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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Truth To Tell (1) (11/19)

8. Truth To Tell (1)

선우는 작은 콘솔 테이블 앞에 서서 손바닥 위에 놓인 유리 바이알을 내려다보았다. 하얀 가루가 삼 분의 일가량 담긴 바이알에는 ‘X-093’이라고 써진 하얀 라벨이 붙어 있었다.

‘딱히 방법이 있는 게 아니라면, 이걸 쓰죠.’

선우는 며칠 전 남자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이게… 뭔가요…?’

자료를 건네던 그날 밤, 남자는 대화 끝에 선우에게 바이알 한 병을 넘겼다.

‘에퀴스 후보 물질 중에 하나였는데, 부작용이 영 아니라 최종 단계에서 탈락된 물질이에요. 시끄러운 건 내가 딱 질색이라. 아직 제형화 연구가 안 돼서 파우더가 전부이긴 하지만, 약효만큼은 확실할 거예요.’

그의 말에 따르면 X-093은 에퀴스보다도 약효나 물성 면에서 뛰어난 물질이었지만, 치명적인 부작용 때문에 결국 시장에는 내놓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그 부작용은 중추 신경 흥분 작용이 너무 강한 나머지 충동성이 제어가 되지 않는다는 것.

X-093은 소량만 투여해도 금세 흥분감이나 행복감을 느낄 수 있지만, 조금만 취해도 감정 제어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약물이었다. 투약한 사람들에게서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증상은 불안, 불면과 함께 머릿속에 담아둔 생각을 여과 과정 없이 곧바로 내뱉는 것이었고, 심할 경우 자해나 폭행 같은 폭력성을 보이기도 한다고.

그러니 남자는 에퀴스 대신 이 약을 써서 양승준이 사실을 말하도록 유도하자고 제안했다. 선우는 심각한 얼굴로 한참 동안 바이알을 내려다보다, 그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이런 방법으로는 증거를 얻는다고 해도 법적인 효력이 없어요.’

‘그걸 누가 아는데?’

‘……네?’

‘양승준이 약을 먹고 진술한 거라는 사실을 한 경위랑 나 말고 누가 또 아냐고.’

‘그거야…….’

‘잊었어요? 에퀴스는 검사에서 검출 안 돼요.’

‘…….’

‘이거 말고 더 좋은 방법이 있어요? 아예 묻을 거면 모를까, 사실이 알고 싶다며.’

‘……모르겠어요. 이런 방법으로 답을 듣는다는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요. 어차피 양승준은 약을 할 거예요. 본인이 스스로 원해서 하는 거고, 우리는 같은 효과를 내는 약을 제공하는 것뿐이에요. 만일 양승준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이 약을 먹고도 범죄 사실을 털어놓진 않겠지. 이걸 사용하고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서 한 경위가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 나는.’

‘…….’

‘잘 생각해 봐요. 이 약을 쓸지, 말지는 한 경위 선택이니까.’

“…….”

선우는 초점 없는 눈으로 손 안에서 바이알을 굴렸다. 그러다 이내 결심이 선 듯, 큰 숨을 한 번 내뱉고는 바이알을 든 손에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선우는 곧 입고 있는 후드티의 앞주머니에 바이알을 깊숙이 집어넣고, 방을 나섰다.

***

선우가 1층으로 내려갔을 때, 응접실에서는 이미 양승준과 태성이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어, 어서 와.”

선우가 소파에 앉자, 양승준은 빈 유리잔에 술 한 잔을 따라 선우의 앞에 놓았다.

“나 참, 권총도 잘 쏠 줄이야. 연우 씨 정말 정체가 뭐야?”

정확히 말하면 산탄총보다 권총을 더 잘 다루는 것이었지만, 선우는 은근하게 미소만 짓고 말았다.

오늘 오후, 태성의 제안으로 근 한 달여 만에 양승준과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본래 양승준은 아도니스 전용 골프장에서 라운딩을 돌기를 원했으나, 서울은 내내 비가 오고 강원도 날씨가 그리 좋지는 않아 계획을 급히 변경하게 되었다.

골프장 대신 정선 사격장에서 만난 이들은 날씨의 영향을 받지 않는 실내 사격장을 이용했다. 그곳에서 권총 사격을 마친 뒤, 태성은 문호 회장의 통나무 별장으로 양승준을 유인해 왔다.

“크, 한동안 바빠서 못했더니 오늘 약발이 기가 막히네."

양승준이 유리잔에 얼마 남지 않은 술을 비워 내며 말했다. 양승준의 앞자리에는 약을 담은 플라스틱 통이 뚜껑이 열린 채로 놓여 있었다.

“문 대표. 내가 전에 말한 건 생각 좀 해 봤어?”

양승준이 묻자, 태성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질문의 요지를 가늠해 보았다. 태성에게서 곧바로 답이 나오질 않자 양승준은 답답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당사 이전 건 말이야.”

“아아, 네에.”

태성은 그제야 여유 있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다시피 건설 쪽은 제 권한이 아니라서요. 회장님께는 의원님 말씀 잘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딱딱하게 회장님이 뭐야, 회장님이.”

양승준이 술병을 들어 제 잔과 태성의 잔을 채웠다.

“아버님이랑 잘 좀 얘기해 봐. 내가 나만 좋자고 이러는 거 아니잖아. 거기에 당사 들어가면 문호도 그 김에 언론 노출 한 번이라도 더 되고, 서로서로 좋은 거 아니겠냐고.”

태성은 동의인지 아닌지 모를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최근, 국민공화당 내에는 서울시장 후보로 김경택을 미는 분위기가 은연중에 확산되고 있었다. 물론 임기를 무사히 마치고, 입당 후 당내 선거까지 거쳐야 하는 과정이 아직 남아 있었지만, 당에서는 이미 김경택을 당원으로 취급하는 중이었다.

양승준이 차기 시장 후보로 가장 유력했던 가운데, 갑자기 김경택이 급부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양 의원 부자의 오래된 당 지배에 신물 난 당원들이 생각보다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 안에 현재 당내 핵심 인물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다는 것.

거기에 얼마 전 교주 사건으로 여론의 시선이 경찰 쪽에 쏠린 것도 한몫을 더 했다. 사건 막바지에 김경택은 언론에 직접 나서서 사건 브리핑을 하는 동시에, 젊은 경찰들의 숭고한 희생에 노고를 치하하는 기자 회견을 열었다. 기가 막힌 시점에 등장한 김경택 덕분에 경찰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선호도는 어느 때보다 높은 상황이었고, 그 호의는 고스란히 김경택에게로 돌아갔다.

이 흐름을 끊기 위해 양승준은 누구보다도 회심의 일격이 필요한 때였다. 때마침 공화당은 올해 말에 중앙 당사 이전을 계획하고 있어, 양승준은 당에 어떻게든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몇 차례나 태성에게 SOS를 청했다.

“그런데 그 자리가 임대료가 워낙 만만치 않아서, 어쩌면 당내에서도 거긴 별로 선호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양승준이 새 당사 자리로 탐내고 있는 곳은 최근 문호건설이 사유지에 지어 올린 24층짜리 고층 건물이었다. 위치가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바로 마주하는 자리에 있어 정치적 상징성을 생각하면 명당이 맞기는 한데…….

“왜 이래, 문 대표. 사람 서운하게. 비싼 거 알지. 아니까 내가 이렇게까지 부탁하는 거 아니야.”

문제는 값을 제대로 지불할 의향이 없다는 것이었다.

“문호에서 성의 보여 주면 당에서도 당신네들 어련히 알아서 챙겨 주고 할 텐데. 내가 꼭 이렇게 대놓고 얘기를 해야겠어?”

태성은 부러 시치미를 떼고 있었지만 양승준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는 지금 임대료를 낮게 책정해 달라는, 아니 정확히는 임대료로 받은 돈의 일부를 다시 뒤로 되돌려 달라는 말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돌려받은 돈은 당의 수뇌부만 아는 비자금이 될 예정이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여의도 한복판 노른자 땅 위에 새로 지은 건물을 저를 위해 통째로 내놓으라는 말인데…. 이건 칼만 안 들었다 뿐이지 날강도가 따로 없으니, 도대체 누가 조폭이고 누가 깡패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예. 회장님과 한번 상의해 보겠습니다.”

“그래, 그래.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라고.”

태성은 어이가 없어서 그저 한쪽 입꼬리로만 웃었다.

술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태성은 제 앞에 앉은 선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 시선을 읽고 선우도 눈을 마주쳐 오기에, 태성은 눈짓만으로 양승준의 술잔을 가리켰다. 약을 쓴다면 양승준의 취기가 적당히 오른 지금이 가장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선우는 슬그머니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어 보았다. 행여나 빠질세라 깊게 집어넣은 바이알은 처음 넣어 둔 위치에 그대로 자리하고 있었다. 선우는 조심스레 바이알을 손에 쥐었다. 바이알과 뚜껑 사이, 미세한 틈으로 엄지손톱을 살짝 밀어 넣기만 하면 금세 뚜껑이 열릴 것이다. 그 사실을 자각하고 나니, 바이알을 쥔 손에 순식간에 땀이 차올랐다.

“의원님. 사실 오늘 제가 뵙자고 한 건 의원님께 조언을 좀 구하고 싶어서입니다.”

태성은 선우의 움직임을 가만히 지켜보다, 이내 양승준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조언?”

“네. 최근에 연우 씨한테 귀찮게 들러붙는 경찰이 하나 생겨서요.”

“…경찰? 아아!”

양승준은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키웠다가, 곧 무언가 생각난 사람처럼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어슴푸레한 기억 속에 연우가 파랗게 질려 경찰에 쫓기고 있다는 말을 하던 장면이 언뜻 떠오른 것이었다.

“의원님도 아시겠지만, 연우 씨가 경찰 조사를 받기는 좀 곤란한 상황이라…. 지금까지는 잘 버텼는데, 수사망이 좁혀지고 있으니까 아무래도 불안한 모양이에요.”

“그래, 그럴 수 있지. 같이 약하다 죽었다던, 그 친구 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건 아니고요.”

“그럼?”

“…….”

태성이 뜸을 들이자, 양승준은 말해 보라는 듯 그를 향해 턱을 까딱였다.

“얼마 전에 사고가 있었어요. 연우 씨가 제 차를 몰다가 실수로 사람을 쳤는데… 경찰에 잡힐까 봐 겁을 먹고 그 자리에서 도망친 모양이에요. 그런데, 운이 나빴던 건지. 그때 피해자가 아직까지 의식 불명인 상태에요. 그렇게 크게 부딪힌 것도 아니라는데.”

“…….”

술잔을 들던 양승준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럼 경찰 측에서 곧바로 연락이 왔을 텐데? 당신이든, 연우 씨든.”

“네. 그래서 저야 뭐, 차량 도난당한 지 꽤 됐다고 둘러대고 윗선에서 잘 수습했죠. 문제는 연우 씨인데, 요즘은 CCTV가 워낙 잘되어 있어서 사람 숨기는 게 쉽지가 않더라고요.”

“…….”

양승준은 혀끝으로 입안을 훑고는 말없이 술을 들어 마셨다.

“저는 그냥 사건 자체를 조용히 묻었으면 하는데, 말단 경찰 놈 하나가 생각보다 끈질기네요.”

흥, 양승준이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제깟 게 끈질기게 굴면 어쩔 거야. 그거 그냥 처리해 주면 되지, 당신답지 않게 뭘 고민해?”

“사람 하나 티 안 나게 처리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그것도 경찰을요.”

“왜, 김경택한테 부탁해 보지 그래. 아, 이제 그 양반은 그런 뒤치다꺼리는 안 하려고 들려나?”

그의 얼굴에 자조적인 미소가 걸렸다.

“아무래도 청장님한테까지 이런 사소한 부탁을 드리는 건 좀 그렇죠. 그리고 무엇보다, 그쪽에 제 사생활을 노출하고 싶지도 않고요.”

양승준이 이해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재차 끄덕였다.

“연우 씨 말이, 의원님도 이 비슷한 사고를 겪으신 적이 있다고……. 그래서인지 연우 씨가 의원님 이야기를 꼭 듣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어떤 방식으로 일을 해결하셨는지…….”

양승준은 곁눈질로 연우를 힐끔 쳐다보았다. 바짝 긴장한 채 무릎 위에 두 주먹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제 얘기를 기다리는 것이 영락없이 주인의 말을 기다리는 강아지 꼴이었다. 초조한 기색을 여실히 담고 있는 모습에 양승준은 헛웃음을 흘렸다.

“난 뭐, 내가 한 게 있나. 다 김경택 그 인간이 알아서 처리한걸.”

“…사람을 처리한 것도 김경택 측이었나요?”

“아니, 그건 아니고.”

양승준은 술잔을 내려놓고, 근처에 있던 시가 케이스에서 시가 한 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판을 차린 게 그 양반이라 이거지.”

시가 끝에 불을 붙인 그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쓴웃음을 지으며 시가 끝을 가볍게 빨고 뱉으니, 곧 양승준의 입에서 뿌연 연기가 흩어져 나왔다.

“하, 생각하니까 또 좆같네. 당시만 해도 일을 참 그럴듯하게 처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

“이제 와서 보니까 내가 내 발등 찍는 거였지 뭐야. 그때 일만 아니었어도 김경택 그 인간이 청장까지 올라갈 일도 없었을 텐데. 도대체 그 일이 사람을 몇 년째 옥죄는 건지.”

“그때 그 일이라 하면…….”

“…….”

태성은 양승준의 빈 잔에 술을 가득 채워 넣었다. 양승준은 태성이 따른 술로 목을 축이고는 뻐끔뻐끔 시가를 빠르게 태웠다.

“우연인지 인연인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연우 씨랑 비슷한 상황이었어.”

그러다 조용히 꺼내 놓는 말에 태성과 선우는 동시에 양승준을 바라보았다.

[4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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