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꽃피는 봄이 오면
2023년 4월의 어느 날
한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법학강의동
“와, 씨. 형법 진짜 미쳤다. 지문 왜 이렇게 길어? 문제 읽다가 시간 다 갔네.”
아, 중간고사 완전 개망했어. 터덜터덜 복도를 걷던 이경현이 함께 걷는 선우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형, 시험 잘 봤어요?”
“어? 응. 뭐, 그럭저럭…?”
“엇, 이 반응 뭐야. 잘 봤나 보네? 안 어려웠어요? 난 기출이랑 겹치는 것도 별로 없어서 존나 당황했는데.”
“그래……? 기출 아닌 건 판례 전부 다 수업 시간에 교수님이 얘기하셨던 거잖아.”
“아니, 그게 몇 갠데 그걸 다 기억해요. 판례만도 책 한 권인데. 아씨, 뭐야. 나만 어려웠나?”
“이경현 바보냐?”
가던 길을 멈춰 서고 좌절하는 이경현의 머리를 누군가가 뒤에서 톡 쳤다.
“물어볼 사람이 없어서 이 형한테 형법을 물어.”
평소 선우와 비교적 친하게 지내는 동기 김재준이었다.
이경현은 제 뒤통수를 쓸어 만지며 김재준과 선우를 번갈아 봤다. 뭐? 왜? 자신이 맞은 이유를 영 모르는 얼굴이라, 김재준은 머리로 까딱 선우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형 경찰대 출신이잖아.”
“헉, 진짜? 형도 경력직 신입이었어요?”
눈을 댕그랗게 뜨고 묻는 이경현에 선우는 멋쩍게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형, 근데 경찰대 출신이면 승진도 엄청 빠르고 그런 거 아니에요? 나중에 막 경찰서 서장님도 하고.”
세 사람이 복도를 나란히 걷는 와중에 이경현이 선우에게 물었다.
“으응, 빠른 편이긴 하지…….”
선우는 마지못해 대답하며 말끝을 흐렸다.
“근데 왜 나왔어요? 공부한 거 아깝게. 돈 벌려고?”
“돈? 아니, 돈은 무슨.”
“야. 네 눈엔 이 형이 돈이 필요해 보이냐?”
김재준이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아, 하긴…….”
연달은 핀잔에 기분이 나쁠 법도 한데, 이경현은 별말 없이 김재준의 말에 곧바로 수긍했다.
이경현이 보기에도 동기 한선우는 확실히 돈이 아쉬운 사람은 아닌 듯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매일같이 명품으로 휘감고 다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어쩌다 한 번씩 몰고 오는 차는 ‘억’ 소리 나게 비싼 외제 차였고, 왼쪽 손목에 항상 차고 다니는 시계는 그 외제 차만큼이나 ‘억’ 소리 나게 비싼 브랜드이기도 했다.
그럼 진짜로 돈이 이유는 아니고……. 뭐 때문에 나온 거지? 자고로 집에 돈 좀 있으면 직업으로는 공무원이 최고랬는데?
이경현이 선우의 차림새를 살피며 의아해했다.
저를 보는 눈빛에 궁금증이 한가득이라, 선우는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그냥. 경찰이라고 해서 내 사람을 지킬 수 있는 건 아니더라고.”
“에엥? 그게 뭐예요. 그럼 변호사는 뭐 별수 있나?”
“그래도……. 내가 그 사람 편이 되어 줄 순 있으니까.”
문득 복도 창가에서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기운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살짝 열린 창밖 너머로 엷은 분홍빛 벚꽃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살랑살랑, 바닥으로 내려앉는 벚꽃 잎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선우의 얼굴에 언뜻 꽃잎만큼이나 맑고 화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얘들아. 나 이만 가 봐야겠다.”
선우가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말했다.
“예? 가긴 어딜 가요? 시험도 끝났는데 뒤풀이해야지!”
“나 선약이 있어서.”
“아아, 안 돼요. 형 안 온다고 하면 여자애들도 다 안 올 거란 말이에요오!”
이경현이 선우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그래도 슬그머니 웃기만 할 뿐 선우가 반응이 없자 김재준이 물었다.
“선약 누구요? 여자 친구?”
“음……. 애인.”
“헉! 애인이래, 애인. 이 형 여자 친구도 있었어. 형 도대체 없는 게 뭐예요?”
너스레를 떠는 이경현을 향해 선우는 사르륵 눈을 접어 웃었다.
“나 먼저 갈게. 다음 주에 보자!”
그러고는 그의 팔을 툭툭 치고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선우는 단숨에 계단을 뛰어내려 1층으로 향했다.
선우가 정문 앞에 도착했을 때, 투명한 유리문 너머 벚꽃 나무가 심어진 도롯가에는 새하얀 SUV 한 대가 서 있었다.
또 그 앞에는 저를 보며 웃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선우는 제 앞을 가로막고 있는 문을 세게 밀었다. 그리고 문이 열림과 동시에 힘차게 달려 나갔다.
살랑살랑, 벚꽃 잎이 내려앉는 그곳을 향해.
따뜻한 봄바람을 몰고 온,
그를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