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올해는 정무도 춘계 선수권 대회에서 이변이 일어난 해가 되었다.
몇 년째 줄곧 각 체급마다 정련이 우세했던 여세 그대로 이번 역시 종합 순위권의 반 이상을 정련 소속 선수들이 차지했으나, 정무도 대련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중량급에서 몇 년째의 패배 기록을 끊고 체련 소속 선수가 우승을 했던 것이다.
체련 선수가 우승을 했다는 것 자체는 큰 뉴스거리가 되지 못했다. 정련 측에서는 아쉬워할 문제이긴 하나 각종 대회에서 승패가 뒤집히는 일은 그리 드물지 않은 일이었으니 특별할 것 없다.
그러나 순위권에 들어가는 선수 대부분이---최근 십 년의 기록을 따져 보면 그 모두가--- 최소 십수 년 이상의 경력이 있는 유단자인 상황에서, 그 우승 선수가 정무도에 적을 올린 지 고작 4년밖에 되지 않은 무단이라는 것은 각 스포츠지며 방송에서 크게 떠들기에 충분한 화젯거리였다.
심지어는 과거 대회 출전 이력도 거의 없어 신인이나 마찬가지인 선수가, 정무도의 대련 중 가장 박력 있고 화려해 시선을 모으는 중량급에서, 그저 순위권에 든 것도 아니고 우승을 거머쥐었다.
거기에 더해, 대련이 시작된 지 1분 20초 만에 한판승.
심판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 남자의 승리를 선언하는 순간까지도 드넓은 체육관에는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그 남자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도복을 바로잡고 대련장에서 내려가 모습을 감춘 뒤에야 누가 시작했는지 모를 환호가 이내 우레 같은 함성으로 바뀌었고, 귀가 먹을 듯 엄청난 그 소리가 이 놀라운 이변이 현실임을 알렸다.
전무후무한 이 사태에 정무도계 전체가 끓어오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
초인종으로 시작된 소리가 쾅쾅쾅 대문을 부술 기세의 소리로 바뀌는 것은 금방이었다. 조금 더 지나자 “사형! 문 좀 열어 봐요, 사형!” 하고 외치는 고함 소리에 휴대 전화 벨 소리까지 가세한다. “사형! 전화 좀 받으라니까!!”라고 대문을 두들기며 외치는 그 인물이 겨우 그 모든 소리들을 멈춘 것은,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느리고 음산하게 끼익 열렸을 때였다.
“사형! 소식 들었죠? 우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지금 어르신들 아주 난리도 아니에요. 아버지 어찌나 열받으셨는지, 저러다 혈관 끊어지지 않을까 걱정될 지경이라니까.”
성큼성큼 뜰을 지나 집 현관을 벌컥 열고 들어온 불청객은 현관 앞에 유령처럼 창백하고 초췌한 낯빛을 하고 서 있던 사람이 그를 무시무시하게 노려보든 말든, 고함 못잖게 성대한 음량으로 소리치며 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뭐 이렇게 어둡게 해 놓고 있어, 커튼 좀 쳐요, 날씨도 좋은데, 하며 거실에 두껍게 쳐 놓은 암막 커튼을 홱 걷어 버리고 거실 유리문까지 활짝 열고서 순식간에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 그 화상을 현관에 우두커니 서서 물끄러미 노려보고 있던 집주인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거실로 들어왔다.
“사형도 들었죠? 어제 춘계 선수권 결과.”
“그래. 그게 뭐.”
거실에 붙어 있는 주방으로 들어간 집주인은 불쾌한 얼굴로 핸드밀에 커피콩을 넣고 갈기 시작했다. 흘끔 시계를 보자 오전 9시를 조금 넘은 시각이다.
“그게 뭐라니? 지금 어르신들이 아주 발칵 뒤집혔는데! 아, 나도 한 잔. 얼음 많이 넣어서요.”
“……. 그러니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밤샘 작업 마치고 두 시간 전에 겨우 잠든 나를 두들겨 깨워서 그 얘기를 늘어놓는 거냔 말이야.”
한층 더 불쾌한 얼굴로 핸드밀에 커피콩을 더 부어 넣는 집주인에게 불청객은 되레 서운하기 짝이 없다는 얼굴을 했다.
“무슨 상관이냐니? 아무리 사형이 지금 좀 쉬고 있는 중이라 해도 그렇지, 정련 후배가 체련의 새파란 신인한테 깨졌는데 그렇게 냉정하게 말할 수 있어요?”
“쉬고 있는 게 아니라 그만둔 거야. 그리고, 사람이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렇게 유난이야.”
“그 말씀 제발 우리 아버지한테 좀 해 주시라구요. 아침에 일어나셔서도 신문 보시다가 스포츠난을 벅벅 찢어 버리시며 역정을 내시는데, 집안이 아주 살얼음판이라니까.”
“하룻밤 지났는데도 화가 안 풀리셨어? 당신답지 않게 오래 가네.”
“그게 그럴 만도 해……, 어제 대회 마치고 장내에서 나오는데 작은아버지가 아버지한테 메롱 했거든. 아버지가 열받아서 작은아버지 멱살 쥐려는 걸 겨우 말렸다니까요. 아오---진짜 다 늙으신 분들이 왜 그러나 몰라, 꼬마애들보다 더 유치해!”
불청객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처럼 외쳤고 집주인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커피콩만 드륵드륵 갈 뿐이었다.
두 노인의 불화는 어제오늘 시작된 일이 아니었다. 밖에서 보면 권위와 관록이 있는 근엄한 어르신들이라지만, 그 두 어르신이 가끔 눈 뜨고 못 볼 정도로 유치하게 싸운다는 건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 고래들이 싸울 때마다 등이 터지는 새우 중 하나가 바로 이 불청객, 정원사범 한태일의 장남이자 둘째 제자인 한호영이었다. 그리고 과거엔 종종 등이 터졌지만 지금은 고래가 출몰하는 영역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새우가 바로 이 집주인, 한태일의 첫째 제자인 서정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래 출몰지에서는 멀어졌다 하나 그 여파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던 서정운은, 묵직한 머리를 깨워 줄 독약 같은 커피를 한호영에게도 한 잔 나눠 주며 빈 소파에 앉았다.
“그래서 어떤 놈이야, 그 엄청난 슈퍼 루키는?”
별 관심은 없지만 일단 물어나 본다는 투로 말하는 서정운에게 한호영은 스포츠 신문을 펼쳐 보였다.
“사촌이에요. 정확히는 육촌인데 어릴 때부터 미국 살면서 일 년에 한두 번씩 한국 들어오곤 했던 놈이거든. 그런데 서너 달 전에 작은아버지가 갑자기 당신 양자 삼겠다고 데려오더니, 이런 사달이 났지 뭐예요.”
“한수일 사범님이? 그분은 뭘 굳이 조카를 양자로 삼으면서까지 그렇게……, ……하긴 그렇게 할 정도로 자질이 뛰어났으니까 무단無段으로도 우승을 했겠지.”
“아무리 이번 춘계 선수권 중량급 시합이 빈집털이였다 해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뜬금없이 등장한 놈이 우승을 다 할 수가 있지? 와……, 내가 정말 어이가 없어서.”
올해의 춘계 선수권은 우연찮게 해외의 워크숍 및 대회와 일정이 바싹 붙은 바람에 성적이 좋은 선수들 여럿이 빠졌다. 특히 중량급 이상에서 순위권에 드는 선수들이 출전하지 않아 다른 때에 비해 상대적으로 타이틀을 얻기가 쉬운 상황이긴 했다.
“그렇다 해도 턱도 없는 놈이 우승할 만큼 호락호락한 대회는 아니지, 춘계 선수권이. 심지어 무단으로 우승이라…….”
서정운은 신문을 끌어당겼다. 지면에는 한 선수가 상대를 호쾌하게 메어치기하는 순간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얼굴은 잘 안 보이네. 체격이 상당한데……. 중량 2급이야? 무제한급까지는 아닐 것 같고.”
“맞아요, 중량 2급. 190은 훨씬 넘고, 2미터까지는 안 되는 것 같던데.”
“이 정도 실력이 되는 놈이 어떻게 여태 알려지지도 않고 있었지?”
“정무도로는 대회에 출전한 적이 거의 없대요. 다른 거 하느라.”
그 미묘한 뉘앙스에 서정운이 고개를 들어 한호영을 보았다. 한호영은 어깨를 추어올렸다.
“온갖 거 다 했더라고요. 유도, 검도, 합기도, 태권도 등등……. 그리고 그거 죄다 대회 기록 보유자.”
서정운은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한동안 중량급에서는 고전 좀 하겠어. 사부님 속 많이 썩으시겠는데. 그래도 뭐, 정련이니 체련이니 따지지만 않으면 정무도의 앞날을 위해 좋은 일이잖아, 이런 훌륭한 인재가 생겼다는 건.”
“그러니까 그런 말씀을 제발 우리 아버지한테 좀 해 달라니까요.”
“난 이미 그곳을 떠난 몸이야. 이런 꼭두새벽에 들이닥친 널 쫓아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난 내 도리를 다하는 거라고.”
한호영이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감싸 쥐든 말든 서정운은 아랑곳도 하지 않고 잘라 말했고, 한호영은 울먹일 듯이 중얼거렸다.
“한동안 분위기 진짜 삭막하게 생겼다고요. 아침에 작은아버지가 전화해서 아버지를 또 뒤집어 놓는 통에 난 벼락 맞을까 봐 도망 나온 거라고.”
“왜.”
“작은아버지가 그놈을 4월 승단식에 참석시키겠다고 하시잖아요. 단도 없는 놈을 승단식에 뭐 하러 부르냐고 아버지가 벌컥 역정을 내시니까, 부르기만 하는 게 왜 문제냐고……. 그래서 아버지가, 그런 공식적인 큰 자리에 아무 볼일도 없는 그놈을 네 옆에 세워 놓으면 섣부른 입들이 아무 말이나 떠들어 댈 거 뻔한데 왜 굳이 얘깃거리를 만드냐고 그러셨더니 작은아버지가…….”
한호영은 말하다 말고 기어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실력 있는 놈 세워 놓는 게 뭐 어떠냐고, 아니면 정련에 걔 이길 놈이라도 있냐고, 있으면 내놔 보라고 불을 지르셨다구요.”
“…….”
서정운은 말을 잃었다.
애다……, 애야……, 아니 요새는 애들도 이렇게 유치하게 싸우지는 않을 거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래 왔던 두 노인네라지만 들을 때마다 그 유치함에 새삼 놀라게 된다.
사부님이 몇 년만 지나면 고희이시지……?, 하고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서정운은 한호영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의 말마따나 저렇게 불을 질러 놨으니 사부님 성격에 보통 격노하시지 않았을 거고, 한동안 분위기 진짜 삭막하겠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고래들 싸우는 바다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서정운은 한가롭게 커피나 마실 따름이었는데, 한호영이 그런 서정운을 음침하게 쳐다보았다.
“남의 일이 아니라고요. 아버지 엄청 화나셔서, 승단식에 당신도 당신 제자들을 죄다 불러서 병풍처럼 두르시겠대.”
“어? ……설마 나도?”
“부르실걸요. 어찌 되었든 첫째 제자잖아요.”
서정운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만둔 지 오래인데 무슨. 게다가 나처럼 악소문이 무성한 제자를 부르시면 당신 명예만 손상될걸. 관두시라 그래.”
“그런 말이 통할 분입디까? 연락 오면 사형이 직접 말씀드려 보시든가.”
“……. 전화 꺼 놔야겠다.”
“그러면 당장 몸소 달려오실걸.”
한호영이 심술궂게 중얼거렸고 서정운은 한층 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미간에 주름을 지었다. 그러다 혀를 차며 한숨을 내뱉고 만다.
“한수일 사범님도 참……, 그 슈퍼 루키 양자가 우승해서 기쁜 마음은 알겠지만, 굳이 승단식에까지 부르실 건 없을 텐데. 그러다 6월의 사범 수련 합숙까지 참가시키시겠어.”
“어, 농담 아니라 정말 그러실지도 몰라요. 그럴 기세야.”
“대관절 어떤 놈인지 궁금해지긴 하네.”
하나도 안 궁금하다는 투로 중얼거리는 서정운을 잠시 뜸하게 쳐다보던 한호영이 툭 하니 내뱉었다.
“그러면 승단식에 와 보시든가요. 굳이 아버지가 부르시지 않더라도 이번에 사형 제자들 중에도 승단하는 사람 좀 있잖아요. 와서 봐 줘요. 사형이 그래도 제자 하나는 잘 키웠잖아. 하도 까칠하게 구는 통에 남은 제자가 몇 안 돼서 그렇지.”
“봐 주긴 무슨. 난 이미 그 업계 떠났고 걔들도 내 손 떠났어. 알아서 잘 살아남으라 그래.”
“너무하시네……. 그 사람들은 아직도 모이면 사형 얘기만 하던데.”
“고생했었단 얘기나 하겠지.”
그야 물론 그렇겠지만요, 하고 중얼거린 한호영은 문득 입을 다물었다. 잠기운이 말끔히 가시지 않아 언짢은 표정 그대로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넘기는 서정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불쑥 말한다.
“사범은 계속하지 그랬어요. 선수 생활은 더 못 하더라도.”
서정운은 아무 대꾸도 없이 잠자코 신문만 넘겼다. 그런 서정운을 보는 한호영의 낯이 부루퉁한 건 아쉬운 탓이다.
“사형이 사람 키우는 건 잘했잖아요. 따지고 보면 아버지의 자랑스런 제자들---우리 사형제들---도 대부분 사형이 가르친 거지 뭐.”
“걔들은 원래 잘했어. 그중 너만 유난히 뺀질거려서 문제였지. 그리고 내가 그만둔 것도 꼭 사고 때문만이 아니라 안 그래도 그만둘까 하던 참이었고. 운때가 그렇게 맞았던 거야.”
담담하지만 단호한 대답에 한호영은 입을 다물었다.
본인이 그렇다면 아쉬움은 자신의 몫으로 남겨 둘 뿐이다. 적어도 그가 알고 있는 서정운은 스스로의 마음을 속이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그가 그렇다면 된 거다.
게다가 어쨌든 지금은 남의 걱정이나 한가롭게 하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당장 집으로 돌아가면 깔려 있을 살얼음판을---심지어 한동안은 녹을 것 같지도 않은데---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나, 그것만이 염려스러울 따름이다.
한호영이 다시금 머리를 감싸 안고 앓는 소리를 내며 괴로워하든 말든 서정운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잠이 모자라 뿌연 머리에서 안개나 걷어 낼 겸 대충 기사 머리말만 눈으로 훑으며 건성으로 신문을 넘기던 차, 그의 손가락이 어느 순간 멈칫했다.
“으.”
서정운이 저도 모르게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감싸 안았던 머리통을 슬그머니 치켜든 한호영은 애매하게 구겨져 있는 서정운의 낯을 보곤 신문을 훑었다. 그리고 서정운의 시선이 멎어 있는 기사를 확인하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서정운을 응시했다.
“사형……, 이번엔 레이싱걸이에요……?”
그 가느스름한 시선 끝에서 서정운은 움찔하더니 중얼거렸다.
“아냐, 오해야. 진짜 오해야. 나 정말 이런 적 없어.”
“물론 그러시겠지. 어디 봐요.”
갑자기 작아지는 사형 앞에서 한호영은 신문을 홱 낚아챘다. 그리고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유명 작곡가 서모 씨와 잘나가는 레이싱걸 김모 양의 스캔들 기사를 죽 훑어내린다.
그 기사는 띠동갑보다 어리고 순진한 여자애를 꾀어내 상당한 금품을 제공하고는 그 대가로 육체적인 향응을 요구한 삼십 대 작곡가의 파렴치한 행태를 폭로하고 있었다.
“사형!! 왜 자꾸 이래요?!”
“아니라니까! 난 그냥 걔가 홀어머니가 아프신데 병원비가 없대서 그 병원비를 보내 줬을 뿐이라고! 걔랑 육체적으로 접촉한 건 그냥 어깨만 끌어안았을 뿐이야, 엄마 아프다고 우는 애 위로해 주려고 어깨만! 정말 그것뿐이란 말야!”
“그러니까 그런 짓을 왜 했냐고, 이 양반아! 정상적으로 잘나가는 레이싱걸이 엄마 병원비가 없다는 게 말이나 돼?! 그런 고전적인 사기에는 요새는 중학생도 안 넘어가! 도대체가, 사형은 이런 식으로 말려든 게 몇 번짼데 또 이러냐구요?!”
내가 이 양반 때문에 속이 썩어, 아주! 하고 한호영은 제 가슴을 텅텅 두들겼다. 순식간에 쪼그라든 서정운은 말없이 주섬주섬 신문을 구겨 의자 밑에 밀어 넣었다. 우울한 빛은 띠었을지언정 놀란 빛은 없는 게, 기사를 보기 전에 이미 속았다는 걸 알고는 있었던 눈치다.
한호영은 벌컥 화를 내려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차피 근거도 없고 실명도 명확하게 나오지 않은---그래 봐야 조금만 검색하면 누구인지 뻔히 알아볼 수 있었지만--- 흥미 위주의 가십이다. 멋모르는 사람들에게 욕만 와장창 먹을 뿐 서정운이 실질적인 피해를 입을 일은 없겠지만, 또 어디선가 한바탕 안줏거리가 되어 주시겠다. 그래도 이번에는 그나마 웃어넘길 수 있을 수준이니 망정이지, 과거에는 더 추잡한 웅덩이에 발을 빠뜨린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내가 보다 보다 사형처럼 여자 운 안 좋은 사람은 처음 봅니다, 진짜.”
“음……, …….”
서정운은 침중하게 입을 열었지만 대꾸할 말이 없는 듯 도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거다.
한호영이 봐 온바, 이 사형만큼 여자 운이 안 좋은 사람이 없었다. 사람이 쓸데없이 외양이 멀끔하고 뭘 하든 능력도 출중하다 보니 따라붙는 여자들도 많았는데, 자기네끼리 피 튀기는 경쟁과 암투를 벌인 끝에 남아나는 여자는 백이면 백 다 꽃뱀이었다. 어쩌다 가끔 사형이 먼저 관심을 가지는 여자도 있긴 했지만 그런 경우도 매우 높은 확률로 진상이었고, 그렇지 않은 드문 여자들은 그녀들 쪽에서 서정운을 연애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즉, 세상에 그렇게나 흔하게 널려 있는 정상적인 여자가 서정운에게는 붙지 않았던 것이다.
이유? 이유라곤 전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어릴 때부터 여자에게는 상냥하게 대해 주어야 한다고 어머니로부터 철저하게 교육을 받은 서정운이, 남자를 대할 때와는 달리 여자에게는---그 여자가 아무리 꽃뱀에 진상, 화상이라 해도--- 무조건적으로 상냥하고 온순하다는 걸 이유라고 들 수도 있겠다.
이 점에 있어 한호영은 ‘상냥하고 온순한 게 아니라 어벙하고 멍청한 거다!’라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라도, 오랜 세월 서정운을 봐 온 바로는 이 남자가 유난히 뭐에 씐 듯이 여자 운이 사나운 것도 사실이었다.
“사형, 차라리 굿이라도 해 보지 그래요.”
“음……, 요전에 거래처 실장님이 용한 데 점 보러 간다고 해서 같이 갔더니, 그 점쟁이가 날 보자마자 대뜸 평생 결혼 못 할 팔자라고 그러긴 하더라.”
농담으로 한 말인데 진지한 대답이---심지어는 암울한 대답이--- 돌아왔다. 한호영은 흰 눈으로 서정운을 보다가 되물었다.
“그 거래처 실장이란 사람도 여자죠?”
“쓸데없는 억측 하지 마. 그냥 일 관계로만 가끔 보는 사람이야.”
“그거야 사형 혼자만의 생각이겠지. 그냥 일 관계로만 가끔 보는 사람이랑 같이 점집을 왜 가요?”
“……. 지금은 안 봐.”
“사형이 저 레이싱걸이랑 수상쩍게 친하게 지내니까 제풀에 떨어져 나갔나 보지. 아마 뒤에서 사형 또 양다리 걸치니 어쩌니 욕을 바가지로 먹었을걸.”
대뜸 코웃음 치는 한호영에게, 서정운은 짚이는 데가 있는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삭막하게 한호영을 노려만 볼 뿐.
이미 그런 일은 하도 비일비재해서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 한호영은 “그래서,” 하고 말을 이었다.
“그 점쟁이는 뭐래요. 결혼 못 할 팔자니까 부적 쓰라거나 굿하라는 소리는 안 하고?”
“타고난 팔자는 용써 봤자 소용없다고 상대도 안 해 주던데.”
“…….”
어차피 미신이고 안 믿으면 그만이라지만 (한편으로는 그 점집 어디냐고 물어보고 싶어졌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다시피 해 이제는 친형제나 진배없는 사형의 비극적인 소식을 듣자 갑자기 가슴이 콱 막히고 답답해지는 한호영이었다.
“난 정말 걱정이라니까요, 사형……. 이러다 사형이 진심으로 웬 여자한테 반해서 목매게 되면 그때는 어쩌나 벌써부터 걱정될 지경이라구. 지금껏 여자 운이 줄기차게 최악이었는데 누군지 모를 그 여자라고 해서 썩 좋은 여자겠어?”
“……이놈이 아침 댓바람부터 쳐들어와서 사람 깨워 놓고 왜 저주를 퍼부어?”
“아침 댓바람부터 이런 기사 실린 건 아무렇지 않고?!”
서정운이 정무도를 하던 시절부터, 번번이 여자 잘못 꼬여 불측한 소문이 날 때마다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서정운을 변호해 주고 속상해했던 한호영이다. 당장 합죽이가 된 서정운을 보며 한호영은 한숨을 쉬었다.
서정운은 모든 여자에게 친절하고 다정했지만 여태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푹 빠져 간절하게 마음앓이 했던 적은 없었다. 그래서 외려 한호영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좀 아는 여자애한테도 덥석 병원비랍시고 거액을 내주며 사기당하는데, 자칫 꽃뱀한테 홀리기라도 해 봐라. 간도 쓸개도 다 빼 줄 거다.
여러모로 다재다능하고 머리도 좋고 어떤 면에서는 무서울 정도로 단호한 사람인데, 여자나 연애 관련으로는 아주 푹 익어 흐물흐물한 복숭아보다도 더 물러 터졌다.
“한동안 아버지가 사형한테 좋은 집안의 성품 좋은 처자들 선 자리 많이 갖다줬잖아요? 차라리 그렇게 선을 봤더라면 최소한 이런 꽃뱀이 꼬이진 않았지, 무슨, 인위적인 만남은 거북하네, 인연을 기다려 보겠네, 이상한 소리만 하더니 이게 뭐냐고요. 지금이라도 그냥 선을 봐요. 말만 하면 아직껏 사형을 그렇게 아끼는 아버지가 좋은 자리로만 골라서 한 보따리 안 갖다주실까 봐?”
“아냐, 그건 아니야. 분명히 네 말대로 내가 여자 운이 다소 안 좋은 편이긴 하다만, 세상에는 분명히 나와 인연인 사람이 있을 거라고. 아무 다른 조건 없이 내가 좋아하고, 또 나를 좋아할, 내 눈에 한없이 고운 사람을 만나서 평생 예쁘게 살아가는 게 내 양보할 수 없는 이상 중 하나야.”
“…….”
서른 훌쩍 넘어 이런 소리나 하는 양반이니 내가 걱정이 안 돼?! 벌컥 소리를 지르고 싶어진 한호영이었지만 이 부분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질 않는 사람이라 이내 포기의 숨을 내쉬고 말았다. 어이없이 서정운을 노려보다 중얼거리기만 할 뿐.
“까칠하고 모질기로 유명한 하원사범 서정운이 이런 인간인 줄 누가 알겠어…….”
“더 이상 사범 아니라니까.”
불퉁하게 대꾸한 서정운은 마침 커피도 다 마셨겠다, 빈 잔을 내려놓으며 일어섰다.
“그만 가. 난 새로 데뷔하는 여자애 녹음 작업 봐주기로 해서 오후에 녹음실 가야 돼. 눈 뜬 김에 집 좀 치우고 나가야겠다.”
“치우고 나갔다 오세요. 난 여기 꼼짝도 않고 웅크리고 있을 테니까.”
“…….”
“째려보지 마요! 사형이 그렇게 째려보면 진짜 무섭다고! 그리고 지금 집에 가 봐, 아버지가 얼마나 날 들들 볶겠어요, 난 못 가, 안 가.”
소파 위에 무릎 끌어안고 달랑 올라앉아 꿈쩍도 안 하고 버티는 한호영을 묵묵히 노려보며 서정운은 가만히 자신의 어깨를 주물렀다. 순간 움찔한 한호영이 그 느린 손길을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몸 상태만 괜찮으면 바닥에 메어꽂아 버리기라도 할 심사였던 것 같지만, 한호영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수면 부족인 서정운의 상태는 썩 상쾌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고로 다친 뒤로는 웬만큼 몸 상태가 좋지 않으면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는 어깨를 가볍게 주무르다 혀를 찬 서정운은 그대로 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한호영이 안도의 숨을 내쉰 찰나,
“집에 가기 싫으면 대련장 가서 연습이나 할 것이지, 네가 이렇게 게을거리니까 정무도를 그따위로밖에 못 하지.”
비수 같은 말이 날아와 가슴에 푸욱 박힌 한호영은 정말로 칼로 찔린 것처럼 가슴께를 움켜쥐며 서정운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서른 줄에 벌써 중원사범인 나더러! 어디 가서든 천재 영재 소리 듣는 나더러! 내 나이에 나 정도 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 같아요?! 나 못한다고 타박하는 사람은 세상에 사형뿐이에요!”
“얄팍하게 실력 좀 있다고 저렇게 게으름 부리면서 농땡이나 피우는 놈을 중원사범씩이나 시키니까 정련이 체련에 질 만도 하지.”
“그런 말은 아버지 앞에서 해 보시라니까!”
“……. 그러면 어떤 결과가 날 것 같아?”
어이없다는 듯 한호영을 보다가 코웃음 치는 서정운의 말에 한호영은 합죽해졌다. 그야……, ……아버지가 날 쥐 잡듯 잡겠지. 그런 말 듣기 싫으면 당장 연습량을 늘리라고.
“그 머리로 공부하느라 참 애썼다. 정무도나마 했으니 다행이지, 사범이라도 안 했으면 저 머리로 어쩔 뻔했어.”
헛웃음을 웃으며 혀를 끌끌 차는 그의 모습은 과거 입만 열면 웃으며 독설을 쏟아 내기로 유명했던 하원사범 서정운의 면모 그대로라, 한호영은 속으로 조금 전에 했던 말을 철회했다. 이 양반은 사범 그만두길 잘했지, 아무렴! 저 독설 때문에 정무도를 때려치운 파릇파릇한 꿈나무가 한둘이 아니었을 거다! 과거에도 저 혀 때문에 욕을 오죽 먹었나, 그래.
“……새로 데뷔한다는 그 여자애한테 삥 뜯기지나 마요.”
한호영은 심술궂게 이죽거렸다. 그리고 그 말은 과연 서정운의 약점을 정곡으로 찌른 듯 그는 더럭 눈에 불을 켜고 노려보면서도 대꾸를 하지 못했고, 그럼에도 어깨를 주무르며 다가오는 그를 피해 한호영은 황급히 소파에서 뛰어내렸다.
*
이럴 줄 알았다.
아침 댓바람부터 대문을 두들기며 깨워 대는 소리가 들려온 순간부터 서정운은 오늘 일진이 썩 좋지는 않을 것 같다고 예감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스포츠 신문에서 그 허황한 가십을 보고 미리 짐작은 했었지만 녹음실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스쳐 지나거나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의 시선에 드러난 호기심이나 흥미 따위가 노골적으로 다가왔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 새삼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유쾌할 리는 없다.
“서 선생, 가십 하나 터진 것 같던데? 괜찮아요? 하여간 이 동네는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너무 난다니까. 기자랍시고 아무 글이나 직직 갈겨 대는 것들은 싹 모아다가 어디 무인도에 내버려야 돼. ……그래, 대관절 어떻게 된 일이에요?”
일하다 몇 번 보았던 것뿐인데 몹시 친한 척 들러붙는 김 실장에게 서정운은 “별일 아닙니다.”라고만 대꾸했다.
지금 녹음실에 들어가 녹음 작업을 하고 있는 여자애의 소속사 직원인 김 실장이 이 업계에서 유명한 확성기이자 가십의 허브라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아마 서정운이 ‘그냥 한두 번 만났을 뿐입니다’라고만 말해도 ‘호텔에서 여러 번 봤다던데?’로 말이 퍼질 가능성이 다분한 인물이었다.
“에이, 우리 사이에 뭘 그래? 말 좀 해 봐요.”
“우리 사이는 일하는 사이죠.”
서정운은 그래도 계속 엉겨 붙으려 하는 그 인물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빙긋이 웃으며 못 박았고, 그제야 그는 무어라 입속으로 구시렁거리다 입을 다물었다. 슬쩍 기분이 상한 눈치다.
“괜찮게 하네요. 몇 살이에요?”
서정운은 알은체도 않고 녹음실 안에 들어가 있는 여자애를 유리창 너머로 가리켰다. “어, 열일곱.”이라고 떨떠름하게 대꾸하는 김 실장의 목소리는 확연하게 기분이 상한 음색이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서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열일곱이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다. 여자가 아니다. 그럼 됐다. ‘왜요, 사형은 꽃뱀 집어등 맞잖아요?!’라는 저주를 남기고 달아나 버린 괘씸한 사제의 말이 가슴 한구석에 남아 찜찜한 기분으로 녹음실로 온 서정운이었다.
그가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녹음 작업이 진행 중이었고, 새로 데뷔한다는 그 여자애는 서정운이 굳이 입댈 것 없이 노래를 곧잘 하고 있었다. 그러잖아도 오늘 일진도 사납고 기분도 영 아닌데 작업까지 난항이라면 속깨나 썩었을 거다.
서정운은 그간 연락이 뜸하던 사람들에게서 ‘기사 봤다. 어떻게 된 거냐’라는 요지의 문자가 날아들고 있는 휴대 전화를 주머니에 넣어 버리곤 작업을 지켜보았다.
“그 레이싱걸, 원래 소문이 별로 안 좋은 애였잖아요?”
그래도 아쉬운지 슬그머니 낚싯줄을 드리우는 김 실장이었지만 서정운은 들은 척도 않았고, 잠시 대답을 기다리던 김 실장은 노골적으로 서정운을 흘끗거리며 “뭐 서 선생도 여자 소문이 썩 좋지는 않은 사람이고.” 하고 빈정거렸다.
너나 잘하세요, 서정운은 그 말을 하는 것조차 귀찮아져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여태 살아오면서 추문에 휘말린 적이 한두 번도 아니었고 이런 식으로 비꼬거나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들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니, 딱히 추문이 돌지 않더라도 서정운은 뒤에서 이런 소리를 숱하게 들어 왔다.
‘사람이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는 법이다.’
어릴 때 서정운의 어머니가 했던 그 말은, 일견 서정운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 말인 듯했다.
서정운은 말하자면 대단히 뛰어난 서러브레드라 할 수 있었는데, 그는 원하는 일들은 웬만하면 다 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고, 그의 부모님은 충분히 사려 깊고 다정한 분들이었으며, 외모 또한 상당히 준수한 편인 그는 또래 가운데 빼어나게 머리도 좋았고 운동도 잘했고 그림이나 노래 따위의 솜씨도 좋아 뭘 하든지 못한다는 소리는 듣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서정운은 어머니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부족한 것이라곤 없어 보이는 그는 여자 운이 없었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여자 운이 엄청나게 좋아 보이는 탓인지, 남자 운도 썩 좋지 않았다. 대부분의 남자는 서정운을 시기하고 싫어했다.
이 김 실장이야말로 ‘서정운을 시기하고 싫어하는’ 남자의 전형이었다. 위로하는 척하면서도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는 걸 본인은 알고 있나 몰라.
그러는 사이 작업을 마친 여자애가 녹음실에서 나왔고, 발랄한 얼굴에 웃음을 한가득 띤 그녀를 손짓해 부른 김 실장은 서정운에게 인사를 시켰다.
“인사해. 지금 네가 부른 곡 만들어 주신 분이야. 서정운 선생님. 누군지 알지? 가요 쪽으로는 작업을 별로 안 하시지만 워낙 유명한 분이니까.”
“예? 아, 예, 그럼요. 처음 뵙겠습니다, 선생님.”
여자애의 얼굴에는 ‘처음 듣는 이름이에요’라고 적혀 있었지만, 얼른 꾸벅 인사를 하는 그녀에게 서정운은 별말 하지 않았다.
“그래. 목소리가 좋던데. 테크닉도 좋고. 순조롭게 잘되겠어.”
“정말요? 감사합니다!”
반색을 하는 여자애에게 서정운도 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서정운을 심술궂게 쳐다보던 김 실장이 불쑥 말했다.
“서 선생, 아무리 여자라면 가리지 않는다 해도 우리 애한테는 손대지 마세요. 소중한 기대주이니까.”
“그럴 리가요. 이제 열일곱이라는 애를.”
“그래도 요즘 애들은 워낙 발육이 좋아서, 사내놈들이 눈독 들여도 이상하지 않다니까……?”
서정운이 딱 잘라 대꾸하자 김 실장은 고개를 저으며 여자애를 훑어보았다. 은근히 말꼬리를 늘이며 가느스름한 눈으로 그녀의 가슴이며 엉덩이, 다리 따위를 훑어본다.
“저보단 실장님이 손대지 마셔야겠습니다.”
서정운이 그런 김 실장에게 웃으며 말하자, 김 실장은 정곡이라도 찔렸는지 대뜸 눈살을 찌푸리더니 불쾌한 기색을 확연히 드러냈다.
“허, 아무려면 내가---.”
“여기서 제가 더 손볼 건 없죠?”
서정운은 김 실장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음향 스태프들에게 확인하고는, 김 실장이 잠시 입을 다문 사이에 “그럼 작업은 별문제 없이 끝난 모양이니 저는 가 보겠습니다. 나중에 연락 주세요.”라는 말만 남기고는 자리를 떴다.
그의 뒤통수에 대고 속으로---혹은 대놓고--- 욕을 퍼부을 김 실장의 모습이 눈에 선했지만 알 바 아니다. 어차피 서정운의 인생에 저런 이들이 한둘이었던 것도 아니다.
누가 말을 걸 틈도 없이 주차장에서 냉큼 차를 빼서 나온 서정운은 얼른 그 길목을 벗어나 그럭저럭 한적한 강변길로 접어든 뒤에야 어깨에서 힘을 풀었다.
아무리 이런 일들이 일상다반사라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다. 어디선가 오지랖 넓은 사제 한호영이 ‘사형은 왜 말을 그렇게 밉살스럽게 해서 굳이 원한을 사요?’라고 핀잔을 주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실제로 과거에 그 말을 여러 번 듣기도 했다.)
뭐 어때. 난 어차피 여자한테도 사랑받지 못하고 남자한테도 미움만 산다, 그래.
반쯤은 자포자기의 심경이 되어 속으로 볼멘소리를 중얼거린 서정운은 울적하게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보았다.
창밖에는 강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강변을 따라 줄지어 서 있는 벚나무에는 아직 3월이 다 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꽃망울이 맺혀 있다. 올해는 예년보다 꽃이 일찍 피겠다. 하긴 벌써 날이 퍽 따뜻해지긴 했다. 오늘은 날씨도 유난히 좋아 햇빛이 눈부시다.
서정운은 자전거를 타거나 그냥 앉아 있거나 개를 데리고 산책하거나 하는 사람들을 보다가 ‘어차피 사람으로 안 될 거면 나도 그냥 개나 한 마리 끌어안고 살까.’ 하고 생각했지만 금방 포기했다. 어릴 적부터 커다랗고 멋진 대형견을 너무도 키우고 싶었지만 동물 털 알레르기가 있는 탓에 그 바람은 이룰 수 없었다. 한두 시간 정도라면 어떻게든 참겠지만 데리고 살기엔 무리였던 것이다.
사람도 안 되고 동물도 안 되고.
“…….”
우울해하고 있던 서정운은 그때 마침 눈에 들어온 주차장 표지판을 보고는 그대로 차를 돌렸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강가를 잠시 서성이다 가려는 변덕이다. 어차피 오후에는 아무 일도 없고 마음도 울적하고 잠도 부족해 노곤한 참인데, 강 언덕 풀밭에 앉아 기분 좋은 볕 아래서 잠깐 졸다 가도 좋겠다.
……라기엔 공기가 아직 쌀쌀했다.
카디건 하나만 걸치고 차에서 내리려던 서정운은 위에 점퍼를 하나 덧입었다. 그러다 문득 입이 심심하다 싶어, 엊그제 갖고 나왔다가 아직껏 조수석에 뒹굴고 있는 마른 육포를 꺼내어 물고는 걸음을 옮겼다.
속이 허전해도 끼니때가 아니면 주전부리를 하지 않는 버릇은 정무도를 그만둔 뒤에도 여전했다. 꼭 간식을 먹고 싶을 때엔 과자 따위 대신 직접 손질해 말린 싱거운 육포를 씹는 것도, 늘 단백질을 챙기던 때의 습관 그대로다. 이제는 정무도도 그만뒀으니 굳이 일부러 단백질을 더 챙길 이유는 없는데도.
……뭐, 맛있으니까.
서정운은 어렴풋이 씁쓸해지려는 머릿속을 얼른 비우고는, 그러고 보니 만들어 둔 육포가 거의 다 떨어져 가던데 가는 길에 고기를 좀 사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사람들이 한적하게 자리 잡고 있는 풀밭으로 걸어가 강이 내려다보이는 빈자리에 앉았다. 볕 아래 나른하게 앉아 있자니 금세 노곤해졌다.
서정운은 그대로 풀밭에 누워 눈을 감았다. 등을 타고 오르는 흙 기운이 싸늘했지만 견딜 만하다. 예전 한겨울에 수련 합숙을 했던 때에는 새벽에 냉수마찰도 거뜬히 했었는데, 확실히 한창 운동을 하던 때에 비하면 추위에 약해졌구나 싶다.
그래, 그때는 그랬었다.
천천히 내쉬는 숨과 함께 생각도 내쉬었다. 의식을 비우고 호흡에 집중한다. 그렇게, 흐릿하게 찾아들려는 어슴푸레한 우울을 몰아낸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깊은숨을 쉬는 동안 눈꺼풀 위로 쏟아지는 노란 햇빛이 이 노곤한 한때에 기분 좋게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던 때, 별안간,
텁.
“---?!”
서정운은 자신의 얼굴을 묵직하게 누르는 뜨뜻미지근한 감촉에 번쩍 눈을 떴다. 반사적으로 반쯤 몸을 일으키자 그의 얼굴에 앞발을 올렸다가 주룩 미끄러지는 조그만 털 뭉치가 보였다.
두 손바닥에 달랑 올라갈 만한 크기를 해서는 열심히 꼬리를 치며 폴짝거리고 있는 그 털 뭉치를 보면서 눈을 껌벅인 서정운은, 아무리 봐도 태어난 지 한두 달밖에 안 되었을 성싶은 이 어린 하룻강아지가 대체 난데없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딱히 주인으로 보이는, 강아지를 찾아다니는 사람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 넌 뭐야.”
목줄도 없네, 강아지를 달랑 들어 올린 서정운은 그놈의 목을 살살 긁으며 중얼거렸다. 손에 쏙 들어오는 그놈은 바동거리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꼬리가 부러져라 흔들어 댄다.
“이놈 색깔이 딱 누렁이 색깔이네. 어디 보자……, 여자애구나. 야, 야, 핥지 마. 왜, 배고파서 그래?”
홀랑 뒤집어 강아지의 아랫배를 들여다보던 서정운은 날름 코끝을 핥는 그놈에게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학학거리는 그놈을 빤히 들여다보다 내려놓은 서정운은 주머니를 뒤적여 아까 덜 먹은 육포를 꺼냈다. 어린놈은 서정운의 무릎 위에 두 앞발을 얹고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꼬리 떨어지겠다. 뭘 줄지 알고 그렇게 좋아해? ……너 운 좋았다, 간 안 하고 말린 거라서 주는 줄 알아.”
서정운은 육포를 잘게 찢어 주자 그 조그만 입으로 열심히 질겅거리는 어린놈을 내려다보았다. 쉴 새 없이 팔랑거리는 꼬리 끝을 살짝 붙들자 꼬리 아랫부분만 붕붕 흔든다. 참내, 이 조그만 것도 꼬리라고, 하고 피식 웃으며 놔주고 말았다.
이 어린 걸 누가 버리고 갔는지 혹은 들개가 낳았는지, 어디서 튀어나온 놈인지 몰라도 조막만 한 게 참 어여쁘다. 게다가 색깔도 딱 서정운이 예뻐하던 개랑 똑같아서 더 정이 갔다. 본산에서 키우던 누렁이. 사범을 할 때에는 매일 그놈 산책을 시켜 주곤 했는데, 정무도를 그만둔 뒤로는 볼 일이 거의 없어졌다.
그러고 보니 요전에 그놈을 봤을 때 배가 불룩하더니 지금은 새끼를 낳았으려나. 그러면 딱 요놈처럼 생겼을 텐데.
서정운은 강아지의 귓등을 살살 쓸어 주었다.
“그나저나 너는 아직 한참 어린놈이 왜 여기 혼자 있어.”
근처에 돌아다니는 어미 개라도 없나,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리던 서정운은 문득 시선을 멈추었다.
여남은 걸음쯤 떨어진 뒤쪽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아까 서정운이 둘러볼 때까지는 아무도 없었으니, 그 뒤 어느새 와서 앉았나 보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한 손에는 물병을 든 그는 운동복에 운동화 차림으로 풀밭에 앉아 강을 바라보고 있다가 서정운이 그를 쳐다보자 시선을 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무심히 시선을 돌린다.
“……?”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서정운은 트레이닝복 점퍼를 벗어 옆에 두고 반팔로 앉아 있는 그 남자를 훑어보았다. 눈에 띄게 체구가 큰 그 남자는 볕이 따뜻하다곤 해도 반팔로 앉아 있을 날씨는 아닌데 추운 기색도 없다.
벗은 팔에 근육이 아주 잘 잡혀 있는 게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얇은 셔츠 아래로 드러난 어깨도, 몸체도 근육이 빈틈없이 잘 잡힌 걸 알겠다. 심지어 근육의 질도 아주 좋아 보였다.
운동하는 놈이로구나. 저 정도면 무슨 운동을 해도 보통 이상으로 하겠다.
내심 감탄하며 남자를 보다가 문득 자신이 너무 노골적으로 쳐다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서정운은 다음 순간 웃고 말았다.
남자는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서정운이 대놓고 쳐다보는 시선을 모를 리가 없는데도, 남자는 굳이 서정운을 마주 보지도 않고 그렇다고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기색도 없이 아무렇지 않게,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 관심도 없다는 빛으로 강을 바라보며 쉬고 있었다.
어쩐지 그게 무척 상쾌하게 여겨짐과 동시에 마음이 편해졌다. 타인이 한 공간에 번연히 존재하지만 그 존재를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유쾌한 편안함이다.
서정운은 기분 좋게 웃고는 다시 강아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새 육포 조각을 다 먹어 치운 그놈은 꼬리를 흔들며 서정운의 손가락 끝을 깨물거리고 있었다.
“뭐, 이제 놀아 달라고? 요놈이 지금 유기견 될지도 모르는 마당에 팔자 좋게……, 가서 네 주인이나 찾아와, 이놈아.”
새까맣고 촉촉한 코를 톡 두드린 서정운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강아지의 머리 근처에서 연신 손을 움직였다. 머리끝을 톡톡톡 두드리다가 강아지가 달려들면 아슬아슬하게 그 손을 거두어 귓등을 긁고, 폴짝거리는 그놈이 그 손가락 끝에 주둥이를 대기 직전에 놈의 턱을 두드린다.
아주 간단하고 별것 아니게 보이는 그 손짓은 손놀림을 예리하고 빠르게 단련하는 정무도의 수련법手鍊法 중 하나다. 얼마나 순간적인 찰나에 얼마나 작은 움직임으로 상대를 비껴 내는지가 관건인 그것은, 이제 서정운에게는 수련이 아닌 놀이나 마찬가지였다. 훨씬 날쌔고 요령 좋은 누렁이도 한 치 차이로 비껴 내는데, 요런 하룻강아지쯤이야 눈 감고도 피한다.
분명 잡힌 것 같은데 잡히지 않은 그 아슬아슬함이 어린 것을 더욱 흥분시키는지 작은 털 뭉치는 재미나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날뛰었다.
헌데 이놈을 어쩐다……, 내가 기를 수는 없고 그렇다고 이대로 버려 두고 가기도 그렇고, 유기견 센터에라도 맡겨야 하나.
강아지와 놀아 주면서도 고민에 잠겨 있던 서정운이 문득 고개를 든 것은 지긋한 시선을 느낀 탓이었다.
눈길을 돌리자 조금 전의 그 남자가 뚫어질 듯 서정운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서정운의 손끝이다.
서정운은 손을 멈추었다. 강아지가 팔짝거리며 더 놀아 달라고 떼를 썼지만 그대로 손을 거두고 만다.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정무도와 관련된 움직임을 할 생각이 들지 않게 된 것은 이미 몇 년 전부터다.
남자가 서정운의 손끝에서 서정운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잠시 서정운을 쳐다보던 것도 잠시, 남자는 자신의 손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따라 해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천천히 손을 움직이기 시작하는 그는 이번에도 주위에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의 손에만 집중하는 눈치였고, 저건 뭔가 싶어 쳐다보던 서정운은 그 깔끔한 무관심에 다시금 웃음이 나고 말았다.
그냥 따라 하는 것치고는 손놀림이 대단히 매섭고 날렵하다. 저거야 정무도를 배운 놈이구나. 썩 훌륭은 한데…… 아직 거칠다. 덜 다듬어졌다.
그때, 서정운의 손 주위를 맴돌며 지분거리던 강아지가 별안간 고개를 홱 돌려 남자를 보더니, 그의 손이 움직이는 걸 보곤 새 놀잇감을 찾아 좋아라 그리로 달려갔다.
“어…….”
서정운이 붙잡을 틈도 없이 남자에게로 달려간 강아지는 제 몸통보다도 큼직한 손에 겁도 없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남자가 강아지와 놀아 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른 뒤쫓아 자리에서 일어난 서정운이 미처 몇 걸음 다가가기도 전에,
“---꺙!!”
겁 없는 하룻강아지는 기어이 제 앞발만 한 손가락에 주둥이를 얻어맞고는 벌렁 나자빠지고 말았다. 얼른 도로 일어나긴 했지만 호되게 아팠는지 바짝 자세를 낮추곤 남자의 눈치를 본다.
내 저럴 것 같더라니. 서정운은 얼른 그리로 걸어갔다.
남자는 변함없이 무표정하게 강아지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세게 칠 작정은 아니었던 듯---혹은 별반 세게 치지도 않았는데 강아지가 뜻밖에 비명을 질러서 당혹스럽기라도 한 듯--- 약간 손을 움츠렸다.
연신 혀를 날름거리는 걸 봐서는 몹시 아팠던 모양인데 그래도 여전히 꼬리는 느리게나마 살랑거리고 있어서, 그 천진함이 귀엽고 가엾어서, 서정운은 강아지를 달랑 들어 올렸다. 그리고 얌전히 숨죽이고 있는 그놈을 살살 쓸어 준다.
“…….”
남자는 말없이 눈을 껌벅이며 서정운을 보았다.
“손이 두껍고 크잖아요. 그러면 나랑 똑같은 정도로 움직여도 나보다 힘이 셀 수밖에 없지. 힘을 더 줄여야 해요.”
서정운이 남자의 커다란 손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하자 남자는 침묵했다. 묵묵히 쳐다보기만 하는 그를 마주 보며 괜한 말을 했나 후회할 찰나, 남자가 입을 열었다.
“힘을 더 줄이면 이만큼의 미세한 거리를 움직이면서 그만한 속도를 낼 수가 없습니다.”
아무 말도 없다 했더니 여태 그걸 생각했었나 보다. 서정운은 문득 재미있어져 언뜻 웃었다.
“글쎄요, 뭐……. 연습해 보시든가요.”
타고난 신체 조건에 따라 개개인이 이를 수 있는 한계는 각자 미세하게 다르겠지만, 당신은 손쓰는 걸 보니 아직 좀 더 끌어올릴 여지가 남아 있는 것 같은데---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내 제자도 아닌데 뭐. 손끝이 아직 거칠다는 말도 굳이 하지 않았다. 내 제자 아닌 걸 뭐.
하지만 어쩐지 재미있긴 하다. 나랑 비슷하거나 한두 살쯤 적을 것 같은데……. 서정운은 거듭 생각에 잠겨 손을 천천히 움직여 보는 남자를 보고 피식 웃으며 그 옆에 앉았다. 그새 강아지도 얻어맞은 충격에서 헤어났는지 도로 꼬물꼬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무도 배웠나 봐요.”
서정운이 묻자 남자는 다시 시선을 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끄러미 서정운을 보던 그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구나. 어디서 본 것 같다 싶더라니. 나도 예전에 했었거든요. 그때 어디서 스치기라도 했었나 봐요.”
“……. 예.”
남자는 다시 서정운을 빤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뭔가 말하려다 말았지만 아무래도 좋다는 투다. 남자는 오로지 자신의 손끝에만 모든 관심이 모인 것처럼, 손을 천천히 움직이다 멈추고, 다시 움직이다 멈추길 반복하고 있었다. 그렇게 집중하고 있으면서도 들을 건 다 듣고 있는지 서정운이 “재밌어요?” 하고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시선을 주지는 않는다.
서정운은 웃으며 눈길을 거두었다. 주위를 폴짝거리며 뛰어다니던 털 뭉치가 다시 서정운의 무릎에 앞발을 얹고 손을 깨물거리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육포를 꺼내어 조금씩 뜯어 주며 자신도 한 점 물어뜯은 서정운은 언뜻 시선을 주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
말없이 입을 우물거리며 육포를 내밀자 무심히 쳐다보던 남자는, 거절하려나 싶었는데 의외로 순순히 받아들었다. 그러곤 “고맙습니다.”라고 무뚝뚝하게 한마디 하더니 뭔지 물어보지도 않고 씹는다. 우물거리는 입술 사이로 얼핏 비죽한 송곳니가 보였다. 왠지 길들지 않은 짐승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 씹지도 않고 금세 삼켜 버리는 남자에게 한 조각 더 줬더니 그것도 순식간에 삼킨다. 감탄스러울 정도다.
먹성 좋네……. 하긴 저 체격이면 소 한 마리를 씹어 먹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몇 살이에요?”
저도 모르게 불쑥 물어보고 나서야 서정운은 낯선 사람에게 묻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물음일지도 모르겠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러나 남자는 불쾌해하거나 거리끼는 내색 없이 대답한다.
“스물일곱입니다.”
“…….”
기껏해야 한두 살 적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이 적다. 서정운은 새삼스럽게 남자를 훑어보다 감탄스레 중얼거렸다.
“역시 요즘 젊은 사람들이 우리 때보다 더 크네……. 나도 내 또래 중에서는 큰 편인데.”
“예.”
이번에도 짤막한 대답만 돌아온다.
붙임성이라곤 없이 무뚝뚝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건성으로 대충 흘려 넘긴다는 느낌도 아니다.
이렇게 성의 있는 무관심이라니.
서정운은 웃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남자의 손은 계속 움직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와 더 기꺼워진다.
괜찮다. 괜찮은 날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음이 울적하고 묵직했는데, 어느새 기분이 한결 나아져 있었다. 날씨도 좋고 기분도 편안하고 심지어 즐겁기까지 하다.
원래라면 잠시 앉아 있다 일어섰을 텐데도 한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었던 건 그렇게 기분이 선선했던 탓이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서늘한 공기가 옷깃 안까지 스며들기 시작했고, 슬슬 가 봐야 할 성싶었다.
서정운은 어차, 하고 몸을 일으켰다. 변덕스런 휴식은 뜻밖에도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기분 좋아지도록 잘 쉬었으니 이제 기분 좋게 떠나면 되지만, 남아 있는 문제가 하나.
“이놈을 어쩐다……. 주인을 찾아주긴 해야 할 텐데…….”
서정운은 발밑에 졸랑거리며 따라붙는 털 뭉치를 달랑 집어 들어 난감하게 쳐다보았다. 그 혼잣말을 들었는지 아직껏 느리게 손을 움직이는 데에 집중하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이리 주십시오.”
“?”
서정운은 손을 내미는 남자를 의아하게 내려다보았다.
“제가 데려왔습니다.”
엉……?, 서정운이 멍하게 눈을 깜박이며 얼결에 그 커다란 손에 강아지를 내려놓자 강아지는 얻어맞은 것도 까먹었는지 아니면 얻어맞은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그 손안에서 발랄하게 꼬리를 흔든다.
“이 녀석 주인이었어요?”
여태 그런 내색이라곤 전혀 없더니, 하고 서정운이 얼떨떨하게 묻자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 그럼 아는 사람 개를 맡아 주고 있는 거?”
“아닙니다.”
“……. 그러면?”
남자는 자꾸 바동거리는 강아지를 어깨에 얹으며 말했다.
“집에서 키우는 개인데, 제 개는 아닙니다.”
특이한 화법이다. 꼭 외국에서 살다 오기라도 한 것 같다. 서정운은 피식 웃었다.
“산책시켜 주려고 데리고 나온 거예요? 아직 집 밖을 산책하기에는 한참 어린 것 같은데.”
“아닙니다.”
“그러면?”
이제 슬슬 이 남자의 화법을 알 것 같기도 해, 뒷말을 기다리지 않고 물어보았다. 물어보면 선선히 대답하지만 안 물어보면 굳이 말하지 않는 남자다.
“자꾸 다리에 달라붙어 거치적거려서 주머니에 집어넣었더니 그대로 잠들었습니다. 자전거 타러 나오는데도 깨지 않아서 그냥 그대로 나왔습니다.”
무덤덤하게 말하는 남자를 보다가 서정운은 웃어 버렸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그래, 이 건장한 체격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겠지만, 어째 좀 귀엽다. 저 말투도 저 표정도 귀엽다는 단어랑은 전혀 안 어울리지만 그래도, 어쩌면 좀 많이 귀여울지도 모르겠어.
서정운은 눈꼬리를 접고서 한동안 소리 없이 웃다가 남자의 어깨 위에서 바르작거리는 털 뭉치의 콧잔등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손 연습하다 때리지 마요.”
인사 대신 그 말을 남기는 서정운에게 남자는 역시나 “예.” 하고 짧으나 진지하게 대답했다.
서정운은 기분 좋게 돌아서려다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너무 힘이 들어가서 속도가 안 나는 거예요.”
불쑥 말하는 서정운을 남자가 의아하게 쳐다본다.
“손목이랑 손가락 끝에서 좀 더 힘을 빼 봐요. 좀 더 가볍게.”
내 제자도 아니니 굳이 말해 줄 필요 없지만, 그래도. 저렇게 진지하게 생각에 잠기는 게 보기 좋아서.
그래서 서정운은 선선히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노랗게 기울어지는 해를 받으며 주차장 쪽으로 얼마간 걷다가 돌아보니 남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느리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 바로 아래서 조그만 털 뭉치가 나풀거리며 뛰어다니는 게 멀리서도 보인다.
서정운은 기분 좋게 웃으며 걸음을 뗐다. 묵직한 기분은 어디론가 가 버린 지 오래. 공기가 차가운데도 몸속은 따끈따끈한 것 같았다. 왠지 마음이 흥성거렸다.
*
퍼벅!!
무겁고 사나운 소리가 대련장 안에 울렸다. 그 심상찮은 소리로 미루어 짐작했던 대로, 옆에서 심판으로 지켜보고 있던 사범이 수련생에게 “매트 새로 깔아라.”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워낙 빠르고 거센 타격이라 매트가 버티지 못하고 터진 것이다.
처음에나 낯빛을 바꾸며 놀랐지 이제는 일례행사가 되다시피 한 일이라, 수련생은 비품실로 연락을 하곤 두꺼운 매트를 끌어냈다. 낯빛이 바뀐 사람은 매트의 찢어진 가죽 바로 옆에 쓰러진 채 딱딱하게 굳어 버린 사범뿐이다.
찢어진 곳은 어깨 바로 옆 한 뼘 거리도 안 되는 곳이다. 사범이 간발의 차로 피하지 않았더라면 어깨를 영영 못 쓰게 되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너……!”
안색이 시퍼레진 사범이 일어서며 외쳤지만, 손등으로 땀을 닦으며 유유히 돌아서다가 의아하게 돌아본 남자는 왜 그러냐는 얼굴이었다. 고의도 실수도 아니라 그저 대련을 함에 있어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또한 그 정도는 응당 피할 줄 알았다는 표정이다.
확실히 남자가 잘못한 일은 없기에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한 사범은 여전히 굳어진 얼굴로 어물어물 물러섰고,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매트 위에서 내려와 물병을 집어 들었다.
그 시종일관을 한호영은 대단히 떨떠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정련과 체련이 사이가 안 좋다 하나 본산의 대련장은 하나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본산 수련생들은 자연히 같은 대련장을 쓰곤 했다.
그러니 한호영은 자신의 재종형제이자 지금은 법적으로 종형제가 된 저 남자, 체련의 눈부신 신인 한무화가 질기고 단단하기 짝이 없는 매트를 이삼 일에 한 번씩은 찢어 먹는 것도 여러 번 봤다. 그의 대련 상대를 하는 수련생이나 사범이 사색이 되어 물러서는 모습을 보았던 건 헤아릴 수도 없다.
“괴물…….”
한호영이 질린 얼굴로 중얼거리는 소리는 바로 뒤에서 터져 나온 숙부의 호쾌한 웃음소리로 덮여 버렸다.
“이 녀석, 힘 조절 좀 하라니까. 매트가 남아나지를 않는구나. 하지만 3, 4단쯤은 벅차하지도 않고 당해 내니 이 녀석과 대련할 상대도 마땅찮단 말이야. 허허, 상대가 마땅찮아서 연습하는 데에 애로가 있다니 이런 경우를 보았나. ……어이쿠, 바로 또 붙으려고? 확실히 젊다 보니 체력이 좋아. 허허, 허허허허.”
물로 목만 축이고는 바로 다시 대련단 위로 올라가 다음 대련 상대에게 묵례를 하는 한무화는 지친 기색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았고, 그런 양아들이 자랑스러워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숙부는 콧대가 열 뼘쯤 솟아 있었다. 그 옆에서 한호영의 부친은 몹시 떨떠름한 얼굴로 눈썹을 치켜올린다.
“대인 대련만 열심히 한다 해서 다 된다더냐. 정무도의 극의를 추구함에 있어 몸가짐보다 먼저 챙겨야 할 것은 마음가짐이지. 정무도를 익히는 데에는 마음을 다스리는 게 먼저여야지, 몸 단련이 우선이어서야 주객이 전도되는 게야.”
“허허, 형님은 그리 말씀하시지만 이 아우 생각은 그렇지 않다니까요. 물론 마음도 중요하나 어찌 사람의 마음과 몸을 따로 생각합니까?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했으니, 심신을 함께 갈고닦아야지요, 형님. 육체를 강건하게 연마하는 것도 마음만큼이나 중하다 봅니다.”
“그리 주장해 본들 과거 수십 년을 돌이켜 보아라. 작은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체적으로 정련이 우세해 오지 않았더냐.”
“그거야 그저 효과가 일찍 나타나 그랬던 것뿐이지요. 앞으로는 그렇지 않을 겁니다. 형님도 만년에는 체련이 옳다 여기실 날이 올 겁니다.”
환갑 지난 노인들이 목청을 드높이며 형제 싸움을 하는 게 별반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정련의 정원사범 한태일과 체련의 정원사범 한수일이 정무도 관련으로 의견을 나눴다 하면 늘 둘 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팽팽하게 대립하며 아웅다웅 다툰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여태까지는 늘 대체로 한태일이 높다란 콧대를 내보였던 데에 비해 얼마 전부터는 한수일이 득의양양했다.
지금 두 노인이 각각 다른 의미로 번쩍거리는 눈길을 보내고 있는 남자, 한무화가 온 이후부터다.
저렇게 형형한 눈길이 쏟아진다면 신경 쓰일 법도 할 텐데 한무화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이쪽으로는 시선 한번 주지 않고 대련 상대를 응시했다. 작년에 4단으로 승단한 대련 상대는 긴장한 기색으로 한무화를 마주 보고 있었다. 암암리에 그들을 지켜보는 시선이 여럿인데도 담담히 대련 상대에게만 집중하는 한무화를 보며, 한호영은 확실히 보통 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딱히 나쁜 놈인 것도 아니란 말이야…….
나쁜 놈이라면 맘 편히 미워하기나 하지, 본가가 넓다고는 하지만 한 담장 안에 살다 보면 마주치는 일도 흔해 이제는 저 사촌 동생---전혀 동생 같은 느낌은 안 들었지만---에게 그럭저럭 익숙해진 한호영이었다.
말수가 몹시 적고 타고난 천성이 무뚝뚝하다는 건 금방 알았다. 주위 일에 관심이 없는 저놈이 집중하는 건 오로지 정무도뿐이라는 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알았고, 엄청난 자질뿐 아니라 성실하고 꾸준한 노력도 마다하지 않는 좋은 선수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워낙 남의 일에 관심도 없고 남의 눈치도 안 봐서 그렇지, 교활하거나 악한 구석은 없다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그래, 나쁜 놈은 아니다. 외려 썩 괜찮은 놈이다. 하지만 역시 저 무뚝뚝한 성격도 그렇고, 체련 소속이란 것도 그렇고, 영 편치 않단 말이야.
“아직 거칠어.”
한무화의 모습을 진지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던 부친이 불쑥 중얼거렸다. 한호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위용은 굉장하고 기술도 훌륭한데 아직 더 다듬어야 할 것 같네요.”
“어릴 때부터 본산에서 키웠더라면 지금쯤은…….”
부친은 혼잣말을 하다 말끝을 흐렸다. 정무도의 수련이 한국만큼 체계적이지는 않은 외국에서 자랐음에도 저 정도라면, 한국에서 제대로 배우며 자랐더라면 엄청난 선수가 되었을 거다. 그것을 아쉽게 여기다가 다음 순간 저놈이 체련 소속이라는 걸 떠올리곤 냉큼 입을 다물어 버린 부친은 이내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손놀림만 희한하게 좀 깨끗하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거칠어. 아직 멀었어. 암, 한참 멀었지.”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숙부가 눈초리를 치켜세웠다.
“거친 게 꼭 나쁜 것만도 아니고 깨끗하고 날렵한 게 꼭 좋은 것만도 아니지요. 각 선수 특성에 맞춰 고유의 기량을 키워 나가는 게 좋은 법. 게다가 저만큼 압도적인 힘이면 기술 어느 정도 차이는 충분히 제압할 수 있습니다.”
“쯔쯔, 그러니까 체련은 안 되는 거야. 수련으로 정진하는 게 우선이지 타고난 게 우선이더냐?”
“타고나는 게 현실적으로 얼마나 결정적이고도 중요한 자질인지 잘 아시는 분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억지 부리지 마십시오, 형님.”
“억지는 네가 부리는 거지! 백보 양보해서 4월 승단식에는 부른다 쳐도, 6월 사범 수련 합숙 때는 안 돼!”
다시금 관자놀이에 핏대를 세우고 말다툼을 하기 시작하는 두 노인에게서 한호영은 슬그머니 한 걸음 물러섰다. 숙부의 눈초리가 한결 사나워졌다.
“안 될 게 뭐랍니까? 체련에 할당된 인원으로 선발하는데 정련인 형님이 관여하실 것 없습니다. 정련에서 누굴 선발하든 언제 우리 체련에서 관여한 적 있었답니까?”
“사범 수련 합숙에 사범도 아닌 놈을 참여시킨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이냐?! 공적인 일에 사적인 관계를 끌어들여서는 안 될 일이다!”
“사범이 아닌 사람이라도 일정수 이상의 사범들의 추천을 받으면 특별 수련생 자격으로 함께 합숙하는 특혜를 주지 않습니까. 그러면 저와 체련 측 사범들이 추천하면 되는 일 아닙니까.”
“그거야 정무도를 꾸준히 성실하게 해 온 유단자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지!”
“유단자만 대상에 해당된다는 정식 규정이라도 있습니까? 제가 이미 찾아봤는데 그런 규정은 없더이다.”
“아니 이눔이……! 안 된다면 안 돼!”
“규정에 어긋난 것도 아닌데, 실력이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놈을 못 나가게 하다니 그런 역차별이 어디 있습니까? 전 저놈 우리 체련 인원으로 사범 합숙에 참여시킬랍니다. 이미 다른 사범들도 찬성했습니다.”
“어허, 안 된대도!”
“안 되지 않습니다!”
두 노인의 언성은 점점 높아져 이미 대련장 안에 쩌렁쩌렁 고함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이러다 자칫하면 서로 멱살이라도 잡겠다 싶어서 재빨리 눈짓을 교환한 정련과 체련 사범들이 얼른 두 노인을 억지로 떼 놓았지만, 분이 풀리지 않아 씨근거리며 동생 노인을 노려보던 형 노인, 한태일이 버럭하고 외쳤다.
“그래, 네가 정 그렇다면 6월 초에 상원사범들의 거수로 결정하자. 공정하게!”
“바라던 바입니다! 공정하게!”
“저놈이 그때까지 얼마나 기술을 예리하게 다듬어 오는지 어디 한번 보자꾸나!”
“아암요, 똑똑히 보십시오, 그때까지 제가 저놈을 직접 붙들고 가르칠 테니!”
정무도의 권위자 정원사범의 선언에 주위가 술렁인 것도 잠시, 대련장 한가운데에 퍼벙!!!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한무화가 대련 상대를 한판으로 메어친 것이다.
메어쳐진 상대가 땀범벅으로 숨을 몰아쉬는 것에 비해 이번에도 한무화는 가볍게 땀만 닦을 뿐 힘든 기색도 없이 인사를 하고 대련단에서 내려섰다.
벌레 씹은 얼굴로 낯을 우그러뜨리는 한태일 사범에게 한수일 사범은 보란 듯이 시선을 보내곤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한무화에게 걸어갔다.
“허허허, 금방 단판에 끝내 버리는구나. 아주 호쾌한 체술이야. 내일부터 무화 너는 내가 직접 가르치도록 하마. 누구든 공연한 트집 잡지 못하도록 내가 아주 잘 가르쳐 줄 테니.”
‘트집’에서 또 한 번 한태일 사범에게 눈길을 보낸 한수일 사범은 다시금 웃음을 터뜨렸고, 한호영은 붉으락푸르락해지는 아버지를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예순을 넘겨 일흔을 향해 가는 나이에 사람들 앞에서 고함치며 싸우는 철없고 유치한 노인네들이라지만, 정무도계의 단 둘뿐인 정원사범, 정무도의 정점에 선 이들이다. 그런 정원사범에게 직접 사사해 배운다는 게 정무도를 익히는 이들에게 있어 얼마나 영예로운 일인지 아는지 모르는지, 한무화는 변함없이 무표정한 낯으로 “예. 감사합니다.”라고 무덤덤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물병을 들고 목을 축이던 한무화는 대련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시계를 보더니 “몸 좀 풀고 오겠습니다.”라며 대련장에서 훌쩍 나가 버렸다. 대련장으로 사용하는 별채 옆에 세워 두었던 자전거를 타고 담장 밖으로 나가 버리는 그의 모습이 창문 너머로 보였다. 별일 없으면 매일 같은 시각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수련을 하고 휴식을 하고 산책을 하는 규칙적인 남자다.
“아니 저놈이, 정원사범이 직접 가르쳐 준다는데 큰절 넙죽 하고 감사하다고 머리를 조아리지는 못할망정……!”
한무화가 뭘 하든 못마땅한 한태일 사범이 역정을 내든 말든, 한수일 사범은 뒷짐을 지고 서서 누구 들으란 듯이 껄껄 웃었다.
“그렇게 잇따라 대련을 해 놓고 지치지도 않는지 몸 풀겠다고 저렇게 나가는 것 보게, 참 굉장한 놈이야. 허허, 허허허허.”
아이고……, 오늘도 아버지 기분이 바닥을 기겠구나……, 한호영은 원망스럽게 숙부를 노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부친은 성이 단단히 난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는 걸음을 돌렸다.
“난 이만 가 봐야겠다.”
“왜 벌써 가시려고요? 어차피 하실 일도 없으실 텐데, 저랑 다과나 하십시다. 날씨도 청명하니 좋겠다, 꽃도 피겠다, 툇마루에서 뜰 내려다보며 차나 마시면 딱이겠구먼.”
“일없다. 너나 마셔라.”
“허허허허, 이런 날도 있으면 저런 날도 있는 게지, 형님 뭐 그리 기분이 상하셨소? 허허허허. 그러지 말고 같이 가십시다.”
대련장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나가 섬돌 위의 신을 구겨 신는 한태일 사범의 뒤를 설렁설렁 따라가며 한수일 사범이 웃어젖혔다.
저 양반 하여간 심술궂으시기는, 한호영이 입속으로 투덜거리며 얼른 부친을 따라 나가, 돌계단 아래로 성큼성큼 내려가는 부친을 따라잡았을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어,” 하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웃음소리가 그치는가 싶더니, 동시에 콰당하고 뭔가 엎어지는 소리가 “어쿠!!” 하는 비명과 함께 들려왔다.
돌아보자 한 발로 섬돌 위의 신을 신고 다른 발로 문턱을 넘어서던 한수일 사범이 섬돌에서 미끄러짐과 동시에 문턱에 걸리는 바람에 성대하게 엎어져 있었다.
“사범님!!!”
사람들이 놀라서 달려갔고, 문간에 구겨지듯이 쓰러진 동생 노인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한동안 일어나지를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