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Oh, Sol Mío!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태성이 잠에서 깼다. 감은 눈을 떠 보니 제 옆에 누워 있어야 할 이가 없었다. 고개만 살짝 들어 방 안을 둘러보니,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흠, 태성은 뒷머리를 다시 베개 위로 내리며 침대 옆 협탁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 핸드폰이 걸리자, 그는 팔은 길게 편 채로 손목만 까딱여 현재 시간을 확인했다.
05:58.
“…….”
새벽 6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각에 태성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아직 해도 뜨기 전이라 그저 푸르스름한 기운만을 품고 있었다.
“벌써 가?”
잠시 후, 축축이 젖은 머리로 나와 방을 가로질러 가는 선우를 향해 태성이 물었다.
“네. 늦었어요.”
선우는 태성에게 눈길 한 번 흘리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걷더니, 이내 드레스룸 안으로 쏙 몸을 감췄다.
“…….”
흐음…. 태성은 팔로 머리를 괴며 몸을 옆으로 돌려 누웠다. 눈썹 한쪽을 쭈욱 치켜올린 그는 무언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쪽, 그런 그에게 선우가 다가와 짧게 입을 맞췄다.
“다녀올게요.”
그새 나갈 채비를 마친 선우는 깔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딤그레이 색상의 정장을 입은 선우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싱그러운 미소를 남기고 서둘러 방을 나섰다.
태성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드레스룸에서 바로 나갈 수 있는 것을 굳이 돌아와 모닝 키스를 하고 가는 선우 덕분에 언짢았던 마음이 조금은 녹아내렸다.
***
“진짜 하긴 하네.”
태성이 새하얀 봉투 안에서 청첩장을 꺼내 들며 말했다. 연한 분홍빛이 감도는 청첩장을 펼쳐, 그 안에 적힌 신랑·신부의 이름을 보니 그의 얼굴에 미소가 절로 떠올랐다.
신랑 김 현 수
신부 오 주 희
“진작 했어야 하는 걸 너 때문에 이제야 하는 거거든?”
“설마 그래서 아이부터 가진 거 아니야? 내가 오 대표 안 놔줄까 봐?”
“그런 것도 없지 않아 있지.”
김현수가 넉살을 떨자, 옆에 있던 오주희가 별소리를 다 한다며 김현수의 등짝을 내리쳤다.
오래된 친구이자 연인인 두 사람은 10년이 넘는 연애 끝에 마침내 결혼을 하기로 했다.
사실 두 사람 사이에서 식을 올리자는 얘기는 꽤 오래전부터 나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태성이 건설사로 이동하게 되면서 그 계획이 기약 없이 미뤄지고 말았다.
태성의 뒤를 이어 리조트의 대표직을 맡게 된 것이 다름 아닌 오주희였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현주바이오텍도 김현수가 개발한 신약이 업계에 돌풍을 일으키는 바람에 두 사람은 너무 바쁜 나머지, 몇 년간 식을 치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몇 달 전, 두 사람에게 귀중한 생명이 찾아오게 되면서 더 이상은 식을 미룰 수가 없게 되었다. 그에 두 사람은 다가오는 10월, ‘Hotel the Moon’ 본점에서 결혼식을 치를 예정이었다.
“준비는 잘돼 가고?”
“야, 말도 마라. 누가 보면 나 연예인이랑 결혼하는 줄 알겠어.”
“아, 정말. 그 말 백 번도 더 들은 것 같다. 이만큼 좋은 기회가 또 없다니까 그래.”
태성 못지않게 워커홀릭인 오주희는 본인의 결혼식마저도 호텔 홍보에 이용하려 들었다. ‘Hotel the Moon’만의 웨딩 패키지를 A부터 Z까지 모두 보여 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며, 그녀는 아주 성대한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입덧 심하다더니 생각보다는 괜찮아 보이네?”
식탁 앞에 유기농 야채와 과일을 수북이 쌓아 놓고 먹는 오주희를 향해 태성이 물었다. 태성에게 청첩장을 전해 줄 겸, 세 사람은 오랜만에 호텔 본점에서 모여 한창 브런치를 즐기던 중이었다.
“푸핫! 그게, 얘도 나 닮아서 일하는 게 재밌나 봐. 초기에 조심한다고 좀 쉬엄쉬엄 할 때는 물 한 잔도 제대로 못 마시겠더니, 결혼 준비도 할 겸 다시 빡세게 일하기 시작하니까 입덧도 싹 가시는 거 있지?”
“하, 얘는 또 얼마나 천방지축일지. 두 여자 사이에서 내가 진이 다 빠질 게 벌써부터 보이지 않냐?”
김현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괜히 엄살을 부렸다. 배 속의 아이가 딸이라는 사실을 듣고 날아갈 듯이 기뻐했던 것을 오주희가 알고, 태성이 알고, 하늘과 땅이 알고 있었다.
“근데… 우리 문 대표님. 얼굴은 전보다 살이 올라서 보기에는 좋은데, 표정이 영 아니시네? 무슨 일 있어?”
오주희가 방울토마토 하나를 입에 쏙 넣으며 물었다. 그녀의 왼쪽 볼이 토마토 모양을 따라 볼록하게 튀어나왔다.
“뻔하지. 저놈이 표정 안 좋을 일이 그거 말고 뭐가 더 있겠어.”
“그거?”
오주희가 김현수와 태성을 번갈아 보며 묻자, 태성은 말없이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렸다.
“흰둥이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야?”
그러자 김현수가 대신 대답을 했다.
웬만한 일에는 이래도 흥, 저래도 흥. 바늘로 옆구리를 찌른대도 감정에 동요가 없는 놈이지만, 태성은 꼭 제 애인의 일이라면 저렇게 기색을 감추질 못했다. 그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흰둥이? 흰둥이가 왜?”
오주희가 눈을 크게 뜨고 태성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태성은 ‘으음.’ 하고 팔짱을 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는 어느덧 꽤 언짢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왜, 왜? 뭔데? 무슨 일인데?”
그러니 오주희가 눈을 반짝이며 달려들었다. 태성은 한쪽 입꼬리만 비스듬히 올린 채로 김현수와 오주희를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못 이기는 척 입을 열었다.
“밖에 내놓기 싫어서.”
올해 초, 선우는 졸업을 하자마자 한 대형 로펌에 입사를 했다. 문호건설 법무팀으로 들어오라는 태성의 제안을 기어이 뿌리치고.
실무를 익혀 보겠답시고 그 힘든 수습 변호사 일을 자청하고 나선 선우는 몇 달째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일이 그렇게 재미있는 건지, 저는 완전히 뒷전이고 오로지 회사 일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이 벌써 반년이 넘었다.
또 가만 보아하니, 사회생활한답시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을 줄줄 꼬여내고 다니는 눈치라 태성은 내심 불편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본인이 워낙 열정적이고, 커리어에도 어느 정도 욕심이 있는 것 같아서 그냥 가만히 두고는 있는데. 솔직히 말하면, 일 다 때려치우고 집 안에만 붙어 있으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야.”
학교 다닐 땐 집이랑 도서관밖에 몰라서 참 편하고 좋았는데. 태성은 그러고 제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들어 마셨다.
“음…….”
“그래. 그럴 만하지.”
태성의 이야기를 들은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이 반응은?”
태성은 의아함에 눈살을 좁혔다. 보나 마나 또 팔불출이라고 핀잔이나 할 줄 알았더니, 의외로 두 사람은 태성의 의견에 격하게 동의하고 있었다.
“아니, 좀… 그렇긴 하잖아.”
오주희가 입안에 꼭 팝콘을 던져 넣듯이 토마토를 하나 더 밀어 넣었다.
“뭐가 그래?”
“사람이 워낙에 빛이 나야 말이지.”
예쁘고 잘생긴 걸 떠나서 사람이 되게 바르고 진실돼 보이잖아? 예전엔 마냥 앳돼 보이기만 하더니, 삼십 대 되고 나서는 은근히 섹시한 분위기도 좀 풍기는 것 같기도 하고…….
거기다 이제는 직장도 번듯하겠다,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어서. 솔직히 너 주는 것도 아까워서, 내가 여동생만 있었으면 무조건 잡아다 냅다 소개시켜 줬을 거 같아.
아삭아삭, 토마토를 씹으며 오주희가 태평하게 얘기했다.
“……그래?”
태성은 커피잔을 내려놓고 턱 끝을 매만졌다. 오주희의 말을 곱씹으며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 그를 향해 김현수가 오주희의 접시에서 토마토를 하나 빼먹으며 말했다.
“그치. 외모도 외모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워낙 남달라서.”
맑고, 깨끗하고 그러면서 적당히 고급스러운 느낌도 좀 있고.
가만있어도 이 사람 저 사람 다 꼬일 것 같아서, 불안해하는 마음도 이해가 가긴 해. 처음엔 잘 모르겠더니, 계속 보니까 지독한 네놈이 왜 한 변을 골랐는지 알겠더라고.
게다가 성격까지 좋아서. 대화하다 보면 사람 마음 편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잖아, 배려심도 깊고. 네가 내 친구이긴 하지만, 너한테 좀… 과분한 사람이긴 하지?
“……그 정도야?”
태성의 눈썹이 완전히 구겨졌다. 김현수의 말에 태성은 머릿속으로 오래된 제 연인을 떠올려 봤다.
그래, 그랬었다. 함께 지낸 시간들이 길어지면서 제가 잠시 잊은 것뿐이지. 누가 봐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 사람이었다, 한선우는.
“심지어 나이까지 어리잖아. 앞으로 미래가 창창한 청춘인데. 한창 잘나가는 어린 애인 두고 있으면 당연히 불안할 수밖에.”
“사회생활하다 보면 또 자기만큼 어리고 활기찬 친구들도 많이 만날 거라. 한 변한테 이제 우리 문 대표님은 한물간 늙수그레, 고루한 사람같이 느껴질 수도 있지.”
“하아, 그에 비해 우리는 좀 있으면 앞자리도 바뀔 예정이고. 이제부터 늘어나는 건 주름과 뱃살뿐일 텐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하겠어. 나 같으면 아마 걱정돼서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잤을 거야.”
“그럼, 그럼. 자다가도 눈이 번쩍 뜨이지.”
“…….”
두 사람이 번갈아 뱉는 말에 태성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끄응, 그는 다시 팔짱을 끼며 의자에 몸을 깊게 묻었다.
눈썹을 한쪽만 치켜올린 채 안색이 어두워진 태성을 보고 오주희와 김현수는 살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
투명한 칸막이 너머로 교도관 두 명이 죄수 한 명을 이끌고 면회실 안으로 들어섰다. 교도관들은 죄수를 칸막이 앞에 놓인 의자에 앉혀 두고, 자신들은 면회실 문 앞으로 몸을 물렀다.
“씨이발, 이놈의 벌레 새끼들이 왜 자꾸 들러붙고 지랄이야.”
퀭한 눈을 하고 앉은 죄수는 목을 벅벅 긁으며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다 그 목을 긁던 손을 흘끗 보더니 이번에는 손등을 찰싹, 찰싹 때리며 소리쳤다.
“아아악! 꺼져, 꺼지라고! 이 벌레 새끼들아!”
“…….”
이어 팔다리를 허공에 탈탈 털어 대는 그를 가만히 지켜보다, 윤해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전하시네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죄수는 눈구멍을 키우며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헉! 해진아! 너 마침 잘 왔다. 이리 와서 이것들 좀 잡아 봐. 이 끈질긴 것들이 잡아도 잡아도 계속 들러붙어 가지고 온몸이 근지러워 미쳐 버릴 것 같아.”
“…….”
“거기서 뭐 하고 있어! 빨리 와서 벌레 잡지 않고!”
죄수는 윤해진에게 목덜미를 들이밀며 옷깃을 까 보였다. 맨들맨들하게 드러난 살가죽 위에는 손톱으로 긁어 생긴 생채기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윤해진은 허공으로 눈길을 돌리며 그를 외면했다. 이미 바닥이란 바닥은 전부 다 들여다본 사이인 줄 알았는데, 그는 볼 때마다 제게 더한 밑바닥을 내보였다.
“학! 이, 씨발. 너지? 너가 또 아버지한테 나 약한 거 꼬질렀지?”
돌연 죄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당장에라도 윤해진에게 달려들 것처럼 눈을 부라리더니, 갑자기 온몸을 웅크리며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아악! 아부지, 잘못했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용서해 주세요, 제발요……!”
그러면서 두 손을 머리 위에 두고 싹싹 비는 그를 보고, 윤해진은 그저 나직한 침음을 내뱉었다.
병상에 누워 몇 년째 꼼짝도 못 하고 있는 사람이 도대체 여긴 어떻게 온다는 건지.
이 레퍼토리가 반복된 것도 벌써 일 년이 다 되어 갔다.
윤해진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이곳을 찾았다. 애증도 사랑이라고, 문득 그가 떠오를 때마다 한 번씩. 그리고 참 고맙게도 그는 올 때마다 그나마 남은 애정마저도 바짝바짝 메마르게 했다.
“해진아, 나 좀 살려 줘. 나 좀 제발 여기서 꺼내 줘. 가서 우리 엄마한테 말만 전하면 돼. 여기 벌레가 우글우글해서 도저히 하룻밤도 더 못 있겠단 말이야. 밤마다 씨발, 험악하게 생긴 깡패 새끼들도 자꾸 찾아와서 한숨도 제대로 못 잔다고!”
죄수가 투명한 창에 들러붙으며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그러다 그는 퍽 간절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알잖아, 해진아. 너 아니면 나 도와줄 사람 없는 거. 나한텐 정말 너밖에 없단 말이야…….”
또 그 소리.
저 말과 저 눈빛이었다. 불쌍한 척, 애틋한 척. 저를 향해 애걸복걸하는 저 모습에 속아 윤해진은 그에게 한평생을 바쳤다. 울며불며 너뿐이라고 매달리는 모습이 저는, 아무도 모르는 그의 진심인 줄로만 알았다.
그저 나약한 약쟁이의 비겁한 농간이었을 뿐이었는데…….
“지겹지도 않으세요.”
이젠 정말 털어 낼 때가 되었다. 그와 엮인 세월이 너무도 길어서 온전히 그를 벗어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으나, 이젠 때가 되었다.
한때나마 당신과 형제가 아니길 바랐고, 같은 성별이 아니길 절실히 바란 적도 있었는데. 이제 와서 그 마음을 되돌아보니 너무 기가 막혀 자조 섞인 웃음조차 나지 않았다.
윤해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저를 향해 고개를 치든 죄수를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위에서 그를 깔아보니 탁한 눈동자에 일말의 감정이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이 이제야 눈에 훤히 들어왔다.
“도련님. 찾아오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출소하시면…… 앞으로는 부디… 사람답게 사세요.”
“해진아! 어디 가! 야! 윤해진! 너 엄마한테 꼭 말해야 한다!”
소리치는 죄수를 뒤로하고 면회실 문을 여는 윤해진 또한 감정이 텅 빈 눈을 하고 있었다.
***
“마침 관장님께서 과거에 우울증과 수면 장애로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을 받으신 기록이 남아 있어서, 항소심 진행하시면 충분히 감형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재판 차질 없이 준비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마음 편히 기다려 주시라는 대표님 전언이 있었습니다.”
“그래요. 재판이야 뭐, 로열 측에서 어련히 알아서 잘할까. 난 재판 결과에 대해선 아무런 걱정 안 해요.”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우가 고개 숙여 인사하자, 관장이라 불린 여자는 선우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나저나,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있었는데.”
“네. 말씀하십시오.”
관장은 테이블 위에 내려 둔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제 눈앞에 열 손가락을 쫙 펼치고 손끝을 살펴보던 그녀는 이내 그중 한 손을 들어 본인의 옆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겼다. 컬이 우아하게 말린 단발머리와 잘 다듬어져 반질반질 빛이 나는 손톱은 그녀가 입고 있는 죄수복과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관장은 내리깔린 눈꺼풀을 차츰 들어 올리며 선우를 보고 물었다.
“우리 애기 변호사님은 애인은 있나?”
“……네?”
“아니, 별건 아니고……. 우리 집에 아직 시집 안 간 딸이 하나 있는데, 애인 없으면 내가 다리나 한번 놔 볼까 하고.”
“아…….”
“내 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애가 참 괜찮거든. 참하고 싹싹하고. 얼굴도 예뻐서 어릴 땐 주위에서 연예인 시키라는 말도 많이 들었어.”
“네에…….”
“선남선녀라 둘이 참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어떻게 만나 볼 생각 없어요?”
“……말씀은 정말 감사하지만, 오랫동안 만나 온 사람이 있어서요.”
관장의 눈길이 선우의 왼쪽 손, 네 번째 손가락에 껴 있는 은색 반지로 가 붙었다. 그녀는 흘깃, 반지에 꽂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거창한 건 아니지만, 내가 우리 변호사님 사위로 맞이하면 작은 로펌 정도는 하나 내줄 수도 있는데.”
“……로펌이요?”
선우가 놀라 되물었다.
“그럼 이렇게 접견 다닌답시고 힘들게 일 안 해도 되잖아. 회사는 변호사 몇 명 고용해서 돌리고, 가끔 편하게 얼굴도장만 찍으면 되지. 남는 시간엔 가족들이랑 여가 시간도 즐기고, 취미 생활도 좀 하고.”
“아… 하하…….”
“개인 사업이 싫으면 회장님 밑으로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고.”
그녀의 남편은 연 매출 1조 원대의 중견 식품 기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선우는 멋쩍게 웃으며 한 손을 들어 눈썹 끝을 매만졌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관장님. 그런데, 저는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과 앞으로도 쭉… 함께하고 싶어서요. 생각해 주신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러고는 고개를 꾸뻑 숙였다.
“…….”
관장은 제 앞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동그란 뒤통수를 보고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그녀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선우를 위아래로 흘기며 물었다.
“내가 말한 건 가지고 왔어요?”
“아, 네. 여기 있습니다.”
선우는 가지고 온 태블릿 PC를 관장 앞에 내어놓았다. 관장의 개인 비서가 그녀에게 꼭 좀 전해 달라 요청한 것이었다.
관장은 톡톡 태블릿을 몇 번 두드리고, 슥슥 화면을 몇 차례 넘기더니, 금세 시큰둥한 표정을 했다.
“아, 정말. 이번 시즌 디자인들이 다 왜 이래?”
그녀가 좌우로 훑어 넘기는 태블릿 화면에는 유명 모델들의 신상 의류 화보가 끝도 없이 펼쳐졌다.
“작년이랑 별로 달라진 것도 모르겠고. 도대체가 살 게 없네, 살 게.”
돈을 준대도 이 모양이니, 원.
퉁명스럽게 혼잣말을 내뱉던 그녀는 머지않아 선우가 앉은 쪽으로 태블릿을 던지듯 밀어 넣었다.
선우는 제 앞에 놓인 액정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하얀 바탕 위에 떠 있는 것은 그녀의 장바구니, 그 안에는 몇 개의 구두와 가방이 담겨 있었다.
***
하아, 접견실을 나서는 선우의 입에서 한숨이 폭 새어 나왔다.
대형 로펌의 새끼 변호사가 된 제가 맡은 일이라는 게 주로 이런 것들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계속되는 상담 뺑뺑이.
변호사랍시고 경험도 없는 제가 의뢰인들을 상담하러 다니는데, 말이 좋아 상담이지 사실은 고객들의 말동무가 되어 주는 것이 주 임무였다. 선우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으나, 사측은 상류층 의뢰인들이 요청하는 일명 ‘황제 접견’에는 매번 선우를 내보내곤 했다.
지금도 그는 프로포폴 불법 투약 혐의로 실형을 살게 된 강남의 한 미술관 관장님을 상대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접견 중에는 정작 재판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별로 없었다. 회사 측에서는 이 일이 VIP를 관리하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일이라 하니, 저야 주어진 바를 최선을 다해 하고는 있지만, 솔직한 마음으로 선우는 이게 꼭 필요한 일들인가 싶기는 했다.
오로지 그를 돕고, 그와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변호사가 되기는 했는데……. 막상 변호사가 되어 마주한 현실은 생각보다 더 녹록지가 않았다.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러하겠지만.
‘어……?’
기운 빠진 걸음으로 교도소 복도를 지나는데, 낯익은 얼굴 하나가 선우를 스쳐 지나갔다. 선우는 가던 길을 멈추고 눈으로 그를 쫓았다.
죄수복을 입은 채 양팔에 교도관을 한 명씩 끼고 가는 그는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에다 대고 알아듣지 못할 말을 끊임없이 웅얼거리고 있었다. 몰골이 워낙 초췌하고 피폐하여 순간 알아보지 못할 뻔했으나, 분명 그자가 맞았다.
선우는 다시 걸음을 옮기며 저를 안내하던 교도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교도관님. 저 사람은…….”
“누구요?”
선우의 물음에 교도관이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곧 알 만하다며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변호사님이 어떻게 저 사람을 알아보네요? 한때 국회의원이었다는 사람이 꼴이 말이 아니죠?”
“……저 사람, 왜… 저렇게 된 거예요……?”
“왜긴 왜야. 이 안에서 사람이 저렇게 맛이 갈 일이 뭐가 더 있겠어요.”
“……?”
선우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교도관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약이죠.”
“약이요……?”
선우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되물었다.
“이 안에서…… 약을 한다고요……?”
교도관은 그런 선우를 향해 씨익,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우리 변호사님은 그래도 아직 순진하시네.”
***
“……어?”
“엇! 윤 비서님…?”
교도소 1층 로비를 벗어나는 길이었다. 선우는 맞은편 복도에서 나오는 윤해진을 마주하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선우는 깜짝 놀라 물었다가, 곧 그가 이곳에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아 “아아…….” 하고 입을 다물었다.
“변호사님은 일하러 오셨나 봐요.”
“어, 네에…….”
“……잠깐 시간 괜찮으시면, 저랑 커피… 한잔하실래요……?”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를 띠고, 윤해진이 물었다.
두 사람은 교도소 내 마련된 작은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씩 사 들고 운동장 외곽을 따라 걸었다. 파란 하늘과 노란 잔디밭, 알록달록 단풍이 든 나무가 회색 빛깔의 담장과 대조를 이루는 맑고 쾌청한 가을날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문 대표님 일 도와주고 계신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네. 대표님 덕분에요.”
“지금 하고 계시는 일은 좀 어떠세요?”
“좋아요. 무엇보다 제가 잘할 수 있는 일들이라. 은혜를 입은 분께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야 저는 감사하죠.”
태성은 윤해진이 양기용 부자의 악업을 세상에 모두 폭로하게 하는 대신 그가 사회에서 재기할 수 있도록 도왔다.
노동 착취와 인권 유린에 대해 윤해진이 양씨 집안사람들에게 건 소송에서 이길 수 있도록 지원하고, 그 집안사람들의 차명 계좌에 있는 자금을 모두 윤해진의 앞으로 돌렸다.
그가 재판을 모두 치르고 과거를 정리하기를 기다렸다가, 일이 마무리가 되었을 시점에 태성은 그에게 저와 함께 일할 것을 제안했다.
태성이 윤해진에게 맡긴 일은 아도니스 뒤를 이어 새로 설립한 사교 클럽의 회원 관리였다. 세도 가문에서 나고 자라, 보고 배운 것만으로도 윤해진은 의전에 특화된 인물이었고, 그가 양기용 부자 밑에서 겪고 들어 온 일들이 태성에게는 전부 귀한 정보가 된다는 판단이었다.
“얼굴도 많이 좋아지셨어요. 편안해 보이시고.”
“선우 씨도요. 원체도 미인이었지만, 한층 더 밝아 보여서 보기 좋네요.”
“……감사합니다.”
선우의 양 볼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두 사람은 운동장 한편에 마련된 벤치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벤치 위로 서늘한 그늘을 만들어 내는 나무 위에서 빨간 단풍잎 한 장이 팔랑팔랑 떨어져 내렸다.
“종종… 여기 오시는 거예요?”
“……가끔이요. 어쩌다 가끔…….”
윤해진은 커피 한 모금을 들어 마셨다. 씁쓸한 맛이 선선한 가을 날씨, 그리고 휑한 제 마음과 제법 잘 어울렸다.
“우습죠. 그 사람을 여기다 넣어 둔 장본인이 저인데, 그래 놓고 또 여길 찾아온다는 게…….”
윤해진은 양기용의 집안에서 식모살이를 하던 사용인의 아이였다. 윤해진의 모친은 부엌일 외에도 간헐적으로 양기용의 성 시중을 들어야 했다. 그런 그녀가 임신을 했으니, 양기용은 당연히 배 속의 아이가 제 핏줄인 줄로만 알았다.
양기용은 느닷없이 생겨 버린 혼외 자식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집에 가둬 두고 키웠다. 신분은 물론이요, 제대로 된 이름 하나 없이. 그러다 윤해진의 모친이 잔병치레를 하다 세상을 떠나자, 그는 그녀의 이름으로 아이를 불렀다.
윤해진이 자신의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양승준의 뒤치다꺼리를 위해 윤해진에게 신분을 만들어 주면서였다. 양기용은 당시 윤해진 모자에 몹시도 분노했으나, 이제 와서 윤해진을 내쫓기에는 이미 성인이 된 그는 제 집안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었다.
그에 양기용은 윤해진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고 그를 제 하수인으로 썼다. 마침 윤해진은 망나니 같은 아들놈의 못 말리는 성욕 분출구인 동시에 입단속도 빈틈없이 시킬 수 있는 좋은 인물이기도 했다.
윤해진은 이 모든 사실을 양기용과의 재판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두 부자가 행해 온 일들을 생각하면 이건 악행의 축에 끼지도 못했다.
“이런 말 하면 절 비웃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 사람…… 사랑했어요…….”
선우는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탄식했다. 양승준을 향한 눈빛에 어렴풋이 윤해진의 마음을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그 말을 본인에게 직접 들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탓이었다.
“어릴 때부터 이름도 없는 절 필요로 하는 사람은 세상에 그 사람 하나밖에 없었거든요.”
“…….”
“사람들은 제가 그 집안에 뭐라도 기대하고 붙어 있었다고 생각했겠지만, 아니요. 저는… 그 사람 옆에서 그 사람이 잘되는 거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어요.”
그래서 나쁜 짓인 줄 알면서도 그 사람이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지 한 거고…….
선우는 고개를 돌려 윤해진을 쳐다보았다. 입가를 살포시 끌어올린 채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눈동자에 서글픈 기색이 잔뜩 묻어 있었다.
“평생 자식 대접 못 받고 살 거 전 알고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얼마나 모질고 독한 사람들인데요. 뭐, 진짜로 자식도 아니었지만…….”
양기용과 그의 식구들에게 인생을 송두리째 기만당했다는 배신감에 모든 걸 폭로하긴 했으나, 그러고도 윤해진은 제 사랑을 전부 저버리지는 못했다.
“저… 정말 구제 불능이죠…….”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선우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사람 마음은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이젠 너무나도 잘 알지 않는가.
“저…… 선우 씨…….”
“네?”
“그 사람…… 형 집행 정지 신청하려고 해요. 변호사 말이, 건강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아…….”
머뭇거리며 조심스레 꺼내 놓는 윤해진의 말에 선우는 교도소 복도에서 마주한 얼굴을 떠올렸다. 역시나 그는 정상적인 상태는 아닌 모양이었다. 건강 상태라 하면 정신 건강을 의미할 테지.
“선우 씨한테는…… 정말로 미안합니다. 절 욕하고 원망하신대도 저는 할 말이 없어요. 그런데…… 이렇게 해야 제가 그 사람을 완전히 떠나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
“정말…… 미안합니다…….”
고개를 깊이 숙여 사죄하는 윤해진에게 선우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다녀왔습니다.”
“엇! 오늘은 금방 오셨네요? 관장님이 웬일로 변호사님을 빨리 놔주셨지?”
회사로 돌아온 선우가 비서에게 복귀를 알리자, 비서가 선우를 밝은 얼굴로 맞이했다.
“변호사님, 근데 손님 오셨어요.”
“…손님이요?”
“네, 그분이요. 안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비서는 눈짓으로 선우의 사무실을 가리켰다.
하, 또 너냐…….
의아한 마음으로 제 방에 들어선 선우는 손님의 정체를 확인하고 문 앞에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왔어?”
“…….”
선우는 접객용 테이블에 앉아 있는 손님을 그냥 지나쳐 책상 앞에 가 앉았다.
“거, 얼굴 한번 보기 되게 힘드네. 뭔 변호사가 외근이 이렇게 많아?”
선우는 손님의 말을 무시하고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책상 위에 펼쳐 놓았다.
“사람을 봤으면 반응을 좀 보여라.”
“…….”
“이야. 로열은 손님 대접을 이렇게 하네? 미래건설 정도면 그래도 꽤 큰 고객사 아닌가아?”
노트북 전원을 누른 손가락이 버튼 위에 그대로 멈췄다. 선우는 곁눈으로 흘깃 손님을 쳐다보았다. 거만하게 앉은 손님은 다리 한쪽을 제 무릎 위에 올려 두고, 반대 다리를 달달 떨고 있었다.
“오늘은 또 왜 왔는데?”
“왜 오기는. 너 보러 왔지.”
선우는 다시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난 너 보기로 한 적 없는데? 왜 자꾸 이렇게 연락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와?”
“보고 싶으니까. 야, 근데 내가 너보다 한참 형인데 너 나한테 자꾸 반말할래?”
“난 약쟁이는 형 취급 안 해.”
“뭐? 야, 내가 약 끊은 게 언젠데. 나 이제 약 같은 거 안 해!”
“잘했네.”
선우가 쳐다보지도 않고 하는 말에 손님은 좋다고 실실 웃었다.
손님의 정체는 미래건설 홍성민 실장이었다.
홍성민은 교도소에서 출소한 뒤로 줄곧 선우의 꽁무니를 쫓아다녔다. 도대체 어떻게 안 건지, 로스쿨을 다닐 때도 학교며 도서관을 연락도 없이 대뜸 찾아오곤 하더니, 로펌에 입사하고 난 뒤로는 일터가 가깝다는 이유로 종종 선우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주인이 자리에 없으면 그냥 돌아갈 법도 한데, 그는 꼭 이렇게 선우가 돌아올 때까지 사무실을 점거하고 있었다. 그리고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이런 질문을 해 왔다.
“문태성이랑은 별일 없고?”
“…….”
저를 향한 시선은 철저히 외면한 선우였지만, 남자의 이름을 언급하는 건 외면할 수가 없었다.
“무슨 별일?”
“넌 꼭, 그 자식 이름을 꺼내야 내 얼굴을 보더라?”
선우가 마침내 제대로 눈을 마주쳐 오자, 홍성민이 씨익 하고 웃었다. 선우는 그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고는 다시 책상 앞으로 눈을 돌렸다. 지금부터 퇴근 전까지 작성해야 할 서면이 산더미였다.
“연애하는 데 애로 사항 같은 건 없어?”
문서를 열고 타이핑을 시작하는데, 문득 홍성민이 물었다. 토독토독, 선우는 눈과 손을 쉬지 않고 그에게 되물었다.
“무슨 애로 사항?”
“뭐어. 성격이 안 맞는다든가, 서운한 점이 있다든가. 아님 사소한 일로 싸웠다든가?”
“글쎄에…….”
성격은 언제나 남자가 제게 다 맞춰 주고 있으니 저야 늘 미안한 마음이고, 서운한 점이 있다면 최근에 둘 다 너무 바빠서 얼굴을 자주 못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소한 일로 싸운 적은…….
자판 위에 놓인 손이 일순 움직임을 멎었다.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말다툼을 좀 했었는데.”
“말다툼? 왜, 왜? 뭐 때문에?”
홍성민이 다리를 내리고 의자에 기댄 몸을 바짝 세우며 눈을 반짝였다.
“아니……. 자꾸 필요 없는 걸 사 오셔 가지고…….”
“필요 없는 거?”
“응.”
선우는 고개를 내려 제 왼쪽 손목을 쳐다봤다. 그를 따라 홍성민도 슬쩍 선우의 손목으로 눈길을 건넸다. 선우는 알이 굵은 은빛 시계를 차고 있었다.
시계……? 시큰둥한 표정으로 시계를 보던 홍성민이 차츰 눈을 키웠다. 언뜻 햇빛에 반사되는 푸른빛을 보고 홍성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헉! 야, 이거 뭐야?”
홍성민이 선우에게 달려들며 물었다. 책상 위에 양팔을 짚고 선 그는 반짝이는 시계로 눈을 고정시켰다.
“이, 이거야? 이거 문태성이 사 준 거라고?”
“응. 시계가 없는 것도 아니고, 전에 사 주신 것도 아직 멀쩡한데 왜 자꾸 이런 걸 사 오시는지 모르겠어.”
“헉……. 어, 언제? 언제 사 줬어?”
“언제…? 한… 한 달 전쯤……?”
8월 말, 스위스로 함께 늦은 여름휴가를 떠났다 마지막 날 밤 제 손목에 채워 준 것이니, 언제라 하면 그때쯤이었다.
선우는 손목에 걸린 시계를 내려다보며 무거운 얼굴을 했다. 시계는 시간만 볼 수 있으면 되는 것을, 남자는 이따금씩 제게 이런 고가의 선물을 했다. 언제나 서로에게 달짝지근한 두 사람이 유일하게 실랑이를 하는 시점은 이런 때였다. 태성이 말도 없이 선우에게 깜짝 선물을 할 때.
분명 또 한두 푼 하는 게 아닐 텐데. 손목도 묵직하고 디자인도 화려해서 쓰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부담스럽기만 하지, 이런 게 도대체 왜 필요한 건지. 선우는 정말로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렇다고 저를 생각해서 사 온 것을 안 하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라, 선우는 그날 밤도 이제 이런 건 제발 그만 좀 사다 나르라고 태성을 타박했었다.
남자에게 싫은 소리를 해야 했던 그날 밤이 떠올라, 선우는 입술을 뚜 하고 내밀었다.
반면, 홍성민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올여름, 스위스의 한 명품 시계 브랜드에서 창사 250주년을 기념하며 딱 250개만 생산했다던 한정판 시계가 선우의 손목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도 구매하려고 몇 번이나 알아봤지만, 수량이 워낙 적어 국내에 몇 개나 들어올지도 알 수가 없다던 그 모델이었다.
와, 이 씨발 미친놈이…… 이걸 구했네…….
굵직한 은빛 시곗줄과 그 한가운데 영롱하게 빛나는 청푸른 시계판을 보고 홍성민은 낮게 탄식했다. 선우의 손목을 꽉 채운 동그란 청판에는 영원을 의미한다는 블루 다이아몬드 한 알이 콕 박혀 있었다.
번쩍이는 시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자니, 선우가 돌연 왼쪽 손목을 좌우로 탈탈 털었다. 시계의 무게에 눌려 손목이 한 번씩 뻐근한 탓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홍성민이 기겁하며 물었다.
“너, 너… 이게 얼마짜린 줄 알아…?”
“그래, 맞다. 이거 얼마 정도 해?”
그렇지 않아도 가격이 궁금해서 인터넷을 뒤져 봤던 선우였다. 그러나 공식 사이트에 한정판이라는 말만 달랑 쓰여 있을 뿐, 어디서도 제대로 된 가격 정보를 얻을 수가 없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올려다보는 선우에 홍성민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 아니야. 별로 안 비싸 그거.”
“별로 안 비싸?”
“응. 그거 뭐, 얼마 안 해.”
그래? 선우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그럼 그나마 다행이라며 이내 머리를 주억였다.
홍성민은 입안에서 혀를 굴렸다. 침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야, 혹시 문태성도 그거 똑같은 거 차고 다니냐?”
“응.”
홍성민이 턱 끝으로 시계를 가리키며 묻자, 선우는 당연하다는 듯 끄덕였다. 같은 거 맞춰 하는 걸 워낙 좋아하는 사람이라, 남자는 시계든 액세서리든 가능하면 제 것과 본인의 것을 함께 구매하는 편이었다.
“하…….”
미친, 이걸 어떻게 이겨. 구하는 것도 구하는 거지만, 두 개면 도대체 돈이 얼마야…….
홍성민은 땅이 꺼지라 한숨을 깊게 내쉬고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정말이지,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 망할 경찰 놈한테 엿을 먹고도 홍성민은 교도소에 있는 동안 한 번씩 이 얼굴이 떠올랐다. 하얗고 보드라운 피부, 촉촉하고 말간 눈동자, 수줍은 웃음 뒤에 언뜻 비치는 묘한 색기는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출소하자마자 한선우 경위를 찾아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차디찬 수감 생활을 버티고 나왔더니, 글쎄 그 사이에 경찰을 그만두었다고!
홍성민은 수소문 끝에 그가 로스쿨을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신이 나서 학교로 쫓아갔다.
그런데 이게 고새를 못 참고 문태성한테 거하게 공사를 친 것이 아닌가. 아니지, 공사가 아니라 살림을 차렸다는 쪽이 더 가까웠다.
게다가 안 좋은 일이 있었다더니, 그걸 모두 이겨 내고 난 뒤의 한선우는 어쩐지 밝은 기운까지 내뿜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이젠 아예 대놓고 섹시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씨발, 난 저 때문에 약까지 끊고 나왔는데. 타이밍 조금 못 맞췄다고 문태성한테 선수를 뺏기다니, 홍성민은 정말 억울해 죽을 것만 같았다.
만난 지도 벌써 햇수로 5년이 넘었으니 이쯤 하면 애정이 식을 법도 한데, 두 사람은 어째 날이 갈수록 더 진하고 견고한 연애를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야. 문태성이 어디가 그렇게 좋아?”
“으응?”
난데없이 인상을 찌푸리며 묻는 홍성민에 선우는 황당하다는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내가 걔보다 못한 게 뭐야.”
“뭐……?”
얘가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선우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미간을 와그작 찡그렸다.
“하, 나 진짜. 야, 내가 걔보다 얼굴이…… 빠지기를 해, 몸매가…… 빠지기를 해……. 돈이…….”
홍성민은 선우의 손목에 걸린 시계를 힐끔 내려다봤다. 갑자기 속이 갑갑해진 홍성민은 한 손을 들어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야! 난 아직 젊고 어리잖아!”
“너 나보다 한참 형이라며.”
“학……!”
똑똑, 그때 선우의 사무실 문이 빼꼼 열렸다. 벌어진 문틈 사이로 선우의 학교 동기이자 입사 동기인 김재준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형. 미팅 시간 다 됐는데 안 가요?”
“어? 벌써 그렇게 됐어?”
선우는 왼쪽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양 갈래로 벌어진 시침과 분침 사이로 블루 다이아가 찬란한 빛을 내비쳤다.
“야, 너 이제 그만 돌아가 봐. 나 회의 들어가야 해.”
“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선우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며 노트북을 챙겨 들었다. 선우가 책상을 빙 돌아 나오자 김재준이 방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그러고는 제게 다가온 선우에게 물었다.
“뭐예요, 저 아저씨는?”
“뭐, 뭐…? 아, 아저씨……?”
“어? 아무것도 아니야.”
“아… 아무거……?”
“빨리 가요, 형. 늦겠어요.”
“응. 야, 나 간다! 갈 때 문 꼭 닫고 가!”
“하……!”
저는 쳐다보지도 않고 허공에다 손을 흔드는 선우를 보고, 홍성민은 그 자리에서 한참을 얼어붙어 있었다.
***
그날 밤, 선우는 퇴근을 서둘렀다. 태성이 오랜만에 일찍 퇴근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왔기 때문이었다.
그래 봐야 집에 오니 밤 10시가 다 되어 있었고, 손에는 일거리를 바리바리 싸 든 채였지만, 선우는 이렇게 해서라도 그와 시간을 함께하고 싶었다.
“다녀왔습니다.”
“어서 와.”
선우가 현관문을 여니, 문 앞에서 근사한 남자가 저를 맞이했다. 선우는 환하게 웃으며 그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선우의 손에서 가방과 짐을 빼 들며 태성이 물었다.
“저녁은 먹었어?”
“네, 대충이요.”
“또 식사 제대로 안 하고 샌드위치 같은 걸로 대강 때운 거 아니야?”
어떻게 알았지……. 선우는 혀를 샐쭉 내밀며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 청첩장 나왔나 보네요?”
복도를 지나 응접실에 도착한 선우가 테이블 위에 놓인 하얀 봉투를 보고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와, 예쁘다!”
그 안에서 연분홍빛 청첩장을 꺼내 든 선우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네요.”
“응. 얼른 씻고 나와. 오랜만에 와인 한잔하자.”
커다란 손이 선우의 머리를 부스스 헝클어뜨렸다.
“진짜 너무 축하해, 시헌아. 나 회사 사람들한테 다 자랑하고 다녔다니까? 네가 말한 친구가 나라고.”
위층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온 선우가 통화를 하며 계단을 내려왔다.
“당연히 안 믿지! 다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래. 그냥 같은 고등학교 나온 걸로 친한 척하는 거 아니냐구.”
오늘 새벽, 한국 영화계에 큰 경사가 있었다. 장영진 감독이 각본과 디렉팅을 맡고, 배우 김시헌이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권태’가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최고 작품상인 황금사자상을 비롯, 각본상·남우주연상까지 3관왕에 오른 것이다.
선우는 이른 아침부터 시헌에게 축하 메시지를 남겼었는데, 인터뷰와 애프터 파티로 내내 정신이 없던 시헌은 현지 시각으로 다음 날이 되어서야 답장을 보내 왔다. 씻고 나오니 시헌에게 메시지가 도착해 있기에, 선우는 반가운 마음에 곧장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와, 근데 네가 너무 유명해지니까 되게 멀리 있는 기분이야. 뭔가…… 뿌듯하고 대견하긴 한데, 이젠 진짜 나랑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 같다고 해야 하나?”
선우가 웃으며 응접실 소파로 다가갔다. 전면 유리창과 마주한 위치에 앉으니, 선우의 앞에는 화려한 한강 야경이 펼쳐지고 그의 옆자리엔 눈부신 남자가 앉아 있었다.
“에이, 알지. 내가 네 맘을 왜 몰라. 그냥, 그런 거 있잖아. 계속 계속 잘됐으면 하면서도, 한편으론 너무 잘되니까 현실감이 없는 느낌. 그렇게 잘되길 바랐는데, 이제 와서 괜히 나만 아는 배우였으면 좋겠고?”
키득거리며 통화를 이어 가는 선우 앞에 붉은빛 와인이 담긴 유리잔이 들이밀렸다. 선우는 제게 와인을 내민 남자에게 눈을 접으며 빈손으로 잔을 받아들었다.
“응, 그럼. 나야 별일 없지. 내 걱정하지 말고 즐겁게 지내다 와. 응, 한국 들어오면 보자. 식사 꼬박꼬박 잘 챙기구!”
통화를 마친 선우가 태성을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와, 진짜 잘됐어요. 그쵸.”
으음, 태성은 정면을 바라본 채 고개를 얕게 끄덕이고는 와인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선우는 그를 따라 자신도 와인 한 모금을 마시고 테이블 위로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손에 든 핸드폰으로 동영상 하나를 찾아 재생시켰다.
‘무엇보다 저 믿고 마음껏 연기할 수 있게 해 주신 장 감독님. 감독님께서 매번 제게 난 영원한 네 팬이라고 말씀해 주시지만, 사실은 제가 정말 당신의 팬입니다. 늘 감사해요.
그리고 한국에서 보고 있을 하나뿐인 내 친구. 항상 응원해 주고 힘이 되어 줘서 고맙다. 우리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든 서로를 아끼는 마음만은 변치 말자던 약속, 너 잊지 말고 꼭 지켜라.
마지막으로 어머니, 아버지. 못난 아들놈 때문에 맘고생 많이 하셨는데, 오늘만큼은 제가 자랑스러운 아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와, 와! 대표님, 이거 봐요. 너무 멋지죠!”
선우가 태성의 앞에 핸드폰을 내보였다. 태성은 턱시도 차림의 시헌을 한 번 흘깃 보고는 선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멋져?”
“네, 멋지죠! 진짜 영광이잖아요. 3대 영화제에서 우리나라 배우가 남우주연상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래요. 이거 찍으면서 감정 소모가 너무 크다고 진짜 힘들어했는데, 뒤늦게라도 보상받은 것 같아서 제가 다 기쁘네요.”
“…….”
배우를 할 걸 그랬나. 태성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손에 든 와인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저를 앞에다 두고 다른 남자가 멋있다고 말하는 선우가 어쩐지 야속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은혜고 뭐고 투자 같은 건 하지 않을 걸 그랬지. 한쪽 입가만 끌어올린 채 스스로를 자조하는 태성의 허리에 문득 늘씬한 팔이 감겨 왔다.
“대표님도 축하해요.”
음…? 태성이 의아함에 두 눈썹을 하늘로 삐죽 들어 올렸다.
“시헌이도 시헌이지만, 대표님이 투자한 영화이기도 하니까 꼭 잘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태성의 옆구리를 파고든 선우가 그를 향해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근데 이 정도로 잘될 줄은 몰랐어요. 역시, 대표님이 안목이 좋은가 봐요. 이렇게 잘될 줄 대표님은 알고 계셨어요?”
하,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해도 유분수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묻는 선우에 태성은 꽁한 마음이 사르륵 녹는 듯했다.
“내가 투자하면 한선우가 좋아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
태성은 선우의 코끝에 걸린 작은 점을 손끝으로 톡 치고는 한 팔로 선우의 등을 폭 감싸 안았다. 선우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허리에 두른 팔을 바짝 조였다. 두 사람의 상체가 빈틈없이 맞붙었다.
창 너머, 주황색 불빛을 내뿜는 다리와 그 불빛이 비치는 강물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선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대표님. 저 오늘 윤 비서님 만났어요.”
“윤 비서?”
“윤해진 씨요.”
아아, 태성이 그제야 알은체를 했다.
“다행히 얼굴이 많이 좋아지셨더라고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얼마 남지 않은 와인을 한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양 의원도 봤어요…….”
바닥이 드러난 와인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던 태성이 순간 몸을 멈칫했다.
“집행 정지 신청하려고 한대요. 아마 받아들여질 것 같다고……. 상태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하더라고요…….”
“…….”
태성의 얼굴이 일순 딱딱하게 굳었다. 선우는 그의 어깨 위에 올려 둔 머리를 살며시 들더니, 정말 궁금해서 묻는다는 듯 말간 눈으로 물었다.
“근데…… 마약은 한번 빠지면 정말 그렇게 끊기가 힘든 거예요……?”
“글쎄.”
태성은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렸다.
“그 안에서도 계속 약을 했대요. 얼마나 오랫동안 해 온 건지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였어요.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있어서 하마터면 못 알아보고 그냥 지나칠 뻔했다니까요.”
“그랬어?”
중독성이 강한 것으로 감질날 때쯤 한 번씩 넣어 줬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애가 타도록 시기와 양을 조절하면서 던져 주면, 길게 볼 것도 없이 6개월만 지나도 누구든 약 없이는 살 수 없는 상태로 만들 수가 있었다.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기어 나온다는 거야? 집행 정지 신청할 정신이 아직까지 남아 있었나.
얼핏 못마땅한 얼굴을 했던 태성이 금세 표정을 싹 감췄다.
“그리고?”
“네?”
“그 두 사람 말고, 또 만난 사람.”
“그 두 사람 말고요? 딱히 없었는데? 의뢰인들 말고는.”
“…….”
태성은 별말 없이 나직한 침음을 뱉었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사무실로 홍성민이 찾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걸 제 입으로 말하자니 모양새가 영 별로였다.
언제부터 이렇게 속 좁은 놈이 되었지. 태성은 속으로 볼품없는 저 자신을 비웃었다.
그때, 선우가 태성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그런데 대표님, 무슨 일 있으셨어요?”
“왜?”
“그냥요. 평소보다 좀 가라앉아 계신 것 같아서……. 혹시 기분이 별로이신 건가 하고요.”
“별로라고 하면?”
“음……. 그럼, 제가 위로해 드려야죠.”
씨익, 입가에 호선을 그린 선우가 슬그머니 태성의 무릎 위로 올라탔다. 이내 양팔을 태성의 목에 두른 선우는 고개를 살짝 꺾고, 그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맞닿은 두 입술에서 달콤한 과일 향과 향긋한 꽃향기가 물씬 풍겼다.
***
가는 길목마다 노란 은행잎이 거리를 수놓은 가을날이었다. 선우는 김재준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고 사무실로 되돌아가는 길이었다. 불현듯 재킷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오주희 대표님」
반가운 이의 전화에 선우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오 대표님! 오랜만이에요!”
태성과 연애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꼭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며 데려간 곳에서 선우는 오주희와 김현수를 만났다. 당시 선우는 태성의 지인을 소개받는 것이 처음이라 혹시라도 그의 친구들이 저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면 어쩌나 무진 긴장을 했더랬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두 사람은 선우를 쌍수 들고 환영했고, 급기야는 태성을 도둑놈으로 몰아세우기까지 했었다. 그 후로 선우는 가끔 두 사람에게 안부 인사를 전했는데, 그게 인연이 되어 이제 오주희와는 꽤 허물없이 연락하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 한 변, 그동안 잘 지냈죠?
“네, 그럼요. 대표님도 잘 지내셨죠? 아기는 잘 커요?”
- 네. 너무 잘 자라서 이제는 우량아를 걱정해야 할 판이에요.
“와, 지난번에 입덧 심하다고 하셔서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 그러게요. 요즘은 언제 입덧했나 싶을 정도로 잘 먹어요. 그나저나, 청첩장을 만나서 줬어야 했는데 그냥 문 대표 손에 들려 보내서 미안해요. 같이 식사라도 하고 싶었는데 도저히 바빠서 시간이 더 안 나네?
“아, 괜찮아요! 그날 시간 못 낸 건 전데요, 뭐.”
어느덧 회사 건물 앞이 다가오자, 선우는 옆에 서 있던 김재준을 보며 손끝으로 제 핸드폰을 콕콕 가리켰다. 그러고는 먼저 들어가라는 의미로 그와 건물 입구를 번갈아 보았다.
- 결혼식 올 수 있죠?
“당연하죠! 두 분 결혼식인데 무조건 가야죠!”
- 요즘 한 변 많이 바쁘다고 걱정하더라고요. 주말에도 못 쉬고 일한다면서요.
“아, 네. 제가 아직 일이 서툴러서요. 그래도 염려 마세요! 아무리 바빠도 대표님 결혼식은 꼭 갈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갈게요.”
- 하하, 고마워요. 문 대표 손 꼭 붙잡고 같이 와요. 오랜만에 데이트하는 기분으로.
“네에.”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서로의 귓가에 닿았다. 선우는 회사 근처 가로수로 심어진 은행나무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아, 그런데 변호사님. 일이 많아서 힘들겠지만, 우리 문 대표님도 틈틈이 신경 좀 써 주세요.
“……대표님이요?”
- 네. 예쁘고 잘난 애인 혹시 어디에 뺏기기라도 할까 전전긍긍하고 있던데.
“네에…?”
노란 잎이 풍성한 나무 아래서 선우가 우뚝 멈춰 섰다. 선우는 황당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전전긍긍하다니?”
- 멋진 애인이 자기한테는 눈길도 안 주고 맨날 일만 하니까 좀 서운한가 보더라구. 사람들 많이 만나면서 누가 또 한 변한테 치근덕거릴까 봐 불안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예에……?”
- 물론 한 변이 한눈팔 사람이 아니라는 거 잘 알고 있지만, 당사자 입장에선 그게 아닌가 봐요? 우린 이제 나이도 제법 먹었으니까. 어린 친구들이 들이대면 괜히 신경 쓰이긴 하겠죠, 아무래도.
“아니,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한눈, 말도 안 돼요, 진짜…….”
누가 저한테 들이댄다는 건지. 정말 불안한 게 도대체 누군데. 선우는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앞머리를 쓸어 올리다 그대로 제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가면 갈수록 섹시함이 더해지는 건 물론이요, 이제는 점점 중후한 멋까지 들고 있어서 사람들이 다 제 애인만 쳐다볼까 초조한 건 오히려 제 쪽이었다.
“왜 대표님은 걱정할 필요도 없는 일로 불안해하실까요? 정작 걱정해야 할 사람은 전데…. 저야말로 대표님 너무 멋있어서 진짜 아무한테도 내보이고 싶지 않다구요…….”
- 으하핫! 방금 한 말 다시 한번 해 줄래요? 이거 녹음해서 문 대표한테 들려주고 싶다.
“하…….”
- 두 사람은 몇 년째인데도 아직도 서로한테 애정이 끓어 넘치네요. 그럼 그렇지, 내가 누굴 걱정해. 나나 잘 살아야겠다.
오주희의 말끝에 웃음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 혹시나 해서 전화해 봤는데, 여전히 잘 지내는 것 같으니 다행이에요. 그럼 우리는 다음 주에 식장에서 만나요.
“네에…. 마저 준비 잘하시고 그날 봬요. 너무 무리하지 마시구요.”
- 네, 고마워요.
“…….”
통화를 마치고 난 선우는 자리를 뜨지 못하고 한참 동안 핸드폰을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어젯밤 그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던 게 이것 때문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도 드물게 한 번씩 그런 기색을 내비치기는 했지만, 그저 농담처럼 한 말인 줄 알았는데……. 오주희에게까지 털어놓을 정도면 그냥 가볍게 넘길 만한 일은 아닌 듯했다.
제가 그만큼 그에게 확신을 주지 못한 것 같아 선우는 금세 마음이 무거워졌다. 새파란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는 선우의 입꼬리와 두 눈썹이 바닥을 향해 축 내려앉았다.
***
잠결에 저와 붙어 자던 이가 꼼지락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니, 오늘도 제 옆은 휑하니 비어 있었다. 뻑뻑한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 방 안을 둘러보자, 파자마 차림의 선우가 스르르 욕실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흐음…….’
시간은 보나 마나 6시가 채 넘지 않았을 것이다. 어제도 자정이 다 되어서야 돌아와 놓고 주말인 오늘은 왜 또 새벽부터 출근을 하는 건지. 태성은 불만 가득한 표정을 하고 옆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한 팔로 머리를 괴고 잠자코 기다리고 있으니, 잠시 후 욕실에서 목에 수건을 두른 선우가 나왔다. 뽀르르, 잰걸음으로 방을 가로지른 선우는 곧 드레스룸으로 꽁무니를 감췄다.
“…….”
태성은 말없이 깊게 침음했다.
머지않아 드레스룸에서 나온 선우가 침대로 다가왔다. 평소보다는 조금 캐주얼한 차림을 한 선우는 여느 때처럼 태성에게 쪽, 가벼운 모닝 키스를 남겼다.
“다녀올게요.”
그러고는 아침 햇살처럼 화사하게 웃는 선우를 태성이 단번에 휙 끌어당겼다.
“엇!”
선우는 팔이 붙들린 채 태성의 위로 고꾸라졌다. 태성은 그런 선우를 끌어안고 순식간에 몸을 빙글 돌렸다.
으앗! 한순간에 침대 위에 발라당 눕혀진 선우가 놀라 눈을 껌뻑이는 사이, 태성이 그를 제 밑에 가두고 진하게 입을 맞췄다.
상쾌한 민트 향이 폴폴 나는 입안을 거칠게 휘젓다, 말캉한 혓바닥을 쪼옥 빨아 당기자 선우가 금세 힘없이 풀어진 눈을 했다.
“아… 저, 가야 되는데…….”
“주말에 무슨 출근이야.”
쪼옵, 태성이 선우의 아랫입술을 세게 빨아들였다.
“읏…! 일이, 남아 가지고…….”
“다음 주에 출근해서 해.”
태성은 동그란 턱 끝을 살짝 깨물며 선우의 허리춤에서 셔츠를 빼냈다. 옷자락 밑으로 손을 넣어 평소 좋아하는 대로 옆구리를 살살 쓸어 만지니, 선우가 몸을 움츠리며 태성을 밀어냈다.
“핫, 주말에 마무리 안 해 두면 일이 또 밀려서요…….”
“아파서 다 못 했다고 해.”
태성은 개의치 않고 선우의 입술 위에 쪽, 쪽 입을 맞췄다. 동시에 손가락 끝으로는 유두를 지그시 누르며 굴리자, 선우가 침대 시트에 대고 등을 좌우로 치댔다.
“으응…. 안 아픈데 어떻게 아프다고 해요…….”
“필요하면 정말로 아프게 만들어 줄 수도 있고.”
태성이 장난스레 웃으며 길게 뻗은 목선 위로 입술을 파묻었다. 셔츠 안을 파고들었던 손은 어느새 밖으로 나와 단정하게 여민 단추를 하나씩 풀고 있었다.
“아, 앗! 대표님! 저 진짜 가야 해요…!”
“일벌레 애인 진짜 피곤하네.”
마지막 단추 한 개만을 남겨 둔 태성이 벌어진 셔츠를 양쪽으로 젖히며, 조그맣게 도드라진 유두를 혀끝으로 쓸어 올렸다.
“흣, 아, 달니이이이임…….”
“이게, 꼭 이럴 때만 애교 부리지.”
평소엔 입에 잘 담지도 않는 애칭을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부르는 선우가 기가 막혔다. 제 어깨를 밀어내는 손을 콱 잡아채고 태성은 색이 연한 유륜 전체를 이빨로 세게 깨물었다.
“아흣!”
“거긴 한 변 아니면 일이 안 돌아간대?”
하얀 몸 구석구석에서 달큼한 과일을 연상시키는 보디 샤워 향이 풀풀 풍겼다. 이 꼴을 하고 가긴 어딜 가. 태성은 남은 단추를 신경질적으로 뜯어내고는 셔츠를 양옆으로 활짝 펼쳤다.
두 팔로 선우의 양 옆구리를 파고든 태성은 제 몸을 선우에게 바짝 붙이며 그의 상체를 꽉 끌어안았다. 빈틈없이 맞닿은 채로 보드라운 살결 이곳저곳을 물고 빠니 선우가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다.
“으으응, 저 말고도, 흐읏, 다들 주말에, 출근해요오…….”
“악덕 기업이네. 이참에 로열이랑 업무 협약을 끊을까? 그럼 한선우도 일이 좀 줄어드나?”
“아, 안 돼요!”
선우가 풀린 눈을 크게 뜨며 빽 소리쳤다.
그 많은 로펌 중에 굳이 블랙 기업이라고까지 불리는 로열에 들어가서 울며 겨자 먹기로 버티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오로지 딱 하나, 로열이 문호건설의 법률자문사이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더 하면 저도 문호 일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갑자기 업무 협약을 끊는다니……! 선우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아직, 계약 기간도 좀, 남았고오, 아…….”
“그럼 지금부터 나 면담하러 왔다고 생각해. 오늘은 내가 의뢰인이야.”
“아, 하아, 진짜아…….”
제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는 의뢰인을 뿌리치지 못하고 선우는 결국 그의 목을 양팔로 둘러 안았다.
***
츕, 성기를 넣었다 빼는 선우의 입에 침이 잔뜩 고였다.
바쁘다는 이유로 남자를 밀어냈으나, 그와의 진한 애무가 고팠던 건 저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 하겠지만, 사납게 곧추선 그의 성기가 사탕과도 같이 달게 느껴졌다.
“변호사님, 이거 봐. 이렇게 야하게 구니까 내가 자꾸 마음을 못 놓는 거라고.”
“아, 하아…….”
두 손으로 태성의 성기를 쥔 채 귀두를 목 끝까지 욱여넣고 빨던 선우가 머리를 쳐들며 입안에 든 것을 뱉어 냈다. 그가 하는 말에 고개를 푹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니, 제 것에서 흘러나온 말간 선액이 남자의 가슴팍을 적시고 있었다.
“흣, 대표님이, 빨아 주시는 게…… 아, 너무, 오랜만이라…….”
“빨아 줄 시간을 내줘야 말이지. 난 한선우만 원하면 언제든 해 줄 수 있는데.”
그러면서 태성은 제 위에 올라탄 선우의 엉덩이를 양쪽으로 활짝 벌렸다. 제가 물고 빨고 핥아 댄 음부 주위가 타액에 젖어 맨들맨들하게 윤이 났다. 혀끝을 단단히 세워 부드럽게 풀어진 구멍으로 박아 넣으니, 선우가 엉덩이를 흠칫 떨며 성기를 쥔 두 손에 힘을 바짝 주었다.
“흐읏…….”
태성은 혓바닥을 둥글게 굴려 내벽을 차근히 넓혔다. 태성의 아랫배에 이마를 비비던 선우도 이내 그의 것을 다시 입에 물었다. 아랫배가 근질근질, 속에서 성욕이 불쑥불쑥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아보려 선우는 온 신경을 눈앞에 놓인 것에 쏟았다.
동그란 귀두 끝을 쪽쪽 빨고 빳빳한 기둥을 혀로 재차 핥아 올리니, 이미 탄탄하게 선 성기에 핏줄이 불뚝 솟아올랐다.
“아, 아아…….”
곧이라도 터질 듯이 팽창한 성기에 입안에서 타액이 질질 새어 나왔다.
“대, 대표님…. 흣, 저, 넣, 넣고 싶은데…….”
“아직 다 안 풀렸어.”
“아, 아니… 괜찮아요…….”
아래가 눅진하게 서서히 녹아내리는 기분도 좋긴 하지만, 전립선에 닿지 못하고 그 주위만 깔짝거리는 혀로는 도저히 제 음심을 다 채우질 못했다. 손에 쥔 걸 제 안에 쑤셔 넣고 단단한 기둥에 전립선을 마구 비벼 대고 싶은 심정이 간절했다.
이왕 출근을 미루게 된 거 오늘만큼은 제가 그를 기분 좋게 해 주려고 마음먹고 달려들었는데, 어쩌다 또 이렇게 그에게 붙들려서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는 건지.
안 되겠다 싶은 선우는 그 자리에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제 골반을 잡고 있는 손을 치우고, 선우는 얼른 태성의 몸에서 내려와 침대 옆 서랍장에서 젤을 찾아 들었다.
“…뭐 해?”
선우는 튜브 뚜껑을 열어 손바닥에 젤을 쭉 짜내고는 홀쭉해진 튜브는 어디론가 휙 던져 버리고 자신은 태성의 다리 사이에 자리했다.
젤이 묻은 손바닥으로 그의 성기를 쥐고 위아래로 훑으니 곧 성기 전체가 번득거렸다. 선우는 몇 차례 더 손목을 빠르게 흔들다 이내 그의 골반 위에 올라앉았다.
“아… 핫……!”
스스로 다리를 쩍 벌리고 좁은 구멍으로 성기를 밀어 넣는 선우에 태성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벽을 완전히 풀지 않은 탓에 성기가 반쯤 들어갔을 때부터 진입이 수월치 않았다. 선우는 두 손을 태성의 아랫배에 올려 두고 양 무릎을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엉덩이만 들어 올려 안에 든 것을 선단만 남겨 둔 채 뽑아냈다.
그리고 다시 푹, 둔부에 힘을 빼며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니 그때마다 안에 박힌 성기가 점점 더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아으읏……!”
“하…….”
몇 번의 시도 끝에 비좁은 내벽이 기어이 성기를 뿌리 끝까지 집어삼켰다. 두 사람의 입에서도 동시에 만족스러운 숨이 흘러나왔다.
태성은 선우를 끌어안으려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선우가 태성의 가슴팍을 지그시 내리누르며 그를 다시금 제자리에 눕혔다.
“오늘은… 제가, 할게요…….”
그러고 선우는 태성의 하체에 맞닿은 엉덩이를 앞뒤로 문대기 시작했다. 핫, 태성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아 가며 양손을 선우의 골반 위로 얹었다.
“하, 아…….”
양 볼이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라 한껏 풀어진 눈을 하고 저를 내려다보는 이에 아래턱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허리를 흔들며 살랑살랑 나부끼는 하얀 나신이 절경이 따로 없었다. 태성은 하체를 위로 쳐올리고 싶은 충동을 애써 내리누르며 선우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하아, 네에?”
“그 악덕 기업은 언제까지 다닐 예정인데?”
“아, 조금만, 더어…….”
태성이 선우의 골반을 쥔 손에 힘을 바짝 주며 허릿짓을 재촉했다. 선우는 그 손에 제 손을 올려놓고 이번에는 위아래로 허리를 움직였다.
“법무팀에, 자리 비워 둔 지가 오랜데.”
“하…. 제가, 읏, 지금 가 봤자, 도와드릴 수 있는 게 없어서…….”
“괜찮아. 그냥 나한테 얼굴 보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흣, 아, 싫어요. 자리만, 축내고 있기, 싫, 아읏……!”
선우는 본능적으로 제가 좋아하는 곳을 좇았다. 허리를 들었다 내리며 귀두 끝으로 전립선을 재차 비벼 대니, 강한 사정감에 내벽이 움찔움찔 떨렸다.
“왜 멈춰?”
계속해. 선우의 움직임이 느려지자 태성은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골반을 위로 쿡 쳐올렸다.
아아…! 그 덕에 선우가 상체를 휘청였다. 태성은 때맞춰 선우의 팔뚝을 세게 잡아끌었다. 제 위로 무너지는 몸을 끌어안고 그는 머리를 숙여 선우의 유두에 입술을 묻었다.
“아흡!”
“당장 안 들어올 거면 주변에 사람들이나 좀 정리해 봐.”
태성이 입속에 든 돌기를 앞니로 자근자근 씹어 물며 말했다.
“하, 으, 사람들이요……?”
선우는 발간 얼굴로 태성을 내려다보았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쳐다보는 눈가가 열기에 축축이 젖어 있었다.
“누구를, 정리해요……?”
기어코 제 속을 드러내게 하는 말간 눈동자가 자못 얄밉기까지 했다. 태성은 두 손을 아래로 내려 선우의 엉덩이를 양쪽에서 꽉 붙잡았다. 선우를 위아래로 흔들며 허리를 위로 세게 치받으니, 선우가 다급히 태성의 어깨를 붙들었다.
“아으읏!”
“홍성민이 사무실로 찾아온다는 건 왜 말 안 했어.”
태성은 그러면서 딱딱하게 솟은 유두를 쫍, 빨았다.
“아……. 홍성민이요……?”
하아, 대표님. 그건 말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해서 말 안 한 거예요. 아, 흣, 선우는 태성이 저를 쳐올리는 속도에 맞춰 하체를 내리눌렀다. 아랫배가 그의 성기로 그득 찬 느낌이 너무 좋아 그만 부르르 몸서리가 쳐졌다.
“김재준은?”
“네, 에? 재준이요……?”
재준이가 왜요? 뜬금없이 제 동기를 찾는 남자에 선우는 상체를 세우고 흔들던 허리를 멈췄다. 그러자 태성은 양손에 쥔 엉덩이를 안쪽으로 힘껏 조이며, 제 성기를 거듭 빠르게 올려붙였다.
아! 앗! 으응! 태성의 흉곽 위에 손을 얹은 채, 그의 위에서 선우가 힘없이 흔들렸다.
“김재준이 로열 대표 아들인 건 알고는 있어?”
“헉! 네에? 아, 흐읏…! 아, 잠깐만……!”
발그스름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보는 선우에 태성은 단숨에 그를 꽉 끌어안고는 몸을 빙글 돌렸다. 선우가 침대 위로 풀썩 떨어지고, 두 사람의 위치가 순식간에 뒤집어졌다.
“재준이가 저희 대표님 아들이라고요?”
“네 대표님은 나고.”
“아, 으응…!”
태성은 양팔로 상체를 지탱하고는 성기를 길게 뺐다 다시 밑을 단번에 쳐올렸다. 이어 빠르게 추삽질을 반복하니, 선우가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껴안았다.
“아, 그럼, 저, 핫, 저, 혹시 낙하산이에요……?”
“반쯤은?”
물론 전직과 출신 학교, 성적이 두루 우수하니 김재준의 입김이 없어도 로열에 입사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형사 출신 신입 변호사에게 험한 형사 사건은 맡기지 않고, 비교적 신사적이고 고상한 사건들만 골라 맡긴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충분했다.
“아아, 맙소사…. 진짜, 하, 몰랐어요…….”
“한선우 눈치 어디 가겠나.”
“아, 근데, 그게, 저를 좋아한다거나, 흣, 그런 건, 아닐 거예요. 읏…!”
“그건 네 생각이고.”
태성은 선우의 엉덩이 사이에 제 고환이 닿을 정도로 성기를 깊숙이 박아넣었다. 맞붙은 살갗으로 선우의 회음부를 비비다 이내 허리로 원을 그리며 내벽을 휘저으니, 선우가 다리를 활짝 벌리며 목을 그러안은 팔에 힘을 바짝 쥐었다.
“아, 아응…! 좋아요. 아, 이거… 너무, 좋아요…….”
“이거?”
“응, 으응. 더, 더, 해 주세요.”
몇 년이 지나도 취향은 바뀌지도 않았다. 성기를 최대한으로 욱여넣고 안을 둥글게 굴려 주면, 선우는 늘 이렇게 애가 달아서 제가 먼저 태성에게 들러붙곤 했다.
“진짜. 야해 빠져 가지고.”
“아, 근데, 대표님. 그런 거 정말, 아, 흐읏,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런 거, 뭐.”
“대표님 말고, 하아, 아무도 저 그렇게 안 봐요. 대표님만,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나도 내가 유난 떠는 거였으면 좋겠는데.”
선우는 두 다리로 태성의 하체를 휘감으며, 그의 입술에 쪽, 쪽 입을 맞췄다.
“그리고, 행여나 누가 저한테 관심 갖는다고 해도, 어차피 제 눈에는 대표님밖에 안 보여요.”
“말이나 못하면.”
“진짠데에…….”
억울한 표정을 짓고 저를 올려다보는 이에 짐짓 식욕이 돌았다. 태성은 급히 달려들어 선우의 입술과 혀를 정신없이 빨아들였다. 말랑거리는 입안, 연한 볼살을 몽땅 짓씹어 버리고 싶은 생각이 불쑥 들었다.
진짜 억울한 게 누군데. 지금까지도 서로 죽고 못 사는 죽마고우에 대한 얘기는 아직 꺼내지도 못했는데, 저를 쫓아 제 혓바닥을 쪽쪽 빨아 대는 선우에 옹졸하게 구겨진 마음이 슬그머니 펴지려 했다.
그래, 누굴 탓하겠는가. 탓을 한다면 예쁜 애인 둔 저를 탓해야 했다.
“아, 대표님. 조금만 더 위로 올라와 주세요.”
맞붙은 입술을 떼어 내며 선우가 말했다. 느닷없는 요구에 태성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선우를 내려다봤다. 그가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선우는 제가 먼저 몸을 아래로 낮췄다. 그러고는 목에 두른 팔을 내려 태성의 상체를 부둥켜안고 탄탄한 가슴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쪼옥, 쪽. 부러 소리를 크게 내며 몇 차례 키스를 남기고, 선우는 색이 짙은 유륜을 혀끝으로 핥아 올렸다. 그가 제게 하듯, 딱딱하게 굳은 유두를 입안에 머금고 살살 굴리다 앞니로 스치듯 긁어내리니, 태성이 목을 울리며 웃었다.
“어디 가서 이렇게 야하게 굴기만 해 봐.”
“제가 이런 걸 어디 가서 하겠어요.”
대표님 아니면 이런 거 하고 싶단 생각도 안 들어요. 제 가슴을 빨며 웅얼거리는 선우의 머리통을 태성이 세게 끌어안았다. 예쁜 게 예쁜 말, 예쁜 짓만 골라 하니 도저히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태성은 동그란 정수리에 입술을 파묻고는 허릿짓에 박차를 가했다. 머지않아 선우가 두 다리로 저를 강하게 얽어매며 사정하자, 그도 가능한 깊은 곳까지 성기를 밀어 넣고 참았던 정액을 길게 토해 냈다.
***
태성을 필두로 문호건설의 임원진들이 대거 현장 시찰에 나섰다. 문호건설이 야심 차게 선보이는 프리미엄 주거복합단지 ‘Sun City’가 드디어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포구 일대를 재개발해 세워진 Sun City는 주거·상업 시설뿐만 아니라 문화, 관광, 쇼핑, 비즈니스 시설을 한 번에 갖춘 초대형·초호화 복합 단지로, 세계 유수의 건축가들이 설계에 참여해 완공 전부터 국내외 건설업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최고급 레지던스와 더불어 6성급 호텔, 대형 쇼핑몰, 미술관, 영화관, 오피스와 콘퍼런스 홀까지 포함하고 있는 이곳은 세련된 외형에 실용적인 내실까지 더했다는 평을 받고 있어, 향후 서울 중심 지역을 대표하는 새로운 랜드마크가 될 곳이기도 했다.
주요 시설들을 차례로 둘러본 태성이 마지막으로 레지던스가 위치한 ‘The Solarium’에 도달했다. 전체가 통유리로 된 The Solarium은 4개의 빌딩으로 구성된 Sun City에서 가장 메인이 되는 건물이었다.
“레지던스 구역은 전부 등록된 지문 인식을 통해서만 출입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입주민 보호와 편의를 위해 리셉션엔 보안 요원과 호텔 지배인 출신의 관리인이 24시간 상주할 예정입니다.”
“네, 좋네요.”
1층 로비에 ‘Sun City 프로젝트’의 총괄 매니저와 태성이 나란히 섰다. 그 뒤로 다수의 관계자들이 두 사람의 주위를 에워쌌다.
“사용 승인은 금주 중으로 떨어질 것 같으니, 개장은 말씀하신 대로 10월 셋째 주 주말에 맞춰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수고 많으셨습니다.”
태성은 대리석으로 사방이 번쩍이는 로비를 크게 둘러본 뒤, 총괄 매니저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기서부터는 저 혼자 둘러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펜트하우스로 직행하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매니저의 말대로 버튼을 누를 때부터 사용자의 지문을 인식한 엘리베이터는 태성이 탑승한 순간, 이미 맨 꼭대기 층 버튼에 불을 밝히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단숨에 최고층에 도달하고, 태성의 앞에는 커다란 현관문이 놓였다.
태성은 문에 달린 작은 패드 위에 당연하다는 듯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금세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이 풀리자, 태성은 문을 열어 펜트하우스 안으로 들어섰다.
또박, 또박. 아직 가구가 채워지지 않은 텅 빈 집 안에 구두 발자국 소리가 청명하게 울려 퍼졌다.
내부를 천천히 살피며 거실까지 걸어온 태성은 한가운데에 팔짱을 끼고 서, 집 안 전체를 빙 둘러보았다.
거실 정면으로는 한강과 그 이남 지역이 한눈에 펼쳐지고, 식당이 위치한 후면에는 높고 파란 하늘 저 끝에 푸른 산줄기와 새하얀 남산타워가 뚜렷이 보였다. 거실을 둘러싼 유리창에 따뜻한 가을 햇살이 한껏 내리쬐어, 비어 있는 공간임에도 집 안에 온화한 기운이 물씬 느껴졌다.
음, 태성은 제자리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네.”
빙긋,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는 그의 얼굴이 우뚝 솟은 오후의 태양만큼이나 훤히 빛났다.
그가 문호건설의 대표직을 맡고 가장 먼저 추진한 ‘Sun City 프로젝트’가 드디어 그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
김현수와 오주희의 결혼식이 있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오늘 같은 날 꼭 출근을 해야 해?”
드레스룸 앞에 비스듬히 기대선 태성은 무척이나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 진짜 죄송해요. 내일까지 꼭 넘겨야 하는 게 있다고 해서……. 서면 몇 개만 얼른 작성하고 곧바로 식장으로 갈게요.”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 진짜 서운해지려고 하는데.”
분명 오늘은 느지막이 일어나 저와 함께 결혼식을 가기로 되어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뜬금없이 상사의 전화를 받고는 갑자기 출근 준비를 하는 선우를 보고, 태성은 기가 막혀 그만 드레스룸까지 쫓아오고 말았다.
“한선우. 네 생일에는 시간 비울 수 있는 거 맞아?”
“네, 당연하죠!”
선우가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대답했다. 예기치 않게 출근을 하려니 본인도 정신이 없는 모양인지, 넥타이를 매는 손이 몇 차례나 버벅거렸다. 제대로 말리지도 못한 머리는 아직도 물기를 머금고 반들거리고 있었다.
쯧, 태성은 언짢은 표정으로 혀를 한 번 차고는 선우의 앞에 다가섰다. 그리고 넥타이에서 선우의 손을 치워 내며 말했다.
“그날까지 바쁘게 굴면 나 정말 가만 안 있는다?”
“응, 응. 그날은 무슨 일이 있어도 회사 안 가요. 절대.”
선우가 요 며칠을 다른 때보다 더 바쁘게 보낸 이유는 그날 하루를 통째로 비우기 위함이기도 했다.
태성은 무심한 손길로 넥타이를 휙, 휙 돌려 맸다. 목 끝까지 타이를 올려 주고, 옷깃까지 깔끔하게 정돈해 준 그가 돌연 길게 내려온 타이 자락을 거칠게 잡아챘다.
“으앗!”
선우의 몸이 앞으로 쏠리기 무섭게 두 사람의 입술이 맞붙었다. 불쑥 쳐들어와 입안을 휘젓는 말캉한 살덩이에 선우가 입을 맞댄 채로 키득거렸다.
“이따 봐요.”
쪼옥 소리를 내며 입술을 떨어트린 선우가 해사하게 웃으며 방을 나섰다.
***
'Hotel the Moon, 강남’의 야외 가든에 바그너의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가을을 한 폭에 담아 놓은 듯, 단풍나무에 둘러싸인 푸른 정원 위에는 알록달록 아름다운 국화 꽃길이 펼쳐져 있었다. 눈부실 만큼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오주희가 꽃길 중앙에 깔린 하얀 주단을 따라 걸었다. 우아하게 걷는 그녀를 따라 양쪽 길가에 장식된 핑크뮬리가 한들한들 춤을 추듯 흔들거렸다.
“헉, 늦어서 죄송해요!”
하객석 끝자락에 서 신부 입장을 지켜보던 태성의 옆에 선우가 섰다. 헐레벌떡 뛰어온 모양인지 선우는 허리까지 꺾어 가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나보다 바쁜 애인 두는 거 정말 별로네.”
선우가 상체를 바로 세우자, 팔짱을 끼고 서 있던 태성이 한 손을 빼내 선우의 코끝을 살짝 쥐고 흔들었다. 히잉, 본인도 미안하긴 한 듯 선우는 눈썹 끝을 내리며 멋쩍게 웃었다.
“와! 진짜 예쁘다!”
신랑과 맞인사를 하고 하객을 향해 돌아서는 신부를 보고 선우가 감탄했다. 호텔 결혼식의 끝을 보여 주겠다던 오주희는 그녀의 계획대로 더없이 화려하고 고상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능력 있는 젊은 두 CEO의 결혼식은 세간에도 초미의 관심사인 듯했다. 호텔 입구에서부터 취재진이 바글바글하다 싶더니, 식이 열리는 가든은 초대장이 있어야만 입장할 수 있음에도 하객들로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그 수많은 하객들 앞에서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두 사람이 함께 혼인 서약서를 읽기 시작했다.
“오늘 저희 두 사람, 영원을 약속하는 이 자리에서 양가 부모님과 참석해 주신 내빈 여러분 앞에 다음과 같이 서약합니다.”
“사랑하겠습니다.”
김현수가 오주희를 보고 말했다.
“존중하겠습니다.”
오주희가 김현수를 보고 말했다.
“항상 당신의 편에 서겠습니다.”
김현수의 목소리를 뒤로, 태성이 조용히 선우의 손을 잡았다.
“항상 당신만을 바라보겠습니다.”
오주희의 목소리를 뒤로, 선우는 고개를 들어 태성을 올려다보았다.
“처음 당신을 향한 마음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시선을 마주쳐 온 태성이 선우를 향해 빙긋이 웃었다.
“지금 당신을 향한 마음 평생 간직하겠습니다.”
선우는 잠시 마주 잡은 손을 내려다보다가, 곧 손을 활짝 펴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깍지를 끼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당신과 함께하겠습니다.”
김현수와 오주희의 목소리를 뒤로, 다시 눈을 마주한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서약을 마친 두 사람에게 우레와 같은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이어 신랑‧신부의 대학 시절 은사가 진행하는 주례와 지인들의 축가가 이어졌다.
“대표님.”
달콤한 사랑 노래가 흘러나올 때쯤, 선우가 태성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건데요.”
태성이 선우의 키에 맞춰 고개를 숙였다.
“……결혼을 하거나 가정을 꾸리고 싶단 생각이 들진 않으세요?”
“내 동거인이 여기 있는데 내가 어디다 가정을 꾸려.”
“혹시나요. 진짜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거예요. 아이가 부럽지는 않은지…….”
“애 우는 소리 딱 질색이라니까.”
태성이 정말 질색을 하고 말했다. 선우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또다시 포기하지 않고 물었다.
“……그래도, 대표님은… 후계자 같은 거 생각하고 그래야 하지 않나……?”
그러자 태성이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요즘 시대에 무슨 후계자. 설마 지금 나 시험해 보는 거야?”
“아니요오.”
선우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를 시험해 보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냥, 가장 가까이에 두고 지내던 두 사람이 결혼을 하니, 그도 내심 미래에 대해 새로운 생각이 들진 않았을지 궁금증이 일었던 것이다.
“난 너랑 천년만년 살다가 너 죽고 나면 가진 거 전부 사회에 환원하고 뒤따라갈 건데? 후계자는 뭐, 남은 사람들끼리 알아서 하라지.”
고맙게도 그는 미래에 대한 생각을 확고히도 밝혀 왔다.
“넌?”
“저요?”
“응. 넌 어떤데. 결혼, 아이. 욕심나?”
“아니요, 전혀. 전 대표님만 있으면 돼요.”
맹세코 그와 함께하는 것 말고 제가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사람들에게 당신이 내 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당신의 사람이라는 것을 공표하지 못한다는 점은 좀 아쉽기는 했다. 정식으로 결혼을 하면 서로에 대한 불안감도 조금은 잠재울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식이 마무리가 되었다. 가족들과의 사진 촬영이 끝나고, 단체 사진을 찍을 지인들은 주례석 앞으로 나오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가자.”
태성이 선우의 손을 잡아끌었다.
엄청난 하객 수를 증명하듯 연단 앞이 온통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태성이 키가 워낙 크니 두 사람은 다른 지인들을 배려하여 맨 뒤쪽 끝자락에 서기로 했다.
단체 사진을 두세 차례 찍고 난 뒤, 사진사가 하객 앞으로 다가왔다.
“자! 이제 제가 하나, 둘, 셋 하면 신부님이 부케 던지실 거예요. 친구분이 부케 받으시면 남은 하객분들은 박수 치면서 신나게 축하해 주시면 됩니다!”
사진사의 안내에 선우는 살짝 까치발을 하고 신부가 서 있는 쪽을 내려다보았다. 누가 그녀의 부케를 받게 될지 궁금했는데, 인파 속에 가려진 건지 어디를 보아도 부케 받을 사람이 보이지가 않았다.
“갑니다! 하나, 둘, 셋!”
사진사의 구호와 함께 오주희의 손에 있던 핑크빛 부케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사람들의 시선이 부케의 움직임을 따라 이동했다. 선우도 고개를 들어 눈으로 그를 좇았다. 얼마나 세게 던진 것인지, 하늘 높이 떠오른 꽃다발이 허공을 멀리도 가로질렀다. 그리고,
어, 어……. 어……?
크게 포물선을 그린 꽃다발은 이내 선우의 두 팔에 안착했다.
“허어……?”
일순 사람들의 시선이 선우에게로 쏠렸다. 얼떨결에 부케를 받아든 선우는 황당함에 태성과 오주희를 번갈아 보았다.
꽃다발이 날아간 거리와 그걸 받아든 남성 하객, 두 가지를 모두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 사이에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짝……!
짝, 짝! 누군가의 짧은 박수를 시작으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이곳저곳에서 밝은 웃음소리가 터지고, 어디선가는 경쾌한 휘파람 소리가 울리기도 했다.
환호하는 사람들 속에서 여전히 얼떨떨한 선우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고개를 갸울였다. 언뜻 눈을 마주친 오주희가 저를 보고 한쪽 눈을 찡긋거린 것 같기도 했다. 어리둥절해진 선우는 다시 옆에 있는 태성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예사로운 표정으로 그저 어깨를 가볍게 으쓱 올렸다 내렸다.
“예쁘네.”
그렇게 말하는 어투도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무덤덤했다.
***
선우의 서른두 번째 생일날이었다.
미리 약속한 대로 온종일 휴가를 낸 두 사람은 오랜만에 늘어지게 늦잠을 잤다. 정확히는 잠을 잤다기보다는 둘이 붙어 꼼지락거리느라 침대 밖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보는 게 맞았다.
기어이 아침부터 서로 한 발씩 빼고 난 두 사람은 오전 11시가 다 되어서야 욕실로 향했다. 함께 샤워를 하고, 앞서 나온 선우가 먼저 드레스룸으로 들어섰다.
“어? 이게 뭐예요?”
제가 사용하는 옷장 앞에 서서 선우가 물었다. 미닫이문을 여니 맨 앞에 못 보던 상앗빛 슈트 한 벌이 걸려 있었다.
“생일 파티 복장.”
뒤따라 들어온 태성이 말했다. 선우를 지나친 그는 자신의 옷장에서 옷걸이에 정갈하게 걸린 슈트 한 벌을 꺼내 보였다. 선우의 것과 디자인이 같고 색깔만 다른 검은색 정장이었다.
“같은 색으로 할까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넌 그 색이 잘 어울려.”
“으아…….”
선우는 눈썹을 구긴 채 입을 떡 벌렸다.
그냥 쇼핑하고 밥이나 먹자더니, 이런 옷은 왜 준비를 한 건지. 이건… 지난 주말 결혼식에서 김현수가 입은 것보다 디자인만 조금 얌전할 뿐, 식 올리는 신랑이 입는 턱시도와 다를 것이 없었다.
“이것도 해야 해요……?”
선우가 슈트 앞에 함께 걸린 보타이를 빼 들며 물었다. 셔츠를 입던 태성이 선우를 흘깃 보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이것도 해야 하는 게 맞는 듯싶었다.
으음…….
보드라운 슈트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선우는 굳은 결심을 하고 셔츠부터 꺼내 들었다. TPO에 맞춰 옷 차려입는 것을 워낙 좋아하는 사람이고, 제 생일날을 저보다도 더 고대하던 남자였으니, 오늘만큼은 군말 없이 그가 하자는 대로 따라보기로 했다.
선우가 옷을 다 입고 나니, 먼저 준비를 끝낸 태성이 다가왔다. 그는 선우의 머리와 보타이를 보기 좋게 다듬어 주고는 선우의 왼쪽 손목을 들어 푸른 다이아가 박힌 은색 시계를 채웠다. 시계를 찬 쪽 손, 네 번째 손가락에는 늘 그렇듯 심플한 은빛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자, 그럼 가실까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제게 손바닥을 내보이는 남자에 선우가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저와 같은 반지, 같은 시계를 하고 있는 그의 왼쪽 손을 꽉 붙들고, 선우는 기분 좋게 발걸음을 떼었다.
***
“와아……. 정말 엄청나네요…….”
서울 한복판에 이렇게 큰 쇼핑몰이라니. 중심에는 아름다운 수로가 흐르고, 양옆으로는 명품관이 줄지어 선 거리를 단둘이 걸으며, 선우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연신 감탄했다.
선우의 생일 파티 장소는 다름 아닌 Sun City였다.
개장을 이틀 앞두고 누구보다도 먼저 보여 주고 싶다며 태성이 데려온 것이었다. 마침 선우도 예전 살던 곳이 어떻게 변했는지 내심 궁금하던 차였다.
두 사람은 아직 오픈하지 않은 ‘Hotel the Moon, with the Sun’에서 늦은 브런치를 하고, 미술관과 쇼핑몰을 차례로 돌았다.
낡고 오래된 아파트 단지가 이렇게 호화로운 복합 단지로 바뀐 것이 신기하면서도, 제 어린 시절을 모두 담고 있는 동네를 이제는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쉽기도 했다.
시간이 한참이나 흘렀으니 이곳도 언젠가는 변해야 했겠지만, 아빠와의 추억들을 되새길 장소가 사라진 것은… 말로 표현한 적은 없어도 못내 서운하기는 했다.
쇼핑몰 끝에 자리한 거대한 광장을 지나,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Sun City에서 가장 크고 높은 빌딩, The Solarium이었다.
“여긴 뭐 하는 곳이에요?”
건물 안으로 들어선 선우가 1층 로비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물었다. 번쩍번쩍 빛이 나는 대리석 복도에는 흡사 미술 전시회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고급스러운 조형물과 그림이 곳곳에 전시되어 있었다.
“가 보면 알아.”
태성은 선우를 복도 가장 안쪽에 위치한 엘리베이터로 이끌었다. 엘리베이터는 두 사람을 곧장 최고층으로 안내했다.
이내 둘은 커다란 현관문 앞에 나란히 섰다. 태성은 왼손에 잡고 있던 선우의 손을 들어, 그의 손가락을 문에 달린 패드 위에 올려놓았다.
“엇!”
동시에 달칵 소리를 내며 잠금이 풀리니, 선우가 놀란 눈을 하고 태성을 바라보았다. 태성은 부드럽게 웃으며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고는 선우에게 먼저 들어가라며 손짓을 했다.
“…….”
또박, 또박. 빈 공간에 두 사람의 느린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선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조심스레 복도를 따라 걸었다. 크게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피는 선우를 태성이 말없이 뒤따랐다.
그리고 마침내 탁 트인 거실에 도달했을 때,
“와, 세상에!”
창가를 마주한 선우의 입에서 탄사가 터져 나왔다.
고층 건물에서 내려다보는 서울 오후의 경치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왠지 손이 닿을 것만 같은 태양과 거기서 쏟아져 내리는 따스한 가을 햇발. 그 빛을 반사해 보석을 흩뿌려 놓은 것처럼 반짝이는 넓고 긴 강물, 그리고 그 강 너머로 펼쳐진 강변 도시가 꼭 한 폭의 도시 풍경화를 보는 듯했다.
“마음에 들어?”
“어떤 게요?”
선우가 창밖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말했다.
“이 집.”
“이 집이요?”
“한선우 거잖아.”
“……네에?”
선우가 고개를 천천히 돌려 어느새 제 왼쪽에 선 태성을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태성의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한 선우가 두 눈썹을 안으로 모았다. 이미 그런 반응을 예상했던 태성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 아버지 신혼집이고. 또, 네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니까. 꼭 다시 돌려주고 싶었어. 비록 모양은 다를지언정.”
“…….”
선우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에 네가 살던 동이 있었지, 아마?”
“핫……!”
일순 양 볼에 소름이 끼쳐 올랐다. 선우는 갑자기 울컥 눈물이 솟을 것만 같은 것을 꾹 참고, 집 안팎을 정신없이 둘러보았다.
그의 말대로였다. 주변이 천지개벽을 하고, 서 있는 곳이 너무 높아서 한 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뿐이지, 제가 어릴 적 살던 그 위치가 얼추 맞는 듯했다.
“어, 어떻게…….”
“생각보다는 좀 오래 걸렸다. 고도 제한 푸느라.”
태성이 아쉽다는 듯 코끝을 찡긋 구겼다.
선우가 살던 지역 일대가 재개발을 추진하면서부터 태성은 이 지역의 부동산 매물들을 야금야금 사들이기 시작했다. 웃돈을 주고 매수를 하더라도 선우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 그리고 저희가 연애를 시작한 이곳을 그는 꼭 제 수중에 넣고 싶었다.
마침 건설사로 자리를 이동하게 되자, 태성은 그때부터 공격적으로 재개발 사업권 수주에 나섰다. 이미 다수의 조합원이 저의 차명이었고, 남은 조합원들을 구워삶는 것은 제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 사업권을 따오는 것 자체는 생각보다 손쉬웠다.
가장 애를 먹었던 것은 고도 규제를 푸는 일이었다. 백 층이 넘는 The Solarium 건설에 걸림돌이 된 건 서울시도 국방부와 같은 관계 부처도 아니요, 바로 시민 단체였다. 규제 완화라면 다짜고짜 들고 일어서는 시민 단체들을 설득하기 위해 태성은 또 한 번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그들 앞에 직접 나서야 했다.
“인테리어가 마무리되면 이 집으로 이사를 올까 하는데.”
“하……. 저는 지금 집으로도 충분한데요…….”
“별로야?”
“아뇨, 아뇨. 그럴 리가요.”
선우가 물기가 고인 눈으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럼 동의하는 거지?”
그리고 목이 빠지라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디든. 대표님 계시는 곳이면, 저는 어디든 상관없어요.”
단호하게 뱉는 말에 태성의 입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잠시 선우의 왼손을 내려다보던 그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한선우.”
“네?”
“우리 결혼할까?”
“……!”
순간 선우의 숨이 멎었다. 눈꺼풀을 깜빡이는 것도 잊은 채 태성을 올려다보니, 그가 미소를 머금고 눈을 마주쳐 왔다. 선우는 그를 홀린 듯 보다가 이내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동성혼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어요.”
한선우다운 대답에 태성이 피식 웃었다.
“법은, 하루아침에도 바뀌는 게 법이고.”
태성은 돌연 팔짱을 끼고는 선우의 왼손으로 힐끔 눈길을 던졌다.
“예물이랑 신혼집은 마련됐으니, 혼수는 이쯤이면 되지 않나?”
선우가 그를 따라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가 바라보는 제 왼쪽 손에는 은빛 시계와 반지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하, 입이 떡 벌어지고 탄성이 절로 나왔다. 눈이 접히고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쏟아지는 햇살만큼이나 환한 미소를 띠고, 선우는 몸을 돌려 태성을 마주 보고 섰다.
“네. 해요, 결혼.”
서로를 향해 선 두 사람에게 눈부신 가을날의 태양 빛이 듬뿍 내리쬐었다.
[‘데스페라도 - ¡Oh, Sol Mío!’ 마침]
데스페라도(The Desperado)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