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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 꽃피는 봄이 오면, 그 후 (18/19)

외전 2. 꽃피는 봄이 오면, 그 후

“빨리 오셨네요?”

태성의 앞에 선 선우가 맑게 웃으며 물었다.

“방금 도착했어. 시험은 잘 봤어?”

“음, 네.”

목소리에 제법 확신이 차 있었다.

“며칠 동안 밤에 안 괴롭히고 꾹 참은 보람이 있네.”

짓궂게 웃는 태성을 보고 선우가 콧등을 찡긋 구겼다 폈다.

“근데 대표님. 오늘 진짜 멋있으시네요.”

선우가 태성을 위에서부터 차근히 훑으며 말했다.

평소에도 늘 그럴싸하게 차려입는 남자지만 오늘따라 유독 더 빛이 나는 듯했다. 까만 정장에 까만 넥타이, 까만 구두. 남들도 다 입는 평범한 정장일 뿐인데, 왜 그가 입으면 이렇게 번쩍번쩍 빛이 나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잘 보여야 할 사람들이 있어서. 타.”

얼굴에까지 빛나는 미소를 머금고, 태성은 조수석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의 에스코트로 자리한 SUV, 그 뒷좌석에는 핑크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꽃다발 세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

살짝 열어 둔 차창 사이로 따뜻한 봄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태성의 차는 국립서울현충원을 향해 달렸다.

1년여에 걸쳐 양승준의 재판이 모두 끝이 나고, 올해 초 한재민 경감의 순직이 인정되었다. 증거불충분으로 양승준이 한재민 살해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 판정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랬다. 재판 결과에 대한 여론의 부정적인 분위기도 영향을 미치기는 했지만, 무엇보다 경찰청장이 인사혁신처에 적극적으로 순직 인정을 요구해 준 덕이 컸다.

아버지의 순직이 인정되고 선우가 가장 먼저 한 것은 현충원으로의 이장 신청이었다. 태성이 몇 차례나 관리가 더 잘되는 곳으로 옮기는 것이 어떻겠느냐 물었으나, 선우는 매차 이곳을 고집했다.

제 아버지라면 분에 넘치는 묘소는 부담스러워할 것이 뻔했을뿐더러, 마지막까지도 경찰로 남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명예로이 여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마침 보훈처의 도움으로 배우자 합장까지 받아들여지자, 선우는 일말의 고민 없이 부모님을 이곳으로 모셨다.

두 분의 묘소를 이장하던 날, 선우는 새 묘비 앞에서 다시 없을 만큼 눈물을 쏟아내었다. 웬만해선 멈추지 않을 것 같더니, 선우는 의외로 집으로 돌아갈 때는 눈물을 모두 거둔 채 후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때쯤부터였을 것이다. 선우가 울적한 기색 하나 없이 오로지 해말간 웃음만을 지을 수 있게 된 것이.

경찰관 묘역에 도착하자, ‘경정 한재민’과 그 배우자의 묘가 두 사람을 반겼다. 순직과 더불어 1계급 특별 승진까지 추서된 한재민이었다.

“엄마, 아빠. 저 왔어요. 아가도 안녕?”

선우는 품에 안고 있던 꽃다발 세 개 중 두 개를 묘비 양옆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제 옆에 선 남자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대표님도 같이 왔어요.”

태성은 말없이 빙긋 웃었다. 이제는 늘 함께 오는 터라 굳이 의식할 필요가 없는데도, 선우는 매번 부모님에게 그를 인사시켰다.

“동생 선물도 있다며.”

“아, 맞다!”

선우는 들고 있던 꽃 한 다발은 잠시 태성에게 맡겨 두고 등에 멘 가방을 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작고 하얀 선물 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상자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덮개를 여니, 그 안에는 또 그만큼이나 작고 앙증맞은 운동화 한 켤레가 담겨 있었다. 선우는 한 손 위에 올려놓아도 손이 남을 정도로 조그마한 신발을 꺼내, 묘비 한쪽 구석에 얌전히 올려 두었다.

“아가야. 생일 축하해.”

정확히 언제 태어났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지만, 엄마의 출산 예정일이 4월 이맘때쯤이었다. 그녀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이 사실을 알게 된 선우는 아기의 생일 선물로 새 신을 준비했다. 그곳에서라도 예쁜 신발을 신고 마음껏 뛰어놀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고른 선물이었다.

“동생을 대하는 한선우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건 또 그거대로 궁금하네.”

“음……. 전 왠지 동생 바보였을 것 같아요.”

“그러고도 남지.”

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도 자기보다 어린 친구들한테는 약한 편이고, 지나가는 길에 아기만 봐도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선우였다. 그러니 제 동생한테는 얼마나 극진했을지, 보지 않아도 그 모습이 눈에 훤했다.

선우는 부모님께 그동안 있었던 학교생활, 태성과 있었던 시시콜콜한 일상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는 동안 선우의 손은 태성의 손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은색 반지를 끼고 있는 태성의 왼손은 언제나 선우의 오른손 차지였다.

엄마, 아빠를 만나 뵙고 경찰묘역을 벗어나는 길에는 박민호 경감의 묘에도 들렀다. 남은 꽃다발 하나는 그의 몫이었다.

푸른 하늘 아래 태극기가 휘날리는 현충원이 지금은 온통 핑크빛이었다. 가는 길목마다 흐드러지게 핀 수양벚꽃이 발걸음을 절로 옮기게 했고, 색이 쨍하니 시선을 잡아끄는 홍매화가 바삐 가는 걸음을 멈추게 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좁은 시냇가를 따라 조성된 산책길을 사푼사푼 걸었다.

“대표님 생일인데 여기는 왜 오자고 하신 거예요?”

“내 인생에 선물을 주신 분들이니까, 나도 감사 인사를 좀 드릴까 해서.”

핫……!

오늘도 그는 부끄러운 말을 스스럼없이도 했다. 순식간에 선우의 얼굴이 오른손에 잡은 그의 손만큼이나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우리 이렇게 손 잡고 걷는 거 진짜 오랜만인 거 같아요.”

“누구 씨가 최근에 워낙 바쁘셨어야지.”

지난 몇 주간 태성의 서재는 온전히 선우의 차지였다. 입학 후 처음 맞는 중간고사에 선우가 한동안 밤낮으로 공부에만 매진했기 때문이었다.

“백수일 때 한선우 좋았는데. 학교 다니니까 보고 싶을 때 마음껏 못 봐서 영 별로야.”

“학교 후배 됐다고 좋아하실 땐 언제고.”

“이렇게 얼굴도 제대로 안 보여 주고 공부만 할 줄은 몰랐지.”

치, 진짜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사람이 누군데.

입술을 삐쭉 내밀고 조그맣게 종알거리는 선우를 보고 태성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제집으로 들어온 뒤로도 선우의 시계는 바쁘게 돌아갔다. 일에 질려서 며칠간은 좀 쉬고 놀 법도 한데, 어떻게 단 하루도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법이 없었다. 제가 출근하고 나면 서재 방 컴퓨터 앞에 붙어 떨어질 줄을 모르던 선우가 도대체 뭘 그렇게 열심히 알아보나 하고 보니, 그건 바로 로스쿨 입학과 관련된 정보였다.

그 뒤로 한 6개월쯤. 선우는 학원을 한두 개 다니고 인터넷 강의를 몇 개 듣는가 싶더니, 몇 차례 시험을 치르고는 제 모교의 법학전문대학원 합격증을 떡 하니 들이밀었다.

하고 싶은 일이 한 가지 있다는 것이 변호사였을 줄이야. 태성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다시 공부해 보니까 어때?”

“재밌어요.”

“……재밌어?”

태성이 가던 길을 멈추고 선우를 이상한 사람 보듯 쳐다봤다. 선우는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말간 웃음을 터트렸다.

“솔직히 머리 아프긴 한데…, 그래도 재미있어요.”

선우가 태성의 걸음을 다시 이끌며 말했다.

“어떤 점이?”

법 조항 하나하나, 판례 하나하나가 그의 사업에 어떻게 적용될지를 생각하며 공부하니 재밌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호 그룹은 워낙에 사업이 다각화되어 있으니 예시로 쓸 만한 사례들도 많았다. 하물며 형법까지도.

그걸 태성에게 얘기하니 그의 얼굴에 보조개가 옴폭 패었다.

“든든하네. 졸업하면 회사로 들어와. 비서실이든 법무팀이든, 원하는 곳 자리 마련해 줄게.”

“네에? 아는 것도 없는데 제가 졸업하자마자 거길 어떻게 가요. 너무 민폐예요.”

“일은 정 실장한테 배우면 되지.”

“정 실장님은 대표님 도와드려야죠.”

“나 도울 사람은 정 실장 말고도 많아.”

선우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다른 데서 수습 거치고, 일도 좀 배우고 난 다음에요. 제가 대표님이랑 회사에 조금이라도 도움될 수 있을 만큼 실무에 익숙해지고 나면, 그때 갈게요.”

태성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한번 고집을 부리면 좀처럼 꺾는 일이 없으니 이번에도 양보하는 건 저일 것이다. 잠시나마 같이 출퇴근하는 나날을 상상했던 태성은 삽시간에 로망이 깨지자, 짐짓 서운한 기색을 내비쳤다.

선우는 그런 그를 보다 옅게 웃으며 물었다.

“대표님은 어떠세요?”

“뭐가?”

“자리 옮기신 거요. 힘들진 않으세요?”

태성은 올해 초 그룹사 인사 발령에서 문호건설 대표직으로 승진 이동을 했다. 리조트에서 4년간의 경영 수업을 마치고, 본격적인 후계자 계승 작업에 들어가기 위함이었다.

문호건설은 ㈜문호의 모태가 된 기업인 데다 문호에서는 가장 큰 계열사이니, 태성이 언젠가 건설사로 입성하는 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그 시기가 예상보다 빨라 그는 또 한 번 세간의 이목을 잔뜩 끌었다.

“할 만해. 오랜만에 도전하는 기분이라 재미도 있고.”

태성의 대답에 선우는 역시나, 하고 고개를 주억였다.

그의 승진을 두고 누군가는 큰 사업체를 꾸려가기에 아직 어리고 경험이 적다며 우려의 시선을 보냈다. 또 누군가는 리조트를 4년 만에 300% 성장시킨 업적을 예로 들며 기대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면 부담감에 마음이 흔들릴 법도 한데, 태성은 언제나처럼 의연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러기 위해서 그가 얼마나 주야 고민을 하고 애를 쓰는지 선우는 이제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는 또다시 맡은 바를 보란 듯이 훌륭하게 해내리라, 선우는 그것 또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맞잡은 손을 얕게 흔들며 걷는 두 사람 사이로 봄바람을 타고 향긋한 꽃향기가 흘러들었다.

“근데 한선우 씨.”

“네?”

“언제까지 대표님이라고 부를 거야?”

“…….”

이번에는 선우가 가던 길을 멈췄다. 두 사람은 시냇가를 가로지르는 짧은 다리 위에 마주 보고 섰다. 선우는 조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럼요? 부회장님? 이건 너무 딱딱하지 않아요?”

“응. 딱딱해.”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도리어 되묻는 선우에 태성은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글쎄. 애정을 담은 호칭, 뭐 없나?”

“아하…….”

애정을 담은 호칭이라……. 선우는 다시 걸음을 옮기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나이 차가 좀 있으니 이름을 부르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고, 형이라 부르기엔 그는 제게 너무 크고 높은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남들이 하는 자기니 여보니 하는 애칭으로 그를 부르자니, 너무 부끄러워 그를 쳐다보지도 못할 것 같았다. 그럼…….

“……형님?”

푸핫! 순간 태성이 몸을 앞으로 숙이며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미안.”

내가 잘못했네. 괜히 쓸데없는 걸로 머리 굴리게나 하고.

눈을 접은 채 조금 앞서 걷는 태성을 향해 선우가 넌지시 말했다.

“그럼……, 달님…?”

“달님?”

태성이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대표님 성이 문 씨니까……. 그, 다, 달링이랑 발음도 좀 비슷한 것 같고오…….”

또 제게는 달빛만큼이나 따뜻하고 포근하고 빛나는 사람이기도 하다고. 새빨개진 얼굴로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옹알대는 선우를 보고 태성은 순간 가슴께가 뻐근해져 왔다.

“윽, 그냥 대표님 할래요. 대표님은 이 호칭이 너무 잘 어울려요. 그리고 제가 나중에 나중에 정말로 대표님 회사로 들어가게 되면, 그땐 진짜 제 대표님 되시는 거니까…….”

“그래.”

뭐든, 너 좋을 대로 해. 횡설수설 급히 말을 늘어놓는 선우에게 태성은 달빛처럼 환한 미소를 선사했다.

시냇가를 벗어나 연한 분홍빛이 감도는 수양벚꽃 길을 따라 걸을 때였다. 바닥을 향해 고개를 한껏 꺾어 내린 벚꽃 나무를 올려다보며 선우가 나직이 말을 건넸다.

“전 그냥 대표님이 이름 불러 주시는 게 좋던데…….”

“이름?”

“네. 그냥 제 이름.”

“한선우?”

“네.”

그가 제 이름 석 자를 부르면 왠지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면서, 살아 있다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기분이 들곤 했다. 선우는 그 느낌이 참 좋았다.

“한선우.”

“네에.”

“선우야.”

“네에.”

속을 간질간질 어루만지는 목소리에 선우가 배시시 웃었다.

그때 쪽, 저의 이름을 부르는 입술이 제 입술 위에 닿았다 떨어졌다. 선우는 간지럽다는 듯 어깨를 한 번 움츠리고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새파란 하늘, 하얀 뭉게구름 아래로 분홍색 벚꽃 잎이 눈송이처럼 폴폴 쏟아져 내렸다.

선우가 걸음을 멈추고 태성을 불러 세웠다.

“대표님.”

“응?”

“사실은 이따 저녁때 드리려고 했는데, 지금 하시면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선우는 가방에서 또 다른 선물 상자를 꺼냈다. 이번에는 조그만 검정색 보석 상자였다.

“생일 축하해요, 달님.”

선우는 손에 든 상자를 태성에게 건넸다. 태성이 그걸 받아 뚜껑을 여니, 그 안에는 은색 빛이 반짝이는 넥타이핀이 들어 있었다. 가늘고 긴 핀 끝자락에는 물방울무늬의 작은 보석도 달려 있었다. 마침 하늘에서 흩날리는 벚꽃 잎과도 같은 연한 핑크빛 다이아였다.

“웬 넥타이핀이야?”

“그냥요. 잘 어울리실 것 같아서.”

선우는 상자 안에서 핀을 꺼내 태성의 까만 넥타이 위에 꽂아 넣었다. 정확히 그의 심장과 같은 선상에 있는 위치였다. 조금이라도 그의 심장에 가까이 붙어 있고 싶은 마음을 담아 준비한 선물이었다.

“이거, 제가 직접 만든 거예요.”

“…….”

알지. 시험 기간에도 틈틈이 시간 내서 공방에 다니는 걸 모르는 척하느라고 내가 얼마나 애를 먹었는데.

태성은 입가에 살그머니 미소를 머금고, 선우가 꽂아 준 핀을 내려다보았다.

“예쁘네.”

“마음에 드세요?”

“그럼. 누가 만든 건데.”

“마음에 드시면 다행이에요.”

상자를 꺼낼 때부터 언뜻 긴장한 기색을 보이던 선우가 그제야 얼굴에 웃음꽃을 활짝 피웠다.

“이거 아까워서 하고 다니겠나.”

“막 하고 다니셔도 돼요. 언제든 또 만들어 드릴 수 있어요.”

“너, 누가 이렇게 예쁜 짓만 골라서 하래.”

“으앗!”

태성이 돌연 선우의 머리를 세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선우의 관자놀이 위에 진하게 입을 맞췄다.

“시험 기간에 독수공방시킨 거 오늘 다 갚아 줄 거니까 각오해.”

하하, 선우의 입에서 맑은 소성이 터져 나왔다.

화사하게 웃는 두 사람의 주위로 팔랑팔랑, 새하얀 나비 한 쌍이 날아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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