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2) (4/28)

*

검진 예약 시간까지는 충분히 여유가 있었다.

점심때 교외에 볼일을 보고 올 일이 있었는데 생각보다 차가 안 막혔던 탓이다.

이대로라면 차가 굼벵이처럼 기어가도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겠어, 한가롭게 강변을 따라 차를 몰던 서정운은 문득 앞유리창에 팔락팔락 떨어지는 꽃잎을 보고 속도를 더욱 늦추었다. 길가의 벚나무에서 바람결에 꽃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어느새 꽃이 피었구나. 올해는 정말로 유난히 봄이 빠르다.

서정운은 벚나무가 예쁘게 줄지어 있는 강둑을 바라보며 차 속도를 좀 더 늦춘다. 조깅을 하는 사람한테도 추월을 당할 만큼 느린 속도였지만 차가 그다지 다니지 않는 널찍한 길이라 마음 졸일 일은 없다.

“…….”

그러고 보니 바로 며칠 전 이 부근에서 왠지 모르게 기억에 남는 사람을 만났었는데. 기억에 남는 강아지와 더불어.

서정운은 느리게 기어가는 차창 밖을 공연히 둘러보았다. 강가를 오가는 사람은 제법 많았지만 그 남자 같은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렇게 눈에 띄는 남자를 못 보고 넘어갈 리도 없다.

때맞춰 우연히 또 마주칠 리도 없는데 어쩐지 아쉬운 기분이 든다. 그 뒤로도 그 남자를 몇 번이나 불쑥불쑥 떠올렸던 탓일까.

이유 없이 기억에 남는 남자였다. 그 과묵한 기색도, 무표정한 얼굴도, 그런데 유난히 마음 편하던 분위기도.

연락처라도 물어볼 걸 그랬나, 하고 생각하던 서정운은 다음 순간 자신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왜 이래, 왜. 고작 한 번 본 사람이 뭐 그렇게 아쉽다고.”

그래, 고작 한 번 본 사람인 데다 얘기라곤 변변찮게 하지도 않았는데 아쉽다면 이상한 일이다. 서정운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액셀을 밟았다.

그러나 차의 속도가 미처 빨라지기도 전에 때마침 조수석에 놓아두었던 휴대 전화가 진동하기 시작했고, 액셀에서 발을 떼며 액정 화면을 본 서정운은 “으.” 하고 중얼거렸다. 화면에 뜬 것은 세 글자, ‘사부님’.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어쩐다. 안 받고 싶은데, 지금 모른 척하고 안 받아 봤자 또 전화하실 테지. 천년만년 모른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고민은 짧았다. 서정운은 갓길에 차를 세우곤 끈질기게 울리고 있는 전화를 집어 들었다.

“예, 사부님.”

「그래, 정운이냐. 어디냐.」

“여의도 근처입니다. 오늘 검진받는 날이라 재활 센터에 가는 중이에요. 사부님은 별일 없으시지요?”

「나야 별일 없지. 네 사숙은 오른발 인대가 끊어져서 깁스를 했다만.」

“예? 한수일 사범님이요? 아니 어쩌다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듣고 서정운이 놀라서 묻자 아주 꼴좋다는 투의 심술궂은 대꾸가 돌아왔다.

「문턱에 걸려 넘어졌을 뿐인데 그리됐다. 그놈도 늙은 게지.」

“……예, 얼른 나으시면 좋겠네요.”

이 어르신이 이리 말씀하시는 걸 보니 일단 크게 걱정할 만큼 다치지는 않으신 모양이고, 또 두 분이 심기 사납게 언성을 높인 지 얼마 안 되었나 보다.

하여튼 우애 한번 각별한 형제라니까……, 서정운이 속으로 중얼거릴 때였다. 「그건 그렇고」라며 드디어 노인이 말을 꺼냈다.

「너 언제 한번 안 올 테냐? 이러다 얼굴도 까먹겠다.」

왔구나.

“예, 조만간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승단식 때 보자꾸나. 다다음 주말이다.」

“아, 그런데 사부님, 제가 그날은 중요한 볼일이…….”

「네 사부 낯도 세워 주지 않을 볼일이라면 그야 물론 아주 중요한 볼일이겠지. 거 뭔지 참 궁금쿠나.」

“……, 사부님, 제가 그런 자리에 참석하면 싫어하실 분이 많으실 테고, 외려 사부님 체면을 깎지나 않을까 염려되는데요.”

「내가 널 부르겠다는데 누가 대놓고 싫어한다더냐? 게다가 이제 와서 내 체면 그리 염려할 것 없다. 네가 현역에 있으면서 소문 뿌리고 다녔던 무렵이라고 어디 내가 체면 없는 사람이었더냐.」

“……, …….”

서정운은 무어라 말이 나오지 않는 입만 벙긋거렸다. 이래서 받기 싫었는데. 이 어르신은 도통 당해 낼 수가 없단 말이야.

「게다가 어찌 되었든 한번 오기는 와야지, 누렁이도 너 기다린다.」

“예? 누렁이요?”

갑자기 웬 개 이름을 꺼내나 싶어 어리둥절하게 되묻자 노인이 혀를 찼다.

「그 녀석이 낳은 새끼들이 무럭무럭 자라 벌써 온 집 안 헤집고 다니는데 넌 그렇게 누렁이 예뻐했던 놈이 어째 그리 매정하게 한번 보러 오지를 않아.」

“아. 낳았어요? 언제요?”

「벌써 달포도 훨씬 지났다, 이놈아. 여섯 마리를 낳았는데 다들 아주 튼튼해.」

“그렇구나. 그럼 가야겠네요.”

「……뭐가 어째? ‘그럼’ 가야겠어? 이눔이…….」

노인의 목소리가 대번에 싸늘해지는 기색에 서정운은 황급히 대답했다.

“아닙니다, 사부님. 사부님 뵈러 가겠습니다. 승단식 때요. 사부님 찾아뵈어야죠.”

「그래, 그래야지, 착하다.」

노인은 짐짓 너그럽게 말했고, 서정운은 ‘결국 잡히고 말았구나.’ 하고 생각하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이런 일이 아니라도, 가끔 와서 아버지도 좀 찾아뵙고 그래라. 얼마 전에 너 요새 어찌 지내냐 하시더라.」

“아, 예, 그래야죠. 어르신도 잘 지내시지요?”

서정운은 문득 웃음을 띠었다.

노인의 아버지인 큰 어르신은 이미 아흔에 가까워, 지금은 본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외따로 지어 둔 별당에서 지내며 거의 바깥 걸음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분이 정무도계에서 물러난 지도 십여 년이 되었는데, 그 당시 아직 정무도를 하고 있었던 서정운은 그 뒤로도 가끔 별당으로 가 큰 어르신을 찾아뵙곤 했었다. 별당에서 조용히 텃밭을 가꾸거나 책을 읽거나 명상을 하며 일상을 보내는 큰 어르신은 마치 은거하는 선사 같았는데, 서정운은 그 고즈넉한 곳도 그 선승 같은 분도 좋았다.

이제는 서정운이 본산에 잘 가지 않으니 뵐 일도 줄었지만, 지금도 그곳의 양지바른 툇마루를 떠올리면 마음이 따끈따끈해지는 것이었다.

「그래, 아주 정정하게 잘 지내신다. 그날 오면 찾아뵈어라. 아버지가 너는 유난히 좋아하신단 말이야.」

“하하, 사부님도 저 좋아하시잖아요.”

「그걸 아는 놈이 그래 승단식에 안 오고 빠져나갈 궁리를 해?!」

“하하……, 아니 그건 아니고……. 그날 꼭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그럼 그날 너 보는 줄 알고 있을 테니 늦지 않게 오너라.」

노인은 다시 한번 못 박고는 전화를 끊었고, 서정운은 까맣게 액정이 꺼져 버리는 휴대 전화를 내려다보다가 긴 숨을 내쉬었다.

결국은 잡혔구나. 이렇게 될 것 같았다. 결국은 이렇게 될 줄 노인에게 전화가 걸려오기 전부터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안 받고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쩔 수 없겠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묵직한 건 어쩔 수 없다.

서정운은 벚꽃이 활짝 피어 있는 벚나무 길을 무거운 눈길로 바라보다가 아직 여유가 남아 있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차에서 내렸다. 통행 차량도 별로 많지 않겠다, 그대로 차를 세워 두고는 둑길을 향해 걷는다.

사실 갔다 오는 게 별 대단한 일은 아니다. 한두 시간 얼굴 내밀고 있다 돌아오면 그만이다. 그를 싫어하는 숱한 사람들의 바늘 같은 시선이나 이지러진 얼굴 따위, 못 본 척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예전 본산에서 지낼 때에는 일상이 그렇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때는 정무도를 할 수 있었던 무렵이다. 그가 그곳에 있는 목적은 오로지 그것뿐이었으므로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았기 때문에 아랑곳 않고 스쳐 지날 수 있었다.

지금은.

“……, 뭐, 나는 견디는 것도 잘하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며 잠시 강을 내려다보던 서정운은 강둑 위에 간이 건물로 세워진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산책을 하거나 자전거 따위를 타며 오가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편의점은 평일 오후인데도 제법 손님이 있었다. 강변을 오갈 만큼 날씨가 풀리자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조리 다 나왔나 보다.

서정운이 카운터 앞에서 아무거나 눈에 띄는 담배를 가리키며 “저거 한 갑 주세요. 예, 그거. 그리고 라이터도 하나.”라고 편의점 직원에게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잘랑잘랑, 편의점 문에 붙어 있던 종이 울렸다. 서정운이 들어와 있는 동안에도 몇 차례나 울렸던 그 소리 쪽으로 그는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뭔가 시야 끝에 좀 큼직한 것이 들어왔다 싶었기 때문인데,

“……아.”

서정운은 막 편의점 안으로 들어선 남자를 보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 남자도 서정운을 보더니 한두 번 눈을 깜박이고는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러나 그뿐, 남자는 알은체는 했으니 됐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돌려 음료대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그 남자다. 며칠 전 마주쳤던 남자.

그때도 강변에서 마주쳤던 터라서 아까 잠깐 떠올리긴 했지만, 그래도 설마 다시 이렇게 마주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서정운은 문득 기분이 좋아졌다. 뭐랄까, 공연히 기분이 들뜨는 느낌이다. 만일 자신에게 꼬리가 달려 있었더라면 그 꼬리가 파닥파닥 흔들리고 있을 것 같은 느낌.

남자의 뒤통수를 쳐다보다가 편의점 직원이 “삼천백 원입니다.”라고 재촉하듯 하는 말을 듣고서야 고개를 돌린 서정운은 가격을 치르고 바깥으로 나왔다. 마침 문 옆에 놓여 있던 테이블이 비어 있어서 거기에 앉는다. 담배 포장을 뜯고 있으려니 곧 남자가 생수 한 병을 들고 편의점에서 나왔다.

“또 보네요.”

서정운은 손을 흔들며 남자에게 빈 의자를 가리켜 보였다. 남자는 잠시 의자를 보다가 별말 없이 순순히 걸어와 앉았다.

무표정하게 강 쪽을 바라보며 물병을 뜯는 남자를 보면서 서정운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며칠 만에 사람이 변할 리도 없건만 정말로 그때의 느낌 그대로다. 어쩌지. 굉장히 반갑잖아.

“오늘은 꼬맹이가 안 보이네? 혼자 왔어요?”

“예.”

변함없이 딱 한마디, 대꾸만 하고 마는 남자에게 서정운은 웃으며 물었다.

“왜? 데려오지.”

“제 형제들이랑 놀고 있었습니다.”

“다 해서 몇 마리인데요?”

“다섯 마리 더 있습니다.”

“아하……. 고만한 것들이 뒤엉겨서 놀고 있으면 진짜 귀엽겠는걸.”

서정운은 조막만 한 것들 여러 마리가 엎치락뒤치락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가만히 웃었다. 그러고 보니 누렁이네 새끼들도 딱 고만하지 싶은데……. 승단식 날 본산에 가면 고놈들부터 보러 가야겠다.

“며칠 전에도 이 시간쯤 봤던 것 같은데, 매일 이 시간에 이쪽으로 운동하러 와요?”

“예. 별일이 없으면요. …….”

남자는 대답을 하곤 왠지 살짝 이상하다는 얼굴로 서정운을 쳐다보았다. 왜 저렇게 쳐다보나, 서정운도 이상한 얼굴로 그를 마주 보며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러다 곧 담배 연기가 남자 쪽으로 흘러가는 걸 보고는 얼른 일어났다.

“아, 미안해요. 연기가 그쪽으로 가네. 이쪽에 앉아요.”

“괜찮습니다.”

“그래도 운동하는데, 담배 안 피우지 않아요?”

서정운이 남자의 팔뚝을 붙들고 일으켜 세우자 남자는 굳이 버틸 생각까지는 없는지 서정운이 앉아 있던 자리로 옮겨 앉았다. 그러고는 빈 의자에 앉는 서정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불쑥 말한다.

“그쪽도 운동하잖습니까.”

어……? 하고, 담뱃재를 떨던 서정운은 뜻밖이라는 기분으로 남자를 보았다. 이 남자가 묻지도 않은 말을 하는 게 의외이기도 했거니와, 이제야 남자가 왜 저런 얼굴로 쳐다봤는지 알겠다.

서정운은 하늘을 쳐다보며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그 연기를 천천히 뱉으며 중얼거린다.

“난 지금은 안 하지. 그러니까 피우는 거예요.”

하늘이 유난히 파랗다. 봄 하늘이 꼭 가을 하늘 같다. 어찌나 높고 파란지 가슴까지 푸르러져서, 평소라면 하지 않을 말까지 덧붙이고 만다.

“다시 하고 싶어질 때마다 피우거든.”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은, 남의 일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지만 이야기는 잠잠히 들어 주는 남자의 귀에도 들어간 모양이었다. 남자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다시 하고 싶으면 안 피우는 편이 좋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피우는 거라니까. 다시 하지 않으려고.”

이기기 때문에 즐거웠던 게 아니다. 즐거웠던 것은 내 몸을 내가 원하는 대로 섬세하게, 정교하게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움직임까지 내 몸을 내가 온전히 통제하고 있다는---내가 원하는 대로 내 움직임이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흘러가고 있는 그 느낌.

바로 그것이 무이기도 한 동시에 예이기도 한 정무도가 서정운에게 주었던 즐거움이었고, 그것이 전부였다. 그것이 더 이상 여의치 않게 되었을 때의 상실감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서정운은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남자는 말없이 서정운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곧,

“예.”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만 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물을 마시며 강을 바라보는 남자는 더 이상 아무 관심도 없다는 빛이다.

서정운은 그가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미리 그럴 줄 짐작했음에도 그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마음이 편했고 또 유쾌했다. 그래서 서정운은 웃었다.

남자는 짧게 웃음을 터뜨리는 서정운을 의아하게 쳐다보긴 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것조차 좋다. 아……, 왠지 또 심장이 울렁울렁하는 것 같은데.

“사람 편하게 해 준다는 말 자주 듣죠?”

서정운이 불쑥 물어본 그 말이 의외였던 모양이다. 남자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 잠시 생각하는 눈치이더니 고개를 저었다.

“들어 본 적 없습니다.”

“그럴 리 없을 텐데……, 아, 별로 관심을 안 둬서 못 들었나 보다.”

이 남자라면 그럴 수 있지, 서정운은 금세 납득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남자는 여전히 미심스럽게 생각해 보는 듯했지만 굳이 반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았다.

“그 뒤로 꼬맹이랑 놀아 줘 봤어요?”

서정운은 가볍게 손짓을 하며 물었다. 수련법 중 한 부분인 그 손짓을 금방 알아본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때리진 않았고?”

“……. 두 번 때렸습니다.”

남자의 목소리가 한층 더 무뚝뚝해졌다.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왠지 조금 우울해진 성싶다. 역시 귀여운데, 어떡하지, 무지 사랑스럽잖아, 서정운은 남자의 무표정한 얼굴을 쳐다보며 웃었다.

“하하, 애 또 꺙꺙거리면서 울었겠네.”

“안 울고 저한테 화냈습니다.”

“화내요? 어떻게?”

“알알거리면서 짖어 대는데, 목소리가 화내는 목소리였습니다.”

“아하……, 하하, 아하하하, 아, 상상이 돼. 너무 잘 돼.”

서정운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조그만 털 뭉치가 알알거리면서 마구 짖어 대는 걸 생각하니 우습고 귀여웠고, 동시에 그 앞에서 이 남자가 저 무표정한 얼굴로 우두커니 있었을 걸 생각하니 한층 더 우습고 귀여웠다. 강아지도, 이 남자도.

“미안하다고 했는데,”

“했는데?”

중얼거리는 남자에게 뒷말을 재촉하자 남자가 처음으로 눈썹을 꿈틀, 찌푸렸다.

“그 뒤로 절 피합니다.”

이번에도 그 모습을 그림처럼 선명하게 떠올린 서정운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는 강을 노려보며 물만 마시고 있다.

“아아, 그래서 못 데려온 거구나. 제 형제들이랑만 놀아서.”

“…….”

“어린것들은 조심스럽게 사랑해 줘야 해요. 아주 작고 사소한 걸로도 다치기 쉽거든. 어린것들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도.”

서정운은 어디 보자, 하고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주전부리 삼아 가지고 다니는 육포가 오늘도 때마침 있었다. 잘됐다.

서정운이 비닐봉지째로 육포를 건네주자 남자가 의아한 얼굴로 그걸 받아들었다.

“그걸로 잘 회유해 봐요. 강아지들이 아주 환장하면서 좋아해요, 그거. 원래는 단백질 보충용으로 간식 삼아 먹으려고 만들어 놓는 건데, 웬만한 시판용 간식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애들이 좋아하더라고. 잘 화해해 봐요.”

“……, 고맙습니다.”

남자는 가볍게 목례하더니 그걸 주머니에 받아 넣었다. 그런 뒤에는 다시 침묵.

어쩌지, 마음에 드는데. 왜 맘에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마음에 든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졌다. 연락처라도 물어보면, ……수상쩍게 생각하겠지?

서정운이 홀로 생각하며 반쯤 피운 담배를 막 끌 때였다. 남자가 “예전에 집에서 개를 길렀었는데,” 하고 불쑥 입을 열었다.

개는 지금도 기르잖아, 그런데 웬일로 먼저 뜬금없는 말을 다 꺼내지? 서정운이 의아하게 쳐다보는 앞에서 남자가 말을 이었다.

“아팠습니다. 워낙 나이가 많아서 수술을 해도 잘 아물지를 않아서 걸핏하면 수술 자국이 터지고, 밥도 못 먹어서 낡아빠진 모포처럼 마르고, 하루 종일 숨을 헐떡였어요. 병원에서는 더 이상은 힘들 것 같다고 하고. 그래도 어쩌면 다시 좋아질 수 있지 않을까, 얼마간이라도 더 사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 이야기도 했었는데,”

“…….”

“제가 죽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안락사를 시켰어요.”

가볍게 손을 깍지 끼고 멀리 강을 보며 말하는 남자는 시종 담담했다. 서정운은 그런 남자의 옆얼굴을 가만히 지켜본다. 얼마 있지 않아 남자가 짧게 말했다.

“그런데, 그러지 말 걸 그랬다는 생각이 가끔 듭니다.”

그것이 말의 끝이었다. 남자는 무미건조한 말투로 그렇게 말하고는 서정운이 지금 막 담배를 끈 재떨이를 들어 옆 테이블로 옮겨 놓았다. 그 아무렇지 않은 손짓을 보다가 서정운이 웃었다.

“담배 안 피우면 좋겠어요?”

남자는 무심히 서정운을 보았다. 별로 그런 뜻은 없다는 듯, 네 마음이라는 얼굴이다.

“그 얘기는 왜 했어요?”

서정운이 다시 묻자 남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생각났습니다.”

그런 뒤 얼마간 더 생각하던 남자가 조용히 덧붙인다.

“그때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하겠지만요.”

*

“계속 어떤 사람이 생각나. 다시 만나 보고 싶고. ……이게 뭘까?”

서정운이 중얼거리자 대번에 한호영이 흰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설마 그 열일곱 살이라는 애는 아니겠죠?!”

“아냐, 스물일곱이랬어. ……그렇게는 안 보이지만.”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면서도 물음에는 제대로 대답하는 서정운을 바라보는 한호영의 눈매가 점점 세모꼴이 되어 간다.

“어디서 만났는데요? 뭐 하는 사람인데?”

“몰라. 한강변에서 쉬다가 우연히 만나서 그냥 몇 마디 나눴을 뿐인데, 계속 생각나네.”

한호영이 눈매뿐 아니라 눈썹까지 주름을 짓는다. 대단히 미심쩍다는 얼굴로 뚫어져라 서정운을 보던 그가 불안스레 중얼거렸다.

“사형이 이런 얘기 하는 건 처음이잖아요. 어떤 사람이에요?”

“귀여워. 사랑스럽고. 조용하고 본인 일에 집중하는 편이고, 왠지 같이 있으면 마음이 따끈따끈해지고 편안해.”

“……, 사형이 이런 얘기 하는 건 정말 처음인데……. 그래서, 만나기로 한 거예요?”

염려스럽게 묻는 한호영의 앞에서 서정운의 낯빛이 우울해졌다.

“아니, 연락처도 몰라. 역시 물어볼 걸 그랬나 봐.”

물어볼까 말까 열심히 고민하는데, 갑자기 시계를 보더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라는 말만 남기고 훌쩍 떠나 버리는 통에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며 침울해하는 서정운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한호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여태 그렇게 여자 소문 숱하게 따라붙었어도 사형이 먼저 이러는 건 처음이잖아요, 사람 더 불안하게. 사형,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사형은 여자 운이 유난히 안 좋으니까 일단은 조심하라구요.”

“여자 아니야.”

“……. 예?”

진지한 기색으로 서정운에게 몸을 기울이던 한호영이 일순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순식간에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얼굴로 망연히 서정운을 쳐다보던 한호영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남자예요? 남자가 왜 생각나요……?”

어, 그럼 연애 감정 같은 게 아니었나? 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은 분명히 그쪽이었던 것 같은데? 한호영이 혼란에 빠진 가운데 서정운은 생각에 잠긴 채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면 난 이상형이라는 게 따로 없었단 말이지. 이상형이 어쩌고저쩌고 해 봤자 그 조건에 맞는 사람과 사귀는 사람 한 명도 못 봤고, 그 조건에 맞는 사람을 만나도 막상 알고 보니 별로 끌리지 않더라는 경우도 여러 번 봤거든. 그래서 난 그저, 어떤 사람이든지 내 눈에만 예뻐 보이고 좋아 보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그러니까 잠깐만요, 사형……, 남자라며……? 지금 딴 얘기 하는 거예요? 갑자기 주제가 바뀐 거야? 그렇죠?”

“이렇게 마음 편하고 보고 싶고 여기가 따뜻해지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아. 왜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원래 사람을 좋아하는 게 아무 이유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불의의 사고 같은 거긴 한데……, 아니 그보다 사형……?”

한호영이 슬슬 진땀을 흘리기 시작할 때였다. 생각에 잠겨 있던 서정운은 문득 낮은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굳이 성급히 결론지을 것 없지. 앞으로 다시 볼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뒷말을 하면서 서정운의 얼굴이 울적해지는 걸 몹시 불안스러운 기분으로 지켜보는 한호영이었지만, 당장 득달같이 캐묻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많은 그였지만, 그러나 관두기로 했다. 왠지 괜히 긁어 부스럼 같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깊이 파고들어 무슨 말을 듣게 될지 두려웠다.

에이, 아무렴 설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늘 주위에 여자가 끊이지를 않는 이 사형이. 한호영은 애써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그러고 보니,” 하고 말을 돌렸다.

“사형, 그 레이싱걸 일은 어떻게 됐어요? 몇 군데서 기사 더 나온 걸 보니까 좀 악의적인 것 같던데. 심지어 걔가 임신했네 어쩌네 하는 기사도 있던데요.”

“응, 그건 정말인가 봐.”

“……. 지금 그것까지 사형이 덮어쓰고 있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러다 말겠지. 근거 없는 스캔들이라는 게 그렇잖아.”

흥미 본위의 소문으로 사람을 실컷 난도질하고 헐뜯다가 막상 근거가 없으면 그대로 누구의 사과도 반성도 없이 흐려지는 일 따위는 흔하다.

“글쎄……, 그 친부가 재계 거물이라는 소리가 있어서. 내가 덮어쓸 것 같긴 하지만, 그쪽도 더 시끄럽게 할 마음은 없을 거야. 이대로 곧 흐지부지될걸.”

“그냥 고소를 하지 그래요.”

“더 시끄럽고 귀찮아져. 이번 목요일 날 협회에서 한번 보자는데 거기에서나 얘기하고 말 거야.”

“거기서는 왜 보자고 한대요?”

“일단 사실이든 아니든 추문이 났으니 확인차 형식적으로 부르는 거지.”

귀찮게, 하고 서정운은 혀를 찼다. 어차피 이 업계에 이런 일이야 일상다반사이고, 대충 담당자와 얼굴 보면서 ‘고생 많으시네요.’, ‘뭘요.’ 그런 얘기나 나누고 나올 게 뻔하다.

……그러고 보니 시간대가 딱, 면담 마치고 한강변에 가면 그 남자를 마주칠 수 있을지도 모를 시간대인데. 그래, 그럼 그 뒤로는 약속을 잡지 말고 얼른 면담만 마치고 나와서 한강변으로…….

그런 생각을 하자 우울했던 기분 따위는 온데간데없이 다시 마음이 흥성거리는 서정운이었다.

저 인간이 왜 저러나 미심쩍게 바라보던 한호영은 괜히 불안스러워 구시렁거리면서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었다. 오늘은 이것 때문에 서정운의 집에 들른 참이었다.

“여기요, 올해 재적확인서. 여기랑 여기에 도장 찍어 주세요.”

한호영이 봉투에서 꺼내어 테이블 위에 펼친 서류를 못마땅하게 내려다본 서정운은 서랍장에서 도장을 꺼내어 오며 혀를 찼다.

“이미 그만둔 사람을 뭘 굳이 적에 올려놓겠다 그러시는지, 사부님도 참…….”

“사형쯤 되면 적에서 빼는 게 더 귀찮아요. 그냥 매년 사형 혼자서 도장 한 번 찍고 마는 게 훨씬 편하지.”

정원사범 직계 제자라는 게 말이 쉽지 아무나 쉽게 될 수 있는 건 줄 알아요? 한호영이 말하는 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서정운은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매년 봄마다 본산에서는 본산에 적을 둔 사범들의 명부를 확인하는데, 이걸로 올해 치의 확인도 끝났다.

몇 년 전 정무도를 그만뒀던 당시에 서정운은 명부에서 이름을 빼려고 했으나, 그러려면 사부며 사형제들에 심지어는 정련, 체련 관계없이 주요 사범들의 확인서가 일일이 필요한 등 그 절차가 몹시 까다로워서 포기하고 말았다. 그렇기에 여전히 명목상으로는 본산의 사범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서류에 찍힌 인주를 후후 불어 다시 봉투에 집어넣는 한호영에게 서정운은 “그러고 보니,” 하고 물었다.

“한수일 사범님은? 인대 끊어졌다더니 좀 괜찮으셔?”

“아아, 아무래도 연세가 있으시니까 젊은 사람처럼 금방 회복은 안 되시나 봐요. 안 그래도 지금 그것 때문에 펄펄 뛰시고 난리예요. 사범 수련합숙 전까지 당신이 직접 그 슈퍼 루키를 갈고닦아서 합숙에 넣고야 말겠다고 의욕 만만이었는데 이렇게 됐으니, 누굴 붙여서 가르쳐야 하나 고민고민 하시더라구요.”

“아아……, 확실히 그럴 만한 사람들은 다 바쁘니까 적임자를 찾기가 쉽지는 않겠지.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대?”

“일단은 체련의 상원사범들이 시간 되는 대로 돌아가면서 봐주기로 한 모양인데, 한 사람이 꾸준하게 봐주는 게 아니면 단기간에 효과가 크게 나기는 쉽지 않죠.”

한호영은 태평하게 대꾸했다. 고개를 주억거리는 서정운도 태평하다. 체련 쪽 문제라면---대외적으로 영향을 미칠 만한 문제도 아니고--- 두 손 놓고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다. 그들의 사부는 심지어는 쌍수 들고 고소해하는 실정이었다.

“선을 말끔하게 다듬는 걸로는 사형만 한 사람이 없었는데.”

한호영이 불쑥 중얼거렸다. 서정운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런들 아무 상관 없는 일이지. 내가 다시 누굴 가르칠 일도 없고, 하물며 체련 쪽이면 말할 나위도 없고. 그나마 선 가다듬는 거라면 체련 쪽에서는 강훈 사범님이 잘하실 텐데.”

“아---안 돼요, 강 사범님은. 그분 되게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거 아시잖아요. 그분 성격으로는 그 녀석 감당 못 하지.”

“왜, 그 슈퍼 루키가 성격이 개판이야?”

대번에 손을 내젓는 한호영을 보고 서정운이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한호영은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고민스러운 낯으로 으음, 하고 중얼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닌데, 뭐랄까, 대하기가 영 거북하고 껄끄러운 게 좀 있어요. 너무 마이페이스랄까, 그러잖아도 덩치도 크고 기백도 엄청난 놈이 주위를 도통 돌아보지를 않으니까, 다들 어려워해요.”

“독불장군 같은 놈인가?”

“아니 그런 것도 아닌데……, 여하튼 좀 그래요. 나도 그놈은 영 거북하더라구.”

그래도 요즘은 그럭저럭 사람들이랑 조금씩 말 트는 것 같기는 한데, 하고 중얼거리는 한호영을 서정운은 희한하다는 눈으로 보았다. 이 넉살 좋고 낯 두꺼운 놈이 거북하다고 하다니 어지간히 대하기 어려운 타입이긴 한가 보다.

“한수일 사범님 속 좀 타시겠네. 그런데 사범 수련 합숙에 특별 수련생으로 받냐 아니냐는 상원사범들의 거수로 결정한다면서. 그럼 그걸 결정하는 대련에서는 상대를 누굴 내보내려고? 춘계 선수권에 처음 나가서 대뜸 우승해 버리는 놈인데 그 기량을 충분히 판단할 수 있을 만큼 그놈을 상대할 만한 사람이라면 웬만한 수준으로는 안 될 텐데.”

“그건 아직 모르죠. 아버지가 알아서 최대한 까다로운 상대로 어련히 안 고르시겠어요?”

“그러다가 너라도 내보내겠다고 하시는 거 아냐?”

“설마요, 그랬다간 욕먹죠.”

비록 서정운에게는 여러모로 까이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현역 시절 뭇 대회들을 휩쓸며 중량급 연패連覇 기록을 남긴 한호영이다. 정원사범의 친아들이어서가 아니라, 그 자질과 실력으로도 충분히 수제자라 할 수 있는 수재로 젊은 층에서는 단연 손꼽히는 인재였다.

그런 사람을, 아무리 혁혁한 성과를 세웠다고는 하나 유단자도 아닌 선수의 상대로 내보낸다면 지나치게 균형이 맞지 않는다고 비난을 사기 십상이다.

“실제로 그놈을 본 적이 없으니 잘 모르겠다만, 아직 한창 팔팔한 나이에 체격도 상당하다며. 네가 나서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서정운이 묻자 한호영은 잠시 생각해 보는 눈치였다. 그런 끝에 고개를 끄덕인다.

“아직은요. 그야 일단 체급은 같다 해도 체격 차가 제법 나는 데다 나는 선수 생활 접은 지 좀 됐으니까 다소 벅찰 것 같긴 한데, 제가 이기긴 할 거예요.”

“아직이라……, 시간 좀 지나면 힘들 것 같은가 보지?”

이번에도 한호영은 잠시 더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예. 익히는 게 무서울 정도로 빨라요. 가르치는 데에 따라서는 몇 년 지나면 그놈 이기는 사람 없을걸요.”

서정운은 가볍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뜻밖이다. 이 자신만만한 놈이 이렇게 말하다니 정말로 상당하긴 한 모양인데, 그 슈퍼 루키.

빙긋이 웃는 서정운을 보고 한호영은 입맛이 씁쓸했는지 불퉁한 낯을 했다가, 문득 비죽이 웃으며 이죽이죽 말했다.

“그러고 보니 사형 결국 승단식 불려 오게 됐다면서요.”

서정운은 웃음을 딱 멈추었다.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찬 그는 손끝으로 주름진 미간을 문질렀다.

“얼굴만 비추고 올 거야. 나머진 너희들이 알아서 해.”

“그래도 오랜만에 그런 자리에서 사형 얼굴 보겠다고 다들 기뻐하고 있다고요.”

“못마땅해하는 사람이 백 배는 많을걸.”

“그야 물론 그렇지만요. 그래도, 어쨌거나 사형이 정무도랑 관련된 공석에 나오는 건 진짜로 오랜만이잖아요.”

한호영은 말을 멈추고 물끄러미 서정운을 보았다. 그는 정무도를 그만둔 이후로는 공적인 자리에 나선 적이 없었다. 이게 벌써 몇 년 만이라, 그게 몹시 그립기도 하고 반갑기도 해 한호영은 웃고 말았다. 그 웃음을 보고 서정운은 한결 언짢은 낯을 했지만.

한호영은 싱글싱글 웃다가 장난 섞어 느릿하게 말했다.

“이러다 사형, 자칫하다간 사범 합숙 때에도 불려 나오시는 거 아니에요?”

그러나 그 농담에 돌아온 대꾸는 아주 단호하고 자신만만했다.

“무슨 소리. 난 바쁜 사람이야. 내일 당장 먹고살 일이 끊어져 버리면 모를까, 매일같이 작업 의뢰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데 그런 데에는 불려 갈 생각도 시간도 없다고.”

“예, 예, 여기저기서 잘나가는 작곡자 선생님이 아무렴, 어련하시겠어요.”

한호영은 어깨를 움츠리며 토달토달 비아냥거렸다. 내심 서정운을 아쉬워하는 부친을 가로막는 방패가 바로 저것 아니었던가. 저 업계로 넘어가서 금세 뿌리를 박아 버린 그의 유능함.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한호영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을 따름이었다.

*

말이 씨가 된다더니, 당장 먹고살 일이 끊어져 버렸다.

……라고 하기엔 일시적인 처분일 뿐이고, 또한 한동안 놀고먹어도 아무 걱정 없을 만큼 통장 잔고는 충분했지만, 그래도 서정운은 협회에서 나오며 어이없는 기분을 씻어 낼 수 없었다.

‘이게 사실 일이 좀 큽니다. 배 속 아기 아버지가 워낙 유명한 거물이다 보니까,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일이 더 골치 아파요. 그야 서 선생이 억울한 피해자인 걸 아는 사람은 다 알지요, 압니다만 그냥 이대로 있으면 잠시 떠들썩하다 금방 묻힐 테니까…….’

‘묻힐 테니까, 너는 한동안 아무 활동도 작업도 하지 말고 조용히 몸 사리고 있어라, 이 말씀입니까?’

‘하하, 이쪽 업계 생리가 좀 그렇잖습니까. 잠시만 쉬다 오시면 예전보다 훨씬 더 일들도 수월해질 테고……, 무슨 말씀인지 아시지요?’

협회 사무실로 들어선 서정운을 대뜸 임원실로 데려갔을 때부터 이상하다 싶었다. 어느 유명한 거물의 비서라고 하는 젊은 남자를 대동하고서 협회 임원이 말한 내용의 요지는 그거였다.

남의 일을 덮어쓰고 한동안 몸 사리고 있으면 그만큼의 대가는 쥐여 줄 테니 좀 쉬다 와라.

그리고 당연히 서정운은 그 말을 순순히 들어줄 만큼 아쉬운 사람도 심약한 사람도 아니었지만,

‘오빠, 정운 오빠, 미안해요. 오빠, ……어엉---.’

얼마간 못 본 사이에 얼굴이 반쪽이 되어선 펑펑 울고 있는 수척한 여자애 앞에서는 무어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젠장, 이런 거엔 약하단 말이야, 속으로 욕을 퍼부으면서도 서정운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고, 허탈한 심경으로 협회 사무실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작업 의뢰를 취소한다는 메일이 몇 통 날아든 걸 보니 협회에서는 이미 손을 써 둔 모양이었다.

벌레를 한 열댓 마리 씹으면 이런 기분일까. ‘대충 한 반년에서 일 년쯤 쉬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하고 웃던 협회장의 몇 올 남지 않은 머리카락이나 쥐어뜯어 놓고 나올 걸 그랬나 보다.

“…….”

서정운은 기분도 영 마뜩잖은데 한호영이나 불러내 갈구며 기분을 풀어 볼까 싶기도 했지만 관뒀다. 그놈에게 한동안 쉬게 되었다고 말하면 그 이야기는 당장 사부님한테 들어갈 거다. 자칫하면 위험하다. 이 일은 그쪽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해 둬야지.

협회에서 나온 서정운은 한강 둔치로 차를 돌렸다. 협회로 오면서, 볼일 마친 다음에는 한강변에나 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비록 그 생각을 떠올렸을 때의 흥성거리고 기분 좋았던 마음은 씻은 듯 사라지고 말았지만.

협회에서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한강변 산책로에 다다랐을 때에는 불쾌한 분노가 울적한 심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런 일이야 살다 보면 겪을 수도 있을 테지만, 그래도 한때 가까이 지내며 살갑게 대하곤 했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얻어맞는 데에는 아무래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여자 운이 나쁜 걸 새삼스럽게 되새기고 싶지는 않단 말이지…….”

서정운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낮은 숨을 내쉬었다.

이미 벚꽃도 지고 완연하게 봄으로 접어든 날씨는 화창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강가에는 오가는 사람도 많았는데 그중 태반은 쌍쌍이 다니는 청춘 남녀들이다. 벤치에 나태하게 기대어 앉아 그 전경을 보고 있던 서정운은 혀를 차며 자신의 얼굴을 문질렀다.

안 돼, 마음이 비뚤어질 것 같아, 죄다 밉살스러워 보이잖아. 저쪽 벤치에서 대낮부터 자웅 동체처럼 붙어 있는 저 둘쯤 되면 그냥 경범죄로 신고해 버리고 싶다…….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다시피 하고 긴 한숨을 내쉬던 서정운의 귀에, 그때, “엄마야!!” 하고 비명을 지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저 옆 벤치에서 한 몸처럼 붙어 있던 남녀 중 하나다. “왜, 왜 그래?” 하고 놀라서 묻는 남자의 목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소리는 학학거리는 짧고 작은 숨소리.

“몰라, 뭐가 발목을 핥…….”

“뭐야, 웬 강아지가 여기 있어?”

울상 지으며 벤치 아래를 들여다보는 여자의 옆에서 남자가 말했다. 동시에 벤치 아래에서 조그만 털 뭉치가 폴짝폴짝 뛰어나왔다. 학학거리며 좋아라 꼬리를 흔들고 있는 그 조그만 놈을 보자마자 여자는 또다시 “엄마야!!” 하고 소리치며 벤치 위로 얼른 다리를 올렸다.

“누구 강아지야? 주인 어딨어? 저리 가, 저리 가!” 하고 그놈을 발로 쫓으며 주위를 둘러보는 남자의 발아래서 열심히 폴짝거리며 뛰어다니고 있는 노란 털 뭉치. 서정운은 그 털 뭉치를 빤히 쳐다보았다.

저거 왠지 어디서 본 적 있는 털 뭉치 같은데……, 하고 서정운이 생각했을 때였다. 고개를 홱 돌린 털 뭉치와 눈이 딱 마주쳤다.

“…….”

“…!”

순간 눈이 반짝하는가 싶더니 털 뭉치는 이산가족이라도 만난 양 번개처럼 뛰어왔고, 당장 서정운의 발치에 달려들어 알알알알 목청껏 짖어 대며 꼬리를 떨어뜨릴 기세로 흔들어 대는 그놈을 서정운은 눈만 껌벅이며 내려다보았다. ‘저 사람이 주인인가 봐.’ 하고 수군거리는 저 옆 벤치 커플의 목소리가 그 요란한 소리에 섞인다.

“야……, 너 저번에 본 걔지? 네 주인 나 아니잖아……?”

서정운은 구두끈을 물어 당겨 풀어 버리는 그놈을 달랑 집어 들었다. 눈높이까지 들어 올려 놈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놈은 마냥 기쁜 듯 천진하게 학학거리며 꼬리만 팔랑팔랑 흔들었다. 그 새까만 눈을 사납게 노려봐도 멋모르고 팔랑팔랑.

“이놈이……, 이쁘면 다야?”

서정운은 피식 웃고 말았다. 털 뭉치를 어깨에 올리고 엉덩이를 툭툭 두드려 주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놈이 여기에 있다는 말인즉슨,

“---.”

있다. 서정운이 찾던 사람이 저만치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서정운이 손을 들어 보이자 그가 꾸벅 묵례를 한다.

멀리서도 눈에 확 띄도록 커다란 남자가 다가오는 모습을 서정운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살랑거리고 있는 강아지의 꼬리만큼 서정운의 기분도 흥겨워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묵직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가슴이 흥성흥성 들떴다.

“이 녀석 데리고 나온 걸 보니 무사히 화해했나 보네.”

서정운이 강아지를 넘겨주며 말하자 남자는 그놈을 받아 풀밭에 내려놓으며 “예.” 하고 대답했다.

“육포가 효과가 괜찮았죠? 그거 맛있어서 애들이 진짜 좋아한다니까.”

“예, 맛있었습니다.”

누렁이도 그거 참 좋아했는데 본산 갈 때 육포 좀 챙겨가야겠다, 하고 생각하던 서정운은 한 박자 늦게야 남자의 말이 귀에 들어왔다. 잠시 웃는 얼굴 그대로 침묵하다 물었다.

“그쪽이 먹었어요?”

“조금요. 맛있었습니다.”

“……그래, 맛있었겠지…….”

애들 주라고 줬더니만, 하고 어이없이 생각하다가 서정운은 웃고 말았다. 강아지랑 나란히 육포 나눠 먹는 모습을 상상하니까 왜 이렇게 웃기고 귀여운지 모르겠다.

가만있자, 오늘도 갖고 나왔던가, 하고 주머니를 뒤적이던 서정운은 아무것도 손에 잡히는 게 없어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운동하던 때 과자 따위 대신 육포를 간식 삼아 씹고 다니던 습관이 남아 있는 탓에 으레 한두 조각씩은 갖고 나오는데 오늘은 깜빡했다.

눈치 빠르게도 서정운이 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하자 당장 눈을 반짝이며 그 주위를 맴돌던 털 뭉치가 ‘왜 안 줘? 왜 안 줘?’라는 눈길을 보내면서 폴짝거린다. 이를 어쩐다, 서정운이 난감하게 털 뭉치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 뒤에 서 있던 남자가 털 뭉치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는 육포 조각을 쥐고 있었다.

“마지막 한 조각입니다.”

좋아라 달려드는 털 뭉치에게 육포를 넘겨준 남자는 왠지 모르게 아주 살짝 아쉬운 눈으로 털 뭉치를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서정운은 이유 없이 웃음이 나와서 피식피식 웃다가 말했다.

“다음에 좀 넉넉하게 갖다줄게요. 얼마 전에 고기 몇 근 사다가 말렸거든.”

“예.”

사양도 안 하네, 그런데 그게 또 우스워서 서정운은 웃고 말았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어느새 기분이 훨씬 나아져 있었다. 아직 가슴 한구석에 살짝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는 느낌은 있었지만, 그쯤은 무시할 수 있을 만큼 기분이 선선하다.

동시에, 이대로 뭔가를 먹으면 얹힐 것 같아서 식사를 걸렀던 게 이제야 출출해졌다.

“점심 먹었어요?”

서정운이 배를 문지르며 묻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 그렇지, 보통은 다들 먹었을 시간이지……, 어……, 출출하진 않아요?”

그러면 일단은 참고 여기서 이 남자랑 이야기 좀 하다가 얘가 가고 나면 슬슬 뭔가 먹으러……, 하고 생각하던 서정운이었지만, 잠깐 생각해 보는 듯하던 남자는 뜻밖에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배가 비긴 했습니다.”

“아, 그럼 나랑 국수 먹으러 갈래요? 바로 저쪽이에요. 걸어서 오 분도 안 걸려. 되게 낡고 작은 식당인데 딱 국수만 팔거든요. 비빔국수랑 멸치국수. 그런데 정말 맛있어요.”

반색을 하며 말하는 서정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고 대답하고는 육포를 깨물거리고 있는 털 뭉치를 주워들었다. 손이 어찌나 큰지 한 손에 폭 담긴다.

서정운은 즐거이 앞장섰다. 그래도 나쁜 일만 벌어지는 하루는 아니구나,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종종 가곤 하는 단골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 뒤를 따르는 묵직한 기척이 좋다.

국숫집은 골목 안쪽에 조그맣게 자리 잡은 것치고는 늘 손님이 많았는데, 지금은 시간대가 식사 때를 비껴 있어서인지 한적하게 비어 있었다. 조리대 앞의 긴 테이블에 남자와 나란히 앉은 서정운은 두 가지 메뉴밖에 적혀 있지 않은 메뉴판을 찬찬히 보다가 “나는 멸치국수.”라고 말했다. 남자는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저는 비빔국수로.”라고 한다.

“매운 거 잘 먹어요? 이 집 비빔국수 엄청 매운데. 맛있긴 해요. 맛있는데 매워.”

“괜찮습니다.”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며 강아지를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내려가고 싶은지 요리조리 고개를 내밀며 아래를 살피던 강아지는 그 높이를 뛰어내릴 수는 없겠다고 판단했는지 결국은 탈푸닥 주저앉고 만다. 한숨까지 폭 쉬는 게, 세상깨나 아는 놈 같다.

서정운은 강아지의 귓등을 슬슬 긁어 주며 앉아 있는 남자를 보았다.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가 눈에 띄게 반듯하다. 평소의 자세가 저렇게 반듯하기 쉽지 않은데, 누가 보면 엄격하게 훈련된 군인인 줄 알겠다.

“그런데 말이에요.”

남자의 옆모습을 지그시 쳐다보던 서정운이 말을 건네자 그제야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예.”

“잘생겼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

남자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빤히 서정운을 보았다. 얼핏 눈썹을 치켜올려 허공을 바라보며 잠깐 생각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상하네……. 외려 너무 자주 들어서 감흥이 없을 것 같은데. 전부터 그런 생각 했는데,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까 정말 잘생겼구나 싶어서 감탄하고 있었거든요. ……아, 그건가 보다. 듣기는 여러 번 들었는데 별로 관심 없이 무심하게 흘려들어서 기억을 못 하나 보구나.”

서정운은 의아하게 고개를 기웃하다 홀로 결론을 내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다, 아직껏 납득을 못 하고 있는 듯한 남자에게 선뜻 손을 내밀어 가만히 손끝으로 남자의 얼굴선 위를 덧그렸다.

“봐요. 이렇게 뼈대가 반듯하게 내려오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다부진데 그렇다고 과하게 억센 느낌도 아니고. ……응, 보면 볼수록 인상 좋고 잘생겼네.”

서정운은 감탄스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테이블 안쪽에서 국수를 삶던 가게 주인이 흘끔 남자를 보고, 다시 서정운을 보고, 다시 남자를 보더니 “아주 남자답고 훤칠하시네요.”라고 넉살 좋게 거들자 서정운은 활짝 웃으며 “그렇죠?” 하고 되물었다.

만면에 웃음을 짓고서 남자의 얼굴에서 손을 거두는 서정운을 무표정하게, 그러나 뭔가 희한한 거라도 보듯이 응시하던 남자는 문득 뭔가를 깨달은 듯 “아.” 하고 중얼거렸다.

“이래서…….”

그러나 무어라 이어지려던 말은 거기서 멈추었고, 남자는 홀로 뭔가를 납득한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서정운은 그 뜻밖의 반응에 뚫어져라 그를 바라보며 뒷말을 기다렸지만 그는 혼자서 결론을 낸 것처럼 평소 같은 무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결국 서정운은 뒷말을 재촉했다.

“이래서?”

남자는 턱을 쓰다듬으며 서정운을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이래서 여자가 끊이지 않는다는 거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서정운은 얼음이 되었다.

5초쯤 그대로 꼼짝 않고 굳어 있던 서정운은 6초쯤에 ‘으.’ 하고 낭패스러운 심경에 빠졌고, 7초쯤에 어물어물 입을 움직였다. 그러나 얼른 말이 나오지 않아 실제로 얘기를 한 건 10초쯤 지났을 때였다.

“……, 나 알아요?”

“기사 봤습니다. 소문도 들었고요.”

“……, ……그렇구나…….”

그렇지. 그러고 보면 서정운은 나름대로 유명인이긴 했다.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알아볼 만큼은 아니지만 여러 지면이나 인터넷상에 그의 개인사가 흔하게 돌아다닐 정도로는.

어떡하지. 이건 정말로 생각도 안 해 본 일인데. 서정운은 이렇게 당혹스러운 게 얼마 만인가 싶었다.

“……안 좋은 소문이 대부분일 텐데.”

“예.”

“……그렇구나…….”

남자의 대답은 너무도 선선했고,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슬며시 물어봤던 서정운은 확인 사살을 당하고는 풀썩 기가 꺾이고 말았다.

“소문이라는 게 워낙 과장도 되고 와전되기도 하고 아예 날조되는 일도 아주 흔해서 그 소문들이 꼭 맞는 것만은 아니고……,”

서정운이 들릴락 말락 하게 중얼중얼했지만 남자는 아무 대꾸도 없었다. 하긴 자기 입으로 변명해 봤자 신빙성도 떨어진다.

서정운이 침울하게 입을 다물었을 때 주문한 국수가 나왔고, 우울한 침묵 속에서---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은 국수를 후룩후룩 먹기 시작했다.

이미 벌어진 일이고 돌이킬 수도 없다지만 왜 소문은 번져 버렸을까, 왜 이 남자는 알게 된 걸까, 무거운 마음으로 국수를 삼키던 서정운은 흘끔 남자를 보았다. 색깔만 봐도 엄청나게 매워 보이는 비빔국수를 평연한 얼굴로 훌훌 넘기고 있던 남자가 시선을 느꼈는지 서정운을 보았다.

“드시고 싶습니까?”

흐린 낯을 한 서정운에게 그가 의아한 빛을 띠더니 물었다. 먹고 싶다면 국수 그릇을 내밀어 줄 기세다.

남자는 왜 서정운이 우울해졌는지는 요만치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조금 전에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이미 지워 버리고 생각조차 안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서정운은 새삼스럽게 다시 깨달았다.

그렇지. 이 남자는 주위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 남자였지. 우연히 귀에 들어온 이야기를 기억은 하고 있더라도 신경은 쓰지 않는 거다. 하물며 어쩌다 길에서 몇 번 마주친 사람의 일 따위야.

서정운이 과거에 무슨 행각을 벌였든 말든 남자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인 것이다.

“…….”

이걸 기뻐해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

서정운은 복잡한 심경에 잠겼다. 그런 서정운의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남자는 자신의 국수 그릇을 서정운에게 약간 밀어 주었다. 그 무심한 호의에 마음이 슬쩍 가벼워진 서정운은 고개를 저었다.

“매운 거 못 먹어요. 어릴 때부터 먹어 버릇을 안 했더니 점점 더 못 먹게 돼서 지금은 김치 같은 거나 그럭저럭 먹는 정도예요. 많이 우울할 때에는 가끔 먹긴 하지만요.”

멸치국수를 삼키며 말한 서정운은 고개를 끄덕이곤 자신의 그릇을 도로 끌어당기는 남자를 보다가 픽 웃고 만다.

“그래도, 오늘도 원래는 매운 걸 먹을 기분이었는데 그쪽이랑 만나서 얘기하다 보니 기분이 나아져서 이거 먹는 거예요. 일하는 쪽에서 상황이 좀 꼬여서. ……그래, 그 소문 때문에요. 한동안 일 쉬면서 조용히 있으라고 협회에서 권고받고 나오는 길이었거든요.”

권고라기보다 정확히는 징계지만, 하고 덧붙이며 서정운은 혀를 찼다. 남자는 이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국수만 후룩후룩 삼키고 있다.

“그래서 당분간은 실업자로 지내게 됐어요. 예정되었던 작업들도 다 취소되고. 그중 딱히 굉장히 하고 싶었던 일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진 빠지거든, 이런 거.”

살다 보면 이런 때도 있는 법이다. 본인의 잘잘못과는 상관없이 삶의 수레바퀴가 헛돌아가는 시기. 시간은 흘러가는데 바퀴는 그 자리에 머무르고 있는 듯한 그 시기를 어떻게 보내면 되는지 서정운은 알고 있었다.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다. 물속에 잠긴 것처럼 가만히. 천천히 멈췄다 가자. 그렇게 생각하면서.

“진창에 발 한쪽이 빠져서 꿈쩍도 하지 않는 것 같은 기분, 들었던 적 있어요?”

서정운이 묻자 남자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언제?”

“지금입니다.”

아직 서정운은 국수를 반도 먹지 않았는데 어느새 그릇을 말끔히 비워 버린 남자는---심지어는 그 매운 걸 싹 비우고도 태연하기 짝이 없는 기색이다--- 입가를 닦으며 “예전에도 몇 번 있었고요.”라고 덧붙인다.

남자가 굳이 먼저 입을 열지 않을 것을 이제는 알고 있는 서정운은 “어떤 상황이었는데요?” 하고 물었다. 그리고 또한 예상했던 대로, 남자는 물어보는 말에 선선히 대답했다.

“저는 뭘 하든 잘하는 편이라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까지는 수월하게 올라갑니다. 하지만 노력하지 않으면 무엇이든 제일 높은 자리에는 올라갈 수 없는데, 그 마지막 얼마만큼의 거리가 발을 떼기 힘든 진창처럼 느껴집니다.”

남자의 말 뒤로, 불현듯 서정운은 오래전 언젠가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0점에서 50점을 받기는 쉬워도 90점에서 100점 받기는 어려운 법이지.’

그런데 지금 너 하는 것처럼 해서 어디 50점이라도 받겠어? 라고 이어진 말이 그가 사범이었던 시절 제자들에게 했던 말이지만, 그 마지막 얼마만큼의 거리가 얼마나 나아가기 어려운지는 서정운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서정운이 결국 내딛지 못했던 거리다.

진창 속의 마지막 몇 걸음.

과연 그곳에 다다를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는 그 지루한 고통의 시간.

“그래서, 예전에는 어떻게 됐어요?”

서정운의 물음에 남자의 담담한 대답이 이어졌다.

“계속 그대로 있다 보니 어느 순간 나와 있었습니다.”

“금방 나왔어요?”

“어느 때에는 몇 달, 어느 때에는 몇 년. 때마다 달랐습니다.”

물음마다 생각에 잠겼다 대답하는 남자를 보며 서정운은 어느 옛날을 떠올렸다.

정무도를 했던 때 그랬었다. 몸을 움직여 얻어지는 것은 경사길을 오르는 게 아닌 계단을 오르는 것과 같았다. 아무리 노력을 하고 또 해도 실력은 그 자리에 멈춰 있던---혹은 외려 더 떨어지는 것 같던--- 시간들과, 그 시간이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어서 더 암담하고 힘들었던 인내. 그것들을 넘기고 나면 어느 순간인지도 모르게 자신은 계단의 한 단 위에 서 있었는데, 그 계단은 오르면 오를수록 점점 더 오르기가 힘들어졌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이 남자도 정무도를 했었지.

“힘들지 않았어요?”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계속 거기에 머물러 있을 마음이 들었어요? 뒷걸음질하는 건 간단했을 텐데.”

“하지만 발을 딛지 않은 곳은 뒤가 아니라 앞에 있었으니까요.”

남자의 무덤덤한 대답은 무성의하게 느껴질 정도로 간결했다. 다른 선택은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는 것처럼.

“그런데, 지금도 진창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에요? 꿈쩍도 하지 않는?”

“예.”

서정운은 남자가 강아지를 데리고 놀던 낯익은 손놀림을 떠올렸다. 손끝이 거칠긴 했지만 틀림없이 보통 수준 이상으로는 실력이 될 것 같았는데. 문득 이 남자는 어떤 정무도를 할까 궁금해졌다.

“거기에서는 언제쯤 나올 것 같아요?”

“모르겠습니다.”

“그만두고 싶지 않아요? 언제쯤 올라설 수 있을지 기약도 없는데?”

남자는 다시 생각에 잠긴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선뜻, 담담하게, 진심을 말한다.

“평생 걸려도 됩니다.”

이런 부분이다.

이런 부분 때문에 이 남자가 마음 편안한 것이다. ‘이런 부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대단히 막연해질 테지만.

서정운은 가슴속을 뻐근하게 채우는 그 막연하고 이름 모를 느낌에 웃었다. 그러다 불쑥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정무도가 그렇게 좋은가 보지.”

남자가 말한 진창이 정무도인지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듣지 못했다는 것이 그 뒤에야 생각났지만, 그러나 서정운의 말은 틀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남자는 부정하지 않고 말했다.

“예.”

그리고 확인해 보기라도 하는 듯 얼마간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예, 좋습니다.”

그렇게 말했고, 그 순간 서정운은 움직임을 멈추고 만다.

아.

일순 머릿속에서 생각들이 씻은 듯 지워졌다. 새하얘진 머릿속에 선명하게 새겨지는 것은 아주 잠깐 느슨해진 남자의 얼굴.

웃었다.

그것은 아주 짧은 찰나, 아주 약간의 스침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의 눈매가 느슨하게 굽어지고 입매가 부드럽게 둥글어지는 걸 서정운은 보았다.

“---.”

서정운이 그대로 우두커니 남자를 바라보는 동안 가게 주인은 남자의 국그릇이 빈 걸 보더니 거기에 장국을 더 담아 주었고, 그 장국을 후루룩 마실 때 즈음엔 이미 남자는 평소와 똑같이 무심한 낯으로 돌아와 있었다.

스스로가 웃었다는 것조차 모를 만큼 짧고 희미한 웃음.

하지만.

---어떡하지.

서정운은 당혹감에 휩싸였다.

일순 멎어 버린 호흡이 이내 숨 가쁘다고 아우성을 질렀고, 멈춘 듯하던 심장이 점차 속도를 높이며 맹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이를 어쩔까. 이런 건 처음이다. 처음이었지만 이게 무엇인지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이 좋다.

그 한 문장은 머릿속으로 떠올림과 동시에 의식 위에 타는 듯 선명하게 새겨졌고, 그런 뒤에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었다.

그의 웃음은---그의 말투도, 그가 움직이는 몸짓도, 그가 보여 주는 표정도, 그와 나누었던 대화도--- 서정운이 마음을 깨닫기에 충분할 만큼 길고 짙었던 것이다.

***

4월 중순이 넘어 말에 가까워지는 주말, 정무도 본산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날은 해마다 한 번 있는 정무도의 승단식 날이었다.

비록 승단식 자체는 매년 있다 하지만, 처음으로 단을 따기 위해서만도 10년 이상의 수련 기간이라는 요건에 맞아야 하고 그 이후부터는 한 단씩 올라가는 데에 각 3년이 지나야 승단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승단을 맞이하는 각 선수들 및 관계자들로서는 큰 의식이라 할 수 있었다.

각 지역의 주요 지원에서도 이날 동시에 승단식을 하는데 그중에서도 탁월한 실적으로 주목을 받는 선수들은 본산의 승단식에 참석하기 때문에, 그날 본산에는 관계자만 참석할 뿐 아니라 여러 방송매체에서도 모여들었고 본산의 대문 밖으로는 축하 화환 따위가 줄지어 늘어섰다. 평소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 사람들과 차량으로 몹시 북적이고 소란스러워지는 날 중 하나다.

그중 차량으로 유난히 북적이는 곳은 뭐라 해도 주차장 근처였는데, 인근의 공터까지 주차장으로 이용을 함에도 주차공간이 부족해 주차를 돕는 신참 수련생들이 아침부터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잠시만요! 이쪽은 허가받은 차량만 주차하실 수 있습니다!”

다른 쪽에서 안내를 하느라 잠시 한눈팔던 사이에 본산 소속 관계자만 주차할 수 있는 공간에 차 한 대가 들어와 멈춰 선 것을 보고 주차 안내를 맡은 수련생 하나가 뛰어오며 외쳤다.

차 문을 열고 나오던 참이라 분명 그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차주는 아무렇지 않게 차 문을 잠그고 걸어 나왔다. 수련생은 차 번호판도 운전자도 낯설다는 걸 확인하고는 엄격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다른 곳에 주차해 주십시오. 이쪽은 본산 소속 사범님들 지정 주차석입니다.”

운전자는 차 열쇠를 주머니에 넣으며 수련생을 보았다. 그 표정이 어딘가 좀 미묘한 빛을 띠고 있어, 수련생은 혹시나 아는 얼굴인가 다시 확인해 본다. 그러나 역시 처음 보는 얼굴이 분명했다. 그렇게 쉽게 잊어버릴 만한 인상이 아니었다.

평균을 약간 웃도는 신장, 그리 다부지지 않게 늘씬하지만 마르지도 않은 체격, 질 좋은 양복의 정장 차림이 썩 잘 어울리는 단정하고 인상 좋은 남자---는, 일견 흔할 듯하면서도 흔하지 않은 법이다. 게다가 곤란한 듯 웃음 짓는 표정은 분명히 부드러웠음에도 왠지 모르게 긴장하게 되는 이런 느낌이라면 더더욱.

“어차피 비어 있는 자리일 텐데, 안 되나요?”

“예, 안 됩니다. 다른 곳으로 옮겨 주십시오.”

남자는 좀 귀찮아하는 기색이었지만 순순히 “그래요, 그럼.” 하고 돌아섰다. 다시 차 쪽으로 걸어가는데 남자의 휴대 전화가 울렸고, 남자는 주머니에서 차 열쇠를 꺼내며 전화를 받았다. 받자마자,

「사형, 어디세요? 설마 딴 데로 새신 건 아니죠? 아버지 기다리세요.」

커다랗게 닦달하는 소리가 전화 바깥까지 새어 나왔다. 남자는 인상을 찡그리며 전화를 약간 귀에서 떼고는 혀를 찼다.

“아직 시간 넉넉하잖아. 지금 주차장이야. 차 댈 자리만 찾으면 금방 대 놓고 갈 거야.”

「아, 오셨어요? 그래요, 그럼 얼른 오세요. 그런데 자리 없어요? 제 자리에 대면 되잖아요? 제 차는 본채 쪽에 세워 뒀으니까 제 자리 비어 있을 텐데.」

“네 자리에 댔는데 지정 주차석이라 안 된다고 옮기래.”

「엥? ……오늘 사범 주차장 안내 누구지?? 나 잠깐 바꿔 줘 봐요.」

“됐어. 그러잖아도 너무 일찍 왔다 싶었는데 자리 찾아 좀 돌다가 들어가면 딱이겠다. 끊어.”

「아니에요, 잠깐 거기 있어 봐요, 금방 사람 보낼---.」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귀찮다는 듯 가차 없이 전화를 끊어 버린 남자가 막 차 문을 열었을 때였다. 옆의 비어 있던 자리에 큼직한 차 한 대가 들어섰다.

멈춰 선 차에서 내리던 중년 남자가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일순 기묘한 기색을 띤 중년 남자는 곧 찡그린 웃음을 띠더니 “야아, 오랜만입니다, 서 사범.” 하고 말을 걸었다. 중년 남자를 보던 그도 빙긋이 웃고는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상호 사범님.” 하고 대답한다.

“그러잖아도 정련 쪽 친구에게 듣자 하니 오늘 한태일 사범님이 부르셨다고 하셔서 오랜만에 얼굴 보겠구나 하고 있었습니다. 잘 지냈지요?”

“예, 염려해 주신 덕분에요. 황 사범님도 잘 지내셨나 봅니다.”

“하하, 나야 뭐 그렇지. 들어 보니까 서 사범도 곡 만드는 일 잘돼 가고 있다면서요. 아참, 얼마 전에 보니까 여자 문제 하나 터진 것 같던데……?”

“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하하하, 참 여전하십니다. 서 사범은 가는 데마다 여자가 줄줄 따르니, 나야 뭐 그저 부러울 따름이야.”

“예, 그러신가 봅니다.”

여상하게 웃으며 말하는 남자의 앞에서 중년 남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얼른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지 콧잔등을 실룩거리며 사납게 남자를 노려본다.

이 심상찮은 분위기에 주차 안내를 하던 수련생은 이 낯선 남자와 낯익은 체련 사범 두 사람을 지켜보며 안절부절못했는데, 본채 쪽에서 그보다 좀 더 연차가 있는 수련생이 달려오다가 그들을 보고는 걸음을 늦추었다. 남자와 아는 사이인지,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꾸벅 인사를 했고 남자도 눈인사를 보낸다.

“한호영 사범님이 가 보라셔서 왔는데…….”

그 수련생 역시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중얼거렸지만 중년 남자가 매섭게 노려보자 입을 다물고 만다. 중년 남자는 사나운 시선을 다시 그 남자에게 돌렸다.

“한태일 정원사범님도 참 제자 잘 두셨지 뭡니까.”

“뭘요. 저야 황상호 사범님처럼 훌륭하신 분이 왜 한수일 사범님의 직계 제자가 못되셨는지가 궁금할 따름인데요.”

중년 남자의 시선이 사납다 못해 험악해졌다. 언제 벌컥 고함을 질러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분위기 속에서 오로지 수련생 두 명만이 초조불안한 심정일 뿐, 정작 그 상대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빙긋이 웃음 짓고 있었다.

“---참 여전한 양반이구만.”

그러나 중년 남자는 고함 대신 으르렁거리듯이 거칠게 말만 던지고는 홱 돌아서 버렸고,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 버리는 그에게는 더 이상 신경도 쓰지 않고 차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가 운전석에 앉기 전에 조금 전에 온 수련생이 얼른 만류했다.

“서 사범님, 차 안 옮기셔도 됩니다. 한호영 사범님이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들어가십시오.”

남자는 잠깐 수련생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고마워요.”

도로 차를 잠근 남자는 본산 쪽으로 걸음을 돌렸고, 이번에는 아무도 그를 만류하지 않았다.

표표히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멀거니 보고 있던 신참 수련생이 중얼거렸다.

“저 사람이…….”

“어, 서정운 사범님. 지금은 그만두셨지만.”

“와……, 성격, 듣던 대로네요…….”

“듣던 대로는 무슨, 이건 새 발의 피다.”

마중 온 수련생은 혀를 차며 중얼거렸고, 신참은 멋모르고 그저 고개만 주억거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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