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Revenge (13/19)

9. Revenge

2021년 11월 1일 12시경

서울특별시 마포구

선우는 예정보다 한 달이나 더 빨리 근무에 복귀했다.

복귀 첫날, 선우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대학 동기 이병재를 만났다. 그를 만난 곳은 청사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식당으로, 인근에서 칼국수와 수제비가 맛있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식사를 주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선우와 이병재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해물 칼국수가 한 그릇씩 놓였다. 폭이 넓은 그릇에는 하얀 면과 맑은 국물이 가득 담겼고, 그 위로는 바지락과 새우가 푸짐하게 얹어져 있었다.

“야. 네가 날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줄은 몰랐다.”

이병재가 그릇을 휘휘 젓다가 이내 칼국수를 크게 한 젓가락 들어 올리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복귀 첫날에 나부터 만나도 되는 거야? 팀원들이 뭐라고 하지 않아?”

“아, 괜찮아. 이따 저녁에 간단하게 회식하기로 했어. 월요일이라 그런가 다들 바쁘신 것 같기도 하고.”

이병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젓가락에 걸린 칼국수를 입으로 후후 불었다. 김이 어느 정도 가신 면발은 곧 이병재의 입속으로 후루룩 빨려 들어갔다.

“몸은 좀 괜찮아?”

이병재가 우물우물 면발을 삼키며 물었다.

“응. 많이 좋아졌어.”

“이게 좋아진 거라고? 얼굴이 완전 소멸 직전인데? 안 그래도 작은 게 이제 거의 안 보일 정도야. 살은 또 왜 이렇게 빠졌어?”

동기의 걱정에 선우는 말없이 웃었다. 선우의 입으로도 칼국수 면 몇 가닥이 호로록 자취를 감췄다.

“진짜 고생했다, 선우야.”

“내가 뭘. 실컷 쉬다 왔는데.”

“쉬다 오기는. 아파서 쉬는 것도 쉬는 거냐? 야, 이제 그만 부서 이동 신청해.”

“나중에.”

“나중에 언제. 이쯤 하면 경험도 할 만큼 한 거 아니냐? 실적이야 말 안 해도 충분할 거고. 칼부림까지 당한 마당에 네가 부서 이동한다고 해서 너 욕할 사람 아무도 없을걸?”

“국수 다 식겠다. 얼른 먹어.”

선우는 이병재의 눈을 피하며 국수를 들이켰다. 예상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친구의 반응을 보고 이병재는 쓴 얼굴로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빈속을 따뜻한 국물로 어지간히 채워 놓고, 선우가 슬쩍 말을 건넸다.

“병재야. 너희 팀 요즘 바쁜가?”

선우와 같은 청사에서 근무하는 이병재는 반부패공공범죄수사대 소속이었다.

“맨날 똑같지 뭐.”

“…….”

이병재는 국수 그릇에 얼굴을 파묻은 채 별일 없다는 듯 말했다. 선우는 그런 이병재를 힐끗 한 번 쳐다보고는 그의 앞에 작은 USB 하나를 꺼내 놓았다.

“시간 되는 대로… 이것 좀 조사해 줄 수 있어?”

“이게 뭔데?”

이병재가 USB로 곁눈질을 보냈다.

“……너, 양승준 의원 알지?”

“국회의원 양승준?”

선우의 고개가 위아래로 작게 움직였다.

“그 사람은 갑자기 왜?”

“이게 그 사람 관련 자료인데…….”

선우는 조용히 주변을 살피고는 이병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목소리를 한껏 낮춰 말했다.

“그 집안에서 운영하는 사학 재단 자금 흐름이 상당히 수상해.”

“…어떤 점이?”

“자료 보면 네가 나보다 훨씬 더 잘 알겠지만, 재단 수익이 거의 없다시피 한데 몇 년째 투자를 크게 하고 있어. 당연히 투자금은 정부 지원금이랑 은행 대출금인데, 학교 하나 설립하는 데 백억이 넘는 돈이 필요하진 않겠지. 이 돈이 어디로 갔는지는… 대충 예상되지?”

이병재는 잠시 멈칫했다 곧 고개를 들고 허리를 바로 세웠다.

“친인척들이 재단 운영직 한 자리씩 맡고 있는 건 물론이고, 그 사람 집안에서 개인적으로 쓰는 사용인들도 전부 재단이나 소속 학교 직원으로 등록되어 있어. 급여나 활동비도 당연히 공금으로 지불하고 있고.”

“사학 재단 운영에 그 정도는 애교지, 뭐. 그리고?”

“몇 년 전에 재단에서 운영하던 강남 계영초를 유지가 어렵다는 명목으로 다른 재단에 팔아넘겼는데, 너무 헐값이야. 그 자리 부지 값만 해도 얼만데. 웃긴 건 그걸 산 재단이 양 의원 처가 쪽에서 운영하는 곳이라는 거지.”

“알 만하네.”

“그렇지? 아마 이중 계약이었을 거고, 그즈음 양승준이 재선 출마를 했으니까 그 돈은 고스란히 선거 비용으로 들어가지 않았을까. 이건 내 생각이야. 세금 탈루는 말할 것도 없고.”

이병재는 손에서 젓가락마저 내려놓았다.

“종로 명립초도 입학은 추첨으로 진행되는데, 일부 대기업이나 고위 공무원 자제들은 기부금 받고 입학시켜 준 정황이 있어. 교사나 교직원 채용 과정도 불투명한데 거기에도 청탁 의심되는 사례들이 꽤 있고. 제일 놀라운 건 명립초는 개교 이래 단 한 번도 교육부 감사를 받아 본 적이 없다는 거야. 개교한 지 30년이 넘었는데.”

“흐음…….”

“본인 지역구 일부 재개발하면서 가족들 명의로 부동산 투자한 건 수익률이 천 프로도 넘더라. 지금 살고 있는 펜트하우스도 고도제한 완화하는 데 힘써 주는 대신 미래건설에서 한 채 받아 낸 거고.”

“야, 씨. 그런 건 우리가 증거 찾기가 너무 힘들잖아.”

“그 안에 음성 파일이랑 녹취록 있어. 그 외에도 벤처 기업 몇 군데랑 손잡고 본인 테마주로 작전 짜서 수십억 먹고 빠진 것도 있는데,”

“야, 야! 잠깐, 잠깐!”

이병재가 선우의 얼굴 앞에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그의 행동에 선우가 말을 멈추자, 이병재는 그 손으로 USB를 가리켰다.

“그러니까, 지금 네가 말한 게 여기 다 들어 있다고?”

선우는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와, 미쳤네. 너 이 자료 어디서 났어?”

“수사할 수 있겠어?”

“어디서 난 건데?”

“…나중에 말해 줄게. 일단 수사할 수 있는지부터 얘기해 줘.”

“…….”

“…….”

“하. 갑자기 담배 존나 땡긴다.”

불현듯 목이 타, 이병재는 물 한 컵을 벌컥 들이마셨다.

“아, 솔직히 여당 소속이라 수사 개시할 때 여기저기 눈치 보이기는 할 것 같은데…. 그래도 뭐, 그게 다 사실이라면 수사해야지.”

그는 식탁 위에 컵을 내려놓고는 USB를 손에 쥐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오우, 한선우 스케일 장난 아닌데? 우리 팀장님 또 이런 거 보면 눈 돌아가는 사람이라 겁나 좋아하실 듯?”

“부탁할게. 출처는 지금 상황에서는 밝힐 순 없는데 확실히 믿을 만한 곳이야. 열어 보면 알겠지만 증거가 굉장히 치밀하게 잘 준비되어 있어서 수사하는 데 어렵지는 않을 거야. 가능하면 혐의로 의심되는 사항들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적시해서 검찰에 무사히 넘겨줘.”

“그래. 가서 제대로 봐 볼게.”

“응. 고마워, 병재야.”

“그 소리 내가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이병재는 가볍게 웃으며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그러다 순간 고개를 갸우뚱하고 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해 먹고도 어떻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안 걸릴 수가 있었지?”

“단 한 번도 안 건들었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싶은데.”

“하긴.”

네 말이 맞다. 이병재의 입술이 못마땅함에 삐죽 튀어나왔다.

***

복귀 후 며칠이 지난 아침이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실내에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집을 나섰더니 오늘은 제가 가장 먼저 출근을 한 듯했다.

선우는 자리로 가 책상 위에 노트북을 켜 놓고,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정확히 2개월 만에 돌아온 사무실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선우는 매일매일 꼭 다른 공간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달라진 팀 분위기에 아직 적응을 못 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인 듯싶었다.

박민호를 떠나보내고 팀원들은 또 한 번의 이별을 겪어야 했다. 팀의 가장 큰 버팀목이었던 김지항 경감이 보직 변경을 신청한 것이었다.

고된 업무 강도, 순경 출신에게 적용되는 차별 대우, 그래서 승진이 늦어진 탓에 팀장보다도 나이가 많은 팀원이 된 것. 이 모든 걸 일에 대한 사명감과 열정으로 이겨낸 김지항이었으나, 아끼는 후배의 죽음 앞에선 그도 버텨 낼 재간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박민호의 사망으로 직업에 대한 회의감을 크게 느낀 그는 이제 모든 미련을 내려놓고 남은 정년을 일선 파출소에서 보내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그렇게 팀원 두 명이 빠지고 선우까지 병가에 들어가자, 최 팀장은 새롭게 팀원 둘을 충원했다. 그러나 새로 온 팀원들은 이전 팀원들과는 스타일이 사뭇 달랐다.

개인적이고, 실적주의 성향이 강한 사람들. 물론 그게 잘못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전 팀 분위기가 워낙 가족 같고 서로에게 돈독했던 터라 선우는 바뀐 팀 분위기에 적응하는 데 은근히 애를 먹고 있었다. 복귀 전 동길에게 귀가 따가울 정도로 하소연을 듣고 내심 각오를 하고 왔는데도 그랬다.

그동안은 적어도 팀원들끼리 서로 눈치 봐 가면서 일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지금은 어째 팀원 하나하나가 서로의 경쟁자가 된 느낌이었다. 화기애애한 팀 분위기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건 김지항과 박민호의 배려가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선우는 두 사람을 가슴에 사무치도록 그리워했다.

안타깝고 허전한 마음에 선우는 박민호의 자리 앞에 서 보았다. 이제는 다른 이의 자리가 된 책상을 손끝으로 쓸어 만지며, 선우는 박민호와의 추억들을 되새겼다.

그를 꼬박꼬박 ‘경위님’이라 부르니 등짝을 시원하게 내리치며 편하게 일하자던 첫 만남부터 차 안에서 함께 잠복하며 자정 넘어 짜장면을 시켜 먹던 기억. 며칠 밤을 같이 새며 CCTV를 돌려보다 머리를 맞대고 꾸벅꾸벅 졸던 기억. 비열한 피의자에 화를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날리려는 것을 제가 붙들고 말린 기억.

그리고, 저를 대신해서 맨몸으로 칼을 막아 준…… 그날의 기억까지…….

“거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잠시 애잔한 감상에 빠져 있던 선우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을 돌려세우니, 자리의 주인인 김준규 경위가 다가오고 있었다. 선우는 머리를 꾸뻑 숙이며 김준규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 오셨어요. 좋은 아침입니다.”

“그 좋은 아침에 남의 자리에서 뭐 하시는 건데요?”

“네? 저, 그냥…….”

“나한테 볼일 있어요?”

“아, 그건 아니고요….”

“그럼? 뭐 빼 갈 자료라도 없나 봤어요?”

“예에? 아뇨. 제가 무슨 경위님 자료를 빼 가요.”

선우가 순간 화들짝 놀랐다. 김준규는 저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훑고 있었다.

“그럼 왜 남의 자리에서 얼쩡거려요?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곧 연말 평가 기간이라 다들 예민한 시기에 이런 행동은 오해 사지 않겠어요?”

“아, 아아. 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선우는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그에게 사과를 했다.

“한 경위야 경감 자리 따 놓은 당상이라 맘 편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 시기 되면 심기가 날카로워지거든. 서로 불편해지지 않게 좀, 주의합시다?”

“어, 어……. 네. 경위님 자료 엿보고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주의할게요.”

김준규는 별 대꾸도 없이 콧바람을 흥, 내뱉고는 선우를 슬쩍 밀어내며 자리에 앉았다.

‘허…….’

그를 피해 옆으로 비켜서는데 선우는 갑자기 기가 콱 막혔다. 제가 정말로 오해 살 만한 행동을 한 건가 싶었는데, 그러기엔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매일 얼굴을 보고 지내야 하는 사이에 웃진 못할망정 왜 이렇게 서로에게 날을 세워야 하는 건지, 선우는 김준규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 사무실 문이 쾅! 하고 큰소리를 내며 열렸다.

“한선우!”

“팀장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선우와 김준규가 동시에 최대영을 향해 인사했다.

“너 당장 회의실로 따라와!”

그리고 최대영은 다짜고짜 선우를 향해 호통쳤다. 영문을 모르는 선우는 그 자리에 꼼짝없이 서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

회의실에 들어선 최대영은 자리에 앉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허리에 양손을 얹고 선 그는 뒤따라 들어오는 선우를 씩씩대며 노려봤다.

“너 미쳤어?”

“네?”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 이 자료는 또 어디서 났어?”

“…!”

탁! 최대영이 선우를 향한 눈초리를 떼지 않은 채, 책상 위로 딱딱한 플라스틱 물체 하나를 던져 놓았다. 은색 빛을 띠는 작은 직사각형 물체는 제가 며칠 전 동기 이병재에게 건네고 온 USB였다.

“어디서 났냐고.”

“……제가… 조사한 겁니다.”

“너 정신 나갔어?”

선우가 놀란 눈으로 최대영을 직시했다.

“네가 뭔데 이걸 조사해. 양승준이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그래?”

“……양승준이 어떤 사람인데요?”

“서울시장 나가려는 사람을 조사해 달라니, 너 제정신이야?”

“네…? 그게, 왜요? 서울시장에 출마하는 것이 그 사람을 조사하지 않을 이유가 되나요?”

“뭐?”

선우는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고, 최대영은 어이가 없어서 눈을 부릅떴다.

“범죄 혐의가 의심되는 사람을 수사 요청하는 게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그런 분이니까 더 제대로 조사를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 팀은 그러라고 만들어진 팀이고요.”

“이 자식이 쉬다 오더니 어디다 정신을 빼 놓고 왔나. 그러다 그 사람이 당선되면?”

“네?”

“양승준이 시장 당선되고 나면 어쩔 건데?”

당선되고 나면 어쩌냐니? 선우는 그의 말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이렇게 들쑤셨다가 그 사람이 시장이라도 되면, 너랑 내가 이 자리 온전히 지킬 수 있을 줄 알아?”

“아…….”

선우가 작게 탄식했다. 이제야 최대영이 버럭버럭 화를 낸 것이 이해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도 버젓이 증거가 있는데 보복이 두려워서 수사를 안 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시장 선거 나가실 분이니까 더 꼼꼼하게 수사해서 모든 의혹을 깨끗하게 밝혀내야죠.”

“네가 그걸 왜? 네가 뭔데 그걸 밝혀?”

“팀장님! 팀장님도,”

“이게 누구 앞길 막으려고 작정했나. 아니면 너도 어디서 든든한 뒷배라도 얻었어?”

“예……?”

최대영의 싸늘한 태도에 선우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아직 겨울도 아닌데 회의실 내부로 한기가 도는 듯했다.

남자에 대해 조사할 때만 해도 어떻게든 수사에 착수하려고 수사대장까지 설득해 낸 사람이면서, 어째서 양승준 건에 대해선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거지? 과거의 당신과 완전히 상반되는 모습을 보이는 팀장에 선우는 그만 얼떨떨해지고 말았다.

“……뒷배라니요.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면. 양 의원 건드리면, 너 멀쩡할 거 같아? 이거 그쪽 귀에 들어가면 곧바로 불법 수사니 보복 수사니 해서 너랑 네 친구부터 고소하고 들 거라고.”

“…….”

“그 정도뿐인 줄 알아? 관련자들 소리소문없이 자리 빠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야.”

최대영은 책상 위에서 USB를 집어 들었다. 잔뜩 골이 난 그는 선우의 눈앞에 대고 USB를 잘잘 흔들며 말했다.

“애먼 짓 하지 말고 위에서 시키는 것만 해, 시키는 것만. 이런 거 조사할 시간 있으면 아도니스 자료나 되는 대로 정리해서 가져와.”

그러고는 USB를 손에 쥔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의실을 나섰다.

“하…….”

선우가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입에서는 허탈한 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텅 빈 회의실에 혼자 남은 선우는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고 제자리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

2021년 11월 8일 11:30

서울특별시 마포구

선우가 복귀한 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흘렀다.

조금 이른 점심시간, 선우는 시간이 맞는 정기영, 김준규와 함께 점심 식사를 하기로 했다. 세 사람이 향한 곳은 청사 뒷골목에 위치한 순대국밥 집이었다.

가장 먼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선 정기영은 제일 안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김준규는 정기영의 옆자리에 앉았고, 마지막에 들어온 선우는 별생각 없이 남은 자리에 착석했다. 그런데 앉고 나서 보니 제가 앉은 곳은 그 자리였다. 남자와 처음 식사하던 날 그가 몸을 구겨 앉았던 바로 그 자리. 선우는 비스듬히 내려앉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국밥만 한 패스트푸드가 또 있을까. 체감상 주문한 지 1분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까만 뚝배기 세 개가 금세 식탁 위에 놓였다. 선우는 평소처럼 뿌연 국물 위로 들깻가루를 한가득 쏟아붓고는 숟가락으로 뚝배기 속을 휘휘 저었다. 그리고 한 스푼 뜨거운 국물을 입에 넣는데, 윽! 역시나 오늘도 비렸다.

비위를 자극하는 돼지 비린내에 선우는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아주 찰나였을 뿐, 선우의 얼굴엔 금방 옅은 웃음이 번졌다. 저 말고도 이 국밥이 비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또 있다는 걸 아니까 왠지 모르게 속이 든든했다. 선우는 비식, 비식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꾹 참아 가며 순대 한 알을 입안에 쏙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깍두기를 향해 젓가락을 뻗었다. 이 또한 습관처럼 한 행동이었으나 선우는 깍두기를 집지 못하고 그냥 손을 거뒀다.

하, 나 이래서 밥은 먹을 수 있을까…….

이제는 거의 자조 섞인 웃음이 나왔다. 이 순대국밥, 깍두기가 도대체 뭐라고 순간마다 남자를 떠올리고 있는 건지. 선우는 고개를 슬쩍 돌려 주방 쪽을 바라보았다. 주방 앞에 마련된 셀프 코너에는 스테인리스 용기에 깍두기가 수북이 담겨 있었다. 저 앞을 그 큰 덩치로 어슬렁거리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실상 아무도 서 있지 않은 곳을 보면서 그랬다.

보고 싶다. 그가 보고 싶다는 것을 인정하면 솔직히 아직도 마음 한구석이 찔리기는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별것도 아닌 음식이, 장소가, 그에 대한 기억들이 자꾸만 그를 생각나게 했다.

“지금 이 분위기면 내년 인사이동에서 진짜로 부산 청장님이 올라오실 수도 있겠어요.”

선우를 현실로 끄집어낸 건 김준규의 목소리였다.

“응. 아무래도 그쪽에서 이를 제대로 간 것 같네.”

“예. 그 정도면 위에서 진짜 어지간히도 쪼아 댔을 거예요? 밑에 사람들만 죽어나는 거지.”

“……부산이 왜요?”

선우가 두 사람을 향해 물었다.

“요즘 부산청 실적 쌓는 게 장난이 아니라. 선우 너 쉬는 동안에도 그쪽에서 큼직큼직한 사건들이 얼마나 많이 터졌는지 몰라.”

대표적으로는 해태파의 와해를 들 수 있었다.

두 달 전쯤, 경찰의 수배가 내려진 뒤 몇 년째 몸을 감추고 있던 해태파 우두머리가 드디어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회장님의 구금 소식에 남은 조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그대로 자취를 감췄다. 잠시 숨을 죽이고 상황을 살피려는 의도였겠으나, 당시에 두목 외에도 핵심 조직원들이 대거 붙잡히는 바람에 향후에도 해태파의 재기는 그리 녹록지 않을 듯했다.

해태파가 국내 조직폭력단 중에서는 워낙에 손꼽히는 규모인지라, 언론에서도 이 소식에 대해서는 며칠간 대대적인 보도를 했었다. 오죽하면 세상과 등진 채 요양 중이던 선우조차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동안 선우는 제가 닥친 일이 너무 커서 세상일에 거의 관심을 두지 못했었는데, 정기영의 말을 듣자 하니 이 사건 외에도 큼지막한 사건들이 더 있었던 모양이었다.

“꼭 벼르기라도 한 것처럼 그간 해결 못 했던 사건들 보란 듯이 해결하고 있으니까. 부산청장님이 내년도 청장 승진을 염두에 두신 건 아닌가, 그런 얘기도 슬슬 나오더라고. 김경택 청장님 임기도 얼마 안 남았잖아.”

“이렇게 기다렸다는 듯이 하반기에 사건 몰아서 터트리는 거 보면 의심 안 할 수가 없어요. 거기에 오늘 건까지 하면, 이건 거의 쐐기 박는 거죠.”

“오늘이요?”

“응. 나도 아침에 김 경위 통해 들은 건데. 보자, 이쯤 되면 기사 다 났겠네.”

정기영은 숟가락을 들지 않은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몇 번 터치만으로 금세 기사를 찾아낸 그는 선우를 향해 액정 화면을 내보였다.

《‘선상 마약 파티’ 연 부유층 자제 등 30명, 부산 앞바다서 검거》

“헉. 이게 뭐예요?”

선우는 정기영의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제 핸드폰을 찾아 들었다. 포털사이트 앱을 켠 선우는 곧장 뉴스 탭으로 화면을 넘겼다. 뭘 자세히 검색해 볼 것도 없이 뉴스 창은 전부 같은 주제의 속보 기사로 도배되어 있었다.

《한조·대영·한경… 재벌 3세들의 해상 환각 파티》

《마약에 빠진 부유층 자제들, 해상에서 30명 무더기 적발》

《해운대 앞바다서 마약 투약 재벌 3세 검거, 한조그룹 고중호 사장 외 29명 입건》

《마약 청정국은 옛말… 재벌가 집단 마약 투약 파문》

《마약에 비틀거리는 대한민국, 부유층 ‘봐주기’ 수사 언제까지?》

선우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맨 위에 있는 기사를 열어 보았다. 엄지손가락으로 화면을 슥슥 내려 가며 기사를 읽는데, 끝을 향해 갈수록 선우의 얼굴이 점차 딱딱하게 굳어 갔다.

기사 내용인즉슨, 어제인 일요일 새벽 해운대 앞바다에서 경찰이 마약 파티가 열린 대형 요트를 검거했다는 것이었다. 탑승자는 총 30명으로 개중에는 재벌가 및 고위 공무원들의 자제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요트 내에서는 헤로인이 대량 발견되었고, 탑승자 전원이 헤로인에 양성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경찰은 그 자리에서 탑승자 전원을 긴급 체포하였고, 현재는 구속 영장을 신청한 상태였다.

선우가 얼굴을 굳힌 이유는 여기 있었다. 한조그룹 고중호 사장, 한경일보 김정주 이사를 비롯, 기사에 언급된 피의자들은 전부 아도니스 소속 일원이었다. 심지어는 제가 마지막으로 요트를 탔던 날 탑승했던 멤버들이 거의 대부분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 언급되지 않은 사람은 해 봐야 두 명 정도, 엄재한 검사와 문호그룹의 문태성이 다였다.

선상 파티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을 뿐, 이건 아도니스 YB 모임일 게 분명했다. 남자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건 그나마 다행이었으나, 아도니스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 틀림없어 보였다. 거기다 탑승자 전원이 헤로인을 투약 중이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선상에서 투여하는 건 에퀴스였으니 이들이 마약 검사에서 걸릴 일은 없어야 했다.

“헤로인이라니. 우리나라에서는 헤로인은 구하기 힘든 줄 알았더니, 이제는 그것도 아닌가 봐요?”

“걔네들이야 워낙 외국을 제집 드나들 듯이 드나드는 애들이니까.”

“……어, 경감님. 죄송해요. 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나서 먼저 사무실 좀 들어가 볼게요.”

선우는 또 다른 기사를 살피며 주춤주춤 몸을 일으켰다.

“어? 그래? 밥은 안 먹고?”

“네. 별로 생각이 없어서요. 두 분 편하게 드시고 오세요.”

쏜살같이 자리를 정리한 선우는 두 사람을 향해 머리를 까딱 숙이고는 서둘러 식당을 나섰다.

***

청사에 도착한 선우는 사무실이 아닌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제 차를 찾아 운전석에 앉은 선우는 남자에게 다급히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고막을 울리는 신호음에 불쑥 초조함이 일었다. 선우는 엄지손톱을 딱딱 깨물며 어서 빨리 그가 응답하기만을 바랐다.

- 네에.

“대표님! 저예요!”

- 알아요.

“괜찮으세요?”

- 뭐가요?

남자의 목소리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기사 봤어요. 아도니스에 문제 생긴 거 맞죠?”

- 문제?

남자는 도리어 제게 되물었다. 설마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있는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선우는 급한 마음에 우다다 말을 쏟아냈다.

“아도니스 회원들을 태운 요트가 해운대에서 적발됐어요. 그 사람들 전부 헤로인을 투약 중이었다는데 알고 계셨어요? 대표님은요? 대표님은 그 자리에 안 계셨던 거예요?”

- 한 경위, 진정해요.

“…네?”

-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경찰에 잡혀갔다는데 뭐가 문제에요.

“대표님……!”

그저 태연한 남자의 태도가 선우는 몹시도 당황스러웠다.

- 왜? 나쁜 놈들 잡았으면 한 경위는 좋은 거 아니야?

“저는……! 그럼 대표님은요? 대표님은 아무 일 없으신 거예요? 경찰 조사받아야 하는 상황인 거 아니에요?”

- 글쎄? 나한테는 아무 연락 없던데?

……연락이 없다니? 체포 당시 현장에는 없었던 건가? OB 모임이면 몰라도 YB 모임은 웬만해선 빠지지 않는 사람인데? 게다가 피의자 조사하면 공급책이 누구인지는 단번에 알 텐데, 연락이 없었다는 게 말이 되나?

선우의 머릿속에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 아, 혹시 지금 나 걱정돼서 이러는 거예요?

“네에?”

그리고 남자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길게 늘어진 꼬리를 한순간에 탁 잘라 버렸다.

“대표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 그럼 뭐가 중요해요? 나한테는 그게 제일 중요한데?

“하, 아니…. 아도니스 회원만 10명이 훌쩍 넘던데……. 더군다나 헤로인이 검출됐다고요. 에퀴스 투약하면 검사에서 안 걸리는 거 아니었어요?”

- 한선우. 지금 네가 뭘 걱정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거야?

“네……?”

- 나야 한 경위가 걱정해 준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만. 이거 원, 대한민국 경찰이 이래도 되나?

“……!”

남자는 말끝에 목을 울려 웃었다. 반면 일순 사고가 정지한 선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표정을 굳혔다.

그의 말이 맞았다. 도대체 제가 지금 뭘 걱정하고 있는 건지. 명색이 마약 수사를 담당한다는 형사가 마약을 만들어 파는 남자와 그의 약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행동인가.

선우는 한숨을 폭 쉬며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 에퀴스에는 문제없어요. 헤로인은 뭐, 약쟁이들이 약 섞어서 하는 게 하루 이틀 있는 일도 아니고. 마침 난 그날 일이 있어서 모임에는 참석을 못 했어요.

“…….”

남자의 안정적인 음성에 안도감을 느낀 것도 잠시.

- 아마 아도니스 멤버들이 조사 과정에서 아도니스에 대해 폭로하거나 내가 약 공급책이라고 밝히는 게 걱정이 되는 모양인데, 글쎄. 내가 손에 뭘 쥐고 있는지 알면서도 그걸 경찰에 다 불 만큼 간 큰 사람들이 있을까 싶네.

“…….”

- 그나마 마약 정도면 죄질이 좀, 가볍지?

선우는 갑자기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남자는 벌어질 상황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을지도 몰랐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아니면 설마, 애초에 경찰에 언질을 준 사람이…….

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너무 억측이지 않나.

- 와, 근데 기분 좋네요.

남자의 한 톤 높아진 목소리가 혼미한 정신을 다잡게 했다.

- 한 경위가 먼저 연락 줬는데 그게 나 걱정돼서라니.

하, 천연덕스럽게 구는 남자에 선우는 짧게 탄식했다.

“……그럼 어쨌든… 대표님은 괜찮으시다는 거죠…?”

- 네. 난 괜찮아요. 그나저나 우리 벌써 며칠이나 못 봤는데, 안부부터 물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잘 지내고 있어요?

“……네. 전 잘 지내고 있어요. 대표님은요?”

- 나도 잘 지내요. 밤마다 끌어안고 자던 애착 인형이 한순간에 사라져서 옆구리가 좀 시린 거 빼고는?

“하아…….”

- 아, 한선우 보고 싶다.

“…….”

선우는 두 입술을 감춰 물었다. 남자의 집에서 나온 뒤로 선우는 의도적으로 그를 피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면 괜히 안겨서 어리광이나 부리고 싶어질 것 같아서 그랬다. 그러기엔 제게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복수’라고 할 만큼 거창한 것은 아니더라도, 양승준을 벌하는 건 제가 직접 하고 싶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양승준이 죗값을 치르게 할 생각이었고,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면 그때 남자에게 마음을 전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런 제 마음을 남자 역시 눈치채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 지금껏 저를 보채지 않고 기다려 주고 있는 것일 테고, 그러니 이렇게 보고 싶다고 하는 말이 제게 얼마나 묵직하게 느껴질지, 그는 알고 있을 터였다.

“대표님…….”

- 네.

“…….”

- 왜요?

“……아니에요…. 별일 없으시다면 그걸로 됐어요…….”

저도 보고 싶다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선우는 말을 아꼈다.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면, 정말로 남자가 너무 보고 싶어서 흔들리는 마음을 도저히 주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

같은 날, 같은 시각.

경기도 성남시 현주바이오텍 연구소장실

“아, 혹시 지금 나 걱정돼서 이러는 거예요?”

생뚱맞은 소리에 핸드폰을 내려놓다 말고 태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뭐가 중요해요? 나한테는 그게 제일 중요한데?”

눈을 게슴츠레 뜬 김현수가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 김현수는 제가 꼭 드라마 속 주인공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 괜찮아요. 옆구리가 좀 시린 거 빼고는? 아, 한선우 보고 싶다……. 우웩!”

그의 짧은 독백극은 헛구역질로 막을 내렸다.

책상 앞에 앉아서 태성의 전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김현수는 통화가 끝나자마자 태성이 했던 대사를 고스란히 읊어 댔다. 저를 흉내 낸답시고 너스레를 떠는 김현수를 보고 태성은 푸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태성을 보고 김현수가 말했다.

“너 말이야. 요즘 진짜 미친놈 같아.”

“너한테 나는 항상 미친놈 아니었어?”

“그랬지. 근데 그동안은 좀 무서운 미친놈이었는데, 지금은 나사 빠진 미친놈이야.”

태성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꼰 다리 위로 태블릿을 올려 둔 그는 화면을 슥슥 넘겨 가며 추가로 올라오는 기사들을 살폈다.

어제 새벽, 평소 같았으면 동해를 돌다가 다시 강릉으로 돌아가야 할 아도니스의 요트가 해운대 선착장에 닻을 내렸다. 요트의 정착지는 박우진과 미리 상의해 둔 곳이었고, 배에서 내리는 이들을 반긴 건 그들의 운전기사가 아닌 부산청 마약범죄수사계 소속 경찰들이었다.

탑승자 전원이 체포될 때까지 선실에서 대기하던 태성은 상황이 완전히 정리되고 난 뒤 유유히 해운대를 벗어났다. 그리고 연락이 닿는 모든 언론사에 이 소식을 전했다. 주요 언론사부터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를 산간 지역 신문사까지.

오랜만에 터진 대형 사건에 월요일 아침부터 언론사들은 앞다퉈 기사를 쏟아 냈고, 덕분에 주요 포털 사이트도 슬금슬금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었다.

체포된 사람들 중에 내로라하는 기업들의 후계자가 대거 포함되어 있어서인지, 이번에는 여론 분위기도 꽤 심상치 않았다.

보통 유명인의 마약 투약 소식에 대중은 싸늘한 반응을 보이곤 했는데, 이번 선상 마약 파티에 대해서는 분노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사회적 책임을 가져야 할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한두 명 숨어서도 아니고, 해상에 호화로운 요트를 버젓이 띄워 놓고 단체로 마약을 했다는 사실이 대중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이었다.

일각에서는 벌써 관련 기업에 대해 불매 운동까지 벌일 조짐을 보이기도 했다. 때문에 이번 사건에 후계자가 연루된 기업들은 당분간 몸을 사리느라 여념이 없을 듯했다.

그리고 이건 정확히 태성이 노리는 바였다. 적어도 이 정도로는 혼을 빼 놓아야 뒤에서 엉뚱한 짓거리할 생각을 하지 못할 터였다.

“도대체 어쩌려고 이래? 아도니스까지 경찰에 넘긴 건 너한테도 타격이 너무 큰 거 아니야?”

“어차피 아도니스는 언젠간 써먹을 용도로 만들어진 거야. 예상보다 시점이 좀 앞당겨지긴 했지만, 시기의 차이인 거지 결론적으로 달라질 건 없어.”

“그럼 더더욱 절체절명의 순간에 써먹었어야지. 아까운 황금 열쇠를 이렇게 쉽게 날려 버려도 되는 거냐고.”

“음, 글쎄. 나한테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이 올까 모르겠는데.”

태성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눈썹과 턱은 한껏 치켜들고, 잔뜩 내리깐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태성을 보고 김현수는 제 앞에 놓인 명패를 조용히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차마 던지지는 못하고 던지는 시늉만 하자, 태성이 소리 내어 웃었다.

농담처럼 말하긴 했지만, 태성은 정말로 아도니스를 희생한 것이 그만큼 값어치가 있는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아도니스를 내어놓고 얻고자 하는 건 세 가지였다.

먼저, 차기 경찰청장의 자리.

이번 사건까지만 잘 마무리가 된다면 박우진의 승진은 거의 확실시될 것으로 보였다. 올 한해 부산청 이상으로 실적을 낸 지방청이 없으니, 본인이 스스로 옷을 벗지 않는 한 그는 내년에 무난히 경찰청장에 임명될 것이다. 그러면 태성 또한 향후 2년간 경찰 쪽은 크게 신경 쓸 것이 없었다.

다음으로는 양승준에 대한 전방위 압박.

이번 모임에 참석했던 이들은 대다수가 양승준과 정치 노선을 같이하는 언론사나 그에게 앞뒤로 정치 후원금을 대는 기업의 자제들이었다. 오너 리스크로 기업 이미지가 쑥대밭이 되었으니, 당분간은 이를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었다. 제 코가 석 자라 정치인 후원까지는 신경 쓸 겨를이 없을 테니, 자연히 양승준도 조만간 언론 플레이와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을 예정이었다.

마지막으로는 제 사람을 건드린 것에 대한 가벼운 경고였다.

한선우를 건드린 고중호와 그걸 웃으며 지켜보고 있던 놈들에게 친히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 제가 아끼는 이에게 손을 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한 번쯤은 톡톡히 일깨워 줘야 했고, 남은 아도니스 멤버들에게도 미리 주의를 주는 건 덤이었다.

“이제 아도니스는 어떻게 할 건데? 이 상태로는 모임을 계속 끌고 갈 수도 없잖아. 내부 반발도 심할 거고, 회장님들 심기도 불편하실 텐데.”

김현수가 명패를 얌전히 내려놓으며 물었다.

“본격적으로 물갈이해야지. 마침 요즘 내부 분위기가 별로이기도 했고. 정 안 되면 아도니스는 허울만 유지하고, 아예 다른 클럽을 설립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어. 그동안 너무 평화로웠지.”

흐르지 않는 물은 썩기 마련이었다.

아도니스도 벌써 설립된 지 30년이 넘었는데, 그 긴 세월 동안 회원 명단은 크게 달라진 바가 없었다. 기껏해야 YB랍시고 그들의 직계 비속이 추가된 정도.

엘리트 중의 엘리트만을 모았다고는 하나, 세상의 변화가 워낙 빠르니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들이 하나씩 있었다. 자식들이 아비의 능력치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들도 더러 속출했다.

이름만 번지르르하게 남은 속 빈 강정은 정작 필요할 때는 하등 쓸모가 없었다. 그런데 저들은 아도니스를 등에 업고 온갖 우대와 혜택을 누리고 있으니, 제 부친이면 몰라도 저는 그걸 가만히 두고만 볼 자비로운 사람은 아니었다. 대대적인 물갈이의 필요성을 느끼던 찰나에, 마침 선우의 일이 제게 불을 지폈다.

세상에 훌륭한 사람은 많고 기업은 만들면 그만이라, 아도니스를 한 번쯤 뒤엎는다고 큰일 날 일은 아니었다. 앞으로도 함께할 우량 회원들에 대해서는 미리 물밑 작업이 끝난 상태였고 그들 또한 분위기 쇄신을 요하고 있었으니, 태성은 시원한 마음으로 고인 물 정화 작업에 착수했다.

다만 딱 하나, 아쉬운 것이 있다면 그건 한조였다. 항공 사업은 문호가 한 번도 진출하지 않은 분야인 데다 무턱대고 손대기에는 규모가 너무 컸다. 그런데 제가 맡은 사업 분야는 항공사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계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동안 한조와 함께 진행해 온 사업들이 꽤 있었는데, 앞으로는 공조가 힘들 테니 당분간은 불편을 겪을 것 같긴 했다.

그러나 속이 좁은 저로서는 고중호만큼은 용납할 수가 없어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왕지사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 김에 아예 괜찮은 저가 항공사를 물색해 볼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재밌는 거 알려 줄까?”

태성은 옆좌석에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꼰 다리를 풀며 몸을 앞으로 숙인 그는 두 다리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양손을 맞잡았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도니스가 어떻게 죽은 줄 알아?”

이건 또 웬 뚱딴지같은 소리야. 눈을 빛내며 묻는 태성에 김현수는 아도니스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람이었냐며 궁시렁거렸다.

“아도니스는 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사냥을 좋아해서 매일같이 사냥에 나섰는데. 결국엔 그 좋아하는 사냥을 하다가 멧돼지에 물려 죽어.”

“……그런데?”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 마약에 환장해서 그거 하겠다고 뻔질나게 모여들다가, 결국 마약 때문에 잡혀 들어간 게 딱 그 꼴이잖아. 이름값 한번 제대로 했지.”

태성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김현수는 순간 뒷골이 서늘해졌다. 방금, 한동안 조용하던 무서운 미친놈의 모습을 언뜻 본 것 같아서였다. 이럴 때는 얼른 화제를 돌리는 게 상책이었다.

“아, 몰라. 난 그딴 신화 같은 건 모르겠고. 그거 약 만든다고 존나게 고생했으니까 연말에 내 상여나 빵빵하게 챙겨.”

태성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에 놓여 있던 서류를 집어 들었다. 최근 부쩍 성장한 현주바이오텍은 연구소 신설과 공장 이전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서류는 그와 관련된 것이었다.

사락사락 넘어가는 종이와 태성의 눈치를 번갈아 보다가 김현수가 넌지시 물었다.

“야. 근데 뭘 이렇게까지 해?”

“뭘?”

“걔도 전후 사정 다 알고 있다며. 그냥 곧바로 양 의원 털어 버리면 그만이지 뭐 하러 일을 키우고 있냐고.”

“본인이 원하는 건 그게 아니니까.”

“본인이 원하는 건 뭔데?”

태성은 서류를 검토하던 것을 멈추고 김현수를 쳐다봤다.

“복수는 직접 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내가 대신해 주면 나야 편하긴 하겠지만, 본인한테는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래? 내가 그 상황이면, 난 누가 대신 복수해 주면 존나 통쾌할 것 같은데?”

“그럴 만한 성격이 못 돼서. 아마 마음에 짐만 얹어 주는 걸껄? 본인 마음 다잡는 데도 왠지 그쪽이 훨씬 더 효과적일 것 같고. 근데 혼자 하는 게 쉽진 않을 거니까, 적어도 체급은 맞춰 줘야지.”

“양 의원 측에서도 알면 가만있지 않을 거 아니야.”

“도발에 응해 주시면 나야 더 고맙고.”

“허어…. 그럼 김경택은?”

“그쪽도 차차 생각해 봐야지. 적어도 곱게 퇴장하는 그림은 나오지 않게.”

태성은 다시 시선을 서류 위로 옮겼다.

“이거 나사가 빠진 게 아니라 사랑에 빠진 거였구만.”

서류에 눈을 고정한 채 씨익 웃는 태성을 보고 김현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다. 김현수는 손등에 턱을 괴고 태성에게 물었다.

“어디가 그렇게 맘에 들어?”

“뭐가?”

“이렇게까지 할 만큼, 걔가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드냐고.”

그러자 태성이 이상한 걸 본다는 듯 김현수를 쳐다봤다. 그 눈빛은 꼭 김현수가 태성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때 쳐다보는 눈빛과 같았다. 김현수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아, 그래. 뭐, 솔직히 외모는 인정인데. 그래도 그 정도 얼굴 되는 애들은 네 주변에 널리고 널리지 않았냐? 당장에 소속사에만 해도 몇 명이야.”

“그래? 금시초문인데?”

“하, 이거 봐. 나사든 사랑이든 뭐가 빠져도 단단히 빠졌어.”

김현수가 태성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그러자 태성은 정말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진짠데. 한선우보다 예쁘고 잘생긴 사람이 내 주변에 어딨어.

“그래. 사랑에 눈이 먼 놈한테 이런 질문을 한 내가 어리석었다.”

김현수는 태성에게 답을 듣는 것을 포기하고 책상 앞에 놓인 모니터로 눈길을 옮겼다. 이래 봬도 저도 꽤 바쁜 사람이라 사실 태성과 노닥거릴 때가 아니었다.

“그냥, 편해.”

그러나 말처럼 편안하게 던져진 한마디가 김현수의 눈길을 다시 잡아끌었다.

“나한테 뭘 바라지 않는 사람이라.”

제 주위에는 온통 제게서 뭐라도 떨어질까, 무슨 정보라도 얻어 낼까, 속을 숨긴 채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는 사람들, 그게 아니면 어디 흠집이라도 잡아 볼까 싶어 세모눈을 하고 지켜보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런 사람들 틈에서 맑은 눈동자에 오롯이 저만을 담고 보는 이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가 있을까.

거기다 본인은 아는지 모르는지, 말은 못 하면서 실은 당신을 좋아하고 있다고 온몸으로 절절하게 표현해 대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안 좋아하고 배겨.

“…….”

어느새 숙연해져 저를 힐끔거리는 김현수를 보고 태성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니까 그런 걸 왜 물어봐.”

괜히 더 보고만 싶어졌잖아. 태성은 손에 쥔 서류를 테이블 위로 툭 던져 놓았다.

“연구소랑 공장 둘 다 별 탈 없이 잘 진행되는 것 같네.”

“응. 지금 마무리 단계라 이번 달 내로는 양쪽 다 공사 끝날 거야. 마약 관련 기밀 서류는 통나무집 서버에만 남겨 놓고 전부 다 폐기했고.”

“잘했네. 식약처 실사 끝날 때까지 당분간은 좀 쉬어 가자고.”

등잔 밑이 어둡다고 두 사람은 현주바이오텍 연구소와 공장에서 대놓고 약을 만들고 있었다. 그동안은 눈치 볼 곳도 없었지만, 이제 일을 터트려 놨으니 어디서 어떻게 공격이 들어올지 모를 일이었다. 그에 태성은 잠시 마약 사업에서 손을 떼기로 했다.

현주바이오텍의 연구소 신설과 공장 이전은 기실, 증거 인멸을 위한 일종의 연막작전에 불과했다.

***

저녁 식사 때를 훌쩍 넘긴 시각. 손님이 드문 한정식집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독방의 문이 열리고, 그 안으로 양승준이 들어섰다.

“늦었습니다, 청장님.”

“무슨. 바쁜 사람인 거 뻔히 아는데. 어서 와 앉아.”

양승준은 성큼성큼 걸어 빈자리 앞에 섰다. 그는 양복바지를 한 번 추어올리고는 좌식 식탁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일이 이렇게 돼서 정신이 없지?”

“예. 말도 마십시오. 며칠째 머리가 딱딱 아파 죽겠습니다.”

인상을 찡그리며 말하는 양승준 앞에 빈 자기 술잔이 놓였다. 고희수가 술병을 집어 들자 양승준은 두 손으로 술잔을 받쳐 들었고, 잔에는 곧 투명한 청주가 채워졌다.

양승준은 고개를 돌려 술 한 잔을 단번에 들이켜고는 식탁 위로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잔을 내려놓았다.

“이래서 피는 못 속인다고. 누가 깡패 새끼 아니랄까 봐, 뒤에서 이딴 식으로 공작질을 하네요.”

“…….”

고희수는 팔짱을 낀 채 말없이 긴 한숨을 내리 쉬었다.

“그 능구렁이 같은 놈이 비죽비죽 웃는 낯으로 언젠간 한 번은 일을 터트릴 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문호는 이제 완전히 김 청장 쪽으로 붙었다고 보면 되는 거지?”

“……예. 아무래도요.”

언짢은 표정을 한 양승준의 코에서 콧바람이 쉬익 뿜어져 나왔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여론 분위기가 이래서 원. 이번에는 다들 형을 피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아.”

고희수 또한 걱정스럽다는 듯 말하며 두 사람의 술잔을 채워 넣었다. 양승준은 착잡한 마음에 의미 없이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식탁 위에는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의 반상 차림이 차려져 있었으나 두 사람 모두 젓가락을 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문제는 자금 조달입니다. 그놈이 돈줄이란 돈줄을 다 막아 버리는 바람에 앞으로 일이 어렵게 돌아가겠어요. 김경택이 입당하기 전에 당원들 마음을 붙들어 놓으려면 지금부터 들어갈 돈이 한두 푼이 아닌데 말입니다.”

“허, 그거 큰일이구만.”

“예. 당장은 처가 쪽에서 도움을 좀 받을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이 상황이 길어지면 정작 선거는 빈손으로 치러야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흐음…….”

고희수도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양승준만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상황이 급변하니 제 앞날도 덩달아 불투명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들어 박우진의 기세가 심상치 않아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는데, 김경택마저 임기를 무사히 마치게 생겼으니, 이러다가 저는 승진의 기회조차 얻지 못할 판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발을 빼자니 양승준과 너무 깊게 엮여 버렸고, 딱 한 발자국만 더 가면 되는 걸 포기하자니 억울하고 애가 타서 자다가도 눈이 번쩍 뜨였다.

“그쪽에서 갑자기 이렇게 나오는 이유가 뭐야? 뭐 짐작 가는 일이라도 있어?”

“……예. 뭐, 대충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알 것 같기는 합니다만…….”

양승준은 당 사무실 이전 건을 의심했다. 아무래도 당사 자리로 여의도 한복판에 있는 건물을 내달라고 한 것에 문호 측 마음이 단단히 틀어진 듯했다. 이전까지는 분위기가 그리 나쁘지 않았고 통나무 별장에서 술을 마신 것이 문태성과 만난 마지막이었으니, 그가 돌변한 이유를 찾자면 그것뿐이었다.

저와 김경택 사이에서 계속 저울질을 하다 계산이 틀어지니 좀 더 다루기 쉬운 김경택 쪽을 밀어 주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까지 지내 온 세월이 있는데, 한순간에 이렇게까지 사람을 척질 수가 있나? 조폭 새끼들은 피도 눈물도 없다더니 그 말이 딱이었다.

양승준은 이를 바득 갈며 술잔을 비웠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문호는 완전히 돌아선 것 같고, 당분간은 다른 곳들도 도움받기가 힘들 것 같으니 무슨 수를 쓰긴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아도니스의 요트가 경찰에 붙잡히고 난 뒤로 양승준은 매일매일이 불구덩이 속이었다. 눈치 빠른 당 수뇌부들은 벌써부터 저를 간 보느라 시도 때도 없이 전화질이었고, 그들을 안심시키는 데만도 하루가 다 갔다. 한때나마 든든했던 후원자들은 죄다 구치소에 처박혀 연락도 닿질 않으니 이건 빛 좋은 개살구만도 못했다. 특히나 제 입이나 마찬가지였던 한경일보가 저를 도외시하는 건 정말로 뼈가 아플 지경이었다.

문태성이 정말로 김경택 측에 붙기로 결정했다면, 그 성격상 시장 선거가 끝날 때까지 저를 가만둘 리가 없었다. 운신의 폭이 조금이라도 더 좁아지기 전에 제가 먼저 그 둘을 치는 것이 답이었다.

“이렇게 된 거 김경택과 문태성을 한 번에 정리해 버릴 만한 해법이 필요한데 말입니다.”

“두 사람을 한 번에 정리해 버릴 만한 해법이라…….”

고희수는 혀로 입안을 훑다가 힐끗, 양승준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이번 기회에 아예 아도니스를 공개적으로 까발리는 건 어때?”

“……아도니스를요?”

눈썹을 치켜뜬 양승준의 이마에 주름이 파였다.

“아도니스라는 상류층 사교 모임이 존재하는 데다 그 뒤를 김경택이 줄곧 봐주고 있었다는 게 밝혀지면, 사회적으로 꽤나 타격이 클 것 같은데.”

“아하하. 아뇨, 그건 좀…….”

양승준은 난처함에 어설피 웃었다. 아도니스가 세상에 드러나면 타격을 입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건 기업인인 문태성이 아니라 정치인인 제게 해당하는 사항이었다. 저는 기껏 해 봐야 대중의 이미지를 먹고 사는 사람이 아닌가.

고희수가 아도니스를 어지간히도 의식하고 있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때다 싶어 속을 내비치는 걸 보니 양승준은 입안이 썼다.

“문호그룹은 이미 표면적으로는 더 이상 아도니스에 관여하지를 않아서요. 지금 시점에서는 아도니스가 알려진다 해도 문 대표 쪽이 크게 피해 볼 일은 없을 겁니다. 거기다 이번 일에 법조계 인물이나 정치 거물들은 일절 포함이 안 된 거 봐서는 일부 회원들하고도 이미 결탁이 끝난 상태일 거라, 자칫하면 남은 사람들만 꼴이 우스워질 수 있습니다.”

“그럼 마약 사업 쪽을 좀 더 파 보는 건? 마침 지난번 블루문 사건 무마한 것도 김 청장이 직접 지시한 거 아니야.”

양승준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놈이 어떤 놈인데요. 다른 건 몰라도 그쪽만큼은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날 겁니다.”

“허허, 참. 그럼 이거 도대체 방도가 없질 않나.”

“…….”

양승준은 고희수를 슬쩍 쳐다보고는 술병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어느새 비어 버린 고희수의 술잔에 조용히 술을 채웠다.

“실은, 제가 따로 생각해 둔 방안이 하나 있긴 합니다만…….”

“방안?”

“예. 그런데 그걸 실행하자면 청장님의 도움이 꼭 필요해서 말입니다.”

“……뭔데 그래?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얘기해 보라고.”

양승준의 얼굴에 어렴풋이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제가 종전에 넘겨 드렸던 자료에서는 건질 만한 것들이 없었습니까?”

“으응. 믿을 만한 부하 놈들 몇몇한테 뿌려 놓긴 했는데 결과가 영 시원찮았지? 알다시피 수사 중간에 엎어진 건들도 있었고. 그래도 계속 주시하고 있으라고는 했으니 그 뒤로 쌓아 둔 정보들이 더 있긴 할 거야.”

“예. 좋습니다. 그건 나중에 문 대표가 경찰 조사에 들어가게 되면 그때 한꺼번에 터트려 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일단은, 그 부하들의 도움이 조금 필요할 것 같은데요.”

양승준이 낮은 목소리로 눈을 빛내며 말하니,

“이번 건만 잘 성사되면 김경택과 문태성 한 번에 정리하는 건 물론이고, 그 공로로 청장님도 분명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거라고… 확신합니다.”

고희수는 허리를 바짝 세워 앉았다.

***

2021년 3월의 어느 날

겨울의 찬 기운이 조금도 가시지 않은 3월 첫째 주의 어느 늦은 저녁이었다. 고희수는 종로구에 위치한 한 중화요릿집 독실에 앉아 지난주의 일을 회상했다. 지난 주말, 고등학교 총동문회 임원진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해마다 2월 말이 되면 서울의 명문, 경운고등학교는 총동문회 임원진 모임을 개최했다. 신년 인사를 겸사로 한 해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몇 년째 동문회의 감사직을 맡고 있는 고희수는 매년 이 모임에 참석하고 있었다. 올해도 언제나처럼 모임은 짧은 회의 후 저녁 식사 자리로 이어졌다.

그리고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고희수를 향해 다가온 이가 있었다.

“선배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어어, 그러게. 우리 양 의원 얼굴을 오랜만에 보네.”

홍보국장을 담당하고 있는 양승준이었다. 말이 임원진이지 사실 그는 얼굴마담에 불과한지라, 웬만해선 모임에 잘 참석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고희수는 그의 등장이 반갑고도 의아했다.

“그간 별일 없으셨죠?”

“그럼, 나야 잘 지내지. 양 의원도 잘 지냈지?”

“예. 물론입니다.”

양승준은 밝은 얼굴을 하고 마침 비어 있는 고희수의 옆자리에 자연스럽게 착석했다. 고희수가 앉아 있던 테이블에는 어느덧 사람이 모두 빠져나간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선배님 임기가 1년도 채 남지 않으셨네요?”

“응. 이제 슬슬 그만두면 뭘 할까 고민해 보려고.”

“예에? 그만두시다니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세요. 당연히 승진하셔야죠.”

양승준이 화들짝 놀라며 하는 말에 고희수는 설핏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승진도 다 운이 따라 줘야 하는 건데. 난 여기까지인가 싶어.”

“에이. 왜 그런 약한 소리를 하고 그러세요. 선배님 같은 분이 승진하셔야지 그 자리에 누가 올라간다고 그러십니까?”

“하하. 말이라도 고맙네. 그런데 아쉽게 됐다만 이번에는 정말로 가능성이 희박해. 김 청장보다 내가 먼저 임기가 끝날 예정이라.”

고희수가 얼굴에 씁쓸한 미소를 비췄다. 그러자 양승준이 그게 뭐 대수냐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고는 고희수에게만 들릴 정도로 아주 나직하게 얘기했다.

“선배님. 김 청장이 임기를 제대로 마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으음……?”

“본청 청장 자리가 비면 아무래도 서울청에 계신 선배님께서 자리를 이어받을 가능성이 가장 높지 않겠습니까?”

“뭐어…. 그렇긴 하다만…….”

고희수는 순간 얼떨떨해지고 말았다. 그의 앞에 양승준이 몸을 낮게 숙이며 말했다.

“선배님께 긴히 드릴 말씀도 있고……. 시간도 늦었는데, 괜찮으시다면 제가 자택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

두 사람의 대화는 양승준의 차 뒷좌석에서 이어졌다.

“선배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김경택 청장이 은퇴 후에 정치를 하고 싶어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그래?”

양승준이 눈을 흘겨 고희수를 살폈다. 역시나 전혀 모르고 있던 눈치였다. 양승준도 김경택이 당내 중진 의원들을 비밀리에 만나고 다닌다는 소문을 이제 막 들은 참이었다.

“예. 그런데 임기가 아직 1년 가까이나 남은 사람이 벌써부터 움직인다는 건, 아마 단순히 의원직 정도를 바라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설마….”

“예. 그 설마가 맞을 겁니다.”

허어, 고희수가 놀란 듯 깊게 탄식했다.

“그래서 최근 후원자들을 물색하고 다니는 모양인데. 그게 참, 저로서는 상황이 무척이나 난감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김 청장 뒤로 문호가 붙은 것 같아서요.”

“문호가…?”

고희수는 크게 키운 눈으로 양승준을 쳐다봤다.

“아니! 문호는 같은 아도니스 소속 아니었어? 그런데 자네를 두고 김 청장한테 붙었다고?”

고희수의 의아한 눈빛을 이해한다는 듯 양승준도 입매를 비틀며 비죽였다.

“양아치 새끼들이 하는 짓이 다 그렇죠, 뭐. 아마도 당선 가능성이 있는 후보들에게 두루두루 다리를 걸쳐 놓을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걸 아도니스 멤버들이 가만히 보고 있어?”

“아도니스는, 언제 적 아도니스랍니까. 아도니스라고 옛날처럼 그렇게 끈끈하고 애틋하지도 않습니다.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아요.”

양승준이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며 고희수의 낯을 살폈다. 그는 내심 흥미로우면서도 그걸 억지로 감추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고희수의 반응이 제가 예상한 것과 같자, 양승준은 조심스레 본론을 꺼내 놓았다.

“아도니스는 둘째치고. 이래서야 원, 제가 불안해서 무슨 일을 진행할 수가 있어야지요.”

“음…….” 고희수가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입니다. 제가 문태성 대표 측 자료를 조금 가지고 있는 게 있는데……. 혹시 청장님께서 이 자료를 한번 검토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문태성 대표?”

“예. 만일을 대비해서 저도 무기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지요.”

흐음, 고희수는 심각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청장님. 김경택이 정말로 시장 자리를 노리는 거라면, 저는 그자가 임기를 채우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습니다.”

“…….”

“검토, 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양승준의 차는 그새 고희수의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똑똑.

짧은 노크 소리가 고희수를 현실로 일깨웠다. “네.” 고희수의 대답과 동시에 독실의 문이 열렸다. 고희수는 옅은 미소로 부하 최대영을 맞이했다.

“이번 인사 결과가 좀 아쉽게 됐네.”

고희수가 제 앞에 자리한 최대영에게 향이 진한 고량주 한 잔을 하사하며 말했다.

때는 전년도 업무 성과에 따른 승진 인사가 단행된 직후였다. 마약 1팀은 남동길이 경사로 승진한 것 외에는 작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작년도 실적이 굉장히 화려했던 것치고는 보잘것없는 성과였다.

“괜찮습니다. 다음번에 또 기회가 있겠지요.”

“글쎄, 그게 말이야 쉽지.”

무슨 영문인지 대놓고 승진의 어려움을 표출하는 고희수에 최대영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총경으로 승진하는 게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거, 자네도 잘 알지 않나. 게다가 경찰대 출신들이 까마득히 줄지어 서 있는데. 암, 쉽지 않지.”

최대영은 손에 받친 고량주 한 잔을 한 번에 들이켰다. 향긋한 첫인상도 잠시, 높은 도수의 독주에 치가 떨리고 목이 탔다.

“최 팀장도 이제 연차가 꽤 돼서 다음 인사에는 꼭 총경으로 승진을 해야 할 텐데 말이야.”

“…….”

무릎을 꿇고 앉은 최대영은 한순간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이왕 경찰이 되었으니, 그래도 서장은 한번 하고 옷을 벗어야 하지 않겠어?”

“……?”

최대영은 슬그머니 눈을 키우며 고희수를 쳐다보았다.

“자네 생각에는 다음 대 청장이 누가 될 것 같은가?”

“……예?”

갑작스러운 질문에 눈을 껌뻑이는 최대영 앞에 검은색 USB 하나가 놓였다.

“이것 좀 조사해 봐.”

“이게… 뭡니까?”

“문호리조트 문태성 대표 자료야.”

“문호… 리조트요…?”

“지금 김경택 청장이 뒤를 봐주고 있는 곳이고, 동시에 김경택 청장의 뒤를 봐주고 있는 곳이기도 해.”

허억, 최대영은 놀라 헛숨을 들이켰다.

“서울청장으로서 내 임기가 이제 10개월 정도 남았는데 말이지. 나는 한 단계 더 높은 곳을 보고 있어.”

고량주를 마신 탓인지 목구멍이 바짝 말라 왔다.

“일이 잘 풀리면 자네 팀 전원 특진은 물론이고, 당신은 원하는 지역 어디든 서장으로 발령 내 줄게. 그럼 퇴직 전까지 말년은 편안히 보낼 수 있겠지.”

그에 최대영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강남경찰서장 정도면 명함 내놓기 그럴듯하잖아? 와이프도 서장 사모면 어디 가서 빠지지 않을 거고, 딸 교육하기에도 그쪽 지역만 한 곳이 없지.”

최대영의 시선은 검은색 USB에 꽂혀 떨어질 줄을 몰랐다.

“가져가서 자료 살펴보고 이리저리 잘 고민해 봐.”

“…….”

고희수가 턱 끝으로 USB를 가리키니, 최대영이 그걸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그 자료를 줄 만한 조건이 되는 사람들은 최 팀장 말고도 많아. 그런데 내 생각엔… 최대영이만큼 이 자료가 절실한 사람도 없어.”

최대영은 손에 쥔 것을 멍하니 내려보다가, 고희수가 술병을 드니 서둘러 USB를 식탁 위로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말없이 두 손으로 술잔을 들어 올렸다.

“참, 그리고 하나만 더. 아도니스라는 사교 클럽에 대해서도 좀 알아봐 봐.”

“……아도니스요…?”

“응. 저기 높으신 분들끼리 모여 만든 사교 모임 같은 건데, 거기도 뒤가 구린 것 같으니까 문호 알아보면서 같이 한번 알아보라고.”

“……예.”

최대영은 딱 한 번,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고는 고희수가 따라 준 술을 마셨다. 그새 익숙해진 것인지, 그 독한 술도 두 번째 들이켜니 목 넘김이 한결 수월했다. 처음엔 잘 느끼지도 못했던 상쾌한 주향에 막혔던 코가 뻥 뚫리는 듯했다.

***

2021년 11월 18일 09:30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약범죄수사대

선우는 책상 앞에 앉아 고민에 빠졌다. 남자가 준 자료를 어떻게 하면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 정도를 따르는 방법으로는 양승준의 부정과 부패를 세상에 폭로하는 것이 여의치가 않을 듯했다.

반부패공공범죄수사대를 통해 양승준을 수사해 보려던 시도가 수포로 돌아가고, 선우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를 넣었다. 신고 사항은 유권자 금품 제공, 여론 조작, 공직자의 선거 개입 유도 등 두 번의 선거를 치르는 동안 양승준이 저지른 선거법 위반 행위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고한 지 열흘이 넘도록 선관위는 이렇다 할 응답이 없었다. 선우가 받은 답이라곤 신고 즉시 민원이 접수되었다는 간단한 통지문이 전부였다. 기다리다 못해 일의 진행 상황을 묻는 전화를 했을 때, 선관위 측은 신고 사항을 검토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니 연락을 줄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답을 주었다.

최 팀장의 반응을 봐서는 아무래도 경찰 내 수사는 힘들 것 같은데, 검찰에 직접 사건을 접수해 볼까. 그런데 문득 검찰이라고 다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검찰이든 경찰이든 윗선에서 고위층 인사의 수사를 무마하는 건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라, 괜히 어설프게 신고를 했다가는 정보만 흘리고 수사는 흐지부지될 것만 같았다.

아쉬운 대로 제1야당에라도 제보를 해 볼까. 현재는 야당 측이 워낙 기를 펴지 못하는 상황이니, 이마저도 그리 좋은 효과를 보지는 못할 듯싶었다.

뭐 더 좋은 수가 없나. 선우는 의미 없이 이런저런 인터넷 사이트를 돌아다녔다. 그러다 마음이 갑갑해져 눈살을 찌푸리며 머릿속을 마구 헤집었다.

그때, 누군가가 선우의 오른쪽 어깨를 툭툭 내리쳤다.

“잠깐 내 자리로 와.”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제 옆에 최대영이 서 있었다.

선우가 최대영의 자리 앞에 서자마자, 그는 다짜고짜 명령부터 내렸다.

“지금 바로 문태성이랑 아도니스 자료 있는 대로 전부 취합해서 가지고 와.”

“……예?”

“시간 없으니까 빨리.”

“갑자기요? 무슨 자료를 말씀하시는 건지…….”

“내가 진작부터 정리해 두라고 얘기했었잖아. 네가 쫓아다니면서 그놈한테 보고 들은 것들, 뭐든 좋으니까 전부 정리해서 가지고 오라고.”

“…….”

선우는 일순 어안이 벙벙해져 아무 말도 못 한 채 제자리에 멀뚱히 서 있었다.

“뭘 꾸물거려? 곧 있으면 문태성 앞으로 구속 영장 발부될 거야. 우리도 숟가락 하나라도 얹으려면 지금 바로 자료 들이밀어야 하니까, 한 시간 내로 싹 다 정리해서 가져와.”

“네? 구속 영장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세요?”

“말 그대로야. 영장 나오는 대로 강수대2)에서 체포하러 간다니까 서둘러.”

“왜요? 무슨 일 때문에요?”

선우가 다급히 물었다. 책상 앞에 앉은 최대영이 눈을 날카롭게 치켜뜨고 선우를 올려다보았다. 곧 그의 입에서 눈빛만큼이나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살인 미수, 폭행, 협박, 공갈.”

“……예…?”

“어제 양승준 의원이 고소장 접수했고, 사안이 너무 심각해서 오늘 아침에 바로 영장 신청 들어갔어.”

“지금… 양승준 의원이라고 하셨어요? 문태성 대표가 양승준 의원을 폭행, 협박했다고요? 지금 그 말씀 하신 거예요?”

선우는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뭘 그렇게 놀라? 깡패 새끼가 깡패질했다는데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왜요? 이유가 뭔데요?”

“지들끼리 있었던 일을 난들 알아? 모종의 일로 문태성이 양 의원을 협박했고, 양 의원이 거기에 굴하지 않으니 폭행했고. 뻔한 스토리지. 전치 12주 진단받고 양 의원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다더라.”

선우의 턱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선우는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아니요. 아닐 거예요, 팀장님. 그럴 리가 없어요.”

“그럴 리가 없다니. 이 자식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됐고, 얼른 가서 자료나 정리해 와. 이대로 가다 문태성 건도 고스란히 강수대 쪽에 뺏기고, 올 한 해 우리가 개고생한 건 한순간에 날아가게 생겼어. 그놈에 대한 건 뭐든 좋으니까 일단 싹 다 가져와 봐.”

“…….”

하, 살인 미수라니.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순간적으로 눈앞이 어찔해졌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소식에 어떤 반응과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뭐 하고 있어? 어차피 이런 새끼들은 정상적인 방법으론 죽어도 못 잡아. 위에서 작정하고 판 깔아 줬을 때 우리도 같이 수사해야 한다고. 일단 잡아 놓고 호텔이든 클럽이든 압수 수색하면 뭐라도 나오겠지.”

선우는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뜨고는 조그맣게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최대한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없습니다.”

“뭐?”

“……수사를 할 만큼 범죄 혐의가 의심되는 사항은 없었습니다.”

“그건 내가 판단할 테니까 넌 가져오기나 해.”

“…….”

선우는 입을 꾹 다문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뭐 해?”

“제 판단에는 문태성 대표가 양승준 의원보다 더 문제 되는 행위를 한 바가 없습니다. 수사를 한다면 양 의원 측을 해야죠. 수사 허락해 주시면 양 의원 불법 마약 투약 증거 가지고 오겠습니다."

허, 이 새끼가 미쳤나. 최대영은 기가 차 웃음도 나지 않았다. 그는 화가 난 얼굴로 선우를 윽박질렀다.

“너 요즘 왜 자꾸 주제넘은 짓을 해? 위에서 체포하라고 명령이 떨어졌다는데 네가 뭐라고 혐의가 있니 마니 하고 있어? 건방지게. 상사 말이 우스워?”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럼 뭔데, 이 새끼야.”

“…….”

선우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어 물었다.

“문태성이 알아서 네 뒤라도 봐 준대?”

“……네?”

“내가 언제까지 눈감아 줄 줄 알았어. 좋은 곳 돌아다니면서 총질하고, 평생에 만져 보지도 못할 외제 차 타고 다니니까 눈에 보이는 게 없지?”

“!”

“새끼가, 조사하라고 붙여 놨더니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별 엉뚱한 짓거리만 하고 다니고 있어. 정신머리가 빠져 먹어 가지고는.”

선우는 순간 머리에 돌을 맞은 기분이었다. 그가 자신을 닦달하고 비아냥거려서가 아니라, 찰나에 뇌리를 스쳐 간 생각 때문이었다.

“팀장님. 설마… 저한테 미행…… 붙이셨습니까?”

“문태성이든 아도니스든 네가 아는 정보 다 내놔. 그럼 나도 전부 모른 척해 줄 테니까.”

“허…….”

최대영은 구태여 부정하지도 않았다. 냉랭한 그의 태도에 불쑥 뒷덜미를 따라 오싹한 한기가 들었다.

“팀장님…….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건데……. 제게 아도니스에 대해 언급하셨던 게…… 처음부터 이러실 생각이셨던 건가요? 저를 문태성 대표한테 붙여 놓고 아도니스에 대해 조사하려고……?”

선우는 옥상에서 최대영과 대화를 나눈 그날을 떠올렸다.

남자의 말이 맞았다. 남자는 제가 그를 찾아간 그날, 단박에 저를 의심했었다. 아도니스 일이라면 훤히 꿰뚫고 있는 그가 보기엔 수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사건이 아니라 뜬금없이 아도니스에 대해 묻는 제가.

“팀장님은 알고 계셨죠. 제게 아도니스에 대한 얘기를 흘리면 제가 문 대표를 찾아갈 거라는 걸.”

마음 한구석에 내내 자리하고 있던 원인 모를 꺼림칙함이 해소되고 나니, 그 자리에는 불쾌한 감정만이 남았다.

“그래서 저를 이용하신 건가요? 왜 처음부터 제대로 말씀하시지 않으셨어요? 솔직하게 얘기해 주셨으면 저는 당연히 팀장님 말씀 따랐을 텐데요. 아니 그보다, 애초에 저희 아버지 사건이 아도니스와 관련이 있긴 했습니까? 아니죠. 아무런 상관없다는 거 알고 계시면서 일부러 그렇게 말씀하셨던 거였군요!”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한데.”

“……!”

선우의 두 눈썹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내가 그렇게 안 했으면, 멀쩡한 방법으로 우리가 그놈한테 접근이나 할 수 있었을 줄 알아? 뒤에 김경택 청장이 버티고 서 있는데, 어림 반 푼어치도 없지.”

저도 모르게 불끈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수사 엎어지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그놈 자식이랑 아도니스 자료 얻어내야 했어. 너도 작년에 봤지? 그렇게 새빠지게 고생해 놓고 우리 팀 누구 하나 제대로 승진 못 한 거. 이거, 우리한테 온 기회였어. 난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거고.”

정신이 얼얼하니 터질 듯 깨문 입술에선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선우. 잘 들어. 지금 상황이 아주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어. 분위기 잘못 타면 우리 팀 누구도 내년에 이 자리에 남아 있을 거라고 장담 못 하는 상황이라고. 우리 이 기회 절대 놓치면 안 돼. 이번 연도 우리 팀 성과, 전부 너한테 달려 있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허튼소리 이제 그만하고 가서 자료 가지고 와.”

“…….”

선우는 이를 바득 갈았다. 실적, 성과. 이젠 정말 넌덜머리가 날 것 같았다. 그깟 실적, 그깟 성과를 내기 위해서라면 사람을 이렇게 농락해도 되는 건가. 울컥 화가 치솟고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해 보려 해도 씩씩, 오르내리는 가슴통을 숨길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정보는 없습니다.”

선우는 머리를 깊게 숙이고는 곧장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 “야! 한선우!” 등 뒤로 최대영이 호통치는 소리가 들렸으나, 선우는 뒤돌아보지 않고 사무실을 나섰다.

“어? 선배님, 어디 가세요?”

성난 걸음으로 복도를 내걷던 선우의 맞은편으로 동길이 다가오고 있었다.

“강수대.”

“엇! 선배님도 얘기 들으셨어요? 저도 지금 강수대에서 오는 길인데.”

선우는 가던 길을 멈추지 않았다.

“와, 대박이죠. 해도 해도 안 되더니 그놈을 살인 미수로 잡네요.”

빠른 걸음으로 걷는 선우 곁을 동길이 옆걸음질로 따라붙었다. 선우는 동길은 쳐다도 보지 않은 채, 굳은 얼굴로 앞만 보고 걸음을 계속했다.

“저 그 증거 자료로 제출된 CCTV 영상 보고 왔는데, 와 씨. 문태성 존나 살벌해요. 아닌 척하더니 조폭은 조폭인가, 사람 패는 솜씨가 예사롭지가 않던데? 양승준 의원 뇌진탕 오고 갈비뼈 두 대 나갔대요. 근데 그럴만해요. 사람을 무슨 개 패듯이 패더라고.”

“이유가 뭐래?”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선우는 계기판을 올려다보며 아래로 내려가는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맨 꼭대기 층에 서 있었다.

“어, 그 뭐라더라? 문태성이 양 의원한테 자기네 건물로 공화당 사무실을 옮겨 달라는 청탁을 했대요. 양 의원은 당연히 거절했고요. 그랬더니 문태성이 보복한답시고 양 의원이랑 경쟁 관계에 있는 사람한테 현질해 가면서 로비를 한 거예요. 그래서 양 의원이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더니, 혼자 흥분해서 사람을 죽일 듯이 패더랍니다.”

“…….”

선우는 고개를 돌려 동길을 쳐다봤다. 오늘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 것이었다.

“근데 문태성이 로비했다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누군데?”

동길은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그러고는 선우의 귓가에 입을 바짝 대고 낮게 속삭였다.

“김경택 청장님.”

“하…!”

“대박이죠! 완전 깜짝 놀라셨죠!”

이럴 줄 알았지. 정말 뻔한 스토리였다. 너무 뻔해서 기도 막히지가 않았다. 선우는 다시 계기판을 올려다보았다. 엘리베이터는 아직도 꼭대기 층에 머물러 있었다. 의미가 없는 행동인 줄 알면서도 마음이 급해지니 버튼에 절로 손이 갔다.

“몇 팀이야?”

“네?”

“강수대 몇 팀이냐고.”

다닥다닥, 선우는 화살표가 그려진 버튼을 재차 누르며 물었다. 흔치 않게 화가 난 목소리라, 동길은 선우를 의아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어… 3팀이요…….”

“응. 고마워.”

여전히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 엘리베이터를 뒤로하고 선우는 비상구로 향했다.

“어? 선배님! 선배님! 어디 가세요!”

비상구 문을 벌컥 연 선우는 계단을 타고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

‘이거 대외비라 진짜 보여 드리면 안 되는 건데. 한 경위님이니까 보여 드리는 거예요.’

강력 3팀에는 마침 안면이 있는 경위가 한 명 있었다. 선우는 그의 도움을 받아 사건의 모든 자료를 살펴볼 수 있었다. 그리고 강수대를 나서는데, 도무지 속이 어수선해서 사무실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 길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간 선우는 제 차를 찾아 운전석에 들어앉았다.

고소장, 양승준의 진술서와 전치 12주짜리 진단서. 글로 써진 것들은 얼마든지 지어낼 수 있었다. 이런 문서들은 제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행위를 직접적으로 증명하는 증거품을 맞닥뜨렸을 때는 저도 사람인지라 설마하는 마음이 불쑥 튀어나오고 말았다.

사건 현장을 담은 CCTV 녹화 영상, 불과 10분도 채 되지 않는 그 영상 속에는 정말로 남자가 양승준을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카메라가 양승준의 정면을 비추는 탓에 마주 보고 선 남자는 영상이 끝나도록 거의 뒷모습만을 보였으나, 그를 못 알아볼 리 없었다.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 시원시원한 팔다리. 특출난 체구는 말할 것도 없었고, 착용하고 있는 옷까지 제가 아는 남자가 맞았다. 심지어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다름 아닌 문호 회장의 통나무 별장이었다.

영상도 전부 조작된 것이라고, 굳게 다잡은 마음을 흔든 것은 또 다른 증거품이었다. 거기에는 총과 장갑이 있었다. 양승준은 남자가 총대로 자신을 폭행했다고 진술했고, 경찰은 통나무 별장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근처 숲에 버려진 장총과 장갑 한 쌍을 발견했다. 당연하게도 두 물건에서는 모두 남자의 지문이 검출되었다고 했다.

선우는 굳이 지문 감식 결과까지는 들춰 보지 않았다. 총과 장갑 모두 남자가 정선 사격장에서 쓰는 개인 장비들이라는 걸 제가 모를 리 없었으므로.

하, 말도 안 돼. 이건 진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선우는 핸들을 양손으로 부여잡고 그 위에 이마를 처박았다.

그 사람일 리가 없었다. 제가 알고 있는 남자는 사람을 그렇게 잔인하게 폭행할 사람이 아니었다. 필시 양승준이 그와 김경택을 곤욕에 빠트리려 무슨 수를 쓴 것이 틀림없었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불결한 생각이 틈새를 비집고 올라왔다.

눈을 씻고 봐도 영상 속 그 사람은 남자가 맞았다. 정말 그가 아닌 걸까? 만일 그가 실제로 양승준을 협박하고 폭행한 것이라면? 내가 보아 온 모습만으로 그가 그런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해도 되는 걸까? 그 사람은 조직의 우두머리이고, 죄를 거스르는 것이 일상인 범법자인데……?

“…….”

아니, 아니야. 선우는 핸들에 파묻힌 머리를 좌우로 털어냈다. 제게 그렇게 따뜻한 품을 내어 준 남자가 그랬을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저는 알고 있지 않나. 당사 이전을 요구한 건 양승준 측이었다. 남자는 도리어 거기에 은근한 난색을 표했었다. 게다가 제 상황을 전부 아는 남자가 김경택을 지원한다고? 이 또한 말이 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이렇게 모든 증거가 의심의 여지 없이 남자를 범인이라고 지칭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선우는 고개를 쳐들고 핸드폰을 급히 찾았다. 그리고 익숙한 이름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지금 어디 계세요?”

- 사무실이요.

신호음이 멎자마자 선우는 숨도 쉬지 않고 그를 찾았다. 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차분한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우습게도 떨리는 호흡이 조금은 진정되는 듯했다.

“대표님. 지금 양승준이, 아니, 곧 경찰들이 갈 거예요. 양승준이 아무래도 무슨 짓을 벌이는 것 같은데,”

- 여기로 와요. 얼굴 보고 얘기하자.

“네…?”

띠릭-.

“여보세요? 대표님? 대표님!”

남자는 짧은 말을 남기고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

얼떨떨해진 선우는 시동을 걸며 남자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몇 번이나 신호가 가도록 남자는 응답이 없었다. 두 번째, 세 번째에도 마찬가지였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남자의 행동에 당황한 선우는 그의 사무실을 향해 서둘러 차를 몰았다.

2021년 11월 18일 11:30

서울특별시 강남구 문호리조트 본사

남자의 사무실이 위치한 호텔 본사 건물에 도착하자 검은 정장 차림의 수행원 한 명이 선우를 맞이했다.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선우를 안내했고, 대표실로 직행하는 엘리베이터까지 동행했다.

두 사람은 단번에 건물의 최고층까지 올라섰다. 이윽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양쪽으로 열렸을 때, 눈앞에는 융단이 깔린 대리석 복도가 길게 펼쳐졌다. 그 끝에는 웅장하게 느껴질 정도로 커다란 목재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조금은 어둑한 조명, 고요하고 장엄한 분위기에 선우는 순간 발걸음을 주저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선우는 곧 복도 끝을 향해 질주했다. 저 문 너머에 남자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한번 뻗은 다리가 멈춰지지 않았다.

긴 복도를 한달음에 달린 선우가 꽉 닫힌 문을 벌컥 열며 소리쳤다.

“대표님!”

“왔어요?”

검은색 슈트를 완벽하게 차려입은 남자는 창가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는 몸을 빙글 돌려세우며 웃는 얼굴로 선우를 반겼다.

“다행이네. 얼굴은 제대로 보고 갈 수 있어서.”

“하아…. 대표님, 여기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니에요.”

선우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의 앞에 섰다.

“조금 있으면 경찰들이 여기로 올 거예요. 대표님 앞으로 체포 영장이 발부된다고 했어요. 아무리 봐도 양승준이 일을 꾸며낸 것 같은데,”

“알고 있어.”

“……네?”

선우가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니, 태성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알고… 계셨다고요……?”

그를 바라보는 선우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어, 어떻게……. 그럼, 대표님이 진짜로… 하신 거예요? 아니죠? 아,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일단 자리를…! 변호사님, 정 실장님은 지금 어디 계세요?”

선우가 횡설수설하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단둘뿐인 방 안을 정신없이 둘러보는 선우는 당장에라도 누가 쫓아올 것처럼 불안한 눈을 하고 있었다. 태성은 고개 숙여 싱겁게 웃고는 선우 앞에 바짝 다가섰다.

“한선우.”

그러고는 한 팔로 선우의 허리를 단단히 휘감았다.

“나 믿어?”

“……예?”

제 눈을 꿰뚫듯 쳐다보며 묻는 남자에 선우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이 긴박한 상황에서 난데없이 자신을 믿느냐니. 짐짓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어, 선우는 심각한 얼굴로 미간을 구겼다.

“나 믿냐고.”

“당연하죠! 믿어요. 대표님이 그러실 분 아니라는 거 알아요. 근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와. 이젠 고민도 안 하네?”

태성은 눈을 접어 활짝 웃었다. 선우는 태평하게 구는 남자가 너무 답답한 나머지 화가 나고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저를 당겨 안은 팔을 풀어내며, 선우가 다급히 외쳤다.

“대표님! 지금 장난하는 게 아니에요! 살인 미수라고요, 살인 미수. 증거품에 대표님 총이랑 장갑이 있었어요. 영상도, 왜인지 모르겠지만, 분명 대표님이었어요. 이건 누가 봐도 대표님이 범인이라고 몰아가는 상황이란 말이에요. 거기다 들어가시면 분명히 조사 과정에서 다른 죄목까지 들이밀 거예요. 여러 부서에서 작정하고 나오면 아무리 대표님이라도 무사히 나오기가, 읍…!”

태성은 자신을 향해 소리치는 선우를 빤히 쳐다보다가 선우의 머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쉴 새 없이 종알거리는 입술 위에 대뜸 입을 맞췄다.

맞댄 입술 사이로 부드럽게 혀를 밀어 넣는 것도 잠시, 태성은 곧 뿌리 끝까지 집어넣을 것처럼 깊게 혓바닥을 욱여넣었다.

“읏……!”

좁은 입안을 혀끝으로 거칠게 휘젓다, 이내 말캉한 혀를 휘감아 강하게 빨아당기니 선우의 목구멍에서 얕은 신음성이 흘렀다. 태성은 개의치 않고 오히려 선우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을 더 주었다. 그리고 마치 선우의 타액까지도 모조리 삼켜 버리려는 사람처럼 그의 혀와 입술을 세차게 빨아들였다.

마음이 급한 선우는 어서 놓아달라는 듯 태성의 가슴팍을 거듭 두들겼다. 그러나 태성은 옴짝달싹하지 않았고, 선우는 그를 거의 뿌리치듯 밀쳐냈다.

“대표님……!”

“한선우. 어쩌다 이 지경이 됐어. 증거 다 보고 왔다며. 그런데도 날 믿어?”

“하아…….”

“너 이래서 도대체 경찰 어떻게 하려고 그래.”

선우가 안쓰럽다는 듯 태성이 눈썹을 구기며 말했다. 그러면서도 입매만큼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웃는 모양을 했다. 저 때문에 울상이 된 얼굴, 축 처진 눈썹과 눈꼬리에 태성은 참지 못하고 또다시 선우의 입술에 입을 맞댔다. 그러면서 선우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그를 벽 한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으읍……!”

주춤주춤, 선우는 남자의 힘에 밀려 뒷걸음질을 했다. 문득 벽면에 등이 스치듯 닿는가 싶더니 별안간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츕, 물기 어린 마찰음과 함께 맞붙었던 입술이 떨어지고, 선우를 지탱하고 있던 팔에도 스르륵 힘이 빠졌다. 어느새 선우는 문 너머에 혼자 서 있었다. 존재조차 몰랐던 문을 사이에 두고 저는 문 안쪽에, 그는 문 바깥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난 괜찮으니까, 내 걱정 하지 말고.”

“……?”

“조금만 기다려.”

“대표님……?”

선우는 의아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남자와 그의 손을 번갈아 보았다. 낯선 공간에 저를 혼자만 밀어 넣고 문고리에서 손을 놓지 않는 남자가 수상했다.

“나 믿는다며. 금방 나올게.”

그는 불현듯 양 볼에 그림 같은 보조개를 띄우더니, 선우를 향해 근사한 미소를 지었다.

“대표님……!”

당혹스러운 마음에 선우는 다급히 문에 매달렸다. 그러나 태성은 도리어 선우를 밀어냈다.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선우를 문에서 떼어 낸 그는 곧 문고리를 빠르게 잡아당겼다.

“대표님!”

닫히는 문 사이로 남자의 얼굴이 서서히 사라지고, 이내 쿵- 소리를 내며 두꺼운 철제문이 완전히 닫혔다.

“!”

선우는 문에 빠르게 달라붙었다. 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잡고 좌우로 돌려보았으나, 달칵달칵 빈 소리만 날 뿐 문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이게, 지금……!

“대표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쾅쾅쾅! 선우는 문을 세게 두드렸다.

대표님! 대표님! 몇 차례나 남자를 불러 봐도 그는 대답이 없었다. 달칵달칵, 선우는 재차 문고리를 돌리고 문을 잡아당겼다. 그래도 소용이 없자 문틈 사이로 연신 그를 부르며 문을 세차게 내리쳤다. 그래 봐야 방음막을 덧댄 철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선우는 문에서 떨어져 나와 신속히 주위를 살폈다. 문을 열 만한 것이 뭐라도 있지 않을까. 열쇠, 아니면 문고리를 부술 만한 것이라든지, 문틈을 조금이라도 벌릴 만한 것이라든지…….

그때, 콰당- 문밖에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바깥이 조금 소란스러워진다 싶더니,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 여러 개가 섞여 들렸다.

‘서울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에서 나왔습니다. 문태성 씨 본인 되시죠?’

헉…! 아, 안 돼……!

선우는 다시 문으로 달려가 귓가를 문틈에 바짝 붙였다.

‘당신을 살인 미수, 폭행 및 공갈, 협박 혐의로 체포…….’

웅얼웅얼 방음문에 막혀 말소리가 또렷이 들리지는 않았으나, 짐작건대 이것은 틀림없이 미란다 원칙이었다. 수십 번, 수백 번도 더 되뇌어 본 문장이니 제 예상이 틀릴 리 없었다.

대표님! 대표님! 덜컥덜컥, 선우는 문고리를 잡아 흔들고, 쾅쾅 문을 정신없이 두드렸다. 그러다 휙, 몸을 돌려 제가 서 있는 방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제발, 뭐라도 좋으니까 제발……!

이곳이 무슨 공간인지, 여기에 뭐가 붙어 있는지도 몰랐다. 책상 위를 들춰 보고, 서랍장을 열고 닫고. 가구란 가구는 전부 뒤져 가며 이리저리 두리번두리번.

“…….”

그러는 사이 바깥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조용해졌다. 선우는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문밖도, 안도 어느덧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삭막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혼자 남은 그를 경찰 여럿이 체포해 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

선우는 망연자실해져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제야 제가 있는 공간을 둘러보니, 이곳은 대표 집무실에 딸린 남자의 휴게실이었다. 오로지 그의 휴식을 위해 마련된 공간은 외부와 철저히 단절되어 있었다. 제가 들어온 문 외에는 출구도 따로 없었고, 그마저도 방음 처리가 되어 있으니 제아무리 소리친들 밖에선 들리지 않을 듯했다.

아, 말도 안 돼…….

선우는 고개를 처박고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제가 악몽을 꾸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남자가 장난을 치는 건 아닐까. 제발 뭐라도 좋으니 누구라도 와서 이게 현실이 아니라고 말해 줬으면 했다.

그 순간, 철컥.

열쇠로 문을 따는 소리가 들렸다. 몇 번을 열려 해도 열리지 않던 문이 단 한 번의 쇳소리로 손쉽게 입구를 벌렸다.

“실장님!”

문을 연 사람은 정윤철이었다. 선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윤철에게 달려갔다.

“실장님! 지금 대표님이 경찰에 끌려가셨어요. 대표님이랑 뭐라도 얘기되신 게 있으세요?”

“한 경위님. 대표님 전언입니다.”

“……?”

선우를 향해 선 정윤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허리를 깊게 숙였다.

“가시는 길,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실장님…!”

“…….”

“하…….”

열린 문 사이로 내리쬐는 눈부신 정오의 햇살에 순간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2021년 11월 18일 15시경

강원도 정선군 정선군청 CCTV 통합관제센터

“실례하겠습니다. 서울경찰청 마약범죄수사대 소속 한선우 경위입니다. 수사 건으로 자료를 좀 요청하려고 하는데요.”

선우는 모니터 앞에 앉은 한 남자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가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뒤를 돌아보자, 선우는 그를 향해 경찰증을 내밀었다.

“공문 가져오셨어요?”

“아, 저… 상황이 너무 급해서 미처 준비를 못 했는데……. 정말 죄송하지만, 영상 먼저 확인해 볼 수 있을까요? 서울 올라가자마자 곧바로 보내 드릴게요.”

선우가 찾아간 남자는 정선군 내 방범용 CCTV 영상을 관리하는 담당 주무관이었다. 그는 의심쩍은 눈으로 선우를 훑었다.

“공문 없으면 안 되는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데요?”

“14일 자, 414번 국도 CCTV 자료가 필요해서요.”

“아, 414번 국도!”

꽤나 구체적인 조건을 언급하니 웬일인지 주무관은 선우에 대한 의심을 쉬이 거두었다. 주무관은 모니터 한 대에 정선군 지도를 띄워 놓고, 414번 국도가 있는 지점을 크게 확대했다.

“여기 말씀하시는 거 맞죠? 그때처럼 이 주변 찍힌 영상 다 필요하신 거예요?”

“……?”

선우는 이미 상황을 알고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담당자가 의아했다.

“……아니요. 한 지점이면 됩니다. 여기 만항재 입구 지나가는 차량들 번호만 확인하면 되거든요.”

선우는 손가락으로 414번 국도 중간쯤을 짚었다. 만항재에는 ‘산상의 화원’이라 불리는 산책로가 있었다. 이곳을 끼고 돌아 산속으로 난 도로를 타고 올라가면 깊은 산골에 문호 회장의 통나무 별장이 나왔다. 인적이 드문 산길까지 CCTV가 설치되어 있지는 않을 테니, 선우는 이 지점에서 양승준과 남자의 차량이 드나드는 것을 확인하려 했다.

“시간대는요?”

“오후 6시부터 자정까지면 될 것 같아요.”

사건 발생 시각은 밤 10시 30분경이었다. 통나무 별장을 이용할 때, 양승준과 남자는 언제나 저녁 7시쯤 별장에 도착하곤 했다. 양승준의 진술서에 따르면 그날도 역시 두 사람은 비슷한 시간대에 이곳을 방문했다. 별장으로 들어가는 것은 넉넉잡아 6시쯤부터 산길로 진입하는 차량을 확인하면 충분할 듯했다. 그리고 양승준의 진술이 모두 사실이라면 남자는 양승준을 폭행한 뒤 자정이 넘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왔어야 했다.

“엥? 이거 왜 이래?”

선우가 요청한 시간대의 영상을 찾아보던 주무관이 갑자기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 이상하네……?”

“……왜요?”

선우는 의아하여 주무관과 그의 모니터를 번갈아 쳐다봤다.

“영상이 좀 잘려 있어 가지고요…….”

“잘려 있다고요?”

“어… 네. 이게 오후 5시, 그다음에 바로 다음 날 새벽으로 넘어가요.”

주무관은 모니터에 띄워 놓은 영상 맨 윗부분을 손으로 가리켰다. 거기에는 영상이 찍힌 날짜와 시간을 의미하는 디지털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21.11.14. 16:59:57.

58, 59, 00. 주무관이 영상을 재생시키자 초 단위로 숫자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01, 02, 03. 그러다 어느 순간, 곧바로 21.11.15. 02:00:01로 숫자가 튀었다.

“쓰읍. 왜 이러지? 그땐 아무 이상 없었는데?”

“……이런 경우가 종종 있나요?”

“아, 어쩌다 가끔요. 그때 CCTV가 고장 났거나, 인터넷 끊기면 그럴 수도 있어요. 근데 이건 얼마 전에 다 열람됐었거든요. 누가 영상 삭제했나?”

“…….”

삭제. 불길한 예감이 물씬 풍기는 단어였다.

주무관은 마우스에 붙은 손과 모니터에 박힌 눈을 떼어 내며, 선우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건 관제 담당자한테 따로 물어봐야 할 것 같아요. 근데 이거 왜 또 필요하신 거예요? 거기 팀장님이 이미 자료 받아 가셨잖아요.”

“……저희 팀장님이요?”

“네. 서울청 마수대 팀장님. 며칠 전에 다녀가셨는데?”

며칠 전……? 사건 접수가 어제였는데 며칠 전이라니? 게다가 이 사건의 담당 부서는 마수대가 아니지 않나.

“강수대가 아니고 마수대요?”

“강수대? 강수대였나? 마수대 맞는 것 같은데? 키 훤칠하고 마르신 분.”

선우는 재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핸드폰을 뒤지면 제 팀장의 사진이 한 장쯤은 있을 것 같았다. 사진 앱을 켜 손가락으로 죽죽 훑어내리니 머지않아 연초에 찍었던 팀 단체 사진이 나왔다. 선우는 그 사진에서 최대영의 얼굴을 크게 확대하여 주무관에게 내보였다.

“이분 맞나요?”

“어어, 맞아요. 이분. 이분이 저한테 파일 받아 가셨어요.”

“언제 다녀가셨나요?”

“월요일인가, 화요일인가. 정확히 기억이 안 나네.”

“…….”

양승준이 고소장을 접수한 것이 수요일 오전이었으니, 그전인 것만은 확실했다.

“월요일인가 봐요. 414번 일대 도로 영상은 다 가져가셨으니까 말씀하신 위치 영상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을 거예요.”

“아, 네에…. 제가 팀장님께 아직 전달을 못 받아서 미처 몰랐네요.”

“에고. 서울에서 여기까지 오셨는데 괜히 헛걸음하셨네.”

“아닙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우는 주무관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하고 센터를 벗어났다.

군청을 나선 선우는 그 길로 통나무 별장으로 달려갔다. 관리인의 손을 타 늘 깔끔한 상태를 유지하던 통나무 별장은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경찰이 현장 조사를 다녀간 탓에 현관문에는 폴리스 라인이 쳐져 있었고, 사건 현장이었던 응접실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대리석 바닥 위로 회색 발자국이 난무한 가운데 온 가구가 엎어지고 뒤집어지고. 고상한 멋을 풍기던 응접실은 본래의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달라지지 않은 것은 단 하나, 벽에 내걸린 짐승의 가죽만큼은 유일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선우는 엉망이 된 응접실을 복잡한 심경으로 둘러보다 이내 그 맹수의 모피 앞에 섰다. 한갓 가죽뿐인 호랑이가 새카만 두 눈으로 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할 듯, 저를 날카롭게 응시하고 있었다.

2021년 11월 18일 19시경

서울특별시 마포구 MK Telecom 마포직영점

“이거 불법인 거 아시죠?”

“야. 너 우리 형님을 뭐로 보고! 마약수사대 형사님이라니까, 도대체 몇 번을 말해!”

“예. 알아요.”

상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선우가 대답했다.

아니, 기껏 도와주려니까 이 형님이 왜 이래? 상준은 눈을 크게 뜨고 선우를 위아래로 흘겨봤다.

“오늘 중으로 꼭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 그래요. 정말 필요한 부분만 살펴보고 곧바로 폐기할게요.”

“예. 상준이 아는 형님이고, 형사님이시라니까 이번만 그냥 해 드리는 거예요. 어디 가서 제가 이거 해 드렸다는 말 진짜 하시면 안 돼요.”

“네. 정말 고마워요.”

남자의 알리바이를 증명할 사소한 증거라도 얻을까 싶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선으로 달려갔지만, 그곳에서는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선우는 긴급 출동할 때도 밟아 본 적 없는 속도로 차를 몰며 상준에게 연락을 취했다. 과거에 지나가는 말로 언뜻, 통신사 직영점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아서였다.

CCTV를 확인할 수 없다면, 다음은 통화 기록이었다. 선우는 상준의 친구에게 사건 당일 두 당사자의 핸드폰 통화 상세내역서를 요청했다.

그리고 결과물을 받아 본 순간, 선우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11월 14일, 양승준은 강원도 정선군에서 세 차례의 발신 내역을 남겼다. 저녁 7시, 밤 10시, 그리고 자정 직전. 남자의 통화 내역은 깨끗하기를 바랐으나, 통탄스럽게도 그 역시 저녁 7시쯤 정선군에서 통화 기록을 남겼다. 사건 당일 두 사람이 실제로 별장에서 만났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증거였다.

한 가지 의문인 점은 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 남자가 경기도 양평군에서 전화를 건 기록이 남았다는 것이었다.

10시 반에 피의자를 폭행한 사람이 30분 후에 150㎞나 떨어진 지역에서 전화를 걸다니. 별장에서부터 양평까지는 아무리 빨리 달려도 1시간 반은 족히 필요한 거리였다.

선우 자신은 이 기록이 남자가 양승준을 폭행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수사 과정에서는 달랐다. 만일 양승준이 사건 발생 시각을 착각했노라고 할 경우, 이 증거는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컸다. 도리어 잘못하면 남자의 죄를 더 확실하게 증명하는 수단이 될지도 몰랐다.

선우는 자료의 내용만 머릿속에 담아 두고, 실체는 곧장 문서 파쇄기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상준과 그의 친구에게 양해를 구하고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차 안으로 돌아온 선우는 뉴스 기사 제목만으로 남자의 상황을 파악했다. 자세한 기사 내용은 보지 않았다. 남자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자극적인 언어를 써 가며 그에 대해 멋대로 떠들어 대는 걸 일호도 보고 싶지 않았다.

미치겠다, 진짜…….

어느덧 해가 져 버린 서울 하늘에는 제 속만큼이나 캄캄한 어둠만이 남아 있었다. 수사가 깊게 진행되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그의 알리바이를 증명할 증거를 제출해야 하는데,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선우는 초조한 마음에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손톱 밑 생살이 훤히 드러나다 못해 새빨갛게 헐어 버릴 때까지 손톱을 씹어 대던 선우는 한참의 고민 끝에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하루 종일 주구장창 진동을 울리던 핸드폰에는 최 팀장과 팀원들로부터 온 부재중 통화와 메시지가 수십 통 남아 있었다. 선우는 그걸 전부 무시하고 일단 키패드부터 열었다.

그리고, 제가 기억하고 있는 번호 열 한자리를 눌렀다.

2021년 11월 19일 2시경

서울특별시 마포구 수사통합청사 1층 정문

“형사님! 형사님!”

“아, 박 기자님.”

지하 주차장으로 갈 여유도 없었다. 선우는 청사 앞마당에 차를 대충 던지듯 주차해 놓고 헐레벌떡 건물로 들어섰다. 그런 그를 박정철 기자가 붙들었다.

“일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아직도 조사 중인 거죠? 대낮에 들어갔는데 지금까지 아무 소식도 없고, 완전 답답해 죽겠어요!”

하, 선우는 인상을 구기며 청사 밖을 쳐다봤다.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취재진이 죽치고 서 있었다. 어쩐지 청사로 들어서는 길목부터 봉고차가 빼곡히 줄지어 있더라니. 먹이를 발견한 승냥이 떼처럼 눈을 밝히고 저를 힐끔거리는 기자들에 선우는 짐짓 오싹한 기분마저 들었다.

“형사님, 근데 진짜예요? 진짜로 문태성 대표가 양승준 의원을 죽이려고 했대요?”

순간 선우는 저도 모르게 갈퀴눈을 하고 박정철을 째려봤다.

“아니에요, 기자님. 아니에요.”

딱 잘라 얘기하고 돌아서는 선우를 박정철이 급히 되잡았다.

“예? 아니라고요?”

“네. 절대 아니에요. 그러니까 기사 절대 쓰지 마세요.”

“이미 썼지! 방송까지 다 나갔는데?”

“그럼 정정 보도 내세요. 그거 아니라고.”

선우는 그에게서 몸을 휙 돌려세웠다.

“어? 어디 가요, 형사님! 자세한 걸 얘기해 줘야 정정하든가 말든가 하지!”

그리고 박정철의 외침을 뒤로 한 채, 큰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다 멈칫, 가던 길을 멈춰 섰다.

“기자님.”

선우는 다시 박정철 앞으로 돌아왔다. 박정철을 마주한 얼굴이 전례 없이 서늘하고 비장했다.

“혹시 지금 바로 특집 기사 낼 수 있으세요?”

***

2021년 11월 19일 11시경

수사통합청사 7층 특별조사실

“대표님. 아실 만큼 아시는 분이 왜 자꾸 이러십니까?”

오전 9시부터 태성의 조사가 재개되었다. 조사실 책상 앞에 턱을 괴고 앉은 태성은 근 두 시간 가까이 이렇다 할 말이 없었다. 형사의 회유에도 그는 입꼬리만 슬쩍 올리고 말 뿐이었다.

전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경찰청에 입성한 태성은 그 뒤로 청사 깊숙한 곳에 자리한 특별조사실에 구금되었다. 부패·비리·중대한 사건 사고에 연루된 고위공직자나 대기업 인사를 수사하기 위해 마련된 특별조사실은 창가에는 암막 커튼과 철조망이, 복도 쪽 창에는 블라인드가 쳐져 있었다. 조사실 내부에는 침대와 소파, 화장실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구속 영장이 발부된 태성은 조사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외부와 단절된 이곳에서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었다.

“계속 이렇게 나오시면 대표님만 불리하시다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당시 상황을 똑바로 얘기해 주셔야 저희도 빨리 조사를 끝내죠.”

태성의 신문은 그를 체포한 강력범죄수사대 강력 3팀의 팀장이 직접 맡았다.

3팀장은 눈앞에 앉은 피의자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중대한 범죄 혐의를 의심받는 상황에서 사람이 이리도 여유로울 수가 있나? 이 새끼 이거 혹시 소시오패스 아니야?

사건 당일 별장을 방문했고, 고소인을 만난 사실이 있다. 하지만 고소인을 협박하거나 폭행하지는 않았다.

증거물로 발견된 총과 장갑은 제 것이 맞다. 그러나 별장으로 증거물을 가지고 간 적은 없다.

확실한 알리바이를 내놓지도 못하는 주제에 어제는 빙빙 말을 돌리더니, 오늘은 아예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사안이 워낙 심각해 변호사가 한 트럭 붙어도 모자랄 판에, 오늘 중으로 입회하겠다던 변호사는 아직도 연락이 오질 않았다.

이 자식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뭐,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고소인의 진술과 증거가 명백하니, 3팀장은 저 역시 적당히 시간을 끌다가 오늘 중으로 조사를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제가 조사를 마치면 그 뒤로는 마수대와 금융범죄수사대가 붙어 그간 의심을 사 온 불법 행위들에 대해 수사를 이어 갈 예정이었다.

“대표님. 이렇게 조사에 협조 안 해 주시면 저희는 양 의원님 진술이 전부 사실이라고 믿는 수밖에 없어요.”

픽, 태성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이 말이 얼마나 하고 싶었을까. 태성은 턱을 괴고 있던 손을 풀며, 손목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정윤철이 돌아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 똑똑.

짧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태성과 3팀장은 동시에 문 쪽을 돌아봤다. 빼꼼 열린 문틈 사이로 새까만 머리통 하나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저어… 팀장님. 잠시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쭈뼛거리며 팀장을 찾는 이는 태성에게 수갑을 채웠던 바로 그 경찰관이었다.

“어엉? 왜?”

“저 그게……. 문제가 좀, 생긴 것 같습니다…….”

“문제?”

“예……. 지금 밖이… 난리가 났어요…….”

그는 몹시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태성이 두 눈썹을 하늘을 향해 치켜떴다.

***

2021년 11월 20일 02:30

수사통합청사 B2층 지하 주차장

길고 긴 조사 끝에 태성의 귀가가 허락되었다. 특별조사실을 나선 태성은 청사 1층에 진을 치고 있는 취재진을 피해 곧바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기자들의 눈을 속일 요량으로 정윤철이 먼저 태성의 차를 타고 청사를 빠져나갔다.

마침내 혼자 남은 태성은 그제야 목을 조이고 있던 검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헤쳤다.

자박, 자박.

이내 고요한 주차장에 한 사람의 발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태성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휙 돌려세웠다.

“너!”

“대표님…….”

맑은 눈에 물기를 담은 이가 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게 진짜.”

눈꼬리가 축 처진 것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만 같았다. 태성은 성큼성큼 걸어가 길게 뻗은 팔로 단숨에 그의 목을 휘감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모로 꺾어 도톰한 입술 위에 제 입을 깊게 맞췄다.

“내가 기다리고 있으랬지. 언제 나 풀어 달랬어.”

“흐으…….”

맞붙은 입술을 떼어 내며 태성이 짓이기듯 말을 뱉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달빛처럼 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빛나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공연히 설움이 밀려와, 선우는 작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태성은 또 한 번 선우에게 입술을 들이밀었다.

“나 이러다 또 잡혀 들어가겠다. 공연음란죄로.”

춥, 축축한 입안에 살덩이를 밀어 넣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억누르며, 태성이 입술을 떨어트렸다. 한 팔로 선우의 허리를 감싸 안은 그는 나머지 빈손을 선우의 바지 주머니로 집어넣었다.

선우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태성은 곧 선우의 눈앞에 차 키를 들어 보였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태성은 선우의 차를 찾아 조수석에 그를 넣어 두고, 저는 보닛을 돌아 운전석에 앉았다.

차 키를 꽂아 시동을 걸려다 말고 태성이 큭,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어떻게 한 거야?”

“뭐가요…?”

“나 어떻게 꺼내 준 거냐고.”

“……비밀이에요.”

선우가 시선을 피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그건 뭐 나중에 차차 알고.”

태성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둘러 시동을 걸며 말했다.

“골라. 1번 너희 집, 2번 더 문 한강, 3번은 우리 집인데 너무 멀어서 그건 내가 싫다.”

“네?”

“지금 당장 여기서라도 하고 싶은 거 참고 있으니까 빨리 골라.”

***

두 사람의 선택은 1번도, 2번도 그렇다고 3번도 아니었다. 몸이 달 대로 단 상태에서 인내심의 한계는 고작 5분이 전부였다. 선우의 차는 큰길로 나서자마자 길가에 세워진 어느 작은 비즈니스호텔로 빨려 가듯 들어갔다.

주차를 하고, 체크인을 하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이 억겁과도 같았다. 태성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마자 선우를 벽에 밀어 넣고 입을 맞췄다. 선우 역시 기다렸다는 듯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크게 벌렸다.

띵-

입술에 입술을 비비고, 혀로 혀를 얽느라 문이 열리는 줄도 몰랐다. 아직도 멀었나. 입을 맞대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질 않아 눈을 떠 보니, 이미 한 번 열렸던 문이 다시 닫히려 하고 있었다.

“하아, 대표님. 다, 온 것 같은데…….”

선우가 맞붙은 입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쪽, 쪽. 흘러나오는 말 마디마디마다 물기 어린 마찰음이 묻어났다. 태성은 오물오물 움직이는 입안에 혀를 깊게 박아 넣고 선우를 번쩍 안아 들었다.

“흡!”

잠깐이라도 떨어질세라 선우는 두 팔로 그의 목을, 두 다리로 허리를 바짝 조여 안았다.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고, 방을 찾아 헤매는 내내 선우의 입속에서는 축축한 혓바닥 두 개가 정신없이 뒤엉켰다.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공공장소에서 남자를 끌어안고, 몸을 비비고, 입을 맞추다니. 제가 미친 것 같았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 같은데, 몸도 머리도 말을 듣지 않았다. 머릿속은 온통 그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었다.

새벽 세 시, 객실이 그리 많지 않은 호텔이라 복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니, 어쩌면 누군가가, 수십 개의 눈동자가 어디선가 저를 지켜보고 있다 하더라도 이제는 아무 상관 없었다.

쿠당탕-

“아……!”

겨우 찾아낸 객실의 문을 열자마자, 태성은 선우를 벽에 몰아넣고 그에게 바짝 붙어 섰다. 골반을 벽 쪽으로 밀어 선우의 벌어진 다리와 엉덩이를 지탱하니, 선우가 곧 허리에 두른 두 다리를 힘껏 조여 왔다.

츄읍, 어둠 속 둘뿐인 공간에서 서로의 입술을 빨아 물고, 타액을 집어삼키니 심간에서 해방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마침내 세상에 온전히 둘만이 남았다.

세상에 오로지 저희만을 위한 시간이 남았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서로의 옷을 벗겨 냈다. 재킷을 양옆으로 밀어내고, 옷소매에서 두 팔을 빼내고, 선우가 태성의 목에서 넥타이를 잡아당겨 바닥에 떨어뜨리도록 맞붙은 입술이 떨어질 줄 몰랐다.

“으음.”

“하아…….”

가쁜 숨소리와 살덩이가 닿았다 떨어지는 차진 음성 사이로 톡, 톡, 가벼운 경음이 울렸다. 태성의 목 언저리에서 시작된 소리였다. 태성의 입천장과 혓바닥에 연신 혀를 비벼 대며, 선우가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내고 있었다. 목을 죄고 있던 맨 위 단추를 시작으로 하나하나씩, 아래 아래로.

태성은 선우의 손이 끝까지 내려가기만을 기다렸다가, 이윽고 옷자락이 완전히 벌어졌을 때 삽시간에 셔츠를 벗어 던졌다. 그러고는 선우의 티셔츠를 단번에 위로 쑥 끌어 올렸다.

어떻게 목에서 옷을 빼내는 그 찰나마저도 떨어지는 순간이 아쉬울 수 있는지. 태성은 마지막까지도 입을 떼지 못하다가, 티셔츠의 목 부분이 선우 머리끝까지 오고 나서야 그의 입술을 놓아주었다.

“하…….”

맨몸이 된 두 상체가 금세 맞물리듯 꽉 붙었다. 태성은 선우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거친 숨이 잔잔해질 무렵, 그는 내리깔고 있던 눈을 들어 선우의 눈을 바라보았다. 동그란 두 눈은 진작부터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두 눈이 오롯이 제 모습만을 담고 있었다.

“…….”

“…….”

태성은 선우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추고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카드 키를 꺼냈다. 체크인을 하고 무슨 정신으로 넣었는지 모를 예비용 키였다. 방에 들어올 때 문 앞에서 찍었던 것은 이미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선우를 받쳐 안은 채로 한 손을 길게 뻗어 키홀더에 카드 키를 꽂아 넣었다.

탁, 단번에 모든 불이 켜지고 방 안이 훤히 밝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방 안을 둘러봤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서로를 쳐다보았다.

푸핫! 곧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고생했어.”

“……고생하셨어요.”

태성은 마치 대답처럼 선우의 턱 끝에 쪽, 짧은 키스를 남겼다.

“이제 좀 씻을까?”

선우가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

“아… 흐으……. 씻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

“씻기만 한다고 한 적은 없는데.”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가 의미 없이 배수구로 흘러갔다.

“흣…!”

그는 기어이 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혓바닥으로 성기를 크게 쓸어올리는 남자에 선우는 허리를 부들 떨었다.

분명 머리까지는 화기애애하게 잘 감았던 것 같은데. 어디서 불이 붙어 버린 거지.

샴푸를 마치고 보디 샤워를 손에 덜어 낸 태성은 손바닥 채로 선우의 몸을 닦아 주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야금야금 선우를 몰아세웠다. 집요하게 구석구석을 훑어 대는 손길이 간지러워 그저 조금 몸을 물렀을 뿐인데. 선우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는 어느새 샤워부스 모퉁이에 콕 박혀 있었다.

“아… 흡……!”

뿌리를 잡고 혓바닥을 넓게 펴 성기를 아래에서 위로 꼼꼼히도 핥아 올리던 태성이 결국 선우의 성기를 입에 물었다. 츕, 츄릅. 타액을 잔뜩 묻혀 놓은 탓에 살갗을 빠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앞으로 뒤로 재차 고개를 넣었다 빼는 그는 사탕 혹은 아이스크림을 빨아 먹는 사람처럼 선우의 성기를 정성스럽게도 빨아 댔다.

선우는 등 뒤에 닿은 벽에 제 엉덩이를 찰싹 붙였다. 자칫 잘못하면 그의 입에다 대고 허릿짓을 할 것만 같아서였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태성은 그새 입안 깊숙한 곳까지 성기를 집어삼켰다. 앞은 본인이 막고 뒤는 벽에 막혀 도망갈 곳도 없는데, 두 팔은 선우의 허벅지를 단단히 붙든 채였다.

“아, 흑. 대표님…!”

선우가 손등으로 제 입을 막았다.

앞뒤로 치고 빠지는 머리통의 움직임이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 입안으로 밀어 넣는 깊이도 점점 깊어져, 태성이 머리를 박아 넣을 때마다 얇은 음모가 그의 콧대를 스쳤다. 입술에 힘을 주어 성기를 뽑아낼 때는 거센 압력에 뻑, 뻑거리는 소리가 욕실을 울리기도 했다.

선우는 그때마다 소스라치며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그러면서도 성기는 곧이라도 터질 것처럼 핏줄을 한껏 세웠다. 입안에 물고 있으면 주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한 번씩 머리를 까딱이기도 했다.

태성은 저를 보채는 성기를 일순 뿌리 끝까지 삼키고 목구멍으로 귀두 끝을 바싹 조였다.

“으윽!”

그러자 선우의 허리가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선우의 머리카락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똑, 똑, 태성의 등 위로 떨어지고, 몸에 묻어 있던 비누 거품은 주륵 흘러 그의 몸을 타고 내렸다.

탄탄하고 너른 등판이 제가 흘린 것들로 번들거리는 것을 보니 입안에 침이 절로 고였다. 선우는 남자의 어깨를 붙든 손에 힘을 꽈악 주며,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학!”

태성은 이때다 싶어 입에 문 것을 볼이 홀쭉해질 정도로 강하게 빨아들였다. 선우의 허벅지까지 바짝 끌어당기며 구강 전체에 힘을 주니, 머지않아 목구멍에 뜨끈한 액이 퍼졌다.

“흐으… 아아앗……!”

울걱울걱 흘러나오는 것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 삼키고서야 태성은 선우의 다리 사이에서 얼굴을 떼어 냈다.

하아, 힘이 빠진 선우가 타일 벽에 등을 기댔다. 양 볼이 동그랗게 열이 오른 그가 한 손으로 눈을 가리며 말했다.

“그걸 왜 자꾸 드세요…….”

“달아.”

태성이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핥았다. 선우는 손을 툭 떨어뜨리며 머리를 좌우로 털었다.

“말도 안 돼요.”

“진짠데?”

몸에 꿀을 발라 놨나? 하는 소리에 선우가 눈살을 살짝 구겼다 폈다.

“더러워요. 드시지 마세요.”

“싫었어?”

“……그건 아닌데에…….”

“그럼 됐지, 뭐.”

붉은 기가 양 볼을 타고 얼굴 전체로 퍼졌다. 싫기는, 오히려 너무 좋았던 것이 문제였다. 남자가 제 것을 입에 넣고 빠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눈으로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처음이라. 생경하면서도 선정적인 광경에 이가 다 떨릴 정도로 흥분했던 저였다.

“……저도… 해 드릴까요?”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남자도 성기를 어마어마하게 키운 상태였다. 선우는 나름 용기를 내어 물었다.

“아니. 나중에.”

그러나 태성은 단칼에 그를 거절했다. 그리고 선우의 몸을 휙 돌려 벽을 바라보게 세웠다.

“지금은 이쪽이 더 급해서.”

“헉!”

순식간에 그의 콧등이 엉덩이골을 짓눌렀다. 선우의 엉덩이를 양쪽으로 활짝 벌린 태성은 구멍 위에 곧바로 혀끝을 가져다 댔다.

뾰족하게 세운 혀끝으로 입구를 꾹꾹 누르다가, 자세가 여의치 않아지자 태성은 선우의 골반을 제 얼굴 쪽으로 잡아당겼다. 선우는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두 손으로 벽을 짚었다. 그러고는 다리를 넓게 벌리며 허리를 살짝 숙였다. 급하기는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아, 읏. 흐읏….”

츗, 입을 맞추고 혀를 섞을 때 나는 소리가 밑에서 났다. 미끄덩한 것이 타액을 몰고 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엉덩이가 흠칫, 흠칫 경련했다.

선우는 고개를 뒤로 돌려 제 둔부에 파묻힌 얼굴을 내려다봤다. 매끈한 이마와 수려한 눈썹, 자연스레 내리깔린 두 눈은 그저 고요하기만 한데, 그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은 외설스럽기 짝이 없었다.

굴곡 없는 콧대가 엉덩이골 사이에 자리하고 그 끝은 회음부를 비벼 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보동보동한 입술과 축축한 혓바닥이 구멍 입구를 간지럽혔다. 그러다 조금 전부터는 아예 말캉한 살덩이가 구멍 안에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혀끝을 빙빙 돌려 가며 내벽을 샅샅이 훑어내니 그때마다 안쪽 점막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방금 사정한 것이 우스웠다. 음란한 마찰음과 그보다 더 음탕한 남자의 애무에 아랫배로 피가 죽죽 몰렸다. 이러다간 속 근육이 다 풀리기도 전에 다리가 먼저 풀리고 말 것 같았다.

“하… 대표님, 그만 일어나세요…….”

선우가 태성의 한쪽 어깨를 슬쩍 밀어냈다. 그러면서 그의 팔을 잡아끄니, 태성이 못 이기는 척 몸을 일으켰다. 마지막으로 입술에 힘을 주어 구멍을 쪽, 빨아들이는 것은 잊지 않았다.

“건강한 건지, 야한 건지 모르겠지만.”

태성이 선우의 등 뒤에 바짝 붙으며 말했다. 허리를 스치고 지나온 손이 그새 올라붙은 성기를 부드럽게 쓸어 만졌다.

“둘 다 내 취향이라 좋네.”

“하… 대표님이… 야한 건데……. 윽…!”

오물오물 닫혀 가는 구멍으로 손가락 하나가 쑤욱 밀려 들어갔다. 등을 받쳐 주는 몸이 너무 편안해서 잠시 방심하고 있던 선우는 불시에 공격을 당했다.

“앗! 아읏!”

한 템포 쉬어갈 것처럼 귓가에 입을 맞추고 손으로는 상체를 천천히 어루만지더니, 다른 한 손으로는 곧바로 전립선을 쿡 쳐올렸다.

“아! 학…!”

입으로 충분히 풀어냈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그의 손가락은 금방 두 개가 되고 세 개가 됐다. 쫀쫀한 내벽이 손가락을 꽉꽉 조여 붙이는데도 아래를 후벼파는 손길은 거침없었다.

응, 응…! 아, 어떡해… 거기……!

도대체 어떻게 알고 제가 느끼는 곳을 정확히 찔러 대는 걸까. 선우는 거의 자지러질 듯한 기분이었다. 어느새 저는 남자가 전립선을 쳐올리는 타이밍에 맞춰 스스로 엉덩이를 내밀고 있었다.

선우는 벽을 짚은 손을 더듬더듬 뻗어 보았다. 애가 타서 손에 뭐라도 쥐어야 할 것만 같아 그랬다. 그러나 벽은 맨 미끈한 대리석 타일뿐이라, 어디에라도 걸쳐 보려는 손이 자꾸만 주륵주륵 미끄러졌다.

“하으으응…….”

선우의 입에서 한숨 섞인 신음이 길게 뽑아졌다. 그러자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턱, 선우의 손 위로 뜨뜻한 손이 얹어졌다. 커다란 손바닥이 선우의 손등을 폭 감싸고, 길쭉한 다섯 손가락이 선우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제 손을 꽉 쥐기에, 선우 또한 남자의 손을 꽈악 붙들어 맸다.

그 순간, 내벽을 쑤셔 대던 손가락이 전립선을 지그시 눌렀다.

“으아, 앗!”

일순 사정감이 치솟았다. 선우는 허리를 곧추세우며 아랫배와 둔부에 힘을 바짝 주었다. 금방이라도 싸 버릴 것 같은 것을 다리를 모아 붙이며 참았더니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때 갑자기 남자의 손가락이 쑥 빠져나갔다.

허억, 선우는 차라리 다행이다 싶어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런데 별안간 남자가 깍지 낀 손을 쭉 끌어당겼다. 그 힘에 몸이 획 돌아갔다. 순간 제 시야를 가득 채운 남자를 올려다보기가 무섭게 몸이 공중에 붕- 떴다.

그리고 푸욱! 굵고 단단한 것이 몸을 꿰뚫었다.

“아흑!”

선우의 양다리를 들쳐 올린 태성이 조붓이 벌어진 구멍 사이로 제 성기를 꾸욱 밀어 넣었다. 선우의 등을 벽에 기대고 빠듯한 내벽에 성기를 밑동까지 욱여넣으니, 선우의 성기 끝에서 새하얀 정액이 울컥 터져 나왔다. 선우는 엉덩이를 조여 붙이며 태성의 목을 바투 끌어안았다.

“으흑, 윽, 읏!”

푸욱, 푹. 태성이 조금 느리다 싶게 허리를 쳐올렸다. 그때마다 선우는 끈적한 점액 덩어리를 픽, 픽 뿜어냈다. 질척거리는 액체가 탄탄하게 짜인 복근 위로 쏘아지고, 그 위로 선우의 둥근 귀두 끝이 문대졌다.

아으으응! 두꺼운 좆기둥이 전립선을 이겨 대는 것만으로도 죽을 맛이었는데, 옹골찬 복부에 성기가 비벼지는 것을 눈으로 보고 있으니 머리가 다 저릿했다. 선우는 더 참지 못하고 양다리로 태성의 허리를 꽈악 죄어 안았다.

“하, 넣자마자 이러면, 자극이 너무, 심한데.”

성기를 쫀득하게 감싸는 내벽에 태성이 괜히 앓는 소리를 했다. 자극이 심하다는 사람이 어째 갈수록 더 빠르게 성기를 쑤셔 넣고 있었다. 정액을 모두 토해 내고 부들부들 떠는 선우를 벽에 딱 붙여 놓고 태성은 본격적으로 허릿짓을 시작했다. 이거 봐. 꿀 발라 놓은 거 맞네. 퍽, 퍽, 올려붙일 때마다 보들보들 말랑한 점막이 성기에 쩍쩍 들러붙었다.

아아, 흐으으으…….

선우의 입에서 신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가 새어 나왔다. 열에 들뜬 얼굴도 쾌락인지 고통인지 모를 감정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사정 후에 기운이 빠져 버렸는지, 목과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팔다리도 자세만 유지할 뿐 힘이 별로 없었다.

태성은 두 다리를 받쳐 든 팔을 한쪽 빼서 선우의 허리를 껴안았다. 나머지 한 팔은 마저 빼어 선우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러고는 선우의 입에 입술을 깊게 묻었다 뗐다.

“어쩌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아… 괜, 찮아요…….”

“그렇게 말하면 내가 속도 조절을 못 해.”

곤란한 얼굴을 하면서도 슬쩍슬쩍 밑을 치대는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힘들면 참지 않아도 돼.”

“진짜, 읏, 괜찮아요.”

제가 남자와 이러기만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그가 안다면 아마 이런 말은 쉽게 못 할 것이었다. 선우는 남은 힘을 쥐어짜 내벽을 한껏 오그라붙였다. 압력이 전달되기는 한 건지 그가 미간을 살짝 구기며 웃었다.

“최대한 빨리 끝내 볼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입을 맞추기 직전 태성이 흘린 말이었다.

그걸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정확히는 말을 할 겨를이 없었다. 입술이 한번 맞붙으면 떨어질 줄을 몰랐고, 어쩌다 떨어진 순간에는 신음을 토해 내느라 바빴다.

“응, 앗! 아앗! 으으응!”

샤워기에서는 아직도 뜨거운 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좁은 샤워부스 안은 온통 습기로, 그리고 두 사람의 열기로 가득 찼다. 쏟아지는 물소리 위에 거친 숨소리와 살갗이 쩍쩍 붙었다 떨어지는 마찰음이 얹어졌다.

“하, 진짜, 미치게 좋다. 네 안.”

태성이 골반을 쾅쾅 올려붙이며 말했다. 그래 봤자 정신이 하나도 없는 선우는 그가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반들거리는 타일 벽에 뒷머리를 마구 비벼 대며 선우가 고개를 뒤로 꺾었다. 그 덕에 늘씬하게 뻗어진 목선 위에 태성이 입술을 파묻었다.

얇은 살가죽을 세게 빨아들이며, 그는 선우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러고는 팔을 아래로 지그시 내리누르며 제 성기를 아주 빠르고 거칠게 찔러 넣었다.

아, 헉! 순간 선우의 눈앞에 별이 돌았다.

“아! 잠, 잠……!”

당황한 선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갑자기 온몸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전율이 돋았다. 내장이 전부 오그라들 것만 같은 기분에 선우가 태성을 급히 두드렸다. 그러나 태성은 오히려 선우의 어깨를 더 세게 얽어매고는 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곳까지 성기를 욱여넣었다.

“아! 앗! 아앗!”

선우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신음이 터졌다. 동시에 아랫배가 홀쭉해질 정도로 안쪽에 힘을 주니 빡빡한 공간을 비집고 뜨뜻한 액이 퍼져 나왔다.

“아흣… 아, 아아…….”

아아, 이게 뭐야……? 선우가 몸에서 힘을 빼지 못하고 연신 부르르 떨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뜬 눈이 태성을 쳐다봤다.

“하아, 느꼈어?”

“아, 흐으으……. 이, 이거…… 흐읏, 뭐, 예요……?”

저, 몸이… 왜, 왜 이래요……? 놀란 얼굴로 묻는 선우에 태성은 눈만 살짝 내려 선우의 성기를 쳐다보았다. 반 정도밖에 서지 않은 성기는 이번에는 정액도 내뱉지 않았다. 그럼에도 선우는 꼭 절정에 다다른 사람마냥 두 볼을 발갛게 상기시킨 채 몸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성기를 물고 있는 내벽이 좆기둥을 오물오물 씹어 물었다.

“아, 아…. 이거, 이상한데에…….”

영문을 모르고 심각해진 선우를 보니 입가에 미소가 절로 피어올랐다. 태성은 두 손으로 선우의 턱을 감싸 쥐고 온 얼굴에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 양 볼에, 눈가에, 코끝에, 마지막으로 입술 위에. 그러고는 눈을 활짝 접어 웃으며 말했다.

“침대로 가자.”

선우는 멍한 눈으로 태성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매달린 팔다리가 후들후들 제멋대로 떨리고 있었다.

남자에게 짐짝처럼 들쳐 온 침대에서 연달아 두 번을 더 달렸다. 물론 그의 기준이었다.

온몸이 노곤노곤하니 힘이 하나도 들어가질 않았다. 선우는 침대에 꼼짝없이 엎드려 살며시 눈을 감았다. 제 옆에 팔로 머리를 괴고 누운 남자가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매만져 주는 것이 기분이 좋았다.

“미안.”

“……왜요?”

“명색이 호텔 사장인데 이런 데서 묵게 해서.”

선우가 살그머니 눈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방 안을 빙 둘러봤다. 작은 직사각형 방 안에 그럴듯한 가구는 침대와 협탁, 좁은 책상과 의자 하나가 전부였다. 선우의 입에서 피식 옅은 웃음이 샜다.

“전 여기도 충분히 좋은데요.”

“어디가?”

태성이 이마를 찌푸렸고, 선우는 다시 눈을 감았다.

“대표님이랑 있으면 어디든 상관없어요.”

허! 이거 말하는 것 좀 봐. 태성은 기가 막혀 코웃음을 쳤다.

“나 더 빠지게 만들어서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가 머리를 만지던 손으로 선우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기특하다는 듯 선우의 머리에 제 얼굴을 파묻고 비볐다.

“아… 따가워요…….”

벌써 이틀째 집에 돌아가지 못했으니 태성의 턱에 까슬하게 수염이 자라 있었다. 관자놀이 아랫부분에 그의 턱이 닿자 따끔거리는 촉감에 선우가 눈을 뜨고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자 태성이 하얀 볼에 부러 더 턱을 문질렀다.

푸흣, 선우가 간지럽다며 고개를 뒤로 내뺐다. 그러면서 태성의 턱을 손바닥으로 살짝 밀어내니, 태성이 그 손바닥에 쪼옵 입을 맞추고는 선우를 놓아주었다.

“대표님은… 수염이 나도 멋있네요.”

선우가 두 팔을 접어 그 위에 머리를 얹었다. 고개의 방향은 태성을 향하게 두었다.

“그러는 한 경위는 왜 수염도 안 나.”

“몰라요…. 잘 안 나요…….”

선우는 머리 밑에서 한쪽 팔을 빼서 손가락으로 제 턱을 만져 보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틀 가까이 면도를 안 한 건데도 제 턱은 마냥 맨들맨들하기만 했다. 사춘기 때는 언젠간 나겠지 싶었는데, 지금 보니 저는 평생 이럴 것 같았다.

그나저나 그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자꾸만 졸음이 몰려왔다. 아마도 제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크게 한몫을 하는 것 같았다.

“이제 얘기해 봐. 어떻게 한 거야?”

“뭘요…?”

“나 구금에서 풀어 준 거.”

“아……. 음…… 잘, 모르겠어요…….”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어리숙하게 뱉는 말에 태성이 목을 울려 웃었다. 그를 따라 선우도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요. 대표님, 근데 저어…… 이제 너무 졸려요…….”

선우가 큰 눈을 꿈뻑, 꿈뻑 느리게 감았다 떴다. 태성이 조사실에 갇혀 있는 동안 선우는 단 한숨도 자지 못했으니 사실 지금까지 버틴 것이 용하긴 했다.

“그래. 조금 자.”

태성이 선우의 관자놀이에 입을 쪽 맞췄다. 그게 꼭 자도 된다고 허락을 맡은 기분이라, 선우는 그제야 두 눈을 완전히 감았다.

“아, 맞다……. 대표님 총…… 제가 가지고 나왔는데…….”

선우가 눈을 감은 채 작게 웅얼거렸다.

“총? 어디서?”

……호랑이… 뒤에서…….

잠이 쏟아지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던 터라 꿈속으로 빠져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

2021년 11월 18일 23시경

서울특별시 중구 R 호텔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사람은 마침 저 혼자였다. 선우는 입고 있는 야상 재킷 주머니에서 작은 유리 바이알 한 병을 꺼내 들었다.

X-093.

새하얀 가루가 들어 있는 바이알은 남자가 건넨 것이었고, 제가 결국은 쓰지 못했던 것이었다. 앞으로도 쓸 일이 없으니 버릴까 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제집 책상 서랍에 깊숙이 숨겨 두었던 것이었다.

이걸 다시 꺼낼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선우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며 바이알을 쥔 손에 주먹을 쥐었다. 이내 선우의 손은 다시 재킷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딩동.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계기판에 17이라고 써진 것을 확인하고 선우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약속 장소는 1703호였다. VVIP 객실 전용층은 애초에 방이 몇 개 되지 않았으니, 호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카펫이 깔린 복도를 걸어 1703호 앞에 선 선우는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똑똑, 객실 문을 두드렸다.

“네에.” 방 안에서 짧은 대답이 들리고 이어 문이 열렸다.

“연우 씨, 어서 와!”

하얀 배스 가운을 입은 양승준이 활짝 웃는 얼굴로 선우를 맞이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양승준이 선우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연우 씨한테 연락 와서 깜짝 놀랐다고.”

전치 12주라는 사람이 이리도 성할 수가 있나. 정말 어디 하나 부러져 깁스라도 하고 있을 줄 알았더니, 양승준은 사지가 멀쩡했다. 그뿐이랴, 씻고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얼굴에선 반들반들 윤기마저 흘렀다.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사람이 호텔에서 만나자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죄송해요. 갑자기 연락드려서.”

“아니, 아니. 죄송할 건 아니고.”

양승준은 선우를 객실 한편에 마련된 바 테이블로 이끌었다. 원목 자재 테이블과 진열장으로 구성된 바 공간에는 주홍빛 조명이 은은하게 켜져 있었다. 혼자 있는 동안 이미 한잔을 한 모양인지, 테이블 위에는 위스키 한 병이 뚜껑이 따진 채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철제로 된 아이스 버킷과 온더록스 잔도 함께였다.

양승준이 잔이 놓인 자리 앞에 앉았다. 그러고는 제 옆자리의 의자를 앉기 좋게 밖으로 빼냈다. 선우는 잠시 머뭇거리다 양승준이 빼준 의자에 조심스럽게 착석했다.

“문 대표님이 경찰에 체포되셔서…….”

곁눈질로 양승준을 힐끔 본 선우가 이내 눈을 거두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테이블 아래에서 두 손을 맞잡았다.

“너무 무서운데… 연락할 곳이 아무 데도 없어서요…….”

불안한 듯 맞닿은 열 손가락이 쉴 새 없이 꼼지락거렸다.

“의원님께서…… 대표님한테 버려지면… 찾아와도 된다고 하셔서…….”

선우는 양승준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동그란 두 눈이 조용히 양승준의 눈치를 살폈다.

“응, 그럼. 잘했어. 잘 찾아왔어.”

축 처진 눈꼬리에 양승준은 그만 연우의 머리를 쓰다듬고 말았다. 생각만이 아니라 정말로 손을 뻗은 저 자신에 양승준은 스스로가 놀랐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에게 개인용 핸드폰 번호를 미리 알려 놓길 잘했다고 저를 추켜세웠다.

“의원님은 괜찮으세요? 갈비뼈가 부러지셨다는 얘기… 뉴스로 봤어요. 머리도 다치셨다고…….”

팔자 눈썹이 되어 저를 걱정하는 이를 두고 양승준이 킥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고개를 살짝 꺾어 턱 끝으로 소파가 있는 쪽을 가리켰다.

“그렇지 않아도 환자 행사하다 오는 길이야. 별거 아닌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쉽지만은 않네?”

소파 위에는 의료용 늑골 보호대가 걸려 있었다.

“병실에 마냥 누워 있는 것도 고역이더라고. 며칠 있지도 않았는데 몸이 근질근질해서 혼났네.”

양승준이 고개를 양옆으로 길게 늘였다.

연우의 전화를 받고 양승준은 윤해진에게 호텔 방을 예약하고 등산복을 가지고 오라고 지시했다. 그는 제 환자복은 윤해진에게 입혀 놓고, 저는 만일을 대비해 보호대만 착용한 뒤 병원을 벗어났다. 취재진이 붙을까 내심 걱정했으나, 등산복 차림으로 윤해진의 차를 타고 이동하는 저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 괜찮으신 거예요? 어디 아프진 않으세요?”

“보다시피?”

“어…… 겉으로 보기에는 크게 다치신 곳이 없는 것 같긴 한데… 그럼 기사는…….”

선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운을 입고 있는 양승준의 몸을 이곳저곳 살폈다. 그러다 의아한 표정으로 양승준을 올려다보니 그가 입꼬리를 히죽 올려 웃었다. 느닷없이 양승준의 손가락이 선우의 볼을 콕 찍었다.

“자꾸 그렇게 쳐다보지 마. 보는 의원님 애간장 녹는다.”

선우는 순간 질색을 하고 양승준의 손을 쳐다봤다. 그리고 재빨리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양승준을 마주할 수는 없었다.

선우는 괜히 바를 둘러보는 척 눈을 굴리다 테이블 위에 놓인 위스키병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어…… 의원님. 저도 한 잔만…… 주실 수 있나요?”

“아, 참. 나 좀 봐. 지금까지 술 한 잔도 안 내놓고 뭐 한 거야.”

양승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은 이걸로 괜찮아? 다른 거 시켜 줄까? 뭐 좋아해?”

“아뇨. 이거면 충분합니다.”

양승준은 고개를 빼 아이스 버킷 안을 확인했다. 마침 얼음도 좀 더 필요할 것 같아 그는 아이스 버킷을 챙겨 들고 벽에 붙은 찬장으로 이동했다. 흥얼흥얼, 그의 코에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선우는 양승준이 등을 지고 돌아서는 것을 보고 슬그머니 양주병을 집어 들었다. 동시에 반대 손으로는 재킷 주머니 안에서 바이알 뚜껑을 따냈다. 유리를 막고 있는 마개가 제거되자마자 선우는 바이알을 꺼내 양주병 입구에 빠르게 가루약을 털어 넣었다. 그러고는 빈 바이알을 얼른 주머니 속에 숨기며 라벨을 구경하는 척 병을 이리저리 돌렸다. 알갱이가 고운 입자가 순식간에 호박 빛깔 액체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땐 갑자기 쓰러졌다고 해서 놀랐는데. 몸은 이제 좀 괜찮은 거야?”

양승준이 돌아와 앉으며 물었다. 얼음이 가득 찬 아이스 버킷과 크리스털 유리잔 한 개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아, 네. 제가 그때 빈혈이 좀 있었거든요.”

선우가 양주병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며 대답했다.

“자.” 양승준은 제 잔과 새로 가져온 잔에 얼음과 술을 채워 넣고 새 잔을 선우에게 건넸다. 선우가 잔을 받아들자 양승준은 선우의 잔 윗부분에 제 잔을 톡 갖다 대었다 뗐다. 그리고 술 한 모금을 크게 들이켰다.

“내 입으로 오라고는 했지만 정말 올 줄은 몰랐네.”

양승준이 술잔을 내려놓다 말고 피식 웃었다. 뜻밖의 횡재에 입에서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눈엣가시 같은 놈을 제거했더니 전리품까지 따라오니 즐겁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가 따로 의지할 곳이 없어서요.”

선우가 유리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우수에 젖은 눈이 잔을 향해 함초롬히 내리깔렸다.

“부모님이 계신 것도 아니고, 번번한 직업이 있는 것도 아니라……. 그런데 대표님까지 그렇게 되시니까 너무 불안하더라구요…….”

“부모님이 두 분 다 안 계셔?”

“……네. 돌아가셨어요. 어릴 때 교통사고로.”

저런. 양승준이 딱하다는 듯 혀를 짧게 찼다.

“참, 그러고 보면 우리 연우 씨도 인생 어지간히 파란만장하네. 좋은 부모 밑에서 사랑 많이 받고 자란 사람처럼 생겨 가지고.”

짐짓 안타깝다 말하며 양승준이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그런 그를 선우가 깔린 눈으로 흘겼다. 이를 앙다문 턱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앞으로는 걱정하지 마. 내가 잘 챙겨 줄게. 뭐가 필요해? 일단 지낼 곳부터 해결해야 하나?”

“…….”

“지금은 어디서 지내? 설마 문 대표 집에 있어?”

선우는 대답을 고민하다 곧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단 오늘은 여기서 지내. 내일 당장 사람 시켜서 연우 씨 지낼 만한 오피스텔 하나 마련할 테니까.”

“……고맙습니다.”

“뭘, 그게 별거라고.”

양승준이 미소를 흘리며 잔에 남은 술을 전부 들이켰다. 선우는 그가 잔을 비워 내는 것을 지켜보다가 빈 잔이 테이블에 놓였을 때 조심스레 그에게 물었다.

“……제가 한 잔 더 따라 드릴까요?”

“그럼 나야 좋지.”

양승준은 화색을 띠며 반겼다. 그러면서 슬쩍 한 팔을 뻗어 선우가 앉은 의자 등받이에 걸쳤다.

“이야. 연우 씨가 따라 주니까 술맛 죽인다.”

선우가 잔을 채워 주자 양승준은 예의껏 한 모금을 작게 들이마셨다. 잔을 금방 내려놓은 양승준이 문득 몸을 틀며 선우의 다리 위에 손을 얹었다.

“내가 우리 연우 씨한테 해 줄 수 있는 게 또 뭐가 있을까?”

그는 손을 넓게 펴 선우의 허벅지를 꽈악 한 번 쥐더니, 이내 손바닥으로 다리를 끈적하게 쓸어 만졌다. 선우는 보이지 않는 쪽으로 인상을 찡그리며 잡힌 다리를 슬그머니 빼냈다.

“……괜찮습니다.”

“왜에, 빼지 말고 얘기해 봐. 솔직히 연우 씨도 뭔가 필요한 게 있으니까 이 밤에 여기까지 찾아왔을 거 아니야.”

양승준의 말에 선우가 쓰게 웃었다. 양승준은 외면당한 손으로 턱을 괴며 선우에게 몸을 더 가까이 붙였다.

“문 대표는 연우 씨한테 뭐 해 줬어? 집은 그 집에서 같이 지냈다고 했고. 차? 차 필요해?”

“아니요. 저는 다른 건 필요 없어요.”

선우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러니 양승준이 등받이에 걸쳐 둔 팔로 선우를 툭 쳤다.

“에이, 얘기해도 괜찮아. 나 그런 거에 인색한 사람 아니야.”

“정말이에요. ……전 의원님이 솔직하게만 말씀해 주시면, 정말 다른 건 아무것도 바라는 거 없습니다.”

선우가 양승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얘기하니 양승준이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또 뭔 소리야. 근데 그놈은 애한테 여태껏 지낼 곳 하나 안 만들어 주고 뭐 했대? 하여튼 있는 놈들이 더 한다니까.”

양승준은 혼잣말을 하듯 궁시렁거리며 잔을 들어 올렸다. 술을 홀짝이며 그는 곁눈질로 연우를 훔쳐봤다. 다른 건 몰라도 외모 하나는 정말 기가 막혔다. 이 바닥에서 스폰 노리고 달려드는 애들 중에 이렇게 순결하고 담백하게 생긴 애가 있던가. 확실히 흔치 않은 스타일이기는 했다. 그러니 그 몸 사리는 문태성이 집에까지 애를 들여앉혔지.

그러고 보면 참 희한했다. 처한 상황들을 들어 보면 굴러도 어디서 진탕 굴러먹다 온 것 같은데, 하는 행동만 보면 또 그렇지도 않았다. 그다지 스폰을 바라는 것 같지도 않고, 어버버하니 딱히 사람 꼬시는 재주도 없고. 그런데 그 드라마틱한 갭이 놀랍게도 사람을 자극했다.

혹시 이것도 다 계산된 연기인가? 그럼 진짜 보통이 아닌데? 신원도 불분명하고… 도대체 얘는 정체가 뭐지……?

아니, 근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꽁꽁 싸매고 왔어?

가만히 보고 있자니 예쁜 목선을 가리고 있는 재킷이 영 눈에 거슬렸다.

“답답하지 않아? 겉옷 벗지 않고.”

양승준이 선우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선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양승준의 손을 잡아 떼고는 옷깃을 다시 바로 여몄다.

“괜찮아요. 아직 좀, 떨려서…….”

“그래?” 양승준이 입을 삐죽였다.

쳇, 제가 먼저 연락해 놓고 거 되게 비싸게 구네. 순간 울컥 짜증이 나, 양승준은 잔에 남은 술을 벌컥 들이마셨다.

“어우. 취한다.”

갑자기 들이켠 술에 골이 띵 울렸다. 그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머리를 털어 내자, 이번에는 시야가 뱅글뱅글 돌았다.

“내가 나이를 먹긴 먹었나. 몇 잔 먹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취하네.”

양승준의 말을 듣고 선우가 그의 안색을 살폈다. 눈 주위가 벌겋게 달아오른 것이 확실히 취한 사람 같아 보이기는 했다. 본인은 인지하지 못한 듯하나, 조금 전부터 그는 다리를 달달 떨고 있었다. 술을 마실 때나 제게 손을 댈 때가 아니면 손가락은 테이블을 하염없이 두드렸다. 입이 마르는지 가끔씩 혀로 입술을 축이기도 했다. 가루약이라 약효가 빨리 돌 것이라는 남자의 말이 정확히 맞았다.

선우는 술을 마시는 척 잔을 입에 살짝 대었다 뗐다. 그리고 이번에는 제가 그를 향해 몸을 틀었다.

“그런데 의원님…. 어떻게 된 거예요?”

“뭐가?”

“그날…… 지난주 일요일에요. 사실은…… 제가 그날 밤에 문 대표님이랑 같이 있었거든요.”

“어… 그래……?”

“네. 밤 11시쯤. 양평에서 문 대표님을 만났는데, 의원님이 그때쯤 문 대표님한테 폭행을 당하셨다고 해서 정말 놀랐어요. 저한테는 계약하고 왔다고 하셨거든요.”

“……그랬어?”

양승준이 눈을 희번득하게 떴다. 알리바이가 될 만한 요소는 전부 제거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복병이 여기 있었다. 이거, 이거 진짜 제대로 숨겨 놔야겠네. 양승준이 입안에서 혀를 굴렸다.

“뉴스에서 나온 CCTV 영상도 봤는데 진짜 대표님 같더라구요. 경찰도 증거가 확실하다고 하고. 그런데 의원님은 괜찮다고 하시니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혹시, 영상이 조작된 건가요?”

“조작이라니! 내가 그거 찍느라 얼마나 고생했다고!”

양승준이 대뜸 발끈하며 잔을 세게 내려놓았다. 어느새 그의 잔은 또 비어 있었다.

“직접 찍으신 거라고요?”

선우가 눈을 크게 뜨고 물으니 양승준이 선우를 빤히 쳐다봤다. 테이블 아래에서 그의 다리가 쉬지 않고 떨리고 있었다. 토도독, 토도독. 손가락으로 연신 테이블을 두드리던 그가 돌연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연우 씨. 당신, 경찰이 잡아갈까 봐 무섭다고 했지?”

“……네.”

선우는 대답을 하면서도 그가 느닷없이 경찰을 운운하는 것이 의아했다.

“그럴 필요 없어. 어차피 걔네들은 제대로 된 증거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거든.”

“……증거요?”

“경찰 수사라는 게 말이야. 결국엔 증거가 전부거든. 왜냐? 경찰도 모르니까. 그날, 그 시점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놈들도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자기들도 증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거지.”

“…….”

틀린 말이 아니라 선우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런데 이 말을 바꿔 말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눈자위가 시뻘겋게 충혈된 양승준이 불현듯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럴싸한 증거가 있으면 죄인 하나 만드는 건 일도 아니란 소리야.”

“…….”

소름 끼치도록 불쾌한 미소에 선우가 어금니를 사리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를 마주하고 있다가는 제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선우는 고개를 돌리고 틀어 앉은 몸을 바로 세웠다. 호흡이 가빠지려는 것을 애써 억누르며 선우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 영상 속 인물……. 대표님이 아닌 거죠.”

“아, 그놈 대역 찾는다고 고생 좀 했지. 알다시피 등치가 워낙에 남다르잖아?”

양승준이 고개를 양옆으로 꺾어 가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양승준은 태성과 체격이 유사한 격투기 선수를 한 명 고용했다고 말했다. 최대한 비슷한 사람을 찾았는데도 미묘하게 느낌이 다르자 대역에게 체중 감량까지 요구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의 옷을 입히고, 머리 모양까지 똑같이 만드니 영상 속에서는 얼추 비슷하게 나오더라고. 그래도 얼굴은 어쩔 수가 없어 뒷모습이나 풀샷을 찍어야 했다고. 사실을 털어놓으며 양승준은 똑같은 짓 두 번은 못 하겠다고 엄살까지 늘어놓았다.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나요?”

“잠깐 휴양 좀 하고 오라고 돈 몇 푼 쥐여 줘서 내보냈지. 고놈도 도박이라면 환장하는 놈이라. 돈 다 떨어지기 전까지는 아마 한국에는 얼굴도 안 비칠 거다.”

“그럼 총이랑 장갑은…….”

“그것만큼 쉬운 게 어딨어. 장갑이야 기성품 장만하는 거 일도 아니고, 총은 마침 내 거랑 같은 기종이라.”

하, 사람의 탈을 쓰고 이럴 수가 있나. 선우는 치가 떨렸다. 쓰레기라는 표현조차 아까운 자와 말을 섞고 있는 이 상황이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역겹고 거북했다.

“도대체 뭐 때문에, 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

“흠. 약자의 발악이라고나 할까?”

약자.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의원님이 약자라고요?”

“그럼! 자본주의 사회는 돈 가진 놈이 최고거든. 나 같은 놈은 그런 놈들한테 알랑방귀 뀌고 다니는 게 일이고. 애초에 먼저 시작한 것도 그놈이야. 사람 숨통을 조여 오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보고만 있어? 그 양심도 없는 놈이 또 무슨 짓을 벌일 줄 알고.”

“하아…….”

진짜 양심도 없는 놈이 마지막 술을 털어 넣었다.

선우는 재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녹음을 정지시켰다. 그리고 핸드폰을 다시 집어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원님. 오늘 술 잘 마셨습니다.”

……응? 붉은 기가 목까지 내려온 양승준이 풀린 눈으로 선우를 올려다봤다.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무슨 소리야?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양승준이 깜짝 놀라며 선우의 팔을 붙들었다. 차갑게 눈을 내리깐 선우가 양승준의 손을 떨쳐냈다.

“저는 의원님께 볼일이 끝나서요.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뭐? 이게 뭔 개소리야? 양승준이 상황을 파악했을 때, 선우는 이미 테이블을 벗어나 문을 향해 가고 있었다. 양승준은 잽싸게 일어나 선우를 쫓았다. 그러고는 손을 길게 뻗어 선우의 팔을 거칠게 낚아챘다.

“갑자기 왜 이래? 어디 가는 거야?”

“말씀드렸잖습니까. 볼일이 끝났다고.”

“뭐?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무슨 볼일이 끝나?”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것을 선우가 무시하고 나가려 하자 양승준은 선우를 벽에 세게 밀쳤다.

“윽!”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가긴 어딜 간다고 그래?”

그는 다리 한쪽을 선우의 다리 사이로 밀어 넣으며 하체를 바짝 붙였다. 가운 안에 속옷만 한 장 두른 그는 성기를 빳빳하게 세운 채였다. 숨을 할딱이며 제 허벅지에 성기를 비벼 대는 양승준을 보고 선우는 순간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비키세요.”

“하, 나 진짜. 준다잖아! 집이든 차든 원하는 거 준다니까 왜 이렇게 뻣뻣하게 굴어?”

“비키지 않으면 무력을 행사하겠습니다. 비키세요.”

무력? 무력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양승준은 콧방귀를 뀌고는 선우의 재킷을 양옆으로 젖혔다. 걷힌 옷깃 사이로 새하얀 목선이 드러나자 양승준은 대번에 달려들어 선우의 옆 목에 입술을 파묻었다.

헉, 씨발 이 살결 봐. 보드랍고 야들야들한 감촉이 딱 제가 상상했던 그 느낌이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뿌듯한 마음에 몸이 하늘로 붕 떠오르는 듯했다. 양승준은 선우의 허벅지 안쪽에 제 성기를 연신 문대며 선우의 상의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 순간,

척- 양승준의 옆머리에 차갑고 딱딱한 물체가 닿았다. 양승준은 의아함에 선우의 목에 묻었던 얼굴을 들어 올렸다. 곁눈으로 제 머리에 붙은 물체를 확인하고, 양승준이 서서히 표정을 굳혔다.

“……뭐 하는 거야?”

“비키시라고요.”

양승준은 인상을 팍 쓰며 고개를 뒤로 빼냈다.

“어디서 이런 어린애 장난감 같은 걸 가져왔어?”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철커덕, 탕! 방 안에 굉음이 울렸다.

동시에 팍! 터지는 소리와 함께 바 테이블 위에서 산산조각 난 유리잔이 사방으로 튀었다. 남자의 약이 담긴 마지막 술 한 잔이 테이블 아래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다음은 내가 뭘 쏠지 모르겠으니까 비키라고 할 때 비켜.”

날이 선 눈으로 양승준을 노려보던 선우가 그의 어깨를 밀치고 지나갔다.

이 미친 새끼가!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양승준은 당장에 눈알을 부라리며 선우에게 다가들었다. 머리꼭지까지 화가 차오른 그가 선우의 뒷덜미를 덥석 잡아 끌어당겼다.

그때, 재빠르게 몸을 돌린 선우가 제 옷깃을 붙든 팔을 잡고 총 끝으로 팔오금을 세게 내리쳤다. 일순 양승준의 팔이 반으로 접히자 선우는 그 팔을 뒤로 획 꺾어 그의 등에 갖다 붙였다. 그 채로 양승준을 벽에 밀어 넣자, 옆얼굴이 벽면에 처박힌 그가 억! 하는 소리를 냈다.

“이 씨발 새끼가 지금 뭐 하는 거야! 이거 안 놔?”

양승준이 팔이 뒤로 꺾인 몸을 좌우로 비틀며 소리쳤다. 그래도 포착된 몸이 풀릴 생각을 않자 양승준은 더 크게 요동치며 외쳤다.

“놔! 놓으라고! 이 새끼가 감히 누구한테, 컥……!”

고래고래 악을 쓰는 그의 입안으로 차디찬 고철 덩어리가 파고들었다.

허억, 양승준은 총구를 입에 문 채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대로 전신이 얼어붙은 그는 눈동자만 굴려 연우를 쳐다봤다. 싸늘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는 연우에게선 아무런 표정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애, 애이래… 이허지 마……!”

양승준의 눈이 삽시간에 공포에 질렸다. 그러면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거냐고 묻기에 선우는 입에 박아 넣은 총을 더 깊숙이 처넣었다.

“헉! 하…… 하여져……!”

“왜요? 죽는 게 무섭습니까?”

양승준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오들오들 떨었다.

“당신은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여 놓고 당신이 죽는 건 무서워요?”

“학! 헤, 헤발……! 헤바 하려져……!”

“…….”

가증스러운 입놀림에 선우는 목구멍 끝까지 총구를 들이밀었다. 뒤틀린 팔을 더 꽉 옥죄며 더 이상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총을 쑤셔 넣으니, 양승준의 턱에서 삼키지 못한 침이 질질 새어 나왔다. 다리에도 힘이 풀리는지 벽에 맞닿은 몸이 희미하게 주저앉고 있었다.

“의원님. 제 진짜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신 적 있죠.”

“흐으으으…….”

“한선우라고 합니다.”

“윽…….”

“10년 전 사망한, 한재민 경감 아들.”

“……!”

컥, 양승준이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눈구멍을 키웠다. 떨리는 눈동자로 선우를 힐끔 본 그가 이내 눈을 질끈 감으며 신음했다. 길길이 날뛰다 한순간에 정말 약자처럼 구는 금수만도 못한 인간의 진상을 보고 선우는 저도 모르게 비소를 머금었다.

“걱정 마세요. 당신 안 죽여요.”

“으으…….”

그러면서도 선우는 양승준의 입안에서 총구를 비틀었다. 그 행동에 겁을 먹은 것인지, 아니면 죽이지 않는다는 말에 안도를 한 것인지. 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왔다.

“내가 지금 여기서 당신을 쏘지 않는 건 당신을 죽이는 게 무서워서도 아니고, 당신을 용서해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끄으윽, 끅……!”

몸을 덜덜 떨며 숨을 꺽꺽 들이켜는 그의 가랑이 사이로 투명한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당신이 죽고 나면 슬퍼할 사람들이 있으니까. 빌어먹을 당신 같은 인간도 떠나고 나면 남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 사람들이 나와 똑같은 고통을 겪고 살지 않았으면 해서입니다.”

“…….”

“사세요. 부디 오래오래 살면서 그동안 저지른 죗값 전부 다 받으시길 바랍니다.”

양승준의 입에서 단숨에 총을 빼낸 선우가 그의 몸을 거칠게 돌려세웠다. 반쯤 혼이 나간 몸뚱이가 저를 바라보고 서자, 선우는 그의 관골에 주먹을 세게 박아 넣었다.

***

호텔에서 나와 청사로 돌아가는 내내 녹음 파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겁에 질린 양승준은 자리에 주저앉아 제가 방을 벗어날 때까지도 넋을 놓고 있었지만, 곧 약 기운이 가시고 정신이 들면 그쪽에서도 무슨 수를 쓸 게 분명했다. 그러기 전에 제가 먼저 선수를 쳐야 했다.

그런데 이 파일이 증거로서 충분히 효력이 있을까? 아니, 그보다 강수대가 이 파일을 증거로 받아 주기는 할까? 강수대가 아니라면 어디에 제출해야 하지? 중간에 또 누가 가로채기라도 하면 아무 소용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경찰 내에서는 이 자료를 제대로 활용할 방안이 없었다.

“형사님! 형사님!”

“아, 박 기자님.”

고민하는 선우 앞에 박정철이 나타났다.

“기자님. 혹시 지금 바로 특집 기사 낼 수 있으세요?”

“…지금 바로요?”

선우의 안색과 태도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박정철은 선우를 서둘러 취재 차량에 태웠다.

방송국으로 이동하는 동안 선우는 박정철에게 제가 녹음해 온 파일을 들려주었다. 양승준의 만행에 아연실색한 박정철은 보도국에 도착하자마자 선우를 제 팀장에게 인도했다. 저 같은 2진 기자가 감당할 만한 수준의 사건이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박정철 덕분에 사회부 사건팀 팀장을 만나게 된 선우는 그에게 제가 가진 자료들을 넘겼다. 양승준 의원의 살인 미수 사건을 비롯, 그의 각종 비리를 증명해 줄 수많은 증거들. 박정철의 팀장은 박정철에게 당장 이번 사건에 대한 기사를 작성하라고 지시한 다음, 선우를 보도국장에게 올려보냈다.

새벽 5시, 이제 막 출근한 보도국장과 마주 앉아 선우는 양승준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선거 비리, 사학 재단 비리, 세금 탈루, 뇌물 수수 그리고 제 부모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까지.

그리고 그날 하루, KBC 보도국은 대한민국 어느 방송국의 보도국보다도 빠르게 돌아갔다.

***

한숨 깊게 자고 일어난 태성은 침대 머리맡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저는 반나절쯤 자고 일어난 듯했고, 제 옆에는 여전히 색색 고른 숨을 내쉬며 곤히 잠을 자는 이가 있었다. 태성은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칼을 슥슥 쓸어 넘기고는 곧 동그란 코끝에 쪽하고 입을 맞췄다.

이내 방 안을 짧게 둘러본 태성이 욕실 앞으로 걸어갔다. 욕실 문 앞에 어젯밤 벗어젖힌 옷가지들이 그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그는 제 슈트 재킷에서 핸드폰만 꺼내 들고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침대에 누워 있는 이를 품 안에 당겨 안으며 정윤철이 보내 둔 보고 자료를 열어 보았다.

시작은 오전 6시, KBC 아침 종합 뉴스에서 첫 소식으로 방영된 박정철 기자의 특보였다.

양승준 의원 살인 미수 사건이 알고 보니 본인의 자작극이었다는 사실을 밝힌 뉴스는 그 근거로 녹취 파일을 제시했다. 양승준과 누군가의 대화를 녹음한 음성 파일에는 양승준의 계략이 낱낱이 담겨 있었다. 비록 음성 변조를 한 상태였지만, 태성은 양승준의 대화 상대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어쩜 음성 변조를 한 목소리조차도 이렇게 솔직담백할 수가 있는지, 덕분에 저는 하다 하다 기계음에도 발정하는 놈이 될 뻔했다.

KBC의 아침 특보는 언론에 큰 여파를 가지고 왔다.

태성은 체포 당시 부러 적극적으로 포토 라인에 섰는데, 그건 사건 규모를 키우기 위함이었다. 파렴치한 피의자의 면모에 사람들이 공분하길 바랐고, 사건이 최대한 많은 이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를 기대했다. 그래야 사건이 뒤집어졌을 때 사회적으로 더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조사실에 앉아 취재 기자들이 모여드는 것을 지켜보며 태성은 정윤철을 기다렸다. 정윤철이 마카오에 숨어든 저의 대역을 잡아 오면, 그때 모든 사실을 밝힐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는 준비한 무대 장치를 보기 좋게 선우에게 뺏기고 말았다.

특보를 접한 언론사들은 경찰에 득달같이 달려들어 사실 파악을 요청했다. 경찰은 상황 수습을 위해 긴급회의를 소집했고, 태성의 조사는 잠시 중단되었다. 그 사이 양승준이 고용한 대역이 청사로 끌려오자 조사는 완전히 원점으로 돌아갔다. 경찰은 울며 겨자 먹기로 양승준을 소환하기로 결정했다.

KBC는 노련한 방송국답게 선우가 제공했을 자료를 알차게도 써먹었다.

오전 특보 외에도 정오 뉴스에서는 처음으로 양승준의 정치 비리 의혹을 보도했고, 프라임 시간대인 저녁 종합 뉴스에서는 고(故) 한재민 경감의 사건을 다뤘다.

하이라이트는 그날 밤 방영된 탐사 취재 프로그램이었다. 60분으로 기획된 특집 방송에서는 양승준의 숱한 비리 의혹을 샅샅이 파헤쳤다. 부정 청탁, 금품 수수, 사학 재단 비리 등등. 그간 태성이 모아 둔 기밀 자료가 세상의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이 모든 것이 단 하루 만에 일어난 일이었고, 정윤철의 보고 자료는 양승준의 체포 기사로 끝이 났다. 제가 선우를 열심히 물고 빠는 사이, 검찰은 양승준의 비리와 한재민 경감 사건을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미국으로 줄행랑치려던 양승준은 공항 검색대를 넘지 못하고 검찰에 연행되었다.

자료를 전부 훑은 태성은 핸드폰을 대충 내려놓고 제 품에 안긴 이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놀랄 거라고 생각은 했으나, 이렇게 직접 발 벗고 나서서 저를 끄집어낼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제가 괜한 짓을 해서 애 맘고생을 시켰나 싶어 태성은 양심이 살짝 찔렸다.

부드러운 머리칼을 살살 쓸어 만지며, 태성은 일주일 전의 일을 상기했다.

2021년 11월 12일 23시경

서울특별시 강남구 H 오피스텔

“헉!”

윤해진은 너무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집에 침입자가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뭐, 뭡니까!”

“요즘 많이 바쁘신가 봐요. 퇴근 시간이 너무 늦네. 야근 수당은 받고 일해요?”

침입자는 낯이 익다 못해 익히 아는 자였다. 거실 한복판에 의자를 두고 앉은 태성은 현관에서 들어오는 윤해진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고. 예의 그 오만한 자세로 태성은 윤해진을 살갑게 맞이했다. 그의 옆에는 정윤철이, 뒤에는 수행원 두 명이 그를 지키고 서 있었다.

“여,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비서님 기다리고 있었죠?”

윤해진은 황당한 얼굴로 태성 앞에 섰다.

“여긴 어떻게 들어오신 거죠?”

“어떻게 들어왔는지가 궁금해요? 나 같으면 왜 왔는지가 궁금할 것 같은데.”

“당장 나가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주거 침입으로 신고하겠습니다.”

“그거 좋네요. 그 김에 난 절도범 신고하면 되고.”

“……!”

툭, 투둑.

윤해진의 발밑으로 묵직한 철 덩어리와 새카만 가죽 장갑 두 짝이 던져졌다.

“이걸로 인생 끝내고 싶은 거 아니면 나랑 얘기 좀 하죠.”

컥, 더 놀랄 겨를도 없이 수행원 두 명이 윤해진의 양옆으로 붙었다. 어깨를 내리누르는 힘과 일순 오금에 가해진 충격에 윤해진은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내가 최근에 총을 하나 잃어버렸거든요. 아니지, 도난을 당했다고 해야 하나? 꽤 아끼던 거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대신 이 총이 걸려 있더라고.”

태성은 구둣발 끝으로 바닥에 놓인 장총을 툭 건드렸다.

“혹시 윤 비서님은 그 총이 어디로 갔는지 아시는가 해서.”

“……제가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요?”

태성은 꼬았던 다리를 풀며, 불쑥 윤해진의 앞으로 몸을 숙였다. 내리깐 눈으로 바닥을 보던 그가 한순간 눈알을 번쩍 치켜올렸다. 새카만 눈동자가 윤해진을 날카롭게 응시했다.

“근데 나는 왜 윤 비서님이 그걸 알고 있을 것 같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윤해진은 번득이는 눈빛을 피해 고개를 틀었다. 옷깃 아래로 드러난 그의 목덜미에 오돌토돌 좁쌀 같은 소름이 돋아 있었다.

“모르면 알게 해 드릴 수도 있는데.”

태성은 윤해진의 무릎 앞에 놓인 총을 집어 들었다. 별안간 철커덕, 총을 장전한 그는 총대를 휙 한 번 크게 돌리고는 총부리를 바닥에 턱 내리꽂았다. 거꾸로 처박힌 총대 끝에 팔을 지탱한 그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아직 생각 안 나셨어요?”

“저는… 정말로 모르는 일……!”

척- 윤해진의 귓가에 총구가 닿았다.

“헉……!”

“내가 못 쏠 것 같아요?”

파르르 떨리는 눈가로 윤해진이 곁눈질을 했다. 옆머리에 붙은 총대를 힐긋 보는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삐질 새어 나왔다. 윤해진의 눈동자는 차츰 총대를 따라 이동했다. 그의 시선이 방아쇠에서 멈추자, 태성은 걸어둔 집게손가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헙!”

윤해진은 눈을 질끈 감고 어깨와 목을 움츠렸다. 동그랗게 말린 몸이 겉에서도 보일 정도로 오들오들 떨리고 있었다.

“…….”

태성은 사시나무 떨듯 파들대는 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금세 흥미를 잃었다는 듯 바닥으로 총을 내던졌다. 확실히 초식 동물을 사냥하는 건 제 취미가 아니었다.

“우리 윤 비서님 충성심 하나는 정말 알아줘야 해요. 그쵸?”

“…….”

“온갖 더러운 일, 추잡한 일. 벌리는 놈 따로 있고, 뒤처리하는 놈 따로 있고. 거기다 발정 난 개새끼는 시도 때도 없이 좆까지 들이미니 윤 비서님 인생도 참 고달프겠어요.”

난데없이 저를 위하는 듯한 말투에 윤해진은 바닥을 향해 처박은 머리를 서서히 들어 올렸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지더라고요. 그건 무얼 위한 충성일까.”

“…….”

“망나니 도련님 수발드는 거야 그렇다 쳐도 폭력에 가학적인 섹스까지 견뎌 내면서 그 곁에 붙어 있는 이유는 뭘까.”

윤해진의 눈이 태성의 눈을 마주했다.

“그렇게 해서 당신이 얻는 건 뭐지? 그 집안에서 언젠간 자식으로 받아 줄 거라는 일말의 기대감? 아님 그 썩어빠진 정치 가문을 더 위대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만족감? 그것도 아니면 단순히 아버지와 형을 위한 눈물겨운 희생인가?”

허억, 윤해진이 숨을 황급히 들이켰다. 제가 평생을 숨겨 왔던 비밀을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들으니 목덜미가 뻣뻣하게 굳고, 뒤통수가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누가 당신 아버진데. 양기용?”

“…….”

“설마, 당신 몸에 진짜로 그 집안 피가 흐르고 있다고 믿는 건 아니지?”

“!”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크게 뜬 눈앞에 툭, 새하얀 서류 봉투가 놓였다. 윤해진은 떨리는 눈동자로 서류 봉투와 태성을 번갈아 보다가 이내 봉투를 들어 그 안에 든 종이를 꺼내 보았다.

〈유전자 감정서〉

“당신이랑 양 의원이 싸지른 걸로 확인한 거니까 결과가 틀릴 리는 없는데. 못 믿겠으면 직접 한 번 더 검사해 보시든가.”

윤해진은 얼떨떨한 심정으로 몇 장짜리 결과지를 한 장씩 들어 넘겼다.

- 감정 결과 -

의뢰인 1과 의뢰인 2의 동일 부계 혈연관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Y 염색체상의 STR 유전자 좌위를 분석한 결과, 총 16개의 유전자형 중 4 좌위 불일치로 동일 부계 관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 이게…….”

맨 마지막 장 하단에 쓰인 글을 읽고, 윤해진은 그 자리에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정말로 얼어 버리기라도 한 듯, 원래도 창백한 피부가 삽시간에 시퍼렇게 질렸다. 결과지를 든 팔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아니었다면 숨을 쉬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그는 미동이 없었다.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한평생 희생한 게 안타깝긴 하지만, 당신한테는 양씨 집안 식구들 피가 단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어요.”

“학……!”

“어때요. 이제 나랑 얘기할 마음이 좀 생겨요?”

“…….”

삽시간에 노기가 그득 차오른 두 눈이 태성을 올려다보았다.

***

윤해진의 집 안에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식탁에 마주 앉아 윤해진에게 양승준의 계획을 모두 듣고 난 태성은 그만 웃음을 크게 터트리고 말았다. 자신을 감옥에 보내겠다는 속셈이 몹시도 싱겁고 어설펐다.

“그걸로 되겠어요?”

“가능할 겁니다.”

뜻밖의 확신에 찬 어조에 태성은 한쪽 눈썹을 위로 추켜올렸다.

“고희수 청장이 붙었거든요.”

“고희수?”

언뜻 놀란 기색을 비친 태성이 입술을 한 번 삐죽이고는 곧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진행합시다.”

“……네?”

윤해진이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계획대로 진행하시라고.”

“아니…….”

윤해진은 제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아니면 그가 제 말을 잘못 들었거나. 그러나 태성은 윤해진의 말을 아주 정확히 들었고,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왕 할 거 제대로 하죠. 의원님께 말씀 전해 주세요. 당사 이전 건, 계약 진행하자고.”

다음날 이른 아침, 태성은 윤해진에게 제 옷 한 벌과 신발 한 켤레를 보냈다. 일요일 저녁 7시, 양승준과 통나무 별장에서 만난 태성은 그 자리에서 임대차 계약서를 넘기고 저녁 9시쯤 별장을 빠져나왔다.

“으음…….”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품에 안은 이가 몸을 작게 뒤척였다. 태성은 머리카락을 만지던 손을 멈추고 그를 더 바투 끌어안았다.

“일어났어요?”

“아니요오…….”

선우가 눈을 감은 채 웅얼거렸다. 태성은 그 모습을 보고 입꼬리를 활짝 올려 웃었다. 사실 그는 아까부터 내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깜찍한 것이 저를 구한답시고 이틀간 이리 뛰고 저리 뛰었을 것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저와 조금이라도 연관될 것 같은 자료는 쏙쏙 빼고 넘긴 모양이라, 기특한 걸 넘어서 이제는 감격스런 마음마저 들었다.

태성은 고개를 숙여 선우의 감은 두 눈에 번갈아 입을 맞췄다.

“졸리면 더 자요. 내일 일요일이니까 더 쉬어도 돼.”

“아… 맞다. 저 내일 당직일 텐데…….”

선우가 태성의 품에 더 깊게 파고들며 말했다. 흡사 칭얼거리기라도 하듯 제 가슴팍에 이마를 비비는 선우를 보고 태성은 몸을 울려 웃었다.

“그럼 여기서 바로 출근하면 되겠네.”

그는 나직이 속삭이며 선우의 머리에 얼굴을 맞댔다.

명색이 호텔 사장이라던 사람은 마포구의 어느 한 작은 비즈니스호텔에서 꼬박 두 밤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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