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prequel 2/2. (2/28)

prequel 2/2.

공항 도착 로비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김영훈이 처음 떠올린 생각은 ‘크다’였다.

큼직한 스포츠백 하나를 발치에 두고 스포츠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는 TV 앞에 서 있는 그는 널찍한 등이며 전체적으로 근육이 단단하게 잡혀 있는 몸이며 짤막한 머리카락이며, 누가 봐도 운동하는 사람 그 자체였다. 그것도, 상당한 완력이 필요한 운동을 전문적인 수준으로 하는 사람.

두어 달 전에 본 적이 있긴 하지만, 설령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잘못 보지는 않았을 거다. 저런 사람이 그리 흔할 리 없었으니까.

“늦어서 죄송합니다. 한무화 씨 맞으시죠? 정무도 체련 협회 본산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김영훈입니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생각보다 차가 너무 막혀서, 라고 변명을 덧붙이던 김영훈은 돌아선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저도 모르게 말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워낙 커서 그런지, 웃음기라곤 없는 무표정이라 그런지, 혹은 이 남자 자체의 분위기가 그런지, 거대한 곰이 눈앞에 버티고 서 있는 것 같았다. 테디베어의 곰이 아니라 잡식성 맹수 곰.

“……저어……, 마중 나오기로 한……, 지난달에 한수일 사범님과 함께 뉴욕에서 뵈었었는데…….”

“예.”

그 무심한 얼굴을 보며 김영훈이 중얼거리자 그제야 남자는 알겠다는 듯 짧게 대답하며 손을 내밀었다. 우와, 손도 엄청나게 크잖아, 라고 생각하며 남자와 악수를 나눈 김영훈은 “같이 가시죠. 짐은 그것뿐인가요?”라고 말을 건네며 차를 세워 둔 바깥으로 그를 이끌었다.

“계속 미국에서 사셨다고 들었는데, 한국이 처음은 아니시죠?”

“아닙니다.”

“…….”

“…….”

“……그러시구나…….”

알고 있다. 남자가 비록 아주 어릴 때부터 미국에서 살았다곤 하지만 학생 때는 방학 때마다 들어와 매년 한두 달씩은 한국에서 지냈다는 걸 김영훈도 이미 서류 처리를 하다가 봐서 알고 있었다. 몰라서 물은 게 아니라 그저 뭐든 얘기 좀 하려는 것뿐이었는데, 남자의 대답은 간결하기 그지없었다. 잠시 기다려 봐도 남자가 김영훈에게 뭘 물어본다거나 말한다거나 할 기미는 아예 보이지 않았다.

“그……, 키가 정말 크시네요. 몇이세요?”

“190 조금 넘습니다.”

“와, 역시. 하지만 조금이 아니라 훨씬 넘어 보이는데, 체격이 워낙 좋아서 그런가 봐요. 체급은 중량급이시죠? 중량 2급?”

“예.”

“…….”

“…….”

“……그러시구나…….”

알고 있다. 김영훈도 다 알고 있다. 여태 이 남자와 관련된 대부분의 서류 업무를 모두 김영훈이 했다. 이 남자의 키며 몸무게며 체급이며, 며칠 전부터 서류상 남자의 양아버지가 된 정원사범 한수일보다 외려 김영훈이 더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몰라서 물어본 게 아니다.

“그러고 보니 격투기류는 웬만한 건 다 하신다면서요. 뿐만 아니라 대부분 다 대회 기록까지 갖고 계시던데……, 이만저만한 무도 천재가 아니라고 한수일 사범님이 감탄하셨거든요. 한수일 사범님이라면 평생 정무도를 하시면서 웬만한 인재들은 다 봐 오신 분인데, 이렇게 욕심내신 분은 처음이에요.”

“예.”

“저도 지난번에 뉴욕에서 한무화 씨 대련하시는 것 봤는데, 정말 박력이 굉장하더라구요. 멀찍이 떨어져서 보는데도 제 간담이 다 서늘하더라니까요.”

“예.”

“그런데 정무도는 4년밖에 안 하셨다던데, 정말입니까? 도저히 4년 만에 갖출 수 있을 만한 실력이 아니던데, 사실은 4년이 아니라 한 14년, 아니 24년쯤 하신 거 아녜요? 하하.”

“아닙니다.”

“하하……, ……그러시구나…….”

누구든 하나 더 데려올걸…….

정원사범 한수일이 지시한 대로 남자를 마중 나온 김영훈은 사무실에서 누구든 한 명 더 데려오지 않은 걸 후회하며, 남자와 둘만 타고 있는 차 안에서 숨이 막히는 듯한 침묵에 잠겼다. 조수석에 앉은 남자를 흘끔 곁눈질로 살피자 남자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바깥을 보고 있었다.

김영훈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당기며 지그시 액셀을 밟았다. 제발 차가 막히지 않기를, 얼른 본산에 도착하길 바라며.

지난달 뉴욕에서 잠깐 마주쳤을 때에도 말수가 적은 남자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말이 없을 줄은 몰랐다. 혹시 한국어를 잘 못하는 건가, 라고 생각하기엔, 김영훈은 이 남자가 한국어 사용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잖아도 위압적인 남자가 이렇게 말없이 있으니 아주 압박감 제대로구나…….

김영훈은 슬그머니 창문을 내려 바깥 공기로나마 숨통을 틔우며, 위압적인 지위에 있지만 알고 보면 전혀 위압적이지 않은 자신의 윗사람, 정무도에 단 둘뿐인 정원사범 중 하나인 한수일을 떠올렸다.

한수일이 그렇게 찢어질 듯 눈을 부릅뜨는 걸 김영훈은 처음 보았다. 그리고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다고, 한수일과 함께 대련장 한가운데를 지켜보며 김영훈도 생각했다.

비록 김영훈 본인은 정무도를 하지 않았지만 관련된 일을 하다 보니 선수들의 대련이나 시합을 볼 일은 허다했고 사람 보는 눈도 예리해졌다. 그런 김영훈의 눈에도 대련장에서 지금 막 본인보다도 더 큰 대련 상대를 가뿐히 메어꽂아 대련의 마무리를 짓고 있는 남자의 모습은 압도적이었다.

‘한무화, 승!’

심판의 판정 뒤 인사를 나누고 흐트러진 도복을 가다듬으며 대련장에서 내려오는 남자는 열기가 피어오르는 산처럼 거대하고 무시무시해 보였다. 별로 힘든 기색도 없이 무표정하게 물병을 들어 목을 축이는 남자를 보면서, 한수일의 옆에 서 있던 중년 남자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형님, 어떻습니까? 우리 무화가 제법 잘하지요?’

‘그래. 그래.’

다른 말도 없이 딱 그 말만 거듭하는 한수일은 분명히 놀랍고 감탄스런 기색이었다.

해외에서 정무도를 하는 선수들은 아무래도 국내보다 평균적인 실력이 다소 떨어지기 때문에, 이곳 뉴욕에서 가장 크다는 정무도 도장에 시찰을 오면서 한수일은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뉴욕에 살고 있는 그의 사촌 동생이 ‘우리 셋째 아들도 정무도를 하는데 썩 잘한다. 꼭 한번 봐 보시라’는 말에도 알았다고 대답은 했지만 세상에 매우 흔한 고슴도치의 말이겠거니 생각했을 따름인데.

김영훈은 남자의 건장한 체격이며 잘 잡혀 있는 근육 따위를 훑는 한수일의 시선에 욕심이 서리는 걸 눈치 빠르게 깨달았다.

욕심나는 것은 어떻게든 손에 넣고야 마는 것이 김영훈이 보아 온 이 욕심 사나운 어르신의 성격이었고, 아니나 다를까 한수일은 아주 잠깐 생각한 끝에 사촌 동생---저 건장한 남자의 아버지---에게 대뜸 말하는 것이었다.

‘주일아. 네 아들 내가 데려가서 키워야겠다.’

그러나 이 갑작스런 발언보다도 김영훈이 더 놀란 것은 그 사촌 동생의 선선한 대답이었다.

‘예, 그러십시오. 여차하면 양자 삼으셔도 됩니다.’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하자.’

잠깐, 본인의 의지는……?! 하고 공연히 제가 당황스러워진 김영훈이었지만, 당장 그 자리에 불려와 ‘너 앞으로 이분을 아버지로 모셔라.’, ‘너 나 따라 한국 들어가서 정무도 제대로 해 보자.’라는 두 분 어르신의 말에 별로 망설이지도 않고 ‘예,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본인을 앞에 두곤 더 할 말이 없었다.

순식간에 아들을 남의 아들로 넘겨주고서도 대단히 흡족하고 자랑스러운 얼굴을 하는 그 사촌 동생분을 보며, 김영훈은 다시 한번 이 집안 일족들의 종가 우대 습성을 확인한 기분이었다.

저 집안이 어떤 집안이냐.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재벌가다. 켜켜이 엮인 사돈들도 비슷한 집안들이다. 친인척 중 장,차관이며 국회의원이며 등등 정계에서 내로라하는 인물들도 부지기수.

그런 집안에서 그나마 가장 가난하다 할 만한 것이 바로 그 유서 깊은 집안의 가전 무술인 정무도를 계승하고 있는 종갓집이었는데, 이대로 당장 망하면 오륙 대 정도밖에는 넉넉하게 먹고 살지 못할 거라고들 하는 그 ‘가난’한 맏이 집안을, 이 집안의 다른 모든 분가 자손들은 하나같이 동경하고 부러워하며 받들었다. 아무리 돈과 권력이 많더라도 가질 수 없는 정통성이라는 게 그들 나름대로는 더없이 중요하고 귀한 모양이라고, 김영훈은 명절이나 중요한 날이면 빠짐없이 본산을 찾아와 맏어르신에게 공손히 인사를 드리고 가는 친인척들을 보며 생각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미국에서 터를 잡아 계열사의 최고 경영자로 남부럽잖은 재력과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남자가 제 아들을 선뜻 양자로 내놓고도 뿌듯해하는 이 분위기에 슬슬 익숙해질 만한 김영훈은, 이제 한국에 돌아가면 바로 관련 서류들을 챙겨야겠구나, 하고 제 할 일을 떠올렸다.

과연 어디에도 고개 숙이거나 움츠러드는 일은 없을 것 같은 이 무심하고 적당히 배부른 맹수 같은 남자도 종가에 양자로 가게 된 것을 기뻐할지는 의문이었지만…….

“…….”

모르겠다. 역시 모르겠어. 저 무표정하고 심드렁해 보이는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김영훈은 시내에 들어설 즈음부터 막히기 시작하는 찻길 한가운데서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왜 자꾸 맹수랑 한 우리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이 드나 모르겠다. 김영훈은 이대로 계속 침묵하다간 질식할 것만 같아 억지로 입을 열었다.

“그……, 한수일 사범님의 양자로 오시라는 제의를 굉장히 쉽게 받아들이시던데, 보통은 그런 제의는 무척 고민한 끝에 결정하는 일일 텐데 아버님께서도 한무화 씨도 아주 간단히 결정하셔서 놀랐어요. 하하, 아무렇지 않으셨어요?”

“예.”

“…….”

“…….”

“……, 집안 분들이 대체적으로 종가를 무척 존중하시던데, 한무화 씨도 그래서인가요?”

“아니요.”

“…….”

“…….”

“……그,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쉽게 결정을……?”

“정무도를 더 깊이 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셨구나, 그러시다면 아주 잘 결정하신 거죠. 아무래도 본산에서, 심지어 정원사범님 밑에서 배우신다면 다른 데서 배우는 것과는 비할 수 없죠.”

어쨌든 물어보면 대답은 하는구나. 물어본 것 이상으로는 대답하지 않지만. 이제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열심히 고민하는 김영훈의 진땀 어린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아무렇지 않은 기색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 년 묵은 맹수의 앞발이 이럴까 싶도록 굵직한 남자의 팔뚝을 곁눈질하며 김영훈은 문득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후천적으로 몸을 이렇게까지 단련한 거야 본인 노력이라 쳐도, 이 건장한 신장이나 근골은 선천적으로 타고났다. 온갖 무도에서 기록을 남길 정도의 믿기지 않는 실력도, 상당수는 본인 노력이라 쳐도 근본적으로 엄청나게 자질이 좋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 게다가 그렇게 무도를 파다가 코뼈 하나쯤 부러져 내려앉았다 해도 이상할 게 없는데, 생긴 것도 (표정이 하도 없어서 좀 무서워 보이긴 하지만) 자세히 보면 멀끔하고, 심지어는 집안에 돈도 퍼다 버릴 정도로 많다.

어떻게 이런 인간이 존재할 수 있나, 그래, 부모가 제 자식을 남의 양자로 선뜻 주겠다고 내놓을 정도이니 알고 보면 사고뭉치이거나 짐 덩어리이거나 혹은 머리라도 더럽게 나쁠지도…… 하고 질투 어린 생각을 했던 김영훈이었으나, 관련 서류를 처리하던 도중 남자의 아버지가 최고 경영자로 있는 그 미국 계열사의 운영진들이 이번 일을 두고 ‘혼자서 열 사람 몫을 해내는 인재를 갑자기 그만두게 하면 어쩌잔 말이냐’고 벌 떼처럼 들고일어났다는 풍문을 듣고 질투마저도 잊어버렸다.

“하지만 이제 한국에서 정무도를 한다면 쓴맛도 제법 보게 될……,”

김영훈은 자신이 저도 모르게 질투 섞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는 것도 몰랐다. 옆에서 물끄러미 날아드는 남자의 시선을 느끼고서야 황급히 변명처럼 주워섬겼다.

“아, 아니, 그러니까, 아무래도 본산에서 배우게 되시잖아요. 본산에는 국내 최고 수준의 선수들이 수련생으로 있으니까요. 정무도에서 국내 최고라고 하면 명실상부하게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니 한무화 씨도 쓴맛, 아니, 고전하시게 될 건데, 하하, 그래도 한무화 씨라면 물론 얼마 있지 않아 그중에서도 독보적인 실력을 보여 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

진땀을 흘리는 김영훈에게 남자는 별반 기분 상한 눈치도 없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좋은 선수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기로 한 겁니다. 저쪽에는 더 이상 흥미로운 선수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요.”

일견 오만하다고 할 수 있는 발언이었으나, 김영훈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남자의 무덤덤한 말투는 그것이 오만도 객기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진심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더 좋은 선수를 만나고 싶어서.

더 용맹한 적수, 더 격렬한 시합, 더 만족스러운 열기를 맛보기 위해.

나른하게 늘어져 있던 짐승이 갑자기 고기 냄새라도 맡은 양 고개를 치켜들고 이쪽을 보는 것 같았다. 눈앞에서 맹수가 발톱을 들썩이는 기분이다.

“예에, 많지요. 국내외의 큰 대회에서 늘 순위권에 들 만한 선수들은 대부분이 본산에 있으니까요. 사범님들도 최고 수준인 분들만 계시고……. 아, 하지만 중량급에서는 본산 선수들 대부분이 정련 쪽 선수라서, 그게 좀 아쉽겠네요. 일반적인 연습 대련으로는 겨루기 어려울 테니…….”

식은땀을 흘리며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던 김영훈은 남자가 의아한 빛을 띠는 걸 깨닫고 얼른 말을 이었다.

“정무도는 협회가 둘로 나뉘어져 있잖아요. 한태일 정원사범님이 이끄시는 정련과 한수일 정원사범님이 이끄시는 체련. 한무화 씨도 이미 정무도를 해 오셨으니 아시겠지만, 그 두 협회가 빈말로도 사이가 좋다고는 할 수 없거든요. 특히나 국내에서는 해외보다 그게 더 심해서요. 정련 선수와 체련 선수는 각각 상원사범 이상의 인가가 없으면 연습 대련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남자는 불만스러운 듯 눈살을 찌푸렸다. 움찔한 김영훈은 그의 눈치를 보랴 운전을 하랴 정신이 없었지만, 남자는 그 이상은 별말 하지 않고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김영훈은 진땀에 젖어, 본산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말자고 결심하고 앞만 쳐다보았다.

정무도의 총본산쯤 되면 평일 낮이라도 그리 한산하지는 않다.

본산에서 수련하는 수련생이나 사범들도 여럿이거니와, 국내외 각지에서 정무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총본산을 둘러보고 싶어 들르는 경우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일주일에 하루, 외부인의 출입을 삼가는 월요일이다. 이날은 수련도 없고 꼭 모여야 할 긴박한 볼일이 있지 않은 한은 회의나 모임도 잡지 않는다. 그래서 개인적인 볼일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한산했다.

그렇게 한산한 총본산, 그중에서도 한층 한적한 대수련장의 뒤쪽 툇마루에 남자는 앉아 있었다.

본산에 도착한 뒤 사무실에 보고하고 올 테니 그동안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고 계시라고 남자를 남겨 두고 자리를 떴던 김영훈은, 다시 돌아오자 남자가 눈에 띄지 않아 이리저리 찾아 헤매던 참이었다.

백 미터 밖에서도 눈에 띌 만큼 건장한 양반이 대관절 어디를 갔기에 이렇게 보이지 않냐, 사방을 둘러보던 김영훈이 막 ‘한무화 씨’ 하고 외치려던 차, 대수련장 뒤 툇마루에 앉아 있던 남자를 발견했다.

아무도 없는 드넓은 목조 건물의 뒤쪽, 노랗게 기울어진 저녁 햇빛을 받으며 남자는 조용히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곧게 편 허리, 허벅지 위에 가볍게 주먹 쥐어 올려놓은 손, 그 반듯한 자세는 쉰다거나 깜빡 잠들었다기보다는 마치 참선이라도 하는 것 같아 김영훈은 선뜻 그를 부르지 못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렇구나. 저 남자는 정무도를 하는 사람이었지.

불현듯 그 사실이 피부에 와 닿았다. 저렇게 명상을 하며 수련을 하는 여러 사범들을 김영훈은 본 바 있었다. 감탄이 나올 만큼 반듯한 자세다.

몹시 뜻밖에도, 오래되어 낡고 묵직한 공기가 내려앉은 이 고요하고 드넓은 나무 건물에 남자가 썩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기시감처럼 떠오르는 낯익은 느낌.

오래전 이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게 언제였더라. 저 공간에 녹아들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던 어느 때. 저 수련장 한가운데에 조용히 정좌하고 앉아 시간이 멈춘 듯 머무르고 있었던 그 사람은,

“…….”

그러나 김영훈이 미처 기억 속의 누군가를 끄집어내기 전에, 남자가 눈을 떴다. 하지만 남자의 시선이 닿은 곳은 김영훈이 아니었다. 뒤꼍의 어느 풀숲에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어린 강아지 한 마리가 어느새 툇마루 위에 기어올라 있었는데, 팔랑거리는 나비를 쫓아 올라온 모양이었다. 그 조막만 한 것을 잠시 응시하던 남자는 이내 도로 무심히 눈을 감았다.

나비가 날아다니는 대로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어린것은 이내 훌쩍 날아가 버린 나비를 시야에서 놓쳐 버리자 근처를 두리번두리번하다가 남자를 보았다. 손가락만 한 꼬리를 살랑거리며 남자에게 다가간 그 겁 없는 것은 제 몸뚱이보다 태산만큼 커다란 남자의 허벅지에 앞발을 얹더니 암벽 타듯 남자의 몸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남자는 다시 눈을 떠 제 몸을 타고 오르는 작은 것을 내려다보았다. 불안정하게 흔들거리며 한 발 기어오르다 미끄러지고, 또 한 발 기어오르다 미끄러지곤 하는 겁 모르는 하룻강아지를 귀찮다는 듯 바라보던 남자는, 그러나 그대로 내버려 두고는 다시 눈을 감는다. 그리고 더 이상은 강아지가 팔뚝 위로 올라오든 어깨까지 올라오든 눈을 뜨지 않았다.

낑낑거리며 용케도 어깨까지 올라간 강아지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머리 꼭대기까지 오를 작정인지 남자의 짤막한 머리카락에 앞발을 묻으며 일어났다. 그러나 영 불안정하게 흔들흔들하던 그놈은 그예 미끄러져 떨어지고 만다.

김영훈이 아이고, 눈살을 찌푸린 순간 어린 것이 바닥에 툭 떨어져 버리기 직전에 남자의 커다란 손이 그 작은 털 뭉치를 허공에서 받아 내었다. 떨어지는 순간 깜짝 놀랐는지 남자의 손바닥 위에 오줌을 지려 버린 어린놈을, 남자는 아무렇잖은 기색으로 바닥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이놈아, 다친다.”

혀를 차며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귀엽다기보다는 귀찮다는 투에 가까웠지만, 짜증스럽거나 화난 기색은 아니었다. 남자가 휴지를 꺼내어 손을 닦는 동안 꽁꽁 얼어붙어 꼼짝도 않고 있던 강아지는 저만치 어디선가 컹컹 짖는 소리가 들려오자 금세 후다닥 달아나 툇마루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고,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눈을 감으려던 남자는 그제야 김영훈을 보았다.

“어…….”

어쩐지 못 볼 걸 본 것만 같아 김영훈이 더듬거리는데,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일어서 툇마루에서 내려왔다.

“하하, 누렁이---본채에서 키우는 진돗개---가 바로 얼마 전에 새끼들을 낳았는데 그놈이 여기까지 왔나 보네요……. 아, 저기, 본채 쪽으로 건너가실게요. 한수일 사범님은 출타 중이십니다만 먼저 큰 어르신께 인사드리고 한태일 사범님께도 인사드리셔야지요.”

의외로 동물을 좋아하나, 그런 것치고는 태도가 영 심드렁하던데, 그래도 생각보다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닐지도 몰라, 김영훈은 왠지 모르게 복잡한 심경으로 앞서 걸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몇 걸음 뒤에서 산책하듯 천천히 따라오고 있었다.

정무도 총본산으로서의 집채들과 한씨 가문 종가로서의 집채들---흔히들 본채라고 부르는 집채들---은 야트막한 돌담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어른이 까치발을 서면 넘겨다볼 수 있을 만한 높이의 돌담은 몇 군데가 나무 문으로 통해 있었다.

그중 주차장과 가까워 정무도와 관계없는 종갓집 사람들도 종종 드나들곤 하는 문으로 김영훈이 막 다가섰을 때, 그 문이 덜컹 열리더니 그 안에서 한 사람이 나왔다.

“아.”

“아, ……오랜만입니다, 서 사범님. 그간 잘 지내셨어요?”

설마 문 바로 앞에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던 듯 잠시 놀란 기색을 띠었던 그 남자는, 김영훈이 인사하자 이내 선선히 웃으며 대꾸했다.

“이제 사범도 아닌데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요. 영훈 씨도 잘 지내죠?”

“왜 사범이 아니세요, 아직 적에 올라 있으신데.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본산에를 다 오셨어요?”

“사범님이 뭐 필요한 게 있다고 하셔서 그거 갖다 드리러요. 지금 뵙고 나오는 길이에요.”

“아, 한태일 정원사범님이……. 그러셨구나. 몸은 좀 괜찮으세요?”

“하하, 몸이야 이미 한참 전에 괜찮아졌죠. 웬만한 일반인보다는 멀쩡합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시종 웃으며 말하던 그는 그제야 김영훈의 뒤에 서 있는 남자를 보았다. 조금 전부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친 그는 조금 눈을 크게 뜨더니 웃었다.

“이쪽은 새로 오신 분인가 봐요. 체격이 아주 좋으시네. 실력도 좋으실 것 같은데……. 체련에서 좋은 인재를 들이셨나 본데요.”

“예, 뭐, 한수일 사범님께서 직접 데려오신 분이니까요.”

김영훈이 반쯤은 자랑스레, 반쯤은 경쟁하듯 말했지만 그는 별달리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자신과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남자에게 눈웃음으로 인사를 건넨다.

“좋은 시합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럼 난 이만 가 볼게요. 다음에 봐요, 영훈 씨.”

형식적인 인사말을 남긴 그는 이내 주차장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돌렸고, 김영훈도 멈추었던 발길을 열린 문 안쪽으로 옮겼다.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김영훈의 뒤를 따라오는 남자에게 김영훈은 여상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아. 예전에 본산에 계셨던 분입니다. 서정운 씨라고, 지금은 거의 안 나오는 분인데 오랜만에 뵈었네요. 원래 한태일 정원사범님 직계 제자로 본산 정련 소속의 하원사범이었는데 몇 년 전 사고로 다친 뒤로 정무도를 쉬고 있어요. 아직 적에 올라가 있긴 한데, 이미 몇 년이나 아무 활동을 안 하고 있으니 실질적으로는 그만뒀다고 봐야죠. 본인도 그만뒀다고 하고.”

김영훈은 줄줄 읊으며 뭔가 머릿속에 걸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뭐지? 뭐가 잠깐 생각나는 게 있었는데. ……뭐 아무렴 어때.

“본산 소속 하원사범이라……. 그럼 저 사람도 실력이 상당히 좋겠군요.”

남자가 중얼거렸다. 이 남자도 가끔은 뭘 말하기도 하는구나, 김영훈은 그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사실 하원사범이라 해도 실제 실력은 웬만한 중원사범에 뒤지지 않는다는 평이었으니까요. 심지어 서른쯤에 이미 그랬었으니까 보통 수준은 아니었죠. 현역 때에도, 상운賞運은 좋지 않아서 우승은 한 적 없지만 참가한 대회마다 늘 순위권이었고요.”

김영훈은 지금은 잊히다시피 했지만 몇 년 전까지는 여러모로 유명했던 인물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윗분들에게는 선수보다는 사범으로 더 인정받긴 했어요. 선수 생활은 더 못 하게 됐다 해도 사범으로는 남아 있었더라도 괜찮았을 텐데……, ……뭐, 하지만 저 남자는 그대로 관두기를 잘했다는 말도 많았으니까요. 이래저래 문제도 많았던 사람이라서.”

의아한 듯 쳐다보기는 했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는 남자에게, 김영훈은 콧잔등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일단 사범 노릇을 워낙 모질게 해서 선수들을 너무 혹독하게 몰아세우기도 했고, 좀 희한한 고집이 있어서 윗사람들과도 조금씩 충돌이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여자 소문이 워낙 지저분해서 정무도의 체면을 떨어뜨린다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김영훈도 그중 하나였다. 사실 저 남자, 서정운 사범과 딱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어서 잘 모르는 사이이긴 하지만 그다지 좋은 소문은 들은 적이 없다. 정련 측 인사니까 체련 측의 귀에는 특히나 안 좋은 소리들이 더 잘 들어온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그렇다.

아무리 운동선수들에게 여자 문제는 바늘에 실 같은 것이라고는 하지만, 저 사람은 유난히 여자 소문이 많았다. 양다리니 어쩌니 해서 저 남자를 두고 큰길 한가운데서 여자들끼리 대판 싸움이 난 적도 있었고 자살 소동을 벌인 여자도 있었고 심지어는 혼인 빙자 간음이 어쩌니, 낙태가 어쩌니, 확인되지 않은 불측한 소문들도 많았다.

무엇보다도 눈살이 찌푸려졌던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사람 주위에는 여자가 끊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괘씸해부러워…….”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김영훈은 남자의 지긋한 시선을 깨닫고는 번쩍 정신을 차렸다. 슬쩍 겸연쩍게 남자를 쳐다본 김영훈은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어쨌든 뭐, 정무도의 격을 생각하면 그만둬서 잘된 셈이지요. 이제는 거의 나오지도 않는 사람이니 마주칠 일도 없을 겁니다. 설령 나온다 한들 정련 쪽 사람이니 얽힐 일도 없고.”

그러는 사이에 남자는 아무 관심도 없는 낯으로, 저만치 멀찍이서 뛰노는 강아지들에게 눈길을 줄 따름이었다.

정말로 자신과 상관없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도 안 두는구나.

김영훈은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이 남자가 관심을 보이는 일은 오로지 정무도에 관련된 것뿐이다. 정무도를 익히는 것과 겨루는 것, 그 외에는 누가 뭘 하든 그가 알 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김영훈도 그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하면 그만이다.

“3월에 있을 춘계 선수권 대회에 한무화 씨도 선수 등록을 해 두라고 한수일 사범님이 말씀하셨는데, 혹시 들으셨나요?”

남자가 고개를 젓는 걸 보고 김영훈은 말을 이었다.

“아마 한동안 바빠지실 거예요. 원래 선수권 대회 전에는 수련 강도가 높아지기도 하거니와 아무래도 한수일 사범님이 한무화 씨에게 기대를 많이 하고 계시거든요. 다행히 춘계 선수권은 유단자가 아니라도 출전할 수 있어서 선수 등록에는 문제없습니다만, 유단자가 아닌 한무화 씨가 좋은 성적을 거두려면 그만큼 열심히 수련하셔야 할 테니까요.”

정무도를 시작한 지 4년밖에 되지 않은 이 남자는 단이 없다. 정무도의 규정상 최소한 10년 이상은 되어야 단을 딸 자격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무도의 유단자라고 하면 다른 격투기의 유단자와는 격이 다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정무도 대회에서는 단이 없는 사람이 유단자를 제치고 순위권 안에 들기란 하늘의 별 따기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경우는 정무도 역사를 통틀어 한 손으로 꼽을 정도.

하지만 이 남자라면.

“…….”

김영훈은 대련장 한가운데에 서 있던 남자를 떠올리며, 동시에 서늘해지는 가슴께를 쓸어내렸다.

놀라운 실력이었다. 아니, 사실 상대를 넘어뜨린 것이 워낙 창졸간의 일이라 남자의 세세한 기술 따위를 알 도리는 없었지만, 그러나 그 순간의 무시무시한 박력과 기백만큼은 진짜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차가운 것이 관통하는 듯하던 그 느낌.

어쩌면 자신은 여태 보았던 적 없는 놀라운 천재를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자신뿐 아니라 아무도 보았던 적 없는 기재.

그것은 틀림없이 자신만의 착각은 아니었고, 그래서 이 남자는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었다.

김영훈은 뒤따라오고 있는 남자를 흘끔 보았다. 김영훈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그런 설명들마저 딱히 관심이 없어 보이는 그는 차라리 이 오래되고 고적한 옛 집채들에 더 마음이 끌려 보였다.

옛 정취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고택의 손때 묻은 나무 기둥이며 낡았지만 반들반들하게 닦여 있는 마루, 간밤에 내린 비로 물기가 남아 있는 기와지붕, 혹은 말끔하게 비질한 섬돌 옆에 다소곳이 자라난 이름 모를 풀꽃 따위.

그런 것들을 차근차근 눈길로 훑는 남자의 모습에서는 그때의 기백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선뜻 다가서기 어려운 위압감은 여전했지만 그때와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담담해, 산책을 즐기듯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그는 이 고적하고 오래된 곳의 공기에 썩 잘 어울렸다.

아까 대수련장의 툇마루에 앉아 있을 때처럼.

“아.”

불현듯 중얼거린 김영훈은 자신에게 시선을 돌린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아니라고 손을 내저었다. 남자는 다시 여상하게 고개를 돌린다.

생각났다. 아까 잠깐 머리에 걸렸으나 떠오르지 않았던 것.

예전에도 본 적이 있는 듯하던 낯익은 느낌, 오래전 그 고요하고 묵직한 곳에 시간이 멈춘 듯 머물렀던 어떤 이.

김영훈은 돌담 쪽을 보았다. 나무 문 저편으로 걸어가 버려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이의 뒷모습을 좇는다.

오래전 아무도 없는 대수련장에 홀로 정좌하고 앉아 묵상하던 그를 본 적이 있었다. 딱 한 번 스치듯 지나쳤던 기억이다.

맞아, 그 사람이었지. 그때 그곳에 녹아들듯 어울렸던 사람. 그게 몹시 뜻밖이라서 외려 선명하게 뇌리에 남았다.

“도통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의외로 아주 썩…….”

김영훈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남자가 다시 그를 보았다. 이번에도 얼버무리려 했지만, 남자의 시선이 공연히 따가워서 우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안 그럴 것 같은데 이곳에 썩 잘 어울린다 싶어서요……, 한무화 씨가.”

“그렇습니까?”

무심히 되묻는 남자에게 김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리고 그 사람도.

그러나 그 뒷말은 삼킨다. 굳이 말할 이유도 없거니와 그런 바람직하지 않은 사람이 이곳에 잘 어우러진다는 건 그다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도 막상 붙여 놓으면 뜻밖에 처음부터 한데 있었던 것처럼 잘 어우러지는 것도 있는 법이구나.

김영훈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내 머릿속을 털어 내듯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사랑채가 저만치 보이기 시작했다.

멀리서 온 종손從孫을 기다리는지 큰 어르신이 대청에 나와 서성이고 계셨다. 집안의 큰 어른이자 정원사범 두 분의 부친인 노인은 정무도의 가장 높은 어르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미 아흔을 바라보는 연세라 십여 년 전 실질적인 일들 일체를 아들들에게 물려주고 지금은 한적하게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큰 어르신이 나와 계시네요.”

김영훈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의 옆에서 옷매무시를 정돈했다. 자신의 종조부---서류상으로는 이제 조부---를 바라보며 고개를 꾸벅 숙이는 남자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그의 낯이 조금 느슨해지는 걸 알겠다. 반가워하고 있나 보다 싶었다.

참 속을 알기 힘든 남자로다.

과연 이 남자랑 어우러질 만한 사람이 있기나 할까?

불쑥, 뜬금없는 생각이 김영훈의 머리를 스쳤다. 동시에 또다시 뭔가 머릿속에 걸리는 것처럼 떠오르는 듯했지만 그게 뭔지는 얼른 잡히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주름진 얼굴에 환한 웃음을 머금은 큰 어르신이 “이리 오련.” 하고 손을 끄덕였고, 자신보다도 훨씬 조그만 노인에게 훌쩍 걸어가 안기는---안는--- 남자를 보며, 김영훈의 머릿속에 잠시 떠올랐던 어떠한 생각은 이내 백일몽처럼 흩어지고 말았다. 어쨌거나 기나긴 하루, 자신의 할 일은 이걸로 끝난 것이다.

남자 한무화가 정무도 본산에 처음으로 들어선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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