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op By Drop 1-prequel 1/2. (1/28)

prequel 1/2.

정무도正武道 본산 소속, 정원사범 한태일의 직계 제자 중 하나인 하원사범 서정운은 여러모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첫 번째로는 국내 정식 등록 선수만 수천 명에 달하는 정무도에서 오로지 두 명뿐인 정원사범, 그중 형인 한태일이 직접 키운 제자들 중 제일 맏이라는 점에서 유명했다.

두 번째로는 현역 선수 시절 국내외의 각종 공식․비공식 대회에서 비록 우승을 한 적은 없으나 경량급輕量級 순위권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는 전적으로 유명했고,

세 번째로는 이십 대 후반의 이른 나이에 현역에서 물러서 사범을 맡은 그가 서른에 이미 6단 기록을 보유했을 만큼의 빼어난 실력을 지닌 하원사범인 것으로 유명했으며,

네 번째로는 통상적으로 3단에 하원사범, 5단이 되면 중원사범으로 승급함에도 불구하고 6단에 이르기까지 계속 하원사범에 머물러야 했던 이유---여성 편력이 워낙 화려한 데다 관련된 추문도 많아 정무도 협회로부터 근신하고 자숙하라는 주의를 정식으로 수차례 받았던 이력으로 유명했다.

오죽하면 정무도 선수들 사이에서 ‘여자들의 공공의 적’이자 ‘남자들의 공공의 경쟁자’라고 암암리에 불릴 정도로 여자 소문이 그치지 않았던 그가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유명해진 것은, 서른 살을 맞은 생일날 친구들과 축배를 들고 밤늦게 귀가하던 길에 불의의 사고로 크게 다쳐 정무도를 그만둬야 하게 되었던 탓이다.

그것은 그가 정무도를 그만둔 뒤에도 제법 오랫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화젯거리가 되곤 했다.

“하나 더 있잖아. 그건 왜 빼먹어.”

과거를 회상하던 정우일은 김진철이 불쑥 끼어들어 말하자 고개를 돌렸다. 지방으로 이사 간 뒤로 못 보고 지내다가 몇 년 만에 만난 김진철은 과거 정우일과 더불어 같은 사범 아래에서 수련했던 동기다.

“어? 내가 뭘 빼먹었지?”

“서정운 사범님이 제자들 까칠하게 가르치기로 얼마나 유명했었냐. 넌 몇 년 됐다고 그걸 까먹어?”

“아아, 그건 뭐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유명한 얘기였으니까.”

“정무도 좀 오래 배웠다는 사람치고 모르는 사람이 어딨었어, 서정운 사범님 빙글빙글 웃으면서 제자들 쥐 잡듯 잡는 거.”

투덜거리던 김진철은 옛 생각이 떠올랐는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당시 밤마다 연습이 끝나면 어찌나 혹사당했는지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몸뚱이를 질질 끌고 도장을 나서던 그들이었다.

“야, 그렇게 독하게 배웠기 때문에 지금 네가 부산에서 그렇게 실력 있다 하는 사범 노릇을 할 수 있는 거야.”

정우일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아니 뭐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그때는 정말 인간이 할 짓이 아니었다고.”라며 구시렁거리는 김진철의 목소리가 슬쩍 줄어든다.

그야 유명하긴 유명했다. 하원사범 서정운이 제자들 독하게 가르치는 건 이 정무도 판에서 사범쯤 한다는 사람치고는 저 시골구석에 있는 사람이라도 모르는 이가 없었고, 서정운 제자치고 눈물 한 됫박쯤 안 흘린 사람이 없었다. 그의 밑에서 일 년 이상 버티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일 년 이상 버틴 사람치고 어디 가서 못한다는 소리 듣는 사람도 없었다.

“하긴 그건 그래. 나 처음 서 사범님한테 배우러 갔을 때 이미 그런 소문들은 귀에 못이 박히게 듣고 갔는데도 설마 그렇게까지 지독하게 굴릴 줄은 몰랐거든.”

“심지어 그 사람이 첫인상은 쓸데없이 좋잖아. 서글서글 잘 웃고 목소리도 차분하니 조용조용하고.”

정우일은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동감했다.

“나는 지금도 기억나는 게, 처음에 서 사범님한테 배우겠다고 찾아갔을 때 본산 들어서서 제일 먼저 마주친 사람이 김정수 사범님이었는데---왜, 기억나지? 지금 충남 지원에 가 계신 그분 말야---, 내가 서 사범님께 배우게 됐다고 말하니까 김 사범님이 ‘서정운 사범한테……? 어, 그래……, 그러면 실력은 분명히 늘 거야…….’ 하고 떨떠름하게 말하면서 왠지 모르게 되게 애틋하고 불쌍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셨는데, 첫날 연습 마치고서야 그 이유를 깨달았지.”

“서 사범님한테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기억 한두 번쯤은 있는 거 아냐?”

정우일은 낄낄거리며 다시금 기억 속 과거를 더듬었다.

국내에서만 수백만, 국내외를 통틀어 수천만 명이 배우고 있다는 정무도. 원래 한씨 문중의 가전 무술로 시작되었으나 이제는 해외까지 널리 알려진 무도의 총본산은 오래되고 단아한 한옥 저택이었다.

유수의 재벌가이자 정재계 도처에 숱한 거물들을 친인척으로 두고 있는 한씨 문중의 종가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이기도 한 그 고택은 대단히 넓은 부지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집채 하나하나가 오래되어 개중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도 여럿 있을 정도다.

그중 정무도와 관련된 용도로 쓰이는 집채들은 식솔들이 생활하는 집채와는 따로 구별되어 있었는데, 그 담장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정우일은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비록 지나가다 마주친 낯익은 사범님 한 분이 ‘오늘부터 서정운 사범님한테 배운다고……? ……그래, 좋은 분을 스승으로 모시게 됐구나. ……열심히 하려무나, 그만두지 말고.’라며 왠지 모르게 안쓰러운 눈길을 주며 혀를 차고 지나간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런 것쯤은 금방 잊어버렸다.

과연 정무도 총본산이다. 큰 대회에서 먼발치서만 보았던 유명한 선수들이 평범하게 오가고 있었다.

어, 저 사람 작년 하계 선수권에서 경량급 우승했던 선수잖아. 그 옆에는 TV에 해설위원으로 종종 나오는 서일구 상원사범……, 우와, 지금 저기 나가는 사람 전년도 중량급 우승자 한호영이다. 한호영 선수를 이렇게 가까운 데서 직접 보다니!

휘둥그런 눈으로 감격해 마지않고 있던 정우일은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정우일 씨?’라는 목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았고, 그때가 서정운 사범을 처음 마주한 때였다.

‘서연보徐然步 밟아 볼래?’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곧 정우일을 수련장으로 데려간 서정운 사범은 정무도의 가장 기본적인 걸음법을 해 보라고 했고, 정우일은 벽 거울을 앞두고 제자리걸음을 밟기 시작하며 자신을 지켜보는 사범을 거울 속으로 흘끗 쳐다보았다.

워낙 젊은 나이에 사범이 되어서 자신과 나이 차가 그리 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어려 보이고 또 소문과는 달리 인상도 좋고 상냥해 보인다. 확실히 여자가 많이 따를 것 같긴 하지만 그렇게 여자관계 지저분하거나 무시무시한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는데, 하고 생각하는 정우일을 지켜보던 사범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외워. 너는 걸음을 딛는 게 급해. 더 여유를 두고, 다리 전체로 밟는다기보다는 무릎과 발목으로 밟는다는 느낌으로 밟아. 체중을 실어서 지그시 눌러서 밀며 무릎을 편다는 느낌으로. 더 부드럽게. 내 말 외웠지? 느낌은 이거야. 하나. 둘…….’

정우일의 앞에 웅크리고 앉아 그의 무릎과 발목을 붙잡은 사범은 천천히 정우일의 걸음에 맞추어 그의 다리를 구부렸다 펴준다. 어리둥절하게 그를 내려다보며 걸음을 디딘 정우일은 ‘이런 느낌으로 밟는 거야. 알겠지? 다시 밟아 봐.’라며 도로 버티고 서는 사범을 앞두고 다시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고, 그때부터가 피 마르는 시간의 시작이었다.

‘걸음이 급하다고 했잖아. 아냐, 둔해졌어.’

‘무릎. 무릎을 쓰라니까. 체중 실어서. 발목도 같이 써야지.’

‘걸음이 다시 급해지잖아.’

식은땀이 흘렀다. 하나를 신경 쓰면 다른 하나를 지적하는 목소리는 처음과 변함없이 온유했는데도 나중에는 채찍이 날아드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얼마 있지 않아 사범은 다른 수련생에게로 돌아섰지만 마음 놓을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걸음이 느슨해지면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는지 당장 ‘무릎.’이라든가 ‘무게 중심.’ 같은 한마디가 날아왔다.

정무도를 익힌 지 십 년도 넘었는데, 심지어 전국 청소년 대회에서 순위권에도 수차례 들고 어디서나 잘한다는 소리를 들어 왔는데, 그런 자신이 고작해야 아기 걸음마 같은 기초 보법으로 이렇게 진땀을 뺄 줄은 몰랐다. 심지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만하라는 말이 없을뿐더러 잠깐 쉴 셈 치면 대뜸 ‘걸음 멈추지 마라.’라는 소리가 날아들 뿐.

아무것도 안 하고 오로지 똑같은 걸음만 밟고 있으려니 다리가 오징어가 된 느낌이었다. 그렇게 지옥 같은 몇 시간을 보낸 뒤 정우일이 지쳐 쓰러지기 직전에야 들은 말은, ‘오늘은 첫날이니 가볍게 이 정도만 하자.’였다.

정무도 총본산에서 배우게 되었다고 온 동네방네에 자랑을 해 둔 탓에 바로 그만두지도 못하고 거의 울며 겨자 먹기로 나간 지 일주일 남짓.

‘일주일 지나서 이 정도라…….’

그날도 기본 보법을 밟는 정우일을 지켜보던 사범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칭찬인지 비난인지 분간이 안 가는 덤덤한 말투에 귀를 쫑긋 세우며 긴장하는 정우일에게 바로 다음 말이 날아왔다.

‘십 년 배웠다면서 지금 이 정도면, 너 여태 뭐 했어.’

제길, 비난이었구나.

정우일은 억울한 심경으로 대꾸했다.

‘열심히 했습니다.’

‘열심히 십 년 했는데 이거야?’

‘자질이 부족한 건 어쩔 수 없잖습니까. 제 깜냥에서는 열심히 했습니다.’

정우일은 부루퉁하게 반박하며 거울 속으로 사범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사범은 눈 하나 까딱 않고 선선하게 웃었다.

‘네가 만족할 만큼? 아니면 남들을 만족시킬 만큼?’

순간 정우일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모른 척 숨겨 두고 있던 뭔가가 덜컥 끌려 나온 것 같은 그 기분. 스스로도 미처 몰랐던---혹은 모른 체했던--- 정곡을 정확히 찔린 것 같았다.

‘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 네가 ‘진짜로’ 열심히 했는지. 일주일 만에 이 정도로 하게 됐는데, 그 자질로 십 년 열심히 해서 이거라면 말이 안 되지.’

어, 이건 칭찬인가?, 라고 생각한 것도 찰나였다. 거울 속에서 빙그레 웃는 사범의 웃음이 짙어졌다.

‘우일아, 제대로 안 할래……?’

한층 조용해지는 목소리에 정우일은 그야말로 채찍에 두들겨 맞은 것처럼 화들짝 어깨를 움츠렸다. 동시에, 바로 그 순간, 정우일은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 일면을 깨달았다.

다 꿰뚫어 보고 있구나. 또, 내가 반항하든 반박하든 씨알도 안 먹히겠구나. 그리고,

‘열,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 사람을 만족시킬 만큼이라면, 그러면 나는 ‘열심히 했다’고 나 자신에게도 당당히 말할 수 있겠구나.

“너는 그래도 낫지, 난 처음에 며칠 동안 보법만 내리밟으면서 내가 도대체 뭐 하는 짓인가 싶고 짜증도 나서 일부러 계속 틀리면서 모르겠다고 했더니 사범님이 뭐라고 했었는지 알아? 날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중얼거린 말이란 게, ‘장식은 예쁘기라도 하지 저 머리는 장식도 아니고…….’였다고. 저건 대체 뭐지 싶은 눈으로 쳐다보면서! 아니 그게 제자한테 할 말이냐?”

“일부러 반항하는 거 귀신같이 알아보는 분인 줄 알면서 왜 그랬어? 네가 잘못했네.”

몇 년 만에 옛 동기를 만나 옛날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때의 기억이 새삼스럽게 선명해졌는지 버럭 화를 내는 김진철에게 정우일은 낄낄 웃으며 대꾸했다. 김진철도 이내 피식거린다.

“사람이 온갖 독한 소리 다 퍼부을 때도 항상 싱글싱글 웃으면서 퍼붓잖아. 시간 좀 지나니까 되레 그게 어찌나 더 열 받는지.”

“반박할 수가 없어서 더 열 받지, 응? 진짜 조그만 거 아주 잠깐 실수해도 기가 막히게 알아보신다니까.”

“기본을 정확하게 지키지 않으면 이겨도 욕먹잖아.”

“그래, 그랬지. 하하, 그러고 보니 너 그때는 기억나냐? 지방의 지원 수련생 몇 명이 참관 와서 너 시범 대련 했을 때.”

“응? 아---경남 쪽에서 하계 선수권 직전에 참관 왔던 그때?”

김진철의 얼굴이 벌레 씹은 듯 우그러졌다.

아차.

김진철은 내심 혀를 차며 순간적으로 흘끗 눈동자만 돌려 사범의 기색을 살폈다. 대련장 주위를 둘러싸고 참관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팔짱 끼고 서서 유유히 지켜보고 있는 서정운 사범은 평소처럼 담담하게 웃는 얼굴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

실수한 것은 아주 짧은 찰나였다. 사실 실수라고 할 만한 것도 아닌 게, 대련 상대의 허점이 눈에 띄어 얼른 파고들려고 서두르다 딱 한 걸음 무게 중심을 정확히 옮기지 않았을 뿐이다.

균형을 잃은 것도 아니고 상대에의 공격도 잘 먹혀들었다. 아무 문제도 없이 넘어간 한순간이었다. 보통이라면 선수 본인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의 일이었고, 게다가 곧바로 연이은 공격으로 우위를 점한 김진철은 대련 상대를 멋들어지게 메어쳐 넘겨 승리를 거머쥐었다.

흠잡을 데 없는 시범 대련이라 할 수 있는 한 판이었다.

지방에 있는 정무도 지원에서 수련생들이 연수차 올라와, 본산 내부를 견학하며 둘러보고는 본산의 수련생과 시범 삼아 실력을 겨루어 본 참이었다.

수련생들을 이끌고 온 지방 지원의 사범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서정운 사범이 시범 대련을 해 보라고 김진철을 불러냈고, 김진철은 지방 수련생들 중에서도 첫째 둘째로 꼽힐 만한 사람을 상대로 대련해 이겼다.

흐트러진 도복의 끈을 고쳐 묶으며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대련장에서 물러난 김진철은 서정운 사범과 나란히 서 있던 지방 사범이 손짓으로 불러 그들에게 다가갔다. 흘끔, 다시 서정운 사범의 눈치를 살폈지만 여전히 웃고 있는 저 표정은 도무지 읽을 수가 없다.

‘하하, 멋진 대련이었습니다. 기본기도 탄탄하고, 아주 실력이 훌륭한데요.’

지방 사범이 김진철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김진철은 흐뭇해져서 웃음이 떠오르려는 낯을 꾸벅 숙이며 겸양했다.

‘아닙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예, 그런 말씀 마세요.’

‘…….’

‘…….’

웃으면서 말을 거드는 서정운 사범의 목소리 뒤로 그 자리에는 짧은 침묵이 흘렀다.

지방 사범은 빙그레 웃고 있는 서정운 사범을 보고 이건 대체 뭔 말인가 눈만 껌벅였고, 연수생들도 눈만 껌벅였고, 서정운 사범의 다른 제자들만 진땀을 흘리며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런 가운데 서정운 사범이 김진철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다정하게 건네는 한마디,

‘진철아. 제대로 안 할래?’

‘---죄송합니다, 사범님!’

김진철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며 외쳤고, 그러면서 생각했다. 그래, 이 귀신같은 인간이 못 봤을 리 없지. 헛된 기대였다. 이제 나는 한동안 무게 중심을 정확하게 옮기는 연습만 죽도록 하게 생겼구나, 다리가 오징어 되도록…….

“서 사범님, 기본이 안 잡혀 있는 거 되게 싫어하셨잖아. 기본이 몸에 안 배어 있으면 뭘 연습하든 소용없다고.”

“아오, 그놈의 기본! 발 고작 한 뼘쯤 더 내딛는다고 대뜸 나뒹굴기라도 하냐? 자빠지기라도 해? 어차피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한 걸음인데, 그걸 갖고 사람을 아주 잡아요, 잡아.”

“사범님 앞에서 그렇게 말해 보지 그랬어.”

“돌았냐?!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대뜸 펄쩍 뛴 김진철은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심지어는 목소리까지 낮춘다.

“이런 얘기 하면 무섭다니까. 어디선가 귀신처럼 다 듣고 있을 것 같거든. 연습 때도 그랬잖아, 다른 데 보고 있는 것 같은데 뭐 좀 잘못하면 귀신처럼 다 알더란 말이야.”

오죽했으면 뒤통수에 눈이 달렸다고 동기들끼리 내기도 했었는데, 그 내기는 결국 아무도 서 사범의 뒤통수를 직접 확인하지 못해서 미결로 그치고 말았다.

“난 요즘도 연습할 때 나 혼자 있어도 설렁설렁 못 하겠더라. 누가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이미 몇 년이나 지난 일이고 더 이상은 서정운 사범이 도장에 있을 리도 없는데, 몸에 붙어 버린 습관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정우일은 “어, 나도 그래.”라며 웃었다.

“습관이란 게 한번 몸에 배어 버리면 없애기 힘들다니까.”

“그래서 기본기가 정확하게 몸에 배도록 연습시키신 거잖아.”

그렇기 때문에, 그들보다 센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들보다 정확한 사람은 손꼽을 정도밖에 없는 것이다.

김진철은 떠름하게 정우일을 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 그 덕에 내가 부산에서 사범으로서는 좀 알아주는 몸이 된 거고.”

“그러고 보니 너도 애들 독하게 갈군다고 악명 높더만, 네가 서정운 사범님 타박할 처지냐?”

“이거 왜 이래, 난 거기에 비하면 천사다, 천사! 난 우리 애들이 좀 잘하면 나름 칭찬도 잘 해 준다고! 너 그분이 제자 칭찬해 주는 거 봤냐?”

그렇게 말하자면 대꾸할 말이 없어진다. 연습하는 걸 지켜보던 사범님이 ‘음.’ 하고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고 돌아서면, 그게 마치 그분의 까다로운 기준에 합격했다는 의미 같아서 칭찬을 들은 듯 기뻐했었다.

생각해 보면 그 흔한 칭찬 한번 못 들은 불쌍한 제자들이라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서 사범님 나름대로는 당신 제자 아끼셨잖아.”

제법 오래전, 하계 선수권 대회에서였다.

그 해는 경량급에서 정련과 체련---정무도 내에서 대립하고 있는 두 파---의 순위 다툼이 유난히 치열했었다.

당시 서정운 사범에게 배우는 수련생이 경량급에 출전해 준결승까지 올라갔다가 아쉽게 패배하고 3-4위전에 나섰는데, 공교롭게도 결승과 3-4위전 모두 정련 측 선수와 체련 측 선수의 대전이 되었다.

원래라면 3-4위전을 먼저 치러야 했지만 선수 사정상 결승을 먼저 치르게 되었고, 결승에서 체련 측 선수가 이겨 우승을 했다. 그 바람에 3-4위전에 임하는 정련 측 선수, 서정운 사범의 제자인 그 동기는 한층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결승에서 체련이 이겼으니 적어도 3-4위전에서라도 정련이 이겨 체면치레는 해야 한다는 정련 측 관계자들의 무언의 압박 속에서,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동기는 끝까지 최선을 다해 분투했으나 결국은 근소한 차이로 석패하고 말았다.

정련 측 관계자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개중에는 개인의 심경보다는 집단의 권익을 우선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라, 어깨를 늘어뜨리고 지친 걸음으로 무대에서 내려오는 선수를 향해 중원사범 하나가 아쉽게 혀를 찼다.

‘고생했네. 쯔쯔, 그래도 거 조금만 더 버텨 보지 그랬어, 이길 수 있는 경기였는데.’

‘……죄송합니다. ……힘이 모자라서,’

면목 없는 듯 꾸벅 고개를 숙이던 선수는 중원사범의 뒤에 서서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던 하원사범 서정운---자신의 스승과 눈이 마주치자 풀 죽어 우물거리다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전력을 쏟아부은 통에 제대로 들어 올리기도 힘든 팔이며 바닥을 질질 끌다시피 하는 다리가 죄스러워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평소에 체력을 붙여 뒀더라면 좋았을 텐데. 뭐 이번 시합은 이미 지난 일이니 그렇다 쳐도, 앞으로는 근력을 키우는 데에 좀 더 신경을 써야겠어. 가만있자, 자네가 누구 밑에 있었더라……?’

‘제가 가르치는 아이입니다.’

그때, 중원사범 뒤에서 서정운 사범이 말했다. 갑작스런 목소리에 중원사범이 움찔하며 돌아보자 서정운 사범은 그를 향해 빙긋이 웃어 보였다.

‘김 사범님은 김 사범님 제자들부터 챙기십시오. 자기 할 일 다 하고 돌아온 제 새끼 잡지 마시고.’

‘아, 아니 이 사람,’

태연하게 말한 서정운 사범은 당혹스럽고 불쾌한 빛을 내비치는 중원사범에게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선수에게 물컵을 내밀었다. 선수는 물 몇 모금을 마신 뒤 ‘……감사합니다.’ 하고 꾸벅 고개를 숙이며 스승의 눈치를 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졌다고 꾸짖거나 나무라지 않았다. 그 대신,

‘이제 여기서 네 할 일은 마쳤으니 그만 돌아가서 연습해.’

라고만 하며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줬을 뿐이다.

“그런데 말이야,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그때 그 이야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건 ‘제대로만 하면 지더라도 혼내지 않는다’가 아니라, ‘나 말곤 아무도 내 새끼 건들지 마’도 아니라, 대회 당일마저도 저녁 연습을 시켰다는 부분 아니냐?”

“어……, 세상에 그런 분 둘도 없지…….”

옛일들을 떠올린 두 남자는 느리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한동안 말을 잃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김진철이 허, 하고 웃었다.

“정말 여러모로 참 인상적인 양반이긴 해. 너나 나나 몇 년 만에 만났는데도 어째 그 양반 얘기만 하고 있냐.”

“그때가 그리운가 보지 뭐.”

“그립긴 개뿔이, 내가 언젠가 저 인간을 바닥에 메꽂아 주고야 말겠다고 이를 간 세월이 얼만데.”

김진철은 콧잔등에 주름을 지으며 투덜거렸다. 못마땅하게 고개를 돌리고 표정을 비죽거리던 그는 잠시 뒤 말을 툭 던졌다.

“그래, 요새는 어떻게 지내셔?”

“어, 잘 지내셔. 본산에도 가끔 볼일 있을 때 오시긴 하는데 도장까지 들어오는 일은 없고.”

“정무도는 더 안 하시고?”

“거의 끊으셨지 뭐. 들어 보니까 아주 가끔 한호영 사범님이 조르셔서 대련을 하시긴 하는 모양인데 몸풀기 수준이란다. 그것도 한호영 사범님이니까 뜸하게나마 대련해 주시는 거지, 다른 사람이랑은 손도 안 섞는다지.”

“한 사범님이야 워낙 서 사범님이랑 가깝게 지내셨으니까. 사형제간이기도 하고.”

한동안 침묵하고 있던 김진철은 혀를 차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아깝게.”

“응.”

정우일도 고개를 주억거리곤 침묵한다. 그러다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래도 뭐, 괜찮으신가 봐. 가끔 오며 가며 얼굴 뵙는데 즐겁게 잘 지내시는 것 같더라고. 하시는 일도 잘되는 모양이고.”

“지금은 작곡하신댔나? 하긴 사범 하던 때부터 이미 하셨었지?”

“아예 대학 전공이 그쪽이었잖아. 그래서, 하원사범씩이나 되는 사람이 체육 전공이 아닌 것도 특이하다고 했었던 거 기억 안 나? 지금은 뮤지컬인지 영화 음악인지 이것저것 하는데 그쪽에서는 꽤 유명하시다던데.”

“허, 그쪽은 여자 많은 동네니까 서 사범님 취향에도 딱 맞고 좋으시겠네. 거기선 여자관계 복잡해도 별 흉도 되지 않는다며? 여자 문제로 여러 번 시끄러웠던 사람이 본인한테 맞는 길로 잘 찾아갔네.”

정무도보다 외려 그쪽이 더 잘 맞을지도 모르겠어, 아주 자알됐다, 라고 툴툴거리며 말하는 김진철이었으나 그 말에는 얼마간의 진심도 묻어난다.

잘됐다. 다른 길로라도 잘 가고 있어서.

정우일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고 당일, 정우일의 전화는 밤새도록 불이 났었다. 아마 서정운의 소식을 물을 수 있을 만한 사람이라면 그날 누구나 그랬을 거다.

그렇게 독하게 굴었어도 결국 그 사범님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이라면 모를까 적어도 직접 그를 겪고 아는 사람들이라면, 오래 겪었으면 오래 겪었을수록, 그를 싫어하는 사람을 정우일은 본 적이 없다.

*

“오후 시합 15분 전입니다. 3부 출전 선수들은 준비하십시오.”

진행 보조자가 대기실 문을 열고 크게 외쳤다. 5분 전에 이미 장내 방송으로 점심 휴게 시간 예비 종료를 알렸으니 대기실마다 굳이 돌아다니며 외치지 않아도 될 텐데, 일 년에 두 번 열리는 대규모 선수권이다 보니 진행 측에서도 실수가 없도록 꼼꼼히 챙기고 있었다.

몇 년 만에 만난 동기와 옛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정우일은 웃음을 지우며 일어섰다. 이제 하잘것없는 잡담은 그만하고 시합에 임해야 할 때다.

“너는 4부에 나간다고 했던가?”

“응, 4부 첫 순서. 너는 3부였지? 상대는 누구야?”

“잘 몰라. 서울 남서부 지원 소속 누구던데.”

“남서부 지원이면 체련 쪽이잖아. 하하, 정우일이, 꼭 이겨야겠네.”

등을 두드리는 김진철에게 정우일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뭐 내 승패가 그렇게 중요하겠어? 어차피 이번에도 우리 정련 쪽이 우위일 텐데.”

무심코 말한 정우일은 근처에서 몸을 풀고 있던 선수가 사납게 노려보는 걸 깨닫고는 아차차, 입을 다물었다. 정련과 체련이 섞여 있는 이런 자리에서 가볍게 할 말이 아니었다. 비록 사실이긴 하더라도 말이다.

현재 정무도에서 실질적으로 가장 높은 어르신이라 할 수 있는 두 명의 정원사범, 형제이기도 한 한태일 사범과 한수일 사범 두 사람이 정무도를 수련하는 방식에서 의견이 달라 팽팽히 대립하다가 결국은 정무도 내부적으로 둘로 파벌이 나뉜 것은 이미 수십 년 전, 그 두 명이 아직 젊었을 때부터의 일이다.

한태일 사범을 필두로 한 정련, 한수일 사범을 필두로 한 체련.

정무도의 각종 대회가 있을 때마다 암암리에 우열을 겨루는 둘의 승부는 근래 들어 정련의 우세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미 십여 년이 넘도록 체련에서 최고 우승자를 배출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심지어 요 사오 년 사이에는 종합 순위권 십 위권 내의 선수 중 예닐곱은 정련 쪽 선수인 상황이었다.

그런 세월이 연년 이어지자 이제 으레 대회가 열릴 때마다 상위권의 과반수는 정련 선수들로 채워지겠거니 하는 인식들이 번져 있는 터였다. 해마다 그랬듯 올해도 체련 측에서 판을 뒤엎을 설욕의 한 수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뭐 별 이변이 있으랴.

정우일은 가볍게 몸을 풀며,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래도 모처럼 낯익은 면면들이 여럿 모인 대회에서 꼴사납게 질 수는 없지, 하고 내심 투지를 불태웠다. 김진철 역시 마찬가지인 듯 4부에 출전한다면서 벌써부터 몸이 근질근질한 기색이었다.

1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체육관의 바깥은 매서운 칼바람이 불고 있는데도 체육관 내는 선수들의 열기로 가득했다.

1년에 두 번 열리는 정무도 선수권 대회.

국제적으로 열리는 하계 선수권에 비하면 규모는 훨씬 작지만 매년 4월에 있는 승단 심사를 앞두고 열리는 춘계 선수권은 그 결과에 따라 선수들의 승단 여부가 갈리기도 하기 때문에 선수들의 투지는 하계 선수권 못지않았다.

비록 정우일은 올해는 승단 자격 요건이 채워지지 않았기에 이번 대회의 결과가 크게 중요하지는 않았지만, 전국적으로 중계되는 TV 카메라 앞에서, 자신과 대결할 상대의 투지 앞에서, 무대를 지켜보는 관계자들의 수많은 시선 앞에서 마음 편할 수는 없다. 김진철도 마찬가지.

“사범님이나마 안 계셔서 다행이지.”

“뭐?”

김진철이 가볍게 몸을 움직이며 중얼거렸다.

“무대 뒤에서 그분이 팔짱 끼고 서서 나 시합하는 거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해 봐. 긴장돼서 제대로 움직일 수나 있겠냐.”

“왜, 그래도 사범님은 지는 것 자체로 꾸지람하신 적은 한 번도 없잖아.”

“그렇지. 이기고 지는 건 문제 삼지 않으시겠지. 하지만 내가 지금 걸음은 제대로 중심 잡아서 밟고 있나, 팔은 올바른 자세로 정확하게 뻗고 있나, 그런 게 신경 쓰여서 제정신이 아닐걸.”

“아아, 맞아. 그리고 설령 이긴다 해도, 하나라도 뭐 잘못했다 하면 틀림없이 시합 끝내고 무대에서 내려오는 나를 붙잡고 빙그레 웃으면서 그러시겠지,”

““우일(진철)아, 제대로 안 할래……?””

동시에 같은 말을 외친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짧게 침묵한 뒤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둘 모두 어렴풋이 긴장해 있던 어깨가 느슨하게 늘어진다. 한결 편해진 기색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두 동기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어깨를 두드렸다.

“이제는 그럴 사람도 없으니 편하게 가자고, 편하게.”

“아무렴. 덕분에, 이제는 편하게 막 밟고 막 뻗어도 기본만큼은 끝내주게 정확해진 우리 동기들 아니겠어?”

「오후 시합 10분 전입니다. 3부 출전 선수들은 대기실에서 준비해 주십시오.」

곧 장내 방송이 울렸고, 가볍게 손바닥을 마주친 두 사람은 서로 격려의 말을 건넨 뒤 걸음을 돌렸다.

올해의 정무도 춘계 선수권 대회 오후 시합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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