 판매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이런 구조는 밖에서 안의 상황을 보지 못하지만, 안에서도 밖의 상황을 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도망 경로도 단순했다. 골목길로 나오거나, 클럽 안으로 들어가 버리거나. 판매자가 어지간히도 아마추어인 모양인지, 경찰에게 뒤를 밟힐 수 있다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선택이었다.
박민호와 선우는 그 뒤로 클럽 주변을 조금 더 탐색하다가, ‘골목길’이 잘 보이는 인근 도로에 차를 세워 두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자정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개시했나 본데?”
자정이 가까워지자, 골목 입구에서 젊은 남성 둘이 나왔다. 차량 조수석에 앉아 있던 선우는 앞에 있는 글러브박스에서 캡 모자를 꺼내 쓰고 차를 나섰다. 비가 거의 그쳐 우산은 필요 없을 정도였으나,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호신용으로 장우산도 하나 챙겨 든 채였다.
발소리를 죽인 채 골목으로 들어서니, 철제로 된 뒷문 근처에 면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 담벼락에 기대 핸드폰을 보고 있는 이는 약 거래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마약 딜러라는 것을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만큼 평범했다.
“저기요.”
남자를 향해 다가간 선우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성수 있나요?”
“…….”
선우의 물음에 그가 곁눈질을 해 왔다. 어둠 속이라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언뜻 액정에서 새어 나온 빛에 드러난 얼굴은 스무 살, 혹은 그 경계에 있는 듯 무척이나 앳된 티가 났다.
저를 경계하는 눈빛에 선우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자연스레 5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꺼내 내미니, 굳어 있던 얼굴이 확연히 풀어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여전히 곁눈을 한 그는 선우를 빠르게 훑고는, 이내 어깨를 가로질러 차고 있던 힙색에서 투명 지퍼백을 하나 꺼내 선우에게 건넸다. 받아 든 지퍼백 안에는 소금 같기도 하고, 밀가루 같기도 한 하얀 가루가 소량 담겨 있었다.
선우는 골목 밖에 대기하고 있는 차 안으로 돌아와, 구매한 것을 박민호에게 넘겼다.
“어때?”
박민호는 미리 준비해 둔 종이컵에 생수를 조금 따르고, 거기에 선우가 가져온 하얀 가루를 녹였다.
“어린 친구 혼자 있어요. 힙색 메고 있는데, 약은 그 안에 있고요. 크게 의심도 안 하고, 조용히 가면 바로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가루를 녹인 물을 간이 검사 키트 위로 떨어트리니 확인 창에 금세 양성 결과가 떴다.
“맞네. 가자.”
동시에 차 문을 연 두 사람은 곧장 ‘골목’으로 진입했다. 박민호는 ㄱ자로 꺾어진 곳에서부터 빠른 걸음으로 걸어 딜러 앞에 섰다.
“어이, 학생.”
그리고 아주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방 한번 볼 수 있어요?”
“예?”
박민호는 다짜고짜 힙색을 잡아챘다.
“어? 아, 씨발. 뭐야, 이 아저씨!”
딜러는 놀란 얼굴로 다급히 힙색을 끌어안았다.
“뭐긴 뭐야. 경찰이지.”
그러나 박민호의 행동이 조금 더 빨랐다. 찰나의 차이로 먼저 힙색 지퍼를 연 박민호가 그 안에 불쑥 손을 집어넣었다.
“우왁! 씹!”
딜러는 몸을 세게 비틀며 완강히 저항했다. 그러다 순간 박민호의 손이 떨어져 나가자, 그는 곧바로 클럽 뒷문을 향해 내달렸다.
선우는 재빨리 딜러를 쫓아가 그의 목덜미를 콱 잡았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한쪽 팔을 꺾어 그의 등 뒤에 바짝 붙였다.
“아! 아아!”
“오야, 아가야. 아저씨는 이런 사람이야.”
그새 딜러 앞에 선 박민호는 한 손에는 힙색에서 잡아 뺀 지퍼백을, 한 손에는 본인의 경찰증을 들고 있었다.
“자, 서울경찰청 마약범죄수사대 박민호 경위입니다. 학생을 마약거래방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하겠습니다.”
찰칵, 딜러의 등 뒤에 붙은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다. 야심 찬 도주는 수 초 만에 막을 내렸다.
***
2021년 8월 27일 1시경
서울경찰청 마약범죄수사대 조사실
구동연(21), 전과 및 상훈 기록 없음.
수도권 소재 B 대학 재학 중.
홍대거리에서 필로폰 판매 중 적발. 검거 당시 0.1g씩 소분된 필로폰 6팩 소지. 마약 간이 검사 결과 음성.
조사실에 두 경찰관을 마주하고 앉은 구동연은 눈에 띄게 몸을 떨었다. 밝은 곳에서 마주한 그는 생각보다 훨씬 순진했고, 생각 외로 상당히 어리숙했다.
“그렇게 떨면서 겁도 없이 약은 잘도 팔았네. 네가 판 게 뭔지 모르는 건 아니지?”
박민호의 물음에 구동연이 푹 떨군 고개를 느릿느릿 끄덕였다.
“소변 검사는 음성이던데. 직접 안 하고 팔기만 했어?”
“네, 네네! 저는 이거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요! 어, 어떻게 하는지도 몰라요.”
구동연은 고개를 번쩍 들고, 두 손을 정신없이 내저었다. 그러면서 자신은 소량씩 구매해 용돈벌이로 판매만 한 게 전부라고 해명했다.
“어디서 구했는데?”
“교주님한테요.”
“그 교주가 누구냐고.”
“모, 몰라요 저도.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그냥 고사바리6)라고.”
겁을 먹고 더듬더듬 말하는 구동연을 보고 박민호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교주는 어떻게 알았어?”
구동연이 교주를 알게 된 건 호기심에 들어가 보기 시작한 딥 웹(Deep web)7)에서였다.
교주가 처음부터 교주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자주 가는 사이트에는 필로폰을 소량씩 만들어 파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만든 필로폰이 퀄리티가 매우 좋아, 약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차츰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그의 약에 ‘성수’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주사를 놓는 순간 뿅, 가는 것이 주님의 구원을 받은 것 같다나 뭐라나.
약쟁이들 사이에서 마약 제조법을 아는 사람을 ‘교수’라고 불렀으니, 사람들은 그 또한 교수라 칭했다. 그러다 ‘성수’가 유명세를 타니 누군가가 그를 ‘교주님’이라 일컬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모두가 그를 그렇게 불렀다.
“약은 어떻게 거래해?”
“채팅방으로요. 주문하면 가상 화폐 지갑 주소를 줘요. 거기다 약값 쏘고 연락하면 나중에 어디서 찾아가라고 얘기해 줘요.”
약속된 장소에 마약을 숨겨 놓고 떠나는 일명 ‘던지기’ 수법이었다. 교주의 작업 장소는 대부분 지하철 홍대입구역 주변이었다.
교주와 거래하는 양은 세트 단위. 한 세트는 0.1g짜리 10팩을 말했고, 가격은 60만 원 선이었다. 구동연은 그걸 일반인들에게 팩당 10만 원에 팔아 4만 원씩 이익을 봤다.
한 번 거래로 40만 원, 두 세트만 가져다 팔면 편의점 알바를 한 달 내내 해야 버는 돈을 단 이틀 만에 벌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겁도 나고, 죄책감도 들었다. 그런데 몇 번 큰돈을 만지고 나니, 약을 파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막말로 자신이 약을 하는 것도 아니고, 팔면서 딱히 누구한테 피해를 준 것도 없는데. 자기는 그저 물건이 필요한 사람들한테 물건을 떼다 파는 상인이랑 다를 게 없었다고, 구동연은 진술했다.
박민호와 선우는 어리석은 중생을 향해 탄식했다.
“그래, 연락해 봐라.”
“네…?”
“교주한테 연락해 보라고.”
“지, 지금이요?”
“그럼 언제 할래.”
박민호가 험악한 표정으로 윽박질렀다.
아… 어… 지금 새벽인데…….
구동연은 깨갱하며, 꾸물꾸물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두 경찰관이 보는 앞에서 교주와의 채팅방을 열었다. 평소처럼 한 세트를 주문하는 메시지를 보내니, 머지않아 교주는 알파벳과 숫자가 난해하게 뒤섞인 문자열을 보내 왔다. 구동연이 말했던 가상 화폐 지갑 주소였다.
보내 준 주소에 약값을 송금하자 교주는 약이 준비되면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박민호와 선우는 구동연을 유치장에 수감하고 교주의 답변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날 오후, 교주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
2021년 8월 31일 23시경
서울경찰청 마약범죄수사대 사무실
“아오, 눈알 빠질 것 같다.”
박민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의 말을 신호로 동길이 짐승같이 포효하며 기지개를 늘어지게 켰다. 몇 시간째 모니터만 들여다보고 있는 팀원들의 흰 자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잠깐 틈을 타 선우도 뻑뻑하게 굳은 눈을 지그시 감아 보았다. 두 눈자위를 손바닥으로 꾸욱 눌렀다 떼고, 이내 눈을 뜨니 순간적으로 시야가 뿌옜다. 선우는 묵직한 눈꺼풀을 둔하게 깜빡이며, 책상 한구석에서 인공 눈물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양 눈에 두 방울씩 똑, 똑.
전자기기의 열기에 뜨끈하게 달아오른 눈동자 위로 투명한 물방울을 떨어트렸다. 맑은 액체가 바싹 메마른 결막을 파고드니, 일순 눈이 시리고 코끝이 찡해 왔다. 그에 선우가 저도 모르게 코를 훌쩍이자, 옆자리에 앉은 동길이 말없이 휴지 한 장을 뽑아 건넸다.
“고마워.”
휴지를 받아드는 선우의 입에서 약한 코맹맹이 소리가 났다.
“지긋지긋하다, 지긋지긋해. 언제나 이 짓거리 좀 안 하고 살려나.”
일에는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주제에 박민호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박민호와 선우에 동길까지 합세하여, 세 사람이 CCTV 영상과 씨름을 하고 있는 것이 벌써 며칠째였다.
지난주 금요일, 교주의 메시지를 받고 박민호와 선우는 구동연을 데리고 홍대입구역으로 직행했다. 역사에 도착하자마자 세 사람은 메시지의 지시대로 남자 화장실 두 번째 칸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똘똘 뭉쳐진 채 변기 뒤에 붙어 있는 검은 비닐봉지 하나를 발견했다. 봉지 안에는 약이 소분된 지퍼백 10개가 들어 있었다. 박민호와 선우는 역사 관리실로 가, 그날의 CCTV 영상을 전부 받아 서로 돌아왔다.
그 뒤로는 지루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용의자의 범위는 딥 웹과 가상화폐 이용에 익숙한 50대 이하의 남성. 두 사람은 구동연이 교주에게 돈을 송금한 순간부터 역사로 가 약을 발견한 시점까지, 그사이에 남자 화장실을 들렀다 나간 모든 사람들을 영상으로 살폈다.
사실상 큰 의미는 없는 일이었다. 화장실 이용객이 한두 명도 아니고, 지역 특성상 이용객의 대부분이 젊은 남성이었다. 화장실 내부에는 CCTV가 없으니 그 많은 사람 중에 누가 두 번째 칸에 들어갔다 나왔는지조차도 추려낼 방법이 없었다.
구동연과 다르게 교주는 나름 치밀한 사람인 듯했다. 구매한 약 봉투에서 지문 검사도 시행했지만, 구동연의 지문 외에 범인의 것으로 의심할 만큼 뚜렷하게 드러난 지문도 없었다.
그러니 마약 1팀은 구동연을 통해 한 번 더 거래를 진행했다.
월요일 오전, 팀장을 제외한 팀원 5명이 모두 구동연을 데리고 홍대입구역으로 출동했다. 박민호가 보는 앞에서 구동연이 약을 주문하고, 팀원들은 평범한 시민 행사를 하며 역사 곳곳에 잠복해 있었다.
교주에게 연락을 받은 것은 그날 오후.
이번에 교주가 약을 던지고 간 장소는 음료 자판기 옆 쓰레기통이었다. 메시지를 받자마자 팀원들은 서둘러 역사 내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딱히 수상한 자를 발견하지 못한 이들은 어제도 허탕을 치고 CCTV 영상만을 수거해 와야 했다.
그리고 세 사람은 어제저녁부터 두 거래일의 영상을 비교해 가며, 첫날 화장실에서 나오는 사람들과 둘째 날 쓰레기통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 중에 동일 인물이 있는지를 살피는 중이었다.
“그, 역무원이나 미화원들도 자세히 봐 봐. 매번 역사 근처에서 거래했다니까, 거기서 일하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그렇게 변장했을 수도 있어.”
“네에.”
박민호의 말에 대답하는 선우는 반쯤 혼이 나간 상태였다. 그다지 화질이 좋지도 않은 영상을 동시에 두 개씩 띄워 놓고 하루 종일 뜯어보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의자에 몸을 추욱 늘어뜨린 채, 시선을 고정한 모니터 화면에는 CCTV 영상이 2배속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지잉, 지잉.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핸드폰이 난데없이 진동을 울렸다. 자정이 가까워진 시각에 도대체 누가 전화를 하는가, 선우가 늘어진 몸에서 더듬더듬 손만 뻗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문태성」
“……?”
흐린 눈을 하고 있던 선우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선우는 조용히 팀원들을 둘러보다, 두 사람 다 모니터를 보느라 정신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살그머니 사무실을 나섰다.
청사 내 대부분의 불이 꺼지고, 일부 조명만이 드문드문 남아 어두운 복도를 겨우 밝혔다. 창밖에는 새카만 배경을 뒤로 한 채, 여름의 끝자락을 알리는 가을 장맛비가 내리고 있었다.
선우는 토독토독, 빗물이 와 닿는 창가 앞에 서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아직 안 잤네요?
느긋하고도 유려하게 흐르는 말소리가 비 오는 여름밤과 제법 잘 어울렸다.
“아, 저 근무 중이라서요.”
- 지금 이 시간까지?
“네, 일이 좀 남아서요. 대표님은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 그냥요. 목소리 듣고 싶어서.
합! 불시에 들어온 공격에 선우는 그만 입을 감춰 물었다. 제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남자의 목소리가 한없이 나긋했다.
“…….”
그 부드러운 음성에 어쩐지 가슴께가 다 간질간질거리는 기분이라, 선우는 도리어 그에게 곧바로 목소리를 들려줄 수가 없었다.
- 밥은 먹고 일해요?
“……어, 네. 그럼요. 조금 전에 팀원들이랑 야식도 시켜 먹었는걸요.”
- 에이, 아쉽네. 먹을 거 사 들고 잠깐 놀러 갈까 했더니.
“……여기를요…?”
- 그럼 어디를?
“여, 여기, 경찰서예요…!”
선우는 누가 들을세라,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며 속닥였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남자의 유쾌한 웃음소리였다.
- 이건 뭐, 경찰서 발만 들여도 잡아들일 기세네. 나 그렇게 당장 붙잡힐 만큼 허술한 사람 아닌데.
선우로서는 정말 진지하게 한 말을 남자는 농담으로 받아쳤다.
- 그럼 이번 주 금요일에는 시간 어때요? 저녁에.
“어… 정확한 건 그때 가 봐야 알 것 같은데…….”
만일 그때까지도 교주에 대한 수사가 해결이 나지 않는다면, 그날도 당연히 야근을 하고 있을 테니까.
“왜요? 양승준이 그날 만나자던가요?”
- 와, 정말 너무하네.
“네?”
천진한 물음에 남자는 선우를 꼭 야박한 사람 취급하는 투로 말했다.
- 데이트 신청하려는 사람 앞에서 다른 남자 이름 꺼내는 거 너무 잔인하지 않아요?
“데이…트요…?”
- 예전에 투자했던 영화, 시사회 초대권이 나왔어요. 이거 핑계로 우리도 남들 하는 평범한 데이트나 한번 해 볼까 싶어서요. 마침 양 의원도 당분간은 시간이 안 난다고 하고.
평범한 데이트…….
그 말을 하는 남자 역시 유별날 것 없이 평범한 태도였으나, 선우에게 와닿는 어감은 전혀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어, 어… 으음…….”
선우는 발개진 볼을 하고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 안 돼요?
“…어… 그… 일이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어서요……. 그날, 상황 봐서 연락드릴게요…….”
- 네, 그래요.
대답과 함께 미세하게 흘러드는 남자의 숨소리에 선우는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는 지금 아마도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예의 그 예쁜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양 볼에는 곧 깊은 우물이 파이겠지.
그와 나누는 이런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대화라니. 살짝 열린 창문 너머로 흘러들어 오는 뜨뜻하고 습한 밤공기에서 어쩐지 단내가 나는 것만 같았다.
- 그런데, 그 팀은 무슨 일이 그렇게 바빠서 이 시간까지 사람을 집에 안 들여보내요?
“아…. 저, 대표님. 혹시 교주산 성수라고 들어 보신 적 있으세요?”
- 음, 홍대 쪽에서 도는 거 말하는 거죠?
“네! 알고 계시네요?”
- 몇 달 전에 연구소에서 샘플로 구해 온 걸 본 적이 있어요. 아마추어 같은데 퀄8)은 확실히 좋긴 좋더라구요. 교주 찾는 중이에요?
“네.”
- 그 정도 퀄이면 전공자일 확률이 높아요.
“전공자요?”
- 네. 아무리 기술자들이 노련하다고 해도, 요즘은 화학이나 약학 전공한 어린 친구들 손을 못 따라가더라고.
“아하….”
- 근데 거래 방식이 워낙 허술해서, 뭐 뒤에 누가 따로 있는 것 같진 않고. 아마 그 일대 대학가 대학원생이 아닐까 싶은데.
“…….”
선우는 경찰도 생각하지 못한 디테일을 잡아내는 남자가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경찰인 제가 남자보다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못내 심통이 났다.
“대표님은 그런 걸 어떻게 다 아세요?”
- 잠재적 경쟁자를 미리 파악해 두는 건 사업의 기본이에요.
맞다. 남자는 건실한 사업가였다. 내다 파는 것이 비정상적으로 건실하지 않아서 그렇지, 일하는 모습만 보면 그는 꽤나 성실하고 착실한 경영인이었다.
이토록 모순적인 사람이라니, 선우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샜다.
- 필요하면 좀 더 알아봐 줄까요?
“그러다가 곧 있으면 경찰도 하시겠어요.”
선우도 그에게 농담이라는 것을 해 보았으나,
- 직장 동료가 취향이에요? 그럼 고려해 보고.
남자는 한술 더 떴다.
“아니요. 전혀 아니에요.”
선우는 보이지도 않는 사람을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고는 잠시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 내 현재 시각을 확인했다. 그새 자정이 훌쩍 넘어 있었다.
“아, 대표님! 저 이제 그만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벌써 시간이…….”
- 그래요. 쉬엄쉬엄하고, 좀 한가해지면 연락 줘요.
“……네에.”
끝나 가는 여름만큼이나 떠나보내는 것이 어쩐지 아쉬운 순간이었다.
선우가 전화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왔을 때, 나가기 직전에 정지해 둔 영상 속에는 군인이 있었다.
……군인…?
순간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선우는 멈춰 있던 영상을 조금 앞으로 돌렸다. 그리고 재생 버튼을 누르니, 군모를 푹 눌러쓴 군인 한 명이 쓰레기통에 무언가를 버리고는 유유히 영상 밖으로 벗어났다.
선우는 영상을 다시 앞으로 돌렸다. 이번에는 재생 속도를 0.5배속으로 조정하고, 군인에게 초점을 맞춘 채 영상을 최대한 확대해 보았다. 느리게 움직이는 군인의 손에서 작고 까만 물체 한 덩이가 떨어졌다. 화면을 확대하니 화질이 뭉개져 정확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언뜻, 쓰레기를 버리는 손은 살색이 아닌 어두침침한 색을 띠고 있었다.
“……선배님. 지난주 금요일에 군인… 있었죠.”
선우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군인?”
“네. 어… 본 것 같은데….”
선우는 지난주 CCTV 영상을 재생시켰다. 타임 라인을 맨 앞으로 당기고 영상을 4배속으로 빠르게 돌리니, 수많은 사람이 화장실 입구를 끊임없이 들락거렸다.
선우는 쏜살같이 지나는 사람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군복을 입은 사람이 나오면 일순 영상을 멈췄다. 그러고는 그 사람의 외형을 조금 전 쓰레기를 버리던 군인의 모습과 비교했다.
재생, 정지. 또 재생, 정지.
반복하기를 세 차례.
첫 번째 군인은 체격이 너무 왜소했다.
두 번째 군인은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여자 친구인 듯 보이는 동행자와 애정 행각을 벌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세 번째 군인은…….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화장실을 벗어나는 군인을 발견하고 선우는 영상의 재생을 멈췄다. 그리고 지난주와 어제 자 영상을 나란히 놓고 느린 속도로 두 개를 동시에 재생했다.
“어라? 선우야, 다시 한번만 앞으로 돌려 봐라.”
어느새 박민호가 제 뒤에 서 있었다. 선우는 박민호의 지시대로 두 영상을 앞으로 되돌렸다. 다시 영상이 재생되고, 양 화면에서 각각 군인이 걸어 나왔다.
“오, 씨발. 맞는 것 같은데?”
옆자리에 앉아 있던 동길이 그새 고개를 길게 내뺀 채 선우의 모니터를 함께 보고 있었다. 동길의 말마따나 사람들 사이로 유유자적 모습을 감추는 두 군인은 체격과 걸음걸이가 매우 흡사했다.
“맞네, 맞네. 똑같네!”
흥분한 동길이 큼지막한 손으로 선우의 등짝을 팍팍 내리쳤다.
“…교주가 군인이라고?”
박민호가 보고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얘기했다.
“근데 군인이 어떻게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약을 팔았을까요?”
“그러니까. 휴가 때만이라고 해도 너무 잦은데. 직업 군인인가? 아님 그냥 예비군?”
동길이 박민호를 올려다보며 묻자, 박민호도 팔짱을 끼며 미심쩍은 얼굴을 했다.
“이것도 일종의 위장 아닐까요? 지하철역에 돌아다니는 군인들이야 늘 있으니까.”
선우가 마우스를 바삐 움직이며 말했다. 선우는 이제 여러 개의 영상을 한꺼번에 띄워 놓고 군인의 이동 경로를 좇았다. 화장실에서 나온 군인과 쓰레기를 버리고 떠난 군인은 모두 같은 곳을 향했다. 그는 지하철역 3번 출구로 나서는 것을 마지막으로 모든 영상 속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가 역사를 떠난 시각은 구동연에게 메시지를 보낸 시각과 정확히 일치했다.
***
다음 날, 선우와 박민호는 날이 밝는 대로 다시 홍대입구역으로 출동했다. 두 사람은 곧바로 3번 출구 주변 상점과 거리에 깔린 CCTV 영상부터 살폈다. 그 결과, 군인이 출구에서 멀지 않은 인근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21년 9월 1일 10시경
서울특별시 마포구 동교동 동교메트로빌 1차
박민호와 선우는 오피스텔 로비에 위치한 경비실로 향했다. 유리막으로 둘러싸인 단칸짜리 경비실 안에는 옆머리가 희끗희끗한 경비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수고하십니다.”
툭툭. 경비실 문을 두드린 박민호가 경비원을 향해 거수경례를 했다. 핸드폰으로 트로트 음악이 나오는 영상을 켠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경비원이 박민호를 흘끗 쳐다봤다.
“예, 무슨 일이십니까?”
“경찰에서 나왔습니다.”
“어이쿠!”
박민호가 경찰증을 내보이자 경비원이 벌떡 일어나며 문을 열었다.
“실례지만, 말씀 좀 묻겠습니다.”
“예, 예. 말씀하십시오.”
“혹시 이 오피스텔에서 이렇게 생긴 사람, 보신 적 있으십니까?”
선우가 경비원에게 미리 뽑아 온 몽타주를 내밀었다. 과학수사대에 요청하여 받아낸 몽타주는 모자에 가려진 눈은 거의 추정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그 외 코와 귀, 입매, 턱선은 아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정확도가 높은 것이라 했다.
“가만있어 보자.”
경비원은 책상에 놓여 있던 돋보기안경을 쓰고 몽타주를 받아 들었다.
“이잉? 이거 403호 사는 청년 같은데?”
“403호요?”
“예에. 거, 키 크고 자알생긴 학생인데, 종종 이렇게 군복 입고 다녀요.”
“군인입니까?”
“글쎄, 하는 일까지는 잘 모르겠는데……. 왔다 갔다 하는 시간대가 워낙 들쭉날쭉해서 군인은 아닌 것도 같고……. 근데 무슨 일이십니까? 이 친구가 뭔 일이라도 저질렀습니까?”
“…….”
“…….”
경비원의 말에 선우와 박민호가 일시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경찰이 누군가에 관해 물을 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해당 인물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가’를 묻기 마련이었다. 그 사람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를 물을 때는 응당, 그럴 만한 사연이나 전적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친구에 대해서 아시는 바가 좀 있으십니까?”
“알기는, 오며 가며 얼굴 보는 게 다지요.”
“……그렇습니까.”
박민호는 조금 실망스러운 얼굴을 하고 경비원에게서 몽타주를 받아들었다. 선우는 그걸 또 건네받아, 반의반으로 접어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런데 어린 친구가 하고 다니는 짓이 좀 그렇긴 해요. 아무리 젊음이 좋다지만…….”
별 소득 없이 돌아서려는 두 사람을 경비원의 말이 붙들었다.
“……어떤, 점이요?”
“으응? 아니, 허구한 날 여자를 그렇게 바꾸고 다녀요. 얼굴값 하느라고 그런가.”
선우가 조심스레 묻자 경비원은 못 이기는 척 담아 둔 이야기를 꺼냈다.
“도대체가, 맨날 술에 절어 사는 건지. 볼 때마다 눈 밑은 퀭- 하고, 눈동자는 흐리멍텅- 해 가지고. 사람이 인사를 해도 받는 둥 마는 둥.”
“술이요.”
혀를 찰찰 차는 경비원을 향해 박민호가 눈을 빛냈다.
“예에. 그, 모르긴 몰라도 여자 친구들도 한 번씩 때리고 그런 갑디다. 가끔 밤늦게 여자 비명 소리가 들린다고, 옆 호 사는 학생이 항의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올라가 보면 또 잔뜩 취해 있어서 뭔 말도 잘 안 통하고.”
“어허…….”
“그래서 난 또 이 학생이 술 먹고 무슨 사고라도 냈는가 싶었지?”
“아, 예. 그런 건 아닙니다. 그냥, 사람을 좀 찾는 중입니다.”
“예에. 뭔 일 없다면 다행이구요.”
“예. 협조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경비원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경비실을 벗어났다.
다음으로 두 사람이 향한 곳은 건물 뒤편에 있는 우편함이었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듬성듬성 차 있는 우편함에서 유독, 403호의 우편함만은 각종 고지서와 우편물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박민호는 우편함 안에 든 것들을 모두 꺼내 두 뭉치로 나누고 한 뭉치는 선우에게 넘겼다.
“임진건, 임진건.”
한 뭉텅이 우편물을 슥슥 넘겨 가며, 박민호가 수신인을 확인했다. 모든 우편물의 주인은 단 한 사람이었다.
“선배님. 이거 보세요.”
선우 역시 건네받은 우편물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그러다 개중 하나를 박민호에게 들이밀었다.
“그렇지! 이거지.”
인근 대학의 화학과 동문회지.
남자의 추측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화학과를 전공하신 임진건 씨. 냄새가 난다, 냄새가 나.”
박민호는 다시 우편물을 하나로 모아 우편함에 처박아 넣었다.
***
403호에서 인기척을 확인하고, 두 사람은 곧장 팀원들을 호출했다.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동길이 끌고 온 승합차가 오피스텔 근처 대로변에 정차했다.
박민호는 승합차 트렁크에서 우체국 집배원 조끼와 모자를 각각 두 개씩 꺼내 선우와 나눠 입었다. 두 사람은 조끼 주머니에 삼단봉과 수갑을 챙겨 넣고, 위장용으로 빈 종이 박스도 하나 들었다. 혹시 모르니 간이 검사 키트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임진건의 집으로는 우선 선우와 박민호만 진입하기로 했다. 여러모로 임진건이 교주로 의심되는 것은 맞지만, 아직 확신하기는 일렀다. 맞다 하더라도 만에 하나 용의자가 탈주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나머지 팀원들은 건물 출입구에서 대기하며 두 사람의 호출을 기다리기로 했다.
“넌 몇 프로쯤 확신하냐?”
4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박민호가 물었다.
“음. 90%요?”
“그러냐? 난 99.9%인데.”
“전 90%도 되게 높게 잡은 건데. 그렇게 확신하시고 아니면 또 서운해하시려고요?”
“아니야. 이놈은 그냥 따악 삘이 왔어. 후딱 잡아 버리고 오늘은 칼퇴하자, 선우야. 이러다 태산이가 내 얼굴 다 까먹겠다.”
박민호가 능청을 떨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박민호는 이렇게 용의자를 체포하러 가기 직전에 꼭 선우나 동길에게 실없는 농담을 해 왔다. 범인 검거를 앞두고 어린 후배들이 행여나 긴장할까 봐 부러 그러는 것을 선우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마음이 고마워 선우는 얼른 몸을 놀려 박민호보다 먼저 임진건의 집으로 향했다.
403호 앞에 선 선우가 현관문에 대고 귀를 기울였다. 아주 조용한 와중에 작게나마 생활 소음이 들려왔다. 이내 박민호와 눈을 마주친 선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딩동.
박민호가 벨을 눌렀다. 그와 동시에 선우는 인터폰 카메라에 노출되지 않도록 벽면에 몸을 붙여 섰다.
“…….”
“…….”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분명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도 집 안에선 어떤 대답도 없자, 이번에는 박민호가 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똑똑.
“임진건 씨.”
“…….”
“…….”
역시나 반응이 없었다.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려 박민호가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 찰나,
“누구세요?”
문 너머로 젊은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체국 등기입니다.”
박민호가 씩씩하게 외쳤다.
그러자 문 바로 앞에서 철컥철컥하는 쇳소리가 몇 차례 들리더니, 현관문이 빼꼼히 열렸다. 문 중앙에는 쇠사슬로 된 보조 잠금장치가 걸린 채였다.
“무슨 일이시죠?”
좁게 열린 문틈 사이로 한눈에 봐도 호남형인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임진건 씨 되십니까?”
“……예. 그런데요?”
“임진건 씨 앞으로 등기가 왔네요.”
임진건은 매서운 눈빛으로 우체부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그러고는 열린 문 사이로 손만 불쑥 내밀었다.
“주세요.”
“아, 저 여기에 등기 받았다는 사인을 좀 해 주셔야 하는데.”
박민호가 태연하게 말하자, 임진건은 귀찮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문을 쾅 닫았다. 곧이어 철커덩, 철커덩. 쇠붙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현관문이 다시 열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박민호가 문손잡이를 세게 잡아당겼다. 현관문이 난데없이 바깥으로 활짝 열리자, 당황한 임진건은 반대로 몸을 뒤로 물렀다.
“엇! 씨발, 뭐, 뭡니까?!”
선우가 그 사이를 비집고 집 안으로 들어서는 동안, 박민호는 임진건의 눈앞에 경찰증을 들이밀었다.
“경찰입니다. 자택 수색 좀 하겠습니다.”
경찰증을 본 임진건은 제자리에 동상처럼 굳어 버렸다.
그리 크지 않은 임진건의 집은 방 한 칸이 딸린 평범한 오피스텔 구조였다. 들어가자마자 있는 짧은 복도를 지나면 양옆으로 부엌과 화장실이 있고, 조금 더 들어가면 거실, 그 옆에 침대방이 하나 있었다.
“와, 이게 다 뭐야.”
“이야. 이거 봐라.”
부엌을 지나던 선우와 박민호가 가던 길을 멈췄다. 두 사람의 입에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우리 교주님께서 공장을 제대로 차리셨네.”
부엌 개수대와 조리대 위에는 익히 있어야 할 식기류나 조리 기구가 일절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곳에 자리한 것은 비커, 플라스크, 농축기 등 각종 실험 도구였다. 개인 혼자서 꾸린 실험실치고는 갖춰진 정도가 꽤나 훌륭했다. 부엌 안쪽에서는 뭐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쾨쾨한 냄새도 나고 있었다.
“야야, 선우야. 교주님 소변부터 받아 봐야겠다.”
두 사람은 일단 임진건의 마약 투약 여부를 확인하기로 했다. 갑자기 급습한 경찰에 당황한 것인지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기는 했으나, 의외로 임진건은 순순히 검사에 응했다.
마약 사범들은 대개 체포 직전, 투약 사실을 부인하고 검사를 거부하거나 도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게 안 된다면 자해를 하든, 폭력을 쓰든. 어떤 방식으로든 경찰에 거칠게 저항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이와 달리 임진건은 무척 차분했고, 충동적인 행동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얌전히 경찰의 지시에 따라 검사를 진행하는 모습이 꼭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 같기도 하고, 결과에 대해 아예 포기를 한 사람 같기도 했다.
예상대로 그는 필로폰에 양성 반응을 보였다. 키트 결과를 확인하자마자 박민호는 그의 두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오케이. 임진건이, 너 여기 딱 가만히 앉아 있어라.”
박민호는 임진건을 식탁 앞에 앉혔다. 그리고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자택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뭐가 이렇게 많아?”
박민호는 순식간에 집 안 구석구석을 들쑤셨다. 신발장에서는 신발 대신 비닐 지퍼백과 검은 봉지를 발견했고, 거실 수납장에서는 주사기와 주사용수, 필로폰으로 의심되는 하얀 가루들을 찾아냈다.
그동안 선우는 부엌을 뒤졌다. 조리대 위아래 붙은 천장과 서랍장을 차례로 여니, 그 안에는 원료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화학 약품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도대체 무슨 시약을 사용한 것인지, 부엌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쾨쾨한 냄새도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사실 쾨쾨하다는 표현도 부족했다. 온갖 쓰레기를 모아 둔대도 이보다는 덜 할 성싶었다. 곧바로 욕지기가 올라올 것만 같은 엄청난 악취에 선우는 한 손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악취의 근원을 찾았다.
발이 멈춘 곳은 싱크대 앞이었다.
선우는 나머지 한 손을 뻗어 개수대 위에 달린 찬장 문을 열었다. 그러자 툭! 커다랗고 묵직한 검은 봉지 하나가 찬장에서 떨어졌다.
‘우욱.’
불쑥 구역질이 나려는 것을 억지로 참아 가며, 선우가 개수대로 떨어진 봉지를 풀어헤쳤다.
“……!”
그리고 그 안에 든 것을 확인한 순간, 선우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서, 선배님…….”
검은 봉지 안에는 핏기 하나 없는 시퍼런 팔뚝이 하나 들어 있었다. 가느다란 다섯 손가락까지 온전히 붙어 있는 그것은 분명 사람의 것이었다.
“어? 씨발, 이거 뭐야!”
그때, 방 안으로 들어선 박민호가 별안간 크게 소리쳤다.
“야! 선우야! 이리로 좀 와 봐라!”
선우를 부르는 목소리가 무척이나 다급했다.
“선배님! 여, 여기…!”
박민호를 부르는 목소리는 몹시도 떨렸다.
선우는 박민호에게 상황을 알리고자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 순간, 푸욱!
“헉!”
불현듯 뜨겁고 날카로운 불덩이가 옆구리를 깊게 파고들었다. 존재를 알 수 없는 이물질이 살갗을 뚫고 들어오는 소름 끼치는 감각에 선우는 들이켠 숨을 뱉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 씨발 새끼들이. 왜 남의 집을 뒤지고 지랄이야.”
“…….”
빛을 잃은 탁한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교주는 같은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괴이하고 공포스러운 모습이었다.
“선우야! 빨리 안 오고 뭐 하…! 이, 이 새끼 뭐야!”
몇 번을 불러도 선우가 나타나질 않자, 박민호는 급히 거실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펼쳐진 광경에 그는 순간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어윽!”
박민호의 등장에 임진건은 선우의 허리춤에 꽂아 넣었던 칼을 빼냈다. 살가죽을 비집고 자리한 날붙이를 억지로 뽑아내는 힘은 가히 엄청난 것이라, 선우의 몸이 일순 크게 휘청였다. 다리가 힘이 풀려 마구 후들거리는 것을 선우는 싱크대를 붙잡고 겨우 버텨 섰다. 문득, 벌어진 살 틈 사이로 뜨끈한 액체가 스물스물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선우야! 무전하고 방! 방 안으로!”
박민호가 임진건을 향해 달려들며 소리쳤다. 그는 흉기를 든 범인을 제압하기 위해 임진건을 뒤에서 덮치듯 끌어안았다.
무, 무전…!
벽력같은 호령에 선우는 정신을 다잡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밑에서 대기하는 팀원들을 호출한 선우는 곧장 방으로 달려갔다.
흐억!
너무도 황망한 상황에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도착한 곳에서, 선우는 한 번 더 놀라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작은 방을 크게 차지하고 있는 침대 위에는 나체를 한 여성이 숨을 헐떡이며 누워 있었다.
“이, 이봐요!”
선우는 서둘러 여자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나 여자는 대답은커녕, 선우의 말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눈동자에 초점이 없는 그녀는 완전히 사리 분간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정신 좀 차려 보세요! 제 말 들리세요?”
선우는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올라가 여자의 볼을 두들겼다.
그때 갑자기, 얕은 숨만 가쁘게 내쉬던 여자가 별안간 눈을 회까닥 뒤집더니 몸을 부르르 떨며 허리를 활처럼 꺾었다. 뒤틀린 몸은 그 채로 뻣뻣하게 경직되고, 팔딱팔딱 뛰던 가슴통이 일시에 멎어 버렸다.
“!”
순식간에 머리 꼭대기까지 전율이 올랐다. 모든 사고가 멈춰 버려 선우는 아무런 생각도, 어떤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아아악-!
그 찰나, 선우를 정신 차리게 한 것은 방 밖에서 들려온 비명이었다. 극심한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외침은 박민호의 것인지, 임진건의 것인지도 구별이 가질 않았다.
당장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퍼뜩, 선우는 파들대는 두 손으로 핸드폰을 붙들고 키패드를 눌렀다. 어느 사이에 손에는 피가 잔뜩 묻은 채라, 그 짧은 세 자리를 누르는 데도 손가락이 자꾸만 액정 위에서 미끄러졌다.
뚜르르르.
“하…….”
침착해. 침착해야 해.
가까스로 통화를 연결시키고, 선우는 그제야 제 숨을 골랐다.
- 119입니다.
“서울경찰청 소속 한선우 경위입니다. 홍대입구역 3번 출구, 동교메트로빌 1차에 위급 환자가 있습니다!”
- 자세한 상황 설명해 주십시오.
“20대 여성, 마약 급성 중독으로 인한 심정지입니다. 메트로빌 1차, 403호로 빠른 출동 부탁드립니다.”
선우는 상황을 급히 전달하며 여자의 코밑과 심장 부근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제가 틀린 것이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역시나 호흡이나 박동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에 선우는 전화를 끊는 것도 잊은 채, 핸드폰을 던져두고 여자의 몸통 쪽으로 바짝 붙어 섰다. 여자의 흉골 위에 두 손을 올려 깍지 끼고, 팔꿈치를 곧게 편 선우는 곧바로 가슴 부위를 강하고 빠르게 압박했다.
헉, 헉.
온 힘을 다해 여자의 흉곽을 내리누르기를 수십 번.
현관 근처에서 여러 사람의 고성이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팀원들이 도착하고, 밖에서도 무슨 일이 벌어진 듯했다. 그러나 당장 눈앞의 상황이 너무 급하니, 선우는 바깥 상태를 살피기는커녕 고개를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허억, 헉.
어느새 선우의 이마에 식은땀이 가득 맺혔다. 체중을 실어 압력을 가할 때마다 옆구리에서는 울걱, 울걱 뜨끈한 피가 새어 나왔다. 살이 베인 통증은 둘째치고, 왼쪽 허리 전체를 불로 지져 대는 듯한 작열감이 막심했다. 팔을 힘껏 내리누를 때마다 선우의 입에서는 고통에 찬 숨이 힘겹게 터져 나왔다.
제발, 제발….
제 정신마저 서서히 혼미해지고 있었으나, 선우는 멈출 수가 없었다. 필사적인 움직임에도 멈춰 버린 심장이 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제발, 살려 주세요…!
삐이이이-
문득, 한쪽 귀를 뚫고 기계음과 같은 이명이 들렸다. 그러더니 이내 양 귀가 먹먹해지며 아무 소리도 들리지가 않았다. 눈앞이 온통 새하얀 빛으로 점멸하며 양팔에 힘이 쭉 빠지는 순간이었다.
턱, 누군가 선우의 어깨를 붙잡았다.
“형사님! 저희가 하겠습니다!”
획 돌아간 몸 앞에는 주황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선우는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와 동시에 구조대원 두 명이 침대 위로 빠르게 올라가 응급 환자의 상태를 살폈다.
“헉! 세상에!”
뒤따라 방으로 들어온 구조대원 한 명이 선우를 보고 소리쳤다. 그렇지 않아도 갑자기 움직인 탓에 머리가 핑- 도는 듯 어지러움을 느끼던 찰나였다.
“혀, 형사님! 괜찮으세요?”
사색이 된 구조대원이 선우의 허리춤을 보며 물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선우도 고개를 내려 보았다. 축축이 젖어 버린 옷이 몸에 찰싹 들러붙어 있었다. 푸르던 우체부 조끼는 어느덧 검붉은 얼룩에 뒤덮여 본래의 색을 잃은 채였다.
하아… 하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선우는 그 자리에서 눈을 감았다.
***
깜빡, 깜빡.
무거운 눈꺼풀이 느리게 오르고 내리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눈에 들어온 것은 온통 새하얀 배경이 전부였다.
눈동자만 굴려 오른쪽을 보니 철제 거치대에 수액 주머니 두 팩이 걸려 있었다. 똑, 똑,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는 투명한 액체가 고무관을 타고 도달하는 곳은 제 오른쪽 손등 위였다.
선우는 이번에는 왼쪽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시원하게 트인 창밖으로 이제 막 해가 지는 듯 푸르스름한 회색빛 하늘이 보였다. 며칠째 줄곧 내리던 비는 이제 완전히 그친 모양이었다.
“허억…!”
몸을 일으키려 고개를 드는데, 불현듯 왼쪽 아랫배에서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살갗이 찢어지고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지경이라, 선우는 그대로 다시 제자리에 눕고 말았다.
“선배님! 일어나셨어요?”
병실 한쪽, 소파에 앉아 있던 동길이 선우의 신음성을 듣고 벌떡 일어나 침대 앞으로 달려왔다.
“……어떻게 된 거야?”
뱃가죽은 물론 내장 깊숙한 곳까지 얼얼한 감각이 가시질 않았다. 선우는 절로 구겨진 이마를 펴지 못하고 동길에게 힘없이 물었다. 마취의 영향인지, 까끌거리는 목구멍을 비집고 나온 목소리에는 쇳소리가 섞여 있었다.
“괜찮으세요? 잠깐만요! 의사, 아, 아니, 간호사 선생님 좀 불러올게요!”
“아, 아니야. 괜찮아.”
선우는 허둥대며 나가려는 동길을 붙들었다.
“예? 깨어나면 호출하라고 했는데?”
“…응. 잠깐만. 괜찮으니까, 천천히.”
동길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선우와 병실 문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이내 얕은 숨을 내쉬며 선우 앞에 섰다.
“하……. 수술은 잘 끝났다는데, 의식을 못 차리셔서 다들 걱정했어요…….”
“……그랬어?”
침대 난간을 붙잡고 선우를 내려다보는 동길은 더없이 침울해 보였다.
“하루가 지났다고요.”
“아… 그래……?”
“예. 의사 말이,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구급대원 앞에서 정신을 잃은 선우는 그 길로 인근 대학 병원으로 옮겨졌다. 도착하자마자 수술대에 오르게 된 것은 어제의 일이었다.
자상을 치료하는 것 자체는 큰일이 아니었으나, 깊게 찔린 탓에 내부 장기의 손상이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찔린 즉시 바로 병원으로 옮겨진 것도 아니었기에 무엇보다 출혈이 심한 상태였다. 희미하게 떨어져 가는 바이털 사인이 겨우 정상으로 돌아온 것은 수술 중 몇 팩의 피를 쏟아부은 후였다.
수술을 마친 선우는 이후 회복실을 거쳐, 이곳 1인 병실로 옮겨졌다. 의사는 분명 수술이 성공적이었다고 했는데, 마취제의 약효가 끝날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선우는 깨어나질 못했다. 선우에게는 마땅한 보호자가 없으니, 이를 아는 팀원들이 돌아가며 선우의 곁을 지키던 와중이었다.
“……네가 나 깨어날 때까지 옆에 있어 준 거야? 고맙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당연히 그래야죠!”
선우는 힘없이 웃었다. 그러고는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드디어 궁금했던 것을 물으려는데 왠지 모르게 심장이 도닥거렸다.
“……교주는, 잡았어?”
“…….”
“……?”
동길이 대답을 주저했다. 갑자기 난처해하는 동길이 선우는 의아했다. 설마 그사이에 교주를 놓치기라도 한 건가, 일순 불안감이 엄습했다.
선우는 기력 없는 손을 들어 동길의 손 위에 올렸다.
“잡았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선우가 재차 물었다. 그러자 동길이 땅이 꺼질 듯, 깊은 한숨을 쉬며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 잡았습니다.”
“…….”
“…….”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동길은 말이 없었다. 곧 울음이라도 터트릴 것 같은 그는, 정복을 갖춰 입은 채였다.
***
아직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간호사와 동길의 말을 무시하고, 선우는 휠체어에 앉았다. 동길에게 인도를 부탁하여, 수액을 그대로 매단 채 선우는 병원 지하에 위치한 장례식장을 찾았다.
고(故) 박민호 님
장례식장 입구에 붙어 있는 모니터 화면에는 믿을 수 없는 현실이 쓰여 있었다.
“한 경위! 깨어났어?!”
휠체어를 타고 들어오는 선우를 보고 멀리서 정기영이 달려왔다.
“어떻게 이 몸으로 여기까지 왔어! 병실에서 쉬고 있지.”
“…….”
선우는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아 제대로 된 대답도 하지 못했다. 허망한 시선으로 장례식장을 둘러보니, 군데군데 제가 아는 동료들이 보였다.
정기영과 동길의 도움을 받아 선우는 분향소로 향했다.
가는 길목마다 줄지어 선 화환을 애써 외면해 보았지만, 결국 그 끝에 마주한 것은 하얀 국화꽃으로 둘러싸인 제단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선우는 박민호를 다시 만났다.
“…….”
날카로운 눈빛, 강인한 입매를 가진 그는 미소 띤 얼굴로 선우를 보고 있었다. 답답한 게 싫다며 정복 입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도 않던 사람이 오늘은 정복 차림으로 저를 맞이했다.
동길의 부축으로 선우는 제단 앞에 섰다. 헌화를 위해 국화꽃 한 송이를 집으려는데 손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려, 선우는 그마저도 동길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핏기를 잃은 얼굴로 헌화대에 꽃을 올려놓은 선우는 이내 고개를 들어 박민호를 바라보았다.
“하…….”
말도 안 돼……. 선우의 입에서 한탄이 흘렀다.
그 자리에 멀거니 선 선우는 절은커녕 묵념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박민호의 영정만을 하염없이 쳐다봤다. 도무지 현실이 믿어지지가 않으니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이어 선우의 시선은 그의 곁을 장식한 수많은 꽃을 지나, 경찰청장이 추서9)하고 갔을 훈장과 표창장에 내려앉았다. 박민호의 눈빛만큼이나 빛나는 금빛 훈장을 보고 선우는 깊게 침음했다. 묵직하게 퍼지는 향내가 가슴을 사정없이 짓눌렀다.
“…….”
선우가 한참을 꼼짝없이 서 있자, 정기영은 선우를 조심스레 상주석으로 데려갔다. 경황이 없어 정기영이 이끄는 대로 끌려간 선우는 상주를 향해 머리를 깊이 숙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선우는 그만 숨이 턱 막히고 말았다.
선우의 앞에는 소복을 입은 박민호의 부인과 키가 선우의 가슴께까지 오는 그의 어린 아들이 서 있었다.
“…네, 네가, 태산이구나…….”
선우가 고운 이마를 살포시 찡그렸다.
“네 얘기 많이 들었어…….”
동그랗고 맑은 눈동자가 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기에, 선우는 힘겹게나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렇게… 멋진 친구였구나…. 태산이가…….”
그러나 더는 태산의 시선을 견뎌 낼 수가 없어, 선우는 급히 고개를 떨궜다. 이내 후드드득, 바닥 위로 투명한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으윽….”
그게 신호탄이라도 된 듯, 선우의 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참아 왔던 감정이 둑 터지듯 터지자, 머리를 거치지 않은 말이 입 밖으로 물밀듯이 쏟아져 나왔다.
“미안해…….”
“…….”
“미안해, 태산아…….”
“…….”
탄식같이 뱉어 내는 선우의 말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형수님…….”
“한 경위…….”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로운 모습으로 선우는 사죄를 했다. 그런 선우를 진정시키려 김지항이 선우에게 다가갔으나 뒤에 선 정기영이 그를 조용히 말렸다.
“제가, 윽, 제가……. 저, 저 혼자만…… 선배님이, 저를……. 흐윽,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선우는 실로 제가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바닥을 향해 고개를 처박고 횡설수설했다. 머리를 너무 깊이 숙인 나머지 허리까지 앞으로 굽어지려는 것을 박민호의 부인이 만류했다.
“…으윽, 끅….”
그녀는 선우의 손을 맞잡았다. 그녀의 체구만큼이나 작은 손은 푸석하게 메마른 얼굴과는 다르게 보드랍고 따스했다.
“……남편이… 한 경위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
선우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박민호의 부인을 마주했다. 그녀의 눈에도 물기가 한가득 고여 있었다.
“우리 태산이가, 한 경위처럼 컸으면 좋겠다고…… 늘 입버릇처럼 얘기했거든요…….”
그러나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선우를 보며 찬찬히 얘기하는 그녀는 도리어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순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와, 선우는 온 얼굴을 사정없이 구겼다. 이내 두 눈을 꾸욱 내리감으니, 굵은 눈물방울이 눈꼬리를 타고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얇은 물줄기가 되어 흐른 눈물은 곧 양 볼을 모두 적시고, 그마저도 모자라 하얀 환자복의 옷깃마저 축축하게 적셨다.
“……한 경위만이라도… 살아서, 다행이에요…….”
“아… 윽…….”
담담한 어투에 선우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가쁘게 숨을 헐떡이던 선우는 결국 더는 참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
1팀 팀원들은 조문객을 위해 마련된 접객실로 자리를 옮겼다. 새하얗게 질린 선우가 숨을 고르길 기다리면서, 동길이 종이컵에 물을 따라 건넸다.
팀원들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선우는 어제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선우가 방 안으로 들어간 사이, 박민호는 칼을 든 교주와 몸싸움을 벌였다. 선우의 호출을 받고 팀원들이 올라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박민호는 복부와 가슴, 어깨를 일곱 번이나 찔렸다.
세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교주를 잡고, 응급 구조대원이 도착한 즉시 박민호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긴급 이송된 그는 곧바로 응급 수술에 들어갔으나 복부와 심장을 찌른 자상은 치명상이 되어, 수술 도중 숨이 멎고 말았다.
박민호를 챙기느라 다른 상황을 파악할 겨를이 없었던 팀원들은 구조대원이 선우를 발견하고 나서야 그의 상태를 알게 되었다. 팀원들은 자신들이 너무 늦어서 미안하다고, 말도 안 되는 자책을 했다. 그러면서 너마저도 깨어나지 못하면 어쩌나, 매시간이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고 속마음을 전해 왔다.
“…….”
선우는 하얀 종이가 깔린 좌식 식탁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상주석에서 너무 많이 울고 와서 더는 나올 눈물도 없을 것 같았는데, 이야기를 듣는 내내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마냥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선우는 옷소매로 차근히 눈물을 닦아 내고, 동길이 건넨 물을 마시며 속을 달래 보았다. 그러고는 소주잔을 기울이는 팀원들을 향해 조용히 물었다.
“……그… 방 안에 있던 친구는… 어떻게 되었나요…?”
그녀마저 죽었다고 할까 봐, 사실은 물어보는 것조차 겁이 났다.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철렁해 입을 떼는 것도 힘겨웠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생명이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응급 처치 받고 중환자실에 있는데, 깨어났다니까 내일쯤이면 일반 병실로 옮겨가지 않을까?”
김지항이 입안으로 소주를 털어 넣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두툼하게 부은 눈이 동그랗게 크기를 키웠다.
“……살았어요…?”
“살았어요.”
“뒤늦게 부모님이랑도 연락이 닿았고. 그렇지 않아도 아까 낮에 그 친구 부모님이 감사하다고 인사하러 왔었어.”
“필로폰 과량 투여로 인한 급성 중독이었대요. 그냥 뒀으면 그대로 사망할 뻔한 거를 대처를 빨리 잘한 덕분에 산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의사가.”
“아… 아아…….”
살았구나……!
일순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살았어… 살았어…….
선우는 바들바들 떨리는 두 손을 식탁 위에 얹고 그 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만감이 교차하니 겨우 그친 눈물이 다시금 솟아오르려 했다.
잊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서 할딱이던 몸, 미세하게 뛰던 심장이 뚝 하고 멈추던 그 순간을 평생 잊어버릴 수 없을 것 같았다.
많게 봐도 20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어린 친구였다. 그녀를 제발 살려 달라고, 제 고통도 잊은 채 저는 믿지도 않는 신들에게 그렇게 빌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선우는 어딘가에 있을 그 신이라는 존재가 무진히도 야속하고 또, 감사했다.
***
박민호의 영결식은 마약범죄수사대가 위치한 마포 청사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아직 외출할 수 있을 정도로 몸을 추스르지는 못했기에, 선우는 장례식장 앞에서 행해진 발인 행사까지만 참석하고 병실로 올라와야 했다.
혼자 남은 선우는 그동안 자지 못했던 잠을 채우기라도 하듯, 반나절이 넘도록 내리 잠만 잤다.
저녁때가 다 돼서야 깬 선우는 그때야 비로소 잊고 있었던 핸드폰을 찾아 들었다. 동료들이 챙겨 놓은 듯, 침대 옆 서랍장에 놓인 핸드폰에는 아마도 제 것일 핏자국이 얼룩덜룩 묻어 있었다.
선우는 배터리가 다 된 핸드폰을 충전기와 연결하고 전원을 켰다. 물티슈를 한 장 뽑아 핏자국을 닦아 내는데, 전원이 들어온 핸드폰이 끊임없이 진동했다. 다들 어디서 어떻게 소식을 들은 것인지, 지인들이 보낸 걱정 어린 메시지와 부재중 통화가 줄줄이 도착하고 있었다.
선우는 메신저를 켜 가장 선단에 있는 채팅방부터 확인했다.
마약 사범 검거 중 흉기에 찔린 경찰관… 1명 사망, 1명 중상
출처 : 경찰저널 - http://police.net/Fdj86kEI
시헌이 10분이 멀다 하고 부재중 통화를 남긴 것은 이 시점부터였다.
메시지를 확인한 선우는 곧장 시헌에게 전화를 걸었다. 진작 연락을 줬어야 했는데, 혼자서 얼마나 마음 졸이고 있었을까. 선우는 반대로 시헌을 걱정했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전화를 받기 어려운 상황인지 신호음이 한참 가도 응답이 없었다. 혹시라도 일에 방해가 될까 봐 선우는 그만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그때, 시헌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한선우!
“어. 시헌아.”
- 아… 하아……. 아아…… 맙소사…….
떨리는 음성으로 탄식하는 시헌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걱정 많이 했지?”
-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너, 너 괜찮은 거야?
“음……. 살아는 있는 것 같아.”
선우는 부러 천연덕스럽게 얘기했다. 생각 없이 몸을 울려 웃으니, 더럭 수술 부위가 욱신거렸다. 선우는 행여나 시헌이 들을까, 소리 죽여 신음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 정말, 정말로, 너야? 네가 칼에 찔린 거야? 정말?
“……으음….”
- 하, 세상에.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시헌은 오늘 새벽, 홍콩에서 국내 소식을 접했다.
해외 로케 촬영차 일주일 가까이 홍콩에 머무르고 있는 시헌은 국내 돌아가는 상황을 잘 모르고 있었으나, 마약 제조자 ‘교주’의 엽기적인 행각으로 한국은 이틀째 떠들썩했다.
인터넷이 하도 난리니, 주변 스태프들도 쉬는 시간이 되면 하나둘씩 ‘교주’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건·사고에는 별 관심도 없지만, 급기야는 자신의 개인 스태프들마저 교주 타령을 하는 것을 듣고 시헌은 슬쩍 기사를 찾아보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선우가 속해 있는 수사대의 일이 아닌가. 심지어는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설마 하는 마음으로 서둘러 선우에게 연락을 했는데 영 응답이 없자, 시헌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시헌은 촬영 중 단 1분이라도 틈이 나면 선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우가 전화를 받지 않으니, 그 후엔 기사를 찾았다. 기사에 혹시라도 부상 경찰관에 대한 신상 정보가 있진 않을까 하고.
뒤늦게, 중상을 입은 경찰관이 ‘B 경위(25)’라는 것을 확인했을 때부터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예전에 선우가 흘러가는 말로 수사대 내에 자신의 또래는 저와 동길뿐이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하아……. 네 전화 기다리다 나 진짜 죽는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으면 예전에 동길이 번호라도 미리 받아 놓는 건데…….
연거푸 한숨을 내리 쉬는 시헌의 목소리에 물기가 고여 있었다.
“미안……. 빨리 연락 줬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경황이 없었어. 핸드폰도 이제야 켠 거 있지.”
- 그래, 그랬겠지……. 어떻게 이런 일이 다 있냐. 뭐, 그런 미친 새끼가……. 몸은 좀 어때? 괜찮아? 아프진 않아?
“으응. 수술도 잘됐다 하고, 아직은 진통제랑 수액 맞고 있어서 그런가… 생각보단 참을 만해.”
- 하, 그래…. 그래도 목소리 들으니까 좀 살 것 같다. 나 지금 진짜 돌아 버릴 것 같은데, 그래도… 일단은 살아 있으니까 됐어…. 그만하길, 정말 다행이야…….
“…….”
다행……. 정말 다행인 걸까…….
나라도 살았으니 다행이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선우는 손끝으로 애꿎은 이불자락을 구겼다.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 또다시 가슴을 억눌러 왔다.
- 선우야. 나 지금 공항인데, 내가 도착하면 시간이…….
“……지금 여길 온다고…? 너 홍콩 아니야?”
잠시 사념에 잠겼던 선우는 시헌의 말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 홍콩인 게 중요해? 네가 칼을 맞았다는데.
“촬영은 어쩌고?”
- 야,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촬영을 하게 생겼어? 이제 곧 비행기 타. 조금만 기다려.
“아, 아니야. 거기서 여기까지 어떻게 온다고 그래. 너, 스케줄도 아직 남았지? 그럼 돌아가. 나 절대 안정하라는데 너 그러고 오면 불안해서 안정 하나도 못 해.”
시헌이 중간에 자르기라도 할까 봐, 선우는 거의 속사포처럼 말을 뱉어 냈다.
- 너 혼자 어떻게 있으려고. 거동도 힘들 텐데.
“동길이가! 동길이가 도와주기로 했어.”
- 그래? 바꿔 줘 봐.
“아, 오늘은 집에 들어가서 쉬라고 했지. 동길이도 며칠째 병원에 있느라 힘들 텐데.”
선우는 시헌이 비행기 타는 것을 막기 위해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을 늘어놓았다.
- 그럼 밤에는 내내 혼자 있는 거잖아.
“밤에는 잠만 자는데 뭐…….”
말끝을 늘이던 선우가 갑자기 진지한 표정과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시헌아. 너 만약에 촬영 남은 거면, 여기 올 생각 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얼른 돌아가. 나 너랑 전화 끊으면 밥 먹고 바로 잘 거야.”
- 응, 그래. 난 가서 너 멀쩡한지 얼굴만 보고 올게.
“야. 목소리 들었으면 됐지, 뭐 얼굴 보러 여기까지 와. 얼굴은 사진 찍어서 보내 줄게. 나 멀쩡해.”
- 그거 좋네. 일단 사진 한 장 찍어 보내. 어? 야, 비행기 시간 다 됐어. 들어간다?
“야, 야아. 나 퇴원하려면 아직 한참 남았어. 일 다 보고 천천히 와도 돼!”
-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일단 넌 쉬고 있어. 자기 전에 톡으로 병실 몇 호인지 보내 놓고. 끊는다!
“어? 야! 김시헌!”
뚝-
아……. 진짜 못 말린다, 김시헌.
선우는 그새 끊겨 버린 전화를 내려다보며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이내 다시 메신저로 돌아가, 그간 쌓인 메시지들을 하나씩 확인했다.
대학 동기 방에서 저를 걱정하다, 경찰 신세를 한탄하는 대화로 이어지는 메시지가 수백 개. 개인적으로 안부를 묻는 선후배, 동료들의 메시지가 또 수십 개.
이곳저곳에 생존 신고와 감사 인사를 돌리고, 선우는 비스듬히 세워 둔 침대에 등을 기댔다. 선우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수많은 메시지와 부재중 통화 중에 남자에게서 온 것은 없었다. 워낙 바쁜 사람이니 아직 제 상황을 모르고 있을지도 몰랐다. 안다 해도 기실, 그가 제게 연락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내심, 그 많던 이름 중에 그의 이름 석 자가 없다는 사실이 못내 서운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그에게 연락을 주기로 한 날이었는데……. 벌써 퇴근 시간 다 지났는데 설마… 내 연락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선우는 침대에 기대 있던 몸을 얼른 바로 세웠다. 그리고 연락처에서 그의 이름을 찾았다.
곧장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데,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근데, 무슨 핑계를 대야 하지……?
제가 하는 거짓말을 귀신같이 알아채는 남자였다. 목소리 상태도 별로 좋지 않으니, 분명 무슨 일 있냐고 물어 올 것이 뻔했다. 얘기가 길어지면 남자에게 이런저런 말로 상황을 둘러댈 자신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선우는 메신저를 열었다. 이후 몇 차례나 문장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선우는 조심스레 전송 버튼을 눌렀다.
메시지를 보내고 나니 괜히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졌다. 선우는 핸드폰을 협탁 위에 올려 두고 등을 돌려 다시 침대 위에 누웠다. 어깨까지 이불을 끌어올리며 눈을 감은 그는 그 뒤로 더는, 협탁 위로 눈길을 보내지 않았다.
***
병마는 밤을 덮친다고 했던가.
저녁 식사로 나온 흰죽을 먹고 침대에 누워 쉬고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수술 부위가 싸하니 슬금슬금 아파 왔다.
식사 전, 간호사가 약이 모두 닳았다며 통증 자가 조절 장치를 수거해 갔는데, 그 뒤부터 통증이 심해지고 있는 듯했다. 내장이 찢어지는 것만 같은 고통에 선우는 모로 누워 몸을 잔뜩 웅크렸다.
“으으….”
시간이 지나면 어련히 괜찮아지겠거니 싶었는데, 어째 갈수록 통증의 강도가 점점 더 세지고 있었다. 뜨거운 것으로 후벼 파는 것마냥 뱃가죽이 쑤시고 후끈거렸다. 조금이라도 움직일라치면 온몸이 찌릿할 정도의 신경통마저 느껴졌다.
“아윽…….”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통을 마냥 참고만 있으니, 전신에서 식은땀이 줄줄 났다. 눈을 감고 있어도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은 난생처음 겪어 보는 일이었다.
의지할 곳이 없어 고작 이불자락을 움켜쥐고 사지를 바들바들 떨고 있을 때였다.
“어머! 환자분! 괜찮으세요?”
바이털 체크를 위해 회진을 돌던 간호사가 선우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선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끙끙 앓기만 했다.
“왜 그러세요, 수술 부위가 아파서 그래요?”
“…….”
간호사가 선우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 선우는 대답 대신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아프시면 진통제라도 추가로 더 놔 드릴까요?”
“……네에….”
간호사의 질문에 겨우 답하는 선우의 얼굴이 파리하다 못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간호사는 서둘러 병실 밖으로 나섰다. 그러고는 머지않아 주사 한 대를 가져왔다.
“진통제 들어가니까 이제 금방 나아지실 거예요. 이렇게 아프시면 너스콜을 하지 그러셨어요.”
간호사가 수액 줄을 통해 주사액을 밀어 넣으며 말했다.
“……너스콜이요?”
선우가 힘없이 묻자 간호사는 침대 위에 붙어 있는 빨간 버튼을 가리켰다. 턱을 살짝 들고 위를 올려다보니, 동그란 버튼과 그 위에 ‘Emergency Button’이라고 쓰인 글자가 떡하니 눈에 들어왔다.
“아…… 그런 게 있는지 몰랐어요…….”
선우는 허무하다는 듯 힘 빠진 웃음을 지었다. 선우를 안쓰럽게 내려다보던 간호사는 손목을 들어 차고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시곗바늘이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대로 잠은 주무실 수 있으시겠어요? 푹 주무셔야 회복이 빠른데…….”
간호사는 서둘러 선우의 체온과 맥박을 확인했다. 둘 다 정상인 것을 확인하고, 그녀는 가져온 의료 도구를 트레이에 챙겨 담았다.
“주사 맞으셨어도 약효 다 되면 또 아프실 수도 있어요. 그때는 꼭 콜하세요.”
“…네, 고맙습니다.”
간호사는 창백하던 얼굴에 차츰 혈기가 도는 것을 보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내 그녀는 트레이를 옆구리에 끼고 자리를 벗어났다.
그대로 병실을 나서려 문고리를 잡는데, 어쩐지 사연을 담은 듯 처연해 보이는 청년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그녀는 다시 돌아와 선우에게 물었다.
“환자분. 정 힘드시면… 의사 선생님께 말씀드려서 먹는 진통제랑 수면제라도 처방을 좀 해 드릴까요?”
선우는 몸을 바로 눕히다 말고, 물끄러미 간호사를 올려다봤다. 그렇지 않아도 낮에 잠을 너무 많이 자기도 했고, 지금도 통증이 꽤 남아 있어서 쉽게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혼자 지새우는 밤은 또 얼마나 길고 외로울까. 처절한 고독감이 밤새 저를 괴롭힐 것이 분명했다.
“……네. 그럼, 그렇게 해 주실래요?”
나지막이 청하는 선우의 목소리에 기운이 하나도 묻어 있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뜨면 이 고통도, 어둠도 모두 끝나 있기를.
선우는 간호사에게 받은 진통제와 수면제를 한입에 털어 넣고 자리에 누웠다. 쏟아지는 약 기운에 졸음을 느낄 새도 없이, 선우는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저 아득한 암흑 속에 빠진 채 헤어 나오지 못하는 선우의 눈두덩 위로 얼핏,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떨어졌다.
……?
눈자위를 스쳐 간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려 선우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것은 조금도 보지 못하고 다시 눈이 감겼다. 수면제의 영향인지, 눈 위에 돌덩이라도 얹어 놓은 듯 눈꺼풀이 천근만근이라 도무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만연한 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선우는 또 까무룩 잠에 빠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누군가가 제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것이 느껴졌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머리카락을 얽어 살살 매만지는 느낌이 포근하고 기분이 좋아, 선우는 눈을 감은 채 그 손길을 고스란히 받고 있었다.
“……시헌이야…?”
그러다 잠기가 가득 묻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거 봐. 또 다른 남자 이름 대지.”
“……?”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에 선우는 잠의 수렁으로 빨려가는 정신을 억지로 붙들었다. 그러고는 손등으로 눈을 비벼 가며 둔한 눈꺼풀을 꾸역꾸역 들어 올렸다. 간신히 뜬 눈을 감으면 또다시 잠에 빠질까 봐, 선우는 눈가에 힘을 꾸욱 주었다.
“……대표님…?”
흐릿한 시야 속에서 남자가 점차 형태를 뚜렷이 했다. 정장 차림을 한 그가 웬일로 머리를 잔뜩 흐트러트린 채였다. 슈트를 입을 때면 늘 빈틈없이, 셔츠를 목 끝까지 여미던 넥타이와 단추도 느슨하게 풀어헤친 상태였다.
칼 같은 단정함은 남자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는데, 오늘따라 무슨 일인지 그는 조금… 어수선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오늘 우리, 데이트하기로 한 날이니까.”
데이트…….
선우는 남자가 가볍게 뱉어 낸 말에서 무겁게 느껴지는 단어 하나만을 골라 속으로 되새겨 보았다.
“데이트 신청한 상대가 너무 바쁜 것 같길래. 조금이라도 아쉬운 사람이 와야지.”
“…….”
“…….”
“……이거… 꿈이에요?”
선우의 엉뚱한 물음에 태성이 설핏 희미하게 웃었다.
“응. 꿈이야.”
역시, 꿈이구나…….
안 그래도 머릿속이 몽롱하고 시계는 흐리터분한 것이 꼭 꿈속에 있는 것 같긴 했다.
선우는 눈동자만 움직여 남자와 그 주변을 둘러보았다. 남자의 뒤로 블라인드가 걷힌 창가에는 새까맣게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창가 끝에 조그맣게 걸린 조각달이 불이 꺼진 병실을 은은하게 비춰 주었다. 따스한 노란빛이 창을 등지고 선 남자에게 와 닿으니, 그 빛이 꼭 그를 보드랍게 감싸 주는 것처럼 보였다.
꿈이라 그런지 배경도 참 낭만적이라는 생각을 하며, 선우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머리 위로 커다란 손이 얹어졌다. 저를 잠에서 깨웠을 때처럼, 남자는 살금살금 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느리게 반복되는 살가운 손길에 마음이 몽글몽글하니 편안해져, 선우는 저도 모르는 새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대표님….”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한 공기 속에서 선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거, 꿈이니까 얘기하는 건데요…….”
마치, 숨겨 둔 비밀을 얘기하는 사람처럼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사실은… 저도 아쉬웠어요.”
“뭐가?”
“저도… 평범한 데이트… 한 번쯤은 해 보고 싶었거든요….”
영화도 보고, 팝콘도 먹고… 그런 거요.
때 묻지 않은 순수한 고백에 태성의 입에서 바람 빠진 웃음이 절로 샜다.
“퇴원하고 하면 되지.”
선우도 따라 맥없이 웃었다.
남자와의 평범한 데이트. 아마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몸은 좀 어때요?”
“……음. 수술은 잘됐고……, 젊으니까 금방 회복될 거래요…….”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선우가 조곤조곤, 제 상태를 얘기했다.
“그건 의사 얘기고. 한선우는 어떤데?”
남자의 질문에 선우는 감은 눈을 떴다. 이름을 불러 주는 묵직하고 온화한 음성이 듣기가 좋았다.
“안 아팠어?”
“……아팠어요.”
선우는 자신의 상태를 묻는 남자를 반히 쳐다보다, 이내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꿈이니까. 이 정도는 말해도 되지 않을까.
“……너무… 아팠어요.”
아파서 숨도 못 쉴 것 같았어요.
지금도… 지금도 너무 아파요…….
남자에게 응석이라도 부리듯, 선우는 그가 서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그러고는 정말 아픈 사람처럼 몸을 한껏 오그라트렸다.
“왜 아프다고 말 안 했어.”
태성이 선우의 이마를 부드럽게 쓸어올리며 물었다. 자상한 질책에 선우는 큼직한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그새 차오른 눈물방울이 눈꼬리를 타고 주륵 흘러내렸다.
“……으음. 박 경위님이… 돌아가셨거든요.”
덤덤하게 꺼내 놓은 목소리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박민호를 생각하니 다시금 가슴이 미어졌다. 한 번을 맞고도 이렇게 아픈데, 그는 무려 일곱 번을 찔렸다고 했다. 그가 죽었는데, 그는 고통 속에서 헤매다 세상을 떠났을 텐데… 제가 어떻게 감히 아프다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을까.
그에 비하면 제 아픔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니어야 했다.
어느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못한 속마음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남자 앞에서는 우는소리가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오는 건지…….
꿈이라서 그런가 보다. 저는 꿈에서라도 이 괴로움과 죄책감을 털어내고 싶어서 기어이 허상 속의 남자를 만들어 냈나 보다고, 선우는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어쩐지 마음이 편해져, 선우는 켜켜이 접어 두었던 참담한 심경을 하나씩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 교주라는 사람이… 저를 먼저 찔렀거든요. 제가 바보같이 한눈팔고 있어서…….’
‘제가 제대로 대처했으면… 선배님이 그렇게 될 일은 없었겠죠……?’
‘교주가 군인이었는데… 그걸 제가 찾았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찾지 않는 건데……. 그 사람 못 찾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잖아요…….’
‘왜 하필 그날이었죠? 왜 하필, 약을 하고 있었을 때 그 집에 들어갔을까요. 이렇게 될 것도 모르고 저는 범인 잡는다고 신나서 들어갔어요…….’
가만가만, 그날의 이야기를 하는 말간 목소리에 차츰 떨림이 가해지고 있었다.
“내가… 내가 그 사람을 잡고 있었어야 했는데. 나, 나는… 내가 그렇게 돼도… 슬퍼할 사람도 많지 않고…… 가족도, 책임져야 할 사람도 없으니까, 차라리 내가 그랬어야 했어요.”
“무슨 소리야.”
눈을 굳게 감은 채, 굵은 눈물을 주륵주륵 흘려 대는 선우의 귓가로 낮은 음성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된 게 너였으면,”
태성이 이를 바득 갈았다.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선우의 소식을 글로만 접했을 뿐인데도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았다 다시 땅으로 처박히는 기분이었다. 당장에라도 교주라는 놈을 갈가리 찢어 버리고 병원으로 달려오고 싶었던 마음을 네가 알기나 할까.
“아이가… 아들이… 박 경위님 아들이 있었어요…….”
선우는 마치 고해성사라도 하듯 계속해서 자신의 속을 내보였다.
“장례식장에 서 있는 그 아이가…… 까만 양복을 입고 서 있는 그 어린아이가, 그게 꼭 나 같아서…… 아빠 장례식에 혼자 남아 있던 나 같아서…….”
“…….”
너무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선우가 힘겹게 숨을 고르며 마지막 말을 겨우 마쳤다.
“네가 그런 게 아니잖아.”
태성은 허리를 깊이 숙여 선우를 살포시 감싸 안았다. 뒷머리를 손으로 받쳐 제 어깨 쪽으로 끌어당기니, 선우가 어깻죽지에 얼굴을 파묻고 이마를 비벼 왔다.
“미안해할 것 없어.”
“윽….”
남자의 말 한마디에 애써 버티고 있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선우는 지금까지 운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온몸을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숨을 끅끅 들이켜며 눈물을 참아 보려 해도 한번 터진 눈물샘은 멈출 줄을 몰랐다.
“흐윽, 흑….”
태성은 자신의 팔을 붙잡고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우는 선우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괜찮아. 잘 살았어.”
“아… 으윽… 아아아…….”
선우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대다 태성의 어깨를 다급히 끌어안았다. 세상에 기댈 것이라곤 오로지 당신 하나뿐이라는 양, 절박하게 매달리는 선우를 태성이 단단히 붙들었다.
그리고 부들부들 떠는 이의 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살아 줘서 고마워.”
태성의 말에 선우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엉엉 소리가 날 정도로 크게 울었다. 태성의 심장 부근이 금시에 선우의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한참을 목 놓아 운 선우는 완전히 탈진해, 까무러치듯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서럽게 울었던지, 선우는 잠이 들고 나서도 한동안 벅찬 숨을 헐떡였다. 눈물 젖은 얼굴을 닦아 주고 이불을 정돈해 주니 안색이 점점 진정되는 것이 보였다. 태성은 내쉬는 숨이 충분히 고른 것을 확인하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촉, 동그랗고 고운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달칵.
애틋한 두 사람의 모습을 뒤로, 병실 문이 조용히 닫혔다.
그날 밤, 선우를 찾아온 손님은 두 명이었다.
***
또박, 또박.
불이 모두 꺼진 병원 로비에 맑은 구둣발 소리가 울렸다.
자박, 자박.
조용한 걸음이 그 뒤를 따랐다.
태성은 병원 밖으로 나와, 건물 옆에 따로 마련된 흡연 구역으로 자리를 옮겼다.
담배를 피울 생각은 사실 전혀 없었다. 다만, 저를 쫓아오는 이에게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할 만한 장소가 필요할 것 같았다.
태성이 담배 한 대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자, 캡 모자를 눌러쓴 장신의 미남자가 그의 앞에 우뚝 섰다.
“안녕하십니까.”
병원 앞 대로변에 기사가 대기 중인데도 곧장 돌아가지 않고 이곳으로 온 이유는, 로비에서부터 제게 따라붙는 인기척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본인을 숨길 생각도 없었는지, 상대방은 제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거침없이 저를 쫓아왔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선을 그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오랜만이네요.”
“대표님께서… 선우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다짜고짜 용건부터 들이미는 상대에 태성이 담배 연기를 후, 뱉어 냈다. 그러고는 계속하라는 의미로 그를 향해 눈썹을 까딱였다.
“선우 일, 도와주시는 것은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거기까지만 해 주셨으면 합니다.”
상대는 아주 정중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청을 해 왔다.
“……공부만 하느라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친구예요. 영악하게 잇속 차리고 그런 것도 못 하고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 이제 그만 흔드셨으면 좋겠어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태성이 한쪽 눈썹을 위로 삐쭉 치켜올렸다.
보호자, 보호자 했더니 진짜 보호자 같은 소리를 하고 있네.
“흔든다고 어디 흔들어지는 사람이던가, 한선우가.”
긴 손가락 사이에 걸린 담배가 태성의 입술에 잠시 닿았다 떨어졌다. 비아냥거리는 듯한 미소와 함께 그의 입에서 뿌연 연기가 흘러나왔다.
“한선우 씨는 어엿한 성인인데. 보호자가 영 성인 취급을 안 해 주시네.”
상대는 태성의 말에 기분이 상한 듯, 눈가를 움찔거렸다. 그러나 이내 다시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워낙에 순진하고 속이 여린 친구라, 대표님이 조금 잘해 주시는 거에 금방 마음을 열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선우가 외골수 같은 기질이 있어요.”
“…….”
“나중에 대표님 마음이 돌아서면 많이 충격받을 거예요. 그러니 뭣 모르는 애 데리고 장난하는 건, 이쯤에서 그만하셨으면 합니다.”
이번에는 태성이 양쪽 눈썹을 모두 구겼다. 상대를 쏘아보는 눈빛에 불쾌한 감정이 역력했다.
“김시헌 씨 눈에는 내가 사랑놀음으로 장난이나 치고 다니는 한심한 놈으로 보이나 봐.”
“…….”
깊은 밤, 안개처럼 음산하게 내리깔린 목소리에 시헌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그 외골수 같은 애한테 왜 친구로 접근을 했어. 애초에 포지션 잘못 잡은 건 당신이야.”
일탈이라고는 모르는 선비 같은 한선우가 십년지기 친구를 하루아침에 연애 상대로 생각한다. 그것도 남자를? 그런 어불성설이 따로 있나.
‘허.’
태성은 담배를 다시 입에 가져가려다 말고 툭, 손을 떨어트렸다. 시헌의 말을 곱씹다 보니 기가 찼다.
“나중에 마음이 돌아설 거라니. 그걸 감히 누가 장담해.”
오히려 마음이 돌아서지 않을 것을 장담할 수 있었다. 저는 한번 마음에 든 것은 끝을 볼 때까지 손에 쥐고 절대 놓지 않는 성정이었으므로.
“미안하지만, 본인이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난 놓아줄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태성은 그가 저를 거부하지 않게 할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게 얼마가 걸리든, 언제가 됐든.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퍽 애석(哀惜)한 일이겠으나, 그만큼 한선우는 이미 제게 너무 애석(愛惜)한 사람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이 변합니다.”
“김시헌 씨 마음은 변하려면 아직 멀었어요?”
자신을 내리깔아 보며 태평하게도 말하는 태성에 시헌이 이를 악물었다. 주먹을 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가고, 속에서는 용솟음치듯 울컥 화가 치밀었으나, 시헌은 침착하게 분을 삭였다.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 아직 해야 할 말이 남아 있었다.
“대표님은 책임져야 할 게 많으신 분 아닙니까.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의 관계를 정리해야만 하는 상황이 올 수밖에,”
“친절하게 내 상황까지 고려해 주니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 하나.”
태성이 담배가 꽂힌 손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무표정한 얼굴 속에 언뜻, 성가신 기색이 묻어났다.
“맞아요. 난 신경 쓸 것도 많고, 책임질 것도 많은 사람이에요.”
태성은 피우다 만 담배를 내려다봤다. 얼마 태우지 않은 것 같은데, 그새 길이가 반 이상 줄어 있었다.
“거기다 한선우 인생 하나쯤 더 얹는다고 달라질 거, 나한텐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 관계를 정리하는 건 오로지 한선우한테 달린 일이야, 당신이나 내가 아니라.”
태성은 바닥에서부터 길게 솟은 재떨이 위에 꽁초를 가볍게 비볐다. 그러고는 불이 꺼진 꽁초를 재떨이 안으로 톡 던져 넣었다.
“나도 고맙게 생각은 해요. 그나마 숨구멍 하나는 있었으니까 지금까지 버틴 거겠지.”
“…….”
“은혜를 어떻게 갚을지는 차차 생각해 볼게요.”
빈손을 양쪽 바지 주머니에 꽂아 넣은 태성이 시헌을 똑바로 보고 섰다. 그리고 그는 싱긋, 입꼬리를 올리며 가볍게 웃었다.
“그동안 수고 많았어요. 앞으로는 그 수고, 내가 하는 걸로 하죠.”
태성은 제 할 말만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
***
눈이 저절로 뜨였다. 수면제를 먹은 지 정확히 8시간 만이었다.
약 기운이 전부 가시니 흐리멍덩하던 머릿속이 구름이 걷힌 듯 개운해졌다. 그리고 정반대로, 마음속은 혼미스럽기가 짝이 없었다.
지난밤 꿈에 그가 나왔는데… 이게 도대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질 않아서였다.
꿈속에서 저는 남자에게 밑바닥까지 속을 까 보이며 엉엉 울었더랬다. 남 앞에서 그렇게 주절주절 떠들며 이성을 잃을 정도로 울어 대다니, 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보면 이건 꿈이 맞는데…….
그런데 또… 그 나긋한 목소리, 다정한 손길을 꿈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생생한 감각이었다. 저를 쓰다듬고 안아 주던 손이 오죽이나 따뜻했으면 아직까지도 그의 온기가 몸에 남아 있는 것만 같을까…….
도무지 아리송한 와중에 선우는 그게 제발 꿈이었기를 바랐다. 무슨 생각으로 그 사람한테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인 건지. 제가 한 말을 떠올리면 전부 다 부끄럽고 창피한 말들뿐이라, 덮고 있는 이불을 걷어차는 것도 모자라 둘둘 말아 저 멀리 밀어 넣고 싶은 심정이었다.
“…….”
그래도…… 그게 꿈이든, 현실이든.
묵직하게 속삭이던 ‘살아 줘서 고맙다’는 말은… 눈이 시큰거리고 가슴이 뻐근해질 만큼 위안이 되는 것이기는 했다.
똑똑.
차마 걷어차지는 못하고, 이불 속에서 조그맣게 헛발질을 하고 있자니 문 쪽에서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에.”
병실 문이 열리고, 의사와 간호사 여럿이 병실 안으로 우르르 들어섰다. 선우가 눈을 뜨고 처음으로 맞이한 오전 회진이었다.
“드디어 얼굴을 제대로 보네요. 어이구, 훌륭한 일 하신 경찰관님이 얼굴도 훤칠하시네.”
가장 앞장서 걸어온 의사가 웃으며 인사를 건네 왔다. 연륜이 있어 보이는 그는 자신을 병원장이라 소개했다.
“어때요. 컨디션은 좀 괜찮아요?”
“아, 네. 많이 좋아졌어요.”
선우는 조금 의아한 얼굴을 하고 저를 에워싼 의료진들을 둘러봤다. 혼자 쓰는 병실이라 환자라곤 저 하나뿐인데, 회진을 온 의료진이 무려 의사가 여섯, 간호사가 다섯이었다.
“얼굴색은 나쁘지 않네요. 피를 많이 흘렸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기본적으로 건강한 체질인가 봐요. 회복 속도가 굉장히 빠른 편이에요.”
병원장이 침대 난간에 손을 얹고 살갑게 얘기했다. 저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정겨워서, 선우는 순간 병원장님과 제가 이전에 무슨 안면이 있었던가를 고민했다.
그러는 동안 수술을 집도했던 담당의가 다가와 선우를 자리에 눕혔다. 말없이 수술 부위를 살피던 의사는 이내 거즈를 떼어 내고 소독약을 발랐다.
‘으으….’
소독약에 절은 탈지면이 실로 꿰맨 살갗 위를 슥슥 닦아 내니, 수술 부위가 저릿저릿 아려 왔다. 기분 나쁜 통증에 선우가 콧등을 살짝 찡그렸다.
“아직은 움직이기가 좀 버겁지요? 어지럽고.”
“네. 조금요….”
“수술은 아주 잘됐어요. 장 과장 솜씨는 우리 병원에서도 워낙 알아주니까, 수술 자체에는 크게 문제가 없을 거예요."
누워 있는 선우가 병원장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러운 건 일시적인 빈혈이에요. 한동안은 철분제 잘 챙겨 드시고, 증상이 나아지면 조금씩 걷기 운동도 해요. 그래야 수술 부위 협착도 안 되고 회복도 빨라요.”
“네에…….”
이렇게 많은 의료진 사이에서 병원장이 직접 나서서 제 건강을 챙겨 주니, 선우는 어쩐지 황송한 기분이 들었다.
“실밥은 5일 뒤에 뽑겠습니다. 그때 상황 봐서, 괜찮으면 그날 오후나 다음 날 바로 퇴원할 수 있을 거예요.”
수술 부위 드레싱을 마친 담당의가 선우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선우는 옷을 정리하고 자리에 앉으며, 병원장과 담당의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뭘, 이게 우리 일인데요. 인사나 좀 잘 전해 줘요.”
“……아…!”
웃으며 얘기하는 병원장을 보고 선우는 앉은 자리에서 무릎을 탁, 쳤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 말도 안 되게 호화로운 병실에 제가 들어와 있는 이유도, 병원장씩이나 되는 분이 친절하게 제 경과를 보고해 주시는 이유도.
아무래도 제 상관 중에 누군가가 병원장과 연줄이 닿아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저는 유명 대학 병원이라 그런지 시설도 대우도 참 남다르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병원 측에서 이렇게 좋은 병실을 내어 줄 정도면, 신경 써 주신 분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경찰 내에서 상당히 계급이 높거나 병원장과 막역한 사이인 듯했다.
“네, 그러겠습니다. 어느 분께…… 전해 드리면 될까요?”
선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으응?”
그러자 병원장이 선우만큼이나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허허, 젊은 친구가. 농담도 잘하기는.”
갑자기 당황한 기색을 띤 병원장이 주위에 서 있는 의사들을 슬쩍 둘러보았다.
으흠, 흠. 병원장은 몇 차례 헛기침을 하더니, 어정쩡한 웃음을 지으며 선우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래요. 그럼, 빨리 회복해요.”
그러고는 조금 붉어진 얼굴을 하고 황급히 등을 돌렸다.
어… 병원장님……?
인사드릴 분이 누군지 아직 말 안 해 주셨는데……?
바삐 병실을 벗어나는 병원장을 보며 선우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
높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시릴 정도로 맑은 가을날이었다.
병원에서 지내는 내내 몸이 근질근질했던 선우는 실밥을 풀자마자 그 즉시 퇴원 수속부터 밟았다. 그리고 다음 날, 곧바로 동길을 만났다.
박민호의 영결식에 참석하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쉬웠던 선우는 그를 안장한 곳에 직접 가서 마지막 배웅을 하기로 했다. 아직 몸 상태가 혼자 돌아다닐 만큼은 아니라, 선우는 동길에게 동행을 부탁했다.
정복을 갖춰 입은 선우는 국화꽃 한 다발과 함께 국립현충원 경찰묘역으로 향했다.
“아니 그래서, 영결식 끝나고 팀장님이랑 정 경감님이 그 새끼 심문하고, 저랑 김 경감님이 현장 수색 다시 갔거든요? 당일에는 뭐, 워낙 정신이 없었으니까.”
선우는 달리는 차 창 밖을 보며, 말없이 동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근데 씨발, 냉장고에서 머리통이 나오잖아요.”
“뭐?!”
“아, 깜짝이야!”
선우가 빽! 소리를 지르자, 동길이 오른손으로 제 귀를 급히 막았다.
“뭘 그렇게 놀라요. 선배님도 이미 팔뚝 본 거 아니었어요?”
“아… 그렇긴 한데…….”
예상을 하고는 있었지만, 토막 난 사체가 추가로 더 발견이 됐다는 건 그래도 충격적이기는 했다.
“냉동고 속에서 정말 별게 다 나오더라고요. 손목, 발목부터 시작해서 팔뚝, 허벅지… 와, 내장은 진짜 못 봐주겠더라.”
윽, 선우는 그 사체를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을 구겼다.
“그래서 시체를 맞춰 봤더니 두 구잖아요.”
“두 구?!”
“예. 아, 선배님 진짜로 기사 제목도 안 쳐다봤나 봐요.”
끔찍하고 잔인무도한 ‘교주 사건’으로 대한민국은 며칠간 온 나라가 들썩였다. 그러나 정작 피해 당사자인 선우는 사건의 전말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건, 선우가 그동안 철저하게 ‘교주 사건’을 외면해 왔기 때문이었다.
팀원 누구에게든 수사 진행 상황을 물으면 소상히 알려 줬을 테고, 그게 아니더라도 인터넷 기사만 대충 읽어 봐도 사건은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선우는 누구에게도 묻지 않았고, 무엇도 찾아보지 않았다.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서였다.
사건 소식을 접하면 또 박민호가 떠오를 게 분명했다. 인간의 것이라고 볼 수 없는 그 괴기한 눈빛도, 나무토막처럼 강직되던 빳빳한 몸뚱이도 마찬가지였다.
할 수만 있다면 그날의 기억을 통째로 들어내고 싶을 정도라, 지금 시점에서는 사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일주일째 TV, 인터넷과는 아예 담을 쌓고 지내는 중이었는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동길은 현충원으로 가는 동안 지금까지의 일들을 자세히도 밝혀 왔다.
“DNA 검사로도 두 명인 거 확인했고, 그놈도 피해자는 두 명뿐이라고 진술하긴 했어요. 근데 또 모르지. 이미 다른 데다 시체 유기 끝낸 거일지 누가 알아요.”
“……사람들은 왜 죽인 거라는데?”
“아, 정확히 말하면 죽인 건 아닌데….”
“그럼?”
“같이 뽕 빨다가 여자애들이 죽어 버렸대요. 근데 시체 처리를 못 하겠더랍니다.”
‘교주’ 임진건의 정체는 인근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화학과 대학원생이었다.
1년 전쯤, 인터넷에서 제조법을 발견하고 필로폰을 만들어 본 것은 순전히 호기심이었다. 그걸 직접 투약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호감형 외모를 갖고도 숫기가 없고 내성적이었던 임진건은 사람들 앞에만 서면 늘 의기소침했다. 그런데 자신이 만든 약을 하니, 기분이 좋은 것은 둘째치고 왠지 마음이 충만하고 자신감이 차올랐다.
본인의 외모가 이성에게 꽤 ‘먹히는’ 얼굴이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용돈벌이나 해 볼까 싶어 약을 팔러 간 클럽에서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여성들을 하나둘씩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때부터 임진건은 종종 클럽에서 이성을 만나, 집으로 데려와 같이 약을 하고 성관계를 맺었다. 그러다 유흥비가 부족하니, 본격적으로 약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교주’니 ‘성수’니 하며 떠받드는 것도 저를 부추기는 데 한몫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소량씩 직접 가져다 팔았는데, 거래량이 점차 많아지니 임진건은 본인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 겁이 났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저 대신 약을 팔아 줄 판매책을 구했다. 제게 접근하는 놈들 중에 제일 어리숙한 놈으로 두세 명 정도. 교주의 정체를 궁금해하지도 않고, 적당히 무서워하면서, 제 지시를 말대꾸 없이 잘 따를 만한 사람으로. 예를 들면, 구동연 같은.
약을 던질 때 군복을 입은 건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서였다. 평범한 군인은 군중 속에서는 없는 사람이나 매한가지였고, 심지어 사람들은 더러 젊은 군인에게 호의적이기까지 했으니, 신분을 숨기기에 이만큼 편리한 복장도 없었다.
“그럼 죽은 사람 토막 내서 그대로 집에 숨겨 두고 있었던 거야?”
“아니요, 무슨. 몸통도 일부 없었고, 머리도 하나뿐이었는데요.”
“그럼 나머지는 어디로 갔어?”
“한강이요.”
그러다 문제가 처음 발생한 것은 올해 6월 즈음이었다. 성관계 후 약을 더 달라고 조르는 상대에게 아무 생각 없이 주사를 놓았는데 그만, 그 여자가 호흡 곤란으로 죽고 만 것이다. 물론 그녀의 숨이 넘어가는 동안 신고할 시간은 충분했다. 하지만 임진건은 제가 교주라는 것이 드러날까 두려워, 숨이 끊어질 때까지 여자를 방에 가둬 두었다.
그리고 임진건은 그맘때쯤 인터넷으로 정육 칼을 주문했다.
두 번째 여성의 사망도 전혀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투약 직후 발작을 일으키더니, 쇼크로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임진건은 같은 방식으로 시신을 처리했다. 그 과정도 첫 번째나 무섭고 힘들었지, 두 번째에는 별다른 느낌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약에 취한 상태에서 사체를 처리하면 묘한 쾌감이 들기도 했다고 진술해, 심문하던 경찰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흩어진 시신을 찾아낸 곳은 주로 냉장고와 부엌 찬장이었는데, 장기의 짝이 맞지 않자 경찰은 임진건에게 나머지의 행방을 물었다. 그러자 그는 가끔 새벽에 한강 공원에서 산책을 하는데, 그 길에 가져다 버렸다고 답했다.
“CCTV로 전부 확인했어요. 꼭두새벽부터 검은 봉지 들고 가서 강물에다 내던지는 거.”
“하…….”
선우가 제 발을 내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폭 쉬었다.
“그 자리에서 두 명 다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고 말할 때는, 와… 나도 그냥 그 새끼 패 버리고 깜빵 갈까 했다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경찰이요. 뒤에 경찰이 더 올 줄 몰랐대요. 그래서 두 분 다 칼로 찌른 거라고요.”
헉…! 선우가 숨을 들이켜며 철렁이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만일 동료들과 구조대원이 없었다면 저는 그 뒤로 도대체 어떻게 됐을까.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쿵덕쿵덕 널을 뛰었다.
과연, 세상이 한바탕 난리가 날 만한 스토리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흉악무도한 교주의 행각에 피해를 당한 경찰관들을 제대로 대우해 줘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된 것이었다.
선우는 모르고 있었지만, 이미 인터넷상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두 경찰관의 공을 치사하고, 안타까운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자세한 신상만 공개되지 않았을 뿐이지, 마약범죄수사대의 ‘B 경위’ 역시 대중의 격려를 한 몸에 받았다.
그 덕에 박민호 경위는 1계급 특진이 추서되었고, 선우는 대통령 표창과 함께 내년도 특진 대상자에 올랐다.
최 팀장에게 병가를 신청하려고 전화했을 때, 포상을 받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얼떨떨했었는데… 이런 뒷얘기가 있었을 줄이야. 선우는 어안이 벙벙해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듣기 힘드실 거 아는데, 행여나 죄책감 갖고 계실까 봐 얘기한 거예요.”
선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동길을 바라봤다.
“박 경위님 그렇게 된 거…… 선배님 탓 아니에요.”
동길은 차선 변경을 위해 왼쪽 사이드미러를 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이번에 그놈 못 잡았으면 피해자 세 명으로 안 끝났어요.”
동길의 굵직한 목소리가 조용히 차 안을 울렸다. 조수석에 앉은 선우는 목받이에 머리를 기대며 나직이 신음했다.
***
“저 앞에서 내려 주면 돼.”
선우가 손가락으로 근처 횡단보도를 가리켰다. 아파트 단지 안까지 들어가려면 낮긴 해도 언덕을 올라야 해서, 선우는 그냥 집 앞 가까운 길목에서 내리기로 했다.
동길의 차가 멈추고, 선우는 두르고 있던 안전벨트를 풀었다.
“오늘 너무 고생 많았다. 고마워, 동길아.”
“아니에요. 저도 일 빠지고 오랜만에 드라이브하니까 좋네요.”
이른 오전에 출발한 두 사람은 늦은 오후가 다 되어서야 돌아왔다. 박민호 경위, 아니 박민호 경감의 묘지에 가면 한바탕 또 기절할 듯이 울고 올 줄 알았는데…. 가는 길에 동길의 이야기를 들어서였을까, 생각보다는 비교적 덤덤하게 인사를 하고 왔다. 그렇다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아아, 선배님 없으면 전 외로워서 어쩌죠?”
선우가 병가를 낸 세 달 동안 저는 아저씨들 심부름이나 하고 있게 생겼다고, 동길이 운전대에 머리를 박으며 좌절했다.
“엄살은.”
그 모습이 귀여워서 선우는 손을 뻗어 까슬한 동길의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가끔 연락 주세요.”
“그래. 너도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중간중간 팀 소식도 좀 전해 줘.”
“당연하죠. 저 힘들 때마다 연락해서 맨날 징징거릴 건데요? 빨리 돌아오시라고.”
“기대하지 마. 3개월 꽉 채우고 돌아갈 거야.”
선우가 작게 소리 내어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운전 조심해!”
조수석 문을 닫고 선우는 창문 너머 동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동길이 탄 차가 출발하고, 차체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쯤에야 선우는 몸을 돌려세웠다.
집으로 향하는 단지 앞 작은 언덕을 오르는데, 혼자가 되니 금세 마음이 썰렁해졌다. 왠지 가슴이 허해서, 선우는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가에 서 있는 가로수의 나뭇잎이 어느새 반쯤 노랗게 변해 있었다. 아마도 이 센티한 마음은 갑자기 성큼 다가온 가을 때문이었나 보다고, 선우는 애꿎은 계절 탓을 해 보았다.
선우가 사는 동은 건물 출입구가 단지 입구와 정면으로 마주 보는 방향에 나 있었다. 그래서 단지를 둘러싼 울타리 너머에서도 출입구에 누가 있는지를 훤히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집 앞에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한 명 와 있었다. 낡은 아파트와는 어지간히도 어울리지 않는 그 손님이, 언젠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던 그 밤과 같은 모습으로.
“……대표님?”
선우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서둘러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잘 지냈어요?”
남자 역시 선우를 향해 다가왔다. 건물 앞 주차장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그리고 남자는 선우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느린 시선으로 훑어내렸다.
“우와. 지금까지 본 한 경위 모습 중에 오늘이 제일 멋지네요.”
선우는 고개를 숙여 남자의 시선을 따라 저를 훑었다.
“아…….”
너무 익숙한 나머지 잠시 잊고 있었는데, 저는 오늘 진청색 제복을 입은 경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모습을 남자에게 보이는 게 어쩐지 좀 쑥스러워, 선우는 곧장 귀를 붉혔다.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
선우가 손에 들고 있던 정모를 품에 끌어안으며 묻자,
“한선우 데리러.”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응답했다.
“가자. 우리 집으로.”
지금까지 본 모습 중에 가장 화사하게 웃는 얼굴로, 그는 그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