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Break (10/19)

7. Break

“들어와요.”

선우는 양팔로 정모를 꼬옥 끌어안은 채 태성의 뒤를 따랐다. 너른 현관을 지나 갤러리를 방불케 하는 복도를 가로지르면, 지난번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부채꼴 모양의 드넓은 응접실이 나왔다.

선우는 응접실 한가운데 서서 멀뚱멀뚱 집 안을 둘러보았다. 고개를 위로 꺾어야지만 끝을 볼 수 있는 높다란 천장도, 한강 전망대 뺨치는 수려한 바깥 경치도 그때와 다를 것 없이 여전했다.

“뭐 해요? 안 따라오고.”

태성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간에 서서 물었다. 앞을 향한 몸은 그대로 두고, 그는 고개와 어깨만 살짝 튼 채 선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요?”

선우가 태성을 올려다보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러자 태성이 주위를 휘휘 둘러보고 되물었다.

“그럼 여기 또 누가 있어요?”

“…….”

얼굴에 의문을 가득 띄운 선우가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조심스레 발을 떼었다. 의아한 마음을 드러내기라도 하듯, 계단을 오르는 걸음걸음에서는 미세한 발자국 소리도 나지 않았다.

먼저 2층에 도착한 태성은 선우가 계단을 다 오르자, 가장 안쪽에 위치한 방으로 그를 데려갔다.

선우를 문 앞에 세우고, 태성이 방문을 여니 곧 두 사람 앞에 넓고 쾌적한 침실이 펼쳐졌다.

“!”

안락한 느낌을 주는 다크 브라운 계열의 침실을 휘이 둘러보며, 선우는 눈을 크게 떴다. 방이 크고, 인테리어가 고급스럽고, 가구가 멋있다는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침실치고는 조금 어둡고 차분한 분위기를 띠는 이 방이 꼭 집주인을 그대로 표현해 낸 것 같은 느낌에서였다.

깔끔하게 정돈된 내부는 남자의 성격과 취향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여기가 침실이에요. 이 오른쪽 문은 욕실.”

태성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쪽 벽에 붙어 있는 문을 또 한 번 열었다.

“와아…!”

그 안을 본 선우의 입에서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제집 거실보다도 클 법한 욕실의 크기도 놀랍긴 했지만, 무엇보다도 선우는 욕실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멋지네요….”

한 면 전체가 유리창으로 되어 있는 욕실 정면은 위로는 서울 하늘을, 아래로는 고요한 한강을 배경으로 삼고 있었다. 창가 바로 앞에는 성인 두세 명이 들어가도 공간이 남을 법한 큼지막한 욕조가 놓여 있었다.

“원하면 언제든 사용해요. 야경 보는 거 좋아하잖아요.”

“……네?”

뭐를…?

선우는 고개를 들어 어느새 제 등 뒤에 서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질문하려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태성은 한쪽 팔로 선우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선우를 방 안쪽으로 이끌었다.

책이 꽉꽉 들어찬 책장과 널찍한 침대를 지나 침실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니, 문이 따로 붙어 있지 않은 통로가 하나 나왔다.

“여기는 드레스룸.”

통로와 연결된 작은 방은 주인의 설명대로 양쪽 벽에 붙박이 옷장이, 방 한가운데에 아일랜드 진열장이 놓여 있었다.

“세탁물은 저기에 넣으면 여사님이 알아서 해 주실 거고.”

태성은 방 끝에 놓인 라탄 바구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고는 불쑥 왼쪽 벽에 붙은 옷장의 미닫이문을 슥, 밀었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열린 옷장 안에는 색깔별, 계절별, 디자인별로 각양각색의 옷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여기서 웬만한 건 다 해결될 것 같긴 한데, 혹시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얘기해요.”

그러니까, 뭐를……?

선우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 떴다.

선우가 드레스룸 입구에 우두커니 서 있자, 태성은 다시 선우의 뒤로 돌아와 이번에는 양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깨를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어 미니, 선우가 떠밀리듯 걸음을 옮겼다.

“이쪽 문으로 나가면 아까 올라온 계단이 나와요.”

태성은 드레스룸 가장 안쪽까지 선우를 밀어 넣다가, 방 끝에 위치한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문을 여니, 그의 말대로 멀지 않은 곳에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태성은 그 계단을 타고 1층으로 앞장서 내려갔다.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지……?

이제 와서 제게 집을 자랑하고 싶은 건 아닐 테고, 왜 갑자기 집안 구경을 시켜 주는 거지…? 뭘 언제든 사용하고, 뭐가 필요하면 얘기를 하라는 거야……?

선우는 여전히 문 앞에 멀뚱히 서서 남자의 의도를 가늠해 보았다.

“천천히 둘러보고 내려와요.”

그러다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조용히 드레스룸 문을 닫고 계단을 내려갔다.

선우가 아래층으로 내려간 뒤에도 집주인의 안내는 계속되었다. 이번에도 선우를 뒤에서 슬쩍 밀며 이끈 그는 부엌과 식당을 시작으로 서재, 미니바, 헬스룸 등 집 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곳곳을 소개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시 응접실로 되돌아왔다.

“이 버튼으로 블라인드를 조절할 수 있어요. 치고 싶으면 이쪽으로, 걷고 싶으면 이쪽으로.”

태성은 테이블 위에서 리모컨을 하나 들고 와, ◁ ▷ 표식이 그려진 버튼을 가리켰다. 그가 오른쪽 버튼을 누르니 유리창 끝에서부터 서서히 블라인드가 쳐지기 시작했다. 창이 반쯤 가려졌을 때, 반대로 왼쪽 버튼을 누르니 블라인드가 도로 걷혔다.

“이거는 조명 밝기 조절,”

태성은 다음으로 그 아래 있는 버튼을 몇 차례 눌렀다. 불현듯 응접실 전체가 차츰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또 어느 순간부터는 점차 밝아지기 시작했다.

“이건 실내 온도 조절.”

마지막으로 △▽ 표식 버튼을 눌렀을 때는 띡- 소리와 함께 리모컨에 붙은 조그마한 창에 현재 온도를 가리키는 숫자가 떴다.

블라인드가 눈앞을 왔다 갔다 하고, 조명이 꺼졌다 켜지는 것을 얼빠진 얼굴로 보고 있던 선우가 갑자기 손을 번쩍 들었다.

“어… 자, 잠깐만요!”

제 뒤에 선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 역시 선우에게 곧장 눈을 맞춰 왔다.

“뭐 궁금한 거 있어요?”

아… 이건 너무 가깝지 않나……?

언제부터였는지, 태성의 가슴팍에 선우의 어깨가 바짝 붙어 있었다. 저를 내려다보는 얼굴이 그야말로 코앞이었다.

선우는 안고 있던 정모를 좀 더 바특하게 끌어안으며 태성에게서 몸을 떼어 냈다. 그리고 빙글 돌아 서 그를 마주했다.

“대표님. 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선우는 입안에서 맴돌던 질문을 마침내 입 밖으로 꺼냈다.

“사용법 설명하잖아요.”

“……왜요?”

“낮에 혼자 있을 때 당황할까 봐요.”

당연하게 대답하는 남자를 보며 선우는 끔뻑, 끔뻑,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제가요?”

선우가 저를 가리키며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자,

“그럼 내가요?”

태성이 그 행동을 똑같이 흉내 내며 되물었다.

“제가 왜요?”

“여기서 지내다 보면 한 번씩은 쓰게 될 거니까.”

“……예에?”

선우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선우는 눈알이 다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얼마나 눈을 크게 떴던지, 매끈하던 이마에 가로로 된 주름이 패었다.

***

두 사람은 테이블 코너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머그 컵 두 잔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선우의 앞에는 연 노란빛 캐모마일 티가, 태성의 앞에는 새까만 원두커피가 놓여 있었다.

“당분간 여기서 지내요.”

“제가… 왜요?”

선우는 정말로 궁금해서 몇 번이고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아직 몸이 불편할 텐데, 집에 누구 도와줄 사람 있어요?”

“아…….”

선우는 뭐라 말을 하려다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냥 주위 사람 아무나 이름을 댈까 싶었지만, 어차피 남자는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곧바로 알아차릴 사람이었다.

“수술 후에는 보양이 정말 중요해요. 혼자서 삼시 세끼 다 챙겨 먹을 자신 있어요? 게다가 빈혈이라며.”

“으음…….”

이번에도 선우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밤에 갑자기 아프면 어떻게 할 거예요. 야밤에 응급실에 가야 할 상황이 생길 수도 있는데. 아프다고 누구한테 전화해서 도움 요청할 사람도 아니잖아, 한선우가.”

“…….”

조곤조곤 사실만을 얘기하는 태성에 선우는 말없이 눈동자만 도록도록 굴렸다.

“그 집에서 또 아픈 거 혼자 참고 있으려고?”

“아… 이제는 그 정도로 아프지는 않아요. 퇴원하면서 진통제도 받아 왔고…….”

“사람 일은 모르는 거예요. 수술한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태성의 말에 선우가 가만가만 눈을 깜빡였다. 그러면서 무릎 위에 얹어 놓은 정모의 테두리를 손가락 끝으로 느리게 훑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한 얼굴을 한 선우는 한 번씩 손을 들어 제 눈썹을 매만지기도 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고민이라는 것을 하기는 하는 눈치라, 태성은 본격적으로 선우를 유치하기로 했다.

“이미 집안일 봐 주시는 분이 계시니, 식사 일 인분 더 챙기는 건 별로 부담도 아니에요. 운동 기구 있으니까 걷기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몸 만들어요. 회복에 전념하기에는 한 경위네 집보다는 훨씬 좋은 환경일 거예요.”

예, 알죠. 알다마다요. 이곳이 제집보다 좋은 환경인 건 지나가는 어린아이를 붙들고 물어도 알 것이었다. 환경이 좋고 나쁜 걸 몰라서 남자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여기서 아예 살라는 게 아니라 요양만 하라는 거예요, 요양만. 혼자 하기는 힘드니까.”

“……그래도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선우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지금 이대로 돌아가면 난 한 경위 집에 간병인 들이고 CCTV 달 거예요.”

“예에?”

놀란 선우가 몸을 발딱이자, 무릎에 놓여 있던 정모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대표님. 그건 범죄예요.”

허리를 굽혀 모자를 주우며, 선우가 어설프게 웃었다. 실없는 소리로라도 에둘러 남자의 말을 거절해 보려 했으나 그다지 효력은 없었다. 선우를 따라 입꼬리를 끌어올리긴 했어도, 그는 몹시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번엔 농담 아니셨나 봐요….”

선우가 몸을 바로 세우며 말했다.

“나 한 경위한테 농담한 적 없는데. 난 좋아하는 사람한테 농담 안 해요.”

“…….”

좋아하는 사람…….

불쑥 파고드는 고백에 선우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좋아하는 사람이 칼을 맞았다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이 어디 있어. 걱정이 돼서 그래요. 또 무슨 일 생길까 봐 불안하고.”

선우의 볼이 발갛게 물드는 것을 보고, 태성은 부러 ‘좋아하는 사람’에 힘을 주어 말했다.

“길게 안 붙들어요. 그냥, 몸이 좀 회복될 때까지만이라도 여기서 지내요.”

“…….”

회복될 때까지만…….

선우는 가만히 두 입술을 감춰 물었다.

사실 이제 막 퇴원을 한 참이라, 선우는 퇴원 이후의 생활에 대해서 한 번도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휴가도 넉넉히 받았겠다, 평소처럼 지내다가 힘들면 그냥 누워서 쉬면 되겠거니.

그런데 남자의 말을 듣고 보니 조금 걱정이 되기는 했다. 퇴원을 하긴 했어도 확실히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니었다. 수술 부위는 곧잘 욱신거렸고, 가끔씩 또다시 칼에 찔린 것처럼 날카로운 통증도 찾아왔다. 움직일 때마다 수술 부위가 당겨 걸음도 느리게 걸어야만 했고, 간간이 어지러운 증상 또한 여전했다.

이런 와중에 스스로 건강을 챙길 수 있을 리가. 병원에서 겪었던 그 극심한 통증을 혼자서 또 겪는다고 상상하면 솔직히 아찔하기도 했다.

그래도,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신세를 져 가면서까지 거창하게 요양을 할 필요가 있을까…. 남자에게 도움을 받는 건 부담스러웠고,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는 건 제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행동이었다.

선우는 고개 숙인 채 생각에 잠겼다. 제 엄지손가락이 모자 정중앙에 박힌 독수리를 연신 쓸어 만지고 있었지만, 선우는 제가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얼른 나아야 양승준도 다시 만나 보죠.”

그러다 들리는 말에 선우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제 아버지 일 알아보는 건 그만두기로 했어요?”

“아니요. 아니에요.”

선우가 세차게 도리질했다.

요 며칠 겪은 일들이 너무 충격적이라 잠시 생각을 접어 두기는 했으나, 그만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거동이 조금만 편해지면 다시 양승준에게 접근하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그런 의미로 일부러 병가를 넉넉하게 받아 둔 것도 있었다.

“그럼 더더욱 여기 있어야겠네. 하루라도 빨리 기운 차려야지.”

“……아, 그래도 이건 좀…….”

“다른 건 깊게 생각하지 말고 한 경위 몸만 생각해요. 며칠만이라도 좋으니까. 아버지 일은 그동안 나도 따로 더 알아볼게요.”

“……며칠…만요…?”

“네. 며칠만.”

“…….”

고민에 빠진 선우가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남자의 제안을 선뜻 수락하는 건 영 마음이 내키질 않는데, 그렇다고 저를 생각해서 해 주는 제안을 냅다 거절하는 것도 마음이 편칠 않았다.

“내가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 거절할 거예요?”

“…네…?”

눈썹이 팔자로 처진 태성의 모습에 선우는 적잖이 당황했다.

“난 때로는 사람 성의를 받는 것도 예의라고 생각해요.”

“…….”

“폐 끼칠까 봐 지레 겁먹고 무작정 거절한다고 능사가 아니에요. 걱정하는 사람 생각도 해 줘야지.”

“…….”

제가 어릴 적 어른들한테나 들었던 소리를 남자가 하니 기분이 조금 묘했다.

“그러고 가면 남은 사람은 신경 쓰여서 손에 일도 잘 안 잡힐 텐데. 아, 혹시 나 걱정하라고 일부러 그러는 건가?”

“…아뇨. 무슨….”

“아니면, 진짜로 CCTV라도 달까요?”

“…….”

“…….”

“……대표님이… 이렇게 말씀이 많으신 분인 줄 몰랐어요….”

선우가 벙찐 얼굴로 태성을 쳐다봤다. 쉬지 않고 말하는 그에게서 언뜻, 제 십년지기 친구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남자는 제가 수락할 때까지 저를 설득할 기세라, 선우는 그만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그럼…… 대표님. 정말, 딱 며칠만 신세 질게요.”

“그래요. 딱 며칠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태성은 기특하다는 듯 선우를 보고 웃었다.

“저… 그럼 방은 어디…….”

선우가 앉은 자리에서 집 안을 빙 둘러보았다. 그가 소개해 준 곳 중에서 손님이 지낼 만한 방은 없었다.

“아까 봤잖아요.”

“어디요?”

태성이 검지로 위를 가리켰다.

“…….”

“…….”

“네에? 아니에요. 무슨 말씀이세요! 저 그냥,”

선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아…….”

다시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앉아 있다 갑자기 몸을 일으키니 순간 머리가 핑그르르 돌았다.

“이거 봐. 이 상태면서 어딜 간다고 그래.”

태성이 팔걸이에 걸친 팔로 턱을 괴며 태평하게 말했다.

“아니… 제가 어떻게 그 방을 써요…….”

선우는 살짝 찡그리며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았다.

“다른 방 쓸게요. 방 많던데. 아니면 저는 여기도 괜찮아요.”

“내가 환자를 이런 데서 재울 만큼 파렴치한은 아니에요.”

“저도 집주인 방을 뺏어서 쓸 만큼 파렴치한이 아니에요.”

“걱정 마요. 나도 그 방 쓸 거니까.”

“……네…?”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침대가 있는 방이 저기뿐이라. 불편하겠어요? 둘이 자기에 좁은 침대는 아닌데.”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선우는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나는 일하느라 집에 머무는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아요. 거의 잠만 잔다고 보면 돼서, 방 쓰는 데 불편하진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 잠이 문제인 것 같은데요……?

선우는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연방 입을 뗐다 다물기를 반복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하얀 두 볼에 동그랗게 분홍빛 홍조가 떠올랐다.

“괘… 괜찮…으시겠어요?”

“뭐 문제 될 거 있어요?”

선우가 묻자 태성은 도리어 어깨를 으쓱이며 되물었다. 그러고는 기쁜 마음을 담아 정식으로 손님을 맞이했다.

“내 집이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지내요.”

***

“다녀오셨어요?”

“!”

현관문을 열던 태성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한쪽 발만 집 안에 들인 채로, 태성은 눈썹을 한껏 치켜올렸다. 하늘을 향한 눈썹이 곧 제자리를 찾고, 이내 그의 입가에 초승달 같은 미소가 떴다.

“네. 다녀왔어요.”

그가 퇴근하는 것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선우는 응접실에 앉아 책을 읽던 중이었다. 아직 실내가 많이 어둡지는 않아, 응접실 불을 한 개만 켜 둔 채였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또로롱’ 하는 기계음이 울렸다. 소리가 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려보니, 현관문으로 향하는 복도에 불이 켜져 있었다. 복도로 가는 길목, 벽에 붙어 있는 인터컴에도 불이 들어온 상태였다.

선우는 읽던 책을 내려놓고 인터컴 앞으로 갔다. 저는 손도 대지 않았는데, 푸른빛이 도는 LED 화면에서 주차장 내부 영상이 자동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검은색 차 한 대가 막 주차를 마치고, 뒷좌석에서 늠름한 풍채의 남자가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촤르르륵-

영상 속을 거니는 집주인을 눈으로 좇다가, 불현듯 들려오는 소리를 따라 선우는 또다시 고개를 돌렸다. 햇살이 강해 낮에 쳐 두었던 블라인드가 저 스스로 걷히는 와중이었다. 훤히 드러난 유리창을 조금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자니, 응접실 전체의 조도가 서서히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

사물도 이렇게 주인을 환대하는데, 사람이 모른 척 가만히 서 있기에는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때에야 선우는 느릿느릿 걸음을 옮겨 현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마침 집주인이 문을 열었다.

“아직 저녁 식사 전이죠?”

태성이 집 안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그 뒤를 따르며 선우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겨우 6시가 막 넘어, 주인 없는 집에서 혼자 식사를 하기에는 살짝 이른 시간이었다.

“조금만 기다려 줄래요? 금방 씻고 올게. 같이 먹어요.”

편한 옷차림을 한 태성이 2층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선우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거의 동시에 식당에 도착한 두 사람이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았다. 태성이 식탁을 덮고 있는 상보를 들어 올리니, 정갈한 한식 한 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집안을 돌보는 심 여사가 퇴근 전 마련해 두고 간 식사였다.

“먹어요. 배고프겠다.”

“잘 먹겠습니다.”

선우가 머리를 꾸뻑 숙였다. 잠깐 내비친 하얀 목덜미가 태성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고개를 드는 동시에 사라진 고운 살결에 아쉬워할 새도 없이, 곧게 뻗은 목선과 매끈한 어깨선이 자리를 대신했다.

“생각보다 더 잘 어울리네.”

태성이 젓가락을 들며 말했다. 무심하게 뱉어 낸 말에 선우는 빈 젓가락을 입에 물었다.

선우는 아이보리색 라운드넥 니트를 입고 있었다. 보나 마나 아무 생각 없이 옷장 맨 앞에 걸린 옷을 빼 입은 모양이었다. 그럴 걸 예상하고 맨 앞에 걸어 둔 옷이기도 했다.

화사한 색감과 얌전한 디자인이 그의 맑은 기운과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골라 둔 옷이었는데, 의외로 선우는 어딘가 모르게 요염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도니스 모임을 위해 옷을 보낼 때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한선우는 옷 입히는 재미가 참 쏠쏠한 사람이었다. 화려하면 화려한 대로, 차분하면 또 차분한 대로. 디자이너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제 분위기에 맞춰 옷을 소화해 내곤 했다.

얼굴이 작아서, 아니면 팔다리가 가늘고 길어서? 아니지, 그런 사람들은 널리고 널리지 않았나.

단정하고 정제된 깔끔함 속에서 묘하게 시선을 끄는 특유의 선정적인 분위기가 옷 태를 살리는 것 같다고, 태성은 생각했다. 많고 많은 보석을 모아 놓은 보석상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새하얀 진주알을 보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제가 고른 옷을 입은 모습을 떠올리며 드레스룸을 채우는 과정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눈앞에 있는 당사자는 과연 상상이나 할까.

태성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선우를 관찰했다. 밥은 안 먹고 꾸물거리고 있는 것이 딱 보니 제게 할 말이 있는 듯했다.

“안 먹고 뭐 해요?”

“저, 대표님.”

태성은 눈빛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병원장님이 인사…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

“그날… 와 주셔서 감사했어요.”

선우가 물끄러미 쳐다보며 얘기하니, 태성이 새삼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은 제가… 대표님이 오신 날 꿈을 꾼 건 줄 알았어요. 약에 취해 있어서……. 바로 인사를 못 드려서 죄송해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역시 이 남자뿐이었다. 병원장의 말과 행동, 병원 측의 극진한 대접들을 곱씹어 볼수록 제게 그런 호의를 베풀 만한 사람은 이 남자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제 정신없는 대화를 하는 와중에, 제가 아픈 걸 혼자 참고 있었던 것을 그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그날의 꿈이 꿈이 아니었음을 확신했다.

“병실도 그렇고, 여러모로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네에.”

태성이 빙긋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데, 저도 이런 대접을 그냥 다 받을 수는 없어서요. 여기서 지내는 동안 조금이라도 생활비를 드릴게요.”

“그래요.”

곧바로 이어지는 대답에 선우가 눈을 키웠다. 얼마를 내놔도 남자에게는 푼돈이라, 됐다고 단박에 거절할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남자는 너무 쉽게 제 의견을 받아들였다.

“저, 그리고…….”

그래서 선우는 한 번 더 용기를 냈다.

“그, 트레이너 선생님은…… 오지 않으셨으면 해요.”

태성이 출근하고 난 뒤, 오전에 뜬금없이 집으로 손님이 한 명 찾아왔다. 선우의 재활을 돕기 위한 트레이너였다. 듬직한 체격을 한 중년의 남성은 만나자마자 소탈한 웃음을 지으며 대뜸 악수를 청해 왔다. 그러면서 앞으로 매일 한두 시간씩 선우가 운동하는 것을 도와줄 것이라고 했다.

“왜요? 별로예요?”

“아뇨, 아뇨. 그게 아니라…….”

제가 뭐 대단한 운동선수도 아니고, 기껏해야 수술 후에 회복하는 건데 트레이너의 도움까지 받을 필요가 있을까. 거기다 재활이라고 해 봐야 지금은 조금씩 걷고 스트레칭하는 게 전부였다. 제게는 하등 필요 없는 것이라 선우는 남자에게 꼭 이 말을 하고 싶었다.

그래도 혹시나, 저를 위해 준비한 걸 거절하면 그가 서운해할까 봐, 선우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운동은 저 혼자 해도 충분할 것 같아요.”

“지금이야 별로 하는 거 없지만, 몸 괜찮아지면 근력 운동도 해야죠.”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볼게요.”

“그분은 좋아하시던데요. 안 그래도 일 잘리고 적적하던 차에 마침 잘됐다고. 한 경위가 보통 사람들보다 운동 능력이 좋은 편이니까, 빨리 회복시켜서 같이 운동하는 것도 기대하고 있더라고요.”

“……잘리셨다고요?”

선우가 눈을 뎅그렇게 떴다.

아직 한참은 창창해 보이시던데, 벌써 잘리셨다고? 요즘 퇴직이 빨라졌다더니 진짜인가 봐……! 그럼… 내가 거절하면 혹시 일자리를 또 잃게 되시는 건가……?

선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심각해졌다. 도대체 어떤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건지, 일자 눈썹에 입술을 꾹 다문 모습을 보고 태성은 웃음을 삼켰다.

“대충 아버지뻘일 텐데, 심심한 분 대화 상대나 해 준다고 생각하고 그냥 관리받는 게 어때요? 아님 낮에 따로 할 일 있어요?”

“아니요. 그건 아닌데…….”

“사람이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라면 케어받아요. 운동 끝나고 바로바로 풀어 주는 것도 중요하니까.”

“으음…….”

선우는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태성은 그걸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하니, 그제야 선우도 따라 젓가락을 놀렸다.

수수하고 털털한 중년의 트레이너가 실은 국가대표 팀 닥터 출신 의사인 동시에, 프로 선수 뺨치는 만능 운동꾼이라는 것을 굳이 얘기하지는 않았다. 일을 잘렸다기보다는 팀 닥터 계약이 끝나서 잠시 쉬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것 또한 한선우가 알 필요는 없었다.

선우의 속도에 맞춰 몇 차례 음식을 집어 먹다가, 태성은 조용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팔짱 낀 양팔을 식탁 위에 얹었다. 눈앞에서 말랑이는 볼이 오물오물 잘도 움직여 대니 당최 식사에 집중을 할 수가 없어서였다.

이럴 바에야 태성은 그냥 대놓고 선우를 구경하기로 했다.

“…….”

“…….”

“……안 드세요?”

선우가 도라지나물을 입에 쏙 넣으며 물었다.

“먹어요.”

태성의 시선은 이제 새하얀 도라지가 빨려 들어가는 새빨간 입안, 그걸 씹느라 자근자근대는 선홍빛 입술을 향해 있었다.

“…….”

“…….”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그냥. 별거 아니에요.”

태성은 선우에게서 눈길을 거두며 다시 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정말 별것 아니었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재개했다. 저를 꽤 유심히도 본 것 같았는데, 그 뒤로 따라오는 말투나 태도는 워낙에 무덤덤한 터라 선우는 별말 없이 식사를 계속했다.

이번에는 아욱국 한 수저가 선우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이래서 사람들이 결혼을 생각하는구나 싶어서.”

풉!

선우가 순간 국그릇 위로 얼굴을 처박았다. 국이 코로 들어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한집에서 같이 밥 먹고 같이 얘기하는 게 이렇게 좋은 거였네.”

“……!”

목에 귀에 볼에 눈가까지 아주 시뻘게진 얼굴로 태성을 마주하니, 그는 태연하게 선우 앞으로 물컵을 밀어 넣었다.

“천천히 먹어요. 체하겠다.”

체하게 만들 장본인이 본인인 주제에 태성은 얼굴색도 표정도 조금도 변한 구석이 없었다.

***

꾸벅, 꾸벅, 숙어 드는 동그란 머리통 위에 커다란 손이 얹어졌다.

“왜 아직 안 들어갔어요.”

잠기운이 더덕더덕 붙은 눈꺼풀이 서서히 위로 올라붙었다. 소파에 앉은 선우가 고개를 위로 꺾어 제 뒤에 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대표님은 안 주무세요?”

“네. 일이 남아서.”

저녁 식사를 마친 후로 태성은 죽 서재에 머물렀다. 진짜로 일이 남은 것도 있었지만, 선우를 위해 자리를 피해 준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 자꾸만 저를 의식하는 것 같아, 조금이나마 맘 편하게 있으라는 의미였다.

저는 일을 하는 중간중간 한 번씩 태블릿으로 응접실의 상황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열 시가 넘고, 열한 시가 넘도록 선우는 방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자리에 앉아 미동도 없이 책만 보고 있길래, 처음에는 책이 정말 재밌어서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러다 가만 보니 어느 순간부터 병든 닭마냥 꼬박꼬박 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태성은 보다 못해 나와 선우를 깨웠다.

“피곤할 텐데 이만 들어가서 쉬어요.”

선우가 위로 향한 고개를 바로 하고, 이번에는 몸을 뒤로 틀어 태성을 마주했다.

“……저 너무 염치없는 것 같아요.”

“무슨 염치.”

“주인도 없는 방 혼자 다 차지하고. 바쁘게 일하시는데 저는 옆에서 놀고 먹고 자고 있으니까.”

하, 그래서 지금까지 안 자고 여기 있었던 거야?

태성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렸다.

“한선우는 가끔 보면 쓸데없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것 같아. 머리를 좀 비워요. 그렇게 따지면, 손님 데려다 놓고 못 놀아 주는 내가 더 염치가 없는 거예요.”

“아, 그건 전혀 아닌데…….”

“우리 집에 쉬라고 데리고 온 거지, 내 눈치 보고 있으라고 데려온 거 아니야. 이러면 내가 널 데리고 온 의미가 없어지잖아.”

“…….”

“난 한 경위가 여기서 지내는 동안 정말로 내 집처럼 편안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나는 그냥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좋으니까 편하게. 저녁 약은 먹었어요?”

“네에….”

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성은 잘했다는 의미로 똑같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선우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럼 들어가서 쉬어요.”

태성이 등을 도닥이자, 선우는 못 이기는 척 방으로 올라갔다.

그의 침대가 원체 안락해서일지, 아니면 그의 말에 힘이 깃들어 있어서일지 모르겠으나, 선우는 그날 밤 근래 들어 가장 편안하고 깊은 잠을 이뤘다.

***

최근, 1분 1초가 바쁜 대표 이사의 일상에 전에 없던 일과가 하나 추가되었다.

틈이 날 때마다 집 안 상황을 모니터링하는 것.

별날 것 없는 단조로운 일상인데, 그거 훔쳐보는 게 뭐가 그렇게 재미있고 즐거운지. 태성은 저도 본인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러 개로 분할된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영상 속 주인공은 먹이를 찾아 숲속을 헤매는 다람쥐마냥 온 집 안을 뽈뽈거리고 돌아다니곤 했다. 그러다 놀거리를 찾으면 또 그때부터는 인형처럼 미동도 없이 한자리에 앉아 몇 시간씩 시간을 보냈다.

며칠 전 집으로 모셔 온 손님은 매우 규칙적인 사람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간단한 식사를 하고 응접실에 앉아 책을 읽었다. 그러면 얼마 지나지 않아 트레이너가 도착했다. 한 시간 조금 넘게 운동하고, 몸을 풀고 나면 트레이너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마냥 혼자 두면 또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을 것 같아서 제가 트레이너에게 부탁해 둔 사항이었다.

예상대로 손님은 친절한 중년 남성에게 굉장히 무른 모습을 보였다. 그건 아마도, 그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트레이너가 가고 나면 못다 한 독서를 하거나, 서재 옆에 붙은 영상실에 가서 영화를 한 편씩 보곤 했다.

손님은 책도 꼭 저 같은 것만 골라 읽었다.

인간관계가 어쩌고, 자기 관리가 저쩌고. 배려가, 몰입이 어쩌고저쩌고하는 그런 닳고 닳은 자기계발서들.

지금도 충분히 열심히 사는 주제에 뭘 더 얼마나 열심히 사시려는 건지. 생각하면 웃음이 나면서도, 한편으론 주변에 기댈 사람 하나 없이도 저렇게 바르게 자란 걸 보면 그게 다 독서 취향의 영향인가 싶어, 마음 한구석이 애잔해지는 것이었다.

태성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대는 손님의 낮잠 시간이었다. 수술 후에 어지간히도 체력이 떨어진 모양인지, 손님은 꼭 오후 두 시쯤 낮잠을 잤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2시간 정도.

어린아이같이 말간 얼굴을 하고 세상 평온하게 자는 모습을 보면, 저 또한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이라. 태성은 오후 두 시가 되면 꼭 책상 한편에 태블릿을 올려 두고 손님의 낮잠 시간을 함께했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손님이 영상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태성은 그만 화면을 껐다. 그러고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로 눈을 옮겼다.

두 개의 보고서.

그러니까, 이걸 본인에게 알려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가 고민인데…….

마음 같아선 하루라도 빨리 사실을 밝혀 버리고 싶었다. 질척이며 양승준이랑 계속 엮여야 하는 꼴도 보기 싫었고, 발목을 잡고 있는 과거에서도 이제는 좀 벗어났으면 했다. 태성은 선우가 마음의 짐을 모두 털어 내고 제 삶을 살았으면 싶었다.

그가 제게 오는 발걸음은 한없이 가벼워야 했고, 제게 오는 길은 무엇보다 즐겁기를 바랐다.

그런데 이거, 본인이 알면… 또 충격받지 않을까.

힘든 일을 겪고 기껏 쉬고 있는 사람한테 이 자료를 들이미는 건 너무 가혹한 것 같은데. 그냥 양승준을 조용히 처리하고 한선우한테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뗄까.

고민에 빠진 태성은 의자에 등을 깊게 파묻은 채, 연신 제 턱을 쓸어 만졌다.

똑똑.

“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태성은 책상 앞으로 몸을 당겨 앉았다. 책상 위에 올려 둔 보고서를 하나로 모아 서류 봉투 안에 넣자, 때맞춰 대표이사실의 문이 열렸다.

“대표님. 결재해 주실 서류요.”

또각또각, 구두 소리와 함께 호텔 총지배인 오주희가 태성의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웬일로 직접 와?”

오주희가 내민 결재판을 받아들며, 태성이 물었다. 대표의 자필 서명이 필요한 결재 서류는 비서실에서 한꺼번에 모아 출근 직후, 퇴근 직전에 가져오는 것이 보통이었다.

“오랜만에 대표님 얼굴이나 볼까 싶어서요.”

“본 지 며칠이나 됐다고.”

“그 며칠이랑은 또 다르신데요?”

오주희는 태성의 대학 동기로, 김현수와 함께 대학 시절 내내 붙어 다닌 삼총사 멤버였다. 처음 태성은 제 앞을 가로막고 늘 과 수석을 차지하는 여학생이 누군가 궁금해서 오주희에게 접근을 했었다. 보는 것만으로는 깐깐하고 얌체 같을 줄 알았더니, 오주희는 의외로 시원시원하고 뒤끝 없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두뇌도, 성격도 완전히 제 취향이라, 태성은 아예 오주희를 제 사람으로 영입했다. 미국 유학비를 전부 대 호텔 경영을 가르치고, 학업이 끝나는 대로 문호리조트 전 지점을 돌아다니며 실무를 익히게 했다. 그리고 제가 문호리조트의 대표 이사가 되자마자, 태성은 오주희를 ‘Hotel the Moon’ 본점의 총지배인으로 앉혔다.

삼십 대의 젊은 대표 이사만큼이나 듣도 보도 못한 파격 승진이라 당시에는 호텔 안팎으로 말이 많은 인사였다. 고위직 임원들은 하나같이 두 사람을 걱정과 우려 섞인 눈초리로 주시했다.

그러나 태성과 오주희가 그 시선을 존경과 응원으로 바꿔 놓는 데는, 2년이란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요즘 즐거운 일 있으신가 봐요.”

“그래 보여?”

태성은 결재판에 꽂힌 계약서들을 빠르게 훑으며 펜을 집어 들었다.

“조금요?”

사실은 조금 아니고 무척이나 그래 보였다.

얼마 전 김현수의 말이, 너네 대표님이 또 무슨 짓을 벌이려는 것 같다고 했다. 가서 동태를 좀 살펴 달라기에 오주희는 일부러 시간을 할애해서 대표를 보러 나섰다. 걱정스런 마음에 오는 길에는 비서실에 들러 최근 대표의 상태를 묻기도 했다. 그런데 비서실의 증언도 그렇고, 제 눈에 보이는 모습도 그렇고. 대표는 전례 없이 활기찬 모습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거, 이거. 뭔가 있긴 한가 본데…….

제 대표란 인간이 매상 웃는 얼굴을 하고 있어도, 오주희는 알고 있었다. 그 번지르르한 얼굴은 다 기계적인 리액션일 뿐이라는 걸. 머릿속으로는 저 사람을, 이 상황을 어떻게 구워삶을까 하는 생각밖에 안 하는 사람이었다, 제 대표는.

그러니까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지금 저 얼굴은 진심으로 유쾌한 표정이었다.

“음. 집에 손님이 와 계셔서 그런가.”

태성은 서류를 한 장씩 넘겨 가며 서명란 위에 펜을 놀렸다.

“손님?”

“응. 흰둥이.”

오주희가 눈을 번쩍 떴다.

“……흰둥이? 뭔, 강아지야?”

대표 입에서 나온 말이 너무 낯설어서, 오주희는 눈썹을 다 찌푸렸다. 그녀의 말과 표정에 태성이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네, 강아지요.”

거봐. 역시 강아지과가 맞는 것 같지. 퇴근하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주인 눈치 살살 보면서 쭐레쭐레 따라오는 꼴이 딱 강아지라니까.

“오우, 말도 안 돼. 살다 살다 우리 대표님이 애완견을 들이는 걸 다 보네. 무슨 종인데?”

“글쎄, 모르겠네. 길에서 주워 와서.”

정확히는 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낚아채 온 것이었다.

“주워 왔다고…?”

‘으흥.’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태성을 오주희가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봤다.

“왜.”

왜냐니. 둘째가라면 서러울 깔끔쟁이가 길바닥에서 강아지를 주워 왔다니까 그러지. 지나가는 개 어미가 다 웃겠다. 거기에 어지간한 심미안이면 내가 말을 안 해.

“야, 그 흰둥이라는 놈 어지간히도 예쁘게 생겼나 보다.”

“……어떻게 알았어?”

“웬만큼 예뻐서야 네 눈에 차지도 않았을 거니까.”

태성은 서류 맨 마지막 장까지 서명을 마치고 펜을 내려놓았다. 동시에 왼쪽 팔을 들어 손바닥 위에 턱을 괴었다.

“역시. 넌 날 너무 잘 알아.”

그러고는 느리게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아침에 보고 온 새하얀 얼굴이 또다시 눈앞에 아른거렸다.

“맞아, 엄청 예뻐. 생긴 것도 예쁜데 하는 짓은 더 예쁘더라고. 얘기하니까 또 보고 싶네.”

“얼씨구야.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오늘은 이만 퇴근해야겠다.”

태성은 결재판을 갈무리해 오주희에게 넘겼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옷걸이에 걸어 둔 재킷을 집어 들었다.

“벌써?”

결재판을 옆구리에 낀 오주희가 왼쪽 손목을 들어 올렸다. 제 시계가 고장 난 게 아니라면 퇴근 시간은 아직 두 시간 가까이 남아 있었다.

“응. 흰둥이 밥 챙겨 줘야지.”

“어… 너 오늘 신입 사원들이랑 저녁 식사 있지 않았나? 다들 엄청 기대하는 눈치였는데?”

“에이. 나보다는 실무에 능한 지배인님이랑 시간 보내는 게 더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재킷을 팔에 걸친 태성이 책상을 돌아 오주희 곁에 섰다. 그가 짓고 있는 이 능글맞은 미소가 무얼 뜻하는지도, 오주희는 잘 알고 있었다.

“잘 부탁해요, 지배인님.”

“아… 나…….”

오주희의 칼퇴가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

“재밌어요?”

“으악!”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태성에 선우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필 주인공과 악당이 대치하는 위기의 순간이라 더 그랬다.

“아, 오셨어요!”

집 안 깊숙이 박힌 영상실에서 불도 다 꺼 놓은 채 영화를 보고 있느라, 선우는 태성이 퇴근하는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선우는 리모컨을 들어 보던 걸 멈추고 현재 시각을 확인했다.

“어… 일찍 오셨네요?”

보통 6시는 넘어야 집에 오는 사람이었는데, 평소보다 귀가 시간이 한 시간이나 빨랐다.

“네. 일이 일찍 끝나서.”

태성의 시선이 재생을 멈춘 스크린 화면으로 향했다. 선우가 보던 것은 연작으로 구성된 슈퍼히어로 영화 중 한 편이었다.

생긴 건 절절한 멜로드라마 열댓 편을 찍어도 모자라게 생겨 놓고, 영화는 한결같이 이런 류를 골랐다. 화려한 CG를 동반한 액션, 히어로 혹은 SF 장르. 그게 권선징악 스토리를 담고 있으면 아마도 백발백중 한선우의 스타일일 것이다.

“저녁 안 먹었죠?”

“네. 아직 시간이…. 대표님은요?”

“나도 아직이에요. 마저 보고 있어요. 씻고 준비 다 되면 부를게요.”

태성은 선우의 손에서 리모컨을 가져와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조용히 영상실의 문을 닫고 나왔다.

씻고 나면 부른다더니, 남자는 영화가 끝나도록 저를 찾지 않았다. 식사 시간도 다 된 듯해, 선우는 영상실을 정리하고 방을 나섰다.

“…?”

방문을 열자마자 부엌에서부터 고소한 기름 냄새가 폴폴 풍겨 왔다. 곧바로 식당으로 가니, 마침 태성이 식탁 위에 널찍한 오목 접시 두 개를 내려놓는 중이었다.

“이게… 뭐예요?”

“우리 저녁?”

그가 놓은 접시 안에는 새우를 곁들인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가 담겨 있었다.

“어떻게 딱 맞춰 왔네요. 지금 부르러 가려고 했는데. 설마 파스타 싫어하는 건 아니죠?”

“네. 크림만 아니면 잘 먹어요.”

“잘됐네. 앉아요.”

태성이 턱 끝으로 선우가 항상 앉는 자리를 가리켰다. 선우는 그 자리에서 머무적거리다 이내 느린 걸음으로 식탁 앞에 섰다.

“아직 술 마시기는 좀 그런가? 와인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태성은 식당 한편에 놓인 와인셀러로 다가가더니, 그 안에서 올리브색 와인병 하나와 와인 잔 두 개를 꺼내 왔다. 식탁을 사이에 두고 선우를 마주 보고 선 태성이 유리병의 마개를 따며 물었다.

“안 앉고 뭐 해요?”

“아, 네.”

선우가 서둘러 의자를 꺼내 앉았다. 곧이어, ‘퐁’ 소리와 함께 병에서 코르크 마개가 뽑혀져 나왔다. 태성은 두 와인 잔에 각각 삼 분의 일가량 와인을 따르고, 그중 한 잔을 선우의 앞으로 밀어 넣었다.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건데요…….”

연한 노란빛의 화이트와인이 얕게 찰랑이는 것을 보며, 선우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이거… 직접 하신 거예요?”

“약 안 탔으니까 걱정 마요.”

태성이 양 볼에 옴폭 보조개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런 걱정 한 거 아니에요.”

“알아. 식기 전에 얼른 먹어요.”

“……잘 먹겠습니다.”

두 사람은 동시에 포크를 들었다. 선우가 포크를 접시에 대고 콕 찍어 돌돌 돌리니 둥근 면발이 포크 날에 도르르 감겼다. 한입 크기로 말린 파스타 면이 금세 선우의 입안으로 쏙 자취를 감췄다.

“와아….”

“괜찮아요?”

선우는 깊이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사실 선우는 느끼한 음식은 질색이라, 스파게티라면 토마토소스와 알리오 올리오 정도만 겨우 먹는 편이었다. 제 입맛을 어떻게 알고 메뉴를 고른 건지도 신기했는데, 맛은 아주 놀라울 정도였다.

담백하고 적당히 짭조름한 것이 느끼한 맛은 전혀 없었고, 신선한 올리브오일에서 느껴지는 풍미는 고소하고 향긋했다. 거기에 상큼한 화이트와인을 한 모금 곁들이니, 깔끔하고 산뜻한 맛이 배가 되었다.

“대표님이 요리도 잘하실 줄은 몰랐어요.”

“잘하는 건 아니고.”

태성도 그제야 포크로 면을 말기 시작했다.

“유학 시절에 익힌 거예요. 혼자 지내니까 저절로 해 먹게 되더라고. 할 줄 아는 건 몇 개 없어요.”

“엄청 맛있어요.”

“다행이네.”

선우는 이번에는 오동통한 새우를 쿡 찍어 입에 넣었다. 안쪽 이로 주황빛이 도는 탱글탱글한 살을 깨물자, 갈라진 틈 사이에서 버터 향이 밴 새우 즙이 주륵 새어 나왔다. 뽀득뽀득, 새우살을 야무지게도 씹으며 선우는 얇게 썬 마늘도 하나 입안에 넣어 보았다. 제 예상대로 새우의 짠맛과 볶은 마늘의 단맛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뤘다.

도대체 이 남자는 못 하는 게 뭐지. 이런 게 세상 혼자 산다는 거구나. 한입, 한입 면을 말아 넣을 때마다 선우의 고개가 절로 까딱거렸다.

“…….”

연거푸 포크 질을 하다가, 선우는 또 저 혼자만 열심히 식사를 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슬쩍 남자의 접시를 확인하니, 역시나 제가 먹은 양의 반도 채 줄어들지 않은 상태였다. 가만 보니 먹는 속도도 느리고, 그는 파스타보다는 주로 와인으로 배를 채우고 있는 듯했다.

“별로… 배 안 고프셨어요?”

“아, 원래 저녁은 많이 먹는 편이 아니라.”

“아…!”

그러고 보니 며칠간 함께한 저녁 식사를 되돌아보면, 덩치가 엄청난 사람이 저녁 식사량은 저와 비슷하거나 어떨 땐 저보다도 적었다. 예전에 순대국밥을 먹어 치운 양을 생각해 보면 몸집만큼이나 양이 보통은 아닌 것 같은데…….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태성은 대답 대신 눈썹을 치켜올렸다.

“대표님. 혹시… 다이어트 같은 거 하세요…?”

선우는 제가 물어보면서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뺄 살이 어딨다고. 근육을 빼면 모를까.

“아, 들켰네.”

“네에…?”

그런데 남자는 생각지도 못한 소리를 해 왔다.

“왜요?”

타고난 몸매도 체격 조건도 충분히 훌륭한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다이어트를 한다는 건지, 선우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어, 이거 진짜 아무도 모르는 비밀인데.”

“비밀이요?”

“한 경위니까 말해 줘야겠다.”

태성이 장난스럽게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난 사실, 관리 안 하면 어마어마해지거든요. 우리 영감님 사진 봤다고 했죠? 딱 그 체질이라, 마음 놓고 먹으면 진짜 헐크처럼 될지도 몰라.”

“……어… 그럼 안 돼요?”

“…….”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선우에 태성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뭐,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사람들한테 자주 노출되는 편이니까, 어느 정도 관리는 해야죠.”

“…그럼, 지금까지 계속 이렇게 관리해 오신 거예요? 언제부터요?”

“음. 성인 되고 난 이후로 죽?”

헤엑, 선우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그래도 먹고 싶은 건 다 먹어요. 저녁 식사량만 조절하는 거지. 많이 먹었다 싶으면 다음 날 운동 좀 더 세게 하고.”

“와……. 생각도 못 했어요. 전 그냥 몸매도 타고나신 건 줄 알았어요.”

“에이, 세상에 그냥 타고나는 게 어딨어요. 설사 타고났다고 해도 지키고 유지하려면 또 그만큼 노력해야지. 그게 몸이 됐든, 뭐가 됐든.”

선우는 입을 헤벌린 채 감탄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눈앞에 있는 이 남자만큼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날 때부터 온통 다이아몬드 칠을 하고 태어났을 줄 알았는데. 그게 십 년이 넘도록 관리하고 유지해 온 결과였다니……. 역시 사람은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고, 선우는 짧게나마 저를 반성했다.

생각해 보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남자는 쉴 틈이 없었다. 제가 일어나기도 전에 나가서 하루도 빠짐 없이 운동을 하고, 퇴근 후에도 자정이 넘도록 서재에 남아 일을 했다. 그 바쁜 와중에도 그는 최신 뉴스며, 신간 서적을 살펴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가 애써 얻어 내고 유지하려는 게 비단 외적인 것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강하게 들었다.

“…대단하시네요.”

“뭐가?”

“그냥, 전부 다요. 신경 쓸 게 엄청 많으실 것 같은데 그걸 전부 다 잘 해내고 계시니까. 사업도 그렇고, 거기에 부업도… 있으시고. 그런데 그 와중에 자기 관리도 철저히 하시고.”

“나 칭찬에 약한 거 어떻게 알았지?”

태성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칭찬 아니고 진심이에요. 이미 가지고 계신 게 많은데도 계속 노력한다는 거,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일이야, 내가 맡은 바니까 최선을 다하는 게 맞는 것 같고. 그건 한 경위도 마찬가지잖아요.”

선우가 고개를 위아래로 느리게 움직였다. 태성은 와인 잔을 식탁 위에 올려 둔 채 빙글빙글 돌리며 말을 이었다.

“사실 외형 관리는 나도 성가실 때도 있는데, 뭐 어쩔 수 없죠.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으로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 사람들 기대에 부응하려면.”

“음… 근데, 대표님은 사업가니까 사업만 잘하시면 되는 거 아니에요?”

선우가 당연한 이치를 얘기했다. 마냥 순박한 물음에 태성의 입에서 바람 빠진 웃음이 샜다.

“모든 사람이 한 경위처럼 생각하면 참 좋겠네.”

태성이 입꼬리를 한쪽만 끌어올리는 모습을 보고 선우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힘들진… 않으세요?”

“……글쎄.”

태성은 잔에 얼마 남지 않은 와인을 한입에 털어 넣고, 다시 와인병을 들었다.

“이렇게 사는 게 익숙해서.”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썩 즐거워 보이지는 않았다. 조르르르, 제 잔에 와인을 반쯤 따르고 태성이 선우를 향해 와인병을 들어 보였다.

“한 잔 더 할래요?”

“……네.”

태성은 손을 길게 뻗어 선우의 잔에도 와인을 채워 넣었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우고 나니 선우의 식사 속도도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다. 대신 잔에 담긴 와인이 줄어드는 속도는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

“대표님.”

선우의 접시가 어느덧 바닥을 드러낼 때쯤이었다. 몇 가닥 남지 않은 파스타 면을 포크로 뒤적이며, 선우가 태성을 불렀다.

“마약을 왜 파시는 건지… 여쭤봐도 돼요?”

“…….”

유리알같이 반짝이는 눈동자로 조심스레 묻는 말에 태성은 잠시 행동을 멈췄다. 와인을 들어 마시려던 것을 포기하고, 태성은 잔의 베이스를 손가락으로 느리게 훑었다.

사업의 목적은 이익 추구. 결국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사업을 한다는 건데…. 태성의 입장에서 그것이 돈은 아니었다. 물론 검은돈이 굴러가는 액수가 크고 세탁하기도 쉽긴 하지만, 재물은 이미 많이 가지고 있었다.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꼭 이 수단이 아니어도 방법은 많았다.

갖은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굳이 이 사업을 하는 이유는…….

“그것만큼 사람 마음 얻어 내기 쉬운 게 없으니까.”

마약이라는 건 사람의 가장 약한 심정을 파고드는 놈이었다.

제아무리 크고 곧은 나무도 조용히 스며드는 빗줄기에 젖기 마련이었고, 그 어떤 튼튼한 나무도 서서히 기둥을 갉아 먹는 개미에게는 속살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내보인 속은 대부분 그 사람의 약점이었고, 사람은 약점을 내보인 상대에게 쉽게 마음을 주거나 쉽게 굴복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이유는 뭔데요?”

“…….”

너무나도 천진한 눈빛에 태성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러게.”

그저 날 때부터 그게 당연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그렇게 얻어 낸 마음으로 그 사람을 구슬리고 조종하는 것. 결국엔 그를 통해 원하는 바를 쟁취해 내는 것.

그게 제가 보고, 겪고, 배워 온 세상이었다. 제가 살아온 세상에서는 이 논리가 너무 당연해서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태성은 한 번 허탈하게 웃고는 도리어 선우에게 물었다.

“한 경위는?”

“저요?”

“왜 경찰이 됐어요? 아버님 일 말고, 다른 이유.”

“아빠 일 말고요……?”

이번에는 선우가 말을 멎었다. 아빠 일 말고, 다른 이유……. 곰곰이 생각해 봤으나,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글쎄요. 아빠 일이 저한테는 너무 큰일이라, 그거 말고 다른 걸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어요. 돌아가신 이유를 알아내려면 그냥, 당연히 경찰이 되어야 하는 줄 알았어요.”

“그럼 아버지 일이 해결되고 나면요. 그땐 뭘 하고 싶은데?”

“어… 음…….”

선우는 고민에 빠졌다.

성인이 된 이래로 너는 뭘 하고 싶냐고 묻는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나는 뭘 하고 싶은지 생각해 보는 것 자체가 제게는 너무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선우는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모르겠어요. 한 번도 그 후일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럼 지금부터 한번 생각해 봐요. 아버지 일이 다 해결되고 나면 뭘 하고 싶은지.”

“…….”

선우는 마지막 남은 면을 포크로 돌돌 말았다. 그대로 입으로 가져가려는데, 어쩐지 목구멍이 꽉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포크는 그냥 내려두고, 대신 와인으로 메인 목을 축였다.

“그래도 경찰… 계속하지 않을까요.”

“…….”

“힘들긴 해도, 저는 제 일이 좋긴 해요.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고.”

태성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요.”

선우는 태성과 눈을 마주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해 온 거고, 가끔은 힘들고 벅차긴 해도, 한편으론 내가 무엇보다 잘하는 일이고 또 재미도 있어요. 그러니까 참고 하는 거지.”

그게 당연했는데….

“근데… 너를 보면 그 당연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한 번씩 들어.”

“…….”

잔잔하게 흘러드는 진중한 목소리와 저를 바라보는 따뜻한 눈빛이 좋아서, 선우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가 말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웃기지? 내 주변에서 내 방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한 경위가 유일한데, 그런 너랑 얘기를 하고 있으면 나는 마음이 편해.”

“…….”

웃기지 않았다. 저는 거꾸로, 저와 정반대되는 방식으로 사는 남자와 이야기를 하면 가슴이 울렁거리고 심장이 요동쳤으니, 웃기다면 제가 더 웃긴 상황이었다.

“재고, 따지고, 머리 아프게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머리 굴리지 않아도 되고. 내 속을 감출 필요도, 겉을 꾸밀 필요도 없어.”

“…….”

저는 거꾸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 머리를 굴려야 했다. 겉만 봐도 제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남자에 선우는 반대로 겉을 그럴듯하게 꾸며 내고 싶었다.

“나는 아마도 그래서, 널 놓치고 싶지 않은 것 같아.”

“…….”

저를 지그시 응시하는 눈동자를, 선우 또한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서로에게 꽤 오랫동안 머물렀다. 선우가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태성을 향한 시선을 천천히 내리까니, 그제야 태성도 선우를 향한 시선을 거뒀다. 그러고는 와인 잔을 들어 올렸다.

와인을 마시는 그림 같은 옆모습, 크게 울렁이는 목울대를 바라보다, 태성이 잔을 내려놓는 것을 보고 선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쪽 사업, 정리하실 생각은… 전혀 없으신 거죠?”

태성이 보기 드물게 눈을 키웠다. 잠깐 짧은 고민을 하는가 싶더니, 그는 양 팔꿈치를 천천히 식탁 위로 올렸다. 이어 두 손을 마주 잡아 깍지 낀 태성은 제 손 위에 하관을 깊이 묻었다.

“한 경위는. 언젠가라도, 그만둘 생각 있어요?”

“…….”

살짝 치켜든 눈동자가 저를 또 꿰뚫어 볼 듯, 진한 시선을 보내 왔다. 선우는 가만, 가만 눈을 껌뻑이다가 결국 그를 피해 고개를 숙였다.

“……아니요.”

선우의 입에서 한숨 같은 답이 흘러나왔다. 순식간에 풀이 확 죽은 동그란 정수리를 보고, 태성은 옅게 미소 짓고 말았다.

두 사람은 태성이 와인 한 병을 모두 비울 때까지, 서로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식사 끝자락에 태성은 선우에게 영화 한 편을 보자고 제안했다. 말은 안 해도 마지막에 식사 분위기가 처진 것을 두고두고 마음에 담고 있을 것 같아서였다.

선우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태성은 옆에서 팝콘을 튀겼다. 노릇노릇하게 튀겨진 팝콘을 그릇에 담아 한 아름 품에 안고, 캔 맥주 몇 개를 챙겨 두 사람은 영상실로 향했다.

영화 선택권은 선우에게 있었는데, 선우는 개봉한 지 몇 년 지난 뮤지컬 드라마 장르의 영화를 골랐다. 가난한 피아니스트와 배우 지망생의 꿈과 사랑을 그린 이야기였다.

전에 시헌의 집에서 DVD를 보다가 결말을 보지 못했던 게 아쉬워서 고른 영화였다. 마침 제가 봤던 앞부분은 영상도 화사하고, 음악도 신났던 걸로 기억나 분위기 전환에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렇게 직접 튀긴 거 진짜 오랜만에 먹어 봐요. 정말 어릴 때 먹어 보고 못 먹어 본 것 같아요.”

선우가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그릇에서 팝콘을 하나 집어 먹으며 말했다.

“나도 오랜만이에요. 쉬는 날 영화 보면서 해 먹으려고 사다 놨는데, 최근에는 휴일이 거의 없어서.”

태성은 휴일에 별다른 일정이 없으면 주로 집에서 영화를 보면서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영화 메이트는 팝콘과 맥주라고 했는데, 그걸 증명하듯 팝콘 튀기는 솜씨가 꽤나 훌륭했다.

식단 관리를 하는 사람답게 조미료는 버터 조금, 소금 조금이 전부였으나, 그게 적당히 고소하고 담담한 맛을 냈다. 언뜻 심심할 수도 있는 맛은 맥주와 함께하니 나쁘지 않았고, 파스타로 든든하게 배를 채운 후라 선우도 짭짤한 맛보다는 이편이 훨씬 더 좋았다.

“우리 그때 못 했던 거 지금 하는 건데. 또 하고 싶었던 거 있어요?”

“못 했던 거요?”

“영화 보고, 팝콘 먹고. 또 하고 싶은 거.”

“아…….”

선우의 양 볼이 금방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영화 시작에 맞춰서 영상실의 조명을 전부 꺼 둔 게 선우에게는 천만다행이었다.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데이트 같은 게 제 관심사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뭘 하고 싶은 게 있었을 리 만무했다.

“데이트, 한 번도 안 해 봤어요?”

“네.” 선우가 스크린을 보며 고개를 주억였다.

“왜? 인기 많았을 텐데. 주변에서 데이트 신청 안 했어요?”

“인기 없었어요.”

“뭐라는 거야.”

태성이 곁눈질로 선우를 쳐다봤다. 어이가 없다는 듯한 말투에 선우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태성은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표정으로 그렇게 얘기를 하고 있었다.

“진짜예요.”

선우는 다시 스크린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런 거 생각할 여유가 없었어요. 아빠 일을 전부 다 알아낼 때까지는 다른 데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거든요. 저는 연애할 생각이 전혀 없는데 데이트하면, 상대방 마음을 꼭 농락하는 것 같잖아요. 그러고 싶진 않았어요.”

한선우다운 생각이었다. 태성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살면서 예쁘게 생겼다고 느껴 본 사람은 있었어요?”

태성이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얄궂은 질문을 했다. 분명 또 우물쭈물하며 그런 거 없었다고 얼굴을 붉힐 줄 알았더니, 의외로 선우는 말간 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하죠. 저도 사람인데.”

“…진짜?”

“음, 네. 예쁘다고 느꼈던 친구는… 한두 명 정도 있었던 거 같아요. 학교 다닐 때.”

태성은 아주 조금 충격을 받았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느낀 감정은 질투라기보다는 어쩐지 배신감 쪽에 더 가까웠다.

“근데 뭐, 그 친구들이랑 연애를 하고 싶다, 데이트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었어요. 그냥 그 사람이 매력적이라는 거지.”

그리고 태성은 안도했다. 선우가 뒷말을 붙여 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태성은 그 친구들이 누구였냐고 꼬치꼬치 물어봤을지도 몰랐다.

“남자는?”

“남자요?!”

선우가 목소리를 키우며 되물었다.

“으음… 잘 모르겠어요. 시헌이보다 멋있는 친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정답이네.”

태성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역시 보호자감으로는 그만한 인재가 없었다.

태성은 팔짱을 끼며, 소파에 등을 깊이 파묻었다. 스크린으로 눈을 돌리니, 주인공들이 이제 막 서로를 향해 호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태성이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나는 어때요? 나라는 사람이 한선우한테 매력적으로 느껴지긴 해요? 외모든, 뭐든.”

“…….”

이번에는 선우가 태성을 힐끔 쳐다보았다. 영화에 완전히 집중한 사람처럼 아무런 미동이 없기에, 선우는 금세 그를 향한 시선을 거뒀다.

“알고 계시면서 묻는 거죠?”

“몰라서 묻는 건데.”

“……묵비권, 행사해도 되나요….”

태성이 목을 울려 웃었다.

“묵비권은 보통, 긍정보다 더 강한 긍정을 의미하지 않나?”

“…….”

선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굳게 닫힌 입술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자, 태성은 답을 얻기를 포기했다.

잠시 후, 한 박자 느리게 선우가 입을 열었다.

“……멋있어요. 태어나서 본 사람 중에 가장.”

한순간 태성의 눈이 번쩍 뜨였다. 태성이 고개를 획 돌려 선우를 쳐다봤으나, 선우는 스크린에서 잠시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하시는 일만 빼고요.”

때마침 영화의 배경이 밝아지며, 스크린에서 나온 빛이 선우의 얼굴을 환히 비췄다. 무표정한 와중에 동그란 볼에 발갛게 뜬 홍조가 태성의 눈에 콕 박히고 말았다. 태성은 고개까지 숙여 가며 큭큭대고 웃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경찰이 유도 신문에 이렇게 쉽게 넘어가면 어떡해.”

선우는 괜히 부끄러운 마음에 두 다리를 접어 소파 위로 올렸다. 두 무릎을 양팔로 끌어안고 그 위에 얼굴을 반쯤 묻으니, 창피한 게 좀 덜 한 것 같았다.

태성은 생글생글 웃으며, 몸 전체를 뒤로 한껏 물렀다. 소파 등받이에 한 팔을 접어 걸친 그는 그쪽 손으로 제 머리를 괴었다. 어차피 영화는 처음부터 제 흥미를 끌지 못했고, 태성은 이제 본격적으로 선우나 실컷 들여다볼 예정이었다. 바로 옆에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면 또 엄청나게 수줍어할 테니, 저는 뒤에서 몰래 조용히 구경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태성은 곧 제 생각을 정정해야 했다. 동그란 머리통,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는 귓바퀴, 솜털이 보송보송한 목덜미를 보고 몰래, 조용히 구경만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아기작아기작, 팝콘을 씹느라 오물대는 볼따구니를 가만히 보고만 있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선우는 그사이에 벌써 영화에 깊게 빠져든 모양인지, 뒤에서 저를 쳐다보는 줄도 모르는 눈치였다. 둘 사이에 놓인 그릇에서 팝콘을 하나, 하나 집어먹는 것도 거의 반은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태성은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선우가 팝콘을 집는 타이밍에 맞춰 그릇에 불쑥 손을 집어넣었다.

“!”

두 사람의 손이 맞닿자,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선우가 눈에 띄게 몸을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태성은 소리 없이 웃으며 팝콘을 한 움큼 집어 왔다. 그러고는 부러 와그작, 와그작, 팝콘 씹는 소리를 크게 냈다. 그러자 잔뜩 움츠린 어깨가 살며시 힘을 빼냈다. 그 과정을 다 보고 있자니 태성은 금방이라도 웃음이 빵 터질 것 같아, 재빨리 입술을 감춰 물었다.

조금 뒤, 태성은 같은 장난을 한 번 더 했다. 이번에는 좀 더 진하게, 선우의 손가락을 살짝 얽었다 놓았다. 물론 우연인 것처럼.

그러니 선우의 목에서 아주 조그맣게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선우는 몸을 동그랗게 웅크리더니, 그 뒤로는 아예 팝콘에 일절 손도 대지 않았다. 태성은 결국 숨까지 참아 가며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막아야 했다.

아, 이제 진짜 안 되겠다.

“오늘은 뭐 했어요? 영화 보는 거 말고.”

태성은 그냥 선우 쪽으로 몸을 틀어 앉았다.

“음… 책 보다가 선생님이랑 운동하고, 아! 식사도 같이했어요. 선생님 가시고 나서는 씻고, 낮잠 자고…….”

선우는 영화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대답했다. 이미 알고 있는 일과였지만, 그걸 종알대는 입으로 직접 듣는 건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그 와중에 본인이 한 일을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성실하게 보고하는 모습에 태성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

“내 생각은?”

이번에도 선우의 몸이 눈에 띄게 굳었다.

“……글쎄요….”

“단 1초도 안 했어요?”

“…….”

선우는 티 나지 않게 몰래 한숨을 내쉬고는 제 무릎을 재차 꼬옥 끌어안았다.

1초가 웬 말인가.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닐 때마다 그를 떠올리는데. 서재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일을 할까. 헬스룸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운동을 할까. 이 집에서 밤에 혼자 있을 땐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할까.

그렇게 생각하면 요양 장소로는 이만한 곳도 없었다. 도대체가 시공간이 멈춰 버리기라도 한 건지, 이곳에 있는 동안 선우는 제가 처한 현실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낮에는 그를 떠올리기만 해도 시간이 쑥쑥 흘렀고,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덧 밤이 와 제 앞에 그가 있었다.

이제 와서 깨닫고 보니 덜컥, 선우는 가슴이 철렁였다.

내가 이래도, 괜찮은 걸까…….

“데이트하면 또 뭐 하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

쿵덕, 쿵덕. 돌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두 주인공이 멋진 차림을 하고 데이트를 하는데, 화려한 오케스트라 사운드에 맞춰 우아하게 춤을 추는데, 도무지 영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자막을 보면서도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내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파악이 되질 않았다.

“알려 줄까요?”

선우는 여전히 무릎을 꽉 끌어안은 채, 태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매번, 내 머릿속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는 걸까.

“보통은… 이런 걸 해요.”

어느새 곁으로 바투 다가온 태성이 한 손을 들어 선우의 턱 끝을 잡았다. 그러고는 제 고개만 살짝 틀어 선우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아…….”

당황한 선우가 황급히 태성의 시선을 피하며, 그의 어깨를 살그머니 밀어냈다.

“저, 대표님…….”

“그거 알아요?”

“…?”

태성의 질문에 선우는 다시 의문을 담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난 이다음 장면에서 주인공들이 뭐라고 할지 알고 있어요.”

태성이 선우의 입술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영화, 이미 수도 없이 봐서 대사까지 전부 외우고 있다는 얘기야.”

“…!”

코앞에 놓인, 속눈썹까지 가지런히 내리깔린 남자의 눈을 보고 선우는 힘겹게 숨을 들이켰다.

“그런데도 내가 이걸 보고 있는 건.”

태성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려 선우의 눈을 마주했다.

“너한테 수작이란 걸 좀 걸어 보려고.”

선우는 서둘러 그를 외면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태성은 선우의 턱을 잡은 손에 힘을 줘, 선우가 다시 저를 바라보게 했다.

곧이어 촉, 하는 소리와 함께 조금 전보다 더 오랫동안 두 사람의 입술이 붙었다 떨어졌다.

“대표님.”

선우가 작게 한숨을 쉬며, 태성의 어깨를 아까보다 좀 더 강하게 밀어냈다.

“저는… 대표님이랑 이러고 있으면… 괜히, 죄를 짓는 기분이에요…….”

“뭐 어때.”

저는 심각하게 한 말을 태성이 가볍게 응하자, 선우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태성은 엷게 웃으며 턱을 붙들었던 손으로 선우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선우의 이마, 눈썹, 귀, 코, 입, 마지막으로 맑은 눈동자를 차례대로 두 눈에 담았다.

“지금 여긴 우리 둘뿐이고.”

태성은 자신을 밀어내는 손을 세게 잡아당겨 제 목에 둘렀다.

“너랑 내가 죄를 짓는다고 해서 우릴 잡아갈 사람은,”

그러고는 엄지손가락으로 선우의 턱을 꾹 눌러, 깨문 입술을 억지로 빼냈다.

“아무도 없어.”

그와 동시에 그는 살짝 벌어진 입술 새로 제 혀를 부드럽게 밀어 넣었다.

***

라디오에서 가을을 노래하는 가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온 지는 오래됐지만, 이맘때쯤이면 어디서든 쉽게 들을 수 있는 노래라 선우에게도 음이 익숙했다. 듣는 것만으로도 바스락거리는 낙엽이 떠오르는 노래를 작게 흥얼거리며, 선우는 운전대를 잡은 손을 까딱거렸다.

정말 오랜만에 하는 외출이었다. 선우는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그가 퇴원한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는데, 오늘은 외래에서 주치의를 만나 수술 후 경과를 듣기로 한 날이었다.

다행히도 선우는 빠르게 정상을 되찾고 있었다. 주치의도 빈혈을 제외하고는 모든 수치가 정상이라고 했다. 아직도 한 번씩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거나 수술 부위가 저릿하고 간지러울 때가 있었지만, 의사는 안타깝게도 그 증상은 앞으로도 한참 더 지속될 수 있다고 말했다. 생살을 가르고 다시 기워 놓은 것이라 그건 환자가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부분이라는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다.

병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선우는 마트로 향했다. 이틀 전, 남자가 멋진 요리를 선사했으니, 이번에는 제가 뭐라도 대접을 해 볼까 싶어서였다. 자신 있는 건 기껏 해 봐야 오므라이스나 김치찌개 같은 간단한 음식이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왠지 남자는 기쁘게 받아 줄 것만 같았다.

선우는 차가 잠시 신호에 걸린 사이, 운전대에 두 팔을 얹어 두고 마트에서 구매할 것을 생각해 봤다.

계란은 냉장고에 있었고, 야채 몇 가지랑 참치 캔…. 김치찌개에 참치 캔 넣으면 싫어하시려나? 참치 기름 넣어야 맛있는데……. 아니면, 관리하는 데 부담 안 되게 아예 닭가슴살 샐러드 같은 걸 해야 하나…….

곧 신호등에 초록불이 들어왔다. 선우는 브레이크 위에 놓인 발을 살짝 떼며 사이드미러를 힐끗 쳐다봤다.

병원 주차장에서부터 보이던 남색 승용차가 여전히 저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탑승자는 평범한 남성 두 명.

아무래도… 맞는 것 같지?

이제 조금만 더 가서 우회전을 하면 곧바로 마트 주차장 입구가 나왔다. 평일 대낮에 남자 두 명이 대학 병원에 들렀다가, 위치가 멀리 떨어진 지역의 대형 마트를 방문할 확률이 몇이나 될까.

선우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고작 서울 시내에 있는 병원을 다녀오는 건데 뭐가 그렇게 걱정이 돼서 사람까지 붙인 건지.

오늘 아침, 태성은 선우에게 제 운전기사를 붙이려 했다. 선우는 그걸 질색하며 거절했는데, 그러자 태성은 선우에게 차 키를 하나 내밀었다. 그래, 기사보단 차라리 이쪽이 낫겠지 싶어 선우는 얌전히 키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주차장에 내려갔을 때, 선우는 차 앞에 서서 이마에 손을 얹고 탄식을 했다.

태성의 펜트하우스와 직통으로 연결된 세대 전용 주차장에는 총 여섯 대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그중 어떤 차를 타야 하는지 궁금해할 새도 없이, 선우가 주차장에 들어서자마자 불을 번쩍이는 차가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다름 아닌 검은색 슈퍼카였다.

그러니까, 제가 며칠 전 본 히어로 영화에서 주인공이 무려 ‘변신’을 하고 나서야 타는 그 슈퍼카.

차 문이 위로 열리는 것을 직접 보면 마냥 신기할 줄 알았으나, 선우가 실제로 느낀 감정은 기겁에 가까웠다. 훤한 대낮에, 이걸 타고 빽빽한 서울 시내, 그것도 정숙한 병원을 가야 한다니. 사람들의 시선도 시선이고, 가는 길에 어디 긁어먹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잔뜩 긴장해서 차를 끌고 나온 선우는 곧 태성이 왜 이 차를 골랐는지 금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병원으로 가는 길만 해도 선우는 저를 위해 갈라지는 도로를 몇 번이나 목격했는지 몰랐다. 사이렌을 울리는 경찰차를 봐도 이 정도로 잽싸게 비켜 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버스며, 택시며, 오토바이까지 알아서 저를 피해 가니 차 자체가 거의 경호원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사람까지 딸려 보내다니.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과잉보호였다.

선우는 거치대에 올려 둔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잠금을 풀고 최근 통화 기록을 여니 제가 찾는 이름이 맨 위에 있었다. 선우는 그에게 통화를 연결하고 전화를 스피커폰으로 전환시켰다.

머지않아 차체 내에 부드러운 중저음이 울려 퍼졌다.

- 진료 끝났어요?

“네. 잠깐 통화 괜찮으세요?”

- 괜찮아요. 집에 가는 길?

“네. 저, 대표님. 너무 신경이 쓰여서 그러는데, 뒤따라오시는 분들… 이제 그만 돌아가시라고 얘기 좀 전해 주시면 안 될까요?”

- ……뒤에 누가 있어요?

시치미를 뚝 떼고 말하는 남자에 선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네. 남자 두 분이요. 남색 세단.

- 음, 남자 둘. 남자 둘이라…….

태성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무진 의외의 것이었다.

- 한 경위 몸 좀 사려야겠네.

“……네?”

- 바깥 볼일은 다 본 거죠? 이만 집으로 돌아가요.

“…….”

평온한 어투로 귀가를 권하는 태성에 선우는 도리어 께름칙한 느낌을 받았다.

“대표님이 붙이신 거… 아니에요?”

- 글쎄.

“…….”

- 사람을 안 붙인 건 아닌데, 그렇게 눈에 띌 만큼 허술한 사람을 쓰진 않아요, 내가.

“어…….”

- 남색 차도 별로 취향은 아니네.

때마침 선우의 차가 다시 신호에 걸렸다. 선우는 룸미러로 저를 쫓는 남색 차량을 살폈다. 조금 전까진 왼쪽 대각선 방향에서 따라오더니, 지금은 바로 뒤에 붙어 있었다.

- 운전 조심해요. 차 번호랑 인상착의 기억해 두고.

“……네. 일단, 알겠습니다.”

선우는 전화를 끊고 주위를 살폈다. 왕복 8차선 도로라 좁진 않으나, 차량이 많아 속도 내기는 힘들어 보였다. 강남 한복판에서 이 차를 가지고 추격전을 벌이는 것도 너무 눈에 띄는 행동이었다.

누구지? 왜 따라오는 거지?

저자들이 저를 미행한 것인지, 이 차를 노리고 붙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면, 이 차를 보고 차 주인인 남자를 노린 것일 수도 있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남자가 사는 곳을 드러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선우는 신호가 바뀌자마자 곧장 직진 방향으로 내달렸다. 가려던 마트가 워낙 유명한 곳이라 대부분의 차량이 마트로 진입하기 위해 우회전을 하는 상황에서, 아니나 다를까 남색 승용차는 저를 따라 직진했다.

속도를 내면 다음 신호에도 걸리지 않을 것 같아, 선우는 액셀 위에 놓인 발에 힘을 가했다. 계속 직진하려는 듯 부러 3차선을 달리다가, 좌회전과 유턴이 가능한 사거리 앞에서 선우는 급하게 1차선으로 차선을 변경했다.

예상대로 남색 승용차의 운전자가 당황하는 것이 룸미러를 통해서도 보였다. 주춤주춤 따라와 2차선에 선 남색 차는 선우가 좌측 깜빡이를 켜니, 저도 따라 좌회전을 준비했다.

잠시 후, 신호등에 초록색 화살표 신호가 뜨고, 선우는 좌회전을 하는 척 차를 크게 돌렸다. 그리고 남색 승용차가 확실하게 좌회전 방향으로 차를 튼 순간, 재빨리 핸들을 최대한으로 꺾었다.

끼이이익-

요란한 마찰음과 함께, 사거리 한가운데서 까만 슈퍼카가 빙글 돌았다.

부웅!

선우는 그대로 유턴해 지금까지 온 길을 빠르게 거슬러 올라갔다. 남색 차는 뒤따라오는 차량에 밀려 차마 유턴을 하지 못하고 좌측으로 빠졌지만, 선우는 고삐를 늦추지 않고 큰 대로를 향해 달렸다. 강남 지역의 각 잡힌 도로 특성상 한 골목만 돌아 나오면 저를 또 마주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후 선우는 일부러 넓고 한적한 도로만을 골라 주위를 뱅뱅 돌다가, 주변에 수상한 사람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태성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

“일찍 오셨네요?”

오늘 태성의 귀가를 반긴 건 아쉽게도 흰둥이는 아니었다. 태성은 이제 막 퇴근하려는 심 여사와 응접실에서 마주쳤다.

“위에 있나요?”

손가락으로 위층을 가리키며 묻자 심 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외출 다녀오시고 그 뒤로는 쭉 2층에 계세요.”

태성은 주저하지 않고 2층으로 향했다. 성큼성큼, 두 계단씩 올라 빠르게 방에 도착한 태성은 문 앞에서 짧게 노크를 했다.

“…….”

그러나 방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행여나 놀랠까 싶어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을 때, 태성의 입에서는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흰둥이는 침대에서 낮잠을 자는 중이었다. 그것도 하얀 목욕 가운만 걸친 채로.

제대로 누운 것도 아니고 다리는 바닥에 내려놓은 채로 몸만 침대를 가로질러 누운 것이, 샤워하고 나와서 잠깐 누워 있는다는 게 그대로 잠이 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씻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지,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칼이 물기를 머금고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거 봐. 전화 받고 걱정돼서 열 일 제쳐놓고 들어왔더니, 정작 당사자는 천하태평이지.

태성은 재킷을 벗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곧장 침대로 다가갔다. 가져온 서류 봉투는 대충 머리맡에 던져두고, 허리를 조금 숙여 널브러져 자고 있는 이를 내려다보니, 허여멀건 얼굴 위로 제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거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사람이 기껏 참고 있는데.

미세하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달콤한 숨이 새어 나왔다. 뜨끈한 물에 눅진하게 녹인 몸은 온기를 내뿜고, 발갛게 달아오른 두 볼은 보기 좋은 혈색을 뽐내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파리하던 입술은 그동안 잘 먹고 잘 쉰 덕분인지, 이제 완전히 선명한 제 색을 되찾은 듯 보였다.

태성은 아예 침대 밑에 자리를 잡았다. 바닥에 앉아 보송보송한 얼굴을 한참 구경하다가, 태성은 손가락으로 선우의 볼을 콕 찍어 보았다. 말랑이는 볼살이 태성의 검지를 포옥 감쌌다.

아, 입술이고 볼이고 그냥 다 깨물어 버리면 좋겠는데…. 자는 거 깨우면, 싫어하려나?

태성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도톰한 아랫입술을 살짝, 아주 살짝 가볍게 입에 물었다.

***

펑- 펑-.

까만 밤하늘 위로 커다란 불꽃이 터졌다.

빨강, 주황, 노랑. 색깔도 가지각색,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이었다.

유리창 앞에 서, 선우는 온몸에 힘을 쭉 빼고 등을 뒤로 기댔다. 저를 단단하게 지지해 주는 탄탄한 몸과 따뜻한 기운이 좋았다. 너른 어깨에 뒷머리를 올려놓으니, 하얀 가운 사이로 남자의 뜨거운 손이 파고들었다.

‘아!’

큼지막한 오른손이 가슴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동시에 왼손이 벌어진 다리 사이를 거칠게 헤집었다. 기다란 손가락을 고간에 깊숙이 집어넣은 남자는 회음과 음낭을 손끝으로 빠르게 훑어내고는 선우의 성기를 아래에서부터 위로 천천히 쓸어올렸다.

‘으응….’

둥근 기둥을 타고 올라간 남자의 손가락은 귀두 끝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선단 끝 갈라진 틈을 손가락 끝으로 살포시 누르고 빙글 돌리니, 선우의 입에서 비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남자는 곧 선우의 오른쪽 귓바퀴를 입에 물며, 반쯤 선 성기를 한 손에 쥐었다. 손아귀에 힘을 주고 기둥을 조이며 위아래로 슥슥 흔들어 대니, 선우가 몸을 비비 꼬며 남자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아, 좋아.’

“좋아?”

‘네, 좋아요….’

남자는 선우의 귓바퀴를 입안에 넣고 굴리다가, 뾰족하게 세운 혀끝을 좁은 귓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축축한 혓바닥이 귓속을 꼼꼼히 핥아 내자, 순간 뒷덜미를 타고 소름이 쭉 끼쳐 올랐다. 선우는 부르르 진저리를 치며 남자의 어깨에 뒷머리를 비벼 댔다. 그러자 남자는 낮게 웃으며 혀를 쑥 빼내고는 살이 연한 귓불을 입으로 쪽 빨아들였다.

그러는 동안 남자의 손은 선우의 몸을 쉴 새 없이 매만졌다. 손가락 사이에 유두를 걸고 가슴을 주물대는 오른손 하며, 기둥 전체를 감싸 성기를 아래위로 치대는 왼손이 움직임을 멈출 줄 몰랐다.

‘아응… 조금만…….’

남자의 농익은 손길에 선우의 성기가 점차 크기를 키우며 위를 향해 바싹 올라붙었다.

‘조금만, 더요…….’

선우가 남자의 옷을 붙든 손을 좌우로 비틀며 애원했다. 남자는 귓가에 머무르던 입술을 목덜미에 파묻으며, 선우를 세게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선우의 요구대로 성기를 쥐고 흔드는 손에 속도를 가했다.

‘아흣…!’

순식간에 몰아치는 정욕에 선우는 저도 모르게 엉덩이에 힘을 바짝 주었다. 부드럽게 움직이던 남자의 손이 조금 거칠어진다고 느껴질 때는 이미 열 손가락, 열 발가락을 전부 안으로 한껏 말아 쥔 상태였다.

‘아… 나올 것 같은데…. 흡…!’

선우는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까치발을 들고 선 선우는 뒷머리만 남자의 어깨에 기댄 채로 몸을 휘었다.

“가도 돼요.”

남자의 속도에 맞춰 허리가 저절로 움직였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그의 손이 움직이는 방향과 반대로 허리를 흔드니, 단전 저 아래에서부터 울컥 사정감이 치솟았다.

선우는 저를 강하게 붙든 팔을 다급히 끌어안으며 몸을 크게 뒤척였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허벅지 안쪽이 부들 떨리는가 싶더니, 순간 둔부를 감싸고 있는 근육들이 일제히 오그라붙었다.

‘아, 아앗, 으응…!’

그리고 곧이어, 유리창 위로 끈적이는 정액이 튀었다.

어느덧 불꽃놀이는 모두 끝이 나고, 새카만 밤하늘을 배경으로 희멀건 액체가 스멀스멀 흘러내렸다.

‘하아…….’

제가 싸지른 것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수치가 몰려왔다. 선우는 새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제 성기를 내려다봤다. 한 번 흥분을 토해 내고도 이상하게 열기가 가라앉지를 않았다. 방금 사정한 성기가 뿌리 끝까지 축축한 것이 금방이라도 흐물흐물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

……축축…?

분명… 손이었는데……. 축축……?

선우가 눈을 번쩍 뜨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뽁! 태성이 성기 끝을 강하게 빨며 뱉어 내니, 별안간 공기를 빨아들이는 소리가 청명하게 울려 퍼졌다.

“아읏!”

귀두 끝에 가해지는 압박에 선우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선우는 제 다리 사이에 자리한 남자와 코앞에서 눈을 마주했다. 바닥에 앉아 있는 남자는 꿀꺽, 목울대를 크게 한 번 울리더니 입꼬리를 빙긋 말아 올렸다.

“헉!”

“다녀왔어요.”

흐트러짐 없이 말끔한 얼굴이 여느 때와 다름없는 미소로 귀가를 알렸다. 호선을 그리는 입술이 침으로 촉촉하게 젖어 있다는 것만 빼면 평소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지, 지, 지, 지금, 뭐,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선우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묻자,

“오해하지 마요. 난 도와준 거니까.”

태성이 눈짓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아래로 내리니, 벌어진 가운 사이로 반질반질한 성기가 머리를 쳐들고 있었다.

“지나가다 보니까 서 있길래.”

“헙!”

선우는 호다닥 다리를 붙이고 급하게 앞을 여몄다. 그러고는 그대로 머리를 깊게 숙여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 아아…….”

다른 것도 아니고 낮잠 자다 발기한 모습을 보이다니, 도무지 창피해서 남자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뜨거운 물에서 너무 오랫동안 샤워를 한 게 화근이었다. 긴장한 채로 격하게 운전을 해서 그랬는지, 집에 돌아오니 온몸이 다 찌뿌둥했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면 굳은 몸이 좀 풀릴 것 같아서, 선우는 곧장 욕실로 향했다.

그 안에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신나게 씻고 나왔는데, 문제는 그 뒤였다. 갑자기 긴장이 풀려서일지, 오랜만에 기력을 많이 소모해서일지, 욕실을 나서니 머리가 어지럽고 몸이 노곤노곤했다.

그래서 드레스룸으로 가는 길에 잠깐만, 정말 아주 잠깐만 쉬었다 갈 생각으로 침대에 잠시 누웠던 건데……. 하필 그대로 잠이 들고, 하필 그맘때 남자가 퇴근을 할 건 또 뭔가.

아니, 이 모든 건 다 일어날 수 있을 법한 일이었다.

문제는 제가 몽정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남자를 상대로, 하필 지금.

혈기 왕성한 사춘기 십 대도 아니고, 무슨 그런 해괴망측한 꿈을 다 꿨지…….

선우는 괴로움에 신음했다. 불타는 고구마가 됐을 게 뻔한 얼굴을 차마 들지 못하고, 선우는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걱정돼서 일찍 온 사람한테 얼굴도 안 보여 줄 거예요?”

“!”

그러다 갑자기 든 생각에, 선우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대, 대표님….”

“으응?”

선우의 부름에 느리게 응답하며, 태성은 조심스레 선우의 두 다리를 벌렸다.

“저, 저… 호, 혹시…….”

“혹시?”

벌어진 다리 사이로 제 몸을 밀어 넣은 태성은 왼팔을 슬그머니 뻗어 선우의 허리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그, 그거…… 드, 드셨어요……?”

“뭘?”

태성이 선우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그, 그, 그, 그거…….”

“그그그, 그게 뭐지?”

새빨갛게 익은 얼굴로 말까지 더듬는 선우를 태성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마주했다. 그러는 사이 태성의 오른손은 선우의 허리에 묶인 끈을 풀어내고 있었다.

“그, 그거, 앗! 자, 잠깐만요!”

어느 사이에 가운을 헤치고, 태성의 손은 선우의 맨살을 파고들었다. 말려 볼 틈도 없이 품 안에 선우를 가둔 태성은 선우의 등을 크게 한 번 쓸어내리고는, 곧바로 왼쪽 옆구리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내가 뭘 먹었는데?”

“아흑!”

축축한 살덩이가 불쑥 수술 부위를 핥아 올리자, 선우가 소리를 내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아파요?”

“아, 아니요….”

태성은 선우를 꼭 끌어안고 다시 한번 혀를 내밀어, 선우의 왼쪽 골반 위쪽에 자리한 자상을 크게 핥았다.

“흐앗! 가, 간지러워요!”

선우가 몸을 크게 비틀었다. 남자가 핥은 것은 수술 자국인데 웃기게도 저릿한 것은 명치끝이었다. 찌릿찌릿, 몸에 전기가 오른 사람처럼 발가락 끝이 절로 곱았다.

“흉 남겠네.”

태성은 우둘투둘 빨갛게 올라온 살갗을 손끝으로 살살 어루만졌다. 이내 그의 입에서 쯧, 하고 작게 혀 차는 소리가 났다.

“나중에 흉터 제거 수술 할래요?”

“아뇨오…….”

선우가 고개를 젓자, 태성은 잘 생각했다며 머리를 끄덕였다. 깨끗한 피부에 흉이 남는 건 아쉽게 되었지만, 수술받는다고 또 다른 사람한테 몇 번이나 예쁜 속살을 내비쳐야 하는 건 저도 별로 내키지가 않았다.

한선우 목숨 걸고 만들어 낸 귀한 상처니까 나라도 실컷 예뻐해 줘야지. 태성은 불그스름한 상처 위에 진득하게 입술을 묻었다가 곧 쪼옥,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살갗을 빨아들였다.

“읏!”

선우가 몸을 모로 웅크리며, 태성을 밀어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성은 개의치 않고 선우의 상체를 가리고 있는 가운을 옆으로 훌러덩 젖혔다. 옆구리에 파묻었던 입술은 얇은 갈비뼈 위에 꾸욱 한 번, 옴폭 패인 명치 위에 꾸욱 한 번 내려앉았다가, 금세 색이 연한 유륜 위로 자리를 잡았다.

“으아아앗…!”

보기에는 마냥 말랑거리게 생긴 주제에 벌써 빳빳하게 솟은 돌기를 입안에 넣고 쭉 빨아 당기니, 애써 앉아서 버티던 선우가 한순간에 자세를 무너뜨렸다.

반쯤 누운 선우는 한쪽 팔꿈치로만 겨우 몸을 지탱하다가, 태성이 앞니로 젖꼭지를 살살 긁어내리니 앓는 소리를 내며 태성의 머리를 바투 끌어안았다.

온몸을 오그라뜨린 채 제 머리통 하나에 의지해서 몸을 떠는 선우를 보고, 태성은 낮게 웃으며 조막만 한 돌기를 입안에서 돌돌 굴렸다. 또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질 않자, 태성은 아예 이빨을 세워 요망한 돌기를 자근자근 깨물어 댔다.

“아, 대표님…. 잠깐…….”

마지막으로 태성은 유륜 전체를 크게 깨물고, 곧게 뻗은 쇄골로 입술을 옮겼다. 일자로 도드라진 뼈 위에 입술을 묻고 살짝 빨아올리니, 연한 살갗에 금방 새빨간 열꽃이 피었다. 쇄골 라인을 따라 수차례 흔적을 남긴 태성은 하얀 피부가 울긋불긋 얼룩이 지고 나서야 파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는 곧장 선우의 목에 이를 박아 넣었다.

“아으으…….”

몰랑거리는 귓불 바로 아래, 늘씬하게 뻗은 목선은 볼 때마다 시선을 잡아끈 것이었다. 그간 신사적인 척, 점잖은 척 그럴싸하게 속을 숨기고 있었지만, 태성은 사실 몇 번이고 여기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지금까지 참아 온 욕망을 한 번에 담아 옆 목을 잘근 씹어 무니, 선우가 몸을 이리저리 뒤치며 바둥거렸다.

“흣, 이제… 그만, 하시면 안 될까요……?”

눈가까지 벌게진 선우가 손등으로 제 입을 틀어막으며 말했다.

“왜? 싫어요?”

태성은 입에 문 살점을 강하게 쭈웁, 빨아들이며 선우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저지를 당한 입술 대신 이번에는 뜨끈뜨끈한 손이 선우의 몸을 구석구석 어루만졌다.

“아, 아뇨…. 그게 아니라…….”

“그럼?”

하아……. 선우가 침대에 벌러덩 누워, 천장을 무너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뱉어낸 숨에서 긴장과 떨림이 잔뜩 묻어났다.

“너무… 너무, 좋아서 그래요……. 뇌가 어떻게 돼 버릴 것 같아서…….”

입을 막고 있던 손은 이제 두 눈을 가리고 있었다. 남자를 쳐다보며 말하기에는 너무 부끄러운 소리였다.

“……하. 넌 진짜.”

태성이 눈썹을 구기며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불시에 선우의 다리 사이로 쑤욱 손을 집어넣은 그는 갈라진 두 살 틈 사이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으악!”

“아직, 하면 안 되겠지?”

선우가 팔딱거리며 다리를 황급히 오므렸다. 아쉬움이 밴 목소리에 슬그머니 손을 치워 보니, 저를 내려다보는 얼굴엔 씁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선우는 아랫입술을 말아 물고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그럼… 딱, 이 정도만요…….”

두 팔로 태성의 목을 끌어당긴 선우는 태성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두 입술 사이에 제 혀끝을 쏘옥 밀어 넣었다. 축축하고 따뜻한 남자의 혓바닥을 혀로 감아 제 입안으로 쭉 끌어당기니, 그가 곧 목을 울려 웃는 것이 느껴졌다.

***

두 사람은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숨을 돌렸다.

태성은 퇴근 후 상태에서 여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다른 점이라면 고작해야 넥타이만 조금 비뚤어진 정도.

두 사람의 입술에 혈기가 돌아 색이 보기 좋게 오른 와중에, 선우는 아랫입술이 벌에 쏘인 것마냥 퉁퉁 부어 있었다.

가운 사이로 드러난 피부는 원래의 살색보다 붉은색을 띠는 부위가 더 많았다. 태성의 입술과 손이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려는 것을 열심히 막아 낸 결과였다. 여러 번에 걸친 거절과 설득과 회유 끝에 하반신을 지켜 내는 것은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선우의 상체는 눈물겨운 희생을 해야만 했다.

“쫓아온 사람들 누군지 기억해요?”

태성이 시선을 천장에 두고 물었다.

“…네. 그냥, 평범했어요. 삼사십 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인데, 운전자는 운동한 사람처럼 체격이 탄탄해 보였고, 동승자는… 보통? 차 번호는 6023이요, 152로.”

152로 6023.

제가 붙인 경호원이 보고한 것과 같은 차량 번호였다.

“누가 한 경위를 미행했을까. 의심 가는 사람 있어요?”

“전혀요…….”

선우는 누워 있는 상태에서 고개만 돌려 태성을 바라보았다.

“저를 미행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저는 차 보고, 대표님을 노린 건가 싶었어요.”

“나를?”

그렇게 대놓고? 어디서 총으로 암살 시도를 한다면 또 모를까, 그렇게 허술한 방법으로 제게 미행을 붙일 사람이 있을까.

“아니면… 양 의원 쪽일 수도 있을까요? 양 의원이 대표님 소속사에 있는 제 신분이 가짜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

태성은 선우를 향해 몸을 돌렸다. 팔로 머리를 괸 채 가만히 선우를 내려다보다가, 태성은 나직이 선우를 불렀다.

“한 경위.”

“…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유. 꼭 알고 싶어요?”

“…….”

태성의 질문에 눈을 키운 선우가 부스스 몸을 일으켜 앉았다.

“……네.”

“…….”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선우에 태성은 잠시 말에 뜸을 들였다.

“알아야 할 필요 있어요? 물론 그러기 힘들 거라는 거 알고 있지만, 벌써 십 년이나 지난 일인데. 이제 그만 마음속에 묻고 한 경위는 한 경위대로 행복하게 사는 게 어때요?”

선우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태성은 곧,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로 잔인한 말을 꺼내 놓았다.

“알면 또 어떻게 할 거야. 진짜 누군가가 아버지를 어떻게 했다고 해서 이제 와서 그 사람을 처벌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텐데.”

“…….”

현실을 일깨우는 모진 소리에 선우는 순식간에 울상이 되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때로는 모르는 게 더 나은 일들도 있어요. 모르면 속 편할 걸, 괜히 알아내서 본인만 괴로워질 수도 있잖아.”

“……괜찮아요. 그래도… 알고 싶어요.”

“나는, 네가 힘들어하는 걸 별로 보고 싶지 않아. 마음 아파할 걸 알면서 굳이 사실을 밝혀내야 하는 이유도 모르겠어.”

“…….”

“너만 괜찮다면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놈들은 내가 어떻게든 처리해 줄게. 넌 그냥, 너만 생각하고 네 삶을 살아.”

“……아니요.”

선우는 태성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힘들어도 상관없어요. 꼭… 알고 싶어요.”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겠다는 오로지 그 한 이유가 지금까지 저를 버티게 한 힘이었다.

십 년이나 지난 일이니 이제 그만 마음속에 묻을 수 있지 않겠냐고? 아마 저는 백 년이 지나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어린 날의 한선우는 아직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한 채였다. 설령 누군가는 이런 저를 보고 어리석고 답답하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미련하고 아둔한 저는 모든 사실을 다 알고 나서야 비로소 그 어두컴컴한 곳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요, 그럼.”

태성 또한 선우가 당연히 이렇게 얘기할 줄 알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본 말이었지만 역시나였다. 태성은 손을 뻗어 머리맡에 던져두었던 서류 봉투를 집었다. 그리고 선우에게 건네니, 선우는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봉투를 받아 들었다.

“이게 뭐예요…?”

태성은 직접 보라는 듯 말없이 눈썹만 씰룩였다. 선우는 조금 망설이는 듯하다, 곧 봉투 안에 든 것들을 꺼내 보았다. 그 안에는 두 개의 문서가 들어 있었다.

하나는 양기용 전 국회의원의 사건 신고 기록서, 또 다른 하나는 선우의 가족 관계에 대한 보고서였다.

“…….”

두 자료를 몇 차례 번갈아 보던 선우는 잠시 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태성을 쳐다보았다.

“이, 이게…….”

자료를 든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선우는 손만큼이나 떨리는 눈동자로 태성을 보고 물었다.

“대표님…. 그러니까 대표님이 보시기엔……. 이 사건의 용의자가… 양승준인 것 같다는 말씀이신 거죠…?”

“아니라고 보는 게 더 어렵지 않겠어요?”

“…….”

“이 정도면 꽤 합리적인 의심이라고 생각하는데.”

태성이 단숨에 몸을 일으켜 앉으며 말했다.

선우는 말문이 막힌 채 다시 자료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두 자료만으로 사실을 확정 짓는 건 위험한 일이지만, 두 자료를 보고도 의심하지 않는 건 우스운 일이었다.

작은 교통사고…….

이래서였어…. 양승준의 이름으로 몇 번이나 사건 기록을 조회해 봐도 아무런 단서를 찾을 수 없었던 이유가…….

“하아…….”

선우는 떨리는 숨을 뱉어내며 두 자료를 쥔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얀 종이 몇 장이 손안에서 구겨지고, 그 자료를 든 손과 팔을 따라 이제는 어깨마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맞든 아니든, 그때 일들을 양승준한테 들어 볼 필요는 있겠죠.”

선우는 처박힌 머리를 들어 태성을 쳐다보았다. 혈색이 돌아 분홍빛을 띠던 얼굴이 그새 하얗게 질려 있었다.

“뭐 좋은 생각 있어요?”

“…….”

태성의 물음에 선우는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라, 충격을 받은 나머지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런 선우 앞에 작은 유리 바이알 하나가 들이밀어졌다.

“딱히 방법이 있는 게 아니라면, 이걸 쓰죠.”

***

“자기야, 이게 웬일이야.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이태원에 위치한 어느 고급 바에 며칠째 배우 김시헌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문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바텐더 테이블 위에는 정말로 그 김시헌이 술에 한껏 취한 채 엎드려 있었다.

“와. 우리 감독님이시네.”

게슴츠레 뜬 눈으로 표정의 변화도 없이 시헌이 맞이한 사람은 장영진 감독이었다.

“왜 이래? 이 바닥 소문 빠른 거 몰라서 이래?”

장영진은 눈살을 구기며 시헌의 옆자리에 앉았다.

“벌써 소문 다 났어요?”

“아직은 아니야. 허민석 감독이 내 대학 선배라. 걱정하더라고, 자기 요즘 좀 혼이 나간 것 같다고.”

허민석 감독은 지금 시헌이 찍고 있는 영화의 총감독이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시헌은 시큰둥한 얼굴로 제 앞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들었다.

“왜 그러는 건데?”

“…….”

얄따란 스트레이트 잔에 술을 가득 채운 시헌이 잔에 든 것을 망설임 없이 한입에 털어 넣었다.

“차였구나?”

잔을 내려놓고 다시 술병을 향해 뻗는 손이 허공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그래 보여요?”

“상대가 누군지도 맞혀 볼까?”

시헌은 병을 들어 조용히 잔을 채웠다.

“김시헌 성격에 같은 연예인은 아닐 테고.”

“…….”

“연예인들 기 다 죽이게 생겨 놓고, 연예인 할 생각은 전혀 없다던 그 친구?”

허, 시헌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신들렸어요?”

“자기가 좋아하는 티를 좀 냈어야지.”

내가 그랬나……. 시헌은 알딸딸한 머리를 팔로 괴고, 무거운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였다.

“왜, 여자가 좋대?”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럼 깔끔하게 평생 친구 해 줄 수 있는데…….”

가볍게 쓴웃음을 지은 시헌이 또다시 술 한 잔을 단번에 들이켰다.

“…감독님, 있잖아요? 나는 걔가 사랑하는 여자랑 결혼해서 애 낳으면, 그 애까지도 예뻐해 줄 자신 있었어요. 여자를 좋아하는 건 뭐, 내가 어떻게 해 볼 수도 없는 거니까.”

“열렬한 사랑이시네요. 그런데?”

“그런데…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 남자가 김시헌은 아니다?”

시헌은 대답 대신 깊은 탄식을 뱉었다.

“와. 세상에 김시헌을 마다하는 사람이 다 있네.”

“치이, 제가 뭐라고요.”

“야, 당신이 뭐라니. 너무한 거 아니야? 잘생겼어, 키 커, 돈 많아, 성격 좋아. 네가 도대체 뭐가 빠져?”

“그 사람도 잘생겼어요.”

“너보다?”

시헌은 머릿속으로 문제적 남자를 떠올려 봤다.

“음……. 네.”

“엄살떤다.”

“진짠데.”

시헌의 입술 사이로 싱거운 웃음이 샜다.

“제가 장담하는데요. 감독님이 지금까지 찍어 본 남자 연예인 중에 그 사람보다 잘생긴 사람은 없을걸요?”

“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런 사람이 어딨어!”

있어요, 그런 사람. 발끈하는 장영진에 시헌이 클클거리며 웃었다. 장영진은 워낙에 영화계에서 미남 컬렉터로 유명한 감독이었다. 그가 주연으로 캐스팅한 남자 연예인은 하나같이 ‘다른 건 몰라도 외모는 인정’이라는 평을 받는 배우들이니, 장영진의 격한 반응이 시헌도 이해가 가기는 했다.

“키도 커요.”

“너보다?”

“음, 네. 심지어 몸도 좋아요.”

“그럼 돈으로 밀어붙이자.”

푸핫! 시헌은 이번에는 진심으로 웃음이 터졌다.

“제가 가진 돈은 그 사람이 가진 돈의 십 분의 일도 안 될 텐데.”

“뭐야. 그게 가능해? 상대도 연예인이야?”

“아뇨.”

“그럼 뭐, 재벌이라도 돼?”

시헌이 어깨를 으쓱였다.

“뭔, 세상에 그런 사람이 다 있냐. 무슨 소설 속 인물도 아니고.”

있더라고요. 감독님도 그 사람 볼 때마다 카메오로라도 좋으니까 한 번만 출현해 달라고 졸랐잖아요. 시헌은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이 혹시라도 새 나올까, 입을 꾹 다물었다.

“쓰읍, 어떡하지? 이건 완전 싸움이 불가능한데?”

장영진이 팔짱을 끼고는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아, 그렇구나. 애초에 싸움이 불가능한 사람이었구나. 그래도 좋아하는 마음만큼은 안 질 자신 있는데……. 시헌은 한숨을 푸욱 쉬며 팔을 베고 엎드렸다.

“이왕 만날 거면 좀 평범하고 무난한 사람을 만나지. 왜 하필 그런 사람을 만나는 건지. 겉만 화려하고 멋있다고 다가 아닌데……. 딱 봐도 결말이 좋을 수가 없거든요, 그 사람이랑은.”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

“왜 몰라요, 보면 각 나오지. 집안끼리 정해 놓은 정혼자라도 없으면 다행인 상황이에요. ……저는… 다른 것보다도, 그 친구가 나중에 상처를 받을까 봐. 그게 너무 걱정이에요.”

“뭐야, 그거. 꼭 딸 키우는 아버지 같은데.”

살짝 벌어진 시헌의 입술 사이로 피식, 하고 바람이 터졌다.

“그 사람도 그러더라고요. 내가 그 친구 보호자라고.”

장영진은 시헌 앞에 놓인 술잔을 제 앞으로 가져왔다.

“근데 감독님. 저 좀… 충격이었어요. 저한테는 한 번도 얘기한 적 없는 속마음을… 그 사람한테는 다 털어놓더라구요…….”

“…….”

“그 친구가 그렇게 서럽게 우는 거… 처음 봤어요. 심지어 아버지 장례식장에서도 그렇게는 안 울었던 것 같은데……. 10년이나 알고 지냈는데……. 그 친구한테 저는 전혀 의지가 안 됐던 걸까요?”

덤덤한 척 얘기하던 시헌의 목소리가 차츰 가라앉고 있었다.

더는 못 봐주겠네. 장영진은 시헌을 대신해서 빈 잔에 술을 채우고 그걸 제 입안에 단숨에 털어 넣었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쓰고 뜨거운 기운이 시헌의 마음을 고스란히 표현하는 듯했다.

“자기야. 삽질 그만하고 일어나.”

장영진은 엎어져 있는 시헌의 팔을 툭툭 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연은 원래 일로 이겨 내는 거거든. 여기서 청승 그만 떨고, 이번에 시나리오 새로 완성된 거 하나 있어. 그거나 보러 가자.”

그러고는 시헌의 양팔 밑으로 두 손을 넣어 그를 강하게 들어 올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