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나를 구원하러 온 무법자
최근 선우는 출퇴근을 도보로 하고 있었다. 청사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30분가량 걸렸는데, 며칠 꾸준히 하니 나름 운동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지나가는 차 소리를 배경 삼아 천천히 걷다 보면 아무 방해 없이 이런저런 생각들을 정리할 수도 있었다. 사실은 이 점이 가장 좋았다.
양승준의 악행이 세상에 드러난 지도 벌써 2주가 지났다.
양승준이 기만극을 벌이는 과정에서 경찰 고위 간부와 결탁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경찰은 양승준과 관련된 모든 사건에서 손을 떼야 했고 수사권은 전부 검찰로 이관되었다.
KBC의 보도로 사건이 일파만파 커지자 김경택 경찰청장과 고희수 서울경찰청장은 보직에서 해임된 동시에 검찰에 소환되었다. 고희수의 하명을 받아 움직인 강수대 강력 3팀장과 마수대 마약 1팀장은 각각 징계위원회에 올랐고, 두 사람 모두 감봉·견책 징계와 더불어 일선 파출소로의 전직이 결정되었다.
남자는 무혐의가 입증된 즉시 양승준을 명예 훼손 및 무고죄로 고소했다.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그는 단숨에 초호화 전관 변호사 군단을 꾸렸다. 거기에 통나무 별장에서 나눈 대화의 녹취 파일을 공개하며, 당사 이전을 요구한 것은 양승준이었다는 사실을 알리니 양승준의 죄목에는 공갈·협박 혐의가 얹어졌다.
양승준 측에서도 부랴부랴 변호사단을 선임했지만, 법조계에서는 이미 양승준의 형을 확실시하고 있었다. 다만 형량을 얼마나 줄일 수 있을지가 이 사건의 관건이라고 했다.
이렇게까지 일이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KBC 시사 프로그램의 특집 방송 덕이 컸다.
KBC 보도국은 총 2주에 걸쳐 양승준의 실체를 만천하에 알렸다. 1부의 내용이 그가 연루된 각종 비리 사건에 대한 것이었다면, 2부는 고(故) 한재민 경감 부부의 살인 사건에 대한 것이었다.
죄를 저지르고 그 죄를 덮기 위해 또 살인을 저지른 양승준과 본인의 출세를 위해 이를 악용한 김경택의 만행은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두 사람의 작태에 국민들은 분노했고, 시사 프로는 방송 뒤에도 한동안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여세를 몰아 KBC는 특집 방송을 한 주 더 이어 가기로 했다. 3부의 내용은 놀랍게도 양승준의 개인 수행원, 윤해진에 대한 것이었고 바로 오늘 밤 방영될 예정이었다.
박정철에게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열흘 전쯤 윤해진이 먼저 방송국에 연락을 취해 왔다고 했다. 그는 시사 프로 PD에게 자신이 평생을 기만당하며 한 집안의 노예로 살아온 사실을 폭로했다. 그의 이야기가 담긴 방송은 이미 예고편만으로도 큰 이슈가 되었으니, 방송이 끝나고 나면 다시 한번 세상이 시끄러울 것으로 예상됐다.
선우는 몇 차례의 수사 과정에서 윤해진이 직접 증인으로 나서 준 것이 상당히 의외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 뒤에는 그럴 만한 사연이 숨겨져 있었다.
‘빵빵-.’
휴우, 재킷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걷던 선우가 문득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이제 정말 다 끝났다. 앞으로 수차례의 재판이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다 한 것 같았다.
‘빵빵-.’
시원하고 후련했지만 어쩐지 마음 한구석에는 이유 모를 공허함이 남았다. 이 헛헛한 속을 찬찬히 채워 가는 것이 지금부터 제가 해야 할 일이었다.
“한선우!”
별안간 저를 부르는 소리에 선우가 고개를 돌렸다. 제가 걷던 도롯가 옆으로 새하얀 SUV 한 대가 멈춰 섰다.
“어? 대표님!”
“무슨 생각 하느라 부르는 소리도 못 들어?”
조수석 창문이 내려간 차 안에는 태성이 타고 있었다.
“어디 가세요?”
“한선우한테. 타요.”
운전석에 앉은 그가 턱짓으로 옆좌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선우는 조수석의 문을 열고 자리에 앉았다. 선우가 안전벨트를 매는 사이 열려 있던 창문이 스르륵 위로 올랐다.
“대표님 요즘 직접 운전하시는 날이 많네요?”
“한선우한테 오려면 어쩔 수 없지.”
“……저요?”
“응. 운전기사 보는 데서 너한테 작업 걸 순 없잖아.”
사이드미러를 보며 핸들을 돌리는 남자를 보고 선우가 피식 웃었다.
태성의 차는 금세 선우의 집 앞에 도착했다. 태성이 아파트 주차장에 주차를 마치고 시동을 끄자, 차 안에는 잠시 짧은 고요가 찾아왔다.
선우는 곧바로 안전벨트를 풀지 못하고 주저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제집이 있는데 왠지 오늘따라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남자를 이대로 돌려보내는 것도 못내 아쉬웠다. 만난 지 이제 겨우 10분밖에 안 됐는데……. 선우는 두 손을 맞잡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대표님. 술 한잔… 하고 가실래요?”
핸들에 팔을 얹고 선우를 지켜보던 태성이 돌연 눈을 예쁘게 접었다.
“나한테 선택권이 어딨어.”
그의 양 볼에 보조개가 옴폭 패어 있었다.
***
편의점 앞 야외 테이블에 맥주 캔이 쌓였다. 선우는 바삭바삭한 어포 스낵을 입에 하나 쏙 넣고, 테이블 위에 과자 봉지를 주섬주섬 풀어놓았다.
이미 맥주 캔을 딴 태성은 맥주를 크게 한 모금 들이켜고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역시나 각 잡힌 슈트 차림의 남자는 오늘도 배경과 어우러지지를 못했다. 큼직한 손으로 버섯 모양 초코 과자를 집어 먹는 남자를 보고 선우는 결국 웃음을 빵 터트렸다.
“이런 데서 술 드셔 보신 적 있으세요?”
선우의 말에 태성이 눈썹을 구겼다. 이건 꼭 옛날 드라마에서 재벌 남자 주인공에게 떡볶이 먹어 본 적 있냐고 물어보는 장면 같지 않은가.
“날 도대체 어떻게 보는 거예요?”
태성은 기가 막힌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그에 선우가 오오, 하고 입술을 동그랗게 말자 태성은 팔짱을 끼며 새초롬하게 말했다.
“바빠서 그럴 시간이 없었던 거라고 해 줄래요?”
아하하, 선우가 말갛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선우는 태성이 먹던 초코 과자를 저도 하나 입에 넣었다. 버섯 기둥을 베어 물기도 전에 달콤한 초콜릿 향이 입안에 감돌았다. 달다. 달아서 혀가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신기하네요.”
“뭐가요?”
“대표님은 뭐든지 다 해 보셨을 것 같은데 처음 해 보시는 게 있다는 게요. 저는 대표님 만나서 다 처음 해 봤거든요. 요트도, 골프도, 해운대에서 불꽃놀이 보는 것도.”
그래서인지 신기하면서도 그의 처음을 함께 한다는 것이 내심 기분이 좋았다.
“나도 한 경위랑 다 처음 해 봤는데?”
“……?”
“나한테 순대국밥 사 준 사람은 네가 처음이고, 누구랑 단둘이 여름휴가 보낸 것도 처음이야. 시가 나눠 펴 본 것도 처음이었고, 이것도 처음이네.”
태성은 손에 든 맥주 캔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태성을 보던 선우의 얼굴에 슬며시 웃음꽃이 피었다.
“어떠셨어요?”
“즐거웠어. 모든 순간이.”
“…….”
“다시없을 만큼.”
태성의 두 눈이 선우를 지그시 응시했다. 선우는 괜히 속이 홧홧해져 그의 눈을 피하며 손등을 얼굴에 가져다 댔다. 바깥바람에 손이 식어 버린 탓인지 손등에 맞닿은 제 볼이 무척이나 뜨뜻하게 느껴졌다.
그때, 어디선가 선우의 열기를 식혀 주는 바람이 불었다. 찬기가 느껴지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바싹 마른 나뭇잎이 작게 회오리를 그리며 길거리를 뒹굴고 있었다.
12월치고는 아직 날씨가 따뜻해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겨울이라고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이 꽤 쌀쌀했다. 그와 야외에서 캔 맥주를 마셨던 게 생각나서 굳이 이곳까지 그를 끌고 왔더니 아무래도 제 욕심이 컸던 모양이었다.
“춥진 않으세요?”
“그러게. 미리 귀띔이라도 해 주지 그랬어.”
태성이 탓하듯 말하자 선우가 헥, 하고 혀를 내밀었다.
“안 되겠다. 이거 남은 것만 마시고 얼른 들어가요.”
“장난이야. 천천히 먹어.”
놀란 선우가 맥주를 벌컥 들이켜자 태성이 선우의 손을 잡아끌었다.
“나 지금도 너무 즐거우니까 우리 조금만 더 있다 가자.”
“……대표님 추우시잖아요.”
“너랑 있는데 추울 겨를이 어딨어.”
그렇게 말하는 남자는 정말로 손이 뜨끈뜨끈했다. 선우는 그의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맥주 캔을 반대 손에 옮겨 쥐었다. 그리고 손목을 살짝 꺾어 그의 손바닥에 제 손바닥을 맞댔다.
“있잖아요, 대표님.”
“네에.”
“저…… 오늘 퇴직계 제출하고 왔어요.”
“……그랬어?”
담담하게 말하는 선우에 태성은 도리어 제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너무 놀라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지만, 행여라도 제가 놀란 티를 내면 선우가 동요할까 봐 태성은 조용히 맞닿은 손을 꽉 쥐고 말았다.
“네. 사실은 그래서 하루 종일 마음이 조금 안 좋았거든요.”
경찰 말곤 다른 대안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경찰이 저의 천직인 줄로만 알고 있어서. 당연히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막상 떠나기로 결정을 내리니 가슴속이 뻥 뚫린 것 같았다. 그건 단순한 아쉬움 정도가 아니라 제 몸의 일부를 떼어 내는 것과 같은 상실감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런데 대표님이랑 얘기하고 나니까 기분이 또 나아지네요.”
그러면서 웃는 선우의 코끝이 어느새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생각해 보니까 저는 경찰이 정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더라구요……. 이제라도 그걸 알아서 다행이에요.”
경찰에 대한 회의감, 조직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죄책감. 저를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들, 또 반대로 불편하게 보는 은근한 시선들. 그런 건 다 차치하고도 더 이상 경찰을 할 수 없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남자가 조사실에 갇혀 있던 그날. 그 하루 동안 제가 도대체 몇 개의 죄를 저질렀는지 몰랐다. 단순히 죄를 저지른 것을 넘어서, 그 많은 짓을 벌이는 동안 저는 단 한 번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제가 행한 것들이 전부 잘못된 일인 줄 알고 있지만, 다시 그 상황이 와도 저는 아마 똑같은 선택을 할 것 같았다. 이런 제가 감히 경찰을 할 자격이 있을까…….
“근데…….”
“……?”
“그만두는 건 전데, 왜 대표님이 그렇게 아쉬운 얼굴을 하세요?”
“…….”
태성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너만큼 경찰이 어울리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었지만 태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는 성정이 비열한 사람이라, 그를 위한답시고 제 발로 찾아온 기회를 무르는 짓 같은 건 할 수가 없었다.
“고맙습니다.”
“…뭐가?”
“그냥, 다요. 대표님 아니었으면 지금 이렇게 웃으면서 있지도 못했을 거예요.”
“내가 뭐 한 게 있나.”
“그럼요. 곁에 있어 주시는 것만으로도 저는 너무 좋았어요. 감사해요.”
태성이 씁쓸하게 웃었다. 멀쩡히 살던 저를 밑바닥까지 끌어내린 사람한테 고맙다 말하니 태성은 마냥 기뻐하지만은 못했다.
“이만 들어갈까? 손이 차다.”
태성은 잡고 있던 손을 살짝 풀며 이번에는 선우의 손끝을 움켜쥐었다. 동글동글한 손가락 끝이 어느새 밤바람만큼 차가워져 있었다. 냉기를 조금이라도 녹여 볼 생각에 손끝을 꾹꾹 주무르고 있자니, 선우가 불쑥 손가락 사이사이로 깍지를 껴 왔다.
“대표님.”
“응?”
“우리… 연애할까요?”
“……!”
태성이 순간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너무 놀란 나머지 잠시 뇌가 얼어붙은 듯했다. 그러나 저를 바라보는 온유한 눈빛에 곧 온몸이 따스하게 녹아내렸다. 태성은 입매를 한껏 끌어올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이것 봐. 나한테 대시한 것도 한선우가 처음이지.”
그러고는 고개를 크게 돌려 주위를 둘러봤다. 근처에 다니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태성은 선우의 입술에 쪽하고 입을 맞췄다.
***
‘시헌아. 나 그 사람이 너무 좋아.’
예년보다 따뜻했던 11월 마지막 주의 어느 날이었다. 간만에 스케줄이 비던 날, 시헌은 선우를 집으로 불렀다. 날씨가 추워지면 한동안 테라스를 이용하지 못할 테니 올해의 마지막 홈 캠핑을 하자는 것이 구실이었다.
진짜 목적은 선우에게 제대로 된 밥을 먹이는 것이었고, 그것보다 더 큰 목적은 선우를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시사 프로로 사실을 접한 저도 이렇게 억장이 무너지는데, 사건을 직접 당한 당사자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고기를 구워 먹고 술 한잔을 걸치는 와중에 선우는 그간의 일들을 덤덤히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 대화 끝에 선우는 제게 고백을 해 왔다.
‘너한테 너무 미안하지만…… 그래도 그 사람한테 내 마음을 전하기 전에 너한테 먼저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아서…….’
“…….”
시헌은 팔을 들어 눈을 덮었다. 천장을 보고 누워 있으니 조명 빛에 눈이 너무 부셨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나도 내가 이러면 안 된다는 거, 잘 알고 있는데……. 근데…… 그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 멈춰지지가 않아. 그 사람을 향한 마음이 자꾸자꾸 커져서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
알지, 그 마음. 누구보다도 제가 잘 알았다. 그러니 선우를 탓할 수도, 말릴 수도 없었다. 사람의 마음은 제멋대로 조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사람이라면 끝이 어떻게 돼도 상관없을 것 같아. 그냥, 함께하는 순간순간이 너무 귀하고 소중해.’
그렇게 말하는 선우는 정말 맑게 갠 얼굴을 하고 있었다. 늘 밝은 척해도 어딘가 모르게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였던 그였다. 그런 선우에게서 시헌은 처음으로 안정감을 느꼈다.
‘시헌아. 내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전부 네 덕분이야. 내 곁에 있어 줘서… 정말 고마웠어.’
그 순간 깨달았다.
제가 사랑하던 열일곱의 어린 소년은 어느새 훌쩍 커, 단단하고 다부진 스물일곱의 청년이 되어 있었다.
시헌은 스물일곱 끝자락에 선 선우를 뜨겁게 안아 주었다. 그건 제 첫사랑의 앞날을 응원하는 의미였다.
부디 행복하기를.
지금부터 펼쳐질 너의 인생에는 따뜻한 봄날만이 가득하기를.
그러자 선우는 저를 마주 안았다. 그리고 물었다.
여전히 네 친구를 해도 되겠느냐고.
시헌은 하나뿐인 십년지기 친구에게는……
달콤한 꿀밤을 선사했다.
“자기야. 청승 떨 거면 너희 집 가서 해. 왜 우리 집에 와서 이 난리야.”
“아, 몰라요. 저 실연당했단 말이에요.”
소파에 누워 발을 구르는 시헌을 보고 장영진이 코웃음을 쳤다.
“그거 예전에 당한 거 아니었어?”
“이제 진짜 끝이에요. 완전. 디 엔드!”
하아, 시헌은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천장이 꺼질 듯 한숨을 쉬었다. 한참을 그 자세로 있던 시헌이 슬그머니 손을 내리며 말했다.
“그래도…… 그전에 하도 질질 짜서 그런가 생각보다는 무덤덤하네요.”
“그게 무덤덤한 거야? 누가 보면 대한민국에 차인 사람 김시헌 혼자인 줄 알겠는데.”
장영진은 아일랜드 바 앞에 서서 와인병에 오프너를 돌돌 꽂아 넣었다. 무심한 그의 태도에 발끈한 시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감독님이 짝사랑을 알아요?”
“모를 건 또 뭐야.”
“흥, 맨날 주위에 사람들 줄줄 달고 다니는 사람이 이런 쓸쓸하고 외로운 감정을 어떻게 알겠어요. 짝사랑을 해 보긴 하셨나 몰라.”
“내가 짝사랑을 왜 안 해 봐? 나 지금도 짝사랑 중인데?”
응……? 시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는 사람 안 말리고 가는 사람 안 잡는 타입인 줄 알았는데, 짝사랑이라니? 그냥 눈여겨본 사람이 있다는 얘긴가?
“꽤 오래전부터 티 내고 다녔는데 그 사람은 진짜 모르더라.”
“……그래요?”
오, 누구지? 장 감독 주변에는 사람이 워낙 많으니까 대충 짐작 가는 이도 없었다. 활기차고 유쾌한 성격이기는 해도 일벌레에 가까운 사람이라 누구를 좋아하고 있다는 느낌도 딱히 들지 않았다.
“너무 조용하게 티 내신 거 아니에요?”
“그러기엔 내 주변 사람들은 바로 눈치채던데.”
“엇! 그래요? 근데 왜 본인은 모르지?”
“눈치가 좀 없는 것 같긴 해. 워낙 다른 사람들한테 관심이 없는 성격이기도 하고.”
그렇구나…. 시헌이 생각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뽀드득, 뽀드득. 코르크 깊숙한 곳까지 파고든 오프너가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빡빡한 마찰음을 냈다. 이쯤이면 됐다 싶어, 장영진은 병 입구에 레버를 걸고 오프너를 위로 잡아당겼다. 탄탄한 팔뚝에 순간 굵은 힘줄이 돋아났다.
“자기도 한잔할 거지?”
“네. 아, 근데 감독님 좋아하는 사람 있다면서 왜 자꾸 이 사람 저 사람한테 다 자기라고 그러세요. 그렇게 여기저기 여지를 주고 다니니까 그 사람도 자기 좋아하는지 눈치를 못 채죠.”
“누가 그래? 내가 이 사람 저 사람한테 다 자기라고 그런다고?”
“누가 그러긴요! 감독님 배우들한테 전부 자기라고 부르잖아요. 상대가 오해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나 자기라고 부르는 사람 한 명밖에 없는데?”
“나 참, 무슨 소리예요. 지금도 저한테…….”
“…….”
뽁! 경쾌한 소리와 함께 와인병에서 코르크가 뽑혀 나왔다. 장영진은 오프너를 내려놓고 와인글라스 두 잔을 꺼내 왔다.
“어…….”
아일랜드 바 위에 잔을 놓고 병을 기울이니 이내 콸콸콸, 투명한 유리 글라스 안으로 새붉은 포도주가 힘차게 쏟아졌다.
“감독님…….”
“아, 맞다. 자기야. 나 지난번에 보여 줬던 작품, 시놉 좀 수정됐는데 한번 볼래?”
장영진이 다른 한 잔에도 마저 포도주를 채워 넣으며 말했다.
***
직장인들의 퇴근 시간, 홍대거리에 위치한 어느 고깃집에서 선우는 김지항을 만났다.
크으-!
“선우야, 마수대 나오니까 제일 좋은 점이 뭔 줄 아냐?”
김지항이 빈 소주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선우는 대답 대신 조용히 소주병을 들었다. 마주 앉은 김지항의 잔에 병을 가까이 가져다 대니, 김지항이 잔을 살짝 들어 올렸다.
“바로 이거거든. 퇴근하고 맘 놓고 술 한잔할 수 있다는 거.”
곧 그의 잔이 맑은 소주로 가득 찼다. 식탁 위에 놓인 불판에서는 두툼한 삼겹살이 노릇노릇하게 구워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선우 너랑 이렇게 여유 있게 술 먹어 본 적도 거의 없는 것 같다?”
“그쵸. 매일매일이 정신없었으니까.”
야근과 당직은 기본이고 휴일도 반납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일은 많고 인력은 부족하니 제대로 된 회식 한 번 하기가 힘들었다. 어쩌다 전부 모여 팀 회식을 할 때면 내일을 위해 술은 취하지 않을 정도로만 먹었고, 회식이 끝나고 다시 청사로 돌아가서 일을 한 경우도 태반이었다.
형사라고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그만큼 마약 1팀의 팀원들은 열정이 넘쳤었다.
“한잔해야지, 한잔해야지 말만 실컷 해 놓고. 결국엔 둘 다 팀을 떠나게 되고 나서야 이런 자리를 갖네.”
“그러게 말이에요.”
“마수대에 있을 땐 거기서 일어나는 일들이 세상 전부인 것 같았는데. 나오고 보니까 그게 뭐라고 그렇게 목숨을 걸었나 싶어.”
말은 그렇게 해도 못내 아쉬운지, 김지항은 쓰게 웃으며 소주 한 잔을 크게 털어 넣었다.
실제로 그가 옮긴 파출소는 마수대 청사에서 5㎞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심지어는 홍대 클럽 거리와 가장 지척에 있는 곳이라 파출소치고는 일이 험했고, 무엇보다 마약 사범을 흔히 접하는 곳이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팀을 떠나기는 했지만, 그는 여전히 마수대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팀 분위기는 좀 어때?”
이번에는 김지항이 소주병을 기울였다. 선우는 제 잔을 단숨에 비우고 김지항이 따라 주는 술을 받았다.
“말씀드리면 경감님 속상해하실 것 같은데요?”
“그 정도야?”
“팀장 자리가 아직 공석이라서요.”
신년 인사 발령 때까지 정기영이 팀장 대행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새로운 팀원들이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아 팀을 통솔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듯했다. 거기에 제가 퇴직을 한다니 동길까지 마음이 싱숭생숭한 모양이라, 이래저래 밝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정 경감이 고생 좀 하겠네.”
선우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지항은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 선우에게 잔을 들이밀었다. 곧 소주잔 두 개가 공중에서 챙 부딪히고, 두 사람은 동시에 잔을 입에 대었다.
“먼저 떠나서 미안해.”
“네에?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죄송해야죠.”
그는 팀을 떠났지만, 저는 조직을 떠날 사람이었다.
“정 경감이야 워낙 이 일에 이골이 난 사람이지만, 너랑 동길이는 전부 처음 겪는 일일 테니까… 너희 둘 두고 떠난 게 두고두고 마음에 걸리더라고.”
“에이, 아니에요. 저희한테 미안해하실 거 전혀 없어요. 동길이도 맨날 말로만 우는소리 하지 누구보다 씩씩하게 지내는 거 잘 아시잖아요.”
선우는 잘 구워진 삼겹살을 김지항 쪽으로 밀어 넣었다.
“막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인 것 같아서, 나 아니면 누가 또 이런 일 하나 싶어서 용을 쓰고 버텼는데……. 민호 녀석 그렇게 보내고 집에 돌아가니까 세상에, 우리 딸이 언제 이렇게 컸나 싶더라고. 와이프도 그새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
“토끼 같은 처자식이 한번 눈에 밟히니까 형사 생활 더는 못 하겠더라.”
그럼요, 이해해요. 선우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동안 뒤도 안 돌아보고 일만 하셨으니, 이제는 부디 쉬엄쉬엄 하시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어 고기를 몇 점 집어먹던 김지항이 잠시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실은, 최 팀장이 고희수 라인 잡았다는 거 대충 눈치채고 있었어.”
“……그러셨어요?”
고기를 양념장에 찍던 선우가 순간 젓가락질을 멈췄다.
“일부러 알려고 한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예전에 최 팀장이 고희수 청장이랑 전화 통화하는 걸 우연히 들었거든. 새로 팀원 충원될 때도 고희수가 자기 쪽 사람 심어 넣는 것 같더라고. 근데 뭐, 그 사람들이 어떻든. 우리야 맡은 일만 잘하면 되는 거니까 크게 신경 안 썼지. 뒤에서 그런 일들을 벌이고 있는 줄은 모르고.”
김지항이 소주 한 잔을 시원하게 털어 넘기는 것을 보며 선우는 빈 젓가락을 입에 물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까 너한테 신경 좀 더 쓸 걸 싶은 생각이 들더라. 아버지 사고…… 알고는 있었는데, 정확한 내막을 몰라서 그냥 입 다물고 있었거든. 내가 마수대 들어가기 전에 벌어진 일이라.”
“…….”
“괜히 얘기 꺼내면 네 아픈 속 들추는 걸까 봐 모른 척했던 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먼저 물어보고 아버지 일도 같이 알아봐 주고 할 걸 그랬어. 선배가 돼서 너무 무심해서 미안했다.”
“아니에요, 경감님! 저는 오히려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으셔서 감사했는걸요.”
한재민 경감의 아들을 보는 눈빛에는 호기심, 궁금증, 은근한 거부감. 주로 그런 것들이 담겨 있었다. 그런 저를 온전히 ‘한선우’로만 봐 준 것이 마약 1팀 사람들이었다. 제가 처한 상황과 관계없이 오롯이 저만 보고 아껴 주는 팀원들이 있으니 저 역시도 그 불편한 시선들을 아무렇지 않게 이겨 낼 수 있었다. 아마도 그건 팀의 연장자인 김지항부터가 저를 그렇게 봐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지 않았을까. 그러니 저는 그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천벌을 받을 놈들.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벌이고도 지금까지 떵떵거리고 살고 있었다니. 꼭 그런 새끼들이 명도 길긴 오지게 길어요.”
김지항은 불쑥 짓씹듯이 혼잣말을 내뱉고는 소주 한 잔으로 분노를 삭였다. 선우는 젓가락으로 양념장에 곁들여진 파채를 뒤적일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지?”
김지항이 두 사람의 잔을 채우며 물었다.
“……네. 한, 이 주 정도….”
“그만두면 뭐 할 거야?”
“천천히 쉬면서 생각해 보려구요.”
“뼛속까지 경찰인 한선우가 나가서 뭘 할지 내가 더 궁금하네.”
선우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도 넌 어딜 가도 예쁨받고 적응 잘할 거야. 사회생활하면서 너같이 열심히 하는 후배 만나기도 쉽지 않거든.”
“감사합니다.”
김지항이 식탁 위로 잔을 들어 올렸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선우야.”
“……종종 놀러 올게요.”
챙, 식탁 한가운데서 두 개의 소주잔이 맞부딪혔다.
***
터벅, 터벅.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생각보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오랜만에 소주를 마셨더니 보통 때보다 빨리 취한 듯했다.
이제 12월 중순이라고 밤공기가 꽤나 차가웠다. 언뜻 불어오는 겨울 밤바람에 손끝이 시려, 선우는 코트 주머니에 양손을 푹 집어넣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새로 씁쓸한 알코올 향이 하얀 입김을 타고 흘러나왔다.
혼자 걷는 거리가 조금 외롭다고 느껴질 때쯤이었다.
지이이잉-
손을 넣은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선우는 핸드폰을 쥐고 있던 손을 꺼냈다.
「문태성」
액정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선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김지항과 헤어지고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는데 그걸 이제야 확인한 모양이었다. 선우는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대표님!”
- 목소리가 밝네?
“대표님 전화받으니까 기분 좋아서요.”
- 그런다고 나 두고 다른 남자랑 술 마신 게 용서되진 않거든?
치, 선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
- 많이 마셨어?
“조금요.”
- 아직 밖인가 보네?
도로를 달리는 차 소리가 전화기를 넘어 태성에게까지 흘러갔다.
“네. 집까지 걸어가는 중이거든요.”
- 메시지 빨리 봤으면 데리러 가는 건데.
“아니에요. 술도 깰 겸 바람 좀 쐬고 싶었어요.”
요즘 부쩍 걸어 다니는 것에 맛들인 선우였다.
“뭐 하고 계셨어요?”
- 그냥 서재에 있었어요.
태성은 지금까지 일을 했다고 말했다.
- 혼자 지낼 땐 몰랐는데, 누구랑 같이 지내다가 혼자 남으니까 되게 허전하더라고. 밤에 침대에 누워 있으면 자꾸 그 사람이 생각나서 방에 잘 안 가게 돼.
그러면서 그는 요즘 자기 전까지 서재나 응접실에 머물다가 잠잘 때만 이 층으로 올라간다고 했다.
- 한선우.
“네?”
- 이런 얘기 전화로 하는 건 진짜 볼품없는 거 아는데.
“?”
- 너랑 같이 있으면 좋겠다.
“…….”
선우의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다.
- 아침에 눈 뜨고, 밤에 눈 감을 때마다 그냥 네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저녁에는 같이 식사하고, 휴일에는 같이 영화 보고. 답답하면 차 타고 나가서 같이 공원 한 바퀴 돌고 들어오고. 이거, 너무 내 욕심인가?
“…….”
그러다 이내 가던 길을 완전히 멈춰 섰다.
- 대답 안 해도 돼. 부담 주려고 한 말은 아니야.
“아니에요, 대표님.”
선우가 일순 똑 부러지는 어투로 말했다.
“욕심, 아니에요. 저도 그래요. 저도 매일매일 매 순간마다 대표님 생각해요.”
오늘도 운동하러 가셨을까, 지금쯤이면 퇴근하셨으려나. 저녁은 뭘 드셨을까, 요즘은 무슨 책을 읽으시지? 그의 일상에 대해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묻고 싶은데, 행여라도 일에 방해될까 봐 꾹꾹 참는 것이 요즘 선우가 가장 많이 하는 행동이었다.
선우의 말을 듣고 태성이 나직이 웃었다.
- 얼굴 보고 싶은데. 내가 지금 거기로 갈까?
“아니요.”
선우는 도롯가로 걸음을 옮겼다.
“제가 갈게요.”
붉은빛을 내며 달려오는 차들을 향해 선우가 손을 번쩍 드니, 곧 그의 앞에 주황색 택시 한 대가 멈춰 섰다.
***
눈이 내리는 크리스마스이브 날이었다. 책상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에서는 경쾌한 캐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기분이라도 내볼까 싶어 선우가 틀어 놓은 것이었다.
선우는 오늘 하루 종일 집 정리를 하는 중이었다. 기나긴 상의 끝에 선우는 태성의 집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정확히는 한 사람의 일방적인 설득과 한 사람의 끊임없는 고민이었지만 두 사람은 그걸 상의라고 불렀다. 마침 지어진 지 30년이 넘은 아파트가 재건축을 계획하고 있어 어디로든 이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기는 했다.
어차피 남자의 집에는 없는 게 없으니 정말 필요한 것만 챙기고 나머지는 전부 버리기로 했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짐이 많은 건지. 부모님의 신혼집이었고, 제가 태어날 때부터 살아온 이 집에는 정리할 것도 버릴 것도 태산이었다.
읏-차! 먼지가 풀풀 날리는 책들 사이에서 선우가 기지개를 쭉 켰다. 고개도 좌우로 늘리고 어깨뼈도 돌려 가며 굳은 몸을 풀고 있자니, 문득 뒤에서 큭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와, 세상에. 진짜 귀엽다.”
조금 전 선우의 집으로 퇴근한 태성이었다. 바닥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그는 대체 어디서 찾아온 건지 선우의 어릴 적 앨범을 들춰 보는 중이었다. 짐 싸는 걸 도와준다며 온 사람이 정작 거기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생겼지?”
무슨 사진 보고 그러는 거지…? 태성의 말에 선우는 무릎으로 기어 앨범 앞에 다가갔다.
“왜요?”
“이거 봤어요?”
태성이 오래된 사진 한 장을 선우에게 들이밀었다. 사진 속에는 피부가 새하얗고 볼이 통통한 어린 아기 한 명이 초콜릿을 먹고 있었다. 다 먹기도 전에 녹아 버린 건지 온 얼굴과 양손에 초콜릿이 범벅이었다. 사진 하단에 찍힌 날짜를 보니 제가 돌이 갓 지난 시점이었다.
“아, 진짜 핥아 먹고 싶게 생겼네.”
“……초콜릿 얘기하시는 거죠…?”
“그럼요. 초콜릿.”
태성은 대충 대답하며 앨범을 한 장 또 넘겼다. 이번에는 천사 같은 아기가 두 눈을 꼭 내리감고 낮잠을 자고 있었다. 태성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태성은 그 사진을 꺼내 앨범 옆에 따로 챙겨 두었다. 그리고 또 한 장 앨범을 넘겼다.
조그만 욕조에서 목욕하는 아기, 엄마 아빠와 생일잔치를 하는 어린아이, 놀이터에서 미끄럼틀을 타고 노는 꼬마, 겨울철에 동글동글 눈사람을 만드는 어린이. 빳빳한 종이가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마다 그의 입에서는 연신 미소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선우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물었다.
“아기 좋아하시나 봐요.”
“내가?”
“네.”
“글쎄?”
태성이 앨범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어린애 우는 소리라면 딱 질색이었지만 굳이 그 말을 선우에게 하지는 않았다.
태성의 상태를 보아하니 앨범을 전부 다 보기 전까지는 미동도 하지 않을 것 같아, 선우는 조용히 자리를 옮겼다.
“후회하지 않겠어?”
꼭 가져가고 싶은 책만 종이 상자에 차곡차곡 담아 넣는데, 태성이 넌지시 물었다. 무슨 소리인가 하고 보니 그는 선우의 대학 시절 전공 책을 쓰다듬고 있었다. 앨범은 그새 다 본 모양인지 맨 끝 장이 덮인 채 바닥에 뒤집혀 있었다.
“저 어차피 윗분들 눈치 보여서 이제 돌아가지도 못해요.”
선우가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혹시라도, 경찰이 계속하고 싶은 거면 얘기해.”
아직 사표 수리 전이니까 청장이 된 박우진에게 얘기하면 현장에 복귀할 수 있을 것이다. 본인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편한 보직으로 이동시켜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선우는 웃는 얼굴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제 미련 없어요. 대표님이야말로 후회하지 않으시겠어요?”
“뭘?”
“음. 저랑 같이 살기로 결정한 거?”
“내 인생에서 제일 잘한 선택인데?”
태성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말했다.
“제가 나중에 대표님 발목 잡고 늘어지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저 생각보다 엄청 끈질겨서 한번 잡으면 안 놔요.”
“바라던 바네.”
태성이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책 정리를 마친 다음은 옷 정리였다. 선우는 커다란 캐리어를 바닥에 펼쳐 놓고 태성에게 옷장 속에 있는 겉옷들을 넣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에게 큼직한 것들을 맡겨 놓고 선우는 속옷, 양말, 자잘 자잘한 여름옷들을 챙겼다.
“이건 누구 옷이야?”
태성이 불쑥 패딩 점퍼 하나를 꺼내 들고 물었다.
“아, 그거 시헌이가 준 건데.”
그런 게 있었지, 참. 선우는 제 옷을 보고도 낯선 얼굴을 했다.
색감과 패턴이 화려한 패딩은 시헌이 언젠가 옷장에 넣어 두고 간 것이었다. 디자인이 너무 요란해서 저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선우가 단 한 번도 꺼내 입은 적이 없는 것이기도 했다. 옷장에 걸어 넣으면서 시헌이 어디 유명한 브랜드 거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이름이 잘 기억나진 않았다.
“별로 한선우 스타일이 아닌데. 입을 거야?”
“아… 잘 안 입을 것 같긴 한데…….”
“그럼 이건 놓고 간다?”
태성이 방 한구석에 점퍼를 휙 내던졌다.
어, 어…! 선우는 구석으로 가 바닥에 떨어진 점퍼를 주워들었다. 이제 보니 옷 뒷덜미에 가격표가 그대로 달려 있었다.
아니, 근데 이게 뭐야. 영이 왜 이렇게 많아. 일, 십, 백, 천…… 사백… 팔십육만 원……? 지금 이 패딩이 486만 원이라는 거야? 선우는 눈이 휘둥그레져 점퍼를 앞뒤로 살폈다.
“이 코트는 한 번도 안 입은 것 같은데?”
그러는 사이 선우 앞에 베이지색 코트 한 벌이 툭 떨어졌다.
“아, 이건…….”
선우는 점퍼를 한 팔에 걸고 다른 쪽 팔로 코트를 집어 들었다. 이건 시헌이 예전에 선물로 준 것이었다. 왜 선물을 줬는지 이유는 잘 기억 안 나지만, 어쨌든 선물을 줬다. 제가 괜찮다는 데도 막무가내로 쇼핑백을 손에 쥐여 줬던 기억은 있었다.
너무 고급스러워서 특별한 날에나 입으려고 모셔 둔 건데. 안타깝게도 형사 일을 하는 저에게 이 코트를 입을 만큼 특별한 날은 오지 않았다.
그런데…… 코트 안쪽에 붙은 태그에 이거, 가격 맞나……? 육천 달러…? 육천 달러면 얼마야……? 헉, 김시헌 미쳤나 봐!
“이것도 잘 안 입지?”
휙, 이번에는 갈색 무스탕 재킷이 발치에 떨어졌다. 시헌이 주고 딱 한 번 입은 것이었다.
“이것도.”
그걸 주워들기가 무섭게 캐시미어 카디건이 휙, 가죽 재킷이 휙. 옷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구부린 선우 앞에 옷가지가 휙휙 떨어져 내렸다.
“아, 자, 잠깐만요!”
“왜?”
“이거 다 버리고 가라고요?”
“다 안 입는 옷들 아니야?”
어떻게 알았는지, 태성은 선우가 부담스러워서 손이 가지 않았던 옷들만 쏙쏙 골라 잘도 빼냈다.
“잘 안 입긴 해도 전부 새 건데요?”
“새 거면 뭐 해. 자리만 차지하지. 어차피 이거 가져가도 다 둘 곳도 없어.”
응? 이건 또 뭔 소리야. 선우가 고개를 기울였다.
“드레스룸 있잖아요.”
“좁아.”
“좁다고요? 엄청 넓던데? 지난번에 저 쓰라고 내주신 옷장, 아직 좀 비어 있으니까 거기에 넣으면 다 들어갈 것 같아요.”
“그러네. 그러고 보니 거기에도 옷이 있었네. 그럼 이거 뭐 하러 가지고 가. 그냥 몸만 오면 된다니까? 지내다가 필요한 거 있으면 그때 또 사요.”
그러면서 태성은 손에 든 옷을 또 하나 바닥에 휙 던졌다. 선우는 바닥에 널브러진 옷들을 주섬주섬 주워들며 말했다.
“싫어요. 옷이 이렇게 많은데 뭘 또 사요. 그리고 이거 다 너무 새거고 비싼 거라 버리기 아까워요.”
“그럼 누구 줘요. 주변에 입을 만한 사람.”
“네, 일단 가져가서 줄 만한 사람 천천히 생각해 볼게요.”
선우는 양팔 가득 품에 안은 옷들을 캐리어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 벌씩 접어 캐리어 안에 가지런히 담아 넣었다. 태성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선우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선우를 따라 조용히 옷을 개는 그의 입술이 못마땅함에 삐죽 튀어나왔다.
“어? 이건 뭐예요?”
이젠 좀 도와주나 싶더니, 겉옷을 정리하다 말고 태성이 또 말을 걸었다. 그는 한 팔에 선우가 가을 동안 자주 입고 다녔던 야상 재킷을 걸고 있었다. 반대쪽 손에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꺼낸 물건이 들려 있었다.
“어? 맞다! 그거 제출해야 하는데!”
은색 빛을 반짝이는 물체는 수갑이었다.
“퇴직 전에 반납해야 하는데 깜빡했어요. 요즘 인수인계한다고 정신이 없어서. 다음 주에 한 번 더 출근하니까 그때 제출해야겠어요.”
선우는 태성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
태성은 말없이 선우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그의 손목에 착, 하고 수갑을 채웠다.
“……하. 뭐 하시는 거예요.”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이러시나. 선우는 제 손목을 가만히 보다 설핏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태성이 손목에 걸린 수갑을 몇 차례 잡아당겼다. 철컹철컹, 은색 얇은 고리에서 청명한 쇳소리가 났다.
“오, 진짜 안 풀리네.”
“당연하죠. 이거 진짜 체포할 때 쓰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요? 열쇠는 어딨어요?”
“거기 반대쪽 주머니에 있을걸요?”
“그렇구나.”
태성이 선우의 옷 주머니를 뒤져 수갑 열쇠를 찾아냈다. 선우는 열쇠를 달라는 의미로 그에게 반대 손을 내밀었다. 태성은 선우의 손을 무시한 채 열쇠를 제 베스트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이어 선우의 반대쪽 손목에도 착, 수갑을 채웠다.
“이거 반납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만 써 볼까?”
“……네?”
그의 얼굴에는 짓궂은 미소가 피어 있었다.
***
철컥.
“하하……. 대표님, 이건 좀…….”
반질반질 웃는 낯을 한 남자는 쇠고랑 사이를 연결하는 고리에 손가락을 걸고 선우를 침대로 이끌었다. 침대 위에 선우를 앉힌 그는 베스트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수갑을 풀었다. 분명 풀었었다. 선우는 그때 손목을 빼고 도망쳤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태성은 헐거워진 수갑을 한쪽만 빼내더니, 다른 한쪽은 선우의 손목에 맞게 다시 조였다. 그러고는 수갑을 쭉 끌어당겨 침대 헤드의 나무살 사이로 둘렀다. 수갑에 팔이 딸려 간 선우는 어, 어, 하는 사이 침대 머리맡에 앉아 있었고, 상황을 파악했을 때는 이미 나머지 손목에도 수갑을 찬 채였다.
“대표님. 제가 오늘 하루 종일 짐 정리하느라 지금 먼지를 엄청 뒤집어썼거든요.”
선우가 손목에 걸린 수갑을 보며 말했다.
“그래서?”
“엇…!”
태성은 선우의 다리를 아래로 쭈욱 잡아당기며 되물었다. 저를 끌어내리는 힘에 선우는 순식간에 침대 위에 발라당 등을 대고 눕게 되었다. 자연스레 엇갈린 양팔은 침대 헤드에 고스란히 매달려 있었다.
“그러니까, 좀 씻기라도 하고 하시는 게…….”
“내가 뭘 하는데?”
태성은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을 하고 수갑 열쇠를 베스트 주머니 속에 쏙 집어넣었다.
“농담 아니구. 저 지금 진짜 더러워요.”
“잘됐네. 얼른 한 판 하고 같이 씻자.”
그리고 그는 선우의 두 다리를 양쪽으로 활짝 벌렸다.
슬금슬금 무릎으로 걸어 선우의 가랑이 사이에 붙어 앉은 태성은 선우를 내려다보며 베스트 단추를 풀었다. 톡, 톡, 톡, 세 개뿐인 단추를 간단히 풀어내고, 그는 베스트를 바닥으로 벗어던졌다. 하얀 와이셔츠 차림이 된 그는 커프스단추를 끌러 소매를 걷어 올리고는 이어 손목에 걸린 시계마저 풀어 헤쳤다.
묵직한 시계가 베스트 위로 툭 떨어지고, 잠시 후 와인 빛깔 넥타이가 그 위에 사락 내려앉았다.
“뭐야. 싫은 척하더니 여긴 왜 벌써 이렇게 됐어.”
“아…….”
선우의 벌어진 고간에 커다란 손이 얹어졌다. 체온이 높은 손바닥이 바지 지퍼 위를 지그시 누르며 주위를 뭉근하게 비비자, 선우가 볼을 붉히며 입에 고인 침을 꼴깍 삼켰다.
지이익-
태성은 그런 선우를 뚫어질 듯 응시하며 지퍼를 끌어 내렸다. 날카로운 눈빛과는 다르게 양쪽으로 한껏 끌어올린 입매는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매섭고도 달콤한 그의 미소가 아찔하다고 느끼는 순간, 선우의 두 다리에서 옷가지가 홀랑 빠져나갔다. 입고 있던 청바지와 속옷이 한꺼번에 벗겨진 선우는 하얀색 맨투맨 티셔츠 한 장만을 남겨 둔 채 일순간 반나체가 되었다.
“으핫…!”
통, 태성이 선우의 성기를 손가락으로 살짝 튕겼다. 붉게 달아오른 것이 고새 천장을 향해 머리를 들고 있었다.
“하여간. 안 그런 척하면서 가만 보면 되게 밝힌다니까?”
“하…….”
선우는 한숨 같은 신음을 내뱉고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제게 시선을 박아 놓고 옷 단추를 푸는 남자가 너무 섹시한 걸 어쩌겠는가. 턱을 쳐들고 내리깔린 눈으로 저를 쳐다보며 시계며 넥타이를 벗어 던지는 남자에 선우는 하반신에 피가 몰리고 입안에 침이 고였다.
얼굴 전체가 후끈하게 달아오른 선우는 조용히 다리를 움츠렸다. 저 혼자만 붉으락푸르락 핏줄이 선 성기를 내놓고 있는 것이 못내 부끄러웠다.
그 사이 태성은 침대 옆에 놓인 작은 책장에서 젤을 집어 들었다. 연애를 하기로 하고 주말마다 선우의 집에 드나드는 태성이 이 방에 제일 먼저 가져다 놓은 물건이었다.
그가 하얀 튜브를 손에다 대고 쭉 짜내자, 투명한 젤이 그의 손가락 위로 울컥 쏟아져 나왔다.
“앗! 차가…!”
태성은 선우의 다리를 좌우로 벌리며 아물어진 살 틈 사이로 손가락 하나를 곧장 밀어 넣었다. 내벽에 젤을 둥글게 펴 바르며 마디 끝까지 손가락을 집어넣으니, 차가운 감촉에 선우가 허리를 움츠렸다.
태성은 빈손으로 선우의 한쪽 허벅지를 단단히 잡았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빼냈다가 손톱이 입구 끝에 닿을 때쯤 하나를 더 붙여 안으로 깊게 밀어 넣었다.
“아…!”
차가운 젤은 뜨뜻한 체온에 금세 냉기를 잃었다. 물컹물컹한 감촉만 남은 젤이 태성의 손가락을 따라 내벽 안을 뒹굴다가 차츰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배 속을 은근하게 녹여 내는 촉감에 선우가 다리를 꼼지락거렸다.
그 순간, 둥근 손끝이 전립선을 쿡 찔러 올렸다.
“아흣!”
그리고 꾹, 꾹, 손가락 두 개가 같은 부위를 연신 찍어 눌렀다. 아랫배가 뻐근하고 속이 근질거려서 선우가 팔다리를 오므리며 움찔거렸다. 그러자 침대 헤드에서 찰캉하고 맑은 쇳소리가 울렸다.
“아으으… 대표니임…….”
“응?”
“이것 좀… 풀어 주세요…….”
찰캉, 찰캉. 선우가 수갑이 걸린 손목을 흔들며 말했다.
“아파?”
“아뇨. 그건 아닌데에…….”
“그럼?”
수갑 안쪽으로 실리콘이 둘러 있어서 손목이 아픈 건 아니었다. 다만 아랫도리에 계속 자극이 오는데 팔을 움직이지 못하니 답답해서 그랬다. 몸이 자꾸 달아올라 저도 그를 만지고 껴안고 입을 맞추고 싶은데 그걸 못 하니 갑갑해서. 그걸 얘기하니 태성은 미소를 머금고 선우의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그건 내가 해 주면 되지.”
그리고 그는 선우의 다리 사이로 몸을 낮게 낮췄다.
벌어진 가랑이 사이로 얼굴을 파묻은 그는 혀를 길게 빼 선우의 성기를 밑동부터 핥아 올렸다. 어느덧 세 개로 늘어난 손가락은 여전히 내벽 안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흐으…… 아, 아…….”
안에서는 손가락이 전립선을 자근자근 눌러 대고, 밖에서는 혓바닥이 성기의 기둥을 쓸어올리니 금방이라도 이성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저와 얼마 차이 나지 않는 체온으로도 제 속을 녹이고 지지고 달궈 놓는 남자에 몸이 저절로 비비 꼬였다. 선우는 애가 달아서 침대 시트에 허리와 엉덩이를 딱 붙이고 하체를 이리저리 뒤척였다.
“헉! 흐앗!”
그러자 큼지막한 손이 제 엉덩이 한쪽을 콱 틀어쥐었다. 밑을 쑤셔 대던 손가락은 갈퀴처럼 구부려져 내벽을 벅벅 긁어내렸다.
“아! 앗! 하앗! 으응…!”
선우는 양 발바닥을 침대 시트에 대고 마구 문댔다. 팔은 침대에 붙들리고, 하체는 남자에게 붙들리니 움직일 수 있는 게 발뿐이었다.
“대표님, 대표님! 이제 그만……!”
선우는 침대 위에 대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리고 태성에게 차라리 이만 넣어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태성은 씨익 웃더니, 선우를 보며 보란 듯이 성기를 핥아 올렸다. 넓게 편 혓바닥이 기둥을 천천히 타고 올라 귀두 끝에 닿자 그는 혀끝으로 힘을 바짝 모았다. 끝이 세모꼴이 된 혀는 곧 선단의 갈라진 틈 사이를 파고들었다.
“아, 악! 대표니이임! 이거…! 흣, 그마안……!”
축축하고 뭉툭한 것이 요도를 비집고 후벼 대자 등허리에 찌릿찌릿 전기가 내렸다. 선우는 허공에서 다리를 바동거리다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빽 질렀다. 큭큭, 태성은 목을 울려 웃고는 내벽을 쑤시던 손가락을 서서히 빼냈다. 동시에 귀두 끝을 앙 물더니 쪼옵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빨았다 뗐다.
“하… 진짜아…….”
태성의 얼굴이 성기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자, 선우는 힘이 풀린 다리를 아래로 쭉 뻗었다. 머리로 열이 올라 뜨끈뜨끈해진 두 눈은 위로 뻗어 있는 팔에 비벼 열기를 식혔다.
아직 제대로 하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진이 빠지지. 선우가 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
“이제 진짜 풀어 주세요…….”
“무슨 소리야. 이제 시작인데.”
태성은 그새 옷을 벗고 있었다. 시원시원하게 단추를 따 셔츠를 훌훌 벗어 던지니, 탄탄하고 매끈한 상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한 손으로 허리춤에 있는 벨트와 버클을 풀어 헤치며, 다른 쪽 팔로는 선우의 다리를 들어 올렸다. 하의는 대충 허벅지까지 끌어내리고는 그는 나머지 팔에도 선우의 다리를 걸쳤다.
그리고 쪽, 선우의 아랫배에 입을 맞췄다.
하아아아…….
쪽, 쪽, 쪽. 곧이어 쏟아지는 뽀뽀 세례에 선우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음모 바로 윗부분을 시작으로 태성의 입술은 선우의 상체를 차근차근 거슬러 올라갔다. 치켜뜬 두 눈은 오로지 선우의 두 눈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쪽, 단전을 지나 배꼽을 싸악, 혀끝으로 훑어내고 또 이내 쪽, 쪽. 중심을 타고 올라온 입술은 명치끝에 조금 길게 머물렀다. 그러는 동안 상의 속을 파고든 손은 선물 포장을 조심스레 벗겨 내듯 하얀 맨투맨 티를 살금살금 들춰 올렸다.
“이번엔 또 뭐가 마음에 들었어?”
태성이 선우의 티셔츠를 가슴 위쪽까지 말아 올리며 물었다.
“하아, 뭐가요……?”
양팔에는 여전히 선우의 다리를 걸친 채라, 선우의 옷을 들어 올리려고 팔을 위로 뻗으니 두 다리가 양쪽으로 활짝 벌어졌다. 그 덕에 엉덩이골 사이에 태성의 성기가 스치듯 닿았다.
“눈 반짝거리는 게 뭐가 마음에 든 눈친데.”
“흐응…….”
태성이 선우의 젖꼭지에도 입을 맞추며 묻자, 선우가 그의 성기에 엉덩이를 비볐다. 살짝살짝 붙었다 떨어지는 성기가 감질났다.
“이게 마음에 든 거야,”
“아…!”
태성이 혀를 내밀어 선우의 유륜을 넓게 핥아 올렸다.
“아니면 이게 마음에 든 거야?”
이번에는 성기로 회음부를 문댔다.
으으응, 그의 행동에 코끝에서 비음이 절로 나왔다. 제가 진짜 눈을 반짝거렸나 싶긴 한데, 사실 선우는 정말로 마음에 든 게 있기는 했다. 물론 이것도 저것도 다 마음에 들지만 그중에 제일 좋은 건 그의 눈빛이었다. 날카롭게 치켜뜬 채 저만을 주시하는 뜨거운 눈빛. 남자가 그 눈빛을 하고 쳐다보면 저는 그를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렸다.
“비밀, 이에요…….”
그래도 속마음을 말하는 건 부끄러웠다.
“그래. 뭐든, 네 맘에 들면 됐지.”
태성은 그러고 선우의 젖꼭지를 입에 물었다.
“흣!”
색이 연한 유륜에 입술을 바짝 마찰시켜 놓고 작은 돌기를 힘껏 빨아당기니, 그 작은 것이 입안에서 빳빳하게 굳으며 크기를 키웠다. 태성은 뽈록 솟은 돌기를 혀로 돌돌 굴리다 이빨로 살살 긁었다. 그러다 끝내는 앞니로 물고 좌우로 잘근잘근 씹었다.
“앗! 아파…!”
선우가 몸을 움츠리며 상체를 뒤로 빼냈다.
태성은 성난 젖꼭지를 혀로 꾸욱 눌러 달래 주고는 쇄골로 입술을 옮겼다. 그와 동시에 선우의 다리 밑에서 한 손을 빼내 그의 가슴을 넓게 쓸어 만졌다. 쪼옥, 연한 살을 빨아올리며 손바닥으로는 깨물지 않은 쪽 꼭지를 문대다가, 태성은 불쑥 선우의 티셔츠를 위로 끌어올렸다.
어…?
도톰한 셔츠 자락이 선우의 머리를 폭 덮었다.
“아… 대표님, 앞이 안 보여요…….”
순식간에 얼굴에 옷을 뒤집어쓴 선우는 온통 하얘진 시야에 당황했다.
“응. 안 보이라고 한 거니까.”
태성은 아직 뽀뽀를 받지 못한 젖꼭지에 진하게 입을 맞췄다. 그러면서 성기를 선우의 벌어진 엉덩이 사이에 가져다 댔다. 빠꼼 벌어진 구멍 입구에 귀두 끝을 맞추고 쿡 찔렀다 빠지니, “흣!” 선우가 눈에 띄게 몸을 움직거렸다.
태성은 아예 양팔로 선우의 상체를 끌어안고 본격적으로 가슴을 빨기 시작했다. 쫍, 쫍, 돌기 끝에 입을 맞추다 유륜 전체를 입에 담아 뻑뻑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흡입했다. 그러는 동안 선우의 다리 사이에서는 둥근 귀두 끝이 구멍 입구를 깔짝거렸다.
“아, 아응! 아아……!”
쿡 찔렀다 빠지고, 또 쿠욱 찔렀다 빠지고.
엉덩이에 힘을 바짝 쥔 선우가 허리를 위로 들어 올렸다. 애가 타서 미칠 것 같았다. 성기가 들어올 것 같아서 긴장하고 있으면 쑥 빠져나가고, 이번에는 정말 들어올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으면 또 쑤욱 빠져나가 버렸다. 남자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이지도 않으니 드나드는 타이밍도 예상이 안 됐다. 마음 같아선 그의 성기를 잡아끌어서라도 밑을 채워 넣었으면 싶은데, 팔이 묶여 있으니 그것도 할 수가 없었다.
“흐으으…… 대표니임…….”
선우는 결국 두 다리로 태성의 둔부를 휘감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회음부에 그의 성기가 비벼졌다.
“넣을까?”
“응, 으응. 빨리……!”
머리 위에 뒤집어쓴 옷 안에서도 선우는 고개를 열렬히 끄덕였다.
“흐읏!”
이윽고 그의 성기가 작게 벌어진 구멍 사이를 제대로 비집고 들어왔다. 둥근 귀두가 좁은 내벽에 길을 내며 파고들고, 뒤이어 단단한 기둥이 쫀득한 점막을 안으로 밀어 올렸다.
이 비좁은 내벽의 생리를 너무 잘 아는 태성은 몸의 주인이 좋아하는 곳을 단번에 찾아냈다. 전립선 주위를 성기 끝으로 쿡쿡 찌르다가 이내 성기를 깊숙이 욱여넣으며 기둥으로 전립선을 비벼 주니, 곧 선우가 상체를 휘어 가며 자지러졌다.
“아, 아! 흐읏, 대, 대표님…! 아, 이거, 너무… 흣…….”
“하, 한선우,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아앗…!”
태성은 허리를 뒤로 길게 빼냈다가 다시 위로 세게 치받았다. 구멍 입구에서 성기가 귀두만 남겨 두고 빠졌다가 다시 안으로 쑤욱 빨려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아, 어떡, 해…! 앗, 아응……!”
찰캉, 수갑이 차인 손목이 아래로 꺾이고 손가락이 동그랗게 오그라들었다. 티셔츠 안에서 선우는 눈을 질끈 감으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다른 감각들이 한껏 예민해졌다. 특히 그의 성기가 안을 파고드는 느낌이 너무 생생하고 또렷했다. 제 점막이 그의 성기에 들러붙고 내벽이 기둥을 조이는 것이 스스로 느껴질 정도였다. 전립선을 찌르고 비비는 느낌은 또 얼마나 자극적인지, 정신줄을 놓고 있다가는 사정액을 줄줄 싸 버릴 것만 같았다.
“대표, 님. 조금만, 살, 살… 학……!”
선우의 말에 태성은 성기를 뿌리 끝까지 밀어 넣었다. 그리고 선우의 말대로 정말 살살, 허리를 잘게 쳐올렸다. 연신 추삽질을 하며 그는 선우의 가슴팍에 입술을 묻었다. 유륜을 혀로 핥고 유두를 쪽쪽 빨다 선우가 아프다고 칭얼대면 또 반대쪽 유두를 이빨로 자근자근 짓씹었다.
선우는 딱 미칠 노릇이었다. 살살하랬더니 제일 깊은 곳까지 성기를 밀어 넣고 전립선을 지분거리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살갗이 간지럽다 못해 따끔거릴 때까지 가슴을 물고 빨았다. 성감대에 직접 닿는 감각만으로도 환장할 것 같은데 상황을 노골적으로 알려 주는 소리도 사람을 미치게 했다. 미끈한 젤이 짓이겨져 찌걱대는 소리도, 맨살을 힘차게 빨아올리느라 뻑뻑거리는 소리도 전부 제 성욕을 끝없이 부추겼다.
“아, 응, 읏…!”
아, 이제 진짜 더는 못 참겠는데…….
선우는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제 성기를 쥐고 흔들고 싶었다.
“아읏!”
그걸 어떻게 알고, 태성은 한 손을 아래로 뻗어 선우의 성기를 감싸 쥐었다. 다른 한 팔은 선우의 머리 옆에 내려놓고 팔꿈치로 상체를 지탱한 그는 허리로 연방 밑을 쳐올리며 선우의 성기를 잡고 흔들었다. 그가 허릿짓을 할 때마다 선우의 머리 위에서 찰랑찰랑 맑은 쇳소리가 울렸다.
아흑! 일순 선우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천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넘어오는 남자의 거친 숨소리와 뜨거운 숨결이 저를 한계까지 달아오르게 했다. 입안에 자꾸 침이 고이는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아 까딱하면 침을 질질 흘릴 것만 같았다.
“아, 아아, 대표님, 저, 흐으… 하, 아아……!”
“하, 이렇게 하니까, 뽀뽀 못 하는 건 고역이다, 그치?”
태성이 선우의 옷자락을 휙 끌어 내리며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흐으, 응, 응.” 머리가 부스스 흩어진 선우가 고개를 정신없이 주억거렸다. 새빨개진 얼굴에 축축이 젖은 눈을 하고 머릿짓을 하는 선우를 보고 태성은 씨익 웃으며 입술을 맞물렸다. 그러고는 선우를 꽈악 껴안으며 추삽질에 박차를 가했다.
“읍, 응, 으읍, 읏, 흐으으읏…!”
선우는 틀어 막힌 입으로 신음했다. 입안에는 그의 혓바닥이, 아래로는 그의 성기가 빈틈없이 꽉꽉 들어찼다. 저를 힘껏 끌어안은 남자의 몸이 맨살에 비벼졌다. 탄탄한 가슴 근육에 젖꼭지가 문대지고, 딱딱한 아랫배에 성기가 짓눌리니 머릿속이 혼미해졌다. 이미 한참 전에 지린 선액은 그의 아랫배에 처발린 지 오래였다.
“흣, 대표님! 저, 진짜, 흡, 더는, 아윽…!”
선우는 머리를 저어 가며 맞붙은 입술을 떼어 내고는 다리로 태성의 허리를 세게 조여 안았다. 딱 붙은 두 사람의 배 사이에서 진득한 정액이 서서히 퍼져 나갔다.
“하, 돌겠네.”
“하으, 으응…….”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선우가 부들 떨었다. 쉽게 가시지 않는 여흥에 내벽이 멋대로 움찔거리며 수축했다.
“헉, 한선우 씨. 오늘 반응, 왜 이래.”
“흐으, 몰라요…….”
“너, 지금 밑이, 하아.”
부드럽고 말랑거리는 점막이 성기를 오물오물 물었다 놓았다. 갑자기 사정감이 치솟아, 태성은 선우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숨을 골랐다.
“하아, 알고 보니 묶이는 거 취향 아니야?”
“아니에요.”
선우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님 눈 가리는 게 취향이었나?”
“아니, 에요. 아, 아니야.”
선우도 저도 격한 감정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듯해, 태성은 골반을 서서히 돌리기 시작했다. 성기를 깊숙이 넣은 채로 안을 뒹굴려 주는 건 선우가 좋아하는 애무 중의 하나였다. 사정 후 여운이 남았을 때 이렇게 성기로 내벽을 천천히 문질러 주면 금세 흐물흐물 녹아서 다시 제게 달라붙곤 했다.
“아, 아…….”
선우는 예상대로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좋아?”
“으으응, 네. 좋아요오…….”
하여간, 정말 좋을 때는 빼는 법이 없었다. 태성은 선우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붙들고 허리를 빙글 돌렸다. 그러다 한 번씩 성기를 살짝 빼내 안을 얕게 치받았다. 그 잠깐 사이에 느끼는 곳을 제대로 찔러 넣었는지, 몇 차례 들락거리기가 무섭게 선우는 금방 풀어진 눈을 했다.
“아! 응…!”
태성은 이번에는 성기를 좀 더 길게 뺐다가 밑을 빠르게 쳐올렸다. 그러자 선우가 양쪽 엉덩이를 바싹 오그라뜨리며 허리를 공중으로 띄웠다. 이때다 싶어 그는 양손에 쥔 엉덩이를 안으로 모아 붙이며 제 성기를 크게 뺐다 거세게 밀어 넣었다.
빼낼 때는 구멍 입구에 선단만 겨우 남을 정도로 길게, 다시 집어넣을 때는 한순간에 음모가 닿을 만큼 깊게, 연달아 성기를 넣었다 빼니 선우가 고개를 젖히고 머리를 침대 시트에 마구 비볐다.
“아흑, 흣! 아, 아, 흡…!”
선우의 다리가 허공에서 힘없이 흔들렸다. 하체를 격하게 몰아붙이는 남자 덕에 두 다리가 힘이 풀려 후들후들 떨렸다. 전립선은 수도 없이 짓눌려 이제는 내벽에 그의 성기가 스치기만 해도 아랫배가 징징 울렸다. 사정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또 분출하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헉!”
그 생각을 하자마자 돌연 성기가 찌릿했다.
“헉, 허억! 그만요…!”
선우가 다급히 말했다.
“흣, 대표님, 아, 그만!”
“응? 후, 조금만.”
“빨리, 학, 빨리, 하시면, 안 될까요?”
선우는 느닷없이 울상이 되어 있었다.
“빨리, 하라고?”
선우의 말에 태성이 더 빠르게 허릿짓을 했다. 그러자 선우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아, 악, 아니! 아니, 에요! 아…! 빨리, 싸, 싸세요…!”
“갑자기? 조금만 더, 해.”
“흣, 아, 아! 빨리, 하셔야, 흑, 될 것, 같은데…?”
아, 이, 이거, 느낌이, 이상한데……? 갑작스런 요의에 몸이 좌로 우로 비비 꼬였다. 선우는 아랫배에 힘을 꽉 주고 버티다가, 이내 두 다리를 태성의 골반에 딱 붙였다.
“아, 잠깐, 잠깐. 대표님, 진짜, 흣, 그만하세요.”
“왜. 또 쌀 것 같아서?”
“네, 아니, 네, 그게 아니라….”
“해. 그게 뭐라고, 새삼.”
태성이 골반으로 선우의 엉덩이를 쿡쿡 쳐올렸다.
“아니, 아니, 아아, 그게 아니라요.”
“나도, 이제 못 멈춰.”
“아, 저 진짜, 화장실, 흣, 화장실, 가야 해요…!”
찰캉, 찰캉. 선우가 상체를 좌우로 뒤틀고 손목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래도 태성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자, 선우는 머리를 정신없이 내저으며 태성을 발로 밀어냈다.
“대표님! 그만! 아으, 아, 아! 아아……!”
“하아…….”
태성이 성기를 끝까지 욱여넣고 입구에 치골을 문대며 사정했다. 안쪽 깊은 곳까지 남자의 정액이 퍼지자, 선우는 순간 엉덩이에 힘이 쭉 빠졌다.
“아흑! 아, 아, 어, 어떡해…….”
동시에 조르르륵, 맞닿은 뱃가죽 사이로 뜨끈하고 맑은 액체가 졸졸 흘러내렸다.
흐아……, 선우는 고개를 획 돌려 팔뚝에 얼굴을 묻었다. 너무 창피해서 도저히 남자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티를 내고 싶지 않은데 팔다리는 물론이고 하반신이 연신 옴짝옴짝 제멋대로 경련했다.
아, 흐읍, 흐으으으…….
“한선우. 울어…?”
얼핏 흐느끼는 듯한 소리에 태성이 놀라 물었다.
“왜 그래, 갑자기?”
“제가, 흐으, 그만하시라고 했잖아요…….”
응? 태성은 성기를 빼내며 선우를 살폈다.
“화장실, 가고 싶다고 했는데에…….”
“아……. 혹시, 이거 때문에 그래?”
태성이 선우의 배를 타고 흐른 액체를 손가락으로 훑어냈다. 선우는 꼼짝없이 얼어붙어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이거 이상한 거 아니야. 봐.”
태성의 말에 선우는 한쪽 눈은 여전히 팔뚝에 묻은 채로 한쪽 눈으로만 태성을 쳐다봤다. 그는 혓바닥을 길게 내밀어 손가락에 묻은 것을 할짝이고 있었다.
“으아악, 그걸 왜 드세요!”
“달다니까.”
선우는 질색을 하며 두 눈을 꽉 내리감았다.
“흐으으……, 이거나 얼른 풀어 주세요…….”
찰캉, 찰캉. 선우가 손목을 힘없이 흔들었다.
태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서 베스트를 집어 들었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온 그는 곧장 침대 헤드로 가 수갑을 풀었다.
하아, 마침내 자유가 된 선우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팠어?”
태성이 선우의 손목에서 수갑을 빼내며 물었다. 실리콘에 쓸린 살갗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태성은 선우의 팔을 끌어당겨 자리에 앉히고는 양 손목을 주물주물 주물러 주었다.
“아픈, 건, 아닌데에, 하…….”
선우가 팔을 축 늘어뜨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좀 얼얼하긴 해도 보는 것만큼 그렇게 아프진 않았다. 그보다는 그 앞에서 오줌도 정액도 아닌 것을 줄줄 싸지른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서 도무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신 이런 거 하지 마세요……. 기분… 진짜 이상하단 말이에요…….”
“응. 알겠어. 이제 안 할게.”
웃는 낯을 한 남자가 머리를 숙여 선우의 입술에 입을 쪽 맞췄다.
히잉, 선우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고는 몸을 웅크리며 침대 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
지잉, 지잉.
이른 아침부터 핸드폰이 줄기차게 울렸다.
“으음…….”
끊이지 않는 진동 소리에 선우가 눈을 떴다. 손을 길게 뻗어 책장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을 집어 드니 별안간 메신저에 수백 개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선우는 어리둥절해 메신저를 켰다.
발신인은 주로 대학 동문들이었다. 개인적인 연락도 몇 개 있었지만, 대부분 단체 채팅방에서 온 메시지였다. 대학 동기방, 친한 선후배들이 모인 대화방, 같은 동아리 출신 동문방. 무슨 이슈라도 생긴 건지 지금 이 순간에도 채팅방 옆에 붙어 있는 숫자들이 하나둘 올라가고 있었다.
선우는 개중 맨 위에 있던 대학 동기들의 채팅방을 열었다. 그리고 잠시 동안 그 상태로 굳어 버렸다.
[속보] 살인 사건 무마 의혹, 김경택 전 경찰청장 극단 선택… 현장서 유서 발견
가장 처음 도착한 메시지는 한 친구가 오늘 아침 뜬 뉴스 기사를 공유한 것이었다. 선우는 기사 링크를 누르며 천천히 몸을 돌려 누웠다. 베개 위에 엎드린 채 기사를 읽어내리는 선우의 얼굴이 차츰 심각해지고 있었다.
“잘 잤어요?”
등허리로 문득 따뜻한 팔이 감겼다. 선우가 고개를 돌리니 조금 전까지 자고 있던 남자가 저를 향해 몸을 돌리고 있었다.
“대표님…….”
선우는 안색이 파리해진 채 그를 찾았다. 태성은 무슨 일인가 싶어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이내 곁눈으로 선우의 핸드폰을 쳐다봤다. 언뜻 기사를 발견한 그는 아예 팔로 턱을 괴며 자세를 제대로 잡았다. 그러고는 핸드폰 화면을 손가락으로 오르내리며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데일리코리아=민은주 기자] 부하 직원 살인 사건의 무마 의혹을 받고 있는 김경택(56) 전 경찰청장이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에 따르면 김 전 청장은 25일 오전 2시 30분쯤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경찰청 본관 건물 옥상에서 투신자살했다. 발견 당시 입고 있던 제복에서는 김 전 청장이 직접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유서가 함께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유서에는 ‘경찰관의 명예를 실추시킨 점에 대해 책임을 통감한다.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내용 등이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김 전 청장은 최근 2011년 고(故) 한재민 경감 살인 사건을 무마하고 사체를 유기한 혐의로 검찰에 구금돼 조사를 받은 바 있다.
“밤새 산타가 아니라 저승사자가 다녀갔나 보네.”
태성이 무미건조한 어투로 말했다.
“…….”
“왜 그렇게 봐?”
선우는 어두운 얼굴을 하고 태성을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머뭇거리던 선우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대표님.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건데……. 그 저승사자가… 대표님은 아니죠……?”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태성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나 아니야.”
“…….”
단박에 부인하는 태성에도 선우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태성은 기가 막혀 코웃음을 쳤다.
“진짜 아니야. 한선우는 도대체 평소에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나 사람 죽이고 그런 무서운 사람 아니야.”
태성은 맹세코 말할 수 있었다. 저는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비록 구치소에 구금되어 있는 동안 딱 살고 싶지 않을 만큼 피를 말려 놓긴 했다만, 결단코 그를 죽이지는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사람을 죽이는 일만큼은 제 영역이 아니었다.
“…….”
선우는 입꼬리가 삐죽 내려앉은 채 태성을 보다가, 한숨을 포옥 내리 쉬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왜 그래?”
선우가 말없이 머리를 저었다.
마음이 몹시도 불편했다. 저는 그들이 살면서 정당한 죗값을 받길 바란 거였지, 목숨을 끊길 바란 것이 아니었다. 아직 재판이 제대로 시작된 것도 아닌데, 결론이 나기도 전에 이렇게 세상을 떠나 버리니 꼭 제가 김경택 그자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 같지 않은가.
죄는 그대로 남았는데 죄를 지은 자가 사라지고 없으니, 죄책감은 도리어 피해자의 몫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태성이 선우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행여라도, 그자를 동정하거나 용서할 생각 같은 건 하지 마.”
“…….”
“일이 이렇게 됐다고 해서 네가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어. 그 사람은 목숨으로 너에게 용서를 구한 게 아니라, 사죄할 기회를 저버리고 도망간 거야.”
선우가 얼굴을 파묻은 상태에서 슬그머니 고개만 돌려 태성을 바라보았다. 신기하게도 그는 오늘도 제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가 지금 이 말을 해 주지 않았더라면, 저는 정말로 김경택을 동정하고 용서하고 또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가 곁에 있다는 사실에 선우는 새삼 감사함을 느꼈다.
“죽는 것만큼 쉬운 게 어딨어. 살아 있는 게 고통일 텐데.”
“…….”
그리고 혼잣말처럼 내뱉은 마지막 말에는 살짝 섬뜩함을 느꼈다. 아주 살짝.
“이제 뭐 할 거야?”
태성이 선우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오늘요?”
선우는 자연스레 태성이 누운 방향으로 몸을 돌리며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맨살인 두 사람의 몸이 서로에게 빈틈없이 맞붙었다.
“아니, 앞으로. 한선우 이제 백수잖아.”
“아……. 그러게요, 이제 뭐 하죠?”
“생각해 본 건 있어?”
“음……. 네. 하나 있긴 한데…….”
선우는 태성의 가슴께에 귀를 가져다 댔다. 쿵, 쿵, 힘차고 규칙적인 박동은 오늘도 선우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선우는 눈을 감고 남자의 심장 소리를 감상했다.
“뭔데?”
“나중에요. 한번 도전해 보고 잘되면 말씀드릴게요.”
“그래.”
태성이 선우의 허리를 더 꽈악 껴안으며 말했다.
“뭐든. 너 하고 싶은 거 해.”
“…….”
선우는 그런 태성을 물끄러미 올려보다가 고개를 위로 한껏 빼냈다.
“네. 지금은…… 이게 제일 하고 싶어요.”
그리고 쪽, 태성의 입술에 짧은 입맞춤을 남겼다.
“대표님. 메리 크리스마스.”
휙, 순식간에 몸이 돌았다. 어느새 선우는 침대에 등을 대고 누워 있었다.
“한선우도. 메리 크리스마스.”
선우의 입술 위로 부드럽고 따뜻한 숨결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